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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4월 28일 금교령 선포와 ‘애기 소동’
1888년 4월 28일 금교령 선포와 ‘애기 소동’ 초창기 한국교회 신도들의 성분과 분포 상황을 살펴보면, 의주 지방은 상업차 중국을 왕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서울사람으로는 선교사들의 한국어 교사와 선교회기관에서 일하는 직원이나 고용인들이었고, 그 외에도 서민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초창기의 한국교회는 천주교와는 다르게 서민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고유의 종교 내지 정통 의식과의 대립이나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비교적 용이하게 교세가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박해가 없은 것은 아니었다. 1888년 4월 28일 한국정부의 조병식으로부터 미국의 딘스모어(Dinsmore) 공사에게 기독교 전도를 금지하라는 공문이 전달되었다. 이 금교령은 주로 천주교에 대하여 행해진 것이었지만, 기독교의 선교 단체에도 적지 않게 영향이 미쳤다. 천주교에서는 한국의 문화가 개방되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한국인 교도의 이름을 빌려 선교와 인연 있는 장소를 구입하여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약현 성당은 천주교인의 처형 장소였던 서소문밖 언덕 위에 세워진 것이고, 종현 성당은 순교자 김범우의 집터에 세워졌으며 이곳은 천주교의 요람이기도 한 명례동 즉 오늘의 명동 성당 자리가 된다. 그런데 이 명동 성당 자리는 궁궐보다 높은 장소였고 역대 국왕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건축 금령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국왕은 그 계획을 듣고 성당 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명하였다. 그러나 건축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금교령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는 북부 지방을 전도 여행하다가 딘스모어 공사로부터 즉시 귀경하라는 공한을 받고 서울에 돌아와 보니 선교사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하였다. 어떤 선교사는 이 포고가 천주교에 해당하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고, 알렌 같은 선교사는 너무 내륙에까지 깊이 들어가 전도함으로 우리에게도 꼭 같이 해당되는 금령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여튼 이러한 사정으로 5월부터 9월까지는 주일 예배를 포함하여 일체의 종교 행사를 중단하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금교령이 내린 직후, 선동 분자들은 모든 외국인은 국외로 추방돼야 한다고 험담을 퍼트렸다. 시국의 공기는 험악해져 중국 텐진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같은 서양인 학살이 국내에서 일어날 것 같은 우려도 없지 않아 있었다. 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떠돌아 서양인들이 어린 아이를 잡아다가 눈알을 뽑아서 약에 쓴다는 등의 말도 퍼졌다. 이 금교령과 “애기소동”(Baby-Riot)의 결과가 전화위복으로 되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스크랜튼 의사의 말과 같이 선교사들은 전혀 어린 아이의 눈알을 뽑지도 아니하였고 아이들을 잡아먹지도 아니하였다. 선교사들은 정부 명령에 곧 순종함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고 무지와 편견으로 된 모해는 시일이 지나자 저절로 해명되었다. 선교사들의 하는 사업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Annual Report of Missionary Society of the Nethodist Episcopal Church for 1889, PP.293-294) 이러한 호전된 분위기를 이용하여 정부 측근의 알렌 같은 인물이 적극적으로 한국 관리를 설득하며 나섰다. 1886년 한불조약의 “교회”라는 글귀가 바로 선교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선교 사업을 인정함이 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1890년 이후 척사법은 사실상에 있어서 死文化되고 말았다.
33인중 기독교측 대표-이승훈/ 2013-05-18
33인중 기독교측 대표-이승훈 평생 소원으로 아래에 적은 두 가지 조건뿐이 형제의 마음속에 깊이 기억되기를 간구합니다. 첫째, 마음과 몸을 다하여 일함으로써 각 사회 인중(人衆)의 신앙을 받는 지경에 이르는 질실(質實)한 진인(眞人)이 생겨나기를. 둘째, 가면이 아니요 진실로 일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에 대하여는 혈기방강(血氣方强)의 청년들까지라도 그를 정당히 경애하며 숭앙하며 사회중심의 추세를 지게 하기를. - 선생이 <개벽> 1922년 1월호 밝힌 ‘신년(新年)의 신의견(新意見)’ 중에서 열 살이 되던 해 학업을 중단하고 상인의 길 들어서 이승훈(李昇薰, 1864. 3. 25~1930. 5. 9) 선생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읍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주(碩柱)이며, 어머니는 홍주(洪州) 김씨이고, 이들 사이의 둘째 아들이 바로 선생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아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호는 남강이다. 가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6살에 고향 정주읍내를 떠나 인근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에서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기 전까지 3, 4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것이 어린 시절 배운 학문의 전부였다. 열 살이 되던 1874년 학업을 중단한 선생은 당시 유기(鍮器)상인으로 유명한 임일권이 운영하던 상점의 사환으로 들어갔다. 4년 뒤에는 이 상점의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으며, 근면성과 성실함이 인근까지 널리 알려져 1878년 이도제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점원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에 들어섰다. 선생은 보부상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전전하면서 자본을 모아 납청정에 유기상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철산의 갑부 오희순의 돈을 얻어 1887년 납청정에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기업가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1차 산업 위주의 사회에서 2차 산업의 토대를 만들어 간 것이다. 선생은 공장 경영방식도 근대적으로 개선하였다. 노동환경을 일신하였고 노동조건 개선에도 힘썼으며, 노동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대우하였다. 때문에 작업 의욕이 왕성하여 생산성이 높고 품질도 우수하여 사업은 날로 번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도 한 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1894년 청일전쟁이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납청정에 자리 잡은 선생의 상점과 공장은 이때 잿더미가 되었다. 신민회에 가입하고 민족교육운동 일환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다 덕천으로 가족과 함께 피난 갔다 돌아온 선생은 또 한번 오희순의 자본을 얻어 상점과 공장을 재건하였다. 나아가 평양에 상사를 개설하고 진남포와 납청정에 지점을 두고 본격적으로 무역과 운송업을 펼쳤다. 서울과 인천 등지로 왕래하면서 사업을 확장하는데 성공한 선생은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 때는 선생에 의해 물가가 좌우될 정도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같이 상업 자본을 축적하여 본격적인 산업 자본가로의 성장을 눈앞에 둔 선생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1902년 우연인지 아니면 민족 자본을 말살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인지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1만냥의 엽전을 싣고 부산으로 가던 선생의 운송선이 일본 영사관 소속의 배와 충돌하여 침몰한 것이다. 이에 선생은 일본 영사를 상대로 2만냥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소송은 당시의 국제 정세에 얽혀 1년이 지난 뒤에야 원가만 받는 것으로 해결되고 말았다. 선생은 1년간의 소송으로 장사의 적기를 놓쳤고, 또 소송에 매달리는 바람에 사업도 제대로 못하여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선생은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외세와 민족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상업 자본가로서 이익을 추구할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민족 현실을 일제와의 소송과정에서 뼈저리게 절감한 것으로 생각된다. 생활상의 문제에서 반일 민족의식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연계선상에서 선생은 43세가 되던 1907년 7월 인생의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평양에 나갔다가 “나라가 없이는 집도 몸도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는 없소”라고 하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그를 찾아가 만난 것이 그 계기였다. 이후 선생은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게 가졌고, 인생 행로는 오직 민족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당장 금주, 금연과 단발을 결행하고,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여 평안북도 총감이 되었다. 이 가운데 선생은 식산 흥업의 책임자로 평양 마산동에 자기(磁器)회사를 설립하였고, 서적의 출판과 공급을 목적으로 태극서관이라고 하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민족교육운동에도 앞장섰다. 도산을 만난 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온 선생은 서당을 고쳐 신식교육 기관인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초등교육 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이어 같은 해 12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이 된 오산학교를 개교하여 교장이 되었다. 민족교육운동을 목적으로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 전경(1915년) ‘안악사건’으로 제주도 유배, ‘105인 사건’으로 옥고 치러 한말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의 구국계몽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선생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전에도 선생은 기독교 설교를 들은 일이 있었지만, 그에 입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나니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서러웠다. 답답한 심정으로 평양으로 나갔다가 한석진 목사의 설교가 있다고 하여 들으러 갔다. 선생은 그 날부터 기독교를 믿기로 작정했고, 돌아와서 오산학교 교육도 기독교 정신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일제에게 나라를 강점 당한 직후부터 선생은 5년여 동안 철저히 탄압을 받았다. 1910년 말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로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 2월 선생은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무단통치에 의한 민족운동자 탄압의 출발점이었다. 1911년 9월 일제는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민족운동자들을 대거 체포한 ‘신민회사건’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 105명을 기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흔히 ‘105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선생을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에야 가출옥하였다. 감옥생활은 선생의 민족의식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 출옥 후 오산학교로 돌아온 선생은 학교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5년 52세의 만학도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수학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는 1901년 마펫트 목사가 창설하여 1907년 첫 졸업생을 낸 기독교 장로교계통의 신학교였다. 이 학교는 기독교계 3.1운동 추진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선생을 비롯하여 민족대표로 활약한 길선주,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목사, 그리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였던 송병조, 김인전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한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선생은 여기서 수학하면서 민족독립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운동 동지들과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3.1운동 추진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이다. 국제 정세의 격변 속에 국내외에서도 거족적 독립운동 움직임 일어 한편 1918년에 들어와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서는 이미 ‘노농정부’가 수립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 대통령 윌슨은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당시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시대가 가고, 인도와 정의의 시대가 도래하는 ‘세계 개조’의 흐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나아가 이 같은 정세의 변화를 이용하여 한국 독립을 성취하고자 국내외 민족운동자들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이러한 흐름아래, 상해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를 파견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 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준비하였다. 즉 외교활동을 통해 민족독립 달성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파리강화회로의 파견뿐 아니라 선우혁, 김순애, 김철, 서병호, 백남규 등을 국내에 밀파하여 독립운동 봉기를 종용하고, 여운형을 만주와 노령 연해주, 조소앙, 장덕수를 일본 동경으로 파견하여 국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 봉기를 이끌어내도록 하였다.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독립운동 논의가 진행되었다. 천도교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16년부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손병희 교주에게 요청하는 신도가 있었고, 1917년에도 그러한 요구가 재차 표출된 적이 있었다. 특히 1917년 겨울에는 김시학의 발의로 우선 천도교, 기독교, 유림 등 3종단이 연합하고, 사회계와 구(舊)관료계의 저명 인사들을 포섭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알려지고,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지자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다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들은 송진우, 현상윤 등 중앙학교측의 인사들과 합세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을 추진하던 재일 유학생들의 밀사로 송계백이 도착한 것이었다. 송계백이 가져온 2.8독립 선언서 초안을 보고, 또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듣고 크게 감동한 현상윤은 이를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와 친구인 최남선에게 보였다. 그리고 다시 송계백과 함께 최린을 찾아가 보여 주고, 그를 통해 손병희에게도 전달한 것이다. 손병희는 이를 보고, “젊은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고 하니 우리 선배들로서도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추진 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법과 진행을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에게 일임하면서,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담당하게 하고, 최린은 외부와의 관계를 맡도록 하였다. 종교계 인사들과 학생층의 연합으로 3.1운동 계획 추진 한편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 추진은 선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2월 6일 선생은 상해 신한청년당의 밀사 선우혁으로부터 국제정세의 변화와 그에 따른 국내 독립운동의 추진을 권유 받았다. 이에 독립운동 추진 논의를 위해 상경한 선생은 최남선, 송진우, 최린 등을 만났고, 이들로부터 천도교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3.1운동 계획을 듣게 되었다. 선생이 절친한 친구에게 보낸 서한 이때 선생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 세력의 독립운동 계획은 쉽게 접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계를 대표한 선생과 천도교계를 대표한 최린은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 아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3.1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곧 바로 서북지방으로 내려가 기독교 지도자들을 순방하며 3.1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갔다. 우선 평양에서는 장로교계의 원로 지도자 길선주 목사와 감리교 지도자 신홍식 목사의 참여를 확약 받았다. 그런 다음 평북노회가 열리던 선천으로 내려가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교회 지도자 들을 만났다. 여기서 선생은 천도교와의 합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3.1운동 참여와 민족대표 선정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회 지도자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그 자리에서 이명룡,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등 4인을 민족대표로 선정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쉽게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동안 이 지역에서 목회 활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상호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선생을 비롯하여 최린, 한용운을 매개로 기독교, 천도교, 불교계와의 접촉이 이루어져 종교계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YMCA를 매개로 학생층이 참여함으로써 민족대연합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3.1운동 계획은 일원화되어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2월 28일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민족대표들이 회합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최종 검토한 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갖도록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식 이후 피체, 민족대표 중 가장 늦게 출옥한 선생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앞에 놓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한용운이 대표로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 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하는 요지의 식사(式辭)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참석자 모두는 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운동의 불을 지폈던 것이다. 이 직후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출동한 일경에게 피체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의 인신(人身)을 구속할 수 있었을지언정 불타는 독립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특히 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당당하게 답변하였다.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하고, 또 먼저도 말하였지만 금번 독립운동은 우리 동지들만으로 한 것이지 외국 사람이나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 사람이라든지 또는 학생 등과는 하등 관계가 없으며, 일본 정부에 대하여 청원한 일에 있어서도 외국 사람의 조력을 요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 말 가운데는 선생의 불요불굴의 독립정신은 물론 자주적 독립운동 노선까지도 모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선생은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늦은 1922년 7월 22일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오산학교와 <동아일보> 경영에 힘쓰다 이후 선생은 정주로 돌아와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쏟았다. 그러면서 물산 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나아가 <동아일보>가 1924년 1월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의 게재와 4월 박춘금 사건으로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를 맡아 ‘민족지’의 경영 정상화에도 노력하였던 것이다. 교단에 선 선생을 그린 기록화 그러던 중 1930년 5월 8일 선생은 전처럼 오산학교를 다 돌아보고 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면회(自勉會)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다. 자면회는 용동 사람들로 조직된 자치기관으로 선생은 거기에 자신의 땅을 내놓아 공동 경작하게 하며 생활 개선과 향상에 힘쓰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갑자기 병이 나 이튿날인 5월 9일 오전 4시,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영면 직전 선생은 평소에 늘 하던 대로, “내 뼈는 학교에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를 원한다”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이었다. 살아서는 독립운동가로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고, 죽은 뒤에는 자신의 유골까지도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4. 19 학생운동과 나/ 손봉호 박사/ 서울대명예교수/ 2010-04-12
4. 19 학생운동과 나 손봉호 박사(서울대명예교수) 4. 19 학생운동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 때 학생들의 가치관과 활동의 동기를 추측해 보려 한다. 1. 순진한 이상주의 그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매우 가난하였다. 추운 겨울 날 전 대학 교정에서 온기가 있는 곳은 도서관과 구내다방 뿐이었다. 강의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수 연구실에도 난방시설은 없었다. 다방에는 훌훌 타는 난로 위에 국을 끓여 팔았는데 그 멀건 국물 한 국자 살 돈이 없어서 교정 양지쪽에 웅크리고 앉아 다 얼어버린 도시락밥을 젓가락으로 깨어 먹기도 하였다. 나는 겨울에 입을 외투가 없어서 가정교사로 있던 집 주인이 입다 버린 헌옷을 입고 다녔는데 조금 커서 허수아비 같아 보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창피했지만 추우니 어쩔 수가 없었다. 가정교사로 두 학생을 가르쳐야 했고 교회에서는 대학생회 회장, 중고등부 지도교사, 찬양대원으로 봉사 까지 했으니 공부할 시간이 거의 없었고, 따라서 학교 성적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책이 없어 교수가 가진 책을 등사하여 읽었는데 글자가 보이지 않아 학기 첫 시간은 보이지 않는 글자 써 넣는데 다 보냈다. 그러나 국민 대부분이 가난했기 때문에 열등감을 갖거나 사회와 국가를 원망해 본 일은 없다. 철저한 반공교육으로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무조건 나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고 빈부격차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때 학생들 대부분이 농촌출신이었기 때문에 농촌발전과 농민계몽에 대한 관심은 컸다. 문리대에서 당시 기독 학생 몇 사람이 <독서회>란 것을 조직하여 가끔 만났는데 무슨 책을 읽었는지는 기억이 없으나 앞으로 졸업한 뒤 농촌으로 가서 농촌계몽운동을 하자는 논의를 한 것은 기억난다. 돈을 조금씩 모아서 소를 사 두는 것이 좋다는데도 합의했으나 모두 가난한 터라 한 푼도 모으지 못했다. 영문과에 속한 회원 셋이 연세가 지긋한 박충집 교수 댁을 방문한 자리에서 농촌운동에 대한 우리들의 포부를 이야기 했더니 “자네들 같이 공부한 사람들은 도시에서 활동해야 나라에 도움이 돼!” 하셨다. 우리들은 속으로 “역시 먹물은 하는 수 없어!”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 때는 “먹물”이란 단어는 유행하지 않았으니 그런 뜻을 가진 다른 단어를 썼을 것이다. 어쨌든 그 독서회 회원들 가운데 그 후 농촌으로 간 사람은 하나도 없고, 물론 소도 한 마리 사지 못했다. 철없고 순진했으며 순수한 것은 좋았으나 이상만 높았지 충분히 현실적이지 못했다. 물론 도회지 출신 학생들은 조금 약아서 그 때 가장 인기가 높았던 은행에 취직하려고 노력하였고 많이 성공했다. 대부분 90년대에 은행 지점장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나 같은 농촌출신들은 4학년이 되어도 앞으로 “학자가 되어야지” 정도의 막연한 생각만 했지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별로 걱정도 하지 않았다. 지금 국정원으로 발전한 중앙정보국을 창설하기 위하여 신입 직원을 모집했는데 대학 학생과에서 나를 추천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는 거절하였다. 입학 하자마자 졸업 후를 생각하는 요즘 학생들과 매우 달랐고, 이것이 4. 19 세대와 오늘날 대학생들 간의 차이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한다. 그 때는 가난했으나 꿈은 풍성하였고, 지금은 풍성하기 때문에 꿈이 메마른 것 같다. 2.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 1960년 3. 15 대통령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난장판이었다. 그 약명 높은 4사5입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법적 토대를 마련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릴레이식 투표, 피아노 개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 가능한 모든 불법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그래도 민주주의 교육은 시켰고 언론의 자유도 어느 정도 보장했으면서도 그렇게 심각한 불법을 저질렀으니 웬만한 양식을 가진 국민이라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마산에서 불법선거에 항의하며 대모하다가 실종된 김주열 군의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신이 발견되자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이에 흥분한 고려대 학생들이 4월 18일 부정선거 항의 데모를 끝내고 귀가하는 길에 정부가 동원한 폭력배들의 습격을 받은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그 이튼 날 반드시 대규모 시위가 있을 것을 직감하고 아예 작업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고 어떤 연락도 받지 않았다. 불의에 대한 순수한 분노가 전부였다. 등교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미 대광고등학교 학생들 수백 명이 학교 앞 혜화동 거리로 구호를 외치며 지나갔다. 얼마 후 누구의 지휘도 없이 학생들은 모였고 선거무효를 외치며 길거리로 달려 나갔다. 한 참 뛰다 보니 내가 제일 뒤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약삭빠른 친구들은 모두 대열 중간에 들어가고 나 같이 좀 어리어리한 학생들은 맨 뒤에 서게 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이 뒤에서 습격해서 곤봉으로 많이 얻어맞고 뒤로 끌려나갔다. 다른 학생들 끌어내는 동안 도망처서 뒷길을 통하여 다시 본대에 합류하였다. 한 참 가다 보니 놀랍게도 영문과에서 가장 인기 없었던 3총사가 같이 뛰고 있었다. 즉 후에 부산에서 목회하다 은퇴한 서영호, 성균관대학 영문과 명예교수 이명섭과 나는 강의시간마다 맨 앞자리 바로 교단 앞에 앉았고 앉자 말자 기도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야유회 등에서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이상한 놈들로 특히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데모하는 현장에는 평소에 그렇게 큰 소리치고 용기 있어 하던 놈들은 어디에 숨어버렸는지 전혀 보이지 않고 영문과 4학년에는 맹꽁이 같은 우리 셋과 대구에서 온 여학생 하나만이 열심히 뛰고 있었다. 국회의사당 (현 서울시의회) 건물에 갔다가 다시 청와대쪽으로 몰려갔는데 이미 다른 학교 학생들이 청와대 가는 길을 가득 메워 세종로 4거리에서 더 나갈 수가 없었다. 기다리다가 우리 셋은 열을 벗어나서 청와대 쪽을 향해 갔다. 경복궁 모서리를 돌아 몇 미터 가지 못해서 총소리가 들렸고 가슴에 총을 맞은 학생들을 다른 학생들에 메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결국 265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총알을 피해 뿔뿔이 헤어져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체 청진동에 있었던 교회에 갔더니 담임 목사님은 대학생회 회장이면 모범을 보여야지 그런 데모나 하고 다녀서야 되겠느냐 하시면서 심하게 꾸짖으셨다. 그러나 4.19가 끝나고 세상이 바뀌자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부상학생들을 위문하는데 교회가 열심을 보였다. 학과에서도 4.19 이후, 놀림 받던 우리 셋이 영웅 대접을 받아 과회의 간부로 선출되었다. 이명섭이 회장, 서영호가 총무, 공부를 제일 못했던 나는 회계를 맡았다. 졸업여행 때 회계가 술값을 주지 않아 데모로 얻은 인기를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국 기독교는 4.19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 않다. 한국 교회는 온갖 불법을 감행하는 자유당 정권을 별로 비판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지하였다 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인이었고 군목만 군종으로 인정할 정도로 기독교에 편향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에 기독교가 큰 공헌을 했고 평등의식도 그렇게 신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가 누리는 특혜에 대해서 다른 종교나 비 종교인들이 거의 비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4월 19일에 기독교 학교인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가장 먼저 길거리에 나섰고, 4.19 희생자 가운데 기독교인이 상당 수 있었으며, 우리 영문과 4학년에서는 예수쟁이 셋 만이 데모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그래도 주목하고 싶다. 주일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거짓과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하지 않았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미워해서 데모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하야하고 미국으로 떠날 때 세종로까지 가서 그를 배웅하는 군종에 끼이기까지 했다. 다만 3.15 선거같은 부정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의 행동이 과연 옳았는가에 대해서 회의하였다. 예수 믿는 사람이 법을 어기고 데모를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자신이 없었다. Westminster 신학교에서 나를 아끼던 Clowney교수가 나를 따로 불러서 “너는 왜 목사 안수를 받지 않으려 하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분을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목사가 되기에 부족합니다”하고 대답하면서 4.19 대모에 참여한 것을 예로 들었다. “그것은 의분 (righteous indignation)이므로 나쁘지 않다”고 하셨다. 그 후 나는 정당화될 수 있는 분노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나쁘지 않을 뿐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개인적 원수는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 특히 약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자를 내가 용서할 권리가 없을 뿐 아니라 미워하고 분노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분노가 바로 사회정의의 원동력인 것이다. 오늘에는 3.15 부정선거 정도의 심각한 부정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 학생들은 좀처럼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 같지 않다. 비록 우리나라는 아니더라도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Zimbabwe의 Mugabe나 북한의 김정일 같은 독재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인간의 매우 중요한 도덕적 자원이며 그리스도인의 의무라 할 수 있다. 3. 새생활운동 4. 19 혁명으로 정권은 바뀌었는데 정치나 사회에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정치인들은 여전히 부패했고 사회는 무질서했다. 전국 방방곡곡에 골목마다 다방이 있었고 거기에는 모두 밀수된 커피를 팔았다. 웬만한 남자는 다 양담배를 피웠는데 모두 밀수된 것이었다. 재무부에 가서 알아보니 일 년에 커피와 양담배 밀수로 빠져나간 돈의 액수가 대전시 시민의 일 년 식량 값 정도였다. 곳곳에 댄스홀이 생겨나서 한 낮에도 유부남녀들이 부둥켜안고 춤을 추고 있었다. 새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은 군용 짚 차를 페인트해서 법이 한정해 놓은 번호를 무시하고 소위 “가 넘버”를 달고 거리를 누볐다. 이렇게 하라고 265명의 아까운 젊은 목숨이 희생되었는가? 이런 현상을 좌시할 수 없다 하여 기독학생 몇 사람이 <새생활운동>이란 것을 시작했다. 김명혁, 김상봉, 이형기 (장신대 교수), 우리 영문과 3총사 등이 발기인으로 출발했는데 수 백 명의 학생들이 호응해 주었다. 내가 임무를 맡아 재무부에 가서 밀수실태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학생들 모임에 보고했더니 모두 흥분해서 커피 마시지 않기, 양담배 피우지 않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커피 한 방울, 피한 방울!”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다방과 길거리로 돌아다니면서 커피 잔을 뒤 엎고 양담배를 빼앗았다. 댄스홀에 찾아 가서 “지금이 춤이나 출 때냐?”하고 호통을 치면 춤추던 사람들이 구석에 얼굴을 가리고 웅크리고 있었다. 김상복 목사는 영어를 잘 해서 미군들이 춤추는 댄스홀에 가서 왜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영어로 설명하면서 연설을 하여 미군들의 박수를 받았다. 미군 댄스홀에 한국 공무원들이 많이 출입했기 때문에 거기에도 간 것이다. 지금 명동 롯데 백화점 자리에 있었던 건물에 있는 덴스홀에 침입해서 2층 홀에는 김명혁 목사가, 3층에는 내가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지른 기억이 난다. 하루는 “가 넘버”를 달고 다니던 국회의원 짚 차 100여 대를 붙잡아서 시청 뒷마당에 끌어 모은 일도 있다. “가” 넘버를 단 차가 오면 길바닥에 가로 누워 차를 세운 다음 다른 학생들이 차에 올라 강제로 차를 시청 뒤로 몰도록 한 것이다. 불을 지를 것인지 해체할 것인지를 논의하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결사대 100명만 남았는데 우리 주동자들은 물론 결사대에 속해 있었다. 오후 늦게 경찰 400명이 들이 닥쳐 모든 짚 차를 다 놓치고 말았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그 동안 빼앗아 놓은 양담배를 세종로 4거리에 쌓아 놓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불사르고 새생활운동을 마감하였다. 4. 19로 학생들이 기세를 얻었기 때문에 그런 난동을 부려도 기가 다 죽은 경찰이 제재하지 못했다. 그 때 또 다른 일부 학생들은 판문점에서 북한 학생들과 회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다. 박정희 장군이 5.16 혁명을 일으킨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런 무질서에 장면 정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불만과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5. 맺는 말 역시 우리의 동기는 순수하였고, 그 때문에 그런 난동에도 불구하고 일반시민들은 4.19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을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를 시민사회로 성장케 하는데 상당할 정도로 공헌했을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와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런 운동이 우리 사회의 안정과 의식수준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방법의 운동은 오늘날에는 용납될 수 없다. 사회 상황이 그 때만큼 절박하지도 않고 법에 의하지 않은 강제행위는 그 이상 허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거기에 참여했던 우리들에게는 일생동안 영향을 끼쳤다. 상당기간 우리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영문과 3총사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해 주시던 김진만 교수님 댁에 초청을 받고 가서는 사모님이 정성들여 끓인 커피를 한 마디로 물리쳤다: “우리는 커피 안마십니다.” (요즘은 모두 커피를 잘도 마신다). 군사독제 시절에 우리는 그렇게 표나게 반대운동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김명혁 목사와 나는 나름대로 항의 성명을 많이 발표하였고, 지금 비록 나이는 많지만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불의에 대한 비판정신은 아직도 조금 남아 꿈틀거리고 있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비록 우리가 쓰던 방법은 따르지 않더라도 사회의 정의와 시민들의 정당한 이익을 위하여 시간과 정열을 바쳤던 우리의 정신과 순수한 동기는 이어받았으면 한다. 최근의 우리 대학생들은 너무 약고 너무 이기적이 되어서 정의와 공익에 너무 관심이 없어 보인다. 우리 사회와 전 세계의 상황은 그런 무관심이 정당할 정도로 평안하지는 않다.
4·19 학생혁명 50주년의 역사신학적 의미/ 두 눈 부릅뜨고 다물지 못한 입/ 이덕주 감신대 교수(한국교회사)/ 2010-04-12
4·19 학생혁명 50주년의 역사신학적 의미 두 눈 부릅뜨고 다물지 못한 입 이덕주(감신대 교수/ 한국교회사) 들어가는 말 “근형[아들]은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벌리고 그 무엇을 부르짖다가 그 무엇을 노려보다가 쓰러졌음이 분명했다. 내가 근형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 볼 때 옆에 있던 의사 한진섭씨는 근형의 부릅뜬 눈을 감기면서 기도를 올렸다. ‘당신의 거룩한 피는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며 민족의 가슴에 오래 살 것입니다. 고이고이 잠드소서’ ‘민주주의 만세! 이근형군 만세!’라고.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거룩한 내 아들 아니 대한의 아들이 과감히 죽어 가는데 왜 울어야 하는가! 장하다. 내 아들. 어미는 울지 않으련다.” 데모한다고 나간 삼대독자 외아들을 찾아 경찰서마다 찾아 헤매다 사흘 만에서 어느 병원 차디찬 시체실에서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벌리고 그 무엇을 부르짖다가, 그 무엇을 노려보다가 쓰러진” 아들. 그런 아들의 시체를 발견한 어머니의 “장하다. 내 아들! 어미는 울지 않으련다.”는 절규. 그 앞에서 교회는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독재정권의 폭력과 총알에 수 없이 스러진 젊은 청년 학생들의 죽음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었던 한국교회는 4 ․ 19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입이 있으나 할 말이 없었지만’(有口無言), 반면 희생자들은 한국교회에 대해 ‘입은 없으나 할 말이 많았다.’(無口多言) 기독학생 이근형이 길거리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면서 다물지 못한 입으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하고자 했던 말은 무엇일까? 4·19 학생혁명은 해방직후 수립되어 12년 동안 통치하면서 ‘독재와 부패’혐의를 쓰게 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와 함께 이승만 ‘장로’대통령의 중요 지지기반이었던 기독교계의 지도력과 권위도 함께 붕괴되는 수치와 아픔을 경험하였다. 19세기 말 선교를 시작한 기독교는 한말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 상황, 그리고 일제시대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한 민족적 수난 상황에서 민족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나름대로 적극 부응하여‘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의 면모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해방직후 분단시대에 한국교회는 신학적,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한 교회 안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분열을 연출하였으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그것을 통한 평화정착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충실하지 못했다. 오히려 해방 후 한국교회는 분단구조 속에서 배태된 1인, 혹은 1당 독재, 그리고 그로 인한 정치 사회적 부패구조와 현실에 침묵하거나 방조함으로 사회악을 고발하고 경계해야 할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한 종교집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독교는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타락에 상당부분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4·19는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권력에 대한 심판만은 아니었다. 그런 정치권력의 부패와 타락에 침묵하였을 뿐 아니라 동조 내지 방조한 교회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다. 4·19는 정치권력에 밀착하여 이권과 편의를 추구하려는 종교단체의 집단 이기주의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4·19와 관련하여 회개와 반성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러하지 못했다. 4·19 직후 회개와 번성이 뼈를 깎는 아픔처럼 철저했더라면 이후 한국교회는 달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 한국교회는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사회적 비판과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다. 일반사회 언론, 특히 청년 학생계층이 주도하는 인터넷 언론에서 기독교는 비난을 넘어 혐오의 대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런 반(反) 기독교 정서에 합리성과 객관성을 결여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런 비판과 비난의 빌미를 제공한 당사자가 바로 교회 지도자들과 기독교라는 점에서 변명과 항변대신 자기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반성적’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4·19를 촉발시킨 자유당 정권과 유착되었던 당시 기독교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4·19 이전 자유당 정권과 밀착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소개할 것이다. ‘박마리아의 명함’: 정치권력과 결탁한 교회 한국 감리교회는 해방직후(1946년) 역사청산 문제로 재건파·복흥파 분열을 이루었다가 3년 만에 통합한 경험이 있고 전쟁직후 교권과 지방색 분제로 2차 분열이 이루어져 1954년 (충청도 중심의) 호헌파 세력이 별도 총회를 조직해 나갔다. 2차 교단 분열 직후 감리교회 안에서는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예배당과 재산을 차지하려는 무력충돌과 법정소송이 이어졌다. 그런 혼란기에 호헌·총리원 양측에서 정치권력의 힘을 빌려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시도들이 추진되었다. 그런 배경에서 ‘박마리아 명함’이야기가 나왔다. 1954년 3월 총회에서 호헌파가 분열해 떨어져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구내에 있던 총리원에 경찰이 들이닥쳐 회계 장부 일체를 압수해갔다. 이때부터 수개월에 걸쳐 유형기 감독을 비롯하여 총리원 관계자들이 ‘공금 횡령 및 유용󰡑 혐의로 집중 조사를 받았다. 대략 세 가지 혐의였다. 첫째, 어느 감리교 평신도가 정부 공사에 입찰 신고를 하는데 필요한 예금잔고서를 마련하기 위해 총리원 회계 장부에서 빼내 사용하고 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비록 총리원 돈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총리원 돈이 개인 통장으로 나갔다 왔음으로 유형기 감독이나 회계 장기수 목사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둘째, 1952년 여름 교육국 주최로 신탄진에서 주일학교 지도자 강습회를 개최하였을 때 사용하고 남은 식량 40여 가마를 개인적으로 횡령했다는 혐의로 교육국 총무였던 김광우 목사가 집중 조사를 받았다. 셋째, 서소문에 있던 토지 임대권리 양도 계약금으로 15만원을 교육국 재정에서 지출한 일로 역시 김광우 목사가 조사를 받았다. 그 땅의 임대권 소유자는 중앙신학교로서 당시 중앙신학교 이사장이 야당(민주당)에서 활약하고 있던 정일형 목사여서 그의 명의로 계약금이 지출되었는데 이 때문에 󰡒총리원을 통해 야당에 정치자금이 흘러 들어간다.󰡓는 의혹을 받았고 그 때문에 더욱 집요한 조사를 받았다. 결국 유형기 감독은 ‘공금 유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되었다. 유형기 감독을 비롯한 총리원 관계자들은 조사받는 과정에서 사건은 감리교회의 내부 투서로 시작되었으며 ‘정치적인󰡑 배경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았다. 총리원측은 사건 담당 검사로부터 󰡒사건 배후에 정부 고위층이 있는 것 같다󰡓는 언질을 받고 갈홍기 박사를 의심했다. 당시 공보처장으로 있던 갈홍기 박사는 1946년 재건파 분열 당시부터 유형기 목사나 김광우 목사와 반대편에 섰던 인물로 자유당 정권의 ‘실세󰡑로 통하던 그가 ‘호헌파󰡑와 결탁하여 사건을 정치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총리원측은 검찰총장을 움직일 수 있는 ‘보다 높은 윗선󰡑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총리원 실행위원이었던 박마리아의 명함을 얻게 된 것이다. 김광우 목사의 증언이다. 󰡒당시 이사회 실행부 위원에는 김활란, 박마리아, 박현숙씨 등과 몇몇 목사들이 있었다. 이 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진정서를 보이고 서명 날인을 청하였다. 그들은 다 교회를 위하여 순응을 하였다. 그 다음 박마리아씨의 명함을 얻었다. 검찰총장에게 나를 소개하는 명함이었다. 나는 그 명함을 가지고 진정서를 휴대하고 총장 비서실의 문을 노크했다. 총장이 진정서에 날인한 이름들을 훑어보더니 그 진정서를 비서실에 접수하라고 하며 모든 사정을 잘 알겠다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해주었다. 나는 재삼 관대히 선처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때 검찰총장은 한격만씨였다. 전형적 법관의 모습이 얼굴에 박힌 깡마른 체구의 인물이었다. 당시 세도가 당당한 박마리아씨의 명함을 보았던 때문인지 퍽 친절하게 문밖에까지 나를 배웅하면서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한 마디 하는 말이 ‘책동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진정서가 유효했는지 검찰에서는 ‘기소유예’ 처분으로 이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곧바로 총리원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총리원측은 호헌파로 나간 목사와 교회에 대한 법정 소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소송의 빌미는 호헌파에서 제공했다. 당시 총리원 유지재단에 속한 교회 재산은 대부분 대지만 등록되어 있고 예배당이나 사택 건물은 미등기인 상태가 많았는데 호헌파로 나간 교회에서 교인 대표 명의로 건물 등기를 한 것이다. 그 결과 토지는 총리원, 건물은 호헌파 소유가 되었다. 그러자 총리원측에서 ‘교회 건물 등기 말소 소송󰡑을 제기하였고 소송이 걸린 교회마다 예배당 쟁탈전이 벌어졌고 경찰이 동원되었다. 당시 호헌파를 이끌었던 박설봉 목사의 증언이다. 󰡒드디어 보복의 회오리바람이 강력하게 일어났습니다. 즉 사회재판이 40여 건 걸려 온 것입니다. 고 조화철 목사는 ‘설교 가차압󰡑을 당했고 동대문교회는 ‘교인의 교회출입 가처분 신청󰡑에 걸렸으며 천안교회, 만리동교회, 중앙교회 등 25여 교회 및 주택 명도 소송이 걸렸고 또 고명균 목사의 경우는 교회 재판을 열어 호헌파라고 목사 파면 처분을 받았고 고목사는 돈암동교회에서 쫓겨났으며 그것도 부족해서 자유당 박마리아 명함을 가지고 경찰을 앞세워 종로 중앙교회에서 설교하고 있는 엄재희 목사와 정등운 목사를 강당에서 끌어내렸습니다. 또한 상이군인 30여 명을 방O신 목사와 박O번 목사가 끌고 와서 예배 보는 교인들을 전부 끌어냈으며 남양교회 장호원교회는 방O신 목사가 도끼로 예배당과 강단을 때려 부수고 야단법석을 쳤습니다. 이것도 다 박마리아의 명함에 의하여 경찰 입회 하에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규탄한다고 해서 시경 강력계 형사들이 총동원되어 체포 선풍이 불어왔습니다.󰡓 호헌파는 총리원측이 경찰의 비호를 받아가며 호헌파 목사와 교회를 탄압한 배경에 ‘박마리아의 명함󰡑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총리원 회계 부정 사건을 ‘기소 유예󰡑로 흐지부지 끝나게 만든 것도, 호헌파 교회에 경찰이 들이닥쳐 교인들을 몰아낸 것도 모두 ‘박마리아의 명함󰡑 때문이라 본 것이다. 하긴, 그 시기 ‘박마리아의 명함󰡑은 교계 뿐 아리라 일반 정치 사회에서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화여자대학 교수였던 박마리아의 명함이 이처럼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시 자유당 실세였던 국회 부의장 이기붕의 부인이라는 사실 외에 개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박마리아의 명함󰡑을 둘러싸고 벌어진 호헌파와 총리원 사이의 힘겨루기는 분열시대를 사는 한국 감리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교회가 분열된 것만도 부끄러운 일이고, 목사와 교인 간에 토지와 건물을 둘러싸고 소유권 소송을 벌인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인데 상대편을 제압하기 위해 ‘윗선󰡑을 찾아 세속 정치권력과 결탁한 것은 더더욱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교회는 점차 세속 정치권력과 ‘부정한󰡑 유착관계를 맺게 되었다. 특혜인가? 행운인가?: 광화문 감리회관 호헌파 분열의 빌미를 제공했던 유형기 감독이 2차 임기를 마치는 1958년 9월 총회 서두에 행한 ‘감독 연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1930년 총리원이 생긴 이래 집 없이 지나던 총리원은 모교회[미국연합감리교회]의 후의로 두 달 전에 광화문 네거리에 감격에 넘치는 기공식을 거행했습니다. 광화문 네거리에 245평을 얻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 터를 얻는데 힘써 주신 이들이 많습니다만은 특별히 우리의 존경하는 이기붕 의장의 수고가 컸으며 또 그 터에 건축 허가를 얻는데는 우리 회원의 한 분이신 김활란 총장의 수고가 컸습니다. 그 두 분과 또 직접 간접으로 수고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총리원은 그 때까지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 구내에 있는 한옥 건물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본래 조선시대 궁궐 부속 건물로 사용되던 것인데 미감리회 선교부가 사서 감리교신학교 구내로 옮기고 처음엔 교사로 사용하다가 1930년 이후 총리원 사무실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신학생들이 급증하여 교사가 부족하게 되었고 건물도 낡아 학교 밖에 총리원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광우 목사가 수복직후 서소문에 있던 중앙신학교 소유 건물 임대권을 확보하려 했던 것도 총리원 건물을 마련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 중 하나였다. 그 무렵 감리교회가 운영하던 국제대학도 건물이 필요했다. 국제대학은 1946년 설립되었지만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고 교수진과 시설미비로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 인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는데 1956년 4월 감리교회가 재단법인 ‘감리학원󰡑을 설립하고 학교를 인수하여 유형기 이사장, 김광우 학장 체제로 재출발하였다. 국제대학은 당시 유일한 ‘야간 대학󰡑으로 학생은 많았지만 교수와 교사(校舍)를 확보하지 못해 무인가 학교로 폐교 위기를 맞고 있었다. 1957년 1월 이사회는 학장을 문창모 장로로 교체하고 본격적으로 학교 대지 확보에 나섰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광화문 네거리, 중구 태평로 1가 64번지에 있는 1천여 평 땅이 나왔다. 일제시대 일본인 소유였다가 해방 후 적산이 되어 국방부에서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총리원과 국제대학 이사회는 공동으로 불하받아 5층 건물을 짓고 1-3층은 총리원에서, 4-5층은 국제대학에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불하받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사회국 총무였던 문창모 장로의 증언이다. 󰡒신청 단체는 모두 27개였는데 우리가 27번째로 접수했다. 경쟁이 아주 치열했던 만큼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리고 국방부에서는 민간인에게 불하하는 것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사회는 이기붕 의장을 찾아가 교육사업을 위해 꼭 불하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의장은 곧 적산관리청을 찾아가 설득하고 민간에게 불하하는 것을 반대하는 국방부를 설득하여 우리 국제대학이 그 땅을 불하받을 수 있었다.󰡓 적산관리청과 국방부를 움직인 것은 이기붕 국회의장이었다. 그래서 󰡒광화문 감리회관은 이기붕 의장이 준 것이다󰡓는 소문이 돌았다. 총리원 실행부 위원에다 국제대학 이사, 총리원 건축위원이었던 그의 아내 박마리아도 힘을 썼다. 자유당 정권의 ‘막후 실세󰡑로 통하던 박마리아를 재단 이사로 끌어들인 것은 그가 부총장으로 있던 이화여대의 김활란 총장이었다. 유형기 감독이 1958년 9월 총회에서 총리원 기공식을 보고하면서 이기붕 의장과 김활란 총장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서울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한 감리회관은 특혜로 얻은 선물이었다. 대지 확보와 건축 허가 과정에서 이기붕 ․ 박마리아 부부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았다. 특혜는 ‘빚󰡑이다. 특히 정치인으로부터 받은 특혜는 그러했다. 감리교회가 정치권으로부터 특혜성 지원을 받고 있을 1958년 봄은 ‘5․2총선󰡑으로 불리는 제 4대 국회의원 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으로 집권 자유당으로서는 개헌 통과선인 국회의원 ‘3분의 2󰡑 확보를 위해 정치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서 이기붕 의장은 기독교인의 ‘몰표󰡑가 필요했고 당선 가능한 기독교인 후보가 필요했다. 비록 떨어졌지만 국제대학장 문창모 장로가 자유당 후보로 김포지역 민의원 선거에 나간 것도 이기붕 의장의 강력한 추천과 권고 때문이었다. 그만큼 당시 감리교회 지도부는 자유당 정권과 밀착되어 있었다. 잦은 교회 분열로 가뜩이나 ‘싸우는 교회󰡑라는 비난을 받고 있던 차에 부패한 정권과 결탁하여 이권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 교회의 권위는 더욱 떨어졌다. 기독교계의 자유당 선거지원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 야욕은 1954년 11월, 소위 ‘사사오입 개헌’으로도 불리는 3선개헌안의 무리한 추진에서 드러났다.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한 3선 개헌안을 근거로 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5월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 나섰고 부통령으로 이기붕 의장을 지목하였다. 무리한 3선 개헌과 이기붕 부통령 후보지명이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음에도 기독교계는 3선을 노리며 대통령후보에 나선 이승만과 그의 정치 파트너를 적극 밀어주자는 입장을 표명하고 나섰다. 당시 기독교계 일반 대중지로 널리 읽히고 있던 <낙원>에서는 이승만에게 ‘경천애인의 민족적 지도자’란 칭호를 붙인 후 그를 ‘다윗’과 비교하여 인간적인 실수까지도 덮어주자는 논지를 폈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失手)가 있었다고 하자. 다윗에게도 실정(失政)과 실수는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백성을 사랑하는’신앙의 사람은 그의 인간적인 연약과 결여에도 불구하고 그가 십자가 앞에 겸허하고 회개할 때 그를 통하여 신의 대능(大能)이 나타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경천애인의 민족적 지도자의 3선을 바라고 또한 그의 대를 이을 신앙과 신념의 사람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그래도 안정권이었는데 부통령 후보로 나선 이기붕에 대한 대중의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당으로서는 부통령 선거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고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이기붕이 ‘감리교 권사’인 것을 강조하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그래서 당시 자유당 선전부장이었던 황성수 장로는 <낙원>에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썼다. “이 대통령께서 전당대회에서 총재각하(이기붕)를 지정한데 유의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통령 지명을 ‘공의’로 생각하셨다는데 중대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각하께서 지명하신 ‘진정한 애국자’ 그리고 ‘부통령의 직책을 완수할 적격자’이신 이기붕 의장을 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서의 그 양심적이며 민주주의적이며 실천적인 정치를 통하여 민족의 백년대계에 광명을 이룩하기를 국민에게 호소하는 바이다.” 이처럼 기독교계 인사들이 나서서 󰡒이승만 ‘장로󰡑를 대통령에, 이기붕 ‘권사󰡑를 부통령에 당선시키자󰡓며 ‘종파의식󰡑에 호소하고 나선 것은 당시 자유당 정권이 계속된 실정으로 민심을 잃어 ‘친 기독교적󰡑 정권 유지가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과 맞선 천주교인 장면의 인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에 개신교 지도자들은 선거를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대결로 몰아가며 ‘1백 2십만󰡑 개신도인들의 결집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기독교계 지도급 인사들은 1956년 5월 실시될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정․부통령선거추진 기독교도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자유당 선거를 지원하고 나섰다. 자유당을 지지하는 친여 기독교계인사들로 조직된 기독교도중앙위원회에서는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남북통일과 도의건국을 완수하기 위하여 장로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이대통령이 지명한 진실한 보필자이며 양심적인 정치가 권사(집사) 이기붕 선생을 부통령으로!”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전국 기독교도들에게 발표하였다. 󰡒한국의 기독교의 진실과 양식으로 조국의 방향이 지어질려고 합니다. 정치가 작란이나 도박이나 요행이 아닌 이상 우리가 이박사가 자기의 정치의 동반자로 택하신 이기붕씨를 앞으로의 4년간의 부통령으로 선택하는 것은 극히 건전한 하나의 상식입니다. 조국과 겨레의 운명이 결정지어질 순간입니다. 상식 이하의 불작란으로 화재를 일으키지 마십시다. 우리나라의 정치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자유의 꽃이 피고 번영의 열매가 맺도록 이승만 장로와 이기붕 권사를 우리 한국 교회 백이십만 신도는 밀고 또 밀어주시기를 삼가 권고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1956년 선거 결과는 자유당의 ‘사실상 패배󰡑로 나타났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장로󰡑가 5백만여 표(55%)를 얻어 당선되기는 했지만 온갖 탄압을 받으며 도전했던 진보계열의 조봉암이 얻은 2백만 표(24%)를 얻었고 자유당 지지를 거부한 무효 1백 8십만 표(22%)의 의미도 컸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이 장면에게 2십만 표 차이로 패했다는 점이다. 국민은 ‘야당󰡑 부통령을 선택함으로 자유당 정권의 독주를 견제하였다. 그럼에도 교회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유당과의 연결된 청탁과 지지의 끈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더욱이 자유당 정권의 ‘막후 실세󰡑로 꼽히던 박마리아는 1954년 이후 감리교 총회 총대가 되어 총리원 이사 및 실행부 위원, 감리교신학대학 이사, 감리학원(국제대학교)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교회 정치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 관계로 종종 이사회가 박마리아의 사택에서 개최되었고 그 때마다 감리교 지도자들은 서대문 ‘국회의장댁󰡑에 초대받아 가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청탁성󰡑 민원이 전달되었는데 교회와 우호적 관계 유지를 원했던 자유당 정부로서도 교계 청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1959년 1월 민의원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기독교계의 대표적 언론이었던 <기독시보> 사장 강수악이 교계잡지 <기독교계>에 쓴 글은 당시 한국교회의 정치권력 결탁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한 사람도 없고 정부 요직에 기독교인 한 사람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매일같이 일어나는 교계의 대소사·교인들의 대소사의 처리와 해결을 청탁하기 위하여 얼마나 막막한 것인가는 정치에 냉담을 가장하는 자다. 기독교교육협회 협동총무 엄요섭 목사가 시교육위원이 되니 제일 먼저 청탁을 가져 오고 또 혜택을 입는 곳이 기독교계 학교들이었다는 것은 최근의 실례다.” 물론 기독교인 중에 정일형 ․ 조병옥 ․ 윤보선 같은 ‘야당󰡑 정치인이 없지 않았으나 이들을 드러내놓고 지지하는 목사나 교인은 없었다. 반면에 교계 인사들의 자유당 지지는 공개적이었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자유당 정권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1960년 3월 15일 대선에서 또다시 연출되었다. 1960년 대선에서 자유당은 이승만-이기붕 카드를 또다시 내놓았다. 야당에서는 이번에도 천주교인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 명의로 기독교계 신문에 실린 광고 내용의 일부다. 󰡒부통령은 네 분이 나오셨읍니다마는 교회의 여론이 지지할 수 있는 분은 리기붕 한 분뿐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리기붕 선생은 그 성실한 인품이 어려서부터 교회 분위기와 교회 생활을 통하여 조성된 것이며 부인 박마리아 선생과 더불어 오늘도 교회와 기독교 교육사업을 위하여 한결같은 성심을 기우리는 교인이십니다. 더욱이 카도릭이 우리나라 정치 속에 침투할 가능성이 무르익어가는 이때에 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서는 신교의 신망과 기대를 리기붕 선생에게 걸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선전이란 점에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당시 기독교계(개신교)의 보편적 여론을 대변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들은 1) 그 동안 기독교계가 이기붕․박마리아 부부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2) 장면을 내세운 가톨릭계의 정치 세력 확산 의도를 방어하기 위해 이기붕 지지를 호소했다. ‘친여󰡑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1960년 대선에서 달라진 민심 때문에 1956년 선거 때만큼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승만 ‘장로 대통령’과 이기붕 ‘권사 부통령’ 후보 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런 식으로 한국교회는 독재와 부패의 오명을 쓰기 시작한 자유당 정권과 공동 운명체로 묶이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의 장기 독재와 부패와 타락에 염증을 느끼고 등을 돌린 민심을 읽는데 실패했다. 부패한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돌아선 민심은 새로운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교회는 다가올 민중의 심판을 읽지 못하고 ‘정치적 후원자󰡑로서 자유당의 집권 연장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각종 교계 행사에 자유당 인사들이 초청받았고 ‘돈을 싸들고’ 지방교회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는 ‘정치꾼 목사’들까지 등장했다. 그 때문에 양식 있는 학생 ․ 지식인들로부터 한국교회는 ‘자유당 주구󰡑란 비난을 받아야 했다. ‘3 ․ 15부정선거󰡑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현장에, 그리고 백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끝에 이승만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남으로 4·19 학생혁명이 이루어진 순간에도 기독교계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놓치고 만 반성의 기회 4·19는 한국 교회에 회개를 촉구하는 하느님의 심판이었다. 썩은 정치와 함께 기생하며 살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예언자적인 삶을 살지 못한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징계였다. 4·19로 한국 기독교는 죽어야 했다. 철저하게 죽을 때 거기에 부활, 다시 삶이 있음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어야 했다. 󰡒4․19를 겪고 난 우리 낡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만 부끄러움과 자책하는 마음에서 학생 제군들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학생들의 시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1960년 5월 초, 감리교신학대학 홍현설 학장이 기독교방송에 출연해서 토로한 것처럼 󰡒교회는 4․19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그것은 자유당 독재정권을 암묵적으로 지지했던 교회의 ‘죄책 고백󰡑이었다. 4·19 학생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 쓸쓸하게 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난 이승만 대통령, 자살로 마감한 이기붕 일가의 비참한 모습은 이들의 권력 연장과 유지를 적극 지지, 후원하였던 한국교회의 붕괴된 권위와 위상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4·19 직후 한국교회 지도자들은‘창피와 수치’를 느꼈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가 속했던 감리교회 교인들의 자괴감은 더욱 심했다. 감리교 평신도로서 당시 <기독교사상>을 편집하던 장병일의 ‘자아비판󰡑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날의 한국 교회는 참 의미에서의 교회가 아닌 가인의 종교였다. 자체의 부패와 모순과 과오는 잊어버린 채, 맥 빠진 교회의 의식과 행사만을 강요하여 왔으니 말이다. 그리고도 자파의 세력 형성과 교권쟁탈에 혈안이 되어 밤을 새우지 않았던가? 민주의 새 아침이 밝아오기까지, 민족의 분노가 터지고 형제의 피가 쏟아지던 그 날도 한국 교회는 발코니에 앉아 교권 쟁탈을 위한 모의에 분주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찌 가인의 종교가 아니라 하겠는가. 교회가 이 꼴이고야 그 나라의 정치가 아니 썩고 아니 망할 리 없다.…… 그러므로 리승만 정권의 부패는 벌써 한국 교회의 부패에서 온 것이다. 그들의 정권은 오늘의 ‘가인󰡑으로 실증되었으나, 한국 교회는 오래전부터 이미 ‘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아벨을 교회 밖에서 죽였고 교회는 아벨을 교회 안에서 죽였다.󰡓 독재 정권 하에서 ‘가인󰡑의 역할을 했던 한국 교회는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160여 명 ‘아벨의 피󰡑에 책임을 져야 했다. 정릉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송흥국 목사는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 교회의 죄목을 밝혔다. 󰡒우리 교회가 과거에 저지른 과오는 무엇이었던가? 1) 교회는 정권과 손을 잡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용하기도 하며, 이용도 당하였다. 교회는 언제나 야당적 입장에서 예언자적 지위를 고수해야 한다. 2) 교회는 한 몸 된 의식을 잊어버리고 교회 내에서 파쟁으로 교회를 약화시켰으며 교회가 사회 정화와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 3) 교회는 속화되어 복음의 선전보다 교권의 장악을 위한 계획과 활동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는 무기력하게 되어, 불 꺼진 등잔, 맛 잃은 소금, 물 없는 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되고 있었다.󰡓 ‘교회 자성론󰡑은 ‘교단 정화론󰡑으로 연결되었고 자유당을 지지했던 교계 지도자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숙정(肅正)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5월 중순 감신 학생들이 총리원을 ‘항의 방문󰡑하여 󰡒3․15부정선거에 관련된 감리교 지도자들의 회개󰡓를 촉구한 것으로 필두로 평신도들도 6월 6일 남산교회에서 장로회 기도회를 개최하고 ‘교계 정화󰡑를 촉구하였는데 이때부터 ‘물러나야 할 목사󰡑 명단이 돌기 시작했다. 이 같은 교계 여론에 밀려 총리원 이사회는 마지못해 6월 30일 󰡒3․15 부정선거에 집권당에 가입 혹은 가담한 교역자를 적당히 처리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적당히’란 표현이 청년 학생 교인들을 흥분시켰다. 얼마 전까지 자유당 정권 유지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던 총리원 집행부의 이 같은 ‘미온적󰡑 자세에 대한 소장파 목회자들의 불만은 높아만 갔다. 결국 7월 22일 경기도 입석 캠프장에서 열린 전국기독교교육지도자 강습회에 참석했던 지방 목회자들은 ‘변명만 늘어놓는󰡑 총리원 간부들의 태도에 분노하여 󰡒집권당에 아부하여 교회의 권위를 손상케 한 교역자를 현직에서 사퇴케 할 것󰡓과 󰡒만일 이것을 단행할 수 없거든 감독과 각국 총무는 깨끗이 물러 갈 것󰡓을 골자로 한 <입석 목사단 7․26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신학생과 소장 목회자들의 총리원 항의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결국 김종필 감독을 비롯한 각국 총무들과 총리원 이사들이 사표를 냈고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특별 총회가 열렸다. 8월 30일 특별총회 총회장인 종교교회 입구에는 ‘3․15부정선거 관련자 퇴진󰡑을 요구하는 신학생과 소장파 목회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총회는 초반부터 ‘임원 개선󰡑 방향을 두고 논란을 빚었다. 처음에는 개혁론자들의 주장이 먹혀들어 󰡒규탄 대상자는 뽑지 말자󰡓는 여론이 우세했으나 점차 현실론자들의 반격에 밀려 󰡒신인을 많이 뽑자󰡓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가급적으로󰡓라는 단서까지 붙였다. 그만큼 기득권층의 저항은 완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을 포함한 총리원 임원들의 ‘신임 투표󰡑가 시작되었다. 김종필 감독은 재신임에 필요한 ‘3분의 2󰡑를 간신히 넘긴 65표로 감독직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나머지 전도국 총무(마경일)와 교육국 총무(김주병), 사회국 총무(한영선), 회계(장기수)의 사표는 모두 수리되고 그 자리에 윤창덕 ․ 전종옥 ․ 유증서 목사와 박이남 장로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총리원 이사 선출에 들어가 기존 28명 중에 3분의 2가 넘는 19명이 새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이 같은 임원 교체는 개혁을 바라는 감리교회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완의 혁명 4·19 4·19가 한국교회에 던진 메시지는 ‘회개와 반성’이었다. 한국교회는 그것 외에 다른 것으로 4·19를 대할 수 없다. 무엇을 반성하고 회개할 것인가? 무엇보다 해방 직후 교권 분쟁에 몰두하여 자기 정화 능력을 상실함으로 부패한 정권에 대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한 정권과 결탁하여 그 선전 도구가 되었던 과오를 회개해야 했다. 단지 같은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그 능력과 자질을 묻지 않고 정치인들을 맹목적으로 지지, 후원함으로 집단 이기주의의 대표적인 집단으로 전락하여 일반사회로부터 권위와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했다. 다윗 임금 앞에서 그의 잘못을 지적했던 나단과 같은 예언자적 용기를 상실하여 “나만 옳다.”는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배타적 독선(獨善)에서 비롯된 독단(獨斷)과 독주(獨走), 그리고 독재(獨裁)를 견제하지 못했던 실수를 반성해야 했다. 그런 반성과 회개 후에야 새롭게 전개될 역사에 창조적 참여가 가능했다. 당시 감리교단 총리원 전도국 총무로 있으면서도 자유당 정권에 맹목적 지지를 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눈치를 받았던 마경일 목사. 그는 4·19직후 사태책임을 느껴 제일 먼저 사표를 제출함으로 교단 쇄신운동의 불씨를 지폈는데 그가 교단지 <감리교생활>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당시 한국교회가 했어야 할 회개와 반성,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기독교인이라는 조건을 이용하여 그것을 배경삼아 높은 지위를 꿈꾸고 부당한 이권을 노렸던 것이다. 대통령의 이름을 걸머지고 긁어모은 모리, 그 그늘 밑에 숨어서 집어삼킨 이권, 그 끄나풀 붙들고 기어 올라가려던 엽관운동, 그 등살을 믿고 세도를 부리고 행세해 보려던 어중이떠중이들, 이런 것들이 모든 사회부정의 바탕을 만들어 놓았다. 아! 그 욕심, 그 허영, 그 출세욕 등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수많은 기독교인의 양심을 마비시켰다. 실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그러니까 입이 있어도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가 되고 눈이 있어도 볼 줄 모르는 소경이 되었다. 이렇듯이 자체가 병들고 부패하고 말았으니 어떻게 사회부정을 시정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맛 잃은 소금이었다. 불 꺼진 등불이었다. 수뢰, 독직, 부정을 감행하다가 4·19사태 이후 그 전모가 세상에 폭로됨으로 사직의 손에 걸려 심판을 받아야 할 원흉들 중에 우리는 여러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섞여 있음을 볼 때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 기회에 깊은 통회와 자성을 가져야 한다. 민족과 사회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걸음을 솔직하게 자인하고 이를 속죄하기 위하여 이제부터의 우리의 삶을 민족봉사의 길로 옮겨 놓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사는 길이요 나아갈 길이다.” 화개와 반성,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는 기독교 신앙 가치이자 역사 속의 책임이다. 특히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확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들의 반성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 8·15 직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4·19 직후에도 한국 사회와 교회는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미봉책으로 위기 상황을 피해가려고만 했다. 4·19 직후 1년 간 진행된 정치적, 사회적 혼란 상황을 빌미로 터진 군사혁명은 역사청산과 정리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군사혁명정부는 4·19 학살의 표면적 책임자들과 그들의 지시를 받고 시위대에 폭력을 행사했던‘정치 깡패’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것으로 정치 쇄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자유당 독재와 타락, 부패의 근본적 원인을 밝히고 척결하는 청산작업은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유당 시절 권세를 누렸던 세력들은 여전히 1960년대 공화당 정권, 1970년대 유신정권, 1980년대 군부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권력 핵심부에서 권세를 누렸다. 그 결과 4·19는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상황은 기독교계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타락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었던 기독교계 안에서도 4·19 직후에는 청년학생과 소장파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정권에 대해 ‘예언자적 감시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자유당 정권에 유착하여 ‘자유당 주구’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적극 활동했던 목회자와 평신도들에 대한 숙정 요구가 제기되기는 했으나 그것도 잠시, “누가 누구를 정죄할 것인가?”하는 집단적 공범의식에 근거한 책임무용론이 확산되었다. 더욱이 실질적으로 책임자를 문책하고 교단 지휘부를 교체할 수 있는 ‘정치적 권한’이 없는 청년학생이나 소장파 목회자들의 제기한 정풍운동의 한계는 분명했다. 여기에 1년 후 군사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정치 환경이 조성되면서 4·19와 관련한 기독교계의 회개와 반성운동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렇다보니 자유당 정권과 유착 하여 정계와 교계를 넘나들며‘비신앙적’활약을 보였던 기독교계 인사들이 196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공화당과 유신정부, 군부독재 정권과 유착관계를 맺고 각종 이권과 교계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교계 지도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 오늘 ‘안티 기독교운동’의 촉발 원인의 하나가 된 한국교회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은 그렇게 해서 조성되었다. 그 때, 회개를 했으면 철저하게 했어야 했다. 반성을 해도 완전하게 했어야 했다. 하다가 만 치료가 병을 더 악화시키듯, 그 때 하다가 만 회개와 반성은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 권력지향적인 정교유착(政敎癒着)과 사회적 양심에 둔감한 도덕적 불감증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렇다보니 교회의 대(對) 사회적, 정치적 ‘예언자’기능이 약화된 것은 물론이고 교회 자체도 그 존재와 사역의 기본근거가 되어야 할 신앙의 자리를 떠나 물질적인 관심과 세속적인 방법으로 교회 일을 해결하고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급속한 물량적 성장을 이룩하여 거대한 몸집을 갖추기는 했으나 그 영적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에서는 50년 전의 그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한국교회는 시간적으로 21세기 글로벌시대를 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자유당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4·19를 ‘미완의 혁명’으로 부르는 이유다. 끝나지 않은 혁명, 그것이 데모 현장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기독학생 이근형이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고 죽은 이유일 것이다. 맺음 글 혁명의 완성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책임이다.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 혁명은 ‘뒤집어엎는 운동 ’이자 ‘제 자리를 찾아가는 운동’이다. 비정상적인 것을 뒤집어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제자리를 떠나 있던 것을 끌어다 제자리로 돌려놓는 운동이다. 교실에 있어야 할 학생과 공장에 있어 할 노동자, 부대에 있어야 할 군인, 성전에서 있어야 할 목회자가 거리로 나온 것은 거꾸로 된 세상을 바로 잡아 놓기 위함이다. 뒤집어 바로 잡은 다음 그들은 떠나왔던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뒤집은 다음 되돌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또 다른 혁명의 대상이 된다. 오늘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 이런 ‘역혁명’(逆革命, counter-revolution)이 아닐까? 강단을 떠나 거리를 방황하는 목회자들, 기도실을 떠나 의사당을 기웃거리는 교계 지도자들, 선거철만 되면 교인표를 얻기 위해 종교집회만 찾아다니는 철새 정치인들....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이 뒤집혀 교정되어야만 4·19 희생자들이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입을 벌려 외쳤던 민주와 정의, 그리고 평화가 이 땅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교회 안에, 기독교계 안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야 하겠다. 지금부터 80년 전, 지금보다 훨씬 적은 숫자로도 일제식민통치 하 민족사회에 영적 권위와 지도력을 발휘했던 한국교회를 향하여 그것도 부족하다며 근본적인‘혁명’을 외쳤던 시대의 양심 최태용 선생의 절규처럼 말이다. “신학은 많고 신앙은 적고 기도회는 많고 기도는 적고 단체로서의 수는 많고 신앙의 개인은 적고 사람의 지혜로의 운동은 많고 하나님 자신의 권능의 일은 적다. 이 많은 일이 적게 되고 이 적은 일이 많게 되어야 세상은 바른 세상이니 그러면 세상이 그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지금 세상은 한번 뒤집혀야 한다. 아! 세상은 역시 한 혁명을 요한다.”
70인역(LXX) 성경은 어떤 책인가?/ 성경역사와 교회사/ 2013-03-18
70인역(LXX) 성경은 어떤 책인가? 칠십인역 성경(七十人譯-) [영] Septuagint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그리스어 역. 본국 팔레스티나를 떠나, 지중해 연안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의 수가 증가하고, 전통적인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많아 졌다. 그런데서, 그들을 위해서도 당시의 일반적인 언어였던 그리스어로 구약성서를 번역할 필요가 생겨져, 전 250-200년경, 에집트의 알레산드리아에서 완성되었다.이 최고(最古)의 번역 성서인 그리스어역이 70인의 학자의 손에 의해 된 것이라는 전통적인 기록에 의해서 보통 [칠십인역](Septuaginta-70을 의미하는 라틴어)이라 부르고, 그 약기호 LXX를 쓰고 있다. 이 번역 사업에 관한 기록 문서로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The letter of Aristeas](->)로 불리우는 위경이 있다. 이 칠십인역 성서는 일찍부터 그리스도 교회의 성서로 되어,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전거로 쓴 성서는 이것이었다(행 18;28 참조). 또한 바울의 편지를 비롯하여 신약성서에 인용되어 있는 구약의 말은, 거의 이 칠십인역에서의 것이다. 곳에 따라서는, 히브리어 원전과의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 칠십인역 성서의 사본은 최고의 것이 보존되어 있어서, 구약성서 본문의 비교 연구에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칠십인역 성서 - 七十人譯聖書 〔라〕Septuaginta,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그리스어 번역본(칠십인역성서).본국 팔레스타인을 떠나 지중해 연안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의 수가 늘어나고 전통적인 히브리어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그들을 위해 당시의 일반적 언어였던 그리스어로 구약성서를 번역할 필요가 생겨 기원전 250∼20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완성됐다. 헤브라이어(語)《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서. 원래는 헤브라이어 원전의 부분 번역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여기에 및 일반 복음서 등의 번역까지도 포함시켜 약기호(略記號)로 LXX라 불렀다. 72명의 학자가 번역에 참가했다는 전설에 따라 이 이름이 붙었으나, 대부분은 소수집단에 의해 번역되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이 이루어졌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요구로 먼저 이 BC3세기 중엽에 번역되고 그 뒤 100년 사이에 현행 정전(正典)의 대부분이 번역되었다. 신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도 중요한 자료이며 《신약성서》의 문체·사상연구에도 가치가 크다. 이 최고의 번역 성서가 70인 학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기록에 의해 보통 「70인역」이라고 부른다(약호는 LXX).70인역 성서는 일찍부터 그리스도교회의 성서로 되어,「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전거로 쓴 성서는 이것이었다(행18:28 참조).이 성서의 사본은 가장 오래된 것이 보존되어 있어 구약성서 본문의 비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칠십인역성서(七十人譯聖書) 는 셈어계에 속하는 중앙 셈어의 하나인 헤브라이어로 쓰여진 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기독교의 성전. 오늘날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구약성서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본래는 헤브라이어 원전인 종교적·도덕적·사회적·생활에 관하여 신이 인간에게 지키도록 내린 규범인 의 부분적인 번역을 일컫는 것이었지만 초창기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여기에 구약성서에 실려 있는 전예언서인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 등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의 사대예언자와 호세아,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의 12소 예언자의 서를 일컫는 후예언서의 총칭으로 일반적으로는 후예언서를 말하는 및 일반 복음서 등의 번역서까지도 넣어서 약기호로 LXX라고도 불리었다. 72명의 학자들에 의하여 번역되었다는 전설에 따라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으나 대부분은 소수집단에 의해서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작업이 이루어졌으며, 바빌론유수를 계기로 하여 팔레스티나를 떠나 온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을 일컫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요구에 의해서 먼저 이 BC 3세기 중엽에 번역이 이루어졌고 이후 100년에 걸쳐서 지금의 정전의 대부분이 번역되었다. 신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로 되고 있으며 에 대한 문체나 사상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큰 가치가 있다. 70인역의 완성으로 구약성서가 한권으로- 칠십인역\' 성경은 바벨론 포로 이후 이방인의 땅에 사는 디아스포라인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을 위해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구약성경)을 당시 세계 공통어인 헬라어(코이네)로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프톨레마이오스2세(재위 주전 285-246년)의 명에 의해 예루살렘의 학자 72명(또는 70명)이 당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한 것이다. 바울도 \'칠십인역\'에서 인용하곤 하였다. 네스틀레 - Eberhard Nestle 1851∼1913,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신약성서 문헌학자. 울름대학과 마울브론신학교 교수를 거쳐 1912년 마울브론신학교 학장을 역임하였다. 동방 여러 언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70인역(七十人譯, Septuaginta)을 연구하고, 다음으로 《신약성서》의 원전연구를 시작하여 1888년 오늘날 가장 권위있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간행하였으며 라틴어 성서 및 루터의 독일어역 성서도 편집하였다.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윌리암 윌버포스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윌리암 윌버포스 윌리암 윌버포스는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초기 복음적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숙부와 살았다. 숙부는 노예 상인이었다가 찬송가 작가가 된 존 뉴턴의 친구였다. 1780년 대학 동창생 피트와 함께 하원 의원에 당선되어 의회 개혁과 로마 가톨릭교도의 정치적 해방을 지원하였다. 그 후 1784∼1785년 유럽 여행 중에 그의 교장이었던 아이작 밀러와 토론을 하면서 유명한 종교 서적 「영혼에서 종교의 발생과 진보」와 성경을 읽는 중에 심도 있는 회심을 경험하게 됐다. 이로써 그는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천이 되었다. 윌버포스는 1785년 후반에 영적인 회심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이전의 습관들을 모두 버렸다. 그의 중요한 공적 경력을 모두 노예 해방 운동에 헌신했다. 1787년 그의 노예 해방 투쟁은 하원의 노예 문제 개혁 운동의 지휘를 떠맡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일에 대한 동기와 결의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라고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윌버포스는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시와 노래, 사진 판매, 노예 제도를 통해 생산한 설탕 불매 운동 그리고 탄원서 제출 운동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한 대중 여론 조성과 책자 출판을 통해 노예 제도 폐지를 전개했다. 드디어 1807년 영국 하원은 그에게 유례 없는 열광과 존경을 보내면서 '노예 무역 폐지법'(The Abolition Act)을 통과시켰다. 그는 박애주의적 개혁을 추구하는 복음주의자 그룹의 중심 인물로서 해외 선교 운동에도 크게 활약하였다. 1833년 '노예 해방 법령'(The Emancipation Act)을 통해 영국 전역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웨슬리가 뿌린 씨앗이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교회와 채플(비국교도들의 교회당)의 문들이 모두 열렸고, 해방된 노예들이 몰려들어 대만원을 이루었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대영 제국의 악법과 맞서 싸웠다. 그는 삶 속에서 매력과 재능 그리고 웅변의 능력을 사용하였다. 날카로운 푸른 눈과 오뚝한 콧날을 가진 이 아담한 사람은 대단히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훌륭한 의회 연설가였다. 그의 어조는 독특하고 음악적이어서 그의 정적도 그의 연설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윌버포스는 1833년 8월 6일 세상을 떠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그는 오늘날 영국의 양심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 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깊은 영성과 실력을 구비한 평신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총체적 부패 속에서도 의와 양심을 포기하지 않은 지도자의 모범을 보였다. 사회악과 맞선 ‘영국의 양심’ 우리 시대의 가장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개인은 무력하며,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할 수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구조적인 악의 뿌리가 얼마나 견고한지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뿌리 뽑는 것은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라고 결론 짓고, 그로 인해 무기력증후군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은 꿈이 없으면 안일이나 좌절, 이기심의 수렁에 빠져서 파멸하기 십상이다.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 소명 1787년 10월 28일, 28세의 영국의 젊은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의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탁월한 정치인이요, 부유한 요크셔 상인의 아들이었던 윌버포스는 자신의 이 비전이 당시 영국 사회에 가져올 파문을 잘 알고 있었다. 구조적인 악, 노예 무역 18세기 말,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을 갖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 북미 대륙으로 실어 나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국의 한 권위 있는 통계에 의하면, 영국이 1776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의 식민지에 공급한 노예 수는 약 3백만 명 정도라고 한다. 당시 노예 무역은 영국 식민지 산업의 기둥이자 근간이었으며, 국가 안보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노예 무역이 영국 선원들에게 탁월한 훈련을 제공하고, 영국 해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신병 모집의 근거를 제공했다. 노예 무역은 연간 5,500명 이상의 선원들을 고용했고, 그것의 고용 효과는 약 16만 톤의 선박과 그에 비례한 선원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따라서 노예 무역의 지지자들은 막강한 상인, 재벌, 넬슨 제독 같은 식민지 기득권 세력, 대부분의 왕족, 귀족들로 구성되어 그 어떤 반대의 소리도 매국으로 치부해 버렸다. 노예 무역은 그야말로 구조적인 악이었다. 승리로 이끈 위대한 행동 왜소한 체구의 윌버포스는 150번이나 되는 대(對) 의회 논쟁을 통해서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 제도를 고집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암살 위협과 갖은 중상모략, 비방에 시달리면서도 윌버포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의 수 많은 뜻 있는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외롭고 기나긴 싸움을 버텨 나갔다.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56년 만에 드디어 영국 의회는 노예 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또한 노예 무역 폐지라는 큰 명제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타락한 영국 사회 곳곳을 개혁해 나갔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복권 제도를 20년에 걸친 의회에서의 공방 끝에 폐지시켰고, 가난한 이들이 병이 들었을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정부 예산으로 설립하게 하였다. 과다한 노동 시간을 제한시키고, '어린이노동 보호법'을 통과시키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타개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구제보다는 직업 교육을 시키고, 취업을 알선하는 제도를 정부가 구체적으로 실행하게 했고, 영국의 야만적인 형벌 제도를 대폭 개정했다. 가난한 자들도 합리적인 재판 과정을 거칠 수 있게 했으며, 형벌 제도에 있어서 벌보다는 갱생(更生)에 초점을 두게 했다. 또한 상류 사회 남자들의 결투 제도 폐지에 앞장섰고, 호화 파티만 일삼던 귀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이들이 여가 시간을 사회 봉사에 쏟도록 했다.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이러한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렀고,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의회 의원 3분의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정치가, 윌버포스 많은 역사가들은 윌버포스가 노예 무역 금지라는 인기 없는 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친구 윌리엄 피트에 이어 수상직을 계승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확고하게 결심하던 날, 이미 개인적 야망을 버렸다. 그는 자기 이익이라는 독재자와 대결을 벌여 승리한 것이다. 그런 용기의 대가로 그는 모욕과 반대와 수치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거꾸로 자유라는 새로운 유산을 그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된 수많은 흑인들에게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이익과 성공을 지향하고 있다고 너무나 자주 치부되는 이 시대에 윌버포스의 생애는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곳, 바로 영국 의회라는 전쟁터에서 불의에 맞서 싸운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정치가였다. 세상 문제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개인적 신앙의 게토(ghetto) 속에 도피하든가, 불신자들이나 다름없이 정치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다. 그리고 윌버포스가 한 일들은 18세기와 19세기의 영국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오늘날과 같이 방대한 조직과 비인간적인 권력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개인이 더 이상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키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전능하신 분이시다. 인간에게는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윌버포스가 막다른 골목과 같은 상황을 타개한 것처럼, 구조적인 악이어서 도무지 해결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악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헌신된 사람들을 절실히 찾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것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임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 준 윌버포스.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일 아침 두 시간을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보냈던 다니엘과 같은 사람이었다.
'아프리카를 사랑한 개척 선교의 시조' 데이빗 리빙스턴
'아프리카를 사랑한 개척 선교의 시조' 데이빗 리빙스턴 데이빗 리빙스턴은 일반인들에게 지리학자요 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였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 1855년 11월 15일, 리빙스턴이 처음 발견한 "빅토리아 폭포" 그는 스코들랜드의 불란타이어에서 1813년 3월 19일 낮은 신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고 매우 가난했다. 그는 디크의 '종교철학과 미래국가의 철학'이란 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됐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자기 직업의 장래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방적공장에서 방적공이 되어 어느 정도 많은 돈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은 그러한 일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이런 목표를 마음에 품고서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고래스고우에 있는 앤더슨 대학에 들어갔다. 의학공부를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회에도 지원을 신청해 놓았다. 그는 수습생으로 받아들여져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을 배울 수 있었다. 1840년 리빙스턴은 의학공부를 마치고 핀스베리의 알빈 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 때는 이미 영국과 중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발발해 있었고 런던선교회는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더 이상 선교사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스도를 만난 열정은 곧 다른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버트 모펫을 만난 것을 계기로 남아프리카를 위한 선교사로 헌신하게 됐다. 리빙스턴은 12월 조오지호에 승선해 남 아프리카를 향해 떠났다. 리빙스턴은 세츠와나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신의 선교를 시작하기에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 곧 케이크를 떠났다. 그는 북쪽으로 길을 떠나 쿠루만과 츠와나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쿠루만을 건설한 로버트 모펫은 20년 동안 선교에 힘써왔다. 도착한 리빙스턴은 인구가 많고 회심자가 많은 번영하는 마을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그 땅은 거의 황무지였으며 한발의 피해를 입고 있었고 관목에 덮인 땅이었다. 종교적 상황도 완전히 엉망이었다. 리빙스턴은 많은 현지인들이 기독교를 먹고 마실 수 있는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립된 부족들에게 유럽인들은 이상하게 보였고 설교자들은 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다. 그들은 종종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사람들에게 그가 믿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리빙스턴은 머리를 낮추고 기도했는데, 이것을 본 그들은 그의 신이 땅속에 있다고 생각해서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12년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회심자 밖에 얻지 못한 데이빗 리빙스턴은 점점 더 정규적인 선교사역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문호가 열려서 유럽인들이 여행할 수 있고 쉽게 정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아프리카인들은 먼저 유럽의 방식이 우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자신들의 관습을 버리고 서구의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더욱 바라게 될 것이다. 그는 “기독교, 무역, 개화”를 불가불리의 것으로 보게 되었다. 리빙스턴은 가족들을 배에 태워 영국으로 보냈다. 잠베시강은 오늘날의 잠비아에서 발원하여 앙골라 동부를 통과한다. 그리고 남동쪽으로 잠비아와 모잠비크를 가로질러 아프리카 남동 해안으로 빠져나간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준비해두셨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때부터 리빙스턴의 삶은 아프리카를 기독교 선교에 개방시켜야 한다는 집념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그는 4년 간 탐험되지 않은 지역으로 4,000마일을 여행했다. 짐베시 북방 탐험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그는 거의 항상 질병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의 의지력은 많은 그의 동료들을 앗아간 질병이나 불편함에 굴하지 않았다. 4년 간의 아프리카 횡단을 마친 리빙스턴은 고향에 돌아가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가 받은 수많은 영예가운데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받은 법학 박사학위도 들어있다. 그는 재빨리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 탐험」(1857)이란 책을 썼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여러 얼굴은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의 일을 하나님께서 관장하신다는 칼빈주의적인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확신했고 한마음으로 그것을 추구해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극심한 고통과 불편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 봉사를 받으셨다면 내 인생은 나의 사역이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 하에 있게 될 것이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노력의 결과를 항상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계획은 한 사람의 인생보다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본래 소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대해 “신성한 소명”이 있다는 그의 말은, 그가 원했던 대로 선교사들과 제국주의 양자에게 도전을 주었다. 아프리카에서 그의 선교적 자세는 적극적이고 개척자적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그는 "아직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수천의 마을들"에 대한 부담을 가진 개척 선교사였다. 이에 대한 유명한 예화로 어느 날 영국에 있는 몇몇 친구들이 리빙스턴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리빙스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자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네. 먼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네를 생각하면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네. 그래서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 주면 좋겠네." 하지만 편지를 받은 리빙스턴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했다.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이거든." 선교사로서 그가 주로 한 일은 아프리카의 길을 연 것이다. 그가 만든 지도를 따라 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873년 5월 1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개척자적인 삶은 지금의 아프리카에 위대한 복음의 업적을 이루게 되는 결과를 낳게 한 위대한 인물로서 평가되고 있다.
간추린 교회사 서론
간추린 교회사 서론 2004-03-11 10:37:22 read : 191 * 머 리 말 *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관류하는 하나의 위대한 힘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역 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신 계획 아래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고 인간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활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교회사의 한없는 줄기 속에서 명멸하는 수 많은 인물과 사건의 위에는 하나님 의 손길이 항상 계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에 겸손히 순종하고 하 나님의 적은 도구로 사용되어짐을 감사할 뿐이다.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들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오 늘의 우리에게 뜨겁게 역사하며, 이 모든 것의 내일을 바라보는 지혜의 눈을 가 지게 한다.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 속에 미미하고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오늘을 사는 하나 의 그릇으로 주 앞에 사용되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리라 믿는 다. 교회가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편자의 교회사를 요약하게 된 것은 순전히 편자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이다. 시험을 앞두고 방대한 교회사의 분량과 연대에 미리 질려버리는 심정이어서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을 여러 권의 참고서 와 교회사에 관한 자료를 섭려하다 보디 하나의 결실이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 다. 교회사 요약에 대해 한 두권의 책이 나왔으나 절판되거나 수 많은 오식 때 문에 편자 자신이 공부할 수 없어서 이와같은 고충을 당하는 교직자와 신학도들 을 위해 외람스럽게 한권의 책으로 엮어 보았다. 또 각종 고시(목사,강도사 등) 의 역대 문제들을 수집하여 각 항목에 밝혔다. 이것은 각종 고시의 수험생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리라 믿는 바이다. 각 장마다 시험 예제를 수록하여 수험생들에게 도움을 제공하였다. 이 책이 편자와 같이 단시간 안에 교회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움 이 되기를 바란다. 이미 있는 자료들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함께 공부하는 안내역이 되기 바랄 뿐이다. 이 책에 있는 오식과 탈자나 체제의 잘못은 순전히 편자에게 있음을 고백하며 공부하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며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만 바랄 뿐이다. = 신학 교재 편찬 위원회 = * 서 론 * 1. 교회사의 정의 기독교의 기원, 발달,인간 세계와의 관계, 구원 역사의 조직화 등을 연구하 는 학문이다. 2. 교회사 연구의 유익 1) 기독교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알게 한다. 2) 과거의 일을 통해 내일의 거울이 되게 한다. 3) 신앙 영웅들의 자취를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준다. 4) 기독교가 세계 문명 발달의 대원천적 세력임을 알게 된다. 5) 고상한 영적 힘을 얻게 한다. 3. 교회사의 학문적 위치 1) 신학 분야 가운데 역사신학에 해당한다. 2) 교회사에는 교리사,사상사, 교회사 교회 정치사, 기독교 문화사 등이 포 함된다. 3) 연구의 범위는 전 세계적이다. 4. 교회사의 시대 구분 1) 고대사 (A.D.1-590)..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고레고리우스 1세 즉위시까지 (1) 사도시대(1-100).. 그리스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끝날 때까지 (2) 사도후 시대(100-313)..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허락할 때까지 (3) 니케아 회의 시대(313-590)..초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 시까지 2) 중세사(590-1517)..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부터 종교 개혁 시작까지 (1) 과도 시대(590-800).. 선교 발달기 (2) 로마 교회 성장 시대 (800-1073)..그레고리 7세 즉위까지(동서교회분리 (3) 로마 교회 전성시대(1073-1303)..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사망까지. (4) 로마 교회 쇠퇴 시대(1303-1517)..종교 개혁까지. 3) 근세사(1517- 현재)..종교 개혁까지 (1) 종교 개혁 시대(1517-1648)..종교 개혁 시작부터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 까지. (2) 근세 시대(1648-1800)..프랑스 혁명까지
간추린 교회사 서론/ 2004-03-11
간추린 교회사 서론 * 머 리 말 *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관류하는 하나의 위대한 힘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역 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신 계획 아래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고 인간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활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교회사의 한없는 줄기 속에서 명멸하는 수 많은 인물과 사건의 위에는 하나님 의 손길이 항상 계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에 겸손히 순종하고 하 나님의 적은 도구로 사용되어짐을 감사할 뿐이다.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들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오 늘의 우리에게 뜨겁게 역사하며, 이 모든 것의 내일을 바라보는 지혜의 눈을 가 지게 한다.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 속에 미미하고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오늘을 사는 하나 의 그릇으로 주 앞에 사용되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리라 믿는 다. 교회가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편자의 교회사를 요약하게 된 것은 순전히 편자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이다. 시험을 앞두고 방대한 교회사의 분량과 연대에 미리 질려버리는 심정이어서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을 여러 권의 참고서 와 교회사에 관한 자료를 섭려하다 보디 하나의 결실이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 다. 교회사 요약에 대해 한 두권의 책이 나왔으나 절판되거나 수 많은 오식 때 문에 편자 자신이 공부할 수 없어서 이와같은 고충을 당하는 교직자와 신학도들 을 위해 외람스럽게 한권의 책으로 엮어 보았다. 또 각종 고시(목사,강도사 등) 의 역대 문제들을 수집하여 각 항목에 밝혔다. 이것은 각종 고시의 수험생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리라 믿는 바이다. 각 장마다 시험 예제를 수록하여 수험생들에게 도움을 제공하였다. 이 책이 편자와 같이 단시간 안에 교회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움 이 되기를 바란다. 이미 있는 자료들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함께 공부하는 안내역이 되기 바랄 뿐이다. 이 책에 있는 오식과 탈자나 체제의 잘못은 순전히 편자에게 있음을 고백하며 공부하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며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만 바랄 뿐이다. = 신학 교재 편찬 위원회 = * 서 론 * 1. 교회사의 정의 기독교의 기원, 발달,인간 세계와의 관계, 구원 역사의 조직화 등을 연구하 는 학문이다. 2. 교회사 연구의 유익 1) 기독교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알게 한다. 2) 과거의 일을 통해 내일의 거울이 되게 한다. 3) 신앙 영웅들의 자취를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준다. 4) 기독교가 세계 문명 발달의 대원천적 세력임을 알게 된다. 5) 고상한 영적 힘을 얻게 한다. 3. 교회사의 학문적 위치 1) 신학 분야 가운데 역사신학에 해당한다. 2) 교회사에는 교리사,사상사, 교회사 교회 정치사, 기독교 문화사 등이 포 함된다. 3) 연구의 범위는 전 세계적이다. 4. 교회사의 시대 구분 1) 고대사 (A.D.1-590)..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고레고리우스 1세 즉위시까지 (1) 사도시대(1-100).. 그리스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끝날 때까지 (2) 사도후 시대(100-313)..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허락할 때까지 (3) 니케아 회의 시대(313-590)..초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 시까지 2) 중세사(590-1517)..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부터 종교 개혁 시작까지 (1) 과도 시대(590-800).. 선교 발달기 (2) 로마 교회 성장 시대 (800-1073)..그레고리 7세 즉위까지(동서교회분리 (3) 로마 교회 전성시대(1073-1303)..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사망까지. (4) 로마 교회 쇠퇴 시대(1303-1517)..종교 개혁까지. 3) 근세사(1517- 현재)..종교 개혁까지 (1) 종교 개혁 시대(1517-1648)..종교 개혁 시작부터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 까지. (2) 근세 시대(1648-1800)..프랑스 혁명까지
간추린 중국 교회사/ 윤승록/ 2006-06-05
간추린 중국 교회사 윤승록 중국은 오랜 역사와 그리고 놀라운 문화를 가진 나라이다. 그들 스스로 세계의 한 가운데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자부심 강한 나라이다. 격변의 20세기를 보내고 중국은 이제 다시 세계의 한가운데로 다시 등장하고 있는 나라이다. ꡐOperation Worldꡑ에 의하면 크기에 있어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나라일 뿐 아니라 전 세계 인구의 20%가 살고 있는 나라이다. 또한 기독교인의 숫자는 8,000만 명에서 1억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공산주의의 통제 하에 놓여 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중국에 있는 이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를 시대별로 간추려 보고 중국 교회의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중국교회사의 시대별 요약 간추린 중국교회사 윤승록 간사 중국 교회사는 다섯 개의 시기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첫째, 당나라 시대의 경교(Neatorians)주의자의 선교 시대, 둘째, 몽고 제국 시대의 카톨릭(Catholic) 선교 시대, 셋째, 19세기까지의 예수회(The Jesuits) 중심의 선교 시대, 넷째,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개신교 선교 시대, 다섯째, 20세기 후반의 공산주의 하의 중국 교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당나라 시대 경교(The Nestorians)에 의한 선교 우리는 중국에서 있었던 첫 기독교 선교의 정확한시기에 대해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Samuel Hugh Moffet 은 AD7세기의 네스토리안들의 선교 이전에 중국인들과 유대인들의 조우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PP,13-14) 이러한 조우는 아마 비단 무역을 통해 이루어 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고대에 비단은 오직 중국에서만 생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이사야서와(이사야 49:12) 에스겔서(에스겔 16:10, 13)에 언급되어있다. Donald Hoke은 주장하기를 BC 700년경에 중국에 유대인 식민지가 있었다고 한다. (The Church in Asia, p.133) 그러한 예로 그는 구약 성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 몇 개의 중국 글자를 들었다. (예: 배를 의미하는 글자인 선이라는 글자는 배 안에 여덟 명의 가족이 타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의라고 하는 단어는 반란을 일으킨 내가 양 아래 피난처를 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황제가 매년 하늘에 드리는 제사는 대속에 대한 유대인 사상의 영향력을 보여 준다. 기원 후 4세기 시리아교회(The Syriac Church)는 페르샤(Persia) 제국 안에 놓여있었다. 325년 니케아 회의(Council of Nicea)에 시리아 교회의 감독들이 참석하게 되고 그들의 출석은 시리아 교회와 페르샤 제국 사이에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은 비록 로마가 근동일대를 지배하는 세력이기는 했으나 페르샤는 여전히 근동의 강력한 제국으로 로마와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묘한 상황에 비록 외형상으로는 로마의 감독이 소집한 기독교의 회의이긴 했으나 실제적인 후원은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틴에 의해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었기 때문에 페르샤의 황제 Shaphur II세는 매우 자극이 되어 외국 세력인 로마 제국에 대해 공적인 참석을 한 시리아 교회의 감독들을 정죄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민감한 시기에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는 나아가 자신이 시리아 교회의 공식적인 보호자임을 샤푸르 2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 이에 격분한 샤푸르 2세는 큰 박해를 시리아 교회에 가하고 이때 콘스탄틴 황제는 시리아 교회의 기독교인들을 돕지 않는다. 박해는 다음 세기(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410년 Seleucia 회의에서 페르샤의 황제Yazdgardh I세에 의해 시리아교회는 페르샤 제국에서the privileged minority 지위를 얻게 된다. John Rooney는 그의 글ꡑThe Nestorians in Central Asiaꡑ에서 ꡐmilletꡑ의 법적 효력은 이슬람교의 ꡐahl-ul-kitabꡑ이라는 개념, 즉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자유는 가지나 그것을 전파할 수는 없는 상태를 정확하게 의미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vol. XXIV, p.119) 나아가 이 정책은 시리아 교회 선교사들의 태도에도 깊이 영향을 주게 된다. 샤푸르 2세의 박해는 시리아교회의 기독교인들을 로마와 그리고 페르샤의 동쪽, 즉 파키스탄, 푼잡, 인도 등으로 옮겨가게 하고 흩어진 시리아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머무는 것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시리아 교회 기독교인들은 무역에 매우 뛰어 나서 이익을 쫓아 스키디아인들과 훈족들에게도 나아갔으며 이때 그들은 복음도 함께 가지고 나아갔다. 어떤 이들은 시리아 교회 기독교인들이 원래 유대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바로 BC 6세기 바벨론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페르샤로 옮겨지게 되었던 유대인들이 바로 그들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시리아 교회의 확장은 7세기 경교(景敎, the Nestorians)의 중국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 첫 번 째 시리아 교회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중국은 당(唐)나라가(AD. 618-905)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초기 경교 선교에 관한 내용은 1642년 Hsian Fu의 고대 수도 근처에서 당나라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원의 벽을 수리하던 인부들에 의해 발견된 거대한 석조(石造) 기념비의 발견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다. 이 석조물은 길이 2.5m,넓이 75cm, 폭 25cm로 그 위에 중국어와 시리아어 2,000여 개가 쓰여 있었다. 석조물의 꼭대기에는 시리아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십자가가 조각되어 있었고 다음과 같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ꡒCommemorative Monument to the Propagation of the Luminous Religion of Ta Chꡑin(Syria) in the Middle Kingdom(China)ꡓ 그 돌비석은 중국과 그리스의 계산법에 의하면 781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중국에서는12개의 경교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들의 연대는 대략 7세기에서 10세기로 추정된다. 이 문서들은 당나라 시대 경교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 졌음을 보여주는데 마지막 문서는 1036년 서 중국, 돈황(Tun-huang)의 한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첫 번 째 경교 선교사들은A-lo-pen(or Abraham)이라는 사람이 이끌었다. 그는 645년 Hsian Fu라고 알려진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 Chang An)에 약간의 성경을 가지고 도착했다. 그가 장안에 도착하자 즉시 그는 그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일단의 중국학자들이 그를 도와 마침내 ꡒThe Sutra of Jesus the Messiahꡑ(메시아 예수의 경전)이라는 제목아 붙은 첫 번 째 기독교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기독교의 신앙을 중국인에게 소개하고 중국의 고대 전통들에 대해 스스로를 변증하며, 국가의 권위에 대한 충성과 그리스도의 법의 정수인 효도를 가르쳤다. 황제는 그 내용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선교사들에게 호의를 보여 주었다. 경교는 중국의 중요한 도시들에 수도원들을 짓기 시작했으며 고대의 석비에 의하면 ꡒ 그 종교는 10개성으로 퍼져나갔으며,…수도원들은 100여 개의 도시에 있었다. ꡒ(Donald Hoke, The Church in Asia, p.135) 그러나 경교의 선교는 몇 가지 요인들에 의해서 점차 소멸되어 갔다. 도날드 호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무엇보다 경교 선교사들은 그들의 의학적인 지식과 외과수술의 기술 때문에 존경받았는데 경교의 비중국인 지도자들 때문에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와 함께 외국 종교로 분류되었다. 그것은 경교가 중국문화와 관계해서 토착화(土着化)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둘째, 경교는 도교(道敎)와 불교(佛敎) 지도자들의 점진적인 질시와 수많은 내전(內戰)으로 인해 약해져 갔다. 셋째, 그들은 그들의 모교회인 메소포타미아의 시리아교회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결과 시리아 교회와의 영적(靈的) 유대(紐帶)에 있어서 잦은 단절을 초래했다. 도날드 호크는 이러한 고립이 중국에서의 경교의 영적인 혼합주의(混合主義)를 초래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경교가 중국에서 신학적으로 얼마나 변질되었으며, 그것이 참으로 중국에서 경교의 소멸을 초래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경교가 중국에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관용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직도 중국과 일본의 불교신자들은 종종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넷째, 불교에 대한 당시 정권의 적개심이 역시 수 천 명의 중국 경교 성직자들을 세속적인 직업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다섯째, 수도원을 위한 땅의 소유와 축적은 당나라 정부로 경교에 대해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여섯째, 그들은 당 조정과 너무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요인들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당 왕조가 멸망하자 경교는 홀로 생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The Church in Asia, pp.136,137) 고대 중국에서 경교의 존재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중국의 북동부, 만주로부터 서쪽지역인 돈황에 이르기까지 많은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어 진다. 그럼에도 왜 고대 중국에서 경교가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경교가 고대 중국에서 기독교의 좋은 대표자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봉린 박사는 그의 글 ꡐChristian Mission to Mongol, China, Japan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ꡓ9세기에서 13세기까지의 이들 기간에 경교회들이 중국에서 사라졌고 거의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 경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들이 있어왔다. 그들은 아마 불교나 마니교, 그리고 회교도들이 되었을 것이다.ꡓ고대 중국에서의 경교 선교는 어쨌든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사용하셨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중국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비록 공적이고 조직적인 선교는 없었으나 우리는 13세기 몽고 제국시대의 중국에 대한 놀랍고도 용기 있는 선교의 노력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카톨릭 사절들에 의해서 되어졌는데 그들 중에는 프란시스코파(Franciscan)와 도미니칸파(Dominican) 등의 수도원 조직의 수도사들이 주로였다. 몽고제국에 대한 그들의 여행과 몽고제국에 머물렀던 그들의 경험에 관한 수도사들의 이야기들은 그 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만이 아니라 기독교 선교의 여러 가지 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13세기 전 세계는 그들이 이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재앙을 경험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헝가리에서 동쪽으로는 고려에 이르기까지 몽고는 거의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몽고에는 네 개의부족이 있었다. 첫째는 Yekamongol로 ꡐ위대한 몽고ꡑ라는 의미이고, 둘째는 Su-mongol로서 ꡐ물의 몽고ꡑ라는 의미였는데 그들은 Tartars라고 불리웠다. 이는 Tartur라는 이름의 강으로부터 그 이름이 연유되었기 때문이었다. 셋째는 Merkit이라는 부족이었고 넷째는 Mecrit이라는 부족이 있었다. 이 부족들은 1167년에 태어난 Chingis혹은 Temuchin에 의해서 결국 통일이 된다. 그들이 정복한 나라들은 다음과 같다; Kitay, the Naimans, the Sorangi. The Karkitayans 혹은 검은 Kitay, Comania, Cumae, Voyrat, karanites,Uigurs, Sari-Uigurs, Bascart 즉 위대한 Hungary, Kergis, Cosmit, the Saracens, theVisermins, the Turcomans, 위대한 Bularis였던 Byleri, Catora, Tomiti, Burithabet,Parrosites, Cassi, the Alans 혹은 Assi, Obesi 혹은 Georgians, Nestorians, Armenians,Kangit, Comans, 유대인들이었던 Brutachi, the Moravians, the Turks, the Gazars, theSamoyedes, the Persians, the Tarci, Lesser India 혹은 Ethiopia, the Circassians,Ruthenians, Baghdad 그리고 the Sarti등이 있었다. ꡒ13세기중엽 몽고제국은 유럽에 있던 서구 기독교 국가들을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새로 교황이 되었던 Innocent IV는 위협을 줄이기 위해 수도사들을 파견한다. 이를 위해 그는 두 명의 프란시스칸, 즉 포르투갈의Lawrence와 Plano Carpini의 John-그는 Assi의 Francis의 직접적인 제자 중의 하나였다-을 택하여 파송한다. 뒤에 베네딕트파의 Pole이라는 사람이 Breslau에서 그들과 합류한다. 이 여행은 매우 위험했다. 그리고 그들의 여행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은Kahn의 편지를 가지고 교황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그 편지의 내용은 서방세계에 대한 위협과 몽고의 황제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들이 담겨있었다. 또한 서구를 복종시키기 위한 전쟁계획을 알리는 것들도 담겨 있었다. 이들의 보고서는 그 당시 몽고제국의 역사만이 아니라 13세기 기독교 선교에 대한 가치 있는 역사적 기록이기도하다.ꡑ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pp.407-408) 서구에 대한몽고제국의 위협은 Hungary 침공을 앞두고 위대한 칸과 헝가리 침공군 사령관이었던 그의 사촌 Batu 사이의 갈등 때문에 줄어들게 된다. 칸(Khan)의 죽음과 Batu의 준 독립적인 지위로 인해 서구는 침공을 면하게 된다. 1247년 교황 Innocent IV는 사절단을 다시 몽고에 보내게 된다. 그들은 도미니칸 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는데 다음과 같다; Fr. Asacelin, Simon of Tournai와 다른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1247년 5월 24일 카스피 해의 서쪽에 있던 Batu의 캠프에 도착한다. 그들은 몽고인들에 의해 학대를 받았으나 칸의 사절이었던 Aljigiday가 옴으로 상황은 호전된다. 그는 남서쪽의 무슬림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기독교인들과의 관계를 세워나가야 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1248년 그들은 두 명의 몽고 사절들과 함께 서구로 돌아온다. 이 때 몽고의 사절들은 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그 편지에 의하면 칸은 서구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할 것이며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한 사라센과의 전쟁을 도울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칸, Guyuk Khan, 의 죽음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이 서신에 대한 응답으로 프랑스의 왕은 몽고의 사절들과 함께 가장 중요한 사절들을 보냈다. 그 사절단은 Longjumeau의 Andrew가 이끌어 갔다. 이 사절단은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된 어느 정도 합법적인 대표단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그럼에도 'Tartary'에 존재하던 많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확인은 서구를 격려했다. St. Louis의 편지를 가지고 갔던 Rubruck의 프란시스코 파의 수도사 William의 사절은 중국화되기 이전의 몽고 제국에 대한 충분하고도 참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몽고 제국 하에서의 경교에 대한 Rubruck의 묘사는 형편없는데 이는 어느 정도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경교도들은 이단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오래된 믿음이 Don 근처의 Golden Horde의 캠프에서부터 Monke의 궁전과 그 너머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발견했다. Balkash호수 근처에서 그는 거의 경교도들 만이 거주하는 마을을 통과하기도 했다. 이곳은 러시아과 몽고의 접경지대인데 징기스칸의 둘째 아들이었던 Chagatai에게 주어졌던 땅이었다. 징기스칸의 손자이며 네 번 째 칸이었던 Kubilai Khan 치하의 종교적인 정책은 관용적이었다. 칸의 궁전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그것은 칸의 어머니였던 Sorkaktani공주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 많이 평가되어서는 않된다. 사실 칸의 궁전에는 칸의 조언자로서 티벳(Tibet) 승(僧)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그의 제국에 있는 모든 종교를 포용했던 것이다. 1289년 교황 Nicholas 4세는 페르샤의 칸이었던 Argun에게만이 아니라 위대한 칸이었던 Kubilai와 중앙아시아에 있던 Ugadey의 집안의 마지막 대표자였던 Kaidu에게도 Monte Corvino의 John을 통해 편지들을 보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였다. 중국에서 그는 12년간이나 사역을 했다. 첫 5년 간 비록 몽고인들에 의해 제대로 취급받지 못했으나 결국에 1299년 북경에 교회를 짓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1307년 그는 교황 Clement 4세에 의해 북경(Khanbakik)의 대주교로 임명받게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는 몽고인들에 의해 주어졌던 기회들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에 실패했다. 그러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교에의 열정과 정신은 어떤 어려움과 난관에도 좌절되지 않았다. 주님은 기꺼이 그들과 함께 하셨으며 그의 왕국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셨다. 그들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몽고제국 시대동안의 선교이후 기독교는 15세기에 중국에 다시 소개되었다. 위대한 선교사, Francis Xavier는 중국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552년 죽고 만다. 1570년대 포르투갈은 명나라 시대 마카오에 항구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곧 그곳은 주교가 임명된다. 마카오를 통해 기독교는 중국에 다시 들어가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신교가 아닌 카톨릭 수도원 조직들에 의해 되어졌다. 첫 번째 선교사는 에수회 소속의 Matteo Ricci(1552-1610)였다. 그의 선교는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 그와 그의 동료 예수회 수도사들은 북경에 거주권을 갖게 되었다. Ricci의 죽음이후 그의 동료들은 제국의 궁전에서 공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이것이 궁전에서 경쟁자들로부터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 청나라로 정권이 바뀜에 따라 심각한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특히 황제, 강희제(康熙帝)의 통치 하에서 선교사들은 궁전으로부터의 호의를 즐기게 된다. (1692년 관용의 칙서가 황제에 의해 내려졌다.) 그 결과 다른 수도원 조직들, 즉 프란시스코파, 도미나칸파, 어거스틴파(Augustinian) 등도 중국에 그들 조직을 세울 수 있게 된다. 18세기가 시작할 때 기독교인들은 거의 모든 성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숫자는 20-30만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거의 한 세기동안 지속되었던 조상숭배와 그 의식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로마 교황청이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고 이 일이 황제를 격노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로마교황청은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이 제사의식을 따르지 않도록 명령한다. (뒤에 20세기에 로마는 이 태도를 바꾸게 된다.) 그 결과 황제는 선교사들이 리치의 태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로마를 떠나도록 명령을 내린다. 1724년과 1736년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칙서를 내리게 된다. 중국에 대한 개신교의 선교는 18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마카오는 여전히 중국에서 포르투갈을 위한 발판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중국에서 제한적인 선교를 할 수 있었다. 광동지역은 중국에서 서구 상인들을 위한 유일한 항구로 허락되었다. 19세기 초 중국을 둘러싼 정치적인 상황은 점진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직 중국과 서구 사이에는 공식적이고도 외교적인 관계는 없었다. 1807년 London Missionary Society가 Robert Morrison을 중국에 파송한다. 그는 중국에 파송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20년을 보냈다. 그의 위대한 사역은 성경을 중국의 Wenli 어로 번역하고 6권의 중국어 사전을 발간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문은 마침내 서구에 의해, 특히 영국에 의해 강제로 열리게 된다. 그것은 불행한 사건, 즉 중국과 영국사이의 아편(阿片) 수입의 문제로 인해 야기된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전쟁은 1839년과 1842년 사이에 일어났다. 그리고 영국이 승리하게 되고 남경조약이 체결되어 그 결과 Canton, Amoy, Foochow, Ningpo, 그리고 Shanghai가 외국인 거주지로 개방되고 홍콩은 영국에 할양된다. 그 조약에 이어 중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는 선교사들의 권리가 주어지게 된다. 청나라와 청 황제의 몰락의 징조가 여러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1860년대는 반외세의 정신이 또한 팽배하던 시기였다. 주 예수의 ‘주’라는 발음과 돼지(저,猪)라는 발음이 유사했기 때문에 예수의 모습이 돼지로 묘사된 삽화도 등장하기도 했으며, 1, 2차 아편전쟁과 그 결과 체결된 불평등한 조약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분노하고 여러 곳에서 반외세 소요가 일어났다. 그 절정은 ꡐThe Boxerꡑs Rebellionꡑ으로 폭발한다. 그와 동시에 청나라와 청 황제의 쇠퇴의 증상이 여러 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1894년에서 1895년 사이에 청일 전쟁이 발발하고 중국은 패배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주목할 만한 단체는 Hudson Taylor 가 시작했던 China Inland Mission(중국내지선교회)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난이 그 절정에 달하던 1853년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1866년 5월 26일16명의 선교사들과 4명의 어린이들로 구성된 CIM 의 첫 번째 선교사 그룹이 4개월의 항해 끝에 중국 항주에 도착하게 된다. 1931년까지 200명으로 구성된 마지막 그룹이 중국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미국과 카나다에서 많은 젊은 일군들을 헌신하게 하였으며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사역했다. 1914년 무렵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로마 카톨릭의 경우 특히 프랑스의 파리 외인 선교회가 이끌었으며 이태리, 독일 그리고 스페인 등의 국가에서 온 선교 조직들이 이러한 진전을 이끌었다. 1914년 전체적인 외국인 선교사들의 숫자가 2,500여명이었고 1912년의 통계에 의하면 교인들의 숫자는 1,431,258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개신교의 경우 1914년 에 선교사의 숫자는 5,426명이었고 그 중 절반이 미국에서 왔으며 40%가 영국, 그리고 10%가 다른 유럽국가에서 왔다.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의 숫자가 25만 명 정도였으며 세례자는 30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Kenneth Scott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ity, vol .II, pp.1325-1326) 1921 상해의 어느 주택 2층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회합을 가졌는데 이곳에서 중국 공산당이 결성된다. 1926년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압도할 만큼 강해지게 된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Kangsi성에 설립되나 국민당의 공세에 밀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산서성 연안까지 대장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산서성 북부 연안에 그 수도를 두게 되며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후 결국 1949년 4월 남경에 있던 국민당 정부를 무너뜨리고 북경에 수도를 세우게 된다. 국민당 정부의 파멸은 하늘의 뜻이 부족했으며, 부패한 정부와 군, 그리고 무엇보다 공산주의자들의 토지개혁의 성공으로 인해 국민들의 마음을 빼았겼기 때문이었다. 중화 인민 공화국은15949년 10월 1일 출범한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서구와 중국 사이에 갈등을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1950년 가을에는 무수한 선교사들이 중국을 떠나게 된다. 1951년 말에 이르러 중국으로부터의 대 추방은 거의 끝나게 된다. 1951년 이후부터 중국교회와 서구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게 되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게 되는 즈음의 중국교회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중화 성경회는 14개의 교구에76,741명의 교구민이 있었다. 루터교회는 The Hsin I 회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83,126명의 성도를 가지고 있었고 입문자가19,928명으로 합계가 103,054명이었다. The Church of Christ in China는 보다 폭 넓은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장로교와 개혁교회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회중(會衆)교회들과 영국 침례교, 카나다 연합교회, The United Brethren of Christ, 일단의 감리교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1949년의 그 회원수는 16,983명으로 보고되었다. 장로교는 3만 명으로 보고되었고 공산화 이후 감리교는 102,693명의성도를 가진 미국 배경의 Wei Li 공회와 44,140명의 성도를 가진 영국 배경의 Shun Tao 공회로 나누어지게 된다. 남침례교의 Chin Hsin 회는 65,000명의 성도들이 있었으며 북침례 배경의 Chin Li 회는 16,701명의 성도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내지 선교회의 후신인 Nei Ti회는 86,345명의 성도가 보고되었다.1949년 직전의 중국교회의 특징중의 하나는 중국의 토착 교회의 발전이었다. 1949년 경 외형적인 규모에 있어서 그들은 중국 교회의 25%에 달하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널리 펴져 있었던 파는 1917년 Paul Eei에 의해 세워진 True Jesus Church이었다, 그들은 10만 명의 성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큰 파는 Watchman Nyi 에 의해 세워진 ‘작은 무리들’(Little flock)인데 그들 스스로는Christian Meeting Places로 불렀으며 그 숫자는 7만 명에 달했다. 또한 Ching Tien-ying에 의해 시작된 Jesus Family가 있었는데 그들은 6천 명 정도 되었다. 1949년 경 13개의 기독 대학들에서 . 5만 명의 졸업생들이 배출되었고 그들 둥 대부분은 지금도 살아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있다. YMCA와 YWCA의 총무로 있던 Y.T.Wu와 Cora Deng, 그리고 Church of Christ in China의 총무로 있던 H.H. Tsui , 그리고 루터교 지도자였던 AiNien-san 등 몇 명의 상해지역의 교회지도자들이 수상으로 있던 주은래를 만나 새로운 국가 체제에 대해 어떻게 충성을 보일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했다. 북경에서 그들은 감리교 감독이었던 Z. T. Kaung과 Yunchi대학 공대 교수였던 T.C. Chao등 북쪽 교회 지도자들과 합류하게 된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ꡐ기독교 고백ꡑ이다. 이 회합이후 광범위한 비판을 받으며 최종적으로 1959년 7월ꡐ새로운 중국의 건설에 있어서 중국 기독교를 위한 노력을 위한 지침ꡑ이라는 제목 하에 기독교 고백이 발간되어 나온다. 9월에 접어들면서 이 고백서에1,537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서명을 하게 되고 1, 2년 후에는 중국의 성도들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400,000명이 서명을 하게 된다. 1950년 교회에 속해 있던 모든 학교, 병원, 그리고 고아원들이 어떠한 보상도 없이 정부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그 가치는 수백만 달러에 해당했다. 교회에 남겨진 유일한 조직체들은 신학교와 성경학교들, 그리고 기독교 출판 기관들만 남게 된다. 이일을 위해 삼자 개혁 운동(The Three Self Reformation Movement)가 준비되었다. 삼자란 자급(self-support),자치(self-government), 자전(self-propagation)의 중국어 약어에서 나온 말이다. 1951년 4월에는 북경에서 기독교에 관해 고발하는 모임의 형식을 논의하는 15인의 수련회와 함께 고발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육가들에 대한 교화와 참여를 통한 교화가 바로 뒤따랐다. 중국의 공산화 이후 첫 공식적인 자유세계 교회로부터의 방문은 1956년 11월 감독 Robin Chen의 초청에 대한 응답으로 오스트렐리아(Australia)의 성공회 감독이었던 Howard W. K. Mowell 의 방문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비록 우리가 1960년대 이후의 중국교회사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중국교회와 관련해서 몇 가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중국의 공산화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중국은 방대한 나라였으며 지방의 많은 곳에는 여전히 공산화를 저항하는 세력들이 있었는데 이 세력을 찾아내어 제거하기 위해 약간의 자유를 허용하는 조치가 1950년대 말에 취해지게 된다. 바로 백화운동이 그것이었다. 이 조치는 먼저 어느 정도의 언론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어 점차 많은 사람들이 공산정부를 비판하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되며 이러한 일련의 자유 이후 공산 정부는 공산화를 저항하는 세력들을 파악해서 제거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70년대 문화대혁명을 통해 내부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대 변혁의 시기를 겪게 되는데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결국 많은 종교세력도 함께 반 공산화의 세력으로 박해를 받게 되는데 가장 큰 피해는 바로 유교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왕조들의 부침 속에서도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세력이었으며 기독교의 확대를 경계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야기 시키기도 했던 세력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의 강력한 박해 속에서 이들은 그 세력을 거의 잃게 된다. 기독교도 함께 박해를 받았으나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오랜 동안 영향력을 갖고 있던 유교주의가 사라진 그 공백을 기독교가 급속히 대체해 가고 있었다. 박해 속에서, 혹은 박해를 피해 중국에 흩어진 무명의 전도자들에 의해 복음은 퍼져갔으며 성령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신학교도, 선교사도, 교회도, 체계화된 선교 전략도 없던 이 위대한 나라에 그 분의 능력으로 큰 부흥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흥의 궁극적 목적은 이 위대한 나라, 오랜 동안 미루어져 왔던 세계 선교를 위해 중국을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그 분의 계획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I. 토착화(土着化, contextualization)의 문제 7세기 이후 기독교는 중국으로 들어가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 왔다. 여러 세기에 걸친 수고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매 세기마다 가장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해야만 했다. 비록 시시로 박해가 있었으나 그러나 중국에서 그것은 선교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 감추어져 있던 장애물을 배우기 위해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토착화의 문제였다. 1. 반(反)외국주의 비록 역사적으로 많은 다른 종족들에 의해 정복당했으나 중국은 다른 외국나라들에 의해 완전히 흡수되어진 적은 없었다, 중국을 정복했던 모든 다른 종족들은 결국 중국과 중국의 문화 속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그리고 중국의 문화 한 가운데에는 언제나 유교가 있었다., 청조의 한 황제였던 Yung ­ cheng은 1727년 내려진 칙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ꡒ그리하여 불교도(佛敎徒)와 도교도(道敎徒)들은 서양 종교를 헐뜯고, 서양인들은 불교와 도교의 거짓됨에 대해 불신을 쌓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중상하며 서로의 이단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고 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나에게 동의하는 모든 것은 정통적인 것이 되나 나와 다른 모든 것은 . 이단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말하기를ꡐ이단적인 것을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해로운 것이다ꡑ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러기에 그 자신과 다른 모든 가르침과 행함을 이단적인 것이라고 힐난했는가? …유교 주의자들은 초기 왕들의 길을 살피고 현자와 덕스러운 전형들에 관한 가르침들을 연구한다. 그들 모두는 백성들에 의해 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ꡓ(Paul A. Cohen, China and Christianity, pp.13,14)Paul A. Cohen은 앞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ꡒ이 연구에서 보듯 이단적인 것과 반(反) 이단적인 것들의 전통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념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특징들의 정체성이 가설되어 질 수 있다. 첫째로 그 용어의 내용과 의미는 역사적인 맥락이나 개인적인 편견에 의해서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ꡐ이단성ꡑ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분명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Yung-cheng황제의 시도조차 그가 인식하고 명령을 내렸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에 의해 손상되었다. 왜냐하면 표면상으로는 모든 가르침 속에는 선의 요소가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나 마지막분석에서 선을 측정하는 그의 기준은 그 시대 중국인들의 선입견에 일치하고 그 논조에 있어서 유교주의자의 것으로 보인다. ꡒ(p.15) 7세기 첫 경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 왔을 때 그들은 중국에서 세 개의 중요한 종교와 만나게 되었다. 즉 불교, 도교, 그리고 유교가 그것이다. 그러나 9세기에 경교는 사라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교의 소멸의 가장 주된 이유가 반 외국주의였다. 경교의 소멸에 대한 이유들에 대해 Samuel Hugh Moffet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교의 소멸에 대한 첫 번째 이유는 9세기에 기독교에 가해 졌던 박해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특별히 반기독교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력한 황제들의 계승으로 인해 국가적 연합이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 자라나던 분파적인 종교 경쟁과 증가하는 외국에 대한 혐오 등에 어느 정도 기인하고 있었다. 대체로 관용적이었던 당 나라시대의 전 역사에 있어서 가장 격렬했던 종교적인 박해는 840년에서 846년 사이의 미신적인 황제였던 Wu-tsung의 통치시절 일어났다. 이 박해는 소위 유교주의자들에 의해 외국 종교라고 이름 붙여진 즉 먼저는 불교도들에 대해, 그리고 마니교와 기독교도들에 대해 주어졌던 것이었다. 후일에 일단의 선교사들이 몽고 시대와 청 나라시대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유교 계급이 황제의 궁정에 넘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몽고의 황제였던 Kubilai는 유교주의자들을 다루는 데 매우 조심스러웠으며, 그의 초기 중요한 조언자들은 대부분 유교주의자들이었다. 한 유교 자문관이 황제에게 유교주의자들의 충성을 확신시켰을 때, 황제는 20명의 유교 학자들을 그의 통치그룹의 중심에 포함시켰다.(Samuel Hugh Moffet,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p.305) 16세기 Matteo Ricci가 중국에 도착했을 때 유교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인들과 유교 고전을 부지런히 배워 그것들에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학자들과 대중들로 하여금 유교주의와의 완전한 단절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유교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되어지는 용어들을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할 때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유교주의자들과 다른 조직들 사이의 논쟁은 중국에서의 기독교인들의 삶에 있어서 유교의식들에 관한 것들이 주된 논점이었다. 19세기 초 개신교 선교가 중국에서 시작될 때 주된 반대는 유교 학자 계급에서 나왔다. 그들은 중국에서 대체로 영향력 있는 무리들이었다.Paul A. Cohen은 그의 글 China and Christianit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ꡒ19세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중국의 교육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적극적이던 소극적이던 기독교를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소극적으로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차갑고도 무관심하게 대했으며 외국 종교를 포용한 학식 있는 계층이나 관리들은 극히 소수였다. 적극적으로는 사람들을 자극하는 강한 반 기독교적인 문서들을 저술하거나 퍼뜨림으로 그들의 적개심을 표현했다. 또한 기독교 선교사들을 넘어지게 할 수많은 장애물들을 만들기도 하고 기독교를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복의 위협을 가하기도 하며 전도자들에 대해 반 기독교적인 폭동에 가담하거나 직접적인 부추김을 통해 적대적으로 대했다. 중국인들 가운데서 반 기독교적인 감정은 어느 정도는 서구의 식민주의자들이나 잇달은 서구와의 전쟁에서의 패배에 이은 불평등한 조약들에 기인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어떤 선교사들은 이러한 불평등한 조약들과 기독교의 선교를 보장해 주는 권리들을 기뻐했다. 그러한 선교사들은 사업적인 이익에 있어서는 견해가 완전히 일치했다. 그 조약들은 불평등하지 않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종들에게 그 나라의 문을 여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Richard W. Van Alstyne, The United States and East Asia, p.118) 그런 까닭에 공산주의자들은 유교에 적대적이 된다. 왜냐하면 유교야말로 공산혁명의 과정에 있어서 지적 장애물이란 사실을 그들은 후에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Te Sheng Meng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ꡒ분명히 공자와 유교주의들은 중국 역사에 있어서 중국의 지적계급의 구성원들이었다. 공자가 지식계급층의 시발자(始發者)였고 유교학교의 설립자였기 때문에 그는 중국의 지적 계급의 지도자라고 불리우고 있다.“(Chinese Communism vs Confucianism, pp.27,28) Paul A Cohen이 말한 것 같이 기독교는 유교의 기초 위에 세워진 중국문화를 위협하는 외국 종교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ꡐ반기독교ꡑ하는 용어는 종종 ꡐ반외세(反外勢)ꡑ라는 용어와 같이 사용되어 지고 이러한 현상은 바로 이런 특별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Paul A Cohen, China and Christianity, p.60) 유교는 중국인들에는 일종의 종교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중국인의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Te Sheng Meng이 말한 것 같이 유교는 한나라 시대 이후 중국문화의 기초였으며 중국인들의 사고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중국에서의 유교의 실체를 배우는 데 많은 시간과 값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했으며 그것을 극복하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 공산혁명의 완수를 위해1960년대 와 70년대 백화운동과 문화대혁명의 과정 속에 종교를 공격하게 되며 그 와중에 중국의 유교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고 이러한 정신적인 공백을 부활과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가 신속하게 메우게 되어 놀라운 부흥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2. 토착화의 문제 선교사들이 특히 서구로부터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곧 그들이 문화적으로만이 아니라 신체적인 외모에서도 다르다는 사실은 깨달았다. 그들의 신체적인 외모-푸른 눈, 금발의 머리카락, 그리고 흰 피부-는 무식한 농민들로 두려워서 움쩍도 못하게 만들었다. 보다 나은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그들을 ꡐ서양 귀신ꡑ들이라고 불렀다. 지식 계급에게 있어서는 기독교를 공공연히 경멸했는데 왜냐하면 민중들의 서구에 대한 기댐으로 인해 백성들에 대한 그들의 권력과 지도자로서의 특권에 대한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해서 중국에서의 기독교의 존재에 대해 싸웠던 것이다.(J Herbert Kane, Understanding Christian Missions, p.200) 최초의 경교 선교사였던 알로펜(Alopen)이 중국에 도착하기 십 여 년 전에 중국 당나라 시대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불교는 외국의 것이며 반 중국적이라는 유교주의자들의 쟁론을 받아들여 불교는 쇠퇴하게 된다. 626년에 내려진 황제의 칙서(勅書)는 도교 사원과 불교도들의 감축과 불교승려들의 세속화(世俗化)를 명령하고 있다. 동일한 정책이 기독교에도 적용되었다. 간혹 관용의 시기가 있었다. 638년 첫 경교 교회가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 세워졌다. 638년 이후 중국의 중요한 도시들에 수도원들이 설립되도록 허락되었다. 고대의 비문에 의하면 ꡒ그 종교는 10여 개의 성으로 퍼졌고…수도원들은 백 여 개의 도시에 넘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교 선교사, 알로펜(Alopen)은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도록 요청 받았는데 여러 명의 중국학자들의 도움으로 그는 그것을 끝냈으며 그 번역본의 제목은 ꡐ메시야, 예수의 경전ꡑ이었다. 비록 경교의 선교사들이 수도원들을 세우고 경전을 번역했으나 그들은 몇 가지의 요인들에 의해 점차 소멸해 갔다,. 그들의 고국으로부터의 적은 지원과 신학적 부패와 더불어 중국의 핵심 집단, 특히 유교주의자들로부터 외국종교 혹은 외국 사상이라는 비판을 극복해야만 했었다. 7세기에 중국의 경교회 안에는 중국인 성직자가한사람도 없었다. 중국에 있던 21명의 수도사들은 모두 페르샤인들이었다. (Samuel Hugh Moffet,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p.293, 303) 몽고제국시대로마 카톨릭 교회는 서방과 교회의 안전을 위해 교황의 사절단으로 수도사들을 보냈다.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은 정치적인 사절단들이었으며 선교사들은 아니었다. 몬테코르비노(Monte Corvino)의 존(John)은 1249년에 중국에 도착해11년 동안 수천 명의 회심(回心)자들을 얻었고 150여명의 신학생들을 훈련시켰다. 1330년 그가 죽었을 때 중국에는 10만 여 명의 회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몽고제국을 멸망시켰을 때 명나라는 몽고의 지배자들과 함께 선교사들을 추방시키고 만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16세기 후반에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중국인 학자 같은 모습으로 보여 지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성경을 번역할 때 ꡐ천(天)ꡑ이나 ꡐ상제(上帝)ꡑ같은 유교적인 용어를 채택했다. 그는 가족생활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조상숭배의 의식들이나 사당에서 드려지는 제사들이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여전히 가족들의 충성된 회원이고, 관리이며 그리고 유교학자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비록 그의 태도가 후에 다른 선교사들에 의해 비 성경적인 것으로 비판의 표적이 되고 로마교황청에 의해 금지되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그 명령은 바뀌게 되었다.) 그는 복음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한 선교사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 황제 강희제(康熙帝)는 리치(Ricci)의 태도에 호감을 갖고 만약 선교사들이 중국에 남기를 원한다면 공식적인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이는 선교사들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태도를 따라야만 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문제의 어떤 부분은 매우 민감한 신학적인 문제와 연관되어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우리들에게 주목받아야 할 것이다. 19세기의 위대한 영적 각성의 경험과 함께 중국에 대한 개신교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토착화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1855년 8월의 어느 저녁 그는 중국의 한 이발소에 가서 중국인의 머리 스타일로 그의 머리를 바꾼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는 중국인의 복장으로 차림을 한다. 이 사건은 1854년에서 1855년까지의10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 직후에 되어진 일이었다. 물론 단지 머리스타일을 바꾸고 의복을 입는 것만이 토착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중국인들의 눈에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일이었다. 19세기 후반 서구와의 전쟁과 전쟁의 결과로 체결되었던 불평등한 조약들에 의해 중국에서 반외세가 절정에 달하게 된다. 또한 ꡐ태평천국의 난ꡑ의 지도자 역시 개신교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이것이 중국정부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일부의 선교사들은 불평등 조약에 의해 주어져 있던 중국 내에서의 권리를 사용함으로 중국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보여 주기도 했다. 비록 모든 선교사들이 그런 태도를 보여 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20세기에 공산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았든지 아니든지 간에 중국의 국수주의자들은 선교사들을 불평등조약의 수혜자(受惠者)로 공격했던 것이다. 20세기 중국은 큰 혼동과 새로운 혁명에 휩싸이게 된다. 1911년 10월 10일 저녁 한 혁명적인 그룹이 우창(Wuchang)을 함락시킨다. 이것이 혁명의 시작이었으며 만주족의 권력의 붕괴가 곧 뒤따랐다. 1911년 12 월 29일 순 타첸(Sun Tatsen)이 새 공화국의 첫 임시 대통령에 선출된다. 그리고 그는 중국 백성들을 위한 3개의 원칙을 선포한다. 즉 , 백성들을 위한 권력, 백성들을 위한 생활, 그리고 민족주의가 그것이었다. 1921년 7월 상해(上海)에서 첫 중국 공산당 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는 호남성에서 온 젊은 마오쩌둥(毛擇東)을 포함해서 12명이 모였다. 장제스( 張介石)은 몇 차례의 군사적인 성공 후 1927년 4월 18일 남경에 그의 정부를 수립한다. 그리고 1949년 4월 23일까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는 군사적인 충돌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오쩌둥이 북경에서 새로운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음을 선포하게 된다. (Rafe De Crespigny, China This Century, pp.182-183) 20세기 초반 중국 교회는 몇 개의 영역에서 진전을 이루었다. 첫째 , 중국교회는 비록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산동성을 비롯한 몇 군데에서 지속적인 부흥을 경험했다. 둘째, 중국교회는 그들 자신의 토착적인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해 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영적인 능력과 믿음을 보여 주었다. 왕 밍타오(Wang Ming-tao), 웟치맨 니(Watchman Nyi), 그리고 양 쌰오탕(Yang Shaotang) 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셋째, 중국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등과 같은 선교조직들이 1920년대에 3자 정책, 즉 ꡐ자치, 자립, 자전ꡑ등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950년대 중국 공산당 정부가ꡐ3자 운동ꡑ을 선포하기 전에 그것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삼자(三自) 정책은 진실로 중국교회가 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야만 했던 것들이었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던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 이것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너무나 역설적인 일이었으며 그 방법이 중국 속에서 그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시는 그분의 경륜과 섭리였던 것이다. 넷째, 일단의 토착적인 중국교회가 나타났다.폴 웨이(Paul Wei) 가 만들었던 참된 예수교회(True Jesus Church), 웟치맨 니(Watchman Nyi)가 조직했던 적은 무리들(Little Flock), 칭티엔 잉(Ching Tien-ying)이 만들었던 예수 가족(Jesus Family)등이 그것이다. 1949년 그들은 수적으로는 중국 개신교의 25%에 해당할 만큼 성장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가올 공산주의자들의 시대를 위해 중국의 교회들을 위한 그의 길을 준비시켰던 것이다. 결론 중국교회는 1,5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의 시기마다 중국교회는 박해(迫害),반외세( 反 外勢), 안팎으로부터의 비판, 신학적인 변질의 위험, 그리고 추방 등의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때때로 하나님 나라의 진전과 확산을 기뻐했으며, 때때로 교회의 파괴를 바라보며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중국에 세우는 일에 결코 너무 서두르지도 너무 늦으시지도 않으셨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중국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또한 중국에 있는 그의 교회를 결코 버리시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그의 계획을 위해 모든 환경을 사용하셨으며 공산주의까지도 사용하셨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중국교회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중국에서 그분께서 그분의 교회를 위해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있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21세기에서 중국에 있는 그분의 백성들을 위한 더 많은 찬양과 놀라운 계획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일 것인데 곧 중국교회가 열방을 향해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교회가 되리라는 확신이다. 이 일은 이미 시작되고 있으며 누구도 그 분이 행하시는 그 일을 좌절시키지 못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사명중의 하나는 중국교회가 더욱 성장하여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될 것이다. 선교는 역사의 뒤로 사라져 갔으나 교회와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여전히 살아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멘.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2004-03-11 10:36:46 read : 15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성격을 띤 최초의 학교는 아펜셀라 선교사에 의하여 세워진 배제학당이다. 1885년 8월 3일 아펜셀라 목사가 이겸라 고영필 의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공부를 개시한 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이며 이는 한 국 현대 교육사상 영원히 기념할만한 뜻있는 날이 되었다. [나는 지난 8월 3일 이겸나와 교엉필이라고 하는 한국인 두사람으로 학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병원에서 스크랜튼 박사를 만났으며 의사가 되 기를 희망하여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들어왔다. (H.G.Appenreller,Fifty of Educational Work. Light to all in the house, 1934) 배제학당은 다음해 6월 8일에 감리교 재한선교회로부터 7명의 학생으로기 독교학교로서의 개교를 공인받았다. 그후 학교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았으 며 1887년에 학생이 67명이나 되었고 한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붉은벽덜을 사 용하여 서양식 새 건물을 건축하였다. 웨렌 (H.W.Warren) 감독에의하여 성 대한 봉헌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그는 [한국인에게 주는 미국의 큰 선물 ]이라는 말로 축사하였다. (Charles A.Sauer, Within the Gate comprising the Addresses delivered at the Fifteen Anniversary of Korean Methodism First Church, The Ko-rean Methodist News Service,1934,p.85). 고종 국왕은 배재학당 출신을 정부에서 등용할 것을 약속하였고 [배제학 당] 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고 명필가 정학교에게 간판을 쓰게하고 외무아 문 의 김윤식을 기켤 아펜셀라 목사에게 교육방침으로 두가지의 중점을두었 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게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립정신을길러주는 데 있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돼야 한다 는 성서의 교훈을 살려 한학자 조한규로 한역케한 를 교훈으로하였다. 학교안에는 자조부 Selfhelp Department)를 두어 각자의 노력에따라 번 돈으로 수업료를 납부케하는 제도를 만들어 근로와 자립정신을길러주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6년 봄, 서울 정동에 남자 기숙학교를 열 고 언더우드 학당이라 이름하였다.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불러들여공 동으로 숙식하면서 인격 형성과 신앙생활을 터득케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 다. 언더우드 목사의 큰 꿈은 여기에서 교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사회지 도자를 양성하는 기독교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평양에 신학교가 서면서 그뜻은 무너졌다. 그렇기는 하나 1914년 동교내에서 고고 의 소리를 발한 [조선기독교대학]은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하여 그 계 획은 한부분은 실현되었다. 언더우드목사의 고아원 시작은 한국에서의 고아사업의 처음이 되었다. 교 육하는 일은 언더우드목사가 직접 하였고 고아사업은 그의 부인이 맡아 하 였다.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성의와 봉사는 놀라우리만큼 희생적이었으구아 들가운데도 도망치는 학생도 있었고 그녀를 심히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그 수는 늘어나 1890년 9월에는 25명이 되었다. (Mrs Underwood`s Le-tter to A.T.Pierson, December,1890,P 943) 언어우드목사의 교육방침은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그 는 학생들에게 청소하고 밥짓는 일, 심부흠하는 일을 비롯하여 자신적으로 근로하는 습관을 터득케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1890년 마펫 (S.A.Moffett)목사가 후임교장이 되었고 그는 학교이름을[예 수교 학당]이라고 고쳤다. 그는 커리큐럼에 있어서 고아원에서 학교 형태로 바꿨으며 교명에 부합하게 성서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주일에는 예수교 학 당 전체가 주일 학교가 된 감이 있었따. 1901년 게일 (J.S.Gale)목사가 교 장이 되면서는 구세학당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뒤 발전을 거듭하여 경신학교 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 제 목 : 한국 교회사 ( 이화학당과 연동여학당 ) 남자를 위하여 세운 배재학당과 쌍벽을 이루어 여자들을 위한 학교로 이 화학당이 섰다. 이화학당은 배재학당보다 몇달 늦게 1886년 5월31일미국 감 리교 여선교회에서 파송한 스크랜튼 (Mary F.Scranton) 여사에의하여 개교 되었다. [학교 사업은 6개월 전에 아들 스크랜튼 박사의 집에서 한사람을 데리고 시작하였다. 그 학생은 정부 고가간의 소실이었으며 왕후의 통역관이 되려 는 희망을 가지고 영어를 배우러 왔던 것이다. 그러나 김부인은 3개월만 공부하고 중단하고 말았다] (Mari F,Scranton,Woman`sWork in Korea,1896) 그 다음에 온 학생도 어머니가 찾아와 딸을 데려가려 함으로 서약서를써 주면서 여러모로 설득하여 겨우 안심시켜 머물러있게 하였다. 그 학생은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찾아온 아이였다. 1886년 한명의 여학생으로 시작된 이화학당은 1887년 7명으로 증가하였고 1888년에 18명의 학생으로 발전하 였다. 스크랜튼 부인은 한국에 있어서 불교와 유교의 전통의식으로 멸시와천대 받고있는 여성들에게 남자와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마음먹었다. 여학생들을 가르치는 스크랜튼 부인의 교육이념이나 매우 철저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사는 환경속에서 가정부인으로서 모범이 되게하 며 또한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신앙의 사람이 되 게하는데 있었다] (G,W.Gilmore,Korea from It`s Capit-al, P,232) [나는 학생들을 서양인의 생활양식과 의복제도를 따르게 하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한국사람을 가장 훌륭한 한국사람을 가장 훌륭한 한국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따라 교 육하려고 힘쓰는 것뿐이다] (The Godpel in All Lands for 1888,P.373) 그녀는 항상 이러한 정신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또 이것이 초창기 이화 의 정신이었다. 처음의 학과목은 영어, 산수, 한국,창가, 역사, 서도등이 었다. 1887년에는 국왕과 정부로부터 정식의 학교 인가를 받았고 명성황후는이 화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그것을 기록한 편액을 하사하였다.이와같은황실 의 배려와 후원은 이화학당을 위하여 영광이 되었고 여성교육 전개를 위하 여 계몽과 격려로서 상당한 효과를 나타냈다. 장로교 선교회에서의 여자를 위한 교육사업은 엘러스(Anni J.Ellers)양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1886년 늦은 가을부터 한명의 여자 고아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선교회 후원을 받게되었고 또 한국정부의 인정도받았다. 이 교육기관은 1889년에 하이든 (Mary E. Hayden)선교사에게 그리고 1890년 도부터는 도티(S.A.Doty) 선교사에게 인계되었다. 학교에서는 신학문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훌륭한 가정 주부가 되게하고 착실한 기독교인 양성에 목표를 두었다. [연동 여학당의 학도가 지금 20명 인데 학교 규칙인즉 비단 학문만 가르쳐서 발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으로 하는 공부와 힘으로 하는 공부를 다하게 하는데 음식만드는 일과 바느 질하는 일과 국문과 국문습자와 성경을 날마다 외워야 하는 공부와 산술과 지리와 역사와 한문과 화학과 간혹 체조 운동하는 공부이다](그리스도 신 문, 6권,15호,1902년 4월 11일) [The do as much as possible of their own Work,learn to cook and tosew in Korea fashion, are taught no English,..and we only seek to make Christian Koreans of them,not American ladies] (L.H.Underwood`sletter to A.T.Pierson, December,1890,P943)위에서 보는 대로 학과목으로음악,산술, 지리, 역사, 한문, 습자 화학등이 있었으며 또 요리와 재봉,체육과목이 있었으나 영어는 가르치지 않았다. 1895년 연지도로 교사를 옮겨 연동여학교란 이름이 붙었고 (조선예수교장 로사기, 상권 81쪽) 이것이 정신여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2004-03-11 10:34:05 read : 11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성격을 띤 최초의 학교는 아펜셀라 선교사에 의하 여 세워진 배제학당이다. 1885년 8월 3일 아펜셀라 목사가 이겸라 고영 필 의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공부를 개시한 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이며 이는 한국 현대 교육사상 영원히 기념할만한 뜻있는 날이 되었다. [나는 지난 8월 3일 이겸나와 교엉필이라고 하는 한국인 두사람으로 학 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병원에서 스크랜튼 박사를 만났으며 의사 가 되기를 희망하여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들어왔다. (H.G.Appenreller, Fifty of Educational Work. Light to all in the house, 1934) 배제학당은 다음해 6월 8일에 감리교 재한선교회로부터 7명의 학생으로 기독교학교로서의 개교를 공인받았다. 그후 학교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 았으며 1887년에 학생이 67명이나 되었고 한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붉은벽 덜을 사용하여 서양식 새 건물을 건축하였다. 웨렌 (H.W.Warren) 감독에 의하여 성대한 봉헌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그는 [한국인에게 주는 미 국의 큰 선물]이라는 말로 축사하였다. (Charles A.Sauer, Within the Gate comprising the Addresses delivered at the Fifteen Anniversary of Korean Methodism First Church, The Ko- rean Methodist News Service,1934,p.85). 고종 국왕은 배재학당 출신을 정부에서 등용할 것을 약속하였고 [배제학 당] 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고 명필가 정학교에게 간판을 쓰게하고 외무 아문 의 김윤식을 기켤 아펜셀라 목사에게 교육방침으로 두가지의 중점을 두었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게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립정신을 길러주는데 있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성서의 교훈을 살려 한학자 조한규로 한역케한 를 교훈으로 하였다. 학교안에는 자조부 Selfhelp Department)를 두어 각자의 노력에 따라 번 돈으로 수업료를 납부케하는 제도를 만들어 근로와 자립정신을길 러주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6년 봄, 서울 정동에 남자 기숙학교를 열 고 언더우드 학당이라 이름하였다.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불러들여 공동으로 숙식하면서 인격 형성과 신앙생활을 터득케 하려는 것이 목적이 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큰 꿈은 여기에서 교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사 회지도자를 양성하는 기독교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평 양에 신학교가 서면서 그뜻은 무너졌다. 그렇기는 하나 1914년 동교내에 서 고고의 소리를 발한 [조선기독교대학]은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하 여 그 계획은 한부분은 실현되었다. 언더우드목사의 고아원 시작은 한국에서의 고아사업의 처음이 되었다. 교육하는 일은 언더우드목사가 직접 하였고 고아사업은 그의 부인이 맡아 하였다.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성의와 봉사는 놀라우리만큼 희생적이었으 구아들가운데도 도망치는 학생도 있었고 그녀를 심히 괴롭혔다. 그러면서 도 그 수는 늘어나 1890년 9월에는 25명이 되었다. (Mrs Underwood`s Le- tter to A.T.Pierson, December,1890,P 943) 언어우드목사의 교육방침은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그 는 학생들에게 청소하고 밥짓는 일, 심부흠하는 일을 비롯하여 자신적으 로 근로하는 습관을 터득케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1890년 마펫 (S.A.Moffett)목사가 후임교장이 되었고 그는 학교이름을[ 예수교 학당]이라고 고쳤다. 그는 커리큐럼에 있어서 고아원에서 학교 형 태로 바꿨으며 교명에 부합하게 성서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주일에는 예 수교 학당 전체가 주일 학교가 된 감이 있었따. 1901년 게일 (J.S.Gale) 목사가 교장이 되면서는 구세학당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뒤 발전을 거듭하 여 경신학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2004-03-11 10:34:05 read : 12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성격을 띤 최초의 학교는 아펜셀라 선교사에 의하 여 세워진 배제학당이다. 1885년 8월 3일 아펜셀라 목사가 이겸라 고영 필 의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공부를 개시한 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이며 이는 한국 현대 교육사상 영원히 기념할만한 뜻있는 날이 되었다. [나는 지난 8월 3일 이겸나와 교엉필이라고 하는 한국인 두사람으로 학 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병원에서 스크랜튼 박사를 만났으며 의사 가 되기를 희망하여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들어왔다. (H.G.Appenreller, Fifty of Educational Work. Light to all in the house, 1934) 배제학당은 다음해 6월 8일에 감리교 재한선교회로부터 7명의 학생으로 기독교학교로서의 개교를 공인받았다. 그후 학교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 았으며 1887년에 학생이 67명이나 되었고 한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붉은벽 덜을 사용하여 서양식 새 건물을 건축하였다. 웨렌 (H.W.Warren) 감독에 의하여 성대한 봉헌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그는 [한국인에게 주는 미 국의 큰 선물]이라는 말로 축사하였다. (Charles A.Sauer, Within the Gate comprising the Addresses delivered at the Fifteen Anniversary of Korean Methodism First Church, The Ko- rean Methodist News Service,1934,p.85). 고종 국왕은 배재학당 출신을 정부에서 등용할 것을 약속하였고 [배제학 당] 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고 명필가 정학교에게 간판을 쓰게하고 외무 아문 의 김윤식을 기켤 아펜셀라 목사에게 교육방침으로 두가지의 중점을 두었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게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립정신을 길러주는데 있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성서의 교훈을 살려 한학자 조한규로 한역케한 를 교훈으로 하였다. 학교안에는 자조부 Selfhelp Department)를 두어 각자의 노력에 따라 번 돈으로 수업료를 납부케하는 제도를 만들어 근로와 자립정신을길 러주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6년 봄, 서울 정동에 남자 기숙학교를 열 고 언더우드 학당이라 이름하였다.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불러들여 공동으로 숙식하면서 인격 형성과 신앙생활을 터득케 하려는 것이 목적이 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큰 꿈은 여기에서 교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사 회지도자를 양성하는 기독교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평 양에 신학교가 서면서 그뜻은 무너졌다. 그렇기는 하나 1914년 동교내에 서 고고의 소리를 발한 [조선기독교대학]은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하 여 그 계획은 한부분은 실현되었다. 언더우드목사의 고아원 시작은 한국에서의 고아사업의 처음이 되었다. 교육하는 일은 언더우드목사가 직접 하였고 고아사업은 그의 부인이 맡아 하였다.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성의와 봉사는 놀라우리만큼 희생적이었으 구아들가운데도 도망치는 학생도 있었고 그녀를 심히 괴롭혔다. 그러면서 도 그 수는 늘어나 1890년 9월에는 25명이 되었다. (Mrs Underwood`s Le- tter to A.T.Pierson, December,1890,P 943) 언어우드목사의 교육방침은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그 는 학생들에게 청소하고 밥짓는 일, 심부흠하는 일을 비롯하여 자신적으 로 근로하는 습관을 터득케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1890년 마펫 (S.A.Moffett)목사가 후임교장이 되었고 그는 학교이름을[ 예수교 학당]이라고 고쳤다. 그는 커리큐럼에 있어서 고아원에서 학교 형 태로 바꿨으며 교명에 부합하게 성서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주일에는 예 수교 학당 전체가 주일 학교가 된 감이 있었따. 1901년 게일 (J.S.Gale) 목사가 교장이 되면서는 구세학당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뒤 발전을 거듭하 여 경신학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감리교 병원 설치
감리교 병원 설치 2004-03-11 10:35:12 read : 13 장로교 계통의 선교사들이 주로 왕실과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병원을 설립 운영하고 있을 때, 감리교 선교사들은 평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료소와 약국같은 것을 설치하여 전도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감리교 선교의사들은 서울중심지를 떠난 변두리와 비장으로 흐터져 순회 진료하기를 힘써 하였다. 감리교 의교사업은 스크랜튼(William B.Scranton)에 의하여 개시되었다. 그는 1885년 9월 10일 병원을 역었으며 이듬해 6월 15일 자신의 시병원이 라고 이름붙였다. 스크랜튼 의사는 전염병 환자를 위하여 무료진료소의 설 치를 계획하여 1887년 12월에 서대문밖 아오개(Aogai)에 진료소를개설하였 다. 그는 또한 부녀들과 아동들의 병 치료를 위하여 여자 의사를 파송해 달라 고 본국교회에 요청하였다. 당시의 한국 관습이 내외 관념이 심하여남자 의 사가 여자 환자를 진찰하기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선교회에 서는 1887년에 하워드 (Mata Howard)를, 1889년에는 셔우드(R-osetta Sherwood)를 그리고 1890년에는 맥길(William B.McGill)를 파송하였다. 하워드는 한국 최초의 부인 병원인 보구여관을 개설하였으며 맥길은 남대 문 옆 상동에 병원을 개설하였다. 이 세 여자의사가 올린 의료의 실적은 3 년동안에 5천5백명을 진료하였음을 보아 가히 평가를 받을만하다. 미국장로교 선교회에서도 여자 의사를 파송하였다. 한국 왕실에서 여자의 사를 요청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1886년 엘레스(Annine J.Ellers)가 병원 이 를 돕기위하여 부임하였다. 엘레스양을 맞은 제중원에서 는 부녀과를 신설 하여 책임을 부여하였다. 그러한 사정에 관하여 설명한 글이 남아있다. [우리 교회에서 대한 병인 들을 위하여 서울 구리개에 제중원을 설립한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한편으 로는 여인의 병울 보게하였다. 만일 대한 부인중에 병이 대단하여병원으로 걸어가지 못하는 이는 제중원으로 기별하면 의원 부인이 가서 보아주는데 이것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뜻을 본받아 약을 주어 치료하여 효험을 많이 보게하는 것이다. 병이있는 이는 제중원으로 가시면 부인이사랑하는 뜻으로 보아 주시리이다. 엘러스 의사는 특히 왕비의 신임을 얻어 자유롭게 왕실을 출입하는 특전 을 얻었다. 그녀는 병의 간호와 치료뿐 아니라 담화를 통하여 서양의문물 과 풍습을 많이 전달하여 기독교 선교를 향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성공 하였다.그러던 중 벙커(D.A.Bunker)의사와 결혼하게 되면서 릴리어스 홀튼 (Lillias S.Horton)양이 1888년 3월부터 부녀과의 책임을 맡게되었다. 릴리어스 홀튼 양은 2년후에 언더우드 목사와 결혼하였으나 그녀는 부녀 과의 책임을 담당하였고 왕후의 시의의 직도 계속하여 유지하였다. 그녀와 왕후와의 친분은 날로 두터워져 언더우드 부인이 쓴 글에 흥미로 운 내용이 있다. [우리는 왕우에게 여러번 복음을 전도할 기회가 있었다. 왕후가 우리에게서 들은 말을 국왕이나 왕자에게 전달한 사실을 알았을 때 는 참으로 기뻤다. 크리스마스 때 우리는 성탄나무를 세워드렸으며 왕후는 매우 기뻐하여 새해를 맞으면서 금일봉과 꿩과 계란을 선물로 하사하였다. 선교 여의사들의 활동은 부녀들의 생명도 남자와 꼭같이 취급하는 행동으 로 나타나 한국 고래의 남녀유별의 관념을 타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 였다. 이러한 면에서도 의료사업의 성과는 선교 초창기에 있어서 선교방법 의 중요한 방식으로 완전히 효과적이었음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감리교 병원설치
감리교 병원설치 2004-03-11 10:37:04 read : 31 장로교 계통의 선교사들이 주로 왕실과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병 원을 설립 운영하고 있을 때, 감리교 선교사들은 평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료소와 약국같은 것을 설치하여 전도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감리교 선교의사들은 서울중심지를 떠난 변두리와 비장으로 흐터져 순회 진료하기를 힘써 하였다. 감리교 의교사업은 스크랜튼(William B.Scranton)에 의하여 개시되었다. 그는 1885년 9월 10일 병원을 역었으며 이듬해 6월 15일 자신의 시병원이 라고 이름붙였다. 스크랜튼 의사는 전염병 환자를 위하여 무료진료소의 설 치를 계획하여 1887년 12월에 서대문밖 아오개(Aogai)에 진료소를개설하였 다. 그는 또한 부녀들과 아동들의 병 치료를 위하여 여자 의사를 파송해 달라 고 본국교회에 요청하였다. 당시의 한국 관습이 내외 관념이 심하여남자 의 사가 여자 환자를 진찰하기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선교회에 서는 1887년에 하워드 (Mata Howard)를, 1889년에는 셔우드(R-osetta Sherwood)를 그리고 1890년에는 맥길(William B.McGill)를 파송하였다. 하워드는 한국 최초의 부인 병원인 보구여관을 개설하였으며 맥길은 남대 문 옆 상동에 병원을 개설하였다. 이 세 여자의사가 올린 의료의 실적은 3 년동안에 5천5백명을 진료하였음을 보아 가히 평가를 받을만하다. 미국장로교 선교회에서도 여자 의사를 파송하였다. 한국 왕실에서 여자의 사를 요청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1886년 엘레스(Annine J.Ellers)가 병원 이 를 돕기위하여 부임하였다. 엘레스양을 맞은 제중원에서 는 부녀과를 신설 하여 책임을 부여하였다. 그러한 사정에 관하여 설명한 글이 남아있다. [우리 교회에서 대한 병인 들을 위하여 서울 구리개에 제중원을 설립한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한편으 로는 여인의 병울 보게하였다. 만일 대한 부인중에 병이 대단하여병원으로 걸어가지 못하는 이는 제중원으로 기별하면 의원 부인이 가서 보아주는데 이것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뜻을 본받아 약을 주어 치료하여 효험을 많이 보게하는 것이다. 병이있는 이는 제중원으로 가시면 부인이사랑하는 뜻으로 보아 주시리이다. 엘러스 의사는 특히 왕비의 신임을 얻어 자유롭게 왕실을 출입하는 특전 을 얻었다. 그녀는 병의 간호와 치료뿐 아니라 담화를 통하여 서양의문물 과 풍습을 많이 전달하여 기독교 선교를 향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성공 하였다.그러던 중 벙커(D.A.Bunker)의사와 결혼하게 되면서 릴리어스 홀튼 (Lillias S.Horton)양이 1888년 3월부터 부녀과의 책임을 맡게되었다. 릴리어스 홀튼 양은 2년후에 언더우드 목사와 결혼하였으나 그녀는 부녀 과의 책임을 담당하였고 왕후의 시의의 직도 계속하여 유지하였다. 그녀와 왕후와의 친분은 날로 두터워져 언더우드 부인이 쓴 글에 흥미로 운 내용이 있다. [우리는 왕우에게 여러번 복음을 전도할 기회가 있었다. 왕후가 우리에게서 들은 말을 국왕이나 왕자에게 전달한 사실을 알았을 때 는 참으로기뻤다. 크리스마스 때 우리는 성탄나무를 세워드렸으며 왕후는 매우 기뻐하여 새해를 맞으면서 금일봉과 꿩과 계란을 선물로 하사하였다. 선교 여의사들의 활동은 부녀들의 생명도 남자와 꼭같이 취급하는 행동으 로 나타나 한국 고래의 남녀유별의 관념을 타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 였다. 이러한 면에서도 의료사업의 성과는 선교 초창기에 있어서 선교방법 의 중요한 방식으로 완전히 효과적이었음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감리교의 신앙과 사상
감리교의 신앙과 사상 2004-03-11 10:36:21 read : 42 감리교의 신앙과 사상 제 1 강 : 감리교의 유래 감리교의 신앙과 사상 1. 감리교회의 유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교회의 명판에는 그의 이름과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존 웨슬리, 그의 마음이 이상스럽게 따듯해짐을 느꼈다.(FELT HIS HEART STRANGELY WARMED) 이 은총의 경험은 감리교의 시작이었다. -미국 드류신학교, 1926년) 웨슬리의 신앙체험은 그가 감리교를 세우는데 힘찬 원동력이 되어졌다. 그가 링컨대학의 강사로 있으면서 조직된 신성클럽(HOLY CLUB)을 통해 발전된 그의 신앙 조직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성클럽의 지도자가 되어 성경연구와 종교적 성결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 들은 초기에는 주 1회 모이다가 후에는 매일 저녁에 기도와 희랍어 성경연구, 고전 문학 연 구를 하고 검소한 식사로 마치곤 하였다. 또한 매주 1회의 성찬식과 한주에 두번의 금식을 하였다. 이러한 규칙적이고 신앙적인 활동을 본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규칙쟁이라는 의미로 감리주의자(METHODIST)라고 불렀고 후에 이것이 우리 교회의 명칭이 되었다. 웨슬리의 신앙은 어려서부터 어머니 수잔 웨슬리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은 경험과 그의 폭넓은 독서(링컨대학 강사) -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희랍어와 라틴어, 수요일에는 논리와 윤 리, 목요일에는 히브리어와 아랍어, 금요일에는 형이상학과 자연철학 그리고 토요일에는 웅 변학과 시문학을 공부했다 - 와 회심 경험은 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학 생 때 과외로 공부할 것을 정해서 스스로 연구하곤 하였다. 먼저 제레미 타일러 감독(J. Tylor)의 거룩한 삶과 죽음 , 수도자 토마스 아 켐피스 (T.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mitatio Christi) , 그리고 월리엄 로우(W. Law)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하여 와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의 부름 이라는 명저들을 통해 그는 종교의 형식보다 는 내면성을 중시하는 것과 목적의 단순성, 사랑의 순결성, 언행의 합일 및 자기 부정과 전적인 헌신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두번째로 그는 성서와 초대 교부의 문헌 연구를 통하여 성화의 개념을 명확히 하였는데 이는 신성클럽(Holy Club) 회원인 클레이톤의 도움으로 성화의 규범적 교리를 접하였고, 그 리스도인의 목표는 완전이며, 그것은 상태가 아닌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커 다란 영향을 준 사람들은 이집트 성자 매커리어스(Macarius), 사이러스(E. Syrus)로써 이들에게서 완전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얻었으며, 익나시우스(Ignatius), 클레멘트(Clement) 등을 통해서는 참 된 성결과 교리와 체험간의 긴밀한 관계성을 이해하였다. 웨슬리는 초대 교회와 동방 교회의 문 헌을 통해 거룩함의 관념은 훈련된 사랑임을 깨달았고, 영국교회의 전통인 이상적 사랑을 종합하 여 사랑의 관념을 완성하였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실천적 영향을 끼친 것은 2회에 걸친 회심사건과 야성회에서의 성령체험 이었다. 그의 1차 회심으로 불리는 사건(1725년)에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바치겠다는 율법 아래서의 종의 신앙을 소유하였고, 1738년 5월 복음적인 2차 회심을 통해 은혜 아래 서있는 인간이 되어 아들의 신앙을 체험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의 마음이 이상스럽게 따뜻해짐을 느낌 으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특히 1738년 연말에 페터레인에서 모인 야성 회(철야기도회)에서의 성령의 강한 임재는 그를 순수한 사랑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실천하 는데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것은 성령의 증거인 동시에 그의 경험이었다. 이러한 신앙적 경험을 가진 그는 1739년 4월부터는 야외에서 전도를 시작하고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영국교회는 그가 설교할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은 이들이 영국교회에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교회는 이들을 받아 주지 않았 다. 결국 웨슬레는 신도회(SOCIETY)를 조직하고 그들을 직접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 날이 발전한 이 신도회의 지도를 위해 작은 단위인 속회(CLASS)를 조직하고 속장제도를 두 어 매주 화요일마다 상당한 교육과 훈련을 시켜 이들의 신앙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웨슬리 가 마지막으로 브리스톨 연회에서 사회를 볼 때에는 감리회원 수가 영국과 북미 그리고 선 교지에 거의 12만명에 이르렀다. 웨슬리 형제가 임종한후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이들에게 경 의를 표하기 위해 명패를 새겼는데 그 명패에는 다음의 세가지 말들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써 생각한다. -JOHN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다. - JOHN 하나님은 그 일꾼을 장사시키나 그 사업은 계속하신다. - CHARLES 2. 감리교회의 전통 감리교회의 신앙과 신학은 다른 개신교회에 비하여 독특성을 갖는다. 이는 일반 개신교 회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분리되거나 개혁하여 발생하였으나 감리교회는 영국성공회에서 시작하고 그 전통은 개신교적이기 보다는 카톨릭 전통에 더욱 가깝다. 특별히 감리교 신앙 은 웨슬리의 지도 노선에 따라 성서적인 기독교로 되돌아 가려는 노력이 가장 돋보이는 교 단이라 할 수있다. 즉 그는 초대 교회의 전통과 고전 카톨릭 전통과 개혁교회 전통을 다양 하게 수용하여 창의적으로 종합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초대 교회의 전통은 웨슬리가 신성클럽의 회원인 존 클레이톤의 도움을 받아 초대 기독 교 교부를 연구함으로써 교회의 본질적 전통을 다시 되찾으려고 했다. 이는 주로 희랍교부 들의 전통과 이집트의 성자인 마카리우스의 여러 문헌들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사상과 사랑은 단지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 었다. (disciplined love,aspiring love) 뿐만 아니라 닛사의 그레고리의 저서를 통해 성령안에서 의 완전과 역사,그리고 은사에 대해 깊이 상고하였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속회의 지도자들을 교육시키는데 3개월마다 한번신 신용증서와 같은 것을 발급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점검하곤 하였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전통을 통해 기독교회의 표준적 규범을 세우게 되었다. 웨슬리는 카톨릭 전통에서 은총의 제도화된 수단(기도 성경읽기, 성례전 참여)을 강조하 였고, 역사적인 3중 안수제도와 감독 제도를 긍정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연속성과 일치를 강 조한 웨슬리는 침례교의 유아세례 불필요성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였고, 유아 세례의 필요성 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직자의 역할을 그 성직자의 능력이나 부정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신다고 믿었다. 또한 신비주의적 영향을 강하게 받던 카톨릭과 성공 회의 영향하에서 웨슬리는 주관적 체험의 강조와 개인적 성화에 강조점을 둔 신비신학을 강 하게 비판하면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며, 공동체적인 성화를 추구해야 한다 고 강조하였다. 개혁적이고 자유교회전통은 특히 모라비안 교도들에 의해 경건주의와 루터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근본적인 교리인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나 sola scriptura(오직 성서로)를 받아 들이되 그것을 일차적인 것이라고 보았지 배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믿음은 사랑의 삶을 위한 수단이라고 보았다.(설교:믿음으로 세워진 율법Ⅱ) 그러나 신앙으로 말미 암은 의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의는 내적인 변화를 통해 성화 의 삶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신비적 정적주의에 빠진 신앙을 비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칼빈이 강조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용인하였으나 인간의 나약성을 강조한 나머지 예정설에 치우친 것을 비판하면서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이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의 은총 으로 인해 주어지는 선재은총이며 이를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3. 감리교 운동 웨슬리는 그의 동료들과 더불어 신성클럽에서 하던 사업들을 계속해서 실행하였다. 그들 은 회원인 월리엄 몰간의 권유로 정기적으로 가난한 이웃과 수감된 죄수들을 방문하고 무산 아동을 가르치는 일에 나섰고 후에는 탄광촌인 킹스우드에 학교를 세워 하류층으로 교육받 지 못하는 사람들과 전도자의 자녀를 교육시켰다. 이러한 일들은 계속해서 사회사업으로 연 결되어 당시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당시의 노동자를 위한 휴계소를 설치하고 빈민금고를 창설하고(1746), 고아원을 세웠으며(1742) 금주 운동을 벌여 술집이 문을 닫게 되었고, 노예폐지 운동을 협조하였다. 웨슬리는 말년에 노예해방운동가인 윌버포스에게 편지 하기를 계속하시오.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전능하신 권능안에서, 아메리카의 노예제도까지 도 그 앞에서 사라지게 되기까지. 하고 격려하였다. 웨슬리는 힘껏 벌고, 힘껏 모으고, 힘껏 써라 고 강조하면서 기회있는대로 모든 사람에 게 선을 행하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되 십분의 일, 십분의 삼, 십분의 오가 아 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께 갚아야 한다 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에게 맡기신 돈으로 굶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나그네 된자를 돕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며, 그리고 인류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웨슬리는 자본주의 원리와 부동산 상속의 권리를 반대하면서 경제적 분배에 대해 강하게 주장하였다. 웨슬리의 이러한 사회적 성화운동은 영국전체를 변화시켰다. 그는 의료소를 개설하였고 극 빈자를 도와주었으며, 섬유공장을 세워 노동할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였다. 또한 출판사업을 통해 신앙을 고취시켰으며, 설교와 찬송시를 출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과 소책자를 발행하여 계몽사업을 벌였다. 계속해서 연결된 선교사업은 미국과 캐나다 아일랜드 독일등을 선교지로 봉사하면서 해 외선교를 강화하였고, 곳곳마다 신앙그룹을 형성하도록 고무하였다. 영국의 노동조합의 출발 은 바로 감리교회의 속회조직을 본따 만든 것이며, 실제로 감리교인이 대부분이었다. 나아가 탄광과 교도소를 방문하도록 조직시켰으며,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영국은 피의 혁명에서 벗 어나게 된 것이다. 제 2 강 : 감리교회의 신앙 1. 감리교회의 신앙적 표준 웨슬레는 영국교회의 신학적 표준인 성서,전통,이성에 경험을 넣어 4개의 신학적이며 신 앙의 표준을 삼았다. 이러한 신학적 표준은 미국 감리교회와 한국감리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감리교회에서의 표준이 되어졌다. (1) 성서 웨슬리는 고전적인 개신교전통에 입각한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성서의 영감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기록되어진 것 으로는 보지 않고, 그들의 일반적 기억과 전승, 그리고 정확성 없이 성서를 인용하였다고 인 정하였다.(신역성서주해 히브리 2:7, 마태1:1, 마태 2:6) 결국 정태적인 문자주의에서 벗어나 전통과 이성과 경험과 관련하여 성서를 해석하였다. 웨슬리는 최고의 권위를 성서에 둔것은 성서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졌음을 확신했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 의 신앙과 실천에 유일하고 충분한 법칙임을 믿었다.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한 책 - 성서 - 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했다.(HOMO UNIUS LIBRI) 그러나 그는 사고의 능력을 배양하기 위 하여 의학, 역사, 문학 등을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성서해석법은 다음과 같다.(W. 아네트) 1) 문자적의미는 애매하거나 상치되지 않는 한 강조한다. 애매한 본문은 선명하 게 말해주는 본문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2) 전체적 맥락에서 본문을 해석한는 것이 중요하다. 3) 성서를 성서자체와 비교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서로 보충) 4) 성서는 경험으로 확증 되어야 한다. 5) 성서의 선포와 이해를 위해 이성이 사용되어야 한다. 6) 최후의 해석은 평범한 진리 이어야 하며, 사변과 불가해한 추리이어서는 안된 다. (2) 전통 웨슬리는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교부들의 권위를 최고의 전통으로 긍정하였으나 3중 안 수제도나 교회의 예전과 같은 중요한 전통적 형식들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특히 기도서와 교훈, 초대 교부 들의 문헌에 중용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성서는 바로 이러한 전통에 의해 읽혀질 때에 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새로운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 전통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근본적인 목표를 재고하는 데 큰 힘을 제공한 다. (3) 이성 웨슬리는 이성을 부인하는 것은 종교를 부인하는 것과 같으며 종교와 이성은 동반자이 며, 모든 비합리적인 종교는 거짓종교라고 하였다. 이성은 하나님의 성령의 지도아래 참종교 의 기초를 수립하는 것과 상부구조를 수립하는 일에 근본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즉 논리적인 능력으로 게시의 증거를 정리하고 성서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에 방어하는 필요한 무기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웨슬리는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밖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 성품의 본래적인 구조입니다. 그리고 조물주에 관해서든지 그 분의 피조물에 관하여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음 놀랍도록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 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언잖기는 하나 필수적인 주제입 니다. 그것을 잠시 생각해 봅시다. 지혜와 사랑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사 우리 자신의 무지를 분별하게 하시기를 빕니다. 라고 하였다. (4) 경험 웨슬리는 권위의 구조에 있어서 개인의 경험을 강조했는데 이는 그의 성령체험을 통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있다. 이는 성서와 전통이라는 차원이 기독교를 형식종교로 만들고, 이성 만의 강조는 논리적 종교로 전락시킬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나는 소위 감리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구라파나 미국에서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아무런 능력이 없는 종교의 형식 곧 죽은 분파로 존재하지 않을까 염려한다. 만일 그들이 처음 출발할 때에 보인 교리와 정신과 훈련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 다. 바로 성서의 권위와 전통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주어졌다고 확인될 때에만 타당한 것이 다. 바로 경험 종교로써의 기독교는 바로 성령의 내적 증거와 권위의 활용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은 성서에 의해 확인되어야 한다. 2. 감리교회의 특색 (1) 은총의 낙관주의 웨슬리의 신학은 은총의 낙관주의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은총 의 낙관주의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한다. 참된 성장은 안정과 사랑의 상호관계 속에 있을 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확신은 미래를 보장하는 담보물은 아니며, 지속적인 복종과 충실만이 미래를 보장한다고 믿었다. 감리교회의 신앙의 내면은 바로 이러한 신앙이 낙관주의인데 그 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양심을 주셨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것을 선 재은총(prevenient Grace)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선재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신앙할 수 있으며, 믿는 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은총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은총에 의한 성장은 은총의 수단으로 더욱 고양되어질 수 있다. 1) 기도 - 이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며, 우리의 삶을 긍정적으로 낙관하며, 더욱 깊은 확신에 차 도록 고무시키는 것이다. 2) 성서연구 - 감리교는 성서적 기독교인이 되고자 했다. 늘 성서 의 말씀을 전체로써 파악하고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감리교인은 스스로 성서가 내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어떻게 하면 성서의 진리를 다른 사람의 선을 도모하는 것으로 만들수가 있는가? 하고 자문하도록 했다. 3) 성찬- 웨슬리는 가능하면 자주 성찬에 참석하도록 했고, 주님이 성찬 가운데 현존하시며, 회개시키는 잠재력을 지녔다 고 믿었다. 4) 금식- 웨슬리는 매주 수,금요일에 금식을 지켰다. 그리고 후에는 금요일을 지 켰다. 이는 어떤 효력을 가지는 것 보다는 그 시간을 하나님과 영적 관심사에 바친다는데 있었다. 5) 친교- 웨슬리는 전도된 신도들을 반(속회,동성 4-8명), 조(남녀 지도자) , 회(40명 의 기도회,매주모임,성서해설,찬송,간증,기도)단위로 묶어 그들의 신앙을 지속적으로 성장하 도록 도와 주었다. (2) 보편적 정신 감리교인은 행동 관습 또는 중요하지 않은 문화적 상황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의견이나 특수한 관념에 동조되지 않고 오직 성서에 기록된 말씀이 기독 교 신앙과 실천에 충분한 규범으로 확신하는 것이었다. 즉 기독교 사상의 일부 의견보다는 그 근본 핵심과 전체에 강조점을 둔다. 웨슬리의 이러한 보편적 정신은 다른 사상에 대해 강제하거나 무조건적인 수용 태도를 거부한다. 단지 근본적인 신앙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적합하다면 그는 관용의 태도를 취하라고 권고한다. 이러한 태도는 일치운동에 커다 란 동력을 제공하였고,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며, 무엇을 하든지 말과 행동에 있어서 모든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과을 도리는 것이다. 그는 의 견이나 말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파괴하지 말고 만민의 아버지 이신 하나님이 한 분 이듯 이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관용정신을 갖는다. 하나님은 만물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일하시 며, 만물 안에 계신다. 그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가? 그러면 우정의 악수를 하자 고 하였다. (3) 사랑의 역동성 웨슬리는 감리교인의 특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주제 에 집중하고 있다. 웨슬리는 신약주해에서(1요한 4:18-19)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 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이 말씀은 모든 종교의 큰 강령이며,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핵심이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전적으로 거룩해지고, 이 사랑이 모든 성결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사랑은 외적인 행동 뿐만 아니라 내적인 성령의 인치심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능력은 진실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근본적으 로는 사회적 사랑이며, 이 사회적 사랑은 자기 사랑과는 구별된다. 바로 자신을 올바로 사랑 하는 그리스도인이란 타인 또한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은 생의 원동력이 되어지 고 결합의 원리이며, 자연적인 긍정의 원리로써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은 기독교인은 자기 사랑을 넘어 타인에 대한 봉사와 희생으로 발전된다. 사랑없는 힘은 폭력이며, 힘없는 사랑 은 무기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역동성은 자신만을 위한 자율이나 타인에게 강제 되는 타율도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힘에 사로 잡히어 뜨거운 열정과 확신 속에서 나누어지 는 사랑이다. 웨슬리는 이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을 성화의 길로 인도하는 위대한 힘이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했다. 감리교인의 증거는 어떠한 교리나 신조에 대한 찬성보다는 그리스도의 형제의 입장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며, 서로의 짐을 져 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의 법을 성 취하는 데 있었다. (4) 창의적 종합 감리교 신앙은 어떠한 주의나 주장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변적인 확대가 되어 서는 안된다. 감리교 신앙은 전세기에 나타난 모든 신학적 장점을 취하고 성서적 전통 속에 서 다시 밝혀내어 이러한 교리의 정신과 그 훈련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2) 믿음으로 얻는 의와 성화의 삶 3) 카리스마와 제도(은혜의 수단과 내적 은총) 4) 교리와 체험 5) 현재적 구원과 미래적 구원 6) 만인구원론 3. 한국감리교회의 신앙 한국감리교회의 신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적 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의 교리적 선언은 회심과 성화 그리고 성령에 의한 구원의 확신을 중점적으로 나타 내고 있으며,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면서 미국교회의 전권위원회의 감독인 H.웰취 감독이 한국신학자들과의 협의하에 제정한 것이다. 이는 미국연합감리교회에 한국인의 신조 (Korean`s creed)로 잘 알려져 있다. 교리적 선언 1) 우리는 만물의 창시자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시요 모든 선과 미와 애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2) 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 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신 을 믿으며 4) 우리는 사랑과 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한 은혜를 믿으며 5)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에 충분한 표준이 됨 을 믿으며 6) 우리는 살아게신 주 안에서 하나가 된 모든 사람들이 예배와 봉사를 목적하여 단결한 교회를 믿으며 7)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 에 모든 사람이 형제됨을 믿으며 8)우리는 의의 최후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한국감리교회는 이러한 감리교적 전통속에서 한국화를 꾀하는데 주력하였다. 특히 감리 교의 주요인물은 감리교 신앙의 핵을 이루어 왔다. 즉 토착화 신학과 변증적 종교신학을 펼 친 최병헌 목사, 또한 1930년대 부흥운동으로 맹렬한 위세를 떨치며 사랑의 신비주의를 강 조했던 영성운동의 부흥사 이용도 목사,그리고 사회봉사와 민중의 해방을 향한 독립투쟁의 장을 마련해 주었던 전덕기 목사가 바로 한국감리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바로 이러한 신학적, 영성적, 실천적 목회가 한국감리교회의 세주류를 이루워왔고, 이를 우리는 통전적으 로 수용해야한다. 제 3 강 : 감리교회의 신학과 교육 1. 감리교회의 신학 (1) 선재은총과 자유의지 감리교 신앙의 독특한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선재 은총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 리가 주님을 믿기 이전부터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바로 선재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다. 장로교의 칼빈주의 5대교리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어졌으므로 하나님을 알수 도 깨달을 수도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성서적인 관점에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전 적으로 타락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나님을 알수 있는 힘을 부여 받게 되었다고 주 장하였다. 이것은 양심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며, 선과 사랑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 한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 칼빈이나 믿음을 강조한 루터 사상을 비판하면 서 성령의 역사를 더욱 중시한 성화의 신앙으로 종합하였다. (2) 의화와 성화 웨슬리에게 있어서 의화와 성화는 그의 신학과 실천에 있어서 중추적인 두 핵심이다. 의 화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성령의 역사가운데 의롭게 되어지는 것 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통해서 확신하는 은총을 받는 것이다. 의화와 더불어 신생(新生)함으로써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추구하며, 성화의 과정을 통 하여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의 화는 상대적인 변화이므로 실제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으며, 의식적인 변화만이 일어난다. 의화는 우리를 위한(for all) 하나님의 은총이며, 성화는 우리 안에서(in all)의 성령의 역사이 다. 전자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외적 관계를 의미하고, 후자는 우리의 내적 영혼을 변화시 키므로 죄인이 의인되고 성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의화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이 형 성되고 성화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화는 그리스도의 삶이 유일 하고 지속적인 근거이므로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나 성화는 그리스도의 구속 적 역사에 대한 내적 타당성의 결과이므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변화되 어 간다. 웨슬리는 이 과정을 구원과 관련시켜 구원을 세속적 의미의 지옥에서의 구출 또는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의 현재적 구원 , 신적 본성의 회복 ,영혼을 원초의 건강으 로 회복 , 영혼의 본래적인 순결성 , 우리의 영혼이 의와 진리의 거룩함과 정의와 자비로 새 롭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 , 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의화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객관적 또는 율법적으로 보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결과로 우리가 죄책에서 용서를 받는 상태적인 변화를 말하며, 성화는 주관 적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안에서 일하시는 결과로 우리 속에 있는 죄의 근원으로부 터 자유를 얻는 실제적인 변화를 말한다. 본질적으로 의화와 성화는 연속성을 가지지만 그 것 나름대로 톡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구분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하나님 안에서의 윤리적인 삶, 도덕적인 삶이며 이로써 정치적, 자 연적 형상을 되찾는 그리스도의 재연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순수한 사랑으로 실천 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영화 감리교의 완전성화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사실상 개인과 공동체를 하나님의 구원이 라는 영역 속에둠으로써 단순한 개인구원이 아니라 통전적인 구원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 스도안에서 의화되고, 성열의 역사로 성화되어가는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순수성으로 변화되 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게 된다.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는 그 순수성을 이루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해지는 삶은 바로 늘 기도하며, 기뻐하는 삶으로 변화되어진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바로 모든 죄에서 구해주시는 바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이러한 사랑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 사랑은 한 순간에 즉시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서가 아니라 매순간 그 사랑을 기대하여야 한다. 지금이 받아들일 때이며, 구원의 날이다. 라고 하였다. (Ⅰ데살로니가 5:23-24) 예수님, 당신의 승리하시는 사랑이 나의 마음 전체를 차지합니다. 이제 나의 영혼은 방황하지 않으며 하나님 안에 평안히 거합니다. 정결케 하시는 불이 나의 마음에 들어와, 나의 영혼을 비추입니다. 주님의 생명을 나의 전 존재에 골고루 부여하시고 내 모든 것을 성화시켜 주옵소서. ------ 찰스 웨슬리 (4) 감리교회론 웨슬리는 교회론이란 논문에서, 교인 전원에게 생명력을 부어주시는 한 성령, 예수 그리 스도로 인한 한 소망, 성도 전체를 주관하고 성도의 마음에 천국을 건설하시는 한 주님을 고백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산희망의 기초를 삼으려, 주님이 베푸시는 신령 한 은혜의 외적 세례와 내적인 성만찬의은사가 있는 만유이 아버지시며, 양자의 영을 허락 해주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는 한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두 세신자로 분산된 모든 공교회가 한 몸임을 고백하는 곳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교회란 하나님이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정당하게 집행되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친교공동체라고 정의했다. 교회는 하나이다.- 한 주님을 고백한다. (una) 교회는 거룩하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신자를 거룩하게 하신다.(sancta) 교회는 보편적이다.- 보편적 구원과 보편적인 규범 (catholica) 교회는 사도적이다.- 사도의 증거와 가르침, 정신의 계승(apostolica) 2. 감리교회의 교육 (1) 감리교 교육 기독교 교육의 역사적 기원은 18세기의 주일학교운동이나 20세기의 교회학교 운동도 아 닌 이스라엘의 태동과 더불어 계속되어 장막공동체, 성전공동체, 회당공동체로 이어져 예배 와 교육을 통해 초대교회에 까지 계속되어왔다. 그러므로 신앙교육은 그 신앙공동체를 이해 하는데서 가능하며, 유기적 관계를 잘 포착할 때 그 의미를 찾을수 있다. 1780년 로버트 레익스는 주일학교 운동을 벌였는데 이는 감리교인이었던 소피아 쿠우크 가 레익스에게 제안함으로 일반 대중의 어린이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근로 청소년 들, 길거리를 헤메이는 젊은이들에게 신앙과 삶의 기쁨을 나눠주는 평신도 운동이었다. 그리 고 이러한 주일학교운의 한계점은 일상생활과 계속되지 못했다는 관점에서 언제나 열린 교 회로써 항상 기독교 교육을 시킨다는 입장에서 교회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익스의 주일학교이전에 감리교회의 어머니인 수잔나 웨슬리의 기초적 교육훈련 은 감리교회로 하여금 교육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수잔나는 두뇌가 명석하고 13세부터 교회론과 교리적 논문을 읽을 정도였고 가족간의 신학적 토론에도 참가 하였다. 사무엘 웨슬리와 결혼한후 그녀는 스스로 자녀 교육을 위해 교과목을 정해 직접 가 르쳤다. 교육방침의 첫째는 규율이었으며, 회초리를 무서워하게 하고, 소리내어 울지 못하도 록 하였고, 고집을 부리지 못하제 하였으며, 자제력을 길러 주었다. 연장자에게는 경어를 쓰 게 했고, 거짓말이나 상스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엄격하였으나 무리하게 억 압하지 않았고, 말을 할줄 알면 아침 저녁으로 주기도문을 외우게 하였고, 짧은 기도문과 교 리문답, 성경의 명구를 외우게 하였다. 자녀들이 다섯돌이 되면 첫공과를 시작하였고, 철자법, 독법,서법등을 가르치고 그 후에 초급의 산수,문법,역사,지리를 순차로 가르쳤다. 교육법에 능숙한 수잔나는 자녀의 재질에 따 라 교육시켰으며, 암송하는 것은 20회씩 되풀이 하여 완전히 외우게 하였다. 웨슬리의 가정 학교는 대학과목과 교수법까지도 동원되었고, 이야기와 강의, 교과서로 가르치고, 논문과 숙 제를 내주었다. 또한 함께 찬송과 노래를 부르며, 유쾌하게 노는 습관을 길러 주었고 친교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이러한 수잔나의 교육은 존 웨슬리의 학문과정과 교육과정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문법책들을 저술하였고,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 후에 킹스우드에 학교를 설립하였으 며, 감리교의 속회제도는 바로 신앙 교육의 터전이었다. 감리교회는 본질적으로 교육과 훈련 으로 가득하였고, 매주 철저한 신앙훈련과 연구없이는 감리교의 지도자나 교사가 될 수 없 었다. (2) 감리교 신앙교육의 방법론 현대의 감리교 신앙의 교육은 주로 이야기법을 통해서 전달될 수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어린이들을 신앙과 회심 그리고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언어가 되어야 하며, 오늘날에는 즉 홍극이나 역할극, 토론등을 통해서 극대화되어야 하며, 그 매체로써 상징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써는 세례의 물과 성찬의 포도주와 떡이다. 오늘날과 같이 대중 매체가 발달된 사회에서는 영화, 환등 사진이나 비디오를 감상한후 의미를 나누는 영상반응 토의나, 음악이나그림, 조각등을 감상한후 작품감상담화 그리고 실제적인 작업으로 그리기, 모자이크,상징물 만들기등을 통한 학습이 필요하다. 또한 학습센타를 여러가지로 만들어 선 택적으로 해보는 학습경험에로 유도가 필요하다. 감리교 교육은 이성과 경험을 사용하되 성 서적이고 전통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 만남과 대화와 참여라는 코이노니아적인 관계성을 설정하고 깊이 있고 친밀한 교육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교육은 학생 개개인의 읜견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 정을 내릴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성장시키되 사랑과 선행에로의 길로 인도되도록 이끌어야 하며, 이러한 것은 감리교 신앙의 본질이다. 에수님도 12명의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3명의 제자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인 것 처럼 공동체적인 관계성도 필요하다. 이러한 인격대 인격의 만남 가운데 임재하 시는 성령의 역할을 겸허히 수용하고 토의되어지고 배운 말씀을 이 세계와 인간들에게 증언 하는 선교 공동체로써 사랑으로 긴밀한 관계를 나눌 때 아름다운 교육이 이루어진다. (3) 감리교 교육의 현장 특별히 감리교 신앙의 성서적 기초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간의 올바른 관계성이 중요하다 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간단히 영성과 정의 라고 할 수 있다. 감리교인의 특징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듯이 영성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게성을 설정하는 것이며, 이 세계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떠나 서 종교의 역할이 제한 된다면 종교는 타계적이 된다. 감리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종교 이다. 사회와 격리되어서는 안된다. 타락과 무질서의 온상이었던 영국 사회를 변화시킨 것이 감리교회의 운동이라면, 분명히 감리교회는 사회적 정의에 뛰어들도록 고무시키는 교육이어 야 한다. 특별히 교회에서는 신앙의 내면을 정화시키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굳센 믿 음의 자녀로 결의를 다지는 터전이며,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가정은 그들 의 삶이 구제척으로 일어나는 현장으로서 믿음의 용기를 더해주고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 며, 위안과 새힘을 얻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그들이 속한 학교는 작은 선교의 지역으로 사회 와 연결되는 선교지이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드러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교육을 통해 변화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생각했던 웨슬리의 사상이 우리를 통해 연속되어진 것이다. 이는 교육사업, 의료사업, 사회 봉사및 정의를 이루어 나가는 구체적인 사랑과 봉사의 삶이 되어져야 할 것이다. 제 4 강 : 감리교회의 미래와 결론 이제 감리교회의 미래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방식에 달려있다.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처럼 사셔야 한다. (Ⅰ요한 2:6) 고 말하는 감 리교인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길을 구체적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첫째로 감리교회의 본질이 성서적이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성서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지 고자 했다는 사실은 어떠한 의견이나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신앙 정신에 있다. 감 리교회의 신앙은 율법주의를 배격하지만 율법은 사랑을 통해 완성해야 할 우리의 과제라고 믿는다. 특별히 성서의 강조점인 사랑에 의한 역동적인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둘째로 감리교회의 영성과 실천을 잘 조화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감리교회는 여러가 지 사상을 잘 조화시키며, 장점과 올바른 것을 취해 하나의 보편적 영성을 가지고 있다. 우 리의 교리로는 누구도 시험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자기 것 으로 긍정하는 사람 어느 기독교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기 위해 파견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의 열린 영성으로 잘 조화를 이루어 이 땅에 하나님의 해방을 선포하고, 사랑과 정의를 이루는 실천적 신앙이 되 어져야 한다. 웨슬리는 말년에 감리교회가 그 정신과 훈련을 상실하고 형식적인 조직체만 남지 않을까 두려워했다는 것을 그의 글을 통해 알수 있다. 감리교회는 실천적인 신앙이어 야 한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영성이 점차 약해지고, 개인주의적이고 비신앙적인 행위를 서 습치 않는다는데에 오늘날 신앙교육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신앙은 인격이다. 우리 안에 계신 이의 인격을 따르지 않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세째로 사회적 현실에 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히 생태계의 묵시적 죽음앞에 놓여 진 인류를 위한 봉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서구의 지각있는 신학자들은 이미 3-40년전 부터 핵의 위험을 강조하고, 군축의 필요성과 정치적 상호 협조를 통해 지구윤리의 새로운 필요 성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는 이제 지구촌 시대이다. 개인의 불의가 전 세계적인 불의가 되어 질수 있다. 생태계의 파괴는 자신의 목을 조이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 생태계 파괴의 현실을 도외시 한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다스리고 관리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응하는 반신앙적인 행위가 될 것이며, 이는 결국 인간성을 스 스로 무시하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타인의 목숨을 경시하는 이기주의적 태도로써 이웃 사랑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퇴색시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며, 그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이다. 끊임없는 기도 는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을 더욱 돈독하도록 이끌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며,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행할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감리교 신앙은 어제의 유산이 지만 오늘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계속되는 복음의 증거이다.
감리교의 전래
감리교의 전래 2004-03-11 10:35:44 read : 27 미국의 각 선교단체들은 한미 수교조약 비준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할때 까지한국 선교사업에 적극책을 쓰지 않고 있었다. 슈펠트 조약이 완결된 직후에 미국은 그 대표 사절로서 루시우스 푸트 (Lucius H.Foote)를 한국에 파송하여 서울에 주재시켰다. 고종황제는 미국 사신의 신임장을 받은 후에 중전의 친척인민영익을 수반으로하는 답례 사절단을 미국에 가는도중에 기차 안에서 발티모어에 있는 가우쳐 대학 총장이며 목사인 존 가우쳐 (John F. Goucher)박사와 동행하게 되 었다. 미대륙 횡단여행 중에 가우쳐 박사와 민영익은 서로 사귀게 되었고 가우쳐 박사는 처음 으로 한국의 실정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가우쳐 박사는 한국이 선교 개척지가 될 수 있는 것을 알고 1883년 11월 6일에감리교 선교사 로 하여금 한국에서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도록 부탁하고 그 일을 위하여 2,000달러의 기부금 까지 선교본부에 보냈다. 그러나 선교본부로부터 아무회답을 받지 못하자 그 이듬해 1월에 일본주재감리교 선교부의 대 표자인 로보트 맥클래이(Robert S.Maclay) 박사에게 편지를보내어 맥클래이 박사가 직접 한국을 답사한 후에 선교사업을 착수했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맥클래이는 1884년 6월 24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맥클래이는 오래전부터 일본에서 가까이 지내던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황제께 한국에서 교육사업과 병원사업의 개설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다. 드디어 한국선교의 새로운 역사의 장은 열렸다. 1884년 7월3일 고종황제로부터교육과 의료사 업을 허락하는 윤허가 내렸다. 그러므로 이것이 한국기독교 (개신교) 의 공식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다.그리고 그 이듬해인 1885년 4월5일에의사인 윌리암 스크랜톤(William B.Scranton)박사와 그의 어머니 매리 스크랜톤 (Mary.F.Scranton)과 헨리 아펜셀러 (Henry G. Appenzeller) 목사가 한 국감리교회의 초대선교사로 부임하였다. - 장로교의 전래 - 미국의 장로교회는 일본주재 선교사들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시작하였다. 특히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추진해 달라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한국인 이수정의 간곡한 호소를 받은 후 부터는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4년 봄에 의술이 훌륭하고 헌신적인 정신을 가진 젊은 의사 존 헤론 (JohnW.Heron)이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여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임명하였으나 한국에서 선교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여 우선 일본에서 한국말을 배우도록하고 그 이듬해인 1885년 6월에야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중국 상해에서 의료선교사로 일하던 호레이스 알렌 (Horace N.Allen)이 한국선교의 뜻 을 품고 미국의 장로교 선교부에 한국선교사로서 일할것을청원하여 허락을 받고 1884년 9월 20 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이것이 장로교 선교사로는 최초의 한국 입국이된다. 한국의 선교를 관망만하고있던 미국 장로 교 선교부는 드디어 호레이스 언더우드 (Horace G.Underwood)를한국의 최초 선교목사로 임명하 였고 그는 1885년 4월 5일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 일행과 함께 한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열심히 선교하여 1886년 7월에는 알렌의 한국어 선생이었던 노도사가한국인으로는 최 초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887년 9월에는 우리나라에서최초로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고 10 월에는 정동교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1901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김창식, 김기범 두 사 람이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받았다. - 의료선교 - 알렌은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우정국사건)이 일어나 중상을 입은민영익을 비롯하여 많은 고 관들을 치료하여 줌으로써 고종 황제의신임을 얻어 1885년 2월에 한국 최초의 서양 의술의 병 원인 광혜원(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을 설립하고 그 책임자가 되었다 (광혜원은후에 제중원으로 개칭하였다). 감리교 최초의 의료 선교사 스크랜톤은 처음에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일하다가 1885년 9월 에 정동제일병원을 세우고 의료선교에 임하였다. 1887년 감리교의 여자 의료선교사인 메타 하 워드(Meta Howard)는 정동의 이화학당 구내에 부인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명성황후는병원의 이 름을 보구여관이라고 지어주었다. 그후 감리교와 장로교는 서울,인천,평야,원산,공주,부산,대구,선천,재령,청주,강계,전주,광주,해주, 안동,군산,목포,개성,춘천,진주,성진,함흥등에 병원을 세우고 의료사업과 동시에 선교사업을 하 였다. 세브란스병원은 1904년 9월에 남대문에 현대식 병원을 신축하고의학교와 간호학교를 설립하여 1908년에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이 한국 최초의 의사들이었다. - 교육 선교 - 교육을 통한 선교의 목적으로 1884년 8월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는 두명의학생을 데리고 학교를 시작하여 다음해인 1885년 6월에 감리교 선교부의 공인을얻고 고종황제로 부터 [배제학 당]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다. 또한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톤은 1886년 5월에 한사람의 학생을 상대로 학교를 시작하였는데 명성황후는 그 이름을 [이화학당]이라고 하사하였다. 이 두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현대교육을 실시하는 남학교와 여학교가 되었다. 이렇게 계속 세워진 우리나라의 기독교 학교들은 1909년 까지 장로교에서 세운학교가 605개 교, 감리교에서 세운학교가 200개교등 다른교파에서 세운학교까지포함하여 기독교학교는 950여 개교에 이르렀다. 1910년에는 이화학당에 대학부가설립되었고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가 설립 되었다. - 문서 선교 - 선교사들은 선교의 매체로 삼기위하여 먼저 한국로 성서번역을 시도하였다. 실은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만주에 있던 로스(Ross)목사 번역의 한글성서가 있었고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출판되었다. 성서번역을 위하여 국내에서는 1809년에 조선성서공회가 조직되고 아펜셀러와언더우드가 마가 복음과 누가복음,요한복음을 한글로 출판하였다. 또한 1900년에는 [신약성서]가 간행되었고 이 어서 1911년에는 [구약성서]가 완역되었다. 찬송가는 1892년 감리교의 존스(Jones) 목사가 처음으로 [찬미가]를 펴낸뒤1908년에 감리교 장 로교가 함께 [합동찬송가]를 간행하였다. 1889년에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배재학당 안에 현대식의 인쇄소가 설치되어문서선교를 위한 기독교 서적들과 기독교 신문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인쇄소에서 서재필박사가 주간하던 [독립신문] 창간호가 인쇄되었다. 기독교신문으로는 1897년 2월에 아펜셀러가 주관한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비롯해서 [그리스 도 신문] (1897년) [예수교 신보] ( 1902년), [예수교 회보](1910년) 등 많은 신문들이 발행되었다. - 일제치하에서의 기독교 -- 한일합병 이후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민족의 비극적 삶에 대하여 어느누구도 속수무책 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때부터 민족의 수난에 앞장서서싸우는 단체가 되었다. - 해서교육총회 사건과 105인 사건 -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옆에 반드시 학교를 세워서 교육사업을 통한 구국운동을 크게 일으켰 다. 일본의 통감부는 교회의 교육운동에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 차리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교 회 지도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저들은 마침내 1910년에 [해서교육총회사건]과 1911년에[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일으켰다. 이 두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되고 투옥된 인사는 약 700명이었으며 당시의 기독교계의 중요인물을 총망라하였다. 이 두 사건은 한국교회가일본 침략자들에게 당한 최초의 박해였다. - 기독교와 독립운동 - 한국의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은 기독교와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보면 그 지도인물의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1910년의 해서교육총회사건, 1911년 신민회 사건과 105인사건, 1914년의 국민회사건등은 기독 교가 3.1운동 이전에 가졌던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이었다. 국내외에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대규모적으로 일어났던 3.1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3.1독립운동은 종파와 계급을 초월한 거족적 독립운동이었지만 독립선언서의민족대표 33인의 종교적 분포가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인 2명으로 되어 있는 것은 3.1운동의 주도 권이 기독교측에 있었음을 시사해 주거니와3.1운동의 만세시위 역시 언제 어디서나 교회가 중 심이 되었었다. 또한 3.1운동에서입은 참화와 피해도 교회가 가장 컸었다. 수원 제암리 교회의 집단학살사건을 비롯해서 강서의 사천교회, 정주교회, 강계교회, 위원교회,북가도 노루바위교회, 서간도의 여러 교회 학살사건등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영원히 잊지못할 가장 가혹하고 처참한 박해였다. 3.1운동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피해 상황을 보면 3월1일부터 5월 30일까지 사이에 교회의 파손 은 47교회였고 1920년 3월1일 까지의 피해 상황은 교회소각이 57교회였다. -신사참배 강요 와 교회의 탄압 - 신사참배강요는 조선총독부가 1932년 평양에서 춘기황령제에 기독교계통학교의참석을 요구한 데서 부터 시작되었다. 1935년 11월에 평안남도 지사였던 일본인야스다께가 최초로 기독교학 교에 신사참배할 것을 강요하였다. 드디어 1937년10월에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자 중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서강제로 폐교되었고 그 후에 전국 각지에 있던 기독교학교들 이 신사참배 거부로차례로 페교되었다. 조선총독부가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를 마지막 으로 전국에 있는 교회를 신사에 참배케 함으 로써 한국교회를 완전히 유린하였다. 그리고 이에 불복하는 지도자들을 모두 검거하여 투옥시 켰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에 있는 외국 선교사들을모두 본국으로 추방하고 예배당 종을 강제로 공출케하여 군기제조에 사용하였다. 1942년 3월에는 일본 기독교 조선 혁신교단을 강제로 조직하게 하고 민족 사상과 내세사상이 강하게 표현된 구약성서의 모세오경과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을성서에서 삭제시키고 찬송가 중 에서도 여러장을 삭제 또는 개편 시켰다. 나중에는 구약성서를 부 성서로 하고 신약성서도 4복음서만을 사용하게 하는 등이루 형용할 수 없는 교회 탄압을 강행하였다. 드디어 1945년 8월 1일에 조선총독부는 한국개신교의 모든 교 파를 강제로 합동시켜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을창설하여 한국교회를 완전히 일본 기독교단에 예속시켰다. -사회 봉사 활동 - 일제의 잔악한 교회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민족의 살길을 바르게 제시하기위하여 국민의 계몽 활동과 새로운 지식의 전달, 생활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을실시하였다. 기독교 청년단체 인 YMCA와 YWCA, 부녀자들을 위한 태화여자사회관등이 절제운동, 폐창운동, 물산장려운동, 여성지위 향상운동 등을 벌렸고 교회들은 힘을 합하여 맹아학교, 고아원, 양노원, 나병환자를 위한 병원, 결핵요양원등을 세우고 운영하였다. - 북한의 교회 재건 - 그렇게도 염원하던 해방의 기쁨이 이 한국 교회에 또 하나의 아픔으로 이어지게되었다. 이 땅에 3.8선이 가로 놓이면서 북한에서는 교회의 탄압이 계속 되었고이를 피하여 많은 신도들이 남한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북한의 공산당들은 교회가 새롭게 재건되는 강한 힘을 느끼게 되자 1946년 11월3일이 일요일 이였는데도 이날을 북한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의 날로 정하였다. 이에 교회들은 즉시 반발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여 북한 당국에 보냈다. 이러한항거에 부딛치자 공산당들은 이들을 투옥시키고 강제 노동으로 교회 지도자들을박해하였다. 드디어 1946년 11 월 28일에는 그들의 어용 단체로 기독교연맹을조직하여 교회를 공산주의 선전에 이용하고 김일 성을 절대지지하며 선거에 솔선수범한다는 결의문까지 발표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목사들은 투옥하거나 추방하였다. _ 남한의 교회재건 -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완전한 신앙자유를 얻었다. 일제 말엽에 강제로모든 교파의 통합이 이루어졌고 해방 후에도 그 합동교단을 그대로 존속하려는 운동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에 새문안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이 모여 교회의합동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자파교회로의 환원에 대한 집념이 더강하여하나의 교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 나 감리교,장로교,성결교,침례교,구세군등 각 교파는 각각 활발히 선교하여 교세를 확장하여 갔 다. - 6.25 전쟁후의 교회 - 6.25 사변을 통하여 받은 교회의 손실은 동족 상잔의 비극 그대로였다. 공산당에 의하여 북한 으로 납치되어간 목사의 수와 순교자는 장로교,감리교, 성결교회만도 236명이었고 교회의 파괴 와 손실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교회가267개에 달하였다. 6.25사변중에 공산당이 저지른 만행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다. 전북 옥구군원당교회는 75명의 신도중에서 73명은 공산당에 의하여 학살되었다. 이러한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을 딛고 한국교 회는 순교자의 터전위에서 날로 부흥되어 갔다. 1951년 2월에는 국군안에 군목제도를 창설하여 현대전에서의 정신적 자세를확립할 뿐 아니라 젊은 군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선교 전위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발전은 교회안에서의 사명을 다할 뿐만 아니라 방송매체를통하여 전국 방 방곡곡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1954년12월에 각교파가 힘을 모아 서울에 [기독 교 중앙방속국] (HLKY)을 개국하였다.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일제 말엽에 강제로모든 교파의 통 합이 이루어졌고 해방후에도 그 합동교단을 그대로 존속하려는운동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에 새문안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이 모여 교회의 합동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자파교회로의 환원에 대한 집념이 더 강하여 하나의교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등 각교파는 각각 활발히 선교하여 교세를 확장 하여 갔다.
감리교회의 시작과 특색
감리교회의 시작과 특색 2004-03-11 10:34:50 read : 22 1.감리교의 시작 감리교회는 영국교회의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영국교회가 옥외전도하 는 것이 점잖지 못하다고 강단을 허락지 않게되자 새로운 종교집단을 조직 하게 되었다. 감리교도를 메도디스트(방법주의자)라 불렀는데 이는 비꼬는 말이었으나 후에 정식 명칭이 되었다. 요한 웨슬레는 동생 찰스 웨슬레와 함께 옥스포드 대학에서 신성구락부를 조직해서 매일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같이 모여 기도하며 성서를 연구하거 나 고전을 연구하고 또 그날의 일들을 반성하는 일들을 규칙적으로 하였다. 이들은 하루에 세번씩 기도하고 매시간마다 반드시 묵도를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금식을 하고, 가난한자와 병자를방문하고 예배에 규칙적으로 참여하 는 등 규칙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735년 10월 14일에 신대륙 아메리카의 인디안 전도를 떠났으나 2년 동안 의 선교를 실패하고 돌아오던 배안에서 모라비안교도의 담대한 신앙으로 보 고 감명받았다. 35세되던 1738년 5월 24일 저녁에 올더스케이트에 있는 모 라비안 교도들의 한 적은 집회소에서 웨슬리는 마음에 뜨거움을 경험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홀로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 결과로 그는 자기의 죄 사 함 받은 확증을 얻고 그는 구원받았음을 확증케 되었다. 이전까지 자기의 선행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적인 공적주의의 신앙에서 전적으로 그리스도께만 의지하고 그가 자기와 같은 죄인도 용서 하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주라는 막연하고 일상적인 신앙보다는 그는 나 의 개인적 구원자이시라는 체험적 신앙을 웨슬리는 올더스케이트의 신생의 경험사건에서 체험함 그는 이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킨 하나님께 대한 산 증 언자가 되게 된 것이다. 웨슬리가 강조했던 3대 교리는 회개와 의인과 성화이다. 2.감리교회의 특색 첫째, 만인 구원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미리부터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멸망으로 예정하셨다는 그런 조건적인 구원관이 아니다. 요 3:16처럼 누구든지이다. 다른 조건이 없는 보편적 구원이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체험신앙을 믿는다. 우리 머리의 생각은 다를지라도 마음만 합하면 손을 내밀어서 함께 일하 자고 했다. 세째, 감리교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고 하나님의 구원도 결코 인간을 강제하실 수는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사나 행동으로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협력과 응답을 필요로하는 신인공동(신인공동)의 구원관을 주장한다. 네째, 우리가 믿는 교리를 노래와 찬송으로 고백하는 노래하는 교회이다. 웨슬리의 동생은 유명한 찬송작가이다. 다섯째,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에게 강단을 개방한 교회이다. 평신도 전 도인 제도와 그들의 옥외설교는 초대 감리교회의 두드러진 특색이다. 순회 목회제도. 여섯째, 기독자의 완전을 추구하는 교회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기 독자의 완전이란 우리의 사랑에 있어서 온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완 전을 죽기전에 생전에 도달 할수도 있고, 죽은 후에 도달할 수 있기도 하다 고 웨슬리는 말함 일곱째, 교육에 치중하는 교회이다.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훈육 하고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함으로 기독교적으로 양육하는 것에 치중하는 교회이다. 여덟째, 사회적인 관심이다. 웨슬레는 사회적인 성결을 말한다.빈민과 노동자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의 제도와 구조의 개선을 위해서 일했다.
개국과 의료.교육 사업의 윤허
개국과 의료.교육 사업의 윤허 2004-03-11 10:33:48 read : 11 기독교가 전래된 19세기 중엽의 한국 정세는 국내적으로 대원군과 민비, 개화파와 보수파의 대립 갈등으로 정치가 난마와 같이 엉크러 진 상태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쇄국 정책이 무너지면서 1876년 일본과 의 수호조약이 체결됨을 계기로 뒤이어서 미국과 영국, 러시아,프랑스 등 여러나라와도 교섭을 개시하여 은둔국의 고립은 깨어지고 밀려드 는 열강의 세력을 응대하기에 힘겨운 처지에 있었다, 일본 세력의 진출에 대하여 보수파의 반항으로 일어난 사건이 임오 군란(壬午軍亂)이었고 친일 개화파의 쿠데타가 갑신정변(甲申政變) 이었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정치는 물론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면 에 숨막힐 정도로 앞길이 막혀있는 정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틈바구니를 뚫고 새로운 기운을 불러 일으키고자 혼신 의 몸부림이 일어나 있었음도 부인하지 못한다. 개국은 되었지만 이것이 곧 기독교 선교를 위한 허락은 아니었다.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한미수호조약 내용에 있어서도 한국 공개항 (共開港)에서 민주시민의 교역권, 거주권, 등을 인정하는 최혜국 대우 를 보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선교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다. 다만 문화관계의 조항 속에 (양국의 생도가 서로 왕래하면 서 언어와 문화를 합습협력하므로 화목과 우의를 돈독히하자)라고 있 는것이 고작이었다. 한미조약 조항중에 한국 정부가 가장 좋아한 내용은 제1조에서 (미합중국은 한국의 정치적독립과 영토적 보장을 아끼지 아니한다) 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외구세의 침투가 극심한 시기이었느고로 이조 항으로 미국으로 부터의 후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H.B.Hulbert,American Policy in the Case of Korea, The New York Times,March 5,1916. 1883년 11월 체결된 한영수호조약에는 서양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종 교예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하는 조문이 삽입되었다. 이는 기독교 선 교를 바라보는 진일보의 상황이었으며 한국정부는 비록 제한된 지역 내이기는 하였지만 외국인의 신앙 행위를 인정한 셈이 돼버리고 말았 다. 1884년 6월 24일, 일본에 주재하고 있은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매클 레이 (Rebert S. Maclay) 목사는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김옥균을 통 하여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7월 3일 [한국내에서 학교와 병원사업을해 도 좋다]고 하는 윤허를 받았다.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 rld, Vol,Lx No 8, 1895,P289). 이때 학교와 병원사업만이 허락된 것은 기독교의 종교적 요소가 아닌 서양의 문명적 요소의 수입만을 희망한 사정을 알게하고도 남는다.김 옥균도 그러한 방향으로 원하였던 모양으로 [세밀한 내용의 결정은없 었으나 곧 사업에 착수해도 좋다]고 하는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였다. (R.S Maclay, Korea`s Permit to Christianity, The Missionary Rev- iew of the World,Vol 9.No 8, 1895,P287) 매클레이 목사는 일본으로 돌아간 즉시로 미국 감리교 외지선교본부 를 향하여 희망에 찬 서신을 발송하였다. [먼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 부터 시작합시다. 제반 사정을 미루어보눈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 교 사업은 성공을 거두게될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하였고 [학교사업 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사업이야말로 시급한 요구입니다] 라고 하여 조속히 선교사업을 개시해달라고 촉구하였다. (Annual Report of the Missionaut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 opal Church for 1884,PP 204-205) 이어 한국주재 미국 푸우트 (Luc- us H.Foote)공사도 본국 국무장관에게 [매클레이 박사가 떤나후에 고 종 국왕의 말씀을 들어 보는대로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데 지장이 없 을 것이며 은연중에 장려하겠다는 뜻까지 보이셨습니다.]라고 보고하 였다. (감리회보, 1934년 6월 10일부, P6) 오랫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박해와 싸운 수많은 성직자 와 성도들의 눈물과 땀과 피의 대가가 이제서야 이루지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1세기가 넘는 기간에 천주교의 가시밭의 길이 있었으며 피어 린 순교의 죽음이 뒤따랐으며 또한 프로테스탄트 선교 선구자들의 희 생과 한국인 개척 전도자들의 대담하고 충성스러운 헌신의 노력이 있 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개국과 의료.교육 사업의 윤허
개국과 의료.교육 사업의 윤허 2004-03-11 10:33:48 read : 12 기독교가 전래된 19세기 중엽의 한국 정세는 국내적으로 대원군과 민비, 개화파와 보수파의 대립 갈등으로 정치가 난마와 같이 엉크러 진 상태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쇄국 정책이 무너지면서 1876년 일본과 의 수호조약이 체결됨을 계기로 뒤이어서 미국과 영국, 러시아,프랑스 등 여러나라와도 교섭을 개시하여 은둔국의 고립은 깨어지고 밀려드 는 열강의 세력을 응대하기에 힘겨운 처지에 있었다, 일본 세력의 진출에 대하여 보수파의 반항으로 일어난 사건이 임오 군란(壬午軍亂)이었고 친일 개화파의 쿠데타가 갑신정변(甲申政變) 이었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정치는 물론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면 에 숨막힐 정도로 앞길이 막혀있는 정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틈바구니를 뚫고 새로운 기운을 불러 일으키고자 혼신 의 몸부림이 일어나 있었음도 부인하지 못한다. 개국은 되었지만 이것이 곧 기독교 선교를 위한 허락은 아니었다.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한미수호조약 내용에 있어서도 한국 공개항 (共開港)에서 민주시민의 교역권, 거주권, 등을 인정하는 최혜국 대우 를 보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선교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다. 다만 문화관계의 조항 속에 (양국의 생도가 서로 왕래하면 서 언어와 문화를 합습협력하므로 화목과 우의를 돈독히하자)라고 있 는것이 고작이었다. 한미조약 조항중에 한국 정부가 가장 좋아한 내용은 제1조에서 (미합중국은 한국의 정치적독립과 영토적 보장을 아끼지 아니한다) 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외구세의 침투가 극심한 시기이었느고로 이조 항으로 미국으로 부터의 후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H.B.Hulbert,American Policy in the Case of Korea, The New York Times,March 5,1916. 1883년 11월 체결된 한영수호조약에는 서양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종 교예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하는 조문이 삽입되었다. 이는 기독교 선 교를 바라보는 진일보의 상황이었으며 한국정부는 비록 제한된 지역 내이기는 하였지만 외국인의 신앙 행위를 인정한 셈이 돼버리고 말았 다. 1884년 6월 24일, 일본에 주재하고 있은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매클 레이 (Rebert S. Maclay) 목사는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김옥균을 통 하여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7월 3일 [한국내에서 학교와 병원사업을해 도 좋다]고 하는 윤허를 받았다.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 rld, Vol,Lx No 8, 1895,P289). 이때 학교와 병원사업만이 허락된 것은 기독교의 종교적 요소가 아닌 서양의 문명적 요소의 수입만을 희망한 사정을 알게하고도 남는다.김 옥균도 그러한 방향으로 원하였던 모양으로 [세밀한 내용의 결정은없 었으나 곧 사업에 착수해도 좋다]고 하는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였다. (R.S Maclay, Korea`s Permit to Christianity, The Missionary Rev- iew of the World,Vol 9.No 8, 1895,P287) 매클레이 목사는 일본으로 돌아간 즉시로 미국 감리교 외지선교본부 를 향하여 희망에 찬 서신을 발송하였다. [먼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 부터 시작합시다. 제반 사정을 미루어보눈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 교 사업은 성공을 거두게될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하였고 [학교사업 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사업이야말로 시급한 요구입니다] 라고 하여 조속히 선교사업을 개시해달라고 촉구하였다. (Annual Report of the Missionaut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 opal Church for 1884,PP 204-205) 이어 한국주재 미국 푸우트 (Luc- us H.Foote)공사도 본국 국무장관에게 [매클레이 박사가 떤나후에 고 종 국왕의 말씀을 들어 보는대로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데 지장이 없 을 것이며 은연중에 장려하겠다는 뜻까지 보이셨습니다.]라고 보고하 였다. (감리회보, 1934년 6월 10일부, P6) 오랫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박해와 싸운 수많은 성직자 와 성도들의 눈물과 땀과 피의 대가가 이제서야 이루지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1세기가 넘는 기간에 천주교의 가시밭의 길이 있었으며 피어 린 순교의 죽음이 뒤따랐으며 또한 프로테스탄트 선교 선구자들의 희 생과 한국인 개척 전도자들의 대담하고 충성스러운 헌신의 노력이 있 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