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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아시아 주일 예배서식/Hope S. Antone/2009-05-24
2009년 아시아 주일 예배서식 NCCK 제공 올해의 국가 : 스리랑카 주제: 눈물 방울 일시: 2009년 5월 24일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목 차 2009 아시아주일에의 초대 2009 아시아주일 주제 해설 스리랑카 기독교협의회 소개 아시아주일 연합예배 설교와 성서연구를 위한 자료 노래와 찬양 어린이를 위한 페이지 알림,,,,,,,,,0 표지그림 해설: 스리랑카는 인도양에 위치한 아시아의 눈물 한 방울과도 같다. 실로 스리랑카는 엄청난 고통을 가져온 정치적 폭행들로 점철된 나라이다. 그러나 고통은, 마치 갈보리의 십자가가 마지막 메시지가 아니듯이, 마지막 메시지가 아니다. 2009년 아시아주일 예배에의 초대 1974년부터 성령강림절 직전 주일에 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 에큐메니칼 기관들이 아시아주일을 지켜왔습니다. 이 날은 현재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the Christian Conference of Asia)의 전신인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 the East Asian Christian Conference) 창립을 축하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올 해 아시아 주일은 2009년 5월 24일입니다. 그러나 이 날짜가 여러분의 교회력 사정 때문에 적절치 못하다면, 다른 적절한 날을 선택하여 아시아 주일을 지키십시오. 이 예배 자료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와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가 공동 작업한 것입니다. 여기 제시된 예배안 혹 그 일부를, 그리고 설교와 성서연구안, 기도문 등을 여러분의 상황에 맞추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예배안을 자국어나 지역 말로 번역하여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올 해 아시아 주일의 주제는 “눈물 방울(Tear Drop)”입니다. 이는 올 해 초점이 되고 있는 스리랑카를 상징합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이 나라의 기독교 형제 자매들은 정치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쟁 상태”에서 자신들이 신앙을 몸으로 살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스리랑카 사람들을 기억합시다. 또한 정의로운 평화를 위해 애쓰는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와 그 회원 교회들의 에큐메니칼 여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CCA는 회원교회와 지역 교회협의회들이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가 사랑하는 자기 나라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애쓰며 진행하고 있는 평화프로그램을 위해 특별 헌금을 해 주실 것을 권합니다. 여러분의 귀한 재정적 지원은 아시아기독교협의회를 통해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로 보낼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prawate@cca.org.hk)에게로 연락 주십시오. 서로가 연합하기 위하여, 우리는 서로 상대방을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는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상대방을 찾아 가 만나야 합니다. (머셔 추기경의 어록: A Testament of Cardinal Mercier) 스리랑카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싱할리인들과 타밀인 모두가 공포에 쌓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부군과 타밀 타이거(the Tamil Tigers:LTTE) 사이의 충돌이 북동쪽의 수천의 사람들을 내쫒았습니다. 유괴와 실종사태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몸값 때문에 유괴를 당하는 반면, 반대자의 소리를 침묵시키려는 목적으로 유괴를 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인 교회는 평화와 화해의 도구로 부름을 받아왔으며, 고통당하고 투쟁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교회가 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번 2009년 아시아 주일이 우리들에게 고통당하는 나라와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힘과 용기와 헌신의 기회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 프라왓 키드안 총무 2009년 아시아 주일 주제 해설 인도양에 위치한 스리랑카는 인도 바로 아래에 있는 하나의 물방울과 같습니다. 예전에 이곳은 여러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인도양의 진주였습니다. 문화적으로 아주 풍부한 다양성을 지녔으며 모든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1505년부터 1948년까지 스리랑카는 포루투칼, 화란, 영국 세 나라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습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주민들이 믿는 종교입니다. 이 나라의 기독교 인구는 7% 정도입니다. 이 나라에는 싱할리, 타밀, 무슬림과 버거족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관용의 정신인 아힘사(ahimsa: 비폭력)로 이 나라에 널리 퍼져있던 공존의식은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 이유와 종교적인 이유로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고, 최근 주민들 사이에 불신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신은 역사적으로 쌓인 불만과 또한 편견들에서 오는 것입니다. 식민지화로부터 이어받은 바와 다른 신앙, 종교, 사상을 지닌 사람들을 복음화하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무감각한 선교방식들이 스리랑카의 어떤 지역에서는 기독교인을 향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스리랑카는 폭력으로 많은 인명을 잃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종족간 폭력은 거의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70,000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2004년 12월 26일 덮친 쯔나미 지진해일은 또 다른 40,000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현재도 진행 중인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싱할리 출신과 타밀 출신이 둘 다 함께 하는 유일한 종교 공동체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종족 갈등에 관련돼 있는 양 쪽 모두에게 전쟁을 끝내고 상호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때로, 이것이 스리랑카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타밀지지자이며 매국노라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보통 주민들은 전쟁에 진저리를 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전쟁 미망인들, 고아들, 절름발이들, 국내 추방자들은 스리랑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스리랑카 곳곳으로부터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이처럼, 인도양의 아주 작은 이 섬은 더 이상 인도양의 진주가 아니라, 인도양의 눈물 방울과 같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이 예배안을 준비했습니다. 눈물은 고통과 번민을 묘사하지만, 동시에 그 상황을 변화시킬 희망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예배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의존하여 하느님과 함께 더 이상 눈물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일을 위한 작은 영감을 받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예배로 우리가 서로 간에 더 가까워지고, 또한 아시아라는 연대로 묶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우리 모두가 이 예배를 통하여 축복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자야시리 티. 페이리스(Jayasiri T. Peiris) 스리랑카 기독교협의회 총무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National Christian Council of Sri Lanka) 소개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는 1945년에 창립되었다(1912년 실론 협의회; 1920년 실론 선교협의회; 그리고 1923년에 인도 미얀마 실론 기독교협의회가 그 전신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우리 구주로 확신하고 고백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부름받고 함께 모였다. 에큐메니칼 연대와 증언을 통하여 여기 이 땅 위에 하느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일하고자 한다. 회원 교단: 실론 교회 - 콜롬보 교구 실론 교회 - 쿠루네갈라 교루 남인도 교회 - 야프나 교구 기독교 개혁교회(전 화란개혁교회) 감리교회 랑카 장로교회 구세군 스리랑카 침례교 쌍가마야 에큐메니칼 기관들: 실론 성서공회(Ceylon Bible Society) 기독교서회(Christian Literature Society) 기독학생연맹(Student Christian Association) YMCA YWCA 아시아 주일 연합예배 주제: “눈물 방울” 경 배 인도자: 성부 성자 성령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 다같이:성부 성자 성령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 (모두 무릎을 꿇고 영광송을 낭송합니다.) 창조주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해방자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신성하신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삼위일체이신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사랑과 성심을 다하여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하느님, 당신께 찬양을 드립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평화 가운데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이 우주를 만드신 이, 하느님이시여 우리에게 자유의 기쁨을 맛보게 하신 성자 예수여 교회를 보호 감찰하시는 성령이시여 우리 하느님 우리 가운데 임하소서 찬송 : “창조주 하느님,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CCA가 발행한 찬송가 Sound the Bamboo 9쪽을 참고하시거나, 관련 찬송을 선택하여 부르십시요) 불 밝히기 (다음 낭송이 천천히 이어지는 동안 목회자는 불을 밝히십시오.) 인도자: 세상은 흑암과 혼돈으로 가득합니다. 아시아는 폭력과 분노로 가득합니다. 우리 나라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한 방울의 눈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시고 희망이 되셨습니다. (축하의 표시로 북과 같은 전통 악기를 연주하십시오) 여는 찬송 “구세주 예수여, 당신께 날아갑니다”(Sound the Bamboo, 59쪽 참조하거나 여러분의 찬송가에서 선택할 수 있다) 고백의 기도 (침묵 가운데 우리의 죄와, 우리 나라의 죄, 세상의 죄를 고백한다.) 인도자: 우리로 끊임없이 하느님 당신께로 향하게 하시며, 우리 삶 가운데서 당신과 경쟁하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응 답: 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으며 내 베게는 눈물로 젖었나이다. 다같이: 신실하신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회중 1: 하느님, 분노로 우리를 벌하지 마옵소서 우리의 죄는 우리가 감당하기에 벅차나이다. 응 답: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으며 내 베게는 눈물로 젖었나이다. 다같이:신실하신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회중 2: 우리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며, 부패와 폭력에 직면하여 침묵했습니다. 우리 안의 빛은 어둠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응 답: 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으며 내 베게는 눈물로 젖었나이다. 다같이:신실하신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회중 3: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예루살렘을 위한 눈물 대신에 세상적 욕망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응 답: 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으며 내 베게는 눈물로 젖었나이다. 다같이:신실하신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회중 4:개인적으로, 또 한 나라로서, 한 대륙으로서 인간성을 짓밟고 저지른 죄를 고백하오니 하느님, 우리를 포기하지 마옵시고, 우리를 떠나지 마옵소서. 오셔서 우리를 도우소서. 응 답: 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으며 내 베게는 눈물로 젖었나이다. 다같이: 신실하신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목회자: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하시고자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총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너의 죄가 사해졌다.’ 다같이:아멘. 하느님, 감사드리나이다. 찬 양 인도자:우리 죄를 사함받았으니 일어나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하느님께서 하신 그 위대한 일들로 주께 영광을 드립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시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를 찬양하라, 주를 찬양하라 땅이여 그의 목소리를 들을찌어다. 주를 찬양하라, 주를 찬양하라, 사람들이여 함께 즐거워하라. 아들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라. 그가 행하신 그 위대하신 일들로 주께 영광 돌리세. 인도자:전능하신 하느님, 당신 외에 다른 신이 없으며, 당신은 백성들을 평화 가운데 살도록 부르시어 당신의 평화를 불어넣으셨습니다. 눈물 한 방울로 아시아의 문제 지역들, 특별히 이 땅을 굽어 보시옵소서. 아시아기독교협의회에 속한 모든 교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알게 하시어, 그들이 교활한 박해와 부패에도 불구하고 의와,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며 당신을 섬기도록 힘주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영광을 돌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평화로 안녕과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어린이들을 위한 시간 (모두 앉는다. 어린이들에게 피흘리는 아시아와 하느님의 관심과 사랑, 또는 부활의 희망을 표현하는 아이들의 생각을 단막극이나 작품으로 만들어 가져오게 합니다.) 낭 독 구약성서의 한 구절을 읽거나, 아시아 작가가 쓴 글, 또는 종교적 문학작품에서 발췌한다. 낭독자: (예. 예레미아 8:22-9:1, 23-24을 봉독하고) 이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는 시인 타고르의 ‘내 마음 속 두려움 없는 곳 Where the mind is without fear\'을 낭송한다. 낭독자: 아시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기탄잘리(Gitanjalee)에서 발췌한 시 한편을 낭송합니다. 마음 속에는 아무런 두려움 없고, 머리를 높이 들어 올릴 수 있는 곳; 모든 인식이 자유로운 곳; 세계가 좁은 벽들로 조각이 나지 않은 곳; 말이 진리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곳;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이 완전을 향하여 팔을 내 뻗는 곳; 맑은 이성의 흐름이 무의미한 관습의 거친 사막에서 그 길을 잃지 않는 곳; 내 마음이 당신 때문에 폭넓은 생각과 행동으로 나아가며, 그래서 자유의 하늘로 나아가는 곳, 나의 아버지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깨어나게 하옵소서. 낭독자: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하느님을 찬양하라. 낭독자2: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히브리서 5:5-10까지의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향해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다같이: 하느님, 감사를 드립니다. 찬송: (알맞은 것으로 선택하십시오)- 낭독자 3은 성서를 들고 나오는데, 이때 등불과 꽃과 춤추는 어린이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온다.) 다같이 찬송: (적절한 영광송을 선택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낭독자3: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도다(시편 126:5) 누가복음 19:41-48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다같이 찬송: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낭독자3: 누가복음 19:41-48 (봉독한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복된 말씀이십니다. 다같이 찬송: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설 교 신앙고백: 니케아 신조 (모두 일어선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드신 창조자이십니다. 그리고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신 자이시며 독생자이십니다.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오신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오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만들어 진 자가 아니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를 통해서 모든 만물이 존재케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또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셔서 성령님과 성모 마리아를 통해 성육신하셨고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한 후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세 번째 날 그는 부활하셨으며 성서의 말씀대로 하늘로 승천하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고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믿사오며, 생명의 주인 되시는 우리 구주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셨으며 성부와 성자와 함께 우리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바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으며 우리는 죄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의식을 받아들이며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믿으며 다가오는 새 세상을 믿습니다. 아멘 기 원 중보의 기도: 이제 선교와 사회적 참여에 대한 생각으로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신도들을 모으는 일에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피조물들이 새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여, 당신의 교회들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의 평안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의 지도자들로 정의롭고 사랑으로 가득 찬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우리로 지혜롭고 올바른 말들을 하게 하옵소서.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들(각자 자신의 관심문제를 말하게 한다) 앞에서 교회를 대변하여 말하게 하옵소서. 우리로 깊이 숙고할 시간을 갖게 하시고,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게 하시고, 오로지 당신에게서 통찰력을 구하게 하옵소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다같이:우리 기도를 들으소서. 주여, 여기 이 교회에 모인 우리들에게, 그리고 아시아 전 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와 또한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그 말씀대로 살아낼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학교와 선생님들의 안녕과, 우리 지역과 지역 의회의 올바른 번창과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배려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서는 특별히 우리가 속한 지역 공동체에 관한 문제의식을 갖고 기도한다) 주여, 자비 베푸소서. 다같이: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중보의 기도: 주여, 우리의 신앙을 우리 내적 삶이나, 우리 가정, 우리 교회에만 연관시키는 것은 매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당신의 비전은 훨씬 더 크십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가 절망에 빠져있는데 안락한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 생각과 마음을 열어 정의로 어두움에 직면하고, 사랑으로 상처받은 자들을 감싸 안게 하옵소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 밤에는 집 밖을 나갈 엄두도 못내는 소수그룹에 속한 가족,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 거짓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무자비한 공격을 당하는 인권운동가이자 잡지기자,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 어릴 적 성폭행을 당하여 이제 남자와의 관계를 할 수 없게 된 젊은 여인, 그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 지난 크리스마스 때 단지 두 개의 카드만을 받고 아직까지 벽난로 위에 놓아 둔 외로운 노인이 있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 자신의 확신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당한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다같이: 우리 기도를 들으소서. 중보의 기도: 오 주여,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소서. 아시아를 위한 사랑의 눈물 한 방울, 사랑과 연민의 은총을 내리소서. 축복이 이슬처럼 내려 당신의 영광과 은총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봉헌 찬송 봉헌 기도 인도자:모든 것이 우리 주 당신께로부터 왔으며, 그 가운데서 우리가 당신께 드립니다(역대기상 29:14). 우리를 당신께 드리오니, 아시아에서의 주의 사역을 위해 우리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를 도구로 삼아 주옵소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의 눈물 한 방울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이 땅에서 우리로 정의를 위해 일하게 하시며, 자비를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 하느님, 당신과 함께 겸손히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 사 (큰 나라 지도나 혹은 아시아지도 앞에 등불을 밝힌다) 회중 1: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흑암으로 덮개를 만드시고, 그 컴컴한 창고에서 보석을 끄집어내시고 눈물 한 방울로 우리에게 빛나는 보석을 보이셨습니다. 다같이: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과 땅이 당신의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회중 2: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께서는 아시아에 아름다운 땅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먹을 수 있게 음식과 마실 물을 주시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을 주셨습니다. 흑암이 사람들을 덮칠지라도 당신은 눈물 한 방울로 흑암 속에서 빛을 비추십니다. 다같이: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과 땅이 당신의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회중 3;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께서는 우리 선조들에게 영감을 주시어 아시아기독교협의회를 만들게 하시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봉사하게 하셨으며, 당신의 교회로 하여금 하나의 등불이 되어, 더 이상 등불과 태양이 필요 없게 되는 그 날이 오기까지 당신의 백성들로 세상을 향한 빛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 날엔 주의 영광이 하느님의 백성위에 비추일 것이며, 하느님의 등불이 단지 눈물 한 방울로 그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실 것입니다. 다같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과 땅에 당신의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인도자: 우리의 모든 간구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마치겠습니다. 다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침묵 후에 다음의 구절을 노래하거나 읊는다. 혹은 관련 찬송을 선택할 수 있다) 성부여, 당신이 나의 안식처이십니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습니다. 성자여, 당신이 나의 안식처이십니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습니다. 성령이시여, 당신이 나의 안식처이십니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습니다. 삼위일체이신 당신이 나의 안식처이십니다. 당신은 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의 거룩한 교회가 제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제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고귀한 말씀이 제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이 공동체가 제 안식처입니다. 평화의 인사(모두 일어선다.) 인도자: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평화가 있기를 간구합니다. 항상 서로 간에 그리고 모두에게 선하게 행하십시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에게 인사하십시오.(데살로니가 전서5:12, 13, 16-17, 26) 다같이: 민족들 간에 평화를 사람들 간에 평화를 교회들 간에 평화를 이웃들 간에 평화를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구하나이다. (모두가 서로를 향해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성가대 찬양:땅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강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대양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진정한 평화가 여러분에게 임하며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 속에 자라기를. 축 도 인도자: (가능하다면 나무 십자가 하나를 들고- 민수기 21:9) 모든 악의 세력보다 강하고, 하늘의 어느 천사보다도 영광스러우신 분, 하느님께서 낳은 자의 십자가가 여러분들이 가는 곳마다 함께 하기를 간구합니다! 저녁때나 밤이나 낮이나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막아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죄로 가득 찬 사람들의 분노나 그 영향으로부터,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알려지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적들로부터, 영혼과 육체와 정신을 미혹시키는 인간적 약점으로부터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을 지키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마지막 찬송 (여러분이 사용하는 찬송 중에서 고른다) 설교와 성서연구를 위한 자료 이번에 선택한 주제는 인도양에 위치한 스리랑카를 아시아의 눈물로 상징화한 것이다. 스리랑카는 이제 고통 밖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정치적 난제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끝이 아니고 경험의 마지막도 아니다. 십자가의 신학이 이를 확고히 해 주며, 십자가는 고통과 승리 이 둘 모두를 경험하게 하는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십자가의 신학은 십자가가 형상적으로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되어 있듯이, 두 끝을 지닌다. 그 두 개의 끝은 고통과 기쁨이며, 잃는 것이면서 얻는 것을 상징한다. 십자가 위에서 만나는 이 두 끝은 실패와 승리, 과거와 미래, 하느님과 인간, 슬픔과 기쁨이다. ‘눈물 방울’은 십자가로 묘사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신학을 지닌다. 시편 42:3 -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 이것이 나의 양식입니다. 삶은 항상 두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삶이란 바퀴는 인간이 체험하는 고통과 기쁨, 이 둘로 돌아간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눈물을 삶의 부정적 요소로 보지 않고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매일의 양식처럼, 눈물은 삶에서 힘을 키워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시편 39:12 - 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내 울부짖는 소리에 귀 기울이소서: 나의 눈물에서 당신의 평화를 거두지 마옵소서. 평화와 갈등은 인간의 삶에서 또 다른 두 끝이라 할 수 있다. 삶 속에서 평화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시편기자는 자신의 삶에서 눈물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하느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 당신의 평화를 거두시지 않으신다. 눈물은 하느님의 권세의 장애물까지도 무너뜨릴 수 있다. 신학적으로 눈물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에 주신 자연스런 무기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감정적 체험을 할 때 슬픔과 동시에 기쁨을 느끼게 되는 이유이다. 요한복음 11:35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짧은 절이다. 바로 이 구절이 기독교 신앙의 로고라 말할 수 있다. 요한은 다음 순간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눈물을 흘리시는 것으로 묘사했다. 여기서 예수는 나사로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위대한 징표가 일어나리라는 것 때문이었다. 여기서 십자가의 전 과정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사랑, 죽음, 부활, 희망 등이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신 예수라 불리는 이 사람에게 모두 나타나있다. 눈물은 단지 인간적인 것만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기도 하다. 누가복음 7:38 - (죄많은 여자)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다. 이 구절에 묘사되고 있는 눈물은 단지 여성적 상징일 뿐만 아니라 여성을 메시야적 사상 속에서 목회자로 그려내고 있다. 예수는 다음 이어지는 구절에서 빚진 사람 두 명에 대한 예화를 들어 용서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용서와 받아들임은 메시야 시대에 있어서 두 가지 실체이고, 여성성은 이런 효과를 위한 주요 도구이다. 여성은 여성만이 지닌 모든 특별한 기능들을 활용하여 교회에서 안수받은 사역으로서 강력한 역할을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7:44 -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 주었다.’ 이 구절에서는 물과 눈물을 유사하게 그리면서 비교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특별히 물과 눈물의 의미를 성체로 묘사하고 있다. 성체는 보통 물, 포도주, 빵으로 상징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인간의 눈물과 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물이 아닌 눈물을 통한 세례는 눈물이 밖으로부터가 취한 것이 아닌 인간의 몸의 산물이기 때문에 훨씬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성체는 단순이 물과 포도주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체험이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성례전 신학, 즉 밖으로 드러나는 상징만으로는 묘사될 수 없는 인간의 내적 변화임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9:41-42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구절에서 보면 평화와 눈물이 함께 간다.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도시를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하고 있다. 평화가 없고 사람들에 대한 관심 없음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이다. 이 구절은 또한 폭력을 언급한다. 예수께서는 이 도시에 평화가 없는고로 눈물을 흘리셨다. 하느님은 온 우주, 창조된 모든 것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만들어진 모든 것이 선하다고 여기셨다. 권력과 욕심으로 하느님의 창조를 파괴시키고 사람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져온 것은 바로 인간이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이를 죄라 한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도시에 이러한 상황을 불러온 사람들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다. 희망은 바랄 것이 없는 처절한 상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희망은 일치감, 연대, 동정, 그리고 새로운 창조에 대한 갈망과 함께 오는 것이다. Pon Anandarajah --------- 자료집을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 2009 아시아주일 위원회: Rev. Joshua Ratnam( 콜롬보 교구) Rev. Pon Anandarajah(감리교) Dr. Narmasena Wickremasinghe (콜롬보 교구) Ms. Lakshini Fernando, 실론 성서공회 총무 Rev. Willie Ranasinghe (침례교 상가마야) 초대되었으나 참석치 못했음 표지 디자인 - Rev. Ranjana Karunarathene (쿠루나갈라 교구)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찬송 및 노래집 Sound the Bamboo CCA Hymnal 2000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가 추천해 주신 다른 노래집들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출판 일정에 맞추어 갖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아시아주일 준비위원회 Dr. Hope S. Antone, 코디네이터 Rev. Freddy de Alwis Mr. Adam Row 특별히 감사드려야 할 분: - Rev. Dr. Jayasiri T. Peiris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 총무로 이번 자료집 준비를 위해 함께 해 주시고, 이번 주제에 관한 해설을 써 주셨습니다. - Dr. Prawate Khid-arn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로 2009년 아시아주일에의 초대글을 써주셨습니다. - Geoff Alves, CCA의 자원봉사자로 이번 아시아주일 자료집 표지와 포스터 레이아웃 디자인 편집자로 수고하셨습니다. 의미 있는 아시아 주일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Hope S. Antone Joint Executive Secretary Faith, Mission and Unity
My fellow citizens/ 오바마 美 대통령 취임사/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국 대통령/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한국어 번역본/ 2009-01-20
My fellow citizens/ 오바마 美 대통령 취임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이 준 신뢰에 감사하며 선조의 희생을 되새기며 우리의 과제 앞에 겸허히 섰습니다. 우선 부시 대통령이 정권 인수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동안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데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있습니다. 우리는 증오와 폭력의 조직과 전쟁 중입니다. 우리의 경제는 탐욕과 무책임의 결과이자 새 시대를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과단성 있는 선택을 하지 못한 탓에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집 값이 내려가고 일자리가 사라지고 여러 사업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건강보험은 너무나 비싸고 교육은 많은 곳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국가 전체적으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추락은 불가피하며 우리의 다음 세대는 안목을 낮춰야 한다는 두려움이 에 직면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실제상황입니다. 그것은 심각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쉽게 짧은 시간에 극복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두려움보다는 희망을, 갈등과 반목보다는 단결을 선택해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사사로운 불만과 허황한 약속, 그리고 우리 정치사에서 오랫동안 계속됐던 반목과 낡아빠진 도그마들의 종식을 선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미국의 위대함을 재확인하면서, 위대함은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뤄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여정은 일보다는 여가를 좇고 부와 명성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나약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터에서 묵묵히 일하면서 번영과 자유를 향해 길고 험한 길을 달려온 이들의 길이었습니다. 미국은 여전히 지구 상에서 가장 번영되고 강력한 국가입니다. 미국 노동자들은 지금의 위기가 시작됐던 때보다 생산성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여전히 창조적이며, 우리의 상품과 서비스는 예전의 것보다는 못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쇠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다시 일어서 몸의 먼지를 떨고 미국을 재건하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일부에서는 우리의 시스템으로 그러한 원대한 계획을 실현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이 지금까지 이룩해낸 것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들은 상상력이 공공의 목적과 연결되고, 필요가 용기를 만날 때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우리 정부가 너무 큰지, 아니면 너무 작은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또 이 정부가 어지간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 가계를 도울 수 있는지, 품위있는 노후생활을 영위할수 있는 연금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답이 ‘예스’이면 우리는 계획을 진전시켜나갈 것이지만 답이 ‘노’라면 이를 끝낼 것입니다. 공공자금을 다루는 우리는 모두 책임성을 지니고 현명하게 자금을 지출하고 또 나쁜 습관을 고치고 투명하게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에만 국민과 정부 사이에, 지극히 중요한 신뢰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문제는 시장이 선한 힘을 지녔는지, 아니면 악한 힘을 지녔는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시장의 힘은 부를 창출하고 자유를 신장시키는 데 그 무엇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감시의 눈이 없다면 시장이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혼란으로 빠져들고, 시장이 부유한 사람들만을 위할 때 한 국가가 더 이상 번영할 수 없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미국의 경제적 성공은 항상 국내총생산(GDP)의 규모에만 의존해 온 것이 아닙니다. 개개인이 부와 번영에 이를 수 있게, 의욕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확대시키는 역량에 좌우돼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공동의 선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의 안보 문제에 관한 한, 안전과 이상 사이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의 건국 선조는 우리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위험에 직면했으며 법규와 인권을 확보하기 위한 헌장을 만들었습니다. 이 헌장은 여러 세대가 흘린 피에 힘입어 신장돼 왔습니다. 이러한 이상은 여전히 세상을 비추고 있으며, 편의를 위해 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큰 국가들 수도에서부터 나의 아버지가 태어난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에까지 모든 국민과 정부는 들으십시오. 미국은 품위와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나라와 남녀노소의 친구이며 다시 한번 이끌 자세가 돼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앞선 세대는 탱크와 미사일로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제압했던 것이 아니라 불굴의 의지와 동맹, 꺾이지 않는 확신으로 제압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힘만으로 우리를 보호할 수 없으며, 힘의 신중한 사용을 통해 우리의 힘이 커진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산의 수호자가 돼야 합니다. 이러한 원칙들에 따라 나간다면 우리는 각 국간 보다 큰 협력과 상호이해 및 노력을 요구하는 새로운 위협에 대처해나갈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라크를 책임있게 이라크 국민에게 넘겨주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렵게 달성한 평화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오랜 우방은 물론 과거의 적국들과도 함께 핵위협을 감소시키고, 더워지는 지구를 정상화시키도록 계속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에 사과할 필요가 없으며 이를 옹호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테러를 하는 세력들에 대해 우리가 매우 강력한 대응의지를 갖추고 있으며, 그들을 패퇴시키고 말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해온 각고의 노력은 결코 약점이 아니며 강점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힌두교는 물론 무신론자들의 국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구상 곳곳에서 온 다양한 언어와 문화로 구성된 국가입니다. 우리는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의 아픔과 분리의 아픔 그리고 어두운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강력해졌고, 단결해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증오는 언젠가 사라지고, 인종간 분리도 해소될 것이며, 세계가 점점 부패하고, 사기가 판을 치고 이견을 갖고 있으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상황에서도 이를 해결하는 데 우리가 적극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란 점을 믿어왔습니다. 빈곤국의 국민에게는 식량지원과 농장개발 및 상수도 정화의 지원을 약속합니다. 또 상대적으로 잘 사는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가 국경 밖의 일에 더이상 무관심하지 않겠으며, 세계의 자원을 효율성 없이 낭비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합니다. 세계가 변하고 있는 만큼 우리도 변해야만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길들을 보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산간 벽지에서, 사막에서 고생하는 용감한 미국인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들은 알링턴 묘지에 잠들어 있는 영웅들처럼 뭔가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단순히 자유의 수호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보다 뭔가 더 큰 것을 위해 봉사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기에 감사를 해야 합니다. 한 세대의 획을 긋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은 바로 이같은 봉사의 정신입니다. 우리 정부가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국민 여러분 또한 믿음과 단호한 결의를 해주십시오. 강의 제방이 무너졌을 때, 친구를 만날 시간을 쪼개 봉사를 해온 분이 일자리를 잃었을 때 집으로 데려가 위로하는 친절을 베풉시다. 연기가 가득 찬계단 속에서 진화작업을 하는 소방대원의 용기나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자애심 모두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도전들은 새로운 게 많은 만큼 이에 대처하는 방식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지만 도전에 이기는 데 필요한 가치는 비록 오래되기는 했지만, 근면과 정직, 페어플레이 정신, 관용, 호기심, 충성과 애국심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정신들은 역사를 진보시켜온 말 없는 강력한 힘들입니다. 그 다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정신으로 우리가 복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은 물론 미국과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우리의 의무를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려는 새로운 시대의 책임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무를 마지못해 이행하지 말고 기꺼이, 단호하게 수용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민권자의 의무이자 비전이기도 합니다. 이는 또 신이 우리에게 요구한 신뢰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또 인종 및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남녀와 아이들이 축하행사에 동참하고, 60여년 전에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지 못했던 아버지를둔 아들이 자유롭게 이를 이용할 수 있게 한 우리의 자유와 신조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다함께 오늘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전진해 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추억해 봅시다. 미국이 건국되던 해, 혹한의 겨울철에도 애국자들은 추운 강가의 꺼져가는 모닥불 주변에 모여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수도를 적군에 빼앗긴 채 눈밭이 피로 물든 상황에서, 혁명의 성과마저도 불확실하던 상황속에서도 우리 건국의 아버지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외우며 견뎌냈습니다.‘미래의 세계를 생각하자. 희망과 미덕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겨울에도 공동의 위험에 놀란 도시와 나라가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나섰다’는 구절인데 그게 바로 아메리카입니다. 올 겨울 우리는 다함께 어려운 시절을 맞았습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외우던 구절을 다시 상기합시다. 희망과 덕목을 지니고 한번더 한파를 뚫고 폭풍을 견디며 나아갑시다. 후손들에게 우리가 시험에 직면했을 때 좌절하지 않고 저 먼 곳의 희망의 지평선과 신의 축복을 응시하면서 전진해 나갔다고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미래세대에게 자유라는 위대한 선물을 안전하게 전달해 주해 전진해 나갔다고 얘기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가스펠(GODSPELL)/ 죤 마이클 테블락作/ 2004-02-12
가스펠(GODSPELL) 죤 마이클 테블락作 스테픈 스와르츠 曲 譯 演出 * 공연 일시 : 19 년 월 ( ) PM. : ( ) PM. : * 공연 장소 : 지봉관. 경복여자상업 고등학교 연극부 에드가 댄스버리, 스튜어트 던칸, 죠셒버러 제작 가 스 펠 (GODSPELL,神意 하나님의 뜻) 성 마태복음에 의한 뮤지칼 ( 樂劇 ) 출 연 : 라마 엘훠드, 페기 고든, 데이빗 하스켈, 죠앤 죠나스, 로빈 라몬트 죠니아 만사노, 길머 마코믹, 제우리 밀레트, 스테픈 데이싼, 허브 싸이몬 작사.음악 : 스테픈 슈와르츠 착상.연출 : 죤-마이켈 테블락 음악편곡 및 지도 : 스테픈 슈와르츠 제작 무대 감독 : 니나 화소 조 명 : 로월.액자이거 의 상 : 수갠 휴 * 내 곁에 작 사 : 제이 . 컴버거 극 : 페기 고든 주의 : 장치는 대피용 철망 울타리로 9자 높이에 안전하게 세워졌으며 관객 쪽으로 열려 있게 한다. 이 울타리를 빈 무대위에 세운다. 밴드는 객석을 향해서 무대 위쪽 오른편 台(프랫드 폼) 위에 피아노와 올갠을 보이게 놓고 왼편으로 키타와 북을 보이게 한다. 엑팅 : 게어리어 (실제 연기에 쓰여지는 격분) 위로 한줄에 3개씩 3줄로 나란히 9개의 표준 전구를 매단다. 무대 바닥에서 10자쯤 높이에 매달되 연기자가 끈을 잡아 당겨 켜고 끌수 있게 한다. 1 막 무대 왼쪽에서 제후리, 토빈, 쏘니아, 페기 들어온다. 무대 오른쪽에선 허브, 라마, 스테픈, 길머, 죠앤이 들어온다. 스테픈, 오는쪽을 건너 뒷벽을 향하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다. 다른 사람들은 길머리를 가운데 두고 좁은 원을 만든다. 콧노래 (허밍)을 시작하여 스테픈이 연설할때까지 계속한다. 스 테 픈 : 예수 (마이크를 잡고) 나의 이름은 하나님 그리고 왕 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지고한 자니라. 내 능력은 무한하며 여지껏 그래 왔노라 나는 믓별과 별자리들을 만들었으며 밤에는 달이 뜨고 낮에는 해가 비치도록 했느니 지구를 만들어 거기에 나무와 풀들이 자라게 했으며 크고 작은 짐승과 새들이 번창케 하고 내 귀여움을 받게 했느니 나는 이 모든것을 오로지 인간의 번영을 위해 만들 었으며 또한 가장 즐거운 동산을 내 손수 만들어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의 즐거움을 위해 동산직이를 삼겠노라. (길마다 위쪽 가운데서 전등을 켠다) 길 마 : 나는 그대를 존경하고 사랑은 하오 그러나 나는 그대 보다는 초크라테스 신에게 복종하겠오 내게 생명과 힘이 있는 동안 나의 가르침을 그치지 않을것이요. 이것이 내가 신에게서 받은 명령이요. 또한 신에게 봉사하는것 보다 더큰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오. 나는 돌아다니며 늙은이나 젊은이거나 늙거나 젊거나 누구에게나 명예 나 재산을 생각치 말고 주로 인간 정신의 위대한 발전에 대하여 먼저 생각토록 가르치고 있오. 만일 이 내 가르침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면 나는 해로운 사람이라 하여도 마땅 하리다. 바 벨 탑 (길머가 계속하는 동안 주제음악 들려온다) 그러나 만일 누가 이것이 내 가르침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는 거짓 을 말하는거요. (주제음악 다시 들려온다) 제 후 리 : (전등을 켠다) 토마스.아퀴니스 우리는 상상과 직관과 이성과 감촉과 의견과 감각등으로 신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는 신을 알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신의 탐구를 계속하는것은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신은 모든것 안에 모든것이고 아무것도 아닌것 속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아무것도 아닌 극히 적은것 속에 보이는가 하면 많은것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분이다. 죠 앤 : (전등을 켠다) 전능하신 신은 우리 집권자를 미치게 만들었다. 마 틴 .루 터 전능하신 신은 우리 백성을 약하게 만들었다. 약삭빠른 독일의 귀족들은 재주껏 악독한 법을 만들었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그래서 법에만 복종하게 만들었다. 이게 바로 독일식이다. 지독한 신, 독일식은 편안하다. (주제음악 다시 들린다) 라마 - 다빈치 (전등켜면) 인류의 성장은...... 자연스러운것....... 쏘니아 - 기본 (전등켜며) 로마의 멸망은....... 자유스러운것........ 불가피한것 인간은 성장하는것 공허를 채우는 인간을 찬양하는 대신 우리는 인간이 그처럼 포악할 수 있었던것에 놀래야 하는것 인간은 오래도록 강하기만 한것 어째서 로마가 멸망하였나 묻는 대신 우리는 그처럼 오래 강할수 있었던 로마를 보고 놀래야 하는것 뿐이다. 로 빈 - : (전등을 켜며) 후레데릭.니체 무엇이 오늘날 고상한 것인고? 페 기 - : (전등을 켜며) 쟝.뽈.싸르트르 무신론적 실존주의 - 내가 말하는 주의야말로 일관성이 있고 나는 이것을 믿지. 허 브 - : (전등을 켜며) 북흐민스터.휼러 인간은 다양한 과정의 복합체...... 페 기 - : 인간성 그런것은 없는 것이지 누구에게도 어떤 사람에게도 없단 쟝.뽈.싸르트르 말이야. 그것들을 착상해낼 신이 없으니까 말이지. 허 브 - : 인간은 다양한 과정의 복합체...... 북흐민스터.휼러 (휼터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주제음악이 부드럽게 다시 들린다) 나는 지금 지구위에 살고 있지만 나는 내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나는 어떤 유형이 아니다. 나는 어떤 물건도 아니고 명사는 물론 아니다. 나는 하나의 동사인가? 진화의 과정 대 우주의 전체기능 의 한 부분인가? 모 두 : 사랑스런 내 바벨의 상아탑 속에 고고히 앉아서 (종알 종알 종알 ....) 어중이 떠중이들 위에 높이서서 (중얼,중얼,종알,종알,중얼 종알,종알,종알,중얼,종알)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 인생의 달콤한 신비를 풀어 보련다. 자 내말 들어봐 (자 내말 들어봐) 인생이 어떤것인지 알아 봐 (인생이 어떤것인지 알아봐) 아, 남들이야 뭐라든 의견이야 맞든 말든 무슨 상관 있나? (모두 쓰레기 바구니를 집어 쏟아 버린다. 허브는 모든 전등을 꺼버린다. 무대는 수라장, 바벨탑이 계속 반복되는 동안 쓰레기를 집어던진다. 주제 음악이 들리고 객석 뒤에서 데이빗에 글씨쓴것 을 휘날리며 노래를 부르며 나라나 통로를 따라서 무대로 간다) 데이빗 - 세례요한 : 노래 : 주의 길을 예비하라 주의 길을 예비하라 주의 길을 예비하라 주의 길을 예비하라 (일제히 환성을 지른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를 부르며 무대 중앙 윗쪽에서 앞쪽으로 일렬로 선다. 데이빗, 한사람씩 세례를 준다. 모두 객석 밖으로 나갈때 까지 계속된다. 노래는 끝나고 모두 의상을 바꿔입으러 나간다. 무대에는 예수와 데이빗만 남는다) 데 이 빗, : 이 독사의 자식들아! 주가 너희들이 받을 벌을 파하라고 경고했어 세 레 요 한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여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 고 뮤 다 그런 생각은 치워. 하나님은 이 돌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얼마든지 만들어 내실수 있어. 하나님의 도끼가 벌써 나무 뿌리에 닿고 있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다 썩어서 불속에 던져버릴거야. 나는 너희들을 회계 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엔 나보다 더 위대한 분이 오실거야. 난 그분의 신발을 벗겨 드릴만한 자격도 없는 놈야.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너희들에게 세례를 주실거야! (그는 스테픈 - 예수가 세례물통을 자기에게 내밀고 있는 것을 본다) (스테픈에게) 아니 당신두요? 스 테 픈 : 그래. 나두 좀 씻어줘. 데 이 빗 : (무릎을 꿇으면서) 오히려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죠. 스 테 픈 : (데이빗을 일으켜 세우며) 아니, 아냐, 이봐, 지금은 이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대로 일꺼야. (이백성 구원 전주 나오며) 언제 구하렵니까? 아바 아바지여 짙은 어둠속에서 헤매는 이 인류 햇빛같은 당신얼굴 밝혀 보게 해줘요 잡풀처럼 짓밟히는 이 인류 구원! 누르는 자 편들고 눌리는자 눌터 통곡 이어지는것 아버지 뜻인가요 안돼요 그럴수는 없어요 햇빛가린 주름 걷히고 한숨대신 노랫소리 이 인류 구원 언제 구하렵니까? 아바 아바지여 어제 구하렵니까 짓밟힌 이 인류 억눌린 인류 구해 줘요 하늘 나는 흰 새 처럼 자유롭게 해줘요 (노래 반복) (광대복장을 하고 배역들이 객석에 들어온다) 스 테 픈 : 이 인류 구원 (세번 반복) 모 두 : 오 이 인류 구원 (세번 반복) 스 테 픈 : 이 인류 구원 스테픈과모두 : 언제 구하렵니까 아바 아바지여 언제 구하렵니까 짓밟힌 이 인류 억눌린 인류 구해줘요 하늘나는 흰새처럼 자유롭게 해줘요 모 두 : 이 인류 자유! 이 인류 자유! 이 인류 구원! 오 이 인류 구원! 이 인류 구원! 오 이 인류 구원해! 이 인류 구원! 이 인류 구원! 이 인류 구원! (배역들 노래 끝내고 무대가운데 책상을 맞춰놓고 나와서 인사)
가자지구 사태 임성빈 교수 논평 전문
가자지구 사태 임성빈 교수 논평 전문 [2009-01-29 10:29] ‘가자지구 사태를 바라보며- 문명충돌론을 경계한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사태가 많은 희생자를 낸 가운데 아직 진정 되지 않고 있다. 세상을 불안케 하고 있는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물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를 지적하겠지만) 중동지역, 특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반복되고 있는 피의 악순환은 우리로 하여금 테러의 근절이란 무척 어려운 과제임을 깨닫게 하고 있다.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과 작은 진보가 곧 그보다 큰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은 세계인들에게 무력감마저 안겨주고 있다. 사실 팔레스타인 지역의 갈등과 미국과 아랍권 사이의 긴장관계는 오늘날의 정치적 경제적 역학관계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문제이해와 해결을 위하여서는 더욱 근원적인 관점으로부터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문명충돌론에 관심을 갖게 한 원인들중 하나가 된 듯 하다. 이것은 곧 오늘의 문제가 역사적인 갈등과 그로 인한 정치, 경제, 문화적 갈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충돌론이 관심을 끌게 된 주요한 배경중 하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미국 중심의 관점에서 중동문제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중동인들의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음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른바 헌팅톤 아류의 문명충돌론은 경계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오늘의 갈등은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의 충돌이며, 이슬람은 자유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자리잡는 데에 걸림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미국식 세계화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와 국방성에 대한 공격은 곧 이슬람의 미국식 세계화에 대한 반대이자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 된다. 역으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은 기독교 문명의 이슬람 문명에 대한 공격이 되는 것이다. 만약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이러한 문명충돌론의 관점에서 오늘의 상황을 해석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폭력의 지속적인 악순환으로 인한 멸망만이 있게 될 뿐이다. 사실 이러한 형태의 문명충돌론은 그 관점이 너무도 서구 중심적이라는 것과, 지역과 문명을 도식화하고 있고 획일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론으로서도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서구를 기독교문명으로써 획일적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듯이, 아랍세계도 이슬람 문명이라는 하나의 틀로 규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헌팅톤 식의 문명충돌론을 경계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문명충돌론이라는 거대담론에 현혹되기 보다는 오늘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다. 그와 함께 미국과 이스라엘과 아랍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대한 객관적 정보와 지식을 확보하여야 할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독특한 관계의 접점인 미국의 언론계와 재계를 주목하여야 한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결국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으며 심지어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도 재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환상과 막연한 짝사랑에 열중하여 고난 중에 있는 이웃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을 저버리고 있는 우리들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임성빈 원장(문화선교연구원)
가자지구 사태에 대한 요르단 왕비의 호소문>
가자지구 사태에 대한 요르단 왕비의 호소문> [2009-01-23 13:17] 가자지구 사태에 대한 요르단 왕비의 호소문 세계인권선언은 제1조에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존엄과 권리를 갖는다’ 고 명시하고 있으며 제3조에서 ‘모든 사람은 삶의 자유와 안전할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선언에 명시한 인권은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41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자 사람들은 억압을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지난 18개월 동안 포위된 속에서 숨죽이며 지냈으며, 지난 10일 동안은 잔인하게 계속되는 공습을 겪어야 했습니다. 모든 인류의 권리를 천명하고 있는 세계인권선언에 가자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가자 사태를 보며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가자 지구에서 얼마나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가 일어나고 있는지 여러분에게 전하기 위해 유엔의 일원으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인도주의를 위협하는 사태는 가자에서 뿐 아니라 세계 다른 지역들에서 일어납니다. 넬슨 만델라는 “팔레스타인에 자유가 오지 않는 한 우리의 자유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말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자유 없이 인도주의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인도주의는 여전히 미완성 상태이며, 보편적이지도 않습니다. 세계 정상들에게 전합니다. 어떤 나라의 어린이건 군사 작전으로 어린이가 희생되는 한 우리의 인도주의는 절대 완성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미 70명 이상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600명 가까운 어린이가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희생된 아이들의 엄마에게 뭐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 아침에 다섯 명의 딸을 모두 잃은 팔레스타인 엄마에게, 고통과 두려움으로 울부짖는 어린 자녀 들을 바라만 봐야 하는 엄마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많은 아이들이 결국 끔찍한 정신적 상처를 입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끝낼 수 없는 고통인가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은 중요하지 않은가요? 희생되는 그들의 생명은요? 가자 어린이들은 삶의 자유, 안전하게 보호받을 권리를 모두 박탈당했습니다.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뭐라고 변명할 건가요? 전세계 모든 나라들은 이 잔혹한 싸움이 멈추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곡물, 연료, 의약품, 생활필수품들이 전해질 수 있도록 신속하게 카르니 검문소를 포함해 가자 지구의 모든 철책을 개방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인도주의와 어린이를 위해 휴전을 촉구해야 합니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파괴된 건물 아래 매장된 사람들을 찾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노약자와 환자들에게 의료진을 보내고 의약품과 필수생활용품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여국 정부들은 최소한 민간인을 위한 유엔팔레스타인 난민기구(UNRWA)가 긴급구호를 위해 호소하는 3,400만 불을 지원해야 합니다. 공습에 희생된 어린이, 겨우 살아남은 가자 어린이와 그 부모들에게 더 이상의 고통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생명, 그들의 희생도 다른 나라의 사람들처럼 가치있고, 중요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어린이와 시민들을 제외한 인도주의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요르단 라니아 압둘라 왕비는 유니세프 특별대사로 아동의 인권과 권리 증진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과학과 성경 ( 대변동은 여러번인가 단 한번인가 )
과학과 성경 ( 대변동은 여러번인가 단 한번인가 ) 2004-02-04 15:04:27 read : 5 남은 의문점은, 현대의 신대변동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지질학적 지층과화 석 묘지들이 수백만 년의 지질학적 휴면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 여러개의 지역적인 대변혁들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서로 연계된 지역적 대변 혁들이 동시대에 발생하여 하나의 전세계적인 대변동을 이룬것인가라는 점 이다. 이미 보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분명히 후자를 가리키고 있다. 결석학, 암석학, 광물학 등의 기본적인 물질적 특징 모두는, 지질학적동 연대를 주장하는 성경의 기록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만약 진화론이 정 말로 사실이라면 물리적인 지구도 생물학적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사람들 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화석증거도 의심스럽다. 이미 지적했듯이, 실지로 화석의 시대구분은이 론상에서만 존재하며 진화론적으로 배열되었다는 증거는 없고 무작위로 흩 어져 있다. 오히려 화석의 배열은 그 생물들이 살았던 생태환경요인에 의 해 보다 더 잘 설명 되어질 수 있다. 따라서 화석에서 발견된모든 동식물이 홍수 이전의 동시대에 살았으며 홍수때의 침전에 의해동시에 묻혔다는 사 실을 논박할 합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는, 모든 지질학자들이 알고 동의해야만 하듯이,전 세계적인 지질학적 배열을 볼 때 전세계적인 부정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정합면이란 두 지질학적 구성물 사이의 면인데, 두침전 기간 사이에 발생한 참식은, 이 접합면의 위와 아래의 지층에 변화, 바위 형태와 화석 내용물의 변화 또는 가장 일반적이며 중요한 것으로 지층 지울기의 변 화 등에 의해 알 수 있다. 전형적으로, 부정합면은 지역적인 침전물이 수면으로 올라와서 퇴적이중 지되고 침식이 시작될 때 생긴다. 따라서 부정합은 퇴적 과정에 시간간격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록 지역적인 지질 배열에서는 많은지역적인 부 정합이 존재하지만, 전세계적인 부정합은, 지질학적 배열의맨 아래 부분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퇴적암을 형성하는 퇴적과정 사이에 많은 시간의 공백기가 없었 음을 말한다. 즉 지질 배열은 기저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일관성이 있다. 만 약 이 사실이, 지질 배열은 급속한 대변동으로 형성되었다는 현재 인정되고 있는 사실과 결합된다면 전세계적인 침전 배열은 급속히동시대적으로 형 성되었다는 점이 입증된다. 세계적인 대홍수에 대한 다른 많은 지질학적 증거(쇄설<쇄설>성암맥들, 침전물이 굳어지지 않았을 때 형성되어진 거대한 습곡들, 자갈과 표석들이 섞인 넓은 지층)들이 있다. 홍수 직후, 강과 호수의 수위가 매우 높았었다 는 증거들이 세계 곳곳에서 발견돼 더욱더 확실한 증거를제공하고 있다. 이는 대홍수 이후 거대한 빗물이 흘러내려가도록 땅들이 융기하고 바다 의 분지들이 열렸다는 성경 말씀을 증거한다.(시편 104:6-9)모든 호수들의 둘레 언덕에는 옛 호안이 나타나 있다. 또한 강들도 현재의 범람원보다 위 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단구를 갖고 있다. 게다가 현재의 모든 강은 소류여 서 이들 강의 협곡이나 계곡 또는 강의 흐름을통해 형성되는 충적토 평원 등을 만들어 내기에는 강들이 너무 작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도 사막에는 물이 풍부했었다. 이 모든 것은고 위도가 빙하기로 들어갔을 때 지구의 저위도는 다우기에 들어갔음으로 설명 된다. 빙하기에 대해 연구하는 지질학자들은 빙하기의 원인과 이에 뒤따라일 어난 다우기의 원인을 결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이 두 가지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전세계적인 노아 홍수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 고 있기 때문이다. 홍수가 지구의 기후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초기 의 지구는 일년 내내 아름다웠고 또 기후는 아열대였다. 홍수가 미친 영향은 빙하기와 지구 위의 모든 다른 '대변동'들 및 현재도 계속되는 재난의 여파들을 설명하기에 아주 적당하다. 끝으로, 모든 지각은 침전물과 침전물의 바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바위들은 분명히, 흐르는 물 아래에 있었다(침전 후 얼음과 바람에의해 형 성된 극소수의 것 제외)는 사실은 지구의 표면 전체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물 아래에 있었다는 일단의 증거가 된다. 지질학자들은 이것을 여러 번에 걸쳐 일어난 서로 다른 융기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으나, 지구의 70퍼센트가 아직 물 아래에있고, 또 세계의 가장 높은 산들조차도 최근에 융기된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교사대학 학칙/ 2003-12-23
교사대학 학칙 2003-12-23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 은혜 가운데 약속의 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고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 땅에 세우고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의 주신 은사를 받아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선교 100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교회학교의 교육은 이 땅의 선교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의 성장과 사회 구조의 변화, 세속 문화의 급속한 변화에 따른 교회학교 교육 현장의 변화에 미쳐 대안을 제시하기도 전에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만 급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와 교회학교의 상황을 한 단어로 표현해 본다면 "정체"입니다. 그러나 정체, 현상황의 유지라는 것은 결국 뒤로 물러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교회학교의 교육이 교회와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따라가기에 아니, 따라가기에도 힘겨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가르침의 사명은 주님의 지상 명령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의 연장이며 또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요 사명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학교의 교육 환경에서 몇 가지 반성을 통해 그 대안을 찾고자 합니다. 첫째로 교회학교의 교육과 세속 -학교- 교육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육의 대상 면에서는 같으나 교육의 목적과 가르침의 행위는 엄연히 다릅니다. 세속 교육의 주된 관심은 지식을 전달하고 사회의 한 구성원을 만드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교육은 지식의 전달이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지식의 전달이라는 개념 아래 교육을 통해 얼마나 많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세상에 빼았겼습니까? 단적으로 각과정을 이수할 때마다 많은 수의 이탈을 지켜보아야 했고 결국 성인이 되었을 때는 처음 시작한 이들의 절반도 남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세속 교육은 초등학교 처음 시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남은 수를 계산하는 것보다 빠져나간 이들을 계산하는 것이 더 쉽울 것입니다. 교회학교의 교육은 결코 지식의 전달이 아닙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그러므로 너는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도 네가 여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4-1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위의 몇 가지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을 가리킨다는 것은 지식의 전달이 주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곧 공과 교재를 통해 성경을 알게 하고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로 구원을 받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도식화한다면 "공과 교재 성경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이와같이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공과를 전달하는데, 성경을 이야기식으로 전달하는데 만 머물고 있습니다. 둘째로 교사 교육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학교교육과는 달리 비전문인들, 즉 교회학교를 마치고 청년 혹은 장년이 되어 남은 이들이 교육을 담당하다 보니 자연히 훈련된 교사보다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경험에 의해 교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사 교육의 부재, 물론 단기적 교육과 특별 주제의 교육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보다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 아래 교사 교육이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교사 교육을 받은 이들을 통해 교회학교의 교육이 운영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교사교육을 교사를 위한 기초와 전문적인 교육 즉 교사 자신을 위한 교육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교사교육을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건져 2부 활동 혹은 당장 써먹을까 에 관심이 더 많으며, 숫자를 늘이는데 급급한 교육으로 축소되어 가고 있습니다. 당장 활용을 위한 것도 중요하고 숫자를 늘이는데 필요한 교육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의미의 교사교육으로 전체적인 교사교육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우선은 교사 자신의 훈련의 자리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교육비의 운영입니다. 교육비의 운영은 프로그램 중심의 운영과 교육 대상자의 숫자와 관련하여 책정하고 사용하는데 예산의 효율적인 운영의 미를 살려 교사의 교육과 교사 후보생을 위한 투자를 늘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위한 교육은 숫자를 늘리고 성경의 지식을 전달하는데는 성공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데는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교회학교의 예산의 사용은 결과보다는 100년후의 투자라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는 교사의 개인 영성입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지식의 전달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일에는 교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사의 개인 영성입이다. 이것은 교육을 통해서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교육을 통해서 그 방법은 제시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교사 개인의 헌신된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또 계속적인 훈련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것처럼 "다 이루었다"는 자족감으로 영성훈련에 게으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성훈련이라함은 끝임 없는 자신의 계발이며 곧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끝임 없는 영성훈련의 모범을 찾는다면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전 9장 27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 빌립보서 3장의 푯대를 향한 바울의 모습이 교사된 우리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로는 프로그램을 버려야 합니다. 현시대에서 교회의 프로그램으로 교육 대상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참여하게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대부분 흥미를 잃어 가고 지루함의 탄성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미 세속의 물질문명을 따라가기란 힘겨운 상황입니다. 2부의 한 프로그램을 참석하는 이 집에 가서 컴퓨터와 씨름하는 것이 더 좋은 세대가 되었습니다. 세속의 흥미를 따라가려는 시도의 프로그램은 과감히 버리십시오. 하지만 세속의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믿음을 성장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도입하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장성한 후의 성인으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준비와 훈련을 시켜 주고 당면한 어린이, 청소년 문화의 그리스도적인 대안들을 프로그램에서 찾게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예수의 마음으로 넓게 열어 둘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섯 번째로 우리 교회의 현실입니다. 선배들 시대부터 지금까지도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고리를 단절하십시오. 몇몇 일꾼들, 재능 있다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은 일에 매여 힘겨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내게로 오라 하셨는데 우리는 도리어 더 많은 짐을 지어 주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한 번쯤은 질문해 보십시오.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할 일은 많고 일꾼은 모자라고 그러니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은 3-4 가지의 일은 기본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적당한 시기가 되면 그 일꾼들은 자취를 감추어 버리지요. 한참 일할 때에 원로가 되어 뒷짐지고 있고 후배들은 없고 그러니 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모자라는 인원의 확보란 두 가지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적으로 정책적인 지원과 양성이 그 하나이고 잃은 양으로 표현할 수 있는 쉬고 있는 이들을 돌아 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조직도, 프로그램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학교 고등부의 과정을 마친 것이 세속과 같이 교육 과정이 끝난 것이 아니며 계속적인 신앙의 도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성장시켜 줄 수 있는 대안과 터전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며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서로의 모습을 통해 권면하며 선교의 불을 태울 수 있는 장이 연계되어져야 합니다. 끝으로 지도자의 문제입니다. 지도자라 함은 두 영역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목회자이며 하나는 평교사중 직분이나 조직상이 아닌 지도력을 가지고 실제 교사 사이에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 두영역의 지도자간의 상호 관계성 즉, 조화와 상호 존중, 원만한 협력의 관계가 발전적인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의 앙금과 독단적인 자세, 지도자의 권위만을 생각한다면 결코 발전이 있을 수 없으며 지도자의 교체시마다 연속성 있는 교회교육이 단절되게 됩니다. 그렇다 해서 두영역의 지도자을 하나의 지도자 군으로 만든다면 한 예로 교사 중심의 지도자를 생각한다면 연속성이라는 측면은 회복시킬 수 있지만 더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목회자 지도자에 전적인 의지를 한다면 연속성에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교회교육은 연속성의 확보와 창조적인 영성의 지도자의 조화 속에 성장할 수 있습니다. 두영역의 지도자들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연주자들과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빈필 오케스트라를 보라 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소리를 지니고 있으며 또 주빈 메타와 같은 지휘자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소리에 지휘자의 소리가 절묘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 소리는 결코 어느 하나를 죽이고 나는 소리가 아니다. 빈필의 소리를 잊지 않았기에 수많은 시간을 지켜 올 수 있었고 주빈 메타와 같이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죽이지 않고 존중하며 그 속에 자신의 소리를 만들 수 있었기에 세기적인 지휘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의 두 지도자 군도 이와 같은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교회의 독특한 색은 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 어떠한 영적인 지도자를 만나느냐가 중요한 푯대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의 반성에 대한 대안들은 여러 가지들로 찾아 볼 수 있겠으나 그 한가지 대안으로 교사 대학에서 찾고자 한다. 교사 대학의 중요한 목적은 일차적으로 교사의 영성훈련과 자기 개발에 있다. 단순한 의미의 작은 신학교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신학교육을 흉내내는 정도의 접근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또한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실용성만을 고려하여 교육이 진행된다면 이 역시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교사의 수적 확보를 위한 일환으로 교사 대학을 활용한다면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교사 대학의 준비와 대하는 교사들의 일차적인 자세는 무엇보다도 먼저 영성훈련, 신앙의 균형 있는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고 3가지 준비가 이에 맞추어져야 한다. 우선은 교사교육의 지도자 군의 형성이다. 교사교육의 지도자 군은 다시 두부류 즉, 조직상의 지도자 군과 실무진의 지도자 군이 각자의 주장보다는 교사를 지도하기 위한 영성훈련이 아닌 먼저 지도자 스스로의 자신의 영성훈련의 자세로 출발하여 먼저 기도와 연합의 장이 말들어져 조직상의 지도자 군의 교회적인 지원과 관심의 실질적인 표현을 보여주고 실무진의 지도자 군은 융통성 있는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과 무엇보다도 교사의 영성훈련의 장을 만들어 주고 관리하고 권면해 주고 예비 교사군을 형성할 수 있는 대안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의 발굴과 양성을 할 수 있는 대안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역시 교육 프로그램의 준비와 적절한 시간을 배정하는 일이다. 학교교육의 교사들은 그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자신이 맡은 과목과 그 준비에 시간을 활용할 수 있으나 교회 교사들은 그렇지 못하다. 교사교육의 시간을 그들의 시간에서 빼낸다는 것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교사 교육을 위한 시간 배정의 문제는 교사들 스스로 결단을 요하는 문제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교사들만 희생하고 결단을 촉구한다는 것도 무리이다.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실무진에서 이에 대한 배려도 있어야 한다. 시간 배정의 문제는 우선 교사 개개인의 시간을 파악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교사들은 자신의 직장과 개인적인 용무들로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현시대 상황으로는 바쁜 것이 표준이라지만 여기에 교사로서 각부서와 학생들에 드리는 시간들로 더 이상의 시간을 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프로그램의 작성에 시간 배정의 문제를 고려하여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소그룹의 작은 교육의 자리를 만들어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에 배려하여야 한다. 프로그램의 작성에 단순히 교사를 위한 통과의례로서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신앙 전반에 걸친 재정립의 신학적인 프로그램과 교사로서 교육에 필요한 이론적인 준비, 그리고 실제적인 실무 등의 프로그램이 작성되어야 하며 또한 에비 교사들을 위한 융통성 있는 학사 운영을 준비하여야 한다. 행정의 편의를 위해 일률적이고 규격화된 학사 운영을 한다면 세속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 교회의 상황에 맞는 효율적이고 융통성 있는 학사 운영 체계를 세워야 한다. 끝으로는 단기적인 교사 대학으로써가 아니라 계속적인 훈련과 연구 과정이 고급 과정에서 실행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야 한다. 교사 대학은 1 - 2년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교육 대상자들이 이 과정을 모두 거치게 되면 물론 그 다음의 교육 대상자들이 있겠지만은 교사 대학을 마친 이들은 또 다시 처음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고 교사 대학원이라는 또 하나의 과정을 만들어 수용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교사 대학의 진행 과정 가운데 각 전공자들 가운데 지도자로 세울 이들을 찾아 좀 더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방향을 설정해 제시하고 준비의 시간을 주어 각 부분별 연구 과정이 준비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사 대학을 마친 이들이 각 전공-특기-을 심화 교육하고 후에는 교회 상황에 맞게 계발할 수 있는 교사 대학의 후속 조치들이 병행해 실무지도자군에서 준비가 되어야 한다.
교회력(Christian Year)
교회력(Christian Year) 성결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 M.div 김 대 원 목 차 Ⅰ. 서 론----------------------------------------------2 Ⅱ. 본 론 ----------------------------------------------2 1. 교회력과 성서일과 ------------------------------------2 1) 교회력 --------------------------------------------2 2) 성서일과 -----------------------------------------3 3) 성서일과의 사용과 그 문제 ----------------------------4 4) 성서일과의 가치성 ----------------------------------5 5) 축제적 교회력의 창조적인 활용 ------------------------- 5 2. 교회력의 신학적 고찰----------------------------------7 1) 구속사로서 교회력 ----------------------------------7 2) 회상으로서 교회력 ----------------------------------7 3) 신앙생활 시간표로서 교회력---------------------------- 7 3. 교회력의 구조 -------------------------------------- 8 1) 週 주기 교회력(The Weekly Cycle)---------------------- 8 2) 半年 주기 교회력 ---------------------------------8 3) 年 주기(The Annual Cycle) --------------------------- 9 4. 교회력의 내용과 의미 ---------------------------------9 1) 대림절(待臨節: Advent) ------------------------------ 9 2) 성탄절(聖誕節: Christmas) ----------------------------10 3) 주현절(主顯節: Epiphany) --------------------------- 11 4) 사순절(四旬節: Lent) -------------------------------- 12 5) 부활절(復活節: Easter, Pascha) ------------------------ 14 6) 성령강림절(聖靈降臨節: Pentecost) -------------------- 16 5. 교회력과 한국 교회의 절기 ----------------------------- 18 1) 3대 절기의 중요성 ---------------------------------- 18 2) 추수감사절의 시기에 대한 문제 ------------------------- 19 3) 교회력과 한국 사회의 기념일 -------------------------- 19 Ⅲ. 결 론 --------------------------------------------- 20 Ⅳ. 참고문헌 ------------------------------------------- 20 Ⅰ. 서 론 ‘교회력’(敎會曆)이란 원래 반복되는 교회의 예배 생활에서 생겨나게 된 것이며, 예배의 역사와 함께 성장되었기 때문에 교회력의 활용은 예배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다. 이러한 교회력을 잘 활용할 때, 목회의 계획과 설교의 계획을 쉽게 수립할 수 있고, 성도들의 신앙생활도 사회문화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할 수 있다고 본다.1) 기독교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교회력이 독창적으로 형성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에서 기인하여 그 줄기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정착되었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력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교훈과 수난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에 의하여 이룩된 교회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형성하여 이룩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 근원은 어떤 경우에도 유대 민족의 종교문화에서 지켜온 전통적인 제의 내용을 담고 있던 절기들을 벗어나서는 연구가 완전할 수 없다고 본다.2) 루터교회와 성공회를 제외한 기독교회의 입장에서 교회력은 부정적인 용어로 불려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교단이나 교리에 관계없이 교회력에 따라 목회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교회력을 더 이상 중세의 산물로 여기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을 중심으로 복음주의 입장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Ⅱ. 본 론 1. 교회력과 성서일과 1) 교회력 흔히 말하는 ‘교회력’이라는 말은 ‘예배력’(Liturgical Calender)이라는 용어에서 온 것이다.3)약 2세기경에 먼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이 연중에 일어난 한 날로 기억하고 축하하면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본다. 사도시대를 지나 4세기 전까지의 초대교회에서는 교회력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부활의 사건에만 초점을 둔 교회의 생활을 계속하여 부활의 사건이 예배의 중심이었고, 교회력의 전부였다. 4세기에 접어든 교회는 로마의 국교로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조직은 교황청을 중심하여 이루어지고 신앙생활도 전체주의로 빠져 초대교회의 경건한 신앙은 서서히 탈선되고 모든 것이 제도와 형식으로 이어지는 아픔이 발생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예배 예전의 엄숙성과 의미부여는 고조되어 교회력을 기초로 활용하였으며, 이때 교회력도 많은 구체적인 발전을 가져 왔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진 종말론적인 신앙에 바탕을 두었던 교회의 생활은 4세기 말에 이르러 역사적인 그리스도교로서 변천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바로 교회력에까지 영향을 미쳐 주님의 날과 부활절 이외에 오순절을 좀 더 구체화하면서 새로운 절기들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중세의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근본적인 의도는 교회력의 준수에서 떠나고, 이탈된 교리들이 교회력에 스며들면서 순수했던 교회력의 내용과 의미는 변질되었다. 중세교회가 교회력에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부분은 성모마리아의 축일을 비롯하여 많은 성직자들의 축일과 다른 여러 축일이 교회력 안에 자리 잡은 것이다. 이상과 같은 중세교회의 침체와 변형된 교리들은 교회력에 거의 빈틈이 없도록 모든 주일과 365일을 겹치면서까지 채워 놓아 대 혼돈의 교회력을 지켜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력의 현실을 주시하면서 각 종교개혁자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는데 마르틴 루터는 교회력의 전반적인 부정보다는 주일과 주님과 함께 관계된 교회력만 지키고 성자들의 축일은 삭제할 것을 권하였다. 츠빙글리는 매주일의 성만찬 위치에 설교를 자리 잡게 하고 일년에 네 차례로 성만찬을 제한할 정도로 급진적인 예배개혁자였다. 그는 우선적으로 교회의 성상들을 철저히 파괴하고 성모마리아를 비롯한 어떤 성자나 순교자들의 숭배도 철저히 거부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많은 개혁교회에서 교회력 경시 사상이 자연적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칼빈으로부터 신학과 예배에 대하여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교회가 지키고 있는 많은 축일에 대하여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특히 이들은 주현절과 성탄절마저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웨슬리의 경우도 스코틀랜드 교회와 비슷한 결정을 내리면서 현재의 가치 있는 목적과 무관한 모든 행사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이상과 같은 종교 개혁가들의 교회력 거부 자세는 오랫동안 개혁교회가 교회력을 외면한 직접적인 동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개신교회도 바로 이러한 영향권 아래 있던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수되었기에 오직 부활절과 성탄절만이 교회력의 전부로 알고 있었다.4) 2) 성서일과(lectionary) 교회의 경건운동을 주도했던 수도원과 같은 곳에서 정한 생활의 시간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명상하고 그 말씀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는 삶의 한 방편으로 성서의 구절들을 교회력을 중심으로 선별하여 모아 놓은 것으로 개인이나 공동체에서 성서를 규칙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읽고 선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성무일과(聖務日課), 성구집(聖句集), 독서일과, 성구선별집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성서일과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성경을 연속적으로 읽어가는 ‘lectio continua’이며, 또 하나는 교회력에 맞게 선별하여 매일의 성경읽기와 또는 매주의 설교본문으로 만든 ‘lectio selecta'가 있다. 전자는 가장 오래된 전통으로서 유대교 회당에서 최근까지 행하여지고 있다. 이 방법은 츠빙글리와 같은 개혁자들에 의하여 수용되기도 하였고 교회력을 무시한 현대의 일부 교회에서 이 방법을 선호하는 예가 있다. 후자는 중요한 교회력의 절기에 맞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정확하고 의미 깊게 심어주는 데 그 목적을 두고 만들어졌다. 이러한 성서일과는 3년이 되면 66권의 모든 말씀을 다 설교할 수 있도록 계획되어 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의 시작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로마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정한 것으로 대답하지만 성서일과의 역사는 유대교의 회당예배부터 그 근거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문제는 이 회당예배에서 있었던 성경 봉독이 교회력과 정확하게 연관성을 맺었는가에 대한 기록을 찾기가 힘든 형편이다. 4세기에 이르러 특별히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을 비롯하여 그 후의 교부들의 설교에서 교회력과 성서일과가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력과 성서일과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다음으로는 8세기의 이전 것으로 추정되는 예루살렘 성서일과로서 주현절인 1월 6일을 기점으로 하여 오순절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현대의 것과 가장 근접한 내용을 갖추고 있다. 20세기에 이르러 성서일과는 실질적으로 장로교의 원조인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시작되었는데, 1940년 그들의 총회가 통과시킨 예식서에 교회력과 성서일과가 실리게 되었고 이를 모든 교회가 수용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어서 1965년에 끝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력에 맞는 성서일과를 제정할 것을 결의하고 1969년에 성서일과를 공포하자 세계의 교회는 성서일과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러한 출발은 북미와 캐나다의 영어권 12교단 대표들에 의하여 공동본문협의회(CCT-Consultation on Common Texts)를 1978년에 출범케 하였고, 1986년에 새로운 성서일과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1991년에 3년 주기의 성서일과가 끝나게 됨에 따라 개정판 공동성서일과(RCL-The Revised Common Lectionary)를 만들어 발표한 바 있다.5) 3) 성서일과의 사용과 그 문제점 성서일과의 보급이 빠른 속도로 세계교회 속에 번지고는 있지만 적극적인 호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먼저 설교의 본문에 대한 자율성이 상실되고 주어진 본문으로 설교를 해야 하는 속박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둘째는 ‘lectio continua’의 방법으로 연속적으로 설교를 해오던 설교자들이 자신의 틀을 고수하기 위하여 새로운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셋째는 성서일과를 따를 때 자신의 설교가 회중의 삶과 무관한 본문과 메시지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넷째는 주어진 본문이 설교자에게 익숙하지 않았을 때 그 본문에 대한 석의(釋義)의 범위와 깊이를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가 각각 다른 문화와 국가의 고유한 절기와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를 사용했을 때 얻게 되는 유익은 훨씬 값진 것들이 많다.6) 4) 성서일과의 가치성 상기의 제기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를 사용했을 때 얻게 되는 유익과 가치성들을 살펴보면 첫째는 설교자의 의향대로 또는 자신의 제한된 성서의 지식을 바탕으로 종횡무진 하던 말씀 사역에 중심을 잡아준다는 점이다. 둘째는 교회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원의 역사에 근거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서일과는 단계적으로 회중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구속의 은총을 실감하는 효과를 경험하게 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모든 교회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동시에 들을 수 있으므로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일체감을 가져 올 뿐만 아니라 교회의 일치를 위한 연관성을 가져오는 효과를 수반한다. 넷째는 구약과 서신서와 시편과 복음서의 성구를 매주일 제시함으로 전반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며 말씀의 질서가 형성되는 장점이 있다. 다섯째는 교회력과 성서일과를 수용하여 목회할 때 설교의 계획뿐만 아니라 목회의 전반적인 계획과 교육 프로그램까지 미리 수립해 온 교회의 경우 말씀 중심의 통일성을 가져오게 되었다. 여섯째는 미리 제시된 교회력과 성서일과를 통하여 말씀의 연속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이 설교의 방향을 미리 알게 되고 스스로 적절한 준비를 하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일곱째는 정해진 주제와 본문을 위하여 설교의 자료를 비롯하여 기타의 준비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끝으로, 성서일과를 사용함에 있어서 각각 다른 민족의 문화와 삶의 장에서 발생되는 설교현장의 중요한 주제는 성탄절, 수난절, 부활절이 아닌 경우에는 자율성이 주어졌다는 점이며, 성서일과와 설교현장의 갈등문제는 얼마든지 설교자가 자유롭게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회력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를 따를 때 설교자는 3년이 지나면 66권의 성경 전체의 말씀을 설교의 본문으로 하여 설교할 수 있다.7) 5) 축제적 교회력의 창조적인 활용 교회전통에서 물려받은 교회력이든, 상황에 맞게 다시 조정한 교회력이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축제적인 예배 표현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야 하며, 예전적 방편으로서의 가치를 지녀야 한다. 교회의 예배가 이 교회력의 계절적 변화 없이는 자칫 무의미하고 너무나 단조로운 행위의 반복이 되기 쉽다. 그러나 계절의 리듬에 맞춰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교회력의 절기가 몇 개이든지 이 절기의 변화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삶과 고난, 죽음, 부활, 성령을 통한 교회의 탄생, 종말을 향한 신앙적인 순례 등 이 모두가 기독교 신앙의 크고 중요한 매듭들이다. 선포의 내용뿐만 아니라 절기의 빛깔 변화를 통한 상징적인 표현과 그 변화는 커다란 신앙적 의미를 가져다 줄 것이다. 교회의 예배에서 매 주일의 예배를 축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해도 예배의 축제적 표현은 요즈음 세계교회 예배의 지배적 흐름이다. 물론 예배의 축제적인 표현은 번거롭다. 그러나 번거로움 때문에 예배의 축제성이 퇴색되어버리면 곤란하다. 또한 인도자와 몇 사람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바른 축제가 될 수 없다. 전체 회중의 참여가 전제되어야 하고, 더욱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참여는 물론 계획성 있는 준비가 있어야만 한다. 교회력의 예전적 활용과 관련하여 앞에서 살펴 본 ‘성서일과’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그 역사와 유래는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최근에는 성서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표준성서일과’까지 만들고 있다. 교회력자체처럼 성서일과도 모두 완성된 것은 아니며 교단이나 교회의 상황과 신학에 따라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는 아직도 남아 있다. 문제는 이런 성서일과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예전적인 교회전통에서는 그날의 설교 내용과는 상관없이 매주일 낮 예배에서 지정된 세 본문(구약, 서신서, 복음서)이 규칙적으로 읽혀지고 있다. 그러나 설교를 통한 복음 선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 교회의 전통에서는 거의 이런 규칙적인 성서봉독이 예배에서 사라져 왔다. 몇 가지 중요한 동기에서 오늘날 세계의 교회들은 이 지정된 성서일과를 설교본문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적어도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 교회를 지배해온 설교의 유형은 ‘제목설교’였다. 그 나름의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설교의 소재나 사고(思考)가 설교자의 개인적인 틀과 그 역량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성격의 설교이기에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고, 듣는 회중들은 항상 같은 발상의 설교에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적어도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를 설교본문으로 택할 경우 이런 막다른 경지에 이른 설교자들에게는 새로운 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미 교회력에 따라 그날에 주어진 세 성서본문들을 어떻게 설교본문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세 본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설교 본문으로 선택할 수 있다. 좀 더 체계 있는 선택을 위해서는 성부의 계절에 구약성서 본문을, 성자의 계절에는 복음서 본문을, 그리고 성령의 계절에는 사도서신의 본문을 택해서 활용할 수도 있다. 어느 하나를 주된 본문으로 정하고 다른 두 본문을 보조 본문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의 경향은 그날에 주어진 세 본문 모두를 설교 본문으로 정하고 설교를 통한 선포의 내용을 발전시키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주어진 세 본문을 함께 엮어서 메시지를 구상할 때 좀 더 다양한 회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회중의 구성 요소가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상황에서는 이미 이 세 본문 설교가 적절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설교 착상과 다른 새로운 방법론을 어떻게 터득해 가느냐 하는 것이다. 교회력의 창조적인 활용 가능성을 모두 제시할 수는 없다. 아니 그 창조성이란 새로운 가능성으로 예배인도자나 설교자, 그리고 개교회의 회중 속에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셈이다. 한국 교회에서 이 교회력의 창조적 활용은 예배의 축제성 개발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교회갱신의 과제로서도 의미 있는 과제라고 생각된다. 한국 교회는 아직도 ‘세속력’에 의존해서 예배와 신앙 훈련을 하고 있다. 설교와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이만큼 성장하고 성숙한 한국교회는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을 기독교의 숨결이 담긴 교회력을 중심으로, 양력에 의한 민족적 행사와 음력에 의한 민속적 절기를 조화시켜 교회 전체의 삶을 기획하고 추진할 때가 되었다. 결국 교회의 예산, 결산은 양력의 새해 기준에 맞추더라도, 그 밖의 교회행사는 창조절로 시작하든, 대림절로 시작하든 교회력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8) 2. 교회력의 신학적 고찰 1) 구속사로서 교회력 교회력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로서, 성탄 사건,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 승천 사건, 성령강림 사건 등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이 역사를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령과 성자와 함께 하신 사역이다. 따라서 교회력의 중요한 절기인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 등은 모두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력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사가 되는 것이다.9) 2) 회상으로서 교회력 우리가 교회력에 따라 설교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이룩하신 구속의 사건을 기억하고 회상하는 일, 즉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이미 이룩하신 구속의 사건들을 통해서 기억력의 한계가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재확인하고 현재화 하는 것이다. 국가도 매년 특정일을 정하여 국경일로 지정하여 기념하는 것은 나라의 역사적인 사건을 반복하여 기억하게 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새롭게 하는 의미가 있다. 초기 기독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되새기며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기억은 단순한 의미의 지식적인 회상이 아니라, 아남네시스(anamnesis)10), 즉 과거의 사건을 통하여 실제적인 효과성(efficacy)을 현재화하는 것이다. 3) 신앙생활 시간표로서 교회력 교회력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건을 중심으로 제자로서의 삶을 계획하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시간표이다. 촌각을 다투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통해 자신의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하루하루와 매주, 매년의 삶을 살아가는 시간표의 의미가 있다. 3. 교회력의 구조 1) 週 주기 교회력(The Weekly Cycle) 교회력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사실이다(Christological center). ‘교회력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의 날’(The Lord's Day)이 ‘週 주기’(The Weekly Cycle)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즉 매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면서 감사와 감격으로 떡을 떼며 잔을 나누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감사하며, 감격해하며 예배를 드렸던 초대 교회의 모습에서 ‘週 주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半年 주기 교회력 교회력은 엄밀한 의미에서 일 년 중 반년정도의 기간(즉 12월부터 시작해서 빠르면 5월초에서 늦으면 6월 중순까지 이르는 6, 7개월의 기간-3월 22일 혹은 4월 25일이 부활주일에 해당되는 경우)에 주로 중요한 행사들이 진행되도록 구조가 되어있다. 물론 오순절이 지난 후부터는 오순절 이후의 절기로서 교회시대에 대한 기념으로 교회들이 지키기는 하지만 그 비중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는 앞서의 기간과 비교할 수가 없다. (1) 두 개의 주기로 이루어짐 이런 교회력이 또 보면 두 개의 주기(cycles)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성탄절주기와 부활절주기이다. 성탄절주기 부활절주기 의미 색깔 대림절 (Advent) 사순절 (Lent) 준비 자주색/ 보라색 성탄절(주현일 포함) (Christmas/Epiphany) 부활절(성령강림절 포함) (Easter) 경축 흰색 주현절후(일반절) (Season After the Epiphany, Ordinary Time) 성령강림절후 성장 녹색 교회력이 발전되어온 순서에 의하면 제일 먼저 확립된 것이 역시 부활절과 그에 관련된 절기들이다. 예를 들어 부활절을 준비케 하기 위해 사순절이 생기고 또 성주간이 생기고 부활절 다음에 오순절 등이 생겨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성탄절이 생기고 성탄절과 관련된 대림절, 주현일(주현절후), 수세일 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성탄절주기는 양력에 의해서 시작이 되는 반면, 부활절 주기는 음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두 개의 주기는 서로 대칭 두 개의 주기는 서로 대칭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즉, 부활절 혹은 성탄절에 앞서서 준비절기-축하절기-이어지는 축제분위기 등의 순서이다. 1960년대 중반이후부터 많은 북미 기독교 교단 예배위원회 대표들이 모여 CCT(공동본문자문위원회, the Consultation on Common Texts)를 결성하였고 이 모임에서 NACCL(북미주 교회력 및 성서일과 위원회, the North American Committee on Calendar and Lectionary)를 조직했는데 이 위원회에서 공동성서일과를 만들어 제출하였고 이후 92년도에 개정공동성서일과를 제정하였는데 이에 기초한 교회력이 공동교회력이다. 3) 年 주기(The Annual Cycle) ‘年 주기’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다. 즉 초대교회는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드리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한 주일의 첫 날, 즉 주일로 옮겨서 예배드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 날은 ‘큰 부활 주일’(The Big Easter)로서 해마다 크게 축하하며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11) 4. 교회력의 내용과 의미 1) 대림절(待臨節: Advent) 교회력의 첫 시작을 알리는 절기로서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한다. 이 절기는 4주일 계속되며 성 안드레의 날인 11월 30일에서 가장 가까운 주일부터 성탄절까지 계속된다. 이 절기의 기간은 4주에서부터 7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나 6세기경에 로마 주교가 4주로 확정했다. 이 기간 중에는 왕 되신 우리 주님의 오심을 맞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고대 기독교인들은 대림절을 엄격히 지켰으며 모든 신자들은 날마다 금식하고 교회 예배에 참석해야 했다. (1) 의미 대림절을 뜻하는 영어 단어 Advent는 두 개의 라틴어 ad와 venire로 이루어져 “오다”(to come to)를 뜻한다. 대림절은 네 개의 주일로 이루어진, 교회력이 시작되는 절기이다. 각 주일의 특징은 첫째 주는 최후의 승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둘째 및 셋째 주는 세례 요한의 출현,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 탄생에 앞선 사건 등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2) 분위기 대림절은 위엄, 충성, 회개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상징 색으로 자주색(Purple), 보라색(Violet)을 사용한다. 이 기간은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에 대해 준비하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단순히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그치지 않고 기다림에서 오는 기쁨의 절기가 되어야 한다. (3) 행사 대림절 기간 동안 예배 찬송은 회개와 재림을 의미하는 곡이 선택되었으며, 결혼식이 중지되고, 보통 하루 한 끼 씩 금식하여 고아원과 양로원 등에 구제를 하였다. 현대교회가 대림절에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하여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것도 유익하다. 2) 성탄절(聖誕節: Christmas)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시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초기 기독교도들은 부활절에만 깊은 관심을 두었을 뿐 성탄절에 대한 연구나 경축의 행사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에서 336년경에 이교도들의 태양신의 생일로 지킨 날을 주님의 탄생일로 정하였다. 그 이유는 주님의 탄생이 늦가을이나 또는 겨울이었다는 사적 증거와 이 시기에 태양이 지평선의 가장 낮은 지점으로부터 다시 올라와 우주에 빛을 주는 날이라는 입장에서 당시의 동지였던 25일을 택하게 되었다. 그 후 안디옥에서는 375년, 알렉산드리아에서는 5세기에 이 성탄절을 지키게 되어 서방의 모든 교회에 퍼지게 되었다.12) (1) 의미 처음에는 이 행사자체를 지키려는 목적보다는 그 당시 이방행사에 대처하는 의도로 지켜졌다.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축제는 아리안 이단13)에 대한 대처로서도 적극적으로 지켜지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처음 354년 연대학자(Chronographer)에 의해 언급이 되었는데 그의 달력에서 이 학자는 12월 25일을 Natalis Solis Invicti(즉 "Birthday of the Unconguered Sun")라고 적은 뒤 12월 25일에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나았다는 기록을 적었다는 것에서 기록을 찾을 수가 있다. (2) 행사 성탄절은 24일 밤부터 시작이 된다. 그래서 보통 성탄전야, 성탄새벽, 성탄아침 등의 3차례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성탄절은 흰색, 황금색, 그리고 가장 우아한 천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며 그 외에 상징들은 말구유, 천사, 목자 등이며 사용될 수 있는 상징어들은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 등이다. 3) 주현절(主顯節: Epiphany, Theophany) 이 절기 역시 성탄절과 마찬가지로 이교도들이 1월 6일을 ‘에온’이란 신의 탄생일로 축하하는 날이었는데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상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을 기념하는 날로 대치 시켰다. 이 절기의 기간은 1월 6일부터 약 8주간 정도 계속되며 다음 절기까지 이어진다. (1) 의미 ‘Epiphany’라는 말의 어원은 헬라어의 ‘ἐπιφάνεια’ 또는 ‘θεοφανεια’이다. 이는 ‘나타남’(appearance) 또는 ‘현현’(manifestation)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들어내셨고,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졌다”는 것이다. 교회력 안에서 주현절은 성탄절보다 더 오래된 축일이다. (2) 주현절의 역사 고대 세계에서 'Epiphany'라는 말은 신의 가시적 현현이나 신처럼 존경받는 통치자가 그의 왕국의 도시들을 격식을 차려 방문함을 의미했다. 초대교인들에게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인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즉 이 단어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심, 또는 하나님이 통치자로 오시는 엄숙한 방문을 의미했다. ① 주현절의 유래 주현절의 유래는 모호하지만, 이집트로부터의 이교적 冬至 잔치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교도의 잔치가 기독교회의 중요한 절기가 된 이유는 주현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언제 나타났느냐 하는 기독론적인 논쟁에서 발전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독론 논쟁에서 초대교회의 2대 이단에 대한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가현설(假現設: Docetism)로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부인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진짜로 육체를 입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경시하거나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단설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양자설(養子設: Adoptionism)이다. 유대교의 유일신관(Monotheism)에 큰 비중을 두는 이단 사설로서, 야훼의 전적인 신성을 인정하는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신적인 면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능력이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그에게 신성을 부여했다는 주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결과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이단이었다. 이러한 논쟁 가운데 주현절 잔치는 초기에 동방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 받으심과 가나의 기적을 강조하면서 축하하는 절기로, 서방교회에서는 말라기 4:2의 ‘의로운 태양’의 개념이 강조되었으며, 주현절을 의로운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서 이 세상을 뚫고 들어오신 사건으로 본다. 그래서 4세기에 이르러 서방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12월 25일에, 동방교회는 1월 6일에 지키게 되었다. ② 주현절과 성탄절의 나뉨 ‘성탄절’이란 말은 354년경의 로마 문서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문서에는 12월 25일이 ‘유대 베들레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 서방교회에서는 이 주현절의 의미가 동방박사의 방문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고, 동방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받음이 이 날의 가장 중요한 의미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동ㆍ서방교회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은 결국 주현절이란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을 축하하는 절기라는 점이다. (3) 신학적 의미 ①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② 주현절은 이렇게 구세주의 세상에 나타나심을 의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올 것을 초청하는 것이다. (4) 주현절의 현재적 의미 기독교회는 주현절을 통해 세상에 오신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성육신의 신비는 성탄절과 주현절에 전달되어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차이가 있다면, 성탄절에는 가난한 사람의 아들이 된 하나님의 아들의 내려오심을 생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주현절에는 이미 세상에서 자신을 나타내기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위엄에 참여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5) 주현절의 행사 이 절기는 “빛으로 오신 예수”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새해의 시작과 맞추어 교회의 빛의 사명, 선교의 사명을 고취하는 절기로 활용될 수 있다. 주현절은 또한 증거의 절기로서 이 기간에 교회는 전도행사를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경배하는 이방의 왕들의 방문을 통해서도 세상 끝까지 복음이 증거되어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세계선교에 특별한 강조를 두어야 한다. 4) 사순절(the Lenten Season) 이 기간은 참회일로부터 시작하여 부활절까지 약 6주간 계속되는 절기이다. 이때의 교회는 금식기간을 정하여 회개와 함께 성결을 추구하며 부활절을 맞는 것이 그 특징이다. (1) 의의 Lent라는 말은 앵글로 색슨의 Lencten(spring)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역사적으로 사순절은 회심자들이 세례를 위해 금식하고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사순절은 진정한 회개와 자기부정과 금식의 시기이며, 영적 훈련의 시기이다. 처음 1세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 머무른 40시간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40시간만 지켰는데, 3세기에 이르러서는 부활 주일 전 한 주일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지키다가 나중에 30일간으로 연장되었으며, 마침내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처음으로 ‘40일’로 정하게 되었다. 6주간 중에는 주일은 포함되지 않는데, 부족한 4일을 보충하기 위해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14)부터 사순절이 시작된다. (2) 사순절의 역사 초대 교회는 매주일을 부활을 위한 경축일로 삼고 예배를 계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비록 오늘과 같이 완전한 교회력은 없었으나 주님의 부활에 초점을 맞춘 매주일의 예배는 ‘작은 부활절’(little Easter)로서 교회력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특별히 초대 교회는 부활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과 영원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이 기간에 세례식을 베풀었다. 결국 초대 교회는 세례와 깊은 관계가 있는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준비하는 기간을 갖게 되었는데 그 기간이 바로 사순절이다. (3) 사순절의 신학적 의미 ① 세례 받을 자들의 준비 기간으로서의 사순절 사순절의 의미는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명상하고 회개하는 기간으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세례 지원자들을 위한 마지막 준비 단계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이 사순절 기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초대 교회가 성례전적인 삶 속에서 교회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② 개인적인 경건과 회개의 사순절 특별히 부활 주일에 세례 받을 사람들의 훈련 및 준비 기간으로 시작되었던 사순절은 아우구스티누스 때(4세기) 이르러서는 세례와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수난에 접하고 머무르는 준비 기간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리하여 사순절은 시간이 흐를수록 엄숙한 예배와 그리스도인들의 성결한 생활을 강조하게 되었고,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부정하고 참회하는 기간으로 지키게 되었다. (4) 분위기 사순절의 분위기는 회개의 색깔인 보라로서 대림절의 색깔과 같다. 이 엄숙한 절기에 맞춰 “알렐루야”와 “영광송”등이 예전에서 생략이 된다. 재의 수요일의 대체적인 색깔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는 검은 색이며 백색은 주의 만찬의 시작을 경축하는 성목요일의 색으로 바뀔 수 있다. 성주간동안, 붉은 색은 사람들에게 희생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보라색을 대신하는 색으로 간주된다. 성금요일의 검은 색은 피보다 더 깊은 어둠을 나타내는 대체적인 색깔이라 할 수 있다. (5) 행사 특히 3일(목요일 일몰부터 부활주일 일몰까지)이 사순절(한 해의)의 절정이며 부활절로 가는 다리이다. 이 경우 목요일 저녁부터 부활절 첫 예배(토요일 저녁)까지 금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은 인간의 죽음을 상징하여 머리에 재를 얹는 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 원래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 예비자들을 훈련시키는 시기로 오늘날 개인이나 그룹을 교리적인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가르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사순절은 그 자체 매일 성경 읽기 프로그램을 시행할 수 있는 절기이며 사도신경(Creeds)에 대한 설교 시리즈도 적절하다.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신앙의 성숙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또한 절제하는 훈련과 기도의 절기로 사순절 기간에 40일 특별새벽기도회 실시를 통하여 교회의 갱신과 부흥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사순절은 전도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신자들은 십자가의 구속으로의 그것의 의미를 증거하고 교회출석이 부진한 신자들을 독려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한다. 5) 부활절(Easter, Pascha) 부활절부터 7주간 계속되는 부활 절기는 기독교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절기로써 지켜지고 있는데, 매해 춘분 이후 보름달이 뜨는 날의 다음 주를 부활 주일로 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3월22일-4월 25일 사이에 지켜지게 된다. (1) 의의 부활절 전야부터 시작되는 부활절(Easter)은 튜튼 족의 신 중 봄과 새벽의 여신의 이름인 Eastre를 인용하여 영어식으로 붙여졌다. 부활절에 대한 원래의 이름은 유월(passover)의 히브리적인 이름인 파스카(Pascha)15)였다. 부활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축제 중의 축제로 지켜져 왔다. 부활절의 중요성은 40일간의 사순절기간이 부활주일에 앞서서 준비기간으로서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보여진다. 더욱이 부활절은 7주 동안 지켜지고 있으며, 다른 절기는 대부분 해마다 달리 정해지는 부활절일자에 따라 조정되고 있다. 부활주일은 부활절을 시작하는 관문이지만 그러나 사순절을 마감하는 날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인데 그렇게 되면 사순절의 의미가 약화되고 하나의 일시적인 프로그램으로 국한되기가 쉽다. 이런 오해는 어떤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대로 사순절이 년 중의 최고 절기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부활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최고 행위에 기초한 제일 중요한 절기인 것이다. 이것을 인식할 때 교회는 그 행사와 관심의 최대의 기간을 갖게 될 것이다. (2) 부활절의 역사 주일이 한 주간의 중심인 것처럼, 일 년의 중심은 ‘Pascha’ 기간이다. 즉 부활절은 교회력의 모든 경축 가운데서 가장 오래 된 것이며 그 근원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심으로 그들에게 자유를 주심을 늘 감사하며 매년 기념하였다. 그런데 초대교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유월절 기간 동안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들도 이제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온전히 자유한 백성들이 되었음을 확신하였다. 과거의 유대인들의 출애굽은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매주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축하하고 감사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 때를 일 년 중에 가장 큰 주일(The great yearly Lord's Day)로 지키게 된 것이다. (3) 행사 부활절의 시작은 그 전야부터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밤새워 기다린다는 데서 유래한다. 전통적으로 부활절 전야(Easter Vigil)에 세례를 시행하고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그들의 세례를 갱신하는 의식을 행한다. 또 이때에 성만찬을 시행할 수 있다. 부활주일 아침 기독교인들이 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면,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고대의 전통이었다. 부활절은 기쁨의 최고 절기이다. 사순절기간동안에 빠져있었던 “알렐루야(Alleluia)"가 다시 들려지고 사순절 금식은 끝나게 된다. 정상적인 식생활로 돌아옴에 대한 기쁨이면서 이제는 더 이상 금식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의 기쁨이기도 하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풍성한 꽃 장식에 의해서 상징되어지기도 한다. 부활의 주는 영화된 몸을 입으신 새로운 존재이시다. 그는 이제 죽음에 의해서 건드려질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그와 함께 부활의 경험을 갖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움은 부활절에 새 옷을 입는 관습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6) 성령강림절(the Pentecost Season) 삼위일체 주일을 비롯하여 시작되는 이 절기는 강림절 첫 주까지 계속되는데 기독교의 가장 긴 절기로서 인정하고 있다. 7세기 이전까지는 이 기간 동안에 특별한 행사나 과제가 주어지지 아니하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교회력의 전반부를 차지한 일반 절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수난, 부활, 승천을 강조하도록 하고 이 오순절 기간 동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계시를 성도들의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 특별히 교회에 임하신 성령의 임재와 그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생동감 있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1) 의의와 역사 오순절은 구약의 3대 절기의 하나로 ‘맥추절’, ‘칠칠절’ 또는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민 28:26) 등으로 유월절 이후 50번째 되는 날 지키는 절기로서 그 목적은 첫 곡식의 추수를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함이었다. 후기 유대교는 이 절기의 의미를 더욱 확대하였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을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로 재해석하여 기념하기도 했으며, 후에는 모세에 의하여 확립된 신앙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한 견진신일(Confirmation)16)의 의미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육신의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것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과 정신을 새롭게 하시고 십계명과 율법을 주신 것을 감사하였다. 즉 유대인들은 첫 추수에 대하여 감사하였던 오순절에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과의 만남 사건을 강조하였다. 즉 오순절은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교회의 탄생을 축하하는 절기가 되었다. 유월절을 통해서 확증된 출애굽 사건 안에 있는 옛 계약(The Old Covenant)이 시내산에서 완성된 것 같이 새 계약(The New Covenant), 즉 부활절에 확증된 새 계약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완성되었다. (2) 승천일과 성령 강림 주일 주후 4세기 전반까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강림을 동시에 기념하였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이르러 이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의 의미를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이 둘을 분리하여 지키게 되었다. 주님 부활 후 40일째를 승천일로 하고, 50일째를 성령강림절로 정했다. (3) 성령강림절의 신학적 의미 ① 교회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과 성령 보내심의 약속의 성취로 인해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출발한 대사건이 일어난 날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령강림의 가장 큰 의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통해 이 땅에 교회를 세우도록 했다는 점이다. ② 구속의 완성과 성령의 임재이다. 성령강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의 완성과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의 완성과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의 성취를 기념하는 축제이다. ③ 선교의 출발점이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최우선으로 한 일은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나약한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복음을 전할 능력을 입게 되었다. ④ 화해와 일치이다. 성령강림절은 화해와 통일의 날이다. 이 날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인하여 다른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었다.17)이것은 성령의 선물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에 막혀있던 의사소통의 벽이 무너짐을 의미한다. ⑤ 세례를 받는 날이다. 부활절과 함께 오순절은 초대 교회 때에 세례를 실시하던 가장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였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대로 베드로의 설교 이후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건이 그 기원이 되었다. (4) 풍습 및 상징들 ① 풍습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중세에는 이 날을 기독교가 실제적으로 탄생한 날로 보고 이를 축하하는 성령강림절 전야제가 베풀어졌다. 또한 성령 강림을 기념하기 위한 많은 행사들도 행해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성령을 상징하는 붉은 예복 입기, 성령께서 임재하실 때 들렸다는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를 연상시키는 나팔 불기,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 날리기 등이 있었다. 현대 기독교회에서는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은사를 받기 위한 기도회 등이 교회마다 행해지고 있다. ② 상징물 a. 비둘기: 성경에서 순결을 상징하는 비둘기는 또한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b.불: 타오르는 불이 성령을 상징하게 된 것은 성령 강림 시 “마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여 있더니”18)라는 성경의 기록에 근거한다. 이 밖에도 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현현 시 자주 등장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창 15:17; 출 3:2; 행 7:30). 오늘날에도 불은 성도들의 뜨거운 열성과 교회의 살아있는 활동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c. 일곱 개의 등불: 성령과 관련된 또 다른 상징으로 일곱 개의 등불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계 4:5)을 상징하는 것으로,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주의 종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한다. (5) 현재적 의미 성령강림절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강림절을 지키고 기념하는 것은 우리의 삶도 초대교회의 성령의 체험을 경험한 성도들처럼 성령에 대한 체험과 경험을 통해 생명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함이다. (6) 행사 성령강림절은 전통적으로 새로운 신입회원, 특별히 세례와 견진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날이기도 하여 성만찬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날은 또 白衣 주일로 불렸는데 세례와 입교의 후보자가 흰옷을 입고 기쁨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성령에 의해 씻기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령강림절에 유대의 소년은 성년이 됨을 알리는 의식(바르 미쯔바; Bar Mitzvah; 계약의 아들)을 치른다. 어른으로서 율법을 지킬 책임을 갖고 성인으로서 특권과 책임이 지워지는 정회원이 되는 것이다. 성령강림절은 성령을 보내시리라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 성취되고 은사를 받게 되기 때문에 기쁨의 분위기를 갖게 된다. 그래서 325년 니케아 회의는 강림절에 무릎 꿇거나 금식하는 일을 금했다. 또한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갱신과 부흥의 때이다. 성령 안에서 신자들은 새롭게 되며, 과거의 대사건을 단지 기념하는 것이 정도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때인 것이다. 5. 교회력과 한국 교회의 절기 한국 교회는 원래 구라파19)교회의 교회력을 전부 따르지 않고 그 중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추수감사절 등을 받아들여 지키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신년예배를 비롯하여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8ㆍ15와 같은 국경일을 더 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에 선교사들이 필요한 대로 전해준 것이 그대로 전통이 된 것으로 판단되며, 그 후에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 여러 행사들과 관련하여 필요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여 교회의 절기 행사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1) 3대 절기의 중요성 기독교의 중요한 3대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이다. 현재 한국 교회는 목회자의 교회력에 대한 가치 인식에 따라 이 세 절기가 지켜지지만 아직도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형편이다. 성탄절과 부활절에 비하여 성령강림의 절기는 대체로 한국 교회의 예배에서 간과되고 있으며, 오히려 구약의 유대 종교의 절기로 이해된 맥추절(칠칠절)이 더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본다. 더욱이 맥추절의 기념도 성령강림절과는 무관하게 7월 둘째, 또는 셋째 주일에 지켜지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가 성령에 대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며, 성령의 체험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성령이 임하신 역사적인 날에 대하여 잊고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모순 된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리고 3대 절기를 말할 때에도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이라고 고집한다. 아마도 구약의 유대종교의 절기에 비교하여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등으로 생각했던 데서 착오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추수감사절의 시기에 대한 문제 한국의 추수감사절은 주로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원래 11월 셋째 주일이 지난 그 주간 목요일에 지키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킨다. 미국의 국가적인 행사를 굳이 한국 교회가 지켜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이 들며, 또한 감사의 절기가 한국의 시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추수감사절은 글자 그대로 가을에 열매를 거두는 추수 절기에 있어야 하는 행사라는 것이다. 계절적으로 이미 겨울이 시작된 이후에 추수감사절이 지켜지기 때문에 한국의 절기에 맞지 않는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자연과 농사에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 정신이요, 의의라고 한다면 그 일정에 있어서는 한국 사회에 알맞게 그 일자를 조정해 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독일 교회는 10월 첫 주일에, 영국교회와 캐나다의 교회들은 모두 10월 중의 행사로 지키고 있다면, 나라마다도 그 시기가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한국의 계절 감각으로도 10월 중에 행하는 것이 더 바람직스럽지 않을까하며, 더욱이 한국의 민속절인 추석을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도 나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3) 교회력과 한국 사회의 기념일 한국 교회의 교회력에는 선교 초기부터 우리 국가와 사회적으로 지키는 행사들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하여 지키는 것이 생겨났다. 추수감사절기가 그러하며, 어린이주일과 어버이주일 등의 기념일이 모두 이런 범주에 속한다. 물론 어린이주일과 어버이주일은 역사적으로는 세계 교회들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 사회ㆍ문화적인 전통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절기들이 우리 사회적인 행사와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에 기여하는 의미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8ㆍ15광복절이나 3ㆍ1절 기념은 의식 있는 목회자들에 따라 교회의 축제일로 지키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역시 어린이 주일이나 어버이주일처럼 이런 기념일을 교회가 기념할 수 있는 뜻있는 날로 지낼 수 있다면 좋을 것으로 여겨진다.20) Ⅲ. 결 론 교회의 교회력은 인간의 노력이 보잘 것 없음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서 교회력이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는 없고 오직 받아들이기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계속적으로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어스 파쉬(Pius Parsch)는 그것을 ‘은총의 교회력’이라 불렀다. 또한 교회력은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인지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절기를 지키는 것도 자칫하면 우상 숭배의 눈속임이 될 수도 있다. 단지 예배에 치장을 하여 멋지게 보이도록 하는데 시간을 쓰기가 쉽다. 잘못된 동기를 위해서 절기를 지키는 것은 안 지키는 것 보다 못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시간의 구조를 이용할 때 절기에 따라 하는 행사가 복음전체를 만나도록 하는 목적을 잘 이루어낼 수 있다.21) 따라서 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해야 하는 책임 있는 자로서 교회력에 대한 충분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문화적 상황 및 개 교회에 적합한 교회력의 재조정과 그에 따라 창출된 성서일과를 도입한다면 이 겨레의 가슴속에 기독교신앙을 심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Ⅳ. 참고문헌 1. 국내도서 김종렬 외 51인,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강단」,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민장배, 「예배학」, 대전: 세화출판사. 박근원, 「오늘의 예배론」, 서울: 대한기독서회, 1992. 정일웅,「개혁교회 예배와 예전학」, 범지출판사, 2008. 정장복, 「교회력과 성서일과」, 서울: 대한기독서회, 1996. ______, 「예배학 개론」, 서울: 예배와 설교아카데미, 2008. 2. 국외도서 제임스 F. 화이트, 정장복ㆍ조기연옮김,「기독교예배학 입문」,서울: 예배와 설교아카데미, 2000. -------------------------------------------------------------------------------- 1) 정일웅,「개혁교회 예배와 예전학」(범지출판사, 2008), 251. 2) 정장복, 「교회력과 성서일과」(서울: 대한기독서회, 1996), 19. 3) 박근원, 「오늘의 예배론」(서울: 대한기독서회, 1992), 167. 4) 정장복, 32-38. 5) 정장복, 「예배학 개론」(서울: 예배와 설교아카데미, 2008), 336-340. 6) 정장복, 340-343. 7) 정장복, 「교회력과 성서일과」(서울: 대한기독서회, 1996), 82-83. 8) 박근원, 175-179. 9) 김종렬 외 51인,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강단」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15~16. 10) ajnavmnhsi" ; 기념(눅 22:19;고전11:24,25) 11)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 : “매주 일요일은 ‘작은 부활절’이며, 그 중 ‘부활절’은 일 년 중 가장 큰 일요일이라 할 수 있다.” 12) 정장복, 316-317. 13) 아리우스주의는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의 장로였던 아리우스(Arius)의 기독론을 말하는 것으로, 잠8:22,행2:36,롬8:29,골1:15,히3:2 등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께서 최초로 지으신 완벽한 피조물로써 ‘하나의 신’으로 승격되었을뿐 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325년 제1차 니케아 회의에서, 또한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정죄되었다. 14)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는 첫날로 성회(聖灰)수요일 또는 성회례일(聖灰禮日)이라고도 한다. 가톨릭에서는 수요일에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상징으로 머리에 재를 뿌리는 의식을 행하는데, 이날을 로마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참회하는 날로 정하고 옷에다 재를 뿌렸다. 이 날은 부활절 전 목요일의 세족일(洗足日)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화해의 길을 모두 함께 걷는다는 공동체(共同體) 의식을 굳히는 의미를 지닌다. 15) 그리스어(語)로는 파스카(Pascha)라고 한다. 교회력에서 가장 오래된 축일로 역사적인 기원을 분명하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리스어(語)나 프랑스어(語)의 호칭은 히브리어(語) 유월절인 페싸흐(הסַפֱֶֹּ;출12:11)에 기초하고 있고 영어의 이스터(Easter)와 독일어의 오스테른(Ostern)은 튜턴족(族)의 봄 여신인 에오스트레(Eostre)에서 파생된 것 같다. 16)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원이 된 신자가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써 새로이 성령(聖靈)과 그 은총을 풍부히 받고, 영혼에 그리스도의 병사로서의 지워지지 않는 인호(印號)를 받는 안수(按手)의식을 행하던 날을 말한다. 17) 행 2:4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8) 행 2:3 19) 구라파(歐羅巴) [명사] ‘유럽’의 한자음 표기 20) 정일웅, 260-262. 21) 제임스 F. 화이트, 정장복ㆍ조기연옮김,「기독교예배학 입문」(서울: 예배와 설교아카데미, 2000), 78-79
권능의 섭리
권능의 섭리 질문: 권능의 섭리란 하나님의 성결을 나타내는 것 인지요? 답 부탁드립니다... 답변: 충분한 답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자신을 다시 돌아 볼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성결이란 것은 '거룩하고 깨끗함'을 말하고, 권능의 섭리란 '권세의 능력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이치'를 말합니다. 권능의 섭리란 말을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님께서 질문하신 문장 그대로,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이치가 하나님이 거룩하고 깨끗함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논증이 있어야 합니다. 막연한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 인지나 피조물이 조물주를 단지 성결하다는 단어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이 어떤 권세를 가지셨는지, 그리고 그 권세를 어떤 능력으로 행하셨는지, 혹은 행하고 계신지, 하나님께 세상은 무엇인지, 그리고 세상 안의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를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부터 할 수 있어야 위와 같은 문장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어떤 거대한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나름 규정한 신과, 그 존재에 대한 비 이성적인 믿음, 그리고 자기 마음과 생각에 그럴 것이라고 규정한 신의 성품으로 성경과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은 피조물의 착각이고, 교만이며 한 단계 더 나아가 비 이성적인 상태라는 것을 스스로의 증명을 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셨다는 것과 그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신 것과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신 것과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예수님이 세상의 행사와 인간을 악하다고 하신 것을 성경에 그렇게 써 있으니까 그냥 그런 것이겠지라고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맹신입니다. 성경에는 위와 같은 말씀뿐 아니라 하나님이 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인간이 생각하는 것마다 악함으로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신 이유와 하나님이 왜 선하신지, 하나님이 왜 영이신지, 그리고 예수님이 왜 세상과 인간을 악하다고 하셨는지 그 과정과 이유도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님의 질문에 답만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그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는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히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성을 가진 인간이, 마음을 가진 인간이 악한 세상의 삶 안에서 힘듦과 부조리한 세상의 경험속에서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선과 악을 규정한 성경 말씀을 보고,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결이라는 말의 뜻이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것은 알되,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함과 깨끗함은 부정한 인간이 말하는 거룩함이나 깨끗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모르는 척 혹은 아예 모르고 있습니다. 가장 단적인 예로 세상은 높아져 있는 사람, 많이 가진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만, 성경에는 낮은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버리고 왔는데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라는 베드로의 말에서 그 다버리고 왔다는 말은 바로 세상에 속한, 세상이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높음과 채움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바로 깨끗하다는 것인데, 그 깨끗하다는 것은 인간이 세상적 통념으로 알고 있는 깨끗하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깨끗하다는 것은 누가 누구보다 혹은 이것보다 저것이 "더와 덜"이라는 상대적 가치관과 잣대로 정해지므로 그것은 진리일 수 없습니다.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므로, 이 나라에서는 그것이 선인데 저 나라에서는 그것이 악인 것과 같은, 때와 장소와 적용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규정은 절대 진리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에 속한 모든 높아지려는 욕심, 채우려는 본능을 모두 지워낸 상태가 바로 거룩한 것이고 깨끗한 마음의 상태라고 성경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약 4: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두 마음이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낮아짐과 비움'과 세상적인 것인 '높아짐과 채움'의 두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높아지고 채워가지려고 전력을 다하면서도 구원도 받고 싶으므로 부적처럼 하나님을 찾는 자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두 마음을 가진 자를 성경에서는 개구리 혹은 에브라임으로 표현하는데 그런 자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볼 수 없으면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지요. 즉 권능이니 섭리니 그리고 하나님과 성결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우선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단지 사전적, 혹은 문자적 의미의 해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이해해야 하며, 그 성경은 한 줄거리로 되어 있는 것이므로 무식한 자든 천한자든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고 알 수 있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학문적 지식의 높음을 자랑하기 위하여 오히려 누구나 읽고 알 수 있는 성경을 알 수 없는 말씀으로 뒤 섞어 해석을 해 놓고, 비 이성적인 현상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오히려 성경을 비 이성적인 말씀으로, 비 진리로 변개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짐승과 다르게 인간에게 이성을 주었고, 그 이성적인 사람이 읽고 알라고 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시는데 암기력 좋고 똑똑한 사람만 그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므로 스스로 거짓맛을 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위에 정의 드린 진리가 무엇인가를 토대로 성경을 본다면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시대적.학문적 관점은 비 진리이므로 동시대 관점에서 누구에게나에 해당되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본다면 성경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신 말씀이라야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비 진리적 관점이 아니라 진리적 관점으로 보면 그것이 진리의 말씀이 된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볼 수 있고, 어느 세대나 적용이 되는 진리적 관점에서 성경을 봐야 하겠습니다. 님의 질문을 보고, 권능,섭리,성결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과연 성경적으로 알고 질문을 하시는 것인가를 스스로 확인해 보시는 것이 먼저 되어야 할 것 같아서 설명이 길었습니다. 현 기독교인들의 문제가 성경을 들고 있으면서 성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다 하면서 유명한 목사라는 사람을 찾고, 세력을 보고 모이며, 집단적 최면에 걸린 상태에서 신앙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며 하나님을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엑세서리처럼 인지하고 있기에 감히 피조물에 불과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 조물주인 하나님을 규정하고 있음에 안타까운 마음에 질문 자체에 오류가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집단, 모임에서 잠시 벗어나서 '하나님과 나' 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이성적인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지요. 조물주, 피조물, 이성을 가진 사람, 그리고 이성을 가진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성경책,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흙에서 만들어진 인간이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이치안에서 그 한정된 삶 동안 사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대일 관계에서 성경을 통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비 이성적인 상태의 신비주의인 어떤 환청.환각과 같은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이 지극히 이성적인 방법으로 만나고, 또 알 수 있도록 성경을 주셨습니다. 사람이나 모임을 따라가며 진리를 찾지 마시고, 성경 말씀 안에서 진리를 찾으시는 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교 정경
그리스도교 정경 그리스도교 교회는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들로부터 성서를 받았으며, 초기 개종자의 대다수를 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어 성서(70인역)가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공식적인 성서가 되었으며, 신약 성서에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히브리 성서 인용들은 바로 이 70인역에서 따온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정경 안에 있는 외경들의 근원이 어떻든지간에, 이 외경들은 그리스도교 성서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러나 이 외경들의 정확한 정경적 지위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았다. 신약 성서에서 이 외경들을 직접 인용한 곳은 없지만, 때때로 그 외경들을 알고 있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적 교부들(1세기 말부터 2세기 초)에게는 이 문헌들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그러나 멜리토(2세기 소아시아 사디스 주교)가 작성한 구약 성서 목록에는 그리스어 성서에서 추가된 문서들(외경)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오리겐(약 185-254년)은 구약 정경을 엄밀하게 22권으로 제한하고 있다. 오리겐 때부터, 히브리어에 익숙해져 있는 교부들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라도, 외경들을 구약에서 분리하는 한 편, 그 외경들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었다. 시리아 동부에서는 7세기까지도 교회가 히브리 정경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집회서(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를 더하고, 역대기, 에즈라, 느헤미야를 제외한 히브리 성서를 사용하였다. 여기에 솔로몬의 지혜, 바룩, 예레미야의 편지, 다니엘 추가본 등이 합쳐지기도 하였다. 6세기 페시타(시리아 본)의 필사본은 암브로시안 사본으로 알려졌는데, 거기에는 마카베오 3, 4권과 에스드라 2, (때로는 4) 권, 요세푸스의 전쟁사 7권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프리카 교회의 초기 의회들(히뽀에서 393년, 카르타고에서 397, 419년)은 외경을 성서로 사용할 것을 긍정하였다. 4세기 그리스도교 정통 신학의 일인자인 아타나시우스는 "정경들"을 분리하여, 그리스도인들만 "읽는 책들"과,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모두 거부한 "외경들"로부터 구별하였다. 표준 라틴어역을 준비하면서 성서신학자 제롬(347-419/420 경)은 "정경들"과 "교회의 문헌들"을 분리시켰는데, 교회의 문헌들(즉 외경 문서들)이란 영적 함양에 좋지만, 권위 있는 경전은 아닌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정반대의 견해인 어거스틴(354-430, 위대한 서방 신학자 중 하나)의 입장이 우세하여서, 라틴 불가타 역에는 이 문서들이 남아 있게 되었다. 작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6세기 초 로마 교회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알려진 Decretum Gelasianum은 토비트, 유딧, 솔로몬의 지혜, 집회서, 마카베오 상 하를 성서에 포함시키고 있다. 중세기에 걸쳐, 외경은 로마 교회와 그리스 교회에서 전반적으로 성서로 인정되었으며, 이따금 이론상의 의혹이 제기되곤 하였다. 1333년 리라의 니콜라스(프랑스 프란세스칸 신학자)는 라틴 불가타와 "히브리 진리" 사이의 차이점을 논하였다. 그리스도교-유대교 간의 논쟁, 히브리어 연구에 대한 관심의 증대, 그리고 결정적으로 종교개혁이 그리스도교 정경에 대한 쟁점을 되살아나게 하였다. 개신교도들은 모든 책들의 정경적 지위를 부인하고, 오직 히브리 성서에 있는 책들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다. 최초의 자국어 성서로서 의문시되는 문서들을 분리시킨 것은 야콥 판 리스펠트에 의한 네덜란드 역이다(안트베르프, 1526). 루터의 독일어 판 성서(1534)도 이같이 분리를 하고, 최초로 "외경"이라는 제목을 달았으며, 성경과 동등하게 여겨질 수 없지만 신앙에 유익하다고 주를 달아 놓았다. 개신교의 견해에 대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는 트렌트 의회(1546)에서, 라틴 불가타 전 권이 동등한 정경적 지위를 누린다고 교리적으로 확언하였다. 이 교리는 1870년의 바티칸 의회에서 다시 확증되었다. 그리스 교회에서는 예루살렘 의회(1672)에서 몇 외경들을 명백히 정경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9세기에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들은 이 문헌들을 성경에서 제외시키는 데에 동의하였다. 영국 교회의 구약 정경사는 대개 제한하는 쪽에 가깝다. 위클리프 성서(14세기)가 외경을 포함하고 있지만, 서문에서 제롬의 판단을 받아들이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영국 주교 마일즈 코버데일(1535)의 번역본은 처음으로 이 책들을 분리해 내면서도, 바룩을 예레미아서 다음에 집어 넣었다. 영국 교회 39개 조항(1562)의 제6조는 명백하게 이 책들이 교리를 형성하는 데에 가치가 없으며, 그렇지만 교훈적 가치가 있으며 읽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외경을 제외시킨 최초의 영어성경은 제네바 성서(1599)이다. 1611년의 제임스 흠정역(King James Version, 1611)은 이 책들을 구약과 신약 사이에 넣었다. 1615년에 대주교 조지 아봇은 외경 없이 성서를 발행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1630년 이후에 간행된 흠정역들은 외경을 제본에서 빼어 버렸다. 1640년의 제네바 성서는 처음으로 영국 안에서 의도적으로 외경을 제외하고 출판하였으며, 이어 1642년의 흠정역도 그렇게 하였다. 1644년 영국의회에서는 이 책들의 공적 독서를 금지시켰으며, 3년 후 장로교에서 발표한 웨스터 민스터 고백은 정경에서 배제함을 선언하였다. 1827년의 '영국과 해외 성서 공회'는 외경을 포함한 성서는 인쇄하지도 배포하지도 않기로 결의하였다. 20세기 영국의 대부분 개신교 성서들은 의문이 가는 책들을 삭제하였거나, 다른 권으로 포함시켜 놓았으며, 예외적으로 도서관용에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포함시켜 놓았다.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스도의 군사 나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셔서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나의 행위로 인함이 아니고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신 것이다. 나는 군사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 나는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모집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기억해 모든 것을 참아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얻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어 함께 살고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할 것이고 부끄러움 없는 인정된 자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나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릴 것이다. 나는 자기를 깨끗이 하여 쓰임에 합당하고 선한 일에 예비될 것이다.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와 함께 의, 믿음 사랑, 화평을 좇을 것이다. 나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돈과 물질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긍하지 않고 겸손하고 성령을 훼방하지 않고 순종하고 감사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스스로를 거룩하게 구별할 것이다. 나는 이웃에게 다정히 대하고 원통함은 즉시 풀어버리며 참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절제하고 온순하고 선한 것을 좋아할 것이고 배반하면서 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급해 하지 않고 자고하지 않으며 쾌락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의 모양과 함께 경건의 능력을 가질 것이다. 나는 핍박을 두려워 하지 않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고 말씀 전파하는 일에 힘쓸 것이다. 나는 범사에 오래 참고 진리의 가르침과 사랑으로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할 것이다. 나는 진리의 교훈만을 받을것이고 나의 사욕을 좇기 위한 스승을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함으로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받고, 전도인의 일을 하고, 직무를 다하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켜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딤후 인용) 이 중에서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이끌어가시는 성령님의 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믿음으로 해 낼 것이다. 성령님 도와주세요!
기도는 배워야 한다
기도는 배워야 한다 눅11:1 1.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1)세례받으실 때(눅 3: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열 두 제자를 선택하실 때(눅 6:12-13)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3)변화산에서(눅 9:28-29)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4)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요 11:41-42)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 니이다\" (5)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마 26:36-42)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6)새벽에(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7)저녁에(막 6:46-47)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8)밤을 새워(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커다란 사건이 있기 전에는 반드시 기도하셨다. 또한 밤을 지새워 기도하시고, 몹시 지쳤을 때도 새벽 일찍이 일어나 기도하셨다. 만약 사람들 중에서 기도가 필요없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예수님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많은 시간을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이 아버지되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언제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이 하셨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셨다. 당신의 능력으로 나사로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일으키셨다. 꼭 그래야만 했는가? 그렇다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위해서는 왜 기도하지 않으셨나? 2. 제자들은 기도할 줄을 몰랐다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지만 제자들은 배를 타고 먼저 건너가려고 했다. 물론 풍랑을 만났지만(마 14:22-23).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왔으나 제자들은 고치지 못하고 망신만 당했다. 나중에 제자들이 조용히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말씀 하셨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그들은 그 때까지 기도할 줄 몰랐다. 결국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다.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이 때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이다. 주기도는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다. 중언부언 하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깊이 생각지 않고, 느끼지도 않고, 의미없이 암송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도 또한 중언부언하는 기도이다. 결국 기도의 훈련을 쌓지 못한 베드로 일행을 보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 떨어지듯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눅 22:44), 제자들은 깨워도 깨워도 잠만 자고 있었다. 기도는 훈련이다. 평소에 기도의 훈련을 쌓은 사람이 영적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 기도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자 다 달아났고, 기도하지 못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기도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까?
기도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까? 아래의 글은 어느 교회의 전도지 고정 칼럼니스트이자 큐티를 가르치는 집사님의 글인데 이 글을 읽고 나서 기도에 관해 혼동이 와서 이렇게 무엇이 성경적으로 맞는 것인지를 알고 싶어 질문을 올립니다. 한 아들이 성장하여 부모를 떠나 멀리 타국으로 갔다. 그 곳에서 사업을 했는데 여러가지 여건이 맞지 않아 고전하다 결국 실패하고 걸인 신세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올 여비 조차 마련하기 어려워 부모님께 도와 달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계속 편지를 보냈는데도 끝내 부모님으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지 못하였다. 결국 편지만 열심히 보내다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그의 부모님들은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아들로부터 계속 편지가 오는데 그 아들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였다. 아들은 편지 봉투에 받는 사람 주소만 썼을뿐 보내는 사람 주소를 쓰지 않아 그 부모님들이 딱한 사정은 아나 도와 줄 방법이 없었던 것이였다. • 믿음의 시작은 기도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싶다. 특히 한국사람들은 기복적 신앙 습성의 탓인지 구하고 바라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들 한다. 응답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대부분 원했던 일들이 이루어졌음으로 그것을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기도의 목적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대화, 교통)가 더 우선이 아닐까? 그렇다면 기도를 통해 우린 어떻게 하나님과의 대화를 가능케 할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기도 했더니 즉시 핸드폰으로 전화를 주셔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도 할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실 수 있는 기회와 그 방법을 드려야 한다. 타국으로 갔던 아들처럼 열심히 부모에게 편지(기도)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도의 응답(대화)을 어떻게 하실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것은 바로 한가지, 말씀(성경)을 통해서이다. 말씀이야 말로 하나님과 통화할 수 있는 핸드폰임을 명심해야 하고 우린 그것(성경)을 늘 사용하는 훈련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 임마누엘에 QT-사역팀이 있다. 적은 수에서 시작 했는데 지금은 10명 정도 매주 모인다. 필자가 감히 말하건데 QT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민 생활이 바쁘고, 시간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숨쉬는 것을 거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말씀을 대하는 내 자신의 마음 가짐이다. QT는 성경의 구절을 잘라서 구절 구절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날의 음성을 듣는 작업이다. 즉 QT는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데이트 인것이다. 왜 내 믿음은 성장하지 않을까 고민하지 말고 내가 지금 하나님과 온전히 교통하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성경공부는 하나님을 알아가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내 영성의 성장에는 별 효과가 없다. 오히려 때로는 쓸데없이 머리만 커져 신앙생활에 지장을 가져 오는 경우도 종종 보아 왔다(교만). 그리고 주위에서 QT를 꾸준히 해오신 많은 분들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임마누엘 교우들에게 QT를 권하고 싶다. 또 한가지 QT는 나눔방에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고 정기적(일주일에 한번 정도)인 소그룹 모임을 갖는 것이 바람직 하다. 혼자서도 할 수 있겠지만 자꾸 나태해지기 쉽고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2008년에는 임마누엘의 모든 교우들이 QT를 생활화 하고 많은 나눔방들이 생기는 한해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당부 하건데 이제는 결단해야 할 시기이다, QT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목숨 걸고 해야한다 내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
기도의 목적
기도의 목적 기도하는 것도 기도하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또 기도에 따라서 취해 야 할 자세도 대에 따라서는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은 기도의 목적과 유형에 대하여 공부해 보기로 한다. 기도는 태도나 시간에 규정이 없다.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최선을 다하는 기도 생활이 필요한데 성도는 언제나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1. 기도의 목적 1)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기도하지 않았을 때 시험이 찾아온다.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2)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약5:16)/ 기도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막9:28-29)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 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3) 주의 종들이 승리하기 위하여 기도하라(히13:18)/기도는 성도들의 영적 호흡이요 승리생활의 모 습이다. (히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 을 확신하노라 4)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라(단6:10)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5) 환난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24:20)/장래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 의 명령이다. (마24:20-21)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 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 기도의 유형(눅22:39-46) 1) 회개의 기도(눅18:13)/성전에 올라간 세리의 기도 (눅18:13-14)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 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2) 믿음으로 구하는기도(막9:23)/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3) 친구관계에서의 기도(눅11:5-8)/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 중에서 집 주인은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예 수님의 모형이고 주인의 벗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주의 종들의 모형이다. 떡 세덩이는 성령을 상징하고 떡은 예수님인데 이것은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형이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상징이다. (눅11:5-8)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 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 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 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4)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의 기도(눅11:9-13) (눅11:9-1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구하라 주실 것이요 - 이것은 앉아서 기도하는 단계다/주실 때까지 구하라 찾으라 찾을 것이요 - 이것은 행동하고 노력하는 단계이다./끝까지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 이것은 노력 후에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다리는 상태이다. 만약에 조급 한 맘으로 열리기도 전에 열고들어간다면 강도요,절도가되는것이다. 5) 서원기도 (1) 야곱의 기도(창28:20-22) / 야곱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면 십일조 하기로 서 원했다. (창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 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 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2) 입다의 기도(삿11:30-31)/입다는 승전케하시면 처음만난 자를 번제로 드리기로 서원했다. (삿11:30-31)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 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 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 한나의 기도(삼상1:10-11)/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했다. (삼상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 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 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여호와께 서원했거든 입에서 나온대로 행하라 (민30:2-3)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또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비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일이나 스스로 제어하려 한 일이 있다 하자 여호와게 서원했거든 갚기를 더디 말라 더디면 죄니라 (신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 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마음에 서원하는 것은 해로울 지라도 변치말라 (시15: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 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갚지 않을 서원은 하지 말라 (시76:11)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 물을 드릴지로다 기도는 어떤 유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내용이 매우 중요한것이다.그러므로기도의 내용에는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서는 안되고 자기 사정을 하나님앞에 간절하게 고한 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듯대로 순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기도의 자세라고 할 수가 있다.
기독교 각 교단에 대하여
기독교 각 교단에 대하여 Q: 대한예수교장로회, 침례교회, 성결교회,감리교등등 장로회내에서도 고신,통합,합동 뭐 이렇게 많이 나뉘던데. 각 교단에 따라서 예배의 형태와 예배의 방법이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강단에 십자가를 반듯이 세워야 하기도 하고 예배때 드럼을 쓰지 못하기도 하고 많은 차이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교파가 나뉘게 된 배경과 각 교단의 성격과 차이점 등등을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A1: 장로교에서 크게 예수교 장로회, 기독교 장로회로 나눕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교 장로회에서 합동, 통합, 고신으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 성경 이해에서 성경의 무오, 축자영감을 주장하는 교단 = 합동, 고신 지금은 교단의 규정할 수 없고 개 교회의 특징을 구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개 교회별로 다양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지역적 차이, 성도들의 구성의 차이 등이 있음으로 어떻게 대별하기가 어렵습니다. A2: 각 교단별 중요 강조점 ①로마천주교 ⒈창립년도:321년 ⒉창시자:콘스탄틴. ⒊주요교리:⑴일요일 신성설 ⑵영혼불멸설 ⑶연옥설 ⑷유아세례 ⑸사죄권 ⑹성사중시 ⑺정치와 종교일치 ⑻삼위일체 ②모라비안교 ⒈창립년도:1457년 ⒉창시자:씨릴 ⒊주요교리:⑴카톨릭 부패성의 반대 ⑵도덕정화 ⑶성경강조 ⑷믿음과 행함강조 ⑸연옥반대 ⑹정교분리주장. ③루터교 ⒈창립년도:1517년 ⒉창시자:루터와 멜랑톤 ⒊주요교리:⑴교황권반대 ⑵성경제일 ⑶칭의 ⑷성사반대 ⑸유아세례 ⑹삼위일체. ④장로교 ⒈창립년도:1560년 ⒉창시자:칼빈,쯔윙글리,낙스. ⒊주요교리: ⑴교황권반대 ⑵하나님주권강조 ⑶성경우선 ⑷예정설 ⑸인간무능강조 ⑹은혜와 중생강조 ⑺교회정치강화. ⑤성공회 ⒈창립년도:1520년 ⒉창시자:위클립, 헨리8세 ⒊주요교리:⑴칭의중시 ⑵원죄주장 ⑶예정설 ⑷정교일치 ⑸국교고수 ⑥회중교 ⒈창립년도:1581년 ⒉창시자: ⒊주요교리:⑴교황권반대 ⑵도덕중시 ⑶장로제도배격 ⑷평신도우선 ⑸성서적신앙강조 ⑦조합교 ⒈창립년도:1581년경 ⒉창시자: ⒊주요교리:⑴세계평화유지 ⑵복음전도 ⑶정교분리 ⑷개인자유신앙 ⑧침례교 ⒈창립년도:1608년경 ⒉창시자:죤스데스 ⒊주요교리:⑴정교분리 ⑵개인자유 ⑶교회독립 ⑷침례 ⑸유아세례반대 ⑹성찬중시 ⑺성경중심 ⑻중생강조 ⑨퀘이크교 ⒈창립년도:17세기말 ⒉창시자: ⒊주요교리:⑴윤리강조 ⑵경건 ⑶무저항 ⑷전쟁반대 ⑸성례반대 ⑹십일금 ⑺조직반대 ⑻성경우위 ⑼비무장 ⑩감리교 ⒈창립년도:1740년 ⒉창시자:요한웨슬레 ⒊주요교리:⑴칭의 ⑵예정설반대 ⑶중생강조 ⑷도덕강조 ⑸은혜강조 ⑹감독제실시 ⑪구세군 ⒈창립년도:1865년 ⒉창시자:월리암푸스 ⒊주요교리:⑴선교강조 ⑵군대식조직 ⑶남녀동등 ⑷절제운동 ⑸자선사업 ⑫성결교 ⒈창립년도:1901년 ⒉창시자:나까다 시게하루(中田重治),CE카우만 ⒊주요교리:⑴교파경시 ⑵중생 ⑶성결 ⑷신유 ⑸회의제도 ⑹엄숙 ⑺경건 ⑻예수중심 ⑬오순절교 ⒈창립년도:1894년 ⒉창시자:미국평신도일단,감리,침례교인으로 구성 ⒊주요교리:⑴성령 ⑵침례 ⑶성찬 ⑷열심 ⑭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⒈창립년도:1860년 ⒉창시자:1800년대 재림운동의 산물,재임스화잇,죠셉베이츠.등. ⒊주요교리:⑴천주교의 삼위일체 ⑵모라비안교의 도덕정화,성경강조.⑶루터교의칭의 ⑷장로교의 중생과 하나님의 주권강조 ⑸성공회의 원죄주장 ⑹조합교의 평화 전도 정교분리 ⑺침례교의 침례 유아세례반대 ⑻감리교의 은혜강조 ⑼퀘이크교의 비무장 경건 윤리강조.
기름 부으심에 대하여
기름 부으심에 대하여 질문: 성령님에 기름 부으심에 대하여 다른 분들은 어떻게 알고있나 궁굼해서요 좋은 글을 부탁드립니다 답변(1) 등불을 켜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합니다. 등불은 빛을 발합니다. 우리가 빛의사람이 되려면 즉 예수의 자녀가 되려면 예수 진리안에 살아야 할것입니다. 예수는 곧 진리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에 진리입니다. 지금 성령으로 임하신 하나님예수는 곧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 속사람안에 진리가 없다면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는 기름입니다. 빛을 발하기 위한 기름입니다. 그 진리는 예수의 말씀이십니다. 가르침입니다.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그 말씀을 마음의 그릇에 담아야 합니다. 그대로 지키고 행하여야 합니다. 이 모습이 예수의 흰 옷을 입은 증거가 됩니다. 이것이 신랑을 맞이할 신부의 기름이 충만한 등불을 예비하는 것이라 할것입니다. 예수진리를 알게 하시는 이가 바로 하나님예수이십니다. 성령으로 임하셔서 말이죠. 진리를 부어주시는거지요. 답변(2):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므로, 빛을 빛으로 여기고 가장 먼저 내 마음 안에, 그리고 세상에 빛을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혜\"를 깨달아 가져야 하기에, 기름은 말씀에서 \"지혜\"를 말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은 반드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선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악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옳다하시며 법으로 규정한 것은 선이고, 사람이 옳다하여 사람의 교훈으로 규정한 것은 악입니다. 가령, 하나님은 인생의 윤리적 선을 악이라고 하시지만, 인생은 윤리적 선을 선이라 하고 또 옳다하고 좋아하는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의 교훈은 반드시 사람이 듣기 좋은 말을 합니다. 가령,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 하며,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 이라 합니다. 또 무조건 예수님 이름만 알고 있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므로, 세상 일에 매진하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고 하셨습니다. 다음 말씀들에서 나오는 \"기름\"과 관련된 자들은 이미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하고, 구원받았다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씀들입니다. [시편17:10]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시편 55] 20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21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인생이 만든 교훈, 세상의 지혜가 자기 기름입니다. 인생의 지혜는 사람에게 채움과 높음의 수단을 제공하므로, 인생의 마음에 잘 들어갑니다.) [에스겔 23장] 40 또 사자를 원방에 보내어 사람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이 오매 그들을 위하여 목욕하며 눈썹을 그리며 스스로 단장하고 41 화려한 자리에 앉아 앞에 상을 베풀고 내 향과 기름을 그 위에 놓고 (* 예수님은 화려한 자리에 앉으신 적이 없습니다. 폐함을 받은 선민, 바리새인들이 화려한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건물과 위엄있어 보이게 꾸민 단상, 그리고 설교때 입는 의상은 바리새인들이 하던 짓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조직과 사람을 보게 하면서 입으로는 예수님을 말하지요. 그것이 예수님 향과 기름을 그들의 잔치, 이미 구원받았으니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 [잠언5장] 1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2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3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4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5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6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 예수님은 육신의 아비가 그리스도인의 아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성경에서 아들아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들으라고 합니다. 음녀의 지혜는 인생의 마음에 좋은 말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채움과 높음을 향한 인생의 마음에는 씁니다. 낮아짐과 비움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란 지혜를 말하며, 이 지혜란 인생의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잠언은 자신을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부어주시는 기름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빛으로 여길 수 있게 하는 깨달음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죽으면 흙으로 사라지는 인생의 헛됨과 높음과 채움을 향한 인생의 마음이 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예수님이 따라오라 하신 길을 따라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르 지고 나를 쫓으라\" 하셨으며, \"세상에 속한 모든 마음을 버리라\"고 하셨고, \"세상의 행사가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내 모든 욕구와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과 악의 규정이 무엇인지 알고, 왜 그러한지 깨달아야만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복음서에 반복하며, 강조하며 말씀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완성하신 마음의 법인 성령의 법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하나님의 법을 덮어버리고, 교리법, 교회법을 만들어 인생의 교훈을 법으로 만들어 따르게 합니다. 예수님이 따르라고 하셨다면, 내 생각이나, 인간의 생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옳다하시는 방법이 이미 성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성령의 법\"이라고 하였고, 야고보는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하며,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밝힙니다. 예수님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말씀과 \"모세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그 자유함과 온전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이 있다는 말이며, 자신들을 그 법을 따르고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미련한 다섯처녀와 슬기로운 다섯처녀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기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처녀만이 예수님께서 합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령은 이미 말씀 안에 계십니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사람이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성경을 주셨고, 인간만이 생각이란 걸 하게, 즉 사고하게 만드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본능에만 충실하다가 죽으면 흙으로 사라지는 짐승과 사람이 유일하게 다른 것은 인간이 사고를 한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사고 하는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성경이면 성경은 완전해야 합니다. 성경이 완전하다 하면, 당연히 성경 안에 성령님이 계셔야 합니다. 말씀에서 성령을 받으라 하였으니 말씀에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말씀을 보고, 말씀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알았으면 말씀 안에서 찾아 만나야지 왜 세상에서 찾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에서 찾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더럽다고 하셨지요. 하나님 나라는 마음에 서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악하다고 하셨으니,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정반대만 옳다고 하시는 말씀으로 깨달음 받아 내 마음에 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성령님도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이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라\" 하셨으니, 그것은 곧 나를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깨달음을 받습니까. 성경 말씀입니다.
대림절이 무엇인가요?
대림절이 무엇인가요 ? 2004-01-02 14:36:35 read : 137 대림절이라고 들어봤는데요. 이때쯤이였던 것 같은데요. 교독문에도 있고요. 정확한 의미나 그때 지켜야 할 것들과 신앙적인 교훈등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강절 대강절(待降節) ·대림절(待臨節)이라고도 한다. 이 절기는 서방교회에서는 4세기부터 지켜왔다. 부활절 이전에 준비기간으로서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이 성탄절 이전 네 주간 동안 지켜지는 절기이다. 성탄절 이전 네번째 주일이 첫 강림절이고 이날 강림절 화환에 준비된 네 개의 촛대 가운데 한 곳에 불이 붙여진다. 두번째 주일에 다시 촛불이 하나 더 켜진다. 이렇게 해서 네번째 주일은 모든 촛불에 불이 켜진다. 설교자는 그 주일에 해당하는 성서구절로 설교한다. 터툴리아누스의 글을 보면, 그 당시에 강림(Adventus)이라는 말은 이미 신이 예배 장소에 임재(臨在)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이 강림절은 갈리아 지방에서는 4세기에 에피파네스 절기(1월 6일) 앞에 금식하며 지켜졌다. 그리스 교회에서는 오늘까지 크리스마스 이전에 금식일로 지킨다. 그러다가 6세기경 처음으로 성탄절 이전의 절기로서 등장하였다. 8세기의 아말라리우스의 메츠의 글을 보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날’로 지켰음이 드러난다. 이 강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시키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심판을 수행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시키기 위해 다시 오는 것을 기다리며 훈련하는 절기로서 그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뜨레스 디아스에 관한 것
뜨레스 디아스에 관한 것 2004-01-10 11:33:27 read : 3 뜨레스 디아스에 관하여 알고 싶습니다. 자세한 것 아시는 분은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분은 좋은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이단이라고 하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박성환 특정 집단이 이단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쉽게 판단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봅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듯, 정통인 것 같으면서 이단인 곳이 있고, 이상하게 보이지만 정통인 곳도 있구요.. 가장 정확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시겠지요. http://www.hansarang21.org/tres/tres%20dias.htm 이 사이트에 한번 가보시면 도움이 될수 있을것입니다. 아래는 다른 곳에서 얻은 글입니다. 뜨레스디아스에 대한 연구보고서 1. 뜨레스디아스의 기원 뜨레스디아스는 1940년 가톨릭에서 시작된 영성훈련인 구르실료가 개신교에 들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뜨레스디아스는 스페인어로 “사흘”의 뜻이다. 3박 4일간 독특하게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서 실시된다. 3일간 크리스천의 기본이 되는 생활의 체험을 통하 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소명을 깨달아 알고 응답하는 회심의 여정을 체험하게 한다. 그 내용은 신앙의 빛으로 인도되는 하나님 체험의 여정,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다짐하 는 회심 체험의 여정, 나와 환경을 복음화해야 한다는 소명 체험의 여정이다. 1949년 1 월 7-10일까지 3박 4일간 스페인의 마요르까에서 공식적인 첫 모임이 시작되었다. 다양하게 만들어진 프로그램과 강의는 케리그마에 일치한 교회의 예언적 사명을 수행하 는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가톨릭 내에서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 참여를 권장하기까지 20년간 내용변경과 실행상의 문제점등이 수정되고 보완되 는 과정을 거쳤다. 현재 전 세계 가톨릭 교회 내에서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평신도 영성 훈련으로 가장 각광받는 영성훈련으로 발전되고 있다. 1967년 5월 이 운동은 한국 천주교회에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현재 천주교회에서는 전 체 한국 교구에서 신앙의 새로운 시대 적응을 위한 신앙 사고의 전환의 한 방법으로 활 달하게 활용되어지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에서는 1985년 미 8권 교회와 미국에 있는 한 인교회를 통하여 소개되면서 이 프로그램의 주도권 쟁탈을 놓고 마치 한국의 고질적인 교파분열을 재현하듯 교단별, 목회자와 목회자, 목회자와 평신도, 평신도와 평신도 그 룹 간에 핵분열을 가속화하고 있다. 2. 뜨레스디아스 프로그램의 내용 프로그램의 내용은 신학적인 핵심인 메시지의 선포, 회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호소 력 있는 선포,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체험하는 기쁨,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실생 활에서 증거하는 삶을 주로 다루고 있다.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이 프로그램은 3박 4일 동안(청소년을 위한 2박 3일의 과정도 있음)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실시된 다. 원래 가톨릭에서 처음 전수될 때는 강의, 그룹토의, 찬양, 섬김 훈련과 각종 독특히 구 성된 프로그램이 있으나 개신교로 전래되면서 용어는 물론 강의 내용은 물론 프로그램 이 자의적으로 변형시켜 실시되고 있다. Rollo라고 하는 15개의 주제별 강의 제목은 1. 삶의 이상, 2. 은혜, 3. 교회, 4. 성령, 5. 경건한 신앙, 6. 성경공부, 7. 성례전, 8. 그리스도안에서의 행동, 9. 은혜의 방해요소, 10. 지도자, 11. 환경, 12. 은혜 안에 서의 생활, 13. 크리스천의 공동체 생활, 14. 새 공동체 모임, 15. 4th Day이다. 주제별 강의 이외에도 현재 한국에서 실시되는 프로그램 중에는 묵상기도, 성찬식, 편지 보내기, 선물보내기, 특별기도회, 세족식, 회개한 죄목 태우기, 촛불길 걷기, 사랑의 포 옹, 아침 만남의 시간, 침묵훈련, 개인고백의 시간, 간증시간 등 실로 다양하다. 3. 연구결과 (1) 긍정적인 측면 1) 짧은 3박 4일의 훈련을 통하여 신앙의 감격과 섬김 훈련의 경험, 봉사와 충성의 결단 을 높여준다. 2) 비록 가톨릭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이지만, 내용의 수정 보완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영 성 훈련의 자극과 도전을 주었다. (2) 부정적인 측면 1) 현재 한국교회에서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나 교회 등 약 100여 군데에서 명칭 조차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다. 원형에 충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곳도 있지만, 가톨릭적 인 요소를 제거라는 명분으로 내용과 형식을 자의적으로 변형시켜 운영하고 있기 때문 에 복음적, 신학적 검증을 총괄적으로 하기 힘이 든다. 2) 이단으로 규정되었거나 지목받고 있는 불건전한 단체들이 세력 확장의 방편으로 활용 하고 있다. 3) 정상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주관하는 교회나 단체에서 훈련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소 위 “복음적인 성경공부”를 빙자하여 별도 그룹을 형성한 후, 이들을 이용하여 교회를 개척하거나, 자신들의 교회로 유인하여 기성 교회에 분란을 주는 경우가 있다. 4) 훈련에 참석한 경험자들이 교회에서 파당을 형성, 특권의식에 젖어 별도의 내, 외부 의 비공식적인 모임을 선호하기 때문에 개교회 모임에 지장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5) 참석자들에게 헌금을 강조해서 재정적인 이득을 추구한다거나, 재정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을 무시하고, 몇몇 주관자들이 재정운용을 철저하게 비밀로 하여 수입과 지출이 베일에 가려진 곳이 있다. 6) 일부 지역(해외포함)이나 개 교회에서는 이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생기는 교회내의 분 란 때문에 이단으로까지 규정되어 철저하게 참가를 금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교회에 서 적극적으로 참석을 홍보하고 권장하는 교회도 공존하고 있다. 7) 세례 받지 않은 초신자 참석, 세례의식 거행, 아브라죠(포용), 무분별한 가톨릭 용 어 사용, 시각적 효과를 위한 지나친 장식에 의존하여 참석자들로부터 거부감을 일으키 게 하는 곳도 있다. 8) 고도로 형식화된 구조와 극단적으로 외부와 차단된 밀폐공간에서의 훈련은 개인에 따 라 억압적인 분위기로 영성 훈련에 대한 나쁜 선입관을 갖게 할 수도 있다. 4. 연구결론 (1) 뜨레스디아스나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은 교단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준된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에 개교회 목회자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와 교회의 성격과 내용을 신중 하게 연구하고 분석하여 참가여부를 목회자 스스로 판단하고 반드시 담임목회자의 추천 을 받고 참가하도록 해야 한다. (2) 이단이나 불건전한 단체와 교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는 절대로 참석을 금하도 록 한다. (3) 이 프로그램은 진행하는 단체나 교회에서도 비밀유지를 통한 성과의 극대화라는 명 분에서 탈피하여 목회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여 목회자와 시행단체간의 갈등이 발생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4) 이 프로그램을 경험한 성도들의 관리는 재교육이라는 명분으로 프로그램을 주관한 단체가 비공개로 할 것이 아니라, 담임 목회자의 목회 영역 안에서 교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 이 프로그램이 이단이나 이에 가까운 교회나 단체가 기성교회나 교인들에게 주는 피 해를 막기 위해서 지속적인 주시가 진행되어야 한다. (6) 변혁의 시대에서 이 프로그램을 복음 안에서 긍정적으로 보완 발전시켜 목회자, 중 직자, 평신도,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 영성 훈련의 돌파구와 새로운 신앙훈련으로 발전 될 수 있는 대안제시를 위해서 긍정적인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맥추감사절
맥추감사절 맥추감사절은 구약의 3대 절기의 하나인 맥추절을 계승한 절기이다. 유대인들의 추수 감사절이었던 맥추절은 히브리 원어로는 ’하그 하카츠르’이며 ’거두어 수확하는 절기’란 뜻을 가지고 있다. 맥추절은 관련 명칭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출 23:16) 후대에는 일반적으로 칠칠절, 오순절 등으로 불리워졌다. 칠칠절(七七節)은 이때가 보리 수확의 첫 단을 하나님께 드린 초실절(初實節)로부터 시작하여 7주간의 곡물 추수기가 끝난 뒤의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오순절(五旬節) 또한 추수기와 관계된 말로, 이 날이 초실절 다음날로부터 계산하여 제 50일째 되는 날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그 외에 축제일 자체보다는 맥추절의 의식에 초점을 맞춘 ’성회’(聖會)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유월절, 초막절과 같이 이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회로 모였음에서 유래된 말이다. 한국에서는 쌀 추수에 맞추어 지켜지는 추수감사절과 더불어 보리 수확과 관계되는 맥추감사절 역시 계속 지켜져 오고 있다. 이러한 맥추 감사절은 한해의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하는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목사님의 설교/2005-09-24
목사님의 설교 목회를 하고 계시는 목사님께서만 또는 이카페를 운영하고 계시는 목사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저의 목사님은 정말 성실하시고,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목사님들중 가장 옳바른 사고를 가지고 계신 오직 주님을 닮고자 늘 기도하시면서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계신분입니다. 다만 메세지가 좀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교회중직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얼마전 목사님을 새로 모셨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부분에 대하여 모니터를 하였고, 성도들의 목사님의 설교내용에 대한 각종 여론을 취합했습니다. 목사님과 또 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이러한 사항들에 대하여 목사님을 면담하고 교인들을 대표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혜롭게 의사를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선한 동역자가 되겠다고 늘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러한 행동이 과연 옳은 생각일까요? 목사님의 입장에 있는 목사님의 고견을 알고 싶어 이러한 무례한 글을 올려 봅니다. 귀한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말씀선교를 전문으로 하는 직분자입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은 성도들이 반드시 성경말씀과 맞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 것이 올바른 신앙인들의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세계 안에는 하나님의 선의 세계와 사단의 악의 세계가 공존해 있으며,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 쓰시는 목자가 있고 사단의 악령이 들어 쓰는 거짓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분별하기 위해서 요일 4장에 보면 영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영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이므로 그 목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 보고 그 말이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말씀인지 사단의 악령이 역사하는 거짓말인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행17:11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 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상고하되 그 것이 성경과 완전히 합치가 되는 말씀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라도 가감해서는 벌을 받고 또 천국 가는 길에서 제하여 버린다고 계22:18-19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이 말씀을 증거 할 때에 성경구절과 세상적인 내용을 섞어서 그럴싸하게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아주 잘 못된 설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오직 성경안에만 있으며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경안에서 짝을 찾아서 문제와 답을 육하원칙에 입각해서 해결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사34:16) 따라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 목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증거하는 자이며 그러하지 않는 자는 성령이 그 안에 없으므로 자기 생각과 세상 것을 가지고 꾸며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 증거하는 자인 것입니다.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와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 까지도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성도들은 것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당해서는 않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즉 말씀을 보지 못하여 깨닫지 못한 소경된 목자가 소경인 성도들을 잘 못 인도하면 둘다 멸망 당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거짓 목자로 인해 무고한 많은 성도들이 함께 멸망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자를 선택할 때 정말로 신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교회나 교단의 모든 성도들이 죽느냐 사느냐하는 대단히 중차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위의 말씀을 참고하셔서 지혜롭게 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Re: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향 마을이장 (예향마을(KMC)) | 05.09.14 19:11 내용출처 : 본인작성 참고서님 목사님의 설교가 문제가 있다고 하셨는데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한 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그 이유는 평신도는 목회자로부터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다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모니터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하나하나 모니터를 해 나간다면 그 속에 흘러가는 진리의 맥을 잡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진리의 맥을 찾는 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진리의 맥을 잡는다는 것은 나무를 보지않고 숲의 전체를 볼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능력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이 결정적 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대하고도 생각이 다르고 깨닫는 바도 다를 수 있습니다. 목사님 또한 다른 이들의 생각을 참고하시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목사님이 깨달은 바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깨달은 것 이상의 것을 전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같은 성경구절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한다고 하여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 질수 있고 목회자에 따라선 전혀 다른 말씀으로 들려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교회의 목사님의 설교에 대하여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전 목사님과 다를 수 있고 다른 목사님과 다를 수 있고 기타 등등... 그런 의미에서 모니터링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 천만한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않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니터링 박업에 대하여 담임목사님의 의견을 물어 보시는 것이 우선인듯 합니다. 목사님이 흔쾌이 참고서님의 생각을 받아 주신다면 좋은 일이고 더 힘이 되겠지요. 그러나 만약 반대하거나 그 일에 대하여 거부의 의사를 밝힌다면 과감히 그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 입니다. 자칫 참고서님의 선한 뜻이 도리어 교만으로 비춰지기 쉽고 또 실재로 교만적인 태도로 변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구체적으로 다르어야 하겠지요.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제3자도 못되는 무지함 속에서 참고서님의 말만 듣고 충고하거나 권면을 드리는 것이기에 참고는 하여도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목사님의 설교의 진의를 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파악하는 것이 좋습니다. 큰 나무아애 있으면 나무의 기뭉과 아래만 보일 뿐 나무 전체를 볼수 없습니다. 일부가 좀 틀리다고 잘 못되었가고 할 수 는 없겠지요. 나무 전체가 잘못된 나무인지 아니면 참고서님이 원하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참고서님의 개인적인 성향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목사님의 설교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곧 이것이 성령을 따라 분별할 수 있는 분별의 은사이지요. 성령의 도우심으로 분별의 은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1. 메세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신학적(또는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메세지가 너무 어렵거나 성도들에게 전달이 안된다는 것인지 글만으로는 알수가 없습니다. 2. 신학적(또는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문제로 느끼시는 부분을 메모하셨다가 같은 교단의 덕망있는 목회자에게 문의를 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아니면 이곳에 자세하게 다시한번 올리셔도 좋을 듯 합니다. 3. 후자의 경우라면 조금 더 시간을 갖고 기다렸다가 기회를 봐서 목사님께 조언을 드리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목사님들도 다른 교회에 부임하셔서 완전히 적응하시는데 적어도 1년 이상이 걸린다고 합니다. 교인들은 메세지, 행정, 심방 등 모든 면에서 전임 교역자와 비교하게 되고요. 4. 목회자를 전인격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선한 품성, 대인관계, 설교, 심방, 상담, 기도회 인도 등 다양한 사역 중에서 목회자가 모든 것을 다 잘할수는 없겠지요. 우리나라는 유독히 설교로 목사님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순수하고 깨끗한 목회자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5. 교회에 대한 고민과 사랑을 엿보면서 교회 내 어른이 계시다는게 참으로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늘 건강하시고, 충성되고 사랑받는 일꾼이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