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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독특성/서철원 교수(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
개혁신학의 독특성 서철원 교수(총신대 신대원, 조직신학) 우리의 신학은 개혁교회(ecclesia reformata)의 신학 곧 개혁신학이므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confessiones ecclesiae reformatae)을 규범(norma)과 근본(fundamentum)으로 삼는다. 그리고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의 신학을 기초로 삼는 다. 특히 칼빈의 기독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에 나타난 신학 전개와 그의 주석에 나타난 성경 이해를 준거해서 신학한다. 물론 고대 교회의 교리를 기본 진리로 받아서 시작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개혁교회는 종교개혁 교회이므로 루터교회와 함께 종교개혁의 기본원리들을 기본으로 취한다. 신학함에 있어서 루터교회는 중생(regeneratio) 혹은 이신칭의(iustificatio) 교리를 실질적인 원리(principium materiale)로 삼고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으로 삼는다. 따라서 개혁 신학도 이신칭의 교리를 기본으로 삼고 또 출발점으로 삼음에는 루터교회와 동일하다. 즉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칭의 교리로 신학함의 근본을 삼는다. 또 개혁신학은 루터교회와 함께 중생과 칭의를 강조하면서 개혁교회는 성화(sanctificatio)를 강조고 거기에로 나아간다. 칭의에서 출발하고 칭의에로 되돌아오는 루터교회 신학과 달리 성화 곧 믿음에 의한 거룩한 생활을 강조한다. 따라서 개혁신학에서는 윤리가 합당한 강조와 존경을 받는다. 종교개혁은 모든 믿음의 내용들을 다 성경에 근거시켰다. 따라서 개혁신학은 성경을 모든 신학함의 원리와 근거로 삼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므로 성경의 권위를 신적 권위로 받는다. 모든 신학함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하고 믿음의 내용도 다 성경에서 도출되고 성경대로 구성한다. 그리하여 성경을 신학의 형식적 원리로 받고 고수한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는 것을 바른 신학함의 원리로 삼는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모든 일을 자기의 경륜대로 이루셨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심도 자기의 작정대로 일하신다. 따라서 다른 신학에 별 자리를 갖지 못하는 예정 교리를 합당한 교리로 받는다. 예정교리는 실은 은혜의 주권성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개혁신학은 다른 신학 체계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언약 사상을 중요한 교리로 삼는다. 하나님은 구원 협약 때도 삼위간에 협약하셨다. 그리고 사람들과 일을 하실 때 언제나 언약 체결을 통해서 일하신다. 언약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따라서 언약교리를 개혁신학의 기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언약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고 첫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됨의 약정으로 이해해야 바른 성경적 진리에 부착하는 것이다. 개혁신학은 인간의 타락 상태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성경대로 부정적이다. 전적인 부패와 무능(corruptio tota et impotentia)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로 갈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불가능하다. 구원은 창조처럼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요 인간의 능력에 의한 시발이나 보충이 불가능하다. 전적 부패와 무능이므로 전적으로 은혜가 일한다. 구원 얻음의 시작점인 부르심도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일 뿐 아니라 중생시켜 믿음에 이르게 하신다. 전적이 부패와 무능을 강조하므로 다른 신학체계들 특히 로마교회로부터 개혁신학이 많은 비난을 받는다. 개혁신학은 은혜의 주권성을 강조하고 합당한 존경으로 신학한다. 성화의 강조에서 은혜의 주권성을 강조하므로 구원의 성취와 적용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되어 은혜에서의 탈락을 불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electio Dei)과 결합한다. 개혁신학은 구원 얻음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모든 구원 은혜가 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구원 얻음에만 핵심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근본진리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의 생명을 공급받아 거룩한 교회가 된다. 그러므로 다른 신학에 별로 고려가 없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을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강조한다. 개혁신학은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구분을 강조하고 그 한계를 분명히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어도 신성과 인성을 섞는 것이 아니고 두 존재간의 거리는 엄격하여 넘어설 수 없다.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근본원리이므로 피조물이 그 한계를 벗어나서 신되기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영화되는 것은 신화가 결코 아니고 그 때도 피조물로 남는다.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낙원의 처음 상태를 넘어가나 피조물의 한계선을 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님과 피조물의 거리와 한계를 강조하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사람에 의해 보충되는 일이 결코 없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구원에 하나님과 함께 동사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전적으로 은혜로만 일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목표는 하나님의 자기 영화(glorificatio Dei sui)이다. 인간의 구원(salus hominum)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을 사시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영광을 자기 목표로 하고 일하신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신학의 목표로 삼는다. 이 목표를 벗어나면 인간의 구원이 모든 신학의 목표가 되어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생을 사시는 것이 된다. 개혁신학은 성화를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영역에 율법이 자리를 가진다. 율법이 구원의 길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규범(norma vitae)으로 역사한다. 개혁신학은 율법에 생활 규범으로서 합당한 자리를 배정한다. 개혁신학은 모든 생활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권(regnum Christi)을 강조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노력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의 영역에서 주이시므로 그가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왕이 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것은 그의 법이 교회와 사회의 법이 됨으로 이루어진다. 이 일을 위해 모든 영역을 복음화하고 말씀의 권세 아래 두기 위해 노력한다.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상은 중립적 내지 적대적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알아 문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리하여 문화명령을 수행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 전파와 문화명령의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역사가 되어야 한다. 개혁신학은 선포된 말씀에 강조를 둔다. 실제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는 길도 선포된 말씀을 통하여서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말씀의 창조(creatura verbi)로 본다. 선포된 말씀이 믿음을 일으키고 믿음의 생활을 하게 하므로 선포된 말씀에 합당한 강조가 놓인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말씀에 의해 개혁된 교회(ecclesia reformata secundum verbum Dei)이므로 성경 전체의 이해를 위하여 다른 교회에서 이루어진 말씀의 바른 이해를 수납한다.
교권정치 그 역사의 반복/2008-12-16
교권정치 그 역사의 반복 (e-GOT / 2008.12.16) 이 땅에 오신 하나님 말씀을, 정치 와 종교, 경제, 문화.. (율법, 역사, 시가, 예언)등으로 나눠 분리하고(요 19:23-24) 세력간의 이해득실을 따진 다음 그 어느 한 쪽만의 메시야인지.. 그 어떤 면만을 집중 부각(浮刻)시킬지에 대해 제비뽑아(시 22:18, 마 27:35-36, 눅 23:34) 결정짓고 난후 왜곡과 은폐작업을 착실히 수행한 역사를 자세히 관찰해 본다면 교권론 자들을(민 31:16, 민 25:16-18) 알게 될 것이고, 그들이 몸담았던 체제의 수호를 위해 ‘이 예수는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다’로 이미 개념잡은 것과 이를 지지대삼아 건축한 장치와 사술(邪術)들 끝에서도 그 흔적을 심심치 않게 발견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인간 사고의 전진을 틀어막고 그 방향을 돌리기 위해 일종의 장벽을 설치한 셈이지요. 또 얼마나 공교(工巧)하고 효과도 좋았던지 누구나 처음 말을 시작할 때마다 일부러 머리 속에다가 그 틀을 재확립 시켜줍니다. 그래서인지 한꺼번에 다 깨고 보긴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그 대가리만 살짝 볼까 합니다. 사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17, 마 10:7-8)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하나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끄실(마 23:8-10) 이 땅의 적은(신앙공동체) 무리들에게(눅 12:32) `하나님 통치`가 임함을 말씀하시고(마 12:28, 눅 11:20, 눅 7:21-23, 눅 17:20-21), 이들이 하늘의 하나님 나라로 까지 행진하는 가운데(마 6:11-13, 고전 10:1-13) 띨 수 밖에 없는,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정치적 색채들을(눅 22:25-30) 세상권력 아래 붙어 기생하는 교권정치가들 로썬 무지한 백성들의 눈을 가릴 필요가 있기 때문에(눅 19:45-48, 막 11:15-18, 요 7:1, 요 8:37.40, 요 5:18) 그 장치들을 고안해 낸 겁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시 146:10, 시 96:10, 사 52:7, 계 19:6)라 함은, 저 하늘에서 처럼 이 땅에서도(마 6:10)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맛볼 수 있게 된 것이고(겔 34:11-16, 눅 7:21-23, 마 11:5-6, 사 29:18-20, 대하 28:15, 마 6:12), 모든 민족이.. 이 예수가 앞서서 인도하시는 신앙의 공동체 체제로 뛰어든다면(마 11:12, 눅 16:16), 더 이상 헤롯당(사두개인)과 알렉산드라 살로메에게서 정치적인 권력을 부여받은(BC 76-67년) 바리새인 같은 아첨꾼들의 자리(눅 22:47-62, 눅 20:45-21:6, 마 23:1-7), 곧 종교상의 맹신ㆍ맹종에 근거한 권위와 권력으로 국가를 지배하고 백성위에 군림(君臨)하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조(一助)라는 허울에 가린(요 7:47, 렘 5:12-13) 회당의 붕당(朋黨)과 성전수탈체제의 역군(役軍)이, 나사렛 예수가 주창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야만 할 하나님 나라`(마 23:11-12, 마 20:26-27, 마 18:4, 눅 14:11, 눅 18:14, 눅 22:27, 막 10:42-45, 요 13:14-17, 눅 17:7-10)에서는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이 땅에 펼쳐질 새 시대엔 없어져야할 퇴물로 전락하기가 그 누구보다도 더 싫기 때문에.. 한 점이라도 더 뺏어먹기 위해 싸우던 어제의 앙숙들이 이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가 친구되어(눅 23:12)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기치(旗幟)아래 이후부턴 본격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해체시킬 묘안을 맹렬히 모색했던 겁니다(요 11:49-50.53, 막 14:55, 마 26:3-4, 마 27:1). 역사 속에 등장한 교황권(敎皇權, the popedom, Kirchenstaatstum)과 교권주의(敎權主義, Staatskirchentum) 등도 이런 류에 속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 자리의 계승(繼承)과 보수(保守)..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눅 16:1-13). 결국, 그들의 대단한 노력과 수고의 덫에 걸린 신앙공동체(교회)의 화석화 건물화는 필연이라 볼 수 있고, 이젠 그 본격적인 해체만 남았다라고 한다면 한국예배당목사조합(한기총)을 너무 과대평가해 주는 것일까요? 어쨌거나 이런 제 말이 안 믿겨지신다면, 한기총의 설립취지와 배경을 먼저 살펴보심이 좋을 듯 싶습니다.
교회 정치학(1)/ 2004-03-05
교회 정치학(1) 제1장 교회 정치학이란 서언: 교회정치학이란 학문 근래에 이르러 칭치 사회에 대한 환경 때문인지 교회 정치에 대해서도 학적인 요청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신학 분야에 포함 또는 예속되다시피 하였고 경험 위주에서 그리고 통속적인 정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여서 보다 분명 한 개념 파악과 위치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에 놓여져 있는 것이 `교 회 정치`분야가 되었다. 1. [일반 정치학]의 의미 일반적으로 정치학이라 하면 `정치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Polis에서 유래되고 이를 영.미쪽에서는 Politics 또는 P olitical Science라 하며 독일쪽에서는 `국가학`이라고 한다.대체로 중세까지는 윤 리학 또는 철학 그리고신학의 일부로 되어 오다가 독자 노선을 걸은 지는 얼마 안 된다. 일반 정치학의 발전 과정을 요약해보면 그리스에서 발생한 정치학이 로마로 계 승되었으나 권력적,실리적인 로마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정치학의 발전보다, 정치 권력의 규범적 구조인 법학만이 진보를 보았을 뿐 정치학은 쇠한 편이었다. 그러나 문예부흥 운동과 종교 개혁의 시대에서는 다시금 소생하였고 미국,영국,프랑스의 민주주의 혁명시대,19세기 자유주의 시대, 그리고 20새기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있 어서는 정치학이 매우 발전을 보게 되었다. 1) 일반 정치학의 문제점 1) 정치학 연구는 많은 제약을 받는다. 2) 정치학은 정치 권력에 의한 압력을 받기 쉽다. 3) 정치학은 그 생활 현상이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2) 정치학과 타 학문 경제학과 정치학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정치학과 법율학의 관계는 보다 직 접적이다. 정치학과 역사학의 관계,정치학과 국가학의 관계, 정치학과 사회학의 관 계, 심리학과의 관계등 교회 정치학에 있어서도 일반 정치학의 유사 학문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2. 교회정치학의 본질과 의의 교회 정치학의 본질은 교회의 본질과 같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하 나님을 즐겁게 하는일`로서 칼빈은 Soli Deo Gloria하였다. 교회, 에클레시아는 정 치적 영역에서 나온 말이다. 교회도 법 아래 있으며 교인들 또한 법 아래 있는 것 이다. 그것은 국법이나 국가 정부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 음을 말한다. 1) 교회정치론과 국가정치론 1) 국가나 일반 정치론은 Polis로 시작되나 교회 정치론은 에덴동산으로 부터 시작된다. 2) 국가 정치에 있어서는 국가와 국민 그리고 국토가 주어가 되나 교회 정치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성서 또는 교회가 주어가 된다 칼 바르트는 교회의 목적은 `영원한 교회가 아니라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하 나님에 의한 Polis의 건설`이라 하였다. 빌립보서에서는 이를 `하늘의 시민` 마태 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 하였다. 3) 일반 정치에서는 현존의 정치 질서를 확립하는 물리적 혹은 심리적 정치력을 중시한다.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의해서이다. 이 나라는 아직도 구속받지 못한 자들을 위해서다.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피조물을 우선적으로 한다. 4) 교회 정치학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 는 하나의 도구다. 교회 정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선포한다. 교회는 세상과 무력전을 벌이는 곳이 아니다. 세상을 정직하고 바르게 하는데, 사랑으로 한다. 교회는 자기 희생을 싸움으로 막지 아니한다. 5) 교회 정치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을 위해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참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쓰고 애쓰며 고난도 받기 마련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심에 선포해야 한다. 6) 교회 정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 니라 주님의 뜻대로 해야한다. 교회 정치의 주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 인간은 도구여야 한다. 7) 교회 정치는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인간들이 교회 안에서 통속적으로 치리하 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교회 정치다. 교 회 정치와 교회 행정은 다르다. 한국 교회는 인간 관계만 잘되면 정치도 행정도 되 는 줄 안다. 2) 교회 정치학의 연구 대상은 교회다 기독교의 모든 신학의 근거는 성서에 둔다. 즉, 하니님의 계시인 성서가 모든 신학의 본거지이다. 사실 교회 정치학은 교회학이나 다름 없다. 교회에 대한 학문 은 곧 교회의 바른 조직과 운영을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목적 으로 한 사명의 공동체이다. 교회 만큼 신적 목적과 사명을 강조하는 데는 없다. 3) 교회정치학은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실제적으로 연구해 야 교회 정치학은 현상보다 미래다. 이는 교회의 역사성을 말한다. 즉 와야 할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와야 할 세계는 곧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서에 다 나타나 있 다. 미래를 볼수 있는 길은 성서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대로 미래를 현실화해 나가는 이론이 곧 신학적 연구요, 제시인 것이다. 4) 교회 정치학은 교회 행정학과 목회 경영학 그리고 교회 헌법학과 동시성을 띤다. 교회 정치학은 교회 행정학에 선행하는 학문이다. 교회 행정학은 교회 정치 원 리에 입각하여 보다 개 교회의 조직 운영 또는 성장에 관한 분야이다. 때로는 행정 이 정치 위에 있을 때도 있으나 원칙은 정치가 앞서야 한다. 교회 경영 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목회 경영이란 목사가 교인을 영 적으로 대하는 모든 분야를 말한다. 물론 다른 사람과 부서나 기구를 활용할 수도 있으나 기도에서부터 설교, 예배,상담,심방,전도 등의 목사의 원리를 논하는 분야 를 말한다. 그리고 교회 헌법에 관한 학도 활발해야 한다. 헌법은 체제적인 면에 관한 것과 교리적인 면에 관한 모든 것을 종합 정리한 표준이다. ----------------------------------------------------------------------------- 제2장 교회와 교회정치 원리에 대한 구약성서적 고찰 ----------------------------------------------------------------------------- 1. 교회와 교회정치의 시작 카할과 에클레시아는 Polis이상으로 정치적 양상을 띤다. 이 말은 `부르심`,`부 름받아 나온` 또는 `택함받은 `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같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에클레시아`는 어느 한 때의 것이 아니라 구속 역사의 통털어 한 양상이다. 그러나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무리의 역할을 하며 독특한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이런 공동체는 국가일 수도 있고 도시일 수도 있으며 부족사회나 씨족사회일 수도 있다. 여기에는 정치가 동반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 아브라함과 계약 하나님은 이미 그 때 그에게 복음을 말씀하셨고 그는 그 복음을 받아들였다. 복 음에 대한 이해가 곧 정치 원리가 된다. 만일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계약 관계가 없 었다면 우리는 계약관계와 무관한 사람들이 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 는 자들과 작음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교회는 복음과 약속 위에서 하 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가시적으로 자리를 잡고 설립이 되었다. 1) 계약의 본성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계약은 하나님 쪽이 휠씬 우월했다. 이렇게 성서가 말하 는 계약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은혜로 인간들에게 가까이 하사 맺 어 준 은혜와 축복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희망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계약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시 살아났고 이방 인들에게 까지 실현이 되었다. 2) 계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언약하셨다. 그의 후손은 혈연적인 관계 가 아니라 믿음의 관계를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과 몸 된 교회까지 를 말한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다. 2) 아브라함 때의 교회의 모습 1) 예배와 예전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맺은 계약 관계의 표증으로 할례를 주셨 다. 할례는 성약에 대한 인간들의 의무요, 책임이었다. 이런 할례는 신약시대에 와 서는 성례로 바뀌었다. 할례든 성례든 이는 율법에서 또는 은혜중에서 행할 의무인 것이다. 2) 하나님의 통치의 계시 아브라함은 그의 자녀들과 부르심을 받았으나 궁극적으로는 `이 땅의 모든 백 성`이라는 교회론을 가르쳐 주신다. 처음에는 부분적이고 특수 하였으나 결국에는 전체적이고 우주적인 교회의 원리가 지극히 초기부터 계시되었다는 사실이다. 2.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교회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들의 교제를 영위시켜 나갔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집` `이삭의 집`, `야곱의 집`,`하나님의 집`,`주의 집`으로 이름 붙였다. 그리고 `성막`,`회막`,`장막`,`성소`,`성전`,`주의 성소`등 으로 아주 제한된 장소의 독특한 처소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다 하나님과 관계된 모임과 전과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 집으로서의 교회 1) 사람들이 거하는 집 직계 가족만이 포함되지 아니하고 종이나 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가 족의 집 이상의 범위도 내포된 집의 뜻이 언급되어 있다. (2) 하나님의 집 `벧엘`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위엄을 야곱이 거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집`이 되 도록 나타내어 주셨다. 여기서 그의 영광을 볼수 있게 하여 주셨고 하나님이 인간 과 만나 은혜의 말씀을 주고 받게 하였다. 이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 하였다. A. 회막(the Tent of Meeting) 회막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와 존귀의 하나님이시며 약속의 하나님 이셨다. 또한 회막 문에서나 회막 안에서는 여러 가지 제사의 일이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말하여, 아브라함의 자손들 중에 하나님의 약 속을 믿는 자들은 회막에서 또는 회막을 향하여 하나님과의 맺은 약속을 열망하였 다. B. `이스라엘의 집`(The house of Israel)과 `하나님의 집` 교회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신 다. `이스라엘의 집`은 진리 안에 있을 때는 언제나 `주님의 집`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서 충성을 다 하였으나 그는 집 주인이 아니었고 장차 주인이 하실 일에 대한 증거에 지나지 않았으며 주인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그 것이요 그것이 `그의 집`이라 는 언급을 하였다. 히브리서 10장 21절에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 이 계시는데 이는 그리스도시요, 그가 하나님의 집에 주인이심을 말하였다. C. 오이코스와 오이키아 오이코스는 물질적인 집, 즉 실제의 빌딩을 말한다. 오이코스의 일반적인 사용은 대략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사용되었다. 가 가족과 가정 나 홀과 아파트멘트 또는 큰 건물 2) 모임으로써의 교회(Congregation, Assembly) 1) 예다와 카할 카할은 어떤 사람들의 전체적인 조직 결속된 하나의 사회, 공화국, 연방 또는 국가적 의미를말하는 반면, 예다는 단순한 모임,사람들의 회중,크던 작던 상관없는 약속된 또는 고정된 회합,사람들 중에서 작은 모임,미팅 클럽 활동 등의 뜻을 말한 다. 다시 말하면 카할은 연합된 전체적인 모임을 말하나 예다는 그 안에서의 작은 온갖 모임을 말한다. 1) 수나고게와 에크레시아 히브리어의 `예다`는 헬라어의 수나고게로 히브리어의 `카할`은 헬라어의 에크 레시아로 번역되었다. `카할`,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말이고 `예다`,수나고게 는 약속된 정해진 회합 또는 여왕벌을 중심한 벌들의 집단적 모임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런 두 말은 다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나 에클레시아 는 `이스라엘의 집`에서 머물고 말 모임에서 떠나, 보다 구원의 깊은 뜻과 특별한 길 과 목적을 위하여 민족은 물론 온 인류가 사명에 입각한 모임을 다시 모여 `하나님 의 교회`로서의 모임을 다시 선포하시는 것이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회 정치의 원리와 기초 1) 장로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로의 직분이 나타난 것은 족장 시대 부터이다. 아브라함 이 늙어서 그의 재산 관리를 늙은 종에게 맡기는 데서부터 장로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장로`은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하나의 의회 제도가 되었다. 결국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 이스라엘의 노 회를 형성하였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백성들의 대표들이었다. 장로직은 백성들을 대신해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였다. 그들은 모두 70인이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 을 따라 출애굽을 도왔다. 장로들은 회중의 두목들 역할도 하였다. 자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의 정치에 관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젊은 사람들 에게서보다 지혜와 경험이 많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지도하는 데 적합하기 때 문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모여서 모임을 가졌고 의논해서 모은 일을 처리하기 시작 하였다. 2) 행정직과 사법의 직 출애굽의 출발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였다. 그러나 출애굽중에 행정적으 로, 사법적으로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출18장 13절-27,신1장13이하등 70인회의 에는 백성들의 장로들과 행정직과 사법 또는 재판하는 자들도 포함된 기 록도 없지 않다. 여기에 교회의 특성이 있고 교회 정치의 특성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직접 그의 교회를 다스리셨다. 그렇지 않을 때는 대행 하는 사람을 사용 하였다. 그리고는 그를 돕는 사람들을 세워 주셨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 시고자 하였다. 그런데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과 그의 종으로 부름받은 자였다. 그 러나 그의 종을 돕는 자들에게는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3) 수나고게의 정치 원리 남북 왕국의 멸망과 포로와 회복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정치와 종교 그리 고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처럼 정치적으로 종교적 으로 생활할 수 없었으나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모임의 윤리와 질서를 갖게 되었 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갖기 시작했던 모이을 돌아온 후에도 그 모임을 병행하였 다. 그것이 곧 회당 인것이다. 1) 쉬나고게의 시작 포로로 잡혀가고 흩어지게 된 유대인들의 바벨론에서 성전 중심의 종교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이 일종의 변칙적인 종교 홀동을 갖기 시작한 것에서 발단이 되었다. 만남의집 또는 기도의 집이었다. 강가에서 ,나무 밑에서, 빌딩 곁에서 또 는 들판에서 기도하는 장소로 사용하기 시작할 때 불려진 이름이었다. 오늘의 개척 교회나 다름없다. 2) 회당의 예배 회당의 예배는 성서를 읽고 해석하였으며, 기도하였고 찬송하였다. 회당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 중심지였다. 회당 예배는 장로 들이 주관하였다.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들의 수직적인 관계였으나 회당은 수평적인 인간 관계였다. 오늘 교회의 입장 에서 볼때는 회당이 휠씬 더 친근감을 주나, 성전 예배가 전부였던 당시 사회에서 회당 예배는 일종의 변칙 또는 약식 행사에 불과하였다. 성전 예배는 전 민족적인 행사였으나 회당예배는 분산된 마을 단위의 모임이었다. 3) 회당의 조직 회당은 마을마다 있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하나님과 맺은약속 안에서 온 백성들이 교제하는 경험적인 실재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회당의 모임을 선택해 서 참여하는 자유가 없었다. 의무적이었다. 그러나 회당에서 추방당하는 일은 없었 다. 회당에는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전원이 다 회당 정치에 참가하 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을 뽑아서 그들에게 회당 정치를 위임하였다. 4) 회당과 회당의 관계 5) 예루살렘 산헤드린 예루살렘 산헤드린은 대제사장 아래 제사장 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로 구 성되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들과 24제사장들, 율법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또는 직업적인 서기관들, 회당이나 노회에서 파송된 장로들로서 예루살렘 산헤드린은 모 두 71인의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4) 회당 체제가 교회 정치 원리에 미친 영향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에게 맡겨져 있던 예배가 그들 스스로 또는 그들이 뽑은 자들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성전에서는성서를 봉독하지도 주해하지도 않았다. 회당에서 비로소 성서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다. 회당에는 제단이 없었다. 분향도 없었다. 어떤 물질적인 제사도 없었다. 더 거룩한 곳도, 거룩한 사람도 없 었다. 성막이나 성전 예배의 중심이 회당으로 옮겨졌다. 물질적인 `하나님의 집`에 서 영적인 `이스라엘의 집`으로 그러나 회당은 세상에 속한 성소가 되었다. 1) 지역적인 데에서 우주적으로 회당 예배는 어디서나 가능한 것이다. 가난한 자라도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한 곳이었으나 회당은 방방곡곡이었다. 2) 개인의 의무와 권리 강조 성전에서는 개인이 중시되지 않았고 거기서는 인간의 발언이 통하지 않았다. 이 에 비하여 회당에서는 개인의 인격과 개인의 임무와 의무가 존중되었다. 4) 회당의 장로회 체재는 민주주의 정치 체제 이런 제도를 교회 정치 원리로 도입한 교회가 바로 장로 교회 이다. 장로교회는 교회에 장로회 체제를 도입하여 성전과 회당의 합작 같은 양면의 병행을 말한다. 회당 정치는 곧 대의 정치 였고 그것은 곧 민주주의 정치 체제나 다름없는 것이다. 5) 신정과 민정 이스라엘은 신정 국가였으면서도 민정 국가였다. 하나님과 약속된 백성들이 하나 님을 직접 성전에서 만났고 간접으로는 회당에서 만났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사 람들은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자유인들이었다. 그러나 절대로 민 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민은 주의 종으로서였다. ----------------------------------------------------------------------------- 제3장 그리스도와 바실레이아 ----------------------------------------------------------------------------- 1. 바실레이아 1)바실레이아의 구약적 배경 하나님은 구약에서 왕권을 가진 분으로서 모든 세상과 모든 민족들 위에 우주적 인 통치를 하시는 분으로 하늘과 땅을 지으신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 성들과 [계약]하시고 다스리시는 신국의 왕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권 이 강조되기는 후기 이스라엘의 왕권이 쇠약해질 때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라는 미래의 기대였다. 다니엘서나 묵시 문학에 보면 또 다른 표현이 나온다. 그것은 곧 `인자`사상이 다. 인자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와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다시는 망하지 않는 나라를 말하였다. 2) 세례 요한의 증거 요한은 이 `하나님의 나라`앞에서 요청되는 것은 개심 또는 개종 그리고 회개라 하였다. 참 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 라함에게 하신 약속 하신것을 받을 수 없으며 심판대에 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 다. 3)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두가지 의미를 나타내는데 그 첫째는 하나님 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일이며, 둘째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 이다. 하나님의 행동으로 그리고 완전히 그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하나님으로 말미 암은 구속 사업과 심판을 말하였다.이는 하늘이 갈라지고 권능으로 임하여 영광중 에 임하는 초월적인 나라를 말하였다. (1) 다이나믹한 도래 `바실레이아`는 인격적인 도래를 내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친히 왕으로서 오심 울 의미한다. 그러나 공간적 `하나님의 나라`도 무시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나 주님이 강력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2) 메시아적 도래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를 통하여 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가 왕 임을 선포하는 나라요,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참된 회복을 말하였다. 이는 지 극히 높은 데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주님의 부활 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메시아성이 보다 인자와 우주성에 더 큰 공감을 거졌다. (3) 현재적 주님의 선포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 말씀 당시에 이미 충만하였고 실존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증거한 `하나님의 나라`는 곧 예수 그 리스도와 동일시 된다.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는 요한까지나 그 후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모두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쓴다.` 그러나 주님의 바실레이아는 미 래성을 언제나 동시에 말씀하셨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데서부터 크게까지 말씀하 셨다. (4) 미래적이며 종말론적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것으로만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지금부터 마지막 날까지의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다. 2. 바실레이아 와 에클레시아 교회는 주님의 가르치심과 설교에 제2의 부산물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주님에 의 하여 선포된 `메시아` 또는 `인자의 오심에 대한 비일치점을 위해 세원진 것으로 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또는 선포하는 예수의 몸이다. 예수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결과가 `교회`로 낙착이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교회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계시되는 것이다. 교회는 이사야서의 경건한 `남은 자`의 것이며 신약에서 그들의 모임이 교회로 표현되었다. 1) 에클레시아는 바실레이아 선포 중에서 주님이 `하니님의 나라`를 선포 하시던 중에서 `에클레시아`의 아이디어가 나왔 다고 본다. 복음을 듣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바실레 이아`는 `에클레시아`보다 휠씬 방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주님이 말씀하신 에클레시아 주님은 자기 자신이 에클레시아를 세우시기로 하셨다. 즉, 참된 `에클레시아`를 보여 주시기로 하셨다. 그것은 그가 죽으심으로 세워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 나 잘 알고 있었다. 주님은 이것을 내교회라 말씀하셨다. 주님은 최종적으로, 전적 으로 그들의 교회를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 멸 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앞에서 보여 주어야 할 새로운 공동체, 옛부터 하나님 으로부터 명령되고 수많은 선지자들이 선포하고 외친 `하나님의 교회`의 재출발, 아니 드디어 본격적인 교회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1) 인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인자`는 다니엘 을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매우 익숙 한 말이었다. 다니엘서 7장 13절에 나타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3)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4) 그대는 베드로라 5) 내가 이 반석 위에 주님은 그런 굳건한 신앙을 고백한 그 반석과 같은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것이었다. 페트로스는 남성 명사며 페트라는 여성 명사다. 베드로는 남자이지 여성 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라는 남성 위에가 반석이 라는 신앙을 말한다. 3) 에클레시아의 기초와 권위 마태복음 16장과 18장에 나오는 `에클레시아`의 본문 말씀은 바로 교회의 기초와 권위를 말해 주고 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고백하는 신앙이 교회의 기초라는 말이 다. 반석은 12사도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는 모두인 것이다. 3. 교회와 사도 1) 부르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르시는 역군들은 이스라엘의 왕이나 선지자들 못지 않게 주님께서도 에클레시아를 위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따로 12인을 부르셨다. 12삳 이후에는 `영적 부르심`이 사울과 바나바에게 있고 아론과 같이 제사장으로 서의 부르심이 있었다. `부르심`과 `택하심`은 구별되었다. `부르심`은 초대를 받 은 뜻으로 `택하심`은 `부르심`을 받아 구체적으로 응답한 무리들을 말하였다. 그 러나 서신에서는 `부르심`과 `택하심`이 같은 것으로 언급되었다. 2) 세우심 사도로 세우신 이유는 본문처럼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즉, 교 육받게 하시고 훈련 받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사도는 메신저와 달랐다. 어쨌든 전 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워서 알고, 깨닫고 ,믿고, 확신하여야만 하는 교육 과 훈련의 필연성이 있었다. 그리고 난 후에 `보내심`을 받는 것이 사도라는 뜻이 다. 3) 보내심 `부르시고``세우주신` 주님은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어 보내셨다. `보낸다`는 말 은 어떤 한 장소로 가게 한다는 말도 된다. 그리고 누구에게 명을 전하도록 보낸다 는 말도 된다. 주님 부활 후에는 12사도에게 제자라는 말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사도들은 예수님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회`보다 `하 나님의 나라`를 위한 `새 이스라엘의 교회`로 12명을 준비시켰다. 4. 주님의 교회와 교회 정치 원리 1) 새 이스라엘 사상 주님이 가르치시고 행하시고 말씀하신 골자를 보면 그것은 곧 바실레이아 에클레 사아 의 원리이다. 그는 처음부터 개혁이었다. 그는 개혁보다도 더 무섭고 심한 대 이변이었다. 주님은 현실을 너무 많이 부정하였다. 주님은 처음부터 마지막 사상에 있었다. 심판하고 들어왔다. 마지막 선지자였다. 이스라엘을 거부하고 새 이스라엘 의 창설을 `바실레이아`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범위를 좁혀 바실레이아를 위한 `에 클레시아`를 세워 주셨다. 2) 새 이스라엘에 요청되는 새로운 공동체 의식 예수는 12사도들을 한데 모으시고, 묶으시고 행동켸 하셨다. 그들을 `남은 자`들 로 새 이스라엘의 핵심으로 작은 무리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였으며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다.그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윤리가 주어졌다. 모세 가 시내산에서 법을 준 것같이 주님도 산에서 새로운 윤리를 제공해 주셨다. 마가 복음 3장 13-14절에는 12사도를 중심한 가르침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조건은 사탄의 무너짐의라는사실이다. 이러한 일은 성령으로 만 가능한데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이 축복으로 주어질 것으로 믿 었다. 요한복음에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기로 거듭 약속하셨다. 교회는 성령에 의하 여 유지되고 운영된다. 성령 없는 신학과 실재는 적 그리스도가 되기도 한다. 1)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막3:19;마12:31) 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 령이나라(막13:11;눅12:12;마10:20) 3) `다웝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막12:36)`라며 시편 110:1말씀을 인용 하였다. 4)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5) `주의 성령이 내개 임하셨으니`(눅4:18) 6)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 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3) 교회의 단일성과 통일성 1) 에스겔서에 나오는 `한 목자에 의한 하 나양무리`의 실현이 주님은 그들이 한 `fold`가 되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고 여러 `fold`에 의한 `flock`을 말씀하셨 다. 쥬님은 유대인들의 옛 `떼거리`로 부터 잃어버려진 자들을 찾아서 그들과 함께 이 떼거리 저 떼거리까지 합쳐진 `큰 무리`를 말씀하셨다. 2) 포도 나무와 가지의 관계 교회의 단일성과 통일성과 연합성은 포도 나무이신 주님에게 여러 개의 가지가 달려 있듯 이를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 안에 그의 제자들 그의 제자들 안에 그리 스도도 있을 수 있는 상호 관계를 말씀하였다. 교회는 작은 무리들로 모인 한 큰 무리로 하나님과 그의 아들에게 속해 있었다. 4) 세상과 교회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이를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다. 주님께 서 세워 주신 교회는 이 세상 안에 있어야 할 교회였다. 그러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였지 세상이 아니었다. 세상을 위해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정치 원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 이러한 원리들을 교회에서 실재 화 할수 있는 정치와 행정 그리고 나아가서 세상까지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주 님의 가르치심이다. 교회가 지켜야하고 가르쳐야 할 것은 주님의 가르치심이지 세 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주님이 선포하신 나라는 세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은 바로 하나님과 주님에 대한 심오한 진리의 말씀을 지혜로 운 자로 공부하고 연구하고 발표하고 선포하며 가르쳐지는 일인 것이다. 교회는 직 분의 고하나 계급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주될 수 없다. 그런 것 이 중요시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점이다. 4) 주님이 가르쳐 주신 3가지 양상의 교회 1) 하나님에 의하여 주님께 나타나신 교회의 가장 으뜸가는 양상은 크고 전체적 이며 하나인 교회였다. 하나님으로 부터 부름받고, 택함받고, 뽑힘받아 구소함을 받은 자들 전부로 구성된 우주적인 하나의 교회는 그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잘 나 타나 있다. 이 교회에는 그리스도가 전부인 교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전적으 로 의지하며 그를 믿고 따르는 교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를 믿고 따르는 교회다. 2) 땅위에서 어떤 때이든 그들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다. 이는 우주적으로 가시할수 있는 교회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 아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주님을 믿고 순종하며 가족과 함께 외적으로 모임을 보 이는 교회를 말씀하셨다. 3) 개체교회 였다. 지역에 있는 회중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기관과 부서들을 조 직하여 운영하는 교회였다. 그리하여 지역적으로 연합하고 상황에 대처하며 서로 협의하는 교회를 말씀하셨다. 이상의 3가지 양사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는 교회 교황이던 군왕이던 그어떤 사람도 머리가 될 수 없는 교회인 것이다.
그레스앰 메이첸의 교회론/김길성 교수(총신대학교 대학원장, 조직신학 교수)
그레스앰 메이첸의 교회론 한국성경신학회 제9차 논문발표회 김길성 교수 (총신대학교 대학원장, 조직신학 교수) 목차 I. 서론 II. 메이천의 초기 신학과 사상 1.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 2.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 3. 2세기의 동정녀 탄생 전통 4. 예수와 바울 5. 기독교와 문화 6. 역사와 신앙 7. 소결론 III. 메이천의 후기 신학과 사상 1. 메이천 이해에 있어서 최근 논쟁 2. 새 선교부의 설립 3. 새 선교부의 합법성 4. 메이천 재판에 대한 재고 5. 소결론 IV. 결론 I. 서론 메이천 박사(John Gresham Machen, 1881-1937)가 소천한지 65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러나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던 소위 장로교 논쟁(the Presbyterian Controversy)에서 메이천의 역할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끝이 날 줄을 모른다. 교회에 대한 메이천의 시각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재세례파나 독립교회파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그의 관점은 신실한 개혁주의와 장로교 신학자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론을 포함한 그의 신학적 시각은 주로 프린스톤 신학의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프린스톤 신학은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정통 칼빈주의에 확고히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신념은 프린스톤 신학교 전임자들이 세워놓은 규범들을 맹목적으로 반복하거나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서 성경이 가진 신뢰성과 명료성에 대한 확신을 비롯하여, 그의 이 같은 신념은 어릴 적부터 견고하게 형성되어 온 것이며, 나아가 그가 자라 온 남부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로 선임되면서 시작한 성경에 대한 자세한 연구와 특히, 당시 신약 분야의 학문적 성과를 자세히 살핀 연구 결과를 통해, 1915년에 이르러 그 완전한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을 살펴보면 메이천은 이미 자신의 남은 일생동안 수행하게 될 작업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는 이 초기 작품들을 통해 이후 그가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몇 가지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독일에서 수학하는 동안 메이천은 그가 일생 동안 싸우게 될 자유주의 운동과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1905년 그는 말부르크 대학교에서 빌헬름 헤르만 (Wilhelm Herrmann) 교수와 만나게 된다. 그는 주로 신약 분야를 공부하였지만, 조직신학에 관한 헤르만 교수의 강의를 수강하기도 하였다. 1905년 12월 10일 메이천이 그의 형 아더 (Arthur)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헤르만은 교의학 교수로서, 가장 지배적인 리츨 학파를 소개하고 있지만, 내겐 너무나 막연하게만 이해될 뿐이야. 그러나 헤르만은 내게 이 엄청난 운동의 배후에 깔린 어떤 종교적 힘을 보여주었지. 뿐만 아니라, 현재 이 운동은 미국의 북장로교를 손안에 넣기 위해 싸우고 있는 중이야. 비록 메이천이 말하고 있는 "미국의 북장로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이미 장로교회가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파괴적인 주장들에 의해 위협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 그는 말부르크 대학교에서 아돌프 쥘리허 (Adolf Juelicher), 요한네스 바이스 (Johannes Weiss), 그리고 월터 바우어 (Walter Bauer)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특히, 비록 헤르만 교수와의 만남이 다음 수년동안 그로 하여금 과연 자신이 목회자로서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그를 뒤흔들어 놓긴 했지만, 메이천은 이 만남을 통해 이 후 자신이 가진 오랜 신앙에 대해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자유주의의 기독교 비판에 대응하여 역사적 기독교를 옹호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에서 돌아오자, 메이천은 당시의 적대적 문화 속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메이천은 자유주의가 신학교와 교회 내에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것이 가져 올 논리적인 의미들을 검토하고, 자유주의의 물질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전제들을 교회의 순결과 일치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메이천이 발견한 것은 교회가 실제적으로 여러 면에서 성경이 명령하는 바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참된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교 교수로서, 그리고 안수 받은 목사로서, 자유주의가 가진 파괴적 전제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전력을 다해 고수하고 있는 현대 역사주의의 해로운 영향들을 교회에 알리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1906년부터 프린스톤 신학교 신약학과 강사로 봉직하게 된 메이천은 성경의 역사적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연구 작업을 통해,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명확성과 신뢰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그는 초자연적인 기독교가 참이라는 것과, 또한 그 사실은 지적으로도 변호되어야만 한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1915년 초,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교회는 지금 혼돈 속에 있으며,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 도저히 평화가 있을 수 없는 곳에서 평화, 평화를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급격히 그 힘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선택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하나님이여,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하나님이여, 성경에 따라 판단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신약 원전에 대한 자세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형성된 이러한 확신에 따라 메이천은 당대의 사상에 대해 철저히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지성적 투쟁을 주장하였다. 결국, 장로교 내에서 일치와 순결을 지키려는 그의 노력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는 교회의 일치와 순결의 교리를 '지성적으로' 옹호하려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대부분 그가 발표한 글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둘째로, 그는 자신의 확신을 교회 활동을 통해 구체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이러한 초기의 지적 성장은 이후 그가 현대주의자들의 운동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관찰을 통해 장로교 논쟁에서 그가 보여준 이후의 행동과 역할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에 뿌리박고 있었던 것임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점차 넓어져 가는 자신이 소속된 교회와 학교에서 일치와 순결의 성경적 균형을 지키려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가왔다. 로우악 (Roark)은 "장로교회 안에서 보여준 메이천의 행동은 교리적으로 '참된 장로교회'에 대한 그의 간절한 기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메이천을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독립교회파 인물로 설명하고 있는 로우악의 묘사와는 맞지 않는다. 필자의 판단에는 그 같은 묘사가 성경적 순결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지키려는 로우악의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II. 메이천의 초기 신학과 사상 신약연구에 관한 메이천의 최초 작품은 그가 학생 때 작성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신약 기사에 대한 비판적 논의"란 글이다. 이 글은 1905년 8월과 1906년 1월 [프린스톤 신학평론]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에 연재되었다. 그는 또한 독일어로 작성된 3편의 연이은 글들을 [슈바르츠부르크분트] 지 (Der Schwarzburgbund)에 기고하였는 데, 이들은 이후 1906년과 1907년에 "Die Universitaeten der Vereinigten Staarten"의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그러나 메이천이 발표한 신약에 관한 초기의 논문들은 주로 책에 관한 평론에 불과하였다. 그의 이러한 평론은 모두 [프린스톤 신학평론](5-10권)을 통해 발표되었는데, 1907년에 하나, 1908년에 넷, 1909년에 다섯, 1910년에 넷, 1911년엔 셋, 그리고 1912년에 하나가 발표되었다. 1912년에 이르러 네 개의 학술논문을 발표하면서 메이천은 학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 중 셋은 동정녀 탄생에 관한 것으로 [프린스톤 신학평론]를 통해 발표되었다. 네 번째 작품은 예수와 바울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다룬 것으로,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들에 의해 발간되었던 [성경신학연구](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라는 잡지를 통해 선을 보였다. 이 두 주제(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예수와 바울)는 신약 비평에 관한 메이천의 후기 작품인 [바울 종교의 기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1912년 메이천은 프린스톤 신학교 100주년 개막 행사 때 자신이 행한 연설을 이듬해 1913년 [프린스톤 신학평론]에 "기독교와 문화"란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1915년에 그는 또 다른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제목은 "역사와 신앙"으로, 이것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약학 조교수로 취임할 때 행한 취임 연설이었다. 1.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 1912년 [프린스톤 신학평론]에 실린 메이천의 첫 논문 제목은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이었다. 이 논문은 주로 누가복음 1:46-55의 (소위 "마그니피캇" [Magnificat]이라 불리는) 마리아의 찬양과 1:68-79의 (소위 "베네딕투스" [Benedictus]라 불리는) 사갸랴의 찬양을 다룬 것이었다. 같은 해에 발표된 그의 두 번째 논문은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두 논문을 통해 메이천은 세 번째 복음서 (누가복음)의 첫 두 장의 출처가 될만한 가능성 있는 자료들의 여러 문제점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이 두 장이 의식적으로 칠십인 역을 모방하여 누가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라고 말한 하르낙 (Adolf von Harnack)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메이천은 마리아 송가 (Magnificat)와 관련된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교부신학의 대표자인 하르낙의 주장을 굳이 다루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피타 (Fridrich Spitta)가 이미 마리아 송가의 기원에 관한 하르낙의 이론을 충분히 반박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이천은 이 스피타의 것과 유사한 방법을 이용하여 사가랴의 노래 (Benedictus)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구절들, 그리고 그 구조를 세심하게 분석하였다. 하르낙과 다른 이들은 이러한 언어적 세부묘사가 바로 누가의 저작임을 입증하는 표지라고 주장하였지만, 메이천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이 모든 사실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가설은, 마리아 송가가 본래 마리아가 노래하였던 아람어 송가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이것이 탄생 기사와는 별개로 회자되다가, 복음서 기록 시 영감 된 누가 자신의 손끝을 통해 탄생기사 안에 있는 현재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사가라의 노래 (Benedictus)에서도 일어났다는 것이다. 후에 이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이란 논문은 실제로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첫 장을 이루게된다. 2.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 메이천은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이란 제목의 두 번째 논문을 통해, 누가복음 1장과 2장에 기록된 탄생 기사를 각기 다른 요소들로 구분하려는 시도들에 반대하고, 탄생 기사의 통일성을 옹호하였다. 그는 당시 신약학계의 세 가지의 가설을 다루었다. (1) 기록된 자료들을 사용하지 않고, 누가 자신이 작성하였을 것이다. (2) 누가는 아람어로 된 문서 자료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3) 누가는 헬라어로 된 문서 자료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는 모든 언어적 증거로 보아 이 탄생 기사가 분명히 성령의 감동으로 된 누가의 작업일 뿐만 아니라, 유대 기독교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따라서 누가복음 1장, 2장과 관련하여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여졌다. 하나는 이 기사가 원시 유대 기독교와 팔레스타인 유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기사가 누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논문을 통해 메이천이 성경을 역사적인 입장에서 연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탄생 기사의 문학적 통일성뿐만 아니라 이 기사를 통해 묘사되고 있는 사건들의 역사성을 동시에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이 탄생 기사의 저자가 "제사장들의 반열과, 적어도 그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방인이라면 자연적으로 하였음직한 설명들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이 기사가 원시 유대 기독교적 배경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 메이천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실제 일어났었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전통이 이미 그 시기에 보존되고 있었던 것으로 주장하였다. 이 같은 입장은 구속사적 기독교가 실제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에 기초한 것이라는 그의 확신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메이천이 증거에 대한 잘못된 해석의 가능성을 무시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다시 한번 전제들이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시종 일관, 만일 탄생 기사에서 묘사되고 있는 사건들이 사실이라면, 그 사건들은 그 자체로 기록된 문서들 안에서 관찰 가능한 현상들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그 문서들과 관련하여 서로 모순된 가정들이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음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비록 탄생 기사 속에 나타난 증거들이 확정적인 것이며, 나아가 합리적인 확신을 갖기에 더 없이 충분한 것이라고 판단될 때조차도, 그는 그러한 증거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메이천은 때로 세상일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메이천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와 탄생은 진실로 타락한 인간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신 방편이었다. 메이천과 여타 역사주의의 가정들을 받아들이고 있던 하르낙과 같은 성경학자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름 아닌 그 같은 신적 개입에 대한 메이천의 개방성에 있었다. 처음부터 메이천은 자신의 입장이 합리적인 논의에 의해 지지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논문들을 써내려 가면서 그가 쏟은 모든 노력은, 유효한 역사적 증거들에 기초한 논리적 논의를 통해 누가복음의 첫 두 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참이라는 것, 곧 그 사건들이 기록된 그대로 실제 일어났었던 사건들이라고 하는 합리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기독교의 역사성과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종교적 가치들 사이의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기독교의 가르침이 참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때, 그가 의도한 바는 다름 아닌 그 가르침이 역사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그의 활동 초기부터 그는 성경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신앙은 모든 증거들을 배제한 비이성적 도약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하게 해석만 된다면 그 증거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확신이라고 하는 점이다. 3. 2세기의 동정녀 탄생 전통 "2세기의 동정녀 탄생 전통"은 1912년 "프린스톤 신학평론"에 실린 메이천의 세 번째 논문이다. 이것은 약간의 수정을 거친 뒤 1930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첫 장이 되었다. 이 논문에서 메이천은 2세기로부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독교 신앙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수집 가능한 증거들을 하나 하나 검토하였다. 그는 사도신경과 사도신경의 기초가 된 고대로마의 신앙고백에서 드러난 증거와,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알렌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순교자 저스틴, 아리스티데스, 그리고 이그나티우스 등 교부들이 남긴 증거들을 검토했다. 이를 통해 그는 'AD110년에 이르러 이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 공동체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어 메이천은 2세기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례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차례로 그 부당성을 입증했다. (1) 이교도 반대자들의 동정녀 탄생 부인, (2) 유대주의 반대자들의 부인, 그리고 (3)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말시온, 카르포크라테스, 그리고 세린투스와 같은 이들의 부인 등이 그것이다.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메이천은 당시 슈미트케 (Alfred Schmidtke)가 작성한 "Neue Fragmente und Untersuchungen zu den judenchristlichen Evangelien"라는 제목의 논문을 다루고 있다. 슈미트케는 '동정녀 탄생의 전통이 단지 4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메이천은 초기의 저자들에 의해 언급되었던 에비온파의 영지주의적 성격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한 슈미트케의 작업이 비록 혁신적인 것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뒤집지는 못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메이천은 자신의 생각을 다음의 두 가지 진술을 통해 요약하고 있다. 1. 동정녀 탄생에 관한 확고하고도 잘 정리된 신앙은 이미 2세기 초기에까지 거슬러 올 라 간다. 2. 2세기를 시작하면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부인의 움직임은 참된 역사적 전통보다는 철학적, 교조적 선입관에 기초하고 있다. "2세기의 동정녀 탄생 전통"이란 논문에서 메이천이 내린 결론은, 특수한 현상들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후기 논거의 기초가 된다. 전달하고 있는 주된 주장과는 별개로, 이 논문이 갖는 중요성은 성경에 대한 역사적 탐구라고 하는 메이천의 접근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세기경의 기독교를 고려하지 않고는 1세기의 기독교를 정당하게 연구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신약을 연구하되 최대한 완벽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며 연구하려 하였다. 그에게 있어, 동정녀 탄생이 2세기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요소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는 그것이 이미 1세기 기독교의 독자적이고 기본적인 가르침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메이천은 자신이 가졌던 기독교 정신에 바탕한 철학적 전제들을 이용해, 당시 역사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던 기존의 많은 사람들과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가 선택한 논의는 역사적 방법은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여러 역사가들에 의해 채택된 일부 전제들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메이천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기사들에 대해 단순히 개연성 있는 설명만 아니라, 보다 정확한 설명을 추구하였다. 4. 예수와 바울 한편, 1912년 신학교 설립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들에 의해 발간된 「성경신학연구」(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를 통해 메이천의 그 해 마지막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의 제목은 "예수와 바울"이었다. 이 논문은 그의 초기 작품들과 후기 작품들 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메이천이 「바울 복음의 기원」이란 제목으로 1921년 발표한 최초의 책은 그가 "예수와 바울"에서 주장한 내용들을 보다 상세하게 기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와 바울"에서 메이천의 기본적인 주장은 바울이 예수의 참된 제자였다는 것이다. 브레데(William Wrede)가 그의 책 [바울](Paulus, 1905)을 통해 밝힌 결론에서 시작하여, 메이천은 자유주의 학자가 시도한 예수의 재구성과 바울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다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더 나아가 메이천은 세 가지 서로 상반되는 시각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 하나 하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다. 우선 그는 율법으로부터의 기독교적 자유라는 문제에 대해 바우어(F. C. Baur)가 지적한 팔레스타인 기독교와 바울의 기독교사이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리츨과 하르낙의 반론을 다루었다. 두 번째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관점과 팔레스타인 기독교의 관점을 대조시킨 "현대 급진주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선 바울과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 간에 어떠한 갈등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세 번째로, 메이천은 바울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잘 알지도, 그다지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부 견해를 다루면서, 실제로 바울은 우리가 아는 이상으로 예수님에 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메이천의 말을 들어보자: 따라서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인간 예수의 생애를 계시하셨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러한 사실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에 그것들은 오히려 바울에게 증오심만을 조장했을 뿐이었다. 그가 회심할 당시 받은 것은 그러한 사실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바울은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살아 계신 주님으로 또한 주인으로 영접하였다 . . . .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럽게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다. . . . 예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부름에 순종하였다. 예수, 과거에 그가?성전의 파괴자요, 율법에 의해 저주받은 자이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된 자로 만?알았던 그분이 살아 계신 주님이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직접적인 임재를 통해 그를 교통 속에, 영광스러운 봉사에로 부르셨다. 바울이 자신의 복음은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을 때, 바울이 의도한 의미는 이것, 바로 이것이다. 메이천은 계속해서, 바울이 살았던 경건한 삶의 본질은 바로 "살아 계신 주님과의 교통"이었으며, 바울사상의 중심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신의 삶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메이천은 "만약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인간이 아니라면, 바울사상 뿐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영감 받은 선지자들의 숭고한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전혀 터무니 없는 오류에 기초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라고 결론짓는다. 이 논문은 메이천의 작품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이 논문에서 그는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이해와 자연적인 이해를 구분하고, 자신은 이 둘 사이의 지적 중간지점을 만들어 두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메이천에게 있어 초자연적 구속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타당성 있는 유일한 설명은 역사적 해석이다. 결국 메이천은 역사적 신앙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그의 확신은 교회 내에 존재하는 자유주의자들만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논문들은 전체적으로 메이천이 이젠 모두가 주목할 만한 신약 신학자로서 부상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은 1913년 Theologische Literaturzeitung지를 통해 메이천의 논문들을 평가하면서, 자신은 비록 메이천의 주장에 찬성하진 않지만, 메이천이 발표한 논문들은 "감탄할 만하며," "매우 주목할 만하다"고 말하였다. 5. 기독교와 문화 한편, 메이천은 1912년 9월 20일 프린스톤 신학교 설립 10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이 연설은 "기독교와 문화"라는 제목으로, 1913년 「프린스톤 신학평론」을 통해 발표되었다. 메이천은 이 논문을 통해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엔 다음의 세 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기독교를 문화에 종속시키는 경우, 둘째는, 기독교를 문화 파괴자로 보는 경우, 세 번째는, 기독교가 문화를 헌신케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만드는 경우이다. 이 같은 대안들 중 메이천이 주로 지지한 것은 세 번째 것이다. 그는 이 세 번째 대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다행히 세 번째 해결책이 가능 하다?즉, 헌신을 말한다. 예술과 과학을 파괴하거나 그것들을 무관심 하는 대신에, 최고의 인문주의자의 열정을 품고 그것들을 장려하자.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을 우리 하나님의 봉사에 헌신하도록 하자. . . .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과의 구별을 흐리게 하거나 세상에서 떠나 일종의 지적 수도원주의로 물러나는 것 대신에, 세상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기 위해 기쁘게 열심을 품고 나아가자. 메이천은 두 번째 해결책, 곧 기독교에 의한 문화 파괴라는 식의 대안을 비논리적일 뿐 아니라, 비성경적이고, 바탕부터 반지성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첫 번째 대안은 더 더욱 치명적인 것으로, 기독교 전반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선 기독교도 문화에 종속될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 이 같은 해결책은, 어느 정도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교회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일 기독교에서 초자연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나면?오늘날은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다?기독교는 단순히 자연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인간의 고안물로, 인간 문화의 한 부분으로 비하되고 만다. 이미 메이천은, 기독교로부터 초자연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기독교 신앙을 자연과 문화, 역사적 힘의 산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 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역사주의의 가정들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독교를 문화에 종속시킴으로써 실제 우리는 기독교를 파괴하였으며, 비록 옛 이름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메이천이 역사주의적 정신이 이미 교회에 침투하였다고 말했을 때, 그는 사실 신학적 자유주의를 역사주의의 산물로 정의하였던 것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이 같은 이해는 그의 후기 작품인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를 통해 잘 설명되어 있다. 비록 조금은 고풍의 글이긴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유는 그것이 초자연적인 것들을 문화적 상대주의의 의미로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기독교 교회 내에 엄청난 변절이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메이천은 이 같은 "지적 분위기"를 질타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기독교를 참된 것으로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선 "종교적 감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오히려 지적인 작업들이 . . . . 요구된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는 바는 "그 동안 지적인 작업들이 무시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점차 보다 쉬운 일들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지금 교회는 자신의 게으름이 빚어낸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우리는 메이천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심각한 사상적 적대 세력의 특징을 정확히 꼬집어 내었고, 활발한 지적 학문 활동이야말로 그것과 싸우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6. 역사와 신앙 1913년 초여름부터 시작하여 메이천은 기독교 사역을 준비하기로 마음먹고, 뉴 브룬스윅 노회 (New Brunswick Presbytery)의 관리 아래 있게 된다. 1914년 6월에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1915년 5월에 신약신학 조교수로 임용된다. 이 때 그의 취임 연설 제목은 "역사와 신앙"이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 조교수로 임용될 때까지, 그는 총회에서 발행하는 교재를 쓰는 일에 몰두했었다. 지금 여기서 이 글을 구석구석 살펴보는 것은 본 논문의 연구 취지를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메이천의 작업이 주로 역사에 기초하고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그가 주장하는 바들은 그가 학생용으로 출판한 책 서론에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 책의 목적은 기독교 경건을 보다 확고한 역사적 지식 위에 세우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마치 학교에서 행해지는 역사 연구 과정과 동일한 방법에 따라 연구되어야 한다.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첫 번째 단계는 사실들을 배우는 것이다. . . . 성경의 역사는 이 점에서 다른 역사들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성경은 사건들의 기록인 것이다. 복음은 일어난 일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 . . 그러나 역사가 비록 신성하다고 해서 역사가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복음이 역사라면 그것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 방법을 통하여 연구되어야 한다. 나아가 메이천의 고백주의가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도 바로 이 책을 통해서이다. 이 책에서 메이천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가장 뛰어난 진술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수 차례에 걸쳐 직접 인용하거나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것은 언제나 소요리 문답의 내용이었다. 메이천이 그것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가 이미 처음부터 그것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장로교회의 역사적 신학적 표준문서들과 고백적 정통 일반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에 관해 토론할 때, 교회사에 등장하는 특정 종류의 교의가 가진 역사적 오류들을 언급하고, 결론부에 이르러 소요리 문답에서 인용한 글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교회는 그 같은 온갖 종류의 오류로부터 벗어나 복음으로 새로워 져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의 구속자는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신 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으니 그 후로 한 위에 특수한 두 가지 성품이 있어 영원토록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시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21) 간단히 말해, 이 것이야 말로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에 관한 기사인 것이다. 그 같은 정의를 담고 있는 매 구절마다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며, 초기엔, 때때로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한 구절 한 구절마다 복음이 가르치는 내용의 본질적 요소가 담겨져 있다. 구절마다 수세기에 걸친 교회사를 통해 검증되고 입증된 것들이다. 또한 메이천은 기독교가 반드시 동시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적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을 역설한다. "기독교의 소망과 현재의 소유"라는 부분에서 메이천은 성령의 역사에 호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을 소유한 교회는 단순히 구원을 기다리는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구원을 받은 교회인 것이다. 성령은 인간이 그리스도께로 돌이킬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며, 첫 선물이 모든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미치게 하시는 이시다. . . . 그러나 여전히 많은 것들은 아직도 미래의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세상은 점점 악에 빠져 들어가고, 기독교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 마지막 영광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다. 메이천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당대의 지적 투쟁에 대한 참여는 그를 근본주의자들과 구별시키는 요인들이다. 그는 실제로 근본주의 운동에 합류하였으며, 그 운동의 지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그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유주의의 공격에 직면해 교회의 일치와 순결 사이에서 성경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근본주의자들과 함께 한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한편, 1915년 5월 3일, 메이천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약신학 조교수로 취임하면서 연설할 기회가 주어졌다. 연설의 제목은 "역사와 신앙"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신약학 학생들은 무엇보다 우선 역사가여야 한다. 성경의 중심과 핵심은 바로 역사이다. . . . 성경은 무엇보다 사건들의 기록인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줄 곳 성경을 역사적으로 연구할 것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어 인간 예수가 바울에 의해 신격화되었다고 주장한 홀츠만(H. J. Holzmann)의 이론을 비판하였다. 메이천은 약간 풍자적인 어조로 현대 신약비평의 본질적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예수는, 공간적 거리와 신비로운 후광에 의해 미혹되기 쉬운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에 의해서 천상에 속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 것이야 말로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망상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전체가 그 같은 망상에 뿌리박고 있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또 메이천은 전에 그가 배웠던 말부르크 대학교의 헤르만(Wilhelm Herrmann)의 글들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예수님에 관한 자유주의적 재구성을 비판하였다. 메이천에게 있어, 복음은 '좋은 소식', 소식, 일어난 일에 대한 보고를 의미하였다. 달리 말해, 그것은 역사인 것이다. '역사와 무관한 복음'은 이미 표현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메이천은 당대의 신학적 자유주의를 현대 자연주의의 산물로 간주하였다. 그는 역사주의의 중심적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현대 역사주의자들에 따르면, 초자연적 인간은 결코 존재한 일이 없다. 그것이 바로 현대 자연주의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세계는 불변의 법칙들에 순응하며, 결코 끊어지지 않는 발전단계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메이천은 급진적 역사주의와 신학적 자유주의 모두의 뿌리엔 자연주의적 가정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자유주의의 재구성을 "실패"라고 단정지었다. 그가 이렇게 단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메이천의 말에 따르면, 우선 복음이 전하고 있는 기사에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구분 자체가 전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둘은 "도저히 풀 수 없을 만큼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메이천이 제시한 두 번째 이유는 설사 자연적인 것을 초자연적인 것에서 분리할 있다 해도, 이러한 분리 작업을 통해 남은 것들이 "의의 교사요, 영감 받은 선지자였으며,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긴 예배자"로서의 예수를 가리키는 요소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메이천에 의하면 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실존 불가능한 인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자신을 메시아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비록 이 같은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을 인정한다 해도, 그가 어떻게 자신의 제자들에게 초자연적 인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메이천은 이 자유주의자들이 제시한 예수는 "기독교회의 근원을 설명해 주기엔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지적한다. 연설을 마치면서, 메이천은 역사와 신앙의 관계 문제를 다시금 언급한다. 그에게 있어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역사는 신앙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하며, 역으로 신앙은 역사를 경험적으로 확증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메이천의 주장은 이 부활이야말로 기독교가 존재하게 된 타당성 있는 유일의 역사적 근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논쟁 자체가 부활의 확실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럴지라도 역사는 자체만으로 "완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 확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뭔가를 역사적으로 연구할 때 빠질 수 있는 뜻하지 않은 위험에 대해 메이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활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오직 개연성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개연성이야말로 역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이러한 개연성은 적어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충분하다. 우리는 부활을 검증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부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검증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적 경험은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동시에 이러한 경험은 역사에 대해 직접성과 즉각성, 그리고 우리를 두려움에서 구원해 줄 확실한 친밀성을 더해준다. 역사와 신앙의 관계를 다루면서 메이천은 간단하면서도 매우 날카롭게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바로 한 가운데 있다. 예수님에 관한 기사에 있어 그러할 뿐 아니라, 성경은 그 자체의 본질적 주장을 확증하여 주었다." 그는 성경이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 기초를 파헤치게 되면 교회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무너질 뿐 아니라 그 무너짐 또한 매우 심각할 것이다." 그는 이어 "기독교의 두 가지 개념"이 교회 내에서 항상 상호 갈등을 일으켜 왔다고 말한 뒤,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회는 지금 혼돈 속에 있으며,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 도저히 평화가 있을 수 없는 곳에서 평화, 평화를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급격히 그 힘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선택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하나님이여,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하나님이여, 성경에 따라 판단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7. 소결론 이것은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로 임명된 뒤 근 10년 간의 학문적 풍토를 자세히 살펴온 깨어있는 학자의 경고였다. 그러나 교회 내 거의 아무도 이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필자는 교회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성경에 관한 적합한 역사적 연구와 초자연적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를 통해 우린 그가 이미 이른 시기부터 교회의 일치와 순결을 지키고자 하는 관심과 성경에 관한 역사적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깊은 확신을 발전시켜 왔으며, 또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필자는 메이천이 교회 내 일치와 순결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할 때마다, 그것은 단순히 장로교회 표준문서에 대한 그의 열정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들기 위한 그의 관심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메이천만 아니라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메이천은 장로교 논쟁에 심각하게 말려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성경의 신실함과 명료함에 대한 강한 확신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전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칼빈(John Calvin)이나, 아치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찰스 하지(Charles Hodge), 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A. A. Hodge),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등과 같은 자신의 믿음의 선배들의 관점을 반영한 것일 뿐이다. 메이천은 이미 그의 활동 초기에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정당한 것일 뿐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신약과 거기에 기록된 사건들이 부분적으로는 그 당시의 역사적 환경이라는 제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그러한 역사적 환경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 결과 메이천은 역사주의의 본질적 교의들은 거부하였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는 기독교 해석과 자신의 교회에 대한 분석뿐 아니라, 당시의 주류적인 흐름에 대해서도 상반된 입장을 취하게 된다.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자,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서 성경이 가진 신뢰성에 대한 메이천의 확신은 그가 자란 미국 남부 배경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독일에서 머무는 동안 일시적으로 자신의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으나, 메이천은 1906년 프린스톤의 교수로 임명된 뒤 성경과 당대의 학문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 그는 자신이 가졌던 최초의 확신을 재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의 관점은 1915년에 이르러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다. III. 메이천의 후기 신학과 사상 메이천이 새 선교부를 설립하기로 한 결정은 소위 자유주의 및 중도파 진영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진영에서조차도 메이천의 후기 신학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재편성과 곧 이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 이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에 속한 장로교 해외선교부의 성격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교단 소속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1932년), 이들에 의해 복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한 메이천은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the 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s)를 조직했다(1933년). 이후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는 뉴 브룬스윅 노회(the Presbytery of New Brunswick)에서 재판을 받고(1934년), 정죄되어(1935년), 결국 총회로부터 목사 정직을 당하기에 이르렀다(1936년). 이 즈음에 그의 오랜 친구였던 클라렌스 매카트니 목사(Dr. Clarence Macartney)는 메이천이 새 선교부에서 손을 떼기를 거절하자 메이천과 메이천이 설립한 새 신학교와도 인연을 끊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동시대와 후대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의 설립을 둘러싼 사태의 진전과 관련하여 메이천과 그의 행동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필자는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 설립과 관련하여 당시 메이천의 교회론적 관심을 우선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1. 메이천 이해에 있어서 최근 논쟁 잔 그레스햄 메이천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 미국 교회사에 있어서 근본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미국에서 근본주의 운동은 몇 몇 학자들에 의해서 주로 사회적인 부적응으로, 또는 농촌과 도시 문화 사이의 갈등의 산물로, 또는 반 진화론적이요 반 지성적인 감성의 표출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서 근본주의 운동에 대하여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 것은 어네스트 샌딘(Ernest R. Sandeen)이라고 볼 수 있다. 샌딘은 1970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인 [근본주의의 뿌리들](The Roots of Fundamentalism)을 통하여, 근본주의 운동의 뿌리는 그 교리적 전통을 포함하여 1920년대의 사회적 격변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그 뿌리가 깊다고 하는 사실을 제시했다. 샌딘에 따르면, 근본주의를 이해하는 두 개의 열쇠는 프린스톤 신학과 천년왕국론이라고 단언했다. 샌딘은 말하기를, 전자(프린스톤 신학)는 근본주의 운동의 구조와 더불어 또한 잘 훈련된 이 운동의 전국적인 지도자들을 배출하였고, 후자, 곧 천년왕국론은 근본주의 운동에 그 생명과 형태를 부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샌딘의 저서가 출판된지 10년 후, 조지 말스덴(George M. Marsden)은 그의 저서 [근본주의와 미국 문화](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에서 주장하기를, 근본주의 운동에 대한 샌딘의 논법은 당시 근본주의로 알려진, 1920년대의 전투적이며 반 현대주의적인 복음주의(the militant, anti-modernistic evangelicalism)라고 하는, 보다 큰 현상을 적절하게 다루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말스덴은 근본주의 운동에 있어서 천년왕국론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샌딘과는 달리 근본주의 운동에 미친 다른 요인들, 곧 19세기 복음주의적 개신교, 부흥운동, 개신교 문화의 퇴조, 현대주의에 대한 반대와 반감, 그리고 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강조 등에 더 역점을 두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근본주의 운동의 교리적 기원에 관한 샌딘의 논지를 재확인했다고 볼 수 있다. 샌딘과 말스덴 두 사람은 모두 근본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교리적 기원에 관하여 프린스톤 신학을 말하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특히 근본주의 운동의 발달에 기여한 것으로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프린스톤 학자들의 강조를 주요 원인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점은 상반된 것으로, 샌딘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말스덴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를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역사학자들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에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안에서 그 절정을 이룬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the Modernist-Fundamentalist controversy)을 기본적으로 교회론에 관한 분쟁으로 취급하였다. 예를 들면, 레퍼츠 레춰(Lefferts A. Loetscher)는 그의 저서 [넓어지는 교회](The Broadening Church)에서, 장로교 논쟁에서의 갈등의 골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교회론적이었다고 말하고, 특히 그 논쟁의 와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 교회의 개념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레춰는 말하기를, 장로교 논쟁에서의 갈등에는 주요한 세 그룹, 곧 극단적 보수주의자들과 온건한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레춰에 의하면, 후자의 두 그룹이 결국 동일한 교회론적인 포용성을 근거로 합세하여, 교회론적인 배타성의 입장을 취한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을 공격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레춰의 논지는 일견 대단히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논쟁의 와중에 있는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신학적인 차이를 극소화하고, 대신에 주변의 문제들, 곧 행정상의 차이점들과 신학교와 교단 안에서의 권력 투쟁 등을 극대화한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에 따르면, 이들 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교회론적인 관점으로부터 이런 차이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레춰는 메이천의 교회론은 장로교적이 아니며, 재세례파의 그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와 유사한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예를 들면, 에드워드 카넬(Edward J. Carnell)은 메이천의 교회론에서 결정적인 약점을 발견하고, 메이천은 개혁주의 교회론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클립튼 옴스테드(Clifton E. Omstead)는 그의 저서 [미합중국 종교사]에서 말하기를, 메이천이 교회를 자원단체로 보기 때문에 메이천은 "조합 교회 제도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이에 덧붙여, 메이천 이해에 있어서 또 하나의 해석이 있으니 달라스 로우악(Dalla Morgan Roark)의 해석이다. 로우악은 그의 학위논문인 "제이 그레스햄 메이천과 교리적으로 진정한 장로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그의 열망"에서 주장하기를, 메이천에 대한 레춰의 취급조차도 메이천의 교회론을 정당화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로우악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 장로교 논쟁에 있어서 메이천의 행동은 "마땅히 교리적으로 '진정한 장로교회'를 위한 그의 열망에 비추어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로우악은 메이천이 장로교 정치체제를 이해하고 있지 못했거나, 아니면 장로교 정치체제와 일치하게 행동하지 못한 독립교회파의 사람이 분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 문제를 아래의 세 가지 관점에서 고찰했다: (1) 종교개혁의 관점, 특히 요한 칼빈의 저작에 나타난 관점, (2) 장로교회 표준문서들의 관점, (3) 미국의 장로교 전통의 관점. 로우악은 주장하기를, 장로교회 안에서 그 표준문서들에 대해 완전한 서약을 요구한 메이천의 견해는, 메이천이 교회를 자원단체로 표현하데 대하여 레춰가 그를 "재세례파"라고 불렀던 바, 오히려 그보다는 로마 카톨릭의 "계급제도적"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는 메이천의 교회론을 "분리주의적"이라고 비난하고, 개인적으로 메이천처럼 정통적인 인물들이 메이천과 함께 분리하는데 동참하지 아니한 것을 지적했다. 로우악도 레춰와 유사하게, 논쟁 당시 장로교회 안에 세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메이천 이끄는 엄격한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오번 선언서의 서약자들과 같은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중도 그룹에 속한 사람들, 곧 이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단의 분열에는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자유주의자들에 대하여는 관용적인 사람들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장로교회의 결정적인 시기에 교회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무리들이 바로 이 세 번째 그룹이었다고 로우악은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메이천이 "교회론과 관련하여 장로교회의 표준문서로부터 이탈했다"고 주장했다. 1923년에 출판된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메이천은 말하기를, 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은 기독교의 한 형태와 다른 형태 사이의 논쟁이 아니라, 한 종교와 서로 다른 종교 사이의 논쟁이라고 주장했다. 메이천에 의하면, 자유주의는 간단히 말해 기독교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주의"로 불려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이 논쟁에 있어서 중대 사안은 정치라든지, 혹은 교회재판에서 흔히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하는 은혜스러움이 아니었다. 실로 바른 신학, 건전한 신학을 거짓 교훈 또는 잘못된 신학으로부터 가려내는 중대 사안은 바로 성경의 권위이다. 필자는 메이천 박사가 본질적으로 신실한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자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본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신학이 그의 저술들을 형상화하였으며, 또한 장로교 논쟁 중에 그가 취한 행동을 지로했다고 하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2. 새 선교부의 설립 메이천은 1937년 유작으로 출판된 그의 저서 [기독교 인간관](The Christian View of Man)에서, 가견교회(the visible church)는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순수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가견교회가 "너무나 자주 오류와 죄악 속에 빠져 왔으며," 이제는 "심각한 정도에 이르기까지 배교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메이천은 이 변화하는 세계(this changing world)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the unchanging Word of God)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메이천의 이 말은 그가 소천(1937년)하기 몇 달 전에 했던 말이었다. 우리는 메이천의 말을 통해 그가 교회의 자원적인 면을 인정하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교회의 직분자들이 교회의 표준문서들에 정직하게 서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하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인 기록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회론에 대한 메이천의 이러한 생각은, 특히 성경의 진리와 교회의 고백주의에의 헌신과 더불어 메이천이 속한 교단(PCUSA,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대한 그의 응답으로 나타났다. 1932년 말에 [선교 재고: 100년 후 평신도들의 질의서]라고 하는 책이 전체 7권으로 출판되었다. 잔 록펠러(John D. Rockfeller, Jr.)씨가 재정을 후원한 이 책에는 15명으로 구성된 선교위원회가 인도, 미얀마, 일본, 중국 등지에서 행해진 미국의 해외선교를 검토했다. 이 연구는 미국 사회종교 연구소의 도움과 미합중국 장로교회를 포함한 당시 7개의 주요 교단 선교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당시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해외선교부의 책임자는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였다. 그러나 이 책들은 전체의 권수만큼이나 대중화되지 못했다. 이후 곧 강력한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하바드 교수였던 윌리엄 하킹(William Ernest Hocking)이 편집한 단 권으로 된 [선교 재고](Rethinking Missions)가 출판되었다. 단 권으로 된 [선교 재고]의 전반적인 어조는 합리주의였다. 이 책자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생생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당시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자유주의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다고 하는 충격적인 기록이었다. 이 책자는 출판되자마자 곧 보주주의자들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았다. 급기야는 장로교 해외선교부의 집행위원들이 "복음적인 선교정신의 기조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확인하고, 또한 교단에 속한 장로교 선교사들에 대한 신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였던 메이천은 교단의 해외선교부가 작성한 그 보고서가 눈가림을 위한 허위이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공격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되었으며. . .; 그것은 성경을 약화시키고 기독교 교리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으며. . .; 그것은 교계에서 오랫동안 지켜온 영벌의 교리를 기각하였으며. . .; 그것은 전도와 분명한 회심과 그리스도에 대한 공개적인 신앙고백을 약화시키고 있다. 당시 사태는 [대지]와 [살아있는 갈대]의 저자인 펄벅 여사의 잡지 기고문으로 말미암아 더욱 악화되었다. 펄벅 여사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는 장로교 선교사였다. 그 펄벅 여사가 [하아퍼즈 매거진]의 1933년 신년호의 기고문에서, 속죄와 구원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미신적"(superstitious)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선교 재고]라는 책자에 대해서도 "삶의 자리에서 종교에 대한 명 진술이자 동시에 종교의 자리에서 기독교에 대한 명 진술"이라고 펄벅 여사는 극찬했다. 결국 이 문제로 펄벅 여사는 해외선교부에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선교부의 위원장인 스피어는 "깊은 유감"의 표명과 함께 그 사직서를 받아 들였다. 펄벅 여사가 사직한 후, 메이천과 스피어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었고, 이 논쟁은 결국 메이천이 속한 뉴 브룬스윅 노회에 의해 1933년도 총회에 4개조의 헌의안으로 상정되었다. 소위 "메이천 헌의안"으로 불려지는 이 헌의안은 총회가 해외선교부에 사람을 선발할 때 "교회가 당면한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는 인사들만" 선발할 것과, 또한 각 선교사는 누구든지, "성경의 완전한 진정성, 우리 주님의 동정녀 탄생,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제사로서의 그리스도의 대속, 그의 몸의 부활과 그의 이적"을 본질적인 진리로 선포하기로 요구할 것을 청원했다. 또한 그 헌의안은 "모든 목사 후보생들이 이들 진리를 받아들일 절대적인 필요성을 부인하는" 인사는 선교부 책임자의 자리에 앉히지 말도록 총회가 선교부에 지시하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이 헌의안은 부결되었고, 소수의견 보고서의 출판마저 해외선교부 책임자의 권고로 거부되고 말았다. 총회는 선교부와 소속한 사람들의 지지를 재확인하고 선교부에 "전폭적이며, 명백하고, 열광적이며, 애정이 넘치는 찬사"를 보냈다. 총회가 끝난 직후, 정확히 말해서 1933년 6월 27일에 독립 선교부를 설립하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첫번 공식 모임이 있었고,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 정관이 채택되었다. 메이천이 새 선교부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3. 새 선교부의 합법성 이듬해 1934년도 총회는 독립 선교부의 폐지를 명했으며, 또한 모든 장로교 회원들이 그 선교부와 관계를 청산하도록 요청했다. 총회의 결의에 따라 뉴 브룬스윅 노회는 메이천을 재판할 7인 징계위원회를 임명했다. 다시 이듬해 1935년 3월 29일 메이천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청원서가 대회와 이듬해 1936년도 총회에도 제출되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1936년도 총회는 "1934년 결의"(the "1934 Mandate")를 확인하고, 총회 재판국은 뉴브룬스윅 노회에 메이천을 정직 시키도록 지시했다. 1936년도 총회가 끝난 지 오래지 않아서 새 교단이 조직되었다. 새로 출발하는 교단의 처음 이름은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였으나, 1939년도 2월에 소집된 제 5회 때부터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결국 정통장로교회의 설립으로까지 진행된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에 대한 범 교단적 분쟁 동안에 표출된 메이천의 생각들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독립 선교부가 장로교 원리에 위배되는지 고찰해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는 교단의 공식적인 선교부와 독립선교부(들)을 항상 인정해 왔다고 하는 점이다. 1869년 미합중국 장로교회 안에 구학파(the Old School)와 신학파(the New School)가 재연합했을 때, 구학파는 해외선교부를 가지고 있었고, 신학파는 해외선교부를 대행하는 미국 해외선교부(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를 운영하고 있었다. 분리된 두 교단이 하나로 합쳐지기 전에, 구학파의 총회와 신학파의 총회는 각각 기독교적인 사역에 있어서 자유를 고려하는 견해를 명백히 표명하는 공동 선언서를 채택했다. 결의안 6번은 아래와 같다: 국내와 해외선교를 위한 선교부 또는 일단의 위원회, 그리고 교회의 다른 종교적 사업이 있어야 하는 바, 이것은 양 교회가 그대로 유지
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의 후예/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목사/ 리전트칼리지 조직신학 교수
마틴 로이드 존스, 청교도의 후예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때로 보면 그는 청교도 같아요.” 판단의 근거는 전혀 잘못된 것이지만, 세익피스피어의 글에서 마리아가 심술 꽃은 익살광대 말볼리오를 가리켜 했던 말이 이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빗 마틴 로이드 존스에 대해서도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청교도’ 라고 부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한 의미의 청교도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청교도들이 남의 흥이나 깨고 항상 얼굴이 굳어 있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청교도들은 쾌락이 경건을 배제하거나 역(遊)으로 경건이 쾌락을 배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처럼 청교도들은 오히려 이런 자세를 정죄하였다. 로이드 존스 박사도 그들과 같은 노선을 걸었다. 금욕주의를 가장하는 것은 미신적인 어리석음 아니면 어린애처럼 미숙 한 것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로이드 존스는 순수한 청교도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청교도 목사들은 언제나, 건전한 경건은 명랑하고기쁨이 충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이드존스박사는. 공적인 자리에서 엄숙해 보이고 카메라 앞에서도 보기 좋은 미소를 지은적은 없지만, 확실히 매우 명랑하고 상냥하며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즐거움이라는 하나님의 선물, 즉 피조물을 즐기는데서오는 기쁨과 구원의 즐거움, 이것은 로이드존스가 늘 강조하던 바이다. 청교도의 노선을 따라 로이드 존스 박사는 역사적인 실제의 청교도 사상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사상의 대부분에 진심으로 공감하였다. 그는 자신이 17세기 사람이라기보다 오히려 18세기 사람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이 말은, 복음 전도와 부흥신학에 있어서 조지 횟필드 및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스타일이 교회를 위한 로이드 존스 자신의 최고 이상이자 자기 삶의 최고 목표라는 의미였다 . 그러나 그가 17세기의 청교도 자료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설교 시에 그가 청교도 저술가들의 글을 여러 차례 언급한점, 목회 초년병들과 심신이 지친 목회자들에게 청교도의 서적들을 읽으라고 끊임없이 권한 점, 그자신이 이 저술들을 탐독했다는 사실 (그의 결혼예물 가운데는 오웬과 백스터의 작품들도 있었다), 1950년부터 1979년까지 연례의 청교도와 개혁주의 연구모임(Puritan and Reformed Studies Conference, 나중에는 주관자가 바뀌고 Westminster Conference로 개칭됨) 을 주관했다는 사실, 출판사Banner of Truth Trust의 청교도 서적 복간 프로그램을 후원한 사실, 청교도들의 저술과 청교도에 관한 서적들을 주로 다룬 복음주의 문고 (Evangelical Library)의 사역을 뒷받침한 점 퉁이 그런 사례들이다 . 또한 1971년의 \"청교도사상과 그 기원” (Puritanism and its Origins)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기도 했다. 1925년부터 “청교도들과 그들의 작품들에 관한 살아있는 진정한 관심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사역 전체가 지금까지 이것의 지배를 받아왔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그가 일생 동안거의 언제나 청교도사상에 의존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놀랄 만큼 독자성이 강한 사상가였으나 자신이 받은 유산(웨일즈인, 비국교도, 개혁주의)을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 유산에 대단한 매력을 느끼고 이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리고 이 유산들 중에서도 역사적 청교도들이 대단히 영예로운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내가 로이드 존스 박사를 처음만난 것은, 레이몬드 존스톤과 내가 둘 다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서 , 연례 청교도 연구모임에 관한 우리의 비전을 박사님 앞에 펼쳐 보이고 이를 실현하는데 도움을 얻기 위해 그의 교회 집무실로 찾아갔을 때였다. 당시 이 아이디어를 환영하면서 그가 보여준 침착한 모습 속의 상기된 표정에, 그리고 극도로 친절한 그의 태도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 그는 우리를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손님으로 환대하면서 우리 모임의 영구의장직을 수락하고, 교회의 여성도들을 통해 점심식사와 차까지 대접하였다. 그 후 해마다 그는 이틀간의 이 모임을 어길 수 없는 중대한 약속으로 간주하였다. 어느 해에는 내가 하루 밖에 참석하지 못하자 나의 우선순위가 잘못됐다며 아주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책망하였다. 세월이 흘러 이 회의의 참석 인원이 1950년의 20 명에서 200명 이상으로 늘어났을 때 박사님은 내게 이런 말을 하였다. 즉 그때까지 박사님은, 레이몬드와 내가 청교도 신앙과 경건의 표준을 세상에 알리고자 애쓰면서 보여준 이러한 열성(熱誠)을, 하나님께서 영국에서 영적 사역을 부흥시키고 있다는 일련의 징후 가운데 하나로 생각해왔으므로, 그 자신도 이 회의에 할 수 있는한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 청교도사상연구모임에서 그는 탁월한 기억력으로 연사가 발표한 내용을 정확히 지적하였다. 모임의 참석자 대부분은 목사들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토론문제들은 목회 지향적이었다. 1959년부터 1978년까지 그가 폐회강연을 맡았는데, 이때 발표한 주제들이 대단히 흥미롭고 다양하다. 그 중에는 “부흥 : 역사적, 신학적 조망” (1959), “존 칼빈과 조지 휫필드” (1964), “프랑스혁명과 그 후” (1975) 등 도 있다. 이런 것들과 기타 많은 주제들은 사건과 인물, 역사에 대한 그의 놀라운 식견과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폐회강연을 통해 로이드 존스 박사는 영적 건덕을 위한 열정적인 지혜와 비전, 정신적 지극과 도전을 주었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여러 면모들 우선, 그는 웨일즈인이었다. 웨일즈인답게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민감하고 따스하며 매력적이고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전형적인 웨일즈인처럼 감상적이지는 않았다. 또 전형적인 웨일즈 설교가처럼 설교에서 제멋대로 상상의 비약을 감행하지도 않았다. 그는 법정의 변호사처럼 말하며 사고했다. 둘째로, 로이드 존스는 훈련을 잘 받은 유능한 의사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과거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문제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신학적 영적으로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 하고서, 여기에 근거해 모든 사물과 사람을 조직적으로 분석하며 고장난 것과 결여된 것을 찾아내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남이 말하지 않은 것이 실제적인 죄나 오류 못지않게 중요한 영적, 신학적 허약의 표정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바트 병원(Bart\'s Hospital)과 할리가(Harley Street) 시절에 도 의학적인 면에서 명석한 진단자였듯이 그는 신학적, 영적으로도 명민한 진단자였다. 그의 마음을 끌었던 청교도 저술가들의 뛰어난 장점 가운데 한 가지도 이것이었다. 그들 역시 영혼의 의사로서 성경에 따라 신학적, 영적으로 바른 것을 깊이 이해하고 , 이틀 속에서 영혼의 문제를 철저히 진단하며 분석하였다는 점이다. 셋째 , 로이드 존스 박사는 걸출한 은사와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성경적, 합리적, 실천적, 목회적신학자였다. 그는 신학교를 다닌 적이 없지만 뜻을 다해 독학하며 끊임없이 독서하고 이슈들을 철저히 사고, 묵상하였다. 그리고 내가 그와 만난 이후를 보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보수주의적 개혁주의를 견지하며, 어느 신학적 모임에서든 탁월한 식견으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였다. 그는 책을 속독하지 않고 천천히 읽었다고 하나 각 주제에 관한 주요한 서적들을 정기적으로 탐독 하고 그들의 견해가 자신과 어떻게 다른지를 검토하였다. 넷째 , 그의 목회사역에는 선지자적특질(quality)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내가 그와 만난 이후 그는 종교적 제도권으로부터, 그리고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종교적 주류문화로부터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는 웨일즈 교회들의 모호한 감상주의와 잉글랜드 복음주의자들의 반지성주의 및 성경과 복음에 대한 양쪽의 불신앙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물론 평신도들과 성직자들 가운데 그에게 경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공식적인 기독교계안의 그의 동배들은 그를 유능하지만 매우 유별난 괴짜로밖에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진보주의적인’ 입장에 만족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로이드 존스를, 오래 전에 그 생존력을 상실한 사역 형태로 후퇴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그의 능력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행동에 찬성할 수도 없었다. 주류를 거스려 헤엄치며, 인기 없는 진리를 옹호하고, 제도권의 인습적인 만족을 비판하며, 세상과 교회 안의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라고 재촉하며, 현대주의의 파산을 선포하고, 현대주의의 교만한 대표자들에게 옛 길을 지적한다는 것은, 권력의 회랑에서 한번도 인기 있는 처방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 하지만 분명 그에게는 이런 고립에 대처할 역량이 있었다. 스펄전이 세속화논쟁(Downgrade controversy)에서 패배하고, 케직대회의 가르침이 국교회의 칼빈주의를 침몰시키며, 자유주의와 사회복음이 웨일즈의 강단들을 점령한 이후 개혁주의 신학의 실(絲)은 사실상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2차 세계대전 후에 개혁주의 신학의 실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복음주의를 엮음으로써 이것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의 사역이 이런 다행스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데는 기독학생회 (Inter-Varsity Fellowship)의 초대 회장 더글라스 존슨(Douglas Johnson)의 공헌이 컸다. 로이드 존스 박사를 후학 양성 사역에 끌어들인 이가 그였다. 이를 통해 로이드존스는, 부상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복음주의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식견을 갖추어 줄 수 있었다. 또한 로이드 존스를 설득해 로이드존스 유력한 목회자 친교단체, 웨스트민스터 펠로우집을 만들게 한 이도 존슨이었다. 이 단체를 통해 로이드 존스는 사실상 초교파적으로 수백 명의 성직자들에게 주교와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박사는 일생 동안 교계의 동배들 대다수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살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때문에 그가 유달리 청교도들에게 친밀감을 가졌던 것 같다. 청교도들은 종교개혁 이후 국교회가 설립될 당시 따돌림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그가 아는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성경적인 모습으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어떤 형태의 비인기나 거부당함도 사양하지 않는 결단력 있는 사람들 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골수 개혁파, 교회 중심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교회 중심주의자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경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진작시키는 핵심기관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는 항상 교회의 상태였다. 전반적으로 그의 설교는 시종일관 두 가지 분야에서 출발하고, 그 분야에서 맴돌며, 그 분야에 안착하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두 가지 분야는 이것이다. 그 하나는 교회의 상황이었다. 교회의 상황에 대한 그의 최종적 처방은 교회가 옛날의 신앙과 실천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성령의 부흥이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세상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그의 최종적 처방은 3R(Ruin 멸망. Redemption 구속, Regeneration 중생)의 성경적 복음이 성령의 권능으로 선포되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박사는 일차적으로 스스로를 전도자로 생각했으나 사실 교회의 상태는 잃어버린 자들의 상태 못지않게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어떤 국교도도, 심지어 국교파 청교도도 그 자신처럼 교회에 대해 진지하게 염려하지 않았으며 염려할수도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1960년대에 그는 이에 관해 나에게 자주이야기 했었다. 그의 교회론은 해를 거듭하면서 발전 하였다. 장로교 목사로 안수 받고 죽는 날까지 공식적으로 장로교인이었지만 그는 교회정치체제와 관련해 ‘확신 있는 독립교회주의자’ (그가 나에게 말할 때 사용한 표현임)가 되었다. 그리고 성인 세례방식과 관련해, 침례 아닌 관수식(뿌리거나 적시기)세례를 끝까지 견지하였지만 언약의 자녀들에 대한 유아세례는 중단하였다. 신조와 의식 절차의 이러한 혼용은 그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흔하지 않은 행위였다. 그러나 그는결코 교회정치 체제를 이슈로 삼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서로 간에 다양한 조직과 관습을 성경에 직접 반하지 않는 이상 이의 없이 용납하고, 힘을 한데 결집해,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지도와 권위 아래 교리적 순결, 영적 깊이, 선교적 생명력을 공동으로 추구하자고 역설하였다. 이렇게 하면 기독교의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교회의 실질적 건강이 촉진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처음에 그는 교파에 관한 문제를 한 켠에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해가 가면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주요개신 교단들이 성경적 개혁신앙과 삶을 받아들이고 영적 부흥을 함께 도모할 가망이 보이지 않자, 그리고 그들과 WCC의 연계가 그들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하리라는 판단이 들자,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이들 교파에서 탈퇴해 옛날식 독립교회 형태의 새로운 ‘무교파’ 연합회를 결성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라고 그는 생각하게 되었다. 1960년대 에, 2천명의 청교도 목사에 대한 1662년도의 추방사건을 기념하는 집회 이후 로이드 존스 박사는 자신의 이런 견해를 공표하고 복음주의 내의 교단 동료들에게 분리를 촉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제스처는 양면으로 강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66년 런던에서 열린 비분리주의적 복음주의 동맹의 대규모 집회에서 박사는 힘을 다해 이를 호소하였으나 존 스토트가 이를 논박하고 나섰다. 본질적으로, 이 분리에 관한 로이드 존스 박사의 논증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주류 교단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에큐메니칼의 곱지 않은 친선 정책에 비추어볼 때 이 분리가 지혜로운 처사라는 것 이었다. 둘째는 이 분리가 복음주의의 하나됨을 보여주는 효과적이고 영광스러우며 그리고 필수적이기까지 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하나됨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종파분립적인 행위라고 보았다. 셋째는 복음주의자들이 현재 자 교단 내의 온갖 악과 연합해 죄를 짓고 있으므로 분리야 말로 당연한 임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복음주의 목사들의 대부분은 자 교단 안에 머물며, 그 안에서 계속 투쟁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결론을 내렸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생애의 마지막 15년간 이 이슈를 역설하고 이에 대해 특히 국교도들에게 압력을 넣게 되자 개인들 간에 소원(陳遠)현상이 발생하였다. 필자도 이를 면하지 못했다. 박사의 그런 주장은 복음주의 공동체를 분열시켰다. 박사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은 분리하지 않는 형제들과 협력하는 것이 타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 때문에 잉글랜드에서 그의 전반적인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이해하기에는 이것이 성경적이고 청교도적인 것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즉 이것은, 미봉책을 거부하는 거룩한 열심, 그리고 교회의 사태가 잘못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체 없는 개혁’을 역설하는 거룩한 갈망이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이런 정신이 청교도 사상의 실질적인 핵심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로이드존스박사의 분리운동은교회의 순결에 대한 청교도적 이상을 따르고자 한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분리운동과 관련해 그가 현실주의적 태도를 결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해 볼만하다. 박사는 원칙적인 이슈에 관해서 공적으로 강력히 설파하였으나 그가 염두에 두었던 새로운 유사교단(‘비교파적인’ 교파)의 청사진을 만들어 자기 비전을 구체화 시킨 적이 없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요구된다는 점을 제외하고 대안이라 할만한 것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조직하는 일을 싫어하였으며, 어떤 모험적 사업이 지나치게 고도로 조직화될수록 영성이 저하될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는 점을 언제나 잊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확실히 유능한 경영자였다. 그 리고 분명 새로운 집단을 만드는 데는 어느 정도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솔직히 고백하고 싶은 점이 있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분리 주장의 성공적 결실을 바랐다기보다 분리 요구의 제스처만을 보이고, 이에 따라 복음주의적 국교도들 과 침례교 연맹안의 침례교도들, 세계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비판하는 일 그 자체에 오히려 더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처럼 남에게 거부당할 것을 얘기하면서, 당대에는 망각된다 하더라도 후대에는 알아줄지도 모를 어떤 의의 깊은 증언을 남기는데 지신의 주된 목적을 두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도 나에게는 있다. 계획 없는 말만의 이 분리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아마도 옳은 판단 일 것이다. 즉 폭넓은 지지를 얻어내고 광범위한 행동 욕구를 일으키기 위해 그 자신이 말했던 내용을, 성령께서 과연 사용하실 것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그는 직접 현장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교파의 우두머리가 되려 하는 듯한 어떤 모습을 비침으로써 자신의 선지자적 역할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누가 그를 비난 할 수 있겠는가? 로이드존스가 본 청교도 사상의 본질 로이드 존스 박사의 강연 “청교도와 그 기원”, “청교도 사상의 창시자 존 낙스”에서 청교도 사상의 본질에 관한 그의 견해가 분명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는 청교도 사상을 하나의 ‘정신적 성향’으로 보았다. 이것은 독자적인 성경연구에서 출발하고, 연구결과를 교회생활에 적용할 것을 강조하며, 교회에 대한 행정당국의 통제에 도전하고, 개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할 때는 언제나교회 제도권과 결별하는 그러한 정신이다. 성경 진리의 적용에 언제나 청교도 신앙의 핵심이었 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는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청교도가 없다.… 적용은 진정한 청교도의 특정이다.” 요컨대 “청교도는 주로 순수한 교회, 진정으로 개혁된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청교도들이 가르친 것들과 은혜의 교리를 강조한 점, 그리고 목회신학을 강조한점 등을 좋아하고, 이런 면들에 아무리 탄복을 금치 못한다 하더라도 순수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에 일차적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확실히 청교도임을 지칭할 자격이 없다.… 교회론을 핵심에 두지 않는다면 진정한 청교도의 자세, 청교도의 견해, 청교도 정신, 청교도의 이해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이런 견해는 백번 타당하디만 여기에 추가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지극히 현대적이었던 선대의 사람 칼빈처럼 중세의 유산을 물려받은 청교도들도 교회의 신앙고백, 질서, 권징, 예배 및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경건과 정직, 그리고 인간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정의와 중용, 이 모두를 단일한 완전체의 구성 요소로 보았다는 점이다. 청교도들의 마음에서는 개인과 사회와 교회 공동체의 모든 요소가 상호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 모두가 ‘여호와께 성결’ 해야 했다. 두 번째는, 특정의 정책적 문제나 기타 많은 문제들에 관해 청교도사상 내에서도 견해가 다양했다는 점이다. 로이드 존스박사 자신이 말한 대로, “대략 1640년 무렵에는 본질적으로 국교도적인, 원래의 청교도가 나타났다. 물론 이들은(영국국교회로부터) 비분리주의적이었다. 다음에는 역시 비분리주의적인 장로교 형태의 청교도가 출현하였다. 그리고 다른 극단에서는 아주 명백하고 뚜렷하고 공공연한 분리주의자들이 등장하였다.” 그 외에도 국교회에 ‘수시로 순응하는’ 반(半)분리주의자라 할 만한 이들도 있었다. 교회정치 체제와 정책에 대해 로이드 존스 박사와 나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청교도정신이 본질적으로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기독교이며, 우리가 오늘날 공감해야 할 대상이라는데 우리는 생각을 같이 했다. 로이드존스의 사역에 나타난 청교도적 요소들 그렇다면 그 자신의 사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청교도적 요소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신학을 합리적, 실천적 학문으로 보는 그의 견해는 신학이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한 학문, 이라고 말한 윌리엄 퍼킨스의 정의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그리고 성경을 신학의 원천으로(즉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로), 그리고 기타 성경적 사상체계의 근원으로 본점은 청교도신학의 고전,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둘째로, 그의 설교 행위는 스타일과 언어 형태가 완전히 20세기 적이었으나 그 철학과 방법, 내용면에서는 전적으로 청교도 적이었다. 교리와 추론 그리고 ‘사용’ (본문에서 진리를 끌어내어 다른 성경 구절과 합리적 고찰로 이를 확증한 다음 이를 적용하는 일), 이 삼단계가 그의 일반적인 설교패턴이었다. 그는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역을 선포하는 행위로서, 찬양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는 행위로서, 양식이다. 설교는 공적 예배의 정점이며,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리스도와 복음의 은혜가 설교의 핵심 이어야한다. 적용에서 (그는 서론도 사실적용의 일부로 사용했다) 설교자는 이 시대를 향해 말해야하며, 청중의 내면 속으로 파고 들어가 하나님 앞에 놓인 그들의 죄와 그들의 근심을 직접 다루어야한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상상의 나래가 없는, 단순하고 진지하며 직설적인 언어가 이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다. (리차드 백스터의 저술을 가리켜 처음 사용 되었던 ‘고상한 무관심’ 이라는 표현이 로이드 존스 박사의 문자화된 설교와 강연에도 몹시 잘 어울린다. 설득력 있는 1대1식의 명료한 언어, 청교도적 의미에서의 ‘친숙한’ 언어를 그는 언제나 추구하였다. 말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설교자에게 자유와 직설, 감정이입과 에너지, 열정과 긍휼을 주며 청중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 갈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기름 부으심을, 설교자는 설교 전과 설교 중에 매번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백스터의 말처럼 설교자는 ‘두 번 다시 설교하지 못할 자처럼 ,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설교했노라“ 말할 수 있어야한다. 각 본문에 대한 설교와 함께 성경의 장들과 책들을 계속하여,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강해하는 것이 훌륭한 설교방식이다. 셋째, 로이드 존스 박사는 영적인 경험을 청교도적인 관점에서 풀이하였다. 이에 관한 그의 이해는 두 가지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는 인간 지성의 지고성이다. 그에 의하면, 지성은 의지의 안내자이며 감정의 판단자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간접적인 사역이다. 성령은 우리를 가르치고 움직일 때 먼저 우리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배우게 하고, 우리를 지극해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신다. 성령이 역사하여 지식을 주실 때 지성과 감정을 함께 자극해 신적인 실상들 즉 하나님, 그리스도, 은혜, 용서, 양자삼기, 새 창조, 안식 등을 효과적으로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청교도의 단어인 ‘체험적’이라는 말을 자체의 본질적 용어로 사용해야 한다. 또 최소한의 감정만이 개입되는 기독교가 최상의 기독교라는 관념은, 강력한 감정들에 대한 불합리한 잉글랜드 중류층의 반발일 뿐이다. 그러한 관념은 어리석기 때문에 조소거리에 불과하며, 성령을 소멸하기 때문에 참으로 서글픈 것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에 의하면, 회심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항해 언제나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는 그리스도, 이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데는 회개(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모심) 와 믿음(죄와 무능력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심) 이 포함된다. 설교자들은 청중에게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지적해 주어야 하며, 그리스도께 오는 자들이 얻게 될 평화 와 기쁨, 마음의 변화, 삶의 새 자원을 찬양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에 의하면, 틀에 박힌 20세기식 복음 전도는 세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지성적 설득을 대신하는 조작적인 감정주의는 거짓 회심을 격려하는 일종의 세뇌이다. 둘째로, 설교자가 마치 성령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는, 결산의 촉구 (일반적인 형태는, “이제 여러분에게 결단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믿기 원하시는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도 역시 그와 동일한 좋지 못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셋째로, 회심과 관련해 언제나 철저하고 근본적인 회개를 역설하지 못하므로 진정한 회심자들이 믿은 후에도 영적 성장을 하지 못하고 얕고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문다. 이러한 약점들 때문에 로이드 존스 박사는 현대의 제도화된 복음 전도 방식을 멀리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 즉 성결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서 로이드 존스 박사는 정적주의적(靜寂主義的) 수동 상태를 복음주의적 지성의 현대적인 귀신들림으로 보고, 여기에는 분명한 축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을 놓아드림으로써 하나님이 하시게 하라”, “노력하기를 멈추고 신뢰하기 시작하라’ 등과 같은 표어들은 이런 견지에서 그가 볼 때에 수치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성결에 대한 판에 박힌 말들은 ‘이것을 하 라’, ‘그것을 다시는 하지 말라, ’먼저 기도한 다음 행동하라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청교도들처럼, 영육간의 갈등이 일생동안 지속됨을 강조하면서, 이를 초월 할 수 있다는 완전 주의적 주장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다. 영적 침체도 로이드 존스 박사가 주의를 기울인 문제였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의사들과 정신병 의사들이 다루는 정신적 우울증과 종종 관련되면서도 그와 다른 상태이다. 이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에 대한 불신이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불신앙에서 오는 감정들과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때 당사자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연단시키면서도 자신의 약속에 언제나 신실하다는 사실에 영적인 눈을 고정하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리라는 사실을 시편 42편 같은 형태로 고백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 박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량에 대한 확신과 미래의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은 그의 삶의 최고 축복이었다. 또한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와 후사임을 직접 증언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해야 할 최고의 위안이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로마서 8장 15~17절이 말하는 이 증언을, 성령의 인침(엡 1:13, 4:30)과 동일시하고 또 사도행전의 몇 구절에서 말하는 성령을 받는 것과 동일시하면서, 언제나 이를 어떤 특정한 체험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 파스칼로부터 에드워즈, 무디, 특히 존 플레벨 같은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강렬한 확신과 변화의 순간에 관해 기록한 여러 성도들의 체험을 실례로 들었다. 그 자신도 천국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런 체험을 한 번 했다고 한다. 이것은 30년 전 내가 그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제 1차 청교도 연구 모임에서도 이 주제에 관해 강연하면서 직접적 확신에 관한 청교도 교리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간과된 진리라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의 런던사역 후반기에는 로마서, 에베소서, 요한복음에 대한 정교한 강해에서(지금은 모두 책으로 출간됨) 이 문제를 길게 다루었다. 청교도들도 로마서 8장 16절과 에베소서 1장 13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였지만, 혹자들은 성령의 증언이 단일순간의 체험이라기보다 끊 임 없는 질적 체험을 가리킨다고 보고, 에베소서 1장 13절은 믿은 후와 어느 시기에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라기보다 믿을 때에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모든 청교도들은 양자됨에 대한 지극히 분명한 체험적 확신을 구하고 남에게도 이를 구하도록 촉구하였다. 이점에서 로이드존스 --------------------------위에 한 줄 잘렸음---------------------------- 마지막으로, 청교도들은 금세기를 포함해 여느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경건한 삶의 면류관으로 보았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종종 설교 시에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함을 강조하였으며, 한 동료에게 자기 삶의 종말은 유종의 미를 거둘, 자기 사역의 마지막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면에서는 그도 영적인 체험에 관한 17세기 청교도들의 가르침을 초월하였다. 즉 주기적인 부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용하시는 주요 수단이라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소신을 수용한 점이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부흥이란 영적인 체험이 매우 깊은 교회에 내리시는 성령의 쏟아부어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 쏟아부어짐이 일어날 때를 결정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하지만 그 때를 앞당길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표대로 일하신다. 이상이 로이드 존스 박사의 견해였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서는 이런 사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청교도들 모두가 종교개혁을 참된 신앙의 부흥으로 인식하였지만, 청교도들은 어느 시기에도 자신들의 사역과 당대의 역사(歷史)를 주기적 부흥의 비전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1929년에서 1931년의 남부 웨일즈 목회에서는 그가 이런 부흥을 어느 정도 맛 보았으나, 잉글랜드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는 이 부흥을 결코 경험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 에게 슬픔의 한 근원이었다. 하나님이 부흥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그의 신념과, 개개교회들이 연합하면 특이한 영적 생명력과 권능을 얻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 (그는 분리 --------------------------위에 한 줄 잘렸음---------------------------- 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알기로 그가 설명한 적이 없다. 어쨌든 에드워즈의 부흥교리가 일생 동안 그의 가슴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영적 거인들이 다시 일어나길 바라며 ‘청교도 같은 사람?’ 그렇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일생의 대부분을 그렇게 살았다. 스펄전은 자기시대에 마지막 청교도라고 일컬어 졌거니와, 이 칭호는 로이드 존스 박사의 생전에도 그에게 붙여졌다. 아마 지금도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칭호는 다른 사림들에게도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 가운데는, 그의 청교도 사상을 이어받은 젊은 목사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지성적으로, 영적으로 로이드 존스 박사가 우리에 전해준 청교도 사역의 찬연한 횃불을 이어받을 위대한 거인들을 일으키시리라고 우리가 기대해보는 것은 백 번 합당하다. 지극히 위대했던 청교도들, 예를 들어 오웬, 백스터, 굳윈, 십스, 퍼킨스, 하우 그리고 3세기에 걸친 그들의 지극히 위대한 추종자들, 예컨대 에드워즈, 스펄전, 라일 그리고 로이드 존스 등과 똑같은 인물들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의 교회에 성숙, 원리, 지혜, 은사, 경건 등에 있어서 그들과 유사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옹호한 기독교의 본질을 충실히 유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기념비적 인물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이런 위대한 인물들이 곧 나타나기를 염원하는 바이다. 오늘날의 교회에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 제임스 패커 / 캐나다 뱅쿠버에 있는 리전트칼리지 (Regent College)의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교수로 있다. 많은 저술을 낸 바 있는 그는 국제적인 베스트셀러「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으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로이드존스 박사의 장녀 엘리자 벳과 옥스퍼드 동기생이기도 한 패커 박사는 로이드 존스 박사와 함께 다년간 청교도 연구모임을 주재하기도 했다.
메가처치(Mega Church)의 배태와 성장/2008-04-14
메가처치(Mega Church)의 배태와 성장 신 광 은ㆍ박 삼 종 (2008.04.14) Ⅰ. 메가 처치는 세속과 맞물려 탄생 메가 처치(Mega Church)는 문화적 교회다. 문화적 교회라고 해서 문화가 꽃피는 교회라는 뜻이 아니다. 세상 문화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수용한 교회라는 뜻이다. 교회가 수용한 세상 문화란 무엇인가? 메가 처치는 우선적으로 근대 문화(modern culture)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교회다. 특히 메가 처치는 근대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적극적 수용을 통해서 탄생할 수 있었다. 아울러 포스트모더니티 역시 과감하게 수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메가 처치는 '카니발'이나 '바보제'와 같은 '축제로서의 예배 기능'(암 6:4-6, 사 5:12, 출 32:6, 고전 10:7)을 적극 개발하고 또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메가 처치 현상은 사회문화적 조류와 흐름을 교회가 적극 수용함으로써 생겨난 교회다. 메가 처치가 문화적 교회요, 메가 처치 현상이 세속적인 조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 그것은 메가 처치 현상에 대한 통속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메가 처치를 가리켜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한 결과'요,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을 부으신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메가 처치는 성령님의 역사나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이기에 앞서 교회가 세상의 흐름과 세속적 조류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생겨나게 된 결과다. 따라서 메가 처치는 태생적으로 세속적인 교회다. 1) 대중의 출현 그렇다면 교회가 받아들인 세속적 흐름이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 번째는 '대중'(mass)의 출현이다. 오르테가 가제트에 의하면 대략 19세기경에 갑작스럽게 대중이 출현했다고 한다. 1800년대까지 유럽 인구는 1억 8000만 명을 넘은 적이 없다. 그런데 1800년부터 1차대 전까지 유럽 인구는 갑작스럽게 4억 6000만 명으로 성장한다. 거의 3배나 증가한 셈이다. 전 세계 인구는 1800년까지 6억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100년 사이 세계 인구는 16억으로 성장하고, 다시 100년이 지나면서 60억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급속한 인구 증가가 만들어 낸 한 가지 중요한 현상은 '양'과 '수'로 승부하는 거대한 무리들, 곧 '대중'(mass)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대중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텅 빈 자리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곳곳마다 사람들로 그득하다. 시각적인 거대한 무리, 몹(mob)이 온 세상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리에도 사람들이 가득하고, 기차역이나 오페라홀·식당·백화점·공원 등에 사람들이 넘쳐 나기 시작했다. 마치 대접에 물이 넘치듯 모든 곳은 갑자기 대중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대중의 위력, 곧 '숫자'가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대중은 자신들의 무기인 '숫자'로 자신들의 생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1820년대 파리에서 욕실 딸린 주택은 단 10채밖에 안 되었지만 대중은 주장하기를 "모두가 이런 주택을 소유할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했다. 모두가 소비하고 소유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를 막는 어떠한 제한이나 장벽도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이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生)의 제한(limitation)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나 대중은 이를 거부했다. 생의 제한은 급속하게 제거되었으며, 무한대의 소비·소유·향유의 욕망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권리 주장으로 말미암아 근대 세계의 '거대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대중의 분출하는 욕망 덕분에 모든 것이 커졌다. 백화점·식당·극장·역·공원 등 이 모든 것은 '똑같이 누리는 권리'를 가진 대중들을 위해 커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대중을 위해서 백화점도 커지고, 극장도 커졌으며, 상품은 대량생산되었고, 도시는 폭발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감히 대중의 요구를 내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교회도 바로 이 대중을 받아들여 커졌다. 이것이 메가 처치다. 따라서 메가 처치는 대중 교회(mass church)다. 2) 도시화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도시화(urbanization)다. 과거에도 도시는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전혀 새로운 도시가 나타났다. 이것을 근대 도시라고 한다. 근대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주로 산업화와 함께 일어난 현상이다. 그러자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 팽창이 너무도 갑작스러워 이를 '도시 폭발'(urban sprawl)이라고 부른다. 과거의 도시와는 다르게 근대 도시는 성곽과 같이 도시의 크기를 제한하는 경계선이 없다. 도시는 무한히 확장가능한 공간이 되었다. 인구 1000만 명 이상이 사는 초거대도시, 메트로폴리스가 출현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메트로폴리스끼리 결합되는 메가로폴리스 시대가 왔다. 이처럼 도시는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계속해서 도시로 몰려오고 있다. 이것이 근대 도시의 특징이다. 근대 도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도시가 사람들이 사는 일반적인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18세기까지 도시란 극히 예외적인 공간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도시지역에 살았다. 1800년대 이전까지 전 세계의 도시 인구는 10%를 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19세기 말, 5만 명 이상의 도시는 서울과 부산, 단 2곳뿐이었으며, 대부분의 도시는 1만 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전 세계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선진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경우 도시 인구는 80%에 육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이와 같은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어서 종 내에 전 세계 모든 인구는 도시에만 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미 오늘날 농촌은 자급 능력을 상실했으며, 식량 공장으로 도시에 편입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미 사람이 사는 모든 곳은 도시로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가 처치는 바로 이 근대 도시에 세워진 교회다. 도시가 없다면 메가 처치도 없다. 메가 처치 현상은 근대 도시가 만들어 낸 현상이다. 메가 처치는 근대 도시의 여러 특성들을 적극 수용했다. 그래서 메가 처치는 완벽하게 도시에 적응된 교회다. 그리고 더 나아가 메가 처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도시다. 모든 메가 처치는 자기만의 작은 도시를 꿈꾼다. 메가 처치의 모든 조직·구조·활동은 도시의 축소판이다. 그래서 메가 처치는 도시성(cityness)으로 충만하다. 도회적인 흥분·자극·세련미·추상성 등이 메가 처치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아니다. 초대 교회도 도시에 있었으나 그들은 철저히 반도시적이었다. 어쨌든 메가 처치는 도시성을 적극 수용한 도시 교회(city church)다. 3) 테크놀로지 세 번째로 주목할 것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이다. 테크놀로지가 없다면 메가 처치도 없다. 메가 처치는 성장의 한계(growth limitation)가 없는 교회인데, 이는 성장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도록 하는 가공할 만한 테크놀로지의 발달 덕분이다. 가령 교통의 발전이 이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고, 이동의 자유가 성장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서울 모 교회 장로는 제주도에 사시는데 매 주 비행기로 예배에 출석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케이스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메가 처치 교인들도 교회버스, 승용차,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교회가 어느 곳에 있든지 자유롭게 이동하여 교회에 출석할 수 있다. 메가 처치는 마음껏 이동의 자유를 즐기는 점퍼(jumper)들의 교회다. 목사의 설교를 어느 곳으로나 전송할 수 있는 전자 테크놀로지의 발전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목사는 더 이상 멀리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설교를 듣게 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 마이크를 쓰면 되고, 소리가 작으면 볼륨만 조금 키우면 된다. 너무 멀어져서 목사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TV화면을 통해서 목사의 얼굴을 소리와 함께 전송하면 된다. 메가 처치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초대형 스크린은 목사의 얼굴을 얼마든 크게 키울 수 있다. 그래서 수만 명이 운집하는 돔형 실내 체육관에서도 천정에 매달린 4면 대형 스크린으로 얼마든지 목사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자 테크놀로지는 메가 처치를 본당 중심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메가 처치는 본당을 넘어선 교회다. 부속실로 전자 신호를 송출하여 본당 밖에서도 얼마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위성 송출을 통해서 전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집에서 편안히 클릭 한 번으로 인터넷 화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전자결제 계좌로 헌금을 송금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쯤 되면 메가 처치의 외곽 경계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메가 처치는 규모 때문에 불가피하게 테크놀로지를 필요로 한다. 규모가 작으면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낮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테크놀로지 의존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메가 처치는 테크놀로지 의존적인 교회다. 부속실에서 TV화면으로 예배를 보는데, 갑자기 음향시스템이 문제가 생겨서 소리는 안 들리고, 그림만 보이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이런 경우 예배는 엉망이 되고 제대로 드려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메가 처치가 얼마나 테크놀로지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이다. 그러니 메가 처치는 실상 테크노 처치(techno church)인 셈이다. 테크놀로지란 단순히 기계장치나 장비가 아니다. 테크놀로지란 자크 엘룰(Jacques Ellul)에 의하면 '목표하는 바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의 총화'다. 이런 점에서 테크놀로지는 정신의 문제요, 태도의 문제며 나아가 그 자체가 하나의 영성(spirituality)이다. 메가 처치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전부 테크놀로지다. 행정기술, 조직기술, 경영기술 등 무진장한 테크놀로지가 교회를 유지·관리·성장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선전(propaganda) 테크놀로지다. 세속적인 광고 기법, 심리학적 발견, 통계조사 방법 등을 도입한 설교·교육·예배는 테크놀로지의 위대한 개가다. 테크놀로지를 소유한 메가 처치는 마음먹은 대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울거나 웃게 할 수 있다. 초단위, 분단위로 계획된 큐시트로 컨트롤되는 메가 처치의 예배는 원하는 시점에, 목표하는 만큼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도 있게 되었다. 아마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시점에 78%의 청중을 울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테크놀로지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메가 처치 안에는 테크놀로지의 영이 운행하고 있다. 참으로 메가 처치는 테크노 처치다. 4) 시장 경제의 출현 메가 처치의 출현이 가능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출현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18~19세기에 서양에서 출현한 매우 특이한 경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의 여러 특징이 있겠지만 본 논의와 연관해서는 자본주의가 시장 경제 시스템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시장 경제의 원리는 단순하다. 판매자가 상품을 시장에 내다팔면 소비자가 시장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 이것이 시장 경제의 원리다. 사실 이것은 그다지 새로운 원리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고, 사고하는 시장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 출현한 시장(market)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라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시장이다(최소투자로 최대이익 창출을 위해 오염ㆍ재해ㆍ복지 등의 사회적비용은 외부 사회와 국가와 개인에게 전가). 시장 경제란 바로 이 자본과 시장의 자율성을 신뢰하는 경제 시스템이다(신 자유주의 FTA : 대자본의 자유로운 무역에 관한 협정). 과거의 자본과 시장은 독립적일 수가 없었다. 과거 시장의 질서는 왕이나 국가와 같은 수없이 많은 외부 세력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간섭과 제재를 받아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자본과 시장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시장의 질서는 왕이나 국가가 아니라 시장 자체가 스스로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어졌다. 시장에 맡겨 두면 시장이 알아서 질서를 세우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시장에는 여러 판매자가 물건을 내다 팔고, 또 여러 소비자가 물건을 사려고 할 것인데, 이들의 판매 경쟁과 소비 경쟁이 저절로 합리적인 가격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방임해 둔다면 시장은 판매와 소비, 공급과 수요가 맞물려서 알아서 잘 굴러갈 것이라는 믿음, 더 나아가 이것이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개입한 것이라는 믿음이 19세기에 출현한 시장의 특징이다(부작용 : 독점ㆍ과점 대자본의 횡포). 이 시장 경제의 원리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중요한 원리다. 놀랍게도 메가 처치는 이 시장의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메가 처치는 시장 상황(market situation)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시장 상황이 도래했다. 오늘날 교회는 시장에 내몰리고 있다. 그리고 교회와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판매하도록, 그리고 그 신앙을 구매하도록 설득당하고 있다. 그래서 마치 여러 판매자들이 상품을 시장에 내다 놓으면, 소비자들이 쇼윈도 안의 상품을 원하는 가격에 구매하듯이,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판매하고 또 구매하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 이 채널 저 채널 재빨리 이동하는 채널 하퍼(channel hopper)처럼 손쉽게 기독교 시장에서 구매 상품인 교회를 옮기는 처치 하퍼(church hopper)족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과거에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회가 신자를 선택했지, 신자가 교회를 선택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는 시장에 나와 있는 여러 교회들 중 자신이 원하는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메가 처치는 시장에서 판매 경쟁에 성공한 교회며, 소형 교회는 판매 실적이 부진한 교회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가 크든 작든 모든 교회는 종교 시장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자유경쟁 시장의 원리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결국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모든 교회는 마켓 처치(market church)다. Ⅱ. 교회 크기에 목매게 된 역사 (1) 본 연재글의 중요한 전제 중 하나는 메가 처치 현상이 2000년 기독교 역사상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메가 처치는 20세기의 산물이며, 그 현상은 대단히 최근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메가 처치의 뿌리는 상당히 옛날까지 뻗어 올라가 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교회는 ‘크기’에 눈을 뜨고,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메가 처치를 가능케 한 교회 내부의 동인이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교회가 크기에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추적해보고자 한다. 1. 규모에 대한 무관심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야만인들의 개종이 있은 후, 1000년이 넘도록 교회는 교회의 규모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기본적으로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것이었기에 교회의 규모가 역동적으로 증가하는 현상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히 초대 교회 때부터 시행한 것으로 보이는 교구제 덕분에 개교회가 갑작스럽게 비범한 성장을 보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또 많은 목회자들은 숫자나 규모의 지나친 관심을 세속적 허영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대체로 규모는 진리에 비해서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2. 18세기 대부흥운동: 규모에 눈을 뜨다 그러다가 18세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대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18세기 영국과 미국을 강타한 1차 대부흥, 혹은 1차 대각성 때 교회는 점차 ‘규모’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여러 가지의 개혁과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숫자’와 ‘규모’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영국 국교회 내에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두게 했다. 메마른 설교와 교리 교육, 형식적인 예배에 지쳐 깊은 영적인 잠에 빠져 있던 대다수 교인들이 어스킨(Erskine) 형제로부터 시작하여, 휫필드(Whitefield), 웨슬리 형제(Westley)로 이어지는 위대한 부흥설교가들의 설교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이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교회당은 이들을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최초로 야외에서 집회를 열게 된다. 한번 상상해보라.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와서 야외에서 집회를 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하늘로부터 무한한 성령의 은혜의 소낙비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아직까지 이런 역사는 한 번도 없었다. 놀라운 흥분과 감격이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교회는 처음으로 숫자와 규모에 눈을 뜨게 된다. 3. 조지 휫필드의 착각: 규모를 하나님의 역사로 혼돈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 꼽히는 휫필드의 미국 사역은 그야말로 전설적이다. 회의주의자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마저 그의 설교를 듣고는 고아원을 위해서 전액을 헌금하고 말았다니 말이다. 프랭클린이 참석했던 집회에 모였던 청중의 숫자는 자그마치 3만 명이나 되었다. 규모면에서 1차 대각성운동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을 꼽으라면 휫필드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휫필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숫자와 규모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와 신념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때문에 그는 ‘숫자’와 ‘규모’에 유별나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동원하고 또 자신의 집회에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한 기술적 방법을 적극 개발했다. 이안 머레이나 마이클 호튼 같은 이들은 참 부흥(revival)이 거짓된 부흥주의(revivalism)로 타락하게 된 것은 알미니우스의 신학 때문이라고 하지만 최초로 숫자를 통한 부흥을 추구했던 휫필드는 칼빈주의자였다. 신학적으로 휫필드는 인간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를 강조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복음전도의 ‘효과’(effect)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던 첫 번째 대표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주로 야외에서 이동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 교회로 사람들을 모이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 가운데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구도자 중심의 집회’를 한 것이다. 그는 집회를 열기 며칠 전에 스태프들을 미리 보내서 장소를 확보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분위기를 조성하며, 신문 광고, 설교문 배포, 풍문 조성 등을 통해 휫필드 집회에 기대심을 높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휫필드의 영웅적 면모는 각별히 부각되었다. 전형적인 스타 시스템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휫필드는 집회와 예배에 광고와 선전을 활용했다. 집회의 방식도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동시대의 인물, 조나단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방식은 이미 쓰인 설교문을 설교단에서 읽는 원고설교였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반응은 에드워즈의 관심의 초점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선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휫필드는 달랐다. 그는 배우 출신으로서, 자신의 말과 억양·얼굴표정·몸짓을 적절하게 연출할 줄 알았다. 거대한 군중 앞에서 원고 없이 즉석으로 자유설교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ex tempore) 설교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들고, 발을 구르고, 성서의 이야기를 몸으로 극화하고, 큰 소리로 우는 등 온 몸으로 설교했다. 또 그는 사람들의 양심을 향해 직접 공격했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상스러운 말까지 내뱉었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연출력 때문에 그가 ‘메소포타미아’라는 말만해도 사람들은 울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휫필드가 ‘숫자’와 ‘규모’를 늘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휫필드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집회 참석 인원의 숫자를 뻥튀기하기도 했다. 휫필드가 이렇게 ‘규모’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선한 목적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고자 했던 그의 모습에서 오늘날의 모든 메가 처치의 목사들의 원형을 발견한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사역했던 대중 운동가다. 대중을 마음대로 요리할 줄 알았던 휫필드는 근대 거인주의의 시조로서, 카리스마적 종교 지도자의 모범이요, 미국 대통령 리더십의 원천이다. 4. 노천 캠프 집회와 시장 상황의 개막 휫필드와 웨슬리의 야외 집회는 무엇보다 교구제의 파괴를 가져왔다. 야외 집회를 소개받았을 때 웨슬리는 처음에 주저했으나 ‘영혼 구령’이라는 지상 과제 앞에서 결국 마지못해 수용하고 만다. 그리고 웨슬리는 말했다. “전 세계가 나의 교구다!” 이제 기성 교회가 임의로 잘라 놓은 교구는 새 시대에 새롭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너져야 하는 낡은 장벽이었다. 교회의 질서는 새로운 운동에 의해서 새롭게 재편되어야 했다. 이때부터 교구제는 급속히 무너져갔다. 미국의 부흥운동가들은 노골적으로 견고한 교구제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19세기 이후 미국에서 노천 캠프 집회는 상당히 대중화되었는데, 캠프 집회가 교회당이 아니라 야외에서 열렸기 때문에 부흥운동은 기존의 지역교회 구도를 벗어나 있었다. 캠프 집회에는 불신자뿐만 아니라 기존 신자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부흥사들은 이들의 마음을 도둑질했다. 솔직히, 신자들이 볼 때에도 기존 교회 목사들은 교구제의 보호 아래 안일하고 나태하며 영적으로 무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부흥운동가들은 뜨겁고 능력이 충만하며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만 들고 전진하는 하나님의 참 종처럼 보였던 것이다. 때문에 집회에 참석했던 신자들은 참 지도자를 찾아 교회를 옮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소위 ‘수평 이동 현상’이 이때 이미 발생한다. 대다수 부흥사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더욱 조장했다. 그들은 기존 교회 목사들을 비판하며, 회심조차 체험하지 못한 목사를 과감히 떠나라고 했다. 은혜가 없고 메마르고 능력이 없는 목사를 떠나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부흥설교가들에게로 가라고 신자들을 종용했다. 그리하여 부흥운동이 진행되면서 부흥운동에 소극적이었던 회중교회·성공회·장로교는 교세가 추락하고, 운동을 주도했던 감리교와 침례교는 급성장했다. 이로써 바야흐로 능력과 실력 위주의 목회 시장이 열린 것이다. 부흥운동은 새로운 교단을 출현케 했으며, 수많은 기존 교회와 교단을 갈가리 쪼개 놓았다. 교단이 많아지면서 신자들의 교회 선택의 폭은 점점 더 넓어졌다. 선택권은 점차 교회에서 신자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바야흐로 시장 상황이 열리고 있었다. 부흥사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시장 상황 속에서 신자들은 점차 고객이 되어가고, 교회는 기업이 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5. 챨스 피니의 ‘새로운 방법’ 1) 새로운 방법(new measure) 19세기 2차 대각성운동을 주도했던 챨스 피니(Charles G. Finney)는 교회가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획기적이고도 정교한 방법론까지 교회에 제공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을 ‘새로운 방법’(new measure)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방법이란 부흥을 이루는 방법을 말한다. 부흥이란 크고 놀라운 역사로서 규모가 비범하게 크다는 것이 핵심이다. 죄인들의 회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회심이 ‘많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부흥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은 언제든지 적절한 수단과 방법만으로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피니의 부흥론의 핵심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죄인을 회심시키기 위한 부흥의 방법이 새로운 방법인데, 새로운 방법은 무엇보다 대중 집회가 필수적이다. 큰 교회 건물이 없으면 시청이나 학교 강당을 찾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노천 캠프 집회를 열었다. 이곳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한 다음,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즉시’ 회개하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을 위해서 피니는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들을 동원하였는데, 환풍기를 조절하고, 음악을 신중하게 활용했으며, 그 외에도 예배의 순서를 갑자기 바꾸기, 예배를 연장하기, 거칠고 통속적인 말을 사용하기, 기도와 설교에서 개인의 이름을 거명하기, 예배 시 설교단에서 가까운 사람에게 질문하기 등이 그 예다. 무엇보다 피니는 집회의 효과를 구체적인 척도로 측정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 전부터 회심할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했던 ‘제단 초청’(altar call) 방식을 적절히 변형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구도 좌석’이다. 집회가 끝날 때쯤 피니는 회심할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맨 앞에 비워둔 의자, 곧 구도 좌석에 앉게 했는데, 이것으로 그는 회심자의 숫자를 계산할 수 있었고, 집회의 효과를 숫자로 측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집회의 목표는 구도 좌석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수의 사람들을 앉히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강렬하고 응시하는 듯하며 짜릿한 느낌을 주는, 미친 듯한 예언자의 눈으로 청중들을 노려보며, 그들의 이름까지 호명하며 회개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지금 즉시!” 회심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소리쳤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고 협박했다. 청중들 사이사이에 앉은 회개를 돕는 스태프들은 죄인들이 결단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그들이 결단하고자 일어설 때 즉시 그들을 구도 좌석으로 인도했다. 이러한 방식은 직업적 부흥사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어떤 목사는 시계를 꺼내들고 “15분 안에 회개하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2) 오직 부흥으로 피니에 와서 부흥은 이제 절대적인 것이 된다. 부흥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피니의 주장이었다. 피니는 자주 신자들에게 이렇게 위협하곤 했다. “지금 당신이 그를 돕는다면 그가 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그를 돕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 영혼의 피 값을 누구에게 찾겠는가?” 수많은 영혼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구하는 것, 이로써 거두어지는 부흥, 이것이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말하는 부흥이 ‘숫자’와 ‘규모’의 동의어나 마찬가지라는 데 있었다. 결국 그는 숫자와 규모가 전부라고 말한 셈이었다. 이로써 피니는 오늘날의 메가 처치를 향한 속도제한 없는 고속도로를 닦아 놓았다. 3) 부흥 테크놀로지 “부흥을 일으키고 싶어도 안 되는걸 어떡하냐?”라고 피니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이 부흥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아니면 부흥을 원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피니는 최초로 방법만 올바르면 결과는 자동으로 얻을 수 있다는 테크놀로지의 원리를 복음 전도에 적용한 사람이다. 피니의 부흥론은 사실 테크놀로지다. 피니에 의하면 신앙이나 회심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일’이다. 그리고 부흥은 ‘기적’이 아니라 정확한 ‘과학’이다. 부흥이란 ‘자연의 힘을 옳게 사용’하면 언제나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그는 말한다. “부흥은 결코 기적도 아니며 또 기적에 의존한 것도 아니다. 부흥은 당면한 수단을 옳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 농사 수단을 제대로 활용하기만 하면 농부는 풍작을 거둘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방법이 옳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피니는 이렇게 말했다.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한다.” 부흥만 이루면 과정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오늘날 대다수 메가 처치 목사들의 전형적인 목회철학이다. 4) 표지로서의 부흥 부흥이 만일 과학이고 테크놀로지라고 하면 이제 누구라도 부흥을 이룰 수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그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자나 교회가 문제라는 말이 된다. 마음만 먹으면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데도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회나 신자가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자나 교회가 병들었거나 죽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흥은 신자나 교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표지가 된다. 부흥을 일으키는 신자나 교회는 건강하지만,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신자나 교회는 병들었거나 죽었다. 부흥은 신자나 교회, 특히 목사의 책임이다. 부흥을 일으킬 줄 모르는 목사는 무지하거나 나태한 목사다. 피니와 함께 부흥, 곧 규모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6. 무디와 이벤트의 시작 19세기 말, 또 한 명의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나타났다. 드와이트 무디(Moody)다. 무디는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층민 출신으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수십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 쓰임을 받았다. 무디는 새로운 복음주의자의 모습을 창조했는데, 그것은 ‘오직 열정만으로’ 영혼 살리는 일에 올인(All-in)하는 전도자의 모습이다. 무디의 영향을 받은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영혼 살리는 그 한 가지 일에 자신의 전 인생을 기꺼이 헌신했다. 무디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신학이 약했고 지식이나 논리도 부족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열정’이 있었다. 그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소박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했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열정만 있으면 되고, 지식이나 학문은 필요 없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 신학과 현대 과학을 불신앙으로 비난했으며,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 문자지상주의)과 같은 근본주의 신앙에만 헌신하도록 촉구했다. 오직 열정만 강조하는 무디와 함께 사고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의 무리가 점차 만들어졌다(부작용 : 교회란 뭔지.. 이 땅의 하나님 나라가 뭔지.. 믿음이 뭔지.. 이런 기본개념의 부재로 예배당을 교회로 착각한 채, 봉사ㆍ헌신을 교회건물에게 드린 눈먼 믿음을 신실한 신앙으로 왜곡). 무디의 열정주의는 더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 전도를 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그는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면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기도 했다. 이것은 정확히 피니의 정신과 일치한다. 그러나 무디는 피니보다 훨씬 덜 지성적이고, 대신에 더 감성적이라는 점이 달랐다. 피니처럼 무디에게도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납되었다. 이렇게 해서 무디식 이벤트 전도 집회가 탄생한다. 무디는 논란이 많은 피니식 ‘구도 좌석’은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심한 영혼들을 초청하는 방식을 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훨씬 더 정교하고 세련된 이벤트로 만들었다. 무디는 호통을 치거나 꾸짖는 대신 솔직하고 소박하게 자신을 내보이며,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메시지가 끝나면 모두 조용히 기도하게 했다. 그러면 파이프 오르간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기 시작한다. 음악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잠시 뒤 집회 전문 가수인 아이라 생키(Ira Sankey)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가사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라, 지치고 상한 자여, 집으로 오라.” 생키의 노래할 때 잘 준비된 백 코러스가 중간 중간 화음을 넣어준다. 속삭이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코러스는 “집으로 돌아로라, 오라, 오! 집으로 오라”를 반복한다. 집회장은 숙연해지고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회심자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면 스태프들은 그들을 준비된 장소로 인도한다. 이러한 무디의 전도 집회는 정확히 오늘날 메가 처치의 이벤트성 집회의 원형이다. 7. 빌리 그래함과 테크노 복음주의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부흥설교자 빌리 그래함은 LA의 천막 집회에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도 휫필드 이후의 복음주의자의 계보를 잇는다. 그는 선조들의 복음주의적 전통을 20세기의 테크놀로지와 잘 버무려 테크노 복음주의(Techno Evangelism)를 완성한 사람이다. 애초에 3주를 계획했다가 극적인 성공으로 9주까지 연장된 천막 집회에 빌리 그래함은 연예인, 스포츠 스타, 회심한 조직 폭력배 등을 게스트로 참석시켜 대중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후 빌리 그래함의 전도 집회는 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피니의 3만 명 집회도 1974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엑스폴로 74대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주최 측은 이때 158만 명이 모였다고 발표했다. 물론 이러한 대형 집회가 가능한 것은 전자 테크놀로지 덕분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대중 매체의 위력을 잘 알고 그것을 적극 활용한 미디어 복음주의자다. 그는 <하나님과의 평화>, <불타는 세계> 등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했으며,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결단> 등의 잡지를 창간하여 영향력을 배가했다. 또 ‘결단의 시간’ 등과 같은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인도해서 전 세계 2500만 명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또 영화를 제작하고, TV에 출연했으며, 다양한 영상물을 사역에 적극 활용했다. 그는 위성중계를 통해 전 세계 수억 명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빌리 그래함과 함께 모든 ‘규모의 장벽’이 무너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어디서나 복음전도자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기독교 하이퍼 리얼리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의 방법과 기술은 모든 메가 처치의 모범이 되었다. Ⅲ. 교회 크기에 목매게 된 역사 (2) 메가처치 현상을 비판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로 세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옥성호 형제나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를 쓴 마이클 호튼, 또 <신학실종>, <윤리실종> 등의 ‘실종’ 시리즈를 쓴 데이빗 웰즈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교회의 크기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큰 교회의 일부 잘못된 면들만 비판함으로써 메가처치 현상을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 한 가지, 이들의 공통점은 메가처치의 그릇된 현상이 몇몇 사람들의 신학적 오류 때문에 생겼다고 보며 그들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지목당한 ‘희생양(?)’으로는 알미니우스, 찰스 피니, 빌리 선데이 등이며, 또 여기에 몇몇 교회성장학자나 세속적 심리학, 마케팅 기법 등도 이 목록에 단골로 올라가는 이름들이다. 이들 몇몇 사람들의 실수 때문에 오늘날 이 모든 끔찍한 문제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가처치 현상은 그들만의 잘못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대표자일 뿐이다. 메가처치 현상의 뿌리는 앞글에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의 노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순수한 동기, 뜨거운 열심,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름대로 선한 싸움을 싸웠지만, 이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엉뚱한 부산물(by-product)과 부작용(side-effect)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들끼리 이리저리 결합해서 ‘괴물’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메가처치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가 규모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역사를 조금 더 추적해 보자. 1. 세계선교운동과 지상 명령 이데올로기 얼핏 보면 메가처치 현상과 세계선교운동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8세기 이후 개신교의 세계선교운동은 놀랍게도 메가처치 현상으로 나아가는 물꼬를 터 주었다. 세계선교운동은 심정적으로 선뜻 인정하기 싫지만 1, 2차 대부흥운동에서 메가처치 현상으로 나아가는 교량이며, 긴 우회로다. 그러니까 1, 2차 대부흥 운동 때 규모에 눈을 뜬 교회는 세계선교운동이라는 긴 우회로를 따라 메가처치 현상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가. ‘지상명령’ 이데올로기 첫째로, 세계선교운동은 ‘지상명령’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지상명령이란 ‘땅 위(地上)’의 명령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극히 높은 최고의(至上)’ 명령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신자와 교회가 올인(all-in)해야 하는 최고 명령이라는 뜻이다. 1, 2차 대각성운동가들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뒤 세계선교운동가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게 된다. 미묘한 강조점의 변화가 생겼다. 이 주장에 따르면 선교 명령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명령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과제들은 전부 부차적인 것이며, 그것들이 선교 명령을 도울 경우에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상명령 이데올로기다. 선교명령을 지상명령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취약하다. 성서는 최고의 명령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사실 교회의 역사에서 선교 명령을 신자와 교회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으로 여겨졌던 적도 별로 없었다. 벌써 2-3세기 이후부터 교회는 선교명령이 벌써 성취되었다고 보기 시작했다. 루터와 칼빈만 하더라도 선교 명령은 1세기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으로서 이미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교회는 선교 명령을 미완의 과제요, 더 나아가 지상 최고의 과업이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도와 선교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그리하여 점차 선교 및 전도 운동은 ‘대약진 운동’이나 ‘천리마 운동’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신자와 교회는 앵무새처럼 이렇게 읊조린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야 한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자, 나가서 복음을 전하자. 전도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오자. 강권하여 주의 집을 채우자.” 나. 목표의 구체화 둘째로, 세계선교운동은 교회와 신자가 올인(all-in)해야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공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나 ‘전도나 선교를 하는 것’ 등은 구체적인 목표라고 할 수 없다. 세계선교운동은 교회가 조금만 노력하면 금새 성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를 적절히 제공했다. 그것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땅 끝’이 바로 구체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사실 땅 끝이란 성경에도 나오는 용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시대마다 다르게 이해되었다. 한 때 땅 끝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혹은 바다 끝 낭떠러지를 뜻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바울에게 땅 끝은 스페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증기선과 증기기차가 상용화된 19세기의 사람들에게 땅 끝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따라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매우 구체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그러자 엄청난 효과가 나타났다. 신자와 교회가 여기에 올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고로 목표는 구체적이어야 하는 법이다. 드와이트 무디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 무디의 이 구호에는 바로 자신의 세대에 복음화가 가능하다는 놀라운 자신감과 뚜렷한 목표의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자신감과 목표의식이 유럽과 미국의 청년들을 선교에 올인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학생자원 선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일어났다. 이후 선교명령은 점차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즉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고, 역사를 종결시키며, 천국을 끌어내리는 종말론적 과업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 교회가 앉아만 있겠는가? 이 위대한 과업의 이름은 ‘세계 복음화’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 서기 2000년까지 세계 복음화를 달성하자는 ‘AD2000 운동(AD2000 &Beyond Movement),’ 복음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자는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미완의 과업을 완수하자는 ‘과업완수운동(FTT: Finishing the Task)’ 등은 무디를 이은 ‘세계 복음화 운동’의 후예들이다. 전 세계 교회는 세계를 복음화하자는 구체적인 목표 아래 하나가 되었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 선교 대회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대회는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세계 복음화’라고 하는 단일 목표 아래 연합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제 전 세계 교회는 오로지 전도와 선교에 올인하게 되었다. 다. 테크놀로지의 적극적 활용 세계선교운동이 제공한 또 하나의 유산은 바로 테크놀로지의 적극적 활용이다. 테크놀로지란 단순히 기계, 전기, 통신, 방송 등의 테크놀로지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테크놀로지란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세계관이며,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새로운 자세와 태도요, 그리고 새로운 사유방식을 말한다. 테크놀로지란 ‘설정된 목표를 성취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의 활용’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테크놀로지가 20세기 이후의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냈다. 세계선교운동도 이 기술적 세계관에 물들게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세계선교운동이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자 이제 전 세계 교회는 목표 성취를 위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데 전념하게 된다. 그리하여 20세기에 선교 전략의 폭발이 일어났다. 사실 수단과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현대 선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의무라고까지 했다. 이 내용이 ‘현대 선교 헌장’의 골자다. 웨슬리, 휫필드, 피니, 무디 등도 같은 관점이었다. 목표 성취를 위한 수단과 방법의 적극적 활용은 19세기를 감리교도(Methodist)의 세기로, 20세기를 방법론자(Methodologist)의 세기로 만들었다. 온갖 종류의 선교전략이 만들어졌다. 10/40창, 미전도 종족 입양 운동, 관문도시 선교 전략, 전문인 선교 전략 등 군사 용어를 방불케 하는 온갖 용어와 전략 등이 난무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테크놀로지가 선교 영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들이 메가처치 현상의 예비적 조건을 형성하게 된다. 테크놀로지는 기본적으로 목표 달성의 수단과 연관이 되어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첫째, 목표는 달성 가능한 것이라야 한다. 따라서 목표는 절대로 추상적이어서는 안 되며, 구체적이고 가시적이라야 한다. 따라서 전략의 기본 중의 기본은 ‘성취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은 제거하고 보이는 것만 골라내는 것이 목표 설정의 기술이다. 둘째로 목표는 집중되어야 한다. 단 하나의 목표만 세워야지 이것저것 여러 개의 목표를 세우면 안 된다. 셋째로 설정된 목표 이외의 나머지 목표는 배제하고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목표가 세워지면 이제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잠깐! 그에 앞서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못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측정도구가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수학과 통계학,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점차 전도와 선교는 과학이자 테크놀로지로 둔갑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메가처치 현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2.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과 교회성장학의 탄생 메가처치 현상이 일어난 경위는 대략 이렇다. 먼저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그에 영향을 받아 세계선교운동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 세계선교운동에서 교회성장학이 발생하고, 이것이 지역교회에 접목되면서 메가처치 현상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도날드 맥가브란이라는 사람이 중요한데, 그는 세계선교운동의 귀한(?) 성과를 교회에 연결(link)시켜준 사람이다. 맥가브란은 인도 다모(Damoh)에서 인도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그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왜 어떤 지역의 교회는 성장하고, 어떤 지역의 교회는 성장하지 않는가? 혹시 여기에 어떤 원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민 끝에 그는 교회 성장의 원리를 정리하여 1950년대 ‘교회성장학’이라는 기이한 학문을 창시하게 된다. 가. 새로운 목표, 교회성장 도널드 맥가브란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세계선교운동과 복음주의권 교회에 전혀 새로운 ‘목표’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 성장(church growth)’이다. 대각성 운동가들의 목표는 ‘영혼 구령’이었고, 초기 선교 운동가들의 목표는 ‘선교 명령의 순종’이었으며, 20세기 선교 운동가들의 목표는 ‘세계 복음화’였다. 그러던 것이 맥가브란에 와서는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은 맥가브란이 세계 복음화라는 목표 달성 여부를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측정 방법을 ‘교회 성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 복음화가 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전략, 전술, 인원, 재정을 쏟아 붓더라도 종국에는 교회가 성장하지 않으면 그 모든 수고는 헛것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그는 전도의 목적을 ‘회심’이 아니라 ‘제자화’라고 천명했다. 무슨 말이냐면, 전도와 영혼구원만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결국 ‘불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뜻이다. 선교 전략은 교회 성장에 맞추어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맥가브란과 함께 지상명령은 ‘교회 성장 명령’으로 바뀌게 된다. 나. 교회 크기에 대한 노골적 강조 지상 명령이 교회 성장이라면 이제 교회 성장은 거역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이 된다. 따라서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지상 명령을 순종하게 못하게 만드는 사탄의 훼방이다. 그가 쓴 <교회 성장의 이해>에는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저항하고 있는 신학자들과 일선 교회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는 교회 성장을 복합적 요인들의 상호작용의 산물로 보려는 자를 ‘불가지론’자라고 부르며, 그들은 “확신이 있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또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주장을 ‘탐색의 신학(theology of search)’라고 부르며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단언한다. 또 종종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전문가들을 비판하며, 그들의 신학적 변명을 반박한다. 맥가브란은 교회 성장을 하나님의 역사나 섭리가 아니라 노골적인 추구 대상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는 자주 세계 복음화를 수량화하는 도표와 통계수치를 인용한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수치와 그래프를 끌어 올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 성장을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과업을 ‘교회 성장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신자와 교회, 선교사들이 교회 성장을 고려하지 않고 있어서 문제라는 것이다. 교회 성장을 고려하고, 의도하고, 목표로 삼고, 추구하라고 독려한다. 그리고 신자와 교회의 모든 노력은 ‘교인 숫자의 증가’로 맞추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맥가브란과 함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전 세계 교회가 교회의 크기를 키우는 데 혈안이 되게 된 것이다. 다. 추수 이론(theology of harvest)의 제시 맥가브란은 그저 전도하는 것, 그저 선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씨만 뿌려서는 안 된다. 추수를 해야 한다. 결국 관건은 추수다. 추수를 위해서 씨를 뿌려야 한다. 맥가브란과 함께 강조점이 옮겨졌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들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한다. 이제 관심사는 씨에서 밭으로 옮겨졌다.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중들이다. 전도와 선교는 말씀 중심에서 구도자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전도와 선교가 구도자 중심으로 바뀌면서 중요한 방법론이 등장했다. 동질 집단의 원리가 그 한 예이다. 똑같은 복음이라도 같은 민족, 같은 문화권 사람들끼리 더 잘 전달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씨 중심’에서 ‘밭 중심’으로의 강조점의 이동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똑같은 복음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맥가브란은 관심 없는 사람들의 ‘비추수지역’보다는 기왕이면 관심자들이 있는 ‘추수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무조건 뿌리지 말고 싹이 날 곳을 잘 살펴보고 뿌리라는 것이다. 맥가브란과 함께 역사상 최초로 교회는 목 좋은 자리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3. 피터 드러커의 ‘경영의 지배’와 새로운 교회성장학 1970년을 지나면서 경영 혁명이 일어났다. 이것은 경영(management)이라는 활동이 더 이상 영리적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영역으로 확산된 것을 말한다. 피터 드러커는 이를 ‘경영의 지배’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2차 대전 이후 점차 병원, 대학, 정부, NGO 단체 등 비영리 단체에서도 광범위하게 경영 기법을 활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야흐로 경영이 인간 활동 전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교회도 속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말대로 1970년을 전후로 교회도 세속적 경영 기법을 적극 활용한다. 이와 함께 교회성장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곧 경영 테크놀로지와 마케팅 기법을 적극 도입한 교회성장학이 탄생한 것이다.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은 선교 전략의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경영 기법을 받아들인 교회성장학은 개교회의 성장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결국 개교회, 곧 개별 단체가 경영 기법을 활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터 드러커의 비영리 단체의 경영의 원리에 의하면 교회는 먼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명’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다음 사명을 성취 가능한 ‘목표’로 전환시켜야 한다. 성취 가능한 목표가 수립되면 이를 위한 마케팅, 경영 혁신, 자원의 효율적 안배와 활용 등의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전략 실행과 그에 따른 성과 측정, 평가가 뒤따른다. 그리고 그에 맞는 인사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수행할 수 있는 리더가 세워져야 한다. 이상의 모든 세속의 지혜가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4.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와 교회성장학의 범람 맥가브란이 ‘교회 성장’을 처음 말했고, 70년대 경영 혁명이 일어난 다음, 피터 와그너와 함께 새로운 교회성장학이 출현하게 된다. 어찌 보면 진정한 교회성장학이 탄생했다고 할 수도 있다. 피터 와그너를 비롯한 여러 교회성장학자들은 70년대 이후 각종 세미나 개최, 대학교에서의 강의, 책 출판, 잡지 발간, 집회 개최 등을 통해서 전 세계에 자신들의 신념과 방법론을 널리 확산시켰다. 가. 지역교회의 성장에 대한 강조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은 선교 전략의 차원이 강했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사례들은 주로 어느 국가나 지역에서의 개신교회나 가톨릭 교회, 성공회의 인구수, 보다 세부적으로는 루터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등의 교파와 교단의 성장 사례들이 많았다. 그러나 피터 와그너가 관심을 가지는 교회 성장은 대부분 개별 교회의 성장 사례들이다. 가령 그는 코랄 릿지 장로교회, 레드우드 교회, 덴버에 있는 제일 나사렛 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의 가든 그로브 크리스탈 교회 등의 교회의 성장에 주목한다. 이러한 개교회 중심의 성장 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은 50-60년대의 두 가지 전도 전략에 대한 비판 때문이기도 했다. 첫 번째는 빌리 그래함의 십자군 전도 운동이다. 1948년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전통적인 노천 캠프 부흥 집회를 극대화한 형태였다. 이 운동은 어느 한 지역이나 도시를 복음으로 초토화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또 하나는 남미의 케네스 스트라챤의 침투전도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빌리 그래함과 같은 어느 한 사람의 영웅적 전도자가 아니라 전 교인이 모두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전도 운동이었다. 그래서 전교인이 전도지를 들고 축호전도를 하거나 총동원 전도주일날 불신자를 대거 끌어와서 복음을 전하자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모두 다음의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그래서 효과가 있었는가?” 물론 이 효과라는 것은 개교회의 세례/침례 신자 숫자의 증가였다. 긴 우회로를 거쳐 마침내 개교회의 수적 증가는 모든 전도 및 선교 운동의 최종 평가 기준이 된 것이다. 나. 자동적 성장의 강조 피터 와그너와 교회성장학파의 한결같은 주장 중 하나는 “성장은 자동적이다”는 것이다. 찰스 피니가 부흥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요, 과학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교회성장학자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종종 생명체의 비유를 든다. 모든 생명체는 저절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제 성장은 더 이상 추구해야 하는 목표도 아니게 되었다. 건강한 교회라면 저절로 성장이 이루어 질 테니 말이다. 반대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거나 혹은 감소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병들었거나 죽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교회성장학파의 이러한 자동적 성장 이론은 성장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목회자와 교인을 죄인 취급하게 만든다. 교회성장학자들에 따르면 그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부정적이고, 고집 세고, 불충하며, 불성실한 자들이다. 또 그들은 지상 최고의 명령인 전도와 선교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자들이요,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목자들이라고 비판한다. 이들의 고집이 교회의 자동적 성장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 성장은 신자와 목회자의 당연한 의무요, 건강한 교회라면 저절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자동적 과정이 되었다. 다. 교회 성장 클리닉 테크놀로지 만일 몸에 병이 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와 똑같은 논리가 교회에 적용되었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거나 침체한다. 이것은 교회가 병들었다는 말이다. 병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치료해야 한다. 그렇다면 병든 교회는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 성장 클리닉을 받아야 한다. 이제 교회성장학은 병든 교회를 치료하는 클리닉 과정이 된다. 그리고 교회성장학은 엉뚱한 약속을 한다. 클리닉을 받아라. 교회가 커질 것이다. 컨설팅을 받아라. 그러면 교회가 성장할 것이다. 교회성장학은 일관된 주장이나 고정된 형태가 없다. 다만 한 가지 공통된 주장을 한다. “교회는 성장해야 하고, 성장할 수 있다.” 수단이나 방법은 나중 문제다. 뭐든 교회가 성장하면 훌륭한 전략이다. 피터 드러커의 <비영리 단체의 경영>은 교회성장학자들에게는 제5의 복음서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효과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효과를 보장하는 모든 방법들이 동원 가능하다. 가령 구체적인 목표 인원의 설정, 불신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의 강조, 대집회와 소그룹의 두 날개 이론, 성령 운동, 치유 집회, 스타 시스템, 브랜드 마케팅, 프랜차이즈 등... 뭐든 효과만 있으면, 뭐든 교회만 커지면 무조건 오케이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 도리어 이러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다.
메가처치, 시장과 자본의 논리/2008-04-25
메가처치, 시장과 자본의 논리 신 광 은 (2008.04.25)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사로잡힌 교회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크리스천들만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기업'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린 아이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박사라도 보지 못 한다. 그것은 교회가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델센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라 실화다. 오늘날 교회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오늘날 교회는 신약시대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층에 장로교, 2층에 감리교, 3층에 침례교, 그리고 지하는 나이트클럽. 백화점 바겐세일과 같은 총동원 전도, 교인 뺏기 경쟁, 집짓기 경쟁. 도대체 어디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할 것이며, 도대체 어디서 로마 제국을 굴복시킨 신약교회와 초대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교회는 벌거벗었다. 이 사실을 남들은 다 아는데 교회만 모른다. 교회가 벌거벗은 모습 중 하나는 오늘날 교회가 자본주의의 질서에 편입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앞글에서 논의한 대중의 출현, 도시화, 테크놀로지의 발전, 시장의 발생 등과 같은 세속적인 현상들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현상의 결과로 교회가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종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메가 처치는 교회 안에 자본주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 메가 처치는 교회의 자본주의화가 낳은 열매다. 여기서 잠깐 교회 안에서 작동 중인 자본주의의 논리를 분석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 1) 고객의 탄생 고객이 탄생했다. 시장 상황에서 오늘날 구도자들은 고객으로 존재한다. 고객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구도자는 자신들의 삶을 전적으로 새롭게 바꿀 생명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은 다만 일용품으로서의 종교에 관심이 있다. 일용품 종교란 무엇인가? 파스칼이 말한 대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지옥의 불행을 피할 수 있는 ‘보험증서’를 말한다(천국보험). 또 일용품 종교란 한 주간의 긴장된 삶을 잠시 이완시켜 줄 ‘기분전환’을 말하며, 바라는 바를 ‘빌 대상’을 말하며, 자신감으로 충전시켜 줄 ‘격려자’를 말하며, 자신의 삶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자기 성찰’을 말한다(은혜의 수단). 그리고 마음이 동하면 몇 푼의 헌금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제 사업’을 말한다. 오늘날 구도자는 이곳저곳 교회를 전전하며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일용품 종교를 구매하고 다닌다. 고객이 탄생한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교회에 고객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 고객이 출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피터 버거식으로 말하자면, 과거에 신앙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초대 교회는 교회 입문에 참된 제자도의 열매를 요구했기에, 또 중세 교회는 기독교 제국의 지배력을 행사했기에 선택권은 교인이 아니라 교회에게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신앙이란 처음에는 지역별로, 더 나아가 도시, 개인별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물론 이 시발(始發)은 교회의 분열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신교냐, 구교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 신교는 독일 루터냐, 프랑스 위그노냐, 영국 성공회냐, 화란 개혁주의냐, 스코틀랜드 장로교냐, 재침례교냐, 그냥 침례교냐, 퀘이커냐 등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채 사람들은 보다 자유로운 선택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대륙으로의 이주를 촉발시켰다. 때문에 미국은 처음부터 자유의 나라였으며, 그리하여 선택의 나라였다. 수정헌법 1조는 미국이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임을 명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모든 교단이나 교파들은 철저한 자유 경쟁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교회나 교단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점점 더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유럽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앙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 혹은 ‘사상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자유권은 하늘이 부여한 인권 중 가장 중요한 권리로 정당화되었다. 유럽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신생국가 미국은 새로운 하나님, 곧 ‘자유의 여신’을 숭배하기에 이른다. 자유권, 곧 자유로운 선택권은 19~20세기를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대중의 지위 향상과 관계가 있다. 19~20세기에 시민권의 확대를 위한 지속적인 투쟁이 있었으며, 이와 함께 민주주의는 꾸준히 발전하였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참정권, 특히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이제 대중은 ‘표밭’이 되었다. 대중에게 권력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은 또한 각 개인을 ‘소비주체’로 승격시켰다.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곧 돈이 모인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이제 숫자는 힘이 되었다.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된 대중은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숫자의 힘’을 주장하게 되었다. 대중은 여론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대중 독재가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대중은 교회의 최고 고객이 되었다.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교회의 분열이 자유를 확대했고, 자유의 확대는 다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촉진시켰다. 마음에 안 맞으면 그냥 갈라서 버렸다. 교회의 분열은 분파주의와 이단의 폭발을 초래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신종 이단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밀러라이트·몰몬교·안식교·크리스천사이언스·여호와증인 등 피터 버거의 말대로 바야흐로 ‘이단의 시대’다. 하지만 누가 이들을 막을쏘냐? 무슨 권리로 신앙의 자유권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같은 현상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6·25를 전후하여 교회를 가르는 붐이 일어났다. 조금만 의견불일치가 생기면 그냥 찢어버렸다. 신사참배 문제로 장로교에서 고신파가 떨어져나갔다. WCC 가입 문제로 통합과 합동이 나뉘고, 합동은 다시 교단의 전횡에 반대하여 개혁교단이 떨어져나갔다.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로 기독교 장로회가 예수교 장로회로부터 또 떨어져나갔다. ‘예수’와 ‘그리스도’가 갈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행이 되었다. 감리교도 기감과 예감이, 성결교도 기성과 예성이 갈라졌고, 침례교는 이단 때문이기는 하지만 역시 기침에서 예침이 떨어져 나왔다. 순복음교회도 갈라졌다. 교회 분리는 이단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황국주·박태선·문선명·나운몽 등에 의해 수많은 이단들이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지금도 구원파·안산홍·신천지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교회의 분리가 교회의 성장을 낳았다는 것이다. 교회가 갈라지면 맨 먼저 신학교를 세우고, 목회자들을 양산하여 내보내면, 목회자들은 목숨을 걸고 교회를 세우고 사역을 하니 교회가 성장할 밖에…. 1960~70년대 유래가 없는 엄청난 한국교회의 부흥은 그리스도의 몸을 갈가리 찢어 얻은 대가였다. 그러나 교회의 핵분열로 말미암는 신학교의 난립과 목회자의 대량양산은 점차 교단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교단이 개교회에 일일이 책임 있는 지원을 해주지 못하게 된 것과도 연관이 있고, 또 교단 하나를 갈라 세우는 것이 밥 먹는 것만큼이나 쉬우니 그만큼 교단의 치리 권능이 약화된 것과도 연관이 있으며, 교회들이 점점 더 치열한 생존 경쟁을 겪게 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완벽한 시장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교단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이제 교회는 순전히 시장 상황 한 복판에 ‘개교회’로 내동댕이쳐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개교회주의’의 모습이다. 바야흐로 교회의 무한분열의 종착점에 도달한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무한분열은 고객에게 그만큼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하게 되었다. 교단이나 교파, 신학이나 전통은 아무래도 좋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자유인가? 이 얼마나 풍성한 선택의 기회인가? 사실 이러한 선택의 폭은 기독교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전 종교에게로 확장되고 있다. 모든 교회와 교파, 그리고 모든 사상과 종교는 종교 시장에 자신들의 특성화된 상품을 내밀며 고객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시장 상황은 신학이나 전통은 부차적인 것이 되게 만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판매와 구매다! 신교나 구교 그리고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사상과 종교는 이러한 시장 상황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믿는다는 것은 마치 백화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의 메시지도 심각하게 변화하게 되었다. 오르띠즈 목사의 말에 의하면, 현대 교회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예수님을 믿어보지 않으시겠어요?”라는 호객 행위로 뒤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변질된 메시지는 성서나 초대 교회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초대 교회는 믿고 싶다고 해도 절대로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격한 심사와 기나긴 예비자 교육을 통과하지 않고서 신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천박한 복음주의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며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다. 천박한 복음주의에서 구원은 자동으로 전제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구도자의 선택뿐이란다. 고객의 선택은 곧 구원 자체란다. 맙소사! 현대 교회에서 더 이상 그리스도는 왕이 아니다. 고객이 왕이다. 현대의 구도자는 물에 빠져 ‘살려달라’ 절규하는 자가 아니라, 거드름을 피우며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는 쇼핑객이며 구매자다. 2) 기업의 출현 고객의 탄생과 동시에 기업이 출현했다. 오늘날 교회는 고객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기업이다. 교회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스스로를 상품판매자로 변신시켜왔다. 메가 처치는 교회가 자신을 기업, 곧 상품판매자로 변신시킨 결과다. 사람들은 말한다. ‘교회의 변신은 무죄!’라고. 어찌하여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교회의 이 기묘한 변신을 ‘무죄’라고 판결하는가? 교회는 언제부터 기업이 되기 시작했을까? 교회가 기업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교회들이 경쟁하면서부터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은 역시 교회의 분리로부터 시작하였다. 정리하면, 교회가 갈라지자 경쟁하게 되고, 경쟁이 시장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시장의 관점에서 볼 때, 16세기 종교 개혁은 가톨릭의 시장 독점권을 박탈한 효과를 발생시켰다(이전의 1054년 정교회와 로마가톨릭의 분열은? 1153년 콘스탄츠 협약은?). 신교 진영와 구교 진영 간의 길고 지루한 전쟁 끝에 양측은 서로의 종교 시장을 넘보지 않기로 하는 베스트팔리아 조약을 맺는다. 이제 서ㆍ유럽은 신교 진영과 구교 진영으로 반토막 났다(정교회, 로마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유럽3등분). 그리고 신교 진영은 다시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를 전후로 가톨릭 진영이 해외 선교에 열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가톨릭 내부의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예수회의 공헌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교회는 유럽에서 잃어버린 시장을 개신교가 미처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던 미개척지인 해외시장에서 되찾고자 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시장질서가 수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 상황은 북미의 신대륙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려왔다. 메이플라워호가 뉴잉글랜드 플리머스항에 도착하기 전후로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이 신대륙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뉴암스테르담의 화란개혁교회, 델라웨어의 스웨덴 루터교, 롱 아일랜드와 뉴저지의 스코틀랜드 장로교, 버지니아지역의 성공회, 퀘벡지역의 가톨릭, 펜실베니아의 독일 경건주의 등등 초기에는 그런대로 각 교회, 교파 간의 지역주의(localism)가 잘 지켜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부흥운동, 독립전쟁의 혼란, 도시화, 서부 개척 등의 요인으로 지역주의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이는 국교가 없는 미국에서 모든 교회, 교파는 처음부터 자유 경쟁으로 자신들의 교세를 불려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계속되는 거대한 이민의 물결은 고객의 증가와 시장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발생한 복음주의는 한편으로는 영혼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촉발된 것이지만, 동시에 여러 교파들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자신들 교세의 확대를 도모하고자 하는 동기에 의해서도 불꽃이 지펴졌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교회는 ‘고객’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교회사에서 북미 신대륙의 독특한 점은 그 땅이 처음부터 선교적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1000년 가까이 국가교회를 통해서 유아세례를 시행해 왔던 유럽에서는 나면서부터 전부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선교나 복음 전도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기독교 국가다’는 식의 낭만화된 건국 신화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미국은 성인(成人)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세례·침례를 베풀어야 하는 선교적 상황의 국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적 상황은 여러 교회와 교파에게 큰 기회를 주었다. 그 기화란 곧 교세 확장과 발전의 기회였던 것이다. 다른 말로 미국은 선교 각축장이었다. 이러한 선교의 경쟁적 상황이 미국 특유의 실용주의와 결합되며 점차 교회는 ‘보다 효과적인 선교’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은 알미니안주의 신학의 산물이라는 통설과는 다르게, 칼빈주의나 알미니우스주의, 신교나 구교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모든 미국 교회와 종교의 공통된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은 칼빈주의자인 죠지 휫필드의 노천 캠프 집회와 자유 설교의 전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알미니우스주의자인 찰스 피니의 ‘새로운 방법’으로 큰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피니의 이러한 방법론은 19세기 이후 교단과 교파, 신구교를 막론하고 모든 교회에서 표준적인 것으로 수용되어졌다. 찰스 피니 이후 19세기 말의 D. L. 무디, 20세기 초의 빌리 선데이, 그리고 20세기 중후반의 빌리 그래함, 21세기 릭 워렌, 빌 하이벨스 등은 이러한 효과적 선교와 전도의 새로운 방법에 대한 헌신자들의 계보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주의적 전통과 방법론은 오늘날 미국제 복음주의의 선교를 통해 전 세계 모든 교회로 퍼져나갔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으로 고안되기 시작한 복음전도의 방법론은 교회를 급속도로 기업화시켰다. 복음주의자들의 효과에 대한 관심과 기업가들의 수익에 대한 관심은 점차 비슷한 것이 되어 갔다. 이미 1차 대각성운동 때부터 거인주의, 곧 스타 시스템이 교회에 도입이 되었으며, 이 방법은 지금도 메가 처치의 가장 효과적인 교회 성장의 방법이다. 또 이 스타 시스템은 메가 처치라는 대기업(?)에 취업을 원하는 수많은 목회지망생들에게 지속적으로 허황된 야망을 부추기는 본보기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장 상황 속에서 교회는 자본주의의 소비자 중심주의, 고객만족의 원칙을 충실히 받아들여 갖가지 신앙 상품들을 개발하여 고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물론 이 상품들은 그 콘텐츠가 얼마나 성서적이고 복음적인지 모른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상품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매일 매일 만들어내고 있는 기발한 신앙 상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메가 처치는 그야말로 신앙 상품들로 즐비한 대형 할인마트다. 메가 처치의 성장 방법이나 경영 기법, 마케팅 기술, 선전 테크놀로지 등은 아무리 보아도 세속 기업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런 메가 처치가 소위 ‘건강한 교회’의 모델과 표준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메가 처치는 교회가 기업화된 최종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3) 자본과 시장의 논리 시장 상황 속에서 교회는 점점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종속하게 된다. 교회가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지배를 받고 있는 몇 가지 징후들만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자본이 형성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는 경제시스템이다. 자본은 큰 돈(big money)이다. 쌓이지 않는 돈은 자본이 아니다. 돈이 계속 쌓여 일정량을 넘기면 자본이 된다. 바로 이 초기 자본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18세기까지 유럽에 거대한 자본이 축적하기 되었는데, 이렇게 잔뜩 축적된 자본이 산업혁명이라는 불꽃과 함께 웅장한 폭발음을 울리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관차의 엔진을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원이다. 축적된 초기 자본은 18세기 자본주의가 발생한 시점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 질서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모든 판매자와 기업에게도 초기 자본은 중요한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음식 솜씨만 좋다고 식당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 목 좋은 곳에 점포를 임대하고, 인테리어를 하고, 홍보를 할 정도의 최소한의 초기 자본이 없으면 장사를 할 수가 없다. 아이템만으로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반드시 초기 자본이 있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교회도 똑같은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 교회도 아이템과 자본,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 흔히들 요즘은 교회 개척이 잘 안 되는 시기라고 한다. 왜 그럴까? 그 실상인즉 목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말씀에 대한 열정, 영혼을 향한 사랑, 인품과 도덕적 자질이 아무리 훌륭해도 종교 시장 진입에 필요한 초기 투자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아예 교회 시장에서 도태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 아닌가?(목회자의 상품화 : 계 13:16-18) 같은 맛이라면 인테리어가 잘 된 식당을 찾는 것이 고객의 취향이듯, 오늘날 교회 고객들은 겉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교회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 취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이나 어느 교회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저 현실일 뿐이다. 그래서 최소한 100명 정도의 교인(특히 직업이 번듯한 어른 성도는 필수), 예배당을 세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재정, 십자가나 의자, 강대상 같은 가구 및 집기, 씬디싸이저나 피아노, 드럼 같은 악기, 주일학교·중고등부·청년부·성가대와 같은 기본적인 조직·전도 및 양육 프로그램, 거기에 더하여 설교가 괜찮은 목사 등의 기본 아이템이 갖추어져야만 그 교회는 시장 상황에서 생존할 수가 있게 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일단 이런 식으로 개척을 하게 되면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지속적인 성장’이다. 이상하게도 자본주의는 멈추어 서 있을 수 없다. 꼭 자전거 같다. 그래서 앞으로 전진하든 아니면 넘어지든 둘 중 하나다. 자본의 힘으로 시작한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다. 계속 페달을 밟아야만 굴러간다. 어느 교회 목사가 한 말이다. “자고로 성도를 굴려야 교회가 잘 되는 법이여.” 그렇다. 목사는 끊임없이 일을 벌여서, 성도들을 굴려야 한다(교회건물에 대한 맹신적 봉사). 그런데 사실 이것은 조직의 간단한 생리일 뿐이다. 끊임없는 행사와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적당히 동력화시켜 주어야 조직에 활력이 생긴다는 것은 경영 리더십의 기초 중 기초다(모이자 돈걷자 집짓자). 그냥 가만히 놔두면 교인들은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침체’해버린다. 이것이 시장질서 안에서의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피곤한 교회다. 교회력에 따른 절기뿐만 아니라 정기 심령 부흥회·사경회·총동원전도주일·바자회·선교여행·체육대회·야유회·특별새벽기도회 등이 끊임없이 계획되고 시행되어야 하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행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착취와 수탈을 미화하고, 사실의 왜곡과 은폐를 정당화). 특히 ‘성전(?) 건축’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프로젝트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점점 커져가는 예배당은 교회 성장의 가시적인 징표요, 하나님나라 건설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전건축 프로젝트는 개별 성도들의 여러 잡다한 요구와 불만들을 깡그리 청소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공통의 목표의식을 설정할 수 있다. 또 눈물겨운 헌신의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업에 현실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대단히 훌륭한 전략이다. 무엇보다 근사한 건물과 인테리어는 새신자 전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더불어 근사하고 쾌적한 공간과 감각적 인테리어, 최신식 장비까지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금상첨환가! 요즘 목회자들은 예수님보다 능력이 많은 모양이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그토록 어렵게 허무신 성전을 단 돈 몇 푼으로 간단히 다시 세워버리니 말이다. 그것도 예루살렘에 한 채가 아니라, 수백, 수천 채의 성전이라니…. 이른바 총동원 전도주일이라는 교회 성장 전략은 백화점 정기 바겐세일을 닮았다. 날짜가 정해지면, 그 다음은 교회 전체의 목표 인원수를 정하고, 교구별·구역별·개인별목표 인원이 할당된다. 각 개인은 나눠준 용지에 후보자인 VIP명단을 기입하고 전도주일 당일까지 새벽마다 기도하며, 온갖 선물 공세, 전화 공세, 식사 공세, 심지어 현금 공세까지 제공하며 예배당으로 끌어당기는 행사를 소위 총동원 전도주일이라고 한다. 물론 전도주일 당일이 되면 교회는 축제의 날이다(암 6:4-6, 사 5:12, 고전 10:7, 출 32:6). 화려한 장식에 적당히 들뜬 분위기, 초특급 강사, 연예인 초청, 각종 영상과 특별 프로그램, CCM 가수, 파워풀한 복음 설교, 거기에 경품까지! 이것은 보험 세일즈나 백화점 바겐세일, 신천지 등 이단의 전도수법이 훌륭하게 버무려져 있는 퓨전 스타일의 복음주의다. 교회는 이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동원하는 수법을 가리켜 ‘영혼 구령’이니 ‘지상 명령에 대한 순종’이니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이런 저런 변명으로 합리화하려고 해도, 영락없이 기업의 판매촉진 수법과 닮았으니 이 일을 어쩌랴! 정리하면 이렇다. 교회의 분리가 경쟁 구도를 만들었고, 경쟁구도가 시장상황을 초래했다. 물론 이러한 교회의 시장상황은 대중의 출현, 도시화, 테크놀로지의 발전, 시장 자본주의의 탄생과 같이 때맞춰 조성된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들과 결합되어 더욱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문제는 교회가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 대안적 공동체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교회는 마치 후천적으로 면역 결핍증에 걸린 AIDS 환자처럼 외부 환경의 독소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점차 본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장 상황에서 구도자들은 고객으로 변신했으며, 교회는 기업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러한 탈선의 종착역은 교회의 무한분열, 완전한 시장상황의 도래(신 자유주의), 자본주의 질서의 정착 등이다. 메가 처치는 교회의 이 탈선이 맺은 풍성한 열매다.
성경적인 조직신학 ( 두려움 )
성경적인 조직신학 ( 두려움 ) 2004-02-24 10:45:41 read : 19 1,주님에 대한 두려움의 의미 (신 4: 10) 네가 호렙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하시매 (신 6: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 니라 (전 12: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 어다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2,두려워 하지 말아야 할것 (왕하 17: 38) 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 다른 신들을 경외치 말고 (잠 25: 25)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눅 21: 2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 의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눅 21: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눅 21: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 는것을 보리라 (눅 21: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히 10: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 멸할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욥 15: 24) 환난과 고통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이기리니 (벧전 5: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권고하심 이니라 3,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명령이다 (신 13: 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 을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벧전 2: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공경하라 (시 22: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자 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자손이여 그를 경외할 지어다 (행 9: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 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많아지니라 (행 10: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많 이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4,주님을 향한 두려움에 대한 설명 (잠 8: 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 만과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시111: 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사 33: 6)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 이니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잠 14: 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 나게하느니라 (시 19: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히 12: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 로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5,하나님을 두려워 하게 된 동기 (계 15: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아 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일이 나타났으매 만 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삼상 12: 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 여오직 그를 경외하머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시130: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수 4: 2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 희로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계 14: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 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6,주님을 두려워함이 절대 필요하다 (시 5: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시 2: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출 20: 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 희를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삼하 23: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이 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대하 19: 6) 재판관에게 이르되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하라 너희의 재 판하는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대하 19: 7)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대하 19: 8) 여호사밧이 또 예루살렘에서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이스라엘 족장중에서 사람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과 예루살렘 거민의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하고 (대하 19: 9) 저희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충의와성 심으로 이 일을 행하라 (고후 7: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두 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7,주님을 두려워하는 결과 (시147: 11)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 는도다 (시103: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불쌍히 여기시나니 (행 10: 35)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받 으시는줄 깨달았도다 (시112: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있도다 (눅 1: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잠 14: 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피난처가 있으리라 (잠 16: 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 로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말 3: 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 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사 8: 12)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 라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사 8: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 하며놀랄 자를 삼으라 (잠 10: 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짧아지 느니라
성경적인 조직신학 ( 땅 )
성경적인 조직신학 ( 땅 ) 2004-03-04 13:56:09 read : 2 제 14 장 땅 1.역사적인 관점 : 땅 회복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 갔고 포로 생활 중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은그들에게 귀환을 약속하시고 땅을 회복시켜 주신다.[렘31:16][겔11:17]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헐물러진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으시고 자 하였다. 2.땅의 신학적 의미 땅은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순종하고 게약을 이행하므로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다. 그 땅들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들이요 축복이 넘치고 풍요로운 땅이다. 이 땅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가 담긴 땅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 님을멀리하고 떠날 때에는 하나님은 그 땅을 다른 민족들의 손에 붙이셨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순종할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셨다. 3.신학적인 고찰 구약의 땅은 지상의 것이나 신약의 땅의 개념은 천상의 기업으로 바꾸워진 다.[마5:5 눅 9:24 눅 13:20 14:11] 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늘의 시민으로 하늘의 땅 기업을 사모하게 되고 기대한다.
성경적인 조직신학 ( 생명의 땅 )
성경적인 조직신학 ( 생명의 땅 ) 2004-02-24 10:03:22 read : 4 제 10 장 생명과 땅 1. 그 땅에서의 축복된 삶 ; 지혜 문학의 관점에서 (암 5: 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신 30: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신 30: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것이라 그리하면 네 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잠 4: 10)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길 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땅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하나님 의약속을 따라서 말씀을 순종하므로 영구한 축복을 누리게 된다. 땅은 하나 님의 선물인 고로 선하게 사용하기도 하고 아름답게 가꾸기도 하고 하나님 의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삶이 중요하다. 2.축복된 삶과 땅의 경영 : 역사서의 관점에서 (신 17: 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 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말 것이며 (신 17: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명령 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왕상 4: 20)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먹 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신 8: 9)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 이며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하나님이 주시는 땅은 사람이 잘 다스릴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에불순종할 경우에 땅이 황무하여질것을 말하고 있다. 3.땅과 풍요로운 삶의 상실 : 선지서의 관점에서 (신 30: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신 30: 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못할것이니라 (삼상 12: 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 하리라 (미 3: 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 은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렘 22: 26)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미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고 악을 행하거나 하나님의 율법들을 어기거나 언약을 파기 할때에는 하나님은 땅을 버리고 황무케하신다. 4.적용 (잠 3: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하 나님이 주신 땅에서 나는 것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잊지 아니하는 삶 은 하나님이주신 땅을 잘 관리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조직신학 ( 오순절의 비교 )
성경적인 조직신학 ( 오순절의 비교 ) 2004-02-25 09:38:39 read : 7 3]오순절의 비교 [1]신약시대의 오순절은 구약시대의 오순절에 비교될수 있다. 구약의 오순 절은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지 오십일째 되는 날이다 (출 12: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 12: 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출 12: 6) 이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출 12: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출 12: 31)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자 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여호와를 섬기며 (출 19: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요 19: 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유대인 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행 1: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 을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말씀하시니 라 (행 1: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 로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2: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출 19: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행 7: 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 (갈 3: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행 2: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삼 천이나 더하더라 (행 2: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기도하 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나 타나니 (행 2: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 2: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출 32: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삼천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행 2: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삼 천이나 더하더라 (고후 3: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민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후 3: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의문 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출 19: 16)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나 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출 19: 18)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강림하 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크게 진동하며 (행 2: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앉 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임하여 있더니 [2]신약시대의 오순절은 베들레헴에 비교될수 있다. 베들레헴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일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에게 임힐 몸을 준비하셨 다 (히 10: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 을 원치아니하시고 오직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고전 6: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후 6: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 신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거하 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백성이 되리라 하셨느 니라 (고전 6: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것이 아니라 (고후 6: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 신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가운데 거하 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백성이 되리라 하셨느 니라 [3]신약시대의 오순절은 구약시대의 바벧에 비교 될수가 있다 (창 11: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우 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행 1: 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 을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창 11: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벧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지면에 흩으셨 더라 (행 2: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어찜이 (창 11: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벧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지면에 흩으셨 더라 (엡 1: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통일되 게 하려 하심이라 9.그리스도인들과 관련된 성령의 사역 1]성령은 믿은 죄인들을 거듭나게 하신다 (요 3: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사람 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요 3: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없느니라 (요 3: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벧 전 1: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씨 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되었느니라 (약 1: 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2]성령께서 믿는 죄인들에게 세례를 주신다 (롬 6: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죽으심 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 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 12: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 으로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갈 3: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옷입 었느니라 (엡 4: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골 2: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가 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1]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의 통일을 간구하시는 그리 스도의 기도에 응답하시기위해서 세례를 주신다. (요 17: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보내신 것을 믿 게 하옵소서 [2]성령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신부를 준비하시기 위해서 세례를 주신다. (롬 12: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서 로지체가 되었느니라 (고전 10: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전 12: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 으로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엡 1: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 1: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충 만이니라 (엡 4: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세우려 하심이라 (엡 5: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 5: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골 3: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자가되라 (고후 11: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 희를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계 19: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 고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전능하신 이가 통치 하시도다 (계 19: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어린양 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계 19: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세 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참되신 말씀 이라 하기로 [3]성령께서는 믿는 죄인들에게 내주하신다. (요 14: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있 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고전 2: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3: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거 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요 14: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 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7: 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흘 러나리라 하시니 (요 7: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 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 시더라) (롬 8: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아 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그리스도의 사람이 아 니라 (요일 3: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거 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안에 거하시는줄을 우 리가 아느니라 (고후 5: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갈 5: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욕 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거스리나 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아니 하리라 (엡 3: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4]성령께서 믿는 조인들을 인치신다 (고후 1: 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엡 1: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4: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고후 1: 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 5: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엡 1: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5]성령께서는 믿는 죄인들을 충만케하신다 (행 2: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6]위 다섯가지의 사역은 믿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일어나고 신앙에 의해일어나며 결코 한때의 감정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는다. [7]위의 첫 네 가지 사역은 결코 상실될수 없으며 다시 구할 필요가 없고 또한 구해도 안된다 우리는 성경에 어느 부분에서도 우리에게 성령의 세례 를주도록 성령으로 우리를 인치도록, 그리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거나 우리 에게내주 하도록 하나님께 요구하라는 명령을 듣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그는 영원토록 성령에 의해 거듭나고 그분이 그에게 내주하며 그분에 의해 세례받고 인치심을 받는다. [8]다섯번째 사역은 상실 될수 있으며 따라서 필요에 따라 몇번이고 계속 그러한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간구해야 한다. (엡 5: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받으라 (행 2: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4: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 (행 6: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 람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행 7: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하나님의 영 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9: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가로되 형 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하신다 하니 (행 11: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무 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 13: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 13: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9] 1-4의 사역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다 (롬 5: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예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빌 4: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10]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비유적 표현 (행 2: 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 (엡 5: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받으라 [11]성령의 충만함은 자신의 불신함으로 상실되기도 합니다. (살전 5: 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마 12: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엡 6: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모 든 화전을 소멸하고 (히 11: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가운 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진을 물리치기도 (엡 4: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고전 5: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행 5: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가득하 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고전 9: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싸우 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고전 9: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 기가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12]성령의 충만함은 회복 될수가 있다 (요일 1: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 가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깨끗게 하실 것이요 (요일 1: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 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3]성령의 충만함은 다음과 같은 축복을 보장한다. 가.성령이 그를 위해 간구하신다 (롬 8: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유 1: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 를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엡 2: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나아감 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나.성령이 그를 인도하실 것이다 (엡 6: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위 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구하고 (요 16: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 로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말하시며 장래 일 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롬 8: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아들 이라 다.성령이 그리에게 증거할 능력을 주실것이다. (요일 2: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 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라.성령은 증거할 능력을 주실 것이다 (행 1: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 과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시니라 마.성령이 그에게 그리고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주실것 이다 (롬 5: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말미암아 하 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바.성령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 게 하신다. (고후 3: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 광을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영으 로 말미암음이니라. (빌 3: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요일 3: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 떻게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것을 인함이니 (빌 3: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알려하 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사.성령은 성품을 강건하게 하실 것이다 (엡 3: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벧전 2: 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유 1: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 를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아.성령이 그에게 성경의 진리를 계시하신다 (고전 2: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자.성령은 봉사와 확신을 주신다 (롬 8: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 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것을 증거하시나니 (요일 3: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거 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안에 거하시는줄을 우 리가 아느니라 차.성려이 그에게 자유를 주실 것이다 (롬 8: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 의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후 3: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카. 성령이 그의 입을 적절한 것들로 채우실 것이다 (막 13: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미리 염 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행 7: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하나님의 영 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 여호와 )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 여호와 ) 2004-02-24 10:45:20 read : 8 뜻: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이 창호는 가창2:4에 처음으로 기록된 이래 단독으로 여호와 로 기재되기 도 하고 여호와 하나님 또는 하나님 여호와라 기재되었다 (1) 모세가 여호와라는 뜻을 물을때 하나님이 대답 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시고 계속해 말씀하시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아브라함 의 하나님이요(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이는 나의 영 원한 이름이여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니라`하셨다(출3:14-15) (2) 히브리 원어에는 야하웨,야웨라 읽게되니 그 뜻은 전에도 계시고 지금 도 계시고 장래에도 계시사 완전하고 무궁한 생명을 가르침.(계1:4) *이성은 단지 피조물의 행위에 볼 뿐이다 그러나 신앙은 피조물의 행위를 통해하나님의 손길을 느낀다. *성부 하나님 1.하나님은 생명의 아버지지이시다 (시 36: 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광명 을 보리이다 (요 5: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주 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행 17: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주재시 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자이심이라 (엡 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 는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말라 (엡 4: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마음 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시 19: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일을 나타내는도다 (시148: 2)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시148: 3)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시148: 4)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시148: 5)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지음을 받았음이로다 1]하나님은 식물들을 돌보신다 (시104: 14)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하시 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시104: 15)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하 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시104: 16) 여호와의 나무가 우택에 흡족함이여 곧 그의 심으신레바논 백 향목이로다 (마 6: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어떻 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아니하느니라 (마 6: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 은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자들아 2]하나님은 짐승들을 돌보신다 (시104: 14)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하시 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시104: 18)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3]하나님은 일기를 주관하신다 (시135: 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깊은 데 서 행하셨도다 (시135: 7)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바 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시147: 8) 저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예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시147: 16) 눈을 양털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시147: 17)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 추위를감당 하리요 (시147: 18) 그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물이 흐르는도다 4]하나님은 계절을 주관하신다 (창 8: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겨울 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행 14: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너희에게 하 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 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2.하나님은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1]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요 20: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6: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8: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갈 4: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요일 4: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증거하노니 (요 3: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요 8: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2]하나님은 천사들에게 아들을 섬기라고 하셨다 (히 1: 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눅 2: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눅 2: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눅 2: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기 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그리 스도 주시니라 (눅 2: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너 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눅 2: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 2: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 2: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베들 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일을 보자 하고 3]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인치셨다 (요 6: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 여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인치신 자니라 4]하나님은 아들에게 영광을 돌린다 (요 8: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하나님은 아들을 증거하셨다 (요 8: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6]하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요 12: 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구원 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위하여 이 때에 왔나 이다 (요 12: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이에 하 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하였고 또 다 시 영광스럽 게 하리라 하신대 (요 17: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아버 지를 영화롭 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지금 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7]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신다 (요 10: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위하 여 목숨을 버림이라 8]하나님은 아들을 가르친다 (요 8: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 을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9]하나님은 아들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눅 4: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규례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전하 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케 하고 (눅 4: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요 3: 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10]하나님은 아들을 기뻐하신다 (사 42: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보 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베풀리라 (마 3: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7: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소리 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벧후 1: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아버지께 존 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1]하나님은 아들의 말을 들으셨다 (요 11: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보내신 것을 저희 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2: 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구원 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위하여 이 때에 왔나 이다 (요 12: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이에 하 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하였고 또 다 시 영광스럽 게 하리라 하신대 (마 26: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 는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 26: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보 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12]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렸다 (요 18: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꽃으라 아버지깨서주 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일 4: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하나님 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 라 (요일 4: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오 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아들을 보내셨 음이니라 (롬 8: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주지 아니하시겠 느뇨 13]하나님은 아들을 인하여 완전히 만족하셨다 (요 8: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기뻐하시 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14]하나님은 아들을 다시 살리셨다 (갈 1: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하나님 아버 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엡 1: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15]하나님은 아들을 높이셨다 (빌 2: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이 름을 주사 (빌 2: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모 든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엡 1: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오 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16]하나님은 아들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엡 1: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17]하나님은 아들에게 심판을 맡기셨다 (요 3: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5: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맡 기셨으니 (요 5: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3.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이시다 (창 1: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전 12: 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나는 아무 낙이없다 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행 17: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주재시 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자이심이라 (행 17: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 고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1]성도들을 미리 아셨다 (롬 8: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 기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벧전 1: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으로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입은자들에 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많을찌어다 2]하나님은 성도들을 미리 정하셨다 (롬 8: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 기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1: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행 13: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영생을 주 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3]하나님은 성도들을 택하셨다 (엡 1: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 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살후 2: 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 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하심이니 (벧전 1: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갈라디아,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벧전 1: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으로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입은자들에 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많을찌어다 (벧전 2: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나 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4]하나님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에게 주셨다 (요 6: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10: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손에 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3: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것을 아시고 5]하나님은 성도들을 부르신다 (마 11: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 게하리라 6]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시키셨다 (롬 8: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 기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7]성도들을 구속하셨다 (엡 1: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하나님은 성도들을 의롭게 하셨다 (롬 8: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이 는 하나님이시니 9]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내주하신다 (요 14: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지 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와서 거처를 저 와 함께 하리라 10]하나님은 성령으로 성도들을 인치신다 (엡 1: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4: 30) 하나 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요 14: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 사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5: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나오 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1]성도들을 지키신다 (요 10: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손에 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7: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이름으로 저희 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하옵소서 12]성도들을 영화롭게 한다 (요 12: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 라 13]성도들을 축복한다 (엡 1: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14]성도들을 사랑하신다 (살후 2: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요 14: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사 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사랑하여 그에게 나 를 나타내리라 (요 15: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15]성도들을 위로하신다 (고후 1: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계 21: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것 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것들이 다 지나갔 음이러라 (살후 2: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16]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유 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요 17: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진리니이다 17]성도에게 평강을 주신다 (롬 1: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노라 (고전 1: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 이있기를 원하노라 (갈 1: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엡 1: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 1: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 이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골 1: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 1: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 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 1: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너희 에게 있을지어다 (딛 1: 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네게 있을지어다 18]성도가 열매을 맺을 때에 기뻐하신다 (요 15: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것이 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19]성도에게 진리를 계시한다 (마 11: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6: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아버지시니라 (눅 10: 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엡 1: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영광의 아버지께서지혜와 계 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20]성도들의 필요를 공급하신다 (마 6: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엡 4: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1]성도들의 예배를 구하신다 (요 4: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 니라 22]성도들을 징계하신다 (히 12: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잊었도 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 하심을 경히 여기지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 다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 12: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너 희를 대우 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있으리요 (히 12: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히 12: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 물며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 12: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하나님 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하시느니라 23]성도들을 회복시키신다 (시 23: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인도하 시는도다 (시 51: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주사 나를 붙드소서 (눅 15: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 에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 24)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얻 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4]그리스도안에서 성도들을 함께 모으실 것이다 (엡 1: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통일되 게 하려 하심이라 25]성도들에게 상급을 주신다 (마 6: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주의하 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얻지 못하느니라 (히 11: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자는 반드 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 야 할지니라 (딤후 4: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나타나 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26]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롬 8: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의롭 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계획 땅 )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계획 땅 ) 2004-02-24 10:44:32 read : 6 제 6 장 하나님의 계획 : 땅 (출 6: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 다 하라 1.땅에 대한 약속과 성취 창세기로 부터 시작하여 사사기 까지는 땅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땅은 하나님의 상징으로 보여주고 실제적으로 주시는 기업이다. 아브라함에 게지시하는 곳을 가라 하셨고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땅에 대한 기업으로 주셨다. 출애굽을 통하여 여호수에게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으로 주워졌다. 2.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땅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표현한다[출6;8] 땅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 리고 약속을 이행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말하고 주워진다. 땅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다. 악을 행할 때에는 하나님은 땅을 축소시켰 고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 할때에는 땅이 확장 되였다. 3.축복으로서의 땅 (출 3: 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땅 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곧 가나안족속,헷 족속,아모리 족속,브리스 족속,히위족속,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 라 (민 13: 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신 6: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신 11: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는 땅은 매우 기름 지고 아름다운땅으로 볼수가 있다. 그 땅에 는 많은 족속들이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쫓아내고 이스라엘 백서에 게 주워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이요 하나님의 계획의 섭리 인것이다. 4.특별한 생활 양식을 요청하는 땅 땅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워지고 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중간적 인 관계로 존제한다. 사람이 악해 질때에 땅이 더럽혀진 것을 말하고 있고 땅이 악하여 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땅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하나님 과 사람과 중간적인 관계로 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 들을 지키고 안식년과 회년을 통하여 땅을 쉬게 함으로 땅이 더 부폐히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계획, 지식 )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계획, 지식 ) 2004-02-24 10:43:55 read : 9 제 5 장 하나님의 계획:하나님에 관한 지식 (출 6: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뺨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너희가 알 지라 1.하나님을 아는것: 그 가능성 아는 것은 그 특성과 성질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 굽으로 내려 간 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표현이 없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애굽의 구출 작전을 통하여 하나님은 전능하심을 보여 주셨 고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심을 보여 주셨고 여호와 하나님 밖에 다른 이가 없음을보야 주셨다. 2.더 큰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 자연 가족 그리고 열국들역사 속 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 할수가 있다. 하나님의 현현은 특히 출애굽 사 건을 통하여 알수가 있다. 하나님의 발견은 하나님의 창조의 자연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이 섬기는 자연의 우상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한 부속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오는 것이다. 족장들에게 하나님은 나 타나셔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들에게 약속하시고 하나님은 축복을 하셨다. 족장들이 발견한 하나님은 멀리계신 분이 아니고 가까이 계시는 하 나님이시다. 3.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출애굽 사건 출애굽의 역사는 친히 하나님의 사역의 역사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 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한발짝도 옴길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인도가 전적으로 보여준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큰 사역의 역사이 다. 이 출애굽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백성을 돌보시고 인 도를 하시는가을 알게 된다. 4.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것: 예배의식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이 주워지기 전에는 예배 의식을 통하여서 하나님 을알게 되였다. 예배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계약이 이루워 지고 하나님을 알게 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마다 절기를 지키기 위 해서 예루살렘에 모였고 그들이 모이는 성회 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 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문이다.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계획과 신약 )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계획과 신약 ) 2004-02-24 10:44:50 read : 8 제 15 장 하나님의 계획과 신약 1.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나라(마 4: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 치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땅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 받은 백성들의 기업이요 구약의희망이 이루워지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성취요 완선이다[마11;4-6]하나님의 나라는 죄에서 구원 받은 백성들에게 주신는 하나님의 은혜로운나라요 축복이다[마 26:28] 2.하나님의 계획과 로마서의 의 (롬 16: 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선지 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하나님은 약속 하신 대로 의의 후사 에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의로움 을주시고 허락하신다. 로마서의 중심은 구원이라는 주제이다. 로마서는 그 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으셨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 님의 계약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게 된다.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계획의 시작 )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계획의 시작 ) 2004-02-25 12:56:16 read : 9 제 1 부 하나님의 계획의 시작 제1장 여호와와 그 분의 목적에 관한 핵심 본문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 의 구원의 역사를 우리엑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과 이스엘과의 계약을 통 하여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임재 등을 살펴본다. 1.중요한 질문에 대한 의미심장한 대답[출5:22-6:8] 1]모세의 중요한 질문 (출 5: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출 5: 23) 내가 바로 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백성을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모세가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를 보 낼 것을 요구하였다,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고된 노동을 시킨다, 이 에 모세는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을합니다. `어찌나를 보내셨나이까?` 또하 나의 질문은 `이 백성을 구원치 아니 하시나이까?` 여기서 모세의 질문 속 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이행에 대한 불만을 토하고 있음을 볼수가 있다. 2]하나님의 계획된 답변 (출 6: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 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 내리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상기 시키시면서 하나님의 계획하 신 것을 이루 실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답변을 통하여 몇가지 사 실을 모세에게 가르쳐 준다, 가.여호와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증명 (출 6: 2)`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하나 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자신을 `여호와`란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야훼`라는 발음으로 표현이 된다. `여호와`란 말은 `주`와 같은 의미로 사 용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출3;14] 하나님의 창조적인 활동 과 하나님의 충족하심을 표현하며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출3:12] 하 나님은 약속을 하심으로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출3:17] 여호와 하나 님은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부터 약속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시며 특히 아브라함과 의 언약의 체결은 그의 섭리와 계획속에서 이루고 계신다 [창15:18 창26:3 출1:7 출6:3-5]. 나.여호와의 목적 (1)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출 6: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다.하나님의 계획은 거룩한 공동체이다. (출 6: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뺨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너희가 알 지라 (레 26: 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백성이 될 것이니라 (렘 7: 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목소 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받으리라 하였으나 (겔 11: 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백 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가 새로운 모습으로 표현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자 기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2) 여호와의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는데 있다. (출 6: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뺨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너희가 알 지라 (3)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풍성한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 다 (출 6: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 다 하라 (출 3: 17) 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족속 아모리족속브리스족속 히 위족속 여부스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 운축복을 받아 누리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2.구약 성경 메시지의 표준자 구약성경의 중심이 되는 핵심이 있다면 출애굽기 5:22-6:8의 본문이 구약 성경의 중심이 된다고 할수가 있다. 여호와는 하나의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계획은 구원으로 이끄시고 특별히 자기 소유가 될 백성들을 모으시며 그 들이여호와를 알도록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들에게 언약의 성취로서 땅을 주 시겠다는 계획이다. 모세을 애굽에 보내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심을 이루시고 언약 성취로 볼수가 있다.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보여 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총아래 구원을 맛보게 된다. 이들은 공통체아래 모이게 된다. 처음에는 예배 중심이고 그다음은 성막 중심이고 그다음은 제사중심으로 전환을 한다. 하나님은 구약의 사건들 속에 하나님은 여러가지고 섭리하시거나 친히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고 하 나님의 언약속에 존재한다. 제2장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초기 예고 하나님의 역사는 모든 일에 계획과 목적을 가지시고 일하신다. 에덴 동 산의 선악과 홍수의 사건들 족장들의 삶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 적을가지고 계심을 볼수가 있다. 특별히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과 하나님의 구출의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목적을 두고 있다. 1.초기역사에 예고된 하나님의 4중 목적 초기 역사 속에 하나님의 4중의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 의심판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축복의 땅이다. 2.족장 들의 기사에 예고된 하나님의 4중 계획 족장들에게 하나님은 언약의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로 하여 하나님의 언 약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그들이 받은 것은 축복의 땅으로 기업을 받았다. 족장들은 하나님과 만남 을제사와 기도의 은혜로 하나님과 만남을 가지게 된다. 제3장 하나님의 계획:구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에서 하나님은 구출의 계획을 세우 시고 그 구출의 목적을 이루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구원을 생활 속에서 체험을 하게 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축복이 요하나님의 목적의 완성이다. 1.역사에 나타난 구출로서의 구원 출14:13-14에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하신것을 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을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능하심과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얘굽의 모든 신들을 치시고 애굽의 힘을 꺽으심으로 하 나님은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다. 1]용사이신 하나님 (출 15: 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슥 14: 16) 예 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왕 만군의 여 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시 23: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출 15: 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하나님은 용사이시며 하나님은 왕중에 왕이시며 목자시며 우리의 구원이시 다. 하나님은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 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심을 보여주시고 있다. 2]구출 방법:여호와 전쟁 하나님이 하시는 싸움은 저룩한 싸움이요 하나님의 백성을 죄로 부터 악으 로 부터 구출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정치적이거나 탐욕적인 싸움이 아닌 하 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방편으로 싸움을 하신다. 하나님은 전쟁을이 르키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전쟁의 승패를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전쟁 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도 하시고 구원도 하신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하여 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도 한다. 2.예배 의식을 통한 축복으로서의 구원 예배의식은 공적인 기도와 제사 노예 그리고 회막과 사제와 같은 예식의 부품들을 포함한다. 예배 의식은 구출행위와 관련을 맺고 있다. 예배 의식 은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을 맺고 있다. 1]제사와 회중 (레 16: 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들 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위와 속죄소 앞 에 뿌릴지니 (레 16: 16)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 를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그같이 할 것 이요 제사는 모든 사람들의 허물과 죄를 사죄하는 과정이니 이것은 사죄의 축복이요 제물로써 속하여 지는 것이다.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은 제사로써 구원을 베풀고 계신다. 2]제사와 개인. 제사로써 모든 개인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사죄를 받을 수가 있다. 자신의 죄의 비중에 상관하지 않고 자기에 힘에 닫는되로 드리는 것이 제사의 의미 를 가지고 있다. 제사 뿐만 아니라 자신이 타인에게 손상을 입혔을 경우에 보상하는 원리 역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다. 3]피의 제사의 의미 (레 17: 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있으므로 피가 죄 를 속하느니라 (레 17: 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자 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하였나니 모든 육체 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끊쳐지리라 (창 9: 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피는 하나님 이 정하신 생명의 상징으로 말하고 있다, 피을 드리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속죄는 피를 가지고 드리는 것이다. 4]제사신학 (민 28: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나의식 물되는 화제,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삼가 내게 드릴지니 라 (레 3: 11)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여호와께 드 리는 식물이니라 (겔 20: 41)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의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 아 내 거룩함을 열국의 목전에서나타낼 것이며 제사는 정한 시기 정한 예물 정한 규범 규칙이 있다. 이 모든 예물에 거룩 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거룩한 예물은 드리는 성도가 진심으로 드리는것 이다. 제사는 범죄자의 영적인 회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특별히 하나님과생 명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제물은 희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사 를 드리는 사람의 희생을 제물의 희생으로 상징하고 그 제물은 생명을 상징 한다. 그러므로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은 생명에 대한 보장 구원을 허락하 신다. 사람들은 제사를 드림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삶 을 통하여 거룩한 삶을 보여 드려야 한다. 3.신학적인 고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싸우셨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하여 하나님은 제사 제도를 만드셨 고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로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셨다. 1]구출 모형으로서의 전쟁에 관한 신학적 고찰 출애굽의 사건은 해방신학자들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압제 받는 사람들 을 구출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목적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사회의 억압과 사회의 정치적인 경제적인 모든 부분에서 구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출애굽 의 사건을 사회의 정의 실현으로 내세우는 것을 볼수가 있다. 그리고 이스 라엘의 공동 생활은 사회 공동체의 사상을 불러 이르키고 있다. 그러나 하 나님은 사회적인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고 영 적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이였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2]제사의 모형들에 관한 신학적 고찰 여호와의 전쟁과 제사 의식은 죄에 대한 사면과 사죄들을 볼수가 있다.곤 경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긍휼과 자비로 표현하여 구제와 사회참여에 방향 을 두고 있다. 제 4 장 하나님의 계획: 계약의 공동체 (출 6: 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뺨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너희가 알 지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여서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언약의 공동체가 이루워진다. 1.계약 공식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 다라고 하는 선언이 25회나 나온다 이로 볼때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체결을 볼수강 있다 이언약은 아브라함에게서도 볼수가 있다, 하나님은 축복을 베풀 백성이나 개인을 불러 하나님은 계약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계 약 안에서 그 계약을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하신다. 하나님 과 계약은 주 계약자가 하나님이시고 계약에 응하는 것은 인간이나 사람 은 그 계약을 파기 할수가 없다. 오직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됩 니다. 2.계약 공동체의 율법 계약으로 율법은 십계명이 그 기초를 하고 여러가지 예배 의식의 법과 생 활의 법과 민법들이 있어 하나님의 계약을 이루어 나아가고 있다. 시계명에 하나님은 그의 서언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선포하신 분이 누 구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율법은 속박으로 부터 벗어난 이스라엘 백 성에게지속적인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3.계약 공동체와 언약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갚아야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신6;6레19:18]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하심 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이되신다. 4.계약과 공동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계약의 공동체이다. 종교적으로 이스라 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 안에 계약이 성립이된다. 이것은 아브라 함이나 각 족장들에게 언약하신 것이 계약이 이루어진다,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공의 )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공의 ) 2004-02-24 10:44:14 read : 26 4.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1]하나님은 거룩하다 (합 1: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출 15: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 에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누구니이 까 (삼상 2: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사 6: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 굴을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사 6: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 호와여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벧전 1: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 한자가 되라 (벧전 1: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 라 2]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 님은사랑이심이라 (요일 4: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 한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 16: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 고로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요 3: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 를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하나님은 신실하다 (고전 1: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 제케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신 7: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 하신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시 36: 5)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 에사무쳤으며 (시 33: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딤후 2: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 하실수 없으시리라 (고전 10: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감당하게 하시느니라 4]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시103: 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인 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신 4: 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 지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마 5: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하 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롬 9: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 히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시103: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 하심이크심이로다 (시 32: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인 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시 51: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5]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신 32: 4)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진 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시 19: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사 45: 21)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 부터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하나님이라 나 외 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삼상 2: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 에서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창 18: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속성 )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속성 ) 2004-02-24 10:42:52 read : 37 *하나님의 속성 (출 3: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 시되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 에게 보내셨다 하라 (사 48: 12)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 음이요또 마지막이라 (사 48: 13)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 니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히 6: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 을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하나님의 자연적인 속성 1]하나님의 영원성 (시 90: 2) 산이 생기기 전,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 터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딤전 1: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 (창 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하나님의 불변성 (삼상 15: 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 이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말 3: 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 희가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약 1: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 로서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3]하나님의 전능하심 (창 1: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 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욥 42: 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아오니 (시 33: 9)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셨도다 (렘 32: 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있 겠느냐 4]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 (왕상 8: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 라도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시139: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 이까 (시139: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 라도거기 계시니이다 (시139: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렘 23: 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 은아니냐 (엡 1: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충 만이니라 5]하나님의 전능하심 (대상 28: 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 음과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 라 (대하 16: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 하는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시 94: 11)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단 2: 20)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욥 42: 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아오니 (사 40: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 와,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하나님의 도덕적인 속성 1]하나님의 거룩하심 (출 15: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 에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누구니이 까 (삼상 2: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사 6: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 굴을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벧전 1: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 라 2]하나님의 의로우심 (시116: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 다 (스 9: 1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 한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이로 인하여 주 앞 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시145: 17)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은혜 로우시도다 (렘 12: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 나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3]하나님의 자비로우심 (시103: 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인 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신 4: 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 지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시 86: 15)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롬 9: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 자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4]하나님의 사랑하심 (요일 4: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 님은사랑이심이라 (요일 4: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 이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 라 (요일 4: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 직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아들을 보내셨음 이니라 (요일 4: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 도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 랑하면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온전히 이루느니 라 (요일 4: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증거하노니 (요일 4: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하 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 3: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 를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일 3: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 을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 16: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 고로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3.하나님의 속성 (출 15: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 에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누구니이 까 (시145: 5)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 이다 (민 14: 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 나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자식에게 갚아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미 7: 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왕상 8: 23)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 하지에 주와 같은 신 이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 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욥 11: 7)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시145: 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 량치못하리로다 (시 25: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교훈하 시리로다 (시119: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시102: 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낡 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시102: 27)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약 1: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 로서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렘 10: 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왕 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능히당치 못하느 니라 (롬 1: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 러지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히 12: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출 34: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여호 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진실이 많은 하나님이 로라 (시116: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 다 (수 24: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 할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 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나 1: 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 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대하 2: 5)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보다 크심이라 (시 86: 10)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욥 23: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욥 23: 9)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딤전 1: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 (시 25: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교훈하 시리로다 (시 92: 15)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그 에게는 불의가 없도다 (사 60: 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 지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 이 되리니 (요일 1: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마 5: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딤전 1: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 하는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 6: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거 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그에게 존귀와 영 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출 9: 14)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신 33: 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 을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체험 )
성경적인 조직신학 ( 하나님의 체험 ) 2004-02-25 12:55:53 read : 4 제 9 장 하나님 체험 (시 18: 7)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인함 이로다 (시 18: 8)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시 18: 9)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어둑캄캄 하도다 (시 18: 10)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시 18: 11)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시 18: 12)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내 리도다 (시 18: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내 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시 18: 14)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시 18: 15)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시 18: 16)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건져 내 셨도다 1.시편에 나타난 하나님의 체험 1]애가 (시 13: 5)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구 원을 기뻐하리이다 (시 22: 14)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 성도들의 영적인 마음을 고백하고 있고 생활 속에서 체험한 일들 고백하고 있다2]감사의 노 래 (욘 2: 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시 30: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대적 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30: 12)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여호 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시107: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영원함이로다 (시107: 2)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대 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3]찬송시 (시117: 1)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저 를 칭송할지어다 (시117: 2)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영원함 이로다 할렐루야 2.지혜의 문학에서의 하나님의 체험 (잠 20: 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구 원하시리라 (잠 20: 12)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잠 19: 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선행을 갚아 주 시리라 (잠 3: 25)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두려워하지 말라 (잠 3: 26)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않게 하시리라 (잠 9: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3.선지서에서의 하나님 체험 (삼상 3: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 3: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왕상 18: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대하 33: 13) 기도한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시 사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매 므낫세가그제야 여 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각 구절을 통해서 보듯이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선지자들은 자신의 삶 속에 서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현실으로나 심령으로나 영 적으로체험 할수가 있는 것들이다.
성경적인 조직신학 (구원 )
성경적인 조직신학 ( 구원 ) 2004-03-05 10:56:11 read : 8 제 7 장 구원 (왕하 18: 19) 랍사게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고하라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의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1.여호와의 날 (암 5: 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여 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여호와의 날은 하 나님이 창조에서 나온 말이요 하나는 에배를 통하여서 보여 지는 것이요 하 나님의 전쟁에 대하여 사용한 말이기도 한다. 특별히 여호와의 날에 대한 것은 구원과 관계르 가지고 있다. 2.메시야 기대 (창 49: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사이에 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 종하리로다 (민 24: 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이스라 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메사야의 기대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 메이야의 사상 은 제사 의식으로 그리고 왕들로 나타나고 이스라엘에 구원자로 나타난다. 구약의 시 문학에서 메시아의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시2:1-3 시2;6] 선지서 에서도 메시아의 사상은 더욱 고조 되고 고통과 괴롬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 성에게는 기대와 소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사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