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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에 관한 설교(1) 아겔다마에 관한 설교(1) 아기에 관한 설교(31) 아니(아니오)에 관한 설교(2)
아니함(아니하다)에 관한 설교(3) 아님(아니다)에 관한 설교(6) 아낌(아끼다)에 관한 설교(1) 아내에 관한 설교(1)
아들에 관한 설교(327) 아름다움(아름답다)에 관한 설교(245) 아멘에 관한 설교(72) 아버지에 관한 설교(283)
아사셀(Azazel, scapegoat)에 관한 설교(19) 아우에 관한 설교(1) 아우성에 관한 설교(1) 아이에 관한 설교(2)
아침에 관한 설교(1) 아픔에 관한 설교(17) 악에 관한 설교(123) 악마에 관한 설교(1)
악인에 관한 설교(36) 안에 관한 설교(7) 안개에 관한 설교(1) 안내에 관한 설교(1)
안녕에 관한 설교(1) 안수에 관한 설교(3) 안식(안식일,안식년)에 관한 설교(405) 안심에 관한 설교(1)
안정에 관한 설교(1) 앉음(앉다)에 관한 설교(1) 않음(않다,아니함,아니하다)에 관한 설교(10) 알아감(알아가다)에 관한 설교(1)
알파에 관한 설교(1) 앎(알다)에 관한 설교(12) 앞에 관한 설교(5) 애국(애국심)에 관한 설교(1)
애씀(애쓰다)에 관한 설교(1) 애통에 관한 설교(51) 야외예배설교(7) 약간에 관한 설교(1)
약사에 관한 설교(1) 약속에 관한 설교(645) 약함에 관한 설교(115) 약혼식 설교(21)
양에 관한 설교(5) 양면에 관한 설교(1) 양성에 관한 설교(1) 양식에 관한 설교(81)
양심에 관한 설교(51) 양육에 관한 설교(54) 양자택일에 관한 설교(1) 어느에 관한 설교(1)
어떤에 관한 설교(4) 어떻게에 관한 설교(14) 어두움(어둠)에 관한 설교(30) 어디에 관한 설교(25)
어려움에 관한 설교(2) 어리석음(어리석다)에 관한 설교(5) 어린이에 관한 설교(152) 어린이주일학교예배설교(1824)
어림(어리다)에 관한 설교(5) 어머니에 관한 설교(184) 어제에 관한 설교(1) 어찌에 관한 설교(3)
억압에 관한 설교(1) 억울에 관한 설교(1) 언약(언약궤)에 대한 설교(415) 언어에 관한 설교(44)
언제에 관한 설교(1) 얻음(얻다)에 관한 설교(4) 얼굴에 관한 설교(103) 얼마에 관한 설교(1)
없어짐(없어지다)에 관한 설교(1) 없음(없다)에 관한 설교(20) 에덴에 관한 설교(1) 에벤에셀에 관한 설교(2)
엘리트에 관한 설교(1) 여기에 관한 설교(1) 여름에 관한 설교(46) 여성에 관한 설교(24)
여인에 관한 설교(155) 여자에 관한 설교(49) 여행에 관한 설교(13) 역동에 관한 설교(1)
역사에 관한 설교(353) 역설에 관한 설교(11) 연관에 관한 설교(1) 연구에 관한 설교(1)
연단에 관한 설교(8) 연보에 관한 설교(19) 연세에 관한 설교(1) 연약에 관한 설교(29)
열에 관한 설교(1) 열납에 관한 설교(1) 열둘(열두)에 관한 설교(2) 열등(열등감)에 관한 설교(22)
열매에 관한 설교(526) 열심에 관한 설교(203) 열전에 관한 설교(6) 열정에 관한 설교(42)
열조에 관한 설교(9) 엶(열다)에 관한 설교(1) 염려에 관한 설교(103) 영에 관한 설교(9)
영감(靈感)에 관한 설교(31) 영광에 관한 설교(565) 영생에 대한 설교(274) 영성(靈性: spirituality)에 관한 설교(78)
영원에 관한 설교(588) 영적(靈的: spiritual)에 관한 설교(472) 영접에 관한 설교(121) 영향(영향력)에 관한 설교(15)
영혼에 관한 설교(440) 영화에 관한 설교(46) 옆에 관한 설교(1) 예에 관한 설교(1)
예고에 관한 설교(15) 예루살렘에 관한 설교(312) 예물에 관한 설교(37) 예배에 관한 설교(791)
예비에 관한 설교(49) 예언에 관한 설교(180) 예정에 관한 설교(3) 옛사람에 관한 설교(2)
오(5)에 관한 설교(1) 오늘에 관한 설교(254) 오른에 관한 설교(1) 오메가에 관한 설교(1)
오순절에 관한 설교(104) 오심(오시다)에 관한 설교(5) 오직에 관한 설교(9) 오호라에 관한 설교(1)
옥에 관한 설교(1) 옥합에 관한 설교(2) 온에 관한 설교(2) 온유에 관한 설교(156)
온전에 관한 설교(92) 온천에 관한 설교(2) 올라감(올라가다)에 관한 설교(1) 올림픽에 관한 설교(20)
옴(오다)에 관한 설교(10) 옷에 관한 설교(2) 완결에 관한 설교(1) 완전에 관한 설교(49)
왕에 관한 설교(353) 왕국에 관한 설교(2) 왜에 관한 설교(12) 외국에 관한 설교(2)
외로움(외롭다)에 관한 설교(1) 외모에 관한 설교(11) 외식에 관한 설교(11) 외적(外的)에 관한 설교(1)
요구에 관한 설교(1) 요단(요단강)에 관한 설교(1) 요절에 관한 설교(1) 요청에 관한 설교(1)
욕구에 관한 설교(1) 욕망에 관한 설교(17) 욕심에 관한 설교(69) 용기에 관한 설교(89)
용사에 관한 설교(1) 용서에 관한 설교(442) 우리에 관한 설교(1229) 우매에 관한 설교(22)
우상(우상숭배)에 관한 설교(147) 우애에 관한 설교(1) 우울에 관한 설교(8) 우정에 관한 설교(13)
운동에 관한 설교(1) 운명에 관한 설교(55) 울음(울다)에 관한 설교(59) 웃음에 관한 설교(47)
원리에 관한 설교(4) 원망에 관한 설교(35) 원수에 관한 설교(84) 원인에 관한 설교(40)
원죄에 관한 설교(1) 원칙에 관한 설교(1) 원함(원하다)에 관한 설교(3) 월드에 관한 설교(1)
웬에 관한 설교(1) 위에 관한 설교(2) 위기에 관한 설교(367) 위대에 관한 설교(128)
위로에 관한 설교(337) 위선에 관한 설교(6) 위안에 관한 설교(3) 위함(위하다)에 관한 설교(18)
유대(유대인, 유대교)에 관한 설교(71) 유산에 관한 설교(4) 유언에 관한 설교(13) 유월절에 관한 설교(47)
유의에 관한 설교(1) 유익에 관한 설교(3) 유일에 관한 설교(1) 유치부설교(159)
유혹에 관한 설교(88) 육신에 대한 설교(109) 육에 관한 설교(1) 윤리에 관한 설교(35)
율법에 관한 설교(230) 으뜸에 관한 설교(6) 은밀(은밀함)에 관한 설교(13) 은사에 관한 설교(237)
은잔에 관한 설교(1) 은총에 관한 설교(151) 은택에 관한 설교(1) 은혜에 관한 설교(2072)
은혼식 설교(7) 음부에 관한 설교(6) 음성에 관한 설교(1) 음식에 관한 설교(4)
음악에 관한 설교(5) 응답에 관한 설교(310) 의에 관한 설교(278) 의무에 관한 설교(61)
의미에 관한 설교(221) 의식에 관한 설교(27) 의인에 관한 설교(256) 의지에 관한 설교(95)
이에 관한 설교(6) 이것에 관한 설교(2) 이김(이기다)에 관한 설교(4) 이단에 관한 설교(16)
이러함(이렇다)에 관한 설교(1) 이렇게에 관한 설교(6) 이루심(이루시다)에 관한 설교(1) 이루어짐(이루어지다)에 관한 설교(1)
이룸(이루다,이루어지다)에 관한 설교(139) 이름에 관한 설교(209) 이별에 관한 설교(1) 이상에 관한 설교(2)
이야기에 관한 설교(160) 이웃에 관한 설교(155) 이유에 관한 설교(239) 이적에 관한 설교(67)
이전에 관한 설교(1) 이정표에 관한 설교(1) 이제에 관한 설교(1) 이치에 관한 설교(1)
이해에 관한 설교(29) 인가에 관한 설교(1) 인간에 관한 설교(352) 인격에 관한 설교(32)
인구에 관한 설교(8) 인내에 관한 설교(184) 인도에 관한 설교(209) 인류에 관한 설교(12)
인물에 관한 설교(31) 인사에 관한 설교(2) 인생에 관한 설교(1475) 인자에 관한 설교(56)
인정에 관한 설교(40) 인질에 관한 설교(2) 인함(인하다)에 관한 설교(3) 일에 관한 설교(100)
일꾼에 관한 설교(320) 일등에 관한 설교(1) 일사에 관한 설교(1) 일상에 관한 설교(1)
일어남(일어나다)에 관한 설교(249) 일어섬(일어서다)에 관한 설교(1) 일으킴(일으키다)에 관한 설교(1) 일일구(119)에 관한 설교(2)
일치에 관한 설교(1) 잃어버림(잃어버리다)에 관한 설교(2) 잃음(잃다)에 관한 설교(3) 임금에 관한 설교(2)
임마누엘에 관한 설교(137) 임무에 관한 설교(15) 임재에 관한 설교(15) 임종에 관한 설교(33)
임직식(안수집사,권사,장로,목사임직식)설교(100) 임함(임하다)에 관한 설교(1) 입에 관한 설교(3) 입관에 관한 설교(14)
입맞춤에 관한 설교(1) 입술에 관한 설교(3) 입음(입다)에 관한 설교(1) 있음(있다)에 관한 설교(49)
잉태에 관한 설교(5) 잊음(잊다)에 관한 설교(1)
100% 응답 받는 기도/ 눅22,39-46/ 2016-04-24
100% 응답 받는 기도 눅22,39-46 캄캄한 밤 칠흑같은 어둠,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블랙홀 보다도 더 캄캄한 어둠을 날카롭게 깨트리고 오장육부를 도려내는듯한 아픔과 처절한 울부짖음이 굉 장한 폭음과 함께 산산히 흩어지는 파편처럼 뿌려지고 있습니다. 33세 인생의 절정에 이제 갓 첫발을 디딘 젊은 청년 예수! 한걸음 한걸음 다 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어떤 방법으로든 피해가고 싶은 그 처절하고도 애절한 지 극히 인간적인 몸부림, 자신이 죽어야만 함을 알면서도, 자신이 죽지않으면 안됨 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삶을 향해 간절한 호소를 간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 예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찌나 간절했던지,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 애절함이 있었던지 몸의 모든 땀을 다 쏟아낸 땀구멍은 이제 생명을 향한 갈망이 겁붉게 녹아든 핏방울을 송글송글 뱉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만일 당신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옵소서. 하나뿐인 당신의 아들이 이다지 도 처절히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버지여!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이 간절한 바램은, 이 처절한 호소는 여지없이 묵살 당해 버리고 말았 습니다. 그리곤 오직 한마디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 소서] 이 말씀만이 하나님에 의해서 냉정하고 비정하게 행해졌습니다. 청년예수의 이 간절한 기도는 과연 응답받은 것입니까? 응답 못받은 것입니 까? 오늘제목을 보고 {에구 또 기도하라는 설교구나}, [맨날하는 소리 또 듣겠구 먼]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방법, 기도의 자세, 기도의 형식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배웠고, 또 수없이 많은 기도를 지금도 해오고 있 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듣기 직전에도 예배 순서를 통해 우태수 집사님의 감동 적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때문에 기도하는 방법, 기도의 마음자세, 기도의 형식등은 다른 설교자들에게 맡겨버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도는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는 일방적인 연설이 나 하소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호흡 이란 우리몸 외부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고 몸에서 만들어진 쓸모없는 탁한 공기 를 내뿜을 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의사 소통이 있어야만 합니다. 때문에 일단 드려진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때에 비로소 온전한 기도로 끝맺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기도가 응답을 받는 기도입니까? 아니 응답을 받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먼저 기도의 응답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커다란 착각속에 빠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기도에 대해 응답을 받고서도 자기가 응답받았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신앙생활 속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 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나의 기도에 대하여서 즉각적으로 그리고 나의 뜻을 100%반영하여 일이 이루어 져야만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하나님께로부터 즉각적이고 100%나의 의견에 합당한 반응이 없으면 기 도응답을 못 받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을 얻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 만이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몇가지 요건만 갖추어 기도 한다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응답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은 하나님의 응답중 지극히 작은 일부나 내가 생각하는 정답만을 하나님의 응답이 라고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만한 자세로 기도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진짜로하나님께서 응답하실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입니 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에는 네가지가 있습니다. [그래 내가 즉시 시행하겠다], [시행은 해 주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시 행은 해주겠지만 그 방법은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안된다]입니다. 그런 데 지금까지 사지선다형 문제에 익숙해 왔던 우리는 1번 답만을 기도의 응답이라 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길러 보셨으니 익히 아실 것입니다. 만일 제딸이 저에게 위인전을 보고 싶으니 책을 사달라고 하면 저는 즉시로 서점에 데려가 위인전을 사줄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수학자가 되겠다고 대학 수학교재를 사달라고 한다면 저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벌써 그런 것 이 무슨 필요가 있니 나중에 네가 능력이 되면 사줄께] 또 제 딸이 유명한 디자 이너가 되겠다고 가위를 가지고 집에 있는 옷을 자르겠다고 한다면 저는 아마도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예야 그 방법은 잘못된 것 같구나, 서점에 가면 오리 기 책들이 많으니 우선 그것으로 열심히 오리고 그리는 것을 연습하도록 하자] 그리고 [아버지 이번주일날 친구들이랑 같이 학교에서 하는 캠프를 다녀오겠습니 다.]라고 한다면 저는 한마디로 [안돼]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아홉 살 배기 자녀가 똑같은 요구를 해 왔다면 어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첫 번째 대답만이 제 응답이고 나머지는 응답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모두가 응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첫 번째의 대답만이 응답이라 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신앙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을 구하는 자세와 동기가 올바로 서지 못하면 정 말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작년 세간을 떠들석 하게 했던 가짜중 일력의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겉으로는 엄청나게 정의롭고 대단한 일인 것 처럼 포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외모를 보고 속아 넘어가서 엄청난 돈을 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풍겨나는 인간의 냄새나고 더러운 흑심이 드러났을 때에 결국 커다란 배신 감과 함께 그 사기꾼을 법의 심판대 앞에 세웠습니다. 결국 사기꾼의 흑심을 채 우기 위해 전시물 노릇을 했던 많은 불쌍한 이들은 이제는 아예 기부도 완전히 끊 긴채 더욱 불쌍하고 고된 삶을 살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겉으로 드러 난 그럴듯한 포장에 속아 넘어가지만 우리의 속까지도 완전히 살피시는 하나님께 서는 우리가 이렇게 잘못된 생각과 동기를 가지고 구하면 절대로 속아넘어가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윌의 기도에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바로 느끼기 위해 다음과 같 은 몇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항상 주님의 임재를 느끼면 살아가고 또한 기도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성령안에 산다든지 하나님의 뜻에 사로잡혀 산다든지 하는 일들 을 엄청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 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이미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깨닫느냐 못깨닫느냐는 그분께서 항상 내 안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고있느냐, 깨닫지 못하고 살 고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라는 것 은 우리가 끊임없이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 다. 우리는 성전 특히 제단 우리 교회로 말하면 강단을 엄청나게 신성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어쩐지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 큰일 날 것 처럼 생각합니다. 왜입니까? 성전에는 강단에는 성령께서 임재하셨기 때문이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성전이, 교회당이, 강단이, 목사가 신령하 고 거룩한 이유는 그 속에 성령이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시 지 않은 성전, 교회당은 단지 큰 강당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수도 페테스부르크의 공산당 당사와, 국회의사당이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이었다는 사실 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시지 않으면 성전 건물도 하루아침에 마귀 의 소굴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재하시지 않은 강단은 단지 인간적인 감화 와 감동을 구걸하는 연설회의 단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없이 선포 되는 말씀은 도한 웅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사람을 그래도목사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의 위임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 아닙니까? 교회당 그자체가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옛날 어떤 목사님은 강단에는 아무 도 못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교회당 안에는 딴따라에서 사용하는 기타나 드럼 키보드등은 절대로 들여 놓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배당이던 강단이던 목사던 간에 성령이 임재 하실 때에 비로소 거룩한 것입 니다. 한 개의 북이, 한벌의 심벌즈가 캬바레에서 두드려 지면 악의 도구가 되는 것이요, 성령의 임재하심 속에서 찬송가의 반주로 쓰이면 그 자체로 거룩한 일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 성전에 들어오시기 전에 성령께서는 어디계셨습니까? 불 교에서 말하는 구천을 떠돌고 계셨습니까? 예배당 십자가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쉬고계셨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 안에서 우리와 동행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루 24시간을 우리와 함께 지내십니다. 우리는 항상 그분과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성도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마치 예배시간에만 그리고 예배당에 와서만 우리에게 임재하시 는 성령님을 인식하고바라보고 갑니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속이기 도하고, 속기도하고, 술도먹고, 담배도피고, 욕도하고,싸움도 하고,시기도 하고,남 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마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살 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교회당 현관문만 들어서면 세상에 둘도없는 거룩한 사람이 되곤합니다. 그리곤 거룩하게 기도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삶을 우리 삶속에서 바라보고 계신 성령께서 어찌 우리의 기도 를 기뻐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정 응답받는 기도를 드리기 원한다면 항상 주님이 함께계시다는 사실을 깨 달으면서 성령께서 바라시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항상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성도라면 어떻게 살고, 생각하여야 할것인가를 깨달으면서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기도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 님의 응답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일에나 해당된다는 사실을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무슨 특별한 사실이나 일들에 대해서만 기도해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 십니다. 우리한번 자신의 하루일과를 살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님은 아마도 이렇게 인사하실 것입니다. [예 혁문아 잘잤니? 어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렴]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건 아내 몫인데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맞다 하지만 네가 그일을 하면 너는 훌륭한 남편이 되지 않겠니?.] 여러분은 혹시 이런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출근을 합니다. 출근길에 아름다운 여인이 장미꽃한다발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 저 꽃과 그 꽃을 든 여인이 매우 아름답죠?] 주님은 말씀하실것입니다. [꽃은 아름답다 하지만 여인은 아름답다고 생각하 지 말아라] 그러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것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어떻게 아름 답지 않다고 합니까?]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여인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잖니 아름다워도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훌륭한 가장이 되 는 길이다.] 그리고 회사에서 거래처 사람을 만납니다. 일이 잘 안풀립니다. 상사에게 호 되게 꾸중을 듣습니다. 욱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밉니다. 그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야 참아라] 항변합니다. 이걸 참으란 말입니 까? [그래도 참아라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리도록 참지 않았니? 이것이 참된 인격자가 되는 길이란다] 퇴근길에 생각합니다. [에이 열받아 소주라도 한잔 하 고 가야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야 집에서 너만 바라보며 맛있게 저녁상 차 려놓고 기다리는 아내와 자녀들을 생각해야지] 이런 음성을 들어보신적이 있습니까? 이 얼마나 자애로우시고 고마우신 주님 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 한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모든 생각과 행 동을 보시면 또한 아시고 계십니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옳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또한 기도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순간 순간 깨닫는 삶이 아닙니가? 우리들의 삶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주님과 대화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 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지냅니다. 그리고 주님앞에 나오기만 하면 눈물 콧물 다 짜며 회개합니다. 주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네가 잘못하는 그곳에 내가 항상 있지 않았니, 내가 그렇게도 하지 말라고 말릴 때에 너는 거들떠 보지도 않더니 이제야 나랑 대 화를 하자고 하는 구나 그 때 그 때 내 음성을 듣고 대화할 수 없었니? 우리가 일상 속에서 주님과 대화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항상 기도하는 삶이 될 수 있고 항상 응답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 그 때 우리에게 가장 알맞고 적절한 응답을 해 주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중 누가 일주일 동안 저랑 여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처신을 매우 신중하게 할 것입니다. 저역시 마찬가지 일것이고요.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항상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깨달으며 살아가는 것이 응답받는 기도의 첩경입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시간내어 기도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특 별히 드리는 기도는 외식혹은 특식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 없던 시절에 명절을 매우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매 끼니 마다 항상 거의 똑같은 메뉴 즉 보리밥에 짠지의 식사를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곤밥에 괴기국이 나오는 명절이 너무나도 기다려 졌을 것입니다. 마 찬가지로 항상 기도하며 매 사에 주님을 인식하며 사는 삶이 매끼 식사라면 특별 히 하는 기도들이야말로 항상 기다려지는 특별한 식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기도회는 일상생활에 찌들었던 우리의 신앙에 새 활력을 찾아주는 참으로 기다 려 져야할 시간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무엇이 참 하나님의 응답인가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주장에 깊이 빠져 있으면 사물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게 마련입 니다.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게되는 경우가 많고 또한 깊은 착각에 빠지곤 합 니다. 마귀들은 오히려 이런 순간을 기회삼아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갖은 노 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응답을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응답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을까요? 첫째로 상식이 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상식이 통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오 늘날 우리사회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상식이통하지 않는 사회. 오늘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설쳐대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응답을 받아서 사회를 어지럽히지 않습니까? 작년 10 월 11 일 그러니까 오병태집사님 만년 노총각의 딱지를 떼시던 날이었 습니다. 예식준비를 위해 빠쁘게 일하는 도중 한 아주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그 리고는 바쁜 저를 앉혀놓고 손질 발짓을 하는 거였습니다. 직감적으로 구걸하러 오신 분인줄은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제 앞에 흰종이를 내밀더니 거기다 이렇게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교회에 들어가서 2만원을 구제비로 받으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제게는 그분께 2만 원을 구제비로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한 노총각 청년이 자기가 평소 흠모하던 처녀에게 불쑥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 니다. [어제 기도중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과 결혼하라고 하셨어요.] 처녀 가 무어라고 대답했을까요? [어! 이상하네 어제밤에 제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미친남자가 와서 내가 너랑 결혼하라고 했다고 할테니 절대로 속아넘어가지 말라고 하던데요.]라고 했답니다. 어던 목사님께서 홀아비 집사님과, 과부 집사님 을 맺어주기 위해서 두분을 모셔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분이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가 기도하는 중에 응답을 들었습니다.] 두분 은 목사님이 하 나님의 뜻이라고 하니까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결혼한 이 두분은 결혼 2년만에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이렇게 황당무계한게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항상 상식이 통하는 방법 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후의 보루인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응 답을 주십니다. 양심에 꺼리끼지 않을 그런 응답이 바른 응답입니다. 오늘날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양심에 관해서는 성도들보다도 목회자가 더 심한경우를 많이보게 됩니 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겨대서, 3년동안 엘란트 라, 소나타, 그리고 그렌져로 차를 바꾸는 그런 목사님도 본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 우리로 올바른 판 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성적인 판단 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런 판단은 자기 합리화적인 판단 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는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행동기준이 제시되어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기도에 대한 모든 응답을 성경의 범위 안에서 베풀어 주십니다. 때문에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항상 임의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의문나는 성구들이 있으면 반드시 교역자들에게 그 뜻을 물어야 합니다. 성경을 임의대로 해석하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곳에서 말씀하고 있습 니다. (여담/어떤 기도 많이하는 사업가가 부도를 내고는 기도원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를 하고나서 하나님 제가 이제 성경을 딱 피고나서 가장 먼저 보이는 성구가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라고 말한후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 때 마태복음 27장5절이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 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 사업가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기도를 한후 하나님 이번이 정말입니다. 하고 말한 후 또 성경을 펼쳐 읽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요한복음 2장5절 [그 어머니가 하 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하는 문장이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업가는 [주님 정말 죽어야 합니까?] 라고 말하고는 그래 한국사람은 삼세번인데 마지막 한 번더 하기로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또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아뿔싸 요번엔 요한복음 13장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 니]라는 성구가 가장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과연 이 사업가는 목매달아 자살을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스스로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자부하는 소경 들이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아전인수격으로 적용해서 많은 사람들을 실족케하 고 상처받게 하는일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그 속에서 삶의 열쇠와 하나님의 응답을 찾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응답받는 기도를 쉬지않고 드리는 그런 교우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항상 우리의 모든 세밀한 일상에 까지도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분께 모든 것을 아 뢰며 살아갑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올 때 항상 그것이 올바른 응 답인가를 상식에, 그리고 양심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올바 로 깨닫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요10:10/ 2006-01-02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요10:10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주 속에는 수많은 혹성들이 있지만 지금까지는 생명체는 지구에만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구의 나이가 얼마인가 하는 것은 과학자들에 따라 다릅니다만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구에 있는 생명공동체에 이미 심각한 종말의 징후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지구온난화현상과 오존층 파괴로 인한 기상의 이변과 생태계 파괴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가 지니고 있는 화석연료는 앞으로 50여 년간 사용할 분량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대체 에너지 개발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진행되는 사막화 현상은 식량문제와 생태계의 보금자리를 위협해가고 있으며 수질오염과 토양산성화, 산소생산량 부족 등은 모든 생명체의 목을 죄어서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식품이 상품으로 둔갑하고 농사가 사업으로 변하면서, 온갖 독성약물과 성장촉진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며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상품을 생산함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독을 먹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환경호르몬의 폐해를 입으며 불안한 미래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앞으로 생명복제기술이 보편화되어서 인간복제까지 감행할 경우에 야기될 창조질서의 대혼란을 예상할 때 지구생명공동체의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예측은 현재까지 나타나고 있는 징후들과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인간의 죄성(罪性)”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려는 악마의 계략에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야고보 장로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생명이 죽어 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종말 을 재촉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일례로 나무들을 보면 나무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는 본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지 접붙이기를 하기 위해 돌감나무 밑동을 잘라버리면, 평소 같으면 싹이 나지 않을 부위이지만 그 밑동에서 싹이 나고 왕성하게 줄기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꺾꽂이를 하기 위해 나무로부터 나뭇가지 일부를 잘라내어 땅에 꽂아 두면 가지 밑 부분에서 뿌리가 생겨나는 것도 잃어버린 뿌리 부분을 복원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 즉,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나무의 본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나무의 성질을 이용해서 접붙이기도 하고 꺾꽂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본성, 이런 본능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모든 동식물들에게는 종족유지 본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손상되어진 신체 부위가 다시 재생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치가 빠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영구치아가 생겨납니다. 피부에 상처를 입어도 손상된 부분에 새 살이 돋아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곧 우리의 생명력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생기 즉 생령을 불어넣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그것을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탐욕 즉 인간이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의 영역을 탐하는 일로 그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보았던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계곡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마른 뼈들입니다. 영적 죽음의 상태를 그렇게 묘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생기가 다시 불어와 마른 뼈들에 가죽이 덮이고 힘줄이 생기며 생명이 회복되어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본성을 주신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 인간들에게는 흔적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 끊임없이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명회복운동라이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는 생명목회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생명목회란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잃어버린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며, 예수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바울 사도는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내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신의 일부를 아니 밑동을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자아 회복을 위한 왕성한 활동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명회복 운동이나 생명목회는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다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는 것이 곧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는 지름길입니다. 생명목회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도 현대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란 항상 시대 시대마다 나타나는 문명 속에서 잘못되어진 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이룩해 온 문명은 분명히 인간들에게 편리함과 안전함과 유익을 준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문명은 결국 생명을 살리는 문명이 아니라 죽이는 문명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유심히 보세요. 문명이 생명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물을 사먹습니다. 수돗물을 불신합니다. 음료로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수도는 약을 통해서 멸균되었지만 물맛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형광등은 밝지만 세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걷다가 우마차를 타다가 자전거를 탔고 그러다가 오토바이를 탔습니다. 이제는 집은 없어도 차는 타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차는 빠르기는 하지만 걷기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걷기를 잃어버리니까 건강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이 또 다른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난1세기 동안 있었던 그 어떤 재난 보다 더 강력한 재난을 당한 모습을 매일 뉴스를 통해서 듣고 있습니다. 특히 2004년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겪었습니다. 미국과 중남미에는 4차례 대형 허리케인이 몰아쳐 플로리다에서만 가옥 2500채가 파괴됐고 아이티에서는 1500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일본에서도 10월 니가타 현 강진과 10차례의 태풍으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매년 그해의 세태를 압축해 나타내는 한자어를 선정해 온 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는 지난해 12월 13일 일본 열도에서 태풍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유난히 자주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災’를 2004년의 한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매스컴에서 해마다 선정하는 10대 뉴스가 선정되고 난 다음인 지난 12월 26일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부근 바다에서 발생한 8.9의 강진으로 인한 해일이 발생하여 여러 나라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사건은 세계 3대재앙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1970년에 방글라데시에 발생한 대홍수와 1976년 중국 탕산에 발생한 대지진, 그리고 이번 인도네시아의 지진과 해일로 인한 피해가 세 번째 큰 재앙이라고 합니다. 사망자가 얼마나 늘어날지는 모르지만 15만 명을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지진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그리고 자연재해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그리고 하나님이 예언해 주신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인도네시아 대지진으로 인한 해일 피해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시대적 변화와 문명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21세기의 초유의 문명으로 인한 생명파괴 현장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생명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반면에 사단은 생명을 죽이려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질병과 가난, 부정과 부패, 억압과 죄악으로부터의 구원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잘 돌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온 세상을 함께 구원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생명을 살려야 하지만 인간의 생명과 관계되는 자연의 생명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 모든 생명을 나의 생명처럼 여기는 의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금년의 교회의 목표를 생명 살리는 일로 정했습니다. 100년의 은혜를 한해로 마무리하고 우리끼리 자축하는 것으로 끝맺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00년의 은혜는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교회의 금년 표어는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이미 정해놓고 보니 정말 표어를 잘 정했다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친히 주관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목사를 통해서 표어를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어는 그냥 구호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말씀이 먼저 선행됩니다. 이 표어를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인 10절입니다. 특히 하반절 말씀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은 양을 훔쳐가서 잡아먹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기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키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적은 양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반면에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할 수만 있으면 좋은 꼴을 먹이고 좋은 물을 마시게 해서 살을 찌우게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마리라도 더 많이 키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파도 치료해 주고 오직 마음이 양에게 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신 사역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무한대의 사랑의 에너지로 병든 자를 고치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미움을 사랑으로, 다툼을 평화로,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시며 온갖 이적을 베푸셨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며 치유하며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스스로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 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베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진피해를 입은 나라 백성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 살리는 일에 첫 번째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이기 때문에 다음주일에는 특별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나와 교회는 언제든지 나눌 수 있어야 하고,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내 자신을 끊임없이 자유낙하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보다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고 보다 더 높은 위치에 도달할수록 더 많은 운동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를 쏟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생명을 살리는 분이 아니라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생명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고 요한복음10장 1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명을 이제 우리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함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모든 성도는 생명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금년 한해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지구상에서는 생명을 살리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을 앞장서서 해야 할 사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와 교회에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우리 교단의 생명살리기운동 10년 계획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만민에게 전파합시다. 둘째는 자연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합시다. 파괴된 자연에 창조의 새 질서를 가져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를 새롭게 하고 하나 되게 합시다. 교회의 삶에 일치와 갱신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넷째는 북한 동포와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분단된 조국에 평화통일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다섯째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 의롭게 살아갑시다. 여섯째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일곱째 장애를 가진 이웃과 함께 살아갑시다. 여덟째 청소년의 꿈을 함께 가꾸고 이루어 갑시다. 아홉째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하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닫힌 사회에 열린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 열린사회를 만들어 포용하고 협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 번째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약육강식의 대중사회에 생명살림의 새 문화를 창달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가장 우선이어야 합니다. 모든 생명 가운데서도 인간의 영혼을 먼저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동안 동성연애와 낙태지지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 운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다 같은 신앙을 가진 대통령이지만 부시 앞에 대통령이었던 클린턴과 현재의 부시 대통령과는 신앙관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낙태지지운동은 낙태를 합법화시키자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 낙태지지운동을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켜서 실제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찰스 콜슨이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싸움이 성공을 거두었군요.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낙태지지운동과 맞서서 성공을 거두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 싸움의 승리는 반쪽도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사회의 운동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정답 아닙니까? 사회운동으로 낙태지지 운동에 반대하긴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회운동으로 해결될 게 아니라 영혼이 치유받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바로 영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사회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 중요합니다. 환경 살리기 운동도 해야 합니다. 불의한 것을 정의로움으로 바꾸는 운동도 해야 합니다. 보안법폐지도 중요하고 역사바로세우기도 중요합니다. 무슨 운동을 하든지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영혼구원과 직결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는 운동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생명운동이 사회적으로 필요합니다. 전도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병원선교 중요합니다. 교도소 선교, 학원선교 등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구역별로 반드시 새 생명 전도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한 구역이 두 사람 이상씩 반드시 세례를 받도록 합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세례를 주도록 최선을 다해 봅시다. 나는 값없이 영혼이 구원을 받아 소망가운데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책망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은 구원의 방주로서의 아름다운 예배당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넓은 예배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채우라고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한 사람도 전도해보지 못한 분들은 금년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생명 살리는 해에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도록 합시다.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은 곧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할렐루야!
100세에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창21:1-8/ 2015-02-12
100세에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창21:1-8 성경 창세기에는 3사람의 조상이 등장합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 그들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만을 따먹고 선한 인류가 번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야 말았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죄악이 관영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타락하므로 죄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롬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한 말씀대로 입니다. 노아는 아담이 타락 후에 제2의 조상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홍수 심판 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에게 축복하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시의 가장 완전한 의인이었던 노아를 세웠으나 그의 아들 함의 범죄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위로 돌아가고 홍수의 심판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원죄로 타락하고 범죄로 파괴된 인간을 구원할 길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뿐이었습니다. 여기에 세움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진리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 원리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등장합니다. 창12:2,3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아담이나 노아에게 축복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 창15:4,5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사라는 나이 늙고 경수도 끊어진 아기 낳을 소망이 없는 노경의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무덤과 같은 사라의 태속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역사할 때 언약의 자식인 아들을 낳게 돈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결국 이삭은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낳은 자식이 되었습니다.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잉태하였으니 아브라함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아들 되는 원리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은 하와가 죄와 율법의 노예가 된 죽은 자를 낳았고 신약은 사라와 마리아가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할 자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라가 잉태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따라 잉태케 하사 언약의 자식을 낳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죽은 자 아담의 후손이 아니요 성령으로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축복의 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한 성경의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에게 믿음으로 많은 축복의 자식을 낳게 하는 하나님 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100세에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생각하며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1. 축복의 말씀의 씨를 나의 마음 배에 잉태케 하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이삭을 잉태한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이 잉태되는 기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쫒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축복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축복의 말씀을 잉태한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2천 년 전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를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성령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 배속에 잉태시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배속에 성령으로 잉태시킬 수 있는 씨앗입니다. 벧전1:16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의 씨는 우리의 마음 뱃속에 잉태케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큰 사건을 계획하시고 성취시키려고 할 때에는 먼저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 되게 될 때 큰 결과 열매를 가져오게 됩니다. 어떤 생각이나 환상이나 감정에서 된 것이 아니라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먼저 임하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성경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하여 축복의 말씀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받아 자기 마음 뱃속에 잉태케 하였습니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 나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요 나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천하 만민이 나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건지고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삼기 위하여 호렙산 가시 떨기 밑에서 축복의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거듭 말씀하여 축복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잉태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 심령 속에 살아 잉태될 때 비로소 큰 사건으로 이루게 됩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사건을 이룬 인물들을 보십시오. 모두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 되었던 것입니다. 세계사를 움직인 신앙의 사람들도 다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된 후에 그대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고아의 왕 조지 뮬러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시81:10에 “나는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이 말씀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어지고 무엇이든지 간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뱃속에 잉태케 하였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짓고 모든 필요한 것을 기도로 해결하였습니다. 고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때마다 필요한대로 공급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3천명의 고아를 살렸고 평생에 풍성한 축복을 누렸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되기만 하면 그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생활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잉태케 하는 성령을 언제나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여서 범사에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기를 바랍니다. 2. 내 마음 배에 잉태된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자라게 하십시오. 말씀이나 생각이 마음뱃속에 잉태된 다음에 믿음으로 그것이 자라나는 꿈을 그리며 그 꿈을 마음 뱃속에 설레도록 채우고 자나 깨나 꿈이 이루어진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천하 만민이 나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말씀하시고 그를 밖으로 인도하시고 밤하늘의 별들을 헤아리게 하시고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게 하셨고 가나안을 상속으로 주시기 전에 멀리서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하므로 가나안땅을 분명하게 소유하는 꿈틀거리는 마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잉태한 사람은 자나 깨나 꿈을 꾸며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그 씨를 자라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말씀이나 아이디어가 잉태되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그들이 이루어진 모습을 그리십시오. 그 씨가 마음 뱃속에 가득히 채우고 꿈틀거리게 하십시오. 우리 마음뱃속에 가득 찬 꿈은 계속 꿈틀거리게 하면 자라나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군에 입대하면서 큰 꿈을 가지고 군 생활을 하였으며 그 꿈을 거의 다 이루었습니다. 저는 우리 일신교회에 대한 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교회에 대한 큰 꿈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 큰 꿈은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제가 우리 일신교회에 오도록 되였을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매일새벽에 기도하며 성경읽기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 영광 보리라” 요11:40말씀이 노래로 터져 나왔습니다. “일신 일신 할렐루야 -----------일신 일신 일신 성도들이여 영광을 보리라” 그때 저는 군종병 이선목이라고, 이호문 목사님 아드님을 데리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복음성가 가수입니다. 그와 함께 곡을 맞추면서 하루 종일 매일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에 와서는 벽에다 크게 써 붙여 놓고 우리 식구가 모두 함께 부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11:을 펴서 성경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그때 제 가슴이 뜨거워지며 말씀에 은혜가 되고 “하나님 영광을 보리라” 설교 말씀을 단숨에 써내러 가게 되었습니다. 일신교회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저는 그때 확신하였습니다. 지금도 확신합니다. 제게 이 말씀이 마음 배 속에 잉태되어 있습니다. 지금 마음배속에서 꿈틀거리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시면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천상의 24장로님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금 면류관을 다시 벗어서 주님 보좌에 던지는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전개 될 것입니다. 믿는 대로 될 지어다. 하나님의 영광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배에 잉태된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자라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3. 입으로 해산 하십시오. 그리고 기고, 걷고, 뛰어다니게 하십시오. 롬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입으로 말하고 시인하게 될 때 창조적인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이 우리의 언어를 통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살아 역사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교회 봉사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입술로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상태의 믿음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지 않는 믿음은 잠자는 믿음입니다. 속에만 있는 믿음-죽은 상태에 있거나 잠자는 상태에 있는 믿음은 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할 때 이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믿음을 입으로 해산하게 하여 살아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민족의 조상으로, 사래는 사라-열국의 어미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게 했습니다. 말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것이 말로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해산하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사라가 “아브라함-민족의 조상, 열국의 아비여!” 또 아브라함이 “사라-열국의 어미여!”하고 서로 불러댔습니다. 90,100세 꼬부라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런 말하기가 굉장히 쑥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사라는 그들의 마음 배 속에 잉태된 것을 입을 통하여 해산을 하였습니다. 믿음을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들은 이웃사람은 자식도 없는 늙은 주제에 열국의 아비 어미라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고 비웃었습니다. 노망이 들어도 보통 들은 것이 아니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사라는 일단 잉태된 것을 해산 해 놓고 보니 시원했고 그것이 기어 다니고, 걷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게 되고 더 힘을 얻어 믿음, 소망,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 갔습니다. 그들의 입으로 믿음을 시인하게 되자 그들의 믿음은 더욱 살아 움직였고 축복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1년이 지난 후 정말 하나님 축복의 말씀의 씨앗-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 감격 했겠습니까? 100년 묵은 썩은 고목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이런 축복의 기적이 하나님 말씀의 씨를 받아 마음 배속에 잉태하고 자라게 한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사람들 대열에서 낙오자 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4. 어려운 잉태 어려운 해산을 통하여 얻은 것 모두를 하나님 앞에 내 놓으십시오. 그 이상의 것을 도루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어렵게 아이를 잉태하였고 어렵게 해산을 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일생일대에 중대한 시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약속과 언약으로 베풀어 주신 모든 축복을 다 거두어 가 버리는 절망적인 순간이요 또 자신과 그토록 사랑스런 아들과 함께 죽어버리는 비장한 결단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칼날을 번득이는 순간 그 생애의 전부를 희생하는 순간이며 또한 자신이 제물이 되어 죽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에 오른 아브라함은 영원한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일시적인 사랑을 죽이는 결단을 내렸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인간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준비하신 양을 잡아 축복의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축복의 새장이 펼쳐지게 아브라함의 손을 계속 잡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였던 것입니다. 그는 승리한 것입니다. 그는 죽고 다시 산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은 6대주 5대양에 믿음의 후손을 거느린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그러므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말씀대로 되였습니다. 약2:21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였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이요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자신에게서 산 믿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축복의 말씀에 신앙을 가집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해산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던 그 축복이 우리의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119 구조대/ 빌3:1-11/ 2001-12-06
119 구조대 빌3:1-11 제가 한국에서 목회를 할 때, 하루는 L 권사님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 대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개 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초인종을 누르자, 그 개는 침입자에게 경고라도 하듯이 맹렬히 짖어댔습니다. 권사님이 문을 열자, 저는 심방대원과 함께 마당을 지나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도 개는 달려들 기세로 짖어댔습니다. 예배를 은혜롭게 마치고, 그 집을 나설 때였습니다. 또 다시 그 집 개가 나타나, 물듯이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개에게 아무런 적개심도 없음을 나타내려 했지만, 그 개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옆에 있던 A권사님은, “이 개가 목사님이신 줄도 모르고, 왜 이렇게 짖어대지?”하고 말했습니다. 그 집을 나와 차를 타려고 문을 여는데, 그 개가 거기까지 따라 나와 제 뒤꿈치를 물었습니다. 며칠 후 L권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개를 funeral home에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 개가 도둑을 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주인은 그 개를 칭찬하고 후한 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개는 주인을 축복하러 온 사람을 물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개들을 조심하라”고 빌립보 교우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주인 말을 듣지 않는 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걸 보면, 빌립보 교회 안에는 개가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로 불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바울은 그 개들이 악한 일꾼들이며,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2절). 그들은 아마 유대인 크리스천 (Jewish Christians)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 교우들에게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도적 가르침 (apostolic teachings)과 대치된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1:12-13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아브라함의 피를 물려받고,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한다”, “그 분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바울은 로마서 2:28-29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28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29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내 몸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낙인을 찍는다 할지라도,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한, 나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크리스천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개는 오히려 너희들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못된 마음자세는 바꿀 생각을 안 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으니, 그들이 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 제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로는, 개는 따라다니면서 물려고 듭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그를 비난하고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할례 문제를 언급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개’라고 불렀고, ‘악한 일꾼’으로 간주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의 신앙적인 열심은 대단합니다. 그러니 이들은 어느 교회에서나 큰 일꾼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교회에 기여를 많이 하는 일꾼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주인의 뜻과 반대된 주장을 하는 일꾼은 악한 일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 말 듣지 않고 남을 물어뜯으려 한다면, 결국 그 개는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예수 안에서 자랑한다”는 것과, “참 할례를 받았다”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예배는 우리가 주장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주장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Worship is not the time you claim but you are claimed). 내 돈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생각하고 내가 봉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에 대한 기여도가 높을수록 교만해지고, 인정받지 못할 경우 사나운 개로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렸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힘 주셔서 봉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낙인을 영혼에 새겨놓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인의 관점과 그리스도인의 관점이 갖는 근본적인 차이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도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 사회에서 사는 한인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기회가 적기 때문에, 그들에겐 자신의 훌륭함을 교회에서 인정받고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만일 인정받지 못하면,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떠나도 그냥 떠나면 좋으련만, 사납게 짖고 이 사람 저 사람 물어뜯고서 떠납니다. 그래서 교회는 크고 작은 분쟁으로 시끄러워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엔 상처가 아물 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잘못하는 것보다 비난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걸 아는 사회입니다. 일 잘 못하는 것보다도 자랑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걸 인정하는 사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도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혀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분의 자녀로 인정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할례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육체의 증거를 자랑했고,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자랑할 것으로 따지자면, 바울에겐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귀족인 베냐민 지파의 혈통을 가졌고, 양친이 다 히브리 사람이었고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은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소수의 바리새파 사람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약 6,000명 정도에 불과하였음]이었고, 유대교의 이단인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만큼 그의 종교적 열심은 열렬했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5-6절). 유대교의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은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훌륭한 이력서를 마치 전과기록처럼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7절).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공적을 벗어던지고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8절). 바울은 왜 이처럼 지난 날 자신의 자랑거리가 되었던 일들을 더러운 오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실패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실패한 경험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8b-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8b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오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즉, 자신의 의를 버리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기 의를 버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 의가 없다면, 인간은 주장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주장이 통하고, 효력을 미칠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주장이 통하지 않고, 효력을 미치지 못할 때, 무시당했다고 느끼고 심한 좌절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섭섭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의를 바탕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자기주장이 관찰되지 않으니까 뭔가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에겐 두 아들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평가해 보면, 큰 아들이 작은 아들보다 더 착합니다. 그러나 얻는 것은 둘째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각각의 주장하는 방식에 기인합니다. 둘째는 뭔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부모에게 와서 애교를 부립니다. 그러면 부모는 처음에 주려고 계획하지 않았다가도 주게 됩니다. 그런데 첫째는 요구를 할 때, 가끔 불만조로 얘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주려고 마음먹었다가도 주지 않습니다. 뭐 마치 부모가 당연히 해 주어야 할 것을 해 주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면, 해 주려고 마음먹었다가도 그 마음이 쏙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이를 둘 이상 키워보신 분이라면, 여러 번 경험하신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부모도 자녀들이 자기 의를 바탕으로 주장하지 않길 바랍니다. 목회자도 그러합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은 얻을 것도 못 얻습니다. 목사가 당연히 해 주어야 할 것을 안 해 준다는 식으로 말하면, 주는 사람도 기분 나쁘고, 줄 생각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불만하면서 해 달라고 그러면, 내 자식에게도 안 해 주는데, 교인은 내가 낳지도 않은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의의 원천 (source)이 섬김의 대상을 결정합니다. 자기로부터 오는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9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 한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다.”는 것은 “자기 의를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여러분,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 붙잡혀 왔을 때, 예수님이 어떤 태도를 취하셨습니까? 자기 의를 바탕으로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죄 없는 사람만 이 여인을 돌로 치라 그러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중에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그러셨습니까? “나는 소득의 1/10을 헌금하고, 일주일에 하루를 금식하며,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자기 의를 가지고 말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감히 들어갈 용기도 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아무 의도 말하지 못하는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의론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교회란 자기 의로 서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서는 연습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 자기 의로 서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평안할 날이 없고, 그리스도의 몸엔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계속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결코 공로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부활은 자기 의를 죽이고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10-1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10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도대체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까? 부활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고난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까? 누구나 고난 받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어떤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고난은 여러분의 어리석음이나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 때문에 발생합니다. 여러분 그런 고난도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고난은 내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나는 고난도,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써 생겨나는 고난도 아닙니다. 바로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따라오는 고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고 흠 없는 분이셨지만,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으셨고, 결국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건 그리스도와 똑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기에 고난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바라고 있었고, 초대교회 교인들은 순교로써 그 진리성을 입증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지난주에 타이완에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수천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무너진 건물에 매몰된 생존자를 구해내기 위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구조팀을 파견했습니다. 며칠 전 모든 TV 뉴스는 6살 난 장징훙 군이 한 구조팀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는 장면을 보도했습니다. 이 구조는 흔히 생존 가능 시간의 마지노선인 72시간을 무려 18 시간 넘은 90시간이 지난 뒤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 극적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뉴스는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화면을 보고 있는데, 구조원의 등 뒤에 “긴급구조대”라는 한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장 군을 구해낸 것은 한국에서 파견된 119구조대원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꼼짝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나를 죽음의 잿더미에서 꺼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그 소년이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은 엄청난 무게의 콘크리트 구조물에 짓눌릴 수 있습니다. 목마름, 배고픔, 추위, 외로움, 공포--이런 고난이 엄습해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번 한 주간도 수많은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1시의 은혜/마20:1-16
11시의 은혜 마20:1-16 시간의 소중함을 먼저 깨달았던 \\\\\\\"베네트\\\\\\\"라는 사람은 시간은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길, 시간이 배급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나날의 기적입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눈을 뜨면 여러분의 지갑 속에는 마치 마술이라도 쓴 것같이 24시간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이 24시간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재산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에게 주어진 24시간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상황 밖의 시간이 있을 때 우리는 가리켜 25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 이하의 시간 처절한 생의 시간을 25시라고 말한다면 인간이상의 시간을 열 한시라고 성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25시가 저주받은 인간의 시간이라면 열 한시는 인간에게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25시안에서 인간은 절망과 한숨과 온갖 비애를 맛보는 대신에 열 한시에서는 희열과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렇게 열망하는 열 한시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적은 반면에 몸서리치는 25시는 누구에게든지 빈번하게 찾아오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을 우린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원치 않는 25시의 쇠사슬에 매어 극한 상황을 헤매며 고통과 번민의 불연속성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업자 수가 100만명이 넘어서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가를 우린 알고 있고, 누구나 25시의 악몽이 영원히 사라지기를 희망하며 살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25시는 그림자처럼 내 곁을 따라 다니고 있는 것이 우리 생의 현실인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모습입니다 마는 예전에는 기차역 주변이나 고속버스 주변에는 지게꾼들이 있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지게꾼 한 사람이 새벽부터 온 종일 짐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은 아무도 그를 불러 짐을 맡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드디어 해가 지고 저녁이 됩니다. 핏기 잃은 처자식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이러다가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불안한 마음이 스칩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 사람은 25시의 주인공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남 보기에는 나이 많은 사람이 짐지고 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일지도 모르나 지금 이 노인에게 있어서는 지게를 못지고 있는 상태가 바로 25시인 것입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짐이지만 그 짐을 지고 아무리 멀어도 짐을 지고 가는 그 순간이 이 지게꾼에게는 열 한시가 되는 것입니다. 지게꾼은 지게를 벗어 놓고 놀고 있는 것이 바로 비극입니다. 하루 끼니를 잇기 위해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 여윈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하며 이 노인의 눈시울은 점점 뜨거워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밤 열 한시가 되어 할 수없이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야할 마지막 시간에 마침내 이 노인은 오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한 보따리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밤 열 한시는 이 노인에게 있어서 감격스러운 시간이 됩니다. 그의 발걸음은 마냥 가볍기만 합니다. 품삯이 고마워서가 아니라 지게꾼이 지게꾼 되게 한 이 보따리 주인 때문에 그저 즐겁기만 합니다.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하기 이전에 빈둥거리며 놀고 있던 자신에게 땀흘려 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받은데 대하여 그는 드디어 삶의 보람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하루의 끼니를 위하여 새벽부터 포도원 품꾼으로 고용되기를 기다리는 자들을 찾아 어떤 포도원 주인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여러 명의 일꾼들을 포도원에 들여 보냈습니다. 같은 방법과 조건으로 아홉 시와 열두 시와 세시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드디어 오후 다섯 시, 즉 유대인의 열 한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열두 시간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오후 여섯 시가 일과종료시간이며 그 시간이 지나면 내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 한시란 일과종료 한 시간 전이라는 말입니다. 그 시각에 주인이 장터에 나가보니 발을 동동 그르며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루의 품삯을 바라며 고용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한 시간만 지나면 빈손으로 그냥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이 사람 역시 25시의 주인공이 되어 안타까운 심정으로 시간을 보내며 안절부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포도원 주인이 그를 불러 포도원에 들여보내 일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 사나이는 눈물겹도록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이토록 고마운 주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는 쏜살같이 달려가서 마지막 한 시간을 최선을 다하여 죽도록 일을 했던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지는 해를 붙들어 두고 싶은 심정으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이 은혜로운 열 한시 -- 일과종료 한 시간을 남겨두고 일을 손에 잡은 이 사나이는 품삯이 고마워서가 아니라 일하지 못하고 놀고 있던 노동자에게 일할 기회를 주었으니 일꾼이 되게 한 그 은혜가 고맙다는 것입니다. 열 한시에 불려온 사나이는 못 다한 분량은 채우기 위해서 일초를 쪼개어 쓸 만큼 정신없이 일을 합니다. 하루를 고스란히 버렸어야할 사람에게 고맙게도 일자리를 주셨으니 한 눈 팔고 불평할 여지없이 주인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밤새껏 일하고 싶습니다. 이제 일과시간이 드디어 끝납니다. 주인이 와서 일꾼들을 모아놓고 품삯을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맨 마지막에 불려와서 한시간 동안 일한 자를 제일 먼저 부르더니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지급하십니다. 물론 작업량에 있어서는 아침 일찍 불러온 사람들이 더 많았겠지만 눈가림과 요령주의로 일한 열 시간보다도 오히려 고마움과 감격 속에서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한 그 한 시간의 작업이 질적으로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시간의 효용성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시간이란 모름지기 아낄 줄 알아야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원리를 여기서 재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아끼고 고마운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기회를 감사와 감격 속에서 일하는 자는 바로 천국을 사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먼저 온 자들이 더 많이 받을 것으로 기대 했는데, 자기들도 역시 한 데나리온 밖에 받지 못하자 포도원 주인을 원망합니다. 12절 말씀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고 말입니다. 이 천국 비유를 보면서 우리는 집주인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2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품삯을 똑같이 나누어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찌 하루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자를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자와 똑같이 대우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은 15절 말씀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에 있습니다. 집주인은 처음부터 12시간 일하는 대가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일꾼들을 자기 밭에 들여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품삯관행에 따른 것입니다. 누구든지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한 품삯을 받는 것은 불공평이 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 데나리온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는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의 불공평이 아니라 은혜스러운 행위입니다. 이것은 주인이 손해를 보면서 자기 밭에 와서 일한 품꾼들에게 일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지불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원망들을 일이 아니라 주인의 선행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주인은 12시간 일한 자와 6시간 일한 자에게나 1시간 일한 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을까? 그 이유는 그 당시 한 가족이 하루 사는데 꼭 필요한 돈이 한 데나리온이기 때문입니다. 일한 시간에는 차이가 있지만 필요를 따진다면 모두가 한데나리온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인은 일의 양을 계산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 품삯을 계산해 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까지 필요한 만큼 한 데나리온을 나누어주었다. 이것은 주인 편에서 보면 자기 희생이요, 선한 행위입니다. 주인의 불공평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주인의 선함을 인하여 주인을 칭송해야합니다. 사람들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는 평등하고자 하는 고민입니다. 남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이 먹는 대로 먹고, 남이 입는 대로 입고, 남이 배운 만큼 배우고,… 남보다 못하면 불만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늘 남과 같아지려고 하기에 그런 공평으로 지향하고자 하기에 우리에게 고민이 따르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에게는 특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고민이 있습니다. 우린 평등하고자 하는 욕망에 머물지 않고 남보다 유별나고 탁월해 보이려고 합니다. 특별함을 즐기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늘 일등이어야만 만족하는 사람, 최고이어야만 만족하는 사람, 그런 행복관을 지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라는 개념은 없이 언제나 \\\\\\\"나\\\\\\\"라는 개념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듯 남이 못 가진 것 가져야 좋고, 남이 모르는 것을 알아야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집도, 옷도, 외모도, 행하는 일도 전부 유별나야만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참으로 오랜만에 옷을 사 입으려고 쇼핑을 갔습니다. 다소 분수에 넘치는 듯한 옷을 큰맘먹고 한 벌 사서 벼르고 별러서 어느 날 본 때있게 입고 외출했다가 우연찮게 자신의 옷과 똑같은 것을 입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기분이 엉망이되어 돌아와서는 다시는 그 옷을 입지 않겠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린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평등에서 기쁨을 얻고 있습니까? 아니면 특별해야만 만족하십니까? 공평함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불평할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우리는 확실하게 깨달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지극히 은총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일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특별히 늦게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기회를 잃어 버렸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고마운 일이 없습니다. 온전히 은혜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시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공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인권적입니다. 우리는 내가 약속대로 내 몫의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면 평등하게 받아들이고 만족하면 족합니다. 다른 사람이 비록 나보다 늦게 왔지만 그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은혜로 생각하고 같이 기뻐해 주면 되는 것입니다. 불평할 것 없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대하여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은혜 체질의 사람이 될 때 진정한 기쁨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평등체질이 되어서 남과 같이 되어야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이란 봉사 체질이 되어서 늘 남을 섬겨야만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이 열 한시가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육신의 열 한시입니다. 연령적으로 볼 때 아홉 시도 지나고 오후3시도 지나 오후 다섯시 즉 유대인의 열 한시에 당도한 분들이 있습니다. 이 때를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은혜로운 시간으로 알아 이 시간이 다 지나가기 전에 죽도록 충성해야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열 한시가 아직 안 되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지 모릅니다. 나는 아직 오전 아홉 시 밖에 안되었으니 놀고먹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착각하지 마십시오. 아침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곡간을 더 짓고 양식을 쌓아 두었지만 오늘밤 그의 영혼을 불러 가면 그 모든 소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제 불러 가실지 모르니 언제나 우리는 열 한시에 사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순간 순간마다 열 한시라는 기분으로 최선을 다하여 언제 어느때 하나님께서 부르셔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은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예수 믿고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셋째, 자랑이 없어졌습니다. 일하고도 미안한 생각이듭니다. 좀 더 잘해야 되는데, 좀 더 잘 섬겨야 되겠는데 하는 생각으로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바로 믿는 사람입니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우리 모두 육신의 열 한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둘째, 교회와 신앙생활의 열 한시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열 한시에 불려온 사람처럼 열심히 일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한국교회가 이 걸음 이대로 나가다가는 얼마 안 가서 25시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회개의 대열에서 \\\\\\\"해야, 해야, 지지 말라 네가 지면 일 끝나고, 일 끝나면 내 백성 위해 무엇으로 봉사할 꼬…\\\\\\\" 이런 심정으로 노래할 수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열 한시에 불려온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제 몇 년 혹은 겨우 몇 달 남짓한 교우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출발은 비록 늦었지만 늦게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으니 그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죽도록 충성을 다하고 전력을 다하여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코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도무지 성장하지 못하고 제 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설교는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설교 강심제를 맞아도 기뻐할 줄 모르는 설교 경화 중에 걸린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열 한시에 불려온 신자들은 그 믿음이 소박하고 순진해서 설교를 들으면 그대로 살기를 애쓰고 성경말씀의 지시를 따르려고 애쓰는 한결같이 열 한시에 사는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말씀대로 정말 나중 믿은 자가 자기를 앞지르는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문닫을 시간이요, 일을 마칠 시간에 일거리를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께서 사업에 은퇴하시고 교회에서도 은퇴하신 다음에 부자도 아니신데 여간 돈 씀씀이가 넉넉합니다. 이 장로님께서는 자기 교회 목사님만이 아니라 노회나 지역에 다른 교파 목사님들도 만나기만 하면 식사대접을 하십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늘 후하게 대합니다. 어느 날 목사님께서 넌지시 물으셨답니다. \\\\\\\"특별한 수입이 없으신데 어디서 돈이 생기십니까?\\\\\\\" 그러자 장로님께서는 \\\\\\\"제 주머니는 늘 넉넉합니다. 아들 삼형제에게 타내거든요\\\\\\\" 그 비결은 아들들에게 \\\\\\\"이놈들아? 내가 돈을 잘 쓰고 다녀야 너희가 효자 된다는 사실을 알아라. 번듯한 아들 삼형제를 두고서 비실비실 얻어먹고 다니면 욕은 너희에게 돌아가니 알아서들 하거라? 내가 돈 달라고 하기는 싫지만 너희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래야 너희가 효자 소리 듣고 너희들에게 복이 돌아가는 거다\\\\\\\"하신 답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목사인 저도 평생 얻어먹고 산다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궁해서 얻어먹는 것이 아닙니다. 서강교회 목사가 밥 굶겠습니까? 대접하는 기쁨, 대접하는 즐거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것도 큰 봉사입니다. 보세요! 제가 구질구질 하게 다니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서강교회 사람들 못됐구나, 어떻게 목사님을 저 모양으로 만들었나 흉봅니다. 제가 넉넉히 베풀고 다녀야 서강교회가 복을 받습니다. 성도여러분! 주는 교회가 복 받습니다. 지금까지 참 어렵게 교회가 지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열 한시를 주셨습니다. 그저 감격해서 감사해서 주는 자의 기쁨을 얻는 즐거움으로 죽도록 충성하여 하늘 나라 상급을 얻으시고 한 데나리온의 상급을 받으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120세에 돌아온 아들/ 창35:27-29
120세에 돌아온 아들/창35:27-29 2001-12-11 17:09:51 read : 263 충북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신석마을에 사는 박태영(朴泰榮·91) 할아버지. 그는 아침식사를 마치면 쌍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집에서 1㎞쯤 떨어진 부모 묘소를 찾습니다. 6·25전쟁 때 다리를 다쳐 불편한데다 고령이어서 묘소로 가는 데는 40분 가량 걸립니다. 그러나 그는 71년째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71년간 ‘시묘(侍墓)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고 있는 그는 어버이날인 8일 국민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20살이 되도록 불효자로 살다가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돌아온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야곱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60세 때에 낳았고(창25:27) 180세에 돌아갔으니 이 때 그의 나이는 120세였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야곱의 효도 실패를 통해 교훈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1.신앙에만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넘겨 받았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재산이 탐나서라기보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신 믿음의 상속권을 어어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못지않은 신앙의 열정가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에서는 장자권을 팔죽 한 그릇보다 하찮게 여긴 육적인 사람이었으니 야곱은 형을 업신 여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신앙의 열정을 위하여 형을 속이고 가로채는 방식을 당연시하였습니다. 이것이 에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고 둘 사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형제간에 원수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불효한 일입니까? 우리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지요. 믿지 않는 형제들, 그들은 조상 제사에 목숨을 걸고, 주일 날이면 놀러가고 행사를 치루고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헌신하는데 얼마나 걸림돌이되는지요. 피치못하게 그들과 담을 쌓아야 하고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신앙에는 열심인데 형제간에 불화하는 성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불신 형제일지라도 그들과 화목하는 것이 참 효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신앙적인 면에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으나 인간적인 면에서 그들에게 낮은 태도, 상대방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소유했다해도 그것이 내 자랑일 수 없는 주님의 베푸신 은혜입니다. 야곱은 그 은혜를 받지 못한 형을 향해 자비하고 긍휼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그의 그런 태도에 에서는 분노하였고 급기야 원수되어 두 사람은 20년이나 등을 돌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가족 일가친척 대에 이단에 빠진 형제들이나 타종교인, 심지어 무속에 심취한 자일지라도 그 인격을 존중히 여기고 화목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의 열정 때문에 형제와 불화한 것, 그로인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한 것, 아무리 정당화해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2.자식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본의 아니게 4명의 부인을 두고 12명의 아들에 1명의 딸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이 13명의 자식들을 너무 너무 사랑했지요. 창33:12-14절을 보면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라고 야곱은 형 에서의 길 인도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야곱이 제일 사랑한 것이 자식이요, 다음이 재산(가축떼)요, 다음이 부인이요 마지막이 부모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면 그 자식들의 요구를 맹목적으로 들어주게 됩니다. 야곱 일행이 도착한 곳은 벧엘로 가기 전 중간 지점은 세겜성이었습니다. 창 33:18-20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도대체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인 야곱 일행이 갈 곳이 아닙니다. 누가 그 성으로 가자고 했습니까? 야곱일까요? 그 부인들일까요? 이들은 이미 120세를 가까이하는 노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젋은이들인 그 자녀들입니다. 제일 큰 아들이 20세 밖에 안된 이 젊은이니 그들의 등쌀에 야곱은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치고 단을 쌓았습니다. . 젊은이들은 세상 문화를 좋아하고 잘 따라 갑니다. 세상에 호기심이 많고 세상 문화에 금방 젖는 세대는 것이 젊은 세대들입니다. 결국 34장을 보면, 고명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들의 아름다운 화장과 유행을 좋아하다가 그 땅의 오랜지 족 세겜의 유혹에 걸려들어 몸을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그들의 요구대로 다 들어주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약점입니다. 가끔 심방 중에 성도들의 자녀들의 방에 보면 연예인의 사진이 즐비하고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 채팅, 음란 사이트가 난무하고 \\\"엽기\\\"가 판을 칩니다. 세상이 음란 문화가 폭력과 자살과 엽기 문화가 그리스도인의 안방까지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식들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 \\\"그래그래, 오냐오냐\\\" 하다가 딸 디나를 망치고 아들을 살인자가 되게한 야곱의 실수 입니다. 그렇게 자식만 사랑하다가 아버지 찾아 뵙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독거노인들이 많은 시대, 어느 한 외로운 노인은 혼자 사시다가 아프다가 돌아가셨는데, 보름 뒤에나 발견되었습니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이 \\\"자식들을 찾아가시지요\\\"라고 제안하면 \\\"제 새끼 이뻐서 정신 없는데 내가 왜 구걸합니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내리 사랑 올리 효도」입니다. 자식 사랑은 절로 되나 부모 효도는 노력해야 합니다. 자식이 아무리 사랑스러울지라도 그 때문에 부모를 소홀히 여기는 일은 부모에게 불행하고 자신에게 불행하고 자식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로 손주를 사랑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3.부모와 하나님의 상관 관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그 가족을을 이끌고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 성에 머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잊었고 부모님도 잊었습니다. 거기서 자녀들로 부끄럽고 끔찍한 일을 당하고 망연자실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은 그 말씀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자식들이 세겜 성의 유행을 따른 옷을 벗기고 몰래 숨겨놓은 우상의 신상을 버리게 하고 다시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야곱이 다시 하나님께로 나갔다는 말이다. 야곱은 20년전 하나님께 약속하였던 제단을 쌓았고 예물을 드려 하나님께 돌아가니 부모님이 생각났고 벧엘에서 부모님이 사시는 헤브론으로 내려갔습니다. \\\"벧엘\\\"=>하나님의 집 집이라면 좋은 건물을 생각하는데, 집은 부모님입니다. 집에 간다는 것은 부모님께로 간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아파트에 산다해도 부모없이 사는 아이는 집없는 아이입니다. 집은 울타리와 내실로 구성되지요, 아버지는 울타리고 어머니는 내실(시128:3)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바깥 양반이라하고 어머니를 집 사람 안 사람이라고 합니다. 집이 안방만 있으면 두렵고, 울타리만 있으면 허전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양친 부모가 있어서 양육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벧엘이 하나님이 집이라는데 겨우 돌기동 하나만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처소는 온 우주를 사용해도 모자랍니다. 하나님은 집, 성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에 갈 수있다는 것은 하늘에 장소와 건물. 보석과 금으로 만든 건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하나님께로 간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가는 것을 잊고 세겜 성에 안주하려했을 때, 그는 하나님도 잊고 부모님도 잊었습니다. 하늘 부모님을 잊고 세겜 성에 머문 결과는 딸 디나가 몸을 더렵혀 오라버니들의 복수극에 온 성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러나 하늘 부모님인 하나님을 다시 찾은 야곱은 땅의 부모인 이삭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늘 부모의 모형인 땅의 부모님을 공경할 것입니다. 결언: 180세의 죽기 직전의 이삭은 60세에 낳은 아들, 100세에 집을 떠난 아들 야곱을 만나고 천국에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고 120살난 아들은 20년 만에 잊었던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120살에 돌아온 아들 야곱을 본 아버지 이삭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천사들의 인도하에 천국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마터면 영원히 불효자가 될 뻔한 아들 야곱을 120년 만에 회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120세에 돌아온 아들/창35:27-29
120세에 돌아온 아들/창35:27-29 2003-02-15 23:08:38 read : 319 충북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신석마을에 사는 박태영(朴泰榮·91) 할아버지. 그는 아침식사를 마치면 쌍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집에서 1㎞쯤 떨어진 부모 묘소를 찾습니다. 6·25전쟁 때 다리를 다쳐 불편한데다 고령이어서 묘소로 가는 데는 40분 가량 걸립니다. 그러나 그는 71년째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71년간 ‘시묘(侍墓)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고 있는 그는 어버이날인 8일 국민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20살이 되도록 불효자로 살다가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돌아온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야곱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60세 때에 낳았고(창25:27) 180세에 돌아갔으니 이 때 그의 나이는 120세였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야곱의 효도 실패를 통해 교훈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1.신앙에만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넘겨 받았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재산이 탐나서라기보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신 믿음의 상속권을 어어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못지않은 신앙의 열정가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에서는 장자권을 팔죽 한 그릇보다 하찮게 여긴 육적인 사람이었으니 야곱은 형을 업신 여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신앙의 열정을 위하여 형을 속이고 가로채는 방식을 당연시하였습니다. 이것이 에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고 둘 사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형제간에 원수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불효한 일입니까? 우리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지요. 믿지 않는 형제들, 그들은 조상 제사에 목숨을 걸고, 주일 날이면 놀러가고 행사를 치루고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헌신하는데 얼마나 걸림돌이되는지요. 피치못하게 그들과 담을 쌓아야 하고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신앙에는 열심인데 형제간에 불화하는 성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불신 형제일지라도 그들과 화목하는 것이 참 효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신앙적인 면에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으나 인간적인 면에서 그들에게 낮은 태도, 상대방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소유했다해도 그것이 내 자랑일 수 없는 주님의 베푸신 은혜입니다. 야곱은 그 은혜를 받지 못한 형을 향해 자비하고 긍휼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그의 그런 태도에 에서는 분노하였고 급기야 원수되어 두 사람은 20년이나 등을 돌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가족 일가친척 대에 이단에 빠진 형제들이나 타종교인, 심지어 무속에 심취한 자일지라도 그 인격을 존중히 여기고 화목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의 열정 때문에 형제와 불화한 것, 그로인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한 것, 아무리 정당화해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2.자식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본의 아니게 4명의 부인을 두고 12명의 아들에 1명의 딸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이 13명의 자식들을 너무 너무 사랑했지요. 창33:12-14절을 보면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라고 야곱은 형 에서의 길 인도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야곱이 제일 사랑한 것이 자식이요, 다음이 재산(가축떼)요, 다음이 부인이요 마지막이 부모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면 그 자식들의 요구를 맹목적으로 들어주게 됩니다. 야곱 일행이 도착한 곳은 벧엘로 가기 전 중간 지점은 세겜성이었습니다. 창 33:18-20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도대체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인 야곱 일행이 갈 곳이 아닙니다. 누가 그 성으로 가자고 했습니까? 야곱일까요? 그 부인들일까요? 이들은 이미 120세를 가까이하는 노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젋은이들인 그 자녀들입니다. 제일 큰 아들이 20세 밖에 안된 이 젊은이니 그들의 등쌀에 야곱은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치고 단을 쌓았습니다. . 젊은이들은 세상 문화를 좋아하고 잘 따라 갑니다. 세상에 호기심이 많고 세상 문화에 금방 젖는 세대는 것이 젊은 세대들입니다. 결국 34장을 보면, 고명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들의 아름다운 화장과 유행을 좋아하다가 그 땅의 오랜지 족 세겜의 유혹에 걸려들어 몸을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그들의 요구대로 다 들어주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약점입니다. 가끔 심방 중에 성도들의 자녀들의 방에 보면 연예인의 사진이 즐비하고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 채팅, 음란 사이트가 난무하고 \\\"엽기\\\"가 판을 칩니다. 세상이 음란 문화가 폭력과 자살과 엽기 문화가 그리스도인의 안방까지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식들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 \\\"그래그래, 오냐오냐\\\" 하다가 딸 디나를 망치고 아들을 살인자가 되게한 야곱의 실수 입니다. 그렇게 자식만 사랑하다가 아버지 찾아 뵙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독거노인들이 많은 시대, 어느 한 외로운 노인은 혼자 사시다가 아프다가 돌아가셨는데, 보름 뒤에나 발견되었습니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이 \\\"자식들을 찾아가시지요\\\"라고 제안하면 \\\"제 새끼 이뻐서 정신 없는데 내가 왜 구걸합니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내리 사랑 올리 효도」입니다. 자식 사랑은 절로 되나 부모 효도는 노력해야 합니다. 자식이 아무리 사랑스러울지라도 그 때문에 부모를 소홀히 여기는 일은 부모에게 불행하고 자신에게 불행하고 자식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로 손주를 사랑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3.부모와 하나님의 상관 관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그 가족을을 이끌고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 성에 머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잊었고 부모님도 잊었습니다. 거기서 자녀들로 부끄럽고 끔찍한 일을 당하고 망연자실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은 그 말씀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자식들이 세겜 성의 유행을 따른 옷을 벗기고 몰래 숨겨놓은 우상의 신상을 버리게 하고 다시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야곱이 다시 하나님께로 나갔다는 말이다. 야곱은 20년전 하나님께 약속하였던 제단을 쌓았고 예물을 드려 하나님께 돌아가니 부모님이 생각났고 벧엘에서 부모님이 사시는 헤브론으로 내려갔습니다. \\\"벧엘\\\"=>하나님의 집 집이라면 좋은 건물을 생각하는데, 집은 부모님입니다. 집에 간다는 것은 부모님께로 간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아파트에 산다해도 부모없이 사는 아이는 집없는 아이입니다. 집은 울타리와 내실로 구성되지요, 아버지는 울타리고 어머니는 내실(시128:3)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바깥 양반이라하고 어머니를 집 사람 안 사람이라고 합니다. 집이 안방만 있으면 두렵고, 울타리만 있으면 허전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양친 부모가 있어서 양육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벧엘이 하나님이 집이라는데 겨우 돌기동 하나만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처소는 온 우주를 사용해도 모자랍니다. 하나님은 집, 성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에 갈 수있다는 것은 하늘에 장소와 건물. 보석과 금으로 만든 건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하나님께로 간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가는 것을 잊고 세겜 성에 안주하려했을 때, 그는 하나님도 잊고 부모님도 잊었습니다. 하늘 부모님을 잊고 세겜 성에 머문 결과는 딸 디나가 몸을 더렵혀 오라버니들의 복수극에 온 성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러나 하늘 부모님인 하나님을 다시 찾은 야곱은 땅의 부모인 이삭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늘 부모의 모형인 땅의 부모님을 공경할 것입니다. 결언: 180세의 죽기 직전의 이삭은 60세에 낳은 아들, 100세에 집을 떠난 아들 야곱을 만나고 천국에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고 120살난 아들은 20년 만에 잊었던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120살에 돌아온 아들 야곱을 본 아버지 이삭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천사들의 인도하에 천국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마터면 영원히 불효자가 될 뻔한 아들 야곱을 120년 만에 회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1400에 필요한 사람(소금의 쓰이는 용도의 수)
1400에 필요한 사람(소금의 쓰이는 용도의 수) [ 유문호 ] 1400에 필요한 사람(소금의 쓰이는 용도의 수) 알아맞춰바!!!!!! 10고개(10달란트문제) ① 나는 아주 작아요. ② 나는 아주 가볍답니다 ③ 나는 바다에 산답니다 ④ 나의 몸은 흰색이구요.. ⑤ 나는 아무 냄새도 안나요 ⑥ 나를 무려 1400군데서 스카웃하여 쓰고 있답니다. ⑦ 나는 엄마가 많이 사용하는 조미료중의 하나예요.. ⑧ 나는 생선을 썩지 않게 할 수 있답니다. ⑨ 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 때 꼭 필요해요 ⑩ 나는 짠맛이랍니다. 오늘은 소금에 대해서 알아볼까 해요... 여러분 중에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는 친구 있나요? 소금은 어디에서 살죠....(바닷가요) 그래요... 그럼! 바닷가에서 소금 본 사람 있나요? 아마 없을꺼예요.... 이상하네... 바닷가에서 사는데 왜 소금을 볼 수가 없죠... 지금부터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설명 할 때니까 잘 들어보세요... 1. 먼저 바닷물을 네모나게 짜 놓은 염판에다가 모아요. 2. 모은 바닷물을 따뜻한 햇님을 통해 오후 3~4시까지 쬐어줘야해요... (그리고 나면 물에 하얀것들이 조금씩 생겨난답니다) 3. T자 모양의 길다란 나무로 그 하얀것들을 가운데로 모아요... (몇차례 계속 반복를 해줘야 해요) 4. 그리고 나선 가운데로 모은 소금에서 물이 다 빠져 나갈 때가지 그대로 두어요. 5. 물이 다 빠지면 완전한 소금이된답니다... 이렇게 해서 소금이 만들어지는 것이예요. 자! 그럼 소금이 하는 것이 무엇이있는지 한번알아볼까요? 공업용으로 쓰이는 소금 난로의 불이 시원치 않으면 소금 한 줌을 난로에 던지는데 화력이 단번에 증가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소금은 사람의 혈액에 들어 있으며, 몸의 세포가 제 기능을 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해요. 소금은 피와 섞여 몸 구석구석까지 돌면서 세포 속의 노폐물을 새 물질로 바꾸어 주어 신진 대사를 촉진해요. 소금은 우리 생활에서 음식의 간을 맞출 때, 장을 담글 때, 식품을 저장하기 위해 절일 때와 같이 음식을 만들 때 여러모로 쓰이죠. 하지만 식품으로 이용하는 소금의 양은 전세계에서 소비하는 양 가운데 아주 조금밖에 되지 않는데요. ☆설탕에 소량의 소금을 넣으면, 설탕의 단맛을 강하게 해줘요.☆ 소금물이 지혈작용을 ~~~~~~~~~ 의료품으로 쓰여요 가정에서 감기예방,축농증,치질,화상,치통,인후통,더위 먹었을 때 민간요법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두통,빈혈,가슴앓이,속이통,위염,급체,안질,두드러기,부스럼,편도선,종기,머리비듬,파상풍,폐결핵,심지어 옻 올랐을 때도 사용하고 있어요. 와! 정말 많다... 소금이 이렇게 다양하게 쓰일줄이야... 정말 놀랐어요.. 근데 예수님께서여러분이 바로 소금이래요.자!한번들어봐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6장13절) 소금이 쓰여지는 데가 아주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 두가지를 뽑는다면 첫째로 바다에 소금이 있는 이유예요... 바다에 소금이 없다면 어떤일이 벌어질까요???? 바닷물이 썩어 고기들이 다 죽겠죠.... 마찬가지로 세상에 소금인 기독교인들이 없다면 세상이 다 썩어져서 사람들이 다 죽을 수밖에 없겠죠..... 둘째로 조미료의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소금이 없다면 무엇으로 소금의 맛을 낼 수 있나요????? 사람의 입맛은 조금 짠맛이 있어야 딱 좋대요...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그 맛을 내래요.... 어떻게 내죠....... 녹아져야만 그 맛을 낼 수 있어요... 남을 위해 희생하는 정신이 필요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사랑처럼... 희생의 정신??????? 뭐가 있을까요???? 우리 말하지 말고 잠시 생각해봐요!!!!!!! 소금이 몇군데에서 쓰여진다구요... 1400군데요.... 여러분들도 1400군데에서 쓰임받는 예수님의 자녀 되길 바래요.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대합창/계14:1-5/어린이,학생설교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대합창 계14:1-5 어린이,학생설교 1. 사도 요한이 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지 육, 칠십 년이 지난 때에 사도로 세우신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요한은 주님의 복음을 인하여 밧모라고 하는 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9절에 보면 그는 그가 주님의 계시를 받아 편지를 보내고자 하는 교회들과 함께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겪었음을 말합니다. 그 역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께 인내를 배웠으며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그는 지금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어 있는 몸이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해진 조직적인 박해를 받아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얽매인 처지에 있었지만, 그때가 그에게서는 그가 섬기는 주님과 더불어서 신령한 교통의 관계 속에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때는 주일이었는데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그의 뒤에서 마치 나팔 소리와도 같은 큰 음성이 갑자기 들려왔는데 그가 이제부터 보는 것을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였습니다(계 1장 10-11절). 하나님께서는 곧 일어날 일을 주의 종들에게 알리려고 그리스도께 계시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종인 요한에게 보내 그 뜻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사도 요한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일에 관한 계시의 말씀을, 곧 그가 듣고 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예언의 말씀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어 교회에서 낭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이 실현될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2. 예루살렘 시온산에서 울려퍼지는 14만 4천 명의 대합창 우리가 보고자 하는 요한계시록 14장 1-5절은 \\\\\\\\\\\\\\\"14만 4천인의 대합창\\\\\\\\\\\\\\\"에 대한 기록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아주 신비스런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 중에 한 장면입니다. 요한은 예루살렘 시온산 꼭대기에 서 계시는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 곁에는 이마에 어린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새긴 사람들이 14만 4천 명이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그러니까 인침을 받은 자들의 수효입니다(계 7장 3-4절). 또한 이 수효는 셀 수 없이 많은 큰 무리를 뜻합니다(계 7장 9절). 이들은 한결같이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흰옷을 입고 있는 것은 자기들에게 가해진 심한 박해 속에서도 어린양의 피로 자기 옷을 빨아 희게 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계 7장 9절, 13-14절). 본문 3절에서는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 4절에서는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의 수효라고 14만 4천이 뜻하고 있는 의미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렇게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성도들의 총화(總和)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수효가 14만 4천 명입니다. 이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구속의 피의 은혜를 입음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오게 되었고, 성전에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계 7장 15절). 이 14만 4천 명은 천상의 보편적 교회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에 의해서 하늘에서는 웅장하고도 참으로 아름다운 대합창이 울려 퍼졌습니다. 마치 폭포 소리 같기도 하고 아주 굉장한 천둥 소리 같기도 한 이 대합창은 거문고에 맞추어 불려졌습니다. 이 대합창은 하나님의 보좌와 4생물(천사장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참조 에스겔 10장)과 24장로들이 있는 앞에서 불려졌습니다. 천상의 오케스트라를 사도 요한은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시온산에서 울려퍼진 14만 4천 명의 대합창은 바로 우리가 조만간에 그 일원의 한 사람으로서 부를 노래입니다. 사도 요한이 받은 예언의 말씀은 그가 말한 대로 곧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도 그렇거니와 모든 세대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습니다. 소망 가운데서 \\\\\\\\\\\\\\\"그 날\\\\\\\\\\\\\\\"의 가까움을 보고 있습니다. 심한 박해가 있을지라도 오직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 경배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세상은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결코 세상이 그들의 믿음을 이기지 못합니다(히 11장 38절). 3. 14만 4천 명에게서 보는 신앙 사도 요한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루살렘 시온산에 있는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대합창을 언급하면서 이 천상의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있는 14만 4천 명의 신앙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貞節)이 있는 자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요,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요,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이들이 주님께 대해 어떤 신앙 속에서 살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14만 4천 명은 \\\\\\\\\\\\\\\"땅 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입니다. 이것은 14만 4천 명이 지닌 신앙의 특징들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나 3절과 관련하여 볼 때 문맥상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옳겠습니다. 3절에서 14만 4천 명에 대하여 말할 때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이라고 그 상징적인 의미를 규정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4절에서 그들이 지닌 신앙의 특징을 설명해 나가면서 다시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14만 4천 명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드리는 첫 열매로서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이라고 한 번역(현대어 성경)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14만 4천 명을 \\\\\\\\\\\\\\\"처음 익은 열매\\\\\\\\\\\\\\\"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용어는 추수에서 가장 먼저 거둔 곡식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용어가 본문에서는 \\\\\\\\\\\\\\\"사람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자\\\\\\\\\\\\\\\"를 뜻하는데 사용되어서 \\\\\\\\\\\\\\\"구속함을 받은 자의 총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처음 익은 열매로 불리운 것은 그 첫 열매가 주님께 거룩하며 그의 특별한 소유로 주님께 속했을 때 그에 따른 모든 열매 또한 그 첫 열매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장 18절)고 말한 것도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이 문장을 현대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가운데 최초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새 생명으로 14만 4천 명의 무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대합창의 기쁨을 결코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공집회에 의한 예배에서 예표적으로 경험해 가고 있는 것인데, 구속함을 얻은 자로서가 아닌 단지 여기에 휩쓸려 들어온 자들, 그들은 기독교가 좋아 보여서 들어온 자들이든지, 아니면 기독교에 들어오면 이런 저런 신비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고 복을 받을 것이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등의 지극히 자의적 생각과 그 판단으로 들어온 자들이든지간에 그러한 인위적인 신앙으로서는 결코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대합창의 기쁨과 동질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같은 흉내를 낼지라도 결코 그 기쁨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14만 4천 명의 한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노래는 결코 될 수가 없는 법입니다. 3절에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저희가 보좌와 네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만 4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둘째, 14만 4천 명은\\\\\\\\\\\\\\\"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정절이 있는 자들\\\\\\\\\\\\\\\"입니다. 정절(貞節)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여자의 곧은 절개\\\\\\\\\\\\\\\", \\\\\\\\\\\\\\\"굳은 마음\\\\\\\\\\\\\\\", \\\\\\\\\\\\\\\"변하지 않는 절개\\\\\\\\\\\\\\\"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절개(節槪)란 \\\\\\\\\\\\\\\"옳은 일을 지키어 뜻을 굽히지 않는 굳은 마음이나 태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정절의 의미를 특별히 여자를 호명(呼名)해서 설명한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만으로 제한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해 정절을 가지고 있어야 할 교회의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 모두가 정절의 문제에 대해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은 여자와 남자 모두가 정절의 문제에서 예외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남자와 더불어 음행하는 것은 정절을 잃어버리는 거이듯이, 또한 총각이 여자와 더불어 음행하는 것도 정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정절은 남녀 모두의 문제입니다. 더구나 남자와 여자는 가정을 이룸으로써 부부가 되어 한 몸의 성격을 갖고 상호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로 맺어졌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여자의 곧은 절개를 14만 4천 명의 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루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우리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히지 않는 이 정절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구약적 배경과 관련하여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약에서는 정절을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음행, 곧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을 향한 우상 숭배적 신앙을 염두에 두고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호 1장 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을 오직 신앙하는 것을 버리고 이방의 우상들을 자신들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삼아 섬겼습니다. 그러니까 탐욕에 이끌려서 하나님에게서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영적 음행에 빠져듦으로 해서 하나님에 대한 정절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섬김의 도리를 율법의 내용을 통해 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함으로 해서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 다루듯이 하게 되었는데, 마치 이방인이 자신들의 우상을 섬기듯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당장의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이익의 재료로 삼아 숭배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신앙적 타락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호 4장 6절)고 말한 것이나,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장 3절)고 외친 말씀이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 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장 6절)고 외친 말씀의 배경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자기들의 만족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탐욕으로 섬기는, 그러니까 사실은 우상을 섬기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음행의 실체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그들이 원한다고 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다가가지를 않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는 하나님보다 이방신이 더 위대하고 커 보입니다. 그래서 이방신에게서 자손의 번성과 재물의 풍요를 기대했습니다.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생활 속에 깊이 파고 들어온 것은 그래서 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정절을 헌신짝 버리듯 나 몰라라 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나 우상에 불과한 이방신에게로 달라붙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또 다른 영적 음행의 실체였습니다. 이때까지 때로는 저들을 자식으로, 때로는 아내로 때로는 백성으로 여겨서 온갖 사랑과 관심과 애정을 쏟으면서 참고 인도해 오셨던 하나님의 헌신적 손길을 자신들의 일신상의 편의와 안일과 필요를 위해 한 순간에 외면하기를 거듭 역사 속에서 반복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일컬어 영적 음행 내지는 간음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사도 요한이 주의 계시를 받아 말하는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란 온갖 세속주의와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세속성(世俗性)의 정체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生)의 자랑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요일 1장 16절). 이는 옛 사람의 속성인 육신적 본능의 욕구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계시록 17장에서 사도 요한은 여자가 상징하는 바의 정체성을 음녀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약에 기록된 바벨론의 사상에서 그 사단적 적대세력의 이미지를 차용(借用)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온갖 배교와 우상숭배와 불신앙으로 대변되는 세상을 가리키며 동시에 갖가지 사단적 세력의 총화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를 음녀란 표현을 써 상징적으로 설명하면서 음녀가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보석과 진주로 꾸몄으며, 손에 가진 금 잔에는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음녀는 또한 자기가 죽인 예수의 증인들이 흘린 피를 즐겨 마시고 취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세상을 이끌어 가는 온갖 현란하고도 매력적인 세속적 사단세력의 총체(總體)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사람들 속에서 목숨을 내어놓으면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킵니다. 신앙인은 그런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들과 같이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여 거기에 자신의 삶을 드려가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합니다. 로마서 기자는 영적 예배자의 삶을 언급하는 가운데 \\\\\\\\\\\\\\\"이 세대를 본받지 말 것\\\\\\\\\\\\\\\"을 우선적으로 요구합니다(롬12:2). 여기서 세대가 의미하는 바는 사단적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대의 시대적 사상체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 시대의 사상적 흐름의 이면을 정확히 해명해서 신앙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선별적으로 경영해 나가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가 곧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행동으로 해석됩니다. 이것이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정절 있는 자\\\\\\\\\\\\\\\"가 가리키는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땅히 섬길 하나님을 성경의 구속사적 계시관에 입각해서 바르게 섬기지 못한다면 이 또한 자의적 숭배신앙에로 정죄 당해 하나님 앞에 불의와 불법으로 판정 받게 되기 십상입니다(롬 10장 2-3절, 마 7장 21-23절).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 신앙의 현실과 교회적 실상을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에 기초해 면밀히 진단하고 검증해야 합니다. 그 내용적 실체가 자기중심적인지 아니면 하나님 중심적인지, 또는 현세 지향적인지 아니면 천상 지향적인지의 여부를 진지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겉보기에 기독교적인 것으로 아름답고 화려하고 거룩하게 치장돼 있다 할지라도, 만에 하나 내적 본질이 성경이 말씀하는 바에 바르게 접촉돼 있지 않다면 하나님과는 관계도 분깃도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회당을 성전화 개념을 가지고 가능하면 웅장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나, 그 속에서 온갖 종교적 열심을 내세워 세속주의와 기복주의, 그리고 상급주의와 지성감천주의, 은사주의를 좇게 하는 신앙은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을 복음을 좇는 참된 믿음에서 떠나 배도와 배교케 하는 가장 좋은 시험의 전략으로 삼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횡행했던 영적 음행이 기독교란 포장으로, 가면으로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신앙생활은 현세적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한 종교적 활동이 아닙니다. 역사를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전폭적으로 신뢰해서 의존하는 영원을 향한 생명적 활동 그 자체를 목적 삼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를 보십시오(계 2-3장). 그리고 주께서 승천하신지 겨우 6, 70 년이 경과되었을 뿐인데, 그리고 주님의 사도된 제자들이 아직도 살아 있던 시대였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죽은 교회와 방불(彷彿)한 교회가 존재했으며, 더러는 토해 내치고 싶을 정도의 빈 껍데기만 남은 교회가, 심지어는 도무지 교회라고 할 수 없는 사단의 공회마저 버젓이 교회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한편 지금은 주께서 부활승천 하신 후 거의 2천 여년이 이른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아니 짧게 잡아서 종교개혁 후로는 500 여년 가까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실상이 성경적 진리를 얼마나 진실되게 유지 보존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넉넉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불과 6, 70년이 지난 당시에도 신앙인에게서 주께 대한 신앙의 정절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 10배, 30배가 지난 오늘날에서는 정말 믿음 있는 자를 볼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가 없었다면 단 한 사람의 의인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한 시대의 절대 다수가 소유하고 누리고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서 항상 진리로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성경역사가 증거하는 바이며 동시에 교회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적은 무리나 작은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고 좋은 것이며 진리를 대변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성경적 기준(基準)과 원리입니다. 성경은 기독교 신앙과 삶의 절대적인 가치와 표준을 제공하는 불멸의 잣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로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 성경적 신앙은 그 실체를 바르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정절은 다름 아닌 성경적 기준과 원리에 부합되는 신앙적 삶을 가리킵니다. 이는 구속사에 접촉되어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전 구속사적 계시관에 접촉돼 경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생명적 활동 말입니다. 이 시대에 오직 하나님만을 우직(愚直)하게 섬기는 신앙의 정절자(貞節者)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켜나가지 못할 때, 그래서 14만 4천 명의 수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는 사람들은 14만 4천 명과 상반되는 짐승에게 속한 것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666표를 날인(捺印) 받게 될 것을 성경은 증거합니다(계13장). 셋째, 14만 4천 명은 \\\\\\\\\\\\\\\"어린양의 인도를 받아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말씀을 생명과 신앙의 도리로 삼고 평생을 이를 받들고 추구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이는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에 성립된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진리에 이르는 지식을 좇는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배우며, 듣고 연구하는 일을 일상화(日常化)시키는 가운데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을 하나님을 알아 가는 지혜와 지식의 증대(增大)에서 찾습니다. 성경공부의 일상화가 가히 구원론적 근거로 작용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찾아집니다. 성경적 신앙의 정절이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순종하는 일에 자신의 구원받은 새 생명의 능력을 전심으로 발휘해 나가는 삶의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때 지식은 행위를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지식에서 행위 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무지한 신앙으로 맹목적인 신앙, 곧 맹신이기 쉽상입니다. 그런가 하면 행위 없는 지식만의 신앙은 관념론적인 신앙으로 그치기 쉽상입니다. 어느 쪽이든지간에 양면을 갖추지 못한 신앙은 참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14만 4천 명에게서 보는 신앙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섬김으로써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새 생명으로 소유하게 됨에 따라 그 새 생명의 능력을 힘있게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아 가는 기쁨에 충만할 뿐만 아니라, 그런 자신들의 인생을 주님께서는 당신이 가신 길에 두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는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거듭 밝히신 일입니다. 자기 부인의 삶과 십자가를 지는 삶인데, 이는 주님이 나눠 주신고난의 잔에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세워질 자신의 교회를 위해서 고난의 잔을 마셨으며, 또한 제자들에게 그들이 교회를 위해서 마셔야 할 고난의 잔을 돌려 마시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몸으로 세우신 교회를 섬기는 일을 위한 사명을 수행하는 사랑의 수고로 살게 하십니다. 교회 전체를 보는 시각으로 교회의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어린양의 인도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의 총합인 14만 4천 명의 신앙을 봅니다. 넷째, 14만 4천 명은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거짓을 찾을 수 없는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14만 4천 명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말하는 진리입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니 도무지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이들이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요 생명의 주가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인데 하나 같이 옳은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수많은 사람이 순종으로 주께 나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 전도 여행을 다닐 때, 아덴에서는 에피큐로스파와 스토아파의 철학자들과 토론이 벌어졌는데 바울이 전하는 말을 단지 \\\\\\\\\\\\\\\"새 교훈\\\\\\\\\\\\\\\" 정도로 인식하는 그들 앞에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을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하여 듣고자 하는 아덴 사람에게 이끌려 아레오바고 광장에 섰을 때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무지를 지적하면서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당당히 전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에서는 폭도로 변한 유대인들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으며, 에베소에서는 여신 아데미를 섬기는 군중들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 바울의 입에서는 거짓말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목숨의 위협을 받은 것은 그가 하는 말에 거짓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와 그 헛된 지혜를 건드리므로 폭도로 변해서입니다. 결코 바울의 말에서는 비난할 근거를 전혀 찾지 못하였습니다. 도무지 그를 해칠수 있는 죄목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말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거짓이 없는, 그래서 흠이 없는 것은 성도의 성품이요 인격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에 이르기까지 장성해 나가야 합니다. 14만 4천 명의 신앙이란 바로 이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일군, 곧 장로, 집사를 세우는 원리들을 말할 때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맡은 자\\\\\\\\\\\\\\\"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3장 9절). 깨끗한 마음을 소유한 자라야 하며, 또한 믿음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섬기며 그분을 증거하는 일을 사명으로 갖고 있는 자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마음과 사명은 성도이면 같이 가져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말에 책임을 갖는 신앙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자들에 의하여서 세워져 갔습니다. 과거 우리 나라가 일제의 압박 속에 있을 때 독립투사들은 입만 열면 나오는 말이 \\\\\\\\\\\\\\\"대한독립\\\\\\\\\\\\\\\"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신 세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에게 죄 사함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변질시켜서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하는 다른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직 순전함으로 복음을 말하는 사람, 그래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거짓이 없는 그 사람은 흠이 없는 자입니다. 성도는 그 입에 복음의 진리를 담고 있지 않은, 그래서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와 함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참된 말을 하여야 합니다. 4. 14만 4천 명의 대합창에서 받는 교훈 14만 4천 명으로 상징되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합창은 모든 세대에서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나타날 수 있는 사단의 박해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보호와 인도 속에 안연히 보존되어 갈 것을 교훈으로 주십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정절을 가지고 어린양이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며,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거짓이 없는 흠 없는 신앙으로 살아간 결과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루살렘 시온산에 우뚝 서 천상에 울려퍼질 대합창을 할 수 있기까지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절대 보호와 인도 속에 그 생명이 보존되어 갑니다. 그런 그는 평화를 경험적으로 누려갑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양단간(兩端間)에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결정하는 세계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14만 4천 명이 보인 신앙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자기들이 속해 있는 편을 잘 알고 있기에 거기에 걸맞는 행동을 해 나갔습니다. 여기에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임이 실증적으로 표명(表明)되고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아멘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대합창/계14:1-5/어린이,학생설교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대합창 계14:1-5 어린이,학생설교 1. 사도 요한이 받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지 육, 칠십 년이 지난 때에 사도로 세우신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요한은 주님의 복음을 인하여 밧모라고 하는 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9절에 보면 그는 그가 주님의 계시를 받아 편지를 보내고자 하는 교회들과 함께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겪었음을 말합니다. 그 역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께 인내를 배웠으며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그는 지금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어 있는 몸이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해진 조직적인 박해를 받아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얽매인 처지에 있었지만, 그때가 그에게서는 그가 섬기는 주님과 더불어서 신령한 교통의 관계 속에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때는 주일이었는데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그의 뒤에서 마치 나팔 소리와도 같은 큰 음성이 갑자기 들려왔는데 그가 이제부터 보는 것을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였습니다(계 1장 10-11절). 하나님께서는 곧 일어날 일을 주의 종들에게 알리려고 그리스도께 계시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종인 요한에게 보내 그 뜻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사도 요한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일에 관한 계시의 말씀을, 곧 그가 듣고 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예언의 말씀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어 교회에서 낭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이 실현될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2. 예루살렘 시온산에서 울려퍼지는 14만 4천 명의 대합창 우리가 보고자 하는 요한계시록 14장 1-5절은 \\\\\\\\\\\\\\\"14만 4천인의 대합창\\\\\\\\\\\\\\\"에 대한 기록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아주 신비스런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 중에 한 장면입니다. 요한은 예루살렘 시온산 꼭대기에 서 계시는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 곁에는 이마에 어린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새긴 사람들이 14만 4천 명이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그러니까 인침을 받은 자들의 수효입니다(계 7장 3-4절). 또한 이 수효는 셀 수 없이 많은 큰 무리를 뜻합니다(계 7장 9절). 이들은 한결같이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흰옷을 입고 있는 것은 자기들에게 가해진 심한 박해 속에서도 어린양의 피로 자기 옷을 빨아 희게 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계 7장 9절, 13-14절). 본문 3절에서는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 4절에서는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의 수효라고 14만 4천이 뜻하고 있는 의미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렇게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성도들의 총화(總和)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수효가 14만 4천 명입니다. 이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구속의 피의 은혜를 입음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오게 되었고, 성전에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계 7장 15절). 이 14만 4천 명은 천상의 보편적 교회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에 의해서 하늘에서는 웅장하고도 참으로 아름다운 대합창이 울려 퍼졌습니다. 마치 폭포 소리 같기도 하고 아주 굉장한 천둥 소리 같기도 한 이 대합창은 거문고에 맞추어 불려졌습니다. 이 대합창은 하나님의 보좌와 4생물(천사장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참조 에스겔 10장)과 24장로들이 있는 앞에서 불려졌습니다. 천상의 오케스트라를 사도 요한은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시온산에서 울려퍼진 14만 4천 명의 대합창은 바로 우리가 조만간에 그 일원의 한 사람으로서 부를 노래입니다. 사도 요한이 받은 예언의 말씀은 그가 말한 대로 곧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도 그렇거니와 모든 세대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습니다. 소망 가운데서 \\\\\\\\\\\\\\\"그 날\\\\\\\\\\\\\\\"의 가까움을 보고 있습니다. 심한 박해가 있을지라도 오직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 경배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세상은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결코 세상이 그들의 믿음을 이기지 못합니다(히 11장 38절). 3. 14만 4천 명에게서 보는 신앙 사도 요한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루살렘 시온산에 있는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대합창을 언급하면서 이 천상의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있는 14만 4천 명의 신앙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貞節)이 있는 자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요,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요,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이들이 주님께 대해 어떤 신앙 속에서 살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14만 4천 명은 \\\\\\\\\\\\\\\"땅 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입니다. 이것은 14만 4천 명이 지닌 신앙의 특징들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나 3절과 관련하여 볼 때 문맥상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옳겠습니다. 3절에서 14만 4천 명에 대하여 말할 때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이라고 그 상징적인 의미를 규정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4절에서 그들이 지닌 신앙의 특징을 설명해 나가면서 다시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14만 4천 명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드리는 첫 열매로서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이라고 한 번역(현대어 성경)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14만 4천 명을 \\\\\\\\\\\\\\\"처음 익은 열매\\\\\\\\\\\\\\\"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용어는 추수에서 가장 먼저 거둔 곡식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용어가 본문에서는 \\\\\\\\\\\\\\\"사람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자\\\\\\\\\\\\\\\"를 뜻하는데 사용되어서 \\\\\\\\\\\\\\\"구속함을 받은 자의 총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처음 익은 열매로 불리운 것은 그 첫 열매가 주님께 거룩하며 그의 특별한 소유로 주님께 속했을 때 그에 따른 모든 열매 또한 그 첫 열매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장 18절)고 말한 것도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이 문장을 현대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가운데 최초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새 생명으로 14만 4천 명의 무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대합창의 기쁨을 결코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공집회에 의한 예배에서 예표적으로 경험해 가고 있는 것인데, 구속함을 얻은 자로서가 아닌 단지 여기에 휩쓸려 들어온 자들, 그들은 기독교가 좋아 보여서 들어온 자들이든지, 아니면 기독교에 들어오면 이런 저런 신비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고 복을 받을 것이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등의 지극히 자의적 생각과 그 판단으로 들어온 자들이든지간에 그러한 인위적인 신앙으로서는 결코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대합창의 기쁨과 동질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같은 흉내를 낼지라도 결코 그 기쁨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14만 4천 명의 한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14만 4천 명이 부르는 노래는 결코 될 수가 없는 법입니다. 3절에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저희가 보좌와 네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만 4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둘째, 14만 4천 명은\\\\\\\\\\\\\\\"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정절이 있는 자들\\\\\\\\\\\\\\\"입니다. 정절(貞節)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여자의 곧은 절개\\\\\\\\\\\\\\\", \\\\\\\\\\\\\\\"굳은 마음\\\\\\\\\\\\\\\", \\\\\\\\\\\\\\\"변하지 않는 절개\\\\\\\\\\\\\\\"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절개(節槪)란 \\\\\\\\\\\\\\\"옳은 일을 지키어 뜻을 굽히지 않는 굳은 마음이나 태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정절의 의미를 특별히 여자를 호명(呼名)해서 설명한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만으로 제한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해 정절을 가지고 있어야 할 교회의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 모두가 정절의 문제에 대해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은 여자와 남자 모두가 정절의 문제에서 예외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남자와 더불어 음행하는 것은 정절을 잃어버리는 거이듯이, 또한 총각이 여자와 더불어 음행하는 것도 정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정절은 남녀 모두의 문제입니다. 더구나 남자와 여자는 가정을 이룸으로써 부부가 되어 한 몸의 성격을 갖고 상호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로 맺어졌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여자의 곧은 절개를 14만 4천 명의 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루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우리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히지 않는 이 정절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구약적 배경과 관련하여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약에서는 정절을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음행, 곧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을 향한 우상 숭배적 신앙을 염두에 두고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호 1장 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을 오직 신앙하는 것을 버리고 이방의 우상들을 자신들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삼아 섬겼습니다. 그러니까 탐욕에 이끌려서 하나님에게서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영적 음행에 빠져듦으로 해서 하나님에 대한 정절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섬김의 도리를 율법의 내용을 통해 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함으로 해서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 다루듯이 하게 되었는데, 마치 이방인이 자신들의 우상을 섬기듯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당장의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이익의 재료로 삼아 숭배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신앙적 타락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호 4장 6절)고 말한 것이나,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장 3절)고 외친 말씀이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 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장 6절)고 외친 말씀의 배경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결코 자기들의 만족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탐욕으로 섬기는, 그러니까 사실은 우상을 섬기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음행의 실체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그들이 원한다고 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다가가지를 않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는 하나님보다 이방신이 더 위대하고 커 보입니다. 그래서 이방신에게서 자손의 번성과 재물의 풍요를 기대했습니다.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생활 속에 깊이 파고 들어온 것은 그래서 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정절을 헌신짝 버리듯 나 몰라라 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나 우상에 불과한 이방신에게로 달라붙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또 다른 영적 음행의 실체였습니다. 이때까지 때로는 저들을 자식으로, 때로는 아내로 때로는 백성으로 여겨서 온갖 사랑과 관심과 애정을 쏟으면서 참고 인도해 오셨던 하나님의 헌신적 손길을 자신들의 일신상의 편의와 안일과 필요를 위해 한 순간에 외면하기를 거듭 역사 속에서 반복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일컬어 영적 음행 내지는 간음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사도 요한이 주의 계시를 받아 말하는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란 온갖 세속주의와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세속성(世俗性)의 정체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生)의 자랑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요일 1장 16절). 이는 옛 사람의 속성인 육신적 본능의 욕구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계시록 17장에서 사도 요한은 여자가 상징하는 바의 정체성을 음녀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약에 기록된 바벨론의 사상에서 그 사단적 적대세력의 이미지를 차용(借用)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온갖 배교와 우상숭배와 불신앙으로 대변되는 세상을 가리키며 동시에 갖가지 사단적 세력의 총화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를 음녀란 표현을 써 상징적으로 설명하면서 음녀가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보석과 진주로 꾸몄으며, 손에 가진 금 잔에는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음녀는 또한 자기가 죽인 예수의 증인들이 흘린 피를 즐겨 마시고 취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세상을 이끌어 가는 온갖 현란하고도 매력적인 세속적 사단세력의 총체(總體)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런 사람들 속에서 목숨을 내어놓으면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킵니다. 신앙인은 그런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그들과 같이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여 거기에 자신의 삶을 드려가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합니다. 로마서 기자는 영적 예배자의 삶을 언급하는 가운데 \\\\\\\\\\\\\\\"이 세대를 본받지 말 것\\\\\\\\\\\\\\\"을 우선적으로 요구합니다(롬12:2). 여기서 세대가 의미하는 바는 사단적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대의 시대적 사상체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 시대의 사상적 흐름의 이면을 정확히 해명해서 신앙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선별적으로 경영해 나가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가 곧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행동으로 해석됩니다. 이것이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정절 있는 자\\\\\\\\\\\\\\\"가 가리키는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땅히 섬길 하나님을 성경의 구속사적 계시관에 입각해서 바르게 섬기지 못한다면 이 또한 자의적 숭배신앙에로 정죄 당해 하나님 앞에 불의와 불법으로 판정 받게 되기 십상입니다(롬 10장 2-3절, 마 7장 21-23절).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시대의 기독교 신앙의 현실과 교회적 실상을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에 기초해 면밀히 진단하고 검증해야 합니다. 그 내용적 실체가 자기중심적인지 아니면 하나님 중심적인지, 또는 현세 지향적인지 아니면 천상 지향적인지의 여부를 진지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겉보기에 기독교적인 것으로 아름답고 화려하고 거룩하게 치장돼 있다 할지라도, 만에 하나 내적 본질이 성경이 말씀하는 바에 바르게 접촉돼 있지 않다면 하나님과는 관계도 분깃도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회당을 성전화 개념을 가지고 가능하면 웅장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나, 그 속에서 온갖 종교적 열심을 내세워 세속주의와 기복주의, 그리고 상급주의와 지성감천주의, 은사주의를 좇게 하는 신앙은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을 복음을 좇는 참된 믿음에서 떠나 배도와 배교케 하는 가장 좋은 시험의 전략으로 삼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횡행했던 영적 음행이 기독교란 포장으로, 가면으로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신앙생활은 현세적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한 종교적 활동이 아닙니다. 역사를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전폭적으로 신뢰해서 의존하는 영원을 향한 생명적 활동 그 자체를 목적 삼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를 보십시오(계 2-3장). 그리고 주께서 승천하신지 겨우 6, 70 년이 경과되었을 뿐인데, 그리고 주님의 사도된 제자들이 아직도 살아 있던 시대였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죽은 교회와 방불(彷彿)한 교회가 존재했으며, 더러는 토해 내치고 싶을 정도의 빈 껍데기만 남은 교회가, 심지어는 도무지 교회라고 할 수 없는 사단의 공회마저 버젓이 교회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한편 지금은 주께서 부활승천 하신 후 거의 2천 여년이 이른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아니 짧게 잡아서 종교개혁 후로는 500 여년 가까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실상이 성경적 진리를 얼마나 진실되게 유지 보존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넉넉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불과 6, 70년이 지난 당시에도 신앙인에게서 주께 대한 신앙의 정절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 10배, 30배가 지난 오늘날에서는 정말 믿음 있는 자를 볼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가 없었다면 단 한 사람의 의인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한 시대의 절대 다수가 소유하고 누리고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서 항상 진리로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성경역사가 증거하는 바이며 동시에 교회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적은 무리나 작은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고 좋은 것이며 진리를 대변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성경적 기준(基準)과 원리입니다. 성경은 기독교 신앙과 삶의 절대적인 가치와 표준을 제공하는 불멸의 잣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로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 성경적 신앙은 그 실체를 바르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정절은 다름 아닌 성경적 기준과 원리에 부합되는 신앙적 삶을 가리킵니다. 이는 구속사에 접촉되어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전 구속사적 계시관에 접촉돼 경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생명적 활동 말입니다. 이 시대에 오직 하나님만을 우직(愚直)하게 섬기는 신앙의 정절자(貞節者)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켜나가지 못할 때, 그래서 14만 4천 명의 수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는 사람들은 14만 4천 명과 상반되는 짐승에게 속한 것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666표를 날인(捺印) 받게 될 것을 성경은 증거합니다(계13장). 셋째, 14만 4천 명은 \\\\\\\\\\\\\\\"어린양의 인도를 받아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말씀을 생명과 신앙의 도리로 삼고 평생을 이를 받들고 추구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이는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에 성립된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진리에 이르는 지식을 좇는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배우며, 듣고 연구하는 일을 일상화(日常化)시키는 가운데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을 하나님을 알아 가는 지혜와 지식의 증대(增大)에서 찾습니다. 성경공부의 일상화가 가히 구원론적 근거로 작용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찾아집니다. 성경적 신앙의 정절이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순종하는 일에 자신의 구원받은 새 생명의 능력을 전심으로 발휘해 나가는 삶의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때 지식은 행위를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지식에서 행위 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무지한 신앙으로 맹목적인 신앙, 곧 맹신이기 쉽상입니다. 그런가 하면 행위 없는 지식만의 신앙은 관념론적인 신앙으로 그치기 쉽상입니다. 어느 쪽이든지간에 양면을 갖추지 못한 신앙은 참 신앙에 이를 수 없습니다. 14만 4천 명에게서 보는 신앙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섬김으로써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새 생명으로 소유하게 됨에 따라 그 새 생명의 능력을 힘있게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아 가는 기쁨에 충만할 뿐만 아니라, 그런 자신들의 인생을 주님께서는 당신이 가신 길에 두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는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거듭 밝히신 일입니다. 자기 부인의 삶과 십자가를 지는 삶인데, 이는 주님이 나눠 주신고난의 잔에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세워질 자신의 교회를 위해서 고난의 잔을 마셨으며, 또한 제자들에게 그들이 교회를 위해서 마셔야 할 고난의 잔을 돌려 마시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몸으로 세우신 교회를 섬기는 일을 위한 사명을 수행하는 사랑의 수고로 살게 하십니다. 교회 전체를 보는 시각으로 교회의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어린양의 인도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의 총합인 14만 4천 명의 신앙을 봅니다. 넷째, 14만 4천 명은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거짓을 찾을 수 없는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14만 4천 명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말하는 진리입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니 도무지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이들이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요 생명의 주가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인데 하나 같이 옳은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수많은 사람이 순종으로 주께 나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 전도 여행을 다닐 때, 아덴에서는 에피큐로스파와 스토아파의 철학자들과 토론이 벌어졌는데 바울이 전하는 말을 단지 \\\\\\\\\\\\\\\"새 교훈\\\\\\\\\\\\\\\" 정도로 인식하는 그들 앞에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을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하여 듣고자 하는 아덴 사람에게 이끌려 아레오바고 광장에 섰을 때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무지를 지적하면서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당당히 전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에서는 폭도로 변한 유대인들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으며, 에베소에서는 여신 아데미를 섬기는 군중들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 바울의 입에서는 거짓말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목숨의 위협을 받은 것은 그가 하는 말에 거짓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와 그 헛된 지혜를 건드리므로 폭도로 변해서입니다. 결코 바울의 말에서는 비난할 근거를 전혀 찾지 못하였습니다. 도무지 그를 해칠수 있는 죄목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말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거짓이 없는, 그래서 흠이 없는 것은 성도의 성품이요 인격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에 이르기까지 장성해 나가야 합니다. 14만 4천 명의 신앙이란 바로 이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일군, 곧 장로, 집사를 세우는 원리들을 말할 때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맡은 자\\\\\\\\\\\\\\\"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딤전 3장 9절). 깨끗한 마음을 소유한 자라야 하며, 또한 믿음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섬기며 그분을 증거하는 일을 사명으로 갖고 있는 자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마음과 사명은 성도이면 같이 가져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말에 책임을 갖는 신앙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자들에 의하여서 세워져 갔습니다. 과거 우리 나라가 일제의 압박 속에 있을 때 독립투사들은 입만 열면 나오는 말이 \\\\\\\\\\\\\\\"대한독립\\\\\\\\\\\\\\\"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신 세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에게 죄 사함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변질시켜서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하는 다른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직 순전함으로 복음을 말하는 사람, 그래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거짓이 없는 그 사람은 흠이 없는 자입니다. 성도는 그 입에 복음의 진리를 담고 있지 않은, 그래서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와 함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참된 말을 하여야 합니다. 4. 14만 4천 명의 대합창에서 받는 교훈 14만 4천 명으로 상징되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합창은 모든 세대에서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나타날 수 있는 사단의 박해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보호와 인도 속에 안연히 보존되어 갈 것을 교훈으로 주십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정절을 가지고 어린양이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며, 그 입에서 나오는 말에 거짓이 없는 흠 없는 신앙으로 살아간 결과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루살렘 시온산에 우뚝 서 천상에 울려퍼질 대합창을 할 수 있기까지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절대 보호와 인도 속에 그 생명이 보존되어 갑니다. 그런 그는 평화를 경험적으로 누려갑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양단간(兩端間)에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결정하는 세계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14만 4천 명이 보인 신앙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자기들이 속해 있는 편을 잘 알고 있기에 거기에 걸맞는 행동을 해 나갔습니다. 여기에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임이 실증적으로 표명(表明)되고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아멘
153(일백쉰세) 마리의 물고기/ 요21:3-11/ 채진영/ 2001-07-07
153(일백쉰세) 마리의 물고기 요21:3-11 여기 볼펜 한 자루가 있어요 이 볼펜의 이름은 \"모나미 153 0.7\" 이라고 써있어요 나는 이 볼펜을 20년 전부터 사용해왔어요 이볼펜은 비싸지도 않고 글씨도 아주편하게 잘써져요 전도사님이 갑자기 볼펜 장수가 된것같죠 ? 절대 그런건 아니예요 하지만 이 볼펜에는 담겨져 있는 믿음의 좋은 이야기가 있기에 여러분들에게 들려줄려고 이 볼펜을 보여주는 거예요 어떤 아저씨가 여러분들처럼 어렸을 때는 교회를 잘 다녔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일하느라고 빠쁘다는 핑계로 교회를 나가지 않았대요 그리고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 사장님소리들으면서 아주아주 뽐을 내며 잘 살았는데 갑자기 회사가 어려워 져서 쫄딱 망했다지 뭐예요 이 아저씨는 정말 죽고싶은 생각만 나더래요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마지막으로 찾아 뵙고 죽으려고 기차를 타고 갔대요 그런데 시골 동네에 들어서는데 교회 종소리가 땡그랑 , 땡그랑 ,하고 은은한소리로 들려오더래요 마침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였드래요 그래서 이 아저씨는 집으로 먼저 가지 않고 어렸을 때 즐겁게 다니던 교회로 먼저 달려갔대요 그리고는 마루로 된 교회 바닦에 엎드려 울면서 울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대요 그런데 실컷 울고나서 고개를 들고보니 자기가 흘린 눈물자국이 153이란 숫자로 나타나 있더라는 거예요 너무너무 신기해서 그 즉시 목사님을 찾아가서 그이야기를 했드니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1장을 목사님께서 펴시더니 읽어보라고 하시드래요 이 아저씨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을 읽고 새힘을 얻어 서울로 돌아와서 망해버린 회사를 다시 세우고 첫 번째 물건을 만든 것이 이 볼펜 이였대요 그래서 이 볼펜에 물고기 153마리를 적어넣은 것이 모나미153이란 이름이 되었다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그후부터는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사업도 점점 잘되어서 지금의 모나미 회사가되었다는 이야기예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이 어떤 내용이길래 그랬을까 궁금하죠?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오셔 갈릴리로 가 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예수님도 그곳으로 가시겠다고 하시고요 그래서 제자들은 갈릴리동네로 가있었어요 그런데 오신다는 예수님이 몇일이 지나도 안오시는거였어요 성질 급한 베드로가 말했어요 애들아!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갈란다 나는 원래 어부였으니까 물고기 잡는데는 선수아니냐 물고기만 잡아다가 팔아도 난 넉넉하게 살수가있어 어어.. 이소리를 듣고있던 다른제자 6명도 함께 가겠다고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따라나서는거였어요 베드로는 신이 났어요 혼자라도 갈려고 했는데 친구들이 함께 가겠다고 하니말이예요 베드로는 옛날에 사용하던 그물을 챙기고 고깃배를 고치고 저녁밥을 든든히 먹고 깜깜한 밤중에 철석철썩 파도치는 바닷가로 나갔어요 갈릴리 바다는 밤에 물고기가 더 많이 잡히는 특징이 있는 바다거든요 베드로가 예수님 만나기전에 날마다 하던일이라서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이예요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또 던지고 해도 고기는 한 마리도 잡히지가 않았어요 베드로와 함께같던 제자들은 짜증이 났어요 베드로만 따라오면 고기를 많이 잡을수 있을거라고 굴뚝같이 믿었는데 그렇치가 않으닌까요 새벽이 되니 제자들은 온몸에 힘이 다빠져버리고 배는고프고 온몸은 추위에 덜덜덜덜 떨려왔어요 날이 밝아오면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잘알고 있는 베드로는 친구들보고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말하고는 배를 돌려 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얘들아 ! 고기 많이 잡았니 ?\" 하고요 제자들이 \"아니요 한 마리도 없습니다\" 라고 하니까 그러면 그물을 다시한번 던져보라는 거예요 여러분 ! 그사람이 그물을 오른쪽에 던지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왼쪽에 던지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그물을 배 앞쪽으로 던지라고 했을까요 ? 맞았어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했어요 제자들은 그럼 마지막으로 한번 저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하고는 7명이 힘을 합하여 힘껏 그물을 던졌어요 그런데 이게 왠일이예요 세상에.......... 고기가 갑자기 어디서 몰려왔는지 그물이 올려지지가 않아요 베드로와 친구들이 너무좋아서 자기들에게 말한 사람을 두리번 거리면서 찾았어요 그런데 또 이게 왠일! 그사람은 자기들의 선생님 예수님이셨어요 성질급한 베드로는 배가 육지에 도착할때까지 기다릴수가 없었어요 그냥 물로 뛰어내려서 헤염쳐 예수님께 달려갔어요 그리고 고기가 가득찬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렸어요 고기가 너무많고 신기해서 제자들은 고기의 숫자를 세어보았드니 153마리였어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한마리 잡지 못하고 고생하느라고 지치고 배고픈 것을 미리 아셨는지 숯불을 피워놓고 떡과 물고기를 굽고 계셨어요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고기도 이리가지고 와서 구워 먹자고 하셨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식사를 하셨어요 예수님 없이 고기를 잡으려던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생만하고 힘만들고 고기한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까 한번 던진 그물에 고기가 153마리나 올라왔어요 여러분들도 혼자공부하면 많은 시간을 해도 힘만들고 머리에 남는 것이 없어요 하지만 예수님이 함께 계셔서 지혜를 주시고 건강을 주시며 기쁨을 주시면 적은 시간을 공부해도 머릿속에 많이많이 남게되요 사업에 실패해서 죽을려고 했던 모나미회사 사장님도 이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성공할수 있었던거예요 여러분 ! 오늘 배운 말씀 잊지마세요.
1회용 인생/ 수3:1-13/ 2016-04-17
1회용 인생 수3:1-13 우리 인간에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번 더 살 수 있는 써비스 볼 (Ball)이 허용만 된다면 모두 다 멋진 제2의 생을 살아 천국은 맡아 놓고 갈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4절에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했다\\\"고 했지요. 그 래서 저는 [1회용 인생]이라고 제목을 정하고 은헤를 나누고자 합니 다. 우리 인생은 무전여행자와도 같고, 초행길의 등산가와도 같고, 대낮 의 장님과도 같다고 하겠지요.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광야, 사막길을 걸어갔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이 아니고 는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8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바로 [믿음]을 따라 사는 신자들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우리는 \\\"1회용 반창고\\\"라고 했고 또 \\\"하루살이\\\"라고 했는데, 한번도 가보지 않은 이 길을, 평생에 처음 가보는 이 1회용 인생길을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잘 갈 수 있을까? 그 9冑燒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하면 .... 의 신앙 4절에 보면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라.\\\"이전에 너희가 이 길 을 지나보지 않았 90 鳴 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나요? 그것 은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그 뒤를 좇으라\\\' 그리하면 평안히 가리 라\\\'고 했습니다. 이 \\\'그리하면\\\'의 신앙은 (1) 하나님 제일주의 입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라 했으니 하나님 외에는 따르지 말라는 것입 니다. 2장 11절에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 라\\\"고 했습니다.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는 말이지요. 길을 잘 알고 천 지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만 따르라는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22장 19절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쌓음 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 패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3장 16절에는 \\\"만일 너희가 다른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의 명을 어기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여 너희에게 주실 아름다 운 땅에서 속히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우리와 같이 계시 는 하나님이십니다. 물질이나 인간이나 권력이나 권세 명예나 그 무엇 도 하나님과의 대등한 자리에 둘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잡 신도 같이 대등하게 둘 수 없다고 했지요.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여호 수아 24장 14-18절, 25-26절에서 참 신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기라고 외쳤습니다.혹시 너희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할찌라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외쳤지요. 그렇습니 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참신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참 신이십니다 (사 45:22, 6,14,46:9,49:7 등) 비록 우리 인간이 한번도 안 가본 곳 을 갈찌라도 그곳을 잘 알고 계시는 만유주 우리 하나님만 따라가면 틀림없이 그 길은 빛이요, 삶의 길임을 믿읍시다. (2) 말씀 제일주의 신앙 본문 3절에 언약궤 메는 것을 보면 \\\'너희 곳을 떠나\\\' \\\'언약궤 뒤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희 곳을 떠나라\\\'고 했으니 완전히 나의 생각, 나의 사상 은 팽개치고 전능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만을 따르라는 것입 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산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100% 그대로 듣지 않고 삭 감시켜 듣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 할 때 삭감시켜 행하는 자도 있음을 봅니다. 말하자면 자기 기분내키 는 대로 들을 것도 듣고 행할 것은 행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행하기 힘든 것은 포기하는 자유주의 신앙입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대로 성경 말씀을 뒤바꾸어 놓고 행하는 비진리의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서 이단 이니, 사이비 종파가 생깁니다. 이것은 곧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 라\\\"다른 복음\\\"\\\"다른 진리\\\" \\\"다른 예수\\\"입니다 (고후 11:4). 이것은 곧 자기 마음대로이니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는 교만을 범 하게 됨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이요, 자기 위주의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생활의 척도요 나침판이요 등대와도 같은데, 이 말씀이 없다면 한번도 안 가본 길을 어찌 가겠습니까? 우주 천지의 질서를 말하고 있는 그 말씀을 이정표로 삼아 따라가면 한번도 안 가 본 길이지만 무슨 장애물이 닥쳐도 목적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예수 따라가면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님의 말씀을 붙잡은 자는 환난이 올 때 참 하나님만 붙잡고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나타내고 하나님 이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칼빈 선생님은 \\\"수고는 내가 하고 영광은 하나님께\\\"라는 좋은 교훈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영적 힘이 없고 길도 없고 목적도 상실하게 됩니다. 2. 성결케 살라고 했다 (5절). 평생 처음 단1회 뿐인 이 인생, 깨끗하게 살다가 깨끗하게 하나님 앞 에 서야 되겠지요. 만약 우리가 평생에 처음 걷는 이 길에 거룩되이 성결케 살지 못하고 죄투성이로 살아간다면 이 길 다 간 후에는 쓴 열 매만 거두게 될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납니다 \\\" 거짓과 사기.도둑을 심으면 무엇을 거두겠습니까?(갈6:7) 우리가 심은 씨는 우리가 열매를 거두어 야 하지요. 내가 성결케 사는 것이 곧 행복이요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나의 무기입니다. 내가 성결함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도의 견인 은 주 앞에 설 때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럽히지 말고 성결의 씨를 심읍시다. 30배, 60배, 100배, 1,00배 열매를 거둡시다. 3. 하나님 영광 위에 바치라고 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고 [하나님을 높이며][영원히 기 념키 위해] 기념비를 세우(수4:5-7)는 멋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 다. 오늘날 예수님 때문에 사실 자기 영광 나타나고 이름 날리는 사람 많 습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헤메와 쓰쓰라는 이름이 주어질지라도 그것 을 하나님께 돌려야 함이 마땅한데, 요즈음은 그런 사람이 없음을 안 타까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 의 이름을 높일까가 문제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배를 채우고, 내 생각 내 뜻을 관찰시켜 볼까하는 주의는 곧 하나님의 지위를 모욕함이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도적질하는 악덕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곧 하 나님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이 높혀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높임이 곧 내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영어에 \\\"이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under + stand = understand 곧 \\\"밑에 선다\\\"란 뜻이 있습니다.내가 밑에 서는 것는, 곧 남을 높혀줌은 내가 낮아짐입니다.내가 땅바닥까지 낮아질 때 우리 하 나님은 영광을 최고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를 살며, 한 번밖에 안 걷는 이 길 마음대로 살면 얼마나 마음대로 살겠습니까?금년 일년은 하나님 제 일주의, 말씀제일주의, 성결 제일주의, 하나님의 영광 제일주의로 살 아갑시다. 내 평생 1회용 인생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연말에 금년 한해의 결산을 할 때에 부끄러움 없는 인간이 되어 봅시다.
1회용 인생/ 수3:1-13/ 2016-04-24
1회용 인생 수3:1-13 우리 인간에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번 더 살 수 있는 써비스 볼 (Ball)이 허용만 된다면 모두 다 멋진 제2의 생을 살아 천국은 맡아 놓고 갈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4절에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했다\\\"고 했지요. 그 래서 저는 [1회용 인생]이라고 제목을 정하고 은헤를 나누고자 합니 다. 우리 인생은 무전여행자와도 같고, 초행길의 등산가와도 같고, 대낮 의 장님과도 같다고 하겠지요.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광야, 사막길을 걸어갔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이 아니고 는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바로 [믿음]을 따라 사는 신자들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어떤이는 우리 인생을 \\\"1회용 반창고\\\"라고 했고 또 \\\"하루살이\\\"라고 했는데, 한번도 가보지 않은 이 길을, 평생에 처음 가보는 이 1회용 인생길을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잘 갈 수 있을까? 그 비결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하면 .... 의 신앙 4절에 보면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라.\\\"이전에 너희가 이 길 을 지나보지 않았다고 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나요? 그것 은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그 뒤를 좇으라\\\' 그리하면 평안히 가리 라\\\'고 했습니다. 이 \\\'그리하면\\\'의 신앙은 (1) 하나님 제일주의 입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라 했으니 하나님 외에는 따르지 말라는 것입 니다. 2장 11절에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 라\\\"고 했습니다.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는 말이지요. 길을 잘 알고 천 지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만 따르라는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22장 19절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쌓음 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 패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3장 16절에는 \\\"만일 너희가 다른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의 명을 어기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여 너희에게 주실 아름다 운 땅에서 속히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우리와 같이 계시 는 하나님이십니다. 물질이나 인간이나 권력이나 권세 명예나 그 무엇 도 하나님과의 대등한 자리에 둘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잡 신도 같이 대등하게 둘 수 없다고 했지요.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여호 수아 24장 14-18절, 25-26절에서 참 신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기라고 외쳤습니다.혹시 너희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할찌라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외쳤지요. 그렇습니 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참신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참 신이십니다 (사 45:22, 6,14,46:9,49:7 등) 비록 우리 인간이 한번도 안 가본 곳 을 갈찌라도 그곳을 잘 알고 계시는 만유주 우리 하나님만 따라가면 틀림없이 그 길은 빛이요, 삶의 길임을 믿읍시다. (2) 말씀 제일주의 신앙 본문 3절에 언약궤 메는 것을 보면 \\\'너희 곳을 떠나\\\' \\\'언약궤 뒤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희 곳을 떠나라\\\'고 했으니 완전히 나의 생각, 나의 사상 은 팽개치고 전능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만을 따르라는 것입 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산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100% 그대로 듣지 않고 삭 감시켜 듣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 할 때 삭감시켜 행하는 자도 있음을 봅니다. 말하자면 자기 기분내키 는 대로 들을 것도 듣고 행할 것은 행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행하기 힘든 것은 포기하는 자유주의 신앙입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대로 성경 말씀을 뒤바꾸어 놓고 행하는 비진리의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서 이단 이니, 사이비 종파가 생깁니다. 이것은 곧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 라\\\"다른 복음\\\"\\\"다른 진리\\\" \\\"다른 예수\\\"입니다 (고후 11:4). 이것은 곧 자기 마음대로이니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는 교만을 범 하게 됨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이요, 자기 위주의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생활의 척도요 나침판이요 등대와도 같은데, 이 말씀이 없다면 한번도 안 가본 길을 어찌 가겠습니까? 우주 천지의 질서를 말하고 있는 그 말씀을 이정표로 삼아 따라가면 한번도 안 가 본 길이지만 무슨 장애물이 닥쳐도 목적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예수 따라가면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님의 말씀을 붙잡은 자는 환난이 올 때 참 하나님만 붙잡고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나타내고 하나님 이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칼빈 선생님은 \\\"수고는 내가 하고 영광은 하나님께\\\"라는 좋은 교훈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영적 힘이 없고 길도 없고 목적도 상실하게 됩니다. 2. 성결케 살라고 했다 (5절). 평생 처음 단1회 뿐인 이 인생, 깨끗하게 살다가 깨끗하게 하나님 앞 에 서야 되겠지요. 만약 우리가 평생에 처음 걷는 이 길에 거룩되이 성결케 살지 못하고 죄투성이로 살아간다면 이 길 다 간 후에는 쓴 열 매만 거두게 될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납니다 \\\" 거짓과 사기.도둑을 심으면 무엇을 거두겠습니까?(갈6:7) 우리가 심은 씨는 우리가 열매를 거두어 야 하지요. 내가 성결케 사는 것이 곧 행복이요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나의 무기입니다. 내가 성결함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도의 견인 은 주 앞에 설 때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럽히지 말고 성결의 씨를 심읍시다. 30배, 60배, 100배, 1,00배 열매를 거둡시다. 3. 하나님 영광 위에 바치라고 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고 [하나님을 높이며][영원히 기 념키 위해] 기념비를 세우(수4:5-7)는 멋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 다. 오늘날 예수님 때문에 사실 자기 영광 나타나고 이름 날리는 사람 많 습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헤메와 쓰쓰라는 이름이 주어질지라도 그것 을 하나님께 돌려야 함이 마땅한데, 요즈음은 그런 사람이 없음을 안 타까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 의 이름을 높일까가 문제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배를 채우고, 내 생각 내 뜻을 관찰시켜 볼까하는 주의는 곧 하나님의 지위를 모욕함이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도적질하는 악덕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곧 하 나님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이 높혀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높임이 곧 내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영어에 \\\"이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under + stand = understand 곧 \\\"밑에 선다\\\"란 뜻이 있습니다.내가 밑에 서는 것는, 곧 남을 높혀줌은 내가 낮아짐입니다.내가 땅바닥까지 낮아질 때 우리 하 나님은 영광을 최고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를 살며, 한 번밖에 안 걷는 이 길 마음대로 살면 얼마나 마음대로 살겠습니까?금년 일년은 하나님 제 일주의, 말씀제일주의, 성결 제일주의, 하나님의 영광 제일주의로 살 아갑시다. 내 평생 1회용 인생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연말에 금년 한해의 결산을 할 때에 부끄러움 없는 인간이 되어 봅시다.
1회용 인생/ 수3:1-13/ 2016-04-24
1회용 인생 수3:1-13 우리 인간에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번 더 살 수 있는 써비스 볼 (Ball)이 허용만 된다면 모두 다 멋진 제2의 생을 살아 천국은 맡아 놓고 갈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4절에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했다\\\"고 했지요. 그 래서 저는 [1회용 인생]이라고 제목을 정하고 은헤를 나누고자 합니 다. 우리 인생은 무전여행자와도 같고, 초행길의 등산가와도 같고, 대낮 의 장님과도 같다고 하겠지요.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광야, 사막길을 걸어갔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이 아니고 는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8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바로 [믿음]을 따라 사는 신자들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어떤이는 우 1회용 반창고\\\"라고 했고 또 \\\"하루살이\\\"라고 했는데, 한번도 가보지 않은 이 길을, 평생에 처음 가보는 이 1회용 인생길을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잘 갈 수 있을까? 그 9冑燒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하면 .... 의 신앙 4절에 보면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라.\\\"이전에 너희가 이 길 을 지나보지 않았 90 鳴 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알 수 있나요? 그것 은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그 뒤를 좇으라\\\' 그리하면 평안히 가리 라\\\'고 했습니다. 이 \\\'그리하면\\\'의 신앙은 (1) 하나님 제일주의 입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라 했으니 하나님 외에는 따르지 말라는 것입 니다. 2장 11절에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 라\\\"고 했습니다.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는 말이지요. 길을 잘 알고 천 지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만 따르라는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22장 19절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쌓음 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 패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3장 16절에는 \\\"만일 너희가 다른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의 명을 어기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여 너희에게 주실 아름다 운 땅에서 속히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우리와 같이 계시 는 하나님이십니다. 물질이나 인간이나 권력이나 권세 명예나 그 무엇 도 하나님과의 대등한 자리에 둘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잡 신도 같이 대등하게 둘 수 없다고 했지요.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여호 수아 24장 14-18절, 25-26절에서 참 신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기라고 외쳤습니다.혹시 너희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할찌라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외쳤지요. 그렇습니 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참신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참 신이십니다 (사 45:22, 6,14,46:9,49:7 등) 비록 우리 인간이 한번도 안 가본 곳 을 갈찌라도 그곳을 잘 알고 계시는 만유주 우리 하나님만 따라가면 틀림없이 그 길은 빛이요, 삶의 길임을 믿읍시다. (2) 말씀 제일주의 신앙 본문 3절에 언약궤 메는 것을 보면 \\\'너희 곳을 떠나\\\' \\\'언약궤 뒤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희 곳을 떠나라\\\'고 했으니 완전히 나의 생각, 나의 사상 은 팽개치고 전능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만을 따르라는 것입 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산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100% 그대로 듣지 않고 삭 감시켜 듣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 할 때 삭감시켜 행하는 자도 있음을 봅니다. 말하자면 자기 기분내키 는 대로 들을 것도 듣고 행할 것은 행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행하기 힘든 것은 포기하는 자유주의 신앙입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대로 성경 말씀을 뒤바꾸어 놓고 행하는 비진리의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서 이단 이니, 사이비 종파가 생깁니다. 이것은 곧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 라\\\"다른 복음\\\"\\\"다른 진리\\\" \\\"다른 예수\\\"입니다 (고후 11:4). 이것은 곧 자기 마음대로이니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는 교만을 범 하게 됨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이요, 자기 위주의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생활의 척도요 나침판이요 등대와도 같은데, 이 말씀이 없다면 한번도 안 가본 길을 어찌 가겠습니까? 우주 천지의 질서를 말하고 있는 그 말씀을 이정표로 삼아 따라가면 한번도 안 가 본 길이지만 무슨 장애물이 닥쳐도 목적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예수 따라가면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님의 말씀을 붙잡은 자는 환난이 올 때 참 하나님만 붙잡고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나타내고 하나님 이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칼빈 선생님은 \\\"수고는 내가 하고 영광은 하나님께\\\"라는 좋은 교훈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영적 힘이 없고 길도 없고 목적도 상실하게 됩니다. 2. 성결케 살라고 했다 (5절). 평생 처음 단1회 뿐인 이 인생, 깨끗하게 살다가 깨끗하게 하나님 앞 에 서야 되겠지요. 만약 우리가 평생에 처음 걷는 이 길에 거룩되이 성결케 살지 못하고 죄투성이로 살아간다면 이 길 다 간 후에는 쓴 열 매만 거두게 될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납니다 \\\" 거짓과 사기.도둑을 심으면 무엇을 거두겠습니까?(갈6:7) 우리가 심은 씨는 우리가 열매를 거두어 야 하지요. 내가 성결케 사는 것이 곧 행복이요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나의 무기입니다. 내가 성결함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도의 견인 은 주 앞에 설 때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럽히지 말고 성결의 씨를 심읍시다. 30배, 60배, 100배, 1,00배 열매를 거둡시다. 3. 하나님 영광 위에 바치라고 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고 [하나님을 높이며][영원히 기 념키 위해] 기념비를 세우(수4:5-7)는 멋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 다. 오늘날 예수님 때문에 사실 자기 영광 나타나고 이름 날리는 사람 많 습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헤메와 쓰쓰라는 이름이 주어질지라도 그것 을 하나님께 돌려야 함이 마땅한데, 요즈음은 그런 사람이 없음을 안 타까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 의 이름을 높일까가 문제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배를 채우고, 내 생각 내 뜻을 관찰시켜 볼까하는 주의는 곧 하나님의 지위를 모욕함이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도적질하는 악덕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곧 하 나님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이 높혀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높임이 곧 내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영어에 \\\"이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under + stand = understand 곧 \\\"밑에 선다\\\"란 뜻이 있습니다.내가 밑에 서는 것는, 곧 남을 높혀줌은 내가 낮아짐입니다.내가 땅바닥까지 낮아질 때 우리 하 나님은 영광을 최고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를 살며, 한 번밖에 안 걷는 이 길 마음대로 살면 얼마나 마음대로 살겠습니까?금년 일년은 하나님 제 일주의, 말씀제일주의, 성결 제일주의, 하나님의 영광 제일주의로 살 아갑시다. 내 평생 1회용 인생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연말에 금년 한해의 결산을 할 때에 부끄러움 없는 인간이 되어 봅시다.
2000마리 돼지 대 1명의 사람/ 막5:1-20/ 이단사이비예방주일설교/ 2003-05-27
2000마리 돼지 대 1명의 사람 막5:1-20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우리를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 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막5:1-20) <목회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오늘을 살게 하시고, 거룩한 주일 기둥교회에서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빛 되고 소금 되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과 성경을 들먹이며 떠들어대는 사이비들 때문에 움츠려드는 요즈음, 하나님, 우리가 있음에, 기둥교회가 있음에, 소망이 있고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더 바르게 더 잘 믿고, 빛 되고 소금 되는 삶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오늘도 주일을 귀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환자, 군대, 객지, 외국에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기둥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기 원하면서도 형편과 사정이 달라 설교 테이프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 복된 가정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가정을 주님이 세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가정을 위하여 비옵나니 -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찬양과 기도, 말씀이 가득한 가정이 되게 하소서. - 감사가 있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날마다 웃음꽃이 피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서로가 지지하고 세워 주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예의를 가르치고 예의가 지켜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사랑할 줄 알고 사랑 받을 줄 아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쉼이 있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부모와 자녀 간에 마음이 통하는 대화가 끊이지 않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이웃에게 열려 있는 가정, 세계로 열려진 가정되게 하소서. - 꿈이 있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며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며 함께 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1.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2.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 해처럼 높으신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3.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여러분 가정과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입술이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즘 며칠 동안 예수 안 믿거나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들에게 아마 시달림을 많이 받으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서울에 어떤 교회, 그 교회의 목사, 사실 그 사람은 자기가 속해 있던 교단에서 이미 몇 년 전에 목사직을 파직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것을 제재하는 제도가 없기 때문에 그 사람 홀로 활동했는데 그 사람으로 인해서 선량한 목회자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평범한 성도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르게 믿어야 하고, 바르게 가르칠 뿐 아니라, 바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1990년 3월 31일자 LA타임지와 교포 신문에 특별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캐나다와 접경하고 있는 미국의 와이오밍 주 북쪽에 있는 몬태나 주에 있는 ‘만민승리교회(Church Universal and Triumphant)’가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Universal’이라는 단어를 ‘만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만민’이라는 이름이 문제인지 그 교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원래 그 교회는 캘리포니아에 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몬태나 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것이 부천에서 인천, 서울로 옮기는 정도의 거리가 아닙니다. LA에서 몬태나 주로 가려면, 자동차로 화장실을 잠깐 들르는 것 외에 자지도 않고 계속해서 이틀을 가야 몬태나 주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부산까지 가는데 4시간 30분이면 간다고 하는데, 얼마나 먼 거리인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사했느냐 하면, 2,500명이 몬태나 주로 이사했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목사는 ‘엘리자벳 클레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이상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계시를 내려 주셨다. 곧 지구에 핵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1990년 3월 말까지 늦어도 4월 23일까지는 핵전쟁이 일어나서 온 지구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와 만민승리교회 교인들은 살려주기로 약속하셨다. 그래서 핵전쟁에도 견딜 만한 땅굴을 파야 되니까 몬태나로 이사 가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만민승리교회 교인들은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도 팔고 아이들의 학교도 자퇴를 시키고 몬태나로 2,500명이 이사를 갔습니다. 미국에서 한 주에 살다가 다른 주로 옮겨간다는 것은 나라를 옮겨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마다 법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래서 운전면허도 다시 취득해야 합니다. 2,500여 명의 성도들이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도 다 퇴학시켜서 몬태나로 이사 갔습니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고신일 목사를 신뢰하십니까? 그러면 몬태나까지는 아니더라도 강원도로 이사 가자고 한다면 집도 내놓고 직장도 다 그만두고 아이들도 자퇴시켜서 가실 분이 계십니까? 웃지 마시고, 그래도 제가 ‘갈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면, 누구라도 손을 들어야 하지 아무도 안 들다니요. 아무튼 2,500명이 직장도 다 내놓고 이사 가서 핵전쟁을 피하기 위한 땅굴을 팠습니다. 큰 땅굴은 756명이, 짧게는 7개월부터 7년까지 견딜 수 있는 땅굴을 팠습니다. 핵전쟁이 나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땅굴을 팠습니다. 물과 음식도 충분히 준비해 놓고, 소·대변을 봐도 정화될 수 있도록 좋은 시설을 갖춰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땅굴에 들어간 그 입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때 저는 미국에 있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지 벌써 8년이 되었는데, 이 사람들이 7년분의 식량만 땅굴에 비치해 두었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후에 나왔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결말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이 핵전쟁으로 지구를 멸망시키려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살려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왜 고신일 목사에게는 알려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멸망하시려고 작정하셨다면, 왜 그 사람들에게만 땅굴을 파라고 하셨을까요? 이 세상에는 이런 이상한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1. 종교의 종류 종교는 크게 4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이방종교: 이방종교는 기독교가 아닌 종교를 말합니다. 힌두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교도 이방종교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사실 유교는 종교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① 신론: 신이 있어야 합니다. ② 인간론: 사람이 어떻게 존재했으며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③ 윤리론: 신과 인간과의 윤리, 인간과 인간과의 윤리에 대한 것입니다. ④ 구원과 내세론: 제한된 인생을 사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으며 영원히 살 수 있는가 하는 내세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교도 굳이 종교에 넣어야 한다면 이방종교에 속할 것입니다. 2) 세속종교: 세속종교라 함은 종교의 틀을 갖지는 않았으나 종교와 같은 그런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 무신론: 신이 없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 불가지론: 알 수 없다, 어떻게 사람이 알 수 있느냐고 단정 짓는 것입니다. - 회의론: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한 것’을 말합니다. - 막시즘(Marxism): 지나친 공산주의를 말합니다. 3) 유사종교(오컬트-occult): 종교와 비슷하면서 종교가 아닌 것이 종교처럼 존재하는 것을 유사종교라고 합니다. 점성술, 무당, 유령, 최면술, 마술, 미신 등을 말합니다. 4) 이단종파(기독교이단): 기독교와 같은 색깔을 띠었으나 정통 기독교가 아닌 이단 종파를 말합니다. 그것을 ‘이단’(異端-다를 이, 끝 단)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성경으로 시작해서 비슷한 것 같지만 끝이, 결말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몰몬교, 통일교, 전도관, 영생교 등 집단을 말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이재록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많이 생기는 이유 가운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별히 한국에 이런 일들이 많은 것은, 제가 보기에는 쉽게 목사가 될 수 있고, 아무렇게나 집단들이 ‘목사’라고 해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제까지 이웃집 아저씨였는데, 오늘 갑자기 목사가 되고, 어제까지 옆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 ‘나 목사야.’라고 말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제가 속한 우리 감리교 교단은 목사가 되려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신학대학 4년을 졸업하고, 일반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려면 반드시 대학원에 진학해야 합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신학대학원을 2년 해야 하고, 일반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대학원을 3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석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냥 받는 것도 아니고 목회를 시작해서 1년쯤 지난 후에 “성경, 신학, 논문, 자격심사, 품행통과” 이 다섯 가지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3년이 지나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그냥 다 목사는 아닙니다. 그때까지는 준회원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도 다시 2년 동안 똑같은 다섯 가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 목사 안수를 받고 진급해야 10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중간에 한 번 떨어진 사람은 12년도 걸리고 13년도 걸립니다. 이렇게 어렵게 목사가 되는데, 어제까지 이웃집 아저씨였던 사람이 오늘 ‘목사’라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고, 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목사직을 파직했다고 해도 법으로 그 사람을 제재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단이라는 것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그릇된 주장을 말하기 때문에 경고하고, 파직을 당해도 계속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가감하는 사람, 성경에 있는 말을 빼고 어떤 말은 첨가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가 계속해서 계시를 받는다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해 주신다고 ‘엘리자벳 클레어’처럼 말하는 사람입니다. 2. 이단의 정의 1) 어원적 정의 이단이란 말은 영어로 “heresy(헤러시)”라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의 “하이레시스”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말은 본래 “선택받은 자, 뽑힌 자”라는 뜻입니다. 2) 성경적 정의 ① 다른 예수, 다른 영(악령),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고후11:4) ② 그릇된 주장에 대해 거듭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딛3:10) ③ 성경을 가감하는 자(계22:18-19) ④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제한하고 부인하는 자(요일2:22-23) ⑤ 지금도 계속적 계시를 주장하는 자(히1:1-2, 엡3:3-4) 성경 아닌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는 자입니다. 3. 이단 종파들의 공통점 1) 발생모체(發生母體)는 기독교입니다. 성경에서 모방하고, 기독교적인 여러 조건들을 모방하여 적용합니다. 2) 기성교회(현실교회)를 비판합니다. 기성교회, 현실교회들을 모두 타락했다고 말하고 부정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종교에만 와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3) 열광주의적인 신비체험을 강조합니다. 영적인 특수체험, 곧 입신, 방언, 접신, 환상, 신유, 진동, 도통 등의 신비하고 격렬한 체험을 과도하게 자랑합니다. 기둥교회 방송실 직원들이 저를 보고 ‘목사님 우리도 뒤에 이상한 현상을 만들 수 있는데 한번 해볼까요?’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기둥 교회도 그런 현상을 나타낼 수가 있다고 합니다. 4) 교주를 신격화하여 숭배합니다. 사이비 이단들은 교주를 신격화합니다. 여러분, 목사를 귀히 여기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고 그래야 하지만 그러나 신은 아닙니다. 고신일 목사도 참 겉만 멀쩡하지 별 볼일 없습니다. 검버섯이 안 생겼나, 또 매일 아파서 비실거립니다. 나는 아픈데 아프다고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해서 기도해 주면 그 사람은 낫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똑같은 증세로 왔는데 기도해도 낫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들끼리 얘기하다가 토라집니다. 누구는 낫게 해 주고 누구는 안 낫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제가 합니까? 사도 바울도 자신이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나았는데 자신은 병든 환자였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5) 독선적 구원관을 주장합니다. 이 이단 종파들은 자기들만이 특별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와야만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5. 이단 종파들에 대한 종합 1) 비성서적 비신학적입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입니다. 이 말은 성경에 위배된다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2) 비윤리적 반사회적입니다. 도덕성이 없습니다. 3) 현실도피자 주의자들입니다. 4)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빛 된 삶을 사는 것을 거절합니다. 역사 세상 사회와 담을 쌓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지향하는 경우입니다. 성경에 ‘너희가 세상에 살면서 빛 되고 소금 되어서 다른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희가 착한 행실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기둥교회 장로님들에게, 또 다른 교회에서 임원교육을 할 때도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건전한 믿음을 가졌다면 이단이 이곳 강단에 와서 설교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기둥교회는 제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믿을 사람이 없는 줄로 압니다. 그런 교회가 건전한 교회, 든든한 교회입니다. 저는 장로님들에게 “장로는 권위나 세우고 대접이나 받으며, 목사를 견제하는 직분이 아닙니다.”라고 가르칩니다.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분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가르쳐지는지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장로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장로는 교회를 지키는 분입니다. 교회의 건물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교회 같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기 위해 기도하며 직분을 감당하는 분들이 장로님들입니다. 장로는 목회자를 지키는 분입니다. 무슨 경호원을 세워서 목회자를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바르게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건을 살피고 돌봐주는 분들이 장로님들입니다. 교회에서 바르게 배운 평신도들이 성경 말씀에 굳게 서 있고 교회를 바르게 지키려 하고 목회자가 바르게 목회하도록 돕는다면 잘못된 이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제가 믿기는 기둥교회 장로님들이나 성도들은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서 계신 분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틀림없이 기사와 이적은 있습니다. 저 자신도 병 고침의 경험이 있습니다. 신유의 체험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해 줄 때 그런 역사가 나타난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모든 궁극적인 권위의 원천, 교회 안에서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하는 일에 최고의 권위를 둔 것은 “성경”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어도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John Wesley) 목사님은 “모든 것의 권위의 원천은 성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웨슬리(Wesley)는 그의 1766년 6월 5일 일기에서 “나의 근거는 성경이다. 그렇다. 나는 성경고집쟁이(Bible-bigot)이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것이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성경을 따른다.”라고 했습니다. (“My ground is the Bible. Yea, I am a Bible-bigot. I follow it in all things, both great and small.”) 전통적으로 신학의 자료는 - 권위적인 자료(authoritative source), 1차적 자료: 성경(Scripture)와 - 보조적인 자료(subsidiary source), 2차적 자료: 전통(Tradition)과 이성(Reason)과 체험(경험, Experience)입니다. 성경(Scripture): 성경이 제일 위에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오신 줄 믿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고 여기에 나오신 줄 믿습니다. 전통(Tradition): 그 다음에 전통이 중요합니다. 전통도 교회 역사 흐름의 그런 전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기독교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잡혀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에 밀라노(Milano) 칙명을 발표하고 기독교를 해방시켰고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후에 박해받던 예수 믿던 사람들이 땅굴 속에서 숨어서 믿다가 밖으로 나와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차츰 차츰 이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325년에 니케아(Nicaea)종교회의를 거쳐서야 잘못된 이단을 단죄하고 기독교의 교리가 성립되었습니다.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325년 이전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도들과의 연대가 가깝고 또 그때까지는 교회가 분리되지 않은 한 목소리를 내었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Reason):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경험하게 하는 그런 이성을 주셨습니다. 판단을 주셨습니다. ‘아,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니까 이렇구나. 교회 전통에 비추어 보니까 이렇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렇구나.’라고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체험(경험, Experience): 신앙생활은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내가 믿어보니까, 내가 말씀을 들어 보니까, 내가 응답받으니까.’라고 내가 만난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그런 성도들인 것을 믿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보에 나온 설교 제목은 “2000마리 돼지 대 1명의 사람”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의 설교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도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돼지 2000마리를 물속에 처박아 죽게 하고 한 영혼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한 영혼’을 구원하자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세상에 이상한 일들이 자꾸 벌어지면서 우리가 전도하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자 마음먹었던 사람들의 마음 문을 닫게 만듭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예수님 당시에 돼지 2000마리는 엄청난 재산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2000마리의 돼지를 물에 집어넣었습니다. 죽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힘들고 어려워도 복음 전하고 영혼 구원하는 일에, 전도하는 일에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실망하지 마세요. 마음 아파할 것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의인 10사람만 있으면 멸망당하지 않았을 텐데 의인 10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제가 분명히 믿기는 우리 기둥교회가, 기둥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찾지 못했던 ‘의인 10사람’과 같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인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그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바르게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뿌리며 가을의 추수를 위해서 씨 뿌리는 농부들처럼 힘들고 어려워도 전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에이 이것 틀렸어. 그것들 다 똑같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지역에서 나오는 생선에서 병균이 발생했다고 해서 평생 동안 생선을 안 먹겠다고 하는 사람은 바보지요. 사과상자에서 썩은 사과 하나를 발견했다고 해서 사과를 평생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 아닙니까? 부천도 공기가 나쁩니다. 공기가 나쁘다고 해서 코를 막고 숨을 안 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단자도 있고,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펼쳐졌다고 해서 여러분의 신앙을 접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도를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도를 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더 기도하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살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더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심야기도회 때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기도하는 자리에 많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고 야단을 쳤습니다. 왜냐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오히려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울지언정 슬프고 안타깝고 답답한 일을 만나서 울면 되겠습니까? 물에 처넣어 죽여 버린 돼지 2000마리보다 한 생명이 그렇게도 귀했다면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계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기둥교회 인사가 이때에 가장 중요한 인사라고 생각합니다. 예배에서, 주일성수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에서, 사람들이 비난하고 손가락질해도 여러분, “주 안에서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씀으로 승리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데에 우리를 쓰시고, 우리 기둥교회를 써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 안에서 범사에 말씀으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돼지 2000마리 보다 한 생명을 귀히 여기셨던 하나님, 한 생명을 위하여 돼지 2000마리를 물에 처넣으신 주여! 오늘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이 여기 모여 예배드립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시옵시고, 빛 되고 소금된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심령 심령들마다 힘 주시고 능력을 주시옵소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고신일 목사(부천 기둥교회)
200만 톤/ 신15:10
200만 톤 신15:10 신명기15장 10절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오늘의 설교 제목은 200만톤입니다. 200만톤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200만톤이란 북한 주민이 필요한 식량의 부족한 분량입니다 북한의 인구는 97년말 통계로 2431만7천명입니다. 이중 백만명이 매년 굶주림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식량이 200만톤정도랍니다. 200만톤의 식량을 주면 북한이 군대에 필요한 군사식량으로 사용한다고 주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상태로라면 100만명씩 죽는 북한의 현실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확률이 더욱 높아집니다. 작년에 북한의 실정을 알리기 위해 망명한 북한 노동당 비서 출신의 황장엽씨는 오히려 북한을 도와주면 식량을 보내 준 것을 알게 된 북한 주민들이 전쟁을 일으키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아직도 철저히 폐쇄되어 있지만 남한이 현재 북한보다 잘 살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고위층들과 외화벌이하는 기관이 230여개가 있어 그들은 다 남한이 잘 더 산다는 것을 알고 있고 쌀을 보내면 지도층들이 남한에 고마워한답니다. 실제로 황장엽 씨가 북한에 노동당 비서로 있을 때 남한이 쌀을 보내줘서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또한 전쟁에는 여섯가지 기본요소가 있습니다. 현재 쌍방 군사력비교, 총동원할 수 있는 전쟁 수행 능력, 국민과 전쟁 수행 정부간의 충성관계, 국제적 동맹관계, 전쟁결과 얻을 수 있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의 비교, 마지막으로 지도자의 의지입니다. 그런데, 현재 김정일이라는 북한 지도자의 의지 이외에는 모든 부분에서 북한이 남한에 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실정에 미친놈이라도 의지만 가지고 전쟁을 하겠느냐고 북한 전문가인 리영희 한양대 대우교수는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북한의 총생산은 220억달러인데, 남한의 군사비는 93년 현재 130억달러이며 95년에 남한이 구입한 무기 금액만해도 43억달러가 넘고 이는 북한 총군사비보다 많은 것이라고 합니다. 1974년이후 남한은 이미 북한 군사비를 초과하기 시작했고 현재의 모든 능력을 비교해도 남한이 북한의 20배를 넘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현재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화력과 전쟁수행능력은 북한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은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식량을 주지 않는다면 북한은 스스로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경없는 의사회\\\'의 보고에 의하면 3년전 한 살 아이들로부터 40살까지 살아남는다해도 앞으로 60여년동안 영양실조의 여파로 기형아가 많을 것이라고 합니다. 북한을 다녀온 이성희 목사님이나 다른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참상을 말로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IMF로 인해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다같이 신명기 15장 10-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첫 번째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구제하기를 명령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구제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범사와 우리의 손으로 하는 바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다같이 잠언11장 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잠언에서도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해 질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IMF가 빨리 지나가기 위해서도 우리는 구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사도행전10장 31절에 나와있습니다.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고넬료라는 사람의 구제를 하나님이 기억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제를 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구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IMF시대를 잘 이겨나가기 위해, 하나님의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구제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제를 할 때는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까요? 신명기 15장 1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구제를 할 때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내야 합니다. 출 25장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출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북한에 있어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고통받는 이웃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구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을 깨달았나요? 오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실천에 옮기는 친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에 광고한 것처럼 오늘 우리는 구제헌금을 걷었습니다. 다음 주까지 구제헌금을 걷을 거예요. 북한의 굶어죽어가고 IMF로 인해 실직한 아빠를 둔 친구들을 위해 마음에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것으로 구제헌금하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엄마 아빠에게 구제헌금한다고 돈을 달라고 하지 말고 자신의 것을 아껴서 해야 됩니다. 조그만 금액이라고 자신의 것을 아껴서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20세기의 마지막 유언/왕상2:1-12
20세기의 마지막 유언/왕상2:1-12 2003-11-05 10:33:30 read : 9 오늘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주일입니다. 1999년도의 마지막 주일이면서 20세기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의미있는 주일에 무슨 말씀으로 은혜를 나눌까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 천년!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표어를 정해 놓았으나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기에 이재 새롭게 출발하는 그런 말씀으로 새 마음과 새 각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초보목회자로서 실수 투성이고 허물 많은 제 모습을 보니 '내가 오늘 말씀에 더 은혜를 받아야 할텐데...' 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새 천년을 향하여 어떤 자세가 준비되어 있습니까? 다시금 새롭게 하는 것이 없이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니 '먼저 내가 죽어야겠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새 천년, 새 천년하면서도 실상은 알맹이 없는 빈 캉통처럼 떠들썩하기만 한 것이 사실입니다. 나라에서도 '새천년준비위원회'라는 조직이 있지만 계획하는 행사들을 보면 너무너무 속상합니다. 너무 속상해서 주보의 신앙칼럼에 글을 올려 보았습니다. [주보신앙칼럼 내용삽입] ['DMZ 2000 - 새천년통일기원제'에 씻김굿이라니...] 새 천년을 앞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소망과 희망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나라마다 성탄절이 지난 다음날부터 밀레니엄 축제로 떠들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양선교회도 새천년에는 성숙한 교회로 성장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새 천년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표어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가슴 벅찬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새천년준비위원회(위원장:이어령)라는 공식적인 준비단체가 있습니다. 새천년준비위원회는 단국대 21세기 예술경영연구소(소장:이동일)와 공동으로 'DMZ 2000-새 천년통일기원제'라는 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에는 기독교계의 항의에 따라 당초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었던 '씻김굿'이 그대로 재현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99년 12월 31일 오후 6시부터 2000년 1월 1일 새벽 1시 40분까지 진행되는 이 행사는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참여하며, 한국의 MBC를 비롯하여 미국의 ABC, 영국의 BBC 방송사 등을 통하여 전세계 87개국으로 동시 생중계되는 국제적 행사입니다. 그러나 이 행사의 서막 1부 '길놀이'는 지난 천년의 한을 씻어내고 강에 드리워진 죽은 사람의 넋을 그릇에 담아 올린다는 '씻김굿 판'이 벌어집니다. 또 '영 돗'을 말아 세우고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일종의 무당 춤사위도 곁들인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지구상의 다섯 인종을 상징한다는 다섯 명의 무당이 다섯 개의 사다리 위에 올라가며 '길 굿'까지 펼쳐 새 천년맞이 행사는 시작부터 '무속문화'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진행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짐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씻김굿이란 죽은 사람을 위한 무당 굿으로 사람의 옷을 돗자리에 말아 몸통을 세우고 주발로 머리를 만든 다음 솥뚜껑을 덮어 갓을 쓴 인간의 모습으로 만든 후 물로 씻기는 굿입니다. 그러므로 이 씻김굿이 예술적으로 승화돼 재현될지라도 주술적 의식을 행하는 무속문화와 샤머니즘을 성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묵은 천년의 온갖 슬픔과 고통을 모두 씻어 버리고 새 몸과 새 마음으로 21세기를 맞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하는 행사 담당자(영상담당자:손형식)의 말을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새 몸과 새 마음이 이런 한 번의 무당굿으로 주어질 수 있을까요?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18:31, 36:26 ) [신앙컬럼의 내용 끝] 그렇습니다. 새 사람이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구약에 다윗이라는 신앙의 대선배가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길을 마치면서 그는 임종의 유언을 남기게 됩니다. 저는 다윗 왕의 임종을 바라보면서 '이 말씀이 나에게 주어진 유언의 말씀이구나!'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유언의 내용은 새 천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계승해야 할 모든 성도들에게 20세기의 유언처럼 남겨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우리의 마음과 심령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임종할 때가 되면 남아 있는 유가족들에게 특히 사랑하는 자식에게 길이 간직할 말을 남기게 마련입니다. 통일왕국을 세우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은 자신이 세운 나라를 더욱 번영케 하며 강성케 하도록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1절). 1. 서론 :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 설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2절상).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2절 상반절)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천년이나 되는 세월도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유한한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천년이란 시간은 이렇게 짧은 세월의 흐름에 떠내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새 천년! 그러나 이것 또한 언젠가는 그 시간의 막을 내려야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히 9:27) 이것이 새 천년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남긴 20세기의 유언입니다. 2. 본론(1) : 다윗의 첫 번째 유언은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2절하).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2절 하반절) 다윗은 이런 연약한 인생을 향하여 이렇게 유언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대장부처럼 용감하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정말로 대장부처럼 살았던 인생이었습니다. 어린 목동시절에도 양들을 헤치려는 사자와 곰들에 맞서 싸웠습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는 거대한 골리앗 장군 앞에서 어린 몸으로 물매돌 하나 들고 대항하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수가 되어서는 전쟁의 맨 앞에서 싸움을 지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정복의 약속을 성취했던 이가 바로 다윗 왕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이 이제 죽음을 앞두고 처음으로 유언하며 권면했던 첫 번째 내용은 바로 대장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까? 이 험난한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남자처럼 믿음의 대장부가 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강하게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게 되면 믿음의 대장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새 힘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0-31) 아무리 피곤해도 잠 한숨 자고 일어나면 펄펄 날것 같은 소년이라도, 인생의 연륜과 경륜으로 무장한 인생의 최고봉의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권면한 내용은 한 마디로 "강하라"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수 1:6상)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수 1:7상)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수 1:9중)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 16:13) 강하지 않으면 이 험난한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이러한 세기말의 혼돈 속에서 우리는 더욱 더 강한 믿음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의 강건한 대장부가 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 3:16) 성령의 능력이란 인간의 힘을 통한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지혜로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부분은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인 권세와 능력이 있어도 그 힘과 권세는 순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무장해야만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권세 잡은 마귀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둘째로, 주 안에 있어서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 6:10)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딤후 4:17상) 결국 이 세상의 승리는 일시적이요, 순간적이요, 영원한 승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이 세상에서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주 안에 있음을 이렇게 자랑했습니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7-31) 바울 서신에 나온 중요한 단어가 "주 안에서"라는 말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신앙의 승리의 비결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영적인 면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우리는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받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그 어떤 위기도 결국은 믿음의 대장부 앞에선 힘없이 쓰러진 골리앗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의 투자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법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우선순위 원리입니다. 3. 본론(2) : 다윗의 두 번째 유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3-4절).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4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수백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씀입니다. 다윗은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복을 받으려면 말씀에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다윗은 자자손손 믿음의 후손이 끊이지 않으려면 말씀을 지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이론적인 그런 권면에 불과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윗의 일평생의 체험에서 나온 유언입니다. 그의 일생의 실수라고 말하는 밧세바와의 범죄에서도 평생 형통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으로 책망했던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그 비참한 포로생활을 해야만 했습니까?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 이후에 수많은 왕들이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왕이 형통한 때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이었던 사울 왕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삼상 15:23,26) 이와는 반대로 70년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신앙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학사 에스라가 제일 먼저 실시했던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곳은 말씀회복 운동이었습니다. "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9-10)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시작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마지막도 말씀에 관한 내용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형통함이 보장된다고 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의 대부 부분은 다윗의 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지금도 유대인들에게 가장 철저하게 암송시키고 있는 장은 119편입니다. 어려서부터 노래로 만들어서 암송을 시킵니다. 시편 119편은 17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에서 다윗은 말씀에 대한 찬양으로 전체를 도배합니다. 그 중에 자신의 고백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시 119:123 ) 119편! 우리에게 119는 중요한 숫자입니다. 소방서의 전화번호입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이 번호를 제일 먼저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에도 문제가 발생하면 119를 펼치십시오. 시편 119편을 말입니다. 이 시대는 참 말씀의 사람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입니다. 말로만이 아닌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그런 말씀의 사람이 정말로 필요한 때입니다. 진실하고 신실한 예수님의 제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4. 본론(3) : 다윗의 세 번째 유언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7-8절).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서 정확하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상벌을 확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자에게는 보상을, 은혜를 버린 자에게는 형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판단하실 때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먼저는 화평을 깨는 이를 처벌하라고 했습니다. "5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본문 5-6절) 남이 나의 평안의 깨는 것은 싫어하면서 남의 평안을 깨는 자들을 처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팔복 중에 화평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했던 이를 처벌하라고 했습니다. "8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저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9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본문 8-9절)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쿠테타로 인하여 쫒겨나니까 완전히 망하는 줄 알고 침을 뱉고 저주하고 욕한 시므이에게는 벌을 내리라고 했습니다. 형통할 때는 하나님께 붙었다가 힘들고 어려우면 세상의 방법을 택한 경우와 같습니다, 셋째로,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던 이에게 은총을 베풀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본문 7절) 그러나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쫒겨 갈 때에 망할 것 같은 나라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군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물을 공급하여 위로했던 바실래와 그 아들들에게는 은총을 베풀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는 다윗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누가 심판대 앞에 설까요? 우리 모두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누구든지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심판은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에 대한 판단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행위에 대하여 선고를 받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든 불신자든 누구든지 심판대를 거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3) 5. 결론 : 다윗의 유언을 받은 솔로몬 나라는 심히 견고했습니다(10-12절). "10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 다윗 성에 장사되니 11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을 치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치리하였더라 12 솔로몬이 그 아비 다윗의 위에 앉으니 그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 다윗의 유언을 따라 나를 이어받은 솔로몬의 나라는 심히 견고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이 다윗의 마지막 유언을 통해서 다시 한번 견고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천년을 바라보는 양선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다윗의 유언을 20세기의 유언으로 받았습니다. 새 천년에도 지금처럼 믿음의 대장부가 됩시다. 새 천년에도 지금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됩시다. 새 천년에도 공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20세기의 마지막 주일에 받은 다윗의 유언! 이 유언을 자자손손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 땅에서의 희망이요 비전이기 때문입니다.(아멘)
21세기 일꾼의 모델/ 딤후1:15-18/ 2016-04-24
21세기 일꾼의 모델 딤후1:15-18 우리 인간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행복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보면 함께하기보다는 홀로있기를 더 즐겨하는 듯 합니다. 관계를 더 좋고 풍성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파괴하지 못해 안달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조화로운 삶이기보다는 정복하고 억압하며 지배하고 파괴하려 합니다. 행복과는 먼 삶입니다. 고독한 삶이요, 불안한 삶이요, 불행의 삶입니다. 하나되지 못하는 삶이요, 분열과 나뉨의 삶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첫째는 인간의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고 합니다. 자신을 우상화합니다. 스스로 심판자가 되고 절대자가 되려고 합니다.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노아의 홍수 사건 후 시날 광야에 도착한 사람들은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면서 탑을 쌓았습니다. 그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보자고, 단결하자고 외쳤지만 하나님은 저들의 교만을 보시고 언어를 혼잡케 하시므로 사방으로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분열은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우월감 때문입니다. 나는 특별하다는 특권의식 때문에 더불어 살지를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보통시민이고 자기만 특별시에 사는 특별시민인 듯 행세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면 조잡의 극치고 자기가 하면 유행의 첨단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면 무식의 소치이고 자기가 하면 멋입니다. 사람은 본디 같습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같이 벌거숭이로 태어났고 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런데도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합니다. 태생이 다르다고 구분하려고 합니다. 이런 자기 우월성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비오면 비 맞아야 하고, 눈감으면 앞이 안 보입니다. 배가 아프면 약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나만은 특별해서 눈감아도 앞이 보이고 비와도 비 안 맞는다고 하면 빨리 청량리로 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수준도 모두 거기서 거기입니다. 자기 우월감이 관계를 상실하게 합니다. 셋째는 자기 집중입니다. 자기만의 생활에 사로잡히면 절대로 함께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자기의 경험과 세계관, 자기 욕심과 자기 자랑에 얽매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배고픔과 고통과 슬픔을 알 수 없습니다. 자기만 좋으면 그만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상관없습니다. 이러한 자기 집중 자기 집착은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삶을 근본부터 흔들어 버리는 교만과 자기 우월감과 자기 집중은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21세기의 큰 특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숙제 또한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어떻게 극복해내며, 어떻게 회복해내느냐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한 때 \\\'신 인류\\\'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전통적 가치와 도덕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젊은이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른 이유로 \\\'신 인류\\\'라는 말을 사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이 시대를 휩쓸고 있는 삶의 방식들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철저하게 순종하며 사는 \\\'신 인류\\\'를 지향해야 하겠습니다. 나날이 황폐해져 가는 21세기를 바로 잡기 위해 먼저 앞서 가는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21세기의 모델이 될만한 일꾼의 상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평신도 오네시보로를 칭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네시보로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바울의 칭찬을 받고 있습니까? 그는 어떤 일꾼이었기에 이 시대에 일꾼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는 먼저 용기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보로를 소개하는 내용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말씀은 16절의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입니다. 유쾌하게 하였다는 이 말의 원어적 뜻은 \\\'활력을 불어준다, 생기를 준다, 싱싱하게 만들어 준다\\\'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그는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실망과 좌절에 빠져있을 때 활력과 용기와 생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의 암울한 자리에서도 싱싱한 소망과 전도의 불타는 열정을 잃지 않게 바울에게 포기할 수 없는 용기를 주었던 일꾼이었습니다. 때문에 바울도 이런 오네시보로의 가정을 위해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곁에 존경하고 싶고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더구나 말없이 사랑하고, 남의 장점을 보며, 그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끝없이 믿어주고, 빛도 없이 묵묵히 희생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가슴이 뜨거워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용기를 북돋아주고 생기를 주는 이웃이 있다는 것은 살맛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보로가 바울에게 바로 그런 친구였습니다. 바로 21세기의 일꾼의 모델입니다. 용기를 주고 마음을 시원케 해주며 부족한 것을 보충해주는 그런 일꾼이 되십시다. 또한 오네시보로는 남을 순수하게 인정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16절 하반절에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이 옥에 갇히자 그를 버렸습니다. 그를 스승으로, 혹은 영적 아버지로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감옥에 갇혀버리자 더 이상 죄수와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오히려 바울의 진실을 평가해주고 그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인간관계는 한 사람의 인간 됨을 순수하게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알아주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 없습니다. 자신은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남은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는 사람을 볼 줄 모른다고 하면서도 남의 진실은 쉽게 짓밟아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을 그대로 알아주고 이해해주시는 인격으로 사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보고 그 여인의 고민을 이해하며 죄인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셨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고민하는 니고데모를 이해하셨습니다. 물질의 욕망과 습관화 된 악에 익숙한 삭개오를 받아 주셨습니다. 동전 두닙을 헌금함에 넣는 과부의 심정과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신앙, 인격, 자질을 인정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조화로운 삶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게 그 처지와 형편에 상관없이 바울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오네시보로, 그는 이 시대의 일꾼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먼저 찾아가는 사랑과 헌신의 사람이었습니다. 17절에 보면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고 바울은 오네시보로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지런히 아픔을 당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좌절과 실망 속에 있는 자들을 찾아가서 용기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염려해주고 자기의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들여 헌신할 줄 아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서로 염려해주고 사랑해주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해 지는 법입니다. 폴 틸리히는 \\\"하나님의 임재가 뚫고 들어가지 못할 인간의 상황은 없다\\\"고 했습니다. 먼저 베풀고, 사랑하고, 용기를 주고, 이해하고, 염려해주면 어떤 얼음도 녹아버립니다. 상대방이 이해할 때까지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우리는 함께 기뻐하며, 함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1세기 일꾼의 모델은 용기를 주는 자입니다. 남을 순수하게 인정해주는 자입니다. 먼저 찾아가는 사랑과 헌신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꾼이 될 때 살 맛 나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될 때 신바람 나는 삶을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결단입니다. 우리의 결단을 주님은 기뻐 받으시고 이러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1세기를 아버지와 함께/ 눅15:11-20
21세기를 아버지와 함께 눅15:11-20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고 살아있고 건강하다는 것은 하나님만 아시고 우리 인간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객 관적으로 보아서 대체로 교회가 열심히 잘 모이고, 열심이 있고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가 뜨겁 고 교회로 오는 길이 열려있고 교회 문이 열려있고 교회로 드나드는 성 도들이 많아지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뜨겁게 주님을 섬기는 성도 들이 이어질 때 대체로 그런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다, 또는 살아있다, 건 강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국가도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건강 한 국가는 전문가에 의해서 진단해 야 되고, 전체적으로 평가를 내리는 데에는 상 당한 시간이 필요로 합니 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도 객관적으 로 간단하게 그 국가의 번영을 짐작 해 알 수 있는 것 은 비행장에 가 보 면 압니다. 외국 손님들이 많이 드 나들고 비행기가 열심으로 오르내리 고, 내리는 비행기가 줄 을 잇고 내 리지를 못해서 관제탑의 지시를 기 다리며 그 위를 상회하는 비행기들 이 끊임없이 이어지면 그 나라는 발 전하는 나라입니다. 또 비행기에서 내린 다음에 고속도로를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차들이 줄을 지어 있 으면 그 나라는 번영하는 나라입니 다. 또 항만에 배들이 꽉 차서 컨테 이너로 실어 나르는 배들이 대기해 있고 끊임없는 하역작업이 이어지면 그 나라 경제는 일어나고 있다, 잘 되고 있다는 그런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서, 하나는 지상에서 도로에서, 하나는 바다에서 이 삼면이 조화를 이루면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십 년 전에 구소련을 가보니까 비행장 에 손님이 없습니다. 비행기 안에도 손님이 1/5도 없습니다. 사람을 도 무지 비 행기 안에서, 밖에서 찾을 길이 없습니다. 비행기는 많은데 뜨 지를 않습니다. 고속도로를 스물 몇 시간을 모스크바 에서 민스크까지 가 도 차를 구경 할 수가 없습니다. 하 루 종일 가도 차가 안보입니다. 레 닌그라드에도 가보면 배 가 없습니 다. \\\'여객선도 없고 화물선도 없고 유조선도 없다\\\' 그러면 그 나라 경 제가 어려운 거지요. 모두다 길가 에 서서 서성대고 있고 할 일이 없습니 다. 낡은 건물들입니다. 가게 앞에는 전부 줄을 서서 빵 한 조각 받기 위 해 서 수 백 명이 줄을 서 있고 버터 하나 받기 위해서 수 백 명이 줄을 서 있습니다. 중국에도 가보니까 구 소련보다 는 낫지만 제가 11년 전에 가보니까 역시 거기에도 하루 종일 가도 차를 좀처럼 만날 수가 없고 비행장에 손님이 없 습니다.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 나라도 IMF를 만나서 한 이 년 동안 도로에서 많이 경험했습니 다. 일년 전, 이년 전에 도로가 그냥 그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화물차가 안 다닙니다.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 님 이 고속도로 에 화물차가 줄을 잇 게 해 주십시오 도로가 지금 텅텅 비었습니다 승용차가 이렇게 다녀서 는 안되겠습니다 화물차 가 짐을 싣 고 열심으로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 십시오\\\' 여러분 차 타고 다니면서 혹시 차가 많다는 이유로 답답해 하 거나 신경질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 다. 도로에는 차가 많아야 됩니다. 도로에 잡초가 우거져서 되겠습니 까? 도 로에 짐승들이 돌아다녀야 되 겠습니까? 차가 많이 움직여야 됩니 다. 복잡하면 도로는 더 닦으면 되 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다녀야 됩니 다. 성장하는 교회는 열심이 있고, 사 람들이 많이 다녀야 살아있는 교회 가 되며, 살아있는 경제, 살아있는 국가, 개인 이나 모두가 다 건강하고 살아 있을수록 열심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부흥과 번영이 얼마나 귀 합니까 천년을 살아 도 일년처럼 감 격스럽게 감사하며 살아야 되고 일 년 흉년도 비극인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IMF가 이년 동 안 눈 깜 작할 사이 지난 것 같지만 그 상흔 과 상처는 형언할 길이 없는 것입니 다. 신앙도 끊임없이 부흥하고 발 전 해야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영 적인 침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 입니까? 경제처럼 빨리 회복할 수 있는 것 도 아닙니다. 신앙의 회복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잘 믿는 것 축복으로 알고 열심 있는 것 정 상으로 알고, 천년 만년 항상 명성 교회는 하나님 앞에 이런 성장과 부 흥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 는 하나님 앞에 늘 기 도를 그렇게 드립니다. \\\'하나님, 저의 후임자도 좀 부족할지라도 열심 있는 종이 와 서 이 교회를 계속 부흥시켜 나 가도 록\\\' 교회는 살아있어야 됩니다. 거지 는 우리가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지가 무엇인가 우리가 알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그 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을 믿어도 하루 믿은 것같이 믿어야 되 고 하나 님이 주신 축복을 언제나 감 격스럽게 우리가 맞이해야 할 것입 니다. 고속도로가 붐비듯이 교회는 열심으로 드나드 는 성도들로 가득 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국 제품 쓰는 것을 아주 비애국적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외국 제품도 써 야 됩니다. 외국도 가보아야 됩니다. 우리 것도 팔고 또 좋은 것도 사다 가 우리가 좋은 것을 사용해서 우리 경제가 경쟁을 하 도록 만들어서 외 국제품보다 더 좋은 걸 만들도록 해 야 합니다. 외국 것을 쓰면 아주 나 쁜 사람으로 그렇게 생각 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청년들이 모여서 그랬 다 그러지요. \\\'나는 애국자야 절대로 외국 것은 안 쓴다\\\'고 그러니 또 한 친구가 말했어요. \\\'나는 더 진짜 애 국자야 외국은 절대로 안 간다\\\'고 또 한 친구가 말했어요. \\\'나는 더 애 국자야 영어는 절대로 안 한다니까\\\' 아닙니다. 영어를 해야됩니다. 인류 역사상 한 언어로 전세계의 모든 회 의와 모든 국경을 한 언어로만 패스 시키는 시대가 없었습니다. 이런 시 대에 지금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어를 해야 되는 거예요. 영어를 하는 것 은 더좋은 애국자가 될 수 있는 것 입니다. 외국을 가 보아야 됩니다. 북한보세요. 외국과 의 왕래도 없이 살아가고 있잖아요. 일본 경우에도 전에 대동아 전쟁을 일으켰던 내각 들은 미국을 한 사람도 안가 보았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전쟁을 일으 킨 거예요. 가 보아야 됩니다. 세계 가 돌아가는 것을 보아야 됩니다. 그 리고 본받아야 됩니다. 더 훌륭한 문화를, 더 훌륭한 삶을, 더 훌륭한 지식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더 좋은 제품도 받아들여야 됩니다. 미국 보 십시오. 미국은 십 년 전부터 일본 자동차를 물밀듯이 수입을 해 가지 고 미국 땅에 어 떤 일본 회사도 다 들어와서 일년에 몇 백만 대씩 자동 차를 팔게 하고 그 대신 미국 자동 차는 경쟁에 져 가지고 다 문닫았습 니다. 세계의 자동차 60%를 만들어 내던 미국이 다 손들어 버렸어요. 몇 만 명 직원들이 다 실직을 당 하 고 해고 당했습니다. 왜 그렇습니 까? 미국 자동차는 승용차가 버스 만합니다. 그래서 낭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차는 아주 실속 있게 경 제적이고 실용적이고 깨끗하고 디자 인도 심플하게 만들어서 미국을 다 눌렀어요. 미국 은 결국 처음에는 졌 지만 일본 자동차와 싸우기 위해서 다시 기술을 개발하고 다시 투자하 고 다시 거기서 일어나 서 지금은 일 본 자동차를 다 누르고 다시 세계 자동차 대국으로 일어날수가 있었습 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경쟁하 는 겁 니다. 다 경쟁이에요. 스포츠도 경쟁 해야 발전하는 거예요. 지식도 경쟁 해야 발전하는 거예요. 정치도 경쟁 하는 거예요. 공산주의는 경쟁이 없 어요. 정치도 혼자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어느 것도 경쟁을 안 하면 그 나라는 몰락하는 거예요. 천국도 교회도 경쟁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12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 하는 자가 얻는다\\\" 그랬어요. 열심 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천 국에 들어가고 그래서 교회도 열심 히 모이는 곳에 가서 더 열 심으로 모이려 하고 더 많이 모이는 데 가 서 배우고 이렇게 도전을 받고 은혜 를 받고 열심을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혼자 사 는 걸 좋아하고 경쟁을 안 하려면 산으로 가십시오. 토끼하고 자든지 호랑이와 살 든지 그렇게 살아가십시 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나라에 크게 쓰임을 받으려면 우리는 언제 나 경쟁하고 잘 믿는 사람을 만나서 더 잘 믿으려고 하고, 말씀을 듣고 더 큰 은혜 받으려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새 시대 새 천년에는 새 로운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 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잘 믿어야 됩니다. 영적인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잘 믿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 님 아버지 를 좋아하고 하나님 아버 지와 함께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오 늘 탕자가 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때 천년을 하루같이 아무 문제가 없었 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았을 때는 문제 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을 떠나면서부터 그에 게는 고통이 오고 환난이 오고 가난이 오고 부끄 러움이 오고 멸시 천대가 따라왔습 니다. 아들로서의 영광은 다 떠 나가 고 거지처럼 이 집 저 집을 기웃거 리며 헤매이는, 온갖 축복을 받으려 고 하지만 하나도 따라오는 것이 없 는 허무하고 헛된 삶이 그에게 주어 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은 풍요로운 삶, 넘치는 삶, 충만 한 삶이 됩니다. 그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 사는 삶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의 삶인 것입니 다. 그를 떠나서 무엇을 얻을 수 있 다는 것은 시험이고,유혹입니다. 결 혼도 사랑도 행복도 그 안에서, 지 식도 국가의 번영과 발전 도 그 안에 서, 도덕도 행복도 그 안에서, 좋은 생각 선한 마음 위대한 사상도 그 안에서, 위대한 예술도 음악도 다 그 안에서 입니다. 그를 벗어난 예 술, 그를 벗어난 음악은 우리 인간 에게 더 큰 허무와 낭패와 불행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어도 얼마든지 좋은 생각 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긍 정적인,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격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 모 두 믿음 안에서 되어야 합니다. 우 리는 믿음을 떠난 모든 것을 예찬하 지 않습니다. 예수 떠나서도 우리보 다 열 배 더 행복의 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는 사실은 행 복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행복 과 축복은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시 는 선물 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축 복은 하나님 안에 있는자에게 위로 부터 하나님에게서 내려주시는 것입 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에밀 구 에는 \\\'나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나를 만들어 가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 습니다.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 인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결 국 자살해 죽었습니다. 적극적인 생 각과 긍정적인 생각을 우리는 신앙 과 혼동하면 안됩니다. 애국과 구제 와 봉사를 신앙과 혼동해서 안됩니 다. 예수 안 믿어도 우 리보다 더 애 국하고 예수 안 믿어도 우리보다 이 웃 사랑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 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 것을 아름답게 볼 것이 아니라, 어떤 것 도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함께 해야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자녀 도, 주 안에서 사업도 주 안에서 번 영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한대 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 도 할 수 없음이니라\\\"는 말씀을 기 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주안에서 행해 져야 합니다. 우리 삶 의 모든 동기는 교회 안에서, 말씀 안에서,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이 세상을 좋게 보지 않습니까? 세 상에는 모든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합 니다. 세상 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이 런 유혹을 받습니다. 이 아들은 하 나님이 함께 하는 곳에 천국이 있는 것을 모르고 세상 을 천국으로 생각 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은 답답한 삶이고, 힘든 삶이고, 어려운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 마음 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아담과 이브처럼 높아지고 싶었습니 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었 습니다. 그렇게 될 것만 같았습니다. 이것이 시험이에요. 유혹이에요. 세상을 높 이 보는 것 세상을 크게 보는 것 다 내 마음대로 될 것만 같이 보는 것 이것이 유혹이에요. 시험이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유혹의 욕 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하지 않았 습니까? 옛사람, 세상을 좋게 보는 눈, 그런 마음들을 버리는 거예요. 그래야 영적인 성장이 오는 줄로 믿 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했어 요. 말씀을 들어도 세상의 정욕과 욕심이 가시나무처럼 덮으면 믿음의 싹이 자랄 수 없다고 마태복음 13장 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이 나를 누르고 내 영적인 성장 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으로 힘있게 자라나 서 세상을 내려 다보고 세상을 그늘로 만들고 하나 님의 축복이 백향목처럼 힘있게 자 라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을 정복할 때 성문을 부수기도 하고 성을 타고 넘기도 하 고 화살을 쏘기도 하고 불화살을 쏘 기도 하고 군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진격해 들어가는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 성을 도무지 점령할 수 없어서 성과 같은 높이로 쌓아 올라가서 건너 뛰어가 는 이러한 방법들도 있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마사다\\\' 라고 하는 곳입 니다. 로마가 세계를 다 점령했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하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습니까? 그런데 AD70년에 예 루살렘을 무너뜨립니다. 예루살렘이 요새이지만 예루살렘이 무너진 다음 에 거기 있던 교인들은 마사다라고 하는 곳으로 도망을 갑니다. 마사다 는 땅에서부터 한 400M 되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사방이 완전히 항아리같이 되어 있으며, 동서남북 이 절벽으로 되어있는 완벽한 요새 입니다. 설령 그런 곳이 있어도 물 이 없으면 안 되는데 여기는 물까지 있는 거예요. 그 유대 나라에 땅에 도 아무리 파도 물이 안나오는 곳인 데 글쎄 마사다에 물이 나오 는 거예 요. 그래서 유대인들 1500명이 거 기로 도망쳐 숨습니다. 무기도 없어 요. 그러나 로마가 이걸 못 점령하 는 거예요. 세계를 점령한 이 로마 가 마사다를 이길 수 없는 거예요. 기적적으로 백 명이 올라와도 그 위 에서 돌 하나만 굴러도 다 떨어져 죽는 거예요. 아무도 올라갈 수가 없어요. 삼 년을 버텼어요. 결국에는 옆에다 같은 성을 쌓는 거예요. 계 속 흙을 가져다가 쌓아서 결국에는 마사다를 점령하는 거예요. 놀라운 일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는 영적 으로 이 세상을 믿음으로 점령해서 내 믿음의 성을 높이 쌓아 올려야 합니다. 내 기도의 성을 높이 쌓아 올 려야 합니다. 이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세상보다 더 큰 영적 성을 쌓아야 합니다. 유럽을 가보십 시요. 그들 은 예수를 믿고 얼마나 영적인 성을 쌓아 올려서 교회들을 얼마나 높이 올렸습니까? 여러분 파 리에 가면 관광지가 어디입니까? 제 일 좋은 관광지가 교회들입니다. 몽 마르뜨 거기가 다 교회예요. 영국에 가보십시요. 독일에 가보십 시요. 최 고로 좋은 것들은 다 천 년 동안 영 적인 성을 높이 쌓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터를 자자손손 높이 쌓아 올려서 저 들이 세계를 통치하고 지배하고 하 나님 앞에 복을 받지 않습니까 하나 님이 최 고입니다. 하나님 잘 믿는 것이 최고입니다. 어느 것보다도 믿 음 이상은 없다는 신앙을 높이 쌓아 올렸습니다. 여 러분의 가정에 신앙 이 높습니까, 여러분이 아직까지 세 상과 비교할 때 여러분의 믿음이 어 느 정도 높아져 있습니 까? 세상에 바람 한번만 불어도 흔들리고 세상 의 무슨 제품 하나만 나와도 깜짝깜 짝 놀라고 감격해 하던 것을, 이 제 는 창세기를 읽어보면서 감격해 하 십시요. 출애굽기를 읽어보면서 감 격해 하십시요. 찬송 부르며 좀 눈 물 흘 려 감격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텔레비젼 보면서 가 수들이 나오면 아이들이 오빠하며 울고 하는데 그 냥 가수들이 나와서 약간 흐응 이러면 울고 어쩔줄 몰라 그래요. 뭐가 놀랍다는 거예요? 하 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위대하게 보면서 새천년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 신앙 하나를 높여야 됩니다. 하 나님과 함께 하는 이 삶을 최고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 의 것은 두려워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고 바라볼 것도 없습니다. 솔로몬이 말한 대로 헛되고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들입니다. 창세기 1 장 28절에 우리 가 이 세상을 따라가 고 흠모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주 어졌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 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 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 와 공중의 새 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 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하 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다스리는 삶이에요. 정 복자예요. 세상을 지배 하고 통치하 는 축복이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입 니다. 세상에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 아니라, 놀라는 일은 하나님 외 에는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새 시대 를 세상을 정복하는 위대한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 세 상은 헛된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얻으려 하다가 삼손은 비참하게 죽 었고 세상의 여인을 사랑하다가 그 자신이 죽 고 말았습니다. 롯은 세상 의 물질을 따라가다가 그의 가족들 까지 다 잃어버렸어요. 삼손은 자기 만 죽었지요. 롯은 온 집안이 다 망 했어요. 어디에서? 세상에서. 세상에 서 잘 살고 행복하게 세상에서 멋대 로 살려고 하다가 세상으 로부터 버 림을 받고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 다. 교회를 나와도 세상에 있는 정 욕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감사해야 지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하면 신앙 생활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옛날 어떤 고을에 너무 인자하고 훌륭한 원님이 있어서 그 지역에 살 아가는 농민이 농사를 지었는데 어 떻게 농사 가 잘 되는지 무 농사를 지었는데 무가 사람만 해요. 그래서 두 내외가 \\\"여보 우리 원님 덕택에 이렇게 농사가 잘 되었는데 이 무는 원님에게 갖다 드립시다\\\" 하고 둘이 서 이고 지고해서 원님에게 가져다 바쳤어요. \\\"원님 덕택에 농사가 잘 되었사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 겠습니까 무 하나지만 너무 이렇게 크고 잘생겨서 원님 에게 가져왔습니 다.\\\" 원님이 들어보니 너무 좋거든 요 그래서 \\\"여봐라 이방, 이렇게 좋 은 백성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 는고! 혹시 방에 뭐 들어온 선물 없 는가?\\\" \\\"예 지난번에 어떤 분이 가 지고온 황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 황소를 저 무를 가 져온 분에게 주도록 해라\\\" 그래서 그 분이 황소를 가지고 집으로 가서 잘 살았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앞집에 있던 분이 \\\'야 참 원님 한테 저렇게 무를 가져가서 황소를 받아 왔구나\\\' 이 사람이 머리를 썼 어요. \\\'그럼 나는 황소를 가져가야지 우리 집 에 있는 황소 한 마리를 가 져다주면 아마 고을 전체를 나한테 다 줄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황소 한 마리를 가져가 서 \\\"원님 감사합니 다 이렇게 원님 덕택에 황소가 잘 컸습니다 그래서 원님에게 가져왔습 니다\\\" 그랬더니 원님이 또 좋아서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이 어디있 나\\\' \\\"이방 그 안에 들어온 거 뭐 혹 시 없는가\\\" \\\"예 있사옵니다 지난 주 일에 무 갖다 놓은 거 하나 있습니 다\\\" \\\"그러면 저 사람에게 무를 주도 록 하여라\\\" 했답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 믿어서 잘 살 아야 된다? 아니에요. 잘 살고 못사 는데 너무 연연 하지 맙시다. 하나 님이 우리 와 함께 하시는 것이 얼마 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잘 살아 내가 가져서 뭐 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축 복으로 영원히 영원히 사는 삶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 영원한 하늘과 땅의 복을 받 았는데, 성경에 출애굽기에서 천대에 은혜를 주신다고 했는데 이제 우리는 거기 서 벗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에게 축복 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건 다 몰 라도 믿음만은 첫째가 되어야합니 다. 우리 는 경제의 IMF가 얼마나 무서운 가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3년만에 IMF는 거의 지나가고 있습 니다. 지난주에 보 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외화가 전 세계에 일곱 째로 많다고 합니다. 보통이 아니지요. 잠 깐동안 엄청난 성장을 가 져왔습니 다. 정치적인 IMF도 소망이 있습니 다. 지식의 IMF, 그 국민이 배우지 못한 것도 언젠가는 배울 수 있습 니 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IMF는 도 덕의 IMF입니다. 학교에 다녀보십 시요. 윤리 도덕 면으로 인간 됨에 F 맞은 사람은 안됩니다. 영적인 F 를 맞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일 이 년에, 십 년 이십 년에 회복하는 것 이 아니에요. 여 러분이 어렵습니까? 그런 것은 잘 만 하면 한 순간에 바 뀔 수가 있어요. 인간 안 된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안 되는 거예요. 천 지가 열 번 바뀌어도 인간 안된 사 람은 못쓰는 거예요. 나는 우리 나 라가 IMF가 올 것도 알았지만 지 금 이런 식으로, 윤리 도덕이 땅에 떨 어진 이런 한심한 시대로 살아간다 면 우리는 회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살 고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제일로 알고 살면서 이 시대를 보 람있게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새 시대가 왔습니다. 하나님과 함 께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 1장 17절 에 온갖 축복이 빛들의 아버지께로 부터 옵니 다. 속지 말라 그랬어요. 세상에 속지 말라, 좋은 것은 아버 지께로 하늘로 위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교회 안에, 말 씀 안에, 은혜 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시 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세 가지 시인이 필요합니 다. 세 가지 고백이 필요합니다. 세 가 지를 돌이켜야 합니다. 첫째, 마음을 돌이켜야 하고 둘째, 발걸음을 돌이 키 고 세번째, 내 생활을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떠난것도 내가 떠났 듯이 돌아오는 것도 내가 돌아와야 해요. 신앙 은 언제나 내가 하는 거 예요. 세상을 사랑한 것도 나 인것 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결심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것도 내 가 안 믿듯이 믿는 것도 내가 믿는 다고 내가 고백해야 됩니다. 내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저버리고 간 것도 내 발걸음이라면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도 내가 옮겨야 되는 거예요. 이건 누가 해 주는 것 이 아니에요. 오늘 이 아들은 지난 날의 잘못된 것을 깨닫고 스스로가 돌이키는 거예 요. 첫째는 마음을 돌 이키는 거예요. 그는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속은 것을 고 백했어요. 시인했어요. 그렇습니다. 인정해야 됩니다. 스스로 고백해야 됩니다. 세상은 헛되더라, 믿을 것이 없더라, 친구도 믿어서는 안되 겠더 라, 하나님을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더라. 속은 것을 언제나 입으로 고백해야 됩니다. 17절을 한번 읽어 보겠 습니다. 눅 15장17절 \\\"이에 스 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 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 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세상에서 나는 이제 길이 없다 죽게 되었다 나는 이제 끝이다. 이런 말 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내가 거지 가 되었다 이런 말을 해야 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을 자 꾸 예찬하는 분들이 있어요. 좋게 말하는 분들이 있 어요. 그건 위험한 생각들입니다. 솔로몬처럼 헛되다 라고 말해야돼요. 삭개오처럼 지난 날을 시인해야 됩니다. 내 가 죄를 지었으니 잘못했습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어요. 베드로도 누가복음 5장에서 아버지를 떠나서는 고기 한 마리도 어제 밤에 잡을 수 없었다고 안되더라고,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두번째는 회개했어요. 자기 자신을 시인하 는 거예요. 자기 잘못을 시인 하고 하나님 앞에 아버지께로 돌아 왔어요. 아버지 앞에 와서 내 모든 잘못된 것을 고 백했어요. 침묵이 금 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백이 금이에 요. 내가 나를 망쳤습니다 아버지 마음을 근심되게 했습니 다. 변명하 면 안됩니다. 변명하면 할수록, 요령 부리면 부릴수록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 니 다. 주의 영을 근심되게 했습니다.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 회개 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가 주어 지는 줄로 믿습니다. 세번째는 품군이라고 자기가 결심을 했어요. 나는 이제 아버지 집에서 품군으로 살겠다는 거예 요. 이것은 굉장한 선 언입니다. 굉장한 선포입니다. 이런 결심하는 사람은 길이 많습니다. 좋 은 자세입니다. 소망 이 있습니다. 이 런 말하면 어디 가든지 사랑 받고 어디 가든지 성공하고 어디 가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허물 은 다 덮입니다. 일자리가 많습니다. 용기 의 사람, 능력의 사람은 나는 이제 품군으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마음 하 나만 낮추면 모든 삶은 형통해 질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와서 신앙생 활 하면서 높은 마음 갖지 마십시 요. 자세가 중요합니다. 저는 탁구를 치는데 구경하는 분들이 늘 그래요. 나를 칭찬하지를 않고 그 폼 가지고 받아 내는 게 기적 같대요. 어떻게 공이 넘어가는지 이해가 안된대요. 나는 괜찮게 치는 것 같은데 자세가 탁구 자세가 아니라는 거예 요. 자세 가 참 중요합니다. 자세가 좌우합니 다. 골프 자세만 잡는데에도 3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친다고 골프 잘 치 는 게 아니래요.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래요. 자세만 잘 잡으면 골프는 저절로 된 대요. 여러분, 가 정에서도 행복 의 자세가 중요합니 다. 다 만들어 놓았지만 자세가 비 딱한 가정은 행복이 비딱하게 가는 거예요. 가정이 건강한 가 정 될 수 없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 나 다 마찬가지 에요. 어느 자리에 가든지 나는 품군이다 라는 마음으 로 살면 행복합니다. 잘됩니다. 성공 합니다. 할 일 많습니다. 제가 어제 국민일보 특집을 처음으로 싣는데 저와 저희 교회를 실었어요. 한 면 을 다른 것 하나 안 싣고 저와 저희 교회에 대해서 실었어요. 나는 너무 죄송해서 내가 거기 실릴만한 자격 도 없는데 인터뷰를 안 하려고 했는 데 목사님 이건 기자의 생각이 아니 고 전체 언론계 신문사에서 회의를 했는데 저를 꼭 실어야 되겠다는 것 이예요. 우리 나라 어른들도 많은데 곤란하다고 해도 꼭 실어야 겠다는 것이예요. 교회를 다니는 기자들이 아마 저를 좋게 보았나봐요. 기자 눈에 드는 것이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면 하여 튼 해보자고 그래서 했 는데 좀 지나친 표현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한가지는 저는 어디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 님 앞에는 품군 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 님의 은혜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 셔서 나와 함께 하셔서이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내 것은 아무 것도 없 다 이런 생각 가지고 하니까 늘 감 사하고 늘 기쁘고 그래서 무엇을 먹 어도 저는 맛있고 어떤 옷을 입어도 내게는 너무 과한 거예요. 감사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옷을 입으면 벗을 생각을 안 합니다. 바꿀 생각 을 안 합니다. 감사하니까. 여러분이 왜 입을 옷이 없습니까 여러분이 눈 이 높아서 그래요. 전 부 다 입을 옷 들이에요.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 옷 사려고 헤매는 것은 눈이 높아 그런 거예요. 어느 식당도 다 맛 있 는 식당이에요. 여러분 입 때문에 문제지요. 음식이 문제가 아니에요. 오늘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왜 우리가 만족이 없어요 왜 행복이 없 어요 왜 여러분이 능력 있게 못사는 거예요 왜 감사하며 못사는 거예요? 여러분이 높아 서 그런 거예요. 그 자세 안 바꾸면 어느 직장 가도 쓰 임 받지 못하고 누구와 결혼해도 어 느 아파트에 가서 살아 도 만족이 없 어요. 주님 나는 품군입니다. 이것이 교회생활에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태풍처럼 몰고 오는 비결이 바 로 이 런 자세에 있는 거예요. 새 천년, 하 나님의 성전에서 새 천년을 하나님 과 함께 하는 모든 성도 이 민족 되 시기를 바랍니다.
21세기를 아버지와 함께/ 눅15:11-20
21세기를 아버지와 함께 눅15:11-20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고 살아있고 건강하다는 것은 하나님만 아시고 우리 인간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객 관적으로 보아서 대체로 교회가 열심히 잘 모이고, 열심이 있고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가 뜨겁 고 교회로 오는 길이 열려있고 교회 문이 열려있고 교회로 드나드는 성 도들이 많아지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뜨겁게 주님을 섬기는 성도 들이 이어질 때 대체로 그런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다, 또는 살아있다, 건 강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국가도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건강 한 국가는 전문가에 의해서 진단해 야 되고, 전체적으로 평가를 내리는 데에는 상 당한 시간이 필요로 합니 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도 객관적으 로 간단하게 그 국가의 번영을 짐작 해 알 수 있는 것 은 비행장에 가 보 면 압니다. 외국 손님들이 많이 드 나들고 비행기가 열심으로 오르내리 고, 내리는 비행기가 줄 을 잇고 내 리지를 못해서 관제탑의 지시를 기 다리며 그 위를 상회하는 비행기들 이 끊임없이 이어지면 그 나라는 발 전하는 나라입니다. 또 비행기에서 내린 다음에 고속도로를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차들이 줄을 지어 있 으면 그 나라는 번영하는 나라입니 다. 또 항만에 배들이 꽉 차서 컨테 이너로 실어 나르는 배들이 대기해 있고 끊임없는 하역작업이 이어지면 그 나라 경제는 일어나고 있다, 잘 되고 있다는 그런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서, 하나는 지상에서 도로에서, 하나는 바다에서 이 삼면이 조화를 이루면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십 년 전에 구소련을 가보니까 비행장 에 손님이 없습니다. 비행기 안에도 손님이 1/5도 없습니다. 사람을 도 무지 비 행기 안에서, 밖에서 찾을 길이 없습니다. 비행기는 많은데 뜨 지를 않습니다. 고속도로를 스물 몇 시간을 모스크바 에서 민스크까지 가 도 차를 구경 할 수가 없습니다. 하 루 종일 가도 차가 안보입니다. 레 닌그라드에도 가보면 배 가 없습니 다. \\\'여객선도 없고 화물선도 없고 유조선도 없다\\\' 그러면 그 나라 경 제가 어려운 거지요. 모두다 길가 에 서서 서성대고 있고 할 일이 없습니 다. 낡은 건물들입니다. 가게 앞에는 전부 줄을 서서 빵 한 조각 받기 위 해 서 수 백 명이 줄을 서 있고 버터 하나 받기 위해서 수 백 명이 줄을 서 있습니다. 중국에도 가보니까 구 소련보다 는 낫지만 제가 11년 전에 가보니까 역시 거기에도 하루 종일 가도 차를 좀처럼 만날 수가 없고 비행장에 손님이 없 습니다.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 나라도 IMF를 만나서 한 이 년 동안 도로에서 많이 경험했습니 다. 일년 전, 이년 전에 도로가 그냥 그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화물차가 안 다닙니다.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 님 이 고속도로 에 화물차가 줄을 잇 게 해 주십시오 도로가 지금 텅텅 비었습니다 승용차가 이렇게 다녀서 는 안되겠습니다 화물차 가 짐을 싣 고 열심으로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 십시오\\\' 여러분 차 타고 다니면서 혹시 차가 많다는 이유로 답답해 하 거나 신경질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 다. 도로에는 차가 많아야 됩니다. 도로에 잡초가 우거져서 되겠습니 까? 도 로에 짐승들이 돌아다녀야 되 겠습니까? 차가 많이 움직여야 됩니 다. 복잡하면 도로는 더 닦으면 되 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다녀야 됩니 다. 성장하는 교회는 열심이 있고, 사 람들이 많이 다녀야 살아있는 교회 가 되며, 살아있는 경제, 살아있는 국가, 개인 이나 모두가 다 건강하고 살아 있을수록 열심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부흥과 번영이 얼마나 귀 합니까 천년을 살아 도 일년처럼 감 격스럽게 감사하며 살아야 되고 일 년 흉년도 비극인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IMF가 이년 동 안 눈 깜 작할 사이 지난 것 같지만 그 상흔 과 상처는 형언할 길이 없는 것입니 다. 신앙도 끊임없이 부흥하고 발 전 해야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영 적인 침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 입니까? 경제처럼 빨리 회복할 수 있는 것 도 아닙니다. 신앙의 회복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잘 믿는 것 축복으로 알고 열심 있는 것 정 상으로 알고, 천년 만년 항상 명성 교회는 하나님 앞에 이런 성장과 부 흥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 는 하나님 앞에 늘 기 도를 그렇게 드립니다. \\\'하나님, 저의 후임자도 좀 부족할지라도 열심 있는 종이 와 서 이 교회를 계속 부흥시켜 나 가도 록\\\' 교회는 살아있어야 됩니다. 거지 는 우리가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지가 무엇인가 우리가 알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그 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을 믿어도 하루 믿은 것같이 믿어야 되 고 하나 님이 주신 축복을 언제나 감 격스럽게 우리가 맞이해야 할 것입 니다. 고속도로가 붐비듯이 교회는 열심으로 드나드 는 성도들로 가득 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국 제품 쓰는 것을 아주 비애국적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외국 제품도 써 야 됩니다. 외국도 가보아야 됩니다. 우리 것도 팔고 또 좋은 것도 사다 가 우리가 좋은 것을 사용해서 우리 경제가 경쟁을 하 도록 만들어서 외 국제품보다 더 좋은 걸 만들도록 해 야 합니다. 외국 것을 쓰면 아주 나 쁜 사람으로 그렇게 생각 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청년들이 모여서 그랬 다 그러지요. \\\'나는 애국자야 절대로 외국 것은 안 쓴다\\\'고 그러니 또 한 친구가 말했어요. \\\'나는 더 진짜 애 국자야 외국은 절대로 안 간다\\\'고 또 한 친구가 말했어요. \\\'나는 더 애 국자야 영어는 절대로 안 한다니까\\\' 아닙니다. 영어를 해야됩니다. 인류 역사상 한 언어로 전세계의 모든 회 의와 모든 국경을 한 언어로만 패스 시키는 시대가 없었습니다. 이런 시 대에 지금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어를 해야 되는 거예요. 영어를 하는 것 은 더좋은 애국자가 될 수 있는 것 입니다. 외국을 가 보아야 됩니다. 북한보세요. 외국과 의 왕래도 없이 살아가고 있잖아요. 일본 경우에도 전에 대동아 전쟁을 일으켰던 내각 들은 미국을 한 사람도 안가 보았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전쟁을 일으 킨 거예요. 가 보아야 됩니다. 세계 가 돌아가는 것을 보아야 됩니다. 그 리고 본받아야 됩니다. 더 훌륭한 문화를, 더 훌륭한 삶을, 더 훌륭한 지식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더 좋은 제품도 받아들여야 됩니다. 미국 보 십시오. 미국은 십 년 전부터 일본 자동차를 물밀듯이 수입을 해 가지 고 미국 땅에 어 떤 일본 회사도 다 들어와서 일년에 몇 백만 대씩 자동 차를 팔게 하고 그 대신 미국 자동 차는 경쟁에 져 가지고 다 문닫았습 니다. 세계의 자동차 60%를 만들어 내던 미국이 다 손들어 버렸어요. 몇 만 명 직원들이 다 실직을 당 하 고 해고 당했습니다. 왜 그렇습니 까? 미국 자동차는 승용차가 버스 만합니다. 그래서 낭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차는 아주 실속 있게 경 제적이고 실용적이고 깨끗하고 디자 인도 심플하게 만들어서 미국을 다 눌렀어요. 미국 은 결국 처음에는 졌 지만 일본 자동차와 싸우기 위해서 다시 기술을 개발하고 다시 투자하 고 다시 거기서 일어나 서 지금은 일 본 자동차를 다 누르고 다시 세계 자동차 대국으로 일어날수가 있었습 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경쟁하 는 겁 니다. 다 경쟁이에요. 스포츠도 경쟁 해야 발전하는 거예요. 지식도 경쟁 해야 발전하는 거예요. 정치도 경쟁 하는 거예요. 공산주의는 경쟁이 없 어요. 정치도 혼자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어느 것도 경쟁을 안 하면 그 나라는 몰락하는 거예요. 천국도 교회도 경쟁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12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 하는 자가 얻는다\\\" 그랬어요. 열심 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천 국에 들어가고 그래서 교회도 열심 히 모이는 곳에 가서 더 열 심으로 모이려 하고 더 많이 모이는 데 가 서 배우고 이렇게 도전을 받고 은혜 를 받고 열심을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혼자 사 는 걸 좋아하고 경쟁을 안 하려면 산으로 가십시오. 토끼하고 자든지 호랑이와 살 든지 그렇게 살아가십시 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나라에 크게 쓰임을 받으려면 우리는 언제 나 경쟁하고 잘 믿는 사람을 만나서 더 잘 믿으려고 하고, 말씀을 듣고 더 큰 은혜 받으려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새 시대 새 천년에는 새 로운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 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잘 믿어야 됩니다. 영적인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잘 믿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 님 아버지 를 좋아하고 하나님 아버 지와 함께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오 늘 탕자가 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때 천년을 하루같이 아무 문제가 없었 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았을 때는 문제 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을 떠나면서부터 그에 게는 고통이 오고 환난이 오고 가난이 오고 부끄 러움이 오고 멸시 천대가 따라왔습 니다. 아들로서의 영광은 다 떠 나가 고 거지처럼 이 집 저 집을 기웃거 리며 헤매이는, 온갖 축복을 받으려 고 하지만 하나도 따라오는 것이 없 는 허무하고 헛된 삶이 그에게 주어 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은 풍요로운 삶, 넘치는 삶, 충만 한 삶이 됩니다. 그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 사는 삶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의 삶인 것입니 다. 그를 떠나서 무엇을 얻을 수 있 다는 것은 시험이고,유혹입니다. 결 혼도 사랑도 행복도 그 안에서, 지 식도 국가의 번영과 발전 도 그 안에 서, 도덕도 행복도 그 안에서, 좋은 생각 선한 마음 위대한 사상도 그 안에서, 위대한 예술도 음악도 다 그 안에서 입니다. 그를 벗어난 예 술, 그를 벗어난 음악은 우리 인간 에게 더 큰 허무와 낭패와 불행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어도 얼마든지 좋은 생각 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긍 정적인,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격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 모 두 믿음 안에서 되어야 합니다. 우 리는 믿음을 떠난 모든 것을 예찬하 지 않습니다. 예수 떠나서도 우리보 다 열 배 더 행복의 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는 사실은 행 복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행복 과 축복은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시 는 선물 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축 복은 하나님 안에 있는자에게 위로 부터 하나님에게서 내려주시는 것입 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에밀 구 에는 \\\'나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나를 만들어 가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 습니다.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 인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결 국 자살해 죽었습니다. 적극적인 생 각과 긍정적인 생각을 우리는 신앙 과 혼동하면 안됩니다. 애국과 구제 와 봉사를 신앙과 혼동해서 안됩니 다. 예수 안 믿어도 우 리보다 더 애 국하고 예수 안 믿어도 우리보다 이 웃 사랑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 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 것을 아름답게 볼 것이 아니라, 어떤 것 도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함께 해야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자녀 도, 주 안에서 사업도 주 안에서 번 영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한대 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 도 할 수 없음이니라\\\"는 말씀을 기 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주안에서 행해 져야 합니다. 우리 삶 의 모든 동기는 교회 안에서, 말씀 안에서,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이 세상을 좋게 보지 않습니까? 세 상에는 모든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합 니다. 세상 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이 런 유혹을 받습니다. 이 아들은 하 나님이 함께 하는 곳에 천국이 있는 것을 모르고 세상 을 천국으로 생각 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은 답답한 삶이고, 힘든 삶이고, 어려운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 마음 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아담과 이브처럼 높아지고 싶었습니 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었 습니다. 그렇게 될 것만 같았습니다. 이것이 시험이에요. 유혹이에요. 세상을 높 이 보는 것 세상을 크게 보는 것 다 내 마음대로 될 것만 같이 보는 것 이것이 유혹이에요. 시험이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유혹의 욕 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하지 않았 습니까? 옛사람, 세상을 좋게 보는 눈, 그런 마음들을 버리는 거예요. 그래야 영적인 성장이 오는 줄로 믿 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했어 요. 말씀을 들어도 세상의 정욕과 욕심이 가시나무처럼 덮으면 믿음의 싹이 자랄 수 없다고 마태복음 13장 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이 나를 누르고 내 영적인 성장 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으로 힘있게 자라나 서 세상을 내려 다보고 세상을 그늘로 만들고 하나 님의 축복이 백향목처럼 힘있게 자 라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을 정복할 때 성문을 부수기도 하고 성을 타고 넘기도 하 고 화살을 쏘기도 하고 불화살을 쏘 기도 하고 군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진격해 들어가는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 성을 도무지 점령할 수 없어서 성과 같은 높이로 쌓아 올라가서 건너 뛰어가 는 이러한 방법들도 있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마사다\\\' 라고 하는 곳입 니다. 로마가 세계를 다 점령했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하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습니까? 그런데 AD70년에 예 루살렘을 무너뜨립니다. 예루살렘이 요새이지만 예루살렘이 무너진 다음 에 거기 있던 교인들은 마사다라고 하는 곳으로 도망을 갑니다. 마사다 는 땅에서부터 한 400M 되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사방이 완전히 항아리같이 되어 있으며, 동서남북 이 절벽으로 되어있는 완벽한 요새 입니다. 설령 그런 곳이 있어도 물 이 없으면 안 되는데 여기는 물까지 있는 거예요. 그 유대 나라에 땅에 도 아무리 파도 물이 안나오는 곳인 데 글쎄 마사다에 물이 나오 는 거예 요. 그래서 유대인들 1500명이 거 기로 도망쳐 숨습니다. 무기도 없어 요. 그러나 로마가 이걸 못 점령하 는 거예요. 세계를 점령한 이 로마 가 마사다를 이길 수 없는 거예요. 기적적으로 백 명이 올라와도 그 위 에서 돌 하나만 굴러도 다 떨어져 죽는 거예요. 아무도 올라갈 수가 없어요. 삼 년을 버텼어요. 결국에는 옆에다 같은 성을 쌓는 거예요. 계 속 흙을 가져다가 쌓아서 결국에는 마사다를 점령하는 거예요. 놀라운 일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는 영적 으로 이 세상을 믿음으로 점령해서 내 믿음의 성을 높이 쌓아 올려야 합니다. 내 기도의 성을 높이 쌓아 올 려야 합니다. 이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세상보다 더 큰 영적 성을 쌓아야 합니다. 유럽을 가보십 시요. 그들 은 예수를 믿고 얼마나 영적인 성을 쌓아 올려서 교회들을 얼마나 높이 올렸습니까? 여러분 파 리에 가면 관광지가 어디입니까? 제 일 좋은 관광지가 교회들입니다. 몽 마르뜨 거기가 다 교회예요. 영국에 가보십시요. 독일에 가보십 시요. 최 고로 좋은 것들은 다 천 년 동안 영 적인 성을 높이 쌓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터를 자자손손 높이 쌓아 올려서 저 들이 세계를 통치하고 지배하고 하 나님 앞에 복을 받지 않습니까 하나 님이 최 고입니다. 하나님 잘 믿는 것이 최고입니다. 어느 것보다도 믿 음 이상은 없다는 신앙을 높이 쌓아 올렸습니다. 여 러분의 가정에 신앙 이 높습니까, 여러분이 아직까지 세 상과 비교할 때 여러분의 믿음이 어 느 정도 높아져 있습니 까? 세상에 바람 한번만 불어도 흔들리고 세상 의 무슨 제품 하나만 나와도 깜짝깜 짝 놀라고 감격해 하던 것을, 이 제 는 창세기를 읽어보면서 감격해 하 십시요. 출애굽기를 읽어보면서 감 격해 하십시요. 찬송 부르며 좀 눈 물 흘 려 감격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텔레비젼 보면서 가 수들이 나오면 아이들이 오빠하며 울고 하는데 그 냥 가수들이 나와서 약간 흐응 이러면 울고 어쩔줄 몰라 그래요. 뭐가 놀랍다는 거예요? 하 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위대하게 보면서 새천년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 신앙 하나를 높여야 됩니다. 하 나님과 함께 하는 이 삶을 최고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 의 것은 두려워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고 바라볼 것도 없습니다. 솔로몬이 말한 대로 헛되고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들입니다. 창세기 1 장 28절에 우리 가 이 세상을 따라가 고 흠모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주 어졌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 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 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 와 공중의 새 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 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하 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다스리는 삶이에요. 정 복자예요. 세상을 지배 하고 통치하 는 축복이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입 니다. 세상에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 아니라, 놀라는 일은 하나님 외 에는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새 시대 를 세상을 정복하는 위대한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 세 상은 헛된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얻으려 하다가 삼손은 비참하게 죽 었고 세상의 여인을 사랑하다가 그 자신이 죽 고 말았습니다. 롯은 세상 의 물질을 따라가다가 그의 가족들 까지 다 잃어버렸어요. 삼손은 자기 만 죽었지요. 롯은 온 집안이 다 망 했어요. 어디에서? 세상에서. 세상에 서 잘 살고 행복하게 세상에서 멋대 로 살려고 하다가 세상으 로부터 버 림을 받고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 다. 교회를 나와도 세상에 있는 정 욕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감사해야 지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하면 신앙 생활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옛날 어떤 고을에 너무 인자하고 훌륭한 원님이 있어서 그 지역에 살 아가는 농민이 농사를 지었는데 어 떻게 농사 가 잘 되는지 무 농사를 지었는데 무가 사람만 해요. 그래서 두 내외가 \\\"여보 우리 원님 덕택에 이렇게 농사가 잘 되었는데 이 무는 원님에게 갖다 드립시다\\\" 하고 둘이 서 이고 지고해서 원님에게 가져다 바쳤어요. \\\"원님 덕택에 농사가 잘 되었사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 겠습니까 무 하나지만 너무 이렇게 크고 잘생겨서 원님 에게 가져왔습니 다.\\\" 원님이 들어보니 너무 좋거든 요 그래서 \\\"여봐라 이방, 이렇게 좋 은 백성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 는고! 혹시 방에 뭐 들어온 선물 없 는가?\\\" \\\"예 지난번에 어떤 분이 가 지고온 황소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 황소를 저 무를 가 져온 분에게 주도록 해라\\\" 그래서 그 분이 황소를 가지고 집으로 가서 잘 살았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앞집에 있던 분이 \\\'야 참 원님 한테 저렇게 무를 가져가서 황소를 받아 왔구나\\\' 이 사람이 머리를 썼 어요. \\\'그럼 나는 황소를 가져가야지 우리 집 에 있는 황소 한 마리를 가 져다주면 아마 고을 전체를 나한테 다 줄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황소 한 마리를 가져가 서 \\\"원님 감사합니 다 이렇게 원님 덕택에 황소가 잘 컸습니다 그래서 원님에게 가져왔습 니다\\\" 그랬더니 원님이 또 좋아서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이 어디있 나\\\' \\\"이방 그 안에 들어온 거 뭐 혹 시 없는가\\\" \\\"예 있사옵니다 지난 주 일에 무 갖다 놓은 거 하나 있습니 다\\\" \\\"그러면 저 사람에게 무를 주도 록 하여라\\\" 했답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 믿어서 잘 살 아야 된다? 아니에요. 잘 살고 못사 는데 너무 연연 하지 맙시다. 하나 님이 우리 와 함께 하시는 것이 얼마 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잘 살아 내가 가져서 뭐 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축 복으로 영원히 영원히 사는 삶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 영원한 하늘과 땅의 복을 받 았는데, 성경에 출애굽기에서 천대에 은혜를 주신다고 했는데 이제 우리는 거기 서 벗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에게 축복 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건 다 몰 라도 믿음만은 첫째가 되어야합니 다. 우리 는 경제의 IMF가 얼마나 무서운 가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3년만에 IMF는 거의 지나가고 있습 니다. 지난주에 보 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외화가 전 세계에 일곱 째로 많다고 합니다. 보통이 아니지요. 잠 깐동안 엄청난 성장을 가 져왔습니 다. 정치적인 IMF도 소망이 있습니 다. 지식의 IMF, 그 국민이 배우지 못한 것도 언젠가는 배울 수 있습 니 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IMF는 도 덕의 IMF입니다. 학교에 다녀보십 시요. 윤리 도덕 면으로 인간 됨에 F 맞은 사람은 안됩니다. 영적인 F 를 맞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일 이 년에, 십 년 이십 년에 회복하는 것 이 아니에요. 여 러분이 어렵습니까? 그런 것은 잘 만 하면 한 순간에 바 뀔 수가 있어요. 인간 안 된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안 되는 거예요. 천 지가 열 번 바뀌어도 인간 안된 사 람은 못쓰는 거예요. 나는 우리 나 라가 IMF가 올 것도 알았지만 지 금 이런 식으로, 윤리 도덕이 땅에 떨 어진 이런 한심한 시대로 살아간다 면 우리는 회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살 고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제일로 알고 살면서 이 시대를 보 람있게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새 시대가 왔습니다. 하나님과 함 께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 1장 17절 에 온갖 축복이 빛들의 아버지께로 부터 옵니 다. 속지 말라 그랬어요. 세상에 속지 말라, 좋은 것은 아버 지께로 하늘로 위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교회 안에, 말 씀 안에, 은혜 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시 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세 가지 시인이 필요합니 다. 세 가지 고백이 필요합니다. 세 가 지를 돌이켜야 합니다. 첫째, 마음을 돌이켜야 하고 둘째, 발걸음을 돌이 키 고 세번째, 내 생활을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떠난것도 내가 떠났 듯이 돌아오는 것도 내가 돌아와야 해요. 신앙 은 언제나 내가 하는 거 예요. 세상을 사랑한 것도 나 인것 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결심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것도 내 가 안 믿듯이 믿는 것도 내가 믿는 다고 내가 고백해야 됩니다. 내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저버리고 간 것도 내 발걸음이라면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도 내가 옮겨야 되는 거예요. 이건 누가 해 주는 것 이 아니에요. 오늘 이 아들은 지난 날의 잘못된 것을 깨닫고 스스로가 돌이키는 거예 요. 첫째는 마음을 돌 이키는 거예요. 그는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속은 것을 고 백했어요. 시인했어요. 그렇습니다. 인정해야 됩니다. 스스로 고백해야 됩니다. 세상은 헛되더라, 믿을 것이 없더라, 친구도 믿어서는 안되 겠더 라, 하나님을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더라. 속은 것을 언제나 입으로 고백해야 됩니다. 17절을 한번 읽어 보겠 습니다. 눅 15장17절 \\\"이에 스 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 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 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세상에서 나는 이제 길이 없다 죽게 되었다 나는 이제 끝이다. 이런 말 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내가 거지 가 되었다 이런 말을 해야 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을 자 꾸 예찬하는 분들이 있어요. 좋게 말하는 분들이 있 어요. 그건 위험한 생각들입니다. 솔로몬처럼 헛되다 라고 말해야돼요. 삭개오처럼 지난 날을 시인해야 됩니다. 내 가 죄를 지었으니 잘못했습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어요. 베드로도 누가복음 5장에서 아버지를 떠나서는 고기 한 마리도 어제 밤에 잡을 수 없었다고 안되더라고,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두번째는 회개했어요. 자기 자신을 시인하 는 거예요. 자기 잘못을 시인 하고 하나님 앞에 아버지께로 돌아 왔어요. 아버지 앞에 와서 내 모든 잘못된 것을 고 백했어요. 침묵이 금 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백이 금이에 요. 내가 나를 망쳤습니다 아버지 마음을 근심되게 했습니 다. 변명하 면 안됩니다. 변명하면 할수록, 요령 부리면 부릴수록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 니 다. 주의 영을 근심되게 했습니다.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 회개 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가 주어 지는 줄로 믿습니다. 세번째는 품군이라고 자기가 결심을 했어요. 나는 이제 아버지 집에서 품군으로 살겠다는 거예 요. 이것은 굉장한 선 언입니다. 굉장한 선포입니다. 이런 결심하는 사람은 길이 많습니다. 좋 은 자세입니다. 소망 이 있습니다. 이 런 말하면 어디 가든지 사랑 받고 어디 가든지 성공하고 어디 가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허물 은 다 덮입니다. 일자리가 많습니다. 용기 의 사람, 능력의 사람은 나는 이제 품군으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마음 하 나만 낮추면 모든 삶은 형통해 질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와서 신앙생 활 하면서 높은 마음 갖지 마십시 요. 자세가 중요합니다. 저는 탁구를 치는데 구경하는 분들이 늘 그래요. 나를 칭찬하지를 않고 그 폼 가지고 받아 내는 게 기적 같대요. 어떻게 공이 넘어가는지 이해가 안된대요. 나는 괜찮게 치는 것 같은데 자세가 탁구 자세가 아니라는 거예 요. 자세 가 참 중요합니다. 자세가 좌우합니 다. 골프 자세만 잡는데에도 3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친다고 골프 잘 치 는 게 아니래요.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래요. 자세만 잘 잡으면 골프는 저절로 된 대요. 여러분, 가 정에서도 행복 의 자세가 중요합니 다. 다 만들어 놓았지만 자세가 비 딱한 가정은 행복이 비딱하게 가는 거예요. 가정이 건강한 가 정 될 수 없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 나 다 마찬가지 에요. 어느 자리에 가든지 나는 품군이다 라는 마음으 로 살면 행복합니다. 잘됩니다. 성공 합니다. 할 일 많습니다. 제가 어제 국민일보 특집을 처음으로 싣는데 저와 저희 교회를 실었어요. 한 면 을 다른 것 하나 안 싣고 저와 저희 교회에 대해서 실었어요. 나는 너무 죄송해서 내가 거기 실릴만한 자격 도 없는데 인터뷰를 안 하려고 했는 데 목사님 이건 기자의 생각이 아니 고 전체 언론계 신문사에서 회의를 했는데 저를 꼭 실어야 되겠다는 것 이예요. 우리 나라 어른들도 많은데 곤란하다고 해도 꼭 실어야 겠다는 것이예요. 교회를 다니는 기자들이 아마 저를 좋게 보았나봐요. 기자 눈에 드는 것이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면 하여 튼 해보자고 그래서 했 는데 좀 지나친 표현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한가지는 저는 어디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 님 앞에는 품군 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 님의 은혜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 셔서 나와 함께 하셔서이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내 것은 아무 것도 없 다 이런 생각 가지고 하니까 늘 감 사하고 늘 기쁘고 그래서 무엇을 먹 어도 저는 맛있고 어떤 옷을 입어도 내게는 너무 과한 거예요. 감사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옷을 입으면 벗을 생각을 안 합니다. 바꿀 생각 을 안 합니다. 감사하니까. 여러분이 왜 입을 옷이 없습니까 여러분이 눈 이 높아서 그래요. 전 부 다 입을 옷 들이에요.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 옷 사려고 헤매는 것은 눈이 높아 그런 거예요. 어느 식당도 다 맛 있 는 식당이에요. 여러분 입 때문에 문제지요. 음식이 문제가 아니에요. 오늘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왜 우리가 만족이 없어요 왜 행복이 없 어요 왜 여러분이 능력 있게 못사는 거예요 왜 감사하며 못사는 거예요? 여러분이 높아 서 그런 거예요. 그 자세 안 바꾸면 어느 직장 가도 쓰 임 받지 못하고 누구와 결혼해도 어 느 아파트에 가서 살아 도 만족이 없 어요. 주님 나는 품군입니다. 이것이 교회생활에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태풍처럼 몰고 오는 비결이 바 로 이 런 자세에 있는 거예요. 새 천년, 하 나님의 성전에서 새 천년을 하나님 과 함께 하는 모든 성도 이 민족 되 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