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나라가 평안함을 얻으니라/ 대하14:1-8/ 2008-05-27
나라가 평안함을 얻으니라 대하14:1-8 5절에 보면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고 합니다. 오늘 제목은 ‘나라가 평안함을 얻으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내일이면 17대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을 합니다. 축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사람인 장로 대통령이 정말 귀한 믿음으로 대통령의 책무를 다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를 바란다는 바램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지금도 이 나라의 가장 필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가정에도 마찬가지고 개인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안이 필요합니다. 평안해야 행복하고 건강하고 다 좋은 것입니다. 샬롬! 샬롬이 있을지어다. 평안이 있을지어다. 평안, 샬롬이 있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샬롬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평화의 왕으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때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집니다. 그래서 분열된 르호보암은 분열된 유다왕국의 일대왕이고 이대는 아비야, 삼대가 아사왕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통일왕국의 왕이었고, 아사는 분열된 남쪽 유다왕국의 세 번째 왕입니다. 그는 아버지 아비야와 같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지 않은 왕이었습니다만 아사는 아버지와는 달리 그 윗대의 할아버지 다윗을 본받아서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사는 왕이되자말자 종교의 개혁을 하고 예배를 회복시키고 이스라엘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도록 해서 그 땅에 자신이 통치하는 동안 평화가 있게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1절에도, 5절에도, 6절에는 두 번이나, 7절에 한번해서 평안이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 나라에 필요한 것은 평안입니다. 경제적부흥도 좋지만 가난한 사람도 평안하고, 노인들도 평안하고, 할렐루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평안함을 누리는 나라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도자가 바로 서야 하고, 모든 백성들이 바르게 설때 그 땅에 평안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안함은 어디서 오느냐? 다 평안을 원하지만 평안은 사람이 만들 수 없습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6절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7절 끝에도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즉 하나님께서 그 땅에 평안을 주셨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평안은 돈으로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으리으리한 그런 집을 짓고, 정말 좋은 것으로 갖추어도 그것가지고 평안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평안은 권력으로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평안은 사람의 머리로써 평안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평안은 사람이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수고를 해도 여러분이 평안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돈이 많으면 평안하겠다. 여러분들 천억짜리 복권, 십억 이십억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국에는 오백억, 천억짜리 복권이 있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천억짜리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 다 평안하지 못해요. 통계가 있는데 다 가정이 파괴되고 평안을 누리지 못해요. 권력으로도 평안을 만들 수 없어요. 평안은 하나님만이 주시는 귀한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평안은 위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평안은 위에서, 하늘로서,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평안은 하늘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은 14:27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모조품입니다. 잠시 평안한것같은데 그것은 끝이 안좋아요. 모조품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평안은 어디로부터 와요? 하나님, 하나님이 주십니다. 시편 4편 8절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나를 안전히 거하게, 나를 평안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언제 이 시편을 지었느냐? 사울왕에게 쫓겨서 온 광야를 헤메고, 때로는 토굴에서 자고, 때로는 빈들에서 잠을 자면서 정말 생명이 언제 날라갈지 모르는 그런 위험과 어려움 속에서 다윗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지켜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 환경이었지만 다윗에게는 평안이 넘친 줄 믿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다윗을 쫓고 있는 사울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습니다. 좋은 장막 속에서 잠을 자지만 그 기름진 것을 먹으면서도 사울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9:11에도 “여호와께서 자기 백서에게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을 주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평안은 하니님이 주시는 것이구나! 평안은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여러분 믿음으로 말미암아 샬롬의 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삶속에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 평안을 주시느냐?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평안을 주시지 안습니다. 하나님은 합당한 자에게 평안의 복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왜 아사왕에게 그가 다스리는 나라위에 평안을 주셨는가 하는 이유를 너무나 상세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그것을 배움으로 말미암아 아사왕에게 믿음을 통해서 아사왕이 받은 평화의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첫째, 아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앞에 평안의 복을 받았습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였다” 선정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올바른 지도자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니님이 그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는 권력을 가진자로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이 왜 세우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 아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였습니다. 백성을 정말 사랑하고, 백성이 잘 살게 되기를 위해서 그는 힘을 쓰는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명을 다하시기를 원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평강의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사욕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그 나라는 평화가 깨어지고, 그 나라는 모든 면에서 어려움과 불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도자가 좋아야 합니다. 가정에도 부모가 좋아야 됩니다. 선과 정의를 행할 때 하나님 앞에 바로 설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평안의 복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72:1-7의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이제 귀한 대통령이 이 나라를 선과 정직함으로 잘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흥왕하는 나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실한 자가 거짓말하고 잘못된 사람은 다 나라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바르고, 의롭고, 깨끗하고, 착하고, 충실한 사람이 흥왕할 수 있는 나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나라가 되어야지요. 그 때 평안함이 달이 차는 것처럼 차진다고 했습니다. 며칠전 정월대보름 때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사람과 이동터널을 지나가는데 깜짝 놀랐서요. 이만한 달이 턱 나타나는 거예요. 저게 뭐야하고 보니까 달이에요. 육십년만에 그렇게 큰 달은 처음 봤서요. 아내보고 “저거 이슬람 사람들이 구워먹는 떡같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큰지...오늘 하나님이 선과 진리를 위에 바르게 서 있는 사람에게 달이 충만한 것같이 평안해진다고 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지도자가 바로 설 때, 지도자가 올바른 사람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의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아사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을 깨끗하게 제거하므로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셨다고 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상을 찍고” 5절에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고 합니다. 산당은 우상을 섬기는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왜 아사에게 평안함을 주셨느냐? 아사는 하나님이 권력을 주실 때 그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실 때 그 주신 힘을 가지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제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오늘 여러분이 평안함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이 충만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를 생각합니다. 아사가 그랬습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평안함을 얻고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우상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제거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제거했을 때 하나님은 아사를 사랑하셔서 그 통치 기간동안에 그 땅에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아사의 열정이 얼마나 컸느냐? 역대하 15:16을 보겠습니다.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얼마나 아사의 우상을 철폐하려는 열정이 강력했는지 모릅니다. 온 백성에게 우상을 제거하라고 하고 이제 실행하는데 아사의 어머니, 왕의 어머니 태후가 우상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아들이 가만히 안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런 짓을 했지만 왕은 어머니로 하여금 태후의 위를 패했습니다. “당신은 왕의 어머니로서의 태후의 자격이 없습니다.”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그래서 얼마나 과감합니까? 얼마나 단호했습니까?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제거함에는 인정사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사를 사랑하셔서 우상을 제거하는데 온 생명을 쏟아놓은 아사에게 그가 통치하는 기간동안에 그 땅에 평안을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평안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언제 평안합니까? 하는 일이 잘 되고, 평안해질 때 평안함이 있을 줄 믿습니다. 어떤 자에게 이런 은혜를 주십니까?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온 노력을 쏟아부을 때 그런 자에게, 그런 가정에, 그런 자가 있는 기업과 나라위에 그런 은혜가 있을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127:2에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뭘 주신다고 했습니까? 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잠이라는 것은 불안하면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괴롭고 힘들고 불안하고 두려워서 잠이 안올 때는 수면제 먹고 자지 마세요. 하나님이 잠을 못자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고민 좀 하라고...잠이 안오니까 뭐까지 먹습니까? 수면제 두알 세알 먹고, 신경안정제 먹고 잠을 청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세요. 이상하게 잠이 안올 때는 우리가 찾아야 될 것이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평안함을 얻으려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내게서 제거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놀라운 평안을 우리에게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서울의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 그분은 정말 백그라운드가 보잘 것이 없서요. 촌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정기적인 공부를 못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목회에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을 많이 하시는지 정말 귀한 분입니다. 그분이 고백합니다. 아주 젊은 시절에 기도도 많이 했지만 노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뭘 좋아했느냐하면 바둑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바둑을 주님만큼 사랑한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깨달아지는데 “바둑이 우상이다”는 겁니다. 우상을 만든다고 우상이 되는게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됩니다. 바둑이 딱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이제 내가 바둑을 철거하겠다. 그래서 어느날 낮에 시골교회 마당에 바둑판을 내어놓고는 도끼로 찍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반쪽이 난 바둑판을 안고는 얼마나 울었다고 합니다. “바둑아 잘 가거라.” 그 때부터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평안을 얻습니까? 하나님 앞에 거리끼는 것, 뭔가 잘못된 것을 정리하고 청산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결단할 때 그 심령과 나라위에 모든 것 위에 평안을 주실 줄 믿습니다. 따라합시다. “정리하자”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정리할 때 그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할렐루야! 셋째, 아사왕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 율법과 명령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4절에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라고 합니다.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의 마씀을 지켜 행하도록 왕이 명령은 내렸습니다. 대단한 왕입니다. 그래야 우리 백성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이 나라가 평안하고...이런 왕입니다. 아사왕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행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아끼고 사랑하셔서 그의 시대에 평안을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절대로 하나님이 평안을 주지 않습니다. 평안은 커녕 하나님의 말씀을 범죄하고 거역할 때는 불안과 염려와 모든 걱정이 내 속에 충만하게 됩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성경은 말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평안의 원리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할렐루야1 아사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평안을 누렸습니다. 다른데 힘쓰지 말고 말씀을 순종하는데 노력할 때 하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속에 평안을 주시고, 장사, 기업과 모든 것에 평안을 복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아사왕은 백성과 함께 주를 찾았습니다. 7절 하반절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고 합니다. 평안을 주셨다고 합니다. 아사왕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평안을 주십니다. 찾는다는 단어는 다라쉬라는 히브리어입니다. 다라쉬는 질문하다, 요구하다라는 뜻입니다. 간절히 요구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누가 기도합니까?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지만 참된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참된 기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헛된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기도가 바른 기도입니까?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늘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는 줄 믿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평안의 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11절에 보시면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라고 합니다. 이 기도는 아사왕 때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쳐들어 왔는데 그 때 한 기도입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평안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괴로운 문제가 있을 때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를 더할 수는 없습니다. 염려함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반드시 그 기도가 이루어질 것을 믿고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면, 기도의 자리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보좌앞에 나와서 믿음으로 엎드리기만 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을 몰아내게 해주실줄 믿습니다. 이상하게 평안이 오는 겁니다. 그렇게 엄청난 걱정거리가 싹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참된 평안을 주실 줄 믿습니다. 먼저 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 평안을 누리고 경험하도록 도와주실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 29:7에도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딤전 2:1-2에도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뭐하라고 했습니까? 특별히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식사할 때마다, 움직일 때마다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지도자가 바로설 때 이 나라에 평안이 오는 겁니다. 담임목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교역자를 위해서 기도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평안함을 얻는 길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호와를 찾음으로 그 땅에 평안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기도할 때 평안함이 오는 겁니다. 고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되는 줄 알고 내 힘으로 사는 줄 알고 사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11절에 읽은 것처럼 우리는 약합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여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함으로 참된 평안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많이 나와서 기도하세요. 새벽마다 많이 나와서 기도하세요. 지금 새벽기도를 개인적으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하고 나와서 기도해보세요. 평안을 주십니다. 또 한가지 마지막으로, 성경전체를 통해서 보겠습니다. 참된 평안을 얻으려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평안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그 무엇을 통해서도 평안을 얻을 수 없는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을 때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므로 평안함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욥기서 22:21에도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합니다. 따라합시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로마서 5:1에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될 때 하나님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속에 차고 넘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대통령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고, 청와대에서 기도하는 대통령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보혈로써 하나님과 늘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에게 그리스도의 평안이 넘치게 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7-8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함을 주셨으니, 이때에 성읍을 건축하고 대군을 양성하자”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셨을때, 나태해지고 마음이 풀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편안할 때 미래를 준비하고 어려울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상황이 좋을때에 힘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편안할 때 기도를 더 많이 하십시오. 그러면 어려움이 올때 넉넉하게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왜 IMF가 왔습니까? 한국이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기 때문이라고 외국의 언론들은 분석했습니다. 돈이 많으니까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면서 정신을 못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IMF가 터져서 얼마나 큰 고난을 겪었습니까? 편안할 때 믿음을 잘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이명박 장로 대통령입니다. 아사와 같은 대통령이 되어 믿음과 지혜로 나라를 잘 섬기고 이끌어서 그를 통하여 한국교회를 통하여 이 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평안이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라의 평안/ 대하14:1-8/ 2004-02-20
나라의 평안 대하14:1-8 국태민안(國泰民安)이란 말이 있습니다. 나라가 태평하고 인민이 살기에 평안함을 가리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남조 유다의 세 번째 왕이었던 아사(B.C 910-869)왕 시대는 실로 국태민안이라고 할 만했습니다. 그는 41년간 유다를 다스린 통치자였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35년까지는 참으로 그와 그 백성이 평안을 누렸습니다(대하15:19). 그러나 그 말기인 6년 동안은 불신앙과 교만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발병이 나서 죽었습니다(대하 16:1-13). 성경은 그의 치세 어간에 \\\'평안했다\\\'는 말을 연발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평안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라의 평안이란… Ⅰ. 국민과 국토와 국권이 안정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민과 국토와 국권(통치권)은 국가(정부) 성립의 3대 요소입니다. 역대하 14장 1절에 「…그 시대에 그 땅이 십 년을 평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14장 5절 하반절에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고 하였습니다. 7절 하반절에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 안을 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15장 15절 중에도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고 하였습니다. 15장 19절에도 「이 때부터 아사 왕 삼십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국민의 생활이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것이 나라 평안의 첩경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나라의 통치권이 튼튼하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아니해야 합니 다. 국토 안팎에 전쟁이 없어야 경제 생산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백성들의 경제가 안정됩니다. 아사 왕 시대의 유다 는 이런 맥락에서 비교적 안정을 누리고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평안했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Ⅱ. 나라의 평안은 위정자(통치자)와 백성이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역대하 14장 7절에 「아사가 일찌기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 라」고 하였습니다. 역대하 15장 2절 중에 선지자 아사랴는 아사 왕에게 「…너희가 만 일 저(하나님)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4절에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12절에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 약하고…」라고 하였습니다. 15절에도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찾았다는 구체 적인 내용들이 무엇인가? 1. 그것은 언약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율례와 명령을 지킨다는 것입니다(대하 14:4). 예컨대 구스 사람 세라가 10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유다를 침략했 을 때, 왕과 백성과 선지자는 일치 단결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적적인 승리를 하고 말았습니다(대하 14:9-15). 2. 유다의 전 지역에 우상과 다 른 신들을 없애고 만 것입니다. 역대하 14장 5절에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아 사 왕은 그 모친 마아가가 가증한 목상을 만들어 우상을 섬긴 일에 대하여 그 태후의 위를 폐하기까지 하였습니다(대하 15:16). 아사왕은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고 싫어하는 우상과 미신을 타파하였습니다. 그것을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일을 했다는 뜻이 됩니다. 3. 왕과 백성들이 선지자의 메시지(말씀)에 감심적으로 신종을 한 것입니다. 오뎃의 아들 선지자 아사랴는 왕 앞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했습니다(대하 15:1-7). 이때 아사 왕은 「…선지자 오뎃(오뎃의 아들 아사랴)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 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대하 15:8) 선지자 오뎃의 아들 아사랴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신의 감동이었습니다(대하 15:1). 그 결과 왕과 백성은 그 마음에 용기를 얻고 용감하게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4. 평화의 때를 선용하였습니다. 아사와 그 백성들은 그 땅의 우상과 여러 잡신들을 타파할 뿐만 아니라, 창조와 건설에 모든 국력을 기울였습니다. 역대하 14장 6절에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저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7절에도 「아사가 일찌기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저희가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한 국토와 국방을 위하여 힘있는 군대를 양성하여 58만의 군대를 가졌습 니다(대하 14:8). 실로 그는 유비무환의 정책을 썼습니다. 평화의 시기를 창조와 건설 에 선용하였습니다. 백성들이 평화의 때를 방종과 방탕으로 낭비하지 않게 하고, 오히려 평화의 때를 부국강병의 기회로 선용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사와 그 백성이 하나님을 찾는 구체적인 내용이요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힘을 얻고, 전 유다 지역에 하나님 이 미워하는 우상과 미신의 세력을 물리치고, 선지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종의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고, 그 결과 평화의 때를 창조와 건설의 기회로 선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평화와 평안의 축복을 더했습니다. Ⅲ. 이 나라 조국(한국)의 평안을 생각할 차례입니다. 이 땅에 자리잡은 나라 치고 완 전한 평화, 영구한 평화를 유지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 큰 이유는 죄로 인하여 타락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세계와 그 가운데 인류 역사를 통치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제한된 국경의 지역들마다 잠정적인 평화를 허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행스럽게도 과거 36년 동안 일본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망국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섭리로 1945년 8월 15일을 기하여 해방을 받았습니다. 해방이 되자마자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전쟁 후에 일어나는 이 땅의 평화 정착이라는 미명이었으나, 그 결과는 남북이 오늘까지 양분되고 마는 비극의 결과뿐입니다. 그나마 민주주의를 국시로 지향하는 우리 남한은 이승만이 주도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1948.8.15). 그러나 이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유물론적 공산주의를 국시로 하는 별개의 정부가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그후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은 남침을 감행하여 남한 전역을 초토화하고 전화(戰禍)를 입혔습니다. 미 국방성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전쟁에 총 5백72만 명의 군대가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측에서만 41만5천 명의 장병과 10만3천2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기록에는 민간인 37만6 천 명의 학살되고 12만3천여 명의 민간인이 납치되었으며, 20만 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은 전사자 5만4천2백 명, 부상자 10만3천2백 명의 피해가 발생했고, 나머지 UN군 가운데 3천1백43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였습니다. 북한과 중공은 1백34만7천여 명이 전사 또는 부상하고, 59년도에 발행된 \\\'북경 리뷰\\\'는 북한의 인구 20%에 해당되는 2백만 명의 어린이가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밖에 한국에서 25만 명의 상이용사와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죄없는 전쟁고아가 생겨났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이 입은 재산의 피해는 그 당시 80억 달러로 추정하고, 미국이 투입한 전쟁 경비는 150억 달러나 되는 천문학적 숫자라고 하였습니다. 북한의 손실은 남한보다 수십 배나 더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기록을 보면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은 무모한 남침 전쟁을 도발하여 660여만 명의 사상자(군인 230만,민간인 430만)를 발생시키고, 공장 900여 개, 주택 60여만 동을 위시하여 산업 시설, 문화 유적 등 전 국토 4/3을 초토화 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과 함께 3년만에 중지되었으나 그 비극의 상처는 판문점이라고 하는 장소에서 반세기가 가깝도록 대치되고 있습니다. 바로 전쟁이 남긴 비극입니다. 그 후에 계속된 초대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그 말로가 독재로 끝이 나고, 그 다음 장면 내각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는 무능으로 9개월만에 박정희 군사 혁명 정부 앞에서 끝이 나 버렸습니다. 사실상 그때부터 우리는 군사 독재의 공포 정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이것이 전두환, 노태우 정부까지 계속이 되었습니다. 이 어간에 온갖 부정과 부패는 만연되어 그것이 공공 기관의 생리 적 습성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후 이른바 김영삼이 이끄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게 되었고, 그 결과는 역사에도 없었던 I.M.F시대를 남기고 끝을 맺었습니다. 현재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이 른바 국민의 정부는 경제 재건, 온갖 류의 부정 부패 개혁 그리고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일관해 오고 있는 국방력 강화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역대 통치자들의 종교적 성향을 보면 이승만은 기독교적 정신이었고, 장면은 로마 천주교였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불교였고, 김영삼은 기독교였습니다. 현재 김대중 대통령은 천주교와 기독교의 합성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 어간에 우리는 수많은 정치적 권력의 진통을 겪었습니다. 군사적 위기와 경제적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교육적, 사회적, 문화적인 극심한 변동의 산고를 겪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평안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국토가 양단이 되어 대치 상태에 있습니다. 역대 통치자들의 통치의 모순과 백성들의 불안이 연속되었습니다. 국민과 국토와 국권이 안정세를 유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안 속에서 평안을 가 지고 사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온갖 진통의 곡절 속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국시로 하고, 자유 시장 경제를 하게 되고, 언론과 출판과 거주와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미증유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수가 천만이 넘는 기독교적 한국이 되었습니다. 지난 6월 15일, 서해 연평도 앞바다에서 북한의 전투 함정들과 남한의 전투 함정들이 15분 정도 한바 탕 교전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온종일 매스컴은 열을 뿜었습니다. 우리는 잠시나마 긴장했고, 세계의 이목은 코소보에서 우리나라로 다시 집중되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금은 잠잠한 가운데 대치 상태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6·25 사변이 발발한 이후로 육지와 바다에 서 종종 있었던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실로 우리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있다면 긴장 속에서의 평안, 잠정적인 평안, 공포 속에서의 평안 그리고 국토가 양단 된 부분적인 평 안이라고 애써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라가 평안해야 합니다.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서 전화(戰禍)를 입는 비극은 다시 이 땅에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희생을 지불하고라도 이 땅에 전쟁 을 막아야 합니다. 어떠한 인내를 계속해서라도 우리는 전쟁만은 막아야 합니다. 전쟁은 죽음, 멸망 그 자체입니다. 지금 우리는 저 유고슬라비아 코소보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정부가 표방하는 햇볕 정책 중 포용의 정신은 우리의 지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위정자와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전심으로 찾아야 합니다. 힘써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도움을 기다리는 기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 상과 미신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잠정적인 평화의 어간을 창조와 건설에 총동원해야 합니다. 결코 허랑방탕하는 낭비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여기에 한국 교회의 결정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 교회는 과거도,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가 사 는 조국에 평화의 비둘기들이 되어야 하고, 7천만의 불침번이 되어야 합니다. 영국은 세 번씩이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 첫 번째는 성경 일부를 번역한 알프레드(Alfred)대왕의 통치기간이었습니다. 이때 영국은 미개와 분열에서 통일된 나라, 문명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두 번째가 전 성경을 공식적으로 증진시킨 엘리자베스 여왕 1세의 통치기간이었습니다. 이때 영국은 처음으로 세계 열강 대열에 섰습니다. 그 세 번째 는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기간으로 여왕 자신과 전국민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대영제국이란 말이 나오게 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때 세계의 통치자들이 부러워 하는 마음으로 빅토리아 여왕에게 영국 태평성대의 이유를 질문하였습니다. 그때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손에 성경을 높이 들고, 이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이 우리 영국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자신있게 대답하였습니다. 세계제2차대전이 끝난 다음이었습니다. 미국과 구라파에서 여론 조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조사 설문 중에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여러 설문 중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가장 많았고, 그 대답 중에 압도적인 열망은 \\\'평화(peace)\\\'라 고 하였습니다. 매튜 헨리(M. Henry)는 \\\'평화는 너무나도 귀중한 보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존 밀턴(J. Milton)은 \\\'평화는 전쟁에 못지 않게 유명한 승리를 갖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단 테(Dante)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평화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케네디(J. F. Kennedy)는 \\\'확실히 평화는 인간심리의 가장 심오한 희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을 찾아야 평안이 옵니다. 통치자와 백성들이 모두 함께 하나님을 찾아야 평안이 옵니다. 하 나님을 찾아야 국토가 보존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국권(통치권)이 튼튼해집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국민이 평안해집니다. 개인과 가정과 이웃이 평안해집니다. 영적으로 평안하고,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평안해집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나라의 절대적인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시편 127:1, 대상 29:10-13). 6·25동란 49주년의 달을 보내면 서 \\\"주여! 조국에 평화를 주옵소서! 통일 한국의 축복을 주옵소서! 선교 한국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바로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라가 평안할 때만이 별들의 전쟁(복음 전도)이 활발해지기 때문입니다. - 아 멘 -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라/ 마5:10-12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라 마5:10-12 하늘 상을 받읍시다. 하나님 상을 받읍시다. 오늘 예배 참석하신 성도님 모두 하늘의 상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양식으로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거스르고 악한 말을 듣고 모욕을 당해도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하는 이유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를 위하여 ....... 첫째 하나님의 품성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시편 116편 5절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 우시며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악인과 의인의 차별성과 동일성은 무엇입니까? 동일성은 세가 지입니다. 1. 아침에 기상하고 저녁에 수면하는 것이 똑같습니다. 2.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전화하고 기획하고 도전하는 것이 똑같습니다. 3. 실수하고 실족하고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똑같습니다. 의인은 경우가 바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기 때문에 의인이 아닙니다. 의인은 첫째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자 기의 실수와 허물을 반성하고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이 의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오른편의 강도처럼 \\\'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불쌍히 여기소 서\\\' \\\'네가 나와 함께 오늘 낙원에 이르리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악인은 강도, 살인, 폭력, 배반, 거짓, 시기하는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 하고 죄를 짓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끝까지 자기 뜻을 고집하고, 주장하고, 완악하고, 자기 의 멋대로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왼편에 \\\'네가 그리스도냐 어서 너도 살고 나도 살리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처음에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 나 나중에는 만나는 길도 없고 통하는 길도 없고 엄청난 차이만 납니다. 잠언 4장 18절 \\\'의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 여러분은 새벽에 여명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희미한 밝음이 신비하게 퍼지고 생명이 분출하 여 충만한 광명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4장 19절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서 넘어 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 \\\" 어둠은 그냥 깊은 어둠으로 순식간에 오 는 것이 아니라 점점 하나씩 하나씩, 어둑어둑, 어슴프레한 것이 깊은 어둠으로 사방이 덮입 니다. 아주 조금씩 한걸음씩 달라져도 새벽부터 정오까지, 저녁부터 자정까지 조금씩 달라지는 것 입니다. 악인이나 의인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방향성만 다릅니다. 내적 방향만 다릅니 다. 의인은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다짐할 것은 다짐하고, 중심에 예수를 모시고 삽니다. 그러나 죄인은 그냥 저냥 삽니다. 되는대로, 가는대로, 흐르는 대로, 통제없이 감각이 없이 살아갑니다. 규모가 없으니까 중심이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미성숙한 사람을 만나면 우 열감과 희열 속에 살고, 자기보다 조금만 성숙한 사람에게는 질투하고 주눅들고 삽니다. 그러나 의인은 가난한데도 처할 줄 알고, 부한데도 처할 줄 알고, 남을 멸시하지도 않고, 주 눅들지도 않고, 참 자유를 느끼며, 선물하며, 남도 빛내고, 자기도 빛내고, 정오의 빛처럼 삽 니다. 그러나 악인은 남도 어렵게 만들고 자신도 어렵게 만듭니다. 남도 차겁게 자신도 차겁게 남 도 병들게 자기도 병들게 만듭니다. 둘째 이유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도 의롭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방법을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습니까? 왜 물에 씻겨주고 불에 태우고 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죄를 씻겨주어도 금방 죄를 짓고 아무리 불에 태워 죄를 없이 하여도 순간에 죄를 만들고 날마다 순간마다 죄 속에 살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와 죄 많은 사람이 죄를 없이하는 방법입니다. 순간에 죄를 지을 때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순간의 죄 씻김을 받으며 의인으로 살게 하는 것 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죄 없음과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과 하나님의 사랑 을 신뢰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5장 21절 하나님의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 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장 2절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4절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 니.......... 믿음으로 죄를 씻고 믿음으로 정결해 지고 믿음으로 바라봄으로 죄와 결별하게 되는 것입니 다. 믿음으로 죄와 결별하고 하나님의 의 안에 의롭게 되는 사람의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의 의를 내세우면 안됩니다. 로마서 10장 3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에게 비유 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기도도 있고 감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릅니 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따로 서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나를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합니다. 자기를 자랑합니다. 타인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사람은 자기 의가 없기 때문에 남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 죄인을 .... 둘째 사람만 의식하면 안됩니다. 마태복음 6장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 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구제할 때와 선을 행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기도할 때는 길 어귀나 사람이 많이 출입하는 시장 어귀에서 하지 말고 은밀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갚아 주 십니다. 사람을 의식함은 하나님이 중심에 없고 하나님을 의식하면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셋째 인격을 도야가 정지되면 안됩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야고보서 1장 20절) 자신에게 못마땅 하고 성을 내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성을 내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여러분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의 불행을 알고 있습니까? 자기의 딸을 결혼시키려고 1400만 불을 사용했습니다. 결혼식을 위하여 결혼식장 주변에 호텔 두 개를 세우고 비행장을 건립 하였습니다. 필리핀에도 700가지 튜우립이 있는데 네덜란드와 하와이에서 수입하여 결혼식 장에서 공항까지 뿌렸습니다. 국민들은 가난하여 일상적인 양식이 없는데 ...... 결국은 미국으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마르코스는 죽고 더 불행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멜다여사는 죽은 남편 송장을 미이라를 만들고 한 달에 한번씩 목욕을 얼굴에는 화장을 했습니다. 사람이 악인이 되는 길은 하나님이 없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정세환이라는 사람은 신장이 이상이 있어서 어머니 의 신장을 이식했지만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위태해진 생명을 위하여 방송으로 정세환을 살려달라고 긴급방송을 했습니다. 어떤 청년이 왔는데 신비하리만큼 정세환이라는 사람과 체질이 일치하여 이식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세환은 병세가 뚜렷하게 호전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무명의 청년은 자기의 치료비 190만원을 지불하고 아무도 모르게 퇴 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가족들은 놀라서 그 청년을 수소문한 결과 의무 기록에 남한주라는 이름과 경북 선산이 고향이며 서울 은평구 어느 주유소에서 일한 것으로만 표기 되었습니 다. 이미 도착해 보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소문한 결과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에 보람 있는 일을 하려고 기도한 크리스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상을 넘치게 받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이 배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욕 먹고 악한 말을 들을 때는 하늘에서 내리는 상이 있 습니다. 끝까지 자기를 내세우고 남을 멸시하고 정죄하고 자랑하며 사람만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 은 하늘의 상이 없습니다. 하늘의 상을 넘치게 받으시는 천국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라/ 마5:10-12/ 2003-11-23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라 마5:10-12 하늘 상을 받읍시다. 하나님 상을 받읍시다. 오늘 예배 참석하신 성도님 모두 하늘의 상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양식으로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거스르고 악한 말을 듣고 모욕을 당해도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하는 이유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를 위하여 ....... 첫째 하나님의 품성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시편 116편 5절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 우시며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악인과 의인의 차별성과 동일성은 무엇입니까? 동일성은 세가 지입니다. 1. 아침에 기상하고 저녁에 수면하는 것이 똑같습니다. 2.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전화하고 기획하고 도전하는 것이 똑같습니다. 3. 실수하고 실족하고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똑같습니다. 의인은 경우가 바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기 때문에 의인이 아닙니다. 의인은 첫째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자 기의 실수와 허물을 반성하고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이 의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오른편의 강도처럼 '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불쌍히 여기소 서' '네가 나와 함께 오늘 낙원에 이르리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악인은 강도, 살인, 폭력, 배반, 거짓, 시기하는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 하고 죄를 짓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끝까지 자기 뜻을 고집하고, 주장하고, 완악하고, 자기 의 멋대로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왼편에 '네가 그리스도냐 어서 너도 살고 나도 살리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처음에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 나 나중에는 만나는 길도 없고 통하는 길도 없고 엄청난 차이만 납니다. 잠언 4장 18절 '의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 여러분은 새벽에 여명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희미한 밝음이 신비하게 퍼지고 생명이 분출하 여 충만한 광명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4장 19절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서 넘어 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 " 어둠은 그냥 깊은 어둠으로 순식간에 오 는 것이 아니라 점점 하나씩 하나씩, 어둑어둑, 어슴프레한 것이 깊은 어둠으로 사방이 덮입 니다. 아주 조금씩 한걸음씩 달라져도 새벽부터 정오까지, 저녁부터 자정까지 조금씩 달라지는 것 입니다. 악인이나 의인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방향성만 다릅니다. 내적 방향만 다릅니 다. 의인은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다짐할 것은 다짐하고, 중심에 예수를 모시고 삽니다. 그러나 죄인은 그냥 저냥 삽니다. 되는대로, 가는대로, 흐르는 대로, 통제없이 감각이 없이 살아갑니다. 규모가 없으니까 중심이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미성숙한 사람을 만나면 우 열감과 희열 속에 살고, 자기보다 조금만 성숙한 사람에게는 질투하고 주눅들고 삽니다. 그러나 의인은 가난한데도 처할 줄 알고, 부한데도 처할 줄 알고, 남을 멸시하지도 않고, 주 눅들지도 않고, 참 자유를 느끼며, 선물하며, 남도 빛내고, 자기도 빛내고, 정오의 빛처럼 삽 니다. 그러나 악인은 남도 어렵게 만들고 자신도 어렵게 만듭니다. 남도 차겁게 자신도 차겁게 남 도 병들게 자기도 병들게 만듭니다. 둘째 이유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도 의롭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방법을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습니까? 왜 물에 씻겨주고 불에 태우고 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죄를 씻겨주어도 금방 죄를 짓고 아무리 불에 태워 죄를 없이 하여도 순간에 죄를 만들고 날마다 순간마다 죄 속에 살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와 죄 많은 사람이 죄를 없이하는 방법입니다. 순간에 죄를 지을 때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순간의 죄 씻김을 받으며 의인으로 살게 하는 것 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죄 없음과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과 하나님의 사랑 을 신뢰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5장 21절 하나님의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 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장 2절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4절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 니.......... 믿음으로 죄를 씻고 믿음으로 정결해 지고 믿음으로 바라봄으로 죄와 결별하게 되는 것입니 다. 믿음으로 죄와 결별하고 하나님의 의 안에 의롭게 되는 사람의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의 의를 내세우면 안됩니다. 로마서 10장 3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에게 비유 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기도도 있고 감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릅니 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따로 서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나를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합니다. 자기를 자랑합니다. 타인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사람은 자기 의가 없기 때문에 남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 죄인을 .... 둘째 사람만 의식하면 안됩니다. 마태복음 6장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 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구제할 때와 선을 행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기도할 때는 길 어귀나 사람이 많이 출입하는 시장 어귀에서 하지 말고 은밀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갚아 주 십니다. 사람을 의식함은 하나님이 중심에 없고 하나님을 의식하면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셋째 인격을 도야가 정지되면 안됩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야고보서 1장 20절) 자신에게 못마땅 하고 성을 내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성을 내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여러분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의 불행을 알고 있습니까? 자기의 딸을 결혼시키려고 1400만 불을 사용했습니다. 결혼식을 위하여 결혼식장 주변에 호텔 두 개를 세우고 비행장을 건립 하였습니다. 필리핀에도 700가지 튜우립이 있는데 네덜란드와 하와이에서 수입하여 결혼식 장에서 공항까지 뿌렸습니다. 국민들은 가난하여 일상적인 양식이 없는데 ...... 결국은 미국으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마르코스는 죽고 더 불행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멜다여사는 죽은 남편 송장을 미이라를 만들고 한 달에 한번씩 목욕을 얼굴에는 화장을 했습니다. 사람이 악인이 되는 길은 하나님이 없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정세환이라는 사람은 신장이 이상이 있어서 어머니 의 신장을 이식했지만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위태해진 생명을 위하여 방송으로 정세환을 살려달라고 긴급방송을 했습니다. 어떤 청년이 왔는데 신비하리만큼 정세환이라는 사람과 체질이 일치하여 이식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세환은 병세가 뚜렷하게 호전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무명의 청년은 자기의 치료비 190만원을 지불하고 아무도 모르게 퇴 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가족들은 놀라서 그 청년을 수소문한 결과 의무 기록에 남한주라는 이름과 경북 선산이 고향이며 서울 은평구 어느 주유소에서 일한 것으로만 표기 되었습니 다. 이미 도착해 보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소문한 결과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에 보람 있는 일을 하려고 기도한 크리스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상을 넘치게 받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이 배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욕 먹고 악한 말을 들을 때는 하늘에서 내리는 상이 있 습니다. 끝까지 자기를 내세우고 남을 멸시하고 정죄하고 자랑하며 사람만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 은 하늘의 상이 없습니다. 하늘의 상을 넘치게 받으시는 천국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라/마5:10-12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라/마5:10-12 2003-11-23 15:01:46 read : 8 하늘 상을 받읍시다. 하나님 상을 받읍시다. 오늘 예배 참석하신 성도님 모두 하늘의 상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양식으로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거스르고 악한 말을 듣고 모욕을 당해도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하는 이유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를 위하여 ....... 첫째 하나님의 품성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시편 116편 5절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 우시며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악인과 의인의 차별성과 동일성은 무엇입니까? 동일성은 세가 지입니다. 1. 아침에 기상하고 저녁에 수면하는 것이 똑같습니다. 2.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전화하고 기획하고 도전하는 것이 똑같습니다. 3. 실수하고 실족하고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똑같습니다. 의인은 경우가 바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기 때문에 의인이 아닙니다. 의인은 첫째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자 기의 실수와 허물을 반성하고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이 의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오른편의 강도처럼 '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불쌍히 여기소 서' '네가 나와 함께 오늘 낙원에 이르리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악인은 강도, 살인, 폭력, 배반, 거짓, 시기하는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 하고 죄를 짓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끝까지 자기 뜻을 고집하고, 주장하고, 완악하고, 자기 의 멋대로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왼편에 '네가 그리스도냐 어서 너도 살고 나도 살리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처음에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 나 나중에는 만나는 길도 없고 통하는 길도 없고 엄청난 차이만 납니다. 잠언 4장 18절 '의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 여러분은 새벽에 여명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희미한 밝음이 신비하게 퍼지고 생명이 분출하 여 충만한 광명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4장 19절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서 넘어 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 " 어둠은 그냥 깊은 어둠으로 순식간에 오 는 것이 아니라 점점 하나씩 하나씩, 어둑어둑, 어슴프레한 것이 깊은 어둠으로 사방이 덮입 니다. 아주 조금씩 한걸음씩 달라져도 새벽부터 정오까지, 저녁부터 자정까지 조금씩 달라지는 것 입니다. 악인이나 의인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방향성만 다릅니다. 내적 방향만 다릅니 다. 의인은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다짐할 것은 다짐하고, 중심에 예수를 모시고 삽니다. 그러나 죄인은 그냥 저냥 삽니다. 되는대로, 가는대로, 흐르는 대로, 통제없이 감각이 없이 살아갑니다. 규모가 없으니까 중심이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미성숙한 사람을 만나면 우 열감과 희열 속에 살고, 자기보다 조금만 성숙한 사람에게는 질투하고 주눅들고 삽니다. 그러나 의인은 가난한데도 처할 줄 알고, 부한데도 처할 줄 알고, 남을 멸시하지도 않고, 주 눅들지도 않고, 참 자유를 느끼며, 선물하며, 남도 빛내고, 자기도 빛내고, 정오의 빛처럼 삽 니다. 그러나 악인은 남도 어렵게 만들고 자신도 어렵게 만듭니다. 남도 차겁게 자신도 차겁게 남 도 병들게 자기도 병들게 만듭니다. 둘째 이유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도 의롭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방법을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습니까? 왜 물에 씻겨주고 불에 태우고 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죄를 씻겨주어도 금방 죄를 짓고 아무리 불에 태워 죄를 없이 하여도 순간에 죄를 만들고 날마다 순간마다 죄 속에 살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와 죄 많은 사람이 죄를 없이하는 방법입니다. 순간에 죄를 지을 때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순간의 죄 씻김을 받으며 의인으로 살게 하는 것 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죄 없음과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과 하나님의 사랑 을 신뢰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5장 21절 하나님의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 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장 2절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4절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 니.......... 믿음으로 죄를 씻고 믿음으로 정결해 지고 믿음으로 바라봄으로 죄와 결별하게 되는 것입니 다. 믿음으로 죄와 결별하고 하나님의 의 안에 의롭게 되는 사람의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의 의를 내세우면 안됩니다. 로마서 10장 3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에게 비유 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기도도 있고 감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릅니 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따로 서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나를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합니다. 자기를 자랑합니다. 타인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사람은 자기 의가 없기 때문에 남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 죄인을 .... 둘째 사람만 의식하면 안됩니다. 마태복음 6장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 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구제할 때와 선을 행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기도할 때는 길 어귀나 사람이 많이 출입하는 시장 어귀에서 하지 말고 은밀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갚아 주 십니다. 사람을 의식함은 하나님이 중심에 없고 하나님을 의식하면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셋째 인격을 도야가 정지되면 안됩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야고보서 1장 20절) 자신에게 못마땅 하고 성을 내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성을 내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여러분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의 불행을 알고 있습니까? 자기의 딸을 결혼시키려고 1400만 불을 사용했습니다. 결혼식을 위하여 결혼식장 주변에 호텔 두 개를 세우고 비행장을 건립 하였습니다. 필리핀에도 700가지 튜우립이 있는데 네덜란드와 하와이에서 수입하여 결혼식 장에서 공항까지 뿌렸습니다. 국민들은 가난하여 일상적인 양식이 없는데 ...... 결국은 미국으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마르코스는 죽고 더 불행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멜다여사는 죽은 남편 송장을 미이라를 만들고 한 달에 한번씩 목욕을 얼굴에는 화장을 했습니다. 사람이 악인이 되는 길은 하나님이 없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정세환이라는 사람은 신장이 이상이 있어서 어머니 의 신장을 이식했지만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위태해진 생명을 위하여 방송으로 정세환을 살려달라고 긴급방송을 했습니다. 어떤 청년이 왔는데 신비하리만큼 정세환이라는 사람과 체질이 일치하여 이식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세환은 병세가 뚜렷하게 호전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무명의 청년은 자기의 치료비 190만원을 지불하고 아무도 모르게 퇴 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가족들은 놀라서 그 청년을 수소문한 결과 의무 기록에 남한주라는 이름과 경북 선산이 고향이며 서울 은평구 어느 주유소에서 일한 것으로만 표기 되었습니 다. 이미 도착해 보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소문한 결과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에 보람 있는 일을 하려고 기도한 크리스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상을 넘치게 받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이 배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욕 먹고 악한 말을 들을 때는 하늘에서 내리는 상이 있 습니다. 끝까지 자기를 내세우고 남을 멸시하고 정죄하고 자랑하며 사람만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 은 하늘의 상이 없습니다. 하늘의 상을 넘치게 받으시는 천국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마5:10-12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마5:10-12 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라. 하늘 상을 받읍시다. 하나님 상을 받읍시다. 오늘 예배 참석하신 성도님 모두 하늘의 상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양식으로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시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거스르고 악한 말을 듣고 모욕을 당해도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하는 이유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를 위하여 ....... 첫째 하나님의 품성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시편 116편 5절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 우시며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악인과 의인의 차별성과 동일성은 무엇입니까? 동일성은 세가 지입니다. 1. 아침에 기상하고 저녁에 수면하는 것이 똑같습니다. 2.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전화하고 기획하고 도전하는 것이 똑같습니다. 3. 실수하고 실족하고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똑같습니다. 의인은 경우가 바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기 때문에 의인이 아닙니다. 의인은 첫째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자 기의 실수와 허물을 반성하고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이 의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오른편의 강도처럼 \\\'주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불쌍히 여기소 서\\\' \\\'네가 나와 함께 오늘 낙원에 이르리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악인은 강도, 살인, 폭력, 배반, 거짓, 시기하는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 하고 죄를 짓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끝까지 자기 뜻을 고집하고, 주장하고, 완악하고, 자기 의 멋대로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왼편에 \\\'네가 그리스도냐 어서 너도 살고 나도 살리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처음에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 나 나중에는 만나는 길도 없고 통하는 길도 없고 엄청난 차이만 납니다. 잠언 4장 18절 \\\'의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 여러분은 새벽에 여명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희미한 밝음이 신비하게 퍼지고 생명이 분출하 여 충만한 광명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4장 19절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서 넘어 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 \\\" 어둠은 그냥 깊은 어둠으로 순식간에 오 는 것이 아니라 점점 하나씩 하나씩, 어둑어둑, 어슴프레한 것이 깊은 어둠으로 사방이 덮입 니다. 아주 조금씩 한걸음씩 달라져도 새벽부터 정오까지, 저녁부터 자정까지 조금씩 달라지는 것 입니다. 악인이나 의인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방향성만 다릅니다. 내적 방향만 다릅니 다. 의인은 하루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다짐할 것은 다짐하고, 중심에 예수를 모시고 삽니다. 그러나 죄인은 그냥 저냥 삽니다. 되는대로, 가는대로, 흐르는 대로, 통제없이 감각이 없이 살아갑니다. 규모가 없으니까 중심이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미성숙한 사람을 만나면 우 열감과 희열 속에 살고, 자기보다 조금만 성숙한 사람에게는 질투하고 주눅들고 삽니다. 그러나 의인은 가난한데도 처할 줄 알고, 부한데도 처할 줄 알고, 남을 멸시하지도 않고, 주 눅들지도 않고, 참 자유를 느끼며, 선물하며, 남도 빛내고, 자기도 빛내고, 정오의 빛처럼 삽 니다. 그러나 악인은 남도 어렵게 만들고 자신도 어렵게 만듭니다. 남도 차겁게 자신도 차겁게 남 도 병들게 자기도 병들게 만듭니다. 둘째 이유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도 의롭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방법을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습니까? 왜 물에 씻겨주고 불에 태우고 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죄를 씻겨주어도 금방 죄를 짓고 아무리 불에 태워 죄를 없이 하여도 순간에 죄를 만들고 날마다 순간마다 죄 속에 살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와 죄 많은 사람이 죄를 없이하는 방법입니다. 순간에 죄를 지을 때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순간의 죄 씻김을 받으며 의인으로 살게 하는 것 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죄 없음과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과 하나님의 사랑 을 신뢰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5장 21절 하나님의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 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3장 2절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4절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 니.......... 믿음으로 죄를 씻고 믿음으로 정결해 지고 믿음으로 바라봄으로 죄와 결별하게 되는 것입니 다. 믿음으로 죄와 결별하고 하나님의 의 안에 의롭게 되는 사람의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의 의를 내세우면 안됩니다. 로마서 10장 3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에게 비유 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기도도 있고 감사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릅니 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따로 서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나를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합니다. 자기를 자랑합니다. 타인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사람은 자기 의가 없기 때문에 남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 죄인을 .... 둘째 사람만 의식하면 안됩니다. 마태복음 6장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 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구제할 때와 선을 행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기도할 때는 길 어귀나 사람이 많이 출입하는 시장 어귀에서 하지 말고 은밀한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갚아 주 십니다. 사람을 의식함은 하나님이 중심에 없고 하나님을 의식하면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셋째 인격을 도야가 정지되면 안됩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야고보서 1장 20절) 자신에게 못마땅 하고 성을 내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성을 내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여러분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의 불행을 알고 있습니까? 자기의 딸을 결혼시키려고 1400만 불을 사용했습니다. 결혼식을 위하여 결혼식장 주변에 호텔 두 개를 세우고 비행장을 건립 하였습니다. 필리핀에도 700가지 튜우립이 있는데 네덜란드와 하와이에서 수입하여 결혼식 장에서 공항까지 뿌렸습니다. 국민들은 가난하여 일상적인 양식이 없는데 ...... 결국은 미국으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마르코스는 죽고 더 불행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멜다여사는 죽은 남편 송장을 미이라를 만들고 한 달에 한번씩 목욕을 얼굴에는 화장을 했습니다. 사람이 악인이 되는 길은 하나님이 없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정세환이라는 사람은 신장이 이상이 있어서 어머니 의 신장을 이식했지만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위태해진 생명을 위하여 방송으로 정세환을 살려달라고 긴급방송을 했습니다. 어떤 청년이 왔는데 신비하리만큼 정세환이라는 사람과 체질이 일치하여 이식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세환은 병세가 뚜렷하게 호전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무명의 청년은 자기의 치료비 190만원을 지불하고 아무도 모르게 퇴 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가족들은 놀라서 그 청년을 수소문한 결과 의무 기록에 남한주라는 이름과 경북 선산이 고향이며 서울 은평구 어느 주유소에서 일한 것으로만 표기 되었습니 다. 이미 도착해 보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소문한 결과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에 보람 있는 일을 하려고 기도한 크리스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상을 넘치게 받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이 배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욕 먹고 악한 말을 들을 때는 하늘에서 내리는 상이 있 습니다. 끝까지 자기를 내세우고 남을 멸시하고 정죄하고 자랑하며 사람만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 은 하늘의 상이 없습니다. 하늘의 상을 넘치게 받으시는 천국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나실인과 피/ 민6:1-8
나실인과 피 민6:1-8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은 인간구원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창세 이래로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선택하셔서 인류를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 중 레위인을 택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은 나실인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전개하셨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할 수 있는 만인 제사장의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인간 사이에 중보로 세우셨던 나실인과 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민수기 6장은 나실인 서원장입니다. 나실인으로 지켜야할 여러가지 조항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성도의 삶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닫고자 합니다. 1.나실인은 포도나무에서 난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말지며(민 6:3-4)” 포도는 기쁨과 쾌락을 상징합니다. 주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은 기쁨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속담에 ‘포도주 없이 흥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듯 기쁨의 상징인 포도주를 금하신 것은 적어도 나실인은 주님을 위하여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살기보다는 자기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더 기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그물을 버렸습니다. 잡은 고기를 버렸습니다. 직업을 버렸습니다. 가정도 포기했습니다. 나실인은 세상적인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을 통한 행복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중보자가 되기 위하여 가장 큰 것을 버리신 분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우리는 놀고 싶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버리고 끊어내야 합니다. 피곤해도 기도해야 합니다. 아까와도 헌금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전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실인의 삶입니다. 2.나실인은 머리를 깍지 말아야 합니다.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민 6:5)” 하나님의 사람은 과팍하고 괴상해야 한다고 워치만 니는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보기에 그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실인이 왜 머리를 깍지 말아야 하는지 성경에서 그 답을 또 찾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궁금한 것은 성경에서 또 그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전 11:14-15)” 성경대로 하면 남자는 머리를 깍아야 하고 여자는 길러야 합니다. 요즘 여자가 짧게 깎고 남자들이 길게 기르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남자는 깎도록 여자는 기르도록 했는데 유독 나실인만은 남자임에도 머리를 기르도록 했습니다. 왜일까요? 당시에는 종이나 노예만 머리를 길렀습니다. 나실인이 머리를 기른 것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자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나실인은 주님을 위해 멸시천대를 받을 각오가 선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 영광과 분리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사는 것도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그리스도니 사나 죽으나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내 몸을 통하여 그가 존귀히 여김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만신창이가 되어도 후회가 없는 사람이입니다. 수치를 참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나실인은 시체를 가까이 하면 안됩니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그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민 6:6-8)” 나실인은 부모형제의 시체도 만지면 안됩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천연적인 애정, 본능적인 사랑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마지막 가는 장면도 주를 위해서는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부모나 처자를 나보다 더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을 말하라면 대개가 어거스틴과 성 프랜시스를 이야기합니다. 프랜시스의 일화입니다. 프랜시스가 성 다미엔 성전을 지을 때였습니다. 성전에서 돌아오는 길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성전을 수축하라!” 간절한 목소리로 세번이나 들려 왔습니다. 그가 독실한 신자였던 반면에 그의 아버지는 지독한 수전노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장에서 고급 옷감을 장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외국에 물건을 사러갈 때는 프랜시스에게 장사를 맡겼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와 계산을 해보면 물건값과 물건에 항상 차이가 났습니다. 아버지가 자기에게 맡길 때마다 프랜시스는 장사한 돈을 성전을 짓는데 드렸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급기야 아들을 법정에 고소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은 이런 판결을 내렸습니다. “다른 사람이 훔쳤다면 3년형은 족히 받을 것이로되 아들이 훔쳤으니 그만큼 변상하도록 하라” 법정 아래서 돈을 내놓으라는 아버지와 한푼도 없다는 아들이 싸움이 붙었습니다. 한참을 싸우다가 프랜시스는 “아버지 잠깐만 기다리세요”하고 나가더니 2분쯤 지나서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때 그의 모습은 완전히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삐에뜨로피!(나는 당신과 인연을 끊겠소!)”외쳤습니다. 재판관이 달려와 벌거벗은 몸에 법복을 입혀 주었습니다. 아버지와 완전히 결별한 프랜시스는 거지노롯을 하여 결국은 성 다미엔 성전을 완공하고야 말았습니다. 프랜시스가 죽은 뒤에 그의 옷을 세탁하던 사람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의 옷에는 예수님과 똑같은 핏자국이 있었습니다.” 46세로 그는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반찬에 양념을 해먹으면 죄라고 말했습니다. 양념할 돈이 있으면 교회를 건축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용된 돈만이 돈이고 나를 위해서 쓰여진 돈은 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그 안에서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나실인은 그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4.나실인의 서원을 어쩔 수 없이 어긴 것도 죄가 됩니다. “누가 홀연히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거든 그 몸을 정결케 하는 날에 머리를 밀 것이니 곧 제 칠 일에 밀 것이며(민 6:9)” 나실인이 되기 위해서는 100여일을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하고 나아가 위에서 제시한 나실인으로서의 조건들을 다 엄수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99일째 되던 날에 갑자기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 죽으면 지금까지 성별예식을 행했던 것은 무효가 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포도주가 섞인 줄 모르고 먹었다가 사실로 밝혀지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내 잘못 하나없이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진 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시 시작해서 깨끗한 세월을 보내야 합니다. 5.나실인은 남녀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민 6:2)” 나라 제사장과 지파 제사장은 20세 이상 남자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나실인 제사장만큼은 여자도 가능했습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전 생애를 드리기로 결정되고 결심되어진 사람들입니다. 나실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서원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3종류가 있습니다. $.본인의 서원-자신이 자원해서 하나님께 스스로를 드리기로 헌신하는 것입 니다. $.부모적 서원-부모가 자녀에게 의사를 묻지 않고 드리기로 서원되어진 사람 입니다. 하나의 아들 사무엘이 이에 속합니다. $.하나님적 서원-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신이 쓰시고자 구별하시는 사람입 니다. 삼손과 세례 요한이 이에 속합니다. 어떤 이유에서 어떤 경로로 나실인이 되었든 그들은 세상과는 구별되이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헌신되어진 사람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외면하지 말고 오히려 더 힘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당당히 나실인으로서의 사람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길이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고 축복하시는 영광도 있습니다. 기쁨으로 감사로 이 직분을 감당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나실인이 필요한 시대/ 삿13:1-14/ 2005-09-04
나실인이 필요한 시대 삿13:1-14 1.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 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 하지 마라 나는 평생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말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 세 번 싸워 스물 세 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말라 나는 끊임 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 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말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이순신 어록의 한 부분입니다. 지난 일년동안 험난한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 진정한 지도력의 의미를 보여주었던 드라마 이 드디어 막을 내렸습니다. 이순신에 대한 역사왜곡시비를 불러 일으키며, 드라마는 성웅 이순신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인간 이순신을 캐내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방황하는 정치, 추락하는 경제속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의 리더쉽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저는 왜 오늘 우리 민족이 이순신에게 다시 열광하는가를 두가지 이유에서 찾고자 합니다. 첫째는 시대를 넘어서려는 초월적인 노력이었고, 둘째는 위기에 순간을 돌파하는 지도력이라고 봅니다. 첫 번째와 관련해서 드라마 의 원작중의 하나인 의 작가 김탁환 교수의 고백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이순신 역시 시대의 전위에 섰던 인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상관명령에 불복종하고 갈등을 빚으면서도 관습과 관례를 넘으려 했다. 그래서 당대 인물들은 이순신의 말과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터에서는 기존의 전법, 전략이 아니라 새로운 전략을 생각해낸 아이디어맨이었다. 당시 장수 100명중 99명이 왼쪽으로 갔다면, 이순신은 유일하게 오른쪽으로 간 인물이었다” 또한 이순신은 위기에 처했을 때 조차 쉽게 포기하지 않는 낙관적인 리더쉽을 지녔습니다. 이순신의 이야기 한토막입니다.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여 단 열두 척의 배만이 남았을 때, 이순신은 수군을 없애겠다는 조정의 공론에 반박하여 이렇게 말했다.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신이 살아있는 한 왜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왜선 앞에서 동요하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즉 ‘必死卽生, 必生卽死’의 정신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냈습니다. 난세를 창조적으로 타개해 나가는 것, 그것이 이순신을 향한 강렬한 사모의 마음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2.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께 범죄할 때마다 역사적인 난관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도 바로 이스라엘의 시련기였습니다. 지금의 팔레스타인사람들인 블레셋의 지배를 40년동안 받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삼손이라는 사사를 태어나게 하셔서 그 위기를 탈출하게 하셨습니다. 삼손은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나실인’의 신분을 취득해야 했습니다. 나실인은 히브리어로 \\\'구별된 자\\\'란 의미의 말입니다. 민수기 6장에는 나실인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나실인은 금지 사항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해야 합니다. 심지어 포도즙, 건포도, 생포도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머리에 삭도를 대면 안됩니다. 즉 머리를 깍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나실인이 지켜야 할 규례입니다. 3000년전 규정이라 오늘날의 사회풍속과는 많이 다릅니다만, 그 의미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라는 말은 세상의 향락으로부터 거리를 두라는 의미입니다. 머리를 깍지 말라는 것은 외견상으로도 구별된 모습을 취하라는 의미이며, 또한 머리를 기르는 것이 부끄러운 관습이었기에,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부끄러움도 달게 받는 다는 뜻입니다.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은 ‘생명살림’을 삶의 중요한 과제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세상과 철저히 구별된 삶이기에 너무도 힘든 삶이었습니다. 그리고도 이러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축복의 약속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체를 즐겁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나실인으로 서약한 사사, 삼손을 통해서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사실은 나실인은 하나님이 정해서 뽑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원에 의해 누구나 원하면 나실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절에 나오는 유명한 선언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소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나실인으로 서약해야 합니다. 3. 요즘 대통령께서 만약에 지역구도타파를 위한 정치개혁만 이룰 수 있다면 권력을 통째로 내놓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셔서 모든 정당과 정치인들, 나아가 온 국민이 그 발언의 진의를 해석하느라 골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과연 대통령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할 국가적 과제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을 놓고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진짜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동산과 관련한 개혁’입니다. 현 정부는 출범초기부터 부동산투기만은 근절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왔고, 현재 이런저런 부동산세제관련 개혁법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동산 소유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서 좌초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제가 문외한이어서 열심히 이해하려고 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요지는 정부는 ‘보유세와 양도세 강화’로 투기를 잡겠다는 것이고, 2주택이상 보유자들은 세금핵폭탄이라 저항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게 오늘 우리 시민들, 그리고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핵심이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무주택자의 비율이 45%에 이르지만, 2002년에는 주택보급률이 이미 100%을 넘었다고 합니다. 여러 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자꾸 아파트를 지을 것이 아니라 여러 채를 가진 사람들이 아파트를 더 이상 소유하지 않으면 무주택자 문제는 해결이 된다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그게 안되는 것은 집을 갖고 있는 것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 악순환이 끊어질 수 있을까요? 예수원의 설립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대천덕 신부님은 라는 책을 통해 우리나라 부동산투기의 해법을 ‘성서적 토지공개념’으로 제시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대천덕 신부를 그토록 존경해 마지 않는 사람들도 그의 토지공개념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대 신부님이 레위기 25장 23절에서는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는 구절로부터 토지의 영원한 소유를 금지하는 것이 신앙적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자꾸 영원히 인간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정신으로 출발한 미국이 서부를 점령해갈 때 이 성서적 토지개념을 외면했습니다. 미국은 ‘토지는 상품이다’를 외치며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강제로 빼앗아 갔습니다. 인디언들은 ‘토지는 자신들을 생산한 어머니’라고 생각해서 사고판다는 것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는데, 총과 함께 소위 근대적 토지소유개념을 들고 나온 백인들에게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나라도 이런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하였습니다. 바로 일본식민지화 직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토지조사사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지주들은 소유지를 관습에 의해서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알고 있었고, 이것은 주변에서 다 인정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근대적 토지개념을 들고 나온거예요. 측량기로 측량을 해서 문서화시키는 작업을 전국적으로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탈법이 행해졌고, 신고하지 아니한 많은 토지들을 일본 제국주의는 송두리째 먹었고, 그 토지들을 친일파들에게 마구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토지는 인간의 것이라는 개념이 만들어낸 역사적 병폐입니다. 우리는 성서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언을 사회를 향해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만이라도 이제 토지는 그냥 빌려 쓰는 것이지, 절대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성서적 정신을 평생동안 실천하겠다는 결단을 해야겠습니다. 즉 토지사용료를 국가에 충분히 내고, 계약기간동안 필요에 따라 사용한다는 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나실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4. 사랑하는 정동의 젊은이 여러분! 우리가 닥친 민족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시대의 나실인을 찾고 계십니다. 탁월한 누군가가 나서서 송두리째 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자리에서부터 ‘나실인의 삶’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나실인을 통하여 우리 시대의 문제를 풀어가십니다. 물론 삼손은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 한때 나실인의 서약을 모두 어긴 적이 있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셨고, 사자의 시체를 만졌으며, 여인의 꼬임에 넘어가 머리카락을 자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실인의 소명을 끝내 생각하였기에 다시 하나님의 도구로 붙들려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나실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 기억하시면서 소리엘이 부른 찬양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저 높은 하늘 위를 밝은 태양 떠오르듯이 난 주저앉지 않으리 어떤 어려움에도 주의 길을 선택하리 빛가운데로 걸으리 주님을 크게 보는 믿은 가지고 세상에 나타내리라 놀라운 주의 사랑을 (후렴) 주의 꿈을 안고 일어나리라 선한능력으로 일어나리라 이 땅의 부흥과 회복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리라. 김종구 목사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요14:6-11/ 2005-11-12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요14:6-11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아멘 서론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의 일이다. 나는 이제 공부를 마쳤으니 좋은 교회에 가서 하고 싶은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였으며 덕분에 소망교회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나름대로 기도 생활도 열심이었다. 나는 항상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기도하곤 하였다. 나는 섬김과 봉사와 희생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가짜 목사가 아닌 진짜 목사로서 부름을 받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예수님을 닮으려고 많이 노력하였다. 왜냐면 인격적으로 성숙한 목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나는 각종 교회 사무에 필요한 것들을 익히고 스스로 교적관리나 성경프로그램등을 제작하기까지 하였다. 또 4년간의 교사활동과 4년간의 교육전도사 경험으로 현장실습도 충분히 익혔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나는 이런 실력들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목회현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교계신문을 샅샅이 뒤지면서 어느 교회에서 전임전도사를 청빙하나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정성껏 이력서를 작성해서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나를 오라고 하는 곳이 없었다. 나는 매우 실망하였다. 다른 동료들은 모두 제갈길을 찾아 가는것 같은데 나는 갈곳이 없었다. 특히 아버지가 목사인 동료들은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아버지가 모두 해결해 주는것 같았고, 나와는 다른 고민, 즉 청빙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여러 교회들을 놓고 얼마나 더 좋은 교회에 가느냐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몹시 부러웠다. 심지어 장로 아들들도 길들이 열리는 것 같았다. 나는 집사 아들이었고, 더군다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의 장래를 위해서 도움주지 못하셨다. 고향 교회 목사님도 꽤 영향력이 있으신 분이셨는데 몇년전에 돌아가셨다. 교사생활을 하였던 광성교회 목사님은 나를 잘 모르셨고, 당시 내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도 내가 다른 교회에 가는것을 원치도 않으셨고 도와주지도 않았으며, 나는 도움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청할줄을 모르고 있었다. 나 스스로는 추천서가 필요없는 사람으로 여겼지만, 세상은 추천서를 필요로 하였다. 아무런 연락이나 아는 사람을 통하지도 않고 그저 신문보고 이력서만 발송하고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였으니 한마디로 제일 나쁜 곳에 자리를 잡고 고기가 물리기를 기다리는 초보 낚시꾼과 같았다. 그래도 마침내 연락이 왔는데 총 4곳에서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한곳은 내가 밥을 너무 힘겹게 먹는 모습을 보고 그냥 돌아가라고 하였다. 당시 너무 말라 있어서 밥을 잘 먹지 못하였다. 한군데에서는 교육목회를 담당해 주기 원하는 곳이어서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알아봐야 겠다고 결정하였다. 한곳에서는 정말 청빙을 하였는데 일주일 후에 당회원들이 반대한다고 취소 하였다. 다른 한곳도 담임목사는 나를 결정하였지만, 담임목사님과 같은 동향 사람이라는 핑계로 장로 몇분이 반대를 해서 어쩔 수 없게 되었다고 하셨다. 나는 연줄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구나고 깨닫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나는 독불장군이었고, 혼자서만 잘나 있었다. 나는 이력서가 가장 진실되고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군가의 소개나 어디 출신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놀랍게도 나를 광주 남광교회에 소개해 준 어떤 전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전혀 나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두말도 필요 없이 청빙되었고 남광교회로 가게 되었다. 나는 혼자 거의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터무니 없이 부족한 일꾼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더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가 너무 많았다. 또 각각 분야가 달라서 그렇지 점수로 따져보니 거의 대부분은 나만큼의 실력은 가지고 있었다. 즉 나는 특별히 점수가 좋은 목사가 아니라, 평범한 보통 목사였던 것이다. 나는 매우 잘 준비된 목사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은 준비하지 않았던 목사였다. 그것은 관계를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관계를 형성하느라 보내는 시간을 아깝다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영안을 열어서 깨닫게 하시기를 바란다. 본론 1.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이란 나를 목적지까지 이르게 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길이 아닌 곳으로 가면 너무 힘이 든다. 나는 산을 타다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여름이라 온 산이 숲으로 뒤덮였는데, 길을 만들면서 전진하니 1m를 가는데 1분이 걸리는 것 같았다. 그것도 밤에 길을 잃었기 때문에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길을 찾았다. 길로 부리나케 내려왔는데 십여분만에 금방 내려오게 되었다. 그래서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승용차는 특히 길이 아닌 곳으로 가려면 꼼짝을 못한다. 얼마 가지 못해서 견인차를 불러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인생길로 접어들면서 많이 고생한다. 분명히 저리로 가야 하겠다 하고 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목적지가 바뀌고 내가 예상했던 가치도 바뀐다.(도원결의했던 유비, 관우, 장비) 많은 사람들이 여기가 길이다, 저기가 길이다 라고 가르칠 때 예수님은 놀랍게도‘내가 곧 길이다’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이 한마디가 우리의 영혼을 살리신다. 사실 그동안 사람들은 ‘저곳이 우리의 목표다’라고 말하기만 했지 그 길은 무엇인지 가르치지 않았다. 왜냐면 목표 자체도 너무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주 어딘가에 천국이 있을것이라는 추측만 난무하였다. 그리고 아무도 그 길을 완주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곧 길이다’라고 하셨다. 윤리를 초월한 영에 속한 말씀이다. 어디가 길이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세상 학문이나 윤리, 또는 어떤 논리나 과학적 탐구에 관한 보고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한 영적 실제를 우리 손에 쥐어주시는 말씀이다.(우리 손으로 만진바라!) 단순한 명제를 이루는 낱말의 조합이 무슨 마법의 주문과 같은 효력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이 말을 아무나 내뱉는다고 가치나 능력이 나타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말을 하실 수 있고, 그래야 거짓이 아닌 진실된 말씀이 된다. 또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명석한 두뇌를 요구 하는 것도 아니고, 해석하기 위해서 수많은 책들을 연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말은 나의 영혼을 깨우는 말이고,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이 말씀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요구하는 말씀이다.(이 말은 그래서 성령으로 인해서 그 영이 살아있는 자가 전하는게 원칙이다.) ‘내가 곧 길이다’라는 이 말씀은 인생의 목적이 어디인지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이 목적지다, 아니다 부산이 목적지다, 아니다 목포가 목적지다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내가 곧 그 열차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누구든지 이 열차에 오르면 목적지에 도달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목적지를 안다는 것 보다는 어떻게 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목적지의 주인을 잘 아느냐 였다. 며칠전 이란으로 떠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무역과 통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법적 절차가 생략되는 정부의 실세를 아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였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중요한 사람과 내가 아는 사이냐에 있다. 예수님이 나의 길임을 깨닫게 되면 조만간 나는 나의 인생의 목표를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나의 사명을 깨닫는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지를 깨닫는다. 내가 모든것을 포기하고서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목적이 있는 사람이 비로소 인생을 사는 것이고, 목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이 아니다. 사람들이 왜 목적도 없고, 제 길도 잘 찾지 못하는가? 그것은 도처에 거짓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진리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이 진리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곧 진리다’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 사람들이 발견한 진리는 고작 과학적 실험결과나 세상을 면밀히 조사하고 발견해 낸 박물학에 지나지 않는다.(그런데 이런 지식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잊혀진다는 것과 세대간의 전달이 너무 힘들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모두 진리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설명하느라 바쁜데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셨다. ‘무엇이 진리냐’‘어떤 명제가 진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진리이냐’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참 진리란 내가 탐구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는 내가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진리에 의해서 이해되고 파악된다. 나는 진리를 이해하는게 아니고, 진리와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 같은 원리가 생명에도 적용된다. 우리의 생명은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조작하지도 못하고 연장시키지도 못한다. 사실 이 생명에 관해서는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명제였다. 가장 중요한 것이었지만, 아무도 정의 내리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하고, 수여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생명의 수여자, 생명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어 가기도 하시는 생명의 주인이시다는 선언이다. 살려면 운동해, 살려면 열심히 일해, 살려면 공부해, 살려면 이 약을 먹어라 등 많은 말들이 있지만, 아무것도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다. 생명이 없으면 길도 진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생명의 수여자이신 예수님이 ‘내가 곧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살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 자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그치신게 아니다. 곧이어‘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말을 하셨다. 사실은 이게 더 핵심적인 말씀이다. 오직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는 아버지께로 가지 못한다. 예수님의 관심의 촛점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이 가장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신 것은 오직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다. 2.관계는 안다는 것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곧이어 7절 말씀에 보면 아버지와 관계를 맺으려면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는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또 보았다고 선언하셨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볼까 염려할 것이 없다. 예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러 오신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우리가 찾아 뵈어야 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시다.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곧 성경인 것이다. 3.믿음의 중요성 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자, 이제 남은 것은 빌립에게 주신 말씀이다. 빌립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가 예수님과 오랫동안 함께 있었지만 영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영이란 보이는게 아니다. 즉 세상적으로, 오감으로, 나의 경험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않된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 안에 이미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보는 눈은 빌립이 말하는 시력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눈이다. 사람에게는 시력도 필요하고, 문화를 보는 눈도 필요하고, 역사를 보는 눈도 필요하고, 사람을 보는 눈도 필요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눈도 필요하고, 자연을 감상하는 눈도 필요하고, 윤리적인 눈과 율법적인 눈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눈은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이다. 다음 구절 10-11절은 그래서 믿음을 강조하신다. 나에게도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 관계, 길, 진리, 생명 이것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마16:13-20/ 2005-04-09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마16:13-20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더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긍정적인 평가인데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이 두 가지 대답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요한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면 예수님과 같은 사람은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계 4대 성인을 예수,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단지 4대 성인 중의 하나라면 아무나 골라잡아 믿으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말이 안됩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에 있어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4대 성인의 하나라 하는 태도로 얼버무려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말씀하신 분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했을 때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한 하나님으로 스스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으로 인정하든지 아니면 정신나간 미치광이로 생각해야 합니다.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 선지자 중의 한 사람 하는 식의 중간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 엘리야 이상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이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흘리는 안타까운 눈물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 이상의 강력한 회개의 메세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들 수준에 머무는 그들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베드로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은 큰 차이가 있지만 히브리적 사고로 보면 아버지와 아들은 동격입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또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말은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책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직분상 기름을 부어 세우는 사람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 되신다는 말입니다.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래로 계속적으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을 요구해 왔습니다. 오늘날 이 역사 속에, 우리의 현실 속에 누가 가장 필요합니까 뛰어난 통치력을 가진 정치가입니까 돈 많은 재력가입니까 많이 배운 지식입니까 아닙니다. 모두가 필요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인간의 근본문제, 원초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군부독재 물러가라고 해서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정치현실은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어도 별로 나아진 게 없습니다. 예전보다 살기가 얼마나 편해졌습니까 그런데 사람살기는 더욱 힘들어졌고 세상은 살벌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 엄청난 지식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주지 못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된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합니다. 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가 그렇게 간절히 필요한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인간에게는 선지자 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배경으로 하여 창조된 존재입니다. 창세기 1:26에 보면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집마다 지은 이가 있고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어떻게 지으셨느냐고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하여도 하나님 떠난 인간은 사는 법이 없습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모든 식물은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그렇게 지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생명을 보존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무엇이 찾아왔습니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범죄 하는 순간에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것처럼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인 죽음이 찾아 왔고, 시간이 가면 늙고 병들어 죽는 육체의 죽음이 찾아오게 되고, 죽은 후에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둘째 사망을 기다리는 가련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온 세상에 충만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모든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하는 순간 이 엄청난 축복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축복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모든 불행이 다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간에게 불행이 찾아왔다면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되돌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다시 만나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하나님께 되돌아갈 능력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저희가 매일같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과 삼아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저희 막내 아들 찾아서 사방을 헤매는 일입니다. 걷기 시작하니까 문만 열렸으면 무조건 나갑니다. 어떤 때는 옥상에서도 찾아오고, 어떤 때는 남의 집에서도 찾아옵니다. 길거리에서도 붙들어옵니다. 어린 아기는 엄마의 보호와 사랑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가버렸을 때 나가기는 자기 의사대로 나갔을지라도 되돌아올 능력은 본인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돌아 올 수 있습니까 엄마가 찾아야 합니다. 아이가 엄마를 잃으면 아무나 보고 엄마 엄마 부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찾고 받아들인 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하나님께 되돌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하나님만이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말씀을 통해서 선포하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길이 되셔서 그 길을 선포하신 선지자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왜 예수님만이 하나님 만나는 유일한 길이 됩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또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영으로 하나님에게 닿아있고, 육체로 인간과 연결되어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가다가 루스 땅에서 피곤하여 잠이 들었습니다. 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는데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창 28:12). 사닥다리가 뭐 하는 겁니까 지면과 지붕이라는 두 지점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 사닥다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51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오신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누구를 말했습니까 오실 메시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전한 것입니다. 그가 누굽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 되신 그리스도를 미래적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요 8:56). 오늘 우리는 2000년 전에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과거적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불행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으로 둘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신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지금도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되시는 선지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선지자, 그리스도 예수가 필요합니다. 2.인간에게는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불신자들에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면 곧바로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반발합니다. 그러나 어떤 잘못된 행위를 인간이 저질러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것부터가 죄인입니다. 엄마의 보호와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아이가 그 울타리를 벗어나 집을 나간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 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가장 기본적으로 주신 말씀은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명령과 금령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라는 것은 하기 싫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설사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들 자신의 한계입니다. 죄인의 몸에서 났기에 죄인이 되었고,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죄성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으니 죄인입니다. 죄인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으로 범죄 합니다. 행동으로 범죄 합니다. 남이 모르게 범죄 합니다. 때로는 드러내놓고 범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렇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는 두려워하며 범죄 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은 대범하게 범죄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의식해서라도 범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품을 벗어나면 대범하게 범죄 하는 것입니다.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부모없이 고아로 자란 이들의 범죄율이 높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지적합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23). 인간 모두가 하나님 앞에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볼 때는 의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죄를 짓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죄의 삯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그 가지 수가 많든 적든 죽어 지옥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죄질이 가볍든 무겁든 관계없이 죄지은 인간은 지옥 갑니다. 하나님 떠난 인간에게, 죄지은 인간에게 죄로부터 보호받는 길이 필요합니다. 원죄, 자범죄를 용서받는 길이 필요합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제사장이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줄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용서를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원죄, 자범죄 모두를 완전하게 용서하시는 제사장입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 생명을 회복하는 길은 죄 없는 누군가가 와서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지 않고는 안되었습니다. 레위기 17:11 말씀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8:22 말씀에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습니다. 지옥 가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죄를 용서할 수 없고, 자기의 죄도 용서받지 못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죄 없는 인간만이 그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 모든 인간 중에는 이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육체가 없고, 피가 없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기 때문에 피를 흘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그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하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사 53:5-6) 그로 인하여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주어졌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죄인인 우리에게는 죄용서 받는 길이 필요했습니다. 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속량 하셨습니다. 죄가 많은 세상, 죄인뿐인 세상에 아무리 많은 죄도, 아무리 무거운 죄도 다 용서하실 수 있는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3.인간에게는 왕되신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부모를 떠난 아기는 어떻게 되겠습니다. 온갖 위협에 다 놓이게 됩니다. 옥상에 올라가면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길거리에 나가면 폭주하는 차에 치일 염려도 있습니다. 저는 가끔 제 아들이 몰래 집을 빠져나갔을 때는 잘 생긴 제 아들을 아이 없는 사람이 집어 가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합니다. 위험한 길로 혼자 돌아다니는 아이는 유괴범이 잡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 아이가 소중한 물건을 지니고 있다면 빼앗아갈 수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온갖 위험이 다 다가와도 아이는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떠난 인간이 이와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마귀의 무차별의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어떤 존재입니까 에스겔 28:12-14에 보면 하나님 앞에 찬양을 맡았던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요한계시록 12:1-9을 보면 이 마귀가 타락할 때 하늘에 있던 천사의 ⅓을 함께 타락했습니다. 에베소서 2:2을 보면 그 마귀가 공중의 권세를 잡았습니다. 창세기 3:1-6에 인간에게 출현하여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렸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겁없이 이 마귀가 예수님도 시험했습니다. 지금도 그는 공중의 권세를 잡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11-13에 보면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이용하여 믿는 자들을 대적합니다. 그 마귀는 예수님이 오셔서 지옥에 가두는 날까지 활동할 것입니다. 이 마귀를 꺾을 인간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가 가진 사망의 권세 아래 모두가 꺾였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들과 제왕들도 사망권세 앞에 무력하게 쓰러졌습니다. 지식을 자랑하던 지혜자들도 패배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이 사망을 이긴 자가 없고 이길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사망을 이겼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까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입니다. 빌립보서 2:6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일서 5:20에 그는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천사인 마귀를 꺾을 수 있고, 마귀에게 매여 살아가는 인생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마귀에게서 인간을 구원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으로 육신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입니다. 세상의 왕은 마귀입니다. 그가 가진 최고 권세는 사망입니다. 모든 인생들을 죽음아래 굴복시키며 호령해 왔습니다. 그 권세로 인간을 두려워 떨게 하며 우상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매여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그 권세에서 완전하게 해방시키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 하자마자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깨뜨리고 승리하사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요한일서 3:8에 성취하셨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마귀가 가진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사 승리하심으로 사망을 이긴 예수님에게 더 이상 공격할 무기가 그에게는 없어진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하나님의 권세가 와집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예수, 그분이 사단의 권세를 꺾고 완전승리하사 우리를 구원하신 만왕의 왕,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이 이름은 선지자로 하나님 만나는 길을 인도해 주는 이름이요, 제사장으로 주홍같이 붉은 죄, 먹과 같이 검은 죄를 다 용서하시는 이름이요, 왕으로 사단의 모든 흑암세력을 깨뜨리고 승리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여신 이름입니다. 선지자, 제사장, 왕. 세 가지를 다 합해서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입니다. 엄청난 이름입니다. 그를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 자녀라는 영적 신분이 주어진 것이요, 하나님의 권세가 임한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모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온 세계에 전해야 합니다. 모든 족속에게 전해야 합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거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내가 선 곳에서 가장 먼 곳까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가장 먼 사람까지 이 사실을 믿고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이 일에 저와 여러분의 생애를 드려야 합니다. 나의 삶의 모든 존재이유는 이것 때문에 있습니다. 믿고 승리하시기를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이복 목사
나의 삶 속에 평화를/ 시27:1-6
나의 삶 속에 평화를 시27:1-6 12월의 표어는 [온누리에 평화를]입니다. 성탄 계절이기 때문에 그런 표어 를 정했습니다. [온 누리에 평화]는 먼저 나의 삶 속에 평화가 임해야 합니 다. 다시 말하면 [온누리]는 곧 온 세상인데 온 세상 평화는 곧 나에게서부 터 평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 으니]했을 때 바로 그 세상은 이 세상의 자연,예컨대 흙,나무,바람,사과들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된 삶의 평화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정원속에 있지 않습니다. 예금통장 에 있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명예에는 더더욱 있지 않지요. 우린 그 사실과 그 고백을 이스라엘의 2대 왕이었던 다윗의 시편속에서 발견하게 되빈다. 실로 그는 부족한 것이 없는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명성을 떨치던 왕이었 습니다. 사무엘하 21:17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을 가리켜 [이스라 엘의 등불]이라고가지 불렀던 훌륭하고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 게도 다윗은 거기서 행복이나 만족을 찾지 않고 있습니다. 신하들이나 측근들 그리고 백성들이 [당신은 이스라엘의 등불이십니다. 희 망이십니다]라고 치켜 올려도 그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아니다,나는 등불 이 못된다. 나의 영원한 등불, 꺼지지 안는 등불은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라고 고백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별 것이 아닌 존재로 보았습니다. 파스칼은 세종류의 사 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자, 이런 사람은 자기가 제아무리 유식 하고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자처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 산지식 즉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고 대범한 척하고 아 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아도 그러나 실상은 살얼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찾기만 하는 자,하도 많이 찾았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 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입니다. 하 나님에 대하여 신앙 생활에 대하여 까다롭게 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날 수 없습니다.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적으로 항상 공부하고 배가 고프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바로 다윗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이 빛이시고 구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겸허한 신앙의 소유자가 바로 이러한 사람들 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위대 한 무기가 주어지는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무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생명을 하나님의 능 력에 맡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능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위축되 어가는 내 생명, 꺼져가는 등불같은 내 생명 속에 새로운 생명의 활력을 불 어넣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 나의 삶은 평화와 안정을 찾게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 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박종순 목사 설교집 [누구를 찾느랴]에서)
나의 삶 속에 평화를/ 시27:1-6/ 2015-12-02
나의 삶 속에 평화를 시27:1-6 12월의 표어는 [온누리에 평화를]입니다. 성탄 계절이기 때문에 그런 표어 를 정했습니다. [온 누리에 평화]는 먼저 나의 삶 속에 평화가 임해야 합니 다. 다시 말하면 [온누리]는 곧 온 세상인데 온 세상 평화는 곧 나에게서부 터 평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 으니]했을 때 바로 그 세상은 이 세상의 자연,예컨대 흙,나무,바람,사과들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된 삶의 평화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정원속에 있지 않습니다. 예금통장 에 있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명예에는 더더욱 있지 않지요. 우린 그 사실과 그 고백을 이스라엘의 2대 왕이었던 다윗의 시편속에서 발견하게 되빈다. 실로 그는 부족한 것이 없는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명성을 떨치던 왕이었 습니다. 사무엘하 21:17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을 가리켜 [이스라 엘의 등불]이라고가지 불렀던 훌륭하고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 게도 다윗은 거기서 행복이나 만족을 찾지 않고 있습니다. 신하들이나 측근들 그리고 백성들이 [당신은 이스라엘의 등불이십니다. 희 망이십니다]라고 치켜 올려도 그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아니다,나는 등불 이 못된다. 나의 영원한 등불, 꺼지지 안는 등불은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라고 고백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별 것이 아닌 존재로 보았습니다. 파스칼은 세종류의 사 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자, 이런 사람은 자기가 제아무리 유식 하고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자처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 산지식 즉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고 대범한 척하고 아 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아도 그러나 실상은 살얼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찾기만 하는 자,하도 많이 찾았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 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입니다. 하 나님에 대하여 신앙 생활에 대하여 까다롭게 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날 수 없습니다.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적으로 항상 공부하고 배가 고프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바로 다윗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이 빛이시고 구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겸허한 신앙의 소유자가 바로 이러한 사람들 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위대 한 무기가 주어지는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무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생명을 하나님의 능 력에 맡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능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위축되 어가는 내 생명, 꺼져가는 등불같은 내 생명 속에 새로운 생명의 활력을 불 어넣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 나의 삶은 평화와 안정을 찾게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 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평안/ 요14:25-31
나의 평안/요14:25-31 2001-11-02 12:29:20 read : 96 <키노>와 <쥬안나>는 가난하지만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착한 인디안 부부입니다. 그들은 사이에 한 아들을 두고서 단란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전갈에 물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경을 헤매는 아이를 업고 병원문을 두드려 대지만 어느 곳 하나 이 가난한 인디안 소년을 받아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절망과 분노 그리고 애원이 뒤섞인 마음을 쓸어안고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민간 요법으로 아들을 응급처치만 해주고 진주 잡이를 나갔습니다. \\\"기필코 진주를 캐야 합니다. 우리 아들을 살리게 도와주소서.\\\" 그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마침내 그들은 갈매기 알만한 커다란 진주를 발견했습니 다. 키노 부부가 진주를 캤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시는 온통 술렁거렸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치료를 거부했던 의사들은 키노의 아이를 맡겠다고 하고 거지들까지 자선을 기대하며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의 기쁨도 잠시, 그날 밤 그들은 진주를 탐내는 괴한의 침입을 받아 하마 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점차 진주를 복이 아니라 화근으로 느끼게 된 쥬안나는 어 느 날 남편 몰래 진주를 바다에 던지려 나가다 뒤따라온 키노의 만류로 결국 버리지 못하였 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키노는 또 괴한의 습격을 받고 격투 끝에 괴한을 죽이게 되 었습니다. \\\"아! 이를 어떻해요? 우리가 사람을 죽이다니….\\\" 결국 그들은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집은 불타고, 타고 가려던 배마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산으로 도망하는데 거기까지 진주를 탐내는 악당 들이 쫓아와 다시 일대 격투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 키노는 오발로 자기 아들을 죽이게 되 었습니다. \\\"이럴 수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캐낸 진주가 오히려 아들을 죽이다니...\\\" 예전의 초라한 오막살이로 돌아온 그들 부부는 한동안 넋을 놓고 손바닥의 진주만 쳐다보 았습니다. 어둠이 깔려갈 무렵 키노는 힘껏 바다로 나가 진주를 던졌습니다. 그러자 진주는 검푸른 물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는 죤 스타인백(1902-1968)의 <진주>라는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곧 근심과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아무런 근심이 없는 완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시대에 유다 땅 전역에는 심각한 문제가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대규모의 바벨 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기 위하여 진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멸망의 그림자가 그들 위에 드 리워지고 있었을 때에, 그들의 악한 행위를 본질적으로 고치는 않으면서 \\\"평안하다, 평안하 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렘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진정한 평안은 없는데도 평안을 이야기한 유다 백성들의 예는 세상의 평안이 거짓된 것임 을 잘 말해 줍니다. 세상에는 참 평안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이며 환상에 불과 합니다. 세계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을 때마다 세계 평화를 약속했고 사람들은 이 같은 약속이 실 현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무솔리니는 로마의 영화를 이 탈리아 국민에게 회복시킨다고 하면서 에디오피아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통치와 전 유럽 평화를 약속하면서 튜튼 족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레닌과 스탈린은 평화와 계급없는 사회를 약속했으나 음모, 배신, 폭행, 대학살, 예속, 세계 정복이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2차세계대전 이전에 <타임>지에 레닌과 스탈린, 처칠, 루스벨 트 등의 평화구상이 나왔으나 그들의 구상은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참 평안은 \\\"나의 평안\\\", 다시말해 예수님의 평안입니다. 평안을 주시는 분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 이 아니라, \\\'위에서 주시는 평안\\\'으로 세상이 주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문제(십자가)를 도피하는 평안, 현실을 피해가려는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께 서 주시는 평안은 문제(십자가)를 극복하는 평안입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일도 우리들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입니다. 슬픔이나 위기나 박해라도 그것을 그르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평안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환경에 의해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변화시키는 초자연적이고 영속적이고 적극적이며 부작용 이 전혀 없는 실로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이러한 평안, 곧 \\\"나의 평안\\\", 예수님의 평안, 하나 님의 평안은 예수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아낌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평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에게는 본질적 으로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과 지식과 권세, 부귀 영화가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있는 사람은 평안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서만 평안 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 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 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 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클라크는 42세된 재판관인데 정신의학자 크레인 박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 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불안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또한 그런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런 정신 의학적인 문제들을 제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 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크레인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매일 매일의 삶의 동반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삶의 긴장이 많 이 줄어들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거의 정신적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얼마 못 가서 수많은 걱정과 근심에 짓눌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궤양, 암, 정신병과 같은 질병으로 건강을 헤치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늘 안달하는 전형적인 건강염려 증(hypochondriac) 환자가 됩니다. 만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을 배운다면, 인간 질병의 50%를 정신 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의학 교육자들의 처방은 실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협력하는 방법은 바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서는 근본적으로 예수가 임해야만 평안이 있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 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 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 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놓고서도 평안하실 수 있었습니다. 바 로 이\\\"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중 하나 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7) 너 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 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 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시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 일 주를 바라나이다....(시25: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 르치시리로다.\\\" 그러나 이 보혜사는 독자적으로 계시나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고 그것을 다시 새롭게 깨닫게 하는 차원에서 교사의 기능을 수 행하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인간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며 생명에 이를 수 없 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이 임하시는 결과 바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불안은 모르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까지라도 통달하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자연히 모든 불안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 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태국의 신문에 한국을 <인재(人災)의 나라, 사고(事故)의 나라>라고 대서특필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7주 동안 대형 사고만 세 네 건이 일어났습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 충주호 폭발 사고, 육교 붕괴 사고, 대도시 서울 한 복판에서의 가스관 폭발 사고 등입니다. 문민정 부 들어서서 하늘에서, 바다에서, 호수에서, 땅에서, 땅 속에서 연달아 추락하고 침몰하고 무 너지고 폭발하고 터지지 않는 곳이 없이 국민들이 불안에 떨며 분노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 습니다. 문민정부가 국민들에게 평안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 저기서 터지는 공무원들 의 부정 부패, 그리고 수많은 사건 사고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것들이 터지고 있는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더 불안한 것입니다. \\\"(롬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평안(화평)입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인간은 진정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27절을 보십시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초상집 같은 상황이며, 사랑하는 제자들 가운데 자신을 배신할 가롯 유다가 끼어 있는 그야말로 어떤 면으로 보아도 기쁨과 평안을 얻을 일이 전혀 없는 처지였습니다.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과 평안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데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다 하 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십자가에 죽어갈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기쁨과 평안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진정한 평안 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거역하고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시므로 참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될 때 평안이 주어지는 것이 지 평안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가르치시고 또한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을 평안으로 인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평안하지 못한 것입 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 음까지일지라도 두렵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 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신랑되시는 부활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확실한 약속과 믿음을 가진 신부된 성도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기뻐하고 평안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데 진실로 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기뻐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으며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아브라함에 관한 영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가 서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하나님 앞에 바치려는 장면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숨막히는 순 간입니까? 작가는 성경에 없는 자기 상상으로 이 장면을 잘 처리하고 있기에 여기 소개하려 고 합니다. \\\"이삭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아느냐?\\\" \\\"네, 압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것 같으냐?\\\" \\\"아버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줄 압니다.\\\" \\\"그렇다. 그러면, 이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든지 이것 모두가 너를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 고 믿을 수 있느냐?\\\" \\\"네, 믿습니다.\\\" \\\"좋다. 여기 누워라.\\\" 이삭은 순종하여 그대로 눕고, 아버지는 제물을 위해 아들을 향해서 칼을 높이 듭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 죽이는 것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므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앞에 전개되 는 사건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므로 있어진다고 믿고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께 감을 기뻐하였으리라.\\\"고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모든 환경에서 기뻐하고 평안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 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실패 가운데서도, 병든 가운데서도, 아니 자 신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하 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소화하 게 되고 평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믿어지고 믿어지면 평안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독서를 하고 있을 때에 병사 한 사람이 와서 \\\"장군은 어느 때가 가장 두렵습니 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나폴레옹은 \\\"나는 이발할 때가 가장 두렵다네. 면도사의 칼이 왔다갔다 할 때면 으시시하기까지 하다네. 그래서 나는 면도할 때에는 부하를 시켜서 이발사의 아들의 목을 잡고 있게 하여 이발사가 내 목을 벨 때는 그 아들의 목도 잘린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고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평안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어떠한 어 려운 일을 당한다할지라도 평안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내가 즐겁다고 생각한 시간은 일평생 동안 네 주일밖에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평안하셨던 예수님의 평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 분들에게 항상 평생동안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평안/요14:25-31
나의 평안/요14:25-31 2003-11-20 11:18:20 read : 11 <키노>와 <쥬안나>는 가난하지만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착한 인디안 부부입니다. 그들은 사이에 한 아들을 두고서 단란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전갈에 물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경을 헤매는 아이를 업고 병원문을 두드려 대지만 어느 곳 하나 이 가난한 인디안 소년을 받아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절망과 분노 그리고 애원이 뒤섞인 마음을 쓸어안고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민간 요법으로 아들을 응급처치만 해주고 진주 잡이를 나갔습니다. "기필코 진주를 캐야 합니다. 우리 아들을 살리게 도와주소서." 그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마침내 그들은 갈매기 알만한 커다란 진주를 발견했습니 다. 키노 부부가 진주를 캤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시는 온통 술렁거렸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치료를 거부했던 의사들은 키노의 아이를 맡겠다고 하고 거지들까지 자선을 기대하며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의 기쁨도 잠시, 그날 밤 그들은 진주를 탐내는 괴한의 침입을 받아 하마 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점차 진주를 복이 아니라 화근으로 느끼게 된 쥬안나는 어 느 날 남편 몰래 진주를 바다에 던지려 나가다 뒤따라온 키노의 만류로 결국 버리지 못하였 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키노는 또 괴한의 습격을 받고 격투 끝에 괴한을 죽이게 되 었습니다. "아! 이를 어떻해요? 우리가 사람을 죽이다니…." 결국 그들은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집은 불타고, 타고 가려던 배마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산으로 도망하는데 거기까지 진주를 탐내는 악당 들이 쫓아와 다시 일대 격투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 키노는 오발로 자기 아들을 죽이게 되 었습니다. "이럴 수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캐낸 진주가 오히려 아들을 죽이다니..." 예전의 초라한 오막살이로 돌아온 그들 부부는 한동안 넋을 놓고 손바닥의 진주만 쳐다보 았습니다. 어둠이 깔려갈 무렵 키노는 힘껏 바다로 나가 진주를 던졌습니다. 그러자 진주는 검푸른 물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는 죤 스타인백(1902-1968)의 <진주>라는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곧 근심과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아무런 근심이 없는 완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시대에 유다 땅 전역에는 심각한 문제가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대규모의 바벨 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기 위하여 진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멸망의 그림자가 그들 위에 드 리워지고 있었을 때에, 그들의 악한 행위를 본질적으로 고치는 않으면서 "평안하다, 평안하 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렘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진정한 평안은 없는데도 평안을 이야기한 유다 백성들의 예는 세상의 평안이 거짓된 것임 을 잘 말해 줍니다. 세상에는 참 평안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이며 환상에 불과 합니다. 세계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을 때마다 세계 평화를 약속했고 사람들은 이 같은 약속이 실 현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무솔리니는 로마의 영화를 이 탈리아 국민에게 회복시킨다고 하면서 에디오피아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통치와 전 유럽 평화를 약속하면서 튜튼 족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레닌과 스탈린은 평화와 계급없는 사회를 약속했으나 음모, 배신, 폭행, 대학살, 예속, 세계 정복이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2차세계대전 이전에 <타임>지에 레닌과 스탈린, 처칠, 루스벨 트 등의 평화구상이 나왔으나 그들의 구상은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참 평안은 "나의 평안", 다시말해 예수님의 평안입니다. 평안을 주시는 분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 이 아니라, '위에서 주시는 평안'으로 세상이 주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문제(십자가)를 도피하는 평안, 현실을 피해가려는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께 서 주시는 평안은 문제(십자가)를 극복하는 평안입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일도 우리들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입니다. 슬픔이나 위기나 박해라도 그것을 그르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외적인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평안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환경에 의해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변화시키는 초자연적이고 영속적이고 적극적이며 부작용 이 전혀 없는 실로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이러한 평안, 곧 "나의 평안", 예수님의 평안, 하나 님의 평안은 예수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아낌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평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에게는 본질적 으로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과 지식과 권세, 부귀 영화가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있는 사람은 평안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서만 평안 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 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 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 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클라크는 42세된 재판관인데 정신의학자 크레인 박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 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불안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또한 그런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런 정신 의학적인 문제들을 제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 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크레인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매일 매일의 삶의 동반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삶의 긴장이 많 이 줄어들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거의 정신적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얼마 못 가서 수많은 걱정과 근심에 짓눌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궤양, 암, 정신병과 같은 질병으로 건강을 헤치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늘 안달하는 전형적인 건강염려 증(hypochondriac) 환자가 됩니다. 만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을 배운다면, 인간 질병의 50%를 정신 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의학 교육자들의 처방은 실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협력하는 방법은 바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서는 근본적으로 예수가 임해야만 평안이 있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 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 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 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놓고서도 평안하실 수 있었습니다. 바 로 이"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중 하나 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7) 너 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 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 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시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 일 주를 바라나이다....(시25: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 르치시리로다." 그러나 이 보혜사는 독자적으로 계시나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고 그것을 다시 새롭게 깨닫게 하는 차원에서 교사의 기능을 수 행하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인간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며 생명에 이를 수 없 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이 임하시는 결과 바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불안은 모르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까지라도 통달하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자연히 모든 불안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 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태국의 신문에 한국을 <인재(人災)의 나라, 사고(事故)의 나라>라고 대서특필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7주 동안 대형 사고만 세 네 건이 일어났습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 충주호 폭발 사고, 육교 붕괴 사고, 대도시 서울 한 복판에서의 가스관 폭발 사고 등입니다. 문민정 부 들어서서 하늘에서, 바다에서, 호수에서, 땅에서, 땅 속에서 연달아 추락하고 침몰하고 무 너지고 폭발하고 터지지 않는 곳이 없이 국민들이 불안에 떨며 분노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 습니다. 문민정부가 국민들에게 평안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 저기서 터지는 공무원들 의 부정 부패, 그리고 수많은 사건 사고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것들이 터지고 있는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더 불안한 것입니다. "(롬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평안(화평)입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인간은 진정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27절을 보십시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초상집 같은 상황이며, 사랑하는 제자들 가운데 자신을 배신할 가롯 유다가 끼어 있는 그야말로 어떤 면으로 보아도 기쁨과 평안을 얻을 일이 전혀 없는 처지였습니다.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과 평안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데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다 하 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십자가에 죽어갈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기쁨과 평안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진정한 평안 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거역하고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시므로 참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될 때 평안이 주어지는 것이 지 평안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가르치시고 또한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을 평안으로 인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평안하지 못한 것입 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 음까지일지라도 두렵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 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신랑되시는 부활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확실한 약속과 믿음을 가진 신부된 성도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기뻐하고 평안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데 진실로 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기뻐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으며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아브라함에 관한 영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가 서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하나님 앞에 바치려는 장면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숨막히는 순 간입니까? 작가는 성경에 없는 자기 상상으로 이 장면을 잘 처리하고 있기에 여기 소개하려 고 합니다. "이삭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아느냐?" "네, 압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것 같으냐?" "아버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줄 압니다." "그렇다. 그러면, 이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든지 이것 모두가 너를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 고 믿을 수 있느냐?" "네, 믿습니다." "좋다. 여기 누워라." 이삭은 순종하여 그대로 눕고, 아버지는 제물을 위해 아들을 향해서 칼을 높이 듭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 죽이는 것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므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앞에 전개되 는 사건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므로 있어진다고 믿고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께 감을 기뻐하였으리라."고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모든 환경에서 기뻐하고 평안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 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실패 가운데서도, 병든 가운데서도, 아니 자 신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하 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소화하 게 되고 평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믿어지고 믿어지면 평안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독서를 하고 있을 때에 병사 한 사람이 와서 "장군은 어느 때가 가장 두렵습니 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나폴레옹은 "나는 이발할 때가 가장 두렵다네. 면도사의 칼이 왔다갔다 할 때면 으시시하기까지 하다네. 그래서 나는 면도할 때에는 부하를 시켜서 이발사의 아들의 목을 잡고 있게 하여 이발사가 내 목을 벨 때는 그 아들의 목도 잘린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고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평안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어떠한 어 려운 일을 당한다할지라도 평안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내가 즐겁다고 생각한 시간은 일평생 동안 네 주일밖에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평안하셨던 예수님의 평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 분들에게 항상 평생동안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5-31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5-31 2005-07-15 08:58:54 read : 250 본문: 요한복음 14:25-31 제목: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본문의 주된 핵심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는(본문27절), 평안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의 \\\"평안[에이레네(eijrhvnh)]\\\"은.... \\\" 평안, 평화, 평강, 화목, 화평, 화친\\\"을 뜻합니다. 「결합하다, 하나되다」에서 온 말입니다. 아마도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같은 뜻을 말하는 구약의 샬롬[!/lv;]이란 말이 더욱 친숙하리라 봅니다. 「샬롬!」은 평안을 비는 유대인의 인사입니다. 우리의 「안녕하세요」와 같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요20:19)」....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사 먼저 평안의 복을 비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는 유대인의 일반적인 인사입니다(마10:12). 그러나, 지금 이곳은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문을 꽁꽁 걸어 잠가놓고 있습니다. 그 문이 열리지도 않고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고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달리다굼\\\"과 같은 말씀입니다(막5:41).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 그 「살아 있는 말씀」이 \\\"달리다굼\\\" 하시니 죽은 소녀가 살아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청년아 일어나\\\" 하시니 상여의 관 속의 청년이 살아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눅7:14).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장사한지 나흘이나 된 무덤에서 나사로가 살아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두려움이 사라지고 제자들이 평안을 누릴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눅24:36)」.... 부활의 주님의 이 축복도 주님의 부활을 의심함으로, 오히려 부활의 주님을 영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니 제자들이 기뻐했습니다(요20:20).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의심은 주님이 쏟아 부어주시는 축복도 담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주님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더욱이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며(본문29절), 놀라운 일이 일어날 때 믿게 하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십자가의 대속을 앞두고 평안을 주심은 그만큼 평안이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이 모인 방에 나타나사 가장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고, 평안을 복 빌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주신 평안입니다. 주고 또 주신 평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도 평안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사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가장 먼저 평안을 주셨습니다(요20:19).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또 평안을 주셨습니다(요20:21). 여드레 후에 도마가 함께 있는 자리에 나타나사 다시 평안을 주셨습니다(요20:26).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기의 \\\"평안\\\", 이것은 일반 사람들이 하는 인사가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 일반적으로 하는 인사의 \\\"평안\\\"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평안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주님이 주신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안이란 말보다는 지금 우리들의 귀에는 \\\"평화\\\"라는 말이 더 익숙해 있습니다. 똑같은 말입니다. 세상은 평화를 말하지만, 전쟁의 소문은 더 늘어갑니다. 난리의 소문은 더 늘어갑니다. 그러기에 더욱 세상은 평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결국은 평화를 이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 주시는 평화가 아니라 세상이 주는 평화로 가짜 평화입니다. 살전 5:3절/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우리 성도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은 가짜 평화가 이루어지면, 곧바로 멸망의 날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주는 가짜 평화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는 비록 손과 발이 묶여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지만, 기쁨의 찬송을 부르는 바울과 실라가 누리는 평화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주님 주시는 평안이 참된 평안입니다. 주님 주시는 평화가 참된 평화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가짜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가짜 평화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바로 주님 모신 곳에서 누리는 평화가 참된 평화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평안 곧 평화에 대하여 살펴보고져 합니다. 1.평안이 무엇인가? 본문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여기의 \\\"끼치노니[압히에미(ajfivhmi)]\\\"는.... \\\"남겨두다, 곁에 두다\\\"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떠나가지만, 평안을 너희에게 남겨둔다는 말씀으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와 같은 뜻입니다.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이렇게 되풀이하시며 평안을 강조하심은 제자들이,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환을 당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요16:33). 또한 주 안에서 누리는 평안이 없이는 주를 믿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요14:1). 주님이 되풀이하시며 강조하시는 평안이 무엇일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신약의 [에이레네(eijrhvnh)] 보다는 구약의 샬롬[!/lv;]이 우리들 귀에 익숙합니다. 다 같이 \\\"평안, 평화, 평강, 화목, 화평, 화친\\\"을 뜻합니다. 우리말에서는 평안은 개인적이고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평화는 공동체적이고 싸움과 관련된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평안 곧 평화는.... ①.싸움이 없는 상태 왕상 4:24-25절/ 솔로몬이 하수 이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하수 이편의 모든 왕이 다 관할한 바 되매 저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가 있었으니,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사도행전 7:26절/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②.인사로 평안을 비는 상태 삼상 25:6절/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마태복음 10:13절/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③.하나님과 화목한 상태 이사야 32:17절/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로마서 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④.언약의 상태 이사야 54:10절/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⑤.막힌 담을 헐고 하나된 상태 에베소 2: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⑥.하나님의 축복의 상태 민수기 6:24-26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⑦.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 마가복음 5: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앞에서 살펴본 성경에 나타난 평안은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세상적이고, 우리 육신이 누리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이고, 우리의 심령이 누리는 평안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과의 평안이 있고, 사람과의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고, 사람이 주는 평안이 있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솔로몬 왕을 가리켜 평화의 왕이라고 합니다. 저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이루어,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참된 평안이요, 안식입니다. 2.주님이 주시는 평안 본문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주님의 평안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에게 주는 평안과 안식입니다. 참된 평안은 안식과 안정과 편안함과 평강이 함께 어우러져야 합니다.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편안함)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안식)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평화)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대상22:9). 솔로몬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가져오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레위기 26:6절/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우나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누릴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할 때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평화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이 누리는 평화인데.... 시후(時候)에 따라 비를 주심도, 땅이 산물을 내게 하심도, 열매 맺게 하심도, 배불리 먹게 하심도, 편안히 눕게 하심도, 사나운 짐승을 제하심도, 오당백(五當百)으로 대적을 쫓게 하심도, 번성케 하고 창대케 하심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라고 했습니다(레26:4-9). 레위기 26:12절/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평화는 하나님의 장막을 저희 중에 세우시고(레26:11) 동거하시는, 「나는 네 하나님, 너희는 내 백성」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택한 백성 이스라엘, 주시마고 하시는 평화, 「나는 네 하나님, 너희는 내 백성.... 이 모두는 저 하늘, 저 천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로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하시는(계21:3-4)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평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주님 주시는 평안이 참된 평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에게 주는 평안과 안식과 안정과 편안함과 평강입니다.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육신적인 것도 있습니다. 바로 수많은 병자들을 질병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하사 평강을 주시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 주시는 평안은 육신적인 것을 넘어 영적인 것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참된 평안입니다. 육신적인 평안은 근본적이지 못합니다. 제한적이요, 영원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타인이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곳에서 누리는 참된 평안은 영원합니다. 남이 빼앗을 수 없습니다(요16:22). 세상이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유는 세상을 이긴 자가 주시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요16:33). 3.세상이 주는 평안 본문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주님은 자신의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며, 세상이 주는 평안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이 세상 임금으로부터(본문30절) 나오는 평안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이루는 평안입니다. 겉모양은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안과는 다릅니다(레26:6). 다시 말해서 그 평안에 대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 곧 평화.... 이 세상 임금으로 말미암아 오는 평화입니다(본문30절). 이 세상 임금은 공주 권세 잡은 자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입니다(엡2:2).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이 세상의 신입니다(고후4:4). 곧 사탄으로 이 세상 임금은 쫓겨나게 됩니다(요12:31). 이김에 삼킨 바 됩니다(고전15:54). 결국은 주님께 멸망당합니다(히2:14; 요일3:8; 계20:10). 세상이 주는 평화.... 이 세상 임금으로 말미암은 평화는 그 임금이 멸망당하면 없어질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하지 못합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평화가 아니요, 가짜 평화입니다. 이 가짜 평화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살전5:3). 세상이 주는 평화.... 이 세상 임금(사탄)으로부터 말미암는 평화로 가짜 평화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화와 같습니다(레26:6). 그래서 이 땅의 많은 성도들이 속게 됩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산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고후11:14)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평안 곧 평화는 좋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소망하는 바입니다. 그 평안 속에 \\\"평화, 평강, 화목, 화평, 화친\\\"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또 이웃과 나 사이에 중간에 막힌 담을 헐고 \\\"하나되어\\\" 이룩한 평안입니다. 그래서 주님 주시는 참된 평안은 귀하고도 좋은 것입니다. 「평화는 좋은 것이여!」.... 그래서, \\\"하나되어 이 평화를 이룩하자!\\\"고 합니다. 지금 세계는 「우리는 하나!」를 외치며, 하나되기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하나의 정치, 하나의 경제, 하나의 문화, 하나의 종교, 등.... 각 분야 별로 하나되기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에서 우리나라가 힘들어하고 있는 \\\"시장 개방\\\"도, 우리의 농촌이 겪는 어려움인 \\\"농업 개방\\\"도 「하나의 경제」를 이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칠레와의 FTA에서 보듯 여기에 동참하지 않으니 외톨이가 되고, 당장 수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지요. 「우리는 하나!」.... 우리 성도들은 이 중에서 「하나의 종교」에 주의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의 종교」가 이룩된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계시록이 말씀하시는 666의 표는 「하나의 정부(정치)」와 「하나의 종교」의 상징입니다. 쉽게 말해서 국기와 같은 것이지요.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666의 표를 받지 않는 사람은 살아갈 수 없는 환난과 핍박과 순교의 시대가 온다고 했습니다(계13장). 「하나의 종교」.... 사회의 평화를 위해서, 크게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타종교간에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하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서로를 인정함에 있어서 타종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유일신이요, 절대자이십니다(God). 타종교는 범신론(汎神論)이요, 상대자입니다(god). 타종교는 골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자 하나님(God)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타종교와 눈높이를 맞추어 절대자 하나님(God)을 상대자 하나님(god)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이것이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종교 다원주의.... 한마디로 \\\"오직 예수\\\"가(행4:12) 아니라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오직 예수\\\"를 양보하기 위해서 예수 중심의 구원에서 하나님 중심의 구원으로, 구원론의 중심 축을 옮겼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지옥의 멸망에 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지요. 사랑의 하나님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아시는 또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길로 가든, 꼭대기에 올라가면 하나님 앞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 주님 주시는 평안으로 만족합니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이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필요 없습니다. 이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은 비록 손과 발이 묶여 감옥에 갇혀 있다할지라도, 바울과 실라와 같이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크고 놀라운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 기쁨으로 찬송 부를 수 있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주님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가짜 평화입니다. 「평화는 좋은 것이여!」.... 그렇습니다. 평화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가 누구에게로 말미암았는가를 우리 성도들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의 평화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말세를 맞으며 환난과 핍박과 순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주님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했습니다(요16:33). 주 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참된 평안 때문에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참된 평안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주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5-31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5-31 찬송가 474장 <서론> 한국인이 좋아하는 명구 하나가 있습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입니다. 이 말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가정이 평안해야 모든 일이 다 잘된다.\\\'하는 뜻이지요. 또 이 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가정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평안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안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인내를 해야 평안이 이루어집니다. 또 가족 중에 누가 희생을 해야 평안이 이루어집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참고, 오히려 기뻐할 때 평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성서적으로 해석하면, \\\'십자가를 짐으로 가정은 평안해진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본문 배경 설명>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원합니다. 불안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불안으로부터 탈출하여 저 위기와 공포가 전혀 없는 평안의 세계에서 거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너무나 불안하다는 사실입니다. 불안한 젊은이들일수록 잡음과 소음이 혼합된 파열음악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 파열음만큼이나 균열이 간 현대인의 내면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불안 때문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류의 처절한 싸움은 불안과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숙원은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474).”이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에는 근심된 일이나 죽을 일이 많습니다.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사건이 어디 한 둘입니까? 우리에게 평안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이 필요합니다. 평안을 빼앗는 것이 무엇입니까?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입니다.“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왜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에 빠져있습니까? 예수 님이 제자들을 떠난다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 님이 떠난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예수 님이 곧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님이 죽으시다니!”예수 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입니다. 당장에 자신들도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스승이 없는 제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3년 동안 예수 님을 믿고 따랐는데, 아무 보상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허탈하기도 하고 장래가 두렵기도 합니다. 예수 님이 죽으신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무지이고 불 신앙입니다. 모든 근심과 두려움은 무지와 불 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 님은 죽으셔야 영광입니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야 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발전되어야 합니다. 예수 님이 좋다고 늘 예수 님 붙잡고 함께 살 수 는 없습니다. 성령을 보내서 일하시는 예수 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알았다면 근심도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론-불안> 어느 주간 잡지사에서 지난 3월 \\\'한국사회 불안감 조사\\\'라는 제목 아래 \\\"당신은 불 안을 느낍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많이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73%, \\\"조금 느낍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20%가 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열에 아홉은 다 불안을 안고 산다는 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가운데서 80% 이상의 사람들이 \\\"작년보다 금년이 더 불안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 지수가 더 높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게 불안을 느낍니까?\\\"라는 질문에는, 북핵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경제가 점점 나빠지지 않을까, 잦은 구조조정으로 해고가 계속되면 직장을 잃지 않 을까, 건강이 잘못되지 않을까 등 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불안의 요인으로 꼽은 것은 교통사고였습니다. 한국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지 않을 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 나서 얼마나 많이 죽는지 모릅니다. 교통사고는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불안의 요인 이 되는 것입니다. <평안의 오적> 심리학자에 의하면, 마음의 평안을 파괴하는 오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가 탐욕이요, 소유욕입니다. 탐욕과 소유욕을 품으면, 마음의 평안이 깨어집니다. 샬롬이 깨어집니다. 또 지나친 성취욕을 가진 사람은 평안이 깨어집니다. 내가 이것은 꼭 이루어야 되겠다. 성공의 종노릇하는 노예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평안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람은 평안이 없습니다. 분노하는 사람도 평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만한 사람은 더욱 평안할 줄 모릅니다. <서론-현대인의 4가지 불안> 현대인들은 네 가지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고 한다. 사고와 건강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갖고 산다. 특히 우리 나라는 교통사고로 만 여명씩 죽으니 얼마나 불안한가? 그리고 범죄도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잔인하게 살인하고 빼앗는 상상치 못할 범죄들이 일어난다. 요즈음에 다양한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해도 찾아내지 못하는 질병이 있고 치료하지 못하는 질병이 있기 마련이다. 이같이 사고와 질병으로 인하여 죽으며 어떻게 하는가? 불안을 지니고 산다. 둘째로 현대인들이 갖는 불안은 사업의 실패에 대한 불안이다. 특히 요즈음에는 은행도 불안하고, 물가도 안정이 되지 않고, 사업이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사업 실패의 불안이 많은 사람들이 느끼며 마치 외줄을 타는 것과 같은 느낌을 경험한다고 한다. 셋째로, 현대인들이 겪는 불안은 인간관계에서 얻어지는 불안이다. 가정이 해체된다. 부부가 싸우고 이혼하고 자녀들은 나뉘어져서 살게된다. 학교에서는 인간관계 사이에서 왕따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불안을 느낄 수 있다. 넷째로, 현대인들이 겪는 불안은 자신의 죄에서 오는 불안이다. 도둑이 제발 절인다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 불안한 마음을 견딜 수 없다.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은 죄를 지으면서 그 죄로 인하여 불안해 한다. 이같이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안을 경험하고 살아간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참으로 편리한 생활을 하지만 과거보다 더욱 불안을 느끼며 살아간다. 혼자 있으면 불안하니까 계속해서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조용하면 또 불안을 느끼니까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서 불안을 이기려고 애쓴다. ----- 또 어떤 사람은 불안을 중독증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한다. 두려운 일이 생기거나 불안한 일이 생기면 어딘가에 의존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술에 의존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알코올 중독증에 걸린다. 어떤 사람은 점치는 일에 의존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불안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두려움이 심해질 뿐이다. 무속인들이 하는 일은 더 겁을 주고서 부적을 갖고 다니지 않거나, 굿을 하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오히려 심한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다 준다. 아무리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많다해도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 <예-불안> 스탈린은 굉장히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독살하지는 않을까 불시에 타살되지는 않을까 하여 항시 두려움 속에 살았다. 그에게는 8개의 침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은행의 금고처럼 단단히 잠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침실도 그에게 편안한 밤을 줄 수 없었던 것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스스로 불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평안의 뜻-하나님과 연합, 결합, 연결-중요> 그러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 불안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평안함을 유지하며 살 수 있겠는가? 평안은 희랍어로 에이레네라고 부른다. 이 희랍어는 결합하다, 연결되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평안함, 평화는 곧 결합되고, 연결될 때에 가져다 주는 결과라는 것이다. 언제 불안한가? 연결이 끊어졌을 때에, 서로 분리되었을 때에 불안하지만 연결되고 서로 하나가 될 때에 참된 평안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관제탑> 만일 비행기를 타고서 미국을 가는데 조종사가 지상의 관제탑과 계속해서 교신을 하면서 간다. 그런데 그 교신이 끊어져서 조종사가 알아서 길을 찾아가야 한다면 얼마나 불안할까? 계속해서 연결될 때에 불안이 사라지고 평안이 오게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와 연결될 때에 참된 평안이 있는가? 우리는 주님과 연결될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있다.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이 임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곧 참된 평안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부활하신 후에 많은 제자들이 두려워서 떨고 있었다. 문도 열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 가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다. <기드온-성경 예> 기드온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 사람들이 괴롭혔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시고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미디안 사람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기드온이 \\\"나는 므낫세 중에 가장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입니다.\\\" 내가 어떻게 미디안 사람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나이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그래도 기드온이 불안해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염소 새끼하고 무교병을 만들고 국을 담아서 가져왔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그대로 하고 지팡이의 끝을 바위에 대니 불이 나서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다. 기드온은 이 광경을 보고서 하나님이 나와 연결되어 있구나, 나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 곳의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다. 샬롬은 평화, 평안을 의미한다. 여호와 샬롬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 지금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신할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는 지금 여러 가지로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 주시는 선물이다. <어머니 뱃속 이야기-예>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운다. 우는 이유는 불안해서 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탯줄로 연결되어 어머니의 맥박소리를 들으면서 열달을 지냈는데 세상에 나와 보니 탯줄로 연결되었던 것이 끊어지니 얼마나 불안한가? 불안한 아이를 안정시키려면 어머니의 맥박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모유를 먹일 때에 왼쪽 가슴에 안고 왼쪽 젖을 먹인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심장이 왼쪽 젖가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가 젖을 먹으면서 그 맥박 소리를 듣고 안정감을 갖는 다는 것이다. 모유를 먹이면서 엄마와 아기가 끊어졌던 맥박이 다시 연결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다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평안을 원한다. 평안은 연결될 때에 오는 것임을 분명히 알자. 아이가 탯줄로 어머니와 연결되어 맥박 소리를 들을 때에 평안한 것처럼, 주님과 연결되어서 주님의 음성을 듣자. 그럴 때에 참된 평안함이 넘칠 줄로 믿는다. 주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불안하지만,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평안을 주신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5절 해석> 25절-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절 해석> 26절-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지금 성도를 위해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일을 대신하십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길을 마련하시는 분으로 계셨듯이 보혜사가 이 일을 마련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고 그 공백 상태를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대신 하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야하는 것입니다. ---- <27절 해석> 27절-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1.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27). 세상 사람들은 평안을 외부적인 환경이나 물질에서 찾습니다.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수면제로 얻은 평안은 몇 시간 못 갑니다. 내일 밤이면 또 괴롭습니다. 술로 얻은 평안은 술기운이 사라지면 형편은 더 악해집니다. 가난해서 먹을 양식이 없는 가정은 땀 흘려 일해서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이 있습니다. 물질로 얻은 평안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물질이 없어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집안에 없던 돈이 한번에 많이 생기면 오히려 집안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물질이 반드시 좋은 변화를 가져온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질로 얻은 평안은 계속적인 물질을 요구합니다. 만약 물질이 지속적으로 공급이 끊어지면 그 평안은 사라집니다. 명예나 권세로 얻은 평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명예가 사라지고 권세가 사라지는 순간에 평안도 사라집니다. 젊음이 주는 평안도 그렇습니다. \\\'정 몽헌\\\'라는 최정상의 현대그룹의 총수가 왜 자살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마음속에 \\\'평안을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물질과 명예를 가지고 살았다하더라도, 그 속에 평안이 없다면, 사는 것 같으나 실상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적으로 마음이 항상 무엇인가초조하고 불안한 사람은 삶의 의미조차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물질(명예)로 채 울 수 없는 평안! 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 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는 자는, 마음속에 근심과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늘의 충만한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 같은 평안의 축복이, 예수 님을 믿는 우리 속에 이미 거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당하고 있는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 님 앞에 엎드려 예수 님 발에 부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장면을 보고, \\\"예수가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그 행실이 얼마나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사람들의 차가운 이목과 시선을 받던 그 여인은 마음이 두근두근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은데, \\\'과연 예수 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약간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향유가 든 옥합을 예수 님 발에 부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하십니다. 그 여인은 죄에서 자유 함을 얻고 평안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은, 예수 님의 옷자락을 만져 깨끗이 치료함을 받고 예수 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예수 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고, 불안해 떠는 자들의 마음속에 참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 님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달려가던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님께서 나타나셔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 님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평안을 끼치는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을 전도 파송 보내시면서도, 너희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평안함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평안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 평안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만약, 그 집이 예수 님의 평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라면, 그 평화가 기도한 사람에게로 되돌아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 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죄인들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 님을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평화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평안을 줍니까?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평안을 줍니다. 지난날에는 예수 님이 직접 평안을 주었지만, 이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주십니다. 이것은 발전된 것입니다. 지난날 보다 더 강력한 평안입니다. 예수 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 님에게서 평안을 보았습니다. 예수 님의 말씀 한마디, 예수 님의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기적을 보았고, 그것은 그들에게 하늘의 평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 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대신 보혜사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부어주심으로 더욱 심오하고 강력한 평안을 주십니다. 눈과 귀로 듣고 맛보던 평안이 아니라, 마음속에 느끼는 평안입니다. 손과 발로 감각적으로 맛보던 평안이 아니라, 영적으로 마음으로 맛보는 평안입니다.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평안이 아니라, 마음속에 영원히 지속되는 평안을 맛봅니다. 보혜사 성령이 주는 평안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보편적인 평안입니다. 조건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는 평안입니다. 병상에서나 지하철에서나 자동차 안에서나 궁궐이나 초가집이나 다 같이 누리는 평안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그럴듯한 환경 적인 요인을 갖춤으로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일어나지도 못하는 새벽에 임하는 평안이고 남들이 곤한 잠에 떨어진 밤중에 임하는 평안입니다. 머리로 얻는 평안이 아니고 가슴으로 얻는 평안입니다. 무슨 재료나 기회가 되어서 조건으로 얻는 평안이 아니라, 성령만 받으면 얻는 평안입니다. 돈이나 배경이나 아무 것도 없이 얻는 평안입니다. 분위기나 환경과 상관없이 얻는 평안입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어떤 환경 적인 요인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2.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 자기 도취의 감옥입니다. 항상 자기가 최고인줄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공주병\\\' 또는 \\\'왕자 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자기 도취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진정한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2).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비판의 감옥입니다. 마7:1절 이하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이와 같이 남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사람이, 비판의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감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 절망의 감옥입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절망하는 사람은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절망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평화를 소유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4). 옛 일만을 황금시대로 생각하는 과거 지향적인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거듭 말하면서 과거에 안주하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도전정신이 약해집니다. 과거 지향적인 감옥에서 벗어날 때,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게 되고, 희망과 용기와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5). 다른 사람의 것만 좋다고 생각하는 선망의 감옥입니다. 남의 떡이 크게 보인다는 우리 속담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과 상황인데도 자신이 더 힘들고 더 어렵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최고로 불쌍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남의 것만을 좋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는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것만을 좋다고 생각하는 선망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6).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증오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감옥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듯이, 남이 잘되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 배가 아픈 사람입니다. 이러한 여섯 가지 감옥. 즉, 자기도취의 감옥, 비판의 감옥, 절망의 감옥, 과거 지향적인 감옥, 선망의 감옥, 그리고 증오와 시기와 질투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님이 성령 님을 통하여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은 가진 자가 평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 부자는 그 부함 때문에 더 많은 염려와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인기 있는 연예인이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의 이목을 많이 의식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 함보다는 겉치레를 포장하는 경우가 더욱 많아 부자유스럽습니다. 전쟁에 사용할 무기가 많으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수물자를 증강하지만, 더욱 전쟁의 공포와 불안은 더해가기만 합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안은, 물질의 평안, 건강의 평안, 또는 명예와 권력의 평안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가져다주는 이 같은 평안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눅12장에서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말하기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다\\\"(눅12:19-21)고 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노력합니다. 재물을 많이 모은다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통해서 평안을 얻고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부자와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기에,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해하거나 세상에 속한 것으로 평안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안은 너무나도 제한된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님이 주시는 평안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을지라도, 또한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평안입니다(합3:17, 18). 어떻게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라. 전쟁터에 나가는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전쟁터에서도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왜 성경책은 가지고 갑니까? 세상에서 자유 할 때에는 읽지 않던 성경을 왜 감옥에서 읽습니까? 성경이 마음의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모함을 당하거나 승진에 누락되었을 때 주로 읽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어린아이와 같아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평안을 얻습니다. 성경은 이상하게도 실패하고 낙심된 사람에게 더욱 강력한 평안을 줍니다. 보혜사 성령이 말씀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다른 세상 적인 무엇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와 함께 할 때, 영생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을 성경에서 말미암느니라. 둘째, 기도하라.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얻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기도는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와 계십니다. 기도로 성령 님과 대화합시다. 마음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합시다. 엘리야는 기도합니다.“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 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왕상19:4).”힘들고 살기 싫다는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옳다고 할 수 없지만,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약함을 인정하면 하나하나 치료하시고, 그 자리에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 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합니다.“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원합니다.” 예수 님도 인성을 가진 분이라 죽음을 피하고 싶다고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을 알고도 기도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얻는 평안은 알기 때문에 사자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실 기도하기 전에는 고민도 많고 갈등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일어서면 달라집니다. 평안이 가득합니다. 풍랑과 파도가 잠잠해지는 이 맛에 기도합니다. 산을 오르거나 낚싯대를 던지고 얻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하면서 얻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깊은 평안 오래가는 평안, 질적으로 우수한 평안을 맛볼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을 때 평안이 찾아옵니다(29).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지 못하면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마음이 편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희망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다른 열 명의 정탐 군이나 믿음이 없는 백성들은 낙담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여 가나안이 아닌 광야로 가버렸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40년 동안 이들에게는 진정한 평안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주시는 평안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참 평안을 얻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러한 불안전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 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겠다\\\"는 예수 님의 공약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약속이며, 이 약속은 이미 믿는 자에게 성취된 약속입니다. 예수 님을 믿는 자는 이미 그 마음속에 영원한 평안,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평강의 주님\\\'이 되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셨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이 같은 약속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분명히 믿어져서, 풍랑 많은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평강을 늘 간직하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평생동안, 아무리 세상의 풍파가 요동하고 우리를 거스린다 하여도, 결코 흔들림이 없이 늘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예수 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우리에게 권면 합니다. 우리는 예수 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해서 평화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평화가 없습니다. 시대가 악해진다는 증거 중에 하나는, 세상에 믿음이 없어진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로간에 불신 때문에 점점 세상은 악해져만 가고, 서로 믿지 못해서 평화가 깨지고 맙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고 하셨습니다. 예수 님을 믿는 자는, 감사와 기쁨과 평강의 축복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영생의 샘물처럼 흘러 넘쳐 납니다. 예수 님은 물 속에 빠진 베드로를 손으로 꼭 잡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을 예수 님께 모두 맡겨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예수 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모두 다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그리고 괴로울 때, 힘들 때, 낙심될 때 주님의 얼굴 바라보십시오.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하거나, 또는 내 모습만으로 만족해하지 말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간에 예수 님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 님 때문에 즐거워하십시오. 그리하면, 평강의 주님께서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한 참된 평강으로 우리 심령 속에 가득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 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가 되어서,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평강이 우리 심령 속에 늘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평안합니까? 그것은 불안의 뿌리가 죄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죄 문제가 해결되어 있지 않는 한 아무리 불안의 세력을 자르고 잘라 낸다 하더라도 어느새 고개를 다시 치켜듭니다. 아무리 불안의 환경을 제거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바꾸고 바꾼다 할지라도 불안은 또 다시 찾아오고 불청객으로 방문을 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이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을 받아야 참 평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를 원수 되게 합니다. 죄가 가로막는 한 평안은 없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죄입니까? 다윗은 몸은 비록 궁궐에 있었지만 마음은 지옥에 있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여름 가믐에 마름 같은 고통이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지만, 마음이 괴로워서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 되고 어떻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어떤 죄라도 회개합시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올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객지에서 마음 고생하느니 차라리 아버지에게 돌아와서“잘못했습니다”하고 매를 맞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죄를 용서받으니까 마음만 편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권리도 회복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안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작은 병도 오래두면 큰 병이 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병이라도 초기에 치료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병이 만병의 원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죄가 있다면 다 회개합시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참 평안을 얻는 삶을 얻기 위해서는 오직 한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평안입니까? 그것은 적어도 폭풍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지금 폭풍이 일어나 죽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엉망입니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엄청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폭풍, 그 위기보다 강한 힘이 있습니다. 바로 그 강한 은혜의 힘이 그들을 붙들어 주기 때문에 참 평안을 누립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위기가 없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걱정, 근심도 없는 평안이 아닙니다. 무서운 위기와 시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덮어 버리고 그것을 이기게 해 주는 더 큰 힘과 은혜가 있기 때문에 평안한 평안입니다. 이것이 참 평안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이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죄 문제를 해결 받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오늘 혹시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 계시면 예수 믿으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아십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비교도 안되고 견줄 수가 없을 것입니다. -------- <예화 짱> 어느 자동차 공장의 정비사가 차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차가 시동이 꺼졌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자동차 본넷트를 열고 살펴보았는데 고장난 부분을 알 수 없습니다. 한참 땀을 흘리는데 어떤 노신사가 다가와 말합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정비사가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제가 차량 정비를 한지 벌써 20년 되었소!\\\" 노신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어떤 부분을 툭 건드렸습니다. 그러자 차가 금방 시동이 걸렸습니다. 그 노신사는 그 차를 발명한 포드였습니다. 우리들은 너무 높아져 있습니다. 몇 십년 동안 무엇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방에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고 어려움도 많이 당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도와줄까?\\\" 여러분! 하나님의 초청에 자신을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매우중요). <염려하는 시간에 기도하라-기도에는 실패가 없습니다.-문제와 근심, 걱정, 어려움에서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돌파하십시다. 힘을 주시옵소서라고 .... > <기도의 중요성> 앤드류 머레이는 기도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늘을 좌우하는 지상 유일의 힘이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간 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무엇보다도 기도에 강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가 있으면 뚫고 나가면 됩니다. 아주 어려운 문제이면 기도하면 됩니다. 너무 다른 어떤 스타를 찾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사람들이 스타입니다. 그러므로 혹 다른 것에서 실패할지라도 기도에서 실패하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실패하는 것이지 기도가 우리에게 실패하는 일은 없습니다. 기도에는 실패가 없습니다(매우중요). 다만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실패할 뿐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기도 응답이 오기 전에 내 속에 힘이 생깁니다. 마음의 평안이 생기고, 지혜와 명철이 생깁니다. 그것이 기도응답만큼 중요합니다. ----- *** 평안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평안이 없다 <중요 성경구절-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중요> 예레미야 29장 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 게 평안을 주기를 원하고 장래에 소망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안 이상 그 하나님 품속 에 우리가 안기면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면 죄가 용서함 받고 마귀의 발톱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 고 영존하시며 전지전능 무소부재 하시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면 우 리 마음 속에 휴식과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22장 21절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안은 인간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날개 아래 거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의 지할 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매우중요 성경구절> 시편 91편 4절로 6절에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날개 밑 내가 편히 거하네’ 주님은 어미 닭처럼 우리를 그 날개로 품으시고 그의 성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밤에 놀라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밤에 놀라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당하는 시련입니다. 밤중에 갑자기 흉한 소식이 들려오면 얼마나 놀랍니까? 밤중에 마음이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부지불식간에 당하는 시련입니다. 충동적인 살인이나 납치를 당하는거나 유괴를 당하는 것이나 우리의 정보가 유출당하거나 카드빚 사기 등 요사이 밤에 깜짝깜짝 놀랄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힘으로 막을 도리가 없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주 날개 안에 있으면 이런 일도 주님이 피하게 해주십니다. <보호하심 예화> 미국의 저명한 뉴스 평론가인 폴 하빈은 다음과 같은 사건을 보도한 일이 있습니다. 네브 라스카주에 있는 비트리스라는 도시의 웨스트사이드침례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30분에는 성가대 연습이 있기 때문에 대원들은 거의 모두 그 시간에 교회 에 모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결코 전에 없었던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 도 빠짐없이 대원 전체가 성가대 연습시간에 좀 늦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피아노를 반주 하는 자는 저녁을 먹고 잠깐 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에 성가대원인 그의 어머니 와 함께 늦을 수밖에 없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한 성가대 여학생은 학교의 급한 숙제 때문에 불가피하게 늦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한 부부는 항상 교회오는 길에 다른 대원들 몇명을 태워서 데리고 오는데 대원들을 태우고 오다가 자동차 엔진이 꺼 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엔진을 다시 고쳐서 오기 때문에 늦어져서 시간 안에 못온다고 연락 이 왔습니다. 정말로 이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그날 저녁에 18명의 성가대원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늦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7시 30분에는 반드시 성가를 연습해야 합니다. 그런 데 연습시간 7시 30분까지는 평안했는데 바로 그날 1950년 3월 1일 수요일 저녁 7시 30분에 교회 지하실에 있는 가스 파이프가 새서 대폭발이 일어나고 교회 전부가 불타버렸는데 성 가 연습실이 바로 가스실 위에 있었습니다. 7시 30분에 정시로 모였으면 한 사람도 빠짐없 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서 죽었을 것인데 그날따라 18명 성가대원 모두 일이 생겨서 정시에 교회에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 살았습니다. 주 안에서 사는 사람은 사건이 생겨도 하 나님 뜻인줄 알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발버둥 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알아서 이 사람들을 다 피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 <주님이 주신 평안 예화 감동> 저는 몇일 전 고층 빌딩의 승강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한 정신 박약아와 그의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휠체어를 잡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거기 타고 있는 이미 다 자란 정신 박약아, 이 아이는 자꾸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해달라고 합니다. 바깥 구경도 하고 신이 나서 기분이 좋습니다. 어머니는 불편하고 외롭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은 밀려들어오지요. 오는 사람마다 다 큰 아이가 휠체어에 타고 밖을 보고 있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피곤해 보입니다. 괴로워합니다. 애처롭습니다. 수치감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바로 정신 박약아의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사랑이 있기에 평화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두 사람 마음속에 주님이 주신 평안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28절 해석> 28절-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예수님의 가심을 기뻐할 이유가 무엇인가? (1)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그가 영화를 얻으시는 사건이기 때문이며(히 12:2), (2) 그가 가심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까닭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이것은, (1) 예수님께서 땅에 계신 동안 영광을 취하시지 않은 고로 아버지보다 낮음을 가리키고, (2) 그가 중보자(中保者)의 지위에 계신 것 만큼, 그 역사에 있어서는 아버지에게 종속(從屬)하심을 말함이다. <29절-31절 해석> 29절-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절-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절-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는 사랑함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은 단순히 그렇게 해야지 나에게 복이 돌아오고 오지 않는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의 결과로 만들어진 하나, 한 뿌리, 한 덩어리가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리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통하여 교회란 우리가 만들려고 만든 단체가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여 만들어진 모임이라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는 일에는 관심 없고 무슨 일을 위한다던가 계모임과 같은 친목을 위해 모인다면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새로운 한 덩어리가 된 존재라는 것을 이 세상 속에 드러내야 합니다. ------- 이 부분 말씀은 14장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 결론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곧, (1) 그가 이 부분에 미리 말씀하신것은, 그 일이 성취될 때에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29절)과 (2) 사단의 무리가 와서 예수님을 고난의 자리로 잡아 간다는 것이다(30-31).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곧, 사단은 예수님을 정죄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고 하늘에 속하셨으며, 또한 그에게는 전연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 <결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27).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평안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예수님의 참된 평안이 찾아옵니다(29)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시대가 불안의 시대고 우리의 존재가 불안한 존재이고 현세계가 불확실의 시대인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 마음에 안심을 갖고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품에 안기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 땅에는 풍파가 늘 일고 안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우리 마음속에 평화(평안)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평안은? ,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안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품에 안기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고 믿고 또 믿고 또 더욱 믿을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5-31/ 1998-10-25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5-31 수학문제를 풀 때 정확한 답을 내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은 식을 바로 찾는 것입니다. 바른 식을 찾지 못한다면 바른 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식을 적용하여 바른 답을 얻을 수는 없습 니다. 여행을 할 때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하기 위하여서는 바른 길을 찾 아야만 합니다. 길을 바로 찾지 못 하고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착할 수 는 없기 때문입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에 중요한 것은 정확한 식을 찾는 것이고 여행할 때 중요한 것은 바른 길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의 중요한 문제를 정확하게 풀어 나가고 목적한 바들을 정확하게 성 취해 나가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 은 삶의 바른 식과 옳은 길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선조들은 철학을 하였습니 다. 철학의 궁극적인 관심은 진리이 었습니다. 진리란 삶의 바른 이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철학은 바로 그 삶 의 이치와 식을 찾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선조들이 철학을 할 때 동양의 선조들은 도를 닦았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길이 있다고 저들은 생각하였고 그 길을 찾아야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IMF의 실패를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실패입니 다. 우리가 이와 같은 실패를 겪게 된 것은 그동안 세워왔던 식이 틀렸 기 때문이고 그동안 우리가 걸어왔 던 길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러므로 IMF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면 그 잘못된 식과 길을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거기까지 깊이 생각들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IMF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가 내어놓은 방안은 \\\\\\\'구조조정\\\\\\\' 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구조 때문 에 이와 같은 실패가 왔다고 보기 때문에 그 잘못된 구조를 조정해야 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구조를 조정 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조를 조정하는 방 법에 관한 것입니다. 정부는 구조조 정을 물리적인 방법으로 감행하려고 만 생각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물 론 그와 같은 방법에 의한 구조조종 도 당분간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 결이 될 수 없습니다. 구조를 조정 하려면 구조가 그렇게 잘못되게 된 근본을 찾아서 거기서부터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만 합니다. IMF와 같은 실패가 오게 된 까 닭은 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 다. 그런데 그와 같은 구조가 잘못 되게 된 것은 우리들의 생각하고 사 는 식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사고방 식과 사는 식이 틀렸기 때문에 구조 가 잘못되게 된 것이고 그 구조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잘 못된 답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런데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식을 바 꾸려고 하지 아니하고 구조만 물리 적인 방법으로 조정하려 하고 있습 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방법이 아닙니다. 구조를 조정하기 이전에 먼저 생각하고 사는 식을 바 꾸어야만 합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사는 식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속담에 모로가도 서울 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리고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꿩 잡는게 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 고 또 같은 맥락의 말씀으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습 니다. 모두가 다 식과 과정은 좀 잘 못 되어도 답과 결과만 좋으면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 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로가도 서 울만 가면 된다라고 이야기하지만 모로가면 절대로 서울을 갈 수 없습 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된다고 하지만 개처럼 번 사람이 정 승처럼 쓰는 예를 저는 본적이 없고 혹 있다고 하여도 그 때문에 개처럼 번 것이 합리화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혹 식이 틀려도 답만 맞으면 된다고들 이야기 하지만 식 이 틀리면 답도 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혹 어쩌다 실수로 식이 틀렸는데도 답이 맞는 수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 다고 거기다가 인생을 걸 수는 없습 니다. 그것은 만에 하나 맞는 것이 지 늘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 다. 틀린 답을 고치려면 식을 고쳐 야만 합니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 이요 법입니다. 그리고 가장 정확한 방법입니다.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 내가 가는 방향은 꽉 막혀서 요지부동인데 반 대편 방향은 길이 뻥 뚫려서 시속 100Km로 쌩쌩 달리는 것을 볼 때 가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길을 바꾸지 않습니다. 빨리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적을 향하여 바르게 달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인생에 있어서는 종종 우 리는 엉뚱한 실수를 합니다. 사탄에 게 아주 우습게 속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사망 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다고 하셨습 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으로 인도하 는 길은 시속 10km도 안되는데 반 대편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100km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뜻 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에게 그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가는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그 길이 넓은가 좁은가만 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답답하게 그 길로 가지 말고 이 넓은 길로 가 라고 우리들을 유혹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세상 의 많은 사람들이 그 당치도 않는 시험과 유혹에 너무 잘 넘어가고 있 다는 사실입니다. 뻥 뚫린 길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의 목적은 잊어 버린채 길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식 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신나게 달린다는 것입니다. 100km의 속도로 달릴 수 있습니 다. 막히는 것도 없습니다. 답답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틀 린 길이기 때문에 아무리 빨리 달려 도 우리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 니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 입니다. 길이 잘못되었으면 빨리 달 려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빨리 달리 면 달릴수록 잘못되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보기에는 답답하게 보여도 느리게 보여도 바른 길로 가 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당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 씀이 우리의 삶의 식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길로 가지 않습니 다. 그 식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 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그라 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교 회에 다니는 우리들까지도 그 식대 로 살지 아니하고 그 길대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제법 잘 달려 왔 습니다. 넓은 길로 그리고 빠른 길 로 달려 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 리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길을 잘 못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식을 잘못 세웠기 때문입니다. 모로가도 서울 만 가면 된다고 하였는데 결국 모로 가다가 엉뚱한데로 가게 되고 말았 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식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길을 바꾸 어야만 합니다. 그 일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이 앞장서서 해야만 합니다. 잘못된 식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식을 내세 워야만 합니다. 잘못된 길을 거부하 고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여야만 합 니다. 악인의 꾀를 좇아 사는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삶을 고집하여야만 합니다. 93년도에 코스타 집회를 인도하 기 위하여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위튼 칼리지 (Wheaton college)에 갔었습 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캠퍼스를 산책하다가 Science hall이라고 이 름 붙여진 건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 벽에 골로새서 1:17 절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By Him all things consist\\\\\\\" 저는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얼마나 큰 감 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과학의 기 초를 신앙위에 놓겠다는 세상에 대 한 선전포고와 같은 강력한 말씀이 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읽으면서 아 이 대학이 참으로 하나님의 대학 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 다. 순간 저는 하나님께 간절한 마 음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런 대학이 우리 한국에도 하나 있 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대학을 우리 한국에도 하나 허락해 주시옵 소서 ...\\\\\\\' 95년도에 포항에서도 외딴곳에 떨어져 있는 흥해읍이라고 하는 곳 에 한동대학교가 세워졌습니다. 학 교를 개교하기도 전에 학교를 세우 던 재단이 부도가 나서 학교는 재단 이 없는 학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 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개교도 하기전에 부 도가 난 지방대학에 누가 오겠는가 라고 생각하겠지만 95년도에 신입생 을 뽑았을 때 경쟁률은 12대 1에 달 했으며 저들의 입학 성적은 서울의 명문대 수준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서울대에 합격을 하고 서도 서울대를 포기하고 한동대에 입학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좋은 교수들도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이 미 좋은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잡은 분들도 그 좋은 자리를 포기하고 부 도난 지방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것 입니다. 그렇게 좋은 교수들과 학생 들을 끌어 드린 한동대의 매력이 무 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한 동대가 개교부터 내세운 학교의 모 토이었습니다. 그 모토는 \\\\\\\'하나님의 식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양 성하는 하나님의 대학\\\\\\\'이라는 것이 었습니다. \\\\\\\'하나님의 식으로 하나님 의 사람들을 양성하는 하나님의 대 학\\\\\\\'이라는 말이 그렇게 사람들을 끌 었던 것입니다. 95년도에 허허 벌판에 세워진 한 동대학은 96년부터 교육개혁 우수대 학으로 뽑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리고 97년도에 이어 98년 올해까지 3년을 연속해서 교육개혁 우수대학 으로 선정되었고 올해는 최우수 대 학으로까지 선정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 니다. 자연 학교는 학교를 홍보할 때 그와같은 사실을 집중적으로 홍 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번 한동대학교에서 발행하는 한동신 문에는 학교 홍보에 대하여 의의를 제기하는 글이 실렸습니다. 그것은 한동대 학생이 쓴 글이었는데 한동 대학교가 교육개혁 우수대학으로 연 속해서 선정되는 것은 감사한 일이 요 자랑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으 나 학교를 홍보할 때 그것을 가장 강조해서 홍보하는 일은 옳지 않다 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한동대에 지원을 하게 된 동기는 한동대가 교육개혁 우수 대학이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 다. 자신들이 한동대에 지원을 하게 된 동기는 한동대가 \\\\\\\'하나님의 식과 방식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이라는데 있었음으로 학교를 홍보할 때에도 교육개혁 우수대학을 제 1번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식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이라는 점을 계속 1 번으로 홍보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계속 해서 좋은 인재들을 뽑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이땅 에 그와같은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 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올 가을 학기부터 월요일마다 한동 대 강의를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크리스천 베이직이라는 과목으로 강 의를 하는데 300명이 좀 넘은 학생 들이 강의를 듣고 있으며 더 감사한 것은 10명이 넘는 교수님들이 강의 에 들어와 함께 강의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공부 하면서 하나님의 식의 기초와 원칙 을 세우고 그 기초와 원칙을 기본으 로 하여 교수님들이 자신의 전공과 신앙을 접목하여 보다 구체적인 하 나님의 식을 세우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 고 학생들로 하여금 그와같은 삶을 세상에 나가 살게 한다면 지금 보다 좋은 세상을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식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 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 로 살기는 세상 식으로 산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예수님은 입으로 주여 주여 하 는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 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 세상은 하나님의 식을 버리고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움직여져가고 있습 니다. 답답하고 느린 길을 외면하고 넓고 빠른 길을 달리기 때문에 편안 하기는 하지만 목적했던 목적을 이 룰 수는 없음으로 참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당 신이 아버지께로 가신 후 보혜사 성 령이 우리에게 오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 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 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 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식과 법을 배우게 될 때 우리에게 평안이 주어질 것인데 그것은 세상 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식으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식으로만 평안 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식으로 삶의 문제를 풀어 가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어 느 길로 달려가고 계십니까? 예수님 이 길이십니다. 예수님이 식이십니 다. 예수님이 법이십니다. 예수님이 수이십니다. 길이 틀리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식과 법이 틀 리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수가 틀리면 이길 수 없습니다. 구조를 조정하는 것만으로는 오 늘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 니다. 식을 바꾸어야만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IMF의 문 제도 마찬가지요 여러분 자신의 문 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식 과 방법이 우리 보기에는 답답해 보 여도 어리석어 보여도 그 식과 방법 이 옳은 식과 방법입니다. 참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이 주시는 평안의 복을 누리시기를 원하신다면 식을 바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고 방식을 바꾸시고 사 는 식을 바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 다. 그리할 때 정말 하나님이 주시 는 참 평강의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김동호 목사(서울 높은뜻숭의교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6-27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6-27 2002-03-06 16:50:56 read : 107 설날이 되면 가장 기뻤던 것이 새옷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추운 날씨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새 옷을 입어보고 새 양말을 신고 좋아하던 그 기쁨을 말도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왜 그렇게도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그리워합니다. 명절날의 최고의 은혜는 부모님을 뵈려고 온 친적들이 모이는 것에도 있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새옷을 받게되는 선물에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을 때 그 옷 하나를 선물 받았을 때 가졌던 기쁨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있습니다. 옷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렇게 좋던 옷도 시간이 지나면 금새 헌옷이 됩니다. 그렇게 좋던 옷이 떨어지고 헤어집니다. 그렇지만 그런 선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시간적이고 조건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선물이 있습니다. 평생토록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 선물이 있습니다. 평생을 입고 가지고 있어도 줄어들지 않는 선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하면 평안입니다. 오늘 저는 샬롬! 평안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얼마전입니다.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바울이 생각났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들어갑니다.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매를 맞고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두려움 없이 찬송과 기도를 합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몸은 감옥속에 있지만 그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평안을 받으면 환경을 초월합니다. 가난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초월하는 평안을 갖게 됩니다. 저는 바울이 누렸던 이 평안을 오늘 전하고자 합니다. 옷은 돈을 주고 얼마든지 살수가 있습니다. 재산은 절약하여 모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부는 노력으로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평안은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평안을 얻는 것입니까? 죄를 내려 놓을 때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근심하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죄라고 하는 것을 품고 있으면 절대로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저는 어릴 때 리어카를 끈 적이 있습니다. 짐을 가득 싣고 오르막을 오릅니다. 그러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올라 갈 수가 없습니다. 짐의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끌고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다가 짐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리어카를 끕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편하게 끌고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짐을 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짐을 지고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있고, 죄를 끊어 버리고 내려 놓아 자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힘이 들고, 무겁고 지친 죄의 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내려 놓기만 하면 자유함을 얻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을 평생동안 지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평생을 불안하고 두렵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놀다가 학교 창문을 깨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창문을 갈아넣을 돈을 가져 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굉장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돈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가 없는 돈입니다. 한 오리정도 되는 길인데, 그 길이 늘 뛰어 내려오던 길인데 그날따라 얼마나 다리에 힘이 빠졌었는지 모릅니다. 힘없이 터벅터벅 내려옵니다. 그런데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어머니가 안에 계십니다. 어머니가 묻습니다. \\\\\\\"얘야! 어디 아프냐!\\\\\\\"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눈길에서 \\\\\\\'내가 정직하게 창문을 깨었다고 말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창문을 깨었습니다\\\\\\\". \\\\\\\"그래서 내일 유리값을 가져 가야 합니다\\\\\\\". 우리집 식구들 중에 학교에 다니면서 창문을 깬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걱정말아라 이 돈을 갔다 주어라\\\\\\\"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날 따라 어머니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당장에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주었습니다. 그 시간 전까지는 그 사건이 불안하고, 걱정이 되는 짐이었고, 큰 걱정이 되고, 불안이 되고, 두려움이 되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얼굴이 창백해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나는 \\\\\\\"창문값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렵고 불안하고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죄는 내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내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질병을 내가 해결하지 못합니다. 질병에 걸리면 두려운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 짐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걱정이 사라지고 공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생에 가장 큰 무거운 짐이 무엇입니까? 죽음이라고 하는 짐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 가슴 아픈 죽음이 있었습니다. 위암에 걸린 환자인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당신이 돌보는 중년이 된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이 공무원이었는데 농구를 하다가 넘어져서 다쳤는데 전신에 마비가 왔습니다. 그런데 긴 투병의 기간 동안에 부인도 친정으로 돌아가 자동으로 이혼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이 아들을 어머니가 목욕을 시키고 옷을 입혀주고 교회에 다닐 때면 꼭 신발이 쇠가 달려있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신발을 신는데 이 신발을 어머니가 신겨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을 두고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죽음의 짐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이제 저 아들은 누가 목욕을 시켜준다 말인가?\\\\\\\" \\\\\\\"교회에 갈때 누가 신발을 신겨준단 말인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북받쳐 오릅니다. 가슴에는 점점 복수가 차오르는데 복수만큼이나 세상의 염려와 걱정이 차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면 그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 얼굴에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죽음의 짐을, 죽음을 향한 두려움을 주님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려놓을 때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는 평안이 없습니다. 나의 죄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근심과 두려움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품고 있는 자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평안을 선물로 주십니다. 수도관을 통하여 물이 흘러 들어옵니다. 수원지에 있는 엄청난 분량의 물입니다. 지난번에 소망교회 수양관에 갔는데 쉬는 시간에 수원 광교산 자락에 저수지에 물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 저수지의 물이 수도관을 통하여 집에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수원지에는 엄청난 분량의 물이 항상 가득합니다. 하늘의 평화는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평안이 성령을 통하여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평안은 아무에게나 들어가지 않습니다. 성령의 통로를 따라 흘러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여러분! 어떤 걱정이 있습니까? 사실 가장 큰 불행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모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는 절대로 평안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감옥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지 않습니까? 왜! 평안한 것입니까? 여기에는 영적이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라고 말씀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기 때문이라 저가 나를 지키실줄을 확신함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 이것이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이 가르쳐 주는 영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느냐가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많아서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질병이 들어서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을 확신하면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잘 살아도 하나님을 모른다는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불안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져도 불안한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통하여 평안을 주십니다. 히스기야왕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벽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기도를 합니다. 여기서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기도를 응답이 다시 이사야에게 임합니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왕하20:5-6) 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의 공포가 왔습니다. 두려움이 왔습니다. 그럴 때에 두가지의 반응을 봅니다. 허둥대다가 마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정난 사실이 오면 허둥댑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왕은 하나님을 향합니다. 기도의 줄을 통하여 응답이 오고 응답이 평안으로 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분의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이 큰 선박을 구경하는데 큰배에는 자이로스코프(gyroscope)라고 하는 커다란 원형장치가 있습니다. 아무리 파도가 높고, 물살이 험해도 배의 수평을 안전을 유지해주는 장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장치가 작동만 하면 배는 안전한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 선교사는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인생이란 배도 소망의 항구를 향하여 항해하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도 안전하게 항해하는 것은 그 안전장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선교사는 \\\\\\\"그것이 바로 기도의 자리이다\\\\\\\"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자리를 붙들고 있으면, 기도의 자리만 작동하고 있으면 배는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외부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이 이 아닙니다. 영적인 자이로스코프가 움직이기만 하면 배는 파도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자이로프스키라고는 안전장치, 평형장치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가 기도하는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평안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실패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다윗을 생각하면서 그가 받은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다윗이 시련을 얼마나 많이 당합니까? 자식이 자기의 죄값으로 죽는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고 장인한테는 생명의 위기를 당합니다. 얼마나 악착같이 죽이려고 합니까? 그런데 끝까지 기도의 자리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아들 압살롬의 세력에 의해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다윗이 누구를 의지합니까? 도망하는 다윗은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잡으러 가는 사람이 평안합니까? 쫓기는 사람이 평안합니까? 사울이 삼천명으로 다윗을 잡으려고 풀어놓습니다. 그리고 이를 잡듯이 다윗을 잡으려고 수색을 합니다. 그러던중 사울이 참모들 사이에 잠을 자고 있게 됩니다. 다윗의 부하중에 아비새라고 하는 부하가 있는데,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삼상26:8)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립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삼상26:11)\\\\\\\" 라고 하십니다. 저 산에 올라 가지고 사울을 지키는 아브넬장군을 부릅니다.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중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삼상26:15) 다윗은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보복하지 않습니다. 위기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기도의 응답을 통하여 하나님의 평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분노가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을 가진 것입니다. 모든 시련과 시험을 끝내고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란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삼하22:1-4)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기도의 응답을 받는 사람은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이 되고 하나님이 방패가 되신다는 확신을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찬양 한번 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라 후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나의 생명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의지시라 주는 나를 이끄시어 주의 길 인도하시며 나의 생의 목자되시니 내가 따르리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생명의 면류관으로 내게 씌우소서 삶의 위기속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는 사람은 평안이 들어 오는 것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7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 2004-07-02 12:54:50 read : 237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원합니다. 불안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불안으로부터 탈출하여 저 위기와 공포가 전혀 없는 평안의 세계에서 거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너무나 불안하다는 사실입니다. 불안한 젊은이들일수록 잡음과 소음이 혼합된 파열음악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 파열음만큼이나 균열이 간 현대인의 내면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불안 때문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류의 처절한 싸움은 불안과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숙원은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474).”이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에는 근심된 일이나 죽을 일이 많습니다.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사건이 어디 한 둘입니까? 우리에게 평안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이 필요합니다. 평안을 빼앗는 것이 무엇입니까?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입니다.“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왜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에 빠져있습니까? 예수 님이 제자들을 떠난다는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 님이 떠난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예수 님이 곧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님이 죽으시다니!”예수 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입니다. 당장에 자신들도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스승이 없는 제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3년 동안 예수 님을 믿고 따랐는데, 아무 보상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허탈하기도 하고 장래가 두렵기도 합니다. 예수 님이 죽으신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무지이고 불 신앙입니다. 모든 근심과 두려움은 무지와 불 신앙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 님은 죽으셔야 영광입니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야 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발전되어야 합니다. 예수 님이 좋다고 늘 예수 님 붙잡고 함께 살 수 는 없습니다. 성령을 보내서 일하시는 예수 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알았다면 근심도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1. 예수 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27). 세상 사람들은 평안을 외부적인 환경이나 물질에서 찾습니다.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수면제로 얻은 평안은 몇 시간 못 갑니다. 내일 밤이면 또 괴롭습니다. 술로 얻은 평안은 술기운이 사라지면 형편은 더 악해집니다. 가난해서 먹을 양식이 없는 가정은 땀 흘려 일해서 일용할 양식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이 있습니다. 물질로 얻은 평안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물질이 없어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집안에 없던 돈이 한번에 많이 생기면 오히려 집안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물질이 반드시 좋은 변화를 가져온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질로 얻은 평안은 계속적인 물질을 요구합니다. 만약 물질이 지속적으로 공급이 끊어지면 그 평안은 사라집니다. 명예나 권세로 얻은 평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명예가 사라지고 권세가 사라지는 순간에 평안도 사라집니다. 젊음이 주는 평안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어렵기도 하지만 쉽기도 한 평안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해서 마음이 슬픈 여자였습니다. 세상은 아들을 낳지 못해서 마음 아픈 여자에게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수색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형에서를 피해 도망가다가 벧엘 광야에서 잠을 잤습니다. 광야의 들짐승 소리가 무서웠고, 부모를 떠난 마음에 외로웠습니다. 광야에서 잠을 자다가 깨서 마음에 평안을 얻는 일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꿈에 하늘로 통하는 사닥다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평안을 얻었습니다. 잠을 깨서 일어난 그 자리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울은 지중해에서 광풍을 만나서 탄 배가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파선하는 배 안에서 평안을 얻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가 받은 평안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피를 흘리고 죽었습니다. 세상에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 평안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가득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마지막까지 평안하게 기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이들은 예수 님이 주시는 평안을 맛본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수가성의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다가 예수 님에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간청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에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을 구합시다. 세상의 평안이 아니라 성령이 주는 참된 평안을 얻읍시다. 신령한 평안을 사모하는 자에게 신령한 평안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평안\\\'입니다. 건강도 필요하고 물질도 필요하고, 또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속에 \\\'평안\\\'이 있어야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이 부유하고 신체적으로는 건강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속에 평안이 없다면, 사는 것 같으나 실상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정 몽헌\\\'라는 최정상의 현대그룹의 총수가 왜 자살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마음속에 \\\'평안을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물질과 명예를 가지고 살았다하더라도, 그 속에 평안이 없다면, 사는 것 같으나 실상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적으로 마음이 항상 무엇인가초조하고 불안한 사람은 삶의 의미조차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물질(명예)로 채 울 수 없는 평안! 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 님이 주시는 평안을 소유하는 자는, 마음속에 근심과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늘의 충만한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 같은 평안의 축복이, 예수 님을 믿는 우리 속에 이미 거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당하고 있는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 님 앞에 엎드려 예수 님 발에 부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장면을 보고, \\\"예수가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그 행실이 얼마나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사람들의 차가운 이목과 시선을 받던 그 여인은 마음이 두근두근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은데, \\\'과연 예수 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약간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향유가 든 옥합을 예수 님 발에 부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하십니다. 그 여인은 죄에서 자유 함을 얻고 평안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은, 예수 님의 옷자락을 만져 깨끗이 치료함을 받고 예수 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예수 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고, 불안해 떠는 자들의 마음속에 참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 님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달려가던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님께서 나타나셔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눅2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 님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평안을 끼치는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을 전도 파송 보내시면서도, 너희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평안함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평안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 평안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만약, 그 집이 예수 님의 평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라면, 그 평화가 기도한 사람에게로 되돌아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 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죄인들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 님을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평화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님은 제자들에게 무슨 평안을 줍니까?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평안을 줍니다. 지난날에는 예수 님이 직접 평안을 주었지만, 이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서 주십니다. 이것은 발전된 것입니다. 지난날 보다 더 강력한 평안입니다. 예수 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 님에게서 평안을 보았습니다. 예수 님의 말씀 한마디, 예수 님의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기적을 보았고, 그것은 그들에게 하늘의 평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 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대신 보혜사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부어주심으로 더욱 심오하고 강력한 평안을 주십니다. 눈과 귀로 듣고 맛보던 평안이 아니라, 마음속에 느끼는 평안입니다. 손과 발로 감각적으로 맛보던 평안이 아니라, 영적으로 마음으로 맛보는 평안입니다.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평안이 아니라, 마음속에 영원히 지속되는 평안을 맛봅니다. 보혜사 성령이 주는 평안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보편적인 평안입니다. 조건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는 평안입니다. 병상에서나 지하철에서나 자동차 안에서나 궁궐이나 초가집이나 다 같이 누리는 평안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그럴듯한 환경 적인 요인을 갖춤으로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일어나지도 못하는 새벽에 임하는 평안이고 남들이 곤한 잠에 떨어진 밤중에 임하는 평안입니다. 머리로 얻는 평안이 아니고 가슴으로 얻는 평안입니다. 무슨 재료나 기회가 되어서 조건으로 얻는 평안이 아니라, 성령만 받으면 얻는 평안입니다. 돈이나 배경이나 아무 것도 없이 얻는 평안입니다. 분위기나 환경과 상관없이 얻는 평안입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어떤 환경 적인 요인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2. 성령 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 자기 도취의 감옥입니다. 항상 자기가 최고인줄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공주병\\\' 또는 \\\'왕자 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자기 도취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진정한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2).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비판의 감옥입니다. 마7:1절 이하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이와 같이 남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사람이, 비판의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감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3). 절망의 감옥입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절망하는 사람은 결국 죽음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절망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평화를 소유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4). 옛 일만을 황금시대로 생각하는 과거 지향적인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거듭 말하면서 과거에 안주하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도전정신이 약해집니다. 과거 지향적인 감옥에서 벗어날 때,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게 되고, 희망과 용기와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5). 다른 사람의 것만 좋다고 생각하는 선망의 감옥입니다. 남의 떡이 크게 보인다는 우리 속담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과 상황인데도 자신이 더 힘들고 더 어렵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최고로 불쌍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남의 것만을 좋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는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의 것만을 좋다고 생각하는 선망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6).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증오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감옥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듯이, 남이 잘되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 배가 아픈 사람입니다. 이러한 여섯 가지 감옥. 즉, 자기도취의 감옥, 비판의 감옥, 절망의 감옥, 과거 지향적인 감옥, 선망의 감옥, 그리고 증오와 시기와 질투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님이 성령 님을 통하여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은 가진 자가 평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 부자는 그 부함 때문에 더 많은 염려와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인기 있는 연예인이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의 이목을 많이 의식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 함보다는 겉치레를 포장하는 경우가 더욱 많아 부자유스럽습니다. 전쟁에 사용할 무기가 많으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수물자를 증강하지만, 더욱 전쟁의 공포와 불안은 더해가기만 합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안은, 물질의 평안, 건강의 평안, 또는 명예와 권력의 평안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가져다주는 이 같은 평안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눅12장에서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말하기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다\\\"(눅12:19-21)고 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노력합니다. 재물을 많이 모은다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통해서 평안을 얻고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부자와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기에,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해하거나 세상에 속한 것으로 평안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안은 너무나도 제한된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님이 주시는 평안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을지라도, 또한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평안입니다(합3:17, 18).어떻게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까? 보혜사는 가르치는 영이고, 생각나게 하는 영입니다.“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26절).” 성령이 아니면 예수 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암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닫고 적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 예수 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 예수 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예수 님은 다시 오신다는 것 등등. 이전에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말씀들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나를 위한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새롭게 합니다. 내 것을 버리고 육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고 영으로 살게 합니다. 성령 안에 하나님의 모든 비밀과 신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얻으려면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돌부리에 넘어지면 가지 말라는 뜻인지, 돌부리를 조심해서 가라는 뜻인지 어떻게 받아들일 것입니까? 겁쟁이는 돌아갈 것이고, 용감한 사람을 그래도 앞으로 나갈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말씀을 통해 임합니다. 몇 개월 전 전 총리 지명을 받았다가 국회에서 총리 인준을 받는데 실패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여론의 공정치 못한 뭇매를 맞았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한 달 동안 외출을 하지 않고 집안에 칩거하였는데, 주로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신문도 뉴스도 보지 않고 성경만 읽었답니다. 성경 말씀은 세상에 줄 수 없는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전쟁터에서도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이 왜 성경책은 가지고 갑니까? 세상에서 자유 할 때에는 읽지 않던 성경을 왜 감옥에서 읽습니까? 성경이 마음의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모함을 당하거나 승진에 누락되었을 때 주로 읽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어린아이와 같아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평안을 얻습니다. 성경은 이상하게도 실패하고 낙심된 사람에게 더욱 강력한 평안을 줍니다. 보혜사 성령이 말씀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다른 세상 적인 무엇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와 함께 할 때, 영생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을 얻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기도는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와 계십니다. 기도로 성령 님과 대화합시다. 마음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합시다. 엘리야는 기도합니다.“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 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왕상19:4).”힘들고 살기 싫다는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옳다고 할 수 없지만,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약함을 인정하면 하나하나 치료하시고, 그 자리에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 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합니다.“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원합니다.” 예수 님도 인성을 가진 분이라 죽음을 피하고 싶다고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을 알고도 기도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얻는 평안은 알기 때문에 사자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실 기도하기 전에는 고민도 많고 갈등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일어서면 달라집니다. 평안이 가득합니다. 풍랑과 파도가 잠잠해지는 이 맛에 기도합니다. 산을 오르거나 낚싯대를 던지고 얻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하면서 얻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깊은 평안 오래가는 평안, 질적으로 우수한 평안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는 평안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매일 갈등과 다툼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전쟁과 피 흘림의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배운 사람이나 가진 사람이나 잘 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평안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다. 방법은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주변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제압해서 평안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힘듭니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에서 보듯이, 힘으로 평안을 얻는다는 것은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근본적으로 되지도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이미 있습니다. 이 평안을 믿음으로 누리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환경이나 나 자신이나 사단이 누르고 있다면 그것을 폅시다. 성령의 충만 만이 평안을 보장합니다. 우리 속에 성령이 이미 주신 그 평안을 우리 것으로 만듭시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의 부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다락방으로 모입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합시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성령 님이 주시는 참평안이 우리 심령 속에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믿을 때 평안이 찾아옵니다(29).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지 못하면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마음이 편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희망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다른 열 명의 정탐 군이나 믿음이 없는 백성들은 낙담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하여 가나안이 아닌 광야로 가버렸습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40년 동안 이들에게는 진정한 평안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주시는 평안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참 평안을 얻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러한 불안전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 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겠다\\\"는 예수 님의 공약은, 분명하고도 확실한 약속이며, 이 약속은 이미 믿는 자에게 성취된 약속입니다. 예수 님을 믿는 자는 이미 그 마음속에 영원한 평안,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평강의 주님\\\'이 되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셨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이 같은 약속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분명히 믿어져서, 풍랑 많은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평강을 늘 간직하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평생동안, 아무리 세상의 풍파가 요동하고 우리를 거스린다 하여도, 결코 흔들림이 없이 늘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예수 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우리에게 권면 합니다. 우리는 예수 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해서 평화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평화가 없습니다. 시대가 악해진다는 증거 중에 하나는, 세상에 믿음이 없어진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로간에 불신 때문에 점점 세상은 악해져만 가고, 서로 믿지 못해서 평화가 깨지고 맙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고 하셨습니다. 예수 님을 믿는 자는, 감사와 기쁨과 평강의 축복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영생의 샘물처럼 흘러 넘쳐 납니다. 예수 님은 물 속에 빠진 베드로를 손으로 꼭 잡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을 예수 님께 모두 맡겨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예수 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모두 다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 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그리고 괴로울 때, 힘들 때, 낙심될 때 주님의 얼굴 바라보십시오.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하거나, 또는 내 모습만으로 만족해하지 말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간에 예수 님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 님 때문에 즐거워하십시오. 그리하면, 평강의 주님께서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한 참된 평강으로 우리 심령 속에 가득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 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가 되어서, 예수 님이 주시는 영원한 평강이 우리 심령 속에 늘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평안합니까? 그것은 불안의 뿌리가 죄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죄 문제가 해결되어 있지 않는 한 아무리 불안의 세력을 자르고 잘라 낸다 하더라도 어느새 고개를 다시 치켜듭니다. 아무리 불안의 환경을 제거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바꾸고 바꾼다 할지라도 불안은 또 다시 찾아오고 불청객으로 방문을 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이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을 받아야 참 평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를 원수 되게 합니다. 죄가 가로막는 한 평안은 없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죄입니까? 다윗은 몸은 비록 궁궐에 있었지만 마음은 지옥에 있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여름 가믐에 마름 같은 고통이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 님을 은 30에 팔았지만, 마음이 괴로워서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 되고 어떻게 평안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 가는 어떤 죄라도 회개합시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아버지 집에 돌아올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객지에서 마음 고생하느니 차라리 아버지에게 돌아와서“잘못했습니다”하고 매를 맞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죄를 용서받으니까 마음만 편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권리도 회복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안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작은 병도 오래두면 큰 병이 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병이라도 초기에 치료하면 고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병이 만병의 원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죄가 있다면 다 회개합시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참 평안을 얻는 삶을 얻기 위해서는 오직 한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평안입니까? 그것은 적어도 폭풍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지금 폭풍이 일어나 죽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엉망입니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엄청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폭풍, 그 위기보다 강한 힘이 있습니다. 바로 그 강한 은혜의 힘이 그들을 붙들어 주기 때문에 참 평안을 누립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위기가 없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걱정, 근심도 없는 평안이 아닙니다. 무서운 위기와 시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덮어 버리고 그것을 이기게 해 주는 더 큰 힘과 은혜가 있기 때문에 평안한 평안입니다. 이것이 참 평안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이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죄 문제를 해결 받은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오늘 혹시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 계시면 예수 믿으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아십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비교도 안되고 견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27).우리는 예수 님이 성령 님을 통하여 주시는 평안을 받아들이고 믿을 때 예수 님의 참된 평안이 찾아옵니다(29) 예수 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으로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동서화목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7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7 수학문제를 풀 때 정확한 답을 내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식을 바로 찾는 것입니다. 바른 식을 찾지 못한다면 바른 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식을 적용하여 바른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여행을 할 때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하기 위하여서는 바른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길을 바로 찾지 못하고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에 중요한 것은 정확한 식을 찾는 것이고 여행할 때 중요한 것은 바른 길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의 중요한 문제를 정확하게 풀어 나가고 목적한 바들을 정확하게 성취해 나가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바른 식과 옳은 길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선조들은 철학을 하였습니다. 철학의 궁극적인 관심은 진리이었습니다. 진리란 삶의 바른 이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철학은 바로 그 삶의 이치와 식을 찾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선조들이 철학을 할 때 동양의 선조들은 도를 닦았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길이 있다고 저들은 생각하였고 그 길을 찾아야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IMF의 실패를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실패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실패를 겪게 된 것은 그동안 세워왔던 식이 틀렸기 때문이고 그동안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IMF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면 그 잘못된 식과 길을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거기까지 깊이 생각들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IMF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가 내어놓은 방안은 \\\\\\\'구조조정\\\\\\\'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구조 때문에 이와 같은 실패가 왔다고 보기 때문에 그 잘못된 구조를 조정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구조를 조정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조를 조정하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정부는 구조조정을 물리적인 방법으로 감행하려고만 생각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방법에 의한 구조조종도 당분간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구조를 조정하려면 구조가 그렇게 잘못되게 된 근본을 찾아서 거기서부터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만 합니다. IMF와 같은 실패가 오게 된 까닭은 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구조가 잘못되게 된 것은 우리들의 생각하고 사는 식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사고방식과 사는 식이 틀렸기 때문에 구조가 잘못되게 된 것이고 그 구조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잘못된 답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식을 바꾸려고 하지 아니하고 구조만 물리적인 방법으로 조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방법이 아닙니다. 구조를 조정하기 이전에 먼저 생각하고 사는 식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사는 식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속담에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꿩잡는게 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같은 맥락의 말씀으로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식과 과정은 좀 잘못 되어도 답과 결과만 좋으면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고 이야기하지만 모로가면 절대로 서울을 갈 수 없습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된다고 하지만 개처럼 번 사람이 정승처럼 쓰는 예를 저는 본적이 없고 혹 있다고 하여도 그 때문에 개처럼 번 것이 합리화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혹 식이 틀려도 답만 맞으면 된다고들 이야기 하지만 식이 틀리면 답도 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혹 어쩌다 실수로 식이 틀렸는데도 답이 맞는 수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기다가 인생을 걸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만에 하나 맞는 것이지 늘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틀린 답을 고치려면 식을 고쳐야만 합니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요 법입니다. 그리고 가장 정확한 방법입니다. 고속도로를 운전할 때 내가 가는 방향은 꽉 막혀서 요지부동인데 반대편 방향은 길이 뻥 뚫려서 시속 100Km로 쌩쌩 달리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길을 바꾸지 않습니다. 빨리 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적을 향하여 바르게 달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생에 있어서는 종종 우리는 엉뚱한 실수를 합니다. 사탄에게 아주 우습게 속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시속 10km도 안되는데 반대편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100km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에게 그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가는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그 길이 넓은가 좁은가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답답하게 그 길로 가지 말고 이 넓은 길로 가라고 우리들을 유혹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 당치도 않는 시험과 유혹에 너무 잘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뻥 뚫린 길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의 목적은 잊어 버린채 길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식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신나게 달린다는 것입니다. 100km의 속도로 달릴 수 있습니다. 막히는 것도 없습니다. 답답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틀린 길이기 때문에 아무리 빨리 달려도 우리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길이 잘못되었으면 빨리 달려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잘못되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보기에는 답답하게 보여도 느리게 보여도 바른 길로 가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당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식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길로 가지 않습니다. 그 식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그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다니는 우리들까지도 그 식대로 살지 아니하고 그 길대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제법 잘 달려 왔습니다. 넓은 길로 그리고 빠른 길로 달려 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식을 잘못 세웠기 때문입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였는데 결국 모로가다가 엉뚱한데로 가게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식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길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 일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해야만 합니다. 잘못된 식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식을 내세워야만 합니다. 잘못된 길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여야만 합니다. 악인의 꾀를 좇아 사는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삶을 고집하여야만 합니다. 93년도에 코스타 집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위튼 칼리지 (Wheaton college)에 갔었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캠퍼스를 산책하다가 Science hall이라고 이름 붙여진 건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 벽에 골로새서 1:17절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By Him all things consist\\\\\\\" 저는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과학의 기초를 신앙위에 놓겠다는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은 강력한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읽으면서 아 이 대학이 참으로 하나님의 대학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런 대학이 우리 한국에도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대학을 우리 한국에도 하나 허락해 주시옵소서 ...\\\\\\\' 95년도에 포항에서도 외딴곳에 떨어져 있는 흥해읍이라고 하는 곳에 한동대학교가 세워졌습니다. 학교를 개교하기도 전에 학교를 세우던 재단이 부도가 나서 학교는 재단이 없는 학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개교도 하기전에 부도가 난 지방대학에 누가 오겠는가라고 생각하겠지만 95년도에 신입생을 뽑았을 때 경쟁률은 12대 1에 달했으며 저들의 입학 성적은 서울의 명문대 수준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서울대에 합격을 하고서도 서울대를 포기하고 한동대에 입학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좋은 교수들도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이미 좋은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잡은 분들도 그 좋은 자리를 포기하고 부도난 지방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교수들과 학생들을 끌어 드린 한동대의 매력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한동대가 개교부터 내세운 학교의 모토이었습니다. 그 모토는 \\\\\\\'하나님의 식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양성하는 하나님의 대학\\\\\\\'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식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양성하는 하나님의 대학\\\\\\\'이라는 말이 그렇게 사람들을 끌었던 것입니다. 95년도에 허허 벌판에 세워진 한동대학은 96년부터 교육개혁 우수대학으로 뽑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97년도에 이어 98년 올해까지 3년을 연속해서 교육개혁 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고 올해는 최우수 대학으로까지 선정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연 학교는 학교를 홍보할 때 그와같은 사실을 집중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한동대학교에서 발행하는 한동신문에는 학교 홍보에 대하여 의의를 제기하는 글이 실렸습니다. 그것은 한동대 학생이 쓴 글이었는데 한동대학교가 교육개혁 우수대학으로 연속해서 선정되는 것은 감사한 일이요 자랑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으나 학교를 홍보할 때 그것을 가장 강조해서 홍보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한동대에 지원을 하게 된 동기는 한동대가 교육개혁 우수대학이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한동대에 지원을 하게 된 동기는 한동대가 \\\\\\\'하나님의 식과 방식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이라는데 있었음으로 학교를 홍보할 때에도 교육개혁 우수대학을 제 1번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이라는 점을 계속 1번으로 홍보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계속해서 좋은 인재들을 뽑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이땅에 그와같은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올 가을 학기부터 월요일마다 한동대 강의를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크리스천 베이직이라는 과목으로 강의를 하는데 300명이 좀 넘은 학생들이 강의를 듣고 있으며 더 감사한 것은 10명이 넘는 교수님들이 강의에 들어와 함께 강의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식의 기초와 원칙을 세우고 그 기초와 원칙을 기본으로 하여 교수님들이 자신의 전공과 신앙을 접목하여 보다 구체적인 하나님의 식을 세우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학생들로 하여금 그와같은 삶을 세상에 나가 살게 한다면 지금 보다 좋은 세상을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식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살기는 세상 식으로 산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 세상은 하나님의 식을 버리고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움직여져가고 있습니다. 답답하고 느린 길을 외면하고 넓고 빠른 길을 달리기 때문에 편안하기는 하지만 목적했던 목적을 이룰 수는 없음으로 참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신 후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그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식과 법을 배우게 될 때 우리에게 평안이 주어질 것인데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식으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식으로만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식으로 삶의 문제를 풀어가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어느 길로 달려가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예수님이 식이십니다. 예수님이 법이십니다. 예수님이 수이십니다. 길이 틀리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식과 법이 틀리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수가 틀리면 이길 수 없습니다. 구조를 조정하는 것만으로는 오늘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식을 바꾸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IMF의 문제도 마찬가지요 여러분 자신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식과 방법이 우리 보기에는 답답해 보여도 어리석어 보여도 그 식과 방법이 옳은 식과 방법입니다. 참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복을 누리시기를 원하신다면 식을 바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고 방식을 바꾸시고 사는 식을 바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강의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