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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강 창조론과 진화론 (2)|창조과학자료
05강 창조론과 진화론 (2)|창조과학자료 김완섭/뉴비전맨 | 조회 8 |추천 0 |2013.02.08. 16:56 http://cafe.daum.net/newvisionkorea/QuSf/25 그 얼마나 돈 벌겠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런 걸 만들어 냈어요. 그래서 이 창조라는 것은 하나님의 과학을 창조라고 해요. 인간의 과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과학. 그래서 제가 이 근육. 이거 봐요. 그래서 이 사람은 세계에서 근육이 제일 크고 좋은 사람인데, 이런 사람은 여자도 말랑말랑, 흐느적 흐느적 그런 거 안 좋아해요. 여자도 근육질을 이런 거 좋아합니다. 그럼 이런 남자하고 이런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아기가 낳자마자 날 때부터 고구마 같은 알통이 붙어 나오느냐? 대단히 죄송한데요, 이런 남자와 근육이 좋은 여자가 결혼을 해도 애는 근육이 한 개도 없는 게 나와. 왜 그러느냐? 후천적으로 획득된 형질은 다음 대에는 유전이 안 되요. 그러니까 라마라크의 용불용설도 말짱 거짓말이야. 이 사람은 기린의 목이 그렇게 길어진 것은 다 초식 동물이다 보니까 땅에 있는 풀을 서로 뜯어먹다가 다 뜯어먹었어. 그러니까 나무 이파리를 따 먹는데 서로 높은 데 것을 따먹으려고 목을 빼니까, 낮은 데 나뭇잎 다 먹고 높은 나무 이파리을 따 먹으려고 목을 빼다가 목이 길어졌다는 거에요. 얼른 보면 그럴 것 같죠? 목이 아무리 봐도 길기도 하고 말이야. 그럼 황새가 왜 목이 기냐? 깊은 물 속에 있는 고기를 건져 먹으려고 자꾸 목을 빼니까, 입도 자꾸 물고기 잡아먹으려고 길어지고 목도 길어졌다는 거에요. 그럼 다리는 왜 길어지냐? 아 그 다리는 엉덩이를 물에 안 젖으려고 자꾸 엉덩이를 드니까……. 그런 말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데, 유전법칙이 나와가지고 후천적으로 획득된 형질은 다음 대에는 유전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나오니까 전부 다 거짓말이 된 겁니다. 그래서 진화론은 90%가 거짓말이 아니고 100%가 거짓말입니다. 진화론자들이 내놓은 화석자료. 여러분 교과서에까지 실어서 그걸 외우고 시험치고 점수주고 받고, 또 받았다고 좋아하고 하는데, 몽땅 거짓말입니다. 진화론자들이 내놓은 네브라스카인이라고 있는데 화석 중에, 1922년도 헤럴드 쿡(Herold Cook)이라는 사람이 네브라스카 서부 강변에서 모양이 이상한 이빨 치아 한 개 줏었어요. 고생물학자 오스본 교수가 이것을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자 에이프맨(ape man)이라고 했는데, 후에 발달된 분석 내지는, 분자생물학적으로 성분 조사해보니까, 사람 것도 아니고 원숭이 것도 아니고, 지금은 멸종되어 사라진 멧돼지 이빨로 판명이 났습니다. 그게 네브라스카인. 상상력이 얼마나 풍부한지 이빨 한 개 만 있고 나머지는 상상으로 그려가지고 사람을 만들어 버려요. 여러분, 그러니까 황우석 교수만 포토샵 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은 포토샵도 할 줄 모르면서 그냥 다 상상도를 가지고 장난친 것입니다. 필트다운맨(Piltdown man)이라고 1911년부터 1915년까지 영국의 찰스 도슨이라는 박물학자가 영국 필트다운 지방에서 턱뼈하고 두개골 일부를 주워가지고 50만년된 유인원,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 존재다 이렇게 해가지고 필트다운인. 다운맨 혹은 필트다운맨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그런데 후에 도슨이 죽고 나서 그가 일평생 가지고 다니면서 강의를 하던 두개골을 가지고 정밀조사에 들어갔는데 날조한 것입니다. 사람의 두개골에다가 아래 턱뼈는 오랑우탄의 뼈를 정교하게 갈아 맞추어서 조작을 한 거에요. 그리고는 그 두 가지를 같은 질감이 느껴질 만큼 화공 약품에 오랫동안 담가두었다가 색깔도 모양도 비슷하게 만들어가지고 그걸 가지고 다녔어요. 아무런 이름 없는 박물학자가 일개 범부가 해골 바가지를 가지고 사기를 쳐가지고 온 세계 유명한 대학에 가서 비싼 갤런티 받아 먹으며 강의하고 다니고 말이야. 여러분, 집에 가서 인터넷을 하신 분들은 필트다운맨이라고 아니면 찰스 도슨을 해가지고 검색을 해 보세요 사이언스라는 과학 잡지에 칼라 특집으로 그 사기꾼 찰스도슨 이야기가 나올 거에요. 필트다운맨.. <이 유명한 사진은 1915년에 촬영된 것. 앞줄 좌측에서부터 언더우드, 아서 케이스, WP 피크래프트, 로이 렝커스터경이고, 뒤줄 좌측부터 바로우, 엘리엇 스미스, 찰스 도슨,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 주요 관련자들이 화석이 재구성 되는 것을 보고 있음.> 그 다음에 자바인이라고 1892년도 진화론자인 듀보아라는 사람이 두개골, 치아, 대퇴골 세 개를 주웠는데,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한 개가 20m. 20m면 여기 한 개 있고, 여기 이만큼 한 게 있고 또 저만큼 한 개 있고. 20m, 20m, 20m 떨어진 따로 있는 곳에서 주워서 이걸 50만년된 직립원인이라고 발표를 한 거에요. 그러니까 독일 사람들이 자존심이 상해서 달려가서 지층 조사를 해봤는데 해 보니까 50만 년 전이 아니라 불과 500년도 안된 지층이야. 화산에 의해서 형성된 얼마 안된 그런 지층에서 나온 그런 뼈들이었습니다. 500년도 안된 걸 갖다가 50만년 전에 것이라고 사기를 쳐 먹은 거죠. 자바인이라고 잡아 죽일 놈들이……. 제가 그 자바섬에가 서 나무화석 하나 갖다놓았죠 여기. 이 나무 화석 자바 섬에 간 기념으로 가져온 겁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교과서에 있다고 다 믿으면 안 됩니다. 베이징인. 북경원인이라는 것은 1922년부터 1938년까지 북경 서남부 주구점이라는 곳에서 38개의 뼈들이 발견되는데, 이걸 북경 유니온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블랙 박사가 중국 사람들의 조상이 되는 유인원의 것이다 하고 발표를 했는데 최근에 대부분 없어져 버렸어요. 망실되었다고 그러는데 제가 볼 때, 망실이 아니고 누가 일부러 싹 빻아가지고 황하강물에 갖다 버린 것 같습니다. 남아 있었으면 분자 생물학이 발달하니까 정체가 탄로 날 것 같으니까, 조용히 누가 아무도 모르게 싹 없앤 거에요. 제일 심각한 게 지금도 1959년도 루이스 리키 진화론자 부부가 아프리카에 가면 탄자니아라는 나라가 있어요. 탄자니아 올두바이 계곡에서 뼈들을 약 400여개 뼈들을 발견해 가지고, 이것들이 175만년 젠장. 끝발 있는 것 더 센 거. 이왕 거짓말하는 것 대박을 터뜨리는 거죠. 175만년 되었다 그랬어요. 아무도 베팅을 못하는구만 보니까. 딴 데 맨 해도 25만년, 50만년 그러는데, 그냥 175만년. 미국의 알량한 미국 미합중국 지질학회라고 하는 학회의 도네이션을 받아가지고 그걸 발굴해 그 이듬해 발표하고 나니까, 그 알량한 그 학회 이름 명예 때문에 수정 발표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어요. 무슨 얘기냐 하면 그 루이스 리키가 발견한 바로 거기서 A4용지 키, A4용지가 이렇게 세우면 1ft인데, 1ft 더 파내려 간데서 어린 아이의 뼈가 나온 거에요. 리키 부부가 원숭이와의 중간존재 뼈를 발견한 거기서 1ft 밑에서 어린 아이뼈가 나왔는데, 그럼 묻힌 게 항상 밑에 있는게 먼저 묻힌 거 아니에요? 그러면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된 것이 아니고, 사람에서 원숭이로 진화된 거야. 지금 우리가 여기서 듣고서 웃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아 그 루이스 리키가 사기를 친 것이구나. 지금 사람들은 발표도 못하고 어정쩡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악한 방송이 영국의 BBC라는 방송이라는 방송이 있는데, 세계서 손꼽는 방송입니다. 그 BBC 방송이 진화론 전도사들이 만든 것인데, 마귀의 종들인데, 이 사람들 진화론 동물의 왕국을 보면, 항상 인류의 기원을 진화를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우리도 KBS, MBS, SBS 방송국도 비싼 외화를 주고 그걸 사 가지고 와서 방송을 하고. 거액을 주고 사와서 물론 제작비가 많이 들었으니 비싸게 사겠지만 나레이터 유광진 이런 분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자연은 진화는 이렇게 선택했습니다. 꼭 결론은 진화를 이야기하죠. 그런데 이런 프로를 보면 항상 인류 기원이 아프리카로 옮겨간거야. 루이스 리키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인류 기원설을 메소포타미아 기원을 갖고 대개 주장을 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모든 방송, 모든 프로그램이 항상 아프리카 기원설을 말합니다. 이 진잔도르푸스 보이세이라고 하는 루이스 리키가 발견한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짓 이론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로 인해서 매우 입장이 난처하게 된 리키 부부인데, 이미 미국 지질학회 이름으로 다 발표하고 나니까 수정도 못하고 일단 그 이름을 짓기를 진잔도르푸스 보이세이 라는 이름으로 발표가 되었습니다. 처음 그 두개골의 연대 측정을 할 때 포타지움 아르곤이라고 하는 연대 측정방식으로 하는데, 175만년 갔다는 거에요. 그런데 연대를 측정하는 방식에는 수많은 방식이 있습니다. 약 30가지의 방식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가 볼 때 일반적으로 생물학적인 화석이 이런게 나왔다 하면 그 어떻게 하느냐? Carbon14. C14라는 물질의 방사선 동위원소 반감기를 체크하는 것인데요. 유기물일 경우에 제일 많이 하는 건데, 이렇습니다. 이 공기 안에는 21%의 산소와 78%의 질소가 있어요. 78%대 21%의 비율로 공기 속에 떠돌이 질소가 있는데, 이 질소에 우주에서 날아오는 광선. 온갖 광선이 학스믹 광선에 충돌하게 되면, 탄소 14라는 물질로 바뀌어요. 그 탄소 14가 공기 중에 있다가 식물의 호흡, 이른바 탄소 동화 작용에 의해서 탄소가 식물체 속에 차곡차곡 쌓습니다. 누적되요. 유입되다가 식물이 죽어버리면 유입된 것은 스톱되고, 그 탄소가 붕괴되어 나가요. 그 다음부터 붕괴되는데, 붕괴되는 속도를 윌라드 리비(Willard Libby)라는 시카고 대학 교수가 검증을 한 것입니다. 이 윌라드 리비가 카본 14가 유기물 속에 있다가 파괴된다는 것을 반감기 절반 감해지는데 한 5,670년 정도가 걸린다. 반비례곡선으로 이렇게. 이렇게 해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는 이 법칙이 나왔기 때문에 유기물 화석이 나오게 되면 연대측정은 장난이다. 완전히 끝내줄 수 있다는 공로가 인정되어서 노벨상을 주었죠. 그런데 그 후 윌라드 리비가 죽은 나서 그 후학들이 그렇게 하면 그렇게 나오나 해봤어. 정주영 회장이 전에 뭐든지 안 된다면 해봤으? 라고 그렇게 물었답니다. 뭐든지 안된다 안된다고 하면 해봤으? 라고 한다죠. 그래서 이 사람들이 해봤어요. 뭘해 봤느냐? 방금 잡은 달팽이에요. 달팽이를 잡아서 알맹이는 꺼내고 껍질을 빻아서 연구했더니, 탄소14 동위원소 반감기로 측정하니, 방금 잡은 건데 세상에 3,600년 전의 것으로 나왔어요. 달팽이가 무슨 3,600년을 살았습니까? 더 웃기는 것은 물개를 한 마리 잡아서 뼈를 분석했더니 머리뼈와 꼬리뼈가 2천년이나 차이가 나더랍니다. 같은 몸에서 머리하고 꼬리가 2천년 차이로 생겼습니까? 그래서 지금은 그 방법도 별로다. 그래서 지금은 윌라드 리비가 받은 노벨상은 회수해야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위 과학자들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거 다 믿을 수 없습니다. 과학적인 이론이 때로는 미신적인 이론보다 조금 낫지만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 말씀이고. 여러분, 과학적인 이론도 얼마나 많이 번복됩니까? 그래서 제가 볼 때는 끝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영원히 변치 않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성경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여기 보니까 그 다음 지층, 동일 지층에서 나온 메머드의 뼈들을 측정할 때, 방사성 탄소14 연대측정방법으로 했는데, 그 연대는 3,100년 밖에 안 나와. 아까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 존재라고 하는 것의 동일 지층에서 나왔는데, 그 뼈는 175만년 후에 나왔다는 것이고, 같은 지층에서 나온 메머드의 뼈를 갖다가 포타지움 아르곤 방식이 아니고, 탄소 14 방법으로 하니까 3,100년에서 1만년 어간으로 나온다는 거에요. 이렇게 교과서에서 배운 그 연대측정이 하나도 신빙성이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제가 학문하는 세계도 조작하고 날조하는 것이 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황우석 교수 뭐 그거 별로 실망 안해요. 그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연대측정의 방법에 따라서 이렇게 큰 오차가 크게 난다는 것을 일반인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 믿게 하려면 좀 힘들 거에요. 그렇게 헤프게 잘 안 믿습니다. 과학자가 말한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안 받아들여요. 과학자가 말하는 것이 성경에 맞으면 그거는 좀 OK. 조금 공부를 했는가보다 라고 인정을 하고, 성경하고 안 맞는 말을 하면 일단 과학적인 이론을 내려놓습니다. 아무리 무슨 하버드, 스탠포드, 캠브리지, 옥스퍼드 어쩌고 해도 그 무슨 교수가 말을 했다 해도 안 믿습니다. 성경을 공부한 사람인데 성경에 있는 것을 믿는 거에요. 오늘날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 말할 때, 아프리카 기원설을 두고 말하는 것을 방송에서 보았다면, 아까 말씀드린 루이스 리키 때문에 175만년 기원설이고, 그 측정방법이 포타지움 아르곤 방법이었다는 것이 기억해 놔둬요. 그럼 보이고 들릴 것입니다. 1907년도 독일의 마우지 지방에서 뼈들이 발견했는데 이 턱뼈를 25만년 전의 것이라고 발표를 했는데, 최근에 허들리카 라고 하는 역시 진화론자인데, 이 사람이 하이델베르크인의 뼈를 두고 분석해 본 결과, 오늘날 하이델베르크에 살고 있는 사람과 똑같다. 아무 차이가 없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 다음은 네안데르탈인. 여러분, 교과서에 제일 많이 나온 사람으로, 목이 구부정해서 털복숭이처럼 해가지고 그 사람인데, 1856년도에 독일의 듀셀도르프에서 발견되었어요. 이 뼈들은 진화론자들이 25만년된 보다 더 진보된 유인원의 것이다 했는데, 최근에 그 뼈를 정밀 조사한 결과 그 뼈의 주인은 비타민 D 결핍이라는 구루병 환자로 판명이 났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교과서에서 배우고 시험치고 점수 따고 했던 게 전부다 이 허무맹랑한 거에요. 크로마뇽인이라고 1868년도 프랑스의 크로마뇽 동굴에서 발견된 것이죠. 이 뼈들의 주인공들은 동굴 벽에다가 정교한 벽화를 그려 놓았어요. 무슨 원숭이가 벽화를 그리겠어요? 그래서 저가 볼 때는 아마 크로마뇽의 발견된 두개골의 용적이 골격이 큰 것을 보면, 홍수전에 살았던 장부들, 네피림들, 거인족의 두개골이 아니겠는가 그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 다음에 오스트탈로 피데쿠스라고. 진화론자들은 오스트랄로 피데쿠스를 플라이오세에서 플라이토세에 존재했던 최초의 화석인이라고 떠드는데, 1925년 다트라는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출토된 유아의 두개골인데, 이름을 짓기를 오스탈로피데쿠스 아프리카누스라고 이름을 거창하게 지어가지고. 무식한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그렇게 했는데, 다트는 유인원의 화석인줄 알고 이름을 붙였던 것인데, 그 후 수십년이 지나는 동안에 이것이 화석으로 인류의 것을 인정 하게 되죠. 학명은 그런 의미를 떠나서 최초의 명명을 존중해서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스트탈로 피테쿠스 중에 후대에 자료는 루이스 리키 부부가 동아프리카 아까 얘기했죠. 탄자니아 올드바이 계곡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후에 다섯 채의 화석을 발견하고 호모 하빌리스. 상당히 능력 있는 인간에 가깝다고 되었다고 그렇게 되었고요. 그 다음에 진잔트로푸스보다 진화된 것으로 해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말을 하고 이것이 조상형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오스트탈로 피테쿠스는 일반적으로 다시 세 종류로 나누는데 아파렌시스, 로부스투스, 아프리카누스로 세종류로 분리하고 아파렌시스는 두개골이 구조상으로 현생 인류보다 이전의 유인원과 흡사한 모습을 보이는데, 두개골을 제외한 나머지 골격은 구조는 현생 인류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원숭이와 사람의 두개골이 차이 난 것은 뭐냐 하면, 사람과 원숭이의 차이를 봤을텐데 두개골의 경사각이 사람은 거의 수직에 가까워요. 수직이면 사람이야. 45도이면 원숭이입니다. 이걸 이용해서 찰스 도슨이라는 사람이 사람 것을 떼어 내버리고 뒷 축을 갈아서 뒤로 제쳐서 튀어나오게 정교하게 만들어서 사기를 쳤던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이 얼마나 그동안에 거짓말을 많이 해 먹었느냐? 여러분, 김정일씨가 지금 공산주의 체제 주체사상을 가지고는 굶어죽기 십상이다 그거 모르겠습니까? 알지만 그전에 거짓말을 너무 했기 때문에, 남쪽에는 다 거지떼이 다 쪽박을 짜고 얻어먹고 어렵게 산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개방 못하고 있는 것처럼, 진화론자들도 거짓말을 어린아이 앞에서 너무 거짓말을 했는데, 그 거짓말을 들은 사람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진화론을 뚜껑을 열어서 솔직히 거짓이고 잘못되었다 그 말을 못하는 거에요. 연구비하고 장학금을 너무 많이 받았고요. 왜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왜 사람들이 진화론을 좋아하냐면요, 하나님이 있으면 잔뜩 부담이 되거든요. 여러분이 전도하려고 세상 사람들에게 가서 천국 이야기를 하면 피식피식 웃죠? 지옥 이야기를 하면 괜히 골을 내죠? 꼭 자기보고 가라는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야기하면 부담이 되니까, 하나님 없다고 하면 좋아하는 거에요. 저는 이런 진화론 공부를 하면서 사실 인생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인간들이 심리적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또 지금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또 죄를 지을 계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으면 잔뜩 부담스럽거든요. 하나님만 없으면 사람의 눈만 속이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래서 무신론자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무신론자는 없습니다. 자기가 무신론자가 되려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한 논문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세상 어느 대학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논문이 한편도 안 나온 거에요. 왜 안 나오는가? 무신론이란 논문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논문의 자료를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무신론을 하려면 신이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을 해야 되는데, 무엇이든 이 땅에 존재 한다면 존재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증거가 있기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리산에 반달곰이 존재하느냐? 있다 없다 있다 없다 하는데, 누가 어느 날 반달곰의 사진을 찍어 왔다든지, 반달곰의 털을 가지고 왔다든지, 반달곰의 분비물을 가지고 왔다든지, 그러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리산에 반달곰이 없다 하려면 이건 골치 아픕니다. 지리산 전체를 골짜기 마다 다 가봐야 돼. 지리산 골짜기가 얼마나 많은데. 태고로부터 사람의 발도 닫지 못는 곳이 많이 있은데. 그러니까 지리산의 반달곰이 없다 그것도 증명 못하는데, 하물며 우주에 하나님이 없다? 자기가 우주를 다 가 봤나? 그러니까 없다는 것은 없다는 증거도 없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기에 무신론은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아무도 무신론자 되고 싶은 사람 많지만 논문을 쓰지 못해가지고 아무도 무신론자 못 됐어요. 그럼에도 왜 사람들이 함부로 무신론자라고 하느냐? 그것은 무신론자가 아니고 무신원자. 하나님이 없기를 소원하는 사람들. 그들은 무신원자에요.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다분히 범죄 심리학적 측면에서 접근을 해야 합니다.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없다고 증명할 수 있게 접근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없었으면 하나님이 없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정도면 상당히 이해가 잘되지요? 죄를 지었거나 지금도 죄를 짓고 있거나 앞으로도 죄를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었으면 하는 겁니다. 하여간 죄인입니다. 죄인. 그리고 유전 법칙을 통해도 진화론은 일어날 수가 없고, 물리적 방법, 화학적 방법, 다 동원해도 열역학적 방법을 동원해도 어떤 방법으로도 진화는 안 됩니다. 열역학 제 2법칙이란게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하면, 모든 사물은 갈수록 점점 더 낡아집니다. 사람이 모든 사물을 사용하든 사용치 않던 간에 허물어지고 닳아지고 없어집니다. 여러분, 옷을 한 벌 사다놨는데 안 입고 가만히 걸어놓았더니, 옷이 점점 더 새 옷이 되더라 그런 옷이 있습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집을 지어서 살지 않고 가만히 놔두면 집이 점점 더 새 집이 되더라 그런 집은 없는 거에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질이 이 법칙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통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아니면 에너지 감소의 법칙. 그러니까 질량은 변치 않습니다. 질량 불변의 법칙이 열역학 제1의 법칙입니다. 그런 것 배웠죠? 질량은 변하지 않은데 가용에너지는 감소한다는 거에요. 가용에너지는 감소한다. 에너지 감소의 법칙. 무질서도가 높아진다. 허물허물해지고, 푸석푸석해지고, 무질서해지고, 쓸모없게 되는 쪽으로 가는 거야. 점점 어떤 사물이 쓸모 있는 쪽으로 가는 게 없어요. 에너지를 점점 상실해서 에너지가 다 모든 물질에서. 그러니까 우라늄 238만 방사선 동위원소가 감해져 가지고 무용지물 되는 납덩어리가 되는 게 아니라, 모든 물질이 다 에너지를 상실해 간다는 거에요. 물리학적으로 논리적으로는 모든 사물은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언젠가는 다 잃어버린다는 거에요..예를 들어서 지구도 완전히 다 식어버리고, 안에 있던 마그마도 없어져 버리고, 다 속속들이 돌덩어리 되버리고, 태양도 다 타서 에너지가 없이 다 발산해 버려서 에너지가 없어져 버리고, 우주 전체의 모든 물질이 에너지를 다 상실해 버리는 때가 온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에너지가 다 붕괴된 상태를 열평형시대라고 그래요. 심장이 뛰다가 삑삑삐. 삐. 비비 하는 것처럼, 이 지구상 우주상 어디서도 에너지를 얻을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거에요. 논리적으로는 그래요. 과학철학적으로 그런 때가 온다는 거에요. 그 만큼 모든 물질은 에너지를 상실해가는 쪽으로 있고, 모든 물질은 점점 붕괴되고 푸석푸석해지고, 못쓰게 되고 쓸모없게 되고 있기 때문에 이 열역학 2법칙, 엔트로피 감소의 법칙, 에너지 감소의 법칙은요, 물리 화학자 누구나 인정합니다. 진화론자도. 이건 공리야.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언제 어디서 누가 몇 번을 검증을 해도 틀림 없어요. 그것만 가지고도 이 땅에서 진화는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그런 정도를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도 진화론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백일천하에 드러나는데, 제가 참으로 안타까와하고 속상한 것은 그러면 지금 현재 오늘날 진화론자들이 이 시골 목사의 상식도 안되는 이 정도도 모르느냐? 다 진화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장하니깐 용서를 못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몰라서 무식해서 그런 것을 주장하면 용서가 되요. 모르니까.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을 다 알고 있습니다. 안된다는 사실을. 그러면서도 말하니까, 그것은 무지가 아니고 억지야. 하나님을 시인하기 싫기 때문에 억지로 어거지로 진화론을 주장하는 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용서가 안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용서가 안됩니다. 어떤 죄는 용서가 되지만 어떤 죄는 용서가 안되요. 진화론은 하나님 훼방죄에요. 노골적으로 정직하게 말하면 하나님 훼방죄에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아니다 우연히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 훼방죄에요. 무지하고 몰라서 그런다면 모르지만 무지가 아니거든요. 진화라는 것은 절대로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거 아니에요? 시골 목사가 아는 과학적 상식을 왜 그 사람들이 모르겠어요? 그래서 결론은 진화론은 90% 거짓말이 아니고 100% 거짓말입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아가 먼 훗날까지 영원한 가설에 불과할 뿐이지, 진화론이란 게 안된다는 거에요. 무신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무신론자는 없다는 책을 쓸만 해요. 무신론이 안 된다는 사실을 꽤 똑똑한 사람들이 빨리 알았어요. 아 이 무신론이 안되는구나. 논리가 안된다 이거야. 없다면 증거도 없거든요. 증거를 내놔야 데는데 없다 이렇게 나올텐데. 그래 알았어. 머리 좋은 사람들. 알고 무신론이 안되니까, 뭘 만드느냐? 유물론(唯物論)을 만들었습니다. 오직 물질만 있다, 유물론 유자가 있을 유(有) 자가 아니고 오직 유(唯) 자를 씁니다. 영도 정신도 천사도 하나님도 그런 것은 없는 것이고, 오직 있는 것은 물질만 있다. 그럼 정신이나 생각이나 그런 것은 뭐냐? 그것은 암즙이 쓸개의 분비물이듯이 정신이나 생각은 뇌의 분비물에 속한다. 그것도 나중에 알고 보면 그런 것은 다 물질일 것이다. 물질이 변화무쌍하게 그 양태을 바꾸는 거라. 예를 들면 물이 물이 되었다가 수증기가 되었다가 눈에 보이는 수증기가 있다가 안보이는 수증기가 있잖아요. 날아가는 것처럼. 얼음 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물질이 되었다가 에너지가 되었다가 하는 것처럼 물질이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이것이 다 상대적이다. 이렇게 절대란 것을 없애버려요. 모든 것을 상대화해 버립니다. 하나님도 성경도 없애버리고 절대 질서도 없고 절대 윤리도 없고 다 상대화해 버립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원리를 가지고 모든 것을 상대화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적 세계관, 기독교 가치관을 다 헝클어가지고 모든 사고의 틀을 전부 뒤흔들어서 견고한 게 완전한 게 절대로 없다 이렇게 만든 거에요. 이런 운동을 뉴에이즈라고 합니다. 이런 뉴에이지라는 걸 많이 들어 보셨을 것인데, 그 시도를 보면 인간들을 어떻게 하면 동물처럼 부려 먹을 수 있겠는가를 연구하는 연구소가 있습니다. 영국의 타비스톡 연구소라는 인간 관계 연구소에서 그런 악한 짓을 하는데, 이 사람들이 맨 처음 시도해 가지고, 문화 틀, 기본, 터전 자체를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한 게, 리버플에서 비틀즈라는 청년들을 갖다가 키워가지고 미국에 상륙시키면서 모든 기독교적 윤리관, 가치관, 세계관 이걸 다 흔들기 시작합니다. 놀랍게도 비틀즈 음악에서는 장조, 단조하는 조가 없어요. 조가 없고 무조. 무조 12음이라 해서, 아무 조도 없는 장조, 단조, 지조도 없는 12음에다 그냥 12음을 계속 반복해서 사람들을 쇄뇌시키는 머리를 확 돌게 만드는, 거기다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 라고 하는 화학적 환각제를 미국 청년들에게 먹여서 인간들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타락으로 몰고 갈 수 있는가를 연구해요. 그렇게 해서 기독교적인 가치관, 기독교적인 거룩성, 클래식한 모든 아름다운 것을 전부 뒤흔들어서 구르게 만들어서, 댄스도 비보이 댄스로 거꾸로 서게 하며, 이렇게 하는 게 이 악당들이 하는 겁니다. 뉴에이즈 운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한 사람이 하자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에 어떤 다른 영들이 해요. 이런 풍조, 이런 시조를 누가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헝클어 가는데, 거기서 최종적인 결론이 전 세계에서 기독교만 없애자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들은 기독교만 없애자는 것입니다. 종교 중에 이 지구상에 남아야 할 종교는 불교하고 힌두교만 남아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마릴린 퍼거슨이란 사람이 '물병자리 음모'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런 걸 왜 창세기 공부를 하면서 왜 이야기 하느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면 다 그 질서에 들어가야 합니다. 창조 질서 안에 다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뒤흔들어가지고 '창조주도 물질도 절대적이 아니고 전부 다 상대적이다. 시간도 다 상대적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절대적인 것이 없으면 절대자인 하나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뒤흔드는데 거기에 어떤 음모가 있었다는 거에요. 제가 볼 때는. 그때 ?물병자리 음모?란 책을 쓴 사람은 미국의 여자인데, 마릴린 퍼거슨이 써가지고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물병자리 음모라고 안 쓰고, ?의식의 혁명?이라고 썼어요. 책 제목이. 한국에 있는 책 중에 마지막 남아있는 한 권을 샀어요. 제가 워낙 교보문고의 단골이다 보니까, 주문하면 전국을 다 뒤져서 찾아줍니다. 마지막 한권 남은 것 사가지고 샀습니다. 읽어보고 있는 중인데 참 무서운 책입니다. 그래서 이 하늘에 12궁성의 별자리가 여러 개가 있는데, 염소자리, 전갈자리, 큰게자리, 사자자리, 처녀자리, 궁수자리, 염소자리, 물고기자리, 물병자리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그 중에서 물고기자리 다음으로 물병자리라는 겁니다. 물고기자리가 뭐라고 하느냐. 물고기자리가 예수님 자리라는 거에요. 예수님 시대 라는 것이고, 그 시대가 지나가고, 물병자리 시대가 도래했다. 이게 물병자리 음모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병자리 음모에서는 만유일체를 말합니다. 모든 것이 다 신이다 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신이면 힌두교 사상입니다. 모든 사물이 다 불성을 갖고 있다. 이건 불교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도 신이다 라는 거에요. 여러분, 이 말을 누가 한 말입니까? ?네가 선악과를 따서 네가 먹고 네 눈이 밝아져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네가 하나님이 되라? 라고 마귀가 창세기부터 해 온 거에요. 오늘날 우리가 다 들을 수 있는 이게 이른바 뉴에이즈 운동. 뉴에이지 무브먼트 하는 것도 다 그 때 에덴동산에 있던 그 마귀가 인내심을 가지고 하고 있는 거에요. 인내심과 조직력을 가지고. 또 인간의 무지를, 무식한 인간들을 이용해 가지고.. 또 교회에서 청년들 잘 들으세요. 교회에서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말고, 성경 읽지도 말고, 계속해서 그 물병자리 음모에서, 뉴에이즈 운동에서 만든 그 뉴에이즈 음악에다 맞추어 가지고, 복음성가, CCM을 만들어 가지고 섞어 가지고 계속해서 이건지 그건지 구분 없이 만들어라 하는 거에요. 이게 CCM이라는 거에요. 크리스천도 컨템퍼러리하게 우리와 같이 어울리자. 기독교가 왜 자꾸 거룩하려고 하느냐.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청년들을 보면 성경을 보고 묵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공부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이 담당한다는 CCM을 위해서 장비를 설치하고 철거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예수 찬미 천 이천 삼천 사천이 나오니까, 이걸 매주 새로운 곡을 익히려니, 한 30, 40분 걸리고 장비 설치하는데 30분 철거하는데, 30분 연습하는데 30분……. 도무지 성경을 보거나 기도할 시간이 없어요. 이게 바로 물병자리 음모라는 거에요. 그런데 이걸 몰라요. 가사를 보니 성경에 나온 가사 같은 게 있으니 좋은 거 아닌가? 노래를 부르니까 감정으로 카타르시스가 되어 가지고 또 은혜 받았데……. 하나님이 은혜를 안 줬는데도 받았데 제가. 안 줘도 받는 사람들이에요. 큰 교회들을 보면 청년들이 교회에서 겨우 그것 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못하게 해봐요. 또 딴 교회로 가 버릴 것 아니에요. 그것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말리지도 못합니다. 지금 창세기가 케케 묵은 얘긴지 아세요? 창세기는 오늘의 책이고 내일의 책이고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오늘의 책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오늘의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공부를 제대로 안하면 신약시대고 뭐고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지금 서구 사회를 보면 무식한 거에요. 캄캄하고 영적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야. 지금 마귀가 입을 벌려놓으니, 마귀 입에 들어가서 춤을 추고 있다니까. 마귀의 혓바닥 위에서 그 장단에 지금 춤추고 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고 있어요. 울어도 시원치 않은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 교회가 영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똑바로 지적해 준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의 장단에 맞추어서 춤을 추는지를 모르고 춤을 추고 있습니다. 성령의 장단이 아닙니다. 시간이 좀 나면 영국이라던지 독일이라던지 미국의 신학이 지금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 가 보면, 여러분은 아마 놀라 자빠질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사대주의 근성이 있으니까, 크리스챤들이 사대주의가 있으니까 어떤 미국이나 독일이나 영국이나 가서 학위를 받아와야 행세를 하고 알아주니까,. 가서 배울 것이 있든 없던 머물다 와야 해요 또.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나온 논문은 한 편도 없습니다. 또 참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이 없다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없는 것을 가지고 누가 없다 하겠습니까? 벌써 신이 없다고 말할 때부터 신이 나타났잖아요. 우리가 이 진화론이란 것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니까 한참을 좋아했는데, 집에서 애들이 묻겠지요. ?아빠, 하나님 없는 건. 좋은데 사람은 어디서 나왔는데?? 물으니까 대답이 궁한거죠.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사람을 설명하다 보니까 진화론이 나온 거에요. 하나님이 있으면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면 그만이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고 사람을 만들었다. 얼마나 쉽습니까? 진리는 단순한 거에요. 그런데 이 복잡한 이야기, 진화론 이야기가 왜 나온 건가 하면, 하나님 없이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 이런 무리한 진화론이 나온 겁니다. 거짓말을 가리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또 하고 또 하다보니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거짓말을 하다 보니, 이제는 우리가 과거부터 잘못된 거짓을 알아서 거짓을 말했다고 못합니다. 교과서에 실어서 사기를 치고 그들의 지금 입장이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우리는 이해는 해야 돼요. 진짜입니다. 지금부터 좀 창세기 성경 본문을 읽다가 말씀드리죠. 창세기. 하나님아버지, 오늘은 우리가 구약성경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그 윤곽을 살펴보았고 이스라엘 역사가 또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역사란 것을 보면서, 우리가 이 율법을 먼저 잘 배워야만 역사가 보이고, 역사를 알아야만 또 예언서가 보이고, 율법과 역사와 예언서를 알아야만 또 신약이 보이겠으며, 이 신약과 구약을 원만히 이해한 후에 계시록까지, 미래 내세까지 다 볼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통전적으로 배우기 위해서 올라왔사오니, 우리가 지각을 열어서 하나님 말씀을 잘 알아듣게 도와주옵시고, 읽고 듣고 배운 것이 우리 속에서 마음속에서 머릿속에서 잘 정리되게 하여 주옵소서. 짧은 시간 자고 쉴 때에 우리 연약한 육체가 먼 먼 길을 달려왔고, 그리고 오늘도 긴 시간을 앉아서 아직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힘들은 과정을 수련 중에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고비를 잘 넘기고 끝까지 잘 완주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가 짧은 시간 자고 쉬지만, 우리 몸에 쌓인 모든 피로가 풀어지게 하옵시고, 내일도 독수리처럼 강건하게 주님과 동행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강의 : 노우호 목사님 (에스라하우스 원장, 마산샤론교회 담임목사)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1)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1) http://mission.bz/7094치유목회 박윤수 (한국치유상담연구원장) 1. Rogers의 생애 1) 어린시절(my early years) 로저스는 엄격하면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분위기의(religious and ethical atmosphere) 집안에서 6남매 중 4 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들은 그들을 매우 아끼고 돌보았다. 자라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의식 - no alcoholic beverage, no dance, cards or theater -하에 키워졌으며 사회적 관계는 적고 열심히 일하는 집안 분위기에 자라났다. 12살 때 농장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사의 가장 큰 이유는 아버님이 농장에 있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사춘기의 자녀들을 도시의 유혹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자 한 게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이곳에 있으면서 그는 나방 키우는 취미를 가지게 되고 또 그의 아버지가 농장을 과학적으로 경영하기로 생각하면서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로저스는 이 동물들(chicken, lamb, calves)을 키우며 과학적 영감을 키운 것 같다. 하나의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며 과학적 방법에 대한 지식과 존중을 얻게 되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2) 대학과 대학원시절(college and graduate education) 처음에는 Wisconsin 대학에서 농업 전공을 전공하였으나 졸업은 역사과 였음. 대학 시절 로저스는 종교모임에 참석한 후 목사(ministry)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며 대학 3학년때는 국제기독학생회 후원으로 국게기독학생연합회에 참석하기 위해 6개월간 중국에 갔다오게 되는데(1922년) 이 일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This was a most important experience to me 라고 얘기함). 그는 그곳에서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다양한 종교적 doctrine을 가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되어 그 자신의 종교관도 그의 부모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또한, 대학교졸업 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헬렌 엘리오트)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로저스가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람으로 로저스에게 꾸준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그녀의 도움이 로저스에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결혼 후 그는 Union Theological Seminary 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그 당시 가장 자유스런 신학교였음(1924). 이 신학교에서 그는 놀랍고도 중요한 경험을 하는데 그건 자유스런 세미나의 경험 - 자기 자신의 생각과 느낌대로 그 결과가 어떠하든 흘러가는 - 이 그의 비지시적 상담의 모형이 된 듯이 보임. 그는 이곳에서 지내면서 점차 자신의 신념을 키우게 되었고 또한 그 자신의 사고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으려고 함( I wanted to find a field in which I could be sure my freedom of thought would not be limited) 3) 심리학자가 되다(Becoming a Psychologist) 자유스런 field를 원했던 로저스는 다시 전공을 바꾸는데 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의 관심을 끌었던 심리학을 공부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그가 다니던 신학교의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콜롬비아대학교의 사범대학(Teachers' college Columbia University)에서 다시 공부를 한다. 여기서 처음 child guidance work를 하게 되는데 이러는 동안 그는 그를 임상 심리학자로 여기게 된다. 또한 새로운 연구소인 Inaptitude for child guidance 에서도 근무하게 되는데 여기에 있으면서 그는 프로이드적 역동관(dynamic Freudian view)을 가진 사람들과 접하게 되나 그는 이 프로이드적 접근과 갈등을 느끼게 된다. 이 갈등은 그에게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다 로체스터에 있는 Child Study Department 라는 아동폭력방지협회에서 일하게 된다. 비록 보수는 $2,900으로 적었으나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가정을 위한 직장이 생기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4) 로체스터 근무시절(The Rochester Years) (이곳에서 12년간 근무) 로저스는 이곳에서 어린이들과 상담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그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되는데 좌절과 성공의 연속에서 차츰 자신의 이론과 견해를 정립시켜 나가게 된다. 『 Does it work?』 『 Is it effective?』라는 질문을 통해 그의 견해를 형식화시켜 나갔다. 그는 이런 과정에서 3가지 작지만 중요한 것들을 느끼게 된다. ① Authority 권위적 견해에도 실수가 있을 확률이 있으며 아직도 개발해야 할 지식이 많다. ⇒ 강박적인 방화 충동에 사로잡힌 환자를 면담하면서 그의 성적 갈등(sexual conflict)을 의식적으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례를 통해 느끼게 됨. 성적 갈등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많으며 이것이 드러났을 때 문제는 사라진다는 이론이 맞지 않게 되는 경험인데 로저스는 이 이론에 관심이 많았었다. ② materials 주도적인 인터뷰 방법이 그리 효과적이지 못함을 깨달음 ⇒ 처음에 그는 인터뷰를 빨리 그리고 직접적으로 이끄는 방법을 발견했고 이것에 만족했으나 나중에 이런 그의 방법이 오히려 내담자의 무의식적 동기의 잘못을 인정하게 만드는 논리적인 질문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이 계속적인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됐다. ③ my self 어디가 아프며, 어디로 가야 되고, 어떤 경험이 묻혀 있으며, 어떤 문제가 결정적이었는지 하는 것을 잘 아는 것은 바로 내담자 자신이다. 따라서 내 자신의 지식과 똑똑함을 내보이는 것 대신에 상담의 방향을 내담자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 ⇒이런 그자신의 태도의 변화는 어느 지적인 어머님과의 면담에서 느낀 것으로 이 어머니는 그 아들의 문제로 면담을 했었는데 아이의 문제 행동의 원인은 ( The problem was clearly her early rejection of the boy)에 있었다. 그러나 로저스는 이런 그녀의 반복적인 태도에 대해 이해시키는데 실패했고 상담을 종료하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상담실을 나가기 직전에 “어른과도 면담을 하나요?”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이에 로저스는 긍정적인 대답을 하게 되면서 부인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 즉 실패감, 불만, 결혼, 절망감 등에 대해 얘기하게 되는데 이런 얘기는 그녀가 얘기했던 Case history 와는 전혀 다른 얘기였고 이때부터 진짜 치료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5) 로저스의 두 자녀(My Children) 로체스터에 있는 동안 로저스는 두 자녀(다비드와 나탈리)를 키우게 되었다. 자녀들이 유아기와 아동기를 지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그의 직업적인 것에서 보다 더 많은 것들 - 개인, 발달, 관계-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로저스는 그 자신이 좋은 아버지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그의 부인은 좋은 어머니였음을 얘기했다. 로저스는 그의 자녀들과의 관계(아동 시절의 기쁨과 고통, 청소년기의 assertiveness 와 어려움들. adults years와 자식들 자신의 가족의 시작)가 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로저스는 그의 자녀들과 깊이 있게 얘기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큰 성과들 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얘기하고 했다. 6) 오하이오주립대 교수시절(Ohio state years) 1940년 로저스는 오하이오주립대학(Ohio state university)의 교수가 된다. 그가 그 대학으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Clinical treatment of the problem child』라는 책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학계에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 자신이 매우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이를 구체화시키고자 노력했다. 1940년 12월에 미네소타대학에 논문을 제출했는데 그 반응이 아주 강했다 (strong). 이런 일은 그 자신의 견해가 타인에게 큰 영향을 줄 수 도 있다는 첫 경험이었다. 또한 1942년에 그는 『 Counseling and Psychology』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상담계에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의 이론능 비지시적 상담이라고 불리는 계기가 된다. 7) 그 후의 생애 1945년 로저스는 시카고 대학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그의 유명한 저서 “내담자 중심치료(Client Centered Therapy)"를 발표했다. 그후 그는 다시 위스콘신대학으로 옮겼는데 그는 그곳에서 심리학과와 정신의학과에서 강의하였으며 병원에 입원해있는 정신병환자를 연구하였다. 1966년 로저스는 위스콘신대학을 떠나 캘리포니아의 라욜라(La Jolla)에 있는 서부행동과학연구소로 옮겼으며 1968년에는 몇몇의 동료와 함께 라욜라에 인간행동연구소(Centers For Studies of Person)을 설립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그의 시간의 대부분을 인간중심집단치료의 연구와 저술에 바쳤다. 그리고 1982년에 숨을 거두었다. Important events in Carl Rogers? life 8 Jan 1902 Born in Chicago, Illinois 1919 Enters agriculture program at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Feb - Aug 1922 Trip to the Far East 22 Oct 1922 Becomes engaged to Helen Elliott 23 Jun 1924 Receives BA in History from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28 Aug 1924 Marries Helen Elliott 1924 Enrolls in liberal Union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 City Summer 1925 Serves as visiting pastor in Dorset, Vermont 1926 Leaves Union for Columbia University Teachers College 17 Mar 1926 David Elliott Rogers born 1 Jun 1927 Recieves MA from Columbia University Teachers College 1928 Joins Rochester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Children (RSPCC) as child psychologist 9 Oct 1928 Natalie Rogers born 1929 Made director of the Child Study Department, RSPCC 20 Mar 1931 Receives doctorate from Columbia University Teachers College 1939 The Clinical Treatment of the Problem Child is published 1940 Accepts position at Ohio State University as clinical psychologist and full professor 11 Dec 1940 Client-centered therapy is ?born? as Rogers addresses the University of Minnesota?s psychological honors society 1942 Counseling and Psychotherapy is published 1945 Moves to the University of Chicago to start counseling center 1946-1947 Serves as president of the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APA) 1951 Client-Centered Therapy is published 1956 Receives the APA?s first Distinguished Contribution Award 1957 Accepts appointment at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in psychiatry and psychology 1961 On Becoming a Person is published Jan 1964 Moves to La Jolla, California, to join staff of the Western Behavioral Studies Institute (WBSI) 1968 With several WBSI colleagues, leaves to form the Center for the Studies of the Person (CSP) 1968-1977 Works with ?encounter groups,? larger organizations 1970 Carl Rogers on Encounter Groups is published 1977 Carl Rogers on Personal Power 1977-1985 Travels extensively to promote his Person-Centered Approach in workshops 29 March 1979 Helen Rogers dies 30 Jan 1987 Nominated for the Nobel Peace Prize by Congressman Jim Bates 4 Feb 1987 Dies in La Jolla, California 이 게시물을...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2)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2) http://mission.bz/7095치유목회 박윤수 (한국치유상담연구원장) 2. 로저스 이론의 발달과 보급 1) 로저스 이론의 발달단계 <상담이론, 교육과학사. p.126-127 > ① 비지시적 단계(nondirective stage : 1940 - 1950) 감정의 반영과 비지시적 기법들로 특징지어짐.『 Counseling and Psychotherapy (1942)』출간 ② 내담자 중심 단계(Client centered stage : 950-1957) 『Client - Centered Therapy (1951)』출간. 내담자를 의존적인 환자가 아닌 책임감 있는 내담자로 취급하는 성격 및 심리치료이론 개발 ③ 경험적단계 ( Experiential stage : 1957-1975) 치료자의 유기체적 경험은 내담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행동을 이끄는데 중요한 준거가됨. 이론의 광범위한 적용이 가능. ④ 인간중심단계(Person centered stage) 관심을 개인에서 교육, 산업, 사회, 국제관계 등으로 돌리기 시작 <상담이론 알아보기, 한남대학교 출판부 p.51-52> ① 1940년대 수용, 반복, 명료화 등의 방법을 사용하는 통찰요법이다. 통찰의 내용은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깨닫는 것이다. 주로 tape분석, 검토를 한다. ② 1950년대 기법보다 counseling 태도가 중시되었다. 내담자의 내적인 참조체제(frame of reference)로 counselor가 같이 공감하고 생각하는 태도, 이것이 치료의 필수요소이다. ③ 1960년대 로저스가 실존주의자로 변모하면서부터이다. 이는 counselor-client 관계를 고치는 자-고침받는 자의 관계(profession)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서로 대화하자는 태도이다. 따라서 client centered 가 아니고 person centered(인간중심)이다. 여기에선 의식적인 기법(수용, 반복, 명료화)이나 의식적인 태도(상대방의 frame of reference)를 포함하여 순간순간의 자기가 원하는 태도를 서로 제시하고 진심으로 충실해지는 것, 이러한 체험 이 사람을 고친다(encounter 중시). 2. 로저스의 이론이 급속히 보급된 이유 정신분석학의 시작은 1990년이며( <꿈의 해석>출판의 해로 출판 당시 프로이드는 44세 였음), 인간중심상담론의 탄생은 1940년이다(로저스가 38세때, 미네소타대학의 초청 강연 때 이론화의 확신을 가짐) 따라서 정신분석 보다 40년이나 늦게 시작한 이 이론이 더욱 급속히 보급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① 비의사(Non-medical)라도 심리요법, 카운슬링이 가능하다. ② 이론이 단순하여 심리학 전공자 이외에도 학습이 용이하다. ③ 정신분석학보다 면접횟수가 적어 보급이 용이하다. ④ 카운슬러가 내담자를 환자가 아니라 손님으로 대하는 인간관계이다.(민주주의 사상 부응, 권위주의에의 반동, 인간존중의 평등한 인간관계 등이 특이하다) ⑤ 인간에게 성장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신뢰감이 미국의 낙천주의에 적합했다.(A.ANeil 이나 E.Fromm의 생각) ⑥ 기독교 문화권에서의 죄의식에 고민하는 자가 로저스의 비심판적 이론에서 해방감을 얻는다. 이 게시물을...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3)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3) http://mission.bz/7096치유목회 박윤수 (한국치유상담연구원장) 3. 인간중심상담이론 Ⅰ. 주요개념 1.인간관 로저스는 인간은 자기를 인도하고, 조절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적절한 조건만 제공되면 마치 씨앗이 성장하여 기능성을 발휘하는 것처럼 타고난 잠재력을 건설적으로 발달시킨다고 보았다. 2. 성격이론 가) 성격의 구조 로저스는 성격자체보다는 상담의 결과 어떻게 성격변화가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인간 성격의 핵심요소-유기체, 현상적 장, 자아 ① 유기체 : 유기체란 전체 인간-신체, 정서, 지식-을 말한다. 인간은 경험에 대해 유기체적으로 반응한다. 다시 말해 어떤 자극이 있을 때 그 자극에 대하여 우리의 전 존재가 반응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저스는 총체적(holistic)입장을 띤다. ② 현상적 장: 이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험의 세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적 사실이 아니라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지각하는 가이다. ③ 자기-가장 중요한 요소 전체적인 현상학적 장 또는 지각적 장으로부터 분화된 부분으로 나(I 와 me)에 대한 일련의 의식과 가치를 말한다. 이 자아는 성격구조의 중심이며 성격발전의 핵심이다. 자아는 유기체의 행동의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나) 부적응 성격의 발달 타인으로부터 긍정적인 관심을 받으려는 욕구는 유기체가 실질적으로 느끼는 욕구를 억누르게 되고 타인의 생각과 가치를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경험이란 아이 자신이 경험하는 바에 의해서가 아닌 타인의 판단에 의해서 좋고 나쁨이 평가되어진다. ☞ 심리적 부적응 현상 신경증 : 심리적 부적응으로 인해 공격적인 수준의 불안을 지속적으로 경험 성격파탄 : 심리적 부적응이 너무 커서 방어기제가 작용할 수 없을 때 자아개념이 깨어짐 다) 자아실현경향성 인간의 중핵적 경향성(core tendency) 실현적 경향성(Actualizing tendency) 형성적 경향성 (formative tendency ) 모든 유기체는 자기자신을 보호하고 실현하며 또 고양시키려는 하나의 기본적인 경향과 노력을 지니고 있으며 유기체는 유전에 의하여 규정된 방향에 따라 스스로 실현하며 그러한 실현적 경향성은 장기간에 걸쳐서 더욱 성숙하고 확장되며 자율적이 된다.(로저스,1951) 우주내의 모든 유기체와 인간은 일정한 방향으로 형성되고자 하는 경향성이 있는데, 이는 더욱 질서 정연하고 복잡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총체적인 운동이며 진화적인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로저스,1978) 3. 충분히 기능하는 사람(fully functioning person) 자신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능력과 재질을 발휘하여 자신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경험을 풍부히 하는 방향으로 이동해 나가는 사람 가. 경험에의 개방성(↔방어적인 삶) 가치의 조건에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상태로 자신의 감정과 태도를 자율이 경험할 수 있다. 방어기제의 사용 없이 자신을 개방할 수 있다. 나. 실존적인 삶(↔대부분 전에 부모로부터 습득한 방식대로 삶) 경직성, 완벽한 조직, 경험에 대한 의도적인 구조가 없는 삶 모든 경험을 이전에는 결코 비슷한 방법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새롭게 신선하게 느낀다. 다. 자신의 유기체에 대한 신뢰(↔유기체의 불신) 가장 만족스런 행동에 도달하는 믿을만한 수단이 바로 자신의 유기체임을 믿는 상태. 옳다고 느껴질 때 그렇게 행동한다. 『어떤 행동이 마치 행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때 그 행동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어떤 상황에 대한 나의 유기체적인 감각전체가 나의 지성(intellect) 보다 더 믿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61, 로저스) 라. 자유감(↔조작되는 느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음) 삶에 대한 개인적 지배감을 즐기며 그것은 일시적인 생각이나 환경 또는 과거의 사건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믿는다. 마. 창조성(↔일상적이고 틀에 박힌) 남들로부터의 인정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모든 영역에서 창의적인 소신과 삶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4)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4) http://mission.bz/7097치유목회 박윤수 (한국치유상담연구원장) Ⅱ. 상담의 과정과 기술 1. 상담의 목적과 목표 내담자의 자아개념과 유기체적 경험간의 불일치를 제거하고 그가 느끼는 자아에 대한 위협과 그것을 방어하려는 방어기제를 해체함으로써 충분히 기능하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을 상담의 목표로 삼는다. 2. 상담의 과정 상담의 과정(On Becoming a Person에서 인용) ① 제 1단계: 이 경직된 경험의 상태에 있는 개인은 자발적으로 상담을 하러 오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피상적인 것이다. 친밀하게 터놓고 대화하는 것은 위험한 것으로 느껴진다. ② 제 2단계: 첫 번째 단계에서 충분히 수용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되면, 상담의 과정은 제 2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가끔 감정들이 표현되기도하나 아직은 과거의 객관적인 경험의 하나로 묘사된다. 그 문제나 갈등이 있는 갈등이 하나의 객관적인 다른사람의 문제처럼 지각된다. ③ 제3단계: 계속 자신이 있는 그대로 수용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되면, 보다 많은 감정들과 사적인 표현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나 경험이 아니고 하나의 객체로서 자기와 관련된 경험들의 표현이다. 어떤 문제도 개인의 외부보다는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④ 제 4단계: 3단계에서 내담자가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수용되고 이해되고 있다고 느낄 때, 보다 자유로운 감정의 흐름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전에는 의식하기를 부인했던 감정들이 그대로 표현되기도 한다. ⑤ 제 5단계: 내담자의 유기체적 유동성의 자유가 증가된다. 따라서 감정들이 지금 여기서의 느낌 상태로 표현된다. 전에 부인 되었던 감정들이 두려움은 있지만 의식속으로 흘러나온다. 진실된 나가 되려는 바램이 있다. ⑥ 제 6단계: 제5단계를 거치면서 이제까지의 상담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극적인 단계로 발전한다. 전에는 부인했던 감정들을 즉각적으로 현재의 경험들로 수용한다. 이제까지 객체로서의 자아는 사라지고 경험의 과정은 현실적인 것으로 된다. 내담자는 자신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대처해 걸 수 있게 된다. ⑦ 제 7단계: 이 단계에서는 이제 상담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아와 유기체의 경험들간의 불일치성은 최소화되고, 일시적이다. 자아는 이러한 경험의 과정에서 신뢰롭게 된다. 그리하여 개인은 자유롭게 경험하면서 충분히 경험하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 상담과정의 특징 ① 상담과정이나 문제해결에 대한 내담자의 책임과 구체성을 강조한다. ② 수용적인 상담관계의 중요성을 강조 ③ 수용적인 분위기에서 내담자가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내담자는 자신의 해결책을 스스로 찾을 수 있게 한다. 로운 관계를 맺는다 이 게시물을...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5)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5) http://mission.bz/7101치유목회 박윤수 (한국치유상담연구원장) 3. 상담의 기술 가. 공감 ▲ 카운슬러가 내담자의 생각, 느낌, 경험에 대하여 카운슬러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내담자의 입장에서 듣고 반응하는 것이다. ▲ 내담자에게 던져주는 단순한 언어반응이 아니라 내담자와 함께 하는 과정이며 내담자의 내적 참조체제(Internal frame of reference)를 이해해야 한다. ① 내담자의 자기존중감을 증가시킴 ② 내담자의 소외감 해소 ③ 새로운 이러한 경험에 대해 흐뭇하게 느낌 ④ 내담자의 자기각성을 증진시키고 자기탐색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게 됨 나. 무조건적 긍정적 관심(배려) ▲ 내담자에 대한 수용, 비소유적 온정, 존중이다. ▲ 내담자의 자기패배적인 순환과정을 파괴시킨다. 다. 진실성 카운슬러가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반응이 순간순간 그가 내적으로 경험하고 느끼는 바와 합치되는 상태를 말한다. #진실성이 중요해지는 이유 ① 내담자로 하여금 카운슬러와의 상담과정을 신뢰하게 해준다. ② 내담자 역시 상담자처럼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 놓게 되어 자기수용의 가능성이 커진다 ③ 내담자 역시 진실성 있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게 된다. #진실성의 특징 ① 단순한 자기노출과는 구별된다. 자기노출-자기자신에 대한 정보, 생각, 느낌, 경험을 드러내 놓는 것 진실성 - 내담자의 경험에 대한 카운슬러의 반응 ② 내담자의 현재 관심사나 상황과 관련된 것 ③ 진실성의 조건 내담자에 대한 카운슬러의 심층적 느낌 ⇒ 자신의 느낌에 대한 카운슬러의 각성 ⇒ 카운슬러 자신의 느낌에 대한 표현
Freud 비판(정신분석학)/박영남 교수님의 목회정신의학강의안/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Freud 비판(정신분석학) Freud의 정신분석은 인간이해에 새로운 장을 제공하였다고 평가받으나 심리학자들은 그의 이론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기 어렵다는 점에, 인본주의자들은 지나치게 기계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이라는 점에, 그리고 행동주의자들은 반대로 충분히 환원주의적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여기서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논의되는 것을 소개한다. Freud 자신은 유대교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신앙생활을 계속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를 환상이라 하였으며 정신분석 이론은 본질적으로 무신론적 이론이다. 그는 종교를 믿는 사람은 성장 과정에 냉정하고 불확실하며 위협적인 현실에 직면하여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고립과 소멸에 직면하면서 경험하는 심한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안정시키기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환상이 종교라고 하였다. 연약하고 취약한 아동이 전능한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받았다는 유아기의 왜곡된 기억을 유지하여 안정과 안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종교를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치하는 일종의 신경증 현상으로 본다. 정신분석은 인간 행동에서 무의식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인간의 욕구와 현실 사이의 갈등은 의식에서 지각하는 것과 함께 지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이에 대응하는 방어기제를 통하여 인간의 행동은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정신분석의 관점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렘17:9) 하여 인간이 알지 못하는 마음을 지적한 말씀과 상반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근본 갈등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과 거역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 있다. 정신분석은 아동기 부모와 관계가 심적 갈등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 성경에서도 자녀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과 일치한다. 정신분석은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하여 기능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한계와 무력함을 인식하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에 근거하여 정신분석적 관점과 상이하다. 정신분석은 자기를 이해하고 내적 갈등을 해소하여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에 초점을 두지만 기독교에서 인간의 구원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에 대한 갈등으로 나타나는 에디푸스 콤플렉스를 초자아로 승화시키어 극복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 인간에 대한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였다. 치료로서 정신분석은 적용하는데 많은 한계가 드러났으며 기독교 상담에서 좋은 관계의 모형이 되지 못한다고 평가된다.
Larry Crabb의 상담모델에 따른 중독상담
Larry Crabb의 상담모델에 따른 중독상담 http://mission.bz/7119치유목회 크리스찬치유목회연구소 Larry Crabb의 상담모델에 따른 중독상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로 오염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 수 있을까”하는 것이 중요한 삶의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탈세를 하지 않고도 부를 축적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아버지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녀들을 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갑자기 찾아온 교통사고로 신체적 장애를 입고도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정말 함께 살기 싫은 시어머니와 웃는 얼굴로 살 수 있을까?” 등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중독자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중독 대상에서 찾은 사람들이다. “당당하고 떳떳한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일에 성공하자”고 다짐을 거듭한 사람들은 일중독자가 되기 쉽고, “당당하고 떳떳한 아버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술로 달래는” 사람들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기 쉽다. 신명기 12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겠지만, 절대로 그들의 자취를 밟거나 그 민족들의 신을 의지할 목적으로 탐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즉,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고민과 갈등을 안고 살면서도, 그래서 때로는 중독의 유혹에 빠질 수 있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의지해서 살아가는 그들의 우상이 아니라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하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Larry Crabb은 ‘사람들에게 어떤 과정을 거쳐 심리적인 문제가 발생되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모델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중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측의 모델에서 첫 번째 칸의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요구'에는 1) 자신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치감)와 2) 관계에서의 안전감에 대한 욕구가 포함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나는 무엇을 잘 해서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여 그 관계에서 안정감을 누리며 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는 분명히 타락 이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충분히 누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욕구를 만족시키고 싶은 잘못된 동기로부터 자신들만의 잘못된 가정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내가 돈이 많다면…'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을 알아준다면…',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 준다면…', 나는 충분히 내가 중요하다는 느낌과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분명히 장애물이 존재한다. 때로는 자신이 미치지 못할 정도의 너무 높은 목표가, 때로는 우리의 불행했던 가족 환경이나 뜻하지 않은 사건과 사고들과 같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외부 환경이, 때로는 실패에 대한 불안감이 자신이 설정한 기본 가정에 따라 중요함과 안전감에 대한 욕구를 맛보는데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 결과 기대가 너무 높은 사람은 죄책감을, 외부 환경을 탓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분노감을,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모델을 중독 상담에 적용해서 생각해보겠다. 일반적으로 중독상담가들이 임상에서 가장 흔히 경험하는 성격장애에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반사회적 성격장애, 경계선 성격 장애, 그리고 편집성 성격장애가 포함된다. 먼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이 초라하다는 느낌을 피하기 위하여 전혀 미치지 못할 만큼의 높은 삶의 목표를 설정한다. 어쩌면 이들은 목표에 닿지 못했을 때의 죄책감을 피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완벽하고, 잘 나고, 인정받고 싶어할지 모른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능력과 운, 환경이 따라주는 사람들은 성취에 성취를 거듭하며 ‘일 중독자'가 되어간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내면의 죄책감과 실패감에 대한 고통을 다루기 위해, 또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일이 아닌 다른 것에 빠져든다. 그것이 요즈음의 컴퓨터 게임일 수도 있고, 인터넷 도박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알코올이나 약물일 수도 있다. 두 번째로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좌절에 대한 핑계를 외부 환경으로 돌리는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사회가 부조리해서, 나는 자식을 돌보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잘 살수 없는 체제 밑에서 살아가니까 화가 나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믿거나 의지하거나 돌볼 수 없고, 그런 한과 울분을 풀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 마지막으로 경계선이나 편집성 성격 장애자들은 사람들에게서 ‘버려짐을 받거나',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 관계에 중독이 되거나,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의 인간 관계를 회피하고 그들만의 안전한 공간에 머무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인터넷 채팅 중독이나 음란물 중독으로 나타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타락 이후 하나님과 단절된 채 자신들이 세운 잘못된 삶의 가정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중독상담의 과정은 먼저 중독 대상으로부터 떨어지는 연습을 한 후 결국 자신의 삶에 뿌리깊이 박혀 있었던 잘못된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탐색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진 지위나 돈, 명예에 더 연연해하며 살아오진 않았는가,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받아들임에 일희일비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살펴볼 일이다. 신명기 12장과 Larry Crab의 상담모델은 우리의 이런 모습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모세는 가나안에 머물지라도 그들의 신을 탐구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Larry Crab은 그 결과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죄책감, 분노, 불안감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거기 살면서 그와 같이 하지 않기'에 끊임없이 실패하지만 우리가 단절한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심으로 다시 회복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매일, 순간 순간 잇닿아 그에 의지하여 살아갈 때 우리는 중독의 위협을 넘어설 수 있다.
Well - dying이란?
\\\"Well - dying\\\"이란 이진영(석3)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 그러나 생명이 있는 한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웰 다잉’은 그런 질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죽음을 검은 베일에 가려진 금기가 아니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 이야기하며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는 대상으로 보자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지나온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고, 힘든 슬픔의 여정을 끝까지 견뎌내는 힘과 용기를 준다. 과연 우리는 죽음을 얼마나 제대로 준비하고 있을까. 국민들의 생사관은 현저히 달라지고 있고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고민도 한층 깊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서부지법에서 나온 ‘존엄사 판결’은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웰 다잉, 품위 있는 죽음을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먼저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존엄사 받아들인다” 88%, “호스피스 이용하겠다” 85% 무의미한 생명 연장에 반대하는 시민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 국민 열에 아홉은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윈위적인 생명 연장에 반대하고 있다. 국립암센터(원장 이진수)가 지난 10월 성인 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벌인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다. 죽음에 임박한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 등 생명연장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존엄사’에 대해서는 87.6%가 찬성 의견을 냈다. 2004년 82.3%에 비해 한층 높아진 수치다. ‘현재의 방법으로는 질병 치료가 불가능하고 점점 악화되는 경우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이용하겠다’는 응답자는 84.6%로 2004년의 57.4%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대한 설명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항목에는 87.6%가 찬성했다. ‘질병이 위중해 말기 상황에 처했을 경우, 본인이 말기라는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질문에는 91.8%가 ‘알아야 한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인식과 현실의 온도 차는 크다. 현재 대형 종합병원의 중환자실을 들여다보면 국민 의식 조사가 마음속의 바람을 반영한 것에 그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울대 병원 혈액종양내고 허대석·김범석 교수팀이 일본임상암학회지에 발표한 연구 결과는그런 현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들의 연구는 전이성 암으로 진단 받고 항암제 치료를 받은 국내 환자 298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사망할 때까지를 추적, 관찰한 것, 편안한 죽음을 준비해야 할 기간인 임종 직전 1개월 동안에도 대형종합병원 응급실을 방문한 암환자의 비율은 33.6%로 미국(9.2%) 등 서구선진국에 비해 대단히 높았다. 절반이 넘는 50.3%의 환자는 임종 두 달 전까지의 적극적은 항암제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임종 6개월 전까지 적극적인 항암제 치료를ㄹ 받는 환자는 9.1%에 불과했고, 상담을 의뢰한 시기는 평균 임종 53일 전으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이 의미 없는 치료를 받느라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병실을 전전하다 삶의 마지막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임종을 맞는 것이다. 지난 11월 28일, 존엄사를 사실상 인정하는 국내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 서부지법은 의식 불명 상태인 김모(75)할머니에 대해 “회복 가능성이 없는 연명치료가 환자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며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존엄사 권리를 인정햇다. 법원은 지난 1997년 보라매병원에서 의식불명 상태의 환자를 보호자의 요구로 조기 퇴우너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에서는 환자 보호자와 담당 의료진에게 살인죄와 살인방조죄 등 유죄를 선고했었다. 김 할머니는 2008년 2월 18일 폐암 발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기관지 내시경을 이용한 폐종양 조직검사를 받던 중 과다출혈 등으로 심정지가 발생했고, 이로 인한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8개월째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상태에 빠졌다. 항생제 투여와 인공영양·수액 공급 등 치료를 받았지만 김 할머니는 인공 호흡기를 제거하면 곧 숨을 거둘 수 있는 상태였다. 그 가족들은 김 할머니가 평소 “기계 의해 연명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며 생명연장 치료를 받지 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의사를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리면서 “가족들의 요구가 아니라 환자의 치료중단 의사가 추정되기 때문”이라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현재의 절망적 상태나 기대 여명기간, 현재 나이 등을 고려할 때 김씨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번 법원 판결에서는 존엄사와 관련, 3가지 쟁점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우선 치료를 하지 않으면 사망하는 응급 상황에서 환자 측이 치료 중단을 요구할 경우, 응급의료법률에 따라 의사는 환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환자의 회복 가능성이 없고 환자가 치료중단 의사가 명확할 경우에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인정돼 의사는 환자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환자가 의식불명 상태에 있을 경우에는 가족과 친지에게 그가 평소에 말한 내용이나 타인의 치료에 대한 반응, 기대 생존기간 등을 종합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존엄사 문제에 대해서는 소생가능성에 대한 판단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것은 가족들이 결정권을 가지고 소생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때 중단되는 치료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등 짚어야 할 문제가 많다. 최근 학계와 정치권 등에서는 존엄사 문제와 관련,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2월 22일 자유선진당 변웅전·이영애 의원이 주최한 ‘안락사와 존엄사 토론회’에서는 연명치료 중단 허용에 대한 법제화를 놓고 “환자나 가족의 고통 등 현실적 측면을 고려해 허용해야 한다” “기계 장치에만 의존해 임종 시간을 미루는 생명유지 기술에 대한 거부는 인간적 죽음의 수용을 위한 준비” 라는 주장과 “의사의 오지이나 반강제적 생명포기 같은 부작용을 감안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자칫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질병으로 시달리는 시민에 대한 새로운 고려장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한편 12월 19일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존엄사 허용, 입법적 해결 가능한가:생명권의 볍률적 제한적 가능성을 중심으로’라는 현안 토론회가 열렸다. 민주당 전현희 의원이 주최한 이날 토론회에서 이석배 경남대 법학부 교수는“환자의 사전의사표시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고 보호자와 의사 상호간에 발생하는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라 밝혔고, 구인회 가톨릭대 교수는 “무의미한 치료 중단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했다. 전병왕 보건복지가족부 의료제도과장은 “정부는 연명치료 중단의 입법화 가능성을 검토 중에 있다”면서 “법적·윤리적 정당화 가능성, 절차와 방법·요건, 국민의식 조사 등을 통한 우리 사회의 수용가능성을 중점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존엄사 말 그대로 ‘품위 있는 죽음’을 말하는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의 의학적 치료를 다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학적 치료가 생명을 더 이상 연장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생명을 더 단축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본다. 안락사 질병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인 행위에 의한 죽음을 뜻한다. 존엄사와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의 요청에 따라 약제 등을 투입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를 ‘적극적 안락사’,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공급이나 약물 투여 등을 중단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이나 심폐소생술 등을 의미한다. 인공호흡기 사용이나 심폐소생술, 신장투석 등 생명유지 기술은 죽음의 과정에 접어든 말기 환자에겐 고통을 연장해 오히려 비인간적이라는 윤리적 지적이 나온다. 무의미한 치료는 환자가 의학적으로 회복 가능한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호흡정지와 심장마비로 사망할 위험이 있을 때 실시하는 ‘의미 있는’ 생명연장치료와는 구분된다. 미국 카네기맬런대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가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끝났다. 말기 췌장암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도 밝은 미소로 삶과 꿈을 이야기한 동영상으로 세계를 감동시켰던 그는 죽음마저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드렸고, 마지막까지 여유 있게 농담을 하면서 여행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강의’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꿈에 대한 강의였다. 반면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떤가.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밝은 미소 속에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아직 많지 않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꿈과 희망을 설파한 포시 교수의 죽음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 사회에서 ‘웰다잉’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는 통계가 있다. 서울대병원 허대석(의대)교수팀이 전이성 암진단을 받았던 국내 호나자 298명을 삼아 순간까지 추적·관찰한 결과 말기암 환자 중 33.6%가 임종 1개월 전까지 응급실을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의 50.3%는 임종 2개월 전, 94,6%는 임종 6개월 전까지 적극적인 항암제 치료를 받았다. 미국에선 임종 6개월 전까지 항암 치료를 받은 환자는 33%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에서 안락사와 존엄사 논쟁이 그치지 않는 것도 심페사·뇌사 등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이 마치 죽음의 정의인 양 죽음에 대한 오해가 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해가 “죽으면 다 끝나는게 아니냐”는 육체중심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죽음이란 옷을 갈아입는 과정”이라고 했다. 생사학을 창시한 미국의 정신과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을 눈앞에 둔 어린아리를 향해 이같이 말했다. “우리 몸은 번데기와 마찬가지다. 죽으면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나비처럼 예쁘게 날아서 천국으로 날아간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포시 교수가 주는 교훈은 마지막 순간까지 낙천적이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100만 명 이상이 본 ‘마지막 강의’란 동영상에서 그는 절대 꿈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포시 교수처럼 죽음에 대처하는 것은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Ⅵ.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며/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Ⅵ.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며 (죽음의 신학 379 ~ 449쪽) 석사과정 1학기 임보영 사도신경에 의하면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에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영원한 생명”을 고백하기 전에 “몸의 부활”을 고백한다. 역사의 마지막에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마지막 재판, 곧 “최후의 심판”을 받은 다음,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우리는 부활과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1. 우리 모두 부활하리라 1)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최근의 해석들 사도신경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 곧 “육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고백한다. 죽음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다가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살아나서 세계사 전체와 함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심판이 있기 전,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그들의 삶에 대한 마지막 책임을 지게 될 것이며, 그 다음에 영원한 생명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의심하며, 육체의 부활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많은 신학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한다. 다음은 그 가운데 세 가지 잘못된 견해이다. (1) 불트만(R. Bultmann)의 견해 : 그는 죽은 자들의 부활은 신약성서가 신화적으로 묘사하는 역사의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믿음의 결단과 세례를 통하여 지금 현재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2) 불트만의 영향下에 있는 오늘날 일련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은 역사의 먼 미래에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죽는 순간에 일어난다는 말한다. (3) 가톨릭 신학자 푀그틀레(A. Voegtle)는 미래에 일어날 시간적 종말과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인한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부활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전 15:13-14). 죽은 자들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구성적 의미를 가진다.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부활 신앙이 포기될 수 없는 이유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작으로 파악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을 “육신이 죽어 해체된 후에도 계속 살아남는 불멸하는 영적 실체”로 파악하면서 영혼 불멸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사도신경”에서 영혼 불멸을 고백하지 않고 “육의 부활”을 고백한다. 그럼 초대교회는 그의 문화권 속에 보편화되어 있던 영혼 불멸설을 고백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육의 부활을 고백하였던가? 대관절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여기서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밝히고 그것이 포기될 수 없는 이유를 고찰하고자 한다. (1)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고백한다. (2)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차안성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은 단지 영적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물질을 포함한다. (3)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차안성, 신체성과 물질성을 고백한다. 인간의 영혼과 신체를 포함한 전인적 존재가 부활할 것이다. (4)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신실하심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끝까지 사랑하며 그들과 교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은 죽은 자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도 언젠가 부활할 것이며, 하나님과의 새로운 생동적 교통 가운데 있을 것임을 부활 신앙은 증언 한다. (5)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그 근원에 있어 하나님의 의를 증언한다. (6)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죽음의 세력의 폐기를 요구한다. 3) 우리의 그 무엇이 부활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 신앙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썩어 없어진 인간의 육체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인간의 그 무엇이 부활할 것인가? 죽음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전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부활도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의 부활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의 부활, “전인적 인간의 부활”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존재 전체”란 무엇인가?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몸을 가지고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일어나는 영적-육체적 행위, 곧 몸적인 행위이다. 삶의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인간의 존재를 가리켜 우리는 신약성서가 말하는 “몸” 곧 인간의 “존재 전체”라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이 역사의 마지막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4) 부활 신앙의 구성 요소로서 영혼 불멸 인간의 영혼은 몸과 구분되지만 몸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전체로서의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영혼을 이와 같이 인격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소위 영혼의 불멸을 인정할 수 있다. 이때 영혼의 불멸은 영과 육의 이원론에 입각한 영혼 불멸설이 말하는 소위 몸 없는 영혼의 불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관계들과 역사를 통하여 결정된 인간의 인격의 핵, 그의 자아의 불멸을 말한다. 우리는 인격적 의미에서 “인격적 불멸”을 인정할 수 있으며 이것을 기독교의 부활 신앙의 구성 요소로서 인정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인정되지 않을 경우 부활 신앙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영혼 불멸설로써 기독교의 부활 신앙을 대체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지 영혼을 인격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그것을 부활 신앙 속에 통합시키려는 것에 불과하다. 김명용 교수가 말하듯이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죽은 자의 부활에 있다. 이 죽은 자의 부활이란 인간의 영혼이 본질적으로 갖는 불멸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능력에 기인하는 새 생명을 의미한다.” 5) 몰트만의 부활 신앙과 영혼 불멸의 통합 최근에 몰트만도 그의 종말론 『오시는 하나님』에서 영혼 불멸과 부활 신앙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 안에는 영 혹은 정신이 있는데 이 영은 “하나님의 생명의 숨”(ruah Jahwe)으로부터 와서 인간을 생동케 하며, 인간이 죽은 후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간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이 생명의 영은 죽지 않는다. 몰트만에 의하면, 영은 몸과 영혼을 가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실현시키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전인적 관계를 모든 상황 속에서 실현시킨다. “우리의 영”을 가리켜 우리는 “삶의 형태와 삶의 역사” 혹은 “삶의 총체성”이라 부를 수 있다. 인간은 총체적으로 살고 총체적으로 죽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부활시킬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몰트만에게 다음과 같은 비판적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새로운 형태의 삶 곧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일이 이미 죽음과 함께 일어난다면,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보편적 부활”은 불필요하지 않은가? 오히려 죽은 자들의 삶의 형태와 삶의 역사, 곧 그들의 인격이 성서가 말하는 수면 상태 속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며, 보편적 부활과 함께 새로운 삶으로 변화된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2. 최후의 심판 기독교는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곧 “최후의 심판”을 믿는다. “영적 몸”(고전 15:44)으로 부활한 다음, 각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1) 최후의 심판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반적으로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따라 인간을 재판하시고 악인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벌을 내리고, 선인에게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 대한 희망이 등장할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인간에게 상과 벌을 내리는 것 이상의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의 마지막에 인간은 모두 부활하여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도 무덤에서 부활시켜 그의 의로운 심판대 앞에 세울 것이다. 그 때에 모든 인간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들의 모든 진실과 거짓이 드러날 것이다. 각자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삶 전체에 대하여 책임을 질 것이다. (1)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고백이다. (2)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고백이다. (3)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정(神正)에 대한 고백이다. (4) 최후의 심판은 역사의 의로운 마감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다. 2) 최후의 심판은 어떻게 끝나는가? 일반적으로 최후의 심판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의로운 자에게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며 불의한 자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내리는 것, 곧 두 가지 결말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일련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반면, 다른 일련의 사람들은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이것이 최후의 심판의 마지막 귀결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쁨도 불완전하지 않겠는가? 또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절대적 사랑으로서의 하나님 상에 모순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 벌은 구원의 수단일 뿐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벌을 내린다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지옥의 벌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일시적 정화를 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부딪힌다. (1) 최후의 심판이 모든 사람의 용서와 만유의 회복으로 끝난다면, 인간의 윤리적 책임감이 해이해질 수 있다. 심지어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2) 그 반면 최후의 심판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의 두 가지 결말로 끝난다고 생각할 때, 무한한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의 상이 훼손된다. 하나님은 절대적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을 내리시는 잔인하고 무서운 하나님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은 보편적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딜레마를 고려할 때,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행위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대부분의 인류가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심판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딛 3:5)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이 결정된다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고, 아마 우리 모두는 지옥의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판단하지 않고,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딤후 1:9)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다. 3. 삶에 대한 전도서의 교훈 1) 차안적인 하나님-차안적인 종교 성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죽음의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보다 삶의 세계에 대하여 일차적 관심을 가진다. (1) 성서의 첫 책 “창세기”는 세계와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 곧 삶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시작한다. 죽음의 세계에 대하여 창세기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2) 구약성서에서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구원은 출애굽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이 철저히 차안적이며 현실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3) 구약 오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율법”은 삶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으며, 율법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십계명도 삶의 세계에서 지켜야할 하나님의 계명들을 요약하고 있다. (4) 예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하나님나라”에 있다. 그가 선포하며 또 기적을 통하여 앞당겨 일으키는 “하나님의 나라”는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 속에 실현되어야할 하나님의 새로운 현실을 가리킨다. (5) 예수의 “주기도”도 차안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 위에서도” 곧 차안의 세계 안에서도 이루어져야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곳에 와야 한다. 또한 주기도문은 이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기본적 삶의 태도를 제시한다. (6) 부활하신 예수는 차안의 세계 속에 다시 나타나시며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 위에 이룰 것을 명령한다. (7)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모든 윤리적 계명들도 차안의 삶 속에서 우리 인간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명령이다. (8)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도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 곧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 가운데 있는” 파안의 세계이다. 성서의 관심은 차안에 있다. 성서의 종교는 철저히 “차안의 종교”이다. 그 뿌리는 “하나님의 차안성”에 있다. 성서의 하나님은 철저히 “차안적인 하나님”이다. 차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삶을 누리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2) 비관적 현실주의자의 책-전도서 구약성서의 전도서는 비관적 현실주의자의 책이라 말할 수 있다. 전도자는 행위와 결과의 인과율을 부인한다. 이 세계는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하다. 이 혼돈과 모순은 먼저 의와 불의, 선과 악의 인과율적 질서의 혼돈에 나타난다. 이 세계의 혼돈과 모순은 근면과 나태, 소유와 향유의 인과율적 질서의 혼돈에 나타난다. 이 세계의 혼돈과 모순은 지혜와 어리석음의 인과율적 질서의 혼돈에 나타난다. 많은 지혜를 가졌다 하여 반드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어리석은 자가 오히려 행복하게 사는 경우가 많다. 이 세계의 혼돈과 모순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에 나타난다. 부지런하여 많은 재산을 가졌거나 많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 하여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혼돈과 모순을 보면서 전도자는 부르짖는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1:2-3) 그럼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현세의 삶을 누려라! 전도자에 의하면, 모든 것은 자기의 때를 가지고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으며, 만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다. 이러한 삶의 때에 순응하면서 삶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삶의 지혜이다. 인간이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 세계의 깊은 의미와 비밀을 해명할 길이 없다.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만이 그것을 아신다. 이 세계의 깊은 의미와 비밀을 하나님에게 맡겨 두고 자기의 삶을 향유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는 차안의 향유와 즐거움과 기쁨을 가르친다. 그러나 전도자는 맹목적이며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계명 안에 있는 삶을 권장한다. 이와 같이 전도자는 차안의 삶을 중요시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전망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4. 인간의 표상 능력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 1)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동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동경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 요소라 말할 수 있다. 생물학적 의미에서 생명의 무한한 연장에 대한 욕망, 이것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일차적 동기라 말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동경은 삶의 성취와 삶의 완성에 대한 동경 때문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나 행복과 기쁨을 원하며 성취된 형태의 삶을 원한다. 완전한 모습의 자기를 동경한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삶을 미완성 가운데서 중단시킨다. 죽음과 함께 그의 희망은 하나의 꿈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게 되며, 영원한 생명에서 삶의 성취와 참된 자기의 모습을 기대한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위에서 기술한 것을 넘어서는 다른 동기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고백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동기는 단순히 현세의 삶의 시간적 연장이나 성취되지 못한 삶의 성취를 바라는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그의 주권에 있다. 하나님은 삶의 주관자일 뿐 아니라 죽음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이스라엘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희망의 동기는 유한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동경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주권에 대한 믿음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계시며 인간에 대한 그의 신실하심을 끝까지 지킨다. 따라서 죽음도 인간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하나님은 죽음을 넘어서 인간과 함께 계시며, 인간은 하나님에게 속한다. 죽음도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을 파괴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나님과의 교통을 단절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을 거부한다. 인간 역사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거부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이 역사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예수는 “죽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죽음의 한계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이 예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에서 살아난 예수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11:25-26)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단순히 삶의 생물학적 시간을 연장시키거나 내세에서 성취된 형태의 삶을 누리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그의 주권과 의로우심에 대한 고백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2) “전혀 새로운 것”으로서의 영원한 생명 예수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혹은 “영원한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 가운데 완전한 형태의 영원한 생명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의 삶에서 출발하여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여러 가지 표상들은 현재의 삶에서 출발하며, 현재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즉 부정의 방법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이 세계에 속한 생명에 비하여 “궁극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가를 인간의 표상과 언어로 완전하게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한다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 인간의 희망은 공허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표상 능력과 언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가를 묘사하고자 한다. 5.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1) 삶의 “충만함”으로서 영원한 생명 “영원”이란 말은 본래 하나님에게만 해당된다. 하나님만이 영원하다. 영원이란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음”, “시간에 내맡겨져 있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나 영원이란 단순히 무한하게 연장되는 시간, 시간의 끝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을 뜻한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란 시간적으로 끝없이 연장되는 생명이 아니라 영적-정신적, 물질적으로 충만한 생명, 충만한 삶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성서는 영원한 생명을 단지 미래의 것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삶 속에서 얻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와 그를 보내신 이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1) 영원한 생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보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삶을 가리킨다. 곧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 내지 사귐, 하나님과 하나 됨에 있다. (2)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명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사랑 가운데서 이웃과 교통하며 이웃을 섬기는 삶에 있다. (3) 영원한 생명은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는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가리킨다. 충만한 삶이란 무엇인가? 소극적으로는 이 세계의 모든 부정적인 것이 사라진 삶이요,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며,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삶이다. (4) 영원한 생명은 “영적인 몸”의 삶이다. 몸적인 삶이다. (5)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서도 노동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6) 영원한 생명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 만물이 평화롭게 사는 세계일 것이다. 이 세계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완전한 화해 속에서 “창조의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 것이다. 2) 이 세상에서 경험되는 영원한 생명 일반적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죽음 다음에 올 피안의 세계, 곧 천당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면 마지막 “보편적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거쳐 역사의 종말에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는 영원한 생명을 단지 미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이 세상의 삶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현재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 세상에 있는 현재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영원한 생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현재의 삶 속에 앞당겨 일어난다. 역사의 목적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은 모든 잘 못된 관계의 회복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로 화해되고 통일됨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경험하는 영원한 생명은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의 완성을 향한 기다림과 동경 가운데 있다. 6. 영원한 생명은 “민중의 아편”인가? 1)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무신론의 비판 프로이트에 의하면 종교의 표상들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가 간절히 소원하는 바의 성취된 현실을 하나의 대상으로 투사시킴으로써 형성되었으며, 그것들은 소위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통하여 형성된다. 개인들에게 종교적 표상들을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문화이다. 모든 문화적 노력들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자연과 운명의 거대한 세력들 앞에서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필요성 때문에 생성된다.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피안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독교 신앙은 “차안의 참된 삶에 대한 신앙에 불과하다” 기독교가 말하는 피안의 삶의 모든 내용들은 사실상 차안의 삶의 본질적 내용들이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세계와 영원한 생명을 설정하고 모든 긍정적 의미를 투사시킨다. 따라서 기독교가 가르치는 영원한 세계,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실현되어야 할 충만하고 행복한 삶의 투사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기독교가 가르치는 피안의 영원한 세계와 영원한 생명은 “아편”과 같은 기능을 가진다. 기독교는 피안의 영원한 세계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함으로써 이 세상의 삶 속에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을 견디게 한다. 그것은 “환상적 위로”이다. 이 세상의 삶의 가치와 삶의 생동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는 종교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 2) 비판에 대한 비판-“영원한 생명”의 해방하는 기능 무신론의 이러한 비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비판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다른 한 가지 면을 간과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의 생명을 상대화시키며 이를 통하여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무한한 집착을 금지시킨다. 이 세상의 생명이 전부가 아니다. 삶의 궁극적 의미는 단순히 이 세상의 삶에 있지 않다. 우리의 생명은 현재의 삶으로 끝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무한한 집착에서 참된 것, 영원한 것을 향하여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인격적 해방의 기능을 가진다.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생명이 죽음과 함께 완전히 끝나버리며,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의미하게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이 나의 죽음과 함께 끝난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허무감과 좌절과 절망에 빠질 것이며 탐욕과 향락 중심의 삶에 빠지게 되어 인간 세계는 지옥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삶이 있다고 생각할 때 현재의 삶은 죽음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질 것이며,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참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며 그것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가질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영원한 생명이 있는 세계는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계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나라”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바라시는 영원한 생명은 단지 피안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현재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적, 물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아니라 삶의 내적인 충만함과 깊이를 뜻한다.
Ⅶ.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Ⅶ.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안락사의 문제와 함께- (p451~492) 치유선교학과 석사1기 김희숙 Ⅰ. 죽음의 장소로서의 병원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병원에서 맞기 때문에, 병원에서 어떻게 더 인간적이며 품위 있는 임종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많은 분야의 학자들과 전문인들이 거론하고 있다. 1) 현대병원의구조 현대산업 사회가 등장하기 이전에 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공동체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등장, 사회전체의 현대화(Modernisierung) 추세와 더불어 개인의 삶의 철저한 개인주의화(Individualisierung), 사회적 익명화(Anonymisierung)가 일어나면서, 가족과 소규모 공동체의 기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개인의 삶은 물론 그의 죽음의 공동체적 의미가 사라지고, 개인의 마지막 죽음은 철저히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배제되어 버린다. 이와 더불어 말기 환자의 임종을 도와주는 일이 병원에서 일하는 전문 의료인에게 맡겨진다. 곧 임종 과정을 도와주는 일의 전문 직업화(Professionslisierung), 제도화(Insitutionalisierung)가 일어난다. 병원은 의학 기술을 통하여 임종환자의 임종을 도와주는 업무를 체계화시키고, 이를 계획하고 수행하며 감독하는 기능을 행사하면서, 차츰 현대인의 아주 편안한 죽음의 장소가 되어 버린다. 현대의 병원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고도로 발전하는 과학 기술을 수용하고 과학 기술의 바탕위에서 체계적, 전략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말한다. 둘째는 병원의 관료적, 계급 체제적 관리에 있다. 현대의 병원은 현대의 과학 기술적 방법과 의료 기기들은 사용하는 동시에, 고도의 분업 체계를 가진 하나의 사회조직이다. 병원의 이러한 전문화는 “먼저 과학 기술적인 것이지만, 조직적으로 근거되어 있으며, 합리적 목적 추구의 원리에서 유래한다.” 고도의 훈련과 경험을 지닌 전문가들은 초현대적기기들을 가지고 병원의 엄격한 관료적 조직 속에서 환자들의 신체적 문제들은 물론, 그들의 정신적, 심리적 문제들을 치료하고자 한다. 이리하여 병원 종사자들과 환자들 사이에는 지식의 차이, 지위의 차이, 신분의 차이가있게 된다. 이러한 고도의 의학적 지식, 전문적 훈련과 경험, 엄격한 분업체계, 병원 종사자들과 환자들 사이의 지적, 사회적, 신분적 차이로 말미암아 현대의 병원은 인간성이 결여된 조직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다. 로데(J. J. Rohde)에 의하면, 인간적이며 인도주의적 목적을 달성코자 하며 또 달성해야 할 현대 병원의 또 한가지 특징은, 비인간성의 구조적 경향에 있다. 이것은 단지 현대 병원의 문제점일 뿐 아니라 현대 사회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사회 전체의 최대 목적이 더 많은 생산과 이윤에 있을 때, 인간은 이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며, 인간의 가치가 효율성과 소유에 따라 결정될 때, 사회는 점점 더 비인간적인 사회로 변모한다. 병원은 이러한 현대 사회의 위험성을 넘어서서, 그 자신의 전체 경향에 있어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구조적 특징(dehumanisiseende Strukturmerkmal)을 가진다. 2) 병원에서 일어나는 환자의 비인간화 병원은 그의 구조적특성 때문에 환자들에 대한 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어쩔수 없이 환자들을 비인격화시키고,” 개인들의 모든 특성과 자신의 의지를 묵살하며 “탈사회화 혹은 탈문화화의 과정에 복종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환자의 비인격화는 다음의 요소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1) 신체적 격리(Isolierung) : 환자는 평소 그가 살고 있던 삶의 환경에서 실제적으로 격리된다. (2) 사회적 격리 : “환자는 평소에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에서 병실로 격리된다. (3) 사회적 위치의 상실(Statusverlust) : 환자의 모든 행동과 신체적 활동들이 병원 종사자들에 의하여 관측된다. 이로써 환자는 그의 사회적 위치를 상실한다. (4) 인격적 격리 : 환자는 그 자신의 인격적 특징들, 자신의 의지를 복종해야 한다. 의료인은 환자의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한며 또 그것을 치료해야 한다. 이때 의료인은 환자를 더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 그 결과 환자는 의료인에 의하여 자신의 정체성이 고려되지 않는 하나의 “물건”처럼 다루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일어난다. 이리하여 현대의 거대한 병원 체제 속에서 의료인들과 환자는 비인격적, 객관적 관계를 가지게 되며, 환자는 자기의 정체성이 고려되지 않는, 이름 없는 하나의 “환자”로 비인격화된다.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환자들의 경우,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유명한 죽음의 사회학자 폰 페르버(Chr. von Ferber)는 병원에서 “병원 종사자들의 문화” 곧 의사, 간호사, 병원 행정 직원들의 문화와 “환자들의 문화”를 구분한다. 양자 사이에는 위치와 기능과 지식의 차이가 있다. 병원 종사자들과 환자들의 교통에 있어, 환자들은 병원 종사자들에게 의존한다. 전자는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후자는 그 명령을 따라야 할 위치에 있다. 전자는 의료학적 지식 체계를 가지고 있는 반면, 후자는 의료학에 대하여 거의 무지하다. 따라서 양자의 교통은 참된 인격적 교통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적 교통이며 피상적 교통에 불과하다. 임종이 멀지 않은 말기 환자의 경우, 이러한 일방적 교통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진다.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는 더 이상 삶의 시간과 삶의 기회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병원 종사자들과 그의 교통은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교통이다. 그는 사실상 인격적, 실존적 교통에서 단절되어, 홀로 죽음을 맞게 된다. 이것은 다음의 두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 의사, 간호사들의 과제는 일반적으로 말기 환자를 돌보는 데에 있지 않고 의학 기술을 통하여 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제거하는데 있다. (2) 말기 환자를 돌보고 그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병원이 설정하는 공적목적”에서 사실상 제외되어 있다. 그것은 병원에 대하여 이차적인 일로 간주된다. 오늘날 의사, 간호사들의 일차적 기능과 병원의 공적 주요 목적은 병원을 찾아온 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과 고통을 제거하고 환자의 건강을 회복하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이 병원의 일차 목적은 환자의 치료와 회복에 있기 때문에, 현대 병원은 치료될 수 있는 환자에 대하여 일차적 관심을 가지며, 더 이상 치료될 수 없는 환자들, 특히 말기 환자들은 병원의 공적 목적에서 제외된 존재로 간주된다. 오늘날 과학 기술은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마저 조작할 수 있고 변형시킬 수 있다. 자연과학과 의학의 이러한 발전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실험 대상으로 생각된다. 임종과 죽음은 그들이 싸워 이겨야 할 각자의 마지막 한계와 과제로 생각된다. 의사와 환자의 인격적 관계 문제는 의학 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말기 환자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그의 주변 세계로부터 분리된다. (1) 그는 병원 종사자들의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 분리된다. 병원에 일시적으로 머무는 환자들이 경험하는 분리 및 소외감과 비교할 때, 말기 환자들이 경험하는 분리와 소외감은 훨씬 더 심각하다. 말기 환자는 호전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삶의 희망을 더 이상 갖지 않기 때문이다. (2) 말기 환자의 실존적 요구들과 의료상의 요구들은 병원의 공적 목적에 조화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는 병원안에 머물지라도 병원에서 사실상 분리된다. (3) 말기 환자는 다른 환자들로부터 분리된다. 다른 환자들은 말기 환자들에 대한 불안, 경험의 결핍, 의사소통에서의 당혹감 때문에, 말기 환자들을 피하기 때문이다. 3) “인간적인 죽음”을 위하여 의사들의 개입과 의술의 도움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을 때, 말기환자는 대개의 경우 간호사들의 보호대상이 된다. 간호사는 말기 환자에 대하여 상당히 큰 책임을 안게 되는 동시에,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갈등에 빠진다. (1) 간호 교육과 실천의 갈등 (2) 병원의 공적 목적과 구체적 현실의 갈등 (3) 현대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죽음과 관련된 의사소통의 어려움이다. 간호사의 기능은 크게 나누어 네 가지로 구성된다. (1) 환자의 신체적 간호 (2) 환자와 가족에 대한 정서적 도움 (3) 환자의 교육 (4) 환자와 의사 사이의 중재 역할인데, 이 중재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간호사는 환자의 유일한 대화 상대자로서 고립된다. 그러나 이것이 간호사에게는 심리적으로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에, 말기 환자 내지 임종 환자는 결국 사회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고립되며, 홀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우리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 현상은 현대 사회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죽음의 배제”에 그 궁극적 원인을 가지기 때문이다. 죽음의 병원화(Hospitalisierung), 말기 환자 내지 임종 환자의 고립화(Isolierung)는 환자의 인격을 훼손하며, “품위 있는 죽음”을 불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기본 가능성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통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임종 환자의 위치는 “구조적 무위치성”이라 말할 수 있다. 병원은 그의 사회적 만남과 접촉을 결정함은 물론, 그의 신체적 기능들을 조정한다. 따라서 임종 환자는 인격적 훼손과 비인간성을 훨씬 더 깊이 경험한다. 임종 환자가 그의 삶의 마지막을 인간적으로 품위 있는 조건 속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임종환자의 통증을 완화시키는 요법(palliative Therapie)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통증 완화 요법은 다음과 같은 목적은 가진다. (1) 임종 환자와 그의 가족들이 마지막 작별을 하기까지 대화를 가질 수 있게 함. (2)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이 환자의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인식가운데서 죽음에 대하여 준비할 수 있게 함. (3) 고통을 느끼지 않는, 품위 있는 죽음을 가능케 한다. 임종 환자의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다음의 세 가지 차원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1) 의학적 차원 : 임종 환자를 무의식적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의식을 유지시키면서 고통을 완화시키는 의료 요법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2) 간호 차원 : 임종 환자가 누워 있는 공간은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이 청결해야 할 것이다. (3) 사회적 차원 : 임종 환자에게 인격적 교통을 제공하고, 그의 가족과 친지들을 그의 죽음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준비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환자의 임종 과정에 통합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 특히 말기 암 환자의 신체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김경식 박사의 보고에 의하면, 말기 암 환자는 (1) 수면부족의 어려움. (2) “못 먹고, 토하고,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나고 그렇기 때문에 피골이 상접해 가는”어려움, (3) 배를 임신부의 배처럼 팽창시키는 변비로 인한 어려움, (4) 발열로 인한 어려움, (5) 호흡 곤란으로 인한 어려움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 죽음은 인간의 삶의 마지막 사건이다. 그것은 이 세계로 부터의 단절이요 작별인 동시에 한 인간의 삶의 완결이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다. 이와 같이 죽음은 죽는 사람 자신에게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지만, 병원 종사자들에게 그것은 매일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에 불과하다. 한 의사는 신체적 죽음을 당하기 직전의 사람이 의사, 간호사, 친척 등 그 주변의 사람들의 비인간적 무관심 속에서 죽은 자처럼 취급될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이를 가리켜 “사회적 죽음”의 한 형태라고 말한다. 이러한 일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병원 종사자들이 지켜야 할 다음의 다섯 가지 “계명”을 제안한다. (1) 환자가 자신의 질병에 관하여 질문 할 때, 병원 종사자들은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태도로 그의 질문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대답해야 하며, 환자가 자신의 질병에 대하여 알고자 하지 않을 권리도 종중해야 할 것이다. (2) 병원 종사자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은 영적, 정식적으로 죽음을 앞둔 환자와 함께 해야 한다. 그들은 환자에게 인내심을 가져야 하며,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며, 그의 생각들에 대하여 존경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3) 환자의 죽음이 도래하였을 때, 의사는 그의 죽음을 수납해야 할 것이다. “의사는 피할 수 없는 것에 자기를 굽힐 도덕적 의무를 가진다.” (4) 환자의 마지막 임종의 시간에 병원 종사자들은 환자를 혼자 있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환자와 함께 있어야 하며 그의 죽음을 동반해야 한다. 그의 죽음을 동반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와 존엄성을 충분히 인정하며 그를 끝까지 사랑함을 뜻한다. 이것은 죽음을 맞는 환자에게 큰 위로가 된다. (5)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의 신체를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환자가 심한 고통을 느낄 때, 진통제 주사를 주어야 하며, 환자가 심한 불안감을 느낄 때, 정신 안정제를 투여함으로써, 환자가 품위 있는 태도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조처해야 한다. Ⅱ. 인간성 있는 의학 1) 현대 의학과 인간성의 문제 오늘날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보는 점점 더 과학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고 있다. 1979년 로마 클럽(Club of Rome)의 보고서에 의하면 오늘날 인간은 그 자신이 발견한 것의 희생물이 되었다. 현대 사회의 과학 기술적, 재정적, 조직적 잠재성은 크게 발전하였으나, 이 잠재성을 이용할 수 있는 도덕적, 정치적 능력에 있어 인간성 결핍의 문제는, 현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 편으로 인간의 자기실현의 위대한 가능성이 보이는 반면, 다른 한 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재난의 위험성이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다. 새로운 의학 기술의 발전은 일반인들에게 물론, 의학자들 자신에게 놀라움과 경이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오늘날 의학에서 방법적, 기술적 가능성들은 참으로 광대하며 거의 무제한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유전인자의 개조, 인공 수정, 인간 생명의 부화, 다양한 신체 부위의 이식, 자궁 치환 요법, 인간 복제, 컴퓨터를 통한 렌트겐 진단 방법 등은 과거의 인류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한다. 그러나 한계를 알지 못하는 의학 기술의 발전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의학 기술의 발전은 어떤 인간적인, 개인적인, 사회적인, 또 정치적인 희생을 초래할 것인가? 인간의 자유와 참 삶이 상실되지 않을까? 인간을 하나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기계로 보고, 의사는 이 기계의 조립공이나 수리공이라고 보는 생각은 이미 심각한 후유증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일련의 의사들이 인간의 생체 실험과 인간 생명의 폐기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 이들 의사들이 전범 재판에서 그들의 행위를 합리적 과학성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고, 그들의 책임을 청지 권력자에게 전가시키고자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알렉산더 미첼리히(Alexander Mitscherlich)등 일련의 의학자들은 “인간성이 결여된 의학”을 경고한다. 인간을 컨베어 벨트에 놓여 있는 하나의 제조품처럼 취급하는 의학 기술과 환자 간호,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더 이상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전문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상징들과 측정 자료들을 상용하는 기기 의학(Apparatmedizin), 의료 요원과 환자 사이의 인격적 신뢰의 관계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며, 인간적인 관계와 접촉, 친절과 인간성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는 현대 의학의 비인간성을 그들은 경고한다. 사실 우리가 환자로서 병원 진료를 받거나 입원을 하였을 때 느끼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는 의료인들의 인간성 문제이다. 아무리 의학 기술이 뛰어나다 할지라고, 의료인들이 비인간적일 때, 환자들은 의료인들은 물론 병원 자체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환멸감을 느끼며, 그 병원에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물론 의학의 객관성, 과학성, 기술과 전문성은 결코 포기될 수 없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기술적 완전성(Perfektion)을 주요 관심으로 삼는 의학과, 환자의 인간성을 주요 관심으로 삼는 의학은 가능한 조화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전은 점점 더 인간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과학 기술을 통한 인류의 진보의 이데올로기는 많은 학자들에게 회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학 기술이 추구하는 합리성은 비합리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과학에 대한 신뢰가 더 이상 일종의 세계관 내지 현실에 대한 총체적 설명이 될 수 없으며, 테크노크라시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사 종교로서 참된 종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많은 과학자들과 의학자들이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학 기술은 물론 과학 기술 일반의 윤리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과학 기술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직면하여 우리는 종교적 기초 없는 의학 윤리가 가능한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2) 의학 윤리와 종교의 관계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의료인들, 무신론자들도 선한 사람일 수 있고,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들이 기독교 신자들보다 더 선하고 윤리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따라서 무신론적 윤리, 인본주의적 윤리도 가능하다.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기본적 규범들, 기본 가치관, 기본 태도에 최소한의 일치점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공동생활이 가능하며, 민주주의와 사회와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객관적” 구속성을 가진 행동 양식의 규범과 근거가 무엇인지 거론될 때, 개인의 양심과 도덕에 근거한 윤리적 개인주의는 유지되기 어렵다.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 타당성을 가진 윤리가 어떻게 가능한가?, “너의 의지의 원칙이 언제나 하나의 보편적 법 해석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칸트의 범주적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가? 도대체 우리 인간은 왜 항상 선하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인간의 절대적 윤리의 기초 내지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종교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을 때, 인간의 특정한 행동에 대한 절대적 구속성은 인정되기 어렵다.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구속성을 가진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보편적 구속성을 가진 의무도 인정되기 어렵다. 종교의 전제가 없을 때, 절대적으로 도덕적인 행동, 보편적 구속성을 가진 에토스가 불가능할 것이다. 참된 종교가 윤리의 근거가 되지 않을 때, 마르크시즘, 과학주의 등 유사 종교가 윤리의 근거가 될 것이다. 참 종교에서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는 유일한 권위는 결코 인간의 이성이나 국가나 교회나 어떤 사회 조직이 아니라, 절대자 곧 하나님의 존재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가 인정될 때, 절대적 윤리의 근거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성 있는 의학, “인간성의 의학”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하고 또 그렇게 끝난다. 이로써 이 선서는 법적 성격을 가지기보다, 윤리적, 종교적 성격을 더 강하게 지닌다. 인간성 있는 의학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성 있는 의학은 전체적 존재로서의 한 인간을 올바르게 파악하고자 하며, 의학의 기술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의 조화를 꾀하며, 종교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에 대하여 개방된 의학일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깊은 차원들을 간과하지 않으며, 인간의 실존과 환자의 영적, 정신적 상황과 문제들을 충분히 고려하는 의학을 가리킨다. 긍정적 형태로 말한다면, 인간성 있는 의학은 인간적으로 고려하고 인간적으로 행동할 것을 말하는 현실주의적 윤리(realistische Ethik)라 말할 수 있다. 이 윤리에서 규범과 상황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양자는, 규범이 상황을 해명하고, 상황은 규범을 결정하는 관계에 있다. 세부적 전문 지식이 도덕적 책임과 결합되며, 과학적 합리성과 정확성이 추구되는 동시에 인격적 헌신이 있으며, 환자의 인간적 가치가 충분히 고려되며 종교에 대하여 개방적인 의학을 가리켜 우리는 “인간성 있는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생명과 환자의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종교적 신념들, 기본 가치들과 절대적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의학이 인간성을 겸비 할 수 있도록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3) 질병과 치료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없을 때, 인간성에 대한 요구는 절대적으로 보편적으로 근거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곧 초월적 존재가 인정될 때, 질병에 걸린 사람은 물론 건강한 사람에게 대한 인간성, 환자에 대해서는 물론 의료인들에 대한 인간성이 절대적 정언 명령으로 근거될 수 있고 또 요구될 수 있을 것이다. ⑴ 인간의 파트너가 되자고 하는 하나님이 인정될 때,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의 자신 안에 근거된 하나의 포기될 수 없는 현실로 인정될 것이다. 이때 사회적 역할, 사회적 기능, 효용 가치를 떠난 한 인격으로서의 인간 자체의 생명을 경외하게 될 것이며,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튼튼하든지 약하든지, 젊든지 늙었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절대적 가치를 가진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사명을 충분히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때 환자는 단순히 연구 대상이나 치료 대상으로 보이지 않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가진 주체로서, 치료의 성숙한 파트로서 진지하게 고려될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인간화의 과정 속에서 의학의 인간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⑵ 질병과 죽음의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을 홀로 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인정될 때, 의료인들과 환자는 질병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질병을 기능의 감소로, 구체적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위험과 위협으로 볼 것이며, 이 위험과 위협은 인간의 존재의 모든 영역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환자는 그 질병에 걸린 시간을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거나 하나님이 저주를 받은 절망적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인간다운 인간으로 변화될 수 있는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질병의 시간을 노동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격적 학습 과정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는 갈등과 고난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견디며 소화함으로써, 또 자신의 유한성을 수용함으로써, 질병의 시간을 인격적 성숙에 이르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⑶ 치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 하나님이 인정될 때, 인간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서는 물론, 그의 시간적 치유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잇을 것이다. 인간은 물질론적 견지에서 단지 영 없는 육체로 파악되거나, 아니면 관념론적 견지에서 육체를 지배하는 영으로만 파악되지 않고, 영과 육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총체적 존재, 총체적 인격으로 파악될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의 삶은 의미있고 가치 있는 것이며 가난하고 늙고 사회적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할 권리를 가진다. 의사는 단지 인간이 가진 질병만을 다루지 않고, 질병에 걸린 인간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모든 치료는 의학의 전문 지식과 경험과 의학적 판단에 기초하여 동시에, 윤리적 규범을 항상 배려해야 할 것이다. 의료인은 환자의 질병만을 보지 않고 그의 존재 전체를 보고, 그에게 정신적, 신체적 도움을 주고자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병원은 인간성 있는 병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의학적 과학성과 객관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인간성을 경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4) 안락사의 문제 생명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가리켜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하는가? 의학적, 생물적 견지에서 생명이란 우리말로 “목숨” 곧 bios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적, 인간학적 견지에서 볼 때, “살아 있다”는 것, 곧 생명이란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의 bios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의 제반 과정에서 참여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학적, 인간학적 차원에서 생명이란 한마디로 “관계”이며 “삶”이다. 생명이란 인격적, 사회적 제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활동을 가리킨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죽음이란 삶의 중지, 모든 관계의 중단이라 말할 수 있다. 환자의 모든 신체적, 생물학적 기능들이 정지되고, 주변 세계의 모든 과정들에 대한 참여가 중단되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죽음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죽음은 신체의 노화와 함께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의 인격적, 사회적 과정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에 완결된다. 일반적으로 의학적, 생물학적 의미의 죽음은 다음의 기준에 따라 확정된다. 의식의 상실, 호흡 기능의 정지, 눈동자의 움직임의 정지, 심장 활동과 혈액 순환의 정지, 심전도의 수평 상태. 그러나 오늘날의 의학은 고도로 발전한 의학 기술을 통하여 이러한 현상들의 나타남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 있으며, 그러하여 인간의 생명의 시간을 상당히 길게 연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거의 죽음 상태에 있는 환자의 호흡과 혈액 순환을 의료 기기를 통하여 유지시킴으로써,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생명과 죽음의 한계를 확정하는 일이 오늘날의 의학에서 매우 어렵게 되었음은 물론,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다. 의사가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각종 의료 기기와 의료 기술을 동원하여 희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생명을 유지시킬 경우, 의료보험 공단은 파산의 위기를 부딪힐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생명을 의학 기술을 통하여 인위적으로 연장시킬 때, 노인의 수가 증가하며, 사회의 연령층 구성에서 노년층에 증대한다. 노인층의 증대는 노인들의 사회적 보호, 연금 보장 등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일으킨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일련의 사람들은 노인들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것은 자선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노인들의 “자연적 죽음”의 권리를 주장하며, 안락사(Euthanasie) 기술에 관한 법률의 개정을 요구한다. 이 문제는 오늘날 의학자, 법학자 그리고 신학자들 사이에 논의되고 잇는 뜨거운 감자와 같은 문제이다. 네덜란드는 최근에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나, 대부부의 다른 나라에서 안락사는 아직도 하나의 “죄악”으로 간주되고 있다. 본래 “안락사”를 뜻하는 영어euthanasia는그리스어“eu”(well,good)와 \\\"Thanatos\\\"(death)가 합쳐진 용어이나, 어원에서 볼 때, 그것은 “수월한 죽음”(an easy death)을 의미한다. 안락사는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는데. “회복 될 수 없거나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고 죽여주는 행위나 관행” 혹은 “한 사람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행위 또는 무위(無爲)에 의해 사람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야기하는 것” 등의 정의가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통용된다. 안락사는 관점에서 따라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죽임을 당하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서 일어나는 자의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일어나는 비자의적 안락사(involuntary euthanasia)로 분류될 수 있다. 자의적 안락사는 소위 “의사 조력 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과 구별하기 어려운 것으로, 당사자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안락사를 말한다. 현재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안락사 허용을 요구하는 캠페인에서 말하는 안락사는 이것을 말한다. 반자의적 안락사는 자신의 죽음에 동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동의하지 않은 사람에게 집행되는 안락사를 말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고 또 허용되지도 않은 유형의 안락사이다. 신생아, 중증의 정신 불구자와 같이 안락에 동의할 수 있는 이해 능력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 질병이나 노쇠 등으로 그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 혼수상태에 빠져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사람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안락사는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도기도 한다. ⑴ 강제적 안락사: 강제적 안락사는, 소위 “살 가치가 없는 생명” 곧 신체 장애자, 정신병 환자,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으며 비생산적인 사람들을 국가의 정책에 따라, 그러나 본인의 동의 없이 죽이는 비본래적 의미의 안락사를 말하며, 이러한 안락사는 거부되어야 한다. 본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안락사”는 “좋은 죽음”(eu-thanatos), “아름다운 죽음”, 곧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군인들이 고통을 오래 당하지 않고 빨리 그리고 쉽게 죽는 죽음을 가리킨다. 임종의 과정에서 고통의 경감시키는 것은 16세기 초 프란시스 베이컨(Fr. Bacon)에 의하여 의사의 과제로 인정되었으며, 19세기 이후“의학적 안락사”(Euthanasia medica)라고 불렀다. 1930년 이후 앵글로 색슨 계통의 나라에서는 고통 없는 편안한 죽음을 주장하는 안락사 단체들의 등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안락사는 인구 과잉과 사회의 노령화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20세기 초부터 무서운 방법으로 실천으로 옮겨졌다. 이미 1920년에 『삶의 가치가 없는 생명의 폐기의 허용』이라는 제목의 문헌이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출판되었다. 이 문헌은 사회가 돌아보아 주기 어려운 “빈 인간 껍데기들”과 “밑바닥 존재들”을 죽여서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히틀러는 이 이론을 “안락사프로그램을 통하여 잔인한 방법으로 실천하였다. 이리하여 “안락사”라는 말은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부정적 의미로 전락하였다. 1939년 9월 1일부터 1941년 8월까지 히틀러의 비밀 명령으로 약 60,000명에서 80,000명이 특별한 살인 시설에서 살해되었다. 어린이들의 안락사와 강제 수용소의 소위 “삶의 가치가 없는” 포로들의 대랑 학살이 1945년까지 계속 되었다.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과 집시와 슬라브 족과 다른 인종들이 잔인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안락사가 아니라, 강제적 살해였다. 이러한 강제적 안락사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위배되므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⑵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안락사: 의사가 임종 환자에게 진통제 혹은 마취제를 투여하여,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키지 않으면서 고통 없이 죽음을 맞게 하는 안락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안락사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며, 윤리적으로 책임적인 행위로 간주되며, 의학적으로도 허용된다. 인간은 품위 있고 참으로 인간적인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그의 신체적 고통의 견딜 수 있는 한도로 경감되며, 생명의 마지막 단계에 심리적 안정제를 통하여 임종 환자가 심리적, 정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 안정제가 환자에 대한 사랑과 친절한 보살핌을 대체해서는 안 될 것이다. ⑶ 수동적 의미의 안락사 : 생명의 인위적 연장을 중단시킴으로써 일어나는 안락사, 예를 들어 폐 기능, 심장 기능, 영양 섭취 기능을 인공적으로 유지시키는 의료 기기들의 가동을 중지시킴으로써 일어나는 안락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의사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치료를 무한정 계속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환자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죽음을 당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의사가 수동적 태도를 취하며, 이를 통하여 죽음이 간접적으로 일어나는 안락사의 한 종류이다. 이에 대하여 오늘날 세계의 많은 의사들과 법학자들,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긍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종류의 안락사 혹은 안락사 기술은 “생명의 인위적 연장의 중단”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4) 적극적 안락사 : 직접적으로 생명의 단축을 목적으로 하는 적극적 안락사 기술, 곧 “은혜의 죽음”은 오늘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사회 운동 단체들이 “은혜의 죽음”의 합법성을 주장한다.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자발적으로 안락사를 원하며, 환자가 안락사를 원한다는 사실이 공증을 받을 때, 안락사가 정확한 조건들에 따라 집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환자의 병이 도저히 치료될 가능성이 없으며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때, 혹은 죽음이 가깝지는 않지만 신체 기관들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을 때 (예를 들어 호흡 마비 등),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하여 뇌 기능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을 때,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인간은 자기의 삶은 물론 그의 죽음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가? 적극적 안락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권리를 인정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 권리(autonome Verfugungsgewalt)를 가지며, 자유로운 법적 국가는 이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과 법학자들 그리고 의사들은 이 권리를 부인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신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 의사의 사명은 치료에 있지, 살인에 있지 않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특이한 사실은, 노인들보다 오히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안락사를 인정하는 반면, 더 이상 치료의 희망이 없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일련의 법학자들에 의하면, 법적국가는 개인이 죽음을 원한다 하여, 그에 대한 살인 곧 안락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일련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기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이러한 상반되는 주장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인간 자신이 책임져야 할 과제가 아닌가? 물론 우리는 적극적 안락사를 쉽게 인정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서 “품위 있는 삶”에 대한 권리에 가지는 동시에,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권리를 갖지 않는가?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의료 기기나 약품에 인간의 생명이 무한정 의존할 경우, 이 권리가 오히려 손상되지 않는가? 인간의 존재가 식물처럼 되어 자신의 의사 표시와 감정 표시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가 과연 인간적으로 품위 있는 삶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시사한다. 카렌 앤 퀸랜(Karen Ann Quinlan)이란 소녀가 질병으로 인하여 무의식 상태에 빠졌을 때 , 그 소녀의 부모가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이 소녀의 생명을 몇 달 동안이나 인위적으로 유지시켰다. 이에 반하여 네덜란드의 한 여자 의사는 반신 마비와 우울증에 걸린 78세의 할머니에게 아편을 주시하여 잠든 상태에서 사망케 하였다. 한 편의 사람들은 이를 “살인”이라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편의 사랑들은 “동정”, “자비”, “도와주는 사랑”이라고 주장하였다 짧은 시간 후에 피할 수 없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을 경우. 중추신경 체계, 호흡 기능, 심장 활동, 혈액 순환의 기능이 심하게 손상되었고, 진행되고 있는 신체의 일반적 쇠락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으면, 혹은 의사가 다스릴 수 없는 감염 증세가 환자에게서 나타낼 때,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치료 대책들은 중단되어도 좋다. 이러한 경우,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대책을 넘어서 합병증을 치료하는 일을 중지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사가 의료 행위를 계속하느냐 아니면 중단하느냐에 대한 법적 규정이 아니라, 의사의 의료적 의무의 범위이다. 스페인 나바라(Navarra) 대학교의 병리학자인 동시에 생윤리학자(Bioethiker)인 곤잘로 헤란츠(Gonzalo Herranz)는 “품위 있는 죽음”(Sterben in Wurde)을 위하여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다섯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1) “자살을 위한 도움” 간청하는 사람과, 그에게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자살을 통한 “품위 있는 죽음”은 인간의 자율성과 자기 결정, 독립성과 자기 해방과 성숙성의 마지막 표현이다. (2) 오랜 기간 동안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다가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는, 품위있는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권리, 곧 안락사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3)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회복될 수 없는 무의식 상태에 빠졌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과 의학 기술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은 품위 있는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이런 환자의 경우, 가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숨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며 고통의 시간을 연장시키는 의료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4) 적극적 안락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죽음의 시간이 멀지 않은 환자의 모습을 비참하게 만들며 그의 품위를 하락시키는 모든 사건들과 현상들을 피하기 위하여 적극적 안락사를 통하여 “품위 있는 죽음”을 가능케 해야 한다. (5) 오늘날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자의 생명을 인공적으로 연장시키는 의료 기기들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의료보험 기관들의 지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또한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의 희생은 그들의 개인적 잠재성과 발전을 저해하며, 결국 그것은 사회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므로 의료 분야의 재정에 관계된 사람들과 일련의 사회학자들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의 과정을 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과거보다 훨씬 더 크게 되었고, 이것을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시작하는 시점에서부터 경험한다. 유전자 조작, 수태 시간의 조정, 임신 중절, 인공 수정, 생명 복제 등, 인간 생명의 시작을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과거에 일련의 신학자들은, 인간 생명의 시작을 인간이 조정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 생명의 시작을 하나님이 인간의 책임에 맡겼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 생명의 마지막도 이전보다 더 많이 인간의 책임에 맡겨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락사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1) 의사는 환자의 죽음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숨겨야 할 하나의 실패로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환자가 어떤 고통을 당하든지 개의치 않고, 모든 의학 기술을 동원하여 환자의 죽음을 몇 시간, 몇 일 혹은 몇 달 동안 지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2) 치료는 환자가 식물인간으로 되지 않고, 그의 중요한 신체 기능들이 회복되며, 그리하여 환자의 인격이 회복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수술이나 중환자실 치료도 그 자체로써 목적이 아니라, 환자가 새로운 품위 있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의사가 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의료상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인가의 문제는 구분되어야 한다. (3) 환자는 그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치료를 거부하고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권리, 곧 안락사의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환자가 어떤 고통을 당하든지 개의치 않고, 의료기기와 약품을 통하여 그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것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는 환자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볼 수 있다. 임종 환자는 가능한 한 병원이나 가족의 삶에 통합되어야 한다. 마지막 불안의 시간에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 (4)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될 때, 안락사는 쉽게 오용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어 버릴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만일 안락사가 허용될 경우, 세밀한 법적 규정에 따라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안락사는 가능한 환자 자신과 그의 가족들과 의료진의 합의하에 시행되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을 권리” 혹은 “품위 있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오히려 과격한 편이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고통의 연장 행위가 더 비윤리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또한 한 사람이 평생 쓰는 의료비 중에서 상당 부분(혹자는 30%라고도 하고, 혹자는 50%라고도 한다.)을 마지막 몇 일 동안에 써 버리는 현실을 생각하면 경제적 자원의 낭비라는 측면에서도 소위 “비용 대비 효과”를 따져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안락사에 대한 논란이 오래 전부터 치열하게 있어 온 선진국들에서는 이미 다양한 방법들을 마련해 놓고 있다. 그 공통된 기준들이란 환자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나 회복될 가망이 없는 고통을 받고 있어야 한다.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키거나 통증을 경감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어야 한다. 여러 명의 의사가 함께 결정해야 한다. 환자나 가족의 뜻을 여러 차례 확인해야한다 등이다. 우리나라의 실정에 가장 잘 부합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다면, 그리하여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제한적인 경우에 한해 허용된다면, 가망 없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이중 삼중의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일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많은 말기 환자들은 사전에 의료진에게 “최후의 순간에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하고 있고, 의사들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다. 어느 것이 더 윤리적이고 더 인간적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다. 전통적 윤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예기치 못한 나쁜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위험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적 윤리를 고집함으로써 생겨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겨날 현실적 피해까지 고려해야만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소극적 안락사의 합법화에 대한 찬반 여부와 무관하게,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 그런 일이 닥칠 경우에는 무의미한 생명연장 행위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현실과 법 사이의 괴리를 남겨 둘 것이 아니라, 혹시 생겨날 수 있는 부작용들이 무엇이 있는지 또 그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치밀하게 검토하여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더 올바른 일일 것이다. Ⅲ.그리스도인들의 품위 있는 죽음 고대 로마의 격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um) 삶과 죽음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Si vis vitam, para mortem) 이 말은, 참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자기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 태도로 죽을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죽음의 예술”(ars moriendi)은 무엇인가?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우주의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스토아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로 죽음을 맞을 것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스토아 철학자처럼 고통과 고뇌 없이 태연자약한 태도로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통과 고뇌에 싸여 “큰소리”를 외치며 마지막 죽음을 당하였다. 따라서 자기의 죽음을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불안과 떨림을 부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양면성을 가진다. 그것은 삶의 시간의 끝남과 모든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교통” 안으로 들어감을 뜻한다. 그들에게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존재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통” 안에 있는 안식과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죽음의 시점과 함께 그들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함께 있음을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죽음 속에서도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존재를 그의 영원한 품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볼 수 있다. 그들의 불안한 마음, 떨리는 마음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안에 있으며, 하나님 자녀들의 자유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은 그의 무서운 힘을 잃어버렸다. 죽음은 그의 “가시”를 빼앗겨 버렸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둠과 공허 속으로, 무 속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 영원한 생명의 빛 속으로 죽는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어떤 새로운 업적을 남길 필요가 없다. 단지 그들의 모든 허물과 죄를 하나님에게 고백하고 하나님에게 자기를 맡기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을 처리하기만 하면 된다. 하인츠 챠른트(Heinz Zahrn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내적 논리에 따라 연역된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안전케 하고자 하였던 모든 보장들과 의지하는 것들과 다리들이 무너질 때, 우리가 서 있는 모든 기초들을 잃어버리고 완전한 무의식 속으로 가라 앉을 때, 우리가 어떤 이웃과도 더 이상 관계할 수 없고 어떤 이웃도 우리와 관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믿음은 총체적으로(total) 되며, 그의 참된 본질이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드러난다. 곧 믿음은 오직 하나님에게 자기를 맡긴다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과 죽음을 포괄한다. 죽음은 인간의 존재를 폐기시키고 침묵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 영원한 것을 느끼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확신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삶을 책임적이고 의미 있게 살고자 노력하게 되며, 또 자기의 죽음을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 하여 죽음이 쉬운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죽음의 불안과 저주를 간단히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불안과 이불안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죽음에 개한 저주의 맹목성을 제거한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이해하도록 가르친다. 그것은 복음의 빛 속에서 죽음을 해명한다. 이리하여 그것은 죽음의 어둠 속에 빛을 비추어 준다.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고 짐승처럼 죽는 사람에게도 죽음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이 있고, 이 불확실설과 불안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하나의 터부로 취급한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있을 때,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죽음을 터부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죽음을 침착한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 임종환자의 가족들은 따뜻한 사랑의 마음, 내적으로 환자와 연대하는 마음으로 그의 임종을 동반하여. 그에게 죽음의 사실을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점점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으로 말미암은 당혹감, 좌절감절망,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마음의 착잡함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질병과 죽음은 좀더 쉽게 환자의 삶에 통합될 수 있고 인간적으로 감내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과 함께 인간의 모든 인격적, 사회적 관계는 중지된다. 그러나 죽음 속에서도 인간을 동반하며 그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는 하나님이 인정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인정될 때, 우리는 품위있게 살 뿐 아니라, 또한 품위있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왔음에도 불고하고 죽음을 거부하면서 마지막 생명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내적 자유와 평화와 위로 속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현실에 우리를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유족이 어떤 비용과 희생을 부담하게 될지 개의치 않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연장시키려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다. 영원한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을 믿을 때, 우리는 이런 무의미한 일을 중지하고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평안한 마지막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사는 죽음을 자기의 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능력으로 더 이상 막아낼 수 없는 임종 환자의 죽음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동반할 수 있을 것이다. 살고자 하는 자는 먼저 죽어야 한다. 자기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죽게 하는 것은, 참으로 살기 시작함을 뜻한다. 여기서 죽음은 단순한 부정(Negation) 이상의 것을 뜻한다. 그것은 초월적인 것의 수단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발견한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요 하나님의 행위의 방법이며, 신적인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신적인 것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의 권능과 의도와 사랑을 전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에도 해당할 수 있다.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용납되고 포용되어야 할 삶의 한 측면이요, 한 발자국 더 나아감이요,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초월적 근원수단과 상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불안과 염려 속에서 죽음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웃과 이 세계 안에 있는 것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가운데서 단 하나의 관계, 곧 하나님의 관계를 신뢰하며, 이 세계의 모든 것과 작별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희망하며,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한 기다림과 내적 평정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 그들은 모든 연약함과 거짓과 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누릴 수 있었던 삶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믿음, 희망, 사랑 가운데서 맞아하는 그들의 죽음은, 헤겔이 말하는 세 가지의미에서 “자양”(Aufhebung)이라고 말 할 수 있다. ⑴ 죽음은 “자양”(Aufhebung)을 뜻한다. 죽음은 삶을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⑵ 죽음은 “보존”(Bewahrung)을 뜻한다.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는 폐기되는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교통 안에 보존되기 때문이다. ⑶ 죽음은 “고양”(Erhebung)을 뜻한다. 인간의 존재가 죽음의 한계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 차원의 영원한 생명으로 고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이러한 해석은 이간의 죽음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죽는 사람과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역시 고통스러운 이별이요, 타락한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현실적 죽음은 대개의 경우 “있어서는 안 될” 이유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길이 잘 들여진 양(羊)처럼 현대 사회의 “죽음의 행진”에 순응하고 죽음을 미화 하거나 찬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에게 죽음을 초래하는 모든 “죽음의 세력들”, “죽음의 사자(死者)”들을 분석하고 그들에 대항하며, “이제는 죽음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는”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경험되는 새로운 세계를 죄와 죽임이 가득한 이 땅 위에 앞당겨 오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품위있게”, “인간다운 조건 속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사회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감사의 미학
감사의 미학 http://mission.bz/7099치유목회 김진영교수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좋은 계절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린다. 사람들은 흔히 행복한 일에 관하여 그 원인을 묻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이 행복이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내가 불행해졌을 때에, 아프거나 실패했을 때에, 고통과 고난을 당할 때에 원인을 따져본다.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불행의 원인을 내게서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지나간 과거의 어떤 사건 등에서 원인을 찾는다. 또 자기 자신의 실수로 얻게 된 어려움을 다른 사람 혹은 사건의 탓으로 돌린다. 이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담을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는 자기부인이며 자기방어의 기제이다. 자신이 받아야 할 고통과 책임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성향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 때에 자기가 책임지고 그 대가를 지불하기보다는 남을 탓하고 나아닌 다른 이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고 남을 원망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 고난과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그 고난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것이 있었던 것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보자. 원망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다음의 돌이킬 수 없는 인간적인 실수가 동반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① 바꿀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 ② 사소한 일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 ③ 남에게 나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것 ④ 어떤 일을 끝까지 시도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 ⑤ 어떤 일을 해보지 않고 실수나 실패를 할까 염려하는 것 ⑥ 일을 하면서 실수를 알면서 반복하는 것 ⑦ 불편이나 실패를 당했을 때에 무심코 내뱉는 말 등. 이러한 원망은 덫에 걸린 짐승이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 덫에서 풀려나기는커녕 자신의 몸을 더욱 상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옭아매게 된다. 이러한 원망과 불평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그 고통과 아픔 자체를 감사하는 태도이다.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은 원망과 불평을 잠재우는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수 년 전 뉴욕에서 교회를 담임했을 때 읽었던 신문 기사가 생각난다. 에반스(Evans)라는 이름을 가진 미국인 목사의 이야기이다. 뉴욕의 부르클린의 교회를 담임하셨던 분인데, 유학 온 한국인 목사들을 잘 후원하였던 분이었다. 한인 유학생들의 장형노릇을 하던 그가 이십 개월 동안 결장암으로 투병하시다 세상을 떠났다. 이민목회자들의 믿음의 선배이며 후원자를 잃고 슬퍼하였는데 그가 남긴 투병신조 4개조의 항목은 한 번 쯤 읽어 볼만한 것이다. 1) 나는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 (I will never complain.) 2) 나는 집안의 분위기를 밝게 만든다. (I will keep the home bright.) 3) 내가 받은 축복을 헤아려볼 것이다. (I will count my blessings.) 4) 내 병을 유익한 것으로 바꾼다. (I will try to turn it to gain.) 이것은 대학시절 읽었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소감(所感)”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고난은 어두워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들의 삶에서 겪게 되는 많은 아픔의 경험을 원망과 불평이라는 도구로 해소하려 하지 말자. 그것보다는 이 경험들이 나 자신의 영혼을 맑게 해 주는 좋은 보약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성숙해 질 수 있는 기회로 감사하자.
게임중독으로 기도 중입니다/ 치유사역/ 2015-03-23
게임중독으로 기도중입니다/ 치유사역 아들의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군요. 일년 동안 공무원시험 준비와 게임에 중독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다 큰 자식을 부모의 아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그가 자기 일에 열심을 다하여 미래에 자립하는 아들로 서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부모님의 기도는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자식의 장래를 위하여 물론 기도하시겠지만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자녀와 많은 이야기 할 시간을 가지십시오. 사실 청년시절에 좌절감을 주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부모님에 대한 실망(뒤 바라지를 제대로 하지 못해 물질적 사회적 소외감을 받을 때)이나. 여자의 배신 . 친구의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그 한 대안으로 다른 것에 열중하게 되고 그 것이 게임이나 인터넷 도박이 될 수 있고 알코올이 될 수 있고 불안한 정신 장애가 있으면 마약에까지 손을 대게 됩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다 시작한 것이 그것에서 성취감을 찾으려다가 결국은 그것에 빠져 후회하면서도 계속하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나쁜 것에는 무엇을 하든지 습관적이고 반복으로 중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아들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과거에 교회를 다녔을 것으로 생각이듭니다. 먼저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저희 가정을 다스려 주옵소서. 남편을 다스려 주옵시고. 아들을 다스려 주옵소서.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 가정에 행복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은 나와 남편과 아들 뇌 기억 속에서 떠날 지어다.(반복)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아들 속에 습관적이 반복적으로 게임을 하게하는 뇌 기억 속에 기억들은 제거되고 제거될지어다. 예수이름으로 게임이 제미가 없어지고 정상적인 믿음의 아들로 돌아와 정상적인 청년의 삶을 살지어다. (반복) 주님 감사합니다. 주의 사랑과 평강으로 저희 가정을 채워 주님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기도는 아무 시간이 나 하면 됩니다. 특히 아드님이 자고 있을 때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하면 좋은 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냥 아들을 위하여 반복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아들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나 야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가장 좋은 응답으로 치료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치유사역(성경적 약속인 기도) 구규창 목사
겨울에 철새들은 어떻게 동사하지 않을까?/ 창조과학자료/ 2013-04-09
겨울에 철새들은 어떻게 동사하지 않을까?/ 창조과학자료 철새들은 추운 날씨에 잠잘 때는 되도록 피부의 노출을 막기 위해 몸을 움츠리고 부리까지도 털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러나 얕은 물속이나 차가운 흙 또는 얼음 위에서는 몸통을 낮추어 잘 수가 없으므로 한 쪽 다리만으로 온 몸을 받친 채 잠을 잔다. 왜 한 쪽 다리로만일까? 물론 되도록 몸의 노출을 줄임으로 결국 체온을 보호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한 쪽 다리가 차가운 물 또는 흙 속에 박혀 있는데 어떻게 체온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 신비가 있다. 새의 상태를 한 번 살펴보자. 만약 새의 몸통의 더운 피가 그대로 발로 내려가면 새는 동상에 걸릴 것이고, 발을 통과한 찬 피가 그대로 몸통으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체온이 낮아져서 결국 얼어 죽고 말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얼어 죽었다는 철새가 없는데, 그 비밀은 새의 발목에 있는 괴망(怪網)이라는 것에 있다. 이것은 괴이한 혈관망(wonder net)이라는 뜻을 가진 특수혈관인데, 발끝에서 냉각되어 올라온 정맥 피는 이 괴망을 통과하면서 동맥피의 열을 받아 따뜻하게 데워진 다음 몸 안으로 들어가고, 이 과정에서 열을 방출한 동맥 피는 냉각되어 발끝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괴망은 혈액의 순환 속에서 일종의 ‘열교환장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겨울에도 철새가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수천만 년 혹은 수억 년 동안 진화되어 왔다는 진화론(적자생존-시행착오를 통한 적응)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수천만 년이 아니라 추운 겨울 하루 저녁 내에 삶과 죽음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박종환, 창조과학회)
고난이란 보자기에 쌓여오는 축복
고난이란 보자기에 쌓여오는 축복 꽃샘 추위없는 봄을 보았는가? 태풍없는 가을이 있었는가? 단련없이, 정금이 만들어지는가? 성도의 삶에 있어서, 고난없는 삶처럼 무익한 삶은 없다. 세상은 고난을 불행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고난은 유익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고 우리가 축복을 달라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깊은 웅덩이를 허락하시고 우리가 성숙을 요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로 다할수 없는 골짜기로 인도하신다. 어느누가 고난없이, 새벽을 깨울수 있으며 어느누가 허리가 꺽어지는 고통없이, 기도의 자리로 나오겠는가? 그러므로 고난은 축복이며, 특권이다. 인간은 고난을 통하여서 만이, 육체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본질로 나아갈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아무 일이 없는, 편안한 사람이다.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꺼리가 없는 사람이다. 예배의 자리에 나와도, 간절할 만한 아무런 동기가 없는 사람이다. 새벽을 깨우려 해도, 도무지 새벽을 깨워야 할 만한 아무런 동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너무 살기가 좋고, 아이들 키우는 재미가 좋고, 사는것이 황홀하고 자아 성취하는 일이 보람차고, 일하는 것이 즐겁고 친구들과 어울려, 세상 문화와 레저를 누리며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새벽은 남의 나라 이야기이고, 기도실은 형무소와 같은 곳일수 있다. 오직 저들의 소원은, 예수를 믿어도 쉽고 편안하게 믿으려는 욕구만 있을 뿐이다. 안 믿자니 그렇고, 믿자니 깊이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아무일이 없으면,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아무일도 안 하신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에도 달구도 물에도 집어 넣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알게 함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함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함이다. 내 자신을, 바로 알게 함이다. 인생을, 깨닫게 함이다. 숨은 허물을, 드러나게 함이다. 사람은 누구나, 숨은 허물을 감추고 살고 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도, 거품이 많다. 잘 믿는듯, 영적인듯, 거룩한듯, 신령한듯... 그러나 불같은 고난 앞에만 서면 거품은 사라지고, 숨은 허물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뿐만아니라 위선과, 위장과, 가장과, 외식의 허물들을 벗기 시작한다. 그리고 신앙의 실재만 남는다. 계란의 껍데기를 벗겨 내거나 깨뜨리지 않고는, 계란을 먹을수 없듯이 우리의 숨은 허물들을 드러내고, 우리의 육의 껍질들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영의 세계로 진입이 불가능하다. 우주선이 대기권을 벗어나지 않고서야, 어찌 무한궤도에 진입할수 있을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영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의 죄성, 육성, 악성, 독성을 깨드리려 하시는 것이다. 아주 발가벗기시는 작업을 하신다. 신앙은 자기체면도 아니며, 오기도 아니며, 깡도 아니며, 신념도 아니다. 신앙은 생명이며, 관계이며, 능력이다. 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거저 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산모가 입덧이나 산고없이, 아이를 출생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산고없이는, 아이도 없다. 마찬가지로 고난없이는, 은혜도 없고 성숙도 없다. 그것이 상처이든, 실패이든, 가난이든, 자녀의 가출이든, 부부간의 지독한 갈등이든.. 구체적인 고난은, 구체적인 은혜를 경험하게 만든다. 성경은 불에도 들어가고, 물에도 들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충만하다. 요셉이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고난이 없었다면, 어찌 용서의 영성을 소유할수 있었을까? 야곱이 에서와의 갈등이 없었다면, 어찌 깨어짐의 사람이 되었을까? 베드로가 한 마리의 고기도 못잡는 실패가 없었다면, 어찌 제자가 되었을까? 바울이 날마다 죽는 것과 같은 삶이 없었다면, 어찌 그 은혜가 머물수 있엇을까? 사도 요한에게 죽음을 방불한 고난이 없었다면, 어찌 하늘이 열렸을까? 신앙의 성숙은, 침대나 쇼파에서 얻어지거나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다. 신앙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지금 만난 고난으로도, 그렇게 맹숭 맹숭하고 미지근하게 사는데 아무일이 없다면, 어찌 하나님을 갈망할까? 은혜의 자리로 나아올까? 어림도 없다. 우리의 육성은, 본래 그런 존재다. 달리면 걷고 싶고, 걸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다. 그런 육신을 믿고 신앙생활하면, 우리의 영은 금방 죽는다. 영이 죽는데는, 하루도 안 걸린다. 영을 살리는 데는, 한참의 시간과 몸부림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고난이 있다면, 춤을 추라. 아무에게나, 그런 고난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안다면, 일단은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래도,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물을 떠난 고기는 못살듯이, 은혜 떠난 성도는 죽는다. 그 은혜는 고난의 통로를 통해서만, 흘러 들어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뿐인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말로 다할수 없는, 유익을 보너스로 얻게 된다. 그것은 축복의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며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며 가장 크고 값진 축복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많아도 말이다. 금을 닮았다고 금이 아니며, 노래를 잘 부른다고 다 가수가 아니며 뿔이 있다고, 다 소가 아니듯이 영적인 지식이 풍성하고, 체험이 많고, 주의 일에 힘쓰며, 예수를 오래 믿었으며, 영적인 용어를 능숙하게 사용한다고 영의 사람이라, 말 할수 없다. 영의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다. 냄새로, 진짜 예수쟁이를 구별할수 있을 것이다. 생화와 조화를, 향기로 구분 하듯이... 현재 당신이 고난중에 있다면, 당신은 적어도 그분을 닮아가는 일에 초대된 귀빈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아무일이 없이 편안하다면, 그분도 당신을 위하여, 아무일도 안하고 계시는 손님일지도 모른다. 그분으로 하여금, 바쁘시게 하라. 그분으로 하여금, 쉬지 못하시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열두 광주리 가득한, 풍성한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성령님/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고맙습니다 성령님 손기철 2007 규장 1. 성령님의 방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다. 이상한 과학자 불교집안에서 자라 미국으로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갔지만 퇴짜를 맞고, 낙심 가운데 아내의 기도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전도를 받게 되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가 말씀에 이끌리어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게 됨.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0, 21 성령님과의 아쉬운 만남 새벽 기도를 통해 방언를 받게 되나 기쁨보다는 의무감으로 열심을 갖고 믿음 생활을 함. ‘나는 나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여기지 않고 내 아까운 시간을 쪼개어 하나님 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인간적인 열심과 이성의 한계 인간적인 열심히 지혜롭지 못하게 복음을 증거하자 오히려 비난을 받게 되고, 율법에 매여 자유없이 생활을 하게 됨.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유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2:23, 24 고전 2:9, 10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2. 성령님의 포옹 : 성령님의 품속에 안기다. 내 영을 적신 성령세례의 단비 교회에서 원하지 않던 내적치유 팀에 강제적 권유에 순종하면서 성령님께 사로잡히게 된다. 사 55: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그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분의 말씀이 가짜라고 생각한다면 무시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만약 진짜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순종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결국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집회 시간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굳게 닫혔던 마음문이 열리고 그 안에 꼭꼭 숨겨두었던 상처를 하나님께 내드리고, 죄를 회개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히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께 제 자신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성령님, 초청합니다.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제가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때부터 나는 내가 사랑하고 추구하고 만나고 싶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노력이나 내가 이룬 결과에 상관없이 영원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나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계속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무엇보다 가장 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놓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18:32-35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나를 정화시켜가시는 성령님의 손길 ‘불법 복제 CD 사건’-출판사에서 나온 자료를 보고나서 복사한 후 그냥 돌려주고 구입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계속해서 출판사에 직접 용서를 빌라고 강권하셔서 울며 겨자먹기로 순종하자 하나님이 용서해주심.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런 죄까지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겠다고 속으로 기도만 드릴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그 사람들을 만나 먼저 용서를 구하기 바랍니다.’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능력이 임하는 기름 부으심 ‘그래서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날마다 기도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할렐루야! 나는 주께서 내 손을 들어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 쓰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3. 성령님의 입술 : 하늘의 소리를 듣고 말하다. 제발 성경 공부 좀 해라 ‘성령 충만한 삶을 살려고 할 때, 성령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해주신 것은 제발 좀 말씀을 공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만 추구하면 이상한 길로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지도는 성경말씀으로, GPS는 성령님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 기기 안에 최신의 지도가 있다 한들, GPS 시스템이 없으면 지금 내가 어느 위치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지도가 틀렸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GPS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내비게이션 지도와 같은 성경말씀은 분명히 틀림없는 지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 안에 말씀이 있다 해도, GPS 역할을 하시는 성령님과 교제할 때만이 그분이 나의 위치를 성경의 좌표에 지적해주실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잘못된 길로 갔을 때 GPS가 다시 가야 할 길을 계산해서 나타내 보여주는 것처럼, 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성령님은 다시 돌아갈 길을 성경 지도상에 보여주십니다. 자동차가 지하로 들어가게 되면 GPS 수신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두움 가운데 들어가 죄를 지을 때는 성령님과의 교제가 끊어집니다. 그러면 아무리 내비게이션의 지도인 말씀이 있어도 위치가 혼미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인도함을 받아야합니다....오직 성령님이 함께하실 때라야 내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게 되고 우리의 삶 가운데 능력이 나타납니다.’ 요 5:39, 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빌 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모든 성령의 역사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또한 말씀은 그 말씀에 따르는 능력이 임해야 진정한 말씀입니다. 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말씀이 살아 역사하지 않는 이유 -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역사에서 말씀이 지식을 전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말씀을 예수님의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접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 말씀을 들을 때, 단지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이지 하나님을 실제로 직접 만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법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라고 말합니다. 말과 ale음이 따로따로인 것입니다. 요10:4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우리가 읽는 성경말씀(로고스)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의 말씀이 오늘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전에는 문자로만 읽고 지나쳤던 어느 한 말씀이 그날따라 마음에 강하게 꽂힐 때가 있습니다. 전에는 전혀 뜻을 모르던 말씀이 갑자기 뜻이 풀리기도 하고, ’이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는 생각을 성령님께서 부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이 바로 레마입니다. 레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서부터 올라와 마음 판에 비췰 때 레마가 되는 것입니다. 합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우리가 마음문을 열었을 때 찾아오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주변 상황이나 꿈이나 환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주변 상황이나 꿈이나 환상을 통해 언제 어떻게 말씀하실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내가 수시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내 몸의 각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고 깨끗이 청소하는 것입니다.’ 롬 6:13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주님, 내 눈과 코와 입과 귀, 가슴, 심령, 손, 발 모두를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주소서. 깨끗케 해주소서. 내 눈이 음란한 곳을 두리번거리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허락하신 것을 보게 하소서! 내 귀가 세상적인 아무소리나 듣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하소서! 내 코가 벌렁거리며 좋은 냄새를 찾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내 입술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그냥 쏟아내지 않게 하시고, 성령님이 말씀하게 하시는 것을 전하게 사소서! 내 마음을 새롭게 사소서! 세상적인 정보고 채우지 않게 하시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감동으로 받는 마음판이 되게 하소서! 내 심령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내 손이 더러운 것을 만지는 탐욕스러운 손이 되지 않게 하시고, 사랑과 치유의 손이 되게 하소서! 이 손이 빛의 손이 되어서 닿는 곳곳마다 변화가 일어나게 하소서! 내 발이 내 욕심대로 움직이지 않게 하시고, 서라 하시면 서고, 가라 하시면 가고, 춤추라 하시면 춤추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방언으로 성령님과 교제하다 ‘방언의 주도자는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시며,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그분께 우리의 혀와 입을 의탁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방언보다 성령세례가 선행되어야 하며,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는 성령 충만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혼미할 때, 방언으로 한참 기도하다보면, 영혼이 깨끗하게 청소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영혼에 붙어 있던 더러운 것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그러나 방언 기도는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훈련입니다. 나의 발성기관을 전적으로 성령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내가 이성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도 제목의 우선 순위를 따라 기도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하나미의 뜻대로 내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간구해주시는 것입니다.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방언을 말하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다보니, 입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머리가 멍하고 공허한 기분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럴 때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도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고전 14:14,15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먼저 성령충만 하도록 간구하고, 방언을 계속해보십시오.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재하신 가운데 방언을 하게 되면 절대로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만약 자꾸 의심이 든다면, 성령님께 새 방언을 부어주시기를 간구해보십시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나는 자동차를 운전할 때, 으레 방언으로 기도합니다...자가용 안에서는 마음껏 성령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방언을 자꾸 하다보면, 생수의 흐름에 따라 방언을 하게 됩니다.’ 요 7:38, 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고 그 마음까지 성령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다른 기도를 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방언에 집중하면서 성령님께 여쭤보는 것입니다. “주님! 지금 나오고 있는 이 방언이 무슨 뜻이죠?” 방언이 먼저 입 밖으로 나가고, 그 뒤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풀어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이 방언이 어떤 뜻이라는 감동을 마음에 주십니다. 예수님의 권세로 선포하다 ‘선포기도를 할 대 성령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는 일도 많았습니다. 권세 잇는 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신분을 생각할 때, 이것이 온전한 기도라고 여겼습니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병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고,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실 때 선포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눅 5: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아버지의 아들 자격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고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소서”라는 간구기도를 드렸지만, 다른 사람이나 악한 영을 향해서는 담대히 선포하셨습니다.’ ‘성령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님과 예수님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이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이 곧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고전 6:17 주와 함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선포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대상을 보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고민과 근심이 있을 때 “애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라고 선포하는 것은, 결국 마음 속 고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너보다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아느냐? 예수님이 피값으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으니, 너희는 내게 아무런 영향력과 권세가 없다. 내 안에서 떠나라!” ‘선포기도를 했을 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사탄은 우리를 비웃고 참소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 가운데 서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에 우리가 의심하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 10:12~14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로 왔노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곧 악한 영의 훼방을 이기고 올텐데, 여기서 내가 믿음을 거두고 의심한다면 그 천사는 악한 영에게 묶여서 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막 11:23,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은 생명의 씨앗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심겨질 때 비로소 생명이 죄와 죽음을 압도하게 됩니다.’ 마8:17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벧전2:24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 나쁜 생각이나 감정이 찾아올 때 할 수 있는 선포기도 ‘이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약 4:7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께 순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선포기도를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게 순복하지 못했던 죄들을 회개해야 기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야 합니다...먼저 철저히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시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노라! 보혈로 인해 내가 죄 사함 받았음을 선포하노라! 내가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에게 나쁜 영향을 준 영, 감정, 생각들은 나의 영, 혼, 육에서 완전히 떠나갈지어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나를 보고 계셨고, 기다리고, 기다리셨습니다. 내 죄를 사해주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내 안에 성령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회복시켜주시고, 나와 교제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도록 나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들을 선전하는 자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려면 하나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내 안에 오신 성령님이 나타나심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자신을 똑같이 나누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이 땅에 나타내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사엥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17:16~18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십시오. 즉,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했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면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오.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이 땅을 먼저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초청해야합니다. 우선 내 자신부터 하나님나라가 되어야합니다. 성령충만은 성령님이 나를 소유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자신이 밟은 당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곳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키면 그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눅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7:20, 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는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입술로 선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지 않는 것입니다. 4. 성령님의 권능 :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쓰임 받다. 성령님의 연장통을 여는 열쇠 성경말씀도 사모하지만, 성경에 약속하신대로 은사도 사모할 뿐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고전 12: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고전 14:1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18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시는데, 마음만 치유되고 몸은 여전히 아픈 채 그냥 살기를 바라지는 않으실텐데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엇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비추셔서, 내 안에 깊숙이 숨어 있는 동기를 드러내신다는 말씀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잠 20:27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과 내 노력과 내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고 능력으로 하여 고전2:4 나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구한 은사를 마음에 심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우리 마음에 심은 말씀이 이 땅에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임신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막4:26-29 존위버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치유가 일어나기를 사모하여 성도들에게 기도해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10개월여동안 성도들이 교회를 많이 떠났다. 그래도 계속 사모하여 간구하였더니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풍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1:6~8 은사는 한 성령님께서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랄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듯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전 12:8~11 성령님은 우리가 은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을 바라보고 성령님의 손을 잡고 사역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필요한 연장을 꼭 집어 우리 손에 쥐어주십니다. 우리는 은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사의 통로일 뿐입니다. 성령님의 손을 잡고 성령님의 마음으로 잃어버림 영혼을 긍휼히 바라볼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사용해주십니다. 만약 당신이 성령세례를 받았고,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면 감동대로 행동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 안에 필요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의 모든 판단과 태도를 하나님나라의 법에 맞추어야 합니다. 또한 당신이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모든 견고한 생각과 감정들을 버려야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8,9 나의 무능함에 대한 믿음보다 하나님의 위해하심에 대한 믿음이 더 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역사가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로 쓰임 받을 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거룩한 부담감과 감사하는 마음 나는 신유 사역자로, 성도들은 병 고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지 스스로 시험하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집회마다 얼마나 두렵고 덜리는 마음으로 오직 성령님만 붙들었는지 모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다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0 우리모두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 3:16 치유받은 사람의 간증을 듣고 동일한 질병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치유될 수 잇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계19:10 사랑을 따라 행하는 은사들 은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큼만 쓸 수 있습니다. 주시는 만큼만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며 세우는 데만 쓰겠다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합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안 아프던 곳이 아픈 것도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일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3:10 아주 특별한 위임식 나는 지금도 교만해질까봐 매일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성령님 앞에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있습니다. 주께 쓰임 받지 못하는 인생은 빈 깡통과 같기 때문입니다. 기름 부으심을 흘려보내다 “내가 너에게 이미 다 주었는데, 너는 모르고 있구나.”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1 결국 주님께서 다 주셨으니, 주신 것을 믿고 “나가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라”는 뜻입니다. 잃어버린 영혼, 상처받은 영혼, 병으로 고통 받는 영혼들을 향해 내가 얼마나 긍휼과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열망이 있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기름 부으심을 흘려보내는 파이프의 직경이 달라질 것이다. 성령님은 정말이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능력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 자아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기름부으심을 받아보았자 곧 기름부으심이 땅에 쏟아지게 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붕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 9:17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내면의 상처와 쓴뿌리를 제거(내적 치유), 둘째,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그 나라의 법대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매일 그 분 앞에서 거룩한 시간을 갖는 가운데 카이로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에 의해 새로워지고,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5. 성령님의 꿈 : 성령님이 열어주시는 새 길을 따르다. 성령님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자아는 죽고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인정해야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성령 세례는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사항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그전까지 우리가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이해했던 말씀을 성령님께서 친히 풀어 이해시켜주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2, 13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성령님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으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내가 내 것을 포기하는 만큼 내 안에 계씬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성령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더욱 능력있는 삶을 사루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세례를 주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1~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개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7,18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2 오직 죄를 회개하고, 내가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임재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자녀의 삶을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고 성령을 초청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믿음으로 취하십시오. 성령님을 초청하는 실제적 방법 1. 우리가 정말 성령세례를 받고자 할 때 품어야 할 동기는 첫째, 하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고자 할 때 나를 버리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분의 영광이 이 땅에 실제로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2. 동기에 대한 점검이 끝났다면, 하나님과 독대 할 수 있는 조용한 장소로 가십시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장소에서,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9~12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 3. 회개하고 성령님릉 초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아버지, 삼위일체 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지금까지 온전히 알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부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모두를 바르게 알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시고, 날마다 교제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만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자녀 삼아주시고, 주님과 교제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나를 통해 이루도록 하신 것 또한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덮어주셔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옵소서. 주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은 나의 몸이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성령님을 초청하여, 이제부터는 나 자신이 아니라ㅣ성령님이 나를 온전히 인도하시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동안 성령님이 나를 소유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님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이용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성령님! 이 시간에 나에게 오시옵소서 내 심령의 한족 구성이 아니라 중앙 보좌에 앉으소서. 성령님을 진심으로 초청합니다. 오시옵소서 내 영혼이 날마다 성령님을 경배하고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영과 혼과 육, 전부를 성령님께 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내 삶을 인도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믿고 기다린다. 정말 믿음으로 기도했다면, 그 다음 단계는 성령세례 받을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저 마음 문을 열고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5. 성령 세례를 누린다. 이제는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믿고 그것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굴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 6. 성령님께 감사드린다. 받은 줄로 믿는다면, 이제는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신 것을 감사하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내 안에 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성령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더 친밀해지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님과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7.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한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그분과 늘 대화해야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작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 14:2 방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를 받은 후 삶의 변화입니다. 이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그분께 당신의 삶의 주도권을 내드리세요. 내드리는 만큼 성령님께서 지혜와 권세와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5 8. 그래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동기를 점검하고 기도하고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로부터 안수기도나, 집회를 통해서도 받을 수 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6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10:44 우리는 무엇보다 그분의 임재 안에서 안식할 것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촌이 주르르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시63:1~7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 27:4 오감으로 아무것을 느낄 수 없다고 해도 우리 안에 그분의 영광이 함께하신 것을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어야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시 91:1,2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3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4:1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 23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의 임재 가운데 당신의 영, 혼, 육을 자유롭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에게 당신을 맡기고 안식하십시오.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기 위해서는 날맏 성령의 임재 안에서 그분과 교제해야 합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1:35 동시에 기름부으심을 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부담감과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을 포기하며 하나미의 능력이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실제로 나타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눅6:19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4 기름 부으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막16:20 성령님과의 교제가 내 계획표의 일부분이 아닌 전부가 되도록 드리는 훈련입니다. 모든 일을 성령 안에서 시작해서 성령 안세서 듣고 말하며 행하고 이루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지금 이 장소에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내 생각과 감정을 포기하고 그분이 나타나시도록 전심으로 기도하십시오. 심령 깊은 곳에서 그분이 나에게 주시는 감동에 따라 순종하십시오. 그분의 나타나심을 감사하고 경배하십시오. 충성하는 사도 바울의 삶 평신도 사역자에게 기름부으심을 흘려보내는 일은 내게 하나의 사명이자 성령님께서 주신 비전입니다. 당신도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받고 가정과 직장, 사회에 기름부으심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님이 주신 더 큰 비전 치유센터 걸립 에필로그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시40:2
곤충의 발은 몇 개인가?/ 창조과학자료/ 2013-04-09
곤충의 발은 몇 개인가? 과학 책에 보면 곤충의 발은 6개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레 11:20-23)라고 되어 있다. 즉, 성경은 곤충의 발이 4개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곤충의 다리를 6개로 보는 것은 일종의 정의이다. 다리 6개를 2개는 손, 4개는 발이라고 정의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실제로 곤충들은 맨 앞의 두 개는 거의 손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현대의 과학은 그냥 6으로 정의한 곤충의 다리를 성경은 아마도 2+4로 정의한 듯하다. 당시에 아무리 과학적으로 발달되지 않았다고 해도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지만) 모세 같은 사람이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일을 몰라서 4개로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은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즉, 사물을 나타내는 정의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기 전에도 만유인력은 있었고, 공룡이라는 말이 생긴 것도 불과 200년도 안 되었지만 훨씬 이전에 공룡은 존재하고 있었다(성경에도 공룡을 언급한곳이 많이 있다). 곤충의 다리가 6개라고 정의한 과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초과학적인 기록은 많이 있지만 비과학적인 기록은 없다. 과학이라는, 사람들이 찾아낸 학문 때문에(엡 4:14)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잃어버리는 우를 다시 범하지 않길 바란다.(고후 10:5) (창조과학회)
과제물/ 죽음에 대한 성서의 기본 인식/ 김균진 저, 죽음의 신학 pp.117-200/ 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과제물/ 죽음에 대한 성서의 기본 인식 죽음에 대한 성서의 기본 인식 (교과서 117 ~200 페이지) 1. 생명의 세계를 파괴하는 죽음의 세력 1) 전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의 죽음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전통적 신학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인간이해를 취하여 물질적 육체로부터 영혼이 그의 영원한 신적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구약성서는 인간의 한 부분, 곧 육의 죽음이 아니라, 전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죽음을 뜻한다. 다시말해 죽음은 육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을 포함한 인간 존재 전체에 일어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존재가 죽음과 함께 총체적으로 없어져버린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도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의 죽음이 아니라, 전체적 존재로서 인간의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다른 점이 있는데 구약성서는 죽음과 함께 인간의 자아가 ‘스올’ 로 내려 간다 (시94:17, 115:17). ‘스올’ 은 들어간 다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이며,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작용할 수 없는 무기력한 세계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죽음과 함께 인간의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살전4:16. 빌1:23). (이종성 종말론 1, 85페이지). 2) 구약성서에 나타난 죽음의 세력 구약성서에서는 죽음을 존재론적 소여로 보는 견해는 다소 빈약한 입장이고 오히려 죽음을 - 1 - 생명을 파괴하고 위협하는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시88:12, 욥10:21~22, 시31:18, 94:17). 죽음을 하나의 공간으로 표상하는 동시에 하나의 세력으로 표상한다.(욥10:21, 12:22, 16:16). 죽음이란 인간의 존재는 물론 이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가는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세력을 뜻한다. 이 죽음의 파괴적 세력들은 의학적.생물학적 측면, 영적.정신적 측면, 사회적 측면, 정치.경제적 측면, 생태학적 측면들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며 (참고로, 신약성서에서도 죽음은 삶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O. Kaiser, E. Lohse, Tod und Leben. 89 페이지 ),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사라지고, 불신앙과 불의와 타락과 폭력과 억압과 착취가 지배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도 죽음 가운데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런 상황 속에 사는 사람들을 이사야 9장 2절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 이라 표현하였다. 3) “죄의 삯은 죽음이요...”- 신약성서에서 죄와 죽음의 인과 관계 죄가 없었다면 죽음이 없을 것이며, 죄책이 없다면 고난도 없을 것이다. (O. Kaiser, E. Lohse, Tod und Leben. 85 페이지 ).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죄 가운데서 사는 자는 “죽은 자”이다. 요한문서도 죽음을 하나의 파괴적이며 반신적인 세력으로 파악한다. 사랑 안에는 생명이 있는 반면, 증오와 미움, 곧 죄 속에는 죽음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행하지 않고 자기만을 추구하는 자는 이미 죽음 속에 있다.(요일서 3:14) 요한서신은 죽음을 어둠에 비유한다. (요일서 2:9) 공관복음도 죽음을 하나님 없는 인간과 이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파멸의 세력으로 파악한다. 무고한 예수를 잡아 죽이는 이 세계는 ‘어둠의 권세’ 곧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계이다.(눅22:53) 죄는 그 본질에서 생명의 훼손이며 파괴이다. 죄를 짓는 사람은 상대방의 생명은 물론 그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고 훼손한다. 그 속에서는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어 버리는 죽음의 세력이 작용한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 것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있다. 양자는 원인과 결과의 철저한 인과관계 속에 있다. 결론적으로 죽음의 파괴적 세력에 대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이해는 크게 차이가 없으나 신약성서는 우주적, 보편적 세력으로 파악하지만 죽음의 세력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있는 반면 구약성서에서는 파괴적 세력에 대한 구체성이 강하다. 즉 신약성서는 죽음의 세력을 온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어둠’ ‘죽음의 땅과 그늘’ 등과 같이 막연하게 묘사하였고 구약성서는 인간의 가난과 질병, 억울한 소송, 적대자로 인한 소외, 고난과 절망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 2 -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모두 죄로 죽는다는 것에서는 같지만 둘의 결정적 차이는 신약성서에서는 죽음의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미 극복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2. “귀신에게 물어보지 말아라” 1) 생명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의 엄격한 구분 죽음에 대한 성서의 이해에서 한 가지 특징은, 먼저 죽은 자들의 세계를 하나님이 그 속에서 활동하는 세계로부터 엄격하게 구분한다는 점에 있다.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무덤에서 주의 사랑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의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흑암 속에서 주의 기적을 알 수나 있겠습니까? 망각의 땅에서 주의 정의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시88:10~12) 이 시편에 의하면 죽은 자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으며 주의 사랑과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으며 주의 정의를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가지고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는 죽음과 함께 중지된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에게는 사랑도 미움도 야망도 없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보상도 없다. 그러므로 인생이 아무리 고달프고 허무할지라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 2) “귀신에게 물어보지 말아라”- 두 세계의 접촉에 대한 엄격한 금지 구약성서는 죽은 자들의 세계와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를 철저히 구분하면서, 두 세계의 접촉을 엄격히 금지한다. 이것을 우리는 먼저 모든 죽은 것은 물론 죽은 것과 접촉한 것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구약성서의 사상에서 발견한다. (민 19:11 이하 참조) 생명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의 접촉을 금지한다. 죽은 짐승의 시체는 물론 이것과 접촉된 모든 물건도 부정하다.(레 11:31 이하, 레 21:11) 모든 형태의 초혼(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 냄)을 금지하며 혼과 만나는 것을 금지한다.(신 18:9~11, 레 20:27) 산 자의 문제를 죽은 자에게서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산 자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사 8:20) 3) 죽음의 탈 신화화 - 3 - 고대의 많은 종교 사상에 의하면 죽은 자들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들의 영이나 혼은 피안의 세계에 존속하며(귀신)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를 출입하면서 그들에게 복을 주기도 하고 화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신앙에 의하면 죽은 자들의 스올의 세계를 믿는다. 스올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살아있는 세계로 출입할 수 없으며 살아있는 자에게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수시로 찾아와서 그들에게 화를 내리기도 하고 복을 내리기도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나타나서 살아 있는 자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죽음의 세계로부터 생명의 세계의 해방과 자유가 죽음의 탈신화화를 통하여 일어난다. 4) 삶의 아름다운 재발견 타 종교 사상에서 발견되는 영혼 불멸설과 윤회설은 인간의 영적 삶이 죽음 후에도 피안의 세계에서 혹은 다른 생물체 안에서 연장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죽음이란 지상의 삶의 철저한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삶으로 통과하는 사건으로 이해되며 지상의 삶은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병원에서의 필자의 경험) 그러나 성서에서는 인간의 삶은 유일회적인 것으로 말한다. 삶의 유일회성은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명확하게 구분될 때 분명해진다. 또한 성서는 인간의 삶의 불가역성을 말한다. 즉 죽음을 과거로 돌이킬 수 없으며 또 반복 될 수 없는 것이다. 삶의 유일회성과 불가역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삶의 허무성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삶이 단 한번 밖에 없으며 지나간 삶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허무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또한 단 한번 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삶의 귀중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죽음 1)죽음의 세계도 다스리는 하나님 죽은 자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첫 번째로 시편 139편 1절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 , 주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았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이 구절에서 ‘안다’는 단지 이론적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그와 가까이 있으며 그와 인격적 교통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안다고 할 때 그것은 깊은 사랑과 합일을 가리키며, 상대방과 언제나 함께 있음을 뜻한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내가 주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 4 -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도 주께서는 거기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께서는 거기에도 계십니다.(시139:7~8) 이 시편에 의하면 주님의 손길을 벗어난 영역은 없다. 음부에서도 하나님의 손이 인간을 붙들 것이며 그를 인도할 것이다. 죽음의 세계도 하나님을 벗어난 독립된 영역이 아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는 분이다.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나오게도 하신다.” (삼상 2:6) 이스라엘 신앙은 죽은 자들의 세계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이라도 붙들어 주며 인도하신다. 2) 죽음의 한계를 깨뜨리는 하나님 - 구약성서의 부활 신앙 구약성서는 본래 죽음 후의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의 과정에서 부활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은 신실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은 죽음과 함께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끝나야 하는가? 에 대한 물음이 부활신앙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은 자들의 부활신앙을 공식적으로 고백한 것은 기원전 1~2세기경 그들이 셀류시스 왕가의 극심한 박해를 받던 때였다. 이 왕가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어 버렸으며 할례와 안식일 제도와 희생 제사를 금하였다. 이것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제단에 제우스의 신상을 세우고 이를 경배하게 하였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의 피를 지성소 제단에 뿌리고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대의 모욕이었고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이었다. 이스라엘의 의로운 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하였다. 그 반면에 정권에 아부하는자들은 세속적 행복과 성공을 누렸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신앙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의로운 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불의한 자들이 행복을 누리고 그런 현실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권선징악의 인과율은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은 과연 옳은가? 하고 묻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의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자연스럽게 말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의로운 자들의 순교를 이대로 끝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잔인하고 불의한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고 최후의 심판을 집행하실 것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물론 부활신앙이 그 전에는 없었느냐? 그건 아니다. 베를린의 조직신학교수 마르크 바르트에 의하면 죽은 자들의 부활신앙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늦게 고백되었다고 하였다. 즉 삼상 2:6, 삼상 2:8, 시 113:7, 호6:1-2, 사24장-27장, 겔37:1-14, 단12:2-3 등에 비추어 이스라엘의 부활신앙은 기원전 1-2세기경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 속에 숨어 있었다고 본다. - 5 - 한 가지 구약시대의 부활은 단순히 인간의 영혼의 부활로 보지 않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으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스올, 곧 죽음의 세계에 있던 인간의 총체적 존재의 다시 살아남으로(재결합이 아니라 재창조) 본다는 점이다. 3) “하나님께서 죽음을 멸하시리라” 지금까지 기술한 죽음에 대한 구약성서의 조망을 발전 단계별로 정리하면 (1) 구약성서는 죽음을 자연사적 사건으로 인식한다 (2) 죽음은 단순한 자연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세력이라는 사실에 눈을 뜬다 (3) 죽음의 세계를 하나님이 다스리고자 하시는 생명의 세계로부터 철저히 구분하며 두 세계의 접촉을 엄격히 금지한다. (귀신숭배금지) (4) 죽음과 죽음의 세계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 (5) 하나님은 죽음의 세력에서 인간을 건지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극복한다. (6) 하나님과의 친교에 참 생명이 있다. 이 친교가 없는 것에 죽음이 있다. 하나님과의 친교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중단 될 수가 없다 (7) 이제 이스라엘 신앙은 한 걸음 더 발전한다. 하나님은 불행과 고난 속에서는 물론 죽음 속에서도 그의 신실한 자들과 함께 계실 뿐 아니라 그의 창조적 능력으로써 죽은 자들을 다 시 살리는 분으로 드러난다. 이제 죽음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통하여 극복될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폐 기 될 것으로 나타난다. 이 죽음의 세력에 대한 폐기가 구약성서에서는 미래에 성취될 것으로 믿는 반면에 신약성서 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단 한 번 그러나 모든 세대에 대하여 폐기가 이루어졌다. 4.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깨어진 죽음의 세력 1)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는 예수 지상의 예수는 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선포하였는데, 이 선포는 후기 유대교의 묵시 사 상의 전통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의 미래에 이러날 종말에 대하여 말하기보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 앞에서의 회개와 현재적 상황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와 같은 예수의 지상 활동은 죽음에 대항하여 생명을 회복하는 운동이라 요약할 수 있다. 예수의 생명 회복 운동 가운데 몇 가지를 우리는 아래와 같이 기술할 수 있다. (1) 예수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 멸시와 소외를 당하였던 사람들의 친구가 됨으로써 그들의 상실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한다. (2) 예수는 의와 불의, 경건과 불경건의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고 소위 의롭고 경건하다는 자들의 불의와 불경건을 폭로하는 반면, 불의하고 불경건하다는 자들의 의와 경건을 드러낸 다. 이를 통하여 예수는 그 사회의 기존 가치관에 따라 불의하고 불경건한 자로 낙인찍힌 - 6 - 자들의 그늘진 생명을 회복한다. (3) 죄는 사실상 생명의 파괴이다. 우리가 죄 지을 때 우리의 생명은 물론 타인의 생명에도 해가 된다. 죄 속에는 언제나 죽음의 세력이 숨어 있으며 죄를 짓는 자는 죽음의 세력의 포 로가 된다. 이러한 죄인에게 예수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그를 하나님과 화해시킴으로써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죄인의 생명을 회복한다. (4) 예수는 병자의 병을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음으로써 그는 그들의 생명을 회복한다. (5) 예수는 희년을 선포함으로써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생명을 회복한다. (6) 예수는 유대와 사마리아와의 지역적 대립에 대하여 초연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지역적 대립으로 인해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킨다. 2)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들의 다양성과 일치점 예수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은 끝나버렸는가? 거짓과 죄와 죽음의 세력이 의와 생명의 세력 에 대하여 승리하는 이것이 역사의 진리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신약성서는 부활로써 대답한다. 신약성서는 예수의 부활의 과정에 대해서 묘사하기보다는 예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난 일들 에 대하여 보도한다. 곧 막달라 마리아, 야곱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부활한 예 수를 만난 일에 대하여 증언하며 부활의 과정 자체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또한 부활의 증언들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과 부활한 예 수가 처음으로 나타났던 장소와 부활한 예수가 나타난 과정들이 복음서끼리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 신약성서의 편집자는 왜 부활의 증언들에 대해 일관성 있게 통일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부활에 대한 역사적 자료보다 다양한 증인들의 신앙적인 증언을 더 중요시하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고 해석된다. 신약성서는 이들의 증언 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였다. 예수의 부활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일관성이나 객관성에서 차이점이 있지만 문제 삼지 않았다. 3) 죽음의 세력에 대한 생명의 승리 고린도전서 15: 3-5 은 도입부분과 네 가지 명제로 나뉜다 도입부분 : “내가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명제 1.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명제 2.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명제 3.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명제 4.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 7 - 명제 1에서 그리스도란 칭호는 예수의 본래 이름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스도 는 곧 메시아는 이방 민족의 불의한 주권과 지배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할 왕 적 존재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그리스도란 칭호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고백과 결 합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를 복음서 기자들이 그리스도라고 고 백하면서 주권을 회복할 왕적 의미인 메시아적 의미는 사라지고, 대신에 많은 사람들의 죄 를 대속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을 가져왔다는 의미로써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게 되었고 고린도서에서는 예수를 빼고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이다. 명제 2에서 예수가 무덤에 묻히셨다고 함으로써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의 심연에 삼키워졌으며 스올의 영역으로 들어갔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명제 3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계에서 머물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셨는 데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하였다. 이는 죽음을 당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라는 뜻 과 이 세계의 역사의 한 가운데서 라는 뜻이 있다. 명제 4에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보여주셨다고 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약 속과 새로운 소명을 주심을 나타낸다. 다시 정리하면 바울의 부활 신앙은 죽음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폐기의 시작이다.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은 사실 상 깨어졌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세계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열려졌다. (3)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과거에 끝나버린 한 사건, 혹은 사실이 아니라 성령 가 운데서 일어나는 자들의 부활의 과정의 근거로 이해된다. 세례도 부활의 과정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왜냐면 세례를 통해 죄와 죽음의 세력에 묶여 있던 인간의 존재가 새로운 생명 으로 부활하기 때문이다. (4) 부활은 불의와 폭력과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세워지 고 생명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새 창조의 시작이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영 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사건이다. (5) 죽음의 세력에게 사로잡힌 자연의 구원 없이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우리는 더 이상 말 할 수 없다. 환경이 오염되어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병든 육체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이 고통을 당하는 현실 속에서, 단지 영혼 구원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 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영혼은 물론 그의 신체를 포함하며, 인간과 사회와 역사는 물론 자연 의 영역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간의 중생이 시작할 뿐 아니라 온 우주의 다시 태어남이 시작한다. 예수의 부활은 판넨베르크가 말하듯이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 온 세계의 새 창조가 시작되는 사건이다. 온 세계의 새로운 창조는 역사의 종말에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노력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앞당겨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물론 자연까지 포함하는 총체적 구원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6)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궁극적 폐기의 약속인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다 - 8 - 4) 빈 무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의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열 수 없는 죽음의 세계의 폐쇄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 돌을 치우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람 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여자들은 누가 이 돌을 치워 줄 것인지 서로 질문한다. 바로 이때 여자들은 예수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 무덤 한 쪽으로 치워져 있음을 발견한 다. 누가 이 문을 열었을까? 하나님이다. 하나님만이 그 문을 열 수 있다. 5) “죽은 자들의 처음 태어난 자” 고전 15장 23절에 의하면 예수는 “죽은 자들의 처음 태어난 자” “죽은 자들의 첫 열매” 이 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모든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이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부활의 인격적 측면이라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화해된 모든 피조물이 그의 뒤를 따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 한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곧 자연의 세계 전체가 죽음의 그늘을 벗어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부활의 자연적, 우주적 측면이라 말할 수 있다. 6) 마지막으로 극복될 원수 바울은 부활의 과정의 세 단계를 말한다. 첫째 단계는 죽은 자들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이고 둘째 단계는 그가 재림할 때 그 에게 속한 사람들의 부활이다. 셋째 단계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위와 세력을 폐하 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종말이다. 종말에 그리스도는 모든 반신적 세력들 과 죽음의 세력들을 페기하실 것이다. 죽음에 대한 바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은 자들의 부활 을 부인하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이원론적 인간관과 세계관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7) 죄와 죽음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세계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는 생명의 세계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의 만남을 통하여 일어난다고 신약성서는 말한다. 예수를 만나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죽음의 세력은 물러가 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열린다. (요5:25) 또한 세례를 통하여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으며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왔다. (롬6:4) 이것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완성은 미래에 있다. 죄가 지배하는 이 세계 속에서 많은 생명들이 죽음을 향하여 줄달음치고 있는 현실을 우리 는 지금 목격하고 있다. 15살, 16살 된 어린 소녀들이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수 백 명의 성 인 남자들과 원조교제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정경유착을 통하여 사회 극소수의 계층은 상상을 넘어서는 풍요와 특권을 누리는 반면 많은 - 9 - 국민들은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는 것마다 부패와 타락과 향락이 만연하 다. 인간이 파괴한 자연환경은 이제 인간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세계는 죽음의 세계다. 이러한 세계 속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시작하시고 그 의 자녀들을 부르신다. 죄와 죽음의 세계를 떠나도록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세 력을 극복하고 모든 피조물의 해방과 영원한 생명이 있는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깨어나라고 부르신다. 감상평 죽음은 인간의 자연적 사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치, 경제, 사회의 타락 과 불의 그러한 현상도 죽음으로 보았고 오염되고 훼손된 자연도 죽음으로 보았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권세에 눌려 있고 죽음의 세력에 눌려서 신음하고 있는 인간과 사회와 자연이 다시 생명을 얻고 살아나는 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다. 행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저가 사망에게 매어 있을 수 없었음이라.’ 더 이상 이 사회와 인간들과 자연은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풀어 살려 주시도록 기도하며, 그리고 하나님이 살리시고 부활케하신 것들은 우리들이 잘 지키고 보존해야할 사명이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관계 사이에 흐르는 힘(power)
관계 사이에 흐르는 힘(power) http://mission.bz/7108치유목회 고 영 순(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 1. 시작하는 말 개인의 어떠함을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자존감이 있다, 혹은 없다’라는 표현보다는 ‘자존감이 높다, 혹은 낮다’라고 말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존감(self esteem)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높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이렇다;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좋아 한다; 내 의견이나 견해에 대해 대체적으로 만족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능력 있어서 과제를 수행할 때 보통 성공 한다; 성적인 존재로서의 나(여성됨/남성됨)에 만족한다 등. 이처럼 높은 자존감의 소유자는 통합성, 정직성, 책임성, 정열, 사랑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름을 말한다. 그(녀)가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좋고 안전하며 그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할 뿐 아니라 결정한 것에 최선을 다하며, 그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타인들을 존중하며, 인생의 어려운 부분들은 인간적으로 수용한다. 자존감이 낮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다르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다른 성공한 사람들처럼) 변화시키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내 의견이나 감정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가끔 내가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껴져 의기소침 한다; 중요한 사람과의 교분을 통해 정체성을 추구 한다; 변화를 두려워한다 등. 낮은 자존감의 소유자는 자신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감과 함께 자기 무가치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그것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공포심과 상대에게 보상받으려는 이기심 때문에 방어적 행동을 하며, 타인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으로 그의 자율성과 개성은 무력해 지고 남성 혹은 여성으로서 정체감도 확립하지 못한다. Carroll Saussy, God Images and Self Esteem: Empowering Women in a Patriarchal Society(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John Konx Press, 1991), 173-75; 김영애,『사티어 의사소통 훈련프로그램』(서울; KFTC, 2002). 182-83; 데이비드 칼슨, 이관직 역, 『자존감』(서울: 두란노, 2002). 자존감이 높다는 말은 한 인격으로 스스로를 만족해 한다는 의미이다. 만족이란 반드시 조건이 충족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정서가 아니다. 만족감은 자존감과 연결되어 있다. 자존감은 일종의 인지 능력으로 인생 조건에 대해 나름대로 유익과 손해를 판단할 수 있으면서, 예기치 못한 인생의 어려움에 대해 인간적 한계를 인정할 수도 있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자존감은 반드시 행복한 조건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느낌이 아니다. 이러한 인생 태도에 대해 학자들은 가족규칙들이 융통성 있게 적용되는 가족구조가 결정적이라고 말한다. 가족은 자존감을 학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가족에서 배운 자존감을 가지고 우리는 관계(relationship) 안에 들어가며, 그 관계의 연결선상이 체계이다. 자존감을 형성하는 장소, 즉 가족은 하나의 체계(system)이며 각 구성원간의 상호의존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상호의존성은 관계의 역학을 뜻한다. 나의 됨됨이는 자존감에 달려 있으며, 내가 관계 속에 들어갈 때는 지배력(power)이 관계성에 영향 미친다. 어떤 두 사람도 함께 있으면 그 순간부터 관계의 우위를 차지하려고 하며, 그 결과 한 사람이 지배하고 다른 사람이 복종하는 상보성 아니면 두 사람이 경쟁하는 대칭성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자존감이 높아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으면, 두 사람의 상호 욕구 충족이 일어나는 대등성 관계를 발달시킨다. 김선남, 『자기성장 집단상담 모형과 프로그램』(서울; 중앙적성출판사, 2001), 191-92. 본 논문은 체계의 한 요소인 관계(relationships)와 그것에 동기부여 하는 힘(power)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힘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어떻게 그것이 정의되고, 습득되고, 사용되는가 하는 것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체계적 성격을 갖고 있는 힘이 가족체계를 감싸고 있는 우리나라 사회구조와 무관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임정빈.정헤정 공저,『성역할과 여성』(서울; 학지사, 1997); 이혜성, 『여성상담』(서울; 도서출판 정일,1998). 자존감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성적 존재로서의 자기 평가는 여성 의회원의 40%를 넘는 스웨덴과 5%도 안 되는 우리나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문화권의 큰 차이 없어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여성의 책임이라는 문화적 명령을 계속 받아들인다. 여성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훈련되며, 그리하여 여성은 그들의 결혼에 책임을 느낀다. Carol Gilligan, "Remapping the Moral Domain; New Images of the Self in Relationship," Claudia Zanardi, Essential Papers on the Psychology of Women(New York; New York University, 1990), 481; Nancy Chodorow, The Reproduction of Mothering: Psychoanalysis and the Sociology of Gender(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8). 만약 관계가 잘못 되면 그것은 여성의 잘못인 것이다. 한국의 여성(어린이)은 사회구조의 참여율만큼이나 복지적 혜택을 못 받는 위치이고 보니, 남성에 비해서(혹은 어른에 비해서) 관계성에 있어 그만큼 주도성이 없다고 봐야겠다. 본 논문에서는 특정 관계(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다수와 소수)에 흐르는 힘(power)에 의해 어떻게 체계가 자기규제(self regulation)를 하는지 그 ‘기민성’을 알고, 그 기민성에 대처하는 목회상담을 의도한다. 자존감은 어떤 관계를 만나든지 간에 영향을 줄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반드시 긍정적 결과만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내가 누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따라 부정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관계에서는 당신은 다수의 입장에서 사회적 통념에 더 편안함(안전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적 통념에 공격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결혼 적령기를 넘긴 사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가족이라는 제도권에 속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않은 소수의 사람에 대해서보다 ‘안전감’을 느낄 것이다. 안전감을 느끼는 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독신, 결손가족, 이혼한 사람 등)에 대해 불리한, 혹은 편견을 담은 사회적 통념을 만들어 낼 것이다. 다른 한편, 가정폭력과 성폭력이 세계 수위권에 들어 있는 나라에 사는 여성(혹은 아이)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남성들(어른들)이 느끼지 않아도 되는 안전에 대한 위협을 느끼면서 사회적 약자에게 가하는 통념(‘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지’, 혹은 ‘옷을 야하게 입었으니까 강간을 당하지’ 등)까지 감수해야만 한다. 더군다나 폭력의 피해자 개인에게 현실의 모든 상황과 문제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우는 것이 우리나라 복지의 현실이고 보면 상담의 역할에 대해 그렇게 낙관할 수 없다. 폭력은 목회 상담가에게 상담가로서의 정체성에 보다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는 분야이다. 권력관계(power-relationship) 속에서 피해자가 당하는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목회 상담가로서의 정체성이 달려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힘이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면, 상담도 그 관계성을 풀어가는 것으로 그 기민함을 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가족치료’라는 말보다는 ‘관계치료’를 선호함을 전제한다. D. S. Becvar & R. J. Becvar, Family Therapy: A Systemic Integration, 정혜정. 이형실 역, 『가족치료: 체계론적 통합』(서울; 도서출판 하우, 2001), 13-15. 체계는 우리에게 문제를 조망하게 해 준다면,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치료의 구체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 체계와 관계성 1) 체계의 경계성(boundary) 가족치료 상담가들이 한 가족원의 증상을 진단할 때 누가 누구의 옆에 있고, 누구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으며, 누구를 쳐다보고, 누구에게 기대고, 누구한테 멀어지려 하는지, 누가 다른 사람하고 관계를 맺기가 힘들어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는지, 그것에 대한 다른 구성원들의 반응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들은 가족체계의 패턴과 위치를 알기 위함이다. 한 가족원의 문제 증상은 이런 증상을 유지시키는 패턴을 변화시켜 가족체계 전체의 변화를 유도할 때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Robert Sherman & Norman Fredman, 김영애 편역, 『부부. 가족치료 기법』(서울; 하나의학사, 1996), 181-82. 또 하나의 진단 방법으로, “당신 가족의 적절한 아침 인사 방식은 어떠한 것인가? 가족논쟁에서 허용되는 행동과 허용되지 않은 행동은 무엇인가?” 하고 묻기도 한다. 불쾌감의 우회적 표현, 문제의 회피, 애정의 표현방식 등은 가족원들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부부나 가족의 관계성을 측정해 보기 위해 상담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즉, 평소 자기가 배우자(부모)에게 주로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평가/비난, 충고/조언, 지시/명령, 침묵/무시, 복종/거짓수용, 경청/공감, 표현/압력 등의 예가 있다. 또 다른 질문으로, 평소 자기가 부모(배우자)에게 주로 갖는 느낌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인가? 불안, 공포, 열등감, 죄책감, 실망, 적개심, 반발심, 사랑, 기쁨, 이해, 존경, 희망 등의 예가 있다. 김선남, 『자기성장 집단상담 모형과 프로그램』(서울; 중앙적성출판사, 2001), 192-93. 이처럼 가족체계 내의 의사소통과 가족 구성원이 어떤 관계성을 이루고 사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계란 무엇인가,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리고 가족생활과의 관련성이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체계의 특성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체계는 전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대상들의 조합이다. 체계의 한 요인이 변화하면 그에 따라 다른 요인들도 변화하며, 이러한 변화는 원래의 변화 요인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체계는 대상(object), 속성(attribute), 관계(relationship) 그리고 환경(environment)의 네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다. 대상은 체계의 부분이며 가족체계에서는 가족원들이 이에 해당된다. 속성은 체계와 개개의 구성원들의 자질 혹은 고유성을 말한다. 가족이나 가족원은 목표, 에너지, 건강, 인종적인 유전 등과 같은 가족체계의 속성을 가진다. 가족체계의 부분들 사이의 ‘관계’는 가족원들 사이의 관계가 된다. 가족관계는 응집과 적응의 수준에 이르게 하는 의사소통에 의하여 특징화된다. ‘환경’도 체계의 구성요인인 이유는, 체계가 주위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체계의 관점은 가족 상호작용의 분석과 미래의 상호작용의 예측, 그리고 체계내의 의미 있는 변화의 발생을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Kathleen M. Galvin& Bernard J. Brommel, Family Communication, 노영주 외역, 『가족관계와 의사소통: 응집성과 변화』( 서울; 도서출판 하우, 1994), 46. 가족에는 부부로 이루어지는 하위체계,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하위체계 등의 하위 체계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하위체계는 각 경계선에 신축성이 있으면서도 분명하여서 다른 하위체계로부터 침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정에서는 흔히 부부 하위체계가 견고하지 못하므로 자식세대가 경계선을 침범하여 부부하위체계에 개입하게 된다. 김성천, “가족치료의 이론과 실제”, 서울여성의 전화, 『가정폭력상담원 전문교육집』(제 30기), 95. 그러므로 건강한 가정은 위계질서가 분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김혜숙, 『가족치료의 이론과 기법』(서울; 학지사, 2003), 75-76. 그런데 누가 힘을 더 많이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가족의 위계질서도 결정된다. 힘을 어느 한 사람만 너무 과다하게 행사할 때 가족원간에 불평과 불만이 쌓이게 된다. 그리하여 가족간의 은근한 힘 겨루기는 위계질서에 혼란을 초래한다. 건강한 가정은 부모가 동등하거나 비슷한 권력을 갖고, 아이들은 부모보다 적은 권력을 갖는 가정을 말한다. 진영석, 『가족치료』(서울; 백산출판사, 2002), 24-25. 부부관계에 있어서 권력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겉으로는 평화로울지 모르나 갈등의 뿌리가 있어서 지배받는 배우자나 아이에게서 문제증상이 나타난다. 아이가 부모보다 많은 권력을 갖거나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지니고 있을 경우에는, 아동이 부모를 지배하게 되고, 부모의 통제력 결핍으로 부모학대 등의 문제 소지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부부관계에 문제가 생길시 가족 내의 각 하위체계간의 경계선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하위체계간의 경계선의 탄력성이 가족체계의 건강성을 말해준다 하겠다. 2) 관계성의 주요소: 힘(power) 힘(power)은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능력 또는 잠재력을 말한다. 힘은 체계적 특성을 지닌 사회구조적 요소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적 요소, 그리고 결과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다차원적 현상이다. 힘(권력)은 사회체계 내에서 다른 구성원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개인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능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힘은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관계의 속성을 가진다. James N. Poling, The Abuse of Power: A Theological Problem(Nashville; Abingdon Press, 1991. 25-26. 가족 안에서 권력이라 함은 가족 내에서 다른 성원들 간의 행동을 통제, 유발, 변화시키는 능력 또는 작용이다. 권력은 또한 가족 내에서의 의사결정 능력으로서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잠재적 능력이다. 권력은 가족원들이 갈등적인 목표를 가지는 가족환경 내에서 그들의 목표를 성취해 낼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옥선화, 정민자, 고선주, 『결혼과 가족』(서울; 도서출판 하우, 2000), 127-28. 가족권력의 원천은 어떤 가족원이 특정 상황에서 상대를 통제할 기회를 증가시켜 주는 자원이다. 가족체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섯 가지 사회적 권력의 원천을 살펴보자. a) 처벌(강제적 권력): 한 개인이 일정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또는 행동하지 않을 경우에 어느 누군가가 자신을 처벌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b) 긍정적인 강화(보상적 권력): 한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느 누군가가 제공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c).전문성(지식): 다른 가족원이 자신보다 어떤 주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d) 합법성(지위): 한 개인이 특정 역할은 어떤 합법적인 책임을 수반한다고 받아들일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e) 동일시(준거적 권력): 한 개인이 자신을 상대방과 유사하게 보고 그 지위를 수용할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f) 설득(정보적 권력): 한 개인이 상대방의 조리 있는 주장을 받아들일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캐슬린 갤빈, 버나드 브롬멜, 노영주 외역, 『가족관계와 의사소통: 응집성과 변화』(서울; 도서출판 하우, 1994), 191-94. 권력 원천에 대한 다른 말로, 경제적 자원(직업과 수입의 정도), 규범적 자원(연령), 감정적 자원(만족도), 개인적 자원(신체적 매력, 역할수행 능력, 성격), 인지적 능력(교육수준)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권력 용어는 상대방이 상황을 지각하는 방식에 의해서 정의된다. 가족관계 내에서 어느 누구도 위의 여섯 가지 권력원천을 모두 똑같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주어진 상황에서 그 모든 것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남편은 보상적 권력과 전문적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가족 내에서 자녀들은 특별히 그들의 의견이 격려 받고 또 존중된다면 합법적 권력과 설득적 권력을 사용하게 된다. 권력원천은 권력결과에 영향을 준다. 가장 큰 보상을 제공할 수 있는 가족원들이 가장 큰 권력을 가진다. 자원이란 한 사람이 목표를 달성하거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어떤 것이다. 권력원천은 보상과 관련되며 이것은 권력의 결과에 영향을 준다. 처벌을 피하는 것, 긍정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 전문가로부터 배우는 것, 명확하게 정의된 규정 속에서 지내는 것, 타인과 동일시하는 것, 설득당하는 것, 타인들이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것 등이 보상될 수 있다. 이러한 권력원천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닌 욕구 만족과 목적 달성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구조주의 가족치료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기법으로 ‘하위체계와 동맹 맺기’가 있는데, 이것은 역기능적으로 분배된 힘과 거리를 조절하여 구성원간의 적절한 경계를 형성시키기 위하여 사용된다. 치료자는 일시적으로 한 하위체계(부모나 자녀들)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자신의 힘과 권위를 그 하위체계나 하위체계 내의 구성원에게 더하여 가족체계의 구조에 변화를 유도하고, 변화가 이루어지면 다시 다른 하위체계와 동맹을 맺어 이 하위체계를 강화시킨다. 이 기법의 전제는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적절한 권위와 지도력을 지녀야 하고, 이러한 권위와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행력 또한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하위체계로서의 부모 하위체계는 자녀들이 형성하는 하위체계보다 위에 존재하는 상하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부부간의 하위체계는 배우자로서 서로 동등한 위치를 갖는 동시에 부모 하위체계로서 적절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모든 조직에 있어서 힘의 사용과 분배는 매우 중요하다. 하위체계 구성원들 사이의 힘의 분배 또한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Robert Sherman & Norman Fredman, 같은 책, 197-98. 3. 힘의 사회화와 양상 1) 출생가족과 권력사용의 영향 부부가 사용하는 권력과정 유형은 출생가족에서의 경험에서 유래된다. 물리적 통제를 사용하는 가족에서 자라난 사람은 그와 같은 방식을 따른다. 지배적인 아버지를 가진 아들은 자기가 부인과 동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출생가족은 아동이 최초로 권력에 대해 학습하는 곳이다. 출생가족에서 사용되었던 전략은 자녀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 또다시 반복된다. 침묵과 같은 권력행사의 유형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린 시기에 학습한 방식들에 대해서는 거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Gayla Margolin, "Effects of Domestic Violence On Children," 57-59. 한 아기가 온 가족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어린아이들도 권력을 행사한다. 자녀들은 성장하고 변화함에 따라 가족구조 내에서 좀더 많은 권력을 요구하며 행사하게 된다. 윌리엄 글래써, 김인자 역, 『행복의 심리: 선택이론』(서울; 한국심리상담연구소, 1998), 70-72. 6세 경에는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늦추려고 투쟁하지만, 16세 경에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한다. 학령기 자녀들은 부모들이 모르는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기 시작하면서 권력을 획득한다. 청소년기는 자녀들이 부모의 권력을 거부하고 반항하므로 가족 내에서 문제가 된다. 자녀로서의 권리의식이 강해 “호루라기(whistle)를 불어서라도”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가지려고 하는 것도 일종의 힘 행사이다. Carol Gilligan, Meeting at the Crossroads: Women's Psychology and Girls' Development(New York; Valentine Books, 1992), 52-57. 권력이 공유되는 가족 내에서는 그러한 변화를 환영하겠지만, 남편지배형, 부인지배형의 가족에서는 그것이 위협이 된다. 온정적인 가족환경에서는 자녀들이 새로운 재능을 발달시키도록 훌륭한 재능에 대해 좋은 보상을 받는다. 부모들이 자기의 요구와 소망을 서로에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잘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지의 여부가 권력에 영향을 준다. 또한 이러한 요구를 배우자나 자녀들이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가 권력결과에 영향을 준다. 부부간의 상호독립 또는 의존성의 정도도 역시 가족 권력체계에 영향을 준다. 가족 내에서 권력이 수행되는 방식은 권력과정을 살펴보거나 가족원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상호작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과정들은 가족의 토의, 논쟁, 문제해결, 의사결정, 위기 등의 시점에서 상호작용에 영향을 준다. 이 과정을 영향력, 설득, 주장성 등을 통한 통제의 시도라고 한다. 어떤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몇 번이나 이야기 하는가, 얼마 나 오랫동안 하는가, 누구에게 이야기 하는가와 질문, 이야기 방해, 침묵의 패턴도 포함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크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지 않을 때도 있다. 가족권력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에서는 주장성(assertiveness)과 통제(control)가 있다. 주장성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효과적인 시도 또는 영향력을 뜻한다. 가족집단에 의하여 누구의 의견이 수용되는가, 가족에서 누가 누구에게 협력하는가, 누구의 영향력이 어떠한 상황에서 중요하게 되는가 등이 판단기준이다. Carol Gilligan, In a Different Voice; Psychological Theory and Women's Development, xiv, 173. 2) 부부의 권력유형 부부의 권력구조가 극단적 부인지배형이나 남편지배형인 경우에 가정폭력이 빈번한 것으로 보고 되었다. 남편의 경제적 자원이나 위신이 부인에 비해 낮을수록 남편는 남성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좀 더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에 대한 불만족은 상대 배우자의 강력한 권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동형은 권위를 공유하고 의사결정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것이 특징이며 모든 주요 영역에서 강력한 결정권을 가진다. 자율형에서는 부부가 권위를 나누어 가진다. 즉 남편과 부인은 비교적 동등한 권위를 갖되 각기 다른 영역에서 권위를 가진다. R. Emerson Dobash-Russell Dobash, Violence Against Wives(New York; The Free Press, 1979), 93-96; Vernon R. Wiehe, Understanding Family Violence, 102. 각 배우자는 특정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책임을 진다. 영역의 분배는 역할 기대와 거의 일치한다. 결혼 만족도는 평등형(공동형과 자율형) 부부에게서 가장 높게 나타나며 남편지배형이 그 다음, 부인지배형에서는 가장 낮게 나타난다. 부인이 스스로 지배적이라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만족점수가 낮게 평가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부인은 무력하거나 무지한 남편을 보충하기 위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연구에서는 부인지배형에서 남편은 부인만큼 불만족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역할무능(role incapacity)이론이 뒷받침해 준다. 부부간의 권력은 한 배우자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정도를 살펴보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최소관심의 법칙”(the principle of least interest)에 근거하여, 가장 애착을 가지는 배우자는 관계에서 적은 권력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관심이 적은 사람이 상대방을 더욱 쉽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과의 관계 이외의 관계, 즉 “대안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서 권력을 가진다. 단지 대안적인 관계를 가진다고 해서 더 큰 권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대안적인 관계가 실질적 위협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어느 정도 관계에 몰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Kathleen Galvin & Bernard Brommel, Family Communication, 197-202. 현대의 많은 부부들이 권력의 평등을 강조하는 가족이념을 발달시키려고 시도한다. 또한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자녀가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장려하고자 한다. “각 개인은 인격적인 존재이다” 혹은 “우리는 모든 의견을 존중한다”는 그런 종류의 가족이념은 권력을 공유하게끔 유도한다. 가족이 모든 가족원들의 성취라는 이념을 지향할 때, 권력차원은 가족의 목표들을 반영할 것이다. 만약 어떤 가족이 성별에 관계없이 자기 충족을 위해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 가족에서의 권력과정과 결과는 남성이 여성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족과 다를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족체계는 그 가족이념이 어떻게 작용되는지를 보여주는 권력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3) 의사소통과 권력 인정, 무시, 거부 행동은 친밀감의 발달과 권력에 영향을 주는 전략이다. 인정은 승인 또는 동의를 의미하며 권력을 얻기 위해 상대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할 때 혹은 상대방에게 보상을 주고자 할 때 사용될 수 있다. 칭찬을 잘하는 아버지는 긍정적인 지지를 필요로 하는 자녀로부터 권력을 부여받는다. 부부관계에서도 이처럼 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으로서 긍정적인 인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 피드백은 일관성을 뜻하며 변화를 극소화시키면서 일정기준을 유지하는 반면, 긍정적 또는 변화를 가져오는 피드백은 부부체계를 다른 수준으로 재조정한다. 부정적 피드백의 예로, 남편이 처음으로 아내를 때렸을 때, “다시 한 번 날 때리면 떠나버리고 말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면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긍정적 피드백의 예로, 처음으로 남편이 신체적 학대를 했을 때 부인이 이를 막을 수 없다면 때리는 것이 오랜 동안 갈등 패턴의 일부가 될 것이다. 송성자, 『가족과 가족치료』(서울; 법문사, 1995) 221-23. 또한 가족원들은 무시라는 처벌전략을 통하여 상대방을 열세한 권력의 위치로 몰아낼 수 있다. 부인지배형이나 부인이 지배적인 성격을 가진 부부의 상호작용은 토론이 길었고 남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요약하면 한 배우자가 지배적일수록 그 상대방 역시 지배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배적인 말투가 투쟁적인 의사소통을 발달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편이 지배적일 때 부인의 상호작용 방식은 질의응답식이다. 남편의 성격이 지배적일 수록 부부는 상대방의 결혼 만족도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한다. 부인이 지배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Kathleen Galvin & Bernard Brommel, Family Communication, 211-13. 응집을 이루기 위해서 각 가족은 특정인에게 과도한 권력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친밀성을 허용하는 의사소통 패턴을 성취해야 한다. 자기와 상대방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행동은 어떤 다른 지배구조 유형에서보다 평등한 상호작용 구조에서 효과적으로 의사소통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족유형은 가족원 각자가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과 포부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에서는 좀더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발달된다. 권력은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막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녀의 문제를 떠맡을 때 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권력을 갖는 것이다. 타인의 의사 결정을 해 주는 남편, 부인, 연인 등은 상대방의 권력을 잠정적으로 감소시킨다. 평등한 가족관계에서는 가족원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각자가 권력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4. 힘(power)의 남용/사회적 통념/목회상담 1) 갈등의 해결양식: 폭력 갈등은 인간관계나 결혼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정상적인 부분이다.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두 사람 사이에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으며, 그것은 때때로 어렵거나 중요한 문제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갈등 해결의 목적은 갈등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는데 있다. 갈등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문제를 해결하는 당신의 태도를 반영한다. 다음의 항목들 중에서 당신은 어떤 태도인가? 즉, 심각한 부부갈등은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심각한 부부갈등이나 폭력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된다; 어릴 때 학대받고 자란 아이는 커서 모두 학대자가 된다. 부부갈등은 한정된 사람에게만 나타난다. 당신이 행복하고 안하기는 상대에게 달려 있다. 부부 사이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문제의 소지를 가지고 있는 상대가 먼저 변해야 된다 등. 정민자, 『가정폭력 가해자를 위한 가족상담프로그램』(서울; 도서출판 양지, 2002), 164. 폭력은 갈등을 해결하는 의사소통의 한 방법이다. 타협이나 협상의 의사소통으로 풀 수 있는 갈등을 행위자가 자기의 힘을 남용하여(abuse) 상황을 통제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방법으로 상대를 조정(control)하는 것을 말한다. 통제(control)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다. 눈 및, 제스쳐, 행동을 통해서 상대를 협박하는 것,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는 것, 상대를 무시하는 말, 상대가 좋아하지 않은 별명 사용이나 농담을 하는 것, 외부접촉이나 친구관계 등을 제한하는 것, 아내에게 자신의 소득액을 알리지 않는 것, 생활비를 아부를 해야 주는 것, 중요한 결정을 늘 자신 혼자 하는 것 등. 이처럼 폭력은 어떤 관계 안에서 한 사람이 다른 상대방을 지배하고 그에게 힘을 행사하기 위해 심리적 또는 신체적 학대를 가하고, 위협하고, 협박하고, 고립시키거나 경제적으로 억압하는 양식을 말한다. 하다못해 상대를 무시하는 ‘농담’도 그러한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에 하는 힘 행사의 한 방법이다. Vernon R. Viehe, Understanding Family Violence: Treating and Preventing Partner, Child, Sibling, and Elder Abuse(London, New Delhi; GAGE Publications), 75. 통계에서는, 부부의 권력관계(power relationship)와 갈등, 남편의 아내폭력률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이와 가계소득은 거의 상관관계가 없고, 교육의 수준은 경미함과 심함의 차이로 나타났다. 갈등 수준이 중간 단계를 넘어서 높은 단계에 이르면, 남성우위형과 권력분리형으로 차이가 두드러진다. 갈등이 낮았을 때와 높았을 때의 차이가 평등형의 경우, 20%밖에 되지 않아 갈등수준이 높아져도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권력분리형 역시 남성우위형과 마찬가지로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데 여성우위형이나 평등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나타냈는데, 이 부부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기본으로 해서 성립될 가능성이 높으며, 우리나라 부부의 권력분리형은 의사결정권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규범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재엽, “한국 가정의 폭력 실태와 원인”, 서울 여성의 전화, 『여성상담전문교육자료집』 (31기), 49-50. 흥미로운 점은, ‘태도가 ‘행동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아내구타에 대해 허용적 태도(경우에 따라서는 아내의 뺨을 때릴 수 있다)는 남성이 더 높게 나왔는데(아내도 이런 허용적 태도를 갖는 사람이 적지 않다), 평소에 아내를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세 배 더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한 폭력의 경우에 있어서도, 허용적인 태도를 가진 남성이 무려 4배 이상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강도가 높게 나타났다. 김재엽, “가정폭력의 태도와 행동 간의 상관관계 연구”,『 한국가족복지학』, 통권 제 2호, 1998. 폭력에 대한 허용적 태도는 의사소통에도 잘 나타난다. 남편이 폭력을 행사했는데, 남편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성 관계를 더 성의 있게 해주거나, 잘못했다고 빌면서 밥상을 더 풍성하게 차려주는 것은, 남편의 폭력을 정당화시켜주는 행위이고 그것을 더 강화시켜도 좋다는 암묵적인 긍정으로 결과 지어질 때가 많다. 부부체계에 환류(feedback)가 부부 행동의 패턴을 만든다고 하였다. Pamela Cooper-White, The Cry of Tamar: Violence Against Women and the Church's Response(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102-103. 힘을 행사하는 의사소통에 대해 피해자가 부정적 피드백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못할 때 가해자의 권력남용 의사소통 방식은 계속되고 또한 강화된다. 가정폭력과 사회폭력의 상관성은 피해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바로잡는 데 매우 중요한 점이다. 전문가에 의하면, 사회적 폭력이 증가할 경우 가정폭력이 늘어나는 경향이고, 가정폭력이 증가할수록 사회적 폭력이 늘어난다고 하였다. 가정폭력 간에는 서로 연관성이 있어 남편과 부인사이의 폭력이 있는 경우 자녀에게도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가정폭력의 반복 및 전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의미이다. 즉 가정폭력을 경험함으로써 폭력사용법과 폭력이 어떠한 상황에서 정당화되는지를 학습하면서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폭력을 생활에서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즉 성적 불평등, 사적 공간으로서의 고립화, 사회적 통제의 결여, 폭력을 관용하는 사회적 규범 등이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Gayla Margolin, "Effects of Domestic Violence on Children," Penelope Trikett & Cynthia Schellenbach ed., Violence Against Children in the Family and the Community(Washington, DC;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1998), 77-90. 또한 폭력은 이것에 대해 잘못으로 규정하지 않는 사회문화적 태도, 제도, 법에 의해 계속적으로 유지된다. 이 말은 폭력에 대한 우리의 법과 사회의 메시지는 일조하는 바가 크다는 뜻이다. 일반 범죄와 비교하여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디어, 교육, 종교기관, 제도, 법, 문화 등을 통해 사회화되고, 그 과정에서 폭력을 부추기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성 역할의 규범을 학습한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 권력구조(경찰, 법, 관례)가 일반적으로 힘이 있는 남성을 선호하고 힘이 없는 여성을 소홀히 하는 것이 사실이다(예. 성폭력). 성폭력에 대한 ‘통념’을 봐도 어떻게 그것이 여성(어린이)의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즉, 성폭력은 젊은 여성들에게 일어난다(통계를 보면 30%가 만 13세 미만의 어린이다). 여자들의 야한 옷차림과 행동이 강간을 유발한다(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사회 풍토의 문제이다. 남성이 짧은 옷을 입는 경우에는 성적 대상 혹은 성폭력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여자들은 강간당하기를 바란다(아무리 사소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해도 분노와 수치심이 오래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순결관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 후유증-자살, 사회부적응, 정신병 등-에 시달린다). 성폭력은 억제할 수 없는 남성의 성충동에 의해 일어난다(남성의 공격적인 성행동을 남성다운 행동이라고 묵인하거나 심지어 조장하는 사회적 풍토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강간은 낯선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2002년 한국성폭력상담소 통계를 보면,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 76.6%이다). 강간범은 정신이상자이다(대부분 사회생활을 멀쩡히 잘하는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자신이 겪는 소외감, 열등의식, 박탈감, 분노 등을 표출할 대상으로 성적 공격에 대항을 못한다고 보는 여성과 어린이를 택한다). 여자가 끝까지 저항하면 강간은 불가능하다(여성은 극도의 공포와 수치심을 느껴 저항하기보다는 무력해지기 쉽다. 많은 경우 말로 위협하는 정도가 아니라 때리거나 흉기로 위협하기도 한다). 강간은 폭력이 아니라 조금 난폭한 성관계이다(성관계란 남녀간에 애정이나 친밀감을 나타내는 의사소통과 상호교감의 한 방법이다. 강간은 강제에 의해 다른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범죄이다. 강간은 성관계가 아니라 성폭력이다). 여성들이 조심하는 것 말고는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것으로 이는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고 구속하는 소극적 임시방편이다. 진정한 해결은 성폭력을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야 하고 적극적인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등. 한국성폭력상담소,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자료집』(성폭력상담소, 2003), 54. 폭력에 대한 개인적 대처에도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폭력행위가 부정적 결과 (예를 들어, 배우자의 가출, 법원의 접근 금지 명령, 감옥 혹은 별거)없이 긍정적 보상만 준다면 폭력의 재 시도는 쉽게 이루어 질 것이다. 2) 사회적 통념 힘의 남용에 대한 사회와 개인의 대처방식이 만들어 낸 결과가 바로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다. 김광일 편저, 『가정폭력; 그 실상과 대책』(서울; 탐구당, 1987), 37-44. 이 사회적 통념은 엄청난 위력으로 피해자의 무력한(powerless) 심리를 조장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떤 시도도 좌절시킨다. 피해 여성들의 ‘우울증’은 이 거대한 통념 앞에 너무나 무력해서 생긴 병이다. 우울증의 근저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가 지배적이다. 즉, 가해자를 떠나기가 두렵다; 취업능력이 없다; 자녀들에겐 그래도 아버지가 필요하다; 여성들은 어디 가서 쉽게 도움을 얻을 수 없다; 혼자되고 외로운 것이 두렵다; 내 행동이 달라지면 남편/애인이 변할 것이다; 폭력적인 남성을 떠나는 것이 종교적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막연하게 자신(피해자)에게 잘못된 것 같다; 타인(교회사람, 친정 식구, 친구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을까 두렵다 등. Dana C. Jack, "Silencing the Self: The Power of Social Imperatives in Female Depression," R. Formanek & A. Gurian, Women and Depression(New York; Springer Publishing, 1987). 또한 사회적 통념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회적 태도를 만들어 낸다. a) 가정폭력은 부부싸움이 아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이기 때문에 남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가정폭력은 일방적인 폭행으로 치명적인 신체적 손상과 정신적인 황폐화를 야기한다. b)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는다? 가해자들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거나 이유 없이 폭력을 일삼는다. 설혹 상대방에게 결점이 있다 해도 그것이 매 맞을 이유가 될 수 없다. c) 내 마누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가부장제의 산물이다. ‘북어와 마누라는 사흘에 한번씩 패야 한다,
관상 기도의 이해와 실천
관상 기도의 이해와 실천 http://mission.bz/7113치유목회 권명수 교수 신자의 신실한 신앙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기도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기도를 외형적으로 보면 소리내어 하는 구송기도, 마음속으로 드리는 묵도가 있다. 내용을 중심으로 보면 중보기도, 통성기도, 탄원기도, 참회기도, 방언기도, 예언기도, 관상기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도를 기독교 전통에는 관상기도라고 여겨 왔다. 관상(觀想)기도 (contemplative prayer)는 구교와 동방교회, 개신교의 일부에서 실천되고 있다. 이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주도적으로 시작은 하지만, 주님과 하나되어 그 분 안에 머무르게 되면, 인간의 주도적 의지는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신자의 영혼 속에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신다. 필자는 이런 기도로 유지되어 가는 영성에 관심을 갖고 이해를 넓혀 가던 중, 오늘 다루고져 하는 토마스 키딩의 글을 접하면서 관상기도를 직접적으로 실천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키딩의 글을 통해 접하고 실천한 관상 기도는 필자에게 낯설지 않았다. 외면적으로 동양에서 오랫동안 행해온 좌선이나 명상과 비슷해서인가 보다. 키딩의 쉽고도 친절한 안내로 어렵지 않게 관상기도의 맛을 보게 되어 필자의 영성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회보에 키딩의 관상기도의 이해를 소개하여, 독자들의 영성 생활의 성숙과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을 갖고 이 글을 쓴다. 더불어 독자의 직접적인 실천과 수련의 결과에 대한 경험담을 기다리면서.... 기독교 영성사를 보면, 관상기도에 대한 이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리 하였음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동방교회에서는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예수의 기를 쉬임없이 기도함으로 종국에는 하느님과 연합하고져 하였다. 이를 통해, 자신이 신성화(deification)되어 가는 것을 관상기도의 최고 수준과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주도적으로 기도의 수련을 통해 성화에 이르며 또 자신의 영이 하느님과 일치코져 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신자의 삶이 점점 주님의 모습으로 닮고져 하였다. 이에 비해 서방교회의 전통에서는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서방교회의 관상기도 이해가 지역의 넓음과 오랜 시기로 인해 한마디로 요약 정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중세 시대의 초반에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인, 대 그레고리 (Gregory the Great, 540-604)의 관상기도 이해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관상기도란 하나님의 환상 (vision)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류의 기도를 觀想기도, 즉 상을 보는 기도라고 번역하여 사용해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키딩의 관상기도 이해는 동방교회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의 관상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 주께서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열린 자세로서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에 내주하시어 그 분이 하시고져 하시는 일을 하도록 한다. 이 영역에로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관할의 영역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내맡기는 대단한 모험을 의미하기에,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기본적으로 요청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수한 믿음이 없이는 나 자신을 열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열어 놓지 못하기 때문이 다. 이렇게 순수한 믿음 가운데 자신을 열어 하나님께 나아가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린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기도에 동의하는 상태를 전통적으로 관상 (contemplation)이라고 불렀다 (로마서 8:27-28). 키딩은 관상기도와 관상 생활과 구분한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주는 일련의 경험이라면, 후자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의미하며, 이 속에서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 움직인다. 이 말은 관상기도를 통해서 여러 기도 경험들을 한다고 해도, 그 열매는 관상생활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관상기도는 자신 만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기도의 열매는 일상의 삶 속인 관상생활에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키딩은 일상생활에서 ... 큰 평화와 겸손과 사랑의 존재 여부가 이 기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말한다 (167쪽).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관상 기도의 경험이 세속 속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남으로, 삶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삶이 되는 생활을 지향한다. 행동과 기도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통전적으로 조화함으로 통합된다. 그런데, 관상 기도 이해에 몇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첫째, 이 기도는 내적 침묵으로부터 시작된다. 관상 기도는 어떤 바램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생각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벗어나서 텅 빈채로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식을 거부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 그 너머에 있는 상태로 나아가고져 한다. 키딩은 의식 너머의 상태에 이르고 거기에 머무는 데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부잣집에 입양된 아이를 적응시키려고 가르치는 능숙한 가정부 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새 집에 입양된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능숙한 가정부는 서두르지 않고 사랑으로 친절하게 아이를 가르치기도 하고 격려도 하면서 새 삶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키딩은 관상기도의 수련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교육이라고 부른다. 둘째, 관상기도란 어떤 기도의 기술이나 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이다. 관상기도에 이르는 절차나 기술들이 도움이 되는 면이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기도자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신뢰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도 생활에 힘쓰는 자세가 무엇보다 요구된다. 기도의 체험과 결과에 대한 관심보다는 믿음과 신뢰 가운데에 있음이 우선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관상기도는 세속의 신자들에게 절실히 요청된다. 전통적으로 관상기도는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수도사들의 전유물로 여기어 왔다. 그러나 키딩은 세속 속의 신앙공동체가 진정한 관상기도의 실천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도원의 핵심은 따로 떨어진 수도원의 외부적 구조에 있지 않고, 그 내면적 상태인 관상기도에 있기 때문이다 (47-8쪽). 그래서 진정한 수도 생활의 실천에 있어 중요한 관상기도는 수도원이나 세속 속의 신자들 누구에게도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세속 속의 평신도와 신앙 공동체들에게는 관상기도가 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속 속의 유혹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 필요때문에 키딩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관상기도의 세계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실천적 안내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어렵다고 여겨졌던 관상기도에 이르는 장애를 줄이려고 향심기도 (Centering Prayer)란 이름으로 발전시켰다. 키딩은 향심기도를 관상기도에 이르는 사다리의 맨 밑에 있는 제일 첫 번째 다리일 뿐 만아니라, 관상의 세계로 쉽게 인도하는 매우 좋은 길이며 유일한 길이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향심기도는 수도 영성의 정수의 하나라고 까지 말한다. 필자가 향심 기도를 몸소 실천하고 느낀 바에 의하면, 향심 기도는 기도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도라고 하는 사실이다. 향심기도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서는 직접 키딩의 책자를 참고해야 할 것이나,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기도자는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마련한 후, 편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마음 속에 떠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조용히 바라보며 저절로 사라지길 기다린다. 그러나 계속해서 생각이 떠오르거나 졸음이 올 경우에 성스런 이름이나 거룩한 단어를 마음 속으로 한 두 번 불러, 마음 속의 생각들에서 마음이 침묵가운데 계속 있기를 지향한다. 이런 과정을 정해진 시간 동안 계속 반복한다. 향심기도가 관상기도의 효과가 있기 위해서는 키딩의 경험에 의하면 20 - 25분 정도를 하루 두 번 하기를 권한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기도하는 중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에 신경이 쓰여 깊은 기도에 들어가기에 방해가 되곤했다. 그래서 자명종 시계나 예정된 시간이 지나면 음악이 나오도록 테이프를 틀어 놓고 기도에 들어가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음악이 끝나면 1-2분 정도 침묵을 지키다가 눈을 뜬다. 향심기도는 아주 성서적이고 초대 교회전통에 닿아 있다. 일세기 초대 교회는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즉 성서를 읽되 성서가 말하는 바를 듣고져 했다. 이것은 3단계가 있는데, 첫째 단계는 성서구절을 읽으면서 묵상하고 (meditatio), 둘째 단계는 읽고 묵상한 내용에 응답하고 (oratorio), 마침내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의 쉼 (contemplatio)으로 옮겨 갔다. 향심기도는 거룩한 독서의 마지막 단계의 하느님 안에서 쉼에 해당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성서를 사랑하고 애독하는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성서를 읽음과 함께 향심기도를 사용하면 많은 영성적 도움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키딩은 향심기도가 단순히 관상기도에로 인도하는 역할만 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후속 저서인 <사랑에의 초대>와 <하나님과의 친밀관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향심기도를 통하여 심령 속의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간증들과 그 근거들을 다루고 있다. 즉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잠재하여 의식치 못하는 상처의 기억들이 향심기도를 통해 의식 속으로 떠올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신자에게 심리적, 영적 성숙에 기여함을 발견하였다. 이 글을 읽는 신실한 신앙 생활을 염원하는 모든 신자들이 향심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통하는 관상생활의 경지에 이르러, 기도와 세상속의 활동이 서로 조화을 이루는 진솔한 영성생활을 영위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이 게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