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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 막4:24-25/ 김성광 목사/ 신년축복주일설교/ 2009-01-03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 막4:24-25 설교 개요 A. 믿음과 축복에 대하여 1. 믿음과 축복 2. 본문 배경 설명(막4:24-25) B.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 1. 기도 시간에 ‘0’을 더하는 믿음 -기도 1분→10분, 10분→100분/ 응답(마7:7-8) 2. 헌금에 ‘0’을 더하는 믿음 - 헌금 10만 원→100만 원, 100만 원→1,000만 원/ 풍성한 축복(고후9:6-7) 3. 전도한 사람의 숫자에 ‘0’을 더하는 믿음 - 전도 1명→10명, 10명 →100명/ 건강(딤후4:2) 4. 봉사와 충성에 ‘0’을 더하는 믿음 - 봉사, 충성 3분→30분, 5분→50분, 10분→100분/ 기쁨(벧전4:10) C. ‘0’을 더하는 믿음으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자 A. 믿음과 축복에 대하여 1. 믿음과 축복 오늘은 마가복음 4장 24-25절의 말씀으로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제목이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축복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축복의 근원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작은 믿음도 있고, 큰 믿음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믿음을 통해서 크게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어떤 가난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예배도 잘 드리고, 또한 새벽 기도까지 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도 뭔가 좀 하게 하옵소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거지처럼 살지 말고, 나도 정착해서 보람된, 안정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를 하다가 마음속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지. 나도 뭔가 해야 돼!’ 그래서 콩나물을 도매로 싸게 받아서 아파트 입구에 앉아서 콩나물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시장에 가서 물건을 받아와서 콩나물 장사를 했는데 조금씩, 조금씩 돈이 모여서 몇 년이 되자 조그만 가게를 하나 얻을 수 있게 되었고, 또 가게를 얻어서 열심히 장사하니까 나중에는 두부 공장까지 차리게 됐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두부 공장을 차려서 사장이 됐으니 이제는 인생이 살맛 나고 신났습니다. 그런데 두부 공장을 운영하니까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콩나물 장사할 때는 시간이 남아서 예배에 참석하고, 새벽 기도까지 나갔는데, 이제는 두부 공장 사장이 되니까 바빠서 새벽 기도도 못 나옵니다. 수요일도 못 가고, 금요일도 못 가고, 겨우겨우 주일만 한 번씩 교회에 가는 신앙이 됐습니다. 그는 사업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두부 공장, 두부 공장, 돈을 벌어야 돼. 사업 해야 돼.’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기꾼에게 걸리고, 운영이 잘 안 되자 사업에만 정신이 빼앗겨서 결국 신앙도 잃어버리고, 두부 공장도 부도로 날아가고, 장만했던 집도 사라지게 됐습니다. 그는 알거지가 됐습니다. 또 다시 거지가 됐습니다. 그는 자기 과거를 생각했습니다. ‘아! 그때 새벽 기도 다니면서 콩나물 장사 할 때가 행복했구나. 나는 이것저것 다 잃어버렸구나.’ 여러분, 돈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돈, 돈 하면서 돈 따라갔다가 돈도 잃어버리고, 신앙도 잃어버리고, 인생도 헛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돈 버는 것도 좋고, 출세하는 것도 좋고, 성공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우선적으로 이 모든 것은 믿음에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바탕이 있어야 물질도, 돈도, 명예도, 세상의 좋은 조건도 오래 지속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큰 자산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산도 있고, 눈에 안 보이는 자산도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안 보이는 자산 중에서도 가장 큰 자산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크면 큰일을 할 수 있고, 믿음이 작으면 작은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창조적인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하시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믿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온전한 믿음을 가져서,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하나님 앞에 축복받고, 형통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막4:24-25)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 마가복음 4장 24-25절에는 예수께서 그릇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헤아린다’는 것은 ‘그릇’을 말합니다. 큰 그릇에는 크게, 많이 담을 수 있지만, 작은 그릇으로는 적게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그릇으로 표현했습니다. 믿음은 바로 그릇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나 사랑이나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크기의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큰 사람은 크게 역사하지만 작은 사람은 작게 역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큰 사람은 ‘아멘’이 많습니다. 믿음이 작은 사람은 ‘아멘’도 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되는데 어떤 믿음을 가져야 됩니까? 오늘 봉독한 말씀의 제목처럼 ‘0’을 하나 더 더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1이라면 10개의 믿음을 갖고, 믿음이 2라면 20개의 믿음을 갖고, 믿음이 3이라면 거기다 ‘0’을 붙여서 30만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0’을 덧붙여서 10배의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거기에 따른 축복도, 은총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일은 많이 해야 되고, 나쁜 일은 안 해야 됩니다. 공부하는 학생의 공부하는 시간, 사업하는 사람의 사업에 대한 열정, 신앙을 가진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 이것은 많을수록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것, 또한 전도하는 것, 충성, 봉사하는 것, 여기에도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을 저는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 시간에 ‘0’을 더하라. 둘째,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 예물 드리는 믿음에 ‘0’을 하나 더 더하라. 셋째, 전도할 때 전도하는 사람 숫자에 ‘0’을 하나 더 더하라. 넷째, 봉사와 충성에도 ‘0’을 더 더하라. ‘0’을 더할 것이냐, ‘0’을 뺄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0’을 더하는 사람에게는 축복도 더해지지만, ‘0’을 빼는 사람에게는 축복도, 은총도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B.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 1. 기도 시간에 ‘0’을 더하는 믿음 - 기도 1분→10분, 10분→100분/ 응답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기도는 조건적입니다. 아무에게나 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찾게 되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닙니다. 구하는 사람, 찾는 사람, 문을 두드리는 그 사람에게 찾아지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고, 얻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9-11절 말씀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여러분, 조건적으로, 구하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구할 때 끈기 있게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벽 기도로 하나님 앞에 구합니다. 한밤중에 주님 앞에 철야 하면서 기도합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응답 주실 때까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의 그 기도를 통해서 응답하고 역사하여 주십니다. 사무엘상 1장 말씀을 보면,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장 12절 말씀을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서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잠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기도도 시간에 따라 다릅니다. 잠깐 기도하는 것하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 그 기도의 차이는 다릅니다. 기도 시간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정성,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삶의 질과 삶의 양이 달라지게 됩니다. 1분 기도하는 사람과 10분 기도하는 사람, 3분 기도하는 사람과 30분 기도하는 사람, 5분 기도하는 사람과 50분 기도하는 사람, 6분 기도하는 사람과 60분 기도하는 사람은 삶의 질과 양이 다릅니다. 과거에는 기도 시간에 관심을 갖지 않고 무관심했더라도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과 기도 시간의 연관성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 24시간 동안에 몇 시간, 몇 분을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는 뭔가 다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어떤 능력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시50:15). 기도하는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진리 가운데 삽니다(시119:18). 생활의 변화가 나타납니다(시121:1-2; 34:4). 기도를 통해서 새로운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사40:31).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요16:24, 빌4:6-7). 기도하는 사람은 순종을 잘합니다(행4:29). 기도를 하면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가 있고(엡6:12, 벧전5:8), 기도하는 사람은 그 기도를 통해서 기적이 나타납니다(약5:16, 행12:5-10, 행16:25).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얼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걱정과 근심과 불안, 두려움,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벌써 자신감이 넘치고, 그 얼굴에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언니 되는 사람이 갑자기 동생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데 오후에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심각한 수술을 받게 됐는데 살아날 가능성은 10%도 아니고,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선택이기 때문에 수술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언니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아! 이제 동생이 세상을 떠나는가 보다. 동생을 잃는가 보다.’ 그는 그 전화를 받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30분을 기도했습니다. 60분을 기도했습니다. 2시간, 3시간, 3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동생의 생명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내 동생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3시간 기도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확신이 생겼습니다. 기도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하고, 기도는 응답이 왔다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해야 합니다. 3시간 동안 기도하자 그는 마음에 평강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그는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아, 내 동생이 떠나는구나. 내 동생이 결국 수술 받고 잘못 돼서 세상을 떠나는구나. 아니야,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내 동생을 살려줬을 거다.’ 하는 생각이 번득 떠오르면서 ‘내 동생을 살려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과연 그 전화는 사망 전보가 아니라 여동생의 상태가 호전되어서 언니를 만나고 싶으니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전갈이었습니다. 즉시로 3시간 동안 동생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2시간, 3시간, 몇 시간씩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 적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 때, 병들었을 때, 또는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와 기도원, 내가 속한 모든 곳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는 응답받을 때까지, 확신이 생길 때까지 해야 하나님께서 응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시간에 ‘0’을 하나 더 더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아멘’ 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겁니다. 그러나 ‘아멘’ 못하는 사람은 둘째 단계로 넘어갑시다. 2. 헌금에 ‘0’을 더하는 믿음 - 헌금 10만원→100만원, 100만원→1,000만원/ 풍성한 축복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할 것이요 인색(吝嗇)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하나님은 기쁘게, 자원해서, 감사함으로 드리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A.D. 55년경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고린도 교회로 보내는 편지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고통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은 기근과 핍박으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가 여유가 있으니까 예루살렘 성도들을 좀 도와주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하고 구제를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많이 주신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성경을 통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은 목사님들이 만든 말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에 있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근거와 배경을 보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물질 드리고, 예물 드리는 것이 마치 농사짓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지을 때 씨를 심는 것과 비유했습니다. 농부가 종자 씨를 심을 때 그것을 다 먹어 치우지 아니하고, 밭에 심으면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수확을 얻습니다. 옥수수를 심고, 벼를 심어서 열매 맺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종자 씨를 다 먹어 버리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자기가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열심히, 많이 심으면 종자 씨도 살아남을 것이요, 또한 그 다음에 심을 많은 씨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농사의 법칙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연법칙을 통해서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물질적인 관계는 농사를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농부가 농사짓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시편 126편 5절 말씀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씨를 뿌릴 때는 눈물을 흘린다 할지라도, 울어가면서라도 씨를 뿌리면 나중에는 기쁨으로 열매를 거둡니다. 울 일 있다고 해서, 눈물 흘린다고 해서 씨 뿌리는 것을 포기하면 영원히 포기입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씨를 뿌리면 나중에 기쁨과 즐거움과 축복이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음식점을 크게 경영하는 교포가 있었습니다. 대개 교포들이 음식점, 식당 사업을 하면서 세금들을 제대로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로부터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이 먹으면 정부 돈(social security)을 받습니다. 이런 불의한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 한국 사람들이 미국 비자 얻기가 참 힘듭니다. 이 사람도 시카고에서 음식점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세금을 정당하게 내지 않고 조금 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돈을 버는 대로 전부 다 가게 벽에다가 금고를 만들어서 그 속에다 숨겼습니다. 돈을 벌면 저녁에 벽 속에 감추고, 감추고 한 것이 한 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3년쯤 지나서 ‘아, 이제는 몇 십만 달러쯤 됐겠구나.’하고 그가 돈을 계산하려고 그 벽을 뜯었더니 돈이 하나도 남아 있질 않았습니다. 전부 종이조각, 전부 조각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 알고 보니 음식 장사가 음식 하면서 돈을 만지니까 그 돈에 음식 냄새가 배어서 쥐들이 전부 갉아먹고 수십만 달러가 전부 먼지 조각, 종이 조각이 된 것입니다. 세금도 내지 않고, 은행 갖다 주면 적발되니까 은행도 갖다 주지 않고, 숨겨 둔 돈,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모은 돈이 먼지가 되고 조각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어리석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6장 19-20절 말씀을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들은 은행에 놓아 두든, 적금을 들든 여러분이 어떠한 방법으로 돈을 쌓았든지 간에 도둑질 당합니다. 이 사람이 가져가고, 저 사람이 가져가고, 가족, 형제, 친척들이 가져가고, 사업해서 망하고, 돈 꿔 주었다 망하고, 이리저리 다 없어집니다. 이 세상에다 쌓지 말고 하늘나라에다가 재물을 쌓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쓸 것을 넘치게 채워 주십니다. 여러분, 돈과 물질은 쓰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쌓아 놓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할 때 써야 됩니다. 들어올 때는 들어오고 나갈 때는 나가야 되는데, 욕심과 탐욕으로 말세에 돈을 세상에 쌓아 놓은 사람들은 교만해집니다. 불신앙에 빠집니다. 마귀의 시험에 들어갑니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들어온 것만큼 다 없어집니다. 재물이 독수리의 날개 치며 나는 것 같이 날아갈 것입니다(잠23:5). 재벌들의 돈도 없어집니다. 회사 사장, 회장들의 돈도 없어집니다. 이 세상의 돈은 왔다 가고, 없어지고, 사라지고, 돌고 도는 것이 돈입니다. 여러분, 돈에 너무 미련 갖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물질로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부산의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계시는데, 이 장로님은 조그마한 개인 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장로님은 개인 병원의 의사였지만, 자기 병원보다 교회를 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전화가 없다고 하면 자기 병원에 있는 전화기를 떼어 주고, 선풍기가 없다고 하면 교회에 선풍기를 달아 주었습니다. 하여튼 교회에서 뭐가 조금만 필요하다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교회를 위해서 아주 충성하는 그런 장로님이었습니다. 얼마 후 병원이 잘 돼서 이제 그 병원을 확장하려고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더 크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장로님은 ‘하나님의 집이 먼저지, 병원이 먼저냐?’ 하며 주저하지 않고 병원을 확장하려던 돈을 교회에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러고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그 부산 온 지역에 장티푸스,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장티푸스, 전염병이 도니까 사람들이 전부 병원에 왔습니다. 너무너무 환자들이 많아서 옆에 있는 학교 강당을 빌려 이 사람, 저 사람, 사람들을 다 수용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돈이 쌓이고 물질이 쌓였습니다. 이 장로님은 엄청난 돈을 저축하게 되어, 이제는 병원을 확장하려던 계획을 아예 취소하고 종합 병원을 지었습니다. 크게 종합 병원을 지어서 그 종합 병원 원장이 됐습니다. 조그만 개인 병원 원장에서 종합 병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더 풍족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작은 부자는 사람의 노력으로 될 수 있지만, 큰 부자는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심을 통해서, 은총 베풀어주심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물을 생각할 때,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어 퍼내는 것과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부어 주시는 축복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말3:10).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릴 때 ‘0’을 뺄 것인가, ‘0’을 더할 것인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0만 원 드릴 사람이 100만 원 드리고, 20만 원 드릴 사람이 200만 원 드리고, 하나님 앞에 물질을 더 드려서 하늘나라 은행에 적금하고, 하나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10%, 20%, 30% 이자가 아니라 30배, 60배, 100배로 채워 주시고, 여러분의 가정을 풍족하게 하시고, 사업을 크게 번창시키시고, 여러분을 통해서 물질 축복의 영광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 중에서 크게 재물의 축복을 받는 분이 많이 나오시기를 축원합니다. 3. 전도한 사람의 숫자에 ‘0’을 더하는 믿음 - 전도 1명 →10명, 10명 →100명/ 건강 “너는 말씀을 전파(傳播)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警責)하며 경계(警戒)하며 권(勸)하라”(딤후4:2)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도하지 못한 것이 죄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전도를 해야 됩니다. 본문에서 전도에 대한 단어는 무엇입니까? ‘전파하라’입니다. 이 ‘전파하라’는 본래 헬라어 성경에 ‘케륏손,’ ‘공포를 하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말씀을 공포를 하라.’는 명령적인 단어로 씌어 있습니다. 또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회를 보지 말고 항상 주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고, 잘못 믿는 사람을 올바로 믿게 하는 그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1명 전도하던 사람에게 ‘0’이 붙으면 10명 전도하고, 1명을 가르치던 사람이 10명을 가르치고, 10명을 가르치던 사람이 100명을 가르치고, 5명을 전도할 사람이 50명을 전도하고, 50명 가르칠 사람 500명 가르치고, 전도의 숫자에도 ‘0’을 하나 더 더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할 때 도와주시고 역사하십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말씀에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福音)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라.” 전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 화가 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대개 보면, 전도하지 않아서 화 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저기 몸이 늘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특별한 병명도 아니고, 병원 가서 낫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전도하지 않아서 건강을 잃어버리고, 지위를 잃어버리고, 전도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빼앗기고 떠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도를 해야 전도하지 않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 말씀에도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康健)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傳道)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은 전도하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건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육체를 건강하게 하십니다. 정신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시험과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기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왜 인생에 기쁨이 없습니까? 전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보람도 없습니다. 의미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자는 멸망치 않습니다. 저는 풍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씨를 뿌려야 거두는 재미도 있지, 심는 것도 없고 거두는 것도 없고 매일 남 뿌리고 거두는 것만 구경하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여러분, 전도에 구경꾼이 되지 마시고, 전도하는, 씨 뿌리는, 전도의 일꾼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도 보면 전도 열심히 하는 교회가 크게 부흥합니다. 회사도 전도하는 회사가 크게 부흥하고 발전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타락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게을러집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교만해집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마귀의 시험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동대문에서 30년 동안 장사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교회는 왔다 갔다 하나 별로 남에 대한 관심도 없고 전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돈 버는 재미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30년 동안 돈을 벌어서, 젊은 나이에 시작했으나 이제는 머리가 허옇게 되고 60이 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출근하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예수님 믿으세요.” 하며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그 전도하는 사람을 만나자 그는 마음에 큰 쇼크를 받았습니다. ‘나는 돈만 벌려고 한평생, 젊었을 때부터 이렇게 백발이 되도록 ‘돈, 돈’하고 살았는데, 저 젊은이는 전도를 하다니…. 전도를 하는구나. 나한테 전도를 했어.’ 그러면서 그는 자기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돈을 벌어서 어디다 쓸 것인가? 쓰지도 못하고 죽을 돈을 왜 이렇게 계속해서 벌고 또 버는 건가? 내 인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돈이라는 것은 벌고 써야지 쓰지도 못할 돈 자꾸 쌓아 놓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들, 딸한테 물려준다고 해서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돈 때문에 방탕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고,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합니까? 이웃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얼마든지 쓸 곳이 많은데, 오늘날은 돈 벌어서 자꾸 쌓아 두는 것만이, 그것만이 좋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때 생각했습니다. “나도 이제는 좋은 일 좀 해야지. 삶에 대한 보람을 느껴야 해.” 그렇게 생각한 후부터 그는 물건을 팔면서 물건 속에다 전도지를 한 장씩, 한 장씩 넣어 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제는 전도가 삶의 목적이고, 장사는 부업입니다.” 그 전에는 돈 버는 것이 전문이고 교회 나가는 것이 부업이었는데, 그가 인생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서는 이제 전도하는 것이 목적이고 장사하는 것은 부업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하는 사람은 삶에 의미가 있습니다.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고 삶의 목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하지 않고 돈, 돈, 돈 하면서 세상 쾌락, 세상 죄악, 세상으로 흘러가는 사람은 결국 그 세상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지 못하고,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하지 않으면 죄를 범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전도하는 사람에게 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 사장님이 교회에 10년 동안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목사님이 전도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렇지, 내가 교회 나오는 것이 좋고 하나님 믿는 것이 좋다면, 왜 좋은 것을 나 혼자만 믿는가? 진정으로 내게 도움이 되고 좋으면 남에게도 권해야지. 음식 먹고 맛있으면 그 음식 먹어보라고 하고, 내가 좋은 건 좋다고, 다른 것은 다 말하면서 왜 교회 나오는 것, 예수 믿는 것, 하나님 믿는 것은 왜 남에게 전하지 못하는가? 나도 전도해야 되겠다.’ 그래서 교회 나온 지 10년 만에 그는 전도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사무실에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나도 이제는 전도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사무실에 먼저 들어오는 사람에게 전도하겠습니다.’하고 기도하고 결정을 했는데, 마침 직원이 결재 서류를 가지고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왔습니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리 오게. 잠깐 할말이 있네. 자네 교회 다니나?” 직원이 깜짝 놀랐습니다. “사장님, 웬일로 교회 다니냐고 물어보십니까? 결재해 주십시오.” “아니야, 결재보다 더 중요한 게 있네. 내가 10년 동안 교회 다니고 예수 믿어도 한 번도 자네에게 전도를 하지 않았지? 내가 이제부터 자네에게 전도를 해야겠어. 교회 나가세.” 그랬더니 이 직원이 “사장님 고맙습니다. 저는 사장님이 10년 동안 교회 나가는 것 알고 있었 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좋아서 나가는지 나빠서 나가는지 그걸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데 가면 나보고 한 번도 같이 가자는 소리를 안 하는가? 아마 사장님은 나 같은 사람은 상대도 안 하는가 봐. 아마 교회는 나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나 봐.’하고 생각했는데 이제 사장님이 나보고 교회 가자고 그러니까 같이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사장님과 꼭 같이 가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여러분, 의외로 전도하고자 하면 쉽게 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좀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부인이 좀 같이 가자고 했으면 좋겠는데, 부모가 좀 같이 가자고 했으면 좋겠는데, 전도하지 않으니까 옆에서 구경만 하고 방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가족 중에서, 또는 형제, 이웃, 친척, 친구 중에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할 때, 전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전도하는 자에게 물질을 주시고, 전도하는 자에게 기쁨을 주시고, 전도하는 자에게 삶의 보람을 느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전도하시는 전도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봉사와 충성에 ‘0’을 더하는 믿음 - 봉사, 충성 3분→30분, 5분→50분, 10분→100분/ 기쁨 “각각 은사(恩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恩惠)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은사를 받은 대로, 은혜를 받은 대로, 하나님 앞에 사랑과 축복을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청지기’라는 말 많이 들으셨지요? ‘청지기’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인데, 그 뜻은 ‘가정 관리자, 가정의 살림을 맡은 종’을 말합니다. 청지기는 가정 살림을 맡은 종입니다. 주인이 바쁘고 할 일이 많으니까 집안 살림을 다 맡아 하는 종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위임된 사람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사를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것에 종으로서 충성하는 것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종은 자기의 소유가 없습니다. 다 주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에게 잘만 하면 주인이 상도, 보상도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분도 주시고 은사도 주십니다. 예언의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구제하는 것, 다스리는 것, 긍휼을 베푸는 은사를 직분을 위해 주셨고, 또한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분도 주시고 이 모든 은사도 주셨습니다. 이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집사, 장로, 권사, 구역장, 조장 이것도 다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 직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청지기 직분입니다. 장관도, 국회의원도 청지기 직분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직업이 다 하나님 앞에 청지기 직분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판사, 검사도 다 청지기입니다. 회사 사장들도 다 하나님 앞에 청지기입니다. 하늘과 땅,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늘과 땅을 다 창조하신 하나님께 속하였고, 이 모든 직분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인생을 깨달아야, 겸손한 인생을 살고 하나님 앞에 은총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축복받고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잠언 28장 20절에 충성된 자는 복이 많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은총과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께서 달란트 비유를 설명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있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감췄다가 가져와서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책망 받고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네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열 달란트를 만들어가지고 주인에게 왔을 때 주인이 칭찬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3절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주인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늘도 땅도 세상 만물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창조된 모든 것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인정 해야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말씀에도 “…죽도록 충성(忠誠)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충성하는 사람은 어떻게 충성해야 합니까? 목숨 걸고 충성하는 겁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놀아 가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눈치 봐 가면서, 한눈팔면서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죽도록, 목숨 걸어 놓고 충성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봉사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봉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행복이 주어집니다. 보람과 기쁨이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보람과 기쁨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3분 봉사하는 사람은 30분 봉사하고, 5분 봉사, 충성하는 사람은 50분 봉사하고, 10분 봉사하는 사람은 100분 봉사하여 봉사하는 시간을 늘리고 봉사하는 질을 높여서 하나님께 봉사해야 합니다. 장로, 권사, 집사, 조장, 구역장, 선교회, 성가대, 교회학교로 봉사해야 합니다. 예배만 보고 훌쩍 가는 것은 진정한 봉사·충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초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도 봉사하게 하옵소서. 충성하게 하옵소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교인 되지 말게 하시고, 무언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봉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채문경 교수라는 분이 간증을 했습니다. 그분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가서 풍금으로 반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훌륭한 반주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피아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에서 반주하기 시작하여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반주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반주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그는 학교 공부보다 교회 반주를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피아노과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피아노과에 입학하고 나서도 성가대 반주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독일 베를린 음대 성악과 교수가 내한했다가 반주자가 필요해서 누가 반주를 잘하는지 수소문했는데, 이 채문경 학생이 반주자로 채택이 됐습니다. 반주를 하고 나니까 그 독일 대학 교수가 유학을 제안했습니다. “반주를 열심히 하고 잘하는데, 독일로 유학 가고 싶으냐?” “네, 가고 싶어요.” 그래서 독일로 유학을 갔습니다. 독일로 유학 가서 오르간을 공부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 초대 오르간 연주자로 초빙 받아서 상임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국제 초청 오르간 연주를 하였고, 국제 콩쿠르 심사 위원이 되었습니다. 대학 교수가 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릴 때 교회에서 풍금, 피아노 만지면서 ‘하나님, 이 반주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며, ‘반주, 반주, 반주’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국가의 행사에도, 또 국제적인 콩쿠르에도 관여하게 하시고, 대학 교수가 되기까지 축복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봉사를 할 것인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할 것인가? 비록 적은 일이라 할지라도 충성하면 큰 것 주시고, 큰 것까지 충성하면 더 큰 것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C. ‘0’을 더하는 믿음으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자 믿음에 ‘0’을 더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 설교 제목에 은혜가 됩니까? 믿음이 생깁니까? 올 한 해 그렇게 살아 보시겠습니까? 가난과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은 믿음으로 겨우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큰 믿음을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왕 가지고 나오려면 큰 것, 큰 그릇을 가지고 나와야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도 많이 담지, 매일 손바닥만 가지고 나오니 뭐 담길 게 있습니까? 손바닥 내밀어봐야 비가 요리 떨어지고 조리 떨어지고 남는 게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받으려면 그릇이 커야 되는 것처럼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못을 파면 연못 물이 출렁거리고, 댐을 파면 댐 물이 출렁거립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데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마시고 믿음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0’을 더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부자 되고 물질 축복 받으십시오. 기도해서 응답 받으시기 바랍니다. 전도 많이 해서 많은 사람 앞에 존경과 칭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 앞에 봉사·충성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만 봉사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동창회에서도, 사회에서도, 또한 교회에서도 봉사·충성 많이 할 때, 충성하는 것만큼 하나님께서 은총과 축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전라북도 어느 교회에 열심 있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늘 하나님께 충성하고, 더 많은 것으로 헌금할 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한번은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목표액을 정하고, 전 교인이 작정 헌금을 하기로 하고, 먼저 제직들부터 모범을 보이려고, 모두 모여서 한 사람, 한사람 돌아가면서 자신의 작정 헌금 액수를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자기는 맨 나중에 작정하겠노라고 지켜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형편이 어려우니까 그러려니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작정 순서가 끝나고, 이 집사님이 작정할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집사님은 다른 사람들의 작정 헌금 중에서 가장 많은 액수에다가 '0'을 하나 더해서 자기의 작정액으로 정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집사님은 날마다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작정 헌금을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그 결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집사님을 서울로 옮기게 해 주시더니, 장사를 시작하게 해 주셨습니다. 집사님은 얼마나 장사가 잘되던지, 작정한 건축헌금을 모두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서 큰 부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서울 어느 교회의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0'을 더하는 믿음으로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여러분, '0'을 더하는 큰 믿음을 가져서, 차고 넘치는 큰 축복을 받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성광 목사(서울 강남교회)
100-1=0 /삼하16:1-23/ 강문호목사 2015-03-18 11:51:17 read : 11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두부 장사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10에서 5을 빼면 얼마니?> 두부 장사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둘이요.> 왜 그랬을 가요? 대답은 이것입니다.s <계산을 잘못해서
100-1=0 /삼하16:1-23/ 강문호목사 2015-03-18 11:51:17 read : 11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두부 장사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10에서 5을 빼면 얼마니?> 두부 장사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둘이요.> 왜 그랬을 가요? 대답은 이것입니다.s <계산을 잘못해서입니다.> 100에서 하나를 빼면 수학적으로는 99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전혀 아닙니다. 100에서 하나를 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100가지 잘 했는 데 하나를 실수하면 모두가 무효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초등학교에서 릴레이 대회가 있었습니다. 한 조가 10명씩입니다. 릴레이를 할 때 법칙이 있습니다. 1번과 마지막 번에 제일 잘 뛰는 사람을 배치하는 법입니다. 9번까지 뛰었습니다. 한 조 선수들이 잘 뛰어 단연 일등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조에 마지막 주자는 마라톤 선수였습니다. 보나 마나 그 조가 일등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지막 주자가 엄청난 착각을 하였습니다. 바톤을 쥐고 역주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자기가 잘못 돌았음을 알았습니다. 꼴찌였습니다. 다 잘했어도 마지막 하나를 잘못 하고 나니 모두가 무효였습니다. 100-1은 무효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모시고 들어갑니다. 웃시야 왕 이야기입니다. 웃시야 왕은 성경에 등장하는 왕중에서 가장 장점임 많은 왕이었습니다. 웃시야 왕은 장점은 100가지였으나 단점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친 왕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웃시야 왕의 장점 16세에 왕이 되었습니다(대하 26;3) 52년 동안 왕노릇하였습니다(대하 26;3) 하나님보시기에 정직하게 정치를 잘 하였습니다(대하 26;4) 하나님의 선지자 스가랴와 침숙하게 지내며 신정 정치를 하였습니다(대하 26;5)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대하 26;5) 하나님이 도와 주셨습니다(대하 26;7) 암몬 나라가 조공을 바쳤습니다(대하 26;8) 나라가 강성하여졌습니다(대하 26;8) 이름이 널리 퍼져 유명한 왕이 되었습니다(대하 26;8) 광야에 망대를 세워 국방을 든든하게 하였습니다(대하 26;10) 물 웅덩이를 많이 발견하여 농사도 잘 되었습니다(대하 26;10) 군대 큰 용사 장군이 2,600명이나 되었습니다(대하 26;12) 건장한 군대가 307,500명이었습니다(대하 26;13) 무기도 많아 강한 군대가 되었습니다(대하 26;14) 신무기를 많이 개발하였습니다(대하 26;15)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있었습니다(대하 26;15) 나라가 점점 강성하여 갔습니다(대하 26;15) 이같이 웃시야 왕에게는 좋은 일만 있었습니다. 역대하 26장 1절부터 읽으면서 웃시야 왕에게 안 좋은 부정적인 것은 단 한마디도, 단 한 단어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가 좋은 것이었습니다. 웃시야왕의 약점 그러나 16절에 웃시야 왕의 한 가지 잘못 한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웃시야왕은 모든 것이 무효가 되었습니다. 100-1은 0였습니다. 16절은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대하 26;16) 52년 동안 그렇게 좋았던 웃시야 왕은 한 단어로 악을 행하였습니다. 악 한 가지가 모두를 무효로 만들었습니다. 100에서 하나를 빼니까 모두가 끝이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는 데 구체적으로 무슨 악입니까? 웃시야왕은 성전에 성소로 들어 갔습니다. 그 곳은 왕은 들어가지 못 하고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 곳에 들어가서 자기가 분향하려고 향로를 잡았습니다. 그 때 가장 용기있는 아사랴 제사장이 자기처럼 용기가 있는 제사장 80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왕에게 정면 도전하였습니다.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 하리이다>(18) 웃시야 왕은 분향하려고 하다가 부들부들 떨면서 화을 냈습니다. 그 때 이마에 문둥병이 생겼습니다. 모두 달려 들어 웃시야 왕을 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별궁에 가두었습니다.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다 좋았는 데 하나가 안 좋았습니다. 시작은 좋았는 데 끝이 안 좋았습니다. 100에서 하나를 빼면 무효입니다. 내가 독일 집회에 갔을 때였습니다. 엄청나게 큰 온천 수영장에 수영을 하러 갔습니다. 온천 목욕탕이 아니라 온천 수영장입니다. 그 많은 물을 다 퍼내고 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큰 수영장에 똥 덩어리가 가라앉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 푸고 보니 낙엽이었습니다. 하나가 문제입니다. 웃시야 왕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습니다. 다 잘 했어도 악을 행하면 모든 것이 망쳐집니다. 교만은 3가지 죄악을 잉태합니다. 교만 때문에 웃시야 왕은 모든 것이 잘 되어 나가다가 문둥병에 걸려 별궁에 거하다가 죽었습니다. 100에서 하나를 빼면 무효입니다. 무슨 악입니까? 1. 교만은 위치 파악의 혼돈을 가져옵니다. 웃시야 왕은 52년 동안 왕노릇하다 보니 착각에 빠졌습니다. 자기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못 하는 곳이 없고, 못 들어 갈 곳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만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만 할 수 있는 향을 피웠습니다. 자기 위치 파악에 혼돈이 왔습니다.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종 선지자를 옆에 모시고 살면서 선지자가 말하는 대로 잘 하였습니다. 특별히 스가랴 선지자를 옆에 두고 정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 후부터 경거망동하게 된 것같습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자기 위치를 찾지 못 하고 벗어나는 것이 죄입니다. 우주 역사상 가장 먼저 일어난 죄는 루시퍼의 반란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루시퍼가 위치 파악에 혼돈이 생겨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구 역사상 최초의 죄는 아담과 하와가 자기 위치 파악에 혼돈을 일으켜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한 사건입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6;18-19)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잠 18;2) 교만한 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합니다. 인격은 입이 아니라 귀입니다. 말하지 않고 듣는 것이 겸손이요, 듣지 않고 말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웃시야 왕은 선지자가 성소에서 나가라고 하는 데 듣지 않고 자기 말만하였습니다. 결국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이야기입니다. 위나라 문후가 어느 날 신하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나를 어떤 왕으로 생각하는고?> 신하들은 하나같이 모두 다 입을 맞춘 것처럼 똑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왕은 참으로 어지신 왕이 옵니다.> 책황이라는 신하가 왕앞에 설 차례였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은 참으로 어지신 왕이 아니 옵니다. 언젠가 중상국을 토벌하신 후에 그 곳에는 소신을 봉하셔야 마땅한 데 황 태자를 영주로 세우셨습니다. 도리에 어긋난 처신을 하신 왕이시기에 어지신 왕이라 할 수 없나이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노발 대발하였습니다. 문후 왕은 이 신하를 쫓아내 버리셨습니다. 임좌 신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신하들은 임좌가 무슨 말을 할 가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은 참으로 어지신 왕이 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임좌가 대답하였습니다. <자고로 어진 임금밑에서는 직언하는 신하가 난다고 하옵니다. 그런데 책황은 확실히 맞는 직언을 하였습니다. 이런 신하가 왕밑에 있다는 것은 왕이 어진 왕이라는 증거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이 말했습니다. <허허.... 참 옳은 말이로고. 내가 책황에게 큰 잘못을 할 뻔 하였구나.> 그리고 책황을 다시 불러 드렸습니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이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웃시야왕은 교만함으로 자기 위치 파악에 혼돈을 일으켜서 결국 100가지 좋은 것을 무효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2. 교만은 매너리즘의 죄를 짓게 합니다. 매너리즘이 무엇입니까? 만성이 된 나태한 상황을 매너리즙이라고 합니다. 웃시야 왕은 52년 동안 왕노릇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교만하다는 것은 자기 돌봄이 없고 긴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52년 왕노릇은 긴장을 완화시켰습니다. 청개구리같습니다. 청개구리를 뜨거운 물속에 집어 넣으면 놀라서 1초만에 뛰어 나옵니다. 그러나 따뜻한 물에 청개구리를 넣으면 따뜻한 것이 기분 좋아서 가만히 있습니다. 아주 살그머니 온도를 조금씩 천천히 높여 줍니다. 그러면 조금 후 삶아지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죽고 맙니다. 이것이 긴장이 완화된 매너리즘입니다. 바이올린은 안 쓸 때에는 풀러 둡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하려면 바짝 조여 주어야 합니다. 키타도 그렇고 활도 그렇습니다. 바로 사용하려면 긴장을 주어야 합니다. 팽팽하게 당겨 주어야 합니다. 피아노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팽팽한 줄이 느슨하여 집니다. 다시 조율하여 주어야 합니다. 자동차도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며 보링하여 주어야 합니다. 사람도 같습니다. 가끔 자극이 필요합니다.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명재상이었던 안영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재상 안영을 모시고 길거리에 나가면 국민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며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절하였습니다. 안영에게 절하는 것인 데 오래 오래 마부 노릇을 하다 보니 자기에게 절하는 것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안 영보다 마부가 체격도 좋고 더 잘 생겼습니다. 국민들이 절할 때마다 앞 서 가는 그가 손을 흔들며 자기가 인사를 받았습니다. 마치 자신에게 그들이 인사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겁니다. 그럴수록 그 마부의 어깨는 더욱 올라갈 수밖에 없었고, 그 마부의 교만함은 더욱 거세어져만 갔습니다. 사실 그는 뒤에 앉아 있는 안영보다 키도 크고 얼굴도 훨씬 잘생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부의 부인은 문틈으로 의기양양하게 말을 모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슬픔에 빠져 버렸습니다. <저것이 아닌데...> 저녁 때 마부가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당신이 모시는 그 분은 제나라 재상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태도를 보면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며 겸손해 하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한낮 마부이면서 그렇게 교만하게 처신하니 이것이 제가 당신을 떠나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아내의 말에 충격을 받은 마부는 자기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교만함을 보이지 않겠다고 부인에게 다짐하였습니다. 그 날부터 마부는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평소와 달라진 마부의 모습을 본 재상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마부는 집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재상은 부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교만함을 접은 마부를 기특하게 여겨 대부라는 벼슬을 천거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역사를 간략하게 역은 사가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위대한 사람 세 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마부가 위대한 사람입니다. 현명한 아내의 올바른 충고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며 고치는 마부의 용기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위대한 사람은 마부의 상사입니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부하의 변화를 인정해 줄줄 알았습니다. 자기 위치를 모르던 그를 눈감고 있다가 변화되는 것을 보고 승진시킨 그가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마부의 아내입니다. 현명한 아내가 위대한 남편을 만들었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남편을 바르게 만든 여인입니다. 절대 정권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52년 동안 장기 집권하면서 교만하여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그 메너리즘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비참한 생을 마쳤습니다. 이집트 무바라크도 30년 집권하면서 78조 개인 재산을 모았습니다.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매너리즘을 국민들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부자는 무인도 하나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잘 심고 꽃도 여기저기 심어 아름다운 섬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좋아 하는 토끼를 풀어 놓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끼들은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털에 윤기가 사라지면서 병난 토끼같이 보였습니다. 드디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자는 탄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병이 나다니.....> 수의사를 불렀습니다. 고개를 저으면서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고 돌아 갔습니다.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 갔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현자가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리를 같이 기르십시오.> 부자는 놀라서 물었습니다. <토끼를 다 잡아 먹으면 어떻게 합니까?> 랍비가 말했습니다. <토끼의 병은 환경이 너무 좋아서 생긴 병입니다. 이리와 함께 기르면 이리에 안 잡혀 먹히려고 힘차게 도망다닐 것입니다. 눈빛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다리에 힘이 생길 것입니다. 털에 윤기가 흐를 것입니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토끼들은 몇 마리 몇 마리 잡혀 먹히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건강하였습니다. 긴장이 있어야 합니다.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환경을 바꾸어야 합니다. 웃시야는 환경을 바꾸는 데 실패하여 100-1는 0로 만들었습니다. 3. 교만은 분노라는 죄를 짓게 합니다. 웃시야 왕이 교만하여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려고 하였습니다. 용기있는 아사랴 제사장이 80명과 함께 가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때 웃시야 왕은 화를 냈습니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의 이마에 문둥병이 생긴지라>(19) 겸손한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화를 냅니다. 화를 낸다는 자체가 교만입니다. 화가 극치에 달할 때 병이 생겼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느니라.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잠29;8-11) 이스라엘 힐렐 랍비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자기를 잘 다스리는 랍비의 모델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자기 친구와 내기를 걸었습니다. <네가 힐렐 랍비를 화나게 만들면 은 400개를 주겠다.> 그 친구는 어떻게 하든지 힐렐 랍비를 화나게 만들어서 은 400개를 받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전 날 힐렐 랍비를 만나러 갔습니다. 힐렐 랍비는 안식일을 잘 맞기 위하여 몸을 깨끗이 닦고 있었습니다. 그는 문앞에서부터 무례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힐렐 랍비를 화나게 만들 작정이었습니다. <힐렐! 어디 있소? 힐렐! 어디 있소?> 쌍스럽게 이름을 부르면 반말을 하였습니다. 힐렐 랍비는 자기를 부르는 음성을 듣고 목욕을 하다 말고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는가?> 그 친구는 천덕스럽게 물었습니다. <당신께 질문 한 가지 하겠습니다.> <말해 보게나.> <왜 바벨론 사람은 머리가 둥글지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힐렐 랍비는 태연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자네는 아주 좋은 질문을 하네. 바벨론 사람들이 머리가 둥근 이유가 있지. 그들의 산파가 아이 받는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네.> 그 친구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힐렐 랍비는 다시 옷을 벗고 목욕을 시작하였습니다. 조금 후 다시 가서 소리를 지르며 힐렐 랍비를 불렀습니다. 힐렐 랍비는 또 목욕하다 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정중히 물었습니다. <왜 왔지?> <질문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무엇인가?> <왜 아프리카 사람들은 발이 넓지요?> <그들은 습지에 살기 때문이라네.> 그 친구는 이 대답을 듣자 말자 힐렐 랍비에게 말했습니다. <질문을 하나 더 하려고 하는 데 화내지 말아 주십시오.> 힐렐 랍비은 말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게나> <당신 탈무드 학교 교장 힐렐이요?> <그렇다네.> <그렇다면 유대인 가운데 당신같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요.> <무슨 말인가?> <당신 때문에 내가 은 400개를 잃게 되었습니다.> 힐렐 랍비은 정중히 말했습니다. <내가 이성을 잃는 것보다 자네가 은 400개를 잃는 편이 더 낫겠네.> 이같이 힐렐은 일생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분노와 거리가 먼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분노에 대하여 설교하고 났을 때 한 부인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나는 성질이 급해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가끔 분노를 폭팔합니다. 그런데 그 때 뿐이거든요. 일분도 안 되어 그 사람과 툭툭 털고 일어납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엽총도 그렇습니다. 한 방이면 끝나지요. 그런데 한방만 쏘아도 박살나고 말지요.> 웃시야 왕의 한번의 화가 결정적이었습니다. 100-1=0입니다. 웃시야 왕이 우리에게 그런 진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00가지 잘 해도 하나가 부족하면 모두를 무효화시킵니다. 온 몸의 100군데가 다 건강하여도 위에 암이 들어가면 위암으로 100가지 건강이 무효입니다. 자동차 부속 2만개가 다 좋아도 핸들 하나가 없으면 운전을 할 수 없습니다. 삼손도 100가지가 다 좋아도 이성에게 약하니까 다 무효가 되어 눈이 빠져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다 좋아도 돈에 약하니까 다 무효가 되었습니다. 100-1=0입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만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킨 모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부자였기에 돈이 많아 그 한 가지 부족을 채우지 못 하고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 청년을 천국에서 만날 수 없습니다. 다 좋아도 한 가지 부족으로 가장 귀중한 구원을 얻지 못 하였습니다. 영원을 위하여 영원하지 아니한 것을 포기하지 못 하였습니다. 묻습니다. <당신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요?> 100-1=0입니다.
100-1=0/ 삼하16:1-23/ 강문호 목사/ 2015-03-18
100-1=0 삼하16:1-23 두부 장사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10에서 5을 빼면 얼마니?> 두부 장사 아들이 대답하였습니다. <둘이요.> 왜 그랬을 가요? 대답은 이것입니다. <계산을 잘못해서입니다.> 100에서 하나를 빼면 수학적으로는 99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전혀 아닙니다. 100에서 하나를 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100가지 잘 했는 데 하나를 실수하면 모두가 무효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초등학교에서 릴레이 대회가 있었습니다. 한 조가 10명씩입니다. 릴레이를 할 때 법칙이 있습니다. 1번과 마지막 번에 제일 잘 뛰는 사람을 배치하는 법입니다. 9번까지 뛰었습니다. 한 조 선수들이 잘 뛰어 단연 일등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조에 마지막 주자는 마라톤 선수였습니다. 보나 마나 그 조가 일등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지막 주자가 엄청난 착각을 하였습니다. 바톤을 쥐고 역주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자기가 잘못 돌았음을 알았습니다. 꼴찌였습니다. 다 잘했어도 마지막 하나를 잘못 하고 나니 모두가 무효였습니다. 100-1은 무효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모시고 들어갑니다. 웃시야 왕 이야기입니다. 웃시야 왕은 성경에 등장하는 왕중에서 가장 장점임 많은 왕이었습니다. 웃시야 왕은 장점은 100가지였으나 단점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친 왕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웃시야 왕의 장점 16세에 왕이 되었습니다(대하 26;3) 52년 동안 왕노릇하였습니다(대하 26;3) 하나님보시기에 정직하게 정치를 잘 하였습니다(대하 26;4) 하나님의 선지자 스가랴와 침숙하게 지내며 신정 정치를 하였습니다(대하 26;5)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대하 26;5) 하나님이 도와 주셨습니다(대하 26;7) 암몬 나라가 조공을 바쳤습니다(대하 26;8) 나라가 강성하여졌습니다(대하 26;8) 이름이 널리 퍼져 유명한 왕이 되었습니다(대하 26;8) 광야에 망대를 세워 국방을 든든하게 하였습니다(대하 26;10) 물 웅덩이를 많이 발견하여 농사도 잘 되었습니다(대하 26;10) 군대 큰 용사 장군이 2,600명이나 되었습니다(대하 26;12) 건장한 군대가 307,500명이었습니다(대하 26;13) 무기도 많아 강한 군대가 되었습니다(대하 26;14) 신무기를 많이 개발하였습니다(대하 26;15)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 있었습니다(대하 26;15) 나라가 점점 강성하여 갔습니다(대하 26;15) 이같이 웃시야 왕에게는 좋은 일만 있었습니다. 역대하 26장 1절부터 읽으면서 웃시야 왕에게 안 좋은 부정적인 것은 단 한마디도, 단 한 단어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가 좋은 것이었습니다. 웃시야왕의 약점 그러나 16절에 웃시야 왕의 한 가지 잘못 한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웃시야왕은 모든 것이 무효가 되었습니다. 100-1은 0였습니다. 16절은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대하 26;16) 52년 동안 그렇게 좋았던 웃시야 왕은 한 단어로 악을 행하였습니다. 악 한 가지가 모두를 무효로 만들었습니다. 100에서 하나를 빼니까 모두가 끝이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는 데 구체적으로 무슨 악입니까? 웃시야왕은 성전에 성소로 들어 갔습니다. 그 곳은 왕은 들어가지 못 하고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 곳에 들어가서 자기가 분향하려고 향로를 잡았습니다. 그 때 가장 용기있는 아사랴 제사장이 자기처럼 용기가 있는 제사장 80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왕에게 정면 도전하였습니다.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 하리이다>(18) 웃시야 왕은 분향하려고 하다가 부들부들 떨면서 화을 냈습니다. 그 때 이마에 문둥병이 생겼습니다. 모두 달려 들어 웃시야 왕을 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별궁에 가두었습니다.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다 좋았는 데 하나가 안 좋았습니다. 시작은 좋았는 데 끝이 안 좋았습니다. 100에서 하나를 빼면 무효입니다. 내가 독일 집회에 갔을 때였습니다. 엄청나게 큰 온천 수영장에 수영을 하러 갔습니다. 온천 목욕탕이 아니라 온천 수영장입니다. 그 많은 물을 다 퍼내고 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큰 수영장에 똥 덩어리가 가라앉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 푸고 보니 낙엽이었습니다. 하나가 문제입니다. 웃시야 왕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습니다. 다 잘 했어도 악을 행하면 모든 것이 망쳐집니다. 교만은 3가지 죄악을 잉태합니다. 교만 때문에 웃시야 왕은 모든 것이 잘 되어 나가다가 문둥병에 걸려 별궁에 거하다가 죽었습니다. 100에서 하나를 빼면 무효입니다. 무슨 악입니까? 1. 교만은 위치 파악의 혼돈을 가져옵니다. 웃시야 왕은 52년 동안 왕노릇하다 보니 착각에 빠졌습니다. 자기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못 하는 곳이 없고, 못 들어 갈 곳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만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만 할 수 있는 향을 피웠습니다. 자기 위치 파악에 혼돈이 왔습니다.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종 선지자를 옆에 모시고 살면서 선지자가 말하는 대로 잘 하였습니다. 특별히 스가랴 선지자를 옆에 두고 정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 후부터 경거망동하게 된 것같습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자기 위치를 찾지 못 하고 벗어나는 것이 죄입니다. 우주 역사상 가장 먼저 일어난 죄는 루시퍼의 반란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루시퍼가 위치 파악에 혼돈이 생겨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구 역사상 최초의 죄는 아담과 하와가 자기 위치 파악에 혼돈을 일으켜서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한 사건입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6;18-19)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잠 18;2) 교만한 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합니다. 인격은 입이 아니라 귀입니다. 말하지 않고 듣는 것이 겸손이요, 듣지 않고 말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웃시야 왕은 선지자가 성소에서 나가라고 하는 데 듣지 않고 자기 말만하였습니다. 결국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 이야기입니다. 위나라 문후가 어느 날 신하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나를 어떤 왕으로 생각하는고?> 신하들은 하나같이 모두 다 입을 맞춘 것처럼 똑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왕은 참으로 어지신 왕이 옵니다.> 책황이라는 신하가 왕앞에 설 차례였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은 참으로 어지신 왕이 아니 옵니다. 언젠가 중상국을 토벌하신 후에 그 곳에는 소신을 봉하셔야 마땅한 데 황 태자를 영주로 세우셨습니다. 도리에 어긋난 처신을 하신 왕이시기에 어지신 왕이라 할 수 없나이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노발 대발하였습니다. 문후 왕은 이 신하를 쫓아내 버리셨습니다. 임좌 신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신하들은 임좌가 무슨 말을 할 가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은 참으로 어지신 왕이 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임좌가 대답하였습니다. <자고로 어진 임금밑에서는 직언하는 신하가 난다고 하옵니다. 그런데 책황은 확실히 맞는 직언을 하였습니다. 이런 신하가 왕밑에 있다는 것은 왕이 어진 왕이라는 증거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이 말했습니다. <허허.... 참 옳은 말이로고. 내가 책황에게 큰 잘못을 할 뻔 하였구나.> 그리고 책황을 다시 불러 드렸습니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이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웃시야왕은 교만함으로 자기 위치 파악에 혼돈을 일으켜서 결국 100가지 좋은 것을 무효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2. 교만은 매너리즘의 죄를 짓게 합니다. 매너리즘이 무엇입니까? 만성이 된 나태한 상황을 매너리즙이라고 합니다. 웃시야 왕은 52년 동안 왕노릇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교만하다는 것은 자기 돌봄이 없고 긴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52년 왕노릇은 긴장을 완화시켰습니다. 청개구리같습니다. 청개구리를 뜨거운 물속에 집어 넣으면 놀라서 1초만에 뛰어 나옵니다. 그러나 따뜻한 물에 청개구리를 넣으면 따뜻한 것이 기분 좋아서 가만히 있습니다. 아주 살그머니 온도를 조금씩 천천히 높여 줍니다. 그러면 조금 후 삶아지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죽고 맙니다. 이것이 긴장이 완화된 매너리즘입니다. 바이올린은 안 쓸 때에는 풀러 둡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하려면 바짝 조여 주어야 합니다. 키타도 그렇고 활도 그렇습니다. 바로 사용하려면 긴장을 주어야 합니다. 팽팽하게 당겨 주어야 합니다. 피아노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팽팽한 줄이 느슨하여 집니다. 다시 조율하여 주어야 합니다. 자동차도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며 보링하여 주어야 합니다. 사람도 같습니다. 가끔 자극이 필요합니다.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명재상이었던 안영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재상 안영을 모시고 길거리에 나가면 국민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며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절하였습니다. 안영에게 절하는 것인 데 오래 오래 마부 노릇을 하다 보니 자기에게 절하는 것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사실은 안 영보다 마부가 체격도 좋고 더 잘 생겼습니다. 국민들이 절할 때마다 앞 서 가는 그가 손을 흔들며 자기가 인사를 받았습니다. 마치 자신에게 그들이 인사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겁니다. 그럴수록 그 마부의 어깨는 더욱 올라갈 수밖에 없었고, 그 마부의 교만함은 더욱 거세어져만 갔습니다. 사실 그는 뒤에 앉아 있는 안영보다 키도 크고 얼굴도 훨씬 잘생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부의 부인은 문틈으로 의기양양하게 말을 모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슬픔에 빠져 버렸습니다. <저것이 아닌데...> 저녁 때 마부가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당신이 모시는 그 분은 제나라 재상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태도를 보면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며 겸손해 하십니다. 그런데 당신은 한낮 마부이면서 그렇게 교만하게 처신하니 이것이 제가 당신을 떠나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아내의 말에 충격을 받은 마부는 자기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교만함을 보이지 않겠다고 부인에게 다짐하였습니다. 그 날부터 마부는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평소와 달라진 마부의 모습을 본 재상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마부는 집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재상은 부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교만함을 접은 마부를 기특하게 여겨 대부라는 벼슬을 천거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역사를 간략하게 역은 사가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위대한 사람 세 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마부가 위대한 사람입니다. 현명한 아내의 올바른 충고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습니다. 잘못을 인정하며 고치는 마부의 용기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위대한 사람은 마부의 상사입니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부하의 변화를 인정해 줄줄 알았습니다. 자기 위치를 모르던 그를 눈감고 있다가 변화되는 것을 보고 승진시킨 그가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마부의 아내입니다. 현명한 아내가 위대한 남편을 만들었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남편을 바르게 만든 여인입니다. 절대 정권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52년 동안 장기 집권하면서 교만하여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그 메너리즘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비참한 생을 마쳤습니다. 이집트 무바라크도 30년 집권하면서 78조 개인 재산을 모았습니다.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매너리즘을 국민들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부자는 무인도 하나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잘 심고 꽃도 여기저기 심어 아름다운 섬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좋아 하는 토끼를 풀어 놓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끼들은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털에 윤기가 사라지면서 병난 토끼같이 보였습니다. 드디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습니다. 부자는 탄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병이 나다니.....> 수의사를 불렀습니다. 고개를 저으면서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고 돌아 갔습니다.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 갔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현자가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리를 같이 기르십시오.> 부자는 놀라서 물었습니다. <토끼를 다 잡아 먹으면 어떻게 합니까?> 랍비가 말했습니다. <토끼의 병은 환경이 너무 좋아서 생긴 병입니다. 이리와 함께 기르면 이리에 안 잡혀 먹히려고 힘차게 도망다닐 것입니다. 눈빛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다리에 힘이 생길 것입니다. 털에 윤기가 흐를 것입니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토끼들은 몇 마리 몇 마리 잡혀 먹히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건강하였습니다. 긴장이 있어야 합니다.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환경을 바꾸어야 합니다. 웃시야는 환경을 바꾸는 데 실패하여 100-1는 0로 만들었습니다. 3. 교만은 분노라는 죄를 짓게 합니다. 웃시야 왕이 교만하여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려고 하였습니다. 용기있는 아사랴 제사장이 80명과 함께 가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때 웃시야 왕은 화를 냈습니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의 이마에 문둥병이 생긴지라>(19) 겸손한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화를 냅니다. 화를 낸다는 자체가 교만입니다. 화가 극치에 달할 때 병이 생겼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케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느니라.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잠29;8-11) 이스라엘 힐렐 랍비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자기를 잘 다스리는 랍비의 모델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자기 친구와 내기를 걸었습니다. <네가 힐렐 랍비를 화나게 만들면 은 400개를 주겠다.> 그 친구는 어떻게 하든지 힐렐 랍비를 화나게 만들어서 은 400개를 받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전 날 힐렐 랍비를 만나러 갔습니다. 힐렐 랍비는 안식일을 잘 맞기 위하여 몸을 깨끗이 닦고 있었습니다. 그는 문앞에서부터 무례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힐렐 랍비를 화나게 만들 작정이었습니다. <힐렐! 어디 있소? 힐렐! 어디 있소?> 쌍스럽게 이름을 부르면 반말을 하였습니다. 힐렐 랍비는 자기를 부르는 음성을 듣고 목욕을 하다 말고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는가?> 그 친구는 천덕스럽게 물었습니다. <당신께 질문 한 가지 하겠습니다.> <말해 보게나.> <왜 바벨론 사람은 머리가 둥글지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힐렐 랍비는 태연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자네는 아주 좋은 질문을 하네. 바벨론 사람들이 머리가 둥근 이유가 있지. 그들의 산파가 아이 받는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네.> 그 친구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힐렐 랍비는 다시 옷을 벗고 목욕을 시작하였습니다. 조금 후 다시 가서 소리를 지르며 힐렐 랍비를 불렀습니다. 힐렐 랍비는 또 목욕하다 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정중히 물었습니다. <왜 왔지?> <질문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무엇인가?> <왜 아프리카 사람들은 발이 넓지요?> <그들은 습지에 살기 때문이라네.> 그 친구는 이 대답을 듣자 말자 힐렐 랍비에게 말했습니다. <질문을 하나 더 하려고 하는 데 화내지 말아 주십시오.> 힐렐 랍비은 말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게나> <당신 탈무드 학교 교장 힐렐이요?> <그렇다네.> <그렇다면 유대인 가운데 당신같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요.> <무슨 말인가?> <당신 때문에 내가 은 400개를 잃게 되었습니다.> 힐렐 랍비은 정중히 말했습니다. <내가 이성을 잃는 것보다 자네가 은 400개를 잃는 편이 더 낫겠네.> 이같이 힐렐은 일생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분노와 거리가 먼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분노에 대하여 설교하고 났을 때 한 부인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나는 성질이 급해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가끔 분노를 폭팔합니다. 그런데 그 때 뿐이거든요. 일분도 안 되어 그 사람과 툭툭 털고 일어납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엽총도 그렇습니다. 한 방이면 끝나지요. 그런데 한방만 쏘아도 박살나고 말지요.> 웃시야 왕의 한번의 화가 결정적이었습니다. 100-1=0입니다. 웃시야 왕이 우리에게 그런 진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00가지 잘 해도 하나가 부족하면 모두를 무효화시킵니다. 온 몸의 100군데가 다 건강하여도 위에 암이 들어가면 위암으로 100가지 건강이 무효입니다. 자동차 부속 2만개가 다 좋아도 핸들 하나가 없으면 운전을 할 수 없습니다. 삼손도 100가지가 다 좋아도 이성에게 약하니까 다 무효가 되어 눈이 빠져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다 좋아도 돈에 약하니까 다 무효가 되었습니다. 100-1=0입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만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킨 모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부자였기에 돈이 많아 그 한 가지 부족을 채우지 못 하고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 청년을 천국에서 만날 수 없습니다. 다 좋아도 한 가지 부족으로 가장 귀중한 구원을 얻지 못 하였습니다. 영원을 위하여 영원하지 아니한 것을 포기하지 못 하였습니다. 묻습니다. <당신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요?> 100-1=0입니다.
11강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계1:12-16/ 김성수목사 2015-07-21 14:49:35 read : 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론> 소리 소문 없는 환란이 더 무섭다. 구원은 바로 죄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인식하지
11강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계1:12-16/ 김성수목사 2015-07-21 14:49:35 read : 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론> 소리 소문 없는 환란이 더 무섭다. 구원은 바로 죄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인식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십자가가 감사하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러나 진짜 무서운 마귀의 핍박과 공격은 예수를 믿고도 전혀 변함없이 자기 욕심을 위해, 자기의 쾌락을 위해 옛 습관과 옛 경향대로 막 사는 것입니다. 인간을 죄로 물들여 망가트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사단이 주는 환난과 핍박이라는 것을 이해 하셔야 합니다. 제가 너무 강하게 죄에 대해서 지적을 했지요? 왜 다소 지나치리만큼 인간과 죄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다루었는가 하면 구원은 바로 죄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인식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십자가가 감사하게 느껴지겠습니까? 복음은 바로 우리가 떨어졌어야 할 지옥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이 분명 복음을 전하러 나갔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전했을까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너희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자각하고 도우심을 구하라’ 는 말입니다. 죄인임에 대한 자각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죄에 대한 지적이 있을 때 여러분이 부담을 느끼시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감격 하셔야지요. 그리고 주일에는 요한 계시록을 설교하면서 그리스도인의 환난에 대해서 많이 설교를 합니다. 지난주에는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는데 제 삶에는 그런 환난이 없는데요, 저는 가짜인가요?’ 그러시더라고요. 여러분, 환난에 대해서 잘 정리를 하고 계셔야 합니다. 환난과 핍박은 물론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아픔과 통증으로도 우리에게 옵니다. 견디기 힘들죠. 그러나 진짜 무서운 마귀의 핍박과 공격은 예수를 믿고도 전혀 변함없이 자기 욕심을 위해, 자기의 쾌락을 위해 옛 습관과 옛 경향대로 막 사는 것입니다. 인간을 죄로 물들여 망가트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사단이 주는 환난과 핍박이라는 것을 이해 하셔야 합니다. 물론 당시는 즐겁습니다. 아무런 고통이 없지요. 그러나 신앙이 점점 성숙해 지게 되면 그렇게 살았던 삶이 엄청나게 괴로운 기억으로 남습니다. 여러분, 환난과 핍박 하니까 무조건 사업이 망하고 병이 걸리고 그런 것만 떠 올리시는가 본데..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환난은, 보이지 않게 우리 삶을 타락시키는 폭풍 속의 고요입니다. 평안을 가장한 핍박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환난과 핍박의 내용입니다. 아무 일 없다고 해서 ‘왜 나에게는 환난이 없고 핍박이 없지?’ 하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가장 무서운, 사탄의 교묘한 핍박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 사람은 부자라서, 저 사람은 얼굴이 잘 생겨서, 저 사람은 건강해서 아무 환난도 경험하고 있지 않을 거야’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환난과 핍박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신 장로님께서도 성경을 가르치시면서 환난과 핍박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를 하시니까 어떤 분이 ‘장로님은 부자라서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모르고 그렇게 말씀 하신다’ 고 하시더라고요. 여러분 돈이 많으면 환난과 핍박을 모릅니까? 여러분, 45일 동안 잠 못 자 보셨어요? 여러분 2년 동안 악성 관절염으로 아침에 일어나면 온 몸을 면도칼로 긁는 듯한 고통을 느껴보셨나요? 여러분 걸핏하면 코피가 흘러 멈추지 않아서, 911에 실려 가는 고통을 당해 보셨습니까? 환난과 핍박과 고통이 뭔지 몰라서 그렇다고요? 사람들은 철저한 인본주의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누구나 자기 고통이 제일 큰지 알아요.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는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쓰인 ‘람바노’라는 헬라어는, 누구나 흔히 겪는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만큼의 아픔이 있어요. 보이지 않는다고 나만 제일 불행하다고, 내가 제일 큰 환난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습니다. 그게 환난의 당위성과 필연성 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그게 부담스럽기만 하시다면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은 아직 ‘땅에 눈을 두고 계신 분’ 들일 겁니다. <본론> 계1:12-16 “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오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13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이'가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14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15 발은 화덕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16 또 오른손에는 일곱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뻗어 나오고, 얼굴은 해가 세차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수수께끼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다 나오는 표현입니다. 인용된 구약의 말씀을 찾아서, 이 계시록 본문의 말씀을 풀어나가면, 쉽게 풀립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밧모 섬에서 성령에 감동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 요한을 공부했습니다. 성령에 감동한 요한이 그 환난과 핍박의 장소인 밧모 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처럼 성령 안에 있는 우리도 역시 이 객관적인 현실 속에서 예수를 볼 수 있는 자라는 것을 함께 확인했지요. 12절부터는 요한이 자기가 본 예수님을 자기가 알고 있는 구약의 표현을 인용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바라봐야 할 그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한은 아홉 가지로 그 분을 묘사합니다. ◑1. 맨 먼저 예수님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13 당시에는 사람들이 입는 옷이 그 사람의 신분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지금 요한이 예수님의 옷을 묘사하면서 그 분의 신분을 이야기하려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발에 끌리는 옷은 제사장의 옷을 말합니다. ‘발에 끌리는’ ‘포데레스’는 신약 성경에서는 여기에 한번밖에 안 나오지만 70인 역 LXX에서는 일곱 번이 나옵니다. 거기서 이 ‘포데레스’는 전부 제사장의 의복과 연관해서 쓰이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에 발 뿐 만이 아니라 신체의 어떤 부분의 살도 겉으로 나오면 안 되었습니다. 얼굴과 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철저하게 가려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이후 인간의 몸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부분을 철저하게 가렸습니다. 그래서 항상 제사장들은 머리에 관을 쓰고, 발을 덮는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8장에 그 제사장의 옷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제사장의 옷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28:4,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라. 그들이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아론으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할지며” 5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공교히 짠 띠를 띠우고” 레16:4 “4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제사장의 옷은 속옷과 겉옷과 에봇과 흉패로 나누어집니다. 흉패는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이 박혀있습니다. 12지파는 교회 즉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전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그 흉패는 정사각형입니다. 그리고 옷감은 성막을 짓는 천과 같은 것입니다. 사용하는 실의 색상도 유사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사장이 입고 있는 옷은 성막을, 성전을,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막의 지성소는 정사각형이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고 모자란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흉패도 정사각형입니다. 지성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성막을 입고 있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스케노오’는 ‘장막을 치다, 텐트를 치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를 장막으로 덮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계7:15-16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21:2-3,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자세히 보시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쳐주시는 장막 아래 보호를 받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이제 이 정도의 연관성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제사장의 옷은 성막입니다. 성막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사장이 성막을 입고 있다는 것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 제사장이신 그 분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게 되는 것을 우리는 제사장의 옷을 입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그 제사장의 옷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촛대 사이에 서 계십니다. 촛대는 교회라고 했지요? 교회는 또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있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를 성전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오해는 마세요. 제가 말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지 붉은 벽돌로 지은 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건물은, 예배당이지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참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도인 여러분을 성전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계15: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2. 가슴에 금띠 :13b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띤 예수님이 어디로부터 나오십니까? (왜 일곱 천사가 예수님을 상징하는지는, 나중에 그 부분에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성전으로부터 나오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 계신 대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본문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십니다. 허리가 아닌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던 사람은 왕이었습니다. 고대 시대 왕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대제사장은 하늘 성전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대제사장은 왕이면서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끌리는 옷을 입으시고, 가슴에 금띠를 띤 분은 왕이시면서 제사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나팔 같은 소리로 말씀을 하십니다. 나팔 같은 소리로 하늘의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누굽니까? 선지자들. 바로 그 분이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요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시라는 것입니다. ▲초림 때는 누더기 옷에 흠모할 것도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다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그 영광을 회복하시고 영광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 모습으로 영광스러운 재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읽어내야 합니다. 초림 때는 구원을 이루시려 오셨지만, 이제 그 분은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을 보세요. 14절을 보시면, ◑3. 백발 계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이 구절은 다니엘서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단7:9-10,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다니엘서는 분명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하나님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바로 예수님이, 그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분은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 우리를 구원해 내신 제사장,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영광과 위엄을 가지신 심판자이시라는 것을 요한은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백발’은 영광과 위엄, 영광의 면류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백발이시라는 것이 아닙니다. 레19:32,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잠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요한은 그러한 구약의 상징을 이용하여 이제 하늘 영광을 회복하신 영광과 위엄을 소유하신 예수님께서 심판자로 오실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 불꽃 같은 눈 :14b 그리고 그 분은 불꽃같은 눈을 갖고 계십니다. 14절 ‘그의 눈은 불꽃같고’ 불꽃같은 눈도 역시 상징이지요. 공중기도 하시는 분들이 가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그게 무슨 뜻일까요? 단10:5-6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계19:11-12,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불꽃같은 눈’도 보시다시피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 분 앞에서는 감추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며,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의 삶을 관찰하시고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마10:26,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큰일 났지요? 하나도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심판만을 이야기하시는 것일까요? 그럼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주님 우리에게 심판을 내려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되나요? 이 말씀은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말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축복의 말씀입니다. 이 심판의 말씀들이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축복의 말씀인지 함께 보자고요. ▲요한 계시록 19장에 보면 ↑ 그 불꽃같은 눈을 하신 심판의 예수님께서 발에 끌리는 제사장 옷을 입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옷에 피가 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무리는 희고 깨끗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왜 그런 모습일까요? 이 모습을 머리에 잘 그려 보세요. 이 부분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49장11절로 먼저 가야 합니다. 창49:8-11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그 중 유다에게 유언을 하는데 유다의 후손에서 ‘실로’ 곧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는 암 나귀 새끼를 타고 그 옷을 포도주에 빨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바로 ‘suffering of christ’,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나귀 새끼를 타는 모습으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른 자들의 저주를 몸에 받고 죽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면 그 옷을 포도즙(원어로는 포도의 피입니다) 틀에 빤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63:1-6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죄인들을 포도즙 틀에 놓인 포도들처럼 밟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의 발에 밟혀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밟히셨습니다. 그 분의 옷에 피가 튀었습니다. 죄의 대가로 흘려야 할 이스라엘의 모든 피가, 그 분께 튀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고, 예수가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제사장이 아무리 금실 은실로 짠 좋은 옷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제사를 드리면 그 제물의 피가 옷에 낭자하게 묻게 됩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잡고 제단에 바치면서, 그 옷에 피가 묻게 되는 것은 바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계시록19장 15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십니다. 그런데 그 포도에게 돌아가야 할 피가 전부 튀어서, 예수님의 옷에 묻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은,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원래 그 피는 그 뒤에 좇아오는 사람들 것이었는데 예수님의 옷에 그 저주의 피가 다 튄 것입니다. ▲이렇게 불꽃같은 눈은, 포도주 틀을 밟는 것과 연결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심판과 함께 구원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달라는 기도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고 마지막 때에 그들에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듯 밟으실 것입니다. 피의 저주가 그 포도주 틀에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무리의 저주는 예수님께서 친히 담당하셔서 건져 주실 것이라는 것을 구약에 능통했던 당시 초대 교회들은 감격 속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불꽃같은 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아시겠지요?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두 눈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 중에서 교회를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 속에서 교회답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래서 잘 못 가고 있는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그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내실 그 불꽃같은 눈이 우리의 이 엉터리 같은 삶을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계2:18-20,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우리는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세상을 심판하시고 교회를 구원하실 것이며 혹 우리가 잘 못 갈 때, 그 분이 지금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면서 우리를 책망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시139:7-10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무 데도 도망 못 갑니다. ◑5. 빛난 주석 같은 발 :15 15 ‘발은 화덕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그리고 예수님의 발은‘빛난 주석’같았다고 요한은 묘사합니다. 주석은 헬라어로 ‘칼콜리바논’입니다. 이 단어는 놋쇠‘칼코스’와 유향, 향나무‘리바노스’라는 단어가 복합되어 생긴 단어입니다. 놋쇠는 능력 권위 주권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 발이 주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계10:1-2,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오른발로 바다를 왼발로 땅을 밟고 계신 그 발, 그 분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라는 말입니다. 그 분의 발은 원수인 마귀의 세력 또한 밟아 뭉개실 것입니다. 시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 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예수님의 발이 주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기시고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주석은 놋쇠와 유향의 합성어라고 했지요? 유향은 제사 때 드려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이 있지요? 바로 제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엡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능력의 왕으로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가지신 그 권위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 진 것이냐? 바로 자신을 제사로 드린 영단번의 제사, 십자가로 그 권위가 주어진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으로 주어진 고난입니다. 그게 주석이라는 단어가 가진 뜻입니다. 그 주석이 어떤 주석입니까? 풀무에 달구어낸 주석입니다. 풀무에 달구어냈다는 것은 고난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발이 주석’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고난을 통과해서 얻어진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여러분 정말 부요하고 싶으세요? 성경의 부요를 맛보고 싶으십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참 부요 함이라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는 것이, 부요함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세요. ◑6.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 :15b 그리고 그 분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에스겔서에서 인용을 한 것입니다. 겔43: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음성을, 그 하나님의 음성을 묘사하는 단어를 가져다가 표현을 했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구약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택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물소리’라는 단어는 절대적이며 쉬지 않고 힘차게 나타나는 권위의 음성을 상징합니다. 그러한 목소리로 예수님은 교회에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지는 편지 서두에 모두 ‘타데 레게이’‘가라사대’하고 시작이 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늘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기적으로 일하시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몇 초만 나타나셔서 ‘나 있다’ 그러고 가시면 전도가 잘 될 텐데 왜 안 그러십니까? 이 패역한 인간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도 못 믿는다는 말입니다. 방법은 성령을 통해서 뿐입니다. 기적을 원하는 것은 아직 믿음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부어주셨다면 기적 같은 것 없어도 얼마든지 기쁘고 행복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그런데 자꾸 기적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아직 선물로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자꾸 신기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말씀 안에 완전한 하늘나라와 복음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른 것 좇아다니지 마세요. 여러분, 지금까지 제가 설교한 내용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됩니까? 아니면 불편하십니까? 저는 애써 기쁜 소식, 복음을 전했는데,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기쁘세요?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시면서, 정말 예수로만 만족하십니까? 심판과 저주의 재림 때 그 저주에서 건져내어졌다는 그 사실만으로 정말 기쁘신가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는 어떤 것으로 기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 기뻐하십니까? ▲여러분, 저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함께 듣고 있기 때문에 몇 번이고 확인하고 확인한 후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설교를 합니다. 저 때문에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옥가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저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뭔가 잘못 된 것 아닙니까? 저는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여러분이 다른 더 좋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제게 원하신다면 뭔가 잘 못 되도, 한참 잘 못된 것 아닙니까? 여러분, 제발 복음을 이해하세요. 정말 복음이 뭔지 바르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를.. 매일 매일 확인하세요.
13강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고 나중이라 /계1:17-20/ 김성수목사 2015-07-21 14:46:17 read : 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으시다면 지금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함께 계십니다. 바라만 봐도 눈이 멀고 죄인은, 그 앞에서면 그
13강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고 나중이라 /계1:17-20/ 김성수목사 2015-07-21 14:46:17 read : 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으시다면 지금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함께 계십니다. 바라만 봐도 눈이 멀고 죄인은, 그 앞에서면 그냥 죽어 버리게 되는 그 천지의 주인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구요. 그 사실을 정말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신데 도저히 그 사실 만으로도 감격스러워 감당을 못할 텐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이제 노예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소원 들어줘요, 병 고쳐 줘요, 부자 만들어 줘요’ 하면서 열심히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문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행동들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나?’를 두려워 하셔야지요. ◑1. 하나님을 뵈면, 죽은 자 같이 됩니다. ‘계1:17, 그를 뵐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구절들을 공부하면서 능력과 권세와 위엄의 주님께서, 지금도 교회를 오른 손에 꼭 붙들어 보호하고 계시며 주석 같은 두 발로,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도 요한이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죽은 자같이 됩니다. 여러분,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삼년 반 동안 함께 숙식을 같이 하던 스승입니다. 그 중에서 유독 사랑을 많이 받았던 ‘주의 사랑하는 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예수님을 보자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요한은 그렇게 사랑해 주던 스승을 만났음에도 반가움과 기쁨이 아닌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그런 모습은,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동일하게 나타났던 현상입니다. 삼손의 아비 마노아와 그 아내가 하나님을 보고 지른 비명을 보십시오. (삿 13:22) “마노아는 아내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우리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오." 다니엘은, 하나님을 보자마자 온 몸에 힘이 빠졌고, 죽은 것처럼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개역 성경에서 깊이 ‘잠들었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담’은 마치 죽은 것처럼 정신을 잃은 모습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단 10:5-9)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7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 이사야도 하나님을 뵈었을 때,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는 하나님을 보자마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고 외칩니다. ‘나는 이제 파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지옥 앞에서 심판을 받을 자가, 마지막 단말마로 지르는 비명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도, 그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직접 보자마자 자신이 얼마나 작고 추하고 더러운 인간인지 일순간에 드러나게 되어 나는 도저히 저 빛을 감당할 수 없는 자로 파멸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에스겔의 임재 체험을 살펴봅시다. (겔 1:28)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여기서도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드렸다고 나오지요? 여기서 ‘엎드리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나팔’도, ‘죽은 것 같이 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빛을 본 후 눈이 멉니다. 영광의 빛이 너무 밝았다는 뜻이지요. (행 9:3-4)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모세의 체험을 보십시다. (출 33:18-20)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은 그토록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 죄인들은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면 ‘난 이제 죽게 되는구나.’ 하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 본 바대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도 그 하나님 앞에 서면.. 죽은 듯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그 새 언약을 성취하시고 약속대로 하나님의 백성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2. 두려워 말아라 “계1:17 그를 뵐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극적 반전이 나타납니다. 사도요한은.. 주님의 임재 앞에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는데, 오히려 주님은.. 그런 사도요한을 따뜻이 위로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으시다 면 지금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함께 계십니다. 바라만 봐도 눈이 멀고, 죄인은 그 앞에서면 그냥 죽어 버리게 되는 그 천지의 주인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구요.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 사실을 정말 믿으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여러분은 이렇게 눈도 안 멀고 죽지도 않게 되신 것입니까? 그게 바로 여러분의 신분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존귀하신 분들이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 분과 대화를 하면서 그 분의 이끄심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친구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이십니다. 여러분, 박쥐나 올빼미는 빛에 노출이 되면 죽습니다. 쥐나 바퀴벌레도 빛을 비추면 감당을 못하고 어디로 숨기 바쁩니다. 그렇게 죄인들에게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두려움과 경악의 심판의 빛입니다. 똑같은 죄인들이었던 우리에게, 그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빛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이렇게 기쁘고 안도하고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햇빛이 식물을 키우고 열매를 맺히게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영광의 빛 속에서 평안을 얻습니다. 그 것이 복음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예수께서 죽은 것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 요한에게 ‘두려워 말라’ 라고 하시면서, 주님은 요한에게, 오른 손을 얹어 안심을 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 심판의 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십니다. 안 좋으세요?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여러분, 그 사실이 정말 믿겨지신다면 그 사실보다 더 여러분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사람, 물건, 사건이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신데 도저히 그 사실 만으로도 감격스러워 감당을 못할 텐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이제 노예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소원 들어줘, 병 고쳐 줘, 부자 만들어 줘’ 하면서 열심히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문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행동들입니다. ◑3. 나는 살아있다. 계1:18 “(나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본문 18절에 보시면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여기서 ‘산 자’라고 번역이 된 ‘호 존’은 관사가 붙은 현재분사 능동태입니다.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시점으로부터 계속 살아 계신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과 신약에서 공히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수3:10)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시42: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이렇게 ‘산 자’ 라는 용어는 신구약에서 공히 하나님께 적용된 신적 칭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단어로 자신을 묘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전에 죽었었다’ 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죽었었다’라는 단어 ‘에게노멘 was 네크로스 dead’는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그 분의 죽음은 영 단번에 일어났지만 그 영향력은 이제 세세토록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구절을 읽으시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 죽음의 영향력이 오늘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정말 이 땅에 죽을 수 있는 인간으로 오셔서 실제로 죽으셨고 이제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자리로 복귀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확실하게 알아두셔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죽었었지만 이제 산자의 자리에 복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정말 허무한 것입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가된 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심으로써,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완전한 의가, 완제품이 되어서,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주1) 구원은 완전한 항복입니다. 살아 나셔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의의 옷’ 그 이외에 우리가 보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영원히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합니다... ◑4. 나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계1:18)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사 22:22)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계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예수께서 바로 이 열쇠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열쇠는 고대 시대를 비롯해서 예수께서 사시던 시대에도 통치권, 권세 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왕이나 황제들이 도시를 방문할 때 그 도시의 성주나 분봉 왕들이 입구에서 왕에게 상징적인 ‘금 열쇠나 은 열쇠‘를 만들어 바쳤다고 합니다. ‘여기는 당신의 통치 아래 있는 당신의 땅입니다’라는 고백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여기서 음부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하데스’라는 말입니다. 하데스는 부정접두사 ‘알파’와, ‘보다’를 의미하는 ‘에이도’의 합성어로 그 끝을 볼 수 없는 아득히 멀고 깊은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데스는 저주받은 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그냥 막연히 죽은 영들이 가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저주받을 자들이 가는 지옥의 의미로 쓰인 것 같습니다. (계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사망과 음부를 의인화해서 마귀의 세력을 표현합니다. (계 20:14)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바로 그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께서 쥐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망과 지옥의 열쇠 뿐 아니라 천국의 열쇠도 쥐고 계신 분이십니다. 열쇠를 쥐고 계시다는 것은 통치권이 그 분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뿐 아니라 음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십니다. 음부에 묶여있는 사탄과 마귀의 세력도, 예수께서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안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대 실패하실 수 없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자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사탄은 완전히 무장해제(disarmed)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는 사탄에게, 넘어가지 못할 선을 그어 주셨지요? (욥 38: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바다의 경계를 그으시고 ‘넘어가지 말아라’라고 명령하시는 그 예수님의 명령에 사탄도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거룩을 가르치시기 위해 필요한 만큼 사탄을 이용하실 뿐입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그 어느 곳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벗어난 무정부 상태의 공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에 잡혀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굳게 잠긴 사망의 자물통을 여십니다. 사망이 자기가 포로로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조리 끌어내십니다. 사망을 상징하는 애굽에 단 한 사람의 이스라엘 백성이 남겨지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한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다 그 사망의 나라에서 나오게 됩니다. 열쇠를 우리 예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보지요. (사 26:19) “그러나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열쇠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의 문을 여십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면, 예수님은 천국 문을 잠가 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회복될 피조물들을 넣고 밖에서 하나님께서 문을 닫아 거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창7:15-16 하나님의 택한 백성 외에는 절대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자물통은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리치고 두들겨도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주님,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종교행위를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문 좀 열어주세요. 주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여기는 너희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너희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지옥 불에 들어가 이를 갈고 슬피 울어라’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그 열쇠를 누가 가지고 계시다구요? ‘예수님’ ▲네,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십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십니다. (요 10: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 당시 양의 우리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산에서 풀을 뜯기다가 동네까지 내려오지 못 할 때 일정한 장소에 양을 모아두는 임시 우리들이 여기 저기 있었습니다. 그런 종류의 우리에는 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입구에는 목자가 서서 양을 통과 시켰다고 합니다. 바로 예수께서 그 양의 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양의 문으로는 이리나 늑대는 못 들어갑니다. 또 다른 양의 우리는 동네 아래에 있는 공동 우리입니다. 목자들이 양을 먹이고 마을로 데리고 들어와서 공동으로 만들어 놓은 우리에 모두 집어넣습니다. ‘다른 집 양하고 섞이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양은 정확하게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아침에 나갈 때 주인이 양을 부르면 그 양들은 자기 주인의 목소리를 따라 목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갑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셨을 때,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셨을 때, 예수님이 빌립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희한하게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좇아갔습니다. 심지어 죽었던 나사로조차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 메시야가 쥐신 다윗을 열쇠를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에 나오셨습니까? 그 열쇠를 쥐신 분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믿겠노라고 분연히 일어선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그 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보태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요한복음9장에 보면 소경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예수님이 안식일 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결국 그 소경은 출교를 당합니다. 쫓겨납니다. 쫓겨나서 누구의 품으로 갑니까?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볼 때는 출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유대교라는 우리에서 불려나온 (부름 받아 나온)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요10장에서, 양의 우리에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불려 나오는 양들의 이야기로 연결시키시는 것입니다. 네, 여러분이 계신 우리가 아무리 매력적이고 강한 울타리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참 양들은 그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오직 예수만이 문이시며 예수만이 참 목자이십니다. ◑5.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계1:17 그리고 그 분은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하십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전에 8절 공부할 때 배웠지요? (계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 동일한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묘사하는데 쓰십니다. 우리를 위해 인간으로 오셔서 죽으신 그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이지요.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나시고 촌구석 나사렛에서 아장아장 걷는 아기부터 출발하셔서, 말을 배우셔야 했고 가구 수리하는 법을 배우셔야 했고, 등짐을 지고 가구를 고치러 다니셨던, 그리고 사람들에게 멸시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하릴없이 죽으셨던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처음이시며 나중이십니다. 그분은 전부이십니다. (잠 8:23-26) “23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요 1:1-3, 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하시니" (고전 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여기에서 ‘주를 시험하다가’가 헬라어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불 뱀을 풀어서 많은 자들을 죽이셨습니다. 그 사건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고전10:9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우리의 구원 사건의 전체를 이끌고 가신 분이십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그 분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속사역을 시작하시고 수행하시고 완성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 이십니다. 그 분이 여러분을 가리켜 내 형제요 내 자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신분이 확인된 여러분이 왜 두렵고 왜 염려를 하십니까? 과거의 상처가 여러분을 괴롭히십니까? 예수님은 처음이십니다. 아직 여러분에게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들이 두려우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나중이시기도 합니다. 그분은 전부이십니다. 두려워 마세요. 힘을 내십시오. 정말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나?’를 두려워 하셔야지요. ▲여러분의 신분이 확인되신 분들은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두려움은 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가 자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죄 속에 머물러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실 거예요.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이면 그렇게 해결하실 것이고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일이 해결되게도 하실 것이고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세요. 두려움을 떨쳐 버리세요.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오른 손을 얹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그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 주1) 로만 가톨릭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교리대로 하면 예수님이 굳이 살아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로만 가톨릭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원죄가 해결되어 그들에게 의가 ’주입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의‘가 영세를 받을 때 주입이 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영세를 안 받으면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 세례 안 받아도 천국 갑니까? 못 갑니까? 부득이하게 세례를 받지 못했으나,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사람은 천국에 갑니다. 세례라는 것은 세례를 받는 사람의 인간적인 긍정이 아니라 그를 향한 하나님의 긍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세례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세례는 우리 성도의 신앙의 고백이며 구원 이해의 표출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세 때 주입된 ‘의’로, 우리는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었고, 선한 행위를 함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되기 때문에 열심히 선행을 보태야 한다고 합니다. 영세를 받은 이후에 짓는 죄는 고해성사를 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된 것은 연옥에서 해결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로는 원죄가 해결된 것이고, 나머지는 인간이 열심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십자가에는 죽으신 예수님이 아직도 걸려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자기들이 완성해야 하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수난 받으시고 죽으셔서, 우리의 원죄를 해결해 주셨으니 우리 열심히 선행을 하고 종교행위를 해서 ‘거기에 보태자’라고 합니다. 굉장히 기특한 발상인 것 같지만 그건 아주 위험한 주장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에 조금도 보탤 수 없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도 그 안에서 부활을 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이지 주님이 죽어주셨고 이제 부활의 몫은 우리에게도 나누어져 있는 것이라면 저는 정말 자신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면 할수록 관록이 붙어 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신이 없어집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시퍼런 칼날 같은 말씀 앞에서 저 자신이 점점 더 밝히 드러나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도 죽기 얼마 전에 쓴 그의 일기에서 ‘하나님 저 정말 잘하는 겁니까? 아니 저 정말 구원받은 사람 맞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겠지요.
153운동으로 성벽을 뛰어넘는 교회 /요21:1-11/삼하22:30/ 김정호 목사
153운동으로 성벽을 뛰어넘는 교회 /요21:1-11/삼하22:30/ 김정호 목사 2016-02-29 15:29:28 어느 마을에 아주 어릴 때부터 ‘개똥이’라고 불리던 푸줏간 주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잘 차려입은 양반이 그 푸줏간으로 들어오더니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개똥아, 고기 한 근 줘 봐.” 푸줏간 주인이 고기를 썰고 있는데 이번에는 옷은 남루하지만 기품이 있어 보이는 또 다른 양반이 들어와 점잖게 주문을 했습니다. “여보게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시게나.” 푸줏간 주인은 곧 두 사람에게 모두 고기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먼저 주문한 양반이 가만히 보니 둘 다 똑같이 한 근씩 주문했는데 두 번째 손님의 고기가 자기 것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화가 난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따져 물었습니다. “이놈아, 똑같이 한 근을 주문했는데 왜 내 한 근은 쥐똥만하고 저 양반 한 근은 저리도 많으냐?” 그랬더니 푸줏간 주인이 무뚝뚝한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리의 고기는 개똥이가 썬 것이고 저쪽 나리의 고기는 박 서방이 썬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 글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양반이나 상놈이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존재를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 아닐까요? 인간은 누구나 존중 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를 존중해주면 나도 그 사람을 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면 나도 그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지 않은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인정 욕구’라고 하며 인간이 가진 수많은 욕구 중에서 가장 강렬한 욕구라고 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인정을 받고 자라면 인격이나 정서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어릴 때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면 정서가 메마르고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남을 욕하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나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살고 순종하면 놀라운 열매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을 때 상상할 수 없는 큰 물고기가 백 쉰세 마리가 잡혔다는 말씀입니다. 새 해에 우리 모두 제자들처럼 순종하여 153운동으로 성벽을 뛰어넘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본문 3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베드로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은 모두 7명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킨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추종자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혐의점을 찾아 핍박하려 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들을 피하여 갈릴리로 가서 다시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무료함과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하여 과거의 직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사도적 사명은 예수님의 명령과 능력이 임해야만 온전하게 수행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큰 꿈과 비젼을 가지고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녔지만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고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여러 번 나타나셨습니다. 첫 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두 번째는 도마 외에 다른 제자들이 모였을 때, 세 번째는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였을 때, 그리고 지금이 네 번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부족했을 때 다시 과거의 직업으로 제자들이 돌아갔습니다.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남자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5년이나 외국으로 떠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출국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떠나고 일년 째 되는 날 너에게 장미꽃을 보낼게.... 그 장미가 백 송이가 안되면 날 기다리지 말고 만약 백 송이가 되면 꼭 기다려줘. 약속할 수 있겠어?”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남자가 떠난 지 꼭 일 년이 되던 어느 날, 예쁜 카드와 함께 장미꽃이 배달되었습니다. 여자는 장미 꽃송이를 헤아리고 또 헤아렸지만 장미는 99송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너무나 실망하여 카드를 읽을 생각도 못하고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버리고 말았습니다. 5년이란 긴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돌아온 남자는 여자가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꼭 한번 만나서 물어볼 것이 있다며 여자에게 만남을 청했습니다. 어렵게 마주한 자리에서 남자가 물었습니다. “장미 꽃송이는 세어보았는지요.” “네, 99송이더군요.” “맞습니다. 카드는 읽지 않았나요?” “카드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여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한 남자가 그녀를 위해 보낸 장미 꽃다발 사이에 끼어놓은 단 한줄의 사연은... 마지막 한 송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신입니다. 마지막까지 잘 읽고 잘 해야 합니다. 대충 하거나 덜렁거리면 반드시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잘 해야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충 듣고 믿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면서 사명의 현장을 떠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물고기가 없나이다 본문 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갈릴리 바다는 여명이 밝아와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밝아졌습니다. 제자들은 설마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얘들아”라고 하셨습니다. 여보게들! 젊은이들!의 의미입니다. 매우 친밀하고 애정이 담긴 호칭이었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없나이다’라는 제자들의 부정의 대답은 제자들이 자신의 과거 기술과 경험을 총동원하였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철저한 패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은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뼈져리게 체험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옆에는 자기를 이해해주고 좋아해주고 허물을 덮어주려는 약 95퍼센트의 고마운 사람들과 자기를 모함하고 밟으려고 하는 5퍼센트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치명적인 결함은 우리를 괴롭히는 5퍼센트의 사람에게 우리의 생각의 95퍼센트가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행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몰랐을 때는 나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집중하느라 그런 사람들이 95퍼센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발견하고 나니 그것은 나의 과장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주변에는 고마운 95퍼센트의 사람들, 아니 99.9퍼센트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내 생각과 에너지를 나를 괴롭히는 0.1퍼센트의 사람들에게 머물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새해에 우리의 생각과 힘과 에너지를 긍정적인 곳에 모으고 사용합시다. 예수님과 가정과 교회에 사용합시다. 우리의 것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이 됩니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잡을 수 없습니다.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꽉 붙어서 사탄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고 동행함으로 성벽을 뛰어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겠습니다 본문 6절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오른편은 갈릴리에서 어부 생활을 하였던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고 사용하고 있었던 지식과 경험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상식을 초월한 명령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모든 것을 그물과 함께 버리고 예수님 명령에 순종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발생하였습니다.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가 잡혔습니다. 제자들의 방법으로는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오른편에 던졌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많은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지만 그 통일성이 보존되어 찢어지지 않고 언제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3가지의 다양성이 있으나 찢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사탄은 찢어지게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 되게 하십니다. 최근에 랜도 포시 교수가 쓴 《마지막 강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카네기 멜론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는데 갑자기 이 사람의 인생에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췌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병을 고쳐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시한부 선고를 받고 교단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내와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남편인 랜디 포시 교수는 교단을 떠나면서 후학들을 대상으로 마지막 강의를 꼭 하고 싶다고 했고 아내는 몇 달 남지 않은 시간을 강의 준비로 보낼 것이 아니라 가족들, 특히 세 아이들과 함께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큰 아이가 고작 다섯 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결국 남편이 마지막 강의를 하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게 된 마지막 강의는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강의를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책으로도 엮여 나온 것입니다. 그 책에서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감동적인 한 구절이 있습니다. “장벽에는 다 이유가 있다. 장벽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장벽은 가로막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는지를 증명할 기회를 주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의 태도가 정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어떤 칼럼에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놓은 것이 있어 그것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바삭 마른 몸으로 학생들 앞에서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그 인상적인 강의에서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들이 무엇이었는지, 그 꿈을 이룰 때 어떤 장애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가 그 장애물들을 어떻게 넘었는지. 꿈을 좇다 보면 누구라도 어떤 시점에서 벽을 만나게 되는데 그 벽은 충분히 자격이 있지 않은 사람을 걸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네가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느냐를 확인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게 강의의 요지 중 하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을 좇다가도 장애물을 만나면 쉽사리 포기해버립니다. “에이, 모르겠다. 안 된대.” 그런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랜디 포시 교수는 꿈을 가지고 달려가다가 장애물을 만난다면 그 장애물은 자기를 방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절실함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랜디 포시 교수의 말이 옳았습니다. 문제는 장애물이 아니라 그 장애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있습니다. 그 장애물을 뛰어넘고자 하는 절실함이 우리에게 없다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장애물 보다 열망이 크면 그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장애물은 방해물이 아니라 목표를 향한 열망을 증명하는 기회가 됩니다. 어떤 순종의 장벽이 있어도 순종으로 뛰어 넘으면 153의 기적은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에 이루어집니다. 장벽의 문제가 아닌 순종의 문제입니다. 성벽이 높은 것이 아니라 순종이 낮을 뿐입니다. 철저한 순종으로 그리고 오른 편의 방법으로 모든 성벽을 뛰어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이 새 해에 153운동으로 성벽을 뛰어넘는 교회가 됩시다. 1년 동안 5명 작정하고 3명을 초청하여 우리 모두 153의 기적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53운동으로 성벽을 뛰어넘는 교회 /요21:1-11/삼하22:30/ 김정호 목사 2016-02-29 15:29:28 read : 99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느 마을에 아주 어릴 때부터 ‘개똥이’라고 불리던 푸줏간 주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잘 차려입은 양반이 그 푸줏간으로 들어오더
153운동으로 성벽을 뛰어넘는 교회 /요21:1-11/삼하22:30/ 김정호 목사 2016-02-29 15:29:28 read : 99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느 마을에 아주 어릴 때부터 ‘개똥이’라고 불리던 푸줏간 주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잘 차려입은 양반이 그 푸줏간으로 들어오더니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개똥아, 고기 한 근 줘 봐.” 푸줏간 주인이 고기를 썰고 있는데 이번에는 옷은 남루하지만 기품이 있어 보이는 또 다른 양반이 들어와 점잖게 주문을 했습니다. “여보게 박 서방, 고기 한 근 주시게나.” 푸줏간 주인은 곧 두 사람에게 모두 고기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먼저 주문한 양반이 가만히 보니 둘 다 똑같이 한 근씩 주문했는데 두 번째 손님의 고기가 자기 것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화가 난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따져 물었습니다. “이놈아, 똑같이 한 근을 주문했는데 왜 내 한 근은 쥐똥만하고 저 양반 한 근은 저리도 많으냐?” 그랬더니 푸줏간 주인이 무뚝뚝한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리의 고기는 개똥이가 썬 것이고 저쪽 나리의 고기는 박 서방이 썬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 글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양반이나 상놈이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존재를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 아닐까요? 인간은 누구나 존중 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를 존중해주면 나도 그 사람을 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면 나도 그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지 않은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인정 욕구’라고 하며 인간이 가진 수많은 욕구 중에서 가장 강렬한 욕구라고 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인정을 받고 자라면 인격이나 정서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어릴 때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면 정서가 메마르고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남을 욕하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나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살고 순종하면 놀라운 열매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을 때 상상할 수 없는 큰 물고기가 백 쉰세 마리가 잡혔다는 말씀입니다. 새 해에 우리 모두 제자들처럼 순종하여 153운동으로 성벽을 뛰어넘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본문 3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베드로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은 모두 7명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킨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추종자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혐의점을 찾아 핍박하려 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들을 피하여 갈릴리로 가서 다시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무료함과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하여 과거의 직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사도적 사명은 예수님의 명령과 능력이 임해야만 온전하게 수행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큰 꿈과 비젼을 가지고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녔지만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고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여러 번 나타나셨습니다. 첫 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두 번째는 도마 외에 다른 제자들이 모였을 때, 세 번째는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였을 때, 그리고 지금이 네 번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부족했을 때 다시 과거의 직업으로 제자들이 돌아갔습니다.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남자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5년이나 외국으로 떠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그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출국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떠나고 일년 째 되는 날 너에게 장미꽃을 보낼게.... 그 장미가 백 송이가 안되면 날 기다리지 말고 만약 백 송이가 되면 꼭 기다려줘. 약속할 수 있겠어?”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남자가 떠난 지 꼭 일 년이 되던 어느 날, 예쁜 카드와 함께 장미꽃이 배달되었습니다. 여자는 장미 꽃송이를 헤아리고 또 헤아렸지만 장미는 99송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너무나 실망하여 카드를 읽을 생각도 못하고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해버리고 말았습니다. 5년이란 긴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돌아온 남자는 여자가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꼭 한번 만나서 물어볼 것이 있다며 여자에게 만남을 청했습니다. 어렵게 마주한 자리에서 남자가 물었습니다. “장미 꽃송이는 세어보았는지요.” “네, 99송이더군요.” “맞습니다. 카드는 읽지 않았나요?” “카드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여자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한 남자가 그녀를 위해 보낸 장미 꽃다발 사이에 끼어놓은 단 한줄의 사연은... 마지막 한 송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신입니다. 마지막까지 잘 읽고 잘 해야 합니다. 대충 하거나 덜렁거리면 반드시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잘 해야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충 듣고 믿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면서 사명의 현장을 떠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물고기가 없나이다 본문 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갈릴리 바다는 여명이 밝아와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밝아졌습니다. 제자들은 설마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얘들아”라고 하셨습니다. 여보게들! 젊은이들!의 의미입니다. 매우 친밀하고 애정이 담긴 호칭이었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없나이다’라는 제자들의 부정의 대답은 제자들이 자신의 과거 기술과 경험을 총동원하였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철저한 패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은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뼈져리게 체험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옆에는 자기를 이해해주고 좋아해주고 허물을 덮어주려는 약 95퍼센트의 고마운 사람들과 자기를 모함하고 밟으려고 하는 5퍼센트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치명적인 결함은 우리를 괴롭히는 5퍼센트의 사람에게 우리의 생각의 95퍼센트가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행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몰랐을 때는 나를 비난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집중하느라 그런 사람들이 95퍼센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발견하고 나니 그것은 나의 과장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주변에는 고마운 95퍼센트의 사람들, 아니 99.9퍼센트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내 생각과 에너지를 나를 괴롭히는 0.1퍼센트의 사람들에게 머물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새해에 우리의 생각과 힘과 에너지를 긍정적인 곳에 모으고 사용합시다. 예수님과 가정과 교회에 사용합시다. 우리의 것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이 됩니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잡을 수 없습니다. 한 마리의 고기도 잡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꽉 붙어서 사탄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고 동행함으로 성벽을 뛰어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겠습니다 본문 6절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오른편은 갈릴리에서 어부 생활을 하였던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고 사용하고 있었던 지식과 경험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습니다. 상식을 초월한 명령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모든 것을 그물과 함께 버리고 예수님 명령에 순종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발생하였습니다.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가 잡혔습니다. 제자들의 방법으로는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오른편에 던졌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많은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지만 그 통일성이 보존되어 찢어지지 않고 언제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3가지의 다양성이 있으나 찢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사탄은 찢어지게 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 되게 하십니다. 최근에 랜도 포시 교수가 쓴 《마지막 강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카네기 멜론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가르치던 교수였는데 갑자기 이 사람의 인생에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췌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병을 고쳐보려고 애썼지만 결국 시한부 선고를 받고 교단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내와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남편인 랜디 포시 교수는 교단을 떠나면서 후학들을 대상으로 마지막 강의를 꼭 하고 싶다고 했고 아내는 몇 달 남지 않은 시간을 강의 준비로 보낼 것이 아니라 가족들, 특히 세 아이들과 함께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큰 아이가 고작 다섯 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결국 남편이 마지막 강의를 하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게 된 마지막 강의는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강의를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책으로도 엮여 나온 것입니다. 그 책에서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감동적인 한 구절이 있습니다. “장벽에는 다 이유가 있다. 장벽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절실하게 원하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장벽은 가로막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는지를 증명할 기회를 주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의 태도가 정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어떤 칼럼에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놓은 것이 있어 그것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바삭 마른 몸으로 학생들 앞에서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그 인상적인 강의에서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꿈들이 무엇이었는지, 그 꿈을 이룰 때 어떤 장애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가 그 장애물들을 어떻게 넘었는지. 꿈을 좇다 보면 누구라도 어떤 시점에서 벽을 만나게 되는데 그 벽은 충분히 자격이 있지 않은 사람을 걸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네가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느냐를 확인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게 강의의 요지 중 하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을 좇다가도 장애물을 만나면 쉽사리 포기해버립니다. “에이, 모르겠다. 안 된대.” 그런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랜디 포시 교수는 꿈을 가지고 달려가다가 장애물을 만난다면 그 장애물은 자기를 방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절실함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랜디 포시 교수의 말이 옳았습니다. 문제는 장애물이 아니라 그 장애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있습니다. 그 장애물을 뛰어넘고자 하는 절실함이 우리에게 없다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장애물 보다 열망이 크면 그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장애물은 방해물이 아니라 목표를 향한 열망을 증명하는 기회가 됩니다. 어떤 순종의 장벽이 있어도 순종으로 뛰어 넘으면 153의 기적은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에 이루어집니다. 장벽의 문제가 아닌 순종의 문제입니다. 성벽이 높은 것이 아니라 순종이 낮을 뿐입니다. 철저한 순종으로 그리고 오른 편의 방법으로 모든 성벽을 뛰어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이 새 해에 153운동으로 성벽을 뛰어넘는 교회가 됩시다. 1년 동안 5명 작정하고 3명을 초청하여 우리 모두 153의 기적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8강 /흰돌에 새겨진 새 이름 /계2:17/ 김성수목사 2015-07-21 14:44:29 read : 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계2: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
18강 /흰돌에 새겨진 새 이름 /계2:17/ 김성수목사 2015-07-21 14:44:29 read : 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계2: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흰 돌에 새겨진 새 이름’ 이런 내용은 ‘대단히 모호’해서, 계시록을 아무리 많이 읽고 달달 외워도, 그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사야61:2절에도, ‘새 이름’이 나옵니다. ☞사62장, 새 예루살렘 그러니까 우리가 계시록의 이해가 어려운 것은, 구약성경을 너무 모르니까.. 계시록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 신자들에게는 ‘흰 돌에 새겨진 새 이름’을 우리처럼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 설교문은, ‘흰 돌’은.. 출28:9~11의 ‘제사장의 보석(거기에 12지파 이름이 새겨짐)’에서 ‘새 이름’은.. 사61:2의 ‘새 이름(새로운 신약교회)’에서 인용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흰 돌에 새겨진 새 이름을 받았다’는 것은, 버가모 교회가, 비록 이방지역에 세워진 이방인 교회이지만, 그들이 영적인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신약교회)에 당당히 편입되는 특권을 뜻한다..고 봅니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봅시다. ◑1. 흰돌에 새겨진 이름 ▲흰돌을 주신다. 당시에는 법정에서 ‘흰돌’을 주면 무죄였고, ‘검은돌’을 주면 유죄 판결이었다. 이렇게 볼 때, ‘흰돌’은, 예수님의 사죄, 속죄, 용서를 의미한다. (발람과 니골라당의 유혹을) 이기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죄용서의 은총을 주신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극장에 들어갈 때, 흰돌에다 자기 이름을 새겨주었다고 한다. 그런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었던 버가모 교인들에게 ‘흰 돌을 주겠다’는 뜻은 ‘천국에 입장을 시켜주겠다’는 뜻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라고 추측한다. 단, ‘발람과 니골라 당의 유혹을 이기는 자에게’이다. 그런데 성경을 추측으로 푸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보면, 아래와 같다. 1) 출28:9~11, 호마노 (돌) 두 개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그들의 나이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새기라 위에서 밑줄 친 단어 3개는, 히브리어로 ‘에벤’인데, ‘돌, 또는 보석’이란 뜻이다. 그 돌(에벤)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겼다. 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이 이스라엘 아들들을 품에 안고, 하나님께 제사로/제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 갈멜산 제단의 복음적 해석 2) 그런데 ‘버가모’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도시이다. 사56:3에, 여호와께 연합된 이방인은, 이방인이라도 이스라엘에 편입된다는 식의 말씀이 나온다. 56: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아들딸을 두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낫게 하여 주겠다. 그들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도록, 영원한 명성을 그들에게 주겠다. (새번역) 6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신약 교회)에 편입된다는 뜻이다. :5, :7 3) 또한 사62:2절 등에도, 새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은 ‘포로에서 회복된 새 백성, 또는 신약시대의 새 백성’을 뜻한다. 사62:2,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새 이름’은.. 쉽게 말하면 ‘새 예루살렘, 새 신약성도, 새 신약교회’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은, 장차 ‘새 신약교회’ 라는 새 이름으로 불릴 것을, 이사야서가 예언하고 있다. ▲(정리하면) ‘흰돌에 새 이름이 적혀 있다’는 의미는, 위1)에 의하면, ‘돌에 이름을 새긴다’는 이스라엘 12지파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제사장의 가슴에 달려 있는 호마노 돌(보석)에는, 각각 6지파씩,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름이 새겨진 흰돌'은, 구약의 바로 그 돌을 연상케 한다. 버가모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 12지파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위2) 에 의하면, 이방인 신자의 이름도, 성전과 성전 벽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사56:5 실제로 계21:14에, ‘그 도성의 성벽에는 주춧돌이 열두 개가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56:5절과, 계21:14절을 연결해서 볼 수 있다. 둘 다 성전 벽에 이름이 적혀 있다. 버가모 교회가 받은 '이름이 새겨진 돌'은, 새 예루살렘 성(신약 교회)에 12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12사도의 이름은.. *교회 지도자들의 이름이 아니라 신약교회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우리 각자 이름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위3)은, 그 사실을 재확인 하고 있다. 사62:2에는, ‘새 이름’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는, 신약시대의 새 신앙공동체를 뜻한다. 버가모 교회는, 이방인 교회이지만, 새 신약교회에서는, 그런 유대인, 이방인 구분 자체가 없어진다. 그게 바로 '새 이름'의 의미다. 그것이 이사야서에 예언되어져 있었는데, 계2:17에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그래서 버가모 교인들이 ‘새 이름이 새겨진 흰돌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비록 이방인들이지만, 이스라엘의 12지파처럼, 당당히 영적 이스라엘에 편입된다..는 뜻이다. 그 보장을, 예수님이,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말씀해 주셨다. 이것은 대단한 약속이요, 축복이다.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있었지만, ‘새 이름’에는, 그런 구분 자체가 없어진다. ‘새 이름’으로 통폐합된다. 그 새 이름은 ‘신약 교회’이다. 아래 구절도 그 내용을 재차 예언한다. 사65:15, 또 너희의 끼친 (옛)이름은 나의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새 이름)으로 칭하리라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차별이 없다. 새 신약교회 안에 들어오는 자들은 ‘다른 이름/새 이름/영적 이스라엘’로 불리는 것이다. ▲(흰돌을)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2:17 ‘감추어진 만나’처럼, 복음을 ‘비밀’이다. 감춰져 있다. 하나님이 택해 주시고, 영안을 열어주시는 사람만.. 그 비밀을 깨닫게 되고, 복음을 믿게 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 ◑2. 감추어진 만나 계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감추었던 만나 ‘감추었던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아래 구절에, 만나는 떡이요, 예수님은 자신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라고 말씀하셨다. 요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감추어진 (만나)’은 무슨 의미인가? 4복음서와 서신서 여러 곳에 예수 그리스도는 ‘감추어져 있다’고 나와 있다. 즉 비밀mystery이다. 예수님을 뻔히 보고도 못 믿는 사람이 있고, 비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있다. 깨닫게, 믿게 해 주셔야.. 믿는다. 그래서 ‘이기는 자에게 감추어진 만나’를 준다는 것은, 2:17 ‘그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 주시고, 더 깊이 깨닫게 해 주신다’는 뜻이다.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감추어진 만나’는 ‘우상의 제물’과 대비된다.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버가모 교인들 안에는, 신실한 성도들과, 타협한 신자들의 2그룹이 있었다. ‘감추어진 만나’를 먹는 성도들과, 발람의 교훈을 지키며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이다. 구약 민수기에, 발람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꾀어 바알 우상을 섬기게 하면서, 거기 여사제들과 행음하도록.. 미혹한 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벌을 받도록.. 이스라엘을 유혹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발람의 교훈’이란, ‘탐욕/물질욕/음욕의 우상숭배’를 뜻한다. 물질욕, 음욕도.. 그 근본 뿌리는 똑같이 ‘탐심, 탐욕’이란 ‘우상’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물질욕, 음욕 등 탐심을 버리지 못한 신자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면, ‘우상의 제물’과 ‘감추어진 만나’가 서로 대비된다. A를 먹으면, B를 안 먹게 되는 식이다. 즉 ‘감추어진 만나’를 먹고 배부른 성도는, ‘우상의 제물, 발람의 교훈’을 따르지 않지만, ‘감추어진 만나’를 먹지 못하고, 배고픈 성도는, ‘우상의 제물’을 먹고, ‘발람의 교훈’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상 숭배의 결과는.. 그 즐거움은 잠시이고, 결과는 완전히 패망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 ............................. ※참고로, (위에서 버가모 교회를 살펴보았는데) 빌라델비아 교회에도 ‘새 이름’을 주셨다. 그런데 아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위에서 살펴본 ‘새 이름’은 ‘자기들의 새 이름, 신약교회 공동체로서의 새 이름’을 뜻한다. 둘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같은 이름'이다. 신약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 이시기 때문이다. 계3:12, 이기는 자는..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14: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19: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9강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 /계2:18-23/왕상18:26-29/ 김성수목사 2015-07-21 14:42:25 read : 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18절, 전체 주제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19강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 /계2:18-23/왕상18:26-29/ 김성수목사 2015-07-21 14:42:25 read : 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18절, 전체 주제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7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두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관한 묘사’는 7교회마다 각각 다른데, 그 각각의 묘사는, 각각의 편지 내용/주제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담고 있다. 눈이 불꽃같다.. 심판주를 의미한다. 발이 주석 같다.. 심판주의 권위를 나타낸다. 주석은.. 쉽게 말하면 놋이다. 빛난 주석은, 번쩍 번쩍 광이 나는 놋이다. 놋의 특징은 ‘단단함’이다. 심판주의 엄격함을 나타낸다. *냉면 그릇이 놋그릇 그래서 서두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를 통해서,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의 전체 주제를 살피면 ‘심판주의 엄격함’이 되겠다. ◑2:19절, 칭찬 19 내가 내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풀어서 쓰면 ‘네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낫다’는 뜻이다. 참고로, 19절 서두의 ‘사업’은 ‘행위’와 같은 말이다. 헬라어로 ‘에르곤’인데, 사업business도 되고, 일works도 된다. 같은 말을 19절 서두에는 ‘사업’으로 번역했고, 나중에는 ‘행위’로 번역했다. 에베소교회와 대비된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 반면에 두아디라 교회는 나중 행위가 더 많았다. 여기까지 칭찬이고.. ........... <본론> ......... ◑2:20절, 책망,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했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의 아내인데, 두로왕의 딸이었다. 그가 이스라엘로 시집을 왔을 때, 바알과 아세라의 여선지자로 자처하면서 열심히 북왕국에, 바알 신앙을 퍼뜨렸다. 원래 왕비인 이세벨이 선지자인 이유는, 아래 구절에 나와 있다. 왕하9: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 idolatry 과 술수 witchcraft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여기서 ‘술수’는 마법, 점치기 witchcraft, sorcery 이라는 말이다. *케쉐프 이런 마법을 행하는 자들을, ‘술객’이라 불렀는데, 출7:11 마법사, 또는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란 뜻이다.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선지자였다. 그래서 계시록 본문에 이세벨을 ‘자칭 선지자’라고 부른 것이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 가운데, <이세벨의 가르침>에 넘어간 자가 있음을 책망하셨다. 계2:20b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위 구절에 보면, 당시 초대교회에 <이세벨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세벨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항해서 싸우던 장면을 보면, 당시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의식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1.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왕상18:26,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바알 선지자들은, 그들의 제사를 축제처럼 드렸다는 것이다. 뛰놀더라 물론 교회도 ‘예배는 잔치적인 요소가 있으므로, 즐겁게 드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등, ‘잔치’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잔치이며, 누구를 위해 뛰노는가?’ 에 달려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말 그대로, 어린 양을 위해서 축제를 해야 한다. 예배는.. 나의 기쁨과 나의 즐거움을 위한 잔치는 아니다. 부수효과는 있더라도 오늘날 우리 가운데, 예배는.. ‘내가 즐겁고, 내가 기쁘고, 내가 위로받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며 이렇게 은연중에 ‘사람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자들이 ‘은혜 받았다’는 말도, 이제 거의 ‘내가 듣고 보기에 좋았다’는 뜻이 되어 버렸다. 예배에 밴드를 동원하는 것, 또한 발을 구르며 찬양하는 것, 그 자체를 놓고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만약 그것이 ‘나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면, <바알의 선지자들이 제단 앞에서 뛰어논 것>과 똑같은 것이다. 이세벨의 가르침에 감염된 것이다. 요즘 청소년 집회에는 드라마, 멀티미디어가 종종 동원된다. 그래야 지루하지 않고, 또한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들이 ‘인간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 참석자들이 ‘재미있게 뛰어논다면’ .. 그건 바알의 예배가 되는 것이다. 예배가 지루하더라도..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져야 한다. 즐거우면 더 좋겠지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기쁨이 충만할 경우도 있다. 여러분, 예배는, 거기에 모인 참석자, 회중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들을 즐겁게 해 주고, 그들에게 뭔가 유익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이 아니다. 그런 부수효과가 있겠지만.. 혹시 없어도 무방하다. 때때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 각자의 죄가 양심에 드러나서.. 얼굴이 붉어지고, 불편해져야 된다. 때때로 우리는, 말씀에 나를 비추어, 통회하는 슬픈 심령이 되어야 한다. 물론 너무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감격해서..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발을 구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젊음과 춤 실력을 발산하기 위한 ‘뛰어노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디 계시는지, 온데 간데 없고, 우리들끼리만 모여서 뛰고 굴리는 잔치.. 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예배는, ‘예복’이 필요한 잔치이다. ‘의의 옷’을 뜻함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격식 있는 formal 잔치라는 것이다. ▲2. 큰 소리로 그들의 신을 부르더라 왕상18: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은, 자기 신이 살아있다는 확신이 없으니까, 큰 소리로 외쳐 부른 것이다. 큰 소리로 부르면, 혹시 깰까봐.. 즉 이 말은, 바알 신은, 인간이 고안해낸 신이라서, 인간과 비슷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큰 소리로 부르면.. 깨어나는 신’ 오늘날 교회에도, 예수가 누구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항상 하나님을 ‘인간과 비슷하게’ 생각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하나님도 싫어하는 줄로 여긴다. 물론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공통분모가 많이 있지만, ‘인본주의적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요즘 ‘가요 콘서트’에 가서, 열광하고, 감동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무슨 가수 콘서트에 가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차고, ‘나가수’ 경연장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는데, 이들이 감동 받는 것은 ‘큰 소리로 열광’하는 것이다. 그들의 음악은 주로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의 큰 음향’이다. 거기서 소곤소곤하면.. 아무도 감동 못 받는다. 물론 우리가 성령이 감동하시면, 큰 소리로 부르짖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소곤거리는 소리에도.. 반응하신다. 보통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때는, 큰 소리로 부르짖기 보다는, 소곤소곤하게 주님과 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세미한 음성 주님이 내 가까이 계시는데, 큰 소리로 외쳐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때는 서로 소곤거린다. ▲3. 자해 왕상18:28,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바알의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요구가 들어지지 않으니까, 자기 몸을 자해했다. 자기 몸을 상하게 해서, 신을 협박하는 것이다. ‘규례를 따라’ 했다는 것은.. 그게 그들의 관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종종, 자기 몸을 자해하는 일을, 제사 드리면서 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1백년 만에 급성장한 이유는 ‘새벽기도’였다. 한국은, 교회가 들어오기 전에, 벌써 어머니들이 부엌에서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새벽마다 기도하던 것이, 전통신앙이었다. 그것이 ‘새벽기도’로 자연스럽게 대치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복 받는다’는 민간신앙도, 고스란히 그대로 옮겨졌다. 원래 기독교 신앙과 기도는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강조하는데, 그 원래 목적은 퇴색되고 ‘자기 소원을 간절히 기도해서, 받아내는’ 그런 새벽기도로 변질된 때가, 과거에 한 때 있었다. 새벽기도는, 성경에도 나오고, 아주 꼭 필요한 것이고, 적극 권장해야 하지만, 오직 자기 소원/야망의 성취를 위해서 ‘새벽기도, 금식기도, 일천번제’ .. 이것은 타종교와 똑같은 무속신앙일 뿐이다. 동남아의 불교, 도교, 힌두교 사원에 새벽이나 아침마다, 무슨 꽃과 음식까지 싸들고 가서 펼쳐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 종교성과 열심히 대단하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자기 욕심과 소원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기도는..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비는 것이다. 그러나 인격적인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기도와 반드시 달라야 한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헌신이지만, 신자가, 무슨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해서, 금식을 하거나 집을 파는 것은.. 죄송하지만 그것은 자해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것이 거의 다 없어졌지만, ‘큰 꿈을 품으시오. 그리고 당신의 그 꿈의 성취를 위해서 이것도 드리고, 저것도 아낌없이 바쳐보시라!’ 이건 투기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바알 종교요, 이세벨의 가르침(자해로 요구 관철)인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와 인격적 관계를 먼저 원하시며, 그런 ‘투기와 뇌물’에는 오히려 벌을 내리신다. 물론 순수하게 십일조와 헌금과 구제를 드리고, 그래서 복을 받는 경우도 반드시 있다. 그러므로 헌금은 가급적 드릴수록 좋다. 또한 주님은 반드시 갚아주신다. 혹시 현세에서 안 갚아주시면, 내세에서 갚아주신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려서, 하나님께서 ‘네가 뭘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지혜를 원합니다’고 대답해서, 지혜를 받았다. 이 내용을 복음적으로 해석하면,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니까) 솔로몬이 지혜 이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내 소원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히 받기 위해서, 일천번제단을 쌓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과연 그걸 원해서, 일천번제 할까? (소원성취 목적의) 새벽기도, 백일작정기도.. 이건 다 불교적 기원을 갖고 있다. 이걸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는 것이다. 자해와 비슷하다. 자기를 괴롭게 해서, 신의 긍휼과 응답을 받아내는 행위다. 삼보일배, 1천배(1천 번 절하기).. 다 그런 식이다. 그런데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면.. 결국은 망한다. 계속되는 2:21~23절에 그 내용이 나온다. ▲4. 진언 (미친듯한 예언) 왕상18: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찌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진언은 frantic prophesy 미친 듯한 예언이다. 제 멋대로, 제 생각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뇌까리는) 것이다. 대체로 보면, 예외도 있지만 참된 예언은.. 공명현상을 일으킨다. 듣는 사람이 다 그 권위에 압도되고, 수긍한다. 거짓 예언은.. 자기 스스로 권위를 세워야 되니까.. 광란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명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듣는 사람에게 아무 감동이 없다. ▲정리하면, 위에서 ▲1~▲4.까지 살펴보았는데, 이런 <이세벨의 가르침>이.. 당시 두아디라 교회에 많이 침투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든 시대에, 같은 경고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면.. 결국은 망한다. 그 내용은 ☞ 이세벨을 용납하면.. 결국 망한다 를 꼭 보세요.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지 않고, <자기 소원 성취>를 근거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자기 소원 성취>를 근거로 하는 신앙은 동남아/남미/아프리카의 신앙이.. 형태는 달라도.. 속 본질은 다 그것이다. 사원에 헌금을 듬뿍 하더라도.. 속 본질이 ‘소원 성취’이다. 기독교는.. 그런 ‘바알 신앙, 이세벨의 가르침’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우상>이 되면, 그 <자기 성공>이란 우상을 위해서, 하나님을 자꾸 이용하려 든다. 또 교회도, 일단 가시적 성과(교회성장)를 내기 위해서 신자들이 <자기 성공>이란 우상을 위해서, 하나님을 자꾸 이용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탕발림’과 같아서, 결국은 다 망한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자의 결말은.. 멸망인데.. 그것이 구약성경(사사기, 룻기, 역사서, 예언서)의 반복되는 메시지인데, 오늘날 신자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경을 못 배워서 일까? ◑2:21~23절 아래 구절들에 대한 해석은 ☞ 이세벨을 용납하면.. 결국 망한다 를 보세요.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계시록을, 일차적으로 구약의 인용이라고 볼 때, 우상숭배를 하고, 회개하지 않았던 아합과 이세벨은 결국 그 아들(요람) 대에 이르러, 예후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때 아합의 70자녀가 하루만에 몰살당했는데, 왕하10:1~7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구절은, 일차적으로 그 사건을 가리킨다. 그것을 두아디라 교회 및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적용하면, 우상숭배자들 및 그 자녀들은.. 결국 완전히 패망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는 뜻이다.
1강 /요한계시록 서론 /계20:7-10/ 김성수목사 2015-07-21 15:11:37 read : 6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계시록을 보는 관점 ▶저/김성수 목사는 계시록을 ‘상징적’으로 주로 해석한다. 묵시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시록을 모두 ‘상징주의적’으로만
1강 /요한계시록 서론 /계20:7-10/ 김성수목사 2015-07-21 15:11:37 read : 6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계시록을 보는 관점 ▶저/김성수 목사는 계시록을 ‘상징적’으로 주로 해석한다. 묵시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시록을 모두 ‘상징주의적’으로만 보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에덴동산도 상징이고, 종말전쟁도 상징이고.. 그런 일은 실제로 안 일어날 것이고, ‘그런 상징적 묘사들을 통해서, 우리는 교훈만 받으면 된다’ 는데.. 그러면 자유주의로 치우치게 된다. ▶저는 계시록을 주로 상징적으로 보되, 바다에서 용이 나온다든지, 그 용이 열 뿔이 달려 있다든지.. 이것은 ‘상징적’으로 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사건은, 교회시대 전체에 not 미래 종말에만 실제로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계시록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이라든지 곡과 마곡의 전쟁은 상징적인 단어들로 표기되어 있지만, 있지도 않을 사건을 설화로 꾸며서 교훈을 주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전쟁은, 교회 시대 내내, 교회가 겪어내야 할 전체 전투를 종합해서 표현해 놓은 것이다. 저는 아마겟돈 전쟁이 미래에 중국과 아시아가 합해서 이스라엘과 전쟁한다는 등의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재림 때까지 교회가 마귀의 공격을 대적하여 싸우는 ‘전체 전쟁’을 다 종합해서 ‘아마겟돈’ ‘곡과 마곡의 전쟁’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본다. 그럼 앞으로 ‘아마겟돈 전쟁’은 없는 것인가? 점점 더 심한 고통과 공격이 우리에게 닥칠 것이다. 최후에 엄청난 마귀의 발악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다 종합해서.. 아마겟돈 전쟁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1) ▶‘적그리스도’나 ‘거짓 선지자’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등 어떤 한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미 요한은 ‘그 시대에 적그리스도가 많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어 왔고, 앞으로 더욱 거세게 발악하는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다. 그 모두를 가리켜.. ‘적그리스도’ 라고 이야기한다. ▶정리하면, 계시록은 인류역사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교회시대를 통해서.. 교회가 겪어내어야 할 일들과, (교회시대에 미래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시며, 우리 교회는 어떻게 안전하게 그 승리의 나팔을 불며,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위로와 격려의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이다. 그것을 당시에 그들을 핍박하던 로마를 빗대어서 바벨론으로 표기해서 당시의 정황, 사건, 신화 등을 동원해서, 구약 성경적 언어를 사용해서 이야기 식으로 친절하게 설명해 놓은 것이.. 계시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명확하게 발견해야 한다. 승리자요, 왕노릇하는 우리 신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찬란한 천국을 확인하고, 그 나라만을 소망하게 될 것이다. 그곳은 슬픔이 없고, 눈물이 없다. 아픔도 없다. 거짓도 죄도 없다. 너무나 완벽한 곳이다. 거기에서 우리들이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계시록은 그것이다. ◑2.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계1:1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마치 성경의 부록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오지 않은 저 미래, 세상 끝에 일어날 일들을, 수수께끼처럼 엮어놓은 책, 정도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요한계시록도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재케 된 교회가, 이 땅에서 겪어야 할 일들을 그려놓은 책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 일들을 잘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이 땅에 고난을 겪고 있는 실제적(실존적)이며, 가시적인 교회와 천상에 완성된 교회를 동시에 딱 띠워서 보여주고는, ‘봐라, 너희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책이 계시록이다.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서 오래 동안 요한계시록을 강해하셨던 포트리스 목사님이 쓰신 The Returning King 이라는 책에 나오는 일화다. 웨스트민스트 신대원 학생들이 학교농구 코드에서 농구하고 있는데 수위 아저씨가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었다. 신학생들: “계시록을 다 아십니까? 저희가 좀 도와드릴까요?” 수위아저씨: “다 알아요!” 신학생들: “무슨 얘긴데요?” 수위아저씨: “네, 예수님이 이기신데요!” 그렇다. 요한계시록은 그것이다. 예수님이 이기신다. 이것 한 가지만 알고 가시면 된다. 계시록은, 지금 가시적으로는 교회가 당하고 있는 것 같고,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이기셨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절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승리할 것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교회는 반드시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게 된다는..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이다. 절대 미래에 있을 어떤 일로, 혹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국한시켜서 수수께끼처럼 풀어서는 안 된다. ◑3. 창세기는 창조, 계시록은 회복 창세기 (창조) 요한계시록 (완성)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된다. 빛이 있으라 하시며 빛을 창조하셨다. 그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주님의 영광의 빛이 성을 밝혀준다. 교활한 사탄이 등장해서 인간을 미혹한다. 그 사탄이 결박당한 채 불못에 던져진다. 이렇게 완성 되어간다. 인간이 낙원을 상실한다. 그 낙원이 회복된다. 인간이 하나님과 결별하게 되지만 인간이 하나님과 혼인관계로 묶인다. 자연이 가시덤불 엉겅퀴를 내어서 인간을 해친다. 자연이 사람을 도우고, 위로한다. 생명나무가 천사의 보호를 받아서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다. 그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다. 에덴동산꼭대기에서 흐르던 강물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으로 흐른다. 에덴동산에서 만물을 통치하라고 위탁받았지만 실패했던 인간이.. 새하늘과 새땅에서 왕노릇하면서 만물을 통치하게 된다. 영원히 변치 않는, 다시는 타락할 수 없는 진짜 낙원이 계시록에 결론으로 묘사된다. 선악과가 있었지만 선악과가 없다. 시험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과 인간을 만들었다가, 그들이 실패하니까 ‘어, 안 되네 또 다른 방법 써 봐야지...’ 하시면서 좌충우돌하시면서 계시록까지 가시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21, 22장의 새하늘가 새땅을 이미 목적하시고, 인간과 우주를 만드신 것이다. ◑4. ‘묵시’라는 큰 그림을 보면서 해석해야! 그래서 이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를 어떻게 의의 흰옷을 입은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가는 가를 기록해 놓은 것이 성경이다. 계시록은 그 성경의 결론 부분이다. 성경의 무슨 부록도, 수수께끼 퍼즐도 아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접근 할 때, 우리는 무슨 수수께끼를 푸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열 뿔이 뭘까?’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이 뭐지?’ 이렇게 접근하지 마시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셔야 한다. 복음이란 숲을 먼저 보시고, 그 안에 있는 나무, 풀, 시내를 보셔야 한다. 먼저 큰 그림(복음)을 보실 수 있어야 한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분명 읽고, 듣고, 기록한 것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이 계시록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복음이 계시되어 있는 책이다. (이해하고나서 지킨다.) 하나님은 계시록을 쓰실 때, 어떻게 해서든지 하늘의 비밀을 밝히 계시해 주시기 위해서 쓰신 것이지, 감춰둬서 알지 못하게 하려고 쓰신 것이 아니다. ‘계시’라는 말 자체가 ‘커튼을 들추고 보여준다’는 뜻이지, ‘커튼을 가리고 비밀을 은폐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계시록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전제를 갖고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미리 겁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에 보면, 거기에 엉뚱하고 신비적인 존재들이 많이 등장한다. 엘프, 이상한 괴물들도 많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 영화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우리가 안다.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 계시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거기에 나오는 ‘악마’의 이빨이 몇 개인지, 그 ‘걸 어다니는 나무’가 수염이 어떤 모양이라든지 ‘골론’의 머리에 뿔이 있는지, 없는지 .. 그런 것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의 주제는 무엇인지, 우리가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가 계시록을 접근해야 한다. 열 뿔, 일곱 머리, 네 생물, 곰의 발, 일곱 별.. 이런 것은 일단 다 생략하시고 전체적인 그림부터 파악하시기 바란다.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세부 상징들도, 해석이 필요한 부분은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5. 계시록을 쉽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 계시록은 친절하게 성경 자체에서 모든 내용을 풀어주고 있다. 그렇게 계시록 자체 안에서도 풀어주고 있고, 또 구약 안에서 다 풀어주고 있다. ▲1.구약이 계시록을 해석해 준다. 계시록은 4백 여 구절 중에, 거의 3백 구절 가까이가 구약의 내용을 짜깁기 한 것이다. 그래서 구약을 통해서, 계시록은 얼마든지 수월하게 해석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계시록을 해석할 때, 항상 구약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계20:8절에 ‘곡과 마곡地名의 전쟁’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에스겔서의 곡과 마곡의 전쟁’ 이야기다. 요한이 최후의 심판 때, 사탄과 그 무리가 심판 받을 것을 에스겔서38~39장을 인용해서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계시록은 전체적으로 ‘반복기법’을 쓰고 있다. 계20:7~10의 ‘곡과 마곡의 전쟁’ 이야기는 에스겔서38~39장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묵시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반복하는 이유는, 그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2. 계시록 본문 안에, 해석이 들어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①계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별은 뭐고, 일곱 금촛대는 무엇인가?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본문이 직접 설명해 주고 있다. ②계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흰옷 입은 무리는 ‘교회’이다. 본문이 본문의 질문을 답변/설명해 주고 있다. ③계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용은.. 마귀 사탄이라고 직접 설명해 주고 있다. ④계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단장한 것 같더라 그게 뭔가 하면, 계21:9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본문이 ‘교회(성도)다’ 라고 설명한다. 벽옥, 황보석, 녹보석 등 각종 보석은 교회, 어린양의 신부를 나타낸다. 그런데 펄시 콜레 같은 사람들은, 천국에 갔다 와서, 천국은 이런 곳이다.. 라고 간증하는 것을 들어보면, 천국에 갔더니 거기에 길이 황금이고, 벽은 녹보석이고, 기둥은 옥보석이니.. 하는 것은, 계시록이 뭘 이야기 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이다. (천국에 진짜 보석이 많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본문의 보석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본문의 보석은.. 천국성도들을 상징적, 묵시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석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교회인 우리들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임을 설명해 놓은 것이지, 천국이 실제로 그렇게 생겼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천국에 보석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세하게 성경이 설명해 주고 있다. 이렇게 계시록은 성경 안에서 다 해석되게 되어있다. 계시록이 그 상징적 내용을 직접 설명하든지, 아니면 구약의 사건을 통해 상징적으로 설명하든지, 계시록은 성경으로 다 풀어진다. 절대 역사적인 사건들을 끌고 들어가서, 이것이 무슨 2차대전이니, 이게 무슨 히틀러니..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6. 요한계시록과 교회론 요한계시록은 표면상으로는 소아시아의 7교회에 보낸 편지 형식을 띠고 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는, 그들이 쓰는 숫자에 특정한 개념을 부여했었다. 특히 1부터 10까지 그런 특별한 개념을 부여했었는데, 7이라는 숫자는 전체, 충만, 완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요한이 소아시아에 다른 유명한 교회들이 많았는데도 굳이 8개도 아니고, 7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그 7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을 초월한 전체 교회, 여러분을 포함한 전체 교회에게 쓴 것이다. 특히 계1:12 가로되 너 보는 것을 (한)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한 책, 한 두루마리에 쓰라는 것이다. 7교회에 보내려면, 7두루마리에 써서 보내야 하는데, 한 두루마리에 써서 회람시키라고 한 것은, 단지 7교회에게만 쓴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에게 이 요한계시록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시록의 전편에 걸쳐서 일관된 흐름을 형성하는 주제는 교회론이다. 이 계시록 강해 전체가 풍성한 교회론의 결론이다. 4장, 5장에 나오는.. 24장로, 7장에 나오는.. 14만 4천, 셀 수 없는 무리 11장의.. 성전과 도시 12장의.. 여인 14장의.. 14만 4천 15장의.. 승리자들 19장의.. 어린양의 신부는.. 모두 교회를 상징하는 말들이다. ▲이렇게 교회가 교회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 교회에게 일어날 일들을 지금 계시록은 설명하고 있다. 계시록은 당시 로마에 압제를 받고 있었던 교회를 향해서 로마인들이 알아볼 수 없는 그들만의 상징, 그들만의 소문, 구약의 내용 등으로 성도들이 이 땅에서는 전투하는 교회로, 전투하는 교회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승리한 교회에, 영적으로, 신분적으로 하늘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 하늘에서는 이미 왕노릇하고 있고, 하나님은 반드시 실패없이 가시적으로도 우리를 그렇게 완성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교회에게 던지고 있다. 4장과 5장에서 24장로들이 나오는데 그 24장로들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보좌 둘레있는 왕의 보좌에 앉아 있다. 24장로는 교회인데 그 교회가 이미 하늘의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는 왕의 보좌에 앉아 있다. 여러분이! 그렇게 가시적인 이 지상의 교회와, 하늘의 교회를 보여주면서 ‘너희들이 지금 이렇게 당하고 있지만, 염려하지 말라 너희들은 지금 천상에서 이렇게 위대한 존재야!’ 라고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는 책이 요한계시록이다.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로 완성되어져 가는 지를 천상에서 이렇게 내려다보시며, 이야기 형식으로 그려 놓은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지금 고난당하고 있는, 지금 핍박 당하고, 세상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 이 시대의 우리 교회에도 동일한 메시지로 선포되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에는, 왜 이렇게 핍박당하는 교회가 없는가? 성경은 핍박당하는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계시록을 써 놓았는데, 왜 지금 미국과 한국에는 핍박당하는 교회가 없는가? 오히려 세상과 적당히 손을 잡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사탄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계속해서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 때로는 육체적인 핍박으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예레미야, 이사야, 베드로, 사도바울 등 많은 주의 종들이 순교를 당했다.) 그렇게 육체적인 핍박을 가해서,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교회가 실패했는가? 지금까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사탄은 그렇게 엄청난 세력으로 우리를 공격해 오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를 계시록이 보여주고 있다. 사탄은 방법을 계속 바꿔가면서 교회를 공격했다. 옛날에는 핍박을 가해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겁을 주었다면, 요즘에는 풍요, 번영, 쾌락을 주어서.. 그래서 서구의 교회들이 오락, 레저, 취미생활에 밀려서 하나 둘씩 문을 닿고 있다. 교회 가는 시간 대신에, 그런 재미있는 곳으로 빠져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교회는 그러한 핍박속에서 지금까지 실패하지 않았듯이,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부활 때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승리의 면류관을 쓸 것이다. 그것이 계시록이다. ‘너희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 지금 너희가 당하고 지는 것 같지만, 아니다. 너희는 지금 이기고 있는 거고, 그 고난 뒤에 너희에게 올 저 영광스런 천국을 기대하면서 ‘이겨라!’고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읽고서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으시면, 단 한 가지만 기억하시라 “이겨라, 이겨라, 우-리-교-회- 이-겨-라! v-i-c-t-o-r-y!” ............................. 주1) 이 견해에 대한 편집자의 견해를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편집자도 이 견해에 동의하고, 이런 설명이 맞지만, 이것이 주된 해석이지만, 중동에서 벌어질 실제전쟁도..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계시록은 사탄과 교회의 영적 전쟁을 기록하고 있지만, 공중에서 그런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순간에, 동시에 지상에서는 중동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본다. ‘적그리스도’도 마찬가지다. 원래 상징적 해석으로는 ‘종말에 나타날 특별한 적그리스도는 없다.’ 적그리스도는 매 시대에 나타난다. 이것이 주된 해석의 흐름이지만, 보조적인 해석으로 보면, 그 매 시대에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종말시대에도(매 시대처럼) 예외 없이 나타날 것인데, 그것은 성경의 문자적(↔상징적) 해석과 일치할 것으로, 저/편집자는 그렇게 본다. 미래 일은 아무도 모르지만..
1교회, 죽었는가 살았는가? /계3:14-22/ 김기석목사 2015-07-11 14:47:22 read : 115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1교회, 죽었는가 살았는가? /계3:14-22/ 김기석목사 2015-07-11 14:47:22 read : 115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 오늘 교회가 서 있는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교회연합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고 많은 교회가 있지만 사실은 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서 있는 자리와 형편은 달라도 우리는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을 가진 목사 한 분이 일을 저질렀더군요. 대구의 동화사에 들어가 탱화에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낙서를 하고, 불전함에 방뇨까지 했다 합니다. 사찰에 들어가 땅 밟기를 했던 젊은이들은 차라리 순진한 편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까요? 바른 분별력을 갖지 못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하고 저급한가를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남의 동네 이야기 할 형편이 못됩니다. 감리교회에서 가장 큰 교회의 한 원로 목사는 조선일보에 전면 광고를 내서 감리교회의 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감리교회는 9월 25일 입법총회를 통해 몇 가지 법안을 고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소위 말하는 ‘세습 방지법’입니다. 목사나 장로의 자제나 사위/며느리들은 당사자들이 속해 있는 교회의 담임자가 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법을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럽지만, 그래도 이 법은 교회가 상식을 회복해 가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이들이 공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그 원로 목사는 ‘세습방지법’을 한 마디로 대형 교회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습의 정당화하는 말을 했습니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자기 후임으로 온 목사가 목회를 잘 하면 시기심이 생기고, 못하면 탓하게 된다면서, 가족이 후임이 되면 시기심보다는 격려하는 마음이 더 생기니 좋은 일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주 바닥을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그런 마음을 극복하는 과정이 아니던가요? 이런 난맥상은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동을 상대로 한 성범죄가 빈발하고 여론이 들끓자 정치인들은 그런 이들에 대해 엄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성범죄자들에 대한 화학적 거세가 논의되더니 급기야 물리적 거세 법안을 만들려는 이들이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특정인들에게 덮어씌우는 일에 익숙합니다. 사회적 증오를 특정한 개인들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사람들의 분노를 해소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만 없어지면 세상이 좋아질까요? 그들을 절망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던 사회 구조를 그대로 방치하는 한 그런 범죄자들은 계속해서 나올 것입니다. 저 역시 파렴치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미워하는 것으로 우리가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절망의 가장자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 삶의 지도를 가질 수 있도록 돕지 않으면 그런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겁니다. 숙명여자대학교의 김응교 교수는 노숙인들을 위해 인문학 강좌를 해 줄 수 있느냐는 어느 시민단체의 요청을 받았을 때 즉시 ‘무조건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명예가 따르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배움을 사회적 자산으로 만드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교회가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 시대의 땅 끝까지 복음을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교회답게 변해야 합니다. • 우리의 실상 저는 오늘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가운데 한 마디의 칭찬도 듣지 못한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칭찬할 게 없는 교회, 기가 막힙니다. 어쩌다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라오디게아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값비싼 의복 생산, 대부업, 의약품 제조를 통해 그 도시는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15-16) 라오디게아는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히에로폴리스와 가까웠는데, 그곳에서 솟아난 물이 흘러흘러 라오디게아에 이를 무렵이면 미지근해졌다고 합니다. 주님은 그런 지역적 특성과 관련시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믿음을 ‘미지근함’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미지근한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3:5)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은 “늘 배우기는 하나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전혀 이를 수 없습니다”(딤후3:7). 냉철한 비판 의식이나 깨끗한 양심, 역사를 꿰뚫어보는 예언자적 시야도 없습니다. 불의한 일을 보아도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통해 뭔가 중요한 삶의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는 아예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별 일 없이 사는 것입니다. 로또 복권에라도 당첨되면 더 좋아하겠지요? 복음의 대의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1935년 12월 17일부터 20일까지 열렸던 평양신학교 학생 부흥회에서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디두모라고도 불리웠던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했던 요한복음11장 16절을 본문으로 삼아 그는 정말 젊은이들의 혼에 불을 지르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으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면서 일사의 각오와 다짐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설교의 한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를 버리지 맙시다. 풀의 꽃같이 시들어 떨어질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더럽게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각오와 다짐과 정절을 지켜 나갑시다. 다만 나에게는 일사각오의 결의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세례 요한도 스데반도 청장년의 때에 뜨거운 피를 흘려 주님을 향한 그의 다짐을 지켜 나갔습니다.” 뜨거운 믿음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어 복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제단 앞에 제물로 바쳐지기를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변질된 겁니다. 변질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17절에 대답의 열쇠가 있습니다. 문제는 부유함입니다. 부유하면 사람들은 복음이 갖는 전복적인 성격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개인적 행복과 위안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로써 냉철하거나 뜨거운 신앙은 잦아들고, 신앙의 형식만 남습니다. 그들은 복음에 의해 변화함을 받지 않고, 복음을 변질시킵니다. • 회생을 위한 처방 주님은 그런 그들의 실상을 꿰뚫어보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영혼은 가련한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오로지 그런 사실을 자신만 모를 뿐입니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17) 자기의 실상을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부딪힌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것은 자기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거들먹거리며 살고, 제 잘난 맛에 살던 우리 속에 있는 상처와 어둠과 욕망과 죄를 보게 하십니다. 그걸 보면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십니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라.” 금은 변치 않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믿음의 사람을 저는 독립의 사람, 직립의 사람, 자기 입장을 가진 사람, 하나의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 규정합니다. 그는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는 어지간한 인생의 무게가 짓눌러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시련과 박해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빗대 말하자면 그는 자본주의의 가치관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정신에 접속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멘'이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사야 할 정련한 금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어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믿음을 영적인 벌거벗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이 떠오릅니다. 거울 보는 걸 좋아하고, 옷장에 쌓아둔 옷을 꺼내 입어보는 데 정신이 팔린 임금에게 어느 날 재단사를 가장한 사기꾼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기가 막힌 천이 있다면서 그 천은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고 말합니다. 허영심에 사로잡힌 왕은 그 옷을 주문하고 결국 ‘있지도 않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섭니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꼭 이런 거겠지요. 성도다운 품격도 인격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뭐라도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며 주님은 안타까우셨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흰 옷을 사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 흰 옷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그 마음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벌거벗은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안약으로 유명한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사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눈이 밝다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이고 덜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보며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스스로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마15:14)라고 하지 않으실까요? 저도 나름대로 안간힘을 다해 공부를 하는 까닭은 눈먼 길잡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안약을 눈에 바르지 않고는 제대로 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사람과 세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방송이나 신문의 눈이 아닙니까? 자본주의의 눈이 아닙니까? 주님의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야 합니다. • 일상 속에 주님 모시기 라오디게아 교회는 많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책망 속에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19a). 하나님의 책망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은 고통과 굴욕감을 안겨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징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히12:6)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나마 이 정로라도 된 것은 실패와 아픔과 좌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성취되고 아무런 갈등과 좌절이 없었다면 우리는 정말 교만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둠을 알기에 빛이 고맙습니다. 질병의 힘겨움이 있기에 건강이 고맙습니다. 난관이 있기에 살아있음이 고마움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한국교회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 때문에 마음 아파합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싶어 한숨도 납니다. 하지만 저는 또 다른 희망을 봅니다.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찬 바람이 불면 재 속에 파묻혔던 불씨가 되살아나는 것처럼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좋은 목회자와 평신도 사역자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혼돈의 수면 위에서 움직이셨던 것처럼 성령은 지금 한국 교회 위에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문제는 그 영을 모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 삶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어 드릴 때만 들어오십니다. 우리 내면에, 가정에, 일터에, 학교에, 사회에, 우리들의 관계 속에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주님은 매 순간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소리를 가려듣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온통 빼앗고 있는 것들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높인 채 음악을 듣는 젊은이들을 봅니다. 그들은 완강하게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은 볼륨을 낮출 때입니다. 이것이 행복을 얻는 길이라고 떠들어대는 세상의 소리에 유혹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영위되는 모든 곳에 주님을 모시면 삶이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우리는 그분의 숨결을 받아 새로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변하면 우리 주변도 변합니다. 교회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살아 있는 줄 알았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준엄하게 깨우쳐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회생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도 이전의 부끄러운 일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부유해지면 반드시 타락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에는 말구유와 십자가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희생이 없는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일사각오는커녕, 조금의 손해도 보려하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라 통칭해서 말했지만 우리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르다는 생각 자체가 교만입니다. 이제 주님의 영으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20강 /갈멜산 제단의 복음적 해석 /왕상18:30-35/ 김성수목사 2015-07-21 14:40:26 read : 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열 두 지파를 품에 안으신 예수 그리스도 왕상18: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20강 /갈멜산 제단의 복음적 해석 /왕상18:30-35/ 김성수목사 2015-07-21 14:40:26 read : 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열 두 지파를 품에 안으신 예수 그리스도 왕상18: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1. 엘리야의 제단과 12돌 그냥 ‘열 두 돌’이라 그러면 쉬운데, 일부러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라고 했다. 야곱의 12지파를 상징하는 12돌 위에, 제물(예수님)이 쪼개져서 올라가 있다. 왕상18:33 제물(송아지 각)이 12돌의 제단을 덮고 있는 모습이다. 이 제단의 모습은, 12지파를 품에 안으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12지파는..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세상의 모든 교회이자, 역사의 모든 교회이다. 이 엘리야가 쌓은 제단의 의미는, 야곱의 12아들들을 상징하는 12돌, 즉, 12지파를 품에 안은 온 몸이 쪼개진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저주를 받아 다 타 없어지고, 참된 영적 해갈이 일어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사건이다. ▲2. 대제사장의 에봇의 어깨 띠에도 12지파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를 위해 속죄제사를 드리시는 대제사장이 되신, 우리 주님은 언제나 영적 이스라엘 12지파를 품에 안고 계신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그가 입었던 옷(에봇)을 보면, 그 어깨 띠에 12지파가 새겨져 있었다. 출28:8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에봇에 정교하게 붙여 짤지며 9 호마노 두 개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10 그들의 나이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새기라 11 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에봇은, 대제사장의 예복(유니폼)이었다. 그 에봇은 앞치마 같은 것으로서, 허리띠와 어깨띠가 있어서, 그 띠로 에봇을 몸에 잡아맨다. 출39:6~7에 보면, 이 호마노를 어깨 띠에 매었다고 했다. 그 어깨띠의 양쪽에 호마노 2개 붙였는데, *호마노 : 붉은 빛깔의 보석 그 보석에 이스라엘의 12아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 두 지파를 품(가슴)에 안고 계신다.. 는 뜻을 상징한다. 갈멜산의 엘리야의 제단과 같은 모습이다. 그 제단에서는, 송아지 각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래 제단의 12돌을, 품에 안고 계셨다. ▲3. 대제사장의 흉패에도 12지파가 새겨져 있었다. 그림의 오른쪽이 흉패이다. 출28:21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에봇과 마찬가지로, 흉패의 12보석에도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 두 지파를 품에 안고 계신다.. 는 뜻을 상징한다. 대제사장의 가슴에 에봇과 흉패가 있으니까. 역시 갈멜산의 엘리야의 제단과 같은 모습이다. 그 제단에서는, 송아지 각으로 상징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래 제단의 12돌을, 품에 안고.. 제물이 되셔서, 그들 모두를 구원하셨다. ▲4. 거룩한 성에도,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계21장에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이것은 참 성전 안에 들어있는 우리들, 교회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계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참 성전이 내려오는데, 거기에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인 여러분들을 품에 안고, 제단에서 쪼개져서 죽으시고, 품에 안고 살아나셨고, 품에 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신다. 예수님은 항상 12지파, 교회를 품어 안고 계신다. 그것이 엘리야가 쌓은 제단의 12돌의 복음적 의미이다. ◑2. 생명수를 흘려내시는 예수 그리스도 왕상18: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1. 엘리야 제단의 도랑의 물은.. 생명수를 의미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부어주시는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 그래서 엘리야가, 제단의 도랑에 물을 갖다 부은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은, 제단 주위의 도랑에 두루 흘렀다. :35 ▲2. 반석이신 그리스도는, 생명수를 내신다. 고전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역시 반석에서 물(생명수)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3.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 에스겔47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 성전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하면, 겔47: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성전을 설명하는데, 그 성전 안에서, 물이 흘러나온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 안에 물이 풍성하게 넘쳐서, 성전 문지방 밑으로 새어나오는 것이다. 역시 성전은.. 그리스도 새어나오는 물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수를 상징한다. ▲4. 에덴의 4강 천국의 모형인 에덴은 어떤 모습인가? 창2: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에덴에 강이 흐르고 있고, 동산을 적시고, 그것이 에덴 밖으로 나왔다.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그 생수가 흘러넘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5. 새 예루살렘의 생명수의 강 게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겔47:1과 똑같다) 또한 에덴과 똑같이 묘사하고 있다. 회복된 에덴, 완성된 새 예루살렘인 것이다.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대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참 해갈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제단에서, 우상에게 그냥 자해하면서 소리 꽥꽥 지르면서 뛰어노는 축제 만들면서 그렇게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자들과 대결이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제단에는, 생수가 흘러넘치고, 온 몸이 쪼개져 내리지만, 그러나 그 안에 12지파를 품고 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저주를 받아, 자신이 불에 다 타 버림으로써 해갈이 되는, 비가 내리는 장면을 엘리야의 갈멜산 제단에서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그 안전한 품에 안기시라. 비록 그 분은 다 쪼개지실지라도, 우리를 안전하게 품고 계신다. 비록 그 분은 다 불에 타 버리실지라도, 우리를 안전하게 구원하신다. 이것이 갈멜산 제단의, 복음적 의미라고 본다. *확대 해석하면, 갈멜산과 므깃도 평원이 멀지 않다고 한다. 가까이에 있다. 엘리야의 갈멜산 대결은, 종말에 벌어질 므깃도 평원에서의 아마겠돈 (영적)전쟁의 모형인 것이다.
21강 /이세벨을 용납하면.. 결국 망한다 /계2:18-23/ 김성수목사 2015-07-21 14:38:48 read : 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예언 중에)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
21강 /이세벨을 용납하면.. 결국 망한다 /계2:18-23/ 김성수목사 2015-07-21 14:38:48 read : 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예언 중에)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2:20 ▲서론/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신은 인본주의적이다. 주1)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채우신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고 약속하셨다.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서, 우리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여러분, 정말 모든 필요가 채워졌는가? 안 채워졌다는 분이 많다. 그럼 하나님이 거짓말 하신 것인가? 물론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이유가 없다. 그럼 뭔가? 우리가, 내 삶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뭔가 욕심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필요한 것들은, 다 채우신다. 그것도 풍성하게 채우신다. 빌4:19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를 모두 채우시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향해 가기 위해서, 은혜의 방편(수단)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차적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 성취를 위해서 은혜로 주시는 수단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많이 도와주셨다. 그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셨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배불리 먹게 하고, 다른 민족들의 부러움을 사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신 게 아니다. 목적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출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게 바로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열방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통해서, 알리고 싶어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언약을 잘 지키며,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그 모습을 통해서, 열방에 하나님을 알리고 싶어 하셨다. 이것이 그들을(또한 나를) 부르신 목적이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가를 이스라엘의 삶을 통해서 알려서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으셨던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편의를 제공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셨고, 필요를 채우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목적을 망각하고, 은혜의 방편을 목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목적과 수단을 뒤바꿔 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채워주시는, 이방 잡신의 한 분쯤으로 여겼다. 사람이 고안해내는 이방 잡신은, 신앙을, 자기의 필요 획득을 위한, 수단쯤으로 여긴다. 그들은, 그게 금송아지든, 여호와든.. 중요하지 않고, I don't care 나의 필요만 채워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히 40일 전에 ‘나는 여호와만 섬기겠다’ 서약해 놓고, 주1) 40일 후에 자기들의 필요를 채워줄 금송아지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우리도 입술로는 신앙고백을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오직 내 삶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한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재통일 하는 것 엡1:10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목적지까지 가는 그 길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이다. (필요를 채우시는 것이.. 신앙생활의 일차적 목적은 아니다.) 그 목적지로 가는데, 필요한 것은 채워주시는 것이다. 내 욕심을 채워주시진 않는다. 그런데 목적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자기들의 필요에만 관심을 갖는 신자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에 <국토대장정>이라는 국토순례행진 행사가 있다. 대학생들이 조국통일을 기원하면서, 최남단 마라도에서 판문점까지 약21일간 걸어가는 ‘국토순례’를 한다. 최종 목적지는 판문점이다. 그리고 그 순례의 목적은 ‘통일 기원’이다. 목적과 목적지가 분명하면, 20박21일 기간 동안에, 식사와 숙박에 여러 가지 불편이 있지만, 참가자들은 꾹 참는다. 왜냐하면 참가자들에게는, 분명한 목적과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함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저도 한 번 참가해 봤는데, 많이 불편했다. 그렇지만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 다들 육신의 피곤함과, 불편한 숙식을 참고 견디는 것을.. 제가 보았다. 물론 그 대장정을 하는 사람 중에, 너무 힘들어서, 숙식이 불편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숙식은 주최측에서 무료로 제공되었다. 그래서 좀 더 나은 숙식을 제공해 달라고, 주최 측에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TV 취재 카메라가 다가오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보았다. 신앙생활은 ‘천국순례 대장정’이다. ‘국토대장정’에 비유해서 목적지와 목적이 분명한 길이다. 그 가는 길에, 숙식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육체가 피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숙식의 편함, 최고급 숙식이.. 그 순례길의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목적의식이 흐릿한 사람은, 그 순례길의 목적을 망각하고, 숙식 문제로 시험에 들거나, (부자라며) 자랑하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이 바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요, 본문으로 말하면 ‘이세벨의 가르침에 빠진 자들’이다. 천국 순례길을 간다는 목적의식이 없으니까! 크리스천의 순례의 길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공급해 주신다. 빌4:19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늘 본부에서 공급되는 지급품이 조금 불편하고, 조금 내 마음에 안 들어도, 목적지를 향해 계속 순례길을 걸어가야 한다. 목적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급품보다! 국토대장정에서 소모품이 주최측에서 지급된 것에 비유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땅의 순례길에서 필요한 것들만 졸라대는 그런 신자들이 있는데, 바로 ‘물질 우상, 금송아지를 섬기는 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바로 본문에 ‘이세벨을 용납한 자’이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이세벨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아세라(바알의 아내) 우상을 퍼트린 장본인이다. 그녀는 이방나라 출신으로서, 아합에게 시집올 때, 자기 우상까지 갖고 와서, 그 우상을 북왕국과, 심지어 자기 딸 아달랴를 남왕국에 시집보내어 온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퍼트린 주범이었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의 본질은 ‘풍요와 다산’이다. 오늘날로 치면, 번영신학이요, 성공주의이다. ▲나는 진짜 순례자인가, 이세벨을 용납한 가짜 순례자인가? 그것을 확인하려면, 1) 나는 나의 필요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점검해야 한다. 그것을 점검하려면, 합3:17절을 암송해 보시면 된다.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구절이 나의 삶에 정말 적용되어 살아지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 보자. 여기에 나온 무화과, 포도, 감람열매, 식물, 양, 소 등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품들이었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것도 (일시적으로) 공급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순례자들이다. 2) 내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기를 추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안 그 첫날부터,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 한다. 그분으로부터 공급되는 그 어떤 축복이 아니라, 그 하나님 자체를 추구하고 있는가? 그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소원과 갈망이 있는가? 호6:1~3, 6 아니면 그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가? ‘주시옵소서’의 신앙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왜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할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언제든지 자기 욕심을 투사해서, 스스로 신(금송아지)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힘을 써야 한다. 안 그러면, 무늬만 기독교이지, 결국 자기 욕심을 채워주는 신앙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천국 생활을 누리지도 못하고, 구원도 못 받고, 결국은 망한다. 망하는 징계를 받아야 교회 다니면서, 기복주의적 신을 섬기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신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출32장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그들은, 우리의 거울이 되는 된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왜 계시록의 7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들 신자들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책이 많이 없어서, 주로 듣는 것으로, 말씀을 배웠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예배드리러 와서,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소원만 열심히 ‘말하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귀있는 자는.. 들어야’ 한다. 여러분, 예배나 성경공부에 불성실하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지 않는 신자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거듭난 신자가 '아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자마자 한 일은,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은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대해 궁금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하게 되어 있다. 그저 내게 복을 주고, 내 소원을 들어주는, 이방신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과, 개인적, 인격적인 사귐과 교제를 통해, 더 알아가기 원한다. 그것이 자연스런 성도의 소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는 신자는, 주일 말고도, 주중 예배나 성경공부에 더욱 열심히 참석한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화를 기억하실 것이다. 엄마 양이, 장에 가면서, 새끼 양들에게 집을 잘 지키라고 하면서, 아무에게도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가르쳤다. 늑대가 새끼 양을 잡아먹으려고 왔다. 목소리를 가다듬어서 ‘얘들아, 엄마 왔어. 문 열어 줘’ 새끼 양들은 ‘우리 엄마 목소리가 아니에요’ 하면서 거부했다. 늑대가 목소리를 많이 연습하고는 다시 왔다. ‘얘들아, 엄마 왔어. 문 열어 줘’ ‘어 엄마 목소리랑 비슷한데? 그럼 문 밑으로 손을 한 번 넣어줘 봐요’ 늑대는 자기 손(발)을 밀어 넣었다. ‘어, 우리 엄마 손이 아니에요. 우리 엄마 손에는, 검은 털이 없어요.’ 그러자 늑대는, 자기 발에 하얀 밀가루를 묻혀서 다시 찾아왔다. ‘얘들아, 엄마 왔어. 문 열어 줘’ 그리고 하얀 자기 손을 밀어 넣었다. 양들은 문을 열어주었는데, 엄마 양이 와서, 그들을 구한다는 얘기... 늑대는, 양떼를 잡아먹기 위해서 집요하게 공격한다. 그 새끼 양들이 늑대와 엄마의 차이점을 구분할 수 없으면, 그들은 금방 문을 열어주고, 금방 잡아먹히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 이세벨과 발람과 니골라 당이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얘들아, 엄마 왔어. 문 열어 줘’ 그때, 신자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이세벨과 발람과 니골라 당에게, 문을 열어주게 되어 있다. 평생 예수 믿고도 .. (엉뚱한 우상을 믿어서) 구원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걸 두아디라 교회에게, 예수님이 2천년 전에 경고하신 것이다. 엉뚱한 자에게 문 열어주지 말라는 것이다. ▲우상 숭배하면, 결국에는 망한다. 하나님은 경고하신다.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그 이세벨의 자녀들(우상숭배자)은 사망으로 죽여 버리겠다고 하셨다. 계2:22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 bed of suffering에 던질터이요 (고난 당한다는 뜻)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일차적으로 이세벨의 신앙을 받아들인 영적 간음을 뜻함)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 her children 를 죽이리니 *이세벨 우상을 섬긴 신도를 뜻함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정말 예수 잘 믿고 계시는가? 천국 갈 자신 있으신가? 제가 설교 때마다 이렇게 흥분하고, 목청을 높이는 이유는, 언젠가 천국에 올라갔을 때, 우리 교회에 다녔다는 집사님, 청년들이 천국에 못 오고, 아래서 불타고 있으면.. 그 얼마나 큰 재앙인가?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제가 매 시간마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이다. 이세벨에게 문 열어 주지 않을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이고 성도이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이세벨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도 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대충대충, 설렁설렁, 어영부영 믿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편한 대로 믿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남유다, 다윗 왕국이, 바벨론에 비참하게 패망한 것은 <우상숭배>때문이었다. 렘44:3~6, 이는 그들이 자기나 너희나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악행으로 말미암음이라 (4)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 하였으나 (5) 그들이 듣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다른 신들에게 여전히 분향하여 그들의 악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므로 (6) 나의 분과 나의 노여움을 쏟아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불살랐더니 그것들이 오늘과 같이 폐허와 황무지가 되었느니라. 그런데 남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겁도 없이 받아들인 이유는.. 그것이 약속하는 달콤한 <풍요와 번영>때문이었다. 렘44:17,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 (아스다롯) 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상도 처음에는 달콤한 것을 준다. 도박에 빠진 사람이 패가망신 하는 이유는, 처음에 돈을 쉽게 조금 땄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도.. 처음에는 뭔가 좀 부자가 되는 것 같은데.. 결국은 패가망신하게 된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라면.. 그를 회개시켜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 큰 환란을 허락하신다! 그게 본문의 교훈이요, 또한 구약 예레미야서의 전체 주제이다! .......................... 주1) ▲서론/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신은 인본주의적이다. 우리가 성경에서도 보시고, 또 실제 삶에서도 경험하는 바와 같이 왜 심지어 예배당에서도, 신자들이 자기의 필요를 따라, 자기가 만들어 놓은 신을 두고서, ‘하나님’이라 이름 붙여 놓고, 그 우상을 섬기는 일이 생기게 될까?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처럼,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쉽게 이세벨을 용납하는 자가 될까? 여러분, 결국 우상도.. 인간이 만들어내는 산물이다. 인간이, 자기 유익을 위해서, 만들어내는 게.. 우상이다. ▲성품은 사람(죄인)과 똑같지만, 힘은 세다. 제우스, 아폴로, 헤라, 포세이돈 등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한 번 살펴보자. 그 신들은, 우리 인간들처럼,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서로 질투하기도 하고, 울고, 웃고, 사랑해 빠지기도 하고, 실연을 당하기도 한다. 그들이 인간과 다른 것은, 아주 강한 힘이 있다는 것과, 올림포스 산에 모여서 영원히 죽지 않는 술인 넥타르를 마시는 것밖에는 없다. 이렇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신들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줄 엄청난 힘만을 소유한 세속적인 존재였다. (하나님처럼 거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들 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의 필요를 채워줄 엄청난 힘’이기 때문에, 신은, 그것(능력)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한국인은, 무속신앙(샤머니즘)이, 접목될 수 있다. 여러분,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아시는가? 수많은 기독교의 문패를 단 신자들이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행과 전도를 하는지.. 무당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달래기 위해서 눈물겨운 치성을 드린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이성으로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에, 즉, 그 이성의 한계 안에 있는 신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신(우상)은, 자기와 똑같이, 언제든지 삐지거나, 진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일부 교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엄청난 힘만을 소유한, 그러나 인간과 비슷한 인격의 하나님을 자기들 상상으로 만들어놓고, (가정해 놓고) 그 신은 자기가 조르고 조르면, 언젠가 그 고집을 듣고, 자기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평소에 그 신을 잘 달래놓지 않으면, 그 신은 언제든지 자기 삶에 개입해서 훼방을 놓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치성을 잘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신을 잘 달래기 위해서, 헌금도 드려주고, (헌금을 드리지 말라는 얘기 아님) 때가 되면 선교도 가 주고, 그런 샤머니즘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이.. 과거에 꽤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했는데, 전통무속신앙(샤머니즘)을 통해 선이해로 가진 신 개념을,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에, 그대로 접목시켜서.. 가르치고.. 또한 배웠다. 그리고 오히려 그 하나님이라고 이름 붙여진 신 위에 자기가 올라서서 자기의 계획, 비전, 목표를 제시해 놓고, ‘당신은 당신이 가진 힘으로, 나를 열심히 도와주기만 하면 돼요!’ (내 소원만 들어주고, 그 외에는 일절 나를 간섭하지 마세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얼마나 많았는지... 그런 신앙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다. ▲인간은.. 자기 필요에 따라.. 신을 만들어낸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스라엘도 계속해서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신을 만들어낸다. 그 대표적 예가, 출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쉽게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신을 제조해 내는 존재인지 너무 확연하게 잘 보여준다. 모세가, 10계명을 위시해서 여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쳤다. 그랬더니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겠습니다. 잘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맹세한 다음에.. 약 40일 후에 일어난 일은, 금송아지 제작이었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24:3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24:7 백성들은, 이렇게 반복적으로 맹세했다. 그렇게 한지 딱 40일이 지나서,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뭐 그런 인간들이 다 있어?’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된다. 이스라엘은 오늘날 신자들을 상징하는 모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 예, 믿습니다 하면서도, 동시에 물질 우상을 섬기기 쉽다. 우리도 그렇게 쉽게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서 그를 가리켜, 겉으로는 ‘하나님’이라 부르지만, 그 속 본질은 ‘금송아지’일수도 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낸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풍요의 신이었던, 암소와 황소의 형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증권가에도, 이렇게 풍요를 상징하는 황소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어쩌면 단순한 조각일 수도 있지만, 과거 시대의 황소가 아직까지 내려온 것일 수도 있다. 자기들의 풍요를 위한 황소 형상을 만들고 있었던 바로 그 시간에, 시내 산에서는 하나님이 돌판에 뭔가를 새기고 계셨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내게 있게 말지니라’ 출20:3 하나님이 직접 이것을 돌판에 막 쓰시면서 계명을 주고 계신 그 시간에도, 백성들은,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게 인간이다. 인간은, 신자/불신자를 막론하고.. 근본적으로 우상 친화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어떤 죄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런 우상을 만들고 섬긴다는 자들을, 가장 미워하신다.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23 (그들은)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서, 자기들의 배腹를 위한 해결사로 하나님을 만들어버린다. 오늘날에도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을 애굽의 풍요의 신인 황소 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름만 하나님이지, 여전히 금송아지다. 이름만 예수님이지, 여전히 금송아지다...
21세기 영계의 파수꾼이 되는 교회 /사60:1-3/ 김홍도 목사
21세기 영계의 파수꾼이 되는 교회 /사60:1-3/ 김홍도 목사 2014-12-22 18:38:32 “생명보다 사명이 더 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나 민족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나 그 민족, 그 교회를 치워버리시기 때문입니다. 파사 나라에 거주하던 유대 민족이 간악한 하만의 계략으로 하루아침에 다 도륙을 당하고 멸절당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말하기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스더 4장 14절), 즉 네가 왕후가 된 것은 이 때에 유대 민족을 구원하라고 세워 주신 것인데 네가 그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한다는 말입니다. 이때에 에스더 왕후는 자기 혼자 왕궁에서 편하게 살겠다고 사명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식하며 기도하고 들어가 왕에게 탄원하여 유다 온 민족의 생명을 구하고 하만과 그 가족은 멸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크거나 작거나 육신의 생명이나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사명 감당하라고 생명을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영계가 심히 혼탁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될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본문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그리고 나서 다음절에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이사야 60장 1~3)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움이 온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울 때에 하나님의 빛과 영광을 받은 교회가 일어나 빛을 발하여 맡겨진 사명을 감당치 않으면 함께 멸망할 것이고, 사명을 다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고 열방과 열왕이 네게로 나아오게 하겠다”는 엄청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시대시대마다 그 시대를 깨우칠 영적 파수꾼을 세우시고 사명을 다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사야 62장 6~7절에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군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밤낮 쉬지 말고 잠잠치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서 그 민족을 구원하라는 말씀입니다. 1. 심판의 날이 심히 가깝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의 확신으로는 21세기는 인류의 마지막 세기요, 22세기는 맞이할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구약의 계시록이라고 하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브갓네살 왕이 본 금신상의 맨 마지막, 열 발가락 시대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니엘 2장 34~35절에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한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 7장에 나오는 사자, 곰, 표범 다음 나온 열 뿔 가진 무서운 짐승 다음에 분명히 7장 13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하는 두 말씀에서 죽었던 로마가 다시 일어나고 열 발가락, 열 뿔이 연합하는 때가 되면 주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재림하셔서 세상 나라를 심판하고 천년왕국,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고 그 후에 영원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로마의 후예인 구라파의 여러 나라가 합하여 작년부터 공동화폐 유로화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외에도 처처에 지진과 피 흘리는 전쟁과 기근이 심판의 날이 가까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지하자원이 고갈되고 심지어 물 부족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으며 수천 년 얼어붙었던 빙산이 녹아내려 수면이 올라오고 하늘에 오존층이 파괴되어 역사 이래 없었던 기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종말의 때가 다 되었습니다. 늦기 전에 복음의 나팔을 힘껏 불어서 영혼을 깨우치고 구원해야 될 때입니다. 2. 영계가 심히 혼탁하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더욱 캄캄해지는 것처럼 말세지말을 당하여 영계가 혼탁해지고 캄캄해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60장 2절에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라고 한 말씀과 같이 영계가 캄캄하고 어두워질수록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고 빛을 받은 교회는 일어나 빛을 발할 때가 된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파괴하는데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씁니다. 하나는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럽고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자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적 타락, 음란입니다. 히틀러가 유태인 600만 명을 잔인하게 죽이고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비참하게 죽인 것과 모택동이 6000여만 명을 죽이고, 스탈린이 7000만 명을 공산주의 혁명이란 핑계로 살육한 것입니다. 북한 공산주의 김일성, 김정일이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을 죽게 하고 쉬지 않고 잔인하게 죽이는 것 등은 모두 살인하고 멸망시키는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 문명도, 종교도, 사탄에게 속한 것이 있고 복을 받고 잘 살게 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서 캄보디아(크메르)에 앙코르와트 사원이라고 있는데 AD 630년경에 세워졌다가 1423년경에 멸망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1860년경 불란서 사람에 의해서 발견될 때까지 그 나라 사람들까지도 그런 어마어마한 사원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몇 킬로미터 안에는 바윗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데 1 미터가 넘는 큰 바윗돌로 사원을 짓고 엄청 긴 돌다리도 어떻게 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안에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이 살았는데 갑자기 다 죽어서 멸절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병으로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아마도 문둥병이나 기타 유행병으로 몽땅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는데 그 어마어마한 사원과 문명이 있었던 줄도 모를 정도로 폭삭 망해버렸는데 영적으로 판단하면 바로 사탄의 종교, 사탄의 문명 때문입니다. 수천 개의 우상이 있고 그림은 전부 뱀이고 글씨까지도 뱀이 기어가는 것 같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뱀이 뒤트는 것 같고 뱀이 고개를 쳐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 더러운 종교를 만드는 사탄의 영이 크메르루즈같은 악한 정부가 들어서서 폴포트같은 잔인한 자가 정권을 잡고 수백만 명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킬링 필드(Killing Field)같은 잔혹한 현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탄의 영 때문에 그 나라가 비참해진 것입니다. 북한은 소련과 가까워서 무신론 사상이며 악한 사탄의 사상인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일 년에 100만 명씩 굶어 죽고 세상의 “악의 축”으로 지목을 받지만 남한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미국의 문명과 신앙을 받아들여 오늘날과 같은 복된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아 잘살게 되니까 도덕성이 타락하고 음란한 정신으로 정신이 썩어져 가는, 사탄의 영이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 걱정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경 진리를 받아들여 축복을 받고 번영했는데 교회가 안일주의에 빠지고 신앙의 열기가 식어진 데다가 복음 전도자를 양성해야 하는 신학교에 신앙을 무너뜨리고 성경을 파괴하는 이단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들이 많이 생겨나서 주의 종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종들을 키워내고 있는 형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이 기독교의 기초를 이루는 것인데 자유주의 신학을 배운 교수들은 십자가의 구속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인하며 예수님의 신성과 영원성도 부인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니까 “예수를 끌어내리고 너희가 제2, 제3의 예수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복음은 토종개구리를 잡아먹고 환경을 파괴하는 황소개구리와 같으므로 황소개구리 같은 복음을 때려잡고 내쫓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우리나라에도 전통의 무속종교가 있으니까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런 이단신학은 과거의 종교다원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보다 더 악랄하고 심각한 사탄의 사상입니다. 영국의 감리교회가 1960년대에 14,000 교회였는데 마귀의 이단신학이 염병처럼 퍼지자 십자가의 구속도 안 믿고, 부활도 안 믿게 되고, 내세 영생 천국과 지옥은 더욱 안 믿게 되어 15년 전 통계에도 8,000 교회가 죽어버리고 6,000 교회가 남았는데 그들도 거의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이 봉급을 탈 수 없으니까 신앙의 선조들이 피땀 흘려 세운 교회당이 술집으로, 가구점으로, 심지어 모슬렘교 사원으로 팔려 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런 사탄의 사상인 이단신학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 진리와 교회를 지키는 영적 파수꾼이 일어나 빛을 발해야 될 때입니다.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울 때, 파수꾼의 사명을 다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고 열방이 우리에게로 빛을 찾아오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복을 받게 됩니다. 3. 우리나라가 5,000년 역사 이래 가장 큰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주님의 교회가 5만여 교회가 있고 1,200만이 넘는 성도가 있는데 지금 사탄의 사상인 공산주의에 다 파괴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미군이 훈련 도중 전차에 여중생 두 명이 깔려 죽었다고 해서 일 년이 가깝도록 한 달째 촛불시위를 하며 성조기를 불태우고 심지어 “미군철수”를 외치고 있으니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미군은 6.25때 4만여 명이나 피 흘리고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여중생 둘이 훈련 도중 죽었다고 “미군철수” 하라고 하니 소름이 끼치는 일입니다. 여기에 때를 맞추어 똑같이 북에서도 촛불시위를 하고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봉인한 것을 다 떼어버리고 NPT 탈퇴를 선언하고 IAEA에서 파견한 사찰단원을 추방하고 한국과 미국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미군이 훈련하다가 8명이 죽었는데도 다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미군의 덕을 많이 입은 한국이 미군철수를 외치는 것은 적화통일을 원한다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만일 미군이 철수한다면 과거 1949년에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1950년에 북한이 쳐들어온 것처럼 적화통일은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미군이 철수하면 외국 자본이 다 빠져나갈 것입니다. 탄탄한 경제 그룹인 삼성도 외국자본이 30%나 됩니다. 이건희 회장은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고 등골에 땀이 흐른다”고 말했습니다. 또 국내 자본도 위험을 느끼고 외국으로 빠져나갈 것이고 따라서 경제는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날 한국이 이만큼 잘살게 되고 거리마다 자동차 홍수를 이루게 된 것은 오랫동안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물건을 팔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반미운동이 확산되자 미국에서도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상점에서도, 심지어 음식점에서도 “한국인은 받지 않음”이라고 써 붙인 곳이 있고, 미시간 주에서는 “현대 자동차 딜러” 앞에 한국인이 성조기 불태우는 사진을 걸어놓고 한국 차 불매운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미국인은 “나는 15년 동안 한국과 거래하며 사업을 해왔으나 이번에 한국에 갔다가 길거리에서 여러 번 모욕을 당할 뻔했다. 나는 한국과 거래를 끊겠으며 동료 사업가들에게도 거래를 끊으라고 권고했다. 더 나아가우리나라 의원들에게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는 운동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만 수원 근처 화성에 땅굴이 발견되었고 북한이 굴착 공사하는 소리도 녹음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쇠로프도 건져 올렸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두 분이 어제 직접 가서 확인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큰 충격을 받고 왔는데, 매일 100~200명씩 와서 보고 큰 충격을 받고 간다고 합니다. 부산에서도 땅굴을 발견했는데 그 발견한 사람 둘이 행방불명되었다고도 하고 죽었다고도 합니다. 연천에서도 땅굴을 발견했는데 발견한 그 사람도 죽었다고 합니다. 화성 땅굴을 발견한 사람도 최근에 죽었는데, 과로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 사실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욱 두려운 소식은 북한에서 한국군 군복을 30만 벌을 홍콩을 통해서 사갔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느날 밤, 군복을 입고 땅굴을 통해서 올라와 부대들을 점령하고 방송국을 점령하면 싸우지도 못하고 공산화되고 맙니다. 엊그제 김정일이 한 말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몇 해만 지나면 여러분도 남 못지않게 잘살도록 해주겠다”고 했는데 무엇을 믿고 한 말이겠습니까? 교회들이, 깨우치는 영혼의 나팔을 불고, 진리의 나팔을 불고, 뜨겁게 기도하여 영적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한 말씀을 명심하고 나팔을 불고 목숨 걸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21세기 영계의 파수꾼이 되는 교회 /사60:1-3/ 김홍도 목사 2014-12-22 18:38:32 read : 100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생명보다 사명이 더 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나 민족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나 그 민
21세기 영계의 파수꾼이 되는 교회 /사60:1-3/ 김홍도 목사 2014-12-22 18:38:32 read : 100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생명보다 사명이 더 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나 민족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나 그 민족, 그 교회를 치워버리시기 때문입니다. 파사 나라에 거주하던 유대 민족이 간악한 하만의 계략으로 하루아침에 다 도륙을 당하고 멸절당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말하기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스더 4장 14절), 즉 네가 왕후가 된 것은 이 때에 유대 민족을 구원하라고 세워 주신 것인데 네가 그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한다는 말입니다. 이때에 에스더 왕후는 자기 혼자 왕궁에서 편하게 살겠다고 사명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식하며 기도하고 들어가 왕에게 탄원하여 유다 온 민족의 생명을 구하고 하만과 그 가족은 멸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크거나 작거나 육신의 생명이나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사명 감당하라고 생명을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영계가 심히 혼탁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될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본문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그리고 나서 다음절에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이사야 60장 1~3)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움이 온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울 때에 하나님의 빛과 영광을 받은 교회가 일어나 빛을 발하여 맡겨진 사명을 감당치 않으면 함께 멸망할 것이고, 사명을 다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고 열방과 열왕이 네게로 나아오게 하겠다”는 엄청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시대시대마다 그 시대를 깨우칠 영적 파수꾼을 세우시고 사명을 다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사야 62장 6~7절에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군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밤낮 쉬지 말고 잠잠치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서 그 민족을 구원하라는 말씀입니다. 1. 심판의 날이 심히 가깝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의 확신으로는 21세기는 인류의 마지막 세기요, 22세기는 맞이할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구약의 계시록이라고 하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브갓네살 왕이 본 금신상의 맨 마지막, 열 발가락 시대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니엘 2장 34~35절에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한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 7장에 나오는 사자, 곰, 표범 다음 나온 열 뿔 가진 무서운 짐승 다음에 분명히 7장 13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하는 두 말씀에서 죽었던 로마가 다시 일어나고 열 발가락, 열 뿔이 연합하는 때가 되면 주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재림하셔서 세상 나라를 심판하고 천년왕국,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고 그 후에 영원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로마의 후예인 구라파의 여러 나라가 합하여 작년부터 공동화폐 유로화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외에도 처처에 지진과 피 흘리는 전쟁과 기근이 심판의 날이 가까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지하자원이 고갈되고 심지어 물 부족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으며 수천 년 얼어붙었던 빙산이 녹아내려 수면이 올라오고 하늘에 오존층이 파괴되어 역사 이래 없었던 기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종말의 때가 다 되었습니다. 늦기 전에 복음의 나팔을 힘껏 불어서 영혼을 깨우치고 구원해야 될 때입니다. 2. 영계가 심히 혼탁하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더욱 캄캄해지는 것처럼 말세지말을 당하여 영계가 혼탁해지고 캄캄해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60장 2절에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라고 한 말씀과 같이 영계가 캄캄하고 어두워질수록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고 빛을 받은 교회는 일어나 빛을 발할 때가 된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파괴하는데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씁니다. 하나는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럽고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자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적 타락, 음란입니다. 히틀러가 유태인 600만 명을 잔인하게 죽이고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비참하게 죽인 것과 모택동이 6000여만 명을 죽이고, 스탈린이 7000만 명을 공산주의 혁명이란 핑계로 살육한 것입니다. 북한 공산주의 김일성, 김정일이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을 죽게 하고 쉬지 않고 잔인하게 죽이는 것 등은 모두 살인하고 멸망시키는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 문명도, 종교도, 사탄에게 속한 것이 있고 복을 받고 잘 살게 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서 캄보디아(크메르)에 앙코르와트 사원이라고 있는데 AD 630년경에 세워졌다가 1423년경에 멸망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1860년경 불란서 사람에 의해서 발견될 때까지 그 나라 사람들까지도 그런 어마어마한 사원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몇 킬로미터 안에는 바윗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데 1 미터가 넘는 큰 바윗돌로 사원을 짓고 엄청 긴 돌다리도 어떻게 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안에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이 살았는데 갑자기 다 죽어서 멸절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병으로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아마도 문둥병이나 기타 유행병으로 몽땅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는데 그 어마어마한 사원과 문명이 있었던 줄도 모를 정도로 폭삭 망해버렸는데 영적으로 판단하면 바로 사탄의 종교, 사탄의 문명 때문입니다. 수천 개의 우상이 있고 그림은 전부 뱀이고 글씨까지도 뱀이 기어가는 것 같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뱀이 뒤트는 것 같고 뱀이 고개를 쳐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 더러운 종교를 만드는 사탄의 영이 크메르루즈같은 악한 정부가 들어서서 폴포트같은 잔인한 자가 정권을 잡고 수백만 명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킬링 필드(Killing Field)같은 잔혹한 현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탄의 영 때문에 그 나라가 비참해진 것입니다. 북한은 소련과 가까워서 무신론 사상이며 악한 사탄의 사상인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일 년에 100만 명씩 굶어 죽고 세상의 “악의 축”으로 지목을 받지만 남한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미국의 문명과 신앙을 받아들여 오늘날과 같은 복된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아 잘살게 되니까 도덕성이 타락하고 음란한 정신으로 정신이 썩어져 가는, 사탄의 영이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 걱정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경 진리를 받아들여 축복을 받고 번영했는데 교회가 안일주의에 빠지고 신앙의 열기가 식어진 데다가 복음 전도자를 양성해야 하는 신학교에 신앙을 무너뜨리고 성경을 파괴하는 이단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들이 많이 생겨나서 주의 종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종들을 키워내고 있는 형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이 기독교의 기초를 이루는 것인데 자유주의 신학을 배운 교수들은 십자가의 구속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인하며 예수님의 신성과 영원성도 부인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니까 “예수를 끌어내리고 너희가 제2, 제3의 예수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복음은 토종개구리를 잡아먹고 환경을 파괴하는 황소개구리와 같으므로 황소개구리 같은 복음을 때려잡고 내쫓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우리나라에도 전통의 무속종교가 있으니까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런 이단신학은 과거의 종교다원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보다 더 악랄하고 심각한 사탄의 사상입니다. 영국의 감리교회가 1960년대에 14,000 교회였는데 마귀의 이단신학이 염병처럼 퍼지자 십자가의 구속도 안 믿고, 부활도 안 믿게 되고, 내세 영생 천국과 지옥은 더욱 안 믿게 되어 15년 전 통계에도 8,000 교회가 죽어버리고 6,000 교회가 남았는데 그들도 거의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이 봉급을 탈 수 없으니까 신앙의 선조들이 피땀 흘려 세운 교회당이 술집으로, 가구점으로, 심지어 모슬렘교 사원으로 팔려 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런 사탄의 사상인 이단신학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 진리와 교회를 지키는 영적 파수꾼이 일어나 빛을 발해야 될 때입니다.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울 때, 파수꾼의 사명을 다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고 열방이 우리에게로 빛을 찾아오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복을 받게 됩니다. 3. 우리나라가 5,000년 역사 이래 가장 큰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주님의 교회가 5만여 교회가 있고 1,200만이 넘는 성도가 있는데 지금 사탄의 사상인 공산주의에 다 파괴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미군이 훈련 도중 전차에 여중생 두 명이 깔려 죽었다고 해서 일 년이 가깝도록 한 달째 촛불시위를 하며 성조기를 불태우고 심지어 “미군철수”를 외치고 있으니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미군은 6.25때 4만여 명이나 피 흘리고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여중생 둘이 훈련 도중 죽었다고 “미군철수” 하라고 하니 소름이 끼치는 일입니다. 여기에 때를 맞추어 똑같이 북에서도 촛불시위를 하고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봉인한 것을 다 떼어버리고 NPT 탈퇴를 선언하고 IAEA에서 파견한 사찰단원을 추방하고 한국과 미국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미군이 훈련하다가 8명이 죽었는데도 다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미군의 덕을 많이 입은 한국이 미군철수를 외치는 것은 적화통일을 원한다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만일 미군이 철수한다면 과거 1949년에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1950년에 북한이 쳐들어온 것처럼 적화통일은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미군이 철수하면 외국 자본이 다 빠져나갈 것입니다. 탄탄한 경제 그룹인 삼성도 외국자본이 30%나 됩니다. 이건희 회장은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고 등골에 땀이 흐른다”고 말했습니다. 또 국내 자본도 위험을 느끼고 외국으로 빠져나갈 것이고 따라서 경제는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날 한국이 이만큼 잘살게 되고 거리마다 자동차 홍수를 이루게 된 것은 오랫동안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물건을 팔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반미운동이 확산되자 미국에서도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상점에서도, 심지어 음식점에서도 “한국인은 받지 않음”이라고 써 붙인 곳이 있고, 미시간 주에서는 “현대 자동차 딜러” 앞에 한국인이 성조기 불태우는 사진을 걸어놓고 한국 차 불매운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미국인은 “나는 15년 동안 한국과 거래하며 사업을 해왔으나 이번에 한국에 갔다가 길거리에서 여러 번 모욕을 당할 뻔했다. 나는 한국과 거래를 끊겠으며 동료 사업가들에게도 거래를 끊으라고 권고했다. 더 나아가우리나라 의원들에게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는 운동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만 수원 근처 화성에 땅굴이 발견되었고 북한이 굴착 공사하는 소리도 녹음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쇠로프도 건져 올렸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두 분이 어제 직접 가서 확인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큰 충격을 받고 왔는데, 매일 100~200명씩 와서 보고 큰 충격을 받고 간다고 합니다. 부산에서도 땅굴을 발견했는데 그 발견한 사람 둘이 행방불명되었다고도 하고 죽었다고도 합니다. 연천에서도 땅굴을 발견했는데 발견한 그 사람도 죽었다고 합니다. 화성 땅굴을 발견한 사람도 최근에 죽었는데, 과로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 사실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욱 두려운 소식은 북한에서 한국군 군복을 30만 벌을 홍콩을 통해서 사갔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느날 밤, 군복을 입고 땅굴을 통해서 올라와 부대들을 점령하고 방송국을 점령하면 싸우지도 못하고 공산화되고 맙니다. 엊그제 김정일이 한 말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몇 해만 지나면 여러분도 남 못지않게 잘살도록 해주겠다”고 했는데 무엇을 믿고 한 말이겠습니까? 교회들이, 깨우치는 영혼의 나팔을 불고, 진리의 나팔을 불고, 뜨겁게 기도하여 영적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한 말씀을 명심하고 나팔을 불고 목숨 걸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21세기를 아버지와 함께/ 눅15:11-21/ 김삼환 목사
눅15:11-21/ 21세기를 아버지와 함께/ 김삼환목사 2014-10-28 10:42:57 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하고 살아있고 건강하다는 것은 하나님만 아시고 우리 인간 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아서 대체로 교회가 열심히 잘 모이 고, 열심이 있고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가 뜨겁고 교회로 오는 길이 열려있고 교회 문이 열려있고 교회로 드나드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뜨겁 게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이어질 때 대체로 그런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다, 또는 살 아있다, 건강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국가도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건강한 국가는 전문가에 의해서 진단해야 되고, 전체 적으로 평가를 내리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도 객관적으로 간단하게 그 국가의 번영을 짐작해 알 수 있는 것은 비행장에 가 보면 압 니다. 외국 손님들이 많이 드나들고 비행기가 열심으로 오르내리고, 내리는 비행기 가 줄을 잇고 내리지를 못해서 관제탑의 지시를 기다리며 그 위를 상회하는 비행기 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 그 나라는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또 비행기에서 내린 다음 에 고속도로를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차들이 줄을 지어 있으면 그 나라는 번영하 는 나라입니다. 또 항만에 배들이 꽉 차서 컨테이너로 실어 나르는 배들이 대기해 있 고 끊임없는 하역작업이 이어지면 그 나라 경제는 일어나고 있다, 잘되고 있다는 그 런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서, 하나는 지상에서 도로에서, 하나는 바다에서 이 삼면이 조화를 이루면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십 년 전에 구소련을 가보니까 비행장에 손님 이 없습니다. 비행기 안에도 손님이 1/5도 없습니다. 사람을 도무지 비행기 안에서, 밖에서 찾을 길이 없습니다. 비행기는 많은데 뜨지를 않습니다. 고속도로를 스물 몇 시간을 모스크바에서 민스크까지 가도 차를 구경 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 종일 가도 차가 안보입니다. 레닌그라드에도 가보면 배가 없습니다. \'여객선도 없고 화물선도 없고 유조선도 없다\' 그러면 그 나라 경제가 어려운 거지요. 모두다 길가에 서서 서 성대고 있고 할 일이 없습니다. 낡은 건물들입니다. 가게 앞에는 전부 줄을 서서 빵 한 조각 받기 위해서 수 백 명이 줄을 서 있고 버터 하나 받기 위해서 수 백 명이 줄 을 서 있습니다. 중국에도 가보니까 구소련보다는 낫지만 제가 11년 전에 가보니까 역시 거기에도 하루 종일 가도 차를 좀처럼 만날 수가 없고 비행장에 손님이 없습니 다.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 나라도 IMF를 만나서 한 이년 동안 도로에서 많이 경험했습니다. 일년 전, 이 년 전에 도로가 그냥 그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화물차가 안 다닙니다. 얼마나 안타 까웠는지 모릅니다. 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고속도로에 화물차가 줄을 잇게 해 주십시오 도로가 지금 텅텅 비었습니다 승용차가 이렇게 다녀서는 안되겠습니다 화물차가 짐을 싣고 열심으로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여러분 차 타고 다니면 서 혹시 차가 많다는 이유로 답답해하거나 신경질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로에 는 차가 많아야 됩니다. 도로에 잡초가 우거져서 되겠습니까? 도로에 짐승들이 돌아 다녀야 되겠습니까? 차가 많이 움직여야 됩니다. 복잡하면 도로는 더 닦으면 되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다녀야 됩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열심이 있고, 사람들이 많이 다녀야 살아있는 교회가 되며, 살아 있는 경제, 살아있는 국가, 개인이나 모두가 다 건강하고 살아 있을수록 열심으로 움 직이는 것입니다. 부흥과 번영이 얼마나 귀합니까 천년을 살아도 일년처럼 감격스럽 게 감사하며 살아야 되고 일년 흉년도 비극인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IMF가 이년 동안 눈 깜작할 사이 지난 것 같지만 그 상흔과 상처는 형언할 길이 없는 것입 니다. 신앙도 끊임없이 부흥하고 발전해야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영적인 침체 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경제처럼 빨리 회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회복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잘 믿는 것 축복으로 알고 열심 있는 것 정상으로 알고, 천년 만년 항상 명성교회는 하나님 앞에 이런 성장과 부흥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늘 기도를 그렇게 드립니다. \'하나님, 저의 후임 자도 좀 부족할지라도 열심 있는 종이 와서 이 교회를 계속 부흥시켜 나가도록\' 교회 는 살아있어야 됩니다. 거지는 우리가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지가 무엇인가 우 리가 알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 을 믿어도 하루 믿은 것같이 믿어야 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언제나 감격스럽게 우리가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고속도로가 붐비듯이 교회는 열심으로 드나드는 성도 들로 가득 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국 제품 쓰는 것을 아주 비애국적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입 니다. 외국 제품도 써야 됩니다. 외국도 가보아야 됩니다. 우리 것도 팔고 또 좋은 것 도 사다가 우리가 좋은 것을 사용해서 우리 경제가 경쟁을 하도록 만들어서 외국제 품보다 더 좋은 걸 만들도록 해야 합니다. 외국 것을 쓰면 아주 나쁜 사람으로 그렇 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청년들이 모여서 그랬다 그러지요. \'나는 애국자야 절 대로 외국 것은 안 쓴다\'고 그러니 또 한 친구가 말했어요. \'나는 더 진짜 애국자야 외국은 절대로 안 간다\'고 또 한 친구가 말했어요. \'나는 더 애국자야 영어는 절대로 안 한다니까\' 아닙니다. 영어를 해야됩니다. 인류역사상 한 언어로 전세계의 모든 회의와 모든 국경을 한 언어로만 패스시키는 시대가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지금은 태어나면서 부터 영어를 해야 되는 거예요. 영어를 하는 것은 더좋은 애국자가 될 수 있는 것입 니다. 외국을 가 보아야 됩니다. 북한보세요. 외국과의 왕래도 없이 살아가고 있잖아 요. 일본 경우에도 전에 대동아 전쟁을 일으켰던 내각들은 미국을 한 사람도 안가 보 았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전쟁을 일으킨 거예요. 가 보아야 됩니다. 세계가 돌아가 는 것을 보아야 됩니다. 그리고 본받아야 됩니다. 더 훌륭한 문화를, 더 훌륭한 삶 을, 더 훌륭한 지식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더 좋은 제품도 받아들여야 됩니다. 미국 보십시오. 미국은 십 년 전부터 일본 자동차를 물밀듯이 수입을 해 가지고 미 국 땅에 어떤 일본 회사도 다 들어와서 일년에 몇 백만 대씩 자동차를 팔게 하고 그 대신 미국 자동차는 경쟁에 져 가지고 다 문닫았습니다. 세계의 자동차 60%를 만들 어 내던 미국이 다 손들어 버렸어요. 몇 만 명 직원들이 다 실직을 당하고 해고 당했 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국 자동차는 승용차가 버스 만합니다. 그래서 낭비를 했습 니다. 그러나 일본차는 아주 실속 있게 경제적이고 실용적이고 깨끗하고 디자인도 심플하게 만들어서 미국을 다 눌렀어요. 미국은 결국 처음에는 졌지만 일본 자동차 와 싸우기 위해서 다시 기술을 개발하고 다시 투자하고 다시 거기서 일어나서 지금 은 일본 자동차를 다 누르고 다시 세계 자동차 대국으로 일어날수가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경쟁하는 겁니다. 다 경쟁이에요. 스포츠도 경쟁해야 발전하는 거 예요. 지식도 경쟁해야 발전하는 거예요. 정치도 경쟁하는 거예요. 공산주의는 경쟁 이 없어요. 정치도 혼자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어느 것도 경쟁을 안 하면 그 나라는 몰락하는 거예요. 천국도 교회도 경쟁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12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가 얻는다\" 그랬어요. 열심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천국 에 들어가고 그래서 교회도 열심히 모이는 곳에 가서 더 열심으로 모이려 하고 더 많 이 모이는 데 가서 배우고 이렇게 도전을 받고 은혜를 받고 열심을 해야 앞으로 나아 갈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혼자 사는 걸 좋아하고 경쟁을 안 하려면 산으로 가십 시오. 토끼하고 자든지 호랑이와 살든지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그러나 적어도 하나 님 나라에 크게 쓰임을 받으려면 우리는 언제나 경쟁하고 잘 믿는 사람을 만나서 더 잘 믿으려고 하고, 말씀을 듣고 더 큰 은혜 받으려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새 시대 새 천년에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잘 믿어야 됩니다. 영적인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잘 믿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좋아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삶을 말합니 다. 오늘 탕자가 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때 천년을 하루같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 다. 하나님과 함께 살았을 때는 문제 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서부 터 그에게는 고통이 오고 환난이 오고 가난이 오고 부끄러움이 오고 멸시 천대가 따 라왔습니다. 아들로서의 영광은 다 떠나가고 거지처럼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며 헤 매이는, 온갖 축복을 받으려고 하지만 하나도 따라오는 것이 없는 허무하고 헛된 삶 이 그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은 풍요로운 삶, 넘치는 삶, 충만한 삶이 됩니다. 그를 떠나 지 않고 그 안에 사는 삶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의 삶인 것입니다. 그를 떠나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시험이고,유혹입니다. 결혼도 사랑도 행복 도 그 안에서, 지식도 국가의 번영과 발전도 그 안에서, 도덕도 행복도 그 안에서, 좋 은 생각 선한 마음 위대한 사상도 그 안에서, 위대한 예술도 음악도 다 그 안에서 입 니다. 그를 벗어난 예술, 그를 벗어난 음악은 우리 인간에게 더 큰 허무와 낭패와 불 행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어도 얼마든지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긍정적인,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격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 모 두 믿음 안에서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떠난 모든 것을 예찬하지 않습니다. 예수 떠나서도 우리보다 열 배 더 행복의 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는 사실은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행복과 축복은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축복은 하나님 안 에 있는자에게 위로부터 하나님에게서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에밀 구에는 \'나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나를 만들어 가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결국 자살해 죽었습니다. 적극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을 우리는 신앙과 혼동하면 안됩니다. 애국과 구제와 봉사를 신앙과 혼동해서 안됩니다. 예수 안 믿어 도 우리보다 더 애국하고 예수 안 믿어도 우리보다 이웃 사랑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 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아름답게 볼 것이 아니라, 어떤 것도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과 함께 해야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자녀도, 주 안에서 사업도 주 안에서 번영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한대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주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동기는 교회 안에서, 말씀 안에서,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이 세상을 좋게 보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모든 것 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이런 유혹을 받습니다. 이 아들 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곳에 천국이 있는 것을 모르고 세상을 천국으로 생각했습니 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은 답답한 삶이고, 힘든 삶이고, 어려운 삶으로 생각했습 니다. 그는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아담과 이브처럼 높아지고 싶 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될 것만 같았습니다. 이것이 시험 이에요. 유혹이에요. 세상을 높이 보는 것 세상을 크게 보는 것 다 내 마음대로 될 것 만 같이 보는 것 이것이 유혹이에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옛 사람, 세상을 좋게 보는 눈, 그런 마음들을 버리는 거예요. 그래야 영적인 성장이 오 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했어요. 말씀을 들어도 세상의 정욕과 욕심이 가시나무처럼 덮으면 믿음의 싹이 자랄 수 없다고 마태복음 13장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좋 은 것들이 나를 누르고 내 영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힘있 게 자라나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세상을 그늘로 만들고 하나님의 축복이 백향목처럼 힘있게 자라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을 정복할 때 성문을 부수기도 하고 성을 타고 넘기도 하고 화살을 쏘 기도 하고 불화살을 쏘기도 하고 군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진격해 들어가 는 방법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 성을 도무지 점령할 수 없어서 성과 같 은 높이로 쌓아 올라가서 건너 뛰어가는 이러한 방법들도 있었습니다. 그 좋은 예 가 \'마사다\' 라고 하는 곳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다 점령했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습니까? 그런데 AD70년에 예루살렘을 무너뜨립니다. 예루살렘이 요새이지만 예루살렘이 무너진 다음에 거기 있던 교인들은 마사다라 고 하는 곳으로 도망을 갑니다. 마사다는 땅에서부터 한 400M 되는 높은 곳에 위치 해 있으며, 사방이 완전히 항아리같이 되어 있으며, 동서남북이 절벽으로 되어있는 완벽한 요새입니다. 설령 그런 곳이 있어도 물이 없으면 안 되는데 여기는 물까지 있 는 거예요. 그 유대 나라에 땅에도 아무리 파도 물이 안나오는 곳인데 글쎄 마사다 에 물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들 1500명이 거기로 도망쳐 숨습니다. 무기 도 없어요. 그러나 로마가 이걸 못 점령하는 거예요. 세계를 점령한 이 로마가 마사 다를 이길 수 없는 거예요. 기적적으로 백 명이 올라와도 그 위에서 돌 하나만 굴러 도 다 떨어져 죽는 거예요. 아무도 올라갈 수가 없어요. 삼 년을 버텼어요. 결국에는 옆에다 같은 성을 쌓는 거예요. 계속 흙을 가져다가 쌓아서 결국에는 마사다를 점령 하는 거예요. 놀라운 일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이 세상을 믿음으로 점령해서 내 믿음의 성을 높이 쌓아 올려야 합니다. 내 기도의 성을 높이 쌓아 올려야 합니다. 이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세상보다 더 큰 영적 성을 쌓아야 합니다. 유럽을 가보십시요. 그들은 예 수를 믿고 얼마나 영적인 성을 쌓아 올려서 교회들을 얼마나 높이 올렸습니까? 여러분 파리에 가면 관광지가 어디입니까? 제일 좋은 관광지가 교회들입니다. 몽마 르뜨 거기가 다 교회예요. 영국에 가보십시요. 독일에 가보십시요. 최고로 좋은 것들 은 다 천 년 동안 영적인 성을 높이 쌓았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믿 음의 터를 자자손손 높이 쌓아 올려서 저들이 세계를 통치하고 지배하고 하나님 앞 에 복을 받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최고입니다. 하나님 잘 믿는 것이 최고입니다. 어 느 것보다도 믿음 이상은 없다는 신앙을 높이 쌓아 올렸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신 앙이 높습니까, 여러분이 아직까지 세상과 비교할 때 여러분의 믿음이 어느 정도 높 아져 있습니까? 세상에 바람 한번만 불어도 흔들리고 세상의 무슨 제품 하나만 나와도 깜짝깜짝 놀 라고 감격해 하던 것을, 이제는 창세기를 읽어보면서 감격해 하십시요. 출애굽기를 읽어보면서 감격해 하십시요. 찬송 부르며 좀 눈물 흘려 감격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텔레비젼 보면서 가수들이 나오면 아이들이 오빠하며 울고 하는데 그냥 가수들이 나와서 약간 흐응 이러면 울고 어쩔줄 몰라 그래요. 뭐가 놀랍다는 거 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위대하게 보면서 새 천년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 신앙 하나를 높여야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 는 이 삶을 최고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의 것은 두려워할 것도 없고 염 려할 것도 없고 바라볼 것도 없습니다. 솔로몬이 말한 대로 헛되고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들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우 리가 이 세상을 따라가고 흠모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에게는 어떤 축복이 주어졌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따라 가는 삶이 아니라 다스리는 삶이에요. 정복자예요.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축복 이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입니다. 세상에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 아니라, 놀라는 일은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새 시대를 세상을 정복하는 위대한 축복 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은 헛된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얻으려 하다가 삼손은 비참 하게 죽었고 세상의 여인을 사랑하다가 그 자신이 죽고 말았습니다. 롯은 세상의 물 질을 따라가다가 그의 가족들까지 다 잃어버렸어요. 삼손은 자기만 죽었지요. 롯은 온 집안이 다 망했어요. 어디에서? 세상에서. 세상에서 잘 살고 행복하게 세상에서 멋대로 살려고 하다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교회를 나와도 세상에 있는 정욕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감사해야지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하면 신앙생활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옛날 어떤 고을에 너무 인자하고 훌륭한 원님이 있어서 그 지역에 살아가는 농민 이 농사를 지었는데 어떻게 농사가 잘 되는지 무 농사를 지었는데 무가 사람만 해 요. 그래서 두 내외가 \"여보 우리 원님 덕택에 이렇게 농사가 잘 되었는데 이 무는 원 님에게 갖다 드립시다\" 하고 둘이서 이고 지고해서 원님에게 가져다 바쳤어요. \"원 님 덕택에 농사가 잘 되었사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겠습니까 무 하나지만 너무 이렇게 크고 잘생겨서 원님에게 가져왔습니다.\" 원님이 들어보니 너무 좋거든요 그 래서 \"여봐라 이방, 이렇게 좋은 백성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고! 혹시 방에 뭐 들어온 선물 없는가?\" \"예 지난번에 어떤 분이 가지고온 황소 한 마리가 있습니 다\" \"그래 그러면 그 황소를 저 무를 가져온 분에게 주도록 해라\" 그래서 그 분이 황 소를 가지고 집으로 가서 잘 살았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앞집에 있던 분이 \'야 참 원님한테 저렇게 무를 가져가서 황소를 받아 왔구나\' 이 사람이 머리를 썼어요. \'그럼 나는 황소를 가져가야지 우리 집에 있는 황소 한 마리를 가져다주면 아마 고을 전체를 나한테 다 줄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황소 한 마리를 가져가서 \"원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원님 덕택에 황소가 잘 컸습니다 그래서 원님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랬더니 원님이 또 좋아서 \'세상에 이렇 게 착한 사람이 어디있나\' \"이방 그 안에 들어온 거 뭐 혹시 없는가\" \"예 있사옵니다 지난 주일에 무 갖다 놓은 거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저 사람에게 무를 주도록 하여 라\" 했답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 믿어서 잘 살아야 된다? 아니에요. 잘 살고 못사는데 너무 연 연 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잘 살아 내가 가져서 뭐 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영원히 영원히 사는 삶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 영원한 하늘과 땅의 복을 받았는데, 성경에 출애굽기에서 천대에 은혜를 주신다고 했는데 이제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건 다 몰라도 믿음 만은 첫째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경제의 IMF가 얼마나 무서운 가를 경험했습니 다. 그러나 3년만에 IMF는 거의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보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외화가 전 세계에 일곱 째로 많다고 합니다. 보통이 아니지요. 잠깐동안 엄청 난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정치적인 IMF도 소망이 있습니다. 지식의 IMF, 그 국민이 배우지 못한 것도 언젠가는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IMF는 도덕의 IMF입니다. 학교에 다녀보십시요. 윤리 도덕 면으로 인간 됨에 F 맞은 사람은 안됩 니다. 영적인 F를 맞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일 이년에, 십 년 이십 년에 회복하는 것 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어렵습니까? 그런 것은 잘 만 하면 한 순간에 바뀔 수가 있어요. 인간 안 된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안 되는 거예요. 천지가 열 번 바뀌어도 인간 안된 사람은 못쓰는 거예요. 나는 우리 나라가 IMF가 올 것도 알았지만 지금 이런 식으로, 윤리 도덕이 땅에 떨어진 이런 한심한 시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회복할 수 없는 어려움 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살고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 님을 제일로 알고 살면서 이 시대를 보람있게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새 시대가 왔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 1장 17절에 온갖 축복 이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옵니다. 속지 말라 그랬어요. 세상에 속지 말라, 좋은 것 은 아버지께로 하늘로 위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교회 안에, 말씀 안에, 은혜 안에 하 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세 가지 시인이 필요합니다. 세 가지 고백이 필요합니다. 세 가지를 돌이켜야 합니다. 첫째, 마음을 돌이켜야 하고 둘째, 발걸음을 돌이키고 세번째, 내 생활을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떠난것도 내가 떠났듯이 돌아오는 것도 내가 돌아와야 해요. 신앙은 언제나 내가 하는 거예요. 세상을 사랑한 것도 나 인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해야 되 는 거예요. 내가 결심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것도 내가 안 믿듯이 믿는 것 도 내가 믿는다고 내가 고백해야 됩니다. 내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저버리고 간 것도 내 발걸음이라면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도 내가 옮겨야 되는 거예요. 이 건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이 아들은 지난날의 잘못된 것을 깨닫고 스스로가 돌이키는 거예요. 첫째는 마음을 돌이키는 거예요. 그는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속은 것을 고백했 어요. 시인했어요. 그렇습니다. 인정해야 됩니다. 스스로 고백해야 됩니다. 세상은 헛되더라, 믿을 것이 없더라, 친구도 믿어서는 안되겠더라, 하나님을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더라. 속은 것을 언제나 입으로 고백해야 됩니다. 17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 다. 눅 15장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 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세상에서 나는 이제 길이 없다 죽게 되었다 나는 이제 끝이다. 이런 말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내가 거지가 되 었다 이런 말을 해야 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을 자꾸 예찬하는 분들이 있어요. 좋게 말하는 분들이 있어 요. 그건 위험한 생각들입니다. 솔로몬처럼 헛되다 라고 말해야돼요. 삭개오처럼 지 난날을 시인해야 됩니다. 내가 죄를 지었으니 잘못했습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어 요. 베드로도 누가복음 5장에서 아버지를 떠나서는 고기 한 마리도 어제 밤에 잡을 수 없었다고 안되더라고,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두번째는 회개했어요. 자기 자신을 시인하는 거예요.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 님 앞에 아버지께로 돌아왔어요. 아버지 앞에 와서 내 모든 잘못된 것을 고백했어 요. 침묵이 금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백이 금이에요. 내가 나를 망쳤습니다 아버지 마음을 근심되게 했습니다. 변명하면 안됩니다. 변명하면 할수록, 요령부리면 부릴 수록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주의 영을 근심되게 했습 니다.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가 주어지 는 줄로 믿습니다. 세번째는 품군이라고 자기가 결심을 했어요. 나는 이제 아버지 집에서 품군으로 살 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굉장한 선언입니다. 굉장한 선포입니다. 이런 결심하는 사람 은 길이 많습니다. 좋은 자세입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말하면 어디 가든지 사 랑 받고 어디 가든지 성공하고 어디 가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허물은 다 덮입 니다. 일자리가 많습니다. 용기의 사람, 능력의 사람은 나는 이제 품군으로 살겠습니 다. 이렇게 마음 하나만 낮추면 모든 삶은 형통해 질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와서 신 앙생활 하면서 높은 마음 갖지 마십시요. 자세가 중요합니다. 저는 탁구를 치는데 구경하는 분들이 늘 그래요. 나를 칭찬하지를 않고 그 폼 가지 고 받아 내는 게 기적 같대요. 어떻게 공이 넘어가는지 이해가 안된대요. 나는 괜찮 게 치는 것 같은데 자세가 탁구 자세가 아니라는 거예요. 자세가 참 중요합니다. 자세가 좌우합니다. 골프 자세만 잡는데에도 3년이 걸린다 고 합니다. 친다고 골프 잘 치는 게 아니래요.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래요. 자세만 잘 잡으면 골프는 저절로 된 대요. 여러분, 가정에서도 행복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다 만들어 놓았지만 자세가 비딱한 가정은 행복이 비딱하게 가는 거예요. 가정이 건 강한 가정 될 수 없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다 마찬가지 에요. 어느 자리 에 가든지 나는 품군이다 라는 마음으로 살면 행복합니다. 잘됩니다. 성공합니다. 할 일 많습니다. 제가 어제 국민일보 특집을 처음으로 싣는데 저와 저희 교회를 실었어요. 한 면을 다른 것 하나 안 싣고 저와 저희 교회에 대해서 실었어요. 나는 너무 죄송해서 내가 거기 실릴만한 자격도 없는데 인터뷰를 안 하려고 했는데 목사님 이건 기자의 생각 이 아니고 전체 언론계 신문사에서 회의를 했는데 저를 꼭 실어야 되겠다는 것이예 요. 우리 나라 어른들도 많은데 곤란하다고 해도 꼭 실어야 겠다는 것이예요. 교회 를 다니는 기자들이 아마 저를 좋게 보았나봐요. 기자 눈에 드는 것이 쉬운 게 아닙 니다. 그러면 하여튼 해보자고 그래서 했는데 좀 지나친 표현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한가지는 저는 어디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는 품군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셔서 나와 함께 하셔서이 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생각 가지고 하니까 늘 감사하 고 늘 기쁘고 그래서 무엇을 먹어도 저는 맛있고 어떤 옷을 입어도 내게는 너무 과 한 거예요. 감사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옷을 입으면 벗을 생각을 안 합니다. 바꿀 생각을 안 합니다. 감사하니 까. 여러분이 왜 입을 옷이 없습니까 여러분이 눈이 높아서 그래요. 전부 다 입을 옷 들이에요.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 옷 사려고 헤매는 것은 눈이 높아 그런 거예요. 어 느 식당도 다 맛있는 식당이에요. 여러분 입 때문에 문제지요. 음식이 문제가 아니에 요. 오늘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왜 우리가 만족이 없어요 왜 행복이 없어요 왜 여 러분이 능력 있게 못사는 거예요 왜 감사하며 못사는 거예요? 여러분이 높아서 그런 거예요. 그 자세 안 바꾸면 어느 직장 가도 쓰임 받지 못하고 누구와 결혼해도 어느 아파트에 가서 살아도 만족이 없어요. 주님 나는 품군입니다. 이것이 교회생활에 하 나님께로부터 은혜를 태풍처럼 몰고 오는 비결이 바로 이런 자세에 있는 거예요. 새 천년, 하나님의 성전에서 새 천년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모든 성도 이 민족 되시기 를 바랍니다.
21세기를 아버지와 함께/ 눅15:11-21/ 김삼환 목사/ 2000-01-26
21세기를 아버지와 함께 눅15:11-21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영적인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잘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좋아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삶을 말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때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았을 때는 이야기 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그에게는 고통이 오고, 환난이 오고, 가난이 오고, 부끄러 움이 오고, 멸시 천대가 따라 왔습니다. 아들로서의 영광은 다 떠나가고, 거지처럼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며 헤메는 삶이 되었 습니다. 허무하고 헛된 삶이 그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은 풍요로운 삶, 넘치는 삶, 충만한 삶이 됩니다. 그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 사는 삶이 하나님 자녀의 삶인 것입니다. 그를 떠나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시험입니다. 유혹입니다. 결혼도 사랑도 행복도 예수 안에서이고, 지식과 국가의 번영과 발전도 예수 안에서이며, 좋은 생각·위대한 사상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도 음악도 다 예수 안 에서입니다. 그를 벗어난 예술, 그를 벗어난 음악은 우리 인간에게 더 큰 허무와 낭패와 불행을 가져 다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얼마든지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격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믿음 안에서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떠난 어떤 것도 예찬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떠나서도 우리보다 열배 더 행복의 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거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행복은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축복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에밀 구에는 \\\"나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나를 만들어 가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결국 자살하였습니다. 적극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을 신앙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또 애국과 구제와 봉사를 신앙과 혼동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것들을 주님보다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이 주님 안에 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곳에 천국이 있는 줄을 모르고, 세상을 천국으로 생각했습니다. 탕자에게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은 답답한 삶이었습니다. 힘든 삶이었습니다.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그는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될 것만 같았습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유혹입니다. 세상을 높이 보는 것, 세상을 크게 보는 것, 다 내 마음대로 될 것만 같아 보이는 것, 이런 것들이 유혹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 삶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살고,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제일로 알고 살면서 이 시대를 보 람있게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마음을 돌이켜야 하고, 둘째 발걸음을 돌이켜야 하고, 셋째 내 생활을 돌이켜야 합니다. \\\"제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라고 회개할 때 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가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나는 이제 품꾼으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낮추면 모든 삶은 형통할 줄로 믿습니다. 김삼환 목사(서울 명성교회)
21세기를 아버지와 함께/ 눅15:11-21/ 김삼환 목사/ 2010-09-30
21세기를 아버지와 함께 눅15:11-21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영적인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잘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좋아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삶을 말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때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았을 때는 이야기 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그에게는 고통이 오고, 환난이 오고, 가난이 오고, 부끄러 움이 오고, 멸시 천대가 따라 왔습니다. 아들로서의 영광은 다 떠나가고, 거지처럼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며 헤메는 삶이 되었 습니다. 허무하고 헛된 삶이 그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은 풍요로운 삶, 넘치는 삶, 충만한 삶이 됩니다. 그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 사는 삶이 하나님 자녀의 삶인 것입니다. 그를 떠나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시험입니다. 유혹입니다. 결혼도 사랑도 행복도 예수 안에서이고, 지식과 국가의 번영과 발전도 예수 안에서이며, 좋은 생각·위대한 사상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도 음악도 다 예수 안 에서입니다. 그를 벗어난 예술, 그를 벗어난 음악은 우리 인간에게 더 큰 허무와 낭패와 불행을 가져 다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얼마든지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격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믿음 안에서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떠난 어떤 것도 예찬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떠나서도 우리보다 열배 더 행복의 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거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행복은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축복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에밀 구에는 \\\\\\\"나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나를 만들어 가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결국 자살하였습니다. 적극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을 신앙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또 애국과 구제와 봉사를 신앙과 혼동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것들을 주님보다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이 주님 안에 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곳에 천국이 있는 줄을 모르고, 세상을 천국으로 생각했습니다. 탕자에게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은 답답한 삶이었습니다. 힘든 삶이었습니다.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그는 내 마음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될 것만 같았습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유혹입니다. 세상을 높이 보는 것, 세상을 크게 보는 것, 다 내 마음대로 될 것만 같아 보이는 것, 이런 것들이 유혹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 삶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살고,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제일로 알고 살면서 이 시대를 보 람있게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마음을 돌이켜야 하고, 둘째 발걸음을 돌이켜야 하고, 셋째 내 생활을 돌이켜야 합니다. \\\\\\\"제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라고 회개할 때 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가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나는 이제 품꾼으로 살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낮추면 모든 삶은 형통할 줄로 믿습니다. 김삼환 목사(서울 명성교회)
21세기를 열어가는 교회/ 행13:1-3/ 김은호 목사
행13:1-3/ 21세기를 열어가는 교회/ 김은호목사 2015-02-17 20:51:32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우리 오륜교회는 안디옥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습니다.그러다가 1990년 11월 1일 지금의 장소로 옮기면서 교회이름이 오륜교회로 바뀌어졌다. 왜 개척을 시작하면서 안디옥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는가 하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안디옥교회가 너무나 건강하고 멋있는 교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멋있는 교회를 세워보자는 마음으로 개척을 시작하였습니다. □ 안디옥교회 설립 배경 성경에는 두 개의 안디옥교회가 있다. 하나는 행13:14절에 나오는 소아시아지방의 안디옥교회이고 또 하나는 본문에 나오는 수리아 지방의 안디옥교회이다. 이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고하면 흩어진 평신도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 19-20절\"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중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교인들은 똘똘뭉쳐 흩어지지않았다.하루에도 3천명 4천명이 불어나서 교회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부흥되는데 그들은 흩어지지 않았씁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루살렘교회에 큰 환난과 핍박을 주셨다. 그래서 스데반이 잡혀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어쩔수 없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안디옥교회는 그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이 세운 교회이다. 이사만 해도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가장 먼저 주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어떤 교회가 21세기를 열어가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1. 성장하는 교회 목사없이 피난온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지만 교회가 놀랍게 성장하였다. 그래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는데 그 소문이 어디까지 들렸는가? 하면 예루살렘이다. 그래서 22절을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예루살렘 교회는 급히 바나바라는 사역자를 안디옥에 파송하였다. 왜 이렇게 안디옥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는가? 성장의 배경은? 첫째로: 주 예수를 전파하였기 때문이다.(20절)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것은 그 교회가 복음적인 교회였음을 말해 준다. 복음이 뭔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예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사 십자가에서 못박혀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죽은 영혼이 살아난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월은 흘러도 이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쌍둥이도 세대차이를 느낄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없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우리의 영혼은 죄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열어가는 교회는 원색적인 복음이 증거되는 교회여야 합니다. 둘째로 주의 손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21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손이 없다. 그런데 여기 주의 손이 함께 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살아역사하심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바나바는 이것을 23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합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역사하시는 손길을 보았습니다.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내어 붸으시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만이 아니라 보고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21세기를 열어가는 교회는 하나님의 은헤를 보고 기뻐할 수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2. 예수를 닮은 교회(26절)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을 크리스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언제 최초로 사용되었는지 아세요. 26절을 보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붙혀진 별명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좋은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을 가리켜서 욕할 때 \'예수 쟁이\'라고 했다. 욕을 잘하는 사람을 욕쟁이, 욕심이 많은 사람을 욕심쟁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그리스도의 사람, 작은예수라는 의미다. 그 사람을 보니 예수를 너무나 빼 닮았다는 말이다. 예수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말하는 것을 보니 걸음걸이를 보니 사는 것을 보니 예배드리는 것을 보니 예수를 너무나 빼닮았다. 그런데 언제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까? 바나바와 바울이 그들을 일년동안 가르침으로 되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 가르침을 받은 후 비로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 예수쟁이가 필요하다. 당신 예수쟁이지? 직장에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 학교에서 군대에서도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 살아 있는 예수가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그렇게 주님은 닮은 제자들이 많은 교회가 21세기를 열어갈 수 있다. 3.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27-30) 안디옥교회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예루살렘교회가 어려움 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듣고 힘 닿는대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다. 29절 \"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여유가 있고 넉넉해서가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으로 따지면 안디옥교회가 더 어렵다. 피난을 온 사람들이 세운 교회이다. 생활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안정된 직장도 없다. 전국에 흉년이 들어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예루살렘교회가 (모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각 각 그 힘대로\"헌금을 하여 예루살렘교회에 보냈다. 누가 구제하는가? 영적인 부요함이 있는 자이다. 돈이 있는 자가 아니다. 4. 열방을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행13:1-3)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했다.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고 그것을 끝가지 관찰하려고 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를 원했다. 행13:2절을 보면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그리고 13:3절을 보면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따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그들은 금식하며 두 사람을 안수하여 전도여행을 떠나 보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왜냐하면 당시 바나바와 바울 이 두사람은 안디옥교회의 목사들입니다. 목사라고는 두 사람밖에 없는데 이 두 지도자를 내어 보낸다는 것은 교회적으로 너무나 손해가되는 것이며 당장 다음 주일부터는 설교를 누가 합니까? 그러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동안의 훈련을 통해서 그들은 지도자없이도 홀로 설 수 있는 제자로서 훈련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교회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그들은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두 사람을 세계전도에 내어 보냈습니다. 바울은 그안디옥교회를 모체로 제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였습니다. 그 전도여행으로 얼마나 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안디옥교회는 받는 교회가 아니라 주는 교회였습니다. 물질도 주고 목사도 보내고...열방을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였습니다. 그렇습니다. 21세기를 열어가는 우리 오륜교회도 이런 교회가되어야 합니다. 내교회 내 자식, 내 가정만을 생각하면 안된다. 열방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열린마음으로 나아가야 21세기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① 성장하는 교회(주예수를 전파,주의 손이 함께 하심) ②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주님을 닮은 교회-예수쟁이) ③ 사랑을 베푸는 교회(어려움 때에 힘 닫는대로) ④ 열방을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내 교회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교회,목회자 없이도 설 수 있는 교회) 이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다. 빛의 사자들이여 (찬259)
21세기를 큰 믿음으로/ 삼상17:41-50/ 김삼환 목사
삼상17:41-50/ 21세기를 큰 믿음으로/ 김삼환목사 2014-10-27 20:20:48 온 세계는 21세기를 앞우고 긴장과 두려움과 흥분과 기대를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 습니다. 국가, 기업, 학문, 모든 예술, 어떠한 분야까지 21세기는 분명히 새로운 한 천년, 새로운시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한 세대가 오리라고 보는 것 입니다. 20세기도 엄청난 변화의 게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모든 것들은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이 요 백년 사이에 아니 한 오십년 사이에 세계는 전체가 새로운 색깔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반도체나 휴 대폰이나 컴퓨터나 인터넷이나 광통신이나 인공위성이나 비행기나 이런 것들은 그 전에는 전혀 볼 수 없는 것들이 요 몇 년 안에 우리 삶의 전체를 잡고 있습니다. 여러 분 집안에 있는 TV나 냉장고나 세탁기나 오디오 제품들이나 CD나 음식을 넣으면 당 장 덥게하는 전자렌지나 이런 것들은 그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입니다. 우리 는 21세기는 더 빠른 속도로 새로운 것을 만나야 되고 적응해야 되고 어떠한 시대가 우리에게 닥칠지 알 수 없는 심히 불안하기도 하고 궁금한 시대이기도 한 것입니다. 대학도 2005년이 되면 대학의 경계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우리 대학이라는 것이 없 어지고 또 여기서 어는 대학에 간다라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다 한 대학으로 지식과 학문과 정보를 어느 대학이나 어느 기구가 독점으로 갖고 가르치는 시대가 아닙니 다. 21세기! 교통수단도 엄청난 변화가 와서 여기서 미국가지 아침에 갔다가 5부에 나오 는 것. 10년 이내로 거의 가능할 것입니다. 그것도 지상으로 갈지, 바닷속으로 갈 지,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어느 것 하나도 우리가 신비한 시대! 우리는 이러한 시대 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1세기에 여러분은 어떤 직업, 어떤 가정, 어떤 사업을 꿈꾸고 있 습니까? 지금은 그런 사업들이 다 없어지고 새로운 사업들로 꽉 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우리나라의 어떤 기업에도 오늘은 이야기하지 말아라 하는 기업이 있습 니다. 제가 들었습니다. 오늘은 이미 무식한 거예요. 오늘은 이미 지나간 거예요. 그 전에는 한 번 배우면 평생 지성인이지만 지금은 오늘의 것을 내일 쓸 수 없기 때문 에 내일을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21세기! 내일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무 엇을 해야 하고 우리 할 일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전능하신 하나 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 그의 보내 어 주신 아들이 나의 구주가 되셔서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그의 인도하심, 선하 신 목자의 인도하심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이 가장 안전한 길, 성공하는 길, 승 리의 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치 릴레이와 같습니다. 경주 자와 같습니다. 100m, 200m를 달릴 때에 경주자는 자기 코스, 자기 라인을 벗어나 면 안되듯이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로 믿으면 아버지로 믿지 않 았을 때와는 길이 다릅니다. 믿음 안에서 거기에서 움직여야 되요. 사업은 바른지, 결본은 바른지. 가정이든, 기업이든,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까지 보는 것 까지 항상 그 안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교독문에서도 읽으신 것처럼, 그 전에 살아 온 것은 믿음을 떠난 삶이요.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나의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살아가는 길은 새로운 길인 것입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 다. 이 생명은 믿음의 생명입니다. 믿음을 떠난 생명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 다. 영생의 길이 아닙니다. 이제 믿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바라보면 서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쓰시고 사랑하시고 믿는 자를 기뻐 하시지 않습니까? 네 믿음대로 되게 하신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약 성경에 보 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지 않습니까? 12명의 정탐꾼을 모 세는 가나안에 들여보냅니다. 열명이 돌아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죠? 붐 신앙의 이야기를 합니다. 불신앙이라 그래 서 인간적으로 뭐 무식하다는 뜻도 아니고 잘못됐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보 고 신앙의 눈으로 안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우리를 보내셨다고 하는 그 믿음으 로 말하지 않고 믿음으로 보기를 않고 듣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을 떠나서 인간의 눈으로 보니까. \\\"아, 우리는 갈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굉장히 광대한 나라입 니다. 성은 굉장히 견고합니다. 그들의 군대는 강합니다. 우리는 메뚜기만도 못 합니 다.\\\" 얼마나 하나님이 섭섭해 하셨어요? 그러나, 두 사람은 여호수아, 갈럽이라고 하 는 두 사람은 그렇게 안 보았어요. 어떻게 보았어요? 믿음의 눈으로 보았어요. 하나 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그 하나님,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그 말씀. 믿고서 보는 거예요. 믿고서 보니까. 아름다운 땅이에요. 믿고 보니까. 너무너무 소망이 넘치는 거예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에요. 믿음으로보니까. 우리가 가느냐 안가느냐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여호수아, 갈렙은 어떻게 보았어요? 그 땅은 우리밥이라고 보았어 요. \\\"우리 밥이라\\\" 어렇게 말했어요. 갈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밥이다. 밥상이다. 하나님이 좋은 땅을 우리를 위해 차려 주셨다. 준비해 주셨다. 이렇게 보았어요. 민수기 14장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땅을 탐지한 자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 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 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입니다. 아름답다라는 거예요. 좋게 보는 거예요. 신앙의 눈은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 를 그 땅으로 인도해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 르는 땅이니라, 좋게 보았어요. 소망을 가지고 보았어요. 하나님 우리에게 제일 좋 은 것을 주셨다고 보았어요. 믿은 하나님을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으로 보고 하나님의 선물을 좋게 받아들이고 믿 음으로 모든 것을 보는 자는 하나 하나를 다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이방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 워 마랄. 불신앙은 뭐냐하면 항상 모든 것을 육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 평가를 인간의 기준으로 보는 것입니다. 질량으로 보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봅니 다. 과학적으로 봅니다. 보이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앞에 것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이 캄캄할 지라도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빛이 비칠 것을 믿고 내가 오늘에 어떤 불치의 병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고쳐주시면 넉 넉히 고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문제를 적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크게 보고 문제를 적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신앙은 밥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멀리 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부정적으 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도 좋게 보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험도 이 시험이 나로 정금같이 쓰임 받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 는 시련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시련과 환난과 재난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보면 21c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나라 위치가 그렇 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를 둘러 싸고 있는 나라가 세계 최강대국 4나라 가운데 3 나라가 우리를 둘러 싸고 있습니다. 아마 그런 나라가 이 지상에 없습니다. 중국이 12억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우리를 대적하는 나라로 살아 움직이고 있습 니다. 몇 십년 동안 공산주의에 잠들어 있던 나라가 지금 일어나서 우는 사자와 같 이 삼킬 자를 찾으려고 중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1c는 미국과 중국이 세계를 지 배한다고 하는데 중국은 미국을 앞선다는 학자들의 발표가 참 많습니다. 이런 나라 가 우리 바로 붙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세계 경제 대국이 여러 가지로 우리나라와 경쟁이 되지 않는 일본이 붙어 있습니다. 또 세계 최 군사강대국인 소련이 바로 붙 어 있습니다. 여러분, 남미나 아프리카나 유럽을 보세요. 이 강대국사이에 적은 나라 도 많이 있지. 요 이세 제일 큰 나라를 앞에 두고 우리나라. 이 한나라 밖에 없습니 다. 섬도 없습니다. 다른 나라 한나라도 없어요. 우리나라 귀 한퉁이 같이 이 적은 나 라가 우리 한국입니다. 인구도 비교가 안되고 지하자원도 없고, 군사적으로도 비교 가 안되고 경제적으로도 전혀 Game이 되지 않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랍니다. 그런데도 또 나라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다 7000천만이 합해도 지금 중국의 한 성도 못 따라 가는데 고것마저도 나누 어져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불안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정말 절망 할 수 밖 에 없습니다. 그 전에 중국이 가난했을 때는 모르지만 지금 중국이 다 경제적으로 움 직이면서 우리하던 것 다 빼앗아가지고 수술하고 제품을 다 만들어 내고 있고, 모든 일에 힘을 쓰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또 한갖 중요한 문제는 이 세나라가 과거에 적어도 1000년 동안 우리를 괴롭힌 나라 들이에요. 한 번도 우리를 한 번 삼키고 나면 또. 저 나라가 삼키고. 저 나라가 삼키 고 나면 중국이 삼키고 중국이 삼키고 나면 일본이 삼키고 소련이 삼키면서 온갖 고 통과 환난과 재난을 이 민족에게 안겨준 이 세 나라입니다. 정말 이 나라가 요만큼이 라도 은혜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셨습니다. 함께 하셨습니다. 힘으로는 이 길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경쟁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께서 그 나라들을 이상하게 자 기를 끼리 어떤 대치를 하게 해서 또 이 나라를 여러면으로 자기들이 이렇게 쉽게 점 령할 수 없게 만들어서 이 나라를 지금 지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문제는 복잡한 것입니다. 누구도. 어느 강대국 한 나라도 풀 수 없고 세 나라도 풀수 없고 네 나라도 풀 수 없 는 아주 이해관계를 요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가지고 지금 보존시키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운명은 어디로 갈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만 이 민족을 버 리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승리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극장에 가서 제일 감동을 받 는 것은 애국가를 부를 때 \\\"하나님이 부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저는 눈물이 안 날 때 가 업습니다. 내가 극장을 자주 가는 것은 아닙니다. 요사이 간 것도 아니예요. 이건 옛날 벤허 보러 갔을 때. 옛날이야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호하신대요 이 애 국가가 나온지도 얼마 안됐지요. 그래서 지금 다른 종파에서는 애국가 바꾸자고 동 해물과 백두산이 하다가 그만 그 후렴할 때는 안 부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호하는 민족.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민족. 이 민족의 소망이요. 힘이요. 축 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신하의 눈으로 보면 길이 있고 좋게 보이고 오히 려 그런 사이에서 이 민족을 들어쓰시는 제 사장 나라도 이 민족을 들어쓰시는 신앙 으로 보면 다 좋은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우리 교회에 앉아 계시는 그리고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 신앙의 눈으로 보면 중국이 나 소련이나 일본을 오히려 하나의 큰 시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대적으로 볼 수도 있지마는 우리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경제가 성장해 가지고 이 민족이 제품을 많이 만들어 내면 하나님이 중국사람에게 마약이 복용하고, 예수 안믿고 술 이나 많이 먹고 담배나 피우면 머리가 둔해가지고 그런 걸 못 만들면 하나님이 이민 족 예수 잘 믿어서 지혜를 주시면 우리가 만들어 가지고 시장으로 만들면 미국이나 유럽 수출하는 것 보다 바로 자동차 싫고 옮기니까 더 잘 살 수 있다고 얼마든지 믿 는 것입니다. 일본이나 소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저들이 하나 님만 정말 이 민족이 잘 경외해서 이 민족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지혜있는 민족이 되어서 제품이나 잘 만들고 이 민족이 하나가 되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들을 시장으 로 삼고 그 민족을 통해서 이 민족은 더욱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 렇습니다. 신앙으로 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보아야 됩니다. 믿지 아니하면 이 나라 의 존재는 운명이 없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지마는 그러나 하나님이 이 민족과 함께 하시면 오히려 이스라엘을 강대국 사이에서 더 귀하게 하듯이 이 민족을 하나님이 높여 주실 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논문에 나오는 말씀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이라고 하는 나라는 이스라엘 서해안 지역에 수 백 년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리잡고 있는 강력한 민족입니다. 이 블 레셋이라고 하는 민족은 아주 문화가 발달한 민족이고 군사력으로도 대단한 민족입 니다. 이스라엘이 항상 블레셋에 백전백패했습니다. 엘리 제사장도 거기에서 자녀들을 다 잃었죠. 사울왕도 아들들과 함께 거기에서 죽었죠. 구약의 여러분, 삼손이라 하는 자도 블레셋에 가서 두눈이 빠져서 죽습니다. 항상 이 스라엘과 수백년 동안 전쟁을 해도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이 블레셋입니다. 블레 셋에 오늘 누가 나왔느냐 하면 골리앗이라고 하는 분이 소고라고 하는 성에 나와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을 치고 큰 소리를 지릅니다. 골리앗은 키가 6규빗하고 한 뼘이 에요. 한 규빗이 45cm인데 6규빗이면 얼마예요? 2m 40cm하고 6규빗 한뼘이니까 얼마예요? 거의 3m에 가까운 거인입니다. 그리고 갑옷을 입었는데 갑옷의 중수가 3000세겔이에요. 3000세겔이 35kg이니까 갑옷무게가 얼마나 큰 장군입니까? 이 창 날만 말이죠. 이 창날만 철이 600세겔이에요. 우리는 신라시대 토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신라보다 1200년, 1300년 전인데도 지금 이 갑옷을 입고 철을 가지고 있었 어요. 우리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민족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가서 블레셋에서 만 든 도자기를 보니까요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요. 지금부터 3500년전에 만든 도자기 가 아주 무늬가 선명하구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이런 세계를 향하여 무역하 는 강대한 나라의 장군인 골리앗이 거기에 나와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을 쳤어요. 에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전부 두려워합니다. 작전회의도 안되고 구사회의도 나라 가 안보회의를 아무리 해도 이 골리앗과 블레셋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그때 누가 나 왔습니까? 다윗이라고 하는 분이, 목동이 형들에게, 형님의 8분이에요. 형들에게 전 쟁 중에 있는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면회하러 갔다가 그 광경을 보는 거예 요 사울왕은 모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 제시한 것이 누구든지 이 골리앗을 이기 면 내 딸이라도 주겠다고 해서 자기보다 소중한 딸을 내어놓을 정도로 이스라엘은 이 전시에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때에 다윗이 나아가서 보니까 이스라엘은 모두 다 전쟁을 포기하고 기가 죽어 있 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골리앗 때문이라고 골리앗이 누구냐고 블레셋의 큰 장군이라고. 아니 할례 받지 아니하는 이방사람을 왜 두려워하느냐고 다윗이 소 리를 질렀습니다. 얘가 무슨, 넌 집에 가있어. 형들이 소리지릅니다. 니가 전쟁도 모 르면서 양을 치다가 와 가지고 무슨 소리냐고 집에나 가라고 양이나 먹이라고 너 먹 이든 양은 어디있나고. 형들이 뭐라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끝까지 달려듭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자의 발톱에서도 건져주셨습니다. 양을 칠 때에 사자가 와서 양을 잡아가면 내가 끝가지 따라가서 사자의 입안에 있는 양을 빼앗아 왔습니 다. 무슨 소립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사람을 두려워해요? 허락을 받아 서 전쟁터에 1:1로 골리앗과 대치합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비웃습니다. 네가 나 를 개로 알고 막대기를 가지고 왔냐?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너는 믿는 것이 너의 창이고 너의 갑옷이고 너의 힘이고 너의 능력이고 너는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네가 전부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나의 믿는 하나님은 상천하 지에 유일하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 노라. 나는 너의 목을 베어서 들짐승에게 주고 새들에게 먹이로 만들겠다. 골리앗을 향하여 물맷돌을 가지고 던져서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져내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이 되었습니다. 이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름부음 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위대한 이스라엘 역사의 최고의 인물이 됩니다. 그 가 누구입니까? 목동 다윗입니다. 아무것도 전쟁에 이길 수 있는 조건이 없지만 하나 님을 믿는 그 믿음이 나라를 건져내고 자기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 다. 하나님은 오늘도 찾고 있습니다. 신앙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 는 사람.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을 오늘도 찾고 있는 것입니다. 1809년 2월 12일 캔 터키 산골에 링컨이라는 어린아이가 가난하게 태어났지 않았습니까? 이 아이가 전 미국을 향하여 세계를 향하여 큰 인물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미국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서 전 미국을 하나로 만들어서 오늘날 미국을 건질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민 주주의에 횃불을 들어준 분이고 온 세계에 존경받는 최고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 니다. 그는 아무것도 목동 다윗과 다를 바가 없는 정말 농촌에서 어머니도 일찍 세상을 떠 나서 가난하여 배운 것 하나 없었지마는 믿음이 이 놀라운 일을 하게 했습니다. 이 나라의 운명도 이 나라의 앞날도 학자가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어느 산골엔가 어머니 밑에서 신앙생활 교육 잘 받은 분이 한 분 나오면 이 민족의 앞날은 해결되고 세계를 향하여 쓰임받는 민족이 될 줄로 믿 습니다. 믿음이 큰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믿음으로 자기 가족을 건졌고요 믿음으로 룻이라고 하는 여인은 그로 말미암아 온 가족의 저주를 벗어나서 축복을 받게 되었 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100세에 아들을 얻었지 않습니까? 믿음은 큰 힘이 있 습니다. 믿음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앞세우지 아니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중요해도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 다. 행복의 조건도 믿음입니다. 축복의 조건도 우리의 미래도 믿음 하나로 족한 것입 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정말 없어서 볼행한 것입니까? 이렇게 우울하고 침울하고 부정적으 로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문제가 어디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믿 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긴 긴 밤을 잠 한잠 자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는 많은 분 들이 무엇 때문입니까? 걱정과 근심을 무엇으로 몰아내려고 하십니까? 우리 인간에 게 닥치는 그 많고 많은 정신적인 갈등과 고민을 무엇으로 해결하려고 하시렵니까? 믿음이 있으면 잠도 잘 오고 믿음이 있으면 평안도 능력도 힘도 주어지는 줄로 믿습 니다. 기독교 역사에 선교사로 양대 산맥이 되는 허드슨 테일러라고 하는 유명한 분 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선교에 큰 역할을 해서 존경을 받는 선교사입니다. 그가 위대한 일을 한 비결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RP서는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가장 약한 사람을 찾고 계셨는데 나에게는 주 님이 그 조건을 찾으셔서 내가 쓰임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주님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 사람이 교만해서 하나님의 쓰임을 거역하 고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고 믿지 아니하고 내 멋대로 하는 것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 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 부족하고 너무 못나서 나는 너무 약해서 주님 앞에 다 맡 겼는데 이런 놀라운 일을 하게 하셨다. 기독교 역사의 최고의 부흥사는 디엘 무딥니 다. 그도 쓰임받는 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뛰어나고 너무 똑 똑하고 너무 지혜로워서 우리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너무 부족해서 하나님이 사용하 지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38년된 병자도 믿음으로 치료함을 받고 베드로도 믿음으로 배가 넘치게 고기를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믿음은 큰 것입 니다. 믿음은 나라를 세계적인 최고의 나라로, 정치인을 세계적인 정치인으로, 과학 자를 세계적인 과학자로 여러분의 인생을 최고의 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힘과 능력 이 믿음 안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미국 국회의사당 안에 도 다른 거 하나도 없고 국회의사당 회의하는 그 안에다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위에다가 딱 걸어놓고 그 아래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귀합니다. 믿음이 최고인 것입니다. 골리 앗을 물리치고 나라를 살리는 길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크게 보아서는 안됩 니다. 세상을 크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문제를 믿음이라는 키 하나로 족한 줄 알아야 하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돈이 있어야 되고 지위가 있어야 되고 건강 이 있어야 되고 지식이 있어야 되고 현대인들은 너무 좋아하고 필요로 하고 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돈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존경 하는 장로님 가정이 있는데 집을 팔려고 해보니까요 문 입구에, 그 출입구에 그 출입 구 5평에 남의 것으로 되어있는 거예요. 윈래 시유진데 누가 사가지고 그래서 못파 는 거예요 그 집에 가 물었더니 안된다는 것예요. 그거 내꺼라는 거예요. 그래서 결 국 그 집에다 반값으로 팔았어요. 이분은 어떤 은사가 있느냐 하면, 전국의 요지를 봐가지고 이런 시유지나 공유지. 요런 것만 사가지고 자기꺼로 만들어 가지고, 그 집 을 못팔게 해 가지고, 결국 자기 걸로 만드는 빌딩을 뺏고 집을 뺏는 거예요. 그래가 지고 돈을 수백억을 벌어가지고, 병원도 크게 짓고 뭐 큰 시에 시장으로도 나오고 그 랬는데 시장도 떨어지고, 여러 형제가 작년에 병원을 몇백 bed를 지었는데 IMF를 만 나가지고 일순간에 그 집이 다 망했어요. 사람이 그런 것만 골라가지고 하는 게요. 자기 앞날도 모르고 남의 약점을 잡아가지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자기가 살려고 하 는 이런 악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우리 교인 인 지하에 있는데 그 이층 주인이 그렇게 빌딩도 많고 돈이 많대요. 그런데 이 사람 은 얼마나 돈 밖에 모르는지 요만큼만 돈 늦게 내면 내어 쫗아 버리고요 해마다 돈 을 올리고 고리대금업자 노릇을 하며 돈을 억수로 많이 벌었는데요. 몇 년전에 이분 이 치매에 걸려 가지고요. 어디에 돈 빌려줬는지 하나도 모른대요. 사람이 앞에 있 는 것만 생각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한치 앞도 모르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돈도 최고가 아니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광야 같은 길일지라도 승리하고 무사히 지나갈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우리의 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신다라는 거 예요. 이사야 41장에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3장에는 야곱아 너를 창조한 여호 와께서 이제 말씀하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어떤 미국에 있는 분이 프랑스에 관광을 갔다가 돌아올 때 호박을 선물로 사왔어요. 이 호박이란 호박 말로 보석 호박이란 게 있어요. 세관을 지나가는 데 세금을 먹이 는 것예요. 호박이거 몇백불 안준건데,오래된 가게에서 산건데,아무것도 아닌데 세 금을 먹이니까 세금을 내고 감정한데 가서 물어봤어요. 물어봤더니 25000불 정도 줄 수 있다고 팔라는 거예요. 안 팔고 또 다른데 가 물어보니 이건 35000불, 가면 갈수 록 값이 비싼 거예요. 나중에 어디가서 물어보니까 이건 10만불도 넘습니다. 왜 그러냐? 여기 들여다 보세요. 여기에는 싸인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죠세핀에게\\\' 그 선물이에요. 똑같은 호박, 별거 아니라도 고 안에 싸인 하나가 있는 것이 그렇게 귀한 거예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별 것 아닌 싸인 하나가 믿음이에요. 믿음은 내 안에, 겉에 sign도 아니에요. 내 마음에 sign이에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거예요. 요, 믿는다는 별 것 아닌 믿음이 우리로 모든 일에 백가지, 천가지, 하루하루 보는 것이 달라지고 듣는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같은 걸 들어도 전혀 다 르게 들리는 거예요. 왜? 요안에 있는 핵이 다르게 처리하는 거예요. 모든 걸 다르게 나에게 재해석 해주는 거예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박국서 1 장과 2장에 보면 하박국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말합니다. 하나님! 이 세 상이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이 다스린다면 왜 이 악인이,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 은 이렇게 잘 됩니까? 주께서 눈이 정결하셔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 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율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 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 정말 못 보시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이 무슨 세상인지 하나님 아십니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같게 하시며 주권 자 없는 곤충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여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 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 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육하니 옳으니이까? 제 멋대로 우상숭배하고 제 멋대로 재산 모아가지 고 벼라 별 짓 다해도 하나님 못 보시나이까? 그때 하나님이 대답하는 말씀이 뭔지 아세요? 야, 너는 그길이 다른거야. 너는 믿음으로 가는 길이야. 너는 믿음으로 사는 길이고. 그 사람은 죄로 사는 길이야. 길이 다른거야.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되고 악인은 악으로 사는거야. 내가 모르는 게 아니다. 악은 악으로 길이 있고 내가 심판하는 것 이고. 의인은 의인으로써 영생이 있는거야. 너는 왜 그런거하고 비교하느냐? 하박국 에서 말씀하셨어요. 사랑의 여러분! 믿으면서 악인의 길을 엿보지 마세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 이런거도 못보시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어떻게 전혀 무관심하십니까? 그러지 말으 라고요. 여러분은 잘 믿는 일에 초점을 맞춰서 어떻게 하면 더 잘 믿을까? 신앙인으 로서의 경주를 더 잘하여 21C에도 엄청나게 변하지 마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통치하 시는 건 마찬가지예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 위에 굳게 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