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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의 광야 여행/ 눅4:1-13
40일의 광야 여행 눅4:1-13 6.25전쟁이 막 끝난 때의 일입니다. 저녁에 군사지역을 통과할 때는 암호를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날의 암호가 열쇠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골출신 군인이 갑자기 ‘손들어 뒤로 돌아서!’ 라는 명령에 그만 암호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이 떠올랐습니다. ‘쇳대!’ 그러자 군인은 그를 헌병대에 넘겼습니다. 아마 보초서는 군인은 서울 사람이라서 열쇠가 구호인데 쇳대라고 하니 무슨 말인지 모른 것입니다. 시골군인은 맛는디~~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헌병대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똑같은 말인데 못 알아들으면 고통이 심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축복된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인간은 고통을 당합니다. 누군가가 통역하여 양쪽에 다리를 놓아서 잘 알아듣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 희생의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시험당하는 사건이 사로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번 주가 바로 예수님의 40일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주간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40일 기도도 하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지냅니다. 물론 고난은 힘든 것이요, 생각하기 싫도록 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부활로 연결하는 필수 과정이기 때문에 꼭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시험을 받으셨을까요? 거기는 다름 아닌 광야입니다. 1. 광야입니다.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광야입니다. 광야는 물이 없는 곳입니다. 식물이 자라기 곤란한 메마른 땅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성지 순례를 마치고, 예루살렘을 떠나 카이로로 향하여 출발하던 때의 일입니다. 사해바다를 지나 에일랏 국경소까지는 계속되는 허허 벌판 광야였습니다. 몇 시간 동안 계속되는 여행에서 창가에 비치는 광야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합니다. 허허 벌판에 식물다운 식물은 없고 가시나무만이 있는데 그 서있는 모습이 자기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라 애처로워서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뙤약볕이 내려 쬐이는 현장에서 홀로서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꼳꼳 하게 서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나뭇잎은 없고 가시만 빽빽이 둘려 있습니다. 땅은 뜨거운 열기만이 올라옵니다. 저곳도 비가 오면 꽃이 피어 향기가 날텐데… 저기도 메시야가 필요합니다.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닙니다. 경제적인 메시야도 아닙니다. 인류가 타락하여 굳게 닫혀버린 하늘 문을 열고 생명의 단비를 주시는 길만이 신천지를 이룰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수천 수년 동안 하늘의 은총을 얻지 못하고 저렇게 목말라 하는 광야, 일생동안 한번도 비가 내리지 않아 메말라 버린 강팍한 마음…. 한번만 성령의 단비를 주시면 저 나무들이 싱싱하게 자랄 수 있을텐데.. 저 인생이 꼭 자기 인생 같더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성령의 단비만 내려주신다면 내 인생도 낙원이 될텐데… 성령의 단비를 나의 마음의 대지를 적시면 내 인생도 행복할텐데… 저 광야가 자기의 마음의 인생 같아서 하염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동생을 위해 돌잔치를 해주었습니다. 마룻바닥에 쌀, 돈, 공책, 실, 연필, 쭉~~ 놔두었습니다. 아이는 무엇을 잡을까? 하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치를 아이가 공책과 연필을 잡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두리번두리번 할 때 엄마는 아이를 공책과 연필을 잡도록 유도를 합니다. 그랬더니 동생이 공책과 연필을 잡았습니다. 엄마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동네방네 소문내면서 자랑합니다. “우리 아이가 공책과 연필을 잡았다. 학자가 될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슴이 울컥합니다. 자기 어머니와 남의 어머니는 저렇게 다르구나, 나를 보고는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 줄아니? 얼마나 힘든 줄 아니? 이 혀가 만발이나 빠질 놈아!” 라고 말하는 엄마가 자기가 낳은 자식은 연필을 잡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연필을 잡았다고 자랑하다니. 아무런 꿈도 없이 그저 죽지 못해 살 수 밖에 없는 자신, 인생의 꿈이라곤 가져 볼 수 없고, 또 있다 해도 저수지가 메말라서 아무도 물을 채울 수 없고 빼서 쓸 수밖에 없는 인생, 그런데 다행히도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교회 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 교회를 다녔는데 나중에는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목사가 됩니다. 목회를 한다는 이름으로 살다보니 40중반에 들었습니다. 가정을 꾸미고 개척을 하면서 가끔 단비를 내려주셔서 조금씩 마음의 저수지에 채워졌지만 근본적인 해결을 못했습니다. 이제 완전히 인생의 저수지가 메말라져서 밑바닥이 드러난 것입니다. 어느 날 아이가 저렇게 말합니다. “아빠 돈 주세요!” 아무 설명도 없이 아침 학교가려다가 다짜고짜로 돈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마치 은행창구에서 맡겨놓은 돈을 찾아 가듯이 말입니다. 아내는 결혼하고 지금까지 개척교회 지키며 직장 다니며 가정을 지키도록 고생시켰고, 아이들은 저렇게 돈을 달라고 하는데 그 욕구하나 못 들어 주고,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아픔을 가지고 와서 은혜를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 순간 찾아온 절망 어디로 둘러보아도, 사면초가였습니다. “주님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주님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희망이라고는 없어요” 저 광야가 내 마음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고 합니다. 2. 그런 세상인데 마귀는 3가지를 시험합니다. 1)경제문제입니다. 2절 하반 절에 보면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절 읽습니다.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욕구가 인간의 근본욕구입니다. 광야 생활하는 것만도 힘든데 마귀는 거기에다가 큰 짐을 지웁니다. 경제 문제입니다. 어느 가정은 배가 고파서 온 식구가 도둑질로 배를 채웁니다. 사람들은 그것은 죄라고 합니다. 감옥에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감옥에 간다고 해도 일단은 먹어야 하겠다는 것이 현실의 욕구입니다. 마귀는 이것을 잘 압니다. “네가 배고파보니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알지 않겠니? 돌로 떡이 되게 하면 너도 배불러서 좋고 또 백성들도 너를 그리스도, 메시야 왕으로 볼 것이 아니겠니?”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굉장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면 “교회도 배가 불러야 교회 간다고 밥이 나오냐 죽이 나오냐?” 라고 말합니다. 실지로 교외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인생 망하게 됩니다. 십일조를 교회 다니면 꼭 내야 합니다. 이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물질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돈이 돈을 번다고 생각되어서 한 푼이라도 절약하는 그것을 활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돈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돈 때문에 망합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사람은 절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늘 돈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그래서 돈 걱정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믿는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고 살아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니 먹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다’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정신이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경배와 찬양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할 때에 새 힘이 솟아납니다. 의미와 보람을 느낍니다. 행복해 집니다. 그러나 현실은 권력, 권세입니다. 마귀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합니다. 5절에 보면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절 같이 읽습니다. “가뢰되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절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권세와 영광,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민 경찬氏 보십시요. 한달 사이에 650억원을 한손에 모으는 실력입니다. 이유는 대통령의 친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힘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다 속는 것입니다. 인생 망칩니다. 그러나 마귀의 말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속는 것입니다. 3) 요행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성경에 인생은 기본자세는 성실과 정직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과정보다도 결과를 더 좋아합니다. 요행으로 잘되면 모든 것이 잘 된 것처럼 속입니다. 9절에 보면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뛰어내려라.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을 것이다.” 성전이 높은 산위에 있어서 민간인들이 있는 집까지 약 200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높은 위치에서 뛰어내렸는데 다친 곳이 없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 올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요술을 부리면 그들 메시야로, 대통령으로 만들 것입니다. 인기 짱일 것입니다. 그것은 요행입니다. 우리도 그런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불경기에 복권 한 장 사서 10억 당선되면 경기가 확 풀릴텐데 그렇게 바라봅니다. 그러나 당선이 안 되면 굉장한 상처를 받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성실과 정직입니다. (시편 25편) 이 세가지 가장 절박합니다만 가장 현실적인 욕구들입니다. ‘이 세가지를 어떻게 승리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마음 밭은 이미 황폐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세가지 욕구를 챙겨야 합니다. 그런데 시험하는 마귀도 만만치 않습니다. 어떻게 이겨야 할까요? 40일 동안 예수님은 마귀와 입씨름 몸싸움 영적싸움 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예수님이 찾은 해답은 이렇습니다. 1) 4절에 보면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경제 문제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실을 바늘에 꿰어야 하듯이 가장 귀한 것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2) 8절에 보면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겨라” 경배의 문제입니다. 무엇에 인생을 바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업하는 사람들을 보면 돈이 들어오면 항상 돈에다 뽀뽀하는 것을 봅니다. 돈을 귀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돈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합니다. 인생이 경제문제가 중요합니다. 3) 12절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원래 하나님은 찬양의 대상입니다. 경배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를 많이 한 사람은 마음이 맑아지고 언제나 여유가 있고 마음에서 나오는 행복이 있습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는 너를 지도하시리라” 찬양과 경배 속에서 인생의 보물을 다 숨겨 두었습니다. 이 3가지를 가지고 마귀가 시험을 걸어옵니다. 사탄의 말에 아멘하고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고 나갈 것인가, 그것이 영적 싸움인 것입니다. 그것을 말로 해서는 잘 모릅니다. 체험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광야 생활 40일은 사실은 광야생활 40년을 줄인 생활일 것입니다. 아니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나안으로 출발한 이후에 40년 생활입니다. 그래서 유랑민족으로 소와 양 가축을 키우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잘 키워놓으면 블레셋 나라나 이방 민족이 다 빼앗아 갔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바벨론 포로 등 이방나라에 잡혀갔습니다. 객지생활에서 제일 좋은 것은 돈입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리고 땅입니다. 그랬더니 돈을 빠앗아 갔습니다. 땅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돈을 보이지 않는 곳에 투자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요 산성이요 방패요 나의 분깃이라 하고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다녔습니다. 마음에 하나님과 묵상합니다. 그 시간을 제일 좋아합니다. 마음속에 그분과 찬양을 좋아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은 축복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돈이 돈을 번다고 하면서 양떼나 소 떼에 마음을 두었다면 오늘날 그들이 부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새처럼 광우병 걸리거나 닭이 감기 걸렸다면 조류독감으로 장사가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투자하고 그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다녔더니 그들은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게 광야를 통해서 얻은 소득입니다. 머릿속에 놓고 다니니 빼앗아 갈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속에 모시고 다니니 무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늘 내 속에서 찬양하는 하나님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인격도 의존신앙이 아니라 독립적인 신앙이 되었습니다. 작년 가을에 구역장들과 강원도 하늘 공원에 갔다가 가시나무를 사왔습니다 그런데 제방에 두고 두세달 물을 주지 않아도 시들지도 않고 건강하게 꿋꿋이 서있습니다. 지난 가을 사오고는 두 번째로 물을 주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인정해 주는 이없어도 언제나 건강하게 하늘을 보면서 싱싱하게 서있습니다. 한편으로 물을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는데 건강하게 잘 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화초 같으면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혹독한 비바람과 싸우고 더위와 햇볕과 싸우면서 당당히 섰기 때문에 어떤 정황에서도 남의 도움 없이 하늘을 향해 곧장 잘 성장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남에게 풍성한 생수를 제공하는 생수의 공급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만큼 광야 생활을 한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애굽의 광야 생활을 끝낸 후에 하나님이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가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크게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 (창49:24) 이런 축복은 그가 광야 생활 같은 연속의 삶을 통해 터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통과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크신 복을 누리는 그릇이 되게 할 것입니다. 시편66편 10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단현하기를 은과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으로 인도 하셨도다” 이번 사순절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중요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39) 골고다에서 흘리신 주님의 눈물이 제 가슴을 적시어 길가 밭처럼 세상에 시달리고 사람에게 시달린 마음 밭, 온갖 염려와 근심에 찔려 있는 가시밭과 같은 나의 마음밭 은혜를 받을 때는 포근하다가도 세상의 뙤약볕이 비취면 시들어버리고 메말라버리는 나의 마음 밭에 주님의 골고다의 눈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반석을 치면서 기도할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다가 목이 말라 아우성 칠 때였습니다. 모두 다 타는 목마름이 있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반석을 치라 그곳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출17:6) 그물은 곧 예수그리스도라고 고린도전서10장에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침 한끼는 금식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몰입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로 내 가슴을 채워주옵소서.
4월에 부를 노래/ 시3:1-8/ 2008-04-09
4월에 부를 노래 시3:1-8 1. 4월의 노래 4월, 정말 좋은 계절이지 않습니까? 온 산을 분홍으로 물들인 진달래, 이미 진 목련과 그 뒤를 잇는 개나리와 벚꽃과 철쭉의 향연을 보면서, 저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려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 박목월의 시 “4월의 노래”에 김순애가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해마다 4월이 되어 활짝 핀 목련의 자태를 볼 때면, 자연스럽게 부르게 되는 노래이지요. 그러나 한 때 제게 있어서 4월은 아주 고통스러운 달이었습니다. T.S. 엘리엇(Eliot)이 “황무지(The Waste Land, 1922)”라는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데요. 20 몇 년 전,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3월 한 달은 대학과 객지 생활에 적응하느라고 정신없이 보내다가, 4월을 맞았는데, 그 4월은 동료 학생들의 엄청난 시위와 그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의 최루탄, 먹물포탄, 진압봉으로 너무나 어지럽고 복잡한 달이었습니다. 특히 4․19 의거 기념일을 맞아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수유리 4․19 기념탑까지 ‘4․19 기념 마라톤’을 실시했는데, 이 역시 마라톤 대회가 아니라 하나의 시위였습니다. 그렇게 갓 스물의 4월은 끝없이 이어진 시위와 경찰의 무차별적인 진압 등으로 제게는 정말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저처럼, 이 찬란한 4월, 새싹과 꽃들을 보면서 그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기보다는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가정의 심각한 위기로 인하여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고, 남편 때문에 자녀 때문에 우는 이들이 있으며, 갑자기 발견된 몸 안의 종양 덩어리로 충격을 받은 이가 있고, 당뇨 합병증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먹는 대로 설사를 해대는 분도 있습니다. 우연히 넘어져 다친 것 같은데 또 다른 질병이 발견 된 분도 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즐거운 노래보다는 고통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분들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힘들게 4월을 보내는 이들은 생명의 신비와 찬란한 봄과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보다는 삶의 애환을 노래하고, 슬픔과 한숨 속에서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엄청난 삶의 고통에 있었던 한 신앙의 선배의 고백입니다. 그는 그 지독한 삶의 고통의 자리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오늘은 그를 통하여 우리가 불러야 할 이 계절의 노래가 무엇인지를 아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2. 다윗의 노래 1) 가장 고통스러운 때에 오늘 본문은 다윗 왕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본문을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지었습니다. 그때가 다윗의 나이 52세였을 때인데요. 다윗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인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고, 그 반역 때문에 다윗은 가족들과 왕궁과 수도 예루살렘을 버리고 맨발로 도망을 쳐야했습니다. 사실 다윗으로서는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5년 간이 아주 힘들었습니다.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른 후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려고 군 사령관 요압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려 전쟁터에서 그를 죽게 했습니다. 그 후 맏아들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인 다말을 겁탈한 사건이 있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다말의 친 오빠인 압살롬이 그 형 암논을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지요.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압살롬이 도망을 갔다가 3년 만에 다윗의 용서를 받아 궁으로 돌아왔고, 그 후 1년 만에 다시 아버지를 배신하고 스스로 왕이 되겠다며 반역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아들이 자신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한 것도 참기 어려운 현실인데, 다윗으로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것이 더 괴로웠습니다. 그 아들이 자신을 몰아낸 후에, 자신을 죽이려고 끊임없이 추적자들과 군대를 보내고 있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젊은 시절부터 전쟁터를 누비며 동고동락했던 자신의 신하들, 신하라기보다는 친구나 혹은 피로 맺은 형제 같은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그 배신감은 또 얼마나 컸을까요? 그리고 오늘 본문도 짐작케 합니다만, 대부분의 국민들마저도 다윗으로부터 돌아서서 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의 반역 사건은 다윗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밧세바 사건을 범한 후에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칼이 네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12:10)”고 예언했던 것과 관련됩니다. 즉 지금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은 자신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아들과 딸들과 부인들이, 나아가 국민들까지 불행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다윗을 더욱 더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3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지은 노래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다윗은 지금 자신의 적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비해,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적은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여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무리들은 하나님도 다윗을 버려 그를 돕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백성들은 다윗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이렇게 되었으며, 모두들 ‘이제 다윗에게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 ‘이제 다윗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다윗 자신도 갈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범한 그 끔찍한 죄로 인해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과거 밧세바와 우리야 사건으로 지은 죄로 인한 당연한 징벌이라고 자신의 양심조차도 고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다시는 ‘성산’, ‘시온산’,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게 된” 절망적인 상황,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그를 버린 것 같은 상황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다윗의 형편입니다. 희망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부르는 노래 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윗은 과거의 잘못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어딘가 믿을 구석이 있었습니까?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는 영원한 우방인 이웃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누군가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어성경은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나(웨)”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는 점입니다. 즉 다윗은 현재 자신의 사정이 너무나 안 좋고, 모든 사람들이 ‘다윗은 저주를 받았다’, ‘지금 당하는 일은 다윗의 죄로 인한 당연한 벌이다’, ‘이것으로 다윗의 생애는 끝이다’,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라고 말하고, 심지어 자신의 양심조차도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속삭이는 상황에서 다윗은 “그러나”로 3절을 시작한다는 것이죠. “예, 맞습니다.” “저도 견딜 수 없이 괴롭고 부끄럽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지금 말 할 수 없이 괴롭고 힘들고, 저 스스로도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 여호와께서 나를 둘러 둘러 지키시는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방패”란 자신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방패가 군인을 둘러싸고서 모든 무기와 공격을 막아내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패가 되심을 그가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이 들고 다니는 방패는 단지 한 면만을 막아주지만, 성도의 방패가 되시는 여호와는 모든 면을 다 막아 주십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적들과, 대다수의 국민들과, 심지어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들려오는 그 모든 공격을 하나님께서 막아주고 계신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호와(는) ‧‧‧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라고 노래하는데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줄 확신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과거의 죄를 두고 두고 갚으시면서 그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위를 내 아들에게 물려주시되 이런 방법으로는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기를 붙드는 자를 반드시 회복시키신다.’ 이런 확신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같은 의미지만 이러한 다윗의 확신은 4절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聖山)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여기서 “성산”이란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시온산, 곧 다윗 성이 위치한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시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다윗을 어떻게 바꾸어놓았을까요? 말만 그럴 듯 하게 하고 현실에서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러나 다윗의 확신은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5절에서 다윗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다윗이 편하게 잠들 상황이 아닙니다. 비록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거나 악몽에 시달릴 수 있는 상황, 불길하고 무서운 꿈을 꿀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또 밤에 자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압살롬의 모사 가운데 신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인정을 받던 아히도벨이 군대 1만 2천을 거느리고 밤에 다윗을 급습하자고 제안을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이런 천하태평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천만인이 자신을 둘러치려 하여도 그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히 현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다윗이 가졌던 이와 같은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하는 불행이나 어려움이 과거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윗이 압살롬이나 자기를 배신한 친구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다윗이 절망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다시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다윗이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만 의지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를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3) 확신으로 가득 찬 노래 다윗은 7절에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쳐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노래한 다윗은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라고 노래를 잇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원어상 이것이 완료형의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막 반란이 시작된 시점이고, 자신이 황급히 도망하는 가운데 있었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미 원수의 뺨을 치시고 그 이를 꺾으셨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다윗의 소망이며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뺨을 친다”는 표현은 수치스러운 형벌을 내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꺾었다”는 것은 원수가 힘을 잃고 무기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나의 하나님,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이며, 적들을 굴복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확신 때문에 다윗은 가장 괴롭고, 더 이상 희망이 없고,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양심조차도 끝이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확신에 찬 밝고 즐거운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지만, 이 말만큼 추상적인 단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는 믿음은 “소망”입니다. 중세 시대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을 ‘대죄’, 즉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이 힘든 일을 이길 것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수 있으며, 고난 중에 인내하는 것이며, 결국 그가 믿고 바라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화약고라고 하는 중동의 레바논에서 6년 반 동안 인질로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AP통신 중동 지국장 ‘테리 앤더슨’이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레바논의 테러분자들은 앤더슨 기자를 감옥에 가두어놓고 고문하며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서방 세계를 위협할 때마다 처형대상자 명단에 항상 그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앤더슨의 몸은 가둘 수 있을지라도 마음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옛 신앙을 회복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되면서 한 말은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였습니다. 앤더슨 기자는 그 절망적인 상황,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소망은 그에게 믿음을 주었고, 결국 그 소망대로 건강하게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윗이나 신앙의 선배들처럼, 소망의 노래, 즐거운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믿음대로, 그 노래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힘들다고 푸념하면 그 푸념대로 됩니다. 한숨 쉬면 계속 한숨 속에 머물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원망과 불평이 여러분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절망하면 여러분은 정말 절망적인 상황에 계속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노래, 소망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그리하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3. 우리가 부를 소망의 노래 말씀을 맺겠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계절인 이 4월에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외로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오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윗은 가장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배신을 당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동고동락했던 친구들도 배신했습니다. 온 백성들이 자기로부터 돌아서서 압살롬을 지지했습니다. 사람들 뿐 아니라 자신의 양심까지도 ‘다윗은 끝났다’, ‘다윗은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잔인한 현실에서 다윗이 부른 노래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였습니까?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노래였습니까? ‘인생 만사 허무하다’는 허무가(虛無歌)였습니까? 적들을 저주하는 저주의 노래였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을 도우실 것이고,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며, 승리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다윗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왕위에 앉았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왕 앞에서 회개하여 민심을 수습하면서 새로운 출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믿고 노래한 대로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믿음, 이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고난이 심하고, 환난이 견딜 수 없고,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이 크고, 여러분의 양심조차도 손가락질하는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들이 부를 노래는 소망의 노래입니다. 확신의 노래입니다. 그러면 그 노래는 반드시 그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
5종목의 나의 기도/ 다만 제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겠습니다/ 마5:11-12/ 주기철 목사/ 평양 산정현교회/ 1939-02-05
5종목의 나의 기도/ 다만 제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겠습니다 마5:11-12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나는 저들의 손에 몇 번째 체포되어 이번에는 오래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가 이 산정현 강단(講壇)에 다시 서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오며 나를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시던 교우 여러분 앞에서 다시 설교하려 하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설교가 아니고 갇히운 중에서 늘 기도하던 다섯 가지 제목 곧 ‘5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말씀하겠습니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합니다.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의(義)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고자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 하와 범죄 후에 사람은 다 죽습니다. 제왕, 장상, 재사, 가인도 다 죽었고 성현, 군자, 위인, 열사도 다 북망산에 갔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어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열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긴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 권세를 내 발 아래에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과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 각오만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싯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에, 스데반은 청장년의 때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 2. 장기(長期)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대로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 년 십 년 계속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버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끝까지 참는 사람이 구원을 얻으리라”(마4:13)고 신신 부탁하였습니다.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사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아픔 어떠하였으리오! 나와 여러분의 죄, 억만 죄인의 죄 짐을 대신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중대하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핏방울 소리를 우주도 감당할 수 없이 지축(地軸)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8:8).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 불사의 몸이오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길이 참아 주가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라(약5:7).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3.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80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남의 아비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① 자식을 아끼지 아니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이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 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꼬! 춘풍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 고요한 밤 달빛이 철장에 새어들 때, 어머님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시던 주님 심정 어떠하였을꼬! 십자가 밑에서 가슴 치며 애통하는 성모 마리아의 아프신 가슴 어떠하였을까?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나의 어머님을, 80 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②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일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 된 의무를 못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두고 잡혀 다니는 이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 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정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 이 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소서. ③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네 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 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리 어린 것은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끝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에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 떼어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이 내 마음 끝없이 비참합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자식 같은 제자들을 앞에 모으시고 위로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 어린 말씀이었고 교훈하시는 말씀, 말씀이 피 끓는 소리였습니다. 어린 자식과 같이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마음 어떠하셨으리까!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주님께 나의 자식을 부탁합니다. 어미 죽은 어린 것을 주님 품에 부탁합니다. ④ 나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나의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을,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에, 이리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나가지 못합니다. 맡기나이다. 내 양들 다 목자 되신 예수님 손에 맡기나이다. 나의 어머님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을 자비하신 주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주님이 싸매어 주시고 길 잃고 헤매는 자를 주님 손수 인도하여 주시고 낙심하고 범죄 한 자를 주님 보혈로 사유하여 주시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내 마음 차마 못 할 일이올시다.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 지켜주시옵소서. 나의 늙으신 어머님과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나의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떼들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으로 이 산정현 이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자취를 따라가려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에게 짐 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자못 무소불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면 철석같은 마음도 변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주님 따라가는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께 합당치 아니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忠節)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무너지는 한(漢) 나라를 붙잡고 오장원(五丈原)에 스러질 때까지 국궁진쇄 사이후이(鞠躬盡碎 死而後而) 죽기까지 애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교회와 그 의를 붙잡고 국궁진쇄 사이후이(鞠躬盡碎 死而後而)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殷) 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 나라에 살 수가 없어 수양산에 숨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굶어 죽으니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불고 있습니다. 정몽주(鄭夢周)는 망하는 고려 나라를 위하여 선죽교에 피를 뿌리니 대(竹)야 났으랴마는 그 절개 대보다 청청창창 싯푸르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一百 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 되고 넋이야 있건 없건 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이 있으랴 이는 우리 선인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충의대절(忠義大節)입니다. 사람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붙잡고 풀무 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 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여 풀무 불이냐! 예수를 사랑하여 사자 굴이냐! 그 무엇이 두려울 것이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백제 나라의 도미부인(都彌夫人)은 개루왕(蓋婁王)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 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늘 뫼 아래에서 한 평생 그 남편을 섬기었습니다. 이는 우리 조선의 딸들이 정절을 지키던 피 눈물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신부되어 주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으랴! 주후 200년 카르타고의 벨 베추어는 22-3세의 방년에 젖먹이와 늙은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받쳐 죽었습니다. 천고의 열녀 벨뻬추어는 주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헌신하기로 열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苟苟盜生) 피할 줄이 있으랴!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 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죽고 죽어 열 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大義貞節) 변치 아니하오리다.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인생 살면 몇 일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사이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아버지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 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아멘. 주기철 목사(朱基徹 牧師, 1897~1944,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
A love that will not let me go(나를 가게 하지 않는 사랑)/ Jeremiah 29:11-13(렘29:11-13), Psalms 37:1-7(시37:1-7), John 10:10(요10:10)/ 2006-07-04
A love that will not let me go(나를 가게 하지 않는 사랑) Jeremiah 29:11-13(렘29:11-13), Psalms 37:1-7(시37:1-7), John 10:10(요10:10) A love that will not let me go Jeremiah 29:11-13, Psalms 37:1-7, John 10:10 In 597 B. C. the Babylonians began to deport God’s chosen people, the Jewish nation, to Babylon. The people of God had chosen to walk away from their close fellowship with the Lord. What events have made a significant difference in your life? What crossroads are you facing? Which way does the Lord wants you or me to go? We need to hear his still, small voice. Jeremiah 29:11-13 1. He Knows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for Us. Romans 8:28 assures us,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So we should remember that we have a Heavenly Father who loves us so much that He wants to have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us. Dr. George Wald, a Harvard biologist, once wrote, “What one really needs is not Nobel laureates but love. How does one think one gets to be a Nobel laureate? It’s a consolation prize. What matters is love.” Does, then, everything that happens in our lives come from the hand of a loving God? No, I don’t think so. On the other hand, our lives are always being guided, in the most difficult situations, by the Divine Hand of our loving Heavenly Father. If troubles come our way like it did to Israel, we can make the best of any difficult situation through trust in the Lord. I am sure as the Israelites were being removed from their homes they were asking why. We have circumstances that we create that can cause God to be displeased with us. But the Lord can work in everything to bring good out of it. When I was at a low point in my life, I stopped my truck at a red light in a small town in Texas and saw on a wooden, little sign in a window in a store that said Jeremiah 29:11, “For I know the plans that I have for you…” That particular day I sure couldn’t see any of his plans. It was a sad day, but as time has passed, I can see that the Lord was working out His plan for me. It wasn’t my plan. My plan had no plan then. I was ready to give up. But now I can say with Paul, “That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good for us…” Are you struggling with something personally? God who loves you and me and is working within our lives as well as within your circumstances. Be patient with Him. Be patient with yourself. Even evil things that happen to us work out for our good because we have Jesus in our hearts. God has the whole world in His hand. He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He knows everything. Is it too much for the us to trust in the Lord all of the time? 2. He Knows His Plans For Us. Jeremiah 29:11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Are you like me sometimes and say, okay Lord, what is going on here? What are you trying to tell me, Lord? Let us be patient and know that God has a plan for us. We sometimes fear God’s plan for us. Remember God loves us and genuinely wants the best for us. Remember God has thoughts of good for us not evil. God’s thoughts are working toward our good not our bad. Even when things seem bad, they will begin to mend; God says He is at work. When God is at work we can count on it being perfect. In Psalms 37:4, for example, it says, “Delight thyself in the Lord and He will give you the desires of your heart.” If we put God first, in His time, He will give us His very best, if we will only wait. God’s plan can turn the worst stuff in our lives into the best. The Lord who loves us wants to bless us. God has even the timing all worked out. Also the Lord’s plans never fail. He knows how long it will take to work His plan in our lives. We do not know how long it will take God to work His plan in our lives. It takes a long time to grow a tree from an acorn. Let’s give our plans to God. Let’s see the great plans God has for us. God can have something for us so much greater than we can imagine. Which do you think will be better, your plan, my plan or God’s plan? A young chaplain friend of mine went to air assault school and put on his wings on his uniform. He wanted to go to Airborne school and Ranger school. He really was determined to go. He just knew that this was God’s will for His life. Yet, God had another plan. The Lord is sending him to a year of training in Clinical Pastoral Education at an Army hospital. When he finishes his year of studies, he will receive a doctor of ministry degree. Then He will be blessed with an assignment in an Army hospital for three years after his year of training. God blesses, doesn’t He? The Lord has thoughts of peace, grace, love and blessing for us in His beloved Son. 3. God’s Plan Includes Prayer Jeremiah 29:12 We are encouraged to pray. Since we know that God is love and He loves His children in good and in bad times, we can pray to Him. Our holy, righteous just, all powerful and loving Lord wants us to talk with Him in prayer. Call to the Lord in prayer and be assured of His answer. He gives us His promises to encourage us to seek Him. When the answer comes, which it will, we must go forward to meet it. “Ask and it shall be given you; seek and ye shall find; knock and it shall be opened unto you,” the Lord Jesus said. Persevere in prayer. God will meet those who seek Him. Ask and it shall be given you; given not lent, not sold you, but given you. What is more free than a gift? Whatever we pray for according to the promise, whatever you ask, shall be given you, if God sees fit for you to have it. Ask and have. It is but ask and have. We ask and have not because we don’t ask. We don’t have because we ask selfishly. Answers to prayer sometimes are very plain and clear. Other times the answers are not as clear. Let us seek the Lord in prayer. Let us diligently seek Him. When we seek the Lord with all our heart, we can be assured that He will be found. He is not in hiding. Hebrews 11:6 tells us, “But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Him; for he that cometh to God must believe that He is, and that He is a rewarder of them that diligently seek Him.” God rewards faith with His will, His way, His blessing, His grace, His presence and His answer. Never give up; the Lord is at work. By faith Jesus says, we can move mountains.
Turn away mine eyes from beholding vanity; and quicken thou me in thy way(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Psalm 119:37(시119:37)/ Pastor Charles Spurgeon(찰스 스펄전 목사)/ 새벽기도회설교/ 1850-01-20
Turn away mine eyes from beholding vanity; and quicken thou me in thy way(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Psalm 119:37(시119:37) DAILY READINGS by Charles Spurgeon sunset Psalm 119:37 EVENING: January 20 There are divers kinds of vanity. The cap and bells of the fool, the mirth of the world, the dance, the lyre, and the cup of the dissolute, all these men know to be vanities; they wear upon their forefront their proper name and title. Far more treacherous are those equally vain things, the cares of this world and the deceitfulness of riches. A man may follow vanity as truly in the counting-house as in the theatre. If he be spending his life in amassing wealth, he passes his days in a vain show. Unless we follow Christ, and make our God the great object of life, we only differ in appearance from the most frivolous. It is clear that there is much need of the first prayer of our text. “Quicken thou me in thy way.” The Psalmist confesses that he is dull, heavy, lumpy, all but dead. Perhaps, dear reader, you feel the same. We are so sluggish that the best motives cannot quicken us, apart from the Lord himself. What! will not hell quicken me? Shall I think of sinners perishing, and yet not be awakened? Will not heaven quicken me? Can I think of the reward that awaiteth the righteous, and yet be cold? Will not death quicken me? Can I think of dying, and standing before my God, and yet be slothful in my Master’s service? Will not Christ’s love constrain me? Can I think of his dear wounds, can I sit at the foot of his cross, and not be stirred with fervency and zeal? It seems so! No mere consideration can quicken us to zeal, but God himself must do it, hence the cry, “Quicken thou me.” The Psalmist breathes out his whole soul in vehement pleadings: his body and his soul unite in prayer. “Turn away mine eyes,” says the body: “Quicken thou me,” cries the soul. This is a fit prayer for every day. O Lord, hear it in my case this night.
Turn away mine eyes from beholding vanity; and quicken thou me in thy way(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Psalm 119:37(시119:37)/ Pastor Charles Spurgeon(찰스 스펄전 목사)/ 새벽기도회설교/ 1850-01-20
Turn away mine eyes from beholding vanity; and quicken thou me in thy way(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Psalm 119:37(시119:37) DAILY READINGS by Charles Spurgeon sunset Psalm 119:37 EVENING: January 20 There are divers kinds of vanity. The cap and bells of the fool, the mirth of the world, the dance, the lyre, and the cup of the dissolute, all these men know to be vanities; they wear upon their forefront their proper name and title. Far more treacherous are those equally vain things, the cares of this world and the deceitfulness of riches. A man may follow vanity as truly in the counting-house as in the theatre. If he be spending his life in amassing wealth, he passes his days in a vain show. Unless we follow Christ, and make our God the great object of life, we only differ in appearance from the most frivolous. It is clear that there is much need of the first prayer of our text. “Quicken thou me in thy way.” The Psalmist confesses that he is dull, heavy, lumpy, all but dead. Perhaps, dear reader, you feel the same. We are so sluggish that the best motives cannot quicken us, apart from the Lord himself. What! will not hell quicken me? Shall I think of sinners perishing, and yet not be awakened? Will not heaven quicken me? Can I think of the reward that awaiteth the righteous, and yet be cold? Will not death quicken me? Can I think of dying, and standing before my God, and yet be slothful in my Master’s service? Will not Christ’s love constrain me? Can I think of his dear wounds, can I sit at the foot of his cross, and not be stirred with fervency and zeal? It seems so! No mere consideration can quicken us to zeal, but God himself must do it, hence the cry, “Quicken thou me.” The Psalmist breathes out his whole soul in vehement pleadings: his body and his soul unite in prayer. “Turn away mine eyes,” says the body: “Quicken thou me,” cries the soul. This is a fit prayer for every day. O Lord, hear it in my case this night.
가룟유다가 남기고 간 것은?(2)/ 막14:17-21, 민14:36-38/ 2004-04-14
가룟 유다가 남기고 간 것은?(2) 막14:17-21, 민14:36-38 우리는 지난주에 유다가 남기고 간 것들 가운데 두 가지 수치스러운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다가 남기고 간 첫 번째 것은 은 30세겔이라는 유산이었는데, 그 은 30이라는 유산은 스승의 피를 팔고서 얻은 배신의 값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재물을 유산으로 남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비록 유다와는 달리 우리가 모은 재산이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재산보다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하고, 삶의 지혜를 물려주는 것이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무엇보다도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의 삶과 신앙은 존경스럽고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부모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유산을 남겨준 것입니다. 유다가 남기고 간 두 번째의 것은 치욕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죽음의 순간입니다. 어떤 죽음을 죽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인생의 마지막 한 순간에 일평생 쌓아놓은 업적을 무너뜨리고 마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평생을 치욕스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함으로써 오랫동안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에 남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황혼을 준비하면서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마지막이 하나님과 교회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건 연세 많으신 분들만 그렇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내 인생의 마지막이 아름답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닥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유다가 남기고 간 세 번째의 것을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유다가 남기고 간 세 번째의 것은 그의 치욕스런 이름입니다. 옛말에 ‘인사유명 호사유피(人死留名 虎死留皮)’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이름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안효관’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이 안효관이라는 사람의 전체를 대변해주는 이름입니다. 인격, 신앙, 사람됨, 행적 등등이 그 이름 안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안효관’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이 생각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곧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내 인생을 대변해주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이름 앞에 단 몇 마디의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면 어떤 수식어가 붙을 것 같습니까? 제가 교육지도 전도사로 중학생들을 지도할 때, 한 수련회를 하면서 인간관계 훈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맡았던 선생님이 가장 먼저 사람들 앞에 자기 자신을 소개는 시간을 주었습니다. 자기를 소개하는데 단 한 문장으로 소개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고민인 아무개입니다’라는 식으로 이름 앞에 자기를 소개할만한 단어를 몇 개 넣어서 한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저를 소개할 차례가 되었을 때 제가 이렇게 저를 소개한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안효관입니다.” 물론 학생들로부터 웃음 섞인 야유를 듣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학생들에게 저를 그렇게 소개했습니다. 그 때는 그 말이 제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 번 해 보실까요? 두 분씩 짝을 지어서 지금 옆에 계신 분에게 단어 몇 개를 넣어서 자신을 소개해 보세요.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소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해 보십시다. 이제는 상대방에게 “제가 보기에 당신은 이러 이러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풍기는 그 사람의 향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향내를 풍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매스꺼운 냄새를 풍기기에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향기로운 꽃이 벌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취를 풍기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라고 말해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그리스도라고 하는 아름다운 이름에 걸맞은 향기를 풍겨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내는 사람이라면 우리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조직폭력배의 두목 곁에는 폭력배들이 모여듭니다. 사기 치는 데는 2등 하라면 서러울 정도로 사기 치는 데 도사인 사람 곁에는 사기꾼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내는 사람에게는 세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더 많습니까? 세상에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더 많습니까, 아니면 불평과 원망 가운데 얼굴에 ‘짜증’이라고 쓰인 사람들이 더 많습니까? 내가 나를 바르게 판단하지 못한다면,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는 것을 보면, 나를 볼 수 있습니다. 내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 이름이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들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이름 듣는 것을 거북해 하거나 이름 듣는 것조차 불쾌하게 생각한다면 나는 인생을 헛되게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몇 명의 이름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그 이름을 들을 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느낌이 오는지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히틀러, 이완용, 가룟 유다.” 어떤 느낌입니까? 또 다른 이름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슈바이처, 테레사 수녀님, 유관순 여사, 에이브러햄 링컨.” 이번에는 어떤 느낌입니까? 이 사람들 앞에 붙여진 수식어만 보아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이고, 그들이 후세 사람에게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히틀러’ 그러면 우리는 ‘세계 대전의 원흉’ ‘유태인을 600만 명이나 죽인 살인마’ 이런 수식어가 생각납니다. ‘이완용’ 그러면 ‘매국노’라는 단어가 떠오르고, ‘가룟 유다’ 그러면 ‘배신자’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반대로 ‘슈바이처’ 그러면 ‘아프리카의 성자’ ‘흑인들의 아버지’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테레사 수녀’ 그러면 ‘인도의 빈민굴에서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살다 간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링컨’ 그러면 ‘흑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지난여름 미국에 갔을 때, 시카고라는 도시에서 공부를 했었습니다. 시카고는 ‘일리노이’라고 하는 주(州) 안에 속해 있는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도시입니다. 시카고에서 운행되고 있는 자동차는 ‘일리노이 주’에서 발행한 번호판을 달고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일리노이 주의 자동차 번호판에 한결같이 들어가 있는 문구 하나가 있습니다. “Land of Lincoln”(링컨의 땅)이란 문구입니다. 링컨은 원래 일리노이 주 출신이 아닙니다. 켄터키 주에서 태어났지만,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일리노이 주에서 주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일리노이 주 사람들은 링컨 대통령이 자기들 땅에서 살았었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그렇게 미국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링컨은 비록 56세에 암살당해 죽고 말았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었습니다. ‘링컨’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들은 마음이 설렐 정도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어떻습니까? 그는 인류 역사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그의 이름 앞에 ‘배신자’라는 부끄러운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선 그를 향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사람,’ 이 얼마나 수치스런 말입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아름다운 이름에 먹칠이나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말입니다. ‘가룟’이란 말은 유다가 태어난 고향 이름입니다. 그리고 ‘유다’라는 말은 ‘찬양’이라는 뜻을 가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신약성경에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가운데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유다서’를 쓴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사람 가운데도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지칭할 때에는 가룟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가룟인 아닌 유다”(요 14:22)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직가라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행 9:11)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선지자 가운데 ‘유다’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이 너무 좋기 때문에 유다라는 이름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신하고 스승을 팔아먹은 유다를 가리켜서는 ‘가룟 유다’ ‘예수를 파는 자 될 유다’라는 말이 수식어로 따라다닙니다. 그는 ‘찬양’이라는 이름의 뜻과는 너무나도 반대되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스승 예수님을 배신함으로써 그 이름을 치욕스럽게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이름만 수치스럽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가 태어난 고향조차도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후세에 어떤 이름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가룟 유다와 같이 수치스런 이름으로 남고 싶은 분은 없겠지요? 사람은 최소한 세 가지 방법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첫 번째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름으로 남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있으나 마나 한 이름으로 살다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이고, 세 번째는 가룟 유다처럼 치욕적인 이름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자취를 남긴 두 사람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들은 12명의 정탐꾼으로 가나안 땅에 갔다 온 사람들입니다. 출애굽기 13:1절 이하에 보면 가나안 땅에 정탐꾼으로 갔던 12명의 이름들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각 지파의 대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12명의 이름 가운데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사람의 이름은 단 두 명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나머지 10명은 성경에 분명히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들의 이름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이름을 기억할만한 어떤 아름다운 모습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담케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똑같은 자격으로 뽑혀서 똑같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12명의 사람들 가운데 나머지 10명은 그 이름을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들의 신앙과 정신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우리 교회가 올해로 창립 27주년을 지냈습니다. 창립 50주년쯤 되어서 우리 교회의 역사를 책으로 편찬한다고 할 때, 과연 내 이름이 그 책에 어떻게 기록될까? 단지 역사의 한 페이지 모퉁이에 남아 있는 있으나마나 한 이름으로 남지 않을까? 아니면 누군가 후세에 내 이름을 읽으면서 내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여러분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교회 요람에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직분을 맡은 제직들은 사진까지 곁들여서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들 가운데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우리 교회가 영원히 기억하고픈 아름다운 이름들도 있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어떤 분들의 이름은 있으나마나 한 이름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교회에 유익을 끼치기는커녕 그 이름 때문에 수치가 될 이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이름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바라기는 우리 교우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될 아름다운 이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있으나 마나 한 이름이 되지 말고, 더구나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으로 남지 않고, 모두가 우리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이름, 그 이름만 들어도 만나보고 싶은 이름, 우리 후대의 사람들이 그 이름을 듣고 한번쯤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이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을 수 있겠습니까? 가룟 유다와 같이 수치스러운 이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데도,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데에도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에서 바울로 변했습니다. 만일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평생을 사울로 살았다면, 성경은 사울을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가룟 유다 다음으로 성경 속에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생애가 바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이름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아름다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이름은 세상에 속한 이름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세상 그 어느 책에 기록된 이름보다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한국을 빛낸 위인들의 이름이 기록된 위인전에 올라간 이름보다,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이 더 명예스러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옛것을 다 포기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더욱 향기 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수많은 신앙인들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의 이름이 더 빛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이 가졌던 지난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와 비견한들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출세하고 싶으면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출세를 위한 그의 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명예를 얻고 싶으면 충분히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학문과 문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재산을 원했다면 그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재물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포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치 있고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기 비움’의 신앙이 사도 바울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세상에서나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이름이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도 자기 비움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남을 위해서 자신은 한없이 낮아질 때에 우리의 이름은 향기로워 집니다. 대접받으려 하지 않고 예수님을 닮아 섬기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내가 죽어질 때에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 계셔서 우리의 이름을 존경받는 이름으로 높여 주십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이게 신앙의 신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으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나십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실 때에 우리는 향기 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럴 때에 우리의 이름이 향기 나는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이름은 향기 나는 이름입니까, 수치스런 이름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성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알렉산더 장군은 굉장히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부대원들이 알렉산더 장군을 존경 할 정도로 그는 지도력을 갖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혼자서 부대 순시를 하다가, 어느 막사에서 병사들의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병사들의 대화 내용은 이런 것 이였습니다. “알렉산더 그 녀석 말이야, 그 놈이 군인이야? 그 놈은 우리부대에 있어서는 안 될 놈이야. 그런 녀석이 어떻게 우리부대에 계속 남아 있는 거야.” 이 이야기를 들은 알렉산더 장군은 급히 장군 집무실로 들어와서 부관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부관에게 지금 당장 가서 그 이야기가 어떻게, 무슨 근거로 나오게 되었는지 알아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잠시 후 부관이 돌아와서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그 내용인즉, 그 부대에는 알렉산더 장군과 똑같은 이름의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병사는 군인으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알렉산더 장군은 부관에게 그 병사가 있는 막사로 안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막사로 가보았습니다. 마침 그 막사에는 병사들이 사역을 나간 터라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어야할 막사 안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고 한 구석에서 심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였습니다. 그곳으로 가보았더니, 한 병사가 군복 단추를 풀어헤친 채, 술에 취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부관이 그 병사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가 “곤한 잠에서 깨운 놈이 누구야” 라고 고함을 치며 비틀거리면서 일어났습니다. 게슴츠레 눈을 떠보니 눈앞에는 알렉산더 장군이 서 있었습니다. 장군 앞에서 이런 꼴을 보였으니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병사는 알렉산더 장군에게 살려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알렉산더 장군이 그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 병사가 대답을 합니다.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그 말은 들은 알렉산더 장군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큰소리로 말을 합니다. “알렉산더! 너는 이제 사형이다.” 그러자 그 병사는 눈물을 흘리며 알렉산더 장군의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알렉산더 장군이 아주 강한 어조로 말을 합니다. “이제 네가 너에게 두 가지를 명하겠노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너의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며 너의 삶을 바꾸어라.(Change your name, or change your life!)”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이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후포중앙교회 교인이라는 것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계십니까? 후포중앙교회에서 받은 직분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면 내 이름 때문에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인 우리 후포중앙교회가 욕을 먹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의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너의 삶을 바꾸어라.” 여러분, 우리의 이름은 정말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들입니다. 이 귀한 이름에 욕이 되지 않고, 오히려 내 이름을 통해서 아름다운 감동을 나누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나뭇가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았다가 날아가도 한 동안 나뭇가지가 출렁거립니다. 그럴진대 하물며 한 평생을 살다간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이름이 다른 사람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름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룟유다는 기회를 놓쳤다/ 마27:2-5/ 2014-02-02
가룟 유다는 기회를 놓쳤다 마27:2-5 마27:2-5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아멘. 우리는 유다가 자살하게 된 사인을 주로 예수를 배신한 죄 때문으로 알기 쉽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도나 우리들이 유다보다 착해서 구원받은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마26:24 ‘...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볼 때 듣는 우리도 안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정론적으로 그는 버림받을 존재였다거나, 성령이 없었다는 등의 신학적으로 그 존재를 설명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음과 버림을 보고 무엇을 깨달을까 하는데 집중하고자 합니다. 1. 가룟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놓쳤던 것 유다 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늘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삽니다. 다만 인내하며 은혜 가운데 죄를 덜 짓고 살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가령, 본문의 유다의 경우와 대조되고 있는 바로 앞 내용, 마26:69- 이하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되, 목숨이 두려워 저주까지 하며 살아남으려고 비굴하게 배신하는 모습을 봅니다. 무엇이 더 큰 죄가 될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예수를 배신했다는데 대한 태도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죄를 두고 말하자면 유다를 너무 욕할 자신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다는, 예수께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마26:21)고 하시고 또 떡을 떼실 때에도 언지를 주셨으나(마26:23,요13:26) 회개치 않았습니다. 전9:11 ‘……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계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히12:7) 유다는 본문 마27: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하는 반성이 왔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마지막 기회였고, 일반적으로 모든 이들이 주로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위험이 있는 곳에 기회가 있고, 기회 있는 곳에 위험도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가 아닌 자아의 내부로부터 위험을 느끼는 그 순간이 기회일 수 있습니다. 반성의 기회를 포착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면서 ‘믿습니다,’를 외치는 것은 미신입니다. 우리는 자기반성의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믿어야 하는 기회를 놓침 가룟 유다의 가장 큰 실수는 좌절의 순간에 바로 그러한 인생의 낙담 중에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유다는 절망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는 자기 양심에 못 이겨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실수하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죄와 스스로 짓는 자범죄를 위해 대속 제물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구원의 핵심진리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고후6:2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기회,καιρὸς)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마25:1-(눅13:25)에는 구원 받는 일을 혼인잔치에 비유하고 혼인 잔치집의 문이 닫힌 후에는 다시는 문이 열리지 않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3:7 ‘...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전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본문 마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고 하는 잘못된 선택으로 그는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영생구원의 결정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롬9:) 무슨 신학적 변명으로도 의문을 제기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념해야 할 사항은, 유다가 주님의 은총을 불신하고 회개의 기회를 줬지만 돈이나 밝히고 영적 귀를 닫아버린 상태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을 보고 우리는 각성하여 회개를 잘해야 하겠고, 회개와 믿음과 충성의 모든 기회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잘하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용서와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강종수 목사(부산 늘새롬교회)
가루서말과 누룩/왕상19:11-18,마13:31-33
가루서말과 누룩/왕상19:11-18,마13:31-33 2003-09-22 19:54:05 read : 4 설날이 며칠 앞으로 닥아왔습니다. 벌써 어제부터 귀경행렬로 나라 안의 모든 길이 메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뿌리를 찾고자 하는 본성이 있어서 그런 어렵고 힘든 길도 마다하지 않고 모두 고향으로 고향으로 달려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영혼의 본향인 하나님을 찾는 것이 그 본성속에 분명히 감추어져 있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괴롭고 힘들때도 고향을 생각하고, 어렵고 외로울 때에 부모와 형제 생각하는 것은 삶의 뿌리를 생각하는 마음이 사람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래의 근원과 뿌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인생은 모두 그 삶의 뿌리가 하나님의 품속이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민족의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알게 모르게 두개의 자신 속에서 작은 갈등을 격게 됩니다. '한국 사람으로서의 나'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입니다. '한국인 나'가 강조될 때, '그리스도인 나'가 약화되고, '그리스도인 나'가 강조될 때, '한국인 나'를 잃어버리는 모순을 우리는 때때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두가 기독교적인 문화속에서 살아가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민족의 명절이 곧 기독교의 명절이요, 기독교의 명절이 민족의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명절이 한국의 명절이 될 수 없으며 한국의 명절이 곧 기독교의 명절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그런 한국땅, 이 문화속에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의 갈등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갈등을 대하는 세가지의 경향들을 보면서 지혜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1. 세상을 등지는 신앙 size="2">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무관심 속에 오직 신앙에만 몰두하는 신앙입니다. 세상을 거부하고 오직 하늘만 바라보는 듯한 태도입니다. '한국인 나'는 던져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인 나'만 주장합니다. 세상은 악하고 두려운 곳이며 가까이 해서는 안되고, 오직 영의 세계만 선하고 깨끗하며 영적인 삶만이 믿음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극히 부정적이며 공격적이 됩니다. 이러한 신앙은 얼른 보면 아주 강한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강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의 태도는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일종의 '도피신앙'입니다. 세상을 피해 도망치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도피신앙은 결코 기독교의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도 불교적인 신앙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삶은 결코 도피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신앙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낯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2:5-8 주님의 가르침과 삶의 모습은 세상을 피하거나 등지는 모습이 아니라 세상속에 내려 오시는 '임마누엘'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과 이세벨의 핍박을 피하여 몇날 며칠에 걸려 호렙산으로 도망하여 지친 모습으로 굴속에 엎드렸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속에도, 지진과 불꽃 속에도 주님을 만날 수 없었으나 그런 격동이 지나간 후에 조용한 음성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엘리야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 나는 이제 지쳤습니다. 세상도 나를 버렸고, 나도 세상을 버렸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저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 저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저도 세상을 등지려 합니다. 제 영혼을 거두어 가시옵소서.' 그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책망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야, 너만 남은 것이 아니다. 너 말고도 바알과 아세라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 7000이나 남아 있느니라.' 그리고 주님의 명령은 다시 세상에 내려가서 세상의 질서를 잡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세상을 전적으로 포기하시거나 저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희망중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은 이 세상을 어찌 인간이 함부로 등을 돌리며 버린다고 하겠습니까. 2. 세상 속에 빠지는 신앙 size="2"> 세상을 등지고 철저히 신앙생활만 한다는 것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그리스도인도 어차피 세상을 사는 것이니 세상사람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안먹고, 안입고, 안쓰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인도 바라는 바 소원이 좋은 옷에 좋은 집에 좋은 환경에서 행복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등진다느니, 세상을 거부한다느니 하는 것은 위선이요, 눈가리고 아옹하는 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집을 피워봐야 자꾸 세상과 담을 쌓게 되고,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니 결국은 어떻게 전도할 것이며, 어떻게 복음의 뿌리가 내리겠느냐는 것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속에 들어가야 하듯이 세상을 구원하려면 세상사람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세상사람들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며 때때로 엎드리어 행복을 기원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구하고, 답답할 때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것이 솔직하고 진실한 신앙과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합리적인 이야기 입니다. 일면 귀를 기울일 부분이 없지 않은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자기를 잃어버린 신앙'입니다. 세상이나 신앙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세상사람의 삶이나 믿음의 삶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나'는 사라지고, 오직 '한국인인 나' 혹은 '세상사람인 나'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때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지고의 푯대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속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신앙의 핵심을 버린다고 하면 결국은 신앙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세상과 함께 가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등지는 신앙이 길가에 떨어져서 자기만의 고집속에 떼굴떼굴 굴러다니다가 생명이 말라버리는 신앙이라면 세상과 함께하는 신앙은 시궁창에 빠져서 자신의 생명이 썩어버리는 신앙입니다.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나실인'이었습니다.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머리를 한번도 깍지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할 지도자로 사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세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불레셋 마을에 예쁜 처녀들에게 빠져서 자신의 사명을 저버렸습니다. 결국은 그로 인하여 눈도 빠지고, 힘도 잃어버린채 연자맷돌을 돌리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 size="2"> 세상을 등지는 것도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 세상과 함께 가는 것도 바른 신앙이 아니라면 무엇이 바른 기독교 신앙이겠습니까? 세상을 등지든지 아니면 세상과 함께 하든지 외에 다른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제3의 방법을 말씀 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태복음13:33 누룩이 가루서말 속에 들어가지만 부스러져 가루가 되지도 않고, 가루속에 그냥 떼굴떼굴 굴러다니지도 않으면서 가루속에서 자신을 녹여 가루를 부풀리는 것이 바른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거부하거나 등지지도 않고, 세상속에서 같이 물들어 썩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 깊이 들어가되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인 나'와 '그리스도인인 나'의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고 서로의 긴장관계속에서 잘 연결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이올린의 줄과 같이 서로 장 당겨져서 조율이 될때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말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어 바벨론에 끌려 갔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을 거부하여 저항하거나 산속에 들어가 무관심속에 산 것이 아니라, 그 체제에 순응하여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그 나라의 관리가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왕의 충성스런 신하로서 충실하였지만 자신의 신앙과 믿음은 절개있게 지켰습니다. 이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이 왔지만 결국은 왕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온 나라에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내는 변화의 역사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참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변화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참 성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등지는 신앙, 세상과 함께가는 신앙,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 이런 신앙의 세 모습은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도 있고, 교단에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교회나 교단은 세상을 등지는 신앙의 태도를 갖습니다. 얼른 보면 대단히 순수해 보이고, 힘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적이며 기독교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과 함께하는 신앙은 지나치게 자유적이거나 정치적인 교회나 개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대단히 세련되어 보이기도 하고,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잃어버린 신앙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신앙은 세상속에 들어가되 자기를 잃지 않는 신앙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생명을 가지고 땅속에 들어가서 싹을 내고 무성해져서 새들이 깃들게 하는 신앙입니다. 누룩과 같이 가루속에 들어가서 결국은 가루를 변화시키어 부풀게 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세상을 거부하고 세상을 등지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중요시 여기면서 세상속에 빠지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분명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누룩처럼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입니까? 민족적인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가루와 누룩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누룩인 성도 여러분, 가루와 동떨어져서 방바닥에 혼자 구르는 누룩이 되지 말고 가루속에 깊이 들어가 함께 녹고, 함께 반죽이 되는 누룩이 되십시오, 그리고 결국은 가루를 부풀리는 변화된 누룩이 되십시오. 가루속에서 부스러져 가루인지 누룩인지 분간을 못하게 되거나 가루와 함께 썩어버리는 맛을 잃어버린 누룩이 되지 마십시오. 가루속에서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는 산 누룩이 되십시오. 이러한 참 믿음의 생활과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의 삶과 기업위에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상칠언(2)/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2002-11-05
가상칠언(2)/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사람들은 내세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답을 다른 종교나 철학 과학에서는 제대로 주지 못합니다. 논어 선진 편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께서 살아 있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질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리요 하시었다. 감히 죽음에 대하여 묻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아직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는가(계로 문사귀신 자왈 미능사인 언능사귀 감문사 왈미지생 언지사-季路 問事鬼神한대 子曰 未能事人이면 焉能事鬼리오.敢問死하나이다. 曰未知生이면 焉知死리오). 한용운님의 알수 없어요 라는 시도 불교의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한용운) 철학자 쇼펜아워는 공원 밴취에 앉아 인생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가에 대하여 골몰히 생각하다가 공원 관리인이 누구며 어디서 온 사람이냐고 하자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여기에 앉아 있지를 않지 하고 어둠 속으로 살아졌다 합니다. 과학도 우주의 비밀 인생의 비밀을 알기 위하여 연구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이라 하여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간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낙원(파라데이소스)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했습니다(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8)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 51:3)한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입니다(I. H. Marshall).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눅16:22)한 말씀에 나사로가 들어가 있는 아브라함의 품을 낙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2)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4) 한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는 셋째 하늘 곧 천국이 낙원입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7)하신 부활 이후 영원히 복을 누릴 천국이 낙원입니다. 낙원은 행복과 안식의 것입니다. 전통적인 관념은 낙원은 의로운 자들이 기업을 받아 찬미 부르는 행복한 곳으로 밝혔으며 초대 교부들도 모든 고난의 요소가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가르쳤습니다. 낙원은 기쁨의 곳입니다. 낙원은 밤이 없으니 기쁨의 곳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 21:23)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 22:5) 낙원은 눈물 사망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없으니 기쁨의 곳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낙원은 완전한 곳입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계 21:16) 스다디온 올림픽 스타디움의 단위로 가로 세로 185미터 크기의 면적을 말합니다. 일만 이천 스다디온은 1500마일(2,200km)입니다. 484만 평방 킬로입니다. 우리나라 남북이 22만 평방 킬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면적 22배입니다. 장광고가 다 같습니다. 이는 완전한 세계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곳이 우리가 들어가 살 곳은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세계입니다. 이러한 낙원에서 주님은 강도에게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두 번째 말씀은 한 강도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혼자 달리신 것이 아니라 흉악한 두 강도와 함께 달리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욕보이기 위해 강도와 함께 매달았습니다. 강도들은 이 세상에서 인생을 자기들의 뜻대로 남의 것으로 참으로 호화스럽게 살아온 자들 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저들의 모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강도와 같이 죄악 가운데 살며 마지막 까지 자기를 고집하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인생의 한 면이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인생의 종말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집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1)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마 25:32)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3)하시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고 합니다. 이는 지옥의 형벌을 말합니다.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4)고 합니다. 이는 천국의 복락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합니다. 1. 오늘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을 먼 장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말씀은 이 말씀을 하는 바로 그날 그 시간을 말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한 오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눅23:40) 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사함을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런가? 라는 히의가 있습니다. 그보다도 생활이 나아지기 위하여,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인간 수양을 위하여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을까?라고말하기도 합니다. 죄라면 살인강도나 간음, 사기 같은 범률상의 죄로만 알 뿐이요, 그것이 없는 한 자기는 의인인줄로 압니다. 기도를 할 때는 습관처럼 \\\"저는 죄인이오니...\\\"하나, 머리를 들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지적합니다. 구원은 자신이 죄인음을 아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게 된 오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0)고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죄를 짓든 그가 예수님의 의를 보고서 하나님 두려운 줄을 발견한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의 오늘도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 곧 두려워함이 지식의 근본이요 축복의 원천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죄 값이 당연함을 깨달은 오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눅 23:41) 죄인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생기자 자신의 죄값이 당연한 것으로 깨닫고 죄 값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줄 아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를 발견한 오늘입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의를 발견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부인한 레난(Renan)은 예수는 어느 방면으로 보던지 독특하다 했습니다. 로메인씨는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지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도 도덕적으로 예수님을 숭배 한다고 했습니다. 밀(J.S. Mill)은 누가 예수님의 말씀과 그 생활을 생각해 낼 수 있으랴 이는 갈보리의 어부들은 못 할 것이요 바울도 못할 것이다 고 했습니다. 스트라우스(Strause)는 예수님은 도덕의 최고 목표다 라고 했습니다. 괴테(Goethe)는 복음서는 참되다 그 이유는 거기서 예수님에게서 오는 도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메튜 아놀드(Matthew Anold)는 예수님의 의로운 길 밖에 다른 더 좋은 것은 인류가 생각 해 낼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렉키(Lecky)는 예수님은 도덕의 최고 목표가 되시고 인류의 마음을 개조하는 독일무이한 분이다. 모든 철학자와 모든 도덕가들은 다 그 앞에서 빛을 잃는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죄하시고 의로우신 구세주이심을 믿고 낙원의 복을 누립십시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의 내세를 맡긴 오늘입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눅 23:42)라고 합니다. 이는 육신의 생명이 떠난 후의 그의 존재가 계속 할 것을 믿은 것이요 내세를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원한 내세를 바라보고 자신을 맡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맡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혀 돌 맞아 죽을 자리에서 용서 받은 여인이 맡깁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다 부름 받은 사울이 맡깁니다. 세리 삭개오가 맡깁니다. 우리도 맡기고 마지막 시간에 일하려간 포도원의 일꾼들처럼 최선을 다하며 낙원의 복락을 누립시다. 2. 네가 1) 강도였던 네가 강도 인생은 매일 같이 주먹과 칼로 나의 것은 내 것 너의 것도 내 것이라 하면서 강도질을 하던 자입니다. 강도는 남의 것을 빼앗고 해하고 모함한 자의 표상이요 오늘 범죄 한 모든 인류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강도와 같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는 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치적인 강도 경제적인 강도 문화적인 강도 의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강도 인생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되어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하는 천국 백성이 된 줄 믿습니다. 2) 변화된 네가 두 강도는 각기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한 강도는 너와 나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의 죄는 유보해 놓고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살고 싶어 단순히 죽음을 면케 달려는 무리한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변화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변화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입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됐습니다. 이 강도는 지금까지는 자기의 힘과 재주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 달려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변화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온전하심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 그리스도의 왕 되심 구세주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에 대한 자세가 변화 되었습니다. 현실 만족을 위해 살았던 그가 내세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미 칼럼니스트 최효섭 목사는 천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항상 날씨가 청명하다. 그곳은 변덕 장이 들이 없기 때문이다. 천국은 전등불이 필요 없다. 모두가 빛이 되기 때문이다. 그곳은 조미료가 필요 없다. 모두가 소금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경쟁과 싸움이 없으며 오직 칭찬과 사랑만 있다. 그곳은 폭탄선언이나 깜짝쇼가 없고 항상 평온하다. 천국의 사람들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감사의 기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천국행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는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다. 교만한 사람, 욕심쟁이, 남을 헐뜯는 사람, 거짓말쟁이, 화를 잘 내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화합을 깨뜨리는 사람은 천국행 비자를 받을 수 없다\\\" (천국 비자-인터넷정보클럽) 천국은 문턱이 매우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교만\\\'과 \\\'거만\\\'으로 치장한 사람은 천국의 낮은 문턱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겸손한 사람을 위해 예비된 아름다운 낙원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를 의지하고 천국 낙원에 들어가는 모두가 됩시다. 3. 나와 함께 예수님은 죄인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그 속에 내주 하시어서 함께 동행 하시며 기도를 들어 주시며 슬픔 가운데서 위로 하시며 마침내 영광 가운데로 데려 가십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5)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6)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말씀은 한 달 뿐이 아니라 일년이나 천년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3)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설립한 양로원에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방문해서 노인들에게 양로원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들은 빅토리아 여왕이 지었다고 답했습니다. 이어 방문객이 여왕이 한번이라도 이 양로원을 방문했느냐고 묻자 노인들은 가끔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방문객이 \\\"그러면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은 여기 오셨습니까?\\\"하고 묻자 노인 한 분이 \\\"아니, 예수님이 왜 오십니까? 예수님은 오시는 분이 아니고 처음부터 여기 계셨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처음부터 같이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 계시며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성 버나드는 \\\"예수님이 문을 열고 들어 오신다든지 걸어오시는 것은 못 봤어도 예수님은 항상 내 곁에 계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웨슬리는 항상 빈 의자를 곁에 놔두고 예수님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십니다. 이 약속 믿고 더욱 믿음위에 굳게 서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재림의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모두가 됩시다.
가상칠언(2)/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2004-04-03
가상칠언(2)/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사람들은 내세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답을 다른 종교나 철학 과학에서는 제대로 주지 못합니다. 논어 선진 편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께서 살아 있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질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리요 하시었다. 감히 죽음에 대하여 묻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아직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는가(계로 문사귀신 자왈 미능사인 언능사귀 감문사 왈미지생 언지사-季路 問事鬼神한대 子曰 未能事人이면 焉能事鬼리오.敢問死하나이다. 曰未知生이면 焉知死리오). 한용운님의 알수 없어요 라는 시도 불교의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한용운) 철학자 쇼펜아워는 공원 밴취에 앉아 인생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가에 대하여 골몰히 생각하다가 공원 관리인이 누구며 어디서 온 사람이냐고 하자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여기에 앉아 있지를 않지 하고 어둠 속으로 살아졌다 합니다. 과학도 우주의 비밀 인생의 비밀을 알기 위하여 연구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이라 하여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간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낙원(파라데이소스)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했습니다(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8)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 51:3)한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입니다(I. H. Marshall).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눅16:22)한 말씀에 나사로가 들어가 있는 아브라함의 품을 낙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2)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4) 한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는 셋째 하늘 곧 천국이 낙원입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7)하신 부활 이후 영원히 복을 누릴 천국이 낙원입니다. 낙원은 행복과 안식의 것입니다. 전통적인 관념은 낙원은 의로운 자들이 기업을 받아 찬미 부르는 행복한 곳으로 밝혔으며 초대 교부들도 모든 고난의 요소가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가르쳤습니다. 낙원은 기쁨의 곳입니다. 낙원은 밤이 없으니 기쁨의 곳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 21:23)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 22:5) 낙원은 눈물 사망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없으니 기쁨의 곳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낙원은 완전한 곳입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계 21:16) 스다디온 올림픽 스타디움의 단위로 가로 세로 185미터 크기의 면적을 말합니다. 일만 이천 스다디온은 1500마일(2,200km)입니다. 484만 평방 킬로입니다. 우리나라 남북이 22만 평방 킬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면적 22배입니다. 장광고가 다 같습니다. 이는 완전한 세계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곳이 우리가 들어가 살 곳은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세계입니다. 이러한 낙원에서 주님은 강도에게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두 번째 말씀은 한 강도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혼자 달리신 것이 아니라 흉악한 두 강도와 함께 달리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욕보이기 위해 강도와 함께 매달았습니다. 강도들은 이 세상에서 인생을 자기들의 뜻대로 남의 것으로 참으로 호화스럽게 살아온 자들 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저들의 모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강도와 같이 죄악 가운데 살며 마지막 까지 자기를 고집하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인생의 한 면이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인생의 종말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집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1)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마 25:32)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3)하시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고 합니다. 이는 지옥의 형벌을 말합니다.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4)고 합니다. 이는 천국의 복락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합니다. 1. 오늘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을 먼 장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말씀은 이 말씀을 하는 바로 그날 그 시간을 말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한 오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눅23:40) 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사함을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런가? 라는 히의가 있습니다. 그보다도 생활이 나아지기 위하여,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인간 수양을 위하여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을까?라고말하기도 합니다. 죄라면 살인강도나 간음, 사기 같은 범률상의 죄로만 알 뿐이요, 그것이 없는 한 자기는 의인인줄로 압니다. 기도를 할 때는 습관처럼 \\\\\\\"저는 죄인이오니...\\\\\\\"하나, 머리를 들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지적합니다. 구원은 자신이 죄인음을 아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게 된 오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0)고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죄를 짓든 그가 예수님의 의를 보고서 하나님 두려운 줄을 발견한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의 오늘도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 곧 두려워함이 지식의 근본이요 축복의 원천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죄 값이 당연함을 깨달은 오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눅 23:41) 죄인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생기자 자신의 죄값이 당연한 것으로 깨닫고 죄 값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줄 아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를 발견한 오늘입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의를 발견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부인한 레난(Renan)은 예수는 어느 방면으로 보던지 독특하다 했습니다. 로메인씨는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지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도 도덕적으로 예수님을 숭배 한다고 했습니다. 밀(J.S. Mill)은 누가 예수님의 말씀과 그 생활을 생각해 낼 수 있으랴 이는 갈보리의 어부들은 못 할 것이요 바울도 못할 것이다 고 했습니다. 스트라우스(Strause)는 예수님은 도덕의 최고 목표다 라고 했습니다. 괴테(Goethe)는 복음서는 참되다 그 이유는 거기서 예수님에게서 오는 도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메튜 아놀드(Matthew Anold)는 예수님의 의로운 길 밖에 다른 더 좋은 것은 인류가 생각 해 낼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렉키(Lecky)는 예수님은 도덕의 최고 목표가 되시고 인류의 마음을 개조하는 독일무이한 분이다. 모든 철학자와 모든 도덕가들은 다 그 앞에서 빛을 잃는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죄하시고 의로우신 구세주이심을 믿고 낙원의 복을 누립십시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의 내세를 맡긴 오늘입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눅 23:42)라고 합니다. 이는 육신의 생명이 떠난 후의 그의 존재가 계속 할 것을 믿은 것이요 내세를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원한 내세를 바라보고 자신을 맡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맡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혀 돌 맞아 죽을 자리에서 용서 받은 여인이 맡깁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다 부름 받은 사울이 맡깁니다. 세리 삭개오가 맡깁니다. 우리도 맡기고 마지막 시간에 일하려간 포도원의 일꾼들처럼 최선을 다하며 낙원의 복락을 누립시다. 2. 네가 1) 강도였던 네가 강도 인생은 매일 같이 주먹과 칼로 나의 것은 내 것 너의 것도 내 것이라 하면서 강도질을 하던 자입니다. 강도는 남의 것을 빼앗고 해하고 모함한 자의 표상이요 오늘 범죄 한 모든 인류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강도와 같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는 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치적인 강도 경제적인 강도 문화적인 강도 의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강도 인생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되어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하는 천국 백성이 된 줄 믿습니다. 2) 변화된 네가 두 강도는 각기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한 강도는 너와 나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의 죄는 유보해 놓고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살고 싶어 단순히 죽음을 면케 달려는 무리한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변화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변화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입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됐습니다. 이 강도는 지금까지는 자기의 힘과 재주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 달려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변화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온전하심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 그리스도의 왕 되심 구세주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에 대한 자세가 변화 되었습니다. 현실 만족을 위해 살았던 그가 내세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미 칼럼니스트 최효섭 목사는 천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항상 날씨가 청명하다. 그곳은 변덕 장이 들이 없기 때문이다. 천국은 전등불이 필요 없다. 모두가 빛이 되기 때문이다. 그곳은 조미료가 필요 없다. 모두가 소금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경쟁과 싸움이 없으며 오직 칭찬과 사랑만 있다. 그곳은 폭탄선언이나 깜짝쇼가 없고 항상 평온하다. 천국의 사람들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감사의 기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천국행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는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다. 교만한 사람, 욕심쟁이, 남을 헐뜯는 사람, 거짓말쟁이, 화를 잘 내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화합을 깨뜨리는 사람은 천국행 비자를 받을 수 없다\\\\\\\" (천국 비자-인터넷정보클럽) 천국은 문턱이 매우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교만\\\\\\\'과 \\\\\\\'거만\\\\\\\'으로 치장한 사람은 천국의 낮은 문턱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겸손한 사람을 위해 예비된 아름다운 낙원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를 의지하고 천국 낙원에 들어가는 모두가 됩시다. 3. 나와 함께 예수님은 죄인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그 속에 내주 하시어서 함께 동행 하시며 기도를 들어 주시며 슬픔 가운데서 위로 하시며 마침내 영광 가운데로 데려 가십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5)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6)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말씀은 한 달 뿐이 아니라 일년이나 천년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3)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설립한 양로원에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방문해서 노인들에게 양로원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들은 빅토리아 여왕이 지었다고 답했습니다. 이어 방문객이 여왕이 한번이라도 이 양로원을 방문했느냐고 묻자 노인들은 가끔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방문객이 \\\\\\\"그러면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은 여기 오셨습니까?\\\\\\\"하고 묻자 노인 한 분이 \\\\\\\"아니, 예수님이 왜 오십니까? 예수님은 오시는 분이 아니고 처음부터 여기 계셨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처음부터 같이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 계시며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성 버나드는 \\\\\\\"예수님이 문을 열고 들어 오신다든지 걸어오시는 것은 못 봤어도 예수님은 항상 내 곁에 계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웨슬리는 항상 빈 의자를 곁에 놔두고 예수님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십니다. 이 약속 믿고 더욱 믿음위에 굳게 서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재림의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모두가 됩시다.
가상칠언(2)/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2004-04-03
가상칠언(2)/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사람들은 내세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답을 다른 종교나 철학 과학에서는 제대로 주지 못합니다. 논어 선진 편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께서 살아 있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질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리요 하시었다. 감히 죽음에 대하여 묻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아직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는가(계로 문사귀신 자왈 미능사인 언능사귀 감문사 왈미지생 언지사-季路 問事鬼神한대 子曰 未能事人이면 焉能事鬼리오.敢問死하나이다. 曰未知生이면 焉知死리오). 한용운님의 알수 없어요 라는 시도 불교의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한용운) 철학자 쇼펜아워는 공원 밴취에 앉아 인생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가에 대하여 골몰히 생각하다가 공원 관리인이 누구며 어디서 온 사람이냐고 하자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여기에 앉아 있지를 않지 하고 어둠 속으로 살아졌다 합니다. 과학도 우주의 비밀 인생의 비밀을 알기 위하여 연구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이라 하여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간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낙원(파라데이소스)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했습니다(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8)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 51:3)한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입니다(I. H. Marshall).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눅16:22)한 말씀에 나사로가 들어가 있는 아브라함의 품을 낙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2)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4) 한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는 셋째 하늘 곧 천국이 낙원입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7)하신 부활 이후 영원히 복을 누릴 천국이 낙원입니다. 낙원은 행복과 안식의 것입니다. 전통적인 관념은 낙원은 의로운 자들이 기업을 받아 찬미 부르는 행복한 곳으로 밝혔으며 초대 교부들도 모든 고난의 요소가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가르쳤습니다. 낙원은 기쁨의 곳입니다. 낙원은 밤이 없으니 기쁨의 곳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 21:23)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 22:5) 낙원은 눈물 사망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없으니 기쁨의 곳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낙원은 완전한 곳입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계 21:16) 스다디온 올림픽 스타디움의 단위로 가로 세로 185미터 크기의 면적을 말합니다. 일만 이천 스다디온은 1500마일(2,200km)입니다. 484만 평방 킬로입니다. 우리나라 남북이 22만 평방 킬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면적 22배입니다. 장광고가 다 같습니다. 이는 완전한 세계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곳이 우리가 들어가 살 곳은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세계입니다. 이러한 낙원에서 주님은 강도에게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두 번째 말씀은 한 강도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혼자 달리신 것이 아니라 흉악한 두 강도와 함께 달리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욕보이기 위해 강도와 함께 매달았습니다. 강도들은 이 세상에서 인생을 자기들의 뜻대로 남의 것으로 참으로 호화스럽게 살아온 자들 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저들의 모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강도와 같이 죄악 가운데 살며 마지막 까지 자기를 고집하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인생의 한 면이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인생의 종말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집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1)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마 25:32)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3)하시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고 합니다. 이는 지옥의 형벌을 말합니다.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4)고 합니다. 이는 천국의 복락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합니다. 1. 오늘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을 먼 장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말씀은 이 말씀을 하는 바로 그날 그 시간을 말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한 오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눅23:40) 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사함을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런가? 라는 히의가 있습니다. 그보다도 생활이 나아지기 위하여,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인간 수양을 위하여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을까?라고말하기도 합니다. 죄라면 살인강도나 간음, 사기 같은 범률상의 죄로만 알 뿐이요, 그것이 없는 한 자기는 의인인줄로 압니다. 기도를 할 때는 습관처럼 \\\\\\\"저는 죄인이오니...\\\\\\\"하나, 머리를 들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지적합니다. 구원은 자신이 죄인음을 아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게 된 오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0)고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죄를 짓든 그가 예수님의 의를 보고서 하나님 두려운 줄을 발견한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의 오늘도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 곧 두려워함이 지식의 근본이요 축복의 원천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죄 값이 당연함을 깨달은 오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눅 23:41) 죄인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생기자 자신의 죄값이 당연한 것으로 깨닫고 죄 값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줄 아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를 발견한 오늘입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의를 발견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부인한 레난(Renan)은 예수는 어느 방면으로 보던지 독특하다 했습니다. 로메인씨는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지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도 도덕적으로 예수님을 숭배 한다고 했습니다. 밀(J.S. Mill)은 누가 예수님의 말씀과 그 생활을 생각해 낼 수 있으랴 이는 갈보리의 어부들은 못 할 것이요 바울도 못할 것이다 고 했습니다. 스트라우스(Strause)는 예수님은 도덕의 최고 목표다 라고 했습니다. 괴테(Goethe)는 복음서는 참되다 그 이유는 거기서 예수님에게서 오는 도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메튜 아놀드(Matthew Anold)는 예수님의 의로운 길 밖에 다른 더 좋은 것은 인류가 생각 해 낼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렉키(Lecky)는 예수님은 도덕의 최고 목표가 되시고 인류의 마음을 개조하는 독일무이한 분이다. 모든 철학자와 모든 도덕가들은 다 그 앞에서 빛을 잃는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죄하시고 의로우신 구세주이심을 믿고 낙원의 복을 누립십시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의 내세를 맡긴 오늘입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눅 23:42)라고 합니다. 이는 육신의 생명이 떠난 후의 그의 존재가 계속 할 것을 믿은 것이요 내세를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원한 내세를 바라보고 자신을 맡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맡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혀 돌 맞아 죽을 자리에서 용서 받은 여인이 맡깁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다 부름 받은 사울이 맡깁니다. 세리 삭개오가 맡깁니다. 우리도 맡기고 마지막 시간에 일하려간 포도원의 일꾼들처럼 최선을 다하며 낙원의 복락을 누립시다. 2. 네가 1) 강도였던 네가 강도 인생은 매일 같이 주먹과 칼로 나의 것은 내 것 너의 것도 내 것이라 하면서 강도질을 하던 자입니다. 강도는 남의 것을 빼앗고 해하고 모함한 자의 표상이요 오늘 범죄 한 모든 인류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강도와 같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는 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치적인 강도 경제적인 강도 문화적인 강도 의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강도 인생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되어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하는 천국 백성이 된 줄 믿습니다. 2) 변화된 네가 두 강도는 각기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한 강도는 너와 나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의 죄는 유보해 놓고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살고 싶어 단순히 죽음을 면케 달려는 무리한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변화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변화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입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됐습니다. 이 강도는 지금까지는 자기의 힘과 재주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 달려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변화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온전하심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 그리스도의 왕 되심 구세주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에 대한 자세가 변화 되었습니다. 현실 만족을 위해 살았던 그가 내세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미 칼럼니스트 최효섭 목사는 천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항상 날씨가 청명하다. 그곳은 변덕 장이 들이 없기 때문이다. 천국은 전등불이 필요 없다. 모두가 빛이 되기 때문이다. 그곳은 조미료가 필요 없다. 모두가 소금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경쟁과 싸움이 없으며 오직 칭찬과 사랑만 있다. 그곳은 폭탄선언이나 깜짝쇼가 없고 항상 평온하다. 천국의 사람들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감사의 기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천국행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는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다. 교만한 사람, 욕심쟁이, 남을 헐뜯는 사람, 거짓말쟁이, 화를 잘 내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화합을 깨뜨리는 사람은 천국행 비자를 받을 수 없다\\\\\\\" (천국 비자-인터넷정보클럽) 천국은 문턱이 매우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교만\\\\\\\'과 \\\\\\\'거만\\\\\\\'으로 치장한 사람은 천국의 낮은 문턱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겸손한 사람을 위해 예비된 아름다운 낙원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를 의지하고 천국 낙원에 들어가는 모두가 됩시다. 3. 나와 함께 예수님은 죄인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그 속에 내주 하시어서 함께 동행 하시며 기도를 들어 주시며 슬픔 가운데서 위로 하시며 마침내 영광 가운데로 데려 가십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5)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6)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말씀은 한 달 뿐이 아니라 일년이나 천년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3)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설립한 양로원에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방문해서 노인들에게 양로원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들은 빅토리아 여왕이 지었다고 답했습니다. 이어 방문객이 여왕이 한번이라도 이 양로원을 방문했느냐고 묻자 노인들은 가끔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방문객이 \\\\\\\"그러면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은 여기 오셨습니까?\\\\\\\"하고 묻자 노인 한 분이 \\\\\\\"아니, 예수님이 왜 오십니까? 예수님은 오시는 분이 아니고 처음부터 여기 계셨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처음부터 같이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 계시며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성 버나드는 \\\\\\\"예수님이 문을 열고 들어 오신다든지 걸어오시는 것은 못 봤어도 예수님은 항상 내 곁에 계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웨슬리는 항상 빈 의자를 곁에 놔두고 예수님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십니다. 이 약속 믿고 더욱 믿음위에 굳게 서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재림의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모두가 됩시다.
가상칠언(2)/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2004-06-18
가상칠언(2)/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사람들은 내세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답을 다른 종교나 철학 과학에서는 제대로 주지 못합니다. 논어 선진 편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께서 살아 있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질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리요 하시었다. 감히 죽음에 대하여 묻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아직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는가(계로 문사귀신 자왈 미능사인 언능사귀 감문사 왈미지생 언지사-季路 問事鬼神한대 子曰 未能事人이면 焉能事鬼리오.敢問死하나이다. 曰未知生이면 焉知死리오). 한용운님의 알수 없어요 라는 시도 불교의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한용운) 철학자 쇼펜아워는 공원 밴취에 앉아 인생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가에 대하여 골몰히 생각하다가 공원 관리인이 누구며 어디서 온 사람이냐고 하자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여기에 앉아 있지를 않지 하고 어둠 속으로 살아졌다 합니다. 과학도 우주의 비밀 인생의 비밀을 알기 위하여 연구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이라 하여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간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도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낙원(파라데이소스)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했습니다(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창 2:8)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 51:3)한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입니다(I. H. Marshall).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눅16:22)한 말씀에 나사로가 들어가 있는 아브라함의 품을 낙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2)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4) 한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는 셋째 하늘 곧 천국이 낙원입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7)하신 부활 이후 영원히 복을 누릴 천국이 낙원입니다. 낙원은 행복과 안식의 것입니다. 전통적인 관념은 낙원은 의로운 자들이 기업을 받아 찬미 부르는 행복한 곳으로 밝혔으며 초대 교부들도 모든 고난의 요소가 없는 평화로운 곳으로 가르쳤습니다. 낙원은 기쁨의 곳입니다. 낙원은 밤이 없으니 기쁨의 곳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계 21:23)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계 22:5) 낙원은 눈물 사망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없으니 기쁨의 곳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낙원은 완전한 곳입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계 21:16) 스다디온 올림픽 스타디움의 단위로 가로 세로 185미터 크기의 면적을 말합니다. 일만 이천 스다디온은 1500마일(2,200km)입니다. 484만 평방 킬로입니다. 우리나라 남북이 22만 평방 킬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면적 22배입니다. 장광고가 다 같습니다. 이는 완전한 세계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곳이 우리가 들어가 살 곳은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세계입니다. 이러한 낙원에서 주님은 강도에게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두 번째 말씀은 한 강도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혼자 달리신 것이 아니라 흉악한 두 강도와 함께 달리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욕보이기 위해 강도와 함께 매달았습니다. 강도들은 이 세상에서 인생을 자기들의 뜻대로 남의 것으로 참으로 호화스럽게 살아온 자들 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저들의 모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강도와 같이 죄악 가운데 살며 마지막 까지 자기를 고집하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인생의 한 면이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인생의 종말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집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1)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마 25:32)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3)하시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고 합니다. 이는 지옥의 형벌을 말합니다.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4)고 합니다. 이는 천국의 복락을 말합니다.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합니다. 1. 오늘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을 먼 장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말씀은 이 말씀을 하는 바로 그날 그 시간을 말합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한 오늘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눅23:40) 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사함을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런가? 라는 히의가 있습니다. 그보다도 생활이 나아지기 위하여,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인간 수양을 위하여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을까?라고말하기도 합니다. 죄라면 살인강도나 간음, 사기 같은 범률상의 죄로만 알 뿐이요, 그것이 없는 한 자기는 의인인줄로 압니다. 기도를 할 때는 습관처럼 \\\"저는 죄인이오니...\\\"하나, 머리를 들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지적합니다. 구원은 자신이 죄인음을 아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게 된 오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0)고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죄를 짓든 그가 예수님의 의를 보고서 하나님 두려운 줄을 발견한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의 오늘도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함 곧 두려워함이 지식의 근본이요 축복의 원천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죄 값이 당연함을 깨달은 오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눅 23:41) 죄인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생기자 자신의 죄값이 당연한 것으로 깨닫고 죄 값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줄 아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를 발견한 오늘입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의를 발견하는 오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부인한 레난(Renan)은 예수는 어느 방면으로 보던지 독특하다 했습니다. 로메인씨는 임종 직전에 예수님을 믿고 지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도 도덕적으로 예수님을 숭배 한다고 했습니다. 밀(J.S. Mill)은 누가 예수님의 말씀과 그 생활을 생각해 낼 수 있으랴 이는 갈보리의 어부들은 못 할 것이요 바울도 못할 것이다 고 했습니다. 스트라우스(Strause)는 예수님은 도덕의 최고 목표다 라고 했습니다. 괴테(Goethe)는 복음서는 참되다 그 이유는 거기서 예수님에게서 오는 도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메튜 아놀드(Matthew Anold)는 예수님의 의로운 길 밖에 다른 더 좋은 것은 인류가 생각 해 낼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렉키(Lecky)는 예수님은 도덕의 최고 목표가 되시고 인류의 마음을 개조하는 독일무이한 분이다. 모든 철학자와 모든 도덕가들은 다 그 앞에서 빛을 잃는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죄하시고 의로우신 구세주이심을 믿고 낙원의 복을 누립십시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의 내세를 맡긴 오늘입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눅 23:42)라고 합니다. 이는 육신의 생명이 떠난 후의 그의 존재가 계속 할 것을 믿은 것이요 내세를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원한 내세를 바라보고 자신을 맡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맡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혀 돌 맞아 죽을 자리에서 용서 받은 여인이 맡깁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다 부름 받은 사울이 맡깁니다. 세리 삭개오가 맡깁니다. 우리도 맡기고 마지막 시간에 일하려간 포도원의 일꾼들처럼 최선을 다하며 낙원의 복락을 누립시다. 2. 네가 1) 강도였던 네가 강도 인생은 매일 같이 주먹과 칼로 나의 것은 내 것 너의 것도 내 것이라 하면서 강도질을 하던 자입니다. 강도는 남의 것을 빼앗고 해하고 모함한 자의 표상이요 오늘 범죄 한 모든 인류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강도와 같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는 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치적인 강도 경제적인 강도 문화적인 강도 의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강도 인생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되어 낙원에 함께 있으리라하는 천국 백성이 된 줄 믿습니다. 2) 변화된 네가 두 강도는 각기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한 강도는 너와 나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이는 자기의 죄는 유보해 놓고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살고 싶어 단순히 죽음을 면케 달려는 무리한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한 강도는 변화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변화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입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됐습니다. 이 강도는 지금까지는 자기의 힘과 재주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 달려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변화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온전하심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 그리스도의 왕 되심 구세주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에 대한 자세가 변화 되었습니다. 현실 만족을 위해 살았던 그가 내세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미 칼럼니스트 최효섭 목사는 천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항상 날씨가 청명하다. 그곳은 변덕 장이 들이 없기 때문이다. 천국은 전등불이 필요 없다. 모두가 빛이 되기 때문이다. 그곳은 조미료가 필요 없다. 모두가 소금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경쟁과 싸움이 없으며 오직 칭찬과 사랑만 있다. 그곳은 폭탄선언이나 깜짝쇼가 없고 항상 평온하다. 천국의 사람들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감사의 기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천국행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는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다. 교만한 사람, 욕심쟁이, 남을 헐뜯는 사람, 거짓말쟁이, 화를 잘 내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화합을 깨뜨리는 사람은 천국행 비자를 받을 수 없다\\\" (천국 비자-인터넷정보클럽) 천국은 문턱이 매우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교만\\\'과 \\\'거만\\\'으로 치장한 사람은 천국의 낮은 문턱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겸손한 사람을 위해 예비된 아름다운 낙원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를 의지하고 천국 낙원에 들어가는 모두가 됩시다. 3. 나와 함께 예수님은 죄인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그 속에 내주 하시어서 함께 동행 하시며 기도를 들어 주시며 슬픔 가운데서 위로 하시며 마침내 영광 가운데로 데려 가십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5)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6)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말씀은 한 달 뿐이 아니라 일년이나 천년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계 21:3)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설립한 양로원에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방문해서 노인들에게 양로원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들은 빅토리아 여왕이 지었다고 답했습니다. 이어 방문객이 여왕이 한번이라도 이 양로원을 방문했느냐고 묻자 노인들은 가끔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방문객이 \\\"그러면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은 여기 오셨습니까?\\\"하고 묻자 노인 한 분이 \\\"아니, 예수님이 왜 오십니까? 예수님은 오시는 분이 아니고 처음부터 여기 계셨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처음부터 같이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함께 계시며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성 버나드는 \\\"예수님이 문을 열고 들어 오신다든지 걸어오시는 것은 못 봤어도 예수님은 항상 내 곁에 계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웨슬리는 항상 빈 의자를 곁에 놔두고 예수님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십니다. 이 약속 믿고 더욱 믿음위에 굳게 서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재림의 그날을 바라보며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모두가 됩시다.
가장 위대한 능력/ 삿15:14-19/ 2010-02-12
가장 위대한 능력 삿15:14-19 어떤 분이 매년 수천만 불씩 수출할 수 있는 큰 기업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많이 있었고, 또 자기 경영의 능력도 탁월했기 때문에 이 기업은 날마다 날마다 번창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가온 불황으로 인하여 부도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해외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밑바닥에서부터 다시금 그의 삶을 시작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잘 사시다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가 힘들지 않으십니까?\\\\\\\" 그는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비록 재산도 잃어버리고 젊음도 잃어버리고 친구들도 다 잃어버렸지만 저는 가장 귀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여러 과정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이 되고 있는 분명한 징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는 그는 돈을 힘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도와주고 있는 경영진들을 힘으로 생각했습니다. 경험을 힘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뛰어난 힘 그 수완을 힘으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큰 어려움을 만난 후에야 가장 위대한 힘은 바로 그 모든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능력이 있습니다. 원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배경이 든든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혹은 타고난 미모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받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재능이 많아서 어려서부터 그 재능 때문에 다른 사람에 비해서 아주 두드러 지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런 선천적인 경우 외에도 후천적으로 내가 얻는 여러 가지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지식을 쌓고 또 좋은 학벌을 가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재물과 좋은 지위 같은 것을 얻어서 이런 것을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그런 귀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타고난 것이든 내가 힘을 써서 얻은 것이든 이 모든 것이 전혀 필요 없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전혀 도움이 안돼는 순간 그런 순간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가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오직 한가지만 남게 될 것입니다. 사람도 자기의 재능도 모든 배경도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남게 되는 경험 우리가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마지막 순간까지 남을 수 있는 우리의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삼손은 아주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좋은 어머니 아주 경건한 어머니의 기도와 함께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좋은 가문 출신입니다. 낳으면서부터 하나님 앞에 드려진 낫실인 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볼만한 그런 출신 성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육체적인 힘을 주셔서 육체적인 괴력을 소유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몸을 결박한 세 줄을 아주 가볍게 끊어 버릴 만한 힘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당당히 특기 하나 가지고도 천명의 불렛셋 군대들을 죽일 수 있는 그런 힘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마치 자동 기계처럼 한번만 소리를 질러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해서 모인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힘을 보면서 잘 풀려 가고 이상하게 자기에게 쏟다 부어지는 이런 능력들을 의식하면서 아마도 삼손은 아마 충분히 오해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야 나는 굉장히 힘이 센 사람이로구나.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굉장한 사람이야. 나보다 힘이 센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아마도 이런 생각들을 삼손은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자화자찬을 합니다. 우리 16절 말씀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아멘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나지 않아요.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자기가 죽인게 아닌데 지금 삼손은 자기가 죽였다고 말하고 있어요. 사실 그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자기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삼손의 착각일 뿐입니다. \\\\\\\"내가 죽였도다.\\\\\\\" 어리석은 부자가 누가복음에서 엄청난 곡식을 수확하고 \\\\\\\"창고를 더 지었으면\\\\\\\"하고 하는 소리하고 좀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17,18절입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답답한 소리를 이 부자가 하고 있습니다. 내 곡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리라.\\\\\\\" 자기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더 큰 창고를 지어서 거기에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착각입니다. 자기 곡식이 아니에요. 자기의 수확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된 것도 아니고 자기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비단 삼손이나 어리석은 부자의 말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착각은 얼마든지 들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우리에게도 재능이 있지 않습니까?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이룹니다. 탁월한 것들이 많이 있고 또 살아가면서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을 내가 노력하고 내가 똑똑해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이런 착각이 우리 인생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힘이 아니고 나의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요, 하나님이 은혜로 하락하신 힘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이룬 일입니다. 내가 태어나면서 얻은 능력이든지 그 이후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든지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힘이요, 능력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삼손은 자기 속에 있는 가장 위대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언제 그 위대한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가 특별을 가지고 천명을 죽였을 때였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세 줄로 묶여 있을 때 그것을 과음 한번 지르는 소리와 함께 자르는 그런 순간이었습니까! 아니에요. 그런 순간에 이 위대한 능력을 그는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마른 순간에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18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여기서는 아멘이 나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삼손이 목이 마르매 삼손이 심히 목이 마르매 목마르는 순간에 그때 위대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그가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그렇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마르는 순간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전혀 지칠 줄 몰랐던 그가 지쳤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천명의 블렛의 사람을 죽였던 그였지만 심히 목마른 순간 그건 이미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 그가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저 한번 필요할 때마다 힘을 쓰기만 하면 하나님이 주신 힘이 그를 통해서 흘려 넘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목마른 순간 자기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 자기의 부족을 느끼는 그 순간에 비로소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는 위대한 능력으로 이렇게 연결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주셨다고 그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 길 가운데 우리의 한계를 경험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마름을 경험하는 순간 가난을 직면하는 순간 실패를 경험하는 순간 이제는 내 힘으로 할 수 없다고 깨닫는 순간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혼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제는 꼼짝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순간이 위대한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호텔인 체인지 비시입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체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홀리데이 인\\\\\\\"이라고 하는 호텔입니다. 이 호텔의 창업 주는 케머슨 윌슨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40세가 조금 넘었을 때 다니던 회사에서부터 갑자기 해고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하늘이 깜깜해 졌어요.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비탄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까? 나는 아직 젊은데 앞으로 갈 길은 먼데 직업이 없으니 무엇을 할까?\\\\\\\" 그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 해고에 담긴 뜻이 무엇입니까?\\\\\\\" 그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건전한 여행객들이 묵을 수 있는 여관업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그가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인 체인망을 가지고 아주 훌륭한 호텔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뒤에는 에굽 군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모세는 고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경험을 모세가 했습니다. 위대한 능력의 종 사도바울에게도 심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능력도 행하고 기적도 베풀었지만 그 속에 있는 그 목마름 자기 건강의 문제가 너무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얼마나 괴로웠던지 세 번씩이나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주여 좀 낫게 해주십시오. 목말라 죽겠나이다. 괴로워 죽겠나이다. 건강한 몸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약할 때 그때가 곧 강할 때\\\\\\\"라는 응답을 주님이 해 주셨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2:9절 같이 읽겠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약할 때 그때가 곧 강할 때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이 임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심한 목마름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 순간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터져 주시는 하나님의 생수를 경험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실패는 새로운 영적인 성공을 경험하는 놀라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 어떤 종류의 한계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어떤 종류의 절망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이런 여러 종류의 한계 상황들을 통해 내가 타고난 재능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이제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약할 때 주님의 강함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나에게 도움이 안될 때 오직 주님만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는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목마름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돕길 원하십니다. 주님의 도움 심을 경험하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가장 목마른 순간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생수가 터지는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약한 순간에 나타날 수 있었던 삼손 속에 있었던 가장 위대한 능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 오늘 바로 이 본문까지 삼손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자동적으로 그 힘은 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에 이르매 삼손이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이 위대한 기도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같이 하실 까요.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그렇습니다. 이게 위대한 전환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자가 기도하게 되는 그런 위대한 순간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나의 가장 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으로 채워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0세기에 천재 과학자라고 불리는 코틀런트박사가 기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같이 읽으실 까요. \\\\\\\"기도는 온 우주를 통해서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그가 바라보던 모든 우주의 능력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기도라고 그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찰스플전도 기도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같이 읽겠습니다. \\\\\\\"기도의 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발견한 진리는 참으로 놀라운 진리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일을 보고 내 능력을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별로 기도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지도 않았는데 잘 일이 풀려 나가고 건강하고 모든 것이 형통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운수 때문에 그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성도가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나의 가장 위대한 힘은 타고난 힘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나에게 주어진 재능 때문에 할 수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위대한 힘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순간입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내가 노력하여 만든 힘도 아니고 내가 타고난 힘을 가지고 이룬 일도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응답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는 일 이것이 가장 위대한 능력의 소산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이루어 낸 수천 가지의 일보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응답 받아 이룬 한가지의 일이 훨씬 위대합니다. 요한복음15:7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지난주간 우리 김태민 선교사님께서 한 주간 동안 우리 교회에 계셨습니다. 정말 좋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귀한 은혜를 끼쳤습니다. 선교사님 자신도 우리 교회를 통해서 큰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무사히 출국을 하셨습니다. 같이 지내는 동안에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태국은 95%이상이 다 불교 나라입니다. 그 가운데 존경받는 사람이 불교 승려들입니다. 왕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이 바로 스님들이에요. 그런데 일년에 한번씩 그 스님 중에 가장 수도를 많이 하고 가장 힘이 있는 스님이 사람들이 다 모아 놓고는 한번씩 자기의 힘을 과시하는 그런 시간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긴 쇠꼬챙이 같은 걸로 양 뺨을 가로질러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거기에 무거운 물건을 달기도 하고 혀에 침을 찌르기도 하면서 아주 살벌한 모습으로 자기의 힘을 과시한다고 합니다. 그때는 보통 귀신들의 힘을 얻어서 그 일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피가 한 방울도 흐리지 않은 것을 사람들이 보고 박수 갈채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참 그 유명한 스님이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 있는데 일단의 태국의 기독교인들이 거기서부터 먼 거리에서 그러나 과음을 지르면 들릴 만한 거리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 태국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저 악령들의 힘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큰 것을 보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얼마나 크게 기도를 했던지 스님의 귀에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힘이 \\\\\\\"쫙\\\\\\\" 빠지더니 양 뺨을 가로지르고 있던 그 쇠꼬챙이가 \\\\\\\"쭉\\\\\\\"하면서 내려가는데 피가 흐리기 시작했답니다. 혀가 찌어지기 시작했답니다. 쓰려져서 급하게 병원으로 실려 갔던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런 일을 할 때는 반듯이 팬 말을 하나 붙이는데 \\\\\\\"예수 믿는 사람 접근 금지\\\\\\\" 이렇게 붙인다고 해요.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이름은 위대하고 우리 주님의 이름은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부르짖는 기도는 이처럼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위대한 능력을 사장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패인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기도는 환자에게 건강을 주고 귀먹은 사람에게 청력을 말 못하는 자에게 언어 능력을 눈먼 자에게 시력을 죽은 자에게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구원을 줍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탄을 쫓아내고 그 방에 하나님이 거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바로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로소 삼손은 자기가 하지 않았고 모두 주님이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그가 목마르고 난 다음에게 비로소 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로 말미암아 위대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그가 고백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지금 당하는 목마름도 채워 주시도록 삼손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주님이 하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어려움 역시도 주님께서 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이렇게 맡기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직면한 모든 문제도 주님이 해결 해 주실 것을 믿고 주 앞에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타고난 것이 별로 없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서 무력감에 빠져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나는 너무 연약한 몸으로 태어났어. 재능도 없어. 가진 것도 없어. 이룬 것도 없어.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무력감을 가지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가장 귀한 능력, 가장 위대한 능력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서 역사는 삶을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 가운데는 내 능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은 바로 내 지혜와, 내 수완과 내 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 줄을 끊고 당나귀 턱뼈로 수천명을 죽이는 삼손처럼 자만해서는 곤란합니다. 주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주님이 저를 능하게 하셨습니다. 이 문제 역시도 주님 손에 맡깁니다. 이렇게 다시금 기도를 깨달은 삼손처럼 우리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복된 기도의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연약할 때 가장 위대한 능력의 통로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삼손은 이제 가장 위대한 능력의 원천인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 1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레위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엔학고레\\\\\\\" 무슨 뜻입니까? \\\\\\\"부르짖은 자의 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시길 원하는 은총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르짖은 자의 샘\\\\\\\" 이 샘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능력의 샘입니다. 능력의 기도가 능력의 하나님을 움직여서 얻은 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면 능력의 하나님은 손을 펼치사 우리에게 엔학고레 샘을 우리에게 터져 주시는 것입니다. 제임스 코든 윌리스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 같이 이 글을 읽겠습니다. \\\\\\\"그 능력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높이 올라가 예수님을 통해 보좌에 이릅니다. 그리고 세계를 움직이는 손을 움직여서 구원이 땅으로 내려오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높이 올라가 예수님 보좌 앞에 이르고 예수님의 그 능하신 손 능력의 손이 땅으로 다시 내려와서 우리의 앞에 엔학고레 샘을 터지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영적인 무기인 기도를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면 가장 위대한 능력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우리 앞에 엔학고레 부르짖은 자의 샘이 터지게 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손이 내려오셔서 우리 앞에 샘을 터지시며 반석을 쪼개시며 우리 앞에 모든 문들을 여러 주시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행 항공술에 선구자라고 불리 우는 헨드리 페이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행 묘기를 하는데 선구자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는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높이 높이 올라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 안에서 \\\\\\\"찍찍\\\\\\\"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생쥐 한 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계속 비행기를 조정하고 있는데 이 생쥐는 선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계속 갉아먹고 있는데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잠깐 후에 비행기가 선이 끊어지는 순간에 추락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위기를 맞았습니다. 위기 중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주여,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 위기를 내가 어떻게 극복하면 좋겠습니까! 저 생쥐를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 순간에 하나님의 감당이 왔습니다. \\\\\\\"더 높이 하늘 보좌를 향하여 높이 날아라.\\\\\\\" 그는 감동을 받고 다시 조정관을 당겼습니다. 높이 높이 날아 올라갔습니다. 한참을 날아갔는데 조용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안 일이지만 생쥐는 사람보다 훨씬 산소를 더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그만 숨을 쉬지 못해서 생쥐가 죽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주변에는 생쥐처럼 \\\\\\\"찍찍\\\\\\\" 거리고 우리를 괴롭게 하고 온통 엉망진창이 되어 가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온통 긁어 대는 소리 고장나고 금방 추락 할 것만 같은 위기 의식들을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조정관을 뒤로 당겨야 합니다.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시다. 하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주님 앞에 간구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엔학고레를 터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샘은 우리의 정신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소생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시고 위대한 기도의 능력을 사용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터뜨려 주시는 부르짖은 자의 샘을 마실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셔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우리 앞에서 샘을 터지게 하시며 엔학고레를 만드는 그런 위대한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에 귀한 말씀으로 입으로 같이 고백을 합시다. \\\\\\\"요한복음16:24절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 겹줄을 끊어 버리는 굉장한 힘을 타고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외울 수 있는 좋은 머리를 타고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든든한 배경들을 가지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능력인 기도의 능력을 가졌습니다. 우리 속에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부르짖은 자의 샘을 주시는 응답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귀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이 능력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심히 목마른 곳으로 인도하실 지도 모릅니다. 힘이 없다고 목마르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고개를 들어 부르짖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 손에 구원이 있고 주님 손에 응답이 있고 주님 손에 힘이 있고 주님의 손에 능력이 있는 것을 믿고 부르짖는 자의 샘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도의 사람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위대한 능력/삿15:14-19
가장 위대한 능력/삿15:14-19 2003-09-23 11:54:13 read : 10 어떤 분이 매년 수천만 불씩 수출할 수 있는 큰 기업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많이 있었고, 또 자기 경영의 능력도 탁월했기 때문에 이 기업은 날마다 날마다 번창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가온 불황으로 인하여 부도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해외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밑바닥에서부터 다시금 그의 삶을 시작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잘 사시다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가 힘들지 않으십니까?" 그는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비록 재산도 잃어버리고 젊음도 잃어버리고 친구들도 다 잃어버렸지만 저는 가장 귀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여러 과정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이 되고 있는 분명한 징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는 그는 돈을 힘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도와주고 있는 경영진들을 힘으로 생각했습니다. 경험을 힘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뛰어난 힘 그 수완을 힘으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큰 어려움을 만난 후에야 가장 위대한 힘은 바로 그 모든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능력이 있습니다. 원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배경이 든든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혹은 타고난 미모로 인하여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받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재능이 많아서 어려서부터 그 재능 때문에 다른 사람에 비해서 아주 두드러 지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런 선천적인 경우 외에도 후천적으로 내가 얻는 여러 가지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지식을 쌓고 또 좋은 학벌을 가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또는 재물과 좋은 지위 같은 것을 얻어서 이런 것을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그런 귀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타고난 것이든 내가 힘을 써서 얻은 것이든 이 모든 것이 전혀 필요 없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전혀 도움이 안돼는 순간 그런 순간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가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오직 한가지만 남게 될 것입니다. 사람도 자기의 재능도 모든 배경도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남게 되는 경험 우리가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마지막 순간까지 남을 수 있는 우리의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삼손은 아주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좋은 어머니 아주 경건한 어머니의 기도와 함께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좋은 가문 출신입니다. 낳으면서부터 하나님 앞에 드려진 낫실인 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볼만한 그런 출신 성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육체적인 힘을 주셔서 육체적인 괴력을 소유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몸을 결박한 세 줄을 아주 가볍게 끊어 버릴 만한 힘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당당히 특기 하나 가지고도 천명의 불렛셋 군대들을 죽일 수 있는 그런 힘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마치 자동 기계처럼 한번만 소리를 질러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해서 모인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힘을 보면서 잘 풀려 가고 이상하게 자기에게 쏟다 부어지는 이런 능력들을 의식하면서 아마도 삼손은 아마 충분히 오해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야 나는 굉장히 힘이 센 사람이로구나.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굉장한 사람이야. 나보다 힘이 센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아마도 이런 생각들을 삼손은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자화자찬을 합니다. 우리 16절 말씀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아멘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나지 않아요.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자기가 죽인게 아닌데 지금 삼손은 자기가 죽였다고 말하고 있어요. 사실 그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자기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삼손의 착각일 뿐입니다. "내가 죽였도다." 어리석은 부자가 누가복음에서 엄청난 곡식을 수확하고 "창고를 더 지었으면"하고 하는 소리하고 좀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2:17,18절입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답답한 소리를 이 부자가 하고 있습니다. 내 곡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리라." 자기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재산이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더 큰 창고를 지어서 거기에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착각입니다. 자기 곡식이 아니에요. 자기의 수확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된 것도 아니고 자기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비단 삼손이나 어리석은 부자의 말이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착각은 얼마든지 들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우리에게도 재능이 있지 않습니까?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나는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이룹니다. 탁월한 것들이 많이 있고 또 살아가면서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을 내가 노력하고 내가 똑똑해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이런 착각이 우리 인생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힘이 아니고 나의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요, 하나님이 은혜로 하락하신 힘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이룬 일입니다. 내가 태어나면서 얻은 능력이든지 그 이후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든지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힘이요, 능력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삼손은 자기 속에 있는 가장 위대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언제 그 위대한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그가 특별을 가지고 천명을 죽였을 때였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세 줄로 묶여 있을 때 그것을 과음 한번 지르는 소리와 함께 자르는 그런 순간이었습니까! 아니에요. 그런 순간에 이 위대한 능력을 그는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마른 순간에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18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여기서는 아멘이 나옵니다. 왜 그런가 하니, 삼손이 목이 마르매 삼손이 심히 목이 마르매 목마르는 순간에 그때 위대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그가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그렇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마르는 순간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전혀 지칠 줄 몰랐던 그가 지쳤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천명의 블렛의 사람을 죽였던 그였지만 심히 목마른 순간 그건 이미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 그가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저 한번 필요할 때마다 힘을 쓰기만 하면 하나님이 주신 힘이 그를 통해서 흘려 넘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목마른 순간 자기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 자기의 부족을 느끼는 그 순간에 비로소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는 위대한 능력으로 이렇게 연결되는 축복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주셨다고 그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 길 가운데 우리의 한계를 경험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마름을 경험하는 순간 가난을 직면하는 순간 실패를 경험하는 순간 이제는 내 힘으로 할 수 없다고 깨닫는 순간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혼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제는 꼼짝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순간이 위대한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호텔인 체인지 비시입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체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홀리데이 인"이라고 하는 호텔입니다. 이 호텔의 창업 주는 케머슨 윌슨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40세가 조금 넘었을 때 다니던 회사에서부터 갑자기 해고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하늘이 깜깜해 졌어요.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비탄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까? 나는 아직 젊은데 앞으로 갈 길은 먼데 직업이 없으니 무엇을 할까?" 그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 해고에 담긴 뜻이 무엇입니까?" 그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건전한 여행객들이 묵을 수 있는 여관업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그가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인 체인망을 가지고 아주 훌륭한 호텔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뒤에는 에굽 군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모세는 고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경험을 모세가 했습니다. 위대한 능력의 종 사도바울에게도 심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능력도 행하고 기적도 베풀었지만 그 속에 있는 그 목마름 자기 건강의 문제가 너무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얼마나 괴로웠던지 세 번씩이나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주여 좀 낫게 해주십시오. 목말라 죽겠나이다. 괴로워 죽겠나이다. 건강한 몸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약할 때 그때가 곧 강할 때"라는 응답을 주님이 해 주셨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2:9절 같이 읽겠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약할 때 그때가 곧 강할 때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함이 임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심한 목마름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 순간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터져 주시는 하나님의 생수를 경험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실패는 새로운 영적인 성공을 경험하는 놀라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금 어떤 종류의 한계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어떤 종류의 절망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이런 여러 종류의 한계 상황들을 통해 내가 타고난 재능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이제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약할 때 주님의 강함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이 원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나에게 도움이 안될 때 오직 주님만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는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목마름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돕길 원하십니다. 주님의 도움 심을 경험하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의 가장 목마른 순간에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생수가 터지는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약한 순간에 나타날 수 있었던 삼손 속에 있었던 가장 위대한 능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 오늘 바로 이 본문까지 삼손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자동적으로 그 힘은 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에 이르매 삼손이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이 위대한 기도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같이 하실 까요.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그렇습니다. 이게 위대한 전환입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자가 기도하게 되는 그런 위대한 순간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나의 가장 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으로 채워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0세기에 천재 과학자라고 불리는 코틀런트박사가 기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같이 읽으실 까요. "기도는 온 우주를 통해서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그가 바라보던 모든 우주의 능력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기도라고 그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찰스플전도 기도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같이 읽겠습니다. "기도의 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늘과 땅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발견한 진리는 참으로 놀라운 진리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일을 보고 내 능력을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별로 기도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지도 않았는데 잘 일이 풀려 나가고 건강하고 모든 것이 형통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은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운수 때문에 그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성도가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나의 가장 위대한 힘은 타고난 힘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나에게 주어진 재능 때문에 할 수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나의 위대한 힘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순간입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내가 노력하여 만든 힘도 아니고 내가 타고난 힘을 가지고 이룬 일도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응답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는 일 이것이 가장 위대한 능력의 소산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이루어 낸 수천 가지의 일보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응답 받아 이룬 한가지의 일이 훨씬 위대합니다. 요한복음15:7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지난주간 우리 김태민 선교사님께서 한 주간 동안 우리 교회에 계셨습니다. 정말 좋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귀한 은혜를 끼쳤습니다. 선교사님 자신도 우리 교회를 통해서 큰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무사히 출국을 하셨습니다. 같이 지내는 동안에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태국은 95%이상이 다 불교 나라입니다. 그 가운데 존경받는 사람이 불교 승려들입니다. 왕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이 바로 스님들이에요. 그런데 일년에 한번씩 그 스님 중에 가장 수도를 많이 하고 가장 힘이 있는 스님이 사람들이 다 모아 놓고는 한번씩 자기의 힘을 과시하는 그런 시간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긴 쇠꼬챙이 같은 걸로 양 뺨을 가로질러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거기에 무거운 물건을 달기도 하고 혀에 침을 찌르기도 하면서 아주 살벌한 모습으로 자기의 힘을 과시한다고 합니다. 그때는 보통 귀신들의 힘을 얻어서 그 일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피가 한 방울도 흐리지 않은 것을 사람들이 보고 박수 갈채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참 그 유명한 스님이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 있는데 일단의 태국의 기독교인들이 거기서부터 먼 거리에서 그러나 과음을 지르면 들릴 만한 거리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 태국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저 악령들의 힘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큰 것을 보여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얼마나 크게 기도를 했던지 스님의 귀에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힘이 "쫙" 빠지더니 양 뺨을 가로지르고 있던 그 쇠꼬챙이가 "쭉"하면서 내려가는데 피가 흐리기 시작했답니다. 혀가 찌어지기 시작했답니다. 쓰려져서 급하게 병원으로 실려 갔던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런 일을 할 때는 반듯이 팬 말을 하나 붙이는데 "예수 믿는 사람 접근 금지" 이렇게 붙인다고 해요.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이름은 위대하고 우리 주님의 이름은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부르짖는 기도는 이처럼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에 이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위대한 능력을 사장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패인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기도는 환자에게 건강을 주고 귀먹은 사람에게 청력을 말 못하는 자에게 언어 능력을 눈먼 자에게 시력을 죽은 자에게 생명을 잃어버린 자에게 구원을 줍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탄을 쫓아내고 그 방에 하나님이 거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바로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로소 삼손은 자기가 하지 않았고 모두 주님이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그가 목마르고 난 다음에게 비로소 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로 말미암아 위대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그가 고백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지금 당하는 목마름도 채워 주시도록 삼손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주님이 하셨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어려움 역시도 주님께서 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이렇게 맡기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직면한 모든 문제도 주님이 해결 해 주실 것을 믿고 주 앞에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타고난 것이 별로 없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서 무력감에 빠져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나는 너무 연약한 몸으로 태어났어. 재능도 없어. 가진 것도 없어. 이룬 것도 없어.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무력감을 가지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가장 귀한 능력, 가장 위대한 능력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서 역사는 삶을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 가운데는 내 능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은 바로 내 지혜와, 내 수완과 내 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 줄을 끊고 당나귀 턱뼈로 수천명을 죽이는 삼손처럼 자만해서는 곤란합니다. 주님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내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주님이 저를 능하게 하셨습니다. 이 문제 역시도 주님 손에 맡깁니다. 이렇게 다시금 기도를 깨달은 삼손처럼 우리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복된 기도의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연약할 때 가장 위대한 능력의 통로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삼손은 이제 가장 위대한 능력의 원천인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 1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레위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엔학고레" 무슨 뜻입니까? "부르짖은 자의 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주시길 원하는 은총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르짖은 자의 샘" 이 샘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능력의 샘입니다. 능력의 기도가 능력의 하나님을 움직여서 얻은 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면 능력의 하나님은 손을 펼치사 우리에게 엔학고레 샘을 우리에게 터져 주시는 것입니다. 제임스 코든 윌리스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 같이 이 글을 읽겠습니다. "그 능력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높이 올라가 예수님을 통해 보좌에 이릅니다. 그리고 세계를 움직이는 손을 움직여서 구원이 땅으로 내려오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높이 올라가 예수님 보좌 앞에 이르고 예수님의 그 능하신 손 능력의 손이 땅으로 다시 내려와서 우리의 앞에 엔학고레 샘을 터지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영적인 무기인 기도를 사용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면 가장 위대한 능력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우리 앞에 엔학고레 부르짖은 자의 샘이 터지게 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손이 내려오셔서 우리 앞에 샘을 터지시며 반석을 쪼개시며 우리 앞에 모든 문들을 여러 주시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행 항공술에 선구자라고 불리 우는 헨드리 페이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행 묘기를 하는데 선구자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는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높이 높이 올라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 안에서 "찍찍"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생쥐 한 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계속 비행기를 조정하고 있는데 이 생쥐는 선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계속 갉아먹고 있는데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잠깐 후에 비행기가 선이 끊어지는 순간에 추락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위기를 맞았습니다. 위기 중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주여,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 위기를 내가 어떻게 극복하면 좋겠습니까! 저 생쥐를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 순간에 하나님의 감당이 왔습니다. "더 높이 하늘 보좌를 향하여 높이 날아라." 그는 감동을 받고 다시 조정관을 당겼습니다. 높이 높이 날아 올라갔습니다. 한참을 날아갔는데 조용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안 일이지만 생쥐는 사람보다 훨씬 산소를 더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그만 숨을 쉬지 못해서 생쥐가 죽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주변에는 생쥐처럼 "찍찍" 거리고 우리를 괴롭게 하고 온통 엉망진창이 되어 가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온통 긁어 대는 소리 고장나고 금방 추락 할 것만 같은 위기 의식들을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조정관을 뒤로 당겨야 합니다.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시다. 하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주님 앞에 간구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엔학고레를 터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샘은 우리의 정신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소생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시고 위대한 기도의 능력을 사용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터뜨려 주시는 부르짖은 자의 샘을 마실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셔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우리 앞에서 샘을 터지게 하시며 엔학고레를 만드는 그런 위대한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에 귀한 말씀으로 입으로 같이 고백을 합시다. "요한복음16:24절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 겹줄을 끊어 버리는 굉장한 힘을 타고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외울 수 있는 좋은 머리를 타고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든든한 배경들을 가지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능력인 기도의 능력을 가졌습니다. 우리 속에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부르짖은 자의 샘을 주시는 응답하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귀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이 능력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심히 목마른 곳으로 인도하실 지도 모릅니다. 힘이 없다고 목마르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고개를 들어 부르짖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 손에 구원이 있고 주님 손에 응답이 있고 주님 손에 힘이 있고 주님의 손에 능력이 있는 것을 믿고 부르짖는 자의 샘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도의 사람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 내의 상처 치유하는 길/ 삼하13:20-22/ 추석설교/ 2014-09-28
가정 내의 상처 치유하는 길 삼하13:20-22 1. 상처를 아물게 하는 보금자리 어떤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그분이 사는 아파트 단지는 아파트 평수가 크면 차 2대의 주차공간이 주어지고, 평수가 작으면 1대의 주차공간이 하나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아파트에 사는 어떤 변호사는 2대의 주차공간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항상 주차선 가운데에 주차합니다. 경비가 말려도 자기 것인데 왜 그러냐고 하니까 주민들이 그 변호사를 비웃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 목사님의 아들이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하고 한참 돌다가 씩씩거리며 들어와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지금 변호사 차를 칼로 긁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입으로는 “그러면 되겠니?”라고 했지만 마음속에는 10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원하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저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옛날 혈기를 아들이 그대로 가진 모습을 보고 등골이 오싹했다고 합니다. 대개 보면 부모의 것이 그대로 아들에게 물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것도 물려지고, 나쁜 것도 물려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넉넉하면 자녀도 넉넉한 마음을 가진 자녀로 자랄 것이고, 부모가 상처가 많으면 자녀도 상처가 많은 자녀로 자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본을 보이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다녀 간 임병철 목사님 바로 앞집에 피터(Peter)라는 이태리 계통의 목사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성도가 1500명 정도 되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고,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뉴욕의 떠오르는 별처럼 목회를 잘 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임병철 목사님과 형제처럼 지내는데, 저도 1997년 미국에 갔을 때 그분과 함께 바비큐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피터 목사님의 가족사랑은 대단합니다. 서양 목사님들은 ‘9 to 5’가 생활화되었습니다. 아침 9시에 교회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합니다. 새벽기도도 없고, 심방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목사님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는 것을 보면 오히려 이상하게 봅니다. 그런데 이 피터 목사님은 드물게 매일 새벽기도를 하는 목사님입니다. 그처럼 열정적으로 사역을 하면서도 한 달에 최소한 한번은 두 부부만의 데이트 시간을 갖고, 일 년에 두 번은 꼭 두 부부만 여행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터 목사님 친척들은 거의 마피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피터 목사님의 친척 장례식이 있어서 임병철 목사님도 갔는데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마피아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마피아들은 인상도 아주 험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에 참석한 마피아들을 보니까 하나같이 잘 생겼고, 매너도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마피아들도 가족을 참 아낀다고 합니다. 그들이 비록 밖에서는 총을 쏘고, 무섭게 싸워도 그들의 자식 사랑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피아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일은 자식을 해치는 일이라고 합니다. 마피아지만 가족의 연대 의식이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합니다. 그처럼 마피아도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데 우리는 더욱 가족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가끔 가족끼리 서로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생기지만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름답게 이뤄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은 우리의 각종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한 보금자리이지 서로 상처는 입히는 전쟁터가 아닙니다. 2. 상처 입은 다윗의 가정 오늘 본문이 있는 사무엘하 13장에는 한 콩가루 집안이 나옵니다. 형제 사이에 강간도 벌어지고, 살인도 벌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콩가루 집안의 가장이 바로 다윗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그의 가정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통 사건 때문입니다. 그 당시 다윗은 이미 여러 명의 아내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한 명을 더 원한 것입니다. 이 ‘하나 더’ 혹은 ‘한 번 더’가 인생을 망치고 가정을 망칩니다. 간통 후에 다윗은 그 일을 은폐하려고 충신 우리아까지 죽였습니다. 그 뒤 다윗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됩니다. 첫 아들 암논이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다말을 강간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다윗이 심히 분노했지만(21절),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인데 어떻게 제대로 벌을 내리겠습니까? 그러니까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한을 품고, 이년 후에 계략을 꾸며 그의 이복 형 암논을 죽였습니다. 가족들이 서로를 혐오하고 죽이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왜 가정이 깨집니까? 통제(control)는 너무 많이 하고 영향력(influence)은 너무 적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려면 통제는 가급적 적게 하고, 영향력은 많이 끼쳐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합니다. 부부도 서로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서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합니다. 3. 가정에서의 상처 치유 방법 오늘날 많은 가정들을 살펴보면 압살롬처럼 한을 품은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가정에서의 상처 치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첫째, 정직한 자백이 필요하고, 둘째, 잘못에서 돌아서는 회개가 필요하고, 셋째,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가정 내에서의 상처 치유를 위해서도 이와 같은 3가지와 함께 기도가 필요합니다. (1) 첫째, 정직한 자백이 필요합니다. 가정 내의 갈등이 일어날 때 한 사람만 일방적으로 잘못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 말은 자기 잘못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태도가 바로 용기이고 성숙함입니다.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정말 낫고자 하고,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면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르게 될 희망은 없습니다. 몸에 이상 신호가 와도 “괜찮다!”고 하면 병은 더 커지게 됩니다. 병원에 가서 “제가 여기가 아픕니다.”고 인정해야 그때부터 치료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정 내의 상처가 치유되려면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자백이 없으면 용서도 없고, 치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자기 약점을 보는데 자기만 그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문제가 없다!”고 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치료의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다!”라는 책 등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척 콜슨(Chuck Colson)이 최근에 칼리 샌티(Carly Santi)라고 하는 젊은 소녀에 관해 쓴 글을 며칠 전에 인터넷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칼리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그녀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칼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수치심이 밀려왔고, 삶의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에서 거의 1년간 말도 없이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이듬해 여름, 그녀는 한 기독교 캠프에 떠밀려 참석했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얼마 후에 칼리는 어머니와 함께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방문하고, 아버지에게 감옥에서 진행되는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하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간청을 듣고 그녀의 아버지 데니스 샌티(Dennis Santi)가 성경 공부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데니스는 면회를 온 딸 칼리에게 “네게 수치를 안겨 준 이 아빠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그 가정에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직한 자백은 인간관계의 치유를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2) 둘째, 상처 입히는 행동을 그쳐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입니다. 가정 내에 상처가 생겼으면 먼저 자신이 고칠 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서서히 변화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배우자의 잘못을 꼭 고쳐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잘못이 고쳐지기는커녕 배우자에게 더 상처만 입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낫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막는다고 “내 맘대로 할 거야!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폭발해!”하고 소리치면 남편이 겁나서 물러섭니까? 더 반발합니다. 그런 식으로 나가면 서로 상처만 입히게 되고, 아무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 문제는 더 꼬이고 악화됩니다. 그러나 갑자기 아내의 말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조용히 있다가 어느 날 한 마디 합니다. “여보! 요새 사는 맛이 안 나요!” 그처럼 작전상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해 보십시오. 물론 그 방법을 너무 심하게 쓰면 남편까지 삶의 용기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전상 적절한 방법으로 우울증이 걸린 사람처럼 행동하면 대부분의 남편들은 겁이 덜컹 나서 말할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라도 열심히 해봐!” 그처럼 상처가 없는 방법을 써야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하게 하면 부러지고, 상처만 입습니다. 부드러운 것이 아이들 교육에 훨씬 효과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엄한 아버지로부터 많이 맞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이 때리면 매의 효과도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어머니는 한 번도 때린 일이 없었습니다. 그냥 손을 붙들고,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데 그러느냐?”고 하면 꼼짝 못하고 어머니 말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강하게 우격다짐으로 남을 바꾸려고 하면 상처가 생기고, 상처는 또 상처를 부르고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에 최선을 다하고 상처를 주는 행동을 멀리해야 합니다. 특히 사소한 행동으로 인한 상처를 잘 요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소한 일이 커져서 가정이 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 서부 시대에 햇필드 가(Hatfields)와 맥코이 가(McCoys)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돼지 한 마리가 누구의 돼지냐 하는 문제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 싸움이 점차 커졌습니다. 12년 동안 서로 원수처럼 지내며 싸웠습니다. 그 싸움으로 햇필드 가의 3명, 맥코이 가 7명, 외부 사람 2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 양쪽 집안 중의 어느 누구도 돼지 한 마리가 12명의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상처를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때로 아주 사소한 일에서 큰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잘못이라도 생각나면 그 잘못에서 과감히 돌아서고, 특히 잘못된 언어를 주의해야 합니다. 옛말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곱지 않은 말을 들어도 곱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을 그 애쓴 만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3) 셋째, 마음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정 내의 갈등은 하루 속히 털어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화해를 손을 내미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화해를 잘 받아들이는 너그러움도 있어야 합니다. 남이 화해를 요청할 때 마음을 닫고 있는 것은 화해의 싹을 자르는 것이고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잘못을 많이 저질렀다고 해도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은 더 잘못된 마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기꺼이 용서하고, 기꺼이 용서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은 말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처럼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갈등을 풀려고 애써야 합니다. 갈등이 풀어지면 친밀성은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갈등을 풀지 않으면 더 비참하게 되고, 언젠가는 그 갈등이 인생 전체를 불태울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을 통해 로드니 부캐넌 목사님의 글을 즐겨 보는 편입니다. 그분이 작년에 캐나다의 앨곤퀸 주 공원(Algonquin Provincial Park)에 가서 카누를 타고 어떤 조그만 섬에 도착했는데, 공원 관리인들이 미친 듯이 구멍을 파고 호수의 물을 양동이로 퍼 넣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불을 끄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불길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어디에서 불이 났느냐고 물었더니 나무뿌리에서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표면 가까운 뿌리가 있는 곳에서 캠프파이어를 했는데, 그 불이 땅 아래에서 몇몇 나무로 옮겨 붙은 것입니다. 그것을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공원 관리인들은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불이 났다는 것을 느끼는데, 만약 그 불을 끄지 않으면 그 불은 섬 전체를 태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가정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불붙은 화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감춘다고 감추지만 대개 그 열기가 느껴집니다. 만약 그것을 끄지 않으면 그것은 전 가정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뿌리에 붙은 불을 하루빨리 꺼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마음 문을 열고 상대방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틀리고 내가 옳다고 해도, 옳고 틀린 것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더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겉으로는 가장 성숙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가장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정의감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으로 덮을 수 있어야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4) 넷째, 기도로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통해서 이론적인 무장을 잘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가족들에게 잘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가족을 매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도해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제일 먼저 성품이 부드럽게 됩니다. 거기에서 문제 해결이 시작되고, 거기에서 상처 치유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한때 전투적이 되고, 표정이 근엄하게 되고, 목소리가 쉰 소리가 되고, 눈빛이 날카롭게 되는 것을 성령 충만의 표시로 오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야 하는데, 비정상을 성령 충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에는 쉰 소리가 더 성령 충만한 소리라고 여겨서 하나님이 주신 목소리를 일부터 망가뜨리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허영심이 충만한 것이지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지하철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하고 소리 지르고, 식당에 15명이 와서 10인분만 시키고, 악을 쓰고 기도한 후에 계속 밑반찬을 달라고 해서 원가보다 더 먹어치우는 성령 충만한 교인들을 보면서, 그분은 고등학교 때에 “주님! 저는 성령을 주셔도 충만하게는 주지 마세요.” 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나오는 말마다 “예수!”가 안 들어간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에 상처를 입는지 모릅니다. 남에게 말로 상처를 입혀 놓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야! 그래서 뒤끝이 없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 뒤끝이 없는 분들이 무섭습니다. 자신이야 상처를 입혔으니까 뒤끝이 없지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얼마나 뒤끝이 많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분들을 보면 친구들이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이웃들이 혀를 내두르고, 심지어는 가족조차 외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성령 충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관계가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부부관계가 좋고, 상하관계를 잘 하고, 고부관계, 친구관계, 교회 내의 성도관계를 잘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가장 큰 증거입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내게 이런 은사가 있느냐?”가 아니라 “나의 인간관계가 아름다우냐?”에 있습니다. 자동차에는 2만개의 부속품이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무쇠 덩어리들입니다. 그래도 아무 마찰 없이 굴러가는 이유는 윤활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성령 충만하면 아름다운 관계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그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때 우리의 각종 상처는 급속히 치유될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가족들이 함께 모일 것입니다. 그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다른 식구들에게 자신의 한을 터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섭섭 마귀가 가장 많이 틈탈 때가 바로 명절 때입니다. 이때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섭섭한 일을 당해도 믿는 사람답게 결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을 생각만 하면 섭섭 마귀가 틈타지만 줄 생각을 하면 별로 섭섭할 일이 없습니다. 이번 추석에 가족들과 모이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 이번 추석을 상처를 입히는 명절이 아니라 상처를 회복하는 명절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기주의와 욕심을 버리면 됩니다. 그 두 가지만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해 사랑과 헌신을 다짐하고, 이번 명절을 가정의 각종 상처가 치유되는 뜻 깊은 명절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분당 샛별교회)
가정의 보물 눈물단지/시56:8
가정의 보물 눈물단지/시56:8 2003-09-22 21:11:49 read : 24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녀들을 낳으시고 사람되게 기르시기에 온갖 수고를 다하신 부모님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성광의 부모님,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우리 자녀들은 마음 모아 기원한다. 또한 가정 총동원주일을 맞이하여 온 가족이 함께 성광의 제단에 모여 위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은 바로 천국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들이 한 집에 모여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 집에 가장 귀한 보물이 이야기가 나왔다. 저마다 집에 있는 보물들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집주인은 다른 어머니들의 자랑을 듣기만 하고 그 집 보물에 대하여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 떠들던 어머니들은 집주인 보고 이 집에는 무슨 비밀스러운 보물이 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하며 보물을 이야기 하라고 했다. 이때 어머니는 웃으면서 우리 집에도 좋은 보물이 있답니다 하며 문을 열고는 밖에서 뛰어 놀고 있는 어린 자녀들을 부르며 "애들아 와서 손님들에게 인사하렴" 어머니는 아이들의 머리를 만지며 우리 집의 보물은 바로 어린아이들입니다 할 때 이제까지 자기의 집의 보물이 최고라고 자랑하던 어머니들이 그만 얼굴이 붉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러분의 집의 보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느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부르시고 세상에 내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한가지씩을 가져오라고 했다. 첫째 천사는 세상에 내려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보아도 아름다운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인간의 마음과 삶이 너무나 더럽게 보였다. 그런데 들판에 피어있는 들꽃은 아름다웠다. 첫째 천사는 그 꽃을 꺾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갔다. 이 세상과 천국 사이에 너무나 거리가 멀어 천사가 가는 동안에 그만 꽃은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둘째 천사는 갓 태어난 어린 아기의 웃음이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아름다운지 몰랐다. 천사는 아기의 웃음을 가지고 천국으로 올라갔다. 이 세상과 천국 사이는 너무 멀어서 천사가 천국으로 오는 동안 아기는 그만 어른이 되고 말았다. 어른의 웃음은 음흉하고 비열하고 이중적인 웃음으로 아름답기는커녕 추하기만 했다. 셋째 천사는 아름다운 것을 찾아 다니다가 할머니 한 분이 외롭게 혼자 사시면서 흩어져 사는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흐르는 눈물과 지난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흐르는 눈물이 마치 진주와 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천사는 할머니의 눈물을 병에 담고 천국으로 올라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머니의 기도의 눈물은 천국의 그 어떤 것보다가장 아름답게 빤짝거릴 뿐 아니라 그 눈물을 보는 자들이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현대인의 생각에는 어떻게 하면 나의 일생에 있어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에는 눈물은 없고 기쁨만이 가득하게 할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에게 눈물을 작게 흘리게 할까? 눈물을 멀리한다. 눈물을 피한다. 눈물을 싫어한다.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눈물 흐리는 삶을 불행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한 두 번만 세수를 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얼굴에서 얼마나 더러운 냄새가 나는지 모른다. 우리가 한 두 번 양치질을 하지 아니하면 얼마나 입에서 악취가 나는지 모른다. 우리가 목욕을 오래 하지 아니하면 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많이 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를 눈물의 기도로 씻지 아니하면 우리는 죄로 인하여 얼마나 더러운지 모른다. 우리 가정의 죄를 눈물의 기도로 씻지 아니하면 가정은 죄의 냄새로 얼마나 악취가 나는지 모른다. 성도들의 눈물은 믿음의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것이다. 남의 아픔을 보고 흘리는 눈물은 이슬보다 더 깨끗하다. 영국 여왕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자들에게 영예의 십자훈장을 수여하게 되었다. 상을 받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 중에는 전쟁에서 부상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전쟁에서 팔다리를 모두 잃고 다른 사람에게 들려서 나온 용사가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훈장을 달아주던 여왕은 팔과 다리를 모두 잃어버린 군인 앞에 섰다. 훈장을 들고 그를 쳐다보던 여왕이 갑자기 훈장을 떨어뜨리고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잠시 후 훈장을 목에 건 용사는 여왕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국과 여왕폐하를 위해서라면 다시 몸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팔 다리를 잃어버린 용사를 감동시킨 것은 번쩍 번쩍 빝나는 훈장이 아니라 여왕의 눈물이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믿음과 큰 믿음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진실되고 정직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봉사를 한다해도 그것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위해, 자녀들의 죄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감동하셔서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하실 것이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오직 눈물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의 눈에 이 귀한 눈물이 말라버렸다. 우리 가정과 교회에 눈물이 말라 버렸다. 이제 우리는 가정과 교회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하겠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눈물을 담아두는 눈물병, 눈물단지를 만들어야 하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정의 보물인 것이다. 본문 시편의 말씀은 다윗의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이곳 저곳으로 피하여 숨어 다니면서 다윗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다윗은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다. "나의 눈에서 흐르는 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주소서" 옛날 로마에서는 국가나 가정에 큰 재난이나 슬픔이 있을 때 흐르는 눈물을 눈물병 담아 두어서 후손들에게 전하여 교훈했다고 한다. 특히 로마의 황제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아주 귀하다고 해서 눈물병에 담아 오래 간직하였다고 한다. 이 눈물을 가장 많이 담아 둔 황제가 기독교를 가장 많이 핍박한 네로 황제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질병으로 고통 당하며 흐르는 기도의 눈물을 기억하여 주신다. 유대 나라에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다 뒤로하고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벽을 향하여 눈물로 기도하였다. 이때 하나님은 이사야 38:5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 살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다. 어떤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인가?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인가? 어떤 가정이 은혜로운 가정인가? 바로 눈물이 있는 가정이다. 눈물 단지에 눈물이 가득 고요여 있는 가정이다. 본문 디모데후서 1장에서 바울은 믿음의 눈으로 디모데의 가정을 볼 때 디모데가 훌륭한 목회자가 된 것은 우연도 아니요, 디모데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디모데의 가정에는 몇 가지 믿음의 아름다운 요소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첫째는 청결한 양심이 있었다 인간의 됨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첫째가 바로 양심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통로이다. 베드로전서 3:21절에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선한 양심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한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한다. 선한 양심은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디모데전후서를 보면 양심에 대한 교훈의 말씀이 여러번 나온다. 이것은 교회 일꾼의 요소도 양심에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은 깨끗한 양심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디모데전서 3:9절에 말씀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4:2절에 죄로 인하여 양심이 화인 맞아 파괴되므로 죄를 지어도 양심이 죽어버렸으므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했다. 이런 자는 양심이 죽은 자이다. 양심이 없는 자와 같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는 청결하고 깨끗한 양심이 있는가? 둘째로 감사가 있다 그 가정에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는 바로 그 가정이 천국과 같은 가정이 되느냐? 아니면 지옥과 같은 가정이 되느냐가 결정 되는 것이다. 감사는 가정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감사는 가정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다. 디모데의 가정에는 세상적으로 돈이나 명예나 세상 적인 것은 없어도 늘 감사가 충만하였다 늘 사람이 충만하였다 늘 평화가 충만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가정에서 위대한 목회자가 나왔던 것이다. 여러분 가정에는 감사가 넘치고 있는가? 셋째는 기쁨이 가득하였다 4절에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라고 했다. 여러분의 가정은 무엇으로 채워졌는가? 현대인의 가정을 보면 참으로 장식을 얼마나 잘 해놓았는지 모른다. 어떤 가정은 실내장식을 보면 정말 행복감에 젖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으로 장식을 잘해놓아도 그 가정에 기쁨과 평화가 없으면 그 가정은 감옥과 같은 가정이 되는 것이다. 가정을 물질적으로, 육적으로 잘 꾸며도 그 가정에 정신적인 것, 믿음의 것이 없으면 불행한 가정이 되는 것이다. 정신적인과 믿음의 것이 무어인가? 기쁨과 평화이다 만족과 이해이다 사랑과 용서이다 이런 것이 없으면 그 가정이 청와대 같이 크고 화려한 집이라 할지라도 불행한 가정이다. 가정은 언제나 기쁨의 강물이 넘쳐흘러야 한다. 사랑의 강물이 넘쳐흘러야 한다. 희망의 강물이 흘러 넘쳐야 한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기쁨이 충만한가? 넷째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다 5절에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성경에 보면 믿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작은 믿음이 있다. 약하여 넘어지는 믿음이 있다. 책망 받는 믿음이 있다. 의심하는 믿음이 있다. 외식하는 믿음이 있다.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세속화된 믿음이 있다. 우리 가정에서는 이런 믿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큰 믿음이 있다. 산을 옮기는 역사하는 믿음이 있다. 능력의 믿음이 있다. 칭찬 받는 믿음이 있다. 아름다운 믿음이 있다. 변함이 없는 믿음이 있다. 상급을 받는 믿음이 있다. 충성된 믿음이 있다. 조상으로부터 상속 받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다. 디모데 가정의 믿음은 조상으로부터 상속을 받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역사가 있는 전통적인 믿음인 것이다. 할머니의 믿음을 딸인 어머니에게 상속했다. 어머니의 믿음을 아들인 디모데에게 상속해주었다. 성광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어떤 가보가 있는가? 가보중의 가보인 믿음을 상속하는 축복의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다섯째 눈물이 있었다 4절에 "네 눈물을 생각하여" 디모데의 가정에는 눈물단지가 있었다. 그 눈물단지는 할머니 로이스가 딸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던 눈물단지였다. 그 눈물단지는 어머니 유니게가 아들 디모데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던 눈물단지이다. 디모데의 가정의 눈물단지는 적어도 삼대로 내려오는 눈물단지였다. 이 눈물단지에는 할머니의 눈물이 들어 있다. 이 눈물단지에는 어머니의 눈물이 들어 있다. 이 눈물단지에는 디모데의 눈물이 들어 있다. 디모데 가정의 눈물단지에는 눈물이 말라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항상 가득 채워져 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이런 가정에서 디모데가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그 배후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가 있다. 디모데가 훌륭한 목회자가 된 것은 세상적인 실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의 가정에 눈물단지에 눈물이 가득 채워지도록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디모데의 가정이 성경에 소개되는 위대한 믿음의 가정이 된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눈물의 기도가 그 가정에 충만했기 때문이다. 성광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기도단지가 있는가? 그 눈물단지에 눈물로 가득 채워져 있는가? 아니면 바싹 말라 있는가? 구약성경에서 눈물의 가정 하나만 소개하고 저의 설교를 마치려고 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가정이다. 그것도 요셉의 형들에게 팔리워 고통 당할 때 흘린 고통의 눈물이 아니다 형들에게 원한에 사무친 눈물의 아니다 억울한 눈물이 아니다 요셉이 세계 최고의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흘린 눈물이다. 천하를 호령하는 요셉에게 무슨 눈물이 있겠는가? 우리 다같이 창세기 42:24절을 읽자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창세기 43:30-31절을 다같이 읽자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 듯 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 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창세기 45:2절을 다같이 읽자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름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창세기 46:29절일 읽자 "요셉이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 고 그 목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동안 울매" 창세기 50:1절을 읽자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창세기 50:17절을 다같이 읽자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 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 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은 한마디로 눈물의 사나이이다. 남자가 왜 비겁하게 우는가? 사실 요셉만큼 남자다운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눈물에는 약한 자였다. 요셉은 종살이나 감옥에 있을 때에는 조금도 울지 않았다. 만약 이럴 때에 요셉이 울었다면 그는 정말 약한 자였을 것이다. 그는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이제는 울지 않고 웃으면서도 얼마든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권력이 있고, 힘이 있고, 지위가 있었는데도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그의 눈물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의 눈물이 가치있는 것이다 그의 눈물이 감동적인 것이다 그의 눈물이 위대한 것이다. 요셉의 눈물을 분석해 보면 ① 사랑의 눈물이었다 ② 용서의 눈물이었다 ③ 책임적인 눈물이었다 ④ 은혜의 눈물이었다 ⑤ 감사의 눈물이었다 눈물의 대명사는 바로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가장 강함 무기는 역시 눈물이다. 저는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여기에 계신 어머님들은 모두 눈물의 어머니이다. 그 어머니의 눈물로 오늘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로 우리 자녀들이 이렇게 믿음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어머니의 눈물이 메말라 가고 있다. 그로 인하여 가정의 눈물병도 메말라 가고 있다. 없어지고 있다. 가정이 사는 길은 오직 어머니의 눈물을 다시 찾는데 있다. 가정의 눈물단지에 눈물이 가득 채워져야 한다. 어떻게 어린 아이들이 어머니의 눈물 없이 자랄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눈물 없이 건축할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데 눈물 없이 구원할 수가 있겠는가? 이제 가정의 눈물단지를 만들고 거기에 우리의 눈물을 담을 때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저잉 되는 것이다. 그 가정은 아름다운 가정이 되는 것이다. 그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가정이 되는 것이다. 평화의 가정이 되는 것이다. 은혜와 축복의 가정이 되는 것이다. 이제 부모님들이 우리를 위하여 많은 눈물을 흘리며 키우셨으니 이제는 우리 자녀들이 눈물로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한다. 이것이 어버이주일을 지키는 우리 성도들의 자세이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린다. 우리 부모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바란다.
감사 노래 불러라/ 시118:1-4, 엡5:15-21/ 2010-08-21
감사 노래 불러라 시118:1-4, 엡5:15-21 (1)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림 가운데 프랑스의 화가 밀레(J. Millet)의 \\\"만 종\\\"이라는 그림이 있다. 19세기의 종교화가인데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성찰하며 땅에서 일하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경건미를 느끼게 된다. 우리 나라의 흥사단 운동을 계승해 가고 있는 석학 안병욱 선생의 글 에 이 그림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이 그림에서는 일하는 사 람,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다. 과연 훌륭한 관찰이요 심미안을 지닌 사람의 평가라 여겨진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성숙해진다. 아울러 한 날의 괴로움을 그 날에 족한 줄로 여기고 일할 수 있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사 람으로 하여금 더욱 아름답고 어른스럽게 한다. 교회 안에서 흔히 말하는 삼박자 축복이란 바로 일과 기도 그리고 감사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으로 승화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나의 축복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더더욱 특별한 축복이다. 아무나 기도할 수는 없다. 은혜받은 사람, 특별한 소명감 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자기의 불완전함을 아는 사람,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해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사람, 더 큰 일 도 수행할 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줄을 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생활은 빈곤의 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진 허기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씨 뿌리는 사 람\\\"의 그림이지만 그의 희망은 추수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성시와 찬송가와 신령한 노 래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십시오\\\"(에베소 5:18) (2) 1895년엔 미국의 남부 알라바마 주에는 일대소동이 벌어졌다. 목화벌 레 소동이었다. 목화농사로 부를 구가하던 알라바마, 그 농장에서 흑인노예 들을 착취하던 백인들에게 최악의 위기가 닥쳤던 것이다. 그들은 생각 끝 에 목화 농사 대신 \\\"낙화생\\\" 농사를 짓기로 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이곳은 세계적 낙화생 영농지가 되었다. 알라바마 주민들은 이를 기념하여 한 동상을 건립했다. \\\"목화 벌레\\\"동 상이다. 그들은 그 동상의 주춧돌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목화벌레에 대해서도 심신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이 벌레 는 우리에게 번영의 계기를 주었다.\\\" 옛날 히브리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하느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느님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하느님은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시 118:5- ) 하느님은 우리에게 땅을 주셨다. 그리고 그 땅에 씨를 뿌려 열매를 거 둘 수 있는 달란트를 주셨다. 알라바마의 땅은 목화농사에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낙화생 농사에도 적합한 땅이다. 그와 같이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을 여러가지 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은총을 받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직업적 선입관이나 전통적 관습에만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날마다 새 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윤리, 새로운 사상, 새로 운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알라바마는 낙화생 농사로도 유명하지만 흑인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M.L.King)목사가 백인들에 의해 암살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총도, 몽둥 이도, 돌도 가지지 않은 그에게 총을 쏜 사람들, 그들은 알라바마 땅은 하 느님께서 백인들에게만 부여한 땅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킹 목사의 죽음은 알라바마 주 뿐만 아니라 전 미국땅이 백인과 흑인 그 밖의 소수민족이 공 존하는 땅임을 밝혀 주었다. 중요한 것은 이 점에 있다. 킹 목사는 흑인들에게 언제나 다음과 같이 충고하기를 잊지 않았다. \\\"비록 거리의 청소부일찌라도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 베토벤이 노래를 작곡하듯 여기 흑인 아무개 청소부가 있었다는 흔적을 남겨 놓으 라\\\"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만이 흑인의 해방이 요 승리라는 뜻이다. (3) 존 와너메이카((J. Warnermaker)의 소년시절 이야기 가운데 있었던 일 이다. 그는 후일 세계 최대의 백화점 왕이였고 YMCA운동가였고 체신부장관 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어릴 적에는 너무나 가난한 집안의 아 들이어서 벽돌공장의 직공으로 자랐다. 그러나 주일이면 빠짐없이 교회를 찾는 신실한 신도였다. 19세기의 미국은 결코 부요한 나라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다니던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예배당으로 들어 오는 오솔길이 흙탕물로 더러워져서 출입하는 사람들이 곤혹을 느끼고 있 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난데없이 그 길 여기 저기에 벽돌이 깔려 있었 다. 그 다음 주일에 더 많은 벽독이 깔려 있어 신도들에게 편이를 주었다. 이에 놀란 목사님이 세번째 주일 이른 아침 예배당에 숨어서 그 길을 지켜 보고 있었다. 한 어린 소년이 벽돌을 지고 와서 또 깔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소년이 바로 와너메이카였다. 그는 주급으로 받은 품삯 가운 데 십일조를 떼어 벽돌을 구입 예배당 길목에 깔았던 것이다. 이 사실이 온 신도들에게 밝혀지자 신도들은 모두가 일대각성, 마침내 예배당을 새로 단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유명한 부흥목사 스폴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별빛을 주신 하 느님께 감사하면 하느님은 달빛을 주실 것이다. 달빛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 하면 햇빛을 주실 것이다. 햇빛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 마음의 빛, 영 혼의 빛을 주실 것이다.\\\" 마음의 빛, 영혼의 빛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 리를 깨닫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한국의 신도들은 무엇이든지 세계제일, 온 세상을 몽땅 차지하려는 엄 청난 기적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한 사람에게서 잃어버렸던 하느 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을 목적하여 선교하는 것임을 망각하고 있다. 하느님 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적더라도 능히 하느 님의 일을 성취하고도 남는다. 병고침을 받고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그 일에 감사하여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한 사람이 이 땅에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사람이다. 풍년이 들어 엄청난 추수를 하여 곡간을 확대 수리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자기소유를 절반을 가난 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한 사람이 이 땅을 복음화하는 역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사람인가? 사람이란 창조된 존재이다. 은혜의 빚을 진 존재이 다. 그러므로 사람됨의 참 모습은 감사이다. 그 비결은 찬양이다\\\"(A. 헤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창조 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얼마일까? 한국에는 1천만의 그리스도 신 자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 가운데 얼마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의 사람됨의 참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 세인들은 교회는 너무나 많은 연보 를 거둬들인다고 비난하고 심지어 걱정까지 한다. 그러나 1천만 하느님나라 백성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가 거 둬들이는 헌금을 몽땅 다 사회에 희사해도 어지간한 대학 하나 세우기에도 벅차다. 모자란다. 어지간한 주요기업 일으키기에도 충분치 못하다. 교회 는 사람을 본래의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선교기관이다. 본래의 사람의 참 모습은 감사하는 것이다. 그 비결은 찬양이라는 헤셀의 말은 백번 지당한 말이다. 그래서 옛날 시인은 노래하였다. \\\"야훼께 감사노래 불러라 그는 어지시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시 118:1- )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혜 를 받은 것이다. 하느님께는 언제나 빚진 존재이다. 그 빚은 계약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에서 진 빚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참 사람은 늘 감사하며 노래 불러야 한다. 거듭 감사노래 부르며 살아야 한다. 빚을 진 사람은 그 것을 갚아야 한다. 그것이 곧 부르심을 받은 것이요 사명을 가지는 것이 다. 그 부르심, 그 사명은 복음의 선교이다.
감사 노래 불러라/ 시118:1-4, 엡5:15-21/ 2010-08-21
감사 노래 불러라 시118:1-4, 엡5:15-21 (1)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림 가운데 프랑스의 화가 밀레(J. Millet)의 \\\"만 종\\\"이라는 그림이 있다. 19세기의 종교화가인데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성찰하며 땅에서 일하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경건미를 느끼게 된다. 우리 나라의 흥사단 운동을 계승해 가고 있는 석학 안병욱 선생의 글 에 이 그림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이 그림에서는 일하는 사 람,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다. 과연 훌륭한 관찰이요 심미안을 지닌 사람의 평가라 여겨진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성숙해진다. 아울러 한 날의 괴로움을 그 날에 족한 줄로 여기고 일할 수 있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사 람으로 하여금 더욱 아름답고 어른스럽게 한다. 교회 안에서 흔히 말하는 삼박자 축복이란 바로 일과 기도 그리고 감사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으로 승화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나의 축복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더더욱 특별한 축복이다. 아무나 기도할 수는 없다. 은혜받은 사람, 특별한 소명감 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자기의 불완전함을 아는 사람,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해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사람, 더 큰 일 도 수행할 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줄을 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생활은 빈곤의 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진 허기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씨 뿌리는 사 람\\\"의 그림이지만 그의 희망은 추수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성시와 찬송가와 신령한 노 래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십시오\\\"(에베소 5:18) (2) 1895년엔 미국의 남부 알라바마 주에는 일대소동이 벌어졌다. 목화벌 레 소동이었다. 목화농사로 부를 구가하던 알라바마, 그 농장에서 흑인노예 들을 착취하던 백인들에게 최악의 위기가 닥쳤던 것이다. 그들은 생각 끝 에 목화 농사 대신 \\\"낙화생\\\" 농사를 짓기로 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이곳은 세계적 낙화생 영농지가 되었다. 알라바마 주민들은 이를 기념하여 한 동상을 건립했다. \\\"목화 벌레\\\"동 상이다. 그들은 그 동상의 주춧돌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목화벌레에 대해서도 심신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이 벌레 는 우리에게 번영의 계기를 주었다.\\\" 옛날 히브리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하느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느님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하느님은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시 118:5- ) 하느님은 우리에게 땅을 주셨다. 그리고 그 땅에 씨를 뿌려 열매를 거 둘 수 있는 달란트를 주셨다. 알라바마의 땅은 목화농사에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낙화생 농사에도 적합한 땅이다. 그와 같이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을 여러가지 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은총을 받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직업적 선입관이나 전통적 관습에만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날마다 새 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윤리, 새로운 사상, 새로 운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알라바마는 낙화생 농사로도 유명하지만 흑인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M.L.King)목사가 백인들에 의해 암살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총도, 몽둥 이도, 돌도 가지지 않은 그에게 총을 쏜 사람들, 그들은 알라바마 땅은 하 느님께서 백인들에게만 부여한 땅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킹 목사의 죽음은 알라바마 주 뿐만 아니라 전 미국땅이 백인과 흑인 그 밖의 소수민족이 공 존하는 땅임을 밝혀 주었다. 중요한 것은 이 점에 있다. 킹 목사는 흑인들에게 언제나 다음과 같이 충고하기를 잊지 않았다. \\\"비록 거리의 청소부일찌라도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 베토벤이 노래를 작곡하듯 여기 흑인 아무개 청소부가 있었다는 흔적을 남겨 놓으 라\\\"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만이 흑인의 해방이 요 승리라는 뜻이다. (3) 존 와너메이카((J. Warnermaker)의 소년시절 이야기 가운데 있었던 일 이다. 그는 후일 세계 최대의 백화점 왕이였고 YMCA운동가였고 체신부장 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어릴 적에는 너무나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어서 벽돌공장의 직공으로 자랐다. 그러나 주일이면 빠짐없이 교회 를 찾는 신실한 신도였다. 19세기의 미국은 결코 부요한 나라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다니던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예배당으로 들어 오는 오솔길이 흙탕물로 더러워져서 출입하는 사람들이 곤혹을 느끼고 있 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난데없이 그 길 여기 저기에 벽돌이 깔려 있었 다. 그 다음 주일에 더 많은 벽독이 깔려 있어 신도들에게 편이를 주었다. 이에 놀란 목사님이 세번째 주일 이른 아침 예배당에 숨어서 그 길을 지켜 보고 있었다. 한 어린 소년이 벽돌을 지고 와서 또 깔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소년이 바로 와너메이카였다. 그는 주급으로 받은 품삯 가운 데 십일조를 떼어 벽돌을 구입 예배당 길목에 깔았던 것이다. 이 사실이 온 신도들에게 밝혀지자 신도들은 모두가 일대각성, 마침내 예배당을 새로 단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유명한 부흥목사 스폴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별빛을 주신 하 느님께 감사하면 하느님은 달빛을 주실 것이다. 달빛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 하면 햇빛을 주실 것이다. 햇빛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 마음의 빛, 영 혼의 빛을 주실 것이다.\\\" 마음의 빛, 영혼의 빛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 리를 깨닫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한국의 신도들은 무엇이든지 세계제일, 온 세상을 몽땅 차지하려는 엄 청난 기적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한 사람에게서 잃어버렸던 하느 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을 목적하여 선교하는 것임을 망각하고 있다. 하느님 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적더라도 능히 하느 님의 일을 성취하고도 남는다. 병고침을 받고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그 일에 감사하여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한 사람이 이 땅에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사람이다. 풍년이 들어 엄청난 추수를 하여 곡간을 확대 수리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자기소유를 절반을 가난 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한 사람이 이 땅을 복음화하는 역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사람인가? 사람이란 창조된 존재이다. 은혜의 빚을 진 존재이 다. 그러므로 사람됨의 참 모습은 감사이다. 그 비결은 찬양이다\\\"(A. 헤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창조 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얼마일까? 한국에는 1천만의 그리스도 신 자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 가운데 얼마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의 사람됨의 참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 세인들은 교회는 너무나 많은 연보 를 거둬들인다고 비난하고 심지어 걱정까지 한다. 그러나 1천만 하느님나라 백성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가 거 둬들이는 헌금을 몽땅 다 사회에 희사해도 어지간한 대학 하나 세우기에도 벅차다. 모자란다. 어지간한 주요기업 일으키기에도 충분치 못하다. 교회 는 사람을 본래의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선교기관이다. 본래의 사람의 참 모습은 감사하는 것이다. 그 비결은 찬양이라는 헤셀의 말은 백번 지당한 말이다. 그래서 옛날 시인은 노래하였다. \\\"야훼께 감사노래 불러라 그는 어지시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시 118:1- )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혜 를 받은 것이다. 하느님께는 언제나 빚진 존재이다. 그 빚은 계약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에서 진 빚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참 사람은 늘 감사하며 노래 불러야 한다. 거듭 감사노래 부르며 살아야 한다. 빚을 진 사람은 그 것을 갚아야 한다. 그것이 곧 부르심을 받은 것이요 사명을 가지는 것이 다. 그 부르심, 그 사명은 복음의 선교이다.
감사·나눔·전도/ 신26:10-11, 롬1:14-17
감사·나눔·전도/신26:10-11,롬1:14-17 2001-10-19 16:52:12 read : 1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 할지니라\\\"(신26:1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새 천년 첫 번째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금년도 추수감사주일은 하나님을 향해 감사 드리면서 한 사람을 전도하는 일을 실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교우 여러분들이 \\\'감사\\\', \\\'나눔\\\', \\\'전도\\\' 이 세 단어를 깊이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날에 우리들은 진정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를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또한 나누어야 할 것이 많은 가운데서도 특별히 복음에 빚진 자라는 심정으로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1. 감 사 지나간 1년을 돌아볼 때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나 하고 있는 일 위에 내려 주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자신을 살펴보면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이 많습니다. 적극적 사고 방식을 강조해 온 필(N. V. Peale) 박사가 하루는 기차를 타고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그의 맞은편에 어떤 부부가 앉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계속해서 모든 일에 불평이었습니다. 좌석이 불편하고 시트가 지저분하고 청소도 제대로 안돼 있고 승무원도 불친절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간에 인사를 교환하던 중 남편이 자신들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필 박사가 물었습니다. \\\"부인께서는 어떤 것을 제조하십니까\\\" 그러자 남편은 웃으면서 \\\"불평을 만들어 내는 제조업자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면서 참아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불평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평 제조업자가 아니라 감사 제조업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은 다음에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신26:2, 10) 맏물을 드려 감사한다는 말에서 몇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맏물을 드림은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맏물은 처음 열매로서 모든 열매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첫 번째를 드리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둘째로, 맏물을 드림은 최상의 것을 드리는 자세입니다. 맏물은 단순히 처음 열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산 중에 제일 좋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는 이처럼 최상의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셋째로, 맏물을 드림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맏물을 드리되 구체적인 감사의 고백과 함께 드리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서 어떻게 감사가 나올 수 있으며 무엇을 드린다 해도 그것이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추수감사절에 맏물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나 눔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은혜와 축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신명기 26장 11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이 말씀은 받은 복을 모든 사람, 가난한 이웃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맏물로 드린 감사예물은 레위인과 객과 더불어 감사 잔치를 하는 데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친 감사예물이 가난한 이웃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나눠주는 용도로 사용하도록 말씀 하셨습니다. 은혜나 축복은 이웃과 나눌 때 더 커집니다. 예수님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눅18:22)고 하셨고,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3:11)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받는 축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이 있을 때만이 참 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우는 장기려 박사님을 잘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분은 아내를 이북에 남겨두고 월남한 후 평생을 홀로 살면서 부산복음병원을 세워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거룩한 의사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일생을 기록한「聖山 장기려」라는 책을 보면 그의 훌륭한 모습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한 가지만 소개하면 그는 \\\"예수님께서는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난 옷이 너무 많아\\\"라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여 자기의 것을 나누어주며 살았다고 합니다.(p.28) 추수감사절에 이와 같이 서로 나누어주며 사는 것을 잊지 맙시다.(히13:16) 사도 바울도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고 말씀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에 나누어 주면서 살아 갈 것을 다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전 도 우리들이 받은 축복을 가지고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추수감사절을 한 사람 전도주일로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첫째로, 왜 전도해야 합니까? 우리들은 복음에 빚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롬1:14) 빚은 갚아야 합니다. 또한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과(롬1:16)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롬1:17)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둘째로, 어떻게 전도해야 합니까? 로마서 1장 15절의 말씀대로 \\\"할 수 있는 대로\\\" 전해야 합니다. 이 말은 모든 힘을 다해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하였습니다. 가족과 친구와 형제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16절의 말씀대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12절에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널리 전해야 합니다. 셋째로, 전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7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불의가 추방되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납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의롭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신이 새로워집니다. 가정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역사가 바뀌게 됩니다. 무디(D. L. Moody)는 하루종일 전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예수 믿으시오\\\"라고 전도하자 \\\"내가 믿건 안 믿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하면서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당신이 나에게 화내는 것은 좋지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라고 강조하자 \\\"당신 왜 자꾸 괴롭히는거요?\\\"하면서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무디는 \\\"그것이 내 직업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아, 당신이 바로 무디선생님이시군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모든 사람이 알아 볼 정도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전도주일이기도 합니다. 이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시다. 탈무드에 보면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가운데 가장 행복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갑시다. 나누며 살 때 받은 것들이 참된 축복이 됩니다. 우리들이 이웃과 나눌 것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주님 앞으로 열심히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감사, 나눔, 전도 이 세 가지를 실천하면서 금년도 추수감사절을 가장 뜻 있게 지킬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