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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C의 파수꾼/겔33:1-9
21C의 파수꾼/겔33:1-9 2003-11-18 15:00:44 read : 1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네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그 사람이 칼이 그 땅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나팔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압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 지어라." (겔 33:1-4,7)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들은 어느 시대나 귀중한 사역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삼일절을 82년 전에 대한독립선언으로 인하여 만세운동이 방방곡곡에 일어나 민족의 지도자들의 결단에 의하여 물밀 듯 일어나는 운동이였습니다. 2.8독립정신과 3.1운동의 위대한 역사는 민족대표33인을 위시하여 많은 젊은이들과 애국지사들의 적극적인 희생을 지불한 것입니다. 특별히 기독교계에서 16명 천도교에서 15명 불교에서 2명의 대표들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앞장서 이 나라 이민족의 파수꾼 이였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은 3월2일을 거사일로 정하였습니다. 갑자기 하루를 앞당긴 것은 주일을 피하기 위한 것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B.C565년경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하는 선민들의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며 끝까지 경성할 것을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언젠가는 회복시켜주신다는 소망을 일으키면서 파수꾼의 사역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기다리면서 경성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회복하기 위하여 각자의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여 파수꾼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경고의 나팔을 불어야합니다. 본문 2절~4절에 파수꾼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적진의 상태를 신속하게 파악하여 적군의 동태를 아군에게 알려야 하는 사명이요. 긴급상황이 일어날 때는 즉각 대처할 수 있도록 "나팔을 불어 경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고의 나팔소리를 들은 특수부대 5분대기조를 비롯하여 전군이 신속하게 출동하여 적군을 섬멸해야하는 것입니다. 파수꾼의 사명을 등한시하여 기습을 당한다든지 습격을 당하면 모든 책임은 파수꾼이 책임을 져야합니다. 82년 전에 민족대표33인을 중심 하여 여러 애국애족지사들이 시대적인 파수꾼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218군에서 200여만 명이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특별히 1919년 2월 8일 재일본 동경조선 청년독립단 대표들이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2.8독립선언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3.1운동에 대한 논의는 은밀한 중에 진행하였으며 1월 20일에 최린, 오세창, 권동진 등 3인은 천도교 손병희와 만나서 밀약 하여 준비하였다고 하며 YMCA, 상동교회, 승동교회, 정동감리교회, 파고다공원, 탑골공원, 같은 장소는 대한독립을 위한 기도로 부르짖음의 장소였습니다. 경고의 나팔을 불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운동의 장소였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결속과 연합의 장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도 이 세대의 파수꾼의 사명을 가지고 새로운 각오와 결단으로 시대를 새롭게 개혁합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부르짖읍시다. 신용사회가 무너지고 윤리도덕이 실종되는 현실을 위해 회개합시다. 2. 오늘의 파수꾼은 앞장서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보면 앞장선 용감한 지파가 있습니다. 민 10:13에 보면 광야에서 행진할 때 유다지파가 앞장섰습니다. 유다는 요셉이 구렁에 빠져 죽을 위기에 있을 때 앞장섰습니다.(창 37:26-27) 삿 1:2 가나안땅에서 전쟁할 때도 유다지파가 앞장섰습니다. 느 13:10~12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살피는 데로 앞장섰습니다. 앞장서는 유다지파에게 하나님께서 자손의 번성을 주셨습니다. (민2장) 앞장설 수 있는 능력을 임마누엘로 역사 하였습니다. 장남은 아니지만 형제의 머리가 되고 12형제중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왕이 많이 나오는 복을 주셔서 야곱이 예언과 축복한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창 49:8-12 까지의 축복은 형제의 찬송이 되고, 네 원수의 목을 잡고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라. 사자같이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가 유다지파에서 탄생한 큰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사에도 파수꾼 같은 사명과 앞장서는 자의 용감한 결단은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질러 뜨겁게 합니다. 3.1정신은 앞장서는 정신입니다. 용감하게 전진하는 것입니다. "오화영목사 추천으로 신석구목사님의 독립운동에 가담할 즈음에 2월 27일 새벽기도 중에 "4천 여년 내려온 이 강토와 너의 대에 와서 빼앗긴 것도 죄인데 찾을 기회가 왔는데 찾으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의 세미한 음성에 눈물을 흘리면서 아멘 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독립운동의 대열에 섰다고 하였습니다. 에스겔선지자는 민족의 파수꾼으로서 외쳤습니다. 경고하였습니다. 격려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강조하였습니다. 민족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3. 21세기의 파수꾼은 희생을 각오해야합니다. 본문 7절에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삼음은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하였습니다. 적극적인자세로 나서야 합니다. 희생을 각오하고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의 기로의 외침이요. 사느냐 죽느냐의 경고요 패하느냐 승리하느냐의 나팔이요 심판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82년 전에 독립운동과 함께 희생적인 파수꾼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몇 사람을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1904년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기고만장하였습니다. 1905년 11월 18일 을사보호조약(오조약)으로 국권이 약화되기 시작하여 11월 22일 고종황제의 친필친서를 대사를 통하여 미국정부에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민족)평화회의에 사절단을 보냈지만 입장을 거부당하여 이준 열사는 분사 순국 순직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할빈역(중국)일본의 전 통감 이도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생포 당하여 1910년 30대 청춘으로 사형 당하였습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활동한 안창호, 윤봉길 외 많은 애국지사들이 희생을 지불하여 목숨 바쳐 이 민족의 파수꾼 이였습니다. 21C의 새 시대의 새 물결을 일으키는 파수꾼이 됩시다. 신앙의 적극적인 전도와 선교의 파수꾼이 되어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합시다. 대한민국의 국가적인 사명과 민족애의 새 지표를 출현할 수 있는 파수꾼의 위상을 확실하게 정립하는 믿음의 파수꾼이 됩시다. 이 시대를 지킵시다. 악령의 물결, 세속의 회오리바람을 완전 진압하여 어떠한 유혹이라도 단호히 대처할 수 있는 파수꾼이 됩시다. 경성하여 기도합시다. 시대의 지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합시다. "할렐루야, 임마누엘, 여호와닛시 아멘"
21세기 영계의 파수꾼이 되는 교회/사60:1-3
21세기 영계의 파수꾼이 되는 교회/사60:1-3 2003-11-18 14:58:12 read : 12 생명보다 사명이 더 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나 민족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나 그 민족, 그 교회를 치워버리시기 때문입니다. 파사 나라에 거주하던 유대 민족이 간악한 하만의 계략으로 하루아침에 다 도륙을 당하고 멸절당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말하기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스더 4장 14절), 즉 네가 왕후가 된 것은 이 때에 유대 민족을 구원하라고 세워 주신 것인데 네가 그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한다는 말입니다. 이때에 에스더 왕후는 자기 혼자 왕궁에서 편하게 살겠다고 사명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식하며 기도하고 들어가 왕에게 탄원하여 유다 온 민족의 생명을 구하고 하만과 그 가족은 멸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크거나 작거나 육신의 생명이나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사명 감당하라고 생명을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오늘날 한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영계가 심히 혼탁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될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본문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그리고 나서 다음절에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이사야 60장 1~3)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움이 온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울 때에 하나님의 빛과 영광을 받은 교회가 일어나 빛을 발하여 맡겨진 사명을 감당치 않으면 함께 멸망할 것이고, 사명을 다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고 열방과 열왕이 네게로 나아오게 하겠다”는 엄청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시대시대마다 그 시대를 깨우칠 영적 파수꾼을 세우시고 사명을 다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사야 62장 6~7절에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군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밤낮 쉬지 말고 잠잠치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서 그 민족을 구원하라는 말씀입니다.1. 심판의 날이 심히 가깝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의 확신으로는 21세기는 인류의 마지막 세기요, 22세기는 맞이할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구약의 계시록이라고 하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브갓네살 왕이 본 금신상의 맨 마지막, 열 발가락 시대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니엘 2장 34~35절에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한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 7장에 나오는 사자, 곰, 표범 다음 나온 열 뿔 가진 무서운 짐승 다음에 분명히 7장 13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하는 두 말씀에서 죽었던 로마가 다시 일어나고 열 발가락, 열 뿔이 연합하는 때가 되면 주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재림하셔서 세상 나라를 심판하고 천년왕국,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지고 그 후에 영원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로마의 후예인 구라파의 여러 나라가 합하여 작년부터 공동화폐 유로화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외에도 처처에 지진과 피 흘리는 전쟁과 기근이 심판의 날이 가까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지하자원이 고갈되고 심지어 물 부족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으며 수천 년 얼어붙었던 빙산이 녹아내려 수면이 올라오고 하늘에 오존층이 파괴되어 역사 이래 없었던 기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종말의 때가 다 되었습니다. 늦기 전에 복음의 나팔을 힘껏 불어서 영혼을 깨우치고 구원해야 될 때입니다. 2. 영계가 심히 혼탁하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더욱 캄캄해지는 것처럼 말세지말을 당하여 영계가 혼탁해지고 캄캄해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60장 2절에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라고 한 말씀과 같이 영계가 캄캄하고 어두워질수록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고 빛을 받은 교회는 일어나 빛을 발할 때가 된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파괴하는데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씁니다. 하나는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럽고 지저분하게 만들어서 자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적 타락, 음란입니다. 히틀러가 유태인 600만 명을 잔인하게 죽이고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비참하게 죽인 것과 모택동이 6000여만 명을 죽이고, 스탈린이 7000만 명을 공산주의 혁명이란 핑계로 살육한 것입니다. 북한 공산주의 김일성, 김정일이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을 죽게 하고 쉬지 않고 잔인하게 죽이는 것 등은 모두 살인하고 멸망시키는 공중권세 잡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문명도, 종교도, 사탄에게 속한 것이 있고 복을 받고 잘 살게 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서 캄보디아(크메르)에 앙코르와트 사원이라고 있는데 AD 630년경에 세워졌다가 1423년경에 멸망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1860년경 불란서 사람에 의해서 발견될 때까지 그 나라 사람들까지도 그런 어마어마한 사원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몇 킬로미터 안에는 바윗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데 1 미터가 넘는 큰 바윗돌로 사원을 짓고 엄청 긴 돌다리도 어떻게 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안에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이 살았는데 갑자기 다 죽어서 멸절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병으로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아마도 문둥병이나 기타 유행병으로 몽땅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는데 그 어마어마한 사원과 문명이 있었던 줄도 모를 정도로 폭삭 망해버렸는데 영적으로 판단하면 바로 사탄의 종교, 사탄의 문명 때문입니다. 수천 개의 우상이 있고 그림은 전부 뱀이고 글씨까지도 뱀이 기어가는 것 같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뱀이 뒤트는 것 같고 뱀이 고개를 쳐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 더러운 종교를 만드는 사탄의 영이 크메르루즈같은 악한 정부가 들어서서 폴포트같은 잔인한 자가 정권을 잡고 수백만 명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킬링 필드(Killing Field)같은 잔혹한 현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탄의 영 때문에 그 나라가 비참해진 것입니다. 북한은 소련과 가까워서 무신론 사상이며 악한 사탄의 사상인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일 년에 100만 명씩 굶어 죽고 세상의 “악의 축”으로 지목을 받지만 남한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미국의 문명과 신앙을 받아들여 오늘날과 같은 복된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아 잘살게 되니까 도덕성이 타락하고 음란한 정신으로 정신이 썩어져 가는, 사탄의 영이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 걱정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경 진리를 받아들여 축복을 받고 번영했는데 교회가 안일주의에 빠지고 신앙의 열기가 식어진 데다가 복음 전도자를 양성해야 하는 신학교에 신앙을 무너뜨리고 성경을 파괴하는 이단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들이 많이 생겨나서 주의 종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종들을 키워내고 있는 형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이 기독교의 기초를 이루는 것인데 자유주의 신학을 배운 교수들은 십자가의 구속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인하며 예수님의 신성과 영원성도 부인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니까 “예수를 끌어내리고 너희가 제2, 제3의 예수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복음은 토종개구리를 잡아먹고 환경을 파괴하는 황소개구리와 같으므로 황소개구리 같은 복음을 때려잡고 내쫓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우리나라에도 전통의 무속종교가 있으니까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런 이단신학은 과거의 종교다원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보다 더 악랄하고 심각한 사탄의 사상입니다. 영국의 감리교회가 1960년대에 14,000 교회였는데 마귀의 이단신학이 염병처럼 퍼지자 십자가의 구속도 안 믿고, 부활도 안 믿게 되고, 내세 영생 천국과 지옥은 더욱 안 믿게 되어 15년 전 통계에도 8,000 교회가 죽어버리고 6,000 교회가 남았는데 그들도 거의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이 봉급을 탈 수 없으니까 신앙의 선조들이 피땀 흘려 세운 교회당이 술집으로, 가구점으로, 심지어 모슬렘교 사원으로 팔려 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런 사탄의 사상인 이단신학을 몰아내지 않으면 그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경 진리와 교회를 지키는 영적 파수꾼이 일어나 빛을 발해야 될 때입니다.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울 때, 파수꾼의 사명을 다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고 열방이 우리에게로 빛을 찾아오고 따라서 경제적으로 복을 받게 됩니다. 3. 우리나라가 5,000년 역사 이래 가장 큰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주님의 교회가 5만여 교회가 있고 1,200만이 넘는 성도가 있는데 지금 사탄의 사상인 공산주의에 다 파괴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미군이 훈련 도중 전차에 여중생 두 명이 깔려 죽었다고 해서 일 년이 가깝도록 한 달째 촛불시위를 하며 성조기를 불태우고 심지어 “미군철수”를 외치고 있으니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미군은 6.25때 4만여 명이나 피 흘리고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여중생 둘이 훈련 도중 죽었다고 “미군철수” 하라고 하니 소름이 끼치는 일입니다. 여기에 때를 맞추어 똑같이 북에서도 촛불시위를 하고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봉인한 것을 다 떼어버리고 NPT 탈퇴를 선언하고 IAEA에서 파견한 사찰단원을 추방하고 한국과 미국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미군이 훈련하다가 8명이 죽었는데도 다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미군의 덕을 많이 입은 한국이 미군철수를 외치는 것은 적화통일을 원한다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만일 미군이 철수한다면 과거 1949년에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1950년에 북한이 쳐들어온 것처럼 적화통일은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미군이 철수하면 외국 자본이 다 빠져나갈 것입니다. 탄탄한 경제 그룹인 삼성도 외국자본이 30%나 됩니다. 이건희 회장은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고 등골에 땀이 흐른다”고 말했습니다. 또 국내 자본도 위험을 느끼고 외국으로 빠져나갈 것이고 따라서 경제는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날 한국이 이만큼 잘살게 되고 거리마다 자동차 홍수를 이루게 된 것은 오랫동안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물건을 팔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반미운동이 확산되자 미국에서도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상점에서도, 심지어 음식점에서도 “한국인은 받지 않음”이라고 써 붙인 곳이 있고, 미시간 주에서는 “현대 자동차 딜러” 앞에 한국인이 성조기 불태우는 사진을 걸어놓고 한국 차 불매운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미국인은 “나는 15년 동안 한국과 거래하며 사업을 해왔으나 이번에 한국에 갔다가 길거리에서 여러 번 모욕을 당할 뻔했다. 나는 한국과 거래를 끊겠으며 동료 사업가들에게도 거래를 끊으라고 권고했다. 더 나아가우리나라 의원들에게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는 운동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만 수원 근처 화성에 땅굴이 발견되었고 북한이 굴착 공사하는 소리도 녹음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쇠로프도 건져 올렸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두 분이 어제 직접 가서 확인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큰 충격을 받고 왔는데, 매일 100~200명씩 와서 보고 큰 충격을 받고 간다고 합니다. 부산에서도 땅굴을 발견했는데 그 발견한 사람 둘이 행방불명되었다고도 하고 죽었다고도 합니다. 연천에서도 땅굴을 발견했는데 발견한 그 사람도 죽었다고 합니다. 화성 땅굴을 발견한 사람도 최근에 죽었는데, 과로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 사실이 아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욱 두려운 소식은 북한에서 한국군 군복을 30만 벌을 홍콩을 통해서 사갔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느날 밤, 군복을 입고 땅굴을 통해서 올라와 부대들을 점령하고 방송국을 점령하면 싸우지도 못하고 공산화되고 맙니다. 엊그제 김정일이 한 말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몇 해만 지나면 여러분도 남 못지않게 잘살도록 해주겠다”고 했는데 무엇을 믿고 한 말이겠습니까? 교회들이, 깨우치는 영혼의 나팔을 불고, 진리의 나팔을 불고, 뜨겁게 기도하여 영적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한 말씀을 명심하고 나팔을 불고 목숨 걸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 요2:1-11/ 2005-05-30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 요2:1-11 4절 예수님은 하나님의‘때’를 따라서 사셨습니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 해도 하늘 아버지의 뜻보다 앞서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마리아의 아들(Son of Mary)이 아니라 인자(Son of Man)로 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7- 10절 물을 포도주로 바꾸셔서 자칫 수치를 당할 수 있었던 잔치를 칭송과 감탄이 터져나오는 기쁨의 잔치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성령으로 영접하실 때,‘ 죽은’유대교 아래서 혹은 어둠 가운데서 참된 삶의 희열을 잃었던이들이 풍성한 주의생명과 교제를누리며 찬양할 것입니다(요10: 9- 10).1절 2- 4장은 가나의 표적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여기서는 새 시대를 여시는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특히‘부활’을 암시하는 표현인‘사흘 되던 날’이나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풍성한 관계를 나타내는 은유인‘혼인’(렘 3:1-8; 겔 16: 38;계 1 9 : 6 - 9은 ), 앞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 백성이 영적인 포로에서 돌아와 풍성하게 회복될 하나님 나라(사 61:10; 62:5)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3,6절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은 더 이상 잔치를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흥겨움은 깨진 채 손님들의 불평은 고조되고, 신혼부부와 가문은 수치를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결례에 쓸 물을 담는‘여섯’ 돌항아리 뿐이었습니다. 이 상황은, 곤경과 결핍으로 기쁨을 잃은 인간의 실존과 형식만 강요할 뿐 전혀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줄 수 없는 무기력한 유대교의 실상을 가리킵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없어서 생긴 내 영혼의 가난과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11절 표적을 보고‘제자들’이 믿었습니다. 하지만 항아리 물을 아구까지 채우고 기적적으로 변모한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갖다준 하인들의 반응은 나오지 않습니다. 기적이 부족해서 못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 불신이 경이로운 기적과 신비를 진부한 일상으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전기수 목사
가나안 땅에 찾아온 평화/ 수11:16-23/ 2004-10-18
가나안 땅에 찾아온 평화 수11:16-23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라고 하는 사람이 늘 즐겨 쓰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948년에 그리스의 내전이 있을 때 한 마을에 청년이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민을 떠날 때 모든 마을 주민들이 부두 가에서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가 전쟁에 나가고 떠나가서 미안한 맘으로 주민들에게 미국에 가면 무엇을 보내 줄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음식, 의복, 의약품 어느 것을 보내드릴 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무리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겐 선물은 필요 없고 평화를 가득 선물해 주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인류는 평화를 간절히 애원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중요하지만 평화가 없는 이런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평화로운 때보다 전쟁과 복력에 휩싸인 때가 더 많습니다. 1968년에 윌(Will)이라는 박사와 듀란트(Ariel Durant)라는 박사가 공동으로 세계의 역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세계사중 전쟁이 없었던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지난 3421년 동안 세계가 전쟁이 없이 평화롭게 지낸 기간이 불과 286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촌 역사의 91.6%는 나날이 전쟁으로 점철되어있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백년 한 세기만 하더라도 전쟁과 혁명으로 죽은 사람이 9억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지구의 한 편 이라크 땅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과 보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고 있는 여호수아서에서도 가나안 땅도 그랬습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갈렙의 이야기를 추정해 볼 때 약 7년간의 전쟁이 계속 되고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이 많이 죽었습니다. 요즘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려놓고 1년도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지쳐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 전쟁 때문에 몸살을 겪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7년간의 전쟁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맨 마지막에 즐거운 소식이 들리는데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듣기를 원했던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마침내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저 이라크의 전쟁도 그치고 이라크 땅에도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전 세계의 평화의 시대가 오기를 바랍니다.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 사이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계속되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면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보다는 우리 심령에 영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여호수아서는 그 당시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평화가 가능한가, 오랜 전쟁을 끝마치고 평화를 찾게 된 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평화를 누릴 수 있었는가? 그런데 그 대답은 아이러니컬하게 전쟁을 통해서였습니다. 2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우리는 일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마지막 절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말씀만 가지고 좋아합니다. 평화가 오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 앞 절에 이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 온 땅을 취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통해서 그 온 땅을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라야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쳐서 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명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왜 가나안 땅에 가고, 왜 그들을 멸하라고 하시는지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의 죄악을 밀어내고 근절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전쟁을 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 죄악을 통회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을 멸절시킬 것을 명령 하고 있습니다 . 19절 20절 말씀에도 기브온은 그들과 이스라엘과 화친하려고 나왔고, 그 밖의 다른 가나안 족속들은 이 이스라엘을 대항하고 대적하고 절대로 그들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가나안 모든 족속이 진멸 당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져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모든 질서가 바로 잡히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남북전쟁도 미국 역사의 뿌리 깊이 박혀있는 노예 제도에 대한 죄악을 뿌리 뽑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역사가들은 다른 목적들이 있었다고 지적하지만 특별히 아브라함 링컨과 같은 사람은 그 노예제도를 위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때의 전쟁이 없었더라면 아직까지도 미국사회에 노예제도와 불평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모든 전쟁에 이러한 논리를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이 벌려놓은 이라크 전쟁도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운 싸움도 바로 그런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모든 왕들을 죽이고 백성을 진멸시키면서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을 했습니다. 그 모든 임무를 완성하고 난 뒤에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영적 교훈들을 얻습니다. 첫째 우리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누구입니까? 먼저 우리는 죄와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죄는 언제는 우리와 하나님을 갈라놓습니다. 죄를 지으면 화평이 깨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히브리서 12:4절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다”고 했는데 우리가 죄와 싸울 때 이런 태도로 싸워야 합니다. 요즘 성도들이 죄에 대해서 무서워하지 않고 죄를 달콤하게 생각하고 죄를 즐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아무리 나를 즐겁게 해주고 유익하게 한다 하더라고 이것이 죄라면 우리는 과감히 죄와 싸우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둘째, 뿐만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과 풍속과도 싸워야 합니다. 로마서12장2절 말씀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합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많이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반역하는 문화나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가치관과 풍속은 결국 우리를 패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이나 풍속들 중에 하나님을 떠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따돌림과 미움을 받는다 하더라고 우리는 세상을 대항해서 싸워야 진정한 영적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싸워야 할 대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습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불복종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영생을 취하기 전에 먼저 싸워야 할 것이 있는데 , 죄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떻게 하면 바른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제 목회 선배 몇 사람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그 중에 한분을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한국에서 목회하는 것 중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흥미 있는 답변을 한 가지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든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형교회를 목회 하다보면 뭐라고 하는 자도 없고, 모든 게 다 잘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데, 그 상황에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이 대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은 바깥뿐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 가나안전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전쟁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땅의 아낙 자손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오기 전 45년 전에 그땅에 정탐하러 왔다가 아낙 자손들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끄고 자신들이 메뚜기 같이 작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때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45년 후에 이제야 가나안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고 승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얻었고 아낙 자손들을 몰아내는데 본문말씀 21절과 22절 말씀을 보면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고 합니다. 이전에는 아낙 자손을 두려워했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이 아낙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거인족속들이 가나안땅에 한 사람도 없도록 멸망시키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약간만 남아있게 될 때까지 이스라엘 경내에 그들이 얼굴을 내 밀수 없도록 격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끝까지 싸워야할 우리의 적수가 있는데, 그가 바로 마귀 사탄입니다. 마귀 사탄은 참 교활합니다. 자기를 드러 내지 않고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에게 달라 붙는지요. 여러분 이번 CBS에서 주최한 뮤지컬 The Promise를 보셨습니까? 그곳에 가 보셨던 분들은 참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 이 뮤지컬 가운데 여러분은 누구를 보았습니까? 예수님의 탄생부터 예수님의 사역과 감동적인 장면들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의 감격적인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 외에도 사도 베드로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극중에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 하는데, 베드로전서 5장8절의 말씀처럼 사탄 마귀가 여기도 저기도 늘 나타나는데 마귀가 안 나타나는 곳이 없었습니다. 호시탐탐 나타나서 역사했던 실체가 마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가 여기 다시 모였을 때 나타나고 우리의 모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그의 권세는 세상의 권세와 영들까지도 모두 동원해서 공격해오는 것이 마치 가나안전쟁의 아낙 자손과 같이 힘세고 무서운 존재가 마귀 사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귀 사탄과의 전투를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싸움을 싸우고 난 뒤에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마귀 사탄과의 싸움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귀와 싸울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시로 기도하면서 악한 영들을 대항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힘입고 특별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을 힘입고 예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실 때에 물러 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마귀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영적인 전쟁을 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이 얻은 평화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얻기 위해 죄와 세상과 나와 마귀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과 함께 연합 되어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쟁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가나의 표적/ 요2:1-11/ 2008-05-21
가나의 표적 요2:1-11 오늘 살펴볼 가나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최초로 행하신 이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때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막 시작하신 시점입니다. 빌립, 나다나엘을 제자로 택한 지 사흘 되던 날, 예수님께서는 여섯 명의 제자와 함께 갈릴리 가나라는 마을의 혼인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가나는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약 14킬로 떨어져 있는 마을로서 그곳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친한 집안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많이 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준비가 부족해선지 알 수 없지만, 포도주가 바닥이 났습니다. 유대인들의 잔치에 포도주는 없어서는 안 될 음료입니다. 포도주가 없는 잔치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참 난처한 일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와서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도움을 기대하고 한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거절이 아닙니다. 다만, 마리아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메시야로서 자기의 때에 그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뜻입니다. 그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하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거기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는 것을 보시고 하인들에게 이르시기를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항아리는 손발을 씻는 물을 담아두는 것인데, 항아리 하나에 약 64리터를 담을 수 있습니다. 이런 항아리가 여섯 개니까 총 분량을 셈하면 약 384리터가 됩니다.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웠을 때 예수님께서는 다시 이르시기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항아리의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신랑을 불러 칭찬했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오늘 저는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행하신 표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을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행하신 처음 기적이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요즘은 세태가 바뀌어서 결혼식에 가도 신나는 분위기가 덜합니다 마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결혼식은 동네잔치였습니다. 특히, 시골에서는 여러 날을 두고 손님이 찾아오기 때문에 잔치 분위기가 상당히 오래갔습니다.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일주일 내내 계속되었으며, 이 기간에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신랑, 신부를 축하하고 함께 포도주와 음식을 나누면서 즐겼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혼인 잔치는 모든 잔치 중에서 가장 즐겁고 기쁨이 충만한 잔치입니다. 돌잔치도 즐겁고, 회갑연도 기쁘지만, 혼인잔치에는 비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을 행하셔서 혼인잔치의 즐거움이 지속되게 해 주신 것은 참으로 따뜻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 표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삶의 기쁨을 잃어버린 인생들에게 참된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망의 그늘 아래 앉은 우리 인생들에게 생명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빛은 사망의 길을 헤매는 인생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저 앞에 굴뚝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을 발견했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클까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을 찾았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이 같은 경우보다도 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은 죄 사함의 기쁨입니다. 죄는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자리 잡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어서 그 마음에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존재적인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죄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해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의 즐거움은 곧바로 화해의 즐거움을 수반합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보면, 집을 나가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가 껴안고 입을 맞추고 환대했습니다. 종들을 불러다가 제일 좋은 내어다 입히고 발에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고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서 함께 먹고 즐겼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곧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합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십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심령 속에 죄 사함의 기쁨, 구원의 기쁨을 부어주십니다. ♪ “주 예수 내 맘에 들아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 졌네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찬 208장)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이 누리게 될 즐거움에 대하여 이 같이 예언했습니다. “1)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3)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사 9:) 예수님께서는 초막절 절기를 지키시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서서 외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고 하셨습니다.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이 한 그릇 시원한 냉수를 제공받았다면 그 심정이 어떠할까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되었으니 이 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생수의 강은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임하여 계신 것은 죄 사함과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표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고 그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기만 하면 강물 같이 넘쳐흐르는 기쁨을 맛보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우리가 기쁨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15장 9절 이하에서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고, 기독교는 잔칫집 같다”고 하였는데, 맞는 말입니다. 절에 가보면 일 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향을 사르고 죽은 자들을 위해 빕니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제사 지내는 것입니다. 마치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존재하는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음을 정복한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으므로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살아감으로써 날마다 혼인잔치집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믿는 우리를 질적으로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집에서 물로써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맹물이 맛나고 향기로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신랑을 불러 칭찬을 했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혼인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좋은 포도주를 계속해서 대접하는 것은 너무나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잔치를 시작할 무렵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고 손님들이 술에 취하여 맛을 잘 분간하지 못할 때쯤 되면 질이 낮은 포도주를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신랑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최상급 포도주를 냈으니 연회장이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그것은 신랑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마 신랑은 좋은 포도주가 계속 나오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물을 포도주로 완전히 변하게 했음을 말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이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칫집에서뿐 아니라 오늘 우리 영혼 속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했습니다. 새것이란 새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 믿기 이전과 예수 믿은 이후의 우리의 존재가 질적으로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외모를 보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지만, 내면을 보면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흔히 악한 자가 뉘우치고 착한 사람이 되는 개과천선(改過遷善)과는 다른 것입니다. 개과천선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도 가능합니다. 그것은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과 같은 질적 변화가 아니라 오염된 물을 정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정수해도 물은 물일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수양을 해서 이전보다 윤리적이 되었더라도 본질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질적 변화란, 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에게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수양을 통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인이 된다고 해서 사람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밤에 니고데모라 하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일 뿐 아니라 산헤드린 의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경에 박식한 랍비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고 했으니 대단한 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칭찬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니고데모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 곧 질적인 변화는 무슨 수양이나 깨달음이나 학문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거듭남은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을 받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신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였는데,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볼 때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일서 5장에 이르기를 “1)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야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형제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핵심 구절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거듭남,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께로서 난 자, 이와 같은 표현은 하나 같이 출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출생을 강조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라야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믿고 순종하는 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본문을 보면, 가나의 혼인잔치는 큰 위기를 만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주가 동이 났으니 잔치 분위기가 시들해 질 것이고, 손님들이 하나둘 일어나 가고 나면 신랑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을 받았을 때 지체하지 않으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혼인잔치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당장 쓸 만큼만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고 아무리 많은 손님이 올지라도 부족함이 없도록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 개에 포도주가 넘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님께서는 어려움을 만난 성도들이 간구할 때 외면하지 않으시고 최선의 해결을 베풀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이르기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셔서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만 시험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우리가 받은 것과 같은 시험을 다 받으셨습니다.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받으시되 죄가 없으시므로 시험에 드신 적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처럼 시험에 넘어지셨다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험을 다 이기셨으므로 얼마든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나아가 사정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니, 예수님께서 기도와 관련해서 말씀하시기를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이 같은 주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응답 받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이므로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기도할 때 이것은 구해도 되고 저것은 구하면 안 된다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염치없이 이것저것 다 해 달라고 기도할 수가 없어요.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을 때만 기도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언뜻 들으면, 참 양심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또는 하나님을 귀찮게 해 드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가상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하는 기본자세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귀찮게 해 드리지 않겠다는 생각은 일종의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많은 것을 구할수록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 마리아처럼 주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합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예수님께 사정을 다 말했으니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하인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은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아구까지 물을 붓고 또 그 물을 도로 퍼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시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물을 길어다 부으라고 하셨더니 그대로 했습니다. 이제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시니 또 그대로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응답 받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2)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말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고 했습니다. 선한 목적이 아니라 악한 목적을 위해서 구하면 응답 받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는 마음가짐이 올발라야 합니다.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기도했는데도 잘못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걱정할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는 하는데 돌을 던져주고, 물고기를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을까요? 칼을 달란다고, 불을 달란다고 선뜻 줄 사람이 있을까요? 혹 자녀가 잘못 구할지라도 좋은 것, 꼭 필요한 것을 주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겠습니다(히 4:16). 사랑하는 성도님들, 가나의 혼인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때때로 우리 삶에도 결핍이 생깁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영혼에게 활력을 주는 기쁨이 동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셨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신의 신분을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사람이 되었더라도 육신의 정욕에 넘어지지 않도록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도와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께 기도로써 사정을 아뢰고 도움을 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혼인잔치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나의 표적/ 요2:1-11/ 2012-03-02
가나의 표적 요2:1-11 서론:오늘 본문은 흔히 예수님의 어머니와 하인들의 순종에 초점을 맞추어 기적을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적은 누구의 순종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요한은 예수님의 기적을 표적이라 함으로써 실제의 사건보다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말하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하나님의 싸인, 암시가 들어있는 어떤 메시지라는 것이다. 오늘은 가나의 표적은 어떤 메시지가 들어있는가 찾아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I.주님은 인생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능력의 메시야시다. 1.잔치집은 한 개인, 한 가정 또는 집단의 모습이다. 2.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나 실제는 근심과 걱정과 고민이 있는 모습을 말한다. 3.당시의 상황에서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보통 난처한 일이 아니다. 4.현지에 가보니 그곳은 비탈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5.그런데 본문에 보면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 6.해결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서 마리아가 나서서 이 사실을 예수님께 고한다. 7.천주교에서는 이 본문 때문에 마리아를 중보자로 극대화 시킨다. ( 그러나 핵심은 마리아의 사역이 아님.) 8.핵심은 예수께서 그들의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 주셨다는 것이다. 9.우리는 다 잔치집처럼 그럴듯해 보이나 실상은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처럼 남이 모르는 고통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10.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능력의 주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는 길뿐임을 믿으라. II.주님은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시는 희생의 메시야시다. 1.우리는 두번째로 이런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2.왜 수 많은 기적 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처음으로 행하셨을까?(요한은 이 사건을 강조함) 3.이 질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연결하면 쉽게 해결 된다. 4.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 받아마시라고 말씀하신다. 5.주님이 처음으로 만드신 것이 포도주 였는데 마지막으로 그 포도주를 주시면서 죄사함을 위한 피 라고 하셨다. 6.즉,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역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7.그래서 요한은 이 사건을 이적이라 하지 않고 표적(Sign) 이라고 기록했다. 8.단순히 즐기라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실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III.주님은 낮은자를 돌아보시는 사랑의 메시야시다. 1.만들어진 포도주는 주님의 명령에 의해 연회장에게 보내졌다. 시식을 위한 것이다. 2.연회장은 마시더니 극찬을 하였으나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했다.(강조) 3.주님께로 부터 나온 것을 아는 사람은 포도주를 떠온 하인들 뿐이다. 4.주님의 보혈은 낮은자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5.주님 앞에서 교만한 자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오직 겸손한 자만 구원 받는다. 6.세상에서는 큰소리치고 호령하는 자가 대우 받지만 주님 앞에서는 낮은자가 대우 받는다. 7.요한은 이 표적이 바로 낮은 자를 돌아보시는 메시야를 암시한다고 보았다. 결론:가나의 표적은 오늘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고난의 문제를 주님께 내어놓고 해결, 죄의 문제를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놓고 해결, 교만을 철저히 깨뜨리고 겸손으로 주님께 나와 구원.
가장 대표적인 폐단/ 행4:32-행5:11/ 2003-04-28
가장 대표적인 폐단 행4:32-행5:11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전에 어떤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어느 만큼 한심한 존재인고 하니, 월요일에는 아담처럼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화요일에는 가인처럼 살인하고, 수요일에는 노아처럼 술 취하고, 목요일에는 다윗처럼 간음하고, 금요일에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토요일에는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했다가 주일 하루 교회에 와서는 유두고처럼 설교 시간에 존다는 것입니다. 아닌게아니라 성경을 읽다 보면 한심스러운 기록들이 참 많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께서 분명히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때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이 어떤 곳입니까? 그야말로 낙원 아닙니까? 무엇 하나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그까짓 선악과에 미련을 갖습니까? 그걸 안 먹어도 아무것도 불편한 것이 없고 먹어봐야 아무것도 유익한 것이 없는데 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먹을 일이 뭐란 말입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인 얘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형인 자기의 제사는 안 받으시면 자기에게 뭔가 잘못이 있는 것을 알아야지, 어떻게 동생을 죽일 생각을 합니까? 동생을 죽인 다음이 더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주 태연하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고 대답했습니다. 형이 동생을 안 지키면 대체 누가 지킨다는 얘기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성경에 왜 이런 한심한 기록이 있어야 하는지 참 답답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다른 것도 아니고 치사하게 돈 몇 푼 떼먹었다가 죽었다는 내용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그 뜨거웠던 신앙 열기와 성령 충만한 분위기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옛날 초대 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부부가 살았는데 헌금을 떼먹었다가 죽었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 헌금은 떼먹지 말자.”고 하면 어딘가 어색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무래도 “헌금을 떼먹지 말아라!” 정도가 아니라 뭔가 다른 메시지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이 어느 만큼 심각한 사건인지를 알려면 먼저 당시 초대 교회의 분위기를 알아야 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합니다. 그때부터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도 칭송을 받았다고 하는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도행전 2장에 소개됩니다. 그 다음에 사도행전 3장에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는 유명한 말씀이 바로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성전 앞에까지 왔으면서도 성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채 단지 동전 몇 닢을 얻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이었던 사람이 베드로의 그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초대 교회가 시작된 다음에 가장 먼저 소개하고 있는 사건이 바로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 이 얘기가 무슨 뜻입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은 단지 불구였던 어떤 사람이 베드로라는 사도를 만나서 치유 받게 되었다는 내용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기록된 사건이 아닙니다. 앞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우리에게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곳이어야 하느냐 하면, 은과 금으로 힘을 얻는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을 얻는 곳이라야 하고 또 이 세상에 속해 있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일어나 걷는 곳이라야 한다는 예표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에는 사도행전 3장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이 그 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내용이 나오고 5장에서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 보십시다.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가 시작됩니다.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 가장 먼저 나온 사건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이고 두 번째 일어난 사건이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은 앞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암시하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은 어떤 사건이겠습니까? 교회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이었으니까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은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교회의 가장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적어도 교회로 모였으면 이런 경우만은 절대 있으면 안 된다. 어떤 경우냐? 바로 아나니아, 삽비라와 같은 경우다.” 하는 뜻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놓치게 되면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 이해되지를 않습니다. “헌금 떼먹은 것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자리에서 당장 죽여버린다는 말인가?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너무 하시는 것 같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대체 어떤 잘못을 했습니까? 땅을 팔아서 그것을 전부 다 헌금하지 않고 일부만 헌금했다가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땅을 팔면 전부 다 헌금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때 아나니아, 삽비라가 어느 만큼을 감추고 어느 만큼을 헌금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하여간 헌금을 하기는 했습니다. 땅을 팔아도 헌금 한 푼 안 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왜 죽어야 합니까? 어떤 집 애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고스란히 집으로 안 갖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잡아죽입니까? 그렇게 하는 집은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 이 돈 용돈으로 쓰세요.” 하고 갖고 오거나 혹시 선물을 사오면 착하다고 하고 받으면 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월급을 받았는데도 아무것도 안 갖고 오면 속으로 삐치면 됩니다. 그런 것 때문에 몸져누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가 이 다음에 가출을 하기 위해서 미리 돈을 모으는 것이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그 돈은 악착같이 빼앗아야 하고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아르바이트를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죽어야 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아나니아, 삽비라가 왜 땅을 팔아서 헌금을 할 생각을 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6-37) 여기에 보면 요셉이라고 하는 본명보다 바나바라고 하는 별명이 훨씬 더 유명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가 자기의 밭을 팔아서 헌금을 했는데 그 헌금이 초대 교회에 상당히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바나바는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칭찬을 받게 되고 결국 “권위자 - 위로의 아들”이라는 훌륭한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런 얘기로 4장이 끝나고 5장이 시작되는데, 본문의 내용을 본래 기록된 그대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5장 1절 앞에 “그러나”라는 말이 들어가야 합니다. 앞부분과 연결해서 읽으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그러나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이렇게 됩니다. 4장 끝 부분에 바나바가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는다는 얘기가 나온 다음에 5장이 시작되는데, 그 내용이 “그러나 아나니아는......”이었습니다. 본래 “그러나”라는 접속부사는 앞에 있는 내용과 뒤에 있는 내용이 반대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 얘기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바나바는 이러저런 일을 했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였다.” 하는 뜻입니다. 결국 아나니아는 바나바가 들었던 칭송이 탐이 났던 것입니다. 바나바처럼 헌신할 마음은 없었으면서도 교인들에게서 받는 칭송은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흉내내기로 했습니다. 바나바가 했던 것처럼 자기도 밭을 팔아서 그 돈을 헌금하기만 하면 교인들의 존경과 박수를 받을 수 있으리라 싶어서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밭을 팔고 보니 슬그머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고 계시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렇게 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감춥니까? 하지만 관심이 사람들에게 있으니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돈을 숨기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에 밭을 판 의도가 신앙적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자기 모습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 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근거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평판이었습니다. “신앙”의 형식을 빌려서조차 얻고 싶은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엄하게 경고하신 사건이 바로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라야 합니다. 신앙의 형식을 빌려서 사람들로부터 대접받는 것이 아닙니다. 요컨대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언제나 우리의 최종 목적이고 삶의 의미이고 우리의 모든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들로부터 대접받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동원될 만큼 값싼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있는 신앙을 근거로 해서 얻고 싶은 것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시선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평판입니까? 어떤 애가 시험 전날 밤 새워서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너무 졸려서 그만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망쳤습니다. 성적표가 엉망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집에 와서 야단을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라 학교에서 시험을 보아야 할 시간에 책가방은 전자오락실에 숨겨 놓고 영화보고 오느라고 아예 시험을 안 봤으면 이것은 얘기가 다릅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이 자랑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거기에는 동정이나 변명의 여지가 있습니다. 누군들 공부를 못하고 싶어서 못합니까? 못하는 입장도 참 답답합니다. 엄마 아빠 닮아서 머리가 나쁜 것을 어떡합니까? 공부만 하려고 하면 졸린 것을 어떡합니까? 모처럼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선생님이 모르는 문제만 시험 내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모르는 문제를 붙잡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믿습니다” 하고 찍었는데도 틀리는 것을 어떡합니까? 이것은 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못해서 시험 성적이 안 좋은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시험을 보아야 할 시간에 어두컴컴한 극장에 앉아서 질겅질겅 오징어 다리나 씹고 왔으면 이것은 얘기가 다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바로 그랬다는 얘기입니다. 신앙 열심이 모자라거나 게으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방향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자기의 신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남의 이목과 자기 체면이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놀라운 사실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고 그저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신앙까지도 기꺼이 팔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 삽비라를 가차없이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 삽비라를 죽였다고 해서 우리도 같이 아나니아, 삽비라 같이 위선적인 사람을 찾아내서 열심히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래 죄인입니다. 생각이나 판단의 근거가 언제나 “하나님”이 아니고 “죄”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 것 같아서 열심히 소매를 걷어붙였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는 하나님 반대쪽인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사실이 상당히 고민스러웠습니다. 사람이 어느 만큼 죄인이냐 하면 자기가 들은 설교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 반대쪽으로 갈 만큼 죄인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 삽비라 얘기를 설교하게 되면, 전부 다 속으로 “그래, 맞아. 아무개도 그렇고 아무개도 그렇고......” 하면서 열심히 다른 사람을 정죄할 텐데 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하는 것이 상당한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이 성경에 있었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5:11)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 있고 난 후 사람들이 전부 다 크게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체 왜 두려워했겠습니까? 만일 우리 주변에서 아나니아 같은 사람, 삽비라 같은 사람을 골라내서 열심히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이 부분은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봐라, 하나님께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용서치 않으시고 단숨에 죽이셨다. 그러니 저런 인간들은 교회를 위해서라도 당장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과연 성경적인 생각이라면, 지금의 내용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가 아니고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이를 갈더라”라고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비록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자기들에게도 같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소름이 오싹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신앙이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자기 주변을 고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고치는 것이 신앙입니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안식일을 범하면 돌로 쳐 죽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 얘기는 누가 안식일을 범하는지를 감시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안식일을 범한 사람을 향하여 입에 거품을 많이 물면 많이 물수록 신앙이 좋다는 징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어느 만큼 싫어하시는지를 바로 알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을 범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신 뜻을 알아서 그런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부분을 실수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면 죽이라고 했다는 이유로 열심히 다른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면 정죄할수록 자기 수준이 높아지는 줄 알고, 안식일을 범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으로 자기들의 신앙을 때웠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한테까지 안식일을 안 지킨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셨으니까 저런 것들은 당장 죽여야 한다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앞에서 초대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 가장 먼저 소개되고 있는 사건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시작된 교회가 장차 나아가야 할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라는 암시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연결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앉은뱅이를 찾아다니면서 열심히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그 본문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은과 금으로 힘을 삼던 모습에서 나사렛 예수로 힘을 삼아야 하고, 성전 앞에까지 왔으면서도 성전의 본래적인 역할이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채 그저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전 몇 닢을 얻는 것이 유일한 관심이던 모습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나가는 것이 각자가 감당해야 할 신앙 책임입니다. 그러면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 같은 사람이고 저 사람이 바로 삽비라 같은 사람이라고 하여 열심히 다른 사람을 향하여 이를 갈며 정죄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신앙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 있는 아나니아적 요소, 삽비라적 요소에 소스라치게 놀라야 하고 또 하나님의 안목이 아니라 사람들의 평판에 더 민감한 자기 모습이 발견될 때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구원 얻은 천국 백성입니다. 하지만 구원 얻은 사람답지 않게 살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세상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것도 나쁠 것이야 없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있어서는 신앙까지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방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싶어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자신을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습을 어느 만큼 싫어하시는지를 바로 알아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요소가 자기에게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두려워해야 하고 그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나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모두 세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나니아입니다. 그에게 있어서의 신앙이란 하나님과 자기와의 통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을 치장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지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사람들이 자기에게 뭐라고 하는 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교회에 오히려 손해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눈이 멀게 됩니다. 그때 아나니아에게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여 그를 다시 보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당시의 아나니아는 그 일이 무척이나 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바로 자기 같은 사람을 잡아죽이려고 멀리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왔다가 눈이 멀었으니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눈이 멀쩡한 사울을 만났어도 그 눈을 뽑아버리고 싶을 텐데, 눈 먼 사울을 위하여 기도하여 그의 눈을 고치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묵묵히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교회에 커다란 유익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아나니아는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될 당시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바울 당시 대제사장의 이름이 아나니아였다고 하더라 하는 정도뿐입니다. 신분이 대제사장이었으니까 그는 상당히 출세한 사람입니다. 세속적인 지위와 영광을 한 몸에 누렸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중에 어떤 아나니아를 택하시겠습니까? 히브리 사람들은 이름마다 그 뜻이 있는데 아나니아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이름은 참 좋습니다. 결국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예컨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나니아는 전혀 이름 값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어떻습니까? 그는 바나바라는 이름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바나바(위로의 아들)다운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미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사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이름에 전혀 어색하지 않게 살 수도 있고, 혹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라는 멋있는 이름을 갖고서 이름과는 전혀 딴판으로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포함한 자기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세상의 박수를 받기 위해서 살든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면 마땅히 세상에 속한 것을 탐낼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까지 세상에 속한 것을 얻기 위해 동원할 것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컨대 신앙이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신앙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언제나 하나님의 관심과 동행함으로 인하여 더욱 부요하여지며, 더욱 풍성하여지며, 더욱 아름다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 영광 돌려드립니다. 죄인이었던 저희가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이 자리에 나아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바라옵기는 이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도록 늘 그 은혜를 마음에 새기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저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사랑으로 저희를 감싸안아 주셨사옵건만 제한된 육신 가지고 제한된 세상을 살고 있는 저희들 늘 이 세상에 속한 것으로 미혹 받기 쉽사오니 언제나 저희의 언행심사를 홀로 단속하여 주옵시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우리의 힘과 소망과 자랑을 삼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육체의 소욕을 좇은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한 줄을 알게 하시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을 수 있도록 언제나 저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가장 필요한 것/ 시91:1-16/ 2002-08-23
가장 필요한 것 시91:1-16 *** 들어가는 말 본 시는 하나님을 향한 흔들림이 없는 아름다운 신뢰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인은 인생의 모든 여정을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확고한 신뢰를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느 정도로 중요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 계시며, 하나님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공간을 내어 드리고 있습니까? 오래 전에 한 청년의 간증 속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청년은 시골에서 살았는데, 읍내로 가기 위하여 항상 지나는 길에 쓰러져 가는 자그마한 초가집이 있었습니다. 가끔은 나이 많은 할머니 한 분이 일하시는 것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날 때마다 거의 대부분은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든지, 찬송 소리가 들렸습니다. 청년도 읍내의 교회에 다니는 터라 그 집에 누가 사는지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그 날은 시간도 넉넉히 남았고 해서 청년이 그 집을 방문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 날도 여전히 찬송소리가 들렸습니다. 열려져 있는 사립문을 지나서 “계십니까?”라고 인기척을 냈습니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면서 할머니가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지나는 길에 들리는 찬송소리가 좋아서 한 번 방문했노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자그마한 방에는 오래 된 장농 하나와 이부자리가 전부였습니다. 정말 가난한 살림살이였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로는 혼자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하게 보였습니다. 청년은 가끔 이야기 소리가 들렸던 것을 생각하면서, “할머니, 손님이 종종오시나 보지요. 가끔 지나다 보면 이야기 소리가 들리 든데…”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아하, 내가 주인과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었구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청년은 “할머니가 집 주인이 아니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주님이 내 주인이시고, 이 집의 주인이시라우.”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주님이 늘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야기도 하고 찬송도 하고 심심하지도 외롭지도 않고, 가난하지만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생각하며 모셨고, 할머니처럼 주님을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의 주인이시며, 우리가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마음의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시인은 본 시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보호자시며 주인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언의 형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위대한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위대한 약속을 받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감리교의 창설자이며, 지도자인 ‘요한 웨슬레’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 가운데 천국의 문으로 자신이 이끌려 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웨슬레는 그곳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한 천사와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화 중에 웨슬레는 천국에는 어떤 사람들이 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천국에 와 있습니까?” 천사는 큰 책을 조심스럽게 뒤져보고 나서, “가톨릭 신자는 천국에 없군요.” 웨슬레는 그리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장로 교인들은 천국에 와 있습니까?” 천사는, “장로 교인도 없는데요.” 역시 별로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모든 교파를 다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대답은 한결같이 “아니오.”였습니다. 웨슬레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교파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감리 교인들은 천국에 몇 사람이나 와 있습니까?” 천사는 “감리 교인도 하나도 없군요.”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 웨슬레는 흥분된 어조로 외쳤습니다. “천국에는 가톨릭 신자도 없고, 장로 교인도 없고, 침례 교인도 없고, 감리 교인도 없다면, 도대체 천국에는 어떤 사람이 와 있습니까?” 천사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웨슬레 씨, 천국에 와 있는 사람들은 단지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신앙 연륜도, 깊은 신앙심도, 교파도, 높은 학식도, 부하고 가난함도 모두 소용없는 것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합니까? 아니면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잘 알지를 못합니까? 본 시편을 통하여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1.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위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본문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진리를 선포합니다. 모든 인생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존자(至尊者, The Most High)이시며, 전능자(全能者, Almighty)이심을 선포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안식을 누립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을 잘 알고 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은밀하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들이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것’은 특권이며 위안입니다. 그 이유는 지존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2. 일반적인 진리를 자신의 입장으로 선언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진리를 자연스럽게 자기의 입장에다 적용시킵니다. 본문 2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시작점입니다. 즉,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거나 책을 통하여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그 말씀을 하십니다. 14: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고, 21절에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고, 15:10절에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2절에는 시인의 각오가 분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라 하리라.’는 단호한 선언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마후짐(Mahuzzim), 곧 ‘크게 견고한 산성’(단11:39)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 곧 자기의 요새로 의지했으며,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완전한 신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은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시인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권면하는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진실한 신뢰의 삶과 이를 전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그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하며, 얼굴에 행복이 그려지게 됩니다. 굳이 ‘사랑하노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생활과 모습에서 사랑을 읽을 수가 있게 됩니다. 이 사랑은 전염성이 강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뢰함으로서 경험했던 은혜를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행하도록 경험을 바탕으로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증언은 두 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①삶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며(3-8절). ②상상할 수 있는 모든 환난에 대한 가능성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절대적인 섭리의 하나님으로 증언(9-13절)합니다. 인생에게 닥치는 위험은 밤낮이 따로 없고, 방법 또한 제한이 없습니다. ①부주의함으로 인하여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 걸리듯, 원수의 모함에 걸릴 수도 있고, ②극한 염병과 같은 죽음의 위기, ③밤과 낮이 따로 없이 들이닥쳐 인생을 파멸케 하는 불의의 사고들(5-6절), ④수많은 사람을 파멸케 하는 재난들, ⑤그리고 3절처럼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중첩되는 고난들, 등. 이 숱한 재난으로부터 하나님은 그의 백성인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미래의 불확실한 어떤 것에 대한 보호까지도 확신하고 있습니다(9-13절). 시인이 이처럼 확신 있고 담대하게 증언하는 것은 자신이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자신이 경험했을 때 증거하는 능력이 있게 됩니다. 요즈음 TV쇼핑몰에서 쇼 호스트들이 물건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소개하면서 입어보기도 하고, 먹어보기도 하면서 이 제품이 안전하고 효력이 있음을 경험적으로 나타내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제품은 그 제품을 실제로 사용해서 이렇게 되었노라고 신제 인물을 등장시켜서 선전합니다. 이것도 역시 경험을 토대로 하는 선전의 효과를 위해서입니다. 만일 제품을 선전하는 사람이 ‘사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효력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누가 그 제품을 신뢰하고 사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자신의 생활에서 실천되어지고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활에서 나타나는 능력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느끼게 하는 생활 속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4. 사랑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 있습니다.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즉각적인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구원’과 ‘높임’과 ‘기도에 대한 응답’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함께 동행 하면서 위기에서 구원하시며, 영화롭게 하시고, 만족케 하실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도 우리 성도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 권력, 출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응답을 듣는 복된 삶이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 막2:1-12/ 2009-09-01
가장 필요한 사람 막2:1-12 요절: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막2:3) 교회안에서 인사할 때에 세상적인 인사법으로 안녕하십니까? 하지말고, 진리적인 인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옆사람하고 서로 인사하여 봅시다. 혼자 왔습니까? 낚아 왔습니까? 낚아 오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네 종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가장 필요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진리세계에, 은평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되시기를 바랍니다. 一.중풍병자(3절) \\\\\\\\\\\\\\\\\\\\\\\\\\\\\\\\\\\\\\\\\\\\\\\\\\\\\\\\\\\\\\\'한 중풍병자를\\\\\\\\\\\\\\\\\\\\\\\\\\\\\\\\\\\\\\\\\\\\\\\\\\\\\\\\\\\\\\\'(3절) 이 중풍병자는 병든 사람입니다. 아픈 사람입니다. 욕된 말로 병신입니다. 등신입니다. 죄 값을 치루고 있는 못난 사람입니다. 그는 죄인입니다(5절) 자기죄로 죄인된 자입니다. 렘31:30절에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정년히 죽으리라\\\\\\\\\\\\\\\\\\\\\\\\\\\\\\\\\\\\\\\\\\\\\\\\\\\\\\\\\\\\\\\' 했으니, 자기 죄로 죄인 되었고, 그 죄 값으로 병들였습니다. 자기를 자기가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프게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를 짓고, 죄값으로 아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 큰짐이 되고 있습니다. 희망이 전혀 없는 자입니다. 살수록 더 불행을 만들어 가는 못난 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과 문화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구석에서 신음해야하는 현실입니다. 불행을 더 더 더 만들어 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을 받아서, 복음을 위하여 쓰지 못하고, 헛 돈이 나가는, 치료비로 빼앗겨야 하는, 손해만 보는 못한 자입니다. 영적인 중풍병자는 하나님이 많은 물질을 주시는데, 교회 새우는데 사용 못하고, 헛돈으로 나가는 못난 짓을 하는 자가 많습니다. 받은 돈으로 죄악을 만들고, 타락한 세상을 건설하고, 타락한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니, 불행자기를 만들고 가는 자가 영적 중풍병자입니다. 二.서기관(바리세인)(5절) \\\\\\\\\\\\\\\\\\\\\\\\\\\\\\\\\\\\\\\\\\\\\\\\\\\\\\\\\\\\\\\'어떤 서기관이 거기 앉아서\\\\\\\\\\\\\\\\\\\\\\\\\\\\\\\\\\\\\\\\\\\\\\\\\\\\\\\\\\\\\\\'(5절)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은 남을 헐뜯는 자들입니다. 타락한 자입니다. 아주 못 된 자들입니다. 옆에 유익을 주고, 치료를 주고, 영생을 주는 예수님으로 효과를 입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예수를 깎아 내리는 자입니다. 자기죄를 만들고 가는 자입니다. 더 죄짓고, 미래에 매를 많이 맞을 자입니다. 더 망치고 불행을 만들고 가는 자입니다. 은혜를 베풀고 치료하여 주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참람하다고 하면서, 고칠 자를 못 고치게 하고, 예수님의 구원의 치료역사를 방해한 흉측한 자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지는 않습니까? 은혜받지 못하게 훼방꾼은 아닙니까? 三. 예수(5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5절) 했으니, 예수님은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고치는 능력자입니다. 소자야 너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능력자요, 권세자입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는 분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문둥병을 다각 고치는 분입니다. 소경을 눈 띄운 능력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영원까지 좋게 하시는 분입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미래치료말씀을 주신 분입니다. 인간의 온갖 불행을 고치는 분입니다. 四. 네 사람(3절)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매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3절) 가장 필요한 사람은 네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준 사람입니다. 아무리 위대하신 예수님이시라도, 만나지 않으면, 안되며, 만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방구석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서 아픔을 당하여, 비참한 자를, 그대로 두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도록 메고 온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요,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진리세계에서, 은평교회에서 제일 필요한 사람, 필요한 일을 하는 자가 이 사람입니다. 이 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면, 사는 역사, 치료역사, 복되게 하는 역사는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수 십년간 앉은뱅이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자를 고침 되게 한 사람은, 앉은뱅이를 미문에 메어 놓은 사람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성전 미문에 두는 자라\\\\\\\\\\\\\\\\\\\\\\\\\\\\\\\\\\\\\\\\\\\\\\\\\\\\\\\\\\\\\\\"(행3:2) 베드로 요한을 통하여 예수의 치료를 받아 팔자를 고친 자는 메어다가 미문에 둔 사람덕분입니다. 치료되는, 결정적인 일을 한 자가, 메고 온 사람입니다. 이렇게 가장 귀한 일,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하니, 성도일이요, 목사일입니다. 빈들에서 배고파하는 오천명을 배부르게 먹인 일이 일어나게 한 자는 보리떡과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설득시켜, 예수께로 인도한, 가장 필요한 일을 한 자가 안드레입니다. \\\\\\\\\\\\\\\\\\\\\\\\\\\\\\\\\\\\\\\\\\\\\\\\\\\\\\\\\\\\\\\"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님의 축복의 역사 있게 한 자는 어린아이를 인도한 안드레이니. 교회부흥은, 이러한 가장 필요한 사람이 있어야 하니, 우리는 이일을 해 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비참하게 쓰러져 죽어 가는 자를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실어 준 사마리아 사람인데, 예수님께서 너희도 사마리아 사람같이 필요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주막은 교회를 말합니다. 37절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6월28일 성도교회 안수집사(2명). 권사(8명) 임직식예배에 설교를 했는데, 아주 은혜스럽게 마치고, 그 교회 목사님은 위암 말기로 6개월안으로 죽는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로 고침을 받아 소생함을 입은 목사님은 치료비중 돈 500만원을 중국교회 건물을 사 드리는 일에 헌금을 했습니다. 아말렉 전쟁에 모세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은 손을 바치는 일을 하여 아말렉을 물리 쳤으니, 중풍병자를 메고 와서 예수님을 만나 게 하였고, 자기 나귀에 태워서 주막으로 인도한 사마리아사람, 앉은뱅이를 미문에 메어 놓은 사람, 예수님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중간에서 중보 일, 가장 귀한 일을 한 안드레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고치는 능력이 없으니, 고치는 능력, 죄사하는 권세자,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풍병신으로 살렵니까? 예수를 대적하는 서기관 바리새인으로 살렵니까? 예수 만나게 하여 축복을 받게 하는 가장 필요한 메고 온 사람으로 살렵니까? 메고 온 사람으로 안 살면 중풍병자 서기관(훼방하는자)으로 살게 됩니다. 필히 예수님 만나게 하는 자로만 살아야 합니다.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어린 주일학생이 부모 식구를 예수 만나게 하여 교회로 메고 와서, 그 가정은 장로반열까지 올라가서 섬기는 복 받은 가정이 있습니다. 지금도 외적으로, 내적으로 자기로 인하여 치료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가장 필요한 사역을 계속해 가야 합니다. 자는 남편, 자식을 머리에 이고 예수께 와야하고, 태워 오든지, 끌고 오든지, 낚아 오든지, 돈주고 사람시켜 메고 오든지, 예수께 오기만 하면 큰 축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만나지 못하면 병신으로 살고, 거지로 살고, 저주로 살다가 지옥 갑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운명과 팔자가 완전히 바꿔지고, 새사람, 건강한 사람, 영생사람 됩니다. 교회안에서도 계속적으로 능력자 예수님을 만나도록 하는, 가장 필요한 사람되시기를 주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양복석 목사(서울 은평교회)
가정, 은혜가 필요한 곳입니다/ 민6:25/ 추석주일설교/ 2013-09-17
가정, 은혜가 필요한 곳입니다 민6:25 추석을 맞아 우리 가정에 왜 은혜가 필요한지, 풍성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왜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할까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빼셔서 하와를 만드시고 그의 아내가 되게 하셔서 인류 최초의 가정이 탄생했습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가정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초가 든든해야 건물이 튼튼하듯 가정의 기초인 은혜가 넘쳐야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가정은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집에 가면 무장해제를 합니다. 아무리 비싼 메이크업 숍에 가서 화장을 하고 비싼 옷을 사 입었을지라도 집에 들어오면 다 지우거나 벗습니다. 반면 가정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기 때문에 약점과 단점과 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가정생활에서 우선 요구되는 것은 은혜와 사랑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할 수 있을까요. 1. 첫째,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가정을 지킬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우리의 가정을 지킬 수 없습니다(시 127:1∼2). 2. 둘째, 은혜의 전달자가 돼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조상은 게르만족 계열인 바이킹족입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해적이었습니다. 당시 해적들은 배를 타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바다를 무대로 강도질을 일삼던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강탈할 때에 재물만 하지 않고 여자들도 강제로 잡아다가 결혼해 자녀를 낳게 했습니다. 그런데 해적에게 잡혀간 자들 중에 기독여성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날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합니까?”라고 한탄만 하고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비록 해적의 아내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곳에 보내신 뜻이 있는 줄 알고 남편을 용서하고 자녀들을 말씀으로 잘 키웠습니다. 그러자 해적들이 변해서 마침내 기독교인이 됐고, 그들이 바로 퓨리턴, 곧 청교도의 뿌리가 된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처가와 시댁을 욕하지 말고 은혜를 받은 자답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3. 셋째,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엡6:24). 상황에 따라 마음이 바뀌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26: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셨습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계2:3∼4). 추석 명절을 계기로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창천 목사(서울 동신교회)
감사와 평안/ 골3:15-17
감사와 평안 /골3:15-17 2009-08-28 14:51:50 read : 101 당신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당신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주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느 날 사냥꾼이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 날은 저녁 무렵이 다 되도록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냥꾼은 실의의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커다란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곰이었습니다. 사냥꾼은 속으로 ‘오호, 아무 것도 사냥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재수가 좋네!’라고 생각하며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불발이 되어 소리만 요란하고 발사가 되지 않아 거꾸로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사냥꾼은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도망을 치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냥꾼이 살아날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이 때 사냥꾼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제가 죽게 되었습니다. 저 곰이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을 배워 저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곰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사냥꾼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어 기뻐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그 곰이 어떤 기도를 하는지 귀를 기울여 들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오늘 하루 종일 굶었는데 맛있는 만찬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감사하는 데 있습니다. 곰도 감사하는 마당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감사의 고백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감사는 나를 앎에서 출발합니다.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이 본문은 감사는 평강의 삶에서 출발하며, 또한 그 평강을 위하여 부름 받은 존재.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君者三樂’ 이라 하여 사람이 즐거울 때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모 형제가 병고 없이 지내는 것이 첫째 낙이요, 둘째 낙은 하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는 것이며, 셋째 낙은 천하에 영특한 재사들을 제자로 교육 할 수 있는 일이다. 여러분들은 이런 즐거움이 있으십니까? 이러한 즐거움이 가득한 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즐거움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우리에게 삶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깨달아 알고, 그것에 헌신하는 삶이 될 때 평강이 내 안에 거하게 됩니다. 또한 평강으로 말미암는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평강이란 에이레네(eijrhvnh)인데 히브리어로는 샬롬(!/lv;)이라고 합니다. 평안함, 원만함, 평화로움, 평강 등을 의미합니다. 즉, 평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풍요로운 영적 상태와 화목을 가리킵니다. 결국 우리가 누리기 원하는 평강은 이 땅의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이 땅의 조건들에 의해 평안을 누리거나, 행복해 하거나 기뻐합니다. 우리들은 이 땅의 것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혼동을 겪습니다. 신앙 안에 있을 때에는 이 땅의 현상과 관계없이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고 감사의 고백이 넘치는데, 현실로 돌아오면, 조금 전의 행복과 기쁨과 감사는 정신없는, 현실감 떨어지는 자의 고백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치 “사랑 하나면 돼”라고 외치는 아직 여드름 보송보송한 20살 난 청년에게, “사랑이 밥 먹여 주나”하고 인생을 달관한 듯 훈계하는 결혼 20년차 아줌마를 생각해 보면 될 듯 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럼, 너는 평강의 삶을 누리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지난 21년의 목회 이력 중 얻었던 휴가 보다 더 짜릿한 휴가 아닌 휴가기간을 얻었습니다.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을 보면서, 원치 않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적어도 내 삶에 이런 순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보면서, 때로는 분노, 때로는 절망, 그리고 어떤 이를 향한 연민의 정들이 서로 교차되고 뒤섞인 감정을 갖고 1달 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이만하면 하나님의 일 앞에 성실하지 않았나? 이만하면 혹시 큰 일을 맡기시려고 예비하신 연단의 시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짐짓 능청도 부려 봅니다. 그러다가 \\\"제자 훈련\\\"에 갔다가 던져진 질문 앞에 직면하여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으로 족합니까?” - 예수님 한 분이면 됩니까? - 십자가 복음 하나면 충분합니까? 어느 한 날, 후배 목사에게 설교 초청을 받은 한 목사님이 설교 본문과 제목을 전화로 불러 줍니다. “시편 23편 1-6. 제목은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후배 목사님이 이를 받아 적으면서 “그 다음에는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 그 뒤에 뭐가 더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약속한 주일 오후에 그 이웃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안내를 받아 강단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아 주보를 펼쳐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후 예배 설교제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사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고백은 말 그대로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내 입으로 분명히 “예수님만으로 족합니다.” 고백하면서도 예수님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듯 합니다. 내 가정이 조금 더 넉넉해져야겠습니다. 직장에서 입사 동기들에 비해 중간 이상 정도의 자리까지는 가야겠습니다. 투자한 주식이 다들 반 토막 이상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은행 이자에 5배 정도, 많이 바라지도 않습니다. 5배 정도는 되어야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들이 적어도 이 정도까지는 이뤄져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만으로 족합니다.”는 명제를 신앙인의 당연한 악세사리 마냥 고백용 선언으로만 치부해 버립니다. 그리고 현실의 실제적인 선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만으로는 안 되겠어요.”라고 타협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 되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더 이상 이 땅의 논리나 가치관이나 주제가 내 삶의 평화를 좌우할 권세가 없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성경에서 3대 절기에 대한 계명을 주실 때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출애굽하여 아직 광야에 있을 때입니다. 여전히 쓰러지고 낙심도 하고 온전히 서 있지 못할 때이고,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한 불안정한 때입니다. 아직 광야에 있을 때, 즉 머나먼 시련의 행진을 하던 때였습니다. 이 절기들은 단서 조건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즉 광야에서는 안 지켜도 된다거나 또는 가나안에 가서 잘 살게 되거든 지키라는 등의 단서는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은 어떤 외부적인 상황에 의하여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그 무엇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감사할 환경 때문에 감사와 평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의 유일한 이유로 하나님께 조금 더 초점을 맞추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형편은 본래 죽은 자였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던 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게 없었다면 어떤 삶의 존재 이유와 보람을 얻을 수 없던 자였습니다. 그런 나를 살려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일을 맡겨 주시고 오늘도 우리 통해 영광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감사는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내 속에 주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운동선수는 훈련 시간에 얼마나 성실하였는가가 경기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시즌 후반에 가서도 꾸준한 실력이 드러나는 선수들은 한결같이 동계 훈련을 착실하게 임한 선수라고 합니다. 옹알이 없이 말 시작한 아이가 있을까요? 뒤뚱 뒤뚱거리다가 넘어져 본 적 없이 뛰어 다닌 아이가 있을까요? 모든 일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결혼 생활에도 우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내가 무슨 말을 하면 잘 알아 들어야 결혼 생활이 편안하다는 것을 결혼 10년차에 들어서야 알았습니다. * 자기, 나 사랑해? - 나 사고 싶은 게 생겼어요. * 자기, 날 얼마나 사랑해? - 나 오늘 일 저질렸는데... * 개가 짖는 것 같아요. - 당장 나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봐. * 맘대로 해요. - 하기만 해봐 * 우리 얘기 좀 해요. - 내 불만이 뭐냐면... 그리고 결혼 20년차가 넘어 서면서 좋아하게 된 기도문이 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는 신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저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자동화 기계가 만능인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자동화된 기계를 이미 사용하고 있습니다. 회전하는 선풍기도 역시 그 처음 단계의 자동화 기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자동 청소기가 있어서 혼자 스스로 방을 움직여 다니면서 청소를 하고, 세탁기, 식기 세척기 등등 인간의 삶에 유용한 다양한 자동화 기기가 만들어지고 상용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휴보’라 명명된 인간을 닮은 휴먼 로봇이 있어서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차원을 지나서 지정된 과제를 수행해 나가도록 지속적으로 발전을 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정부 로봇이 만들어지면 제일 먼저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휴먼형 로봇이 만들어져도 실제로 인간의 동작, 혹은 감각, 능력에 버금가도록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훈련이 반복되어 져도 가능한 일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코를 후비는 동작 하나만 하여도 사람들이 코를 후비는 감각과 그것에 반응하는 속도와 아픔을 허용하는 한계치를 결코 흉내 낼 수 없답니다. 훈련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에서든 서투를 수밖에 없습니다. 운동을 하더라도 기본기가 다져지지 않으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실력이 늘 수 없습니다. 이미 감사할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 내지 못합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들을 때나 기도할 때에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좋은 시어머니가 기도 하던 중에 자식이 없는 며느리를 목사님에게 가서 기도를 받게 해야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믿음이 부족해서 썩 내키진 않았지만 어머니 부탁이니깐 그냥 받기로 했는데.... “아가야! 목사님이 손 얹고 기도 하실 때 무조건 ‘아멘’ ‘아멘’ 해야 된다.” 목사님의 기도가 이어졌지만 며느리는 “아멘”이란 말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이때 다급해진 시어머니. 며느리 대신 연신 “아멘!”을 외칩니다. 그리고 결국 기도가 응답되어서 시어머니가 아기를 가졌답니다. 바라는 것을 강하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아멘으로 시인하십시오. 콩 심은데 콩 나는 것처럼 긍정은 긍정을 낳습니다. 부정을 통해선 긍정이 나오질 않습니다. ‘아멘’도, 긍정도, 시인도, 그리고 고백도 모두 훈련을 통해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의 고백에도 역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감사의 고백은 감사한 상황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의 고백은 감사할 마음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상황이 복스러워야 감사가 나올 것 같습니다. 우리가 좋아하고 원하고 기대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열망은, 기필코 그것이 이루어져야 만이 감사할 것이라고 하나님을 압박하기도 합니다. 시편은 복을 노래한 보고입니다. 그 시편은 복 있는 자에 대한 선언으로 그 문을 엽니다. (시1:1-8)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 시편의 말씀에 의하면 복은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건화 된 그 무엇에 우리의 관심과 복됨의 여부를 판단하려 합니다. 이 땅 위에 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모두 사건화 되어 있습니다. 복권에 한번 당첨이 되어야, 멋진 배우자를 만나야, 원하는 무엇인가를 해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복의 사건화’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전부 이교적인 방법입니다. 무당과 점쟁이를 찾아가면 모든 행운과 액운은 연관되어져 있습니다. 또 사건화 시킵니다. ‘당신은 지금 이런 일 때문에 불행하다. 그러니까 이러 이러한 처방을 하면 액운이 물러간다.’ 이것이 무당과 점쟁이가 가르치는 행복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은 사건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의 원리나 방법이나 목적은 모두 사건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은 내가 행하려는 어떤 의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받는 복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복된 상황은 내가 어떻게 내 앞에 있는 사건을 다루느냐에 의해 복과 화로 구별되어집니다. 그래서 복 없는 악인들은 이렇게 됩니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상황에 의하여 바람부는 대로 쉽게 날려 흔들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날을 뒤돌아보며 자신을 먼저 훈련해 보고자 했습니다. 상황을 사건화 시키지 않고 감사할 마음을 먼저 가져 보려 시도했습니다. 저는 1988년 목회를 시작한 이후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혹간 부모님이 제 집을 방문하셔도 하룻밤 주무시고 가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도 목회하시는 입장이시기도 하고, 자식도 목회하는 입장이니 서로의 현장에 바쁘다는 이유였습니다.상황적으로는 이해할 수는 있어도 내심 많이 섭섭하기도 했었습니다. 부친께서 은퇴 후, 소천하시고 어머니 홀로 되셨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당신의 집을 벗어나려 하지 않으십니다. 조르고 졸라서, 이 핑계 저 핑계로 집에 모시기를 1주일. 겨우 1주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시고 있다 보니 조금 불편합니다. 당신도 불편하고, 저도 불편합니다. 워낙 오래 떨어져 살다보니 서로 삶의 패턴에 달라서 생기는 불편함입니다. 자식은 어머니 배려해 드린다고, 어머니는 자식들 배려해 주신다고 조심하는 것이 오히려 서로 불편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6월 첫 주 이후, 어쩔 수 없이 1달 가까운 시간을 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불편한 것들이 조금씩 완화됩니다. 생각 같아서는 1년 정도 더 이런 상태라면 정말 서로가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침 수술을 받으셔야 할 일이 생겨서 모시면서 수술을 잘 마치고 병원에 모시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아픔의 시간들로 보였던 이 시간들이 없었다면 어머니나, 저나, 자식들이 모두 많이 힘들 수 있었는데 장남 노릇을 제대로 한 것 같아 동생들에게 면목을 세워 볼 수 있었습니다. 모시고 산 것이 아니라 얹혀 산 것이 되었지만 상황에 내몰리는 듯 생활한 1달이 주는 감사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목회 시작한 이후 다른 이의 설교를 들어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일은 늘 맡겨진 현장에 있어야 하기에 은혜가 넘치는 크고 작은 교회를 탐방하며 예배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1달 간 또 다른 귀한 현장에서 예배하며, 각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며 참으로 좋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고, 동시에 설교 시간에 졸아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시간들을 통해 설교자가 성도들을 졸게 하는 것은 설교자가 행할 수 있는 죄악중의 가장 큰 죄악일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란 제자 훈련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고백합니다. 다른 일을 하는 분들에 비해서 목회자들은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은 편인데, 지난 한 달은 한 순간도 떨어져 본 일이 없을 만큼 가까이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뭔 일이 많아지겠어요? 스트레스가 많은 시간들이다 보니 예민해지고, 결국 말다툼도 하게 되고, 제가 삐치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경험해 보니 결국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알고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힘든 여러 시간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힘들기는 했지만, 누군가를 공격하고, 힘들게 하는 시간이 아니었음에 감사합니다. 독화살을 맞은 듯, 총 맞은 것처럼, 휘청거리는 아픔이 있었지만, 누군가를 향해서 독화살을 날리거나 총 쏘는 데 시간을 쓰지 않고 기도하는 일에 더욱 전념케 하신 하나님 앞에 오히려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 여겨졌습니다. 발생하는 모든 일이 도무지 모두들 처음 겪는 일들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실수들 앞에 자책하고, 또 누군가를 향해서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음에 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상황에 따른 결과물이 아닙니다. 감사는 내 뜻대로 이루어진 일에 대한 리포트가 아닙니다. 감사는 감사할 마음을 지닌 자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런 고백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감사할 마음을 먼저 가지십시오. 감사한 상황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감사의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을 봅니다. (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최고의 찬양입니다. 정리합니다. 나를 아는 것에서부터 감사는 시작이 됩니다. 죽었던 나를 살리시고 사명을 주시고 지금의 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상황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애써 여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환경과 조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되어질 수 있기를 훈련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 돌리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강권의 역사의 필요성/ 슥3:1-10/ 2010-08-12
강권의 역사의 필요성 슥3:1-10 서 론 하나님은 역사를 하시되 일반적인 구원을 주기 위한 역사도 있고 특히 종을 완전히 들어쓰기 위한 역사도 있으니 종말의 종을 어떻게 들어 쓸 것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권 역사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은혜로 되지만 종말의 종은 싸워야 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종을 만들기 위한 역사를 강권 역사라 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십자가의 피를 믿으면 되는 것이니 강권이라는 것이 결부되지 않는다. 강권이란 도저히 해보다 일이 안될 때 특별조치로 세우는 것을 강권이라 하는 것이다. 강권역사의 필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대표적인 사람을 세우기 위한 필요성 (1-5) 이것은 사단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 더불어 대표적인 종을 마음대로 대적하도록 만드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말세에 적군을 때리는 역사의 대표라는 것은 자기 자체가 원수가 되는 사단에게 그만큼 시련을 받아 보아야 되겠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단의 세력이 무엇인지 체험의 과정이 없다면 사단에게 피해 당하는 사람을 바로 서도록 지도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군대를 지휘하는 총 책임자가 되려면 자기가 직접 적군과 전투 경험이 없는 사람은 도저히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전투란 이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해 본 사실이 있어야 된다. 대표적인 책임자에게 강권 역사가 임해야 될 것은 사람은 사단과 싸워 승리할만한 인격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신이시니 사단을 대적시키는 시험이 올 때 문제없이 물리쳤지만 신성이 없는 사람은 마귀의 신인 사단을 이길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슬린 나무 같이 더러운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슬린 나무란 뜻은 그 종이 사단과 싸웠다는 뜻이다. 그러면 군대가 싸우다가 부상당했다면 싸움을 붙힌 편에서 고쳐줄 의무가 있다. 사단의 편에 가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편에서 사단과 싸웠다는 뜻이 그슬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종이 정욕에 끌리는 생활이 아니고 사단을 대항하는 싸움에서 자기의 힘으로 완전 승리를 이루지 못할 때 그대로 둔다면 대표적인 사명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강권으로 옷을 벗기라고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옷과 정한 관을 하나님편에서 책임지고 입혀주는 일을 강권이라 하는 것이다. 2. 역사의 강권 (6-8) 하나님은 강권으로 대표적인 종에게 천사가 돕도록 같이해 주는 것이다. 대표자가 도를 준행하며 율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강권의 힘이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며 지키는 것도 강권으로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과를 제했기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과 대립을 시킬 때 첫 번에는 대표자를 세우기 위해서 시켰고 다음에는 강권으로 순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순이란 자기 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순의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힘인 자기 자체의 힘과 능이 가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루터기로부터 진액이 오므로 하루 아침에 순이 되는 것이다. 사단과 싸우는 대표자와 함께 동료들도 강권 역사의 힘을 다시 받아야 된다는 뜻으로 예표라고 했던 것이다. 예표라는 것은 앞으로 될 표적이 된다는 것 뿐이다는 것이다. 3. 세계적 강권 역사 (9-10) 하나님은 역사의 순서가 있는 것이니 종도 대표자를 들어 쓰는 역사도 있고 일반을 들어 쓰는 역사도 있다. 예를들면 대표적인 싸움도 있고 일반적인 싸움도 있다는 뜻과 같다. 일반적 대중의 역사라는 것은 새길 것을 새기고 이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새긴다는 것은 세계적인 역사가 될 만한 확실한 말씀의 칼로 새겨지는 일이요 땅의 죄악을 제한다는 것은 개인의 죄가 아니라 이 땅 모든 종들에게 해당되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그때는 각각 서로 초대를 하게 되는 대중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아무리 일반적인 역사라해도 강권이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심판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날까지는 버림돌의 진리를 바로 전하는 역사이었으나 종말의 순의 역사는 세운돌의 심판권세의 강권 역사이다. 결 론 하나님은 사단에게 권세를 주는 말기에 하나님 편에서도 강권으로 역사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심판기에 남은 교회와 종을 위한 역사이니 하나님 편에서도 강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학2:18절 이하를 보면 심판이 오는 말기의 역사는 스룹바벨로 인을 삼는다고 한 것은 그만한 권세를 맡긴다는 것이다.
강보에 싸인 평화/ 눅2:8-14/ 김기석 목사/ 성탄절설교/ 2003-12-25
강보에 싸인 평화 눅2:8-14 ● 마지막 꽃잎 한 장이 열리는 시간 죽음의 그늘에 앉은 이들에게 구원의 빛으로 오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 성탄의 기쁜 소식이 우리의 음습하고 어두운 마음을 환히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성탄절이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세속의 명절이 된 것 같습니다만,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세상일로 갈래갈래 찢긴 마음의 흥분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성탄절 아침 저는 이호우 님의 <개화(開花)>라는 시조 한 수를 떠올려 봅니다. 꽃이 피네, 한 잎 두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시인은 세상의 이면과 내통하는 존재라지요? 그들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시인이 되라는 말씀인 것 같기도 합니다. 시인은 지금 꽃봉오리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촛대처럼 안으로 꽃을 머금고 있던 꽃봉오리에서 꽃잎이 하나 수줍게 고개를 듭니다. 잠시 후 또 다른 꽃잎도 주저주저하며 고개를 듭니다. 이 놀라운 개화의 순간은 시인에게 하늘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시인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꽃의 기적을 바라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한 잎입니다. 그 한 잎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의 설렘을 시인은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라 표현합니다. 계시처럼 열릴 개화의 시간을 기다리며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입니다. 시인도 따라 눈을 감습니다. 그 순간은 거룩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마지막 꽃 잎 한 장이 열리는 그 거룩한 시간은 바로 성탄절입니다. ● 절망의 땅에 들려온 평화의 노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천하를 호령하던 때,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던 때, 세계사의 변방인 유대의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의 신화가 사람들의 의식과 삶을 옭죄던 때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혹한 세금에 살림이 거덜 났고, 새로운 세상의 꿈은 꺼질듯 가물거리고 있었습니다. 삶에 여백이 없으니 민심은 흉흉해지고, 인심은 각박해졌습니다. 사람들은 한숨을 물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유대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새벽이 밝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자기들 속에 깃든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 그들은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비한 빛이 자기들을 감싸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꿈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신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들판에 엎드렸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귀로 들었는지 마음으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부드러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2:10-11) 하나님의 사자들이 온 것은 절망의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주 탄생의 소식이 ‘모든’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님을 잘 압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만족 속에 사는 사람, 하나님을 등지고 이생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구주 탄생의 소식은 재난입니다.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당황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마2:3). 그들은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기존질서를 뒤흔들어놓을 수도 있는 메시야의 탄생을 반기지 않습니다. 반기든 반기지 않든 하나님은 당신의 시간에 구원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 강보와 구유 그런데 태어난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는 징표 두 가지가 참 놀랍습니다. ‘강보’와 ‘구유’.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두 이미지가 갖는 혁명적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보십시오. 온 백성에게 평화와 구원을 가져오실 메시야가 강보襁褓에 싸여 있습니다. 갓난아기니까 당연하지, 하고 생각하시는 분은 설마 안 계시겠지요?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은 연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의 구원자가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이 놀라운 역설이 저는 사무치게 좋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주님이 우리의 문제를 들어주시고, 해결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강보에 싸인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에게 완제품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산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항상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염원하는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 오시는 주님은 지금 우리의 돌봄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당신의 일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큰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세상 도처에서 날마다 전쟁과 분열의 소식이 들려와도 이제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강보에 싸인 평화를, 그리고 생명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소중히 보듬어 안으려 합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다”고 외쳤습니다. 강보에 싸인 아기는 바로 우리의 꿈이기도 합니다. 평화와 생명에 수의壽衣를 입히려는 헤롯의 무리들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들은 강보에 싸인 아기를 이길 수 없습니다. 아기를 알아보는 두 번째 표징은 ‘구유’입니다. ‘구유’는 가장 비천한 삶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축제에 들뜬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도 않는 구석진 자리, 바로 그곳이야말로 우리 주님을 만날 자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분과 만나기 위해 찾아가야 할 구유는 어디일까요? 그것은 우리들 각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삶의 희망을 잃고 자식을 버리는 비정한 부모들의 마음자리, 카드빚에 몰려 온 가족이 죽음을 선택하는 절망의 자리, 찬바람 부는 거리에 내몰린 이주 노동자들의 마음자리, 성한 이들조차 숨 가쁘게 만드는 세상에서 저만치 뒤쳐진 채 살아가는 장애우들, 갈 곳 없는 노인들과 버림받은 어린이들이 서있는 삶의 자리, 바로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는 구유가 아닐까요? 그곳에서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는 어쩌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곡일 겁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든 안 다니는 사람이든 이 곡을 좋아합니다. 멜로디의 서정성 때문인지 어린이들도 좋아합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고백이 말만이 아니라, ‘너’를 향한 우리 삶의 태도와 입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네편 내편을 갈라가면서 서있는 삶의 자리가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을 만나도, 한 번만 이 노래의 첫 구절을 흥얼거려보십시오. 마음이 훨씬 자유로워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인종과 피부색,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우리가 서로를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로 대접할 때 강보에 싸여 있는 ‘평화’는 크게 자랄 것입니다. ● 나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소서. 꽃 한 송이의 피어남 속에서 우주적인 기쁨과 황홀을 경험한 시인의 마음으로 우리가 세상을 본다면, 우리는 삶이 제 아무리 힘겨워도 낙심할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탄절이 우리 모두의 거듭남의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 품에는 강보에 싸인 아기가 안겨 있습니다. 우리 속에 숨겨져 있는 가장 따뜻한 사랑으로 그 아기를 품어 안을 때, 우리는 하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추운 겨울, 인정이 메말라 더욱 추운 세상에 주님은 알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시인의 음성을 빌어 기도합니다. 나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십시오. 알몸으로 오시는 주여 우리들이 그분의 옷이 되려 할 때, 역사의 새 봄은 다가올 것입니다. 약한 듯 보이나 세상의 어떤 힘도 꺾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분을 가슴에 모시고 살면 우리는 하늘의 힘으로 든든할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의 빛이 교우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가정에 환히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 목사(서울 청파감리교회)
거친 들에 찾아 온 평화/ 호2:14-20
거친들에 찾아 온 평화/호2:14-20 2001-09-08 08:16:47 read : 67 구약역서인 유대종교는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가 세상에 오신다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 그 생명이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탄생했으나 저들은 율법과 에배의식에 빠져 진리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눅5;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호세아는 유대종교 말년에 있던 선지자로 당시 유대종교는 극도로 형식화되었고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과 남편이자 선지자인 호세아와의 관계로 전개하여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유대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구속섭리를 우리에게 알게 한 예언서이다. 1.거친들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14-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희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거친들---광야 교회를 의미한다. 거친들 이라고 하는 이유는 은혜 받기 이전은 교회생활이 상당히 어려운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주고 있다. 행7;38절에 보면 모세를 중심으로 광야 40년의 생활을 광야교회라고 하였다. 38-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주신 것은 축복 받고, 재미있게 잘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예비해 놓으시고 그 세계에 살 수 있는 자격자를 만들기 위한 훈련소인 것을 알아야한다. 예 :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름다운 가나안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은밀한 계시가 있었다. 창11;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창12;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직접약속은 15장에서 구체화되었다. 창15;7-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땅 가나안을 주실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을 연단 하셨다. 예 : 요셉에게 애굽의 총리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으실 때에도 요셉에게 엄청난 환난을 주었다. 형제들의 배신으로 종으로 팔려감, 보디발의 아내의 간계로 이국 땅에서 깊은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요셉은 이러한 시련의 기간을 믿음으로 잘 견딘 결과, 애굽의 총리가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예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직접 예언하고 알려주는 세례 요한은 유대광야에서 험난한 세월을 지냈다. 마3;1-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4-이 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친 들을 주시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1)거친들에서만 ---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깨닫게 된다 (풍요 속에는 위로가 없다) 2)거친들에서만 ---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게 되어있다. 14-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2. 아골 골짜기에 소망의 문을 세우시는 하나님 15-거기서 비로소 저희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니 아골 골짜기---이스라엘 북단에 있는데 괴로움의 골짜기란 뜻으로 이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말하며 영적으로 유대종교 말년을 의미한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들이나, 교회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이들이나, 또는 우리 주변에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 오늘의 영과 이전에 그들에게는 거친 들과, 아골 골짜기의 어려운 세월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골 골짜기에 소망의 문을 세우신다고 하였다. 소망의 문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선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는 교회이다. 15-거기서 비로소 저희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15하-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에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같이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 애굽에 종되었을때에 출애굽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출애굽하게 될 때에 저들을 꿈을 꾸는 것으로 착각했다고 했다. 소망의 문은---예수님을 말한다. 구약 종교가 끝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새 복음이 이루어졌으니 이제 이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며, 사는 신약시대가 앞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다. 요10;1-7절의 말씀은 신약교회의 성격을 말씀해주고 있다.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 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며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면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아골 골짜기는 아간과 같은 우리 자신을 말하고 있다. 아간이 시날산 외투 한벌과 금이백과 은오백을 감추어 놓았다가 발각되어 그 가족과 함께 이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때려 죽임을 당했다. 아골 골짜기와 같은 나였는데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소망의 문을 세워주시니 이는 참된 교회를 통하여 세워주셨다. 바울은 절망의 아골 골짜기에 처해있을 때 소망의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를 통하여 발견하여 사도 중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갈6;14-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3.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1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이말은 인간의 관계 중에 제 일인칭을 의미한다. 이것은 변할래야 변할 수 없는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피흘려 거친들 아골 골짜기에 하나님의 교회인 소망의 문을 세우심은 본문에 볼때에 3가지 은총과 축복을 말해주고 있다. (1)거친들에 평화로운 새봄이 시작된다고 했다. 18-그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고 전쟁을 없이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거친들에 있지만 평화로운 세계를 알고 살게되어있다. (2)새로운 삶이 시작되게 하였다. 19-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를 들며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입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영원히 살되---죽은 영이 영원한 생명으로 소생함을 말한다. 의와,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됨을 말한다. 의와---의롭다함을 입음 공변됨과---정의와 진리, 은총과---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말한다. 긍휼히 여김---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말한다. 예 : 유대종교 말년에 시몬이라하는 이는 성전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살았다. 눅2;25-예루살렘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니 (3)비로소 행복한 생애를 축복하셨다 20-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우리는 영생과,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을 받음으로 주님께로 가고 주님께서는 진실함으로 내게 결혼하겠다는 말이다 진실함으로---여성으로서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남편의 자격을 말한다. 예 : 이 땅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것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창6;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육에 속해있을때는 자기 육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여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 (돈, 권력, 정욕, 명예) 초상집에 가면 아이고 아이고 하고 우는 것은 속았다는 말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나를 속이지 않는 것이없다 우리 주님께서는 진실함으로 우리에게 장가든다고 하였으니 이는 가까이 할수록 좋은 신랑임을 말해주고 있다.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비로소 하나님의 구속섭리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거친 세상에서의 평안/ 시4:7-8/ 2003-11-17
거친 세상에서의 평안 시4:7-8 모든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을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안보다는 더 많은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로 시달리고 있는지 미국같은 경우 아스피린이 하루에 15톤씩 소비되고 있다고 합니다. 약 중에서도 신경안정제가 가장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평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잠언 14장 30절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시기하는 마음은 뼈까지 썩게 한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는 세 종류의 평안을 말하고 있습니다. 1)영적 평안입니다(spiritual peace). 영적 평안이란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평안을 가질 수 있기 전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뜻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롬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정서적 평안입니다(emotional peace).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영적 평안이 하나님과의 평화(with God)라면, 정서적 평안은 \\\"하나님의 평안\\\"(of God), 곧 하나 님이 주시는 내면적 평안을 말합니다. 마음의 평정과 안정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우리 마음을 다스려주시면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여기 주장하라는 말은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올림픽 게임 선수들이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하는만큼 불리한 상황에서도 득점을 잘 합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혼란스런 상황을 만나더라도 내적 평정을 잘 유지시켜 주십니다. 3)관계적 평안입니다(relatuional peace).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화평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사람과의 평화라고 부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과의 문제(people problems)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편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편안한 사람만이 만나는 자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편안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참 편안함을 느낍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 많은 환난과 시련의 와중에서도 언제나 평안함을 유지했습니다. 다윗의 시편은 읽는이들로 하여금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합니다. 심령의 고요함을 맛보게 합니다. 모든 불안과 긴장으로부터 심령의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오늘 시편 4편 8절 결론만 읽더라도 얼마나 마음을 안정시켜 줍니까?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470장). 1. 기도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시편 3편은 아침의 기도라면, 4편은 저녁의 기도입니다. 시편 3편 5절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지난 밤에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에 편안히 누워 자고 일어나게 되었음을 감사하는 아침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4편 8절에서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오늘 밤에도 여호와께서 안전하게 돌보아주실 것이니, 나는 평안히 눕고 자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이 지금 어떤 형편에서 이 시를 썼습니까? 자기 아들 압살롬이 쿠테타를 일으켜 피란길에 올라 있었습니다. 최소한 1만명 이상의 반란세력이 다윗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삼하 15:12을 보면 압살롬을 지지하는 군세는 증가일로에 있었고, 다윗의 군사는 계속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이처럼 불안한 정황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왕실과 백성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초조와 긴장 속에서도 저녁이 되면 의례히 누워잘 수 있는 이 평안! 기도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다윗은 3장 5-6절에서 얼마나 멋있는 신앙인의 기상을 보여 줍니까? \\\"지난 밤에도 내가 평안히 누워 자고 아침에 일어났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돌보아주셨기 때문이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다윗이 처한 정황이 얼마나 살얼음처럼 위험한 위기상황입니까? 3장 1절을 보십시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도소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하기를 다윗아 이제는 네 인생도 끝장이구나. 이번에는 하나님도 너를 못도우실 것 같구나\\\" 이처럼 자기를 대적하는 수가 많은만큼 다윗 역시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3장 4절과, 4장 1절입니다. 다윗은 적군의 수나 전략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황이 어려움과 처지의 불리함을 알기에 더욱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란 현실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무감각이 아닙니다. 평안이란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요, 문제를 피하거나 포기할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기도하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1)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을 바꾸어 주십니다. 2)문제를 당면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바꾸어 주십니다. 환경과 위기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밤에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두 눈에 쌍불을 키고 자기 앞에 우뚝 서더래요. 그래서 얼마나 다급하게 기도하였던지 밤새도록 하호, 하호하고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호랑이가 나타났어요를 간단히 줄여서 하호, 하호했답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기도하고 새벽이 되어 눈을 떠보니 자기 눈 앞에 플래시를 켜놓고 기도했더래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와 평안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Prayer and Peace. 기도는 원인이고 평안은 결과입니다. 사울 왕은 기도를 멈추는 날부터 불안과 고독과 우울증으로 시달렸으나, 다윗은 기도하는 만큼 평안을 누렸습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 당해 슬플때 나위로 받게 하시네\\\"(482장) 2.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다윗의 신앙생활의 비결은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입니다. 오늘 시편 3편과 4편만 보더라도 다윗은 인생의 모든 위기와 내일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는 신뢰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여기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오직이라는 말은 단 한분뿐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인생을 맡아주실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어떤 사람이 목욕탕에서 귀중품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경찰서에 신고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욕탕에는 \\\"귀중품은 분실될 염려가 있으니 주인에게 맡기십시오\\\"라는 경고가 있는한, 선생님께서는 주인에게 맡기지 않았으니 주인이 책임질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귀중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 다 맡기시 바랍니다. 인생의 짐은 맡길수록 가벼워지고 편해집니다. 비행기를 탈 때도 짐을 다 부치고 나면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공항에서도 짐보관소에 맡겨 놓고 손가방만 들고 돌아다니면 참 편합니다. 돈도 은행에 맡기고 필요할 때 찾아 쓰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염려(worry)라는 말은 원래 질식시킨다(choke)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염려를 하지말라는 소극적인 처방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라는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벧전 5:7). \\\"여러분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이는 주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염려 다 맡겨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생 163장) 옛날 노르웨이에서 어느 소녀 아이가 어른들을 감동시킨 좋은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독일군이 마을을 폭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멀리서 방문을 오셨던 목사님마저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함께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런데 열세살난 소녀 아이만 편안하게 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아침에 어른들이 물었습니다. 너는 독일군들이 폭격하는게 무섭지도 않니? 어떻게 그렇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니? 그런데 이 소녀 아이의 대답에 모든 어른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무시지 않고 깨어 계시는데, 나까지 자지 않아야 할 필요가 없잖아요.\\\"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다 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는만큼 우리는 쉽게 잠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두려움으로 앉아있지 않고 \\\"평안히 누울\\\" 것이다. 잠 못들고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신경을 쓰는대신 \\\"평안히 잠잘 수 있는 것\\\"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빗장보다 더 안전한 것은 \\\"여호와의 보호하심\\\"입니다. 보호자는 오직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의 잠못 이루는 시간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의 흔적들입니다. 어떤 베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만큼 편안할 수 없으며, 어떤 이불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안만큼 포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들이 우리를 대항하고 위협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문제의 그림자로 하나님을 보지말고, 하나님의 능력의 빛으로 당신의 문제를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오늘날 당신의 평안을 도둑질하려고 합니까? 직업의 전환, 경제문제, 대 수술, 까다로운 사람, 내면적 두려움, 실패에대한 염려, 만성적 질병들, 책임감,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 이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평안이란 고통이 없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 풍랑의 와중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복된 말씀으로 우리를 안심시켜 주십니다(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 안, 평 안, 평 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생 222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평안의 사람이 되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끼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peace maker가 되라는 말씀을 88번이나 강조합니다. 1)화해를 주선하십시오 화해하는 것을 주저하지 마시고, 주선해 보세요. 먼저 화목의 주도자가 되십시오. 다른 사람이 먼저 화해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는데 왜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상대방이 먼저 내게 상처를 주었거나, 내가 상처를 주었느냐에 개의치 말고 내가 먼저 화목을 주도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적극적인 제안을 하십니다(마 5:23-24).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2)가능한 한 화합을 힘쓰십시오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점을 찾는 것입니다. 어느 면에서든지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타협은 꼭 필요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양보하고 타협합니다. 가능한 한 융화와 일치에 힘을 씁니다.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사람의 85%는 기술부족이 아니라, 서로 화합을 못하는 인격의 모난 개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새 사람의 새 생활 지침으로 이렇게 제시합니다(롬 12:18).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회목하게 지내라\\\" 3)성취보다는 화목을 추구하십시오 성경은 성취보다는 화목을 더 중요시합니다. 사업보다 사람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사업의 성공보다는 사람을 얻는 것이 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일치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통일하지 않고도 단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상이점을 인정하면서도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천편일률적인 목표달성을 강요하지 않고, 다만 화목을 요구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화해하고자 힘쓰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위로하며 격려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평안의 사람, 평안을 누리고 평안을 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초청) (생 163장, or,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시기하는 마음은 뼈까지 썩게 한다\\\" 다윗은 환난과 시련의 와중에서도 언제나 평안함을 유지했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오늘 당신의 염려와 걱정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밑에 다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염려 다 맡겨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생 163장) 이처럼 우리는 먼저 편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편안한 사람만이 만나는 자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습니다. 마음이 편안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참 편안함을 느낍니다. 오늘 당신은 얼마나 화해를 주도하고 계신가요? 당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화목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의 목적은 성취입니가, 화목입니까? 혹시 당신은 추구하는 사업은 잘 성공하는데, 사람을 잃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평가해 주십니다.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 5:9).
거친 세상에서의 평안/시4:7-8
거친 세상에서의 평안/시4:7-8 2003-11-20 12:07:53 read : 73 모든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을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안보다는 더 많은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로 시달리고 있는지 미국같은 경우 아스피린이 하루에 15톤씩 소비되고 있다고 합니다. 약 중에서도 신경안정제가 가장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평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잠언 14장 30절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시기하는 마음은 뼈까지 썩게 한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는 세 종류의 평안을 말하고 있습니다. 1)영적 평안입니다(spiritual peace). 영적 평안이란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평안을 가질 수 있기 전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뜻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롬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정서적 평안입니다(emotional peace).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영적 평안이 하나님과의 평화(with God)라면, 정서적 평안은 "하나님의 평안"(of God), 곧 하나 님이 주시는 내면적 평안을 말합니다. 마음의 평정과 안정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우리 마음을 다스려주시면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여기 주장하라는 말은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올림픽 게임 선수들이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하는만큼 불리한 상황에서도 득점을 잘 합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혼란스런 상황을 만나더라도 내적 평정을 잘 유지시켜 주십니다. 3)관계적 평안입니다(relatuional peace).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화평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사람과의 평화라고 부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과의 문제(people problems)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라"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편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편안한 사람만이 만나는 자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편안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참 편안함을 느낍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 많은 환난과 시련의 와중에서도 언제나 평안함을 유지했습니다. 다윗의 시편은 읽는이들로 하여금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합니다. 심령의 고요함을 맛보게 합니다. 모든 불안과 긴장으로부터 심령의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오늘 시편 4편 8절 결론만 읽더라도 얼마나 마음을 안정시켜 줍니까?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470장). 1. 기도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시편 3편은 아침의 기도라면, 4편은 저녁의 기도입니다. 시편 3편 5절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지난 밤에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에 편안히 누워 자고 일어나게 되었음을 감사하는 아침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4편 8절에서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오늘 밤에도 여호와께서 안전하게 돌보아주실 것이니, 나는 평안히 눕고 자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이 지금 어떤 형편에서 이 시를 썼습니까? 자기 아들 압살롬이 쿠테타를 일으켜 피란길에 올라 있었습니다. 최소한 1만명 이상의 반란세력이 다윗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삼하 15:12을 보면 압살롬을 지지하는 군세는 증가일로에 있었고, 다윗의 군사는 계속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기에 이처럼 불안한 정황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왕실과 백성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초조와 긴장 속에서도 저녁이 되면 의례히 누워잘 수 있는 이 평안! 기도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다윗은 3장 5-6절에서 얼마나 멋있는 신앙인의 기상을 보여 줍니까? "지난 밤에도 내가 평안히 누워 자고 아침에 일어났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돌보아주셨기 때문이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다윗이 처한 정황이 얼마나 살얼음처럼 위험한 위기상황입니까? 3장 1절을 보십시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도소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말하기를 다윗아 이제는 네 인생도 끝장이구나. 이번에는 하나님도 너를 못도우실 것 같구나" 이처럼 자기를 대적하는 수가 많은만큼 다윗 역시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3장 4절과, 4장 1절입니다. 다윗은 적군의 수나 전략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황이 어려움과 처지의 불리함을 알기에 더욱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란 현실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무감각이 아닙니다. 평안이란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요, 문제를 피하거나 포기할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기도하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1)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을 바꾸어 주십니다. 2)문제를 당면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바꾸어 주십니다. 환경과 위기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밤에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두 눈에 쌍불을 키고 자기 앞에 우뚝 서더래요. 그래서 얼마나 다급하게 기도하였던지 밤새도록 하호, 하호하고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호랑이가 나타났어요를 간단히 줄여서 하호, 하호했답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기도하고 새벽이 되어 눈을 떠보니 자기 눈 앞에 플래시를 켜놓고 기도했더래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와 평안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Prayer and Peace. 기도는 원인이고 평안은 결과입니다. 사울 왕은 기도를 멈추는 날부터 불안과 고독과 우울증으로 시달렸으나, 다윗은 기도하는 만큼 평안을 누렸습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 당해 슬플때 나위로 받게 하시네"(482장) 2.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다윗의 신앙생활의 비결은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입니다. 오늘 시편 3편과 4편만 보더라도 다윗은 인생의 모든 위기와 내일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는 신뢰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여기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오직이라는 말은 단 한분뿐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인생을 맡아주실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어떤 사람이 목욕탕에서 귀중품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경찰서에 신고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욕탕에는 "귀중품은 분실될 염려가 있으니 주인에게 맡기십시오"라는 경고가 있는한, 선생님께서는 주인에게 맡기지 않았으니 주인이 책임질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귀중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 다 맡기시 바랍니다. 인생의 짐은 맡길수록 가벼워지고 편해집니다. 비행기를 탈 때도 짐을 다 부치고 나면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공항에서도 짐보관소에 맡겨 놓고 손가방만 들고 돌아다니면 참 편합니다. 돈도 은행에 맡기고 필요할 때 찾아 쓰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염려(worry)라는 말은 원래 질식시킨다(choke)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염려를 하지말라는 소극적인 처방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라는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벧전 5:7). "여러분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이는 주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염려 다 맡겨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생 163장) 옛날 노르웨이에서 어느 소녀 아이가 어른들을 감동시킨 좋은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독일군이 마을을 폭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멀리서 방문을 오셨던 목사님마저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함께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런데 열세살난 소녀 아이만 편안하게 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아침에 어른들이 물었습니다. 너는 독일군들이 폭격하는게 무섭지도 않니? 어떻게 그렇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니? 그런데 이 소녀 아이의 대답에 모든 어른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무시지 않고 깨어 계시는데, 나까지 자지 않아야 할 필요가 없잖아요."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다 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는만큼 우리는 쉽게 잠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두려움으로 앉아있지 않고 "평안히 누울" 것이다. 잠 못들고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신경을 쓰는대신 "평안히 잠잘 수 있는 것"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빗장보다 더 안전한 것은 "여호와의 보호하심"입니다. 보호자는 오직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의 잠못 이루는 시간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의 흔적들입니다. 어떤 베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만큼 편안할 수 없으며, 어떤 이불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안만큼 포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들이 우리를 대항하고 위협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문제의 그림자로 하나님을 보지말고, 하나님의 능력의 빛으로 당신의 문제를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오늘날 당신의 평안을 도둑질하려고 합니까? 직업의 전환, 경제문제, 대 수술, 까다로운 사람, 내면적 두려움, 실패에대한 염려, 만성적 질병들, 책임감,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 이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평안이란 고통이 없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 풍랑의 와중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복된 말씀으로 우리를 안심시켜 주십니다(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 안, 평 안, 평 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생 222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평안의 사람이 되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끼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peace maker가 되라는 말씀을 88번이나 강조합니다. 1)화해를 주선하십시오 화해하는 것을 주저하지 마시고, 주선해 보세요. 먼저 화목의 주도자가 되십시오. 다른 사람이 먼저 화해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는데 왜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상대방이 먼저 내게 상처를 주었거나, 내가 상처를 주었느냐에 개의치 말고 내가 먼저 화목을 주도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적극적인 제안을 하십니다(마 5:23-24).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2)가능한 한 화합을 힘쓰십시오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점을 찾는 것입니다. 어느 면에서든지 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타협은 꼭 필요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양보하고 타협합니다. 가능한 한 융화와 일치에 힘을 씁니다.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사람의 85%는 기술부족이 아니라, 서로 화합을 못하는 인격의 모난 개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새 사람의 새 생활 지침으로 이렇게 제시합니다(롬 12:18).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회목하게 지내라" 3)성취보다는 화목을 추구하십시오 성경은 성취보다는 화목을 더 중요시합니다. 사업보다 사람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사업의 성공보다는 사람을 얻는 것이 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일치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통일하지 않고도 단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상이점을 인정하면서도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천편일률적인 목표달성을 강요하지 않고, 다만 화목을 요구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화해하고자 힘쓰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위로하며 격려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평안의 사람, 평안을 누리고 평안을 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초청) (생 163장, or,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시기하는 마음은 뼈까지 썩게 한다" 다윗은 환난과 시련의 와중에서도 언제나 평안함을 유지했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오늘 당신의 염려와 걱정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밑에 다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염려 다 맡겨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생 163장) 이처럼 우리는 먼저 편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편안한 사람만이 만나는 자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습니다. 마음이 편안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참 편안함을 느낍니다. 오늘 당신은 얼마나 화해를 주도하고 계신가요? 당신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화목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의 목적은 성취입니가, 화목입니까? 혹시 당신은 추구하는 사업은 잘 성공하는데, 사람을 잃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평가해 주십니다.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 5:9).
거친 풍랑/ 마8:23-27/ 2010-07-23
거친 풍랑 마8:23-27 애써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려고 하는 교인들 중에 어려운 시험을 당하여 \\\"왜 저에게는 이런 시험들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처럼 답답하고 가슴 아플 때가 없습니다. 7남 3녀를 두고 부요하게 살며, 항상 하나님을 공경하며, 아침마다 자녀들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거리낌 없이 살던 욥의 경건한 가정에도 그토록 무서운 시련이 있었습니다. 연차적으로 그 많은 가축 떼를 빼앗기고, 집이 무너져 열 자녀가 일시에 죽어야 하고, 자신은 악성 피부병에 걸려 고통을 겪어야 하는 참상이었습니다. 그 시련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벌받을 짓을 하였더라면 모르지만 가장 경건한 가정에서 된 일이라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지 참 답답한 일이지요. 작은 교회를 위하여 생사를 걸고 목회하는 겸손한 목사가 갑자기 닥친 중풍으로 일시에 목회 길이 막히고, 가족의 가난한 짐을 지고 숱한 고생을 해야 하는 모 목사님을 볼 때도 무엇이라고 우리가 답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타고 가는 짧은 항해의 길에 거친 풍랑이 일어나서 시련을 겪는 모습입니다. 종일토록 복음의 일을 마치고 제자들이 다음의 장소로 주님과 함께 배를 저어 가는데도 거친 풍랑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첫째로, 좁은 바다에서의 거친 풍랑입니다. 태평양이나 대서양이나 지중해 같은 큰 바다에서 거친 풍랑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갈릴리 같은 작은 바다, 곧 호수에 불과한데서 거친 풍랑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태평양은 16,600만㎢의 면적은 가지고 있고 대서양은 8,200만㎢, 인도양은 7,300만㎢, 지중해는 297만㎢의 면적을 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큰 바다에서 그런 무서운 풍랑이 일어나고 태풍이 일어나서 고난을 겪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여기에 비해 갈릴리 바다는 남북이 겨우 20㎞, 동서가 12㎞, 총면적은 166㎢밖에 되지 않는 아주 적은 호수입니다. 노를 저어 가는 배로 아무리 먼 곳이라도 1시간 내지 2시간 정도면 건너갈 수 있는 손바닥만한 좁은 바다입니다. 이런 좁은 바다에서 거친 풍랑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찮은 것에서도 거친 시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별것이 아닌데서도 무서운 시험이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의 일입니다. 윌리암 휘크라는 사람은 23년 생애에 가장 좋은 소식을 듣고 그러고는 바로 죽었습니다. 윌리암은 옥스퍼드에서 영재였습니다. 1928년 그가 대학을 최우수자로 졸업하였는데 그동안 30여년 동안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그 만한 우수자가 없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총장과 교수들의 특별초대를 받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옥스퍼드의 교수로 약속을 받아 돌아오다가 심장 마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명문 옥스퍼드의 교수로 약속을 받은 가장 좋은 날에 그는 죽음을 맞이했으니 너무 좋은 소식도 큰 시련인지 모를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 입다를 보십시오. 입다가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그토록 애먹이던 암몬과의 싸워 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때, 하필이면 무남독녀인 딸이 춤을 추며 아버지를 환영할 것이 무엇입니까. 입다는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하기를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라고 통탄한 것이 나와 있습니다. 자기 딸이 승리하고 개선하는 아버지를 기뻐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런데 왜 괴로워해야 했던가? 그것은 입다가 전쟁에 출전하기 전에 하나님께 서약하기를 \\\"암몬과 싸워 승리하고 돌아올 때 제일 먼저 환영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겠다\\\"고 서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필이면 사랑하는 자기 무남 독녀 하나의 딸이 자기를 환영했으니 그래서 옷을 찢고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 암몬 군사를 쳐서 처리하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 돌아오는 이 입다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되는 시련이 생겼습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됩니까? 시편 90편 10절에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人出은 짧고 시련은 많다, 혹은 시련은 길다\\\"란 그런 뜻이 되지요. 사실 우리의 행복한 생애는 짧고 불행의 연속은 길다는 뜻이올시다. 둘째로, 순종의 바다에 거친 풍랑입니다. 요나의 길에 거친 풍랑이 일어나는 것은 억울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요나는 니느웨로 가야만 하는 사람이 다시스로 도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마땅히 순종해야만 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그는 마땅히 이런 거친 풍랑의 고난을 겪어야 했던 사람입니다. 삼손의 길에 거친 풍랑이 일어나도 그것은 억울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구별되게 살아야 할 자가 이방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고 있었기 때문이고 가르쳐 주어서 안될 비밀을 누설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에 거친 풍랑이 일어난 것은 그리 억울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아야 할 자가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것을 두려워해야 할 자가 경거망동을 일삼았으니 마땅히 그 가정에는 거친 풍랑이 일어날지라도 억울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주의 제자들의 경우는 다르다고 보아집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가는 길이었습니다. 순종하여 가는 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복음 사역을 순수히 수종을 드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위해 산 것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산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남을 해친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주님의 복음을 사역을 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에게 거친 풍랑의 위협을 받아야 했습니다. 찬송가 작시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화니 크로스비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생후 6주만에 세상을 볼 수 있었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나를 어둡게 살게 하셨다\\\" 그러니 6주 동안만 눈으로 볼 수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봉사가 되어 그는 일생을 눈먼 봉사로 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로스비는 자기는 남을 한번도 애먹여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6주간도 아직도 생후 6주간이라 흠과 티가 있었겠느냐 말이지요? 또 볼 수 없는 그의 생애는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했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둠의 속박에서 온갖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물을 보지 못하는 시련도 큰데다가 거기서 오는 여러 가지 시험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각고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화니 크로스비가 \\\"하나님이여! 내가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무엇이라고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 봅은 신실한 크리스천으로서 너무나 시련이 심해서 자기 교회 담임목사 젬 핼리 목사에게 심각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왜 저에게 가혹한 시험만 있습니까?\\\" 그는 수십년동안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주일을 어긴 일이 한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십일조를 어긴 일도 한번도 없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잘못을 범하지도 않았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반신불수가 되고,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은 우연히 실명되고, 하나밖에 없는 딸은 천질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만을 순종하고 살아가는 가정에 아내는 반신불수요, 한 아들은 우연히 실명이 되어 봉사가 되고, 단 하나 밖에 없는 딸은 천질을 앓고 있으니 이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래서 담임 목사에게 \\\"목사님, 왜 저에게 가혹한 시험이 있습니까?\\\" 이 때에 제임스 핼리 목사는 할 말이 없어서 \\\"오직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순종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좇아 살고 있지만은 여러분의 길에도 작고 큰 시험이 몰아치고 있으니 이 때 무엇이라고 여러분이 물어볼 것입니까? 세 번째는 바다의 사람에게 거친 풍랑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바다에서 성장한 바다의 사람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를 꼽는다면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이들은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 언제 물결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 때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바다의 사나이들이 노를 젓는데도 거친 풍랑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6장 3절에 인간들은 천기를 분별할 줄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홍수 피해를 막지 못하는 것이, 한발을 예상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들도 천기를 분별할 줄 압니다. 그러면서도 홍수를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발을 예상 못해서 당하는 고난이 많다는 것이지요. 이사야 40장 30절에 젊고, 가장 힘이 펄펄 할 때도 피곤하고, 곤비하고, 넘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건강하고 건장해서, 또 젊고 젊어서, 가장 힘이 있는 걸음을 걸을 수 있을 때도,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을 때도, 펄펄하게 살 수 있을 때도 넘어지고 곤비하고 피곤해 집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신명기 22장 4절에 네발 가진 든든한 소도 길에서 넘어질 수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그 소가 네 발 가지고 든든히 서 있습니다. 그런 소가 넘어질 수 있다 말이지요. 스가랴 11장 2절에 견고한 백향목도 넘어지고 꺾여질 때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람차고 힘있게 뻗어있는 저 백향목도 넘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찬 폭풍에 넘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다의 사람에게도 거친 풍랑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젊은 청년들에게도 시련의 시련이 연속될 수가 있는 것이요, 잘 살고 건전한 사람에게도 시련의 시련은 연속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를 막을 자가 어디 있습니까? 옛말에 헤엄 잘치는 자는 물에 빠져 죽고, 나무에 잘 오르는 자는 나무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고 그랬습니다. 나무 잘 타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다의 사람에게도 거친 풍랑은 사정없이 닥쳐왔다는 사실입니다. 거친 풍랑은 염치도 없습니다. 체면도 없습니다. 인정 사정도 없습니다. 내키는 데로 덤비는 폭군이었습니다. 여기에 바다의 사나이들이 겁을 먹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좁은 바다에서 거친 풍랑이요, 순종의 사람에게도 거친 풍랑이요, 바다의 사람에게도 거친 풍랑이 폭군처럼 덤벼들었으니,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안심하고 살 땅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피할 장소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안연하다 하고, 가슴을 치며, 배를 두드리며, 여러분 자신이 행복한 낮잠을 잘 데가 이 세상 어디 있느냐 말이지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말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남모르는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왜 이렇습니까?\\\"하고 누구에게 물을 수 있습니까? \\\"왜 저에게 이런 시험들이 오고 있습니까?\\\" \\\"나는 주님을 의지하는 백성이 아닙니까? 왜 주님, 내게는 이런 시련이 있습니까? 나는 주님을 의지하는 백성이 아닙니까? 왜 나에게는 이런 시험이 있습니까?\\\"하고 내가 묻고 물어본들 시원한 대답을 할 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한마디로 끝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결론적으로 여기에도 해결의 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24절에 \\\"예수님이 그 배에서 주무시는지라\\\" 주무셔도 괜찮습니다. 주님만 계시면 됩니다. 마태복음 14장 25절에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위로 걸어오심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인하여 고통을 겪을지라도 성난 파도 위로 우리 주님이 만약에 걸어오신다면 다 되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걸어오시면 됩니다. 8장 26절에 보니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14장 32절에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 바람이 그쳤더라\\\" 예수님이 찾아주시든지, 계시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씀이지요. 거센 바람도 주님의 책망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고, 거친 파도도 주님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 25절에 사랑하는 어린 딸이 갑자기 죽어 이로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 집에 주님이 찾아 주시면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주시니 곧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딸이 죽어 슬픔에 잠겨 호곡하고 있던지, 통곡하고 있던지, 울고 있을지라도 그곳에 주님 찾아 주시니 어린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3절에 하나밖에 없는 오라비와 누이 둘이서 살다가 오라비가 죽어 슬픔에 잠긴 가정에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죽어 장사 된지 벌써 사흘이 되어 무덤에 있는 그곳에 주님이 가셔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랬습니다. 베로 동인 체 벌떡 일어나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8장 28절에서 30절에 가다라 지방 무덤 가에서 배회하던 불쌍하기 그지없는 미친 자에게 주님이 찾아 주셨을 때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악귀에 걸린들 무슨 걱정이요, 내 아들이 죽고, 내 아내가 죽고, 우리 가정에 풍지박산, 이런 저런 시험이 온들 주님만 찾아주시면 해결되는 줄 믿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여류 작가 케리 엘리자벳 여사가 쓴 \\\"정상의 꽃\\\"이라는 작품을 보니 주인공 \\\'수잔\\\'은 한 남자를 사랑하여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하자 10일만에 남편이 군 입대 명령을 받고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동안은 편지가 오고 가면서 서로의 사랑을 편지 속에 담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도 갑자기 끊겨 졌고, 오랜 후에 편지 한 장이 날라 왔습니다. 그 편지 속에 \\\"나는 두 팔을 잃었습니다. 다른 전우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나는 이제 당신과 함께 할 수 없는 몸입니다. 나를 잊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수잔은 즉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남편을 주님처럼 영원히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그 남편을 영원히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하고는 남편의 병실로 달려갔습니다. 남편의 병실을 찾았을 때 남편은 깜짝 놀랐습니다. 수잔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받고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나는 당신을 평생에 사랑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나는 당신을 평생에 사랑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불우한 운명이 둘의 사랑을 갈라놓을 것 같지만 도리어 주님이 계시는 자들이라 더 뜨거운 사랑의 결실을 가져왔습니다. 어떤 시련이라도 어떤 불행이라도 주님이 찾아 주시고, 주님이 계신다면 모든 것은 해결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행복의 길이 되는 줄 믿습니다.
건강하고 평안한 교회로!/행9:31-
건강하고 평안한 교회로!/행9:31- 2003-11-20 10:59:25 read : 5 오늘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날마다 수가 더 많아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울이 개종하여 꺾이게 됨으로 박해가 잠자고 교회는 안정을 찾아서 좋은 축복의 시기를 선용함으로 전성기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위로 가운데 평안과 번영과 도약의 시기가 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도 금년으로 목회 5개년 제 1차 계획을 마치고 제 2차 5개년 계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실을 다지는 해로서 질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를 목표로 전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기도제목은 "건강하고 평안한 교회로 자라며 일하게 하옵소서" 입니다. 교회는 건강해야 하며 평안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나타난 초대교회가 평안하며 든든히 서 갔다고 하는 말씀은 곧 건강하고 평안한 교회로 자라갔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장하며 일하는 교회로, 외적인 목표는 성령 충만한 교회, 교회다운 교회, 세계 속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내적인 목표는 짐없는 교회, 담없는 교회, 말없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교회다운 교회로서 내실을 다지고 질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짐없는 교회, 담없는 교회, 말없는 교회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짐없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짐을 벗는데 있습니다. 시편 81편 6절의 말씀에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종살이하는 노예의 굴레에서 자유케 하셨고, 짐을 벗겨 주시고, 구걸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축복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시편 14편 25절에는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 아래 밟으리니 그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대적의 손에서 멍에를 꺾어버리고 짐을 벗기시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55편 22절에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고,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며 "내게 와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8) 주님께로 가까이 나와서 주님의 교훈을 잘 배우는 사람은 짐을 풀고 가벼운 은혜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짐을 벗기는 곳입니다. 그러나 율법사들이 사람들에게 어려운 짐만 지워주고 자신들은 한 손가락도 대지 않고 있다고 화받을 자들이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눅 11:46) 성경은 우리에게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갈 6:2) 주님이 계신 교회는 우리의 짐을 주님 앞에 와서 벗을뿐 아니라 형제의 짐을 함께 져주고 또 그 짐을 벗기는 일을 협력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헌금도 자유롭게 하도록 하고, 봉사도 어느 분야에서 무엇을 봉사할 것인가를 스스로 자원하여 써내도록 하며, 이사오신 분들도 자유롭게 자기 의사대로 등록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짐없는 생활, 이것은 우리가 소원하는 마음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진리를 잘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벗어야 할 짐이 있고 져야 할 짐이 있습니다. 벗어야 할 짐은 세상에서 우리는 죄의 짐을 지고 고달파 하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밑에 와서 죄를 회개하고 죄를 사함받고 자유함을 얻어 죄의 짐은 벗어야 합니다. 반면에 져야 할 짐은 스스로 자원하여 지는 십자가의 멍에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지시고 만민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하여 지신, 자원하신 길입니다. 그 십자가를 우리는 져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고, 종의 멍에를 벗었고, 짐을 벗었으니 그 은혜를 생각할 때 주님을 위하여 내 몸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으로 일하는 멍에는 메어야 합니다. 그것은 짐이 아니요 나같은 죄인이 주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인 줄 알고 자원하여 기쁨으로 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 때문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은 그 십자가를 지는 만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사업의 미완성이나 불완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그 십자가를 지고 멍에를 지고 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구속의 후속 사업을 계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짐이 아니요, 기쁨입니다. 우리가 감격 속에서 기쁨으로 지고 가는 십자가입니다. 둘째로, 담없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담을 허무는데 있습니다. 몸된 교회는 주님이 세우셨는데 교회는 담을 허심으로 창립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에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베소 2장 14절에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히브리서 9장 3절에는 지성소가 나오는데 여기 성막생활의 지성소는 담을 허물으심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담을 쌓는 생활은 십자가와 원수가 되는 생활입니다. 여하한 이유에서라도 교회에서 담을 쌓아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복음 운동은 담을 허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공산 세계까지의 선교는 곧 무신론자들에게까지도 담을 헐고 들어가는 운동입니다. 담을 치고 사는 교회는 질적인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담을 쌓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불행 속으로 가두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로서 좋은 교회가 되려면 여러분 사이에 그 어느 누구도 계속해서 담없는 성도의 관계를 만드시기를 축원합니다. 초대교회가 참으로 본이 되는 것은 그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사랑의 떡을 함께 떼며 담없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참 교회다운 교회가 된 것입니다. 담을 친 상태의 교회는 병든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평안한 교회로 자라며 일하게 해달라는 내년도의 기도는 우리들이 참으로 담을 쌓지 아니하고 병들지 않고 시험이 없는 교회로서 계속해서 성장하며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평화의 댐 공사는 참으로 많은 국력낭비요 몹시 슬픈 일 입니다. 공산당들이 담을 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담이 있는 것은 불행스러운 일입니다. 그 누구와도 우리는 담을 쌓고 담을 쳐서는 안됩니다. 문을 열고 대화해야 합니다. 담을 헐고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그 어떤 일로도 누구와도 담이 없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회만 이루어지는 담없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말없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건강치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말이 많은 데서 오는 말의 공해로 인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에 보면, 말에 대한 경고와 주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완전한 자라고 말씀하면서 말 때문에 우리가 불완전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몇 가지 설명을 하고 있는데, 말(馬)을 순종케 하려고 입에 자갈을 먹여 말 전체를 어거하며, 광풍에 밀리는 배를(舟) 지극히 작은 키로 운전해 가고, 작은 불(火)이 큰 나무를 불태우듯, 혀를 자갈 물리우고 잘 다스리면 자기의 생이 잘 다스려지고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그것이 자기 생을 불사르게 하고 쉬지 아니하는 악(惡)이고 독(毒)이 가득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입으로 주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입으로 형제를 저주할 수 없으며 한 샘(泉)에서 어찌 쓴물과 단물이 나올 수 있으며 어떻게 포도 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무화과 나무에서 포도 열매를 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다운 말만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로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교회에서 말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가 병들었을 때 우리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고 병든 것이란 말씀입니다. 말로 주는 상처는 그의 영적 생활의 건강을 빼앗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의 일을 추상적으로 이야기해서 참견하는 말을 하지 맙시다. 말은 듣는 말 외에 보태서 하지 맙시다. 말은 거짓되게 하지 말고 진실하게 합시다. 말은 골라서 해야 될 말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맙시다. 말을 참아야 될 때 참아 가며 삽시다. 말 없는 교인이 제일 좋은 교인이고, 말 많은 교인은 좋은 교인이 아닙니다. 말없는 교회가 은혜스러운 교회요, 말 많은 교회는 은혜스럽지 못한 교회입니다. 좋은 교회는 다른 사람이 와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 합심해서 좋은 교회를 만들기를 노력해야 될 줄 압니다. 이 교회에 들어서면 누구나 다 자기의 짐이 풀어져야 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할 때 편안히 안식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여기와서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짐을 벗고 어느 누구와도 담이 없이 다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선교회, 어느 속, 누구를 만나든지 누구와도 가깝고 친할 수 있는, 사랑하는 담없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만나 교회를 좋은 교회, 교회다운 교회, 소문난 교회로 만들어서 누구든지 이 교회를 찾아와 짐을 풀고 참으로 담없이 기쁨으로 살 수 있는 말없는 좋은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단이 필요한 신앙/ 수24:14-15/ 2001-11-15
결단이 필요한 신앙 수24:14-15 겨울의 세찬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남쪽 끝으로 떠나가는 오리 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쪽 끝으로 떠나기 전날 밤 그 오리 떼들은 어느 농장 마당에 기숙하면서, 곡식들을 잔뜩 주워 배불리 먹고 힘을 보충한 뒤 그 다음날 아침 오리 떼들은 날아간다. 그런데 그중 오리 한 마리는 \\\"이 많은 곡식알들이 있으니 나는 여기 남아 좀 더 먹고 떠나 야겠다\\\"고 하면서 뒤쳐졌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도 그 오리는 하루만 더 있기 로 하고, 그 다음 날도 여전히 그냥 남아 있으면서, 그 맛있는 곡식을 먹었다. 그러는 동안 그 오리는 하나의 습관처럼 \\\"내일 나는 남쪽으로 날아가겠다.\\\" 고만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되어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와서 더 이상 지체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 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오리는 이제 그의 날개를 펴서 농장마당을 가로질러 날아오르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오리는 너무 살이 쪄 있어서 날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결단이 필요할 때 하지 못하고 그 결단을 뒤로 미룰 때 오는 피해와 아픔은 더욱 큽 니다. 우리는 지난 수년간 믿음 안에 살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고 확증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 습니다. 과연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제대로 하나님을 믿으며 살고 있는가를 질문하면서 이제 중요한 것은 내 모습을 보고 아 내 가 믿음 안에 있지 못했구나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믿음 안에서 살기를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의 결단을 촉구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계속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이 섬기 는 신을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믿음의 생활을 하고 싶은 대도 계속 미진한 상태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면 이제 분명하게 선 택의 결단을 내리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여호수아는 우리에게 무엇을 결단하라고 강권합니까?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한 쪽을 택하라고 강권하고 있 습니다. 우유부단한 백성들에게 향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이방 신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이방 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릴 것 인지를 결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던 그 시대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을 섬기든 지 세상적으로 살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 이라고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와 일들로 인하여 믿음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망설이며 이중 생활을 할 것인가? 이제 믿음 안에 살 것을 결단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눅9:62) 예수님께서도 한 사건을 통해 결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먼저 집에 가서 가족들과 작별하기를 바랬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분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한번만 도는 것으로도 무너뜨리게 하실 수 있었지만, 엿새 동안 매일같이 한바퀴씩 돌고 제 칠 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바퀴 돌고 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함을 치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한바퀴씩 돌면서 여리고 성이 얼마나 견고한 성인가를, 그리고 성을 지키는 군인들이 얼마나 강한가를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만 믿고 전진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하고 낙심하여 후퇴할 것이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결단을 하나님께서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로 마음의 결단을 내린 여호수아와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곱 바퀴를 돌고 난 다음 우렁차게 승리를 외침으로 여리고 성벽은 무너지게 되었던 것입니 다(수6:1-21).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선택의 자리에서 항상 하나님 편을 택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유혹을.. 모세도 바로의 궁궐의 부귀와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다니엘도 우상의 제물로 자신을 더럽힐 것인가 부귀와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거룩함을 지켜 가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했어야 했습니다. 신앙은 이와 같이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세상을 신으로 섬기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만 섬기며 살 것인가? 오늘 본문 앞을 보면 왜 하나님만 섬기며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가를 설명하고 있습니 다. 이스라엘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끝없는 은혜와 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설명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내 인생에 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뒤돌아 볼 때 그 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 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 오직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 길에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며 돌보아 주실 분이 누구입니까? 오직 우리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평강교회 모든 성도님께서는 하나님만 섬기며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10:12 \\\"곧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네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 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과 정성을 가지고 섬기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며 살 대상은 누구인가? 진정으로 우리 마음과 정성을 다했을 때 행복과 기쁨과 삶의 의미가 주어지는 대상은 누구 인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에게 진실과 성실로 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또한 성실과 진실로 대해야함은 당연할 것 입니다. 이러한 결단에 대한 강권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을 합니 다.(16-18절)에 보면 그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단을 한 것 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신앙의 결단이 서기를 기도합니다. 아마 그들도 망설였을 것입니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도 마음에 결단을 내리지 않고 한편으로 세상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바닷가에 가면 게가 있는데, 게는 두 개의 구멍을 뚫어놓고 적이 침입하면 다른 통로 도망갑니다. 그래서 게를 잡으려면 한 쪽 구멍을 막아놓고 다른 쪽 구멍으로 파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을 똑같이 의지하고 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의지하던 통로를 막아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들어도 듣고 깨달아도 결단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아파해야 될 병든 신앙의 모습일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은 말씀을 듣고 아름다운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결단만 내려놓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 약 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마음에 결단을 내렸으면 믿음의 행진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행진을 시작하다가 환경을 바라보고 그만 환경에 눌려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뒤로 물러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갈 때는 하나님의 말씀만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입으로 시인하면서 나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난 다음 물위로 걸어 가다가 바람과 바다를 보고 두려워함으로 물 속으로 빠져버린 베드로처럼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일단 하나님을 따라가기로 마음에 결단을 내렸으면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부여잡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진할 때 마귀는 우리의 가는 길에 첩첩이 장애물을 설치하고 우리의 가는 길을 방해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는데 사악한 마귀 가 이를 보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귀가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의 길에 자꾸 장 애물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요일4:4)\\\"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 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상담 중... 아픔이 클수록 그 끝은 가깝고 ...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에 장애물이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하나님께서 위대한 계 획을 가지고서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아침 우리 모두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의 결단을 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건강하고 아름 다운 모습으로 이제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음을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며 정성으로 섬기며 살겠다고 결단을 하는 우리에게 주님 은 분명 풍성한 은혜와 돌보심과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직 나만을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나를 구원하신 그 주님만을 나도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나와 우리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했던 여호수아와 같이 저와 평강교회 모든 성도 님은 이 시간 믿음으로 살겠노라고, 하나님만 섬기며 살겠노라고, 그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 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노라 결단하는 복된 성도님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아멘.
결단이 필요한 신앙/ 수24:14-18/ 2001-09-19
결단이 필요한 신앙 수24:14-18 덴마크의 위대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겨울의 세찬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남쪽 끝으로 떠나가는 오리 떼에 관한 이야기를 한 일이 있다. 떠나기 전날 밤 그 오리 떼들은 어느 농장 마당에 기숙하면서, 곡식들을 잔뜩 주워 배불리 먹게 된다. 그 다음날 아침 오리 떼들은 날아간다. 그런데 그중 큰오리 한 마리는 \\\"이 곡식알들이 참 좋다. 그러니 나는 여기 남아 좀 더 먹고 떠나야겠다\\\"고 하면서 뒤쳐졌다. 그 다음날 아침 그 오리는 하루만 더 있기 로 하고, 그 다음 날도 여전히 그냥 남아 있으면서, 그 맛있는 곡식을 먹었다. 그러는 동안 그 오리는 하나의 습관처럼 뇌까리기 시작했다. \\\"내일 나는 남쪽으로 날아가겠다.\\\" 그러는 동안 겨울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와서 더 이상 지체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오리는 이제 그의 날개를 펴서 농장마당을 가로질러 날아 오르려 했다. 그러나 아뿔사! 그 오리는 너무 살이 쪄 있어서 날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오리는 너무 지체했던 것이다. 우리는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고 그 결단을 하지 않았을 때 오는 피해와 아픔은 너무 크다. 우리는 지난 4주간 동안 믿음 안에 살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고 확증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과연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제대로 하나님 을 믿으며 살고 있는가?를 질문하면서 내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것은 내 모습을 보고 아 내가 믿음 안에 있지 못했구나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고, 내 믿음은 이런 부분에서 미진 했구나를 깨달을 뿐 아니라 이제는 결단이 필요하다. 믿음 안에서 살기를 결단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계속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며 살았다. 즉 주변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다. 믿음의 생활을 하고 싶은 대도 계속 미진한 상태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면 이제 분명하게 선택의 결단을 내리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무엇을 결단하라고 강권하는가? 1. 결단(선택)을 촉구하는 여호수아 (15)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한 쪽을 택하라고 강권하고 있다. 즉 우유부단한 백성들에게 향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이방 신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이방 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 릴 것인지를 결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던 그 시대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을 섬기든지 세상 적으로 살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는 것이 다. 우리는 신앙생활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공감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계속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와 일들로 인하여 믿음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망설이며 이중 생활을 할 것인가? 이제 믿음 안에 살 것을 결단하라고 촉 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한 사건을 통해 결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신 적이있다.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집에 가서 가족들과 작별하기를 바랐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다\\\"(눅9:62). 신앙은 선택이다. 분명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이 선택의 자리에서 항상 하나님 편을 택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을 것인가? 말것인가?를 선택했어야 했다. 아브라함도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본토의 기득권과 자리잡은 안락함과 안정감을 계속 누리고 살 것인가? 와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 음의 길을 선택함으로 미래의 불확실함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두려움과 불안감속에 살아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결단이 필요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부인도 소돔과 고모라성이 망할 때 모든 것을 두고 나오면서 그것에 마음을 두고 미련을 가지고 뒤를 돌아 볼 것과 하나님의 말씀대 로 믿고 오직 앞만 보고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요셉은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을 받아 들여 육체적인 쾌락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는 믿음의 길을 가야 되는가?를 선택해야 했 다. 모세도 바로의 궁궐의 부귀와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 것인가? 와 상 주심을 바라보며 주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다니엘도 우상의 제물로 자신을 더럽힐 것인가? 와 좋은 기회와 부귀와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거룩함을 지켜 가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것인가?를 선택했어 야 했다. 신앙은 이와 같이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세상을 신으로 섬기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만 섬기며 살 것인가? 2. 믿음을 촉구하는 여호수아 (14)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만 믿고 살 것을 촉구하고 있다. 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만 섬기며 살라고 하는가? 1) 그러므로 오늘 본문 앞을 보면 왜 하나님만 섬기며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인하여 끝없는 은혜와 돌보심과 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 누구인가? 내 인생에 복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뒤돌아 볼 때 그 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 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 오직 주님밖에는 없다. 우리 인생 길에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며 돌보아 주실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 인간이 만들고 섬기는 우상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며 돌볼 능 력이 없다고 하셨다. 오직 우리 주님밖에는 없다. 우리 인생 길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누리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누구신가? 오직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만 섬기며 믿음의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 2) 이제는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왜 자꾸 옆을 보면서 믿음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이중적인 삶을 계속하 지 말고 결단을 내려서 하나님만 섬기며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이제는 결단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3)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만 섬기라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첫째가 경외하며 둘째가 성실과 진정으로 섬기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 신명기 10:12 \\\"곧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네가 오늘날 네 행복 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과 정성을 가지고 섬기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살 대상은 누구인가? 진정으로 우리 마음과 정성을 다했을 때 행복과 기쁨과 삶의 의미가 주어지는 대상은 누구인가? 우리가 순 종하고 섬기며 살 가치와 의미가 있는 분은 누구인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러므로 그만 섬기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실과 성실로 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또한 성실과 진실로 대해야한다. 3. 신앙을 결단하는 이스라엘 (16-18) 이러한 결단에 대한 강권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을 한다. 그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단을 한 것이 다. 권면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 말씀 앞에 좋은 반응을 보인 것이다. 신앙은 반응이 있어야 한다. 주님을 보면서도, 말씀을 들으면서도 반응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마11:17에서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 리가 애곡 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고 하셨다. 반응이 없는 신앙의 상태를 강팍한 세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무리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다면 깨달아도 결단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아파해야 될 병든 모습이다. 건강한 신앙은 말씀을 들 으며 거기에 아름다운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 아침 우리 모두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의 결단을 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제는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단해 보자. 이제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며 정성으로 섬기며 살겠다고 결단하며 믿음을 확인하자. 결 론 여호수아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결단과 믿음의 삶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좋은 반응을 보이자. 우리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함을 보았다. 미루다 보면 우리의 신앙은 훼손되고 변절되어 우리 믿음을 상실하게 된다. 미지근하고 혼합되어 변절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행이다. 이제는 결단이 필요하다. 나와 우리 집은 여호만을 섬기겠다고 고백했던 여호수아와 같이 나와 우리 집은 믿음으로 살겠노라고, 하나님만 섬기며 살겠노라 고, 그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며 살겠노라고 결단하자. 오직 나만을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나를 구원하신 그 주님만을 나도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결단하자. 나를 위해 오늘도 풍성한 은혜와 돌보심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 정성을 다해 전심으로 섬기며 살겠노라고 고백하며 좋은 결단을 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