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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가 룻의 안식할 곳을 찾아줌/룻3:1-18
나오미가 룻의 안식할 곳을 찾아줌/룻3:1-18 2003-09-09 20:52:11 read : 2 (여는 말) 살림살이나 가구나 변변치 못하였던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과거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가정에는 소위(횃대보)라는 하얀천을 장농이나 옷걸이 대신하여 벽에다 걸어 놓았습니다. 그 당시 누나들은 고운솜씨로 이런 것 하나쯤은 수놓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보통 영어로 (sweet Home)(즐거운 가정)이라는 문구를 써 넣기도 했습니다. 과거보다 경 제적으로는 여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진정 가정이 보금자리로써 구실을 하 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새들에게 깃들일 등지가 필요하다면 우리 인생에게는 더욱 보금자 리가 요구됩니다. 짝을 잃은 룻을 위해 시모 나오미는 안식할 곳을 찾아 주 려고 하였습니다. 1.시모 나오미는 자부 룻에게 결혼 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1)자부 룻의 결혼을 위한 나오미의 지혜로운 작전 ①나오미가 룻에게 결흔할 것을 요청한 이유가 있습니다.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룻과 앞으로 생애가 복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②나오미는 룻에게 결혼을 위한 준비로 몇가지를 명령하였습너다. ⓐ친족 보아스의 타작마당으로 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갈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울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보아스가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라 하였습 니다. (2)자부 룻은 시모 나오미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함 ①룻은 나오미의 말씀대로 따를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②룻은 나오미의 명령대로 온전히 준행하였습니다( 창 6:22). 2.룻이 보아스에게 결혼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1)룻은 담대하게 보아스에게 청혼 하였습니다. ①룻은 여인의 자존심을 접어두고 시모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룻의 행동이란 믿음을 동반한 용기있는 행위였습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자신을 시녀라고 낮추었습니다. ②룻은 현숙한 여인이었으나 시모의 명령을 좇았습니다. ⓐ룻의 현숙함은 베들레헴 백성이 다 인정하였습니다. ⓑ룻에게 청혼받은 보아스 역시 「너희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다」 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2)보아스는 일단 룻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①빈부와 연소를 따지지 아니한 룻의 청흔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②보아스는 자신보다 가가운 친족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③그 친족이 포기한 경우 자신이 결혼할 것을 여호와의 사심으로써 룻에게 맹세하였습니다. (3)보아스는 앞으로 신부될 룻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①룻의 아름다운 현숙함을 지켜주기 위해 신경을 썼습니다. ②룻에게 보리를 주어 새벽 일찍 시모에게 보냈습니다. 3.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모든 일을 보고했습니다. (1)시모 나오미와 룻의 대화 ①나오미는 계속 자부 룻을 딸로 불렀습니다. ②룻 역시 시모에게 그 날된 일을 소상히 보고했습니다. (2)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부탁함 ①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기다릴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②보아스가 이 일이 성취하기가지 계속 힘쓸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닫는 말) 안식이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마지막의 행위입니다. 이날을 어떻개 보낼 것인가는 십게명의 4계명으로써 밝혀 주셨습니다. 안식이란 시 간적 개념일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안 식의 땅이며 우리 성도에게는 (저안식) 하나님의 나라가 안식의 최상의 상 태로 소망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히 4:3-11). 이 땅에서 진정한 안식은 없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은 안식의 터가 되어야 합니다.
나오미와 룻/룻1:1-18
나오미와 룻/룻1:1-18 2003-06-27 12:46:10 read : 8 본문의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을 탈출하여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당대의 어른들이 살아있을 동안 하나님을 섬겼다고 기록합니다. (수24:31) 그 이후의 세대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가 바로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다람쥐 쳇바퀴와 같습니다. 불순종 → 하나님의 징계(고난) → 회개 → 하나님의 구원(회복) → 불순종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온 나라에 흉년이 들게 하기도 하셨고, 이웃나라들을 일으켜 침략하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1. 살기 어려워 약속의 땅을 떠나는 나오미의 가족 이런 시대를 살아가던 한 가족이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남편은 엘리멜렉, 아들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이들이 만난 흉년은 실제 흉년인지,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흉년인지는 몰라도 견디기 어려운 흉년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온 재산과 땅을 포기하고 이방나라로 갈 수밖에 없었던 형편이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족이 가나안 땅을 떠난 것은 그냥 이 곳을 떠나 저 곳으로 가는 단순한 이동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요, 축복의 땅입니다. 그 땅은 그들의 기업이요,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땅입니다. 나오미의 가족이 가나안 땅을 떠난 것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포기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을 포기하거나,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나오미의 가정과 같은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을 본질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악세사리처럼 여기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겪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자기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땅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더욱 죄를 짓는 것입니다. 떠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아야 옳은 것입니다. 말씀안에서 한 가족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오미의 가족은 가족적인 신앙의 위기를 만났을 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오미 가족중에는 모압으로의 이동을 막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족 중에 신앙의 기둥이 될 만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 가족이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서로 영적으로 세워주지 못하고, 함께 인간의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4여전도회 회원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신앙의 기둥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넘어지고, 약해지면, 온 가정이 약해지고 힘들어진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분, 한 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가정에서 뿐 아니라 구역, 지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먹고 살기 위해 가나안을 포기하고 모압으로 갔을 때 어떤 일을 만나게 됩니까? 나오미의 남편이 죽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아들이 결혼을 하였습니다. 조금 회복되는가 했는데, 객지생활 10년에 두 아들 마저 죽고 맙니다. 나오미의 비참해진 형편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이다. 여자 중에서도 노년기의 여자는 더욱 약하다. 그 중에서도 과부는 더 불쌍하며, 거기에 가난한 과부는 더더욱 측은하다. 나아가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 중에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은 더욱 처량하며, 그것도 먼 타국에서 객이 된 자식 없는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는 실로 가련하며 불쌍하다. 진정 욥이 남자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다면, 나오미는 여자 중 가장 처량한 지경에 빠진 여자이다." (Thomas Fuller) 2. 모압땅에서 낮아진 나오미 나오미는 모압땅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얻으려고 왔는데,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진리가 여기에 밝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느라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을 때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얻으려고 그 나라와 의를 포기한 삶의 결과가 바로 나오미의 모습입니다. 이 순서를 바꾸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 바꾸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바꾸실 것입니다. 나오미는 모압땅에서 낮고 낮은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는 나오미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고난에도 유익이 있습니다. 이제 나오미의 마음과 귀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긍휼히 여겨 그곳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압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결심을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나오미의 신앙의 회복의 결단입니다. 고난 중에, 환난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나태하고, 뒤로 쳐진 신앙, 무너져 내리고 있는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불편하고 괴롭습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로 한 걸음 더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고난속에서 빛나는 나오미의 <하나님 신앙> 나오미가 가나안으로 돌아가기 전에 할 일이 있었습니다. 두 며느리를 돌려보내는 일입니다. 더 이상 고생시킬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기만 하면 잘 산다는 보장도 전혀 없었습니다. 며느리들은 이방인이기에 가나안에서는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합니다. "딸들아, 네 어미로 돌아가라. 다시 결혼하여 잘 살아라" 오르바는 돌아가지만,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옵니다. "이제 돌아가라"는 어머니의 권면과 설득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룻의 말을 들어봅시다. "나를 가라 하지 마소서. 어머니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겠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나오미는 이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고마웠겠습니까? 룻은 무엇때문에 이런 말과 함께 인간적 소망도 없는 가나안땅으로 나오미를 따라 가려고 했을까요? 룻에게 <하나님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있으면서 그 신앙을 보고 가졌던 것입니다. 나오미가 가나안을 떠나올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지만, 고난을 겪으면서 얼마나 성숙한 신앙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룻1:21의 고백을 보면 나오미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룻은 나오미의 이 신앙을 보았던 것입니다. 고난속에서 빛나는 시어머니의 신앙을 보았습니다. 4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고난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나오미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족들에게, 이웃에게 이 신앙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 하나님을 따라 룻은 이방여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나오미를 따라서 가나안에 와서 고생도 좀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복된 결혼인지요. 룻은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그의 혈통에서 예수님이 탄생하게 됩니다. 룻은 바로 오늘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복음과 상관도 없고, 예수님과 상관도 없던 우리를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불러 주시고,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인지요. 룻이 복된 여인인 것처럼 우리도 참 복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큰 은혜를 입은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룻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내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내가 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내가 먼저 앞장 서겠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신앙>으로 한 평생 빛나게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레갑 자손의 순종과 이스라엘의 불순종/ 렘35:1-19/ 새벽기도회설교/ 2005-05-31
레갑 자손의 순종과 이스라엘의 불순종 렘35:1-19 17-19절 주인을 몰라보고 주인의 말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이스라엘에게는 선지자들이 누누이 경고했던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상의 명령에 오래도록 신실했던 레갑 족속에게는 대가 영영히 끊어지지 않는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와 단체에는 주께서 축복과 심판 중에 무엇을 주실 것 같습니까? 3-11절 이스라엘은 절박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까지도 상황이 호전되자마자 금방 저버렸지만, 레갑 족속의 사람들은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예레미야가 권해도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집도 짓지 않고 씨를 뿌리지도 않고 포도원을 가꾸지도 않았습니다. 평생장막에 거하는 불편한 삶을 고집했습니다. 지금 이들이 예루살렘에 잠시 거하고 있는 것도 바벨론의 침공 때문이며, 위험이 걷히면 성에서 나가 또 다시 조상의 명령대로 살 것입니다. 참으로 신실하고 우직한 사람들 아닙니까? 불편을 참는 것은 고사하고, 형제를 압제하고 맹세를 깨뜨려가면서까지 움켜쥔 자기 이익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너무나 다른 태도입니다. 사람에게 신실하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신실할 수는 없습니다. 불편하고 힘들고 손해 보는 삶이 기다린다 해도 약속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묵상으로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하겠다는 약속은 여전히 내 삶의 우선순위가 되고 있습니까? 물려받아 지키고 있고 또 물려줄 우리 가정의 신앙의 유산은 무엇입니까? 12-16절 레갑 자손들은 ‘사람’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도 긴 세월 동안(약 300년) 집도 없이 나그네로 살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무시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는 이미 죽은 지 오랜 한 인간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오신 것입니다. 그들은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신을 좇지 말라는 경고도 무시했으며,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이렇게 오래도록 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유지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인내를 증명해 주지 않습니까? 전기수 목사
레갑의 자손/렘35:1-19
레갑의 자손/렘35:1-19 2003-06-05 10:06:52 read : 13 갤럽 여론 조사에 의하면 개인적 성공의 기준이 1) 좋은 건강 2) 든든한 직장 3) 행복한 가정 4) 좋은 교육 5) 마음의 평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보고에 따르면 명문대학 나와서 건강하여 대기업에 종사하는 가장이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성공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2차 대전 때 동남아시아에서 영국군이 일본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포로들이 계곡의 큰 다리를 건설하는데 투입됩니다. 포로 중의 영국 지휘관은 포로 생활의 실의와 좌절감을 극복시키기 위하여 멋진 다리를 만들므로 포로들에게 성취의 기쁨을 가지게 할 목적으로 다리를 건설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리가 다 완성된 후 이 지휘관은 몹시 놀랐습니다. 동맹국 미국이 이 다리를 폭파하기 위하여 무진장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이 다리는 적의 군사적 목적을 성공시키는 이적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영화화 한 것이 바로 <콰이강의 다리>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에도 이런 실패가 없습니까? 작은 만족에 집착하다 보니 결국 세상에서 나의 성공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고 하나님 앞에 실패가 되고 있지 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서 성공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으로 살아가고 얼마나 경건한 자손을 일으키느냐? 에 있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면서도 신실한 믿음과 경건을 소유한 레갑 족속을 통해 유다 백성들의 패역과 불순종을 대조적으로 보여 줌으로 우리에게 신앙적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늘 이 시대의 레갑의 자손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자들이 많이 일어나는 가문을 일으키는 믿음의 조상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렘 35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레갑 족속의 삶을 본보기로 들어 <2> 당시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다 백성의 불신앙적인 행위가 얼마나 완악한가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레갑 족속은 어두운 세대에 시대를 깨우쳐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유명인사가 되고 스타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에 빛들의 자녀로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 놓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민족정신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오산학교가 있습니다. 1907년 12월 평북 정주군(定州郡)에 남강 이승훈(李昇薰) 장로가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입니다. 오산 학교에는 조만식 장로님이 있었고 그 뒤에 유영모 선생이 교사를 거쳐 교장을 지냈습니다. 당시 조만식 장로가 교장 재직 시 민족 지도자로서 춘원 이광수를 과학기술의 선구자로 유영모 선생을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영모 선생은 16세 때 아버지가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승동 교회에 나가서 장로가 되고 그는 장로의 아들로서 동경물리학교를 수학하고 오산학교 교사로 교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그런데 항상 이광수 선생이 유영모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 모든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는 [ 시계 같은 사람 ] 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합니다. 말 보다 삶을 통해 주위 사람들과 학생들을 일깨워 주는 선생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훌륭한 교사가 있어기 때문에 많은 인재들이 오산학교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시대를 일깨워 주는 사람, 시계 같은 사람, 바로 레갑의 자손들은 그 시대를 일깨워 지고 그 시대의 시간을 가리켜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레갑의 족속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레갑의 족속은 본래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니었습니다. 즉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대상2:55절에 보면 겐 족속으로서 아라비아 지역의 페트라 근처, 또는 미디안 광야에 정착해 있던 족속으로 성경학자들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3> 이들은 당시 유목민으로서 유다 광야에서 목축을 하고 있었던 족속입니다. 그런데 레갑의 족속 중 요나답이라는 사람이 자기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그들 조상들이 지키던 관습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고 그 후 레갑의 자손들은 약 250 년 동안이나 그 관습을 잘 지켜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레갑의 자손들은 그 선조 요나답의 한 말에 철저히 복종했는데 반면에 유다 백성들은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어 깨우쳐 주었지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이면에 숨겨져 있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란 인물은 왕하10:15절에 나오는 여호나답을 말합니다. 여호나답은 당시 부패한 아합 왕조를 무너뜨린 예후를 도와서 아합에 속한 자를 진멸하고 나아가 바알의 모든 선지자를 멸하는데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그 자식들은 장관이 되고 장군이 되고 왕후가 되는 것이 역사의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나 요나답은 그의 자손들에게 세상에서 출세할 것을 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 것을 명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조금마한 사회적인 지위만 있어도 병역을 기피하려고 하고, 조기 유학을 떠나는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신앙적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레갑의 자손들을 통해서 유다백성들에게 신앙의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레갑의 자손들의 신앙을 소문뿐인가 진정한 신앙인인가를 시험해 보라고 합니다. 2-10절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레갑의 족속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우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사람 하난의 아들들의 방에 레갑의 자손들을 불러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을 놓고 마시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레갑의 자손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기를 <4> 1)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2)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3)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하라 그리하면 너희 생명의 날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는 우리 선조 요나답의 말에 순종하여 평생에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파종도 아니하고 장막에 거처하여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한 대로 다 준행했다는 것입니다. 레갑의 자손들은 한마디로 가훈을 잘 지킨 신앙의 뼈대있는 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250년 동안 방문 위에 걸려 있는 가훈이 아니라 저들의 삶과 정신을 지탱해준 신앙적 가훈을 지켜온 경건한 자손들입니다. 신학자 <클락크>에 의하면 레갑의 자손들이 준수하고 있던 생활 신조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1)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은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경건한 삶을 의미하고 있다고 합니다. 팔레스틴이나 유럽 쪽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포도주나 술은 일상생활에 빠질 수 없는 음료수입니다. 왜냐하면 그쪽 사람들의 집은 다 대리석 돌집입니다. 지질이 다 석회석 대리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물들이 다 석회석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포도주를 마셔야 만이 몸 속에서 석회석이 분해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술 때문에 실수를 하고 술 때문에 타락을 하기 때문에 아예 레갑의 자손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실정은 자그나 정치하고 권력의 핵심에 올라갈수록 폭탄주량과 정비례한다고 합니다. 권력 핵심에 있는 교회 중직자가 대 낯에 여성 장관과 폭탄주 내기해서 저서 남자 망신 다시켰다고 하는 심심찮게 폭탄주 스캔들이 메스컴에 오르고 있습니다. 술 마실 줄 모르면 출세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 오늘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레갑의 자손들은 이 세상의 출세나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경건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2) 집도 짓지 않고 파종을 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5> 이 땅에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가지지 않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약1:14절 [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그래서 예수님은 눅12:15절에 어리섞은 부자 이야기하면서 [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 ] 합니다. 그리고 눅14:33절에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고 합니다. 레갑의 자손도 사람인데 왜 집도 짓고 농사도 지어 곳간에 양식을 쌓아 놓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마는 그러나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으로서 남는 것이 더 귀중한 삶이라는데 눈이 뜨였기 때문에 집도 파종도 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이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제가 알고 있는 장로님이 한 번은 이런 말을 해요 [ 목사님 사람은 참 간사하지요 기술자로 일당 받을 때는 100만원 월급에 10만원 십일조 기쁨으로 드렸는데 오너가 되어 9000만원 수입을 손에 쥐고 보니 900만원 십일조 드리는 것보다 1000만원 보태면 일억 저축해 놓을 수 있는데 싶어 이것 가지고 일 주일 고민하다가 900만원 십일조 드리고 나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 그렇습니다. 남의 집 셋방 살 때는 13평 아파트라도 내 집만 있어면 감사하며 살 것 같지만 막상 13평 아파트 마련하고 나면 아파트는 그래도 30평은 되야지 하는 것이 인간의 속물근성인 것입니다. 레갑의 자손들은 이 세상의 부자보다는 하나님 앞에 경건의 자손이 되기를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3) 평생에 장막에 거했다는 것은 영원한 천국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이다 라고 합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유목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족장들의 삶은 그야말로 장막을 치고 사는 유랑민의 삶입니다. 그러면서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족장들의 삶을 단순한 장막생활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히11:9-10절에 [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장막 생활은 <6> 바로 천국 본향을 사모하는 예표적인 삶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삶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빌3:19절에 세상 사람들은 [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 하지만 [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 그러므로 땅의 것을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영원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설 때를 기다리는 삶인 것을 말합니다. 레갑의 자손들은 이 땅의 영광보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았던 자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세상의 유행보다 하나님의 경건을 나타내기를 결심한 사람 세상의 부자보다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 세상의 영광보다 하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당시 레갑 족속 중 일부는 광야에 살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성안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레갑 자손이 예루살렘 성안에 거하고 있었다는 것은 11절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하게 될 시점에 피난하여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예루살렘 거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아니하였지마는 레갑의 자손들은 예루살렘 성에 거하면서도 저들의 신앙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오늘 도시 교회가 안고 있는 약점이 무엇입니까? 각박한 인심과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구가 도시로 밀집되다 보니 도시 교회가 수적으로는 굉장히 성장을 했지마는 질적으로는 점점 신앙의 수준이 저하되어져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일 낯 교인은 도시 교회가 낳은 산물입니다. 앞으로 주 5일제 근무가 전면 실시되면 도시 교회도 주일 낯 교인마져도 유지하기 힘든 시기가 올 것입니다. 저는 내일교회 담임목사로서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답을 얻지 못해지마는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에 젊은 교인들이 주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형편은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명맥은 유지하지만 대부분 연세 드신 장로님 권사님 아니면 60, 70대 나이드신 직분자들이지만 우리 교회는 젊은 교인들이 더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7> 이것 어떻게 해석할까요? 순서가 좀 바뀐 것 같아요. 물론 도시생활 신앙생활 하기 힘들겠지요. 그러나 레갑의 자손들은 도시생활 속에서도 저들의 신앙을 지켰다는 것 당시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굉장히 도전을 주는 사람들이요 바로 신앙의 시계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당시 유대 백성들의 영적상태는 어떠합니까? 13-15절까지 보면 1)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받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레갑 자손들은 수 백 년 전에 그 조상 요나답이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한 명령을 오늘날까지 잘 따르고 있는데 너희는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2) 많은 선지자를 부지런히 보내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바벨론의 손에서 너희를 지켜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서 거하리라 하여도 귀를 기울이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갑의 자손들은 그 선조가 명한 명령을 준행하나 이 백성은 나를 듣지 아니 하도다 라고 탄식합니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중대한 위기의 순간에 처해 있습니다. 마치 바벨론 침공을 앞둔 예루살렘 같이 계19:의 세상 음녀 바벨론이 교회를 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속문화 그리고 사이버 문화 나아가 레저 문화 점점 교회가 침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 중직자가 되어서도 1부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등산가고 온천 간 것을 자랑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완전히 폭력 음란 사이버 문화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푸젼 문화의 유행으로 종교도 혼합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한국교회협의회 총무가 석탄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18:2절에 [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 [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 고 합니다. 세상 유행 따라가다가는 함께 망한다는 것입니다. <8> 그러나 누가 거대한 바벨론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만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경고합니다. 불신앙의 결과가 어떠할 것을 말합니다. 17절 [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에게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이는 내가 그들에게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며 불러도 대답지 아니함이니라] 이 재앙은 바로 바벨론에 포로되어 갈 것을 말합니다. 레갑의 자손들은 그 조상의 말 한마디에 수 백년 동안이나 그 명령을 지키는데 유다 백성들은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내어 악한 길에서 돌이켜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라고 했지만 저들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되고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되어 갈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 백성이 망하려고 하면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귀울이지 않습니다. 사55:3절에 [ 너희는 귀를 귀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살길을 열려 줍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겠다고 경고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지금이라도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렘29:11절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 [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 미국의 피자 체인점 가운데 도미노 피자가 있습니다. 도미노 피자의 설립자 <토마스 모하난>은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원에서 고아로 자라났습니다. 입양이 되어 학교에 들어갔지만 공부에는 전혀 흥미가 없고 불량청소년이 되어 사고뭉치로 퇴학을 당했습니다. 주위 모든 사람들과 환경이 자신을 외면한다고 여겨지니 점점 더 빗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나니 고아원에서 들은 선생님의 말이 기억났습니다. [ 하나님은 널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단다 ] <9> 모하난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는 피자 가게에 취직하여 남들 보다 더 열심히 일함으로 피자 경연대회에서 11초만에 피자 한 판을 구워내는 일류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1500개의 점포를 소유하고 있는 도미노 피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붙든 진실한 청종은 실패로 끝나는 줄만 알았던 삶을 승리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유다 백성들은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시며 반면에 레갑 족속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을 약속합니다. 19절에 [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준행한 레갑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소유하게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성전의 제사장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말합니다. 레갑의 자손들에게 어떠한 직분이 맡겨졌는지 성경에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섬기는 일에 저들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이방인으로서 놀라운 축복임을 말합니다. 레갑의 자손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영영히 끊이지 않겠다는 약속은 다른 성서 문헌에서 많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경건의 자손을 통하여 하나님 섬기는 특권을 주십니다. 저는 찬50장 3절 가사가 참 좋아요 [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고 저 성전 돌같이 긴하게 하소서 ] 경건의 자손 되어서 하나님 섬기는 특권을 누리는 신앙의 레갑의 자손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결 론 > 레갑의 자손은 어두워 시계를 알 수 없는 세상에 시계와 같이 그 시대를 일깨워 주는 하나님의 경건한 자손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도 비록 이방인들이었지마는 하나님 앞에 경건한 자손이 되어 세상 유행보다, 세상의 부자 보다, 이 땅의 영광보다 하나님 앞에 경건한 자로 살아가는 내일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레갑의 자손들/ 렘35:1-11, 출20:12, 딤전5:8/ 추석추모추석가정예배설교/ 2010-09-23
레갑의 자손들 렘35:1-11, 출20:12, 딤전5:8 명절 날 아침에 드리는 추모예배는 돌아가신 날, 그 한 분을 기리며 드리는 추도예배와는 달리 가족 중 생존해 계신 제일 어른의 부모님부터 그 아래의 모든 선조들을 추모하고 그 은덕을 감사하는 예배입니다. (종손의 가정에서는 그 이상의 선조들까지 추모에 포함됩니다.) < 예배순서 > 예배선언(가족 중 연장자나 적당한 사람)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우리를 조상들의 육체를 통해 낳게 하셨고 그 분들의 희생적 사랑에 의해 이만큼 살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조상들의 은덕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추석 명절을 맞아 훌륭한 조상들을 기리며 그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사도신경, 다같이) 찬송(460장, 다같이) 기도(가족 중) 살아 계셔서 오늘도 저희들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즐거운 추석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모든 가족들이 한데 모여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이 예배를 받아주시고 저희 가정과 가족들, 또한 저희의 생업 위에 크신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오늘의 우리가 있음은 선조님들의 사랑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시옵소서. 지금 저희들 곁에 계시지는 않지만 마치 어른을 모시고 사는 것처럼 저희들 행동을 조심하게 하셔서 형제간에 우애 있게 하시고 망령된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간 혹시 우리 가족들 간에 서로 마음의 상처를 입힌 것이 있으면 이제 진심으로 화목하게 하시고 어려운 일을 만나 낙심한 사람이 있다면 아낌없는 격려와 사랑을 보이게 하시옵소서. 무엇보다 우리 온 일가친척들이 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을 섬기다가 천국에서도 다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오늘의 예배에 함께하여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성경봉독(출20:12, 딤전5:8)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설교 말씀 1. 서언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오늘의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후손으로 결과적으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서도 한민족(韓民族)입니다. 오늘 우리 한민족은 전 세계에 걸쳐 약 7천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모두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 가정은 한민족 중에서도 성씨(姓氏)를 < >라 하는 시조 < >의 후손으로 본관(本貫)은 < >이고, 선조들의 이름과 간단한 행적이 기록된 족보(族譜)를 보면 우리 선조들 중에서는 훌륭한 일을 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여기에서 근래에 돌아가신 부모님 혹은 조부모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본받거나 교훈삼을 만한 얘기들을 첨가시킨다.) 하나님은 오늘 읽은 성경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라고 하시면서 선조들을 공경하는 마음을 늘 가져야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은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2. 선조에게 감사하는 우리들이 됩시다. 하나님을 모르는 분들은 오늘 우리가 추도예배를 드리고 있는 시간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분들은 조상을 초대해서 후손들이 정성껏 차린 제사음식을 잡수시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고린도전서 10:20은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조상을 초대하지만 실제로 찾아오는 것은 조상이 아닌 귀신인 것입니다. 귀신은 조상이 아닙니다. 또한 조상이 죽어 귀신이 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지 “귀신을 공경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을 초대하는 제사는 어리석은 일이요,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선조들의 은덕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훌륭한 선조들이 많습니다. 선조들의 육신을 통하여 이 세상에 왔습니다. 이런 명절을 지킬 수 있는 것도 선조들의 가르침과 희생 때문임을 기억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겠으며,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모두 마음속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여러 선조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다 같이 성경을 다시 한 번 읽읍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3. 선조의 훌륭한 점을 기리도록 합시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지 예레미야 35:6 이하에 좋은 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B.C 7세기 경 이스라엘은 도덕이 무너졌고 타락된 윤리가 판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는 야아사냐라는 사람과 그 집안을 알게 되었는데 그 집안사람들은 아무도 술을 마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야아사냐의 집안은 레갑이라는 선조의 후손인데 그들의 조상 레갑이 제사장 집안으로서 몇 백년 전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며 남긴 유훈을 좇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상의 유훈을 중시하여 철저히 따라서 그것이 집안 전통이 되고 내력이 된 레갑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은 35:18-19에서 큰복을 약속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조가 되게 하신 분들 중에도 많은 훌륭한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집의 전통이 되고 내력이 된 것도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훌륭한 유훈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명절에 우리 가족 모두 선조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조상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들이 될 것을 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레갑의 후손들에게 복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 가정과 가족들에게도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훌륭하신 여러 선조님, 선조님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결심합시다. 예레미야 35:18-19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4. 가족 사랑을 실천하며 삽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십계명 중 사람이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첫 계명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지켜야할 계명입니다). 이것은 권고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신약성경 디모데전서 5:8 말씀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추모예배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살아계신 부모님을 잘 공경하고 형제들 사이에 의좋게 지내는 모습을 하나님과 우리 선조들에게 보여주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가족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가족보다 더 귀한 것도 별로 없습니다. 가족들 특히 부모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리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고 양보하며 뜨겁게 사랑하며 살도록 합시다. 어버이 살아계실 때 효도를 다 합시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5. 맺는 말 제사하는 사람들에게 조상의 모습을 하고 찾아오는 귀신은 쫓아내야 합니다. 죽어서도 땅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염려하는(눅16:19 이하 나사로와 부자 참조)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는 추석이 됩시다. 돌아가신 어른의 훌륭한 점을 본받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로 결심합시다. 그리고 가족들 간에 힘껏 사랑하며 살기로 다짐하십시다. 합심기도 ① 들은 말씀을 생각하며 회개와 결심의 기도를 드린다. ② 가족의 공동기도제목을 위해 기도한다. ③가족들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다같이 통성으로, 또는 조용히 합심해서 찬송(545장, 다 같이) 폐회기도(주기도문, 다 같이)
레갑의 자손들/ 렘35:1-11/ 2013-03-23
레갑의 자손들 렘35:1-11 하나님께서 레갑 족속을 통하여 유대 백성들에게 깨우치려 한 것은 유대 왕 여호야김의 통치 말년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 2차 유대 침공 때의 일이며, 이 때 레갑 족속들은 그들의 생존위험을 느끼고 예루살렘 성안으로 피난해 와 있었습니다. 레갑 족속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아들 호밥의 후손들로서 겐 족속의 사람들입니다(삿 1:16, 대상 2:55). 이 겐 족속들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 가나안에 정착한 한 족속이 레갑 자손이고 레갑의 장남이 곧 요나답입니다. 이 요나답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후 왕 시대의 사람으로 명망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레갑 족속들은 약230년간 그 선조가 명한 훈계를 지금까지 지켜옴으로써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을 각성시키기 위한표본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답이 그의 후손들에게 부탁한 생활규범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기록하여 남긴 것 같이 자신도 철저히 그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수대에 걸쳐서 이를 신실하게 준행하였습니다. 그 후손들 모두가 요나답이 생전에 자신이 준수하였듯이 이를 준수하였음을 본문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그 교훈은 두 가지로 모두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그는 후손들에게 나실인의 계율에 따라 포도주 마시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술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빛으로 마음의 즐거움을 심는 경건의 사람 되기를 원했습니다. (2) 그는 후손들에게 장막에 거하여 집을 짓지 말 것이며 땅을 사거나 세를 내거나 땅을 점령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들의 고향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정착하거나 뿌리를 박고 안정되게 생활하는 것을 생각하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2. 요나단이 이런 생활규범을 전해 준 이유 (1) 그들의 조상들의 몇 가통을 지킬 것을 명하였습니다. (2) 그들이 분수에 맞는 삶을 살 것을 명 하였습니다. (3) 그는 그들이 그들과 함께 사는 이웃들의 생활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동요되지 말 것을 명하였습니다. (4) 그는 그들의 사치와 관능적인 쾌락의 유혹에 대비하여 무장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5) 그는 그들로 고통과 재난의 시기에 대비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6)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규칙적인 생활을 배우도록 또 훈련 아래서 생활하는 법을 배우도록 명하였습니다. 3. 레갑 족속이 그 선조의 훈계를 엄수함 (1) 선조의 훈계를 엄수함 6-7절에 “그들이 가로되‥‥‥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레갑 족속들은 그 조상 요나답의 훈계를 따라 금욕적이며 탈속적민 생활을 한 모습을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것과 집을 짓지 않은 것과 밭을 사서 농사짓는 일을 하지 않은 것과 평생동안 장막에서 사는 것 등입니다. 이들의 생활계율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금욕절제와 검소와 순종입니다. 요나답이 이런 계율을 자손대대로 지키도록 한 이유는 생명의 안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레갑의 자손들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사람으로 해내기 어려운 일을 잘 해 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갑의 자손들은 선조의 유훈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2) 레갑 족속들은 생존의 위기에 대처 할 줄 아는 삶이었습니다. 국가를 소유하지 못한 유목민으로서 언제나 남의 나라에서 유랑해야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생활계율이 그들의 생존을 유지하는데 더욱 지혜로운 방법이었습니다. 즉 현지인과의 마찰과 그 결과에서 오는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후손들을 지키려는 것이었으나 이것을 지키는 것은 곤난한 일이였으나 레갑 자손들은 용케도 선조의 유훈을 훌륭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저들을 크게 칭찬하신 것입니다. 4. 레갑의 유훈에는 처벌 조항은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레갑은 저들 후손이 자기의 유훈을 지켜주기를 바라기는 했으되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위반자를 위한 처벌 규정을 세우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런 물렁한 명령이 잘 지켜지기가 어려울 터인데도 의외로 철저하게 그리고 대대로 더구나 한 사람의 위반자도 없이 즐거이 잘 지켜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점을 기특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명색이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은 더구나 상별조항까지 붙어있는 하나님의 교훈을 쓴오이 보듯 하는 것이 아닙니까 16절에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을 그 선조가 그들에게 명한 그 명령을 준행하나 이 백성은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고 하심은 하나님의 진노라기보다 탄식인 것입니다. 5. 레갑 족속을 통한 하나님의 교훈 (1) 언약을 지키지 않은 유대를 깨우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레갑 족속을 성전안에 있는 예언자의 방으로 인도했습니다. 그 방은 방백들의 방 옆이고 문지기의 방 위라고 했습니다(4절). 이들을 방백의 방으로 인도하지 아니하고 예언자의 방에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예언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장소라는 상징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갑 자손들은 선조의 계율도 저처럼 지키는데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있으니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유대 백성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부지런히 유대 백성에게 경고하고 각성시켰으나 유대는 그것을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국가를 가진 백성이 유랑민만도 못하고, 선민이 이방인만도 못하다는 책망인 동시에 각성하고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2) 생존의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는 유대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레갑 족속을 통하여 교훈하시려고 또 하나의 의도는 생존의 위기에 대처할줄 아는 그들을 유대 백성들은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갑 족속들은 바벨론 군대의 침공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피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백성들은 바벨론의 침공에 대처할 줄을 모르고 지냈던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레갑 자손의 경건과 그 지혜를 배워야 했었던 것입니다. 고제완 목사
레갑인들의 부모 공경/렘35:1-11,18-19
레갑인들의 부모 공경/렘35:1-11,18-19 2003-06-05 10:07:22 read : 13 부모님들의 끝없는 자녀 사랑은 하나님의 인간 사랑의 그림자이며 자녀들의 부모 공경은 성도들의 하나님 경외의 본보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장하면서 부모님을 잘 섬겼으며 그 절정은 십자가 위에서 운명을 앞둔 절박한 순간에도 어머니의 앞날을 생각하사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 : 26, 27) 하시며 요한에게 모시도록 부탁한 것은 우리에게 큰 부모공경의 모범과 교훈이 되셨습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마22 : 37∼40)인데 '이웃사랑' 특히 레19 : 18 말씀의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나는 여호와니라"와 요일 4 : 20, 21절의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는 말씀을 따라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일을 실천합시다. 우리의 부모님은 어떠한 모습이든지간에 '부모'라는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권위요 나의 몸이 부모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넓은 의미의 부모는 이웃의 부모를 포함한 모든 윗사람이 모두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간 부모 중심의 윤리 도덕 수준보다는 훨씬 높고 완벽한 말씀 따른 부모 공경으로 하나님 경외의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레갑인들의 가훈 순종의 효도 삼상15 :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羊)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셨는데 사람으로서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부모님께도 그 가르침이 성경적일 때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대접이며 공경이요 기쁨입니다. 1. 레갑인들의 가문 역사 모세의 장인 '호밥'의 족속으로 미디안 족속(민10 : 29)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살아오며 유다 지파와 가까왔습니다(삼상27 : 10, 30 : 29). 이들은 하나님을 충성되이 섬겼으며 특히 이스라엘을 침략한 가나안왕 군대 장관 '시스라'를 호밥의 자손중 겐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삿4 : 11)이 자기 장막에 안심시켜 들이고 전쟁에 지쳐 잠들었을 때에 장막 말뚝을 '시스라'의 살쩍에 박아 죽였습니다(삿4 : 17∼23, 5 : 24∼31). 포로 귀환 후에도 예루살렘성 재건공사에 적극 협력하여 분문중수(糞門重修)후에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습니다(느3 : 14). 곧 돈독한 신앙인으로 살아왔습니다. 2. 레갑인들의 정절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레갑 집안 모든 사람들을 불러다가 포도주 잔을 놓고 마시라고 권할 때에 그들은 우리 선조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명하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셨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지켰다(6∼11). 그런데 전쟁을 피하여 지금 예루살렘에 와서 살고 있는 것도 선조의 명령에 비하여 죄송한데 어찌 포도주까지 마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요나답이 명령한 레갑인의 가훈 목적은 유목생활을 하여 영토를 갖지 않으므로 외국침략의 화를 면하고 시골생활로 도시의 부패를 면하고, 술의 해독을 면하고 선조의 가훈을 순종함으로 효도를 장려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지키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으나 그 정절의 정신은 귀하며 성도의 생활에서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요나답 이래 약 250년간 그 교훈을 그대로 지켜 부모 공경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래서 레갑인의 정절과 부모 교훈 순종을 예로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13∼17). 실천에 어려움이 많은 조상의 가훈을 레갑인들이 250여년간 순종했다면 부모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님의 본을 배운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제5계명 출20 : 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평강의 장수를 누리려면 말씀따라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신5 : 16). 레19 : 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 신27 :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시고 회개 않는 불순종하는 자식은 재판하여서 돌로 쳐 죽여 악을 제하고 듣는이들이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21 : 18∼21). 잠23 : 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잠30 : 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무섭게 경고 하셨으나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부모를 거역하며"입니다(딤후3 : 2). 마침내 노인의 천국이라고 일컫는 한국에서도 자녀들이 부모 부양 능력이 있는데도 부양 않을 경우 부양비를 정부에서 세금으로 징수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자녀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쏟은 부모의 정성, 희생, 사랑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사람 노릇하며 내가 잘되고 볻 받기 위해서라도 부모공경에 힘써야 합니다. 요셉은 애굽 총리로서 바쁜 가운데도 아버지와 그 가족을 모셔와서 섬겼습니다(창45 : 9, 10). 다윗은 피난살이 가운데도 부모님을 모셨고, 룻은 과부가 되어서도 아무 소망없는 과부 시모 나오미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하나님 중심으로 주안에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효도의 종교이며 그 수준이 하나님 중심의 효도이니 윤리적 효도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레갑인들에게 주신 복(18∼19) 하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레갑인들이 들었습니다. 조상이 명령한 것을 잘 순종했다고 예레미야가 칭찬을 했습니다(18).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좋은 모범으로 예레미야가 예를 들며 예언하여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우리들에게도 감동을 주니 큰 복을 받았습니다. 또한 레갑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영영히 번성하며 대를 이어 갈 것을 19절에서 예언합니다. 그 말씀을 따라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습니다. 엡6 : 1∼3에도 주안에서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하셨습니다. 순종의 조건은 '주안에서' 곧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할 때에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땅에서 형통한 삶과 평강의 장수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요 하나님이 주시길 원하는 복입니다. 이러한 귀한 복을 부모공경자에게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형통하고 성공하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합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준행하며 하나님이 복주셔야 가능합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며 하나님 경외자에게 잘되고 장수의 복을 주시겠다고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아멘.
레갑인들의 부모 공경/렘35:1-11,18-19
레갑인들의 부모 공경/렘35:1-11,18-19 2003-10-26 16:15:36 read : 8 부모님들의 끝없는 자녀 사랑은 하나님의 인간 사랑의 그림자이며 자녀들의 부모 공경은 성도들의 하나님 경외의 본보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장하면서 부모님을 잘 섬겼으며 그 절정은 십자가 위에서 운명을 앞둔 절박한 순간에도 어머니의 앞날을 생각하사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 : 26, 27) 하시며 요한에게 모시도록 부탁한 것은 우리에게 큰 부모공경의 모범과 교훈이 되셨습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마22 : 37∼40)인데 '이웃사랑' 특히 레19 : 18 말씀의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나는 여호와니라"와 요일 4 : 20, 21절의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는 말씀을 따라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일을 실천합시다. 우리의 부모님은 어떠한 모습이든지간에 '부모'라는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권위요 나의 몸이 부모로부터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넓은 의미의 부모는 이웃의 부모를 포함한 모든 윗사람이 모두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간 부모 중심의 윤리 도덕 수준보다는 훨씬 높고 완벽한 말씀 따른 부모 공경으로 하나님 경외의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레갑인들의 가훈 순종의 효도 삼상15 :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羊)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셨는데 사람으로서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부모님께도 그 가르침이 성경적일 때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대접이며 공경이요 기쁨입니다. 1. 레갑인들의 가문 역사 모세의 장인 '호밥'의 족속으로 미디안 족속(민10 : 29)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살아오며 유다 지파와 가까왔습니다(삼상27 : 10, 30 : 29). 이들은 하나님을 충성되이 섬겼으며 특히 이스라엘을 침략한 가나안왕 군대 장관 '시스라'를 호밥의 자손중 겐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삿4 : 11)이 자기 장막에 안심시켜 들이고 전쟁에 지쳐 잠들었을 때에 장막 말뚝을 '시스라'의 살쩍에 박아 죽였습니다(삿4 : 17∼23, 5 : 24∼31). 포로 귀환 후에도 예루살렘성 재건공사에 적극 협력하여 분문중수(糞門重修)후에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습니다(느3 : 14). 곧 돈독한 신앙인으로 살아왔습니다. 2. 레갑인들의 정절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레갑 집안 모든 사람들을 불러다가 포도주 잔을 놓고 마시라고 권할 때에 그들은 우리 선조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명하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셨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지켰다(6∼11). 그런데 전쟁을 피하여 지금 예루살렘에 와서 살고 있는 것도 선조의 명령에 비하여 죄송한데 어찌 포도주까지 마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요나답이 명령한 레갑인의 가훈 목적은 유목생활을 하여 영토를 갖지 않으므로 외국침략의 화를 면하고 시골생활로 도시의 부패를 면하고, 술의 해독을 면하고 선조의 가훈을 순종함으로 효도를 장려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지키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으나 그 정절의 정신은 귀하며 성도의 생활에서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요나답 이래 약 250년간 그 교훈을 그대로 지켜 부모 공경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래서 레갑인의 정절과 부모 교훈 순종을 예로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13∼17). 실천에 어려움이 많은 조상의 가훈을 레갑인들이 250여년간 순종했다면 부모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님의 본을 배운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제5계명 출20 : 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평강의 장수를 누리려면 말씀따라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신5 : 16). 레19 : 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 신27 : 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말씀하시고 회개 않는 불순종하는 자식은 재판하여서 돌로 쳐 죽여 악을 제하고 듣는이들이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21 : 18∼21). 잠23 : 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잠30 : 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무섭게 경고 하셨으나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부모를 거역하며"입니다(딤후3 : 2). 마침내 노인의 천국이라고 일컫는 한국에서도 자녀들이 부모 부양 능력이 있는데도 부양 않을 경우 부양비를 정부에서 세금으로 징수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자녀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쏟은 부모의 정성, 희생, 사랑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사람 노릇하며 내가 잘되고 볻 받기 위해서라도 부모공경에 힘써야 합니다. 요셉은 애굽 총리로서 바쁜 가운데도 아버지와 그 가족을 모셔와서 섬겼습니다(창45 : 9, 10). 다윗은 피난살이 가운데도 부모님을 모셨고, 룻은 과부가 되어서도 아무 소망없는 과부 시모 나오미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가르침은 하나님 중심으로 주안에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효도의 종교이며 그 수준이 하나님 중심의 효도이니 윤리적 효도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레갑인들에게 주신 복(18∼19) 하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레갑인들이 들었습니다. 조상이 명령한 것을 잘 순종했다고 예레미야가 칭찬을 했습니다(18).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좋은 모범으로 예레미야가 예를 들며 예언하여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우리들에게도 감동을 주니 큰 복을 받았습니다. 또한 레갑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영영히 번성하며 대를 이어 갈 것을 19절에서 예언합니다. 그 말씀을 따라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습니다. 엡6 : 1∼3에도 주안에서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하셨습니다. 순종의 조건은 '주안에서' 곧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할 때에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땅에서 형통한 삶과 평강의 장수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요 하나님이 주시길 원하는 복입니다. 이러한 귀한 복을 부모공경자에게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형통하고 성공하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합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준행하며 하나님이 복주셔야 가능합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며 하나님 경외자에게 잘되고 장수의 복을 주시겠다고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아멘
룻-일사각오의 축복/ 룻1:15-18
룻-일사각오의 축복/ 룻1:15-18 2003-06-27 13:30:25 read : 12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었던 엘리멜렉의 가족들이 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사 시대라고 하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 첫번째 사사 옷니엘이 등장한 때로부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등장할 때까지를 가리킵니다. 이 기간은 대략 342년 간입니다. 그 가운데서 룻기의 사건은 사사 드보라와 바락의 활동으로 이스라엘에 임한 40년 간의 평화 시대가 끝난 후 미디안의 압제를 받던 기드온의 시대로 추정됩니다. (삿1:1,21:25) 유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던 엘리멜렉 가정에 흉년이라는 재앙이 찾아왔습니다. 고대의 농사는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으므로 얼마든지 흉년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흉년을 맞아 괴로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엘리멜렉 일가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지키지 않고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모압 지방은 사해 동편에 위치하며 사사 시대에는 아르논강을 경계로 르우벤 지파와 인접해 있었습니다. (삿2:18) 흉년을 만나 이방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엘리멜렉 일가의 행위는 불신앙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을 숭배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흉년을 보내시고 적의 침략을 받아 압제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징계를 피하려고 기업을 버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한 가지 더 행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결과 엘리멜렉 일가는 이방 모압 땅에서 뜻밖의 큰 슬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지 얼마 후에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게다가 모압 여자들과 결혼했던 두 아들도 모압 지방에 거주한 지 십 년 즈음에 죽고 말았습니다.(신28:51,왕하8:1) 1)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룻은 모압여인입니다.(룻1:4)룻이라는 이름은 '자손, 친구, 동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룻이 다윗 왕의 조부 오벳을 낳고, 모압여인으로서 이스라엘 자손의 족보를 잇게 한 이스라엘의 친구이며 동료라는 함축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룻은 모압 지방의 여인이었는데, 모압은 롯의 자손으로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모압은 친족 관계에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모압과의 전쟁을 금하셨습니다.(신2:9) 그런데 모압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행군해 갈 때 그들의 통과를 거절하였습니다. 또한 출애굽 당시 모압족속은 미디안과 합세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했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모압은 미신적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족속이었습니다. 2) 그녀는 말론과 결혼합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엘리멜렉 집안은 가장이었던 엘리멜렉이 죽어 큰 슬픔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이 모압 여인들과 결혼함으로써 기쁨이 찾아왔습니다.(룻1:4) 이러한 기쁨도 잠깐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오미의 두 아들이 결혼하여 자녀도 없이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룻1:5) 이제 과부인 나오미와 두 자부만 남는 처절한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말론과 결혼했던 모압 여인 룻은 자식도 없는 상태에서 남편을 잃어버리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으로 내려가는 믿음의 결과는 슬픔과 곤고입니다. 3) 그녀는 베들레헴으로 이주합니다. 흉년으로 인하여 고국 유다를 떠나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엘리멜렉 일가였습니다. 모압 지방에서 엘리멜렉과 두 아들의 죽음을 맞이했던 나오미는 고국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기셔서 먹을 양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모압 지방에서 큰 슬픔을 겪고 두 자부와 함께 살던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나오미의 거듭되는 요청에 두 자부 중 하나인 오르바는 돌아가고 룻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곁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룻은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이주하였습니다. (룻1:19)베들레헴은 하나님의 집입니다.문제가운데 찾아온 하나님의 집에서 그들은 새로운 축복의 장이 열리는 것을 누립니다. 4) 룻의 신앙 고백은 금쟁반의 금사과입니다.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면서 자부 룻에게 모압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떠날 것을 강권하는 시모에게 대답한 룻의 말 속에서 우리는 그녀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즉 어머니의 백성이 자신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은 그녀의 신앙의 근거와 시모를 향한 자기 희생적인 결심이 온전히 하나님께 있음을 말해 줍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 룻의 신앙고백은 일사각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무런 소망도 없는 나오미를 따르기로 결심한 룻의 신앙은 대단한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장사될 것이라' 는 룻의 고백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 성도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주님 가시는 곳에 우리도 따라가며 앞서 가신 발자취를 따라 주님을 위해 일사 각오의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룻1:22) 5)룻은 이방인으로서 예수의 조상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따르느냐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의 방향이요 믿음의 방향입니다.우리가 가까이 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결국은 그 모습으로 변하고야 맙니다.유유상종입니다.끼리끼리입니다.좋은 쪽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돌아온 룻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섭리로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룻4:13) 보아스와 룻을 통하여 얻은 자손들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조상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룻의 자기 희생적인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의로운 삶이 이방인의 몸으로서 메시야의 반열에 오르는 은총을 입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룻의 삶은 극적입니다.그녀가 베들레헴으로 나오미와 함께 올라옴으로 그녀의 인생은 확연하게 달라졌던 것입니다.일사각오의 결단이 그녀로 하여금 위대한 삶의 길로 나아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방인이기에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았고 그리고 절망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맡겼던 것입니다.그랬더니 그녀는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이 해에 새로운 믿음의 결단을 하십시다.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합시다.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겠다고 결단합시다.그리고 효를 다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합시다.이러한 결단에는 틀림없는 축복이 따르게 마련인 것입니다.하나님을 향하는 삶이기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룻과 나오미/룻1:15-22
룻과 나오미/룻1:15-22 2003-06-27 13:30:59 read : 8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자녀된 사람들은 부모님의 은혜를 마음에 깊이 새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혼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또 자녀를 낳지 않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 없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자기 인생의 출발이요 시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버이된 분들은 자녀에 대하여 신앙의 본을 보이고 있으며 자녀 사랑의 방향이 바로 되어 있는가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인 룻과 나오미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입니다. 한국 가정의 역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긴장과 갈등의 관계로 악순환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옛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미워하는 까닭은 자식의 사랑을 독점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젊은 날에 시집살이 때문에 남편과의 사랑이 좌절되었을 때 마음놓고 애정을 쏟아준 대상이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남편을 향한 사랑을 보상하는 내용물이요 모든 고통과 고독을 순환시킬 수 있는 도피구였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새로운 경쟁자로 며느리가 생길 때 내적 투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똑같은 시집살이를 또 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는 시어머니가 수난을 당하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옛날과 반대로 노년에 의지할 곳 없는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고 심지어 구박을 못이겨 자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룻기에 나타난 룻과 나오미는 고부간의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룻기는 아름다운 전원의 서사시로 이스라엘의 암흑기인 사사 시대의 말기에 등장한 한 촌부의 이야기입니다. 룻기는 전쟁기록이 아닙니다. 룻기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흔해빠진 정치사도 아닙니다. 룻기는 가정적 아름다운 사랑을 극적으로 묘사한 IS의 아름다운 전원시입니다. 그리고 이 짧은 내용 속에는 교리, 신학, 율법, 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며 고난 속에서 서로 돕고 살아가는 고부간의 인정담이 기록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뜨겁게 적셔 줍니다. 성경에는 여성의 이름으로 된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하나는 룻기이고 하나는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는 이스라엘 여자가 이방 남자에게 시집간 이야기이고 룻기는 이방 여자가 이스라엘 남자에게 시집온 이야기입니다. 에스더는 여성의 기지와 용기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낸 이야기이며 룻기는 한 가련한 과부를 희생과 효성으로 공경한 이야기입니다. 에스더는 유대 여성이 이방에 가서 왕후가 되어 왕의 사랑을 받은 이야기이며 룻기는 이방 여성이 유대 남자와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죽게 되어 남편 사랑도 받지 못하였고 아무 희망이 없는 미래를 알면서도 시어머니를 따라 나선 이야기입니다. 에스더는 이스라엘 민족주의가 한창일 때, 이방을 증오할 때 기록된 책이며 룻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개방주의와 국제주의가 상승할 때 기록된 책입니다. 룻기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남자와 나오미라고 하는 여자가 결혼하여 잘 살고 있었습니다. 자녀를 낳다 보니 아들만 둘을 낳았습니다. 이 가정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흉년을 만난 베들레헴이었지만 이 가정은 물질이 풍족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편인 엘리멜렉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기관지 천식이었는지, 어쩌면 폐병이었는지 아무튼 공기가 좋은 곳으로 이사가야 할 생각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휴양을 위해서 고향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갈때는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많은 물질을 싣고 많은 돈을 가지고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모압에 가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가진 재물도 다 써버린 뒤 알거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엘리멜렉은 결혼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면 결혼 못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성에게는 모성애가 있어서 그 모성애에 발동이 걸리면 아무리 병약한 사람에게도 결혼을 하게 됩니다. 아무튼 총각 때부터 몸이 약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는 이유는 아들을 낳자마자 그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의 이름을 말룐, 둘째 아들의 이름을 길룐이라 했는데 말룐이란 뜻은 병자란 뜻이고 길룐이란 뜻은 허약이란 뜻입니다. 세상에 아들을 낳아 놓고 병자, 허약 이렇게 붙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히브리 사람이니까 가능합니다. 히브리 사람은 보는대로 사실화합니다.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둘째 아들을 낳다가 에미는 죽고 태아만 건졌습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한 아내입니다. 그러니 그 태아가 얼마나 밉겠습니까? 자기 에미를 죽였으니까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붙였는데 그 뜻은 괴로운 자식, 가엾은 자식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남편의 건강이 나쁘니까 아들들의 이름을 그렇게 짓고 또 바쁜 마음에 서둘러서 아들들을 장가 보냈습니다. 큰 아들은 오르바라고 하는 모압 처녀에게 장가를 보냈고 둘째 아들은 룻이라는 모압 처녀에게 장가를 보냈습니다. 오르바는 작은 사슴이란 뜻이고 룻이라고 하는 뜻은 선한 벗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죽더니 얼마후 큰 아들, 둘째 아들 다 죽었습니다. 집안에 남자라고는 하나도 없고 과부 셋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집안에 어떤 나쁜 병력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의약품이 잘 발달되었다면 살았을 것인데 결국 탸향살이 10년만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말았습니다. 두 자부가 시어머니를 따라 나왔지만 두 며느리를 고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각기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였습니다.이 때 큰 자부 오르바는 돌아갔지만 둘째 자부 룻은 16절에서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각오가 단단하니까 거지 모습이지만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룻의 형편이 만약 여러분의 형편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세상에 이러한 며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타국이요, 남편도 없고 집도 없는 베들레헴으로 시어머니를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먹을 양식이 없어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다가 그것으로 양식을 삼았습니다. 그의 효행은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효성이 지극한 룻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보아스의 아내가 되게 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으며 예수님의 조상 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마 1:5, 예수님의 족보에서 이방 여인이지만 당당히 룻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가련한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신 룻에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축복으로 안겨 주셨습니다. 이제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오미는 불행한 여인으로 보여집니다. 나오미란 이름의 뜻은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이 나신 곳, 베들레헴,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즐겁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나오미 가족이 모압으로 간 것은 흉년 때문에 간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베들레헴에서도 부자였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남편이 병약하니 병을 고쳐 보려고 공기좋고 전망좋은 모압으로 갔다고 봅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을 떠날 때 풍족한 중에 떠났다고 1:21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불행은 베들레헴을 떠난데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내 계산으로 살아갈 때 몰아닥치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에 은혜가 소멸되고 짜증스러운 삶이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보다 인간의 계산과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롯과 큰 딸이 근친상간하여 생긴 아들이 모압 족속입니다. 그래도 베들레헴은 은혜의 장소요, 축복이 예정된 동네였습니다. 베들레헴이란 이름의 뜻이 떡집이란 뜻인데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주님을 떠나면 주려 죽습니다. 능력의 주님을 멀리 하면 질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멸망당하고 맙니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흉년은 곡식의 흉년, 물질의 흉년이 아니라 말씀의 흉년, 은혜의 흉년, 사랑의 흉년이 들때입니다. 인생은 두길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비참한 거지꼴로 10년만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동네 사람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 "당신 나오미 아니오? 진짜 나오미 맞아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나오미는 "여러분 이제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세요. 기쁨과 즐거움이란 뜻의 나오미는 여기에 없소. 나는 지금 기쁨도 즐거움도 없는 사람이요. 내가 떠날 때는 수많은 물질을 수레에 싣고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갔지만 전능 하나님께서 나를 텅 비게 하셨오. 이제부터 내 이름을 마라라고 불러주시오"라고 했습니다. 마라라고 하는 뜻은 '괴로움, 비참함, 쓰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 내용을 한국식으로 번역을 했는데, 나오미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내 이름을 나오미 즉, 기쁠 희자, 순할 순 자 '희순이'라고 부르지 마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치시고 괴롭혔으니 이제부터 나를 쓸 苦 자, 순할 順 자, 고순이라고 불러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편에서 자기 자신을 고순이라고 불러 달라고 말한 것을 보면 대단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왠만한 여자 같으면 자기 처지를 침이 마르도록 변명한다든지, 동네 사람들이 보지 않게 숨어서 들어오든지, 캄캄한 밤중에 올 것인데 과부가 된 며느리를 데리고 대낮에 동네 안으로 들어오면서 "여보시오, 나를 라마로 불러주시오" 하는 당당한 모습을 봅니다. 비극 속에서 자기를 볼 수 있었고 또 성숙한 인격자가 된 나오미를 보게 됩니다. 통이 크고 마음이 넓고 비극 속에서 다져진 인격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룻에게 보여주는 시어머니의 배려 또한 놀랄만합니다. 이방 여인 청산 과부를 데리고 와서 믿음의 대를 이어갈 남편을 정해 주는데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젊은 룻에게 지시를 합니다. 어떻게 하든 그에게 재생의 길을 열어 주려고 애쓰는 매력적인 시어머니를 발견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어려우면 남을 생각지 못합니다. 또 자기 비극을 곁에 있는 사람도 같이 짊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못된 인간들의 마음입니다. 자기가 넉넉하고 행복할때만 남을 생각해 주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입니다. 17세기 어느 수녀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주님께서는 제가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늙어버릴 것을 저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때나 무엇에나 한마디 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저를 사려 깊으나 시무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저로 하여금 뜻하지 않은 곳에서 선한 것을 보고 뜻밖의 사람에게서 좋은 재능을 발견하는 능력을 주소서.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선뜻 칭찬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주소서. 아멘. 나오미는 자기가 괴로워도 남을 위해 좋은 길을 생각해 줍니다. 룻이 신앙의 사람이요 베들레헴의 부자인 보아스를 만나게 될 때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를 칭찬해 줍니다. 그래서 룻이 보아스에게 마음이 끌리게 해 줍니다. 누구든지 남을 비방하면 싫어지고 칭찬해 주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재생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온갖 작전을 짜고 지시를 합니다. 목욕을 어떻게 해라, 머리에 기름을 어떻게 발라라, 향수를 쳐라, 또 보릿가리 뒤에 몇시에 숨어 있다가 보아스가 이불 속에 들어가면 그 발치로 들어가라는 등, 작전을 지시합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시키는대로 그대로 했더니 성공했습니다. 나오미가 어떻게 이런 폭넓은 마음을 가진 인격자가 되었으냐 그것은 그에게 닥친 비극 때문일 것입니다. 나오미가 행복하고, 행복하고, 행복했다면 이런 인격을 가질 수 있었을까 생각됩니다. 비극을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그런 못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비극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 선택받은 사람은 비극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붙들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바로 이 후자의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그 고난이 영혼의 모든 찌꺼기를 걸러내 주고 세척해 주는 것이라고 믿으며 그 고난이 자기의 인격을 다듬어 주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죄를 지었을때도 결코 고난을 주시지 않고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관심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영혼을 눈뜨게 하기 위해서 고난도 주시고 그의 가진 물질도 빼앗곤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때는 곧 은혜의 때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환경과 좌절이 와도 고부간의 갈등이 아니라 사랑으로 승화하는 것입니다. 룻과 나오미 같은 신앙과 인격으로 행복한 가정, 축복의 가정을 이루어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룻과 하나님 나라/룻1:15-22
룻과 하나님 나라/룻1:15-22 2003-06-27 13:33:34 read : 10 이번 월드컵의 최대 이변은 세계 랭킹 1위이며 지난 대회 우승팀인 프랑스의 예선 탈락이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이다. 그런데 이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나라가 있다. 바로 세네갈이다. -월드컵 무대 첫 출전에 프랑스를 겪파한 데 이어 16강에 진출한 나라이다. 뒤질세라 기자들은 곧바로 그 팀의 메추 감독을 취재, 소개했다. 프랑스 출신으로 세네갈 팀을 맡아 많은 좌절도 겪었다. 그러나 그는 한 세네갈 여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아프리카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 여인과 결혼하며 아프리카를 제 2의 조국으로 선택한 결과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했던) 세네갈 유명 선수들이 하나 둘 씩 돌아와 하나로 뭉쳤다는 것이다. 비록 흰 피부를 가졌지만,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삶의 가치를 기꺼이 선택한 결과 그는 비로소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루과이와의 경기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흰 피부를 갖고 있지만 아프리카인의 뜨거운 심장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속한 나라의 삶의 가치를 바르게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그 나라 시민으로서의 마땅한 삶이다. 나라마다 고유한 삶의 가치가 있다. 다른 나라와는 다른 그 나라만의 가치가 있다. 그 나라의 역사성과 시대적 이상이 담겨 있는 가치이다. 유럽인은 유럽인들대로, 아시아인은 아시아인들대로 그들의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또, 한국인은 아니지만 한국인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존중하며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다. 그는 지난 5월 28일 타임즈와 인터뷰를 했다. 그 일부이다. "나는 한국 선수들을 대단히 사랑한다. 그들의 순수함은 나를 들뜨게 한다. 과거 한국축구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변방의 소속팀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속한 나라이며 내가 이끌고 있는 우리의 나라이다. 비록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내가 선택한 나라이며, 또한 가능성이 있는 나라이다" 비록 네덜란드 출신으로 파란 눈을 가졌지만, 한국팀 감독으로서 한국 선수들을 매우 사랑하며/ 엄연히 한국은 자신이 속한 우리의 나라라는 것/ 무엇보다 한국은 자신이 선택한 내일의 희망을 걸 수 있는 훌륭한 나라라는 것!! 비록 국적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지금 우리는 한 나라에 속한 시민으로서 내일의 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얼굴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취향이 다를지라도 한 분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 자신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물리적인 몸을 가졌고 또 물리적인 나라에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나라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영적 신분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바로 천국,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심을 통해 이루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셨다. 또한 자신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사건들을 통해 나타나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셨다. 바로 사람들에게 영생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고, 또 천국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영생을 얻은 것이고 또 천국을 소유한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놀라운 영적 지위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사시되 이 땅의 속한 삶의 가치를 좇아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9:58) 한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얽매이기 쉬운 것들로부터 구별된 자신만의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일상의 양식이나 의복 문제, 그리고 세속적 출세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고, 잃어진 영혼을 찾는 것이었다. 그만큼 예수님의 삶은 종말론적 삶이었다. 임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임하지는 않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 삶이었다. 이제 곧 다시 오면 완성되는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임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의 완성은 다름 아닌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우리를 통해 그 나라는 점차 완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바로 오늘 나의 삶이 종말론적 삶이다. 그 나라의 완성을 향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종말론적 삶이다. 그래서 주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얻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이 종말론적 삶이었다! 디도서 2:13절에 말씀하고 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나 큰 은혜로 구원을 얻은 우리 친 백성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디도서 2:12절.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자신에 대해서는 근신하고 자제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의롭고 바른 행위를 하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언제나 경건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적극적인 자세라는 것이다. 한 영국 장교가 아프리카의 깊은 정글에 있을 때 친구가 방문했다. 친구가보니 그는 격식을 갖춘 식탁 앞에 멋진 장교 정장을 하고 앉아있더라는 것이다. 친구가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 주일에 한 번 씩 이렇게 식사하는 것을 규칙으로 만들었네. 나는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영국 군인으로서 내 나라의 풍습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이 밀림에서도 이렇게 하는 것일세" 우리는 엄연히 하늘 시민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어떤 시험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시련이 있더라도 우리는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이루어질 비전을 바라보며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고향을 떠나 약속하신 땅에 왔지만 그 땅을 당장 차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또 기근이 심해 그곳에 머물기 힘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즉 자기에게 비전을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1회성 행사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는 계속해서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것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어질 그 날을 소망하며 오늘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 삶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서 침묵정진 하는 사람이다. 내 인생의 진보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실 것임을 확신하면서 오늘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빌립보서 3:13-14절. "형제들아 내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로 본문의 룻을 소개한다. 룻은 모압 여인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여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도, 하나님의 율법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 모든 것과 관계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하나님의 백성다움에 가깝고 또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이스라엘만큼 긍지 있는 사람들이 없다. 말씀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웠으며, 말씀이 빠진 삶이란 그들에게는 없을 만큼 그들 삶에 말씀이 차지하는 것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아는 사람들보다 말씀을 더 잘 실천한 사람이 있다. 그럼으로써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하나님 나라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룻이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6-17) 아무도 '이웃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실천하지 않고 있는 그 시대 상황 속에서,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 얼마든지 편안한 조건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룻은 그것을 뒤로하고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 가장 가련한 여인이 된 시모를 따라 부모와 고국을 떠난다. 뿐만 아니라, 가장 부족하고 빈곤한 형편 속에서 들에 나가 이삭을 주워 시모를 부양해야만 하는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아낸다. 바로 이러한 룻의 삶은 하나의 시대적인 계시이다. 당시 택한 백성들이 있었고.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왕 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종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웃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엄연히 그들에게 율법으로 주어졌지만 그들 삶 속에서는 잊혀진 말씀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룻의 삶은 바로 그 시대 속에 '이웃을 돌보라'는 잊혀진 하나님의 말씀을 되살려내는 하나의 계시로서 들려졌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룻기서가 있는 역사적 이유며, 영적 이유이다. 룻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면서도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또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사사 시대, 혼란과 무질서와 불 신앙이 팽배한 가운데서도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 삶을 살았던 한 의로운 사람 룻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의 역사가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룻은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으며, 결국 메시아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 선배 목사님이 하시는 얘기가, 어느 날 교회 문을 나서는데 모자를 쓴 한 분이 교회 창문 유리를 닦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다가가서 보니 그 분은 그 교회 원로 목사님이셨다는 것이다. 저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명색이 '목사'라고 성도들이 해주는 대접만 많이 받고 있는 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 임원이 되고, 속회 지도자가 되고, 선교회장이 되고, 교사 성가대원이 되고, 또 무엇이 된다 한들 그 직분 자체가 그 자리 자체가 내가 완성해야 할 하나님 나라와 관계를 맺는 일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가? 직분이 있고 책임이 있음에도 '지켜지지 않고' '무시되고' 또 '작은 일로 취급되는' 그런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고 섬겨지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매일같이 말씀을 듣고 배운 제자들은 정작 '해야 하고' '섬겨야 하고' '희생하는 일'에는 빠지고, 오히려 남들이 하는 일에 대해 '간섭하고' '꾸짖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성경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진정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 삶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 삶이라는 것은 모태신앙과 같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중직 같은 자리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거리의 문제이다. 얼마나 밀착되어 있느냐 -주님의 뜻과 말씀과 마음과 명령에 우리의 마음과 뜻과 생명이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가, 그 거리의 문제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룻은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도 아니다. 또 성경말씀이나 설교를 많이 들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이웃을 돕고 있다'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 '자기를 희생하고 있다' 진정 그녀는 하나님과 아주 가까이 연결된 사람이요, 하나님 나라와 관계하는 삶을 산 사람이다. 식당 일을 하는 것이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 청소를 하는 것이 설교를 많이 들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차 안내를 하는 것이 어떤 직분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그의 마음과 뜻과 삶이 하나님과 가까이 연결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요 하나님 나라와 관계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진정으로 마음을 열어야 한다. 내가 필요한 만큼만 여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여는 것도 아니다. 나를 필요로 할 때 여는 것이다. 조금만 여는 것이 아니라 다 활짝 여는 것이다. 룻이 나오미를 향해 마음을 다 열었다. 이로 인해 세상만 환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다. 바로 우리를 통해 완성될 나라이다. 오늘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통해 완성될 나라이다. 내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내 마음을 열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더 완성되어져 갈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이 부르심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시기 바란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더 테레사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룻의 굳은 결심/ 룻1:16/ 2004-05-21
룻의 굳은 결심 룻1:16 룻의 굳은 결심 16절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내용 요약〕 룻이 시모에게 자신의 신앙을 밝혀주는 말로서 어머니가 걸어가는 그 도의 길을 함께 갈 것을 말하고 그를 위해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을 하며 같은 백성이 되어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살겠다는 말입니다. (1)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룻은 돌아가라고 강권하는 어머니의 명령을 거역하는 말이 아니고 어머님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강권할 필요가 없다는 말로서 모든 말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의미보다 말하는 사람의 중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그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니고 그의 심중을 바로 이해하여야 그 말의 참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룻의 초월적 신앙을 볼 수 있으니 초월적인 신앙이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사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과정을 거쳐야 초월적인 신앙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모든 일에 허용 심과 낭비 생활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 없으면 못살고 있을 것이 있어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셋째,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대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넷째, 없어도 있는 것 같이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 룻의 오대 초월 *** 첫째, 인정 초월(人情 超越) 둘째, 물진 초월(物質 超越) 셋째, 환경 초월(環境 超越) 넷째, 이성 초월(異性 超越) 다섯째, 생사 초월(生死 超越)을 하여야 갈 수 있습니다. (2)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강권하지\\\" 는 [ ]<파-가으>(Intreat)도착하다, 뻗치다, 만나다, 마주치다란 뜻으로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한 말씀은 인정 초월(人情 超越)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기 위해서는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자매의 인연을 끊고 떠나야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나오미를 따라가는 길은 인정에 끌려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3)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가시는\\\" 한 [ ]<얄-라크>(thou goest)[타]좇다, 인도하다, 보내다, 떠나다, 몰아가다, 순종하다, 준행 하다, 복종하다, [자]가다, 오다, 진행하다, 다니다, 동행하다, 나가다, 이르다, 퍼지다, 약하다, 쇠하다란 뜻으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란 말씀은 물질 초월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룻의 입장에서 보면 모압 땅의 생활 기반을 버려야 하고 베들레헴에는 아무런 생활 대책은 없이 가정의 경제의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룻이 모압의 친정 집으로 가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걸어간 생애를 본받아 룻도 그와 같은 생애로 살아가겠다는 말로서 신앙으로 사는 길은 그 신앙과 같은 생애가 따른 다는 말입니다. ▣ 빌립보 4장 12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곱품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한 말은 물질 초월의 방법으로 룻과 같이 신령한 주님을 따르는 길은 모든 문제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 실력을 갖추어가며 가는 길입니다. (4)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나오미를 시모로 부르지 않고 어머니라 부른 것은 모여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끈을 수 없는 관계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은 [ ]<룬>(thou lodgest)오두막, 유숙하다, 머무르다, 원망하다란 뜻으로 어머니가 유숙하는 곳은 전혀 생활이 보장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서 노숙을 하던지 또는 객사에서 자던지 어머니가 머무는 그 곳이면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여 주신 곳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는 [ ]<룬>(I will lodge)같은 단어로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한 말은 환경 초월을 말하는 것입니다. 룻은 이방 여자로 베들레헴에서 살려면 유대인들의 학대를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룻은 베들레헴의 생활 풍습을 새로이 적응하는 것은 새 사람의 생활로 사는 것입니다. (5)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백성이\\\" 는 [ ]<암>(thy people){통}[명]무리, 백성, 거민, 자기 열조, 만민, 족속, 종자, 민족이란 뜻으로 어머니의 백성이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백성입니다. 또는 왕적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의 백성이 되고\\\" 는 [ ]<암>(shall be my people){통}[명]같은 단어로서 나의 백성이 되고는 어머니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겠다는 말로서, 첫째, 모압 민족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살겠다는 말입니다. 둘째, 육적 행복을 바라고 믿던 성도가 신령한 행복을 바라고 믿는 생활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셋째, 육적 생활의 기반을 버리고 영적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생도 극복하겠다는 말입니다. 베들레헴 백성의 신앙과 존귀성과 그 성도가 받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겠다는 말입니다. 룻이 베들레헴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된다는 말은 이성(異性)초월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룻은 젊은 여자로서 평생을 남편 없이 혼자서 살아갈 결심이 없으면 베들레헴에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베들레헴 백성들은 이방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 한 분만을 남편으로 모시고 살아가겠다는 말입니다. (6)\\\"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자신도 그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룻이 나오미를 모시고 사는 중에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과정은 다음 같습니다. 첫째, 의식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생활 습관 속에서) 둘째, 제도적 규범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가정 예배를 통해서) 셋째, 역사적 사건(성경)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룻의 효도/룻1:15-18
룻의 효도/룻1:15-18 2003-06-27 13:34:03 read : 10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를 낳아 주시고 우리를 양육해 주시는 은혜를 깊이 감사하며 우리가 부모님께서 효성을 다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에는 "룻의 효도를 본받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인 나오미와 아들 말론과 기론 두 아들을 데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흉년이 왔습니다.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으니 모압 땅이 가면 살수 가 있다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압 땅에 내려가 두 아들을 결혼을 시켰습니다. 큰 며느리 이름이 오르바, 작은 며느리 이름이 룻입니다. 모압 땅에 살다가 아버지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큰아들 말론도 죽었고 작은 아들 기론도 죽었습니다. 모압 땅에 남은 사람은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나오미가 생각을 하니 자신의 형편이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남편이 죽고 자신의 자식이 죽고 난 다음에 . '내가 돌아갈 곳은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부들을 모압땅에 두고 자신은 베들레헴으로 갈려고 합니다. 큰 자부는 모압 땅에 있고 그런데 둘째 자부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게 됩니다. 룻은 시어미니 나오미를 잘 봉향하고 효도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룻은 역사에 기록되는 효부로써 정말 룻과 같이 우리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귀한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그렇다면 룻이 어떻게 효도를 했고 룻이 받은 축복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원합니다. 첫째 룻은 어려운 중에 효도를 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간들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남편이 있습니까, 나오미가 돈이 많습니까, 집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해 한번도 가보지 못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됩니다. 송죽의 절개는 추운 겨울에 알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라가 어려울 떄 충신을 알 수가 있고, 가정이 어려울 때 효부룰 알수 가 있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 울 때 부모님을 섬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병이 들었 때 부모님을 모시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부모님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이 있기에 오늘에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섬기고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도리입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성경 십계명에도 나와 있습니다. 5계명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갈수록 부모님의 효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청량리역에 부모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님을 청량리 역에 있게 하고 부모님을 버려 두고 집으로 왔습니다. 나중에 경찰들이 와서 자식에 대해서 계속 묻자 부모님들은 알약을 먹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혹시 라도 자식들에게 누가 될 까봐서 부모님들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울 때 부모님을 섬기는 사람이 효도 인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불효자라고 말합니다. 왜냐 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이유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기독교만큼 효에 대해서 많이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제사를 잘 지낸들 무슨 효가 되겠습니다. 살아 있을 때 에 부모님께 효도를 잘 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조금 힘이 들어도 조금 부모님의 성격이 까다로와도 주안에서 잘 섬기는 사랑하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룻은 정성을 다해서 효도를 했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이 도착했을 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가 마침 보리 추수할 때입니다. 그래서 룻이 이삭을 주어다가 빵을 구어서 시어머니를 섬깁니다. 부모님은 한 평생 자식만을 위해서 희생과 헌신을 하면 삽니다. 한 부모는 열자녀를 키우는데 열 자녀는 한 부모 모시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룻처럼 정도을 다해 부모님을 섬겨야 할 줄 믿습니다. 룻은 끝까지 효도를 했습니다. 룻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이렇습니다. 룻기1장 16절과 17절을 보면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의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너도 죽어 거기 장사 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은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감정에 따라 부모님을 대하는 것은 옮지 않습니다. 조금 섭섭해도 조금 성격이 안 맞아도 끝까지 부모님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존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룻은 믿음으로 어머니를 섬겨 습니다. 그는 이방 여자이지만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고르반이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만 잘하면 부모님에게 못해도 된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유대인들은 얼마나 책망하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모님을 효도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부모님을 섬기라고했습니다. 효도 중에 가장 큰 효도는 예수 안믿는 부모님을 예수 믿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입니다. 우리교회 자매 하나는 자기 부모님이 예수를 안 믿는 다고 자신의 직장을 포기하고 시골집으로 내려가 부모님을 예수 믿게 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입니다. 셋째. 룻이 효도 할 때 하나님은 룻을 축복하셨습니다. 룻이 보리 이삭은 주으러 갔다가 보리밭에 주인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부모에게 효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축복을 하는데 룻이 보아스와 결혼을 했고, 오베새를 낳고 오베새는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방 여자 였지만 부모에게 효도를 잘 하니 하나님이 룻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부모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놀라운 축복을 하실 것입니다. 심는 데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내가 부모님에게 효도하면 자식이 나에게 효도하고 내가 부모님에게 불효하면 자식도 나에게 불효합니다. 내가 부모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자식도 여러분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을 정말 공경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천사 세명을 불러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땅에 내려가 가장 아름다운 것 한 가지를 가지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천사 하나는 제일 아름다운 꽃을 가지고 올라 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기의 웃음을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올라가다가 꽃은 시들어 버리고 아이의 웃음은 어른이 되어 사라지고 어머니의 사랑 만 남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장 고귀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랐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늘 생각하고 어머니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룻의 효성과 받은 축복/룻1:15-18
룻의 효성과 받은 축복/룻1:15-18 2003-06-27 13:34:30 read : 5 요즘의 가정에는 문제가 참 많습니다. 자녀를 낳으면 그전에는 어머니의 젖을 먹였는데, 지금은 우유를 먹여 키웁니다. 저희 때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가고, 그렇게 살다가 결혼을 해서야 부모님을 떠났습니다 . 저도 역시 그랬습니다. 목회를 할 때 토요일에 가서 목회를 하고, 월요일에는 어머니께 돌아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결혼한 후에야 독립을 하였습니다. 요즘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없습니다. 저희 교회 유치원만 해도 아이들이 밤이 늦도록 집에 가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자라다가 유학이라도 가게 되면 더욱 볼 수 없고, 결국 결혼하게 되면 함께 살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룻을 보면 시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효성이 얼마나 지극한지 모릅니다. 그 이야기의 시작은 베들레헴, 예루살렘에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었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150여 곳 댐이 물이 말라버렸답니다. 이북은 아마 더할 것입니다. 이렇게 흉년이 들어 나오미의 가족이 이방나라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서 사는 동안 남편 엘리멜렉, 큰아들 말론, 길룐이 결혼까지 했는데, 자녀도 없이 모두 죽게 되니 첫째 며느리 오르바도, 둘째 며느리 룻도 모두 과부가 되었습니다. 10년이 흐른 후에 나오미가 예루살렘 베들레헴에 맥추절때에 풍년이 들어서 곡식이 풍성하다는 말을 듣고 억울했습니다. 모두 다 잃어 버리고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희망도 없이 고국으로 가려고 떠나는데, 두 며느리가 따라 나섭니다. 나오미는 자식도, 돈도, 고국에는 집도 없으니 그들의 백성에게로 돌아가라 말합니다. 이 말에 첫째 며느리인 오르바는 돌아갑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인 룻은 자신을 돌아가라 강권하지 말아 달라 부탁을 합니다. 그러며 어머니가 유숙하는 곳에 자신도 유숙하고, 어머니 가는 곳에 자신도 가고, 어머니 장사되는 곳에 자신도 장사되겠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이런 며느리를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정의 달과 어버이 주일을 맞아 그가 한 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一. 룻은 "어머님과 한 평생을 동행하겠습니다." 지난주간 텔레비젼을 보니 요즘 노인들이 이혼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이혼을 하면 재산을 반절 나누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혼자 편하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룻은 그 시어머니가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가는 곳에 자기도 가겠다고 매달리고 있습니다. 요즘 시대는 자기 중심시대입니다. 그래서 부모님 모시는 것도, 함께 있는 것도 짐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 계신 곳에 내가 있고, 어머니 좋아하는 것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며느리가 어디있습니까? 자기가 싫으면 싫고, 자기 좋으면 좋은 것입니다. 부모가 좋은 것, 싫은 것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룻은 어머니와 동행하기 위해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二. 룻은 어머님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습니다. 부모가 늙으면 그 방에 냄새가 나기 때문에 아들은 혹 들어갈 지도 모르지만, 며느리는 들어가기가 힘듭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와서 자신의 아버지가 중풍으로 누워 계시는데, 5년 동안 그 방에 냄새 하나 나지 않게 잘 했답니다. 그런데, 5년 지나니까 효자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직장에 갔다와서 아버지 방을 들어가니 청소도 않고, 치우지 않아서 냄새가 너무 심해 속상해서 자기 아내와 싸웠다는 것입니다. 너무 오래 누워 계시니까 아버지 빨리 돌아 가셔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지겨워 진다는 것입니다. 저도 몇 년전에 쓰러졌었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 은혜로 다시 이렇게 건강하게 말씀도 증거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제게 넷째 아들 성일집사가 미국에 있습니다. 그 딸이 지금 2살먹었습니다. 얼마나 그 딸이 이쁜지 모릅니다. 제가 한국에서 전화를 하면 "할배, 할매!"하고 부릅니다. L.A에 가게 되면 마중을 나오는데, 공항에서 할아버지를 부르며 뽀뽀를 해주고 그럽니다. 그런데, 다음 날에 제가 "뽀뽀!"하면 손을 흔들고 싫다고 합니다. 냄새가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빨을 6번 딱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어린 아이도 대번 정색을 하는데, 내가 항상 어른을 모시고 산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저는 젊어서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제 아내가 향수를 뿌려줍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관리를 잘해야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신 분이라 몸에서 술 냄새가 나고, 옆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 어머니 유숙하는 곳에 유숙한다고 하니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런 룻의 모습을 우리는 꼭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三. 룻은 어머님 백성이 나의 백성입니다.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이방여인이 예루살렘 베들레헴의 선민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종족 싸움은 없지만 지방싸움이 대단합니다. 제가 인도에 부흥회를 간적이 있습니다. 인도의 종족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지금 인도네시아에 싸움이 있는데, 그것도 종족 싸움입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무섭습니다. 룻에게도 자기 민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 때문에 자기를 버리고 어머니의 백성이 자신의 백성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무엇입니까? 四. 룻은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룻은 어머님이 섬기는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그 어머니와 함께하는 하나님을 붙잡고 자신의 하나님 됨을 고백한 것입니다. 어떤 권사님의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며느리 감을 사귀었습니다. 그런데, 카톨릭 교도였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 신부가 주례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그 아들의 신앙이 약하니 아마 카톨릭으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카톨릭은 십계명의 첫계명을 어기는 곳입니다. "나 외에 새긴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못된 것이지요. 룻은 어머님이 섬기는 하나님을 믿으니 자신도 그 하나님 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신앙을 본받았습니다. 이 룻도 하나님을 섬기는 어머니를 보고 하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이 나오미는 이 룻을 떼어놓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러나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룻이 그 어머니께 보리 추수하는 곳에 가서 보리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하니, 나오미가 그 친척중에 베들레헴의 부자인 보아스의 밭과 논으로 가서 주워 오라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이 보리 이삭을 주워서 모으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물어보아 그가 나오미의 며느리이며, 그가 나오미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의 모습이 예쁘고 착하게 보이니 감동되어서 일꾼들에게 보리를 한주먹은 거두고, 한주먹은 밭에 흩어놓으라 명합니다. 그러니 룻이 보리 이삭을 차고 넘치게 주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五. 룻이 받은 축복을 보라 룻이 받은 축복은 이방여자로써 아브라함의 족보에 들어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복에, 다윗의 족보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마1:1-6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 말합니다. 룻이 다윗왕의 할머니가 되고, 아브라함의 족복, 이삭의 족보, 야곱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갔습니다. 7절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그 어머니를 따라 섬기는 효성과 그 어머니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붙잡으니,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룻과 같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의 본을 소중히 받아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룻의 효심/룻1:15-18
룻의 효심/룻1:15-18 2003-06-27 13:33:07 read : 11 미국에 나이 많은 할아버지께서 조그마한 케잌 하나를 들고 이웃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면서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 "사실은 오늘은 제 아내의 여든 여섯 번째 생일입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케잌이지만 축하를 드리고 같이 나누어드리기 위해서 가져왔습니다." 그 케잌을 받아든 이웃집의 가족이 너무 황당하고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할아버지가 5리를 넘게 걸어오셨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가신 다음에 한 시간 후에 또 오셨어요. 그래서 깜짝 놀라서 "할아버지,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멋쩍은 듯이 "그게 아니고요. 사실은 제 부인의 나이가 여든 다섯입니다. 제 부인이 내 나이가 여든 다섯이라고 꼭 이야기를 하고 오라서 해서 제가 다시 왔습니다." 누가 나이를 들기를 좋아하겠습니까? 늙기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사람이 태어나고 점점 늙어 가는 것은 하나님의 정한 위치인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나이 많으신 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60대 이상 되신 어르신들, 그때는 연탄불이 어디에 있습니까? 시골에 사신 분들은 솔가지를 꺾어서 콧물 눈물을 닦으면서 밥을 짓고, 세탁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추운 겨울에 꽁꽁 언 냇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찬물에 빨래를 합니다. 손이 얼마나 시럽겠습니까? 그 손을 몇 번이고 호호 불면서 겨드랑이 밑에 손을 몇 번씩 넣었다가 꺼내었다가 하면서 빨래를 했습니다. 수돗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 먼 동구 밖까지 물동이를 이고 눈밭에다 더울 때나 물동이를 이고 가져다가 식구들의 식사를 지어서 이렇게 살았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시골에서 기억이 듭니다만 달이 뜨는 날은 한참 농번기라서 새벽에 달을 보고 들에 나가요. 한참을 일을 하다가 보면 한나절을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고 집에 돌아와서 식사를 하고 또 가서 일을 하고 이렇게 길쌈을 매어가면서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요즈음 흔한 승용차, 나들이, 여행, 관광, 텔레비전, 생각도 못하지요. 저녁이면 기름을 아끼려고 식사만 끝나면 그냥 잠을 주무십니다. 이런 한 세상을 다 살아오셨는데 이제 요즈음 세상을 보니 얼마나 살기가 좋습니까? 그러니 빨리 가고싶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더 건강하고 이 좋은 세상을 더 보고싶어요. 우리 어른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정말 고생하면서 살아오셨는데 효도는 못할망정 불효를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못해드릴 망정 마음에 못을 박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오늘만이라도 우리에게 부모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이 주는 말씀인 나오미를 통해서 우리가 배운 것은 완전한 부모는 이 땅에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부모는 딱 한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외에는 모든 부모도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다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부모에게서 양육을 받고 자라면서도 상처를 입지 않는 자녀가 하나도 없습니다. 특별히 교도소에 가 있는 사람들에게 다 물어보십시오. 한결같이 그들은 부모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어요. 부모를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고싶은 분노를 가지고 있어요. 얼마나 커다란 상처로 부모를 입었으면 그런 마음을 품고 교도소에서 그 소중한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나오미역시 그들은 훌륭한 부모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앞부분에 보면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내가 나오미였고 말론 기룐이란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살았습니다. 축복받은 땅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태어날 떡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장 복된 그 곳에 살고있는데 그들 가운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엘리멜렉은 하나님을 등져서는 안 되는데 결국 먹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갔다는 상징입니다. 약속의 유대 땅을 떠나서는 안 되는데 모압 땅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속에서 인생의 경제적인 가뭄이 드는 것, 건강의 가뭄이 드는 것, 그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신앙의 가뭄이 드는 것, 엘리멜렉이예요. 왜 떠났습니까? 흉년이 들어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 흉년 속에서도 베들레헴을 떠나지 않고 끝내 이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을 떠났던 것은 그들의 신앙이 식어졌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를 찾아서 세상을 향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학생의 믿음은 무엇으로 결정할 수 있는고 하니, 공부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청년의 믿음은 무엇으로 결정할 수 있는고 하니, 결혼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중년의 믿음은 무엇으로 결정할 수 있는고 하니, 신앙의 정도를 가는지 안 가는지 그것을 보면 그분의 믿음을 알 수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노년의 믿음은 노욕을 얼마나 부리는지 안 부리는지 그것을 보면 어르신의 믿음을 점검할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엘리멜렉은 결국 하나님을 잘 섬겨서 성지 같은 땅에서 살았지만 결국 흉년을 극복하지를 못하고 인간의 생각으로 믿음을 져버리고 세상을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더욱이나 성경에 보면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이방 여인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든지 자부를 삼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철저한 명령이었습니다. 모압과 이스라엘이 멀면 얼마나 멉니까? 걸어서 이민을 갔을 정도로 가까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제문제 때문에 여기까지 왔더라도 자부만큼은 이스라엘 민족 우리 동족을 데려와야지,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런데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 그들은 모압의 두 여인을 데려다가 자부까지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엘리멜렉이라는 뜻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오" 그런 엘리멜렉이 이제는 나의 왕은 돈이요. 나의 왕은 밥이요. 나의 왕은 세상이요. 그러고 세상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세상의 방법으로 살수밖에 없지를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년만에 나오미로 말하면 남편 죽고 두 아들까지 다 죽었어요. 남는 것은 나오미, 두 며느리, 과부 셋만 남았어요. 이 결과에 대해서 나오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룻기 1:13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는 알고 있습니다. 10년만에 남편이 죽었고 두 아들이 죽은 것이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치고 계신다는 것을 나오미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20-21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날 때는 가진 것이 많았고 그 정도이면 충분히 살수가 있어요. 더 잘살아보려고 세상을 향해 갔는데 10년만에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불행한 인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라는 뜻은 '기쁘다, 즐겁다, 행복하다,' 그렇게 살아야 될 나오미가 너무너무 불행해져서 고향에 돌아오니까 사람들이 몰라보는 거예요. "당신이 나오미가 아니냐"고 그때 하는 말이 "나를 나오미라고 하지를 말아라. 마라라 불러주시오. 마라라라는 뜻은 쓰다, 슬프다는 뜻이에요. 결국 나오미 부부는 실패의 상징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실패한 부부들이 참 많아요. 대표적으로 보면 노아입니다. 노아가 실수한 것은 방주를 지을 때입니까? 방주 안에 있을 때 실수했습니까? 아니에요. 홍수 재난이 다 지나가고 포도를 심어서 주렁주렁 열매를 맺어 풍년이 왔어요. 노아의 마음속에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나도 한잔 마셔보자 좀 취해보면 어떻겠나" 그러고 한 잔을 마신게 취해서 벌거벗은 채로 길가에 누어있는 수치를 드러냈는데 불행하게 함이 먼저 보았어요. 그러고 뛰어가서 자기 형제들에게 아버지가 이렇게 수치스럽게 부끄럽게 누어있다고 화를 내면서 형제들에게 소문을 냈어요. 셈과 야벳은 그 말을 듣고 아버지의 옷을 들고 가서 정면으로 걸어가지를 못하고 뒷걸음을 쳐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워주고 방에다 잘 모셔드렸어요. 실수는 누가 했습니까? 아버지가 했습니다. 저주는 누가 받았습니까? 야벳과 가나안이라는 그 후손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거는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완전할 수 없고 모든 부모도 완전할 수 없다. 자식 앞에 수치를 드러내고 부끄러운 수치를 드러낼 수가 있다 이겁니다. 아버지가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두 아들이 죽고 재산을 다 탕진하고 그럴 수가 있지를 않습니까? 그럴지라도 부모의 죄는 미워하더라도 부모이기 때문에 부모를 미워하지를 말고 수치를 가리워주면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는 교훈입니다. 이게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예를 들면 그렇게 훌륭한 '다윗'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이었지만 자녀들 앞에는 존경받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가지고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아버지 피난 가고 아버지의 후궁들을 다 데려다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로서 아버지의 후궁을 다 범했습니다. 못된 짓을 했습니다. 왜 압살롬이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였지만 왕이라는 권세를 가지고 수많은 후궁들과 성적인 문란을 일으키는 것을 압살롬이 보고 그것이 마음의 상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상처였기 때문에 분노를 품고 아버지의 평소에 즐겼던 그 문란한 성적인 생활을 모든 백성 앞에 폭로했던 것입니다. 그 점에는 다윗이 회개를 해야됩니다. 한번 그 실수를 범했으면 다시는 그 실수를 범하지를 말아야 되지만 옛날의 모든 남자들이 거의 그래야 남자다운 줄을 알고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설령 아버지가 그랬을망정 아버지의 수치를 다 드러냈던 압살롬은 천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아버지의 그 수치를 다 감싸고 아버지를 존경하며 아버지의 믿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찬양하고 섬겼던 다윗의 그 한 부분이 있어요. 사람이 언제나 완전할 수가 없어요. 솔로몬은 아버지의 믿음을 이어받아서 왕이 되었고 일천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의 천천 만만의 가장 존귀한 영광과 축복을 솔로몬이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부모가 훌륭해야만, 부모가 존경스러워야만, 부모가 자식에게 실수 없이 잘 해주어야만, 부모에게 잘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왕이 잘못하고, 부모가 잘못하고, 주의 종이 잘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앞에는 질서를 지킬 것이며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면서 사랑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그에게 복을 내려주신다고 하는 대단히 귀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나오미였는데 룻이라고 하는 좋은 자부를 만나 그의 가정이 다시 회복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의 대를 이은 복 받은 가문을 룻이라고 하는 이방의 한 여인을 통해서 다 망하고 깨진 그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재하는 것을 믿습니다. '효'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큰 축복인가를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룻은 이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효심이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모든 허물을 탓하지를 아니하고 다 덮고 이렇게 패가망신한 것, 나오미가 고백한 "내 탓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오르바는 자기 친정 집으로 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오미의 시어머니를 너무 불쌍히 여기고 차마 불쌍한 시어머니를 두고 돌아갈 수가 없어서 차라리 시어머니가 부자이고 잘 되었더라면 떠날텐데 너무 불쌍해서 떠날 수가 없어서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의 가신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묵는 곳에 나도 묵고 그것이 어떤 고생의 자리라고 할지라도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어머니의 죽어 묻힌 그 곳에 나도 묻히기를 원하나이다 죽은 내 어머니를 버리고 내가 도망을 간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천벌을 내리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는 현대 고부간의 갈등이 일반 상식화된 이 세상에서 룻의 이야기는 얼마나 귀감이 되는지 시어머니가 훌륭해서가 아니고 잘 해주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자기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씨앗을 뿌린 사람이 시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룻은 그 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잘 모시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게 효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룻의 지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한번 결혼했으면 끝까지 그 가문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르바는 가버렸지만 룻은 끝까지 남습니다. 요즈음에 현대 여성들 가운데 말짱한 자식 다 놔두고, 엄연히 살아있는 남편을 다 놔두고,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문란하고 결국은 나중에 그것이 폭로가 될까봐서 깡패를 시켜서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신문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요즈음 신문에 폭행을 당한 아내에게 두들겨 맞고 사는 남편들이 많아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집에 들어가도 인격적으로 아내와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지를 못해요. 대화를 안 해주니 집으로 못 들어가고 공원 의자에 앉았다가 하루를 보내고 올 데 갈 데 없이 정말 불쌍한 그런 남성들이 얼마나 많다고 그래요. 요즈음은 여권이 얼마나 상실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좋지 않은 점으로 가고있습니다. 그러나 룻을 보십시오. 이미 남편이 세상을 떠나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내가 이 가문에 결혼을 해왔으면 죽기까지 이 가문을 내가 지켜야 된다고 하는 정말 귀감이 되는 모습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특별히 이런 부분에 있어서 꼭 부모에게 자라는 그 부분만이 아니라 이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효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이 있기 때문에 가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녀는 매우 근면 성실한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하루가 지난 이후에 그는 바구니를 들고 이삭을 주우러 나갑니다. 어떤 환경이든지 이 여인은 극복할 수 있는 의지가 강한 여인입니다. 생활력이 강한 여인입니다. 베들레헴에 오자마자 여인들이 옷을 어떻게 입나, 머리 스타일은 어떻게 하나, 그것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바로 바구니를 들고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는 여인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오늘 현대여인들은 죽으라고 열심히 고생을 해서 남편들이 돈을 벌어다가 주면 자기 몸을 치장하는데 돈을 다 쓰지 말고, 오히려 가난한 가문을 부자로 세우고 다 망한 집안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생활력이 강한 여인, 바로 이게 잠언서 31장에 말씀한 현숙한 여인을 말합니다. 여러분, 부모에게 용돈을 드리고 음식을 해드리고 이게 잘해드린 효도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도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원망 불평하지, 않고 그 환경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의지가 있는 사람, 진실과 성실성이 있는 사람이죠.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신앙의 아름다움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 종교를 바꾸었어요. 나라를 바꾸었어요. 언어를 극복합니다. 나오미가 선교사노릇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룻이 선교사입니다. 이럴 때 나오미같은 믿음 생활을 하신 분은 회개를 하십시오. 부끄러워하십시오. 세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고 복 받은 가문에 태어났으면 성도답게 살아야 되지를 않겠습니까? 어머니를 가만히 지켜보니까 비록 한 순간에 판단을 잘못해서 모압까지 와 가지고 망했지만 하나님을 향하는 그 믿음만큼은 본 받을만한 어머니였습니다. 여러분, 효자도 부모가 만듭니다. 자식의 신앙도 부모가 만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왜, 이 못된 자아을 교회도 안 나가느냐, 기도도 안 하느냐, 왜 믿음 생활을 안 하느냐," 탓하지를 마세요 왜 자식을 보고 효자 노릇도 못 하느냐고 탓하지를 마십시오. 효자도 부모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도 부모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룻은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어요.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겠습니다. 우리 나이 드신 어르신들 노년에 쓸데없는 노여움을 부리지를 마시고 남은 여생을 철저히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사시다가 천국에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고귀한 정신을 사랑하는 자부들에게 손부들에게 손자들에게 잘 가르쳐주고 축복하다가 천국에 가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최고의 효도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 날 우리에게 이런 마음을 가졌으면 참 좋겠다 적어보았습니다. 1. 효도에는 내일이 없다.(부모님이 언제 돌아 가실지 몰라요. 내 직장 내 건강이 언제 어 떻게 될지를 몰라요. 요즈음은 하룻밤 사이에 안녕하세요? 교통사고가 많고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퇴직하고 어찌 될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시간 주셨을 때 부모님을 잘 모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2. 물질과 함께 마음을 드리십시오. 3. 공손히 간호를 하십시오. 4. 하나님의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하십시오. 5. 순종보다 더 좋은 미덕은 없습니다. 6. 잘못이 있다고 거역하지 마십시오. 7. 가정 분위기를 화목하게 하십시오. 8. 항상 말을 정중하게 하십시오. 9. 나의 잘못을 먼저 고하십시오. 10. 항상 밝은 얼굴을 가지십시오. 11.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12. 마음을 안심시켜드리십시오. 13. 부모의 고통을 잊지 마십시오. 14.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십시오. 15. 감사를 자주 표현하십시오. 16. 세상의 부모보다 더 좋은 분은 없다는 것을 늘 기억하십시오. 17 부모 공경하는 것을 자랑하십시오. 18. 형제간에 화목하십시오. 19 부모를 위하여 늘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꼭 기억하실 것은 하나님의 질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히 여기고, 그 분들의 위에 있는 권위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해도 다 용서하고 그 허물을 덮은 자가 큰 자이고 하나님이 축복하심을 믿습니다. 룻은 이렇게 복을 받았습니다. 이방 여인이 영광스런 다윗 왕가의 증조할머니가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방 여인은 예수님의 족보 가운데 들어오는 영광을 차지합니다. 마태복음 1:5절에 나와있습니다. 룻기 4장에 보면 모든 동네사람들이 나오미에게 창찬하기를 자네의 며느리는 일곱 아들보다 더 존귀하고 며느리일세. 룻을 보면 나오미에게는 너무너무 과분한 거예요. 일곱 아들보다 더 어머니를 잘 모셔서 영광스럽게 했던 자랑스런 며느리라고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영광스런 명예를 얻었습니다. 더 큰 영광은 성경에 여성의 이름으로 기록된 책이 두 권이 있습니다. 하나는 에스더 그는 유대인인데 그러나 이방 여인이면서 성경책에 기록된 것은 룻기서밖에 없습니다. 두고두고 성경책을 기록할 때마다 룻의 이름을 기억하는 존귀한 자 스타가 되도록 하나님이 세워주셨음을 믿습니다. 우리 부모의 허물들을 다 용서하십시다. 그것을 마음에 접어두면 안돼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왔다가 돌아가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내 문밖에까지 왔다가도 문을 열지 못하고 되돌려보낸다는 겁니다. 부모님이 과거에 어찌했을지라도 오늘 이 시간에 다 용서하고 부모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고생고생을 하신 노년의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화목하고, 사랑하고, 화평이 넘치는 가정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게 5월의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 아 멘 -
룻처럼 효도하자/룻1:15-18
룻처럼 효도하자/룻1:15-18 2003-06-27 13:18:14 read : 4 사사시대때에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 두아들말론과 기룐 네 식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때에 둘째 며느리였던 룻 이라는 여인의 그 행실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귀감이 되어지는 아름다운 효에 대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해였던가 그 땅에 큰 흉년이 들 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수해동안 흉년이 계속 되어지자 살다가 힘이 들 었던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은 자라나는 자녀들에게까지 이 고생을 물려주게 될까 염려하면서 흉년이 없는 모압 땅에 가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이사를 했습니다. 그들은 목메이고 그리던 모압이라는 땅에서 보다 더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축복스럽게 살려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다리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눈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다 름 아닌 그 집안에 호주며 남편인 엘리멜렉이 죽 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야속하다고는 하 지만 이렇게 슬플 수가 있습니까? 나오미 눈에서는 눈물이 마른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태 산처럼 믿고 의지했던 남편이 죽게 되자 의지할 때가 없어서 나오미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인생을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 고생스러워서 웁니다. 또한 고향산천 부모형제를 떠나서 이억만리 외국땅인 모압에서 서러움과 고통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후회스러워서 웁 니다. 그라나 흐리는 세월은 눈물을 마르게 하는 약이었습니다. 세월은 그녀의 눈에서 눈물 을 닦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서둘러서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성공시키는데 노력했 습니다. 그것도 모압자녀들 가운데서 이름 있고, 가문 있고, 기품 있는 마음씨 고운 아가씨 들을 골라서 자부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맏며느리로 맞이하니 그 이름이 오르바라고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며느리를 데리고 왔으니 바로 룻이라고 하는 여인입니다. 모압 에 온지 십 여년이 지났습니다. 남편의 슬픔도 잊어가고 있을 무렵 이것이 또 웬 날벼락입 니까? 큰아들 말론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기룐 두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 뒤에서 남았더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슬픈 사연이었던지 성경은 그 들이 어떻게 죽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잘 살아보겠다고 찾아온 모압에서 이 불행을 맞고 보았더니 얼마나 가슴이 매여는지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말로다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당하니 나오미는 슬프다 못해 부끄러웠습니다. 동네사람들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 런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은 모압에서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두 며느리를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인즉,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함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베들레헴 고향 땅에 풍년이 찾 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녀는 베들레헴으로 귀향할 것을 결심하고 젊어서 등진 고향 황혼녘에 찾아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자부를 돌려보내면서 "사량하는 딸들아 너희들은 각각 어미 집으로 돌아가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 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시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 시기를 원하노라. " 라고 말했습니다. 나오미는 큰 며느리였던 오르바를 설득합니다. 돌아가 라. 나는 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너는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 . 그때 나오미는 오르바를 설 득하여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룻은 돌아가려하지 않았습니다. 룻은 뭐라고 표현했는지 아 십니까? 14절에 보면 룻은 그를 붓 좇았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겠다 고, 어머니가 떠나는 그길을 나도 떠나겠고, 어머니가 머무는 그곳에 나도 머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황혼녘에 외로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시어머니와 함께 하겠다는 룻의 장엄한 고 백을 읽는 동안 우리 마음은 숙연해집니다. 세상이 아무리 편해도 룻의 감동적인 이 글은 지우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우리는 이 내용에서 효가 무엇 인가를 배웁니다. 또한 부모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하여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명명백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기로 소원했다 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면 말로써 오르바를 돌려보낸 시어머니 나오미는 "보라 네 동서는 그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이것이 시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자식을 위 해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위해 마지막 전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데 이 말을 들은 룻은 어머니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 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길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 하겠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룻은 시어머니를 혼자 돌려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자 기가 그 노 시어머니를 모시지 아니하면 그를 모실 분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룻은 노 시모를 모시고 살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요즘과 비교해볼 때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보여줍 니다. 내 친정부모가 귀한걸 알면 내 남편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도 귀한 줄 알아야합 니다. 그 부모님께 효도하는 며느리 아들 또한 며느리와 아들과 딸과 사위를 사랑할 줄 아 는 부모의 사랑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룻의 효도는 시어머니를 위하여 자기자신 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데서 볼수 있습니다. 요즘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에서 자기 유 익과 자기 안목과 자랑과 정욕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이 시대인데도 여러분 룻이라고 하는 여인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기 위하여 자기를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국을 포기했습니다, 또한 고향을 버렸습니다. 자신의 일가친척도 버렸습니 다. 부모와도 이별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종교도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어머니 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라고 말합니다. 그 는 시어머니를 위하여 자신의 평안과 행복도 버렸습니다. 그리고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생 명도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즘에 찾아보기 힘든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사랑입니 다. 효가 깨지면 가정이 깨집니다. 효가 살아야 가정이 살고 민족의 장래가 보장됩니다. 잊 혀져가고 깨어져 가는 효도가 다시 한번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가정들로부터 되살 아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룻의 효도는 아무 소망이 없는 시어머니 를 공경했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구슬땀을 흘리면서 농사를 짖는 것은 가을에 풍성한 수확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구 슬땀을 흘리면서 그들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일을 합 니다. 고생도 참습니다. 그러나 룻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한가지 소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효도가 남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세상은 황폐해져가고 가정은 무너질데로 무너져가고 사람들의 인륜은 찾아보기 힘든 어려운 세상을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녀 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어머니와 네 아버지께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
보아스와 룻의 두번째 대화/룻2:11-13
보아스와 룻의 두번째 대화/룻2:11-13 2003-09-24 14:51:55 read : 4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본문은 보아스와 룻이 주고받은 두번째 대화입니다. 11절에는 보아스가 룻을 칭찬하는 말이 세 가지로 나오고, 12절에는 보아스가 룻을 축복하는 내용이 나오고, 13절에서는 다시 룻이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2:10,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큰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룻은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보아스가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면에서 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겸손의 본이 되기도 합니다. 눅 18:11-14을 보면 성전에서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를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기도할 때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죄를 회개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오리려 세리를 높여주셨습니다.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겸손히 우리 자신을 낮출 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높여주신다고 했습니다. 욥 22:29,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잠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룻이 이렇게 겸손함을 보일 때 오히려 보아스가 룻을 높여줍니다. 칭찬을 해줍니다. 먼저 보아스가 칭찬하는 것을 살펴봅니다. 세 가지를 들어서 룻을 칭찬했습니다. 2:11,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첫째,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룻의 효행을 칭찬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룻의 남편이 누구였습니까? 룻의 남편은 말론이었습니다(4:10).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시모가 누구입니까? 나오미입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행한 모든 것이 어떠했다는 것입니까? 룻 1:8,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룻은 나오미를 선대했습니다. 그 효행을 보아스가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룻이 부모와 조국을 떠난 것을 칭찬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룻의 부모와 고국 땅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강권을 했지만 룻은 불쌍한 시어머니를 떠나는 대신에 자기의 부모와 자기의 고국을 떠났습니다. 룻이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불쌍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서 자기의 정든 고향을 떠난 그 희생을 칭찬했습니다. 셋째로,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을 칭찬했습니다.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은 어느 나라 백성입니까? 유다 백성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이 땅을 너에게 주고, 너의 자손을 창대하게 하고, 너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룻에게는 그러한 약속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기 시어머니를 따라서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백성에게로 왔습니다. 대단한 신앙이요, 대단한 모험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세 가지로 칭찬했습니다. 첫째는 룻의 효행, 둘째는 룻의 희생, 셋째는 룻의 신앙 또는 모험, 이 세 가지를 칭찬했습니다. 2:11 마지막 부분에 보면 룻의 행한 일들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고 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 대해서 이미 들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룻을 칭찬한 것으로 보아 보아스는 룻에 대해서 좋은 면을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에 대한 소문은 어떻게 나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칭찬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칭찬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저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룻을 칭찬한 보아스가 이번에는 룻을 축복합니다. 2: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 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먼저 여호와께서 룻이 행한 일에 보응해주시기를 빌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상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하 22:21,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시 18:20,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잠 11:18,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보아스는 자기가 베풀어준 은혜가 룻이 행한 것의 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룻이 행한 일을 다 갚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룻이 행한 일에 대해 복을 주실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 뿐만 아니라 보호해주시기도 빌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상 주시는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피난처가 되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보아스는 룻을 무엇에 비유하고 있습니까? "날개 아래"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로 보아서 룻을 연약한, 도움이 꼭 필요하고 보호를 받아야 할 새끼 새에 비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룻이 행한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상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여러 군데에서 우리를 품안에 품으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로 우리는 큰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 36: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시 91: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오늘 이 새벽에 단잠을 깨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날 이 시간을 잊지 않고 나오신 여러분께 하나님께서 온전한 상으로 갚으시기를 원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이 참 힘듭니다. 그러나 힘은 들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지켜주시고, 우리의 건강을 돌보아주시고,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십니다. 기도하는 것이 때로는 힘들지만 내 기도를 통하여 내 가정이 평안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힘들지만 내가 기도하므로 우리 구역이 편안해지고, 우리 교회가 편안해지고, 우리 나라가 안전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이 시간을 늘 기억하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힘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13절에서 보아스의 칭찬과 축복의 말에 대해 룻이 답변을 합니다. 감사하는 말입니다.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룻이 보아스에게 "내 주여"라고 하면서 말을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잘해주고 대접을 받으면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기어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켰습니다. "내 주여."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는 당신은 주인이고, 나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히 어떻게 거절하겠냐는 것입니다. 도리어 감사히 받겠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은혜를 입는다는 표현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창 33:15, "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 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삼하 16:4, "왕이 시바더러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시바가 가로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나로 왕의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 옵소서 하니라." 어떤 사람은 도와준다고 해도 "내가 거지냐?"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 비성경적입니다. 사랑을 받을 줄 알 때 베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큰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필요할 때는 남의 사랑을 받기도 하고 또 아낌없이 줄 줄도 아는 것,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것입니다. 나는 도움도 필요 없고, 돕지도 않고, 오직 내 힘으로 살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고 하는 이 말은 또한 얼마나 적극적인 말입니까? "베풀어주신 은혜를 사양하지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룻은 두 가지로 감사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첫째, 보아스의 위로에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나는 당신의 여종보다도 더 못하지만 그러나 위로해주어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룻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땅에 와서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 아침 일찍 밭에 나왔을 때 그 마음속에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관습도 다른 곳에 와서 욕을 먹지나 않을까, 멸시나 당하지 않을까, 혹 쫒겨나지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되는 일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걱정들을 깨끗하게 다 씻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위로를 구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어루만져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용기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는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나아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다 받아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고 말했습니다. 보아스가 베푼 은혜는 룻의 마음에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보아스처럼 남을 위로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보아스처럼 복을 받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남을 위로하고 남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속상할 때나 마음속에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불을 덮어쓰고 한숨만 짓고 있지 말고, 다 떨치고 일어나서 남을 위로하고 남을 기쁘게 하고 내 손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물질로 돕는 일을 해보십시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할 때 내가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의 근심도 해결해주시고 내 육신의 고통도 다 치유해 주십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제를 기억하셨다고 했습니다. 행 10:30∼31,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 때까지 내 집에서 제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다른 사람을 돕고 구제하는 것을 하나님은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무슨 어려움이 있고 육신이 고달프다 할지라도 방에서 근심 걱정만 하고 한숨만 쉬고 있지 말고 오히려 떨치고 일어나서 남을 위로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모습이 다 되셔서 오늘도 복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아스와 룻의 첫번째 대화/룻2:8-10
보아스와 룻의 첫번째 대화/룻2:8-10 2003-09-24 14:53:01 read :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보아스와 룻이 드디어 대화를 시작합니다. 보아스는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한테 룻이 어떠한 사람이고, 룻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룻이 아침 일찍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해왔는지를 자세히 들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에 말을 합니다. 2: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내 딸아!\\\"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에게 하는 것처럼 친근함을 가지고 하는 말투입니다. 그것을 보면 보아스와 룻은 나이 차이가 조금 있다고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룻 3:10,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여기서 말한 것으로 보아서도 보아스가 연소하지 않고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내 딸아!\\\" 할 때는 아버지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내 딸아 들으라.\\\" 따로 들으라고 하지 않아도 지금 룻은 듣고 있습니다. \\\"들으라\\\"고 하는 것은 \\\"귀를 기울여라,\\\" \\\"잘 들어라\\\"고 강조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하면 잘 들으라고 강조하는 말입니다.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20:3,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 시 50: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렘 10:1,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미 1:2,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보아스는 룻에게 두 가지는 하지 말고, 그 대신에 두 가지를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두 가지 중 첫째는,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새는 엿장수도 없지만 엿장수가 짤랑짤랑 가위질을 일 분에 몇 번 합니까? 엿장수 마음대로지요. 이삭을 줍는 사람이 어느 밭에 가서 이삭을 줍느냐는 것은 누구 마음입니까? 이삭을 줍는 사람 마음입니다. 이 밭보다도 저 밭에 가면 더 많이 주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저 밭으로 갑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두번째로 하지 말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여기서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두 가지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에 두 가지를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했습니다. 보아스를 위해서 일하는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는 말은 다시 말해 보아스는 룻을 단순히 이삭 줍는 여자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돌보고 자기 책임하에 있는 일꾼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추수기에 일꾼을 구할 때는 두 부류로 구합니다. 한 부류는 남자들이고, 또 한 부류는 여자들입니다. 보리 추수할 때 남자들이 하는 일은 곡식을 베는 일입니다. 여자들이 하는 일은 그것을 모아서 단으로 묶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곡식 단을 묶는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고 한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라고 한 것은, 9절에 보면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 \\\"그들\\\"이 두 번 나옵니다. 앞에 나오는 \\\"그들\\\"은 누구입니까? 남자들입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나오는 \\\"그들\\\"은 누구겠습니까? 소녀들입니다. 히브리어는 남성 단어가 따로 있고 여성 단어가 따로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처음 나오는 그들이 남성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즉, 소년들이 베고 여자들이 단을 모아서 묶어 놓으면 그 여자들의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룻은 이삭을 줍는 여러 사람들보다도 더 유리하게 더 많은 것을 주울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또 어떤 혜택을 주었습니까? 9절 가운데 부분을 봅시다.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 라.\\\" 극성스럽게 이삭 줍는 여자는 하나라도 더 줍기 위해서 넘어가서는 안되는 경계선을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 않겠습니까? 제재를 하기 위해 처음에는 주의를 하다가 나중에는 욕이 튀어나오고 책망을 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일에서 룻을 보호하기 위해 보아스가 지시한 것입니다. 2:15∼16,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그러니까 보아스는 룻이 단순히 이삭 줍는 사람이 아니라 일꾼처럼 아무런 장애없이 마음껏 주울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룻이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뭐라고 부탁을 했습니까? 2:7에서 보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 보아스가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고 허락해주었습니다. 또 15절에도 보면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룻이 바라던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소원을 그대로 이루어주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9절 하반부를 보십시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 라.\\\" 성지 이스라엘은 참 덥습니다. 햇볕이 쨍쨍 내려쪼일 때는 얼마나 목이 마르겠습니까? 보아스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나라나 유대나, 물을 길어오는 일은 남자가 할 입니까? 여자가 할 일입니까? 보통은 여자들이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옵니다. 여자들이 길어오면 남자들이 물을 마십니다. 창 24:11, \\\"그 약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올 때이었더라.\\\" 창 24:13,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섰다가.\\\" 삼상 9:11, \\\"그들이 성을 향한 비탈길로 올라가다가 물 길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묻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이와 같이 여인이 물을 길어오는 경우가 있었고,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사는 이방인들이 길어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수 9:21∼27, \\\"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라 하니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었더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일러 가로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그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 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신 29:10∼11, \\\"오늘날 너희 곧 너희 두령과 너희 지파와 너희 장로들과 너희 유사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너희 유아들과 너희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선 것은.\\\" 그런데 여기 본문에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소년 남자가 길어온 것을 여자가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혜택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제가 한 가지 물어봅니다. 우리 나라에서 물맛이 제일 좋은 물이 어디의 물일 것 같습니까? \\\"가평수양관 물맛이요!\\\" \\\"예, 우리 교회의 가평수양관 물맛이 제일입니다.\\\" 우리가 우리 수양관의 물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언제나 자기 것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할 줄 알고, 자기 남편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제일 좋은 교회가 어느 교회입니까? 물론 승동교회지요. 자기 교회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구역장은 우리 구역장입니다. 자기 구역장, 자기 교역자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우리 목사님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부흥사경회를 할 때는 강사 목사님을 접대하겠다고 서로 나섭니다. 이미 강사 목사님을 접대할 분이 선약이 되어 있다고 해도 자기가 하겠다고 사정사정하더니 부흥사경회가 끝나고나니까 아무도 목사 대접하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교역자를 사랑할 줄 알고, 자기 목사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평 수양관의 물맛이 제일이라고 좋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는 물맛이 제일 좋은 곳이 어디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에 있는 이야기가 기억나십니까? 다윗이 블레셋과 싸움을 할 때 목이 탔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좀 길어다가 그 시원한 물을 먹게 했으면.\\\" 그 소리를 듣고 세 부하가 적진을 헤치고 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길어왔습니다. 그때 다윗이 이 물을 어떻게 했습니까? 마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을 쏟아부었습니다. 삼하 23: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 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 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이스라엘에서 제일 물맛이 좋은 우물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입니다. 그러면 룻기의 이 소년들도 어디서 물을 길어왔겠습니까?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의 그 시원한 물을 길어왔을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보아스가 룻에게 베풀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것보다 더욱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은혜의 생수를 우리에게 값없이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사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은혜를 받은 룻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10절에 보면 룻이 땅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이 행동은 두 가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당신과 나 사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공경의 표시로써 엎드려서 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마음에 감사가 넘쳤기 때문에 감사의 표시로 엎드려서 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보아스에게 감사의 말을 했습니다. 2:10,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큰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자신은 이스라엘의 여인과 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전혀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감사 하다는 뜻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에는 이런 풍속이 있다고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그 사람 집에 가서 찬 이슬을 맞으면서 집 밖에서 하룻밤을 지새워야 합니다. 만약 배은망덕하게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집 밖에서 이슬을 맞지 아니했다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마을에서 그를 쫒아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6.25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많이 굶주렸습니다. 쌀도 없어서 보리쌀을 조금 맷돌로 간 다음에 물을 잔뜩 부어서 죽을 끓여서 그것으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감사해서, 살아 있는 그 자체로도 감사해서 울고 또 울지 아니했습니까? 그때는 우리가 살아 있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해서 천막으로 만든 예배당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좋은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도 무엇이 그리 부족한지 마음에 감사가 없습니다. 교회 환경이 좋지 않다느니, 교육관이 없어서 어떻다느니, 그저 불평 불만입니다. 다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가 작은 일에 감사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 큰 감사의 조건을 날마다 우리에게 더해 주실 것입니다. 벳새다 들판에 5,000명이라고 하는 많은 무리가 모였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모인 사람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납니다. 예수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때 안드레가 나타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예수님, 이거 예수님께 드릴 테니까 예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안드레야, 평소에도 네 머리가 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 혼자 있을 때 조용히 가지고 와야지 입장 난처하게 지금 그걸 가지고 오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적은 것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축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감사할 때에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날마다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전의 사람-룻/룻1:15-18
비전의 사람-룻/룻1:15-18 2003-06-27 13:19:38 read : 8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 중에서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국화 옆에서'라고 하는 제목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아니, 국화꽃은 가을에 피는 거 아냐? 이제 봄이 막 오려는데 벌써 가을 이야기를 할려구?' 그러실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이 있었고 뜨거운 여름이 있었으며, 그 혹독한 비바람도 있었다고 노래합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나서야 가을에 비로소 한 송이 국화를 보게 됩니다. '이제 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위하여 그 긴긴 여름이 있었고. 그리고 소쩍새는 한여름 내내 울었던 것 같다'라고 시인은 생각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이란 이념이 아니기에 '주의'라는 말을 쓸 수 없지만 부득이 기독교에게 어떤 '주의'를 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현실주의'일 것이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현실을 부정하지도 도피하지도 않습니다. 현실을 떠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 의미와 목적을 알고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현대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질병도 가난도 아니라는 걸, 현대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허무', 곧 '의미 상실'입니다.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겠고, 왜 내가 이 일을 꼭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그것 말입니다. 요즈음 축구국가대표선수 감독으로 우리나라에 온 '히딩크'에 대하여 폭발적인국민적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그분에게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중간 역할을 하는 '박항서' 코치에 의하면 전에는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왜 그런 힘든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를 몰라서 기피하고 물의를 일으키다가 결국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았기에 스스로 훈련이 재미가 나서 열심히 한다고 말합니다. 왜 내가 참고 해야 하는지 그걸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의미상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고 절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인터넷 '야후 코리아' 사장이 가정을 더 중요시 하겠다고 사표를 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만, 얼마 전 미국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의 대표이사가 연봉 400만 불(약 50억원)의 지위를 자진 사임해버려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정작 이유는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답니다. 돈은 벌 수 있었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 곧 뭔가 비전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 자리를 그는 미련 없이 떠나버렸습니다. - 1 - 배가 불러서 그렇다구요? 배가 고파보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허겁지겁 먹게 된다구요? 아닙니다. 그렇게 매도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 사회에 망조가 드는 거 아닙니까? 배고파 허겁지겁 먹다가 습관이 되어서 이제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습니다. 남의 인생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도 없이 그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는 내 배고픔과 배부름에 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에 있습니다.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말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다가 어떻게 내가 죽을 수 있느냐?'에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삶의 의미'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적어도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삶의 의미'에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일을 위하여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고 선언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일이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대체 나는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 쓰여지고 있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 어느 순간에 죽을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생을 바쳐야 하고 그리고 마침내 그 일로 죽어야 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일 전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죽음의 일들이 있었습니다. 일본 동경 전철역에서 일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한국청년의 사건과 이번에 진화작업 도중 변을 당한 분들의 일이 모두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며, 그러기에 국민적 추앙을 받는 일로서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그런 중에도 우리가 냉철하게 분석해 본다면 과연 그 청년과 소방관의 죽음이 같은 죽음인가? 하는 일입니다. 생업의 일이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으로 요령을 부려 치부하려는 세상에서 사회봉사차원에서 이 직업을 택하고 몸을 사리지 않고 타인을 구하려 했다는 점에서 보면 과연 살신성인의 모습으로 추앙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방관들의 죽음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가 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 그 일은 그들의 의무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청년의 죽음에는 의무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가만히 있어도 될 위치였지만 그는 임의로 타인을 구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당한 죽음이기에 더욱 더 존경과 추앙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 청년의 경우도 엄밀히 따져보면 순간의 결정을 요구받은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술 취해서 철로에 떨어진 저 사람을 구하는데 목숨을 걸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순간의 판단이 요구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순간의 판단은 때로는 과감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 - 2 - '에잇'하고 저질러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아무나 행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목숨을 걸 일에 오랜 시간을 두고 요구받는 것이라면 끝까지 그럴 수 있다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룻'이라는 한 모압 여인이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그 결단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17절 上)." 앞으로 일이 잘 풀려 살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위해서라면 죽을 줄 알고도 어머니와 함께 하겠다는 단호한 결단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당신의 인생 전체가 고난스럽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으실 줄 아시면서, 곧 평생 죽음을 느끼면서 사셨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내일을 모르고 사는 것이, 언제 죽을지를 모르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그걸 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그건 사는 게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편히 살 수 있는 다른 길을 버리고 평생 죽음을 각오하고 어머니를 따라가겠다는 것이니, '룻'! 그녀는 과연 누구입니까? 그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 이렇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엘리멜렉'이라 이름하는 한 가난한 유태인이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흉년이 들어 온 땅이 기근으로 인한 고통을 극심하게 겪게 되자 '엘리멜렉'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이방 나라, 모압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압땅으로 이민을 오자 말자 거기 낯선 땅에서 돌연 '엘리멜렉'이 죽게 됩니다. 어느 날 졸지에 과부가 된 그의 아내 '나오미'는 이곳 이방 땅의 처녀들인 '오르바'와 '룻'이라고 하는 두 여인들을 며느리로 받아들임으로써 남편을 잃은 괴로움을 달래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을 천운으로 하고 세상에 태어났는지 이 여인은 곧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두 아들조차 손자도 보지 못한 채 이방 땅에서 잃게 되는 큰 아픔을 겪게 됩니다. 남자란 남자는 다 죽어서 이 가문은 대를 이을 자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무 대책도 없이 순식간에 황무한 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저 연약한 세 여인,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두 며느리들인 '오르바'와 '룻', 쌍과부집이 아니라 삼과부집이 된 저들이 이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을 도대체 무슨 수로 헤쳐 나가며 살아 나갈 것입니까? 그래도 사려 깊고 신앙심이 깊은 '나오미'는 비록 자신도 과부신세지만 그보다는 졸지에 청상이 된 젊은 며느리들의 슬픔을 생각하며 억척스러우리만큼 자신의 고통스러운 신세를 한탄하거나 비굴하게 비켜 가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며느리들을 독려하며 충실한 동반자로서 그녀들과 더불어 그 고난을 돌파하며 이겨나가고 있었습니다. - 3 - 그러던 어느 해 '나오미'가 떠나왔던 조국 땅에도 흉년이 물러나고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마침내 '나오미'는 살기 좋아진 자기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역이민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문득 귀향길에 앞서 새파랗게 젊은 두 며느리의 장래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나야 늙은 몸, 이제 내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 남은 생을 어느 한 구석에 몸 붙여 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가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두 젊은 며느리들의 경우를 생각하면 저들에게는 시어미의 고향이 오히려 낯설고 물 설은 남의 나라이고, 남편도 없는 객지라서 다 늙은 자신을 따라 나섰다가 자기마저 죽어 없어지면 저들은 도대체 누구를 의지하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오미'는 그들을 불러 놓고 간곡한 말로 '늙은 시어미의 가는 길을 따라 나서서 아까운 청춘을 희생하지 말고 너희들의 조국인 모압 땅에 남아서 새 남편을 만나 새 인생을 열어 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진심으로 만류를 한 것입니다. 마침내 시어머니의 간곡한 권면이 지극해서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슬픔에 작별인사를 하고 자기 조국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인 '룻'은 자신의 조국보다는 시어머니와 같이 있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인생을 먼저 살고 혼자된 과부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룻'은 끝까지 어머니와 같이 할 것을 고집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룻'은 '나오미'와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불쌍한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의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분 아래에서 세상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된 것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깊고도 살뜰한 사랑과 위로를 통하여 성경의 하나님을 알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기에 이제 그 어머니로 하여금 노경의 길을 홀로 걸어가게 해 드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룻'이 알았던 본래의 신은 사실은 모압신 '그모스'였지만 이제 그녀가 시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절실하게 깨닫고 체험하게 되었던 유일하신 참된 신은 결단코 자기 민족의 신인 '그모스'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모압의 신도, 이스라엘의 민족에 국한된 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구구절절 시어머니와의 사랑의 생을 통하여 며느리 '룻'에게 알려진 '어머니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룻'이 제 민족을 통하여 배운 신은 모압 민족의 전통과 민족의 종교적 전례와 교리를 통해 억지로 배운 신이라면 그녀가 그녀의 시어머니를 통하여 알게 된 신은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의 삶을 통하여 자신에게 - 4 -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가오신 하나님이셨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 下)" '오르바'는 중간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끝까지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집이 아니라 마음속에 자리 잡은 비전에서 나온 확신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신자의 신앙적인 비전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그래서 그녀는 시작할 때에 모압신을 버리고 확실한 것, 여호와 신앙을 잡았으며, 그 신앙을 끝까지, 그리고 견고히 잡기 위하여 분명한 비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16절). 그녀의 고백은 확고하게 네 가지로 이어집니다. ■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비록 그곳이 내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어머니와 함께 가는 길이라면 그 길은 생명의 길일 것이며 그곳은 빛과 사랑이 넘치는 곳일 것입니다. ■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비록 오두막집에 묵는다 하더라도, 아니 그보다 훨씬 못한 곳에 묵는다 하더라도 나는 따르겠습니다. 이유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겠습니다. 단순히 같은 국적을 갖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이웃이라면 저도 그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겠습니다. ■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제 어머니와 같이 나의 전 생을 하나님의 제단 앞에 바치려 합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살지 몰라도 하나님을 떠난 내 삶은 존재할 수 없는, 나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룻'은 '나오미'와 함께 신앙에 목숨을 걸 것을 선언합니다 (17절). 죽어도 어머니와 같이 죽겠다는 말입니다. 어머니를 향한 효(孝)에서 신앙이 나온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인하여 더 지극한 효행의 마음이 나온 것입니다. 그녀에게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나오미'의 말대로 친정으로 돌아가서 팔자를 고치는 것이 비전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서 썩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건 비전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그런고로 이젠 우리의 비전이 중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이 비전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신자임에도 욕망과 비전을 혼동합니다. - 5 - 자신을 확실히 검증하십시오. 혹시 지금 가지고 계신 것이 욕망인지 비전인지를... 어떻게 구분하겠습니까? ■이기심인지 이타심인지..., ■십자가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게 비전이 분명할 것 같으면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사랑도, 긍휼도, 효행도, 인내와 절제도! 그녀는 마침내 덕을 이루어 많은 사람의 칭송 속에 '보아스'라는 신앙과 재력을 겸비한 사람과 재혼을 하게 됩니다(룻 4:10). 이제는 불행 끝, 행복의 시작입니다. 이제야 축복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에 머물지 않고 마태복음은 그녀의 영광스러운 비전성취를 구별하여 증거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 1:5,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아! 그래서 그랬었나 봅니다. 이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봅니다. 그래서 뜨거운 여름의 고난이 있었고, 그래서 모진 비바람도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룻'의 삶이 왜 그리 처절했던고? 저는 그저 과부들의 팔자가 세서 그러려니 했었습니다. '그렇지! 남편 복이 없는 여자가 무슨 복인들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영광의 비전을 이루시기 위해 그 동안 하나님은 그녀의 삶에 소쩍새를 슬피 울게 하셨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찬란하게 피우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칼 없는 전쟁이 정치이고 칼 있는 정치가 전쟁이다." 그래요. 지금 세상은 칼 없는 전쟁판, 칼 있는 전쟁판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칼도, 힘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무슨 비전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건 오해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룻'은 이 싸움에서 승리한 비전의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 '룻'!, 그녀는 자신의 후손 중에 메시아가 탄생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순종하는 평범한 여성을 통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녀는 대단한 배경을 가지지도, 현대적 관점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분명한 비전을 가졌고 그 비전에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철저히 이루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기심은 버리고 십자가는 지려는 비전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비전에 목숨을 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사명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삶에서 소쩍새가 울어도 그 일을 행하십시오. 거기에 영광스러운 비전성취가 주어질 것!!!
비전의 사람-룻/룻1:15-18
비전의 사람-룻/룻1:15-18 2003-11-17 19:09:55 read : 2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 중에서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시는 \'국화 옆에서\'라고 하는 제목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아니, 국화꽃은 가을에 피는 거 아냐? 이제 봄이 막 오려는데 벌써 가을 이야기를 할려구?\' 그러실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이 있었고 뜨거운 여름이 있었으며, 그 혹독한 비바람도 있었다고 노래합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나서야 가을에 비로소 한 송이 국화를 보게 됩니다. \'이제 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위하여 그 긴긴 여름이 있었고. 그리고 소쩍새는 한여름 내내 울었던 것 같다\'라고 시인은 생각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이란 이념이 아니기에 \'주의\'라는 말을 쓸 수 없지만 부득이 기독교에게 어떤 \'주의\'를 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현실주의\'일 것이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현실을 부정하지도 도피하지도 않습니다. 현실을 떠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 의미와 목적을 알고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현대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질병도 가난도 아니라는 걸, 현대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허무\', 곧 \'의미 상실\'입니다.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겠고, 왜 내가 이 일을 꼭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그것 말입니다. 요즈음 축구국가대표선수 감독으로 우리나라에 온 \'히딩크\'에 대하여 폭발적인국민적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그분에게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중간 역할을 하는 \'박항서\' 코치에 의하면 전에는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왜 그런 힘든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를 몰라서 기피하고 물의를 일으키다가 결국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았기에 스스로 훈련이 재미가 나서 열심히 한다고 말합니다. 왜 내가 참고 해야 하는지 그걸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의미상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고 절망하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인터넷 \'야후 코리아\' 사장이 가정을 더 중요시 하겠다고 사표를 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만, 얼마 전 미국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의 대표이사가 연봉 400만 불(약 50억원)의 지위를 자진 사임해버려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정작 이유는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답니다. 돈은 벌 수 있었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 곧 뭔가 비전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 자리를 그는 미련 없이 떠나버렸습니다. - 1 - 배가 불러서 그렇다구요? 배가 고파보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허겁지겁 먹게 된다구요? 아닙니다. 그렇게 매도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 사회에 망조가 드는 거 아닙니까? 배고파 허겁지겁 먹다가 습관이 되어서 이제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습니다. 남의 인생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도 없이 그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는 내 배고픔과 배부름에 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에 있습니다.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말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다가 어떻게 내가 죽을 수 있느냐?\'에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삶의 의미\'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적어도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삶의 의미\'에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일을 위하여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고 선언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일이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대체 나는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 쓰여지고 있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 어느 순간에 죽을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생을 바쳐야 하고 그리고 마침내 그 일로 죽어야 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일 전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죽음의 일들이 있었습니다. 일본 동경 전철역에서 일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한국청년의 사건과 이번에 진화작업 도중 변을 당한 분들의 일이 모두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며, 그러기에 국민적 추앙을 받는 일로서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그런 중에도 우리가 냉철하게 분석해 본다면 과연 그 청년과 소방관의 죽음이 같은 죽음인가? 하는 일입니다. 생업의 일이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으로 요령을 부려 치부하려는 세상에서 사회봉사차원에서 이 직업을 택하고 몸을 사리지 않고 타인을 구하려 했다는 점에서 보면 과연 살신성인의 모습으로 추앙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소방관들의 죽음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가 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 그 일은 그들의 의무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청년의 죽음에는 의무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가만히 있어도 될 위치였지만 그는 임의로 타인을 구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당한 죽음이기에 더욱 더 존경과 추앙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 청년의 경우도 엄밀히 따져보면 순간의 결정을 요구받은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술 취해서 철로에 떨어진 저 사람을 구하는데 목숨을 걸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순간의 판단이 요구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순간의 판단은 때로는 과감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 - 2 - \'에잇\'하고 저질러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아무나 행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목숨을 걸 일에 오랜 시간을 두고 요구받는 것이라면 끝까지 그럴 수 있다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룻\'이라는 한 모압 여인이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그 결단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17절 上).\" 앞으로 일이 잘 풀려 살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위해서라면 죽을 줄 알고도 어머니와 함께 하겠다는 단호한 결단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당신의 인생 전체가 고난스럽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처절하게 죽으실 줄 아시면서, 곧 평생 죽음을 느끼면서 사셨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내일을 모르고 사는 것이, 언제 죽을지를 모르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그걸 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그건 사는 게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편히 살 수 있는 다른 길을 버리고 평생 죽음을 각오하고 어머니를 따라가겠다는 것이니, \'룻\'! 그녀는 과연 누구입니까? 그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 이렇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엘리멜렉\'이라 이름하는 한 가난한 유태인이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흉년이 들어 온 땅이 기근으로 인한 고통을 극심하게 겪게 되자 \'엘리멜렉\'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이방 나라, 모압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압땅으로 이민을 오자 말자 거기 낯선 땅에서 돌연 \'엘리멜렉\'이 죽게 됩니다. 어느 날 졸지에 과부가 된 그의 아내 \'나오미\'는 이곳 이방 땅의 처녀들인 \'오르바\'와 \'룻\'이라고 하는 두 여인들을 며느리로 받아들임으로써 남편을 잃은 괴로움을 달래 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을 천운으로 하고 세상에 태어났는지 이 여인은 곧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두 아들조차 손자도 보지 못한 채 이방 땅에서 잃게 되는 큰 아픔을 겪게 됩니다. 남자란 남자는 다 죽어서 이 가문은 대를 이을 자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무 대책도 없이 순식간에 황무한 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저 연약한 세 여인,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두 며느리들인 \'오르바\'와 \'룻\', 쌍과부집이 아니라 삼과부집이 된 저들이 이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을 도대체 무슨 수로 헤쳐 나가며 살아 나갈 것입니까? 그래도 사려 깊고 신앙심이 깊은 \'나오미\'는 비록 자신도 과부신세지만 그보다는 졸지에 청상이 된 젊은 며느리들의 슬픔을 생각하며 억척스러우리만큼 자신의 고통스러운 신세를 한탄하거나 비굴하게 비켜 가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며느리들을 독려하며 충실한 동반자로서 그녀들과 더불어 그 고난을 돌파하며 이겨나가고 있었습니다. - 3 - 그러던 어느 해 \'나오미\'가 떠나왔던 조국 땅에도 흉년이 물러나고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마침내 \'나오미\'는 살기 좋아진 자기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역이민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문득 귀향길에 앞서 새파랗게 젊은 두 며느리의 장래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나야 늙은 몸, 이제 내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 남은 생을 어느 한 구석에 몸 붙여 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가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두 젊은 며느리들의 경우를 생각하면 저들에게는 시어미의 고향이 오히려 낯설고 물 설은 남의 나라이고, 남편도 없는 객지라서 다 늙은 자신을 따라 나섰다가 자기마저 죽어 없어지면 저들은 도대체 누구를 의지하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오미\'는 그들을 불러 놓고 간곡한 말로 \'늙은 시어미의 가는 길을 따라 나서서 아까운 청춘을 희생하지 말고 너희들의 조국인 모압 땅에 남아서 새 남편을 만나 새 인생을 열어 가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진심으로 만류를 한 것입니다. 마침내 시어머니의 간곡한 권면이 지극해서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슬픔에 작별인사를 하고 자기 조국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인 \'룻\'은 자신의 조국보다는 시어머니와 같이 있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인생을 먼저 살고 혼자된 과부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룻\'은 끝까지 어머니와 같이 할 것을 고집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룻\'은 \'나오미\'와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불쌍한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의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분 아래에서 세상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된 것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깊고도 살뜰한 사랑과 위로를 통하여 성경의 하나님을 알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기에 이제 그 어머니로 하여금 노경의 길을 홀로 걸어가게 해 드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룻\'이 알았던 본래의 신은 사실은 모압신 \'그모스\'였지만 이제 그녀가 시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절실하게 깨닫고 체험하게 되었던 유일하신 참된 신은 결단코 자기 민족의 신인 \'그모스\'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모압의 신도, 이스라엘의 민족에 국한된 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구구절절 시어머니와의 사랑의 생을 통하여 며느리 \'룻\'에게 알려진 \'어머니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룻\'이 제 민족을 통하여 배운 신은 모압 민족의 전통과 민족의 종교적 전례와 교리를 통해 억지로 배운 신이라면 그녀가 그녀의 시어머니를 통하여 알게 된 신은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과 섬김의 삶을 통하여 자신에게 - 4 -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가오신 하나님이셨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 下)\" \'오르바\'는 중간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끝까지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집이 아니라 마음속에 자리 잡은 비전에서 나온 확신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신자의 신앙적인 비전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그래서 그녀는 시작할 때에 모압신을 버리고 확실한 것, 여호와 신앙을 잡았으며, 그 신앙을 끝까지, 그리고 견고히 잡기 위하여 분명한 비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16절). 그녀의 고백은 확고하게 네 가지로 이어집니다. ■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비록 그곳이 내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어머니와 함께 가는 길이라면 그 길은 생명의 길일 것이며 그곳은 빛과 사랑이 넘치는 곳일 것입니다. ■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비록 오두막집에 묵는다 하더라도, 아니 그보다 훨씬 못한 곳에 묵는다 하더라도 나는 따르겠습니다. 이유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겠습니다. 단순히 같은 국적을 갖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이웃이라면 저도 그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겠습니다. ■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제 어머니와 같이 나의 전 생을 하나님의 제단 앞에 바치려 합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살지 몰라도 하나님을 떠난 내 삶은 존재할 수 없는, 나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룻\'은 \'나오미\'와 함께 신앙에 목숨을 걸 것을 선언합니다 (17절). 죽어도 어머니와 같이 죽겠다는 말입니다. 어머니를 향한 효(孝)에서 신앙이 나온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인하여 더 지극한 효행의 마음이 나온 것입니다. 그녀에게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나오미\'의 말대로 친정으로 돌아가서 팔자를 고치는 것이 비전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서 썩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건 비전이 아니라 욕망입니다. 그런고로 이젠 우리의 비전이 중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이 비전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신자임에도 욕망과 비전을 혼동합니다. - 5 - 자신을 확실히 검증하십시오. 혹시 지금 가지고 계신 것이 욕망인지 비전인지를... 어떻게 구분하겠습니까? ■이기심인지 이타심인지..., ■십자가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게 비전이 분명할 것 같으면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사랑도, 긍휼도, 효행도, 인내와 절제도! 그녀는 마침내 덕을 이루어 많은 사람의 칭송 속에 \'보아스\'라는 신앙과 재력을 겸비한 사람과 재혼을 하게 됩니다(룻 4:10). 이제는 불행 끝, 행복의 시작입니다. 이제야 축복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에 머물지 않고 마태복음은 그녀의 영광스러운 비전성취를 구별하여 증거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 1:5,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아! 그래서 그랬었나 봅니다. 이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봅니다. 그래서 뜨거운 여름의 고난이 있었고, 그래서 모진 비바람도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룻\'의 삶이 왜 그리 처절했던고? 저는 그저 과부들의 팔자가 세서 그러려니 했었습니다. \'그렇지! 남편 복이 없는 여자가 무슨 복인들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영광의 비전을 이루시기 위해 그 동안 하나님은 그녀의 삶에 소쩍새를 슬피 울게 하셨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찬란하게 피우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칼 없는 전쟁이 정치이고 칼 있는 정치가 전쟁이다.\" 그래요. 지금 세상은 칼 없는 전쟁판, 칼 있는 전쟁판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칼도, 힘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무슨 비전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건 오해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룻\'은 이 싸움에서 승리한 비전의 사람입니다. 비전의 사람 \'룻\'!, 그녀는 자신의 후손 중에 메시아가 탄생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순종하는 평범한 여성을 통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녀는 대단한 배경을 가지지도, 현대적 관점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분명한 비전을 가졌고 그 비전에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철저히 이루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기심은 버리고 십자가는 지려는 비전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비전에 목숨을 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사명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삶에서 소쩍새가 울어도 그 일을 행하십시오. 거기에 영광스러운 비전성취가 주어질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