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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와 탕자 문화(1)/ 눅15:11-24
21세기와 탕자 문화(1) 눅15:11-24 사람은 아무리 자기를 부인해도 여전히 사람일 뿐입니다. 결코 신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짐승도 아니며 벌레도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가끔 신이 되려 하고 때로는 짐승처럼, 벌레처럼 타락하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의 세계는 인간에게 또다른 절망과 소망을 던져주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잘 아는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에 나오는 이 탕자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으로 많은 설교를 해 왔지만 이 시점에서 오늘의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차례 \\\\\\\'21세기와 탕자문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때 성령께서 여러분들에게 큰 감동으로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탕자문화 우선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굉장히 강하게 설정이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란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아들은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나와 있는데 좁은 의미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 지칭할 수 있고 넓은 의미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 했고 아버지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둘째 아들을 \\\\\\\'탕자\\\\\\\'라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붙인 한자어입니다만 이 둘째아들의 행위는 글자 그대로 탕자입니다. LA에 있는 어느 교회에 소그룹 친교 모임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주목을 끄는 명칭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돌탕회\\\\\\\'라는 것인데 \\\\\\\'돌아온 탕자들의 회\\\\\\\'라는 뜻입니다. 아주 방탕하게 살던 자들이 이제는 다시 이전 생활을 반복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이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탕자문화라는 개념으로 오늘 본문을 접근하고 싶습니다. 문화라는 이 말은 우리에게 도전하는 말인데 요즘 와서는 매스미디어와 인터넷 문화로 인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문화세계를 느끼게 합니다. 요즘은 사이버문화라는 말이 등장하였습니다. 이 사이버란 가상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가상세계에 의해 현실 세계가 영향을 받으며 이 사이버 문화의 영향 안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문화 변천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오늘 우리의 문화는 탕자, 타락된 문화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문화에 관한 개념을 먼저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 가지 문화 첫째, 우리는 전통문화라는 것을 접하고 삽니다. 어느 민족에게나 전통이 있고 거기에 영향을 받습니다. 전통문화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닙니다. 이 전통 문화는 그 민족마다 특색을 가지고 있고 자존심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치는 우리의 전통 문화를 대변하는 음식중 하나입니다. 김치에 젓갈이나 고춧가루를 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젊은 아이들이 김치를 안먹는다고 해도 김치안에 치즈를 넣을 수 없고 우유를 부을 수 없습니다. 김치에 집합된 우리의 전통 문화의식은 아주 강력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현대 주택이 발달하고 서양 주택이 들어 온다고 해도 우리는 방에 신을 벗고 가야 합니다. 우리의 경건, 도덕성, 정신세계가 신 신는 것을 용납 안합니다. 그러므로 전통 문화는 고상합니다. 너의 문화는 좋고 우리 문화는 등급이 낮다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두번째는 기술 문화의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술 문화의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옷 하나도, 마이크도, 음향 시설도 모두 기술 문화의 영역 안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인을 해도 우리는 모두 기술 문화의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기술 문화는 우리의 삶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현대 문화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심산에 있는 사찰에게도 기술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핵 문화입니다. 이것은 절대 가치 문화입니다.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배격해야 합니다. 전통 문화가 고상하나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과 배치되는 것은 배격해야 합니다. 기술문화가 아무리 편리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킬 때는 그것을 배격해야 합니다. 이것이 절대가치의 핵 문화라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절대로 양보될 수 없는 핵문화가 있습니다. 내게 돌아올 몫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탕자는 탕자 문화를 우리 앞에 창출하고 있습니다. 이 탕자 문화의 근본이 어디서 시작되는가? 12절을 보면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 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탕자입니다. 이 탕자는 탕자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탕자 문화의 가치관의 근원은 오늘 본문에 그대로 나와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이 문장을 잘 명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들이 아버지 앞에 가서 아버지의 의견은 아랑곳 없고 당당하게 아버지 앞에 가서 이 아들놈이 하는 말이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속에 가장 강조되는 개념은 아들의 \\\\\\\'자기\\\\\\\'입니다. 자기 중심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은 아들에게 돌아갈 몫이 있으나 아직은 그것까지도 아버지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것이 내 것이며 지금 그것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탕자는 자기 중심으로부터 탕자 문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내 것, 내 분깃, 내 몫을 달라고 우기는 이 모습은 오늘 현대 문화의 자화상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참 귀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 천륜의 관계가 재산을 두고 서로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는 틈이 나야 합니다. 여기 가운데 있는 재산보다 사실은 아버지가 더 소중하고 이 재산보다 사실은 아들이 더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재산 때문에 비참한 비극이 벌어진 것입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버지고 아들인데 지금 아들의 눈에는 아버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탕자문화의 특징입니다. 이번 주간에 우리나라는 국회의원 출마 공천자 발표로 인하여 꽤 시끄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떠드는 소리를 잘 들어보면 모두가 다 탕자 문화속에 함께 뒹굴어 가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 몫이고 자기를 깨뜨리지 않습니다. 자기 몫이 돌아오면 의인이 되고 성자가 되지만 자기 몫에 침해를 당하면 모두 사나운 호랑이로 변하고 악인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탕자문화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잘 보여 줍니다. 가인은 자기 생각을 가지고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 좋은대로 악을 저질렀습니다. 니므롯 자손들은 자기들 소견을 따라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사사시대 사람들을 가리켜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이 우상이요, 신이요, 자기 몫이 오직 문화의 가치척도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2장 28절 이하에 여로보암왕은 자기 마음대로 산당을 짓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제사장을 세우고 절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벧엘과 단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가는 백성들을 가로막고 금송아지에게 경배하게 했습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만든 왕입니다.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만들어 놓고 백성들을 타락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탕자문화의 뿌리들입니다. 여러분 오늘 현대인들을 보십시오. 자기 몫 외에 다른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치의 기준이 자기의 몫입니다. 이 아들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서 아버지를 아버지로 보지 않고 자기자신이 아들됨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 탕자는 온통 감정도 의지도 비전도 오직 자기 몫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도 자녀됨도 안중에 없습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 몫을 챙기는 것이 이 탕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나도 귀하고 여러분도 귀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현실은 돈이라는 것이 사이에 끼어서 나도 상하고 너도 상하는 탕자 문화의 시궁창 속에서 뒹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내 몫을 남을 위해서 주어 보았습니까? 내 몫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드려 보았습니까? 철저히 내 몫만 붙잡고 누군가 내 몫에 손만 대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탕자문화에 빠져 있지는 않았냐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갈라놓는 이 재산 문제는 오늘 내가 믿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격 안에는 예수를 사랑하고 싶고 순종하고 싶은 근본적 도덕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잘못됩니까? 돈이라는 것이 사이에 끼어서 하나님께도 상처가 가고 나도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자 문화의 모습입니다. 탕자의 참상 탕자는 비참한 비극을 맞이합니다. 13절 이하를 보면 \\\\\\\"그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은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였더니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했습니다. 탕자문화의 비극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집을 떠납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받아서 아버지 집을 떠나면서 자기는 성공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아버지를 떠나는데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안됩니다. 재물을 모아서 먼 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이 먼 나라는 미국도 아니요 알라스카도 아닙니다. 이 먼 나라는 비행기를 타고 20시간 가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이 먼 나라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나라입니다. 아버지가 귀찮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 이하에 보면 죄에 대한 목록이 나옵니다. 온갖 불의와 탐욕, 추악, 탐욕이 가득한 나라가 바로 악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바로 먼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정치가 먼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물질, 교육이 먼 나라입니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곳이 바로 먼 나라입니다. 탕자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14절에 이 탕자가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그 모습을 정리해 봅시다. 이 사람은 술과 함께 방탕해 버렸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이 아들은 술하고 방탕했고 창기와 함께 방탕했습니다. 그 아까운 재물을 창기에게 다 써버렸습니다. 여기에 암시적인 것이 있는데 이 친구가 그 많은 물질을 다 없이한 여기에 현대인의 정서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허비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 아들은 돈으로 자기자신을 자학한 것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정신세계가 공허해지면 돈으로 자학합니다. 쇼핑, 술, 마약을 통해 자기를 자학합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돈으로 인간을 학대하는 자학현상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궁핍했습니다. 한없이 주리고 주리는 궁핍의 상태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은 기생충과 같은 인간으로 전락했습니다. 15절에 보면 \\\\\\\'가서 그 나라 백성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 불행한 인간입니다. 그런가 하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라고 했습세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탕자의 참상입니다. 맺는 말 탕자문화는 오늘 우리 현실의 문화입니다. 모 여자 경찰서장이 매춘을 뿌리 뽑겠다고 단속의 칼을 들었습니다. 통계를 보니 지금 우리나라에는 20세이하의 여성으로 거기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50만명이라고 합니다. 미성년자들이 이만큼 탕자 문화속에서 함께 뒹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속 문화는 본질상 탕자 문화입니다. 편하고 살기 좋은 모든 기술 문화, 사이버 문화 배후에는 위선과 타락이 있습니다. 지금 영화, 문학, 예술, 유행이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입니다. 영화 속의 장면을 보면 감탄합니다. 그러나 그 장면은 모두 꾸며진 거짓의 것입니다. 또 하나는 거기에는 종교성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지금 헐리우드, 세계문화를 지배하는 그 곳에는 뉴에이지 신봉자들이 들어가 있고, 사탄 숭배자, 다원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작품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오염된 문화를 받아 마시고 있습니다. 이제 이 비참한 탕자가 살길이 무엇입니까? 오직 한길 - 떠나온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 문제를 다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1세기와 탕자 문화(3)/ 눅15:11-24
21세기와 탕자 문화(3) 눅15:11-24 \\\\\\\'호가호위\' 또는 \'호위호차\\\\\\\'(虎威狐借)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여우가 호랑이의 힘을 빌어 왕노릇 한다는 말입니다. 여우가 산길을 가다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여우가 꾀를 내어 말하기를 \\\\\\\"이 산에서 나보다 강한 자가 없습니다요. 증명해 보일테니 내 뒤를 따라와 주세요.\\\\\\\" 정말 짐승들이 여우를 보자 다 달아나 버립니다. 호랑이가 생각하기를 \\\\\\\"야, 이놈이 정말 센 놈이구나. 나도 봉변을 당할는지 모르겠는걸.\\\\\\\" 슬슬 뒷걸음질 치면서 숨어버렸습니다. 여우는 그것도 모르고 거들먹거리며 가다가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이 우화는 우리 인생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 탕자가 바로 여우와 같은 신세가 되고만 사람입니다. 이 친구는 아버지께 재산을 얻어 가지고 그 돈의 힘을 믿고 독불장군처럼 행세를 했습니다. 아버지도 안중에 없습니다. 가족도 가정도 고향도 친구도 그는 안중에 없습니다. 자기가 왕입니다. 돈의 힘을 믿고 그는 못하는 게 없는 줄 알았고 못 가질 게 없을 줄 알았지만 그의 인생은 지금 비참한 모습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벤처정신의 아버지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내아들은 죽었다가 살아온 아들이다.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다.\\\\\\\" 아버지는 실로 위대한 사랑의 아버집니다. 이 망나니 같은 아들을 그렇게도 이유를 묻지 않고 영접해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이 아버지를 묵상하다가 오늘날의 현대적인 감각을 가지고 이 아버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즘 여러분이 벤처기업이란 말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 벤처의 이론이 우리 신앙생활에 아주 유용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섬기는 것도 이 벤쳐 마인드를 가지고 섬기면 대단히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벤처정신은 세 가지인데 하나는 변화입니다.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묵은 것, 구태의연한 것, 발전이 없는 것,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 등은 과감하게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벤처정신은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한발 먼저 생각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숙입니다. 벤처는 발전 안하면 과감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벤처는 반드시 성숙을 해야 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야 하고 이 달보다 다음달이 더 성숙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할도 성숙해야 합니다. 예수 믿은 연륜에 따라 지혜와 생각이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벤처 마인드는 헌신입니다. 돈을 벌어 자기만 잘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어 사회에 환원을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다시 투자를 하고 국가와 인류를 위해 쓰겠다는 이 정신이 벤처정신입니다. 예수 믿고 은혜받고 복 받아서 우리는 나 혼자 잘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복음을 위해 살고 이 땅위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 이런 것이 바로 벤처 마인드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대단한 벤처 사업가입니다.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아담을 지어놓고 복을 주시며 가라사대 \\\\\\\"너는 번성하고 충만하라 땅을 정복해라 땅을 다스리라 만물을 다스리라\\\\\\\"는 위대한 문화명령을 주셨습니다. 노아를 부르신 하나님,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은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변화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이 성숙해 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정신을 가지고 만물을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와 같은 벤처 마인드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성경이 바로 벤처 마인드의 교과서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도 위대한 벤처 사업가입니다. 쓸모없는 아들을 쓸모 있는 아들로 만들어 내는 아버지입니다.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이 아들을 하나님 아버지가 회복시켜서 위대한 아들로 다시 만드는 그 작업을 합니다. 본문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세 가지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제일 좋은 옷 첫째, 아버지는 그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고 했습니다. 지금 돼지우리에서 돌아온 탕자의 그 옷은 도저히 아버지 집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더러운 옷을 입고는 아들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옷은 반드시 벗어야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새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이 탕자는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옷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스가랴 3장 3-4절에는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2절과 14절에는 \\\\\\\"빛의 갑옷을 입으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 옷은 죄 사함을 입은 자가 입는 옷입니다. 영적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옷이 바로 이 아들에게 입혀주는 옷입니다. 이사야 61장 10절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의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옷 자랑을 많이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 옷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됨의 옷입니다. 죄사함을 받은 의의 옷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입혀진 옷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많이 자랑하고 사셔야 합니다. 내가 입고 있는 의의 옷, 그리스도의 옷을 떳떳하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가락지 그 다음에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이 징표는 신분의 확인이고 권리의 확인입니다. 권리를 주는 것입니다. 이제 너는 내 아들노릇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반지 사건도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41장 41절은 바로가 요셉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다스리게 하리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왕이 자기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 준 것은 왕권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권리를 주노라. 내 아버지의 권한을 이제는 네게 주노라\\\\\\\'면서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 주셨습니다 . 이 반지는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입니다. 우리는 권세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제사장의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권세입니다. 형제를 위해 예수 이름으로 축복는 권세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선지자의 권세입니다. 악령을 물리치며 이 땅위에서 우상을 이기는 것은 왕의 권세입니다. 성도들은 제사장 권과 선지자 권과 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락지 이것을 또한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 신 세번째는 발에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신입니다. 그것을 벗고 새 신을 신겼습니다. 신은 자유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기뻐하는 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네 마음대로 살지 말고 더러운 것을 밟지 말고 아버지의 의도하는 대로 네 발걸음을 옮기라는 것입니다. 시편 18편 33절에 보면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십니다. 암사슴 발은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깨끗한 발입니다. 더러운 곳을 밟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슴은 더러운 물이나 시궁창 물을 함부로 밟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도는 깨끗한 발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더러운 곳에 가서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면 안됩니다. 사창가에 가서 \\\\\\\'주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음란 비디오를 보면서 깨끗하게 살겠다고 다짐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러운 곳에 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암사슴 발은 위기를 극복하는 발입니다. 빠른 발입니다. 맹수가 와도 잘 도망가고 낭떠러지도 잘 달리는 발입니다. 성도들은 고난을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잘 대처하고 피하는 암사슴의 발과 같은 그런 발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발은 아무데나 함부로 내딛는 발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신겨주는 새 신을 신고는 이제 아버지가 기뻐하는 대로 그 발을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돌아온 이 탕자는 상상할 수 없는 대접을 받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준 이 세 가지 장식은 곧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새 옷을 받았습니다. 의의 옷입니다. 우리도 반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입니다. 우리도 새 신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선물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기쁨을 누리라 그런데 오늘 설교의 절정은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23절과 24절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신앙생활은 선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장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먹고 마시고 잔치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아온 이 아들을 위해서 거창한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송아지를 잡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배설합니다. 이 아들에게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기쁨을 그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그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잔치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집 주인이 즐거워하는 그 기쁨을 하객들도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후대하는 것에 대하여 이 아들은 인간적으로는 정말 불편합니다. 죄를 짓고 돌아온 놈은 종아리를 맞아야 오히려 편합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호의입니다 . 놀라운 잔치를 베풀어 놓고 먹고 마시게 하는데 거기에 대하여 이 아들은 한마디 거부나 변명도 없이 아버지가 즐거워하는 그 즐거움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거부하면 불효입니다. 기뻐하는 아버지 마음을 알고 받아들여야 이 아들이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기쁨을 오늘 우리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그 은혜를 그 분은 기쁨으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그 분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행복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을 누릴 줄 알고 재물을 누릴 줄 알고 지식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라스웰 박사가 미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I love you\\\\\\\'라는 말을 연구했습니다. 친애형, 순애형, 타산형, 자기중심형, 구속형이 있는데 친애형과 순애형은 긍정적이나 그 외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고 합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 별 뜻도 없이 말을 하는 사람이 75%가 되었다고 합니다. 말의 진실은 7%밖에 전달이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보여주면 55%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이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지만 이혼률이 50% 이상입니다. 또 재혼한 사람 가운데도 두명중 한 사람이 이혼을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얼마나 사랑의 고백을 많이 합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믿고있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의 반응이 마음에도 없는 \\\\\\\'I love you\\\\\\\'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아버지의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고 그대로 누려야 합니다. 아들을 보고 잔치하며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이 바로 오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우리가 깊이 알고 그 분을 순종해야 합니다. 맺는 말 신앙 생활은 오늘 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이 잔치를 가지고 큰 아이디어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고행이 아니라 여행이 되어야 합니다. 여행을 떠나는 신나는 사람의 기분처럼 신앙 생활은 여행하는 모습으로 예수를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는 고난이 있지만 먼 여행 길에서는 볼 때는 즐거운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미주여행을 하다가 짐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아주 많이 속상했지만 전체 여행을 볼 때 그 여행 자체는 아주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오늘 한 순간은 괴롭고 어떤 일에 있어서는 시험에 들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여행가는 심정으로 뛰어 넘으시기 바랍니다. 신앙 생활이 여행의 기쁨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가락지만 끼고 옷만 입고 신만 신고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잔치집에서 먹고 마시며 누리는 풍성한 삶이 있는 신앙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21세기와 탕자 문화(4)/ 눅15:25-32
21세기와 탕자 문화(4) 눅15:25-32 문화는 언제나 뿌리가 있습니다. 우연히 발생하거나 자생적으로 나타나는 문화는 없습니다. 문화는 반드시 출처, 근거, 주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기독교문화 보다는 불교문화, 샤먼문화가 근거에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오천년의 역사 속에 기독교가 들어온 계기는 지금부터 약 백여년 전이고 그전에는 불교, 유교, 샤머니즘이 우리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삼국시대나 고려조까지 이 불교문화가 크게 흥왕을 했고 조선조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불교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최대 종파는 역시 불교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와 문화의 바탕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한국이 자랑하는 금강산도 불교적 이름입니다. 금강이라는 이 말은 불교에서 가장 존중하는 용어입니다. 부처의 몸을 금강신이라 하며 부처의 지혜를 금강지라 부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성산을 시온이라 합니다만 불교에서는 금강산이라 합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도 기독교인이 16명이나 참여했으나 그 숫자를 정하는 데는 불교정신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문화에는 불교문화의 영향이 깊이 뿌리 박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만나는 탕자도 그가 만든 탕자문화가 있습니다. 맏아들은 맏아들대로의 탕자문화가 있고 둘째 아들은 둘째 아들대로의 탕자문화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간 탕자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집을 나간 적이 없지만 집을 나간 둘째 아들보다 더 나으냐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아들의 모든 권리와 신분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집안의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맏아들의 위치와 권한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둘째 아들도 집을 나갔던 탕자이고 이 맏아들도 집안에 있으면서 여전히 탕자의 문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맏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받기를 바랍니다. 집안에 있는 탕자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집에 늘 같이 사는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맏아들은 오늘 탕자문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25절에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밭에 간 것은 일하러 갔습니다.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밭에 가서 일하는 것은 부지런한 모습이고 일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그 점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맏아들은 밭에 가서 일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는데 밭에 나가서 일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집에서 잔치를 한다면 마땅히 잔치준비를 하고 잔치를 함께 기뻐해야 할 것인데 이 아들은 잔치 준비와는 아무 관계없이 홀로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맏아들은 관련이 없습니다. 그 보다도 맏아들은 집에 와서 하는 행동이 더 문제입니다. 그는 맏아들의 신분으로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면 그냥 들어가면 됩니다. 왜 잔치하는지 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보면 됩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종을 불러서 물어보고 있습니다. 그때 종은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기뻐서 이렇게 잔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종을 불러서 아버지가 하는 의도를 듣고 있습니다. 이 맏아들의 행동에서 아버지와 그는 정신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평소에도 아버지와 대화가 안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아버지와 맏아들간의 관계가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한 집에 사는 아들이지만 아버지 마음과 그의 마음은 전혀 일치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28절에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잔치를 배설했다는 소식을 들은 맏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하여 노했다고 합니다. 성을 내야 할 때 사람은 정서상으로 성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맏아들은 지금 전혀 어울리지 않은 분노를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잔치가 벌어지는 잔치집에서 그가 분노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는 아버지가 배설한 것으로 잔치의 주인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배설한 잔치에 대해서 정면으로 분노하면서 아버지의 잔치를 거역한다는 것은 큰 불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집밖에서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집밖에 진을 치고 앉아서 버티고 있는 것도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이 아들의 행동을 소문으로 들은 아버지가 집안에서 밖에 나와 큰아들을 권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마땅히 맏아들이 아버지가 잔치를 배설하는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복종하여 집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집밖에 서서 분노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나와 권했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자 그 뿐 아닙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했을 때 이 맏아들이 어떻게 대꾸합니까? 오늘 설교의 요지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29절에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세 가지를 주장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자식의 입에서 아버지에게 이 말을 한다는 것은 아버지와 인연을 끊겠다는 말입니다. 부모들 앞에 다 큰 자식이 와서 \\\\\\\'오늘 중대한 말씀 드릴게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부모님을 극진히 잘 섬겼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뭔가 계산이 좀 있어야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부모 되신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자식이 부모를 섬긴 그것이 공로가 됩니까? 그게 무슨 삯이 되는 일입니까? 하지만 맏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지금 자기 공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맏아들로서 중대한 범죄입니다. 아버지가 이 말을 듣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말입니다. 또 그 다음 말은 명을 어긴 일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한번도 아버지 명령을 어긴 일이 없고 아버지의 마음에 지금까지 맞도록 일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의 행동 때문에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지금 자기로 하여 마음이 상해 있는데 자기편에서 \\\\\\\'나는 이제 할 일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곧 자기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이 맏아들의 모습은 아버지가 볼 때는 불효자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말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습니다.\\\\\\\" 이 말은 자기 보상에 대한 말입니다. 여러분 낳아 키워서 사람노릇까지 하게 돌봐준 부모를 향해서 나를 위해 보상해 달라며 덤벼들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 엄청난 말을 하며 도전하는 맏아들의 모습은 정말 잔치하는 집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세 가지를 잃은 삶 맏아들이 하는 말을 분석해 보면 세 가지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다가 맏아들처럼 불신앙에 빠지면 이와 같이 세 가지를 잃게 됩니다. 첫째, 맏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살지만 사실은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그 좋은 아버지를 몰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보다 좋은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 아들은 그들 자신으로는 버림받을 아들들이지만 맏아들도 회복이 되고 둘째 아들도 함께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두 아들들을 품어주었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지 아버지가 없다면 이 두 형제는 절대로 화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아버지를 잃고 사는 맏아들의 불행,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범하기 쉬운 실수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것을 잃어버려도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놓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며 그를 기쁘게 하는 가정을 만들고,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 왔을 때 그 아들을 받아들이고 기뻐 잔치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아들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잃어버린 것은 맏아들의 특권입니다. 본문 31절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집에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다\\\\\\\' 라는 말로 풀이 할 수 있는데 맏아들은 그 축복과 특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특권과 하나님이 언약하신 복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동생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동생이 돌아오고 아버지가 그를 다시 아들로 회복시켜 주셨다면 당연히 그를 동생으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맏아들이 하는 말은 동생을 송아지 한 마리에도 비길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송아지 한 마리 보다 못한 동생으로 그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동생은 단순히 혈육의 동생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주위의 이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잃지 말고 얻으시기 바랍니다. 특히 동생은 아버지가 용서하고 아들로 받아들인 동생이므로 당연히 형도 동생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맏아들은 복의 근원 되시는 아버지를 잃어버렸고 맏아들의 특권을 잃어 버렸으며 돌아온 귀한 동생 또한 잃어버린, 모든 것을 잃은 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는 예배당 밖에 있는 탕자도 있지만 예배당 안에도 탕자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주고 자기 특권을 상실하고 살 때 교회는 다니지만 우리가 맏아들의 모습을 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맏아들은 교회 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둘째 아들은 교회 밖에 있는 탕자입니다. 교회 밖의 탕자는 돌아오면 아버지가 영접합니다. 그때 집안에 있는 맏아들 된 우리가 그 돌아온 탕자를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용서한 이 아들을 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과 임무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인정해야 할 것은 교회 안에 맏아들 된 탕자가 있기 때문에 사실 부조리와 모순이 많이 있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살기 때문에 나쁜 집이고 맏아들 때문에 망할 집이 아닙니다. 아버지 때문에 그 집은 여전히 좋은 집이고 영원히 복된 집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런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맏아들 같이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도 하나님의 교회는 아버지의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이기 때문에 그 분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교회를 전체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교회 다니는 어떤 개인은 잘못할 수 있어도 교회 전체는 하나님이 거하는 거룩한 집입니다. 맺는 말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탕자와 기뻐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면서 그 기쁨을 필설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둘째 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잔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시편 51편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상한 심령에 가까이 하시고 통회하는 심령에 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예배를 받으실 때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기도, 찬양,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란 말을 우리 문화를 가지고 설명해 봅시다. 맛에는 오미(五味)가 있습니다. 이 맛은 세계인이 함께 다 느끼는 맛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이 오미보다 더 오묘한 맛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발효된 맛, 삭은 맛입니다. 간장, 된장, 고추장, 젓갈, 짱아치, 김치 등 한국 음식의 90% 이상이 발효된 음식입니다. 김치는 재료가 다 발효되어 전혀 새로운 하나의 오묘한 맛을 내고 있습니다. 그 발효된 과정, 발효의 맛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상한 심령입니다. 성도가 발효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맛을 내지 못하는 한국 음식과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발효가 되지 않은 김치를 즉석에서 먹어보면 매운맛, 신맛, 단맛, 짠맛, 그대로 다 납니다. 그러나 그 오미가 삭혀지면 맛이 없어지고 오묘한 삭은 맛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마늘이 들었어도 삭혀진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더 맛나게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적으로 발효된 심령으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개밥에 도토리 굴러다니듯 혼자 굴러다니면 안됩니다. 자기 맛은 죽고 남의 맛을 더 돋구어 주는 발효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맛이 발효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여전히 자기 생각, 자기 기준, 자기 공로, 자기 칭찬을 요구합니까? 이런 것은 아버지 앞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런 맏아들의 생각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생각 속에 전부 들어가서 삭혀져야 할 생각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속적인 생각, 자기 중심의 감정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가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 안에서 모두 삭혀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맛나게 잡수시는 맛난 음식처럼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에 맞는 아들로 다시 만들어 질줄 믿습니다.
21세기와 탕자 문화/ 눅15:25-32
21세기와 탕자 문화 눅15:25-32 문화는 언제나 뿌리가 있습니다. 우연히 발생하거나 자생적으로 나타나는 문화는 없습니다. 문화는 반드시 출처, 근거, 주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기독교문화 보다는 불교문화, 샤먼문화가 근거에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오천년의 역사 속에 기독교가 들어온 계기는 지금부터 약 백여년 전이고 그전에는 불교, 유교, 샤머니즘이 우리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삼국시대나 고려조까지 이 불교문화가 크게 흥왕을 했고 조선조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불교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최대 종파는 역시 불교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와 문화의 바탕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한국이 자랑하는 금강산도 불교적 이름입니다. 금강이라는 이 말은 불교에서 가장 존중하는 용어입니다. 부처의 몸을 금강신이라 하며 부처의 지혜를 금강지라 부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성산을 시온이라 합니다만 불교에서는 금강산이라 합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도 기독교인이 16명이나 참여했으나 그 숫자를 정하는 데는 불교정신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문화에는 불교문화의 영향이 깊이 뿌리 박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만나는 탕자도 그가 만든 탕자문화가 있습니다. 맏아들은 맏아들대로의 탕자문화가 있고 둘째 아들은 둘째 아들대로의 탕자문화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집을 나간 탕자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집을 나간 적이 없지만 집을 나간 둘째 아들보다 더 나으냐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아들의 모든 권리와 신분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집안의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맏아들의 위치와 권한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둘째 아들도 집을 나갔던 탕자이고 이 맏아들도 집안에 있으면서 여전히 탕자의 문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맏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받기를 바랍니다. 집안에 있는 탕자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집에 늘 같이 사는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맏아들은 오늘 탕자문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25절에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밭에 간 것은 일하러 갔습니다.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밭에 가서 일하는 것은 부지런한 모습이고 일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그 점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맏아들은 밭에 가서 일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는데 밭에 나가서 일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집에서 잔치를 한다면 마땅히 잔치준비를 하고 잔치를 함께 기뻐해야 할 것인데 이 아들은 잔치 준비와는 아무 관계없이 홀로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맏아들은 관련이 없습니다. 그 보다도 맏아들은 집에 와서 하는 행동이 더 문제입니다. 그는 맏아들의 신분으로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면 그냥 들어가면 됩니다. 왜 잔치하는지 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보면 됩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종을 불러서 물어보고 있습니다. 그때 종은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기뻐서 이렇게 잔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종을 불러서 아버지가 하는 의도를 듣고 있습니다. 이 맏아들의 행동에서 아버지와 그는 정신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평소에도 아버지와 대화가 안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아버지와 맏아들간의 관계가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한 집에 사는 아들이지만 아버지 마음과 그의 마음은 전혀 일치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28절에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잔치를 배설했다는 소식을 들은 맏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하여 노했다고 합니다. 성을 내야 할 때 사람은 정서상으로 성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맏아들은 지금 전혀 어울리지 않은 분노를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잔치가 벌어지는 잔치집에서 그가 분노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잔치는 아버지가 배설한 것으로 잔치의 주인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배설한 잔치에 대해서 정면으로 분노하면서 아버지의 잔치를 거역한다는 것은 큰 불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집밖에서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집밖에 진을 치고 앉아서 버티고 있는 것도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이 아들의 행동을 소문으로 들은 아버지가 집안에서 밖에 나와 큰아들을 권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마땅히 맏아들이 아버지가 잔치를 배설하는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복종하여 집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집밖에 서서 분노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나와 권했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자 그 뿐 아닙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했을 때 이 맏아들이 어떻게 대꾸합니까? 오늘 설교의 요지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29절에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세 가지를 주장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겼습니다…\\\\\\\' 자식의 입에서 아버지에게 이 말을 한다는 것은 아버지와 인연을 끊겠다는 말입니다. 부모들 앞에 다 큰 자식이 와서 \\\\\\\'오늘 중대한 말씀 드릴게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부모님을 극진히 잘 섬겼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뭔가 계산이 좀 있어야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부모 되신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자식이 부모를 섬긴 그것이 공로가 됩니까? 그게 무슨 삯이 되는 일입니까? 하지만 맏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지금 자기 공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맏아들로서 중대한 범죄입니다. 아버지가 이 말을 듣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말입니다. 또 그 다음 말은 명을 어긴 일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한번도 아버지 명령을 어긴 일이 없고 아버지의 마음에 지금까지 맞도록 일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의 행동 때문에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지금 자기로 하여 마음이 상해 있는데 자기편에서 \\\\\\\'나는 이제 할 일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곧 자기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이 맏아들의 모습은 아버지가 볼 때는 불효자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말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습니다.\\\\\\\" 이 말은 자기 보상에 대한 말입니다. 여러분 낳아 키워서 사람노릇까지 하게 돌봐준 부모를 향해서 나를 위해 보상해 달라며 덤벼들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 엄청난 말을 하며 도전하는 맏아들의 모습은 정말 잔치하는 집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세 가지를 잃은 삶 맏아들이 하는 말을 분석해 보면 세 가지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다가 맏아들처럼 불신앙에 빠지면 이와 같이 세 가지를 잃게 됩니다. 첫째, 맏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살지만 사실은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그 좋은 아버지를 몰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보다 좋은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 아들은 그들 자신으로는 버림받을 아들들이지만 맏아들도 회복이 되고 둘째 아들도 함께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두 아들들을 품어주었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지 아버지가 없다면 이 두 형제는 절대로 화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아버지를 잃고 사는 맏아들의 불행,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범하기 쉬운 실수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것을 잃어버려도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놓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며 그를 기쁘게 하는 가정을 만들고,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 왔을 때 그 아들을 받아들이고 기뻐 잔치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와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아들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잃어버린 것은 맏아들의 특권입니다. 본문 31절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집에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다\\\\\\\' 라는 말로 풀이 할 수 있는데 맏아들은 그 축복과 특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특권과 하나님이 언약하신 복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동생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동생이 돌아오고 아버지가 그를 다시 아들로 회복시켜 주셨다면 당연히 그를 동생으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맏아들이 하는 말은 동생을 송아지 한 마리에도 비길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송아지 한 마리 보다 못한 동생으로 그는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동생은 단순히 혈육의 동생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주위의 이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을 잃지 말고 얻으시기 바랍니다. 특히 동생은 아버지가 용서하고 아들로 받아들인 동생이므로 당연히 형도 동생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맏아들은 복의 근원 되시는 아버지를 잃어버렸고 맏아들의 특권을 잃어 버렸으며 돌아온 귀한 동생 또한 잃어버린, 모든 것을 잃은 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러한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는 예배당 밖에 있는 탕자도 있지만 예배당 안에도 탕자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주고 자기 특권을 상실하고 살 때 교회는 다니지만 우리가 맏아들의 모습을 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맏아들은 교회 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둘째 아들은 교회 밖에 있는 탕자입니다. 교회 밖의 탕자는 돌아오면 아버지가 영접합니다. 그때 집안에 있는 맏아들 된 우리가 그 돌아온 탕자를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용서한 이 아들을 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과 임무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인정해야 할 것은 교회 안에 맏아들 된 탕자가 있기 때문에 사실 부조리와 모순이 많이 있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살기 때문에 나쁜 집이고 맏아들 때문에 망할 집이 아닙니다. 아버지 때문에 그 집은 여전히 좋은 집이고 영원히 복된 집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런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맏아들 같이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도 하나님의 교회는 아버지의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이기 때문에 그 분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교회를 전체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교회 다니는 어떤 개인은 잘못할 수 있어도 교회 전체는 하나님이 거하는 거룩한 집입니다. 맺는 말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탕자와 기뻐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면서 그 기쁨을 필설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둘째 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잔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시편 51편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상한 심령에 가까이 하시고 통회하는 심령에 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예배를 받으실 때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기도, 찬양,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란 말을 우리 문화를 가지고 설명해 봅시다. 맛에는 오미(五味)가 있습니다. 이 맛은 세계인이 함께 다 느끼는 맛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이 오미보다 더 오묘한 맛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발효된 맛, 삭은 맛입니다. 간장, 된장, 고추장, 젓갈, 짱아치, 김치 등 한국 음식의 90% 이상이 발효된 음식입니다. 김치는 재료가 다 발효되어 전혀 새로운 하나의 오묘한 맛을 내고 있습니다. 그 발효된 과정, 발효의 맛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상한 심령입니다. 성도가 발효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맛을 내지 못하는 한국 음식과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발효가 되지 않은 김치를 즉석에서 먹어보면 매운맛, 신맛, 단맛, 짠맛, 그대로 다 납니다. 그러나 그 오미가 삭혀지면 맛이 없어지고 오묘한 삭은 맛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마늘이 들었어도 삭혀진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더 맛나게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적으로 발효된 심령으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개밥에 도토리 굴러다니듯 혼자 굴러다니면 안됩니다. 자기 맛은 죽고 남의 맛을 더 돋구어 주는 발효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맛이 발효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여전히 자기 생각, 자기 기준, 자기 공로, 자기 칭찬을 요구합니까? 이런 것은 아버지 앞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런 맏아들의 생각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생각 속에 전부 들어가서 삭혀져야 할 생각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속적인 생각, 자기 중심의 감정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가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 안에서 모두 삭혀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맛나게 잡수시는 맛난 음식처럼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에 맞는 아들로 다시 만들어 질줄 믿습니다.
A New Attitude for a New Year(새해를 향한 새로운 태도)/ Romans 5:1-5(롬5:1-5)/ 신년축복주일설교/ 2007-01-03
A New Attitude for a New Year(새해를 향한 새로운 태도) Romans 5:1-5(롬5:1-5) A New Attitude for a New Year Romans 5:1-5 Charles Swindoll says, the longer I live, the more I realize the impact of attitude on life. Attitude to me is more important: than facts, than the past, than education, than money, than circumstances, than failures, than successes, than what other people think or say or do, than appearances, than giftedness or skill. It will make or break a company, a church, a home. The remarkable thing is we have a choice every day regarding the attitude we will embrace for that day. We cannot change our past. We cannot change the inevitable. The only thing we can do is play on the one thing we have, and that is our attitude. I am convinced that life is 10% what happens to me and 90% how I react to it. And so it is with you. We are in charge of our attitudes. Swindoll is right. It is not what happens to us that is important, it is how we respond to what happens to us. It is not what life brings, but what we bring to life that matters. I have known many people who have come from good homes, and had many advantages in life, who never rose above mediocrity. On the other hand, I have known many people who have come from poverty and abuse who accomplished great things. I have known people who were exceedingly intelligent and gifted, who rarely contributed anything to the world. And I have known people who were very average in intelligence and ability who were great successes. Some were willing to believe and work hard in spite of great disadvantages, while others gave up before they started. They never really tried. Some rested on their laurels, while others had a dream. Some complained about what was wrong, and others put forth the effort to make things right. Some had faith in God, and others had faith in nothing. Some lived in cynicism and despair, while others in lesser circumstances lived in faith and hope. I think there are some key areas of our attitude in life that are important. The first is this: Be authentic. In other words, be real. Be yourself. Authenticity is an attitude of honesty and humility. Don’t try to be someone you are not. Don’t wear a mask around others. Be the same person in public and private. One of the disappointing things about some of our national religious leaders this past year was that they were living two different lives. They were not authentic. Their public persona was vastly different from their personal life. It would have been far better for them to talk openly about their struggles, and admit their weaknesses, rather than to pretend everything was great. Far better for us to know of their struggles, so they could get help and we could pray for them, than have them pretend they had it all together, when they were actually falling apart. We would have had much more respect for them. It is so hard to hide secret parts of your life, and the bigger the secret is the harder it is to hide. The harder it is to hide, the more dysfunctional your life becomes. It takes courage to be authentic. It doesn’t take any courage to wear a mask. One of the scriptures I love is about what it will be like when the kingdom of heaven arrives in its fullness. Paul says, how we see but a poor reflection as in a mirror; then we sha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I am fully known?(1 Corinthians 13:12). I love that. It gives us such great freedom to be ourselves. And Paul writes that in his wonderful discourse on love in 1 Corinthians 13. So what we see is that in God’s kingdom we are fully known by God and others, and fully loved by God and others. This is the model for what it means to live in Christian community ?to be the church. When someone opens up to us about a struggle in their lives, we don’t react with shock and shame. We are honored that someone has trusted us at a very deep level, and we seek to be an encourager and a listener. As we begin to know them at a deeper level, we grow to love them at a deeper level. A kind of relationship develops that was not possible before. One of the things that has been a great blessing for me is that when new people come into our church and become a part of small group, they remark at how real the people of our church are. People are actually open and honest about their struggles and failures, their doubts and fears. They don’t pretend they have it all together. That is why we come together, to encourage and strengthen each other ?to let people know that they are not alone. We are a family and we support each other. A second key attitude that helps us to be more healthy is to: Be of good cheer. You can’t be of good cheer if you are constantly thinking about how bad and terrible the world is. If you are focused on the end of the world, you cannot enjoy the present moment. How can we ever convince the world that we have good news if all we talk about is bad news? And we don’t just have good news, we have the best news the world has ever heard ?news that the world is desperately in need of. If you are angry at the world, you cannot be at peace in the world. If you are afraid of the world, you cannot minister to the world. You have to love the world as God loves the world. It was Jesus who said, I have told you these things, so that in me you may have peace.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John 16:33). Just this week I saw a book written by a very popular Christian author entitled The Last Christian Generation. In the book he says, if trends continue, the next generation of the Church will not even be rightfully called Christian. Did I miss something? When did this generation become Christian? He is discouraged about the lack of knowledge in people about Christian ideas and world view. I understand that, but since when did the kingdom of God depend on what we were doing? Have we forgotten about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We have always.
Endurance: Mark of a Good Christian Pilgrim(인내,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특징)/ 2 Timothy 2:1-7(딤후2:1-7)/ Rev. W.N.B. Appiah/ 영한대역설교/ 2012-02-12
Endurance: Mark of a Good Christian Pilgrim(인내,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특징) 2 Timothy 2:1-7(딤후2:1-7) Sermon Theme: Endurance: mark of a Good Christian Pilgrim Scripture Reading: 2 Timothy 2:1-7 Preacher: Rev. W.N.B. Appiah 1. Introduction A story is told of a missionary, who after working in a foreign land for the whole of his life decided to return to his home country on his retirement. Seeing his retirement and his home going as a very important chapter in his life, he wrote letters to inform his relatives and few friends he could remember, that he was coming home. Having given the time of his arrival in the mail, he expected them to meet him and welcome him home. But to his shock, on arrival, there was no body to meet him. Not even one person. Filled with sadness he sat and begin to weep. But God spoke to him and said “my son you have not come home yet. You don’t have a home in this world. There are thousands of angels waiting to welcome you home. 2. Pilgrimage as a Metaphor of Christian Life This is to underscore the fact that the Christian life is a journey through this world. Jacob described his life as a pilgrimage when asked of his age by Pharaoh (Ge.47:9). King David also acknowledged this truth before God when he said in his prayer “We are aliens and strangers in your sight, as were all our forefathers...” (1 Chronicles 29:15 c/f Ps.39:12). The writer of Hebrews also testifies to this as he wrote to express the thoughts of the patriarchs “..and they admitted that they were aliens and strangers on earth” (Hebrews 11:13; 13:14). Again the apostle Peter also confirms it and says “Dear friends, I urge you, as aliens and strangers in this world, ...” (1 Pe.2:11). We can now say that the Bible confirms the Christian’s life on this earth as making a journey and our destination is heaven where our Father, God and our Lord Jesus Christ and the hosts of angels are awaiting us. 3. Risks and Dangers in the Way In every pilgrimage there are risks to take and dangers to face. There are accidents that can take one’s life and there could be discouraging heavy traffic jams that can make the journey boring. In the same way there are life threatening risks and dangers in our Christian life which we need to overcome to make a successful journey to our destination heaven. Israel often sinned against God through idol worship and had to be punished by God several times. In the New Testament Jesus suffered persecution and even death from the hands of the Jews (Mk.10:33-34) and the disciples, including Paul, also faced the threat of death and Paul especially suffered many beatings and persecutions (2 Cor.4:8-12), which could have discouraged them from continuing with the Christian life. But none of them gave up the Christian life. For when the Lord asked the twelve disciples in John 6:67 if they would want to quit, Peter answered and said “Lord to whom shall we go? ...” (6:68). How then could they survive these difficulties and remain steadfast with the Lord? In other words what was their secret for their endurance? 4. Making a Successful Journey Many things go into making a successful journey through risks and dangers. For example there is the purpose of the journey, watchfulness and good guidance. But above all these is endurance. No matter how watchful one can be, or how good the purpose or the goal of the journey is or how good one’s guidance is, without endurance it will be difficult to succeed. Endurance is therefore a very important element in our Christian life. Without it we cannot make it. 5. Endurance The apostle Paul exhorted Timothy to endure hardship as a good soldier of Christ. But earlier in chapter 1, Paul had outlined some of the difficulties and the problems that faced Timothy and for that matter our present Christian community. For example he tells him “not to be ashamed to testify” about the Lord and also not fail to stand by him in his suffering (2 Tim.1:8). Paul uses three imageries a soldier, a farmer and an athlete to emphasize this important theme. The lesson is that people in any of these professions hold on to endurance as the key to success. For that reason the soldier trains all time under all conditions to enable him/her endure in times of war so as to win his master’s favor. The farmer also endures the hard and sometimes cruel weather to tend the crops so that he/she can reap bountiful harvest. While the athlete also trains hard in order to win his/her competitions. This teaches us that the Christian like the soldier, farmer or athlete needs to endure the various temptations and difficulties, which we meet as Christians. Paul endured the persecutions that came his way. Jesus als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 and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Heb.12:2). Neither Paul, nor any of the apostles nor Jesus enjoyed the problems, risks and dangers that faced them, yet they patiently faced them and endured them. But today many of us run away from problems because we cannot endure the discomfort involved. 6. Spiritual Exercise Paul telling Timothy to be godly wrote “..train yourself to be godly. For physical training is of value, but godliness has value for all things” (1 Tim.4:7b-8). The Christian needs to train to be godly through spiritual exercises. These are: praying without ceasing (1 Thess.5:17) sometimes with fasting, reading and devotional study of the Bible (2 Tim.3:16-17), constant meditation on the word of God (Jos.1: 8), constantly sharing the gospel with the unbelievers [(i.e. seeking the lost for the Lord) Matt. 28: 19-20], constantly being in fellowship with other believers (Heb.10:25) and constantly praising God for who He is. As we begin to practice these in the Church and at home, we fall in constant fellowship with the Holy Spirit and through Him we are strengthened to overcome. Hard training is the key to endurance but it could also be an obstacle in itself. We therefore need an incentive to urge us on. A farmer’s incentive for his hard work is what he/she expects to harvest. The athlete’s incentive is the crown or price, which is at stake. Paul’s incentive was “for the sake of others” (2 Tim.2:10) and also “in other to rule with Christ” (2 Tim.2:12a) and that of Jesus was for the joy that was ahead of Him. We must be train hard to endure because there is a great (Lk.6:23, 35) reward of incorruptible crown (1 Cor.9:25)a crown of glory (1 Pe.5:4; Rev.2:10). 7. Conclusion The Bible teaches that the Christian life on this earth is a journey that we are making. It is full of dangers, risks and problems. But we need to be able to endure all these dangers and problems. Endurance therefore becomes a key word for the Christian. But endurance comes through vigorous training in spiritual exercises. Though the training could in itself deter us, let the incentives that are there for us i.e. the incorruptible crown, encourage us to begin our spiritual exercise if we are not already doing it. But if we are already doing it then continue. May the grace of God be with you. ***************************************************************************************** 인내,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특징 딤후2:1-7 1. 들어가며 평생을 외국에서 일을 한 후 은퇴하자마자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선교사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삶에서 은퇴 후 고향으로 가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는 그가 기억할 수 있는 친척들과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로 자기의 도착 시간을 알려주었기에 그들이 그를 마중 나와 환영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가 놀랍게도 그를 만나러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슬픔에 가득차서 그는 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너를 위한 집이 없느니라. 네가 고향에 온 것을 환영하기 위해 기다리는 수천 명의 천사들이 있다.” 2. 그리스도인 삶의 은유로서의 순례 위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이란 이 세상을 통과하는 여행임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바로 왕이 그의 나이를 물었을 때 그의 삶은 나그네의 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윗왕도 그의 기도에서 주 앞에서 이런 진실을 인정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대상29:15, 참조 시39:12). 히브리서의 작자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에 대한 생각을 표현할 때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히11:13, 히13:14). 또한 사도 베드로도 이를 확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벧전2:11).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하나의 여행이며 우리의 종착역은 천국 -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천사의 무리가 우리를 기다리는 - 임을 성경에서 확실히 밝히고 있습니다. 3. 가로막는 위급과 위험 모든 순례에는 무릅써야 할 위급과 맞서야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건들이 있으며 여행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는 낙담할 만한 교통 체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도 우리의 종착역인 천국까지 성공적인 여행을 완수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목숨을 위협하는 위급과 위험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를 하여 하나님에 대해 죄를 지었고 몇 번 하나님께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은 박해를 받고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으며(막10:33-34), 바울을 포함한 제자들 또한 죽음의 위협에 직면했으며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인 삶을 계속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는 많은 몰매와 핍박을 당했습니다(고후4:8-12).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6:67에서 예수께서 12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을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우리가 뉘에게로 가오리이까? ...”(요6:68).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주님과 확고부동하게 같이 갈 수 있었을까요? 즉 이런 인내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4. 성공적인 여행 만들기 위급과 위험 중에서도 성공적인 여행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겠지요. 예를 들면 여행의 목적, 조심성, 훌륭한 안내자 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조심한다 할지라도, 여행의 목적이나 목표가 훌륭하다 할지라도, 안내자가 좋다 할지라도 인내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 없이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5. 인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훌륭한 병사로서 어려움을 인내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1장 앞부분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처한 어려움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 문제는 우리의 현재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주에 대한 “증거 하는 것”을 부끄러워 말고 고난 중에서도 그와 함께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세 가지 비유적 표현, 곧 이 중요한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병사, 농부, 운동선수를 사용했습니다.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성공의 열쇠로 인내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병사는 상사의 호의를 얻기 위해 전쟁 시 인내할 수 있도록 어떤 상황 하에서도 항상 훈련해야 합니다. 농부 또한 풍성한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 어렵고 때로는 무자비한 날씨를 견디어 작물을 돌보아야 합니다. 운동선수 또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열심히 운동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도 병사, 농부, 운동선수들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만나게 될 여러 가지 다양한 유혹과 어려움을 인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바울은 그 앞에 온 핍박을 견뎌냈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바울도, 제자들도, 예수님도 그들에게 직면한 문제와 위급과 위험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참을성 있게 그것들과 부딪쳐서 견뎌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많은 이들은 이런 불편을 참지 못하고 문제에서 도망칩니다. 6. 영적인 훈련 디모데에게 경건하라고 말하는 바울은 “ ...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딤전4:7b-8).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훈련을 통해 경건해지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훈련이란: 끊임없이 기도하기(살전5:17), 때로는 단식을 동반한 성경 통독과 헌신적인 성경공부(딤후3:16-17), 하나님 말씀의 꾸준한 묵상(수1:8), 믿지 않는 자에게 꾸준히 복음 전하기 [주님을 위해 잃어버린 양을 찾기], 믿는 자와의 끊임없는 교제(히10:25), 하나님을 꾸준히 찬양하기. 이런 훈련을 교회와 집에서 실시하기 시작하면 성령님과 계속적인 교제를 하게 되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힘든 훈련은 인내의 열쇠이기도 하지만 그 차제로는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계속할 수 있는 인센티브가 필요합니다. 농부에게 있어 근면할 수 있게 해 주는 인센티브는 수확에 대한 기대감일 것입니다. 운동선수에게는 상패나 상금이겠지요. 바울에게 있어 인센티브는 “타인을 위하여”였으며(딤후2:10),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해”(딤후2:12a)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인센티브는 그 앞에 놓여 있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9:25), 영광의 면류관(벧전5:4, 계2:10)이라는 커다란 상(눅6:23,35)이 있으므로 우리는 인내할 수 있도록 열심히 훈련되어야 합니다. 7. 결론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의 여행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위험과 위급과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위험과 문제들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내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키워드가 되는 것입니다. 인내란 영적인 훈련이라는 강건한 훈련을 통해 나오는 것입니다. 비록 훈련 그 자체가 우리를 좌절시킬 수도 있겠지만 우리를 위해 있는 - 썩지 않는 면류관 -이라는 인센티브가 우리가 영적 훈련을 아직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영적 훈련을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벌써 하고 있다면 계속 합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난과 부요에 대한 태도/ 약1:9-11/ 2001-09-15
가난과 부요에 대한 태도 약1:9-11 세상에서 사람들을 갈라놓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빈과 부의 차이입니다.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때로는 생과 죽음의 차이만큼이나 클 때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는 위축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낮은 형제와 부한 형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낮은 형제란 재물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권력 등에 있어서 열등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부한 형제는 모든 것을 가져 풍요로운 자들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물론 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역시 가난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결코 자랑거리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에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으름 때문이든지 놀고먹기를 즐겨하거나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로 가난해 지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3)이라고 했습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난한 자와는 달리 성경의 가난한 자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가난하다는 것이 꼭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낮은 자가 어떻게 자기의 높임을 자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8) 하나님께서 낮은 자들을 높이시는 이유는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낮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까? 먼저 낮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 낮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겸손한 자가 낮은 자요 낮은 자는 하나님께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2) 낮다는 것은 소유가 없으므로 남에게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자기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교만하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3) 낮다는 것은 명령에 순종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는 높은 자에게 순종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낮은 자만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므로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낮은 자라고 무조건 높아지고 또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높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높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높다는 것은 갑자기 환경이 바꾸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물질 등으로 갑자기 풍성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높아짐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지식을 가진 자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안 다음 그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여 자기가 이제껏 귀하게 여겼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의 높임은 세상의 귀한 것들에 있지 아니함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새로운 부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전 1:5) 우리의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풍성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새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 3:12) 우리의 죄로 더렵혀진 옷을 벗어버리고 깨끗한 세마포 새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마포는 우리가 영원히 입고 있어야 할 옷입니다. 그런데 이 옷을 우리에게 갈아 입혀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높아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높아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겸손해야 할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한 사람은 어떤 것인가를 봅니다.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10절) 부요하다는 것은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서 부자라는 말입니다. 우선 부한 자는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첫째로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교만한 자입니다.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께 부족함이 없다고 믿고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사람입니다. 고린도 전서에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절)고 경고하셨습니다. 바로 신앙적 교만한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 충만할수록 더욱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받은 것들이 소멸될 것입니다. 둘째로, 세상의 명예와 권세가 높은 자들을 말합니다. 모든 세상의 권세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께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위에서 주셔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지닌 것을 결코 자랑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건 어느 때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물질로 부요한 자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물질이 풍요로운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보다 쉽다고 하신 바로 그 부자입니다. 물질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자라고 해서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소유를 자랑한 곳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닌 소유로 인하여 하나님을 잘 섬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도 부자였었고, 욥도 부자였습니다. 신약에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부자였습니다. 또한 바울과 함께 전도를 한 바나바도 구부로의 부자였습니다. 빌레몬서의 수신자인 빌레몬도 역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소유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의 소유가 진정한 자기 것으로 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소유보다 하나님 안에서 낮아짐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귀하게 들어 쓰신 것입니다. 스스로 부하다고 생각이 들면 하나님 안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꼭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영적으로 교만한 자는 늘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부족함을 구해야 할 것이며, 2) 세상의 명예나 권세로 높은 위치에 있다고 믿어지면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며, 3) 물질의 부한 자는 그 풍요로움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셨으므로 내가 누리고 있다는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자기는 가난하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끝으로 잠언의 한 말씀을 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 이니이다 (잠 30:7-9절) 바로 이런 자세가 우리의 바른 삶의 자세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의 기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가난과 부요에 대한 태도/ 약1:9-11/ 2003-07-09
가난과 부요에 대한 태도 약1:9-11 세상에서 사람들을 갈라놓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빈과 부의 차이입니다.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때로는 생과 죽음의 차이만큼이나 클 때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는 위축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낮은 형제와 부한 형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낮은 형제란 재물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권력 등에 있어서 열등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부한 형제는 모든 것을 가져 풍요로운 자들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물론 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역시 가난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결코 자랑거리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에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으름 때문이든지 놀고먹기를 즐겨하거나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로 가난해 지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3)이라고 했습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난한 자와는 달리 성경의 가난한 자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가난하다는 것이 꼭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낮은 자가 어떻게 자기의 높임을 자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8) 하나님께서 낮은 자들을 높이시는 이유는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낮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까? 먼저 낮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 낮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겸손한 자가 낮은 자요 낮은 자는 하나님께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2) 낮다는 것은 소유가 없으므로 남에게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자기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교만하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3) 낮다는 것은 명령에 순종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는 높은 자에게 순종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낮은 자만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므로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낮은 자라고 무조건 높아지고 또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높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높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높다는 것은 갑자기 환경이 바꾸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물질 등으로 갑자기 풍성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높아짐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지식을 가진 자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안 다음 그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여 자기가 이제껏 귀하게 여겼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의 높임은 세상의 귀한 것들에 있지 아니함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새로운 부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전 1:5) 우리의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풍성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새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 3:12) 우리의 죄로 더렵혀진 옷을 벗어버리고 깨끗한 세마포 새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마포는 우리가 영원히 입고 있어야 할 옷입니다. 그런데 이 옷을 우리에게 갈아 입혀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높아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높아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겸손해야 할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한 사람은 어떤 것인가를 봅니다.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10절) 부요하다는 것은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서 부자라는 말입니다. 우선 부한 자는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첫째로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교만한 자입니다.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께 부족함이 없다고 믿고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사람입니다. 고린도 전서에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절)고 경고하셨습니다. 바로 신앙적 교만한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 충만할수록 더욱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받은 것들이 소멸될 것입니다. 둘째로, 세상의 명예와 권세가 높은 자들을 말합니다. 모든 세상의 권세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께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위에서 주셔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지닌 것을 결코 자랑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건 어느 때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물질로 부요한 자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물질이 풍요로운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보다 쉽다고 하신 바로 그 부자입니다. 물질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자라고 해서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소유를 자랑한 곳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닌 소유로 인하여 하나님을 잘 섬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도 부자였었고, 욥도 부자였습니다. 신약에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부자였습니다. 또한 바울과 함께 전도를 한 바나바도 구부로의 부자였습니다. 빌레몬서의 수신자인 빌레몬도 역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소유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의 소유가 진정한 자기 것으로 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소유보다 하나님 안에서 낮아짐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귀하게 들어 쓰신 것입니다. 스스로 부하다고 생각이 들면 하나님 안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꼭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영적으로 교만한 자는 늘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부족함을 구해야 할 것이며, 2) 세상의 명예나 권세로 높은 위치에 있다고 믿어지면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며, 3) 물질의 부한 자는 그 풍요로움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셨으므로 내가 누리고 있다는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자기는 가난하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끝으로 잠언의 한 말씀을 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 이니이다 (잠 30:7-9절) 바로 이런 자세가 우리의 바른 삶의 자세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의 기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가난과 부요에 대한 태도/ 약1:9/ 2004-12-29
가난과 부요에 대한 태도 약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약 1:9-11) 세상에서 사람들을 갈라놓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빈과 부의 차이입니다.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때로는 생과 죽음의 차이만큼이나 클 때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는 위축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낮은 형제와 부한 형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낮은 형제란 재물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권력 등에 있어서 열등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부한 형제는 모든 것을 가져 풍요로운 자들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물론 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역시 가난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결코 자랑거리가 아님을 분명히 분하고 있습니다. 가난에는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으름 때문이든지 놀고먹기를 즐겨하거나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로 가난해 지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3)이라고 했습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난한 자와는 달리 성경의 가난한 자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가난하다는 것이 꼭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낮은 자가 어떻게 자기의 높임을 자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8) 하나님께서 낮은 자들을 높이시는 이유는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낮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까? 먼저 낮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 낮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겸손한 자가 낮은 자요 낮은 자는 하나님께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2) 낮다는 것은 소유가 없으므로 남에게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교만하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3) 낮다는 것은 명령에 순종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는 높은 자에게 순종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낮은 자만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므로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낮은 자라고 무조건 높아지고 또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높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높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높다는 것은 갑자기 환경이 바꾸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물질 등으로 갑자기 풍성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높아짐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 째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지식을 가진 자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8)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안 다음 그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여 자기가 이제껏 귀하게 여겼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의 높임은 세상의 귀한 것들에 있지 아니함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둘 째로, 새로운 부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전 1:5) 우리의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풍성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셨습니다. 셋 째로, 새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골 3:12) 우리의 죄로 더렵혀진 옷을 벗어버리고 깨끗한 세마포 새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마포는 우리가 영원히 입고 있어야 할 옷입니다. 그런데 이 옷을 우리에게 갈아 입혀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높아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높아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겸손해야 할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한 사람은 어떤 것인가를 봅니다.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10절) 부요하다는 것은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서 부자라는 말입니다. 우선 부한 자는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첫째로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교만한 자입니다.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께 부족함이 없다고 믿고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사람입니다. 고린도 전서에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절)고 경고하셨습니다. 바로 신앙적 교만한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 충만할수록 더욱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받은 것들이 소멸될 것입니다. 둘째로, 세상의 명예와 권세가 높은 자들을 말합니다. 모든 세상의 권세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께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위에서 주셔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지닌 것을 결코 자랑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 건 어느 때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물질로 부요한 자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물질이 풍요로운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보다 쉽다고 하신 바로 그 부자입니다. 물질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자라고 해서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의 소유를 자랑한 곳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닌 소유로 인하여 하나님을 잘 섬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도 부자였었고, 욥도 부자였습니다. 신약에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부자였습니다. 또한 바울과 함께 전도를 한 바나바도 구부로의 부자였습니다. 빌레몬서의 수신자인 빌레몬도 역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소유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의 소유가 진정한 자기 것으로 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소유보다 하나님 안에서 낮아짐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귀하게 들어 쓰신 것입니다. 스스로 부하다고 생각이 들면 하나님 안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꼭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영적으로 교만한 자는 늘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부족함을 구해야 할 것이며, 2) 세상의 명예나 권세로 높은 위치에 있다고 믿어지면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며, 3) 물질의 부한 자는 그 풍요로움도 역시 하나님께서 주셨으므로 내가 누리고 있다는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거두어 가실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자기는 가난하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끝으로 잠언의 한 말씀을 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 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 30:7-9절) 바로 이런 자세가 우리의 바른 삶의 자세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이 기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거듭난 자의 특징들/ 요3:3/ 2008-02-21
거듭난 자의 특징들 요3:3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이것은 종교상 가장 중요한 질문의 하나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교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거듭났다고 생각합니다.”하는 대답만으로는 안 된다. 이름뿐인 교인들의 대다수는 성경적인 중생의 표나 증거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중생에 대한 성경의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요한일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죄의 습성을 멀리함 첫째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3:9, 5:18)했습니다. 거듭난 사람, 다시 말하면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던 못된 버릇을 끊어버리고 지난날에 행하던 죄악된 마음과 의지와 모든 나쁜 성벽(性癖)을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게 된다. 무슨 일에든지 죄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려 하며, 악을 행하고도 전연 마음 아프게 느끼지도 않던 지난 날, 마음 속에 일어나는 악과 더불어 고민하기는커녕 악을 벗으로 여겨왔던 과거의 모든 생활을 이제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죄를 미워하여 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매일의 생활에서 죄에 대항하여 싸우며, 죄의 비참함을 깨달으며 그러한 죄의 멍에를 탄식하며 넘어질 때마다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심령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시는 죄를 즐거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장 미워하고 가증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시는 그의 마음 속에 죄를 용납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일 1:8). 다만 죄를 무엇보다도 미워하며 심령으로부터의 간절한 소원이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뿐이다. 누구든지 그 마음에서부터 일어나는 나쁜 생각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일어나는 추하고 더러운 언행을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야고보는 “우리는 다 실수가 많다”(약 3:2)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실수와 허물까지라도 다 원통하게 여겨 매일매일 참회하며,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전력을 기울여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힘쓰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 둘째로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일 5:1)라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구원하실 유일하신 구세주이심을 믿는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보내주신 거룩한 자이며 그분 외에 다른 구세주가 또 없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오직 무가치한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달으며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을만한 확실하고도 견고한 터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를 통하여 모든 죄를 용서함 받은 것을 믿는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성취하신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것을 확신하며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과 심판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공포와 의심을 가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전연 믿음이 없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를 믿으려고 하느냐?”하고 반문해 보라. 그리고 또 “당신은 당신이 쌓은 선이나, 수양(修養)이나, 기도나, 교회를 봉사하는 일이나, 심지어 당신의 교회에 영생의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자문자답해 보라. 당신의 마음 속에 어떠한 대답이 떠오르는지 귀 기울여 보라. 의로운 생활을 힘씀 셋째로 요한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성도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일을 행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은 피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항상 바라보고 그의 가신 발자취를 따라 살고자 하며, 그의 명령대로 행하므로 그리스도의 친구임을 나타내려고 힘쓴다. 그렇다고 하여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떠나지 않는 악을 인하여 탄식하며, 자기 마음 속에 다른 한 지배자가 있어서 은혜의 길을 가로 막으며, 하나님의 품에서 멀리 떠나게 하려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그러나 마음 속에 거하는 악을 비록 완전히 빼어버리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는 결코 악의 세력에 본심으로 동조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가 신자인지 아닌지를 전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의심하는 자리에까지 떨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는 곧 용기를 회복하여 존 뉴턴이 말한 것과 같이 “오늘 나의 나 된 것은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 된 것도 아니요, 내가 원하여서나 애씀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하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함 넷째로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 3:14)하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모든 사람들을 한결같이 진실한 사랑으로 사랑한다. 특히 한 마음을 가진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더욱 뜨거운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말할 수 없이 악한 죄인에게라도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며, 한편 자기와 함께 한 멍에 아래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더욱 열렬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골육의 친척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오히려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더 즐겨한다. 그들은 서로 한 집안 식구와 같이 여기며, 같은 적을 대항하여 싸우는 전우가 되며, 또한 같은 차에 동승한 반려자가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이해하고 서로 돕는다. 그들은 비록 사회적 지위나, 부나, 나라와 얼굴빛이 서로 다를지라도 다 한 아버지의 아들과 딸들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이김 다섯째로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세상의 표준에 의하여 하지 않는다. 그는 굳게 서서, 두려움 없이, 세상의 온갖 풍조에 휩쓸려 흘러 내려가지 않으며 남들이 무어라 한들 자기의 목표를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행복을 줄듯이 속삭이는 주위의 모든 식물 중에서 향락을 구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허무하며 무익하며 무가치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는 이미 모든 일의 경중을 다 판단해 놓았기 때문에 남에게 비난을 받든지 칭찬을 받든지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첫째 되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이 목적을 향하여 전진할 뿐이다. 정결한 생활을 계속함 여섯째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자기를 지키매”(요 5:18)하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의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하여 언제나 조심한다. 그래서 그는 죄에 물들지 않으려고 힘 쓸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할 바 모든 일에 정결한 마음으로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려 깊게 친구를 사귄다. 그는 악한 사귐이 마음을 더럽게 한다는 것과, 질병이 사람들에게 건강보다 해를 끼치듯이 악한 것들은 유익하기보다 손해를 끼치는 것임을 잘 안다. 그는 모든 시간을 아껴 쓸 줄 알며, 시간을 선용하려고 힘쓴다. 그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군인과 같이 무장(武裝)을 늦추지 않고 유혹의 함정에 빠질까 늘 경계한다. 그리고 그는 항상 조심하며, 겸손하며, 기도하기를 힘쓴다. 중생의 표현 이상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따르는 여섯 가지 표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거듭난 사람들에게서 표현될 때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표현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조금 약하게 나타나며 어떤 사람에게서는 힘 있게 나타나서 누가 보나 확실하고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이 표현된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또 어떤 것들은 저런 사람들에게서 더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여하튼 이 여섯 가지 표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에게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임에는 틀림없다. 끝으로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이 여섯 가지 표를 가진 사람만이 중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중생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중생의 표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거듭났는가? 누구든지 이 물음에 확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내일의 양식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르는, 깊은 궁핍 속에서 지내지만 결코 동요하지 않고 언제나 고요하고 평온한 한 그리스도인 사나이를 본 적이 있다. 만일 그가 인디안 추장만큼 부자였더라도 그에게는 약간의 근심거리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었으니 바로 그에게는 전혀 가난하지 않고 그의 근심을 언제나 무덤 속으로 가져가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이웃이 있었던 것이다.” (스펄전) 존 찰스 라일(John Charles Ryle) 목사
거짓 선지자의 특징/ 미3:5-8/ 2005-11-29
거짓 선지자의 특징 미3:5-8 중심내용: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하수인이다. 1.본문개요 본문은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열거하였다. 오늘의 현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가 필요하다. 서론 1.요즘처럼 사이비 종교에 대하여 언론이 대대적으로 취급한 적은 일찌기 없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는 퍽이나 다행한 일일 것이다. 2.지금도 사이비이단의 그물에 걸려있는 길잃은 양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3.왜 이 땅에는 끊임없이 독버섯 같은 이단들이 생겨날까? 그것은 사탄의 역사임에 틀림이 없다. 문제는 멀쩡하던 목회자가 어느날 갑자기 이단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4.과거 이름을 떨치던 부흥사 중에도 이단으로 종말을 맺은 자가 적지않다. 5.앞으로도 이런 불행한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의 특징을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단은 거짓선지자에 의해 시작된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I.물질만을 요구한다(5). A.댓가를 원한다. 1.마치 염불에는 정신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 그대로다. 2.입에 먹을 거리가 있으면 평강을 외친다고 하였다.즉 감사헌금을 많이 하면 좋은 점괘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3.그러나 돈을 주지 않으면 저주 악담을 한다고 하였다. B.하나님은 결코 억지헌금을 요구하지 않는다. 1.헌금은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즐겨내는 것을 받으시지 결코 억지로 받으려 하지는 않는다. 2.우리 주위에 가정제단이니, 민족제단이니 하면서 집에서 마치 점쟁이가 점치듯이 예언기도를 하는 자들이 있는데, 물론 그들 중에는 건전한 분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방법은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요, 성서적 교회론과 어긋나는 행위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돈 봉투를 요구하고 있다. 3.심지어는 기성교단의 교단 신학교 출신 부흥사나 목회자 중에도 불건전한 방법으로 헌금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는데 매우 위험한 일이다. 4.구원파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십일조가 필요치 않다고 했다. 하지만 저들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엄청난 사채를 끌어들였고 갚지 않았다. 그리고 사업비 투자라는 명목하에 교묘히 착취했다. 차라리 십일조만 했던들 저런 엄청난 일이 있었겠는가? 5.대다수의 사이비 종교의 방법이 공통으로 구원파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들은 전재산을 요구한다. 이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II.묵시를 깨닫지 못한다(6). A.선지자는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1.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거듭남이 없었기 때문에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2.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한다는 말은 마치 차는 있으나 운전을 할줄 몰라 쩔쩔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3.흑암을 만나나 점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선지자는 어두움의 세대에 한줄기 빛을 제시하는 시대의 선각자다. 그러나 자신이 가짜이기 때문에 빛을 제시 할 수가 없다. B.참 선지자는 말씀을 깨닫는 자다. 1.목회자는 행정가가 아니다. 사업가도 아니다. 건축가는 더욱 아니다. 운전수도 아니다. 자선사업가도 아니다. 2.목회자는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여 깊은 진리를 깨닫는 자다.래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전하는 일에 전념했다고 하였다. 만일 목회자가 본질적인 업무를 떠나 부수적인 일에 너무 매달린다면 그도 거짓 선지자의 위험에 빠질 염려가 있다. 3.교회 역시 목회자를 사업가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단순히 심방만 전담하는 자로 오해해서도 안된다. 목회자가 말씀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III.하나님의 응답이없다(7). A.거짓 선지자는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한다. 1.우리가 제아무리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다면 응답받을 수 없다. 2.거짓 선지자에게는 응답이 있을 수 없다. B.거짓 선지자는 결과를 봐야 알 수 있다. 1.거짓 선지자에게도 그만한 매력이 있다. 능히 민중을 유혹할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2.만일 그의 능력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사탄의 올무에 빠지고말 것이다.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IV.죄의식이 없다(8). A.화인 맞은 심령은 죄를 깨닫지 못한다. 1.사이비에 속한자는 죄를 깨닫지 못한다. 당연히 죄의식이 없다. 2.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만천하에 밝히 드러나게 하실 것이다. B.하나님 앞에서 감추일 것은 아무것도 없다. 1.제 아무리 죄의식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는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죄를 기록한 책이요, 하나는 상급을 기록한 책이다. 2.구원파는 자기들만이 가장 이상적인 모임이라고 했다. 그러나 저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깨닫는가? 저들은 거짓말을 밥먹듯이 했다.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면서 뻔뻔스럽게 능청을 떨었다. 이것이 이단이요, 거짓 선지자다. 3.하나님은 지금 인간을 통하여 저들의 죄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죄는 인간의 힘으로 밝힐 수 없다. 검찰이 제아무리 공정하게 밝힌다고 해도 의혹은 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도 감출 수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결론 1.오늘날 가장 존경받고 가장 깨끗해야할 목회자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사탄의 종들 때문이다. 2.명문 신학교를 나와야만 훌륭한 목회자가 돼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종이냐가 문제다. 제아무리 명문학교에서 교육받았어도 중생하지 못했다면, 성화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도 언젠가는 사이비의 반열에 끼일 수 있게 된다. 3.외적인 표적만을 보려 한다면 그도 역시 사이비에 속을 수 밖에 없다. 4.거짓 선지자에게는 분명한 특징이 있다.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다. 거짓 선지자는 자기를 위해 사는 자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 5.거짓 선지자를 멀리하자. 불의를 행치말고 의에 속한 자가 되자. 이차일 목사
검열관적인 태도를 지니지 말라/ 마7:1-5/ 2010-09-02
검열관적인 태도를 지니지 말라 마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잇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그가 이전에 지니고 있던 관계들의 객체들에 대한 새로운 변화를 요청 받습니다 그 관계 변화의 요청의 객체를 본문 이하의 구절을 따라 분류해 보면 허물을 지닌 우리 형제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개나 돼지라 일컬어지는 그룹들, 하늘 아버지, 일반적인 사람들. 좁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료 순례자들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관계의 대상이 되는 이 객체들에 대한 지침을 우리에게 내려 주심으로 관계에 있어 긴장과 문제를 야기시키는 잘못됨을 이겨내도록 도우십니다 그 중 오늘 본문은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허물을 지닌 우리 형제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1.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은 형제들의 허물을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고 가르치십니다 먼저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이 명령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비평적 기능을 중지하라는 것으로 받아 들이는 오해를 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마치 못 본 듯이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일부러 눈감아 주라는 것 아닙니다 모든 비평을 삼가고 진리와 잘못, 선과 악을 식별하는 것을 금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정말 이러한 의도에서 명하신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보고도 지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정직한것이요 외식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치의 판단을 가능케 하셨고, 그 판단에 기초하여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의 것보다 낫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연이은 6절에서 예수님은 ‘거룩한 것들을 개에게 주는 것’과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을 피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상대방에 대한 판단에 근거한 것입니다 비평적 식별은 우리에게 오히려 의로운 삶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검열관과 같은 태도를 지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서 권위를 행사하려 하지 말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러한 검열관적 비난은 여러 유쾌하지 못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이고 파괴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찾는데 즐거움을 찾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동기에 대하여 가장 나쁜 구조물을 올려 놓습니다. 그들의 계획에 찬물을 껴 얹으며, 그들의 실수에 매우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에서 이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판단을 받아야만 하는 종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가 설 것인가 아니면 넘어질 것인가는 그 자신의 주인 앞에서이다(롬14:4)’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5). 우리는 또한 그 사람의 마음의 동기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에 동료에 대한 심판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검열관의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형제를 비난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판단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판단하지 말라(1)” 비평하되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 허물있는 형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이 말씀은 ‘허물있는 형제를 판단하는 자를 판단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될 때에 아주 엄중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허물있는 형제를 판단하는 자를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다.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심판하지 말라” 예수님은 부연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판단하는 그 방법으로, 너희들이 판단받게 될 것이다.” “너희가 재는 그 기준으로 너희들이 재질 것이다” 예수님은 형제의 허물에 대하여 관대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허물 가운데 있는 이들을 판단함에 있어 자비와 사랑으로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 때에도 자비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형제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식별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그들을 도와 주어야 하는 책임 때문입니다. 형제를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요청되어지는 것은 이러한 엄격한 판단의 기준을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을 부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장미빛 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유혹에 늘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 너희는 너희들의 형제의 눈 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너희 자신의 눈에 있는 통나무는 발견하지 못하느냐?” 그것은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무어라 한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네 일이나 하지 간섭하지 말라는 말과 다릅니다. 우리 자신의 눈에 있는 통나무라는 허물을 밝히 인식해야하는 이유는 형제들의 눈에 있는 티끌을 꺼낼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 허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사람만이 형제의 허물로부터 형제가 벗어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종의 형제이다.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를 고치라, 그러나 원수로서가 아니라, 벌을 제공하는 고소자로서가 아니라, 약을 제공하는 의사와 같이 하라.
고난을 이기는 사람의 특징/ 창39:1-6/ 2008-08-02
고난을 이기는 사람의 특징 창39:1-6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에게도 시련은 있다. 온전한 신앙의 사람이었지만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던 요셉의 삶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 고난은 축복의 도구일 뿐이다. 외국인 노예 출신으로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던 요셉을 삶을 통해 고난을 이기는 사람의 특징을 배워보자. 1.매사에 긍정적인 자세를 가진다. 요셉은 어떤 경우에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노예로 팔려간 최악의 상황에도 주인의 아내 때문에 모처럼의 기회도 잃어버리고 억울한 옥살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성실할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자세는 비단 성격 문제만은 아니다. 의도적으로 마음을 먹어야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신념이나 각오가 아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의 일하심과 역사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에 근거하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건강도 유지되고 상황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작은 어려움을 두고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행동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이 번제물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이 준비 하신다”고 했다. 어떻게 이 보다 긍정적일 수 있겠는가?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우리가 믿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아니신가?(롬4:17). 2.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우리의 삶은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에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 주로 다른 사람들을 잘 칭찬하고 너무 똑똑한 척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잘 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요셉은 보디발에 집에서는 주인에게 최선을 다하므로 관계를 증진했다. 이런 삶이 그에게 모든 가정사를 맡기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도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어렵고 힘들었지만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잊지 않았다. 감옥에 있을 때는 왕의 신하들이 수심에 차있는 것을 그냥 넘기지 않고 따뜻한 말로 위로 해주었다(창40:6-7). 바로 이 사람으로 인해 바로를 만날 수 있었고 결국에 총리가 될 수 있었다. 평상시의 인간관계가 이렇게 중요하다. 좋은 신앙인은 늘 관계에서 행복을 누려야 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3.일상을 하나님의 인도로 생각한다. 성도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어야 한다. 인생은 우둔해서 잘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깨닫는 되는 경우가 많다. 요셉은 13년간 고통을 받았고 고난은 깊어졌으나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다. 그러나 13년 중 10년 쯤 되었을 때도 고난의 가장 깊은 수렁에서도 믿음의 말을 한다.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요셉이 한 말이다. (창40:8) “해석은 하나님께 있나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신앙의 고백을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읽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요셉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었던 사람임에 틀림없다(창50:20).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야 애굽에 올 수 있었고, 감옥에 들어가야 바로의 신하를 만날 수 있었으며, 그래야 왕을 소개받고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총리가 되어야 중근동의 기근의 고통을 해결하고, 고향의 가족들을 모셔 와서 봉향하며, 출애굽시 까지 이스라엘의 생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할렐루야! 도원욱 목사(서울 한성교회)
고난을 통하여 보다 넓은 세계로/ 시119:65-72/ 2003-05-27
고난을 통하여 보다 넓은 세계로 시119:65-72 어느 청교도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새와 같다. 그들은 새장 속에서 가장 훌륭하게 노래한다. 그들은 깊은 고통 속에 있을 때 가장 훌륭하게 노래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통하여 성숙하면서 영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됨을 뜻합니다. 오늘 읽어드린 고린도후서 말씀에 보면, 육체의 가시를 없애 달라는 사도 바울의 기도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은혜가 넘쳤다고 하면, 그것은 좋은 일이 일어나고 만사형통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는 전도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고생을 하였고, 육체의 가시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있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지니고 있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간질병이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안질이었다고 합니다. 다메섹에서 빛을 보면서 눈이 멀었다가 나중에 고침을 받기는 했지만, 그 후 계속해서 눈이 안 좋았고 안질이 심했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널리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 가시는 바울에게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가리켜 사탄의 사자라고 할 정도라면, 그 가시가 보통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해 세 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응답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가시가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그 가시로 인하여 그가 고통을 받았지만 그 고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라고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 이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바울은 새로운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약하여졌지만, 영적으로는 강하여진 체험입니다. 그의 삶의 중심이 육체에서 영으로 옮겨진 체험입니다. 그는 고난을 통하여 보다 넓은 영적 세계를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활짝 열린 부활의 세계를 묵상하는 사순절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삶과 이 세계 속에 깃들인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욕망을 위한 기도 우리는 먼저 사도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였다는데 주목하고자 합니다. 한 곳에 머물면서 전도한 것이 아니라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면서 전도하였던 바울에게 육체적 질병은 고통스럽고 불편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시대에 약한 육체를 이끌고 장거리 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세 번이나 그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의 질병만 없다면 보다 효과적으로 그리고 보다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전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목회의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병든 자를 문병하고 위하여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누구도 여기에 이의(異議)를 달 사람이 없습니다. 목회자들은 하도 병자들이 많고 또 잘 치료되지 않는 병도 많아서 때로 자신에게 치유의 은사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 이런 치유를 중심으로 한 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병 때문에 고통 받는 환자들을 보면 저들을 능력으로 고쳐 주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력함에 늘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하는 목회가 진정으로 성공한 목회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육체적 질병의 치유는 단순하게 질병의 치유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육체적 행복과 번영을 기도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소위 삼박자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영혼도 잘 되고 육체적 건강도 얻고, 사업의 번창으로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바로 삼박자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믿음의 목적을 이 땅에 국한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영혼의 구원과 고난 없는 이 땅의 삶이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린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기겠다는 발상과 같습니다. 넓은 길로 가면서 영생에 이르겠다는 생각이지만, 넓은 길에는 영생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을 강조하시는 까닭은 고난을 통해서, 즉 욕망의 포기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이를 수 있음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삼박자 구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육체적 모든 욕망을 포기하여야만 하기 때문에 구원은 한 박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육체적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거기에만 머물러 있다면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육체를 넘어서 보다 크고 완성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는 육체의 삶을 빨리 넘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전진하지는 않고 그냥 육체적 삶에 머물면서 그 삶만을 풍요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도가 기복적인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당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기복(祈福)에서 출발하지만 기도하는 중에 점차 깨달으면서 우리의 목표가 이 땅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기복적인 내용 대신 하나님 나라를 구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기도하게 됩니다. 그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우리 영의 눈이 떠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편견에서 벗어나 새로운 넓은 세계에 미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가 이렇게 발전할 때 기복적 신앙에서 벗어나면서 영적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연약한 생명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대로 응답하셔서 그의 육체적 가시를 제거하시지 않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응답하신 까닭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을 병들지도 않고 아무런 제약도 없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인간을 만드심으로 병도 들고 고난도 당하는 연약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제한적이며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물론 인간은 그가 지은 죄 때문에 더 많은 문제와 질병과 고통과 죽음을 가져왔지만, 죄가 아니었어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병들고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인간을 이렇게 제한적인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제한적인 존재가 되게 하시므로 그 제한을 넘어서 펼쳐지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말씀은 ‘너의 그 육체적 가시는 오히려 너의 영적 진보를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그냥 두어두는 것이 좋겠다.’는 뜻입니다. 육체적 가시를 통해서 영적 진보라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부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그 가시를 없애므로 육체적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가시를 통해서 영적 진보를 이루는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런 응답의 뜻을 얼른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그 때부터는 그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하겠다고 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육체의 가시를 통해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동시에 겸손을 배웠습니다. 내가 받은 여러 가지 엄청난 계시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고후 12:7 바울이 “여러 가지 엄청난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과대평가 하였을 경우 그 평가를 그대로 받아 교만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몸의 가시를 통해서 그가 아무리 “엄청난 계시”를 받았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일 뿐임을 깨우치게 하셨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가시를 통해서 겸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병에 걸리거나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날 때 무조건 나으려 하고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고난을 통하여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기를 힘쓰고, 그 연약함을 넘어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내가 간직해온 모든 욕망을 회개하고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전도자의 “헛되고 헛되다”라는 깨달음을 얻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얻으려고 했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육체적 생명은 아무리 건강해도 결국 약하여지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에게는, 그 날이 풀과도 같고, 피고 지는 들꽃 같아, 바람 한 번 지나가면 곧 시들어,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다”(시 103:15)는 시인의 각성을 체험하여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이런 각성을 얻게 된다면, 고난은 결코 피할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시편의 시인처럼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119:71 약한 데서 완전하여지는 능력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응답을 통하여 바울은 자기가 약할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온전한 능력으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을 볼 때마다 정말 놀라운 신학자요, 능력 있는 전도자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신학적 사색은 참으로 깊고 오묘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사실 오늘의 신학자들처럼 체계적인 신학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일찍이 전도자가 되어 수많은 역경과 박해를 받으면서 사방으로 돌아다녔기에 책상에 앉아 깊이 생각하며 저술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쓴 편지들은 그 어느 신학서적보다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그의 약함을 깨달으면서 그 안에 받아 드린 “여러 가지 엄청난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그 안에 간직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장로교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요한 칼뱅은 걸어 다니는 병원이란 별명을 들을 만큼 일생동안 병약체로서 건강하게 지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바짝 마른 뾰족 턱을 한 날카로운 인상인데, 그것이 병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일곱 가지 중병을 앓았는데 곧 이틀에 한 번씩 심한 두통을 앓았으며, 심장병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폐병으로 오후엔 미열이 계속되었으며, 심한 위장병으로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했으며, 각기, 치질, 신경통으로 보행이 곤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칼뱅은 25세에 그 유명한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였고, 신구약 주석을 모두 집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네바 시에서 신정 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엄격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55세로 세상을 떠날 때 8,90세의 노인처럼 보였다고 역사가들이 전하는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를 외우면서 부름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고난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바라보게 하는 촉진제였습니다. 고난은 우리로 영의 눈을 뜨게 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이 이 땅의 육체적 생명에 끝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할 뿐 아니라 그 세계가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가를 알게 해줍니다.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 영광에 비하면 이 땅의 삶이 정말로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비밀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 땅의 가난과 질병과 고난을 가볍게 여기며 기쁨으로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전진하며 성장해 갑니다. 미국과 영국이 일으킨 이라크 침공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세계가 또 다시 큰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동서냉전이 끝나면 평화가 오리라는 기대와 달리 더 어처구니없는 전쟁이 일어났고, 그 때문에 수많은 생명들이 죽고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계속 전쟁과 천재지변 같은 고통 속에 몰아넣으시는 것은 이 세계가 지향하는 유토피아의 꿈을 접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세계는 이라크 침공 때문에 더 절실하게 진정한 평화를 원하게 되었고, 그 평화는 어떤 선한 나라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 나라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고난이 이 세계를 각성케 하며 영적 세계를 향하여 눈을 뜨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욕망을 다함께 소멸시키므로 인간을 부활의 세계로 이끌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에 바울처럼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영적 진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에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 시련을 통하여 겸손을 배우게 될 것이고, 하늘 문이 열리고 거기로부터 놀라운 생명의 능력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 자리 잡을 것입니다. 하잘 것 없는 육체의 욕망을 위하여 기도하는 대신에 영생의 신비를 볼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영생의 넓은 세계로 헤엄쳐 나갈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안개처럼 사라질 이 땅의 삶에 매이지 말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성장하며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육체의 고난을 오히려 자랑하며 감사하면서 여러분 안에서 완전하게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건설에 참여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강해(28)/ 성찬 받는 자의 올바른 태도/ 고전11:17-34/ 2004-10-13
성찬 받는 자의 올바른 태도 고전11:17-34 Ⅰ.내용 분해와 조직 1.머리말 1.이번에는 칭찬할 수 없는 일을 한 가지 말하겠다(17) 2.너희가 성만찬을 위해서 모이는 자리가 유익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17) 2.본론 ①교회분열과 주님의 만찬 ㄱ.너희가 분열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a.너희가 모임에서 논쟁과 분열을 일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 간다는 말이 여러 사람을 통하여 자주 내 귀에 들려온다(18) b.그러니, 어찌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18) c.물론,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분열도 생기게 되어 있다(19) ㄴ.그런 형편에 어떻게 성찬을 가질 수 있는가? a.너희가 분열되어 있으니, 너희가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20) b.너희는 다른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음식을 나누지 않고, 앞다투어 제각기 제 양만 채우고 있다(21) c.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배고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한 사람도 있다(21) ㄷ.그처럼 행하는 성찬은 잘하는 짓이 아니다. a.먹고 마시는 일은 자기 집에서도 할 수 있다(22) b.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으니, 그것이 잘하는 짓인가?(22) c.이 일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말해야 옳겠는가?(22) ②성찬 받기 위한 바른 태도 ㄱ.내가 전해 준 것은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a.주께서 잡히시던 밤, 빵을 손에 들고 감사드리신 후에 빵을 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걸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3-24)” b.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5) c.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너희는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의미를 되풀이해서 선포해야 한다(26) ㄴ.성찬을 받기 전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a.만일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빵을 먹고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님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27) b.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시기 전에, 누구나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봐야 한다(28) c.주님의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29) ㄷ.우리 스스로를 살피면 심판을 받지 않으리라. a.이 때문에, 너희 가운데는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많다(30) b.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살피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31) c.우리가 심판받아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다(32) 3.맺는말 ①너희가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라(33) ②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라(34). ③그것은 너희가 모이는 일로 해서 심판하실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34) Ⅱ.내용 연구와 삶의 적용 1.고린도교회의 성찬식 ①성찬 받기 전의 자세 ㄱ.교인들이 모일 때에 논쟁과 분열을 일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져가고 있다(18) ㄴ.옳고 그름을 따지다 보면 때로는 분열도 생기지만,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19-20) ②성찬 받을 때의 모습 ㄱ.다른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먹지 않고, 앞 다투어 제각기 제 양만 채우고 있다(21) ㄴ.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고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한 사람도 있다(21) ③성찬 받은 결과 ㄱ.교회 명예를 손상시키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22) ㄴ.주님의 심판을 받아서,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이 많다(30) 2.성만찬 ①성만찬의 시작 ㄱ.언제 : 주께서 잡히시던 밤(23) ㄴ.실행순서 : 빵을 먼저, 포도주를 나중에(23-25) a.감사기도 : 빵, 또는 포도주를 들고 감사기도를 드렸다(23,25) b.말씀선포 ○빵을 떼어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4)’ ○포도주를 마시게 한 후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5)’ c.함께나눔 : 예수께서 떼어준 빵을 함께 먹고, 또한 예수께서 나눠준 포도주를 함께 마셨다(25) ②올바른 성만찬 ㄱ.받기 전 : 누구나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봐야 한다(28) ㄴ.받을 때 : 주님의 만찬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서 받아야 한다(29) ③그릇된 성만찬 ㄱ.태도 : 주님의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신다(29) ㄴ.결과 :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29) 3.삶의 적용 ①인간의 문제와 그 결과 ㄱ.교회 안에서 분쟁과 분열이 많다. ㄴ.성찬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한 채 받는 경우가 많다. ㄷ.다른 사람의 형편을 자세히 돌아보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행할 때가 많다. ②하나님의 섭리와 치료 ㄱ.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ㄴ.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하기 위하여 성만찬을 제정하여 주셨다. ③인간의 응답과 실천 ㄱ.교회 안에서 분열과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ㄴ.성찬을 받기 전에 자기 자신을 잘 살펴봐야 한다. ㄷ.성만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서 성찬을 받도록 해야 한다. 정수환 목사(김포 양촌면 학운리 학운감리교회)
고린도전서강해(28)/ 성찬 받는 자의 올바른 태도/ 고전11:17-34/ 정수환 목사/ 학운교회/ 2004-10-13
고린도전서강해(28)/ 성찬 받는 자의 올바른 태도 고전11:17-34 Ⅰ.내용 분해와 조직 1.머리말 1.이번에는 칭찬할 수 없는 일을 한 가지 말하겠다(17) 2.너희가 성만찬을 위해서 모이는 자리가 유익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17) 2.본론 ①교회분열과 주님의 만찬 ㄱ.너희가 분열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a.너희가 모임에서 논쟁과 분열을 일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 간다는 말이 여러 사람을 통하여 자주 내 귀에 들려온다(18) b.그러니, 어찌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18) c.물론,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분열도 생기게 되어 있다(19) ㄴ.그런 형편에 어떻게 성찬을 가질 수 있는가? a.너희가 분열되어 있으니, 너희가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20) b.너희는 다른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음식을 나누지 않고, 앞 다투어 제각기 제 양만 채우고 있다(21) c.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배고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한 사람도 있다(21) ㄷ.그처럼 행하는 성찬은 잘하는 짓이 아니다. a.먹고 마시는 일은 자기 집에서도 할 수 있다(22) b.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으니, 그것이 잘하는 짓인가?(22) c.이 일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말해야 옳겠는가?(22) ②성찬 받기 위한 바른 태도 ㄱ.내가 전해 준 것은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a.주께서 잡히시던 밤, 빵을 손에 들고 감사드리신 후에 빵을 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걸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3-24)” b.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5) c.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너희는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의미를 되풀이해서 선포해야 한다(26) ㄴ.성찬을 받기 전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a.만일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빵을 먹고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님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27) b.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시기 전에, 누구나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봐야 한다(28) c.주님의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29) ㄷ.우리 스스로를 살피면 심판을 받지 않으리라. a.이 때문에, 너희 가운데는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많다(30) b.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살피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31) c.우리가 심판받아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다(32) 3.맺는말 ①너희가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라(33) ②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라(34). ③그것은 너희가 모이는 일로 해서 심판하실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34) Ⅱ.내용 연구와 삶의 적용 1.고린도교회의 성찬식 ①성찬 받기 전의 자세 ㄱ.교인들이 모일 때에 논쟁과 분열을 일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져가고 있다(18) ㄴ.옳고 그름을 따지다 보면 때로는 분열도 생기지만,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19-20) ②성찬 받을 때의 모습 ㄱ.다른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먹지 않고, 앞 다투어 제각기 제 양만 채우고 있다(21) ㄴ.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고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한 사람도 있다(21) ③성찬 받은 결과 ㄱ.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22) ㄴ.주님의 심판을 받아서,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이 많다(30) 2.성만찬 ①성만찬의 시작 ㄱ.언제 : 주께서 잡히시던 밤(23) ㄴ.실행순서 : 빵을 먼저, 포도주를 나중에(23-25) a.감사기도 : 빵, 또는 포도주를 들고 감사기도를 드렸다(23,25) b.말씀선포 ○빵을 떼어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4)’ ○포도주를 마시게 한 후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5)’ c.함께나눔 : 예수께서 떼어준 빵을 함께 먹고, 또한 예수께서 나눠준 포도주를 함께 마셨다(25) ②올바른 성만찬 ㄱ.받기 전 : 누구나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봐야 한다(28) ㄴ.받을 때 : 주님의 만찬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서 받아야 한다(29) ③그릇된 성만찬 ㄱ.태도 : 주님의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신다(29) ㄴ.결과 :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29) 3.삶의 적용 ①인간의 문제와 그 결과 ㄱ.교회 안에서 분쟁과 분열이 많다. ㄴ.성찬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한 채 받는 경우가 많다. ㄷ.다른 사람의 형편을 자세히 돌아보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행할 때가 많다. ②하나님의 섭리와 치료 ㄱ.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ㄴ.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하기 위하여 성만찬을 제정하여 주셨다. ③인간의 응답과 실천 ㄱ.교회 안에서 분열과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ㄴ.성찬을 받기 전에 자기 자신을 잘 살펴봐야 한다. ㄷ.성만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서 성찬을 받도록 해야 한다. 현대어성경 17 다음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동의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성만찬을 위해서 모이는 자리가 유익하기 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18 여러분이 모임에서 논쟁과 분열을 일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 간다는 말이 여러 사람을 통하여 자주 내 귀에 들려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9 물론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분열도 생기겠지요. 20 그러나 여러분이 함께 모여서 나누는 식사는 성만찬이 아니라 그냥 먹고 마시는 자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21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음식을 나누지 않고 모두가 앞을 다투어 제각기 제 양만 채우고 있다지요? 그래서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배고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한 사람도 있다니 22 그것이 사실입니까? 먹고 마시는 일이라면 자기 집에서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음식을 가져오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잘한 짓입니까? 이 일에 대해 내가 어떤 말을 해야 옳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합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23 주님의 식탁에 대해서는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또 나도 전에 여러분에게 전해 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던 그날 밤에 주 예수께서는 떡을 들어 24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받아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니 이렇게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25 또 식사 후에 포도주 잔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하나님과 너희 사이에 세우는 새 계약이다. 이 계약은 내 피로 세우는 것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 이렇게 행하라.\\\\\\\\\\\\\\\\\\\\\\\\\\\\\\\\\\\\\\\\\\\\\\\\\\\\\\\\\\\\\\\\\\\\\\\\\\\\\\\\\\\\\\\\\\\\\\\\\\\\\\\\\\\\\\\\\\\\\\\\\\\\\\\' 26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의미를 되풀이해서 선포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예식을 계속하십시오. 27 만일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떡을 먹고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님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28 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시기 전에는 누구나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봐야 합니다. 29 만일 누가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지 않고 또 주님의 만찬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채 제멋대로 먹고 마신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볍게 여긴 탓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30 여러분 가운데 약한 자와 병자가 많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 생긴 것은 이 때문입니다. 31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심판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32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심판하실지라도 그것은 다만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33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성만찬을 하기 위해 모일 때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 34 만일 매우 배가 고프거든 집에서 식사를 하고 오십시오. 그래서 심판받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 밖의 다른 문제는 내가 그곳에 가서 일러드리겠습니다. 표준새번역 17 다음에 지시하려는 문제에서는 내가 여러분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일이 이로움을 주지 못하고 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18 첫째로, 여러분이 교회에서 모일 때에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19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밝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서도 당파가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20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21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음식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22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23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드시어서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25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26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28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피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시십시오. 29 주님의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30 이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는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31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살피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32 그런데 우리가 주께로부터 심판을 받아서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33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십시오. 34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모이는 일로 심판하실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밖에 남은 문제들은, 내가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고통 당한 자에게 대할 태도/ 욥16:1-5/ 2005-12-01
고통 당한 자에게 대할 태도 욥16:1-5 우리 속담에 \\\'불 난데 부채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직 면한 자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기 때문에 평범한 이야기에도 곧잘 성을 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의 신경을 자극시키고도 남을 독설이나 조롱 은 말 그대로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이 되고 맙니다. 어떤 경우이건 상대방 을 인격적으로 성실히 대하기란 쉽지 않지만 특히 불행에 처한 사람을 대 할 때에는 각별한 배려가 요청된다 하겠습니다. 본문은 세 친구와 욥 사이 의 괴리가 얼마나 컸던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스한 안위의 말보 다는 냉혹하고 헛된 이론에 치우친 친구들의 정죄함을 처음 접했을 때 욥 은 격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비난과 독설이 점점 심 해지자, 욥은 아예 그들과 상대하기 조차 괴로워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호소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도우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 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시121:1)욥이 듣기에는 친구들의 말은 오히려 번 뇌케하고 허망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욥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와 같은 처지이면 나도 너희와 같이 책망이나 권면도 할 수 있다\\\"(4,5)고 합니다. 참된 위로는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는 심정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습니 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참된 뜻을 전하려 하지 않고 전통적인 인간의 지혜 와 경험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욥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는데 실패한 것입 니다.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우리는 어려움에 봉착한 형제, 자매를 대할 때 나 특히 상담자로 나설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상고해 보기로 합시다. 1.강한 용기를 북돋우어 주어야 합니다. 욥은 자기에게 어처구니없는 공박을 퍼붓고 있는 세 친구들에게 그들의 경박성을 지탄하였습니다. 세 친구들이 욥을 찾아왔던 원래의 목적은 극심 한 재난을 당하고있는 욥을 위로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자 기의 신앙적 단견과 편견들을 가지고 욥을 가차없이 정죄하여 도리어 설상 가상 격으로 욥에게 더욱 잔인한 고통을 끼쳐 주고 있습니다. 돌팔이 의사 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현재의 재 난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잘잘못을 규명하려 드는 그럴싸한 논리가 아니라 따뜻한 마음의 격려입니다. 죄를 묻고 따지는 것은 하나님 께서 하실 일이지 우리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죄를 묻기 이전에 그가 이 재난을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최선의 도움을 주 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이에서도 정반대의 폐단이 간단없이 빚어지고 있다 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비교적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사람조차도 남의 재난을 보면서 하나님께 벌받고 있다는 말을 남발하는 경 우가 많은데 이런 태도는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 신이 특별한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재난을 당한 사람보다 의롭 거나 잘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라도 회개하지 않 으면 극단적인 재난 가운데로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바르 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다 깊은 섭리 안에서 욥처럼 영문 모를 재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들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겠습니다. 이 모습은 주님 을 닮아 가는 출발입니다. 2.상처를 감싸 주어야 합니다. 욥은 만약 입장이 서로 바꾸어졌다면 \\\'나는 입술의 위로를 너희의 근심 을 풀어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위로의 말로 재난당하고 있 는 자의 상처를 싸매어 주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점에서 세 친구 는 지탄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해 주기는 커녕 도리어 허망한 말을 가지고 번뇌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나 재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벌써 큰 상처를 받고 있는 셈입 니다. 그러기에 만약 우리가 이점을 깊이 통찰한다면 상처받은 부위를 도리 어 헤집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말이 정당하고 훌륭한 것 이더라도 상대편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은 커다란 부작용만 일으킵니다. 뛰 어난 양약이더라도 병에 맞지 않으면 몸에 해만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상처받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따뜻하게 싸매어 주고 보살펴 주는 일 밖에 필요한 것이 없습니 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가정이나 직장이나 학교 등을 막론하고 이런저 런 일들로 상처를 받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진정 한 위로자가 별로 없고 서로 남의 탓으로만 돌려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경(西經)에 보면 고대 중국의 문왕은 자기 백성 보기를 몹시 다친 사람들 을 보듯 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위로의 아버지라고 찬탄하였고 이런 위로가 고난 을 견디도록 만든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1: 3.6) 위로는 상처받은 사람 뿐 만아니라 숨쉬고 있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갈급함입니다. 세상에는 위로받 고 싶어서 울부짖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 평안을 위하 여 위로의 사역자로 살아 가는 축복을 기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사이에 재난을 당하는 자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 것에는 우리가 그 런 자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하나님이 자비 깊은 섭리와 배려가 담겨 있 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가 곁에 있다면 우리는 먼저 용기를 북돋워 주고 위로로써 상처를 싸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불리 그를 향하여 죄를 회개하라는 식의 경망한 충고는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그 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이지 절대로 정죄가 아닌 것입니다. 이이복 목사
고통 당한 자에게 대할 태도/ 욥16:1-5/ 2005-12-01
고통 당한 자에게 대할 태도 욥16:1-5 우리 속담에 \\\'불 난 데 부채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직 면한 자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기 때문에 평범한 이야기에도 곧잘 성을 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의 신경을 자극시키고도 남을 독설이나 조롱 은 말 그대로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이 되고 맙니다. 어떤 경우이건 상대방 을 인격적으로 성실히 대하기란 쉽지 않지만 특히 불행에 처한 사람을 대 할 때에는 각별한 배려가 요청된다 하겠습니다. 본문은 세 친구와 욥 사이 의 괴리가 얼마나 컸던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스한 안위의 말보 다는 냉혹하고 헛된 이론에 치우친 친구들의 정죄함을 처음 접했을 때 욥 은 격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비난과 독설이 점점 심 해지자, 욥은 아예 그들과 상대하기 조차 괴로워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호소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도우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 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시121:1)욥이 듣기에는 친구들의 말은 오히려 번 뇌케하고 허망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욥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와 같은 처지이면 나도 너희와 같이 책망이나 권면도 할 수 있다\\\"(4,5)고 합니다. 참된 위로는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는 심정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습니 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참된 뜻을 전하려 하지 않고 전통적인 인간의 지혜 와 경험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욥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는데 실패한 것입 니다.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우리는 어려움에 봉착한 형제, 자매를 대할 때 나 특히 상담자로 나설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상고해 보기로 합시다. 1.강한 용기를 북돋우어 주어야 합니다. 욥은 자기에게 어처구니없는 공박을 퍼붓고 있는 세 친구들에게 그들의 경박성을 지탄하였습니다. 세 친구들이 욥을 찾아왔던 원래의 목적은 극심 한 재난을 당하고있는 욥을 위로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자 기의 신앙적 단견과 편견들을 가지고 욥을 가차없이 정죄하여 도리어 설상 가상 격으로 욥에게 더욱 잔인한 고통을 끼쳐 주고 있습니다. 돌팔이 의사 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현재의 재 난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잘잘못을 규명하려 드는 그럴싸한 논리가 아니라 따뜻한 마음의 격려입니다. 죄를 묻고 따지는 것은 하나님 께서 하실 일이지 우리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죄를 묻기 이전에 그가 이 재난을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최선의 도움을 주 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이에서도 정반대의 폐단이 간단없이 빚어지고 있다 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비교적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사람조차도 남의 재난을 보면서 하나님께 벌받고 있다는 말을 남발하는 경 우가 많은데 이런 태도는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 신이 특별한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재난을 당한 사람보다 의롭 거나 잘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라도 회개하지 않 으면 극단적인 재난 가운데로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바르 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다 깊은 섭리 안에서 욥처럼 영문 모를 재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들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겠습니다. 이 모습은 주님 을 닮아 가는 출발입니다. 2.상처를 감싸 주어야 합니다. 욥은 만약 입장이 서로 바꾸어졌다면 \\\'나는 입술의 위로를 너희의 근심 을 풀어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위로의 말로 재난당하고 있 는 자의 상처를 싸매어 주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점에서 세 친구 는 지탄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해 주기는 커녕 도리어 허망한 말을 가지고 번뇌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나 재난을 당하고 있는 것은 벌써 큰 상처를 받고 있는 셈입 니다. 그러기에 만약 우리가 이점을 깊이 통찰한다면 상처받은 부위를 도리 어 헤집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말이 정당하고 훌륭한 것 이더라도 상대편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은 커다란 부작용만 일으킵니다. 뛰 어난 양약이더라도 병에 맞지 않으면 몸에 해만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상처받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따뜻하게 싸매어 주고 보살펴 주는 일 밖에 필요한 것이 없습니 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가정이나 직장이나 학교 등을 막론하고 이런저 런 일들로 상처를 받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진정 한 위로자가 별로 없고 서로 남의 탓으로만 돌려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경(西經)에 보면 고대 중국의 문왕은 자기 백성 보기를 몹시 다친 사람들 을 보듯 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위로의 아버지라고 찬탄하였고 이런 위로가 고난 을 견디도록 만든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1: 3.6) 위로는 상처받은 사람 뿐 만아니라 숨쉬고 있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갈급함입니다. 세상에는 위로받 고 싶어서 울부짖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 평안을 위하 여 위로의 사역자로 살아 가는 축복을 기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사이에 재난을 당하는 자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 것에는 우리가 그 런 자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하나님이 자비 깊은 섭리와 배려가 담겨 있 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가 곁에 있다면 우리는 먼저 용기를 북돋워 주고 위로로써 상처를 싸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불리 그를 향하여 죄를 회개하라는 식의 경망한 충고는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그 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이지 절대로 정죄가 아닌 것입니다. 이이복 목사
교회 원리(3)/ 탁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막10:42-45/ 2006-03-12
교회 원리(3)/ 탁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막10:42-45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변하고 말을 바꾸면 인생이 변한다는 말이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자신이 행복해지려고 생각하는 만큼 행복해 질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늘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행복을 찾아내는 우리자신의 생각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고 싶으면 행복하다는 마음을 내안에 생각할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남보다 뛰어나고 탁월하게 인생을 살아가려면 남들이 하는데로 똑갈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더 열정을 가지고 남보다 조금더 노력하고 열심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출근 시간이 8시라면 보통 사람들은 10분 늦게 출근해서 어슬렁 거리다가 커피를 마시고 20분 늦게 업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퇴근때에는 남보다 10분 일찍 퇴근합니다. 상사가 나가면 너 나 할것없이 인터넷 즐기고 시간 끌면서 업무를 대충 합니다. 그러면서도 승진때가되면 하나님 왜 내겐 복을 주시지 않고 왜 나는 승진이 되지 않습니까? 하고 투덜 됩니다. 그러나 탁월한 사람은 출근할 때에도 남보다 10분 일찍 출근하고 더 분발하면서 목표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축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남보다 뛰어나고 탁월한 사람을 쓰십니다. 제작년 안식년이 되어서 저의 안사람과 미국에 몇 개월 있었는데 저녁 5시가 되면 공원 잔디밭에 가서 한시간 동안 파란 잔디위를 걸으며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공원까지 걸어가는 길 좌우에 집들이 쭉있는데 사람들마다 개성있게 집을 가꾸고 정원을 꾸며놓고 화초를 심고 각가지 나무를 키워 놓았는데 모두가 특색있게 까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따금 어떤집은 집이 헐어져있고 잔디도 안깍고 페인트칠도 안하고 잡초만 우거져 있는집도 있는데 제가 보기에도 집주인이 게으르고 성실치 못한 사람같아서 보기가 아주 나쁘더라구요 아마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들의 삶을 보실 때 성실치 못하고 삶의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삶을 그렇게 보지 않을까 생각이 되어 집니다. 아무튼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아름다운 삶은 무슨일을 하든지 삶의 목표가있고 그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름다운 삶이 아닌가 생각이 되어 집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14에서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인생으로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7:4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간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탁월한 교회가 되는 것이나 탁월한 일꾼이 되는 것은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탁월한 자세 즉 어떤 태도를 가져야 탁월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탁월한 일은 탁월한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이유를 분석해 보면 태도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탁월한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태도에 대해서 주님의 역설적 메시지입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크고자 하는 자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란 탁월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크고자 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great)을 뜻하고 으뜸이 되는 사람은 첫째되는 사람(first)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위대하고 첫째가 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이나 종이 되는 것은 이론신앙이 아니라 실천신앙입니다. 머리 신앙이 아니라 손과 발이 따라가는 행동신앙입니다. 이런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탁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시하신 탁월한 사람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섬기는 종으로서 리더가 되는 것이 탁월한 사람이라고 할 때 그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여러분들이 탁월한 사람이 되고 첫째 되는 사람으로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 어떤한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1 거룩함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탁월한 사람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거룩함에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창세기 49:3-4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 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입니다. 르우벤은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탁월한 사람이 되지 못한 이유는 거룩함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특별하고 다른 형제들과 비교될 수 없는 축복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입니다. 야곱은 다른 자식들보다 두배의 축복과 분깃을 르우벤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탁월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거룩함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침상을 더럽히며 누울 자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태도로 인하여 탁월함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거룩하지 못하여 그 위대해 질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특별한 사람들을 부르실 때 요구하신 특징이 거룩이라고 했습니다. 계19: 14절에 사도요한은 거룩한 사람들을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들을 부르셔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세우도록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교회는 거룩한 백성들이 모인 곳입니다. 재능이 없고 돈이 없고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지 않고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4-16의 말씀을 보면 “너희는 이전에 알지 못할때에 좇았던 옛날에 사욕을 버리고 모든 행실에 있어서 거룩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해 지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탁월한 사람이 되려면 예전에 좇던 삶을 버리고 사욕을 멀리하여서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출애굽기 20:11에보면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거룩한 삶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주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거룩의 기초입니다. 탁월한 사람의 태도는 일을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서 거룩하게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룩은 시간의 질서, 영적 질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한 사람은 주일을 반드시 지키고 예배를 삶의 최우선으로 앞에 놓는 사람입니다. 2,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탁월한 사람이 되는 두 번째 조건은 긍휼함을 베푸는 것입니다. 왜 긍휼함이 탁월함의 조건이 되는지 야고보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야고보서 2: 13을 보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하였습니다. 긍휼(mercy)이란 상대방을 향하여 마땅히 베푸는 폭넓은 행위입니다. 긍휼은 은혜와는 다릅니다. 은혜란 거저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원한 생명, 구원, 중생, 하늘나라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사람에게 거져 주시는 은혜입니다. 은혜는 사람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받을 수 없는 가운데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씀입니다. 내가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심판의 그날에 나에게도 긍휼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때 의를 기준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그 의에는 긍휼함이 있어야 하는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일을 할 때 주의해야 할것이 있다면 내가 긍휼을 베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자신의 고집을 앞세우다가 자비를 베풀지 못한다면 우리도 긍휼함을 받지 못하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긍휼을 베푸는 곳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긍휼함의 체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의 기도를 보십시오.(단 9: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옵소서 다니엘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긍휼을 의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사자의 굴에서 구원하고 위대한 지도자로 사용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탁월한 사람은 긍휼을 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사역은 의로 하기보다 긍휼로 하는 것입니다. 의를 너무 강조하다가 사람을 잃고 교회가 분열이 되고 상처를 주면서 교회를 세워간다면 그 교회는 심판의 때에 견디지 못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탁월한 사람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다니엘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용서하소서”라는 기도는 기도 중의 가장 위력있는 기도입니다. 저 사람을 심판해 달라는 기도나 저 사람을 손봐달라는 기도는 긍휼이 없는 기도이며 칼을 휘두르며 기도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탁월한 지도였습니다. 그의 지도력은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지도력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 쫒기어 유다 광야에서 숨어지낼 때 아둘람굴에 400명이 몰려 들었습니다. 사무엘상 22:2에 보면 그 사람들의 신분계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환난 당한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데리고 다윗은 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신분 회복을 위하여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다윗이 왕이 되어 강한 지도력을 갖고 나라를 세울때 함께할 용사들이(삼하23:8-39) 필요했는데 바로 유다 광야 아둘람 굴에 살았던 그 사람들이 다윗을 도왔습니다. 이렇게 긍휼함을 갖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긍휼과 자비는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것이고 용기를 주는것이고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능력입니다. 긍휼을 베풀면 반드시 돌아오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궁휼을 베푸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미래를 심는것입니다. 교회의 사역은 긍휼의 사역입니다. 교회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해서 있는 곳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가 옳고 그름만 따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만 하는 곳이라면 죽음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소망을 주며 허물과 단점을 가려주게 된다면 어떤 사람들도 치유를 받고 생명을 얻는 곳이 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교회가 아니라 긍휼을 알게 하는 교회가 되도록 탁월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3, 정직히 행하여야 합니다. 탁월한 사람이 되는 세 번째 조건은 정직입니다. 요즘 세상이 하두 거짓이 판을치고 가짜가 많고 위장을 잘하여서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시대가 찾는 탁월한 사람은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시대가 너무나 부패되고 거짓으로 뒤덮여 있기에 바르고 정직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정직함은 힘이있는 것이고 정직한 사람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위대한 사람도 정직한 사람입니다. 신명기 6:18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신명기 13:18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정직을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여호와 목전에서 정직히 행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 앞에서의 정직보다 더 중요 합니다. 하나님앞의 정직이라는 것은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하나님은 동행해 주십니다. 역대하서에 소개된 유다의 왕들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쓰시고 버리시는 기준이 정직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정직을 행한 왕들은 나라도 평안하고 하나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셨던 정직한 왕들은 여호사밧(20:32), 요아스(24:2), 아마샤(25:2), 웃시야(26:4), 히스기야(29:2), 요시야(34:1,2)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나라를 탁월하게 다스린 왕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쓰십니다. 역대상 29:17에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라고 다윗은 하나님이 정직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정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거절하는 사람은 거짓을 행하는 자입니다(잠6:16-19). 거짓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습니다. 거짓은 심판을 받습니다(계22:15). 거짓은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행동입니다(잠17:9).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시편 112:2에 보면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약속했습니다. 복을 받는 교회나 복을받는 가정은 모두 정직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에게 기쁨을 주시고(시97:11), 정직한 자에게 의를 베풀어 주십니다(시36:10). 정직한 자를 돌보시며(욥8:6) 정직한자의 삶을 인도하시고 정직한자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시125:4, 잠11:6, 신6:18,19). 무엇보다도 정직한 사람은 마음이 즐겁습니다(시32:11, 97:11). 또한 정직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비밀의 지혜를 미리 알려 주신다고 잠언 2:7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직은 탁월한 사람이 되게 하는 자질인 동시에 실천 신앙입니다. 교회도 정직한 곳이 될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잠언 14:11을보면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으나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흥하는 집과 망하는 집의 기준이 정직입니다. 개인도 똑 같습니다. 흥하는 인생과 망하는 인생의 차이도 정직에 있습니다. 거짓을 통해서는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관계이든 돈 관리이든 경영이든 교회 사역이든 모든 것의 기준이 정직입니다. 진흥하는 기업이나 교회도 정직에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정신, 물질,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더러우면 하나님은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능력과 축복을 주십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탁월한 사람이 되려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을 통해 들었습니다. 탁월한 태도는 거룩과 긍휼과 정직이라고 했습니다. 탁월한 사람은 탁월한 태도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탁월하게 쓰임받기 원한다면 탁월한 태도로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일으키시고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탁월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깨끗하게 만드는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거룩하게 세우는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하고 거룩한 모습. 긍휼을 베푸는 넓은모습, 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쓰임 받는 탁월한 리더자들이 되어 우이제일교회를 더욱 반석위에 세워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무웅 목사(서울 강북구 우이동 우이제일교회)
교회가 축복의 통로입니다/ 시122:1-9/ 맥추감사주일직전주일설교/ 2012-06-24
교회가 축복의 통로입니다 시122:1-9 맥추감사절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인도에 대한 감사의 절기라고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절기를 삼아서 감사를 드리는 기간입니다. 사람은 하루에도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루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생명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일을 알지 못하는 연약한 인생들에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가는 길에 빛이 되시고 발에 등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셔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축복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더 큰 축복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 에덴동산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즉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신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죄를 지음으로 에덴을 잃어버렸고,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또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 인생을 만나주실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광야를 지날 때 성막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성막에서 백성을 부르시고, 만나시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는 공간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막은 작은 에덴동산과 같은 곳입니다. 성막은 에덴에서 추방당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최고의 은혜요 축복의 선물이었습니다. 에덴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지파가 성막을 향하여 머리를 두었습니다. 즉 생각의 중심이 성막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막이 움직일 때 움직여야 했습니다. 이 말은 삶의 중심이 성막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막이 곧 그들의 보호이며, 인도이며, 축복이며, 능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마침내 솔로몬 때에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다윗이 준비하여 솔로몬이 건축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 후 하나님께서 아주 세부적으로 자세하게 성전을 어떻게 건축해야 할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여 성전 봉헌을 마쳤을 때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왕상9: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이처럼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두고, 하나님의 마음과 눈길이 항상 머무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전을 사모해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은 성전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면 기뻐야 합니다. 평안함을 느껴야 합니다. 어머니 품과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을 사랑하고 가까이했던 완벽한 모델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다윗입니다. 본문 1절에도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것, 성전에 머무는 것, 성전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기쁘고 즐거워야 합니다. 물론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만 아니라 모든 지파와 백성들이 예루살렘 곧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였고 만족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6.7절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에 올라가는 성도는 형통하게 됩니다. 평안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성전에 나오는 것을 좋아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에 나오는 성도를 기억하시고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구약에서는 성전 개념이었다면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교회가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지불하시고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곳에서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으며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며 훈련받고 교회를 통해서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떠나서 자신들을 생각할 수 없듯이 오늘 우리도 교회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섬김의 공간, 사역의 공간 전도와 양육의 공간, 생명의 산실이며 축복의 통로가 되는 곳입니다. 예배를 드리다 복을 받고, 기도하다 응답을 받고, 섬기며 전도하다가 영혼을 구원하고, 훈련과 양육을 통해서 자신의 성장을 이루며, 교우와의 관계 가운데서 절제와 인내를 배웁니다. 교회는 세상을 이길 힘을 얻는 공간이며, 하나님과의 소통의 공간이며 성도와의 교제의 공간입니다. 이 세상에 교회보다 더 아름답고 복된 곳은 없습니다. 교회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교회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나의 축복의 통로이며, 우리의, 민족과 족속과 나라와 열방 가운데 축복의 통로입니다. 교회를 사랑합시다. 교회를 가까이 합시다. 교회의 부흥과 형통을 위해 기도합시다. 교회를 위해 헌신합시다. 교회를 세웁시다. 교회를 존중히 여깁시다. 교회를 통해 축복이 흘러가기를 축복합니다. 류우열 목사(인천 복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