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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당회 목회서신 2003년 12월 17일
2003년 당회 목회서신 2003년 12월 17일 작성자 등 록 파 일 Ⅰ. 한 해가 또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긴 그림자를 남기며 서산으로 넘어가는 2003년의 태양을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합니다. 세월은 일정한 보폭으로 가고 있지만, 우리들은 뭔가에 쫓기듯 숨을 헐떡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힘겹지 않은 순간이 없었지만 우리는 산 자의 땅에서 뒤를 돌아보고, 또 앞을 내다보며 이렇게 서 있습니다. 하지만 한 해의 끝자락에 선 우리 마음은 그리 흔흔(欣欣)하지 않습니다. 삶의 열매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수능 성적표를 받아들고 누가 볼세라 겁먹은 표정으로 들여다보는 수험생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열심히 멋지게 살고 싶었고, 좀 더 나누고 섬기며 살기를 원했고, 좀 더 정신의 여백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아'의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지나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인식 장로님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노용래 집사님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교인들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위기 속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요즘 들어 자꾸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요8:16, 29)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 말씀이 제 마음에 떠오를 때마다 하얀 백지 위에 또박또박 써 내려간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들고 느꼈던 가슴 뭉클함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Ⅱ. 올해는 참 많은 분들이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직접·간접으로 우리가 동참했던 장례식만 해도 14차례나 되었습니다. 죽음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다가올 수 있는 가능태임을 우리는 두렵게 경험했습니다. 만남의 시간이 길든 짧든 모든 헤어짐은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슬픔의 자취를 남기게 마련입니다. 아직도 제 손을 잡으면서 눈물을 글썽이시는 분들을 대할 때마다 저는 말을 잊고 맙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가 슬픔을 당한 모든 가족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런데 교우들의 슬픔을 공유하는 체험을 통해 우리는 이전보다 더 큰사랑으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슬픔이 준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의 슬픔에 공감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야말로 우리의 사람됨을 드러내는 징표라지요?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인간과 모든 면에서 유사한 사이보그인 터미네이터가 마지막까지 이해할 수 없던 것이 바로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그런 슬픔에의 동참을 통해 타자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아는 부드러운 영혼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도 여럿입니다. 아기들의 태어남은 한 가정의 경사이기도 하지만, 신앙 공동체의 경사이기도 합니다. 이 귀한 아기들을 믿음 안에서 잘 보살피고,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내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 속에서 자란 아이라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지요? Ⅲ. <아름다운 원로모임>을 진행하면서 가슴이 짠해짐을 느꼈습니다. 함께 여행을 하고, 이런 저런 작업을 하면서 엿본 원로들의 삶의 내력은, 오늘 우리가 이처럼 살게 된 것은 바로 이분들 덕분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나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19:32)는 말씀이 왜 사람다운 세상의 초석인지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일인 일 구좌 갖기 운동>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더 아름다운 세상,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꿈을 실현하기 애쓰는 시민운동단체와 봉사단체의 후원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마땅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교우들의 절반 정도가 동참하고 있지만 저는 새해에는 모든 이들이 동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후원회원이 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몸으로 봉사하려는 마음의 열정도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쁜 교회 간판이 세워지고, 작은 화단에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을 즐기면서 우리는 조금씩 밝아지는 우리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보았습니다.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교회의 밝은 미래를 그려보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Ⅳ. 새해 우리 교회의 목표는 "평화의 씨앗을 심는 우리"(마5:9)로 정했습니다. 평화는 불화의 땅에 사는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꿈입니다. 올해 초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의 광풍은 평화를 염원하는 지구촌 사람들의 의식을 갈래갈래 찢어놓았습니다. 우리 사회 각 계층에서 다양하게 분출되고 있는 갈등들은 우리의 미래 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노동자와 사용자, 세대간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가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평화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욕망이 관계의 매개항이 되는 곳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 그리고 배려가 있을 때 우리는 평화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평화는 기성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씨앗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겨자씨 한 알이 자라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참 소중합니다. 전면적인 평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서있는 삶의 자리에서 작은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자식의 시린 손을 품에 넣어 녹여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우리가 서로의 아픔을 덜어주려고 애쓰다보면 어느 결에 우리 삶은 평화의 기운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강에서 취한 돌을 세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행위를 기념했듯이, 우리도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평화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와 동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2003년 12월 14일 담임목사 김기석
감성교육의 방법들 2013년 03월 26일
감성교육의 방법들 2013년 03월 26일 작성자 나눔 감성교육의 방법들 시대는 논리와 분석 중심의 이성중심에서 이해와 공감 중심의 감성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감성은 생활주변의 감각적인 자극들을 잘 수용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읽을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의 두뇌에서 좌뇌는 이성을 관장한다면 우뇌는 감성을 관장한다. 그래서 왼손잡이는 특히 감성이 잘 발달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좌뇌가 발달한 사람은 이성이 발달하여 논리,분석력이 탁월하고 암기력과 이해력이 뛰어나서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엘리트가 되기 쉽다. 반면에 우뇌가 발달하여 감성이 발달한 사람은 아름다움을 잘 느끼고 표현할 줄 알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읽어서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지만 암기력과 이해력이 떨어져서 학교 성적은 잘 안 좋을 수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사회의 엘리트들은 논리분석력과 암기력과 이해력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다수의 보통 타인들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섬기는 능력은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사회는 이웃을 배려하는 법과 제도 또는 문화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엘리트들이주로 담당하고 있는 법조계나 언론계,정치계 등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배후에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감성을 무시한 이성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것도 원인중에 하나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보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세상이 창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린이나 청소년 그리고 성인들에게 감성을 길러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보려 한다. 첫째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을 자주 접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연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본다. 사계절 자연 속에서 무수히 많은 아름다움들이 있어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산,들,강,바다 등의 자연을 자주 접하고 감상하는 경험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연은 아름다움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축소판이기에 자연 속에서 건강한 인생관을 형성하고 지혜로운 철학을 배울 수도 있다. 두 번째는 어린이나 학생들 그리고 성인들이 음악이나 미술활동을 자주 경험하고 즐길 수 있게 배려해야 한다. 느낌을 관장하는 감성의 작용으로 하는 예술활동중에 일반적인 것이 음악이나 미술이다. 다양한 음악작품이나 미술작품을 수시로 감상하는 훈련뿐만 아니라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는 표현활동도 자주 하는 것이 감성을 기르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은 음악이나 미술 감상,표현활동은 또한 즐거운 놀이이기도 해서 몸에 좋은 엔돌핀호르몬을 배출하게 해 주어 스트레스 해소나 정서순화에 큰 도움이 된다. 풍부한 예술활동은 마음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배려는 돌봄과 관심과 고려하고 한다. 가족을 포함한 이웃들에게 일상적인 삶 속에서 배려를 통해서 섬기는 훈련을 하는 것도 감성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성을 기르는데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서로 간에 배려하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면 우리는 덜 찡그리고 보다 많이 웃을 수 있는 그래서 모두가 마음과 몸이 건강한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작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작은 배려의 실천이다. 가장 이상적인 두뇌 발달은 좌우의 뇌가 골고루 발달한 것일 것이다. 폭넓은 독서와 사색의 훈련으로 논리와 분석력을 관장하는 좌뇌를 발달시키고 위에서 제시한 훈련으로 감수성을 관장하는 우뇌를 발달시키면 좌뇌와 우뇌의 고른 작용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창의력도 발달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제도교육이 주로 암기와 이해력 중심의 이성중심이기에 한편으로 의지적으로 존중과 배려심을 길러주는 감성교육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기에 자녀들에게나 자신에게 감성을 길러줄 수 있는 일상적이고 쉬운 방법들을 제시해 보았다. 모든지 치우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사회도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되고 균형있게 발달한 사회로 재창조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2005년 03월 26일
고도는 오지 않는다 2005년 03월 26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고도(Godot)는 오지 않는다 (*이 글은 고 변선환 박사 10주기를 추모하여 변선환 아키브에서 개최한 모임을 위해 쓴 글입니다. 본격적인 비평이나 작품론으로 쓴 것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생각으로 쓴 글입니다) “엘리아드의 아름다운 문장 하나: ‘망명자는 누구나 이타카로 되돌아가고 있는 율리시스이다. 모든 생활은 오디세이, 이타카로 가는 길, 중심으로 가는 길의 모사이다. 망명자는 자기 방황의 감춰진 뜻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중심을 향한 입사적 시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저마다 자신의 다리와 악으로 집으로 가고 있다.’”(김현, <<행복한 책읽기 > 중에서) ● 시간 속의 멀미 바람지기인 아이올로스는 아홉 살바기 황소의 가죽을 벗겨 만든 자루에 ‘울부짖는 바람들의 길들’을 단단히 묶어주며 순한 서풍의 입김으로 오뒤세우스 일행을 배웅했습니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밤낮으로 항해하여 열흘째 되는 날에는 벌써 고향 땅의 화톳불이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지쳐 있던 오뒤세우스에게 달콤한 잠이 엄습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그 사이에 오뒤세우스의 전우들은 오뒤세우스가 아이올로스로부터 받은 가죽 부대 속에 황금과 은이 가득할 것이라고 수근거렸습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그들이 그 자루를 풀자, 온갖 바람이 터져 나와 그들의 배를 고향 땅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또 다시 아이올로스의 섬까지 떠밀려갔지만 아이올로스는 “내게는 축복받은 신들께 미움받는 인간을 보살펴 주거나 호송해 줄 권한이 없다”며 그들을 매몰차게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온갖 시련을 겪으며 항해하다가 마침내 아이아이아 섬에 닿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머리를 곱게 땋은 키르케가 살고 있었습니다. 섬을 수색하러 갔던 전우들은 키르케가 주는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신했습니다. 그들은 돼지의 머리와 목소리와 털과 외모를 가지게 되었으나, 분별력만은 여전하여 전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전우들의 비극을 전해들은 오뒤세우스에게 헤르메스가 다가와 키르케의 마법을 뿌리칠 수 있는 약초 몰뤼를 주었습니다. 물론 오뒤세우스는 전우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섬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습니다. 저는 호메로스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간의 소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돼지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분별력과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아니 그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자기 생각을 표현할 언어를 상실했다는 사실입니다. 발화하는 순간 꿀꿀거리는 소리가 되고 마는 현실, 기막힌 전락입니다.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언어를 포기하는 인어공주의 비극도 이런 것일 겁니다. 타락 이전의 본래적 존재에 대한 기억과 타락한 현존재 사이의 불일치 혹은 불화, 그리고 동료들에게 가닿을 수 없는 불모의 언어, 이것이야말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인간에게 품부된 운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은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돼지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자기가 인간이었음을 끝끝내 기억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문학은 기억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선택함에서 발생합니다. 그것은 신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비동일성의 자각에서 오는 고통과 목마름이 없다면 문학도 신학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래시계처럼 줄어드는 시간의 한계에 갇혀 있지 않다면, 불안의 풍랑도 의혹의 구름도 일지 않는 지복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면 유지해야 할 기억 혹은 회복해야 할 자리에 대한 탐색은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신학은 리브가의 태 속에 있던 에서와 야곱처럼 뿌리가 하나입니다. 인간의 삶의 양상과 인식구조가 변함에 따라서 이야기의 구성원리가 점차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발생 초기의 문학은 신학적 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신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와 더불어 조화롭게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작가들에 이르면 상황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신들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의 전면에 나타나지만,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는 조금씩 무대의 중앙에서 슬금슬금 물러서다가 마침내 에우리피데스에 이르면 신들은 단역 배우 신세가 되고 맙니다. 서정시의 등장은 신들의 황혼을 재촉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때도 세계는 신성한 힘에 의해 지배된다는 세계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신화 시대에서 전설 시대로, 전설 시대에서 로만스적 고소설의 시대로 이행해가면서 신들의 자리는 점차 인간의 정신이 그리고 지상적 원리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근대 소설은 사회와 개인의 갈등을 보여주면서 그 분열을 극복하려는 ‘개인’의 내면적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경향이 가속화되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분열이 사회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근원적 상황임을 점차 깊이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니체는 이런 경험을 <<비극의 탄생>>에서 현기증으로 표현했고, 사르트르는 ‘구토’라 표현했습니다. ● 카오스 앞에서 “조르바, 우리는 구더기랍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아주 작은 구더기지요. 이 조그만 잎이 바로 지굽니다. 다른 잎은 밤이면 가슴 설레이며 바라보는 별입니다. 우리는 이 조그만 잎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잎의 냄새를 맡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려고 우리는 맛을 보고 먹을 만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잎의 위를 두드려 봅니다. 잎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소리를 냅니다. 어떤 사람은―겁이 없는 사람들이겠지―잎 가장자리까지 이릅니다. 거기에서 고개를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봅니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떱니다. 밑바닥의 나락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되지요. 멀리서 우리는 거대한 나무의 다른 잎들이 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뿌리에서 우리 잎으로 수액을 빨아올리는 걸 감지합니다. 우리 가슴이 부풀지요. 끔찍한 나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맙니다.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잎 가장자리까지 이르러 고개를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본 사람들의 공포에서 시작되는 게 뭘까요? 실존에 대한 자각이 아닐까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와의 대면을, 삶의 실상과의 대면을 회피하지 않는 영혼이라면 그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저는 변선환 선생님(*앞으로 언급하는 ‘선생님’은 모두 변선환 선생님을 지칭합니다)의 안내를 따라 그 가장자리에 섰던 두 정신, 윌리엄 포크너와 사무엘 베케트가 느꼈던 어지럼증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윌리엄 포크너가 <<음향과 분노>>(*이것은 세익스피어의 <맥베드> 5막 5장에 나오는 맥베드의 대사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자기가 등장하는 시간에는 무대 위에서 거드름피우며 왔다갔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더 이상 말을 누가 들어주지 않는 가련한 배우이다. 그것은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 요란한 소리와 흥분으로 차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사실 ‘음향’이라는 번역어가 적절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에서 만들어낸 소설적 공간인 요크나파토오파군(郡)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축약 혹은 상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와 그에 따르는 정체성의 위기 혹은 정신적인 위기를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 바로 그곳이 요크나파토오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크나파토오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은 지금 이곳 서울에서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 소설의 주제를 ‘인간의 소외 상황과 그 구원’이라는 말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작가가 드러내고 있는 지방색은 “사실과 전혀 다른 지대, 곧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부대물에 불과”(<<현대신학과 문학>>, 170쪽) 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대체로 이 말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부대물’이라는 표현은 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지역적인 소재를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에 접목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작품 속에는 어쩔 수 없이 작가 개인의 경험이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든 시골이든 한 장소는 사람들의 기억과 가치가 고스란히 저정돼 있는 곳입니다. 포크너가 ‘요크나파토오파’와 그 주변 환경을 그리는 대목은 매우 사실적이고 또 섬세합니다. 그것을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배경으로 본다면 작품을 오독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히려 요크나파토오파는 미국 북부의 산업화 과정과 전통적인 미국 남부의 전통적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살아온 포크너의 삶의 이력이 그가 살아온 땅의 이력과 만나서 빚어낸 소설적 공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곳은 아름답고 풍요롭습니다. 하지만 그 위에서 영위되는 삶은 조화롭지 못합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공간은 황량합니다. 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시골길, 그리고 돌더미 하나, 그것이 전부입니다. 눈길이 머물만한 곳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단순한 무대 이미지는 어떤 화려한 무대 이미지보다도 강력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이 됩니다. 그곳은 일상성이 소거된 자리, 곧 추상성만이 주인노릇을 하는 관념적 공간입니다. 외부로 향한 시선이 가 닿을 데가 없으면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광야에 나간 사람은 자기를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군더더기처럼 우리에게 덧붙여진 것들을 벗고, 자신의 알몸을 응시해야 하는 겁니다. 희곡의 첫 장면은 돌 위에 앉은 에스트라공이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숨을 헐떡이며 애써보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관습적인 시선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환기시켜주는 행동이 아닐까요? 그런데 선생님은 베케트가 만든 이 무대공간을 “출구 없는 오늘의 현대판 지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생의 의미를 상실한 허무주의의 감옥”이라는 것이지요(208쪽). 저는 이런 단정적인 규정이 좀 마음에 걸립니다. 물론 베케트는 시간과 공간의 원근법이 사라진 추상적 공간을 설정하고 그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놓습니다. 흔히 베케트의 연극을 부조리극이라고 부릅니다. 부조리하다는 것은 삶의 목표가 사라졌다는 것이며, 자기 삶의 뿌리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말일 겁니다. 베케트는 그런 삶의 상황 가운데서 삶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사실 베케트의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는 우리가 일상 중에 사용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언어는 우리들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구축하기도 합니다. 베케트는 기존의 텍스트가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과 이데올로기적 편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에스트라공에게 성경은 종교적 텍스트가 아닙니다. 성서를 읽어봤냐는 블라디미르의 질문에 에스트라공은 “한번 훑어본 것도 같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쨌든 성지의 지도는 생각난다. 색칠한 지도였는데 아주 예뻤어. 사해는 옥색이어서 그걸 들여다보기만 해도 목이 말라왔지. 난 신혼 여행을 그리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헤엄도 치고 행복하게 될 것 같았다.”(베케트, 15쪽) 전통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대해온 독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트라공에게 성경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 혹은 권력으로 변한 기독교의 텍스트가 아닙니다. 푸꼬 식으로 말하자면 에스트라공의 성경 읽기는 모든 지식체계를 미리 조건짓는 무의식적 하부구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에게 소박한 행복을 상기시켜주는 매개물일 뿐인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도둑 가운데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복음서 저자의 기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그런데, 복음서를 쓴 친구 중 하나만은 그자들 중의 하나가 구원을 받았다는 거야. 에스트라공: 그래? 그렇다면 그 친구들 견해가 서로 다른 거지 뭐. 얘긴 단지 그것뿐이지 뭐야? 블라디미르: 넷이 다 거기 한자리에 있었다니까.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도둑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나머지 세 사람 얘기는 제쳐놓고 그 사람 말만 믿는지 모르겠다니까. 에스트라공: 누가 믿는다는 거야? 블라디미르: 누구나 다 그렇게 믿고 있잖아? 그 사람의 해석 밖에 모르고 있다니까. 에스트라공: 사람들이 다 바보니까 그렇지.(베케트, 17쪽) “그 사람의 해석 밖에 모르고 있다니까”. 베케트는 열린 텍스트를 하나의 의미규정 속에 가두는 행위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신성불가침의 확실성 위에 세워진 세계에서 소설은 죽는다”는 밀란 쿤데라의 말도 같은 의미일 겁니다. 하지만 베케트의 새로운 실험은 성공한 것일까요? 아무런 입각점도 없다면 모든 것은 불확실성 속에 매몰되고 맙니다. 베케트가 보여주려는 것은 아무런 입각점도 없는 세계의 혼돈일까요? ● 시간 속에서 멀미하는 사람들 이제 포크너와 베케트의 인물들이 체험한 ‘시간’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연대기적 시간과 리얼리즘 소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음향과 분노>>는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 시간은 비틀려 있기 일쑤이고, 서사구조도 매우 난해하기 때문입니다. 포크너가 우리를 골탕먹이려고 그런 서술방법을 택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의 내면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이 가장 유효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억은 연대기적인 시간을 따라 정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 기억의 창고는 여러 가지 경험과 무의식의 층위가 뒤죽박죽으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질서정연하게 정리할 수도 없으려니와, 정리한 그것이 곧 우리의 내면풍경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겁니다. 시간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의식에 따라 달리 경험됩니다. 특히 비정상적인 의식세계에 투영된 시간의 빛깔은 다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음향과 분노>>는 몰락한 귀족인 콤프슨 가문의 자녀들의 비정상적인 의식세계에 투영된 다양한 시간의 빛깔을 그려 보이고 있습니다.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소제목은 각각 ‘1928년 4월 7일’, ‘1910년 6월 2일’, ‘1928년 4월 6일’, 그리고 ‘1928년 4월 8일’입니다. 시간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집 앞에 있던 목초지마저 팔아야 할 정도로 몰락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 콤프슨 씨는 술병을 들고 살고, 콤프슨 부인은 자기 연민에 빠져 집안 일을 흑인하녀에게 맡긴 채 침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국민이 희망이다 2003년 10월 27일
국민이 희망이다 2003년 10월 27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국민이 희망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 뭐냐는 질문에 정치가는 회심의 미소를 띠고 '정치가'라고 대답했다. 창조 이전의 혼돈을 만든 게 누구였겠느냐는 말에 사람들은 다 고개를 끄덕였다. 입법자와 집행자로서 '질서'의 수호자이어야 할 정치가들이 혼돈의 창조자라면 그들의 존재이유는 소멸된 것이다. 정치권과 경제권의 유착의 실상이 스멀스멀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그럴 줄 알았어' 하면서도 허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지금 국민은 피곤하다. 여야의 끝도 없는 소모적인 정쟁에 지쳤고, 그들의 부패에 실망했다. 대통령의 재신임 문제와 불법적 정치자금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이 망각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다. 태풍 매미가 할퀴고 간 상처를 회복하느라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이들이 잊혀지고 있고, 새만금 간척 사업에 대한 논의가 물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핵폐기장 건설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이 아무런 해결의 실마리도 찾지 못한 채 국민들의 의식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 생태계 파괴가 불보듯 뻔한 사패산 터널 공사, 정보인권 침해논란을 빚고 있는 교육행정 시스템(NEIS)에 대한 논의는 언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는 형편이다. 한미행정협정 개정에 대한 요구는 이라크 파병 논의의 파도속에 묻히고 말았다. 정통부는 시청자의 참여를 보장하고 전자 민주주의를 구현한다면서 추진하고 있는 디지털 방송정책을 여러 가지 파행성에도 불구하고 힘으로 밀고 나가려 한다. 재외국민들의 인권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청년 실업자들의 한숨은 눌함이 되어 우리의 의식에 이명증을 일으킨다. 정치권이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조정 기능을 잃자 각종 이익단체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고함을 지르고 있다. 이성적이고 탄력있는 사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건강이 항상성의 유지라면 지금 우리 사회는 건강사회가 아니다. 민생의 모든 현안들이 정치논리로 환원되는 한 건강사회를 기대하는 것은 푸른 나무에서 생선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국민들이 똑똑해지는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의 행태를 주목하면서, 그들을 표로 심판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어둡다고 탄식만 할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자리에서 등불 하나를 켜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척박한 민심의 땅을 갈아엎어 희망을 파종해야 한다. 미우나 고우나 내 나라 아닌가?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권위주의의 옷을 벗으라 2003년 04월 18일
권위주의의 옷을 벗으라 2003년 04월 18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권위주의의 옷을 벗으라 권위는 주장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위를 내세우는 순간 그나마 유지되어 오던 그의 권위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권위를 뜻하는 그리스 말 '엑수시아'는 그 말의 역설적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권위는 '본질'(우시아)로부터(엑스) 나온다. 하지만 그릇된 권위는 '본질'에서 벗어남으로서 획득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릇된 권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다. 그릇된 권위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권위주의의 갑옷을 입는다. 그는 그 갑옷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 한 시골 초등학교 교장선생의 자살을 둘러싸고 보수적인 언론과 교원단체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전교조 때리기에 나섰다. 그들은 전교조가 마치 기존질서의 철저한 전복을 꾀하는 혁명 세력이나 되는 것처럼 야단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우리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결국 그를 죽음에로 내몬 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 깃든 미시적 권력의 욕망이다. 오랫동안 서열 사회의 틀 안에서 살아왔고, 사유해왔던 이들은 그 동안 당연시되어왔던 서열 관계의 해체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폭력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를 만나든 먼저 나이를 묻고 학번을 묻는 것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 그 선험적인 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불온의 꼬리표가 붙게 마련이다. 국회 행자위와 문광위 소속 의원들이 젊은 장관들에게 보인 방자함은 우리 사회가 서있는 미성숙의 한 단면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장관들이 추진하는 정책보다는, 그동안의 관행대로 처신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더 예민하고 반응하고 있다. 아랫자리에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자 왠지 기분이 나쁜 것이다. '진리에 대한 헌신이 나를 정치로 끌고 들어갔다'고 말했던 간디의 자세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시대를 읽는 건전한 상식인의 눈이나마 갖추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혼미한 정신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며, 스스로 만든 번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이성과 합리성보다는 기분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는 창의적인 정신이 발현될 여지가 거의 없다. 때는 바야흐로 청명·곡우를 지나 입하를 향해 달려가는 데, 권위주의의 갑옷을 입은 이들은 그 칙칙한 의상을 벗어 던질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정은 종교인들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이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서열 사회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영혼을 받아들일 여백이 그들에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교회 안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윤동주 시인의 기다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치열한 자기 비움과 자기 성찰, 그리고 섬김의 실천을 통해 우리 영혼에 드리운 어둠, 한반도와 온 세계에 드리운 어둠을 조금씩 내모는 참 권위의 사람들이 그립다. (김기석 목사)
기도로 품는 이슈1 2006년 11월 30일
기도로 품는 이슈1 2006년 11월 30일 작성자 (vorblick) 등 록 파 일 [기도로 품는 이슈] < 한반도 냉전질서 새국면 > --지난 18일 부시 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핵폐기를 할 경우 한국전 종료선언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발언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설정했던 것과는 달리, 북한을 협상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협정 체제가 완성되기까지는 북한의 핵 폐기가 전제되는 것을 포함해 선결해야 할 사항이 적지 않아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앞에는 너무나 많은 길이 있습니다. 걷고 나면 분명해 보이는 길이, 걷기 전에는 왜 그리 막연하고 두렵기만 한지 모르겠습니다. 불화의 씨가 뿌려진 세상에서 평화의 열매를 거두기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야만 할 길입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라고 말한 어느 선각자를 기억합니다.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욕심의 비늘을 벗겨주시고, 단호히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해주십시오.] < 그칠 줄 모르는 집값상승 >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래 부동산 정책이 수도 없이 나왔지만 집값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천정부지로 뛰고 또 뛰고 있다. 이에 집값 안정과 경기부양이라는 상충된 목표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신뢰도가 땅에 떨어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가난한 이들의 삶의 터전을 휩쓸어가는 저 여름날의 태풍보다도 더 치명적인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와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합니다. 부동산 광풍에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영원한 거처로 삼기로 작정한 이들조차 그 바람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주님, 이 바람을 향하여 ‘고요하고 잠잠하라’ 외쳐주십시오.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던 이들이 소박한 꿈이 더 이상 짓밟히지 않는 세상이 열리도록 속히 간섭해주십시오.] < 20대 취업자 수 20년 만에 최저 >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들어 20~29세 취업자 수는 월 평균 407만2천명에 그치고 있다. 이는 1985년 이후 가장 적은 것으로, 20대 취업자 수가 가장 많았던 1995년에 비해서는 11년 만에 95만 명이나 줄었다. 전체 취업자 수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20대 취업자의 감소는 산업현장이 고령화되는 것을 의미해 경제 활력 약화가 우려되고 있다.-- [가장 밝고 아름다워야 할 이 땅의 젊은이들의 처진 어깨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식구들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늦잠을 잔다는 어느 젊은이의 고백 속에서 절망을 봅니다. 하나님의 일터인 이 세상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일깨워주십시오. 또한 그들에게 일과 돈벌이를 동일시하지 않는 영혼의 성숙함도 허락해주십시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건전한 노동과 쉼의 리듬 속에서 생을 축제로 바꾸는 삶의 연금술사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 수능시험 끝, 점수 스트레스 시작 >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막을 내렸다. 지금부터 다음달 13일 수능성적 통지 이전까지는 수험생들이 가채점을 통해 나온 예상점수를 바탕으로 대입 지원전략을 세우는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시험 치르기 전 못지않게 수험생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결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쉽게 불안 증세를 보이고 우울증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까르르 웃으며 지나가는 학생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도시의 음울함을 깨뜨립니다. 하지만 그들의 웃음 소리가 잦아든 곳에 절망의 한숨이 찾아들까 걱정스럽습니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수험생들 모두가 자신의 생이 은총이요 기적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어떤 경우에라도 현실을 긍정하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할 줄 아는 존재에의 용기를 그들에게 허락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각자에게 품부된 삶의 몫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시오.] < 44사이즈 문화, 거식증 늘어간다 > --브라질에서 최근 한 여성 모델이 거식증으로 사망한데 이어 이번에는 여대생이 같은 증세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지나친 다이어트의 폐해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나 배우 등이 거식증 등이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경우는 많았으나, 최근에는 그 환자 층이 일반인에게로 점점 가속화되어 확대되고 있다. 최근 거식증 환자가 늘어나는 것은 마른 것을 선호하는 문화가 크게 한 몫 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우리는 어머니의 굵어진 손마디와 주름잡힌 얼굴이야말로 성스러운 아름다움임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상업화된 대중매체들과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의 정신적 허약함이 빚어낸 이 반생명적인 흐름을 이제는 끊어주십시오. 표범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사람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는 티베트인들의 속담이 떠오릅니다. 우리 속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 우리의 우선적 관심이 되게 해주십시오.] < 지구 온난화 대책 시급 > --지구의 거대한 냉장고 ‘남극’이 온난화 현상으로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다. 세계기상기구(WMO) 보고에 따르면 지난 15년 간 남극의 기온은 약 0.3도 상승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추세가 계속될 경우 현재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기상이변, 바다 수온 상승, 사막화 현상 등을 불러일으키면서 지구 생태계를 파괴해 나갈 것으로 보여 대책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 이 멋지고 황홀한 시간의 리듬이 자꾸만 어긋나고 있습니다.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불러주신 우리들의 탐욕이 빚어낸 참극입니다. 하나님,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을 보시고 ‘보기에 좋다’고 찬탄하십니까? 덜 쓰고, 조금 불편하게 살기로 작정하면 삶의 비애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일깨워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기 위한 이슬떨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기도로 품는 이슈12 2007년 06월 08일
기도로 품는 이슈12 2007년 06월 08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기도로 품는 이슈12 어머니 성(姓) 따른 자녀이름 가능 [내년부터 호적법을 대신할 ‘가족관계 등록 등에 관한 법률(가족법)’이 시행되면서 호주 중심의 가족관계가 개인 중심으로 독립될 전망이다. 가족법에 따르면 자녀의 성과 본은 아버지를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협의하면 어머니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으며, 법원의 허가를 받으면 재혼한 여성이 자녀들의 성을 새 아버지의 성으로 바꿀 수 있다.] 자비하신 하나님,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산도 그 뿌리는 땅에 이어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있음’은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를 통해 우리를 이 세상에 내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자기 뿌리를 잊지 않아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인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이혼과 재혼, 그리고 혼외자녀와 입양 등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진 오늘의 현실은 우리에게 가족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 가족법의 시행을 통해 개인의 존엄과 가치가 존중되는 세상이 열리게 해주십시오. 이 법이 가족 관계의 해체를 추동하기보다는 가족 공동체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계기가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학력 간 소득격차 사상최대 [올 1분기(1~3월)중 고졸 가장의 한 달 소득이 대졸 가장의 68%에 그치는 등 고졸자와 대졸자간 소득차가 분기별 기준으로 가장 크게 벌어졌다. 대졸가구주의 월평균 소득이 454만6600원으로 1년 전 같은 기간에 비해 7.9% 늘어난 반면, 고졸가구주의 월평균 소득은 309만2300원으로 4.2% 늘어나는데 그쳤다. 학력 간 소득격차는 교육비, 특히 사교육비의 지출격차로 이어져 학력과 빈부의 대물림 고착화가 우려되고 있다.] 주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골고루 베풀어주십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공평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 순례길을 가는 동안 우리 가슴은 시퍼렇게 멍이 들고 말았습니다. 세상에서 겪는 차별과 모멸감은 찌르는 가시가 되어 우리를 괴롭힙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야 좋은 사람으로 혹은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회 분위기는 우리의 삶을 축제가 아니라 전쟁터로 만들고 있습니다. 차별과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일찌감치 경쟁이라는 보이지 않는 전선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주님, 희년의 나팔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고, 저마다 받은 바 달란트를 사용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주눅들지 않는 새로운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해주십시오. 월급쟁이 36.7% 비정규직… 7월부터 차별 금지 [통계청 근로형태 조사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 근로자가 크게 늘어나 임금근로자의 36.7%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또 비정규직 가운데는 한시적 근로자가 63.1%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이중 근로계약기간을 정한 기간제 근로자는 45.3%로 조사됐다. 하지만 오는 7월 300인 이상 기업에 도입되는 비정규직법에 따라,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에 임금과 근로시간 등을 차별할 경우 최고 1억 원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주님, 어떤 소리가 우리의 귓전에 천둥소리처럼 들려옵니다. ‘비정규직은 일회용이 아니다’, ‘우리는 여물만 먹여주면 일하는 소가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은 눌함(訥喊)이 되어 우리의 양심을 짓누릅니다. 든든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에게 하루하루는 그저 가시방석일 따름입니다. 똑같이 일하면서도 직장에 대한 소속감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의 휑한 가슴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새로 제정된 비정규직 법안이 미흡하나마 경쟁 체계의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설 땅이 되게 해주십시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는 것이 거룩한 삶의 내용임을 가르쳐주신 주님, 우리 사회가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해 좀 더 따뜻하고 세심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정부에 반환된 주한미군기지… 환경오염 치유 미흡 [주한미군기지 781만 4천여 평이 5월 31일 정부에 반환됐다. 기지 관리권이 한국으로 이양됐지만 정부는 미국 측의 환경오염 치유 여부를 최종 확인하지 못한 상태라, 반환된 기지의 오염을 치유하는데 국민의 혈세 수백원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방부 관계자는 “미국 측은 바이오슬러핑 작업을 통해 오염을 치유했다고 설명했지만 우리 정부의 확인 요청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주님, 분단국의 비애를 느끼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이 땅의 강토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여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게 하던 땅은 더 이상 주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잘 행하는 것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옛 사람의 말이 새삼스럽게 들려옵니다. 군대가 주둔하던 자리가 불모의 땅으로 변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외침을 오늘도 들어야 합니까? 주님, 세상의 궁극적인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십시오. 잘못된 일을 바로 잡을 용기와 인내를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고, 생태학적 발자국을 적게 남기며 살도록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십시오. 동탄 신도시 동쪽 신도시 지정 [동탄 신도시 동쪽 660만평에 10만 5000여 개의 주택이 들어서 26만 명을 수용하게 되고, 분양가는 평당 800만 원대로 저렴하게 책정된다. 이 지역은 현재 개발 중인 동탄 신도시와 경부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는 곳으로 기존 동탄 1지구와 합하면 면적은 총 933만평, 가구 수는 14만 6000가구가 돼 지금까지 개발된 수도권 신도시 중 최대 규모이다.] 주님, 회색빛 건물이 늘어날수록 초록빛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산이 파헤쳐지고, 농지가 메워지면서 도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마을 공동체는 해체되고, 살풋한 기억의 매체들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서울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라고들 말합니다. 부동산 업자들과 투기꾼들만 신이 났습니다. 커가는 도시를 바라보면서 불가사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과민한 탓인지요? 인간적인 규모를 벗어난 대도시가 빚어내는 참극은 그저 견디어야만 하는 것입니까? 주님,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새로 건설되는 도시가 희망의 무덤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반짝이는 것에 눈이 팔려 설레임으로 다가서지만 그것이 사금파리나 유리 조각임을 알았을 때 느꼈던 어린시절의 허망함을 이제는 맛보지 않게 해주십시오.
기도로 품는 이슈17 2007년 09월 17일
기도로 품는 이슈17 2007년 09월 17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기도로 품는 이슈17.hwp [32 KBytes] 기도로 품는 이슈17 북미관계 급진전(사진) [북한과 미국이 6자회담의 양자관계정상화 실무그룹회의를 통해 핵시설 연내 불능화와 양국간 관계정상화 조치에 의견을 모았다. 북한은 올해 말까지 모든 핵프로그램을 전면신고하고 모든 핵시설을 불능화하며, 미국은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하고 적성국교역법 적용을 해제하는 등 관계정상화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미국의 조치는 북한에 대한 조지 부시 대통령의 메시지에 북한이 화답한 데 따른 것이다. 즉 부시 대통령은 아태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핵문제의 임기내 해결에 자신감을 보이면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결단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냈고, 이에 김위원장이 긍정적으로 답한 것이다. 북핵 불능화가 연내 이뤄진다면 한반도 평화 및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구축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탈 개연성이 높다. 이는 또 오는 9월 7일 호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의 한미정상회담과 10월초로 예정된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먹장구름 너머에 무지개가 있음을 일깨워주신 주님, 지난 60여 년 동안 한반도에 드리웠던 짙은 구름이 이제는 걷히는 것이옵니까? 희망의 조짐과 절망의 조짐이 갈마드는 세월을 가슴 졸인 채 살아온 우리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같은 문화와 습속과 언어를 가지고 살면서도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며 살아야 했던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인의 표를 지닌 채 살아왔습니다. 혼란과 두려움이 우리 삶의 기본 정황이었습니다. 우리 가슴에 맺힌 피멍울을 풀어주실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이제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이끌어주십시오.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게 해주시고, 생명과 평화의 새 세상을 함께 그리게 해주십시오. 텔레반 피랍자 전원 석방(사진) [아프가니스탄 텔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됐던 한국인 인질 23명 중 살해된 2명과 미리 석방된 2명을 제외한 19명이 피랍 42일 만인 8월 30일 모두 석방됐으며, 9월 2일 오전 6시 35분 대한항공 편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고 배형규 목사의 형과, 앞서 석방된 김지나 씨의 오빠도 배 목사와 심성민 씨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자리를 함께했다. 피랍자 중 최고령자인 유경식 씨는 일행을 대표해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도와주신 국민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피랍자 가족모임 차성민 대표는 “저희 가족들은 여러분께 받은 사랑을 돌려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먼저 돌아가신 배 목사와 심 씨 몫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버스를 타고 경기 안양시 샘안양병원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과 감격적인 재회를 했다. 정부가 발표한 인질 석방 조건은 크게 한국군 연내 철군과 아프간 선교 중지 두 가지였으며, 이번 사태 해결과정에서 소요된 제반비용에 대해 정부는 피랍자와 교회측에 ‘구상권’을 청구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주님, 당신의 아들딸들을 사지에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물로 부둥켜안는 그 손길들에서, 엄마의 볼을 쓰다듬으며 그 존재감을 확인하는 아이의 눈길에서 언뜻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부재하는 것 같은 고통의 심연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리던 조국에 돌아와서도 그들은 죄인처럼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들과 한국교회를 향한 세간의 돌팔매질이 매섭기만 합니다. 주님, 이번 사태가 한국교회의 성숙을 위한 밑돌이 되게 해주십시오. 진정한 선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데 있음을 잊지 말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현실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임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좁아진 하반기 채용시장 [올 하반기 채용규모는 전년 동기에 비해 10% 감소할 전망이다. 이는 주요 대기업을 비롯한 538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한 조사로, 하반기 주요 상장사의 일자리 창출계획은 1만 9814개에 그쳤다. 불과 한 달 전 “올 하반기 채용전망은 밝다”던 각종 취업기관 조사와 언론보도를 뒤집는 결과이다. 조사에 따르면 상장사 10개사 중 4개사가 하반기 채용계획이 없거나(26%) 미정(17%)이다. 향후 경제상황에 대해 낙관과 우려가 뒤섞이고 있는 가운데, 최근 등락을 거듭하는 주식시장과 금리․유가․환율․대선 등 불확실성이 커져 기업들이 연초에 세운 채용계획을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주님, 오늘의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대학입시의 관문 앞에서 한번 비틀거리고, 취직의 문 앞에서 지쳐 쓰러지는 저들에게 삶의 의미 물음은 어쩌면 화려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유의 호칭조차 갖지 못한 채 한 ‘덩어리’로 인식되는 20대를 가리켜 ‘88만원 세대’라 지칭한 이가 있습니다. 주님, 요엘 선지자를 통해 주셨던 주의 영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부어주십시오. 파시스트적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 등 떠밀리며 살기보다는, 세상의 가치관과 관습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줄 아는 눈빛이 맑은 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제 지친 저들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어 주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고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국내입양, 해외입양 넘어섰다 [보건복지부가 국회 복건복지위원회에 제출한 ‘국내외 입양현황’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입양 아동수는 742명으로 전체 입양 아동 수 1,223명 중 69.2%를 차지해 우리나라 입양 사상 최초로 국내 입양이 국외 입양을 추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국내입양의 폭발적인 증가라기보다는 정부가 올해부터 추진 중인 ‘국내입양 우선 추진제’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국내입양 우선추진제는 ‘입양대상 아동’으로 결정된 후 5개월 동안은 국내 입양이 우선되는 제도로, 올해 1월1일 이후 입양대상으로 결정된 아동은 다섯 달 동안 해외로 입양될 수 없어 국외입양 아동의 수가 급감한 것으로 복지부 관계자는 분석했다.] 주님, 우리는 경제대국이라는 환상에 빠져 우리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입니다. 수많은 아이들을 수출하는 나라라는 오명, 어려운 나라를 돕는 일에 인색한 나라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는 한 우리는 선진국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핏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야말로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질긴 거미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나의 부모며 형제자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습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강도를 만난 것 같은 상황에 처한 아이들의 품이 되어주려는 이들이 많아지게 해주십시오.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는 이들에게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충만히 내려주십시오. 달아오르는 2008 미국 대선 [2008년 11월 4일에 실시되는 미국 대선 고지를 향한 경쟁이 과거 어느 선거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현재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전국적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다. 한편 공화당 내에서는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단연 선두로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이런 와중에 9월 6일 공식출마를 선언한 프레드 톰슨 전 상원의원이 ‘제2의 레이건’으로 주목받고 있다.] 주님,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이미 미국만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동구권이 해체된 이후에 미국은 전 세계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자리에 서있습니다. 권력은 스스로 부패한다는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힘을 가질수록 더욱 겸손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강자가 약자의 아픔을 헤아리고 그들의 살 권리를 확보해줄 수는 없는 것입니까? 추수를 할 때에도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놓으라고 하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지배의 욕구를 넘어 섬김의 의지를 가진 사람, 병든 지구의 신음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아는 이를 일으켜 세워주십시오.
기도로 품는 이슈2 2006년 12월 19일
기도로 품는 이슈2 2006년 12월 19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기도로 품는 이슈2 (다음의 열 가지 항목은 다움의 네티즌들이 뽑은 2006년도의 이슈입니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이 때에 다시 한번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지난 날들을 돌아봅니다. 걸림돌처럼 우리 앞에 놓였던 그 사건들을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주님께 청해봅니다.) 1. 황우석 사태 하나님,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평원 한 복판에 세워진 바벨탑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남에게 뒤쳐질까 두려워 거짓을 더위잡았던 한 사람의 몰락은 우리에게 아픈 경고가 되고 있습니다. 생명의 문제를 경제 문제로 환원시키고는 거기에 열광했던 우리들의 천박함을 꾸짖어주십시오. 힘겨울지라도 진실의 터 위에 우리 인생의 집을 짓게 해주십시오. 말 없이 정진하는 모든 과학도들의 날개가 꺾이지 않도록 저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십시오. 2. 북한의 핵실험 주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도 인류는 여전히 불화의 벌판을 질주하고 있습니다. 절박한 북한의 사정을 모르지 않지만, 살기 위해서 핵을 택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은 너무도 근시안적입니다. 한반도에 관련된 모든 이해당사국들이 자기 파멸에 이르고야말 어리석은 경주를 그만 두게 해주십시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예언자의 꿈이 이 한반도에서 현실이 되게 해주십시오. 3.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선출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를 원하지만 분쟁과 전쟁의 소식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의 소음이 멈출 날은 언제입니까? 수단과 소말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파간의 갈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종으로 세움을 입은 반기문 총장에게 이 모든 일들을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이 시대의 광기에 맞설만한 통찰력과 용기와 믿음을 그에게 허락해주십시오. 4. 도박 공화국 - 바다 이야기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는 사도의 가르침이 무색한 세상입니다. 세상은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가치관이 전도된 이 세상에서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사행성 도박장에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을 향한 몸짓이 아니라 절망으로의 투신입니다. 주님, 사람들을 도박판으로 은밀히 잡아끄는 모든 제도와 법령들이 정비되게 해주시고, 그 일을 통해 이득을 꾀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두려움을 보여주십시오. 5. 한미 FTA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앞두고 어떤 이들은 이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이 ‘낯선 식민지’의 도래라고 말합니다. 어느 편이든 진실의 일면만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일러주십시오. 어느 길이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살아가는 ‘땅의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는” 세상의 꿈을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6. 부동산 광풍 주님, 지금 이 땅에서 집은 더 이상 아늑한 보금자리가 아닙니다. 부동산 광풍에 떠밀려 부평초처럼 흔들리는 이들에게 집은 사회적 신분의 기호이고, 돈벌이의 수단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내집 마련의 꿈은 가진 자들의 투기로 말미암아 가뭇없이 스러지고 있습니다. 주님, 정착 생활의 안락함에 젖어들 즈음 초막에 머물며 조상들의 신산스런 삶과 주님의 은총을 톺아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7. 박근혜 피습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하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를 원합니다. 소통의 길이 막힐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존재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들이 있어 세상은 조화롭습니다.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생명에게 위해를 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나움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8. 첫 여성 총리의 탄생 가부장적인 문화가 여전히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서 여성 총리가 탄생하게 된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그로 하여금 이 땅의 여성들이 보여온 검질긴 생명력과 포용력으로 상처난 것들을 얼싸안게 해주시고, 나뉜 것들을 하나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해주십시오. 그가 이르는 곳마다 거친 마음들이 부드러워지게 하시고, 막혔던 소통의 통로가 열리게 해주십시오. 그의 존재가 이 땅의 딸들에게 더 큰 희망의 징조가 되게 해주십시오. 9. 중국의 고대사 왜곡 끊임없이 타자를 만들어내고 그들과의 차이를 강조하고 배제함으로써 ‘우리’라는 일체감을 굳혀가는 것이 제국주의자들의 버릇인 것 같습니다. 남의 역사를 왜곡해서라도 자민족이 처한 현재적 어려움을 돌파하려는 저들의 의도가 불순합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시편 기자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주님, 저들의 불순한 의도를 깨뜨려주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타자를 배척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더불어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는 밝은 눈을 허락해주십시오. 10. 일본, 독도 주변 해역 탐사 시도 뭇 나라의 도모를 흩으시고, 뭇 민족의 계획을 무효로 돌리시는 하나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이 아시아인들에게 가했던 폭력과 광기의 역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정신대 할머니들의 억눌린 신음소리가 지금도 이 산하를 떠돌고 있고, 식민주의의 잔재가 망령처럼 우리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주님, 낡은 토대 위에 새로운 역사를 세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역사를 날조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들기 전에 먼저 엎드려 고통받은 이들 앞에 사죄할 수 있는 겸허함을 저들에게 허락해주십시오.
기도로 품는 이슈20 2007년 10월 23일
기도로 품는 이슈20 2007년 10월 23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기도로 품는 이슈20 12월 29일이면 한국도 ‘사형폐지국가’ [‘사형폐지의 날’인 10월 10일, 인권 종교지도자 300명과 20여개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사형폐지국가선포식’을 열었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30일 사형수 23명에 대한 사형을 끝으로 지금까지 사형을 집행한 적이 없어, 10년 동안 사형집행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는 국제기준에 따라 올 12월 29일에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될 예정이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저 역시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이 확정됐던 사람”이라며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준 인권으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사형 폐지 지지의사를 밝혔다. 또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은 “우리 국민의 법 감정이 사형제 폐지를 반대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의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지했다”면서 “내년은 사형제 폐지를 확인하고 기념하는 자리가 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습니다. 아무리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그도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며 사랑받기를 갈망하는 존재임을 망각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흉측한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홉스의 말에 공감하게 되고, 공분에 치를 떨기도 합니다. 정녕 그들 속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은 심각한 편견과 무지와 오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팔은 그들까지도 감싸안을 만큼 넉넉함을 믿습니다. 주님, 이제 우리나라가 ‘실질적 사형 폐지국’을 넘어 사형 폐지를 선언하는 나라로 성장해가게 해주십시오. 그를 통해 우리 국민 모두가 생명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내면화한 채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노벨평화상도 환경을 선택했다 [‘노벨상의 꽃’이라 불리는 노벨평화상이 올해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유엔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에 돌아갔다. 1895년 제정된 노벨 평화상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지를 받들어 군비 축소나 평화 회담 개최 등 협소한 의미의 ‘평화’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노벨 위원회는 인류가 처한 갈등과 위협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에 발맞춰 평화의 의미를 분쟁해결 및 사형폐지에서 ‘환경’ 분야에까지 확대했다. 지구온난화라는 위험에 대처하는 노력이 지구 평화와 안전에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노벨위원회는 기후변화와 평화의 관련성에 대해 “기후변화는 대규모 난민과 자원에 대한 폭력적 경쟁을 유발해 궁극적으로 인류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히브리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고 그들을 해방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 아무리 귀를 막아도 피조물의 신음소리가 처연하게 들려오는 세상입니다. 어느 날 문득 봄이 되어도 꽃이 피지 않고, 새들이 노래하기를 그치고, 풀벌레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죽음의 세상이 올 것만 같아 애가 탑니다. ‘보시기에 좋다’고 경탄하셨던 주님의 세계, 잘 돌보라고 맡겨주신 이 세상을 우리는 과도한 욕심으로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제 소박하고 불편한 삶을 능동적으로 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해주십시오. ‘더 많이, 더 편리하게’ 사는 삶이 얼마나 반생명적이고 폭력적인 삶의 방식인지를 깨닫게 해주십시오. 생명과 평화가 입 맞추는 세상을 열기 위해 두려움 없이 전진하는 우리가 되게 해주십시오. 로스쿨 정원 놓고 시민단체 반발 [2009년 개원하는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의 첫해 총 정원을 1,500명으로 정한 정부안이 나오자 대학과 시민단체들이 잇따라 반대 모임을 갖는 등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전국 법대교수들은 10월 18일 로스쿨 정부안이 그대로 관철될 경우 로스쿨 설립 신청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전국 200여 개 4년제 대학모임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도 정부의 로스쿨 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특히 대학들은 청와대가 이날 로스쿨 정원에 대해 “교육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한 목소리로 불만을 표시했다. 1,500명 발표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법조계도 대학의 반대가 거세지자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해, 대학과 법조계 사이에 낀 교육부는 국회 재보고를 앞두고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모습이다.] 주님,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갈등이 불가피한 것입니까? 재화나 기회는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차지하려는 이들이 많아 다툼이 생겼을 때 그것을 조정하는 것이 법의 역할인 줄로 압니다. 법이 공정해야 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과거 우매했던 시절의 유언비어가 아니라, 오늘도 역시 통용되는 말처럼 인식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 법을 집행하는 자리가 신분상승의 가장 확실한 길로 여겨지는 이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 문제를 두고 다투고 있는 여러 주체들이 한번만이라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판단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성장’에만 관심 있는 경제단체들 [경제단체들이 대통령 선거를 두 달 앞두고 경제정책과 관련한 각종 요구를 쏟아냈다. 대선 주자에게 정책 건의 형식으로 전달될 이들 요구의 내용은 대기업 중심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대선 주자들에게 제시한 ‘경영계 대선 공약 정책 건의서’를 보면,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부터 법인세율 인하에 이르기까지 대기업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내용들이 많았고, 대한상공회의소가 대선주자들에게 전달한 정책 건의 내용과, 전경련이 내놓은 ‘미래한국비전’도 규제 완화와 폐지가 주된 내용이라, 경제단체들도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주님, 금융위기를 겪은 후 변화된 국제경제질서 속에서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고용불안, 비정규직의 증가, 실직의 위험 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가슴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포의 짙은 그늘이 드리웠습니다. 행복한 얼굴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회의 공공성이 확보되지 않은 우리 현실 속에서 분배의 문제를 소홀히 하는 성장은 빈부의 격차만을 크게 하지 않을는지요? 모든 경제인들이 추수하는 밭의 한 모퉁이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베지 말고 남겨두라 하셨던 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대통령선거가 강자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기회로 악용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가계 통신비 OECD중 최고 [10월 18일 정보통신부가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김희정 의원(한나라당)에게 제출한 ‘가계통신 서비스 소비 형태 및 통신 지출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가계 소비지출 대비 통신비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2003년 기준 우리나라가 5.6%로 가장 높았고, 헝가리가 4.8%, 네덜란드가 4.1%로 뒤를 이었다. 반면 프랑스(2.7%) 일본(2.7%) 영국(2.3%) 미국(1.8%) 등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낮았다. 2005년 연구결과가 뒤늦게 공개되자, 정통부가 연구결과를 그동안 숨기면서까지 소비자들의 통신 요금 인하 요구를 가로막아 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실제로 2005년~2006년에는 통신 요금인하가 이뤄지지 않았다.] 주님,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문득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란히 서 있던 젊은이들 여섯 명이 저마다 손 전화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대한민국은 통화중’이라는 말이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벽을 더위잡고 위로 오르는 담쟁이넝쿨처럼 사람들은 뭔가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것은 소통에의 갈망일 것입니다. 그런데 통화량의 증대가 소통의 증대로 이어지는 것인지요? 주님, 밖에서만 샘물을 찾으면 목마름은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샘물은 이미 우리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해주십시오. 그 샘물을 떠 목마른 이의 마른 목을 축여주며 살게 해주십시오. 피상적인 만남에 만족하지 말게 해주시고, 서로의 아픔과 상처까지도 보듬어 안으려는 사랑의 마음이 우리 사이에 흐르게 해주십시오. 아멘.
기도로 품는 이슈23 2007년 12월 18일
기도로 품는 이슈23 2007년 12월 18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자비하신 주님, 동지 무렵 밤은 가장 어둡습니다. 분주함 속에 달려온 일 년을 갈무리해야 하는 지금 엄부렁한 우리 영혼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고요히 돌이켜 스스로를 성찰해야 하는 이 시간, 우리 마음은 자꾸만 서해안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유조선에서 흘러나온 기름띠가 해안을 뒤덮는 광경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분노의 감정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습니다. 속이 타들어가는 지역 주민들의 한숨소리가 우리의 평안한 잠을 방해했고, 기름을 뒤발한 고둥과 게, 뿔논병아리의 끔벅이는 눈이 서러웠습니다. 개펄에 스며든 기름이 생태계에 미칠 영향도 도무지 가늠할 길이 없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영원히 청정할 것만 같았던,, 마음에 울혈 든 사람들의 가슴을 시원케 해주었던 바다의 신음소리가 이제는 우리 가슴을 찢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우리는 지금 기적을 보고 있습니다. 저 태안 바닷가 모래사장에 갯바위에 조가비처럼 엎드려 있는 사람들, 그들의 울력다짐이 기적을 만들고 있습니다. 주님, 아직도 우리 속에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누군가의 신음소리에 공명하는 이들이 이렇게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이 우리의 일상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안전불감증이라는 말이 사라지게 해주셔서, 더 이상 무고한 생명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주님, 변전을 거듭하는 것이 역사입니까?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지혜를 주시고, 명철을 주시고,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히브리 시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왕이 의를 이루면 산들이 백성에게 평화를 안겨 주며, 언덕들이 백성에게 정의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시72:3) 새로 선출된 대통령 당선자의 품을 넓혀주십시오.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해주십시오. 겨울 칼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서 있던 이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비굴함과 천박함을 강요하는 사회에 살면서 속으로 신음을 삼켜야 했던 이들의 은결든 마음을 어루만지게 해주십시오. 그의 마음 눈을 여시어, 우주에 편만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세계를 돌보고 가꾸는 일에 마음을 다하게 해주십시오. 그를 선한 길로 인도해주십시오. 아멘.
기도로 품는 이슈27 2008년 03월 11일
기도로 품는 이슈27 2008년 03월 11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부활의 새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주님, 마당가에 피어난 청매실 꽃봉오리를 세면서 기적에나 접한 듯 마냥 기뻤습니다. 문득 정진규 시인의 흥취가 물씬 느껴졌습니다.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산천을 보며 그는 노래했습니다.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왈큰왈큰 알몸 열어 보이고 있어 무덤도 열고 있어 때가 되니 그냥 그렇게 하고 있어” 자유를 가로막는 인간 세상의 반생명성에 혀를 찬 후 그는 노래 끝에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 한 사날 잘 열리고 있어 누구나 오셔, 아름답게 놀다 가셔!“ 이 구절을 음미하면서 마치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받은 듯 흐뭇해졌습니다. 하지만 눈길을 사람살이의 마당으로 돌리면 마음은 어느새 잿빛으로 변해버립니다. 어머니와 세 딸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을 살해한 이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한때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사람의 이 처참한 전락에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과 악, 빛과 어둠, 사랑과 증오의 경계선에서 서성입니다. 욕망을 부추기는 소비주의의 문화는 우리를 악과 어둠과 증오를 향해 몰아갑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의 심연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우리가 어긋난 길로 갈 때마다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우리 길을 막아주십시오. 가인을 향한 주님의 경고가 나팔소리가 되어 들려옵니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7) 새롭게 구성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이들의 면면을 보면서 많은 이들의 가슴은 숯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인 그들의 삶의 방식이 얼마나 서민 대중들의 삶과 유리된 것인지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재산 축적에 탁월한 수완을 보인 그들을 보면서 차마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가난한 백성을 억압과 폭력에서 건져 그 목숨을 살려 주며 그들의 피를 귀중하게 여기는 지도자를 언급하면서 “그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가 그치지 않고, 그를 위하여 비는 복이 늘 계속될 것”(시72:15)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주님, 국정을 책임진 이들에게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불필요한 잉여가 아니라, 사람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협력해야 할 소중한 파트너로 여기게 해주십시오. 주님,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신입생들의 기강을 세운다며 얼차려를 주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슬펐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군사주의 문화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법, 다른 이들의 다름을 존중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채 우리는 획일적 가치에 순종하는 법만을 배우고, 또 가르칩니다 며칠 전에는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일제 고사를 치렀습니다.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성적에 따라 줄을 서게 되었습니다. 서울시의 교육 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이가 한 말을 들으셨는지요? “나라가 아이들에게 어릴 적부터 경쟁하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이 말을 듣고는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그는 서열화야말로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첩경이라고 믿는 듯합니다. 남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누군가의 선한 이웃이 되는 일은 교육이 감당할 과제가 아니라는 말인지요? 주님, 문득 여러 해 전에 어느 학생에게서 받았던 편지가 떠올랐습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만이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는 이 교실, 이 학교, 이 사회가 우리를 죽게 만듭니다.” 이런 교육 풍토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질서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품부하신 삶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또 그것을 충분히 누리며 살도록 격려하는 일은 세상 물정 모르는 이의 췌언(贅言)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요? 주님, 승자독식 사회의 망령을 이길 힘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자비하신 주님,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 사고들을 보면서 우리 마음에 굳은 살이 생겼습니다.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울지도 아파하지도 않는 저희들입니다. 우리의 굳은 살과 같은 마음 도려내주시고, 새살과 같은 마음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절망의 어둠이 우리 마음을 뒤덮을지라도 희망의 노래 힘차게 부르는 우리가 되게 해주십시오. 생명의 따뜻함으로 무정한 세상의 굳음을 깨뜨리게 해주십시오. 부활의 새 노래로 잠든 생명을 깨우게 해주십시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립니다. 아멘.
기도로 품는 이슈4 2007년 01월 19일
기도로 품는 이슈4 2007년 01월 19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노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 제안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9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대통령 4년 연임제를 도입하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르는 내용으로 개헌을 발의하겠다고 선언했다. 청와대는 대국민 홍보와 대야 압박에 적극 나서고 있는 반면, 한나라당 등 야당은 현 정부 임기 중 개헌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개헌을 둘러싼 대치 정국이 장기화될 조짐이다.] 자비하신 하나님, 국가의 정치체제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섭리해가시는 중요한 도구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치인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붕괴 직전입니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습니다. 대통령 연임제 개헌을 둘러싼 날선 공방이 소모적인 논쟁으로 끝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정파간의 이해를 떠나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가장 소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정치인들과 국민들에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 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누군가에 대한 혹은 어느 정치집단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을 떠나서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허락하여주십시오. 정부 군복무 단축 방안 검토 [범정부 차원의 ‘병역자원 연구기획단’은 지난 5일 현역군인의 복무기간을 18개월로 단축하는 ‘병역제도 개선방안’을 청와대와 국방부에 보고하였고, 정부는 군 복무기간을 단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던 예언자들의 꿈이 실현될 날은 언제입니까? 증오와 적개심과 의구심으로 쌓아올린 장벽이 분단의 장벽보다 높아진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평화와 사랑의 세상을 열기 위해 힘써야 할 젊은이들이 군대에 복무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현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군복무 단축에 대한 논의가 어떤 이들에게는 희망의 소식이 되고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운 소식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시오. 현대차 노조 부분파업 돌입 [연말 성과금 차등 지급에 반발하고 있는 현대차 노조는 지난 15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곧바로 파업에 들어가면서 공장 가동이 중단됐다. 현대차 노조가 잔업과 특근을 거부하며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간 12월 28일 이후 생산 차질로 인한 손실액이 27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일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소명임을 믿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일의 의미는 돈벌이로 환원되면서 우리들의 삶의 질은 점점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 비해서 배고픔은 덜하지만 감사와 만족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노사관계가 확립되게 해주십시오. 기업의 운영이 투명하게 이루어지게 해주시고,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게 해주십시오. 노동자와 사용자와 정부가 상생의 마음으로 협력하여 이 난국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노동이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의 일부분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민영/이찬 사건’ 가정폭력 전담부서 배당 [결혼 12여 일 만에 이혼을 한 탤런트 이민영․이찬 커플의 결별 원인이 남자 쪽의 폭행으로 밝혀졌다. 이민영 씨는 폭행으로 유산을 하고 코가 골절됐다며 이찬 씨를 가정폭력 및 상해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이민영 씨 고소는 본질이 가정폭력 사건이기 때문에 가정폭력 전담부서인 형사7부 검사에게 배당했다”고 밝혔다.] 사람의 모든 만남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정의가 무너진 세상, 죄로 얼룩진 세상에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입니다. 사랑의 기쁨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음의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관계에 욕심이 끼어드는 순간 사랑은 잿빛으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사랑의 고백이 원망의 말로 바뀌고, 다정한 쓰다듬음이 폭력으로 변하는 현실이 두렵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그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게 해주시고, 덕보려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기보다는 상대에게 귀한 선물이 되려는 마음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잇단 놀이공원 안전사고 [서울 잠실 롯데월드가 안전사고 여파로 전면 보수공사를 위해 4개월 전면 휴장을 선언한 지 일주일 만에 국내 최대 놀이시설인 에버랜드에서도 사고로 한 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한국종합유원시설협회는 대구 우방랜드와 경남 양산 통도환타지아, 대전 꿈돌이랜드 등의 놀이시설에서도 안전문제가 지적된다고 밝혔다. 잇단 놀이공원 사고로 방학을 맞아 놀이공원을 찾으려는 시민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 사람이 아니라 이윤이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이 난폭한 시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구김살없이 환한 아이들의 미소와 웃음소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줍니다. 과잉교육의 열풍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영혼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저들이 쉼을 위해 모처럼 찾은 놀이시설에서 어린이들의 웃음이 고통의 비명으로 바뀌고, 부모들의 미소가 슬픔의 탄식으로 바꾸지 않게 해주십시오.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의 살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 체제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하게 해주십시오.
기도로 품는 이슈6 2007년 02월 23일
기도로 품는 이슈6 2007년 02월 23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기도로 품는 이슈6 1. 더워지는 지구와 한반도 <기상청은 올해 우리나라 기온은 평년보다 0.5도 이상 높고, 이상 기온현상이 많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따뜻한 겨울로 인해 논밭의 해충이 소멸되지 않아 봄철 농작물 피해와 심한 조기 황사현상이 우려되고, 여름 찜통더위와 초대형 태풍 습격이 예상된다고 경고했다. 한편, 영국 기상청도 올해가 세계적으로 가장 더운 한해가 될 것으로 예측했으며, 심각한 물 부족 상태와 수많은 동식물이 멸종할 것이라 경고했다.> 출애굽기를 읽을 때마다 눈 앞에서 전개되는 비극적 자연재해를 보면서도 여전히 완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던 바로를 보며 혀를 찼습니다. 그의 무지와 굳은 마음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과 피조세계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주님, 그런데 바로는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이 시대의 바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느라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잘 보전하는 일에 게을렀습니다. 묵시록의 네 기사가 망령처럼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습니다. 주님, 너무 늦기 전에 돌이키게 해주십시오. 불편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소박한 삶을 기꺼워하는 마음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2. 정부, 자살방지 종합대책 마련 <통계청에 따르면 자살로 죽은 사람은 2005년 1만2047명으로 2000년 6460명에 비해 두 배로 늘었고, 육상 교통사고에 따른 사망자는 2005년 7776명으로 2000년 1만1844명에 비해 34.3% 줄었다. 정부는 자살로 인한 사망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판단해 범정부적인 종합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다음달부터 시민단체ㆍ종교계 등이 대거 참여하는 ‘생명존중 인식개선 캠페인’ 대대적 전개, 긴급 상담전화 요원 증원, 자살관련 유해 사이트 감독 강화 등 제도개선을 추진하기로 했다.> 생명은 살라는 명령임을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기에 늘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한 순간은 살아있음이 은총으로 경험되다가도 다른 순간 삶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되어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사랑의 버팀목입니다. 주님,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시오. 우리 마음에 칙칙한 어둠이 찾아들 때 그 어둠을 배경으로 떠오르는 영롱한 별빛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찬미하는 이들의 소리가 지금 흐느끼는 영혼들의 가슴에도 가 닿게 해주십시오. 3. 신입사원까지 이력서만 28회 <지난해 2월 4년제 대학졸업자 10명중 6명이 취업에 성공했고 이들은 취업하기까지 평균 27.8회 입사지원서를 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전공별 취업자비율은 경상계열이 72.6%로 가장 높았고, 이공(70.5%), 사회과학(65.8%), 예체능(61.2%) 순이었다. 인문계열은 57.4%로 가장 낮았다. ‘취업 성공 요인’ 설문에서는 인턴십 등 실무경험이 33.6%로 가장 많이 꼽혔고, 주위 인맥활용, 관련분야 자격증 취득, 스터디 등 철저한 면접 준비, 외국어 능력 순으로 나타났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소중한 선물임을 믿습니다. ‘할 일을 얻은 사람은 또 다른 행복을 찾지 않는다’는 카알라일의 말은 노동이 곧 자기 실현의 기회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환가치와 이윤이 최대의 관심이 되면서 노동의 의미는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굳게 닫힌 취업의 문 밖에 선 채 울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어찌 해야 합니까? 세상이 뭐라 평가하든 그들은 모두 소중한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저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도록 기회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기쁨과 창의성과 협동을 바탕으로 하는 참된 노동의 즐거움을 저들도 누리게 해주십시오. 4. 혼혈․입양 초등 교과서 수록 <학생들에게 혼혈아와 입양아들에 대한 차별이 잘못됐음을 가르치는 더불어 살아가는 교육이 올해 신학기부터 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이뤄진다. 교육부는 각종 불이익을 받고 있는 다문화 가정 자녀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5학년과 6학년 도덕 교과서에 혼혈아와 입양아 문제를 다룬 과제를 신설했다고 밝혔다. 국내 초․중․고에 다니는 국제결혼가정 자녀는 2005년 6121명에서 현재 7998명으로 30.6% 증가하는 등 매년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이방 나그네들을 억압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펼침막 광고를 볼 때마다 왠지 모욕당한 듯한 느낌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낭만적인 소리꾼의 허사인지요? ‘사람만이 희망이다’란 말은 철부지 시인의 잠꼬대같은 소리인지요? 경제력, 문화, 피부색, 인종에 따라 사람의 값을 매기는 우리들 내부의 식민지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다문화 가정에 속한 이들이 우리 외부에 있는 낯선 자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풍부하게 해주는 소중한 이들임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5. 미국하원, 일본군위안부 청문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피해자 청문회가 미 의회 사상 처음으로, 15일 오후 하원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원회에서 열렸다. 한국인 2명 외에 네덜란드인 얀 러프 오헤른도 증인으로 출석하여 위안부 피해가 아시아만의 일이 아닌, 전 세계적 이슈임을 드러냈다. 아․태․소위 위원장은 “일본군 성노예는 일본 정부가 저지른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 사건이며, 신체장애와 학살 등을 수반한 전례 없이 잔인하고 중대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한편, 주미 일본대사는 아․태․소위에 보낸 서한에서 "일본은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을 인정했고 피해자들에게 보상도 했다"고 주장하며 유감을 표시했다.> 늙고 메말라 마른 등걸처럼 변해버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분들이 헤쳐나와야 했던 자기 모멸의 세월이 아프게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아픈 기억을 망각 속에 묻어두지 않는 것은 그런 비극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절한 염원 때문일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저들이 감내해야 했던 아픔을 위로하실 분은 주님 뿐이십니다. 아직도 피흘리고 있는 그분들의 상처를 빛으로 바꿔주십시오. 그리고 가해자들에게 참회하는 영을 허락해주십시오. 거짓의 터전 위에 세우는 어떤 집도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기도로 품는 이슈8 2007년 04월 04일
기도로 품는 이슈8 2007년 04월 04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기도로 품는 이슈8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타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4월 2일 극적으로 타결됨에 따라 우리나라 경제는 세계 최강인 미국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국내업체들은 원자재를 값싸게 조달할 수 있고, 중국․일본․아세안을 합친 것보다 더 큰 미국 수입시장에 대한 접근이 쉬워졌다. 한편 축산, 낙농, 곡물, 과일, 채소, 잎담배, 꿀, 인삼, 등 주요 농산품 대부분이 직접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농가피해가 우려되며, 미국 기업과 직접 경쟁해야 하는 서비스업 분야의 전면적 개편도 예상된다.]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하나님, 어떤 일도 현실 속에서 경험되기 전에는 그 실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다가온 한미 자유무역 협정이 선악과가 될지 생명의 열매가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기업들이 이 협정을 환영하고, 중소상공인이나 농어민들이 반대하는 것을 볼 때 이 체제는 약자들에게는 독배가 될 가능성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약한 자들의 살 권리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 이 협상의 타결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눈물 흘리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십시오. 그리고 정책입안자들의 마음이 사회적 약자들의 마음 자리에까지 낮아지게 해주십시오. 서울대 연구팀, 세계 첫 ‘복제늑대’ 공개 [서울대 연구팀은 멸종 위기에 처한 회색 늑대 2마리를 복제하여 1년 5개월째 정상적으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복제늑대를 서울대공원 특별전시관에 전시해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라 밝혔다. 서울대 교수(수의학과)가 이끄는 동물 복제 팀은 지난해 12월 암컷 개 복제에 성공했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개와 늑대 복제는 세계에서 유일한 연구 성과이다.] 작년 봄을 뜨겁게 달구었던 줄기세포 논란은 여전히 미완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복제했다는 늑대는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원시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실험실에서 생산된 원시성이라는 아이러니 앞에 서있습니다. 과학은 계몽의 빛이 될 수도 있지만 무저갱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 혼돈을 밝히는 참 빛을 주십시오. 또 다시 통계의 오류 혹은 왜곡을 지적하는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거짓의 나무에 열리는 과학의 열매는 우리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재앙일 수도 있음을 알아차리게 해주십시오. 대구, 2011년 세계육상대회 개최 확정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27일 집행이사회를 열어 2011년 제 13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세계육상) 개최지로 대구를 확정했다. 한국은 이로써 이탈리아, 일본, 독일, 스웨덴, 스페인, 프랑스에 이어 일곱 번째로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하계올림픽, 월드컵축구, 세계육상)를 모두 개최한 스포츠 외교 강국 반열에 올랐다. 세계육상은 211개국에서 3,500여명의 선수단과 취재진 3,000여 명이 참가하고 지구촌 65억 명이 시청하는 행사로 단일 스포츠 종목으로는 월드컵 축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이다.] 경기장을 내달리는 젊은 건각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하느라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진 우리의 눈 앞에서 분수처럼 솟구치는 그들의 건강한 몸은 마치 기적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 기쁜 소식을 듣고도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어도 텅 비어 있는 학교 운동장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 대회가 계기가 되어 공부에 지친 아이들이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운동장을 내달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도록 이끌어주십시오. 또 기왕 유치한 대회이니 최선을 다해 준비하게 해주시고,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이 땅에서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내년 하반기부터 모집․채용 시 연령차별 금지 [노동부는 내년 하반기부터 모집과 채용 부문에서 연령차별을 금지하고, 퇴직이나 해고, 승진, 임금 등에서도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개정 법률을 입법예고하고 2008년 하반기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업주가 모집․채용 단계에서 연령차별을 할 경우,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고 확정된 시정명령을 이향하지 않으면 1억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가된다.] 출애굽의 길로 히브리인들을 이끄신 주님, 우리는 지금까지 일상화된 차별을 운명인양 받아들이며 살아왔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 곳곳에 드리운 금제의 선은 강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조그마한 끈에 묶여 있는 덩치 큰 코끼리처럼 우리는 전통과 관습과 제도에 묶인 채 살았습니다. 하지만 차별은 운명이 아님을 이제는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회적 관습의 장벽을 넘나들며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품부받은 생의 몫을 온전히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주님, 이런 일을 계기로 해서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성숙한 사회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레바논 파병 한국군 주둔지 확정 [레바논 유엔평화유지군(UNIFIL) 소속으로 활동하게 될 한국군의 주둔지가 남부 해안도시 티레에서 3㎞ 떨어진 구릉지대로 확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군 선발대는 오는 6월에, 본진은 7월에 각각 레바논에 파병돼 감시 및 정찰임무를 맡을 예정이며, 레바논에 파견돼 파병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한국군 관계자는 ‘티레가 유엔이 관할하고 있는 지역 가운데 가장 안전한 곳’이라 밝혔다. 현재 레바논에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 등 29개국 출신 만3천여 명이 유엔군으로 주둔하면서 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고 있다.] 주님께서 발로 걸으셨던 두로 땅에 우리의 젊은이들이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1948년의 나크바(‘재앙’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추방을 일컫는 말) 이래 자기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초라한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땅입니다. 안전하다고는 하나, 화약고나 다를 바 없는 그곳에 가는 이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점령군이 아니라 난민들의 벗이 되어 그들의 아픔과 한을 사랑과 돌보는 일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과 만나게 해주십시오. 우리 젊은이들이 흘리는 소중한 땀방울 하나 하나가 분쟁의 땅에 묻히는 평화의 씨앗이 되게 해주십시오. 한일 외교장관 회담…위안부 사과, 독도, 신사참배는 종전 입장 고수 [한국과 일본은 3월 31일 외교장관 회담을 열고 북한 핵 문제와 과거사 등 양국 현안을 논의했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군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최근 일본의 잘못된 언행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했고, 아소 다로 일본 외상은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계승하고 위안부 당사자들에 대해 사죄한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 문제와 독도 영유권 문제 등에 대해서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 냉랭한 한·일 관계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줬다.] 피해자들에게 있어서 과거에 겪었던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가해자들의 뻔뻔한 태도입니다. 군대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가슴에는 지금도 선혈이 흐르고 있습니다.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까닭은, 인류의 역사에 다시는 그런 야만적인 행위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자각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가해자인 일본의 거듭된 망언은 역사의 진보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깨뜨리기에 충분합니다. 주님, 원수들을 벌해달라고 빌었던 시편 시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함께 살아야 할 이웃입니다. 그들에게 잘못을 시인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올 봄 이어지는 최악황사 [1일 한반도 상공을 뒤덮었던 최악의 황사는 강한 바람에 밀려 한반도 남동쪽으로 물러갔지만, 기상청은 올봄 황사가 예년보다 자주 발생하고 이번 달 중 강한 황사가 2~3차례 더 나타나겠다고 밝혔다. 내몽골과 고비 사막에서 지난달 30일 발원해 31일부터 한반도 상공을 습격한 황사는 올 들어 6번째 황사로, 미세먼지는 평소의 20~40배에 달했으며, 전국적으로 동시에 황사 경보가 발효된 것은 기상청이 미세먼지 농도를 측정해 황사 특보를 발표한 2002년 이후 처음이다.] 봄철의 불청객인 황사 때문에 우리의 봄이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뿌옇게 흐린 하늘이 마치 우리가 살아가게 될 디스토피아의 예시인 듯 싶어 가슴이 아픕니다. 황사 마스크를 쓴 채 종종걸음으로 등교하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며 죄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이 누려야 할 미래의 자원까지 강탈해 배를 불린 자들입니다. 주님, 너무 늦기 전에 돌이킬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지구의 공멸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이 미친 경주를 그치고, 아름다운 초록별 지구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모든 나라와 개인들이, 특히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들이 노력하게 해주십시오.
기도로 품은 이슈28 2009년 04월 10일
기도로 품은 이슈28 2009년 04월 10일 작성자 김기석 (.) 등 록 파 일 이 혼곤한 풍요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오, 주님, 부활의 노래 소리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칙칙하고 무거운 겨울옷을 벗어던진 이의 홀가분함으로 봄의 노래, 생명의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우리의 선율은 이내 단조(短調)로 바뀌고 맙니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조차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요즘입니다. 무고한 어린 학생들이 무자비한 폭력 앞에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이 죽음 앞에서는 '부끄럽다, 참담하다'는 말조차 췌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히브리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주님, 어린 딸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들의 통곡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주님의 마음도 그 어머니들의 마음처럼 찢길 듯 아프십니까? 세상의 어떤 말로도 위로받을 길 없는 그들을 어찌해야 합니까? 무고하게 흘린 그 어린 학생들의 피를 어찌해야 합니까? 오늘만큼은 "어떤 피조물의 비열함, 사악함, 오류에 의해서도 주님은 침해당하시지 않는다"는 성인의 고백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주님, 꽂이 진 자리에 남는 열매처럼 이혜진 꽃, 우예슬 꽃이 스러진 자리에서 폭력이 사라진 세상의 오롯한 꿈이 열매로 맺히게 해주십시오. 주님께 흐뭇하고 행복한 보고를 올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런 우리의 소박한 소망을 비웃듯 참담한 일들만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즐겨먹는 스낵에서 생쥐 머리가 나오고, 참치 캔에서 칼날이 나오고, 단팥빵에서는 벌레가 나옵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하다 하신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급격하게 무너진 세상에 살면서 우리 영혼은 거칠어졌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대신, 의심과 냉소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삶의 도구를 바꿀 때 신조차 바꾼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풍요와 다산의 신은 지금도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합니다. 자칫하면 욕망의 심연에 빠져들기 쉬운 나날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라도 먼저 깨어나 이 혼곤한 풍요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욕심을 덜어낸 자의 홀가분함으로 생의 기쁨을 한껏 누리며 살게 해주십시오. 주님,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을 앞두고 독립을 부르짖던 많은 티베트인들이 중국의 유혈진압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올림픽 기간 중에는 도시 국가들 사이의 모든 전쟁과 적대 행위가 엄격하게 금지되고 사형 집행이 금지되고, 법적 분쟁도 중지되었던 고대 올림픽 정신은 가뭇없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티베트인들의 울부짖음은 세계의 양심을 울리는 쇠북소리이지만 그들에게 응답하는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강대국인 중국의 비위를 건드리기 싫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고요를 찢는 하갈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그의 억울함을 감찰하였던 주님, 티베트인들을 보살펴주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세상의 약자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의 꿈을 인류의 가슴에 심어주십시오. 주님,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의 파도가 쓰나미가 되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유가 상승과 국제 곡물 가격 상승으로 말미암아 우리 경제는 위태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정부의 정책은 오락가락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리라는 국민들의 장밋빛 기대는 회색빛으로 변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정파별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이 땅에서 낯선 풍경은 아니지만 소태를 씹은 것처럼 입이 쓴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 이 나라가 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리고 그 길을 우직하게 걸어갈 새로운 일꾼들을 일으켜주십시오. 아멘.
기독교윤리4 2007년 11월 20일
기독교윤리4 2007년 11월 20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병역 거부자, 동성애자, 에이즈환자, 마약중독자, 재소자, 중범죄자들에 대한 감리교회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참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네요. 이런 문제들 만큼 사람들 사이에 견해가 엇갈리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언급된 모든 경우가 다 우리 사회의 그늘에 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그늘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사람을 좀 불편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주류 사회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난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10월 2일에 ‘차별 금지법’이 입법 예고 되면서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차별이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 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 전력, 보호처분, 성적 지향, 학력,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개인이나 집을 분리, 구별, 제한, 배제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내포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가운데서 유독 ‘성적 지향’을 삭제해야 한다며 전면적인 투쟁을 선언했습니다. 동성애는 윤리도덕에도 어긋나는 성적행위로써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회악이요 비정상이라는 것이지요. 차별 금지 법안은 동성애 확산을 조장하여 여러 가지 사회 병리 현상을 심화시킨다는 게 그분들의 주장입니다. 법무부는 결국 ‘성적 지향’를 포함한 7개의 조항을 삭제함으로 차별 금지법안을 완화시켰습니다.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위에 언급된 이들도 우리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좋고 싫음을 떠나서 모든 사람은 존경까지는 아니라 해도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우리 눈에 거슬린다고 하여 누군가를 ‘비국민’ 취급을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그들’을 구별하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일에 익숙합니다. 이런 구분은 은연중에 가치판단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정상’은 선하고, ‘그들’과 ‘비정상’은 악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누구도 속단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것도 함부로 규정할 게 못 됩니다. 성적 소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급한 욕망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난잡한 이들도 있지만, 동성애의 문제는 취향의 문제라기보다는 생리적인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남성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 여성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든지, 여성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 남성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면 그런 존재의 자기 불화 속에서 그들은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에이즈 환자나 마약 중독자, 중범죄자들을 보면 우리는 일단 의혹의 눈길을 보내게 됩니다. 그들은 낯선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이 없다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성년의 숲을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강도 만난 이웃들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런 자리에 있는 이들이야말로 주님이 말씀하신 ‘땅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죄의 시선이나 냉소적인 말은 그들을 바른 자리로 되돌리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주님의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들을 외면하면서 교회가 주님의 몸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병역 거부자 문제는 분단국가인 우리의 경우 매우 민감한 사안입니다. 국가주의와 천부의 인권 사이에서 우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국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이들에게 병역 거부자는 반역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인권’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이들에게 양심에 반하는 병역의 부과는 폭력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대체 복무제는 특정한 종교 단체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그럴 소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적인 소신 때문에 갈등하고 있는 이들의 고뇌에 대해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기로에 선 한국 기독교 2009년 09월 16일
기로에 선 한국 기독교 2009년 09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등 록 파 일 기로에 선 한국 기독교 -최형묵, <<한국 기독교와 권력의 길>> 한국 개신교의 몰락을 예고하거나 예견하는 목소리들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이런 음울한 전망은 안티 기독교 진영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개신교회에 대한 호감도가 낮아지고 교인 수가 줄어드는 것과 목회자들에 대한 신뢰도 추락은 정비례한다. 대중들에게 각인된 개신교의 모습은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일부 대형교회와 목회자들의 이미지와 일치한다. 물론 이런 현상에 대해 억울해 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예수 정신을 꼭 붙들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교회와 목회자들은 속이 탈 뿐이다. 대안을 모색하는 이들도 있지만, 개혁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견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개신교의 몰락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라며 씁쓸해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우리 시대는 냉소의 시대”라고 말했는데, 젊은 목회자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냉소주의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보존의 욕망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냉소주의의 특색이다. 그 차가운 웃음은 실은 현실에 순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기제일 때가 많다. 한국 교회, 희망이 있는가? 이 질문은 시의적절하지만 무책임하다. 사실 희망이란 저절로 주어지거나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희망이 있으면 희망은 있는 것이고, 희망이 없으면 없는 것이다. 교회의 희망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응시와 분석이 전제되어야 한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비난 게임’(blame game)은 사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응시는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진다. 내부자의 시선이 그 하나이고, 외부자의 시선이 다른 하나이다. 탄식은 있지만 정밀한 분석은 부족한 것이 교계의 현실이다. 그런 중에 좋은 목회자이면서 좋은 신학자인 최형묵 목사(이하 최형묵)의 <<한국 기독교와 권력의 길>>은 “그 내부에서 바라보며 대안을 찾는다”는 부제가 가리키듯 내부자의 시선으로 한국 교회를 응시하고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병력을 추적하는 의사처럼 치열하게 바라본다. 그런 바라봄의 결실인 이 책은 한국교회가 이 지점에 당도하기까지의 궤적을 비교적 적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 부정적 시선에 가로막혀버린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을 제시하면서 대안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문법 제1장에서 최형묵은 "한국 기독교는 단일한 실체인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노정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질문이다.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성령 안에 있는 실체로서의 교회는 하나이지만,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 속에 자리한 교회는 다양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주류 기독교가 보수적 색채를 띠고 있다면,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진보적 기독교도 분명히 있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이다. 1970, 80년대는 한국 기독교의 급성장기인 데 이 시기의 성장을 주도한 것은 물론 보수적 기독교였다. 이 때 벌어진 각종 대형집회는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종교임을 사람들의 뇌리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진보적 기독교는 또 다른 의미에서 큰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개발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이 두 진영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는데, 정교분리를 표방하던 보수 기독교 진영은 정권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 이후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진행되면서 진보적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었고, 기독교는 점차 보수적 집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1989년에 결성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보수적인 정치 견해를 표명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고, 사회적 쟁점이 되는 사안마다 마치 이익집단처럼 행동했다. 이 과정에서 대형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비리가 언론에 의해 노출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시민사회의 도덕적 규준과 심각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조금씩 노골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도 이 때부터이다. 하지만 현상에는 뿌리가 있게 마련이다. 사회학자인 정수복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라는 책에서 "사회구성원들의 행위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사고방식을 '문화적 문법(cultural grammer)'이라고 명명하면서, 그 문화적 문법은 "그 집단구성원들 사이에 일체감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변화를 거부하는 특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최형묵은 한국 주류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문법을 나름대로 분석해내고 있다. 그가 예시하고 있는 것은 경제적 성장을 신앙의 성취로 인식하는 현세주의와, 타자와의 소통보다는 일방적 태도를 고수하는 자기중심주의(23)이다. 이 둘은 '힘에 대한 숭배 성향'으로부터 파생된다. 제국과 성전체제에 대한 항거와 반역의 봉화였던 기독교가 힘에 대해 숭배한다면 그것은 자기 배반이 아닐 수 없다. 최형묵은 대형교회들의 성장 동력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는 선발 대형 교회와 후발 대형 교회를 나누는데 그 가름의 기준이 되는 때는 대략 1980년대 후반이다. 선발 대형 교회는 개발독재 체제하의 한국 사회의 흐름을 잘 붙든 경우라 할 수 있다. 교회는 돌진적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역할을 감당했고, 전통적인 공동체성이 와해되어 갈 때 교회는 그 대안이 되었다.(26). 교회는 구성원들에게 성찰하는 신앙보다는 즉각적인 응답을 추구하는 신앙을 주입했다. 경제적 풍요와 출세는 신실한 믿음의 증거처럼 인식되었다. 현세주의는 이렇게 기독교인들의 내면에 각인되었다. 이 시기의 교회 성장은 목회자의 절대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권력의 독점화 현상은 당연한 결과였고, 신앙도 균질화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목소리는 용납되지 않았다. 나중에 나타난 교회 세습과 목회자의 윤리 문제는 내부로부터의 제어 기능 및 자정 능력을 기르지 못한 탓에 발생한 문제들이다. 후발 대형 교회의 등장은 민주화가 진전되는 과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대개 중상층 이상의 사람들로 구성된 이 교회들은 상당한 합리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창의성과 권력 분점이 요구되던 시대정신에 맞춰 교회는 그런 가치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평신도들의 지도력이 존중되고, 재정의 불투명성도 극복되고, 비리에 휘말리는 일도 드물었다. 도덕적 의제를 선점하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한국 교회에 근본적 변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 밑바닥에는 여전히 힘에 대한 숭배 성향이 강하고, 성장주의적 가치관을 따르는 현세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정수복은 정재식의 말을 빌어 기독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려면 "현실 긍정과 타협의 자세를 버리고 초월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현실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새로운 삶의 원칙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전통을 제시해야 한다"(앞의 책, 544쪽)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대형교회들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변혁을 지향하는 진보적 기독교도 이런 면에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문제는 목회자들과 회중 사이의 신념상의 이질성이 너무 컸다는 점이다. 사회에 대해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목회자들도 교회 안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민주화 이후 "국가권력의 성격이 변화된 상황에서 변혁보다는 적응의 태도를 취한"(31) 것도 그 한 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와 교회의 변혁을 지향하고, 변혁을 지향하는 사회적 세력들과 연대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이런 노력들은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힘에 대한 선망을 극복하려면 제2장에서 최형묵은 주류 한국 기독교의 보수성의 뿌리를 탐색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 뿌리는 전래 초기에까지 뻗쳐 있다. 한국 교회가 힘에 대한 동경을 내면화하게 된 것은 위기가 일상화 되었던 근세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래 초기부터 기독교는 '힘의 종교'로 수용되었다. 학교와 병원을 짓고, 근대적 제도를 도입하고, 탐관오리의 학정이나 전쟁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선교사들은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지도급 인사들이 기독교를 수용했던 것도 기독교 신앙을 서구적 근대화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최형묵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한국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보수화되게 된 계기라고 평가한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신앙을 통해 한국인들이 점차 민족독립의식을 갖게 된 현실을 매우 위험하게 생각했다. 선교본국과 일제 당국과의 갈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흥운동의 방향을 '성령 운동'을 통한 상한 영혼의 치유로 돌려놓았다. 결국 불의에 대한 공분과 시대에 대한 아픔은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해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교회는 이때부터 불의한 권력에 대해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 그래서 불온시 되지 않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교회는 사회적 불안에 대한 대용물로 내세에 누릴 복락, 물질 축복을 약속했다. 세속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신앙적 논리는 불안과 궁핍에 시달렸던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더욱 강화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장한 교회는 진리 자체를 독점한 듯한 태도를 견지했으며, 타자들과 건강한 소통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쟁점들에 대해 공공의 영역에서 함께 토론하고 검증하기보다는 자기의 기준을 절대적 기준인양 제시하거나, 그도 여의치 않을 때는 실력으로 저지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동원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이 많아지면서 교회는 자신의 권력에 도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배의 포기'를 가르쳤던 예수 정신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문제는 힘에 대한 선망을 내면화시키는 기제들이 교회 안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의 안목이 돋보이는 것은 이 대목이다. 그는 이런 의식이 교회 내에서 구조화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한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집합적 관행들은 무의식적인 삶의 양식이 되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직분이 그렇다. 직분은 역할의 배분이라기보다는 계급적 서열로 인식되고 있다. 예배의식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 중심의 예배의식에서 평신도들은 수동적 객체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이로써 예배는 "위계화된 질서를 최종적으로 승인하고 강화하는 기제"(67)가 된다. 예배 공간과 여타의 공간을 갈라놓는 공간 배치나,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호칭들도 위계적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기제가 된다. 최형묵이 지적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는 성서 번역의 문제이다. 한국에 나온 거의 모든 성경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거의 반말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번역투는 섬기러 오신 주님을 제왕적 이미지로 고착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새로운 교회의 요청 제3장에서 최형묵은 대안을 모색하던 진보 기독교의 길을 탐색하고 있다. 저자는 진보 기독교의 뿌리를 일제치하의 민족적․사회적 저항운동에서 찾는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했던 해방직후부터 기독교를 통한 근대화의 실현을 꿈꾸었던 이승만 정부에 이르기까지 진보 기독교의 전통은 단절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4.19혁명의 성과를 뒤집은 5.16군사쿠테타는 숨죽이고 있던 진보적 기독교를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삼선개헌안, 그리고 한일협정 비준이 시도되었을 때 일단의 기독교 인사들이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77) 경제개발이 가속화되면서 발생한 농민, 도시빈민, 노동자 등 민중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던 진보 기독교계에 일대 각성의 계기가 된 것은 1970년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1970년 11월 25일 신․구교 합동으로 드린 추모예배에서 김재준 목사는 추도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기독교도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78) 민중신학은 그렇게 해서 태동되었고, 진보 기독교는 한국 진보 사회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그것은 국내외적인 인적, 물적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교회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용공 낙인에 대한 보호막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도적 1980년대 후반 민주주의가 제도 속에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진보 기독교는 정권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며 민중의 현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반면 사회적 약자의 이해관계와 거리를 둔 채 이루어진 진보 인사의 정권 참여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기게 되었고, 그들의 정치적 행동을 추동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는 보수진영으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다. 이때부터 한국의 진보 기독교를 대표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위상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보적 사회운동이 다양한 시민운동으로 분지해 나간 것도 진보 기독교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자본의 지구화, 군사적 패권의 확장으로 발생하는 폭력의 악순환, 지구 생태계의 파괴 현실은 진보적 기독교 진영에게 새로운 과제를 부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2000년대 들어 이런 문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진보 진영의 저변층과 복음주의 진영의 저변층이 연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전반적으로 보수화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최형묵은 이 시대 기독교의 과제를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자본의 횡포를 제어할 수 있도록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시각을 갖는 것, 대안적 세계화를 추구하는 세력과의 연대 모색, 생명․평화운동과의 긴밀한 결합, 소수자 운동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연대 강화, 기독교의 사회적 실천과 교회 및 신학의 유기적 결합 등이 그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성직자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교회의 모형을 추구해야 한다. 저자는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는 ‘교회 해체 전략’으로 교회 중심주의를 부정하면서 탈교회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을 중시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재구성 전략’으로 앞서 이야기했던 바 위계질서를 내면화하도록 하는 교회 구조의 부정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교회 해체 전략’이라는 용어는 ‘탈기독교’를 부추기는 것으로 곡해될 수도 있어 여전히 교회 중심적 신앙생활에 익숙한 이들 사이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차라리 교회에 대한 전통적 이해의 틀을 확장하면 어떨까? 용산참사가 벌어진 후 촛불교회와 가톨릭교회는 그 곳에서 지속적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그 현장을 거룩한 장소로 바꿔냈다. 경계선에 서서 이제 다시금 묻는다.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는가? 제4장에서 최형묵은 희망의 단초를 제시한다. 권력화된 주류 기독교가 세속적 권력에 영합하는 길을 택했다면 새로운 기독교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초월적 전망을 제시하는 일에 진력해야 한다. 저자는 이런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진화심리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와 루이스 월퍼트의 견해를 참조하고, 니체의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끌어들인다. 그들의 논의는 참조할만한 것이지만 그 앞에 지레 주눅들 건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부정성을 노정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주인과 노예의 대립 자체를 넘어서는 세계를 바라보고 있고, 또 지금 여기에서 구원의 기쁨에 동참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유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심판과 구원이 바로 지금의 문제임을 인식할 때 기독교는 희망의 닻을 올릴 수 있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세계의 특색을 ‘유동하는 공포’라는 말로 요약한다. 그 실체도 불분명하고, 위치도 알 수 없고, 형태도 불확실하고, 이리저리 유동하기에 종적도 원인도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질서와 안정성을 위협하는 일들,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일들이 날마다 일어난다. 기독교는 과연 이런 시대에 빛과 소금일 수 있을까? 그 동안 한국의 주류 기독교는 현세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강화해가면서 경이로운 신앙체험을 진부하게 만들어왔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오히려 마틴 부버의 말대로 ‘그대’의 세계에 다가서는 것을 가로막아 온 것은 아닌가?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자기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신학자들을 내쫓는 현실, 내세우는 명분은 보편적일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세속의 논리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해왔던 기독교는 ‘유동하는 공포’ 시대의 ‘길’이 되기 어렵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경계선에 서 있다. 자기 폐쇄적인 주류 기독교의 논리 속에 함몰될 것인가? 세상과 소통하는 개방성 신앙을 향해 길을 떠날 것인가? 최형묵이 가리켜 보이는 길은 물론 후자이다. 그는 한국 교회 현실을 조망하기 위한 분석의 틀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이제 독자들에게 남겨진 몫은 비판을 넘어 대안을 추구하는 것이다. 초월적 비전을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끌어들이기 위해 무수한 만남의 계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오른다. 울고 있는 성 다미아노를 꿈에서 만난 프란체스코는 “어찌 된 일입니까? 당신은 천국에 계시잖아요, 그렇죠? 그럼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입니까?” 하고 묻는다. 다미아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래,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네.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지상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눈물이지.” 그러면서 그는 프란체스코에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위험에 처해 있으니 어서 일어나게.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자네의 등으로 떠받치게. 온 교회가 나의 작은 예배당처럼 퇴락하고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고 있다네. 교회를 일으켜 세우게!”(니코스 카잔차키스, <<성자 프란체스코1>>, 열린책들, 76쪽)
나란히 걷는 법을 배울 때 2007년 08월 02일
나란히 걷는 법을 배울 때 2007년 08월 02일 작성자 (vorblick@dreamwiz.com) 등 록 파 일 나란히 걷는 법을 배울 때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자꾸 가다보면 생기는 것이다.” 루쉰의 이 말과 처음 만난 것은 80년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말을 실감하고 있다. 20여 년 전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는 갈 수 없는 땅, 가서는 안 되는 땅, 길이 끊긴 땅에 들어갔다. 그들에게는 반역자라는 붉은색 찌지가 붙었다. 하지만 그들이 걸었던 그 자리에 난 발자국을 따라 사람들이 오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길이 열렸다. 그 길은 시작은 꿈이었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충돌하고 있던 그 암울한 시대에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을 보고,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그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을 꿈꾸었다. 꿈은 무력한가? 그렇지 않다. 꿈꾸는 자가 없다면 역사는 새로워지지 않는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 마는 조개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 부분) 문익환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정주영은 소떼를 몰고 휴전선을 넘었다. 끊어졌던 철로가 연결되었다. 개성공단을 향하는 차량의 행렬은 날마다 휴전선을 넘고 있다. 북한의 조림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민간단체의 활동도 활발하고, 빵공장과 병원을 세워주는 일도 활발하다. 바야흐로 길이 열린 것이다. 서울역에서 평양행 기차표를 달라고 하겠다던 한 노인의 꿈, 유럽의 어느 간이역에서 서울행 열차표를 살 꿈을 꾸었던 홍세화의 꿈이 실현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통일로 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평화로운 통일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호 신뢰가 필요한데, 신뢰라는 것은 한 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갈등 요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만나 차이를 조정하고, 평화로운 공존의 틀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여러 정파들이 북한을 타자화하고 그들과의 차이를 식량을 지원하고, 비료를 지원하고, 에너지를 지원하는 일로 우리가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그들을 통일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경제력의 차이를 가지고 그들에게 근거없는 열등감을 강요할 때 남북의 만남은 서로에게 불행이 될 가능성이 많다. 개성공단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중대한 통일의 실험실이다. 우리가 차이를 넘어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것이며, 서로의 필요에 주체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는 장이니 말이다. 경제논리가 그 장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곳은 통일 이후의 삶의 본보기 집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통일 한국은 비시장적 가치들이 진지하게 고려되는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벌써부터 개성공단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개성공단에서 흘러나온 오․폐수가 사천강, 임진강, 한강 하구로 이어지는 수계를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인접한 비무장지대 서쪽의 습지생태계를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전 환경성 검토라는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한 결과이다. 미군이 주둔했던 땅이 기름으로 뒤범벅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분노한다. 통일의 실험실인 개성이 장망성으로 변해간다면 우리 앞에 열린 길에는 다시금 다북쑥이 우거지게 될지도 모른다. 길은 열렸지만 아직 그 길에는 위험이 많다. 하여 임종을 앞둔 메브 푸엘로가 했던 말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렇다. 구세주 그리스도께 올라가는 길은 울퉁불퉁하고 때로는 위험하기도 하다. 우리네 가진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맨발로 걸어가는 이들과 함께 걸어 길 끝에 계시는 하나님께 가야 한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출발점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나란히 걷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모두 함께 도달하게 될 것이다.” 맨발로 걸어가는 이들과 함께 걷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서는 사람들, 홀로 앞서 가기보다는 더디더라도 함께 걷기를 배우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통일의 일꾼들이다.
내 혼의 문신 2000년 08월 29일
내 혼의 문신 2000년 08월 29일 작성자 (kisuk@hanimail.com) 등 록 파 일 내 혼의 문신 1.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 나오는 소년 오스카가 앙증맞게 두들겨대는 양철북소리가 들려온다. 장엄한 군악대의 연주 사이를 뚫고 딸국질처럼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그러다가 마침내 군악대의 연주를 춤곡으로 바꾸어 버리는, 그래서 나찌의 선동장을 무도장으로 바꾸는, 광기에 사로잡혀 굳어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미소를 돌려주고, 서로의 어깨를 부둥켜안고 왈츠를 추게 만들던…성적 쾌락에 탐닉하는 음란한 어머니, 정치적인 광기에 사로잡힌 아버지로 대표되는 성인들의 세계에 절망해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한 오스카, 오, 스카(scar), 오, 스, 카. 2. 신학교 시절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만난 것이 탈이었다. 나는 24살 젊은이의 저항적인 혼에 매료되었다. 아웃사이더는 기성의 사회질서에 안주하지 못하는 소외자이지만 그들이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그의 말은 주술과 같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아웃사이더교'의 충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 책이 전거로 사용하고 있는 책은 구할 수 있는 한 구해 읽었다. 그리고 즐겨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신학적인 언설은 허무의 대해를 건너기에는 너무나 허약한 조각배였다. 학교에는 빛이 없었다. 나는 의식만큼은 까뮈의 '반항적 인간'이었고, 스스로 신성모독자가 되었다. 아, 얼치기의 세월이여! 최인훈 전집을 읽으면서 한껏 부풀은 나의 자의식은 '요즘 무슨 책을 읽냐?'는 물음에 최인훈 전집이라고 하면 '아, 최인호?' 하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절망했다. 깊숙한 대화를 하다가도 자신이 기독교 신앙이 박아놓은 금제의 팻말을 부지중에 넘어섰음을 알고 황황히 철수해 경건한 신앙인의 자리로 돌아가는 동료들의 한계에 절망했다. 빛이 없었다. 나는 방황했다. '나는 성년의 숲을 어린아이처럼 방황했다'는 카프카의 말을 빛 삼아. 3. '신학은 인간학이다.'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나는 이 말이 좋았다. 포이에르바하가 서있는 자리가 신학사 좌표평면의 어디쯤인지, 불트만이 이 명제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좋았다. 막연하기는 했지만 이 말이 신학교에 머물고 있는 나의 숨구멍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신에 대한 말들'이 너무 많았다. 교회의 설교는 인간을 지나치게 비하했고 복잡다기한 삶을 교리적 도식으로 단순화시켰다.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고는 설교를 들을 수가 없었다. 신학은 건조했고, 권위주의의 의상 속에 인간의 알몸을 숨겼다. '상황은 물음이고 복음은 답'이라는 신학적 진술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의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 마당에서 해결하지 않고 '절대의존의 감정'이라는 신앙에 맡겨버리는 불성실에 화가 났다. 당대의 문제와 치열하게 씨름하지 않으면서 쉽게 영원에서 답을 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의 게으름이었다. 천의 얼굴을 한 현실, 들뢰즈의 말대로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변화해가는 세상에 신학이 내미는 해답은 언제나 퀴퀴한 냄새가 났다. 무한히 확산수렴하는 현실에 선험적 확실성과 절대적 진리라는 항수(恒數)로 대응하는 신학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방황의 여지를 주지 않는 신학과 교회, 한 점의 유보도 없이 확신에 찬 신학적 담론, 그것은 신화였고 허구였다. 그런데 '신학은 인간학'이라니! 그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변덕스럽고 추한, 사랑의 갈망으로 몸을 태우고 때로는 미움과 질투의 불길을 지피는 인간들의 냄새를 신학이 허용한다니,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저 밑바닥에서 자신의 욕망을 부둥켜안고 울고 웃는 신학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눈이 어두웠던 탓일 것이다. 건조해 보이는 신학적인 담론 속에 담겨있는 절제의 미학을 모르냐고 꾸지람을 당한다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어두웠다. 신학은 나의 욕망을 줄여주지도 못했고, 정직하게 내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지도 못했다. 4. 목이 말랐다. 영혼의 허깃증을 엎드림으로 채우기에 나는 너무 젊었다. 팽팽히 당기고 있던 저항의 줄을 놓을 수 없었다. 신학과 인간학의 행복한 결합은 꿈이었던가? 신학은 인간학이지만 인간학이 아니다. 인간학은 신학이지만 신학이 아니다. 이 비동일성의 고통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고향 이타카를 향해 고된 항해를 계속하는 오디세우스처럼 나는 방황했다. 가끔 시원한 샘물을 만났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 텍스트 속에서가 아니었다. '소설'이나 '시' 속에서 였다. 주저하지 않고 방황하고, 대척없이 정직한, 그리고 비명과 한숨소리를 숨기려하지 않는 그 허구의 세계에서 나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곤 했다. 신학이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질식할 것 같았던 나의 혼은 평범하고 사소한 것/순간들을 잊을 수 없는 것/순간으로 바꾸는 문학의 연금술적 마술에 매료됐다. 물음에 해답을 제시하려 하지 않고, 새로운 물음을 통해 길을 여는 문학,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신학적 인간학의 대안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대안동경이 있단다. 자기가 서있는 곳보다는 건너편을 이상화하는 마음 말이다. 문학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저 건너편에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바라보고, 감탄하고, 그 세계가 열어젖힌 창문을 통해 신학 속에 유폐되어 살아가는 수인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족했다. 얼마나 유치했던가. 시인들의 언어를 모방하고, 소설가들의 현실 인식을 적당히 훔치면서 나는 자족했다. 스스로 비창조적인 아웃사이더가 되어가는 것은 모르고, 신학의 권위주의에 반잘하고 신학의 변방으로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세계의 변방에 편입되기를 꿈꿨다. 그곳에는 내 마른 목을 축여줄 감로주가 있는 것처럼. 5. 문학은 인간존재의 기본 범주인 시간의 예술이다. 시간, 소름끼치는 시간. "지옥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그렇지만 가장 가혹한 동네가 있다면 그곳은 단 한 순간도 '시간'을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에밀 시오랑의 아포리즘이다. 문학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행위이거나, 사람들의 시간 경험에 대한 기록이다. 시간과 함께 사멸해 가는 것들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 그것이 문학행위이다. 튼실한 언어의 밧줄로 한 순간을 사로잡아 그 순간 속에서 영원의 흔적을 보려는 것. 왜? 모든 스러져가는 것들을 사랑하기에. 망각의 강물을 마시기 전, 키케로의 마술에 걸려 돼지로 변하기 전에, 아니 변한 후에도 자신이 인간이었음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무늬와도 같은 흔적을 남긴다. 여름 장대비에 숨막힌 지렁이가 집밖으로 나와 진흙 위를 온몸으로 기어가 흔적을 남기듯 문학은 시간 위를 기어간 사람들의 흔적이다. 눈물의 흔적이다. 한 시인에게 물었다. "왜 시를 쓰시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제일 편하니까. 하지만 나는 시를 쓸 줄 몰라. 그냥 잘 살고싶을 뿐이야." 그말이 눈물임을 나는 안다. 소설가 친구가 말했다. "절망스럽지만 나는 계속 쓸거야. 나는 소설로 내 인생에 복무하고 있으니까." 한 문학 평론가는 나를 붙잡고 울었다. "말이 자꾸 나를 배신한다"면서. 나는 한숨짓는다. 오련히 그 자태를 드러냈던 문학의 봉토가 이러저리 옮겨다닌다는 사막의 호수처럼 떠돌고 있음을 확인하기에. 그러나 그들이 눈물로 그린 그 흔적들은 일회적인 것이기에 아름답고, 아름답기에 영원의 그릇에 담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학은 종교와 만난다. 시간의 예술인 문학은 위로 날아오르든, 아래로 낮은 포복을 하든 불멸을 지향한다. 그러기에 진실/진지한 문학은 이미 종교적이다. 꼭 기독교적인 소재를 다루어야 기독교문학(사실 나는 이런 냄새나는 표현조차 버리고싶다)인가? 아니다. 신/교회/목사/집사가 등장하지 않아도 작가의 문제의식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관통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문학이라 할 수 있다. 역으로 그런 소재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기독교적 가치들을 구체적 상황의 법정에 세우지 않고 선험적인 삶의 법칙으로 제시하는 문학은 참된 기독교문학이라 할 수 없다. 전복적(顚覆的) 상상력이 문학의 생명이다. 하늘과 땅을 뒤집고, 선과 악을 뒤집고, 미와 추를 뒤집고,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허문다. 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신성모독자들의 세계여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기존의 가치관에 순치된 문학,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 노릇을 하는 문학을 나는 경멸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이 땅에서 참된 기독교문학을 발견하지 못했다(이것은 철저하게 나의 주관적 평가이고, 나의 단견의 소치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란다). 작가들은 가위눌려 있다. 스스로 금제의 팻말을 내다걸고, 절대로 넘어선 안 될 금줄을 임의로 설정해 놓고는 그 한계를 지키려 한다. 에덴을 둘러친 화염검을 향해 돌진하는 작가가 없다. 물론 시늉은 있다. 그러나 화염검에 불타버리든, 찔리든 개의치 않고 내달리는 작가가 없다. 예술로 형상화되지 못한 천박한 수준의 담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흘낏 기웃거린 것에 지나지 않는만 나는 이땅에 기독교문학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생각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를 꿈꾼다. 금제의 팻말을 몰래 치워버리거나, 가볍게 금줄을 넘어서서 이땅의 작가들에게 놀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 그리고 공기 구멍을 뚫어 척박한 땅에 산소를 공급하고, 박토를 삼켜 자신의 체액으로 기름지게 만든 후 분변토로 배출하는 지렁이처럼 기독교라는 척박한 땅에 문학의 성취를 소개하는 것, 써놓고보니 외람되다. 가관이다. 하지만 꿈도 못 꾸랴. 남들은 不惑이라 하는 나이에 나는 여전히 迷惑의 들판에 서있다. 6. 횡설수설을 마치려고 한다.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문학과 신학이, 신성모독을 꿈꾸는 문학과, 인간학이라는 신학이 내 혼 에 지울 수 없는 '문신'이 되기를 꿈꾼다. 이 꿈이 나를 속일지라도. 속는 것도 나의 생이므로. 오스카의 북소리를 들으려고 나는 귀를 모은다. 이웃 공장의 마이크 소리, 야채를 싣고 온 장사꾼들의 핸드마이크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그리고 나의 신음소리. 나는 아프다. 오스카의 북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네가 하늘의 북을 울리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를 끈다. 그러나 잠시 후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이 글은 몇 해 전에 쓴 글인데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종교와 문학"이라는 과목을 가르치게 된 것을 계기로, 나의 정신의 궤적을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수정없이 그대로 여기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