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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 도원욱 목사/ 서울 한성교회/ 2010-07-02
감사의 이유 43세의 변호사인 스파포드는 아내 및 5명의 아이들과 함께 미국 시카고 근교에 살고 있었다. 그는 1871년에 외아들을 잃었고, 몇 달 후 큰 화재로 전 재산마저 잃어버렸다. 그 2년 뒤 아내의 건강을 위해 가족 모두가 유럽 여행을 계획했으나 예기치 않은 일로 아내와 네 명의 딸만 먼저 배를 타고 출발하게 된다. 1873년 11월 22일, 그 배는 영국 선박과 충돌해 12분 만에 침몰했고 226명이 죽었다. 아내는 구출되었지만 자녀들은 불행히도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 아내가 보낸 전보를 받고 네 딸을 삼켜버린 비극의 사고 지역을 지나면서 지은 시가 바로 ‘내 평생에 가는 길’로 잘 알려진 찬송가 ‘내 영혼 평안해(It is well with my soul)’이다. 스파포드를 강하게 붙들고 있었던 그 평안, 그 비극적이고 참담한 상황에서도 평안을 선포할 수 있었던 그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평화와 행복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 마음의 정원에 감사의 나무를 심으라.’ 어느 철학자의 말이다. 감사는 행복과 평안의 원천이다. 환경이나 자원, 조건 등만이 감사의 조건은 아니다. 이미 내게 주어진 복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한 공급받고 있는 공기, 물, 햇볕은 하나님께서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믿는 자에게나 그렇지 않은 자에게나 똑같이 내려주신 선물이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넘치도록 감사해야 한다. 너무도 기초적인 감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감동이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더 큰 감사의 이유는 바로 그분의 성실하시고 인자하신 성품에 있다.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일관적인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이미 죽은 우리의 영을 대신하여,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죗값을 치르셨다. 우리의 죽은 영을 다시 살리셨다. 영원히 사단의 종으로 매여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자유케 하시고 양자 삼아주셨다. 내가 잘나서도 아니고 착해서도 아니다. 그냥 그분의 일방적인 사랑의 언약 때문이었다. 그 언약으로 인하여 그를 믿고 영접하는 자녀에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 1:12)를 주셨거니와 더 나아가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삼아주시고 ‘의인’이라 칭해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바로 그 은혜의 사건이 평생 감사의 제목인 것이다.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나 있는 존재였던가.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시고 자녀 삼아 주시며 또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후에 이어질 영원한 안식처까지 예비해두지 않으셨던가.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구원의 계획과 실행을 하나씩 알아가게 되면 이 땅에서 불평거리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변하지 않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날마다 새로운 감사를 낳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의 한낱 괴로움을 이기고 인내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 이 땅에서의 감사 조건들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그 구원의 감사는 믿는 누구에게든지 공평한 것이며 살아가는 날 동안 드리고 또 드려도 모자란 거룩한 사건이다. 전하고 전해도 모자란 복된 소식이다 그 감사를 지금 선 자리에서 드리기를, 또한 선포하기를 바란다. 그 감사로 오직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기를 소망한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5)
겨울이 주는 축복/안성우 목사/서대신교회/2010-02-01
겨울이 주는 축복 러시아 코스타를 섬기러 모스크바에 다녀왔다. 은혜를 사모하는 러시아 유학생들과 고민을 나누고 왔다. 하루는 여유를 가지고 모스크바를 둘러볼 수 있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러시아의 겨울은 잊지 못할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붉은 광장’이 아닌 매서운 추위가 주는 메시지가 더 진하게 남아 있다. 겨울이 6개월인 러시아는 겨울이 주는 축복을 듬뿍 받은 나라였다. 첫째, 문학과 예술의 발전이다. 차이코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푸슈킨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은 추운 겨울의 열매들이었다. 둘째, 전쟁에서의 승리였다. 여름에 4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정복에 나선 나폴레옹은 대패를 한다. 러시아의 겨울을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의 패전은 나폴레옹이 리더십을 잃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셋째, 봄을 기다리는 사모함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봄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가치를 증대시키며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인생의 겨울이 길어진다면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글을 썼다. 작곡을 했다. 미술과 발레 등의 재능을 겨울의 터널 속에서 갈고 닦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러시아의 길고 혹독한 겨울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혹자는 추위를 달래려고 독한 술병에 그들의 인생을 담아버리고 말았다. 러시아에선 “영하 40도가 아니면 추위라 말하지 말고, 40도를 넘지 않으면 술이라 하지 말고, 4000㎞를 넘지 않으면 멀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단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풍성한 가을을 기대하지만 긴 겨울이 없이는 가을 열매를 볼 수 없다. 우리가 사계를 말할 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사계는 겨울부터 시작된다. 인생의 사계도 겨울부터 출발함을 불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봄으로 시작해서 겨울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겨울로부터 시작해서 가을로 끝나는 인생을 사모한다.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은 저녁이 하루의 시작점이다. 아침이 꼭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인생의 시작이 겨울일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겨울은 완전 축복일 것이다. 하나님이 쓰셨던 많은 사람이 대부분 긴 겨울이라는 터널을 통과했다. 1996년 석봉토스트의 대표 김석봉 사장의 전 재산은 200만원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육 전도사로 부임하여 봉사했다. 전도사 신분에 길거리로 나가 장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개월을 고민한 끝에 중고차를 구입한 후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 교회에서 봉사하기로 했다. 처음 매출은 하루 2만∼3만원 정도. 혹독한 첫 겨울 추위를 맛본 것이다. “오늘까지만 하고 그만둬야지”라고 몇 번씩 되뇌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네 인생도 오늘은 숨고 싶은 날들 속에 서 있을 수 있지만 겨울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으면 좋겠다. 나폴레옹이 겨울에 겨울옷을 입고 러시아 정복을 시작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를 다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오늘도 인생의 혹한을 보내고 있을 한 사람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마음을 여는 힘/ 전병욱 목사/ 2010-02-10
마음을 여는 힘 1885년 조선에 온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의 기도문이 있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천신만고 끝에 태평양을 건너 조선에 왔다.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다. 절망, 가난, 인습에 매어 있는 모습이다.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는 자들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는 것이 힘들다. 조선 남자의 속셈이 보이지 않는다. 조정의 내심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는다. 우리를 양귀자, 서양 귀신이라고 하며 의심하고 경계한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이질적인 상황에서 마음을 얻을 길은 멀어 보였다. 그러다가 경북 지방에 콜레라가 돌았다. 모두 피해 도망칠 때, 교회와 선교사들이 앞장서서 사람들을 구해낸다.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잃고 난 후에는 제국주의와 싸우는 교회가 되었다. 민족과 함께 울며 민족의 고난에 동참했다. 한국 기독교는 출발부터 민족 기독교였다. 애국 기독교였다. 독립선언 민족지도자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이었다.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었다. 애국 운동의 핵심에 기독교가 있었다. 교회는 민족의 마음을 얻었다. 고난이 민족의 마음을 얻는 통로가 된 것이다. 우리 교회 어떤 목사 이야기이다. 한 성도가 암 투병 중이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앞둔 상황이었다. 거의 매일 찾아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돌봐주었다. 나는 감동했다. 이런 헌신적인 사역자가 다 있다니!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가셨다. 그 분의 딸은 예쁘고, 신앙 좋은 총각들의 관심을 모으는 자매였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고고함까지 갖춘 자매였다. 아버지를 돌봐주고, 영접까지 시켜주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마음이 열렸다. 지금은 그 목사의 아내가 되어 있다. 열리지 않는 마음을 여든 힘이 무엇인가? 타인의 고난에 온몸을 던져 동참하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때마다 고난과 희생 속으로 들어가라. 가장 힘든 곳으로 가라. 그곳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기회의 땅이 된다. 그래서 크리스천이 강한 것이다. 희생의 장소, 고난의 장소를 향해 자기 발로 걸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의 중심인 마음을 얻는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고난은 신비롭다. 고난에 동참하는 중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알게 된다. 고난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연결시켜준다. 고난은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도 연결시켜준다. 고난 없이는 껍데기만 추구하는 인생이 된다. 고난은 마음을 얻게 하는 기회의 땅이다. 전병욱 목사
먼지도 햇빛을 받으면/ 소강석 목사/ 2010-02-16
먼지도 햇빛을 받으면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야행성이었다. 늦은 저녁까지 골똘하게 무언가를 생각하다 잠이 들곤 했다. 그런데 옛날 시골의 밤은 유난히 추웠다. 찢어진 창호지 사이로 바람이 불면 차가운 기운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러면 방안에 있는 식구들이 이불 하나를 가지고 싸움을 하는 것이다. 몸을 덮으려고 한 쪽에서 이불을 잡아당기면 다른 쪽은 추위에 떨고 다시 반대편에서 이불을 잡아당기면 또 다른 쪽이 추위에 떨었다. 그렇게 밤새 이불 전쟁을 하는 것이다. 겨울 추위와 싸우며 날을 새면 제일 늦게 일어난 사람이 이불을 갠다. 그때 먼동이 틀 무렵, 동녘 하늘에서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아침이 밝아온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이불을 갤 때면 꼭꼭 닫은 문틈 사이로도 기어이 찾아온 마치 레이저쇼를 하는 것처럼 찬란한 빛 한줄기가 비취는 것이다. 그 문틈 사이로 비취는 햇빛을 보면 먼지 미립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그 먼지 미립자들은 밤하늘에 별이 빛나는 것처럼, 광활한 우주 속에서 빛나는 행성들처럼 광채를 발하며 날아다닌다. 그때서야 “아, 방안에 이렇게 먼지가 많았구나” 생각하면서 문을 더 활짝 열어놓는다. 그러면 빛이 레이저 폭탄처럼 쏟아진다. 그 속에서 먼지들은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는 듯 황홀한 빛을 발한다. 사소한 먼지나 공중의 티끌도 햇빛을 받으면 광채를 발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공중의 티끌이나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아닌가. 시편 8장 4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고백한다. 그렇다. 우리는 먼지만도 못한 존재다. 별들의 광야인 저 우주의 신비에 비춰볼 때 우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항성과 행성이 거대한 우주의 초침을 밀고 가는 시간의 수레바퀴 아래서 인간은 얼마나 유약한 존재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빛, 사랑의 광채가 비췰 때 인간 존재는 저 우주의 신비보다 더 아름다운 오로라의 향연으로 빛난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가진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광채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빛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저 시공간의 동심원을 넘어서 복음의 광채, 은혜의 광채를 비추어주신단 말인가. 내 모습 어디가 아름다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단 말인가. 우리는 너무나 약하고 부족한 먼지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주님이 사랑의 광채를 비추어주셔서 먼지와 티끌 같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광채를 비추게 해주신 것이다. 한국교회도 주님의 광채를 받아야 한다. 스스로 빛나려고 하면 안 된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성을 쌓고 귀족의 옷을 입으려고 하면 안 된다. 누더기 옷을 걸치더라도 주님의 광채를 받아야 진짜 사회 속에 광채를 발하는 빛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먼지도 햇빛을 받으면 광채를 낸다. 당신이 아름다운 것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의 빛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소강석 목사(용인 새에덴교회)
미(美)에 관한 소고/도원욱 목사/서울 한성교회/2010-02-19
미(美)에 관한 소고 도원욱 목사 필자가 아는 한 여인의 이야기다. 학창시절 공부에 욕심이 많았던 그녀는 별로 뛰어나지 않은 외모엔 마음을 접고 오로지 대학입시에 몰두했다. 멋 내는 친구들을 경멸에 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실력으로 승부하리라’는 일념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그녀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런데 고민이 시작됐다. ‘열심히 먹어도 대학만 가면 살이 빠지고, 빠진 살이 키로 간다’는 그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었다. 대학에 가보니 예쁘면서 실력까지 고루 갖춘 소위 엄친딸(엄마 친구의 딸)이 너무도 많은 것이었다. ‘예쁜 것들은 머리가 비었다’고 철썩 같이 믿었던 그 철학은 신기루에 불과했다. 똑똑한 학생들 사이에서 그녀가 믿었던 지성은 정말 평범한 것이었다. 따라서 닥치는 대로 다이어트와 헬스에 몰입했다. 하지만 벽은 높고도 높았다. 살이야 빼면 된다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작은 키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인생의 시련으로 인해 ‘미’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자유롭게 됐다. 그것은 머리나 외모가 아닌 ‘마음’이었다. 그녀의 삶은 바뀌기 시작했다. 정이 없던 눈빛은 주변 사람을 챙기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변했고, 여유 없는 표정과 무뚝뚝한 얼굴엔 생글생글 미소가 넘치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귀엽다” “사랑스럽다”라는 말은 나이 40세가 다 돼서야 듣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이제 예쁜 여자 욕심에서 탈출했다. 더 큰 욕심을 가지고 산다. 사랑스러운 현숙한 여인, 이것이 바로 미소가 유난히 아름다운 그녀의 미(美)에 관한 소고다. 얼짱, 몸짱, 루저, 동안….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의 외모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외모에 치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다수 사람은 자기계발이라고 말할 것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자기계발이라는 고상한 수식어조차 붙이기에 민망한, 그저 생각 없이 외모에 치중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잊지 말기를. 달콤한 쿠키를 담은 상자에선 달콤한 향기가 나지만 생선을 담은 상자에선 비린내가 난다는 사실을. ‘마음에 양식을 주세요’라는 서점의 독서캠페인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실력과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남을 돌아보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미소를 갖고 향수 냄새가 아닌 향기가 어리는 사람이야말로 이 시대가 목말라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아닐지. 그 마음은 남을 돌보고자 하는 작은 배려에서 시작된다. 곧 3월이다. 꽃이 만개하는 봄이다. 이 봄에 당신 안에 사랑의 꽃을 피워보면 어떨지. 그것이 당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아름다운 화장이 될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메이크업은 당신 안에 있는 ‘사랑’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믿음의 유산 되새기며/김병삼 목사/만나교회/2010-01-31
믿음의 유산 되새기며 ‘육신의 아버지, 신앙적 아버지, 성경적 아버지…’를 고민하던 중, 나의 아버지를 진솔하게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음의 글은 ‘올드 앤 뉴(Old & New)’라는 제목으로 아버지가 즐겨하셨던 동일한 본문의 설교로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은 아들이 다시 설교하며 출판했던 책의 서문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마음이 이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나누고 싶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보다, 늘 아버지를 넘어서려고 했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지시던 때도, 심장이 멎어 심폐 소생술 하던 순간도 저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너무나 선명하게 각인된 아버님의 모습, 하지만, 경황 중에 5일 장으로 지내기로 결정하고 문상을 받는 중에 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내가 넘어서려고 했던 아버님의 그늘과 신앙의 유산 가운데 있는 제 모습을 봅니다. 누군가 좋은 말로 ‘효자병’이라는데, 살아생전 아버님께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그렇게 흐르지 않던 눈물이 마음속에 굳어버렸는지 빠져나오지 못하고 아픔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슬플 때 울지 못하면 그 아픔이 나중에 온다고 했는데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을 낳아봐야 아비가 되고, 부모님을 여의고 나서야 자식이 된다고 했는데 저도 이제 어른이 된 느낌입니다. 아버님이 쓰러지시고 교회를 담임하며 지나간 시간이 꿈같습니다. 어느 날 꿈을 깨고 보니, 아버님이 그리던 교회의 모습과 꿈꾸던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군가 이 아름다운 만나교회를 보지 못하고 가신 아버님이 아쉽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보는 이 모든 것이야말로 이미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진 아버님의 비전이 아니겠습니까?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모세를 생각합니다. 그 순간까지 모세의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아버님 역시 부르심을 받기 전 주에도 힘차게 집회를 인도하셨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끝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모세의 마지막 임종이 절대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이 있었던 것처럼, 자신의 발로 밟는 것보다 가슴으로 그 땅을 밟고, 벅찬 가슴으로 하나님께 불림을 받은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아버님이 그립습니다. 아버님을 사랑합니다. 그 가슴에 품었던 꿈이 이루어짐을 천국에서 편안히 지켜보세요.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은 아들, 병삼
방랑… 방황… 방향…/ 전병욱 목사/ 2010-02-03
방랑… 방황… 방향… 인생이나 사역에서 자세가 중요하다. 자세만 좋아도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방랑, 방황, 방향이라는 단어를 통해 살펴보자. ‘방랑’은 대책 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삶을 말한다. 표류하거나 유랑하는 인생이다.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남들이 유학가면, 자기도 유학간다. 남들이 유행이라고 하면, 자기도 그대로 따라한다. 왜 하는지를 모르고 편승하는 인생이다. 무조건 유학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방랑하지 말라는 뜻이다. ‘방황’은 목적은 있으나 ‘방향’을 찾지 못할 때의 상황이다. 방황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탐색의 시간이다. 바울은 아시아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성령이 막으셨다.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다. 예수의 영이 막았다(행 16:6∼7). 복음 증거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황의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마게도냐인이 환상을 보고, 빌립보로 향한다. 빌립보라는 ‘방향’을 잡고 집중했다는 말이다. 방황은 방향을 찾기 전에 거쳐야 할 필수 코스이다. 방황은 다른 말로 하면 유연성이다. 고집불통의 사람은 방황의 유익이 무엇인지 모른다. 처음부터 목적을 향해 직선으로만 가려고 한다. 곡사포는 사실 별로 무섭지 않다. 왜? 정확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도의 정확성을 요구하는 미사일은 크루즈 기능이 있다. 순간순간 새로운 정보를 입력해서 목표물을 맞출 때까지 궤도를 수정한다. 수정 기능이 있는 인생이 크루즈 인생이다. 열심 있는 사람이 성공 가능성이 높다. 왜? 여러 시도를 통해서 될 것과 안 될 것을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감 잡고, 될 것을 붙든다. 그리고 집중한다. 예를 들면 대만 선교 중에 어느 한 팀에서 한국어 학당이 좋은 소통의 도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모든 팀이 이렇게 되는 것에 집중한다. 그래서 열매의 확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기 기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실망, 상처, 갈등이 많다. 남편에 대한 실망이 큰 사람이 있다. 왜? 배용준의 외모, 카네기만큼의 돈, 아인슈타인 정도의 실력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건 큰 착각이다. 현실감을 가지고 기대를 수정해야 한다. 크루즈 기능을 작동해야 만족이 있다. 장기를 둘 때 “차”와 “포”가 강하다. 왜? 가장 가는 길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력하게 쓰임 받는다. 자유와 유연성을 기르라. 그것이 바로 쓰임 받는 길이다. 왜 ‘졸’이 되는가? 한 칸밖에 못 움직이는 제한성 때문이다. ‘졸’같이 살지 말고, ‘차’나 ‘포’같이 살라. 유연성이 능력이다. 시행착오 중에 확실하게 되는 한 가지를 붙들라. 이것에 집중하라. 삶의 자원을 쏟아 부으라. 이것이 열매 맺는 첩경이다. 방랑은 안 된다. 방황에서 방향을 잡으라. 유연성과 집중력이 강한 인생의 특징이다. 전병욱 목사
불어라! 서북풍… 동남풍… / 소강석 목사/ 2010-02-09
불어라! 서북풍… 동남풍…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흔히 바람은 생명력과 희망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서북쪽에는 지중해, 동남쪽에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다. 그래서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북풍의 바람이 습기를 품고 비를 내릴 때는 우기가 된다. 이 시기의 이른 비와 늦은 비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밭에 씨를 뿌리고 싹이 나고 열매를 거둔다. 그러나 항상 서북풍만 불어서는 안 된다. 동남풍이 불어야 한다. 동남풍은 아라비안 광야를 지나오는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다. 이 바람이 불어야 곡식이 익고 과일 꽃이 수정되고 다 자란 열매를 익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두 바람은 기후와 농사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남풍이 불어올 즈음 오순절 절기를 지켰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오순절에 토라를 받았고 신약에서는 성령이 바람같이 불같이 임했다. 동남풍의 뜨거운 바람이 불었던 것처럼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비둘기나 이슬이나 단비와 같은 성령이 아니라 불과 바람 같은 성령으로 임했다고 표현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구약의 지정학적 바람과 절기를 통해서 은혜와 축복의 교훈을 주시고 신약 시대에는 바람과 같은 성령의 은혜를 주셨다. 바람은 인간의 힘으로 조절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바람의 생성과 소멸을 주관하신다. 적벽대전을 앞둔 제갈량이 운무의 변화를 읽고 동남풍이 불 것을 예견하고 대승을 거두지만, 그것 또한 예측한 것이지 바람의 방향을 스스로 조절한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의 부흥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서북풍과 동남풍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 사실 나는 신도시 목회를 하다 보니 성도들이 부흥사의 이미지보다는 현대적이고 지적인 빅토리아풍의 목회자를 선호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주로 대학 강연, 세미나, 집필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여러 대형 연합집회와 부흥성회의 강사로 쓰임 받으면서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성경공부와 세미나, 사회활동을 한다고 하여도 세상의 타락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몇 번의 고사와 깊은 고뇌 끝에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대표회장에 취임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건전하고 새로운 성령운동을 하려고 한다. 그렇다. 다시 한국교회에 서북풍, 동남풍이 불어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부흥을 구해야 한다. 성령운동의 본질은 변함없으나 현대문화와 접목된 한층 업그레이드된 성령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엑스플로74대회, 한국기독교100주년 선교대회처럼 100만명이 넘는 대규모 성령집회를 열어야 한다. 전국적인 성령운동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새로운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해야 한다. 이제 서북풍, 동남풍이 다시 불어야 한다. 그 바람과 함께 한국교회가 부흥의 파도를 타고 새로운 성령시대의 서막을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 소강석 목사(용인 새에덴교회)
비너스상의 비밀/도원욱 목사/서울 한성교회/2010-02-12
비너스상의 비밀 사소한 일에도 늘 근심이 많은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절친한 친구가 그에게 엽서 한 장을 보냈다. 엽서의 앞면에는 두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 상이 그려져 있었고 뒷면에는 친구가 쓴 글이 적혀 있었다. ‘계속 걱정하면서 손톱을 물어뜯으면 이렇게 된다네.’ 지나친 걱정은 몸과 마음에 모두 해롭다.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빨리 죽는다고 한다. 고혈압, 위장병, 암 등 질병의 70% 이상이 불안과 염려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염려를 기도로 바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사소한 고민으로 고개 숙인 이들을 위한 몇 가지 해결책이 있다. 첫째, 미리 걱정하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좋아지는 것은 없다. 불확실한, 아니 어쩌면 일어나지도 않을 수 있는 내일의 걱정을 과감히 떨쳐 버리자. 걱정은 마음의 고통을 늘리고 생활의 여유와 즐거움을 조금씩 앗아간다는 점을 명심하길. 녹이 쇠를 좀 먹듯이 근심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As rust eats iron, so care eats the heart). 둘째, 불가피한 일은 받아들이라.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다. 고민하는 문제와 상황을 철저히 분석하고,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냉정히 물어보라. 또한 이에 대해 글로 작성해보는 것도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일은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듯 그렇게 심각하거나 끔찍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면 한층 마음이 홀가분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불가피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오히려 상황이 역전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셋째, 건설적인 일에 몰두하라. 버나드 쇼는 괴로워지는 데도 비결이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불필요하게 자꾸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지 말고 항상 바쁘게 생활하자. 좋은 생각만 하려는 노력도 고민하는 습관을 없애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불필요한 걱정으로 무거워진 마음의 자리를 좋은 생각으로 가득 채워보지 않겠는가. 넷째, 유쾌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라. 상황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기쁘고 행복한 듯 말하고 행동하면 이내 작아져버린 마음의 근심을 보며 진정 미소 짓게 될 것이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보라. 당신은 웃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어깨를 펴고 크게 숨을 들이쉬라. 준비되었는가. 이제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 보라. 근심이 당신보다 클 수는 없다. 당신이 극복하지 못할 상황은 없다. 염려라는 불청객만 당신의 마음에 초청하지 않는다면…. ‘일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염려이다.’(헨리 워드 버치)
성벽을 헐고 길을 내십시오/유관재 목사/성광교회/2010-02-18
성벽을 헐고 길을 내십시오 유관재 목사 로마는 전 세계에 수많은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로마가 지나간 자리에는 대단한 건축물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그 건축의 가장 대표적 건설은 도로입니다. 기원전 312년에 시작한 로마 가도의 건설은 제정 시대에 접어들어 유럽, 중근동, 북아프리카에 걸친 제국 전역을 망라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로마제국 전역에 둘러쳐진 가도는 주요 간선도로만도 375갈래였습니다. 전체 길이가 8만㎞나 되었습니다. 자갈 포장을 한 간선도로나 사도까지 합하면 총연장 길이는 30만㎞에 이르렀습니다. 길은 떨어져 있는 둘 사이를 잇는 역할을 합니다. 제6대 로마 왕 세르비우스의 지시에 의해 세워진 성벽은 로마의 일곱 개 언덕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 성벽이 얼마나 견고한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 공략을 주저하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견고한 세르비우스 성벽을 카이사르는 과감히 철거했습니다. 성벽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성벽은 사람이나 물건의 자유로운 왕래를 방해합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상식을 뛰어넘어 성벽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때부터 진정한 ‘로마에 의한 평화(팍스로마나)’라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성벽을 쌓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멋진 도로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벽은 단절로 인해 고독 우울 원망 교만을 만듭니다. 성벽을 부수고 서로를 잇는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부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잇는 길을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미래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에게 지성소의 휘장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길을 내시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만드셨습니다. 이제 나도 이웃과 성벽을 허물고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카네기멜론대학교의 심리학자 셀던 코헨은 관계와 건강의 상관관계에 대한 실험을 한 뒤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첫째, 누군가와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감기에 걸릴 확률이 2.5배 높다. 둘째, 타인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은 끊임없는 말다툼 이상으로 건강에 좋지 않다. 인간관계 폭이 좁은 사람들은 사회관계망이 넓은 사람들에 비해 감기에 걸릴 확률이 4.2배나 높다. 이는 흡연으로 인한 감기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다. 셋째, 사회적으로 잘 융화된 사람들은 병 회복도 빠르고 더 오래 산다.’ 다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에서 제일 오른쪽의 제자 그룹(다대오와 셀롯인 시몬)은 수군거리고 관계에서 멀어져 있는 표정입니다. 그러기에 성경 어디에서도 그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흔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멋있게 한 흔적도 없습니다. 뒤에서 수군거리고, 관계에서 멀어지려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도, 건강할 수도, 기쁨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멋지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함께하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계에서 성벽을 허물고 길을 내야 합니다. 외딴섬이 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함께 손을 잡아야 합니다. 함께 손을 잡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패에서 배워라/안성우 목사/서대신교회/2010-02-08
실패에서 배워라 한 달 전쯤 일본 도쿄에서 사흘간의 집회를 인도하고 도요타 본사를 방문하기 위해 신칸센에 몸을 실었다. 도요타 메구미교회에서 만난 선교사님은 당시 “도요타자동차는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비상의 날갯짓을 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 달여 지난 지금 도요타의 추락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시드니 핑켈스타인은 ‘실패에서 배우는 성공 법칙’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을 말했다. 첫 번째는 ‘자신과 기업이 환경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이다. 도요타는 하이브리드 기술에서 자신과 기업이 새로운 자동차 환경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실패하는 사람들의 여섯 번째 습관은 ‘중요한 장애물을 과소평가한다’이다. 여러 차례 세계 각국에서 도요타의 가속페달과 제동장치의 문제점에 대한 위험신호들이 있었다. 그러나 놓쳐버리고 말았다. 전문경영 체제에서 14년 만에 오너경영 체제로 복귀한 도요타 아키오 회장은 2009년 10월, “현재 도요타자동차는 대기업이 패망에 이르는 5단계 중 4단계에 와 있다”고 했다. 이것은 경고가 아니라 사실이 되었다. 세상은 신화에 미쳐 있다. 그러나 신화의 주인공들은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 내려고 무리한 레이스를 펼친다. 우리나라에도 몇몇 신화를 써 내려가는 사람들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유명세는 잠깐이지만 좋은 평판은 오래간다. 신뢰를 잃으면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도요타는 이미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리콜 비용이 아니라 브랜드 가치와 기업의 신뢰도 추락이다. 추락이 몰락으로 이어지는 불행은 없었으면 한다.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도 점유율이나 성적을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인류가 완전한 차를 만들 순 없지만 완전한 차를 포기할 수 없다. 완전한 차를 위해 미련하게 노력하다 보면 1위는 선물로 주어진다. 그런 1위는 추락하기도 쉽지 않다. 필자도 교회를 개척해서 ‘성공신화’에 도전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게 하셨다. 그래서 이젠 완전할 순 없지만 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빠른 성장보다는 바른 성장을 위해 고민하고 있다. 위기에 대한 초기 대응은 잘못되었다. 도요타가 이제부터라도 정직하게 대응한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더 위대한 회사가 될 수 있다. 비온 뒤의 땅이 굳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커피도, 나이키도 한때는 신뢰를 잃었다. 그들은 위기를 정직하게 대면했고 완벽하진 않지만 회복되었다. 자동차 산업의 이해타산으로 국가전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일은 남의 집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 무엇보다 신뢰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도요타자동차를 다 팔아서라도 신뢰를 회복하려 한다면 충성 고객들은 더 높은 신뢰를 보낼 것이다. 어렵지만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이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성공 법칙이다.
아이티의 빛과 어두움/유관재 목사/성광교회/2010-02-04
아이티의 빛과 어두움 아이티는 어두웠다. 도미니카의 수도 산토도밍고를 통해 밤에 들어간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마을에라도 들어설라치면 금세 사람들이 구름처럼 둘러선다. 도와달라고. 먹을 것과 일터를 달라고. 도시는 거대한 텐트촌이었다. 도저히 치울 수 없는 쓰레기로 도시가 덮여 있다. 냄새가 심한 곳에선 폐 속 깊이 들어오는 악취에 숨을 쉴 수 없었다. 모든 상황이 어두웠다 차를 타고 이동 중에 총격전을 보았을 때는 어두움이 아니라 캄캄함이었다. 총성에 놀라 보니 바로 앞에서 누군가 총을 쏘고 있었다. 옆에는 적십자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차량이 있었다. 적십자 관계자가 총에 맞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놀라서 몸을 피했다. 총에 맞은 사람은 몇 번이나 일어나려 하다 또 다시 총알을 맞아 쓰러졌다. 총구가 우리를 향하고 있지 않은지 불안해하며 차를 세워 사방을 살피는데, 모든 것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지진에 교도소가 무너져 수감됐던 6000여명의 죄수가 모두 탈출했다. 그들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법원이었다. 그곳에 불을 질렀다. 모든 기록을 없앴다. 총격전을 본 곳은 범죄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우범지역이었다. 아이티는 원래 제국주의를 물리친 세계 최초의 흑인 독립국이다. 아이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12월 5일 상륙하며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스페인이 섬의 동쪽(지금의 도미니카)에 관심을 가질 때 영국과 프랑스의 해적 기지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영국을 쫓아내고 1697년 스페인과 리스위크(Ryswik) 조약을 맺어 지금의 아이티를 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해방 노예들이 1791년 반란을 일으키고 1804년에 최초의 흑인 독립국이 되었다. 독립 후 계속 독재와 내전이 반복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가난에 이번 지진 참사까지 일어난 것이다. 말 그대로 어두움의 땅이 됐다. 그러나 빛을 보았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은 어두운 아이티의 빛이었다. 비록 아이티까지는 못 왔지만 물질로, 기도로 돕는 손길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한국에서 아이티까지 오려면 비행기와 자동차로 꼬박 이틀은 걸려야 한다. 시차 극복할 여유도 없이 도착하자마자 최선을 다하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은 아이티의 새로운 빛이었다. 대부분의 자원봉사자들은 크리스천이었다. 어디 소속으로, 어떤 경로로 들어왔든지 대화해 보면 거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 어두움 속에서 빛을 보며 아이티를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 아이티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먼저 영적으로 황무한 땅을 치료해 주시고 부흥케 하옵소서. 그래서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모든 분야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흔적이 있는 새로운 역사의 막이 열리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과 가슴을 제대로 깨닫고 알아 내가 먼저 빛이 되게 하소서.’
아이티의 슈바이처/유관재 목사/성광교회/2010-02-11
아이티의 슈바이처 전 세계에 가장 많은 국민이 흩어져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이런 곳에도 한국 사람이 있구나!’ 하며 놀랄 때가 있다. 놀람을 넘어 감동을 받을 때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지역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다. 찬송가의 표현대로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 아낌없이 삶을 드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다. 아이티에서 김용재 선교사를 만났을 때 그런 전율을 느꼈다. 한국의 섬유업체 책임자로 도미니카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 선교사가 된 그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의료선교를 하기로 결심하고 늦은 나이에 의학을 공부했다. 후원하는 단체 없이 의사로서 선교사로서 사역을 하던 그는 보다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 한의학을 다시 공부해 한의사가 되었다. 도미니카 대학교 부총장이라는 안정된 직장과 명예도 포기한 그는 지금 같은 섬의 두 나라 아이티와 도미니카에서 의료 선교사로서 묵묵히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그가 아이티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아이티에서 도미니카에 공부하러 온 어떤 사람을 통해 아이티 남자 아이를 소개받고 입양하기로 결심했다. 입양 수속을 하기 위해 아이티에 들어간 그는 그곳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고 아이티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김 선교사는 자신이 도미니카 의대에서 가르치던 아이티 인턴들을 제자양육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당신들은 도미니카에서 잘 사는 의사로 살 것인가, 아니면 아이티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조국을 섬길 것인가? 나는 한국 사람이지만 아이티를 섬기기로 결심했다. 한 달의 시간을 줄 테니 결심하시오.” 그의 도전에 여섯 명의 인턴이 아이티로 돌아가기로 하고 하나님 앞에 삶을 드렸다. 김 선교사는 그들과 함께 2006년 ‘비바 아이티(VIVA HAITI)’란 조직을 만들었다. ‘비바 아이티’는 생막이란 도시를 중심으로 복음적 새마을운동을 펼치고 있다. 한 지역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아이티에도 희망의 바람이 불 수 있다는 모델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사역의 비전이다. 아이티에 필요한 것은 먹을 것보다도 잃어버린 희망을 찾아주는 것이다. 지진 전에도 원조로 살았던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항상 잘못된 지도자를 만났기에 희망이 없었다. 복음이 없었기에 희망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이 필요하고 복음으로 변화된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김 선교사는 의료 사역을 통해 그 일을 시작하고 있다. 그가 사역했던 곳을 지나가면 사람들이 반가움으로 달려온다. 자신을 대가 없이 치료해준 마음씨 좋은 의사이기 때문이다. 아니 의사가 아니라 그는 그들에게 형이었고 오빠였고 삼촌이었고 아버지였다. 그는 아이티의 슈바이처였다. 특별한 후원 단체가 없어도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클리닉과 교회 건축을 시작했다. 그 현장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여기에 기도의 동역자가 일어나게 하소서. 그래서 이곳 아이티에 희망의 싹이 돋아나게 하소서!”
원초적 질문-돈/김병삼 목사/만나교회/2010-02-21
원초적 질문-돈 어떤 모임에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다. 나이든 부부가 있다. 그런데 그 남편에게는 돈이 아주 많았다. 문제는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것이었다. 아내에게 그 돈을 하나도 안 주면 “맞아 죽는답니다.” 아내에게 반만 주고 나면 나머지도 달라는 아내의 등쌀에 “쫄려 죽는답니다.” 아내에게 자신이 가진 돈을 다 주고 나면 “굶어 죽는답니다.” 돈의 문제는 모든 사람에게 민감하다. 아무리 고상한 척해도 돈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경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의 사역, 비유 역시 경제적인 부분과 아주 민감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사실 돈이라는 것이 있어서 행복하기도 하지만, 있어서 불행해지기도 한다. 돈이 있어서 감사한 사람도 있지만, 돈이 있어서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도 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한 사람도 있지만,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결국 돈의 문제는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돈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살아가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우리가 늘 물어야 하는 신앙적 질문이란 돈의 유무(有無)가 아니라 돈을 가진 사람들의 품위에 대한 것이 아닐까? 어느 날 성경을 묵상하다가 한참을 고민하게 된 구절이 있다. 출애굽기 13장 11절을 보면 이제 막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예배와 제물에 대해 언급하며 이런 단서를 붙이고 있다.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목사로서 필자는 “진정한 감사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설교해 왔는데, 하나님은 너무나도 조건적인 감사를 명령하신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이 문제는 ‘주어진 환경’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인정(認定)’에 대한 신앙적 물음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출애굽시키셨지만, 모두 그 땅을 밟지 못했고 모든 사람에게 그 땅을 주셨지만, 모두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다”라고 신앙적으로 인정한 사람들만이 축복을 누렸다. 그래서 오늘 ‘돈과 소유’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놀라운 축복에 대하여 인정하며 그 축복을 누리는가?” 출애굽 과정에서 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모세가 행한 10가지 재앙 앞에서 바로 왕이 보인 태도다. 어쩌면 그렇게 완악할 수 있을까?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사”라고 증언한다. 즉 그 완악함과 고통의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우리도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인정하는가?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안성우 목사/서대신교회/2010-02-15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 일본의 3대 기업가 하면 마쓰시타 고노스케(마쓰시타전기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혼다자동차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교세라 창업자)다. 이들 중 이나모리 가즈오를 ‘경영의 신’이라 부른다. 그는 1990년대 버블 붕괴 후 장기 복합 불황까지 견뎌내고 ‘교세라’를 세계적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교세라는 지금 159개의 자회사에 5만8000명의 종업원, 매출액 증가율은 매년 27%씩 기록한다. 경영의 신의 경영 철학이 궁금해졌다. 참 단순했다. 거짓말 하지 않기,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기, 정직하게 행동하기, 욕심 부리지 않기, 자기 것만 생각하지 않기 등이다.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이 아닌가. 경영의 신이라기에 큰 기대를 걸고 읽어 내려갔던 책들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렇게 기본만 지켜도 경영의 신이 된다는 말이 아닌가. 그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책 곳곳에서는 ‘영성’ ‘창조자’ ‘마음 높이기’ 등의 개념을 터득하기 위한 고뇌가 엿보인다. 그는 65세에 은퇴하고 퇴직금 56억원을 모교인 가고시마대학 등 교육기관에 전액 기부하기로 하고 영혼 수양을 위해 떠났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일본항공(JAL)의 위기가 경영의 일선으로 다시 불러냈다. 그를 구원투수로 내세워 파산 직전의 일본항공을 다시 날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탁월한 리더를 넘어 위대한 리더가 된 이나모리 가즈오가 있는 일본이 부럽다. 도요다 아키오가 도요타자동차 ‘리콜’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미국 청문회에 불려나갈 참이다. 도요타는 수세에서 반격을 택했다. 천문학적인 광고비를 지불하고 슈퍼볼의 광고 시간을 샀다. 신뢰 회복을 위해서다. 적대적인 방송사에는 광고를 주지 않고 우호적인 방송사에만 광고를 주는 길을 택했다. 유치원에서도 이렇게 가르치진 않았다. 거짓말을 한 잘못을 인정한다면 신뢰 회복에도 욕심 부리지 말아야 한다. 천문학적인 광고비를 리콜을 위해 찾아온 고객들의 정신적·시간적인 피해를 보상하는 비용으로 지불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기업이나 정치인이나 교회나 리더십이 신뢰를 잃을 때가 있다. 필사적으로 만회하려 한다.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뢰 회복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또 다른 불신을 낳게 된다. 필자도 목회를 하면서 잠시 어떤 일로 신뢰를 잃었던 적이 있다. 억울하고 속상해서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그럼에도 내가 할 일에 집중했다. 이럴 때 타인의 반응에 지나치게 민감하면 더 큰 악수를 두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다. 만 1년을 조용히 보냈다. 그랬더니 위기를 처리하는 방법에서 신뢰를 얻었다. 하나님은 그 일로 인하여 더 큰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이끄셨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배운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만 잘 지켜도 이나모리 가즈오를 능가할 수 있다고 본다. 지식 없음이 아니라 행하지 않음이 문제다. 오늘부터 실행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작은 것 하나부터 정직하게 살아가고 싶다.
잠들 수 없는 꿈 / 소강석 목사/ 2010-02-02
잠들 수 없는 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아바타’의 열풍이 대단하다. 역대 국내 외화 흥행 1위, 전 세계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인간족이 판도라 행성의 언옥타늄이라는 대체에너지를 침탈하기 위하여 나비족을 공격한다는 스토리와 환상적인 3D 그래픽이 관객을 매료시킨다. 영화뿐만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몽환적인 판타지 스토리가 주목을 받고 있다.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하거나 경험할 수 없는 퓨전 판타지 문학이 주류를 이룬다. 이것은 현실 세계에 대한 부정이며 암묵적 반항의 신호이다. 현실 세계는 삭막하고 피폐하다. 희망보다는 절망의 짐을 안겨준다. 그러기에 현대인은 꿈과 환상의 멀티미디어 문학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목마름을 해갈하고 있는 것이다. 코펜하겐 미래학연구소장인 롤프 안센은 정보화 사회 이후에는 꿈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며, 상품의 꿈과 이야기를 사고파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미래 사회에서의 꿈은 하나의 상품이며 위대한 가치체계요, 부를 창출하는 스토리가 된다. 꿈이 없는 기업이나 조직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꿈이 없는 사람은 경쟁에서 뒤처진다. 한국교회는 어떤가? 한국교회도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면 100년, 200년 후에는 현재 유럽 교회처럼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다시 새롭게 꿈을 꾼다면 결코 박물관의 유물처럼 퇴화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꿈에는 길이 있고, 아니 꿈이 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꿈의 인생이었다.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쫓겨난 이후에 고독한 별빛 아래서 잠들고 차가운 새벽이슬을 맞으며 깨어나는 외로운 순례자 인생이었다. 120원짜리 점심을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가난한 신학생이었지만 기도원에 올라갈 때면 소나무들을 나의 성도라고 생각하고 설교 연습을 하였다. 점심 값을 아껴서 책을 사 보며 밤마다 지혜의 등불을 밝혔다. 바로 이런 꿈이 있었기에 길 위에서 쓰러지고 잠들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눈을 비비며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꿈의 인생이요, 목마른 희망의 노래였다. 나라고 해서 왜 쓰라진 좌절과 상처가 없었겠는가? 그러나 꿈은 그 길을 걷게 하였고 오늘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 꿈은 길 위에서도 잠들지 않는다. 물론 잠시 잠들 수 있으나 꿈에는 길이 있기 때문에 또 일어나 걷게 한다. 그것이 허상이요 야망에 불과하다면 포기하고 싶을 것이다. 아니, 좌절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정한 꿈은 걸어가고 또 걸어가게 한다. 한국교회도 다시 꿈을 꾸어야 한다. 세계교회사에 남을 급성장과 기적 같은 부흥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것이 우리의 종착역이 아니다. 다시 통일한국의 가교와 세계선교의 비전을 품고 걸어가야 한다. 요셉과 다니엘, 에스겔은 민족의 폐허 위에서 거룩한 환상과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가야 할 길이 되었다. 한국교회가 민족의 광야에서 꿈을 꾸며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결코 잠들 수 없는 꿈을, 길 위에서도 저토록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별빛의 꿈을! 소강석 목사(용인 새에덴교회)
찬밥이 맛없는 이유/ 전병욱 목사/ 2010-02-17
찬밥이 맛없는 이유 전병욱 목사 찬밥은 맛이 없다. 왜 그런가? 온도에 따라 쌀에 든 녹말의 형태가 바뀌기 때문이다. 보통 쌀에 든 녹말은 ‘베타 상태’의 녹말이다. 그런데 뜨거워지면 ‘알파 상태’로 변화된다. 부피가 커지고, 서로 부드럽게 달라붙는다. 그래서 맛있다. 밥이 식으면 다시 베타 녹말로 변한다. 그래서 맛이 없어진다. 요즘 나는 임실 치즈 피자를 자주 먹는다. 국산 치즈이기 때문에 신선도가 좋고 맛있다. 외국 치즈의 약점은 딱딱하다는 것이다. 국산 치즈를 뜨거울 때 바로 먹으면 녹아내린다. 소화도 잘 되고 배도 아프지 않다. 왜? 알파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 때문이다. 일을 쉽게 하는 사람은 뜨거울 때 일한다. 성령이 기도할 마음을 줄 때 기도하면 쉽다. 헌신할 마음을 줄 때 헌신하는 것은 쉽다. 뜨거움이라는 감동이 밀려올 때, 일하면 뭐든지 쉽다. 어리석은 사람은 식었을 때 억지로 하려고 한다. 항상 베타 상태에서 일하려고 한다. ‘내 모든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라는 찬송만 좋아한다. 그래서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 40여명의 남자들과 함께 MT를 떠났다. 눈 덮인 산을 오르는 등산을 했다. 첫날은 답사의 의미로 짧은 코스를 갔다. 둘째 날은 3시간쯤 걸리는 4배 정도 되는 거리를 등산했다. 그런데 정상에서 보니 첫째 날 힘들었는지 말없이 빠진 사람이 있었다. 공동체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전화로 올라오라고 했다. 다수의 사람들은 동료애를 가지고 즐겁게 알파 상태에서 등산을 했다. 야성을 기르고, 공동체의 하나 됨을 느끼는 기쁨의 시간이었다. 동참하지 않은 사람은 혼자서 힘들고 외롭게 베타 상태로 등산을 했다. 같은 일을 해도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 뜨거울 때 해야 한다. 알파 상태로 일해야 한다. 한 사람이 뜨거운 열정으로 일하면 바람이 일어난다. 바람의 원리는 무엇인가? 바람은 기압 차로 일어나는 대기 이동이다. 고기압과 저기압의 차이가 클수록 큰 바람이 생긴다. 바람이 일어나는 조건은 자기와 수준차이가 큰 대상을 만날 때, 일어난다. 성령을 만나면 내 안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부흥은 대개 한 사람의 가슴에서 시작된다. 한 사람이 우뚝 솟은 고기압이 될 때, 주변에는 바람이 일어난다. 기독교의 개혁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영적 고기압이 될 때, 영적 기압 차로 인해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씀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바람 일으킴의 가장 큰 적은 관료주의이다. 다 비슷비슷하게 안주하기를 원하면 바람은 일어나지 않는다. 앞서는 한 명이 전체를 살린다. 앞서는 한 사람의 변화가 전체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답답한 상태에 놓인 전체를 새롭게 하는 바람의 아들, 바람의 딸들이 나오기 고대한다. 전병욱 목사
최고의 예배는… /김병삼 목사/만나교회/2010-02-07
최고의 예배는… 예배를 표현하는 많은 말이 있다. 한때 한국교회에서 ‘열린 예배’라는 논쟁이 일었던 이유도 사실은 예배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예배를 드리는 대상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표현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더는 이런 논쟁이 무의미하며 이런 문제로 논쟁할 정도로 한국교회가 미성숙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인정함에도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배는 우리의 체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이사야가 경험했던 ‘스랍의 체험’은 그가 예배자로서 반응할 때 나타난 현상이지, 그가 스랍의 체험을 하려고 나아갔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신자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하는 “은혜 받았어!”라는 말이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만족시켜주는 체험을 두고 한 말이라면 예배를 오해하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그의 길을 걸으라’에서 예배를 이렇게 정의한다. “성경은 예배를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는 사람이 ‘체험’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이 어떻든, 심지어 그것에 대한 느낌이 있는지조차 상관없이,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다. 체험은 그러한 예배로부터 발전되어 나오는 것이지 그 반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고 나아가는 우리 신앙인의 삶의 흔적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자신이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말한다. 여기서 ‘흔적’이란 ‘상처’라는 말로 그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몸에 가져야 했던 아픔의 상처일 수 있다. 오래전 전병욱 목사가 쓴 ‘낙타 무릎’이라는 책에서 낙타는 무릎을 꿇고 일어서기 때문에 굳은살이 박여 구부러진 것처럼 신앙인에게 기도의 무릎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도전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자의 흔적이 있을 때 비로소 예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당신은 예배자로서 하나님께 반응한 것 때문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당신이 드린 그 예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반응하는 삶을 살다가 당신의 삶에서 어떤 상처를 경험했는가. 지금은 추억처럼 되어버린 어떤 시골교회에서 드려지는 저녁예배의 장면을 상상해 보라. 지금처럼 능숙하고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어도 눈물과 감격이 있었던 예배를 말이다. 어떤 교회의 장로님이 너무 긴장해서 설교하는 목사님을 이렇게 소개했단다. 분명히 머릿속에서는 ‘이제 목사님 나오셔서 하나님 말씀 전해주시겠습니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그만 “하나님 나오셔서 목사님 말씀 전해주시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회중의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단에 오르신 재치 만점 목사님의 “하나님 나오셨습니다!”라는 말에 이내 교회는 웃음바다가 되었고 덕분에 마음이 열린 성도들은 그날 최고의 헌신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최고의 예배는 우리가 최고로 완전하기 때문에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최고이신 하나님 앞에 최고의 반응을 보일 때 드려지는 것이다. 실수 없음의 완전함이 아니라 실수 가운데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신실한 반응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 이것이 예배다!
칭찬 씨앗 뿌려보자/도원욱 목사/서울 한성교회/2010-02-05
‘칭찬 씨앗’ 뿌려보자 어느 책에 인용된 글을 소개한다. 영화 ‘트위스터’ ‘왓 위민 원트’ ‘캐스트 어웨이’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던 헬렌 헌트의 얘기다. TV 단역배우부터 시작한 헌트는 비중 있는 배역을 따내고자 치렀던 오디션마다 떨어지는 불운을 겪었다. 고심 끝에 결국 배우의 길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찢어질 듯 아픈 마음을 안은 채 장을 보러 갔다. 마침 그 때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상품을 진열하던 한 직원이 그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 직원은 깜짝 놀라며 헌트에게 “당신을 TV에서 봤는데 진짜 놀라운 재능을 타고 났더군요”라고 말했다. 그 말 한 마디가 헌트의 인생을 바꿨다. 그녀는 연기에 다시 도전했고 결국 ‘파이오니아 우먼’이라는 드라마 오디션에 합격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를 일약 스타덤에 앉게 한 작품이었다. 헌트는 훗날 “그 사람은 아마도 나를 도와주러 나타난 천사였을 것”이라며 “나는 이 세상에 천사가 있다는 말을 믿는다”고 말했다. 우리 주변에도 날개를 감춘 천사가 많다. 지나치기 쉬운 작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들이다. 인생의 크고 작은 일에 낙심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헌트의 마음을 돌린 점원의 한 마디 말처럼, 격려는 우리에게 무엇이든 한 번 더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확실히 그렇다. 욕먹고 야단맞으면 ‘나는 안 되나 보다. 포기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약해서 그런지 부정적 이야기를 들으면 금세 기가 꺾이게 마련이다. 반면에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또 칭찬을 듣고픈 마음에 의욕이 불끈 솟아오른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잠 27:21) 은은 도가니에서, 금은 풀무에서 녹아 단련되듯 사람은 칭찬을 통해 새롭게 빚어진다. 칭찬에 걸맞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렇다. 진심어린 칭찬은 사람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한다. 마치 달콤한 생크림 케이크에 설탕 가루를 얹어 선물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긍정적인 생각,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일은 간단하다. 주변 사람들을 세워주고 그의 인생을 바꿀 정도의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은 예상외로 쉽다. 주변 사람이 훗날 맺게 될 열매를 기대하며 가능성이라는 ‘씨앗’을 칭찬하라. 당신의 칭찬을 먹고 자란 그 씨앗은 큰 열매를 맺고 당신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인생의 무게 앞에 처진 어깨로 고개 숙인 주변 사람을 춤추게 할 이는 바로 당신이다. 리더십에 대한 글로 유명한 존 맥스웰도 “격려는 영혼의 산소”라고 말했다. 그만큼 격려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격려 받는 만큼 더 강해질 수 있다. ‘달과 6펜스’의 작가 서머셋 모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비판을 해달라고 하는데, 사실상 그들이 원하는 것은 칭찬이다.”
하나님의 법칙, 세상의 법칙/ 유관재 목사/ 성광교회/ 2010-07-01
하나님의 법칙, 세상의 법칙 오래전 대만의 원주민 마을 울라이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타이베이를 버스로 출발한 나는 ‘아침 날씨가 좋아서 오늘 좋은 여행이 되겠구나’ 생각하며 창밖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검은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얼마 후 세찬 비가 내리치기 시작하는데 경험해보지 못한 폭우였다. 비 때문에 걱정하며 울라이 정류장에 내리는데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우산을 파는 아주머니였다. 반갑게 달려가 인사하며 우산을 하나 샀다. 다행히 얼마 후 비가 그쳐서 생각보다 더 많이 울라이를 구경할 수 있었다. 울라이는 민속마을일 뿐 아니라 강물에 온천이 흐르는 곳이어서 색다른 경험을 하며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다시 타이베이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한 아주머니가 반갑게 나를 향해 달려왔다. 자세히 보니 오전에 나에게 우산을 팔았던 아주머니였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 다가와 우산을 달라고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내가 산 우산이기에 줄 수 없다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막무가내로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안 된다고 하고…. 그러는 사이 아주머니가 날쌔게 나에게서 우산을 뺏어 달아나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아무리 관광지지만 이럴 수가 있는가? 화나는 마음을 삭이며 버스를 탔다. 그날 저녁 한 선교사님을 만나 식사를 같이하게 되었다. 식사를 하며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선교사님에게 했더니 껄껄 웃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그 우산은 파는 게 아니고 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스운 나의 모습을 보았다. 대만의 살아가는 법칙을 몰랐기에 나는 엉뚱하게 생각하고 화를 냈던 것이었다. 내가 화를 낼 일이 아니라 도리어 우산을 빌려주는 사람을 만나서 감사해야 했는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법칙은 세상의 그것과 반대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법칙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하나님께 도대체 나의 인생은 왜 이러냐고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과 한국은 서로 반대인 것이 너무 많다. 한국은 성을 쓰고 이름을 쓰지만, 미국은 이름을 쓰고 그 다음 성을 쓴다. 응급상황에 한국은 119를 누르지만, 미국은 911을 누른다. 전화번호를 모를 때 한국은 114를 누르지만 미국은 411을 누른다. 밤과 낮도 반대다. 주소를 쓰는 방식도 반대다. 미국에 가면 미국의 법칙을 따라야 미국을 누릴 수 있고 한국에 오면 한국의 법칙을 따라야 한국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하면 화나는 사건만 만나게 된다. 하나님의 법칙과 세상의 법칙도 반대다. 세상은 원수를 갚으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법칙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세상은 밟고 올라서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섬기라고 한다. 세상은 손에 쥐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손을 펴라고 한다. 세상은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주는 것이 복이라고 한다. 나는 오늘 세상의 법칙으로 살며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하나님의 법칙으로 인생을 조정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