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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4월 28일 금교령 선포와 ‘애기 소동’
1888년 4월 28일 금교령 선포와 ‘애기 소동’ 초창기 한국교회 신도들의 성분과 분포 상황을 살펴보면, 의주 지방은 상업차 중국을 왕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서울사람으로는 선교사들의 한국어 교사와 선교회기관에서 일하는 직원이나 고용인들이었고, 그 외에도 서민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초창기의 한국교회는 천주교와는 다르게 서민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고유의 종교 내지 정통 의식과의 대립이나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비교적 용이하게 교세가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혀 박해가 없은 것은 아니었다. 1888년 4월 28일 한국정부의 조병식으로부터 미국의 딘스모어(Dinsmore) 공사에게 기독교 전도를 금지하라는 공문이 전달되었다. 이 금교령은 주로 천주교에 대하여 행해진 것이었지만, 기독교의 선교 단체에도 적지 않게 영향이 미쳤다. 천주교에서는 한국의 문화가 개방되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한국인 교도의 이름을 빌려 선교와 인연 있는 장소를 구입하여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약현 성당은 천주교인의 처형 장소였던 서소문밖 언덕 위에 세워진 것이고, 종현 성당은 순교자 김범우의 집터에 세워졌으며 이곳은 천주교의 요람이기도 한 명례동 즉 오늘의 명동 성당 자리가 된다. 그런데 이 명동 성당 자리는 궁궐보다 높은 장소였고 역대 국왕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건축 금령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다. 국왕은 그 계획을 듣고 성당 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명하였다. 그러나 건축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금교령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는 북부 지방을 전도 여행하다가 딘스모어 공사로부터 즉시 귀경하라는 공한을 받고 서울에 돌아와 보니 선교사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하였다. 어떤 선교사는 이 포고가 천주교에 해당하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고, 알렌 같은 선교사는 너무 내륙에까지 깊이 들어가 전도함으로 우리에게도 꼭 같이 해당되는 금령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여튼 이러한 사정으로 5월부터 9월까지는 주일 예배를 포함하여 일체의 종교 행사를 중단하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금교령이 내린 직후, 선동 분자들은 모든 외국인은 국외로 추방돼야 한다고 험담을 퍼트렸다. 시국의 공기는 험악해져 중국 텐진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같은 서양인 학살이 국내에서 일어날 것 같은 우려도 없지 않아 있었다. 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떠돌아 서양인들이 어린 아이를 잡아다가 눈알을 뽑아서 약에 쓴다는 등의 말도 퍼졌다. 이 금교령과 “애기소동”(Baby-Riot)의 결과가 전화위복으로 되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스크랜튼 의사의 말과 같이 선교사들은 전혀 어린 아이의 눈알을 뽑지도 아니하였고 아이들을 잡아먹지도 아니하였다. 선교사들은 정부 명령에 곧 순종함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고 무지와 편견으로 된 모해는 시일이 지나자 저절로 해명되었다. 선교사들의 하는 사업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Annual Report of Missionary Society of the Nethodist Episcopal Church for 1889, PP.293-294) 이러한 호전된 분위기를 이용하여 정부 측근의 알렌 같은 인물이 적극적으로 한국 관리를 설득하며 나섰다. 1886년 한불조약의 “교회”라는 글귀가 바로 선교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선교 사업을 인정함이 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1890년 이후 척사법은 사실상에 있어서 死文化되고 말았다.
1930년대의 민족운동 2002-02-02 10:23:21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 만 열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1930년대의 민족운동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까지 자료상의 한계와 분단으로 인한 연구여건의 미성숙 등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만을 언급하고 사회주의 계열에 대해서는 서술에서 배제하거나 서술하더라도 극히 소극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이 시기까지 국내 민족운동에 관한 연구성
1930년대의 민족운동 2002-02-02 10:23:21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 만 열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1930년대의 민족운동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까지 자료상의 한계와 분단으로 인한 연구여건의 미성숙 등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만을 언급하고 사회주의 계열에 대해서는 서술에서 배제하거나 서술하더라도 극히 소극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이 시기까지 국내 민족운동에 관한 연구성과는 양적으로 적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편향된 연구성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관한 몇 안되는 연구성과들도 민족해방운동의 구체적 활동에 대한 실증적 연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에 대한 종전의 연구시각은 기본적으로 근대화론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었다. 몇몇 연구자들은, 3·1운동 이후 국내 민족운동은 일제와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실력양성운동으로 발전하였다는 논지를 펴면서, 이는 당시 상황에서 민족역량을 강화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근대화론의 연장선상에 선 이들의 민족해방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은 당연히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며, 따라서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식민지 민중의 운동보다는 일부 선각자들의 민중에 대한 지도·계몽이 눈에 띄게 된다. 따라서 1920년대 이후 민족운동사 서술의 체계도 일괄적으로 실력양성운동→ 학생운동 → 의열투쟁 등의 도식에 따르게 된다. 이와같은 획일적인 역사인식 태도가 변화하게 되는 것은 1970년대 후반을 경과하면서부터였다. 특히 민중론이 새롭게 제기되면서부터 다양한 접근방법을 통해 1920년대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전개된다. 한편 남한에서의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에 대한 연구는 크게 세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정부수립후 1950년대말까지로서 사회주의운동사에 대한 연구자체가 금기시된, 연구의 불모기이다. 제2기는 1960년 4·19혁명이후 1970년대말까지로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연구가 조심스럽게 이루어지는 한편, 반공주의적인 시각의 연구자들이 이 운동사를 체계화한 시기이다. 제3기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로서 민중사적 시각에서 사회주의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있는 시기이다. 사회주의운동사 연구가 금단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제1기의 상황은 4·19혁명운동이후 민족의식이 고양되는 시대적 분위기가 역사학계에도 반영되면서 점차 바뀌게 된다. 1964년 조지훈이 《한국민족운동사》에서 일제하의 사회주의 운동을 민족운동사의 체계속에 편입시킨 사실은 남한에서의 사회주의운동 연구사에서 선언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어나 이것은 사회주의운동을 민족해방운동사의 주요한 구성요소로서 인정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운동에서 민족주의적인 측면만을 떼어내어 이에 대해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이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2기의 진보적 연구자들에 의한 사회주의운동사 연구는 민족주의적 통일지향적 관점에서 사회주의운동을 민족주의운동과 동일한 수준에서 통합되어야 할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데에 특징이 있다. 1960-70년대에 진보적 연구자들이 시론적이고 개괄적인 수준에서 사회주의운동사를 다룬데 비하여 남한의 관변 보수학계와 미국학계에서는 이 시기에 방대한 체계의 연구성과를 생산하여 북한에서의 연구 및 남한에서의 진보적 문제제기에 대응하였다. 대표적인 연구성과로는 서대숙의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1967)와 김준엽·김창순의《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제1-5권(1967-76년), 이정식·스칼라피노의 Communism in Korea 제1권(1972년) 이 있다. 민족주의적 시각과 반공주의적 시각에서의 연구에 국한되어 있던 학계의 풍토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후에 연구의 제3기를 맞는다. 1980년 이후 진보적인 소장 연구자들은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을 노동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민족해방, 계급해방을 위한 투쟁이자 과학적 변혁론을 세워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분야에 대한 소장 연구자들의 관심은 다양하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념과 노선에 대해서는 민족문제와 통일전선론, 농업·농민운동론, 민족개량주의론, 그리고 1930년대의 당재건운동의 노선 등에 대한 연구가 있다. 다음으로 사회주의운동자들의 운동에 대해서는 조선공산당의 조직위상과 6·10만세에서의 사회주의자들의 역할 등에 대한 연구가 있다. 위와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1920년대보다도 1930년대에 대한 연구가 들어나게 되었다. 1920년대의 연구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활동이 분리되어 연구된 경향에 비해 1930년대에는 양자를 서로 연관시켜 연구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또 1930년대의 혁명적 농민조합 노동조합에 대한 연구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도 90년대 들어서서 연구경향의 하나라고 하겠다. 즉 농민 노동조합운동이 조선공산당의 재건운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느냐의 여부와 그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고 있느냐의 여부가 큰 관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연구자들 간에는 사회주의운동사를 정리하는 하나의 합의된 인식틀이 마련되지는 않았다.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적 위치와 1930년대 운동으로의 합법칙적 발전, 사회주의운동에서의 파벌성과 주류형성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존재하고 있다. 이같은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1930년대의 독립운동의 대강을 살피려 한다. 내용은 국내와 국외로 나누고, 국내운동은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그리고 학생운동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전시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강요되었음을 감안하면 민족문화운동을 마땅히 서술해야 했으나 원고의 분량상 생략하였다. 국외의 운동은 중국 관내와 만주지역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지급까지 금기시되어온 부분까지 수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서술을 토대로 1930년대의 독립운동의 방략과 특징을 간단히 정리하였다. 1. 국내 운동 1920년대 이래 노동 농민운동을 비롯한 청년학생 여성운동 등의 대중운동은 다양한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시작되었지만, 일제의 억압과 수탈구조 아래에서 반일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1930년대 초반 노동 농민운동은 더욱 첨예화된 계급문제와 민족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요구하며 격증하였다. 1930년대 '혁명적' 대중조직운동은 이러한 내부적인 요인에다가 코민테른의 지시 등 외부적인 요인이 복합되어,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민족해방운동은 1929-32년 사이에 급격하게 고조된 이후 32년부터 전반적인 운동의 추세는 약화되어 간다. 그 원인은 당시 사회주의운동세력의 전술적 좌편향에 따라 민족통일전선이 협소해지게 되었고, 만주침략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지배체제가 강화되었으며, 이같은 내외정세의 변화에 따라 민족해방운동이 분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좌편향 전술은 점차 극복되어 갔고, 일제의 대륙침략 확대화에 대하여 민족운동세력들은 민족해방의 결정적인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인식하였다. 1930년대 말에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후반기 민족주의가 부상하게 된다. 이와 함께 국제사회주의운동의 반제반파쇼인민전선 또는 민족통일전선이 수용되어 민족운동은 활기를 띠게 된 점도 없지 않다. 1940년대 독립군적인 무장투쟁도 계획, 준비되고 있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관점에 서서 1930년대의 국내 민족운동을 몇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1. 농민운동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형성된 식민지지주제 아래에서 조선인 농민은 전층적 몰락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일제시대 농민이 전체 인구의 8할 가까운 상황 아래 농민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이며 민족문제였다. 30년대는 기존 식민지농정의 모순에다가 세계공황의 영향까지 받아 농가경제가 파탄상태에 이르면서, 농민문제는 더욱 심각한 문제로 부상하였다. 일제는 공황의 여파로 당면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안으로 자본의 재편성과 지배체제의 파쇼화를 도모하고, 밖으로는 대외침략을 가속화시키고 식민지에 대한 보다 강력한 지배체제를 확립하려고 한다. 농업공황에 따른 농산물 가격은 유례없이 폭락하여, 1926년 쌀 1석이 31.59엔이던 것이 1931년에는 14.74엔으로 절반 이상으로 하락하였다. 1931년 9월 현재 조선 농촌의 부채액이 5억엔에 달하고 있는데, 이 액수는 전체 경지의 4할을 저당한 셈이 될 정도였다. 춘궁농가도 급증하여 1930년 현재 전국 자작농호의 평균 17.6%. 자소작농호의 36.5%. 소작농호의 66.8%가 춘궁농가였다. 1930년대 초반 농가가 전층적으로 몰락하는 사회경제적 상황은 농민운동을 고양시켰고, 농촌구제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어느 때보다도 고조시켰다. 당시 운동 주체들은 각기 농가경제의 파탄 상황을 어떤 형태로든지 개선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농민획득경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식민지권력은 농촌을 구제한다는 구실 아래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여, 사회정책으로 체제위기상황을 미봉하는 한편 농민 농촌에 대한 식민지권력의 통제력을 강화하여 대외침략전쟁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1930년대 농민운동은 양적으로 증가하면서 그 규모와 지속성 격렬성이 기존의 것보다 크게 성장하였다. 기존의 합법농조와 달리 반합법 비합법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활발했고, 이 외에도 폭동적인 형태의 쟁의가 일본인 대농장을 중심으로 빈발하였으며, 소규모의 소작쟁의도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였다. 또 민족주의우파의 주도 아래 야학 등의 농촌계몽운동과 협동조합운동도 전국 각지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1.1.1. 소작쟁의 1930년대 초기에는 자연발생적인 소작쟁의와 함께 조직적인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6년 현재 198건(참가인원 2,745명)에 불과했던 소작쟁의는 1930년에는 726건(13,012명), 1935년에는 25,834건(58,019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농민단체 수도 1926년 현재 119개에서 1930년에는 1,759개로 급증하였다. 소작쟁의는 1920년대는 주로 전라 경상 충청도 등 대지주 중심의 식민지 지주제가 발달한 삼남지역에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소작쟁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자연발생적인 소작쟁의의 전개과정에서 농민들은 투쟁조직을 주체적으로 결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투쟁방법도 다양하게 구사하였다. 1931년에 전개된 소작쟁의의 특징은 곡가 하락을 이유로 각종 부담 경감 요구에 기초한 쟁의가 현저하게 증가하였고, '쟁의방법이 어느 것이나 단체행동을 취하야 쟁의의 약 7할이 통제있는 대중운동으로 단결'되었으며, 경남북 전북 황해 등의 대농장의 대부분이 쟁의상태여서 투쟁의 조직성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31년 현재 쟁의 규모가 크고 또 상당 기간 동안 투쟁이 계속된 지역에는 대개 그 나름의 조직규율을 갖춘 소작인조합 또는 비상설적인 소작인대표자회나 투쟁동맹(소작료불납동맹 아사동맹 불경작동맹)이 결성되었으며, 따라서 투쟁의 방법도 지주나 관청에 동정을 호소하는 방법보다는 위압적인 시위, 아사동맹 불경작동맹 결성, 소작료 불납, 추수거부, 농민운동단체 또는 사회단체와의 연대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농민운동은 농민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들을 조직화시키고, 이를 농업 농민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향한 투쟁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1931년 한해 동안 소작쟁의, 수세불납동맹투쟁, 수리조합반대 등 농업정책 반대투쟁에 동원된 농민은 약 42,800명이었는데 피검자 수만도 약 1,838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소작쟁의는 농민운동 조직의 조직적 정치적 지도가 미약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요구가 식민지권력의 중재와 법정판결에 흡수되어 개량화되는 것이 많았으며, 심지어는 완전한 패배로 귀결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제는 1932년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면서, 그 보조정책으로 1933년 소작조정령을 공포하였다. 이는 일체의 소작쟁의에서 집단행동이나 직접행동을 금하고, 소작단체의 쟁의 개입이나 다른 농민단체들의 참여를 금지하고 오직 군청관리들로 구성되는 군소작조정위원회의 중재나 법정 판결로만 해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지주 소작문제에 식민지권력이 개입하여 소작농민을 직접 파악함과 동시에 쟁의의 집단성을 분산시키고 농민을 개별 격파하고자 하는 정책이었다. 따라서 쟁의의 결과 농민의 요구 관철은 1920-24년, 1927-32년 사이에 각각 28%, 15.6%이었던 것이, 1933-36년에는 58.9%로 상승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930년대 초 소작쟁의의 급속한 증가와 그 농민요구의 관철 상승은 농민들의 변혁의 욕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당시 일제가 농촌진흥운동과 소작조정령을 통해 농민운동 등 민족운동의 열기를 체제내화하고자 했던 정책에 따라, 농민운동이 식민지 권력의 영향권 아래 흡수되고 있음을 일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소작쟁의는 계속 증가해서 1937년에 소작쟁의 건수는 최고에 달해 31,799건이었고, 중일전쟁으로 감소하지만 1939년에는 16,452건에 달했다. 한편 식민지 농정의 모순 속에서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몰락하는 가운데 자작빈농과 중농도 소작인조합에 가입함으로써, 1920년대 중반 이후 소작인조합은 농민조합으로 전환되어 갔다. 농민조합의 단계에서는 소작쟁의의 성격도 질적으로 달라졌다. 종래 단순한 소작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에서 관계자의 검거 투옥 등의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농민운동은 경제투쟁으로부터 식민지통치에 대해 저항하는 정치투쟁으로 변화되었다. 즉 1920년대 후반 소작쟁의의 대상은 지주와 더불어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이행해갔는데, 이러한 쟁의의 주체가 농민조합으로 발전해갔던 것이다. 이 시기 대규모 농민의 지주에 대한 투쟁은 평북 용천군 불이흥업회사 서선농장 소작인 1,500여 명의 쟁의, 평남 용강군 재등농장의 쟁의, 황해도 황주군 일본인 농장의 쟁의, 전북 강진군 鎌田농장 200여 명의 쟁의, 김제군 多木농장의 소작인 800여 명의 쟁의, 옥구군 熊本 농장 쟁의, 경남 김해 창원군의 迫間농장 소작쟁의 등이다. 迫間농장의 쟁의에서는 식민지권력까지 공격대상으로 하면서, 소작쟁의의 성격은 단순한 경제투쟁이 아니라 정치적 민족적 성격이 농후하였다. 이러한 대규모 소작쟁의는 기본적으로 소작인의 경제투쟁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대규모의 지속적 쟁의가 가능하였던 것은 사회주의운동들의 지도적 역할 특히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조직적 지도와 관련이 있다. 경남의 김해농조는 김해 창원에 걸쳐 있던 迫間농장의 대규모 소작쟁의를 조직적으로 지도하였던 조직이었으며, ML계의 당재건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외 각 도 각 지방에서 혁농이 건설되거나 건설을 위한 준비회가 만들어져 광범하게 혁농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1.2. 혁명적 농조운동 1930년대 혁명적 농조운동이 출현하게 된 객관적 조건은, 농가경제의 파탄과 소작쟁의의 격증, 일제의 사회정책적 농정과 농민에 대한 통제 강화 등을 들 수 있다. 일제는 1932년 이후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면서 농촌진흥회 향약 등 관제조직을 통해 농민들의 일상적 생활요구를 일정부분 수렴하고 그들의 동향에 주시하고, 나아가 지주 소작인 양자 간의 융화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농민운동의 체체내화를 획책하고 있었다. 이 시기 부락단위의 농촌진흥회 향약 등의 관제 농민조직은 1933년 11월 현재 29,383개에 1,036,287명에 이르고 있어, 공산 민족 기타 온건단체를 합한 농민운동 조직의 1,351개. 87,282명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농민층에 침투해 있었다. 관제조직의 확대는 일제 경찰의 탄압과 함께 농민운동조직의 파괴를 가속화시켜, 32년을 경계로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유명무실해졌다. 이러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혁명적 농조가 결성되었는데, 그 대내외적 조건은 다음과 같다. 1930년대 혁명적 농조운동은 1920년대 말에 나타나고 있던 농민 대중의 투쟁을 정치적 혁명적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합법농조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합법 농조들은 소작관계 개선투쟁, 야학 등 농민계몽운동, 수리조합반대, 부역반대 등 지역의 사정에 따른 농정반대투쟁 그리고 수시로 제기된 정치적 쟁점 즉 농민총동맹집회해금, 공산당 사건 관련재판의 공개요구, 각종 민중운동 사건에 대한 성명서 발표, 메이데이 기념행사 등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 농민층의 전층적인 하강분해가 가속화되고 또 '토지와 주택을 달라' '일제 타도'(정평농민동맹) 등의 구호 아래 소작빈농들의 혁명적 진출이 가속화됨에도 불구하고, 합법 농조운동의 주체들은 빈농층의 정치 경제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농조운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혁농운동의 또 하나의 요인으로는 코민테른의 12월테제 등 국제노동운동 지도기관의 지시가 이러한 전환의 주요한 촉매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적 농조는 조직의 주체에 따라 다음과 같이 결성되었다. 첫째, 주로 기존의 합법 농조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정평 홍원 단천 영흥 북청 성진 지방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오랫동안 대중운동을 전개하다가 사회운동의 방향전환에 영향받은 지방의 토박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주도된 경우로, 수원 평택 나주 봉화 영주 문천 풍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세째, 여러 파벌의 당재건운동 집단에 의해서도 혁농운동이 전개되었다. 공산주의자 그룹은 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한 뒤, 준비위원회의 세포를 건설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합법 농조를 혁농으로 전환하거나 따로 새롭게 혁농을 건설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NL계의 이문홍 등이 문천 영흥 고원 등지에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한 사건, 권대형 등이 조직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의 관련인물이 전남노농협의회와 경남적색농민조합건설 동부위원회 및 서부위원회를 조직한 것, 서울파의 이영 등이 조직한 조선공산당재건 조직준비위원회가 북청 이원에 십수 개의 적색농조를 조직한 사건, 강목구 등이 국제공산청년동맹의 지령하에 밀명을 띠고 잠입하여 함주에 수개의 적색농조를 건설한 것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1930년대 혁명적 농조운동이 전개된 지역은 전체 220개의 군 도(島) 가운데 80개 지역이었고, 전국에서 혁명적 농조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은 함남 함북 강원 등 북부 지방이었다. 일제가 '조선 좌경운동의 근원지' '사상적 특수지대'로 규정하고, 이 지역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가했던 함경도 지방에서 농조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함경도는 전국적으로 지주 소작관계가 가장 약한 곳인데다가 1920년대말 이후 일본독점자본 특히 중화학공업의 함경도 진출이 매우 활발했으므로 자본 임노동관계가 급속히 변화되었다. 둘째,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만주와 러시아로부터 공산주의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가장 빨리 받을 수 있었다. 세째, 1920년대 노농운동은 남부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어 북부지방 특히 함경도지방에 대한 탄압은 남부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는데, 이처럼 상대적으로 이완된 탄압 때문에 함경도지방에서 농민운동역량은 보존되고 조직화될 수 있었다. 혁명적 농조운동의 핵심적인 본질은 빈농우위를 전제로 한 반제반봉건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빈농중심의 원칙'을 정치노선과 조직 및 투쟁노선에 관철시키려고 했다. 이에 따라 혁명적 농조는 토지혁명 등 소작빈농의 계급적 이익을 옹호하는 각종 혁명적 슬로건을 표방하고, 빈농우위의 원칙에 따라 아래로부터 위로의 조직 방침을 채택했다. 혁명적 농민운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혁농은 높은 조직율을 보이면서 대중조직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였다. 예를 들어, 정평의 경우 1929년 말에 농민동맹이 7개 지부에 1,050명의 맹원을 확보했는데, 농조는 1930년말 군내 9개 면에 지부를, 216개 리 가운데 133개 리에 142개 반을 설치하였고, 군내 농가 10,826호 가운데 4,456명의 조합원을 확보하였다. 영흥농조도 11개 면 가운데 8개 면에 9개 지부, 170여 개 반을 설치하였으며 12,000여 명의 조합원을 확보하였다. 단천 역시 농민동맹 당시 7개 면에 12개 지부, 1,253명의 맹원을 조직하고 있었지만 농조로 전환되고 난 후에는 8개 면에 22개 지부와 90여개의 반을 조직하였다. 이런 점은 단천농조와 명천농조의 경우도 비슷하였다. 혁농의 계급적 성격도 보다 뚜렷해졌다. 정평농조는 조합에서 지주를 배제하고 조합원의 자격을 궁농 농업노동자 소작농 자소작 자작농에 국한하여 소작농이 50%이고, 자작농이 20% 정도였고, 단천도 지주를 배제하고 순수무산농민을 중심으로 조합원의 구성을 바꾸었으며, 영흥도 자본가 지주 등의 불순분자를 배격한 순수한 무산농민만의 단결체라는 조직원칙을 세웠다. 영흥농조 역시 영흥농맹의 조직원을 그대로 조합원으로 계승한 점, 홍원농조의 조합원이 자기 집의 채권문서를 소각하였던 점, 명천농조는 투쟁의 주력군을 설정할 때 '부농소멸정책에 일찍부터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하여, 빈농 중농과 동맹하되 조건부로 부농을 참가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진도농민조합은 소수의 귀향 청년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하부조직의 대중기반이 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계급주의 입장으로 경사된 곳도 있다. 둘째, 합법활동과 비합법공간을 활용했다. 혁농운동은 가능한 한 기존의 대중조직을 활용, 그 기반을 확대하고자 했고, 일제의 탄압의 가중으로 합법 농조들이 궤멸되고 합법 운동의 공간이 철저하게 봉쇄되는 가운데 비합법 지하조직으로 나갔다. 따라서 혁농은 비합법 투쟁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비합법 조직을 건설한 이후에도 농촌진흥회 같은 합법 운동공간을 충분히 활용하고자 했다. 홍원농조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일제의 주목을 덜 받고 있던 조선농민사의 조직을 이용하여 농조의 하부조직을 설치하는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명천은 금주회 단연회 친목회 등 합법적 대중사업단체의 형식을 빌려서 그룹을 조직하고자 했다. 또 혁명적 농조와 병행하는 각 부락 촌락단위의 농민위원회라는 '농조보다도 광범한 대중조직'에도 농조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고자 했다. 이같은 합법공간을 이용한 농조활동은 30년대 중반 이후 수용되는 반제반파쇼 인민전선전술 방침에서 더욱 강조된다. 셋째, 혁명적 농조의 투쟁전략은 이전의 합법투쟁에 기반한 경제투쟁 위주에서 합법투쟁과 비합법투쟁의 결합,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연계로 바뀌었다. 정평농조는 26개 행동강령에서 당면이익에 관한 것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단천은 운동방침으로 '농민대중의 일상투쟁 즉 경제적 활동에 대부분의 역량을 집중한 후 정치투쟁으로의 전화를 기도 실현해야 할 것'을 정했다. 그 방침에 따라 소작상황 조사, 소작권 이동 반대, 최고소작료 확정, 소작인 무상노동 금지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홍원의 '호세연납진정데모' '채권증서소각사건' 등도 그런 것이다. 경제투쟁과 함께 각 농조는 농민들의 계급적 입장에 대한 각성을 높이고 계급적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프로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각 지부 반 단위로 각종 다양한 교양교육 활동과 전단이나 격문의 제작 배포를 통해 사회주의사상을 보급하고 반제계급의식을 심화시켰다. 또 일제가 농민통제강화의 수단으로 봉건적 유교 질서를 강요한 데 대해 봉건적 억압철폐투쟁도 전개하였는데, 명천농조에서는 농민위원회를 통해 洞會제도 반대 등 '반봉건투쟁'을 통해 각 부락 촌락 단위의 사회적 역관계를 재편성함과 동시에 조직 미조직 농민대중의 투쟁을 포용하고자 했다. 농조는 이러한 경제투쟁을 통해 농민들의 불만을 조직화하여 대중적 기반을 넓히면서, 이러한 투쟁 기반을 일제 식민지지배 자체를 타도하는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농민들의 정치적 요구는 각종 집회와 격문 등에서 '일제타도' '노동자 농민 해방 만세' '투옥된 정치범의 석방' 등의 슬로건으로 제기되었다. 명천농민조합은 토지혁명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대중노선을 분명히 견지하면서 경제투쟁뿐 아니라 정치적 혁명적 요구도 제시하였다. 또 메이데이 등 각종 기념일 투쟁을 이용하여, 농조는 일상대중투쟁을 획기적 기념캠페인과 결합시키고, 가능한 한도내에서 기념투쟁을 반제국주의적 대중데모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이 투쟁에서 일상투쟁과 정치투쟁이 결합될 수 있었다. 네째, 조직보위투쟁과 함께 무장봉기의 준비활동도 전개하였다. 여러 차례의 대규모 검거사건과 경찰과 자위단의 공세가 강화되자, 자위조직을 건설하고 무장의 강화를 준비하였다. 여기서 무장투쟁은 '상비적 무력에 의한 무장투쟁' 즉 별도의 계획적인 훈련으로 무장역량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체육활동 강제차압반대투쟁 동지탈환투쟁 등 일상적인 활동체계 속에서 무장자위역량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무장봉기의 준비는 1930년대 중반 이후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는 가운데, 공산주의 활동가들의 활동을 통해 노동운동 등에서도 가장 유력한 투쟁방법의 하나로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코민테른 제 7차대회의 결정은 대체로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국내에서도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관지역의 중심적인 활동가 이계석은 최소복 정칠성 등을 매개로 이재유 그룹과 연계를 맺으면서 혁명적 농조 및 당재건을 위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재유 그룹의 검거로 최소복 정칠성도 구속되면서 이 계획은 일단 실패하였다. 그 후 최소복 정칠성의 출감 이후 농조재건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창순이란 지도자를 통해 인민전선운동의 전략전술을 수용하게 되었다. 즉 종래의 계급 대 계급의 전술을 폐기하고 각 계급을 망라하여 전민족적인 운동역량을 반제국주의전선에 집중시킬 것, 노농독재권력 확립, 노농소비에트 건설, 토지혁명 완성 등의 슬로건을 폐기하고, 반파쇼 제국주의 투쟁 및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정책적 투쟁목표로 하여 민족해방전선을 강화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1930년대 혁농운동은 전국 도처에서 상당히 전개되었고, 30년대 후반까지 농조재건운동이 시도되고 있어, 농민운동의 주류이면서 민족해방운동의 주된 한 부문운동이었다. 따라서 혁농운동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주체적 운동으로서 달성한 하나의 도달점'이라고 평가할만하다. 따라서 이 운동은 정치 경제적 역량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운동으로, 이 운동의 의의는 민중의 개량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 역량을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조직해 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혁농운동은 많은 한계를 갖고 있다. 첫째, 지역적 고립성 분산성을 들 수 있다. 각 지역의 농민운동을 전국적으로 지도할 만한 중앙지도부가 없어, 지역 차원에서의 분산적 조직과 투쟁은 전체 농민운동 나아가 전체 변혁운동의 통일적 역량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에 쉽게 각개격파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모험주의적 편향성과 그와 관련된 계급지상주의의 편향이다. 농조는 운동의 초기단계에서 너무 조급하게 소모적인 과격투쟁을 벌임으로써 농조의 지속적인 활동역량을 크게 손실시켰다. 또한 초기 단계에서 운동의 지도층이 일종의 이념의 과격성을 보여, 처음부터 빈농을 중심으로 여러 계급.계층을 통일전선으로 결집시켜 운동역량을 강화하는데 한계를 보였던 것이다. 1.1.3. 농촌계몽운동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가 사회운동의 주된 이념으로 발전함에 따라, 농민운동은 이후 조직의 정비와 확대 강화를 통해 농민 속으로 침투해갔다. 이에 대응하여, 민족주의계열에서도 농민계몽 생활개선 농사개량 등을 주요 목표로 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농민의 생활의식의 변화, 영농개선, 협동 등을 통해 농민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함으로써 농민이 당면한 생활난을 타개하고 농민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자립적인 농촌경제를 창출하자는 것을 지향하는 운동인데, 여기에는 조선농민사운동 협동조합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이 속한다. 이 운동은 농민의 몰락을 낳게 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식민지 경제체제라는 외적 요인보다는 농민의 생활의식과 농촌사회의 생활조건이라는 내적 요인을 강조함으로써 식민지 통치권력이나 지주세력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이 운동은 극단적인 정치개혁보다 점진적인 개량을 추구하였으며, 또 물질생활의 향상보다는 정신생활의 향상, 즉 도덕개조와 인격개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자립경제운동이었다. 1930년대 초 농업공황의 영향으로 농민의 전층적인 하강분해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들에 대한 조직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30년대 들어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자들은 농민획득경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일제는 혁농운동을 탄압하는 한편, 체제지향적인 운동의 체제내 포섭정책을 취하고, 농민운동의 좌경화를 막기 위한 '사회운동의 안전판'으로서 개량주의 농민운동의 활성화를 촉진하였음으로, 농촌계몽운동이 어느 정도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농촌계몽운동에 대해 일제는 식민지통치에 정면으로 대립하지 않는 한 이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농촌계몽운동 단체들은 주로 농사개량 생활개선 농민계몽 경제생활 개선 등을 표방하면서, 당시 농가경제의 구제라는 사회적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함으로써 1930년대 초반기 상당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일제의 의도와는 달리 이들 농촌계몽운동은 농민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높였으며, 따라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단체들이 늘 표방한 '열심히 배우고 일하고 절약하면 언젠가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선전구호는 농진운동이 표방한 자력갱생의 구호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이들 단체는, 그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농민들의 가난을 일제와 지주들의 착취 때문이 아니라 농민들의 나태와 무지의 결과라고 선전함으로써 소작빈농들의 정치적 불만을 私事化하였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농촌계몽운동은 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제의 통치기반을 넓혀 주는 한계도 지녔다. 이런 양면성은 식민지 직접통치를 받고 있던 국내 운동에서는 혁명적 운동 노선 이외는 어느 정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1.1.3.1. 천도교의 조선농민사 1924년 4월 17일 노동자 농민의 통일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될 무렵 천도교도들은 그들의 기반인 농어촌이 사회주의자들이 지도하는 조선노농총동맹에 의해 장악되는 데에 대응하여 1925년 10월 29일 조선농민사를 창립하게 되었다. 농민사는 초기 《조선농민》을 발간하는 한 잡지사에 불과했으나, 1926년 이후 각지에 잡지 조선농민의 구독을 매개로 한 이른바 사우회를 통해 운동단체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28년 2월 지방조직의 확대 강화를 중심으로 하는 농민사의 社制를 개정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주의자들과의 지방운동의 패권을 겨루고 있던 천도교청년당측의 대응조처였다. 개정을 통해 농민사는 종래의 계몽단체에서 농민운동단체로 전환되었고, 里농민사를 기본 조직으로 하여, 면 군단위 농민사와 전국적인 조선농민사로 조직체계를 정비하였다. 또 농민사 구성원도 소작농을 비롯하여 자작농 자소작농 농업노동자 농촌수공업자 등으로 확대하였으며, 청년당의 지방 농민조직은 농민사의 공식적인 하부조직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제 개정 단행 이후 조선농민사는 지방 내에 농민총동맹 신간회 등에 버금가는 조직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28년 2월 현재 지방농민사는 158개에 사원 수 16,570명이었고(이 중 약 85%가 비천도교계 농민), 신간회는 1928년말 현재 지회 143개에 회원 수 2만의 규모였으며, 농민총동맹은 1927년 9월 창립 당시 32개에 회원수 24,180명이었다. 조선농민사는 1929년 말 현재 327개의 지부조직에 1만6천여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게 되었다. 당시 조선농민사 중앙이사장인 이성환은 천도교인으로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사회주의적 색채를 조화시켜 반제 반봉건 운동의 성격에서 농민운동을 실천하였다. 농민사는 농민운동으로 그 체제를 전환한 이후 상당히 강력한 항일적 성격을 갖는 반제 반봉건적 색채가 짙은 농민운동단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0년 4월까지 농민운동단체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없었다. 일제의 탄압과 1929년 4월 이래 재정 종교적인 문제를 둘러싼 천도교와의 대립은 활동의 전개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최린의 신파에 속하는 천도교청년당에 의해 1930년 4월 8일 제3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이성환계가 축출된 이후, 조선농민사의 그 운영 주체와 지도노선이 달라졌다. 그들은 조선농민사를 조선사정에 맞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식민지체제에 적응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계급운동을 할 시기도 아니고 정당을 조직할 시기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사상운동을 부르짖는 자와 농민운동만을 부르짖는 자는 사회정세를 모르고 농민운동 소아병에 걸린 자들이라고 하면서 이성환을 극렬히 비난하였고, 식민지체제에 적당히 적응하면서 경제적 실리추구만이 유일한 운동방향이고 살아갈 길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투쟁성이나 운동성이 없었고, 알선부가 확대 개편된 농민공생조합과 같은 당면한 경제실리추구운동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은 별로 받지 않아 1935년 경까지 계속 활동하였다. 조선농민사는 1926년 농민운동단체로서 면모를 갖추어가면서, 알선부 사업이 시작되었다. 1930년 4월 천도교 청년당이 조선농민사를 장악한 직후, 농민사는 3개의 '실행강목'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 '당면이익과 경제운동'은 현실적 문제의 해결이란 명분 아래 식민지체제에 순응하면서 농민의 빈곤해결을 위한 실리적 경제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각 지역에서 조직되었던 알선부는 공생조합으로 개편되거나 새로 공생조합들이 조직되어, 주로 생산품과 소비품을 알선하여 중간이익을 농민이 취득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알선사업을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농민공생조합이 군농민사 산하에 조직되었고, 1933년 8월에는 중앙기관 농민공생조합중앙회가 조직되어, 지방공생조합 농민들에 대한 통제구도가 일단 확립되었다. 1933년 9월말 현재 군농민사 150여 개소, 동리농민사 3,000여 개소에 사원 총수 20여만, 공생조합 180여 개소에 조합원 5만 여명이나 되는 농민사의 지방조직은, 1933년말부터 급속한 해체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농민사 공생조합의 조직은 농진운동의 기반으로 포섭되어갔다. 농민사는 朴榮喆.崔麟 등이 1934년 1월 농진운동을 민간운동으로 이행시키려는 의도 아래 창립한 時中會에 가담함으로써, 이후 농진운동에 별다른 마찰없이 흡수되어 갔다. 조선농민사는 농촌피폐의 원인을 농민 개개의 문제로 돌리고 체제내적 개량적 운동으로 농촌에서 기반을 닦음으로써, 1930년 이후 점차 격화되는 반제투쟁과 사회주의자들의 적색농민조합운동에 대한 안전판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1.1.3.2. 기독교의 농촌계몽운동 기독교는 1920년대 초부터 하기아동성경학교 혹은 주일학교를 통해서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 청년회의 농촌사업은 1925년 2월을 기해 기구를 개편하여, 농촌부를 신설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또 192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의 영향 아래 농촌사업은 농사기술개량, 생활개선사업을 중심으로 활발히 추진되었다. 기독교 청년회의 간부들은 조선 농촌의 피폐의 원인을 일제에 의한 일본자본주의 경제권에 편입된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반제 반독점투쟁도 모색하지 않고, 단지 협동과 신용만 있으면 농촌은 소생될 수 있다는 체제내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념 아래 기독교계는 1938년경까지 농사개량 부업장려 야학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5월 현재 지방의 협동조합은 49개, 조합원수는 1,692명으로 성장했고, 1931년 4월에는 이러한 기반위에 협동조합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32년에는 전국에 65개의 협동조합이 있었다. 이같이 공황기에 계속 확대 발전하던 기독교청년회의 협동조합운동은 1932년 농진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점차 여기에 흡수 포섭되어 갔다. 기독교 청년회의 농촌사업내용이 자력갱생운동과 유사하여, 총독부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청년회의 농촌사업 조직을 일제는 농촌진흥회에 강제로 합쳐버렸다. 1935년경에는 협동조합이 거의 해체되거나 혹은 진흥회에 흡수되어 버리고, 1937년에는 중앙의 협동조합연합회가, 1938년에는 기독교청년회의 농촌부가 폐지되고 만다. 1.1.3.3. 학생 계몽운동 1930년 이전 시기의 학생대중운동은 대체로 학내문제를 이유로 내건 동맹휴교와 시위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이같은 차원을 넘어서 비밀독서회운동과 반제동맹운동, 공장 농촌의 생산현장에 투입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농촌운동은 주로 언론기관 종교단체 등에서 행한 합법적인 각종 계몽운동에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당시 농촌계몽운동이 식민지체제 아래 점진적인 개량을 도모하고자 하여, 합법공간에서 생활개선 문자보급 등의 계몽운동을 통해 당면이익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언론기관이 행한 농촌계몽운동으로는 조선일보사의 문자보급운동(1929-1934)과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학생 브나로드운동이 있다. 브나로드운동은 1931년부터 시작되어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하기방학중에 실시되었으나, 1935년부터는 일제당국에 의해 금지되었다. 브나로드운동의 내용은 학생들이 하기휴가 기간 동안 농촌으로 들어가 문맹퇴치 위생개선 등의 계몽활동을 벌이는 것이었는데, 학생계몽대 학생강연대 학생기자대의 3대로 나누어져 활동했다. 여기에 참여한 학생수는 4회에 걸쳐 5,700명이었고, 활동결과 10만여명이 문맹퇴치되었다. 이 운동을 주최한 동아일보 계열은 당시 농민문제의 근원을 농민 자신의 무지 등 민족구성원 개개인의 못난 자질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았다. 이같은 주장은 총독부측이 농촌진흥운동 과정에서 강조했던 것들과 일치하였다. 즉 총독부측은 농민들의 가난이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나태 낭비벽 무식 탓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갱생의 유일한 비결은 불철주야의 노동과 근검절약, 합리적 농업경영이라고 강조하였다. 당시 일제는 만주사변 이후 대륙침략을 가속화하면서, 조선사회를 전시동원체제로 통제화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농촌계몽운동에 대해 일제는 식민지통치에 정면으로 대립하지 않는 한 이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 운동을 주관한 동아일보계열과 총독부는 비슷한 이데올로기에 기초하여 운동을 전개하였던 셈이다. 다시 말하면 이 운동의 주최측은 식민지체제를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개량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은 대중과 접하면서 단순히 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를 민족운동의 장으로 활용하여 농민들 사이에 민족의식을 주입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주최측과 학생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주최측이 '글과 셈 이외에 이 운동에 아무 것도 혼합하지 말 것'이라고 강조한 것은, 이러한 주최측의 의도와 학생들과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브나로드운동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학생들의 주체적 참여에 의해 전개된 귀농운동적 성격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일제가 이 운동을 감시하고 탄압하고 중지명령까지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과 또 1934년 활동에 즈음하여 동아측이 학생들에게 '우리 계몽운동의 범위를 분명히 아실 것' '교재에 보인 것 외에는 일체로 말씀 말아주심이 좋다'고 당부했다는 사실에서, 동아측의 의도와는 달리 이 운동이 계몽운동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1935년 브나로드운동이 일제로부터 금지당한 뒤, 1930년대 후반에도 학생들은 비밀조직을 통해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려고 시도하였다 1.2. 노동운동 1920년대 말부터 발전해 오던 노동운동은 30년대 급격히 고양되었다. 그 배경으로 우선 1930년대 들어 일본의 대륙병참기지화 정책 아래 대규모 군수공장이 건설되었고, 독점자본의 진출에 따른 공업의 성장으로 노동자의 양적인 팽창이 있었으며, 일제의 파쇼적 탄압으로 민족적 계급적 인식이 높아지고 사회주의자의 대중투쟁 강화와 함께 사회주의사상이 일반대중에게까지 깊이 침투됨으로써 새로운 단계로의 질적 발전이 요구되었음을 들 수 있다.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의 노동운동의 특징은, 그 이전의 경제투쟁 비폭력투쟁 합법투쟁 중심의 대중적 파업투쟁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을 더욱 강화하였고, 폭력적 비합법 투쟁으로 점차 이행하였으며, 공개조직 중심의 운동에서 지하조직 중심의 운동으로 전환되어 갔다는 점이다. 이로써 경제투쟁 중심의 일반적 노동쟁의에서, 반제의 정치투쟁을 지향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노동운동에서 방향전환론은 1926년 4월 정우회 선언에 기초하여 11월 조선노농총동맹은 노동운동을 대중운동으로 전환시키고, 정치투쟁에까지 진출시키겠다고 주장함으로써 대두하였다. 1928년초에서 29년초에 공산주의자들은 '가자! 공장으로! 광산으로! 노동자 속으로!'라는 슬로간 아래, 종래 노동운동의 소시민성을 극복하고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고,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전체적 목적의식적 정치투쟁에로' 나아가고자 모색하였다. 이런 방향전환론은 1930년대초에 적색노조운동이 그 조직적 기반을 노동대중에 뿌리를 내리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1920년대 이래 노동운동의 반성과 그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한 내재적인 요인과 코민테른 등 국제노동운동노선의 영향에 의한 외재적 요인이 복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1.2.1. 대중적 파업투쟁 1929년에 103건에 달했던 노동쟁의는 30년 160건. 31년 201건으로 해마다 그 건수가 증가되었고, 쟁의 양상은 시위 공장습격 폭동 등 조직적이었으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많은 노동쟁의에는 전국 각지에서 조직되었던 노동조합의 개입과 지도가 있었다. 노동조합은 일반적으로 파업의 교섭과 중재자로 나섰고, 파업과정에 개입하여 이를 후원하고 지도하거나 혹은 파업을 직접 조직, 주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 조선노동총동맹은 거의 무력화되어 있었고, 종래의 노동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던 지역별 노동연합회 등도 개개의 파업투쟁에 대해 사후적으로 지원, 조정하는 역할에 그치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파업을 조직, 지도하는 경우에도 노동자대중과 밀착되지 못하여 노동자들의 기대와 요구에 맞는 투쟁과 협상을 전개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은 새로운 조직형태, 새로운 지도부를 요구하게 되었고, '기존 노동조합 개조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이미 상당수의 공산주의자와 그들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의 비합법적인 서클이 노동자 대중 속에서 활발히 활동을 시작했고, 적색노조운동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1935년 7월 13일 진남포 제련소 1,200명 노동자들의 파업 단행에는 진남포지역 혁명적 노동조합이 노동자 상조계 간판을 내걸고 노동자 대중을 조직하고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선전하면서 이 파업을 조직하고 지도했다. 1930년대 조선내 중소공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무공장의 파업에서 나타난 적색노조의 지도, 개입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성에서는 ML계의 R.S협의회가 조직되어, 대정고무 우리고무 등의 여공들을 지도하였고, 권태영의 공산주의자그룹은 하부조직으로 적색노동조합지도부를 두어 경성고무공업소 대동고무 등에서 여성노동자를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평양에서는 1930년 8월 총파업에 공산주의자협의회 등의 여러 분파는 각기 고무 산업부문의 노동자를 평양에 호응하여 궐기시키는 것을 제1의 임무로 하여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3월에 조직된 적색노조인 산업별 노동조합 부산건설협의회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노동자의 의식을 교양하기도 하고, 4월의 栗田 고무파업에는 이를 격려하는 삐라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나타난 투쟁양상은 일제의 직접적 통치기관과 억압기구가 상존했던 상황에서 공장습격 경찰서파괴 등 폭력 양상에서 볼 때 반제투쟁의 성격을 가진 것이며 민족해방운동에서 일정한 지위와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1.2.2.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1930년대 노동운동은 이러한 산업별 노조의 전국적인 전망아래 이전의 합법형태에서 비합법형태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으로 이행하였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20년대 축적된 운동의 경험과 함께 1928년 말 이후 코민테른 등이 제시한 일련의 지침이 방향전환을 모색하던 국내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30년대 혁명적 노동운동은 1935년 이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반파시즘 인민전선, 반제민족통일전선으로 점차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30년대 혁노운동은 계급 대 계급의 좌편향성이 상당히 강고하게 적용되고 있었고, 이러한 성격은 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이 작성한 '조선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이하 12월테제), 1930년 9월 코민테른 산하 프로핀테른의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의 임무에 관한 테제'(이하 9월테제)와 1931년 10월 '조선의 범태평양 노동조합비서부 지지자에 대한 동비서부의 서신'(이하 10월서신) 등의 기본 지침에 기초한 것이었다. 12월 테제는 종래 인테리층으로 구성되어 파벌투쟁의 약점을 갖고 있던 조선공산당의 조직구성을 반성하고 노농대중에 기초한 조직으로 재구성할 것을 제기하였다. 12월테제의 노동자 농민 중심의 당재건 방침은 9월테제 10월서신으로 좀더 구체화되었다. 이 지침들은 공장을 토대로 대중의 일상적 이익을 대변하는 독자의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을 결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즉, 개개 직업 및 개개 지역의 특수한 이익에 따라 노동자의 요구에 대한 구체적인 강령을 제시하고 그것을 기초로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내에서 강고한 대중적 투쟁을 전개하여 그 속에서 혁명적 노동조합 반대파를 조직할 것과 광범한 미조직 노동대중을 조직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1930년대 혁노운동은 당재건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전개되었는데, 주체에 따라 크게 3 가지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첫째, 당재건운동의 일환으로 당의 계급적 기초를 형성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코민테른의 12월테제로 조공이 해체된 이후 '파벌해소' '노동자 빈농에 기초한 당의 재건'이라는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12월테제 이후 1931년 무렵까지 전국단위의 당재건준비위원회의 지도하에 산업중심지와 농촌지대에 당재건준비위원회의 세포조직을 먼저 조직하고, 그 뒤에 그를 기반으로 하여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지배적이었다. 공장내에서 대중적 기반은 거의 없거나 전반적으로 미약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학생이나 인텔리를 중심으로 한 반제동맹과 같은 형태를 더욱 선호하였다. 이에 따라 주요한 활동내용도 각 공장이나 경영 내에서의 활동보다는 학교나 가두를 중심으로 토론회, 독서회 등을 통한 의식화와 동지의 획득, 선전선동을 위한 격문과 삐라의 살포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931년 이후 당재건의 방침이 변화하여, 일정지역내의 공장과 대경영을 기반으로 먼저 튼튼한 대중적 조직기반을 선차적으로 건설한 연후에 그 성과를 토대로 당을 재건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활동내용도 대중적 파업투쟁의 조직과 지도에 매진하였고, 이를 위한 운동방침이나 강령 전술전략의 수립, 노동대중의 교양증대와 계급의식의 고양 등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그 후 1930년대 중반까지 전국 도처에서 혁명적 대중조직을 지도하면서, 당재건의 조직적 기초를 마련하려던 지역단위 공산주의자그룹들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재유 그룹운동(1930-35)은 적색노동조합 농민조합 학생조직의 활동을 바탕으로 당을 재건하려 했다. 이재유 그룹은 서울을 중심으로 금속 화학 섬유 출판 등으로 조직을 구분하여 산업별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片倉제사공장 星印고무공장 昭和제사공장 서울고무공장 조선견직공장 등의 파업을 주도하였다. 권영태 그룹은 1933년 9월 종방쟁의를 지도하는 등 혁명적 노동조합의 활동에 주력하여 기반이 다져지자 혁노그룹으로서 섬유 화학 식료품 금속부를 나누어 활동하는 한편, 최고지도기관으로서 공산주의그룹을 결성하였다. 1939년에서 1941년까지 활동하여,'최후의 당재건운동'으로 평가받는 경성콤그룹은 금속 섬유 전기 출판의 산업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둘째, 프로핀테른 산하 범태평양 노동조합회의(이하 태로)의 조직확대작업으로 추진된 것이다. 이 태로계열의 혁명적 노조운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함경남도 지방을 중심으로 1930년 말부터 1934년까지 4차에 걸쳐 끈질기게 전개되었고, 이 사건은 혁명적 노조건설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태로 블라디보스톡 지부에서 일하던 김호반은 1930년 12월 입국하여 함흥과 흥남 일대를 중심으로 경성 평양 부산 등지까지 조직원을 파견하는 등 거의 전국을 무대로 적색노조운동을 전개하였다. 김호반은 1931년 2월 15일에 함흥노동연맹회를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적색노조화를 목적으로 김호반을 총책임자로 하는 함흥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그 산하 목공부 화학부 금속부 철도부를 구성,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그는 한주교 정달헌 등으로 하여금 함흥조선질소비료공장에 연구회를 조직하도록 하여 이것을 연구회 뷰로 좌익노조결성준비위원회로 발족시켰다. 정달헌은 1931년 2월 평양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의 건설을 위해 이주하와 함께 '평양노동연맹 좌익화위원회'를 조직하였다. 5월 위원회의 하부조직인 '평양전매국분회 조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함흥지역은 1931년 5월 메이데이 격문사건을 계기로, 평양지역은 1933년 초 고무공장 여직공들의 파업을 계기로 각각 20, 30명의 검거자를 내고 와해되었다(1차태로사건). 정달헌은 1차조직이 붕괴된 이후에도 평양노동연합회를 산업별노조로 개편하고, 평양양말직공조합을 근거로 1932년 5월 비합법 적색노조를 조직하였으며, 1932년 5-6월의 평양고무 여공파업을 지도하다가 검거되었다. 그러나 검거를 피한 장회진 박세영 등이 조직 재건에 착수하여, 1931년 10월에는 함흥자유노동조합을 결성하였고, 박세영과 김원묵은 3월 흥남 방면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잠정적 지도기관으로서 '흥남좌익'을 결성하여, 조선질소비료 흥남공장에 대한 비합법조직을 시도하였다. 이 밖에 원산에서는 원산노동연합회를 산업별 노동조합화하고자 했고, ML계의 노동운동조직과의 통합을 실시하였다. 2차 태로는 1932년 메이데이 투쟁을 준비하는 도중에 일제에 노출되어 500여명이 검거되었다. 최장섭은 태로 연락부와 조선과의 연락기관 설치에 주력하고, 임민호 고경인은 2차 태로의 잔존세력을 규합하여 혁명적 노동조합을 건설하라는 태로 블라디보스톡 연락부의 지시를 받고 귀국하여, 화학노동조합을 조직하고자 했다. 3차 태로는 여성노동자 획득에도 주력하였는데, 1933년 2월에 검거되었다. 1932년경부터 프로핀테른 동방부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들어와 활동중이던 이경덕은 흥남의 조선질소비료공장과 장진수력발전소 공사장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직활동을 전개하다 1934년 11월 중순경에 20여명의 청년노동자와 검거되었다(4차 태로). 태로에서 직접 파견한 활동 이외에도, 4차 태로 이후에도 태로 관련자들을 중심으로 함흥 원산 흥남지역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계속되었다. 1936년부터 1차태로 관련자 이주하, 2차태로 관련자 전태범 송별립 등이 원산을 중심으로 혁명적 노동조합을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1938년 4월 이들은 이강국 최용달 등과 함께 '적색노동조합 원산좌익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산하에 철도 화학 금속 부분의 산업별 노동조합을 건설하고자 했다. 셋째, 당이나 태로와는 직접적인 연관없이 기층 노동자 자신이나 각지에 분산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좌익적 요소들이 당시의 정세에 맞는 노동운동의 조직발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경우였다. 혁명적 노동조합은 대중조직이라기보다는 전위적 요소 즉 선진노동자의 결집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선진적 노동자조직으로서의 혁노가 대중적 조직의 성격을 결합하려는 과정은 원산지역의 경우는 이렇다. 원산총파업 이후 원산지역의 활동가들은 1932년 3월 이후 혁노건설운동을 전개하여, 1936년 10월 상순에 이주하 이강국 등이 결성한 적색노동조합조직준비기관을 토대로 1938년 4월 이주하 방용필 등이 원산 지역의 선진노동자의 정치조직으로서 혁노인 '적색노동조합 원산좌익위원회'(이하 원산좌익)를 건설하였다. 1937년 6월 이주하는 이강국을 통해 코민테른 7차대회의 노선을 채택하였다. 원산 활동가들은 적색노동조합조직준비기관과 원산좌익의 활동을 통해, 정치조직지향의 성격을 지니면서 노동자대중조직적 성격을 함께 가진 혁노를 건설하고자 했다. 원산좌익은 대중적 조직기반으로 결성된 철우회와 화학부문의 친목회 등은 반제반전의식을 고취하는 동시에 임금인상투쟁 등의 일상적인 경제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활동하였다. 원산의 활동가들은 반파쇼인민전선전술을 수용하여 다음과 같은 대중노선을 추진하였다. 첫째, 이들은 '공장속으로'라는 구호 대신에 '전 인민 속으로'라는 구호 아래 대중노선을 더욱 강화하였다. 둘째, 모든 합법적 국면에서의 활동의 기회를 기민하게 활용하여, 비합법활동과 긴밀하게 결합시키는데 관심을 돌렸다. 셋째, 반전반파쇼투쟁을 당면한 정치투쟁의 선전슬로간으로 내세웠고, 이를 일상투쟁과 결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원산 활동가들은 '중국의 민족해방전쟁을 전적으로 지지하자! 일본제국주의의 강도적 약탈전쟁을 내란으로, 식민지해방전쟁으로 전화시키자!'는 구호를 채택하였고, 이와 아울러 조선인 지원병제실시반대투쟁 선동을 중시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이 장기화되고 확대되면 될수록 조선해방의 결정적 시기가 앞당겨질 것으로 보았다. 결정적 시기에 무장봉기할 것에 대비하여, 주체적 역량을 강화할 방도를 마련하고, 주요 시설과 거점을 점령하기 위해 행동대를 배치하는 계획도 충분히 마련했다. 혁노운동은 '정치적 각성과 계급적 훈련' '민족부르조아지에 대한 끊임없는 폭로와 투쟁'을 계급적 임무로 규정한 위에 정치적 경제적 요구를 결합하여 정치투쟁을 전면에 내세우고 노동자를 시위와 운동에 동원하였다. 또 합법활동과 비합법공간을 긴밀하게 결합시키고자 했던 혁노운동은,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31-1935년까지 70여건에 1,759명이 관계된 것으로 나타났다. 1.3. 학생운동 1920년대 후반기, 학생운동의 조직은 중앙에서 전국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어, 학교 혹은 지방을 중심으로 소단위의 실천조직으로 성장하였다.
1970년대와1980년대성장 2004-03-06 10:12:53 read : 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교회성장 한국 교회는 선교 100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760만 신자와 23,000교회로 성장하여, 1910년 에딘버러 선교 대회에서 한국 교회의 성장 을 표현하던 말대로 `경이적 성장`을 하였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은둔 의 나라(Hermit nation)로 통하던 한국이 이제는 허락의 나라(
1970년대와1980년대성장 2004-03-06 10:12:53 read : 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교회성장 한국 교회는 선교 100년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760만 신자와 23,000교회로 성장하여, 1910년 에딘버러 선교 대회에서 한국 교회의 성장 을 표현하던 말대로 `경이적 성장`을 하였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은둔 의 나라(Hermit nation)로 통하던 한국이 이제는 허락의 나라(permit nation)로 바뀐 것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 늘어나고 있다. 하루에 6개 의 개척교회가 생기는 성장하는 교회이다.(1982년 통계) 문공부의 통계가 정확하다면 개신교와 천주교의 9백7만6천명의 신자는 더 이상 소수 그룹이 아니다. 60만을 자랑하는 세계 제일의 교회가 한국에 있으며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또한 한국에 있다. 교회 330,000중 2,000여명 이 상의 교회가 100개에 불과한 미국과 비교해 볼때 26,600개 교회 중 2,000명 이상의 교회가 20개 이상이나 된다.(82년통계) 1. 한국 교회 성장 현황 한국에서 장로 교회가 대표적인 성장 케이스이다. 이에 대한 여러 가 지 원인으로는 자 ,자치,자력 파의 네비우스 방법과 감리교보다 더 보수 적인 신학, 직접 전도의 강조가 그 원인이 된다. 이들 장로교회들은 특히 79년과 81년 사이에 커다란 성장을 가져왔는데 ,장로교 합동측은 1만 교회 운동은 75년 시작할 무렵 2,733교회 833,726명 신자였던 것이 5년 후인 81년에는 3,616 교회 1,448,915의 신자로 성장하였 다. 장로교 통합측은 75년도 2,885개 교인 약70만이었던 것이 6년 후인 81년 도에는3,727교회 120만 을 상회하게 되어 6년동안 900개의 교회가 증가하였 고, 신자는 50만 이상 증가하여,연평균 교회는 120개,신자는7만명씩 성장했 음을 말하고 있다. 이들은 외향적 교회로 전도에 적극적이었고, 학원선교,특수선교,농어촌회지 원,평신도 전도요원화 프로그램 개발등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기장은 교회의 양적 성장 보다는 사회 참여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양적 성장은 합동과 통합에 비하여 약한 편이다. 신앙 양 심의 자유, 신학의 학문적 자유,에큐메니칼 운동, 사회 참여의 하나님의 선 교를 선언한 기장은 개인 구원보다 사회의 구조악에 더 큰 관심을 두어 왔 다. 이들도 교세 확장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실제 30%정도의 실적에 그치고 말아 사회 참여가 곧 선교라는 혁명적 신학이 실제로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맥가브란 교수도 이론적으로는 교회가 사회 정의에 큰 관심을 표명하고 어떤 계층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면 교 회의 놀라운 성장이 따라 온다는 것이 가능할것으로 아나 그러한 일은 없었 다고 말한다. 또 영국의 사회 계획은 침례교와 감리교를 부흥시키지 못했 다고 말한다. 감리교는 초기에는 양적 성장면에서 많이 뒤떨어졌으나 의료 활동등과 여자 선교사의 파송등으로 70년대 와서는 크게 부흥하였다. 1974년에 감 리교는 1,559개 교회와 355,000신자였으나 81년에는 2,569교회,80만 신자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선교 신학과 한국의 전통 문화 및 종교에 가치를 부여하는 토착 신학을 발전시키면서도 교회를 성장시키는 비결은 교 역자들과 교인들의 전도열과 신앙의 정열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성결교 역시 교회 성장을 위하여 교단적으로 집중적인 노력을 하 여왔다. 이들은 60년대 까지도 자립을 하지 못한 교단이었으나 십자군 전 도 운동, 축호 전도, 노방 전도,장막 전도등과 단독 목회 2년 이상자에게만 목사 안수를 주는 방법으로 개교회 개척을 독려하는 등 ,신학적으로는 웨슬 레의 감리교 신학이지만 사회 참여보다는 직접 전도에 치중함으로 연10%이 상의 성장을 보았다. 그래서60년대까지 523교회에 신도126,150이었던 것 이 80년에 와서 1,187교회 신도 416,378로 급성장 하였다. 70년대에 세계적 교회로 성장한 오순절 교회의 순복음 중앙 교회는 축 복의 신학과 3박자 구원 및 5중 축복을 바탕으로 60만이상의 신도를 모으로 매주 5,000명 이상의 새신자를 얻었다. 이들의 성장의 비결은 현재 여기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며, 교인들 의 영적,현실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축복의 설교와 신유의 신앙을 큰 원 인으로 꼽지만,더 큰 이유는 조직적 행정과 구역 제도의 강화라고 할 수 있 다. 특히 평신도 훈련을 중시하여 유급 구역장 제도에 의한 평신도의 책 임적 목회 원리를 잘 운용하고 있다. 서울을 대교구로 나누고 그 안에 수백 여개의 소교구와 구역 조직이 거 미줄처럼 되어 있으며 주요한 구역 활동은 교육과 전도로 이 구역제도를 통 하여 신도들이 서로 기도해 주며, 간증하며, 말씀을 연구하며, 격려하여 돌 보게 한다. 2. 교회성장 방법론의 적용 70,80년대 이들의 놀라운 부흥을 성장 원리에 비추어 보아 살펴볼 수 있다. 한국의 교회들은 70년,80년대에 우선순위를 잘 선택하였다. 미국의 예를 들면 65년부터 75년까지 사회봉사를 교회의 우선순위로 채택한 교회들은 성 공회(Episcopal Church)는 -17%, 그리스도교회(United Church of CHRIST)는 -12%, 연합 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는 -12%, 연합 감리교회 (United Methodist Church)는 - 10%,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U.S.)는 -8%의 교인 증감을가져왔다. 이에 반하여 복음전파를 교회의 우선 순위로 채택한 교회들은 Christan and Missionary Allience는 126%,하나님의 교회(CH.of God)는 67%, 하나님 의 성회(Assemblies of God)는 33%, 나사렛 교회(CH.of the Nazarene)는 29%, 남 침례교회(S.Baphst Conv.)는 18% 성장을 가져왔다. 즉 미국에 있는 10개 교회가 각각 우선 순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교 인의 증감을 보여준 좋은 예이다. 이처럼 한국의 교회들은 그들의 우선 순위를 전도에 두었기에 일부 교단에서는 분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성장을 이룰 수가 있었다. 또 동질집단 원리(Homogeneous Unit)를 잘 활용하였다. 이것은 한 사 람을 개종시킬 때 그를 그 속했던 공동체에서 독립시키어 교회나 선교사 마 을에 둘 것이 아니라 물화적 장벽을 넘지 않게 하여 자기 사회에 그대로 머 물도록 한다는 원리이다. 그렇게 하면 다음 이 개종자는 즉시 자기의 동료나 친척들에게 전도할 경우 한 마을이나 씨족이 동시에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동질단 위에 의한 집단 기종을 맥가브란은 하나님의 다리라고 부른다. 가족,부 족,혈연,계급,친구 관계는 불신자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다리가 된다고 생 각했다. 이것은 한국의 성장원리로 보았을때 커다란 영향이었다. 대중운동원리(People Movement)도 영향이었다. 동질집단의 원리는 대 중운동을 초래하는데, 이것은 동질 단위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개종시키는 일종의 연쇄반응에 의한 것으로 한국 군대의 합동세례도 대중운동으로 본 다. 수용성의 원리(Receptivity)의 활용도 중요하다. 수용성원리란 어느 동질단위의 그룹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반면 복음에 대해 저항적인 그룹 이 있는데 ,아노미 상황은 전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전통 사회가 붕괴 되고 새 사상과 문화를 동경하는 사회,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불안한 사회는 수용성이 높은 사회이다. 한국교회는 수용성의 원리가 어느 정도 적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 교회의 신자의 1/3이 서울에 집중되어 어느 도시보다 신자율이 높은 것은 전통부재와 극심한 변화의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70년대,80년대의 놀 라운 성장도 사회적 불안정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러한 이론은 자립의 네비우스 원리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성 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비록 적극적 사고방식과 물량주의 위주라는 부정 적인 영향도 끼쳤지만 전도와 선교에 더 큰 자극을 주기도했다. 3. 한국 교회 성장의 원인 70,80년대의 교회 성장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부흥| 동을 말할 수 있 다. 한국은 부흥 운동이 있을 때 마다 놀라운 성장을 가져왔다. 1900년 대의 성장은 1906년 감리교 선교사 하등이 원산에서 기도를 함으로 시작된 것이고 ,20년대의 성장은 이 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이고, 40년대의 성장은 장대현 교회의 부흥운동으로 시작됴다. 이처럼 70,80년대에 굵직한 부흥운동들(엑스폴로 74,70년대에 유행한 대 부흥성회)은 한국 교회의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신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또한 이것은 대 전도 운동을 일으키게 했 고, 회개 운동,정화 운동, 선교운동을 가져와서 성장은 당연한 것이 되었 다. 또한 성장의 원인이 되는 것은 축복과 치유 (영,혼,육의 치유)이다. 교회들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전파하기에 문자 적 성경주의냐 혹은 사회 복음이냐의 갈등은 없었으며,이적과 치유는 당연 히 성서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고, 이런 배경 속에서 순복음등의 축복의 강 조와, 많은 기적의 역사는 점점 개인화 되어가는, 소외되는 사람들에게 새 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즉, 그들의 영을 만족시키는 축복의 선포는 한참 경제 성장이라는 틀에 끼인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되었다. 특히 로버트 슐러의 교회성장론 이 들어와서 사람들에게 `불가능은 없다` `세계 제일의 큰 교회를 꿈꾸라` 라는 등의 표현은 70년대 한국 교회에 회오리친 성장 운동이었다. 이로써 한국에 적극적 사고와 축복의 신학이 지배를 하게 되었다. 순복음이 대표적인 이런 유형으로 교회성장한 예이며 그 뒤를 잇는 대형 교회들도 대부분 적극적 사고와 축복의 선포가 그런 결과를 낳게 했다. 또 치유의 강조는 기독교를 어떤 틀에 붙잡아 놓지 않고 살아 있는 종교라는 것을 체험케 해 줌으로서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가능케 해 주었다. 사회적인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도 사회 속의 한 단체이기 때 문에 사회와 문화의 영향이 불가피하다. 교회 성장의 원인을 지나치게 사 회 환경에 돌림으로 영적 실제를 사회학에 종속시키는 것을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사회 상황과 교회 성장은 함수 관계가 있음이 명 백한 것이다. 70,80년대의 성장은 정치적 불안에서 절망감,민족주의,더 좋은 문화의 동경도 한 몫을 차지 한다. 특히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경 제까지 안정되지 못하여 언제 불이 날지 모르는 위기 의식이 민중들의 심층 에 내재해 있어 종교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는 곳에서는 또한 타종교와 각종 신흥 종교 역시 번영하고 있다. 그래서 70년대에 각종 신흥 종교의 난립과 또한 정부적 차원에서의 그들의 정리가 있었고,대순진리회가 1백만을 돌파했던 때도 이때이다. 또한 교회 성장의 사회적 요소로 도시화를 들 수 있다. 70년대부터 대도시로 인구집 중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짐에 따라 교회의 도시화는 이들의 추세에 따른 다. 도시화가 교회성장에 큰 변수가 되는 이유는 , 변화는 도시의 상류층에 서 시작하여 하류층으로, 다음 농촌으로 확산한다고 한며 그리고 변화가 많 은 지역이 복음을 잘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 반면에 농촌은 도시에 비해 보수적이어서 새 사상이나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기 때문에 성장이 둔하다. 그런데 이 도시화는 어려운 문제도 불러 일으킨다. 즉,교회는 놀랍게 성장했으나 과다경쟁의 고민이 생긴 것이다. 한 예 로 상계동의 한 동에서 무려 100개의 교회가 난립하고 있어 교회 공해를 일 으키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교회의 무계획적이고 과다 경쟁적 개척이 무 자격 신학교등 많은 신학교들의 대량 무자격 교역자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4. 결 론 한국 교회의 70.,80년대의 대형 성장의 요인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았 다. 그러나 이 요인 외에 교회의 공신력,현실참여에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의 비판 기능을 강조하여 현실 참여를 함으로 성장하였다는 객관적 평가를 내리기는 아직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교회성장은 현실참여속에서 이루어진 적은 하나도 없 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 교회가 놀라운 70,80년대의 성장을 기록한 것은 뜨거운 신앙의 정열때문이었다. 한국의 교회들은 기도하는 교회,전 도하는 교회,바치는 교회,열심히 모이는 교회이다. 소열도 (Stanley Soltau)선교사는 한국 교회 성장이 전도,성경 연구, 기도,바치는 것,핍박이 라고 하였다.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가지 부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성전에 기도 의 불이 꺼지지 않는데 , 이것에다가 전도의 열정,모임에 참석하는 열정,아 낌없이 바치는 헌금의 정열은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점에서 교회성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적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복음적 신앙과 평신도들의 적극 적 참여는 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초래하였다. 전세계적으로 신자는 증가하지만 명목상의 신자가 너무 많아서 라오디 게아적 상황이 도처에 보인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열심 있는 평신도를 많이 확보함으로 교회가 성장하였다. 초대 교회 성장이 평신도에 의한 자 발적 성장인것 같이 오늘날 한국 교회도 이 원리를 잘 적용하고 있다. 또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성장하는 교회는 평신도 전도자를 훈련하여 성공 을 거둔 사례가 많거니와 과거의 심령 부흥회를 전도와 선교 집회로 전환하 는 것도 현재의 두드러진 경향중의 하나이다. 지금 현재의 교회는 놀라운 급성장을 멈추고 도리어 퇴보해나가고 있 다. 앞으로 교회가 더 평신도들의 삶속에 접근하지 않는다면 더 퇴보할 지도 모른다. 옛날부터 교회가 민족의 과제,또 민중의 문제와 연결되었을 때 교회는 발전해 나갔다. 1800년때도 교회가 청나라로부터 재산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었을때 성장 하였고, 1900년대의 대성장운동도 독립운동의 기반을 교육에 두고 이것을 이끌어 나갔기에 성장하였다. 그러다 삼일운동이후 지도자가 외국으로 가 갑작스런 세대교체로 인해 민중의 동정으로 약간의 부흥을 가져왔고,20년대 와 30년대 사이는 기독교가 교권다툼에만 앞서고 민족운동과 민중을 돌아보 지 않았을 때 성장은 멈추었다. 50년대와 60년대는 구호물자로 인한 교회성장이 있었고 70년까지 는 정 권과 결탁했을때 성장이 느려졌다가 70,80년대에는 민중의 삶 속에 들어가 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소망을 주었을때 교회는 발전하였다. 즉 교회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 사회를,민중을 이끌어 갈때 (신앙 으로)그 교회는 성장하였고,발전하였다. 앞으로 퇴보해 나가는 교회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떤 정치적인 개입이나 현실적 참여가 아닌, 내가 전하는 자들의 삶속에 그리스도의 사랑 을 가지고 들어가 그들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그들의 소외된 삶을 뜨거운 신앙의 힘으로 이끌어 줄때 다시 교회는 성장해 나갈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이끄는 참된 목자의 역할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참고 도서 1. 나일선, `교회성장론`, 서울:엠마오출판사,1989. 2. 피터 와그너,`기독교 선교전략`,전호진역,서울:생명의 말씀사,1978. 3. 이중복,`한국 감리교회의 선교운동`,감리교신학대학 석사학위논문, 1980. 4. 안수훈, `한국 성결교회 성장사`,성결교회 출판부,1981. 5. 피터 와그너,`교회성장학 개론`,이재범역,서울:솔로몬출판사,1987. 6. 장중열,`교회 성장과 선교학`,서울:성광문화사,1990. 7. 이장식,`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88. 8. 서명원,`한국교회 성장사`,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9. 9. 피터 와그너,`성령의 은사와 교회 성장`,서울:생명의 말씀사,1989. 10. 해롤드 엘 픽켓트,`교회 성장의 열 가지 원리`,서울:기독교 문서선교 회,1983.
21세기와 한국교회와 시민사회운동 2002-02-02 10:23:52 read : 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권 진 관 (신학 및 윤리, 성공회대) 21세기는 한국 민족 대부분의 성원들과 전통적으로 고난받아 왔던 이른바 민중들이 많은 고난을 받는 시기가 될 것이다. 어디 약소 민족과 민중 뿐이랴. 21세기에 가서는 우주와 환경도 수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극대 이윤을 얻기 위해 타자의 생명을 서슴없이 남용하는 어떤 강력한 세력이
21세기와 한국교회와 시민사회운동 2002-02-02 10:23:52 read : 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권 진 관 (신학 및 윤리, 성공회대) 21세기는 한국 민족 대부분의 성원들과 전통적으로 고난받아 왔던 이른바 민중들이 많은 고난을 받는 시기가 될 것이다. 어디 약소 민족과 민중 뿐이랴. 21세기에 가서는 우주와 환경도 수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극대 이윤을 얻기 위해 타자의 생명을 서슴없이 남용하는 어떤 강력한 세력이 21세기를 풍미할 것이며, 이러한 세력은 그 어떤 세력에게도 굴복하지 않고 이 지구를 경영해 나갈 것이다. 이 힘을 어떤 사람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라고도 말하기도 한다. 이 세력을 혹자는 다국적 기업과 자본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다국적만이 그 세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력은 이른바 다국적 기업과 자본을 비롯한 국가 등 온갖 세력 들의 총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세력은 개인, 인간 집단뿐만 아니라 민족, 인종, 심지어 대륙 마저도 희생시킬 수 있는 강한 힘이다. 이 힘은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도 종식시키기도 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우리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키고, 자연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국의 민중의 수난은 세계적인 차원의 원인이 있다. 노동자들의 수난, 심지어 화이트칼라들의 불안도 세계적인 시장경제원리에서 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노동자들의 수난은 자신들의 잘못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리는 사람들의 잘못에서 비롯된 사람들이다. 21 세기를 바라보는 척박한 상황 속에서 지휘하는 사람들이 잘못 판단하고 준비하고 배분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의 물질적 욕심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권력과 유착한 비리 재벌들의 소유주들, 경영인들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인간들을 마음대로 부리려고 하는 바로와 같은 세력이 있는데 그 세력은 이른바 세계시장경제체제가 불러일으키고 있는 경쟁체계라고 할 수 있어며, 이것은 모든 나라의 민중들을 억압하는 세력이다. 이 세력은 한국이라고 하는 제3세계의 경제를 위기에 빠뜨려 놓고, 그 경제의 주요 책임자들에게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쓰고 버릴 수 있도록 강요함으로써 그 세력의 주구가 되게 하는 세력이다. 정치권력은 이 세력의 주구 혹은 대리인이 되기 쉽다. 한국의 재벌들은 이러한 세력의 일부이기도 하고, 또 그의 수혜자이기도 한다. 개악된 노동법에 복수노조금지, 제3자 개입금지, 공무원 교사 단결권 금지조항 등이 존재하는 것도 바로 이 세력의 존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또 파업기간중 대체근로 허용은 사실상 노동자 쟁의권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것이며,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 도입은 사용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노동자를 최소한의 임금으로 마음대로 부려먹고 필요에 따라 해고할 수 있게 한 것인데 이와같이 노동자들이 극단적으로 고난을 받게 된 원인도 따지고 보면 이 거대한 세력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노동자들뿐 아니라 중소기업, 자영업자, 서민, 농민들이 모두 수난을 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기업체들의 임원들 혹은 중견의 위치에 있는 사원들 마저도 세계적 경쟁구조의 편입 (이른바 세계화의 이름으로)에 의해서 수난을 받고 있는 중이다. 연봉제, 명퇴, 감원 등에 의해서 일자리를 잃고, 등산길을 메우는 40대가 생기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 세력이 한번 지나가면 민족과 민중을 억압하거나 해지지 않고는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이 세력은 전 인류와 세계를 극단적인 경쟁구조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약자들은 도태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러한 척박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운동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글에서는 앞으로의 운동을 위한 기본 방향과 자세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한다. 유대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다음 3 가지의 본원적인 것들로 나누었다. 그것은 노동 (labor), 업적 (work), 행동 (action) 등이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활동들이다. 본필자는 아렌트가 제시한 세 가지의 행동양태들을 응용하여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을 부각시켜 보려고 한다. 노동이란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입고, 생육하고, 거주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결과물들을 얻기 위한 활동이다. 옛날에는 노동이 자연물에 대해 직접 몸을 부려 결과물을 거두어 들였으며, 오늘날에도 이러한 종래의 노동의 형태는 계속 이어지기는 하지만, 요즘에는 여러 기계와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에 대해 변형을 가해 결과물을 얻는 방식을 주로 택한다. 비록 노동의 모습이 변화되기는 했지만, 그 본질에서는 변함이 없다. 노동은 삶의 신진대사를 위한 최소한의 인간의 활동이다. 노동은 그렇기 때문에 인간 생명과 직결된 활동이다. 재산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은 노동하지 않고 살 수없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재산은 자기의 몸이다. 몸과 노동, 그리고 생명은 직결된다. 몸의 생명은 노동을 위한 원천이요, 노동의 목적은 인간 몸의 생명을 영위키 위한 것이다. 이와같이 노동은 자연과 생명에 가장 밀착된 인간활동이다. 노동자들은 노동을 하며 가족의 생명을 부양한다. 그들은 노동아니고는 달리 부양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활동의 대부분은 이 노동에 의해서 차지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데에 한눈을 팔 수가 없다. 다른 곳에 눈을 돌려 시간을 소비할 수도 없다. 하루 24 시간을 거의 노동을 위하여 투자한다. 쉬는 것도 노동을 위한 휴식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칼 마르크스가 잘 설명해 준 바 있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의 활동 양식은 노동이다. 삼성이나 현대, 대우 등 굴지의 기업에 종사하는 중산층 화이트 칼라들도 그들이 아무리 지금 잘 산다고 하더라도 노동을 한다는 점에서는 일고 노동자들과 다름없다. 노동은 기본적으로 강제되는 것이다. 노동에 있어서 자발성은 상대적으로 작다. 그 다음의 중요한 활동 양태는 work (업적)이다. 이 업적을 이루며, 또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진 자들일 것이다. 소위 부르죠아들이며 힘있는 사람들이며, 명망가들일 것이다. 아마 전문가 계급도 여기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가 계급은 고용된 노동자일 수도 있으므로 노동하는 노동자와 흡사하기도 하지만 그중 상당수는 '업적을 쌓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그만큼 자기의 시간을 자기의 계획 하에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문가들에게는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위있고, 재산있으며, 권력있는 사람들, 소위 이 땅의 '주인들' (masters)은 업적을 위해 활동한다. 그 업적이 자신의 생활을 지탱해 주고 식구들을 부양시켜 주지만, 그러한 활동은 위에서 말한 노동이라는 활동과는 그 종류에 있어서 다르다. 그 업적을 위한 활동에서는 활동 주체자의 자아(I, ego)의 기획이 자기의 활동의 결과물 속에 박혀져 나온다. 따라서 업적의 삶은 소유격의 형용어를 가진다. 이른바 누구 누구의 업적을 말한다. 이와같이 임자를 분명하 하는 활동은 무엇이 자신의 업적을 가장 많이 이루게 하느냐에 따라 행동한다. 즉 자기의 계획과 이익에 유용한가에 따라 행동하거나 않거나 한다. 여기에서의 행동을 하기 위한 기준은 이른바 "유용성" (utility)이다. 업적을 위한 활동은 따라서 "자기 중심적"이다. 바울과 루터가 말한대로 우리는 업적(work, 행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 혹은 믿음의 행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세번째의 활동 양식은 이른바 '행동' (action)이다. '행동'에서는 행위자의 주체성이 중요시된다. 남들이 시켜서 하는 것이 행동이 아니다. '행동'은 자신의 판단과 의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자발성과 자유에 기초한다. '행동'에는 말하기가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말과 함께하는 행동이 아니면 진정한 행동이 될 수 없다. 말을 자유스럽게 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평등하고 참여적이며 상호주체적인 관계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이 오고 가면서 '행동'이 이루어 지는데 이러한 행동은 홀로만의 유아독존적인 행동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행동이다. 즉, 공동체적 행동이다. 따라서 '행동'을 위한 전제조건은 공동체의 성립이다. 행동의 결과는 행동일 뿐이다. 행동자는 행동을 생산해 내는 저자가 될 수 없고, 단지 행동자일 뿐이다. 여러 행동자들의 행동의 산물로 나타난 역사는 그 저자(author)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저자가 없는 열려있는 것이지 어떤 생산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이나 업적의 활동 속에는 공동체가 있기 보다는 이익사회가 존재한다. '말있는 행동'을 위한 사회적 조건은 공동체적인 참여 민주적인 질서이다. 따라서 이러한 질서가 갖추어지지 않은 사회는 자유한 '행동'을 억압한다. 이러한 사회는 사람들을 주체자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다. '행동'은 유용성(업적)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도 아니며, 삶의 필연적 강제 (노동)에 의해 기인되는 것도 아니다. '행동'은 인간다움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이것이 없을 때 인간다움은 사라진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활동은 업적이나 노동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서 아렌트의 '행동'에 대해 좀더 설명해 보기로 한다. 행동한다는 것은 곧 시작한다는 것 곧 기선을 취한다는 것 (to begin, and to set something in motion, to take intiative)을 의미한다. 즉 자유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란 인류가 시작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업적을 부정하는 삶이었다. 그는 업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 업적 대신에 사랑의 행동을 추구했을 뿐이다. 그의 삶은 누가 복음 4:17 이하에 나오는 말씀이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삶은 교회를 세우는 업적의 삶도 아니었으며,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짧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순수히 하느님의 나라을 위해 믿음의 행동을 했던 분이었다. 그는 자기의 업적으로 저서 한권도 내어 놓지 못했다. 그는 결국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그의 삶은 업적을 그렇게도 철저하게 이루어 놓지 않은 삶이었다. 그는 재산을 한푼도 마련하지 않았으며, 자식하나 남기지도 않고 그야말로 철저하게 종말적인 행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신 분이었다. 그는 솔로몬 처럼 성전을 건축하는 업적을 내지도 못했으며,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통일하여, 나라를 일으키는 업적을 내지도 않았다. 빌라도나 헤로데 처럼 권력을 가지지도 못했다. 그는 오직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셨다. 그의 행동이나 말씀은 업적으로 남지는 않았다. 말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며, 행동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들이 업적으로 남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업적으로 남으려면 그 속에 자기 중심적인 욕심이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던 선한 사마리아인도 업적과 관계없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의 행동이 자기 자신의 업무, 업적 혹은 비지니스와 무관하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업적과 무관하지만 그는 행동했다. 그 행동이 자신의 출세와 영달에 관계가 없었을 것이지만 그는 행동했던 것이다. 업적에 대칭한 개념으로서 '행동'이 있을 때 공동체는 큰다 업적이라는 내용 속에는 언제나 자아의 계획이 담겨있다. 라틴어로 업적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homo faber라고 한다. 공작인이다. 무엇을 만들 때 자기 자신을 그 속에 부어 넣는다. 자기 자신의 도안이나 계획된 디자인을 자기가 만든 작품에 부어 넣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이루어 내는 사람을 말한다. 현대인들은 모두 homo faber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무슨 일이든 자기가 한 일에 자기 자신을 각인 시키고 싶어하는 성질을 현대인들은 가지고 있다. 무엇을 만들고 이루어 낼 때, 언제나 그 속에 자신의 의도가 담겨 있다. 자신의 계획이 그 속에 담겨있는 성질을 가진다. 따라서 업적 속에는 언제나 자아라는 것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자기 교만이라는 것도 그 속에 담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업적이라는 말에는 항상 소유격이 붙는다. 누구누구의 업적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세종대왕의 업적, 김영삼 대통령의 업적, 누구 누구 총장의 업적... 이러한 것들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업적 등등. 업적이라는 말 속에는 "나"가 우선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믿음의 행동에는 나 보다는 우선 이웃이 중심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행동을 하는 사람은 나를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을 내세우기 때문에 이것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업적을 추구하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은 공동체가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경쟁 사회가 이루어진다. 서로 자기 자신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 속에는 공동체성이 자랄 수 없게 된다. 오직 경쟁으로 서로 질시하고, 헐뜯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업적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믿음의 행동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 업적을 추구하지 않고 믿음의 행동을 하는 사람은 곧 예수의 십자가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업적의 자랑과 위용이 무너진다. 십자가 앞에서는 나의 모든 영광과 지혜와 힘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업적이 무색해 지고 초라해 지고 마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업적을 구하지 않는 '행동'의 전형이었다. 십자가에 대한 믿음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인도해 주는 무한한 흡인력이다. 십자가의 신앙은 우리의 업적적인 공명심을 버리고 믿음의 행동으로 인도해 준다. 십자가의 신학과 믿음의 '행동' 십자가 신학을 모르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이면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하느님은 전통적으로 선한분, 힘있는 능력자로 보여졌지만, 십자가에 의해 하느님의 가려졌던 부분이 들어났다. 보이는 부분은 하느님의 적극적인 능력 부분이다. 영광의 하느님, 전능의 하느님, 전지전능, 무소부재, 능력의 하느님이다. 병을 낫게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하느님, 이러한 분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이다. 좋으신 하느님의 모습이다. 하느님은 강한 성이요, 구원의 바위이시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이러한 분이 우리들에게 드러나 알게되었던 분이시다. 그런데 하느님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 감추어졌던 부분이 있다. 보이지 않았던 부분의 중요한 부분이 예수에 의해서 드러났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건 속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느님이 정반대되는 표지 아래에서 사역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십자가는 연약함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다. 그야말로 로마시대에 정치범들에게 주어졌던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은 연약하고 어리석음을 드러내셨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가장 약하고 어리석을 때 우리를 돌보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십자가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십자가 신학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 고린도 전서 1장이라고 생각한다. 그중 중요한 부분을 보자. 고린도 전서 1장 23-24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이시다.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일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지혜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는 세상을 다시한번 보아야 한다. 다시 26-29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지혜있는 자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미련하고 지혜없는 자들을 택하신다는 것이고, 또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한다는 것이며,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신다는 것이다. 지혜있는 사람들, 세상적인 지혜, 사회에 잘 적응해 내고,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못나고, 여러모로 약하고 천한 것같은 자들을 택하사 그들을 높이 쓰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지혜없고, 약하고, 천한 자, 멸시받는 자들은 누구를 말하는가? 그것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바로 세상적인 업적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 업적이 아니라, 믿음의 용기, 믿음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업적을 쌓고 경쟁에서 이기며, 출세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볼 때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며, 이러한 사람들의 공통된 점은 업적을 쌓는 사람둘이라는 것이다. 업적을 쌓는 사람은 바로 세상적인 지혜와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 선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면서, 세상적인 지혜와 세상적인 권력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것들이 비록 일시적으로는 지혜있는 것같고, 힘이 있는 것같지만 결국은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에 기대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소치라는 것이요, "어리석은 부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약함과 어리석음의 상징이다. 그렇지만 30절에 바울 선생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명쾌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이십니다." 그런데 헬라 사람들처럼 세상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걸림돌이 되었다. 헬라인들이나 유대인들처럼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멸시한다. 그리고 세상적인 지혜와 세상적인 권력에 눈멀어 있다. 무엇이 진정한 지혜요 진리인지를 모르고 있다. 고로 2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루터도 그의 하에델베르크 논쟁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 영광의 신학자들은 고통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광의 신학자들은 고통보다는 업적을, 십자가 보다는 영광을, 약함보다는 강함을, 어리석음 보다는 지혜를, 일반적으로 말해 악보다는 선을 더 좋아한다. .... 그들은 십자가와 고통을 싫어하고 업적과 공적의 영광을 사모한다." 세상지헤자들은 권력과 명예와 업적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루터는 "십자가를 통하여 업적이 권좌에서 쫓겨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업적주의자, 권력 추구자, 금전 만능주의자, 세상권세주의자들은 신학적으로 빗대어 말한다면 영광의 신학을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출세를 지향하고, 권력을 추구하며, 물질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기력한 것이라고 예수 이후의 기독교 제일의 선생인 바울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깊이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사회를 잘못 바라 볼 수 있다. 루터에 의하면 십자가의 고통을 모르고 그것을 못느끼는 사람은 교만하고 오만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기때문에 만약에 그들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선택적으로 할 것이며, 꼭 좋은 것만을 골라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거나,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교만을 자초하게 될 것이라는 한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업적을 위한 교회이지 '행동'을 위한 교회는 아니다. 한국교회는 자본주의적 행동양식을 추구하고 있으며, 유용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무엇이 교인을 늘리는 일이냐, 재산을 늘리는 것이냐, 어느 목사가 이러한 일을 잘 해 내느냐로 그 가치를 판단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업적주의, 물량주의에 빠져 있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더 많은 교인수, 더 많은 헌금과 예산, 더 큰 교회를 가지려고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한국교회가 물질주의(맘몬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물질이 많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만능주의가 은연 중에 교회 속에 스며 들어왔다. 업적과 권력과 물질이 중심이 되는 곳에는 소수가 그것들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교회의 관료주의가 생긴다. 교인들의 참여는 매우 수동적으로 일어나고, 그것도 부차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지 교회의 중요 영역은 성직자와 소수의 교회관료들에 의해 운영되어 진다. 양심있고 뜻있는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처음 기독교가 전래되었을 때 한국의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의 위협과 봉건주의의 질곡 하에 있었던 우리나라에 주권재민 사상, 남녀평등사상, 민주주의, 반봉건 사상, 신교육이 기독교와 함께 소개되었을 때 기독교는 그야말로 민족의 희망이었고, 개혁적인 사상이요 종교였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서는 아시아에서 유래없이 기독교 선교가 성공했고, 불교와 유교 등과 함께 민족의 종교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3.1운동과 같은 빛나는 전통을 창조했고, 70년대-80년대 독재와 항거하는 좋은 전통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팽창주의, 물량주의, 성장주의, 성공주의에 눈이 어두워 맘몬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역사의 희망이기는 커녕 역사의 짐이 되고 말았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 대안적 교회를 창출하지 않고는 모든 교회개혁의 노력은 구호로 끝나고 말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나타나야 할 대안적 교회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 제도 교회들에 대한 부정 속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부정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부정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존의 한국교회에 대해 먼저 긍정해야 한다. 긍정은 곧 포용을 의미한다. 포용과 동시에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한국교회에 대해 강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뜻있는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여하면서 한국교회의 지금의 모습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질서 (특히 쁘띠 부르죠아적 정신구조)에 잘 적응하고 있다. 즉 현실 질서와 타협하고 있는 교회가 한국의 교단교회, 제도교회라고 보여진다. 한국교회의 장로를 중심한 당회구조는 마치 주식회사의 임원회와 비슷하며, 따라서 주로 돈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실권을 행사하는 제도적 장치로 사용되고 있으며, 많은 목회자들은 이러한 구조가 잘 돌아가도록 설교하고 축복해 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이 한국교회의 전체의 모습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다만 많은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교회는 민중들로부터 배척받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이미 기존질서와 손을 잡은지 오래 되었다. 이러한 교회가 우리나라의 통일에 어떻게 기여할 것이며, 통일 후에 있을 혼란 속에서 어떻게 민족의 양심의 지주로 설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 한국교회는 교세의 측면에서 볼 때, 전반적인 침체에 빠질 전망이다. 그것은 주로 다음의 몇 가지의 이유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첫째로, 일반인들의 생활이 나아진 것이 한 요인이 된다. 산업화와 현대화 이후의 서구 교회가 침체에 빠졌음을 상기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테코스탈 (오순절, Pentecostal) 교회들이 일시적으로 흥할 소지는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한국의 제도교회는 쇠퇴의 길로 빠져 갈 것이라고 보여진다. 둘째로, 교회의 권위, 특히 목회자들의 권위가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변화된 현실 속에서 정의에 입각한 발언을 제대로 해오지 못했고, 자본주의적 방식의 목회를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자기 예배당의 좌석도 제대로 채우지 못 할 정도로 교세가 침체할 것으로 보인다. 세째로, 한국교회는 현대의 우상들의 포로가 되었다. 물질만능주의, 거대화 주의, 권력 지향주의에 빠져있다.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기능과 사명이 상실되었다. 네째로 한국의 교회들이 침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으로 멀티미디어 등 새로운 미디아의 발전에 의해 교회 공동체의 약화와 개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이 양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영상 매체 등 멀티미디어를 이용하여 필요한 종교방송을 집에서 선택하여 예배드리고 헌금을 내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일반 교회들은 약화될 우려가 있다. 멀티미디어와 교회의 미래: 교회는 '행동'하는 제자 공동체여야 한다 기독교는 공동체이다 (Christianity is community). 기독교의 사랑은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나는 공동체 안에 있는 나이다. 공동체 없는 나를 생각할 수 없다. 기독교는 언제나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와 무관한 나만의 신앙을 추구하는 일부 기독교의 세력이 있다. 그러한 신앙을 퍼뜨리고 조장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대표격인 사람들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TV 에반젤리스트들이다. 그들은 공동체적인 예식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이 안방에 편안히 앉아서 자신들이 연기하는 설교와 예배를 보고 듣기를 원한다. 그리고 5불, 10불, 혹은 5천원, 만원의 헌금만 우편으로 혹은 온라인으로 보내면 성도의 역할을 다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뉴 미디어의 발달은 이러한 개인적인 종교를 더욱 조장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에도 기독교가 복음전파를 위해서 멀티 미디어를 활용하거나 케이블 TV를 활용하게 될 것인데, 이것의 문제점은 바로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종교, 보이지 않는 종교 (the invisible religion)가 조장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보이지 않는 종교」를 쓴 러크만 (Thomas Luckmann)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자율적인" 소비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자신의 궁극적인 의미 체계를 종교들, 교회들, TV 종교 프로그램들로부터 얻은 종교적인 상징들을 선택적으로 재구성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한 교회나 한 공동체에 스스로를 붙들어 놓지 않고 여러 교회, 여러 종교 프로그램들 중에서 필요한 것을 취향에 따라 선택하여 자기의 신앙 체계를 만드는 종교적 상징의 소비자요, 재구성자라고 한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스스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그는 "자율적" (autonomous)이며 독립적이다. 이러한 현대인에게 있어서 종교는 공동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다. 오늘날과 같이 멀티 미디어에 의해서 쏟아지고 있는 종교 프로그램이나, 케이블 TV로부터 오는 다양한 예배와 설교들은 이러한 자율적인 소비자인 현대인의 취향에 딱들어 맞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이것의 함정은 다름 아닌 공동체성의 파괴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종교'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믿는 신앙, 또 그것에서 비롯되는 '개인적인' 신앙이 결과하는 문제점은 신앙인들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는 공동체 정신의 상실이다. 이러한 신앙은 사람을 '노동'과 '업적'의 행동 반경 속에 묶어놓을 뿐이지 믿음의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성공주의를 조장함으로써 가난한 노동자를 부유한 사람들의 업적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하는 장미 빛 환상에 젖게 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기독교인들은 공동체의 성원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교회없이는 존재이유가 없다. 그 교회가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떠날 수는 없다. 교회를 갱신해야 하는 과제만이 남을 뿐이다. 교회가 타락해서 교회를 떠난다고 우리의 책임은 면제되는가? TV 에반젤리스트(복음전도자)들은 '그렇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 개인적인 신앙을 가진다고 해서 그는 책임적인 존재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의 제자들인 우리들은 '행동'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 교회공동체가 이 사회와 세상에 봉사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갱신하고 참여해야 한다. 필자는 보이지 않는 종교, 개인적인 신앙을 선택하는 경향이 많을수록 기독교는 건강하지 않게 된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교회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무책임한 사람들이며, 그들은 예수를 뒤따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라고 본훼퍼는 말하였다. 한국 교회는 물량주의적 경향에 의해서 교회 내의 코이노니아와 공동체성이 많이 손상되었다. 이러한 공동체성의 상실은 앞으로 뉴미디어의 시대, 미디어 혁명 시대가 본격화되면 더 심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체 성원들의 직접적인 만남과 참여에 의해서 교회공동체는 세워진다. 필자는 교회는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자발적인 참여와 친교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많은 경우 목회자 중심, 당회 중심으로 운영됨으로써 위로부터 아래로 모든 결정 사항이 내려오는 운영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필자는 이러한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밑바닥으로부터의 자발적인 참여,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열심에 의해서 교회가 서야 한다고 본다. 교인들은 양떼, 목사는 목자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회는 모든 교인들과 함께 해 가는 것이지 목회자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목사가 전문적인 목회자라고 한다면, 교인들은 목사의 동역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인은 함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신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이루는 지체들이다. 바울선생이 설파했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관한 말씀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특별히 의미있는 말씀이다 (고전 12장). 모든 성원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룬다. 성원들은 각자의 은사를 가지고 공동체에 공헌한다. 거기에는 어느 누가 위에 있고 어느 누구는 낮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원 모두가 평등하며, 모든 일에 성원들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공동체를 우리 교회가 목표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가 먼저 이 사회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교회 안에 사랑과 평등의 공동체성이 있을 때 우리 사회는 교회를 존경하게 되고 따르게 된다. 공동체적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과제가 21 세기를 향한 오늘의 시대에 주어진 교회와 청년의 중요한 사명이다. 현대인들은 점점더 개인주의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며 개인적인 현대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정보들과 상징들을 취사선택하여 자기의 방식대로 사용할 것이다. 멀티 미디어 등 뉴 미디어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경향을 더욱 강화시켜 줄 것이다. 또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제도의 강화에서 비롯되는 경쟁주의는 공동체적 문화를 더욱 파괴할 것이다. 이러한 속에서 공동체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취향에 있어 개인주의화되어 가고 있으며, 또 혹독한 경쟁 구조는 더욱더 사람들을 공동체로부터 떨어뜨리고 개별화시키고 있다. 교회가 이러한 환경 속에서 공동체적인 삶과 문화를 형성시킨다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 된다. 우리는 우리 교회와 기독청년학생운동이 지금 공동체적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어떠한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공동체성과 공동체 문화의 형성은 기독교 복음의 정신을 구체화하는 첫출발이다. 공동체가 있어야 코이노니아가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천될 수 있다. 교회는 우리 사회가 공동체적인 훈훈함과 정의가 있는 곳이 되게 하는 출발지요 진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교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나아가서 교회는 이 사회가 전체적으로 올바른 코이노니아 속에 있게 하기 위해 그 사회적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과제 자유민주주의는 시민사회적 공간을 마련해 주는데 일정하게 공헌하였다. 이전에는 시민사회의 제 요소들이 국가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 하에 놓여 있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자율적인 공간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공간이 이제는 국가뿐 아니라 자본과 시장의 힘에 의해 크게 제약되고 있다. 이러한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힘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은 시민사회 안에 형성되는 다양한 공동체들에서 나온다. 필자는 시민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 시대의 몰록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이론적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본다. 시민사회는 그대로 방치될 경우 기존의 지배세력 즉 자본과 국가의 연합에 의해 지배되고 만다. 여기에 진보적인 세력의 과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진보적인 세력은 시민사회 안에서 대안적인 비젼과 삶과 행동의 양식을 가지고 시민사회 안에 있는 인자들을 설득하고 연대해 나가야 한다. 오늘날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시민운동, 연대활동들은 이러한 노력들의 일환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연대활동과 운동은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맘몬과 몰록의 영이 현대인의 정신 속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적 자세를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잘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운동도 국가가 지원하게 되었고, 기업의 돈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마저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필자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시민사회운동의 기초를 건실하게 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며, 교회와 기초공동체들이 여기에 일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없는 시민운동은 퇴락하고 만다. 시민사회 안에 존재하는 교회와 기초공동체들은 서로 광범위하게 연대함으로써 자신의 공간적, 지역적, 영역적 제한성을 탈피한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관점과 연대 속에서 자신들의 과제들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시민사회 안에는 크게 보아 두 개의 진영이 싸우고 있다. 그것은 이 사회를 맘몬과 몰록의 지배하에 놓으려고 하는 세계적 자본과 시장의 힘과 이에 대항하는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공동체 운동간의 싸움이라고 본다. 공동체들은 새로운 정치사회(국가)와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대안적 삶을 제시한다. 즉, 한편으로, 공동체들은 지방자치제와 정당의 올바른 발전에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와 공동체들, 기독학생운동은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려고 한다. 생산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그 예라 하겠다. 교회와 공동체들은 자기들만의 고립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연대할 수 있는 교회와 공동체만이 오늘의 문제를 풀 수 있다. 교회와 기초공동체는 시민사회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조직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교회, 기초공동체, 기독학생운동은 이른바 밑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성원들로부터 그 조직의 힘이 올라오는 사랑과 참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선교의 과제: 시민사회 속에서의 공동체 확대의 과제 예수는 자신들만의 섹트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 공동체를 매개로 하여 더 크고 넓은 공간에서 형제자매애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교회공동체도 예수의 뒤를 이어야 한다. 교회공동체는 자신을 목적으로 삼지 말고 더 큰 과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보다 넓은 범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 공헌하여야 한다. 교회공동체를 넘어서 사회적인 상위 개념으로서 시민사회를 말하고자 한다. 필자는 교회공동체가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더 넓은 사회적 공동체는 시민사회 안에 건설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공동체들이 모여 시민사회를 이룸으로써 시민사회의 원리가 약자를 보호하는 공동체적 원리가 되게 하는 것이 교회공동체의 사회적 임무라고 생각한다. 시민사회는 자연그대로는 힘있는 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이다. 시민사회 안에 두 개의 진영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영과 이에 대항하여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로운 코이노니아를 지향하는 진영이 있을 수 있다. 교회공동체는 후자의 진영에서 전초기지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시민사회는 한편으로 물질적인 힘으로 지배하려는 세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물리적 힘으로 지배하려는 정치세력애 대항하며, 나아가서는 현대의 새로운 레바이아단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기술주의(technology)의 지배에 의한 민중과 시민의 대중화(massification)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사회 내에 대안적 공동체들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 속에서 교회공동체의 선교적 과제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 (civil society)라는 개념은 앞으로 진보 운동을 펴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인다. 이태리의 실천적 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로부터 시민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얻었다. 그람시는 경제적 토대와 공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가를 제외한 모든 광범위한 영역을 시민사회라고 했다. 그리하여 시민사회는 학교, 교회, 노동조합 등 여러 형태의 조합들, 신문, 언론, 정당 등을 포함한 이른바 ぢ이념의 시장っ을 형성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람시는 시민사회 내부에 분열이 있음을 보았다. 현재의 국가와 경제적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해 주는 진영과 이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를 갖는 진영, 즉 낡은 사회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대안적 세상을 세우려는 세력 간의 대립이 존재한다. 부언하면, 그람시는 시민사회를 ぢ모든 물질적 관계っ와 동일시하는 경제 결정론적 환원주의에 반대하여 시민사회를 ぢ모든 이데올로기적-문화적 관계っ로 파악한다. 그는 시민사회를 경제적 토대로부터 일정하게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음을 우선 강조하면서 이 시민사회는 또한 국가로부터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영역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국가와 경제적 토대로부터 항상 영향을 받으며, 기존의 국가와 경제적 토대는 서로 힘을 합쳐 시민사회를 장악하려고 한다. 그람시에 의하면, 시민사회가 국가와 경제적 토대의 장악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비젼을 가지는 근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젼을 시민사회의 대부분의 성원들이 공유할 때에만 효과적인 사회변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고 구현하는 세력이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게 될 때 사회변혁이 가능하며, 따라서 시민사회 안에 광범위한 연대 (진지)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시민사회는 그대로 방치될 경우 기존의 지배세력 즉 자본과 국가의 연합에 의해 지배되고 만다. 여기에 진보적인 세력의 과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진보적인 세력은 시민사회 안에서 대안적인 비젼과 삶과 행동의 양식을 가지고 시민사회 안에 있는 인자들을 설득하고 연대해 나가야 한다. 오늘날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다양한 시민운동, 연대활동들은 이러한 노력들의 일환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연대활동과 운동은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맘몬과 몰록의 영이 현대인의 정신 속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적 자세를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잘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운동도 국가가 지원하게 되었고, 기업의 돈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마저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필자가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시민사회운동의 기초를 건실하게 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며, 기초공동체들이 여기에 일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없는 시민운동은 퇴락하고 만다. 시민사회 안에 존재하는 기초공동체들은 서로 광범위하게 연대함으로써 자신의 공간적, 지역적, 영역적 제한성을 탈피한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관점과 연대 속에서 자신들의 과제들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시민사회 안에는 크게 보아 두 개의 진영이 싸우고 있다. 그것은 이 사회를 맘몬과 몰록의 지배하에 놓으려고 하는 세계적 자본과 시장의 힘과 이에 대항하는 더불어 살고자 하는 공동체 운동간의 싸움이라고 본다. 공동체들은 새로운 정치사회(국가)와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대안적 삶을 제시한다. 즉, 한편으로, 공동체들은 지방자치제와 정당의 올바른 발전에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다른 한편으로, 공동체들은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려고 한다. 생산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그 예라 하겠다. 공동체들은 자기들만의 고립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연대할 수 있는 공동체만이 오늘의 문제를 풀 수 있다. 기초공동체는 시민사회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조직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기초공동체는 이른바 밑바닥을 구성하고 있는 성원들로부터 그 조직의 힘이 올라오는 사랑과 참여의 공동체이다. 기초공동체에서는 다음 절에서 언급되듯이 나눔과 비움과 스스로 행함과, 연대와 사랑이 일어난다. 시민사회를 위한 기본 조직으로서의 공동체 형성의 원리 (1) 나눔의 원리: 공동체의 형성은 성원 상호간의 나눔에서부터 출발한다. 요한복음은 ぢ생명의 빵っ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생명의 빵은 제자들을 위해 나뉘어진다. ぢ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っ (6:51). 생명의 빵은 나뉘어 질 것이며, 이것이 나뉘어져야만 생명을 얻게 된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 나뉘어져야 생명이 살고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나눔이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이루어 질 수 없다. 무엇을 나눈다는 것인가? 나눔에 있어서는 우선 경제적인 나눔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실, 경제적으로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경험 속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식으로든 나눔이 없이는 생명이 살아질 수 없고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다. 모두 자기가 가진 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쓴다고 가정하자. 거기에 어떻게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예를들어, 음식을 나눔은 옛부터 내려온 공동체적 전통이다. 음식을 나누는 곳일수록 공동체가 생긴다. 가족이 공동체일 수 있는 것은 가정만큼 음식을 많이 나누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가정에서는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진다. 나눔이 없는 곳은 냉랭하다. 예수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생명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했다. ぢ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っ (요한 15:13). 공동체의 형성은 나눔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의 이야기(요한복음 6:1-15)라고 하겠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다섯 개의 떡을 자발적으로 나눔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기적이 일어났고, 그것이 성인 오천명 이상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이 이루어졌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었던 기적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를 이루어 질 때에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눔 속에서 공동체는 형성되고 그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일이 기적처럼 이루어진다. 공동체가 음식을 나누는 밥상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주일 예배후 교인들끼리 점심을 같이 먹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공동체의 나눔은 공동체 자체 안에서의 나눔으로 끝날 수 없다. 공동체는 밖의 이웃, 모든 고난 당하는 이웃을 위해, 그리고 함께 의를 위해 일하는 다른 공동체들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가 공동체에 내는 재물은 주로 이러한 나누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오늘날 제도교회들은 자신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재물을 사용함으로써 나눔을 실행하지 않는다. 공동체 교회는 제도보다는 이웃에 먼저 관심을 기울인다. 제도를 되도록 축소하고 합리화하는 일은 나눔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나눔은 단순히 경제적인 나눔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인 의미도 가진다. 공동체 안에서의 발언권이나 지도력 등이 나뉘어져야 한다. 말의 독점이나, 결정권과 권력에의 독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많은 조직체가 이러한 권한의 나눔을 실천하지 않음으로써 권한과 권력이 소수 혹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성원의 대다수가 이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특히 교회는 이러한 권한의 나눔을 교회의 치리, 봉사, 목회, 말씀선포, 성례전 집행 등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해야 한다. 공동체 교회 속에서의 나눔은 교회 안의 "권력"의 나눔에서부터 실시되어야 한다. 공동체 속에서 오고가는 말이 한 사람에 의해서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은 말하고 대다수는 그의 청중이 되는 공동체는 진정한 것이 못 된다. 이런 면에서 선포 (설교)를 되도록 짧게 간명하고도 이해하기 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공부할 때에도 모든 사람들이 느낀 점을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치리와 행정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성원들 대다수가 참여하도록 지금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 교회는 무엇이든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자진하여 내어 놓음으로써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배분받을 때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받을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2) 비움의 원리: 나눔의 원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비운다는 것은 우선 집착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숫자나 외형적 크기에 집착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기획, 전략, 형식, 목표를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ぢ의지의 침묵っ을 말하는 것으로서 텅빈 상태를 의미한다. 빈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의도성을 너무 강조하면 공동체가 깨진다. 의지와 생각이 너무 꽉 차있고, 형식이나 제도가 물샐 틈없이 들어서게 되면 공동체성이 상실된다. 공동체 안에는 잘된 기획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버림과 비움 속에서 공동체는 역설적으로 성장한다. 이렇게 비우는 이유는 이 빈 공간에 무엇인가가 채워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채워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채워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빈공간이 있는 곳에 참여가 일어난다. 모든 것이 잘 기획된 곳에는 성원들이 참여할 여지가 없어 진다. 더 중요하게는 성령이 역사할 공간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빈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그 속에 배타성, 지배, 억지, 강압, 부담, 집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스럽게 모이는 것이 공동체이다. 의도성이나 억지에 의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예수도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이 물러남으로써 그 공동체 안에 빈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예수는 직접 이 공동체를 지휘하지 않았다. 자신이 물러난 그 공간 속에 성령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신이 떠나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뻐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성령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3) 스스로 함의 원리: 즉 자발성의 원리이다. 스스로함의 원리는 참여의 원리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공동체의 원리이기도 하다. 공동체 성원들은 무위를 통해 일한다(爲). 스스로 있음의 (自然스러운) 존재로서 공동체 성원들은 이제 스스로 행함의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공동체 역사의 주체로 일어난다. 공동체는 자기 집착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또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한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혹은 권력이든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의한 행동이다. 위의 비움의 원리에서는 정(靜)이었지만, 스스로 함의 원리는 동(動)의 원리이다. 그러나 이 정과 동은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공동체는 사건의 공동체요 활동의 공동체이다. 이 활동은 일단 침묵과 멈춤에서 오는 활동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활동으로만 채워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공동체는 비로서 자기의 의도성을 가질 수 있다. 위에서는 의도성을 배제했지만 이제 다시 성령의 지도에 따라 공동체는 의도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나를 버리고 성령의 가르침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박재순은 이러한 스스로 함의 원리야 말로 씨량 민중 사상의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공동체는 스스로 함의 원리에 의해 이 사회를 코이노니아적 정치체 (Politike Koinonia), 즉 진정한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 스스로 함의 원리는 결국 신명나는 행동을 낳는다. 이러한 공동체의 자발적 행동은 다른 공동체들과 신명나는 '희망의 연대'를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한다. (4) ぢ더불어っ의 원리: 이것은 연대의 원리이다. 공동체는 자기 자신만으로 자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른 공동체들과 연대 속에서 형성되며, 힘을 얻고, 또 함께 일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더불어의 원리는 공동체의 형성의 원리가 된다. 기초공동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 넘는 더 넒은 시야를 가져야 하며, 자신보다 더 큰 것을 향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공동체는 다른 공동체들과 힘을 합쳐 사회 전체의 변혁을 모색한다. 이러한 면에서 선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제 선교는 가진 자(혹은, 우월한 자)가 없는 자(혹은, 열등한 자)에게 시혜적으로 무엇을 주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 속에서의 연대의 행위이다. 함께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연대하며 일하는 것을 선교라고 해야 한다. 시민사회에서의 교회의 선교의 모습은 더더욱 연대의 모습을 띄어야 한다. 시민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사회선교는 행동을 더불어 하는 연대(action in solidarity)의 모습을 취해야 한다. 이 연대에서는 다른 종교를 개종하려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 함께 정의롭고, 민주적인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시민사회의 기초 조직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하고, 인적, 물적인 공헌을 해 주는 일은 교회공동체의 연대사업의 주요한 부분이 된다. 이러한 연대를 위해서는 교회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해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즉 단순한 예배공동체라는 좁은 의미의 정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예배뿐만 아니라 봉사와 치유를 위한 공동체임을 이해하고, 나아가서 시민사회의 근간의 조직으로서, 시민사회가 정의롭고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게 하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5) 사랑의 원리: 공동체 형성을 위한 포괄적인 원리는 역시 사랑의 원리이다. 이것은 위의 모든 원리의 기초를 이룬다. 사랑의 원리는 예수가 주신 새로운 계명에 기초한다. 예수는 십계명을 종합하고 그것을 뛰어 넘는 새로운 계명을 기독교인들에게 주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 13:34). 이 ぢ새 계명っ은 요한복음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다 (15장 12, 17절).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기초는 그리스도인 예수의 사랑에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인 ぢ우리っ들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하는 것이며, 공동체 안의 사랑의 연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제하고 그것을 닮으려고 한다. 공동체와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연결된다. 위의 5 가지의 원리만이 공동체 형성의 기본원리일 수는 없을 것이다. 공동체의 경험이 깊어 질 수록 보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원리들이 새롭게 발견되리라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적어도 위의 5 가지의 원리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공동체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공동체가 있음에도 그것이 공동체의 성격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알게 모르게 위의 원리 중에 하나 혹은 여럿을 결여하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자 한다. 사회개혁과 교회갱신의 과제 공동체교회는 구체적으로는 포괄적 해방을 위한 사회개혁의 과제와 교회가 이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를 갱신하는 과제라는 이중적인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예수의 작은 모임인 교회공동체들은 모든 선한 세력과 모든 뜻을 같이 하는 교회들과 연대하여 사회개혁과 교회갱신에 구체적인 공헌을 해야만 그 존재 의의가 있을 것이다. 교회갱신은 포괄적인 해방을 위한 사회개혁을 위한 수단적 기능을 가진다. 교회갱신은 교회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교회갱신은 교회가 모든 면에서 균형을 갖추고 모든 면에서 전체적(wholistic) 성격을 확보하자는 것이 아니다. 완전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완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 일도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신제가 연후에 치국평천하라는 말도 바로 이러한 완전주의로부터 기인되는 실천의 부재와 우유부단의 예일 것이다. 오늘날 온전주의 혹은 완전주의를 내새우며 소위 좌로나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ぢ중도적인っ 교회들은 역사가 실제로 그들을 필요로 할 때 이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완전주의나 중도주의를 자신의 사회적 입장으로 내세우는 교회는 이미 교회갱신을 포기한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니라 자신을 부단히 변혁하는 과정에 있는 교회를 말한다. 교회의 진정한 자기 정체성(identity)을 정태적 (static) 완전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보다 진정한 것을 찾아 나서는 자기 변화과 운동의 과정에서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완전함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임재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 공동체교회는 스스로를 자신의 목표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렇게 된다면 공동체는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새로운 교회공동체는 포괄적인 해방을 위해 즉 하느님의 나라가 이땅에 거할 수 있도록 예수운동을 하기 위한 전초기지 일 뿐이다.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 포괄적인 해방이지, 공동체를 형성하는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오늘날 공동체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교회들이 매우 많아졌다. 그러나 그 교회공동체 운동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수단이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수단이므로 공동체를 세우는 일 자체 속에 이미 그 자체로 일정한 목적과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
33인중 기독교측 대표-이승훈/ 2013-05-18
33인중 기독교측 대표-이승훈 평생 소원으로 아래에 적은 두 가지 조건뿐이 형제의 마음속에 깊이 기억되기를 간구합니다. 첫째, 마음과 몸을 다하여 일함으로써 각 사회 인중(人衆)의 신앙을 받는 지경에 이르는 질실(質實)한 진인(眞人)이 생겨나기를. 둘째, 가면이 아니요 진실로 일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에 대하여는 혈기방강(血氣方强)의 청년들까지라도 그를 정당히 경애하며 숭앙하며 사회중심의 추세를 지게 하기를. - 선생이 <개벽> 1922년 1월호 밝힌 ‘신년(新年)의 신의견(新意見)’ 중에서 열 살이 되던 해 학업을 중단하고 상인의 길 들어서 이승훈(李昇薰, 1864. 3. 25~1930. 5. 9) 선생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읍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주(碩柱)이며, 어머니는 홍주(洪州) 김씨이고, 이들 사이의 둘째 아들이 바로 선생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아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호는 남강이다. 가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6살에 고향 정주읍내를 떠나 인근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에서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기 전까지 3, 4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것이 어린 시절 배운 학문의 전부였다. 열 살이 되던 1874년 학업을 중단한 선생은 당시 유기(鍮器)상인으로 유명한 임일권이 운영하던 상점의 사환으로 들어갔다. 4년 뒤에는 이 상점의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으며, 근면성과 성실함이 인근까지 널리 알려져 1878년 이도제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점원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에 들어섰다. 선생은 보부상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전전하면서 자본을 모아 납청정에 유기상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철산의 갑부 오희순의 돈을 얻어 1887년 납청정에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기업가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1차 산업 위주의 사회에서 2차 산업의 토대를 만들어 간 것이다. 선생은 공장 경영방식도 근대적으로 개선하였다. 노동환경을 일신하였고 노동조건 개선에도 힘썼으며, 노동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대우하였다. 때문에 작업 의욕이 왕성하여 생산성이 높고 품질도 우수하여 사업은 날로 번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도 한 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1894년 청일전쟁이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납청정에 자리 잡은 선생의 상점과 공장은 이때 잿더미가 되었다. 신민회에 가입하고 민족교육운동 일환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다 덕천으로 가족과 함께 피난 갔다 돌아온 선생은 또 한번 오희순의 자본을 얻어 상점과 공장을 재건하였다. 나아가 평양에 상사를 개설하고 진남포와 납청정에 지점을 두고 본격적으로 무역과 운송업을 펼쳤다. 서울과 인천 등지로 왕래하면서 사업을 확장하는데 성공한 선생은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 때는 선생에 의해 물가가 좌우될 정도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같이 상업 자본을 축적하여 본격적인 산업 자본가로의 성장을 눈앞에 둔 선생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1902년 우연인지 아니면 민족 자본을 말살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인지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1만냥의 엽전을 싣고 부산으로 가던 선생의 운송선이 일본 영사관 소속의 배와 충돌하여 침몰한 것이다. 이에 선생은 일본 영사를 상대로 2만냥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소송은 당시의 국제 정세에 얽혀 1년이 지난 뒤에야 원가만 받는 것으로 해결되고 말았다. 선생은 1년간의 소송으로 장사의 적기를 놓쳤고, 또 소송에 매달리는 바람에 사업도 제대로 못하여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선생은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외세와 민족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상업 자본가로서 이익을 추구할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민족 현실을 일제와의 소송과정에서 뼈저리게 절감한 것으로 생각된다. 생활상의 문제에서 반일 민족의식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연계선상에서 선생은 43세가 되던 1907년 7월 인생의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평양에 나갔다가 “나라가 없이는 집도 몸도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는 없소”라고 하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그를 찾아가 만난 것이 그 계기였다. 이후 선생은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게 가졌고, 인생 행로는 오직 민족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당장 금주, 금연과 단발을 결행하고,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여 평안북도 총감이 되었다. 이 가운데 선생은 식산 흥업의 책임자로 평양 마산동에 자기(磁器)회사를 설립하였고, 서적의 출판과 공급을 목적으로 태극서관이라고 하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민족교육운동에도 앞장섰다. 도산을 만난 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온 선생은 서당을 고쳐 신식교육 기관인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초등교육 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이어 같은 해 12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이 된 오산학교를 개교하여 교장이 되었다. 민족교육운동을 목적으로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 전경(1915년) ‘안악사건’으로 제주도 유배, ‘105인 사건’으로 옥고 치러 한말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의 구국계몽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선생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전에도 선생은 기독교 설교를 들은 일이 있었지만, 그에 입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나니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서러웠다. 답답한 심정으로 평양으로 나갔다가 한석진 목사의 설교가 있다고 하여 들으러 갔다. 선생은 그 날부터 기독교를 믿기로 작정했고, 돌아와서 오산학교 교육도 기독교 정신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일제에게 나라를 강점 당한 직후부터 선생은 5년여 동안 철저히 탄압을 받았다. 1910년 말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로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 2월 선생은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무단통치에 의한 민족운동자 탄압의 출발점이었다. 1911년 9월 일제는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민족운동자들을 대거 체포한 ‘신민회사건’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 105명을 기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흔히 ‘105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선생을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에야 가출옥하였다. 감옥생활은 선생의 민족의식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 출옥 후 오산학교로 돌아온 선생은 학교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5년 52세의 만학도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수학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는 1901년 마펫트 목사가 창설하여 1907년 첫 졸업생을 낸 기독교 장로교계통의 신학교였다. 이 학교는 기독교계 3.1운동 추진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선생을 비롯하여 민족대표로 활약한 길선주,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목사, 그리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였던 송병조, 김인전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한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선생은 여기서 수학하면서 민족독립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운동 동지들과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3.1운동 추진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이다. 국제 정세의 격변 속에 국내외에서도 거족적 독립운동 움직임 일어 한편 1918년에 들어와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서는 이미 ‘노농정부’가 수립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 대통령 윌슨은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당시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시대가 가고, 인도와 정의의 시대가 도래하는 ‘세계 개조’의 흐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나아가 이 같은 정세의 변화를 이용하여 한국 독립을 성취하고자 국내외 민족운동자들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이러한 흐름아래, 상해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를 파견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 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준비하였다. 즉 외교활동을 통해 민족독립 달성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파리강화회로의 파견뿐 아니라 선우혁, 김순애, 김철, 서병호, 백남규 등을 국내에 밀파하여 독립운동 봉기를 종용하고, 여운형을 만주와 노령 연해주, 조소앙, 장덕수를 일본 동경으로 파견하여 국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 봉기를 이끌어내도록 하였다.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독립운동 논의가 진행되었다. 천도교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16년부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손병희 교주에게 요청하는 신도가 있었고, 1917년에도 그러한 요구가 재차 표출된 적이 있었다. 특히 1917년 겨울에는 김시학의 발의로 우선 천도교, 기독교, 유림 등 3종단이 연합하고, 사회계와 구(舊)관료계의 저명 인사들을 포섭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알려지고,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지자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다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들은 송진우, 현상윤 등 중앙학교측의 인사들과 합세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을 추진하던 재일 유학생들의 밀사로 송계백이 도착한 것이었다. 송계백이 가져온 2.8독립 선언서 초안을 보고, 또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듣고 크게 감동한 현상윤은 이를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와 친구인 최남선에게 보였다. 그리고 다시 송계백과 함께 최린을 찾아가 보여 주고, 그를 통해 손병희에게도 전달한 것이다. 손병희는 이를 보고, “젊은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고 하니 우리 선배들로서도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추진 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법과 진행을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에게 일임하면서,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담당하게 하고, 최린은 외부와의 관계를 맡도록 하였다. 종교계 인사들과 학생층의 연합으로 3.1운동 계획 추진 한편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 추진은 선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2월 6일 선생은 상해 신한청년당의 밀사 선우혁으로부터 국제정세의 변화와 그에 따른 국내 독립운동의 추진을 권유 받았다. 이에 독립운동 추진 논의를 위해 상경한 선생은 최남선, 송진우, 최린 등을 만났고, 이들로부터 천도교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3.1운동 계획을 듣게 되었다. 선생이 절친한 친구에게 보낸 서한 이때 선생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 세력의 독립운동 계획은 쉽게 접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계를 대표한 선생과 천도교계를 대표한 최린은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 아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3.1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곧 바로 서북지방으로 내려가 기독교 지도자들을 순방하며 3.1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갔다. 우선 평양에서는 장로교계의 원로 지도자 길선주 목사와 감리교 지도자 신홍식 목사의 참여를 확약 받았다. 그런 다음 평북노회가 열리던 선천으로 내려가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교회 지도자 들을 만났다. 여기서 선생은 천도교와의 합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3.1운동 참여와 민족대표 선정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회 지도자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그 자리에서 이명룡,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등 4인을 민족대표로 선정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쉽게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동안 이 지역에서 목회 활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상호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선생을 비롯하여 최린, 한용운을 매개로 기독교, 천도교, 불교계와의 접촉이 이루어져 종교계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YMCA를 매개로 학생층이 참여함으로써 민족대연합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3.1운동 계획은 일원화되어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2월 28일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민족대표들이 회합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최종 검토한 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갖도록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식 이후 피체, 민족대표 중 가장 늦게 출옥한 선생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앞에 놓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한용운이 대표로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 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하는 요지의 식사(式辭)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참석자 모두는 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운동의 불을 지폈던 것이다. 이 직후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출동한 일경에게 피체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의 인신(人身)을 구속할 수 있었을지언정 불타는 독립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특히 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당당하게 답변하였다.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하고, 또 먼저도 말하였지만 금번 독립운동은 우리 동지들만으로 한 것이지 외국 사람이나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 사람이라든지 또는 학생 등과는 하등 관계가 없으며, 일본 정부에 대하여 청원한 일에 있어서도 외국 사람의 조력을 요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 말 가운데는 선생의 불요불굴의 독립정신은 물론 자주적 독립운동 노선까지도 모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선생은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늦은 1922년 7월 22일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오산학교와 <동아일보> 경영에 힘쓰다 이후 선생은 정주로 돌아와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쏟았다. 그러면서 물산 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나아가 <동아일보>가 1924년 1월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의 게재와 4월 박춘금 사건으로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를 맡아 ‘민족지’의 경영 정상화에도 노력하였던 것이다. 교단에 선 선생을 그린 기록화 그러던 중 1930년 5월 8일 선생은 전처럼 오산학교를 다 돌아보고 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면회(自勉會)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다. 자면회는 용동 사람들로 조직된 자치기관으로 선생은 거기에 자신의 땅을 내놓아 공동 경작하게 하며 생활 개선과 향상에 힘쓰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갑자기 병이 나 이튿날인 5월 9일 오전 4시,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영면 직전 선생은 평소에 늘 하던 대로, “내 뼈는 학교에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를 원한다”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이었다. 살아서는 독립운동가로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고, 죽은 뒤에는 자신의 유골까지도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4·19 학생혁명 50주년의 역사신학적 의미/ 두 눈 부릅뜨고 다물지 못한 입/ 이덕주 감신대 교수(한국교회사)/ 2010-04-12
4·19 학생혁명 50주년의 역사신학적 의미 두 눈 부릅뜨고 다물지 못한 입 이덕주(감신대 교수/ 한국교회사) 들어가는 말 “근형[아들]은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벌리고 그 무엇을 부르짖다가 그 무엇을 노려보다가 쓰러졌음이 분명했다. 내가 근형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 볼 때 옆에 있던 의사 한진섭씨는 근형의 부릅뜬 눈을 감기면서 기도를 올렸다. ‘당신의 거룩한 피는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며 민족의 가슴에 오래 살 것입니다. 고이고이 잠드소서’ ‘민주주의 만세! 이근형군 만세!’라고.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거룩한 내 아들 아니 대한의 아들이 과감히 죽어 가는데 왜 울어야 하는가! 장하다. 내 아들. 어미는 울지 않으련다.” 데모한다고 나간 삼대독자 외아들을 찾아 경찰서마다 찾아 헤매다 사흘 만에서 어느 병원 차디찬 시체실에서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벌리고 그 무엇을 부르짖다가, 그 무엇을 노려보다가 쓰러진” 아들. 그런 아들의 시체를 발견한 어머니의 “장하다. 내 아들! 어미는 울지 않으련다.”는 절규. 그 앞에서 교회는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독재정권의 폭력과 총알에 수 없이 스러진 젊은 청년 학생들의 죽음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었던 한국교회는 4 ․ 19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입이 있으나 할 말이 없었지만’(有口無言), 반면 희생자들은 한국교회에 대해 ‘입은 없으나 할 말이 많았다.’(無口多言) 기독학생 이근형이 길거리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면서 다물지 못한 입으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하고자 했던 말은 무엇일까? 4·19 학생혁명은 해방직후 수립되어 12년 동안 통치하면서 ‘독재와 부패’혐의를 쓰게 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와 함께 이승만 ‘장로’대통령의 중요 지지기반이었던 기독교계의 지도력과 권위도 함께 붕괴되는 수치와 아픔을 경험하였다. 19세기 말 선교를 시작한 기독교는 한말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 상황, 그리고 일제시대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한 민족적 수난 상황에서 민족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나름대로 적극 부응하여‘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의 면모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해방직후 분단시대에 한국교회는 신학적,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한 교회 안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분열을 연출하였으며 민족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그것을 통한 평화정착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충실하지 못했다. 오히려 해방 후 한국교회는 분단구조 속에서 배태된 1인, 혹은 1당 독재, 그리고 그로 인한 정치 사회적 부패구조와 현실에 침묵하거나 방조함으로 사회악을 고발하고 경계해야 할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한 종교집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독교는 자유당 정권의 부패와 타락에 상당부분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4·19는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권력에 대한 심판만은 아니었다. 그런 정치권력의 부패와 타락에 침묵하였을 뿐 아니라 동조 내지 방조한 교회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다. 4·19는 정치권력에 밀착하여 이권과 편의를 추구하려는 종교단체의 집단 이기주의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4·19와 관련하여 회개와 반성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러하지 못했다. 4·19 직후 회개와 번성이 뼈를 깎는 아픔처럼 철저했더라면 이후 한국교회는 달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 한국교회는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사회적 비판과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다. 일반사회 언론, 특히 청년 학생계층이 주도하는 인터넷 언론에서 기독교는 비난을 넘어 혐오의 대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런 반(反) 기독교 정서에 합리성과 객관성을 결여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런 비판과 비난의 빌미를 제공한 당사자가 바로 교회 지도자들과 기독교라는 점에서 변명과 항변대신 자기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반성적’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4·19를 촉발시킨 자유당 정권과 유착되었던 당시 기독교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4·19 이전 자유당 정권과 밀착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소개할 것이다. ‘박마리아의 명함’: 정치권력과 결탁한 교회 한국 감리교회는 해방직후(1946년) 역사청산 문제로 재건파·복흥파 분열을 이루었다가 3년 만에 통합한 경험이 있고 전쟁직후 교권과 지방색 분제로 2차 분열이 이루어져 1954년 (충청도 중심의) 호헌파 세력이 별도 총회를 조직해 나갔다. 2차 교단 분열 직후 감리교회 안에서는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예배당과 재산을 차지하려는 무력충돌과 법정소송이 이어졌다. 그런 혼란기에 호헌·총리원 양측에서 정치권력의 힘을 빌려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시도들이 추진되었다. 그런 배경에서 ‘박마리아 명함’이야기가 나왔다. 1954년 3월 총회에서 호헌파가 분열해 떨어져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구내에 있던 총리원에 경찰이 들이닥쳐 회계 장부 일체를 압수해갔다. 이때부터 수개월에 걸쳐 유형기 감독을 비롯하여 총리원 관계자들이 ‘공금 횡령 및 유용󰡑 혐의로 집중 조사를 받았다. 대략 세 가지 혐의였다. 첫째, 어느 감리교 평신도가 정부 공사에 입찰 신고를 하는데 필요한 예금잔고서를 마련하기 위해 총리원 회계 장부에서 빼내 사용하고 돌려준 일이 있었는데 비록 총리원 돈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총리원 돈이 개인 통장으로 나갔다 왔음으로 유형기 감독이나 회계 장기수 목사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둘째, 1952년 여름 교육국 주최로 신탄진에서 주일학교 지도자 강습회를 개최하였을 때 사용하고 남은 식량 40여 가마를 개인적으로 횡령했다는 혐의로 교육국 총무였던 김광우 목사가 집중 조사를 받았다. 셋째, 서소문에 있던 토지 임대권리 양도 계약금으로 15만원을 교육국 재정에서 지출한 일로 역시 김광우 목사가 조사를 받았다. 그 땅의 임대권 소유자는 중앙신학교로서 당시 중앙신학교 이사장이 야당(민주당)에서 활약하고 있던 정일형 목사여서 그의 명의로 계약금이 지출되었는데 이 때문에 󰡒총리원을 통해 야당에 정치자금이 흘러 들어간다.󰡓는 의혹을 받았고 그 때문에 더욱 집요한 조사를 받았다. 결국 유형기 감독은 ‘공금 유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되었다. 유형기 감독을 비롯한 총리원 관계자들은 조사받는 과정에서 사건은 감리교회의 내부 투서로 시작되었으며 ‘정치적인󰡑 배경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았다. 총리원측은 사건 담당 검사로부터 󰡒사건 배후에 정부 고위층이 있는 것 같다󰡓는 언질을 받고 갈홍기 박사를 의심했다. 당시 공보처장으로 있던 갈홍기 박사는 1946년 재건파 분열 당시부터 유형기 목사나 김광우 목사와 반대편에 섰던 인물로 자유당 정권의 ‘실세󰡑로 통하던 그가 ‘호헌파󰡑와 결탁하여 사건을 정치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총리원측은 검찰총장을 움직일 수 있는 ‘보다 높은 윗선󰡑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총리원 실행위원이었던 박마리아의 명함을 얻게 된 것이다. 김광우 목사의 증언이다. 󰡒당시 이사회 실행부 위원에는 김활란, 박마리아, 박현숙씨 등과 몇몇 목사들이 있었다. 이 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진정서를 보이고 서명 날인을 청하였다. 그들은 다 교회를 위하여 순응을 하였다. 그 다음 박마리아씨의 명함을 얻었다. 검찰총장에게 나를 소개하는 명함이었다. 나는 그 명함을 가지고 진정서를 휴대하고 총장 비서실의 문을 노크했다. 총장이 진정서에 날인한 이름들을 훑어보더니 그 진정서를 비서실에 접수하라고 하며 모든 사정을 잘 알겠다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해주었다. 나는 재삼 관대히 선처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때 검찰총장은 한격만씨였다. 전형적 법관의 모습이 얼굴에 박힌 깡마른 체구의 인물이었다. 당시 세도가 당당한 박마리아씨의 명함을 보았던 때문인지 퍽 친절하게 문밖에까지 나를 배웅하면서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한 마디 하는 말이 ‘책동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진정서가 유효했는지 검찰에서는 ‘기소유예’ 처분으로 이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곧바로 총리원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총리원측은 호헌파로 나간 목사와 교회에 대한 법정 소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소송의 빌미는 호헌파에서 제공했다. 당시 총리원 유지재단에 속한 교회 재산은 대부분 대지만 등록되어 있고 예배당이나 사택 건물은 미등기인 상태가 많았는데 호헌파로 나간 교회에서 교인 대표 명의로 건물 등기를 한 것이다. 그 결과 토지는 총리원, 건물은 호헌파 소유가 되었다. 그러자 총리원측에서 ‘교회 건물 등기 말소 소송󰡑을 제기하였고 소송이 걸린 교회마다 예배당 쟁탈전이 벌어졌고 경찰이 동원되었다. 당시 호헌파를 이끌었던 박설봉 목사의 증언이다. 󰡒드디어 보복의 회오리바람이 강력하게 일어났습니다. 즉 사회재판이 40여 건 걸려 온 것입니다. 고 조화철 목사는 ‘설교 가차압󰡑을 당했고 동대문교회는 ‘교인의 교회출입 가처분 신청󰡑에 걸렸으며 천안교회, 만리동교회, 중앙교회 등 25여 교회 및 주택 명도 소송이 걸렸고 또 고명균 목사의 경우는 교회 재판을 열어 호헌파라고 목사 파면 처분을 받았고 고목사는 돈암동교회에서 쫓겨났으며 그것도 부족해서 자유당 박마리아 명함을 가지고 경찰을 앞세워 종로 중앙교회에서 설교하고 있는 엄재희 목사와 정등운 목사를 강당에서 끌어내렸습니다. 또한 상이군인 30여 명을 방O신 목사와 박O번 목사가 끌고 와서 예배 보는 교인들을 전부 끌어냈으며 남양교회 장호원교회는 방O신 목사가 도끼로 예배당과 강단을 때려 부수고 야단법석을 쳤습니다. 이것도 다 박마리아의 명함에 의하여 경찰 입회 하에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규탄한다고 해서 시경 강력계 형사들이 총동원되어 체포 선풍이 불어왔습니다.󰡓 호헌파는 총리원측이 경찰의 비호를 받아가며 호헌파 목사와 교회를 탄압한 배경에 ‘박마리아의 명함󰡑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총리원 회계 부정 사건을 ‘기소 유예󰡑로 흐지부지 끝나게 만든 것도, 호헌파 교회에 경찰이 들이닥쳐 교인들을 몰아낸 것도 모두 ‘박마리아의 명함󰡑 때문이라 본 것이다. 하긴, 그 시기 ‘박마리아의 명함󰡑은 교계 뿐 아리라 일반 정치 사회에서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화여자대학 교수였던 박마리아의 명함이 이처럼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시 자유당 실세였던 국회 부의장 이기붕의 부인이라는 사실 외에 개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박마리아의 명함󰡑을 둘러싸고 벌어진 호헌파와 총리원 사이의 힘겨루기는 분열시대를 사는 한국 감리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교회가 분열된 것만도 부끄러운 일이고, 목사와 교인 간에 토지와 건물을 둘러싸고 소유권 소송을 벌인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인데 상대편을 제압하기 위해 ‘윗선󰡑을 찾아 세속 정치권력과 결탁한 것은 더더욱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교회는 점차 세속 정치권력과 ‘부정한󰡑 유착관계를 맺게 되었다. 특혜인가? 행운인가?: 광화문 감리회관 호헌파 분열의 빌미를 제공했던 유형기 감독이 2차 임기를 마치는 1958년 9월 총회 서두에 행한 ‘감독 연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1930년 총리원이 생긴 이래 집 없이 지나던 총리원은 모교회[미국연합감리교회]의 후의로 두 달 전에 광화문 네거리에 감격에 넘치는 기공식을 거행했습니다. 광화문 네거리에 245평을 얻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 터를 얻는데 힘써 주신 이들이 많습니다만은 특별히 우리의 존경하는 이기붕 의장의 수고가 컸으며 또 그 터에 건축 허가를 얻는데는 우리 회원의 한 분이신 김활란 총장의 수고가 컸습니다. 그 두 분과 또 직접 간접으로 수고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총리원은 그 때까지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 구내에 있는 한옥 건물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본래 조선시대 궁궐 부속 건물로 사용되던 것인데 미감리회 선교부가 사서 감리교신학교 구내로 옮기고 처음엔 교사로 사용하다가 1930년 이후 총리원 사무실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신학생들이 급증하여 교사가 부족하게 되었고 건물도 낡아 학교 밖에 총리원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광우 목사가 수복직후 서소문에 있던 중앙신학교 소유 건물 임대권을 확보하려 했던 것도 총리원 건물을 마련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 중 하나였다. 그 무렵 감리교회가 운영하던 국제대학도 건물이 필요했다. 국제대학은 1946년 설립되었지만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고 교수진과 시설미비로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 인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는데 1956년 4월 감리교회가 재단법인 ‘감리학원󰡑을 설립하고 학교를 인수하여 유형기 이사장, 김광우 학장 체제로 재출발하였다. 국제대학은 당시 유일한 ‘야간 대학󰡑으로 학생은 많았지만 교수와 교사(校舍)를 확보하지 못해 무인가 학교로 폐교 위기를 맞고 있었다. 1957년 1월 이사회는 학장을 문창모 장로로 교체하고 본격적으로 학교 대지 확보에 나섰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광화문 네거리, 중구 태평로 1가 64번지에 있는 1천여 평 땅이 나왔다. 일제시대 일본인 소유였다가 해방 후 적산이 되어 국방부에서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총리원과 국제대학 이사회는 공동으로 불하받아 5층 건물을 짓고 1-3층은 총리원에서, 4-5층은 국제대학에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불하받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사회국 총무였던 문창모 장로의 증언이다. 󰡒신청 단체는 모두 27개였는데 우리가 27번째로 접수했다. 경쟁이 아주 치열했던 만큼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리고 국방부에서는 민간인에게 불하하는 것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사회는 이기붕 의장을 찾아가 교육사업을 위해 꼭 불하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의장은 곧 적산관리청을 찾아가 설득하고 민간에게 불하하는 것을 반대하는 국방부를 설득하여 우리 국제대학이 그 땅을 불하받을 수 있었다.󰡓 적산관리청과 국방부를 움직인 것은 이기붕 국회의장이었다. 그래서 󰡒광화문 감리회관은 이기붕 의장이 준 것이다󰡓는 소문이 돌았다. 총리원 실행부 위원에다 국제대학 이사, 총리원 건축위원이었던 그의 아내 박마리아도 힘을 썼다. 자유당 정권의 ‘막후 실세󰡑로 통하던 박마리아를 재단 이사로 끌어들인 것은 그가 부총장으로 있던 이화여대의 김활란 총장이었다. 유형기 감독이 1958년 9월 총회에서 총리원 기공식을 보고하면서 이기붕 의장과 김활란 총장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서울 한복판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한 감리회관은 특혜로 얻은 선물이었다. 대지 확보와 건축 허가 과정에서 이기붕 ․ 박마리아 부부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았다. 특혜는 ‘빚󰡑이다. 특히 정치인으로부터 받은 특혜는 그러했다. 감리교회가 정치권으로부터 특혜성 지원을 받고 있을 1958년 봄은 ‘5․2총선󰡑으로 불리는 제 4대 국회의원 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으로 집권 자유당으로서는 개헌 통과선인 국회의원 ‘3분의 2󰡑 확보를 위해 정치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서 이기붕 의장은 기독교인의 ‘몰표󰡑가 필요했고 당선 가능한 기독교인 후보가 필요했다. 비록 떨어졌지만 국제대학장 문창모 장로가 자유당 후보로 김포지역 민의원 선거에 나간 것도 이기붕 의장의 강력한 추천과 권고 때문이었다. 그만큼 당시 감리교회 지도부는 자유당 정권과 밀착되어 있었다. 잦은 교회 분열로 가뜩이나 ‘싸우는 교회󰡑라는 비난을 받고 있던 차에 부패한 정권과 결탁하여 이권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 교회의 권위는 더욱 떨어졌다. 기독교계의 자유당 선거지원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 야욕은 1954년 11월, 소위 ‘사사오입 개헌’으로도 불리는 3선개헌안의 무리한 추진에서 드러났다.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한 3선 개헌안을 근거로 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5월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 나섰고 부통령으로 이기붕 의장을 지목하였다. 무리한 3선 개헌과 이기붕 부통령 후보지명이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음에도 기독교계는 3선을 노리며 대통령후보에 나선 이승만과 그의 정치 파트너를 적극 밀어주자는 입장을 표명하고 나섰다. 당시 기독교계 일반 대중지로 널리 읽히고 있던 <낙원>에서는 이승만에게 ‘경천애인의 민족적 지도자’란 칭호를 붙인 후 그를 ‘다윗’과 비교하여 인간적인 실수까지도 덮어주자는 논지를 폈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失手)가 있었다고 하자. 다윗에게도 실정(失政)과 실수는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백성을 사랑하는’신앙의 사람은 그의 인간적인 연약과 결여에도 불구하고 그가 십자가 앞에 겸허하고 회개할 때 그를 통하여 신의 대능(大能)이 나타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경천애인의 민족적 지도자의 3선을 바라고 또한 그의 대를 이을 신앙과 신념의 사람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그래도 안정권이었는데 부통령 후보로 나선 이기붕에 대한 대중의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당으로서는 부통령 선거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고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이기붕이 ‘감리교 권사’인 것을 강조하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그래서 당시 자유당 선전부장이었던 황성수 장로는 <낙원>에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썼다. “이 대통령께서 전당대회에서 총재각하(이기붕)를 지정한데 유의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통령 지명을 ‘공의’로 생각하셨다는데 중대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각하께서 지명하신 ‘진정한 애국자’ 그리고 ‘부통령의 직책을 완수할 적격자’이신 이기붕 의장을 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서의 그 양심적이며 민주주의적이며 실천적인 정치를 통하여 민족의 백년대계에 광명을 이룩하기를 국민에게 호소하는 바이다.” 이처럼 기독교계 인사들이 나서서 󰡒이승만 ‘장로󰡑를 대통령에, 이기붕 ‘권사󰡑를 부통령에 당선시키자󰡓며 ‘종파의식󰡑에 호소하고 나선 것은 당시 자유당 정권이 계속된 실정으로 민심을 잃어 ‘친 기독교적󰡑 정권 유지가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과 맞선 천주교인 장면의 인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에 개신교 지도자들은 선거를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대결로 몰아가며 ‘1백 2십만󰡑 개신도인들의 결집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기독교계 지도급 인사들은 1956년 5월 실시될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정․부통령선거추진 기독교도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자유당 선거를 지원하고 나섰다. 자유당을 지지하는 친여 기독교계인사들로 조직된 기독교도중앙위원회에서는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남북통일과 도의건국을 완수하기 위하여 장로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이대통령이 지명한 진실한 보필자이며 양심적인 정치가 권사(집사) 이기붕 선생을 부통령으로!”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전국 기독교도들에게 발표하였다. 󰡒한국의 기독교의 진실과 양식으로 조국의 방향이 지어질려고 합니다. 정치가 작란이나 도박이나 요행이 아닌 이상 우리가 이박사가 자기의 정치의 동반자로 택하신 이기붕씨를 앞으로의 4년간의 부통령으로 선택하는 것은 극히 건전한 하나의 상식입니다. 조국과 겨레의 운명이 결정지어질 순간입니다. 상식 이하의 불작란으로 화재를 일으키지 마십시다. 우리나라의 정치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자유의 꽃이 피고 번영의 열매가 맺도록 이승만 장로와 이기붕 권사를 우리 한국 교회 백이십만 신도는 밀고 또 밀어주시기를 삼가 권고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1956년 선거 결과는 자유당의 ‘사실상 패배󰡑로 나타났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장로󰡑가 5백만여 표(55%)를 얻어 당선되기는 했지만 온갖 탄압을 받으며 도전했던 진보계열의 조봉암이 얻은 2백만 표(24%)를 얻었고 자유당 지지를 거부한 무효 1백 8십만 표(22%)의 의미도 컸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이 장면에게 2십만 표 차이로 패했다는 점이다. 국민은 ‘야당󰡑 부통령을 선택함으로 자유당 정권의 독주를 견제하였다. 그럼에도 교회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유당과의 연결된 청탁과 지지의 끈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더욱이 자유당 정권의 ‘막후 실세󰡑로 꼽히던 박마리아는 1954년 이후 감리교 총회 총대가 되어 총리원 이사 및 실행부 위원, 감리교신학대학 이사, 감리학원(국제대학교)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교회 정치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 관계로 종종 이사회가 박마리아의 사택에서 개최되었고 그 때마다 감리교 지도자들은 서대문 ‘국회의장댁󰡑에 초대받아 가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청탁성󰡑 민원이 전달되었는데 교회와 우호적 관계 유지를 원했던 자유당 정부로서도 교계 청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1959년 1월 민의원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기독교계의 대표적 언론이었던 <기독시보> 사장 강수악이 교계잡지 <기독교계>에 쓴 글은 당시 한국교회의 정치권력 결탁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기독교인 국회의원이 한 사람도 없고 정부 요직에 기독교인 한 사람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매일같이 일어나는 교계의 대소사·교인들의 대소사의 처리와 해결을 청탁하기 위하여 얼마나 막막한 것인가는 정치에 냉담을 가장하는 자다. 기독교교육협회 협동총무 엄요섭 목사가 시교육위원이 되니 제일 먼저 청탁을 가져 오고 또 혜택을 입는 곳이 기독교계 학교들이었다는 것은 최근의 실례다.” 물론 기독교인 중에 정일형 ․ 조병옥 ․ 윤보선 같은 ‘야당󰡑 정치인이 없지 않았으나 이들을 드러내놓고 지지하는 목사나 교인은 없었다. 반면에 교계 인사들의 자유당 지지는 공개적이었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자유당 정권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1960년 3월 15일 대선에서 또다시 연출되었다. 1960년 대선에서 자유당은 이승만-이기붕 카드를 또다시 내놓았다. 야당에서는 이번에도 천주교인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 명의로 기독교계 신문에 실린 광고 내용의 일부다. 󰡒부통령은 네 분이 나오셨읍니다마는 교회의 여론이 지지할 수 있는 분은 리기붕 한 분뿐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리기붕 선생은 그 성실한 인품이 어려서부터 교회 분위기와 교회 생활을 통하여 조성된 것이며 부인 박마리아 선생과 더불어 오늘도 교회와 기독교 교육사업을 위하여 한결같은 성심을 기우리는 교인이십니다. 더욱이 카도릭이 우리나라 정치 속에 침투할 가능성이 무르익어가는 이때에 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서는 신교의 신망과 기대를 리기붕 선생에게 걸어야 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선전이란 점에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당시 기독교계(개신교)의 보편적 여론을 대변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이들은 1) 그 동안 기독교계가 이기붕․박마리아 부부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2) 장면을 내세운 가톨릭계의 정치 세력 확산 의도를 방어하기 위해 이기붕 지지를 호소했다. ‘친여󰡑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1960년 대선에서 달라진 민심 때문에 1956년 선거 때만큼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승만 ‘장로 대통령’과 이기붕 ‘권사 부통령’ 후보 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런 식으로 한국교회는 독재와 부패의 오명을 쓰기 시작한 자유당 정권과 공동 운명체로 묶이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의 장기 독재와 부패와 타락에 염증을 느끼고 등을 돌린 민심을 읽는데 실패했다. 부패한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돌아선 민심은 새로운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교회는 다가올 민중의 심판을 읽지 못하고 ‘정치적 후원자󰡑로서 자유당의 집권 연장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각종 교계 행사에 자유당 인사들이 초청받았고 ‘돈을 싸들고’ 지방교회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는 ‘정치꾼 목사’들까지 등장했다. 그 때문에 양식 있는 학생 ․ 지식인들로부터 한국교회는 ‘자유당 주구󰡑란 비난을 받아야 했다. ‘3 ․ 15부정선거󰡑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청년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현장에, 그리고 백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끝에 이승만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남으로 4·19 학생혁명이 이루어진 순간에도 기독교계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놓치고 만 반성의 기회 4·19는 한국 교회에 회개를 촉구하는 하느님의 심판이었다. 썩은 정치와 함께 기생하며 살던 기독교인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예언자적인 삶을 살지 못한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징계였다. 4·19로 한국 기독교는 죽어야 했다. 철저하게 죽을 때 거기에 부활, 다시 삶이 있음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었어야 했다. 󰡒4․19를 겪고 난 우리 낡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만 부끄러움과 자책하는 마음에서 학생 제군들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학생들의 시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1960년 5월 초, 감리교신학대학 홍현설 학장이 기독교방송에 출연해서 토로한 것처럼 󰡒교회는 4․19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그것은 자유당 독재정권을 암묵적으로 지지했던 교회의 ‘죄책 고백󰡑이었다. 4·19 학생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 쓸쓸하게 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난 이승만 대통령, 자살로 마감한 이기붕 일가의 비참한 모습은 이들의 권력 연장과 유지를 적극 지지, 후원하였던 한국교회의 붕괴된 권위와 위상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4·19 직후 한국교회 지도자들은‘창피와 수치’를 느꼈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가 속했던 감리교회 교인들의 자괴감은 더욱 심했다. 감리교 평신도로서 당시 <기독교사상>을 편집하던 장병일의 ‘자아비판󰡑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날의 한국 교회는 참 의미에서의 교회가 아닌 가인의 종교였다. 자체의 부패와 모순과 과오는 잊어버린 채, 맥 빠진 교회의 의식과 행사만을 강요하여 왔으니 말이다. 그리고도 자파의 세력 형성과 교권쟁탈에 혈안이 되어 밤을 새우지 않았던가? 민주의 새 아침이 밝아오기까지, 민족의 분노가 터지고 형제의 피가 쏟아지던 그 날도 한국 교회는 발코니에 앉아 교권 쟁탈을 위한 모의에 분주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찌 가인의 종교가 아니라 하겠는가. 교회가 이 꼴이고야 그 나라의 정치가 아니 썩고 아니 망할 리 없다.…… 그러므로 리승만 정권의 부패는 벌써 한국 교회의 부패에서 온 것이다. 그들의 정권은 오늘의 ‘가인󰡑으로 실증되었으나, 한국 교회는 오래전부터 이미 ‘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아벨을 교회 밖에서 죽였고 교회는 아벨을 교회 안에서 죽였다.󰡓 독재 정권 하에서 ‘가인󰡑의 역할을 했던 한국 교회는 혁명 과정에서 희생된 160여 명 ‘아벨의 피󰡑에 책임을 져야 했다. 정릉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송흥국 목사는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 교회의 죄목을 밝혔다. 󰡒우리 교회가 과거에 저지른 과오는 무엇이었던가? 1) 교회는 정권과 손을 잡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용하기도 하며, 이용도 당하였다. 교회는 언제나 야당적 입장에서 예언자적 지위를 고수해야 한다. 2) 교회는 한 몸 된 의식을 잊어버리고 교회 내에서 파쟁으로 교회를 약화시켰으며 교회가 사회 정화와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 3) 교회는 속화되어 복음의 선전보다 교권의 장악을 위한 계획과 활동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는 무기력하게 되어, 불 꺼진 등잔, 맛 잃은 소금, 물 없는 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되고 있었다.󰡓 ‘교회 자성론󰡑은 ‘교단 정화론󰡑으로 연결되었고 자유당을 지지했던 교계 지도자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숙정(肅正)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5월 중순 감신 학생들이 총리원을 ‘항의 방문󰡑하여 󰡒3․15부정선거에 관련된 감리교 지도자들의 회개󰡓를 촉구한 것으로 필두로 평신도들도 6월 6일 남산교회에서 장로회 기도회를 개최하고 ‘교계 정화󰡑를 촉구하였는데 이때부터 ‘물러나야 할 목사󰡑 명단이 돌기 시작했다. 이 같은 교계 여론에 밀려 총리원 이사회는 마지못해 6월 30일 󰡒3․15 부정선거에 집권당에 가입 혹은 가담한 교역자를 적당히 처리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적당히’란 표현이 청년 학생 교인들을 흥분시켰다. 얼마 전까지 자유당 정권 유지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던 총리원 집행부의 이 같은 ‘미온적󰡑 자세에 대한 소장파 목회자들의 불만은 높아만 갔다. 결국 7월 22일 경기도 입석 캠프장에서 열린 전국기독교교육지도자 강습회에 참석했던 지방 목회자들은 ‘변명만 늘어놓는󰡑 총리원 간부들의 태도에 분노하여 󰡒집권당에 아부하여 교회의 권위를 손상케 한 교역자를 현직에서 사퇴케 할 것󰡓과 󰡒만일 이것을 단행할 수 없거든 감독과 각국 총무는 깨끗이 물러 갈 것󰡓을 골자로 한 <입석 목사단 7․26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신학생과 소장 목회자들의 총리원 항의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결국 김종필 감독을 비롯한 각국 총무들과 총리원 이사들이 사표를 냈고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특별 총회가 열렸다. 8월 30일 특별총회 총회장인 종교교회 입구에는 ‘3․15부정선거 관련자 퇴진󰡑을 요구하는 신학생과 소장파 목회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총회는 초반부터 ‘임원 개선󰡑 방향을 두고 논란을 빚었다. 처음에는 개혁론자들의 주장이 먹혀들어 󰡒규탄 대상자는 뽑지 말자󰡓는 여론이 우세했으나 점차 현실론자들의 반격에 밀려 󰡒신인을 많이 뽑자󰡓로 바뀌었고 마지막에는 󰡒가급적으로󰡓라는 단서까지 붙였다. 그만큼 기득권층의 저항은 완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을 포함한 총리원 임원들의 ‘신임 투표󰡑가 시작되었다. 김종필 감독은 재신임에 필요한 ‘3분의 2󰡑를 간신히 넘긴 65표로 감독직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나머지 전도국 총무(마경일)와 교육국 총무(김주병), 사회국 총무(한영선), 회계(장기수)의 사표는 모두 수리되고 그 자리에 윤창덕 ․ 전종옥 ․ 유증서 목사와 박이남 장로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총리원 이사 선출에 들어가 기존 28명 중에 3분의 2가 넘는 19명이 새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이 같은 임원 교체는 개혁을 바라는 감리교회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완의 혁명 4·19 4·19가 한국교회에 던진 메시지는 ‘회개와 반성’이었다. 한국교회는 그것 외에 다른 것으로 4·19를 대할 수 없다. 무엇을 반성하고 회개할 것인가? 무엇보다 해방 직후 교권 분쟁에 몰두하여 자기 정화 능력을 상실함으로 부패한 정권에 대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한 정권과 결탁하여 그 선전 도구가 되었던 과오를 회개해야 했다. 단지 같은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그 능력과 자질을 묻지 않고 정치인들을 맹목적으로 지지, 후원함으로 집단 이기주의의 대표적인 집단으로 전락하여 일반사회로부터 권위와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했다. 다윗 임금 앞에서 그의 잘못을 지적했던 나단과 같은 예언자적 용기를 상실하여 “나만 옳다.”는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배타적 독선(獨善)에서 비롯된 독단(獨斷)과 독주(獨走), 그리고 독재(獨裁)를 견제하지 못했던 실수를 반성해야 했다. 그런 반성과 회개 후에야 새롭게 전개될 역사에 창조적 참여가 가능했다. 당시 감리교단 총리원 전도국 총무로 있으면서도 자유당 정권에 맹목적 지지를 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눈치를 받았던 마경일 목사. 그는 4·19직후 사태책임을 느껴 제일 먼저 사표를 제출함으로 교단 쇄신운동의 불씨를 지폈는데 그가 교단지 <감리교생활>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당시 한국교회가 했어야 할 회개와 반성,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과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기독교인이라는 조건을 이용하여 그것을 배경삼아 높은 지위를 꿈꾸고 부당한 이권을 노렸던 것이다. 대통령의 이름을 걸머지고 긁어모은 모리, 그 그늘 밑에 숨어서 집어삼킨 이권, 그 끄나풀 붙들고 기어 올라가려던 엽관운동, 그 등살을 믿고 세도를 부리고 행세해 보려던 어중이떠중이들, 이런 것들이 모든 사회부정의 바탕을 만들어 놓았다. 아! 그 욕심, 그 허영, 그 출세욕 등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수많은 기독교인의 양심을 마비시켰다. 실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그러니까 입이 있어도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가 되고 눈이 있어도 볼 줄 모르는 소경이 되었다. 이렇듯이 자체가 병들고 부패하고 말았으니 어떻게 사회부정을 시정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맛 잃은 소금이었다. 불 꺼진 등불이었다. 수뢰, 독직, 부정을 감행하다가 4·19사태 이후 그 전모가 세상에 폭로됨으로 사직의 손에 걸려 심판을 받아야 할 원흉들 중에 우리는 여러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섞여 있음을 볼 때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 기회에 깊은 통회와 자성을 가져야 한다. 민족과 사회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걸음을 솔직하게 자인하고 이를 속죄하기 위하여 이제부터의 우리의 삶을 민족봉사의 길로 옮겨 놓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사는 길이요 나아갈 길이다.” 화개와 반성,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는 기독교 신앙 가치이자 역사 속의 책임이다. 특히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확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들의 반성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 8·15 직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4·19 직후에도 한국 사회와 교회는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미봉책으로 위기 상황을 피해가려고만 했다. 4·19 직후 1년 간 진행된 정치적, 사회적 혼란 상황을 빌미로 터진 군사혁명은 역사청산과 정리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군사혁명정부는 4·19 학살의 표면적 책임자들과 그들의 지시를 받고 시위대에 폭력을 행사했던‘정치 깡패’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것으로 정치 쇄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자유당 독재와 타락, 부패의 근본적 원인을 밝히고 척결하는 청산작업은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유당 시절 권세를 누렸던 세력들은 여전히 1960년대 공화당 정권, 1970년대 유신정권, 1980년대 군부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을 바꾸어가며 권력 핵심부에서 권세를 누렸다. 그 결과 4·19는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다. 상황은 기독교계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타락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었던 기독교계 안에서도 4·19 직후에는 청년학생과 소장파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정권에 대해 ‘예언자적 감시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자유당 정권에 유착하여 ‘자유당 주구’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적극 활동했던 목회자와 평신도들에 대한 숙정 요구가 제기되기는 했으나 그것도 잠시, “누가 누구를 정죄할 것인가?”하는 집단적 공범의식에 근거한 책임무용론이 확산되었다. 더욱이 실질적으로 책임자를 문책하고 교단 지휘부를 교체할 수 있는 ‘정치적 권한’이 없는 청년학생이나 소장파 목회자들의 제기한 정풍운동의 한계는 분명했다. 여기에 1년 후 군사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정치 환경이 조성되면서 4·19와 관련한 기독교계의 회개와 반성운동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렇다보니 자유당 정권과 유착 하여 정계와 교계를 넘나들며‘비신앙적’활약을 보였던 기독교계 인사들이 196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공화당과 유신정부, 군부독재 정권과 유착관계를 맺고 각종 이권과 교계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교계 지도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 오늘 ‘안티 기독교운동’의 촉발 원인의 하나가 된 한국교회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은 그렇게 해서 조성되었다. 그 때, 회개를 했으면 철저하게 했어야 했다. 반성을 해도 완전하게 했어야 했다. 하다가 만 치료가 병을 더 악화시키듯, 그 때 하다가 만 회개와 반성은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 권력지향적인 정교유착(政敎癒着)과 사회적 양심에 둔감한 도덕적 불감증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렇다보니 교회의 대(對) 사회적, 정치적 ‘예언자’기능이 약화된 것은 물론이고 교회 자체도 그 존재와 사역의 기본근거가 되어야 할 신앙의 자리를 떠나 물질적인 관심과 세속적인 방법으로 교회 일을 해결하고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급속한 물량적 성장을 이룩하여 거대한 몸집을 갖추기는 했으나 그 영적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에서는 50년 전의 그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한국교회는 시간적으로 21세기 글로벌시대를 살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자유당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4·19를 ‘미완의 혁명’으로 부르는 이유다. 끝나지 않은 혁명, 그것이 데모 현장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기독학생 이근형이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고 죽은 이유일 것이다. 맺음 글 혁명의 완성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책임이다.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 혁명은 ‘뒤집어엎는 운동 ’이자 ‘제 자리를 찾아가는 운동’이다. 비정상적인 것을 뒤집어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제자리를 떠나 있던 것을 끌어다 제자리로 돌려놓는 운동이다. 교실에 있어야 할 학생과 공장에 있어 할 노동자, 부대에 있어야 할 군인, 성전에서 있어야 할 목회자가 거리로 나온 것은 거꾸로 된 세상을 바로 잡아 놓기 위함이다. 뒤집어 바로 잡은 다음 그들은 떠나왔던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뒤집은 다음 되돌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또 다른 혁명의 대상이 된다. 오늘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 이런 ‘역혁명’(逆革命, counter-revolution)이 아닐까? 강단을 떠나 거리를 방황하는 목회자들, 기도실을 떠나 의사당을 기웃거리는 교계 지도자들, 선거철만 되면 교인표를 얻기 위해 종교집회만 찾아다니는 철새 정치인들....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이 뒤집혀 교정되어야만 4·19 희생자들이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입을 벌려 외쳤던 민주와 정의, 그리고 평화가 이 땅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교회 안에, 기독교계 안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야 하겠다. 지금부터 80년 전, 지금보다 훨씬 적은 숫자로도 일제식민통치 하 민족사회에 영적 권위와 지도력을 발휘했던 한국교회를 향하여 그것도 부족하다며 근본적인‘혁명’을 외쳤던 시대의 양심 최태용 선생의 절규처럼 말이다. “신학은 많고 신앙은 적고 기도회는 많고 기도는 적고 단체로서의 수는 많고 신앙의 개인은 적고 사람의 지혜로의 운동은 많고 하나님 자신의 권능의 일은 적다. 이 많은 일이 적게 되고 이 적은 일이 많게 되어야 세상은 바른 세상이니 그러면 세상이 그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지금 세상은 한번 뒤집혀야 한다. 아! 세상은 역시 한 혁명을 요한다.”
70인역(LXX) 성경은 어떤 책인가?/ 성경역사와 교회사/ 2013-03-18
70인역(LXX) 성경은 어떤 책인가? 칠십인역 성경(七十人譯-) [영] Septuagint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그리스어 역. 본국 팔레스티나를 떠나, 지중해 연안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의 수가 증가하고, 전통적인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많아 졌다. 그런데서, 그들을 위해서도 당시의 일반적인 언어였던 그리스어로 구약성서를 번역할 필요가 생겨져, 전 250-200년경, 에집트의 알레산드리아에서 완성되었다.이 최고(最古)의 번역 성서인 그리스어역이 70인의 학자의 손에 의해 된 것이라는 전통적인 기록에 의해서 보통 [칠십인역](Septuaginta-70을 의미하는 라틴어)이라 부르고, 그 약기호 LXX를 쓰고 있다. 이 번역 사업에 관한 기록 문서로서,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The letter of Aristeas](->)로 불리우는 위경이 있다. 이 칠십인역 성서는 일찍부터 그리스도 교회의 성서로 되어,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전거로 쓴 성서는 이것이었다(행 18;28 참조). 또한 바울의 편지를 비롯하여 신약성서에 인용되어 있는 구약의 말은, 거의 이 칠십인역에서의 것이다. 곳에 따라서는, 히브리어 원전과의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 칠십인역 성서의 사본은 최고의 것이 보존되어 있어서, 구약성서 본문의 비교 연구에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칠십인역 성서 - 七十人譯聖書 〔라〕Septuaginta,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그리스어 번역본(칠십인역성서).본국 팔레스타인을 떠나 지중해 연안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의 수가 늘어나고 전통적인 히브리어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그들을 위해 당시의 일반적 언어였던 그리스어로 구약성서를 번역할 필요가 생겨 기원전 250∼20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완성됐다. 헤브라이어(語)《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서. 원래는 헤브라이어 원전의 부분 번역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여기에 및 일반 복음서 등의 번역까지도 포함시켜 약기호(略記號)로 LXX라 불렀다. 72명의 학자가 번역에 참가했다는 전설에 따라 이 이름이 붙었으나, 대부분은 소수집단에 의해 번역되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이 이루어졌으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요구로 먼저 이 BC3세기 중엽에 번역되고 그 뒤 100년 사이에 현행 정전(正典)의 대부분이 번역되었다. 신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도 중요한 자료이며 《신약성서》의 문체·사상연구에도 가치가 크다. 이 최고의 번역 성서가 70인 학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기록에 의해 보통 「70인역」이라고 부른다(약호는 LXX).70인역 성서는 일찍부터 그리스도교회의 성서로 되어,「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전거로 쓴 성서는 이것이었다(행18:28 참조).이 성서의 사본은 가장 오래된 것이 보존되어 있어 구약성서 본문의 비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칠십인역성서(七十人譯聖書) 는 셈어계에 속하는 중앙 셈어의 하나인 헤브라이어로 쓰여진 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기독교의 성전. 오늘날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구약성서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본래는 헤브라이어 원전인 종교적·도덕적·사회적·생활에 관하여 신이 인간에게 지키도록 내린 규범인 의 부분적인 번역을 일컫는 것이었지만 초창기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여기에 구약성서에 실려 있는 전예언서인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 등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의 사대예언자와 호세아, 요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의 12소 예언자의 서를 일컫는 후예언서의 총칭으로 일반적으로는 후예언서를 말하는 및 일반 복음서 등의 번역서까지도 넣어서 약기호로 LXX라고도 불리었다. 72명의 학자들에 의하여 번역되었다는 전설에 따라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으나 대부분은 소수집단에 의해서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작업이 이루어졌으며, 바빌론유수를 계기로 하여 팔레스티나를 떠나 온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을 일컫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요구에 의해서 먼저 이 BC 3세기 중엽에 번역이 이루어졌고 이후 100년에 걸쳐서 지금의 정전의 대부분이 번역되었다. 신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로 되고 있으며 에 대한 문체나 사상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큰 가치가 있다. 70인역의 완성으로 구약성서가 한권으로- 칠십인역\' 성경은 바벨론 포로 이후 이방인의 땅에 사는 디아스포라인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을 위해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구약성경)을 당시 세계 공통어인 헬라어(코이네)로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프톨레마이오스2세(재위 주전 285-246년)의 명에 의해 예루살렘의 학자 72명(또는 70명)이 당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한 것이다. 바울도 \'칠십인역\'에서 인용하곤 하였다. 네스틀레 - Eberhard Nestle 1851∼1913,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신약성서 문헌학자. 울름대학과 마울브론신학교 교수를 거쳐 1912년 마울브론신학교 학장을 역임하였다. 동방 여러 언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70인역(七十人譯, Septuaginta)을 연구하고, 다음으로 《신약성서》의 원전연구를 시작하여 1888년 오늘날 가장 권위있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간행하였으며 라틴어 성서 및 루터의 독일어역 성서도 편집하였다.
90년대 한국사회에서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전망 2002-02-02 10:24:29 read : 1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남섭 교수 (한일신대) 1. 문제제기와 연구 주제 1.1.1. 문제제기 - [경제기적] 뒤에 오는 [경제정의론]의 의미 [경제정의]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현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경제기적'도 이루었고, 올림픽도 치렀고, '중산층'도 많아졌고, GNP도 높아졌고,
90년대 한국사회에서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전망 2002-02-02 10:24:29 read : 1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남섭 교수 (한일신대) 1. 문제제기와 연구 주제 1.1.1. 문제제기 - [경제기적] 뒤에 오는 [경제정의론]의 의미 [경제정의]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현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경제기적'도 이루었고, 올림픽도 치렀고, '중산층'도 많아졌고, GNP도 높아졌고, 자가용도 많아졌는데, '경제정의'를 내세운 한 시민운동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시민사회로부터 그렇게 많은 호응을 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소박한 의혹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기적'뒤에 몰려오는 이 황당한 '경제정의'의 요구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황당한 현상은 당연히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하나는 경제성장으로 상징되는 '경제기적'이 곧 경제정의는 아니라는 문제이다. 경제의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는 왜 우리사회가 정의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고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장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또 다른 문제는 왜 지금 '경제정의'가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그 실현 가능성은 사실상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불가사이한' 현실의 존재가 바로 오늘 우리가 '경제정의'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하는 출발점이 된다. 사실 교회는 지난 몇 년 사이에 경제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명해 왔다. 이것은 한국교회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교회의 공통된 관심사로 나타났으며, 자본주의 사회뿐만이 아니라 구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일어나는 전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동구의 몰락]이후 자본주의가 인간의 발전과 경제정의 실현의 가장 효율적인 체제라면 이제 그것을 가만히 따르기만 하면 되는데 왜 [경제]가 심각한 주제가 되고 [경제정의]가 계속 요구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소위 변화된 오늘의 세계에서 논의되는 [경제정의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검토할 필요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1.1.2. 연구주제와 방법 그리고 한계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우리는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90년대 한국사회에서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전망이 무엇인지를 논의 하는데 이 연구의 기본 목적이 있다. 우리의 연구과제는 어떤 새로운 신학적 경제정의론을 제시하는데 있지 않고 현 우리사회의 경제현실에서 지배적으로 논의되는 경제정의론의 타당성을 거시 이론적 차원에서 검토하는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 우리사회의 지배적 경제질서를 [신 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 규정하고 먼저 이 정책의 출현 배경과 특징을 정리 분석한 다음 이 정책이 표명하는 [경제정의론]의 의미를 규명할 것이다. 그 다음 이 정책의 국내적 조명을 김영삼 민간 정부의 [신경제 5개년 계획]과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을 중심으로 전개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미시적 접근 방법보다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제정의론의 논의를 전체적 의미에서 평가하는 거시적방법을 취할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의 연구목표는 처방이 아니라 진단에 있다. 왜냐하면 골비쳐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대안의 모색은 올바른 진단 뒤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서 논의되는 경제정의론]의 이데올로기성 규명에 분석의 초점을 둘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다분히 이론적 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 점이 이 연구의 한계가 될 것이다. 이 연구는 토론을 위한 시론적 성격의 것으로 완결된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서 논의 되는 경제정의론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가능하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 뿐만아니라 성서적, 신학적 근거에서 볼때도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다. 나머지도 이에 대한 설명을 하나씩 하는것으로 2. 이론적 방법론적 전제들 : 왜 신학은 경제를 문제삼는가 신학이 경제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한 가지 비유를 들면서 이 문제를 접근하려고 한다. "경제문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교회는 '앰뷸런스적'인 일을 많이 해왔다. 그러나 이 일은 언제나 필요하나 그것은 제한되어 있다. 그것은 재해는 다루나 그것의 원인과 예방은 다루지 않는다. '앰뷰런스적'인 행동은 주로 아마츄어적인 이해에 의존한다. '앱뷸런스식'의 차원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이슈를 아주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전문가 없이 할 수 없는 일이 많다. 그러나 전문가가 다룰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주제에 포함된 이슈는 (경제문제) 전문가에게만 맡기기에는 사안이 너무나 중요하다." 이 비유는 오늘 신학이 경제문제를 다루어야 함을 상식적 차원에서 잘 설명해 준다. 이제 좀더 깊이 있는 이론적 근거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성서적 근거와 신학적 근거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의의 개념정의, 여기서 우리는 제3세계,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적 입장을 참고할 것이다. 2.1.1. 성서적 근거들 경제 문제에 대하여 성서가 이야기하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모두 요약 할 수 없다.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의 책으로서 성서는 경제적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신뢰하고 자연을 보존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책임성을 다루는 창조주 하나님을 다룬다. 하나님의 중심 주제로서 정의에 대하여 논의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의를 빵과 기구들로 바꾸어 놓았는지를 보여준다. 성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개입주의자(intervencionista)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의지와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죄로 가득한 구조를 정당화 하지 않도록, 불평등을 허용하지 않도록, 그리고 노예를 증가하지 않도록, 타자의 희생 위에 부를 축적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가난한 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기구를 창조하도록 요구한다. 예수 자신은 그의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구약에서의 해방의 예언자적 메시지를 가득 채웠다. 이것을 그는 나사렛의 선언에서, 가난한 자와의 연대 속에서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성서적 전망이 우리가 경제적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는 것을 불가능 하게 한다. 그 자신의 고유한 법과 절대적 원칙을 선호하는 오늘의 세계경제는 우상숭배에 대한 성서적 비판을 받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과 맘몬사이의 선택이 함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 할 필요가 있다. 너는 하나님과 맘몬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눅 16:13). 우리는 정의롭고 존속될 수 있는 대안적 경제체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미 만들어진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새로운 꿈과 우리의 탐구를 위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행동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서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세계는 무에서 창조되었다. 여자는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준다. 5개의 빵조각으로 5천명을 먹인 기적이야기, 죽음에서 살아난 예수의 이야기, 이 모든 것은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그리스도는 새땅과 새하늘을 약속하시는 분( 계시록 21:5 )임을 가리킨다. 2.1.2. 신학적 근거들 어떤 사람들은 신학은 경제를 분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경제에 대한 윤리적 성찰의 역사는 오래 전부터 있으나 신학적 성찰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위대한 신학자들은(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경제와 정치는 결코 교회의 영역이 아니라고 진술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들 신학자들은 신앙과 사회, 정치적 실천을 연결 시켰으나 언제나 간접적으로 하였다. 예를 들면, 루터와 칼빈은 경제와 정치를 세상적 영역의 부분으로 고려하였지, 영적 영역의 부분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는 칼빈과 개혁교회의 전통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신앙 그 자체는 경제생활의 원칙이다. 정치와 경제 또한 "영적 영역"의 부문이다. 경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개혁교회의 기여가 본질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우리는 개혁교회의 신학적 유산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개혁교회의 신학적 유산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영역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요구하는 오늘 우리의 세계질서와는 대립된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교회의 세 가지 신학적 전제에 대한 빠른 이해를 요구받는다. - sola scriptura(오직 성서로)는 (우리는) 삶의 모든 부문에 있어서 오직 성서가 우리를 인도함을 가르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현재 세계 경제에서 우리는 율법, 예언자 그리고 복음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와는 독립되어 살도록 요구하는 사회와 직면하고 있다. 불의한 경제실천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과 착취당한 자의 편에 선 하나님의 개입은 분명하게 십계명과 예언자의 가르침, 그리고 그리스도의 관심에 표현되어 있다. Sola gratia (오직 은총으로)는 이해타산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한 선물로 선포된다. 그러나 근대세계 경제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을 노예화하도록 위협하는 파렴치한 힘과 직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구원과 삶은 신앙의 체험(sola fide)이라는 진리를 확고하게 고수하여야 한다. 그러나 근대세계경제에서 우리는 역사의 종말이 도래하였다는 주장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요구는 해방을 위한 가난한 자의 희망을 죽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세속화한다. 개혁교회의 신학에 따르면 인간구조의 영원성, 역사적 순간을 적대화하려는 욕망은 진정한 이단이며 신앙의 적이다. 이점을 16세기의 사회경제적 관계의 변화에 신학적으로 적용하였다는 점이 교회에 대한 칼빈의 최대의 선물이었다. 그는 다른 개혁자들이 하지 않은 방법으로 태어나고 있던 자본주의 질서와 쉽지 않은 평화를 이루었다. 여기서 이것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교리는 예정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론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에 칼빈은 봉건주의의 구질서를 방어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으며 또 그 질서가 지나가는 것을 슬퍼할 이유가 있음을 느끼지 않았다. 또 하나님이 모든 새질서에 대한 주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칼빈은 그 안에서 기독교의 소명을 발휘하는 정당한 가능성과 적극적 가치를 보았다. 이리하여 경제적 삶과 사상에 대한 칼빈신학의 최대의 기여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경제체제는 하늘아래 없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는 데 있다. 2.1.3. 경제학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경제활동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행동규범에 대하여 끊임없이 관심을 표명해 왔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회의 사회적 교리는 경제적 무질서를 문제삼았다. 가령 1891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Rerum Novarum (새로운 사태)", "개신교 종교 사회주의(쿠터, 라카츠, 바르트)", 불가코프(Bulgakov)와 베르자에프(Berdiaev)와 같은 러시아의 망명 신학자들,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책임사회 윤리", 1961년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Matar et Magistral", "Facem in Terris (땅의 평화 1963)", 1967년의 교황 파울로 6세의 회칙 "Populorum Progressio"등 이 모든 것은 경제적 현실의 문제에 대한 교회와 신학의 우려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경제활동에 대하여 영향을 주려는 교회와 신학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가르침이 사실상 경제학자, 경영자, 기업가, 다국적 기업에 의하여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있다. 교회와 신학이 현대 경제체제의 지배적 방향을 비판하고 [공공선]의 중요성과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부의 생산과 분배]를 호소하나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만약 어떤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며 불의한 경제구조는 평상시처럼 계속된다. 여기서 더 심각한 문제는 경제활동에 있어서 주요한 위치에 있는 평신도 - 경제학자, 기업가, 경영가 -들이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전혀 반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에 정반대 되는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에 있다. 교회는 경제적 문제에 대하여 개입할 수 없으며, 교회는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제는 도덕 또는 윤리적 원칙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경제는 가치 중립적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경제적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효율성이며, 이것은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내는 데 있다. 한마디로 교회와 이들 경제적 활동의 책임자들 사이의 대화는 "귀머거리 사이의 대화"의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와 경제계사이의 이러한 관계의 부재는 민중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경제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주지 못하며 이점이 오늘 신학과 경제에 대한 새로운 관계의 정립이 요구되는 배경이 된다. 경제학자들과 기업가들이 신학을 거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학자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경제를 관리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면 [공공선]에 대하여 말하는데) 경제학자들과 기업가들은 이러한 신학적 주장들을 당위적인 것에 대한 것이지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지적해야 할 사실은 이들 경제계의 주체(은행가, 사업가, 상인)들의 입장에서 나타나는 허위의식이다. 이들은 경제적 삶과 윤리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윤리는 인간 삶이 보다 인간적이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윤리는 삶의 재생산을 위해 염려하는 데 이것은 경제적 행위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이것은 윤리에게 있어서 중립적 지역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삶의 물질적 조건에서 출발하여, 경제가 삶의 재생산을 돕든지 또는 돕지 않든지를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며 가치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이해관계를 숨기려는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이 된다. 이와 반대로, 프리드만(M, Freedmann)과 시카고 학파의 입장을 따르는 경제학자들은 경제를 도덕 밖의 것으로 설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본성이 다루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신학이 경제학을 비판하게 되는 고유한 경제적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신학자들과 교회를 세계의 현실 밖으로 놓으려는 도덕주의적 관점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를 세계의 현실 밖으로 격리하려는 대표적인 경제학이 바로 고전적 또는 신고전주의 경제이며, 맑스주의 경제학자들 가운데서는 스탈린의 경제적 저술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경제를 과학이라고 규정하고 신학을 미신이라고 간주, 세계 밖으로 추방하려 하는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모두 분석할 수 없다. 단지 고전적 경제학자들에 제한하여, 그들의 비합리적 허위의식을 지적하려 한다. Julio de Santa Ana 가 정확하게 보았듯이 이들의 중요저작들에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경제적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대표적 표현이다. 그는 모순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시장을 조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서 그는 시장은 동일한 사회적 힘이 만나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신적 개념을 마술적으로 (신학적으로) 도입하면서 모순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현실을 숨기려 하였다. 이외에도 고전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종교적 언어의 예들은 많이 있다. "기적", "희생", "구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희생"의 개념은 종교적 실천에 그 기원이 있다. 오늘날 이 희생의 언어는 끊임없이 반복되나 "대중 계층의 희생"만을 가르치지 풍요 속에 사는 이들의 희생은 요구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시카고 학파와 밀턴 프리드만의 사상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즉 "높은 사회적 희생" 없이 경제 성장은 불가능하다. "구원"의 개념은 외채 - 제3세계의 외채 - 에 대해서 말할 때 많이 사용되는데, 여기서 외채는 민중의 희생으로 또는 외채의 "구제"로 해결된다. 외채의 "구제"와 같은 말들은 겨우 형이상학적인 것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은, 경제이론은 근본적 입장을 표현하기 위하여, 종교와 신학에 고유한 단어들을 사용하며, 이러한 상징의 사용도, 무의식적으로, 경제이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숨기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고전적 정치경제학을 가리켜 종교이론이라 규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모든 경제 이론은 하나의 함축적 신학을 포괄하고 있으며 정반대로 모든 신학적 성찰은 또한 그 속에 함축적 경제학을 지니고 있다"는 Julio Santa Ana의 진술은 정당하다고 본다. 이것은 또 우리의 경제정의에 대한 논의가 경제 현실과 유리된 도덕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현실 그 자체에서 출발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2.1.4.경제정의의 주요 원칙들 이제 우리가 이 연구에서 전제하는 '경제정의' 의 주요 원칙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개념 정의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성서적 ,신학적 논의를 그 주요내용으로 한다. 첫째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공동체- 경제정의는 생산과 분배가 중요하게 고려되나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이며, 노동자의 세계이며 인간 노동의 가치이다. 생산성과 성장은 신학적으로나 성서적으로 볼 때 사회경제적 질서를 위한 마지막 기준으로 받아들 일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 정의로운 경제 체제로의 가능한 전환은 오직 [하나님의 왕국]의 담지자인 가난한 자들의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의 삶이 사회경제적 질서를 위한 최후의 기준이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수의 논리 (la logia de las mayorias)가 기준이 되는 생산의 새로운 사회관계가 형성되는 사회를 전제한다. 경제 정의는 불의한 경제체제의 변혁을 위해 저항하고 실천하는 착취당하는 이들과의 연대를 요구한다. 3.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있어서 경제정의 "변화된 세계", "새로운 세계질서","경제 제일주의로의 세계질서의 재편"이 오늘의 세계를 묘사하는 대표적 용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표현-수식어-뒤에 놓여 있는 공통적인 현실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세계적 재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정의}와 관련하여 검토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이러한 [세계질서]가 태동하게된 배경을 이해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며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동구권 이후]갑자기 닥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이라는 점을 분석할 것이다. 3.1.1. 현 국제 경제질서의 재편의 배경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국내 경제학자들은 최근의 세계 경제 질서의 위기와 재편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3자위원회의 전략(Comision Trilateral) 대한 평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세계자본주의 주도국의 자체 분석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1960년대 말에 시작한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적 위기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국제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프로젝트의 실현을 보장하는 새로운 전략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이 당시 논의된 기본적인 적은 이제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제 3세계와 제4세계의 빈곤이었다. 가난한 나라들은 갈수록 집요하게 [새로운 국제질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것은 부의 균등한 재분배, 원자재의 가격과 공산품 사이의 균등한 상호교환, 일련의 기술이전,유리한 환율등을 함축하였다. 부유한 북의 나라들에 대한 가난한 남의 나라들로 결집된 새로운 적의 도전과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구조적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1973년에 록펠러, 키신저, 브렌진스키의 지도아래 3자 위원회(Comision Trilateral)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세나라, 미국,서유럽,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가,은행가,다국적 기업의 최고 경영인,정치가,학자 들로 구성되었다. 3자위원회의 이름은 바로 이 세나라가 연합 한데서 나왔다. 이 3자위원회에서 논의된 중요한 결론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전지구적이라면, 해결책 또한 전지구적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사회주의와 같은 다른 체제로의 전환 또는 남쪽의 가난한 나라들이 요구하는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의 수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혁신이 아니라 갱신이다.(세계적 차원에서 직면하고 있는 체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조정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새로운 국제체제]의 출현이 아니라 [갱신된 국제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이리하여 3자위원회는 자본주의 위기의 극복을 위한 기본적인 전략을 다음과 같이 작성하였다. 첫째, 경제적 차원에서 다국적 기업을 통하여 자본의 국제화를 강화하는 것,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소속된 모든 나라들의 체제의 지구적 해결에 가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족 경제의 자율성에 대한 희구와 독자정치의 수립은 이러한 협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방해물로 간주되어야 한다. 둘째, 재정적 차원에서 기존하는 국제금융기구들(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등)의 기능을 다국적 은행을 통해 강화한다. 세째, 과학-기술적 차원에서,고전적이고 더러운(환경오염)산업기술을 남의 주변부 나라들로 이전하고 중심부 나라들엔 보다 역동적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기술 산업의 주요 부분을 보존한다. 여기서 환경산업은 3자위원회를 위하여 아주 중요한 산업으로 고려된다. 네째, 정치적 차원에서,세계자본주의의 위기의 해결은 이 체제를 구성하는 모든 나라들에게 그 혜택이 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능한] 나라들과 [가능하지 않은]나라들 사이의 선택이 제기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능한 나라들은 브라질, 베네쥬엘라, 멕시코 등 소수의 중진국들이 3자위원회 나라들과 강력하게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나라들로 선택된 나라들은 3자위원회에서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가치들의 회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즉 "상대적 민주화" 또는 "보호된 민주화"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 말은 제3세계 정치가 또는 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3자위원회에 의해 만들어 졌다. (간혹 이 용어는 보다 사회적인 언어로 "기독교 민주당",또는 "사회 민주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 이들 나라에 있어서 임금의 상대적 회복을 장려하여 중간층의 구매력을 증가시키고 이를 통해 내수시장의 소비망을 확대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3자위원회의 외부시장(국제시장)에 활력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가 수출하기를 원함으로 인하여 3자위원회의 시장은 포화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서구 자유 민주주의]의 이미지를 더럽힌 '국가안보국가'의 야만적 행위를 청소하기 위하여 인권의 옹호와 고무를 진작하는 정책을 취한다. 이상이 3자위원회가 오랜 시간의 협의와 연구끝에 수렴한 체제 위기의 장기적 극복 전략의 전체적 대안이었다. 따라서 이 기본 전략의 실제적 적용은 3자위원회와의 긴밀한 협력의 방식을 통하여(G7회담)실시되며 이 과정에서 개별 나라들의 특수한 결정은 전체적 전략을 준수한다는 조건아래에서 허용되어 졌다. 이 장기전략의 1단계는 카터의 인권정책으로 나타났고 2단계는 레이건 - 부쉬 - 대처 - 콜-나까소네 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과감한 실시로 나타났다. 지난 80년대 동안 실시된 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는 대부분 실패로 평가되고 있으나 예상하지 않았던 동구권의 붕괴로 인해 이 정책의 전환 내지 포기는 아직 미결정의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시장경제체제의 우수성을 선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남아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 오늘 "변화된 세계" 또는 "새로운 국제질서"라는 요란한 소리로 떠들썩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태동하게 된 배경이다. 3.1.2.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특징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태동배경에서 지적하였듯이, 이 경제질서는 제3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정의로운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의 요구에 대항하기 위하여 구상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전략적 경제 정책의 한 단계이다. 기본적으로 불의한 기존의 경제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갱신된"경제정책의 하나이다. 이제 갱신된 이 경제질서의 특징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 질서가 제시하는 경제정의론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분석해 보자.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주요한 특징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시장경제의 세계화'(또는 지구화, 국제화)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의 사유화' 또는 '민영화'가 그것이다.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1.2.1.1.. 시장경제의 세계화 시장경제의 세계화는 이미 10년 전부터 추진되어 왔으나 이것이 국제적 여론의 파고를 타기 시작한 것은 "동구의 몰락" 이후이다. '동구의 붕괴'는 시장경제체제의 환상을 더욱 부풀렸다. 그러나 매스컴을 통한 국제화 논의는 국제화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심지어는 허황된 의식까지 유포하고 있음을 지적되어야 한다. 세계화는 두 가지 모순된 현상을 동반한다. 한편으로는 범지구화 현상이 진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배타적인 지역 경제블록화 현상이 오히려 강화된다. 이 상반되게 보이는 현상은 사실은 단일한 논리에서 기인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글로발리즘(Globalismo)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주도해 왔던 미국이 1950년대 중반 이후 경제적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체제의 수립으로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3자 위원회(Comision Trilateral)에 의해 재편되어 졌다. 글로벌리즘은 제한 없는 자유무역을 통하여 세계경제질서를 발전시키자는 강자의 논리이다. 그것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의 확장적, 공세적 이데올로기로서 불균등한 세계경제의 갈등구조를 극복 내지 해소하기 보다는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시장질서의 회복은 흔히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른바 왈라스-파레토(Walras-Pareto)의 일반균형론(teoriade equibrio)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에서 그러한 가정이 나온다. 더구나 국가 주도의 전형적인 발전모델로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장은 그 안에 인간이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제로이며 결코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물론 1930년대 이후의 국가개입(뉴딜 정책)이 스태그플레이션이 라는 새로운 형태의 모순을 낳은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전후에 복지국가가 이룬 모든 개혁적 성과를 부정하고 시장으로 돌아가자는 신자유주의의 시장경제만능론은 현실을 무시한 지나친 비약이다. 다른 한편 경제의 세계화는 시장의 '개방화'로 나타난다. '개방'을 하지 않으면 세계경제에서 낙후되는 것으로 평가된다.이 이론에서는 선진국의 보호주의 정책(슈퍼301조와 같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며 한국보다 500년이나 앞서서 세계경제에 개방한 라틴아메리카 경제의 낙후성에 대한 설명이 없다. 지난 500년 진행된 개방의 실패경험은 역사의 박물관속에 갇혀 버린다. 개방화 속에서도 선진국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보호주의의 장벽에 대해서는 쌍무협정의 조항으로 슬그머니 처리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계화 또는 개방화의 선택적 적용이 일어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3.1.2.1.2. 경제의 사유화(Privatization) 또는 민영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두번째 특징은 공기업의 사유화 또는 민영화이다. '국가개입의 최소화','작은 정부론','정부규제의 완화','민간의 활력','행정의 간소화'등 경제의 사유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용어들이다. 이 정책의 핵심은 국가의 경제개입을 견제 또는 국가기능의 역할(경제에 있어서)을 최소화하는데 있다.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n)은 케인즈의 개입주의 국가론이 자본주의의 모든 위기의 원인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이것은 경제의 사유화를 추진하는 기본이론이 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선진제국에서 보여지는 경제위기의 주된 원인은 복지국가체제의 실패에 있다. 케인즈 주의에 입각한 복지정책은 본질적으로 인플레와 노동의욕의 상실로 인한 경기침체로 말미암아 국가재정이 파탄에 직면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재정의 건전화를 기하기 위해서 공적부문-복지부문-의 지원을 줄이는 '작은 정부'를 지향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고용과 복지를 창출하는데 드는 불요불급한 지출을 줄이고 공익에 대한 기업의 부담을 덜어 줌으로써 경쟁력 강화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것은 고용과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을 통한 케인즈주의적 유효수요관리 정책으로부터 유연생산적 공급 지향적 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개입국가적 조치와 함께 꾸준히 늘어난 국가 지출 및 공급지향경제를 지원키 위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막대한 투자는 국가채무규모의 엄청난 증대를 가져 왔으며 이러한 부담은 민영화와 탈규제조치에 의해서만 해결될 것으로 전제한다. 이리하여 이제껏 공익과 고용안정,사회복지의 상징이던 공기업이 어느새 낭비와 비효율의 상징으로 급변하면서 대대적인 민영화의 수난을 겪게 되는 것이다. 민영화 조치는 각종 규제완화,사회복지 삭감,긴축재정과 함께 국제화시대의 각국 정부들이 가장 애호하는 경쟁력 강화전략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할 사실은 경제의 민영화보다는 복지국가가 먼저 선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구의 이 복지국가는 동구의 사회주의 복지국가와의 경쟁 상태에서 형성,전개되었다는 점이며 결과는 체제자체의 위기를 불러온 엄청난 부담이었으며 결국 이 정책의 상호 포기로 귀결되었다.단지 차이는 사회주의적 국가개입을 채택하였던 자본주의 복지국가(케인즈식)정책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가지고 원래의 자본주의 노선으로 복귀하였다면 동구의 현 사회주의 국가들은 기존의 강력한 국가주도의 복지국가사회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적'시장경제정책'을 채택하였다는 데 있다. 이것 은 궤도,노선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지 체제의 붕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뉴딜정책을 시행하였을때 아무도 미국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라고 평가하지 않았듯 유신체제의 긴급조치 8.3을 시행하였을때 아무도 한국자본주의 체제의 ꝷ괴라고 평가하지 않았다. 3.1.2.1.3. 지배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형성배경에서 언급하였지만,'국제화'현상은 세계 각 지역간의 상호의존적 관계의 자유로운 발전의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지난 수십 년간 심화되어온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팽창,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 통신위성,정보의 전달 및 수송체계의 비상한 발달로 인하여 세계적 통상의 기회와 규모와 속도가 엄청나게 증가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회라고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국제화'는 현대사의 오랜 질곡인 제국주의적 지배와 종속관계가 더욱 악화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단적으로 지금 자본과 기술과 상품의 자유로운 교류는 가능하지만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불가능하다는데 이미 드러나 있다. 무너진 동구의 장벽은 이제 제1세계와 제3세계사이의 국경선으로 옮겨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 구체적 작업은 유럽에서의 이민법제정과 미국의 나프타 체결(NAFTA)의도에서 나타난다. 서구의 지역별 경제블록화 이면에는 제3세계 노동의 제1세계로의 이동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다국적 기업은 싸고 자원이용이 용이한 세계 어느 지역이건 옮겨 다닐 자유를 누리지만 세계의 기층민중에게는 자신의 일자리를 선택하여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사실상 제한되어 있다. 자유는 자본의 것이지 민중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라은 자만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학자 김종철이 "국제화 논의는 성장과 경제개발 및 자유무역의 논리를 전세계적으로 확대하려는 다국적 기업들과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에 직접 간접으로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라고 단언한 것은 타당성이 있다. 3.1.3.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과 경제정의론 지금까지 서구신학은 서구자본주의 자체를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본질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사회학자들이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을 기독교윤리와의 관계에서 해석해 보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교회 내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를 동일시한 신학은 없었다. 오히려 기독교와 자본주의 가치 사이의 긴장관계를 보여주는 신학적 진술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낙관적 신뢰는 "숨은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처음으로 서구신학은 자본주의를 두려움 없이 기독교의 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체제로서 정당화하였으며 이것은 신보수주의 신학(Neoconservadurismo ; 이하 NC로 약칭) 또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오랫동안 적대 관계에 있었던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더 가관인 것은 고전경제학이 도덕신학과의 결합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경제학이 신학임을 공식적으로 시인하는 행위이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재편은 단순히 새로운 경제정책의 부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보장하고 촉진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과정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수립자들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모순 - 윤리적 위기 - 을 단순히 정책의 변화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에서 출현한 것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 또는 NC이다. 이 NC는 유럽에서 출현하였으나 북미에서 훨씬 대중적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미국의 유명대학의 사회학자, 경제학자, 정치학자 등으로 구성되어 지며(Think Toank) 이것은 제도적으로 "종교와 민주주의를 위한 연구소(Institution on Religion and Democracy)"산하에 결집되어졌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학자로는 카톨릭사제출신의 미첼 노박(Michael Novak), 개신교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톤(Samuel Huntington), 루터교의 노이하우스(J. R. Neuhaus)와 글라사르(N.. Glasar) 그리고 크리스톨(I. Kristol)을 지적할 수 있다. 이기구의 최대의 과제의 하나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데 있으며 여기에서 경제학은 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제 신자유주의 경제신학의 신학적 전제를 경제정의론에 제한하여 정리해 보려고 한다. 3.1.3.1.1.시장경제가 생산하는 상품으로서 경제정의 (개인연금시대 - 개인연금을 위한 경제정의) 신자유주의 경제신학의 근본적 목표는 "민주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가장 인간적이고 합리적이고 정당한 체계로 제시하는 데 있다. 이들 NC이론에 의하면,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민주적 자본주의"경제제도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경제체계"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정치경제제도보다 인간의 사회적 문제해결책으로서 더욱 능률적이며, 보다 현실적이다. 이들은 인간의 자유로운 창의성과 자유를 확보하면서 인간 공동체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건인 재화의 생산분재(경제정의)문제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회경제체제보다 훨씬 합리적인 사회제도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역사의 내적 구조는 이것을 입증한다. 겨우 200년도 채 안되는 자본주의 지배동안에 부르주아는 그이전의 세대들이 이룬 것보다 훨씬 막강한 생산력을 창조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러한 생산기술의 끊임없는 혁명과 동시에 억압적 관계를 해소하는 사회적 관계의 다른 혁명"을 보았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신학(노박과 피터 버그)은 거의 배타적으로 자본주의의 장점만을 찬양하였다. NC의 경제신학에 따르면,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에 있는 덕목은 효율성과 성장 그리고 인간의 창조성과 기업정신이다. 창조적 환상없이 이윤도 효과적 성장도 없다. 창조적 상상력과 함께 기업의 팀웍이 있으며, 기업적 관리를 견디는 합리적, 인간적 조정이 있다. 시장경제의 이러한 덕목은 자유와 정의(경제)에 유리한 조건들을 창조하도록 이끈다. 이것은 사회적 다원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그와 함께 자유와 연대의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자본주의의 덕의 극치는 분배능력에서 나타난다. 시장경제도 다른 어떤 체제보다 나은 분배를 실현한다. 당연히 국가의 계획경제보다 나으며 심지어는 복지국가의 빈곤에 대항한 투쟁의 방법들보다 낫다. 이점을 버거는 입증할 수 있는 경험적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소위 쿤츠(Kunts)의 곡선에 의하면, "만약 경제성장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부와 이익의 불평등은 처음에는 심해지나 그후에는 빠른 시간안에 감소되며 그후에는 상대적으로 안정한 위치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쿤츠의 테제를 입증해 주는 구체적인 예로 아시아의 자본주의(NICS)경험을 제시한다. 요약하면, 자본주의는 모두의 운명을 개선한다. 부자와 가난한자 둘 다 동등하게 자본주의로 인해 더 많은 것을 확보한다.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혁명은 지금까지 존재하는 그 어떤 체제보다 정치경제적 과정에서 보다 해방적이다. 빈곤과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보장하며 자유와 경제정의의 생산을 보장한다. 그리고 자유와 경제정의의 생산은 시장경제가 확대될수록 더욱 증가한다. 말하자면 시장경제가 생산하는 상품으로서 '경제정의' 인 셈이다. 2) 자본주의체제의 도덕적 위기 극복책으로서 경제신학 앞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객관적 분석보다도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훨씬 많이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적 투쟁이란 보다 폭넓은 프로그램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NC의 민주적 자본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전통의 재건을 위한 신보수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반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랫동안 적대관계에 있었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동맹을 맺게 된 위기의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 자본주의는 깊은 사회-문화적 위기 앞에 직면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이 진단은 정치적, 문화적 세계뿐만 아니라 종교적 세계에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근대성 자체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나타난다. 이들에 의하면 근대사회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 모순에 있다. 근대자유의 두 가지 역동성 사이의 충돌, 즉 경제적 역동성과 문화적 역동성이 충돌할 상황에 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근대 경제학은 갈수록 많이 생산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의무를 추진한다.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조건의 추구가 근대경제학의 주요관심사였다. 이를 위해 적합한 계획, 효과적 관리와 높은 이윤을 끈덕지게 추구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잘 훈련된 대담한 기업적 인간이 요구되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실현의 표현을 향한 근대적 근대성, 자신의 본래성의 실현을 추구하는 문화적 근대성이 있다. 이것은 개인의 주관성과 그 실현을 중심에 둔다 이 문화적 근대성의 극단은 나르시즘과 쾌락주의(hedonismo)의 탐구로 나타난다. 신보수주의 이론가들은 상반된 이 두개의 역동성이 현재 극적으로 충돌할 과정에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이들이 이과정을 심각하게 느끼는 이유는 문화논리가 경제논리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를 움직이게 하는 가치들을 방해한다는 데에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자본주의를 위해 아주 위험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기술적 과학적 생산의 근본을 뿌리채 흔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난 200년 동안 자본주의체제를 뿌리내리게 해온 것에 대한 도덕적 가치와 태도들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NC가 염려하는 중심적 도덕은 청교도적 윤리이다. 근대성에 대한 NC진단의 핵심을 성격 지운다면, 그것은 청교도적인 도덕성의 상실, 가치의 상실에 있다. 보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자본주의 근대성의 하나의 영적 위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들 NC이론가들은 민주적 자본주의의 현실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자본주의 근대성의 허약성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니엘 벨의 테제는 바로 이것을 포착하고 있다. 소비주의와 쾌락주의는 자본주의 근대성의 문화적 역동성의 표현이다. 여기서 지배적인 가치는 소유와 소비가 제공하는 기쁨이다. 이 기쁨을 통해 체제의 멤버들에게 (대중)체제를 정당화하여 체제는 이렇게 그들의 멤버를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근본에는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는 도덕적, 성스러운 것의 경험이 없다. 금지된 것과 허용된 것의 한계가 허공에서 사라져 버린다. NC의 우려는 문화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모순을 해소해야 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것을 맛보려고 하는 소비주의와 쾌락주의의 희구는 단지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만을 위해 움직이는 윤리이다. 이 윤리는 질서로 훈련되고 질서를 사랑하는 노동자의 인격을 양성하지 않는다. 정반대로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개념, 완전히 쾌락주의적인 개인, 체제가 요구하는 특성을 지니지 못한 개인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쾌락주의적 병폐를 중단시켜야 하며 생산성의 윤리, 질서, 규율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NC의 사상가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능의 기본에는 아담 스미스가 아미 본 것처럼, 그것 없이는 체제가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일련의 가치체계가 있다. 그것은 체제의 규범을 존중하는 것, 협약의 준수정신이다. 또 중요한 다른 가치는 다른 이를 위한 희생의 능력이다. 이 두 가치는 민주적 자본주의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여기서 NC이론가들은 생산적이고 희생적 윤리의 나무는 종교적 기반이 없이는 고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NC의 진단에는 윤리를 회복하기 위한 종교의 필요성에 대해 일반화된 의견이 있다. (유대-기독교) 종교 없이는 노동, 포기, 질서등과 같은 정신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보증이 없다. 다시 말해, 체제의 봉사를 위한 종교적 부흥이 필요하게 된다. 체제의 도덕적 기능을 위한 봉사, 체제의 정신적 기능을 위한 봉사에 윤리와 종교가 요구되어 진다.여기서 체제가 필요로 하는 사회적, 도덕적 덕목에 대한 교리적 강화가 일어난다. 미첼 노박의 민주적 자본주의의 경제신학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미첼 노박의 경제신학은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성서)를 이용한다. 기독교는 민주적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받아들인다. 자본주의의 문화적 "영혼"으로서, 궁극적 인간화와 조화의 힘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이점이 또한 NC의 경제신학이 우리시대의 사회。 문화적 위험중의 하나가 되는 이유이며 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근거이다. 4. 한국사회에 있어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와 경제정의 앞에서 우리는 우리시대 지배적인 경제체제인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발생배경, 특징 그리고 경제정의론의 한계를 분석하여 보았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한국사회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고 이과정에서 제기되는 경제정의론의 의미와 한계를 김영삼 민간정부의 경제5개년계획과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을 중심으로 논의해 보려한다. 여기서 우리의 논의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측면을 다루지 않고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들의 경제정의론의 정책논의의 전체적 의미를 평가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4.1.1. 「신경제5개년계획」의 성격과 경제정의관 김영삼 민간정부가 지난 1년간 추진해온 경제정책의 방향은 경제활성화, 경제개혁 그리고 국가경쟁력 강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여 왔다. 이러한 기본 경제정책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0년대부터 6공화국 말기인 1993년 2월까지 약 30년간 이어져온 경제정책의 기조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30년간의 경제정책이란 중앙 통제적(국가 계획적) 경제정책을 의미하며 중앙 통제적 경제정책은 i)중앙정부의 계획에 따라 세운 성장목표의 추구; ii)중앙정부의 금융, 세금감면 또는 보조금, 행정지원 등의 직。간접지원; iii)중앙정부의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의 직접적 통제, 규제를 특징으로 한다. 30년간 6차에 걸친 경제개발정책은 한마디로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그 형식상 크게 차이가 없는 계획경제였다. 김영삼 민간정부는 취임이후 1960년대 이후 30년간 6차에 걸쳐 추진해왔던 '경제개발계획(제7차경제사회개발1992-1996)을 포함하여'이란 이름을 폐기하고 '신경제5개년계획(92-97)'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입안하였다. '신경제 100일계획'이라는 단기 전략아래 시행해온 경기활성화의 추구와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 실시로 표현되는 개혁적 경제정책, 그리고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조인에 따른 국제화, 개방화의 추진과 국가경쟁력 강화로 요약된다. 그러나 김영삼정부가 지난 1년간 시행해온 경제정책의 방향은 지난 30년간 군사정부가 추진해온 성장지상주의 경제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임금인상의 억제를 노사합의의 형태로 강제하고, 금년을 노사분규가 없는 해로 만들겠다는 선언등은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를 직접 통제해온 과거 30년의 정책기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 지난 1년간의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은 지난 30년간 군부통치 시대의 중앙 통제적 경제정책을 그대로 답습해 계승하고 유지하되, 낡은 중앙 통제적 정책에 새로운 이름만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신경제5개년계획'에 관련하여 계속된다. 정부는 '신경제5개년계획지침'에서, 민간의 창의를 최대한 발현시킬 수 있도록 과거의 정부주도적이고 개입 위주의 경제운용에서 벗어나 시장의 자원배분기능을 최대한 활용하는 민간주도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이 '지침'에 의하면, '신경제'의 기본이념도 정부의 지시와 통제 대신 국민의 참여와 창의가 발전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는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부국제가 대폭 줄어들어 기업 활동이 자유로운 경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달 후 발표된 '신경제5개년계획'에 따르면, '신경제'란 "모든 국민이 함께 하는 경제"를 말하며, 여기서 말하는 모든 국민에는 정부와 민간이 함께 포함되었다. 즉 신경제란 "정부와 민간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경제"를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신경제'는 민간주도경제운영과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요약하면, 김영삼 민간정부의 '신경제'는 산업독점자본의 이익을 관철하는 신자유주의적 성장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다. '신경제'는 자본분파간의 관계를 합리화하여 산업자본을 강화하고, 생산자계층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강화하여 사적 독점자본의 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국제적인 자본경쟁에 대처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경제'는 '신자유주의'전략에 의한 슘페터적 근로국가로의 이행을 기본으로 하되 신국가주의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는 장상환의 평가는 적절하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상반된 평가에 직면하게 된다. 개혁지향적인 진보적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김영삼정부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 전망한다. 이와 달리 [경실련]의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김영삼정부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진보적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김영삼 민간정부의 '신경제'는 전혀 새로움이 없는 과거의 성장정책의 재판이다. 차이는 지난 80년대 한국경제의 여건변화를 감안하지 않은 채 신자유주의 논리-시장경제논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비결은 재벌지배의 강화가 될 수 밖에 없다. 이 점을 신경제의 대외무역정책, 산업발전, 금융정책, 재정정책, 토지, 주택부문정책, 농업정책, 노동정책, 사회복지정책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다. 이 분석에 의하면, 재정정책안을 제외하고, 신경제의 대부분의 정책이 철저하게 시장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현재의 경쟁력 강화대책은 재벌위주로 짜여져 있다고 지적된다. 그러나 민간정부의 '신경제'가 신자유주의의 시장논리를 철저하게 반영되지 않는 부문도 인정한다. 그것은 재정정책부문에서 발견되는데, 이상영은 정부가 내세운 '작은 정부'라는 것이 재정정책에서 전혀 0반영되지 않고 있음을 분석하면서 이것은 구호와 정책이 따로 놀고 있는 예라고 지적한다. 경제정의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노동 부문과 사회복지부문에 대한 [신경제]의 정책 방향은 부정적이다. 노동부문을 분석한 이병희는 신노동정책이 국가 경쟁력의 강화를 목표로 고통 분담과 의제적 합의만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별 자본의 노동 통제 강화를 뒷받침하는 정책이 감소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사회복지부문을 다룬 강혜구는 기초복지에 대한 정수 지출이 다른 중간 수준의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낮은 현실에서 (도표 참조) 신경제정책은 이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신경제정책은 재정의 지원이 필요한 기초복지는 외면한 채 민간이 사회복지부문에 적극 개입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 가령 실버타운 건설에 민간 자본의 주도를 장려 - 비판한다. 시장논리에 입각한 이러한 정책은 사회복지부문에서의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 전망하였다. 노동부문과 복지부문에 있어서 경실련의 경제학자들도 긍정적 결론을 얻지 못한다. 93년호에 7-8%의 경제성장률과 4-5%의 물가상승억제선을 제시한 김영삼정부의 경제학은 국민에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통분담 및 임금인상의 자제를 요구했으나, 결과는 저성장, 고물가상승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고통분담에 참여한 국민에게 더 큰 고통을 부담시겼다고 비판한다. 경실련의 대표적 경제학자인 이근식도 신경제의 경제개혁은 재벌 위주로 경제가 운용되었음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분배정의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경제개혁의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분배정의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불로소득의 배제를 강조한다. 요약하면 [신경제]는 재벌위주의 종전의 성장정책이 크게 변화되지 않는 성격으로 인하여 부정적인 [경제적 민주화]의 전망을 제시한다. 심지어, 강철규는 '1백일 계획' 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발상자체가 시장경제질서로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그는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하는 개혁을 요구한다. 4.1.2.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의 성격 1989년 7월 시민운동의 활성화를 통해 한국 사회의 건전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취지 아래 창립된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제 거의 4년에 걸친 활동 끝에 명실공히 한국 사회의 중요한 시민운동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경실련의 시민운동으로서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긍정적인 평가가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무엇보다도 [경제정의]의 문제를 짧은 시간에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제기하였다는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동시에 [경실련]의 한계에 대한 논의도 당연히 경실련이 제기한 [경제정의]의 향방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실련]이 그동안 제시한 경제정의의 향방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실련]이 그동안 제시한 경제정의의 구체적인 정책 대안에 대한 미시적 분석보다 구체적인 정책대한에 내포된 전반적인 철학적 성격을 검토해보려 한다.0 필자가 보기에는,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의 철학적 기조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여진다. 비록 민주복지국가형에 대한 기대에서 보여지는 모순적 이념형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토대로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추구하는 [경제정의론]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도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의 새로운 점은 한국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노사간의 모순이라는 시각에서보다는 생산계층과 비생산계층의 모순이라는 각도에서 파악하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토지투기로 인한 엄청난 불로소득과 이로 인한 빈부의 격차 심화 현상은 노사간의 모순이라는 접근방식으로 풀리지 않는, 그러나 한국 사회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경제 문제라고 인식한다. 따라서 경실련은 한국 사회 '경제민주화'의 핵심을 불로소득의 척결에 두고 토지 세제의 개혁과 금융자율화, 그리고 임대주택을 비롯한 복지정책의 확대를 목표로 설정하였다. 당연히 국가 또는 정부의 역할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 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경실련]의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따르고 있음을 보나, 국가의 역할에 있어서는 약간의 수정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원칙적으로 경제분야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사회복지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우는 개발 독재 과정에서 세제와 금융 혜택을 통한 정부와 재벌의 유착이라는 정경유착 - 금권정치의 왜곡된 형태로 국가의 개입이 이루어져왔다고 진단한다. 이에 대해 경실련은 국가의 역할은 공공복지에 국한되어야 하며 그 이외의 것들은 시장의 자율적 기능에 맡겨야 한다고 처방한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의 역할을 넘어서는 경제분야의 정책은 반시장적, 중앙통제적이며 반자유주의적 경제질서를 도모하는 것으로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정책들이라고 규정한다. [경실련] 경제학자들의 경제정의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시장경제 질서에 기반을 둔 인본적 시장경제이다. 이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민주적 자본주의론'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경실련] 경제정의론의 문제점을 지적해보도록 하자.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가정은 성장과 분배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동자와 기업가의 관계는 결코 적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공존공생의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 계급의 일방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노동자와 기업가 모두의 공동 이익 - 사회의 일반 이익이나 공공 선 - 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이 '공동 이익' 또는 '사회의 일반 이익'과 '공공 선'의 내용을 누가 정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경실련의 한국 중산계층의 초계급적 입장을 취한다는 평가는 지나치게 이상화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에서 문제되는 두번째 전제는 경제와 정치의 지나친 구분이다. 경실련은 경제의 정치화를 두려워한다. 시장경제의 자율성에 대한 신화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는 시장 기능을 민주적으로 통제해나가야 하는 데서 당연히 직면하는 정치적 역학 관계의 중요성이 무시된다. 이것은 시민단체, 노조, 소비자운동 등이 직접 시장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에 대한 정치적 인식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윌리암 윌버포스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윌리암 윌버포스 윌리암 윌버포스는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초기 복음적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숙부와 살았다. 숙부는 노예 상인이었다가 찬송가 작가가 된 존 뉴턴의 친구였다. 1780년 대학 동창생 피트와 함께 하원 의원에 당선되어 의회 개혁과 로마 가톨릭교도의 정치적 해방을 지원하였다. 그 후 1784∼1785년 유럽 여행 중에 그의 교장이었던 아이작 밀러와 토론을 하면서 유명한 종교 서적 「영혼에서 종교의 발생과 진보」와 성경을 읽는 중에 심도 있는 회심을 경험하게 됐다. 이로써 그는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천이 되었다. 윌버포스는 1785년 후반에 영적인 회심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이전의 습관들을 모두 버렸다. 그의 중요한 공적 경력을 모두 노예 해방 운동에 헌신했다. 1787년 그의 노예 해방 투쟁은 하원의 노예 문제 개혁 운동의 지휘를 떠맡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일에 대한 동기와 결의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라고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윌버포스는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시와 노래, 사진 판매, 노예 제도를 통해 생산한 설탕 불매 운동 그리고 탄원서 제출 운동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한 대중 여론 조성과 책자 출판을 통해 노예 제도 폐지를 전개했다. 드디어 1807년 영국 하원은 그에게 유례 없는 열광과 존경을 보내면서 '노예 무역 폐지법'(The Abolition Act)을 통과시켰다. 그는 박애주의적 개혁을 추구하는 복음주의자 그룹의 중심 인물로서 해외 선교 운동에도 크게 활약하였다. 1833년 '노예 해방 법령'(The Emancipation Act)을 통해 영국 전역에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웨슬리가 뿌린 씨앗이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었다.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교회와 채플(비국교도들의 교회당)의 문들이 모두 열렸고, 해방된 노예들이 몰려들어 대만원을 이루었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대영 제국의 악법과 맞서 싸웠다. 그는 삶 속에서 매력과 재능 그리고 웅변의 능력을 사용하였다. 날카로운 푸른 눈과 오뚝한 콧날을 가진 이 아담한 사람은 대단히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진 훌륭한 의회 연설가였다. 그의 어조는 독특하고 음악적이어서 그의 정적도 그의 연설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윌버포스는 1833년 8월 6일 세상을 떠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그는 오늘날 영국의 양심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 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깊은 영성과 실력을 구비한 평신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총체적 부패 속에서도 의와 양심을 포기하지 않은 지도자의 모범을 보였다. 사회악과 맞선 ‘영국의 양심’ 우리 시대의 가장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개인은 무력하며,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할 수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구조적인 악의 뿌리가 얼마나 견고한지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뿌리 뽑는 것은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라고 결론 짓고, 그로 인해 무기력증후군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은 꿈이 없으면 안일이나 좌절, 이기심의 수렁에 빠져서 파멸하기 십상이다.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 소명 1787년 10월 28일, 28세의 영국의 젊은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의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탁월한 정치인이요, 부유한 요크셔 상인의 아들이었던 윌버포스는 자신의 이 비전이 당시 영국 사회에 가져올 파문을 잘 알고 있었다. 구조적인 악, 노예 무역 18세기 말,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을 갖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 북미 대륙으로 실어 나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미국의 한 권위 있는 통계에 의하면, 영국이 1776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의 식민지에 공급한 노예 수는 약 3백만 명 정도라고 한다. 당시 노예 무역은 영국 식민지 산업의 기둥이자 근간이었으며, 국가 안보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노예 무역이 영국 선원들에게 탁월한 훈련을 제공하고, 영국 해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신병 모집의 근거를 제공했다. 노예 무역은 연간 5,500명 이상의 선원들을 고용했고, 그것의 고용 효과는 약 16만 톤의 선박과 그에 비례한 선원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따라서 노예 무역의 지지자들은 막강한 상인, 재벌, 넬슨 제독 같은 식민지 기득권 세력, 대부분의 왕족, 귀족들로 구성되어 그 어떤 반대의 소리도 매국으로 치부해 버렸다. 노예 무역은 그야말로 구조적인 악이었다. 승리로 이끈 위대한 행동 왜소한 체구의 윌버포스는 150번이나 되는 대(對) 의회 논쟁을 통해서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 제도를 고집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암살 위협과 갖은 중상모략, 비방에 시달리면서도 윌버포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의 수 많은 뜻 있는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외롭고 기나긴 싸움을 버텨 나갔다.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56년 만에 드디어 영국 의회는 노예 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또한 노예 무역 폐지라는 큰 명제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타락한 영국 사회 곳곳을 개혁해 나갔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복권 제도를 20년에 걸친 의회에서의 공방 끝에 폐지시켰고, 가난한 이들이 병이 들었을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정부 예산으로 설립하게 하였다. 과다한 노동 시간을 제한시키고, '어린이노동 보호법'을 통과시키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타개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구제보다는 직업 교육을 시키고, 취업을 알선하는 제도를 정부가 구체적으로 실행하게 했고, 영국의 야만적인 형벌 제도를 대폭 개정했다. 가난한 자들도 합리적인 재판 과정을 거칠 수 있게 했으며, 형벌 제도에 있어서 벌보다는 갱생(更生)에 초점을 두게 했다. 또한 상류 사회 남자들의 결투 제도 폐지에 앞장섰고, 호화 파티만 일삼던 귀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이들이 여가 시간을 사회 봉사에 쏟도록 했다.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이러한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렀고,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의회 의원 3분의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정치가, 윌버포스 많은 역사가들은 윌버포스가 노예 무역 금지라는 인기 없는 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친구 윌리엄 피트에 이어 수상직을 계승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확고하게 결심하던 날, 이미 개인적 야망을 버렸다. 그는 자기 이익이라는 독재자와 대결을 벌여 승리한 것이다. 그런 용기의 대가로 그는 모욕과 반대와 수치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거꾸로 자유라는 새로운 유산을 그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된 수많은 흑인들에게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이익과 성공을 지향하고 있다고 너무나 자주 치부되는 이 시대에 윌버포스의 생애는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곳, 바로 영국 의회라는 전쟁터에서 불의에 맞서 싸운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정치가였다. 세상 문제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개인적 신앙의 게토(ghetto) 속에 도피하든가, 불신자들이나 다름없이 정치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다. 그리고 윌버포스가 한 일들은 18세기와 19세기의 영국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오늘날과 같이 방대한 조직과 비인간적인 권력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개인이 더 이상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키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전능하신 분이시다. 인간에게는 자신과 자신의 주변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윌버포스가 막다른 골목과 같은 상황을 타개한 것처럼, 구조적인 악이어서 도무지 해결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악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헌신된 사람들을 절실히 찾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것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임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 준 윌버포스.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일 아침 두 시간을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보냈던 다니엘과 같은 사람이었다.
'아프리카를 사랑한 개척 선교의 시조' 데이빗 리빙스턴
'아프리카를 사랑한 개척 선교의 시조' 데이빗 리빙스턴 데이빗 리빙스턴은 일반인들에게 지리학자요 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였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 1855년 11월 15일, 리빙스턴이 처음 발견한 "빅토리아 폭포" 그는 스코들랜드의 불란타이어에서 1813년 3월 19일 낮은 신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고 매우 가난했다. 그는 디크의 '종교철학과 미래국가의 철학'이란 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됐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자기 직업의 장래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방적공장에서 방적공이 되어 어느 정도 많은 돈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은 그러한 일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이런 목표를 마음에 품고서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고래스고우에 있는 앤더슨 대학에 들어갔다. 의학공부를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회에도 지원을 신청해 놓았다. 그는 수습생으로 받아들여져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을 배울 수 있었다. 1840년 리빙스턴은 의학공부를 마치고 핀스베리의 알빈 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 때는 이미 영국과 중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발발해 있었고 런던선교회는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더 이상 선교사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스도를 만난 열정은 곧 다른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버트 모펫을 만난 것을 계기로 남아프리카를 위한 선교사로 헌신하게 됐다. 리빙스턴은 12월 조오지호에 승선해 남 아프리카를 향해 떠났다. 리빙스턴은 세츠와나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신의 선교를 시작하기에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 곧 케이크를 떠났다. 그는 북쪽으로 길을 떠나 쿠루만과 츠와나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쿠루만을 건설한 로버트 모펫은 20년 동안 선교에 힘써왔다. 도착한 리빙스턴은 인구가 많고 회심자가 많은 번영하는 마을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그 땅은 거의 황무지였으며 한발의 피해를 입고 있었고 관목에 덮인 땅이었다. 종교적 상황도 완전히 엉망이었다. 리빙스턴은 많은 현지인들이 기독교를 먹고 마실 수 있는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립된 부족들에게 유럽인들은 이상하게 보였고 설교자들은 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다. 그들은 종종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사람들에게 그가 믿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리빙스턴은 머리를 낮추고 기도했는데, 이것을 본 그들은 그의 신이 땅속에 있다고 생각해서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12년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회심자 밖에 얻지 못한 데이빗 리빙스턴은 점점 더 정규적인 선교사역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문호가 열려서 유럽인들이 여행할 수 있고 쉽게 정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아프리카인들은 먼저 유럽의 방식이 우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자신들의 관습을 버리고 서구의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더욱 바라게 될 것이다. 그는 “기독교, 무역, 개화”를 불가불리의 것으로 보게 되었다. 리빙스턴은 가족들을 배에 태워 영국으로 보냈다. 잠베시강은 오늘날의 잠비아에서 발원하여 앙골라 동부를 통과한다. 그리고 남동쪽으로 잠비아와 모잠비크를 가로질러 아프리카 남동 해안으로 빠져나간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준비해두셨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때부터 리빙스턴의 삶은 아프리카를 기독교 선교에 개방시켜야 한다는 집념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그는 4년 간 탐험되지 않은 지역으로 4,000마일을 여행했다. 짐베시 북방 탐험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그는 거의 항상 질병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의 의지력은 많은 그의 동료들을 앗아간 질병이나 불편함에 굴하지 않았다. 4년 간의 아프리카 횡단을 마친 리빙스턴은 고향에 돌아가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가 받은 수많은 영예가운데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받은 법학 박사학위도 들어있다. 그는 재빨리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 탐험」(1857)이란 책을 썼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여러 얼굴은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의 일을 하나님께서 관장하신다는 칼빈주의적인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확신했고 한마음으로 그것을 추구해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극심한 고통과 불편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 봉사를 받으셨다면 내 인생은 나의 사역이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 하에 있게 될 것이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노력의 결과를 항상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계획은 한 사람의 인생보다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본래 소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대해 “신성한 소명”이 있다는 그의 말은, 그가 원했던 대로 선교사들과 제국주의 양자에게 도전을 주었다. 아프리카에서 그의 선교적 자세는 적극적이고 개척자적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그는 "아직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수천의 마을들"에 대한 부담을 가진 개척 선교사였다. 이에 대한 유명한 예화로 어느 날 영국에 있는 몇몇 친구들이 리빙스턴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리빙스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자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네. 먼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네를 생각하면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네. 그래서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에 보내 주면 좋겠네." 하지만 편지를 받은 리빙스턴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했다.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이거든." 선교사로서 그가 주로 한 일은 아프리카의 길을 연 것이다. 그가 만든 지도를 따라 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873년 5월 1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개척자적인 삶은 지금의 아프리카에 위대한 복음의 업적을 이루게 되는 결과를 낳게 한 위대한 인물로서 평가되고 있다.
간추린 교회사 서론
간추린 교회사 서론 2004-03-11 10:37:22 read : 191 * 머 리 말 *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관류하는 하나의 위대한 힘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역 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신 계획 아래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고 인간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활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교회사의 한없는 줄기 속에서 명멸하는 수 많은 인물과 사건의 위에는 하나님 의 손길이 항상 계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에 겸손히 순종하고 하 나님의 적은 도구로 사용되어짐을 감사할 뿐이다.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들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오 늘의 우리에게 뜨겁게 역사하며, 이 모든 것의 내일을 바라보는 지혜의 눈을 가 지게 한다.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 속에 미미하고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오늘을 사는 하나 의 그릇으로 주 앞에 사용되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리라 믿는 다. 교회가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편자의 교회사를 요약하게 된 것은 순전히 편자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이다. 시험을 앞두고 방대한 교회사의 분량과 연대에 미리 질려버리는 심정이어서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을 여러 권의 참고서 와 교회사에 관한 자료를 섭려하다 보디 하나의 결실이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 다. 교회사 요약에 대해 한 두권의 책이 나왔으나 절판되거나 수 많은 오식 때 문에 편자 자신이 공부할 수 없어서 이와같은 고충을 당하는 교직자와 신학도들 을 위해 외람스럽게 한권의 책으로 엮어 보았다. 또 각종 고시(목사,강도사 등) 의 역대 문제들을 수집하여 각 항목에 밝혔다. 이것은 각종 고시의 수험생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리라 믿는 바이다. 각 장마다 시험 예제를 수록하여 수험생들에게 도움을 제공하였다. 이 책이 편자와 같이 단시간 안에 교회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움 이 되기를 바란다. 이미 있는 자료들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함께 공부하는 안내역이 되기 바랄 뿐이다. 이 책에 있는 오식과 탈자나 체제의 잘못은 순전히 편자에게 있음을 고백하며 공부하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며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만 바랄 뿐이다. = 신학 교재 편찬 위원회 = * 서 론 * 1. 교회사의 정의 기독교의 기원, 발달,인간 세계와의 관계, 구원 역사의 조직화 등을 연구하 는 학문이다. 2. 교회사 연구의 유익 1) 기독교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알게 한다. 2) 과거의 일을 통해 내일의 거울이 되게 한다. 3) 신앙 영웅들의 자취를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준다. 4) 기독교가 세계 문명 발달의 대원천적 세력임을 알게 된다. 5) 고상한 영적 힘을 얻게 한다. 3. 교회사의 학문적 위치 1) 신학 분야 가운데 역사신학에 해당한다. 2) 교회사에는 교리사,사상사, 교회사 교회 정치사, 기독교 문화사 등이 포 함된다. 3) 연구의 범위는 전 세계적이다. 4. 교회사의 시대 구분 1) 고대사 (A.D.1-590)..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고레고리우스 1세 즉위시까지 (1) 사도시대(1-100).. 그리스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끝날 때까지 (2) 사도후 시대(100-313)..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허락할 때까지 (3) 니케아 회의 시대(313-590)..초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 시까지 2) 중세사(590-1517)..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부터 종교 개혁 시작까지 (1) 과도 시대(590-800).. 선교 발달기 (2) 로마 교회 성장 시대 (800-1073)..그레고리 7세 즉위까지(동서교회분리 (3) 로마 교회 전성시대(1073-1303)..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사망까지. (4) 로마 교회 쇠퇴 시대(1303-1517)..종교 개혁까지. 3) 근세사(1517- 현재)..종교 개혁까지 (1) 종교 개혁 시대(1517-1648)..종교 개혁 시작부터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 까지. (2) 근세 시대(1648-1800)..프랑스 혁명까지
간추린 교회사 서론 2004-03-11 10:37:22 read : 2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머 리 말 *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관류하는 하나의 위대한 힘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역 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신 계획 아래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고 인간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활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교회사의 한없는 줄기 속에서 명멸하는 수 많은 인물과 사건의 위에는 하나님 의 손길이 항상 계심을 느낄
간추린 교회사 서론 2004-03-11 10:37:22 read : 2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머 리 말 *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관류하는 하나의 위대한 힘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역 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신 계획 아래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고 인간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활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교회사의 한없는 줄기 속에서 명멸하는 수 많은 인물과 사건의 위에는 하나님 의 손길이 항상 계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에 겸손히 순종하고 하 나님의 적은 도구로 사용되어짐을 감사할 뿐이다.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들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오 늘의 우리에게 뜨겁게 역사하며, 이 모든 것의 내일을 바라보는 지혜의 눈을 가 지게 한다.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 속에 미미하고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오늘을 사는 하나 의 그릇으로 주 앞에 사용되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리라 믿는 다. 교회가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편자의 교회사를 요약하게 된 것은 순전히 편자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이다. 시험을 앞두고 방대한 교회사의 분량과 연대에 미리 질려버리는 심정이어서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을 여러 권의 참고서 와 교회사에 관한 자료를 섭려하다 보디 하나의 결실이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 다. 교회사 요약에 대해 한 두권의 책이 나왔으나 절판되거나 수 많은 오식 때 문에 편자 자신이 공부할 수 없어서 이와같은 고충을 당하는 교직자와 신학도들 을 위해 외람스럽게 한권의 책으로 엮어 보았다. 또 각종 고시(목사,강도사 등) 의 역대 문제들을 수집하여 각 항목에 밝혔다. 이것은 각종 고시의 수험생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리라 믿는 바이다. 각 장마다 시험 예제를 수록하여 수험생들에게 도움을 제공하였다. 이 책이 편자와 같이 단시간 안에 교회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움 이 되기를 바란다. 이미 있는 자료들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함께 공부하는 안내역이 되기 바랄 뿐이다. 이 책에 있는 오식과 탈자나 체제의 잘못은 순전히 편자에게 있음을 고백하며 공부하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며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만 바랄 뿐이다. = 신학 교재 편찬 위원회 = * 서 론 * 1. 교회사의 정의 기독교의 기원, 발달,인간 세계와의 관계, 구원 역사의 조직화 등을 연구하 는 학문이다. 2. 교회사 연구의 유익 1) 기독교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알게 한다. 2) 과거의 일을 통해 내일의 거울이 되게 한다. 3) 신앙 영웅들의 자취를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준다. 4) 기독교가 세계 문명 발달의 대원천적 세력임을 알게 된다. 5) 고상한 영적 힘을 얻게 한다. 3. 교회사의 학문적 위치 1) 신학 분야 가운데 역사신학에 해당한다. 2) 교회사에는 교리사,사상사, 교회사 교회 정치사, 기독교 문화사 등이 포 함된다. 3) 연구의 범위는 전 세계적이다. 4. 교회사의 시대 구분 1) 고대사 (A.D.1-590)..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고레고리우스 1세 즉위시까지 (1) 사도시대(1-100).. 그리스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끝날 때까지 (2) 사도후 시대(100-313)..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허락할 때까지 (3) 니케아 회의 시대(313-590)..초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 시까지 2) 중세사(590-1517)..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부터 종교 개혁 시작까지 (1) 과도 시대(590-800).. 선교 발달기 (2) 로마 교회 성장 시대 (800-1073)..그레고리 7세 즉위까지(동서교회분리 (3) 로마 교회 전성시대(1073-1303)..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사망까지. (4) 로마 교회 쇠퇴 시대(1303-1517)..종교 개혁까지. 3) 근세사(1517- 현재)..종교 개혁까지 (1) 종교 개혁 시대(1517-1648)..종교 개혁 시작부터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 까지. (2) 근세 시대(1648-1800)..프랑스 혁명까지
간추린 교회사 서론/ 2004-03-11
간추린 교회사 서론 * 머 리 말 *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관류하는 하나의 위대한 힘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역 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크신 계획 아래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고 인간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활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교회사의 한없는 줄기 속에서 명멸하는 수 많은 인물과 사건의 위에는 하나님 의 손길이 항상 계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에 겸손히 순종하고 하 나님의 적은 도구로 사용되어짐을 감사할 뿐이다.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들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오 늘의 우리에게 뜨겁게 역사하며, 이 모든 것의 내일을 바라보는 지혜의 눈을 가 지게 한다.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 속에 미미하고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오늘을 사는 하나 의 그릇으로 주 앞에 사용되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리라 믿는 다. 교회가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편자의 교회사를 요약하게 된 것은 순전히 편자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이다. 시험을 앞두고 방대한 교회사의 분량과 연대에 미리 질려버리는 심정이어서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을 여러 권의 참고서 와 교회사에 관한 자료를 섭려하다 보디 하나의 결실이 나온 것이 바로 이 책이 다. 교회사 요약에 대해 한 두권의 책이 나왔으나 절판되거나 수 많은 오식 때 문에 편자 자신이 공부할 수 없어서 이와같은 고충을 당하는 교직자와 신학도들 을 위해 외람스럽게 한권의 책으로 엮어 보았다. 또 각종 고시(목사,강도사 등) 의 역대 문제들을 수집하여 각 항목에 밝혔다. 이것은 각종 고시의 수험생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리라 믿는 바이다. 각 장마다 시험 예제를 수록하여 수험생들에게 도움을 제공하였다. 이 책이 편자와 같이 단시간 안에 교회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움 이 되기를 바란다. 이미 있는 자료들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지만 함께 공부하는 안내역이 되기 바랄 뿐이다. 이 책에 있는 오식과 탈자나 체제의 잘못은 순전히 편자에게 있음을 고백하며 공부하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며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만 바랄 뿐이다. = 신학 교재 편찬 위원회 = * 서 론 * 1. 교회사의 정의 기독교의 기원, 발달,인간 세계와의 관계, 구원 역사의 조직화 등을 연구하 는 학문이다. 2. 교회사 연구의 유익 1) 기독교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알게 한다. 2) 과거의 일을 통해 내일의 거울이 되게 한다. 3) 신앙 영웅들의 자취를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준다. 4) 기독교가 세계 문명 발달의 대원천적 세력임을 알게 된다. 5) 고상한 영적 힘을 얻게 한다. 3. 교회사의 학문적 위치 1) 신학 분야 가운데 역사신학에 해당한다. 2) 교회사에는 교리사,사상사, 교회사 교회 정치사, 기독교 문화사 등이 포 함된다. 3) 연구의 범위는 전 세계적이다. 4. 교회사의 시대 구분 1) 고대사 (A.D.1-590)..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고레고리우스 1세 즉위시까지 (1) 사도시대(1-100).. 그리스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끝날 때까지 (2) 사도후 시대(100-313)..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허락할 때까지 (3) 니케아 회의 시대(313-590)..초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 시까지 2) 중세사(590-1517)..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부터 종교 개혁 시작까지 (1) 과도 시대(590-800).. 선교 발달기 (2) 로마 교회 성장 시대 (800-1073)..그레고리 7세 즉위까지(동서교회분리 (3) 로마 교회 전성시대(1073-1303)..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사망까지. (4) 로마 교회 쇠퇴 시대(1303-1517)..종교 개혁까지. 3) 근세사(1517- 현재)..종교 개혁까지 (1) 종교 개혁 시대(1517-1648)..종교 개혁 시작부터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 까지. (2) 근세 시대(1648-1800)..프랑스 혁명까지
간추린 중국 교회사/ 윤승록/ 2006-06-05
간추린 중국 교회사 윤승록 중국은 오랜 역사와 그리고 놀라운 문화를 가진 나라이다. 그들 스스로 세계의 한 가운데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자부심 강한 나라이다. 격변의 20세기를 보내고 중국은 이제 다시 세계의 한가운데로 다시 등장하고 있는 나라이다. ꡐOperation Worldꡑ에 의하면 크기에 있어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나라일 뿐 아니라 전 세계 인구의 20%가 살고 있는 나라이다. 또한 기독교인의 숫자는 8,000만 명에서 1억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공산주의의 통제 하에 놓여 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중국에 있는 이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를 시대별로 간추려 보고 중국 교회의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중국교회사의 시대별 요약 간추린 중국교회사 윤승록 간사 중국 교회사는 다섯 개의 시기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첫째, 당나라 시대의 경교(Neatorians)주의자의 선교 시대, 둘째, 몽고 제국 시대의 카톨릭(Catholic) 선교 시대, 셋째, 19세기까지의 예수회(The Jesuits) 중심의 선교 시대, 넷째,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개신교 선교 시대, 다섯째, 20세기 후반의 공산주의 하의 중국 교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당나라 시대 경교(The Nestorians)에 의한 선교 우리는 중국에서 있었던 첫 기독교 선교의 정확한시기에 대해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Samuel Hugh Moffet 은 AD7세기의 네스토리안들의 선교 이전에 중국인들과 유대인들의 조우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PP,13-14) 이러한 조우는 아마 비단 무역을 통해 이루어 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고대에 비단은 오직 중국에서만 생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이사야서와(이사야 49:12) 에스겔서(에스겔 16:10, 13)에 언급되어있다. Donald Hoke은 주장하기를 BC 700년경에 중국에 유대인 식민지가 있었다고 한다. (The Church in Asia, p.133) 그러한 예로 그는 구약 성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 몇 개의 중국 글자를 들었다. (예: 배를 의미하는 글자인 선이라는 글자는 배 안에 여덟 명의 가족이 타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의라고 하는 단어는 반란을 일으킨 내가 양 아래 피난처를 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황제가 매년 하늘에 드리는 제사는 대속에 대한 유대인 사상의 영향력을 보여 준다. 기원 후 4세기 시리아교회(The Syriac Church)는 페르샤(Persia) 제국 안에 놓여있었다. 325년 니케아 회의(Council of Nicea)에 시리아 교회의 감독들이 참석하게 되고 그들의 출석은 시리아 교회와 페르샤 제국 사이에 정치적인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은 비록 로마가 근동일대를 지배하는 세력이기는 했으나 페르샤는 여전히 근동의 강력한 제국으로 로마와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묘한 상황에 비록 외형상으로는 로마의 감독이 소집한 기독교의 회의이긴 했으나 실제적인 후원은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틴에 의해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었기 때문에 페르샤의 황제 Shaphur II세는 매우 자극이 되어 외국 세력인 로마 제국에 대해 공적인 참석을 한 시리아 교회의 감독들을 정죄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민감한 시기에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는 나아가 자신이 시리아 교회의 공식적인 보호자임을 샤푸르 2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 이에 격분한 샤푸르 2세는 큰 박해를 시리아 교회에 가하고 이때 콘스탄틴 황제는 시리아 교회의 기독교인들을 돕지 않는다. 박해는 다음 세기(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410년 Seleucia 회의에서 페르샤의 황제Yazdgardh I세에 의해 시리아교회는 페르샤 제국에서the privileged minority 지위를 얻게 된다. John Rooney는 그의 글ꡑThe Nestorians in Central Asiaꡑ에서 ꡐmilletꡑ의 법적 효력은 이슬람교의 ꡐahl-ul-kitabꡑ이라는 개념, 즉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자유는 가지나 그것을 전파할 수는 없는 상태를 정확하게 의미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vol. XXIV, p.119) 나아가 이 정책은 시리아 교회 선교사들의 태도에도 깊이 영향을 주게 된다. 샤푸르 2세의 박해는 시리아교회의 기독교인들을 로마와 그리고 페르샤의 동쪽, 즉 파키스탄, 푼잡, 인도 등으로 옮겨가게 하고 흩어진 시리아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머무는 것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시리아 교회 기독교인들은 무역에 매우 뛰어 나서 이익을 쫓아 스키디아인들과 훈족들에게도 나아갔으며 이때 그들은 복음도 함께 가지고 나아갔다. 어떤 이들은 시리아 교회 기독교인들이 원래 유대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바로 BC 6세기 바벨론에 의해 팔레스타인에서 페르샤로 옮겨지게 되었던 유대인들이 바로 그들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시리아 교회의 확장은 7세기 경교(景敎, the Nestorians)의 중국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 첫 번 째 시리아 교회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중국은 당(唐)나라가(AD. 618-905)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초기 경교 선교에 관한 내용은 1642년 Hsian Fu의 고대 수도 근처에서 당나라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원의 벽을 수리하던 인부들에 의해 발견된 거대한 석조(石造) 기념비의 발견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다. 이 석조물은 길이 2.5m,넓이 75cm, 폭 25cm로 그 위에 중국어와 시리아어 2,000여 개가 쓰여 있었다. 석조물의 꼭대기에는 시리아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십자가가 조각되어 있었고 다음과 같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ꡒCommemorative Monument to the Propagation of the Luminous Religion of Ta Chꡑin(Syria) in the Middle Kingdom(China)ꡓ 그 돌비석은 중국과 그리스의 계산법에 의하면 781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중국에서는12개의 경교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들의 연대는 대략 7세기에서 10세기로 추정된다. 이 문서들은 당나라 시대 경교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 졌음을 보여주는데 마지막 문서는 1036년 서 중국, 돈황(Tun-huang)의 한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첫 번 째 경교 선교사들은A-lo-pen(or Abraham)이라는 사람이 이끌었다. 그는 645년 Hsian Fu라고 알려진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 Chang An)에 약간의 성경을 가지고 도착했다. 그가 장안에 도착하자 즉시 그는 그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일단의 중국학자들이 그를 도와 마침내 ꡒThe Sutra of Jesus the Messiahꡑ(메시아 예수의 경전)이라는 제목아 붙은 첫 번 째 기독교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기독교의 신앙을 중국인에게 소개하고 중국의 고대 전통들에 대해 스스로를 변증하며, 국가의 권위에 대한 충성과 그리스도의 법의 정수인 효도를 가르쳤다. 황제는 그 내용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선교사들에게 호의를 보여 주었다. 경교는 중국의 중요한 도시들에 수도원들을 짓기 시작했으며 고대의 석비에 의하면 ꡒ 그 종교는 10개성으로 퍼져나갔으며,…수도원들은 100여 개의 도시에 있었다. ꡒ(Donald Hoke, The Church in Asia, p.135) 그러나 경교의 선교는 몇 가지 요인들에 의해서 점차 소멸되어 갔다. 도날드 호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무엇보다 경교 선교사들은 그들의 의학적인 지식과 외과수술의 기술 때문에 존경받았는데 경교의 비중국인 지도자들 때문에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와 함께 외국 종교로 분류되었다. 그것은 경교가 중국문화와 관계해서 토착화(土着化)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둘째, 경교는 도교(道敎)와 불교(佛敎) 지도자들의 점진적인 질시와 수많은 내전(內戰)으로 인해 약해져 갔다. 셋째, 그들은 그들의 모교회인 메소포타미아의 시리아교회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결과 시리아 교회와의 영적(靈的) 유대(紐帶)에 있어서 잦은 단절을 초래했다. 도날드 호크는 이러한 고립이 중국에서의 경교의 영적인 혼합주의(混合主義)를 초래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경교가 중국에서 신학적으로 얼마나 변질되었으며, 그것이 참으로 중국에서 경교의 소멸을 초래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경교가 중국에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관용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직도 중국과 일본의 불교신자들은 종종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넷째, 불교에 대한 당시 정권의 적개심이 역시 수 천 명의 중국 경교 성직자들을 세속적인 직업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다섯째, 수도원을 위한 땅의 소유와 축적은 당나라 정부로 경교에 대해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여섯째, 그들은 당 조정과 너무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요인들에 의해 지나치게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당 왕조가 멸망하자 경교는 홀로 생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The Church in Asia, pp.136,137) 고대 중국에서 경교의 존재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중국의 북동부, 만주로부터 서쪽지역인 돈황에 이르기까지 많은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어 진다. 그럼에도 왜 고대 중국에서 경교가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경교가 고대 중국에서 기독교의 좋은 대표자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봉린 박사는 그의 글 ꡐChristian Mission to Mongol, China, Japan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ꡓ9세기에서 13세기까지의 이들 기간에 경교회들이 중국에서 사라졌고 거의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 경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들이 있어왔다. 그들은 아마 불교나 마니교, 그리고 회교도들이 되었을 것이다.ꡓ고대 중국에서의 경교 선교는 어쨌든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사용하셨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중국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비록 공적이고 조직적인 선교는 없었으나 우리는 13세기 몽고 제국시대의 중국에 대한 놀랍고도 용기 있는 선교의 노력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카톨릭 사절들에 의해서 되어졌는데 그들 중에는 프란시스코파(Franciscan)와 도미니칸파(Dominican) 등의 수도원 조직의 수도사들이 주로였다. 몽고제국에 대한 그들의 여행과 몽고제국에 머물렀던 그들의 경험에 관한 수도사들의 이야기들은 그 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만이 아니라 기독교 선교의 여러 가지 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13세기 전 세계는 그들이 이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재앙을 경험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헝가리에서 동쪽으로는 고려에 이르기까지 몽고는 거의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몽고에는 네 개의부족이 있었다. 첫째는 Yekamongol로 ꡐ위대한 몽고ꡑ라는 의미이고, 둘째는 Su-mongol로서 ꡐ물의 몽고ꡑ라는 의미였는데 그들은 Tartars라고 불리웠다. 이는 Tartur라는 이름의 강으로부터 그 이름이 연유되었기 때문이었다. 셋째는 Merkit이라는 부족이었고 넷째는 Mecrit이라는 부족이 있었다. 이 부족들은 1167년에 태어난 Chingis혹은 Temuchin에 의해서 결국 통일이 된다. 그들이 정복한 나라들은 다음과 같다; Kitay, the Naimans, the Sorangi. The Karkitayans 혹은 검은 Kitay, Comania, Cumae, Voyrat, karanites,Uigurs, Sari-Uigurs, Bascart 즉 위대한 Hungary, Kergis, Cosmit, the Saracens, theVisermins, the Turcomans, 위대한 Bularis였던 Byleri, Catora, Tomiti, Burithabet,Parrosites, Cassi, the Alans 혹은 Assi, Obesi 혹은 Georgians, Nestorians, Armenians,Kangit, Comans, 유대인들이었던 Brutachi, the Moravians, the Turks, the Gazars, theSamoyedes, the Persians, the Tarci, Lesser India 혹은 Ethiopia, the Circassians,Ruthenians, Baghdad 그리고 the Sarti등이 있었다. ꡒ13세기중엽 몽고제국은 유럽에 있던 서구 기독교 국가들을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새로 교황이 되었던 Innocent IV는 위협을 줄이기 위해 수도사들을 파견한다. 이를 위해 그는 두 명의 프란시스칸, 즉 포르투갈의Lawrence와 Plano Carpini의 John-그는 Assi의 Francis의 직접적인 제자 중의 하나였다-을 택하여 파송한다. 뒤에 베네딕트파의 Pole이라는 사람이 Breslau에서 그들과 합류한다. 이 여행은 매우 위험했다. 그리고 그들의 여행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은Kahn의 편지를 가지고 교황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그 편지의 내용은 서방세계에 대한 위협과 몽고의 황제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들이 담겨있었다. 또한 서구를 복종시키기 위한 전쟁계획을 알리는 것들도 담겨 있었다. 이들의 보고서는 그 당시 몽고제국의 역사만이 아니라 13세기 기독교 선교에 대한 가치 있는 역사적 기록이기도하다.ꡑ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pp.407-408) 서구에 대한몽고제국의 위협은 Hungary 침공을 앞두고 위대한 칸과 헝가리 침공군 사령관이었던 그의 사촌 Batu 사이의 갈등 때문에 줄어들게 된다. 칸(Khan)의 죽음과 Batu의 준 독립적인 지위로 인해 서구는 침공을 면하게 된다. 1247년 교황 Innocent IV는 사절단을 다시 몽고에 보내게 된다. 그들은 도미니칸 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는데 다음과 같다; Fr. Asacelin, Simon of Tournai와 다른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1247년 5월 24일 카스피 해의 서쪽에 있던 Batu의 캠프에 도착한다. 그들은 몽고인들에 의해 학대를 받았으나 칸의 사절이었던 Aljigiday가 옴으로 상황은 호전된다. 그는 남서쪽의 무슬림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기독교인들과의 관계를 세워나가야 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1248년 그들은 두 명의 몽고 사절들과 함께 서구로 돌아온다. 이 때 몽고의 사절들은 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그 편지에 의하면 칸은 서구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할 것이며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한 사라센과의 전쟁을 도울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칸, Guyuk Khan, 의 죽음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이 서신에 대한 응답으로 프랑스의 왕은 몽고의 사절들과 함께 가장 중요한 사절들을 보냈다. 그 사절단은 Longjumeau의 Andrew가 이끌어 갔다. 이 사절단은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된 어느 정도 합법적인 대표단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그럼에도 'Tartary'에 존재하던 많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확인은 서구를 격려했다. St. Louis의 편지를 가지고 갔던 Rubruck의 프란시스코 파의 수도사 William의 사절은 중국화되기 이전의 몽고 제국에 대한 충분하고도 참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몽고 제국 하에서의 경교에 대한 Rubruck의 묘사는 형편없는데 이는 어느 정도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경교도들은 이단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오래된 믿음이 Don 근처의 Golden Horde의 캠프에서부터 Monke의 궁전과 그 너머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발견했다. Balkash호수 근처에서 그는 거의 경교도들 만이 거주하는 마을을 통과하기도 했다. 이곳은 러시아과 몽고의 접경지대인데 징기스칸의 둘째 아들이었던 Chagatai에게 주어졌던 땅이었다. 징기스칸의 손자이며 네 번 째 칸이었던 Kubilai Khan 치하의 종교적인 정책은 관용적이었다. 칸의 궁전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그것은 칸의 어머니였던 Sorkaktani공주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너무 많이 평가되어서는 않된다. 사실 칸의 궁전에는 칸의 조언자로서 티벳(Tibet) 승(僧)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그의 제국에 있는 모든 종교를 포용했던 것이다. 1289년 교황 Nicholas 4세는 페르샤의 칸이었던 Argun에게만이 아니라 위대한 칸이었던 Kubilai와 중앙아시아에 있던 Ugadey의 집안의 마지막 대표자였던 Kaidu에게도 Monte Corvino의 John을 통해 편지들을 보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였다. 중국에서 그는 12년간이나 사역을 했다. 첫 5년 간 비록 몽고인들에 의해 제대로 취급받지 못했으나 결국에 1299년 북경에 교회를 짓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1307년 그는 교황 Clement 4세에 의해 북경(Khanbakik)의 대주교로 임명받게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는 몽고인들에 의해 주어졌던 기회들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에 실패했다. 그러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교에의 열정과 정신은 어떤 어려움과 난관에도 좌절되지 않았다. 주님은 기꺼이 그들과 함께 하셨으며 그의 왕국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셨다. 그들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몽고제국 시대동안의 선교이후 기독교는 15세기에 중국에 다시 소개되었다. 위대한 선교사, Francis Xavier는 중국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552년 죽고 만다. 1570년대 포르투갈은 명나라 시대 마카오에 항구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곧 그곳은 주교가 임명된다. 마카오를 통해 기독교는 중국에 다시 들어가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신교가 아닌 카톨릭 수도원 조직들에 의해 되어졌다. 첫 번째 선교사는 에수회 소속의 Matteo Ricci(1552-1610)였다. 그의 선교는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 그와 그의 동료 예수회 수도사들은 북경에 거주권을 갖게 되었다. Ricci의 죽음이후 그의 동료들은 제국의 궁전에서 공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이것이 궁전에서 경쟁자들로부터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 청나라로 정권이 바뀜에 따라 심각한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특히 황제, 강희제(康熙帝)의 통치 하에서 선교사들은 궁전으로부터의 호의를 즐기게 된다. (1692년 관용의 칙서가 황제에 의해 내려졌다.) 그 결과 다른 수도원 조직들, 즉 프란시스코파, 도미나칸파, 어거스틴파(Augustinian) 등도 중국에 그들 조직을 세울 수 있게 된다. 18세기가 시작할 때 기독교인들은 거의 모든 성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숫자는 20-30만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거의 한 세기동안 지속되었던 조상숭배와 그 의식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로마 교황청이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고 이 일이 황제를 격노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로마교황청은 중국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이 제사의식을 따르지 않도록 명령한다. (뒤에 20세기에 로마는 이 태도를 바꾸게 된다.) 그 결과 황제는 선교사들이 리치의 태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로마를 떠나도록 명령을 내린다. 1724년과 1736년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칙서를 내리게 된다. 중국에 대한 개신교의 선교는 18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마카오는 여전히 중국에서 포르투갈을 위한 발판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중국에서 제한적인 선교를 할 수 있었다. 광동지역은 중국에서 서구 상인들을 위한 유일한 항구로 허락되었다. 19세기 초 중국을 둘러싼 정치적인 상황은 점진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직 중국과 서구 사이에는 공식적이고도 외교적인 관계는 없었다. 1807년 London Missionary Society가 Robert Morrison을 중국에 파송한다. 그는 중국에 파송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20년을 보냈다. 그의 위대한 사역은 성경을 중국의 Wenli 어로 번역하고 6권의 중국어 사전을 발간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문은 마침내 서구에 의해, 특히 영국에 의해 강제로 열리게 된다. 그것은 불행한 사건, 즉 중국과 영국사이의 아편(阿片) 수입의 문제로 인해 야기된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전쟁은 1839년과 1842년 사이에 일어났다. 그리고 영국이 승리하게 되고 남경조약이 체결되어 그 결과 Canton, Amoy, Foochow, Ningpo, 그리고 Shanghai가 외국인 거주지로 개방되고 홍콩은 영국에 할양된다. 그 조약에 이어 중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는 선교사들의 권리가 주어지게 된다. 청나라와 청 황제의 몰락의 징조가 여러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1860년대는 반외세의 정신이 또한 팽배하던 시기였다. 주 예수의 ‘주’라는 발음과 돼지(저,猪)라는 발음이 유사했기 때문에 예수의 모습이 돼지로 묘사된 삽화도 등장하기도 했으며, 1, 2차 아편전쟁과 그 결과 체결된 불평등한 조약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분노하고 여러 곳에서 반외세 소요가 일어났다. 그 절정은 ꡐThe Boxerꡑs Rebellionꡑ으로 폭발한다. 그와 동시에 청나라와 청 황제의 쇠퇴의 증상이 여러 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1894년에서 1895년 사이에 청일 전쟁이 발발하고 중국은 패배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주목할 만한 단체는 Hudson Taylor 가 시작했던 China Inland Mission(중국내지선교회)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난이 그 절정에 달하던 1853년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1866년 5월 26일16명의 선교사들과 4명의 어린이들로 구성된 CIM 의 첫 번째 선교사 그룹이 4개월의 항해 끝에 중국 항주에 도착하게 된다. 1931년까지 200명으로 구성된 마지막 그룹이 중국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미국과 카나다에서 많은 젊은 일군들을 헌신하게 하였으며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사역했다. 1914년 무렵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로마 카톨릭의 경우 특히 프랑스의 파리 외인 선교회가 이끌었으며 이태리, 독일 그리고 스페인 등의 국가에서 온 선교 조직들이 이러한 진전을 이끌었다. 1914년 전체적인 외국인 선교사들의 숫자가 2,500여명이었고 1912년의 통계에 의하면 교인들의 숫자는 1,431,258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개신교의 경우 1914년 에 선교사의 숫자는 5,426명이었고 그 중 절반이 미국에서 왔으며 40%가 영국, 그리고 10%가 다른 유럽국가에서 왔다.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의 숫자가 25만 명 정도였으며 세례자는 30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Kenneth Scott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ity, vol .II, pp.1325-1326) 1921 상해의 어느 주택 2층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회합을 가졌는데 이곳에서 중국 공산당이 결성된다. 1926년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압도할 만큼 강해지게 된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Kangsi성에 설립되나 국민당의 공세에 밀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산서성 연안까지 대장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산서성 북부 연안에 그 수도를 두게 되며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후 결국 1949년 4월 남경에 있던 국민당 정부를 무너뜨리고 북경에 수도를 세우게 된다. 국민당 정부의 파멸은 하늘의 뜻이 부족했으며, 부패한 정부와 군, 그리고 무엇보다 공산주의자들의 토지개혁의 성공으로 인해 국민들의 마음을 빼았겼기 때문이었다. 중화 인민 공화국은15949년 10월 1일 출범한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서구와 중국 사이에 갈등을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1950년 가을에는 무수한 선교사들이 중국을 떠나게 된다. 1951년 말에 이르러 중국으로부터의 대 추방은 거의 끝나게 된다. 1951년 이후부터 중국교회와 서구와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게 되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게 되는 즈음의 중국교회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중화 성경회는 14개의 교구에76,741명의 교구민이 있었다. 루터교회는 The Hsin I 회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83,126명의 성도를 가지고 있었고 입문자가19,928명으로 합계가 103,054명이었다. The Church of Christ in China는 보다 폭 넓은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장로교와 개혁교회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회중(會衆)교회들과 영국 침례교, 카나다 연합교회, The United Brethren of Christ, 일단의 감리교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1949년의 그 회원수는 16,983명으로 보고되었다. 장로교는 3만 명으로 보고되었고 공산화 이후 감리교는 102,693명의성도를 가진 미국 배경의 Wei Li 공회와 44,140명의 성도를 가진 영국 배경의 Shun Tao 공회로 나누어지게 된다. 남침례교의 Chin Hsin 회는 65,000명의 성도들이 있었으며 북침례 배경의 Chin Li 회는 16,701명의 성도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내지 선교회의 후신인 Nei Ti회는 86,345명의 성도가 보고되었다.1949년 직전의 중국교회의 특징중의 하나는 중국의 토착 교회의 발전이었다. 1949년 경 외형적인 규모에 있어서 그들은 중국 교회의 25%에 달하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널리 펴져 있었던 파는 1917년 Paul Eei에 의해 세워진 True Jesus Church이었다, 그들은 10만 명의 성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큰 파는 Watchman Nyi 에 의해 세워진 ‘작은 무리들’(Little flock)인데 그들 스스로는Christian Meeting Places로 불렀으며 그 숫자는 7만 명에 달했다. 또한 Ching Tien-ying에 의해 시작된 Jesus Family가 있었는데 그들은 6천 명 정도 되었다. 1949년 경 13개의 기독 대학들에서 . 5만 명의 졸업생들이 배출되었고 그들 둥 대부분은 지금도 살아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있다. YMCA와 YWCA의 총무로 있던 Y.T.Wu와 Cora Deng, 그리고 Church of Christ in China의 총무로 있던 H.H. Tsui , 그리고 루터교 지도자였던 AiNien-san 등 몇 명의 상해지역의 교회지도자들이 수상으로 있던 주은래를 만나 새로운 국가 체제에 대해 어떻게 충성을 보일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했다. 북경에서 그들은 감리교 감독이었던 Z. T. Kaung과 Yunchi대학 공대 교수였던 T.C. Chao등 북쪽 교회 지도자들과 합류하게 된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ꡐ기독교 고백ꡑ이다. 이 회합이후 광범위한 비판을 받으며 최종적으로 1959년 7월ꡐ새로운 중국의 건설에 있어서 중국 기독교를 위한 노력을 위한 지침ꡑ이라는 제목 하에 기독교 고백이 발간되어 나온다. 9월에 접어들면서 이 고백서에1,537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서명을 하게 되고 1, 2년 후에는 중국의 성도들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400,000명이 서명을 하게 된다. 1950년 교회에 속해 있던 모든 학교, 병원, 그리고 고아원들이 어떠한 보상도 없이 정부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그 가치는 수백만 달러에 해당했다. 교회에 남겨진 유일한 조직체들은 신학교와 성경학교들, 그리고 기독교 출판 기관들만 남게 된다. 이일을 위해 삼자 개혁 운동(The Three Self Reformation Movement)가 준비되었다. 삼자란 자급(self-support),자치(self-government), 자전(self-propagation)의 중국어 약어에서 나온 말이다. 1951년 4월에는 북경에서 기독교에 관해 고발하는 모임의 형식을 논의하는 15인의 수련회와 함께 고발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육가들에 대한 교화와 참여를 통한 교화가 바로 뒤따랐다. 중국의 공산화 이후 첫 공식적인 자유세계 교회로부터의 방문은 1956년 11월 감독 Robin Chen의 초청에 대한 응답으로 오스트렐리아(Australia)의 성공회 감독이었던 Howard W. K. Mowell 의 방문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비록 우리가 1960년대 이후의 중국교회사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중국교회와 관련해서 몇 가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중국의 공산화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중국은 방대한 나라였으며 지방의 많은 곳에는 여전히 공산화를 저항하는 세력들이 있었는데 이 세력을 찾아내어 제거하기 위해 약간의 자유를 허용하는 조치가 1950년대 말에 취해지게 된다. 바로 백화운동이 그것이었다. 이 조치는 먼저 어느 정도의 언론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어 점차 많은 사람들이 공산정부를 비판하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되며 이러한 일련의 자유 이후 공산 정부는 공산화를 저항하는 세력들을 파악해서 제거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70년대 문화대혁명을 통해 내부의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대 변혁의 시기를 겪게 되는데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결국 많은 종교세력도 함께 반 공산화의 세력으로 박해를 받게 되는데 가장 큰 피해는 바로 유교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왕조들의 부침 속에서도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세력이었으며 기독교의 확대를 경계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야기 시키기도 했던 세력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의 강력한 박해 속에서 이들은 그 세력을 거의 잃게 된다. 기독교도 함께 박해를 받았으나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오랜 동안 영향력을 갖고 있던 유교주의가 사라진 그 공백을 기독교가 급속히 대체해 가고 있었다. 박해 속에서, 혹은 박해를 피해 중국에 흩어진 무명의 전도자들에 의해 복음은 퍼져갔으며 성령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신학교도, 선교사도, 교회도, 체계화된 선교 전략도 없던 이 위대한 나라에 그 분의 능력으로 큰 부흥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흥의 궁극적 목적은 이 위대한 나라, 오랜 동안 미루어져 왔던 세계 선교를 위해 중국을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그 분의 계획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I. 토착화(土着化, contextualization)의 문제 7세기 이후 기독교는 중국으로 들어가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 왔다. 여러 세기에 걸친 수고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매 세기마다 가장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해야만 했다. 비록 시시로 박해가 있었으나 그러나 중국에서 그것은 선교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 감추어져 있던 장애물을 배우기 위해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토착화의 문제였다. 1. 반(反)외국주의 비록 역사적으로 많은 다른 종족들에 의해 정복당했으나 중국은 다른 외국나라들에 의해 완전히 흡수되어진 적은 없었다, 중국을 정복했던 모든 다른 종족들은 결국 중국과 중국의 문화 속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그리고 중국의 문화 한 가운데에는 언제나 유교가 있었다., 청조의 한 황제였던 Yung ­ cheng은 1727년 내려진 칙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ꡒ그리하여 불교도(佛敎徒)와 도교도(道敎徒)들은 서양 종교를 헐뜯고, 서양인들은 불교와 도교의 거짓됨에 대해 불신을 쌓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중상하며 서로의 이단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고 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나에게 동의하는 모든 것은 정통적인 것이 되나 나와 다른 모든 것은 . 이단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말하기를ꡐ이단적인 것을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해로운 것이다ꡑ고 했다. 그러나 공자는 그러기에 그 자신과 다른 모든 가르침과 행함을 이단적인 것이라고 힐난했는가? …유교 주의자들은 초기 왕들의 길을 살피고 현자와 덕스러운 전형들에 관한 가르침들을 연구한다. 그들 모두는 백성들에 의해 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ꡓ(Paul A. Cohen, China and Christianity, pp.13,14)Paul A. Cohen은 앞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ꡒ이 연구에서 보듯 이단적인 것과 반(反) 이단적인 것들의 전통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념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특징들의 정체성이 가설되어 질 수 있다. 첫째로 그 용어의 내용과 의미는 역사적인 맥락이나 개인적인 편견에 의해서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ꡐ이단성ꡑ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분명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Yung-cheng황제의 시도조차 그가 인식하고 명령을 내렸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에 의해 손상되었다. 왜냐하면 표면상으로는 모든 가르침 속에는 선의 요소가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나 마지막분석에서 선을 측정하는 그의 기준은 그 시대 중국인들의 선입견에 일치하고 그 논조에 있어서 유교주의자의 것으로 보인다. ꡒ(p.15) 7세기 첫 경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 왔을 때 그들은 중국에서 세 개의 중요한 종교와 만나게 되었다. 즉 불교, 도교, 그리고 유교가 그것이다. 그러나 9세기에 경교는 사라졌다. 그리고 이러한 경교의 소멸의 가장 주된 이유가 반 외국주의였다. 경교의 소멸에 대한 이유들에 대해 Samuel Hugh Moffet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교의 소멸에 대한 첫 번째 이유는 9세기에 기독교에 가해 졌던 박해였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특별히 반기독교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력한 황제들의 계승으로 인해 국가적 연합이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 자라나던 분파적인 종교 경쟁과 증가하는 외국에 대한 혐오 등에 어느 정도 기인하고 있었다. 대체로 관용적이었던 당 나라시대의 전 역사에 있어서 가장 격렬했던 종교적인 박해는 840년에서 846년 사이의 미신적인 황제였던 Wu-tsung의 통치시절 일어났다. 이 박해는 소위 유교주의자들에 의해 외국 종교라고 이름 붙여진 즉 먼저는 불교도들에 대해, 그리고 마니교와 기독교도들에 대해 주어졌던 것이었다. 후일에 일단의 선교사들이 몽고 시대와 청 나라시대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유교 계급이 황제의 궁정에 넘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몽고의 황제였던 Kubilai는 유교주의자들을 다루는 데 매우 조심스러웠으며, 그의 초기 중요한 조언자들은 대부분 유교주의자들이었다. 한 유교 자문관이 황제에게 유교주의자들의 충성을 확신시켰을 때, 황제는 20명의 유교 학자들을 그의 통치그룹의 중심에 포함시켰다.(Samuel Hugh Moffet,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p.305) 16세기 Matteo Ricci가 중국에 도착했을 때 유교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인들과 유교 고전을 부지런히 배워 그것들에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학자들과 대중들로 하여금 유교주의와의 완전한 단절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유교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되어지는 용어들을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할 때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유교주의자들과 다른 조직들 사이의 논쟁은 중국에서의 기독교인들의 삶에 있어서 유교의식들에 관한 것들이 주된 논점이었다. 19세기 초 개신교 선교가 중국에서 시작될 때 주된 반대는 유교 학자 계급에서 나왔다. 그들은 중국에서 대체로 영향력 있는 무리들이었다.Paul A. Cohen은 그의 글 China and Christianit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ꡒ19세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중국의 교육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적극적이던 소극적이던 기독교를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소극적으로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차갑고도 무관심하게 대했으며 외국 종교를 포용한 학식 있는 계층이나 관리들은 극히 소수였다. 적극적으로는 사람들을 자극하는 강한 반 기독교적인 문서들을 저술하거나 퍼뜨림으로 그들의 적개심을 표현했다. 또한 기독교 선교사들을 넘어지게 할 수많은 장애물들을 만들기도 하고 기독교를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복의 위협을 가하기도 하며 전도자들에 대해 반 기독교적인 폭동에 가담하거나 직접적인 부추김을 통해 적대적으로 대했다. 중국인들 가운데서 반 기독교적인 감정은 어느 정도는 서구의 식민주의자들이나 잇달은 서구와의 전쟁에서의 패배에 이은 불평등한 조약들에 기인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어떤 선교사들은 이러한 불평등한 조약들과 기독교의 선교를 보장해 주는 권리들을 기뻐했다. 그러한 선교사들은 사업적인 이익에 있어서는 견해가 완전히 일치했다. 그 조약들은 불평등하지 않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종들에게 그 나라의 문을 여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Richard W. Van Alstyne, The United States and East Asia, p.118) 그런 까닭에 공산주의자들은 유교에 적대적이 된다. 왜냐하면 유교야말로 공산혁명의 과정에 있어서 지적 장애물이란 사실을 그들은 후에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Te Sheng Meng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ꡒ분명히 공자와 유교주의들은 중국 역사에 있어서 중국의 지적계급의 구성원들이었다. 공자가 지식계급층의 시발자(始發者)였고 유교학교의 설립자였기 때문에 그는 중국의 지적 계급의 지도자라고 불리우고 있다.“(Chinese Communism vs Confucianism, pp.27,28) Paul A Cohen이 말한 것 같이 기독교는 유교의 기초 위에 세워진 중국문화를 위협하는 외국 종교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ꡐ반기독교ꡑ하는 용어는 종종 ꡐ반외세(反外勢)ꡑ라는 용어와 같이 사용되어 지고 이러한 현상은 바로 이런 특별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Paul A Cohen, China and Christianity, p.60) 유교는 중국인들에는 일종의 종교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중국인의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Te Sheng Meng이 말한 것 같이 유교는 한나라 시대 이후 중국문화의 기초였으며 중국인들의 사고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중국에서의 유교의 실체를 배우는 데 많은 시간과 값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했으며 그것을 극복하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 공산혁명의 완수를 위해1960년대 와 70년대 백화운동과 문화대혁명의 과정 속에 종교를 공격하게 되며 그 와중에 중국의 유교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고 이러한 정신적인 공백을 부활과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가 신속하게 메우게 되어 놀라운 부흥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2. 토착화의 문제 선교사들이 특히 서구로부터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곧 그들이 문화적으로만이 아니라 신체적인 외모에서도 다르다는 사실은 깨달았다. 그들의 신체적인 외모-푸른 눈, 금발의 머리카락, 그리고 흰 피부-는 무식한 농민들로 두려워서 움쩍도 못하게 만들었다. 보다 나은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그들을 ꡐ서양 귀신ꡑ들이라고 불렀다. 지식 계급에게 있어서는 기독교를 공공연히 경멸했는데 왜냐하면 민중들의 서구에 대한 기댐으로 인해 백성들에 대한 그들의 권력과 지도자로서의 특권에 대한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해서 중국에서의 기독교의 존재에 대해 싸웠던 것이다.(J Herbert Kane, Understanding Christian Missions, p.200) 최초의 경교 선교사였던 알로펜(Alopen)이 중국에 도착하기 십 여 년 전에 중국 당나라 시대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불교는 외국의 것이며 반 중국적이라는 유교주의자들의 쟁론을 받아들여 불교는 쇠퇴하게 된다. 626년에 내려진 황제의 칙서(勅書)는 도교 사원과 불교도들의 감축과 불교승려들의 세속화(世俗化)를 명령하고 있다. 동일한 정책이 기독교에도 적용되었다. 간혹 관용의 시기가 있었다. 638년 첫 경교 교회가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 세워졌다. 638년 이후 중국의 중요한 도시들에 수도원들이 설립되도록 허락되었다. 고대의 비문에 의하면 ꡒ그 종교는 10여 개의 성으로 퍼졌고…수도원들은 백 여 개의 도시에 넘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교 선교사, 알로펜(Alopen)은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도록 요청 받았는데 여러 명의 중국학자들의 도움으로 그는 그것을 끝냈으며 그 번역본의 제목은 ꡐ메시야, 예수의 경전ꡑ이었다. 비록 경교의 선교사들이 수도원들을 세우고 경전을 번역했으나 그들은 몇 가지의 요인들에 의해 점차 소멸해 갔다,. 그들의 고국으로부터의 적은 지원과 신학적 부패와 더불어 중국의 핵심 집단, 특히 유교주의자들로부터 외국종교 혹은 외국 사상이라는 비판을 극복해야만 했었다. 7세기에 중국의 경교회 안에는 중국인 성직자가한사람도 없었다. 중국에 있던 21명의 수도사들은 모두 페르샤인들이었다. (Samuel Hugh Moffet,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p.293, 303) 몽고제국시대로마 카톨릭 교회는 서방과 교회의 안전을 위해 교황의 사절단으로 수도사들을 보냈다.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은 정치적인 사절단들이었으며 선교사들은 아니었다. 몬테코르비노(Monte Corvino)의 존(John)은 1249년에 중국에 도착해11년 동안 수천 명의 회심(回心)자들을 얻었고 150여명의 신학생들을 훈련시켰다. 1330년 그가 죽었을 때 중국에는 10만 여 명의 회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몽고제국을 멸망시켰을 때 명나라는 몽고의 지배자들과 함께 선교사들을 추방시키고 만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16세기 후반에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중국인 학자 같은 모습으로 보여 지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성경을 번역할 때 ꡐ천(天)ꡑ이나 ꡐ상제(上帝)ꡑ같은 유교적인 용어를 채택했다. 그는 가족생활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조상숭배의 의식들이나 사당에서 드려지는 제사들이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여전히 가족들의 충성된 회원이고, 관리이며 그리고 유교학자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비록 그의 태도가 후에 다른 선교사들에 의해 비 성경적인 것으로 비판의 표적이 되고 로마교황청에 의해 금지되었다 하더라도 (나중에 그 명령은 바뀌게 되었다.) 그는 복음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한 선교사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 황제 강희제(康熙帝)는 리치(Ricci)의 태도에 호감을 갖고 만약 선교사들이 중국에 남기를 원한다면 공식적인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이는 선교사들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태도를 따라야만 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문제의 어떤 부분은 매우 민감한 신학적인 문제와 연관되어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우리들에게 주목받아야 할 것이다. 19세기의 위대한 영적 각성의 경험과 함께 중국에 대한 개신교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토착화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1855년 8월의 어느 저녁 그는 중국의 한 이발소에 가서 중국인의 머리 스타일로 그의 머리를 바꾼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는 중국인의 복장으로 차림을 한다. 이 사건은 1854년에서 1855년까지의10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 직후에 되어진 일이었다. 물론 단지 머리스타일을 바꾸고 의복을 입는 것만이 토착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중국인들의 눈에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일이었다. 19세기 후반 서구와의 전쟁과 전쟁의 결과로 체결되었던 불평등한 조약들에 의해 중국에서 반외세가 절정에 달하게 된다. 또한 ꡐ태평천국의 난ꡑ의 지도자 역시 개신교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이것이 중국정부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일부의 선교사들은 불평등 조약에 의해 주어져 있던 중국 내에서의 권리를 사용함으로 중국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보여 주기도 했다. 비록 모든 선교사들이 그런 태도를 보여 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20세기에 공산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았든지 아니든지 간에 중국의 국수주의자들은 선교사들을 불평등조약의 수혜자(受惠者)로 공격했던 것이다. 20세기 중국은 큰 혼동과 새로운 혁명에 휩싸이게 된다. 1911년 10월 10일 저녁 한 혁명적인 그룹이 우창(Wuchang)을 함락시킨다. 이것이 혁명의 시작이었으며 만주족의 권력의 붕괴가 곧 뒤따랐다. 1911년 12 월 29일 순 타첸(Sun Tatsen)이 새 공화국의 첫 임시 대통령에 선출된다. 그리고 그는 중국 백성들을 위한 3개의 원칙을 선포한다. 즉 , 백성들을 위한 권력, 백성들을 위한 생활, 그리고 민족주의가 그것이었다. 1921년 7월 상해(上海)에서 첫 중국 공산당 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는 호남성에서 온 젊은 마오쩌둥(毛擇東)을 포함해서 12명이 모였다. 장제스( 張介石)은 몇 차례의 군사적인 성공 후 1927년 4월 18일 남경에 그의 정부를 수립한다. 그리고 1949년 4월 23일까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는 군사적인 충돌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오쩌둥이 북경에서 새로운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음을 선포하게 된다. (Rafe De Crespigny, China This Century, pp.182-183) 20세기 초반 중국 교회는 몇 개의 영역에서 진전을 이루었다. 첫째 , 중국교회는 비록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산동성을 비롯한 몇 군데에서 지속적인 부흥을 경험했다. 둘째, 중국교회는 그들 자신의 토착적인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해 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영적인 능력과 믿음을 보여 주었다. 왕 밍타오(Wang Ming-tao), 웟치맨 니(Watchman Nyi), 그리고 양 쌰오탕(Yang Shaotang) 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셋째, 중국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등과 같은 선교조직들이 1920년대에 3자 정책, 즉 ꡐ자치, 자립, 자전ꡑ등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950년대 중국 공산당 정부가ꡐ3자 운동ꡑ을 선포하기 전에 그것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삼자(三自) 정책은 진실로 중국교회가 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야만 했던 것들이었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던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 이것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너무나 역설적인 일이었으며 그 방법이 중국 속에서 그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시는 그분의 경륜과 섭리였던 것이다. 넷째, 일단의 토착적인 중국교회가 나타났다.폴 웨이(Paul Wei) 가 만들었던 참된 예수교회(True Jesus Church), 웟치맨 니(Watchman Nyi)가 조직했던 적은 무리들(Little Flock), 칭티엔 잉(Ching Tien-ying)이 만들었던 예수 가족(Jesus Family)등이 그것이다. 1949년 그들은 수적으로는 중국 개신교의 25%에 해당할 만큼 성장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가올 공산주의자들의 시대를 위해 중국의 교회들을 위한 그의 길을 준비시켰던 것이다. 결론 중국교회는 1,5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의 시기마다 중국교회는 박해(迫害),반외세( 反 外勢), 안팎으로부터의 비판, 신학적인 변질의 위험, 그리고 추방 등의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때때로 하나님 나라의 진전과 확산을 기뻐했으며, 때때로 교회의 파괴를 바라보며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중국에 세우는 일에 결코 너무 서두르지도 너무 늦으시지도 않으셨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중국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또한 중국에 있는 그의 교회를 결코 버리시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그의 계획을 위해 모든 환경을 사용하셨으며 공산주의까지도 사용하셨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중국교회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중국에서 그분께서 그분의 교회를 위해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 있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21세기에서 중국에 있는 그분의 백성들을 위한 더 많은 찬양과 놀라운 계획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일 것인데 곧 중국교회가 열방을 향해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교회가 되리라는 확신이다. 이 일은 이미 시작되고 있으며 누구도 그 분이 행하시는 그 일을 좌절시키지 못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사명중의 하나는 중국교회가 더욱 성장하여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감당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될 것이다. 선교는 역사의 뒤로 사라져 갔으나 교회와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여전히 살아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멘.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2004-03-11 10:36:46 read : 15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성격을 띤 최초의 학교는 아펜셀라 선교사에 의하여 세워진 배제학당이다. 1885년 8월 3일 아펜셀라 목사가 이겸라 고영필 의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공부를 개시한 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이며 이는 한 국 현대 교육사상 영원히 기념할만한 뜻있는 날이 되었다. [나는 지난 8월 3일 이겸나와 교엉필이라고 하는 한국인 두사람으로 학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병원에서 스크랜튼 박사를 만났으며 의사가 되 기를 희망하여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들어왔다. (H.G.Appenreller,Fifty of Educational Work. Light to all in the house, 1934) 배제학당은 다음해 6월 8일에 감리교 재한선교회로부터 7명의 학생으로기 독교학교로서의 개교를 공인받았다. 그후 학교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았으 며 1887년에 학생이 67명이나 되었고 한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붉은벽덜을 사 용하여 서양식 새 건물을 건축하였다. 웨렌 (H.W.Warren) 감독에의하여 성 대한 봉헌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그는 [한국인에게 주는 미국의 큰 선물 ]이라는 말로 축사하였다. (Charles A.Sauer, Within the Gate comprising the Addresses delivered at the Fifteen Anniversary of Korean Methodism First Church, The Ko-rean Methodist News Service,1934,p.85). 고종 국왕은 배재학당 출신을 정부에서 등용할 것을 약속하였고 [배제학 당] 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고 명필가 정학교에게 간판을 쓰게하고 외무아 문 의 김윤식을 기켤 아펜셀라 목사에게 교육방침으로 두가지의 중점을두었 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게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립정신을길러주는 데 있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돼야 한다 는 성서의 교훈을 살려 한학자 조한규로 한역케한 를 교훈으로하였다. 학교안에는 자조부 Selfhelp Department)를 두어 각자의 노력에따라 번 돈으로 수업료를 납부케하는 제도를 만들어 근로와 자립정신을길러주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6년 봄, 서울 정동에 남자 기숙학교를 열 고 언더우드 학당이라 이름하였다.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불러들여공 동으로 숙식하면서 인격 형성과 신앙생활을 터득케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 다. 언더우드 목사의 큰 꿈은 여기에서 교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사회지 도자를 양성하는 기독교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평양에 신학교가 서면서 그뜻은 무너졌다. 그렇기는 하나 1914년 동교내에서 고고 의 소리를 발한 [조선기독교대학]은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하여 그 계 획은 한부분은 실현되었다. 언더우드목사의 고아원 시작은 한국에서의 고아사업의 처음이 되었다. 교 육하는 일은 언더우드목사가 직접 하였고 고아사업은 그의 부인이 맡아 하 였다.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성의와 봉사는 놀라우리만큼 희생적이었으구아 들가운데도 도망치는 학생도 있었고 그녀를 심히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그 수는 늘어나 1890년 9월에는 25명이 되었다. (Mrs Underwood`s Le-tter to A.T.Pierson, December,1890,P 943) 언어우드목사의 교육방침은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그 는 학생들에게 청소하고 밥짓는 일, 심부흠하는 일을 비롯하여 자신적으로 근로하는 습관을 터득케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1890년 마펫 (S.A.Moffett)목사가 후임교장이 되었고 그는 학교이름을[예 수교 학당]이라고 고쳤다. 그는 커리큐럼에 있어서 고아원에서 학교 형태로 바꿨으며 교명에 부합하게 성서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주일에는 예수교 학 당 전체가 주일 학교가 된 감이 있었따. 1901년 게일 (J.S.Gale)목사가 교 장이 되면서는 구세학당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뒤 발전을 거듭하여 경신학교 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 제 목 : 한국 교회사 ( 이화학당과 연동여학당 ) 남자를 위하여 세운 배재학당과 쌍벽을 이루어 여자들을 위한 학교로 이 화학당이 섰다. 이화학당은 배재학당보다 몇달 늦게 1886년 5월31일미국 감 리교 여선교회에서 파송한 스크랜튼 (Mary F.Scranton) 여사에의하여 개교 되었다. [학교 사업은 6개월 전에 아들 스크랜튼 박사의 집에서 한사람을 데리고 시작하였다. 그 학생은 정부 고가간의 소실이었으며 왕후의 통역관이 되려 는 희망을 가지고 영어를 배우러 왔던 것이다. 그러나 김부인은 3개월만 공부하고 중단하고 말았다] (Mari F,Scranton,Woman`sWork in Korea,1896) 그 다음에 온 학생도 어머니가 찾아와 딸을 데려가려 함으로 서약서를써 주면서 여러모로 설득하여 겨우 안심시켜 머물러있게 하였다. 그 학생은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찾아온 아이였다. 1886년 한명의 여학생으로 시작된 이화학당은 1887년 7명으로 증가하였고 1888년에 18명의 학생으로 발전하 였다. 스크랜튼 부인은 한국에 있어서 불교와 유교의 전통의식으로 멸시와천대 받고있는 여성들에게 남자와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마음먹었다. 여학생들을 가르치는 스크랜튼 부인의 교육이념이나 매우 철저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사는 환경속에서 가정부인으로서 모범이 되게하 며 또한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신앙의 사람이 되 게하는데 있었다] (G,W.Gilmore,Korea from It`s Capit-al, P,232) [나는 학생들을 서양인의 생활양식과 의복제도를 따르게 하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한국사람을 가장 훌륭한 한국사람을 가장 훌륭한 한국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따라 교 육하려고 힘쓰는 것뿐이다] (The Godpel in All Lands for 1888,P.373) 그녀는 항상 이러한 정신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또 이것이 초창기 이화 의 정신이었다. 처음의 학과목은 영어, 산수, 한국,창가, 역사, 서도등이 었다. 1887년에는 국왕과 정부로부터 정식의 학교 인가를 받았고 명성황후는이 화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그것을 기록한 편액을 하사하였다.이와같은황실 의 배려와 후원은 이화학당을 위하여 영광이 되었고 여성교육 전개를 위하 여 계몽과 격려로서 상당한 효과를 나타냈다. 장로교 선교회에서의 여자를 위한 교육사업은 엘러스(Anni J.Ellers)양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1886년 늦은 가을부터 한명의 여자 고아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선교회 후원을 받게되었고 또 한국정부의 인정도받았다. 이 교육기관은 1889년에 하이든 (Mary E. Hayden)선교사에게 그리고 1890년 도부터는 도티(S.A.Doty) 선교사에게 인계되었다. 학교에서는 신학문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훌륭한 가정 주부가 되게하고 착실한 기독교인 양성에 목표를 두었다. [연동 여학당의 학도가 지금 20명 인데 학교 규칙인즉 비단 학문만 가르쳐서 발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으로 하는 공부와 힘으로 하는 공부를 다하게 하는데 음식만드는 일과 바느 질하는 일과 국문과 국문습자와 성경을 날마다 외워야 하는 공부와 산술과 지리와 역사와 한문과 화학과 간혹 체조 운동하는 공부이다](그리스도 신 문, 6권,15호,1902년 4월 11일) [The do as much as possible of their own Work,learn to cook and tosew in Korea fashion, are taught no English,..and we only seek to make Christian Koreans of them,not American ladies] (L.H.Underwood`sletter to A.T.Pierson, December,1890,P943)위에서 보는 대로 학과목으로음악,산술, 지리, 역사, 한문, 습자 화학등이 있었으며 또 요리와 재봉,체육과목이 있었으나 영어는 가르치지 않았다. 1895년 연지도로 교사를 옮겨 연동여학교란 이름이 붙었고 (조선예수교장 로사기, 상권 81쪽) 이것이 정신여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2004-03-11 10:34:05 read : 11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성격을 띤 최초의 학교는 아펜셀라 선교사에 의하 여 세워진 배제학당이다. 1885년 8월 3일 아펜셀라 목사가 이겸라 고영 필 의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공부를 개시한 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이며 이는 한국 현대 교육사상 영원히 기념할만한 뜻있는 날이 되었다. [나는 지난 8월 3일 이겸나와 교엉필이라고 하는 한국인 두사람으로 학 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병원에서 스크랜튼 박사를 만났으며 의사 가 되기를 희망하여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들어왔다. (H.G.Appenreller, Fifty of Educational Work. Light to all in the house, 1934) 배제학당은 다음해 6월 8일에 감리교 재한선교회로부터 7명의 학생으로 기독교학교로서의 개교를 공인받았다. 그후 학교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 았으며 1887년에 학생이 67명이나 되었고 한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붉은벽 덜을 사용하여 서양식 새 건물을 건축하였다. 웨렌 (H.W.Warren) 감독에 의하여 성대한 봉헌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그는 [한국인에게 주는 미 국의 큰 선물]이라는 말로 축사하였다. (Charles A.Sauer, Within the Gate comprising the Addresses delivered at the Fifteen Anniversary of Korean Methodism First Church, The Ko- rean Methodist News Service,1934,p.85). 고종 국왕은 배재학당 출신을 정부에서 등용할 것을 약속하였고 [배제학 당] 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고 명필가 정학교에게 간판을 쓰게하고 외무 아문 의 김윤식을 기켤 아펜셀라 목사에게 교육방침으로 두가지의 중점을 두었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게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립정신을 길러주는데 있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성서의 교훈을 살려 한학자 조한규로 한역케한 를 교훈으로 하였다. 학교안에는 자조부 Selfhelp Department)를 두어 각자의 노력에 따라 번 돈으로 수업료를 납부케하는 제도를 만들어 근로와 자립정신을길 러주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6년 봄, 서울 정동에 남자 기숙학교를 열 고 언더우드 학당이라 이름하였다.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불러들여 공동으로 숙식하면서 인격 형성과 신앙생활을 터득케 하려는 것이 목적이 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큰 꿈은 여기에서 교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사 회지도자를 양성하는 기독교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평 양에 신학교가 서면서 그뜻은 무너졌다. 그렇기는 하나 1914년 동교내에 서 고고의 소리를 발한 [조선기독교대학]은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하 여 그 계획은 한부분은 실현되었다. 언더우드목사의 고아원 시작은 한국에서의 고아사업의 처음이 되었다. 교육하는 일은 언더우드목사가 직접 하였고 고아사업은 그의 부인이 맡아 하였다.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성의와 봉사는 놀라우리만큼 희생적이었으 구아들가운데도 도망치는 학생도 있었고 그녀를 심히 괴롭혔다. 그러면서 도 그 수는 늘어나 1890년 9월에는 25명이 되었다. (Mrs Underwood`s Le- tter to A.T.Pierson, December,1890,P 943) 언어우드목사의 교육방침은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그 는 학생들에게 청소하고 밥짓는 일, 심부흠하는 일을 비롯하여 자신적으 로 근로하는 습관을 터득케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1890년 마펫 (S.A.Moffett)목사가 후임교장이 되었고 그는 학교이름을[ 예수교 학당]이라고 고쳤다. 그는 커리큐럼에 있어서 고아원에서 학교 형 태로 바꿨으며 교명에 부합하게 성서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주일에는 예 수교 학당 전체가 주일 학교가 된 감이 있었따. 1901년 게일 (J.S.Gale) 목사가 교장이 되면서는 구세학당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뒤 발전을 거듭하 여 경신학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2004-03-11 10:34:05 read : 12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성격을 띤 최초의 학교는 아펜셀라 선교사에 의하 여 세워진 배제학당이다. 1885년 8월 3일 아펜셀라 목사가 이겸라 고영 필 의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공부를 개시한 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이며 이는 한국 현대 교육사상 영원히 기념할만한 뜻있는 날이 되었다. [나는 지난 8월 3일 이겸나와 교엉필이라고 하는 한국인 두사람으로 학 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병원에서 스크랜튼 박사를 만났으며 의사 가 되기를 희망하여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들어왔다. (H.G.Appenreller, Fifty of Educational Work. Light to all in the house, 1934) 배제학당은 다음해 6월 8일에 감리교 재한선교회로부터 7명의 학생으로 기독교학교로서의 개교를 공인받았다. 그후 학교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 았으며 1887년에 학생이 67명이나 되었고 한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붉은벽 덜을 사용하여 서양식 새 건물을 건축하였다. 웨렌 (H.W.Warren) 감독에 의하여 성대한 봉헌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그는 [한국인에게 주는 미 국의 큰 선물]이라는 말로 축사하였다. (Charles A.Sauer, Within the Gate comprising the Addresses delivered at the Fifteen Anniversary of Korean Methodism First Church, The Ko- rean Methodist News Service,1934,p.85). 고종 국왕은 배재학당 출신을 정부에서 등용할 것을 약속하였고 [배제학 당] 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고 명필가 정학교에게 간판을 쓰게하고 외무 아문 의 김윤식을 기켤 아펜셀라 목사에게 교육방침으로 두가지의 중점을 두었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게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립정신을 길러주는데 있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성서의 교훈을 살려 한학자 조한규로 한역케한 를 교훈으로 하였다. 학교안에는 자조부 Selfhelp Department)를 두어 각자의 노력에 따라 번 돈으로 수업료를 납부케하는 제도를 만들어 근로와 자립정신을길 러주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6년 봄, 서울 정동에 남자 기숙학교를 열 고 언더우드 학당이라 이름하였다.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불러들여 공동으로 숙식하면서 인격 형성과 신앙생활을 터득케 하려는 것이 목적이 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큰 꿈은 여기에서 교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사 회지도자를 양성하는 기독교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평 양에 신학교가 서면서 그뜻은 무너졌다. 그렇기는 하나 1914년 동교내에 서 고고의 소리를 발한 [조선기독교대학]은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하 여 그 계획은 한부분은 실현되었다. 언더우드목사의 고아원 시작은 한국에서의 고아사업의 처음이 되었다. 교육하는 일은 언더우드목사가 직접 하였고 고아사업은 그의 부인이 맡아 하였다.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성의와 봉사는 놀라우리만큼 희생적이었으 구아들가운데도 도망치는 학생도 있었고 그녀를 심히 괴롭혔다. 그러면서 도 그 수는 늘어나 1890년 9월에는 25명이 되었다. (Mrs Underwood`s Le- tter to A.T.Pierson, December,1890,P 943) 언어우드목사의 교육방침은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그 는 학생들에게 청소하고 밥짓는 일, 심부흠하는 일을 비롯하여 자신적으 로 근로하는 습관을 터득케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1890년 마펫 (S.A.Moffett)목사가 후임교장이 되었고 그는 학교이름을[ 예수교 학당]이라고 고쳤다. 그는 커리큐럼에 있어서 고아원에서 학교 형 태로 바꿨으며 교명에 부합하게 성서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주일에는 예 수교 학당 전체가 주일 학교가 된 감이 있었따. 1901년 게일 (J.S.Gale) 목사가 교장이 되면서는 구세학당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뒤 발전을 거듭하 여 경신학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2004-03-11 10:34:05 read : 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성격을 띤 최초의 학교는 아펜셀라 선교사에 의하 여 세워진 배제학당이다. 1885년 8월 3일 아펜셀라 목사가 이겸라 고영 필 의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공부를 개시한 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이며 이는 한국 현대 교육사상 영원히 기념할만한 뜻있는 날이 되었다. [나는 지난 8월 3일 이겸나와 교엉필이라고 하는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2004-03-11 10:34:05 read : 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성격을 띤 최초의 학교는 아펜셀라 선교사에 의하 여 세워진 배제학당이다. 1885년 8월 3일 아펜셀라 목사가 이겸라 고영 필 의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공부를 개시한 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이며 이는 한국 현대 교육사상 영원히 기념할만한 뜻있는 날이 되었다. [나는 지난 8월 3일 이겸나와 교엉필이라고 하는 한국인 두사람으로 학 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병원에서 스크랜튼 박사를 만났으며 의사 가 되기를 희망하여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들어왔다. (H.G.Appenreller, Fifty of Educational Work. Light to all in the house, 1934) 배제학당은 다음해 6월 8일에 감리교 재한선교회로부터 7명의 학생으로 기독교학교로서의 개교를 공인받았다. 그후 학교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 았으며 1887년에 학생이 67명이나 되었고 한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붉은벽 덜을 사용하여 서양식 새 건물을 건축하였다. 웨렌 (H.W.Warren) 감독에 의하여 성대한 봉헌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그는 [한국인에게 주는 미 국의 큰 선물]이라는 말로 축사하였다. (Charles A.Sauer, Within the Gate comprising the Addresses delivered at the Fifteen Anniversary of Korean Methodism First Church, The Ko- rean Methodist News Service,1934,p.85). 고종 국왕은 배재학당 출신을 정부에서 등용할 것을 약속하였고 [배제학 당] 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고 명필가 정학교에게 간판을 쓰게하고 외무 아문 의 김윤식을 기켤 아펜셀라 목사에게 교육방침으로 두가지의 중점을 두었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게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립정신을 길러주는데 있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성서의 교훈을 살려 한학자 조한규로 한역케한 를 교훈으로 하였다. 학교안에는 자조부 Selfhelp Department)를 두어 각자의 노력에 따라 번 돈으로 수업료를 납부케하는 제도를 만들어 근로와 자립정신을길 러주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6년 봄, 서울 정동에 남자 기숙학교를 열 고 언더우드 학당이라 이름하였다.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불러들여 공동으로 숙식하면서 인격 형성과 신앙생활을 터득케 하려는 것이 목적이 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큰 꿈은 여기에서 교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사 회지도자를 양성하는 기독교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평 양에 신학교가 서면서 그뜻은 무너졌다. 그렇기는 하나 1914년 동교내에 서 고고의 소리를 발한 [조선기독교대학]은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하 여 그 계획은 한부분은 실현되었다. 언더우드목사의 고아원 시작은 한국에서의 고아사업의 처음이 되었다. 교육하는 일은 언더우드목사가 직접 하였고 고아사업은 그의 부인이 맡아 하였다.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성의와 봉사는 놀라우리만큼 희생적이었으 구아들가운데도 도망치는 학생도 있었고 그녀를 심히 괴롭혔다. 그러면서 도 그 수는 늘어나 1890년 9월에는 25명이 되었다. (Mrs Underwood`s Le- tter to A.T.Pierson, December,1890,P 943) 언어우드목사의 교육방침은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그 는 학생들에게 청소하고 밥짓는 일, 심부흠하는 일을 비롯하여 자신적으 로 근로하는 습관을 터득케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1890년 마펫 (S.A.Moffett)목사가 후임교장이 되었고 그는 학교이름을[ 예수교 학당]이라고 고쳤다. 그는 커리큐럼에 있어서 고아원에서 학교 형 태로 바꿨으며 교명에 부합하게 성서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주일에는 예 수교 학당 전체가 주일 학교가 된 감이 있었따. 1901년 게일 (J.S.Gale) 목사가 교장이 되면서는 구세학당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뒤 발전을 거듭하 여 경신학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2004-03-11 10:36:46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성격을 띤 최초의 학교는 아펜셀라 선교사에 의하여 세워진 배제학당이다. 1885년 8월 3일 아펜셀라 목사가 이겸라 고영필 의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공부를 개시한 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이며 이는 한 국 현대 교육사상 영원히 기념할만한 뜻있는 날이 되었다. [나는 지난 8월 3일 이겸나와 교엉필이라고 하는
감리교 배제학당, 장로교 구세학당 2004-03-11 10:36:46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나라에서 현대식 성격을 띤 최초의 학교는 아펜셀라 선교사에 의하여 세워진 배제학당이다. 1885년 8월 3일 아펜셀라 목사가 이겸라 고영필 의 두 학생을 데리고 영어 공부를 개시한 것이 배재학당의 출발이며 이는 한 국 현대 교육사상 영원히 기념할만한 뜻있는 날이 되었다. [나는 지난 8월 3일 이겸나와 교엉필이라고 하는 한국인 두사람으로 학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병원에서 스크랜튼 박사를 만났으며 의사가 되 기를 희망하여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들어왔다. (H.G.Appenreller,Fifty of Educational Work. Light to all in the house, 1934) 배제학당은 다음해 6월 8일에 감리교 재한선교회로부터 7명의 학생으로기 독교학교로서의 개교를 공인받았다. 그후 학교는 놀랄만한 발전을 보았으 며 1887년에 학생이 67명이나 되었고 한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붉은벽덜을 사 용하여 서양식 새 건물을 건축하였다. 웨렌 (H.W.Warren) 감독에의하여 성 대한 봉헌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그는 [한국인에게 주는 미국의 큰 선물 ]이라는 말로 축사하였다. (Charles A.Sauer, Within the Gate comprising the Addresses delivered at the Fifteen Anniversary of Korean Methodism First Church, The Ko-rean Methodist News Service,1934,p.85). 고종 국왕은 배재학당 출신을 정부에서 등용할 것을 약속하였고 [배제학 당] 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고 명필가 정학교에게 간판을 쓰게하고 외무아 문 의 김윤식을 기켤 아펜셀라 목사에게 교육방침으로 두가지의 중점을두었 다. 첫째는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게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립정신을길러주는 데 있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돼야 한다 는 성서의 교훈을 살려 한학자 조한규로 한역케한 를 교훈으로하였다. 학교안에는 자조부 Selfhelp Department)를 두어 각자의 노력에따라 번 돈으로 수업료를 납부케하는 제도를 만들어 근로와 자립정신을길러주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6년 봄, 서울 정동에 남자 기숙학교를 열 고 언더우드 학당이라 이름하였다. 고아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불러들여공 동으로 숙식하면서 인격 형성과 신앙생활을 터득케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 다. 언더우드 목사의 큰 꿈은 여기에서 교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사회지 도자를 양성하는 기독교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평양에 신학교가 서면서 그뜻은 무너졌다. 그렇기는 하나 1914년 동교내에서 고고 의 소리를 발한 [조선기독교대학]은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하여 그 계 획은 한부분은 실현되었다. 언더우드목사의 고아원 시작은 한국에서의 고아사업의 처음이 되었다. 교 육하는 일은 언더우드목사가 직접 하였고 고아사업은 그의 부인이 맡아 하 였다.그녀의 고아들에 대한 성의와 봉사는 놀라우리만큼 희생적이었으구아 들가운데도 도망치는 학생도 있었고 그녀를 심히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그 수는 늘어나 1890년 9월에는 25명이 되었다. (Mrs Underwood`s Le-tter to A.T.Pierson, December,1890,P 943) 언어우드목사의 교육방침은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그 는 학생들에게 청소하고 밥짓는 일, 심부흠하는 일을 비롯하여 자신적으로 근로하는 습관을 터득케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1890년 마펫 (S.A.Moffett)목사가 후임교장이 되었고 그는 학교이름을[예 수교 학당]이라고 고쳤다. 그는 커리큐럼에 있어서 고아원에서 학교 형태로 바꿨으며 교명에 부합하게 성서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주일에는 예수교 학 당 전체가 주일 학교가 된 감이 있었따. 1901년 게일 (J.S.Gale)목사가 교 장이 되면서는 구세학당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뒤 발전을 거듭하여 경신학교 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 제 목 : 한국 교회사 ( 이화학당과 연동여학당 ) 남자를 위하여 세운 배재학당과 쌍벽을 이루어 여자들을 위한 학교로 이 화학당이 섰다. 이화학당은 배재학당보다 몇달 늦게 1886년 5월31일미국 감 리교 여선교회에서 파송한 스크랜튼 (Mary F.Scranton) 여사에의하여 개교 되었다. [학교 사업은 6개월 전에 아들 스크랜튼 박사의 집에서 한사람을 데리고 시작하였다. 그 학생은 정부 고가간의 소실이었으며 왕후의 통역관이 되려 는 희망을 가지고 영어를 배우러 왔던 것이다. 그러나 김부인은 3개월만 공부하고 중단하고 말았다] (Mari F,Scranton,Woman`sWork in Korea,1896) 그 다음에 온 학생도 어머니가 찾아와 딸을 데려가려 함으로 서약서를써 주면서 여러모로 설득하여 겨우 안심시켜 머물러있게 하였다. 그 학생은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찾아온 아이였다. 1886년 한명의 여학생으로 시작된 이화학당은 1887년 7명으로 증가하였고 1888년에 18명의 학생으로 발전하 였다. 스크랜튼 부인은 한국에 있어서 불교와 유교의 전통의식으로 멸시와천대 받고있는 여성들에게 남자와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마음먹었다. 여학생들을 가르치는 스크랜튼 부인의 교육이념이나 매우 철저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사는 환경속에서 가정부인으로서 모범이 되게하 며 또한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신앙의 사람이 되 게하는데 있었다] (G,W.Gilmore,Korea from It`s Capit-al, P,232) [나는 학생들을 서양인의 생활양식과 의복제도를 따르게 하려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한국사람을 가장 훌륭한 한국사람을 가장 훌륭한 한국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따라 교 육하려고 힘쓰는 것뿐이다] (The Godpel in All Lands for 1888,P.373) 그녀는 항상 이러한 정신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또 이것이 초창기 이화 의 정신이었다. 처음의 학과목은 영어, 산수, 한국,창가, 역사, 서도등이 었다. 1887년에는 국왕과 정부로부터 정식의 학교 인가를 받았고 명성황후는이 화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그것을 기록한 편액을 하사하였다.이와같은황실 의 배려와 후원은 이화학당을 위하여 영광이 되었고 여성교육 전개를 위하 여 계몽과 격려로서 상당한 효과를 나타냈다. 장로교 선교회에서의 여자를 위한 교육사업은 엘러스(Anni J.Ellers)양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1886년 늦은 가을부터 한명의 여자 고아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선교회 후원을 받게되었고 또 한국정부의 인정도받았다. 이 교육기관은 1889년에 하이든 (Mary E. Hayden)선교사에게 그리고 1890년 도부터는 도티(S.A.Doty) 선교사에게 인계되었다. 학교에서는 신학문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훌륭한 가정 주부가 되게하고 착실한 기독교인 양성에 목표를 두었다. [연동 여학당의 학도가 지금 20명 인데 학교 규칙인즉 비단 학문만 가르쳐서 발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으로 하는 공부와 힘으로 하는 공부를 다하게 하는데 음식만드는 일과 바느 질하는 일과 국문과 국문습자와 성경을 날마다 외워야 하는 공부와 산술과 지리와 역사와 한문과 화학과 간혹 체조 운동하는 공부이다](그리스도 신 문, 6권,15호,1902년 4월 11일) [The do as much as possible of their own Work,learn to cook and tosew in Korea fashion, are taught no English,..and we only seek to make Christian Koreans of them,not American ladies] (L.H.Underwood`sletter to A.T.Pierson, December,1890,P943)위에서 보는 대로 학과목으로음악,산술, 지리, 역사, 한문, 습자 화학등이 있었으며 또 요리와 재봉,체육과목이 있었으나 영어는 가르치지 않았다. 1895년 연지도로 교사를 옮겨 연동여학교란 이름이 붙었고 (조선예수교장 로사기, 상권 81쪽) 이것이 정신여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감리교 병원 설치
감리교 병원 설치 2004-03-11 10:35:12 read : 13 장로교 계통의 선교사들이 주로 왕실과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병원을 설립 운영하고 있을 때, 감리교 선교사들은 평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료소와 약국같은 것을 설치하여 전도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감리교 선교의사들은 서울중심지를 떠난 변두리와 비장으로 흐터져 순회 진료하기를 힘써 하였다. 감리교 의교사업은 스크랜튼(William B.Scranton)에 의하여 개시되었다. 그는 1885년 9월 10일 병원을 역었으며 이듬해 6월 15일 자신의 시병원이 라고 이름붙였다. 스크랜튼 의사는 전염병 환자를 위하여 무료진료소의 설 치를 계획하여 1887년 12월에 서대문밖 아오개(Aogai)에 진료소를개설하였 다. 그는 또한 부녀들과 아동들의 병 치료를 위하여 여자 의사를 파송해 달라 고 본국교회에 요청하였다. 당시의 한국 관습이 내외 관념이 심하여남자 의 사가 여자 환자를 진찰하기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선교회에 서는 1887년에 하워드 (Mata Howard)를, 1889년에는 셔우드(R-osetta Sherwood)를 그리고 1890년에는 맥길(William B.McGill)를 파송하였다. 하워드는 한국 최초의 부인 병원인 보구여관을 개설하였으며 맥길은 남대 문 옆 상동에 병원을 개설하였다. 이 세 여자의사가 올린 의료의 실적은 3 년동안에 5천5백명을 진료하였음을 보아 가히 평가를 받을만하다. 미국장로교 선교회에서도 여자 의사를 파송하였다. 한국 왕실에서 여자의 사를 요청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1886년 엘레스(Annine J.Ellers)가 병원 이 를 돕기위하여 부임하였다. 엘레스양을 맞은 제중원에서 는 부녀과를 신설 하여 책임을 부여하였다. 그러한 사정에 관하여 설명한 글이 남아있다. [우리 교회에서 대한 병인 들을 위하여 서울 구리개에 제중원을 설립한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한편으 로는 여인의 병울 보게하였다. 만일 대한 부인중에 병이 대단하여병원으로 걸어가지 못하는 이는 제중원으로 기별하면 의원 부인이 가서 보아주는데 이것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뜻을 본받아 약을 주어 치료하여 효험을 많이 보게하는 것이다. 병이있는 이는 제중원으로 가시면 부인이사랑하는 뜻으로 보아 주시리이다. 엘러스 의사는 특히 왕비의 신임을 얻어 자유롭게 왕실을 출입하는 특전 을 얻었다. 그녀는 병의 간호와 치료뿐 아니라 담화를 통하여 서양의문물 과 풍습을 많이 전달하여 기독교 선교를 향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성공 하였다.그러던 중 벙커(D.A.Bunker)의사와 결혼하게 되면서 릴리어스 홀튼 (Lillias S.Horton)양이 1888년 3월부터 부녀과의 책임을 맡게되었다. 릴리어스 홀튼 양은 2년후에 언더우드 목사와 결혼하였으나 그녀는 부녀 과의 책임을 담당하였고 왕후의 시의의 직도 계속하여 유지하였다. 그녀와 왕후와의 친분은 날로 두터워져 언더우드 부인이 쓴 글에 흥미로 운 내용이 있다. [우리는 왕우에게 여러번 복음을 전도할 기회가 있었다. 왕후가 우리에게서 들은 말을 국왕이나 왕자에게 전달한 사실을 알았을 때 는 참으로 기뻤다. 크리스마스 때 우리는 성탄나무를 세워드렸으며 왕후는 매우 기뻐하여 새해를 맞으면서 금일봉과 꿩과 계란을 선물로 하사하였다. 선교 여의사들의 활동은 부녀들의 생명도 남자와 꼭같이 취급하는 행동으 로 나타나 한국 고래의 남녀유별의 관념을 타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 였다. 이러한 면에서도 의료사업의 성과는 선교 초창기에 있어서 선교방법 의 중요한 방식으로 완전히 효과적이었음을 입증하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