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설교

<필독(사이트 사용법: 설교,자료,성경,찬송가 검색방법)>(0) 필독(사이트 사용법: 설교,자료,성경,찬송가 검색방법)(1) <주제별 한국어설교(Korean Sermons Arranged by Topics)>(0) ㄱ주제별 설교(25464)
ㄴ주제별 설교(2204) ㄷ주제별 설교(2247) ㄹ주제별 설교(8) ㅁ주제별 설교(10156)
ㅂ주제별 설교(8110) ㅅ주제별 설교(30750) ㅇ주제별 설교(24571) ㅈ주제별 설교(14431)
ㅊ주제별 설교(6739) ㅋ주제별 설교(64) ㅌ주제별 설교(233) ㅍ주제별 설교(1609)
ㅎ주제별 설교(15678) <성경별 한국어설교(Korean Sermons Arranged by Bible Books)>(0) 구약성경 설교(23801) 신약성경 설교(28614)
<성경별 강해설교(Expository Sermons Arranged by Bible Books)>(0) 강해설교(4500) <목사별 한국어설교(Korean Sermons Arranged by Pastors)>(0) ㄱ성씨 목사설교(14446)
ㄴ성씨 목사설교(608) ㄷ성씨 목사설교(0) ㄹ성씨 목사설교(1243) ㅁ성씨 목사설교(625)
ㅂ성씨 목사설교(4585) ㅅ성씨 목사설교(210) ㅇ성씨 목사설교(12013) ㅈ성씨 목사설교(8745)
ㅊ성씨 목사설교(43) ㅋ성씨 목사설교(0) ㅌ성씨 목사설교(0) ㅍ성씨 목사설교(1300)
ㅎ성씨 목사설교(2499) 외국 목사설교(629) <절기별 한국어설교(Korean Sermons Arranged by Seasons)>(0) (1월~12월) 일반주일설교(50188)
(1월 6일) 신년축복주일설교(795) (1월 6일) 주현절설교(24) (1월 20일) 여전도회주일설교(39) (2월 3일) 설날주일설교(167)
(2월 3일) 설날추모설날가정예배설교(17) (2월 3일) 세계선교주일설교(선교설교)(306) (2월 3일) 은급주일설교(12) (2월 10일) 입학졸업축하예배설교(39)
(2월 24일) 삼일절100주년기념주일설교(158) (3월 3일) 사회봉사주일설교(봉사설교)(260) (3월 3일) 산상변모(변화)주일설교(변모에 관한 설교)(276) (3월 6일~4월 20일) 사순절설교(613)
(3월 10일) 남선교회주일설교(22) (3월 10일) 성례(세례,성찬)주일설교(534) (4월 14일) 종려주일(고난주간)설교(고난설교)(1962) (4월 21일) 부활주일설교(2762)
(4월 21일) 총동원전도주일설교(28) (4월 21일) 군선교주일설교(군대,군사,군인,용사에 관한 설교)(102) (4월 28일) 장애인주일설교(87) (4월 28일) 노동주일설교(64)
(5월 1일-31일) 가정의달설교(1529) (5월 5일) 신학교주일설교(18) (5월 5일) 어린이주일설교(1308) (5월 12일) 어버이주일설교(부모에 관한 설교)(1670)
(5월 19일) 부부주일설교(남편, 아내에 관한 설교)(322) (5월 19일) 스승의주일설교(214) (5월 19일) 청년주일설교(청년회설교)(242) (5월 26일) 성결교회주일설교(성결에 관한 설교)(54)
(5월 26일) 승천주일설교(승천일 5월 29일)(14) (5월 26일) 웨슬리회심기념주일설교(14) (5월 26일) 청소년주일설교(23) (6월 2일) 나라를 위한 기도 주일설교(249)
(6월 2일) 농어촌주일설교(농부, 농사, 어부, 어로에 관한 설교)(83) (6월 2일) 환경주일설교(환경에 관한 설교)(71) (6월 9일) 성령강림주일설교(성령설교)(2054) (6월 16일) 삼위일체주일설교(38)
(6월 23일) 순교자기념주일설교(68) (6월 23일) 북한선교주일설교(17) (6월 23일) 육이오(6.25)기념주일설교(142) (7월 7일) 맥추감사주일설교(852)
(7월 14일) 교회학교교사주일설교(71) (8월 11일) 팔일오(8.15)광복절기념주일(평화통일주일)설교(해방에 관한 설교)(435) (9월 1일) 이단경계주일설교(40) (9월 1일) 교역자보건주일설교(감리교)(8)
(9월 8일) 외국인근로자선교주일설교(이방인에 관한 설교)(69) (9월 8일) 추석주일설교(한가위감사주일설교)(283) (9월 8일) 추석추모추석가정예배설교(29) (10월 20일) 직장선교주일설교(13)
(10월 27일) 세계교회일치와연대주일설교(연합에 관한 설교)(94) (10월 27일) 종교개혁기념주일설교(543) (11월 3일) 학원선교주일설교(13) (11월 17일) 추수감사주일설교(추수설교, 감사설교)(3056)
(12월 1일~12월 24일) 대림절(대강절)설교(372) (12월 8일) 인권주일설교(31) (12월 2일 성찬주일설교)(1) (12월 8일) 성서주일설교(123)
(12월 22일) 성탄주일(12월 25일 성탄절, 크리스마스)설교(1535) (12월 29일) 송년주일설교(365)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설교(437) <성경인물별 한국어설교(Korean Sermons Arranged by Bible Characters)>(0)
ㄱ성경인물별 설교(696) ㄴ성경인물별 설교(407) ㄷ성경인물별 설교(1161) ㄹ성경인물별 설교(105)
ㅁ성경인물별 설교(801) ㅂ성경인물별 설교(1275) ㅅ성경인물별 설교(1054) ㅇ성경인물별 설교(12959)
ㅈ성경인물별 설교(0) ㅊ성경인물별 설교(0) ㅋ성경인물별 설교(0) ㅌ성경인물별 설교(0)
ㅍ성경인물별 설교(0) ㅎ성경인물별 설교(76) <영어설교(English Sermons)>(0) 영한대역,한영대역 영어설교(English to Korean, Korean to English Sermons)(4059)
Old Testament sermons(38) New Testament sermons(73) a주제별영어설교(50) b주제별영어설교(12)
c주제별영어설교(16) d주제별영어설교(7) e주제별영어설교(5) f주제별영어설교(16)
g주제별영어설교(15) h주제별영어설교(10) i주제별영어설교(5) j주제별영어설교(0)
k주제별영어설교(0) l주제별영어설교(15) m주제별영어설교(11) n주제별영어설교(2)
o주제별영어설교(13) p주제별영어설교(6) q주제별영어설교(1) r주제별영어설교(4)
s주제별영어설교(10) t주제별영어설교(17) u주제별영어설교(0) v주제별영어설교(1)
w주제별영어설교(14) x주제별영어설교(0) y주제별영어설교(2) z주제별영어설교(0)
0~9주제별영어설교(7) <기타 외국어 설교(Other Foreign Language Sermons)>(0) <일본어설교(Japanese Sermons)>(0) 牧師別の日本語説教(67898)
聖書別の日本語説教(15) 主題別の日本語説教(0) あ~お主題別の日本語説教(6) か~こ主題別の日本語説教(18)
さ~そ主題別の日本語説教(31) た~と主題別の日本語説教(3) な~の主題別の日本語説教(2) は~ほ主題別の日本語説教(13)
ま~も主題別の日本語説教(3) や~よ主題別の日本語説教(1) ら~ろ主題別の日本語説教(0) わ~ん主題別の日本語説教(0)
<중국어설교(Chinese Sermons)>(0) 중국어설교(Chinese Sermons)(195) <스페인어설교(Spanish Sermons)>(0) 스페인어설교(Spanish Sermons)(1013)
<독일어설교(German Sermons)>(0) 독일어설교(German Sermons)(14) <네덜란드어(화란어)설교(Dutch Sermons)>(0) 네덜란드어(화란어)설교(Dutch Sermons)(8)
<아랍어설교(Arabic Sermons)>(0) 아랍어설교(Arabic Sermons)(87)
2001년 9월9일 수14:9-12 행복을 베푸는 사람 2017-11-21 23:54:36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문에 난 기사 가운데 한 글을 생각합니다. "그는 참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교회를 대물림 해 주라는 권유를
2001년 9월9일 수14:9-12 행복을 베푸는 사람 2017-11-21 23:54:36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문에 난 기사 가운데 한 글을 생각합니다. "그는 참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교회를 대물림 해 주라는 권유를 를 뿌리치고 바보같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먼 외국으로 쫓아 버렸습니다. 새까만 후배들이 통일운동에 앞장선다면서 가로막힌 북녘땅을 제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릴 때도 그는 참 바보처럼 "저 많은 실향민들이 고향엘 가지 못하는데 어찌 나 혼자만 가겠는가"라면서 그리운 고향 땅을 한번도 밟아 보지 못했습니다. 사자후 같은 명 설교도,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감동적인 웅변도 할 줄 몰랐던 그는 그저 바보처럼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손과 발로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설교하고 선포했을 뿐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입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을 가졌던 이 바보같은 목사님의 이름은 한 경직 목사입니다. 여러분 누구의 마음으로 사십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사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양보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실줄로 믿습니다. 교인중에는 유치한 신앙심을 갖고 있는데 유치한 신앙인은 4가지 특징이 있답니다. 내가 해당이 돼나 안돼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①첫번째 예수 믿으면 결코 고난과 고통이 없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고통과 어려움은 저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도 내게 유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징계의 매를 드신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유치한 신앙인은 ②고난을 불행으로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은 불행과 고난이라도 불평하지 아니하고 인내할 줄 아는 신앙인입니다. 세 번째 유치한 신앙인은 ③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기도는 다 들어주신다고 믿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초조해 하고 속상해 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내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원 대로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욕심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은 내 소원을 간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처럼 주님 뜻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쩨 유치한 신앙인은 ④언제나 모든 분야에서 우두머리가 되고 승리만 해야 한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무조건 이겨야 되고 평지만을 고집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는 오늘 갈렙처럼 평지보다 산지를 달라고 하는 신앙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내 뜻 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신앙이며 평지보다 산지를 달라고 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갈렙은 유다 지파 여분네의 아들로서 출애굽 2년에 바란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뽑힌 12명중에 유다 지파의 대표로 뽑힌 사람입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면서 그 땅이 어떠한지, 거민은 어떠한지, 여러 가지를 살펴보고 오는 중에 그가 40일 만에 돌아오면서 가나안 땅의 포도 한 송이를 꺾어 왔는데 그 송이가 얼마나 큰지 두 사람이 막대기에 메고 왔을 정도로 탐스러운 광일 이었습니다. 12명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 와서 보고하는데 10명은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땅의 백성들은 모두 거인과 같고 우리는 그 앞에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보고를 할 때에 온 회중이 통곡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너무 좋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자,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라고 설득하였으나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돌로 치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불신앙의 부정적인 나약한 믿음을 가졌던 20세 이상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이 정복하고 이제 12지파가 땅을 제비뽑기로 나누는 아주 심각한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누가 공적이 큰가에 따라서 땅을 나누겠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비뽑기를 해서 공평하게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전날 모두 한숨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앴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농사짓기 좋은 땅을 배분 받을 것인가, 이왕이면 강이 있고 살기 좋은 땅을 차지할까 하는 심정으로 나와서 제비뽑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묵이 흐르고 긴장된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보시오" 라고 손을 들고 크게 외쳐대는 노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갈렙이었습니다. "나는 저기 높은 산지를 내게 주시요!" 모든 사람들이 원치 않는 헤브론 산지에 땅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헤브론 땅은 헤브론은 산지였습니다. 헤브론에는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었고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로 가나안 땅을 정탐 할 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낙 자손들은 네피림의 후손들로 용맹스러운 부족이었으며 그들의 성읍은 크고 견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정탐꾼들이 벌벌 떤 이유도 이 아낙자손들과 그들의 견고한 성읍을 보고 기가 질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헤브론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 험악한 땅 헤브론을 달라는 것이었다. 갈렙은 여호수아 다음으로 2인자였다. 갈렙이 가나안 땅 중에서 가장 좋은 땅을 달라고 했어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렙은 남들이 갖기 가장 싫어하는 땅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헤브론을 받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정복하겠다는 것이다. 아낙자손들을 쫓아내고 내 땅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인데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싫어하니 내가 힘든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이만한 아량과 포부와 믿음을 본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공(功)이 있으면, 그의 합당한 대우를 해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사람이 나이 들면 힘들어 편히 쉬고 싶을 텐데 갈렙은 그의 나이가 85세 인데도 고생스런 일을 자청한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그들을 쫒아내리이다." 이것이 갈렙의 신앙적 삶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험악한 아낙자손과도 싸워서 이길 수가 있으니 이 산지를 내게 달라는 것입니다. !" 수14:9에 보면 모세가 갈렙에게 약소한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는 갈렙에게 "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라고 약속한 것입니다. (민13:32) 갈렙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수고를 하였기 때문에 그가 밞은 가나안 땅을 마음대로 차지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갈렙은 이미 옥토를 약속을 받았음으로 고생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갈렙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자기에게 돌아올 옥토를 차지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지의 옥토는 다른 11지파에게 주고 점령하기 어려운 산지를 갖겠다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즘 세상은 자신은 평안한 것을 택하고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것을 맏기는 것이 요즘 세상인데 갈렙은 이와는 정반대로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갈렙을 통해서 기쁨을 남에게 베풀고 자기는 희생하는 고매한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기 조카 롯에게 그렇게 했습니다.(창13:1-18) 이삭도 우물을 빼앗는 그랄 사람들에게 자기를 희생하고 다 양보합니다.(창26:17-22) 나 하기 싫은 일을 남편이나 며느리 시키지 말고 내가 해야 합니다. 나 하기 어려운 일을 다른 사람을 시키지 말고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가정은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부흥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산지를 찾을 때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렙의 신앙이 여러분의 신앙에 모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맨날 평지만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한번 산지를 달라고 해 보십시오. 남들이 하기 싫은 일 화장실 청소,주방 봉사를 자청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불평하고, 무엇 때문에 섭섭해 합니까? 내가 남보다 힘든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너무 쉬운 것만 찾지 마십시오. 나 하기 어려운 일을 다른 사람을 시키지 말고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나 하기 싫은 일을 남편이나 며느리 시키지 말고 내가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가정은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사회는 밝아질 것입니다. 오늘 갈렙은 그 산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갈렙은 어떤 믿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신앙으로 산지를 달라고 했습니까? 1.갈렙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과 꿈이 마음속에 언제든지 가득 채워 있었습니다. 7절에 보면 "성실한 마음으로..." 9절에는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라고 갈렙의 신앙을 기록하였습니다. 갈렙은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신앙인 입니다. 갈렙은 평소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 만을 쫒는 신앙인 었다는 것입니다. 40세 때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을 때의 마음이나 45년이 지난 지금! 85세 때의 마음이나 여호와를 쫒는 변함없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로 때로 낙심하고 좌절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45년 동안의 갈렙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향하여 충성된 마음으로 변치 않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 전쟁의 승리자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남과 북은 모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남북 모두 누구나 다 "하나님 우리편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편이 되게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링컨은 그 자신이 하나님편이 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을 쫒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기도처럼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여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편한 것을 구하기 보다 힘든 일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갈렙은 남에게 기쁨을 베푸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고 주인공이 되고 싶은 시대인데 갈렙은 그 모든 영광과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갈렙이 "나는 1등 공로자니까 내가 제일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하겠소" 라고 말한다면 여호수아의 입장이나 백성들의 신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주연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조연이 없으면 주연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되려면 수많은 조연이 필요한 것처럼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에서도 조연이 필요합니다. 갈렙의 위대한 점은 그가 무대 뒷편에서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모세가 있게 된 것은 그 배후에 아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협력이 없었다고 하면 모세는 그 큰 일을 감당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갈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특별한 직책을 맡은 일이 없이 평범한 족장이었습니다. 그래도 갈렙은 불평없이 여호수아를 잘 받들어 주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간 숨은 지도자였습니다. 여호수아가 훌륭한 지도자가 된 것은 바로 갈렙과 같이 묵묵히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극이 상연되려면 주연도 중요하고 조연도 있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람들은 무대 뒤에서 조명도 해주고 분장도 해주고, 효과, 음향 등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있음으로 한편의 연극이 상연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받아야 할 영광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때 쉽게 질투하거나 섭섭해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레오날드 번스타인에게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선생님, 수많은 악기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무엇입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히기를 "제 2 바이올린입니다. 제 1 바이올린을 훌륭하게 연주하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제 2 바이올린을 연주하려는 사람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무도 제 2 연주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면 아름다운 음악이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우리는 모두 칭찬 받고 박수 받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갈렙과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사람이 되십시오. 묵묵히 무대 뒷편에서 섬기는 마음으로 살아 가십시오 기쁨을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농장 주인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진 후 농장의 가축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 잔칫상에 올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모여서 회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소가 말했습니다. "나는 주인이 농사일을 돕는데 기여합니다. 논을 갈고 밭을 갈뿐 아니라 짐을 실어 나릅니다. 그러니 나는 꼭 있어야 합니다." 그랬더니 개가 가 말하기를 "나도 도둑이 들어오면 짖고 막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고양이도 말했습니다. "나는 곡식을 훔쳐먹는 쥐를 잡아 먹습니다. 닭도 한마디 했습니다. "나는 새벽을 알리고 날마다 알을 낳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죄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돼지가 죽음으로서 그 주인집 딸의 결혼식 피로연은 훌륭하게 치룰수가 있었지만 누구하나 돼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청소원은 지저분한 직업이지만 청소하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세상이 더럽겟습니까? 여러분 세상에는 이와같이 이름도 빛도 없이 수고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정말 우리가 가야할 산지가 어디입니까? 겸손과 양보의 산지입니다 일제와 공산 치하에서 민족 해방을 위하여 싸운 조만식 장로님은 일제하에서 때때로 여러 번 투옥된 일이 있었습니다. 옥중 생활 중에서 좁은 감방 안에 14인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밤에는 14명이 함께 누워 잘 수가 없어서 7명씩 교대로 누워서 자는데 7명이 먼저 자고 나머지 7명이 뒤에 잡니다. 그런데 조장로님은 일년여 동안 단 하루 밤도 누워서 자는 일이 없었답니다. 그가 누워서 잘 시간에 몸이 허약한 사람이 보여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고 자기는 앉아서 잠을 잤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희생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3.갈렙은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12절 "그곳에는 아낙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쫓아 내리이다." "여호와께서 함게 하시면?"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그들을 쫒아내고 승리자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승리하는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실수를 하고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간음죄를 짓고 살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눈물로 간구하며, 회개하고 주님만 찾으니까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땅으로 내려가고, 이스마엘을 낳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주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하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지만 주님은 그 마음을 아시고 찾아가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시고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베드로를 다시 감싸 안으시고 높여주신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자존심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이 3가지 있다고 합니다. 1) 첫째는 "좀더 참았으면 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해서 나 자신이나 남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2) 둘째는 "좀더 베풀며 살 걸..."이라고 아쉬워 한 답니다. 자식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왜 좀더 효도하지 못했나 후회한다고 합니다. 재산을 잃어 버리고 나면 내가 있을 때에 좀더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지 못했나 후회한다고 합니다. 베푸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셋째로 "좀더 열심히 그리고 재밌게 살걸..."하는 것입니다. 돈버는 것, 살림하는 것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큰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를 감사와 기쁨으로 오손도손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후회하는 이유는 끝까지 열심히 충성스럽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방송인으로 크게 성공한 에디 켄터라는 사람은 수첩에 이런 글귀를 새겨놓고 일할 때 마다 자신을 되돌아 보곤 했다고 합니다. 1)"내가 지금 하는일이 내 재산과 내 야심을 이루기 위한 일인가 아니면 더 가치있는 값진 보람있는 일인가, 2)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남을 섬기기 위한 것인가' 내가 아무리 성공해도 내 야심을 이루는 것으로 그치면 인생의 패배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신앙의 목표는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그것이 갈렙의 신앙입니다. 갈렙은 성공한 자이지만 그는 성공보다 믿음에 승리자로 당당히 여러 사람들 앞에 나타 났습니다. 갈렙은 꿈과 비전의 갖고 믿음의 승리자요 용기있는 승리자입니다. 우리 인생이 후회없는 인생이 되려면 끝까지 맡은 일에 믿음으로 열심으로 충성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 에서 보니까 한 마리의 사자가 사슴을 쫓고 있습니다. 사자가 사슴을 잡았을까요? 못 잡았습니다. 이유는 사자는 한끼의 식사를 위하여 달렸고 사슴은 생사를 걸고 달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환경이 안 좋아도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온 열성을 다하고 전심전력하면 분명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결과가 올 것입니다. 본문 13절에는 남에게 기쁨을 베푸는 갈렙에게 주어진 결과가 무엇인지 결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읽는다). 여호수아는 그가 받은 축복권으로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갈렙을 축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갈렙의 용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을 크게 뜹시기 바람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를 읽는 성도가 되시기 바람니다. 갈렙처럼 성실하게 사시고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시기 바람니다. 불굴의 신앙 용기를 가지고 고난을 극복합시다. 인간은 늙고 변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갈렙을 더 많이 축복하시기 위하여 믿음의 산지를 주시고 크게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렙에게 꿈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었기에 갈렙은 산지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갈렙을 더 축복하시기 위하여 갈렙에게 산지를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도 꿈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여러 모양의 산지를 주셨습니다. 감사하시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람니다. "하나님이 주신 산지를 통하여 더 큰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07:41:20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흔히 인생을 경주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것도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경주 마라톤과 같은 경주에 비유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빨리 가는지 정신없이 지난 1년을 달려왔습니다. 어느덧 364일이란 시간을 살았
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07:41:20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흔히 인생을 경주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것도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경주 마라톤과 같은 경주에 비유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빨리 가는지 정신없이 지난 1년을 달려왔습니다. 어느덧 364일이란 시간을 살았고 이제 하루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일 년을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그동안 어떤 일들을 겪으셨나요? 즐거운 일, 슬픈 일, 기쁜 일, 안타까운 일 등 다양한 일들을 겪으시며 이 시간까지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흐름은 그 누구도, 어떤 세력도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희랍신화에서 시간이란 머리 뒤가 대머리라고 합니다. 시간은 다가오는 앞머리를 잡을 수 있지 자나간 다음에는 잡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딥니다. 문제는 이 시점에서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또한 붙잡을 수도 없거니와 붙잡는다고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시간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 말씀 가운데서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으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회고하고 반성할 뿐 아니라 다가오는 새로운 한 해를 대비해야 하는지를 살피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시간의 주관자를 의식하라 디모데 후서는 13개 또는 14개의 서신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바울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네로 황제의 핍박하에서 2차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본서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대략 AD 67년 경이 되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당부하는 서신을 써서 보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는 표현은 자기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내면서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직감하며 유언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디모데후서입니다. 이렇게 시간이란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며,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다가오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시간이고 때입니다. 문제는 이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시간과 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전 3:1-8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제 죽을 때가 가까이 왔음을 직면하고 디모데에게 이 서신으로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또 한해가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나의 생을 꼼꼼하게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지난 시간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살아왔는지 깊이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고 겪은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과연 내게 주어진 그 소중한 시간을 허락해 주신 주관자의 뜻과 바램에 얼마나 부합하며 살아왔는지요? 자신을 깊이 되돌아보시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2. 직무에 최선을 다하라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난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자신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선한 싸움을 싸웠고 자신에게 주어진 경주를 끝까지 완주했으며 그 경주를 믿음을 변절하지 않고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그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었고 또한 싸움의 대상이 누구였으며, 그 싸움에서 승리한 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울이란 “여호와께 간구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바울의 뜻은 “작은 자”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여행 가던 중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사실을 세 번 기록되어 있음을 봅니다(행 9:1-9; 22:4-16; 26:9-17). 그 이후 그는 주님의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행 9:15)에 순종하여 자신의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롬 11:13; 갈 2:8) 한평생 자신의 사명에 충성하였습니다(딤후 4:7). * 행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 롬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 갈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 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그가 대적한 대상들은 율법주의적 유대인들과 이교도들과 당시에 유행하였던 다양한 헬라 사상들과 영지주의와 같은 이교 사상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각종 이단 사설들이 유행병처럼 돌고 있습니다. 사리사욕에 빠진 스승을 따라다니며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각종 이단 사설이 난분분합니다. 쓸데없는 세속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시간을 허비하며 보냅니다. 지난날의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거짓이 참의 옷을 입고 약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꾀이고 있는 이 세태 속에 하염없이 정신이 팔려 허송세월하고 말았습니다. 이 송년의 시점에 이러한 점을 점검하고 다시금 추슬러 새롭게 출발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흐름과 현상을 잘 살펴 과연 내가 먼저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즉 영적 점검과 함께 재무장하여 새해를 맞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확신을 갖고 소망하라 사도 바울은 8절에서 확신 가운데 임종을 앞둔 자로서의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하여 지난 일 년을 살아오셨습니까? 그저 먹고 살기 위하여 동분서주(東奔西走)하셨습니까? 성도 모두는 장차 하나님 앞에 설 그날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 날의 평가가 최종적인 것임을 인식하고 세상의 풍습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부르신 분의 뜻을 따라 날마다 확인하며 그 뜻에 맞는 일들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긴장감과 목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사역에 충성했습니다. 그의 충성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 고백하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고후 11:23-28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정말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신실한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최선의 사역에 투신한 종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사역 비결을 밝히고 있습니다. * 빌 4:12-13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교회를 염려하는 일에 얼마나 상심해 하며 헌신했는지요? 저희도 숱한 시간 염려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주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요 긍휼을 베풀어 주신 사랑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의 전적인 헌신은 당시 교회의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로부터 인정받고 대접받기 위한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이름을 높이 드러내기 위한 자기의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대한 것은 바로 구원을 완성하시어 교회의 주인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며 칭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이 소망을 확신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질 “의의 면류관(딤후 4:8a)”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주어진 사명에 한평생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얻고 평가받을 것을 기대하고 한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대하고 소망한 것은 장차 임하실 주 예수께서 수여하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이 면류관은 “죽도록 헌신한 사역자에게 주어질” 뿐입니다. 그는 이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사역한 것을 말합니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께서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요계 2:10 a, c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 교회가 성도도 많지 않고 건물도 없어서 빌어 사용하는 상황이지만, 저희는 지난 26년 동안 한결같이 믿음을 잃지 않고 성도와 교회를 염려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 아래서 복음 전파 사역에 힘써 왔습니다. 특히 지난 5년 동안 교회 Web-site를 방문한 분들이 53만 8천 3백 명이나 됩니다. 매 주일 전한 설교 말씀은 매주 30여 개가 CD로 녹음돼 배포되고 있고 그동안 6집에 이르는 설교집도 500여 권이 배포되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발간한 설교집을 읽어 본 어느 한 성도를 만나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일 수는 있겠지만, “이런 말씀으로 교육받고 있는 둘로스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좋으시겠느냐고 하면서 정말 성숙한 성도들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말씀을 사모하고 교회를 염려하며 자신의 영적 성장과 성숙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둘로스교회는 섬겨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장차 자신이 받을 의의 면류관이 자기에게만 주어질 것이라고 자랑하지 않고 있음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8b 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말씀과 같이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성도가 충성스럽게 말씀에 순종하면 그에게도 역시 사도 바울에게 주어질 의의 면류관이 수여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 또한 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십니까? 이 진리가 우리의 소망이고 희망이고 믿음입니까? 사도 바울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한평생 충성스러운 성도의 길을 갔다면 우리 역시 그런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장차 앞으로 겪게 될 영적 현장을 이제까지 보다도 더 열악하고 혼란스럽고 힘들지 모릅니다. 작년보다 내년이 더 힘든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스스로 격려하며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할 것을 다짐했듯이, 우리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확신하고, 내년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요구하셨습니다. *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결론 이제 내일이 지나면, 365년이란 시간이 다 지나갑니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들 이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만 하지 맙시다. 그러나 실수와 실패를 잊지 말고 주의 은혜를 기억하고 더욱 불발하여 그날에 주어질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보고 다가오는 새해의 시간을 최선을 다하여 충성합시다. 바라기는 모두가 주님 앞에 설 그날을 의식하며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셔서 새해 하루하루를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잊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주인 되신 주께서 다음과 같이 칭찬하시며 영광스러운 구원에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아멘
Find Yourself In The Circle5 2002-03-15 11:44:58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목 설교자 Rev. Rick Langeloh 성경 Luke22:14-34 참고사항 college ministries of mppc 설교내용 Jesus came to the Last Supper with his disciples knowing what was ahead and knowing that he had
Find Yourself In The Circle5 2002-03-15 11:44:58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목 설교자 Rev. Rick Langeloh 성경 Luke22:14-34 참고사항 college ministries of mppc 설교내용 Jesus came to the Last Supper with his disciples knowing what was ahead and knowing that he had to prepare them for jarring events they would witness in the hours to come. In much the same way, we see Maundy Thursday as a time to prepare ourselves to remember and reflect on Jesus' work on the cross and the great news of his resurrection. We have the perspective of nearly 2000 years history on these events, but try for a few moments to put yourself back in that upper room. See if you can identify with the disciples — in their agendas, emotions or questions. It was an important night for the nation of Israel as people gathered in Jerusalem from all across the world to celebrate the Passover. Jesus had taken the time to pre-arrange for a room where he and the disciples could celebrate that special meal together. Coming on the heals of the victorious entrance into Jerusalem on Palm Sunday the air of excitement and anticipation must have been intoxicating. What would happen next? Where would all this lead? The disciples were sure they knew. They already envisioned themselves in positions of power as Jesus assumed control of his kingdom and made them rulers with him. Why not? The crowds had been ready to make Jesus king by force and the disciples had no problem with going along for the ride. To them, even Jesus seemed to match their mood. As they sat together in that upper room he told them, I have eagerly desired to eat this Passover with you before I suffer. For I will not eat of it again until it is fulfilled in the kingdom of God. I am convinced the disciples heard the word "fulfilled" and passed over the part about suffering. They had been with Jesus three years and they were sure he was going to set up his kingdom on earth. The Passover remains an important part of Jewish religion, commemorating God's deliverance of his people from slavery in Egypt. Our Jewish friends and neighbors celebrate Passover to this day and it is a special time for them to gather with family and friends, but that was especially true in Jesus' day. There were elaborate preparations for Passover. According to William Barclay: For a month before, the story and meaning of the Passover was the subject of the teaching of every synagogue. Two days before the Passover there was in every house a ceremonial search for leaven. The householder took a candle and solemnly searched every nook and cranny in silence, and the last particle of leaven was thrown out. Every male Jew, who was of age and who lived within 15 miles of the holy city, was bound by law to attend the Passover. But it was the ambition of every Jew in every part of the world... to come to the Passover in Jerusalem at least once in his lifetime. (1) Given that major priority it was not surprising that Jesus wanted to spend the Passover with his disciples. But there was a significance in Jesus' words that went beyond the traditional celebration. Jesus desired the time together with "great desire." He was passionate about this time with his disciples. And so the question emerges, "What made this event so significant?" Why was this time with his disciples so important? Why would it be important to us tonight? First of all, it was significant because Jesus wanted to assure the disciples of his love for them. Jesus, had been the leader of this small band of men for three years, and now he knew he was about to become their Savior. He knew the time of His suffering was near. The disciples had heard him preach to crowds, feed thousands, heal the sick and raise the dead. It must have been an incredibly powerful thing to hear Jesus say: "I eagerly desire to be with you." Ideally for Jesus this would have been a time to reminisce and savor his disciples' fellowship — a time for the disciples to encourage Jesus for his trial to come. But the various Gospel writers gave several insights into the minds of the disciples as they came to that Passover celebration. What the disciples brought to the dinner table that night was a variety of agendas devoted to self, not to Jesus and his needs. Jesus wanted them to remember from that night that he loved them — not for them to plague themselves with guilt for their failure to be there for Jesus. What we see reminds us of Jesus' amazing capacity to love us in spite of our selfish "double" agendas. First, there was the agenda of betrayal. Jesus knew that Judas had agreed to hand him over to the Jewish leaders. He knew the time had come for him to die. He felt the dual weight of purpose and destiny but with anticipation, not dread. Jesus' words about desiring to be together were issued to all in attendance. He still loved Judas! Luke is sparse in the details but even here we see Jesus' warning to Judas as words of compassion, "woe to that man by whom the Son of Man is betrayed!" Jesus was reminding Judas one more time of his responsibility and the implications of his choice. Was it too late? — not yet. But then Judas hardened his heart and Satan entered into him to seal his fate and carry out the deed. Next was the agenda of position and prestige. Luke records that the disciples argued about which of them was considered the greatest. This was important to them because in Jewish celebrations of that day, the host sat at the middle of the table. On the host's right sat the guest of first honor. On his left the second guest; second on his right, the third guest; second on his left the fourth guest; and so on round the table (ibid., page 67). Arguing for position meant that they were still looking for a kingdom on earth — one where their value would come from their authority and ability to wield power. Jesus did not deny that a kingdom was coming nor that they would have a key role in that kingdom. Jesus reminded his disciples that his kingdom had different values than the kingdoms of the world. At that time one of the favorite titles a king or emperor bestowed on himself was "Benefactor." A person might rule ruthlessly but yet call himself the benefactor of his people. Jesus told his disciples that it wasn't the king but the servant who received that title in his kingdom. Furthermore, Jesus got up from the table, took off his robe and started washing his disciples' feet. Ever the teacher, even at the end, Jesus gave them his own example. They knew that He was their teacher. They knew that they should wash his feet, but no one wanted to wash anyone else's feet. First betrayal. Then struggle for position and power. Next there was misplaced confidence. Jesus told Peter that Satan had desired to sift the disciples like wheat. Jesus assured Peter he had prayed for him that his faith would not completely fail and that he would be used to strengthen his brothers in their faith. Peter just as confidently assured Jesus that he would follow him to prison and to death. It never dawned on him that he would deny Jesus three times before dawn. However, Peter would soon be stripped of his props and supports to find out that even though he had gained the nick name of Peter (the rock) he was still Simon. He hadn't learned to stand on his own yet. He was shaky and didn't know it. Finally, there was the agenda of doubt. Luke didn't record that, but John did. It must have been hard for Jesus to have spent three years investing in lives, teaching, training, being observed in miracles and to have those persons asking at his last meal with him to tell them the way to the Father and to show them the Father. That's what Thomas and Philip did. Philip said, "We don't know the way" and Thomas said, "Lord, show us the Father and that will be enough." Imagine you are a teacher going into finals week and suddenly discovering that some of your top students are still unclear on the basics. Jesus had to remind the disciples,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And, "anyone who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 . . .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What is comforting to me about Jesus interactions with his disciples that night is that he loved them and wanted to be with them knowing full well their weakness and struggle. It helps me believe that he loves me and desires to be in relationship with me even when I sin, don't serve or have doubts. This is a group of guys I can relate to. They are spiritual slow learners who need the patience and prodding of a savior who loved them too much to give up on them. They wanted to believe and they wanted to follow but they couldn't make it on their own. Maybe you can relate to them too. Can you find yourself in that circle of fellowship around the table? Struggling with the need for position or power, Perhaps your lifestyle is betraying the Savior you said you would make Lord of your life, Maybe you have come tonight with doubts and are unsure about your own faith. Or perhaps you come with another issue that you know stands between you and Jesus and you wonder whether his offer extends to you. If Jesus knew about my sin, would he still love me? The good news is that Jesus issues the same invitation to each of us. He earnestly desires to spend time with us and he invites us to respond to his invitation because his character is love and grace personified. Love is a powerful force and it would be significant if that is where the story ended — but it didn't. Jesus' desire to be with his disciples on that Passover night was also significant because of what Jesus did. Jesus earnestly desired to be with the disciples because he loved them and because he knew that what he was about to go through was what they needed most. Jesus told the disciples that he would not eat of the Passover again until it found its fulfillment in the Kingdom of God. The Passover celebrated the freedom of the Jews to leave slavery in Egypt for the promised land. The Jews were to take sheep or goats, slaughter them and put some of the blood from each animal on the door posts and frames of their homes. That night God would "pass-over" those homes where the blood was in place, sparing their first born sons; those homes without the blood would lose their first born son. The Passover lamb had to be without "spot or blemish." Jesus, as the only one who lived a life without sin, was the ultimate Passover lamb. The one who's spilled blood would allow God to Passover the sins of those who believed in him. The fulfillment of the Passover meant deliverance from sin and death, and the establishment of his kingdom. And it meant that Jesus had to die! But how could he communicate that in a way that the disciples could grasp and remember in the midst of all that would transpire in the hours to come? Part of the Passover ceremony is bread made from unleavened dough, commemorating the last meal in Egypt when the people needed to be ready to leave at a moments notice. Another key ingredient was a series of cups of wine. Jesus took those elements and gave them new meaning, showing what he was about to do on the cross made it possible for a new covenant between God and humanity. He took the bread and broke it saying, This is my body broken for you; do this to remember me. And after the supper he took the cup and said, This cup is the new covenant in my blood for the remission of sins. As often as you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ou proclaim my death until I come again. Just as the blood of the Passover animal delivered your ancestors in Egypt, so my blood will deliver you from your sins. It was the new covenant of grace which allowed Jesus to take those gathered around the table and accept them, love them and continue to teach them to the end. He knew he had a purpose in coming. He knew he was about to fulfill that purpose. He wanted his friends to know and to remember. In the same way, Jesus is always looking to expand the circle of friendship that he had with those disciples in the upper room. He desires to spend time with us too. Some of us may be realizing, we've come through all of Lent and we haven't been spending time with Jesus, cultivating our relationship. It's not too late, he invites us to join him around this table and to move on with him from here. Others of us gathered here may realize that they have never entered into a relationship with Jesus. But now that you know how much he loves you, how much he was willing to do for you, how open his invitation is to you, you may decide that tonight is the night for you to receive his invitation and to invite him into your life. Now we aren't in an upper room in Jerusalem. We are in a church sanctuary in Menlo Park. But the significance of Jesus' time with the disciples is still with us today because we have experienced first hand the blessing of his sacrifice and the relationship he offers us. 970327 서클에서 자신을 찾으십시오 5 2002-03-15 11:44:58 읽기 : 6 내용 넓게보기. 및 연락처 프린트하기제목 설교자 목사 릭 Langeloh 성경 Luke22 : 14-34 MPPC의 참고 사항 대학 사역 설교 내용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그가 그들이에서 목격 할 이벤트를 거슬리는 위해 준비해야한다고 앞서 무엇인지 알고 모르고와 함께 최후의 만찬에 온 올 시간. 마찬가지로, 우리는 Maundy 목요일이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역사와 그의 부활에 관한 위대한 소식을 기억하고 반영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이 사건들에 대해 거의 2000 년의 역사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잠시 동안 그 상층 방에 다시 들어가도록 노력하십시오. 의제, 감정 또는 질문에서 제자를 식별 할 수 있는지보십시오. 사람들이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중요한 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와 제자들이 그 특별한 식사를 함께 축하 할 수있는 방을 미리 마련해 두 셨습니다.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승리하는 입구의 치유를 받으러 오면 흥분과 기대의 공기가 술에 취했을 것입니다.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 모든 것이 어디로 인도됩니까? 제자들은 그들이 알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께서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고 통치권을 행사할 때 권력의 위치에 이미 자신을 상상했습니다. 왜 안돼? 군중들은 예수를 강제로 왕으로 만들 준비가되어 있었고 제자들은 타기 위해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조차도 그들의 기분에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그 위층 방에 함께 앉았을 때, 나는 고난을 겪기 전에이 유월절 식사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취 될 때까지 그것을 다시 먹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제자들이 "만족"이라는 말을 듣고 고통에 관해 그 부분을 넘어 갔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3 년 동안 예수와 함께 있었으며 땅에 자신의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 종교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으며, 이집트에서 노예 제도에서 자신의 백성을 구출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우리의 유대인 친구들과 이웃들은 오늘날 유월절을 축하하며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모이는 특별한 시간이지만 예수 시대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유월절에 대한 정교한 준비가있었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에 따르면 , 한 달 전에 유월절의 이야기와 의미는 모든 회당의 가르침의 주제였습니다. 유월절 이틀 전에 모든 집에는 누룩에 대한 의식적인 수색이있었습니다. 그 집주인은 양초를 가져 와서 구석 구석을 묵묵히 찾아 엄숙히 수색했으며 마지막으로 누룩을 버렸습니다. 나이가 많고 성스러운 도시에서 15 마일 이내에 살았던 모든 남성 유대인은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해 법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있는 모든 유대인의 야심은 ... 그의 생애에서 적어도 한 번은 예루살렘 유월절에 오는 것입니다. (1) 그 중요한 우선 순위를 감안할 때, 예수 께서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고 싶어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에는 전통 축제를 넘어서는 의미가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큰 소망"과 함께 시간을 원하셨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이 시간에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번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밤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우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신 시키려고 하셨기 때문에 중요했습니다. 예수는 3 년 동안이 작은 무리의 지도자였으며 이제는 자신이 구주가 되려고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고난의시기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군중에게 전파하고, 수천 명을 먹이고, 병자를 고치며, 죽은자를 키우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를위한 이상적으로 이것은 제자들의 친교를 회상하고 맛볼 시간이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련이 오도록 격려 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복음서 필자들은 제자들이 그 유월절 축하 행사에 참석했을 때 몇 가지 통찰력을주었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이 식탁에 가져온 것은 예수와 그분의 필요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다양한 의제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날 밤부터 그들이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찾아 오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보고있는 것은 이기적인 "이중"의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할 수있는 예수의 놀라운 능력을 상기시켜줍니다. 첫째, 배신의 의제가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다가 그를 유대 지도자들에게 넘겨 주기로 동의 하셨다는 것을 알고있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목적과 운명의 이중 무게를 느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기대했다. 함께하고자하는 예수의 말씀이 참석 한 모든 사람들에게 발행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유다를 사랑했습니다! 누가는 세부 사항이 희박하지만 여기서도 유다에 대한 예수의 경고를 동정의 말로 봅니다.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자신의 책임과 선택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너무 늦었 어? - 아직. 그러나 유다는 마음을 굳게하였고 사단은 그의 운명을 봉인하고 행동을 수행하기 위해 그에게 들어갔다. 다음은 지위와 명성의 의제였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이 그들 중 어느 것이 가장 큰 것으로 여겨졌는지를 논박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날 유대인 축제에서 주인이 식탁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그들에게 중요했습니다. 호스트의 오른쪽에 첫 번째 명예의 손님이 앉았습니다. 그의 왼쪽에서 두 번째 손님; 두 번째는 오른쪽, 세 번째 손님; 그의 왼쪽에 두 번째는 네 번째 손님; 등등 테이블 주위에 (ibid., 페이지 67). 지위를 주장한다는 것은 여전히 ​​지상에서 왕국을 찾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왕국의 권위는 권력을 행사할 수있는 능력과 능력에서 비롯됩니다. 예수께서는 왕국이 다가오고 있거나 그 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부정하지 않으 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왕국이 세상의 왕국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당시 왕이나 황제가 자신에게 부여한 인기 타이틀 중 하나는 "혜택"이었습니다. 사람은 무자비하게 통치하지만 자신을 자신의 백성의 후원자로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왕이 아니라 자신의 왕국에서 그 직분을받은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 옷을 벗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셨습니다. 교사는 끝까지도 자신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그들의 교사라는 것을 알고있었습니다. 그들은 발을 씻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고 싶지 않았습니다. 첫 배신. 그런 다음 위치와 권력을 위해 투쟁하십시오. 다음으로 자신감이 잘못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 밀처럼 제자들을 체질하기를 원하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자신의 믿음이 완전히 실패하지 않고 자신의 형제들을 믿음으로 강화시키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 감옥에서 죽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확신했습니다. 그가 새벽 세 번 예수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그에게 새벽이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곧 자신의 소품과 지지대를 제거하여 베드로의 별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몬이라는 것을 알 수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스스로 자립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는 흔들리고 그것을 몰랐다. 마지막으로 의심의 제가있었습니다.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요한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께서 인생에 투자하고, 가르치고, 훈련하고, 기적을 행하고, 마지막 식사를 할 때 아버지 께가는 길을 알려주고 아버지 께 보여주기 위해 3 년을 보냈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 그것이 토마스와 필립이 한 일입니다. 빌립은“우리는 길을 모른다”고 토마스는 말했습니다.“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충분합니다.” 선생님이 마지막 주에 가고 갑자기 최고 학생 중 일부가 기본에 대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 요 진리 요 생명입니다. 아무도 나를 통해서 외에는 아버지 께 오지 않습니다"라고 상기시켜 주어야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과 예수와의 상호 작용에 대해 위안이되는 것은 그분이 그들을 사랑하고 자신의 약점과 투쟁을 충분히 아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죄를 지거나 봉사하지 않거나 의심이있을 때도 나와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고 믿는 데 도움이됩니다. 이것은 내가 관련된 사람들의 그룹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포기하기에 너무 많이 사랑하는 구세주의 인내와 속삭임을 필요로하는 영적인 느린 학습자입니다. 그들은 믿기를 원했고 따르기를 원했지만 스스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당신도 그들과 관련이있을 수 있습니다. 탁자 주위의 친교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습니까? 지위 나 권력의 필요로 어려움을 겪고있는 아마 당신의 생활 방식은 당신이 주님을 당신의 삶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구주를 배신하고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오늘 밤 의심을 가지고 왔으며 자신의 믿음에 대해 확신이 없습니다. 또는 당신은 당신과 예수 사이에 서있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있을 것이며, 그의 제안이 당신에게까지 이어지는 지 궁금합니다. 예수 께서 내 죄에 대해 아 셨다면 여전히 나를 사랑하겠습니까? 좋은 소식은 예수 께서 우리 각자에게 같은 초대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간절히 원하며, 그분의 성품은 사랑과 은혜로 인격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의 초대에 응답하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사랑은 강력한 힘이며, 그것이 이야기가 끝나는 곳이라면 중요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월절 밤에 제자들과 함께 있고 싶어했던 예수의 소망 또한 예수 께서하신 일 때문에 중요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 하셨으며, 제자들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월절이 하느님의 왕국에서 성취 될 때까지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약속의 땅을 위해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노예를 떠날 자유를 축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도살하고 각 동물의 피를 집의 문 기둥과 틀에 두어야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피가 있던 집을 "지나가 신"첫 아들을 아끼지 않으 셨습니다. 피가없는 집은 처음 태어난 아들을 잃을 것입니다. 유월절 양에는 "반점이나 결점"이 없어야했습니다. 죄없는 삶을 사는 유일한 사람인 예수는 최고의 유월절 양이었습니다. 피를 흘린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의 죄를 유월절로 보내실 수있었습니다. 유월절의 성취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과 그의 왕국의 설립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죽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이 앞으로 몇 시간 동안 일어날 모든 것들 가운데서 파악하고 기억할 수있는 방식으로 어떻게 그것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까? 유월절 식의 일부는 사람들이 즉시 통지를 떠날 준비가되었을 때 이집트에서 마지막 식사를 기념하는 이스트를 넣지 않은 반죽으로 만든 빵입니다. 또 다른 주요 성분은 일련의 와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요소들을 취 하셔서 그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셨으며, 그가 십자가에서하려고하신 일이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새로운 계약을 맺을 수있게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빵을 가져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를 기억하기 위해 이것을하십시오. 저녁 식사 후에 그는 컵을 들고 말했다. 이 컵은 죄 사함을위한 제 피의 새 계약입니다. 이 빵을 먹고이 컵을 마실 때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나의 죽음을 선포합니다. 유월절 동물의 피가 당신의 조상을 이집트에 전달한 것처럼, 내 피가 당신의 죄에서 당신을 구원 할 것입니다. 예수 께서 식탁에 모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끝까지 계속 가르치게하신 것은 새로운 은혜의 계약이었습니다. 그는 오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한다는 것을 알고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이 알고 기억하기를 원했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항상 위방에있는 제자들과 가진 우정의 범위를 넓히려 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와도 시간을 보내고 싶어합니다. 우리 중 일부는 깨달았을 수도 있고, 사순절을 모두 지났으며, 우리와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예수와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를이 테이블 주위로 초대하고 여기에서 그와 함께 나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여기 모인 다른 사람들은 결코 예수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이 그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기꺼이했는지, 그의 초대가 당신에게 얼마나 열려 있는지 알게되었으므로, 오늘 밤 당신이 그의 초대를 받고 당신의 인생에 초대 할 밤이라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 이제 우리는 예루살렘의 위층 방에 없습니다. 우리는 멘로 파크의 교회 성소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시간의 중요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희생의 축복과 그분이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관계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970327
Gentle Jesus?7 2002-03-15 20:42:01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목 설교자 Rev. Scott Dudley 성경 John2:12-17 참고사항 college ministries of mppc 설교내용 In preparation for this sermon I asked Dave Swartz, one of our media technicians, to scan in some pictures from
Gentle Jesus?7 2002-03-15 20:42:01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목 설교자 Rev. Scott Dudley 성경 John2:12-17 참고사항 college ministries of mppc 설교내용 In preparation for this sermon I asked Dave Swartz, one of our media technicians, to scan in some pictures from my Children's Bible. These are the images of Jesus that I grew up with. Display pictures on video screen. Here, we have Jesus looking gentle. Here we have Jesus looking deserted. Here, we have Jesus looking exhausted. It's the Jesus on tranquilizers effect. These are the pictures I grew up with. Jesus as gentle, Jesus as meek, Jesus as mild. And above all, Jesus as nice. As a child, and even now, these pictures are great in that they remind me that Jesus is loving and that he's kind -- which he is. However, pictures like these don't tell the whole story about who he is. Jesus is also a little more radical than these pictures suggest. Consider the story we just read from the Bible about Jesus clearing the temple tables. He comes off as a radical guy. If you look at this thing from the merchant's point of view all they were trying to do in the temple was provide a service. They provide some animals for people to sacrifice, and a place where they can exchange their money. It's kind of a one-stop shopping experience. They can get their shopping done and worship all in one shot. Then, Jesus, without so much as a "How do you do" comes in and turns their tables over. It's not nice. And it is not the kind of thing that religious leaders are supposed to do. Let's just put this in context. Let's just say Doug here suddenly went berserk and came and started turning things over up here and yelling at us about how we don't sing on key. That would be shocking, right? Tomorrow Walt and the elders would have to take poor Doug out to lunch and try to calm him down. Doug what's wrong? Are you bitter about your salary? What is it? It would be a scandal. You can understand, then, why people were so outraged by Jesus. He tolerated what he wasn't supposed to tolerate, like prostitutes and tax collectors. And he didn't tolerate what was supposed to impress him, like merchants in the temple. He was good, but he wasn't always nice. I don't know about you, but that scandalizes me because what I want most of the time is a nice, gentle Jesus. I don't want a Jesus who is going to confront me. I don't want a Jesus who is going to come into my life and tell me that I might be doing something wrong, especially if I like what I am doing. I don't want Jesus to overturn any of my tables. But just like Jesus clears the temple, he wants to clear the temple of our lives of anything that gets in the way of knowing him better. Throughout the New Testament we are referred to as the temple of God. 1 Corinthians 3:16 says this,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The temple is just a metaphor for us. And Jesus may want to get in our lives and overturn a few things so we can get to know him better. To begin with, I think Jesus wants to overturn the ways we commercialize our relationship with him. Jesus says to the merchants, How dare you turn my Father's house into a market. The problem with these merchants in the temple is that they were making a relationship with God into something that was commercial. Relating to God became a matter of buying a pigeon and paying a temple tax. It was a business transaction. And it commercialized the way people related to God. I think we do similar things, at least I do, in a couple ways. For instance, a lot of times I think we go shopping for the aspects of God's character that we like, leaving out the parts of God that we don't necessarily want to follow. I was having lunch with a student a while back, and I was talking to the student about God's call in our lives to love other people, to reach out to them, and to give them our time. As I was talking to him the student just looked at me and said, Well, I just choose to not believe in a God like that. How do you do that? You can't pick a God like you pick a cell phone. I like these features, but not these features in my God. God is who God is. And when we go picking and choosing what parts of him we want to follow, that's a consumer mentality toward God. We say he is our Savior, but we don't want him as our Lord. Another way I commercialize my relationship with God is sometimes I come to God or I come to church looking only for what I can get out of it. To have my tastes met, to have my comfort attended to, rather than coming to God to worship him and to reach out to a hurting world. That's a consumer mentality toward God. I think the biggest way that I commercialize my relationship with God is that I barter with him and I bargain with him to try to get what I want. Just this last week I was upset at God because I had given a series of talks in our college group that I thought were pretty lousy. I was feeling like a failure -- and a little frustrated with God because in that particular week I had actually prayed extra hard. I had actually read the Bible a little longer than normal, and I had done a few extra good deeds, and it seemed to me that the least God could do was to help me out with my career. It's dumb theology, but it is mine. I was bartering with God -- bartering with him to try to get what I wanted out of him. That is commercializing my relationship with God. I think a lot of us do this. We pray long and faithfully, hoping that God will bless our business. We rack up a lot of good deeds hoping God will see it, and in return, give us a spouse or a better house or whatever it is we think we want. That is commercializing our relationship with God. It turns him into a vending machine. And the biggest problem with all of this is we rob ourselves and we rob God of a real living relationship with him. That is why Jesus says, My house should be called a house of prayer but you are making it a den of robbers. Jesus contrasts prayer and theft, which don't seem like natural opposites, but they are. Prayer is supposed to be about intimacy with God and seeking his instead of ours. It's not about bartering with him. When we barter with him, we commercialize our faith and that robs us of a real relationship with him. Jesus came to overturn all the ways we do that. That's not all Jesus came to change. He doesn't want to just change us as individuals; he also wants to change who we are as a community. Which brings me to the second thing that Jesus is overturning here. Jesus wants to overturn the way we exclude people from his community. Another problem with the merchants in the temple is they were excluding some people from worshiping God. The poor people could not afford their rates, so they were left out. But more than that, they had set up shop in what was called the Court of the Gentiles. That court was meant to be a place where non-Jews could come to worship, but they couldn't because there were cows and sheep and merchants cluttering it up, so they were excluded. In fact, the entire temple in Jerusalem was a system of exclusionary courtyards meant to keep certain people away from God. The outside was a court for the gentiles, One step in was a court for women, Further in was a court for Jewish men, Further in still there was a court for the priests, and Finally, there was a court that only the high priests could enter in, and then only once a year. It was a system of exclusions. Jesus came to overturn all of that. In fact, after he cleared the temple, Matthew reports that, the blind and the lame came to him for healing in the temple area. In other words, Jesus had provided room in God's house for people who were normally left out. Now that sounds good and inclusive and nice, but when I am honest with myself, sometimes that rubs me the wrong way. Because sometimes there might be a few people that I would like to exclude. At a church I worked at, the high school pastor got a letter from a woman complaining about the fact that there were a lot of non-Christian kids in the youth group. She complained that these non-Christian kids, after the youth group was over, made too much noise and listened to music that she considered to be ungodly. Some of them were smoking and cussing and she thought that was a disgrace to the church. People like that don't belong in church. That was her point. I remember that a few other people on staff and I had a good time pointing out all the theological fallacies of that letter -- Jesus came for just such people, and if Jesus were here, he'd tell this person off, etc. We were pointing out all the errors in the letter, and I was feeling pretty smug for understanding the Almighty better than anyone else until one staff member said, You know, Jesus wants to include this woman in his church just as much as he does those kids. You see, the radical inclusivity of God's grace for this woman meant that Jesus wanted those kids in his church. And the radical inclusivity of God's grace for me meant that Jesus wanted that woman in his church just as much as he wanted those cussing, smoking teenagers. Or for that matter, just as much as he wanted judgmental, arrogant me. Nobody is first. Nobody is last. Everybody is welcome as long as they put their faith in Jesus Christ. Now, for a person like me who has spent his entire life trying to be number one, that's a scandal. It's good, but it doesn't always feel nice because it challenges me. Jesus wants to overturn all the ways we exclude people from this community. The bottom line of this story and the main point of this sermon is this: Jesus wants to overturn any barrier, whatever it is, that separates anybody from knowing him. Whether that is people inside the church or outside, Jesus wants to get rid of all barriers. That is why he was so angry in this story. The temple is supposed to be the place where God's spirit dwelt and where people could come to meet God. And all those tables in the temple acted as barriers between people and God. And Jesus came to get rid of anything that divides people from God. That's his whole mission. That's the whole point of the cross. That's why he came. What was the biggest barrier between God and us? It was our sin. And Jesus went to the cross to get rid of it. He paid the penalty for our sin so we could know intimacy with God. But he didn't just stop there. He came to remove any barriers that would separate us from God. So the take-home question this morning is this: What tables have you set up in your life that act as a barrier between you and God? Because Jesus wants to get rid of them. Maybe, like me, it is your commercial view of God. Maybe, like me, you try to bargain with God for what you want. Jesus wants to overturn that. Maybe it's a career that is more important to you than God. Maybe it's a relationship or a sinful behavior that you can't give up. He wants to overturn those things. For us as a community, maybe there are people that aren't here that should be because somehow we are leaving them out. Jesus wants to overturn that. Some of you here this morning may be living this out. Maybe Jesus is trying to pull something out of your life that you kind of like. It feels like he is turning over some tables and it doesn't feel very nice. I want you to trust me on this; it is good even if it doesn't feel good. He is doing it because he loves you. He is doing it because he just wants to be closer to you. Throughout graduate school I would say the biggest barrier between me and God was my addiction to success. I worked way harder at achieving accolades than I did at getting to know Jesus. And it was more important for me to publish a paper in a prestigious journal or land a great job at a top University than it was to know Jesus or to serve him. I was addicted to success. And then he got me into this job doing college ministry. If you know anything about college ministry, it is notoriously difficult to build because college students have a lot of things that they would rather do than to come to hear me preach at them -- which makes me feel unsuccessful, because to me the entire world is one giant mirror and all it reflects is me. That's called narcissism and it is a psychological disorder. But I am getting over it. Jesus has been turning that table over for four years. At times it has been painful and I have felt like a failure, and at times it is hard, but it has all been very good for me. I am learning slowly that I have to measure myself by my relationship with God, not by how good I am at something or how successful I am. I have to measure myself by my faithfulness to him, not by my success. And the difficulty of the job has forced me to lean on him more then I ever had to in my life, and all that has brought me closer to Christ. I would do all of that over again. It's cheap at twice the price, to know him better. Jesus wants to get rid of anything that stands between him and us, and so whatever it is that is blocking us from him, he wants to eliminate it. My dad tells a great story about growing up on a farm as a little boy miles from the nearest town. On that farm they had a tree that had a bird's nest full of eggs. He and his siblings would watch the eggs everyday to see if they would hatch. When they did, they were so excited about the baby birds because they were the closest things to pets that they'd ever had. One day my dad and his siblings were out in the yard and this giant snake started slithering up the tree, going for those baby birds. My dad and his sister started to scream. The mother bird was circling overhead but she couldn't get to the nest because of the snake. The baby birds were chirping and the mother bird was chirping and my dad and his sisters were chirping. Everyone was chirping. So my grandma who was a loving and gentle, but simultaneously kind of a frightening woman, did something a little unusual for her. She picked up a hoe and went running across the yard and started hacking the snake to bits, which just terrified my dad all the more. He was more afraid of his mom at that point than he was the snake. But in the end she killed the snake and the birds were safe. Now, I want to ask you these questions: Was that a nice grandma? Was that a gentle grandma? No! But in that instance she couldn't afford to be nice and gentle. It was either the snake or the birds, and next it might have been her kids. She loved both enough to protect them from anything that was going to harm them. And, as much as it terrified my dad, in the long run it actually comforted him because he knew he had this strong Amazon woman for a mother and she was on his side. And there was nothing that was going to hurt him as long as she was around. That is Jesus Christ. Yes, he is kind; Yes, he is gentle; Yes, he is loving. But he is also strong. And there are things that threaten to separate us from God our Father. There are things that threaten our spiritual lives and Jesus is zealous to overturn those things. Whether that's our selfishness, our pride, our unholy thoughts and actions, our fear, our guilt, our sense of inadequacy, whatever it is that separates us from God, Jesus will overturn it. It may not always feel nice, but it is always good. So, what are the tables that you have set up in the temple of your life that keep you from knowing the fullness of God? Jesus wants to overturn them. Why don't you let him? 온화한 예수? 7 2002-03-15 20:42:01 읽는 : 8 내용 넓게보기. 및 연락처 프린트하기제목 설교자 목사 스콧 더들리 성경 John2 : 12 ~ 17 개 MPPC의 참고 사항 대학 사역 내용 설교 내 어린이 성경에서 일부 사진 스캔 데이브 스와 츠, 우리의 미디어 기술자 중 하나를, 요청이 설교를 준비합니다. 이것들은 내가 자란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비디오 화면에 사진을 표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부드럽게 보이게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버리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는 예수님을 지치게합니다. 진정제 효과에 대한 예수입니다. 이것들은 내가 자란 사진들입니다. 온유 한 예수, 온유 한 예수, 온유 한 예수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예수. 어린 시절, 그리고 지금도이 그림들은 예수가 사랑하고 친절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전체 이야기를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예수는 또한이 그림들이 제시하는 것보다 조금 더 급진적입니다. 예수 께서 성전 식탁을 치우는 것에 관해 성서에서 읽은 이야기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급진적 인 사람으로 떠납니다. 상인의 관점에서이 점을 보면 그들이 성전에서하려고 한 모든 것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희생 할 수있는 동물과 돈을 교환 할 수있는 장소를 제공합니다. 일종의 원 스톱 쇼핑 경험입니다. 쇼핑을 마치고 한 번에 숭배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어떻게합니까?”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 와서 식탁을 뒤집습니다.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이해야 할 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문맥에 넣어 봅시다. 여기 Doug가 갑자기 맹렬하게 갔다가 여기로 물건을 넘기고 우리가 키를 부르지 않는 방법에 대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고 가정 해 봅시다. 충격적일까요? 내일 Walt와 장로들은 가난한 Doug를 점심으로 데리고 가서 진정 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더그 무슨 일이야? 당신은 당신의 급여에 대해 쓴가? 무엇입니까? 스캔들 일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예수님에 의해 분노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춘부 나 세금 징수 원과 같이 자신이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용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전 상인처럼 자신에게 깊은 인상을 줄만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좋았지 만 항상 좋은 것은 아니 었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 잘 모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원하는 것은 훌륭하고 온화한 예수이기 때문에 저를 스캔들합니다. 나는 저와 마주 칠 예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 와서 특히 내가하고있는 일을 좋아한다면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말할 예수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예수가 내 식탁을 뒤집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께서 성전을 지우 신 것처럼, 그분은 우리의 삶의 성전을 그분을 더 잘 아는 데 방해가되는 것들로 지우고 싶어합니다. 신약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립니다. 고린도 전서 3 장 16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영이 당신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성전은 우리에게 은유 일뿐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우리의 삶에 들어가서 몇 가지를 뒤집어 우리가 그분을 더 잘 알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예수는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를 상업화하는 방식을 뒤집기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상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어떻게 아버지 집을 시장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까? 성전에서이 상인들의 문제는 그들이 상업적인 것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것은 비둘기를 사서 성전 세금을 내야하는 문제가되었습니다. 비즈니스 거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방식을 상업화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적어도 몇 가지 방법으로 비슷한 일을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가 좋아하는 하나님의 성품의 측면을 위해 쇼핑을한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반드시 따르고 싶지 않은 하나님의 부분은 제외합니다. 나는 한 학생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우리에게 시간을 주라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학생과 이야기하고있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이야기하면서 학생은 방금 나를보고 말했다. 저는 그런 신을 믿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어떻게합니까? 당신은 당신이 휴대 전화를 선택처럼 신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나는이 특징들이 마음에 들지만, 나의 특징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이 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따라 가고자하는 부분을 고르고 선택할 때, 그것은 하나님 께 대한 소비자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구주라고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업화하는 또 다른 방법은 때때로 하나님 께 나아갈 수 있거나 교회에서 나올 수있는 것만 찾아내는 것입니다. 내 취향을 충족시키고, 그분을 경배하고 아픈 세상에 손을 뻗기 위해 하나님 께 나아 오기보다는 내 안락함을 지키기 위해. 그것은 하나님 께 대한 소비자의 생각입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업화하는 가장 큰 방법은 내가 그와 물물 교환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그와 협상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나는 우리 대학 그룹에서 꽤 거칠다고 생각한 일련의 연설을했기 때문에 하나님 께 화를 냈습니다. 나는 실패와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특정 주에 나는 실제로 열심히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조금 좌절했습니다. 나는 실제로 평상시보다 조금 더 오래 성경을 읽었고, 나는 약간의 선행을 더 많이했으며, 하나님 께서 할 수있는 최소한의 일이 저의 경력을 도와주는 것 같았습니다. 멍청한 신학이지만 내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물물 교환을하고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업화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이 일을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하나님 께서 우리의 사업을 축복하기를 바라면서 길고 충실하게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께서 그것을 보시기를 바라면서 많은 선행을 쌓아 놓았으며, 그 대가로 배우자 나 더 나은 집 또는 우리가 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업화하는 것입니다. 그를 자동 판매기로 바꿉니다. 그리고이 모든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를 빼앗아 하나님과 그분과의 실제 생활 관계를 빼앗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내 집은기도의 집으로 불리어야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기도와 절도를 대조해보십시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감과 우리를 대신하여 그분을 찾는 것이어야합니다. 그와 물물 교환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와 물물 교환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상업화하고 그로 인해 우리는 그와의 진정한 관계를 잃게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하는 모든 길을 뒤집으 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께서 다 바꾸신 것은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개인으로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가 공동체 인 사람을 바꾸고 싶어합니다. 예수 께서 여기에서 뒤집어 놓으신 두 번째 일로 나를 안내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사람들을 자신의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방식을 뒤집기를 원하십니다. 성전 상인들의 또 다른 문제는 일부 사람들이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금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배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들은 이방인의 법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상점을 세웠습니다. 그 법정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예배를 올 수있는 곳 이었지만 소와 양, 상인들이 그것을 어지럽히 지 않아서 배제 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있는 성전 전체는 특정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하는 배제 안뜰 시스템이었습니다. 외부는 이방인 을위한 법정이었고 , 한 걸음은 여성 을위한 법정이었고 , 또 한 명은 유대인 남성을위한 법정이었으며, 더 나아가 제사장을위한 법정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대제사들만 들어갈 수있는 법정이 있었으며 그 후에는 일 년에 한 번만 법정이있었습니다. 제외 시스템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뒤집으 셨습니다. 실제로 마태 복음은 성전을 개간 한 후에 맹인과 절름발이가 성전 지역에서 치료를 받으러 왔다고 보고합니다 . 다시 말해서, 예수는 일반적으로 빠져 있던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의 집에 방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제는 포용적이고 훌륭하게 들리지만,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때로는 잘못된 길을 sometimes습니다. 때로는 제외하고 싶은 사람이 몇 명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일한 교회에서 고등학교 목회자는 한 청년 그룹에 비 기독교 어린이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불평하는 한 여자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청소년 그룹이 끝난 후이 기독교인이 아닌 아이들이 너무 많은 소리를 내고 불경건하다고 생각한 음악을 들었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흡연과 저주를 받았으며 그녀는 그것이 교회의 수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요점이었다. 나는 다른 몇몇 직원들과 나는 그 편지의 모든 신학 적 오류를 지적하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기억했다. 예수는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오셨으며, 예수가 여기 계셨다면,이 사람에게 말을 해주셨을 것이다. 편지의 모든 오류를 지적하고 있었고, 한 직원이 말할 때까지 전능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는이 여자를 그 아이들에게하는 것처럼 교회에 포함 시키려고합니다. 아시다시피,이 여자에 대한 하느님의 은혜의 과격한 포괄 성은 예수 께서 교회에있는 그 아이들을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과격한 포괄 성은 예수가 저주하고 흡연하는 십대들을 원하는만큼 교회에서 그 여자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는 그 문제에 대해, 그가 판단하고 싶었던만큼 오만했습니다. 아무도 처음이 아닙니다. 아무도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한 모든 사람을 환영합니다. 지금, 평생 동안 최선을 다해 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것은 스캔들입니다. 좋지만 항상 도전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이 공동체에서 사람들을 배제하는 모든 방법을 뒤집기를 원하십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과이 설교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아는 사람과 구분하는 장벽이 무엇이든 뒤집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교회 내부에 있든 외부에 있든 예수께서는 모든 장벽을 없애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는이 이야기에서 매우 화가났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러 올 수있는 곳이어야합니다. 그리고 성전의 모든 탁자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장벽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나누는 것을 없애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요점입니다. 그래서 그가왔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가장 큰 장벽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없애기 위해 십자가로갔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알 수 있도록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킬 수있는 장벽을 없애기 위해 왔습니다. 오늘 아침에 가져가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장벽 역할을하는 당신의 삶에 어떤 테이블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을 없애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처럼, 그것은 당신의 하나님에 대한 상업적인 견해 일 것입니다. 어쩌면 나처럼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 께 협상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그것을 뒤집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신보다 당신에게 더 중요한 직업 일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이 포기할 수없는 관계 또는 죄 많은 행동 일 수 있습니다. 그는 그런 것들을 뒤집기를 원합니다. 공동체로서 우리에게는 아마도 여기에없는 사람들이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것을 뒤집기를 원합니다. 오늘 아침 여기에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이 생활을하고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꺼내려고 노력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가 일부 테이블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느껴지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것을 믿기를 바랍니다.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좋습니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당신에게 더 가까이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하고 있습니다. 대학원 전체에 걸쳐 저와 하나님 사이의 가장 큰 장벽은 성공에 대한 중독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아는 것보다 찬사를 얻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저를 명예 저널에 출판하거나 일류 대학에서 훌륭한 직업을 구하는 것이 예수를 아는 것이나 그를 섬기는 것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나는 성공에 중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학 사역을하면서이 일을하게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대학 사역에 대해 알고 있다면, 대학생들이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축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의 거대한 거울이며 그것이 반영하는 것은 저뿐입니다. 그것은 자기애라고 불리며 심리적 장애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4 년 동안 그 식탁을 뒤집어 오셨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고통스럽고 실패로 느껴졌고 때로는 힘들지만, 그것은 모두 나에게 아주 좋았습니다. 나는 내가 어떤 일을 잘하는지,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측정해야한다는 것을 천천히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성공이 아니라 그에 대한 나의 신실함으로 자신을 측정해야한다. 그리고 일이 어려워서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 다 더 의지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모든 것이 나를 그리스도 께 더 가까이 데려 왔습니다. 나는 다시 그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그를 더 잘 알기 위해 두 배의 가격으로 싸다. 예수님은 그와 우리 사이에있는 것을 제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막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없애고 싶어합니다. 아빠는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작은 소년 마일로 농장에서 자라는 좋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농장에는 새의 둥지에 알로 가득 찬 나무가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알이 부화하는지 알기 위해 매일 알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그랬을 때, 그들은 아기 새들에 대해 매우 흥분했습니다. 어느 날 아빠와 그의 형제들이 마당에 나왔는데이 거대한 뱀이 나무 위로 미끄러 져 가서 새들을 낳았습니다. 아빠와 여동생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미 새가 머리 위로 돌고 있었지만 뱀 때문에 둥지로 갈 수 없었습니다. 아기 새들이 rp 소리를 내며 엄마 새가 rp 소리를 내며 아빠와 그의 자매들이 rp 소리를 지르고있었습니다. 모두가 chi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랑스럽고 온화한 할머니 그러나 동시에 무서운 여자는 그녀에게 조금 특이한 일을했습니다. 그녀는 괭이를 들고 마당을 가로 질러 달려가 뱀을 조금씩 해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뱀보다 그 시점에서 엄마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뱀을 죽였고 새들은 안전했습니다. 자, 나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하고 싶습니다 : 좋은 할머니였습니까? 온화한 할머니 였나요? 아니! 그러나 그 경우에 그녀는 친절하고 온화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뱀이나 새였으며 다음은 그녀의 아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해를 끼칠 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에 충분히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겁에 질린만큼 장기적으로는 어머니를 위해이 강한 아마존 여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 기 때문에 실제로 그를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주변에있는 한 그를 다치게 할 일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 그는 친절합니다. 예, 그는 온화합니다. 예, 그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강하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 시키겠다고 위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 있으며, 예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뒤집으려고 열심을 내 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기심, 자부심, 거룩하지 않은 생각과 행동, 두려움, 죄책감, 부적절 함 등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이 무엇이든 예수께서는 그것을 뒤집으 실 것입니다. 항상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항상 좋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당신의 삶의 성전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충만 함을 알지 못하게하는 테이블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을 뒤집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를 보내지 않습니까?
Step by Step6 2002-03-15 20:34:56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목 설교자 Rev. Frank VanderZwan 성경 1 Samuel16:1-13 참고사항 college ministries of mppc 설교내용 All of us at some level struggle to find the will of God for our lives. I'm facing a serious illness,
Step by Step6 2002-03-15 20:34:56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목 설교자 Rev. Frank VanderZwan 성경 1 Samuel16:1-13 참고사항 college ministries of mppc 설교내용 All of us at some level struggle to find the will of God for our lives. I'm facing a serious illness, what will happen to me? I'm worried about decisions my children are making. Will I ever find the person that I'm meant to be with in my life? I've lost my job, now what? Where is God in all of this? The truth is this: Often we know what His will is, but we would rather not do it. Sometimes we follow his will until it becomes too difficult. Often we simply try to shortcut God's leading. Many times we don't have the patience to wait for God. Maybe it's easier to do nothing and wallow in the past and worry. Perhaps the future simply looks frightening. God's will is like this beam of light. It is there. It is powerful. It allows us to see. In it we have security and safety. His light never gets turned off. However, we make the choice of stepping into that beam or not. We are the ones who make the choice of using the light... God's will, or not. There is only one answer to the question of God's will. Trust in Go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Proverbs 3:5-6). How do we reach a place in life where we can trust God for anything and everything? Paul, writing to the Thessalonians, says: Be joyful always; pray continually;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In Romans 12:2 we read: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 -- 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Knowing God's will begins with a loving relationship with Him. The will of God is expressed in the present tense. It comes out of our growing "love" relationship with God. Now, for a little background on the story before us. Saul, the first king of Israel, through his stubborn arrogance and disobedience had become a great disappointment to God. The most telling statement is found in 1 Samuel 15:11 I am grieved that I have made Saul king, because he has turned away from me and has not carried out my instructions. 1. The first truth is that we are to take action! Our text opens with Samuel mourning the circumstances of Saul's demise. He wasn't prepared to let go of the past because he didn't think this was how things would turn out. God tells Samuel to stop worrying about what He, God, has already decided to do. How long will you mourn for Saul since I have rejected him as king over Israel? (verse 1) In other words How long are you going to stay focused on yesterday rather than trusting God for today? Life is not about what has been but about what is to be. The gap between how it is and how it ought to be, is where the real journey of faith is. Christ fills in the gap. The most important step of faith is the first step. We must move because it is in pursuing, that we truly find God's will for our lives. God said: Samuel, get on with things. Go fill your horn with oil and be on your way. I am sending you to Jesse of Bethlehem. I have chosen one of his sons to be king. (verse 2) As God revealed his will it was evident that he would tell Samuel only what he needed to know step by step. No information overload here. If Samuel were to trust God he didn't need to know the whole plan, just one piece at a time. This reality of having to move forward in obedience to God's will is shown over and over again in the scriptures. Many of the Biblical characters from Abraham and Moses to Paul had to move out in faith and trust God in the face of the unknown, often through enemy territory. Many times it would have been easier and more comfortable to sit by the fire and reflect on how things were or how things could be than to step out. As we step out in faith there are several things about the will of God that we need to know. Don't ever give up despite the circumstances of life. There are no shortcuts with God. We cannot manipulate God to do what we want. Seek God's will does not mean asking him to bless our will. God also makes it clear that He is the one who makes the choices about the future, and we just trust him for it. He doesn't consult Samuel about whom he thinks would make a good king, but rather he just tells him to do what he wants him to do. So, added to our loving relationship with the Father, there is a powerful sense of obedience and faithfulness connected to the will of God. 2. The second truth is that God will walk us through enemy territory and make all the provisions needed! Even a godly person can have questions. But Samuel said, "How can I go? Saul will hear about it and kill me?" (verse 2) Samuel was afraid for his very life. There is no doubt that Saul would have tried to kill him if he could have. Samuel was heading into enemy territory and he was afraid. In frightening circumstances for Samuel, God again shows that He can make a way through a path that seems too difficult to follow. The Lord said, "Take a heifer with you and say, 'I have come to sacrifice to the Lord.'" Invite Jesse to the sacrifice, and I will show you what to do. You are to anoint for me the one I indicate. (verse 3) God told Samuel to bring a heifer because this was the appropriate response in terms of a peace offering for victory as well as for consecration. What is the enemy territory in our lives? It can be dealing with the past, worry and anxiety about the future, career changes, our loneliness, illness, and uncertainty. Many times as we face circumstances that seem dark and frightening. When Samuel listens to God's direction, the instructions are simple: Fill your horn with oil. Go to Bethlehem. Invite Jesse to the sacrifice. Check out his family and I will take you to the next step. It isn't complicated. God calls us to just show up in trust and obedience. Trust God because He knows what He is doing and he will surprise us with his unfolding plan. One step at a time. God doesn't give Samuel more information than he needs at the time. There is no information overload, but it is just simply a moving forward one step at a time, learning to be obedient, and following the Lord direction. A great statement is found in verse 4 Samuel did what the Lord said. Obedience! When we face the uncertainty of our day-to-day life can we do what Samuel did; move forward in total trust? Hasn't God shown His faithfulness and care for us over and over again in the face of the uncertainties of our lives? Think about some of the valleys where God has come alongside to carry you. 3. The third truth is that we must be in constant prayer! Prayer is not an "add-on" or a "second thought" because it is the primary source for staying in the beam of God's will. Samuel did what the Lord commanded as he continued to be in communication with God. Samuel saw Eliab and thought, "Surely the Lord's anointed stands here before the Lord." (verse 6) Samuel understood that he was to anoint the next king of Israel and of course from a human perspective the new king would be the eldest son of the family, the biggest and the strongest, so that he could be a good leader. But God doesn't use the human standards to gage his choices. How did Samuel know what God's will was at this point? He talked with God. Not only do we talk with God, but we also have to listen when he speaks. Sometimes our communication style is that we ask questions and don't ever wait for an answer because we already assume what the person is going to say. God's word for Samuel was crucial. He says that Eliab was not the chosen one. But the Lord said to Samuel, "Do not consider his appearance or his height, for I have rejected him. The Lord does not look at the things man looks at. Man looks at the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verse 7) God's will isn't always our will and we don't always understand it at the time. We look at things from our limited human perspective rather than through God's lens. By just looking at outward appearance we cannot figure out what a person is like. How about our co-workers? Don't we make quick and unfair judgements without giving someone else a chance? Have a look around at the people sitting beside you today. What conclusions would you draw about them today? What do you think about them? Now remember that God makes his decisions about people based on what is on the inside and not on the outside. "Then Jesse called Abinadab and had him pass in front of Samuel. But Samuel said, "The Lord has not chosen this one either." Jesse had Shammah pass by, but Samuel said, "Nor has the Lord chosen this one." Jesse had seven of his sons pass before Samuel, but Samuel said to him, "The Lord has not chosen these." (verses 8-9) Here is another clue to the way in which we pray for God's will. We are to be patient. God lets the whole family pass before Samuel to show that it is not man's will at work but rather God's. >From a human perspective perhaps any of the boys would have made a good king, but it was not to be God's choice. The choice would lie with yet another son. This son was the least significant of all the brothers, he was also the youngest and would not be fit for a kingly role. God sees the significance and the potential of every person which is something that we can't do. Think of the possibilities for us every day if we patiently respond to the leading of the Holy Spirit in our lives. The reward for Samuel was the completion of his task and that is celebrated by the power of God poured out. So Samuel took the horn of oil and anointed him in the presence of his brothers, and from that day on the spirit of the Lord came upon David in power. (verse 13) Samuel saw the results of his journey and thus was able to praise God for it, but this is not always the case. Faith is belief in the invisible realities. In this life we are often blinded by the visible realities to the invisible realities.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Hebrews 11:1) Our journey is one step at a time, moment by moment, relying on the power of the God of the Universe who is absolutely in love with each of us. Some of you here today may think that this is a slick formula for finding God's will. Let me tell you that there is no formula. This past week one our my best friends, Gerry Grant, died. He was a great friend who trusted God even though it was not really the outcome that he desired. I want to share a quote from a note he sent to his family when he was diagnosed with leukemia at the end of October: Our ultimate happiness, salvation and assurance is to be united with Him in eternity, and that is what I want for each of you. I have no idea what he wants for me in the days ahead, but I do know he has given me the drive to continue to be a counselor and comforter to my loved ones. I love you all very much and want you to understand and accept his perfect will for whatever happens in the future. We'll be honored beyond belief if you will just BELIEVE. Love, your Dad and Grandpa. Here is a man who relates to God's will in reality. We now see that this is not just some slick formula. This is not an easy three-step program to finding God's will. The reality is that working through God's will is a struggle. But, we are reminded that in effect we must begin by recognizing that we are in a loving relationship with God. Then, we walk forward in our lives in obedience and faithfulness to Him. The truth is this: Trust in God with all your heart and lean not on your own understanding.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6 단계 단계별 2002-03-15 20:34:56 읽기 : 6 내용 넓게보기. 하기 및 연락처 프린트제목 설교자 목사 프랭크 VanderZwan 성경 1 Samuel16 : 1-13 MPPC의 참고 사항 대학 사역 설교 내용 우리 모두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어느 정도의 투쟁에서. 심각한 질병에 직면했습니다. 어떻게됩니까? 자녀들이 내린 결정이 걱정입니다. 내 인생에서 함께 할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요? 나는 직업을 잃어 버렸다. 이제 무엇?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진실은 이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게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 어려워 질 때까지 그분의 뜻을 따릅니다. 종종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인도를 단축하려고 노력합니다. 여러 번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아무것도하지 않고 일을 더 쉽게하고 걱정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아마도 미래는 단순히 무섭게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이 빛의 광선과 같습니다. 저기있어. 강력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보안과 안전이 있습니다. 그의 빛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빔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빛의 사용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질문에는 단 하나의 대답 만이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이해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모든 방법으로 그를 인정하고, 그는 당신의 길을 곧게 만들 것입니다. (잠언 3 : 5-6). 우리는 어떤 일과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을 믿을 수있는 삶의 장소에 어떻게 도달합니까?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쓰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계속기도하십시오. 모든 상황에서 감사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당신을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로마서 12 장 2 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습니다. 더 이상이 세상의 본을 따르지 말고 당신의 생각이 새롭게 됨으로써 변화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분의 선하고 기쁘고 완전한 의지를 시험하고 승인 할 수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그분과의 사랑스러운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현재 시제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성장하는 "사랑"관계에서 나옵니다. 이제, 우리 앞에있는 이야기에 대한 약간의 배경.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은 완고한 오만과 불순종으로 인해 하느님 께 크게 실망하게되었습니다. 사무엘 상 15 장 11 절에서 가장 말하는 것은 사울 왕이 나를 떠나서 내 지시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울 왕이되었음을 슬프게한다. 1. 첫 번째 진실은 우리가 행동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문은 사무엘이 사울의 죽음의 상황을 애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이것이 상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를 놓을 준비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자신이 이미 결정한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시오. 내가 이스라엘을 왕으로 거부 한 사울을 얼마나 오랫동안 슬퍼 할 것입니까? (1 절) 다시 말해 , 오늘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어제에 계속 집중하고 있습니까? 인생은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되고 어떻게되어야하는지의 차이는 믿음의 진정한 여정이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차이를 채우 십니다. 믿음의 가장 중요한 단계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는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움직여야하며,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찾게됩니다. 신은 말했다 : 사무엘. 경적을 기름으로 채우고 가십시오. 베들레헴의 제시에게 보냈습니다. 나는 그의 아들 중 하나를 왕으로 선택했습니다. (2 절) 하나님 께서 자신의 뜻을 밝히 셨을 때, 사무엘에게 단계별로 알아야 할 것만 알려 주실 것이 분명했습니다. 여기에 정보 과부하가 없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한 번에 한 조각 씩 전체 계획을 알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앞으로 나아가 야하는 이러한 현실은 경전에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서 바울까지의 많은 성서 인물들은 종종 적의 영토를 통해 미지의 얼굴을 믿으며 믿음으로 나아가 야했습니다. 여러 번 불 옆에 앉아 물건이 어떻게 걸 렸는지 또는 어떻게 걸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더 쉽고 편안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뜻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인생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에게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행하도록 조작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해서 우리의 뜻을 축복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분이 미래에 대한 선택을하는 사람임을 분명히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을 신뢰합니다. 그는 좋은 왕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사무엘과상의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일을하도록 지시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에 덧붙여서,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강력한 순종과 신 실감이 있습니다. 2. 두 번째 진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적의 영토를 통해 걸 으시고 필요한 모든 준비를하실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이라도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사울은 그것에 대해 듣고 저를 죽일 것입니까?"라고 말했습니다. (2 절) 사무엘은 자신의 삶을 두려워했습니다. 사울이 자기가 할 수 있다면 그를 죽이려고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무엘은 적의 영역으로 향하고 있었고 두려워했습니다. 사무엘에게는 끔찍한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분이 따르기가 너무 어려운 길을 통과 할 수 있음을 다시 보여 주 십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와 함께 상속자를 가져 가서 '나는 주님 께 희생하러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시에게 희생을 권유하십시오. 내가 나타내는 것을 기름 부으십시오. (3 절)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암송가를 가져 오라고 말씀 하셨는데, 이것이 승리와 봉헌을위한 평화 제물에 관한 적절한 대응 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적의 영토는 무엇입니까? 과거를 다룰 수 있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경력 변화, 외로움, 질병 및 불확실성. 우리가 어둡고 두려운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엘이 하느님의 지시에 귀를 기울이면 지침은 간단 합니다. 뿔로 기름을 채우십시오. 베들레헴으로 가십시오. 제시를 희생 제물로 초대하십시오. 그의 가족을 확인 하고 다음 단계로 당신을 데려 갈 것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신뢰와 순종으로 나타나도록 부르신 다. 그분은 자신이하고있는 일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전개 계획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한 번에 한 단계 씩.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당시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주지 않으 십니다. 정보 과부하는 없지만 한 번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주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4 절에서 사무엘은 주님의 말씀대로 큰 성명을 발견했습니다 . 복종! 우리가 일상 생활의 불확실성에 직면 할 때 사무엘이 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신뢰를 추구합니까? 우리 삶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실 하심과 우리를 계속 돌 보시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께서 당신을 태우기 위해하신 계곡들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3. 세 번째 진실은 우리가 끊임없이기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추가”또는“두 번째 생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머무를 수있는 주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의사 소통을하면서 주님의 명령을 행했습니다. 사무엘은 엘리압을보고 "확실히 주님의 기름 부음받은 자들이 여기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6 절) 사무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다음 왕에게 기름을 부어야하며, 물론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새 왕이 가장 크고 강한 가족의 장남이되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표준을 사용하여 자신의 선택을 측정하지 않으 십니다. 사무엘은이 시점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대화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 할뿐만 아니라 그가 말할 때도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때때로 우리의 의사 소통 방식은 ​​우리가 그 사람의 말을 이미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질문을하고 답을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무엘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압이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그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의 외모 나 키를 고려하지 말라. 주님은 사람이 보는 것을 보지 않으시 고, 사람은 외모를 보시지 만, 마음을 보시고있다." " (7 절) 하나님의 뜻이 항상 우리의 뜻은 아니며 우리는 항상 그 뜻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렌즈를 통해서가 아니라 제한된 인간의 관점에서 사물을 봅니다. 외모 만 보면 사람의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동료들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주지 않고 신속하고 불공정 한 판단을하지 않습니까? 오늘 당신 옆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십시오. 오늘 그들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제 하나님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있는 것에 근거하여 사람들에 대한 결정을 내리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럼 제시 아비 나답을 불러 그에게 사무엘. 앞에 통과했다 그러나 사무엘이 말했다,"주님이 어떤 것인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 제시가에 의해 삼마 패스를했지만, 사무엘은 말했다,"아니다 주님은이 일을 선택했다. " 제시 그의 아들 중 일곱 명이 사무엘을지나 갔지만 사무엘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선택하지 않으 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또 다른 단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내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가족이 사무엘 앞에 가셔서 그것이 직장에서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 주 십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아마도 어떤 소년이든 훌륭한 왕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선택이 아니 었습니다. 선택은 또 다른 아들과 함께있을 것입니다. 이 아들은 모든 형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았으며, 또한 가장 어 렸으며 왕의 역할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없는 모든 사람의 중요성과 잠재력을 보 십니다. 우리 삶에서 성령의 인도에 참을성있게 반응한다면 매일 우리를위한 가능성을 생각하십시오. 사무엘에 대한 보상은 그의 임무 완수였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형제들의 면전에서 기름 뿔을 가져다가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그날부터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13 절) 사무엘은 여행 결과를보고 하느님을 찬양 할 수 있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생에서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현실에 의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해 눈을 멀게합니다. 이제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11 : 1) 우리의 여정은 한 순간에 한 걸음 씩 한 단계 씩 진행되며, 우리 각자와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우주의 하느님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오늘날 여러분 중 일부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위한 매끄러운 공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식이 없다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 가장 친한 친구 인 Gerry Grant가 죽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원하는 결과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신뢰 한 위대한 친구였습니다. 저는 10 월 말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 가족에게 보낸 메모에서 인용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궁극적 인 행복, 구원 및 확신은 영원 토록 그분과 연합되어야하며,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는 그가 앞으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담자와 위안자가 될 수있는 동기를 주 었음을 안다. 나는 여러분 모두를 매우 사랑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믿는다면 우리는 믿음을 넘어 영광입니다. 사랑, 아빠와 할아버지. 여기 실제로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매끄러운 공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위한 쉬운 3 단계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투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상 우리가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시작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분의 순종과 신실함으로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신 자신의 이해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모든 방법으로 그를 인정하고, 그는 당신의 길을 똑바로 만들 것입니다.
What is it that God can’t do for you5 2002-03-15 10:45:15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목 설교자 Bishop Terry M. Owens 성경 Genesis18:14-14 참고사항 Maranatha Church of God 설교내용 Gen 18:14 Is any thing too hard for the LORD? At the time appointed I will return u
What is it that God can’t do for you5 2002-03-15 10:45:15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목 설교자 Bishop Terry M. Owens 성경 Genesis18:14-14 참고사항 Maranatha Church of God 설교내용 Gen 18:14 Is any thing too hard for the LORD? At the time appointed I will return unto thee, according to the time of life, and Sarah shall have a son. KJV Num 11:23 And the LORD said unto Moses, Is the LORD’s hand waxed short? thou shalt see now whether my word shall come to pass unto thee or not. KJV Job 42:2 I know that thou canst do every thing, and that no thought can be withholden from thee. KJV Jeremiah 32:27 Behold, I am the LORD, the God of all flesh: is there any thing too hard for me? KJV Luke 1:37 For with God nothing shall be impossible. KJV Luke 18:27 And he said, The things which are impossible with men are possible with God. KJV Matt 19:26 But Jesus beheld them, and said unto them, With me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I ask you again this morning, what is it that God can’t do for you? We see from the Old Testament to the New Testament that God is capable of doing any thing that God wants to do. Nothing is impossible! If nothing is impossible to God, then we must ask ourselves a question, why do we panic, and why do we worry when bad things seem to happen. If God really is able to do anything, if nothing is truly impossible, then what’s wrong? The problem doesn’t lie with God. It’s not because He can’t do it. It’s because we don’t place ourselves in a position to receive from Him. Why do we throw our belief in God out the window as soon as problems come our way? Why do we in a moments notice get so frustrated and so discouraged when problems come, if God is truly able to do anything? Let me assure you of something, the problem doesn’t lie in God’s ability to meet your needs. The answer is lies in our ability to trust God in everything we face. So many times we are guilty of shutting down God’s ability to work in our life. I want us to look at this morning some of the hindrances in our lives that keeps us from receiving what we need from the Lord. As we do this, then we’re going to see what needs to be in place for us to be on the receiving end of God’s blessings. First you need to realize that we can tie the hands of God – I want you to see this morning a couple of ways that you can tie the hands of God. First, we tie the hands of God when we don’t operate by faith. Matthew 13:58 says this of Jesus … “And he did not many mighty works there because of their unbelief.” Heb 11:6 “But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him: for he that cometh to God must believe that he is, and that he is a rewarder of them that diligently seek him.” There’s two powerful things that come out of these verses. First, unbelief limits God’s ability to do mighty works and second, we can’t even begin to please God or receive anything from Him without faith. What causes us not to operate in faith? People like to speculate, but if you want to get down to the root cause of things, you need to go to the Word of God and see what it says. So let’s see what the Word says: Turn to Matt 22:29 in the verses previous to this one, the Pharisees are having a talk with Jesus and they are trying to trap Him in His answers. But in the 29th verse Jesus lays a very important spiritual principal out, look at what He says… “Jesus answered and said unto them, Ye do err, not knowing the scriptures, nor the power of God.” This addresses the very core of our lack of faith. There’s a difference in knowing what the scriptures say and knowing the scriptures. For example, I can read a book on a famous person, I could recite to you all the major achievements of that person’s life, all their failures and if you didn’t know much about me, you might think that the person I was talking about was a friend of mine. The truth is, I just know about them. I really don’t know them. There’s a lot of that going on in the body of Christ. People know about the scriptures, I hear it when I counsel people, they’ll tell me, I know that’s what the scriptures say, but! What they’re telling me is when it comes to knowing the truth of the scriptures and experiencing them for their selves, they’re clueless. The question you need to ask yourself this morning, which person side of the fence am I on? If you want to operate in faith, you must go from the Logos word (the written word) to the Rhema word (the living word). You’ll never really ever know the power of God unless you experience the power of the Word! Jesus said it himself, “you do err not knowing the scripture, nor the power of God” You can’t have a casual attitude about the Word and expect to experience the power of the Word! It just won’t happen. It’s got to get into your mind and it must get into your spirit. Faith and the Word of God are inseparable. Rom 10:17 “So then faith cometh by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God.” It is the Word of God that the Holy Spirit uses to awaken a response of faith in us. If you have a faith problem, then more than likely you have a hearing problem too. How many times have you sat through a church service and you didn’t really hear what was being preached. Don’t sit there trying to act spiritual. I think we’re all guilty of that one time or another. You were there in body but your mind was off somewhere else. You were thinking about your problems, how am I going to get through this crisis? I don’t know where the money is going to come from. Or I wonder where we’re going to go for lunch. There are believers that go to church every week and when they leave that service they say, I’m not any better than I was. But my question to them is did they “hear” the word so it could produce faith in your life? Be a person of the Word and ask God to open the scriptures up to you. Another reason God can’t move is due to sin present Satan has a lot of people fooled into believing that once they go to an alter and pray, then they’re okay for the rest of their life. But then problems arise and they wonder where’s God at in all of this. You need to understand something. God is not going to be mocked, you can’t live any way that you want and still expect God’s blessings upon your life. Listen to what the Word says in Galatians 6: Gal 6:7-9 “Be not deceived; God is not mocked: for whatsoever a man soweth, that shall he also reap. For he that soweth to his flesh shall of the flesh reap corruption; but he that soweth to the Spirit shall of the Spirit reap life everlasting. And let us not be weary in well doing: for in due season we shall reap, if we faint not.” Every one sitting here this morning is producing some kind of harvest in your life. There may be some of you that it seems all you seem to reap is misery and problems and heartaches. There are others that are reaping blessings in their life. Your harvest is determined by the seed you plant. If you want a harvest of blessings upon your life, then you can’t be sowing in sin. Listen to what the Psalmist said: Ps 66:18 “If I regard iniquity in my heart, the Lord will not hear me:” Sin shuts down the communication process between you and God. Actually what that verse is saying, if I have sin in my heart, God chooses not to listen to me until I come to Him with a prayer of repentance. He hears you, but He chooses to resist you or ignore you because you’re coming before Him with sin, and He can not stand sin. I’ve always been puzzled about people who keep resisting the voice of God, who keeps on sinning if after that the Lord has dealt with them about it and then they get mad at God when they don’t get a prayer answered. It’s time that we realize that God isn’t our honey pot. He’s not just a blessing machine. He’s the only one and true Holy God, that resists sin and will judge sin when it’s in our life. There’re too many Christians that are playing games with God and the refuse to deal with the sin question in their life. You need to realize something, not everyone that’s in the body of Christ will be part of the Bride of Christ. Jesus is coming back after a Bride that’s without spot or blemish. Not everyone that says Lord, Lord is going to enter into heaven. For years we’ve always looked at getting to heaven as a one step process, but it’s not. The first step is Christ forgiving you of your sins, that’s God’s part. Then step two is our part. We must do the will of the father. Matt 7:21-23 Not every 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but he that doeth the will of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in thy name? and in thy name have cast out devils? and in thy name done many wonderful works? And then will I profess unto them, I never knew you: depart from me, ye that work iniquity. Can I share something with you out of love church? I’m afraid for some of you. I don’t have any doubt that you’ve asked Christ into your heart, but I look at some of your lives and I don’t see you entering into the second step. You’re not doing the will of the Father, you’re not actively working for the Kingdom of God. And the part that bothers me is that it don’t seem to bother you. Why do you come to church? Is it out of duty or is it because your love for Christ? If your relationship with God has gotten to the place where you’re just operating out of duty, then you need to do some serious soul searching and ask God to renew a right Spirit in you. You’re in danger of missing heaven. When your fleshly appetites out weigh your Spiritual appetite, you’re in danger of missing heaven. I’m telling you these things out of love this morning. Jesus is coming back after a church that’s on fire for Him. He’s coming after a people who are hungry for Him. He’s coming back after people who are doing the will of the Father. You might be saying to yourself, I don’t believe it preacher. God’s moving in my life. Listen, because you’ve asked Christ to come into your life, God’s obligated by His word to take care of you, and He’s doing that. He’s given you a roof over your head and a car. Food on your table. But deep inside of you, you know you’re lacking something. You will never enter into the fullness of the relationship God intended for to have as long as you keep pushing Him away. God is looking for a reason to bless you, the Word tells us if we delight ourselves in the Lord that He will give us the desires of our life, but you keep pushing Him away. Sin is not something we can afford in our life. Sin keeps God from blessing you like He wants too. Conclusion: There’s nothing that you’re facing this morning that God can’t take care of. God doesn’t have a Y2K problem, His Word still works, God has not retired, but He’s waiting for your life line up to His requirements. What’s your need this morning. Do feel like your prayers have been hindered? Do you feel like your relationship with God is not what it needs to be? I challenge you this morning to look deep inside yourself. Quit giving up so easy. Quit trusting everything else as your source instead of God. ... 하나님 께서 당신을 위해하실 수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5 2002-03-15 10:45:15 읽기 : 4 내용 넓게보기. 하기 및 연락처 프린트제목 설교자 주교 테리 M. 오웬 성경 Genesis18 : 14-14 참고 하나님의 사항 마라나타 교회 설교 내용 세대 18시 14분가 너무 열심히 주님을 위해 어떤 일입니까? 지정된 시간에 나는 생애의 시간에 따라 너에게 돌아올 것이며 사라는 아들을 가질 것이다. KNV Num 11:23 여호와 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 졌는가 너는 이제 내 말이 너에게 전달 될 것인지 안다. KJV 욥 42 : 2 나는 네가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며 네 생각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KJV 예레미야 32:27 보라, 나는 모든 육체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나에게 너무 어려운 것이 있는가? KJV 누가 복음 1:37 하느님과 함께 라면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KJV 누가 복음 18:27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KJV Matt 19:26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보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오늘 아침에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 께서 당신을 위해하실 수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까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음을 봅니다. 불가능은 없습니다! 하나님 께 불가능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하고 왜 당황하며 왜 나쁜 일이 생길지 걱정해야합니까?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정말로 불가능한 것이 없다면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문제는 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가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그분으로부터받을 수있는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기 자마자 우리는 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창 밖으로 내버려 두는가? 하나님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면 문제가 생길 때 왜 우리가 잠시 좌절감을 느끼고 낙담하게됩니까? 당신에게 무언가를 확신시켜 드리겠습니다. 문제는 당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 대답은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할 수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할 수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차단하는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필요한 것을받지 못하게하는 방해물을 우리가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묶을 수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아침 당신이 하나님의 손을 묶을 수있는 몇 가지 방법을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우리는 믿음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손을 묶습니다. 마태 복음 13:58에서는 예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그는 불신으로 인해 강력한 일을 많이하지 않았습니다.” 히 11 : 6“그러나 믿음 없이는 그를 기쁘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 나아 오는 사람은 자신이 있고 그를 부지런히 찾는 사람들의 상을 믿어야한다.” 이 두 가지 강력한 것들이있다 . 구절. 첫째, 불신은 강력한 일을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둘째, 우리는 심지어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거나 그분으로부터 어떤 것도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일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좋아하지만 사물의 근본 원인을 찾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서 그 내용을 알아야합니다.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자. 바리새인들은이 말씀 앞의 구절에서 마태 복음 22:29을 참조하여 예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그분의 응답에 그를 붙잡 으려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께서 말씀에서 매우 중요한 영적 주요 밖으로 모습을 낳는 절 29에 ... "예수 께서 대답하여 너희가 경전도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고, ERR 않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이 주소에게의 가장 핵심 믿음의 부족. 경전의 말씀과 경전을 아는 데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유명한 사람에 관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삶의 모든 주요 업적, 모든 실패를 암송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에 대해 많이 몰랐다면, 당신은 내가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내 친구 였어 진실은, 나는 그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로 그들을 모른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경전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조언 할 때 들었습니다. 그들이 말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경전이 말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말하는 것은 경전의 진실을 알고 그들의 자아를 위해 경험할 때, 단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 울타리의 어느쪽에 있습니까? 믿음으로 일하기를 원한다면 로고 단어 (쓰기 단어)에서 레마 단어 (살아있는 단어)로 가야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여러분은 경전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말씀에 대해 우연한 태도를 가질 수 없으며 말씀의 힘을 경험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 들어가고 당신의 정신에 들어가야합니다.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은 분리 할 수 ​​없습니다. 롬 10:17“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려 오니 하나님 의 말씀으로 들려오 십니다.”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의 응답을 일 깨우기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에 문제가 있다면, 청각에 문제가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회 예배를 몇 번이나 했는데도 설교 내용을 듣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한 번이라도 유죄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몸에 있었지만 당신의 마음은 다른 곳에서 벗어났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있었습니다. 어떻게이 위기를 극복 할 수 있습니까? 돈이 어디서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점심 먹으러 갈 곳이 궁금합니다. 매주 교회에가는 신자들이 있으며 그들이 그 직무를 떠날 때 나는 나보다 나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의 질문은 그들이 당신의 삶에 대한 믿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단어를“들었”습니까? 말씀의 사람이되어 하나님 께서 당신에게 경전을 열어달라고기도하십시오. 하나님 께서 움직일 수없는 또 다른 이유는 현재 사단이 많은 사람들이 일단 교대하고기도하면 그들의 남은 생애 동안 괜찮다고 믿는 것에 현혹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고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위치가 궁금합니다. 무언가를 이해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조롱을 당하지 않으실 것이며,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없으며 여전히 당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 : Gal 6 : 7-9 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하지 않으 십니다. 사람이 무엇을 입든 그는 거두게 될 것입니다. 육신에게 뿌린자는 육체의 부패를 거둘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뿌린자는 영의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지내지 않도록합시다. 우리가 기절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절 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곳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은 당신의 삶에서 어떤 종류의 수확을하게됩니다. 당신이 거두는 것만으로도 불행과 문제와 상심 만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 축복을 거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신의 수확은 당신이 심는 씨앗에 의해 결정됩니다. 당신의 삶에 축복의 수확을 원한다면, 당신은 죄를 뿌릴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을 듣습니다. 시 66:18“내 마음에 죄가 있으면 주님은 내 말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 죄는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의사 소통 과정을 막습니다. 사실 그 구절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만일 내 마음에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회개기도로 하나님 께 나아갈 때까지 내 말을 듣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는 당신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죄를 가지고 그분 앞에 오기 때문에 당신을 저항하거나 무시하기를 선택하셨습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의 음성에 저항하는 사람들, 그 이후에 주님 께서 그들에 관해 그 일을 하셨다면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때 하나님 께 화를내는 사람들에 대해 당황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꿀 냄비가 아님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그는 단지 축복 기계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에있을 때 죄를 물리 치시고 죄를 심판하실 유일한 독생자 이십니다. 하나님과 게임을하고있는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으며 그들의 삶에서 죄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있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부의 일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는 흠이나 흠이없는 신부를 따라 다시 오 십니다. 주님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이 주님 께서 천국에 들어 가실 것은 아닙니다. 수년 동안 우리는 항상 한 걸음 프로세스로 천국에가는 것을 보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당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그것은 하나님의 일부입니다. 그런 다음 2 단계가 우리의 부분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합니다. 마 7 : 21-23 나에게 말하는 주 여호와여 모든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자는 주님, 주님, 그날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이름으로 악마를 쫓아 냈습니까?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훌륭한 일을 하였습니까?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고백 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당신과 무언가를 나눌 수 있습니까? 나는 당신 중 일부를 두려워합니다. 나는 당신이 그리스도를 당신의 마음에 간구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삶의 일부를 보았고 당신이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를 귀찮게하는 부분은 그것이 당신을 귀찮게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 오나요? 의무가 아닌가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사랑 때문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직무를 수행하는 장소에 도달했다면, 진지한 영혼을 찾아서 하나님 께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요청해야합니다. 하늘이 없어 질 위험이 있습니다. 육적 인 식욕이 영적 식욕의 무게를 weigh 때, 당신은 하늘이 없어 질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런 것들을 사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해 불타고있는 교회를 다시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는 배고픈 사람들을 쫓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다시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설교자를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당신의 그리스도 께서 당신의 삶에 오도록 요청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보살핌을 그분의 말씀으로 의무화 하셨으며, 그분은 그렇게하십니다. 그는 당신에게 당신의 머리와 차 위에 지붕을주었습니다. 당신의 테이블에 음식. 그러나 당신 안에는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계속 밀고 나가는 한, 하나님 께서 의도하신 관계의 충만 함을 결코 입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축복해야 할 이유를 찾고 계십니다. 말씀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우리 삶의 소망을 주실 것이라고 기뻐하지만, 계속 그분을 밀어 내리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우리 삶에서 감당할 수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 께서도 당신이 원하시는 것처럼 당신을 축복하지 못하게합니다. 결론: 오늘 아침에 하나님 께서 돌보실 수없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Y2K 문제가없고, 그분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하나님은 은퇴하지 않으 셨지만, 당신의 삶이 그분의 요구 사항에 부합되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아침에 필요한 게 뭐야? 기도가 방해받은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오늘 아침 당신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보도록 도전합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대신에 당신의 근원으로 다른 모든 것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
가정을 행복하게 /잠15:13-24/ 이상호목사 2016-12-20 11:13:47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교회 표어 두 번째 '가정을 행복하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가정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을 소유와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즉 소유가 행복과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유를 통하여 잠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
가정을 행복하게 /잠15:13-24/ 이상호목사 2016-12-20 11:13:47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교회 표어 두 번째 '가정을 행복하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가정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을 소유와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즉 소유가 행복과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유를 통하여 잠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행복을 주는 요소는 아닙니다. 어떤 이는 무소유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 버리고 산으로 들어갑니다. 수행과 득도함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전 공학 자들은 또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사람에게는 행복을 느끼는 뇌가 있어 그것을 조작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약물로 행복해지기 원합니다. 그래서 마약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정의 참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가정이 행복해 지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 16절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소유나, 외적인 그 무엇에 있지 않고 오직 이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행복의 첩경입니다. 잠언에서 많이 말씀하고 있는데 지혜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어디서 옵니까? 잠9: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이십니다. 또 건강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건강이 누구로부터 옵니까? 잠10:2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고 했으니 건강하여 장수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니 하나님이 행복의 첩경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자녀가 잘 되는 것이 부모의 행복이요,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누가 줍니까? 잠14:26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고 하셨으니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이들은 물질과 은사와 풍성함이 가정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어디로 옵니까? 약1:17절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하셨으니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추구합니다. 사실 돈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편리합니다. 그러나 꼭 행복과 정비례하지는 않습니다. 설사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라고 할지라도 그 물질을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잠19:2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으니 여호와 경외하는 것이 재물을 얻는 비결입니다. 잠22:4절에서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최대의 불행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신학자 <폴 틸리히>는 현대인은 세 가지로 인하여 불안하고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교통사고나 병, 재난,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서 죽음을 당하므로 이로 인해서 불행해지고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인생의 허무감입니다. 무엇을 이루어 놓으면 허무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명예나 권력, 혹은 어떠한 목표를 이루어 놓으면 사람들은 만족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허탈감과 허무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살기가 어려운 나라에서 자살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없이 풍요를 누리는 나라에서 자살율이 높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목표가 없으니 의욕이 있을 수 없고, 의욕이 없으니 권태와 허무와 허탈감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낙엽 떨어져 뒹구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무상함을 느끼고, 그래서 허무하고 허전하여 옷을 입어도 어딘가 모르게 허전함이 엄습하는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낙엽은 떨어지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곧 꽃피고 새우는 새봄이 되면 다시 예쁜 싹이 돋아 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인생의 허무감이 행복을 빼앗아 가고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죄책감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와 회개하고 자백하기만 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워 주시고, 또 인정도 하시지 않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다윗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롬4:6-8절에 말씀하였습니다. 때문에 폴 틸리히가 걱정하는 현대인들의 불안과 불행은 우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행복은 만들어진 완제품도 아니고, 유산도 아니고, 은사도 아니며, 더구나 운명도 아닙니다. 행복한 가정은 세워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함이 충만하기만 하면 행복한 사람이 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환경을 보고 낙심하지 마시고, 불행한 환경을 운명으로 돌리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D, 큐랜(Curran)은 건강한 가정의 특징을 연구하기 위해서 500여명의 전문가들(학교장, 교도교사, 일반교사, 교회목사, 교육담당 전도사, 소아과의사, 가정의사, 정신과의사, 사회사업가, 간호사, 가족상담 및 가족치료사, 자원봉사단체 지도자)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응답한 건강한 가정의 특징을 요약하면 10가지입니다. 1)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공통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는 가정, 2)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자발적이고 진솔하게 대화하는 가정, 3)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가정, 4)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가질 줄 아는 가정, 5)가족 구성원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가정, 6)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점을 존중하고 개성을 인정해 주는 가정, 7)가족 구성원들이 동일한 전통과 풍습을 공유하고 긴밀한 유대감을 유지하는 가정, 8)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웃과 인류에 대한 봉사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가정, 9)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공동책임을 자각하고 감당하는 가정, 10)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문제를 인정하고 도움을 청할 만큼 열린 가정이 건강한 가정의 특징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행복한 가정의 첫 번째 순서는 바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즉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의 요소와 상관없는 삶을 살기에 남다른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2. 마음에 즐거움이 있는 가정 13절, 15절입니다.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즐거우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생각과 근거에 차이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락을 함으로 즐거움을 누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미 우리는 기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근심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었습니다. 인간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무엇을 소유해서 기쁨을 얻는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이 계시고, 그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요16:22) 다윗의 고백이 하나님을 자기 옆에 모시고 살 때 참으로 기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6:8-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니 마음도 기쁘고 영혼도 기쁘고 육체도 편안하다고 했으니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을 모실 때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관계로 인해서 마음의 기쁨을 빼앗기고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받고 기쁨을 빼앗긴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하고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해야 합니다. 경제적 문제로 마음의 기쁨을 빼앗기고 사는 가정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돈을 잃는다고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잃고 신앙을 회복하고! 잃었던 하나님을 더욱 붙잡게 되었다면 그 잃은 돈은 나의 은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빼앗기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우리 믿음의 가정 식구들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까? 물질의 풍요도, 자녀들의 출세도, 가문의 명예도 아닙니다. 성경을 몇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는 합3:17-18절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둘째는 기도 응답으로 기뻐하여야 합니다. 요16: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도하여 응답받은 한나는 노래하기를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2:1). 에9:22절에 에스더는 기도가 응답될 때에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기뻐하여야 합니다. 시19:8에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좀 특별한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입니다.(요16:22) 전에 사도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행13:52) 행5:41절에는 사도들이 예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자유 하는 자들에게 권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곤욕스러운 채찍이 우리 속에 있는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이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하였습니다.(고후8:1-2) 이 즐거움과 기쁨을 회복하시고 유지하시고 빼앗기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3. 가장 가까운 식구들끼리 더욱 사랑하는 가정(:17) 17절입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가정 공동체는 남남이 모여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있는 대로! 생긴 대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내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잖습니까?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생긴 대로 할 수 있는 것만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연장자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동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어린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 보다 낫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 무엇이 최대의 이단이냐? 최대의 이단은 교의상의 이단이 아니라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이단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른 집을 부러워 할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무식하여도 내 아버지 내 어머니요,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내 아들 내 딸입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내 사위이고, 내 며느리입니다. 아무리 형편없이 가난하여도 내 남편이고 아무리 못생겼어도 내 아내입니다. 내가 어려움 당하고 내가 고난에 처하면 이웃집 그 누가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내 식구요, 내 가족입니다. 가족끼리 먼저 사랑하여야 합니다. 성경도 말씀하기를 모든 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식구들에게 이 선을 행하되 먼저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 했으니 성도들이 먼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1)마땅히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삿16:15, 삼상18:1)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라고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생명같이 사랑했는데 이때 그들의 마음과 마음이 연락되었다고 했습니다. 2)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여야 합니다.(창29:20, 34:19 살전1:3) 야곱이 라헬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라헬을 위하여 수고하는 칠 년을 수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창 29:20) 3)목숨까지 주어야 합니다.(살전2:8, 요15:13, 갈2:20) 사랑하면 목숨까지 줄 수 있게 됩니다.(살전 2:8) 주님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15:13) 9일 동안 천국 만들기 어느 날, 한 부인이 가정생활을 비관하며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나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정말 힘들어요.” 그때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을 이해한다. 이제 소원을 들어줄 텐데 그 전에 몇 가지 내 말대로 해보겠니?" 그 부인이 “예!” 하자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얘야! 집안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 마지막 정리를 잘 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청소 좀 할래?”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3일 후, 하나님이 다시 와서 말했습니다.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네가 죽은 후 애들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3일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어볼래?”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애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마지막 부탁 하나 하자!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3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줘 봐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그녀는 3일 동안 최대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천국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그때 부인이 말했습니다.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서 천국을 만들어가며 살아볼래요!” ‘9일 동안 천국 만들기’의 기적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희생의 길은 행복으로 가는 밝은 길입니다. 희생의 짐을 지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나 너를 위해 모든 것을 걸 때, 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겁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삽니다. 더 나아가 죽이고자 하면 죽고, 살리고자 하면 삽니다. 이 역설의 진리를 잘 소화하는 소화력이 있을 때 행복의 키가 부쩍 자라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우리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충심으로 경외하고 주님이 주신 기쁨을 잃지 마시고 오직 무조건 사랑하셔서 가정을 행복하게 이루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자 /고후7:1-/ 박봉수 목사 2016-02-01 15:33:22 read : 8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조선왕조의 시작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세 곶 됴코 여름 하나니” 풀이해 보면 이런 말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 이제 막 개국한 조선왕조가 뿌리 깊은 나무가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열매도 풍성이 맺는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자 /고후7:1-/ 박봉수 목사 2016-02-01 15:33:22 read : 8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조선왕조의 시작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세 곶 됴코 여름 하나니” 풀이해 보면 이런 말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 이제 막 개국한 조선왕조가 뿌리 깊은 나무가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열매도 풍성이 맺는 것처럼 창대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뿌리가 깊은 나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당시 막 개국한 조선의 사상적이고 정신적 상황을 암시해 줍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창건된 조선은 개국 초기 정통성의 시비 때문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든든히 세워주고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어줄 사상적이고 정신적인 뿌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속히 이 뿌리가 깊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이 어서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신앙적이고 신학사상적인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패역한 세상 속에서 그리고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흔들림 없이 든든히 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부흥을 이어가며 더욱 번성하여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뿌리를 찾고, 그 뿌리를 잘 보존하며, 나아가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 교회의 뿌리는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주후 11세기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서방교회는 주후 16세기에 종교개혁으로 로마 천주교회와 개신교로 나뉘었습니다. 이 때 개신교는 로마 천주교회를 개혁하는 형태에 따라 다양한 분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심이 되는 분파가 둘입니다. 하나는 루터교회입니다. 루터가 중심이 돼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여 독일과 북유럽 중심으로 뻗어나간 교회를 말합니다. 이 루터교회는 로마 천주교의 잘못된 신학사상을 철저하게 개혁을 했지만 예배 의식은 대체로 계승했습니다. 둘은 개혁교회입니다. 요한 깔뱅이 중심이 돼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여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운동으로 발전해 나간 교회를 말합니다. 이 개혁교회는 로마 천주교의 신학사상은 물론이고, 예배 의식까지도 철저하게 개혁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교회는 교회정치의 형태까지도 철저하게 개혁했습니다. 당시 로마 천주교의 교황 중심의 감독제를 과감하게 철폐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성경에 나타나는 장로제도를 기초로 하여 장로회 중심의 정치제도를 도입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장로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같은 교회를 말합니다. 신학사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개혁교회라고 하고, 정치형태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장로교회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교단 소속의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교회의 뿌리는 멀리는 초대교회에 있고, 가까이에는 이 개혁교회(Reformed Church) 또는 장로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뿌리가 깊은 교회가 되려면 우리의 뿌리를 정확히 알고 그 뿌리를 보다 튼튼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장로교회가 정치형태로는 그 뿌리인 장로회를 유지하고 있지만, 신학 사상적으로는 그 뿌리인 개혁교회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신학 사상이 순복음 교회인지, 감리교회, 침례교회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단 사상까지 유입되어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장로교회는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뿌리 깊은 교회가 되려면 정치형태로서 장로회를 잘 유지할 뿐 아니라 신학사상적으로 개혁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그 뿌리를 굳게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즉 더욱 철저하게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의 뿌리인 개혁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 핵심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절대 주권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회의 신학사상의 핵심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있습니다. 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도텔레스의 철학사상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삶은 존재의 원리인 신을 탐구하는 삶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각색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은 하나님을 탐구하는 삶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가장 이상적인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태도는 자칫 인본주의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이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주체요 하나님은 객체가 될 수 있습니다. 개혁신앙은 이 점을 철저하게 개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은 단지 하나님을 명상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그 절대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신본주의적 신앙인 것입니다. 신 11:8-12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네가 들어가서 차지하려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모세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가나안 땅은 애굽에서 저들이 농사짓던 땅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저들이 농사를 지을 때 물이 풍부한 나일 강에서 물을 끌어들일 수 있었지만, 저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는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의지해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애굽보다 가나안 땅에 더 좋은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나안 땅은 1년에 두 차례 비다운 비가 내립니다. 하나는 우기가 시작되며 내리는 이른 비이고, 다른 하나는 우기가 끝나가며 내리는 늦은 비입니다. 가나안 땅의 흙은 석회질이 많아서 가물면 땅이 시멘트처럼 굳어집니다. 그래서 이른 비가 내려 굳어진 땅이 부드러워져야 농부들이 밭을 기경해서 씨를 뿌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하기 전 늦은 비가 와서 곡식들이 열매를 잘 맺어야 거둘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농사를 지으며 늘 하늘을 우러러보게 됩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밭에 씨를 뿌리며 뜨거운 마음으로 이른 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가을에 추수를 한 뒤에 뜨거운 마음으로 늦은 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나안 땅은 늘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땅입니다. 하나님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땅입니다. 그래서 신본주의적 관점에서 이 땅이 가나안 복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 땅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가나안 땅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사는 땅이어야 합니다. 반대로 애굽이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뜻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땅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땅에서 탈출해 나와야 합니다. 바로 출애굽해야 합니다. 2. 성경 중심의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회는 성경보다 교회의 전통과 교황의 가르침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위배되는 면죄부를 만들어 판매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게 된 배경은 교회가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헌금을 받아들여 교회의 필요를 채우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니냐는 실용주의적 발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리게 됐고, 그 결정이 권위를 가지고 집행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실용주의적 발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이 선하지 않더라도 눈 감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발상이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개혁신앙은 이 점을 단호하게 개혁해 갔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든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성경 외에 권위 있게 세워져있던 판단 기준들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목적과 과정 모두 성경의 권위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철저하게 강조했습니다. 육상이나 수영 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지켜야 할 자기 레인이 있습니다. 선수가 아무리 잘 뛰어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해도 그 레인을 이탈했다면 바로 실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경주를 할 때도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레인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말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단이나 방법이야 어떻든지 결과만 좋으면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개혁신앙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입니다. 결과도 성경대로여야 하고, 방법도 성경대로 여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사우스다코다 주의 러시모어에는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 중 네 사람의 얼굴이 조각되어있습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그리고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입니다. 그런데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성경을 사랑했고, 성경대로 살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워싱턴은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올바로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습니다. 이것이 미국 대통령 선서의 전통이 됐습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면서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 있다”라고 한 바가 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통해 지혜를 터득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중 가장 귀한 것은 성경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인생을 참되게 살기 원한다면 그에게 성경을 주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혁신앙은 이처럼 성경을 귀중히 여기고 성경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성경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3.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의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의 영적 지도하에 살아가는 신자들은 개인적 경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제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 역시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경건한 신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더 이상 경건한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라틴어로 코람 오미네(Coram homine)라고 합니다. “코람”이라는 말은 전치사로 “앞에서”라는 뜻이고, “오미네”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과 삶이 철저하게 분리되어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잠깐 동안 그리고 기도하는 잠깐 동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만 상대하며 살아갑니다. 개혁신앙은 이점을 단호하게 개혁해 갑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칭찬받을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합니다. 역시 “코람”이라는 말은 “앞에서”라는 전치사입니다. 그리고 “데오”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예배드릴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늘 하나님을 상대하며 살아갑니다.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눈동자처럼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가까운 친구 목사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중견교회가 되었습니다만 그 교회 개척 때 이야기입니다. 상가를 얻어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 간판을 걸고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개척 예배 때는 가까운 친지들과 전에 사역하던 교회 교우들이 참여해서 100여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개척 후 첫 예배를 드렸는데 자기 가족들하고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 포함해서 7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아무도 없고 자기하고 아내 둘이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배 인도하고 아내가 반주하고 새벽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중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 낙심이 돼서 그 다음날부터는 예배 인도하지 않고 단에 오르지 않고 그냥 기도만 했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성령께서 그 마음에 강하게 책망을 하시더랍니다. “새벽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회중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정식으로 인도하라”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회중이 아무도 없더라도 정성껏 설교 준비를 해서 설교도 하고 순서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3일째 되던 날 지나 가던 교인이 들어오더랍니다. 이사 온 사람인데 새벽 기도할 교회를 찾다가 교회에 불이 켜지고 찬송소리가 들려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더욱 정성을 다해서 말씀도 전하고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분이 그날부터 빠지지 않고 새벽에 나오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좋다고 전도해서 새벽기도가 부흥되기 시작했답니다. 이 목사님이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회는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사람을 보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보고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코람데오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코람데오의 신앙이 우리 개혁신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493주년 종교개혁개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부패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고 새롭게 신앙의 기치를 들었던 날을 기념해서 지키는 날입니다. 특히 우리는 개혁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개혁신앙이란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신앙, 성경중심의 신앙, 그리고 코람데오의 신앙을 핵심으로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 신앙의 뿌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이 개혁신앙을 떠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철저하게 돌아서서 이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군대 귀신들린 사람 /눅8:26-30, 눅8:38-39/ 이동원목사 2014-12-04 15:55:57 read : 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77년 미국 오히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3명의 여성에 대한 납치와 강간으로 체포된 빌리 밀리건(Billy Milliga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의외로 무죄판결을 받고 대신 정신 병원에 수감됩니다. 그가 진단받은 병명은 ‘다중 인격 장애’(multiple
군대 귀신들린 사람 /눅8:26-30, 눅8:38-39/ 이동원목사 2014-12-04 15:55:57 read : 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77년 미국 오히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3명의 여성에 대한 납치와 강간으로 체포된 빌리 밀리건(Billy Milliga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의외로 무죄판결을 받고 대신 정신 병원에 수감됩니다. 그가 진단받은 병명은 ‘다중 인격 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였습니다. 다중 인격 장애는 한마디로 한 사람 안에 여러 인격들이 존재하면서 행동을 지배하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스토리는 ‘빌리 밀리건-스물 네 개의 인격을 가진 사나이’ 라는 책으로 소설화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의 담당자인 변호사는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 빌리가 다중인격임을 확신하게 되어 그를 변호하게 됩니다. 변호사는 검사 앞에서 빌리의 다중 인격이 나타나는 모습을 재현하는데 성공합니다. 빌리의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인격은 나중에 무려 24명으로 밝혀지지만 재판당시에는 10명 정도가 중심인물들로 부각됩니다. ‘빌리’는 핵심인격으로 자신이 다중인격임을 알고 괴로워하면서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레이건’이란 이름의 인격은 거칠고 폭력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앨런’은 사기꾼으로 탁월한 말솜씨로 타인들과의 협상을 담당합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강간사실을 부정하다가 나중에 ‘에이들라나’가 등장하여 강간 범행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선생’이라는 인격이 등장하여 다른 여러 인격들을 통합하는 조정 기능을 담당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다중인격은 일종의 방어기제로 예를 들어 어렸을 때 경험한 학대나 외로움, 혹은 성폭행 같은 상처로 시작되는데 이런 충격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을 때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안에서 여러 다양한 인격들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 소개된 주인공이 바로 이런 다중인격 장애인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유사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갈릴리 바다 맞은편 거라사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주인공은 본래 도시에 살던 사람이었는데 그의 질병으로 인해서 집을 떠나 무덤사이를 방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도시 문명의 전형적인 피해자일 가능성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요르단 성지순례에서 거라사를 다녀오며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이미 예수님 당시에 거라사(제라쉬, 움께이스)는 거대한 문명을 자랑하던 도시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본문의 주인공을 진단하며 그가 군대 귀신들에 의해 즉 많은 귀신들이 그안에 거하며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심리학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정신적 상처가 깊어가는 도시의 현대인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늘 날 이런 다중인격적 장애증상들을 보이며 방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런 사람들에게도 치유의 희망이 있을까요? 물론 그 희망은 예수뿐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이 병든 사람을 치유하시는 그 변화의 과정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신의 정직한 상태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모든 치유는 직면에서 시작됩니다. 자기의 문제를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면하는 사람은 모두 어느 정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중인격 장애를 위시해서 대부분의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자기가 병자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을 앓는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알콜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 성 중독자가 자신을 중독자라고 인정하시는 것을 본적이 있으십니까? 인정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을 만나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이 질문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질문을 하십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그의 이름을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그는 이 질문을 통해서 그가 자신을 직면하도록 자기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30절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그는 스스로를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하나가 아닌 여러 존재들이 군대처럼 자기 안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의 자가 진단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경험하는 상태를 적어도 그는 진실하게 묘사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치유의 시작이며 치유의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명함에 적혀 있거나 주민 등록에 적혀 있는 이름 말고 당신의 깊은 내면에서 소리치고 있는 당신의 진정한 이름들은 무엇입니까? 요한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묘사한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우리들의 인생 구도여정에서 만나는 이웃들의 이름이 아닌 우리 자신들의 이름들이 아닌가요? 크리스챤씨, 전도자씨, 고집쟁이, 온순씨, 선의씨, 자만씨, 악의씨, 적의씨, 무자비씨, 겁쟁이, 회의씨, 허례씨, 위선씨, 질투씨, 아첨씨, 경멸씨, 믿음씨, 수다쟁이, 허영씨, 절망씨, 심약씨, 두려움씨, 무지씨, 구두쇠, 소망씨--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당신의 이름은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중인격 장애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내 이름도 혹시 군대가 아닌가요? 치유를 원하신다면 이제라도 자신의 정직한 상태를 직면하십시오. 예수님의 치유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습니까? 2. 치유의 주이신 예수의 발치에 앉히십니다. 본문을 읽어 내려가며 감사하고 또 감사한 것은 예수께서 이 사람을 마침내 예수의 발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눅8:35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물론 본문의 상황은 그가 치유된 직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그가 치유되기 전에도 본문 28절에 보면 그는 예수를 보고 그 앞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 앞에 엎드렸고 그리고 마침내 예수의 발치에 앉히신바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요 축복입니까?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2-3주후엔 이웃 사랑 축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 우리의 VIP들에게 베풀어야 할 도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하여 예수 앞에 엎드리게 하고 마침내 그들로 예수의 발치에 앉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치유를 경험할 것입니다. 온전해 질 것입니다.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순순히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할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군대 귀신 들린 이 사람도 처음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와 나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내 인생에서 나를 귀찮게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의 발치에 앉아 주를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를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 없이 살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새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리, 가장 편안한 자리를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의 발치아래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치아래 앉아 세상 모든 것을 얻은 행복한 자였습니다. 이번 이웃 사랑축제에 이런 행복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VIP들을 치유의 주님이신 예수의 발치아래 앉도록 인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3. 집으로 돌아가 예수를 전파하게 하십니다. 이제 이런 놀라운 치유, 행복한 치유를 경험한 이 사람에게 주께서 명하신 마지막 부탁은 무엇이었는가를 주목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자기를 변화시켜준 예수님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38절입니다.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다음절 3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나 홀로만의 신앙이 아닙니다. 나 홀로 치유받고--나 홀로 구원받고--나 홀로 은혜받고--나 홀로 행복해지고의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경험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 이웃들과 이 은혜를, 이 행복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네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이 기쁜 소식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39절의 하반절입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이 군대 귀신 들렸던 자가 마침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 군대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왜 주께서는 기적을 체험한 그에게 주님을 따라오기보다 먼저 자기 집, 자기 마을로 가서 전도하기를 요구하셨을까요? 그것이 바로 그에 대한 주님의 기대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우선순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전도의 명에 순종해본 일이 없는 성도들이 계시다면 지난 달의 추천도서 ‘진돗개 전도왕’을 꼭 읽어 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은지 얼마 안되는 저자 박병선 집사님은 믿은 첫해에 무려 750명을 주께로 인도합니다. 그냥 전도만 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정착시킨 것입니다. 그 비결은 진돗개처럼 전도하는 것입니다. 한번 물면 결코 놓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물고 흔드는 것입니다. 교회 나가 예수 믿겠다고 상대방이 고백하게 될 때까지 계속 그에게 전하고 또 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전도가 주의 가장 중요한 명이기 때문에 주의 일에 충성하면 주께서 내 모든 일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으로 전도의 명에 순종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분은 본래 전남 순천시청에서 26년간을 근무한 공무원이었는데 그가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되어 명예퇴직하고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한참 믿음이 뜨거운 시절이어서 나름대로 원칙을 정하고 선거에 나섰는데 그 원칙은 “전도는 내가 선거운동은 하나님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전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면 “한표 부탁합니다가 아니라 예수 믿읍시다”였다고 합니다. 선거 사무실에서는 “선거 운동은 안하고 전도만 할거냐” “전도는 시의원 당선되고 난 후에 해도 되지 않느냐” “정말 하나님이 선거운동을 해주시겠느냐” “하나님만 너무 믿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지 모르겠다”등등의 우려가 많았지만 그는 전도에만 열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2002년 6.13 지방선거의 결과는 전남 최다 득표 당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시의원이 된 후 다시 동료 시의원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하여 22명중 20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순천시 복음화에 앞장서는 시의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책 머리말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세상적인 여러 가지 일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취미 생활이라고도 할수 있겠지요. 처음에 사진 촬영, 그 다음엔 수석, 그러다가 어느 날 진돗개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진돗개는 어느 개보다도 영리하여 충성심이 강한 개입니다. 얼마나 진돗개를 좋아하고 사랑했던지 진돗개를 훈련시키는 1급 훈련사 자격증을 소유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MBC특집 ‘진돗개 사랑’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저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돌리게 하셨습니다. 저는 식당이든 길거리든 그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찾아가서 전도했습니다. 한번 만나서 안 되면 두 번,세 번, 아니 어떤 경우에는 한달이고 두 달이고 찾아다니면서 전도하여 끝내 그 영혼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드디어 진돗개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 마치 본문에 군대 귀신 들린 자가 이제는 복음의 군병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변신이 갈망되지 않으시나요? 언제 까지 군대의 영들에 매여 노예 된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를 얻으실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서 나아가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실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언제까지 내 문제에만 빠져 사시겠습니까? 이젠 이웃들을 구원하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라! /롬6:1-4/ 이삼규 목사 2017-06-14 06:59:19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4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라! /롬6:1-4/ 이삼규 목사 2017-06-14 06:59:19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오늘 봉독해 올린 말씀 가운데 3절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해드리겠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꿈에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정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에 들어온 사람들 중 감리교인은 몇 명이나 됩니까?” 천사는 천국에 들어온 사람들의 명부를 한참 뒤진 후에 말했습니다. “감리교인은 한 명도 없군요.” 웨슬레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장로교인은 몇 명이나 왔나요?” 그러자 천사가 또 장부를 훑어보더니 “장로교인도 없군요.” 웨슬레는 매우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천사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국에 온 사람은 누구란 말입니까?” 천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천국에 온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로마서는 논쟁적인 글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성도가 품었을 법한 의문들을 가져와 독백 적으로 문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질문은 3:8절에 나옵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라는 질문과 유사합니다. 여기에서는 “은혜가 더욱 임하게 하도록 죄악을 더욱 행해야 하지 않겠느냐?”(사역)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질문은 5장의 논의를 훌륭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의 능력에 대해서 세세하게 논증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은혜가 더 강하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범죄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질문을 통해서 사도는, 그럼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방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행할 것인가?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 이야기는 심리적으로는 방종의 가능성까지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사랑엔 언제나 이러한 허점이 있고 맹점이 있습니다. 우리도 늘 경험하는 바이지만 사랑에는 사랑대로 반드시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면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사랑처럼 애매하고 무력하고 맹랑한 일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용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계속 용서하게 되면 무질서를 낳는 것 같고, 죄도 묵인하면 범죄를 가능케 하는 것을 측면에서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죄를 지으면 당장 심판하고 꼬집고 바로, 비판을 해야지 용서하면 더 많은 죄를 범하게 하는 결과가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즉, 관용은 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은혜를 믿어서 더 죄짓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믿고 더 방종하며,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더하는 것이 아냐 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우리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즉,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무슨 뜻입니까? ‘죽음’이란 ‘ajpoqnhvskw( 아포쓰네스코)’ ‘죽다, 죽음에 직면하다, 죽기 마련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들이 누구와 불화할 때 “내가 죽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정신적으로 한 번 더 죽으면 됩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불만이 있고 원망이 있는 것은 살아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전에 제가 성도님들 초상 치를 때 염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돌아가신 분들은 아무 말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도 말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원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면 원망이 없습니다. 사랑 앞에 모든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참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집이 센 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한 번만 물러나고 한 번만 죽어보면 자신이 생깁니다. 죽고 보면 죄에 대한 매력을 잃게 됩니다. 죄에 대해 완전히 죽었다는 뜻입니다. 죽어지내면 죄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죄가 죽은 자를 다스리지 않습니다. 사탄도 시체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귀도 죽은 자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살아서 움직이고 교만해야 마귀가 가까이 갑니다. 어느 면으로든지 살아 있으면 마귀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죽음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성격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 죽음을 말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죽음을 간혹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극기를 통해서 나를 이기는 것, 혹은 망각 상태, 잃어버린 상태, 그리고 강한 절제로써 힘든 고행 생활 등을 가리켜 죽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혼자 고행하며 혼자 죽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세례로 설명합니다. 세례는 왜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이유를 그 속에 담고 있습니다. 세례라는 말은 ‘baptivzw(밥티조) ’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세례(침례)를 베풀다/ baptize’입니다. 동사 밥티조는 밥토(bavptw, 잠그다, 물들이다)의 강의형으로 (a) '담그다' (b) (사람을 물에 빠뜨리거나 배를 침몰시킴으로) '멸망시키다'를 뜻합니다. 침례교 같은 곳에서는 세례탕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침례를 베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요단강에서 해야 된다고 요단 강 물을 직접 가져와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세례의 뜻, 즉 잠근다는 것은 물속에 완전히 잠기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물속에서 죽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가 죄의 나라에서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서 죄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죄 안에서 행한다면 이 모든 것이 무익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돌아다니는 유령처럼 이미 죽었던 데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났기’(7절)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죄의 지배와 통치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풀려나온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는 어리석음은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것입니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세례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약속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에 부응하지 않고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죽여야 합니까?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두 가지 의미에서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을 죽이고 또 죄로 향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옛사람 혹은, 예수 없는 사람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옛사람을 죽여야 하며, 또한 죄 된 나(즉, 죄에 대하여 매력을 지니고 있는 나)를 죽여야 합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에 죽은 자는 욕심이 없습니다. 세상적 욕심이 있을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죽는 모습을 세례라고 말합니다. 결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여자가 결혼하면 ‘출가외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결혼한 후에 친정에 자주 내왕하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혼해 살면서 친정생각을 많이 하면 결혼 생활에 지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과거를 깨끗이 잊으라는 말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안 됩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도 옛사람이 죽어야 성공합니다. 어떤 분이 어렸을 때 동창 가운데 첫 사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장성하여 서로 잊고 가정을 꾸려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창회에 나갔는데 첫 사랑이 참석하였더랍니다. 그래서 첫 사랑이라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 물으니 결혼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런데 남편은 죽고 이제 혼자 산다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첫 사랑을 잊지 못하고 집에 돌아 와서 아내에게 자기 첫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 여자를 그냥 버려둘 수 없다고 그 첫 사랑에게 가겠다고 하니 여자가 그러면 이혼하자고 해서 이혼을 했답니다. 이분은 서울대학까지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첫 사랑을 잊지 못하고 가정이 깨지고 그렇다고 그 첫 사랑과 잘 되었느냐 하면 그렇게 되지도 못하였답니다. 결혼 생활도 옛사람이 죽어야 편안합니다. 처녀 생활이 죽어야 하고, 친정생활이 죽어야 하며, 이제 신랑과 함께 새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이 결혼식입니다. 옛 말에 오죽하면 그 집의 귀신이 되라고 하였겠습니까? 세례도 이와 같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옛 생활은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뉴질랜드의 원주민 피지족이 있습니다. 그 원주민이 사는 동네 한 가운데는 killing stone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는 우리나라 단두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바위입니다. killing stone은 죽이는 바위로써 아주 무서운 사형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죄가 많은 죄인은 이 큰 바위에 묶어 놓고 머리를 짓눌러서 죽이며 흐르는 피를 닦아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참혹한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죄에 대한 경고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선교사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게 하고 세례를 줄 때, 그 죽이는 바위 앞에서 주었습니다. 그 바위에서 피를 보게 하고 “자, 옛사람은 이렇게 죽습니다.”하며 세례의 의미를 지혜로운 방법으로 인식시켜주었습니다. 이 선교방법이 대표적인 케이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옛사람이 완전히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세례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나는 벌써 죽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벌써 죽은 사람이요, 지금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생이므로 나를 위한 생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처럼 나를 위하여 죽으신 자를 위해 사는 것으로 나는 벌써 죽었습니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에게는 사망이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의 생명력을 지닌 새로운 존재로 살게 됩니다. 부활의 생명력은 단지 먼 미래에 유보된 능력이 아니라, 현재 이 땅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죄의 사망권세를 이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능력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살게 하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육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살게 하고 영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살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자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새 생명을 얻은 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성도에게 귀중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부활의 능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땅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가게 만드는 거룩함의 능력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부패한 인간이 육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사는 비결은 부활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인간을 지배하던 죄의 권세를 꺾으셨으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자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자임을 역설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께 대해 사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부활의 생명을 얻은 자로서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여겨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롬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해서 하나님께 대해 살았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이전과 다른 삶의 방식, 즉 하나님이 주신 영생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여전히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여전히 죽은 자입니다. 죄에 속한 옛사람은 죽고 죄의 권세를 벗어나 새사람으로 거듭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죄와 완전히 결별한 자입니다. 죄를 가까이 하는 자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계속 죄 가운데 살아가려는 자는 자기의 정체성을 잊은 자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성도가 자기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죄의 도구로 사용하는 자가 아니며 의의 도구로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게 성별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은 거룩함의 길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거룩함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신성한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몸이 죄의 지배를 받는 자는 이 같은 신성한 의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성도의 거룩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다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거룩한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다리는 자의 삶 /마25:14-30/ 임영수 목사 2015-05-07 10:34:36 read : 3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의 본문은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주인이 먼 타국에 출타한 기간 주인으로부터 어떤 삶의 과제를 위임받은 종들의 삶의 유형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인이 돌아오는 그 시간 동안 종들에게 책임이 부여되고 주인이 돌아와서 그 책임을 묻는 비유입니다. 대강절의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단순한 기
기다리는 자의 삶 /마25:14-30/ 임영수 목사 2015-05-07 10:34:36 read : 3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의 본문은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주인이 먼 타국에 출타한 기간 주인으로부터 어떤 삶의 과제를 위임받은 종들의 삶의 유형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인이 돌아오는 그 시간 동안 종들에게 책임이 부여되고 주인이 돌아와서 그 책임을 묻는 비유입니다. 대강절의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단순한 기다림이 아닌 어떤 희망에서 어떤 삶의 모습으로 기다리는가 입니다. 이 비유에 기다림의 삶의 유형으로 두 가지 형태가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그 다음은 두 달란트 받은 사람, 다른 하나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다섯 달라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신의 책임에 신실한 긍정적인 유형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신실하지 못한 부정적인 유형입니다. 비유에서 긍정적인 유형보다 부정적 유형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이 타국으로 떠날 때 종들에게 맡기고 떠난 달란트는 그 시대에 통용되고 있던 화폐 단위의 일종입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달란트는 화폐를 의미하기보다 종들에게 그들의 능력에 따라 맡긴 하나님의 선물을 뜻합니다. 그 선물이 재능일 수도 있고, 구원일 수도 있고, 복음 또는 재화일 수도 있습니다. 비유의 내용을 다시 검토해 보면 주인이 타국으로 떠날 때 세 종을 불러 각각 그들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그 다음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라트를 맡기고 떠났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으로 장사하여 각각 배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서 그것을 숨겨 두었습니다. 때가 되어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습니다. 배를 남긴 두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칭찬과 상을 받았고, 한 달란트를 그대로 묻어 둔 사람은 엄한 벌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게 된 동기는 예수님 자신이 세상을 떠날 시간을 얼마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사는 삶으로, 그들의 책임과 창조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종교 생활이 잘못하면 지나치게 자기 의와 자신의 안전에 만 몰두하는 소극적인 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는 하나님 나라와는 멀리 있게 되고, 이미 받은 선물까지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위기는 소극성에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근본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책임과 창조적인 삶을 가르치기보다 자기 자신의 의와 안전만을 추구해 가는 소극적인 삶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한 종교 생활에는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이 요청됩니다. 그러한 삶의 태도에서 받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되고 더욱 충만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비유에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있는 자란 주인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배를 남긴 사람이며, 없는 자란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미 주어진 것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들은 바를 실천하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갈 때,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더 생기고 믿음에 더 부요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들은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으로 끝내고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아갈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약화되고 신앙이 침체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창조적 행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서 그 분을 만나게 되고 이미 듣고 배운 바가 확실하게 됩니다. 이러한 원리는 반드시 신앙 문제에서만이 아닌 한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발견되는 재능에서도 확인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예능의 소질이 탁월한 사람일지라도 그것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연마하지 않으면 무용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연마해서 다른 사람과 사회를 위해 사용하면 그 달란트는 더욱더 빛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는 묻어 두면 없어집니다. 그것을 빼앗긴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란트는 창조적 삶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창조적 삶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통해 표현됩니다. 비유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의 삶의 태도인 책임과 창조의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서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자기 것의 발견입니다. 비유에서 문제로 제기되는 것이 달란트의 액수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나 그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미 받은 바의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는가를 물으십니다. 최선은 자기 것에 대한 가치를 발견했을 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그것을 묻어 두게 됩니다. 자기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될 때 다른 사람의 것을 넘나 보며 부러워하거나 비교하는 데서 해방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내적 문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오는 좌절·시기·질투입니다. 성서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데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것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만의 고유한 자랑할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작은 것으로 행복하게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창조적 삶은 모방이나 흉내가 아닙니다. 자기의 것을 발견해서 그것을 독창적으로 표현해 가는 것입니다. 한 젊은 화가가 자신의 그린 삽화들을 들고 신문사를 찾아다녔으나 매번 거절당했습니다. 어떤 신문사 편집장은 대놓고 그에게 아무 재능이 없어 보인다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화가는 자신의 재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기하지 않고 더 많은 언론 매체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마침내 그는 어느 교회 출판물에 삽화 그리는 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싸구려 차고에 세를 든 그는 생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누군가 자신의 작품을 사 줄 것이라는 희망 속에 계속 작품을 그려 나갔습니다. 하루는 작업 도중에 그는 차고 안을 뛰어 다니는 생쥐를 보고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미키 마우스라는 이름의 동물 캐릭터를 창조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월트 디즈니는 전설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요구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자들에 대한 보상은 주인이 그들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겠다는 것과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종이 장사해서 남긴 달란트의 액수를 칭찬하지 않고 그의 신실성을 칭찬했습니다. 신실성은 정직성과 관련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직하면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고 손해본다는 것이 삶의 좌우명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속이고 숨길려고 합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의 관계는 언제나 파상적이고 모든 일의 거의 요식행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정직할 때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서적 의미에서 정직은 영적 성숙의 정도입니다. 영적 성숙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참여해 가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직한 자의 것입니다. 핑계·책임 회피·원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와 선물을 놓치게 합니다. 저희 첫째 아이가 고등학교 삼 학년 때 너무 불평과 핑계가 많았습니다. 저는 아들의 그러한 부정적 모습이 학교 공부는 힘들고 생각대로 모든 것이 되어 가지 않는데서 오는 정신적 부담에서 나오는 행동임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보기에는 그 상태로 놔두면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아 불러서 매우 엄하게 꾸짖고 타일렀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보다는 그러한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그후 그는 반성하고 그의 삶의 태도를 많이 바꾸었습니다. 물론 대학에도 입학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요구되는 것은 모험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가 주인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모험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물질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되는 투기가 아닙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향한 모험을 요구하십니다. 폴 투르니에 박사는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험을 거부하고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안일하게 보존해 갈려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우리가 모험을 거부하는 이유는 모험에는 너무나 많은 두려움과 위험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모험을 할 때 우리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험을 좋아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모험에 참여해서 그 분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생의 모험을 요구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그것을 거부하였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복된 미래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모험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길은 매우 어렵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많은 위험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모험의 길에서 인간의 나약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 안에서 모험을 떠났기 때문에 실수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결국 이 사건에서 저 사건으로 그를 인도하셔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지까지 도달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 살아오면서 지금까지의 과정이 모험이었습니다. 목회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모험은 매우 다양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 새로운 신학 서적을 읽어가는 일, 기도, 묵상, 주일마다 새로운 내용의 설교 준비, 해외 연구 모두 모험입니다. 이 모험을 포기하고 신학교 입학할 때 가지고 있었던 확신과 지식에 안주했다면 저는 목회도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살아 계시는 인격적인 분으로 고백해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험의 과정에서 많은 실수도 하였고, 고뇌와 불면의 밤도 있었고, 깊은 회의, 좌절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생은 모험입니다. 위험과 곤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모험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확실성과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우리의 실패와 실수를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서적 모험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 모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창조적 표현의 한 형태입니다. * 모험은 모방이 아니고 독창적입니다. * 모험은 하나의 최종 목표를 추구하는 가운데 통일성을 지닙니다. * 모험의 목표는 사랑입니다. 목표를 제안하는 것도 사랑이며 그 모험의 과정을 유지시켜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 모험은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의 우리의 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언제인가는 우리와 결산을 하실 것입니다. 그때가 없다면 우리의 생은 진정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 결산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달란트의 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의 가치를 찾아냈는가, 당신은 정직했는가, 당신은 모험을 했는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답변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제목이 "어느 졸업생의 기도"라는 시를 소개해 드리면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주님, 내가 약간의 지식을 얻었사오니 슬기롭게 사용하여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 그런 길을 보여 주시옵소서 고뇌 많은 삶을 좀더 뜻있게 살고자 원하오니 믿음과 용기를 베푸시어 나의 나날에 목적을 심으소서 가장 큰 열매를 맺도록 당신 섬길 길 보이시고 나의 모든 배움과 지식과 기술이 당신 뜻 행함을 배워 참 열매 맺게 하소서 내 모든 일 행할 때 언제나 깨닫게 하소서 지식은 배움에서 비롯함이며 지혜는 당신께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H. S. 라이스 - 아 멘 -
깨끗한 교회 /대하34:14-21/막11:15-18/ 이성희목사 2015-01-19 10:08:50 read : 12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브라질 단기 선교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멀고 힘든 길이지만 모두가 기도해 주시는 덕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의료 선교도, 이미용 선교도 효과적이었고 많은 열매가 있을 줄을 믿습니다. 주성염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하여 한인 목회를 하면서 원주민 선교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아주
깨끗한 교회 /대하34:14-21/막11:15-18/ 이성희목사 2015-01-19 10:08:50 read : 12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브라질 단기 선교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멀고 힘든 길이지만 모두가 기도해 주시는 덕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의료 선교도, 이미용 선교도 효과적이었고 많은 열매가 있을 줄을 믿습니다. 주성염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하여 한인 목회를 하면서 원주민 선교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아주 적절한 선교정책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브라질의 공용어인 포르투갈어와 영어와 한국말을 다 잘해서 아주 효율적인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도 우리 연동교회의 교우들을 하나님이 보내시고 우리가 갔을 때에 반갑게 맞아 주시고 환대를 받았습니다. 특히 강성극집사님께서 이민자로서 성공적으로 생활하시고 계셨습니다. 김영철집사님도 아주 사업에 성공하여 잘 지내고 계십니다. 우리 일행을 그 집에까지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교우들에게 문안드려 달라고 하는 부탁도 받았습니다. 선교 일정을 마치고 이과수폭포에 가 보았습니다.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나이아가라폭포에 가 본적이 있습니다만 정말 그들이 말하는대로 불쌍한 나이아가라입니다. 우리가 간 날은 아주 더운 날이었지만 더운 것이 기억이 되지 않을만큼 그 광경이 머리에 꽉 차 있습니다. 이 폭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세 나라의 국경에 인접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여러번 지도가 바뀌다가 파라과이의 것이었지만 브라질과의 전쟁에 패하여 브라질의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이나 파라과이는 자기의 것이었다가 주인이 바뀌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볼 때는 누구의 것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로 말하면 주인은 바뀐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 폭포의 주인이셨습니다. 세계인이 공유하고 함께 즐기고 관리할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회도 사람이 수없이 지나가고,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인인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고 깨끗하심처럼 깨끗해야합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원망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갈등 없는 공동체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회학자 스캇펙은 갈등 없는 공동체는 ‘유사 공동체’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공동체란 갈등이 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극복해 나갑니다. 초대교회는 갈등 때문에 성장한 교회입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초보자들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갈등은 교회의 성장의 요인이었습니다. 갈등을 해결하면 성장했습니다. 갈등은 해결하면 더 이상 갈등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봉헌 때문에, 구제 때문에, 할례 때문에, 지역 때문에 갈등이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성장의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화해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기만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신문사나 전화국은 소식을 받아 전해 주는 곳이지만 교회는 결코 그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단순히 그 말씀 때문에 몰려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세상의 갑남을녀가 모여 전혀 새로운 사회적 완전체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며 역사에 의미를 세우는 일입니다. 갈등이 있고, 불결하고, 문제가 있는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해야 할 일은 교회는 이런 문제를 깨끗케 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깨끗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공히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교회는 신비로우면서도 늘 혼란이 함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를 겸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실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는 공생애 초기에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으로 나와 있고, 그리고 복음서는 공생애 말기에 다시 깨끗케 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두번의 성전 숙정의 사건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이유를 보며 성경을 통하여 우리 교회도 깨끗케 됨을 배워 깨끗한 교회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우리 교회가 깨끗케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깨끗하게 하신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첫째, 상업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성전 내의 상업주의, 물질주의는 주님이 채찍을 드신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까지도 상업주의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장사꾼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성전에 드릴 제물이 성전에서 팔렸습니다. 제사장들이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받았습니다. 이런 당시의 성전을 예수님은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최근에도 상업주의 논리가 교회를 지배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큰 건물과 화려한 장식과 교인의 수가 교회의 판단 기준이 되었습니다. 시장의 논리라고 말하는 자본주의의 법칙이 교회까지도 지배합니다. 자본주의는 다윈이즘을 기초로 하는 정글법칙입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적자생존의 법칙이 교회에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전을 가만히 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에 강도들이 득실거린다는 말입니다. 강도는 힘으로 돈과 목숨을 빼앗는 사람입니다. 힘으로 돈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빼앗는 곳이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내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덕을 보겠다고 교회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됩니다. 항상 내가 손해보고 교회가 덕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도 우리가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43에는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책망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가지고 높은 자리를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함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그 때에 사마리아의 시몬이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8:20에는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지금도 그런 죄, 죄인이 있습니다.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으로 교회를 꾸려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으로 은혜를 조작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때 미국의 텔레비전 선교를 이끌어가던 짐 베이커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PTL이라는 엄청난 그룹을 거느린 PTL 왕국의 총수였습니다. 수억불에 해당되는 재산을 가지고 크리스천 테마파크를 조성하고 회원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사기협의로 구속되어 45년형을 받고 복역중입니다. PTL이란 “Praise the Lord” 즉 “하나님을 찬양하라”라는 말의 약자입니다. “리더십의 그림자”란 책에 보면 이 분은 리더십의 그림자인 어두운 부분을 극복하지 못한 예로 나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지는 어릴 때의 열등의식과 자신의 왜소함 등을 엉뚱한 방향으로 해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인 ‘나는 잘못 살았다’(I was Wrong)이란 책에서 자신이 번영의 신인 금송아지를 숭배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금송아지에게 우리를 인도하라고 하는 광야의 실패는 지금도 교회에 잔재하고 있는 교회의 실패 요인입니다. 면죄부도 상업주의의 한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로마 교회는 성베드로 성당이라는 엄청난 대작을 도모하였습니다. 성베드로 성당을 지을만한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데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면죄부를 팔아서 성당 건축의 재원을 마련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에 앞장선 신부 테젤(Tezel)이 면죄부를 팔러 갔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면죄부를 사면 지난 죄를 다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앞으로 지을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테젤은 “하나를 더 사면 앞으로 지을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테젤이 면죄부를 팔고 로마로 돌아오다가 강도를 만나 돈을 다 털렸습니다. 테젤은 이 돈이 면죄부를 판 돈이라고 하였지만 강도는 그 손을 다 털어갔습니다. “면죄부를 판 돈을 훔쳐가면 지옥의 밑창에 들어간다”하고 테젤이 말하자 강도는 면죄부 두 장을 보이며 “앞으로 지을 죄도 면죄 맏는다고 그러지 않았소”하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런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의 산물이 성베드로 성당입니다. 이런 상업주의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분주함은 물질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도 교회도 분주함은 이제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분주함의 저변에는 물질이라는 맘몬의 신이 있습니다. 물질만능을 반영하는 돈버는 책이 홍수를 이룹니다. “돈버는 법을 한 수 가르쳐 주마”라고 사람들을 꼬입니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어제 뉴스에는 유럽에도 로또 열풍으로 사람들이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테레사수녀가 한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이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참으로 빈곤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물질주의와 상업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둘째, 교권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권리로 성전을 장사하는 자리로 빌려주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의 권리로 이용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타락하고 더러워지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마귀를 보세요. 천하 만국을 다 보이며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니 절하라”고 합니다. 천하 만국이 하나님의 것이며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에게 주인 아닌 마귀가 보이며 주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처럼 위장하고 이용하는 것은 마귀의 짓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교권주의에 빠지게 되면 마귀의 모습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당시 종교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제사장의 직은 세습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일하고 권력 행사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성직자가 안일해지고 권력 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타락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직자의 안일과 권력 행사 그 자체가 타락입니다. 또 여기에 한번 빠지게 되면 그 맛에서 헤어나기 힘들다고 합니다. 구약의 종교개혁이 요시야시대에 일어납니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성전을 깨끗케 하고 그 후로는 성전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요시야 왕의 성전숙정으로 성전에서 쓰레기 밑에 쳐박혀 있는 성경 두루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힐기야 대제사장이 무얼했단 말입니까? 힐기야는 안일한 권력형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대하여 아무 책임감이 없고 자신의 세속적 권리만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속적 권력에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교회의 힘을 세속적 힘과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의 힘은 거룩한 힘입니다. 거룩한 힘은 구별된 힘인 것입니다. 신령하고 거룩한 힘은 세상을 지배하고 야합하는 힘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힘입니다. 예수님도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29에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힘은 세상을 세속적으로 지배하려는 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가지고 세속적 명예나 권력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힘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힘보다 훨씬 더 강해야 하고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대이든 교회가 힘의 상징이 되면 교회가 부패하였습니다. 중세의 교회는 정말 힘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였습니다. 교회의 힘이 가장 강할 때가 교황 이노센트 3세 때일 것입니다. 그는 1198년부터 1216년까지 교황으로 재임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황제를 임명했습니다. 또 영국의 존 왕이 교황청이 임명한 켄터베리 대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4차 십자군을 선포하였습니다. 결국 존 왕이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전체가 교황청의 봉토가 되었고 매년 1천 마르크의 봉토세를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교회의 권력이 결국 종교개혁의 불을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가장 어두운 시대라고 합니다. 이 때는 성직자가 가장 부유한 계급이었습니다. 수도원이 가장 재산을 많이 거느린 기관이었습니다. 돈을 주고 성직을 사는 성직 매매가 성행하였습니다 . 최근 한국 교회의 화두는 기독교 정당 창당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직자 가운데도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정치는 성직자의 몫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직자가 현실 정치에서 잘못되면 교회에 직접적 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당이란 어디까지나 정치적 차원에서 구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적 차원에서 정당이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와 같은 진흙탕에서는 성경적 원리와 신앙적 양심을 지켜가면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교회가 정당을 창당할 것이 아니라 기독 의원들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여 정치가 교회를 이롭게 하고 선교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가짜 박사학위 소동입니다.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이 문제가 고개를 드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정부의 부패방지위원회는 우리 나라의 가짜 박사학위를 뿌리뽑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당자 가운데는 목사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저도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걸 꼭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면 불편할 때가 많아요. 누가 뭘 물어보면 멋지게 대답해도 박사니까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 하면서 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르면 “박사가 그것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사가 인정받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박사학위 없으면서 실력 있는 것이 더 훌륭한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들이 이런 욕심을 가지는데는 성도들의 잘못도 있다고 봅니다. 자기 교회의 목사가 가짜라도 박사학위 하나쯤은 있는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조리한 필요와 충족의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부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교권의 침해라고 봅니다. 이런 데서부터 우리는 자유로와야 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셋째, 혼합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예수님 당시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은 세 번 건축되었습니다. 첫째는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포로민이 귀환할 때에 스룹바벨이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헤롯 성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이 유대인에게 환심 사기 위하여 세워놓은 성전입니다. 제사장들이 그걸 미끼로 성전을 지어주는 것을 묵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를 세워준 것입니다. 이 성전을 완공하기 위하여 제사장들은 헤롯에게 결탁하고 온갖 아양을 다 떨었을 것입니다.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목적이 혼동되고 혼합된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성전을 기뻐하실리가 없습니다. 성전은 혼합되지 않고 깨끗해야 합니다. 신명기 22:9에는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고 합니다. 10절는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라고 합니다. 11절에는 또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왜요? 이렇게 혼합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신을 혼돈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혼합주의를 배격하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집단 무의식과 정서가 상당히 혼합적입니다. 그래서 생활에서 보면 혼돈과 혼합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집단 무의식은 식사문화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밥을 먹을 때도 보면 비빔밥과 국밥이 주류입니다. 비벼먹고 말아먹는 것은 모두 혼합된 음식입니다. 섞어찌개라는 것도 있고 부대찌개라는 것도 있습니다. 아무 것이나 전부 집어 넣어 끓여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콜라와 사이다도 섞어서 마십니다. 그게 맛있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술을 마셔도 섞습니다. 말썽많은 폭탄주를 보니까 위스키와 맥주를 섞어서 마십디다. 그래야 기분좋게 취한다나요. 섞으면 폭탄이 되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내 곤하게 잠이 드셨습니다. 그 때에 심한 바람이 불어 물결이 요동하고 물이 배에 들어와 배가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는 물 위에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불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바람은 언제나 붑니다. 문제는 물이 배 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물은 배 밖에 있어야 하고, 배 밑에 있어야 하는데 배 안에 들어왔기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에 존재합니다. 세상에는 항상 바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세상의 물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을 지배하고 초월하는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혼합되고 심지어 야합하게 되면 교회는 문제가 발생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리 채프먼은 그의 책 ‘하나님이 쓰시는 사랑의 언어’에서 “문화적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들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여깁니다. 겉은 기독교인이지만 속은 세속 문화가 혼란스럽게 혼재해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일반적으로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하지 못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기에 확실하지 못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적 불교 신자나 힌두교도, 유대인, 무슬림이나 다를바가 전혀 없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형편없는 사람들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더럽고 어지러운 교회도 깨끗하게 하십니다. 교회를 보면 비판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합니다. 깨끗지 못한 부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들은 나 때문에 더러워진 부분입니다. 교회가 고쳐야 할 부분은 알고 보면 내가 고쳐야 할 부분들입니다. 내가 고쳐지면 교회가 절로 깨끗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최근 어느 책에서 희망적 글을 읽었습니다. 윌리엄 헨드릭스의 ‘이탈자 인터뷰’에서 상처 받고 환멸을 느껴 교회를 떠났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영적 성장을 계속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힘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잘 명심해야 합니다.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고독자가 돼야 합니다. 의식 있는 소수가 돼야 합니다. 지배적 양심으로 우뚝 서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교회는 아름다워지고, 깨끗하게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란 거름과 같습니다. 거름은 한 곳에 쌓아두면 이웃에게 악취를 풍깁니다. 그러나 땅에 골고루 뿌리면 세상을 비옥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 때문에 세상이 더러워졌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없다면 이 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깨끗한 교회를 위하여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인 하나님의 집에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특정한 사람의 집이 아니라 만민의 집이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온갖 상인들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전도서 5:1에는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교회가 깨끗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산에서 신을 벗는 모세의 심정으로 우리의 세속적인 더러움을 벗고 교회를 들어옵시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집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나를 정결케 합시다. 깨끗한 하나님의 집에는 깨끗한 사람들이 들어올 자격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깨끗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와 내 집의 멋진 결단 /수24:14-18/ 조봉희 목사 2016-01-09 07:26:25 read : 9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원전 49년 1월 11일, 줄리어스 시이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일단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의 핵심부로 진입하면 돌아올 길이 없다는 것을
나와 내 집의 멋진 결단 /수24:14-18/ 조봉희 목사 2016-01-09 07:26:25 read : 9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원전 49년 1월 11일, 줄리어스 시이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일단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의 핵심부로 진입하면 돌아올 길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남은 길은 로마를 점령하든가, 폼페이우스에게 멸망당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이저는 루비콘을 건너기로 결심한 순간, 그 목표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연한 결심으로 그는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므로 세 마디로 된 유명한 보고를 로마 원로원으로 보냈습니다.『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의 깊은 뜻대로 의연한 결단이 가져온 위대한 승리의 표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의미있는 일을 결단하면 그 입지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 강조하는 동사신앙의 본질은 한번 뜻을 정했으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살기로 결심했으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한길 가는 순례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결심과 입지가 분명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다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형통의 비결입니다.(1:7) 우리 한국교회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 1921년 4월에 그 유명한 오산학교를 마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단하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에 오산학교의 교장선생님이었던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평양 신학교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 당시 예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평양까지 먼 길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는 주기철 목사의 손을 꼭 잡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주군, 꼭 귀담아 듣게. 이것을 내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천만 동포의 생각과 의견이라고 생각해두게나.” 그리고 덧붙입니다. “나는 평생 동안 많은 인재를 봐왔지만 자네 같은 사람은 없었다네. 자네만한 인물이 없었어. 그래 내가 간곡히 부탁하네. 일본에 건너가서 동경고등사범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오산학교를 맡아주게나. 이 나라의 희망이 아닌가.” 사실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일본의 동경에 유학 가는 것이 모두의 꿈이었고 그 중에서도 세계적인 동경사범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최고의 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잠시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음과 같이 의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께 제 몸을 바쳐버렸습니다. 기독교에 헌신한 이 몸이 어찌 교육에 다시 헌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만 섬기기로 작정하고 결단한 그의 입지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공적인 신앙인들의 공통분모는 입지가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결심과 다짐은 어떤 유혹과 현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심각한 기로에서도 의연한 태도만을 표명했습니다. 오늘날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는 이와 같은 마음의 확고한 결심과 새로운 다짐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살펴본 여호수아서의 중심주제, 동사신앙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 위기의 어떤 불확실한 기로에서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입지가 분명한 신앙으로 앞만 보고 정진하는 삶이 곧 동사신앙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장부 여호수아는 그의 110년 인생을 마감하면서 다시 한 번 동사신앙의 본질을 재확인하며 다짐시켜줍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수없이 천명합니다. 인생의 어떤 유혹과 현혹 앞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단호하게 결의하고 결단하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합니다. 만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대세를 따라 우상을 섬기는 쪽으로 편향되어 간다할지라도『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길 것이라.』고 분명한 입지를 표명합니다.(15절)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지도자 여호수아의 신앙에 감동을 받고 자신들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의연하게 다짐합니다.(18절) 오늘 우리도 이런 멋진 신앙의 결단을 재 다짐하는 새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예수 잘 믿는 방법은 물에 빠지듯이 풍덩 빠져서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푹 빠져서 섬기면 됩니다. 참 간단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섬기라”는 말을 9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여호수아서 강해를 통한 동사신앙 시리즈의 결론으로 하나님만을 더 잘 섬기기로 새롭게 결심하고 다짐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더욱 더 간단합니다. 1.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여호수아는 왜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겨야한다고 강력하게 호소하며 촉구합니까? 주님만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7절)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바벨론 땅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2-3절, 5-6절)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우주 창조 전부터 웅대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사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들이 그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도 우리가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할 것은 나와 내 집이 예수님만 믿기로 작정하고 결심하는 일입니다. 본문 15절처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결정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에 있어서만큼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로 날마다 새롭게 다짐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한번만 태어난 사람은 육신적으로도 죽고, 또 다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니 두 번 죽어요. 육신적으로도 태어나고 영적으로도 거듭나는 사람은, 육신적으로만 한 번 죽고 그 다음에는 영생으로 부활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만을 믿고 섬기기로 작정하고 결심해야 합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4:12)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페니실린을 발명하여 노벨상을 탄 바 있는 유명한 Alexander Fleming박사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박사님께서 발견하신 가장 위대한 발견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는 이런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나는 대단한 죄인이요, 주 예수는 위대한 구주라는 사실을 발견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굳게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다음에 그들을 얼마나 자상하게 돌보아 주셨던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적들을 일으켜 주셨던가요? ①기적적으로 애굽에 내린 재앙에서 그들만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5절) ②기적적으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6절) ③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7절) ④기적적으로 광야생활 40년을 지켜주셨습니다.(8-10절) ⑤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습니다.(11절) ⑥기적적으로 가나안 땅 정착의 모든 길목에서 보호해주셨습니다.(17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기적적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불기둥은 최초의 난방 시스템이요, 구름기둥은 최초의 냉방 시스템입니다. 4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여주셨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오게 하셨고 쓴물을 달게 하셨고, 40년 광야 여정동안 발도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광야 40년과 함께 가나안 땅 정착 기간 40년 동안에도 여전히 돌아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결심하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든든한 보호자이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나와 동행해주시는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이십니다. 그러니 어떤 경제적인 불황에서도 비상한 섭리로 돌보아주십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섬기기로 굳게 결심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큰 능력, 주는 나의 보호자, 내가 항상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3. 하나님은 우리의 승리자이십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본문 18절에서는 또 하나의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어떤 악의 세력에서도 거뜬히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난공불락의 장벽 앞에 놓이더라도 결국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주안점이요, 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한 축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부터 13절 사이에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승리하게 하셨음을 확신시켜 주려고『내가』라는 말을 18번이나 반복합니다.(8절,10절,11절,12절,13절)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주신다는 점을 주지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어떤 환난이나 역경, 시련, 고통도 거뜬히 이기게 해주십니다. 여호수아 23장 10절에서는 우리 한 사람이 천 명을 당할 수 있음을 천명하십니다. 신명기 32장 30절에서는 두 사람이면 만 명도 몰아낼 수 있다고 더 큰 확신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승리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세상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질병을 이기며, 마귀를 이깁니다. 역경을 이기고, 시련을 이기며, 그 어떤 암도 이기고, 세상 모든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의 세상생활은 영적 싸움이요 능력대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말씀 그대로 우리를 넉넉한 승리자가 되게 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37절)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날마다 결심과 다짐을 새롭게 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기만 하면 구약 시대의 영웅 욥처럼 멋진 결말을 보는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Your decision determines your destiny! 당신의 결심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기도 초청) (나의 맘속에 온전히 주님만 모셔놓고 …)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당신은 여러 가지 환경적 어려움 때문에 신앙적 입지가 흐려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히려 상황이 어두울수록 믿음의 결의와 다짐을 굳게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든든한 보호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넉넉한 승리자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니 당신의 신앙적 입지와 결심을 분명하게 다짐할수록 하나님은 당신에게 멋진 결말을 안겨주십니다. 당신의 그 결심이 당신의 운명을 멋지게 결정해줍니다. Your decision determines your destiny!!'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마2:1-12/ 박한응목사 2017-08-18 09:33:39 read : 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오늘은 온 인류의 구세주시며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이 복되고 거룩한 성탄절에 하나님의 신령하신 은혜와 주님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그런데 이 성탄절이 되면 제일 먼저 성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마2:1-12/ 박한응목사 2017-08-18 09:33:39 read : 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오늘은 온 인류의 구세주시며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이 복되고 거룩한 성탄절에 하나님의 신령하신 은혜와 주님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그런데 이 성탄절이 되면 제일 먼저 성탄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돈 벌기 위해서 더 더욱 혈안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백화점과 상점들이 각종 물건들을 쌓아놓고서 손님을 유혹하고 있고 덩달아서 술집들이 매상을 올리려고 야단들을 합니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추리도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서글픈 것이 있습니다. 이 성탄절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이신데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카드가 여러 장 날라 왔는데 그 카드의 그림을 보면 우리나라의 무슨 풍경이나 산타할아버지의 수염 난 얼굴과 썰매를 끄는 루돌프 사슴의 그림이 있고 아니면 박사들이 약대를 타고 가는 그림들은 있으나 예수님은 어디에도 있지를 않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성탄절이란 거룩하신 분이 탄생하신 날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만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빙자하여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난 날을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마호멧교에서는 자기네의 교주인 마호멧이 태어난 날을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통일교의 교주인 문선명은 자기의 생일을 이 세상에 해와 달이 태어난 날이라고 하여 가장 큰 명절로 지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없는 성탄절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금년의 성탄절에는 반드시 나의 마음에 예수를 영접하고 나의 가정에 예수를 영접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이른 새벽 머나먼 동방의 바사 나라에서부터 여러 날 동안 걸어서 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그 박사들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에 대하여도 아닙니다. 머나먼 박사들에게 수개월 전에 나타나서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면서 이 시간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모두 은혜 충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별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여러 곳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창1:16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던 넷째 날에 별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 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②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너의 씨가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창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26: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③단12:3절 말씀에는 세상에서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④그리고 오늘 분문 말씀에서와 같이 동방에서부터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밤하늘에 무수히 수놓고 있는 별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하는 것과 성탄을 알리고 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이 시간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아 멘!>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라고 정하였습니다. 다 같이 한 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내 신앙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내 생활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그러면 이 시간에는 별에 대하여 그 속성과 의미와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1. 별은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이후로 수천 년, 수 만년이 지나오도록 별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우주의 천문학을 연구하는 천문학자에 의하면 수억 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캄캄한 밤하늘에 은구슬을 뿌려 놓은 듯 변함이 없이 우리 인간들에게 낭만을 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가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괴로움에 고통당하는 이들이여 눈을 들어서 하늘의 별을 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너무나 변화무쌍합니다. 변질이 너무 잘됩니다. 그래서 옛 말에 이르기를 인심은 조석변(人心은 朝夕變)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변함없이 연초에 다짐하였던 것을 끝까지 잘 추진해 나가야 하며 은혜 받았을 때의 그 결심과 각오를 변치 말고 잘 행함으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것입니다. 2. 별은 항상 변함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있는것 같아도 모두가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주공간을 돌고 있는 모든 행성들은 1미리 의 착오나 편차도 없이 태양을 중심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의 갈 길을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에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때에는 그 모든 별들과 행성들의 선회하는 궤도를 슈퍼컴퓨터를 동원하여 몇 달 몇 년씩 계산을 하여서 어떤 행성과도 충돌하지 않고 궤도를 돌 수 있도록 쏘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에서 쏘아 올린 인공위성도 자기의 사명을 다하여 명령을 받은 대로 지구 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들은 이 별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말할 것 없이 자기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남의 자리를 넘보아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에도 들에서 양들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천군 천사들의 소리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들려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까지 그 자리를 굳게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고 고백한 여호수아와 같이 세상사람 모두가 다 주님을 떠난다 해도 나는 내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별은 항상 신비한 존재입니다. 별은 아무리 연구를 하여도 그 비밀을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태고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천문학자들이 별을 보고 연구를 하여왔어도 별은 언제까지나 신비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1969. 7. 20. 미국의 암스트롱이라는 우주비행사가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을 하여 2시간동안 월면을 걸어 다녔습니다. 지난 2007년에는 우리나라의 이소연 씨가 우주선을 타고 우주정거장에 가서 14일간을 체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많은 과학이 발달을 해 왔고 미국과 러시아는 경쟁적으로 금성과 화성 등의 별을 연구하려고 우주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과학과 기술로서 아무리 연구해도 그저 추상적인 것뿐이지 아직까지 별에 대하여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인간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고 또 그 별들을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신비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존경받고 동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항상 마음은 여유가 있고, 그리고 아무런 기뻐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항상 얼굴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신비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4. 별은 항상 우리 사람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줍니다. 세상에는 저 하늘의 별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별은 우리 인간들에게 무한한 꿈과 소망을 줍니다. 시인이 별을 보면 시가 읊어지고, 소설가가 별을 보면 한편의 소설이 되기도 합니다. 음악가가 별을 보면 훌륭한 노래가 지어집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낙심한 사람이 저 별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 힘과 소망을 얻었습니까?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별을 보면 그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리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저 하늘의 별과 같이 축복하리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아브라함의 받은 축복을 소망하게 됩니다. 저 하늘에 무수한 별들은 아무리 검은 구름이 가리워도 구름 저편에서는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여름날 장마 속에서 여러 날 동안 별을 보지 못하다가 검은 구름 사이사이로 별이 보일 때에는 모든 사람이 기뻐합니다. (행27:20) “여러 날 동안 해도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고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하여 열나흘 동안 별 구경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항상 별과 같이 남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아무리 환란의 검은 구름이 우리의 앞을 가린다고 하여도 우리들 본연의 별과 같은 믿음을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5. 별은 사람들의 갈 길을 인도해 주고 때를 알려줍니다. 지금이야 최첨단 전자 장비가 있고 최소한 나침반이 있어서 별 어려움은 없지만 전에는 그렇지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넓은 바다를 여행하든지, 또는 끝없이 넓은 사막을 여행하든지, 또는 산중에서 캄캄할 때 길을 잃었을 때에 사방을 알 수 없고 어디가 동서남북인지를 알 수 없을 때에 북극성은 항상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또 어느 별이 북극지를 알 수가 없을 때를 대비하여 왼쪽에는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있고 오늘 쪽에는 W모양의 가시오페아 별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중에 깊은 산 속에서라도, 또 넓은 사막 가운데서라도, 망망대해에서도 북극성을 보고서 방향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이미 수개월 전에 이방나라인 바사 나라의 박사들에게도 별을 통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알려 주셨고 그 별은 머나먼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별은 때와 시기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예>지금이야 누구나 시계를 가지고 있고, 시계 없는 집이 없으며, 집마다 몇 개씩의 시계가 있지만, 예전에는 시계가 없어서 자다가도 밖에 나와서 별을 보고서 시간을 측정하곤 하였습니다. 전에 나의 어머님은 나를 위하여 새벽밥을 해주실 때에 시계가 없어서 꼭 밖에 나와 새벽별을 보고 새벽밥을 하셨는데 날이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은 별을 볼 수가 없어서 그저 한숨 주무시곤 밥을 하셔서 어느 날은 한밤중에도 밥을 먹곤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별은 우리들에게 때와 시기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때와 시기를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무슨 때를 알려야 하겠습니까? 마지막 말세가 가까이 다가옴을 알려야 하고(벧전4:7), 지금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할 때(막1:15)를 알려야 하며, 또한 은혜 받고 구원을 얻을 때가(고후6:2) 되었음을 알려야 합니다. 6.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항상 앞서서 인도하였고 멈출 때에 멈추었습니다. 동방에서부터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은 항상 박사들의 앞에서 인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 땅 베들레헴에 와서는 예수님이 누우신 집 위에서 멈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바른 신앙의 생활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앞서서 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뒤에 떨어지면 따라가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마라톤의 경기에서도 한 번 뒤로 쳐지게 되면 다시 앞으로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이 시대에 앞장서서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으며 또한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멈출 때가 되면 아무리 미련이 있어도 멈추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앞서가는 것만이 운전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멈출 자리에서 잘 멈추어야 합니다. 항상 과한 것은 오히려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이 멈추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부덕이 되고 맙니다. 7. 별은 번성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5:5절 말씀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하셨고 22:17절 말씀에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별은 번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정이 아브라함의 가정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 탄생하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의 믿음이 저 동방에서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과 같이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① 오늘도 변함없이 저 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과 같이 ② 항상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③ 항상 신비한 존재로서 ④ 누구에게든지 소망과 기쁨을 주고 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며 ⑥ 모든 사람들보다 항상 앞서서 가면서 ⑦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과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은 번성하는 축복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내 손을 힘 있게 하소서 /느6:7-9/막3:1-5/ 이성희목사 2015-01-18 18:00:17 read : 11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런던 장애인올림픽이 오늘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최선을 다해 경기하는 모습이 올림픽 못지않게 감동을 줍니다. 지난 주간에 사격 입사 경추장애 결선에서 금메달을 딴 강주영선수는 세계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부인인 이윤경씨가 보조요원으로 함께 참여하여 기쁨이 배가 되
내 손을 힘 있게 하소서 /느6:7-9/막3:1-5/ 이성희목사 2015-01-18 18:00:17 read : 11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런던 장애인올림픽이 오늘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최선을 다해 경기하는 모습이 올림픽 못지않게 감동을 줍니다. 지난 주간에 사격 입사 경추장애 결선에서 금메달을 딴 강주영선수는 세계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부인인 이윤경씨가 보조요원으로 함께 참여하여 기쁨이 배가 되었습니다. 손을 마음대로 못 쓰는 경추장애선수들에게는 실탄장전 등의 도움을 주는 보조요원이 함께 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강선수는 대학생 때 사고로 경추를 다쳐 하반신을 쓰지 못합니다. 오른손도 쥐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왼손으로 사격을 합니다. 경추에 장애를 입었는데 손을 쓰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에 뇌에 손상을 입으면 손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손이 아니라 다른 곳이 탈나도 손을 못 쓰게 됩니다. 손을 쓰기 위해서는 손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고쳐야 할 때가 많습니다. 손을 쓸 줄 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homo sapiens)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쓸 줄 아는 사람(homo habilis)입니다. 손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도구를 만들 줄 아는 사람(homo faber)입니다. 사람이 생각한다는 것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의 숙련은 두뇌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손 솜씨는 두뇌에서 비롯됩니다. 아이들이 손으로 무엇을 만들고 색종이를 접는 놀이를 많이 하면 두뇌가 좋아집니다. 손은 두뇌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머리와 손은 항상 짝을 이룹니다. 결국 손은 마음의 대행자입니다. 손에 대한 전설이나, 신화나, 이야기 등은 한 결 같이 손을 힘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손재주도 알고 보면 손의 힘입니다. 손의 섬세함도 다 손의 힘입니다. 손은 그 자체로 힘이 있고, 또 손은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국의 ‘아서왕의 전설’에 의하면 수면에 선 아서는 호수에서 손이 올라와 명검 엑스캘리버(Excalibur)를 양도받고, 죽을 때에 부하 베디비아를 통하여 다시 호수에 던져서 돌려주자, 물속에서 나타난 손이 칼을 받아서 수면 밑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호수의 손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손입니다. 손의 힘이란 관리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무기로 변합니다. 권세를 얻기 위해 남을 할퀴고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의 목을 죄고, 쾌락을 위해 상대를 유혹하는 손이 됩니다. 반면에 손은 잘 다스리면 은혜의 도구로 쓰입니다. 우리의 손을 잘 쓰면 하나님의 손안에 든 연장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에게 매일 손을 쓰는 일 하라고 지시합니다. 손을 쓰는 일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입니다. 사람은 손을 써야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손은 그 자체로 많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신 가운데 보면 손이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시바신은 천수천족(千手千足)의 신입니다. 인도나 네팔 등지의 힌두 신전에 가보면 신들이 있는데 힌두의 신은 많은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교의 신들은 그 많은 손으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한 손으로 모든 것을 주장하십니다. 야훼 하나님과 모세의 첫 만남을 보세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대화 가운데 모세에게 물으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손에 있는 지팡이를 보이자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네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손에 나병의 흔적이 생겼습니다. 모세가 놀라자 하나님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의 만남을 손을 가지고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힘이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손을 힘 있게 하십니다. 느헤미야는 귀환기의 영웅입니다. 평신도로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아 돌아와 일을 시작했지만 방해자들이 있었습니다. 산발랏, 게셈, 도비야라는 사람들이 계속 일을 방해하며 맥 빠지게 합니다. 느헤미야의 일을 조롱했습니다. 산발랏의 다섯 번째 편지에 대하여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고 청합니다. 이 기도는 느헤미야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기도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에게도 가장 절실한 기도가 바로 이 기도입니다. 우리도 이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렵게 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 6:9 상반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이라고 합니다. 방해자들이 느헤미야와 함께 일하는 사람을 두렵게 하려고 합니다. 겁을 주려고 합니다. 그들이 왜 두렵게 하고자 합니까? 실상은 자기들이 두려우니까 그 두려움을 느헤미야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야곱과 그 가족이 애급으로 이주하여 400년을 살았습니다. 오랜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나와서 히브리백성을 종이 되게 하여 심한 노역을 하게 하고 구박합니다. 왜 히브리 사람을 구박하는지 아십니까? 히브리 사람의 번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왕이 “히브리 여인이 아기를 낳을 때 아들이면 죽이라”고 합니다. 왜 죽이라고 합니까? 히브리 사람이 두려우니까 죽이라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을 죽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하여 모압을 지나게 되었을 때 모압의 발락왕은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백성을 저주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왜 저주하라고 하였습니까? 두려우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출애급기 15:15에는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급이 변방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두려워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가데스에서 에돔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에돔의 밭이나 포도원을 해치지 않을 것이며, 우물물도 마시지 않고 지나가기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에돔 왕은 “안 된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을 경유하지 못하고 다른 길로 돌아서 가나안을 향했습니다. 에돔왕도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두려워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위협하고, 돌로 치려 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허위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였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끊임없이 외부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우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사도행전에서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말씀을 전하다가 공회에 잡혀 왔습니다.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책잡을만한 것을 찾지 못하자 “위협하여 놓으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였습니다. 사실은 사도들을 두려워하여 위협한 것입니다. 스데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을 이기지 못하자 위협하였고, 그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자 귀를 막고 돌로 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 출신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위협과 핍박이 많았겠습니까? 성경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고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바울의 생명 있는 복음을 두려워하여 그를 두렵게 하였던 것입니다. 생명을 전하면 누구나 이런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허드슨 연구소의 연구원인 유대인 마이클 호로비츠의 관찰에 의하면 “유럽의 역사를 살펴볼 때 지금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섬뜩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의 숫자에 버금가는 것이다.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15만 9천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순교하며, 2억에서 2억 5천만 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 정치적 박해를 받으며 4억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실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예수를 믿고 있으니 모두가 편안하게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순교는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요즘에도 순교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재작년 한해에 2,175명이 순교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국제오픈도어선교회의 발표에 의하면 나이지리아에서 종교 폭동으로 2,000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이라크에서 90명이 순교하였습니다. 파키스탄과 라오스에서 29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집트와 인도에서 각각 9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순교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교도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도 이런 위협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과 억울함과 비난이 있습니다. 이런 불쾌하고 힘든 일들을 만날 때에 조금도 섭섭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교에 비교해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는 왜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경외’란 말은 거룩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경외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 찬양, 우선순위를 올려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두렵게 하고, 위협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걸 섬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 섬김은 그냥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신앙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섬깁니다. 열대 아메리카 산의 짖는 원숭이는 정글에서 가장 소리가 큰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리는 가장 크지만 가장 힘세지는 않습니다. 동물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원숭이가 두려울 때 소리를 크게 지른다고 합니다. 두려운 개가 크게 짓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사람을 두렵게 하지만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손을 힘 있게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6:9 하반절에는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고 합니다. 산발랏의 다섯 번째 편지 내용에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와서 페르시아 왕실에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전혀 근거가 없는 모함을 한 것입니다. 산발랏의 무고한 모함이 아닥사스다왕에게 전해질 경우, 느헤미야는 곤란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손을 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는 간구는 ‘하나님께 담대한 마음을 허락해 주실 것을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아말렉과 첫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준비되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 싸워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손이 높이 들렸기 때문에 승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높이 들린 모세의 손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그 손이 내려오지 않게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손이 높이 들리게 힘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그 손은 승리의 손이었습니다. 모세는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깃발’이란 뜻입니다. 모세의 팔이 높이 올라가 있어서 이겼지만 ‘모세 닛시’가 아닙니다. 모세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싸우셨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삼손은 성경에서 가장 힘센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나실인이었으므로 어릴 때부터 특별하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큰 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충동을 통제할 만큼 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그는 여자에게 약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둘째는 혼자서 성공하려면 실패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항상 혼자서 싸웠습니다. 혼자 싸울 때는 멋지게 이길 수 있었지만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사랑하던 여인 들릴라가 “당신을 결박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여러번 거짓으로 가르쳐 주었지만 결국 들릴라에게 천기누설을 하고 맙니다. 그의 머리털을 밀어버리자 그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힘이 없어진 삼손의 두 눈을 뺐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다곤 신전에 데려가 재주를 부리게 하였습니다. 삼손은 두 기둥 사이에 서서 손으로 기둥 잡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신전이 파괴될 때에 3,000명이 죽었습니다. 성경은 이 때 죽은 자의 수가 삼손이 살아 있을 때 죽인 자 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삼손의 손을 힘 있게 하여 그가 원수를 갚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에는 내과, 안과, 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신경정신과 치유가 다 있습니다. 그 중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손이 말랐던 그 사람은 원래 이름 난 석수였다고 합니다. 돌을 깨고 다듬는 직업을 가진 석수가 손이 말라 있으면 그는 직업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시고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에게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손에 힘만 있으면 만사가 풀립니다. 다시 석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마른 손이 풀려 손을 힘 있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희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의 손은 권위와 힘의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손을 얹음”(laying on of hands)이란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손을 얹었다는 것은 여러 경우에 등장합니다. 첫째는 어떤 직분을 주어 임직할 때입니다. 둘째는 치유할 때입니다. 셋째는 범죄자를 돌로 칠 때입니다. 넷째는 짐승을 제물로 잡을 때입니다. 다섯째는 신약에서 축복할 때입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에 손을 얹은 것은 주의 종의 손을 힘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입니다. 마가복음 16:18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원수의 손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사람의 손에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권능을 하나님의 사람의 손을 이용하여 나타내 주십니다. 하나님이 힘 있게 하는 손은 주먹 쥔 손이 아니라 열린 손, 편 손입니다. 열린 손은 주먹 쥔 손보다 힘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열린 손은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열린 손은 평온함을 주는 손입니다. 열린 손의 반대는 주먹입니다. 주먹을 쥐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억지로 움켜쥐려고 합니다. 주려고 하기보다 빼앗으려고 합니다. 주먹은 전쟁을 일으키며 항상 누군가와 대적합니다. 진정한 힘은 주먹을 쥐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열린 손으로만 얻을 수 있고, 열린 손으로 진정한 소원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주먹 쥔 손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 수 없습니다. 이미 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얻으려면 손을 열어야 합니다. 손을 쫙 펴야 합니다. 한국인의 손은 기계보다 정밀한 손이라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세계가 우리의 손에 찬사를 보냅니다. 쇠 젓가락으로 콩을 집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가전제품이나, 조립 공정이나, 생명공학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손이 우리의 손입니다. 우리민족은 손으로 하는 일은 잘 하는 민족입니다. 운동도 손으로 하는 운동을 발로 하는 운동보다 잘 하는 민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민족에게 하나님이 손에 힘을 주셔야 합니다. 손의 힘이 필요합니다. 결론 얼마 전 이라크의 ‘회교혁명 평의회’에서는 포고령 통해 새로운 형벌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이미 범죄자들에게 ‘손목절단형’을 집행하고 있는 이라크에서는 최근 범죄가 급증함에 따라 귀를 자르는 형벌을 실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수족을 절단당한 전과자에게는 이마에 문신을 명령했습니다. 수족을 절단 당한 것과 및 문신을 숨기려고 성형수술을 하거나 그렇게 하도록 그 행위를 도와주는 사람들 역시 손과 귀가 잘리게 됩니다. 이슬람의 법은 참 무섭습니다. 손을 자르는 형벌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성경도 손을 자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의하여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을 위하여 자릅니다. 마태복음 5:30에는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합니다. 왜요? 손을 더 힘 있게 하려고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6:3에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고 합니다. 왜요? 손을 더 힘 있게 하려고 모르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원수들의 위협이나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원수들을 이기게 하시려고 우리 손에 하나님의 힘을 실어주십니다. 느헤미야를 괴롭히던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손에 힘이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의 공사가 잘 끝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손을 하나님이 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시23:5/ 오주철 목사 2016-04-11 09:30:27 read : 4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결혼을 앞둔 손녀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처음 시집 오셔서 할아버지를 뭐라고 부르셨어요? 처음에는 영감이라고 안 하셨지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물론이지 처음에는 나도 당신이라고 했지"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손녀가 다시 "요즈음은 어떻게 부르세요?"라고 하니까 할머니
내 원수의 목전에서 /시23:5/ 오주철 목사 2016-04-11 09:30:27 read : 4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결혼을 앞둔 손녀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처음 시집 오셔서 할아버지를 뭐라고 부르셨어요? 처음에는 영감이라고 안 하셨지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물론이지 처음에는 나도 당신이라고 했지"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손녀가 다시 "요즈음은 어떻게 부르세요?"라고 하니까 할머니가 지체없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응, 요새는 웬수라고 해."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에는 유달리 원수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23편에서도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23편 5절을 북한에서 번역된 성경에 보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쑤를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을 각 지방 버전으로 이렇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경상도 버전입니다. "내 라이벌 죽일 놈의 문디 자슥들 앞에서 내 대가리에 지름을 바르고/ 낼로 팍팍 키와 주시니 내사 뭔 걱정이 있겄노 말이다." 충청도 버전입니다. "주님께서 지 웬수의 면전에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잔치를 여시구 / 지름으로 지 머리에 발라주시니 지가 몸둘바를 모르겠네유. 시방두 지 잔이 넘치네유" 전라도 버전입니다. "아따! 주께서 저 싸가지 없는 놈들 앞에서 내게 밥상을 챙겨주시고 내 대그빡에 지름칠해 주싱께로 / 참말로 나가 기뻐블그마이" "내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궁극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그 원수는 바로 사탄 마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탄'이라는 원래의 뜻이 'enemy'라고 해서 '원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탄 마귀라는 말은 원수 마귀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할 때, 혹은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 끊임없이 우리의 삶과 사고의 영역 속에 도전하며 인간들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하는 존재가 바로 원수 마귀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귀의 공격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약속하기를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들에게 상을 차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수들 두 눈뜨고 쳐다보는데 보란 듯 이것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다시 말하면, 원수들이 두 눈뜨고 쳐다보고 있는 그 앞에서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요? 첫째로, 그 은혜는 풍성한 공급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여정이 결코 낭만적인 산책로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시편 23편에서 묵상한 것처럼 하나님의 양들인 우리도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반드시 지나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도 시련과 고통에서 예외가 되어져 있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과 시련에서 면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사탄 마귀는 우리의 마음속에, 특별히 예수를 믿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를 믿으면 어쩐지 인생에서 내가 손해를 볼 것 같고, 신앙생활이 고통의 길일 것 같은 그런 어두운 마음의 그림을 그려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도를 해 보면 솔직하게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저는 믿고 싶은데요, 그런데 믿었다가 우리 집안에 우환이 생길까봐 믿지 못하겠어요." 예수를 믿고 싶지만 믿었다가 우리 집안에 풍파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길까봐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 보셨습니까? 전도를 해 봤어야 만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원수의 목전에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0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여기에서 도둑은 원수 마귀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파괴시킵니다. 마귀는 빼앗는 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가져가고, 가치를 왜곡시키는 자, 그것이 원수 마귀입니다. 원수 마귀가 하는 일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의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흔히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좀 고생을 하지만 죽을 때는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구원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는 양들이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간신히 구원만 받아서 고생하다가 죽을 때 천당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풍성한 생명, 풍성한 기쁨, 풍성한 의미, 풍성한 감격을 누리는 삶이 가능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더 풍성한 기쁨을 누리십시오. 더 더 풍성한 감격을 누리십시오. 더 더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십시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를 믿고 이런 풍성한 삶을 체험한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에 어느 한 날 반드시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주님, 예수를 믿고 보니까 제 잔이 넘치네요." 아직도 이 고백을 못해 보신 분은 죄송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분이십니다. 실제로 중동 지방의 양들을 관찰해 보면, 그 양들이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시기가 양들을 데리고 골짜기를 따라 고원지대의 방목장으로 올라가는 시기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목자들은 봄철에 미리 그 고원지대를 답사한다고 합니다. 여름철을 지날 때 양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를 미리 올라가서 답사를 하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양들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대부분 목자들이 양들을 위해서 준비한 고원지대의 목초지는 바위가 편편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풀들이 있습니다.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맹수들이나 야수들의 공격에서 쉽게 양떼들을 지킬 수 있고, 따스한 햇빛이 있고 편편한 넓은 바위가 있는 곳을 미리 답사하여 준비해 둡니다. 그리고 이런 지역을 가리켜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일반적으로 "메사"(MESA)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목자들은 양떼들을 데리고 골짜기를 지나서 고원지대로 올라갑니다. 일단 거기에 도착하게 되면 "메사", 편편한 바위가 있는 주변 지역을 깨끗이 정리를 합니다. 그리고 웅덩이나 샘물들을 잘 관리해서 양떼들이 쉽게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주변에 독풀들을 제거하고 좋은 풀들을 먹을 수 있는 환경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맹수들의 불의의 습격에 대비하여 울타리나 둑을 만들어 자기의 양들이 마음껏 안심하고 향연을 즐기게 합니다. 이것을 일종의 "메사"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양떼들이 골짜기를 지나서 고원지대를 향해 올라가다가 지치고 힘들어하는 그 순간, 드디어 "메사"라고 하는 고원지대의 방목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시편 기자가 고백하고 있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Table)을 차려 주시고" 편편한 바위가 있고, 물이 있고, 싱싱하게 푸른 식물이 있습니다. 이런 천연의 잔치 자리인 고산의 목초지에서 긴 여정에 지친 양들이 오랜만에 실컷 먹고 마시며 쉬었을 때 양들이 느끼는 소감은 어떤 소감일까요? 이런 소감일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신도 어려움 속에 있지만 당시에 고난을 받고 있었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런 메시지를 계속해서 되풀이합니다. "여러분, 기뻐하세요. 좀 어려움이 있어도 기뻐하세요.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기뻐하세요." 이것이 빌립보서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앞에 스크린에 띄워져 있는 빌립보서 4장 1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풍성한 삶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양들이 목자에게 이끌림을 받아 골짜기를 올라가면서 힘들고 지쳐갈 때 종종 목자는 양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양들아, 힘들지? 그러나 조금만 견뎌. 조금만 더 올라가면 메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는 인생의 여정에는 이런 메사의 은총, 혹은 풍성한 공급의 은총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여정이 조금은 힘들고 피곤해도 저 높은 곳, 고원의 목초지에 예비된 향연을 기대하신다면 우리는 오늘의 시련을 견딜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앞에 주께서 예비하신 잔치 자리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과거에 모두가 다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다렸던 유일한 희망은 동네 잔치였습니다. 우리 집 잔치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동네 잔치만 열리면 그 날은 내 잔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잔이 넘치는 날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잔치집과 같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 잔치 날이 다가옵니다. 그날 원수의 목전에서 누리게 될 그 풍성한 공급의 은혜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암울한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잔치집의 비전을 보여주시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조금만 기다려. 우리는 곧 메사에 도착할 거야. 거기에 가면 우리는 실컷 먹고 마실 수 있단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우리가 지금 인생의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건너편에 있는 비전을 바라볼 수가 있다면 우리는 이길 수가 있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내일의 잔치날을 그릴 수만 있다면 오늘의 고통은 좀 힘들고 어렵지만 그러나 넉넉히,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향연의 자리를 준비하시고, 상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는 신랄한 어둠과 고통의 한복판 속에서도 오늘의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어느 날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향연을 베풀어주실 그분을 바라보라"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시련이고, 어둠이고, 고통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미래에 주님께서 준비하신 그 잔치와 향연의 비전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은혜, 그것은 첫째로 풍성한 공급의 은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두 번째는, 완벽한 치유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원수의 목전에서 어느 날 경험하게 될 놀라운 은혜 가운데 하나가 완벽한 치유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삶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믿고 살아도 상처는 피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여정에도 상처는 있습니다. 상처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상처를 받습니다. 문제는 이 상처에서 속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치료를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상처 때문에 무너집니다. 그 상처 때문에 좌절하고, 그 상처 때문에 포기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안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치료받는 것입니다. 한때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가 나중에 목사가 되었던 필립 켈러는 양들이 골짜기를 지나 고원지대를 향할 때, 그리고 고원에 도착할 때 양떼들을 위협하는 최대의 원수는 파리떼라고 합니다. 그는 양떼들을 공격하는 파리떼의 다양한 종류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쇠파리, 말파리, 발뒤꿈치 파리, 코파리, 허리파리, 사슴파리, 진디파리, 등에, 모기, 각다귀, 날개 달린 각종 해충파리 등" 수많은 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양들은 코파리에게 약하다고 합니다. 코파리가 양떼들 주변에서 윙윙거리기 시작하면 양떼들은 갑자기 긴장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코파리의 목적은 일단 양들의 코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의 코에 덮힌 촉촉하고 끈끈한 점막 안에 알을 낳으려고 기회를 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공격해서 양들의 머리까지 진격해 들어온다고 합니다. 만일 코 파리가 알을 낳기에 성공하면 며칠 안에 부화되어 작고 가느다란 벌레와도 같은 유충이 콧구멍을 통해 양의 머리 속까지 파고 들어가 각종 염증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코파리가 이 머리를 점령하게 되면 양들은 격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경험하게 되면 양들은 그 머리를 바위에 부딪치고, 나무에 부딪치면서 데굴데굴 굴러다닌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때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기름병을 준비합니다. 제일 좋은 것이 올리브 기름입니다. 목자는 그 기름병을 가지고 있다가 양의 코를 마구 비벼줍니다. 코 속에 기름을 집어넣기도 하고, 귀를 비벼주기도 합니다. 목을 비벼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에 계속 발라 줍니다. 그러면 양들이 시원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고통을 당하는 양이 있으면 기름병이 아니라 기름통을 가지고 있다가 아예 양들의 머리를 거기에다 푹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꺼냅니다. 그때 양들은 비로소 치료를 느끼면서 표정이 환해진다고 합니다. 평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배경에서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본문 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제 본문의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궁금하십니까? 그렇다면 옆에 있는 분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야고보서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영적 지도자들에게 병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그냥 기도가 아니라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1장에 보면, 메시아의 예언이 나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예언하면서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래서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십니까?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며,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메시아가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아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치료할 그분의 사역을 상징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고통과 슬픔 속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가 찾아와서 내 상처를 만져주며 나와 함께 있어줄 때 우리는 얼마나 위로를 느낍니까? 그렇지만 사람의 위로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나의 고통을 이해해도 그 이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가장 완벽하게 아시는 분, 나의 처절한 외로움과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내 존재의 깊은 곳에 숨겨진 고통과 상처를 이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그분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셔서 내 존재의 깊은 곳을 만져주실 때 비로소 우리의 치료는 완벽한 것입니다. 인간의 상처의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영, 그 영의 기름 부으심만이 완벽한 치유의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 강원도에 정착해 살면서 예수원을 설립하여 많은 영성을 끼쳤던 대천덕 신부이신 R. A. 토레이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루벤 토레이는 무디와 함께 사역했을 뿐만 아니라 무디 성경학교 교장을 지냈던 유명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침에 일어날 때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성령으로 내게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으심, 성령의 만지심이 우리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간 밤에 어제의 고통을 치유하고 오늘 하루를 새롭게 살수 있는 준비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만으로 가능할 수가 있습니다. 어제는 어제를 위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했습니다. 오늘을 위해서는 오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삶에서 오늘 내가 견뎌내야 할 삶의 고통과 억압 앞에 도전하기 위해서 오늘 이 순간 내게 임하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어제의 기름 부으심만으로 오늘의 상처를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매일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성령으로 내게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저는 오늘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추상적인 소리로 들릴 것 같지만 그러나 이것만이 우리 민족이 서로 하나가 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말들을 많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말들이 해결될 것 같지만 말이 많으면 말이 많습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은 유달리 상처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우리가 공격적이고 비판적이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과거에 내가 받은 상처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유달리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받은 상처가 그만큼 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상처 받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기도로 주님 앞에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의 도우심을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만이 완벽한 해답이라고 믿습니다. 남북 분단의 상처도 깊은 상처인데, 그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남남갈등입니다. 대통령을 향해 욕설을 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우리의 국론이 분열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공격하는 이런 대립의 관계가 계속된다면 이 깊은 상처는 어떻게 치료할 수가 있겠습니까? 서로의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감정적인 비난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남북 분단의 고통에다가 남남갈등의 또 다른 상처를 추가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상처와 죄들을 꺼집어내고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져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치유를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의 새로운 날을 전망하고 바라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분이 우리에게 기름 부어 주시면 마음이 상한 자들이 고침을 받고, 슬픔에 잠겨 있던 사람들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날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이렇게 고백하며 치유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 번째로, 그것은 새로운 사역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치유 받은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적극적으로는 치유만이 아니라 이제는 치유를 받았으니 새로운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로 하여금 새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기름 부으심은 새로운 사역에로의 은혜입니다. 구약에 보면, 어떤 자리에 임명될 때 기름 부음을 받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왕이 왕의 자리에 취임할 때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임명될 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구약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그 자리에 취임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역사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새로운 왕이 취임할 때마다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왕과 새로운 선지자를 기다립니다. 가짜 선지자에 질리면서 그들은 새로운 선지자들을 기다립니다. 새로운 제사장을 기다립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실망하면서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세 가지 기능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주시는 한 분이 역사에 나타날 것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아람어입니다. 이 메시아라는 말을 헬라어로 바꾸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똑 같은데 그 뜻은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약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이 무엇인 줄을 아십니까? 아니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최대의 사건이 무엇인 줄을 아십니까? 그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날 가장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따라다니고 있던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라 다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작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습니다. 상처를 치료 받고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작은 그리스도로 삼고, 우리 주변에 아직도 예수님을 모른 채 더 깊은 고통과 상처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저와 여러분들이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상처받은 이웃들을 위해 그들의 상처를 만져주는 작은 목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고백은 단순한 자기 만족의 고백이 아닌 사명을 이루는 자의 감격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먹을 것을 풍성하게 가진 배부른 사람이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자기 만족의 고백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사명을 이룬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사명을 거룩하게 성취할 수 있었던 사람만이 드릴 수 있었던 고백이 바로 이 고백이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백이 단순히 자기 만족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기뻐하시는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사역의 자리에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 이 거룩한 영적인 일에는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뿌리를 내리지만 사람의 의지는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죄성에 오염된 우리 인간은 지금 사는 그 방식에 아주 절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방식 그대로 살아가려는 유혹에 이끌리게 됩니다.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싫어합니다. 양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노력, 뭔가 지금보다는 달라지고자 하는 어떤 구체적인 노력이 없다면 결코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그 방식 그대로 한다면 지금보다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보다는 뭔가 달라져야만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역을 붙잡고 최선의 노력을 하십시오. 거룩한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신앙이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 은혜를 그의 백성들에게 풍성하게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되어지기 위해서는 사역의 자리에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역의 자리에로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나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에게 찾아오시고 나를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은혜를 보다 구체적으로 누리기를 원하신다면 기억하십시오. 사역의 자리에로 들어가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오늘의 시편 기자가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런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