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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에서 찬송으로 2002-03-26 11:51:07 read : 4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룻4:13-22 하나님은 바꿔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소망으로 어려움을 희망으로 눈물과 고통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바꿔주시 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 동안 여러분들께 룻기에 대한 강해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룻기의 마지막 부분으로 룻이 결국은 축복을 받게 되는 내용입니다. 룻기 1장은 고통으로부터 시작합
고난에서 찬송으로 2002-03-26 11:51:07 read : 4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룻4:13-22 하나님은 바꿔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소망으로 어려움을 희망으로 눈물과 고통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바꿔주시 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 동안 여러분들께 룻기에 대한 강해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룻기의 마지막 부분으로 룻이 결국은 축복을 받게 되는 내용입니다. 룻기 1장은 고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남편이 죽고 흉년이 오고 배가 고파서 절망 가운데 눈물을 짓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다가 룻기 4장에서는 룻이 어마어마하 게 축복을 받게되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줍던 룻이 보아스를 만나고 그로 인해 은혜를 입으며 지내 는 장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이스라엘의 수혼제도에 따라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임을 깨닫 고 밤에 룻을 보아스의 침실로 들어가게 하는 장면, 그리고 보아스가 룻을 되돌려 보내는 장면…. 결국 룻과 보아스는 결혼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그들의 자손 중에 다윗이 태어나게 되고 더 나아가 인류의 구원자이신 메시아를 탄생하게 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 모든 것에는 기회가 있는 법입니다. 그때 그 집을 샀어야 했는데… 그 땅을 샀어야 했는데…그 여자와 결혼했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해도 기회가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이처럼 축복 받을 기회가 있습니다. (룻4:6)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이 말을 한 룻의 가까운 친족은 자신에게 손해가 있을까봐 룻에 대한 기업 무를 책임을 포 기하여 룻과 결혼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가 받을 뻔하던 엄청난 축복은 보아스에게 돌아가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고 다 복되기를 바라지만 어떤 분들은 그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어떤 분들은 진득하게 일을 합니다. 좀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원하니까 하나님의 뜻이기 때 문에 그 일을 합니다. 하지만 일부사람들은 사람들이 좀 알아주고 자기 얼굴이 나타나는 곳에는 서로 일을 하려 다가도 남들이 몰라주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손해볼 것 같으면 하지 않으려고들 합니다. 학교를 다닌다고 다 서울대학교 들어가는 것은 아닌 것처럼 교회 왔다고 다 복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자만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듯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면 좀 손해 보는 것 같고 남들이 몰라준다 하더라도 진득하고 성실하게 그 일을 행해 나갈 때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복 주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억하시기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개개인에게 행하신 축복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지 않으면 그 축복의 기회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 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을 통하여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 가운데 장자에 대 한 축복이 있었으나 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축 복의 계획이 야곱에게 넘어갔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그릇이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인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축복입니다. 룻은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축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의 가장 부자인 보아스와 결혼했습니다. 부자와 결혼해 편안한 일생을 보냅 니다. 두 번째는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룻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다윗 왕의 증조할머 니가 되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룻 한사람으로 인해 베들 레헴이 복을 받고 이스라엘 전체가 복을 받고 세계 전체가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 기 위하여 룻의 허리로부터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룻이 이와 같은 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룻은 믿음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 할 수 있었습니다. 룻기 1장,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불러 “우리에게는 이제 아무런 희망이 없다. 그 러니 너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팔자를 펴라”했을 때에 첫째 며느리 오르바는 보따리를 이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룻은 하나님을 계속 믿고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따라나섰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보고 하나님은 룻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7-29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 수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다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 우 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 나 형제나 자녀나 부모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 받겠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로다. 주 를 위해서 믿음 지키기 위하여 내가 희생한 것이 있다면 이 땅에서 여러 배 보상받겠고 하 나님 나라에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리라. 하나님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보시고 우리에게 보 응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조금 손해를 봅니까. 조금 헌신합니까. 하나 님은 다 기억하시고 우리들에게 갚아주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룻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한 순종의 인물입니다.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여 보아스의 침실로 들어갑니다. 이상한 관습이었지만 이스라엘 의 관습, 즉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을 때 룻은 그것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때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의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고 나가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기쁘게 보시고 그럼 믿음을 행하는 자에게 축복해 주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28장을 통하여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신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 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 리니 (신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 이며 (신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이러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삼가 듣고 말씀을 지켜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임하여 가라사대… 혹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계십니까? 혹시 불순종 때문에 약속한 축복이 임하지 않는 것 은 아닙니까? 내가 말씀에 정말 순종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시고 순종부터 하시는 여러분들 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 말씀을 삼가 듣고 말씀을 지켜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임하여 가라사 대…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말로만이 아니라 이 말씀을 행동으로 순종 할 때 에 하나님의 축복이 회복될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결론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룻기 1장은 고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룻은 현숙한 여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 여 인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바꿔 주실 줄 믿습니다. 고통을 축 복으로 어려움을 소망으로… 내가 믿음을 지켜 최선을 다할 때…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나를 칠 때에…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룻을 바꿔주었듯이 그렇게 바꿔주실 것을 믿습니다.
고난이 있을지라도 2002-03-26 11:52:50 read : 7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룻1:6-18 유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땅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거기서 남편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즈음 아들들도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며느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
고난이 있을지라도 2002-03-26 11:52:50 read : 7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룻1:6-18 유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땅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거기서 남편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즈음 아들들도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며느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떠나고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함께 좇아가고자 합니다. 결국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는 나오미는 그 곳에서 자신을 반갑게 맞는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은 이제 나오미, 희락이 아니라 마라,괴로움이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모압땅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예기치않은 고난이 찾아왔고 남편과 아들들을 잃고 빈손으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 시어머니를 바라보는 두 며느리에 태도를 동해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메세지를 듣고자 합니다. 우리는 나오미와 같이 예기치않은 고난이 찾아오는 이세상에 살고 있습니다.우리가 그리스도인이나 육체를 가지고 이세상에 사는 한 우리들도 고난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이 세상에 있으므로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오미를 떠난 오르바는 더 이상 성경에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를 따라 괴로움의 길을 떠난 룻은 예수님의 구원의 족보에 오르게 되며, 다윗의 할머니가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닥쳐오는 고난과 교회에 닥치는 어려움을 보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집니까? 대체로 세가지로 볼수 있습니다. 첫째, 원망과 불평의 태도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의 부당성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왜 내게 이러한 고난이 닥쳐야 하는가? 나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했는 데 왜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교회인데 왜 어려움이 있어야 하는가? 라는 불평을 터트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불평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앞에 수많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으면 이러한 광야길말고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시지, 우리는 고기도 못먹고 이렇게 여기서 힘들게 고생만 하는구나 차라리 이곳에서 죽어버렸으면 좋겠구나!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그들을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 불평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더 이상 가나안은 복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종살이에서 벗어나고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약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평함으로 가나안을 복지로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았다할지라도, 천국을 향해 간다 할지라도 내 고난과 교회의 어려움으로 불평하고 있는 한 그 성도의 마음속에는 천국은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의 눈에는 천국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와 성도사이 교회와 성도사이에 불평하고 원망의 싹이 트고 있는 이상 신뢰가 깨어지고 장래에 대한 소망의 등불은 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이 말한 그대로 행하시겠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광야에서 죽어가고 맙니다. 이스라엘백성의 시체가 광야를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고난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삶속에서도 고난이 있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도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도피적인 태도입니다. 시편 55편에 다윗도 고난중에 피하고 싶다는 초보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초보적인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느 누가 고난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고난을 피하려고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또 다른 고난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고난을 회피하려는 자세는 그의 인생과 마음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회피함으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 없고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피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인식하여 도피하는 삶을 청산해야 할 것입니다. 세째, 자기연민과 동정에 빠지는 태도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보다 더 고난을 당한 사람은 없고 더 억울하게 사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을 합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을 아무도 모른다고 자기연민과 동정에 빠져서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좋아보입니다."라는 말보다도 "힘들어보입니다."라는 말이 더 큰 위로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를 동정하고 연민을 불러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 위해서 고독과 아픔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포자기하며 자신의 고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거기서는 아무런 해결이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동정과 자기연민으로 깊은 상처로 빠져들어 절망속에 잠기게 되고 늘 자신의 삶을 눈물로 보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쓰실 수가 없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때때로 태풍과 폭풍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폭풍과 태풍으로 바다가 깨끗해진 것을 보셨습니까? 그렇습니다.고난은 우리의 불길같이 끓어오르는 욕망을 제거해주며, 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내 신앙을 이끄는 기회가 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고난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을 지라도 고난앞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태도, 피하고 자기연민에 빠지는 태도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속에서 새로운 삶의 태도를 보게됩니다. 고난을 맞아서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만 남은 가정일지라도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르는 룻을 통해 진정 고난을 맞앗을 때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오미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룻은 왜 나오미를 끝까지 따랐을까요? 바로 나오미에게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오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룻은 나오미에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이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노라 나와 함께 기도하자."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버지시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십자가의 수치와 멸시와 죽음의 고통이 예수님의 마음을 깊숙히 찔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과연 예수님은 십자가의 앞에서 결단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버지의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고난앞에서 피하지 아니하고 불평하거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아니하고 고난에 맞서서 일어나는 용기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을 믿기 때문에 내가 다 알 수 없고 억울함과 부당함이 있더라도 담대히 그 자리에서 일어서고 인내하는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뒤에는 놀라운 부활의 사건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부활의 아침을 소망하면서 당당하게 십자가를 맞서는 예수님을 우리는 따라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사랑과 능력을 믿으며, 나를 이 어려움에서 이끌어내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귀한 일꾼삼으시려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당당하게 일어서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려움과 환란 속에 있는 우리는 바라보면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어려움속에 있는 우리와 우리 영광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자 일어서자!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저 십자가를 향해 당당히 맞서자. 그래서 부활의 아침을 함께 맞자!."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당하게 맞서서 나갑시다.고난을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불평하는 것이며 고난을 회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며, 고난앞에서 자기 연민과 동정에 빠지는 것은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당하고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당당하게 고난을 맞는다면 가까운 어느날 부활의 아름다운 승리가 우리에게 아릅답게 열매맺어질 그 날 과연 하나님께서 살아계심과 나와 함께 계심을 고백하게 될것입니다. 그와 같은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밭에 이르렀더라 2002-03-26 11:35:34 read : 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룻2:1-7 어느 커다란 보험회사의 간부 수련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회사가 개발한 상품을 효과적으로 영업하고 판매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마케팅 전문가와 경영 전문가, 행동심리 학자, 이런 분들을 연사로 모셔다가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객의 환심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구매 충동을 일으킬 수 있을까? 어떻
그 밭에 이르렀더라 2002-03-26 11:35:34 read : 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룻2:1-7 어느 커다란 보험회사의 간부 수련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회사가 개발한 상품을 효과적으로 영업하고 판매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마케팅 전문가와 경영 전문가, 행동심리 학자, 이런 분들을 연사로 모셔다가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객의 환심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구매 충동을 일으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신속히 계약을 체결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내용으로 강의는 뜨겁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참석한 사람들은 ‘가르쳐 준 대로 해서 높은 실적을 올려야겠다’라고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강의에 대하여 최종적인 결단을 내리도록 위임 받은 강사가 강단에 올랐을 때에 그는 청중들을 죽 둘러보고 나서 “오늘 하루 여러분이 배웠던 모든 강의는 다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장내는 웅성거리고 수련회를 주관했던 임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습니다. ‘저 양반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이렇게 놀라고 있는데 그 연사는 태연하게 말하기를 “여러분은 지금까지 소비자를 조종하는 기법을 배우셨는데, 소비자는 여러분에 의해 조종되는 물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소비자를 이용할 권리도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판매전략으로써의 인간 조종술을 배우셨는데 그거 너무 믿지 마십시오. 정말 이 상품이 좋고 또 사람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상대방을 위한 마음으로 뜨겁게 이유만 설명하면 되지, 왜 비굴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고, 내가 사기꾼이 되면서 스스로를 비하시키는 것입니가? 여러분이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세요!” 그리고는 한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흑인 지도자 중에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계시는데 어느 보험 영업사원이 조사를 해 보니까 이 목사님이 생명보험에 가입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으나 사람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생각을 하고 목사님을 만나야겠다 해서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너무나 바쁜 목사님이라서 만나기 어려웠지만 기필코 만나서 목사님 앞에서 인사를 합니다. “저는 보험회사 직원입니다. 저는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데 제가 온 것은 생명보험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직원의 말을 다 듣고 난 목사님은 자기 가정의 장래를 위한 이 보험사원의 관심과 뜨거운 마음에 감동이 되어 가입 신청서에 싸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에 그 목사님은 총탄에 의해서 암살이 됩니다. 한 푼의 재산도 없었던 목사님의 유가족들은 불행 중 다행으로 며칠 전에 가입한 생명보험 때문에 아무런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한 보험회사 직원의 고객의 장래를 염려하는 그 마음과 자기 일에 대한 굳건한 사명감이 한 가족의 생활을 구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 마음을 변화시켜서 내가 돈을 더벌어야 겠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조정하려는 비도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공한다 해도 마음 속에는 후회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식적 테크닉을 다 버리고 더 깊고 순수한 면에서 승부를 걸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부터 여러분은 성공의 문턱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연을 했더랍니다. 이 강연을 듣고 있던 청중들이 다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합니다. 미국 사회학자 ‘토니 콤폴러 ’교수의 말입니다. 현대 사회를 지도하는 윤리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격윤리요, 또 하나는 성품윤리입니다. 성격윤리란 무엇인가 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해야 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성격에 따라서 나를 변화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 성격윤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외적인 것이고 하나는 내적인 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쉽게 말해서 사람을 대하는 기술로 통칭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대하는 기술 중에 하나가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입니다. T.V를 보니 ‘옷차림도 전략이다’라는 광고가 있던데 맞는 말입니다. 성격윤리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옷차림을 멋있게 하고, 말을 잘해서 호감을 끌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어떻게 하면 마음에 들 수 있을까 하는 많은 기술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미지 메이킹(Image Making)이라고도 하는데, 상대방에게 나를 잘 어필시키는 기술입니다. 또 하나는 내면적인 것으로써 적극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하면 된다’ 외치면서 나 자신을 스스로 무장하고 고객을 만나기도 전에 ‘내가 몇 사람을 만날 것이고, 얼마를 벌어들일 것이고 그 돈을 가지고 어디다가 멋지게 써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기쁜 마음으로 고객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성공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를 어필하고,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나의 세력을 과시하고, 안되면 뇌물을 주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나를 잘 인식시켜서, 목적한 바를 성취하는 모든 자세와 기법을 가리켜 성격윤리라 말합니다. 쉬운 말로 가면윤리입니다. 이와는 반대인 성품윤리라는 것이 있는데, 성품윤리란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테크닉, 자기무장이 아니고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 성품이 더 중요하다는 가치관입니다. 즉 정직과, 진실과, 사랑과, 정의와, 겸손과, 순수함! 이런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하고 이러한 원칙을 따라 살아갈 때에 진정한 성공과 행복이 있다는 그러한 가치관을 가리켜 성품윤리라 말합니다. 이 두 윤리 체계 중에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일까요? 미국의 인력관리 회사인 ‘하워드 피셔 협회’는 미국의 100대 기업의 총수들을 불러놓고, 그들이 요구하는 사원들의 이상적 모델을 쓰라고 해서 분석을 했는데, 하나같이 성격윤리가 아닌 성품윤리를 선호하는 경향을 띄고 있다고 발표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격윤리는 나쁜 것이냐 하면 절대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로되, 성품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성격윤리란 그 자체로는 가면을 쓴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의 윤리 문제는 아주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크리스챤들은 굉장히 많지만 사회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에서는 신앙인인데, 일터에 나가면 안믿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사회에 나가서도 교회에서와 같은 신앙인의 삶을 가능케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많이 연구를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결론을 얻어 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맨 먼저 고쳐야 할 것이 있는데 ‘직장이란 생존경쟁의 현장이다. 약육강식과 권모술수와 위선이 판을 치고 있는 곳이요 피도 눈물도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 진실과 성실과 정직을 가지고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는 가치관을 깨뜨리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삶의 윤리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성격윤리를 가져야지 성품윤리를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사고방식부터 깨뜨려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윤리는 성품윤리요, 더 나아가서 도덕입니다. 이 위에 성경적 가치관이 있습니다. 성품윤리란 성경적 가치관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윤리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성경적 가치관이 이 험한 생존경쟁의 세계 속에서 궁극적으로 가장 유익한 원리라고 하는 것을 명심해야만, 그들의 삶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는 우리의 살아가는 현장, 일터, 살벌한 생존경쟁의 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떠한 자세로 일해야 하고 그에게 어떠한 결과를 하나님은 약속하시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오미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스라엘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이 여자가 아들 둘과 남편하고 살았었는데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부자집인데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남쪽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모압은 평야가 넓고 기후가 좋아서 풍요하기 때문에, 비록 이방사람들이 살고 하나님의 성전이 없는 곳이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그곳에 가서 형편이 좀 나아진 다음에 풍년되면 돌아오지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곧 돌아올 것이라 생각 했는데, 사람사는 게 어디 그렇습니까? 마음대로 안됩니다. 그곳에서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을 해서 10년을 삽니다.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찌어찌 해서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습니다. 과부 셋만 살아갑니다. 이렇게 되자 나오미는 크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셨구나. 내가 하나님을 버리고 성전을 버리고 신앙도 다 팔아먹고, 오직 돈에 눈이 멀어서 이곳까지 와서 이 지경이 되었다.’라고 말입니다. 영적인 환경이 소중한데 이것을 다 무시하고 경제적 환경만 따라서 여기까지 왔더니만, 다 잃고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결심하기를 ‘이제 내가 돌아가리라. 다 망한 모습이 남부끄럽지만 그래도 이제 남은 생은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며 살리라’ 결심을 하고 한 며느리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야말로 빈손으로 처량하게 돌아옵니다. 이제 이스라엘로 돌아와 보니 며느리로서는 살 길이 막막합니다. 그래서 자기 환경을 살펴 보는데 1절 말씀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레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자기 친척 중에 부자가 한 분 살고 있었는데도 그 부자에게 찾아가서 좀 도와 달라 하는 부탁을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추수 때가 되어서 이삭줍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옛날에 우리 나라도 이삭줍기를 했지 않습니까? 이삭줍는 일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여기 룻이라는 사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자집 며느리였습니다. 그러나 창피해서 이 일을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이삭줍기에 발벗고 나서게 됩니다. 가끔 심방을 하다 보면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교우들도 만나고 아파트에서 청소하는 교우들도 만나는데 얼굴이 마주치면 무척 민망해들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민망해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정직하지 못하고 게으른 것이 부끄럽지 일하는 것은 지위와 상관없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절대로 부끄러워 마세요. 이스라엘 풍속에 의하면 추수할 때에 곡식을 다 베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벼 벨 때 싹 베버리지 말고 조금씩 남겨 두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주워 먹고 배를 굶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복잡할 게 뭐 있나? 한 꺼번에 다 추수해서 몇 되씩 퍼 주면 깨끗하지!’ 하지만 이 말씀에는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 의미는 공짜로 양식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것이 권리입니까?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당연히 얻어먹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주는 자는 은혜로 주지만 받는 자는 노력해서 먹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을 무작정 도와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애쓰고 수고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구제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과부를 도우라고 했고 과부도 60이상된 사람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들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식있는 사람들은 돕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봉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도 못한 사람을 도와주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도움 받는 만큼 기도해주라, 기도라도 해야 한다. 공짜로 먹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동의 원리입니다. 몇 년 전에 어떤 사업장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예상 하지 않았는데 제가 가니까 사장님이 종업원들을 불러 모아서 예배를 드리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다들 어색해 하길래..... “이리 오십시오..... 나는 이곳에 복 빌러 온 목사이고, 여러분은 이곳을 위해 일하시는 분들이니 우리는 서로 통하는게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 “여러분 중에 이 직장이나 사장님에 대해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 계세요?” 물었더니 다들 웃으시기에 “그 웃음의 의미는 내가 잘 모르지만 일터에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2절 말씀을 같이 봉독했습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뉘게 은혜를 입으면! 룻은 지금 어느 밭에 가서 일할지 모르지만 내가 그 밭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는 것이라고 고백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일하고 있는 그 직장 혹은 그 주인에 대해서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일해줬고 당신은 월급줬고 당연한거지!” 이러한 마음으로 사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내가 얼마 동안 여기 있을지는 몰라도 있는 동안에는 고마운 마음으로 일을 해야 여러분이 편합니다. 그리고 3절 “룻이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우연히! 이것은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절대로 우연히 아니었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고 많은 밭 중에 하필이면 왜 보아스의 밭에 갔을까? 이것을 역설적으로 설명 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디서 일하든지, 친구 소개로 왔든지, 내가 지원해서 입사를 했든지, 오다 보니까 여기까지 흘러 왔다 생각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이유가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안하고 사니까 내가 여기 온 목적을 모릅니다. 또 하나 이제 이 직장에서 어떻게 일해야 될까요? 5절입니다.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리는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뉘 소녀냐” 이삭을 줍는 여인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룻을 보고 주인이 묻습니다. 왜 그 많은 여인 중에 룻이 눈에 띄었느냐 7절 이 그 대답입니다.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더니 아침부터 잠시 집에서 쉰 후에 계속하는 중입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다른 머슴들이 봐도 참 좋았단 말입니다. ‘나를 예쁘게 봐 주세요’ 하고 아첨하고 미소 짓는다고 예뻐 보이는게 아닙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그 모습! 그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세상 내 힘으로 사는 것 같아도 누군가의 은혜를 입고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곳으로 나를 보내신 것이고, 그러므로 고마운 마음으로 여기서 배울 것이 있고 의미가 있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게 될 때에, 더 큰 은혜를 입게 되고 성공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어떻게 되는가 하면 8절 말씀이 그 해답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다른 곳으로 가지 마라, 여기 있어라.’보내기에 아까운 사람이 되고, 소중한 사람이 되고, 대접받는 사람이 되고,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얘깁니다. ‘일할 곳이 없어요’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반성하셔야 합니다. 세상이 각박하고 치밀해서 뚫고 들어갈 길이 없다구요? 아닙니다! 물어보십시오. 진실한 사람 찾느라고 눈이 빠질 지경입니다. 일할 곳이 없는게 아니라 내 성실이 부족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전했더니 굉장히 좋아들하셨습니다. 이제는 대상을 바꿔서 사장님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8절입니다.“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마을로 가지마라” 이 마음을 사장님이 가져야 합니다. ‘저 사람 얼마짜리인데 돈 준만큼 일하나? 필요없다면 바로 감원시킬 그런 생각 마세요. ‘다른 곳으로 가지 마라 나와 함께 일하자’ 이런 마음 가지고 아껴 주세요. 그 다음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말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내 날개 아래 보호함을 받으라고 내게 위탁한 사람이다.’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3절입니다.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위로해 주고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다. 너는 필요한 사람이고 용기를 주고 기쁘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놀게 해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시킬 것은 시켜야지요. 그러나 예를 들면, 말을 해도 기분 좋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밑의 사람이 마음 상하는 이유는 윗 사람이 시키는 일의 내용이 아니라, 일 시키는 그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중하게 대하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존중하고 위로해 주는 가운데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떠한 관계가 되어야 하는가 하면 4절 말씀에 요약이 되어 있는데, “마침 보아스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이 대답하되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서로 기도하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은 먼저 일꾼들에게 여호와의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바꾼다면 “하나님! 우리 직원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세요. 그들에게 복을 주세요” 멋있는 사장님 아닙니까? 여기에 대해서 종업원이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사장님과 회사에 복 주세요” 이렇게 되어지는 일터 되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어느 광산촌에 그 광산의 경영자가 세운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경영자와 노동자들이 함께 그 교회를 다녔는데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양자간 타협이 되지않아 극단적으로 대립을 하였습니다. 모이라고 해도 같이 안모이고, 기도를 해도 서로 욕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기를 40일! 목사님이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묘안을 내서, 상대방이 온다는 사실을 숨긴채 양쪽이 모두 모이도록 했습니다. 서로 만나 어색해 하는 그 때, 목사님이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제 부탁입니다. 이 시간 기도 할 것은, 자기 기도는 빼고 상대편을 위한 기도만 하고 끝냅시다.”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은혜 가운데 기도가 마쳐졌습니다. 기도회를 마친 다음 차를 마시는데, 경영자 중 한 사람이 일어나서 “상대를 위해 기도하니 은혜가 됩니다. 나는 노동자들을 위해 오늘부터 꼭 조금이라도 기도하겠습니다.” 그랬더니, 노동자 중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당신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겠다구요? 나는 사실 하나님도 잘 안 믿지만 당신이 우리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한다면 나는 당신을 믿겠습니다.” 이 목사님이 이 사건을 경험하고 쓴 책은 산업 선교하는 사람들의 고전으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복잡한 문제는 진실과 정직과 사랑과 기도 외에는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나라 좀 보십시오. 부정 부패로 얼룩져 있습니다. 우리의 젊은 이들의 가치관이 아노미 현상을 맞고 있으며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디뎌야 할 사람들이 탄식합니다. 열심히 일해 한 푼 두 푼 모아서 뭐하나? 정직과 진실을 가지고 이 거칠고 냉정한 사회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걱정도 많고 방법도 연구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이 승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도덕 윤리, 성품 윤리를 가지고 나갈 때에 승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미래 학자들은 말하기를 ‘앞으로의 세대는 기술의 세대에서 정보통신의 세대로’ 그 다음에는 도덕의 세계로 갈 것이다. 도덕이 높은 자가 승리할 것이다’이렇게 전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운명의 주인공입니까? 종입니까? 룻이라고 하는 여자를 보십시오. 인생에는 수동적인,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룻이 과부된 것, 베들레헴으로 온 것, 보아스의 밭까지 온 것, 수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는 능동적이었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언제나 진리를 따라 열심히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 앞에는 각박한 세상, 피 튀기는 현장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터가 열심히 일하는 곳이 되고, 서로를 향하여 마음을 여는 곳이 되고, 더 나아가서 서로 위하여 기도하는 보아스의 밭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생 라합과 창가의 붉은 줄 2002-03-26 10:02:56 read : 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수2:15-18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서 가나안을 향해 갈 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배후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가나안 정복의 교두보라고 할 수 있는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서 두 정탐꾼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탄로가 나서 여리고 왕에게 보고되어 여리고 왕은 기생 라합의 집을 수색하게 했
기생 라합과 창가의 붉은 줄 2002-03-26 10:02:56 read : 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수2:15-18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서 가나안을 향해 갈 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배후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가나안 정복의 교두보라고 할 수 있는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서 두 정탐꾼을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탄로가 나서 여리고 왕에게 보고되어 여리고 왕은 기생 라합의 집을 수색하게 했습니다. 이 때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지붕 위로 데리고 가서 삼대에 숨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할 때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살려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두 정탐꾼은 만일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기생 라합은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리우고 산으로 가서 3일 동안 피신해 있다가 돌아가도록 해주었습니다. 두 정탐꾼은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고 말하면서 맹세시킨 후 다시 싯딤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로 인해 기생 라합은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기생 라합과 창가의 붉은 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붉은 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한 구원을 교훈해줍니다. 기생 라합은 틀림없이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함락을 당해서 멸망을 받을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두 정탐꾼과 약속한 대로 창가에 붉은 줄을 매달았습니다. 이것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의 구원의 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지막 심판 때에 다 멸망 받을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9:22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아니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찬송가 186장 5절에 보면 '그 피가 맘 속에 큰 증거 됩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9에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일 구약시대에 태어났다면 하나님의 성소에 여러분과 제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만이 하루에 한 번씩 들어갔고,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만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에베소서 1:7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피는 바로 멸망 받을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입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7:13,14에 보면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는 유전죄, 자범죄,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도덕적인 죄, 윤리적인 죄, 타의에 의한 죄, 자의에 의한 죄 등 모든 죄를 다 씻어주시는 구속의 은총을 입게 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붉은 줄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수 2:17∼21) 두 정탐꾼은 기생 라합에게 창가에 붉은 줄을 매달 때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다 구원해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기생 라합은 이 약속대로 창가에 붉은 줄을 매달아 여리고 성이 함락될 때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마태복음 5:18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찬송가 455장 4절에도 보면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25에 보면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향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구속의 약속으로 주의 몸과 피를 기념하게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잊지 않게 했습니다. 에스겔 16:59,60에도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거역했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이행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맺은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사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우리에게 다시 새로운 하나님의 긍휼의 은총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히브리서 6:17,18에도 보면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에 변함이 없는 것을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변치 않는 주님의 사랑이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서 가장 귀한 일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어떻게 육신의 쾌락 향락 오락에 남보다도 더 즐겁게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잘 먹거나 못 먹거나 부귀 영화 명예 권세를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잘 살고 못 살거나 잠시 지나가는 하나의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는 자에게 주신 예비하신 천국이 여러분과 저에게 보장되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또 그 약속을 따라서 이 땅에서도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되고, 믿는 것에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되고, 심는 것에 보상을 받게 되고, 또 주를 섬기고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한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이 땅에서 받고 사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도 인격이 있는 사람은 그 약속을 이행해줍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신구약의 모든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살아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체험하도록 역사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좌절과 절망 중에 있을 때에도 성경말씀을 상고하면 그 말씀이 여러분 생활 속에 해답을 줍니다. 또 우리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승리할 바를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반드시 놀라운 승리의 과정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성경을 늘 가까이 해야 됩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성경 말씀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해야 됩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에 등불이 되어서 비추어주시는 행로를 바라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늘 성취받는 사람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식을 다 통달해도 성경 말씀을 모른다면 그는 캄캄한 암흑세계에 사는 사람입니다. 비록 세상의 학문과 지식을 다 통달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다면 그는 지상에서 최고의 지식을 가진 명철한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 인과보응의 법칙을 교훈해줍니다. 여호수아 2:12에 보면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고 강청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기생 라합이 두 정탐꾼을 선대한 것처럼 자기와 자기 가족을 선대해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과보응의 법칙을 영원히 우리 가운데 이행해주십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선한 일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마음에 선한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좋은 일이 있기를 원하시면 먼저 그릇을 준비하고 생각을 선하게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보화를 담아 주실 줄 믿습니다. 380년 동안 미국에 이민 온 137개국의 사람들 중에 악한 일을 행하고 산 사람과 선한 일을 행하고 산 사람들의 후손을 조사해본 결과 가장 최고로 악을 행하며 산 사람으로 '유코'라는 여인이 뽑혔습니다. 이 여인은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사람인데 자자손손이 술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7대손 800명을 조사해본 결과 살인죄수가 7명, 강도가 60명, 감옥살이 하는 사람이 264명, 거지가 된 사람이 150명, 양육받고 의탁하며 신세 진 자가 160명, 창녀가 199명, 정당한 직업을 가진 분은 20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유코의 후손들을 먹여 살리는데 국가의 재정이 260여만 달러가 지출되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미국의 이민 역사 중에 제일 착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으로는 절제 운동의 창지자인 요나단이 뽑혔습니다. 그래서 그의 5대손 700명을 조사해본 결과 목사님이 125명, 대학교 총장이 13명, 교수가 250명, 변호사를 개업한 분이 100명, 판·검사가 된 분이 30명, 육해공군의 고급장교가 75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똑같은 지역에서 똑같은 이민 생활을 하면서 악한 일을 하고 산 사람의 후대와 선한 일을 하고 산 사람의 후대의 집계는 바로 인과보응의 법칙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선한 일을 행하면 선한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면 악한 일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마음과 좋은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면 좋은 일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악을 품으면 그 얼굴에 악의 모습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수사기관에 종사하는 분들은 범죄자의 뒷조사를 안해도 얼굴 보면 다 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정직한 삶을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드시 말도 행동도 마음도 생각도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어떤 아버지가 매우 넓은 농장에 기계로 호박을 재배하는데, 한 번은 아들에게 호박씨를 간격을 잘 맞추어 심으라고 시켰답니다. 그래서 호박씨를 심는데 심어도 심어도 끝이 없자, 처음에는 잘 심다가 나중에는 구덩이를 파서 그곳에 남은 씨앗을 모두 묻고 하루 종일 해도 다 할 수 없는 일을 겨우 몇 시간만에 다 끝내고 아버지에게 가서 호박씨를 다 심었다고 했습니다. "너 벌써 다 심었니?" "그럼요, 얼마나 열심히 심었는대요?" "그래, 너 참 오늘 매우 열심히 했구나" 그런데 아무래도 아버지가 미심쩍어서 호박씨가 난 다음에 가보니까 정말 아버지가 시킨대로 간격을 잘 맞추어서 모두 잘 났더랍니다. "그래 참 잘했다"고 하고서 조금 더 가니까 호박씨가 안보이더랍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한 쪽에 가보니까 호박씨가 콩나물처럼 수없이 한꺼번에 나 있더랍니다. "아, 이 놈이 아버지를 속였구나" 그래서 아들을 불러서 "너 그 때 호박씨 심으라고 한 것 다 심었느냐?" "그럼요, 아버지 제가 얼마나 열심히 심었는데요?" "그래? 그러면 이리 좀 오너라."하고 데리고 가서 콩나물처럼 수북히 나 있는 곳을 보여주었더니, 그 때 그 아들이 흙으로 덮어놓으면 모를 줄 알았는데 심은 것이 이렇게 날 것을 미처 생각을 못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6:7에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악을 심든지 선을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실 때 잘했다 칭찬 받고 하나님 보실 때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는 이런 아름다운 삶이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인과보응의 법칙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2;14에 보면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 생명을 너희에게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인정받기를 좋아합니다. 잘 대우해주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외식과 가식으로 잘 보여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돌봐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와 진실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생 라합처럼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의지하고 착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살며, 남을 도우면서 살기를 힘쓰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이 있을 뿐 아니라 하늘과 이 땅에서 상을 크게 누리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입게 될 줄 믿습니다. 주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 하시고, 여러분들의 행하는 모든 일에 주님께서 부요하고 강건하게 하시며, 평탄하게 하시고 생각밖에 더 좋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물붓듯이 부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생 라합의 신앙 2002-03-26 10:00:40 read : 1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수2:1-14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을 오늘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라합은 그 직업이 기생입니다. 그는 음란한 도시 여리고 성에 거주하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었습니다.(수2:15) 이 여인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군대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여리고 성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생 라합의 신앙 2002-03-26 10:00:40 read : 1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수2:1-14 라합이라고 하는 여인을 오늘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라합은 그 직업이 기생입니다. 그는 음란한 도시 여리고 성에 거주하고 있는 여자입니다.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었습니다.(수2:15) 이 여인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군대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여리고 성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군대는 대항해서 그 어떤 민족도 당할 수 없는 민족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떠돌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하여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입니다. 그러던 차에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자기의 집에 숨겨두는 인연을 맺게 되는데, 그것이 기회가 되어서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침략할 때에 라합과 그 집안의 식구들은 살려 주기로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 증표로 여리고 성, 그녀의 집에 창문에 붉은 밧줄을 매달아 놓기로 하였습니다. 이 줄을 보고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되 그 붉은 줄이 있는 라합의 집만은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라합은 기생의 신분으로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 라합은 어떤 신앙의 여인입니까? Ⅰ. 불행한 직업을 가진 여인입니다. 기생이란 노래나 춤으로 술자리에 흥을 돋구어 주는 직업입니다. 레19:29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딸들로 기생이 되지 못하게 하라고 엄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엄하게 금하시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 두사람이 기생 라합의 집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여리고"라는 이름의 뜻은 "향기의 도시, 달의 고을, 종려나무의 성"이라는 뜻으로 요단 골짜기에 있는 요새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관문과 같은 성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이 지역을 바라보고 여호와의 물댄 동산과 같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한 땅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땅이라 그런지 이곳에는 향락 산업이 발달되어 풍기가 음란하게 된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런 도시의 분위기가 그를 기생으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직업 선택을 바로 해야합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이 살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직업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믿음으로 포기하고 신앙 생활을 마음놓고 할 수 있는 직장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월급을 조금만 받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막6:33) 하시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하나님의 사람을 도와 준 여인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공략하기 전에 먼저 여리고 성을 정복해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이미 가나안 땅은 40년 전에 12명의 정탐꾼들에 의해서 정탐한 경험이 있었습니다.(민13:17-23) 이제 다시 보낸 것입니다. 적의 병력은 어떠한지, 지형은 어떠한지를 살피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만 정탐꾼들이 발각이 되었고,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이 기생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정보가 여리고 성 군대에 입수되었습니다. 군대가 급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맞은 정탐꾼들을 기생 라합이 보호해 줍니다. 수2:4-6에 "그 여인이 그 두사람을 이미 숨긴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정탐꾼들이 우리 집에 온 것은 사실이지만 성문을 닫을 때쯤 그들이 돌아갔다고 말해 줍니다. 라합의 이 같은 행동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입니다. 라합은 우리말로간첩을 숨겨 주는 사람으로서 해적 행위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탐꾼들을 숨겨 줍니다. 그래서 정탐꾼들의 임무 수행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 준 여인입니다. 이 라합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을 포기한 여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리고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이것을 기생 라합은 알고 있습니다. 이 같은 시점에서 라합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건 것입니다. 이 같은 신앙적인 선택이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위험한일을 당하게 되더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에스더가 그렇게 해서 나라를 구원하고 자기도 구원을 받았습니다.(에4:16) 다니엘이 그렇게 해서 목숨도 건지고, 신앙도 지켰고, 이방인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였습니다.(단3:16,17, 6:10) 라합은 정탐꾼들로 하여금 산에서 3일 동안 무사히 숨어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결국 정탐꾼들을 밧줄로 달아 내려 주어서 무사히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오게 해 주었습니다.(수2:15) 마10:40에 보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정탐꾼들을 도와 준 라합은 하나님을 도와 준 사람입니다. 오늘도 주의 일을 하는 종들을 돕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라합은 주님의 일에 동역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Ⅲ. 라합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수2:11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어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이 유일하신 신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과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신 것과 가나안 땅을 정복하실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추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을 가졌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라합의 신앙을 이렇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약2:25) Ⅳ. 구원의 비밀을 받은 사람입니다. 수2:18에 "우리가 이 땅에 돌아 올 때에 우리를 닫아 내리 운 창에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고 하였습니다. 라합을 구원하겠다는 약속으로 붉은 밧줄을 약속했습니다. 이 붉은 밧줄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증표가 되어 라합을 구원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 붉은 줄이 매달려 있는 집은 아마도 모두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에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 좌우 인방에 바르면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 가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 때 이방인이라도 그 붉은 피를 문설주에 칠하였더라면 그 집도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입니다. 라합은 구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창문에 드리운 붉은 줄! 이것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여리고의 사람들은 이 붉은 줄의 의미를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라합은 그 줄을 보면서 얼마나 평안을 느꼈겠습니까!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기생 라합은 붉은 줄을 굳게 붙들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이 붉은 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굳게 의지하여 그 은혜로 구원을 얻고, 승리의 생활과 축복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붉은 보혈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속하셨고,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겼으며, 어둠에서 빛으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옮겨 놓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욱이 그녀는 자기의 가족의 구원을 그렇게 갈망한 사람입니다. 수2:13절입니다."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를 이제 여호와께 맹세하라"고 말하고있습니다. 노아를 통해서 그 일가가 지상 홍수 멸망에도 구원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서 롯의 일가가 구원을 받았듯이 라합이 하나님을 믿고 그의 종들을 선대한 것이 근거가 되어 라합의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가족까지 구원하기를 갈망하였기에 라합의 소원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사명과 또 확신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한 사람 때문에 나와 우리 집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그 일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라합은 자기도 구원을 얻고 가족을 구원한 여인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이 일을 위해서 힘쓰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나오미가 룻의 안식할 곳을 찾아줌/룻3:1-18
나오미가 룻의 안식할 곳을 찾아줌/룻3:1-18 2003-09-09 20:52:11 read : 2 (여는 말) 살림살이나 가구나 변변치 못하였던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과거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가정에는 소위(횃대보)라는 하얀천을 장농이나 옷걸이 대신하여 벽에다 걸어 놓았습니다. 그 당시 누나들은 고운솜씨로 이런 것 하나쯤은 수놓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보통 영어로 (sweet Home)(즐거운 가정)이라는 문구를 써 넣기도 했습니다. 과거보다 경 제적으로는 여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진정 가정이 보금자리로써 구실을 하 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새들에게 깃들일 등지가 필요하다면 우리 인생에게는 더욱 보금자 리가 요구됩니다. 짝을 잃은 룻을 위해 시모 나오미는 안식할 곳을 찾아 주 려고 하였습니다. 1.시모 나오미는 자부 룻에게 결혼 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1)자부 룻의 결혼을 위한 나오미의 지혜로운 작전 ①나오미가 룻에게 결흔할 것을 요청한 이유가 있습니다.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룻과 앞으로 생애가 복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②나오미는 룻에게 결혼을 위한 준비로 몇가지를 명령하였습너다. ⓐ친족 보아스의 타작마당으로 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갈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울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보아스가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라 하였습 니다. (2)자부 룻은 시모 나오미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함 ①룻은 나오미의 말씀대로 따를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②룻은 나오미의 명령대로 온전히 준행하였습니다( 창 6:22). 2.룻이 보아스에게 결혼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1)룻은 담대하게 보아스에게 청혼 하였습니다. ①룻은 여인의 자존심을 접어두고 시모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룻의 행동이란 믿음을 동반한 용기있는 행위였습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자신을 시녀라고 낮추었습니다. ②룻은 현숙한 여인이었으나 시모의 명령을 좇았습니다. ⓐ룻의 현숙함은 베들레헴 백성이 다 인정하였습니다. ⓑ룻에게 청혼받은 보아스 역시 「너희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다」 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2)보아스는 일단 룻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①빈부와 연소를 따지지 아니한 룻의 청흔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②보아스는 자신보다 가가운 친족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③그 친족이 포기한 경우 자신이 결혼할 것을 여호와의 사심으로써 룻에게 맹세하였습니다. (3)보아스는 앞으로 신부될 룻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①룻의 아름다운 현숙함을 지켜주기 위해 신경을 썼습니다. ②룻에게 보리를 주어 새벽 일찍 시모에게 보냈습니다. 3.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모든 일을 보고했습니다. (1)시모 나오미와 룻의 대화 ①나오미는 계속 자부 룻을 딸로 불렀습니다. ②룻 역시 시모에게 그 날된 일을 소상히 보고했습니다. (2)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부탁함 ①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기다릴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②보아스가 이 일이 성취하기가지 계속 힘쓸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닫는 말) 안식이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마지막의 행위입니다. 이날을 어떻개 보낼 것인가는 십게명의 4계명으로써 밝혀 주셨습니다. 안식이란 시 간적 개념일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안 식의 땅이며 우리 성도에게는 (저안식) 하나님의 나라가 안식의 최상의 상 태로 소망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히 4:3-11). 이 땅에서 진정한 안식은 없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은 안식의 터가 되어야 합니다.
나오미와 룻/룻1:1-18
나오미와 룻/룻1:1-18 2003-06-27 12:46:10 read : 8 본문의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을 탈출하여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당대의 어른들이 살아있을 동안 하나님을 섬겼다고 기록합니다. (수24:31) 그 이후의 세대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가 바로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다람쥐 쳇바퀴와 같습니다. 불순종 → 하나님의 징계(고난) → 회개 → 하나님의 구원(회복) → 불순종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온 나라에 흉년이 들게 하기도 하셨고, 이웃나라들을 일으켜 침략하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1. 살기 어려워 약속의 땅을 떠나는 나오미의 가족 이런 시대를 살아가던 한 가족이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남편은 엘리멜렉, 아들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이들이 만난 흉년은 실제 흉년인지,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흉년인지는 몰라도 견디기 어려운 흉년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온 재산과 땅을 포기하고 이방나라로 갈 수밖에 없었던 형편이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족이 가나안 땅을 떠난 것은 그냥 이 곳을 떠나 저 곳으로 가는 단순한 이동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요, 축복의 땅입니다. 그 땅은 그들의 기업이요,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땅입니다. 나오미의 가족이 가나안 땅을 떠난 것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포기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을 포기하거나,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나오미의 가정과 같은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본질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악세사리처럼 여기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겪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자기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땅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더욱 죄를 짓는 것입니다. 떠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옳은 것입니다. 말씀안에서 한 가족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오미의 가족은 가족적인 신앙의 위기를 만났을 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오미 가족중에는 모압으로의 이동을 막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족 중에 신앙의 기둥이 될 만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 가족이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서로 영적으로 세워주지 못하고, 함께 인간의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4여전도회 회원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신앙의 기둥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넘어지고, 약해지면, 온 가정이 약해지고 힘들어진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분, 한 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가정에서 뿐 아니라 구역, 지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먹고 살기 위해 가나안을 포기하고 모압으로 갔을 때 어떤 일을 만나게 됩니까? 나오미의 남편이 죽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아들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조금 회복되는가 했는데, 객지생활 10년에 두 아들 마저 죽고 맙니다. 나오미의 비참해진 형편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이다. 여자 중에서도 노년기의 여자는 더욱 약하다. 그 중에서도 과부는 더 불쌍하며, 거기에 가난한 과부는 더더욱 측은하다. 나아가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 중에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은 더욱 처량하며, 그것도 먼 타국에서 객이 된 자식 없는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는 실로 가련하며 불쌍하다. 진정 욥이 남자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다면, 나오미는 여자 중 가장 처량한 지경에 빠진 여자이다." (Thomas Fuller) 2. 모압땅에서 낮아진 나오미 나오미는 모압땅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얻으려고 왔는데,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진리가 여기에 밝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느라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을 때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얻으려고 그 나라와 의를 포기한 삶의 결과가 바로 나오미의 모습입니다. 이 순서를 바꾸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 바꾸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바꾸실 것입니다. 나오미는 모압땅에서 낮고 낮은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는 나오미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고난에도 유익이 있습니다. 이제 나오미의 마음과 귀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긍휼히 여겨 그곳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압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결심을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나오미의 신앙의 회복의 결단입니다. 고난 중에, 환난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나태하고, 뒤로 쳐진 신앙, 무너져 내리고 있는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불편하고 괴롭습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로 한 걸음 더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고난속에서 빛나는 나오미의 <하나님 신앙> 나오미가 가나안으로 돌아가기 전에 할 일이 있었습니다. 두 며느리를 돌려보내는 일입니다. 더 이상 고생시킬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기만 하면 잘 산다는 보장도 전혀 없었습니다. 며느리들은 이방인이기에 가나안에서는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합니다. "딸들아, 네 어미로 돌아가라. 다시 결혼하여 잘 살아라" 오르바는 돌아가지만,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옵니다. "이제 돌아가라"는 어머니의 권면과 설득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룻의 말을 들어봅시다. "나를 가라 하지 마소서. 어머니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겠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나오미는 이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고마웠겠습니까? 룻은 무엇때문에 이런 말과 함께 인간적 소망도 없는 가나안땅으로 나오미를 따라 가려고 했을까요? 룻에게 <하나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있으면서 그 신앙을 보고 가졌던 것입니다. 나오미가 가나안을 떠나올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지만, 고난을 겪으면서 얼마나 성숙한 신앙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룻1:21의 고백을 보면 나오미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룻은 나오미의 이 신앙을 보았던 것입니다. 고난속에서 빛나는 시어머니의 신앙을 보았습니다. 4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고난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나오미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족들에게, 이웃에게 이 신앙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 하나님을 따라 룻은 이방여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나오미를 따라서 가나안에 와서 고생도 좀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복된 결혼인지요. 룻은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그의 혈통에서 예수님이 탄생하게 됩니다. 룻은 바로 오늘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복음과 상관도 없고, 예수님과 상관도 없던 우리를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불러 주시고,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인지요. 룻이 복된 여인인 것처럼 우리도 참 복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큰 은혜를 입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룻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내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내가 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내가 먼저 앞장 서겠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신앙>으로 한 평생 빛나게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라반 ― 이기적인 지략의 대가 2002-02-01 08:47:28 read : 4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의 인물연구 1. 인적 사항 1. 브두엘의 아들, 리브가의 오라비, 이삭의 처남, 라헬과 레아의 아버지, 야곱의 장인이며, 외삼촌 2. B.C. 1920년 경에 하란에 살던 부유한 목자. 3. '라반'은 '횐 빛'의 의미. 2. 생애 주요 사건 라반의 생애는 2번에 걸쳐 아브라함과 사돈을 맺는 것으로
라반 ― 이기적인 지략의 대가 2002-02-01 08:47:28 read : 4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의 인물연구 1. 인적 사항 1. 브두엘의 아들, 리브가의 오라비, 이삭의 처남, 라헬과 레아의 아버지, 야곱의 장인이며, 외삼촌 2. B.C. 1920년 경에 하란에 살던 부유한 목자. 3. '라반'은 '횐 빛'의 의미. 2. 생애 주요 사건 라반의 생애는 2번에 걸쳐 아브라함과 사돈을 맺는 것으로 전개된다. 1. 첫 번째 사돈 맺음 ① 리브가를 이삭에게 시집 보냄(창 24:29-60). ② 리브가의 결혼은 아브라함의 충복 엘리에셀의 기도의 응답이기도 하지만 라반의 탐욕의 결과임(창 24:30,31). 2. 두번째 사돈 맺음 ① 야곱과 라헬의 결혼 약속을 어기고서 14년간이나 야곱에게 일을 시킴(창 29:15-30). ② 자신의 이익을 위해 두 딸을 이용, 14년이 지난 후 6년간 일을 더 시킴(창30장). ③ 그의 태도의 변화로 야곱과 그 가족이 야반 도주함(창 31:1-25). ④ 라반은 도주한 야곱을 좇아 서로 맹약함(창 31:43-55). 3. 성격과 업적 1. 장점 : 2대에 걸쳐 아브라함과 사돈 맺음. 빠른 기지를 가짐. 2. 단점 :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함. 이익에 소용이 없으면 용납치 않으려는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자. 4. 교훈 1. 야곱의 약속을 어기고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자 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라반의 모습은, 곧 조금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다(마 25:43). 2. 일찍이 야곱은 꾀를 내어 형 에서를 속이고서 축복을 받았었지만, 결혼이라는 중대사에서 교활한 라반에게 속고 말았다. 이처럼 속고 속이는 인간 관계는 하나님 앞에 자랑스레 내놓을 것이 못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행한 대로 받음을 보여주셨다(마 7:17). 3. 라반은 야곱을 대할 때에 순전히 자기 유익만을 구하려 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사람은 물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반드시 버려야 할 태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이익은 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버리기까지 하셨기 때문이다(갈 1:4).
라반 ― 이기적인 지략의 대가 2002-03-21 09:22:33 read : 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인적 사항 1. 브두엘의 아들, 리브가의 오라비, 이삭의 처남, 라헬과 레아의 아버지, 야곱의 장인이며, 외삼촌 2. B.C. 1920년 경에 하란에 살던 부유한 목자. 3. '라반'은 '횐 빛'의 의미. 2. 생애 주요 사건 라반의 생애는 2번에 걸쳐 아브라함과 사돈을 맺는 것으로 전개된다. 1. 첫 번
라반 ― 이기적인 지략의 대가 2002-03-21 09:22:33 read : 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인적 사항 1. 브두엘의 아들, 리브가의 오라비, 이삭의 처남, 라헬과 레아의 아버지, 야곱의 장인이며, 외삼촌 2. B.C. 1920년 경에 하란에 살던 부유한 목자. 3. \'라반\'은 \'횐 빛\'의 의미. 2. 생애 주요 사건 라반의 생애는 2번에 걸쳐 아브라함과 사돈을 맺는 것으로 전개된다. 1. 첫 번째 사돈 맺음 ① 리브가를 이삭에게 시집 보냄(창 24:29-60). ② 리브가의 결혼은 아브라함의 충복 엘리에셀의 기도의 응답이기도 하지만 라반의 탐욕의 결과임(창 24:30,31). 2. 두번째 사돈 맺음 ① 야곱과 라헬의 결혼 약속을 어기고서 14년간이나 야곱에게 일을 시킴(창 29:15-30). ② 자신의 이익을 위해 두 딸을 이용, 14년이 지난 후 6년간 일을 더 시킴(창30장). ③ 그의 태도의 변화로 야곱과 그 가족이 야반 도주함(창 31:1-25). ④ 라반은 도주한 야곱을 좇아 서로 맹약함(창 31:43-55). 3. 성격과 업적 1. 장점 : 2대에 걸쳐 아브라함과 사돈 맺음. 빠른 기지를 가짐. 2. 단점 :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함. 이익에 소용이 없으면 용납치 않으려는 자기 중심적 이기주의자. 4. 교훈 1. 야곱의 약속을 어기고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자 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라반의 모습은, 곧 조금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다(마 25:43). 2. 일찍이 야곱은 꾀를 내어 형 에서를 속이고서 축복을 받았었지만, 결혼이라는 중대사에서 교활한 라반에게 속고 말았다. 이처럼 속고 속이는 인간 관계는 하나님 앞에 자랑스레 내놓을 것이 못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행한 대로 받음을 보여주셨다(마 7:17). 3. 라반은 야곱을 대할 때에 순전히 자기 유익만을 구하려 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사람은 물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반드시 버려야 할 태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이익은 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버리기까지 하셨기 때문이다(갈 1:4).
라반을 떠나는 야곱 2002-03-21 09:22:03 read : 3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31:17-42 1. 라반에게서 도망하는 야곱 야곱은 라반이 집에서 20년을 지냈습니다. 그결과 그는 네명의 아내와 12명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라반보더 더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젠 아무런 걱정없이 살수 있을정도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양털을 깍는 때를 골라 모
라반을 떠나는 야곱 2002-03-21 09:22:03 read : 3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31:17-42 1. 라반에게서 도망하는 야곱 야곱은 라반이 집에서 20년을 지냈습니다. 그결과 그는 네명의 아내와 12명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라반보더 더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젠 아무런 걱정없이 살수 있을정도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양털을 깍는 때를 골라 모든 소유를 모으로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라반에게서 도망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야곱이 왜 라반에게서 도망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제 야곱은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이 없습니다.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라반을 떠난다는 것은 첫 번째로 경제적인 이유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자신을 만나주셨던 그 하나님을 20년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그 하나님을 위해 살기 보다 철저하게 자신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풍성한 유산을 누리기 보다 경제적인 풍요를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가 원했던 결혼을 했고 4명의 아내와 12명의 자식을 얻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그는 대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가정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시기와 질투와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바람잘날이 없었습니다. 진정한 안식처와 쉼터가 되지 못했습니다. 또 그가 원했던 물질도 얻었습니다. 라반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원했던 것을 다 소유했습에도 그의 삶은 괴로웠습니다. 그의 처남들이 자기를 사기꾼으로 몰아세웁니다. 재물이 그의 삶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외적이고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질지는 몰라도 그의 마음 한켠엔 늘 만족되지 않는 갈급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난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야곱에게 네조상의 땅으로 제 족속에게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20년동안 속고만 살았습니다. 이제는 라반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하도 믿지 못할 정도로 그에 대한 신뢰는 떨어져 있었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하나님일 음성을 듣는 순간 20년동안 까맣게 잃어버렸던 하나님이 생각난것입니다. 벧엘에서의 하나님을 다시 만난것입니다. 벧엘에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 질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것입니다. 너와 네자손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을 잊고 있었는데 하나님을 자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을 떠나있었는데 하나님은 한번도 자신을 떠나지 않고 자신에게 하신 약속을 다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 때문에 그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자신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그는 순종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결정에 가족들이 따라 줄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가족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그 부인들에게 선포합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부인들이 그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은 지금까지 이들은 한번도 한 마음을 가져본 일이 없었던 자들입니다. 날마다 원수가 되어 다투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말에 하나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 라반의 집을 도망치는 것은 삶이 새로운 자유를 위해 탈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한 도망도 아닙니다. 잘못을 저질러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어서 도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도망입니다. 다시말해 세상의 삶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누구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 이세상의 필요와 풍요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작정되어진 자들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할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내 삶을 드리기 보다 내 육체와 삶의 편안함만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도 야곱처럼 세상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에게로 도망해야될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할 때 가정에 진정한 평화와 일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자신을 위해서 살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자들입니다. 2. 야곱이 라반에게 허락을 맞지 않고 도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야곱은 라반에게 떠나겠다고 통보나 허락을 맞지 않고 야밤도주입니다. 이런 야곱의 행위는 잘된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야곱의 삶의 모든 결정은 라반이 했습니다. 라반의 의도대로 흘러갔습니다. 야곱은 라헬하고 결혼하려고 했습니니다. 그러나 야곱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라 라반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7년을 결혼을 위해 일해주려고 했는데 그는 14년을 일해야 했습니다. 라반의 원대로 된것입니다. 그는 결혼의 계약이 끝났을 때 그는 라반에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자신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자 라반은 돌아가는 것도 좋은데 돌아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냐 재산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그의 뜻보다는 라반의 뜻이 작용했습니다. 20년의 삶을 돌아보면 야곱의인생은 라반의 결정이었습니다. 20년동안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결정이 아닌 라반의 결정을 따랐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라반의 결정을 따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주인은 라반이 아니라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라반에게 허락을 맞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벧엘에서 만났던 진짜주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무엇인가 우리의 인생의 주인을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어떤일을 결정하게 되는 주된 요인이 무엇인가를 보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게됩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의해 모든 사람이 결정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주인은 돈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결정이 부모에 의해 결정되기 도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인생이 결정됩니다. 직장과 일의 노에로 전락해 버립니다. 명예가 될수 있습니다. 권력을 주인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마련하는 것이 주인입니다. 육체적인 편안함만을 주인으로 삶습니다. 모든 결정이 이 기준으로 채택되어집니다. 그러나 이런것들은 우리 인생의 진짜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대단한 것을 약속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거짓말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데리고 산꼭대기로 갑니다. 거기서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고 내게 한번만 절하면 다 주겠다고 합니다. 천하만국의 진짜주인을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말했습니다. 너가 섬겨야 할 진짜주인은 하나님이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더 이상 라반에게 허락을 맞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짜주인이 그에게 말씀하셨기에 그는 그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1)하루는 예수님에게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둘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라고 한다면 내가 사는 집보다 주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주님이 되어야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2)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내가 주님을 좇겠습니다. 그러나 나로 먼저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소서"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죽은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말했습니다. 부모가 죽고나면 모든 것이 올 스톱됩니다. 장사하는 일이 최우선됩니다. 직장도 그만둡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 일에 우선합니다. 그러나 에수님은 그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3)세 번째 사람들이 "내가 주님을 좇겠습니다. 그러나 나로 먼저 내가족을 작별하게 하소서"합니다. 가족이라는 정을 끊기가 어렵습니다. 자식에 대한 애착이 주님보다 더 앞설수 있습니다. 왜 요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필요들, 세상의 가치들, 그리고 혈육의 정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선되야하을 말합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자기를 주관해오던 라반에게 허락을 맞지 않고 도망하는 것을 잘한 일입니다. 참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난이상 더 이상 그의 말에 순종할 필요도 그리고 그에게 허락을 맞을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3. 라반에게 큰소리 치는 야곱 야곱이 도망갔다는 소식이 라반에게 들려지자 라반은 불같이 화를 내며 추격대를 만들어 야곱을 쫓아옵니다. 지금 라반이 야곱을 추격할때는 삼일이 지난후였습니다. 야곱도 될수 있으면 라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려고 안깐힘을 쓰며 달아납니다. 그런데 라반은 추격 역시 만만치가 않습니다. 결국 길르앗이라는 곳에서 맞주치게 됩니다. 하란에서 길리앗은 약 400Km이상되는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거리입니다. 일주일만에 그 만한 거리를 갔다면 야곱이 얼마나 결사적으로 도망쳤는지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라반의 추격대는 4일만에 야곱을 따라잡은 것입니다. 결국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야곱은 라반에게 덜미가 잡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의 주인노릇하던 마귀는 우리를 하나님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가짜 인생의 주인이었던 마귀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때 마귀가 그것을 가만히 두고만 있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대단한 위력으로 따라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 전체가 사단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세상은 자기를 떠나는 자를 결코 그 냥내 버려 두지 않습니다. 자꾸만 거짓말을 해서 자신의 수하에 묶어 두려고 합니다. 세상만 바라보게 합니다. 승진시켜줄게, 돈을 주고 편안하게 살게 해줄게 하며 우리를 타협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나서기만 하면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야곱을 따라왔던 라반이 그에게 하는 말은 왜 나한테 말하지 않고 떠났느냐 내게 말을 했다면 내가 너에게 축복을 하고 환영하며 떠나보낼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자강 중요하게 여기는 드라빔이 있는데 이것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찾아야겠다고 합니다. 자기가 섬기는 신을 도적질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대한 태도가 이상하게 부드럽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해할려고 다려오는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자잘못을 따지지 말고 야곱에게 손도 못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라반은 그 드라빔을 찾기 위해 안깐힘을 씀습니다. 그러나 결국 찾아내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라반앞에만 서기만 하면 이상하게 자신을 잃었습니다. 마치 고양이 앞에선 쥐처럼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그리고 할말을 못하고 그가 시키는 데로 따라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태도가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라반에게 큰소리칩니다. 누구든지 라반의 것을 도적질했다면 그는 살려주지 않고 그것은 당신이 취하십시오 라반은 그 말을 듣고 열심히 찾았지만 그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야곱이 라반에게 큰소리칩니다. 그동안 자신게 잘못했던 모든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 합니다. 20년동안 자신을 속였던 것을 이야기 하며 라반의 잘못을 공격합니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왜 이렇게 담대해 졌나 하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라반에게 감히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해본적이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라반앞에 서기만 하면 그는 쪼그라들게 되고 꼼짝못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야곱이 그렇게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갈대로 가보자 하는 코너에 몰린 쥐처럼 막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라반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의 처자식을 다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품삯을 변개할때도 괜히 라반의 심사를 잘못건드렸다간 모든 것을 다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내 인생은 내 인생의 행복은 라반의 손에 달려있어, 라반이 내 인생을 결정할수 있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은 라반하고 는 비교할수 없는 하나님이 그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셔거 그를 든든하게 보호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추격하는 라반을 꼼짝도 못하도록 했던 분이 바로 자신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에게는 놀라운 담력이 생겼습니다. 그동안 그 토록 두려워보이던 라반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였습니다. 야곱이 큰소리친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인생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휘둘려 왔던 라반은 무엇입니까? 왠지모르게 그것앞에서기만 하면 내자신이 나도 모르게 위축되는 라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사람이 아닌 세상에 가두어 두려고 하던 라반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외모입니까? 자식입니까? 직장입니까?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겠다는 결단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돈과 직장이 성공이라는 계획이 자식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해 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선택과 결단을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라반은 여러분에게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앞에서 큰소리 칠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신분이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신분을 상승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라합 2002-03-26 10:06:07 read : 1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히 11:31) 성경은 항상 '나의 이야기' 여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 역시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처럼 살게 된다. 때로는 아브라함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야곱이 되기도 한다. 아니면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도 하고 기생 라합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의 얘기가 나의 얘기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을 믿는
라합 2002-03-26 10:06:07 read : 1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히 11:31) 성경은 항상 '나의 이야기' 여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 역시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처럼 살게 된다. 때로는 아브라함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야곱이 되기도 한다. 아니면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도 하고 기생 라합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의 얘기가 나의 얘기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 교회 나가서 예배드린다고 하나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 나오는 라합은 교회 나가서 하나님 믿게 된 사람이 아니다. 물론 교회 나가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교회 나가지 않고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나를 향하여 '무교회주의자' 운운할 일은 아니다. 나는 무교회주의자도 아닐 뿐더러 교회주의자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처럼 살고자 원하는 한 개인일 뿐이다. 얘기는 간단하다. 교회의 일원이 된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이 되어야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히브리서 저자가 지금껏 얘기해 온 바는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하는 점이다. 그 믿는 사람의 한 전형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본문의 라합이다. 라합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것이지 교회에 나가기만 하면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건 그는 궁극적으로 교회의 일원이며(따라서 '무교회주의' 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인간들이 벽돌로 지어 놓고 '교회' 라고 이름 붙여 놓은 건물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된 줄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다고 예수 믿는 사람, 하나님 믿는 사람이 될 것 같으면 참으로 걱정이 없겠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대열에 든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부인해야만 하는 아픔을 수반한다. 아벨이 그랬고 에녹이 그랬으며 노아 역시 그랬다. 어디 이뿐인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이 땅 위에서 부평초처럼 이 세상과 유리된 삶을 살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의 원리를 부정하고 자신의 목숨을 미워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몸은 이 세상의 원리를 따라가고 있으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요 오해이다. 본문의 주인공 라합 역시 마찬가지이다. 라합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세상적으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나타내 준다. 믿음이란 참으로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는 것이 아니며, 앞으로 천년왕국이 어떻게 일어나며 1999년의 지구 대멸망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천년왕국이 내일부터이건 내년부터이건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구의 멸망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내년이건 10년 후이건 그 일이 '오늘의 일' 이 아닌 다음에야 우리에게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 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이다. 계속 강조해 온 바이지만 믿음은 '관념' 이 아니다. '내일' 이라는 미래는 오늘의 삶이 아니라는 뜻에서 '관념' 에 불과하다. 과거 역시 마찬가지이다. 2 000년 전에 예수라는 인물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이 땅 위에 태어났다가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만에 부활했느냐 말았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예수 그리스도' 가 오늘 나와 더불어 사는 삶이 없다면 그것은 남의 집 얘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밝혀두지만 내일 일 (우리 육신이 죽고 부활하는 모든 일도 여기 속한다) 을 위하여 염려할 필요도 없고 염려해서도 안 된다 (마 6:34). 문제는 '오늘'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다. 천년왕국의 존재를 믿는다고 거기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오늘' 그렇게 산다. 오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오늘 내가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느냐가 문제다. 오늘의 삶은 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마 13:22) 에 푹 젖어 있으면서 백번 천번 교회 나가서 봉사한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교회 나가기 전에 이 세상에 대한 염려부터 내려놓을 일이다. '이 세상의 염려' 란 단순히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가 아니다. 5공 청산이 되어야 하는데 -, 국가 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하는데 -. 이런 생각들이 이 세상의 염려 이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들이나 신부님들이 이런 일들을 위하여 단식투쟁 혹은 가두시위 등을 하시는데 이 모든 일들이 '이 세상의 염려' 에 꽁꽁 묶여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으며 제5공화국을 청산하는 일과도 상관없다. 어차피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는 것(요일 5:19)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세상을 쳐부수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건 인간들의 생각이다), 이런 세상이 때리면 얻어맞고 죽이면 죽임 당하면서, 즉 죽음으로써 살고 버림으로써 얻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다. 국가보안법으로 무기를 삼든지 돈으로 무기를 삼든지 자기네들끼리 실컷하라고 내어버려 둘 일이다. 억울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느냐고 볼멘 항의를 하실 분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은 억울한 사람들이 아니다. 모두 자업자득일 뿐이다.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그만큼 '세상 일' 에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려고 이땅에 오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마 22:21)' 돌려주라고 했다. 그렇다고 카이사가 옳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내어버려 두라는 뜻이다. 내어버려 둔다고 옳은 것은 아니며 더구나 예뻐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5공청산을 안해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고 조국 통일 가로막는 국가 보안법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는 얘기도 아니다. 다만 그런 일들은 '세상의 일' 이며 이 세상의 일에 대해 염려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살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점 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라합을 인간적인 면에서 평가하자면 그녀는 형편없는 쓰레기일 뿐이다. 그녀가 '창녀' 였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창녀는 오히려 동정의 여지가 있기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형편없는 쓰레기' 라고 막가는 표현을 하는 것은 그녀의 행동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라합의 삶을 보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 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수 2:1-6)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의 방황을 끝내고 이제 막 요단강을 건넜다.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끝난 셈이다. 이런 이스라엘이 최초로 공격해야 하는 대상이 여리고 성이었는데, 여호수아는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정탐꾼 둘을 여리고성에 파견한다. 그러나 그 정탐꾼들은 여리고 성의 정보망에 포착되고, 여리고 성에서는 왕이 직접 나서서 라합을 심문한다. 하지만 라합은 왕의 심문을 '지혜롭게' 피해 간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라합의 임기응변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자기만 살겠다고' 자기 민족과 나라를 배반한 이런 행동이 괜찮은 것이냐 하는 점이다. 라합의 생각에는 아무래도 여리고 성이 망하겠거든, 그래서 그녀는 얼른 여리고를 버리고 이스라엘에 가서 붙었던 것이다. 아무리 배운 게 없는 창녀라지만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이런 라합의 행동이 칭찬받을 일이라면 이완용이가 나쁜 놈이 될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김일성이 역시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한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서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위난에서 건진 사람들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라합이 하나님을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 하는 형이상학적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녀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한 일이라고는 나라와 민족을 적의 손에 팔아먹은 것밖에 아무 것도 없다. 그것도 뭐 그럴만한 대의나 명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사람에게 무슨 대의며 무슨 명분이랴. 라합은 이렇게 여리고 왕을 속이고 정탐꾼들에게 아첨하여 일가의 목숨을 구한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수 2:12-13) 이상이 라합의 믿음이요 삶이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리고 자기 민족을 팔아먹은 여자. 자신의 목숨과 자기 가족의 안녕을 위하여 자기 나라를 배신한 여자. 그 이름이 라합이다. 오늘날 사회의 정의를 구현한다는 분들이나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애쓰시는 분들께서는 이 라합의 믿음과 삶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 하실는지. 과연 히브리서 저자처럼 '믿음으로 라합은'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히브리서 저자야 자기가 히브리인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혹시 여리고 성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라합을 어떻게 평가했을 것인가. 이런 면에서 나는 라합을 '인간 쓰레기' 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라합에게 오면 '인간 쓰레기' 가 되는 일이다. 라합이라고 애국심이 없었겠는가. 라합이라고 자기 나라 백성들이 다른 민족의 칼날에 무참히 죽임당하는 것이 좋았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나라에 총부리를 겨누는 것이며 자신의 동족과 원수가 되는 것임을 어찌하랴. 이래서 '믿음' 이란 "삶" 이라는 말이고 '관념' 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살기는 자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나라와 민족은 어디까지나 '이세상의 염려' 일 뿐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동족을 등지는 일이다. 여기서 동족이라 함은 물론 '이 세상' 을 말한다. 이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 때 그 삶이 자기의 믿음이 된다. 얼핏 보기에는 이 세상(여리고)이 하나님(이스라엘)보다 훨씬 강력했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함락시키지 못했더라면 라합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되거나 종신형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믿음이란 이처럼 아슬아슬한 생의 줄다리기이며 일생을 건 도박일 수도 있다. 일생을 건다는 것은 마지막 카드를 받았을 때 자기 카드가 '이 세상' 의 카드를 이기지 못한다면 자신의 전 생애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믿지 않는다는 얘기며 이 세상에 대한 포기의 선언이다. 여리고 성이 더이상 동족이 아니며 자기 나라가 아니라는 결단.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결단을 하더라도 당분간은 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하고 여리고에서 더 머물러야 한다는 점이다. 이 기간이 힘들고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무능력자이고 어떤 면에서는 '인간 쓰레기' 이다. 이런 반대급부가 없는 믿음은 라합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라합의 믿음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일을 세상 나라의 통일을 위해 애쓰는 일이라 생각하고, 탄압받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불의한 공권력에 대항하고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항하여 전심전력 투쟁한다. 마치 세례 요한이 헤롯왕의 부도덕을 맹렬히 비난했던 것처럼.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막 6:17-18) 이 사건으로 세례 요한은 결국 죽는다. 불의한 공권력에 희생된 '의로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도 처음부터 세례 요한을 죽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했으며 요한의 말에 대해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듣고 있었다 (막 6:20). 불의한 사람이라고 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없이 정적(政敵)을 죽이는 사람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인 줄 알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욕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헤롯 역시 세례 요한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여건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헤롯이나 헤로디아의 행동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야 어차피 그런 사람들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치자. 하지만 세례 요한이야말로 문제의 인물이다. 세례 요한은 왜, 무엇 때문에 헤롯 같은 인물의 결혼문제에 얽매여 죽게끔 되었는가. 이런 죽음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문제는 오늘날 해방신학의 주제와도 연결된다. 불의한 공권력에 대항하는 기독교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 세례 요한은 이러한 불의하고 부도덕한 세상의 지배계급에 온 몸으로 부닥쳐 경종을 울리고 한줌 흙으로 산화한 사람이다. 오늘날의 해방신학자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헌신인가. 뿐만 아니라 민중의 대변자라고 하는 사람들께서도 충분히 추앙하여 마땅한 삶의 모습이 아닌가. 세상의 절대권력자 헤롯 앞에서, 그의 불의와 부도덕에 대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던 때에 과감히 그를 비난하고 나선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세례 요한의 이러한 죽음에 대해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마 14:12-13) 예수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일언반구 논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냥 다른 동네로 가버리신다. 왜 그랬을까. 세례 요한이 자기보다 앞장서서 헤롯을 비난하고 나선 데 대해 고깝게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헤롯의 군사력이 무서워서, 잘못 말했다간 자기도 잡혀갈까 싶어서 그랬을까. 만일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이런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신교, 구교를 막론하고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져 있기도 하다). 과연 아무 말도 못(안)하고 슬쩍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일까. 왠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는가. 우리 같으면 당연히 헤롯을 비난해야 하고 국가보안법을 비난해야 한다고 생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반응은 '노 코멘트' 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보다 세례 요한의 행동에 심정적으로 훨씬 더 동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한다. 이래서 생각 따로 삶 따로이고 믿음 따로 행동 따로 이다. 말년의 세례 요한은 예수의 그리스도성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반신반의하던 사람이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 11:2,6)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분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던 모습이 옥에 갇히던 때의 요한이다. 결국 어떤 면에서 예수와 요한은 신앙의 노선이 서로 달랐다고도 볼 수 있는데, 즉 요한은 예수의 그리스도성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고 예수는 이런 요한에 대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고 대꾸하고 있었다. 요즈음의 얘기로 환언하면 세례 요한은 현실참여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고 예수는 국가니 민족해방이니 정권의 정통성이니 하는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신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이런 모습은 그가 십자가에 죽기 얼마 전에 말한 다음과 같은 메시지에도 잘 드러난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네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 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5-36)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 나라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불의와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과 요한의 죽음이 다른 점은, 물론 여러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그들을 죽인 주체가 누구냐 하는 점이다. 세례 요한의 경우는 '세상 권력' 이지만 예수의 경우는 이와 좀 다르다. 빌라도나 로마 병정들은 하수인이고 실제로 예수를 죽이는 것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및 바리새인들 그리고 유대 민중들이다. 유대 민중들은 처음에는 예수를 향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막 11:9)' 하면서 좋아들 했지만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막 15:13)' 고 외친다. 민중들이란 언제나 어디서나 이렇다. 예수는 결국 민중들에 의해서 죽임 당한다. 세례 요한을 죽이는 헤롯은 심히 근심하면서(그가 근심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사형을 집행하지만,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근심하지 않는다. 그만큼 예수는 '민중들' 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는 얘기이다. 예수는 한마디로 '유대인' 이 아니었다. 유대 민족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지도 않았고 부정과 부도덕의 헤롯 정권을 타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 민중의 기대는 민족의 해방이었고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었으니 예수의 기대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호의를 보내지 않는다. 예수는 이러한 민중들의 기대를 저버린 죄로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예수의 죽음을 표면적으로만 바라보면 예수는 복지 인권국가를 꿈꾸는 유대 민중의 꿈을 짓밟은 죄로 죽는다. 라합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탈(脫)유대인을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수긍이 된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로마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모두 '이 세상' 일 뿐이다. 이 세상은 로마를 쳐부수거나 소련을 쳐부수어서 평정할 문제가 아니다. 예수가 생각하는 '이 세상' 은 우리 모두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나의 가족, 친척, 이웃, 나라와 민족)만을 사랑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평정된다 (마 5:43-).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 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세상의 시민권을 버려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라합처럼 자기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을 수도 있고 예수처럼 그들의 손에 맞아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일한 죽음이라도 이 세상 정권의 부도덕성을 나무라다 죽는 것은 아니다. 민중들 대다수가 바라는 그런 일들을 하다가 죽는 죽음이 아니다. 여리고의 어느 민중이 라합의 행동을 칭찬하겠는가. 예수가 유대 민중의 동의가 없었더라도 죽었을 것인가.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는 누가 헤롯을 욕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렇지만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당시의 민중들이 빌라도와 헤롯을 비난했겠는가. 성경을 읽을 때는 항상 그 속에 동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아니면 그 역사의 무대를 오늘날로 옮겨와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의 식민지 팔레스틴의 한 청년으로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며, 수탈받는 민중들 틈에서 그 민중들의 고통을 체험한 예수를 읽어야 한다. 예수는 민중을 수탈하는 이 세상 권력에 대해 공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받는 그 민중들을 나무란다. 우리는 과연 이런 예수를 믿고 있는가. 오늘날 이 땅에 예수가 재림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예수가 와서 한다는 소리가 맨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하면서 돌아다닌다면 이 땅의 어느 민중이 그를 좋아하겠는가.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고 노사분규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가서 얘기해 보라. 국가보안법에 연루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10여년씩 하고 나온 사람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얘기해 보라. 통일운동 한답시고 왔다갔다 하다 간첩으로 몰려서 사형당한 의로운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빈들로 도망가는 예수를 생각해 보라. 산상수훈은 세상의 가진 자나 세상의 집권자들에게 하는 얘기가 아니다. 산상수훈은 민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마 5:1). 오늘날 이 땅에 예수가 다시 온대도 그는 십자가에 죽거나 아니면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하거나 할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특히 해방신학자들과 민중운동가들은 그를 '비겁한 지식인' 혹은 '현실 도피적 몽상가' 라 비난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민중으로부터 소외당하고 결국엔 그 민중의 손에 죽임 당한다. 라합이 자기 동족이며 자기 나라인 여리고를 부인한 것은 예수의 나라를 볼 줄 알았고 그 나라에 자기 인생을 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인간적인 명분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라는 자기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육신적 혈통으로는 여리고의 백성이었지만. 그래서 그 여리고 백성들에겐 '인간 쓰레기' 가 되었지만. 우리 모두 '인간 쓰레기' 가 되자. 나는 라합을 사랑한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요일 5:19-21)
라합 ― 믿음으로 구원얻은 여리고 기생 2002-02-01 08:54:31 read : 9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의 인물연구 1. 인적 사항 1) 아모리 족속의 기생(수 2:1). 2) 유다 지파 살몬의 아내, 보아스의 어머니(마 1:5). 3) 라합은 '넓다'라는 뜻. 4) 메시야의 족보에 오른 네 여인 중 한 사람(마 1:5) 2. 성품 1)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을 숨겨준 용기의 소유자(수 2:6).
라합 ― 믿음으로 구원얻은 여리고 기생 2002-02-01 08:54:31 read : 9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의 인물연구 1. 인적 사항 1) 아모리 족속의 기생(수 2:1). 2) 유다 지파 살몬의 아내, 보아스의 어머니(마 1:5). 3) 라합은 '넓다'라는 뜻. 4) 메시야의 족보에 오른 네 여인 중 한 사람(마 1:5) 2. 성품 1)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을 숨겨준 용기의 소유자(수 2:6). 2) 다급한 상황 중에도 정탐꾼들을 빨리 피신시키고 여리고 왕의 추격대를 따돌린 영특함이 넘치는 자. 3)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입으로 고백한 진실된 신앙의 소유자(수 2:9). 4) 전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깨닫고, 이를 놓치지 않은 현명함을 가진 자(수 2:12,13). 5) 정탐꾼을 보낸 후 즉시 붉은 줄을 창문에 메어놓고 구원의 날을 기다린 인내의 소유자(수 2:21). 3. 구속사적 지위 1) 정탐꾼을 보호해 줌으로써 구원받은 여리고의 유일한 신앙인(수6:17). 2) 믿음으로 가족 모두를 구원시킨 최초의 이방 여인(수6:25). 4. 주요 공적 1) 여리고 왕의 추격대로부터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보호·도피시킴(수 2:6,22). 2) 정탐꾼과 서약을 지켜서 비밀을 누설치 않음(수 2:20,21). 3) 여리고 성 함락 시에 가족 모두를 구원시킴(수 6:25). 5. 실수 1)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기생의 신분을 가짐(수 2:1). 2) 정탐꾼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함(수2:4-6). 6. 평가 및 교훈 1) 급박한 상황에 봉착했을 때, 라합은 슬기롭게 처신하여 위기를 모면했다(수2:4-6).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수 2:8-11). 이는 오늘 날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으로만 믿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우리들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진리를 교훈 한다(약 2:14,26). 2) 라합이 살던 여리고는 우상 숭배가 만연하던 죄악의 도성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에서도 라합은 하나님의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써 그 믿음을 나타냈다(수2:9-11). 이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이 열악함을 핑계로 신앙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또 이를 자위(自慰)해서는 안된다. 3) 라합은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될 것을 확신하고는 자기와 더불어 온 가족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정탐꾼에게 간구했다(수 2:13). 이처럼 자기 혼자만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애쓴 라합의 모습은 안일하게 '나 혼자만의 신앙'을 누리고 있는 소극적 자세의 신앙인들 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나는 과연 가족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4) 도덕적으로 보잘 것 없는 기생 라합이 오직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메시야의 가계에 기록되는 놀라운 신분으로 상승하였다(마1:5). 이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구속 사역 후 성화(聖化)되어진 그리스도인의 신분 상승을 보여준다. 이처럼 놀라운 주안에서의 신분 상승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미 주어진 바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처지가 보잘 것 없고 나약하다 하더라도 모든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매 순간마다 우리의 신분에 합당한 생활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한다(벧전2:9).
라합/ 수2:1-7/ 2018-11-04
라합 수2:1-7 한 사람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아담 때문에 온 인류에게 죄가 입장되었고, 한 사람 예수때문에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한 사람 아간 때문에 아간 식구 전체가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고, 한 사람 노아때문에 8식구 전체가 홍수에 멸망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한사람 요나때문에 배가 흔들려 전체 사람이 고생하였고, 한 사람 롯 때문에 롯의 가정이 구원받았습니다. 본문은 한 사람 라합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발을 딛게 되었고, 한사람 라합 때문에 온 그의 가족이 복받은 이야기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보잘것 없고 쓰레기 같은 인생 라합 그녀는 창녀였습니다. 70인역 성경에는 매춘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그만 디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녀는 드러누워 돈을 버는 직업이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직업중 가장 비참하고 천한 직업이다> 그러나 라합은 괄목할만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라합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라합이라고 하는 뜻은 <거만함> <결렬함> <광대함>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라합은 정말 거만한 사람같은 기생이었지만 나중에 광대한 일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1. 바꾸는 믿음 라합은 주변을 온통 바꿀 줄 아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어떤 것을 바꾸었습니까? (1) 민족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여리고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ꡒ약속의 땅ꡓ이었지 ꡒ고국의 땅ꡓ은 아니었습니다. 남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여호수아가 파견한 두 정탐꾼은 여리고에 들어가 제일 접근하기 쉬운 술집에 들어가 라합을 만났습니다. 놀랍게도 라합은 이 땅이 이스라엘 백성의 땅이 될 것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누구도 거스릴 수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라합 하나 때문에 여리고 민족의 역사가 비극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소망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2)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46명중에 라합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마 1:5). 그 중에 5명이 여자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거룩한 여자가 아니라 창녀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공헌한 5대 여걸 중에 하나입니다. (3) 가정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여리고 사람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라합 가정만 살았습니다. 한 사람 라합 때문에 가정 전체가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라합 하나 때문에 민족의 역사가 바뀌고, 기독교의 역사가 바뀌고, 가정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나 하나 때문에 주변이 바뀌도록 하여야 합니다. 2. 칭찬받는 믿음 라합의 믿음은 칭찬받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칭찬하신 믿음이 몇 번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가버나움의 백부장 믿음을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그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방문하시게 되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은 못 고치실 병이 없으신 분임을 소문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 몇 명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자기 종을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l 장로들이 예수님 앞으로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4-5) 예수님은 회당을 지은 백부장이라는 말을 들으시고 그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 때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게 하였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6-8)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9) 이렇게 예수님이 칭찬하신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믿음도 칭찬받는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바울이 칭찬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11;31) 히브리서의 저자를 루터는 아볼로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터틀리안은 바나바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르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설이 제일 유력합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서 바울은 16명의 믿음의 거성, 신앙의 거목, 일꾼의 거인들이 등장합니다. 누가 인정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울이 인정한 16명입니다. 그중에 15명이 남자입니다. 단 한명 라합만이 여자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라합을 높이 보고 있는 것일까요? 굉장한 바울이 놀랍게 라합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칭찬한 믿음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수아 2장에서 온통 라합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있는 믿음이라고 라합을 칭찬했습니다. 마태는 메시야 믿음이라고 라합을 칭찬하였습니다. 바울은 종합적으로 라합을 칭찬하였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김제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출생한 이 자익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은 너무나 가난하였습니다. 끼니 구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얻어 먹었습니다. 그는 결심을 하고 가출하였습니다. 이리 저리 다니다가 온 곳에 곡창지대 김제였습니다. 그는 어느 부자집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밥만 먹여주면 머슴이 되겠습니다. 시키는 일을 다 하겠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머슴으로 써주었습니다. 그는 죽을 둥 살 둥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집을 떠나면 굶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미국 남장로교 최 의덕 선교사가 김제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일찍 들어 간 곳입니다. 이 선교사가 마방을 드나들면서 전도하다가 이 자익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이 자익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인 가족도 함께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무식한 이 자익은 주인 아들이 독방에서 한문자 읽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암송하면서 한문자를 배웠습니다. 어깨 너머로 공부한 것입니다. 최 의덕 선교사는 김제를 중심으로 크게 활동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점점 늘어 나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금산교회입니다. 선교사는 주인 조 덕삼과 머슴 이 자익을 교회 일군으로 함께 임명하였습니다. 최 의덕 선교사 선교 활동 반경이 점점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이 자익 청년을 설교자로 임명하였습니다. 너무나 믿음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또 맡길 만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조 덕삼은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일꾼이 교회의 설교자가 된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은혜도 충만히 받았습니다. 조금도 시기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08년이었습니다.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데 조 덕삼과 이 자익이 장로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투표를 하였습니다. 투표 결과 이 자익은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조 덕삼은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 결과를 놓고 웅성거렸습니다. 그 때 조 덕삼이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교우들이여! 참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봉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자익은 장로로 선출하여 일하게 하였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는 젊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열심히 있습니다. 우리 이 자익을 장로로 잘 받들어 교회를 성장시키십시다> 모두가 감격속에서 박수를 쳤습니다. 1년 후에 조 덕삼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 자익 장로는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장로교의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져서 머슴인 이 자익 목사를 잘 받들어 섬겼던 조덕삼 장로는 집안 대대로 하나님께 크게 세움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모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모두 칭찬받아야 할 믿음들입니다. 라합도 어느 누구에게나 칭찬받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이름이 떠오를 때 칭찬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하여야 합니다. 3. 지혜롭게 혀를 놀리는 믿음 우리는 말 잘 하는 사람보다 잘 말하는 사람을 더 좋아 합니다. 하나님도 물론 그렇습니다. 라합은 지혜로운 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정탐꾼이 숨어 들어와습니다. 여리고 왕이 정보를 알고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라합은 이미 지붕위 삼대속에 2명의 정탐꾼을 숨겨 놓았습니다. 이제 2명의 정탐꾼의 운명은 라합의 혀에 달렸습니다. 이때 라합이 대답하였습니다.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 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4-5) 처음에는 긍정하였고 나중에 부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고, 나중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지혜의 입술이었습니다. 모두 부정하면 라합이 죽을 것이고, 모두 긍정하면 두정탐꾼이 죽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모두는 따라갔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지혜의 입술을 가집니다. 남에게 혀로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육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는 오래가는 법입니다. 나이가 지긋이 들은 최 상필이라는 백정은 장터에 푸줏간을 경영하며 고기를 팔았습니다. 양반 두 명이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그 중에 한 명 <얘! 상필아! 쇠고기 두 근을 다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기 두 근을 잘라 주었습니다. 함께 온 다른 양반은 자기보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이에게 반말하기가 미안하여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최 서방! 고기 두 근만 주게나> 기분좋게 대답한 최 상필은 큰 칼로 고기를 선뜻 베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산 양반의 고기보다 두 배나 많았습니다. 먼저 고기를 산 양반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놈아! 넌 눈도 없냐? 같은 고기 두 근인데 어째서 이렇게 두 배 차이가 나냐?> 그러자 최 상필이 대답하였습니다. <예. 그야 손님 고기는 상필이가 자른 것이고 이 어른신네 고기는 최 서방이 자른 것이니까요> 사람이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둡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지혜로운 말만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라합은 지혜로운 입술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내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파하여서는 안 됩니다. 4. 아는 것을 행하는 믿음 라합은 아는 것을 행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라합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이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으미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 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부모님과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① 간담이 녹았습니다 ② 마음이 녹았습니다. ③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고 행하여 하나님께 돌아온 자는 라합 하나뿐이었습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한 다는 것을 알면서 정직하게 사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사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이길 확률은 1/100입니다. 바클레이의 견해입니다. 이스라엘은 40년 광야 생활에 지쳐 있었고 여리고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공격해야 하고 여리고는 방어하면 족합니다. 이스라엘은 무기가 없지만 여리고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할 것이라는 믿음은 조롱거리의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라합의 믿음에는 동의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라합의 결단에 박수치는 이도 없었습니다. 라합의 생각에 박수치는 이도 없었습니다. 라합의 방향에 따라오는 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정말 믿었기에 확고하였습니다. 확고하였기에 양보할 틈이 없었습니다. 초대교부 크리소스톰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느냐? 좋다. 그러면 내가 온 세상을 반대하리라> 라합은 정말 믿었기에 참으로 행동하였습니다. 미국 뉴욕 뉴저지에 한 교회가 있습니다. 한인교회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여선교 회장이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그는 3 에이커 그러니까 3,600 평 대지에 잔디밭이 있고, 풀장이 있는 으리으리한 집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느 주일에 이 회장이 이런 광고를 해달라고 목사님에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폐품을 모아서 돈을 모으고 싶습니다. 주의 선교사업을 위해서 쓰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광고를 좀 해 잘 해 주시죠> 그 날 아침 목사님은 이렇게 광고를 했습니다. <본 교회 여선교 회장님께서 이 시간 폐품을 모집하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회장을 위해서 폐품 수집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버려둔 폐품을 전부 가지고 오십시요. 가져오시면 교회에서는 그것을 팔아서 여선교 회장의 생활비와 용돈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광고를 들은 여선교 회장이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말자 목사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목사님, 저를 거지로 알았습니까? 제가 언제 폐품 팔아서 먹고 산다고 했습니까?> 목사님이 여선교 회장에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시오. 당신은 예수님보다 부자입니까? 그러면 당신은 예수님을 거지로 알았습니까? 폐품이나 쓰레기같은 것 주워다가 예수님께 드리려 합니까?> 이 말을 들은 여선교 회장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습니다. <오 주여,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소서> 목사님도, 여선교 회장님도 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보통 분들이 아닙니다. 바르게 책망하고 즉시로 받아 드리는 자세가 얼마나 좋습니까? 라합의 믿음은 아는 것을 행할 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언행일치의 믿음이었습니다. 5. 모험의 믿음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모험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험을 합니다. 모험을 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왕이 라합의 집에 군사를 보내었습니다. 정탐꾼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라합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만일 이 때 군사들이 온 집안을 뒤져 두 정탐꾼을 찾아냈다고 하면 라합은 민족적 배반자로 극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공개 처형감이었습니다. 간첩 동조죄였습니다. 참된 믿음은 정말 믿기에 미친듯이 일하기에 타인이 보면 마치 모험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모험을 감행합니다. 믿음의 별명은 모험입니다. 6. 온 가족을 구원하는 믿음 믿음의 사람은 온 가족을 구원합니다. 라합은 온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라합 하나 때문에 가족 모두가 구원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어느 정신과 의사의 경험담입니다. 어느 날 공부를 죽도록 하기 싫어하는 자식 때문에 속을 썩고 있는 부모가 찾아 왔습니다. 자식이 공부를 그렇게 안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박사에 의사에 교수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훌륭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나는 당신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철길 건널목을 철부지 아이 하나가 건널려고 하고 있습니다. 기차가 달려 들고 있습니다. 그 옆 거의 비슷한 거리에 시장에서 허레 일을 하는 지게꾼과 내가 서 있습니다. 당신 생각에는 누가 아이를 구하려고 먼저 뛰어 들 것같습니까?> <지게꾼이 먼저 뛰어 들 것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아무리 기생이라도 라합은 여리고성에 살고 있는 이중에서 미래에 소망을 바라보는 가장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6가지 특징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1. 바꾸는 믿음 2. 칭찬받는 믿음 3. 지혜롭게 혀를 놀리는 믿음 4. 아는 것을 행하는 믿음 5. 모험의 믿음 6. 온 가족을 구원하는 믿음.
라합/ 수2:1-7/ 2018-11-04
라합 수2:1-7 한 사람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아담 때문에 온 인류에게 죄가 입장되었고, 한 사람 예수때문에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한 사람 아간 때문에 아간 식구 전체가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고, 한 사람 노아때문에 8식구 전체가 홍수에 멸망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한사람 요나때문에 배가 흔들려 전체 사람이 고생하였고, 한 사람 롯 때문에 롯의 가정이 구원받았습니다. 본문은 한 사람 라합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발을 딛게 되었고, 한사람 라합 때문에 온 그의 가족이 복받은 이야기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보잘것 없고 쓰레기 같은 인생 라합 그녀는 창녀였습니다. 70인역 성경에는 매춘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그만 디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녀는 드러누워 돈을 버는 직업이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직업중 가장 비참하고 천한 직업이다> 그러나 라합은 괄목할만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라합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라합이라고 하는 뜻은 <거만함> <결렬함> <광대함>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라합은 정말 거만한 사람같은 기생이었지만 나중에 광대한 일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1. 바꾸는 믿음 라합은 주변을 온통 바꿀 줄 아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어떤 것을 바꾸었습니까? (1) 민족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여리고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ꡒ약속의 땅ꡓ이었지 ꡒ고국의 땅ꡓ은 아니었습니다. 남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여호수아가 파견한 두 정탐꾼은 여리고에 들어가 제일 접근하기 쉬운 술집에 들어가 라합을 만났습니다. 놀랍게도 라합은 이 땅이 이스라엘 백성의 땅이 될 것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누구도 거스릴 수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협력하였습니다. 라합 하나 때문에 여리고 민족의 역사가 비극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소망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2)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46명중에 라합의 이름이 등장합니다(마 1:5). 그 중에 5명이 여자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거룩한 여자가 아니라 창녀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공헌한 5대 여걸 중에 하나입니다. (3) 가정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여리고 사람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라합 가정만 살았습니다. 한 사람 라합 때문에 가정 전체가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라합 하나 때문에 민족의 역사가 바뀌고, 기독교의 역사가 바뀌고, 가정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나 하나 때문에 주변이 바뀌도록 하여야 합니다. 2. 칭찬받는 믿음 라합의 믿음은 칭찬받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칭찬하신 믿음이 몇 번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가버나움의 백부장 믿음을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그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방문하시게 되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은 못 고치실 병이 없으신 분임을 소문을 듣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장로 몇 명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자기 종을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l 장로들이 예수님 앞으로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 7;4-5) 예수님은 회당을 지은 백부장이라는 말을 들으시고 그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 때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게 하였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6-8)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9) 이렇게 예수님이 칭찬하신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믿음도 칭찬받는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바울이 칭찬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11;31) 히브리서의 저자를 루터는 아볼로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터틀리안은 바나바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르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설이 제일 유력합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서 바울은 16명의 믿음의 거성, 신앙의 거목, 일꾼의 거인들이 등장합니다. 누가 인정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울이 인정한 16명입니다. 그중에 15명이 남자입니다. 단 한명 라합만이 여자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라합을 높이 보고 있는 것일까요? 굉장한 바울이 놀랍게 라합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칭찬한 믿음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수아 2장에서 온통 라합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있는 믿음이라고 라합을 칭찬했습니다. 마태는 메시야 믿음이라고 라합을 칭찬하였습니다. 바울은 종합적으로 라합을 칭찬하였습니다. 칭찬받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김제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출생한 이 자익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집은 너무나 가난하였습니다. 끼니 구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얻어 먹었습니다. 그는 결심을 하고 가출하였습니다. 이리 저리 다니다가 온 곳에 곡창지대 김제였습니다. 그는 어느 부자집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밥만 먹여주면 머슴이 되겠습니다. 시키는 일을 다 하겠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머슴으로 써주었습니다. 그는 죽을 둥 살 둥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집을 떠나면 굶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미국 남장로교 최 의덕 선교사가 김제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이 일찍 들어 간 곳입니다. 이 선교사가 마방을 드나들면서 전도하다가 이 자익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이 자익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인 가족도 함께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무식한 이 자익은 주인 아들이 독방에서 한문자 읽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암송하면서 한문자를 배웠습니다. 어깨 너머로 공부한 것입니다. 최 의덕 선교사는 김제를 중심으로 크게 활동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점점 늘어 나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금산교회입니다. 선교사는 주인 조 덕삼과 머슴 이 자익을 교회 일군으로 함께 임명하였습니다. 최 의덕 선교사 선교 활동 반경이 점점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이 자익 청년을 설교자로 임명하였습니다. 너무나 믿음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또 맡길 만 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조 덕삼은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던 일꾼이 교회의 설교자가 된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은혜도 충만히 받았습니다. 조금도 시기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08년이었습니다. 금산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데 조 덕삼과 이 자익이 장로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투표를 하였습니다. 투표 결과 이 자익은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조 덕삼은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 결과를 놓고 웅성거렸습니다. 그 때 조 덕삼이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 교우들이여! 참 감사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교회에 봉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자익은 장로로 선출하여 일하게 하였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는 젊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열심히 있습니다. 우리 이 자익을 장로로 잘 받들어 교회를 성장시키십시다> 모두가 감격속에서 박수를 쳤습니다. 1년 후에 조 덕삼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 자익 장로는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 장로교의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져서 머슴인 이 자익 목사를 잘 받들어 섬겼던 조덕삼 장로는 집안 대대로 하나님께 크게 세움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모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모두 칭찬받아야 할 믿음들입니다. 라합도 어느 누구에게나 칭찬받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이름이 떠오를 때 칭찬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하여야 합니다. 3. 지혜롭게 혀를 놀리는 믿음 우리는 말 잘 하는 사람보다 잘 말하는 사람을 더 좋아 합니다. 하나님도 물론 그렇습니다. 라합은 지혜로운 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정탐꾼이 숨어 들어와습니다. 여리고 왕이 정보를 알고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라합은 이미 지붕위 삼대속에 2명의 정탐꾼을 숨겨 놓았습니다. 이제 2명의 정탐꾼의 운명은 라합의 혀에 달렸습니다. 이때 라합이 대답하였습니다.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 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4-5) 처음에는 긍정하였고 나중에 부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고, 나중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지혜의 입술이었습니다. 모두 부정하면 라합이 죽을 것이고, 모두 긍정하면 두정탐꾼이 죽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모두는 따라갔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지혜의 입술을 가집니다. 남에게 혀로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육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는 오래가는 법입니다. 나이가 지긋이 들은 최 상필이라는 백정은 장터에 푸줏간을 경영하며 고기를 팔았습니다. 양반 두 명이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그 중에 한 명 <얘! 상필아! 쇠고기 두 근을 다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기 두 근을 잘라 주었습니다. 함께 온 다른 양반은 자기보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이에게 반말하기가 미안하여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최 서방! 고기 두 근만 주게나> 기분좋게 대답한 최 상필은 큰 칼로 고기를 선뜻 베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산 양반의 고기보다 두 배나 많았습니다. 먼저 고기를 산 양반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놈아! 넌 눈도 없냐? 같은 고기 두 근인데 어째서 이렇게 두 배 차이가 나냐?> 그러자 최 상필이 대답하였습니다. <예. 그야 손님 고기는 상필이가 자른 것이고 이 어른신네 고기는 최 서방이 자른 것이니까요> 사람이 무엇이든지 심는 대로 거둡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지혜로운 말만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라합은 지혜로운 입술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내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파하여서는 안 됩니다. 4. 아는 것을 행하는 믿음 라합은 아는 것을 행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라합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이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으미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 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부모님과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① 간담이 녹았습니다 ② 마음이 녹았습니다. ③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고 행하여 하나님께 돌아온 자는 라합 하나뿐이었습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한 다는 것을 알면서 정직하게 사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사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이길 확률은 1/100입니다. 바클레이의 견해입니다. 이스라엘은 40년 광야 생활에 지쳐 있었고 여리고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공격해야 하고 여리고는 방어하면 족합니다. 이스라엘은 무기가 없지만 여리고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할 것이라는 믿음은 조롱거리의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라합의 믿음에는 동의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라합의 결단에 박수치는 이도 없었습니다. 라합의 생각에 박수치는 이도 없었습니다. 라합의 방향에 따라오는 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정말 믿었기에 확고하였습니다. 확고하였기에 양보할 틈이 없었습니다. 초대교부 크리소스톰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느냐? 좋다. 그러면 내가 온 세상을 반대하리라> 라합은 정말 믿었기에 참으로 행동하였습니다. 미국 뉴욕 뉴저지에 한 교회가 있습니다. 한인교회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여선교 회장이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그는 3 에이커 그러니까 3,600 평 대지에 잔디밭이 있고, 풀장이 있는 으리으리한 집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느 주일에 이 회장이 이런 광고를 해달라고 목사님에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폐품을 모아서 돈을 모으고 싶습니다. 주의 선교사업을 위해서 쓰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광고를 좀 해 잘 해 주시죠> 그 날 아침 목사님은 이렇게 광고를 했습니다. <본 교회 여선교 회장님께서 이 시간 폐품을 모집하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회장을 위해서 폐품 수집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버려둔 폐품을 전부 가지고 오십시요. 가져오시면 교회에서는 그것을 팔아서 여선교 회장의 생활비와 용돈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광고를 들은 여선교 회장이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말자 목사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목사님, 저를 거지로 알았습니까? 제가 언제 폐품 팔아서 먹고 산다고 했습니까?> 목사님이 여선교 회장에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시오. 당신은 예수님보다 부자입니까? 그러면 당신은 예수님을 거지로 알았습니까? 폐품이나 쓰레기같은 것 주워다가 예수님께 드리려 합니까?> 이 말을 들은 여선교 회장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습니다. <오 주여,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소서> 목사님도, 여선교 회장님도 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보통 분들이 아닙니다. 바르게 책망하고 즉시로 받아 드리는 자세가 얼마나 좋습니까? 라합의 믿음은 아는 것을 행할 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언행일치의 믿음이었습니다. 5. 모험의 믿음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모험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험을 합니다. 모험을 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왕이 라합의 집에 군사를 보내었습니다. 정탐꾼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라합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만일 이 때 군사들이 온 집안을 뒤져 두 정탐꾼을 찾아냈다고 하면 라합은 민족적 배반자로 극형에 처해졌을 것입니다. 공개 처형감이었습니다. 간첩 동조죄였습니다. 참된 믿음은 정말 믿기에 미친듯이 일하기에 타인이 보면 마치 모험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모험을 감행합니다. 믿음의 별명은 모험입니다. 6. 온 가족을 구원하는 믿음 믿음의 사람은 온 가족을 구원합니다. 라합은 온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라합 하나 때문에 가족 모두가 구원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어느 정신과 의사의 경험담입니다. 어느 날 공부를 죽도록 하기 싫어하는 자식 때문에 속을 썩고 있는 부모가 찾아 왔습니다. 자식이 공부를 그렇게 안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박사에 의사에 교수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훌륭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나는 당신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철길 건널목을 철부지 아이 하나가 건널려고 하고 있습니다. 기차가 달려 들고 있습니다. 그 옆 거의 비슷한 거리에 시장에서 허레 일을 하는 지게꾼과 내가 서 있습니다. 당신 생각에는 누가 아이를 구하려고 먼저 뛰어 들 것같습니까?> <지게꾼이 먼저 뛰어 들 것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아무리 기생이라도 라합은 여리고성에 살고 있는 이중에서 미래에 소망을 바라보는 가장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6가지 특징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1. 바꾸는 믿음 2. 칭찬받는 믿음 3. 지혜롭게 혀를 놀리는 믿음 4. 아는 것을 행하는 믿음 5. 모험의 믿음 6. 온 가족을 구원하는 믿음.
라합의 고백과 믿음 2002-03-26 10:01:24 read : 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수2:11-14 할렐루야! 오늘은 "라합의 고백과 믿음"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여자의 힘이란 남자보다 주먹힘이 약하다는 것뿐이지 실제적으로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합니다. 남자보다 정신력이 강하고 의지력이 강합니다. 남자는 의지력도 약하고 정신력도 약합니다. 예를 든다면 여자는 여
라합의 고백과 믿음 2002-03-26 10:01:24 read : 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수2:11-14 할렐루야! 오늘은 "라합의 고백과 믿음"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여자의 힘이란 남자보다 주먹힘이 약하다는 것뿐이지 실제적으로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합니다. 남자보다 정신력이 강하고 의지력이 강합니다. 남자는 의지력도 약하고 정신력도 약합니다. 예를 든다면 여자는 여러 아이들을 혼자 힘으로 훌륭하게 기르는 키우기도 하지만 남자는 혼자서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본문의 라합이라는 여인을 보면 보통 여인이 아님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1)믿음의 눈을 뜬 영적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1: 사람에게는 분별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혀는 음식 맛을 분별합니다. 짠맛, 단맛을 분별합니다. 귀는 음을 분별합니다. 좋은 소리, 나쁜 소리를 분별합니다. 눈도 사물을 분별합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믿음으로 보는 분별력입니다. 성도에게는 믿음의 분별력이 분명하고 좋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요10:4-5절에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과 타인의 음성을 분별한다는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어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주를 좇았습니다. 그러나 주를 좇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를 좇지 않은 사람들은 주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는 주의 음성을 듣는 주의 양들입니다. 주의 택하신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의 택하신 백성이요. 주의 말씀의 음성을 듣는 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성도는 말씀을 분별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모유 맛과 우유 맛을 분별합니다. 성도는 말씀의 맛을 분별해서 오직 말씀을 알고 말씀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 부지런히 살아라. 성공해라. 식의 하나의 교훈정도가 아닙니다. 내 심령의 변화를 주는 말씀이요. 내속의 새로운 나를 중생 시키시는 말씀이요. 내 인격을 변화시키시는 말씀이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말씀이요. 내 삶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의 말씀이요. 내 영혼의 양식이 되는 것이 말씀입니다. 성도는 말씀의 맛을 분별할 수 있는 은혜가 있어서 세상의 어떤 즐거운 소리보다 말씀을 더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3: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일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합은 일을 통하여 분별하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2;4절에서 "그 여인이" 라는 말은 불규칙 복수형으로서 음란한 여자를 가리키고 8절에서 라합은 그 여인의 이름을 말합니다.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한 여기서의 라합이란 어근을 찾아보았을 때에 뜻은 넓은 것을 말합니다. 신분상으로 그는 죄인이며 창기였으며, 허물많은 존재였으나 넓게 볼 수 있는 이상적 세계관이 오히려 믿음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은혜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도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다가오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주의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2)믿음의 고백이 진실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라합의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있는 내용입니다. 그의 고백 중에서 1:간담이 녹는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뜻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백성을 심히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수6:1절에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고 한 말이 실감하게 합니다. 이만큼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믿음의 무기와 힘을 가진 백성입니다. 더욱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무엇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은 배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도는 무엇에든 믿음의 담대함이 있어야 하지 배짱으로 행하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16:33절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 하셨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믿기만 하면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사단이 한길로 왔다 일곱 길로 도망하는 역사가 나타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10절에서 그녀는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를 마르게 한 것과 광야에서 전쟁의 관한 소식 등을 들어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고 전능자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단순히 한 민족으로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백성이라는 것 때문에 두려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라합은 비록 천한 신분의 여인이었으나 이스라엘의 함께 하는 하나님의 들은 소문이 그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되게하였고 깨닫게 하였던 것입니다. 히11:1절 말씀같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라고 한 대로 이루어졌고, 롬 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처음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처음 시작한 사람일지라도 말씀듣는 일에 부지런하면 믿음은 축복된 믿음이 되어지고 큰 믿음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성도는 나의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신앙고백은 배워서하는 고백도 아니요, 시켜서 따라하는 고백도 아니요. 자신이 실로 믿어지고 깨달아져서 입술에서 나오는 그런 고백이 참 고백입니다. 이를테면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것은 누구에게 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거하는 성령이 배드로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은혜 주셨고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욥이 그의 신앙을 고백합니다.(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신앙고백을 행2: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신앙고백은 확신적인 고백이어야 하고 속에서 믿어지는 믿음에서 나오는 고백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3)믿음으로 행하는 자에게 구할 권한을 주셨습니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고 대가를 요구하였습니다. 라합이 그들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창기로서는 당연한 권리요. 당연한 요구였는데 여기서 그 기질을 어김없이 발휘하였습니다. 1:라합이 무엇을 요구한 것은 뜻이 있는 요구입니다. 바로 살려달라는 말입니다.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는 이 말 가운데서 "표"는 "오다. 에서 기원한 것으로 너희가 여리고성으로 쳐들어올 때에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 무엇인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을 약속하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라합은 살기 위해서 정탐꾼을 극진히 대접을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살리느냐 죽이느냐 흥하게 하느냐 망하게 하느냐 하는 모든 근본적인 주권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라합이 정탐들을 극진히 대우한 것처럼 우리는 내 정성과 믿음을 다하여 주 예수를 바로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영생과 구원이 보장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성도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자기의 요구조건을 당당하게 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왜냐하면 자기 할 노릇 다 하였다는 말입니다. 내 아무리 천한 창기에 불과하지만 나는 내 민족을 배신하면서까지 너희들을 대우하였으니 살길를 가르쳐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로서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성도는 주앞에 이와같이 우리는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당하게 우리가 구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앞에 내 모습이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14: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요구에 주께서 시행한다는 말씀 속에는 상당한 권리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녀의 요구에 부모는 시행하듯이 하는 주님의 마음을 살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라합은 천한 자리에서 존귀한 몸과 마음이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의 족보의 대를 잇는 역할을 이 여인이 하였습니다. 비록 이방의 천한 창기의 신분이었으나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주를 영접하고 죄를 회개한 사람은 그 죄를 가리움 받고 천국백성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2> 라합은 가족을 모두 구원받게 하였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은 여인, 이스라엘 승리를 위해 쓰임받은 여인, 가족의 구원을 위해 쓰임받은 여인이 바로 라합이었습니다. 그는 존귀하게 쓰임받았고 쓰임받아야 할에 귀하게 쓰여진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도는 귀하게 쓰임받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성도는 라합처럼 말씀을 잘들으므로서 믿음이 성장하고 영적 안목이 열려서 말씀의 세계가 보여지고, 거짓영과 진리의 영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라합의 구원과 축복 2002-03-26 10:05:05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수2:1-24 약 2:25, /이와 같이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다른 길로 그들을 보냈을 때,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점령함에 앞서 제일 어려운 문제는 여리고성의 점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두 정탐군을 파송하여 그 성의 형편을 빨리 탐지하
라합의 구원과 축복 2002-03-26 10:05:05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수2:1-24 약 2:25, /이와 같이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다른 길로 그들을 보냈을 때,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점령함에 앞서 제일 어려운 문제는 여리고성의 점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두 정탐군을 파송하여 그 성의 형편을 빨리 탐지하고 자기들이 은신하기에 제일 좋은 은신처로서 한 기생의 집을 택하여 그 집에 투숙하였다. 그 기생의 이름은 라하인데, 이때 라합은 자기 집에 온 이 정탐군을 잘 영접하여 선대함으로써 구원을 받고 나중에는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이 되는 참으로 이방 여인중 더욱이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 영광스러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1. 두 증인을 영접한 그림자이다. 요 1:12,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 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고 했습니다. 여리코성이 함락될 때 기생 라합이 구원 받은 것은 첫째로 두 정탐군을 영접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라합이 이 두 점탐군을 영접하지 못했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 같이 여리코성이 무너져 내릴 때 그들과 함께 멸망을 받았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1) 왕으로 영접하였다. 본문 3절, /여리코 왕이 라합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네 집에 들어와서 네게 온 사람들을 내보내라. 이는 그들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음이라.”고 하였을 때 기생 라합은 자기를 다스리는 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두 정탐군을 숨긴 것은 곧 그들을 왕으로 영접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를 전도자로 파송하실 때,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또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사람은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 고 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라고 하면, 여호수아(예수)는 복음의 상징이요, 두 정탐군은 두 증인의 모형이다. 라합이 두 증인을 영접한 것은 곧 두 증인을 파송한 여호수아(예수)를 영접한 샘이다. 이에 라합은 앞으로 자기를 다스릴 왕은 현재 여리고 왕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될 것을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용감하게 현재 자기를 통치하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두 정탐군을 영접하고 그를 숨겼던 것입니다. 2)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하였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게 되면 사형이다. 그러나 라합이 자기가 왕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두 정탐군을 숨기는 행동은 곧 자기의 목숨을 내 놓은 행동이었다. 그는 현재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형을 당한다 해도 두 정탐군을 숨겨두기만 하면 반드시 살 것을 믿었으니, 그는 대속의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두 정탐에게 말하기를 {수 2:12- 13=? ‘그러므로 이제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내가 너희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니,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에 친절을 베풀 것을 주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달라’ = 20 = 그리고 너희는 너희가 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자매들과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의 생명을 죽음에서 구해내 달라.‘ 하니. 그때 두 정탐군이 대답하기를 /14 ’너희가 우리의 일을 발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하노라. 주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가 너를 친절하고 진실하게 대우하리라.‘ 하더라. 고 했습니다. 라합과 두 정탐군들 사이의 서로의 계약은 생명의 언약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라합은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두 사람도 앞으로 라함과 그 가족들의 생명을 구해주어야 한다는 귿은 계약으로써 “진실한 표”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신약에 와서 놀라운 구속의 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그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값주고 사시어 진실하신 성령으로 우리를 인치시는 모형인 것입니다.(엡 1:7, 13). 3) 선지자로 영접하였다. 라합은 두 사람을 자기 집 지붕위에 가지런히 쌓아 둔 삼대로 숨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나는 주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것을 아노라. 하였다. (수 2:8).라합은 그 두 정탐군을 선지자로 영접한 것입니다. 특히 삼대는 베옷을 만드는 나무인데, 여기서 짠 베옷은 가는 베와 굵은 베가 있습니다. 굵은 베옷은 계 11:3에 나오는 두 증인이 입은 옷이기도 합니다. 지붕위에 가지런히 쌓아둔 삼대는 두 증인의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인데, 라합은 기생이요 창녀의 신분이면서 그 나라와 왕과 내통하기도 하고, 또 두 증인의 옷을 만들기 위해서 삼베단을 지붕위에 쌓아놓았던 것입니다. 라합은 겉으로 보기에는 술과 노래와 웃음으로 남자들을 희롱하며 몸을 파는 창녀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러나 그 여자는 선지자적인 선견이 있는 여성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집에 몰래숨어 들어온 하나의 길손 나그네를 선지자로 알아보고 그들을 남달리 친절하게 영접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정탐군을 숨겨주는 여성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두 정탐의 피난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의 믿음의 행위요, 사랑을 실천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약 2:2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다른 길로 그들을 보냈을 때,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으냐?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 21:31에서 말씀하시기를 /그 둘 중에 누가 그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라고 하시니, 그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첫째이니이다.” 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특히 마 1:5을 보시면 /라합은 예수님의 신부의 모형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 구원의 기회를 잘 포착한 라합이었다. *어두워지자 성문이 닫힐 때쯤 되어 그 사람들이 나갔으니,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속히 그들을 쫓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사람들을 따라잡으리라.(수 2:5)고 했습니다. 기생이요, 창녀인 라합이 구원받은 것은 자기에게 찾아온 구원의 기회를 바로 포착했으며,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21 = 여러코성 안에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에게 찾아온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고 모두 멸망의 길로 갔던 것입니다. 다 멸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만한 그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이사야선지는 사 55:6에서 /그를 찾을 만한 때에 너희는 주를 구하며, 그가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 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실패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찾아온 좋은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은혜를 받을 때 구원의 기회를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1.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여리코성 안에 모든 사람들은 마음눈이 어두워서 구원의 기회를 상실했지만, 그러나 라합은 비록 천한 창녀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마음눈이 밝아 있었습니다. 마음눈이 캄캄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찾아온 구원의 기회를 육신의 소욕으로 바꾸는 과오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창인 영안이 열린 사람은 자기의 혼을 구원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여리코 왕과 모든 백성들은 두 증인을 한낫 그 나라를 첩보하러 온 하나의 정탐으로 보고 그들을 사로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증인을 영접하는 것이 자기로서는 구원의 최선의 기회인 것을 알았습니다. 마지막 종말에 가서도 영안의 열린 자라야 짐승의 밥이 되지 않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소돔 성 안에 백성들은 눈이 어둡고 캄캄해서 다 망했습니다만, 눈이 밝은 의인 롯만은 살아남았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2. 라합은 위기의식에 도전했던 것입니다. 5절? /어두워지자 성문이 닫힐 때쯤 되어 그 사람들이 나갔으니,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문은 구원의 문 곧 기회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어두워졌다는 것은 종말을 뜻합니다. 그리고“성문이 닫힐 때쯤 되어”란 말은 구원의 기회가 끝나감을 뜻합니다. 여리코성에 두 사람이 파송될 때는 여리코성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구원의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 시대에도 두 증인의 증거 기간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기간이 된다는 사실을 계 11:1- 3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됩니다. 영원히 구원의 기회는 다시 없습니다. 한번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구원을 호소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마 25: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고 하셨습니다. 주께로부터 무서운 냉대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슬피 우는 비극만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라합은 ‘어두워지자 성문이 닫힐 때쯤 되어, 자기 집에 찾아온 두 사람을 영접할 이 시기를 놓치면 자기는 영원한 멸망이라는 시급하고도 긴장된 위기의식을 가졌습니다. 이 긴장된 위기의식 때문에 그는 감히 왕의 무서운 어명도 거역하고 두 증인을 숨기는데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지금 봉착한 위험은 앞으로 당할 위험보다 극소화될 때, 현재의 위험에 도전하고 새로운 비약을 시도하게 됩니다. 3. 라합처럼 새로운 용기와 결단성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용기와 결단성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 실패의 요인 중에 하나는 결 = 22 = 단력의 부족입니다. ‘차차’라는 기만과 이론적 행위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실패하게 됩니다. 여리코의 영화냐? 아니면 구원이냐? 의 기점에서 라합은 비록 천한 신분의 여성이었지만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죽음을 택하는 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그것을 결정하는 스스로의 결단의 용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3. 라합은 복음을 들었습니다. /11절 ‘우리가 이런 일을 듣자마자 우리의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인하여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용기가 남아 있지 않았으니, 이는 주 너희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 아래로는 땅에 계신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롬 10:10‘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롬 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람나라 군대 장관 나아만은 자기 집 계집종에게서 구원의 복음을 들었고(왕하 5:2). 12년 동안 혈류병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재산도 다 날려버렸으며, 그래도 치료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병이 더 악화 되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만났다고 (막 5:25-27) 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복음서와 그 밖의 모든 성경 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은 먼저 복음의 소식을 들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첫째가는 요소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1. 라합처럼 우리는 자신의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라합은 두 사람이 눕기 전에 지붕위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9절‘나는 주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것을 아노라. 너희의 두려움이 우리에게 내려 있고, 이 땅의 모든 거민이 너희로 인하여 힘이 빠져 있도다. 고 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소문(복음)을 들은 그녀의 신앙 고백이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자신의 신앙을 주님 앞에 고백해야 됩니다. 베드로는 주의 복음을 듣고 자신은 죄인임과 동시“주는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요 1:49에서‘랍비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주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라합은 본문 9절에서 ’나는 주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것을 아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신앙은 고백을 통하여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2. 말씀에 대한 고백, 신앙은 말씀의 고백을 통하여 성장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사건, 홍해를 건너던 사건, 요단 저편에서 아모리의 두 왕을 멸한 사건을 들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그들은 마음이 녹았다고 11절은 말합니다. 라합은 은혜의 복음과 이스라엘 역사적 사건을 통해 현재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출애굽의 사건을 통해서 속죄의 복음을 알고 있습니다. 문설주에 발랐던 피, 그리고 홍해를 건넜던 사건을 통해서 물세례를 통한 중생의 도리를 알고 있습니다. = 23 = 또한 요단 저편의 사건 곧 아모리의 시혼왕 옥에 행한 사건을 통해서 기적과 승리의 복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는 성령 세례와 바빌론의 멸망(여리고 함락)이 있은 후 예수 재림으로 인한 가나안 입국, 안식의 복음까지 그는 알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기생의 몸이기는 하지만 두 증인을 영접하므로 그는 예언의 말씀을 듣고 영안이 밝아진 교회의 모형인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성령의 역사하심이 두 증인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3. 이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바른 고백만 있으면 하나님께 대한 바른 고백이 있게 됩니다. 라합의 믿음은 “주 너희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 아래로는 땅에 계신 하나님이심이라.”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창조하시고 자기를 지배하시는 이가 여리코성의 우상 신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했습니다. 4. 라합은 구원을 보증을 받았다. 본문 12절“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에 친절을 베풀 것을 주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달라.”고 하였다. 라합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후 구원을 보증을 요구했습니다. 두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 선대하여 줌과 같이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에 친절을 베풀 것을 주로 내게 맹세하고, 13절 /그리고 너희는 너희가 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자매들과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의 생명을 죽음에서 구해내 달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진실한 표”를 달라고 했습니다. 1) 진실한 표의 비밀이 있다. 봉크(C. Vonk)는 말하기를“여호와께서 생명 구속 결정케 함에 관하여 이스라엘을 가르침에 있어서 사용한 빛이 붉은 빛이다.”라고 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에 문설주에 양의 피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보혈의 예표입니다. 이 중요한 구속의 피는 이스라엘 구원 역사에 계속 흐려지지 않고 계승하여 왔다. 라합은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구 사람이 말한 대로 행한 것은 그들의 말이 진실한 것을 믿었다. 이것은 바로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주홍 실 줄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2) 주홍 실 줄은 언약에 대한 증거이다. 이 붉은 줄은 두 증인과 라합이 서로 서약하고 맹세한 후에 주어진 증거물이다. 라합은 두 사람을 비밀히 순겼다가 그들을 창을 통해 줄로 내려가게 하고 속히 산으로 가서 쫓는 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거기서 삼 일을 숨어 있다가 그 후에 너희가 너희 길을 갈지니라. 고 1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또한 두 사람이 일러준 말대로 두 정탐군을 달아내린 그 창문에 주홍실 줄을 매어 두었다. (21절), 여기서 주홍실 줄은 두 정탐군과 라합의 굳은 언약의 증거물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언약의 상징이라(히 9:20)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유효한 영원불변의 언약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는 그 언약의 증거를 믿고 곧 순종하고 실천으로 행동하였다. 그러므로 이 주홍실 줄은 라합에게 있어서는 유월절의 의미와 동일한 언약의 상징입니다. = 24 = 3) 주홍실 줄은 라합만이 아는 비밀이다. 두 사람이 라합에게 일러준 말은 라합만이 아는 비밀이다. 두 사람을 순겨준 비밀을 아무에게도 누설치 말아야 한다는 서약이 있은 후 서로 맹세하고 증거물을 주었다. 그 증거물은 바로 주홍실 줄인데 라합에게 있어서 주홍실 줄은 구원의 보증이 되는 기쁨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라합만이 아는 비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홍실 줄을 창에 내리고 매어둔 것은 라합 외에는 그 비밀을 아무도 모릅니다. 두 사람이 유숙하고 간 그 다음 날부터 라합의 집 창가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붉은 줄이 창가에 매달려 바람에 날리고 있었지만,그러나 그것을 여리코성의 많은 사람들은 쳐다만 볼뿐이지 아무도 그 주홍실 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 주홍실 줄의 의미를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라합이 기생이요 창녀이니까 손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 한방법이 아닌가 하고 착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이 성안에 들어왔을 때, 그를 정탐으로 여겨 체포하도록 왕에게 사실을 보고한 사람은 있었으나 라합의 집 창가에 주홍실 줄에 대해서는 왕께 고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 집에 출입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것은 아무 가치 없는 무의미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라합만이 아는 구원의 비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신비는 여러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졌다가 이제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의 풍요함이 어떠한지를 알리고자 하셨으니,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오, 곧 영광의 소망이라. (골 1:26-27)고 했습니다. 또한 고전 1:18에서 바울은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소홀히 하고, 육신적인 일에 분주하고 무관심 때문에 버림을 당한다. 이 비밀은 받은 자 밖에 모르는 비밀인 것입니다. 계 2:17에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추어진 만나를 주어서 먹게 하리라. 또 그에게 흰 돌을 주리니, 그 돌에는 새로운 이름이 기록되어서 그것을 받은 자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리라/ 고 했습니다. 라합의 이 주홍실 줄은 라합 외에는 모르는 비밀인 것입니다. 5. 라합은 구원의 확증을 받았다. 수 2:18-19=? /보라, 우리가 이 땅으로 들어올 때에, 네가 우리를 내려가게 한창에 이 주홍실 줄을 매어 두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네 아비의 가족 모두를 네 집으로 모을지니라. /누구든지 네 집 문들에서 거리로 나가는 자는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그래도 우리는 죄가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그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의 피가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게 되리라. 1. 창세기 6장에서 노아는 식구들이 다 방주 안에서만 보호를 받았다. 노아는 방주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을 칠하였다.(창 6:14). 이 역청은 방주자체의 부패를 방지할 뿐아니라. 밖에서 스며드는 물을 방지하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아무리 방주를 견고하게 지었다 하더라도 밖에서 물이 침수하면 그 배는 침몰하고 만다. 그러므로 방주에 칠한 이 역청은 대단히 중요하다. 역청은 히=원어로“카파르”인데 그 뜻은 속량 덮는다는 뜻이다. 곧 그리스도의 보혈안에 있을 때만이 가장 안전한 구원이 보장된다는 말씀입니다. = 25 = 2. 모세의 갈대상자에 칠한 찰흙과 역청. 아이 모세를 담았던 갈대로 만든 궤는 찰흙과 역청으로 칠을 했습니다. 여기서 역청을 발랐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태어 난지 삼 개월 동안 숨겨서 키워졌다. 더 이상 아이를 숨길 수가 없게 되자. 갈대로 만든 궤에 담겨져서 강가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모세는 강가에 버려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 이 갈대로 만든 궤 안에서 생명의 보호를 받았다. 이때 파라오 왕, 공주의 시녀들은 전도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출 2:3-5) 3.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좌우 문설주의 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양을 잡아 우슬초 다발을 만들어 대야에 있는 피에 적셔서, 문 인방과 양쪽 기둥에다 뿌리고, 너희 중 아무도 아침까지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출 12:22). 여기서 양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구원의 언약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는 비밀이었습니다. 이집트 백성들은 이 비밀을 모르다가 맏아들이 죽는 재앙을 당한 것입니다. 양의 피는 그리스도 보혈의 상징인데, 우리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을 때만이 생명의 구출을 받는 것입니다. 양의 피를 문 인방과 양쪽 기둥에다가 뿌리고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도 그 집 문밖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라합에게 속한 사람은 주홍실 줄이 창가에 매여져 있는 그 집 밖을 나가지 말아야 한다. 나가면 죽습니다. 두 정탐군을 달아 내린 창가에 붉은 줄을 매고 라합과 그에게 속한 가족들을 다 그 집안으로 모으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때 누구든지 그 주홍실 줄이 있는 그 집밖으로 나가면 구원이 없습니다. (수 2:19)보면‘누구든지 네 집 문들에서 거리로 나가는 자는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그래도 우리는 죄가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그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의 피가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그 집 안에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구원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롬 8: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 고 했습니다. 모세를 담았던 갈대로 만든 궤에 찰흙과 역청을 발랐던 것, 이스라엘 민족의 유월절 양의 피, 라합의 집 창에 주홍실 줄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상징입니다. 그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 피 안에 있을 때만이 그 피의 공효가 이루어집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그 피로 죄에서 구속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피 밖으로 나가는 자가 있다면 구원이 성취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합은 붉은 줄을 그 창에 매어 달고, 그의 가족들을 그 집 안으로 모으고 그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구원 받는다는 믿음의 확증을 받았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라합은 기생의 신분으로 구원을 받았다. 가장 천한 이방 여인의 신분에서 예수님의 신부의 영광스러운 족보에 기재되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자기도 구원하고 자기의 모든 식구들도 구원하였다. 그는 말씀(언약)을 절대 순종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곧 실천으로 행동하였다. 두 증인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사랑의 실천이 있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여리코성은 멀지 않아 곧 멸망할 장망성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 26 = 그리고 자기에게 찾아온 최후의 단 한번의 유일한 마지막 기회를 잘 포착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여리코와 같은 장망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시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듯 우리는 참으로 최고의 행복한 안식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복음 증거기간에 두 증인이 나타나 1260일을 예언합니다. (계11: ) 우리는 이 최후 복음 증거기간에 기생이요 창녀였던 라합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집, 창가에 라합과 같이 붉은 줄(그리스도의 보혈)을 매어 달고 다시 오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굳게 믿고 기도하면서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온 천하에 울려 퍼지는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라합의 믿음 2002-03-26 10:02:06 read : 7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히11:31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위대한 위인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장을 우리들이 오랜 시간 살펴보면서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이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누구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믿음의 근거가 있습니다. 믿음은 순종인데, 무엇을 순종하는
라합의 믿음 2002-03-26 10:02:06 read : 7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히11:31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위대한 위인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장을 우리들이 오랜 시간 살펴보면서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까?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이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누구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믿음의 근거가 있습니다. 믿음은 순종인데, 무엇을 순종하는 것입니까? 믿음은 어떤 자신의 생각이나 여론이나 세상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현실에 말씀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일에 우리가 먼저 힘을 써야합니다. 믿음은 순종의 행위를 수반합니다. 말로만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그대로 현실에 순종으로 행동으로 나타냈습니다. 산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순종의 결과는 구원이었습니다. 이는 아벨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다 그러합니다. 그런데 11장에서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이었다는 점이요 다음은 아브라함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들이였다는 점이요 마지막으로 그들 모두는 경건한 신앙인들이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소개된 [라합]은 아브라함의 후손도 남자도 아니요 경건한 성도도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모리 사람, 이방인으로 그것도 기생의 신분을 가진 천한 여성이였읍니다. 그런 그가 믿음의 위인의 한 사람으로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읍니다. 그러면 그 비결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합니까?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11:31)고 말씀하였읍니다. 실로 라합은 죄악의 도성에서도 도덕적으로 볼 때 당시 그곳에서 가장 불결한 직업인 매춘부였습니다. 이같이 부덕한 여인이 어떻게 여리고 성안에서 유일하게 구원을 받았으며 예수님의 조상의 한 여인이 되는 축복을 받았을까요?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해답을 본문 서두에서 증거하고 있읍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 인정이 될만한 바른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읍니다. 많은 이들이 믿음이 있노라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 께서 인정할 만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함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 얻은 것도 그러합니다. 엡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우리들, 곧 기생라합과 같이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약속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아무 소망없고 하나님도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사려고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어 구원 얻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원 얻는 기생 라합은 어떤 믿음이 있읍니까? 첫째로 믿음은 들음에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라합은 들었다고 했습니다. 수 2:10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렸던 것입니다. 온 여리고 성이 두려움과 공포에 싸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 것과 이스라엘이 강한 나라 애굽에서 탈출했다는 것은 역사에 없는 위대한 사건인데, 하나님이라는 신이 이 일을 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롬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듣는다고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듣고 두려움만 가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리고 성을 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믿어야했던 것인데 라합은 하나님의 사건을 듣고 그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는 라합에게 확실한 지적신앙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순종의 행위를 하는 것 보다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관을 하나님의 뜻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주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으로 믿습니다. 그런 줄을 믿습니다. 백번을 아멘해도 주관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신념이고 자기 확신이지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 주관과 주장부터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합니다. 믿음은 지적인 면을 가져야합니다. 성경을 알아야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말기 바랍니다. 라합의 두번째 믿음은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경외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확신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을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정적으로 확신하는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수 2: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고백하고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는 12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것이 라합의 의지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할 확률은 백만분지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이 불리한 상황에 있었으나 라합은 현상황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음으로 승리할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당시 라합은 이방인이요 기생이며 이스라엘의 적국인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 즉 지적이고 정적이며 의지적 신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길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곧 복음을 들음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으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정적인 요소가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떠는 것 만으로도 온전한 믿음 아닙니다. 이는 귀신도 그렇게 합니다. 이제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붙들고, 바라보는 행함의 의지적인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라합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내가 아노라" 한 것은 "내가 믿습니다" 하는 것보다 더 강한 의조 입니다. 어쩌면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사람은 어쩌면 잘 안 믿어지는 까닭에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노라 하는 고백은 확신에 찬 고백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메세지를 듣고, 하나님의 역사를 알았기에 '나는 하나님을 압니다" 했고, 믿겠다는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사람의 신앙고백은 "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압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1;12에 그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 내가 그에게 의탁한 것을 그가 지켜주실 줄을 확신한다" 했습니다. 기생 라합의 신앙이 훌륭함은 그는 하나님을 바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행동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본문에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라고 하였읍니다. 이는 라합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라합의 행동은 목숨을 건 일입니다. 성 안에 아무도 라합과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병사를 숨겨준다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확신에 찬 믿음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를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 하면서 예를 들되 라합을 말했습니다. 약 2:25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라합의 순종은 "믿음으로..." 라고 하고, 야고보서에는 "행함으로 구원 얻었다"고 하니 서로 모순된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은 단지 말로만 하는 것 아니고, 지식으로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면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라합이 구원을 받은 것은 라합의 행함있는 온전한 믿음의 결과 입니다. 행함이란 믿음의 전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믿음으로 강에 들어서므로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성경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뇨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서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일으킬 때 아무리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했다 할찌라도 앉은뱅이 자신이 나는 일어날 수 없읍니다 하고 앉아만 있었다면 하나님의 기적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구원의 하나님임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인 정탐꾼들을 보호해주고 안전하게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 즉 너희도 내 아버지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수2:13)고 구원의 증표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행동이 결여된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많은 이들이 행동이 없는 추상적 믿음만으로 믿노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나 행동이 없고 믿으나 실천이 없읍니다. 믿음의 결과 믿음에는 언제나 상급이 있고 결과가 있습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란 씨앗과 같습니다. 씨앗이 땅속에 묻히면 반드시 새싹이 솟아 오릅니다. 이처럼 믿음은 성장하여 상급과 축복을 안겨줍니다. 첫째로 라합은 믿음올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멸망치 아니하였도다."(31)고 하였습니다 여리고성은 불신자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현장이였읍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라합에게는 구원의 현장이 되었읍니다. 살전 1:7,8 "주 예수 서 저희 능력의 천사들과 함 하늘로 부터 불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불신앙은 멸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습니다. 라합은 창에 붉은 줄만 매달므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읍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마음속에 믿고 나갈 때 구원은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라합은 믿음으로 선민이 되었읍니다. 마 1:5 라합은 [살몬]이라는 유대인과 결혼을 하였읍니다. 이방인이 선민 즉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합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읍니다. 라합은 과거에는 죄악의 백성 가운데에서도 죄악의 선두에 서서 죄를 짓게 하는 여인이었으나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새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명예를 얻었읍니다. 마 1:5 라합은 예수님의 족복의 한사람이 되는 영광을 얻었읍니다. 이방여인 치고도 기생이 메시야의 족보의 한사람 즉 예수님의 혈통적 조상이 되었으니 실로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읍니다. 믿음은 최대의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라합을 통해 배우십시다. 이방인이요 가장 천한 여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이 되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라합은 그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수 6:22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23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라합이 혼자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믿음의 행위를 했을 때에 그 가족들이 얼마나 당황해하고 조롱했겠습니까? 그러나 라합은 자기의 소중한 믿음을 자기 가족들에게 증거했습니다. 그의 믿음이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해보면 "아직 식구 중에 시어머니가 믿지 않고 있으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 구원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정말로 남편과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라합과 같이, 노아와 같이 그 자신이 먼저 시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라합이 먼저 믿었고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족까지 구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멀리 생각하고 큰 비젼을 품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먼저는 내 주변입니다. 제 가족이 바로 구원되지 않았으면 하나님께 먼저 기도해야합니다. 가족을 지나치게 생각해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내 신앙을 반걸음 양보하면 저들도 따라 올 것 같이 생각되지만 결코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악하다 했습니다. 대구에 동부제일교회 김길복집사님, 자기 아버지에게 예수 믿는다고 많이 맞기도 하고, 무릅을 찔리기도했습니다. 그가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악하다는 생각으로 효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 형제가 중요해도 내가 예수 믿는 것은 양보가 없다. 하는 절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 집사님을 통해 그 반대하던 아버지도 구원 얻고 그 어머니는 권사님되고, 동생 둘은 목회를 한답니다. 라합은 자기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요! 하나님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부모 형제를 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줄 믿습니다. 구원하여주옵소서 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도해야합니다. 라합의 믿음은 자기가 먼저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하기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재동씨, 기도회 인도하면서 "누군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하는데, 자신이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기도하기를 기다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 현실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들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믿음은 듣고 진정한 마음으로 두려워하며 경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는 것은 귀신의 믿음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행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정탐군을 숨겼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믿음의 결과는 라합에게 놀라운 상급을 주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의 장에 기록되었고,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된 여인입니다. 라합은 자기만 구원할 뿐 아니라 그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이 라합은 다윗 왕의 선조가 됩니다. 우리들은 교회의 부흥, 이 땅에 부흥을 기도하기 전에 자신 부커 부흥되어야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양보하고는 가정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먼저 변화되지 않고는 가정도 교회도 변화되지 못한다는 인식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라합과 같은 믿음으로 구원하셨습니다. 라합 같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셔서 자신을 구원하고 자신의 가족을 구원합시다. 믿음 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라헬-질투심이 강한 미모의 여인/ 창29:17/ 2002-02-01
라헬-질투심이 강한 미모의 여인 창29:17 》성경의 인물연구 1. 인적 사항 ① 라반의 둘째 따이며 야곱의 아내, 레아의 동생이며,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조카. ② '라헬'은 '암양'을 의미하며, 피조물에서 따온 최초의 이름. ③ 곱고 아리따운 여인(창 29:17). ④ 그녀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유적이 베들레헴에 있음. 2. 성품 ① 아름답고 고운 자태로서 평생을 적극적으로 생활함. ② 자녀문제로 심한 질투를 보이며 가정의 불화를 야기시킴(창 30:1;31:32-35). ③ 자신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쳐 감출 정도로 자신의 대한 욕망이 강함(창31:32,34,35). 3. 구속사적 지위 ① 아브라함 소명 이후 제3대에 이른 언약 가문 족장인 야곱의 두 번째 정실부인. 이 당시는 중혼제도가 일반화되어 있어서 레아와 라헬은 빌하 및 실바와는 달리 둘 다 정실부인의 지위를 보유했다. ② 자녀가 없는 자로서 자식을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실제의 장자 르우벤 대신 이스라엘의 영적 장자 명분을 얻는 요셉과 야곱의 막내아들인 베냐민등을 낳음(창 30:23,24;49:4;대상 5:1). 4. 평가 및 교훈 ① 라헬은 남편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못 낳는 자로서 자녀를 낳는 형 레아를 투기함으로 서로의 불화를 더욱 심화시켰다(창 30:1,14,25). 이런 사실은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며, 나보다 남을 위하고 스스로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함을 배우게 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② 라헬은 비록 그 자신이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형을 투기하고 불평하는 연약한 자였으나 하나님께 자녀 잉태를 위해서 기도하여 응답 받아 자녀 요셉을 낳았다(창 30:22-24). 여기에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이 비록 하나님 앞에 연약하고 부족한 자일지라도 하나님께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사 만족을 얻게 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시50:15). 5. 핵심성구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 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창 30:22).
라헬과 레아 2002-03-20 16:33:16 read : 8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29:16-35 오늘 저녁에도 하나님은 은혜와 은사를 예비해 놓고 성도들을 기다리십니다. 오늘 헌신을 다짐하는 여전도회는 물런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성도님께서는 마음 문을 활짝 여시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골에 믿음 좋은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가정도 어려워 매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라헬과 레아 2002-03-20 16:33:16 read : 8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29:16-35 오늘 저녁에도 하나님은 은혜와 은사를 예비해 놓고 성도들을 기다리십니다. 오늘 헌신을 다짐하는 여전도회는 물런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성도님께서는 마음 문을 활짝 여시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골에 믿음 좋은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가정도 어려워 매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는 "주여 너무 힘이 듭니다! 주여 너무 힘이 듭니다!" 라고 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예수님이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셨던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천국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꿈속에서도 그 자매는 주님이 바로 나의 죄를 대신하셔서 이와 같은 십자가를 지셨구나 생각하면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를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자매는 힘이 붙여 "주님 너무 힘이 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셨으니까 이 십자가를 조금만 잘라주세요."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러라고 하고는 십자가를 잘라주 었습니다. 이제 한결 가벼워 졌습니다. 그러나 또 얼마를 가다보니까 또 십자가가 무거워져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자매는 또 예수님께 십자가를 조금만 잘라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또 아무 말 없이 십자가를 잘라주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십자가를 자르고 잘랐습니다. 이제 천국이 눈앞에 보이는데 깊은 계곡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큰 십자가를 질질 끌고 오더니 계곡에 턱 걸쳐놓으니까 자동적으로 다리가 되어서 그 협곡을 건너는데 이 자매의 십자가는 세 번씩이나 잘라내고 보니까 너무 짧아서 소용이 없었습니다. 천국은 보이는데 건널 수가 없어 이 자매는 요단강 가에서 목놓아 울고 우는데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그 자매는 "아멘! 아멘!" 하다가 잠을 깼고 그 후로는 "주님 어렵습니다. 힘이 듭니다" 제 십자가를 가볍게 해주세요. 했던 삶이 아니라 이제는 변하여 그 자매는 항상 주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고 있다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두 여인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레아와 라헬이라는 자매인데 그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한 남편을 섬기면서 같은 시대를 살아온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두여인을 생각할 때 언니 레아는 인물도 부족하고, 게다가 시력도 좋지 못한, 그래서 시집도 못 갈 여인인데 그의 아버지 라반이 꾀를 부려서 억지로 시집을 보내 천덕꾸러기로 일생을 살아온 여인, 눈물과 한숨과 근심 걱정으로 일생을 보낸 여인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면 라헬은 인물도 예쁘고, 무엇하나 흠잡을 데 없는 여인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고 좋은 조건을 가졌지만 그녀는 남을 사랑하는 마음, 남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 남을 이해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지는 못한 여성이었음을 창세기 30장을 계속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두 여인의 남편이 된 야곱도 라헬만 사랑했기 때문에 어느 면으로 보나 언니 레아는 모든 것에 불리하고 도저히 삶의 낙이 없는 여인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에 있는 레아에게 더 큰 축복을 주셨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 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 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러면 레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축복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1. 레아는 자식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천하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라반에게 맏딸이 된 레아는 동생 라헬 때문에 모든 것에 있어서 불리한 조건들뿐이었습니다. 부친 라반도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야곱이 나타나 라반은 일찍부터 라헬을 사랑하는 야곱을 속여서 레아를 시집보냈던 것입니다. 라반은 딸을 7년간 머슴살이의 조건에 팔아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남편 야곱도 라헬만 사랑하였고 누구하나 라헬을 사랑해주지 않았습니다. 레아의 삶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마도 레아는 야곱을 짝사랑했을 것입니다. 남편으로부터 참 사랑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고 남편이 섬기는 하나님을 그녀도 섬기게 되었다. 고독한 밤을 지날 때 그녀는 누구를 찾았을까? 숙종때 인형왕후를 죽이려고 밤마다 저주의 주문을 외던 장희빈처럼 질투로 밤을 새웠을까 요! 레아는 고독한 밤에 남편 야곱이 섬겼던 하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레아를 보셨습니다. 자녀를 허락하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후처 하갈이 아이를 배자 여주인 사라를 업신여기는 장면이 있습니다. 레아는 어찌 보면 하갈보다도 마음의 상처가 클 터인데도 레아는 라헬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깊이 받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받았습니다. 아리따운 용모는 없었지만 훌륭한 자녀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훨씬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레아의 아들들 중에 레위는 그의 후손들이 제사장 직분을 맡은 축복을 받았으며 넷째 아들 유다는 그의 후손 중에 다윗 왕이 출생을 하여 왕가로서 또 그의 혈통에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오늘 우리는 라헬과 레아를 보면서 무엇을 알게 됩니까? 누가 진정한 승자입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과 하나님의 뜻과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환자가 고백 한 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영적 은혜를 주시기 위해 육적 결핍을 주시고, 영원한 것을 주시기 위해 유한한 것을 빼앗아 가시며, 우리를 겸손케 하기 위해 더 큰 그릇 만들어 더 큰복을 주시기 위해 부족하게 하시고 어려움을 주십니다. 참으로 깊이 있는 고백의 글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라헬과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레아의 삶을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세상도 그때와 같이 인생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좋은 것이요, 행복으로 착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그 용모가, 빈부가, 귀천이 아니라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과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쓰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여러분들은 레아와 같이 모든 조건이 불리하다고, 내 나이가 많다고, 육신이 약하다고 세상에서 부요하지 못하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만 있으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레아와 같이 충만하게 받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약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세상은 우리를 레아와 같이 부족한 모습으로 보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들어 모든 원수를 부끄럽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평강교회 모든 성도님 그리고 헌신을 다짐하며 신앙의 각오를 새롭게 하시는 여전도회 모든 회원이 하나님께 사랑 받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서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 멘.
라헬의 죽음을 통한 교훈 2002-03-20 16:34:46 read : 8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35:16-21 본문은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과 장사를 지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주는데 과연 그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1. 인생에 있어서 삶과 죽음은 늘 상존합니다. 본문 16-20절을 보면 야곱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난산 끝에 베노니 곧 베냐민을 낳고 죽은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일
라헬의 죽음을 통한 교훈 2002-03-20 16:34:46 read : 8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창35:16-21 본문은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과 장사를 지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주는데 과연 그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1. 인생에 있어서 삶과 죽음은 늘 상존합니다. 본문 16-20절을 보면 야곱의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난산 끝에 베노니 곧 베냐민을 낳고 죽은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일찍이 라헬은 요셉을 낳은 후 또 하나의 아들을 낳고자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그 소망을 이룬 것입니다. 이러한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탄생은 우리에게 인생에 관한 깊은 진리를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늘 상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게는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습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가 하면 또 다른 생명은 유명을 달리합니다. 또 개인적으로도 삶을 시작하는 순간 죽음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계속되는 한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그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한편 곧 삶만을 인정하고 죽음은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부정한다고 죽음이 오지 않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소리 없이 다가와서 갑자기 임하게 됩니다. 사실 인생은 죽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살면서 죽음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늘 죽음을 대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만이 죽음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정녕 우리는 죽음을 잘 대비하는 삶을 삶으로서 죽음이 우리에게 임할 때 당황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 가시리이다(욥 30:23) "저가 보리로다 지혜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시 49:10)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무르게 할 사람도 얼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전 8:8) 2. 성도는 세상을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6-20절을 보면 라헬은 난산 끝에 야곱의 열두 번째 아들 베냐민을 낳고 죽었습니다. 즉 라헬은 그토록 염원하던 둘째 아들을 낳았지만 정작 그 아들을 품에 안아보는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한 것입니다. 그녀가 둘째 아들을 낳고 죽어가면서 그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란 의미의 '베노니' 라고 부른 사실(18절)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죽음을 슬퍼했는지 가히 짐작할만 합니다. 그러나 라헬은 비록 슬픔 가운데 죽었지만 그녀는 새 생명을 낳음으로써 많은 사람을 기쁘게 했습니다. 라헬이 죽으면서 지은 '베노니'의 이름이 야곱에 의해 '기쁨의 아들'이란 의미의 '베냐민'으로 개칭된 사실은 이를 잘 반영해 줍니다. 특별히 그녀가 베냐민을 낳음으로써 완전한 이스라엘 12공동체가 형성되는 근간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고 인류 구속, 곧 많은 사람으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죽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그것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특별한 것이 될 수도 있고 평범한 것이 될 수도 있으며 치욕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평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치욕적인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평범하거나 치욕적인 죽음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는 죽음을 라헬의 경우와 같이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은 물론 더 많은 생명을 있게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죽음과 생명의 비밀이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입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홀로 십자가상에서 세상의 모든 죄악과 고통을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수많은 새 생명을 탄생시키사 하나님의 자녀로 드렸던 것입니다(롬 5:18). 우리 또한 이처럼 이 세상에서 썩어져 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고(고전 10:33)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비록 죽으나 참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도 풍성히 얻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나라의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멀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륵 보존하리라(요 12:24, 25)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3.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8절에 보면 라헬이 죽는 순간을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죽으면 비록 육신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그대로 남아 그가 온 곳으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을 떠난 인간의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전도자는 전도서 3장 21절에서 인생의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또한 전도서 12장 7절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육신이 죽으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2:7)께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상태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죽은 후에 하나님께로 가서 그가 세상에 있을 때 행한 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죽으면 그만인데 살아 생전 살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사는게 최고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죄를 짓고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 후에 그들 앞에 닥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보지 못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입니까? 그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어라고 말할 것이며 견딜 수 없는 지옥의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죽음 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 인생을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자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짧은 이 땅에서 마음껏 쾌락을 누리다가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육체의 정욕과 죄의 유혹을 이기고 인내함으로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받는 자가 되시겠습니까?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뜨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내가 보니 죽은 자가 무론 대소하고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19절을 보면 라헬이 죽자 야곱이 그녀를 베들레헴 길에 장사지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당시의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야곱은 가솔을 이끌고 최후의 목적지인 이삭이 살고 있던 본향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라헬이 베들레헴 근처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아직도 본향을 향해 가는 도중이기에 라헬을 베들레헴 길에 장사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을 영원한 장막을 위해 투자해야 합니다. 라헬의 무덤을 뒤로하고 또 다시 순례와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20절). 여러분은 여기서 무엇을 보십니까? 아마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본향을 향하여 쉼 없이 걸어가는 나그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의 처소(요 142)를 향하여 순례 길을 떠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우리 성도들이 영원히 머무를 영원한 거처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단지 우리가 하늘 본향을 향해 순례 길을 가다가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야곱이 그의 사랑하는 아내의 무덤을 뒤로하고 계속해서 그 아비가 있는 기럇아르바로 향해 나아갔듯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버리고 하늘 본향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잠시 머물 이 땅에서의 생활을 위해 많은 돈을 사용하지 않고 돈을 모아 고향으로 송금을 합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잠시 머무를 이 세상의 삶을 위해 모든 정열과 재물과 시간을 바쳐서는 안됩니다. 대신에 교회와 복음 사업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우리의 재물과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영원히 거할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거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19, 20)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세상에 살고(딛 2:12) 4.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20절에 보면 야곱은 죽은 라헬을 베들레헴 길에 장사지내고 묘에 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라헬의 무덤과 묘비가 눈에 잘 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참 허무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라헬이 어떤 여인입니까? 그녀는 언니인 레아에 이어 야곱의 아내가 되었지만 아름다웠던 까닭에 레아에 비해 야곱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재물에 대한 욕심도 많아서 하란에서 도망칠 때 장차 유산을 분배할 때 상속권의 증거가 되는 드라빔을 훔쳐 나오기까지 하였습니다(31:32). 뿐만 아니라 투기심이 많아 아들 낳는 것에서도 언니를 이기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30:1-8). 그러나 결국 그녀는 드라빔을 가지고도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아 보지 못하였고 그렇게 얻고 싶었던 막내아들을 낳고도 안아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비록 언약의 땅에 묻히기는 하였지만 열조의 무덤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길가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길가에 있는 라헬의 무덤과 묘비는 '공수래 공수거, 곧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허무한 인생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로 인생은 죽을 때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죽으면서까지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할진대 남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가지겠다고 서로 미워하고 속이고 분노하고 해를 가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헛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것을 위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아니라 명예로운 이름으로 기억되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 책에 그 이름이 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업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5.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21절에 보면 이스라엘 곧 야곱이 라헬을 장사 지낸 후 다시 그 아비 집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야곱이 라헬을 잃은 실의를 극복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라헬이 누구입니까?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었습니까? 야곱은 그녀를 얻기 위해 무려 14년 동안을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하였습니다. 그런 라헬을 잃은 야곱의 마음은 아마 하늘이 무너진 듯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실의에 빠져 주저앉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야곱은 어디에서 이런 힘과 용기를 얻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자신의 수십 년 역경 속에서 지켜 주신 하나님이 또한 지금도 그와 함께 하셔서 상처받은 그의 심령을 위로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져 평소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떠날 때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마저 떠나 버려 아무 의지할 데가 없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련과 절망적인 상황이 닥쳐도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힘과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이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절망 속에서 독수리가 하늘로 날개 치고 오름과 같은 힘과 희망을 주실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