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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깨자. 2004년 01월 03일
고정관념을 깨자. 2004년 01월 03일 작성자 장혜숙 (erding@korea.com) <의미전달의 목적 외에는 존재가치가 없는 초월적 상징>의 예로 화장실 표지 기호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여 인간의 고정관념에 대한 생각과 접목이 되었다. 공부라는 것이 지루하기도 하지만 가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면 재미있기도 하다. “고정관념을 깨자”는 생각으로 화장실의 남녀 표지판을 현재 사용되는 상징과 다르게 표현한다. 바지를 입은 여자-댄디 룩의 여자와 스코트랜드의 전통의상-체크무늬 미니 스커트를 입은 남자를 화장실의 남녀 표지판으로 붙여놓는다면? 어디가 여자쪽이고 어디가 남자쪽인지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들 뿐일까? 잘나고 똑똑한 많은 사람들도 덩달아서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멋쟁이 모자로 남녀쪽을 구분하는 표지도 있는데 그 색깔을 남자쪽을 빨강, 여자쪽을 까망으로 한다면 역시 또 혼란이 올 것이다. 고정관념의 작은 틀을 하나 깨는 것, 이것에도 우왕좌왕하는 것이 삶의 실체인 것 같다. 그동안 지니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의 고정관념들을 새해를 맞아 모두 깨어버리고 긍정적인 눈으로 다시 보아야겠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편견의 담장도 무너뜨리고 좀더 폭넓은 시각으로 모든것을 수용해야겠다.
귀의(歸依) 2003년 11월 24일
귀의(歸依) 2003년 11월 24일 작성자 chs (.) 공항에 가면서 차량 통과료를 내기위해 지갑을 열었다. 이게 웬일인가? 지갑이 텅 비어있다. 생각을 더듬어보니 전날 현금카드로 돈을 찾아 시장을 보고 입고나갔던 옷의 주머니에 그냥 넣어둔 것이다. 그 카드는 교통카드로 겸해서 쓰고 있는 카드이다. 그이가 출장갈 때 가끔은 공항에 함께 나가는데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는 싶은데 운전하는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하기는 싫고 그래서 차는 먼저 돌려보내고 나중에 버스를 타고 돌아오곤 한다. 만약에 이렇게 빈 지갑을 가지고 가는 날, 빈 지갑인 줄도 모른 채 차를 먼저 돌려보내고 얼마 후 그이도 떠나고, 그러면 나는 어찌 했을까? 돌아갈 여비, 그리고 빈 지갑. 한국에 돌아오니 빈 지갑도 겁이 안 나고, 빈 통장도 겁이 안 난다. 이렇게 내 나라란 참 좋은 곳이다! 참 편한 곳이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어도, 빈 털털이로 있어도 겁이 안나니 말이다. “만나”는 쌓아둘 수 없음도 알고, “일용할 양식”에 감사할 줄도 알지만, 외국에 있을 때는 내일을 위한 만나를 저장해 두어야 안심이 되었고, 한국행 여비(이사비용, 비행기 표)정도는 여유가 있어야 안심이 되었었다. 비록 한 달 이상을 버틸 만큼의 양식이 있어도 한국행 비행기 표값 정도의 돈이 남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돌아올 계획을 세우고 늘 그날을 기다리며 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앞에 남은 날들에 소용될 물건이나 돈이나 시간이나 그런 것들을 가늠할 땐 언제나 <돌아갈 때까지>가 마지노 선이 되곤 했다. 이것도 인간의 귀소본능의 일종인가…. 오래 전에 그이가 직장 동료들과 함께 지방에 여행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동료 한 사람이 인사불성인 상태로 대취한 채 없어졌다. 이튿날 아침, 그가 나타나서 한 설명이 참 신기하다. 술먹던 자리에서 떠나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 어느만큼 가서 내렸단다. 그리곤 어떤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낯 선 곳의 여관이었다. 그는 다시 여행간 자리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버스를 탄 시간이 회사에서 집에 가는 시간과 똑 같이 걸렸다. 무의식중에 작용한 귀소본능이랄까? 아무리 대취해도, 의식이 없어도 집에는 찾아가는 일이 참 신기하다. 우리의 일상중에 이런 귀소본능이 작용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인생에서도 큰 획을 그으며 귀소본능이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최종 귀착지는 어디일까? 하관식 때마다 듣게되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도 있고, 불교의 귀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근원적인 귀소본능을 생각해보면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에게 돌아가는 것이 최종 귀착지가 될 것이다. 최종 귀착지엔 그냥 이렇게 살다가 저절로 가는 것인가? “여보게 저승갈 때 무얼 가지고 가지?”라는 말처럼 우린 무얼 가지고 돌아가나? 오랜 외국생활을 끝내고 귀국할 때 손때묻고 정든 많은 물건들을 다 남에게 주고, 버리고 왔다. 무얼 잔뜩 가지고 와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냥 돌아온다는 자체 만으로도 좋아서 가지고 있던 물건에는 하나도 욕심이 나지 않았다. 다 버려도 좋았다. 빈 몸으로 와도. 내 나라는 이렇게 좋은 곳이다! 내 나라는 참 편한 곳이다! 하물며 마지막 귀착지인 창조주의 나라는 얼마나 좋을까. 쓰던 물건 다 버리고 가도 아깝지 않은 곳이리라, 그 곳에 가면. 빈 지갑이어도 전혀 걱정이 안 되는 곳이리라, 그 곳은. 내 인생의 마지막 귀착지, 우리의 창조주 나의 하나님이 계신 곳, 나는 그 곳을 향해 어디만큼 와 있는가?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신 그 분, 이승에도 계시고 저승에도 계신 그 분, 낯 선 여행지에도 계시고 익숙한 내 고장에도 계신 그 분, 일터에도 계시고 내 집에도 계신 그 분, 꽉 찬 지갑 속에도 계시고 텅 빈 지갑 속에도 계신 그 분, 나는 그 분이 계신 곳에 이미 들어와 있는가……………
그 곳에 가면 2004년 02월 05일
그 곳에 가면 2004년 02월 05일 작성자 박 정숙 (wind92@empal.com) 충청도 예산읍 안골 마을에 중고등부 수련회를 잘 다녀왔다. 2 박 3 일이 화살처럼 빨리 지나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예당(?) 저수지, 저명한 기타리스트 출신의 멋있는 목사님의 강의, 고려견 "쿤", 수려한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밤에 아이들이 저수지로 놀러 가서 당황했던 일도 있었고, 힘들었던 성경 읽기도 뿌듯한 추억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떠들고 활동하던 아이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또, 지금까지 있었던 수련회 중 가장 많은 학생들이 참여해서 기 뻤다. 서 영수 전도사님께서 관상기도를 가르쳐 주시는데 학생들이 무 척 진지하게 듣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 분은 장애우 목회를 하신다고 한다. 영원한 미자립교회 라고 하셨 다. 그 분 부터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얻으셨다. 힘이 있다면 도와드 리면 좋겠다 싶었다.
나는 특별하다??? 2003년 10월 20일
나는 특별하다??? 2003년 10월 20일 작성자 장혜숙 (.) 병원에 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만원. 접수 창구에서 진료예약을 하려는 사람들의 심각한 표정들을 보게된다. 원하는 날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하고 지정해주는 날짜는 두 세 달 후에나 진찰이 가능하다는 답을 듣는 환자들의 표정이 밝을 리 없다. 각자 개인의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굳이 특진 의사의 진찰을 받지 않아도 되는 환자 한 명이 일반진료로 물러나면 꼭 필요한 위급한 환자 한 명이 특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벌써 4년 째, 퇴행성 질환으로 똑같은 약처방을 받아오는 어머니, 의사와 면담은 단 5분 정도 뿐이다. 녹음기 튼 것처럼 같은 질문과 답변이다. 요즘 어떠세요? 그냥 그래요. 할머니 나이드셔서 그래요. 그럼 안 낫나요? 더 아프지 않으시면 다행이지요. 그 분야에선 우리나라에서 최고라고 손꼽히는 특진의사, 그에게서 오늘도 4년전과 똑같은 문진과 답을 주고받은 후 역시 똑같은 약처방을 받았다. 몇 달전에 예약할 때부터 굳이 그 의사에게 하지 않아도 이미 그 의사가 한 처방으로 똑같이 다른 의사가 해준다고 설명을 드렸으나 어머니는 화를 내신다. 그 의사가 제일 잘 본다고 소문이 났다는 것이다. 제일 용하단다. 나는 불효자인가? 어머님을 최고의 의사에게 모시는 것을 막으려는 못된 딸인가?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노환보다 더 위급한 환자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노환을 소홀히 여겨서도 아니다. 다만, 다른 일반 의사가 대신할 수 있는 환자가 꼭 그 특진의사의 시간을 차지하고 있어서, 정말 특진 의사의 진료가 필요한 위급하고 위독한 한 사람이 애타게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자꾸만 마음이 쓰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특진의사가 어머님께 멀리 다니시기 힘든데 굳이 여기 오시지 말고 동네 가까운 곳에 가셔서 약 처방받으시라고 말을 한 것이다. 약처방은 변함없이 같이 하도록 서류를 만들어 줄테니 어느 병원을 가셔도 다 마찬가지라고 설명하며 어머니를 설득시킨 것이다. 그 의사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자기를 절실히 필요로하고 있는 위급한 환자들에게 시간을 내주고싶은 마음이었을게다. 의사가 그렇게 설명을 하니 어머니도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런데 그 일이 어머니에겐 큰 쇼크였나보다. 정형외과 진료를 마치고 곧바로 이어진 가정의학과 진료에서 그만 혈압이 엄청 올라간 것이다. 병원에 가실 때만해도 기분이 좋으셨었는데..... 병원에 가면 이런 부류의 환자들이 참 많다. 유명의사, 일류의사, 최고의 의사에게만 진료받기를 고집하는 일종의 \"일류병\" 환자들이 정말 많다. 육안으로 다 판정할 순 없지만, 병원출입을 오래 하다보면 대충 그런 일류병 환자들을 감으로 식별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사용하는 물품을 최고로 고집하는 것과는 또 다르지 않는가. 나는 남과 다르다, 나는 특별하다, 나는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한다는 의식을 병원진료에서까지 고집한다면 그들의 일류병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서 기다리는 환자들의 신음소리는 어쩔 것인가? 오늘도 나는 예약을 하지 못해서 낙심하는 환자들의 신음소리 때문에 양보해도 될 형편이면서도 먼저 차지한 진료시간이 마냥 미안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나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을 갖기 위해 늘 기도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2004년 01월 24일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2004년 01월 24일 작성자 장혜숙 (erding@korea.com) 사람들은 태어난 이후로 한없이 많은 모든 것들을 교육 받는다. 그 연령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신분에 맞게 처신하는 법을 배운다. 처한 위치에 따른 인간의 도리, 나이의 변화에 따른 삶의 지혜 이런 것들을 윗대에서 배우기도 하고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익히기도 한다. 사람은 늙어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할 정도로 배움에는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 그 많은 배움 중에서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있다. <부모의 역할>과 <어른의 처신>이 바로 내가 늘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자식의 도리도 배웠고, 손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행할 예의도 배웠는데, 부모 노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른 노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별로 배운 게 없다. 그저 더듬어 나갈 뿐이다. 그래서 늘 시행착오에 후회가 쌓인다. 자식이 부모에게 어찌 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은 못할 망정 그 이론은 알고있다. 그런데 나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는 잘 모른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지켜야 할 도리는 자라면서 계속 어른들에게서 들으며 컸지만, 어른이 되면 아랫사람에게 어떤 도리를 지켜야 하는지는 듣지 못하고 컸다. 그러니 나의 어른 노릇은 오죽할까. 어른 중심의 일방적인 처신일 때가 많을 것이다. 많은 어른들이 어른들의 처신에 대한 교육(피교육도 포함)을 등한시 한다. 그저 아랫사람들에게 아랫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데 바쁠 뿐이다. 몇 살이라고 획을 그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아랫사람 가르치기를 멈추고 자신이 어른교육을 받는데 힘을 써야 할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기를 바람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아직 만 나이의 생일이 남아있지만, 며칠 지나면 그마저 꽉 차서 양력으로나 음력으로나 만으로나 어쨌든 한 살을 확실히 더 먹는데……………… 세상에 어른 만 못한 아이는 용서가 되지만, 아이만도 못한 어른은 용서 받기 어렵다. 어떤 사람이 제대로 된 어른일까………? 나이 한 살 더 먹는 즈음의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어떡하면 더 젊어 보일까가 아니라, 어떡하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될까, 이것이 더 중요한 화두이다.
노년엔 어디에서 살을까.......? 2003년 01월 01일
노년엔 어디에서 살을까.......?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장혜숙 오월은 아직도 반이나 남았는데 오늘 다섯번째의 청첩장을 들고 결혼식장을 찾아갔다. 남은 날들 동안 또 몇장의 청첩장이 날아들지......... 예식장에서 십여명의 동창생들을 만났다. 우리 동창생들이 만나면 이제 더이상 애들 공부가 어떻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손자 손녀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나이가 되다니 내가 벌써! 나중에 좀 더 늙으면 어디서 살지,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도시의 살인적인 집값에 짓눌려 사는 우리들은 서울 집 팔아 시골로 이사가서 남은 돈 맘놓고 쓰겠다는 이야기도 가끔 한다. 그런데 살던 곳을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무얼 하고 살지, 이런 걱정도 한다. 독일에 있을 때 가까이 지내던 부인과도 노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부인은 "푸른 초원 위의 그림같은 집"에서 살고있다. 참 아름다운 전원생활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은퇴후엔 도심 한가운데서 살고싶다고 했다. 아이가 어려서는 자연 속에서 커야하기 때문에 시골에서 살았는데 이젠 자녀 걱정없이 자기 부부들 편한 대로만 결정하면 된단다. 직장생활하느라, 아이들 키우느라, 시골이라, 그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던 문화생활을 마음껏 하고싶단다. 저녁에 하는 콘서트도 가고, 영화구경도 자주 가고, 끝나면 밤늦게까지 카페에서 차마시며 이야기도 하고, 아프면 가까운 큰 병원에 후딱 쫓아가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서 외롭지 않게 살고싶단다. 방문객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좋단다. 사실 나는 그 집을 방문하기 위해 뜸한 배차 시간의 버스에 기차에 다시 택시를 이용해 찾아간 적이 있다. 그 집에 머무른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지만 오가고 하루 해를 다 보냈다. 이 독일 부인의 생각은, 젊어서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도시에 살고 늙어서는 전원생활을 꿈꾸는 우리네와 전혀 다른 생각이다. 그 집 아이들은 정말 천국과도 같은 자연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큰 도시에서만 하는 유명 콘서트 한번 보는 것도 벼르고 별러야했고, 끝나면 호텔에서 묵고 돌아와야하는 지경이었으니, 늙고 은퇴한 후의 한가한 시간들은 마음껏 문화생활을 즐기고싶다는 뜻도 이해가 간다. 도시 생활에 찌든 나는 늙어서 어디에서 살까? 시간많은 노년에 문화생활도 즐기고, 필수적으로 찾게될 병원도 가까이 있고, 친구들(내 나이만큼 늙은)이 힘들이지 않고 쉽게 오갈 수 있는 곳, 그런 곳은 어디일까.........? 무엇보다도, 청파교회를 다닐 수 없는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을까? 젊어서 어떤 목적으로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른 노년의 정착생활인데, 이 문제를 쉽게 결정할 수 있을까? "여호와 이레"
봄농사 2005년 04월 22일
봄농사 2005년 04월 22일 작성자 정숙 보고 자란 것이 농사인지라 나도 모르게 농사를 시작했다.-그래서 일본 가부키배우들이 대를 이어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2003년 11 월에 이사온 지금 집에는 화단이 있다. 물론 주인댁 전용이다. 그러나, 난 주인댁의 허락을 얻어 화단에 부추씨와 상추씨를 뿌렸다. 유기농 채소를 저렴하게 먹기 위해서다. 부추는 한 번 심으면 겨울을 넘기고도 계속 난다고 한다.간에 무척 좋다고 하고, 난 가끔 출출할 때 과자대신 부추전을 부쳐먹는다. 건강을 위해서. 2 층에 주인댁, 1 층에 우리를 포함해 두 집이 산다. 모두 함께 먹기 위해 넉넉히 심었다. 상추는 시차를 두어 한 번 더 뿌리려고 한다. 상추는 자라서 대가 올라가면 못 먹기 때문이다. 난 심지어 옆집에 직접 가서 부추씨를 심었다. 애초에는 옆집 할아버지께 씨만 드리기로 했는데 얼떨결에 옆 집 아이와 같이 심게 되었다. 아줌마가 우리보고 심으라고 하셔서. ^^;; 5 월이 되면 맨드라미를 심을 것이다. 내 화분과 주인댁 화단에. 다른 꽃인 줄 알고 샀지만. 찹쌀이 있으면 꽃전을 부쳐먹으면 맛있을 텐데..... 어렸을 때 여러 번 먹은 기억이 남아 있다. 요즘 감기로 드러누워 지내서 이렇게 가끔 소일을 했다.이웃분들이 내게 이럴 시간이 있냐고 물으신다. 없다. 그러니 갑갑한 노릇이다. 어머님이 보내주신 보약을 열심히 먹고 있다. 맛있게 먹게 해달라고 매 번 기도드리면서.토하지 않도록. 정말 죄송하다. 건강이 안 좋아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신경 쓰시게 해서. 봄날은 간다.
부드러움에 대하여 2003년 01월 01일
부드러움에 대하여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온유지향 (21stcentury@hanmir.com) 내가 아는 한 성경 속에서 예수님은 부드럽고 온유하신 분으로 보였다. 단지, 성전 앞에서 가게를 차려 놓고 있는 것에 대하여 격분한 것을 제외하고 나면 극히 부드러우시고 온유하신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도 패기와 용감함이나 혹은 직선적인 것 혹은 박진감 넘치는 것 보다는 온순하면서 은근히 끈기있게 그리고 부드럽게 추진하는 것이 무리없어 보인다. 대부분의 경우 음식을 먹을 때에도 우리는 등심, 혹은 꽃등심, 안창살 등의 고기부위를 찾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보여지며, 개인적으로 마른 오징어 씹는 것을 싫어하며 꼭히 마른 오징어를 먹어야 할 경우에는 구워서, 끓는 물에 데친 다음에야 고추장 혹은 마요네즈 등에 찍어 먹는다. 또 조금 다른 면을 보면, 오늘날 각 기업체나 단체의 상징을 표하는 로고에도 직선 보다는 곡선이 강조되고, 특히 디자인 등에는 직선은 금물이다. 이와 같은 세태의 흐름은 물론 우리가 수용하는 인간 행태에도 직선보다는 곡선이 더 긍정적인 측면이 많고 강함 보다는 부드러움이 더 요구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남자가 너무 여성화되는 것이야 다소 문제가 있겠지만, 조금은 부드러울 필요가 있으리라 여겨지며, 하물며 여성이야 더욱이 그러한 면이 돋보이지 않을까 싶네요. 작은 일에 화내고, 토라지고, 다시는 안볼 듯 해서야 되겠습니까? 세상 사는 일이 뭐 그리 엄청난 일이야 있을라구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봄직 않습니까?
부활의 기쁨 2004년 04월 10일
부활의 기쁨 2004년 04월 10일 작성자 권혁순 정말 오랫만에 이 곳에 글을 쓰게 됩니다. 미국에 있을 때는 자주 글을 남겼는데, 한국에 돌아 온 이후로는 매일 홈페이지에 들어오면서도 글을 남기지 않게 됩니다. 그저 바쁘다는 핑계로.... 오늘 드디어 글을 남기고 싶다는 충동이 절정에 달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한가한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몇 시간 후에 방송국에서 제 수업을 녹화하러 온다는데, 수업 준비도 아직 안되어서 마음은 바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생겼습니다. 교육과정평가원에 있는 후배의 부탁으로 초등학교 과학 실험을 설명하는 동영상 작업을 몇 달 동안하고 있습니다. 지난 달에는 몇 시간 동안 녹화 작업도 하여 제 얼굴이 인터넷을 통해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영상에 자막을 넣는 작업을 지난 주중에 하다가 드디어 그저께 마무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15개나 되는 동영상을 일일이 다 보면서 몇 분 몇초 위치에 어떤 자막이 들어가야 하는가를 써서 주어야 했습니다. 모니터에 아래 한글 파일 열어 놓고, 그 위에 동영상 화면 띄우고 시간 나오는 것 보면서 적당한 설명 자막 쓰고 하는 작업을 몇 시간 동안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컴퓨터가 멈추었습니다. 물론 종종 있는 일이지요. 능력이 딸리는 컴퓨터에게 너무나 많은 일을 시키니 얘도 힘들어하죠. 늘상 하듯이 재시동을 했죠. 아래한글은 불시에 작업이 멈추어도 새로 시작하면 조금 전에 임시로 저장했던 화일이 열리게 되어 있는 편리한 프로그램입니다. 컴퓨터가 다운되는 일을 몇 번 겪은 사람들은 컴퓨터가 알아서 수시로 저장을 하도록 옵션을 지정하기도 하고, 본인도 자주 저장을 합니다. 그래서 평소처럼 그러려니 하고 아래한글을 시작했는데, 임시 저장 화일이 있다는 메세지가 뜨지 않았습니다. 탐색기로 임시 저장 화일을 찾아도 나오지 않고요. 다행히 5분 전에 저장된 화일이 있어서 열었는데, 화일 형식이 잘못되었다는 메세지만 뜨고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럴수가, 그 때의 시간이 새벽 1시 30분. 몇 시간 동안 작업한 것을 열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탐색기에는 화일 이름이며 크기가 남아 있는데 말입니다. 다른 컴퓨터에서 열어 보려고 화일을 복사하려 했더니, 그것 마져도 안되고.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리 저리 제가 아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아도 안되어서,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방법이 있을까하고요. 그러나, 복구 방법은 없더군요. 화일 복구를 전문으로 하는 곳에서 10만원을 내면 화일을 복구해 준다고 하더군요. 복구가 안되면 돈을 받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화일을 복사할 수도 없으니 그 곳에 보낼 수도 없고, 하드 디스크를 통째로 보내는 수밖에 없더군요. 이리 저리 고민하다 새벽 4시가 되어 그냥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컴퓨터도 좀 쉬고 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고요. 그러나 다음날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약속한 날짜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것 말고도 다른 일로 또 밤을 새야 할 판인데, 이 작업을 또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제 일을 도와 주는 학생에게 부탁하기로 하고 그 학생에게 처음에 작업하던 화일을 주려고 했습니다. 자료실에 화일을 올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잘 올라가지 않아서 중단했는데, 자료실에 보니 그 화일이 올라가 있더군요. 그런데, 화일 이름을 보니 자료를 잘못 올렸더라고요. 원래 올리려던 화일은 \'자막1.hwp\'인데, 실수로 \'자막2.hwp\'를 올렸어요. 자막1.hwp는 전날 작업한 화일이고, 자막2.hwp가 새로 하루 종일 작업했는데 저를 속 상하게 했던 문제의 화일입니다. 문제의 화일이라 자료실에 업로드하는데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나 하여 자료실에 업로드 된 화일을 열어 보았는데, 신기하게도 열리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도 열어 볼 수 없었던 화일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정말 기쁩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이 곳에 글을 남깁니다. 2천년전 몇 몇 사람들이 경험한 기쁨은 이것보다 더한 것이었겠죠? 이제 방송 녹화할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실험실로 가야합니다. 오후에는 열심히 강의하고, 밤 늦게 서울로 돌아갑니다. 오늘 성가대 마지막 연습이 있을텐데, 함께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지휘자님께 해야겠군요. 내일은 더 큰 부활의 기쁨이 가슴에 다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빼앗긴 언약궤 2004년 01월 18일
빼앗긴 언약궤 2004년 01월 18일 작성자 윤석철 (ysc@sooa.com) 빼앗긴 언약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한 이스라엘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싸움에서 패하여 3만 명의 보병이 전사하고 엘리 대제사장의 두 아들도 죽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었다(사무엘상 1~11).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느 전쟁에서도 늘 승리한다고 굳게 믿었던 이스라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까지 언약궤를 앞세우고 숱한 이방민족을 쳐 복속 시키며 위엄을 떨치던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이 왜 블레셋과의 싸움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장에 모셔오기까지 했는데도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을까? 더구나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를 적의 손에 빼앗기는 일이 어찌 생길 수 있었을까? 언약궤를 전장에 모셔오는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확인하려 하였다.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더 이스라엘을 위해 역사하시어 적군 블레셋을 무찌르실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궤로 상징되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의 내용은 잊고 그 형상에만 매달렸다. 이스라엘이 최후로 믿고 의지하던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가 침묵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침묵하셨다. 언약궤를 적에게 빼앗기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훗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본다. 줄에 묶이고 갈고리에 찍히어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을 본다.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 생활을 본다. 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본다. 같은 일을 되풀이 하는 유대인의 완악함을 본다. 서울의 밤 하늘을 아름답게 밝히는 빨간 불빛의 십자가들을 본다. 형해화(形骸化)한 이 시대의 “믿는 일”을 본다. 제의(祭儀)와 조직(組織)과 형식(形式)으로 굳어져가고 있는 이 세대의 교회를 본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마음이 굳은 세대를 본다. 우리나라의 밤, 특히 서울을 비롯한 큰 도시의 밤 풍경을 바라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큰 감명(!)을 받게 된다. 골목 골목 한 건물 건너마다 이 교단 저 교단의 서로 다른 교회들이 빨간 불빛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온 밤을 비추기 때문이다. 그 교회들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이 있고, 거기에 어김 없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책”이 펼쳐져 있고 전깃불 촛대로 밤새 불을 밝힌다. 우리는 그 곳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은연중 여기며 삼가 옷깃을 여미고 경건의 눈으로 그 강단을 바라본다. 가슴으로 하나님을 믿고, 가슴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가슴으로 성령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한 세대가 아니라는 것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겪는 어려움중의 하나이다. 신앙교리와 신학적 교의를 모두 통달하지는 못한다 해도 우리 가슴의 믿음을 우리의 머리를 통해 지적(知的)으로 확인하여야 안심이 되는 세대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리라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확인하고 안심한 그 믿음도 우리의 삶을 통해 구체화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고, 그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는 현실을 바라보는 마음은 마지막 나뭇잎까지 다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한 겨울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큼 스산하다. 정의의 이름으로, 십자군의 이름으로 수백만 수천만 명의 사람이 피 흘리고 고통 받는 전쟁의 소식을 우리는 안방이나 거실에서 편안한 자세로 영화 감상하듯 보고 듣는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못 배우고 힘 없고 탈출구도 없이 절망하는 사람들의 애기를 매일 듣고 본다. 그러나 이 시대가 겪는 아픔이 내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에 위안을 받으며 잠자리에 든다. 아직 나에게는 저런 비참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 과감히 일어나 주님 뜻에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한다. 교회를 언약궤처럼 앞세우고, 이 시대의 우리 신앙을 앞세우고 블레셋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처럼 행군가를 크게 부르며 전장에 나아가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5, 6, 7, 8/ 2003-01-01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5, 6, 7, 8/ 2003-01-01 5. 구레네 사람 시몬 (Simon of Cyrene)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 4지점에서 남쪽으로 10m 정도 가다가 서쪽으로 꺾이면서 치즈 골짜기를 벗어나 골고다를 향해 언덕 길이 시작되는 곳.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던 곳(마27:32)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주후 1895년 천주교에 의해 지어졌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누 23:26) 6은 성베로니카 여인이 물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는 곳이다. 제 5지점에서 골고다를 향한 언덕으로 약 3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수녀원이다. 성베로니카(St. Veronica)가 예수님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드렸는데 돌려 받은 손수건에 예수의 초상이 새겨졌다는 전승에 따라 1882년에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7은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진 곳이다. 천장이 덮여 있는 상가 골목을 오르다 보면 역시 좁은 길이 좌 우측으로 나 있는 십자로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가면 다마스커스 성문이 나오고, 좌측으로 가면 골고다 언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75년 천주교에서 구입하여 학교 (School of the Arts and Crafts) 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곳은 예수 당시 성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cf 히 13:12 ~ 13) 8 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고 말씀하신 곳. 제 7지점의 바로 서쪽에 있는 희랍 정교회이다. 이 지점의 표는 라틴 십자가에 희랍말(NIKA) 이 기록된 돌판이다. 검게 그을리고 더렵혀져 있어서 주의 깊게 찾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울며 따라오는 여인들을 예수께서 위로하신 곳.
아들을 훈련소에 보내고... 2003년 01월 01일
아들을 훈련소에 보내고...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장혜숙 마치 좋은 곳에 드라이브하러 가듯, 호수를 끼고 경춘가도를 달려 청평을 지나, 수목원 아침고요를 지나, 그렇게 가다가 현리에 있는 맹호부대 훈련소에 갔지요.오후 1시에 입소하는 것이라 12시 반쯤에 바로 문앞에서 서성이며 들어가지 않고 아쉬움을 나누고 있는데, 정문에 있는 사병이 갑자기 큰소리로 빨리 들어가라고 외치는 거에요. 늦게 들어가면 자기 몸에 맞는 옷 받아입기가 어렵다고.그 소리듣고 그냥 곧바로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좀 안스러워 보이더군요.아들과 나는 새벽기도 시간에 계속 만나고 있으리라고 맹세하며 헤어졌답니다.나는 아들이 새벽에 기도하는 이 엄마를 기억하고 힘을 얻기보다는,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기를 더 바라고 있습니다. 그 애가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3년의 훈련이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니까요.어머님은 벌써 며칠전부처 애간장을 태우셨지요.나는 그런 어머니를 위로하느라고 다른 집 아들들도 다 천하에 제일 귀한 자식이고, 우리 애 만큼 안 귀한 자식이 하나도 없이 모두다 귀한 자식들이라고 했었고요.휴전상태인 이 땅에 태어난 사내아이로서 겪어야하는 통과의례이니 잘 마치고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집으로 돌아와 욕실에서 손을 씻으며 그 아이가 쓰던 쉐이빙 폼, 아프터 쉐이브, 데오도랑, 장 폴 고띠에 향수병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 뜨뜻한 물로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나간 아들을 벌써부터 그리워합니다. 헤어진지 겨우 세 시간도 안됐는데....그 아이가 한 동안은 그런 목욕의 여유를 즐길 수 없겟지요.어쩌면 향수까지 챙겨서 사용하던 그 아이는 이 어려운 사회에서 쁘띠 브루주아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드는군요.거친 음식을 먹고, 힘겨운 육체적 훈련을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대접받지 못하며, 썰렁하니 급하게 몸을 씻고, 딱딱한 잠자리에서 하루를 마감할 때, 이 땅의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한껏 키워가지고 나오는 훈련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그 아이가 엄마를 위로한 말은, 그동안 여러 환경변화를 겪으며 지나왔기 때문에 저는 어떤 환경 속에 내동댕이쳐놔도 다 견디고 지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 말이 가슴 속에서 가만히 되살아납니다. 그동안 정말 낯선 환경 속에 홀로 던져지며 겪었던 시절이 고달프기도 했었겠구나............낯 선 나라, 낯 선 사람들, 낯 선 생활 속에서 마치 전투하듯 긴장상태로 이어진 그 아이의 지난 날들이었으니까요.아들은 이제 그동안 해오던 수업 활동의 한 부분처럼 또 다른 활동학습을 하러 간 거라고 생각하며 지내렵니다.고등학교 때 여러가지의 특별활동이 있었지요.지도읽기 교육시간에 벌판에서 헤매던 날 지독한 독감에 걸리기도 했었고, 며칠 째 계속 세찬 비와 우박이 퍼붓는 악천후 속에서 제 몸무게만큼 나가는 배낭 메고 지도와 나침반으로 길을 찾으며 오스트리아 산 속을 헤매던 트레킹,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사태까지 생기는데도 강행한 터키에서의 일주일간 카누훈련, 비록 인공암벽이긴 하지만 매주 계속되던 암벽등반 훈련. 마운틴 바이킹. 그 모든 활동에서 한 번도 낙오하지 않고 버틴 아들을 믿고 이번 군사훈련도 무사히 마치리라고 마음을 달랩니다.아들이 벗어놓은 잠옷에 아직 체온이 남아있는데 벌써부터 그리워하는 엄마의 마음입니다.
여긴 아주아주 덥지만 여름이 아니랍니다...^^ 2003년 01월 01일
여긴 아주아주 덥지만 여름이 아니랍니다...^^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나몽이 (fredyk79@hotmail.com) 안녕하세요. 인사 전합니다. 먼저, 목사님께 안부인사 드리구요... 많은 어르신들께도...그리고 청년들에게도 요~ 필리핀에 온지도 어느덧 3주가 다 되었구요. 피부는 아주아주 까맣게 탔답니 다. 아무리 탔어도 여기서는 백인인가봐요~ ^^ 아직도 어딜가나 이곳사람들의 시 선이 느껴지네요. 하지만 따갑지는 않아요. 어찌나 친절하고 좋은지... 지난번에 한번 기회가 있어서 글을 한 번 썼었는데...안남아 있네요? 인터넷 사 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소식전하기가 쉽지가 않답니다. 그리고 좀 바쁘기도 하구요. 무엇보다. 저희 부모님도 그러실테고...많은 분들이 걱정하실텐데. 여기는 필리핀에서 1시간반정도 떨어져있는....(수원쯤) 곳이구요. UPLB (University of Phillipine Los Banos)거든요. 그러니까 필리핀 국립대 로스빠뇨 스 분교? 그정도죠... 마닐라에 비하면 물가도 많이 싸구요. 먹는 음식도 입맛에 맞구요. 벌써 여러 사 람들 친구 사귀어서 심심하지 않답니다. 게다가 오늘은 함께 일하는 Forest Ranger아저씨네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갔었는 데 나름대로 은혜받고 왔답니다. ^^ 아저씨네 두 딸이 17,18살 대학생인데 이곳 에선 거의 수재로 통한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교회에서 Worsip에 적극적이고 오 늘 교회에 함께 가서... 우리가 늘 부르는 복으성가를 영어로 불렀더니...어떻 게 아냐고 무지무지 반가워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그 친구들과 한층 더 큰 fellowship을 갖게되었답니다. 게다가 그 두친구는 고등학교를 인터네셔널 학교 를 다녀서 영어 발음도 아주 좋구... 사실 보통 사람들은 필리피노 발음이 있어 서 쬐끔 듣기가 힘들거든요. 아무튼... 생활속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ㅁ낳은 공부가 되고 있습니 다. 더욱이 그 친구들과는 같은 신앙인의 화두를 가지고 얘기할수도 있구... 언 제 시간 되면 함께 연주도 하고 노래도 하자고 제안하네요. 앗... 가야겠다. 시간이 없어서 여기까지만 소식 전합니다. 얼른 프로젝트 일끝내고 영어공부 많이 해야죠. 그리고 Mission도 있고해서... 열심히 살고 가능한한 족족 연락드리겟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겐 전화비 비싸서 전화 자주 못하니까... 누나가 보면... 소식 전해주길!! 모두들... bless you! bye~!!!
여열 2003년 01월 01일
여열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장혜숙 압력솥에 밥을 지었습니다.끓기 시작하여 2분 후에 불을 끕니다. 불을 끈 후에도 솥의 뜨거운 열기로 얼마간 더 끓다가 뜸까지 들여집니다.전기 프라이팬에 전을 지집니다. 마지막 재료를 프라이팬에 펼쳐놓고 전원을 끕니다. 그래도 훌륭하게 노릇노릇 지져집니다.다리미질을 합니다. 코드를 뽑은 후에 손수건 대여섯 장을 그냥 다립니다. 그래도 남은 열이 아까워 안 다려도 그만인 앞치마까지 문질러봅니다.어젠 수요일, 기도의 밤이었지요.감사하고 속죄하고 구하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오늘 하루종일 어제 기도할 때 느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곤 하더군요.압력솥에 밥이 끓기 시작하자 불을 끄면서 갑자기 아!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뜨거운 열이 남아있어 불을 끈 후에도 뜸이 드는구나!바로 그겁니다. 교회에 가는 이유가.교회에 다녀온 후에는 교회에서 가졌던 감정들이 교회에서 돌아온 후로도 한참동안 남아있습니다. 그 열기가 식을 때쯤엔 다시 교회에 가는 날이 됩니다. 물론 건물로서의 교회만 뜻하는 것은 아니지요. 건물도 포함된 교회의 모든 의미를 다 뜻합니다.꿈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잠깐 다녀간 막내 아들이 남기고 간 말 한마디가 자주 생각났었는데, 이젠 그 애에게 오늘 느낀 <교회에 가야하는 이유>를 메일로 보내야겟습니다.그애가 남기고 간 말은 목사님의 설교말씀 중에 예로 들었던 활활타는 모닥불에서 혼자 떨어져나온 장작개비에 관한 이야기랍니다."엄마, 혼자서는 타오르지 못하고 꺼져버린다면, 무더기 속에서 다른 것에 의지해 계속 타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오늘은 아들에게 답을 보냅니다."아들아, 교회에 갔다오면 교회에서 느꼈던 뜨거움이 얼마간 더 남아있는 것이 엄마는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런데 불을 끄면 <얼마간>일 뿐, 결국은 싸늘해지니까, 엄마는 자꾸만 교회에 간다."너무 부족한 답이죠......사족.아이들 다 독립시키고도 외로워하지 않고 씩씩하게 잘 살려고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는데, 짧은 글을 써놓고 다시 읽으며 제 자신도 깜짝 놀랐답니다. 아들이 함께 있다간 그 기간이 2주일이 넘는데............ 꿈처럼 바람처럼 다녀갔다고 썼네요. 자제할 수 없는 어미의 본능입니다.
외로운 길 2003년 01월 01일
외로운 길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박 재 실 (21stcentury@hanmir.com) 우리 담임목사님께서도 수차 설교를 통하여 말씀드린 바 있지만, 이런 글이 있어 소개드립니다. <갈매기의 꿈 Jonathan Livingston Seagull> 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다. 1970년대 초반 리처드 바크(Richard Bach)라는 작가가 쓴 이 조그마한 책자는 그 당시 베스트 셀러였다. 이 책의 주인공 조나단은 보통의 갈매기와 다른 갈매기였다. 다른 갈매기는 눈만 뜨면 고작 어선 뒤를 따라다니면서 생선이나 주워 먹는 것으로 나날을 보내는데, 조나단만은 이것을 당연한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더 높이. 더 빨리. 더 아름답게 나는 것, '비상'의 신비스런 경지를 탐구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쏟는다. 조나단의 아버지, 어머니는 아들이 걱정스러워 제발 '다른 갈매기와 같이' 되어, 겨울이 닥치기 전에 어서 '먹는 것'에 열중할 것이지, '나는 것' 같은 허황한 것에 신경쓰지 말 것을 권유하고 애원한다. 이왕 공부를 하려겨든 좀 더 실제적인 것,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먹이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연구하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웅비를 목적으로 하는 자기의 '실험'을 계속한 조나단은 마침내 갈매기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반 갈매기는 상상할 수 없는 경지를 터득하는 체험을 한다. 그리고는 이 신나는 '돌출(breakthrough)', 참다운 삶의 의미, 자유, 새로운 발견을 자기 부모, 친구와 나누려고 한다. 그러나 기대와는 전혀 달리, 결국 그는 갈매기 사회의 '위엄과 전통'을 파괴하고 당치도 않게 이상한 소리를 하는 못된 갈매기라는 판결을 받고 갈매기 집단에서 추방되고 만다. 그는 한없이 슬펐다. 그 슬픔은 그저 고독하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동료가 이 놀라운 비상의 기쁨을 거절했다는 것, 눈을 뜨고 보기를 거부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그는 홀로 계속적인 추구의 길을 떠나 점점 높은 차원의 실제, 진정한 의미의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다. ----원문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오강남 저 62-63 페이지, 현암사>----- 이와 같은 것이 믿음 생활이라는 것 같아서 소개드립니다. 성경도 때로는 우상이 될 수 있다는군요-만사 제쳐 두고 성경 위주로 믿음생활이 되는 경우-. 아뭏든 이 책을 사서 보시면 더욱 도움이 되고 다양한 각도에서 믿음생활을 비춰주는 책이 될 것 같아 권해드립니다. 많이 읽으세요.
우리가 꽃들에게 지은 죄 2005년 04월 02일
우리가 꽃들에게 지은 죄 2005년 04월 02일 작성자 장혜숙 사진 자료실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볼 것이 많아서 봄이라지요?" 아주 오래 전에, 지금 보다는 훨씬 한가하던 시절에 썼던 수필이 그렇게 시작되는데........ 파일을 뒤져보니~ 있다! 아직 봄의 한가운데는 아니지만, 매일 한 시간 씩만 더 자는 것이 '바램'까지 되어버린 지금, 옛날의 봄 노래를 다시 읽어본다. 수필 <우리가 꽃들에게 지은 죄> 볼 것이 많아서 <봄>이라고 했다던가. 봄은 사람들의 입과 입 사이를 징검징검 건너뛰면서 손에 잡히지도 않은 채 훌쩍 여름으로 도망갈텐데. 색깔로 오는 봄, 소리로 오는 봄, 냄새로 오는 봄, 내 마음 한 곳을 깔짝깔짝 건드리며 아는 체 해달라고 귀찮게 구는 봄이다. 그래, 나 너 봄이 오는 저 먼발치에서부터 너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너의 걸음을 마음속으로 재촉하며 기다리기까지 했지. 그런데 잠시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저만큼 느릿느릿 다가오던 네가 갑자기 내 안에까지 확 들어와 버렸구나. 이젠 봄, 너가 내 안에 있는 거니? 꼭꼭 챙겨서 널 가둬둬야겠다. 넌 언제나 그랬잖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슬그머니 없어져버렸지. 아, 봄 소리가 왜 드높은지 오늘 갑자기 생각이 났다. 흘러내린 바지춤처럼 쭈그러져 그 안의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자루, 윗목에 버티고 있던 그 절박한 봄날의 양식 자루가 안 보이기 때문이다. 봄의 통과의례, 그 헐렁한 쌀자루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눈에 안 띠게 되었을까. 그래서 우리들은 겁 없이 봄 노래를 부른다. 겁없이. 대지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에 눈앞이 아른아른 하고, 횟배앓는 촌부의 눈앞이 현기증에 아른아른하고, 맨발로 들판을 내닫는 아이들의 눈이 노오란 꽃다지에 아른아른하고, 내 유년의 봄은 그렇게 아른아른한 모습으로 왔었다. 아지랑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이고 아른아른하게. 이미 계절 깊숙이 들어앉은 봄을 노래하며 샛노란 수선화가 거리 곳곳에서 활짝 웃고있다. 개나리꽃은 진한 유화물감을 붓으로 찍은 듯하고, 수선화는 수채화 물감을 정성스레 펴 바른 듯 청초하다. 수선화가 시들어갈 무렵부터는 튤립이 핀다. 튤립이 함초롬히 오므리고 있던 꽃잎을 활짝 열어 젖힐 무렵이면 장미가 피기 시작하고… 내 마음도 그런 순서를 밟으려나? 온 마당이 환한 꽃등을 밝히면 내 마음도 환히 피어나려나… 봄은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한데 나는 꽃 몇 송이를 하나 씩 자세히 들여다보며 가슴이 서서히 굳어짐을 느낀다. 왜일까? 꽃은 앞 다투며 피어나고 있는데, 곁으로 지나가는 봄을 내 안에 꽉 잡아두었는데, 왜 내 마음은 오히려 굳은살처럼 단단해지는 걸까? 문득 꽃이 자연스럽지 못함을 느낀 때문이다. 한 송이 한 송이가 너무 선명하여 디지털 화면에 클로즈업된 사진같이 느껴진다. 윤곽이 또렷한 꽃 송이가 마치 실물과 똑같이 만든 인조조화처럼 느껴진다. 기억을 더듬어본다. 언제부터였더라... 반짝종이로 턱을 받혀준 거베라, 종이접기로 접어놓은 듯한 백합, 미소를 잃은 장미... 그랬다. 비록 생화이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생화들이 내겐 마치 조화처럼 생명을 잃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꽃들은 틀 속에 갇힌 정물(靜物)이 되어있었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실크로 섬세하게 만든 조화들, 투명 플라스틱으로 물방울까지 붙여둔 생화와 똑같은 조화들을 많이 봐왔음이다. 수반 속에 갇힌 생화의 정형적인 꽃꽂이에 익숙해졌음이다. 백합, 장미, 라벤더, 민트 향이 늘 생활 주변에 함께 했음이다. 온실에서 한 겨울에 피는 봄 꽃들, 냉장고 속에서 여름을 나고 가을부터 잎이 빨개지는 포인세티아를 예사로 보아왔음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온실 속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죽은 듯 피어있는 꽃들에 익숙해졌음이다. 아, 풋풋한 풀내음 풍기는 들판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야생화를 잊고 있었음이다. 오늘 내가 생화같은 조화에 감탄하고 조화같은 생화에 가슴이 굳어짐은, 조화를 꾸밈에 태연하듯 생화를 함부로함에 태연한 때문이다. 꽃은 꽃 하나로 존재할 수 없다. 바람이 꽃이 살아있음을 알려줘야 하고, 향기가 꽃이 살아있음을 알려줘야 하고, 생명은 생명끼리 통하는 이치를 풀벌레들이 알려줘야만 꽃은 내 가슴 속에도 생명의 온기를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다. 꽃은 제철 바람에 그 꽃잎이 나부낄 때 우리의 단단한 가슴을 보드랍게 풀어준다. 보랏빛 아이리스, 잉크빛 패랭이 꽃은 그 차가운 색으로도 우리에게 따뜻함을 전해주고, 주황색의 튤립, 샛노랑의 후리지아는 그 따뜻한 색으로도 우리에게 선선한 청량감을 전해줄 수 있다. 꽃은 정물이기를 거부한다. 바람속에 한들거리며 벌나비와 달콤한 밀어를 나누기를 갈망한다. 봄비에 차가와진 내 입술이 따뜻함을 그리워하듯, 꽃들도 그렇게 갈망하는 것이 있다. 꽃을 품은 봄, 봄을 품은 꽃, 꽃을 품은 내 마음, 내 마음을 품은 봄. 봄을 한 자락 끌어다 덮고 나른한 몸을 누인다.
작은 불씨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이 2005년 03월 02일
작은 불씨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이 2005년 03월 02일 작성자 박범희 어제는 이화여고 선생님들 몇분과 함께 계원예고 음악회에 갔습니다. 콧대높은(?) 제가 존경하는 몇 안되는 분 중 하나인 심치선 교장님 정년퇴임 음악회였습니다. 정식 명칭은 '심치선 교장 선생님 교직 52주년 기념 음악회'로 명칭에는 퇴임이란 말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아마 기념음악회와 퇴임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아서였을까요? 심치선 교장님은 1995년 2월 이화여고 교장직을 정년퇴임하시고, 1996년부터 2005년 2월까지 만 9년을 초빙교장으로 계원예고에 계신 것이었지요. 저도 자세한 연세는 모르지만 대략 76세 정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오래 교장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분과 6년동안 함께 한 저의 생각은, 건강만 허락하신다면 더 하셔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정도입니다. 제가 참 닮고싶은 분입니다. 원래 발이 넓은 분이라 많은 손님들이 오셨기에 눈도장이나 제대로 찍을 수 있을까 염려했지만, 역시 마음씀씀이가 보통인 분은 아니신지라 그 많은 사람들 일일이 인사하시며, '박범희도 이리와 사진찍자'는 말씀에 약간은 놀라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물론 우리 일행들을 일일이 부르시며 그 과정에서 하신 말씀이었지요. 언제나 박선생, 박선생 하던 분이었는데. 박범희 하시다니. 우리 일행 중에 내가 막내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친근하게 부르신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런 말이 있나요? "마누라가 좋으면 처가집 개도 좋아보인다" 없음 말고요. 여하튼 교장님을 좋아해서인지, 그날따라 행사장 곳곳에서 안내를 맡은 선생님들과 용인아저씨들, 학생들 모두 천사처럼 보였어요. 행사장에서 본 몇 가지 기억나는 일들 하나. 행사장 입구에 늘어서있던 화환들 중 하나-이화여고 기능직 사원 일동. 이화여고 용인 아저씨, 아주머니들께서 보내주신 것이었습니. 심교장님이 가장 힘들게 일하시는 분들에게 많은 정을 주셨음을 바로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이었습니다. 10여년 전 제가 이화에 근무할 때도 용인아저씨들을 2번에 걸쳐 제주도 여행을 보내주셨던 일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항상 존대말로 따뜻하게 대하시고. 게다가 그분 이후의 교장이 그분들을 종부리듯(?) 하셨으니, 너무 대조되어서 더욱 기억에 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둘. 음악회를 지휘한 김성용 선생님의 교지에 쓴 글 중 일부 <하나님의 진리등대> 심치선 교장선생님께 드립니다. 심치선 교장 선생님의 교직 52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찬송가 '하나님의 진리등대'를 오케스트라곡으로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모두의 등불이 되어 주셨습니다. 등대는 어둔 밤에 빛나는 빛을 내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하지만 선생님께서 걸으신 길은 낮과 같은 때에는 등대처럼 외롭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교직 52년의 모습을 생각하며 기념하고자 합니다. 어느 등대보다 힘차고 더욱 찬란한 불빛을 생각하면서... 제가 보기에 글이 좀 엉성하기는 하였지만 교장 선생님의 외로움까지 걱정해주는 따뜻한 마음이 좋았습니다. 한곡 한곡 마칠때마다 환한 웃음으로 청중에게 인사하는 참 착해보이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이외에도 교장님을 만날 때마다 '사랑합니다'를 밝게 외치는 예쁜 학생들, 교지에 실린 선생님들의 글에 담긴 아쉬움. - "이제 교직에 있는 동안, 선생님의 큰 마음에서 나온 몸짓과 생각을 닮으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 모두가 좋아 보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큰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워낙 좀팽이들이, 무사안일한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이기에 더욱 커보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따뜻함이 주변을 따뜻하게 만든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내일이면 다시 1학년 신입생을 맞게 됩니다. 올해도 1학년을 맞게되었습니다. 28일 마지막으로 작년 1학년 우리반 아이들을 만나서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작년은 행복한 한 해였다. 너희들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납부금도 잘내고, 결석도 거의 없고, 들어오는 선생님들에게 칭찬받고 등등" 내년 이맘때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올해처럼 이런 저런 이유를 달지 않고, "너희들이 있었기에 나는 행복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멋있는 선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눈 같고, 솜 같은 종이[퍼옴] 2004년 04월 08일
저 눈 같고, 솜 같은 종이[퍼옴] 2004년 04월 08일 작성자 chs 한국일보의 글인데 함께 나누고 싶어서 여기에 옮깁니다. 기회가 되면 [이순원의 길 위의 이야기] 읽어보세요. 저는 매일 읽는데 잠시 생각하는 시간이 되곤 합니다. [이순원의 길 위의 이야기] <저 눈 같고, 솜 같은 종이> 내가 어릴 적엔 이사를 하거나 새로 지은 집을 방문할 때는 꼭 성냥을 가져갔다. 때로는 안방 문 위에 쌀을 일 때 쓰는 조리를 걸고 그 조리에 성냥을 담아두기도 했다. 불처럼 확 일어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UN 팔각표’나 ‘비사표’ 말고도 꼭 그런 용도에 쓰라고 ‘돈표’ 성냥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턴가 집들이의 기본 선물이 세제로 바뀌고, 휴지로 바뀌었다. 나는 내 나이 열세 살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35년 전에 휴지를 처음 보았다. 그때 우리에게 휴지란 이미 배운 책을 찢은 종이거나 신문지뿐이었는데, 할머니 제사를 지내러 온 서울 고모부가 주머니에서 눈처럼 하얗고 솜처럼 푹신하며 또 있는 듯 없는 듯 무게감도 잘 느껴지지 않는 얇은 종이 수건을 꺼내 팽, 하고 코를 풀어 던지는 것이었다. 아니, 세상에 코 한번 풀자고 저렇게 눈 같고 솜 같은 종이를 쓰다니. 그것도 수건처럼 여러 번 쓰는 게 아니라 단 한번 팽, 하고 버리다니. 아무리 흔해도 저러면 죄받지 않나 싶을 만큼 대관령 아래 산골 소년은 그런 고모부와 서울 사람들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주 답사기 - 5 2003년 01월 01일
제주 답사기 - 5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박범희 (bmyju@freechal.com) 제주 정치의중심 - 관덕정 관덕정 (보물 322호)은 세종 30년(1448년) 제주 목사였던 신숙청이 병사들의 훈련과 무예수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창건한 정자이다. 관덕(觀德)은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 라는 <예기>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처음 현판은 안평대군이 썼는데 소실되고, 지금 걸려있는 것은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글씨라 한다. 관덕정 마당에서는 잔치가 베풀어졌고, 진상용 말을 점검했으며,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민란의 장두가 악질 향리들을 처벌하던 장소였다. ‘이재수란’ 막바지인 1901년 5월 28일 제주 성내의 주민들에 의해 성문이 열리면서 민군이 성내로 진입하여 제주성을 장악하고 교민들을 이곳 앞마당에 모아놓고 살해한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프랑스 군인에 의해 촬영된 현장 사진이 남아있다. 또한 일제 강점초기를 전후해서는 5일에 한번 시장이 섰던 곳이기도 하다. 4.3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던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운동권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시위를 주도한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제주 태종16년(1416) 제주의 지방행정 구역은 제주목(濟州牧)과 정의현.대정현 삼읍체제로 개편되었다. 당시 제주도는 말의 생산지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의 하나였고, 이러한 중앙 정부의 인식은 제주에 대한 강력한 지방통치로 나타났다. 이러한 삼읍체제는 한말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으나, 1914년 하나로 통합될 때까지 500여년간이나 유지되었다. 삼읍의 행정구역은 일반적으로 제주목은 동쪽의 종달에서 서쪽 두모에 이르는 즉, 한라산 북쪽 일대였고, 정의현은 시흥에서 법환에 이르는 제주의 동남부 일대이며, 대정현은 강정에서 고산에 이르는 제주의 서남부 일대이다. 삼읍에는 고을 원(員)님이라 부르는 수령으로 제주목사(정3품), 정의현감(종5품), 대정현감(종6품)이 파견되었으며, 제주목에는 목사를 보좌하는 관리로 판관(종5품)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제주목사는 형옥, 소송의 처리, 부세의 징수, 군마의 고찰, 왜구의 방비 등 제주도 지방에 대한 모든 행정을 집행하고 사후에 전라도 관찰사에게 1년에 두 차례 보고를 해야 했다. 목사의 행정기관인 제주목은 현재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 목관아지터(사적380호)에 위치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세종 17년(1435) 최해산 목사가 제주목 관아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리자, 영청(營廳)인 홍화각(弘化閣)을 건립하면서 종루, 침실, 영고 등206칸의 관아 건물을 새로 지었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읍성을 쌓았다. 따라서 제주읍성은 제주목사와 제주판관 등 지방관의 거처인 동시에 정책의 산실이었고 명령을 집행하는 곳이었다. 망경루와 연북정 망경루(望京樓)는 제주목 관아 중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2003년 1월 22일 재건축 완공 예정인 제주목 관아는 망경루가 빠져있다. 아마 제주의 향토사학자들이 관청의 중심인 동헌보다 망경루(서울을 바라본다)가 훨씬 더 큰 것이기에 자존심 때문에 뺀 것은 아닐까? 연북정은 조천읍에 있는 정자로서 북쪽 즉 서울을 사모하는 정자란 뜻이다. 망경루와 연북정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서울 즉 중앙을 향한 관리들의 그리움 즉 출세를 위한 열망이다. 외딴 섬 제주도에 관리로 파견된다는 것은 결국은 좌천이었고, 하루빨리 여기저기 손을 놓아 중앙으로 올라가고자 했던, 그리하여 백성들의 생활에는 관심없고 오로지 중앙으로 가기 위해 뇌물을 써야했기에 수탈에만 열을 올렸던 그들이 떠오른다. 제주의 진상품 조선 시대 제주는 국가에 대한 중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진상기지 역할을 했다. 당시 대표적인 진상물은 말과 귤, 해산물, 약재 등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제주도 중산간 지역은 대부분 진상을 위한 말을 키우는 국가 목장이었다. 제주공마는 해마다 바치는 年例貢馬, 3년마다 바치는 식년공마, 그리고 부정기적으로 바치는 경우가 있었다. 이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부정기적으로 바치는 말이었다. 즉 왕명에 의해 戰馬 혹은 무역을 위한 말의 징발이 수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더구나 관리들이 민간에서 기르는 말을 빼앗아 사사로이 중앙정부에 바치기도 하여 그 폐단은 적지않았다. 다음으로 귤의 진상이다. <경국대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주, 정의, 대정 등 삼읍에서는 매년 귤나무를 새로 심거나 접붙이기를 하여 인근 주민들로 하여금 재배하도록 하였는데, 매12월에는 수량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결실 초기에 기록된 숫자에 맞춰 낙과에 의한 피해 숫자까지도 채워야 하는 과직(果直:과수원을 지키는 역을 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매우 심하여서 제주도민들은 과직으로 차출되는 것을 매우 기피하였다. 전복,해삼,미역,옥돔 등 바다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도 중요한 진상물이었다. 해산물의 진상을 위하여 포작인(浦作人 혹은 鮑作)과 잠녀(潛女)를 특별히 두어서 이들로 하여금 진상에 필요한 해산물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진상용 뿐만아니라, 관아에서 쓰이는 물품들도 모두 담당하였는데, 이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탐라에서 제주로 <탐라(耽羅)>라는 명칭은 6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그 때 비로소 쓰기 시작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제주도 주변의 다른 지역집단과 구분되는 해상도서집단으로서 나름대로 결속력 있는 일정한 정치체가 들어섰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주도는 그 역사적.지리적 특성상 군현체계에 의한 중앙의 직접 지배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주(星主).왕자(王子)와 같은 전통적 지배체계를 중앙정부가 인정하되, 이들 지배체계를 정부가 장악함으로써 제주를 통할하는, 말하자면 간접지배 방식으로 통치하였던 것이다. 제주 지역에 고려 정부의 통제력이 매우 구체적으로 미치게 된 것은 고려 중기 대략 12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제주>가 <탐라>를 대신하는 것은 탐라가 군에서 목으로 승격되는 고종10년(1223)이전의 일이다. 제주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중앙정부 입장에서, <독립국>으로서의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탐라>라는 명칭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탐라가 독립국으로서의 전통을 담은 이름이라면, 제주(濟州)는 중앙이나 육지의 관점에서 본 이름이라는 것이 주목된다. 목호의 난 1273년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원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직할령으로 삼았다. 총관부의 이름을 ‘탐라’라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 근대의 시작이라고 하는 ‘강화도 조약’ 제 1조가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것이었다. 왜 일본은 조선을 자주국이라고 치켜세웠을까? 이는 조선을 자기의 속국으로 생각하고 있던 청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한 사전조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원이 ‘제주’가 아닌 ‘탐라’총관부로 이름지은 것은 고려 정부의 간섭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원은 남송과 일본 정벌의 전초 병참기지로 제주도를 활용하는 한편, 목마장을 직접 마련해 원제국의 14개 국립목장 중 하나로 키우는 등 물자수탈의 경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후 탐라는 두 차례 일본 정벌의 실패를 겪고 난 뒤 고려에 환속되었다가 다시 원에 귀속되는 등 왔다갔다 한다. 그러나 이는 탐라에 설치한 관부의 관할권 소재가 고려에 있느냐, 원에 있느냐 하는 현상적 변화였을 뿐이었다. 실질적으로는 탐라가 양국에 이중귀속되는 상황에서 물자수탈에 중점이 두어진 원의 탐라경영은 줄곧 계속되었다. 그러나 몽고의 선진 목마 기술이 제주로 유입되면서 제주는 급속히 발전한다. 현대자동차가 울산에 제철소가 포항에 들어서면서 울산과 포항이 급속히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일 것이다. 목호(牧胡)는 말을 기르는 몽골의 목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탐라가 원의 직할령이 된 이래 탐라에 왔던 군인,목호,유배죄수나 정치인 등 몽골인 등과 이들과 결혼한 탐라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탐라민이 목호의 세력기반이었다. 원명 교체기인 공민왕 23년(1374)에 명나라가 탐라의 말 2000여필을 조공으로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는 목호 세력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해에 편성된 탐라출정군의 총사령관은 최영이었고, 출정군은 수도권과 국경지대가 빠진 전국에서 차출한 정예군 2만 5,605명과 전함 31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국경지대까지 더해 동원했던 요동정벌군 3만 8,830명과도 견줄 전력이며, 당시 탐라 인구와도 맞먹었을 병력이었다. 출정군 이외에도 평정실패,왜구출몰 혹은 이들과 목호의 합세 등과 같은 사태를 대비한 군대가 양광도(경기, 충청 일대)와 전라도에 따로 주둔하였다. 최영이 탐라에 와 한달 여간 전투를 벌여 끝마쳤던 목호 평정은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년(1374)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고 묘사될 정도로 고려와 목호 세력의 총력전이었다. 탐라민의 상당수가 목호 세력에게 합세했던 만큼, 탐라민의 희생도 컸다. 이영권 선생은 목호의 난 진압을 ‘1948년 4.3 이전의 최대 제주민 학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제주 무속에서 보이는 최영에 대한 이야기는 좋지않게 되어있다고 한다. <확인하지 못했음> 제주무속에서는 그 이전 삼별초 항쟁의 중심인물인 김통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좋지 않게 되어 있었다. 애월면 고내리에 있는 고내본향당의 본풀이(당의 근본에 대하여 설명한 말)를 보자. “전략 김통정 장수가 (탐라국에) 와서 보니 / 우마와 생산이 잘 낳니 / 그것을 욕심하고 / 탐라국을 먹을라고 / 무류탐심(無類貪心)하니 / 천자국(天子國)에서는 김통정 장수를 / 잡을려고 세 장수를 / 보내였습네다 / - 중략 - / 김통정이는 / 세 장수를 피하려고 / 각 백성에게 / 재 닷되와 비 한자루를 / 받아서 / 재는 토성에 깔고 / 비자루는 말꼬리에 달아서 / 말을 타고 성위를 돌렸습네다 / 성위에는 재로 안개가 / 자욱하니 / 세 장수는 짐작을 못하였습네다 / 그러나 최후에는 세 장수가 / 토성까지 닥쳐왔습네다 / 토성이 높아지고 / 무쇠문은 잠가서 / 들어가지 못하니 / 어떠한 여자의 말을 듣고 / 무쇠문에 / 석달 열흘 백일간을 / 풀무를 하니 / 무쇠문이 녹아졌습네다 / 세 장수가 성안에 들어갈 때 / 김통정이는 도망가게 / 되었습네다 / 김통정이 처는 / 뱃속에 아기를 가졌는데 / 김통정이가 도망가면서 / 내가 없으면 너도 죽으니까 / 내손으로 없애겠다 하여 / 처를 발로 밝고 / 손으로 당겨 찢어 / 던져두고 / - 후략 - 김통정의 탐라국을 먹으려는 욕심과 자기의 처를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을 그리면서 김통정을 못된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무속에서 구전되어온 이야기와 우리가 삼별초의 항쟁으로 배운 내용과 차이가 난다. 제주가 없었으면 조선은 없었다? 한편 최영이 탐라에 와 있는 동안 고려 조정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고 10살의 어린 우왕이 추대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뒤에 위화도 회군과 관계가 된다. 고려 조정에서는 고압적인 명의 요구에 반발해 우왕 14년(1388)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를 주도한 것이 바로 최영이었다. 그는 정벌군 총사령관으로서 전쟁 지휘와 감독을 위해 서경(평양)으로 나아가자 우왕도 자신의 신변에 불안을 느껴 굳이 따라나섰다. 이들이 서경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였다. 사실 최영은 전쟁터로 나아가 정벌군을 직접 지휘,감독하려 하려했다. 이를 하지 못한 것은 우왕의 만류때문이었다. 우왕은 공민왕23년(1374) 최영이 목호의 난을 평정하러 탐라에 가 개경에 없었기 때문에 공민왕이 시해되었다고 10세 어린 나이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우왕은 부왕에게 일어났던 일이 자기에게도 되풀이될까 두려워 최영을 곁에 두어 자신의 신변안전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요동정벌의 전쟁터로 가려는 그의 발길을 막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인 위화도 회군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제주 답사기를 올립니다. 2003년 01월 01일
제주 답사기를 올립니다. 2003년 01월 01일 작성자 박범희 (bmyju@freechal.com) 지난 1월 17일부터 20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주관하는제주답사를 다녀왔습니다.방학 때마다 다니는 답사이지만,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으니 조금만 지나도 갔다왔는지 어땠는지 맨숭맨숭해서 이번에야말로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대학 동창들이 만나는 사이트에다가답사기를 연재하겠다는 호언을 했습니다.이것이 굴레가 되어 결국은 겨우 겨우 답사기가 이루어졌습니다.하지만 답사기라는 것이 답사하는 사람의 주관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답사하는 사람은 이렇게 보았구나, 아하 이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라는차원에서 읽으시면 부담이 없으실 것 같습니다.긴 글도 있고 짧은 글도 있는데 각각이 끊어지기 때문에 그냥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