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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07:41:20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흔히 인생을 경주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것도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경주 마라톤과 같은 경주에 비유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빨리 가는지 정신없이 지난 1년을 달려왔습니다. 어느덧 364일이란 시간을 살았
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07:41:20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흔히 인생을 경주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것도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경주 마라톤과 같은 경주에 비유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빨리 가는지 정신없이 지난 1년을 달려왔습니다. 어느덧 364일이란 시간을 살았고 이제 하루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일 년을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그동안 어떤 일들을 겪으셨나요? 즐거운 일, 슬픈 일, 기쁜 일, 안타까운 일 등 다양한 일들을 겪으시며 이 시간까지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흐름은 그 누구도, 어떤 세력도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희랍신화에서 시간이란 머리 뒤가 대머리라고 합니다. 시간은 다가오는 앞머리를 잡을 수 있지 자나간 다음에는 잡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딥니다. 문제는 이 시점에서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또한 붙잡을 수도 없거니와 붙잡는다고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시간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 말씀 가운데서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으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회고하고 반성할 뿐 아니라 다가오는 새로운 한 해를 대비해야 하는지를 살피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시간의 주관자를 의식하라 디모데 후서는 13개 또는 14개의 서신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바울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네로 황제의 핍박하에서 2차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본서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대략 AD 67년 경이 되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당부하는 서신을 써서 보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는 표현은 자기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내면서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직감하며 유언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디모데후서입니다. 이렇게 시간이란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며,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다가오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시간이고 때입니다. 문제는 이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시간과 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전 3:1-8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제 죽을 때가 가까이 왔음을 직면하고 디모데에게 이 서신으로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또 한해가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나의 생을 꼼꼼하게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지난 시간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살아왔는지 깊이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고 겪은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과연 내게 주어진 그 소중한 시간을 허락해 주신 주관자의 뜻과 바램에 얼마나 부합하며 살아왔는지요? 자신을 깊이 되돌아보시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2. 직무에 최선을 다하라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난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자신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선한 싸움을 싸웠고 자신에게 주어진 경주를 끝까지 완주했으며 그 경주를 믿음을 변절하지 않고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그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었고 또한 싸움의 대상이 누구였으며, 그 싸움에서 승리한 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울이란 “여호와께 간구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바울의 뜻은 “작은 자”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여행 가던 중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사실을 세 번 기록되어 있음을 봅니다(행 9:1-9; 22:4-16; 26:9-17). 그 이후 그는 주님의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행 9:15)에 순종하여 자신의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롬 11:13; 갈 2:8) 한평생 자신의 사명에 충성하였습니다(딤후 4:7). * 행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 롬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 갈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 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그가 대적한 대상들은 율법주의적 유대인들과 이교도들과 당시에 유행하였던 다양한 헬라 사상들과 영지주의와 같은 이교 사상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각종 이단 사설들이 유행병처럼 돌고 있습니다. 사리사욕에 빠진 스승을 따라다니며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각종 이단 사설이 난분분합니다. 쓸데없는 세속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시간을 허비하며 보냅니다. 지난날의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거짓이 참의 옷을 입고 약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꾀이고 있는 이 세태 속에 하염없이 정신이 팔려 허송세월하고 말았습니다. 이 송년의 시점에 이러한 점을 점검하고 다시금 추슬러 새롭게 출발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흐름과 현상을 잘 살펴 과연 내가 먼저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즉 영적 점검과 함께 재무장하여 새해를 맞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확신을 갖고 소망하라 사도 바울은 8절에서 확신 가운데 임종을 앞둔 자로서의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하여 지난 일 년을 살아오셨습니까? 그저 먹고 살기 위하여 동분서주(東奔西走)하셨습니까? 성도 모두는 장차 하나님 앞에 설 그날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 날의 평가가 최종적인 것임을 인식하고 세상의 풍습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부르신 분의 뜻을 따라 날마다 확인하며 그 뜻에 맞는 일들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긴장감과 목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사역에 충성했습니다. 그의 충성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 고백하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고후 11:23-28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정말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신실한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최선의 사역에 투신한 종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사역 비결을 밝히고 있습니다. * 빌 4:12-13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교회를 염려하는 일에 얼마나 상심해 하며 헌신했는지요? 저희도 숱한 시간 염려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주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요 긍휼을 베풀어 주신 사랑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의 전적인 헌신은 당시 교회의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로부터 인정받고 대접받기 위한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이름을 높이 드러내기 위한 자기의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대한 것은 바로 구원을 완성하시어 교회의 주인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며 칭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이 소망을 확신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질 “의의 면류관(딤후 4:8a)”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주어진 사명에 한평생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얻고 평가받을 것을 기대하고 한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대하고 소망한 것은 장차 임하실 주 예수께서 수여하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이 면류관은 “죽도록 헌신한 사역자에게 주어질” 뿐입니다. 그는 이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사역한 것을 말합니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께서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요계 2:10 a, c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 교회가 성도도 많지 않고 건물도 없어서 빌어 사용하는 상황이지만, 저희는 지난 26년 동안 한결같이 믿음을 잃지 않고 성도와 교회를 염려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 아래서 복음 전파 사역에 힘써 왔습니다. 특히 지난 5년 동안 교회 Web-site를 방문한 분들이 53만 8천 3백 명이나 됩니다. 매 주일 전한 설교 말씀은 매주 30여 개가 CD로 녹음돼 배포되고 있고 그동안 6집에 이르는 설교집도 500여 권이 배포되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발간한 설교집을 읽어 본 어느 한 성도를 만나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일 수는 있겠지만, “이런 말씀으로 교육받고 있는 둘로스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좋으시겠느냐고 하면서 정말 성숙한 성도들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말씀을 사모하고 교회를 염려하며 자신의 영적 성장과 성숙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둘로스교회는 섬겨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장차 자신이 받을 의의 면류관이 자기에게만 주어질 것이라고 자랑하지 않고 있음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8b 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말씀과 같이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성도가 충성스럽게 말씀에 순종하면 그에게도 역시 사도 바울에게 주어질 의의 면류관이 수여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 또한 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십니까? 이 진리가 우리의 소망이고 희망이고 믿음입니까? 사도 바울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한평생 충성스러운 성도의 길을 갔다면 우리 역시 그런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장차 앞으로 겪게 될 영적 현장을 이제까지 보다도 더 열악하고 혼란스럽고 힘들지 모릅니다. 작년보다 내년이 더 힘든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스스로 격려하며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할 것을 다짐했듯이, 우리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확신하고, 내년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요구하셨습니다. *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결론 이제 내일이 지나면, 365년이란 시간이 다 지나갑니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들 이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만 하지 맙시다. 그러나 실수와 실패를 잊지 말고 주의 은혜를 기억하고 더욱 불발하여 그날에 주어질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보고 다가오는 새해의 시간을 최선을 다하여 충성합시다. 바라기는 모두가 주님 앞에 설 그날을 의식하며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셔서 새해 하루하루를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잊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주인 되신 주께서 다음과 같이 칭찬하시며 영광스러운 구원에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아멘
가정을 행복하게 /잠15:13-24/ 이상호목사 2016-12-20 11:13:47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교회 표어 두 번째 '가정을 행복하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가정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을 소유와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즉 소유가 행복과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유를 통하여 잠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
가정을 행복하게 /잠15:13-24/ 이상호목사 2016-12-20 11:13:47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교회 표어 두 번째 '가정을 행복하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가정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을 소유와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즉 소유가 행복과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유를 통하여 잠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행복을 주는 요소는 아닙니다. 어떤 이는 무소유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 버리고 산으로 들어갑니다. 수행과 득도함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전 공학 자들은 또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사람에게는 행복을 느끼는 뇌가 있어 그것을 조작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약물로 행복해지기 원합니다. 그래서 마약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정의 참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가정이 행복해 지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 16절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소유나, 외적인 그 무엇에 있지 않고 오직 이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행복의 첩경입니다. 잠언에서 많이 말씀하고 있는데 지혜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어디서 옵니까? 잠9: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이십니다. 또 건강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건강이 누구로부터 옵니까? 잠10:2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고 했으니 건강하여 장수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니 하나님이 행복의 첩경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자녀가 잘 되는 것이 부모의 행복이요,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누가 줍니까? 잠14:26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고 하셨으니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이들은 물질과 은사와 풍성함이 가정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어디로 옵니까? 약1:17절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하셨으니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추구합니다. 사실 돈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편리합니다. 그러나 꼭 행복과 정비례하지는 않습니다. 설사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라고 할지라도 그 물질을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잠19:2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으니 여호와 경외하는 것이 재물을 얻는 비결입니다. 잠22:4절에서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최대의 불행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신학자 <폴 틸리히>는 현대인은 세 가지로 인하여 불안하고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교통사고나 병, 재난,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서 죽음을 당하므로 이로 인해서 불행해지고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인생의 허무감입니다. 무엇을 이루어 놓으면 허무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명예나 권력, 혹은 어떠한 목표를 이루어 놓으면 사람들은 만족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허탈감과 허무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살기가 어려운 나라에서 자살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없이 풍요를 누리는 나라에서 자살율이 높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목표가 없으니 의욕이 있을 수 없고, 의욕이 없으니 권태와 허무와 허탈감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낙엽 떨어져 뒹구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무상함을 느끼고, 그래서 허무하고 허전하여 옷을 입어도 어딘가 모르게 허전함이 엄습하는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낙엽은 떨어지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곧 꽃피고 새우는 새봄이 되면 다시 예쁜 싹이 돋아 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인생의 허무감이 행복을 빼앗아 가고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죄책감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와 회개하고 자백하기만 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워 주시고, 또 인정도 하시지 않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다윗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롬4:6-8절에 말씀하였습니다. 때문에 폴 틸리히가 걱정하는 현대인들의 불안과 불행은 우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행복은 만들어진 완제품도 아니고, 유산도 아니고, 은사도 아니며, 더구나 운명도 아닙니다. 행복한 가정은 세워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함이 충만하기만 하면 행복한 사람이 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환경을 보고 낙심하지 마시고, 불행한 환경을 운명으로 돌리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D, 큐랜(Curran)은 건강한 가정의 특징을 연구하기 위해서 500여명의 전문가들(학교장, 교도교사, 일반교사, 교회목사, 교육담당 전도사, 소아과의사, 가정의사, 정신과의사, 사회사업가, 간호사, 가족상담 및 가족치료사, 자원봉사단체 지도자)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응답한 건강한 가정의 특징을 요약하면 10가지입니다. 1)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공통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는 가정, 2)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자발적이고 진솔하게 대화하는 가정, 3)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가정, 4)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가질 줄 아는 가정, 5)가족 구성원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가정, 6)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점을 존중하고 개성을 인정해 주는 가정, 7)가족 구성원들이 동일한 전통과 풍습을 공유하고 긴밀한 유대감을 유지하는 가정, 8)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웃과 인류에 대한 봉사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가정, 9)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공동책임을 자각하고 감당하는 가정, 10)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문제를 인정하고 도움을 청할 만큼 열린 가정이 건강한 가정의 특징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행복한 가정의 첫 번째 순서는 바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즉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의 요소와 상관없는 삶을 살기에 남다른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2. 마음에 즐거움이 있는 가정 13절, 15절입니다.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즐거우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생각과 근거에 차이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락을 함으로 즐거움을 누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미 우리는 기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근심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었습니다. 인간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무엇을 소유해서 기쁨을 얻는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이 계시고, 그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요16:22) 다윗의 고백이 하나님을 자기 옆에 모시고 살 때 참으로 기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6:8-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니 마음도 기쁘고 영혼도 기쁘고 육체도 편안하다고 했으니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을 모실 때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관계로 인해서 마음의 기쁨을 빼앗기고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받고 기쁨을 빼앗긴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하고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해야 합니다. 경제적 문제로 마음의 기쁨을 빼앗기고 사는 가정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돈을 잃는다고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잃고 신앙을 회복하고! 잃었던 하나님을 더욱 붙잡게 되었다면 그 잃은 돈은 나의 은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빼앗기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우리 믿음의 가정 식구들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까? 물질의 풍요도, 자녀들의 출세도, 가문의 명예도 아닙니다. 성경을 몇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는 합3:17-18절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둘째는 기도 응답으로 기뻐하여야 합니다. 요16: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도하여 응답받은 한나는 노래하기를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2:1). 에9:22절에 에스더는 기도가 응답될 때에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기뻐하여야 합니다. 시19:8에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좀 특별한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입니다.(요16:22) 전에 사도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행13:52) 행5:41절에는 사도들이 예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자유 하는 자들에게 권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곤욕스러운 채찍이 우리 속에 있는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이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하였습니다.(고후8:1-2) 이 즐거움과 기쁨을 회복하시고 유지하시고 빼앗기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3. 가장 가까운 식구들끼리 더욱 사랑하는 가정(:17) 17절입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가정 공동체는 남남이 모여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있는 대로! 생긴 대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내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잖습니까?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생긴 대로 할 수 있는 것만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연장자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동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어린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 보다 낫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 무엇이 최대의 이단이냐? 최대의 이단은 교의상의 이단이 아니라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이단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른 집을 부러워 할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무식하여도 내 아버지 내 어머니요,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내 아들 내 딸입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내 사위이고, 내 며느리입니다. 아무리 형편없이 가난하여도 내 남편이고 아무리 못생겼어도 내 아내입니다. 내가 어려움 당하고 내가 고난에 처하면 이웃집 그 누가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내 식구요, 내 가족입니다. 가족끼리 먼저 사랑하여야 합니다. 성경도 말씀하기를 모든 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식구들에게 이 선을 행하되 먼저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 했으니 성도들이 먼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1)마땅히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삿16:15, 삼상18:1)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라고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생명같이 사랑했는데 이때 그들의 마음과 마음이 연락되었다고 했습니다. 2)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여야 합니다.(창29:20, 34:19 살전1:3) 야곱이 라헬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라헬을 위하여 수고하는 칠 년을 수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창 29:20) 3)목숨까지 주어야 합니다.(살전2:8, 요15:13, 갈2:20) 사랑하면 목숨까지 줄 수 있게 됩니다.(살전 2:8) 주님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15:13) 9일 동안 천국 만들기 어느 날, 한 부인이 가정생활을 비관하며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나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정말 힘들어요.” 그때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을 이해한다. 이제 소원을 들어줄 텐데 그 전에 몇 가지 내 말대로 해보겠니?" 그 부인이 “예!” 하자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얘야! 집안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 마지막 정리를 잘 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청소 좀 할래?”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3일 후, 하나님이 다시 와서 말했습니다.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네가 죽은 후 애들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3일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어볼래?”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애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마지막 부탁 하나 하자!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3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줘 봐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그녀는 3일 동안 최대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천국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그때 부인이 말했습니다.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서 천국을 만들어가며 살아볼래요!” ‘9일 동안 천국 만들기’의 기적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희생의 길은 행복으로 가는 밝은 길입니다. 희생의 짐을 지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나 너를 위해 모든 것을 걸 때, 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겁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삽니다. 더 나아가 죽이고자 하면 죽고, 살리고자 하면 삽니다. 이 역설의 진리를 잘 소화하는 소화력이 있을 때 행복의 키가 부쩍 자라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우리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충심으로 경외하고 주님이 주신 기쁨을 잃지 마시고 오직 무조건 사랑하셔서 가정을 행복하게 이루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자 /고후7:1-/ 박봉수 목사 2016-02-01 15:33:22 read : 8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조선왕조의 시작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세 곶 됴코 여름 하나니” 풀이해 보면 이런 말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 이제 막 개국한 조선왕조가 뿌리 깊은 나무가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열매도 풍성이 맺는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자 /고후7:1-/ 박봉수 목사 2016-02-01 15:33:22 read : 8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조선왕조의 시작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세 곶 됴코 여름 하나니” 풀이해 보면 이런 말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 이제 막 개국한 조선왕조가 뿌리 깊은 나무가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열매도 풍성이 맺는 것처럼 창대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뿌리가 깊은 나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당시 막 개국한 조선의 사상적이고 정신적 상황을 암시해 줍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창건된 조선은 개국 초기 정통성의 시비 때문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든든히 세워주고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어줄 사상적이고 정신적인 뿌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속히 이 뿌리가 깊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이 어서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신앙적이고 신학사상적인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패역한 세상 속에서 그리고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흔들림 없이 든든히 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부흥을 이어가며 더욱 번성하여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뿌리를 찾고, 그 뿌리를 잘 보존하며, 나아가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 교회의 뿌리는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주후 11세기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서방교회는 주후 16세기에 종교개혁으로 로마 천주교회와 개신교로 나뉘었습니다. 이 때 개신교는 로마 천주교회를 개혁하는 형태에 따라 다양한 분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심이 되는 분파가 둘입니다. 하나는 루터교회입니다. 루터가 중심이 돼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여 독일과 북유럽 중심으로 뻗어나간 교회를 말합니다. 이 루터교회는 로마 천주교의 잘못된 신학사상을 철저하게 개혁을 했지만 예배 의식은 대체로 계승했습니다. 둘은 개혁교회입니다. 요한 깔뱅이 중심이 돼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여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운동으로 발전해 나간 교회를 말합니다. 이 개혁교회는 로마 천주교의 신학사상은 물론이고, 예배 의식까지도 철저하게 개혁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교회는 교회정치의 형태까지도 철저하게 개혁했습니다. 당시 로마 천주교의 교황 중심의 감독제를 과감하게 철폐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성경에 나타나는 장로제도를 기초로 하여 장로회 중심의 정치제도를 도입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장로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같은 교회를 말합니다. 신학사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개혁교회라고 하고, 정치형태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장로교회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교단 소속의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교회의 뿌리는 멀리는 초대교회에 있고, 가까이에는 이 개혁교회(Reformed Church) 또는 장로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뿌리가 깊은 교회가 되려면 우리의 뿌리를 정확히 알고 그 뿌리를 보다 튼튼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장로교회가 정치형태로는 그 뿌리인 장로회를 유지하고 있지만, 신학 사상적으로는 그 뿌리인 개혁교회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신학 사상이 순복음 교회인지, 감리교회, 침례교회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단 사상까지 유입되어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장로교회는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뿌리 깊은 교회가 되려면 정치형태로서 장로회를 잘 유지할 뿐 아니라 신학사상적으로 개혁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그 뿌리를 굳게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즉 더욱 철저하게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의 뿌리인 개혁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 핵심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절대 주권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회의 신학사상의 핵심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있습니다. 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도텔레스의 철학사상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삶은 존재의 원리인 신을 탐구하는 삶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각색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은 하나님을 탐구하는 삶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가장 이상적인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태도는 자칫 인본주의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이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주체요 하나님은 객체가 될 수 있습니다. 개혁신앙은 이 점을 철저하게 개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은 단지 하나님을 명상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그 절대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신본주의적 신앙인 것입니다. 신 11:8-12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네가 들어가서 차지하려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모세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가나안 땅은 애굽에서 저들이 농사짓던 땅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저들이 농사를 지을 때 물이 풍부한 나일 강에서 물을 끌어들일 수 있었지만, 저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는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의지해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애굽보다 가나안 땅에 더 좋은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나안 땅은 1년에 두 차례 비다운 비가 내립니다. 하나는 우기가 시작되며 내리는 이른 비이고, 다른 하나는 우기가 끝나가며 내리는 늦은 비입니다. 가나안 땅의 흙은 석회질이 많아서 가물면 땅이 시멘트처럼 굳어집니다. 그래서 이른 비가 내려 굳어진 땅이 부드러워져야 농부들이 밭을 기경해서 씨를 뿌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하기 전 늦은 비가 와서 곡식들이 열매를 잘 맺어야 거둘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농사를 지으며 늘 하늘을 우러러보게 됩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밭에 씨를 뿌리며 뜨거운 마음으로 이른 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가을에 추수를 한 뒤에 뜨거운 마음으로 늦은 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나안 땅은 늘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땅입니다. 하나님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땅입니다. 그래서 신본주의적 관점에서 이 땅이 가나안 복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 땅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가나안 땅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사는 땅이어야 합니다. 반대로 애굽이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뜻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땅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땅에서 탈출해 나와야 합니다. 바로 출애굽해야 합니다. 2. 성경 중심의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회는 성경보다 교회의 전통과 교황의 가르침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위배되는 면죄부를 만들어 판매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게 된 배경은 교회가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헌금을 받아들여 교회의 필요를 채우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니냐는 실용주의적 발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리게 됐고, 그 결정이 권위를 가지고 집행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실용주의적 발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이 선하지 않더라도 눈 감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발상이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개혁신앙은 이 점을 단호하게 개혁해 갔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든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성경 외에 권위 있게 세워져있던 판단 기준들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목적과 과정 모두 성경의 권위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철저하게 강조했습니다. 육상이나 수영 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지켜야 할 자기 레인이 있습니다. 선수가 아무리 잘 뛰어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해도 그 레인을 이탈했다면 바로 실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경주를 할 때도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레인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말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단이나 방법이야 어떻든지 결과만 좋으면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개혁신앙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입니다. 결과도 성경대로여야 하고, 방법도 성경대로 여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사우스다코다 주의 러시모어에는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 중 네 사람의 얼굴이 조각되어있습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그리고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입니다. 그런데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성경을 사랑했고, 성경대로 살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워싱턴은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올바로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습니다. 이것이 미국 대통령 선서의 전통이 됐습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면서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 있다”라고 한 바가 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통해 지혜를 터득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중 가장 귀한 것은 성경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인생을 참되게 살기 원한다면 그에게 성경을 주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혁신앙은 이처럼 성경을 귀중히 여기고 성경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성경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3.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의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의 영적 지도하에 살아가는 신자들은 개인적 경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제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 역시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경건한 신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더 이상 경건한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라틴어로 코람 오미네(Coram homine)라고 합니다. “코람”이라는 말은 전치사로 “앞에서”라는 뜻이고, “오미네”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과 삶이 철저하게 분리되어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잠깐 동안 그리고 기도하는 잠깐 동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만 상대하며 살아갑니다. 개혁신앙은 이점을 단호하게 개혁해 갑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칭찬받을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합니다. 역시 “코람”이라는 말은 “앞에서”라는 전치사입니다. 그리고 “데오”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예배드릴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늘 하나님을 상대하며 살아갑니다.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눈동자처럼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가까운 친구 목사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중견교회가 되었습니다만 그 교회 개척 때 이야기입니다. 상가를 얻어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 간판을 걸고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개척 예배 때는 가까운 친지들과 전에 사역하던 교회 교우들이 참여해서 100여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개척 후 첫 예배를 드렸는데 자기 가족들하고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 포함해서 7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아무도 없고 자기하고 아내 둘이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배 인도하고 아내가 반주하고 새벽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중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 낙심이 돼서 그 다음날부터는 예배 인도하지 않고 단에 오르지 않고 그냥 기도만 했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성령께서 그 마음에 강하게 책망을 하시더랍니다. “새벽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회중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정식으로 인도하라”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회중이 아무도 없더라도 정성껏 설교 준비를 해서 설교도 하고 순서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3일째 되던 날 지나 가던 교인이 들어오더랍니다. 이사 온 사람인데 새벽 기도할 교회를 찾다가 교회에 불이 켜지고 찬송소리가 들려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더욱 정성을 다해서 말씀도 전하고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분이 그날부터 빠지지 않고 새벽에 나오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좋다고 전도해서 새벽기도가 부흥되기 시작했답니다. 이 목사님이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회는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사람을 보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보고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코람데오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코람데오의 신앙이 우리 개혁신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493주년 종교개혁개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부패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고 새롭게 신앙의 기치를 들었던 날을 기념해서 지키는 날입니다. 특히 우리는 개혁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개혁신앙이란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신앙, 성경중심의 신앙, 그리고 코람데오의 신앙을 핵심으로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 신앙의 뿌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이 개혁신앙을 떠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철저하게 돌아서서 이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군대 귀신들린 사람 /눅8:26-30, 눅8:38-39/ 이동원목사 2014-12-04 15:55:57 read : 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77년 미국 오히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3명의 여성에 대한 납치와 강간으로 체포된 빌리 밀리건(Billy Milliga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의외로 무죄판결을 받고 대신 정신 병원에 수감됩니다. 그가 진단받은 병명은 ‘다중 인격 장애’(multiple
군대 귀신들린 사람 /눅8:26-30, 눅8:38-39/ 이동원목사 2014-12-04 15:55:57 read : 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77년 미국 오히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3명의 여성에 대한 납치와 강간으로 체포된 빌리 밀리건(Billy Milliga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의외로 무죄판결을 받고 대신 정신 병원에 수감됩니다. 그가 진단받은 병명은 ‘다중 인격 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였습니다. 다중 인격 장애는 한마디로 한 사람 안에 여러 인격들이 존재하면서 행동을 지배하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스토리는 ‘빌리 밀리건-스물 네 개의 인격을 가진 사나이’ 라는 책으로 소설화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의 담당자인 변호사는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 빌리가 다중인격임을 확신하게 되어 그를 변호하게 됩니다. 변호사는 검사 앞에서 빌리의 다중 인격이 나타나는 모습을 재현하는데 성공합니다. 빌리의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인격은 나중에 무려 24명으로 밝혀지지만 재판당시에는 10명 정도가 중심인물들로 부각됩니다. ‘빌리’는 핵심인격으로 자신이 다중인격임을 알고 괴로워하면서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레이건’이란 이름의 인격은 거칠고 폭력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앨런’은 사기꾼으로 탁월한 말솜씨로 타인들과의 협상을 담당합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강간사실을 부정하다가 나중에 ‘에이들라나’가 등장하여 강간 범행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선생’이라는 인격이 등장하여 다른 여러 인격들을 통합하는 조정 기능을 담당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다중인격은 일종의 방어기제로 예를 들어 어렸을 때 경험한 학대나 외로움, 혹은 성폭행 같은 상처로 시작되는데 이런 충격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을 때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안에서 여러 다양한 인격들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 소개된 주인공이 바로 이런 다중인격 장애인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유사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갈릴리 바다 맞은편 거라사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주인공은 본래 도시에 살던 사람이었는데 그의 질병으로 인해서 집을 떠나 무덤사이를 방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도시 문명의 전형적인 피해자일 가능성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요르단 성지순례에서 거라사를 다녀오며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이미 예수님 당시에 거라사(제라쉬, 움께이스)는 거대한 문명을 자랑하던 도시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본문의 주인공을 진단하며 그가 군대 귀신들에 의해 즉 많은 귀신들이 그안에 거하며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심리학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정신적 상처가 깊어가는 도시의 현대인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늘 날 이런 다중인격적 장애증상들을 보이며 방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런 사람들에게도 치유의 희망이 있을까요? 물론 그 희망은 예수뿐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이 병든 사람을 치유하시는 그 변화의 과정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신의 정직한 상태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모든 치유는 직면에서 시작됩니다. 자기의 문제를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면하는 사람은 모두 어느 정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중인격 장애를 위시해서 대부분의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자기가 병자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을 앓는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알콜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 성 중독자가 자신을 중독자라고 인정하시는 것을 본적이 있으십니까? 인정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을 만나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이 질문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질문을 하십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그의 이름을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그는 이 질문을 통해서 그가 자신을 직면하도록 자기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30절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그는 스스로를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하나가 아닌 여러 존재들이 군대처럼 자기 안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의 자가 진단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경험하는 상태를 적어도 그는 진실하게 묘사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치유의 시작이며 치유의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명함에 적혀 있거나 주민 등록에 적혀 있는 이름 말고 당신의 깊은 내면에서 소리치고 있는 당신의 진정한 이름들은 무엇입니까? 요한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묘사한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우리들의 인생 구도여정에서 만나는 이웃들의 이름이 아닌 우리 자신들의 이름들이 아닌가요? 크리스챤씨, 전도자씨, 고집쟁이, 온순씨, 선의씨, 자만씨, 악의씨, 적의씨, 무자비씨, 겁쟁이, 회의씨, 허례씨, 위선씨, 질투씨, 아첨씨, 경멸씨, 믿음씨, 수다쟁이, 허영씨, 절망씨, 심약씨, 두려움씨, 무지씨, 구두쇠, 소망씨--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당신의 이름은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중인격 장애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내 이름도 혹시 군대가 아닌가요? 치유를 원하신다면 이제라도 자신의 정직한 상태를 직면하십시오. 예수님의 치유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습니까? 2. 치유의 주이신 예수의 발치에 앉히십니다. 본문을 읽어 내려가며 감사하고 또 감사한 것은 예수께서 이 사람을 마침내 예수의 발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눅8:35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물론 본문의 상황은 그가 치유된 직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그가 치유되기 전에도 본문 28절에 보면 그는 예수를 보고 그 앞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 앞에 엎드렸고 그리고 마침내 예수의 발치에 앉히신바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요 축복입니까?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2-3주후엔 이웃 사랑 축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 우리의 VIP들에게 베풀어야 할 도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하여 예수 앞에 엎드리게 하고 마침내 그들로 예수의 발치에 앉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치유를 경험할 것입니다. 온전해 질 것입니다.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순순히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할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군대 귀신 들린 이 사람도 처음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와 나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내 인생에서 나를 귀찮게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의 발치에 앉아 주를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를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 없이 살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새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리, 가장 편안한 자리를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의 발치아래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치아래 앉아 세상 모든 것을 얻은 행복한 자였습니다. 이번 이웃 사랑축제에 이런 행복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VIP들을 치유의 주님이신 예수의 발치아래 앉도록 인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3. 집으로 돌아가 예수를 전파하게 하십니다. 이제 이런 놀라운 치유, 행복한 치유를 경험한 이 사람에게 주께서 명하신 마지막 부탁은 무엇이었는가를 주목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자기를 변화시켜준 예수님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38절입니다.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다음절 3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나 홀로만의 신앙이 아닙니다. 나 홀로 치유받고--나 홀로 구원받고--나 홀로 은혜받고--나 홀로 행복해지고의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경험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 이웃들과 이 은혜를, 이 행복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네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이 기쁜 소식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39절의 하반절입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이 군대 귀신 들렸던 자가 마침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 군대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왜 주께서는 기적을 체험한 그에게 주님을 따라오기보다 먼저 자기 집, 자기 마을로 가서 전도하기를 요구하셨을까요? 그것이 바로 그에 대한 주님의 기대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우선순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전도의 명에 순종해본 일이 없는 성도들이 계시다면 지난 달의 추천도서 ‘진돗개 전도왕’을 꼭 읽어 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은지 얼마 안되는 저자 박병선 집사님은 믿은 첫해에 무려 750명을 주께로 인도합니다. 그냥 전도만 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정착시킨 것입니다. 그 비결은 진돗개처럼 전도하는 것입니다. 한번 물면 결코 놓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물고 흔드는 것입니다. 교회 나가 예수 믿겠다고 상대방이 고백하게 될 때까지 계속 그에게 전하고 또 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전도가 주의 가장 중요한 명이기 때문에 주의 일에 충성하면 주께서 내 모든 일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으로 전도의 명에 순종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분은 본래 전남 순천시청에서 26년간을 근무한 공무원이었는데 그가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되어 명예퇴직하고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한참 믿음이 뜨거운 시절이어서 나름대로 원칙을 정하고 선거에 나섰는데 그 원칙은 “전도는 내가 선거운동은 하나님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전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면 “한표 부탁합니다가 아니라 예수 믿읍시다”였다고 합니다. 선거 사무실에서는 “선거 운동은 안하고 전도만 할거냐” “전도는 시의원 당선되고 난 후에 해도 되지 않느냐” “정말 하나님이 선거운동을 해주시겠느냐” “하나님만 너무 믿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지 모르겠다”등등의 우려가 많았지만 그는 전도에만 열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2002년 6.13 지방선거의 결과는 전남 최다 득표 당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시의원이 된 후 다시 동료 시의원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하여 22명중 20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순천시 복음화에 앞장서는 시의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책 머리말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세상적인 여러 가지 일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취미 생활이라고도 할수 있겠지요. 처음에 사진 촬영, 그 다음엔 수석, 그러다가 어느 날 진돗개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진돗개는 어느 개보다도 영리하여 충성심이 강한 개입니다. 얼마나 진돗개를 좋아하고 사랑했던지 진돗개를 훈련시키는 1급 훈련사 자격증을 소유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MBC특집 ‘진돗개 사랑’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저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돌리게 하셨습니다. 저는 식당이든 길거리든 그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찾아가서 전도했습니다. 한번 만나서 안 되면 두 번,세 번, 아니 어떤 경우에는 한달이고 두 달이고 찾아다니면서 전도하여 끝내 그 영혼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드디어 진돗개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 마치 본문에 군대 귀신 들린 자가 이제는 복음의 군병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변신이 갈망되지 않으시나요? 언제 까지 군대의 영들에 매여 노예 된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를 얻으실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서 나아가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실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언제까지 내 문제에만 빠져 사시겠습니까? 이젠 이웃들을 구원하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라! /롬6:1-4/ 이삼규 목사 2017-06-14 06:59:19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4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라! /롬6:1-4/ 이삼규 목사 2017-06-14 06:59:19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오늘 봉독해 올린 말씀 가운데 3절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해드리겠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꿈에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정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에 들어온 사람들 중 감리교인은 몇 명이나 됩니까?” 천사는 천국에 들어온 사람들의 명부를 한참 뒤진 후에 말했습니다. “감리교인은 한 명도 없군요.” 웨슬레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장로교인은 몇 명이나 왔나요?” 그러자 천사가 또 장부를 훑어보더니 “장로교인도 없군요.” 웨슬레는 매우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천사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국에 온 사람은 누구란 말입니까?” 천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천국에 온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로마서는 논쟁적인 글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성도가 품었을 법한 의문들을 가져와 독백 적으로 문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질문은 3:8절에 나옵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라는 질문과 유사합니다. 여기에서는 “은혜가 더욱 임하게 하도록 죄악을 더욱 행해야 하지 않겠느냐?”(사역)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질문은 5장의 논의를 훌륭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의 능력에 대해서 세세하게 논증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은혜가 더 강하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범죄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질문을 통해서 사도는, 그럼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방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행할 것인가?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 이야기는 심리적으로는 방종의 가능성까지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사랑엔 언제나 이러한 허점이 있고 맹점이 있습니다. 우리도 늘 경험하는 바이지만 사랑에는 사랑대로 반드시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면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사랑처럼 애매하고 무력하고 맹랑한 일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용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계속 용서하게 되면 무질서를 낳는 것 같고, 죄도 묵인하면 범죄를 가능케 하는 것을 측면에서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죄를 지으면 당장 심판하고 꼬집고 바로, 비판을 해야지 용서하면 더 많은 죄를 범하게 하는 결과가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즉, 관용은 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은혜를 믿어서 더 죄짓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믿고 더 방종하며,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더하는 것이 아냐 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우리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즉,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무슨 뜻입니까? ‘죽음’이란 ‘ajpoqnhvskw( 아포쓰네스코)’ ‘죽다, 죽음에 직면하다, 죽기 마련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들이 누구와 불화할 때 “내가 죽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정신적으로 한 번 더 죽으면 됩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불만이 있고 원망이 있는 것은 살아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전에 제가 성도님들 초상 치를 때 염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돌아가신 분들은 아무 말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도 말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원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면 원망이 없습니다. 사랑 앞에 모든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참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집이 센 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한 번만 물러나고 한 번만 죽어보면 자신이 생깁니다. 죽고 보면 죄에 대한 매력을 잃게 됩니다. 죄에 대해 완전히 죽었다는 뜻입니다. 죽어지내면 죄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죄가 죽은 자를 다스리지 않습니다. 사탄도 시체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귀도 죽은 자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살아서 움직이고 교만해야 마귀가 가까이 갑니다. 어느 면으로든지 살아 있으면 마귀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죽음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성격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 죽음을 말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죽음을 간혹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극기를 통해서 나를 이기는 것, 혹은 망각 상태, 잃어버린 상태, 그리고 강한 절제로써 힘든 고행 생활 등을 가리켜 죽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혼자 고행하며 혼자 죽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세례로 설명합니다. 세례는 왜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이유를 그 속에 담고 있습니다. 세례라는 말은 ‘baptivzw(밥티조) ’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세례(침례)를 베풀다/ baptize’입니다. 동사 밥티조는 밥토(bavptw, 잠그다, 물들이다)의 강의형으로 (a) '담그다' (b) (사람을 물에 빠뜨리거나 배를 침몰시킴으로) '멸망시키다'를 뜻합니다. 침례교 같은 곳에서는 세례탕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침례를 베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요단강에서 해야 된다고 요단 강 물을 직접 가져와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세례의 뜻, 즉 잠근다는 것은 물속에 완전히 잠기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물속에서 죽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가 죄의 나라에서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서 죄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죄 안에서 행한다면 이 모든 것이 무익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돌아다니는 유령처럼 이미 죽었던 데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났기’(7절)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죄의 지배와 통치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풀려나온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는 어리석음은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것입니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세례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약속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에 부응하지 않고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죽여야 합니까?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두 가지 의미에서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을 죽이고 또 죄로 향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옛사람 혹은, 예수 없는 사람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옛사람을 죽여야 하며, 또한 죄 된 나(즉, 죄에 대하여 매력을 지니고 있는 나)를 죽여야 합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에 죽은 자는 욕심이 없습니다. 세상적 욕심이 있을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죽는 모습을 세례라고 말합니다. 결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여자가 결혼하면 ‘출가외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결혼한 후에 친정에 자주 내왕하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혼해 살면서 친정생각을 많이 하면 결혼 생활에 지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과거를 깨끗이 잊으라는 말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안 됩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도 옛사람이 죽어야 성공합니다. 어떤 분이 어렸을 때 동창 가운데 첫 사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장성하여 서로 잊고 가정을 꾸려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창회에 나갔는데 첫 사랑이 참석하였더랍니다. 그래서 첫 사랑이라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 물으니 결혼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런데 남편은 죽고 이제 혼자 산다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첫 사랑을 잊지 못하고 집에 돌아 와서 아내에게 자기 첫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 여자를 그냥 버려둘 수 없다고 그 첫 사랑에게 가겠다고 하니 여자가 그러면 이혼하자고 해서 이혼을 했답니다. 이분은 서울대학까지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첫 사랑을 잊지 못하고 가정이 깨지고 그렇다고 그 첫 사랑과 잘 되었느냐 하면 그렇게 되지도 못하였답니다. 결혼 생활도 옛사람이 죽어야 편안합니다. 처녀 생활이 죽어야 하고, 친정생활이 죽어야 하며, 이제 신랑과 함께 새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이 결혼식입니다. 옛 말에 오죽하면 그 집의 귀신이 되라고 하였겠습니까? 세례도 이와 같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옛 생활은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뉴질랜드의 원주민 피지족이 있습니다. 그 원주민이 사는 동네 한 가운데는 killing stone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는 우리나라 단두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바위입니다. killing stone은 죽이는 바위로써 아주 무서운 사형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죄가 많은 죄인은 이 큰 바위에 묶어 놓고 머리를 짓눌러서 죽이며 흐르는 피를 닦아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참혹한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죄에 대한 경고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선교사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게 하고 세례를 줄 때, 그 죽이는 바위 앞에서 주었습니다. 그 바위에서 피를 보게 하고 “자, 옛사람은 이렇게 죽습니다.”하며 세례의 의미를 지혜로운 방법으로 인식시켜주었습니다. 이 선교방법이 대표적인 케이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옛사람이 완전히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세례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나는 벌써 죽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벌써 죽은 사람이요, 지금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생이므로 나를 위한 생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처럼 나를 위하여 죽으신 자를 위해 사는 것으로 나는 벌써 죽었습니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에게는 사망이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의 생명력을 지닌 새로운 존재로 살게 됩니다. 부활의 생명력은 단지 먼 미래에 유보된 능력이 아니라, 현재 이 땅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죄의 사망권세를 이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능력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살게 하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육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살게 하고 영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살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자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새 생명을 얻은 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성도에게 귀중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부활의 능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땅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가게 만드는 거룩함의 능력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부패한 인간이 육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사는 비결은 부활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인간을 지배하던 죄의 권세를 꺾으셨으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자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자임을 역설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께 대해 사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부활의 생명을 얻은 자로서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여겨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롬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해서 하나님께 대해 살았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이전과 다른 삶의 방식, 즉 하나님이 주신 영생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여전히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여전히 죽은 자입니다. 죄에 속한 옛사람은 죽고 죄의 권세를 벗어나 새사람으로 거듭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죄와 완전히 결별한 자입니다. 죄를 가까이 하는 자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계속 죄 가운데 살아가려는 자는 자기의 정체성을 잊은 자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성도가 자기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죄의 도구로 사용하는 자가 아니며 의의 도구로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게 성별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은 거룩함의 길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거룩함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신성한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몸이 죄의 지배를 받는 자는 이 같은 신성한 의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성도의 거룩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다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거룩한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깨끗한 교회 /대하34:14-21/막11:15-18/ 이성희목사 2015-01-19 10:08:50 read : 12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브라질 단기 선교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멀고 힘든 길이지만 모두가 기도해 주시는 덕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의료 선교도, 이미용 선교도 효과적이었고 많은 열매가 있을 줄을 믿습니다. 주성염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하여 한인 목회를 하면서 원주민 선교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아주
깨끗한 교회 /대하34:14-21/막11:15-18/ 이성희목사 2015-01-19 10:08:50 read : 12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브라질 단기 선교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멀고 힘든 길이지만 모두가 기도해 주시는 덕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의료 선교도, 이미용 선교도 효과적이었고 많은 열매가 있을 줄을 믿습니다. 주성염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하여 한인 목회를 하면서 원주민 선교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아주 적절한 선교정책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브라질의 공용어인 포르투갈어와 영어와 한국말을 다 잘해서 아주 효율적인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도 우리 연동교회의 교우들을 하나님이 보내시고 우리가 갔을 때에 반갑게 맞아 주시고 환대를 받았습니다. 특히 강성극집사님께서 이민자로서 성공적으로 생활하시고 계셨습니다. 김영철집사님도 아주 사업에 성공하여 잘 지내고 계십니다. 우리 일행을 그 집에까지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교우들에게 문안드려 달라고 하는 부탁도 받았습니다. 선교 일정을 마치고 이과수폭포에 가 보았습니다.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나이아가라폭포에 가 본적이 있습니다만 정말 그들이 말하는대로 불쌍한 나이아가라입니다. 우리가 간 날은 아주 더운 날이었지만 더운 것이 기억이 되지 않을만큼 그 광경이 머리에 꽉 차 있습니다. 이 폭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세 나라의 국경에 인접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여러번 지도가 바뀌다가 파라과이의 것이었지만 브라질과의 전쟁에 패하여 브라질의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이나 파라과이는 자기의 것이었다가 주인이 바뀌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볼 때는 누구의 것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로 말하면 주인은 바뀐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 폭포의 주인이셨습니다. 세계인이 공유하고 함께 즐기고 관리할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회도 사람이 수없이 지나가고,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인인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고 깨끗하심처럼 깨끗해야합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원망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갈등 없는 공동체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회학자 스캇펙은 갈등 없는 공동체는 ‘유사 공동체’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공동체란 갈등이 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극복해 나갑니다. 초대교회는 갈등 때문에 성장한 교회입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초보자들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갈등은 교회의 성장의 요인이었습니다. 갈등을 해결하면 성장했습니다. 갈등은 해결하면 더 이상 갈등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봉헌 때문에, 구제 때문에, 할례 때문에, 지역 때문에 갈등이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성장의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화해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기만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신문사나 전화국은 소식을 받아 전해 주는 곳이지만 교회는 결코 그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단순히 그 말씀 때문에 몰려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세상의 갑남을녀가 모여 전혀 새로운 사회적 완전체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며 역사에 의미를 세우는 일입니다. 갈등이 있고, 불결하고, 문제가 있는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해야 할 일은 교회는 이런 문제를 깨끗케 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깨끗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공히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교회는 신비로우면서도 늘 혼란이 함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를 겸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실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는 공생애 초기에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으로 나와 있고, 그리고 복음서는 공생애 말기에 다시 깨끗케 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두번의 성전 숙정의 사건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이유를 보며 성경을 통하여 우리 교회도 깨끗케 됨을 배워 깨끗한 교회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우리 교회가 깨끗케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깨끗하게 하신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첫째, 상업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성전 내의 상업주의, 물질주의는 주님이 채찍을 드신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까지도 상업주의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장사꾼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성전에 드릴 제물이 성전에서 팔렸습니다. 제사장들이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받았습니다. 이런 당시의 성전을 예수님은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최근에도 상업주의 논리가 교회를 지배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큰 건물과 화려한 장식과 교인의 수가 교회의 판단 기준이 되었습니다. 시장의 논리라고 말하는 자본주의의 법칙이 교회까지도 지배합니다. 자본주의는 다윈이즘을 기초로 하는 정글법칙입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적자생존의 법칙이 교회에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전을 가만히 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에 강도들이 득실거린다는 말입니다. 강도는 힘으로 돈과 목숨을 빼앗는 사람입니다. 힘으로 돈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빼앗는 곳이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내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덕을 보겠다고 교회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됩니다. 항상 내가 손해보고 교회가 덕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도 우리가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43에는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책망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가지고 높은 자리를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함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그 때에 사마리아의 시몬이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8:20에는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지금도 그런 죄, 죄인이 있습니다.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으로 교회를 꾸려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으로 은혜를 조작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때 미국의 텔레비전 선교를 이끌어가던 짐 베이커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PTL이라는 엄청난 그룹을 거느린 PTL 왕국의 총수였습니다. 수억불에 해당되는 재산을 가지고 크리스천 테마파크를 조성하고 회원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사기협의로 구속되어 45년형을 받고 복역중입니다. PTL이란 “Praise the Lord” 즉 “하나님을 찬양하라”라는 말의 약자입니다. “리더십의 그림자”란 책에 보면 이 분은 리더십의 그림자인 어두운 부분을 극복하지 못한 예로 나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지는 어릴 때의 열등의식과 자신의 왜소함 등을 엉뚱한 방향으로 해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인 ‘나는 잘못 살았다’(I was Wrong)이란 책에서 자신이 번영의 신인 금송아지를 숭배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금송아지에게 우리를 인도하라고 하는 광야의 실패는 지금도 교회에 잔재하고 있는 교회의 실패 요인입니다. 면죄부도 상업주의의 한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로마 교회는 성베드로 성당이라는 엄청난 대작을 도모하였습니다. 성베드로 성당을 지을만한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데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면죄부를 팔아서 성당 건축의 재원을 마련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에 앞장선 신부 테젤(Tezel)이 면죄부를 팔러 갔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면죄부를 사면 지난 죄를 다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앞으로 지을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테젤은 “하나를 더 사면 앞으로 지을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테젤이 면죄부를 팔고 로마로 돌아오다가 강도를 만나 돈을 다 털렸습니다. 테젤은 이 돈이 면죄부를 판 돈이라고 하였지만 강도는 그 손을 다 털어갔습니다. “면죄부를 판 돈을 훔쳐가면 지옥의 밑창에 들어간다”하고 테젤이 말하자 강도는 면죄부 두 장을 보이며 “앞으로 지을 죄도 면죄 맏는다고 그러지 않았소”하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런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의 산물이 성베드로 성당입니다. 이런 상업주의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분주함은 물질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도 교회도 분주함은 이제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분주함의 저변에는 물질이라는 맘몬의 신이 있습니다. 물질만능을 반영하는 돈버는 책이 홍수를 이룹니다. “돈버는 법을 한 수 가르쳐 주마”라고 사람들을 꼬입니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어제 뉴스에는 유럽에도 로또 열풍으로 사람들이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테레사수녀가 한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이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참으로 빈곤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물질주의와 상업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둘째, 교권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권리로 성전을 장사하는 자리로 빌려주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의 권리로 이용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타락하고 더러워지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마귀를 보세요. 천하 만국을 다 보이며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니 절하라”고 합니다. 천하 만국이 하나님의 것이며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에게 주인 아닌 마귀가 보이며 주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처럼 위장하고 이용하는 것은 마귀의 짓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교권주의에 빠지게 되면 마귀의 모습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당시 종교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제사장의 직은 세습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일하고 권력 행사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성직자가 안일해지고 권력 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타락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직자의 안일과 권력 행사 그 자체가 타락입니다. 또 여기에 한번 빠지게 되면 그 맛에서 헤어나기 힘들다고 합니다. 구약의 종교개혁이 요시야시대에 일어납니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성전을 깨끗케 하고 그 후로는 성전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요시야 왕의 성전숙정으로 성전에서 쓰레기 밑에 쳐박혀 있는 성경 두루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힐기야 대제사장이 무얼했단 말입니까? 힐기야는 안일한 권력형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대하여 아무 책임감이 없고 자신의 세속적 권리만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속적 권력에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교회의 힘을 세속적 힘과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의 힘은 거룩한 힘입니다. 거룩한 힘은 구별된 힘인 것입니다. 신령하고 거룩한 힘은 세상을 지배하고 야합하는 힘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힘입니다. 예수님도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29에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힘은 세상을 세속적으로 지배하려는 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가지고 세속적 명예나 권력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힘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힘보다 훨씬 더 강해야 하고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대이든 교회가 힘의 상징이 되면 교회가 부패하였습니다. 중세의 교회는 정말 힘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였습니다. 교회의 힘이 가장 강할 때가 교황 이노센트 3세 때일 것입니다. 그는 1198년부터 1216년까지 교황으로 재임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황제를 임명했습니다. 또 영국의 존 왕이 교황청이 임명한 켄터베리 대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4차 십자군을 선포하였습니다. 결국 존 왕이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전체가 교황청의 봉토가 되었고 매년 1천 마르크의 봉토세를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교회의 권력이 결국 종교개혁의 불을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가장 어두운 시대라고 합니다. 이 때는 성직자가 가장 부유한 계급이었습니다. 수도원이 가장 재산을 많이 거느린 기관이었습니다. 돈을 주고 성직을 사는 성직 매매가 성행하였습니다 . 최근 한국 교회의 화두는 기독교 정당 창당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직자 가운데도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정치는 성직자의 몫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직자가 현실 정치에서 잘못되면 교회에 직접적 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당이란 어디까지나 정치적 차원에서 구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적 차원에서 정당이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와 같은 진흙탕에서는 성경적 원리와 신앙적 양심을 지켜가면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교회가 정당을 창당할 것이 아니라 기독 의원들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여 정치가 교회를 이롭게 하고 선교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가짜 박사학위 소동입니다.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이 문제가 고개를 드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정부의 부패방지위원회는 우리 나라의 가짜 박사학위를 뿌리뽑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당자 가운데는 목사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저도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걸 꼭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면 불편할 때가 많아요. 누가 뭘 물어보면 멋지게 대답해도 박사니까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 하면서 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르면 “박사가 그것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사가 인정받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박사학위 없으면서 실력 있는 것이 더 훌륭한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들이 이런 욕심을 가지는데는 성도들의 잘못도 있다고 봅니다. 자기 교회의 목사가 가짜라도 박사학위 하나쯤은 있는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조리한 필요와 충족의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부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교권의 침해라고 봅니다. 이런 데서부터 우리는 자유로와야 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셋째, 혼합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예수님 당시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은 세 번 건축되었습니다. 첫째는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포로민이 귀환할 때에 스룹바벨이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헤롯 성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이 유대인에게 환심 사기 위하여 세워놓은 성전입니다. 제사장들이 그걸 미끼로 성전을 지어주는 것을 묵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를 세워준 것입니다. 이 성전을 완공하기 위하여 제사장들은 헤롯에게 결탁하고 온갖 아양을 다 떨었을 것입니다.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목적이 혼동되고 혼합된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성전을 기뻐하실리가 없습니다. 성전은 혼합되지 않고 깨끗해야 합니다. 신명기 22:9에는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고 합니다. 10절는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라고 합니다. 11절에는 또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왜요? 이렇게 혼합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신을 혼돈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혼합주의를 배격하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집단 무의식과 정서가 상당히 혼합적입니다. 그래서 생활에서 보면 혼돈과 혼합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집단 무의식은 식사문화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밥을 먹을 때도 보면 비빔밥과 국밥이 주류입니다. 비벼먹고 말아먹는 것은 모두 혼합된 음식입니다. 섞어찌개라는 것도 있고 부대찌개라는 것도 있습니다. 아무 것이나 전부 집어 넣어 끓여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콜라와 사이다도 섞어서 마십니다. 그게 맛있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술을 마셔도 섞습니다. 말썽많은 폭탄주를 보니까 위스키와 맥주를 섞어서 마십디다. 그래야 기분좋게 취한다나요. 섞으면 폭탄이 되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내 곤하게 잠이 드셨습니다. 그 때에 심한 바람이 불어 물결이 요동하고 물이 배에 들어와 배가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는 물 위에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불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바람은 언제나 붑니다. 문제는 물이 배 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물은 배 밖에 있어야 하고, 배 밑에 있어야 하는데 배 안에 들어왔기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에 존재합니다. 세상에는 항상 바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세상의 물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을 지배하고 초월하는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혼합되고 심지어 야합하게 되면 교회는 문제가 발생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리 채프먼은 그의 책 ‘하나님이 쓰시는 사랑의 언어’에서 “문화적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들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여깁니다. 겉은 기독교인이지만 속은 세속 문화가 혼란스럽게 혼재해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일반적으로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하지 못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기에 확실하지 못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적 불교 신자나 힌두교도, 유대인, 무슬림이나 다를바가 전혀 없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형편없는 사람들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더럽고 어지러운 교회도 깨끗하게 하십니다. 교회를 보면 비판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합니다. 깨끗지 못한 부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들은 나 때문에 더러워진 부분입니다. 교회가 고쳐야 할 부분은 알고 보면 내가 고쳐야 할 부분들입니다. 내가 고쳐지면 교회가 절로 깨끗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최근 어느 책에서 희망적 글을 읽었습니다. 윌리엄 헨드릭스의 ‘이탈자 인터뷰’에서 상처 받고 환멸을 느껴 교회를 떠났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영적 성장을 계속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힘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잘 명심해야 합니다.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고독자가 돼야 합니다. 의식 있는 소수가 돼야 합니다. 지배적 양심으로 우뚝 서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교회는 아름다워지고, 깨끗하게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란 거름과 같습니다. 거름은 한 곳에 쌓아두면 이웃에게 악취를 풍깁니다. 그러나 땅에 골고루 뿌리면 세상을 비옥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 때문에 세상이 더러워졌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없다면 이 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깨끗한 교회를 위하여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인 하나님의 집에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특정한 사람의 집이 아니라 만민의 집이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온갖 상인들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전도서 5:1에는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교회가 깨끗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산에서 신을 벗는 모세의 심정으로 우리의 세속적인 더러움을 벗고 교회를 들어옵시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집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나를 정결케 합시다. 깨끗한 하나님의 집에는 깨끗한 사람들이 들어올 자격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깨끗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와 내 집의 멋진 결단 /수24:14-18/ 조봉희 목사 2016-01-09 07:26:25 read : 9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원전 49년 1월 11일, 줄리어스 시이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일단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의 핵심부로 진입하면 돌아올 길이 없다는 것을
나와 내 집의 멋진 결단 /수24:14-18/ 조봉희 목사 2016-01-09 07:26:25 read : 9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원전 49년 1월 11일, 줄리어스 시이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일단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의 핵심부로 진입하면 돌아올 길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남은 길은 로마를 점령하든가, 폼페이우스에게 멸망당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이저는 루비콘을 건너기로 결심한 순간, 그 목표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연한 결심으로 그는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므로 세 마디로 된 유명한 보고를 로마 원로원으로 보냈습니다.『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의 깊은 뜻대로 의연한 결단이 가져온 위대한 승리의 표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의미있는 일을 결단하면 그 입지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 강조하는 동사신앙의 본질은 한번 뜻을 정했으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살기로 결심했으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한길 가는 순례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결심과 입지가 분명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다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형통의 비결입니다.(1:7) 우리 한국교회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 1921년 4월에 그 유명한 오산학교를 마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단하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에 오산학교의 교장선생님이었던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평양 신학교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 당시 예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평양까지 먼 길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는 주기철 목사의 손을 꼭 잡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주군, 꼭 귀담아 듣게. 이것을 내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천만 동포의 생각과 의견이라고 생각해두게나.” 그리고 덧붙입니다. “나는 평생 동안 많은 인재를 봐왔지만 자네 같은 사람은 없었다네. 자네만한 인물이 없었어. 그래 내가 간곡히 부탁하네. 일본에 건너가서 동경고등사범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오산학교를 맡아주게나. 이 나라의 희망이 아닌가.” 사실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일본의 동경에 유학 가는 것이 모두의 꿈이었고 그 중에서도 세계적인 동경사범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최고의 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잠시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음과 같이 의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께 제 몸을 바쳐버렸습니다. 기독교에 헌신한 이 몸이 어찌 교육에 다시 헌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만 섬기기로 작정하고 결단한 그의 입지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공적인 신앙인들의 공통분모는 입지가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결심과 다짐은 어떤 유혹과 현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심각한 기로에서도 의연한 태도만을 표명했습니다. 오늘날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는 이와 같은 마음의 확고한 결심과 새로운 다짐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살펴본 여호수아서의 중심주제, 동사신앙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 위기의 어떤 불확실한 기로에서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입지가 분명한 신앙으로 앞만 보고 정진하는 삶이 곧 동사신앙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장부 여호수아는 그의 110년 인생을 마감하면서 다시 한 번 동사신앙의 본질을 재확인하며 다짐시켜줍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수없이 천명합니다. 인생의 어떤 유혹과 현혹 앞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단호하게 결의하고 결단하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합니다. 만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대세를 따라 우상을 섬기는 쪽으로 편향되어 간다할지라도『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길 것이라.』고 분명한 입지를 표명합니다.(15절)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지도자 여호수아의 신앙에 감동을 받고 자신들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의연하게 다짐합니다.(18절) 오늘 우리도 이런 멋진 신앙의 결단을 재 다짐하는 새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예수 잘 믿는 방법은 물에 빠지듯이 풍덩 빠져서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푹 빠져서 섬기면 됩니다. 참 간단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섬기라”는 말을 9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여호수아서 강해를 통한 동사신앙 시리즈의 결론으로 하나님만을 더 잘 섬기기로 새롭게 결심하고 다짐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더욱 더 간단합니다. 1.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여호수아는 왜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겨야한다고 강력하게 호소하며 촉구합니까? 주님만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7절)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바벨론 땅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2-3절, 5-6절)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우주 창조 전부터 웅대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사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들이 그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도 우리가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할 것은 나와 내 집이 예수님만 믿기로 작정하고 결심하는 일입니다. 본문 15절처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결정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에 있어서만큼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로 날마다 새롭게 다짐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한번만 태어난 사람은 육신적으로도 죽고, 또 다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니 두 번 죽어요. 육신적으로도 태어나고 영적으로도 거듭나는 사람은, 육신적으로만 한 번 죽고 그 다음에는 영생으로 부활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만을 믿고 섬기기로 작정하고 결심해야 합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4:12)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페니실린을 발명하여 노벨상을 탄 바 있는 유명한 Alexander Fleming박사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박사님께서 발견하신 가장 위대한 발견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는 이런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나는 대단한 죄인이요, 주 예수는 위대한 구주라는 사실을 발견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굳게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다음에 그들을 얼마나 자상하게 돌보아 주셨던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적들을 일으켜 주셨던가요? ①기적적으로 애굽에 내린 재앙에서 그들만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5절) ②기적적으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6절) ③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7절) ④기적적으로 광야생활 40년을 지켜주셨습니다.(8-10절) ⑤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습니다.(11절) ⑥기적적으로 가나안 땅 정착의 모든 길목에서 보호해주셨습니다.(17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기적적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불기둥은 최초의 난방 시스템이요, 구름기둥은 최초의 냉방 시스템입니다. 4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여주셨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오게 하셨고 쓴물을 달게 하셨고, 40년 광야 여정동안 발도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광야 40년과 함께 가나안 땅 정착 기간 40년 동안에도 여전히 돌아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결심하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든든한 보호자이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나와 동행해주시는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이십니다. 그러니 어떤 경제적인 불황에서도 비상한 섭리로 돌보아주십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섬기기로 굳게 결심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큰 능력, 주는 나의 보호자, 내가 항상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3. 하나님은 우리의 승리자이십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본문 18절에서는 또 하나의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어떤 악의 세력에서도 거뜬히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난공불락의 장벽 앞에 놓이더라도 결국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주안점이요, 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한 축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부터 13절 사이에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승리하게 하셨음을 확신시켜 주려고『내가』라는 말을 18번이나 반복합니다.(8절,10절,11절,12절,13절)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주신다는 점을 주지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어떤 환난이나 역경, 시련, 고통도 거뜬히 이기게 해주십니다. 여호수아 23장 10절에서는 우리 한 사람이 천 명을 당할 수 있음을 천명하십니다. 신명기 32장 30절에서는 두 사람이면 만 명도 몰아낼 수 있다고 더 큰 확신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승리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세상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질병을 이기며, 마귀를 이깁니다. 역경을 이기고, 시련을 이기며, 그 어떤 암도 이기고, 세상 모든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의 세상생활은 영적 싸움이요 능력대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말씀 그대로 우리를 넉넉한 승리자가 되게 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37절)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날마다 결심과 다짐을 새롭게 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기만 하면 구약 시대의 영웅 욥처럼 멋진 결말을 보는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Your decision determines your destiny! 당신의 결심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기도 초청) (나의 맘속에 온전히 주님만 모셔놓고 …)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당신은 여러 가지 환경적 어려움 때문에 신앙적 입지가 흐려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히려 상황이 어두울수록 믿음의 결의와 다짐을 굳게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든든한 보호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넉넉한 승리자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니 당신의 신앙적 입지와 결심을 분명하게 다짐할수록 하나님은 당신에게 멋진 결말을 안겨주십니다. 당신의 그 결심이 당신의 운명을 멋지게 결정해줍니다. Your decision determines your destiny!!'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마2:1-12/ 박한응목사 2017-08-18 09:33:39 read : 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오늘은 온 인류의 구세주시며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이 복되고 거룩한 성탄절에 하나님의 신령하신 은혜와 주님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그런데 이 성탄절이 되면 제일 먼저 성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마2:1-12/ 박한응목사 2017-08-18 09:33:39 read : 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오늘은 온 인류의 구세주시며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이 복되고 거룩한 성탄절에 하나님의 신령하신 은혜와 주님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그런데 이 성탄절이 되면 제일 먼저 성탄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돈 벌기 위해서 더 더욱 혈안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백화점과 상점들이 각종 물건들을 쌓아놓고서 손님을 유혹하고 있고 덩달아서 술집들이 매상을 올리려고 야단들을 합니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추리도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서글픈 것이 있습니다. 이 성탄절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이신데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카드가 여러 장 날라 왔는데 그 카드의 그림을 보면 우리나라의 무슨 풍경이나 산타할아버지의 수염 난 얼굴과 썰매를 끄는 루돌프 사슴의 그림이 있고 아니면 박사들이 약대를 타고 가는 그림들은 있으나 예수님은 어디에도 있지를 않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성탄절이란 거룩하신 분이 탄생하신 날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만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빙자하여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난 날을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마호멧교에서는 자기네의 교주인 마호멧이 태어난 날을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통일교의 교주인 문선명은 자기의 생일을 이 세상에 해와 달이 태어난 날이라고 하여 가장 큰 명절로 지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없는 성탄절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금년의 성탄절에는 반드시 나의 마음에 예수를 영접하고 나의 가정에 예수를 영접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이른 새벽 머나먼 동방의 바사 나라에서부터 여러 날 동안 걸어서 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그 박사들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에 대하여도 아닙니다. 머나먼 박사들에게 수개월 전에 나타나서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면서 이 시간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모두 은혜 충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별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여러 곳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창1:16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던 넷째 날에 별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 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②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너의 씨가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창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26: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③단12:3절 말씀에는 세상에서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④그리고 오늘 분문 말씀에서와 같이 동방에서부터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밤하늘에 무수히 수놓고 있는 별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하는 것과 성탄을 알리고 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이 시간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아 멘!>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라고 정하였습니다. 다 같이 한 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내 신앙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내 생활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그러면 이 시간에는 별에 대하여 그 속성과 의미와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1. 별은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이후로 수천 년, 수 만년이 지나오도록 별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우주의 천문학을 연구하는 천문학자에 의하면 수억 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캄캄한 밤하늘에 은구슬을 뿌려 놓은 듯 변함이 없이 우리 인간들에게 낭만을 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가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괴로움에 고통당하는 이들이여 눈을 들어서 하늘의 별을 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너무나 변화무쌍합니다. 변질이 너무 잘됩니다. 그래서 옛 말에 이르기를 인심은 조석변(人心은 朝夕變)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변함없이 연초에 다짐하였던 것을 끝까지 잘 추진해 나가야 하며 은혜 받았을 때의 그 결심과 각오를 변치 말고 잘 행함으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것입니다. 2. 별은 항상 변함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있는것 같아도 모두가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주공간을 돌고 있는 모든 행성들은 1미리 의 착오나 편차도 없이 태양을 중심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의 갈 길을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에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때에는 그 모든 별들과 행성들의 선회하는 궤도를 슈퍼컴퓨터를 동원하여 몇 달 몇 년씩 계산을 하여서 어떤 행성과도 충돌하지 않고 궤도를 돌 수 있도록 쏘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에서 쏘아 올린 인공위성도 자기의 사명을 다하여 명령을 받은 대로 지구 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들은 이 별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말할 것 없이 자기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남의 자리를 넘보아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에도 들에서 양들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천군 천사들의 소리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들려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까지 그 자리를 굳게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고 고백한 여호수아와 같이 세상사람 모두가 다 주님을 떠난다 해도 나는 내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별은 항상 신비한 존재입니다. 별은 아무리 연구를 하여도 그 비밀을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태고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천문학자들이 별을 보고 연구를 하여왔어도 별은 언제까지나 신비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1969. 7. 20. 미국의 암스트롱이라는 우주비행사가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을 하여 2시간동안 월면을 걸어 다녔습니다. 지난 2007년에는 우리나라의 이소연 씨가 우주선을 타고 우주정거장에 가서 14일간을 체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많은 과학이 발달을 해 왔고 미국과 러시아는 경쟁적으로 금성과 화성 등의 별을 연구하려고 우주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과학과 기술로서 아무리 연구해도 그저 추상적인 것뿐이지 아직까지 별에 대하여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인간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고 또 그 별들을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신비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존경받고 동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항상 마음은 여유가 있고, 그리고 아무런 기뻐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항상 얼굴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신비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4. 별은 항상 우리 사람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줍니다. 세상에는 저 하늘의 별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별은 우리 인간들에게 무한한 꿈과 소망을 줍니다. 시인이 별을 보면 시가 읊어지고, 소설가가 별을 보면 한편의 소설이 되기도 합니다. 음악가가 별을 보면 훌륭한 노래가 지어집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낙심한 사람이 저 별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 힘과 소망을 얻었습니까?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별을 보면 그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리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저 하늘의 별과 같이 축복하리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아브라함의 받은 축복을 소망하게 됩니다. 저 하늘에 무수한 별들은 아무리 검은 구름이 가리워도 구름 저편에서는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여름날 장마 속에서 여러 날 동안 별을 보지 못하다가 검은 구름 사이사이로 별이 보일 때에는 모든 사람이 기뻐합니다. (행27:20) “여러 날 동안 해도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고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하여 열나흘 동안 별 구경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항상 별과 같이 남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아무리 환란의 검은 구름이 우리의 앞을 가린다고 하여도 우리들 본연의 별과 같은 믿음을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5. 별은 사람들의 갈 길을 인도해 주고 때를 알려줍니다. 지금이야 최첨단 전자 장비가 있고 최소한 나침반이 있어서 별 어려움은 없지만 전에는 그렇지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넓은 바다를 여행하든지, 또는 끝없이 넓은 사막을 여행하든지, 또는 산중에서 캄캄할 때 길을 잃었을 때에 사방을 알 수 없고 어디가 동서남북인지를 알 수 없을 때에 북극성은 항상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또 어느 별이 북극지를 알 수가 없을 때를 대비하여 왼쪽에는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있고 오늘 쪽에는 W모양의 가시오페아 별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중에 깊은 산 속에서라도, 또 넓은 사막 가운데서라도, 망망대해에서도 북극성을 보고서 방향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이미 수개월 전에 이방나라인 바사 나라의 박사들에게도 별을 통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알려 주셨고 그 별은 머나먼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별은 때와 시기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예>지금이야 누구나 시계를 가지고 있고, 시계 없는 집이 없으며, 집마다 몇 개씩의 시계가 있지만, 예전에는 시계가 없어서 자다가도 밖에 나와서 별을 보고서 시간을 측정하곤 하였습니다. 전에 나의 어머님은 나를 위하여 새벽밥을 해주실 때에 시계가 없어서 꼭 밖에 나와 새벽별을 보고 새벽밥을 하셨는데 날이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은 별을 볼 수가 없어서 그저 한숨 주무시곤 밥을 하셔서 어느 날은 한밤중에도 밥을 먹곤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별은 우리들에게 때와 시기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때와 시기를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무슨 때를 알려야 하겠습니까? 마지막 말세가 가까이 다가옴을 알려야 하고(벧전4:7), 지금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할 때(막1:15)를 알려야 하며, 또한 은혜 받고 구원을 얻을 때가(고후6:2) 되었음을 알려야 합니다. 6.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항상 앞서서 인도하였고 멈출 때에 멈추었습니다. 동방에서부터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은 항상 박사들의 앞에서 인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 땅 베들레헴에 와서는 예수님이 누우신 집 위에서 멈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바른 신앙의 생활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앞서서 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뒤에 떨어지면 따라가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마라톤의 경기에서도 한 번 뒤로 쳐지게 되면 다시 앞으로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이 시대에 앞장서서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으며 또한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멈출 때가 되면 아무리 미련이 있어도 멈추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앞서가는 것만이 운전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멈출 자리에서 잘 멈추어야 합니다. 항상 과한 것은 오히려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이 멈추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부덕이 되고 맙니다. 7. 별은 번성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5:5절 말씀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하셨고 22:17절 말씀에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별은 번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정이 아브라함의 가정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 탄생하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의 믿음이 저 동방에서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과 같이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① 오늘도 변함없이 저 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과 같이 ② 항상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③ 항상 신비한 존재로서 ④ 누구에게든지 소망과 기쁨을 주고 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며 ⑥ 모든 사람들보다 항상 앞서서 가면서 ⑦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과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은 번성하는 축복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내 손을 힘 있게 하소서 /느6:7-9/막3:1-5/ 이성희목사 2015-01-18 18:00:17 read : 11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런던 장애인올림픽이 오늘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최선을 다해 경기하는 모습이 올림픽 못지않게 감동을 줍니다. 지난 주간에 사격 입사 경추장애 결선에서 금메달을 딴 강주영선수는 세계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부인인 이윤경씨가 보조요원으로 함께 참여하여 기쁨이 배가 되
내 손을 힘 있게 하소서 /느6:7-9/막3:1-5/ 이성희목사 2015-01-18 18:00:17 read : 11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런던 장애인올림픽이 오늘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최선을 다해 경기하는 모습이 올림픽 못지않게 감동을 줍니다. 지난 주간에 사격 입사 경추장애 결선에서 금메달을 딴 강주영선수는 세계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부인인 이윤경씨가 보조요원으로 함께 참여하여 기쁨이 배가 되었습니다. 손을 마음대로 못 쓰는 경추장애선수들에게는 실탄장전 등의 도움을 주는 보조요원이 함께 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강선수는 대학생 때 사고로 경추를 다쳐 하반신을 쓰지 못합니다. 오른손도 쥐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왼손으로 사격을 합니다. 경추에 장애를 입었는데 손을 쓰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에 뇌에 손상을 입으면 손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손이 아니라 다른 곳이 탈나도 손을 못 쓰게 됩니다. 손을 쓰기 위해서는 손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고쳐야 할 때가 많습니다. 손을 쓸 줄 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homo sapiens)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쓸 줄 아는 사람(homo habilis)입니다. 손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도구를 만들 줄 아는 사람(homo faber)입니다. 사람이 생각한다는 것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의 숙련은 두뇌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손 솜씨는 두뇌에서 비롯됩니다. 아이들이 손으로 무엇을 만들고 색종이를 접는 놀이를 많이 하면 두뇌가 좋아집니다. 손은 두뇌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머리와 손은 항상 짝을 이룹니다. 결국 손은 마음의 대행자입니다. 손에 대한 전설이나, 신화나, 이야기 등은 한 결 같이 손을 힘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손재주도 알고 보면 손의 힘입니다. 손의 섬세함도 다 손의 힘입니다. 손은 그 자체로 힘이 있고, 또 손은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국의 ‘아서왕의 전설’에 의하면 수면에 선 아서는 호수에서 손이 올라와 명검 엑스캘리버(Excalibur)를 양도받고, 죽을 때에 부하 베디비아를 통하여 다시 호수에 던져서 돌려주자, 물속에서 나타난 손이 칼을 받아서 수면 밑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호수의 손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손입니다. 손의 힘이란 관리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무기로 변합니다. 권세를 얻기 위해 남을 할퀴고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의 목을 죄고, 쾌락을 위해 상대를 유혹하는 손이 됩니다. 반면에 손은 잘 다스리면 은혜의 도구로 쓰입니다. 우리의 손을 잘 쓰면 하나님의 손안에 든 연장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에게 매일 손을 쓰는 일 하라고 지시합니다. 손을 쓰는 일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입니다. 사람은 손을 써야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손은 그 자체로 많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신 가운데 보면 손이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시바신은 천수천족(千手千足)의 신입니다. 인도나 네팔 등지의 힌두 신전에 가보면 신들이 있는데 힌두의 신은 많은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교의 신들은 그 많은 손으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한 손으로 모든 것을 주장하십니다. 야훼 하나님과 모세의 첫 만남을 보세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대화 가운데 모세에게 물으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손에 있는 지팡이를 보이자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네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손에 나병의 흔적이 생겼습니다. 모세가 놀라자 하나님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의 만남을 손을 가지고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힘이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손을 힘 있게 하십니다. 느헤미야는 귀환기의 영웅입니다. 평신도로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아 돌아와 일을 시작했지만 방해자들이 있었습니다. 산발랏, 게셈, 도비야라는 사람들이 계속 일을 방해하며 맥 빠지게 합니다. 느헤미야의 일을 조롱했습니다. 산발랏의 다섯 번째 편지에 대하여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고 청합니다. 이 기도는 느헤미야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기도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에게도 가장 절실한 기도가 바로 이 기도입니다. 우리도 이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렵게 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 6:9 상반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이라고 합니다. 방해자들이 느헤미야와 함께 일하는 사람을 두렵게 하려고 합니다. 겁을 주려고 합니다. 그들이 왜 두렵게 하고자 합니까? 실상은 자기들이 두려우니까 그 두려움을 느헤미야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야곱과 그 가족이 애급으로 이주하여 400년을 살았습니다. 오랜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나와서 히브리백성을 종이 되게 하여 심한 노역을 하게 하고 구박합니다. 왜 히브리 사람을 구박하는지 아십니까? 히브리 사람의 번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왕이 “히브리 여인이 아기를 낳을 때 아들이면 죽이라”고 합니다. 왜 죽이라고 합니까? 히브리 사람이 두려우니까 죽이라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을 죽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하여 모압을 지나게 되었을 때 모압의 발락왕은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백성을 저주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왜 저주하라고 하였습니까? 두려우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출애급기 15:15에는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급이 변방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두려워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가데스에서 에돔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에돔의 밭이나 포도원을 해치지 않을 것이며, 우물물도 마시지 않고 지나가기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에돔 왕은 “안 된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을 경유하지 못하고 다른 길로 돌아서 가나안을 향했습니다. 에돔왕도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두려워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위협하고, 돌로 치려 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허위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였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끊임없이 외부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우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사도행전에서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말씀을 전하다가 공회에 잡혀 왔습니다.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책잡을만한 것을 찾지 못하자 “위협하여 놓으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였습니다. 사실은 사도들을 두려워하여 위협한 것입니다. 스데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을 이기지 못하자 위협하였고, 그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자 귀를 막고 돌로 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 출신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위협과 핍박이 많았겠습니까? 성경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고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바울의 생명 있는 복음을 두려워하여 그를 두렵게 하였던 것입니다. 생명을 전하면 누구나 이런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허드슨 연구소의 연구원인 유대인 마이클 호로비츠의 관찰에 의하면 “유럽의 역사를 살펴볼 때 지금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섬뜩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의 숫자에 버금가는 것이다.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15만 9천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순교하며, 2억에서 2억 5천만 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 정치적 박해를 받으며 4억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실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예수를 믿고 있으니 모두가 편안하게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순교는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요즘에도 순교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재작년 한해에 2,175명이 순교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국제오픈도어선교회의 발표에 의하면 나이지리아에서 종교 폭동으로 2,000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이라크에서 90명이 순교하였습니다. 파키스탄과 라오스에서 29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집트와 인도에서 각각 9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순교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교도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도 이런 위협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과 억울함과 비난이 있습니다. 이런 불쾌하고 힘든 일들을 만날 때에 조금도 섭섭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교에 비교해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는 왜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경외’란 말은 거룩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경외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 찬양, 우선순위를 올려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두렵게 하고, 위협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걸 섬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 섬김은 그냥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신앙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섬깁니다. 열대 아메리카 산의 짖는 원숭이는 정글에서 가장 소리가 큰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리는 가장 크지만 가장 힘세지는 않습니다. 동물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원숭이가 두려울 때 소리를 크게 지른다고 합니다. 두려운 개가 크게 짓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사람을 두렵게 하지만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손을 힘 있게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6:9 하반절에는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고 합니다. 산발랏의 다섯 번째 편지 내용에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와서 페르시아 왕실에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전혀 근거가 없는 모함을 한 것입니다. 산발랏의 무고한 모함이 아닥사스다왕에게 전해질 경우, 느헤미야는 곤란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손을 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는 간구는 ‘하나님께 담대한 마음을 허락해 주실 것을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아말렉과 첫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준비되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 싸워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손이 높이 들렸기 때문에 승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높이 들린 모세의 손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그 손이 내려오지 않게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손이 높이 들리게 힘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그 손은 승리의 손이었습니다. 모세는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깃발’이란 뜻입니다. 모세의 팔이 높이 올라가 있어서 이겼지만 ‘모세 닛시’가 아닙니다. 모세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싸우셨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삼손은 성경에서 가장 힘센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나실인이었으므로 어릴 때부터 특별하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큰 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충동을 통제할 만큼 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그는 여자에게 약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둘째는 혼자서 성공하려면 실패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항상 혼자서 싸웠습니다. 혼자 싸울 때는 멋지게 이길 수 있었지만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사랑하던 여인 들릴라가 “당신을 결박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여러번 거짓으로 가르쳐 주었지만 결국 들릴라에게 천기누설을 하고 맙니다. 그의 머리털을 밀어버리자 그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힘이 없어진 삼손의 두 눈을 뺐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다곤 신전에 데려가 재주를 부리게 하였습니다. 삼손은 두 기둥 사이에 서서 손으로 기둥 잡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신전이 파괴될 때에 3,000명이 죽었습니다. 성경은 이 때 죽은 자의 수가 삼손이 살아 있을 때 죽인 자 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삼손의 손을 힘 있게 하여 그가 원수를 갚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에는 내과, 안과, 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신경정신과 치유가 다 있습니다. 그 중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손이 말랐던 그 사람은 원래 이름 난 석수였다고 합니다. 돌을 깨고 다듬는 직업을 가진 석수가 손이 말라 있으면 그는 직업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시고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에게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손에 힘만 있으면 만사가 풀립니다. 다시 석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마른 손이 풀려 손을 힘 있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희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의 손은 권위와 힘의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손을 얹음”(laying on of hands)이란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손을 얹었다는 것은 여러 경우에 등장합니다. 첫째는 어떤 직분을 주어 임직할 때입니다. 둘째는 치유할 때입니다. 셋째는 범죄자를 돌로 칠 때입니다. 넷째는 짐승을 제물로 잡을 때입니다. 다섯째는 신약에서 축복할 때입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에 손을 얹은 것은 주의 종의 손을 힘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입니다. 마가복음 16:18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원수의 손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사람의 손에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권능을 하나님의 사람의 손을 이용하여 나타내 주십니다. 하나님이 힘 있게 하는 손은 주먹 쥔 손이 아니라 열린 손, 편 손입니다. 열린 손은 주먹 쥔 손보다 힘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열린 손은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열린 손은 평온함을 주는 손입니다. 열린 손의 반대는 주먹입니다. 주먹을 쥐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억지로 움켜쥐려고 합니다. 주려고 하기보다 빼앗으려고 합니다. 주먹은 전쟁을 일으키며 항상 누군가와 대적합니다. 진정한 힘은 주먹을 쥐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열린 손으로만 얻을 수 있고, 열린 손으로 진정한 소원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주먹 쥔 손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 수 없습니다. 이미 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얻으려면 손을 열어야 합니다. 손을 쫙 펴야 합니다. 한국인의 손은 기계보다 정밀한 손이라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세계가 우리의 손에 찬사를 보냅니다. 쇠 젓가락으로 콩을 집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가전제품이나, 조립 공정이나, 생명공학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손이 우리의 손입니다. 우리민족은 손으로 하는 일은 잘 하는 민족입니다. 운동도 손으로 하는 운동을 발로 하는 운동보다 잘 하는 민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민족에게 하나님이 손에 힘을 주셔야 합니다. 손의 힘이 필요합니다. 결론 얼마 전 이라크의 ‘회교혁명 평의회’에서는 포고령 통해 새로운 형벌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이미 범죄자들에게 ‘손목절단형’을 집행하고 있는 이라크에서는 최근 범죄가 급증함에 따라 귀를 자르는 형벌을 실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수족을 절단당한 전과자에게는 이마에 문신을 명령했습니다. 수족을 절단 당한 것과 및 문신을 숨기려고 성형수술을 하거나 그렇게 하도록 그 행위를 도와주는 사람들 역시 손과 귀가 잘리게 됩니다. 이슬람의 법은 참 무섭습니다. 손을 자르는 형벌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성경도 손을 자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의하여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을 위하여 자릅니다. 마태복음 5:30에는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합니다. 왜요? 손을 더 힘 있게 하려고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6:3에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고 합니다. 왜요? 손을 더 힘 있게 하려고 모르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원수들의 위협이나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원수들을 이기게 하시려고 우리 손에 하나님의 힘을 실어주십니다. 느헤미야를 괴롭히던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손에 힘이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의 공사가 잘 끝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손을 하나님이 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시23:5/ 오주철 목사 2016-04-11 09:30:27 read : 4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결혼을 앞둔 손녀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처음 시집 오셔서 할아버지를 뭐라고 부르셨어요? 처음에는 영감이라고 안 하셨지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물론이지 처음에는 나도 당신이라고 했지"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손녀가 다시 "요즈음은 어떻게 부르세요?"라고 하니까 할머니
내 원수의 목전에서 /시23:5/ 오주철 목사 2016-04-11 09:30:27 read : 4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결혼을 앞둔 손녀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처음 시집 오셔서 할아버지를 뭐라고 부르셨어요? 처음에는 영감이라고 안 하셨지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물론이지 처음에는 나도 당신이라고 했지"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손녀가 다시 "요즈음은 어떻게 부르세요?"라고 하니까 할머니가 지체없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응, 요새는 웬수라고 해."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에는 유달리 원수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23편에서도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23편 5절을 북한에서 번역된 성경에 보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쑤를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을 각 지방 버전으로 이렇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경상도 버전입니다. "내 라이벌 죽일 놈의 문디 자슥들 앞에서 내 대가리에 지름을 바르고/ 낼로 팍팍 키와 주시니 내사 뭔 걱정이 있겄노 말이다." 충청도 버전입니다. "주님께서 지 웬수의 면전에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잔치를 여시구 / 지름으로 지 머리에 발라주시니 지가 몸둘바를 모르겠네유. 시방두 지 잔이 넘치네유" 전라도 버전입니다. "아따! 주께서 저 싸가지 없는 놈들 앞에서 내게 밥상을 챙겨주시고 내 대그빡에 지름칠해 주싱께로 / 참말로 나가 기뻐블그마이" "내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궁극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그 원수는 바로 사탄 마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탄'이라는 원래의 뜻이 'enemy'라고 해서 '원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탄 마귀라는 말은 원수 마귀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할 때, 혹은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 끊임없이 우리의 삶과 사고의 영역 속에 도전하며 인간들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하는 존재가 바로 원수 마귀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귀의 공격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약속하기를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들에게 상을 차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수들 두 눈뜨고 쳐다보는데 보란 듯 이것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다시 말하면, 원수들이 두 눈뜨고 쳐다보고 있는 그 앞에서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요? 첫째로, 그 은혜는 풍성한 공급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여정이 결코 낭만적인 산책로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시편 23편에서 묵상한 것처럼 하나님의 양들인 우리도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반드시 지나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도 시련과 고통에서 예외가 되어져 있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과 시련에서 면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사탄 마귀는 우리의 마음속에, 특별히 예수를 믿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를 믿으면 어쩐지 인생에서 내가 손해를 볼 것 같고, 신앙생활이 고통의 길일 것 같은 그런 어두운 마음의 그림을 그려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도를 해 보면 솔직하게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저는 믿고 싶은데요, 그런데 믿었다가 우리 집안에 우환이 생길까봐 믿지 못하겠어요." 예수를 믿고 싶지만 믿었다가 우리 집안에 풍파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길까봐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 보셨습니까? 전도를 해 봤어야 만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원수의 목전에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0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여기에서 도둑은 원수 마귀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파괴시킵니다. 마귀는 빼앗는 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가져가고, 가치를 왜곡시키는 자, 그것이 원수 마귀입니다. 원수 마귀가 하는 일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의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흔히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좀 고생을 하지만 죽을 때는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구원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는 양들이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간신히 구원만 받아서 고생하다가 죽을 때 천당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풍성한 생명, 풍성한 기쁨, 풍성한 의미, 풍성한 감격을 누리는 삶이 가능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더 풍성한 기쁨을 누리십시오. 더 더 풍성한 감격을 누리십시오. 더 더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십시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를 믿고 이런 풍성한 삶을 체험한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에 어느 한 날 반드시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주님, 예수를 믿고 보니까 제 잔이 넘치네요." 아직도 이 고백을 못해 보신 분은 죄송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분이십니다. 실제로 중동 지방의 양들을 관찰해 보면, 그 양들이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시기가 양들을 데리고 골짜기를 따라 고원지대의 방목장으로 올라가는 시기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목자들은 봄철에 미리 그 고원지대를 답사한다고 합니다. 여름철을 지날 때 양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를 미리 올라가서 답사를 하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양들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대부분 목자들이 양들을 위해서 준비한 고원지대의 목초지는 바위가 편편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풀들이 있습니다.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맹수들이나 야수들의 공격에서 쉽게 양떼들을 지킬 수 있고, 따스한 햇빛이 있고 편편한 넓은 바위가 있는 곳을 미리 답사하여 준비해 둡니다. 그리고 이런 지역을 가리켜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일반적으로 "메사"(MESA)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목자들은 양떼들을 데리고 골짜기를 지나서 고원지대로 올라갑니다. 일단 거기에 도착하게 되면 "메사", 편편한 바위가 있는 주변 지역을 깨끗이 정리를 합니다. 그리고 웅덩이나 샘물들을 잘 관리해서 양떼들이 쉽게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주변에 독풀들을 제거하고 좋은 풀들을 먹을 수 있는 환경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맹수들의 불의의 습격에 대비하여 울타리나 둑을 만들어 자기의 양들이 마음껏 안심하고 향연을 즐기게 합니다. 이것을 일종의 "메사"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양떼들이 골짜기를 지나서 고원지대를 향해 올라가다가 지치고 힘들어하는 그 순간, 드디어 "메사"라고 하는 고원지대의 방목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시편 기자가 고백하고 있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Table)을 차려 주시고" 편편한 바위가 있고, 물이 있고, 싱싱하게 푸른 식물이 있습니다. 이런 천연의 잔치 자리인 고산의 목초지에서 긴 여정에 지친 양들이 오랜만에 실컷 먹고 마시며 쉬었을 때 양들이 느끼는 소감은 어떤 소감일까요? 이런 소감일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신도 어려움 속에 있지만 당시에 고난을 받고 있었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런 메시지를 계속해서 되풀이합니다. "여러분, 기뻐하세요. 좀 어려움이 있어도 기뻐하세요.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기뻐하세요." 이것이 빌립보서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앞에 스크린에 띄워져 있는 빌립보서 4장 1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풍성한 삶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양들이 목자에게 이끌림을 받아 골짜기를 올라가면서 힘들고 지쳐갈 때 종종 목자는 양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양들아, 힘들지? 그러나 조금만 견뎌. 조금만 더 올라가면 메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는 인생의 여정에는 이런 메사의 은총, 혹은 풍성한 공급의 은총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여정이 조금은 힘들고 피곤해도 저 높은 곳, 고원의 목초지에 예비된 향연을 기대하신다면 우리는 오늘의 시련을 견딜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앞에 주께서 예비하신 잔치 자리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과거에 모두가 다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다렸던 유일한 희망은 동네 잔치였습니다. 우리 집 잔치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동네 잔치만 열리면 그 날은 내 잔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잔이 넘치는 날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잔치집과 같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 잔치 날이 다가옵니다. 그날 원수의 목전에서 누리게 될 그 풍성한 공급의 은혜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암울한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잔치집의 비전을 보여주시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조금만 기다려. 우리는 곧 메사에 도착할 거야. 거기에 가면 우리는 실컷 먹고 마실 수 있단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우리가 지금 인생의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건너편에 있는 비전을 바라볼 수가 있다면 우리는 이길 수가 있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내일의 잔치날을 그릴 수만 있다면 오늘의 고통은 좀 힘들고 어렵지만 그러나 넉넉히,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향연의 자리를 준비하시고, 상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는 신랄한 어둠과 고통의 한복판 속에서도 오늘의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어느 날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향연을 베풀어주실 그분을 바라보라"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시련이고, 어둠이고, 고통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미래에 주님께서 준비하신 그 잔치와 향연의 비전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은혜, 그것은 첫째로 풍성한 공급의 은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두 번째는, 완벽한 치유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원수의 목전에서 어느 날 경험하게 될 놀라운 은혜 가운데 하나가 완벽한 치유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삶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믿고 살아도 상처는 피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여정에도 상처는 있습니다. 상처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상처를 받습니다. 문제는 이 상처에서 속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치료를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상처 때문에 무너집니다. 그 상처 때문에 좌절하고, 그 상처 때문에 포기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안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치료받는 것입니다. 한때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가 나중에 목사가 되었던 필립 켈러는 양들이 골짜기를 지나 고원지대를 향할 때, 그리고 고원에 도착할 때 양떼들을 위협하는 최대의 원수는 파리떼라고 합니다. 그는 양떼들을 공격하는 파리떼의 다양한 종류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쇠파리, 말파리, 발뒤꿈치 파리, 코파리, 허리파리, 사슴파리, 진디파리, 등에, 모기, 각다귀, 날개 달린 각종 해충파리 등" 수많은 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양들은 코파리에게 약하다고 합니다. 코파리가 양떼들 주변에서 윙윙거리기 시작하면 양떼들은 갑자기 긴장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코파리의 목적은 일단 양들의 코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의 코에 덮힌 촉촉하고 끈끈한 점막 안에 알을 낳으려고 기회를 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공격해서 양들의 머리까지 진격해 들어온다고 합니다. 만일 코 파리가 알을 낳기에 성공하면 며칠 안에 부화되어 작고 가느다란 벌레와도 같은 유충이 콧구멍을 통해 양의 머리 속까지 파고 들어가 각종 염증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코파리가 이 머리를 점령하게 되면 양들은 격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경험하게 되면 양들은 그 머리를 바위에 부딪치고, 나무에 부딪치면서 데굴데굴 굴러다닌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때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기름병을 준비합니다. 제일 좋은 것이 올리브 기름입니다. 목자는 그 기름병을 가지고 있다가 양의 코를 마구 비벼줍니다. 코 속에 기름을 집어넣기도 하고, 귀를 비벼주기도 합니다. 목을 비벼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에 계속 발라 줍니다. 그러면 양들이 시원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고통을 당하는 양이 있으면 기름병이 아니라 기름통을 가지고 있다가 아예 양들의 머리를 거기에다 푹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꺼냅니다. 그때 양들은 비로소 치료를 느끼면서 표정이 환해진다고 합니다. 평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배경에서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본문 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제 본문의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궁금하십니까? 그렇다면 옆에 있는 분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야고보서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영적 지도자들에게 병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그냥 기도가 아니라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1장에 보면, 메시아의 예언이 나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예언하면서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래서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십니까?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며,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메시아가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아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치료할 그분의 사역을 상징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고통과 슬픔 속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가 찾아와서 내 상처를 만져주며 나와 함께 있어줄 때 우리는 얼마나 위로를 느낍니까? 그렇지만 사람의 위로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나의 고통을 이해해도 그 이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가장 완벽하게 아시는 분, 나의 처절한 외로움과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내 존재의 깊은 곳에 숨겨진 고통과 상처를 이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그분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셔서 내 존재의 깊은 곳을 만져주실 때 비로소 우리의 치료는 완벽한 것입니다. 인간의 상처의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영, 그 영의 기름 부으심만이 완벽한 치유의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 강원도에 정착해 살면서 예수원을 설립하여 많은 영성을 끼쳤던 대천덕 신부이신 R. A. 토레이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루벤 토레이는 무디와 함께 사역했을 뿐만 아니라 무디 성경학교 교장을 지냈던 유명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침에 일어날 때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성령으로 내게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으심, 성령의 만지심이 우리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간 밤에 어제의 고통을 치유하고 오늘 하루를 새롭게 살수 있는 준비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만으로 가능할 수가 있습니다. 어제는 어제를 위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했습니다. 오늘을 위해서는 오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삶에서 오늘 내가 견뎌내야 할 삶의 고통과 억압 앞에 도전하기 위해서 오늘 이 순간 내게 임하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어제의 기름 부으심만으로 오늘의 상처를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매일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성령으로 내게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저는 오늘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추상적인 소리로 들릴 것 같지만 그러나 이것만이 우리 민족이 서로 하나가 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말들을 많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말들이 해결될 것 같지만 말이 많으면 말이 많습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은 유달리 상처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우리가 공격적이고 비판적이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과거에 내가 받은 상처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유달리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받은 상처가 그만큼 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상처 받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기도로 주님 앞에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의 도우심을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만이 완벽한 해답이라고 믿습니다. 남북 분단의 상처도 깊은 상처인데, 그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남남갈등입니다. 대통령을 향해 욕설을 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우리의 국론이 분열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공격하는 이런 대립의 관계가 계속된다면 이 깊은 상처는 어떻게 치료할 수가 있겠습니까? 서로의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감정적인 비난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남북 분단의 고통에다가 남남갈등의 또 다른 상처를 추가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상처와 죄들을 꺼집어내고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져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치유를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의 새로운 날을 전망하고 바라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분이 우리에게 기름 부어 주시면 마음이 상한 자들이 고침을 받고, 슬픔에 잠겨 있던 사람들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날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이렇게 고백하며 치유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 번째로, 그것은 새로운 사역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치유 받은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적극적으로는 치유만이 아니라 이제는 치유를 받았으니 새로운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로 하여금 새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기름 부으심은 새로운 사역에로의 은혜입니다. 구약에 보면, 어떤 자리에 임명될 때 기름 부음을 받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왕이 왕의 자리에 취임할 때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임명될 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구약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그 자리에 취임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역사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새로운 왕이 취임할 때마다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왕과 새로운 선지자를 기다립니다. 가짜 선지자에 질리면서 그들은 새로운 선지자들을 기다립니다. 새로운 제사장을 기다립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실망하면서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세 가지 기능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주시는 한 분이 역사에 나타날 것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아람어입니다. 이 메시아라는 말을 헬라어로 바꾸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똑 같은데 그 뜻은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약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이 무엇인 줄을 아십니까? 아니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최대의 사건이 무엇인 줄을 아십니까? 그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날 가장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따라다니고 있던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라 다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작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습니다. 상처를 치료 받고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작은 그리스도로 삼고, 우리 주변에 아직도 예수님을 모른 채 더 깊은 고통과 상처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저와 여러분들이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상처받은 이웃들을 위해 그들의 상처를 만져주는 작은 목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고백은 단순한 자기 만족의 고백이 아닌 사명을 이루는 자의 감격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먹을 것을 풍성하게 가진 배부른 사람이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자기 만족의 고백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사명을 이룬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사명을 거룩하게 성취할 수 있었던 사람만이 드릴 수 있었던 고백이 바로 이 고백이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백이 단순히 자기 만족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기뻐하시는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사역의 자리에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 이 거룩한 영적인 일에는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뿌리를 내리지만 사람의 의지는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죄성에 오염된 우리 인간은 지금 사는 그 방식에 아주 절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방식 그대로 살아가려는 유혹에 이끌리게 됩니다.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싫어합니다. 양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노력, 뭔가 지금보다는 달라지고자 하는 어떤 구체적인 노력이 없다면 결코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그 방식 그대로 한다면 지금보다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보다는 뭔가 달라져야만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역을 붙잡고 최선의 노력을 하십시오. 거룩한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신앙이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 은혜를 그의 백성들에게 풍성하게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되어지기 위해서는 사역의 자리에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역의 자리에로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나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에게 찾아오시고 나를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은혜를 보다 구체적으로 누리기를 원하신다면 기억하십시오. 사역의 자리에로 들어가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오늘의 시편 기자가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런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너의 얼굴을 보다니 /창46:28-30/ 김기석목사 2015-07-13 10:22:42 read : 17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스라엘이 유다를 자기보다 앞세워서 요셉에게로 보내어, 야곱 일행이 고센으로 간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일행이 고센 땅에 이르렀을 때에, 요셉이
내가 너의 얼굴을 보다니 /창46:28-30/ 김기석목사 2015-07-13 10:22:42 read : 17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스라엘이 유다를 자기보다 앞세워서 요셉에게로 보내어, 야곱 일행이 고센으로 간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일행이 고센 땅에 이르렀을 때에, 요셉이 자기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려고, 병거를 갖추어서 고센으로 갔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보고서,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았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너의 얼굴을 보다니, 네가 여태까지 살아 있구나!"] • 누구에게나 있는 옷궤 하나 어버이 주일입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느라 애쓴 이 땅의 모든 어버이들과 그들을 통해 이 세상에 오게 된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버이주일을 앞두고 이청준 선생의 단편 <눈길>을 읽었습니다. 소설은 자수성가하여 도시에서 살고 있던 화자 '나'가 다 쓰러져가는 시골집에 살고 있던 어머니를 찾아가면서 시작됩니다. 늙은 어머니는 단칸방에서 큰 며느리와 세 조카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옷궤 때문에 발조차 뻗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자는 어머니를 '노인'이라고 지칭합니다. 의도적인 거리 두기입니다. 그는 혼잣소리인양 여러 차례 그 노인과 자기 사이에 갚아야 할 빚은 없다고 말합니다. 남편과 큰 아들을 일찍이 떠나보내고 근근히 삶을 이어가야 했던 어머니는 객지에서 공부하는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미안함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며느리는 좁은 방에서 옷궤를 치우는 게 어떠냐는 말해보지만 노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 낡은 옷궤는 '나'를 옛 기억으로 인도합니다. 도시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는 술버릇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 형이 전답과 선산을 팔고, 마침내는 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집까지 팔아넘겼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옛 마을을 찾아갑니다. 어스름을 기다려 살던 집 골목에 들어서니 집은 괴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문간에서 한참 어정거리고 있는 데 친척 누나의 기별을 듣고 달려온 어머니가 아들을 나무라며 집안으로 잡아 끌었습니다. 살림살이를 다 드러낸 집에서 어머니는 옛날과 똑같이 저녁을 지어 내왔습니다. 언젠가 아들이 돌아오면 저녁밥 한 끼를 지어 먹이고 마지막 밤을 지내게 해주고 싶었던 어머니는 새 주인의 양해를 얻어 혼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그 빈집을 드나들며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했고, 안방 한쪽에 이불 한 채와 옷궤 하나를 예대로 그냥 남겨두었습니다. 옷궤는 옛 집의 분위기를 되살려내 아들의 괴로운 잠자리를 위로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아들과 어머니를 이어주는 끈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마다 그런 '옷궤'가 하나쯤은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구질구질해 보여도 어머니 혹은 아버지는 결코 버릴 수 없는 물건 말입니다. 그것은 또한 자식들에게는 부모님의 은은한 사랑을 드러내주는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몇 주 전 교우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자들의 영정을 모신 안산분향소를 다녀왔습니다. 희생자 295명의 영정과 9명의 실종자들의 영정을 일람하면서 가슴이 시렸습니다. 저 푸릇푸릇한 젊은이들의 생명과 꿈이 소멸되기까지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공포와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영정 앞에는 가족들이 가져다 놓은 여러 가지 유품들과 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진도 있고, 과자도 있고, 편지도 있고, 운동기구도 있고, 애장품도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사물도 배치된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남들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그 물건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기억의 통로였습니다. 소설 <눈길>에 나오는 어머니의 옷궤와 같은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 아름다운 화해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에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 나옵니다. 첫째는 부모가 살아 계시고, 형제가 두루 잘 지내는 것입니다(父母俱存 兄弟無故). 둘째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셋째는 뛰어난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입니다(得天下英才 而敎育之). 맹자는 그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하는 앞뒤에 천하를 통일하여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라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런데 첫번째 즐거움이 '부모구존, 형제무고'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토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도 부모공경을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교훈의 첫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소중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병통이 아닌가 싶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라지거나 스러지고 난 후에야 우리가 누리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꼭 톨스토이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귀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좋은 인생을 살기 위한 비결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성경은 온통 잃어버린 것들을 찾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과 연관시켜 설명하시곤 했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이야기, 집을 떠났던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이야기 등이 떠오릅니다.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을 때 누구나 다 기뻐합니다. 기쁨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기본 정조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 한다면 나는 야곱과 에서의 상봉 장면을 들겠습니다(창32-33장). 감정이 상한 채 헤어졌던 형제가 20년 만에 만나는 장면은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어엿이 일가를 이룬 야곱이었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 야곱을 죽이겠다'고 이를 갈던 형 에서의 노기 띤 음성이 평생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형과의 대면을 앞둔 그는 귀향의 설렘보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얍복강 나루에 엎드렸습니다. 엎드림은 가장 수동적인 자세입니다. 어느 순간 그는 자기 허리춤을 붙잡는 어떤 존재와 씨름을 했습니다. 그 깊은 밤 그가 붙들고 씨름했던 것은 어쩌면 자기 안의 두려움이 아니었을까요? 다친 엉덩이뼈는 속이는 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으로 인해 무너진 그의 중심이었을 겁니다. 그밤에 옛 사람 야곱은 죽었고, 자기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붙들고 살아갈 새 사람 이스라엘이 태어났습니다. 날이 밝았을 때 그는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형 에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형은 옛날의 악감정을 다 잊고 동생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경은 그곳이 브니엘이었다고 말합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의 브니엘은 어디입니까? 형제자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는 곳, 즉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형제는 두 팔을 벌려 서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형님을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이보다 아름다운 화해의 장면을 저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 한 노인 이야기 창세기는 온통 형제간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화해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다른 형제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이들이 화목하게 지내기 참 어렵다는 사실을 일러줍니다.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이 사이좋은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일 겁니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으면 관대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도 기독교인들이 먼 세상 사람들은 사랑하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비웃듯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아름다움은 갈등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화해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예외입니다. 관계의 어그러짐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세상이지만, 그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적 과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이야기는 형제간의 갈등의 여파로 인해 살맛을 잃어버린 채 살던 한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노인은 야곱입니다. 고향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여 일가를 이루어 살던 그의 가정은 여전히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외동딸이었던 디나가 히위 사람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겁탈을 당한 일이 벌어졌고 분기탱천한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남자들을 죽이고 그 성읍을 약탈하는 일이 벌어졌고, 야곱은 부득이 그곳을 떠나 베델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야곱이 사랑하던 아내 라헬은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쓸쓸해진 야곱은 라헬을 통해 낳은 아들 요셉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향한 아버지 야곱의 편애는 다른 아들들의 마음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형제를 종으로 파는 참람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형들은 요셉이 입고 있던 화려한 옷에 염소피를 묻혀서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는 들에서 우연히 그 옷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들짐승에게 잡아 먹힌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슬픈 나머지 옷을 찢고, 베옷을 걸치고 아들을 생각하며 여러 날을 울었습니다. 그는 위로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때 야곱의 심정이 어때 했을까요? 가슴 가득 회한이 차올랐을 겁니다. 자기가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자책의 심정에 사로잡혔겠지요. 형을 두 번씩이나 속였던 일이 떠올랐을 것이고, 밧단아람에서 보냈던 20년의 쓰라린 나날이 떠올랐을 것이고, 자식들을 얻었을 때의 기쁨, 특히 라헬을 통해 요셉을 얻었을 때의 기쁨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과의 갈등 때문에 가족들을 솔가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던 여정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고향이라고 찾아온 땅에서 딸이 겁탈을 당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던 그 느낌, 라헬이 속절없이 세상을 등졌을 때 느꼈던 아득한 절망, 그리고 요셉의 죽음. 그에게 삶은 너무 가혹했습니다. 그는 어쩌면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세요?' 하고 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나이든 분들이 야곱 이야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가 겪었던 신산스런 삶의 이야기가 자신들의 경험과 오롯이 겹쳐지기 때문일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금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주름이 깊게 패인 분들은 야곱의 그 마음을 넉넉히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등지기도 하고, 아득바득 애써 일궈놓은 삶의 터전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기도 하고,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기도 하면서 살아온 모진 세월이었습니다. • 평범한 행복의 꿈 하지만 야곱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망쳐놓은 것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오랜 가뭄으로 먹을 것을 구할 길이 없었던 야곱의 아들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드나들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천만 뜻밖에도 그곳에서 형제들은 자기들이 팔아버렸던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화해를 하게 됩니다. 요셉과 다른 형제들의 화해 장면도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화해를 이루게 되자 비로소 요셉은 자기가 겪어야 했던 그 모진 고통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창45:5) 이런 인식은 계시적 깨달음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요셉 뿐입니다. 그 형들은 이런 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형제를 팔아버렸던 자기들의 무정한 처사에 대한 회개와 참회입니다. 가해자들이 이런 말을 전유해서 피해자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내려오라고 부탁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야곱 일행이 애굽 땅의 북동부 지역인 고센에 이르렀다는 전갈을 받은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맞으려고 그곳으로 갑니다. 성경은 부자 상봉 대목을 이렇게 그려 보여줍니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보고서,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았다"(29) 아버지 야곱도 말합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너의 얼굴을 보다니, 네가 여태까지 살아 있구나!"(30) 여러분, 아십니까?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말입니다. 가족들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가장 평범한 것 속에 가장 비범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모든 가족들이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가족이 없는 이들에게는 우리가 가족이 되고 품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존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세상, 모두가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은 우리들의 꿈이기도 하지만, 주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꿈이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어야 합니다. 혈연에 바탕을 둔 가족주의를 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이들이 한 가족 되어 정겹게 살아갈 때 새로운 세상은 움터올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비판보다 희망의 말을 /마7:1-6/ 조봉희 목사 2016-01-11 17:26:57 read : 9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
비판보다 희망의 말을 /마7:1-6/ 조봉희 목사 2016-01-11 17:26:57 read : 9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 설교말씀 고려 말기에 무학 대사가 이성계 장군을 만났습니다. 이성계가 무학 대사를 보니 참 못생겼습니다. 그래서‘대사께서는 돼지상이군요.’라고 혹평했습니다. 그러자 무학 대사는 이성계를 향해 ‘장군께서는 부처상이시군요.’ 라고 호평해주었습니다. 무학의 응수에 이성계는 큰 감동을 받고 다시 물었습니다. ‘나는 대사를 돼지상이라고 혹평했는데, 대사께서는 어찌 나를 부처상이라고 호평해주십니까?’ 이에 대하여 무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긴 대로 남을 보는 법이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제일 많이 짓는 죄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방하는 죄일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잘할 때 비판적이 되기 쉽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6장의 설교 이후에 주시는 7장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영적 수준이 향상 될 때 자칫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나보다 믿음이 약하거나 덜 헌신하는 자를 비판하거나 정죄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설교말씀처럼 자기는 돈 문제도 초월하고, 신앙을 최우선으로 헌신하는 삶을 사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한 점을 비판할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 사람의 약점보다는 장점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 혹평보다는 호평할 줄 알아야 합니다. 헐뜯고 비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지 W. Barclay는 매우 심플하면서도 의미 깊게 해석해줍니다. 첫째, 우리는 그 사건 전체나, 그 사람 전체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전부를 알지 못합니다. 사실 비판이란 언제나 부분적입니다. 한 면만 보고, 또는 한 편 얘기만 듣고 판단하기 때문에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인도 격언에도 ‘남의 신발을 신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걸음걸이를 평가하지 말라.’고 합니다. 유대의 훌륭한 랍비 힐렐은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네가 그 사람의 환경이나 입장이 될 때까지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우리는 겉모습만 가지고는 남의 사정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완벽하게 공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우리의 판단은 편파적이고 외형적입니다. 특히 비판적 안목으로 보기 시작하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먼저 보이기 때문에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편견에 의해 비판하기가 쉽습니다. 공정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비판할 만큼 선하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남을 비판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남을 비판하되, 자신이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될 만큼 완전무결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향해 분노하고 있던 군종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이 말씀 앞에 기세등등했던 무리들은 하나씩 둘씩 소리 없이 물러갔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꼬리 내린 강아지 꼴입니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비판할 만큼 완벽하게 선하지 못한 것입니다. 완전무결하신 예수님께서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넷째, 비판과 비방은 신앙적이거나 영적이지 못합니다. 원래 비방이라는 말은 사탄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비난과 헐뜯음은 마귀가 시키는 일입니다.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기운을 빼고, 상처를 입히고, 심지어 믿음에서 떨어지게까지 합니다. 어떤 분이 비난의 부작용을 이렇게 명료하게 정리해줍니다. 첫째, 그것은 결코 치료하지 않는다. - 그것은 항상 상처를 줄뿐이다. 둘째, 그것은 결코 사람을 완전하게 하지 못한다. - 그것은 오직 관계를 파괴시킬 뿐이다. 셋째, 그것은 결코 결속시키지 않는다. - 그것은 오직 분리시킬 뿐이다. 넷째, 그것은 결코 세우지 않는다. - 그것은 오직 허물뿐이다. 다섯째, 그것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 그것은 오직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할 뿐이다. 이처럼 비판은 사람을 깎아내리고 관계를 단절시키며,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내지 말고, 사랑으로 덮어주라.”고 강조하십니다. 사실 비판적인 사람일수록 인격이 병든 자요, 관대한 사람일수록 인품이 건강하고 고결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수준 높은 덕성과 영성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는 그 방법론을 간단하게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1. 한담을 즐기지 말자. 인격과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한담을 즐깁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대로 대인일수록 사상을 말하는 반면, 소인일수록 사람 얘기를 즐깁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사람 비판하는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사람 얘기 많이 하면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험담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판하기를 멈추라고 당부하십니다.(1절) 즉 재판장 노릇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역할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비판과 정죄는 하나님의 역할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월권 행동입니다. 우리가 한담을 즐기다보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대신, 남의 허물만 들추어내고, 훈장노릇을 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남의 단점을 꼬집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타인에게 충고하는 것이다.” 사람은 여간해서 자신의 허물을 잘 모르고, 남의 결점만 지적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매우 실제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티와 들보」라는 용어를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목공소에서 일하셨기에 톱밥이나 작은 알갱이가 눈 속에 들어가는 경험을 자주 하셨습니다. 여기서 티는 톱밥을 말하고, 들보는 통나무나 서까래를 뜻합니다. 이처럼 한담을 즐기는 자는 자신에게 있는 통나무처럼 큰 결점은 못보고, 남에게 있는 톱밥 같은 작은 허물만 들추어냅니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나 허물을 침소봉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인격이 성숙한 사람일수록 남의 얘기를 잘 하지 않는 훌륭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원래 한담이라는 말은“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안 좋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현장에 없는 사람에 관해서는 안 좋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 11장 13절을 보면,『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그래요. 한담을 즐길수록 남의 치부만을 들추어냅니다. 그래서 잠언 20장 19절에서는『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새게 하는 사람이니, 입을 벌리고 다니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한담을 즐길수록 상대방을 비난하는 험담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한담하지 말아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비판 대신 희망을 말을 하는 자가 됩시다. 깎아 내리는 자가 아니라, 높이 세워주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그는 어떤가’에서 ‘나는 어떤가’로 관점을 돌리자. 사람은 자기가 표준이 되면 비판적이기 쉽습니다. 주님 앞에서 나는 어떤가를 수시로 물어야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의 실수를 볼 때 먼저 자기를 돌아볼 줄 알고, 또 두려워할 줄 압니다.(갈라디아서 6:1) 쭉정이 일수록 남을 내려다보고, 알곡일수록 자신을 내려다봅니다. 특히 성숙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자기 허물을 정당화하려고 남의 약점을 침소봉대합니다. “가랑잎이 솔잎보고 바스락거린다고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고어에도 “자기 집 두레박줄이 짧은 것은 탓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이 깊은 것만 탓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일에는 바늘 끝처럼 예민하면서 자신에 관해서는 바다처럼 관용을 베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다른 사람을 엄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일수록 주님으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고, 너그럽게 헤아려주는 사람일수록 주님으로부터 너그러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지시켜 줍니다. 누가복음 6:37에서는 비판하지 않으면 비판받지 않고, 정죄하지 않으면 정죄 받지 않는다고 가르쳐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의 허물을 고쳐 보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쉽게 비판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 사람의 실수나 허점을 보더라도 ‘나는 어떤가’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자기를 살핍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자는 영이 맑아지고, 밝아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냉혹하게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대신, 가슴 깊이 품어주고 세워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즉 비판 대신 희망을 심어주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영국 런던이 첫 번째 폭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런던에 있던 모든 언론계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때 한 저널리스트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영국 언론은 사회에 대하여 아주 예리한 비판적 안목을 가진 언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판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시(戰時)이고 지금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비판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제 잠시 동안만은 희망을 선전하고 희망의 기사를 씁시다. 신문에서 희망을 보게 하여 우리의 현실이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과 희망을 우리 민족에게 주도록 합시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신문 기자들은 그 저널리스트의 말에 모두 합의하여 모든 기사의 논조를 다르게 썼습니다.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실었고 군대에 출정하는 젊은이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러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의 모습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차지했습니다. 또한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희망에 찬 메시지가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영국 국토 전체는 한순간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고 승리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판과 심판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정죄와 파멸만 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판보다는 사랑의 영을 구해야합니다. 희망의 영을 구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6절에서 수준 높은 덕성과 영성을 정립시켜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판이 매우 거룩하게 보인다할지라도 그것을 정당화 내지 합리화만 시키면 결국은 나 자신과 이웃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만다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때로는 예리한 비판이 거룩하고 근엄하게 보인다할지라도 그것은 곧 ‘돼지 코에 귀걸이’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가슴 아픈 상처만 남겨놓고 만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점을 가르쳐주십니다. 거룩한 신학보다는 사랑의 신앙이 더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비판보다는 희망을 심어주자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우리 다같이 따라 하십시다. 거룩한 신학보다는 사랑의 신앙으로, 비판보다는 희망의 말로 서로를 세워주며 축복하자! (기도 초청)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 전체를 다 알지 못하며, 나 자신부터 다른 사람을 비판할 만큼 선하거나 완전무결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비방이나 비난은 사람을 세워주거나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주고, 좋은 관계마저 파괴시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이상 한담을 즐겨서는 안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인 거룩한 신학보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사랑의 신앙입니다. 우리 이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님, 저로 하여금 예리한 비판자보다는 위로와 격려의 말로 희망을 심어주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사람을 끄는 사람 /행20:7-12/ 강문호목사 2015-03-11 12:27:51 read : 117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베를린에서 2시간 반 내지 3시간을 가면 비텐베르그 성이 있습니다. 바로 루터가 농촌 목회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평민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걸어서 5분 정도
사람을 끄는 사람 /행20:7-12/ 강문호목사 2015-03-11 12:27:51 read : 117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베를린에서 2시간 반 내지 3시간을 가면 비텐베르그 성이 있습니다. 바로 루터가 농촌 목회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평민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귀족들만 다니는 귀족 교회가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그 귀족교회 정문에 종교 개혁을 위하여 95개 조항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그 동안 이 성은 공산권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독일이 통일되면서 이 곳은 온 세계인들의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일년에 680만명이 이 곳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만도 70만명이 찾아 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교회 강대상 우편에 루터 묘까지 있습니다. 한 명이 이 곳에 와서 루터 책을 사고, 차를 마십니다. 10만원씩만 쓴다고 하여도 일년에 이 곳에서 사용하는 돈은 6,800억원이 됩니다. 이 곳은 루터 거리, 루터 대학, 루터 까페, 루터 레스토랑등 모두 루터이름뿐입니다. 이 곳 주민 3만명은 대대로 루터 때문에 먹고 사는 이들입니다. 나는 루터 묘를 붙들고 기도할 때에 <사람을 끄는 사람>이라는 말이 영감적으로 떠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끌 수가 있을 가요? 본문을 보면 바울은 분명히 사람을 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드로아에서 7일을 머믈렀습니다. 그 곳에 있는 성도들과 정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내일은 바울이 떠나는 날입니다.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모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바울은 수많은 사람을 끌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모였는 지를 암시하는 말씀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8절에 등불을 많이 켰는 데.....등불을 많이 켰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9절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라는 말씀속에도 사람이 많았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창가에 걸터 앉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10절을 보면 바울의 설교가 길었습니다. 졸음을 이기지 못 하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가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떠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떠들었다는 말을 보니 스데반을 죽일 때 수많은 군중이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행22;23)라고 하였는 데 그 군중들의 떠드는 것과 같은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떠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12절에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받았다고 하였는 데 그 사람들도 무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바울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느 곳을 가든지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목사는 사람을 끌어야 합니다. 성도도 사람을 끌어야 합니다. 교회도 사람을 끌어야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사람을 끌어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도 사람을 끌어야 합니다. 영화도 사람을 끄는 영화가 성행에 성공한 영화입니다. 사회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사람을 끄는 사람일까요? 바울을 보면 어떤 사람이 사람을 끄는 사람인 지 그 비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귀로 들을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바울은 귀로 들을 것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끈 것은 무엇인가 할 말이 있고 온 사람들은 바울로부터 무엇인가 들을 것이 있어서 모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나는 칼기를 폭파시켰던 김 현희와 같이 논산지방 감리교 연합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월요일 밤부터 목요일 밤까지 집회인 데 수요일 오후 2시에 김 현희가 오게 되어 있고 나머지는 내가 인도하는 집회입니다. 내가 집회를 인도하는 시간에는 600석 교회가 보기 좋게 찼을 뿐입니다. 가득 차지 못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 현희 오는 시간에는 온통 그 주변에 교통이 마비되었습니다. 경찰이 동원되고 난리였습니다. 나는 집회 앞자리에 앉아서 “나는 무엇인가?”라고 허탈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들려 줄 것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끕니다. 귀에 줄 것이 있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몰려 듭니다. 따뜻한 말을 하여 주는 사람을 사람들은 찾아 갑니다. 용기있는 말을 하여 주는 사람을 사람들은 찾고 있습니다.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흠모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95개 조항을 걸어 놓은 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었다면 1520년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출판한 것은 종교 개혁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지금까지 제도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 놓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책에서 <만인 제사장론>을 선언한 것은 종교개혁의 원자폭탄이었습니다. 루터는 그 책에서 4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1. 모든 성도는 세례받는 순간 제사장이 된다. 2. 성직자와 성도는 같은 제사장이기에 계급이 있을 수 없다 3. 성도는 이제부터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할 필요가 없다.직접 하나님께 비밀 회개가 가능하다 4. 성직자와 성도는 기능면에서 구분될 뿐이다.성직자는 말씀 선포의 직능을,성도는 세속직분을 감당하여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 줄 때 온 유럽은 루터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몰려 들었습니다. 유럽의 시선은 루터가 움직이는 곳을 따라갔습니다. 쓸데 없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말을 들려주는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 사람들은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일본 최고 제약회사 가네보 회사 회장 미타니야스토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많이 받았기에 그는 제약회사 사장이면서도 일본 전역에서 강사로 그를 부르고 있습니다. 들을 것이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난리들입니다. 그는 그 회사의 인사 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출근하기만 하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책상에 성경을 펴놓고 읽었습니다. 회사에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였습니다. 얼마 후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회사 내에서는 종교 활동을 하지 말아라.” 그는 회사에서 쫓겨 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선언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나를 배반하는구나!” 그리고 성경을 읽는 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그는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결심하였습니다. “내가 회사를 쫓겨 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 마음에 평강이 찾아 왔습니다. 그 후 그는 직장에서 더 열심히 전도하고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성실성을 인정받아서 승진을 거듭하였습니다. 드디어 그 회사의 경영을 총 책임지는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지나온 이야기를 알고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강의 요청이 쇄도하였습니다. 그는 회사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들을 것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인생을 멋지게 살고 감동있게 산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2. 눈으로 볼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바울이 사람을 그렇게 많이 끈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바울을 따라 다니면 언제나 눈으로 볼 것이 많았습니다. 바울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따랐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따른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 데 바울에게는 언제나 표적이 따랐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창가에 걸터 앉았다가 죽은 유두고를 살렸습니다. 19장 바로 앞장에서는 가는 곳마다 바울이 희안한 기적이 따르고 있음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19;11-12) 이렇게 눈으로 볼 것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끌게 됩니다. 루터가 500년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끌고 있는 이유는 그에게도 기적이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가 따랐습니다. 몇 년전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유럽 연합 집회를 인도할 때 루터가 재판을 받은 웜스 국회에 가본적이 있습니다.그런데 그 국회로 들어가는 길을 <루터 바움 스트라세>라고 부릅니다. 루터가 재판을 받을 때 한 할머니와 천주교인이 길거리에서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인은 루터는 배반자라고 못박으며 열을 내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루터가 맞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논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길가운데 꽂으면서 말했습니다. “만일 루터가 올바르면 이 지팡이에서 싹이 날 것이다.” 며칠이 지났습니다.길가운데 꽂아둔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그 나무는 세 명의 어른이 팔을 벌려야 잡힐 정도로 굵고 큰 나무가 되어 길 가운데 있습니다. 그 나무를 루터나무라고 말하고 그 거리를 루터 거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따르는 사람은 사람을 끌 수 있습니다. 덴마크에 갔더니 덴마크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국부 영웅은 그룬드비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신성한 직업인 농업을 강조하면서 온 국토에 농산물을 심기를 권하였습니다. 전 국민이 온 농토에 씨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가물어서 모든 땅이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룬드비 목사님은 기도를 선포하고 온 국민이 기도하는 데 1842년 4월 16일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덴마크에는 해마다 4월 16일을 기도의 날로 정하고 공휴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나는 기도의 날이 있는 나라를 처음 보았습니다. 덴마크가 35,000불 국민소득을 올리고 있는 일등국가가 되었습니다. 눈으로 볼 것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끌게 됩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 큰 교회는 콜롬비아 보고타에 있는 ICM교회입니다. 지금 주일낮 45,000명이 모이고 있습니다. 그 교회가 그렇게 많이 모이는 이유도 기적이 늘 따르는 눈으로 볼 것이 있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카스텔라노스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데 중풍병자 12명이 나란히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났는 데 안수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아직 신유의 역사가 한번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카스텔라노스 목사님은 중얼거리며 기도하였습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나는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겠나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중에 세 번째 줄에 앉아 있는 중풍병자가 간절하게 사모하는 눈빛이 닥아 왔습니다. 그는 영감적으로 그 사람을 하나님이 지목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앞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그 곳으로 쏠렸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까?” “걸어서 가기를 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그는 일어나 걸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들어 왔는 데 그가 휠체어를 밀고 나갔습니다. 그 후부터 이 교회가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눈으로 볼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3. 손에 줄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본문에 사람들이 바울 주변에 모인 이유를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7절에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떡을 떼러 모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송별파티하러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송별파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내일 떠날 것이니까 일찍 쉬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부흥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날이니까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였습니다.그러나 바울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밤중까지 설교가 계속 되었습니다. 밤중이 몇 시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유두고 청년이 졸은 것을 보니 상당히 오래 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진심의 사랑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끌었습니다. 진심은 통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대통령들이 신는 구두는 앨런 에드먼드입니다. 이 구두 회사의 경영자 존 스톨렌워크 이야기입니다. 그는 세가지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1.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파악한다. 2. 고급 구두가 아니라 최고 구두를 만든다. 3.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기업이 된다. 이런 철학으로 미국 최고의 구두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고 구두 회사가 되기까지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1984년 불이 나서 공장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터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구두를 만들던 직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허탈함속에 말했습니다. “다 두 손을 드세요.” 모두가 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 때 그가 말했습니다. “구두 만들어 놓은 제품이 다 타버렸습니다. 구두를 만들 가죽도 다 탔습니다. 공장도 탔습니다. 그러나 구두를 만들 두 손은 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도 잃지 않았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박수를 쳤습니다. 그는 사원들에게 분명한 철학을 주었습니다. 용기를 주었습니다. 희망을 주었습니다. 힘을 주었습니다. 그 회사가 최고의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 회사에 취직하고 싶어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그 회사 구두를 사신으려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매장마다 몰리고 있습니다. 대통령까지 끌어 당겼습니다. 줄 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줄 것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어느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돈이 아쉬울 때에는 그에게 가서 빌려 쓰고 갚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누구나 머리를 숙이고 공손히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항상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으로 북적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 한 사람만은 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화가 났습니다. 그를 만나 물었습니다. “왜 당신만은 나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까?”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돈을 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당신에게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그러면 내 재산을 반을 주면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당신 재산의 반을 주면 당신과 내가 재산이 같은 데 무엇 때문에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그러면 다 주면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당신 재산 다 주면 내가 당신보다 부자이고 당신은 빈 털털이인 데 무엇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당당한 그에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온 동네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신유의 은사로 병든 사람을 살렸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죽은 유드고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사람들은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두 여자가 출연하였습니다. 사실은 원수지간입니다. 한 여자가 알콜 중독자로 운전을 하다가 마주 앉아 있는 다른 여인의 딸을 치어 죽게 하였습니다. 가해자 여자는 딸을 셋 두었습니다. 그러나 알콜 중독되어 세상을 멋대로 살아가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딸을 죽였지만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오히려 술을 끊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요?”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찍이 주님이 나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여야 합니다. 나는 내 딸을 치어 죽인 저 여자를 용서함으로 주님의 용서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나는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눌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용서하고 사랑을 주는 사람은 사람을 끄는 사람이 됩니다. 고양이는 따뜻한 곳에 편안하게 두 다리를 뻗고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뜻한 사람, 무엇인가 주는 사람에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끄는 사람, 사람을 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고 어떤 교회가 사람을 끌 수 있을 가요? 1. 귀에 들을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2. 눈에 볼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3. 손에 줄 것이 있는 사람이 사람을 끕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 /눅16:19-31/ 주준태 목사 2016-09-24 14:28:43 read : 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공자에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공자 왈, “이 세상 삶도 다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리요?” 이로 보건대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이 세상의 처세술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전에 먼저 종교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참 종교는 정확하게 내세관을 지도합니다. 불교는 이 세상을 사
삶과 죽음의 의미 /눅16:19-31/ 주준태 목사 2016-09-24 14:28:43 read : 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공자에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공자 왈, “이 세상 삶도 다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리요?” 이로 보건대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이 세상의 처세술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전에 먼저 종교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참 종교는 정확하게 내세관을 지도합니다. 불교는 이 세상을 사파세계, 108번뇌의 세계로 봅니다. 그래서 불성을 따라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 종교의 특성은 애매모호한 내세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참된 생명의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이미 천국을 소유했으므로 이제 그 확실한 천국을 이 지상에 가져오는데 초점을 둡니다. 불교는 차세에서 내세로, 기독교는 천국에서 지상으로, 하나는 세상종교요 하나는 천국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온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음입니다. 천국이 믿는 자의 가슴에 임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인간의 자력에서가 아니라 타력,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불교는 염불을 외워 무언의 세계로 가는 나무아미타불의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의 종교입니다. 최근 Times지에서 떠들썩하게 취급한 Raymond A. Moody 박사의 “Life After Life, 사후의 생명”에서 죽음의 근처에 가 본 사람들의 체험을 여러 면에서 조사한 바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자신의 시신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볼 수 있고, 잠정적으로 그 영체가 인격적인 빛을 만나고 곧 평화를 맛보는 것이 보편적인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 체험이 고후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들어갈 때 내가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몰랐다는 표현과 대단히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Moody 박사의 연구는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어떤 느낌을 줄 뿐, 죽음 근처에서 본 그것이 사후세계의 전체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를 떠날 때 터널을 통과하는 듯 한 느낌 또는 어떤 세찬 소용돌이를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빛 속에서 보는 영체들인 천사들의 환영을 받게 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 아무도 갔다가 돌아온 적이 없는 천국의 상급이 있고, 지옥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러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인간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한 결과로 주어진 형벌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의 뿌리는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점에서 하나님과 절대 분리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인간의 본체시고 사람은 운명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가 사랑의 관계에 있지 않고, 믿음과 신뢰의 관계에 있지 않고, 소망과 기대의 관계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실상 죽음의 관계입니다. 종교란 사실, how의 문제를 취급하는 방법상, 기술상의 문제를 취급하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why, 의미상, 인격상 문제를 취급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 이것은 근본적으로 의미상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천국에서나 지옥에서나 영생합니다. 영원한 데서 태어난 인생은 절대로 멸절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긍정적이지 못한 관계는 죽음의 관계요, 멸망의 관계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적극적인 교제가 있는 관계는 영생의 관계요, 생명의 관계입니다. 사람만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한 중학생이 제게 물었습니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글쎄” “내 바지를 누가 가져 갔노?” 그러나 인간은 죽음과 삶을 생각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죽어야 하나, 살아야 하나?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햄릿의 입을 통해 고뇌하는 인간을 부각시킵니다. 이 삶과 죽음은 근본 종교적인 문제요,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 삶을 자연과학이나 의학에서, 삶과 죽음의 현상 조사에서, 뇌사와 심장사 사이에서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R. Dawkins 교수와 R. Williams 대주교의 토론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고민하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거기로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여기로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가난뱅이는 천국에 갔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멋대로 산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여기서 첫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옥과 천국, 다시 말하면 인생의 영원한 본향은 사람의 형편과 관계에서가 아니라 이 땅을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돈이나 인력이나 세상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신적 행동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되 어떻게 만나야 되는가를 생각해야 할 수직적인 관계의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둘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땅과 내세는 연속되어 있되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마치 넓은 바다 위를 뛰어오르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영원에서 출생하여 시간선상을 비상하다가 다시금 영원으로 돌아가는 한 순간 그것이 인생입니다. 인간만이 짧지만 영생을 생각합니다. 전 3:11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러나 그 한 순간의 비상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영원을 두고 하나님과 화목할 것인가, 내가 영원을 두고 하나님과 등지고 살 것인가?” 이 영원에 대한 나의 태도를 이 땅 위에 사는 날 동안 결정해야 합니다. 이 운명적은 결단은 감추어진 영역에서, 찬송의 영역에서, 결론의 영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지만 나타난 영역에서, 실제의 영역에서는 인간이 결단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따라 영생을 선택할 수도, 영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할 수도, 하나님을 끝까지 시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 4:7, 신 6:16) 하나님을 시험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창 2:17)!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하던 마귀와 함께 영원한 형벌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 3:31-36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명하신 법칙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예수님 자신이 말씀해 주심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 신자들이 서 있을 유일한 반석입니다. 우리는 천지는 무너져도, 세상은 변해도, 주의 약속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치 않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는 자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더 많이 벌고 출세하고 즐기는 곳으로 끝나는 장소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과 죽음을 선택하는 장소입니다. 그러한 질적인 삶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성령만이 믿는 자의 가슴속에 비취어 알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의 죽음의 현상을 넘어서 영원한 본향으로 갑니다. 영혼은 바로 가고, 육체는 변함을 받고 갑니다. 그리고 그 장소는 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 곧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누리는 세계요,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 곧 저주와 분리와 불신의 세계 곧 단테가 말한 loveless, hopeless, 사랑도 소망도 없는 세계입니다. 인간이 죄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멸망을 선고받아 천국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주가 오셔서 당신께서 친히 천국 가는 길이 되시고 진리와 생명이 되심으로써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셔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운명적으로 지고 있는 두 가지 멍에를 보셨습니다. 그 하나는 고독의 멍에요, 또 하나는 죽음의 멍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고독과 죽음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랑과 부활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자신이 삶과 죽음, 세상과 천국 사이에 살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빌 1:20-24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나는 죽기를 원한다, 죽어 천당 가는 것이 고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지고 담대한 표현입니까? 그는 삶과 죽음의 고민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극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 믿는 자의 삶과 죽음의 의미가 되십니다. 그분의 약속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도 귀중히 보시고, 죽음은 더 귀중하게 취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믿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지금도 주의 사자들이 믿는 이를 둘러 진치고 있지만, 내가 육체를 벗어날 때 몸의 눈이 보지 못하던 천사들을 보고 그들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서 주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시 116:15과 34:7의 말씀입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할렐루야! C. Dickens는 두 도시 이야기를 썼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두 도시의 시민이요, 시민권 소유자입니다. 빌 3:20-21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지난 2. 23일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진화론 대 창조론의 Richard Dawkins 교수와 Rowan Williams 캔터베리 대주교 사이에 토론이 있었습니다. Dawkins가 대담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물리학자들을 통해서 세계와 우주 그리고 생명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의 설명은 무에서 시작한다. 아주 명쾌하고 매력적인 설명 아닌가? 왜 신이라는 혼란스러운 존재로 이 명쾌함을 어지럽히려고 하는가?” 대주교가 겸비하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상황들 속에서 세계는 신이 디자인했다는 유신론적 설명과 인간의 진화, 이 두 개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거대 이론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저는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나라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모호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두 개의 나라를 창조하고 다스립니다. 이곳에서 저 곳으로, 저 곳에서 이곳으로 아무도 건너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혼란스럽지도 않고 질서정연한 나라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15:50). 그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상속하는 나라입니다. 믿음의 기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장, 히 1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바랬고, 구체적인 약속의 땅을 사모했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만세 전에 특별히 준비하신 복된 기업의 땅입니다. 이 땅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온전한 영적 유대인, 아브라함의 후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의 땅 가나안은 신약적인 개념으로 영원한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만 살다가 죽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안내해 주고, 주 예수께서 반겨주시며, 온전해진 뭇 성도들과 풍성하고 품위 있는 교제를 나누는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의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이 땅 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잘하고 있는 일에는 삶의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계속 잘하시길 바랍니다. 첫째, 전도사랑방의 발전입니다. 우리 교회 전도사랑방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주도적으로 개설하기도 하고 혐조하기도 합시다. 봄 전도사랑방을 통하여 더욱 은혜로운 삶을 아름답게 물들입시다. 둘째, 주중 절기가정예배의 실천입니다. 금년 상반기에 준비하여 하반기부터 실시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주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시 90:12, 17). 할렐루야!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 /삿13-16/히11:32-33/ 김명혁목사 2015-02-01 17:36:22 read : 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가 고등학교 학생이었을 때 삼손에 관한 영화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두 눈을 뽑힌 삼손이 거대한 다곤의 신전을 두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 /삿13-16/히11:32-33/ 김명혁목사 2015-02-01 17:36:22 read : 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가 고등학교 학생이었을 때 삼손에 관한 영화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두 눈을 뽑힌 삼손이 거대한 다곤의 신전을 두 팔로 기둥을 밀어서 무너뜨리는 신나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흥분된 마음으로 박수를 치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 사사기 13장부터 16장까지 기록된 삼손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는 고등학생 때 지녔던 흥분된 감정과는 정 반대의 감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흥분된 감정이 아닌 서글픈 감정이었습니다. 삼손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라는 서글픈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만드신 특제품이었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 심판을 받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사라는 인물로 특별하게 만드신 특제품이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삼손을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태아 교육까지 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찌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찌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삿13:3,4). 태어날 때부터 삼손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셨습니다. 장성한 다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셨고 그래서 큰 힘을 지니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아주 큰 힘을 가진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특제품으로 사사로 만들어진 강한 사람 삼손이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무절제한’ 삶을 살았습니다. ‘천방지축의’ 삶을 살았습니다. ‘못 말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삶의 모습을 잠시 그려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특제품으로 만들어 주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고, 특별한 은사까지 부여해주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무절제한’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선물로 주신 성령의 은사들만을 믿고, 강한 힘을 자랑하면서, 자신들을 대단한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내세우면서, 고삐 풀린 망아지들 같은 무절제한, 물욕과 정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서글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서글퍼 하는 대상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저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태어날 때부터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시고 그리고 아직까지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고는, 똥 배짱을 지니고, 제 멋대로 무절제하게 살아가는 서글픈 인간이 삼손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므로, 저는 삼중적인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인간인 삼손을 바라보면서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모순되는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삶을 살고 있는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가장 슬픈 서글픔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는 은혜로운 설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는 서글픈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을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그저 서글픈 마음을 지니게 된다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아내로 삼기 위해 딤나로 내려간 이야기 입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삿14:1,2). 삼손의 부모가 삼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삿14:3a) 그러나 삼손은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딤나에 내려가서 불레셋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삿13:3b) 4절의 말씀이 마치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한 일이 옳은 일이었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그러나 이 말씀이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한 일이 옳았다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여기 이른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 이라고 함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율법의 말씀도 무시해가시면서 필요한 일을 성립시킨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사람인 삼손이 이방 여자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함이다. 그가 끝까지 그 여자를 취하겠다고 고집한 것은 그의 잘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을 계기로 하여 그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는 경륜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한 사건도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이다. 나실인 삼손이 불레셋 여자를 취하는 것은 나실인의 법도 범함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당장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로 참으시며 그를 사용하셨다.”(박윤선 목사). 결국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서 불레셋 여자를 아내로 취한 사건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무절제한 행동을 한 사건이었습니다. 옳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가서 블레셋 여자를 아내로 삼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7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잔치를 베푸는 동안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수수께끼를 풀면 옷 30별을 그들에게 줄 것이고 풀지 못하면 그들이 삼손에게 옷 30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온 것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아무도 그 수수께끼를 알아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를 꼬이고 협박해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라고 했습니다. 삼손의 아내가 울면서 삼손에게 답을 알려달라고 애걸했고 결국 삼손은 그 답을 알려주었습니다. 제 7일 되는 날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와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 맞추었습니다. 삼손이 화가 났습니다. 그들이 아내를 협박하고 꼬여서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 맞춘 것을 알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스글론이란 곳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30명을 쳐 죽이고 그들의 옷 30벌을 빼앗아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천방지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방지축의 삼손을 버리시지 않고 자기의 신을 그에게 부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저 자만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화를 내면서, 아내를 버리고 아비 집으로 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아내로 준 것을 알고는 다시 화가 나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불레셋 사람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단과 곡식과 감람원을 모두 불 살라버렸다고 했습니다. 후에는 자기를 잡으려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오는 불레셋 사람들을 나귀의 새 턱뼈를 가지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쳐서 죽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삼손을 불레셋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셨지만, 삼손은 인격도 없고 신앙인의 모습도 지니지 못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신을 계속해서 삼손에게 부어주셨고 삼손에게 마실 물까지 솟아나게 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삼손을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둘째, 삼손이 가사에 가서 기생에게 들어간 이야기 입니다.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강한 사람 삼손은 정욕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인, 제 멋대로 무절제하게 행동한, 천방지축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이 기생의 집에 들어가면서 아마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도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갔으니 자기도 얼마든지 기생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이 기생의 집에 들어간 것은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한 것이었고, 삼손이 기생 집에 들어간 것은 기생과 하룻 밤을 즐기려고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삼손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절제하게 행동한 못 말리는 인간이었습니다. 삼손이 가사에 와서 기생의 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가사의 불레셋 사람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그리고 성문에 사람들을 매복해서 밤새도록 지키다가 새벽에 삼손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밤 중에 일어나서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산 꼭대기까지 도망을 갔다고 했습니다. 삼손이 밤중에 일어나 큰 힘을 발휘한 것은 아직까지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 증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못 말리는 삼손을 바라보시면서 속이 많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삼손과 같이 무절제하게 행동하는, 못 말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욕과 정욕에 사로잡혀 부도덕한 행동을 뻔뻔하게 하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강함을 믿고,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들을 자랑하면서, 제 멋대로 무절제하게 행동하는, 못 말리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버리시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부끄러운 지도자들과 일반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탄식할 일이고 슬퍼할 일입니다. 셋째, 삼손이 소렉 골자기로 가서 들릴라 라는 여인을 사랑한 이야기 입니다.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자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삼손은 육체의 사람이었고 정욕의 사람이었습니다. 들릴라는 여인을 사랑하다가 삼손은 몸도 빼앗기고 마음도 빼앗기고 정신도 빼앗기고 영혼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들리라의 네 번에 걸친 애걸과 애교에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예쁜 여자를 믿을 수도 없고 힘센 남자를 믿을 수도 없다는 서글픈 사실을 실감합니다. “삼손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았으며 어떻게 하면 삼손을 결박할 수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애걸을 하는 예쁜 여자 들리라에게 삼손은 세 번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 찍어 너머지지 않는 장사가 없다는 말대로 삼손은 네 번째 애걸에 너머지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큰 힘이 자기 머리 털에 있다는 비밀을 들릴라에게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삼손이 들릴라에게 그 비밀을 공개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그리고는 예쁜 여자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단 잠을 자다가 그만 머리 털을 밀리우고 말았습니다. 결국 삼손은 나실인의 신분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가장 슬프고 가장 비극적인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오래오래 참으시던 하나님께서 결국 삼손을 버리시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그런 비극도 알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영적으로 마비되었습니다.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비극적인 결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슬프고도 비극적인 처지에 이르게 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실인의 서약을 이미 어기고서도,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의 서약을 이미 어기고서도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와 함께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삼손은 큰 힘을 잃게 되었고 두 눈이 뽑혔고 놋줄로 매임을 당했고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는 불행과 슬픔과 비극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삼손은 불레셋 사람들의 조롱감이 되었고 조소감이 되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은 다곤의 신전에 모여서 다곤 신이 자기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말하면서 다곤 신에게 찬송을 부르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조롱하고 모독했습니다. 삼손은 다곤 신전에 모인 삼천 여명의 불레셋 사람들 앞에서 재주까지 부렸다고 했습니다.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불레셋 모든 방백도 거기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명 가량이라 다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삿16:27). 얼마나 서글프고 얼마나 비극적인 장면인지 모릅니다. 삼손의 ‘무절제하고’ ‘자유분방한’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행동이 가져온 이스라엘의 비극이었습니다. 사사 “기드온의 이김의 이야기”와 비교할 때 사사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가 얼마나 서글픈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삼손은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의 불행과 비극의 마지막 정점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불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16:28). 하나님께서 삼손의 마지막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의 마지막 부르짖음에 항상 귀를 기울이십니다. 삼손에게 다시 한 번 큰 힘을 부어주셨습니다. 집을 버티고 있던 두 기둥을 삼손은 두 손으로 밀어서 무너뜨렸습니다. 결국 다곤의 거대한 신전이 무너져서 그 집안에 있던 삼천 여명의 불레셋 사람들이 모두 무너지는 집에 깔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삼손도 함께 깔려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불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동시에 정욕에 따라서 무절제하게 제 멋대로 살던 삼손에 대한 심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삼손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의 타락은 하나님의 벌을 받을만한 것이었다.” 물론 삼손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의 타락에 대한 벌을 받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삼손의 서글픔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삼손은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사의 사명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천방지축의, 못 말리는, 무절제한 삶을 살다가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도 못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을 완전히 몰아낸 사람은 마지막 사사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삼손의 못 말리는 이야기”와 “삼손의 서글픔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삼손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들을 받고서도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무질서하게 제 멋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오늘의 못 말리는 이야기와 서글픔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삼손의 타락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삼손을 바라보시고 슬퍼하시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도 얼마나 속상해 하시고 얼마나 슬퍼 하실까를 생각해 봅니다. 새벽마다 여러분들과 함께 데살로니가전서를 읽고 있는데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기쁨과 감사와 사랑과 자랑과 보고싶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과 자랑과 보고싶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속상함과 서글픔과 탄식과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 아침 너무 서글픈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며칠 전 제가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니게 된 서글픔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설교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당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깨진 질그릇 같은 부족한 죄인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서글픔의 대상에서 기쁨의 대상으로 바뀌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탄식의 대상에서 자랑의 대상으로 바뀌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판의 대상에서 축복의 대상으로 바뀌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새벽기도의 능력을 얻자 /출14:21-31, 계2:4-5/ 박한응목사 2017-09-04 13:56:43 read : 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어느새 7월도 셋째주일입니다.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이 시간도 한량없는 은혜와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벌써 금년 절반이 다 가고 7월도 중순입니다. 그 동안 바쁜 농번기를 지내오면서
새벽기도의 능력을 얻자 /출14:21-31, 계2:4-5/ 박한응목사 2017-09-04 13:56:43 read : 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어느새 7월도 셋째주일입니다.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이 시간도 한량없는 은혜와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벌써 금년 절반이 다 가고 7월도 중순입니다. 그 동안 바쁜 농번기를 지내오면서 우리 창정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많이 침체되었습니다. 그 한 예로 새벽기도의 열이 식었습니다. 떨어진 신앙, 침체된 믿음을 다시 회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어디서 떨어졌는지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우리 창정교회의 성도들도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기 전에 어디서 떨어졌는지 잃어버린 열심과 믿음을 다시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새 힘을 얻고 날마다 시간마다 충만한 은혜 안에서 생기 넘치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거의 모두 새벽에 역사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이 새벽에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왜 새벽기도를 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새벽기도를 하면 어떤 은혜를 받게 되는가? 이 시간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생기의 바람이 불어 위로부터 은혜와 새 힘을 얻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한 심령도 이 시간을 사탄에게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목하여 강단을 보시기 바랍니다.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베드로를 똑바로 주목할 때 그의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습니다.(행3:3-6) 여리고성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고 급기야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눅10장)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볼 때에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5) 이 시간도 여러분들의 신령한 눈이 열려져서 하늘 보좌를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옛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침(새벽)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특별히 적합한 시간으로 생각하여 왔습니다. (시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루가 시작되는 은밀한 시간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의무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고유한 특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 나만의 교제의 시간입니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그날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날의 첫 시간을 기도로서 시작하며, 새벽에 주님과 교제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권이고 의무입니다. 새벽에 우리들의 온 영과, 혼과, 육이 하나님께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제일 큰 유익을 주는 행위이고, 사탄 마귀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잠시도 분리시키지 못하게 하는 은총의 순간 인줄 믿습니다.<아 멘!> 새벽 시간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몰두할 수 있는 최고의 좋은 시간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이 없이는 한 순간도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새벽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와 울부짖어 기도할 때 하루 온 종일 하나님과의 동행을 할 수가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남은여생이 헛되게 낭비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영적으로 거지와 같은 신세가 되어서 인생의 찌꺼기와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서 날마다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천국 잔치에 아름다운 영적 옷을 입고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풍성한 만나를 먹고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바로 새벽기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 입은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고,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생수를 마시면서 광야생활을 잘 하였습니다.(신8:4) 이와 같이 오늘의 우리들이 하루의 삶 속에서 아니 일생의 삶 속에서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으며, 양식이 핍절치 않는 가나안 정복의 기적의 역사는 바로 새벽 시간에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알 것은 * 하루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놀라운 영력(Spritual Power)이 새벽기도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계신 주님을 향한 열망의 불도 새벽기도에서부터 타오릅니다. * 자신의 약한 것을 깨닫고 강한 힘을 얻는 것도 새벽기도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 근심과 공포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가는 담대함도 새벽기도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 안일과 쾌락의 파멸과 멸망의 넓은 길을 가다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생명의 길을 발견하는 좁은 길을 가는 것도 새벽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의 능력도, 새벽기도를 통하여 얻을 수가 있습니다. * 깨끗한 마음과, 고상하고 경건된 심령도, 새벽기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멘> 새벽 시간에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는” 생명의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이 예속되는 축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 왜 새벽기도를 해야 하는가?(필요성) 새벽 한 시간 나의 모든 것이 성령의 지배 아래 사로잡힐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세주이신 것”(마16:16)을 고백할 수가 있고 “내게 능력 주시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하는 영적 자부심과 영적 자신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①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시작할 때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어 나를 강하게 하시고 ②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바칠 때 주님께서 내 앞에 계시어 나를 붙들어 주시며 ③ 하루의 첫 시간을 간구로 시작할 때 주님이 나를 보호해 주십니다. ④ 하루의 첫 시간을 깊은 명상으로 시작할 때 하나님은 나를 붙들어 주시고 ⑤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서 천국 문을 두드리며 시작할 때 하늘 문을 열어주십니다. ⑥ 하루의 첫 시간을 회개로 시작할 때 용서와 위로를 주시고 ⑦ 하루의 첫 시간을 부르짖음으로 시작할 때 주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나의 곁에 계시어 나를 지켜 주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길에 가장 좋은 시간이 새벽 시간입니다. ″ ″ 가장 귀한 시간도 새벽 시간입니다. ″ ″ 가장 복된 시간도 새벽 시간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시 57: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제부터는 우리 모두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이 귀한 새벽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허송세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새벽을 깨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아 멘!> 새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이 시간 주님께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다 같이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의 약함을 도우사, 강하게 하시고, 날마다 새벽마다, 하나님을 앙망 하면서,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옵소서” <아 멘> <찬385장> 1 못 박혀 죽으신 하나님 어린 양 믿습니다 죄 속함 받고서 이 몸과 맘 드려 간절히 빌 때에 들으소서 2 풍성한 은혜로 약한 맘 도우사 열심 주고 날 대속했으니 주 사랑하는 맘 불같이 뜨겁게 하옵소서 3 이 세상 어두워 길 찾기 곤하니 인도하사 그 밝은 빛으로 환하게 하시고 내 슬픈 눈물을 씻기소서 4 내 생명 꿈같이 이 세상 떠날 때 부르시고 사랑을 베푸사 평안케 하시며 영생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고단하고, 피곤하고, 뭐가 어떻고, 하는 핑계로 자신의 나태하고 게으른 것을 합리화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는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믿음 좋던 사람이 믿음이 식어지고 타락하는 과정을 보면 제일 먼저 새벽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저녁예배를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온갖 불평을 합니다. 예배 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매일 새벽기도를 해야 1주일에 11시간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대학을 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노력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그들은 오르지 대학을 가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얼마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내 볼일 다 보고, 내 할 일 다 한 뒤에 시간이 남으면 교회에 오고하는 안일한 생각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역사상 유명한 신앙가들은 모두가 새벽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새벽기도를 철저히 하셨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게 됩니다. 나도 청소년기에 나의 인생의 갈 길에 대하여 방황하고 있을 때에 새벽기도에서 은혜를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장 무서운 죄가 무슨 죄인지 아십니까? 살인하고 강도짓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도하지 않는 죄입니다. 가장 어설프고 형식적인 믿음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믿음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실수는 기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타락은 새벽기도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새벽기도를 잃어버릴 때 그 사람의 믿음은 점점 식어지고 마침내는 헤어날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내리 달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제부터 자신의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의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나아가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새벽기도 하는 성도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 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할렐루야!! 가장 심각한 파멸과 파산은 사업이 망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침체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도 식어버리고, 또 신앙생활에 대한 의욕도 상실해 버린, 텅 빈 영혼, 껍데기만 남아 있는 형식적인 믿음은 가장 큰 수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항상 기쁘게 하는 마음도 새벽기도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영적 능력도 새벽기도에서 얻는 것입니다.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삶의 자원도 새벽기도에서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감격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삶의 소망도, 생활의 승리도, 기적의 손길도, 새벽기도에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새벽기도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특히 농촌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참으로 새벽에 일어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마치 등산가들이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새벽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잠자리를 뛰쳐나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새벽에 잠자리에서부터 승리를 하여야 합니다. 시편5:3절 말씀 “여호와여 새벽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새벽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람들이 새벽기도를 잃어버렸을 때 ① 인생의 제일 귀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제일 귀한 역사를 잃어버리고 ③ 능력을 잃어버리고 ④ 빈껍데기만 남은 인본주의로 전락해서 ⑤ 빈 깡통같이 소리만 요란하게 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신자들이 새벽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새벽기도는 아예 저 먼 나라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새벽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저들의 마음속에 영적 풍요로움과 평화가 없이 미움과 시기와 원망과 불평이 저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깨달은 우리 창정교회 성도들은 내일 새벽부터 하나님 앞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합니다.(시121:1) 새벽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앞만 향하여 달려 나갈 때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인생의 최선의 길이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설계하시기 바랍니다.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창정교회 성도 여러분!! 오랫동안 새벽기도를 잃어버렸던 심령이 오늘 이 시간 다시 회복되어서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간구하기를 결심하는 여러분들의 믿음 위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성도 여러분!! 가장 무서운 죄는 기도하지 않는 죄입니다. 가장 어설픈 믿음은 하나님과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큰 실수는 기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장 치명적인 타락은 새벽기도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새벽기도를 잃어버릴 때 하늘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삼손이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에 눈이 뽑히고 혀가 잘리고 이방 나라의 우상 앞에서 연자 맷돌을 돌리면서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2. 새벽기도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새벽기도를 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새벽기도를 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새벽기도를 하면 어떤 능력이 나타나는가? (1) 새벽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시46: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2) 새벽기도를 하면 온갖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길을 며칠 가다보니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천명 2천명도 아니고, 만 명 2만 명도 아닌 적어도 2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어떻게 광야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새벽마다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할렐루야!! (3) 새벽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나왔을 때에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기병대가 추격을 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밤새 동안 동풍이 강하게 불더니 새벽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벽에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4)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새벽에)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삼상 3장에는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잠을 잘 때에 새벽에 하나님이 임하여 서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삼상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새벽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야곱이 20년 만에 하란 땅 외삼촌의 집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새벽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이 엄청난 새벽기도의 비밀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벽기도의 능력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가 새벽에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새벽에 놀라우신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여 생동감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새벽기도는 자기희생입니다. 희생 없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희생 없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희생 없이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제부터 나의 가장 귀한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나의 가장 귀한 생각을 주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날마다 날마다 기쁨과 은혜 안에서, 승리하는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다 같이 찬송을 한 장 부르겠습니다. <찬380장 1절> 나의 생명 되신 주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의 흘린 보혈로 정케하사 받아 주소서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아 - 멘!> 이제부터 잠든 영혼, 침체된 신앙, 형식적인 믿음에서 깨어납시다. 이 시간 새롭게 결심하고 깨어나는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의 단비가 흡족하게 내려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성도가 마지막 붙들고 의지해야 할 것이 바로 새벽기도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영혼의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새벽에 너를 도와주리라 아-멘! 새벽에 너를 만나주리라 아-멘! 새벽에 너와 함께 하리라 아-멘! 새벽에 너를 붙들어 주리라 아-멘! 우리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믿고 의지하세요. 이제는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성도여 일어나라 주께서 새 힘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실패와 좌절과 낙망 가운데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나태와 게으름에서 이제는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습관과 관념에서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죄악과 어둠에서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질병과 고통에서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환난과 고난 중에서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막2:11, 요5:8) 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의로운 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이 하나님의 은총이 오늘 새롭게 결심하고 새 출발하는 우리 창정교회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