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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에 관한 설교(4) 다름(다르다)에 관한 설교(3) 다만에 관한 설교(1) 다스림(다스리다)에 관한 설교(2)
다시에 관한 설교(4) 다음에 관한 설교(4) 다툼(다투다)에 관한 설교(1) 다함(다하다)에 관한 설교(1)
단계에 관한 설교(2) 단물에 관한 설교(1) 단장에 관한 설교(1) 달란트에 관한 설교(19)
닮음(닮다)에 관한 설교(1) 담에 관한 설교(1) 담대에 관한 설교(2) 담음(담다)에 관한 설교(1)
당부에 관한 설교(1) 당신에 관한 설교(12) 당연에 관한 설교(1) 당함(당하다)에 관한 설교(6)
대에 관한 설교(1) 대강(대강절)에 관한 설교(4) 대로에 관한 설교(6) 대망에 관한 설교(1)
대면에 관한 설교(1) 대비에 관한 설교(10) 대상에 관한 설교(1) 대신에 관한 설교(28)
대장부에 관한 설교(1) 대적에 관한 설교(1) 대접에 관한 설교(2) 대조에 관한 설교(1)
대처에 관한 설교(2) 대표에 관한 설교(1) 대학부설교(1) 대함(대하다)에 관한 설교(9)
대화에 관한 설교(21) 더(더욱)에 관한 설교(13) 덤불에 관한 설교(1) 덧입음(덧입다)에 관한 설교(1)
데려감(데려가다)에 관한 설교(1) 도에 관한 설교(2) 도덕에 관한 설교(1) 도리에 관한 설교(1)
도시락에 관한 설교(1) 도움(돕다)에 관한 설교(33) 도전에 관한 설교(55) 도피(도피성)에 관한 설교(16)
독에 관한 설교(1) 독수리에 관한 설교(1) 돈(금전)에 관한 설교(71) 돋음(돋다)에 관한 설교(1)
돌아감(돌아가다)에 관한 설교(6) 돌아옴(돌아오다)에 관한 설교(4) 돌이킴에 관한 설교(1) 동기에 관한 설교(2)
동방에 관한 설교(4) 동산에 관한 설교(3) 동서에 관한 설교(2) 동역에 관한 설교(46)
동정(동정녀)에 관한 설교(11) 동행에 관한 설교(159) 돼지에 관한 설교(1) 됨(되다)에 관한 설교(27)
두려움에 관한 설교(119) 둘(두)에 관한 설교(5) 둠(두다)에 관한 설교(5) 뒤에 관한 설교(4)
뒤틀림(뒤틀리다)에 관한 설교(1) 드림(드리다)에 관한 설교(12) 든든함에 관한 설교(1) 들어감에 관한 설교(2)
들음(듣다)에 관한 설교(5) 듦(들다)에 관한 설교(2) 등불에 관한 설교(39) 디자인에 관한 설교(1)
따라감(따라가다)에 관한 설교(1) 따름(따르다)에 관한 설교(5) 딸에 관한 설교(27) 땅에 관한 설교(419)
때에 관한 설교(773) 떠남(떠나심)에 관한 설교(2) 떡에 관한 설교(2) 떨어짐(떨어지다)에 관한 설교(1)
또에 관한 설교(2) 뜨거움(뜨겁다)에 관한 설교(1) 뜸(뜨다)에 관한 설교(1) 뜻에 관한 설교(193)
2000마리 돼지 대 1명의 사람/ 막5:1-20/ 이단사이비예방주일설교/ 2003-05-27
2000마리 돼지 대 1명의 사람 막5:1-20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우리를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 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막5:1-20) <목회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오늘을 살게 하시고, 거룩한 주일 기둥교회에서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빛 되고 소금 되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과 성경을 들먹이며 떠들어대는 사이비들 때문에 움츠려드는 요즈음, 하나님, 우리가 있음에, 기둥교회가 있음에, 소망이 있고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더 바르게 더 잘 믿고, 빛 되고 소금 되는 삶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오늘도 주일을 귀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환자, 군대, 객지, 외국에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기둥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기 원하면서도 형편과 사정이 달라 설교 테이프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 복된 가정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가정을 주님이 세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가정을 위하여 비옵나니 -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찬양과 기도, 말씀이 가득한 가정이 되게 하소서. - 감사가 있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날마다 웃음꽃이 피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서로가 지지하고 세워 주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예의를 가르치고 예의가 지켜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사랑할 줄 알고 사랑 받을 줄 아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쉼이 있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부모와 자녀 간에 마음이 통하는 대화가 끊이지 않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이웃에게 열려 있는 가정, 세계로 열려진 가정되게 하소서. - 꿈이 있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며 함께 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1.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2.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 해처럼 높으신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3.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여러분 가정과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입술이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즘 며칠 동안 예수 안 믿거나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들에게 아마 시달림을 많이 받으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서울에 어떤 교회, 그 교회의 목사, 사실 그 사람은 자기가 속해 있던 교단에서 이미 몇 년 전에 목사직을 파직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것을 제재하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그 사람 홀로 활동했는데 그 사람으로 인해서 선량한 목회자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평범한 성도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르게 믿어야 하고, 바르게 가르칠 뿐 아니라, 바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1990년 3월 31일자 LA타임지와 교포 신문에 특별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캐나다와 접경하고 있는 미국의 와이오밍 주 북쪽에 있는 몬태나 주에 있는 ‘만민승리교회(Church Universal and Triumphant)’가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Universal’이라는 단어를 ‘만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만민’이라는 이름이 문제인지 그 교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원래 그 교회는 캘리포니아에 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몬태나 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것이 부천에서 인천, 서울로 옮기는 정도의 거리가 아닙니다. LA에서 몬태나 주로 가려면, 자동차로 화장실을 잠깐 들르는 것 외에 자지도 않고 계속해서 이틀을 가야 몬태나 주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부산까지 가는데 4시간 30분이면 간다고 하는데, 얼마나 먼 거리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사했느냐 하면, 2,500명이 몬태나 주로 이사했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목사는 ‘엘리자벳 클레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이상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계시를 내려 주셨다. 곧 지구에 핵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1990년 3월 말까지 늦어도 4월 23일까지는 핵전쟁이 일어나서 온 지구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와 만민승리교회 교인들은 살려주기로 약속하셨다. 그래서 핵전쟁에도 견딜 만한 땅굴을 파야 되니까 몬태나로 이사 가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만민승리교회 교인들은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도 팔고 아이들의 학교도 자퇴를 시키고 몬태나로 2,500명이 이사를 갔습니다. 미국에서 한 주에 살다가 다른 주로 옮겨간다는 것은 나라를 옮겨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마다 법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래서 운전면허도 다시 취득해야 합니다. 2,500여 명의 성도들이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도 다 퇴학시켜서 몬태나로 이사 갔습니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고신일 목사를 신뢰하십니까? 그러면 몬태나까지는 아니더라도 강원도로 이사 가자고 한다면 집도 내놓고 직장도 다 그만두고 아이들도 자퇴시켜서 가실 분이 계십니까? 웃지 마시고, 그래도 제가 ‘갈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면, 누구라도 손을 들어야 하지 아무도 안 들다니요. 아무튼 2,500명이 직장도 다 내놓고 이사 가서 핵전쟁을 피하기 위한 땅굴을 팠습니다. 큰 땅굴은 756명이, 짧게는 7개월부터 7년까지 견딜 수 있는 땅굴을 팠습니다. 핵전쟁이 나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땅굴을 팠습니다. 물과 음식도 충분히 준비해 놓고, 소·대변을 봐도 정화될 수 있도록 좋은 시설을 갖춰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땅굴에 들어간 그 입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때 저는 미국에 있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지 벌써 8년이 되었는데, 이 사람들이 7년분의 식량만 땅굴에 비치해 두었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후에 나왔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결말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이 핵전쟁으로 지구를 멸망시키려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살려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왜 고신일 목사에게는 알려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멸망하시려고 작정하셨다면, 왜 그 사람들에게만 땅굴을 파라고 하셨을까요? 이 세상에는 이런 이상한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1. 종교의 종류 종교는 크게 4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이방종교: 이방종교는 기독교가 아닌 종교를 말합니다. 힌두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교도 이방종교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사실 유교는 종교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① 신론: 신이 있어야 합니다. ② 인간론: 사람이 어떻게 존재했으며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③ 윤리론: 신과 인간과의 윤리, 인간과 인간과의 윤리에 대한 것입니다. ④ 구원과 내세론: 제한된 인생을 사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으며 영원히 살 수 있는가 하는 내세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교도 굳이 종교에 넣어야 한다면 이방종교에 속할 것입니다. 2) 세속종교: 세속종교라 함은 종교의 틀을 갖지는 않았으나 종교와 같은 그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 무신론: 신이 없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 불가지론: 알 수 없다, 어떻게 사람이 알 수 있느냐고 단정 짓는 것입니다. - 회의론: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한 것’을 말합니다. - 막시즘(Marxism): 지나친 공산주의를 말합니다. 3) 유사종교(오컬트-occult): 종교와 비슷하면서 종교가 아닌 것이 종교처럼 존재하는 것을 유사종교라고 합니다. 점성술, 무당, 유령, 최면술, 마술, 미신 등을 말합니다. 4) 이단종파(기독교이단): 기독교와 같은 색깔을 띠었으나 정통 기독교가 아닌 이단 종파를 말합니다. 그것을 ‘이단’(異端-다를 이, 끝 단)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성경으로 시작해서 비슷한 것 같지만 끝이, 결말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몰몬교, 통일교, 전도관, 영생교 등 집단을 말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이재록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많이 생기는 이유 가운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별히 한국에 이런 일들이 많은 것은, 제가 보기에는 쉽게 목사가 될 수 있고, 아무렇게나 집단들이 ‘목사’라고 해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제까지 이웃집 아저씨였는데, 오늘 갑자기 목사가 되고, 어제까지 옆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 ‘나 목사야.’라고 말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제가 속한 우리 감리교 교단은 목사가 되려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신학대학 4년을 졸업하고, 일반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려면 반드시 대학원에 진학해야 합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신학대학원을 2년 해야 하고, 일반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대학원을 3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석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냥 받는 것도 아니고 목회를 시작해서 1년쯤 지난 후에 “성경, 신학, 논문, 자격심사, 품행통과” 이 다섯 가지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3년이 지나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그냥 다 목사는 아닙니다. 그때까지는 준회원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도 다시 2년 동안 똑같은 다섯 가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목사 안수를 받고 진급해야 10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중간에 한 번 떨어진 사람은 12년도 걸리고 13년도 걸립니다. 이렇게 어렵게 목사가 되는데, 어제까지 이웃집 아저씨였던 사람이 오늘 ‘목사’라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고, 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목사직을 파직했다고 해도 법으로 그 사람을 제재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단이라는 것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그릇된 주장을 말하기 때문에 경고하고, 파직을 당해도 계속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가감하는 사람, 성경에 있는 말을 빼고 어떤 말은 첨가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가 계속해서 계시를 받는다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해 주신다고 ‘엘리자벳 클레어’처럼 말하는 사람입니다. 2. 이단의 정의 1) 어원적 정의 이단이란 말은 영어로 “heresy(헤러시)”라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의 “하이레시스”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은 본래 “선택받은 자, 뽑힌 자”라는 뜻입니다. 2) 성경적 정의 ① 다른 예수, 다른 영(악령),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고후11:4) ② 그릇된 주장에 대해 거듭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딛3:10) ③ 성경을 가감하는 자(계22:18-19) ④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제한하고 부인하는 자(요일2:22-23) ⑤ 지금도 계속적 계시를 주장하는 자(히1:1-2, 엡3:3-4) 성경 아닌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는 자입니다. 3. 이단 종파들의 공통점 1) 발생모체(發生母體)는 기독교입니다. 성경에서 모방하고, 기독교적인 여러 조건들을 모방하여 적용합니다. 2) 기성교회(현실교회)를 비판합니다. 기성교회, 현실교회들을 모두 타락했다고 말하고 부정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종교에만 와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3) 열광주의적인 신비체험을 강조합니다. 영적인 특수체험, 곧 입신, 방언, 접신, 환상, 신유, 진동, 도통 등의 신비하고 격렬한 체험을 과도하게 자랑합니다. 기둥교회 방송실 직원들이 저를 보고 ‘목사님 우리도 뒤에 이상한 현상을 만들 수 있는데 한번 해볼까요?’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기둥 교회도 그런 현상을 나타낼 수가 있다고 합니다. 4) 교주를 신격화하여 숭배합니다. 사이비 이단들은 교주를 신격화합니다. 여러분, 목사를 귀히 여기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고 그래야 하지만 그러나 신은 아닙니다. 고신일 목사도 참 겉만 멀쩡하지 별 볼일 없습니다. 검버섯이 안 생겼나, 또 매일 아파서 비실거립니다. 나는 아픈데 아프다고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해서 기도해 주면 그 사람은 낫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똑같은 증세로 왔는데 기도해도 낫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들끼리 얘기하다가 토라집니다. 누구는 낫게 해 주고 누구는 안 낫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제가 합니까? 사도 바울도 자신이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나았는데 자신은 병든 환자였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5) 독선적 구원관을 주장합니다. 이 이단 종파들은 자기들만이 특별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와야만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5. 이단 종파들에 대한 종합 1) 비성서적 비신학적입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입니다. 이 말은 성경에 위배된다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2) 비윤리적 반사회적입니다. 도덕성이 없습니다. 3) 현실도피자 주의자들입니다. 4)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빛 된 삶을 사는 것을 거절합니다. 역사 세상 사회와 담을 쌓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지향하는 경우입니다. 성경에 ‘너희가 세상에 살면서 빛 되고 소금 되어서 다른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희가 착한 행실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기둥교회 장로님들에게, 또 다른 교회에서 임원교육을 할 때도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건전한 믿음을 가졌다면 이단이 이곳 강단에 와서 설교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기둥교회는 제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믿을 사람이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런 교회가 건전한 교회, 든든한 교회입니다. 저는 장로님들에게 “장로는 권위나 세우고 대접이나 받으며, 목사를 견제하는 직분이 아닙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분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가르쳐지는지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장로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장로는 교회를 지키는 분입니다. 교회의 건물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교회 같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기 위해 기도하며 직분을 감당하는 분들이 장로님들입니다. 장로는 목회자를 지키는 분입니다. 무슨 경호원을 세워서 목회자를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바르게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건을 살피고 돌봐주는 분들이 장로님들입니다. 교회에서 바르게 배운 평신도들이 성경 말씀에 굳게 서 있고 교회를 바르게 지키려 하고 목회자가 바르게 목회하도록 돕는다면 잘못된 이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제가 믿기는 기둥교회 장로님들이나 성도들은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서 계신 분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틀림없이 기사와 이적은 있습니다. 저 자신도 병 고침의 경험이 있습니다. 신유의 체험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해 줄 때 그런 역사가 나타난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모든 궁극적인 권위의 원천, 교회 안에서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하는 일에 최고의 권위를 둔 것은 “성경”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어도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은 “모든 것의 권위의 원천은 성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웨슬리(Wesley)는 그의 1766년 6월 5일 일기에서 “나의 근거는 성경이다. 그렇다. 나는 성경고집쟁이(Bible-bigot)이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것이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성경을 따른다.”라고 했습니다. (“My ground is the Bible. Yea, I am a Bible-bigot. I follow it in all things, both great and small.”) 전통적으로 신학의 자료는 - 권위적인 자료(authoritative source), 1차적 자료: 성경(Scripture)와 - 보조적인 자료(subsidiary source), 2차적 자료: 전통(Tradition)과 이성(Reason)과 체험(경험, Experience)입니다. 성경(Scripture): 성경이 제일 위에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오신 줄 믿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고 여기에 나오신 줄 믿습니다. 전통(Tradition): 그 다음에 전통이 중요합니다. 전통도 교회 역사 흐름의 그런 전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기독교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잡혀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에 밀라노(Milano) 칙명을 발표하고 기독교를 해방시켰고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후에 박해받던 예수 믿던 사람들이 땅굴 속에서 숨어서 믿다가 밖으로 나와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차츰 차츰 이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325년에 니케아(Nicaea)종교회의를 거쳐서야 잘못된 이단을 단죄하고 기독교의 교리가 성립되었습니다.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325년 이전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도들과의 연대가 가깝고 또 그때까지는 교회가 분리되지 않은 한 목소리를 내었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Reason):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경험하게 하는 그런 이성을 주셨습니다. 판단을 주셨습니다. ‘아,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니까 이렇구나. 교회 전통에 비추어 보니까 이렇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렇구나.’라고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체험(경험, Experience): 신앙생활은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내가 믿어보니까, 내가 말씀을 들어 보니까, 내가 응답받으니까.’라고 내가 만난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그런 성도들인 것을 믿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보에 나온 설교 제목은 “2000마리 돼지 대 1명의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의 설교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도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돼지 2000마리를 물속에 처박아 죽게 하고 한 영혼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한 영혼’을 구원하자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세상에 이상한 일들이 자꾸 벌어지면서 우리가 전도하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자 마음먹었던 사람들의 마음 문을 닫게 만듭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예수님 당시에 돼지 2000마리는 엄청난 재산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2000마리의 돼지를 물에 집어넣었습니다. 죽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힘들고 어려워도 복음 전하고 영혼 구원하는 일에, 전도하는 일에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실망하지 마세요. 마음 아파할 것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의인 10사람만 있으면 멸망당하지 않았을 텐데 의인 10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제가 분명히 믿기는 우리 기둥교회가, 기둥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찾지 못했던 ‘의인 10사람’과 같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인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그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바르게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뿌리며 가을의 추수를 위해서 씨 뿌리는 농부들처럼 힘들고 어려워도 전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에이 이것 틀렸어. 그것들 다 똑같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지역에서 나오는 생선에서 병균이 발생했다고 해서 평생 동안 생선을 안 먹겠다고 하는 사람은 바보지요. 사과상자에서 썩은 사과 하나를 발견했다고 해서 사과를 평생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 아닙니까? 부천도 공기가 나쁩니다. 공기가 나쁘다고 해서 코를 막고 숨을 안 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단자도 있고,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펼쳐졌다고 해서 여러분의 신앙을 접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도를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도를 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더 기도하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살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더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심야기도회 때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기도하는 자리에 많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고 야단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오히려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울지언정 슬프고 안타깝고 답답한 일을 만나서 울면 되겠습니까? 물에 처넣어 죽여 버린 돼지 2000마리보다 한 생명이 그렇게도 귀했다면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계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기둥교회 인사가 이때에 가장 중요한 인사라고 생각합니다. 예배에서, 주일성수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에서, 사람들이 비난하고 손가락질해도 여러분, “주 안에서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씀으로 승리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데에 우리를 쓰시고, 우리 기둥교회를 써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 안에서 범사에 말씀으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돼지 2000마리 보다 한 생명을 귀히 여기셨던 하나님, 한 생명을 위하여 돼지 2000마리를 물에 처넣으신 주여! 오늘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여기 모여 예배드립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시옵시고, 빛 되고 소금된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심령 심령들마다 힘 주시고 능력을 주시옵소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고신일 목사(부천 기둥교회)
2000마리 돼지 대 1명의 사람/ 막5:1-20/ 이단사이비예방주일설교/ 2003-05-27
2000마리 돼지 대 1명의 사람 막5:1-20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우리를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 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막5:1-20) <목회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오늘을 살게 하시고, 거룩한 주일 기둥교회에서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빛 되고 소금 되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과 성경을 들먹이며 떠들어대는 사이비들 때문에 움츠려드는 요즈음, 하나님, 우리가 있음에, 기둥교회가 있음에, 소망이 있고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더 바르게 더 잘 믿고, 빛 되고 소금 되는 삶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오늘도 주일을 귀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환자, 군대, 객지, 외국에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기둥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기 원하면서도 형편과 사정이 달라 설교 테이프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 복된 가정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가정을 주님이 세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가정을 위하여 비옵나니 -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찬양과 기도, 말씀이 가득한 가정이 되게 하소서. - 감사가 있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날마다 웃음꽃이 피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서로가 지지하고 세워 주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예의를 가르치고 예의가 지켜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사랑할 줄 알고 사랑 받을 줄 아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쉼이 있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부모와 자녀 간에 마음이 통하는 대화가 끊이지 않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이웃에게 열려 있는 가정, 세계로 열려진 가정되게 하소서. - 꿈이 있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며 함께 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1.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2.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 해처럼 높으신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3.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여러분 가정과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입술이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즘 며칠 동안 예수 안 믿거나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들에게 아마 시달림을 많이 받으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서울에 어떤 교회, 그 교회의 목사, 사실 그 사람은 자기가 속해 있던 교단에서 이미 몇 년 전에 목사직을 파직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것을 제재하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그 사람 홀로 활동했는데 그 사람으로 인해서 선량한 목회자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평범한 성도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르게 믿어야 하고, 바르게 가르칠 뿐 아니라, 바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1990년 3월 31일자 LA타임지와 교포 신문에 특별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캐나다와 접경하고 있는 미국의 와이오밍 주 북쪽에 있는 몬태나 주에 있는 ‘만민승리교회(Church Universal and Triumphant)’가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Universal’이라는 단어를 ‘만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만민’이라는 이름이 문제인지 그 교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원래 그 교회는 캘리포니아에 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몬태나 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것이 부천에서 인천, 서울로 옮기는 정도의 거리가 아닙니다. LA에서 몬태나 주로 가려면, 자동차로 화장실을 잠깐 들르는 것 외에 자지도 않고 계속해서 이틀을 가야 몬태나 주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부산까지 가는데 4시간 30분이면 간다고 하는데, 얼마나 먼 거리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사했느냐 하면, 2,500명이 몬태나 주로 이사했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목사는 ‘엘리자벳 클레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이상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계시를 내려 주셨다. 곧 지구에 핵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1990년 3월 말까지 늦어도 4월 23일까지는 핵전쟁이 일어나서 온 지구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와 만민승리교회 교인들은 살려주기로 약속하셨다. 그래서 핵전쟁에도 견딜 만한 땅굴을 파야 되니까 몬태나로 이사 가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만민승리교회 교인들은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도 팔고 아이들의 학교도 자퇴를 시키고 몬태나로 2,500명이 이사를 갔습니다. 미국에서 한 주에 살다가 다른 주로 옮겨간다는 것은 나라를 옮겨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마다 법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래서 운전면허도 다시 취득해야 합니다. 2,500여 명의 성도들이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도 다 퇴학시켜서 몬태나로 이사 갔습니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고신일 목사를 신뢰하십니까? 그러면 몬태나까지는 아니더라도 강원도로 이사 가자고 한다면 집도 내놓고 직장도 다 그만두고 아이들도 자퇴시켜서 가실 분이 계십니까? 웃지 마시고, 그래도 제가 ‘갈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면, 누구라도 손을 들어야 하지 아무도 안 들다니요. 아무튼 2,500명이 직장도 다 내놓고 이사 가서 핵전쟁을 피하기 위한 땅굴을 팠습니다. 큰 땅굴은 756명이, 짧게는 7개월부터 7년까지 견딜 수 있는 땅굴을 팠습니다. 핵전쟁이 나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땅굴을 팠습니다. 물과 음식도 충분히 준비해 놓고, 소·대변을 봐도 정화될 수 있도록 좋은 시설을 갖춰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땅굴에 들어간 그 입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때 저는 미국에 있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지 벌써 8년이 되었는데, 이 사람들이 7년분의 식량만 땅굴에 비치해 두었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후에 나왔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결말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이 핵전쟁으로 지구를 멸망시키려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살려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왜 고신일 목사에게는 알려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멸망하시려고 작정하셨다면, 왜 그 사람들에게만 땅굴을 파라고 하셨을까요? 이 세상에는 이런 이상한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1. 종교의 종류 종교는 크게 4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이방종교: 이방종교는 기독교가 아닌 종교를 말합니다. 힌두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교도 이방종교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사실 유교는 종교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① 신론: 신이 있어야 합니다. ② 인간론: 사람이 어떻게 존재했으며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③ 윤리론: 신과 인간과의 윤리, 인간과 인간과의 윤리에 대한 것입니다. ④ 구원과 내세론: 제한된 인생을 사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으며 영원히 살 수 있는가 하는 내세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교도 굳이 종교에 넣어야 한다면 이방종교에 속할 것입니다. 2) 세속종교: 세속종교라 함은 종교의 틀을 갖지는 않았으나 종교와 같은 그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 무신론: 신이 없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 불가지론: 알 수 없다, 어떻게 사람이 알 수 있느냐고 단정 짓는 것입니다. - 회의론: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한 것’을 말합니다. - 막시즘(Marxism): 지나친 공산주의를 말합니다. 3) 유사종교(오컬트-occult): 종교와 비슷하면서 종교가 아닌 것이 종교처럼 존재하는 것을 유사종교라고 합니다. 점성술, 무당, 유령, 최면술, 마술, 미신 등을 말합니다. 4) 이단종파(기독교이단): 기독교와 같은 색깔을 띠었으나 정통 기독교가 아닌 이단 종파를 말합니다. 그것을 ‘이단’(異端-다를 이, 끝 단)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성경으로 시작해서 비슷한 것 같지만 끝이, 결말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몰몬교, 통일교, 전도관, 영생교 등 집단을 말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이재록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많이 생기는 이유 가운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별히 한국에 이런 일들이 많은 것은, 제가 보기에는 쉽게 목사가 될 수 있고, 아무렇게나 집단들이 ‘목사’라고 해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제까지 이웃집 아저씨였는데, 오늘 갑자기 목사가 되고, 어제까지 옆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 ‘나 목사야.’라고 말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제가 속한 우리 감리교 교단은 목사가 되려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신학대학 4년을 졸업하고, 일반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려면 반드시 대학원에 진학해야 합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신학대학원을 2년 해야 하고, 일반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대학원을 3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석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냥 받는 것도 아니고 목회를 시작해서 1년쯤 지난 후에 “성경, 신학, 논문, 자격심사, 품행통과” 이 다섯 가지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3년이 지나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그냥 다 목사는 아닙니다. 그때까지는 준회원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도 다시 2년 동안 똑같은 다섯 가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목사 안수를 받고 진급해야 10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중간에 한 번 떨어진 사람은 12년도 걸리고 13년도 걸립니다. 이렇게 어렵게 목사가 되는데, 어제까지 이웃집 아저씨였던 사람이 오늘 ‘목사’라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고, 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목사직을 파직했다고 해도 법으로 그 사람을 제재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단이라는 것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그릇된 주장을 말하기 때문에 경고하고, 파직을 당해도 계속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가감하는 사람, 성경에 있는 말을 빼고 어떤 말은 첨가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가 계속해서 계시를 받는다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해 주신다고 ‘엘리자벳 클레어’처럼 말하는 사람입니다. 2. 이단의 정의 1) 어원적 정의 이단이란 말은 영어로 “heresy(헤러시)”라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의 “하이레시스”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은 본래 “선택받은 자, 뽑힌 자”라는 뜻입니다. 2) 성경적 정의 ① 다른 예수, 다른 영(악령),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고후11:4) ② 그릇된 주장에 대해 거듭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딛3:10) ③ 성경을 가감하는 자(계22:18-19) ④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제한하고 부인하는 자(요일2:22-23) ⑤ 지금도 계속적 계시를 주장하는 자(히1:1-2, 엡3:3-4) 성경 아닌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는 자입니다. 3. 이단 종파들의 공통점 1) 발생모체(發生母體)는 기독교입니다. 성경에서 모방하고, 기독교적인 여러 조건들을 모방하여 적용합니다. 2) 기성교회(현실교회)를 비판합니다. 기성교회, 현실교회들을 모두 타락했다고 말하고 부정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종교에만 와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3) 열광주의적인 신비체험을 강조합니다. 영적인 특수체험, 곧 입신, 방언, 접신, 환상, 신유, 진동, 도통 등의 신비하고 격렬한 체험을 과도하게 자랑합니다. 기둥교회 방송실 직원들이 저를 보고 ‘목사님 우리도 뒤에 이상한 현상을 만들 수 있는데 한번 해볼까요?’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기둥 교회도 그런 현상을 나타낼 수가 있다고 합니다. 4) 교주를 신격화하여 숭배합니다. 사이비 이단들은 교주를 신격화합니다. 여러분, 목사를 귀히 여기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고 그래야 하지만 그러나 신은 아닙니다. 고신일 목사도 참 겉만 멀쩡하지 별 볼일 없습니다. 검버섯이 안 생겼나, 또 매일 아파서 비실거립니다. 나는 아픈데 아프다고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해서 기도해 주면 그 사람은 낫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똑같은 증세로 왔는데 기도해도 낫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들끼리 얘기하다가 토라집니다. 누구는 낫게 해 주고 누구는 안 낫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제가 합니까? 사도 바울도 자신이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나았는데 자신은 병든 환자였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5) 독선적 구원관을 주장합니다. 이 이단 종파들은 자기들만이 특별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와야만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5. 이단 종파들에 대한 종합 1) 비성서적 비신학적입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입니다. 이 말은 성경에 위배된다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2) 비윤리적 반사회적입니다. 도덕성이 없습니다. 3) 현실도피자 주의자들입니다. 4)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빛 된 삶을 사는 것을 거절합니다. 역사 세상 사회와 담을 쌓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지향하는 경우입니다. 성경에 ‘너희가 세상에 살면서 빛 되고 소금 되어서 다른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희가 착한 행실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기둥교회 장로님들에게, 또 다른 교회에서 임원교육을 할 때도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건전한 믿음을 가졌다면 이단이 이곳 강단에 와서 설교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기둥교회는 제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믿을 사람이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런 교회가 건전한 교회, 든든한 교회입니다. 저는 장로님들에게 “장로는 권위나 세우고 대접이나 받으며, 목사를 견제하는 직분이 아닙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분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가르쳐지는지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장로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장로는 교회를 지키는 분입니다. 교회의 건물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교회 같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기 위해 기도하며 직분을 감당하는 분들이 장로님들입니다. 장로는 목회자를 지키는 분입니다. 무슨 경호원을 세워서 목회자를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바르게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건을 살피고 돌봐주는 분들이 장로님들입니다. 교회에서 바르게 배운 평신도들이 성경 말씀에 굳게 서 있고 교회를 바르게 지키려 하고 목회자가 바르게 목회하도록 돕는다면 잘못된 이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제가 믿기는 기둥교회 장로님들이나 성도들은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서 계신 분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틀림없이 기사와 이적은 있습니다. 저 자신도 병 고침의 경험이 있습니다. 신유의 체험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해 줄 때 그런 역사가 나타난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모든 궁극적인 권위의 원천, 교회 안에서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하는 일에 최고의 권위를 둔 것은 “성경”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어도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은 “모든 것의 권위의 원천은 성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웨슬리(Wesley)는 그의 1766년 6월 5일 일기에서 “나의 근거는 성경이다. 그렇다. 나는 성경고집쟁이(Bible-bigot)이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것이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성경을 따른다.”라고 했습니다. (“My ground is the Bible. Yea, I am a Bible-bigot. I follow it in all things, both great and small.”) 전통적으로 신학의 자료는 - 권위적인 자료(authoritative source), 1차적 자료: 성경(Scripture)와 - 보조적인 자료(subsidiary source), 2차적 자료: 전통(Tradition)과 이성(Reason)과 체험(경험, Experience)입니다. 성경(Scripture): 성경이 제일 위에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오신 줄 믿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고 여기에 나오신 줄 믿습니다. 전통(Tradition): 그 다음에 전통이 중요합니다. 전통도 교회 역사 흐름의 그런 전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기독교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잡혀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에 밀라노(Milano) 칙명을 발표하고 기독교를 해방시켰고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후에 박해받던 예수 믿던 사람들이 땅굴 속에서 숨어서 믿다가 밖으로 나와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차츰 차츰 이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325년에 니케아(Nicaea)종교회의를 거쳐서야 잘못된 이단을 단죄하고 기독교의 교리가 성립되었습니다.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325년 이전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도들과의 연대가 가깝고 또 그때까지는 교회가 분리되지 않은 한 목소리를 내었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Reason):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경험하게 하는 그런 이성을 주셨습니다. 판단을 주셨습니다. ‘아,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니까 이렇구나. 교회 전통에 비추어 보니까 이렇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렇구나.’라고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체험(경험, Experience): 신앙생활은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내가 믿어보니까, 내가 말씀을 들어 보니까, 내가 응답받으니까.’라고 내가 만난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그런 성도들인 것을 믿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보에 나온 설교 제목은 “2000마리 돼지 대 1명의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의 설교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도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돼지 2000마리를 물속에 처박아 죽게 하고 한 영혼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한 영혼’을 구원하자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세상에 이상한 일들이 자꾸 벌어지면서 우리가 전도하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자 마음먹었던 사람들의 마음 문을 닫게 만듭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예수님 당시에 돼지 2000마리는 엄청난 재산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2000마리의 돼지를 물에 집어넣었습니다. 죽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힘들고 어려워도 복음 전하고 영혼 구원하는 일에, 전도하는 일에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실망하지 마세요. 마음 아파할 것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의인 10사람만 있으면 멸망당하지 않았을 텐데 의인 10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제가 분명히 믿기는 우리 기둥교회가, 기둥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찾지 못했던 ‘의인 10사람’과 같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인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그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바르게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뿌리며 가을의 추수를 위해서 씨 뿌리는 농부들처럼 힘들고 어려워도 전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에이 이것 틀렸어. 그것들 다 똑같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지역에서 나오는 생선에서 병균이 발생했다고 해서 평생 동안 생선을 안 먹겠다고 하는 사람은 바보지요. 사과상자에서 썩은 사과 하나를 발견했다고 해서 사과를 평생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 아닙니까? 부천도 공기가 나쁩니다. 공기가 나쁘다고 해서 코를 막고 숨을 안 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단자도 있고,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펼쳐졌다고 해서 여러분의 신앙을 접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도를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도를 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더 기도하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살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더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심야기도회 때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기도하는 자리에 많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고 야단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오히려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울지언정 슬프고 안타깝고 답답한 일을 만나서 울면 되겠습니까? 물에 처넣어 죽여 버린 돼지 2000마리보다 한 생명이 그렇게도 귀했다면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계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기둥교회 인사가 이때에 가장 중요한 인사라고 생각합니다. 예배에서, 주일성수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에서, 사람들이 비난하고 손가락질해도 여러분, “주 안에서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씀으로 승리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데에 우리를 쓰시고, 우리 기둥교회를 써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 안에서 범사에 말씀으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돼지 2000마리 보다 한 생명을 귀히 여기셨던 하나님, 한 생명을 위하여 돼지 2000마리를 물에 처넣으신 주여! 오늘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여기 모여 예배드립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시옵시고, 빛 되고 소금된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심령 심령들마다 힘 주시고 능력을 주시옵소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고신일 목사(부천 기둥교회)
5종목의 나의 기도/ 다만 제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겠습니다/ 마5:11-12/ 주기철 목사/ 평양 산정현교회/ 1939-02-05
5종목의 나의 기도/ 다만 제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겠습니다 마5:11-12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나는 저들의 손에 몇 번째 체포되어 이번에는 오래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가 이 산정현 강단(講壇)에 다시 서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오며 나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시던 교우 여러분 앞에서 다시 설교하려 하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설교가 아니고 갇히운 중에서 늘 기도하던 다섯 가지 제목 곧 ‘5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말씀하겠습니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합니다.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의(義)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고자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 하와 범죄 후에 사람은 다 죽습니다. 제왕, 장상, 재사, 가인도 다 죽었고 성현, 군자, 위인, 열사도 다 북망산에 갔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어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열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긴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 권세를 내 발 아래에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과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 각오만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싯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에, 스데반은 청장년의 때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 2. 장기(長期)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대로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 년 십 년 계속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버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끝까지 참는 사람이 구원을 얻으리라”(마4:13)고 신신 부탁하였습니다.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사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아픔 어떠하였으리오! 나와 여러분의 죄, 억만 죄인의 죄 짐을 대신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중대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핏방울 소리를 우주도 감당할 수 없이 지축(地軸)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8:8).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 불사의 몸이오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길이 참아 주가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라(약5:7).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3.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80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남의 아비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① 자식을 아끼지 아니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이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 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꼬! 춘풍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 고요한 밤 달빛이 철장에 새어들 때, 어머님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시던 주님 심정 어떠하였을꼬! 십자가 밑에서 가슴 치며 애통하는 성모 마리아의 아프신 가슴 어떠하였을까?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을, 80 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②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일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 된 의무를 못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두고 잡혀 다니는 이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 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정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 이 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소서. ③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네 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 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리 어린 것은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끝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에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 떼어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이 내 마음 끝없이 비참합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자식 같은 제자들을 앞에 모으시고 위로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 어린 말씀이었고 교훈하시는 말씀, 말씀이 피 끓는 소리였습니다. 어린 자식과 같이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마음 어떠하셨으리까!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주님께 나의 자식을 부탁합니다. 어미 죽은 어린 것을 주님 품에 부탁합니다. ④ 나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나의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을,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에, 이리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나가지 못합니다. 맡기나이다. 내 양들 다 목자 되신 예수님 손에 맡기나이다. 나의 어머님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을 자비하신 주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주님이 싸매어 주시고 길 잃고 헤매는 자를 주님 손수 인도하여 주시고 낙심하고 범죄 한 자를 주님 보혈로 사유하여 주시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내 마음 차마 못 할 일이올시다.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 지켜주시옵소서. 나의 늙으신 어머님과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나의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떼들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으로 이 산정현 이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자취를 따라가려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에게 짐 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자못 무소불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면 철석같은 마음도 변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주님 따라가는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忠節)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무너지는 한(漢) 나라를 붙잡고 오장원(五丈原)에 스러질 때까지 국궁진쇄 사이후이(鞠躬盡碎 死而後而) 죽기까지 애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교회와 그 의를 붙잡고 국궁진쇄 사이후이(鞠躬盡碎 死而後而)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殷) 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 나라에 살 수가 없어 수양산에 숨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굶어 죽으니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불고 있습니다. 정몽주(鄭夢周)는 망하는 고려 나라를 위하여 선죽교에 피를 뿌리니 대(竹)야 났으랴마는 그 절개 대보다 청청창창 싯푸르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 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 되고 넋이야 있건 없건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이 있으랴 이는 우리 선인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충의대절(忠義大節)입니다. 사람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붙잡고 풀무 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 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여 풀무 불이냐! 예수를 사랑하여 사자 굴이냐! 그 무엇이 두려울 것이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백제 나라의 도미부인(都彌夫人)은 개루왕(蓋婁王)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 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늘 뫼 아래에서 한 평생 그 남편을 섬기었습니다. 이는 우리 조선의 딸들이 정절을 지키던 피 눈물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신부되어 주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으랴! 주후 200년 카르타고의 벨 베추어는 22-3세의 방년에 젖먹이와 늙은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받쳐 죽었습니다. 천고의 열녀 벨뻬추어는 주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헌신하기로 열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苟苟盜生) 피할 줄이 있으랴!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 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죽고 죽어 열 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大義貞節) 변치 아니하오리다.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인생 살면 몇 일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사이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아버지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 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아멘. 주기철 목사(朱基徹 牧師, 1897~1944,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
A Life that Makes Others Happy(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삶)/ Philippians 4:4-8(빌4:4-8)/ Pastor Sou-Young Lee(이수영 목사)/ 2002-09-11
A Life that Makes Others Happy(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삶) Philippians 4:4-8(빌4:4-8) A Life that Makes Others Happy Philippians 4:4-8 We often hear that there are three kinds of people. The first kind of people is those who are necessary in a society. The second kind of people is those who are neither necessary nor harmful in a society. The third kind of people is those who are to be perished in a society. We need to reflect on ourselves in what group are we classified. Of course, all the people will agree that they are to be classified in the first group and not to be classified in the third group. Jesus says us,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as well as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We should understand these words as the commandment to be the people that are necessary for a society. We should not be such people that are neither required nor harmful. Needless to say, we should not be such people that need to be perished from this society. Then, what is the criteria of these three kinds of people? I think the most important criterion is, like the example of salt and light, instructiveness. That is, people can be classified by whether they are instructive for people and society or not. In other words, people can be classified by whether they can make others happy or not. Everyone wants to be happy and no one wants to be miserable. Therefore, there is no more precious thing than making others happy, especially as many people as possible. On the other hand, there will be no more detestable life than making others unhappy, especially making plenty of people unhappy. In fact, the most blessed are those who can make others pleasant and happy with their words and actions. When we have such reputations as “My mind becomes joyful whenever I see him” or “I become happy whenever I see her smile or laughing” from others, then we can judge that our life has been blessed and successful. On the contrary, our lives must have been failure if our words and actions have made others unpleasant, inflicted others, caused pains many others, and brought harms others. How miserable our lives will be if we have such reputations from others as “The guy? Out of luck!” “Don’t mention about the guy before me! He angers me!” “The best is not to contact with him!” “If he perish in silence, it’s the best help for us!” Why do we need to live such lives? Of course, in some cases, we can bring damages and pains to others even though we try to do good for others. However, there are some ill natured people who continually devise miserable matters for others, enjoy the misery of others, and regard them as their happiness. I believe that there is no more cursed life than such people in this world. The misery of such people is that they do not change their mind but to be more stubborn when some others tell them their wrong doings. We should reflect on ourselves whether we are not such kind of people in our community. Making others happy does not require great efforts, huge capital, much knowledge, or great preparation. It only requires little concern for, small understanding of, and warm mind for others. Small kindness, concessions, smiles, and devotion which emanates from them can make others happy. Holding the doors for a while with a smile for the following person, after you enter into the building, can make this society bright and hopeful. One praise of good doing can make people happy. One embracing with the recognition of hard work can blow away all the fatigue and agony and make a person very happy. Some days ago, I fully realized the usefulness of a dim candle light. The electricity was off for that night and nothing was possible until one family member who knew the location of a match return to home and lit a candle. The dark society of this world really requires us to be a small light. The following words of Jesus are really meaningful in these days: “Neithe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Instead they put it on its stand, and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our good deeds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Today’s scripture answers to the question of “How can we make others happy?” At first, verse 4 of today’s scripture says, “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Those who rejoice at all times can make others happy. People who frown and grumble at all times cannot make others happy. However, to rejoice without any reason is not good. Only those who rejoice with unselfish reason can make others happy. If a person is pleased with a fortunate big income when others feel bad because of lost money, can the pleasure make others happy? Our pleasure should be founded on our Lord. Those who rejoice with the faith on Jesus Christ in thankful of the grace, even in similar or worse situation to others, can make others happy. This is the meaning of verse 4 which says, “Rejoice in the Lord always.” Verse 5 says, “Let your gentleness be evident to all. The Lord is near.” The word “gentleness” is the most difficult word for Korean theologists to translate among the words in New Testament. It means “justice and something better than justice.” We may misunderstand “gentleness” as “the generosity that sacrifices justice.” But “gentleness” here means the wisdom and ability which do not sacrifice justice. Gentleness also does not allow justice to hurt the people. We can make others happy if we can forgive and love others without sacrificing justice. Although this is difficult task to do, it is required to christians. As it is required to all christians, bible says, “Let your gentleness be evident to all.” Verse 6 says,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Those who do not be anxious can make others happy and can make others feel relief. Those who illustrate all his worries before a person really make others tired, gruesome, and frustrated. If someone are to listen the grumble of others in this hard world, it will really deprive the listener’s happiness. On the contrary, those who are carefree before serious situation also make others uneasy and unhappy. We are not anxious not because we have no worries nor are we indiscreet. We are not anxious because we entrust all our worries to our God. This is the reason why Apostle Paul says,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and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Those who report everything to God, pray for the solution, and who are free from worry can make others happy. Verse 6 also says us to pray with “thanksgiving.” Prayer with thanksgiving has two meanings. First, it requires to thank the fact that we can pray God entrusting all our things. Second, it requires to pray with the faith that God will grant all our requests. When we pray in this manner, we can enjoy peace in our mind. This fact is illustrated by verse 7 which says,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Such a peace of mind and thought has the power to make others happy. Verse 8 introduces many secrets that can make others happy. It says, “Finally, broth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think about such things.” That is, it requires us to think and practice eagerly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and whatever is admirable. “What is true” here means to be truthful and to be a person that can be trusted. It makes us very happy to know or to have a person that is truthful and that can be trusted in all matters. Verse 8 says, “whatever is noble.” “Noble” here implies to be respectable, to be elegant, to be valuable, and to be earnest. Seeing a person who is respectable, elegant, and earnest in all matters at all time makes us happy. Verse 8 says, whatever is right. “Right” means keeping all the duties that should be observed in human relationships. Everyone who tries to have right relationship with God and keeps all the duties in human relations makes others happy. Verse 8 says, “whatever is pure.” Pure is translated as “chaste” in Korean bible. “Pure” here implies the trait which enables people to approach God, which reflects God, and which is enough to be used by God. Seeing a people who is pure and chaste make people happy. Verse 8 says, “whatever is lovely.” This implies the mind and character that can attract others’ mind. Seeing those who attract every others’ mind make people happy. Verse 8 says, “whatever is admirable.” Those who have good reputation in all matters also make others happy. Verse 8 also says, “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 This indicates all kinds of excellency and the matters that can be praised. If we eagerly think and practice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 then we will be able to make others happy. These words are more precious for us because Apostle Paul wrote this letter in custody in jail to the saints of Philippians who were in danger of persecution. As the political, economic, social situation we are encountering now does not make us happy in these days, we all the more need to be the people that make others happy. Our church has the slogan “Let’s live as the children of light” in this year. Thus, all of we saints need to hear such praise as “You make this world livable,” or “Saemoonan Church is providing hope for this society!” Let us be the saints that make Saemoonan Church happy. Let us be the Saemoonan Church that make Korea happy. Through such efforts, I hope that the word “Saemoonanian” in a dictionary can be interpreted as “something that makes others happy” in sometime in the future. It will be the glory of God and it will be worthwhile events for us. Such word will be the evidence to our descendants on the fact that the saints of Saemoonan Church lived their life as the children of light in this world. “People that make others happy,” I hope this is not mere a dream. I hope it becomes the goal of our life and the principle of our practice within faith in this year. Pastor Sou-Young Lee(Saemoonan Church)(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A Lunch box of a boy(소년의 도시락)/ John 6:1-15(요6:1-15 )/ 어린이주일학교영어설교/ 영한대역설교/ 2009-09-27
A Lunch box of a boy(소년의 도시락) John 6:1-15(요6:1-15) A Lunch box of a boy John 6:1-15 There was a boy. This boy’s name is not recorded in bible. Would you give him a nice name? O. K. Let’s call him Terry. He must be as tall as @@ (pointing one of students). His hair must be as short as ##‘s hair. He must be as active as **. One day, Terry was running an errand. He was carrying a box. It is a package his mother wanted to give to his uncle. Terry had another box. It’s the lunch box his mother made for him. It was his favorite lunch box - two fish and five loaves of bread. ◎ Speaking & Activities1 말하기 & 활동1 준비물: 도시락 크기의 종이박스와 그 안에 오려 넣은 오병이어 그림 또는 실물 Here is Terry’s lunch box. What are in this box? (two fish and five loaves of bread) Let’s see they are in here. Let’s count them. (어린이들과 함께 센다) One, two - two fish. One, two, three, four, five - five loaves of bread...two fish and five loaves of bread. Terry walked and walked until he saw a great crowd at the foot of a mountain. Terry thought, “There must be something fun. I will take a look at it.” and went close to the crowd. Jesus was teaching people bible stories. People loved to hear Jesus teaching because it made them happy. People wanted to learn more and more about God and they didn’t want to go home. It passed lunch time.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t is lunch time. Where can we give them something to eat?” Philip counted money and answered, “We don’t have enough money, sir.” Jacob looked around and answered, “We don’t see any restaurant ... even Mcdonald or Burger King near around.” Thomas yawned and answered, “How about sending them back home?” Nobody came up with a great answer. At that time, Andrew came with Terry, the little boy. Andrew said, “This boy said he had something to share with us ◎ Speaking & Activities2 말하기 & 활동2 준비물: 4명의 제자 이름을 적은 흰 종이 The four disciples of Jesus are here. We will have them come up here. Four disciples, come forward, please. Here they are. But I won’t tell you their names. They will say what they said to Jesus. Then you will tell me each disciple’s name. Philip counted money and answered, “We don’t have enough money, sir.” Who is this man? James looked around and answered, “We don’t see any restaurant ... even Mcdonald or Burger King near around.” Thomas yawned and answered, “How about sending them back home?” Nobody came up with a great answer. Finally Andrew came with Terry, the little boy. Andrew said, “This boy said he had something to share.” “What is that?” asked Jesus. “Jesus, you said God’s people should share. I have my lunch box. I want to share it with people.” “How many people can eat it?” asked disciples opening up the lunch box. “Only two fish and five loaves of bread?” said disappointed disciples “They are yummy. And Jesus can do anything with it. Don’t you believe?” said Terry. Jesus took the two fish and five loaves of bread. He held them up high in heaven and prayed. “Thanks, Father for this meal and this boy’s faith.” Then, he had the food passed out. The food in the box was passed out until 5,000 people were fed. “This is a miracle!” “You must be God’s Son.” People shouted in joy. “I told you so. I knew He could do it,” Terry smiled. Dear friends, we are here in Jesus’ presence. in the house of God. Anything can happen if we are willing to share, willing to give to Jesus what we have, even though they are very small pieces. And we also can give him our faith. Then Jesus will take them and bless them and the next thing that will happen will be blessings abundant over on Gupo and Busan and all over the world. 소년의 도시락 요6:1-15 한 소년이 있었어요. 이 소년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아요. 그에게 좋은 이름을 붙여주어 볼까요? (학생들로부터 이름 추천을 받는다) 좋아요. 그를 테리라고 부릅시다. 그는 oo (참석 학생 중에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만큼 키가 커요. 그의 머리칼은 ## 만큼 짧아요. 그는 ** 만큼 활동적이에요. 어느 날 테리는 심부름을 하고 있었어요. 그는 짐을 들고 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그의 삼촌에게 전해 주시기를 원하는 물건이었어요. 테리는 또 다른 박스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해 만들어주신 점심 도시락이었어요. 그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점심이었어요. 두 마리 생선과 다섯 조각의 빵이었어요. ◎ 말하기 & 활동 1 여기에 테리의 점심 도시락이 있어요. 이 안에 무엇이 있을까요? (두 마리 생선과 다섯 덩이의 빵) 이 안에 그것들이 있는지 봅시다. 한번 세어 봅시다. 하나, 둘 - 두 마리의 생선. 하나, 둘, 셋, 넷, 다섯 - 다섯 덩이의 빵 ... 두 마리의 생선과 다섯 덩이의 빵. 테리는 걷고 걷다가 산기슭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어요. 테리는 생각했죠, “뭔가 재미있는 게 있나봐. 가서 봐야겠어.” 그리고 군중들이 모인 곳으로 가까이 갔어요. 사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가르쳐 주고 계셨어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좋아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니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더 많이 배우기를 원했고, 그들은 집에 가기를 원치 않았어요. 점심시간이 지났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어요. “점심시간이구나.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까?” 필립이 돈을 세어보고 대답하기를, “우리는 충분한 돈이 없어요, 주님.” 야곱이 둘러보고 대답하기를 “여긴 식당이 없어요. 이 근처엔 맥도날드도 버거킹도 없어요.” 토마스가 하품을 하며 대답하길,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어요?” 아무도 좋은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마침내 안드레가 어린소년 테리를 데리고 왔어요. 안드레가 말하기를, “이 애가 나누어 (먹을) 것이 있답니다.” ◎ 말하기 & 활동 2 여기 예수님의 네 명의 제자들이 있어요. 그들을 불러 이 앞에 나와 보게 합시다. 네 명의 제자들, 앞으로 나와 보세요. 여기 나왔네요.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한 말을 할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은 각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맞춰보세요. ☐☐이 돈을 세어보고 대답하기를, “우리는 충분한 돈이 없어요, 주님.”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둘러보고 대답하기를 “여긴 식당이 없어요. 이 근처엔 맥도날드도 버거킹도 없어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가 하품을 하며 대답하길,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어요?” 아무도 좋은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가 말하기를, “이 애가 나누어 (먹을) 것이 있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게 무어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나누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제게 점심 도시락이 있어요. 이걸 사람들과 나눠 먹고 싶어요.” 그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을까?” 제자들은 도시락을 열면서 생각했어요. “두 마리 생선과 다섯 조각의 빵뿐이야?” 제자들이 실망하여 말했어요. “그것들은 참 맛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것으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으세요? 테리가 대답하였어요. 예수님은 두 마리의 생선과 다섯 조각의 빵을 손에 들었어요. 그것들을 하늘로 높이 들어 올리시고 기도했어요.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 음식과 소년의 믿음으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은 음식을 나누어 돌리기 시작하셨어요. 도시락안의 음식은 돌려지고 돌려졌어요. 오천 명이 먹을 때까지 그치지 않고 나누어 졌어요. “이것은 기적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틀림없군요!” 사람들은 기뻐하며 외쳤습니다. “그것 봐요.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저 분이 하실 수 있을 줄 알았다구요!” 테리는 미소 지었습니다. ◎ 질문 Q1. 무엇이 문제였는가요? (점심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Q2. 테리의 점심 도시락에는 무엇이 들어있었나요? (두 마리의 생선과 다섯 조각의 빵) Q3. 테리가 그의 점심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사람은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무언가 놀라운 일을 하실 줄로 믿었다.)요 6:1-15 Pastor Seong-Ah Hong(홍성아 목사)(Busan Gupo Church(부산구포교회))
A man who eats the bread of life(생명의 떡을 먹는 사람)/ John 6:48-58(요6:48-58)/ 2003-06-11
A man who eats the bread of life(생명의 떡을 먹는 사람) John 6:48–58(요6:48-58) A man who eats the bread of life John 6:48–58 A man takes a food to keep his life and works to feed the food to his body. All alive that had eaten bread were dead. While, Jesus spoke of the bread of life personally which whoever eat it never is dead. “I am that bread of life. Your fathers did eat manna in the wilderness, and are dead. – I am the living bread which came down from heaven: If any man eat of this bread, he shall live for ever: and the bread that I will give is my flesh, which I will for the life of the world.” All foods that we have taken are perished and everyone that had eaten the food was dead. So Jesus said of it, “labor not for the meat which perishes, but for that meat which endures into everlasting life, which the son of man shall give into you. What is the bread of life that not perishes or not dead and how can we obtain it? 1. Jesus is the bread of life and that we eat the bread means that we believe in him. Jesus has come as the bread of life. He has come down from the Heaven to become a bread of life or a food for us, such as to crucify himself on the cross for us. The passage of 53 –55 in this paragraph says, “then. Jesus said into them, verily, verily, I say into you, except you eat the flesh of the Son of man, and drink his blood, you have no life in you. Whoso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has eternal life; and I will raise him up at the last day. For my flesh is meat indeed, and my blood is drink indeed. That we eat Jesus flesh, and drinks his blood means that we must believe in Jesus. Such as, that eating his flesh means that by our spirit, we believe in the fact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who is living and that his body was offered for us. That drinking us his blood means that we believe in the fact by spirit that he paid the worthy of our sin as shed his blood on the cross. That eating his flesh is the same behavior as that drinking his blood. As obtaining the life by eating a food, we may obtain the everlasting life as receiving him. 2. Jesus’ flesh is the true food for us and is the true drink his blood for us. “For my flesh is meat indeed, and my blood is drink indeed (55).” Jesus is the true food and true drink for everyone regardless of sex, old and young, or poor and rich. Whosoever believes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This food is not an amount that we take for only a day but have to eat it we day by day. Without missing, we should eat it as believing in him. As eating it, it may become the true food within me. Also the family member each may live as believing Jesus. I hope that family all would live, eating and drinking of Jesus who is the true food and drink for us. 3. He who eats the bread of life lives, communicating with God. “He that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dwells in me, and I in him (56).” Dwelling in Jesus means that we live within him. If the bread of life of Jesus enters within me, we may communicate with Jesus and by his power, our soul is revived. The happiness of Jesus’ believer depends on communicating with him. Therefore, he that eats the bread of life may live satisfactorily, always communicating with Lord (John6: 35) 4. He that eats the bread of life lives by the grace of God (57). “As the living Father has sent me, and I live by the Father: so he that eats me, even he shall live by me (57).” He that eats the Christ will be changed into his physical constitutes and come to resembling his personality into the configuration of Christ and make live as him. This is the living by Christ. If you ate the bread of life of Christ, his power shall come out of from you. Like this, he that eats the bread of life can praise under the trouble and persecution and even while he is dying, his face is radiant like an angel. This is because he lives, eating the bread of life by his grace. 5. He that eats the bread of life shall live forever and shall become a food to others. “This is that bread which came down from heaven: not as your father did eat manna, and are dead: he that eats of this bread shall live forever (58).” We may live forever as eating Jesus the bread of life. Since Jesus saved us as becoming bread to us, we also must save other as becoming bread to them. Multitude men always followed him: since there was bread, a poor could eat the bread, a solitary man ate the comfort and fed courage to a discouragement, the health to sicknesses, the life to dead. Jesus was a friend to sinners and beings discarded. Dear everybody! Wherever you go, I hope that you would become a being who is able to feed eatable things to others. Only a man that bears the cross of Jesus can distribute the bread to others as being as bread to them. In this world, many are suffered from starvation: some of them thirst for real physical food, while there are filled fully with the beings to be fallen into hell’s fire forever without tasting a bread of life which is food of a spirit. Let us feed such men the bread of life and let us become ourselves bread over the starvations, thirsty, beings in rags, solitude, imprisoned, discarded and alienated. Let us eat the bread of life which makes us not dead forever and feed it to them to be saved. Pastor S. H. Park
Running Away From True Love(진실한 사랑으로부터의 도피)/ Genesis 3:8(창3:8)/ Rev. W. N. B. Appiah/ 영한대역설교/ 2012-04-09
Running Away From True Love(진실한 사랑으로부터의 도피) Genesis 3:8(창3:8) Sermon Theme: Running Away From True Love Scripture Reading: Genesis 3: 8 Preacher: Rev. W. N. B. Appiah 1. Introduction One would wonder why I have chosen such a theme for my sermon today. One may ask is it possible that someone can run away from true love, knowing what love actually stands for? Yes it may sound ridiculous yet it is a reality not only in the Biblical times but also in today’s world. In the Biblical times we read in Gen.3: 8 about Adam and Eve running away from the love of God and in Luke 15 also we read about the prodigal son running away from his parental home. Similarly many people are running away from God’s love. 2. Causes Why then can it happen like that? Let us now examine some of the causes, which lead to people running away from true love i.e. the Love of God. But let us consider first what is meant by the love of God since Adam and his wife run away from God’s love because they presumably did not understand it. They saw God’s love negatively as being harsh and deceitful laws that prevented them from knowing the truth. Today people continue to accuse God of the same thing. But God’s love is rather protecting and caring hence the commandment to Adam and Eve. a. Lustful Desires Living in the love of God, Adam was given the commandment ‘You are free to eat from any tree in the garden; but you must not eat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or when you eat of it you will surely die’ (Gen.2: 16-17). But the Bible says again that ‘when the woman saw that the fruit of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pleasing to the eye, and also desirable for gaining wisdom, she took some and ate it.’(Gen.3:6) These words ‘good for food’, ‘pleasing to the eye’, and ‘desirable for gaining wisdom’ are phrases that suggest the causes for man’s running away from God’s love. i) Good for Food. This is one of the reasons why the woman accepted to eat the fruit. ‘Good for Food’, does this suggest they were facing hunger that is why it seemed good for food in spite of God’s warning? There was no hunger because there were thousands of trees with fruits they could eat from. It rather suggests greediness in man. They were just greedy so instead of saying we have enough they rather sought for more. Greediness continues to keep many people away from the love of God. They are greedy for more money and therefore have no time for God. They are greedy for the things of this world that they will want to steal, cheat or kill to get more. ii) Pleasing to the eye. Another reason that made them to run away from the love of God, which is the true Love, is the lust of the eye. They were misled by the outward appearance of the fruit, the beauty of it. Many are deceived by seemingly smart adverts on T.V., Radio and on the internet. For example adverts sometimes show one is smart if one smokes cigarette. Therefore you see adverts with handsome ‘winners’ smoking to portray smoking leads to success. It rather leads us from true love, the love of God. It causes serious health problems, which in the final analysis leads the sick to question the love of God. iii) Desirable for Gaining Wisdom. Adam and his wife desired to gain wisdom without passing through the process of maturity. It is the same problem with us today as many people talk about seeking deeper knowledge and wisdom outside of the limits God has given to us. Many seek deeper wisdom from Theosophical learning, some also from scientific studies and other esoteric studies. But God’s way of showing His true love to man does not lie in worldly wisdom. It lay in the ‘foolishness’ of God dying on the cross. The apostle Paul says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1 Cor.1:18). Let us approach the Cross of Christ that we may taste the true love of God, the Self sacrificing love. b. Impatience Adam and his wife could not patiently go through the process of maturation before desiring to eat the forbidden fruit. If they had been patient in obedience to God’s command, they would have become wise without having to run away from God’s love. It is also an indication of insubordination. Their disobedience to God’s command is a sign of refusal to submit to His authority. In the same way many people are rebelling to the authority of God. Many people want to control their own life. They often say this is my life let me lead it as I choose. Some times we rebel without knowing that we are rebelling. Whenever we rebel against any authority in society i.e. against our parents, teachers or the elderly we are rebelling against God because God’s command is that we respect the commands of our parents and people in authority. The prodigal son similarly, could not wait for the right time of his inheritance to come. He could not wait to go through the process of maturity through submission. So he rebelled against his father and took his inheritance away and spend it in an unwise manner. Sometimes running away from love does not mean running away from home. In certain cases one could be living with parents in the same home and failure to submit (obey) to them. This cuts one from enjoying the parents’ true love though they continue to stay in the same house. This is the reason why in these days, many young ones often say their parents hate them. They have rather run away from the true love of the parents because of impatience and insubordination. 3. The outcome of running from true love What is the result of running away from true love? In the two materials under consideration (i.e. Gen.3 & Lk.15: 11 ff.) we can see that the consequences are disastrous. There is wretchedness, poverty and hatred. The blissful life that Adam and his wife desired rather remained elusive and the earlier bliss they were enjoying in the garden turned into one of wretchedness, poverty and hatred when God threw them out of the garden. They became wretched because wickedness and hatred had taken the place of true love. The same thing happened to the prodigal son. Having spent his wealth, his life became wretched because he became poor and had no food to eat and no clothing to wear. God loves you and wants to show His love to you in the most affectionate manner you have ever wanted, if only you will turn and come to Him you have this love to enjoy. 4. Turning point There needs to be a turning point in your attitude towards your parents, teachers, and other elderly people, those in authority and for that matter, towards God. The turning point of the prodigal son was when he came to his senses and said I will set out and go back to my father and say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Lk.15:17-18) This decision brought him back into the loving arms of his father. If only we can follow this example and give up our lustful desires of greediness, and selfishness and come back to God, He will accept us back and show us His true love. The apostle Paul says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Ro.12:2) You only need to change your mind and respond to God’s love. There is no true love outside of the house of God i.e. the Church. The Psalmist saw this and responded appropriately I was glad when they said to me let us go to the House of God (Ps.122: 1; KJV). For it is there that one finds true love. ====================================================================================== 진실한 사랑으로부터의 도피 창3:8 1. 들어가며 어떤 이는 오늘의 설교 주제로 왜 이런 주제를 택했는지 궁금할 겁니다. 또 어떤 이는 사랑이 실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것은 성경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현실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창세기 3: 8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는 아담과 이브가 있고 누가복음 15장에서는 부모의 고향으로부터 도망치는 탕아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도망칩니다. 2. 이유 왜 이 같은 일이 일어날까요? 진실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는 몇 가지 이유를 알아봅시다. 아담과 그의 부인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도망쳤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질고 거짓의 규칙이라고 부정적으로 보아 진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하나님을 단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아담과 이브에게 내린 계명이래로 사람들을 보호하고 돌봐주는 사랑입니다. a. 음탕한 욕망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 때 아담에게는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 16-17).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창세기 3: 6).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라는 이 말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인간들이 도망친 원인들을 제시해주는 어휘들입니다. i) 먹음직도 하고 여자가 과일을 먹은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먹음직하다’라는 것이 배가 고파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는 것일까요? 남자와 여자가 먹을 수 있는 수천 가지의 나무가 있었으므로 배고픔이란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이 갖는 탐욕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단지 ‘탐욕이 많아서 충분하다.’라고 하는 대신에 더 많은 것을 찾았던 것입니다. 탐욕은 끊임없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더 많은 돈에 대한 탐욕으로 하나님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탐욕으로 더 가지기 위해 훔치고 속이고 죽이고 합니다. ii) 보암직도 하고 진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든 또 다른 이유는 눈의 욕망입니다. 겉모양인 과일의 아름다움에 의해 현혹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TV, 라디오, 인터넷에서 겉에서 보기에 멋있는 광고에 속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광고는 때때로 담배 피면 멋있다고 보여줍니다. 잘생긴 ‘승자’가 담배 피우는 것을 광고함으로써 흡연이 성공을 이끌어준다고 광고합니다. 오히려 진실 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질게 할 뿐입니다. 심각한 건강 문제를 일으켜서 종단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니까요. iii)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아담과 이브는 성숙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지혜를 얻기를 열망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경계선 밖에서 깊은 지식과 지혜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듯이 오늘날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견신(見神)론적인 학문으로 깊은 지혜를 찾고, 어떤 이는 과학적 학문적으로 어떤 이들은 비교적(秘敎的) 학문으로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실하신 사랑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의 지혜안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하나님의 ‘어리석음’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 18).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다가가서 하나님의 진실하신 사랑 -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맛을 느껴보세요. b. 조급함 아담과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희망하기에 앞서 성숙이라는 단계를 참을성 있게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참을성을 가졌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도망칠 필요 없이 지혜로워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은 하나님의 권위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한 표시입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나의 삶이니 내가 선택한 대로 끌고 가게 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반항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반항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의 어떤 권위 - 부모님, 선생님, 어른들-에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님과 권위를 지닌 자들을 존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탕아도 마찬가지로 다가올 적정한 때를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복종을 또한 성숙의 과정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그의 상속을 훔쳐 지혜롭지 못한 방법으로 탕진했습니다. 사랑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이 가출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님과 같은 집에서 살면서 부모님께 순종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이것은 같은 집에 살지만 부모님의 진실한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하죠. 많은 청소년들이 부모님들은 나를 미워한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조급함과 불복종으로 부모님의 진실한 사랑으로부터 도망쳤으면서도 말입니다. 3. 진실한 사랑으로부터 도망한 결과 진실한 사랑으로부터의 도피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경우 (창세기 3장, 누가복음 15: 11)에서 그 결과는 참담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초라함과 가난과 증오입니다. 아담과 그의 부인이 갈망하던 기쁨에 찬 생활은 기약할 수 없었고 하나님이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냈을 때 예전에 누렸던 행복은 비참함과 가난,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사악과 증오가 진실한 사랑을 대신해버렸기에 그들은 비참해졌습니다. 똑같은 일이 탕아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을 다 써버린 후 그는 가난하여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이 없어 비참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이 원하던 가장 애정이 넘치는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보여주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만 고개를 돌려 하나님께 나오면 여러분은 이러한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4. 전환점 부모님, 선생님, 어른들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그들의 권위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에 전환점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탕아의 전환점은 “이에 스스로 돌이켜” 말하기를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누가복음 15: 17-18)입니다. 이러한 결정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팔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예를 따라 음탕한 욕망과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받아주실 것이며 그의 진실하신 사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로마서 12: 2). 여러분은 마음을 바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 - 교회- 밖에서는 진실한 사랑이 없습니다. 시편의 작가들은 이것을 알았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응답하였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122: 1). 왜냐하면 진실한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그 곳이기 때문입니다.
Turn away mine eyes from beholding vanity; and quicken thou me in thy way(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Psalm 119:37(시119:37)/ Pastor Charles Spurgeon(찰스 스펄전 목사)/ 새벽기도회설교/ 1850-01-20
Turn away mine eyes from beholding vanity; and quicken thou me in thy way(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Psalm 119:37(시119:37) DAILY READINGS by Charles Spurgeon sunset Psalm 119:37 EVENING: January 20 There are divers kinds of vanity. The cap and bells of the fool, the mirth of the world, the dance, the lyre, and the cup of the dissolute, all these men know to be vanities; they wear upon their forefront their proper name and title. Far more treacherous are those equally vain things, the cares of this world and the deceitfulness of riches. A man may follow vanity as truly in the counting-house as in the theatre. If he be spending his life in amassing wealth, he passes his days in a vain show. Unless we follow Christ, and make our God the great object of life, we only differ in appearance from the most frivolous. It is clear that there is much need of the first prayer of our text. “Quicken thou me in thy way.” The Psalmist confesses that he is dull, heavy, lumpy, all but dead. Perhaps, dear reader, you feel the same. We are so sluggish that the best motives cannot quicken us, apart from the Lord himself. What! will not hell quicken me? Shall I think of sinners perishing, and yet not be awakened? Will not heaven quicken me? Can I think of the reward that awaiteth the righteous, and yet be cold? Will not death quicken me? Can I think of dying, and standing before my God, and yet be slothful in my Master’s service? Will not Christ’s love constrain me? Can I think of his dear wounds, can I sit at the foot of his cross, and not be stirred with fervency and zeal? It seems so! No mere consideration can quicken us to zeal, but God himself must do it, hence the cry, “Quicken thou me.” The Psalmist breathes out his whole soul in vehement pleadings: his body and his soul unite in prayer. “Turn away mine eyes,” says the body: “Quicken thou me,” cries the soul. This is a fit prayer for every day. O Lord, hear it in my case this night.
가까이 계실 때 부르라/ 사55:6-11/ 2004-03-22
가까이 계실 때 부르라 사55:6-11 사람들은 무엇인가 가까이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가까이 하고자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과 가까이 하기를 원합니다. 출세한 사람과 가까이 하기를 원합니다. 돈 많은 사람과 가까이 하기를 원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 좋아하였더니 사람들에게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고 손해 보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사람들을 가까이 하면 이용하려하고 자신의 종처럼 부리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것들과 가까이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갓집과 변소는 멀리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마저도 멀리 하지 않고 가까이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회 건축하는데 변소를 성전 안에 두느냐 밖에 두느냐에 상당한 논란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소를 거룩한 성전 안에 둘 수 있느냐는 반대세력과 성전 안에 두자는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어쩔 수 없이 투표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전 밖으로 내 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 있고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이 있습니다. 사랑 이빨은 없어도 됩니다. 맹장도 없어도 됩니다. 심장은 꼭 있어야 하고 간도 꼭 있어야 합니다. 꼭 필요한 것이 없이 아무리 많은 것이 있어도 짐이 될 뿐입니다. 여행갈 때 수백 가지의 짐을 가지면 고생합니다. 짐 챙기고 짐 끌고 다니다가 힘이 다 빠집니다. 여행할 때 일할 때는 간편할수록 좋습니다. 꼭 필요한 몇 가지 혹 한 가지라도 잘 사용하는 것들을 가지고 가야 한다. 막상 있어야 할 것은 가지고 오지 않고 없어야 할 것들은 가지고 다니는 예가 있었다. 막상 가까이 해야 할 것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멀리 하여야할 것을 가까이 하는 예들이 있습니다. 가까이 가지고 있어야할 것들은 가지고 있지 않고 가지지 않을 것들을 많은 것들을 너무 가까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가까이 해야 할 것은 변치 않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선입니다. 그보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선이요 최고선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들 가까이 와 계신다고 한번 더 알려줍니다. 은혜 중 은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가까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누가와도 저항할 수 없는 아기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로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구원역사를 통해서 무한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어야 될 한 분이 있다면 바로 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 있으면 우리는 만족합니다. 그분이 가까이 계시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분이 의롭기 때문에 가까이 하면 의로와 집니다. 그분에게 기쁨이 있기 때문에 가까이 하면 기쁩니다. 권세와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까이 하면 우리에게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리의 복입니다(시 73:28). 약한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강해집니다.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부해집니다. 병든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고침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도와주시면 우리에게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을 가까이 해야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Ⅰ. 하나님 가까이 하기를 준비하라 7절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이 여기시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준비 없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준비하는 분이십니다. 구원의 시점을 준비하시고 때를 따라 나눠주실 복을 마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성호가 \\\"여호와 이레\\\"입니다. 예비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 4:12).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는 자 준비하는 자! 간절히 찾고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만나지고 찾아집니다(잠 8:17, 렘 29:13).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겸손할 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복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주신 최고의 계명은 힘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힘을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새 힘을 어디에 쏟아 붓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침마다 새로워진 정력과 정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먼저 부어야 할 줄 믿습니다. 갈멜산의 엘리야는 하나님의 응답을 그냥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준비했습니다. 열두 돌을 쌓았습니다. 열두 항아리의 물을 부었습니다. 고랑을 팠습니다. 힘들었습니다. 준비가 절반이고 준비가 99%입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열심으로 부지런히 준비했습니다. 번제 단을 쌓고 기도의 제단을 수축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준비하는 가운데 더욱 가까워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가 여호와께 열심히 특심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종인 것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중에 가까이 계심을 나타내소서.\\\"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 번제물과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왕상 18장). 하나님을 준비하여 만나지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 같은 준비된 삶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번제물을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 겸손히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충성하는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십니다. 이삭을 잡으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 수풀에 뿔이 걸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창 22:12-13). 아브라함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구나!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는구나! 그래서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불렀습니다. 그것이 그의 감사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예측하지 못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가까이 계신 주님을 부르기 위하여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고 마음을 쏟으면 상상하지 못한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의 도움을 반드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준비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항상 준비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Ⅱ. 하나님은 복 주시기 위하여 가까이 하신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라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때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에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원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1) 복 주시기 원합니다. 솔로몬왕에게 그가 어린 시절 하나님에게 제사드릴 때 되어진 이야기 있습니다. 1000번제로 하나님에게 제사들릴 때 꿈속에 나타나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입니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에서도 몇 가지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시고, 널리 용서하시고, 형통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만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한자의 축복입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에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원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인도를 받을 것이며, 환경이 바뀌어 진다. 그 말은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한다고 하였다.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친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위기가 바뀌어 지며 환경이 개선되어지는가를 보여준 말씀입니다. 2) 돌아서야 합니다. 7절 말씀에서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온전히 우리 신앙인들은 돌아 서는 일이 있어야 한다. 죽고 사는 문제가 돌아서느냐에 달렸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여전히 우리의 생활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해가 밝아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은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시렵니까? 온전히 바꾸는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돌아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게 돌아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주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때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내입에서 나가는 말고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였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에게 족을 주실 것을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되어진다고 하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어떻게 말씀하시는가가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말씀이 있어 말씀대로 창조가 되어진 삭선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Ⅲ. 하나님을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우리가 원하지 아니해도 시험이 생깁니다. 우리가 선택하지 아니해도 죄악이 들어옵니다. 일단 심령에 시험이 들면 만사가 못마땅해집니다. 목사가 소리를 질러도 기분 나쁘고 제스추어가 많아도 감정상합니다. 유모어를 해도 우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사람의 심령이 딱딱해집니다. 어두워집니다. 슬픔이 가득해집니다. 외로와 집니다.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갈증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모세가 그런 영혼의 파리함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신 28:47-48).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이 떠나가시면, 결국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가정도 심판하시고 교회도 심판하시고 나라도 심판하십니다. 암흑기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 그것은 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내가 빛을 향하여 서면 빛이 환하게 하여주고 빛을 등지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 자리지만 같은 자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앉은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을 향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실 때가옵니다. 여러분이 어떤 도시에 누구를 만나러 갔다고 해서 그곳에 눌러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서 구원과 축복을 베풀어 주시지만 언제나 우리의 시간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항상 지나치려 하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주님이 주권자시며 우리를 종의 입장에서 긴장시키기 위해섭니다. 은혜의 시간이 지나면 심판의 시간이 옵니다. 마음이 멀어진 후에는 말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은혜를 베풀기 위해 오셨을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를 돕기 위해 가까이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기회를 놓치고 기회를 다시 만들려는 사람은 미련합니다. 공부할 기회 행복의 기회를 놓치고 난 다음 다시 살리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되는 것도 기회가 있습니다. 행복할 때는 이래도 행복하고 저래도 행복합니다. 형통할 때는 심는 것마다 거둡니다. 뿌리는 것마다 싹이 납니다. 은혜로울 때는 이래도 은혜롭고 저래도 은혜롭습니다. 은혜받으면 모든 것이 좋아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로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만나는 일에 힘을 경주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 지금은 좋은 때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여 이 때를 밝히 드러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였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열심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더 분명하게 주의 이름으로 말하겠습니다. \\\"지금 열심히 일하십시오. 오늘 열심히 사랑하십시오. 지금 열심히 봉사하십시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에는 그분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쉽게 대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있을 때는 귓속말을 해도 그것을 귀담아 듣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오해했지만 심정을 통한 한나의 기도는 즉시 응답받았습니다. 한나에게 주님이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녀는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속닥속닥 기도했습니다. 소리를 크게 지르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멀리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귀가 먹었나? 왜 소리 지르느냐?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자와 가까이 계십니다. 마음의 교만을 버리십시오. 죄악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야고보 사도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맺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내일을 기획하십시오. 2004년을 기획하십시오. 주님께 부르짖기 위해 오늘 잔뜩 긴장하십시오. 여러분이 기획하는 중에 주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은혜를 많이 받으십시오. 힘을 다하십시오. 간절히 부르짖으십시오. 정성껏 기도하십시오. 아버지께서 도와주십니다. 인간의 어려움이란 사람은 도와줄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어려움은 능력의 손길이 움직여야 합니다.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야 합니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지만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면 다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만날 만한 때에,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에, 부지런히 찾고 정성껏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2004년도는 2003년보다는 낳은 해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합시다. 2)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3) 하나님을 찾되 최선을 다하여 가까이 합시다.
가까이 계실 때/ 사55:6-9/ 2002-10-18
가까이 계실 때 사55:6-9 □ 가까이 계실 때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 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6-9) 1. 인간의 삶은 항상 고달픔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란 말입니다. 세상의 과학 기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점점 더 높아만 가는데, 그것을 영위해 나가는 인간의 삶은 왜 이렇게 고달픔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세계 곳곳마다 천재지변으로, 홍수로, 가뭄으로, 지진으로 시달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우리 나라는 극심한 가뭄으로 이렇게 타 들어가는 현실을 보면서, 삶에 안전지대란 거의 없는 상태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몇 일전 일본에서는 초등학교에 어떤 정신병자가 들어와 마구 어린이를 찔러 죽게 함으로 일본열도가 온통 떠들썩하였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학교도 안전지대는 못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학교폭력>이란 것이 사회 문제가 되었고, 얼마 전에는 학원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한 경우도 있었고 또 살인까지 범하게 된 놀라운 일이 벌어졌음을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어디에서 안전한 삶이 보장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가하면, 모두가 먹고 살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고기 집을 차려놓고 많은 투자를 해 놓았더니, 요즘 광우병이니 구제 역이니 하면서 통 장사가 되지 않아 고스란히 문을 닫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구조 조정으로 직업을 잃어버리고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가 먹고살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서로를 아끼며, 서로를 위하며 사는 사회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땅덩어리는 좁고 인구는 많으니 어느 곳에 가든지 경쟁의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하고, 심지어 화장실에 가서도 줄을 서야하고, 물을 마시려해도 줄을 서야하고, 밥을 먹으려해도 줄을 서야 하니 사람이 너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앞지르기를 하려고들 합니다. 그뿐입니까! 남들처럼 입히고, 먹이고, 교육시켜야 하기에 사교육비 때문에 이민을 가는 사람들까지 나왔습니다. 이렇게 모두가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내리던 갈릴리 바다의 제자들처럼 지난밤도 뜬 눈으로 밤을 밝힌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원하는바 대로 모두 충족되지 못하기에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고, 좌절이 있고, 절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2.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은 우선 하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믿으려니 힘이 듭니다. 하나님을 만나되 삶 속에서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만나거나, 환상적으로 만나거나, 신비적인 것으로만 만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생활 신앙이 못 됩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지식으로 알고 하나님을 이론적으로 말하는 동안 하나님은 나의 삶의 변화를 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하되, 삶 속에서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만나 주시겠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가 언제이며, 가까이 계실 때는 언제이겠습니까? 이것을 오늘 우리들이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날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가까이 계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때를 놓치면 후회합니다. 기회는 언제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누구에게나 기회는 한 두번 다 주어집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보면, 공부할 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기회를 놓치면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또 결혼할 때에 결혼도 해야 합니다. 그런 기회를 놓치면 후회하듯, 신앙 생활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실 때가 있습니다. 이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가까이 계실 때 부르짖어야 합니다. 마치 여리고 성의 소경들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가까이 지나갈 때 부르짖어 고침을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 만나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만날 수 있고, 어떤 때에 가까이 계시는가?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① 하나님은 마음이 상할 때 가까이 계신다고 하였습니다.(시34:18) 시편 34:18절에 보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상할 때에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이 상할 때란 어떤 때입니까? 내가 바라던 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합니다. 나의 요구한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합니다. 내가 기도한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마음이 상합니다. 그럴 때가 도리어 하나님이 나와 가장 가까이 계실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경우에 보면 그와는 반대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음 상할 때는 하나님이 떠난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믿던 사람들도 세상으로 나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도 잘 안하고 집에서 들어 누워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런 때에 대부분의 경우에는 술을 먹습니다. 술 먹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 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중심에 통회하려면 눈물 없이는 안됩니다. 눈물이 있어야 마음 밭이 녹아집니다. 눈물 없는 기도를 하는 동안 먼지 외에 날릴 것이 없습니다. 마치 요즘 깡말라버린 밭에서 무슨 생명의 새싹이 움터 나오겠습니까? 눈물로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 밭에서 생명 운동이 일어납니다. 비가 내려 촉촉하게 마른땅을 적시듯, 눈물의 기도에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보이게 됩니다. 멀리 계시던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어느 기독교 문인이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한동안 실의에 빠져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고통 중에 지내다가, 눈물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어 도리어 일찍 불러간 아들을 통하여 봉사의 기회를 삼게 되었다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합니다. ② 하나님은 진실하게 간구 할 때 가까이 계십니다.(시145:8) 시편 145:8절에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 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 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하게 간구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막연하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구도 거짓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남을 속이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거짓되게 진실을 위장하는지 모릅니다. 순진한 사람은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진실되게 간구 하는 자에게 어떤 경로를 통하든지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진실되게 간구 하는 자에게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 진실의 간구(懇求)가 하나님의 뜻과 합일하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사실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대로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신의 뜻을 깨달아 알도록 우리를 유도해서 당신의 뜻을 성취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때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통하여 깨닫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통을 통하여 더 좋은 것을 얻게 하십니다. 그것이 영적 축복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만일 재산을 날리지 않았으면 아직도 여전히 방탕한 생활에서 예수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살 수 밖에 없었던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재산을 날렸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좌절입니다. 때로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 중에 하나님은 나에게 가까이 계셨고, 오늘 이렇게 예수 믿고 이 자리에 나아와 예배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이 상한 분들이 계십니까? 무슨 일로 마음이 상하였든지 여러분 곁에 하나님이 제일 가까이 와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결코 분을 내지 마십시다. 결코 과격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맙시다. 너무 힘들면 그대로 잠시 머물러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진실하게 한번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이런 고통과 비극 속에서 당신이 내게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대면하면 반드시 들려주실 것입니다. 저는 1968년 부활절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부모님의 하나님이었고,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하나님이었고, 배워서 아는 지식의 하나님이었지 나의 삶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새롭습니다. 부활절 일주일간 방학기간 필라델피아 해리스버그에서 국제학생들의 모임이 있어 저도 거기에 참석하였다가 인도 학생이 운전하는 승용차에 동승하여 학교로 돌아오다가 졸며 운전한 덕분에 다리 교량 난간을 시속 120km로 들이받았습니다. 그 결과 저는 팔이 빠져 버렸고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수술을 받고 깨어나 보니, 여러 가지 감회가 서렸습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한편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또 한편에서는 진실된 기도가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기도 중에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내가 너의 머리를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고 팔만 상하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러면서 깨달음이 왔습니다. 무거운 짐도 못 들게 하고, 노동도 할 수 없게 하고, 손을 들어 45도 각도로 축도 하는 일에 지장 없도록 하게 한 기가 막히도록 정확하게 만들어 놓은 하나님임을 그때 만났습니다. \\\"하나님! 잘못하였습니다. 목회 목사 안하겠다고 하였던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진실되게 기도해 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후 부터 하나님은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시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도 어려울 때마다, 힘들 때마다 가까이 계심을 확인시켜 주시곤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만 때에 만나야 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삶 속에 인격적으로 만난 하나님과 한평생 동행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 사55:1-7/ 2001-12-08
가까이 계실때에 부르라 사55:1-7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가 간증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 분은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가 다리 하나를 잃어버린 상이용사입니다. 하지만 역경을 딛고 사업을 하여 큰 기업을 이루었습니다. 그 분의 간증 가운데 그의 가장 중요한 때를 말하였는데 바로 자신의 다리 한쪽을 잃어 버렸던 베트남 전쟁 이야기였습니다. 전투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입어 크게 부상을 당해 실신하여 병원으로 실려갔던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 병원에서 그는 일생일대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야전병원에서는 Mash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수많은 병사들이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올 때 이 Mash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Mash가 발생하면 야전 군의관들은 서둘러 치료되어서 나을 사람인가 아니면 치료받아도 죽을 사람인가를 구별합니다. 그래서 꼭 살아야 될 사람은 먼저 의료를 주어 빨리 살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각 환자들에게 3가지의 딱지를 발가락에 붙여집니다. 첫째로 No Hope, 희망이 없다라는 딱지입니다. 이 환자는 치료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희망이 없다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Dead이라는 딱지가 입니다.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지요. 세 번째로는 Medical help needed입니다. 이 환자는 조금만 돌보아 주면 살 수 있으니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표시입니다. 이 월남참전 실업가 역시 전투에서 관통상을 입고 피로 뒤범벅이 되어 야전병원에 실려갔습니다. 거의 실신을 한 상태였습니다. 몸은 완전 마비가 되어 오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귀에는 가물가물 군의관과 간호사가 대화하는 것이 들립니다. 이때 군의관의 소리가 No Hope 이런 말이었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뚜벅뚜벅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생사가 한순간에 왔다갔다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간호사가 자기의 발가락에 No hope 이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나의 인생이 희망이 없다니, No Hope이라니, 아니야 내가 여기서 내 인생을 마칠 수는 없어\\\"라는 생각에 있는 모든 힘을 다해 간호사를 불렀습니다. 이 순간이 아니면 나는 끝난다라는 마음으로 간호사를 불렀습니다. \\\"간호사, 간호사, 나는 살아야해. 나에게 No Hope이란 말을 하지 말아요. 나는 쪼금만 치료해주면 나을 수 있어요. 나를 쪼금만 치료해 주세요.\\\" 자신은 크게 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만한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기만한 목소리를 이 간호사가 듣고 그가 외치는 입에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No Hope이 아니에요. 나는 쪼금만 치료해 주면 나을 수 있어요. 나를 치료해 주세요.\\\" 이 소리를 듣자 간호사는 No Hope 이라는 딱지를 떼고 다시 \\\"Medical help needed\\\"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비록 나중에 다리 한쪽을 절단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는 생명을 건졌습니다. 한순간의 외침이 No Hope에서 Medical help needed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이 상이용사는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 살면서 훌륭한 사업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증합니다. 모든 이에게는 Medical Help Needed가 필요하다. 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Jesus Help Needed 예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맞습니다. 광야같은 인생을 걸어가면서, 어렵고 힘든 미국이민의 삶을 살면서, 힘든 학업가운데 우리에게 들려지는 소리는 Jesus help needed입니다. 목사에게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기쁨이 있다면 한 영혼 한 영혼이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영혼을 바라보면서 No Hope 이라는 말보다는 Jesus help needed 란 말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핵심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인간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아보겠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죄성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대문자 SIN(죄성)입니다. 이 죄성은 여러 가지의 죄를 낳습니다. 죄가 또 다른 죄를 낳습니다. 바로 우리가 범하는 자범죄 소문자 sins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죄들은 더욱 가중되어 결국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도 아닙니다. 칼도 아닙니다. 바로 죄가 사람을 죽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떨어져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바로 성경이 누누이 이야기하는 관점입니다. 두분 째로 성경은 죄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바로 Jesus help needed입니다. 오직 죄성과 자신이 지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Jesus Help Needed. 하지만 언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나요? 그 때가 언제입니까? 인생을 일생이라고 합니다. 한자로 일생이란 한번밖에 없는 생애라는 뜻이지요. 어떤 종교에서는 사람이 착하면 사후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든지 사람이 악하면 동물로 태어난다는 윤회설을 말합니다. 거짓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딱 한번의 일생밖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치있고 의미있고 탁월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역사, 일생가운데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농사에도 심을 때가 있고 가꿀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지요. 맞습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태어날 때가 있고, 자랄 때가 있고, 공부할 때가 있고, 결혼할 때가 있고, 봉사할 때가 있습니다. 때를 이야기하면 많은 분들이 자신의 시간이 많은 줄 압니다. 여러분, 일생가운데 법칙이 또 한가지가 있는데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이 왔지만 갈 때는 순서 없이 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보다 먼저 간다는 법칙이 없는 것이 일생의 법칙입니다. 성경에서 첫 번째로 죽은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담과 하와가 아닙니다. 부모가 먼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벨이 먼저 죽었습니다. 자녀가 먼저 죽었습니다. 어느 공동묘지에 죽은 사람의 나이 분포를 보니 30대에서 40대 죽은 자들이 60%라고 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이 왔지만 갈 때는 순서 없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맞겨주신 시간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사 3장 1절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너무나도 맞는 말입니다 말씀과 대화함(Engage the Word)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 6절 한 절에도 \\\'때\\\'라는 말이 두 번씩 나옵니다. 우리 다함께 6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첫 번째 때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가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를 강조하는 이유는 인생에서 하나님과 만남을 가지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나를 향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세 베네딕트 수도원 일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탄이 부하들을 시켜 땅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지옥으로 데려오도록 방법을 강구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네명의 마귀가 각각 자신의 비상한 방법을 연구해서 사람들에게 접근합니다. 첫 번째 마귀는 성경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선전하였습니다. 두 번째 마귀는 천국이나 지옥이란 없는 것이니 속지 말라고 선전했습니다. 세 번째 마귀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마귀는 성경은 믿을만한 것이고, 천국과 지옥도 있고, 하나님도 있다고 말하면서 모든 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살짝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래알 같이 많은 인생인데 너무 각박하게 신앙생활 하지말고 좀 여유를 가지고 차차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후 네 마귀가 모여 앉아 지옥으로 끌고 온 영혼의 수를 세어보니 네 번째 마귀 \\\"천천히 믿으라고 말한 마귀\\\"가 단연 일위였다고 합니다. 이 마귀를 차차마귀라고 하지요. 차차 믿으라는 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우리가 하나님을 영원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어디에다 존재하신 무소부재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존재입니다. 시간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유한한 존재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은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몸이 건강한 사람이 카바레에서 춤을 추며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술집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병이 들어 병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분은 보았습니다. 병석에서 인간의 나약과 한계와 무능을 깊이 절감하며 하나님께로 나오는 분을 보았습니다. 사업이 힘들어 주님께로 나온 분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가정의 어려움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건강한 이들보다 병상에 있는 자들,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기보다는 약함을 인정하는 자들이 주님을 찾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욱 강하고 놀랍게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약한 존재인 인간임을 말할 때 강하고 능력이 많으신 무한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힘듭니까? 가정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학업의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약함을 체험하는 이 순간이 여호와를 만날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복음송 가수 중에 송정미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이 복음송 가수의 곡 중에 이런 곡이 있습니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제가 나머지를 찬양하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모든 사람은 주님이 필요합니다. Jesus help needed.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입니까? 남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입니까? 그것은 절대로 우리의 공허감을 채워줄수가 없습니다. 허상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때 공허감은 만족함으로 채워집니다. 주님께 자신을 드리며 기도할 때 주님을 만나고 강한 사람으로 살수 있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와 만나자고 하는 순간이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샘과 베티라는 신혼부부의 글을 읽었습니다. 결혼해서 직장도 번듯하고 먹고 살수 있을 정도로 잘 사는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남편 샘에게는 부인 베티에게 한번도 손도 못되게 하는 차가 있었습니다. 바로 10만불 가량의 스포츠카였습니다. 얼마나 그것을 애지중지 하는지 부인이 한번만 몰아보자고 해도 못 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가 못 몰게 하면 계속 몰려고 하는 것처럼 남편이 낮잠을 자는 동안에 몰래 그 차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깐만 몰고 남편이 깨기 전에 돌아오면 무슨 일이 있겠나 싶어 몰고 나간 것이지요. 그런데 차를 몰고 가다가 앞에 어린아이가 딱 나타나는데 옆으로 꺾어 급정거를 하는데 바로 길가에 서있는 전봇대에 차를 꽝하고 박아버렸습니다.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차를 박아 버렸으니 마음이 불안합니다. 마음이 불안해도 언제나 찾아오는 사람이 있지요. 바로 삐용삐용 달려온 경찰관입니다. 경찰관이 와서 말합니다. 제가 경험자인데 이런 말을 안 듣는 것이 좋습니다. \\\"Drive Licence and registration please\\\" 마음이 두근두근합니다. 이제 남편 앞에 가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합니다. 그런데 차량 등록증을 꺼내려고 하는데 등록증 앞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부인 베티에게! 당신이 이 글을 안 보았으면 좋겠어.\\\" 두 번째 글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 글을 읽는다면 틀림없이 사고가 나서 읽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줄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하지만 베티, 이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틀림없이 많이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나는 감사한다.\\\" 마지막 네 번째 줄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베티, 내가 이 차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차보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주기 바래. 사랑해.\\\" 차보다 자신의 몸을 더 아껴 주는 남편이 너무 고맙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티는 생각합니다. \\\"아 우리 남편이 차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나를 더 사랑하는 구나\\\". 여러분,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온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혹시라도 한국에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바로 이 미국 땅에서 주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왜 6절의 하나님을 만날 때가 있다고 합니까? 왜 하나님이 가까이 하실 때가 있다고 하십니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말씀 첫머리에 말씀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말씀으로 응답함(Response the Word) 전도서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무슨 말입니까? 사람은 유년의 때가 있고 청년의 때가 있고 중년과 장년의 때가 있고 노년의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유년의 시기에는 너무 어려서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중년기에는 세상의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는 때입니다. 중년의 때에 예수님을 만나는 예도 많이 있지만 참으로 인생의 많은 장애가 있어 주님께로 더욱 쉽게 나오지 못합니다. 중년의 시기는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중 마치 돌밭과도 같은 때입니다. 뿌리가 내리려고 하려 하는데 인생의 장애들이 겹겹이 있어 참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어렵습니다. 장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물, 명예, 욕심 등의 죄의 가시덤불이 너무 많아 진리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복음의 싹이 자라기에 너무나 험준한 때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입니까? 언제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실 때입니까? 유년일수도 있고 중년일수도 있고 장년일수도 있습니다. 노년의 때일 수도 잇습니다. 하지만 가장 하나님을 확실히 만날 수 있는 때는 바로 청년시기입니다. 청년의 때에는 비교적 양심적이며 선을 추구하고 정의를 찾습니다. 아울러 이상이 높고 현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영원한 진리를 찾고 인생의 깊은 뜻을 탐구합니다. 성경의 인물을 보면 청년기에 하나님을 만난 사래가 많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나 예레미야, 주님의 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과 디모데, 모두 청년의 때인 20-30때에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모든 사람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귀가 열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의 삶에 간섭하셔서 역사 하시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귀가 들리는 순간,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으로 나감(Go with the Word) 한 거지 왕초가 죽으면서 부하들에게 쪽지 하나를 남겼습니다. 그 쪽지 하나면 평생 굶어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남긴 종이입니다. 그 종이를 열어보니 동네 생일 목록이었다고 합니다. 거지 왕초가 남긴 것이 얻어먹을 수 있는 날 생일목록이였습니다. 왕초라면 생일목록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진짜 왕초라면 동네사람들 생일 목록보다도 남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남겨야 합니다. \\\"부하들아, 나는 지금까지 거지로 살았지만 너희는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마라. 너희 빨리 거지를 청산하고 남들처럼 똑바로 세상에서 살아라\\\" 뭐 이런 말을 남겨야 정말 왕초인 것입니다. 자녀에게도 돈을 남겨줘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망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이 너의 생애 가운데 계시니 그분을 만나야 한다.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고 인도하신단다\\\" 이런 말을 남겨야 합니다. 자녀에게 말해야 합니다. \\\"너는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야. 하나님이 너를 보내 주셨단다.\\\" 그러면 자녀는 틀림없이 말을 할 것입니다. \\\"\\\"아빠, 엄마 염려하지마. 아빠와 엄마는 나에게 세상에서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잖아!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남길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존관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그 때를 간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셨던 그 때를 간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나에게는 이런 스토리가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힘든 시기에 찾아 오셨다. 나에게 이런 기쁨을 주셨다\\\" That is my story. 내가 약할 때 나에게 힘주셨던 하나님, 나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주셨던 하나님을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간증입니다. 이번 한주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간증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간증이 무엇입니까? 찬송가 204장처럼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런 것이 진정한 간증입니다. 다함께 찬송가 204장을 찬양하면서 기도함으로 성만찬에 참여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에 초대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눌 때 주님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다함께 204장 부르겠습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 사55:6-7/ 2012-02-12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전도서 3장 1절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우리에게 교훈하여 준다. 우 리 동양의 성현들은 옛날부터 천시(天時)란 말을 썼다. 하늘의 때라는 말이다. 파사의 오마라고 하는 유명한 분은 되돌아오지 않는 것이 4가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입 밖으로 뱉은 말, 쏜 화살, 지나간 생활, 잃은 기회”라고 했다. 인간의 가장 귀한 영혼의 구원, 영생을 얻는 것도 시간적인 제한이 있다. 기회가 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가까이 계실 때가 있 다. 여호와를 만날 때가 있다. 청년시대는 특별히 하나님을 만날만한 시기이다. 인생의 깊은 뜻을 탐구하고 영혼을 사모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 청년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 사실이다. 이때에 신앙을 얻어 인생의 방향을 바로 잡고 일생을 통해서 많은 봉사를 하시기를 특별히 부탁한다. 역경은 또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때이다 때때로 우리는 생의 위기를 당한다.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면 인간의 나약함, 제한성, 무능을 깊이 느낀다. 특별히 병이 위독해서 사망에 직면하게 될 때에는 인생의 깊은 뜻을 더듬게 된다. 그래서 병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이들이 많다. 또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몇 번은 슬픈 일을 당한다. 이런 슬픈 일은 흔히 예고없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슬픔의 밀물이 들어올 때에 믿음의 배를 띄워 인생의 포구를 향하여 돛을 다는 이가 많다. 슬픈 때는 하 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것이다. 슬픔은 우리가 원하는 경험은 아니다. 그러나 슬플 때에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 것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와 위로를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 그밖에도 우리의 일생을 보면 어떤 이는 사업에 실패를 할 수도 있고, 고독한 생활이 강요되는 이도 있고, 환난과 재난을 당하는 이도 있고, 역경을 당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오히려 은혜와 축복을 받는 이들이 많 다. 당신은 지금 환난을 당하는가? 역경에 처해 있는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때에 하나님을 만나서 인도를 받게 될 때에 당신의 역경과 오늘의 불행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은혜의 해가 있다. 또는 특별히 구원의 날이 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주시는 시기가 있다. 주후 1세기가 그러한 때였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친히 땅에 방문 한 시기이다.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열 두 제자가 복음을 전파한 시기이다. 은혜의 때가 아닌가?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때가 종종 있다. 가령 종교 개혁자들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서 선포한 16세기나,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를 전 세계에 보낸 18, 19세기가 은혜의 시기다. 이 시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순절은 특별한 구원의 날이다.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는 구원의 날이었다. 특히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 금 북한 선교를 위해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 주님 재림의 징조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5월 전도의 달은 특히 하나님을 만날만한 기회이다. 하나님께서 기회 주실 때에 작정하고, 과거의 생활을 끊어 버리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해야 한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이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가까이 계실 때에 찾으라/ 사55:6-9/ 2001-09-03
가까이 계실 때에 찾으라 사55:6-9 \\\'햇볕이 쨍쨍 났을 때 건초더미를 만들라\\\'(Make hay while the sun shines.)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일이든지 그 때 그 때 해야 할 일 이 있다는 뜻입니다. 좋은 기회가 찾아 왔을 때 그 기회를 잘 선용할줄 알아 야 합니다. 만약 그 때 그 시기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넘기거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면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오는 법입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을 피우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 다. 하루하루 뒤로 미루다가 결국 아무 일도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 습니까? 어떤 일들은 타이밍(timing)이 아주 정확하게 맞아야만 제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도 할 때 제대로 해야 합니다. 마음이 순수하 고 학구열에 불타고 건강이 있고 젊음이 있을 때 공부를 열심히 해야 쌓아놓 은 지식이 머리 속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하더라도 운동하기에 적당 한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못하면 나중에 기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오게 됩니다. 봉사를 할 때 해야지 봉사를 하지 않고 미적미적하며 뒤로 미루게 되면 봉사조차도 할 수 없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헌신해야지 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기회를 타서 헌신도 해야 합니다. 나중에 후회하고 탄식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매사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인생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도 귀하게 사용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때 오늘의 본문말씀에 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두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만날 만한 때\\\'이고, 또 하나는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입니 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분들이 있어요. 또 어떤 이들은 열심히 찾으려고 애쓰긴 하는데 하나님 아닌 엉뚱한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성도들 중에도 그저 막연히 만날 수가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 나님은 영적인 분이라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가 까이 갈 수도 없다는 나름대로의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하실 때가 있 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아무 때나 자신의 지혜나 능력 으로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이 만나 주실 만한 때를 만들어 주심으 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러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가까이 나가므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주심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 주심으로 우리가 그 분을 만나 뵙고 그 분의 품에 안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한번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여기서 \\\'만날 만한 때\\\' 러눈 말 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나 주심으로 만날 수 있다는 수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Seek the Lord while he may be found.\\\" 라고 하여 수동형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보다 알 기 쉽게 번역하자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발견되어질 때, 그러한 때 에 나를 찾으라.\\\" \\\"너희를 만나기 위해서 내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줄 때 그 때 나를 찾으라.\\\" \\\"너희들에게 가까이 접근하고 있을 때에 나를 부르라\\\" 주 님을 우리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 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만나주시는 때가 있 기 때문에 그 때를 잘 살펴서 주님을 찾고 만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일 최단 거리로 접근하실 때가 언제인가? 가까이 계실 때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실 때가 언제 인가? 만나 주신다고 하셨는데 과연 주님을 만날 만한 때란 언제를 말하는가? 성경에 보면 주님을 만날 만한 때가 분명히 따로 있다고 하시는데 과연 그 때 가 언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환난의 날이 임할 때 주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환난을 당하고 역경을 만나고 극심한 고난 속에 내몰릴 때 그 때가 주님을 만날 만한 때요 주님이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실 때라는 것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이므로 그 때 적극적으로 나를 찾고 부르라는 것입 니다, 너희들이 피곤하고 낙담하여 쓰러질 때에 나를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모든 것이 평탄하고 잘 이루어질 때는 하나님 찾을 생각을 별로 안 합니다. 하나님 찾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기가 잘 살 수 있으니까 구태여 하나 님께 부르짖으며 나를 만나 주십시오. 내가 죽겠습니다. 이런 이야기하지 않습 니다. 인간은 본래 완악하고 교만해서 환난을 당하여 낮아지기 전까지는 결코 항복하지 않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받지 아니하면 인간은 겸손해지지 않습니 다. 인간의 줄 왜 환난 날이 주님을 만날 만한 때인가? 왜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우리에 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시는가? 이는 그 때에 우리의 마음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옆에라도 계 신다면 그 자리에서 꽉 부여잡고 싶은 이런 충동이 일어날 때가 언제인가? 인 간이 낮아질 때로 낮아졌을 때 겸손해졌을 때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주 님을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절망적인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몰 리게 되었을 때 사업이 부도나고 파산되고 자녀들은 나가서 사고를 저지르고 문제를 일으킬 때, 가정에 이런 저런 많은 시련이 불어닥쳐서 삶의 풍파가 여 러분을 뒤덮으려고 할 때 그 때야말로 하나님을 찾을만한 때인 줄 기억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만나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낙담한 가운데 계십니까? 이 시간 험한 세파와 싸우다가 실망하여 좌절하신 분 안 계십니까? 인간의 줄이 다 끊어져서 이제는 도저히 가망이 없 다고 생각하면서 가슴 아프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계신 분 안 계십니까? 그 때 야말로 주님을 만날 때임을 기억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심으로 주님과 새 로운 출발을 해 나가시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시련의 날에 나를 찾으라. 너희들이 피곤하고 낙 심될 때 나를 부르라.\\\" 모든 희망이 끊어진 그 순간이야말로 영원한 희망이 되시는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붙들 때임을 기억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십시오. 주님께서 만나주실 것입니다. 외로움이 찾아올 때 주님을 만날 때가 언제인가?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실 때가 언제인가? 우리 인생의 가장 외롭고 쓸쓸할 때에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사랑하는 자녀를 잃고 혼자서 외롭게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 다면 그 때가 주님을 만날 때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외로움에 떠는 이들 을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어주시고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남편이 되어 주시고 아내가 되어 주십니다. 여러분의 나그네길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등을 돌리고 떠났습니까? 사람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어떻게 할 줄 몰라하는 분 계십니까? 나는 이 세상에 혼자 놓 여졌다 정말 외롭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분 계십니까? 여러분을 위로하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성경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형 에서의 추격을 피해서 멀리 멀리 도망을 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광야를 지나게 되었는데 어느덧 밤이 찾아와 차가운 밤공기에 추워 떨며 어디선가 울부짖는 짐승소리를 들으며 외 로움에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누구하나 자기를 따뜻 하게 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옆에 있는 돌을 베개삼아 누워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그 때에 주님을 만납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사닥 다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천사가 오르락 내르락하는 광경을 야곱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 외로웠던 순간에 찾아 오신 주님을 만나 그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 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셔서 만일 나를 무사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 게 해 주신다면 내가 내 소득의 십분지 일을 반드시 바칠 것이고 지금 내가 끌어안고 있는 돌 베개를 기초 삼아서 주님의 전을 이곳에 세우겠습니다.\\\" 가장 외로울 때 주님을 만났고 감격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 줄 알았는데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분인 줄 알 았는데 주님이 여기 계셨군요.\\\" 그 가장 외로웠던 순간에 가장 극적으로 주님 을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왕의 추격을 피해서 멀리 도망을 가다 기진해서 쓰러집니다. \\\"하나님 나는 이제 혼자되었군요. 이제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 다. 차라리 나를 죽여 주십시오.\\\" 외로움에 떨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사 기 운을 차릴 수 있게 하시고 힘을 얻어 그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가 언제입니까? 가장 외롭고 쓸쓸할 때, 그 때야말로 가 장 최상의 적기임을 기억하시고 때를 놓치지 말고 가까이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이 허무해질 때 어느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어느 때 하나님이 가장 우리에게 최단 거리로 접근해 오시는가? 좋은 인생을 살고 싶다는 충동이 속에서부터 솟아오 를 때 하나님께서 그 때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지난 나날들을 돌아보니 모두가 헛되구나\\\" \\\"내가 너무 무의미한 인생을 살았구나, 아 참으로 잘못 살았구나\\\" \\\"내가 전에 가치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가치없는 것이로구나\\\" \\\"아 나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죄인인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되겠다\\\" 이런 강한 의지와 욕망이 속에서 꿈틀거릴 때 그 때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 가오십니다. 새로운 출발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주님을 만난 삭개오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지나온 나날들을 반추해보다가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너무 비참하고 초라하게 생각이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죄의식과 수치심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살수만은 없지 않은가라 는 충동이 일어나면서 거리로 뛰쳐나갑니다. 그 때 주님이 오고 있다는 소문 을 듣습니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기 시작 합니다. 그럴수록 주님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주님의 모습 을 잘 바라다볼 수 있는 위치를 잡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멀리서 그 분의 움직임을 보는 순간 그의 가슴이 쿵당쿵당 뛰기 시작합니다. 그의 마음 은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아 나도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 그 분이 누구신가 알 수는 없지만 그 분을 만나기만 하면 뭔가 새로운 일이 열릴 것이다.\\\" 바로 거기서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을 다 읽기라도 했다는 듯 그가 앉아 있는 뽕나무 아래로 가까이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밤 네 집에 유하여야 되겠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세요. 그 순간 그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 웠겠습니까? 그는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길이 없어 즉석에서 이렇게 발표합니다. \\\"만일 내가 토색한 것이 있으면 내 재산의 절반을 떼어서 라도 다 갚겠습니다. 남에게 나쁜 짓하고 속이고 빼앗은 것 있으면 내가 내 재산 절반 가운데 또 사분지 일을 내어 놓겠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고백입니까! 이 세상에 돈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삶을 결 단한다면 얼마나 신나는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출발이 주님을 만나 주님을 모셔들임으로써 일어나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부끄럽게 여겨지십니까? 지나 온 삶이 죄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만날 만한 가장 좋은 때에 여러분이 놓여져 있다는 사실 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널리 용서하시고 어떤 죄라도 다 탕감해 주시고 주님의 보혈의 피로 깨끗이 씻어주시는 주님 앞에 나와 주님을 부름으로 주님을 만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할 수 있는 여러분들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부르라 어떻게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맞아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만날 만한 때에 나를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나를 부르라\\\" \\\'찾으라! 부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실한 외침 주님이 가까이 오실 때에 우리가 주님을 모셔들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단지 주님을 찾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나가시는 데 지 나가시거나 말거나, 만나면 그만이고 또 못 만나도 그만이다는 식으로 멀뚱멀 뚱 쳐다보고만 있다면 주님은 우리 곁을 지나 멀리 떠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주님이 지나가실 때에 주님을 찾고 부르십시오. 그냥 지나치도록 하지 마십시 오. 그 분을 불러 세우십시오. 소경 바디매오를 아십니까? 주님이 자기 옆을 지나가신다고 하자 큰 소리로 \\\'주님! 내게 자비를 주십시오. 내게 긍휼을 베풀 어주십시오.\\\' 하며 외쳐 부르다 주님을 극적으로 만나지 않았습니까? 주님을 부르십시오.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잡아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찾는다 부른다 하는 말은 간절한 마음으로 부른다는 말입니다. 그 냥 생각없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없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찾고 부름은 주님이 내 삶에 오시지 아니하면 \\\'나는 죽습니다. 나는 이제 다 끝입니 다. 주님이 오셔야 삽니다. 주님 살려 주세요.\\\' 라는 간절한 기원을 담은 기도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얼마나 찾고 소리 높여 불러 보았습니까? 큰 소리로 부르 짖지 않아도 됩니다. 나직한 음성으로라도 진실을 담아 \\\'사랑의 주님, 사랑해 요. 주님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내가 믿습니다. 고백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 를 원합니다.\\\' 주님을 찾고 부를 때에 가까이 오셔서 만나주시고 여러분의 모 든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을 부 르십시오. 네 길과 생각을 버리라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돌아오려거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여호와께로 돌아와야만 살 길이 있다 고 말씀합니다. 돌아올 때 그냥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은 그 길을 버리 라고 말합니다. 그 길이라는 히브리어 \\\'떼레크\\\'라는 단어는 사람이 하도 밟고 다녀서 땅의 표면이 굳어져 맨질맨질해진 땅바닥을 말합니다. 악인의 길 여러분에게는 수도 없이 반복하여 걸었던 길이 있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 찾아갔던 그 어둠의 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걸었던 쾌락의 길, 자만의 길, 이기심의 길들이 있을지도 모릅 니다. 그 길은 하도 다녀서 눈을 감아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어디에 내려놓아도 단번에 찾아갈 수 있는 익숙한 길입니다. 김유신 장군에 관한 일화를 기억하십니까? 그에게는 늘 즐겨 찾던 기생이 있었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뻔질나게 기생집을 드나들다보니까 그의 말 도 익숙해져서 아예 처음부터 말머리를 기생집으로 돌리더라는 것입니다. 어 느 날 사귀던 기생과의 관계를 끊기로 굳게 결심을 하고 집으로 향하다가 깜 빡 졸다가 잠에서 깨어 보니 어느덧 그 기생집 문 앞에 와 있더라는 것입니 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죄악의 길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다시는 안가겠노라고 다짐해보지만 과거의 습관을 버리는 일이 그렇게 쉽지를 않습니 다. 그런 결단도 잠시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전의 길을 또다시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인생 길을 걸어 오셨습니까? 어떤 길을 밟으며 밟으며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그것이 악인의 길이라면 이 시간 성령으로 그 모든 것을 끊으시고 주의 이 름으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시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 와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악인은 그 길을 끊고 주님께로 와 야 합니다.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두번 다시 죄의 길을 밟지 않는 것만도 굉장한 일이지만 그러나 생각을 버리는 일도 그 못지 않게 어렵 고 위대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생각을 버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굳어진 삶의 내면의 계 획과 날마다 걷던 그 굳어진 길을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길을 떠났 다하더라도 생각이 머리에 있으면 언젠가 그 곳으로 다시 찾아가게 됩니다. 생각을 고쳐야만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몸은 교 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서도 생각은 세상에 가 있고, 하고 싶은 일 들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틀을 바꾸십시오. 틀을 바꾸는 순간 새로운 아 이디어가 떠오르게 될 것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순간 당신의 세상은 새 롭게 열릴 것입니다.\\\' 어느 전자제품의 광고예요. 아주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과거의 잘못되고 낡고 부패한 생각들을 다 벗어버리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영감들이 반짝반짝 새롭게 떠오르게 해 주실 것이 고 그런 아이디어들이 떠오르는 순간 지금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위대 한 신세계가 여러분 앞에 펼쳐질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이 지금까지 늘 즐겨 걸었던 죄의 길에서 즉시 떠나시기 바 랍니다. 과거 악하고 더러운 생각들을 다 뒤로 던져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께로 돌아와 주님이 주시는 생각으로 주님이 주시는 길을 따라서 순종하며 나아가십시오. 그리하면 주님이 여러분에게 가까이 찾아오사 기쁘게 만나 주 실줄 믿습니다. 주님이 축복해 주심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지금까지의 어느 인 생보다 더 위대하고 더 아름답고 더 존귀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고 또 만나주기를 원하고 계시는데 우리들은 어떻게 된 셈인지 주님의 곁을 떠나서 내 멋대로 살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잘못 걸어왔던 우리들의 삶의 길을 다 청산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는 악한 계획들과 더럽고 추한 생각들을 버릴 수 있도록 성령으로 강하게 이끌어 주옵소서. 이제부터라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주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게 하옵시며 언제나 주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 속에 살게 하사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으로 우리의 삶을 가득 채워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가까이 계실 때에/ 기도를 원하시는 하나님/ 마6:5-8/ 2010-09-02
가까이 계실 때에/ 기도를 원하시는 하나님 마6:5-8 “목사님, 주님께서 3일동안 금식기도하라고 말씀하셔서 오늘부터 시작합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자궁암에 걸려서 고통을 받다가 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워있는 40대 후반의 여인을 심방갔더니 목사에게 하는 첫마디였습니다. “수술회복을 위해선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아야 될텐데 금식을 좀 미루면 어떨까요?” 나는 목사이기보다는 어쩌면 의사처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수술을 받고 난 다음에 회복이 정상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너무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우리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신다고 했어요. 우리 주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언제나 제가 원하면 다 들어주시고 늘 말씀해 주시니까요”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그녀를 위해 예배를 드리고는 돌아오는 차안에서 골몰히 생각에 빠졌습니다. 신학적인 딜레마에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부딪쳐오는 경험의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오는 물음입니다. 그 여인은 대학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신학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평범히 살아가는 주부인데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언제나 그 여인은 하나님의 손을 연인처럼 꼭 잡고 대화하면서 살고 있었고 두꺼운 성경과 찬송을 들고 찾아간 나는 언제나 그 여인의 하나님에게 찾아오는 방문객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찾아가는 심방이 아니라 주님 계신 곳에 찾아 뵙고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목회자인 나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사귀며 의논하며 살아가는 것이 살아있는 신앙생활이 아닐까하는 배움입니다. 이러한 관계가 나와 하나님과 형성되어질 때 거기에 참된 기도가 드려질 수 있고 기도를 통한 대화의 경험이 나를 감격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어떻게 기도 할 것인가?”의 저의가 바로 이런 관계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믿음의 생활이 외식하는 자와 같지 않을 것이며 중언부언하는 자가 되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까이 내 삶을 이끌어 주시는 그분에게 삶의 얘기를 나누면서 감사해야 할 때는 감사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그런면에서 오늘은 기도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서로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할 때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를 통해서 ①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며 ②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이며 ③ 기도하는 사람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베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까? 다음 몇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생활가운데서 말과 행동과 생각에서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생활의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기도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서1:9)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구약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미리 알고 따르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욕에 사로잡혀 부끄러운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 다윗은 하나님에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소서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때까지니이까?“(시6:1-3)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가 그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마치 어두운 그림자가 가로놓인 것처럼 막혀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괴로워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1-3) 이렇게 기도하는 다윗을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예언자들을 통해서 여러번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렘33:8)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6-7의 말씀입니다. 죄를 씻겨 주시되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14에 보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조건입니다. (2) 기도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데는 많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우리를 좌절시키고 실패하게 하는 상황과 결단에 직면되어지곤 합니다. 정말 지혜가 있어야 믿음 안에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높은 지혜없이는 우리의 영적 생활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의 약속이 야고보 1:5에 있습니다. “너희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3) 병고침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15에서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기도하면 병든자를 고쳐 주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기보면 “믿음의 기도”가 병든자를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믿음 없는 기도는 그 생명이 없습니다. 믿음있는 기도라야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서 신유의 역사를 이끌어 냅니다. 물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왕의 경우처럼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은 뜻을 바꾸실 수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여러분이 병들거나 약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나아서 건강해지면 그 건강을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건강을 세상적인 것, 죄 짖는 것을 위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기도가 무가치한 것이 됩니다. (4) 담임목사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사를 비판하고 부족한 것들을 지적은 하면서도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정말 적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직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다른 일을 제치고 교회를 섬기기로 결심하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담임목사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면 능력있는 목사가 될 것입니다. 목사를 위해 기도하면 그 상급을 반드시 되돌려 받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비난은 되돌아오는 상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1-2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를 위해 기도하십시요. 그러면 목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밑에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5) 우리들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필요를 느끼는 피조물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새날이 올 때마다 새로운 것이 필요합니다.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이 늘 필요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6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또 빌립보서 4:19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 모든 쓸 것들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의 것이 됨을 가르치는 말씀들입니다. 이 모든 기도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됩니다. 요한복음 14:13-14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니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의 기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응답받는 것이지 내 공로나 내 의지 때문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요, 이렇게 주님의 공로로 받은 것이라야 그 모든 것들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로부터 무엇인가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어떤 딸이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도시로 떠났을 때 어머니는 그 딸로부터 소식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 딸의 새로운 직장에 대해 듣기를 원합니다. 그 딸이 만나는 사람들이나 출석하고 있는 교회나 그녀가 입고 다니는 새로운 옷 등에 대해 듣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딸이 어머니에게 전화하거나 편지쓰기를 게을리 하여 소식을 전해 주지 않을 때 어머니는 몹시 슬퍼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 느끼는 같은 느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필요한 것, 도움이 필요한 것, 가슴아픈 것, 기쁨, 즐거움 등을 갖고 주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둘째로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①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는 하나의 영적 교통이지 무엇을 요구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산타크로스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물론 기도는 영적인 친교나 교통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님께 간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무엇이든지 필요가 있으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여자들은 아이쇼핑(eye shopping)을 즐깁니다. 이것을 window shopping이라고 합니다. 살 돈이 없어도 쇼핑센터에 가서 이것저것 보면서 반나절이상을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 남자들은 몹시 다리 아파하면서 무의미하게 느낍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이렇게 window shopping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전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기도의 행동만 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가르치기를 진정한 기도는 구하는 것(asking), 찾는 것(seeking), 두드리라(knocking)는 것입니다. 기도는 구하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식당에 있을 때 우리는 메뉴를 보고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분명히 웨이터에게 구합니다. “스테이크를 적당히 익혀 주시고 셀러드는 후렌치 드레싱을 뿌리고 감자튀김과 커피를 주세요” 우리가 식품점에 갔을 때도 “음식 한 바구니만 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식빵하나, 상추, 베이컨, 밀크 등을 삽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 언제 식사 한 번 합시다”이것은 그저 인사이지 언제 식사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 목요일 저녁 시간이 어떤가요? 그날 제가 6:30분에 목사님을 어느 식당에 모시고 저녁을 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다른 얘기입니다. 그때 나는 시간이 있으면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정하게 됩니다. 기도가 바로 이런 구체적인 것이 있어야합니다. ②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서나 아니면 인간을 대할 때 바른 자세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설정이 되어야 올바른 나를 발견하고 내 이웃을 발견하는 사랑의 관계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이 안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최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길로 최선의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기도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내 죄를 깨닫게 되고 용서를 구하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갖게됩니다. 또 때때로 기도를 통해서 내가 내 형제나 친구나 이웃에게 행한 잘못한 죄나 태도를 깨닫게 됩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갖게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③ 염려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빌 4:6-7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기키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의 근심과 걱정대신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안에서 갖다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시편 34:6에 보면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며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옛날 다윗에게만 하였던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염려스러울 때 기도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염려로부터 지켜주십니다. ④ 기도를 하는 目的은 하나님과의 영적교통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발전시킬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내곁에 계심을 느끼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내게서 멀리 계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곁에 계심을 느끼기 위해서도 언제나 기도합시다. 셋째로 기도의 사람들을 찾아 봅시다. ① 히스기야(Hezekiah)왕의 기도와 응답 받은 것을 생각해 봅시다. 어느날 앗수루의 큰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포위망을 구축하고 좁혀들기 시작했습니다. 앗수루의 산헤립(Sennacherib)왕이 Hezekiah왕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네 하나님이 너희들을 구출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다른 도시들을 모두 파괴시켰다. 너희들이 다음 망할 차례이다. 우리가 너희들을 쳐 들어가서 네 민족을 살해하고 너희 도시들을 점령할 것이다“ Hezekiah가 이 편지를 받고는 그는 자기 참모들이나 각료들과 의논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선전으로 올라갔습니다. Hezekiah왕은 그 편지를 주님 앞에 펼쳐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앗수루군대의 진영으로 보냈습니다. 185,000명의 군인들을 진멸시켰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가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주님 앞에 그 편지를 펼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기도하면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베드로의 기도와 응답을 살펴봅시다. 행12장에 보면 헤롯왕이 극렬신자 몇 명을 죽이고 그 순을 꺽으려고 먼저 야고보를 죽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다른 교우들이 요한 마가의 어머니 집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사인 베드로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감옥밖에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6명의 군인들이 베드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두명의 군인사이에서 쇠사슬에 함께 묶여 있어서 도망하기에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베드로를 잠에 취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교우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때 천사를 내려보내어 쇠사슬을 끊게 하고 그를 인도하여 감옥 밖으로 내 보냈습니다. 베드로가 마가의 어머니 집에 도착했을 때 기도하던 무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에 감탄합니다. 영국 브리스톨(Brsitol)에 사는 한 하나님의 사람이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들이 살수 있는 집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들어 주셨습니다. 그가 곧 George Muller였고 그는 생전에 2000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았고 700만불이상의 돈을 거두어서 고아원을 경영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사람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동원하여 그 모든 일을 해내었습니다. Muller는 고아들을 돌볼뿐만 아니라 수백명의 선교사들을 도왔고 그들을 통해서 수천권의 성경을 세계에 보냈고 많은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불쌍하고 나약하게 사느냐하면 우리의 기도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5:7 에 보면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살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그와 가까이 지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의 말씀이 다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퍼부어 주시는 그의 축복을 가까이 있을 때 받을 수 있습니다. 남북전쟁 때 일입니다. 남부의 어떤 사람이 많은 노예들을 가졌으나 다 자유인으로 풀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농장 주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종 하나를 불렀습니다. 그 종은 그 주인에게 매우 신실하였습니다. 그는 그 종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Sam, 네가 만일 나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네가 내일을 거두어 주고 보살펴준다면 재가 죽은 다음에 많은 것으로 너에게 갚아 주겠다” Sam은 그의 전 주인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요구대로 함께 살기를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인이 죽을 때까지 열심히 그를 돌보아 주면서 일을 했습니다. 주인이 죽은 후에도 그는 잔디를 깎고 나무를 패고 일할 수 없을 때까지 열심히 심부름을 허면서 일했습니다. 그는 아주 작은 오두막에서 살면서 먹을 것을 충분히 구하지 못한 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때 어느날 한 사람이 그에게 왔습니다. “Sam, 너의 옛 주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가 너를 위해서 은행에 $5000을 남겨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가서 네가 필요한 것 만큼 찾아서 쓰라는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은행 창구에 가서 말했습니다. “Marse Tom이 이 은행에 나를 위해서 돈을 좀 남겨 놓았습니까?” “예. 그가 $5,000.00을 남겨 놓았습니다.”은행원의 대답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나요?” Sam이 묻자 은행원은 그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원하는 만큼의 돈의 액수를 Check에 써줄테니 그 수표위에 싸인을 하되 어떤 마크만 하시면 됩니다” “$50센트쯤 찾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은행원이 수표를 써주자 싸인란에 X표를 해서 주었더니 즉시 50센트를 받았습니다. Sam은 너무 기뻐서 그 돈을 받아 들고 집으로 달려 왔습니다. 약간의 음식을 사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오두막에 살면서 $4,999.50가 은행에 있는데도 찾을 생각도 없이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요구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텐데 우리는 참된 기도를 드리지 않으므로 영적으로 육적으로 가난하게 살다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풍부한 것을 쓸 줄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선조들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구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불황기라고 합니다. 정치적으로 매우 불신시대에 삽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뜨겁지 못합니다. 정치꾼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가정적으로도 불안정합니다. 영구한 가정이 드뭅니다. 늘 불안하고 깨질듯한 위기속에 삽니다. 청소년들을 기르기가 어렵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이뤄져야 할 일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의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일 것입니다. 산헤립 앞에서 떠는 히스기야가 기도함으로 얻은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합시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살리는 동료들의 기도가 되게 합시다.
가까이 계실 때에/ 기도를 원하시는 하나님/ 마6:5-8/ 2010-09-02
가까이 계실 때에/ 기도를 원하시는 하나님 마6:5-8 “목사님, 주님께서 3일동안 금식기도하라고 말씀하셔서 오늘부터 시작합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자궁암에 걸려서 고통을 받다가 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워있는 40대 후반의 여인을 심방갔더니 목사에게 하는 첫마디였습니다. “수술회복을 위해선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아야 될텐데 금식을 좀 미루면 어떨까요?” 나는 목사이기보다는 어쩌면 의사처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수술을 받고 난 다음에 회복이 정상적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너무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우리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신다고 했어요. 우리 주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언제나 제가 원하면 다 들어주시고 늘 말씀해 주시니까요”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그녀를 위해 예배를 드리고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골몰히 생각에 빠졌습니다. 신학적인 딜레마에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부딪쳐오는 경험의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오는 물음입니다. 그 여인은 대학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신학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평범히 살아가는 주부인데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언제나 그 여인은 하나님의 손을 연인처럼 꼭 잡고 대화하면서 살고 있었고 두꺼운 성경과 찬송을 들고 찾아간 나는 언제나 그 여인의 하나님에게 찾아오는 방문객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찾아가는 심방이 아니라 주님 계신 곳에 찾아 뵙고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목회자인 나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가장 가까운 친구로 사귀며 의논하며 살아가는 것이 살아있는 신앙생활이 아닐까하는 배움입니다. 이러한 관계가 나와 하나님과 형성되어질 때 거기에 참된 기도가 드려질 수 있고 기도를 통한 대화의 경험이 나를 감격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어떻게 기도 할 것인가?”의 저의가 바로 이런 관계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믿음의 생활이 외식하는 자와 같지 않을 것이며 중언부언하는 자가 되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까이 내 삶을 이끌어 주시는 그분에게 삶의 얘기를 나누면서 감사해야 할 때는 감사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기도입니다. 그런면에서 오늘은 기도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서로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할 때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를 통해서 ①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며 ②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이며 ③ 기도하는 사람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베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까? 다음 몇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생활가운데서 말과 행동과 생각에서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생활의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기도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서1:9)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구약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미리 알고 따르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욕에 사로잡혀 부끄러운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 다윗은 하나님에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소서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때까지니이까?“(시6:1-3)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가 그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마치 어두운 그림자가 가로놓인 것처럼 막혀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괴로워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1-3) 이렇게 기도하는 다윗을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예언자들을 통해서 여러번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렘33:8)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6-7의 말씀입니다. 죄를 씻겨 주시되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14에 보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조건입니다. (2) 기도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데는 많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우리를 좌절시키고 실패하게 하는 상황과 결단에 직면되어지곤 합니다. 정말 지혜가 있어야 믿음 안에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높은 지혜없이는 우리의 영적 생활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의 약속이 야고보 1:5에 있습니다. “너희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3) 병고침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15에서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기도하면 병든자를 고쳐 주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기보면 “믿음의 기도”가 병든자를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믿음 없는 기도는 그 생명이 없습니다. 믿음있는 기도라야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서 신유의 역사를 이끌어 냅니다. 물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왕의 경우처럼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은 뜻을 바꾸실 수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여러분이 병들거나 약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나아서 건강해지면 그 건강을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건강을 세상적인 것, 죄 짖는 것을 위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기도가 무가치한 것이 됩니다. (4) 담임목사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사를 비판하고 부족한 것들을 지적은 하면서도 목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정말 적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직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다른 일을 제치고 교회를 섬기기로 결심하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담임목사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면 능력있는 목사가 될 것입니다. 목사를 위해 기도하면 그 상급을 반드시 되돌려 받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비난은 되돌아오는 상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1-2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를 위해 기도하십시요. 그러면 목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밑에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5) 우리들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필요를 느끼는 피조물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새날이 올 때마다 새로운 것이 필요합니다.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이 늘 필요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6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또 빌립보서 4:19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 모든 쓸 것들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의 것이 됨을 가르치는 말씀들입니다. 이 모든 기도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됩니다. 요한복음 14:13-14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니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의 기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응답받는 것이지 내 공로나 내 의지 때문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요, 이렇게 주님의 공로로 받은 것이라야 그 모든 것들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로부터 무엇인가를 듣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어떤 딸이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도시로 떠났을 때 어머니는 그 딸로부터 소식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 딸의 새로운 직장에 대해 듣기를 원합니다. 그 딸이 만나는 사람들이나 출석하고 있는 교회나 그녀가 입고 다니는 새로운 옷 등에 대해 듣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딸이 어머니에게 전화하거나 편지쓰기를 게을리 하여 소식을 전해 주지 않을 때 어머니는 몹시 슬퍼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 느끼는 같은 느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필요한 것, 도움이 필요한 것, 가슴아픈 것, 기쁨, 즐거움 등을 갖고 주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둘째로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①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는 하나의 영적 교통이지 무엇을 요구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산타크로스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물론 기도는 영적인 친교나 교통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님께 간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무엇이든지 필요가 있으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여자들은 아이쇼핑(eye shopping)을 즐깁니다. 이것을 window shopping이라고 합니다. 살 돈이 없어도 쇼핑센터에 가서 이것저것 보면서 반나절이상을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 남자들은 몹시 다리 아파하면서 무의미하게 느낍니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이렇게 window shopping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전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얻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기도의 행동만 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가르치기를 진정한 기도는 구하는 것(asking), 찾는 것(seeking), 두드리라(knocking)는 것입니다. 기도는 구하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식당에 있을 때 우리는 메뉴를 보고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분명히 웨이터에게 구합니다. “스테이크를 적당히 익혀 주시고 셀러드는 후렌치 드레싱을 뿌리고 감자튀김과 커피를 주세요” 우리가 식품점에 갔을 때도 “음식 한 바구니만 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식빵하나, 상추, 베이컨, 밀크 등을 삽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 언제 식사 한 번 합시다”이것은 그저 인사이지 언제 식사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 목요일 저녁 시간이 어떤가요? 그날 제가 6:30분에 목사님을 어느 식당에 모시고 저녁을 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다른 얘기입니다. 그때 나는 시간이 있으면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정하게 됩니다. 기도가 바로 이런 구체적인 것이 있어야합니다. ②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서나 아니면 인간을 대할 때 바른 자세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설정이 되어야 올바른 나를 발견하고 내 이웃을 발견하는 사랑의 관계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이 안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최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길로 최선의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기도를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내 죄를 깨닫게 되고 용서를 구하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갖게됩니다. 또 때때로 기도를 통해서 내가 내 형제나 친구나 이웃에게 행한 잘못한 죄나 태도를 깨닫게 됩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갖게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③ 염려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빌 4:6-7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기키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의 근심과 걱정대신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안에서 갖다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시편 34:6에 보면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며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옛날 다윗에게만 하였던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염려스러울 때 기도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염려로부터 지켜주십니다. ④ 기도를 하는 目的은 하나님과의 영적교통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발전시킬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내곁에 계심을 느끼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내게서 멀리 계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곁에 계심을 느끼기 위해서도 언제나 기도합시다. 셋째로 기도의 사람들을 찾아 봅시다. ① 히스기야(Hezekiah)왕의 기도와 응답 받은 것을 생각해 봅시다. 어느날 앗수루의 큰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포위망을 구축하고 좁혀들기 시작했습니다. 앗수루의 산헤립(Sennacherib)왕이 Hezekiah왕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네 하나님이 너희들을 구출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다른 도시들을 모두 파괴시켰다. 너희들이 다음 망할 차례이다. 우리가 너희들을 쳐 들어가서 네 민족을 살해하고 너희 도시들을 점령할 것이다“ Hezekiah가 이 편지를 받고는 그는 자기 참모들이나 각료들과 의논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선전으로 올라갔습니다. Hezekiah왕은 그 편지를 주님 앞에 펼쳐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앗수루군대의 진영으로 보냈습니다. 185,000명의 군인들을 진멸시켰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가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주님 앞에 그 편지를 펼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기도하면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베드로의 기도와 응답을 살펴봅시다. 행12장에 보면 헤롯왕이 극렬신자 몇 명을 죽이고 그 순을 꺽으려고 먼저 야고보를 죽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다른 교우들이 요한 마가의 어머니 집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사인 베드로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몹시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감옥밖에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6명의 군인들이 베드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두명의 군인사이에서 쇠사슬에 함께 묶여 있어서 도망하기에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베드로를 잠에 취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교우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때 천사를 내려보내어 쇠사슬을 끊게 하고 그를 인도하여 감옥 밖으로 내 보냈습니다. 베드로가 마가의 어머니 집에 도착했을 때 기도하던 무리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에 감탄합니다. 영국 브리스톨(Brsitol)에 사는 한 하나님의 사람이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들이 살수 있는 집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들어 주셨습니다. 그가 곧 George Muller였고 그는 생전에 2000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았고 700만불이상의 돈을 거두어서 고아원을 경영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사람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동원하여 그 모든 일을 해내었습니다. Muller는 고아들을 돌볼뿐만 아니라 수백명의 선교사들을 도왔고 그들을 통해서 수천권의 성경을 세계에 보냈고 많은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불쌍하고 나약하게 사느냐하면 우리의 기도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5:7 에 보면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살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그와 가까이 지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의 말씀이 다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퍼부어 주시는 그의 축복을 가까이 있을 때 받을 수 있습니다. 남북전쟁 때 일입니다. 남부의 어떤 사람이 많은 노예들을 가졌으나 다 자유인으로 풀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농장 주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종 하나를 불렀습니다. 그 종은 그 주인에게 매우 신실하였습니다. 그는 그 종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Sam, 네가 만일 나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네가 내일을 거두어 주고 보살펴준다면 재가 죽은 다음에 많은 것으로 너에게 갚아 주겠다” Sam은 그의 전 주인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요구대로 함께 살기를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인이 죽을 때까지 열심히 그를 돌보아 주면서 일을 했습니다. 주인이 죽은 후에도 그는 잔디를 깎고 나무를 패고 일할 수 없을 때까지 열심히 심부름을 허면서 일했습니다. 그는 아주 작은 오두막에서 살면서 먹을 것을 충분히 구하지 못한 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때 어느날 한 사람이 그에게 왔습니다. “Sam, 너의 옛 주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가 너를 위해서 은행에 $5000을 남겨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가서 네가 필요한 것 만큼 찾아서 쓰라는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은행 창구에 가서 말했습니다. “Marse Tom이 이 은행에 나를 위해서 돈을 좀 남겨 놓았습니까?” “예. 그가 $5,000.00을 남겨 놓았습니다.”은행원의 대답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나요?” Sam이 묻자 은행원은 그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원하는 만큼의 돈의 액수를 Check에 써줄테니 그 수표위에 싸인을 하되 어떤 마크만 하시면 됩니다” “$50센트쯤 찾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은행원이 수표를 써주자 싸인란에 X표를 해서 주었더니 즉시 50센트를 받았습니다. Sam은 너무 기뻐서 그 돈을 받아 들고 집으로 달려 왔습니다. 약간의 음식을 사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오두막에 살면서 $4,999.50가 은행에 있는데도 찾을 생각도 없이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요구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텐데 우리는 참된 기도를 드리지 않으므로 영적으로 육적으로 가난하게 살다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풍부한 것을 쓸 줄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선조들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구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불황기라고 합니다. 정치적으로 매우 불신시대에 삽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뜨겁지 못합니다. 정치꾼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가정적으로도 불안정합니다. 영구한 가정이 드뭅니다. 늘 불안하고 깨질듯한 위기속에 삽니다. 청소년들을 기르기가 어렵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이뤄져야 할 일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우리의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일 것입니다. 산헤립 앞에서 떠는 히스기야가 기도함으로 얻은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합시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살리는 동료들의 기도가 되게 합시다.
가까이 계실때에 부르라/ 사55:1-7/ 2003-01-14
가까이 계실때에 부르라 사55:1-7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가 간증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 분은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가 다리 하나를 잃어버린 상이용사입니다. 하지만 역경을 딛고 사업을 하여 큰 기업을 이루었습니다. 그 분의 간증 가운데 그의 가장 중요한 때를 말하였는데 바로 자신의 다리 한쪽을 잃어 버렸던 베트남 전쟁 이야기였습니다. 전투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입어 크게 부상을 당해 실신하여 병원으로 실려갔던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 병원에서 그는 일생일대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야전병원에서는 Mash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수많은 병사들이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올 때 이 Mash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Mash가 발생하면 야전 군의관들은 서둘러 치료되어서 나을 사람인가 아니면 치료받아도 죽을 사람인가를 구별합니다. 그래서 꼭 살아야 될 사람은 먼저 의료를 주어 빨리 살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각 환자들에게 3가지의 딱지를 발가락에 붙여집니다. 첫째로 No Hope, 희망이 없다라는 딱지입니다. 이 환자는 치료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희망이 없다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Dead이라는 딱지가 입니다.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지요. 세 번째로는 Medical help needed입니다. 이 환자는 조금만 돌보아 주면 살 수 있으니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표시입니다. 이 월남참전 실업가 역시 전투에서 관통상을 입고 피로 뒤범벅이 되어 야전병원에 실려갔습니다. 거의 실신을 한 상태였습니다. 몸은 완전 마비가 되어 오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귀에는 가물가물 군의관과 간호사가 대화하는 것이 들립니다. 이때 군의관의 소리가 No Hope 이런 말이었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뚜벅뚜벅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생사가 한순간에 왔다갔다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간호사가 자기의 발가락에 No hope 이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나의 인생이 희망이 없다니, No Hope이라니, 아니야 내가 여기서 내 인생을 마칠 수는 없어\\\"라는 생각에 있는 모든 힘을 다해 간호사를 불렀습니다. 이 순간이 아니면 나는 끝난다라는 마음으로 간호사를 불렀습니다. \\\"간호사, 간호사, 나는 살아야해. 나에게 No Hope이란 말을 하지 말아요. 나는 쪼금만 치료해주면 나을 수 있어요. 나를 쪼금만 치료해 주세요.\\\" 자신은 크게 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모기 소리만한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기만한 목소리를 이 간호사가 듣고 그가 외치는 입에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No Hope이 아니에요. 나는 쪼금만 치료해 주면 나을 수 있어요. 나를 치료해 주세요.\\\" 이 소리를 듣자 간호사는 No Hope 이라는 딱지를 떼고 다시 \\\"Medical help needed\\\"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비록 나중에 다리 한쪽을 절단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는 생명을 건졌습니다. 한순간의 외침이 No Hope에서 Medical help needed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이 상이용사는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 살면서 훌륭한 사업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증합니다. 모든 이에게는 Medical Help Needed가 필요하다. 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Jesus Help Needed 예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맞습니다. 광야같은 인생을 걸어가면서, 어렵고 힘든 미국이민의 삶을 살면서, 힘든 학업가운데 우리에게 들려지는 소리는 Jesus help needed입니다. 목사에게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기쁨이 있다면 한 영혼 한 영혼이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영혼을 바라보면서 No Hope 이라는 말보다는 Jesus help needed 란 말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핵심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인간은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아보겠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죄성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대문자 SIN(죄성)입니다. 이 죄성은 여러 가지의 죄를 낳습니다. 죄가 또 다른 죄를 낳습니다. 바로 우리가 범하는 자범죄 소문자 sins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죄들은 더욱 가중되어 결국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도 아닙니다. 칼도 아닙니다. 바로 죄가 사람을 죽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떨어져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바로 성경이 누누이 이야기하는 관점입니다. 두분 째로 성경은 죄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바로 Jesus help needed입니다. 오직 죄성과 자신이 지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Jesus Help Needed. 하지만 언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나요? 그 때가 언제입니까? 인생을 일생이라고 합니다. 한자로 일생이란 한번밖에 없는 생애라는 뜻이지요. 어떤 종교에서는 사람이 착하면 사후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든지 사람이 악하면 동물로 태어난다는 윤회설을 말합니다. 거짓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딱 한번의 일생밖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치있고 의미있고 탁월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역사, 일생가운데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농사에도 심을 때가 있고 가꿀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지요. 맞습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태어날 때가 있고, 자랄 때가 있고, 공부할 때가 있고, 결혼할 때가 있고, 봉사할 때가 있습니다. 때를 이야기하면 많은 분들이 자신의 시간이 많은 줄 압니다. 여러분, 일생가운데 법칙이 또 한가지가 있는데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이 왔지만 갈 때는 순서 없이 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보다 먼저 간다는 법칙이 없는 것이 일생의 법칙입니다. 성경에서 첫 번째로 죽은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담과 하와가 아닙니다. 부모가 먼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벨이 먼저 죽었습니다. 자녀가 먼저 죽었습니다. 어느 공동묘지에 죽은 사람의 나이 분포를 보니 30대에서 40대 죽은 자들이 60%라고 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이 왔지만 갈 때는 순서 없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맞겨주신 시간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사 3장 1절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너무나도 맞는 말입니다 말씀과 대화함(Engage the Word)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 6절 한 절에도 \\\'때\\\'라는 말이 두 번씩 나옵니다. 우리 다함께 6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첫 번째 때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가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를 강조하는 이유는 인생에서 하나님과 만남을 가지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나를 향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세 베네딕트 수도원 일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탄이 부하들을 시켜 땅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지옥으로 데려오도록 방법을 강구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네명의 마귀가 각각 자신의 비상한 방법을 연구해서 사람들에게 접근합니다. 첫 번째 마귀는 성경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선전하였습니다. 두 번째 마귀는 천국이나 지옥이란 없는 것이니 속지 말라고 선전했습니다. 세 번째 마귀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마귀는 성경은 믿을만한 것이고, 천국과 지옥도 있고, 하나님도 있다고 말하면서 모든 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살짝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래알 같이 많은 인생인데 너무 각박하게 신앙생활 하지말고 좀 여유를 가지고 차차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후 네 마귀가 모여 앉아 지옥으로 끌고 온 영혼의 수를 세어보니 네 번째 마귀 \\\"천천히 믿으라고 말한 마귀\\\"가 단연 일위였다고 합니다. 이 마귀를 차차마귀라고 하지요. 차차 믿으라는 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우리가 하나님을 영원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어디에다 존재하신 무소부재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존재입니다. 시간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유한한 존재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은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몸이 건강한 사람이 카바레에서 춤을 추며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술집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병이 들어 병원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분은 보았습니다. 병석에서 인간의 나약과 한계와 무능을 깊이 절감하며 하나님께로 나오는 분을 보았습니다. 사업이 힘들어 주님께로 나온 분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가정의 어려움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건강한 이들보다 병상에 있는 자들,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기보다는 약함을 인정하는 자들이 주님을 찾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욱 강하고 놀랍게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약한 존재인 인간임을 말할 때 강하고 능력이 많으신 무한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힘듭니까? 가정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학업의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약함을 체험하는 이 순간이 여호와를 만날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복음송 가수 중에 송정미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이 복음송 가수의 곡 중에 이런 곡이 있습니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제가 나머지를 찬양하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모든 사람은 주님이 필요합니다. Jesus help needed.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입니까? 남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입니까? 그것은 절대로 우리의 공허감을 채워줄수가 없습니다. 허상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때 공허감은 만족함으로 채워집니다. 주님께 자신을 드리며 기도할 때 주님을 만나고 강한 사람으로 살수 있습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와 만나자고 하는 순간이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샘과 베티라는 신혼부부의 글을 읽었습니다. 결혼해서 직장도 번듯하고 먹고 살수 있을 정도로 잘 사는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남편 샘에게는 부인 베티에게 한번도 손도 못되게 하는 차가 있었습니다. 바로 10만불 가량의 스포츠카였습니다. 얼마나 그것을 애지중지 하는지 부인이 한번만 몰아보자고 해도 못 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가 못 몰게 하면 계속 몰려고 하는 것처럼 남편이 낮잠을 자는 동안에 몰래 그 차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깐만 몰고 남편이 깨기 전에 돌아오면 무슨 일이 있겠나 싶어 몰고 나간 것이지요. 그런데 차를 몰고 가다가 앞에 어린아이가 딱 나타나는데 옆으로 꺾어 급정거를 하는데 바로 길가에 서있는 전봇대에 차를 꽝하고 박아버렸습니다.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차를 박아 버렸으니 마음이 불안합니다. 마음이 불안해도 언제나 찾아오는 사람이 있지요. 바로 삐용삐용 달려온 경찰관입니다. 경찰관이 와서 말합니다. 제가 경험자인데 이런 말을 안 듣는 것이 좋습니다. \\\"Drive Licence and registration please\\\" 마음이 두근두근합니다. 이제 남편 앞에 가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합니다. 그런데 차량 등록증을 꺼내려고 하는데 등록증 앞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부인 베티에게! 당신이 이 글을 안 보았으면 좋겠어.\\\" 두 번째 글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 글을 읽는다면 틀림없이 사고가 나서 읽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줄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하지만 베티, 이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틀림없이 많이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나는 감사한다.\\\" 마지막 네 번째 줄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베티, 내가 이 차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차보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주기 바래. 사랑해.\\\" 차보다 자신의 몸을 더 아껴 주는 남편이 너무 고맙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티는 생각합니다. \\\"아 우리 남편이 차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나를 더 사랑하는 구나\\\". 여러분,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온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혹시라도 한국에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바로 이 미국 땅에서 주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왜 6절의 하나님을 만날 때가 있다고 합니까? 왜 하나님이 가까이 하실 때가 있다고 하십니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말씀 첫머리에 말씀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말씀으로 응답함(Response the Word) 전도서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무슨 말입니까? 사람은 유년의 때가 있고 청년의 때가 있고 중년과 장년의 때가 있고 노년의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유년의 시기에는 너무 어려서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중년기에는 세상의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는 때입니다. 중년의 때에 예수님을 만나는 예도 많이 있지만 참으로 인생의 많은 장애가 있어 주님께로 더욱 쉽게 나오지 못합니다. 중년의 시기는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중 마치 돌밭과도 같은 때입니다. 뿌리가 내리려고 하려 하는데 인생의 장애들이 겹겹이 있어 참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어렵습니다. 장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물, 명예, 욕심 등의 죄의 가시덤불이 너무 많아 진리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복음의 싹이 자라기에 너무나 험준한 때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입니까? 언제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실 때입니까? 유년일수도 있고 중년일수도 있고 장년일수도 있습니다. 노년의 때일 수도 잇습니다. 하지만 가장 하나님을 확실히 만날 수 있는 때는 바로 청년시기입니다. 청년의 때에는 비교적 양심적이며 선을 추구하고 정의를 찾습니다. 아울러 이상이 높고 현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영원한 진리를 찾고 인생의 깊은 뜻을 탐구합니다. 성경의 인물을 보면 청년기에 하나님을 만난 사래가 많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나 예레미야, 주님의 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과 디모데, 모두 청년의 때인 20-30때에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모든 사람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귀가 열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의 삶에 간섭하셔서 역사 하시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귀가 들리는 순간,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으로 나감(Go with the Word) 한 거지 왕초가 죽으면서 부하들에게 쪽지 하나를 남겼습니다. 그 쪽지 하나면 평생 굶어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남긴 종이입니다. 그 종이를 열어보니 동네 생일 목록이었다고 합니다. 거지 왕초가 남긴 것이 얻어먹을 수 있는 날 생일목록이였습니다. 왕초라면 생일목록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진짜 왕초라면 동네사람들 생일 목록보다도 남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남겨야 합니다. \\\"부하들아, 나는 지금까지 거지로 살았지만 너희는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마라. 너희 빨리 거지를 청산하고 남들처럼 똑바로 세상에서 살아라\\\" 뭐 이런 말을 남겨야 정말 왕초인 것입니다. 자녀에게도 돈을 남겨줘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망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이 너의 생애 가운데 계시니 그분을 만나야 한다. 그분이 너를 도와주시고 인도하신단다\\\" 이런 말을 남겨야 합니다. 자녀에게 말해야 합니다. \\\"너는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야. 하나님이 너를 보내 주셨단다.\\\" 그러면 자녀는 틀림없이 말을 할 것입니다. \\\"\\\"아빠, 엄마 염려하지마. 아빠와 엄마는 나에게 세상에서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잖아!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남길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실존관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그 때를 간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셨던 그 때를 간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나에게는 이런 스토리가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힘든 시기에 찾아 오셨다. 나에게 이런 기쁨을 주셨다\\\" That is my story. 내가 약할 때 나에게 힘주셨던 하나님, 나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주셨던 하나님을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간증입니다. 이번 한주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간증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간증이 무엇입니까? 찬송가 204장처럼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런 것이 진정한 간증입니다. 다함께 찬송가 204장을 찬양하면서 기도함으로 성만찬에 참여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에 초대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눌 때 주님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 수1:1-9/ 2003-04-29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 수1:1-9 여러분께서는 오늘 봉독한 여호수아서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큰 흐름을 들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얘기는 모세의 얘기와 중첩됩니다. 모세 얘기가 끝나면서 여호수아 얘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이야기를 그려봅시다. 고고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모세가 출애굽한 해는 아마 기원전 1250년경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원전 1250년, 우리 역사에 뭐가 있나 찾아보았는데,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가 세워진 때는 기원전 57년 정도밖에 안 되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백제는 18년일 뿐입니다. 하여튼 기원전 천년 대는 아주 오래 전의 시대입니다. 기원전 1250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거닐다가 이제 40년이 지난 약 1210년경에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의 마지막 지점에 와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서 40년 동안 돌아온 여정은 이스라엘 지도를 놓고 보면 이렇습니다. 가나안 지도를 눈앞에 놓으면, 위쪽 그러니까 북쪽에 큰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이 호수가 갈릴리 호수입니다. 또 하나 남쪽에 보면 물이 흘러들되 빠져나가지 않아서 죽은 호수가 있습니다. 그 호수를 사해라고 하는데,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 몸이 둥둥 뜹니다. 북쪽 갈릴리 호수와 남쪽 사해를 연결하는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이 바로 요단강입니다. 이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편은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입니다. 요단강 서편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지금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와 있는가 하면,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드는 남쪽 접경지역의 동쪽에 있습니다. 여기에 서서 보면, 서쪽에 있는 도시는 여리고입니다. 서쪽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새로 등장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서 지금 나아가려고 합니다. 바로 기원전 1200년경, 요단강 건너편 동쪽의 일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요단강 동편에 있는 한 산에서 또 다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산은 느보라 이름하는 산입니다. 느보 산. 그 산의 제일 큰 봉우리가 비스가입니다.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 이 봉우리에 모세가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봉우리에 앉은 모세에게 요단 강 너머 서쪽에 있는 땅을 보여줍니다. 이름하여 가나안 땅, 내용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이 땅을 모세에게 보여주면서 이제 40년 동안 걸어온 길의 목표인 저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에게는 \\\"모세야, 너는 이 땅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40년 간 고생했는데, 눈앞에 있는 땅에 못 들어간다니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성서에는 모세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야웨 하나님의 말씀에 승복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기 보좌관이었던 여호수아를 택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합니다. 인간적으로 솔직히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나이 80에 출애굽해서 이제 120이 되었는데, 목표를 눈앞에 두고 강제 퇴역입니다. 강제로 은퇴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회, 요즘말로 말하면 공동의회를 열고서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신명기 32장에 있는 이 유언의 내용을 모세의 노래라고 합니다. 노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야웨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속에서 여러분을 이끌었으나, 나는 이제 여기서 끝납니다. 내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3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마지막으로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기를 비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합니다만, 그 땅은 사실 신천지는 아닙니다.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흉년이 들어 양식이 없어서 이집트로 가서 민족도, 자존심도, 역사도 다 팔고서 먹을 것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몽땅 이집트로 간 것이 4백 년 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형제들이 미워하여 이집트 상인에게 판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온 집안이, 이스라엘 전체가 다 이사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타향살이를 자처했고 그것은 식민 생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집트 종살이 생활은 하나님이 시킨 것도 아니고, 이집트가 전쟁을 벌여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닙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넘기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먹고살 물품을 얻고 자유를 내주었습니다. 그렇게 지낸 것이 4백 년! 그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두고 온 산하, 우리의 고향, 흉년은 지나고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복된 땅, 그 땅으로 돌아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비전, 이것이 4백 년 동안 이스라엘을 정신적으로 지켜주었습니다. 그 비전을 모아서 모세가 출애굽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요단강 건너편에 놓고 동쪽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오늘로 끝납니다. 그리고 가나안 입성의 역사가 막 시작됩니다. 출애굽할 때의 역사는 모세와 함께 과거로 흘러가고, 가나안 입성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여호수아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역사를 보면, 모세와 여호수아는 비록 같이 일한 사람이었으나 여호수아가 모세가 아닌 바에는 지도자는 달라진 것입니다. 단절입니다. 모세는 모세,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단절의 연속입니다. 역사를 단절의 연속으로 보는 눈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셨던 자신의 모습, 임마누엘의 모습을 새로 선정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도 그대로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과 사람의 모습은 단절이지만, 사람이 바뀌고 지도자가 바뀌지만,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도도한 물결, 역사의 혼, 역사를 움직이는 힘, 그것은 단절이 아닌 연속된 흐름입니다. 그것은 야웨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그분은 모세를 통해서만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같은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끄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역사는 단절 속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바뀌고 단절되지만,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역사는 끊임이 없습니다. 모세가 받은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역사 속의 한 토막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개인의 역사, 가정의 역사, 사회의 역사, 민족과 세계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거나 역사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절만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은 있습니다. 이 흐름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흐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역사 속에 도도하게 흐릅니다. 단절 속에 끊임없이 연속되는 새로운 역사!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고 떠났던 백성이 4백 년의 이집트 생활을 거쳐서 40년 광야 길을 지나서 오늘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떠나온 고향에 다시 들어갑니다. 야웨 하나님은 4백 년 이집트 종살이 때에도,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도, 그리고 가나안,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도 계속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역사의 주인, 그 주인이 3천 2백 년 이후에 살아가는 오늘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계속할 것이다. 너희들은 바뀌어도 이념이 바뀌고 체제가 바뀌고 나라 이름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모두가 바뀌어도,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창조와 완성 사이에서 나의 역사는 계속된다. 이 역사의 토막토막 속에 너희는 열과 성의를 가지고 동참하라.\\\" 여호수아가 어떻게 가나안에 입성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인도하리라는 약속을 사람을 바뀌더라도 지키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서양 역사를 보면, 영국에서 살던 사람들의 일단이 종교문제로 박해받다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서 소위 우리가 지금 말하는 신대륙, 미국 대륙을 향해서 떠납니다. 아마 그때 그 사람들 마음속에 그리던 신대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땅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꿈을 안고 고향을 등지고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으로 향합니다. 오늘 여호수아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은 대서양을 건너가던 청교도들처럼,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가려고 합니다. 젖이 흐른다는 말은 양과 염소가 푸른 풀을 부족함 없이 뜯고 젖을 충분히 제공하는 최고의 초지를 가리킵니다. 꿀이 흐른다는 것은 양봉사업이 잘 되는 땅, 비옥한 땅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 아니라 목축과 농사와 양봉이 잘 되어서 복이 넘치는 땅, 가나안으로 가자! 우리가 오늘날 건너야 할 요단강, 대서양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지만, 서양 사람들은 대서양을 건넜지만, 혹시 우리는 3·8선이라 이름하는 육지 속의 대양을 건너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과 북이 서로 건넘으로써 삼천리 금수강산이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이 될 수 있는 날, 그게 언제입니까? 그 미래를 품고 오늘 평화를 향해 나가보십시다. 사람은 변합니다. 역사는 변합니다. 체제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을 주신 이 하나님이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이 길을 가자.\\\" 이 길을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작지만 알찬 경동이라 이름하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서는 역사의 단절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의 연속성을 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단절 속에서도 연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한테 주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읽은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우리의 생명을 누가 보장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기간을 누가 약속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약속 못 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 살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살아있는 만큼 일하고, 그래서 역사는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를 거쳐서 예언자들에게로 이어져 온 단절된 역사를 결정적으로 이으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준 약속의 담지자,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고향 땅에서는 천대받는다\\\"고 예수님도 불평하셨습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는 인간이 버린 마지막 선지자, 인간이 버린 유대의 마지막 지도자였습니다. 그 사람을 유대 역사가 인간의 존재나 체제가 완전히 버렸습니다. 버린 구체적인 증거가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완전히 죽였지만, 그걸로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시 이어집니다. 부활이 뭡니까? 인간이 끊어놓은 역사를 하나님은 다시 묶으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시는 표입니다. 인간이 칼로 싹둑 잘라버린 역사를 하나님은 보혈의 피로 다시 엮어 연속시켜놓습니다. 그렇지 않고 경동교회가 어떻게 생깁니까? 십자가에 죽어버리고 말았다면, 뭐 때문에 교회가 생깁니까? 신앙은 어디서 생깁니까? 인간이 끊어놓습니다. 그리고 다 죽이기도 합니다. 폭격도 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은 끊어진 채, 상처받은 채, 죽임 당한 채 같이 와서, 다시 당신의 복의 역사를 연결시켜 놓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너희는 내가 준 역사의 한 토막을 성실히 살면서 나의 역사를 증거하라고 보낸 사람들이다.\\\" 끊어진 역사를 이어주는 십자가의 보혈, 그 보혈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부활이라 이름하는 생명의 신천지가 열립니다. 우리 앞을 막아선 요단강을 건너면, 새로운 신천지가 나타납니다. 요단강은 어디에든지 있습니다. 우리 가슴에도 있고, 우리 사회에도 있습니다. 건너십시오. 가면 새로운 땅이 열립니다. 미지의 땅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오늘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민14:1-10/ 2010-07-02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민14:1-10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처음부터 주신 약속이며 그 후손 이삭, 야곱에게 연이어 나타나시어 꿈으로,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들려주신 틀림없는 약속입니다. 한 밤 중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끄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하시고는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인의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그에게 한 민족을 세워서 가나안 땅을 주어서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면서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창 18:18~19절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한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그 후손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나라가 어떠한 축복을 받았는가를 온 세상 민족에게 보여주심으로 온 민족이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섬김으로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가나안 땅에 살았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야곱의 아들 요셉의 시대에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먼저 애굽에 종으로 팔렸던 요셉이 애굽에서 국무총리가 되어 애굽의 온 땅을 다스릴 때에 야곱의 온 식구도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요셉이 죽고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크게 번성하게 되었는데 애굽의 바로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두려워하여 종으로 삼아 힘든 노역을 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드디어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은 한 사람 모세를 세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보이시면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그 축복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이 백성에게 얻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애굽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열가지 재앙을 애굽 백성에게 내리고 드디어 지긋지긋한 종살이에서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는 4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이었으나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뒤로 물러나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 염려되어 이 백성으로 곧바로 가나안으로 향하지 않고 광야길로 돌려서 이 광야 길에서 훈련을 받고 연단을 받아 충분히 준비된 후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얻게 하려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훈련의 과정을 거쳐 준비된 후에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 광야 길은 아스팔트 길이 아닙니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여유만만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빛이 40도를 넘고 또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매우 추운 곳이었습니다. 또 모래 사막이 끝없이 펼쳐진 곳도 있어서 길을 잘 못 들면 여지 없이 목말라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마실 물이 어디에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운이 좋아야 먹을 수 있습니다. 또 독사가 우굴거리는 곳이어서 언제 어디서 나와서 물지 모르는 곳이 사막, 광야입니다. 환경적으로 이렇게 열악한 곳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훈련받기에는 둘도 없는 아주 적당한 환경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광야라는 곳은 인간 스스로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어저께 뉴스를 보니까 다카르 랠리라고 하는 대륙횡단 자동차 경주가 있는데 올해도 1명이 죽고 3명이 혼수 상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디카르 랠리라고 하는 이 자동차 경주는 사하라 사막 횡단을 즐겼던 프랑스의 모험가 티에리 사빈(프랑스·1949~1986년)이 만든 대륙횡단 자동차 대회로 불리우는데 1979년 첫 대회 때 프랑스 파리에서 세네갈 다카르를 왕복하는데서 유래하여 다카르랠리로 불립니다. 지금까지 28회가 열리는 동안 무려 25명의 드라이버와 지역주민 등 50여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해 ‘죽음의 레이스’로 일컬어 졌습니다. 이 경기는 오토바이, 4륜 자전거, 트럭, 자동차 등 4개부문에서 이루어지는데 모두 530여대의 차량이 14개 구간으로 이뤄진 9574㎞를 질주하는 지상 최대의 오프로드(비포장 도로) 모터스포츠대회라고 합니다. 이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새 자동차를 가지고 정비를 잘 하고 또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난다고 하더라도 수천킬로미터가 넘는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이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스라엘 백성은 기구도 없이 또 장정만 있는 것도 아니고 노인과 여자 어린 아이가 다 함께하고 있는데 이 사막에서 살아남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은 모두 합하여 200만명 정도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길을 한 번 잘못들면 사막으로 들어가 모두가 다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로 하여금 이 광야 길에서 길을 잘 못가서 죽은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광야 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는데 ......... 기록하기를 ... 신1:30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 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1: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1:33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신 8: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신 8: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 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선선하게 해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해 주시고, 길을 가다가 목말라 하면 바위에서 물을 내서 마시게 하시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메추라기 새떼를 끌어다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내리게 하시고........... 또 날마다 아침 새벽에 집 밖에 나가면 만나가 내려서 백성들이 다 먹고 남을 정도로 충분히 먹을 양식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을 보면서 광야 길을 걸어와서 이제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 두 정탐꾼을 선발해서 과연 이 땅이 어떠한 땅인가 알아보겠다고 하여 대표를 뽑아서 가서 보고 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서 정탐하고 왔는데 과연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틀림없습니다. 13장 23절에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메고 왔는데 얼마나 컸던지 가지를 베어서 둘이서 막대기에 꿰어서 왔습니다. 또 석류과 무화과 열매를 따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들은 과일을 보이면서 가서 본즉 과연 그 땅에 절과 꿀이 흐르는 땅이더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 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 인과 여부스 인과 아모리 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 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32~33절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 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 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열 둘 중에 열명은 악평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백성들도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였습니다. 이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면서 한 지휘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야단법석입니다. 그리고 아니다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올라가서 취하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고 하면서 외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향하여 돌을 들어 치려고 막 일어서는 것입니다. 얼마 안있으면 이들이 돌에 맞아 죽을 참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나도 생각지 않고 ............ 언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느냐? ......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키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도 생각지 않고 원망과 불평으로 나아갔던 이 사람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빠꾸(일본말)..... 회정!!! 다시 뒤로 돌앗!........... 앞으로 가!.......... 해서 다시 광야로 들어가 40년을 방황하면서 다 죽을 때까지 배회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2세대들이 주역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해서 다시금 와서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고 아이 성을 비롯한 가나안의 강한 족속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땅에 들어가서 사사 시대를 거쳐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왕과 다윗왕이 기름부음을 받고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을 이루어 가나안 전 지역,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모든 가나안 땅을 통합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여정은 저와 여러분들이 마귀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죄에서 해방되어 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아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 하나님 주시는 은혜와 사랑, 지키시는 은혜를 우리가 받으면서 지금 저 천국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 하나님 계신 저 천국에 들어가려면......... 휴거의 들림을 받으려면 .......... 한가지만 잘 합시다. 원망하지 맙시다. ............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읍시다. ........ 하나님의 능력, 그 크신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그 세상의 문제 속에 빠져들어가 죽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 오직 찬송과 기도로 주의 말씀 안에서 순종하면서 하루 하루 나가면 언젠가는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될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오직 믿음 만이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세 번째 명령/ 여리고 정복/ 수6:1-7, 히11:29-31/ 사순절설교/ 2003-03-20
가나안 땅에서의 세 번째 명령/ 여리고 정복 수6:1-7, 히11:29-31 여호수아서는 우리의 신앙 생활의 전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잘 공부하고 이해하며 우리 신앙 생활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어떻게 신앙생활하면 승리할 수 있을까 하는 비결도 이 성경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과정을 보면 입성의 과정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입성의 과정, 그것이 1장에서 5장까지입니다. 광야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약속의 땅 구원의 자리에 이르는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첫 번째 명령하신 내용이 기념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이 만연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고 결정하셨고, 물로 온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다시는 내가 너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언약의 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심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우리를 구원시키고 새로운 땅에 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깨닫고 살아가라는 이것이 할례의식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의식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하면서도 항상 그 의미를 가집니다. 내가 십자가 앞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절기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내 자신을 죽이고 포기하지 않으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은 해도 주님과 깊은 교통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나를 십자가 앞에 내려 놓는 순간에 주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에서 첫 열매를 먹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약속대로 그들에게 첫 소산을 주셨습니다. 열매의 의미는 굉장한데 있습니다. 거기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열매는 갈증을 해소시켜 줍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포도열매를 우리가 생각할 때 포도에는 생명의 씨앗이 있고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는 배불리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의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주시고 항상 우리에게 배부름과 만족함을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가운데 살고 생명을 나눌 수 있습니다. 입성의 단계에는 1번째 단계 요단을 건너라. 요단을 건너서 2번째 단계는 정복의 단계입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라.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데는 항상 이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는 입성의 단계, 그리고 정복의 단계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입성하시면 왕으로 오셔서 예루살렘을 통치하시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님이 넘어뜨려야 하는 수많은 여리고 성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십자가가 바로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십자가가 바로 주님께서는 큰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방법으로 그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순종의 방법으로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사람들은 다 패배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승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세 번째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바를 지켜가는 과정을 보면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승리의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함으로 그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승리하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 본문 6장을 보면 1~7절까지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8~19절까지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적혀 있습니다. 20~21절까지에는 그 결과가 곧 승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먼저 명령,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와 똑같습니다. 일찍 일어나라. 그리고 언약궤를 앞세우고 아무 말 없이 따라가라. 여기 여리고 성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가 12절에 보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 15절에도 \\\'제 칠일 새벽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앞세웁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와 거리를 두고 사람들이 따라갑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도 항상 하나님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매일 당하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려면 내 앞에서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보면 성 주위를 매일 한바퀴씩 한번씩 돌아라. 엿새동안 그리하라. 제사장 7명이 양 뿔로 만든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 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제사장들이 앞서가고 언약궤가 그 중간에 있고 백성들이 따라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바라보고 따라가라. 제 7일에는 일곱바퀴를 돌되, 양각 나팔을 불고 그 소리가 들리면 소리를 질러라. 7 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 7이란 숫자는 대단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보통 하늘의 숫자를 3이라고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4를 땅의 숫자라 말합니다. 동 서 남 북. 그리고 3과 4를 더해서 완전숫자인 7이 됩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7이란 숫자를 씁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모든 주권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여기 내용 전체로 보면 항상 중심이 하나님이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전의 중심이 정말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우리가 하는 모든 초점이 정말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지 우리에게 맞추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리고 성은 굉장한 성 같아도 지금 시대와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성 둘레가 0.6Km입니다. 그러나 이 성이 그 당시에 가나안 땅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8000년부터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중간 규모의 도시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600m의 성은 20여분이면 다 돌 수가 있습니다. 이 성을 하나님께서 돌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앞서가셨고 말씀하신 바를 듣고 믿고 순종함으로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승리의 역할을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리고 성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만사형통인줄 알았습니다. 땅은 좋았습니다. 첫 소산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사실 거기 이미 여러 족속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처형한 왕만 해도 31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만사형통의 복을 주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곳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사형통이 방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악한 영들이 우리로 하여금 만사 형통의 삶을 계속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막는 것 자체가 여리고 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무너뜨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교회 안에서도 부딪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은 다 누린 것입니다.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고 평안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악한 영들에 의해서 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장 큰 여리고 성은 우리의 자아입니다. 삐뚤어진 자아입니다. 자신에게 쌓여진 여리고 성이 무너지면 하나님과 교통이 되어집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스스로 십자가 앞에 자기를 죽이지 못하고 살아서 역사하려고 하는 사람이나 제도에 의해서 우리는 교회 생활을 즐겁게 하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것이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들어야 합니다. 내 자아와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 속에서도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수 많은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패배하고 맙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찾아가보면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6장 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었다.\\\'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을 쌓았습니다. 성문이 굳게 닫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지만 문을 굳게 닫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들고 나가보면 사람들이 문을 굳게 닫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을 쌓는 일입니다. 성이 그들의 보호요, 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물질로 성을 쌓습니다. 혹은 자녀나, 지식이나, 직업이 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 성을 어떻게 정복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 방법을 그대로 배워서 사용하면 헤매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해 나가는 길입니다. 무너뜨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무기나 장비를 준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이 아닌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악한 영과 대항해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세심한 하나님의 지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시에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함으로 성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인내하며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 일어나서 20분 동안 성을 돌고 와서 진에 머물러 앉아 있습니다. 엿새동안입니다. 마지막 칠일째도 일곱바퀴째 돕니다. 일찍 일어나라 하니 일어나고, 성을 돌라고 하니 돌았습니다. 나팔을 불어라 하니 불었고, 소리가 들릴 때 소리를 지르라고 할 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성이 무너졌습니다. 기적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비밀이며 큰 축복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면 다 순종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을 보면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니 물을 채웁니다. 떠다 주라고 하니 떠다 줍니다. 의심하면서 맛을 본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거기서 여호수아가 이런 지시를 합니다. \\\'입에 아무 말도 내지 말라.\\\' 10절 말씀에 보면 \\\'여호수아에 백성에게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여호수아는 경험이 있습니다. 1차 정탐 때 열두명이 정탐을 합니다. 그러나 10명의 부정적인 사람에 의해서 전체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심지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까지도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는대로 듣는대로 판단해서 말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여호수아가 알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쁜 소식은 사람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만든다.\\\' 부정적인 말은 전염성이 강해서 금방 전체의 분위기를 침울하게 합니다. 반면 좋은 소식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 줍니다. 부정과 긍정은 곧 패배와 승리의 시작이다. 불행과 행복도 부정과 긍정에서 기인되어 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좋은 소식을 전해주러 오신 좋은 소식 자체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 듣고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먼저 소리를 지르라고 하지 않고 나팔소리가 들리면 듣고 소리를 지르라고 합니다. 나아만 장군의 순종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그들은 부질없는 행동을 보고 의심을 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리고성도 튼튼하고 그들은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라고 합니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 7일동안 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지만 매년 그 방법입니다. 성찬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면 어떠한 방법도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통이 있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같은 행위를 반복해도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가는 하나님을 그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생명을 주고 갈증을 해소해 주시고 풍족함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통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순절 절기입니다. 저는 사순절 때마다 세상의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 성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나를 괴롭히고 방해하는 여러 가지 일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마치 여리고 성을 도는 것처럼 하나님을 앞세우고 사순절을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광야에서 건지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죄 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영원한 은혜의 자리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나안 땅에도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 성이 있는 것 처럼 오늘날 많은 여리고 성들이 세상에도 있고 우리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내 속 깊숙이 있습니다. 우리가 혈과 육으로 아무리 노력하고 결단해도 무너뜨릴 수가 없습니다. 기도만이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앞세워서 하나님이 하시게 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내가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 성이 무엇인지 알고 주님이 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할 때 주님이 내게 오셔서 나의 주님으로 역사하실 때 변화될 수 있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있는 수많은 여리고 성이 무너뜨려 지시고 사순절 이후에는 정말 부활의 승리를 안겨다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서의 율례/ 출23:20-33
가나안 땅에서의 율례/출23:20-33 2003-09-29 21:41:39 read : 198 오늘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지켜야 할 율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애굽에 대한 심판으로 말미암은 출애굽 구원의 구속함을 받아 시내산에 도착하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이 불타고 땅이 진동하는 큰 위엄 가운데 강림하셨고, 자신이 그 큰 능력으로 백성을 구속하신 뜻을 알리셨습니다. 그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순종하는 자기 백성 삼으시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 모세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밝히신 자신의 뜻은 그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속한 제사장 나라 삼으시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그의 소유된 백성,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백성, 열방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 삼으시고자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순종하여 제사장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바로 이 일을 봉사하도록 구속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일을 믿음과 순종함으로 봉사할 것 같으면 그들은 열국 중에서 뛰어난 위치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함으로 이 일을 봉사해 내지 못할 것 같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버림이 되어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섬김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목적인 것입니다. 그 뜻을 따라 하나님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봉사할 것 같으면 그는 그 백성을 위해 예비하신 기업을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복과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저주함을 받아 그 나라에서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참으로 비참한 길을 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언약의 삶에로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 없이 주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순종함으로 그의 나라를 봉사함 없이 주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 없이 그 기업을 상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강론되고 있는 말씀들은 그 백성 이스라엘이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하는 언약의 말씀들인 것이지, 그저 감사하니까 지켜드리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말씀들은 우리의 생을 걸고 들어야 하는 말씀들인 것이지, 그저 받은 구원에 감사해서 몇 가지 지켜드리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주를 순종함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듣는 것 없이 주의 나라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며 주를 따름 없이는 결단코 하늘에 간직하신 썩지 않을 기업을 상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봉사하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운명을 좌우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들 앞에 자신들을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 가운데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장차 약속하신 기업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반드시 지켜야할 율례들입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0-23절\\\"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네가 그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나의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을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는 길에 그 사자의 지시를 잘 청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를 일컬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늘 그의 천사를 그의 사자로 보내셔서 일하시고 사자를 통해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천사가 경배를 받을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지만, 그 천사는 천사로서 경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았기에 그 이름으로 경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분들은 \\\'어떻게 천사가 경배 받을 수 있는가\\\'해서 여기 나타난 사자는 성육신 이전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 본문이 지지하는 바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여하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를 청종해야 하고 그를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말씀이 되었든지 간에 그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나아가라 하시면 나아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춰야 합니다. 취하라 하시면 취하고 버리라 하시면 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를 청종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자를 통해 그 백성 이스라엘을 그 기업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업을 얻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그 대적에게 대적이 되어 친히 싸우실 것입니다. 무엇만 하면요? 보내신 사자의 말을 청종만 한다면.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 가운데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고 주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로 진리의 지식 가운데서 자라게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순종하여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영을 통해 우리를 영원한 기업의 땅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보이시고 가르치시며 깨닫게 하시는 바에 순종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깨어 그 음성을 듣기를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보이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보이시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러움이요, 그가 가르치시는 바는 주께서 우리를 가르치셨던 바로 그 가르침이요, 그가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바는 약속하신 나라를 위한 하늘 지혜의 삶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의 영께서 우리에게 보이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는 바,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을 따라 주 따르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 뜻에 순종하기를 거절치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 뜻에로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육체의 소욕을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주께서는 그 영으로 우리를 영원한 영광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삶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도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모든 죄들과 싸워야만 합니다. 가나안의 신, 풍요의 신, 육신적인 쾌락과 즐거움의 신을 거절해야 합니다. 이방의 가증한 육체의 만족과 쾌락을 줄 수 있는 죄 된 풍습을 내버려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거절하기란 쉬운 일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명하십니다. 24-28절\\\"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또)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여기 \\\'날 수를 채운다\\\'는 말은 아마 장수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한다\\\'는 말은 원수들이 등을 보이며 도망하는 것을 말할 것이고, 여기 \\\'왕벌\\\'은 아마 천사를 통한 일종의 재앙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만약 이방 신을 버리고 그것들을 훼파하며 하나님만을 섬길 것 같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더할 나위 없는 복으로 그들의 삶을 채우실 것입니다.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모든 병을 제하며 잉태하는 힘과 장수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모든 원수 앞에서 그들을 높이시며 대적들이 일구어 놓은 산업과 토지를 힘들이지 않고 얻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로 어떻게 그 땅을 얻게 하실 지, 그리고 그 영역은 어디까지가 될 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이 황무하게 되어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하여 일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내가 너의 지경을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하수까지 정하고 그 땅의 거민을 네 손에 붙이리니, 네가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낼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땅을 자기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 약속은 변함 없는 것입니다. 주시되 그러나 그 땅을 즉각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거민을 서서히 쫓아내실 것입니다. 왜입니까?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할 준비가 덜 되었으므로 만일 한꺼번에 멸하였을 경우 그곳이 들짐승이 들끓는 황무지가 될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얻을 기업의 보존에까지 세심히 배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하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 대적을 그 손에 붙이셨을 때, 반드시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그들을 그 땅에 조금이라도 남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왜입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시험거리가 되어 백성이 범죄하게 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32-33\\\"--------\\\"\\\"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과 언약하지 말라.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 여기 \\\'올무가 된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이유가 될 것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거민을 남기거나 우상을 훼파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것은 결국 그들의 올무가 되어 그들의 목을 죌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소홀히 듣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 대적을 그 손에 붙이셨을 때는 그들을 철저히 진멸하고 불쌍히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철저히 그 땅에서 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땅을 하나님의 거하시는 땅, 하나님과 그 백성이 함께 하는 정결한 땅으로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여 하나님의 세우시고자 하시는 거룩한 나라를 일구어 가야 합니다. 가나안을 구별하시고 그곳에 그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시는 그 뜻을 순종함으로 받들어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그 땅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며 이방 세계로부터 구별하여야 합니다. 모든 이방 죄와 풍습으로부터 그 땅을 거룩히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 제사장 나라로서의 거룩함이 나타나는 나라, 열방의 빛이 되어지는 그런 나라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여 부르신 뜻을 이루는 것이요, 그들의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들 안에서 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새롭고 거룩하신 뜻을 우리 가운데 나타내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놓이는 그래서 주께서 만유 가운데 만유가 되시는 그런 나라에 대한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그의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세상에 그 영광이 증거되는 그리하여 만민을 그 영광에로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주께서는 그 몸 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셨고 우리로 그 몸을 이루는 지체를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여 주의 나라로서 교회를 이 세상으로부터 거룩히 구별한다면, 그리고 그 지체로서 우리 자신을 죄로부터 구별하여 거룩한 주의 전으로 세워간다면, 우리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런 덕을 증거하는 제사장 나라로서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만민은 우리에게서 주의 영광을 볼 것이며, 그 영광을 흠모함으로 우리와 함께 주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 아래 주와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께서는 죽음과 싸우셨고 지금도 그 영광의 나라를 위해 싸우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과 순종으로 이 싸움에 동참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왕벌을 보내 그 대적을 두렵게 하시고 멸하셨던 것처럼, 친히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 우리로 그 영광된 기업을 얻게 하시기까지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순종하여 오늘을 살아야 하겠고, 그의 뜻을 청종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쳐 복종시켜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모든 죄와 사욕, 주께 대한 불신앙, 교회를 어둡게 하는 온갖 탐욕의 우상들과 대항하여 싸워야 하겠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신 우리 주의 영광을 증거하는 거룩한 나라로 이 교회를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 안에서 이 거룩한 싸움에 동참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