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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에 속한 사람>을 읽고(3)/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3. 구조의 길 사탄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 즉시 구조의 손길을 구해야 한다. 악령들의 간계-악령들은 싸우지 않고는 자기들의 포로를 놓아주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악령들은 온갖 힘을 동원해서 신자가 구조의 도움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펼 것이다. 자신 마음의 핑계의 원천을 조사해 보고 점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잘못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머리에 무슨 핑계가 떠오르건 간에 그리스도인은 주의 깊게 이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존심 때문에, 폭로 후 그 상황을 직면하기가 두려워서 도움을 구하지 않거나 덮어버리면 안 된다. 싸우는 과정에서 자기 머리가 얼마나 우둔하며, 어두우며, 수동적이고 다루기가 힘든가를 깨닫게 된다.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새로워지지 않은 마음은 새로워져야 한다. 받아들였던 거짓말은 일일이 색출하여 부인해야만 한다. 수동적인 태도는 자유로운 행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새로워진 마음-옛사람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의지를 발휘하여 옛 생각을 비롯한 낡은 옛 행위를 벗어 버려야 한다. 옛 습관과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더라도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철저하게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악인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새로워지지 않은 마음 상태는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매일같이 육신의 생각들을 부인하는 연습을 하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모든 생각을 끈기있게 면밀히 검토하되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서 그리해야 한다.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 한다. 거짓말을 부인함-마음속에 어떤 충동이 생겨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몸에 관한 문제들이 마귀가 말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악령의 거짓이다. 신자는 자신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고, 그로 인해 자신이 어디서 기만을 당하고 왜 고통을 당했는지 알 수 있도록 빛을 달라고 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는 모든 육신적인 고통과 환경적인 고통을 세심히 조사해 보아야 한다. 원천을 추적한 다음, 조용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빛이 비치기를 기다려야 한다. 최소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진리를 원한다는 것과 진리를 알고 순종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선언할 수 있다. 기도와 의지의 선택으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탄의 기만을 대적해야 한다. 전에는 믿었으나 이제는 믿지 않는 거짓말을 하나씩 부인해야 한다. 정상적인 상태에 대한 인식-고뇌에 빠질 때 무엇이 정상적인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자기의 영이 강건하고 기억력과 사고력이 왕성하고 몸이 제일 건강하던 때를 회상해 보도록 하라 이것은 최소한 회복해야 할 목표를 설정해 줄 것이다. 현재 상태와 정상적인 상태를 비교함으로써 자기가 얼마만큼 멀어져 있는가를 판단할 수가 있다. 비정상적인 상태를 거부하고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수동적인 태도를 버림-영적인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은 인간에 관계되는 어떠한 것도 의지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악령들의 기만을 받아들이고 악령들이 그의 생활속에서 활동하도록 허용한 것은 무지 때문이다. 의지를 활용하여 자기가 스스로 주인이라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이전의 동의를 뒤엎고 원수가 자기 존재의 어떤 부분이라도 조종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그의 마음이 자신에게 속해 있으며 스스로 이를 활용하고 외부 세력이 자기의 마음을 자극하고 통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이 싸움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을 활용해야 한다. 가능하면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거나 더 좋은 환경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 없이 자기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는 마음을 활용하여 생각하되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말할 것이며 무엇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신자는 마음을 활용하여 생각하고, 살피고, 기억하고, 이해해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악령들의 거짓말을 공격해야 한다. 의심에 대해서는 믿음의 말씀으로 응답하고, 절망에 대해서는 희망의 말씀으로 응답하라. 불안에 대해서는 평안의 말씀으로 응답하고 적절한 구절이 생각나지 않으면, 주님의 인도를 구해야 할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활용해서 마귀를 대적할 때마다 그는 온전히 십자가가 이루어 놓은 사실에 의존한다. 신자는 죽었다. 악령들은 죽은 사람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안식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굉장한 유익이 따른다. 자유와 갱신- 점차 자유로워 감으로 스스로 만족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잃어버린 모든 기지를 되찾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마음이 빛과 지혜와 총명과 상상력과 사고력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약간의 유익을 얻었다고 해서 만족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4. 마음의 법칙 이전의 사고방식을 부인하고 매일 새로워진 마음을 따라서 생각해야 한다. 경계 태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영과 함께 일하는 마음-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영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시므로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마음을 통하여 이 계시의 의미를 파악한다. 자신의 의지로 영적인 힘을 사용함으로써 몸을 활성화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 신자의 마음은 성령의 출구다. 성령께서는 인간의영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인간의 영을 나타내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 영, 영적인 마음-영을 따라 행하는 것은 영의 일에 마음을 두고 영으로 하여금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것을 뜻한다. 마음이 어느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생활도 좌우된다. 영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은 영의 인도를 받기 위한 첫째 조건이다. 무엇이든 영의 직관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은 섬세하고 조용하고 잔잔하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면 우리의 영과 마음은 성령과 함께 적극적으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열린마음-폐쇄된 마음은 진리가 영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폐쇄된 마음은 편파적이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항목은 모조리 반대라고 비판한다. 자기 생각이 진리의 척도이다. 이런 마음 상태는 신자의 영적 상태를 해친다. 자유로운 영과 더불어 우리의 마음에 장애물이 없을 때 우리는 진리를 가장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통제하는 마음-생각은 행도의 씨앗이다. 일단 뿌려놓은 생각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 결국 자라난다. 죄는 따지고 보면 이전에 우리가 마음속에 품은 적이 있는 생각의 씨앗이다. 죄된 생각이 우리 머리 속에 잠재해 있다면 얼마 후에 악한 행동으로 나타내게 될 것이다. 정신 생활이 통제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통제 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철저히 검토해 보아야 하며, 단 한가지의 생각이라도 우리의 관찰이나 판단을 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어떤 생각이든 간에 검토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자신의 정신생활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부당한 생각을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문제를 주의 깊게 관찰해 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은 분별력 있고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언제나 마음을 하나님의 평안 가운데 보전해야 한다. 마음은 감정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 마음은 조용히 하나님 안에 거하여야 하며, 믿음으로 일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마음- 하나님의 말씀이 절실히 필요할 때 적당한 구절을 찾아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말씀을 읽고 암기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부지런히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의 법으로 채워주실 것이다. 우리 마음이 주님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다면, 성령은 우리에게 적절한 구절을 생각나게 하심으로써 즉시 윌 영의 직관을 통해 마음의 눈을 밝히실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한 마음을 구함-계속적으로 자기의 정신 생활을 순화하고 생생하게 유지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주님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바로 생각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어떠한 생각도 자신의 악한 성품에서 나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악ㅎ한 성품에서 어떤 생각이 솟아난다 하더라도 즉시 하나님의 빛에 의해 드러나고 처리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제9부 혼의 분석 -의지 1. 신자의 의지 인간의 의지는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다. 참괴고 완전한 구원은 인간의 의지를 구원한다. 그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순수한 하나님과의 연합을 소유할 수 없다. 의지 곧 뜻이 연합될 때 참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유의지-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원치 않는 것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셨다.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인간 편에서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타락과 구원-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의지와 부패하고 타락한 사단의 의지가 있다. 이 두 의지 사이에 독립적이며 주권적인 인간의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새 생명을 받아 그 생명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위한 모든 봉사도 육신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자진해서 받아들인다면,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물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그것의 출처를 보신다. 아담의 의지의 불순종으로 타락했으므로 현재의 구원 역시 자기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킴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다. 복종하는 의지-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에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로 전향시키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의 지배적인 의지가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되면, 그 사람은 자연히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죄의 공통분모는 불순종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주님께서 주님이 바라시는 상태로 인도하시기 위해 주로 환경을 통해 손길을 나타내신다. 많은 불쾌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신다. 우리의 행로에서 많은 실제적인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하게 하시고, 이를 통해 우리가 머리를 숙이고 완전히 항복하도록 하신다. 우리 의지는 실로 완고하여, 심한 훈련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것은 모두 벗겨 버리려 하신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참으로 중생을 경험한 후,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맹세나 각오가 참인지 아닌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로 하여금 각종 시련을 통과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 외에는 무엇이든지 부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신 목적이 그들이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자녀들에게 알리기 원하신다. 종이 가지고 있는 순종의 의지는 주인의 모든 명령을 무조건 이행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뜻과 같은 뜻을 가진 아들은 자신의 의무를 행할 뿐 아니라 기쁨으로 행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밖의 일은 헛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자 않은 생각이나 능력은 저주를 받는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조건들을 이행하면서 한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매걸음마다 표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좁은 길인 것이다. 2. 수동성과 이에 따르는 위험들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경 지식과 경험의 풍부함을 계속해서 자랑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인과법칙-악령의 침입이 죄 짓는 것에서 비롯된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잃어버린 영토를 탈취하기 위해서 가차없이 죄를 처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사람이 능동적으로 범하는 죄나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는 죄나 모두 명백한 죄로 간주되고 있다. 사람이 자기 재능의 어떤 부분을 사용하지 않고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하면, 이것은 마귀와 원수에게 활동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죄가 원수의 공격 조건이다. 수동성-의지의 기관이 자기에게 맡겨진 문제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을 중단하는 것이다. 자아 통제의 결핍과 자유 의지의 상실이다. 자신의 어느 부분도 사용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만을 고대한다. 신자의 어리석음-하나님께서는 순종하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신다. 우리 욕망을 빼앗거나 의지의 기능을 무기력한 상태로 만들지 않으신다. 사람은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 수동성에 따르는 위험들-수동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하다가 중단해 버린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증상이 수동성과 원수의 침략에서 기인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자신의 타고난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악령들의 거짓말을 분별하지 못하여, 계속 기만을 당한다. 무지에 의해 기만에 빠졌고, 기만은 수동성을 낳았으며, 수동성은 마귀의 침투로 인한 고통을 초래했다. 이와 같은 상태에 빠지면, 그는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악령들의 조종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직관을 통해 알게 되면, 자신의 모든 부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한다. 3. 신자의 실수 신자가 성경의 가르침을 경시하고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리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는 속임을 당할 것이다. 겸손한 태도로 자기도 마귀의 속임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끊임없이 속임을 당할 것이다. 수동성은 잘못된 순종과 헌신으로 과도한 순종 또는 헌신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 뿐만 아니라 사탄의 행동 원리에 대해서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사탄은 항상 각자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내적인 원칙을 점검해 봄으로써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과 악령들로부터 비롯된 것을 구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에 대한 그릇된 이해-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타고난 능력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을 부인하고, 그 대신 매순간 모든 필요를 공급받기 위해 하나님의 생명력을 의지하며 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일-우리가 자발적으로 소원을 품고 행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감동시키고 누그러뜨리고 격려하여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향해 움직이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소원을 향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 스스로 뜻을 정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뜻을 세우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는 데 사용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성령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령은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우리의 직관만ㅇ르 자극하신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뜻을 전달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영을 사용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기 위해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반면 악령들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협력을 구한다. 악령들은 직접적인 지배를 구한다. 영을 통해 계시를 받은 후 자신의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천에 옮기도록 해야 한다. 신령한 생활-하나님이 대신 말을 해주신다고 생각하고, 초자연적인 음성만을 기다리거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해주실 것이며, 자신은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랑을 부어 주시기만을 기대하는 오해를 갖는다. 또 자신을 겸손하다며 너무 비하시키거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의지를 사용하지 않은채 수동적으로 맹종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고난과 연약함-일부러 고난과 연약함을 자청하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악령들의 활동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악령은 사람의 의지가 수동적이 되거나 자기가 일할 수 있는 조건들이 형성될 때마다 어김없이 행동을 개시한다. 하나님은 신자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기 위해 자기 의지를 발휘하고 자기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협력하기를 원하신다. 악령은 그의 일을 추진하기 위해 신자의 의지가 수동적이 되어 자기 능력을 일체 사용하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4. 자유로 가는 길 지식이 없이는 자유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진리에 대한 지식-진리만이 사람을 자유케 할 수 있다. 초자연적인 경험을 접할 때 맨 먼저 그 출처를 분별하여 마귀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 이 경험이 악령으로부터 비롯한 것일 때 그는 틀림없이 수동적인 상태에 빠지며, 그들의 마음이 텅 비고, 모든 행동이 외적인 강요에 의해 행해진다. 수동적인 복종을 요구하는지 판단해 보아야 한다. 성령은 사람이 주권적으로 자유 의지를 행사하기 바라시는 반면에, 악령은 사람이 전적으로 수동적이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모름지기 자기 자신에 관한 모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겸손과 정직이 필요하다. 신자들은 혹시 성령을 거스려 죄를 지을까 두려워하여 영들을 시험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하기를 바라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시험해 본 결과 그것이 성령으로 판명되면 성령은 이 시험을 견디실 수 있을 것이며, 그 시험의 결과가 악령으로 판명되면 악령의 본래 성품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자신은 오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끝까지 속는다. 신자도 사탄의 기만에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 또한 사탄의 간교에 넘어갈 수 있음을 시인한다. 내가 속았음을 시인한다. 자신이 왜 속았는지를 자문해 본다. 기지의 발견-죄 외에도 악령들의 거짓말을 받아들인다든지, 수동적 의지 상태에 둔다든지, 마귀가 제공한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악령들에게 기지를 제공하는 요소이다. 신자는 수동적인 상태를 자각하는 즉시 그 잃은 기지를 회복해야 한다. 견고하고 강인한 의지로 끈질기게 사탄과 싸워 대항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가 어디에서 속았는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한 모든 진리를 보여 달라고 진심으로 간구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인들이 듣기 꺼려하는 것은 사탄에게 내어준 기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르기를 두려워하는 부분이 바로 처리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은 상실한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징후들과 그것들의 원인을 하나님께서 밝혀 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통한 깨달음은 필수적이다. 기지의 회복 - 의지가 취하는 최초 단계는 원수를 몰아낼 결심을 하는 것이다. 자기가 희망하는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자유를 선택한다. 나는 해방을 원한다. 나느 수동적인 상태를 거부한다. 나는 나의 재능을 사용하겠다. 나는 악령들의 간교를 알아야겠다. 나는 그들이 패배하기를 원한다. 나는 흑암의 권세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온갖 거짓말과 변명들을 거절한다. 이와 같은 의지의 선언은 악령과의 싸움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이런 싸움이 전개되는 동안 신자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여야 한다. 결심하고 선택하는 것 외에도 의지는 대항하고 거절해야 한다. “나는 악령들이 나의 주권을 유린하지 못하게 하겠다. 악령들이 나의 인격을 침해하도록 허용하지 않겠다. 악령들이 나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겠다. 나는 악령들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겠다. 나는 그들이 나를 마음대로 조작하지 못하게 하겠다.내가 진실로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겠다. 나는 나의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나의 모든 지체가 나 자신의 지배를 받기를 원한다. 나는 악령들이 나를 자극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모든 역사에 대항한다. ” 그 후에 우리는 또한 우리의 강한 의지로 대항해야 한다. 예전에는 받아들였던 것을 거절함으로, 예전에 믿었던 것을 믿지 않음으로, 예전에 가까이하던 것을 멀리함으로, 예전에 세웠던 것을 파괴함으로. 등 모든 과거의 생각이나 계획이나 허락을 폐지해야 하며, 심지어 과거의 기도와 응답들도 부인해야 한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회복해야 한다. 순전한 마음으로 해방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빛을 간구한다면, 성령께서 점차 그의 과거를 보여 주실 것이다. 하나씩 대항해 나가면 결국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많은 싸움을 통해 강건해져야 한다. 자신이 주님과 하나된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의 죽으심이 곧 자기의 죽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악령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에게는 힘을 행사할 수 없으므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는 것은 악령의 속박에서 성도를 해방시켜 준다. 성도는 이러한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해야 한다. 또 그러한 기초와 더불어 원수의 모든 거짓말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항해야 한다. 악한 세력이 성도에게 새롭고 더 큰 환난을 가져다 줄 때, 그는 이 고난이 마귀로부터 비롯한 것임을 알고 이를 거절하고 무시해 버리며, 그것에 대해 고민하거나 이야기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당분간 불편한 점을 참고 견디면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담대하게 의지를 행사할 때, 그는 자신이 점차로 해방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귀에게 더 이상 새로운 영토를 허용하지 않으면, 마귀가 차지한 영토가 감소됨에 따라 성도를 괴롭히는 힘도 점차 줄어들 것이다. 참된 하나님의 인도-예수님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의지를 좇아 행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과 참으로 연합한 성도라면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 곁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모든 부분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시간을 가진 후에 자신의 모든 지체를 능동적으로 준비시켜 그 뜻에 능동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순종을 실천함에 있어서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직관에 하나님이 뜻에 대한 성령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소원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성도가 참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그 속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강건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과 연합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의 직관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소원하고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계속해서 마귀의 뜻을 배척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그의 뜻을 입증해 달라고 간구하면, 그 성도는 머지않아 이러한 의지의 태도가 영적인 생활에서 큰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기통제- 성령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이 자제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수동적인 상태에 빠지지 않고 영적 생활에서 전진만을 계속할 것이다. 자신의 영을 너무 차거나 너무 뜨겁지 않은 적절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오직 사람의 의지가 새로워지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만 자신의 영을 지배하고 그것을 적절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사람의 영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고 말할 때는 영이 직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되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사람 전체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마음과 그 밖에 혼의 기능에 속한 모든 것. 모든 생각은 온전히 의지릐 통제를 받아야 한다. 방황하는 생각들을 하나씩 점검하여 그리스도께 복종케해야 하고 위엣것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육신은 그 사람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한다. 의지의 힘을 빌어 자기 육신을 통제하고 다스려야 하며 육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고 온전히 순종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연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전 존재가 우리에게 복종하도록 그것을 통제해야 한다. 제10부 육신 1. 신자와 그의 육신 육신에 힘이 있지만 우리는 그 육신의 힘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반면에 하나님을 위해 노력하고 봉사하고 증거해야 함을 위해 육신의 힘이 필요하다. 육신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데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죽은 육신에 생명을 주시는 것이 방법이다. 만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이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의 죽을 몸도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몸에 생명을 주신다는 말의 참뜻은 우리 육신이 병들었을 때는 성령께서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가 병들지 않았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건강한 상태로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지상 장막을 강건하게 해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육신의 허약함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나 하나님 나라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하신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는 것이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믿으며 원하지만, 자신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죄로 인하여 우리의 육신이 죽었으므로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 수 없다. 또 성령께서 우리의 죽을 몸에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 필요가 없다. 육신은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영적 생활을 속박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공급을 힘입어 우리 속사람은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직접 겉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공급을 받고 있다. 육신의 정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육신의 허약함이나 질병이나 고통도 우리를 좌우할 수 없게 되었다. 육신을 적절한 상태로 유지하여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 외에 우리는 육신에게 아무런 빚도 지고 있지 않다. 우리 생활이 의식주로만 가득 차서는 안된다. 이런 것은 필요에 따라 오고 가야지, 우리의 마음속에 자기 잡고 우리 욕망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합당한 육신의 욕구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우선적인 필요를 위해서 우리 육신을 쳐 복종시킬 필요가 있다. 성령은 우리 육신에 생명을 주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몸의 행실을 처형하는 분이기도 하다.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 몸에 생명을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몸이 살기 위해서는 그 행실이 먼저 죽어야 한다. 육신에 생명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많은 육신의 행실들을 죽일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만이 우리의 육신에 생명을 줄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자기 몸을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금식을 하지만,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먹고 마신다. 우리 몸은 주를 위한 것이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음식은 단지 우리의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부부간의 합법적인 성관계에서도 지나친 방종은 금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과도한 육신의 일은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신체의 어느 부분이든지 개인의 만족만ㅇ르 위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몸은 오로지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만 사용되어야 한다. 육신이 주님께 속해 있지만 그 육신을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책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우리 몸은 주를 위하고, 주님은 우리 몸을 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완전히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의 정도에 따라 자신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우리의 몸이 진정으로 주님을 위할 때 주님이 우리 몸을 위하시는 것도 경험하게 된다. 주님께서 우리의 헌신을 받아들이시고 우리의 육시에 그의 생명과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의 몸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우리의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우리의 몸은 주님의 능력으로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악한 세력은 육신이 없는 영들로서 인간의 육신을 탐낸다. 주요 목표는 인간의 육신을 장악하는 것이다. 우리 육신이 영의 일을 침범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은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마라. 믿음으로 이 사실을 의지하면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성결과 기쁨과 의와 그리스도의 사람을 가져다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약하고 지치고 병든 육신에 생명과 능력과 건강과 힘을 주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 우리 몸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주께서 몸을 위하신다는 진리가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도록 항상 방심하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자유로이 나타내실 수 있도록 말이다. 2. 질병 질병은 죄의 결과이며 사망의 전조이다.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셨을 때 죄를 용서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육신도 고쳐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질병을 담당하신다. 우리 질병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질병을 가질 필요가 없다. 죄는 우리의 영혼과 육신에 해를 끼쳤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둘을 다 구원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 영과 혼과 육의 구원자이시며, 죄사함의 능력뿐 아니라 치유의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징계-질병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징계 수단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판단하여 봄으로써 질병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질병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단련시켜 죄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질병은 성도로 하여금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며 어떤 숨겨진 죄나 고집이나 자기 의지가 있는지 살피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장벽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마음을 깊숙이 보면 지난 과거의 생활이 얼마나 자아 중심적이었으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거리가 멀었는지 깨닫게 되낟. 자아 성찰을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며, 하나님의 치유를 받을 수 있다. 질병에 걸렸을 때 걱정하거나 두려워 말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 보며, 정직하게 자기가 어떤 결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는지 알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어디에서 실수를 했는지 지적해 주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어떤 면이 지적을 받든지간에 즉시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타인에게 해를 끼쳤다면 이를 보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납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자신을 새롭게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징계하신다. 성도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죄에서 떠나며 죄가 사함 받았음을 믿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두려움 없아 하나님께서 낫게 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 때 주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나타나며, 주님의 생명이 성도의 육신에 들어와 육신을 살게 한다. 우리가 가진 결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 질병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지 않으면, 성령께서 그 징계의 이유를 명확히 알려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질병을 고쳐주기를 원하며 우리가 그이 사랑과 능력을 경험함으로써 하나님과 더욱 가까운 교제를 가질 수 있기를 원하신다. 질병과 자아-모든 어렵고 힘든 환경은 우리의 참된 상태를 드러내는 결과를 낳는다. 병에 걸려 보기 전에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 살고 얼마나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결코 깨닫지 못한다. 평상시에는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며 주님으로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아도 기꺼이 감수하리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병에 걸렸을 때 그러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순수하지 못했던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 길에 만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자신의 미숙한 감정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길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질병을 허락하심으로 하나님이 특별히 계획하신 뜻을 향한 그들의 태도를 드러내신다.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받을 때 자기 자신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은 가증한 일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데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빨리 낫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떠한 질병이든 신자에게 임할 때는 하나님의 승낙이 필요하며, 반드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성도간의 교제가 가지는 궁극적인 목적은 성도가 하나님의 모든 처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에게 닥치는 일을 거부하는 성도는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또한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병 낫기를 간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기를 기다릴 수 있는가? 질병은 성고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지를 쉽게 드러내 준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나 사람들을 대할 때나, 우리는 많은 생각과 의견들을 고집한다. 자신의 뜻을 좇아 행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영적 생활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일을 파괴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초조해 하고, 즉각 치유되기를 구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보다는 우리가 순종함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고통과 허약함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건강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모든 생각이 육체의 고통과 치료 방법에만 집중된다. 약을 복용하여 효과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지만 치료가 지연되면 하나미의 사랑을 오해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 몸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보살펴 주시도록 하는 것이다. 악화된 증상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은 우리 몸의 상태에 몰두하지 말고 주님을 생각하라는 경고임을 알아야 한다. 약-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질병의 뿌리를 찾아 해결하는 대신에 사람이 만들어 낸 의약품을 통해 치료를 받으려고 한다. 사람은 본래 많은 시련을 겪기 전에는 믿음으로 구원받기를 싫어한다. 어쩌면 죄사함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더욱 강렬하게, 질병을 치유받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구원을 이루셨을 때 우리를 죄에서 뿐만 아니라 질병에서도 구원하셨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외치지만, 마음은 온통 약에 대한 생각으로 사로잡혀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데서 비롯되는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약을 사용할 경우에는 사람의 지혜를 의존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경우에는 예수님의 생명과 역사를 의존한다. 약을 복용하는 것은 믿음의 싸움을 포기하고 쉬운 길을 택한 것이다. 주님의 능력보다는 약의 능력에 치유의 소망을 둘 때는 육신적으로 치유를 받을지라도 영적 생활은 해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조용히 침묵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방법과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하여 치료를 받는다면 영적인 소득을 얻는다. 자기 죄를 자백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그의 능력을 의존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함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질병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은 우리 자신의 활동을 중단하고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라는 것이다. 자기 사랑에 빠져 있지 않다면 고침 받기 위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는다. 약을 의존하는 것은 낫기 위해 열심히 애를 쓰나 하나님의 의지하는 자는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방법을 찾는다면 그는 치료를 받고 난 후에도 또 병에 걸리게 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불쌍히 여길 만한 더 많은 이유들을 주실 것이다. 치유의 영은 거룩한 영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치유가 아니라 거룩함이다. 처음에 우리가 벗어나야 할 것은 질병이 아니라 자아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순전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신뢰했을 때 이전에 의지하지 않았던 생명에 의해 살기 시작한다. 증상이 더욱 악화된다 하더라도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 하나님과 좀더 가까워지고, 믿음도 증가하며, 치유가 임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양분을 조금 섭취함으로 우리 몸이 건강해질 수 있다. 질병보다는 건강을-질병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의해 나음을 입은 사람은 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몸도 영과 혼처럼 흠없이 보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 사람 전체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치유는 종종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질병은 마귀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이를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을 따르고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도록 하실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치유를 받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면, 자연히 치유를 받은 후에는 건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거룩한 생활을 해나갈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치유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먼저 질병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 다음에 마음을 다하여 그 말씀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 자신의 몸을 새롭게 하나님께 드려라. 질병과 죄의 관계-질병과 사망은 죄의 결과이다. 질병은 죄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는다. 구체적인 죄가 발견되는 즉시 죄를 고백하면, 그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을 수 있다. 질병과 주님의 역사-주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시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다. 주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또한 질병도 처리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예쑤님께서 실로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셨으므로 질병이 현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나타나고 있는 맡큼 횡행해서는 안된다. 바울처럼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전까지 우리는 담대하게 주님께서 친히 그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질병을 제거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질병에 대한 신자의 태도-걱정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된다. 질병을 통해서 배우게 된 교훈은 무엇이든 명심하여야 한다. 하나님과 교제할 때 많은 문제들이 속히 해결 될 것이기 때문이다. 치료책을 찾기 위해 서두르지 말고, 먼저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름을 바르라. 생명이 흐르는 곳에 질병은 사라진다. 생명이 차단되었던 그 지체에게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기름이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징계와 질병-질병은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작용하고 있기 때눔에 거룩한 열매를 맺으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강력한 손 아래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원인을 처리했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손길이 그에게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그가 자고하거나 나태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또는 다른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그런 줄 알아야 하며, 그 질병을 참고 견디며, 거기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자신의 육체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자는 이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 교훈을 얻지 못하면 질병은 의미가 없다. 질병은 사람을 거룩하게 못하지만 질병을 통해 얻게 되는 교훈이 그를 거룩하게 한다. 욥이 시험의 기간을 무사히 마치자 그의 질병은 떠났다.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교훈을 빨리 배울수록 질병도 신속히 사라진다. 질병에 걸리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원수의 공격으로 비롯된 질병은 주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한다. 우리는 자연법칙을 어겨 고통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잘 돌봐야 한다. 치유를 구하는 방법- 주님의 능력-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뜻-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주님의 역사-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진정으로 믿는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미 고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3. 육신의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몸은 죽을 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주님께 속한 우리 몸은 죽음을 삼키는 생명력을 보유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연합한 사실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므로,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영과 혼과 몸에 그의 생명의 흐름을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의 영 안에 주님의 생명이 늘 가득 차 있어서 우리의 몸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각종 현상들이 몸에 나타날지라도 그것들은 사실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건강해지는 것은 우리 죽을 몸에 주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의 생명은 과거에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신 것처럼, 현재에는 이 죽을 몸을 살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매시간 하나님으로 인해 새 힘을 얻기를 원하신다. 육신은 타고난 혼적 생명에 의해 활동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생명에 의존하여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몸의 생명이 된다. 하나님이 말씀이 그 능력을 발휘할 때 사람은 그 말씀으로도 살 수 있다. 하나님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숨어 잇다. 자연적인 영양 공급이 부족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옛 성도들의 경험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신 날들만큼 필요한 힘을 공급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고,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므로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인 힘과 육적인 힘을 공급받을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을 의존하면 성령의 능력이 우리 일상 생활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 주시는 것은 우리가 병이 나은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 몸의 힘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가 그분에 의해 살고 그분의 능력으로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그의 생명을 우리 육신의 힘으로 믿고 받아들이며,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다면, 치유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경험-그리스도의 생명은 머리에서 각 지체로 흐르면서 에너지와 생명력을 공급한다.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므로, 생명은 자연히 우리 몸에 흐르게 되어 있다. 이 생명은 믿음을 통해서만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질병을 고쳐 주시고 힘을 주실 때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서 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그이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내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대로 힘을 행사하며 살도록 그의 생명을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힘을 주신다. 자연적인 능력과 예수님의 능력-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육신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새로워진 몸을 갖도록 권고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힘입어 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죽을 몸에 생명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가 매순간 그의 힘에 의지하여 살 수 있기를 원하신다. 주님을 육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속적인 믿음을 필요로 한다. 매 순간의 삶을 위해서 매순간의 힘이 필요하다. 주님과 온전히 연합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삶이다. 우리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덜어져서 살 수 있다면,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뜻대로 살려고 할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순종하는 성도라면 자신의 몸이 건강하고 주님의 생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힘을 받기 위해 자신의 힘을 버릴 것이다. 하나님을 힘입어 살기 위해서는 주제 넘는 일은 금해야 한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인 한 후에 움직이기 시작해야 한다. 순종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는 축복-지식적으로 우리 몸이 주를 위한다는 것을 알고 잇지만 우리의 자아 의지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히 채워주실 수가 없다. 우리의 생활은 물론 장래의 일에 관해서도 자신이 주관하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의지한다. 우리는 침착하게 믿음을 행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이제부터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보다 못한 것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어떤 일에서든지 하나님보다 앞서서 자기의 힘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도우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채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뻗치실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의 동기가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의 선물을 바라는 데 있다면, 우리는 이미 넘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산다면, 그는 도움이나 축복이나 공급을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을 조건 없이 하나님께 드릴 것이다. 4. 사망의 극복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금도 죽음을 이기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죄와 자아와 세상과 사탄을 이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승리의 생활을 누리고 싶다면, 이 세상에 있는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경험은 많이 했다 하더라도 사망을 이기는 경험은 얼마나 해보았는가? 죽음에 대해 수동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죽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기 전에는 결단코 수동적으로 자신을 사망에 넘겨 주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사망을 대적해야 한다. 사망의 힘을 정복할 힘을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맡은 일을 끝마칠 때까지는 죽지 않으리라고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설령 죽음이 닥친다 해도 사망이 쏘는 것이 제거되었음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하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공중으로 들리워 올라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망에서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맡은 일을 완수한 후에 오는 사망-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할 일을 완수하고 더 이상 지상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에는 반드시 사망을 거부해야 한다. 주님께서도 자기의 저항하는 일에 함께 하실 것을 믿고 강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아직 주님을 위해서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망의 징조가 보인다 하더라도 안심하고 주님을 신뢰할 수 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죽을 수 없어서 반항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분명한 지시를 받아야 한다. 사망을 두려워 하지 않음-예수님처럼 죽음을 통과할 때 신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죽음이 두렵거나 또는 죽기가 싫어서 죽음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미 싸움에 패배한 것이다. 죽음이 두려워 주님이 오시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살아서 공중으로 들립받는 것- 휴거는 점점 가까워 온다. 산 채로 들림받기 위해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이 되기 전에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지 말고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 살아있는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죽음을 완전히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주 예수님은 곧 돌아오신다. 우리는 사망과 총력전을 치루어야 한다. 사탄이 근심 걱정이 주어 소진시키고 사는 것을 포기하게 한다. 사단의 목적은 우리가 살아서 들림받는 것을 좌절시키는 데 있다. 주여, 주님께서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에 저는 지금 사망의 공격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사망을 정복하기로 결심하였사오니, 주여 제가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께서는 사망을 극복하도옥 도우실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생명을 구하며, 아무것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망에 이르는 죄- 사망을 이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죄를 이겨야 한다. 사망은 죄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었더라도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죄도 우리 육체 안에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사망에 이르는 죄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를 판단하는 마음을 항상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여지없이 심판해야 한다. 죄를 범할 때마다 반드시 자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 잠언의 교훈-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때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연장된다는 사실을 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지혜로우며, 의를 추구하고, 마음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생명을 보전하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내세의 능력-우리는 지금 믿음을 통해 질병이나 약함이나 죽음이 없는 내세의 능력을 미리 맛볼 수 있다. 믿음은 시간을 초월한다. 믿음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일에 의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실 일도 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내세의 영광을 지금 맛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이 우리의 장래에 관한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매 순간 주님을 위해 살고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의 필요를 위해 주님의 부활 생명을 의지하자.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영에 속한 사람>을 읽고(1)/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영에 속한 사람’을 읽고 과 목 명 : 영성과 치유 담당교수 : 김찬기 교수님 교 재 : 영에 속한 사람, 워치만 니 지음, 생명의 말씀사 학 번 : 09535107 성 명 : 정 원 경(석사과정 1학기) 제 출 일 : 2009. 4. 14 줄거리 제1부 영, 혼, 몸 1. 영과 혼과 몸 성경은 인간을 세 부분, 즉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으로 나누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5:24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인간의 영으로 변한 생기가 인간의 몸과 접했을 때, 혼이 생겨났다. 따라서 혼은 인간의 몸과 영의 결합이다. 하나님의 기운이 인간의 몸에 들어왔을 때 그것은 사람의 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영이 몸과 반응했을 때 혼이 생겨났다. 사람의 영이 죽은 몸과 만났을 때 혼이 생겨난 것이다. 영을 떠나 있는 몸은 죽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혼’으로 지칭하신다. 그 이유는 사람의 됨됨이가 그 혼의 상태에 달려 잇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혼은 인간의 자유 의지의 기관으로서 그의 개성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혼은 인간의 자유 의지의 기관으로서, 사람의 혼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혼은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영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지배하도록 할 것이다. 영은 전기와 같고, 혼은 빛과 같으며, 몸은 전선에 해당한다. 그러나 혼이 이생에서 우리 존재의 요소들이 교차하는 점인 데 반하여 영은 부활한 상태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힘이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몸을 통하여 물질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의 몸을 세계에 대한 의식을 주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혼은 인간의 자아에 속하며 그의 인격을 나타내므로 자아 의식의 부분이라고 한다. 영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부분으로서, 영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경배할 수 있다. 영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해주기 때문에 하나님 의식의 요소하고 한다. 하나님은 영 안에 거하시고, 자아는 혼 안에 거하며, 감각은 몸 안에 거한다. 혼의 능력은 바로 영의 힘이다. 영은 스스로 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고, 오직 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혼은 인격이 머무는 곳이다. 혼은 영과 몸의 중간에 서서 영의 세계가 지배하게 할까 육의 세계가 지배하게 할까를 분별하고 결정하는 데 능력을 행사한다. 성전 : 바깥뜰(외적인 예배 드리는 곳), 성소(제사장들만 들어가는 곳), 지성소(하나님 거하시는 곳) 몸(성소 바깥 뜰):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물로서 인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혼 : 거듭난 사람의 성소, 그이 사랑과 의지와 생각이 완전히 깨어서 예산 제사장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 영 : 더 깊이 들어가면 휘장 뒤에 지성소가 있는데, 이곳은 어떠한 인간의 빛도 침투한 적이 없고 어떠한 사람도 육안으로 이곳을 꿰뚫어 본적이 없다. 이 영은 인간의 자아의식 너머에 존재하며 감각을 초월해 있다. 여기서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제한다. 하나님께서는 영, 다음엔 혼, 그리고 마지막 몸 이러한 순서를 원하신다. 2. 영과 혼 영의 주요 기능 *양심-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분별 기관, 만일 사람이 그릇 행하면 양심은 비난의 음성을 발한다. *직관-인간의 영에 속한 감각 기관, 외부의 영향과 무관하게 직접적으로 감지하는 것 *영교-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무엇이 영적인 것이고 무엇이 혼적인 것인지를 가르쳐 달라고 주님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강해질수록 영의 기능은 약화되어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된다. 혼의 기능 우리를 인간적으로 만드는 요소인 인격이 거하는 곳. 의지: 결정을 위한 기구로 우리의 선택 능력을 보여줌 지성: 사고의 기구, 지적 능력, 지혜와 지식과 추리 감정: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좌우하는 기구 감정을 통해 표현과 느낌 혼이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인식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영적, 혼적-이 되느냐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혼적 생명은 태어날 때 물려받는 것이다. 이 생명이 소유하고 있는 것과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가능성은 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3. 인간의 타락 인간은 순종이나 불순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자기의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지고 있었다. 영적 생활에서 하나님이 결코 우리의 자유를 짓밟거나 강탈해 가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일도 우리를 위해 행하시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영이 주인과 같은 조재며, 혼은 청지기와 같으며, 몸은 종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타락하여 본래의 순서가 흐트러졌다. 선악과는 인간의 혼을 높이고 영을 억압했다. 혼은 창조된 생명 육적 생명이다. 혼이 청지기로서의 자기 위치를 잘 지키고 영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고 생명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혼의 영역이 지나치게 팽창하면 그에 따라 영은 억압을 당하게 된다. 인간 타락의 역사를 주의깊게 살펴본 결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써 그들의 혼을 발전시켜 영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고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몰아 넣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탄은 사람의 혼을 죄로 유인하는 데 육신의 일을 이용한다. 혼이 죄를 범하자마자 영은 완전한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사탄이 하는 일의 순서는 언제나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사람의 의지가 사탄에게 굴복하는 순간 사탄은 그 사람의 인격을 소유하게 되며 그의 영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하나님 일은 언제나 안에서부터 밖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에서 일을 시작하여 그의 지성을 비추고, 감정을 자극하며, 그 몸에 의지를 행사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신다. 범죄하는 것이 혼이므로 속죄가 필요한 것도 혼이다. 그리고 그것은 혼에 의해서만 속죄될 수 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완전히 만족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 반면에 혼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이끌려 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것 특히 지식을 탐낸다. 영에 의하여 아담은 하나님을 느꼈고, 하나님의 음성을 알았고, 하나님과 영교하며 하나님을 매우 예민하게 감지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 그의 영은 죽고 말았다.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은 몸의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중단되는 것이다. 영이 무능해져서 하나님과 영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영이 비록 하나님에 대하여 죽어 있다 해도 마음이나 몸만큼 활동적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어 있으나 사탄에 대해서는 살아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지금 그 안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을 따르고 있다. 혼은 정욕과 욕망의 요구에 굴함으로써 몸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되면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좌정하실 자리를 찾을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 일단 사람이 완전히 육신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 그는 자신을 해방시킬 가망이 없다. 혼이 영의 권위를 짓밟고 들어선 것이다. 혼은 이제 몸의 욕구에 순종하고 정욕과 욕망을 충족시키도록 강요를 당한다. 많은 인간의 사상과 이론으로는 생명의 말씀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그저 혼에 의해서만 통제를 받는 게 아니라 몸의 지배를 받기도 한다. 죄의 몸은 욕망과 정욕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사람은 가장 흉악한 죄를 범할 수도 있다. 몸의 힘이 너무나 비대해져서 혼이 순종하는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영이 으뜸이 되어 우리의 혼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일단 육적인 상태로 기울어지면 영은 혼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죄는 영을 살해했다. 모든 사람이 죄와 허물로 죽었기 때문에 영적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되었다. 결국 죄는 몸에게 권력을 부여했다. 그래서 죄성이 몸을 통해 다스리게 된 것이다. 4. 구원 죽음은 인간의 타락을 통로 삼아 세상에 들어왔다. 죽음은 언제나 죄를 통해서 온다. 죄는 죽음으로부터 구조되기 전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죄가 인간성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죽음으로 속죄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의 성품을 입으시고 인간 대신에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죄에 물들지 않은 그의 거룩한 인간성은 죽음을 통하여 죄로 물든 인류를 구속할 수 있었다. 주님은 대속물로 죽으심으로 모든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그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바치셨다. 그래서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다. 요5:24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모든 육체는 그 안에 들어 있었다. 한 사람 아담의 행동이 전 인류의 행동을 대표하듯이, 한 사람 그리스도의 일은 모든 사람의 일을 대표하는 것이다.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많은 이들의 의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중생을 통하여 태어난 새로운 인류(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그의 영과 혼과 몸에 고통을 받으신 것이다. 몸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인간의 몸이 겪어야 할 모든 고통이 주님의 몸에 가해졌다. 따라서 그는 죽기까지 육신적 고통을 당하시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쳤다. 그는 이 모든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몸뿐만 아니라, 혼도 고통을 당했다.예수는 그의 혼에서 죄의 고통을 견디려고 몰약 탄 포도주를 거절했다. 그는 의식을 마비시키는 잔보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잔을 마시기 원했다. 주님께서는 일생 동안 죄와 사탄에게 종노릇하는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종으로 오셨다. 우리는 정욕과 분노와 습관과 세상의 노예다. 우리는 죄에 팔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이와 같은 노예생활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의 온갖 수치를 짊어지셨다. 모든 사람이 눈에 보이는 죄의 영광을 즐겼기 때문에 우리의 구주는 죄의 비참한 수치를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저주와 수치를 당했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더 이상 저주를 당하지 않으며 부끄러움도 당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의 영도 역시 막대한 고통을 당했다. 하나님이 언제나 그와 함께 했다.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 있었는데도 하나님께 버림을 당해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는 쓰라린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영적인 분리의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그의 영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버림을 견디어 냈고 또 한편으로는 악령의 비웃음에 대적했다. 사람의 영은 스스로를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스스로를 높이며, 악령을 따랐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와 연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완전히 부서뜨려야만 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표자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와 연합되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십자가는 죄인의 심판ㅇ르 담당하며, 죄인의 무가치함을 선포하며, 죄인을 못 박으며, 주 예수의 생명을 나누어 준다. 따라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에 의하여 거듭나며 주 예수의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중생 : 성경에 나타나 있는 중생의 개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구속하시고 육의 원칙을 파하셨으므로, 주님과 연합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결국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처음 맛보는 것은 우리의 영이다. 중생은 전적으로 우리의 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사람이 특이한 것은 혼과 연합되어 사람을 형성하고 있는 영을 지니고 잇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영으로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 죽은 영에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을 때 죽은 옛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영, 혼, 몸-을 모두 주님께 내어드리는 일에 믿음을 행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주 예수의 죽음을 나 자신의 죽음으로 여기고, 주 예수의 부활을 나 자신의 부활로 여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고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나대신 죽으셨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죽었다. 따라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주님과 연합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경험한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중생은 주님의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 동참하여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영의 지배를 받으며 은혜 가운데서 자라갈 때에만 구원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 제2부 육신 1. 육신과 구원 인간의 타락을 기회로 해서 혼은 영의 권위를 대적하고 몸과 그 정욕의 종이 되었다. 이리하여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 되었다. 사람의 영은 그 고상한 위치를 박탁당하고 죄수의 위치로 전락했다. 육적인 사람은 세상을 따르며 육의 감각을 따라 행동한다. 우리가 육을 이기려면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롬7:13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육으로 태어났다. 어떠한 교육 정도나 교양이나 도덕이나 종교도 사람을 육적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육체의 실제 상태를 익히 아시기 때문에 육은 변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셨다(유23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이 변하거나 향상 되거나 개선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신다. 따라서 주님은 세상을 구언함에 있어서 사람의 육체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육을 죽이는 일을 도우신다. 육은 죽어야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은 단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다. 육신으로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죄가 없으셨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신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세상의 죄인들과 가장 밀접하게 연합된 것이다. 죄에 대한 심판과 벌은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육신 안에서 죄를 죽여 버린 것이다. 그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죄 자체가 정죄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에 연합되어 그들의 육신에 죄를 정죄받은 사람들에게는 죄가 역사할 힘이 없는 것이다. 죄의 대가와 죄의 능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아들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주님께서는 이제 모든 사람 앞에 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도록 해 놓으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다시 복구시키기 위해 먼저 우리 내부에서 영의 위치를 회복시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 속에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셔서 그 영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려내신다. 성령이 사람의 영 안에 거함으로써 사람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간다. 우리의 영은 소생되어 다시 주권을 가지고 다스린다. 사람은 특별한 일을 행함으로써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써 거듭난다. 개개인의 신자가 자신이 이미 거듭났으며 새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에게는 죽음과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며,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성경이 우리에게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라고 권고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고 당부하셨다. 신자가 죄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아를 부인하는 데는 전 생애가 걸린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만 우리의 죄를 지셨다. 그러나 주님은 전 생애를 통하여 자신을 부인하셨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고,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매일 매일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많은 주님의 일꾼들이 죄인들에게 죄 용서를 받으나 죄를 멀리할 힘이 결여되어 있는 불완전구원만 믿게 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구원이 완전히 제시될 경우에도 죄인들은 그들의 죄만 사함받기를 원하고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은 진심으로 기대하지 않을 때가 있다. 육신은 모든 초점을 자아에게 맞추고, 영적 생명은 모든 중심을 그리스도에게 둔다. 육은 사람을 죄로 이끌기 원하고, 영적 생명은 사람을 의로 이끌기 원한다. 신자는 영적 생명이 우세해지면 더 없이 기뻐하고, 육신이 앞서면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험은 그 사람이 거듭났음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육을 개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육을 멸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죄사함과 중생을 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것을 주신다. 그리고 갈등을 통해서 하나님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한 승리를 추구하고 체험하게 하신다. 이 투쟁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신자들이 절망하여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더 맹렬한 싸움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구원에 이를 것이다. 2.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 믿음이 어린 신도들의 영혼을 돌보는 이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치에 대해서만 말해 주고 영적인 체험을 추구하도록 격려하지 않거나 신자들 자신이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기 않기 때문에 자라지 못한다. 이들은 대게 구원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나, 영적인 의욕이 없거나, 영적인 성장을 위해 귀한 대가를 치를 의향이 없다. 육적인 사람의 특징은 오랫동안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며 영적인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신령한 가르침이 아니고 기꺼이 자신의 생활을 성령께 맡기고 성령의 명령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순종하는 마음이다. 자신에게 많은 세상적인 행동이나 습관들이 아직 그대로 생활에 배어 있다면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육에 속해 있는 것이다. 육신의 죄들 - 영양, 생식, 방어 영양 : 세상은 음식으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 유혹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생식 : 탐심을 가지고 먹은 죄는 즉시 육정과 수치를 불러일으켰다. 방어 : 죄가 득세하면 몸은 자기 방어에 그 힘을 발휘한다. 몸의 안락과 쾌락에 방해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대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육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보시는 그대로 사람에게 계시해 줄 때에만 사람은 사악함과 더러움의 육신을 올바로 보고 다룰 수 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겸손해질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죄 때문에 슬피 울 때까지, 우리가 이름만 그리스도인인지 실제 생활은 여전히 육체의 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함께 기도하자. 우리 마음이 모든 육적 요소를 제거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오를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지금은 성령에 의해 우리 죄를 새로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을 때이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충실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자기 육신을 그 빛 가운데 비추어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거룩함을 계시해 달라고 성령께 진실되게 간구한다면 틀림없이 성령은 그렇게 해 주신다. 3. 십자가와 성령 신자는 육체 자체를 다루는 일은 망각하고, 열매에 불과한 죄를 처리하기 위해 갖가지 계획을 세우기에 바쁘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대신 매일 자신의 상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실제 경험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감정과 경험을 무시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 말씀에 단순하게 반응하라. 그리하면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 아멘 실로 나의 육체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의 말씀을 따라 행할 때 우리는 우리 육신이 정말로 죽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면, 경험은 자연히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 너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롬8:13 몸의 행실들을 제거하려면 온전히 성령을 의지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개인적 경험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께서 무엇이든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에는 십자가의 죽음을 적용시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육신의 악한 행실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성령에 힘입어 주 예수의 거룩한 죽음의 힘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승리는 요원한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이런 식으로 몸의 행실을 죽인다면 그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께서는 죄의 몸을 멸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끝내 관철시키고 말 것이다. 롬6:6 하나님의 자녀가 언제라도 성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즉시 육신을 따르는 생활로 되돌아간다. 4. 육신의 자랑들 불행하게도 혼은 육체의 기관으로부터 비롯된 유혹에 굴복함으로써 영의 권세에서 벗어나 대신 몸을 주관하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육신의 선행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신뢰와 자기 의존이다. 육신이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한 절대로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주 절박한 시기에도 육신은 계속 출구를 찾아 헤매며 책략을 세운다. 무엇이든지 하나만을 바라고 기다리는 가운데서, 즉 성령을 의지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면 의심할 여지없이 육신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종종 성령의 도움으로 새로운 진리를 깨닫는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진리는 육신의 자랑으로 변해 버린다. 성령께서 오셔서 도와주시길 바라면서도, 자신이 길을 인도해 나가기를 갈망한다. 언제 어디서든지 육신이 하나님을 섬기면 죄의 힘이 강세를 떨치게 된다는 것은 영적 진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한 승리를 경험하자마자 범하는 가장 큰 잘못은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 승리의 방법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범죄로부터 나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정욕을 따르는 것이나 선행을 자랑하는 것이나 똑같이 부패한 육신의 특징이다. 한편으로 성령께서 시작하신 일을 이루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육신의 정욕과 욕망을 없애는 헛된 시도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바를 행할 수 없다. 5. 육신에 대한 신자의 궁극적인 태도 사람이 아무리 선하다 하더라도, 행함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일 때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만을 기뻐하신다. 아들과 아들의 일을 떠나서는 어떠한 사람, 어떠한 일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사람은 선을 행하고 향상하고 전진하기 위해서 많은 방법을 고안해 내지만, 이 모든 것은 육신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사람의 행동이 아무리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 행동이 성령을 완전히 신뢰하는 가운데서 나온 것이 아니면 육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신자의 자기 기만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신자가 자기 육신의 정체를 깨닫고 하나님의 견해에 도달하게 하기 위하여 그를 가장 수치스러운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혼이 넘어지고 약해지고 심지어 죄를 범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신다. 이렇게 해서 그로 하여금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는지의 여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파악하게 하실 목적으로 우리를 시험하신다. 사탄의 공격을 받으면 신자는 자기 육신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가를 점차 깨닫게 된다. 신자는 잠시라도 육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살피는 일에 계속 마음을 쓰지 않고 게을리 할 때 그는 다시 육신의 자랑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셔서 주 예수를 믿게 하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성령께서 죄를 책망하시는 일이 세상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자기 눈으로 보았고 주님께 크게 쓰임 받은 사도였지만 자기 의도 쓰레기와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 바울은 자기 육체를 신뢰할 만한 많은 이유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깨닫고 그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고 무가치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 제자들처럼 하나님께서 실제로 갈보리로 가서 고난 받을 준비를 하라고 부르실 때 그리스도인은 곧 뒤로 물러서서 물처럼 연약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경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우리가 동원하는 모든 방법은 다 육체의 자의적 예배다. 이러한 예배는 성경의 가르침에 다른 예배도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예배도 아니다. 육체를 따라 행할 가능성은, 예배하는 일에나, 그리스도의 일에나, 성경 지식에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나 어디든지 존재한다. 육체의 생명은 신자를 도와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도 있고, 진리를 묵상하게 할 수도 있고, 자신을 주님께 드리도록 할 수도 있다. 이 육체의 생명은 그를 자극하여 많은 선행을 하게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이 타고난 육체의 생명을 참된 생명으로 착각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육신을 십자가에 넘겨줄 때, 우리는 육신에 아무런 선한 것이 거하지 않으며 육신은 하나님의 저주밖에 받을 것이 없는 무가치한 것임을 인정하고, 육신을 저주에 처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일 정도로 겸손하지 못하다. 우리는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고 쓸데없으며 완전히 부패새서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훌륭한 죽음과 철저한 죽음을 당할 필요가 있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주님께서 당신의 약점을 모두 지적하여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영문밖에서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감수할 수 있는가? 십자가의 영이 당신 안에서 역사하도록 허용할 용의가 있는가? 우리가 완전히 죽을 수만 있다면? 육신의 죽음이 계속해서 유지되지 않으면, 부활이나 승천의 영역은 실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안전은 성령 안에 있다. 안전한 길은 혹 내가 육신에 진지를 내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언제든지 가르침을 받겠다는 자세를 취하는 데 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리고, 성령께서 예수의 죽음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도록 의탁해야 한다. 이전에 우리가 육신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었듯이, 이제는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 이를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성령께서 당신 안에 거하심을 믿으라. 이러한 인도는 마음이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에 속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주 예수를 높이시는 반면에 육신은 낮추신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자랑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한다면, 십자가의 할례를 받고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성령을 믿고 그에게만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육신을 신뢰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멸시하고, 우리 육신이 믿을 수 없고 전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육체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말자. 거룩한 근면함과 함께, 의지하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육체의 공격 목표가 될 것이다. 아주 작은 교만이 육체에 기회를 제공한다. 당신이 칭찬을 받기 위해서 육신의 약점을 사람들 앞에서 숨겼다고 하자. 그러면 당신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육체에 활동할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편으로는 육체에 기회를 주지 않는 태도를 항상 견지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상생활 중에 육체를 부인하라는 요구가 있을 때마다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늘 우리의 생각을 살펴야 한다. 허영심은 육체에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눌 때도 많은 말 속에 육신이 자기 일을 도모할 근거를 찾지 못하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육신은 많은 계획과 방법을 구상하고,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육신은 자기 의견이 있고 힘이 잇고 능력이 있다. 육신이 행하는 선행도 육신이 범하는 죄와 똑같이 겸허한 마음으로 회개하여야 한다. 우리는 항상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들 자신도 깨끗하게 되기 위하여 육체의 모든 더러움을 샅샅이 찾아내어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제3부 혼 1. 죄로부터의 구원과 혼적 생명 왜 우리는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을 의심하는가? 바울은 선언했다.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 롬 6:6 이러한 태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부족하거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가셨을 때 우리도 그 안에서 함께 갔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우리도 역시 그 안에서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죄의 몸은 옛 사람이 물러남으로써 그 힘을 잃어 버렸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푼 일이다. 그의 목적은 우리가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는 죄의 압력에 굴복하거나 죄의 권능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이 ‘여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말씀을 믿을 때 주의 성령께서 경험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어놓기를 원하는 것을 끝까지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죄가 우리 위에 왕 노릇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으로 보거나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주님께 해당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매일매일 믿는 법을 익혀야 한다. 또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우리의 성별 됨을 흠 없이 유지하는 법을 매일매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요구조건이 아무리 육신에 어렵고 거슬린다 해도 이에 적극적으로 응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른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다. 특별히 우리는 죄와 몸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사실 우리가 십자가의 치유를 경험하고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기 전에 우리의 몸은 죄의 몸이었다. 죄는 몸을 붙잡아 종노릇할 것을 강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죄의 특별한 활동 영역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몸이 죄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이와 같이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실제로 자기 몸이 죄의 능력과 영향력에서 해방되는 것을 경험한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목적은 몸을 죄의 지배로부터 건져 내는 데 있다. 죄의 반려자인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 사람이 그 자리를 대치함으로써 몸에 대한 죄의 권세는 무너진다. 옛 사람의 협조 없이는 죄가 직접 몸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처리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늘 의존하고 있는 혼적 생명이다. 몸은 시들어 없어질 수 있지만 혼은 그대로 살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혼은 언제나 자아(self)에 중심을 두고 있다. 혼을 의지하며 사는 신자들은 의지나 지성이나 감정으로 기울어진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원하는 바를 따라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다. 혼의 생명은 원칙적으로 육적인 힘이다. 신자가 혼의 생명을 죽음에 내어주지 않는다면, 그는 이 생명을 기르는 중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것이며 결국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혼을 인간의 육적인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혼이 우리를 육신 가운데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선하고 겸손하며 사랑할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것이다. 생명은 우리 몸의 각 지체에 생기를 주는, 사람 안에 있는 힘이다. 따라서 이 내적인 혼의 힘은 외적 신체 활동을 통하여 표현된다. 혼적 생명은 무엇이든지 명령받은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영이 지배할 때는, 혼이 영의 지시를 받아 영의 원하는 바를 따라 결정을 내리고 행할 수 있는 의지를 발휘한다. 그러나 죄가 몸을 지배할 때는, 혼이 죄에게 유혹되어 죄가 원하는 바를 따라 결정하고 행할 수 있도록 의지를 발휘한다. 혼의 기능은 명령을 집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조인으로 있을 동안에는,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혼이며, 우리의 본성은 죄이다. 우리의 행함을 결정하는 것은 죄이며 죄스럽게 행할 힘을 제공해주는 것은 혼이다. 신자가 주 예수께서 그의 대속물로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진 것이며 그의 영은 살아난 것이다. 그와 더불어 새 성품을 가져온다. 새 성품과 옛 성품은 매일같이 전인에 대한 권세를 잡기 위해 권력 다툼을 벌인다. 십자가가 신자의 죄 된 성품을 처리하긴 했지만 혼의 생명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낮아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가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겠는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 생활에 힘을 얻어 새 성품의 요구에 따르려 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 결과는 계속 혼에 거하는 생활을 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완전히 의존함으로써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자아의 힘을 신뢰함으로써 행해지는 것은 신령한 것으로 받아들이실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일체 부인하고, 매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을 감지하면서, 전적으로 주님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즉 그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지상에 가한다. 하나님을 향한 봉사를 계획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그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혼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위해 그 힘을 의지하지 않고, 계속 자아의 힘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바를 따라 행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타고난 지혜를 사용하여 많은 독창적인 방안을 고안해낸다. 영적 생명은 그 자체가 극히 강력한 것이지만, 혼적 생명은 인간 속에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거의 전 인격을 통제하다시피 한다. 우리가 혼적 생명을 부인하고 영적 생명으로 지배권을 잡게 하지 않으면 영적 생명은 발전할 기회를 잃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에게 영적 성장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이다. 성령 안에 행하는 것은 죄를 안 짓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는데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바라고, 사람들이 하는 대로 살고 일한다면 성령께서 어떻게 그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실 수 있도록 전적으로 성령을 의존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의 충만을 갈망한다면, 우리는 먼저 모든 곳에 침투하는 혼의 영향력을 때려 부수어야 한다. 신령한 생활은 단순히 영의 직관에 주의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다. 신자가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스스로 시작하거나 규제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성령의 음성이 자기의 영에 직관적으로 들려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며 스스로 부하의 입장을 취할 것이다. 내적인 음성을 듣자마자, 신자는 일어나서 직관이 지시하는 바를 따라 일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행함으로써 신자는 견고하게 주를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직 성령만이 발동을 거실 수 있는 분이다. 그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 신자는 활동이 요구될 때마다 자신의 약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에게 약속을 주실 것을 간청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자마자, 그는 성령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알고 행동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태도가 있는 곳에 틀림없이 그의 말씀대로 능력을 허락하실 것이다. 이와 반대로 혼적인 생활은 자아중심으로 쉽게 마음의 자극을 받는다. 영의 평안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쁜 감정을 찾아 헤맨다. 신자의 혼적인 상태는 하나님과 협조하는 원칙과 영적 생명을 이해하는 정도와 실제로 혼적 생명에 얼마나 굴복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영이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한, 신자는 혼적 생활을 증오하고 영적인 생활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어느 생명을 선택하느냐가 그가 따를 길을 결정한다. 2. 혼적인 신자의 경험 혼적인 신자들은 호기심이 너무 많다. 철저히 성경의 예선을 연구하여 호기심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다른 점과 우월함을 나타내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지적으로 아는 것이 체험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대부분의 혼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의롭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자기의 사소한 의견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심지어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들의 마음은 멀리 방황하게 된다. 이들은 보통 사전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행동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이 항상 원칙대로 행동한다는 것과 행동 하나하나를 신중히 생각한다는 것을 확신시키려 한다. 이들의 행동은 도저히 예측하기가 힘들다. 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쉽게 감동을 받는다. 매우 흥분하다가도 다음에는 낙담하며 슬퍼한다. 하나님께서는 혼적인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영역에서 조그마한 진보라도 이룩하기만 하면 스스로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모든 일의 중심으로 여기는 그들의 연약함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마치 주님을 직접 보고 만지기라도 한 것과 같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뿐 아니라, 그런 말할 수 없는 축복의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특별한 은사와 초자연적인 경험을 허락하신다. 이런 특별한 은혜를 이용하여 신자들을 낮추시고 그들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이끄신다. 불행히도 신자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시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다. 신령한 사람은 기분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종종 외적인 문제로 마음이 불안해진다. 주변 세상의 사람이나 일이나 사물이 툭하면 속사람을 침범하여 영의 평안을 뒤흔들어 놓는다. 혼적인 사람들은 보통 감각에 따라 좌우되기가 쉽다. 주님께서는 이들이 신령한 상태에 이르기 전에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경험을 주셨다 빼앗으셨다 함으로써 서서히 신자로 하여금 감정에서 떠나 믿음으로 행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의 임재를 실감할 때만 그들의 영적 상태가 고조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영적 상태도 저조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말이 많아 흥분된 감정 때문에 끝없이 토론을 벌인다. 그들은 말에 있어서 자제할 줄을 모른다. 이제 혼적인 그리스도인은 말을 길게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이들은 일단 대화가 고조되면 후퇴할 줄을 모른다. 말이 많으면 자제력을 잃거나 논쟁을 통하여 마음의 평안을 상실하거나 비판으로 말미암아 사랑까지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경망스러운 것은 성도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너절하고 경박한 이야기를 좋아하고 조잡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좋아한다. 혼적인 신자는 또한 안목의 정욕에 빠진다. 이들은 아직 인간의 예술적 관념에 대하여 죽었다는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주님과 함께 고통당한다는 상징으로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다닌다. 이들은 종종 자기 연민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문학이나 자연을 좋아하고 속세와 격리된 생활을 꿈꾼다. 이들은 감정에 의해 완전한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위험한 위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완전한 자기만족을 이룬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지식은 풍부할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경험은 부족하다. 이들은 다른 사람은 판단할 줄 알지만 자기 자신은 고칠 생각을 않는다. 영과 혼의 분리에 대한 가르침을 들으면, 이들의 마음은 거침없이 흡수하고 나서 그들의 생활이 아닌 남의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혼적인 생각과 행동을 분석하고 분별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습득한 지식은 남을 판단하도록 부추길 뿐이지, 자신들에게는 조금도 유익이 없는 것이다. 남을 비판하려는 경향은 혼적인 사람들 사이에 찾아볼 수 있는 양상으로 이들은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혼적인 역량은 가지고 있지만 겸손해질 수 있는 영적 역량은 결핍되어 있다. 이들의 겉 사람이 아직 부서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하기 힘들고 동행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혼의 생명에 의존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교만하다. 이는 그들이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나님께 모든 은혜를 돌리려고 노력해도 육적인 신자들의 마음은 자아에 고착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의 겸손을 자랑하는 자다. 주님의 은혜로 육적인 생활이 얼마나 부패하고 추잡스러운 것인지, 그 실상을 깨달은 후에도, 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난 후에도, 이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겸손하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혼적인 사람들은 일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열심히 있으며 의욕에 차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을 할 수 있는 열심과 역량이 있기 때문에 일을 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할 때에만 칭찬이 따른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의 일을 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믿는다. 이들은 결코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적이 없다. 그와는 반대로 계획과 책략으로 가득한 지성으로, 자기의 생각에 따라 일한다. 이들은 부지런하게 일을 하기 때문에 자기들보다 한가한 형제들을 보면 자기들이 훨씬 앞서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진다. 혼적인 신자들의 일은 주로 느낌에 따라 좌우된다. 이들은 일을 하고 싶은 기분이 날 때에만 일을 한다. 그러다가 이 기분이 사라지면 자동적으로 일을 놓는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일을 하는데도 마음에 평안을 유지하지 못한다. 이들은 신령한 사람들처럼 조용히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다. 이들의 마음은 외적인 문제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 자기가 진력하는 일로 실망하기 쉽다. 이들에게는 주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고요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 내적인 감각과 외적인 환경에 규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믿음의 법의 진가를 인식하지 못한다.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닌데도 기분이 실패했다 싶으면 포기한다. 아직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혼을 신뢰하는 신자들은 원시적인 안목이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실망을 하게 된다. 이들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밖에 볼 줄 모른다. 이들은 일의 시종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법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하여 즉각적인 성공을 갈망한다. 그러나 일을 성취할 수 없을 때는 일을 끝까지 추진하지 못하고 계속되는 어둠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 혼적인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가 남보다 나은 것이 아닌데도 남의 흠을 찾아내는 데 전문가다. 비판하는 데 빠르고 용서하는 데는 느리다. 남의 잘못을 찾아내어 시정할 때에 이들이 취하는 태도는 일종의 자기만족과 우월감이다. 또 이들은 성급하다. 이들은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지 못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열심과 정열에 의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길을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잠잠히 기다리지를 못한다. 육적인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그들의 노력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생각하고 계획하고 모의하고 예언한다. 그로 인해 주님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일을 더 생각한다. 종종 우리에게 일을 주시는 주님을 망각한다. 영적인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는 혼적인 사람들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른다. 그래서 종종 온당치 못하다. 영적 분별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제한된 생각과 제한하는 생각을 너무 지나치게 신뢰한다. 설교할 때도 혼적인 사람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기다리는 것보다, 분석하고 자료를 모으고 생각을 짜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자연히 주님보다는 그들이 준비한 메시지를 더 신뢰하게 된다. 성령께서 인간의 필요를 계시하고 하나님께서 듣는 이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믿는 대신, 이들은 전적으로 자기가 하는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믿는다. 누구나 성령으로 의지하지 않고 말을 의존할 때는 영적인 열매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한 말들이 아무리 많은 환호와 갈채를 받는다 하더라도, 이것은 사람들의 지성에는 미칠지 몰라도 사람들의 마음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혼적인 신자들은 거창하고 고상한 말과 어구를 즐겨 사용한다.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을 흉내 내려고 하는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시 종이에 적어두지만 성령에 의해서 그들의 영에 계시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마음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지에 관하여 의문을 갖지 않는다. 또 이들은 남을 돕는 일에서 특별한 기쁨을 발견하는 이들이 있다. 부당한 요소를 발견하거나 남이 곤경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이들이 즉시 선배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자기의 제한된 통찰력을 가지고 돕겠다고 나선다.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성도들의 경험을 무진장 쏟아 놓는다. 이들은 마치 자기의 모든 창고를 열어 모든 보물을 꺼내 보인 히스기야 왕과 같다. 이런 가르침의 대부분은 단순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의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또 수줍음이나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못해 침묵을 지키려고 하는 이도 있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비판한다. 육적인 사람은 하나님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하나님 안에 숨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남에게 보이기를 원한다. 이들은 영적인 일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기 원한다. 이들은 남의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이들은 자만심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한다. 이들은 능력 있는 사역자로 주님께 크게 쓰임받기를 원한다. 혼적인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한 영혼을 구원하셨다 하면, 이들은 기쁨에 넘쳐 자신을 영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아직 그릇에 담지 않은 대양의 물이 얼마나 깊고 방대한지를 모르고 있다. 자기의 그릇이 가득 차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이다. 이러한 제한된 역량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더 이상 사용하실 수가 없다. 사람들이 이를 알아주지 못할 때 이들에겐 큰 고뇌가 따른다. 육적인 신자들은 원칙이 없이 헤매는 사람들이다. 감정과 지성을 따라 생활한다. 이들은 기분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감정을 움직여 이런 저런 행동을 하도록 자극한다. 그러나 일단 감정이 지나가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혼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난히 타고난 재능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혼적인 사람들에게 풍성한 재능을 부여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재능을 자발적으로 죽음에 넘기게 하고 또한 부활의 경험 가운데서 새롭고 영광스럽게 된 재능을 되찾게 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 재능을 죽음에 넘기기 꺼려하고, 그 대신 그것들을 최대한도로 활용하려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쓰여져야 한다. 그러나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이것을 자기의 것으로 오인한다. 이들이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한, 계속해서 그들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도록 맡기지 않고 그들의 생각대로 그 재능들을 사용할 것이다. 육적인 사람들은 생각이 강하고 감정이 풍부하며 재능이 많기 때문에 쉽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마음을 움직인다. 이들에겐 영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영적 경험을 했다고 우리가 신령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우리가 우리의 죄와 자아에서 모두 해방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신령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 3. 혼적인 생활의 위험 혼적 생명은 육적인 힘, 하나님에 대하여 굽힐 줄 모르는 강퍅한 마음, 많은 의견과 계획을 가지고 있는 자기 나름대로의 지혜, 영적인 경험 가운데서 추구되는 감정적 흥분으로 표현된다. 혼 속에는 이처럼 여러 기능이 있기 때문에 많은 혼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은 극히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생활 모습이 크게 다르더라도 이들은 모두 혼적인 생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빛에 의해 자신의 참된 진상을 봄으로써, 새로운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대신 자신이 진리에 의해 자유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빛을 이용하여 기꺼이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면,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오늘날과 같이 낮지는 않았을 것이다. 혼적 상태의 가장 두드러진 표시는 진리를 지적으로 추구하고, 지적으로 받아들이고, 지적으로 전파하는 것이다. 지적인 기능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신자들은 영적 문제에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 갈구를 채우는 데 하나님의 계시보다 자기의 생각에 더 많이 의존한다. 이들은 기도보다는 계산하고 따지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한다. 신자들이 영적인 것으로 가장 많이 오인하는 것이 감정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사심을 마음속으로나 감각기관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혼적인 생활은 흔히 의지, 즉 자기 주장 능력에서 나타난다. 이들의 생활의 중심은 자신에게 있고, 이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타락한 혼은 언제나 신자로 하여금 육적인 힘으로 행하게 하고, 자신의 힘과 자신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주님을 아는 일에나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에 있어서 신체적인 감각을 탐하게 하고, 이성의 힘을 빌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그의 영적 생활에 커다란 해를 끼치며, 결국 참된 영적 열매를 거의 맺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깊이 뉘우치며 회개하는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 혼적 신자들은 죄만 범하지 않으면 되지 우리의 타고난 힘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반문한다. 율법을 범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고 타고난 미덕을 살려 나가는 데 무슨 반대할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이런 행동은 죄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훌륭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풍성한은사와 재능을 부여해 주셨는데 어째서 이를 활용할 수 없는가 하고 말이다. 또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부지런히 연구하는데 무엇이 잘못이냐고 반문한다. 우리 두뇌는 하나님께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왜 우리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가? 이들은 영적인 것과 혼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꺼이 바라고 기다려야 하며, 육신의 선한 삶에 관련된 허다한 악에 대하여 성령의 계시를 간구하여야 한다. 이것은 솔직함과 겸손함으로 행해져야 하며,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기꺼이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적절한 시기에 성령께서는 이들의 육적 삶이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지적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 이들의 모든 일과 행함이 주님께 중심을 두지 않고 자신에게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실 것이다. 이들의 선한 행위는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의 일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 이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지도 않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힘으로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은 단순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이다. 이들의 모든 기도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노력은 단순히 외적인 쇼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들은 그 재능을 주신 분은 망각하고 자신의 재능만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한 것도 사실은 자신의 지성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지식을 구할 뿐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나 주님의 자비와 친밀함을 깨닫기 원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유쾌하게 하고 자신의 감정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삶과 활동의 중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계시에 의하여 혼적생활의 추악함을 깨달은 후에야 혼적 생명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는다. 신자가 처음으로 성령의 비췸을 받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빛 아래서 회개하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혼적 생명을 죽음에 넘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기만적이다. 얼마 후에 자기 신뢰와 자기 사랑과 자기만족이 재등장한다. 우리가 기꺼이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전하며 우리의 상태는 얼마나 변하기 쉬운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혼적 삶이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견해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의 혼적 생활의 갖가지 부패성을 지적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혼적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이는 데 믿음을 행사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는지를 성령께서 계시해 주실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xpo도를 가짐으로써만 우리는 구속의 길로 인도될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완벽한 순서는 먼저 인간의 영 안에 역사하고, 다음으로 혼의 마음을 깨우치고, 마지막으로 몸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
<영에 속한 사람>을 읽고(2)/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영에 속한 사람’을 읽고(2) 우리는 좋은 아이디어를 창안해 낼 수 없으며, 성령의 일을 이룰 만한 능력이 없음을 자인해야 한다. 신령한 사람은 영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신령한 사람의 감정과 이성이 완전히 영의 통제하에 놓여 영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유와 논리를 내세워 영의 d=계씨를 반대하지도 않고, 지혜를 자랑함으로 영에 반기를 들지도 않는다. 이제 영이 좋아하는 것만을 즐기고, 영이 허락하는 것만을 느낀다. 영은 감정의 생명이 된다. 요약 :영적인 사람은 자기 영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며, 그 하나님은 그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 영의 생명이 그의 전 인격에 충만하여, 그의 모든 구성 요소가 영의 생명으로 생활하고 영의 힘으로 작용한다. 영적인 사람은 혼의 생명으로 살지 않는다. 그의 생각과 상상과 느낌과 애착심과 욕망과 의견은 성령에 의해 새로워지고 정결케 되어 영에게 순복한다. 이들은 더 이상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영적인 사람은 아직 몸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육체에서 분리된 영이 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적인 고통이나 피로나 요구가 영으로 하여금 그 높은 위치에서 떨어지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몸의 모든 지체가 의의 도구가 되었다. 영적인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다. 모든 것이 영으로부터 유출된다. 자기 자신도 영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나타낸다. 영적인 사람은 영으로 산다. 3. 영적인 일 영적인 사람 속에 있는 생명은 영적인 일을 행함으로써 유출되어야 한다. 자신이 성령의 능력을 갈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분별해야겠다. 우리 동기가 하나님께 속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분명히 능력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그는 더욱 육신적인 교만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의 육신을 정죄하고 영을 따라 생활한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능력을 받을 것이다. 이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은 영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준비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을 자유케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은 효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으로 일하는 법을 알기 위해 영을 따라 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일꾼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리스도인은 필요나 이익이나 공로 때문에 주제넘게 어떤 일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일은 설교자의 설득이나 친구의 격려나 우리의 타고난 성향에 의해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 선택받은 일꾼은 성령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권세가 없다. 모든 행동은 성령의 손안에 있다. 신자들은 단지 순종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일을 맡기실 때는 반드시 그 일에 필요한 영적 능력을 주신다. 우리의 생각과 욕망은 완전히 주님께 바쳐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은 신자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한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영적인 일은 사람의 영에 생명을 부여하거나 영 안에 있는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많은 사람들은 구속의 교리는 믿지만 구속하시는 구세주는 믿지 못한다. 망리 이들이 대야에 양의 피를 채우기만 하고 마음의 문에 바르지 않는다면 이들의 중생은 가짜인 것이다.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처럼 행세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인 지식이 없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들을 수 도 있고 대화를 나눈 수도 있으나,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지식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영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을 쏟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영적인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지를 이해한다면, 우리의 생각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기 의존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고 얼굴을 붉힐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주지 못하면 우리의 노력은 하늘에서 아무런 칭찬도 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속 사람 안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면, 그 일이 이성과 감정에 부합하건 안하건 간에, 생명을 전해 줄 힘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전해주는 데 목표를 둔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힘은 분명히 하나님의 힘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지고 해야할 일은 바로 자기의 영을 하나의 그릇으로서 하나님께 바치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죽음에 넘기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로서 크게 사용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자기 일 가운데 어느 부분을 성령께서 기름 부으셨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 때에 그는 성령과 협력할 수 있고, 성령의 능력의 흐름 안에서 활동할 수 있다. 4. 기도와 싸움 모든 기도는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영적이지 않은 기도는 순수하지 못한 것이며 확실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기도란 사람이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육신은 기도에서도 용납되지 않는다. 참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공허한 상태를 드러내고, 기도를 듣는 분의 충만함을 드러낸다. 영적인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직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후에 드려지는 기도이다. 모든 신령한 기도는 그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드러내시고 그 필요한 것을 우리의 직관적인 영 속에 부담으로 느끼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알려 주신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롬8:26)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성령께 이를 가르쳐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다음으로 그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할 말도 주신다. 신자는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영으로 받고, 자기가 받은 것을 마음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인이 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삶도 영을 따라 살아야한다. 영적인 일과 영적인 싸움은 기도에 달려 있다.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을 힘입어 강건해진 후에야 우리는 원수와 싸우는 법을 알게 된다. 우리가 영적으로 전진함에 따라 사탄과 그의 나라가 실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영으로 원수를 대적하고 공격하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떤 현상이 나타나든 그 원천을 캐보아 원수의 위조 행각인지 영적인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영으로 적수에 대항하여 싸우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가 영을 따라 행한다면 영 안에서 악한 세력에 대항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는 법을 알 수 있다. 사단은 신자들의 영을 가라앉게 함으로서 신자들의 높은 위치를 하강시키고 자신이 올라가려고 노력한다. 기도와 싸움으로 적을 공격함에 따라 그의 속사람은 더 튼튼해지고 영의 능력이 발달한다. 원수에게 저항하지 않는 영은 대개 억압되어 있는 영이다. 신자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저항한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말씀은 그에게 영과 생명이 된다. 원수에게 기만당하고 매여 있는 많은 이들은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어둠의 권세로부터 경험적으로 온전히 벗어났을 때에만 스스로 적을 정복하고 다른 사람도 구해 줄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은 새 생명의 성장을 저해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항상 전쟁을 하고 있다, 죄, 타고난 생명, 초자연적인 원수에 대한 전쟁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전쟁터에서 펼쳐지는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다. 우리의 속 사람이 참으로 우리의 전 존재를 지배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과 협조해야 한다.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일하는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결코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자기가 느끼는 것을 우리가 느끼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우리가 바라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영적 싸움을 하는 데 있어서 때때로 우리 속 사람을 적극적인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온전히 성령께 바치되 피동적인 복종은 피해야 한다. 또 우리는 끊임없이 사탄을 공격해야 한다. 신자가 영적 영역에 들어서면, 매일 영적으로 전투 태세를 갖추고 악한 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탄의 모든 일을 전복시키기 위하여 영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매일 영을 내보내고 계속 원수를 대적한다면 그의 영은 활발하게 활동하며 강해질 것이다. 영적인 생활은 영적으로 유익이 있는 생활이다. 늘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가져야 한다. 제5부 영의 분석 1. 직관 혼에 감각이 있듯이 영에도 감각이 있어 그의 깊은 영의 심층에서 다양한 감각을 느낀다. 영적인 감각을 직관이라 한다. 이 감각이 어떤 동기나 이유가 없이 직접 침투되기 때문이다. 영적인 감각은 외부의 원인이 필요 없고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직접 표출되는 것이다. 직관은 영의 생각을 표현하며,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신자의 영에 계시하신다. 성령은 우리 마음의 생각이나 감정의 흥분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신다. 기름부음은 사람의 영속에 역사하여 직관으로 성령의 생각을 알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을 모든 신자들의 영 속에 넣어 주셨다. 내재하시는 성령께서 무엇이 하나님께 속하며 무엇이 안 속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의 영을 좀 더 활발하고 순수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해야 한다. 사람의 지식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거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경고를 멀리하지 말고 직관으로부터 오는 작고 세미한 음성을 따라야 한다. 사람은 거듭나서 새 생명을 받은 후에라야 직관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통해 인간의 영에 그 뜻을 계시하신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은밀한 교제와 영적 연합을 즐기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직관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것이며 틀림없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 것이다. 영적 경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영에 알려지기 때문에 영적인 경험이고 혼적 경험은 사람 자신으로부터 일어나며 영을 통하여 나타나지 않는다. 이성이 하는 일은 우리가 영으로 안 것을 겉 사람에게 설명하고,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의 생명이 실제로 우리의 영에 들어와 영의 직관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직관을 통하여 자기의 생각을 알리고 자기의 길을 이해시킴으로써 우리가 주님을 따르도록 이끄신다. 성령을 힘입어 새 사람 속의 영을 강건케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완전히 멸하고 영의 일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며, 평안이다. 2. 영교 영적 세계와의 교통은 영이나 영의 직관적인 기능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일을 상상할 수 없다.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성령을 통하여 계시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 성령만이 하나님의 사정을 직관적으로 안다. 즉 성령께서 직관적으로 아는 것을 자신의 직관으로 받아야 한다. 이 두 개의 직관이 서로 결합될 때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재를 알았으니 우리의 책임은 이 깨달은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직관은 계시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동일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주님의 뜻을 찾는 것이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 등 하나님께 관계되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에서 비롯될 때에만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이성은 자신이 아이디어를 짜내고 전 인격이 그것을 따르도록 요구해서는 안 된다. 영은 성장한다. 만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신자의 영이 더 강해지고 더 예민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전혀 성장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중시하시며 우리 영의 성장에 특별한 관심을 쏟으신다. 우리가 주님과 영교하는 데 있어 지혜와 계시의 영은 절대 필수적인 것이다. 계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계시를 받는 이가 참으로 드물다. 혼적 지혜는 사람의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고 영적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에 공급하시는 것이다. 참된 지식은 모두 영에서 나온다. 3. 양심 우리의 영은 직관과 영교의 기능 외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때 우리를 꾸짖거나 질책하여 불안하게 만든다. 이 능력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곳이다. 신자의 양심은 죄를 질책하고 의를 인정하고 권장한다. 우리의 내적인 감독이 우리의 성향이나 행동에 대하여 말해 주는 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께서 첫 번째로 하시는 일은 이 혼수상태에 있는 양심을 깨우는 것이다. 만일 사람의 양심이 불신의 죄를 비롯하여 무슨 죄든지 고백할 용의가 있다면,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죄에 대해 슬퍼할 것이며 간절히 주님의 자비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양심이 책망에 대하여 닫혀있다면 그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빛으로 죄인의 양심을 비추어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고, 복음의 빛으로 사람의 양심을 비추어 그를 구원하신다. 만일 이를 취한다면, 그는 주 예수의 보혈이 어떻게 자기 양심의 모든 가책을 해결해 주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양심과 직관은 분리시킬 수 없다. 새 생명을 받고 보혈로 양심을 정결케 함으로 직관을 소생시켜야 한다. 신자들은 자신의 소생된 직관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리스도인은 양심에 털끝만큼도 가책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양심이 조그마한 죄라도 걸리게 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영교하는 데 있어서 직관의 정상적인 기능은 억압당하고 제한을 받게 된다. 주 예수의 보혈이 그의 양심을 정결케 하고 양심에 예리한 감각을 주어 성령의 듯에 순종하도록 한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하기 원한다면, 양심의 소리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심은 직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모든 것을 정죄한다. 정죄 받은 그 문제가 제거되지 않는 한 양심은 그 질책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양심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지적하도록 해야 한다. 양심의 질책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일체 제거할 용의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정직하게 자기 양심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성령께서 틀림없이 오셔서 도와주실 것이다. 혼탁한 양심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감을 잃게 하며, 이러한 자신감의 상실은 주님과의 영교를 두절시킨다. 오직 거리낌이 없는 양심만이 신자를 위하여 증거할 것이다. 영을 따라 행하는 데 있어서 항상 이 증거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양심은 직관의 계시만을 인정한다. 직관은 신자를 인도하고, 양심은 신자를 강권하여 직관을 따르도록 한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생활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선한 양심은 영을 따라 행하는 삶에 필수적인 것이다. 이러한 증거를 받는 것이 신자의 모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증거가 있을 때 우리는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다. 항상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보배로운 피를 신뢰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깨끗하지 못한 양심은 자연히 사람을 대하여도 깨끗하지 못한 양심이 된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상을 구할 수 있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기 전에 죄가 먼저 사함을 받아 깨끗이 해결되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이 전보다 더 선해졌다든가 또는 많은 악이 제거 되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신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거리낌 없는 양심을 소유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 숨기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양심의 책망을 받은 죄는 즉시 자백해야 하며, 보혈에 의해 씻음을 받아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엄마나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한가를 보신다. 만일 우리가 솔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마음을 다하여 이를 순종한다면, 우리 생활에 모르는 죄가 많을지라도 우리의 교제는 깨지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양심의 지식 수준에 따라 우리와 교제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바에 따라서 자녀들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는 양심이 우리에게 말한 것을 형제더러 행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양심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는지의 여부를 증거해 준다. 그러나 양심은 지식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 즉 스스로 알고 있는 것만을 책망하고, 우리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또 제한된 지식으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도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겸손으로 주님께 지식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지식을 따르지 말고 양심을 따르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자. 제6부 영을 따라 행하는 것 1. 영적 생활에 따르는 위험들 우리가 지속적으로 계시를 경험하려면 영의 법칙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해야 한다. 우리에게 성령께서 공급해 주시는 지식을 통하여 우리 속사람의 모든 부분이 참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분변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활동을 살피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따라, 성령께서 우리의 영에 계시해 주시는 대로 생활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영적 감각을 혼동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거짓된 감정을 일으킨다. 사탄은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혼동시킨다. 마음의 확신이 없는한 영적으로 전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양심 문제를 해결하려다 애쓰고 평안을 잃고, 결국 영적 생활을 중지하게 한다. 죄를 지었다면 즉시 회개하고, 그런 후에도 책망의 소리가 계속 들린다면 그것은 분명히 악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죄의 자각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하지만, 사탄의 목표는 그저 송사하고 질책하여 고통을 주고자 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령 안에서 행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어떤 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영의 직관으로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 우리의 영이 감각한 성령의 계시는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계시와 일치되어야 한다. 사람의 영의 기능과 작용을 파악하자마자 우리가 직면하는 위험은, 우리의 영이 단지 성령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전적으로 우리의 영을 의뢰하는 것이다. 2. 영의 법칙 하나님의 자녀는 영을 따라 행하는 삶의 첫째 조건으로서 자기 속 사람의 의식을 감각할 줄 알아야 한다. 영이 압력을 받을 때 그리스도인은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고 하나님의 참된 인도를 놓치게 된다. 영에 가해지는 중압감이나 압력을 즉시 처리하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이다. 때에 따라 말로, 기도하는 중에 영의 힘으로 대적해야 하고, 중압감의 원인을 찾아 처리해야 한다. 영은 자신을 표현하는 기관으로 혼과 몸을 필요로 한다. 사단에 의해 영이 봉쇄되면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여 원수에 대해 소리내어 말하고, 음성을 높여 십자가의 승리와 원수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마음을 다하여 혼과 몸으로 원수의 일을 물리쳐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영을 여는 하나의 수단이다. 성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원수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주 예수의 영광스런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와 더불어 영의 힘을 발휘하여 봉쇄망을 뚫고 밖으로 나가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영은 악령에 의해 중독될 수 있다. 영을 따라 살기 원한다면, 모든 면에서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때때로 사탄은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 영을 강퍅하게 만든다. 용서하지 않는 영은 원수에게서 기인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관대하지 않은 영은 몸으로서의 교회에서 스스로 분리시키도록 부추긴다. 또 교만의 영을 투입시켜 신자들을 넘어지게 한다. 처음에는 사탄으로부터 온 독들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이들을 저지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라도 받아들인다면, 이 독들은 육신의 죄들로 변할 수 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영을 항상 부드럽고 온화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즉시 멈추어야 한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순결한 영으로 말하기 원한다. 나는 원수를 대적하기 원한다. 만일 형제에게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주저된다면, 우리의 영은 그대로 죄 가운데 갇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영을 부드럽고 온화하게 유지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영의 침륜이나 침몰은 대개가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데 있다. 누구의 영이든 바깥쪽으로 향하지 않고 내부로 향할 때, 하나님의 능력은 즉시 단절되면 영은 곧 혼 속에 빠진다. 이러한 작용이 영보다도 감정 속에서 생활하도록 유혹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영이 활동을 계속 하고 침체 되지 않도록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단의 영의 중압감과 달리 영적 부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신자에게 나타내어 하나님과 협조하게 만들려는 목적에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담은 일단 우리가 기도를 드리면 사라진다. 그러나 중압감은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이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제거 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부담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이 항상 자유롭고 유동적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영 속에 있는 기도의 부담은 기도를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고통을 받을 용의가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우리가 영의 부담을 받을 때마다 즉시 기도를 통하여 그 부담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법을 찾도록 하자. 자신의 영적 생활에 쇠퇴를 감지하는 즉시, 하나님의 자녀는 자동적으로 어디엔가 출구가 막혔음을 인식해야 한다. 즉시 기도하고 숙고하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시험하고 찾아내야 한다. 성령께 그 이유를 계시해 달라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자신이 생명의 지속적인 흐름을 위한 조건들을 이행하지 못한 곳이 어느 부분인지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후퇴했다는 것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퇴보한 이유를 적극적으로 밝혀내야 한다. 신자의 영이 때때로 어두어지기도 한다. 우리의 영이 성령과 접축을 끊었기 때문이다. 영은 몸을 규제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해야 하며, 거꾸로 몸의 영향을 ke아서는 안 된다. 자기의 영이 원수의 공격을 받아 무책임하게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즉각적인 회복을 구하고 지체없이 원수가 하는 모든 일과 그 일의 원인을 대적하고 나서야 한다. 종종 영의 무책임한 원인은 영의 완강함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의 부드럽고 온유한 영을 필요로 하신다. 짤막한 신호에도 주님께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영이 언제 무책임하며 성령과 협조할 수 없는지를 인식하고 있어야 하고, 왜 그런지 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영이 원수와 자아의 생활로 인해 방해를 받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로운 영교를 나눌 수 있도록 주의 깊게 자신의 영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3. 영을 돕는 마음의 원칙 만일 영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마음의 활동에 의해 영을 유인하여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을 영을 도와주는 마음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영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는 대신에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기도로 맞설 때 우리의 영은 상승할 것이다.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라 이미 배운 말로 악령을 저주하라 기도제목이 생각나면 하나씩 떠오르는 대로 그 문제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이 문제들에 대해 기도하고 난 후에 여전히 우리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고 우리의 영은 반응을 보이ㅣ 않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기도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기도 제목이 아님ㅇ르 깨닫게 된다. 그러나 기도 중에 어떤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우리의 영이 반응하는 것같이 느껴진다고 하면 드디어 주님의 뜻을 따라 간구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갖가지 양상의 문제를 놓고 영의 부담이 사라질 때까지 주의 깊게 그리고 철저하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영적으로 우리를 인도해 달라고 마음으로 구해야 할 것이다. 마음을 사용하여 영을 일으켜야 하며, 영을 움직이게 하여 이 문제가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영과 마음은 힘을 합쳐 싸움에 임한다. 만일 영이 압력에 눌려 그 저항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영을 대신하여 싸움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이 기도하는 가운데 버티고 싸운다면 영은 그로 인해 다시 힘을 얻어 난국에 대처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남의 마음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형제에게 반응을 보이기 전에 그이 생각의 흐름이 어떠한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4. 영의 정상적인 상태 우리의 그릇된 행동은 대부분 그릇된 영에 그 원인이 있다. 통회하는 영-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통회하는 심령 가운데 죄에 대해 슬퍼하며 생활하기를 원하신다. 상한 심령-하나님은 가난하고 괴로워하는 영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떨기 때문에 가난한 영을 기뻐하신다. 모든 자기 신뢰와 자부심은 무너져야 한다. 겸손한 영-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미덕을 표현하기 위하여 겸손한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영은 언제나 주님을 바라고 기다려야 하며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 없이 겸손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함-오직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겸손 할 수 있다. 온유한 영-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유한 영을 연마하기를 기대하신다. 온유한 영은 주님의 뜻이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긴다. 열심있는 영-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충만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이 영속적으로 열심을 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열심 있는 영의 표시는 항상 주를 섬기는 것이다. 냉철한 영-우리 영에 냉철함이 결여되어 있을 때 우리는 종종 무절제한 행동을 취하는 수가 있다. 기쁨에 찬 영-하나님에 대해서는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는 영을 지녀야 한다. 능력의 영-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겁 없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위해 담대하게 고통과 수치를 당하고, 참된 용기로써 모든 손실을 받아 들이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성실하심을 의지할 것을 요구하신다. 고요한 영-우리의 영이 고요해질 때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으며, 혼란스러울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영의 새로움-순간순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거룩한 영-하나님의 자녀는 죄가 자신을 이기어 자신의 영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죄에 대하여 죽은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거룩함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 강한 영-우리의 영의 힘은 성령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자가 영을 따라 행할 때 성령으로부터 더 많은 능력을 얻을 것이며 그의 속사람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을 언제나 강건하게 유지시켜야 한다. 영의 일치-신령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일 뿐 아니라 각 성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도 하나이다. 자유롭고 개방된 영은 다른 형제들과의 접촉에 있어서 벽을 만들지 않는다. 은혜로 충만한 영-항상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은혜로 우리 영을 가득 채워야겠다. 휴거의 영-휴거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은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지상에서 생활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아 주님의 재림과 자신의 휴거를 기다린다. 제7부 혼의 분석 - 감정 1. 신자와 감정 사람의 감정은 타고난 여러 가지 느낌에 불과한 것으로 자주 바뀐다. 감정적인 신자는 자신의 생활이 너무나 불안정한 상태ㅔ 있고 생각하고 슬퍼한다. 감정적인 생활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모신다면 변덕스런 생활을 벗어날 수 있다. 영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감정이 이를 대신한다는 것을 인식해 두어야 한다. 영감은 언제나 사람의 영 속에 있는 성령으로부터 생기는 반면에 감정은 언제나 사람의 외부로부터 들어온다. 영을 따라 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모든 행동은 원칙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영적인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안정감과 평안을 유지한다. 무슨 일이 닥치건, 아무리 큰 공격이 밀어닥쳐도 그것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변하지 않는 성품을 나타낸다. 주님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인간 속에 있는 아무것도 하나님의 생명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영이 아직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알지 못하면 여전히 죽어 있을 수 있다. 십자가가 우리의 욕망에 역사할 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되며, 영적인 힘은 자연히 우리 안에 나타날 것이다. 감정은 하나님께서 처리하지 않으면 언제나 변덕스러운 자기 기분을 따른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의 감정 위에 십자가가 더욱 깊이 역사하도록 한다면, 그들은 곧 감정이 더 이상 영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영과 협조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감정은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이는 감정의 그 혼란스럽고 불 같은 성격을 파괴하고, 전적으로 영에 복종시키기 위해서다. 십자가는 영에게 모든 감정의 활동을 지배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2. 애정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애정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주님께서 그것을 주관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 일하면서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활동하는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자.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 때문에 주님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 한 분만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자기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자신을 남들보다 낫게 생각하지 않고, 남들을 자기 자신처럼 생각한다. 오늘 하나님 안에 잇고, 하나님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우리의 애정은 주님을 사랑하는 데 쓰이더라도 전적으로 영의 지배하에 놓여야만 한다. 영적인 사랑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는 무슨 일을 당하든간에 또는 자신의 기분과 상관없이 주님을 사랑할 것이다. 먼저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이를 부지런히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을 믿기를 원하신다. 신자는 항상 어떤 사람 또는 사물이 자신의 애정을 자극하는지를 영적으로 분변해야 한다. 3. 욕망 욕망은 우리의 감정 생활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욕망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한다. 육신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때 강력한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교만은 욕망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감정적인 신자는 자신을 나타내기에 급급하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영적인 명성을 추구하는 것과 죄를 사랑하는 것을 똑같이 더러운 것으로 여기신다. 우리는 사람도 보지 않고 하늘도 보지 않고 오직 성령 안에 살면서 주의 보좌 앞에서 주님을 섬길 때에만, 우리의 감정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며, 우리가 감정에 대하여 얼마나 불완전하게 죽었으며, 또 얼마나 감정을 따라 살고 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성급함이 죽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고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을 기뻐하신다. 고통 가운데 침묵을 지킬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가 역사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바가 때때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자신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고 열망하는 것이 있다면, 이를 완전히 포기하라고 요구하신다. 우리가 조용히 우리의 타고난 성품에 맞지 않는 것들을 받아들일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혼적 생명을 더욱더 단단히 십자가에 못 박는 또 하나의 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허영심은 죽어야 한다.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의 욕망을 대적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으로서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멍에를 메셨다. 그는 아버지의 뜻만으로 만족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멍에를 메고, 그의 제재를 받고, 그의 뜻을 행하고, 육신의 자유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명하신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시거나, 요구하시거나, 책임 지워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좋은 것으로 간주한다. 영적 생활의 특징은 만족이다. 하나님 안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다 찾았다는 의미에서의 만족이다. 십자가는 열매를 맺는다.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열매를 얻는다. 어떤 십자가도 우리에게 헛되지 않을 것이다. 4. 느낌의 생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때, 대개 느낌의 생활을 경험한다. 대게 죄에서 해방되는 경험을 한 후에 거치게 되며 커다란 기쁨을 가져온다. 주님을 가깝고 소중하게 느끼고 의식한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오래 가지 않아 사라지게 된다. 그들이 낙담하고 실의에 빠짐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속한다고 알고 있는 많은 일들이 행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삭막한 상태가 지나가면 갑자기 갈구하던 감정이 되돌아온다. 주님께서 떠나신 것이 자신의 불성실함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이후부터는 이 느낌의 생활을 또다시 상실하지 않기 위해 되찾은 기쁨을 보전하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온 힘과 정성을 다해 매일 주님을 섬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이전을 경험하기 시작하며 번민과 낙담에 빠진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이와 같은 경험을 몇 번씩 되풀이한다. 이 감각은 혼의 일부이다. 많은 것을 느끼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든 간에 우리는 변함이 없이 그대로이다. 흥분이나 낙담도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하기 위하여 기쁨을 주신다. 그리고 어떠한 환경이 처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기를 기대하신다. 주님께서 쓰시는 여러 방법 가운데 기쁜 감정을 주셨다가 나중에 다시 빼앗아 가신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부패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 겸손이 따른다. 환경의 영향에 따라서 그 삶이 자주 변하는 사람은 아직 주님을 깊이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환경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모든 감각을 이겨내야 한다. 주님은 이런 환경을 이길 수 있도록 다양한 감정들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참된 영적 생활은 느낌의 생활이 아니라 의지의 생활이다. 신령한 사람의 의지는 이미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었다. 이제 이 의지는 전체 인격에 명령을 내리기 전에 영의 계시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목표는 감정 대신에 의지가 일하게 하는 데 있다. 신령한 생활은 의지를 통해 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신자가 느낌의 생활을 경험할 때마다 그의 영적인 행로에서 한 단계를 더 올라섰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항상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의지가 영을 순종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대로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감정을 따라 생활하는 것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적 생활에 커다란 위험을 제공할 수 있다. 직관은 감정이 조용할 때만 적극적으로 활동하루 수 있다. 직관은 자주 사용 될 때 강해진다. 그러나 감정에 의존하는 사람의 의지는 그 주권을 박탈당한다.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했다면 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열렬히 주님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기쁨을 주시는 이도 취하신 이도 주님이시다. 선물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선물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행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 제거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감정안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무엇이든지 감정을 몸으로 유인하는 것은 십중팔구 악령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적인 생활을 부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외부의 육체적인 느낌들을 일일이 부인해야 한다. 5. 믿음의 생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은 믿는 분에게 닻을 걸고 잇지. 믿음을 행사하는 자, 즉 자신에게 닻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가 믿는 분을 바라본다. 비록 우리가 완전히 변한다 해도 우리가 신뢰하는 그분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믿음은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감정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기를 원하신다. 개인의 감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에만 관심을 두는 생활이다..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완전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자신의 관심이나 무관심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믿음의 생활은 느낌의 생활과 정반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지 자신의 기쁨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쁨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살기를 바라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은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은 부인한다면, 우리는 아직 십자가의 더 깊은 할례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만드시든 간에 무조건 순종할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따를 때, 주님께서는 보통 그에게 굉장한 기쁨을 주신다. 비록 주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긴 했어도 그로 말미암아오는 기쁨은 그가 상실했던 것을 훨씬 능가한다. 따라서 그는 기꺼이 주님의 듯에 순종한다. 그러나 그 기쁨을 기대하면서 주님의 뜻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슨 동기로 신자가 주님을 따르는지를 알고 싶어하신다. 그래서 위로를 받지 못하고 고통을 경함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무엇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게 된다. 이것이 실제적인 십자가다. 기쁠 것이 전혀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밀고 나간다.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자아를 위해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고 자아를 기꺼이 죽음에 넘기는 것임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자기를 미워하여 죽이려고 한다고 느낄지라도,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계속 자신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대하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임을 인식한다면, 그와 같이 자주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것이며 불만스런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훌륭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의 타고난 생명은 즉시 십자가에 의해 제거될 것이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영교할 시간과 장소를 찾는데 마음을 쓰고 자기의 의무인 일들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자연히 주변 사람들의 필요나 행복은 무시하게 된다. 그는 매일 매일의 크고 작은 일에서 주님과 연합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신자는 자기 생명이나 죽음은 개의치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만 마음을 쓴다. 그는 이미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 그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오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주님의 길은 모두 사랑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도의 용사로서 사탄을 이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이 가장 고상한 생활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아직도 감정의 작용 때문에 불안해질 수 가 있기에 깨어 기도하는 생활이 계속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으로 본다. 그를 무너뜨린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그를 일으켜 세운 분도 하나님이시다. 혼적인 것은 무너지고 영적인 것은 세움을 입은 것이다. 제8부 혼의 분석 -마음 1. 마음은 싸움터이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사탄과 그의 악령들이 진리에 대항해서 싸우는 싸움터이다. 마음은 사탄에게 유약한 존재다. 인간의 세력과 마귀의 세력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교통은 사고의 기관 안에서 이루어진다. 생각은 항상 어둠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본래 마음은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은 어두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거듭나는 순간 사람의 마음에 전폭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사람의 마음은 아귀와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을 받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의 변화를 받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회개한 후에도 신자의 마음이 완전히 사탄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비록 구원은 받았지만 신자들의 사고 생활이 아직 새로워지지 않은 채로 있기 때문에 결국 마음은 가장 전력적인 싸움터로 남아있는 것이다. 신자가 지성 안에서 악령들을 물리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는 계속 유혹당하고 기만당하여 자기 의지의 주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상존하는 위험은 거짓된 가르침을 자신의 생각 속에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하고 순수한 헌신에서 떠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새 생명을 받고 새로운 심령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두뇌를 가지고 있지 못할 수가 있다. 허다한 성도들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의 두뇌는 잡다한 이론과 의견과 목표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사람의 말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의 생활 태도 때문에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성경 대신에 사람의 말과 행동을 진리의 척도로 삼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영과 같이 새롭게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고 생활을 창조 당시의 우수한 상태로 환원시킴으로써, 우리가 생활에서뿐 아니라 생각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 누가 나의 마음을 통제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을 대신해서 마음을 지배하는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자녀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는 즉시 원수가 그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데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생각이 아니고 악령의 생각임을 알아야 한다. 무질서하고 돌발적인 생각은 십중팔구 악령들의 행위에서 연유한 것이다. 악령들은 그들의 생각을 신자의 머리 속에 주입시켜, 신자가 그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인하려 한다. 제어하기 어려운 생각들이 있는 경우에는 마음이 어떤 것을 붙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무제를 져쳐놓고 싶지만 어떤 외적인 힘이 그 문제를 잊지 못하게 하고 계속 생각하도록 강요할 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악령들이 하는 일이다. 악령들은 인간의 마음에 무엇을 더해 주거나 무엇을 빼앗아감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다. 인간의 허락 없이는 사탄도 마음을 사용할 힘이 없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악령들ㄹ에게 내맡기지만 않는다면 악령들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할 권리가 없다. 우리를 유혹하는 생각에 대해서 우리의 의지로 거부한다면 그 생각은 즉시 중단될 것이다. 새로워지지 않은 마음-그리스도인이 계속 육신적인 상태로 머문다면, 마귀의 군대는 그의 성격과 기질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생각을 그에게 주입시켜 신자가 마음을 새롭게 하지 못하도록 훼방 놓으려 한다. 부당한 마음-그 마음에 죄를 품고 있으면 그는 자기의 마음을 악령들이 쓸 수 있도록 빌려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오해하는 것-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참된 의미를 잘 모르는 성도들은 이 진리들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고 편견에 빠지게 된다. 악령들이 신자들의 오해에 따라서 전략을 세운다. 신자들은 자기의 오해에 근거한 것인줄 모르고 하나님으로서 난 것이라고 단정한다.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사탄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환경과 장래의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준다. 그 생각을 받아들여 정말 약해지고 병을 앓게 된다. 공허한 마음- 악령들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공허한 상태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머리가 텅 비어 있으면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사고력과 지각력을 잃고 무조건 받아들인다. 수동적인 마음-어떤 외부 세력이 그것을 자극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영의 직관에 있지, 혼의 마음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원칙은 언제나 인간이 자기의 의지로 자신의 전인격을 다스리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수동적인 태도-정상적인 하나님의 인도는 영의 직관 속에 있는 것이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직관으로 알고 마음으로 증명한다. 마음의 기능은 사용하지 않고 제쳐놓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먼저 새롭게 한 다음에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의식적으로 몸의 여러 부분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책임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그는 오로지 수동적인 상태에서 부분적으로 아니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게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검토하고 그 다음에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직관과 의식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일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과 성경 말씀에 일치한다. 악령으로부터 오는 것은 마음의 기능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요가나 명상 등도. 악령들의 생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즉시 행동을 취하도록 강요하고 억압한다. 결코 인간에게 생각하고 고려하거나 조사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혼돈시키고 마비 시킴으로써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악령에게서 유출괴는 것은 모두 인간의 마음의 정상적인 기능을 빼앗아 간다. 2. 수동적인 마음 상태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의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갑작스런 생각들을 거부해야 한다. 성경구절이 갑자기 떠올라 생각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임이 끝나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아무런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사람의 마음이 악령들에게 개방되어 있다면, 밤에 그가 꾸게 되는 꿈들은 대부분 낮에 접했던 영상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들은 낮 동안에는 영상을 만들어내고 밤에는 꿈을 꾸게 한다. 이것은 이상하고 어리석고 공상적이며, 사람을 교만하고 멍청하고 어리둥절하고 비합리적으로 만든다. 밤에는 뇌가 낮만큼 활동적이지 않다 더 수동적이고 마귀에게 조종당하기가 더 쉬운 것이다. 그의 잠은 힘을 회복시켜 주지 못한다. 밤낮으로 악령들의 활동에 저항한다면 그는 자유를 되찾게 될 것이다. 불면증-생각이 홍수처럼 밀어닥친다. 이러한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의문해보아야 한다. 건망증-부자연스런 기억 상실은 모두 사탄의 세력의 간교한 공격을 암시하는 것이다. 집중력의 결핍-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한 채 굉장히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악령들의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집중하기 못하는 것이다. 악령들이 먼저 갖가지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우리가 자기들의 말을 듣고 그것을 남에게 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무기력함-외부에서 들어온 생각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환경에 의해 이리저리 밀려다닐 뿐 스스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모든 일이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에 일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도중에 중단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계속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적인 무기력함이라는 병에 걸리게 된다. 불행한 생각을 도저히 버릴 수 없다. 변덕스러움-변덕스럽게 바뀌는 생각들을 따르는 가운데 자연히 변덕스러운 사람이 된다. 밤이 깊을 때 마음이 극히 혼미할 때 결정을 바꾸도록 유도한다. 수다스러움-갖가지 잡된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데 어떻게 입이 잠잠할 수 있겠는가? 마음은 비어 있는데 무익한 말을 중단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때때로 이러한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뜻에 반대되게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생각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말들은 모두 악령들이 조장한 것이다. 고집-사람의 정신적인 기능이 수동적인 상태에 빠져 어둠의 세력에 정복되면, 그는 일단 결정을 내린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제시하는 이유나 증거에 절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마음이 무기력한 상태이므로 악령들이 마음속에 집어넣는 것은 무엇이든 가장 우수한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이 초자연적인 음성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시험하거나 검토하거나 고려하기를 거부하고, 완고하게 그것을 주장하면서 다른 의견에는 아예 귀를 기울이여 하지 않는다. 사고력을 일체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쉽게 악령들에게 속아 넘어가게 마련이다. 그의 마음은 어떠한 변화도 허용하지 않는다. 눈의 징후-사람의 눈은 몸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그의 마음을 잘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마음속에서 성령에 근거하지 않은 어떤 독립된 움직임을 발견한다면, 그는 즉시 자신이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Freud 비판(정신분석학)/박영남 교수님의 목회정신의학강의안/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Freud 비판(정신분석학) Freud의 정신분석은 인간이해에 새로운 장을 제공하였다고 평가받으나 심리학자들은 그의 이론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기 어렵다는 점에, 인본주의자들은 지나치게 기계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이라는 점에, 그리고 행동주의자들은 반대로 충분히 환원주의적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여기서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논의되는 것을 소개한다. Freud 자신은 유대교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신앙생활을 계속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를 환상이라 하였으며 정신분석 이론은 본질적으로 무신론적 이론이다. 그는 종교를 믿는 사람은 성장 과정에 냉정하고 불확실하며 위협적인 현실에 직면하여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고립과 소멸에 직면하면서 경험하는 심한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안정시키기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환상이 종교라고 하였다. 연약하고 취약한 아동이 전능한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보호받았다는 유아기의 왜곡된 기억을 유지하여 안정과 안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종교를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치하는 일종의 신경증 현상으로 본다. 정신분석은 인간 행동에서 무의식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인간의 욕구와 현실 사이의 갈등은 의식에서 지각하는 것과 함께 지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이에 대응하는 방어기제를 통하여 인간의 행동은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정신분석의 관점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누가 능히 알리요”(렘17:9) 하여 인간이 알지 못하는 마음을 지적한 말씀과 상반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근본 갈등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과 거역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 있다. 정신분석은 아동기 부모와 관계가 심적 갈등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 성경에서도 자녀 양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과 일치한다. 정신분석은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하여 기능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한계와 무력함을 인식하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에 근거하여 정신분석적 관점과 상이하다. 정신분석은 자기를 이해하고 내적 갈등을 해소하여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에 초점을 두지만 기독교에서 인간의 구원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에 대한 갈등으로 나타나는 에디푸스 콤플렉스를 초자아로 승화시키어 극복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 인간에 대한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였다. 치료로서 정신분석은 적용하는데 많은 한계가 드러났으며 기독교 상담에서 좋은 관계의 모형이 되지 못한다고 평가된다.
Well - dying\이란?
\\\"Well - dying\\\"이란 이진영(석3)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 그러나 생명이 있는 한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웰 다잉’은 그런 질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죽음을 검은 베일에 가려진 금기가 아니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 이야기하며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는 대상으로 보자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지나온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고, 힘든 슬픔의 여정을 끝까지 견뎌내는 힘과 용기를 준다. 과연 우리는 죽음을 얼마나 제대로 준비하고 있을까. 국민들의 생사관은 현저히 달라지고 있고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고민도 한층 깊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서부지법에서 나온 ‘존엄사 판결’은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웰 다잉, 품위 있는 죽음을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먼저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존엄사 받아들인다” 88%, “호스피스 이용하겠다” 85% 무의미한 생명 연장에 반대하는 시민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 국민 열에 아홉은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윈위적인 생명 연장에 반대하고 있다. 국립암센터(원장 이진수)가 지난 10월 성인 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벌인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다. 죽음에 임박한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 등 생명연장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존엄사’에 대해서는 87.6%가 찬성 의견을 냈다. 2004년 82.3%에 비해 한층 높아진 수치다. ‘현재의 방법으로는 질병 치료가 불가능하고 점점 악화되는 경우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이용하겠다’는 응답자는 84.6%로 2004년의 57.4%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대한 설명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항목에는 87.6%가 찬성했다. ‘질병이 위중해 말기 상황에 처했을 경우, 본인이 말기라는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질문에는 91.8%가 ‘알아야 한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인식과 현실의 온도 차는 크다. 현재 대형 종합병원의 중환자실을 들여다보면 국민 의식 조사가 마음속의 바람을 반영한 것에 그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울대 병원 혈액종양내고 허대석·김범석 교수팀이 일본임상암학회지에 발표한 연구 결과는그런 현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들의 연구는 전이성 암으로 진단 받고 항암제 치료를 받은 국내 환자 298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사망할 때까지를 추적, 관찰한 것, 편안한 죽음을 준비해야 할 기간인 임종 직전 1개월 동안에도 대형종합병원 응급실을 방문한 암환자의 비율은 33.6%로 미국(9.2%) 등 서구선진국에 비해 대단히 높았다. 절반이 넘는 50.3%의 환자는 임종 두 달 전까지의 적극적은 항암제 치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임종 6개월 전까지 적극적인 항암제 치료를ㄹ 받는 환자는 9.1%에 불과했고, 상담을 의뢰한 시기는 평균 임종 53일 전으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이 의미 없는 치료를 받느라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병실을 전전하다 삶의 마지막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임종을 맞는 것이다. 지난 11월 28일, 존엄사를 사실상 인정하는 국내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 서부지법은 의식 불명 상태인 김모(75)할머니에 대해 “회복 가능성이 없는 연명치료가 환자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며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존엄사 권리를 인정햇다. 법원은 지난 1997년 보라매병원에서 의식불명 상태의 환자를 보호자의 요구로 조기 퇴우너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에서는 환자 보호자와 담당 의료진에게 살인죄와 살인방조죄 등 유죄를 선고했었다. 김 할머니는 2008년 2월 18일 폐암 발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기관지 내시경을 이용한 폐종양 조직검사를 받던 중 과다출혈 등으로 심정지가 발생했고, 이로 인한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8개월째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상태에 빠졌다. 항생제 투여와 인공영양·수액 공급 등 치료를 받았지만 김 할머니는 인공 호흡기를 제거하면 곧 숨을 거둘 수 있는 상태였다. 그 가족들은 김 할머니가 평소 “기계 의해 연명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며 생명연장 치료를 받지 않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의사를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원고 일부 승소판결을 내리면서 “가족들의 요구가 아니라 환자의 치료중단 의사가 추정되기 때문”이라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현재의 절망적 상태나 기대 여명기간, 현재 나이 등을 고려할 때 김씨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번 법원 판결에서는 존엄사와 관련, 3가지 쟁점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우선 치료를 하지 않으면 사망하는 응급 상황에서 환자 측이 치료 중단을 요구할 경우, 응급의료법률에 따라 의사는 환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환자의 회복 가능성이 없고 환자가 치료중단 의사가 명확할 경우에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인정돼 의사는 환자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환자가 의식불명 상태에 있을 경우에는 가족과 친지에게 그가 평소에 말한 내용이나 타인의 치료에 대한 반응, 기대 생존기간 등을 종합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존엄사 문제에 대해서는 소생가능성에 대한 판단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것은 가족들이 결정권을 가지고 소생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때 중단되는 치료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등 짚어야 할 문제가 많다. 최근 학계와 정치권 등에서는 존엄사 문제와 관련,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2월 22일 자유선진당 변웅전·이영애 의원이 주최한 ‘안락사와 존엄사 토론회’에서는 연명치료 중단 허용에 대한 법제화를 놓고 “환자나 가족의 고통 등 현실적 측면을 고려해 허용해야 한다” “기계 장치에만 의존해 임종 시간을 미루는 생명유지 기술에 대한 거부는 인간적 죽음의 수용을 위한 준비” 라는 주장과 “의사의 오지이나 반강제적 생명포기 같은 부작용을 감안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자칫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질병으로 시달리는 시민에 대한 새로운 고려장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한편 12월 19일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존엄사 허용, 입법적 해결 가능한가:생명권의 볍률적 제한적 가능성을 중심으로’라는 현안 토론회가 열렸다. 민주당 전현희 의원이 주최한 이날 토론회에서 이석배 경남대 법학부 교수는“환자의 사전의사표시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고 보호자와 의사 상호간에 발생하는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라 밝혔고, 구인회 가톨릭대 교수는 “무의미한 치료 중단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했다. 전병왕 보건복지가족부 의료제도과장은 “정부는 연명치료 중단의 입법화 가능성을 검토 중에 있다”면서 “법적·윤리적 정당화 가능성, 절차와 방법·요건, 국민의식 조사 등을 통한 우리 사회의 수용가능성을 중점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존엄사 말 그대로 ‘품위 있는 죽음’을 말하는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의 의학적 치료를 다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질병에 의한 자연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의학적 치료가 생명을 더 이상 연장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생명을 더 단축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본다. 안락사 질병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인 행위에 의한 죽음을 뜻한다. 존엄사와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의 요청에 따라 약제 등을 투입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를 ‘적극적 안락사’,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공급이나 약물 투여 등을 중단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학적으로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기계적 호흡이나 심폐소생술 등을 의미한다. 인공호흡기 사용이나 심폐소생술, 신장투석 등 생명유지 기술은 죽음의 과정에 접어든 말기 환자에겐 고통을 연장해 오히려 비인간적이라는 윤리적 지적이 나온다. 무의미한 치료는 환자가 의학적으로 회복 가능한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호흡정지와 심장마비로 사망할 위험이 있을 때 실시하는 ‘의미 있는’ 생명연장치료와는 구분된다. 미국 카네기맬런대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가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끝났다. 말기 췌장암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도 밝은 미소로 삶과 꿈을 이야기한 동영상으로 세계를 감동시켰던 그는 죽음마저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드렸고, 마지막까지 여유 있게 농담을 하면서 여행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강의’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꿈에 대한 강의였다. 반면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떤가.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밝은 미소 속에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아직 많지 않다.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꿈과 희망을 설파한 포시 교수의 죽음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 사회에서 ‘웰다잉’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는 통계가 있다. 서울대병원 허대석(의대)교수팀이 전이성 암진단을 받았던 국내 호나자 298명을 삼아 순간까지 추적·관찰한 결과 말기암 환자 중 33.6%가 임종 1개월 전까지 응급실을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의 50.3%는 임종 2개월 전, 94,6%는 임종 6개월 전까지 적극적인 항암제 치료를 받았다. 미국에선 임종 6개월 전까지 항암 치료를 받은 환자는 33%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에서 안락사와 존엄사 논쟁이 그치지 않는 것도 심페사·뇌사 등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이 마치 죽음의 정의인 양 죽음에 대한 오해가 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해가 “죽으면 다 끝나는게 아니냐”는 육체중심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죽음이란 옷을 갈아입는 과정”이라고 했다. 생사학을 창시한 미국의 정신과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을 눈앞에 둔 어린아리를 향해 이같이 말했다. “우리 몸은 번데기와 마찬가지다. 죽으면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나비처럼 예쁘게 날아서 천국으로 날아간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포시 교수가 주는 교훈은 마지막 순간까지 낙천적이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100만 명 이상이 본 ‘마지막 강의’란 동영상에서 그는 절대 꿈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포시 교수처럼 죽음에 대처하는 것은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웰 다잉’에 대하여
‘웰 다잉’에 대하여 1. 웰다잉(well-dying) 준비 2. 나의 죽음 준비 3. 나의 유언장 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과목명 : 사생학과 호스피스 담당 교수 : 김경호 교수님 제출자 :정원경(09535107) 1. 웰다잉(well-dying) 죽음 준비 \"웰다잉은 진정한 웰빙의 마무리이다\" 인간은 죽음의 존재라고 정의하고 “모든 사람에 죽는다는 것은 확실한 일인데도 무의식중에 있는 나는 죽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다”고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한 삶을 살듯이 죽을 때도 각자 고유한 죽음을 맞이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모두는 항상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죽음은 두려워한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정이므로 우리는 거기에 대비하여야 한다. 죽음을 피하거나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도 죽음을 면할 길은 없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고 영생을 얻는 방법이 있다고 믿으면 나는 무지하거나 자신을 기만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숙연한 마음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죽음에는 의지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이 있다. 죽음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가 그것이다. 그것을 공포로 느낄 수도 있고 환희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인간은 각기 항상 자기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죽음그것은 생명이 소중하고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권리이며 의무이기도 하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품위 있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은 더욱 소중하다. 그것이, 즉 품위 있고 의미 있게 죽는 것, 곧 ‘웰다잉’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웰다잉이라고 할까, 이 세상 어느 누구가 편안한 죽음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는 도대체 어떠한 것들을 준비하여야만 웰다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이의 죽음은 평안과 평화를 느낄 수 있지만, 또 다른 죽음은 고통과 자신의 인격과 가족의 신뢰마저 무너뜨리고 아픔만 남기고 떠난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의 주변에서 가지고 있는 죽음은 무엇이겠는가 두려움과 무서움 그리고 고통만을 죽음이라고 표현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죽음준비’에 대해서 묻는다면 미간을 찌뿌리고 화를 내거나 하루하루 살기 바쁜 세상인데,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죽음까지 미리 생각해야 하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준비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또 죽음 준비는 노인만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죽음은 나이순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으므로, 죽음준비는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 모두에게 관계된다. 이웃 일본이나, 미국, 독일 등지에서는 중. 고등학교에 ‘죽음준비’ 교육과정이 필수과목이라고 한다. 또한 일본 정부에는 연간 4억엔을 들여서 죽음준비 교육과정을 개발한다. 미국 공립의 초. 중. 고교에 죽음준비 과목이 개설 된지가 20년이 되었고, 독일에서는 중. 고용 죽음죽비의 교재가 20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진 우리나라는 ‘웰다잉’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고는 있지만 아직 초보 수준이다. 노년기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노인 죽음준비 학교가 있을 뿐이다. 자동차 사고에 대비해 보험을 들거나 노후를 대비해 연금을 매달 붓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준비는 마치 남의 일이기라도 한 듯 전혀 하지 않는 게 바로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죽음준비교육은 노인들에게만 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가르칠 필요가 있다. 죽음준비 교육철학의 원리는 “죽음을 알아야 삶의 방향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죽는가의 질문은 사람은 왜 사는가의 물음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아는 것, 그것이 삶을 아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2세는 종을 항상 데리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종으로 하여금 아참마다, “대왕시여! 당신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라고 환기 시켰다고 합니다. 죽음 준비는 삶과 죽음 각각에 관련해 말할 수 있다. 첫째, 죽음 준비는 삶과 관련해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에 유념하면서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돌아보고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라는 뜻이다. 둘째, 죽음 준비는 죽음과 관련해 평소에 죽음을 미리 준비해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해 두라는 의미이다. 죽음 준비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죽음에 대비해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라는 뜻이다. 죽음준비는 삶을 이치에 맞게 살아보기 위해 임박해 있는 죽음을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따라서 죽음준비는 죽을 준비가 아니라 바로 삶의 준비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 준비를 하지 않고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죽음준비교육은 이 땅에서 제대로 살도록 하기 위한 삶의 교육이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될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라고 달라이라마는 말했다. 삶을 이치에 맞게 살지 않고서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사는 법을 익혀야 죽음을 평온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도 우리는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생활을 보다 단순하게 이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찮은 활동과 사소한 관심거리로 삶의 시간을 가득 채우게 되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죽음의 임박성에 대면하지 않게 된다. 죽음의 임박성을 의식하면서 살게 될 때 ‘만일 내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자기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성찰과 반성을 통해 현실의 삶을 건강하고 의미있게 보내기 위함이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참 애썼다. 나름대로 충실한 삶이었다”라는 만족감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못다한 아쉬운 것들이나 후회할 것 들이 많아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면 아무리 잘 살았다 하더라도 과연 그 사람은 잘 살았다고 할 수 없으니 웰다잉이야말로 웰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항상 자기 자신의 향상을 도모하고 자기 자신을 연마하여 타인이나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매사에 최선을 다해 후회하지 않는 삶이 참 살기 곧 웰빙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웰다잉에 대한 관심을 갖고 ‘얼마나’ 사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를 고심해 봐야 한다. 2. 나의 죽음 준비 ‘삶을 따뜻하게 살고 싶고 또한 따뜻하게 죽고 싶다.’ 마음만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이 ‘웰다잉’에 대한 과제가 있기 전까지 고심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웰빙을 위해 웰다잉을 준비해야 됨을 알게 된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봐야할지 인터넷도 검색해 보고, 남들이 적어 둔 유서 같은 것도 훔쳐보곤 했지만 약간의 형식이 다를 뿐 비슷한 것 같았다. 열심히 살고, 나누고 누리다가 평안히 돌아가는 것이었다. 내 삶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삶의 과정에서 가끔씩 마지막을 바라보며 여운을 주면서 웃고 싶다. *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 만들기. - 가끔씩(기도원 갈 때) 긍정적인 마음으로 죽음을 생각해 보고, 해야 할 일과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 돌아보기. - 죽음에 대해 낙서하기, 나의 삶 작품 만들어 보기(사진, 조형물 등) - 영정 사진 생각해 보며 인물 사진 찍어 보기 * 주님과 동행 - 기도하기(사명 잘 감당하다가 주님이 부르실 때 잠들 듯이 복되게 죽게 해 달라고) - 하나님과 대화 내용 적기(기도 내용) * 일기에 적어 보기 - 고마운 점 , 미안했던 일, 잘못한 일 적기. * 나누기 - 선교지 후원 - 어려운 이웃 단체 후원 - 부활절, 성탄절 이웃들과 나눔 잔치 * 유서함 만들기 - 유서 작성 - 사전 의료 지시서 작성 - 지인들, 고마운 사람, 미안했던 사람들에게 편지 써 놓기 - 전도하고 싶었는데 전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편지 써 놓기 3. 나의 유언 존엄한 죽음을 위한 나의 선언서(사전의료지시서) 저는 제가 병에 걸려 치료가 불가능하고 죽음이 임박할 경우를 대비하여 저의 가족, 친척, 저의 치료를 맡고 있는 모든 분들과 행여라도 형사적인 문제가 발생할 경우 수사관과 법관님들께 다음과 같은 저의 희망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선언서는 저의 정신이 매우 온전한 상태에 있을 때 적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저의 정신이 온전할 때는 이 선언서를 저 자신이 파기할 수도 있지만, 철회하겠다는 문서를 재차 작성하지 않는 한 유효합니다. 저의 병이나 사고로 인하여 죽음이 곧 닥쳐오지 않다 하더라도, 또 현대 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죽는 시간을 뒤로 미루기 위한 일체의 연명 조치는 일절 거부합니다. 제가 3일 이상 이른바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을 때는 생명유지를 위한 일체의 연명조치(심폐소생술-임종을 앞서 앞가슴을 누르고, 투약하고, 전기적 충격을 주고, 인공기계호흡 등을 적용하는 의료시술), 대수술(예:담낭제거수술, 대장부분절제술 등, 인공투석, 기타 모든 수술)을 중단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그런 경우 저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진통 조치는 최대한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로 인해 예를 들어 마약 등의 부작용으로 죽음을 일찍 맞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의 이상의 소망과 환자로서의 나의 권리를 존중하고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저의 선언서를 통해 제가 바라는 사항을 충실하게 이행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저의 요청에 따라 진행된 모든 행위의 책임은 저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주소 : 00시 00구 00동 00번지 주민등록 번호 : 000000-0000000 날짜 : 2009년 6월 00일 성명 : 정원경 (인) 가. 사전의료지시서 나. 임종 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날 받아 주시옵소서. 뇌사 판정이나 소생 가능성이 없음이 판정되면 기증할 수 있는 모든 장기를 기증하여 주시고, 화장해서 제가 좋아하는 꽃향기 가득 맡을 수 있는 들꽃 핀 산자락 풀밭 아래 묻어주세요. 그러나 저의 가족 모두가 부재한 경우 해부실습용으로 기증해주시기 바랍니다. 다. 장례 절차 평소 입었던 옷으로 깔끔하게 입혀주시고, 예수님처럼 하얀 천으로 한 번 감싸서 관에 넣어주세요. 수의 입고 염습하는 것 생각만 해도 답답합니다. 사망 판정 후 목사님, 성도님들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예식 거행 후 다른 절차 없이 바로 화장해서 영정 사진 뒤에 안보이게 놓아주세요. 국화꽃 장식 대신 예쁜 장미 안개 꽃다발 하나만 놓아주세요.(국화꽃 안 좋아합니다.) 장례기간은 이틀만 하고 그 동안 평소에 즐겨듣던 말씀찬양 CD를 틀어주시고, 모두들 편안한 옷차림으로, 즐거운 모습으로 함께 했으면 합니다.(장례식장에 검은색만 가득한 건 더 우울해보입니다.) 저의 물건과 재산은 남길 것이 거의 없지만 가족들이 알아서 하든지, 아무도 없을 시 목사님께 맡겨 교회에 기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묘지로 가기 전 친정 부모님댁을 들렀다 가주시기 바랍니다. 라. 가족들에게 아래 글은 전도 동영상과 함께 유서함에 담아놓겠습니다. 동영상에도 넣어 놓겠지만, 혹시 보여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이 편지를 각자에게 전해 주십시오. 1년 후 가족이 모일 때에도 한 번 보며 하나님께 충성하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 사랑하는 남편(내 주님)께 같이 걷다 보면 걸음이 빨라서 내가 먼저 앞 서 가면 저만치 뒤따라오며 귀여운 표정으로 투덜대던 당신. 천국도 당신보다 한 발치 앞서 가는 거니까 울음을 멈추고, 남은 아이들과 힘차게 찬송 부르며 배웅해주시면 저도 환히 웃으면서 갈 수 있을 겁니다. 천국 올 때까지 남은 사역 끝까지 잘 감당하시고 하나님께 무한 영광 돌리시길 기도합니다. 당신을 위해 남겨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어쩌지요? 하지만 우리가 함께하는 동안 원 없이 사랑했다고 확신합니다. 제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준 천사와 같은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신 사랑 때문에 예수님 만나고, 구원받아 천국 갑니다. 처음 만나면서부터 천국으로 돌아가는 이 날까지 깨지랴 넘어지랴 뒤따라 다니며 한 없이 아껴주고 사랑해준 당신.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 바름이와 순종이에게 맘이 여려 슬픈 이야기만 봐도 펑펑 우는 우리 딸 바름아, 항상 씩씩한 우리 순종아, 아빠를 부탁해. 너희들도 엄마가 없다는 생각에 힘들겠지만, 아빠가 몸 추스르실 때까지 세심히 보살펴주길, 위로해드리길 부탁한다. 우리 바름이와 순종이는 찬양도 잘하지. 발인 예식 때 찬양 불러 줄 수 있겠니? 엄마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 했던 천국 가는 길 우리 아들, 딸 찬양 들으면 안심하며 갈 수 있을 것 같아. 바름아, 순종아,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일 하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거란다. 우리 바름이와 순종이가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노력하길, 늘 하나님이 말씀 보며 기도하여 주의 음성 듣고, 순종 할 수 있는 기특한 하나님의 감동들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 우뚝 일어서서 너희를 위로하는 자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감사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었으면 한다. 너희에게 줄 것은 오직 믿음뿐이란다. 믿음 굳게 잡고 넘어지지 말아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 찬송하며 믿음 굳게 잡아라. 엄마가 하나님보다도 너희를 사랑했던 죄인인데, 표현을 많이 못했구나. 바름아, 순종아, 엄마를 믿고 따라주고 사랑해줘서 고맙다. 사랑한다. *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제가 일평생 제 목숨을 대신해서라도 두 분 예수님 믿고 천국 갈 준비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기에 두 분이 제 유서를 보실 줄 믿습니다. 항상 행복했지만, 마음이 심히 아픈 것은 불쌍한 두 분을 전도하지 못한 것 때문입니다. 모진 고생하시며 사신 두 분이 예수님을 부인하여 천국에도 못 가신다면 이 딸은 차마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서 하나님께 갈 수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저의 죄를 감당케 하시므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기만 하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데, 사랑하는 딸을 봐서라도 꼭 교회에 나가시고 목사님 말씀 들으시고 순종하시길 애타게 간구합니다. 이 딸이 용기가 없어 두 분을 강권하지 못하고 뒤에서 눈물 기도만 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매일 매일 두 분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얼마나 행복해서 울었는지 모릅니다. 틈 날 때 두 분께 썼던 편지를 제 방 한 곳에 모아두었습니다. 교회에 미친 딸이라 안타까워하시기에 부치지 못한 편지들입니다. 천천히 읽어보시고 두 분을 생각하는 저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깊은 시골에서 농사 지어 저희들 뒷바라지 하시느라고 바쁘게 일만 하신 두 분께 드리는 저의 마지막 선물입니다. 그리고 묘지로 가기 전 두 분께 들를 때 꼭 예수님 믿고 천국 가겠노라고 약속해주기시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천국에서 만납시다. 아버지, 어머니 천국 오실 때 찬송 부르며 마중 나가렵니다. 천국에서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 고마우신 시부모님께.. 하나님 사랑으로 감싸주신 은혜 어찌 갚으리요. 마냥 철없는 딸같은 며느리를 혼내키지도 못하시고 기도로 길러주신 두 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이런 부모님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스승같은 두 분께 하나님 사랑 받고, 말씀 배우며 행복한 세상낙원 누리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플 때, 방황 할 때 손수 챙겨주시고, 감싸 안아주신 것 감사합니다. 겉으론 투정하면서도 마음으론 죄송하고 감사했는데 표현이 부족했습니다. 가면서라도 두 분께 고백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죽음의 이해와 목회적 돌봄’을 읽고
‘죽음의 이해와 목회적 돌봄’을 읽고 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과목명 : 사생학과 호스피스 담당 교수 : 김경호 교수님 제출자 :정원경(09535107) ‘죽음 이해와 목회적 돌봄’을 읽고 ▶ 서론 먼저, 연구하고 고심한 논문에 대해 ‘죽음’이라는 것에도 거의 의식 없이 전무하게 살았던 자로써 평가를 어떻게 해야할지 의문이 들었지만, 하나님의 또 하나의 메시지라 생각하며 관심을 갖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었고 짧게나마 서평을 적습니다. ‘사생학과 호스피스’ 과목을 처음 접할 때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배우는 것을 생소하게 느껴지면서 논문의 제목을 보고 ‘기독장’을 말하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논문을 다 읽었을 때에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 느낌이었다. ‘죽음’에 대해 꺼리는 우리나라 정서와 함께 교회에서도 다른 예식은 어느 정도 의식이 있고 틀이 있는 반면 마지막에 대한 것은 별로 생각하고 싶어하지도 않고 예식도 유족들의 의사나 주위 반응에 끌려다니는 것이 대부분 현실이다. 그런데 목회자의 입장에서 소신을 가지고 ‘죽음’을 여러 면에서 바라보고 이해를 연구하고 장례절차까지 생각해 본 것은 외면시 되는 곳에 자세한 관심을 둔 하나의 사랑표시라고 볼 수 있다. 수많은 사건사고가 주위에 있음에도 죽음이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이때에 믿음 있는 성도들일지라도 정작 죽음의 한계 상황에 처하게 되면 충격을 받게 되고 생의 의미마저 상실한 채 무너져 내리는 경우가 많다. 삶의 질은 향상되었지만 이기적인 이 시대에 목회자로서의 돌봄은 너무나도 절실하다. 성도들이 가장 힘들 때 가장 의지하고 싶은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고 이들을 치유의 손길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위치에서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여기서 목회자들이 상고하고 숙지하고 있어야 할 점들을 정리한 것은 돕는 자들에게 아주 유용한 자료로 쓰일 것 같다. ▶ 조목 조목 살펴보며 막연히 알고 있었던 ‘죽음’에 대해 기본적 이해와 사회 전반에 깔린 종교적 이해를 차근차근 다룸으로서 서로의 의식과 차이점을 정리하여 총체적 이해를 도왔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제시함으로서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구절에서 하나님의 뜻이 세밀하게 함축되어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어떠한 자세로 다가가야 할지 생각해봐야하는 의무감이 생겼다. 구약에서는 죽음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하며 죽음의 권세는 곧 하나님의 권세로 이해되어진다. 그래서 죽음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죽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는 의식과 장례식에 대한 애도의 기사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부분을 읽고 구약 성서를 뒤져봤는데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해 슬퍼하며 애통함과 재앙으로 인해 바로가 아들을 위해 호곡함, 야곱의 죽음에서 요셉의 호곡하는 것 등 몇몇 사람 외에 대부분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듯이 표현되어 있는 점을 보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감이 실감되었고 그런 자세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음은 절망과 시련을 뛰어넘는 것임이 보여지면서 승리의 통쾌함을 느끼면서 ‘죽음’이라는 존재의 감사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사후 세계를 말씀으로 자세히 짚으면서 삶 가운데 결혼이나 취업 준비처럼 ‘죽음’에 대해 꼭 짚고 넘어가야하는 필요성을 제시했다. 임종자의 임상적 기본 이해 부분에서 임종자의 심리적 상태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돕는자의 이해를 도왔고, 더불어 유가족의 심리상태까지 관심 갖고 바라본 것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임종자를 위한 돌봄에서 유가족을 위한 돌봄, 그리고 장례에서의 돌봄까지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서 사용되는 용어와 각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도와야하는지의 실천 교과서를 보는 듯 해 처음으로 임하는 사람에게도 훌륭한 도움서가 될 것 같다. 전반적으로 살펴본 결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죽음에 임하는 자와 유가족을 대하는 목회자와 돕는자에게 필요한 핵심서라고 할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 미신과 같이 끝없이 나열되는 두꺼운 이론서와 달리 성경적 입장을 토대로 상황에 맞는 알짜배기 실전서를 제시했다는 데에도 깊은 의미를 두며 찬사를 보낸다. ▶ 보충되었으면 하는 점 주로 임종 직면하는 자와 임종자, 유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이해를 제시했는데, ‘죽음의 이해와 목회적 돌봄’이 제목이므로 ‘죽음’을 염두해 두고 살아야하는 모든 성도들에 대한 평상시 ‘죽음교육’에 대한 자세에 관한 약간의 방향이나 좋은 예시도 다루어졌으면 하는 바램과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소개되었으면 더욱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나타내는 환자와 유가족의 심리 상태 뿐 아니라 성경에서 나오는 인물이나 훌륭한 사람들의 본받을만한 죽음을 대하며 준비하는 자세 등을 보여주기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장례 절차도 성서 말씀에 따라 유가족과 조문객을 위로하고 전도할 수 있는 ‘기독교 장례예식’에 대한 좋은 향방이나 예시도 제시되었으면 좋겠다. ▶ 결론 주위에서 치러진 기독교장례예식을 바라보면서 일반 예식과 별 차이 없이 단순히 목사님, 성도님들과 예식을 거행하는 것뿐이라는 안타까운 면이 있었는데, 나름대로 이런 고민을 안고 연구 모색하는 모습이 있다는 데에 반가웠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사소할 것 같았던 이런 부분에까지 세심하게 목회자의 관심이 있음을 알고 감사하게 되었다. 이 논문과 그동안의 교육과정을 통해 목회자는 아니지만 성도로서, 돕는자로서 ‘죽음’이라는 삶의 좋은 교육 매개체를 활용하여 전도하는데도 더 신경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기도하며 알차게 보내야겠다.
Ⅵ.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며/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Ⅵ. 영원한 생명을 기다리며 (죽음의 신학 379 ~ 449쪽) 석사과정 1학기 임보영 사도신경에 의하면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에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영원한 생명”을 고백하기 전에 “몸의 부활”을 고백한다. 역사의 마지막에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마지막 재판, 곧 “최후의 심판”을 받은 다음,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우리는 부활과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1. 우리 모두 부활하리라 1)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최근의 해석들 사도신경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 곧 “육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고백한다. 죽음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다가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살아나서 세계사 전체와 함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심판이 있기 전,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그들의 삶에 대한 마지막 책임을 지게 될 것이며, 그 다음에 영원한 생명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의심하며, 육체의 부활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많은 신학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한다. 다음은 그 가운데 세 가지 잘못된 견해이다. (1) 불트만(R. Bultmann)의 견해 : 그는 죽은 자들의 부활은 신약성서가 신화적으로 묘사하는 역사의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믿음의 결단과 세례를 통하여 지금 현재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2) 불트만의 영향下에 있는 오늘날 일련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은 역사의 먼 미래에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죽는 순간에 일어난다는 말한다. (3) 가톨릭 신학자 푀그틀레(A. Voegtle)는 미래에 일어날 시간적 종말과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인한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부활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전 15:13-14). 죽은 자들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구성적 의미를 가진다.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부활 신앙이 포기될 수 없는 이유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작으로 파악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을 “육신이 죽어 해체된 후에도 계속 살아남는 불멸하는 영적 실체”로 파악하면서 영혼 불멸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사도신경”에서 영혼 불멸을 고백하지 않고 “육의 부활”을 고백한다. 그럼 초대교회는 그의 문화권 속에 보편화되어 있던 영혼 불멸설을 고백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육의 부활을 고백하였던가? 대관절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여기서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밝히고 그것이 포기될 수 없는 이유를 고찰하고자 한다. (1)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을 고백한다. (2)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차안성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은 단지 영적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물질을 포함한다. (3)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차안성, 신체성과 물질성을 고백한다. 인간의 영혼과 신체를 포함한 전인적 존재가 부활할 것이다. (4)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신실하심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끝까지 사랑하며 그들과 교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은 죽은 자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도 언젠가 부활할 것이며, 하나님과의 새로운 생동적 교통 가운데 있을 것임을 부활 신앙은 증언 한다. (5)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그 근원에 있어 하나님의 의를 증언한다. (6)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은 죽음의 세력의 폐기를 요구한다. 3) 우리의 그 무엇이 부활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 신앙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썩어 없어진 인간의 육체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인간의 그 무엇이 부활할 것인가? 죽음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전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부활도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의 부활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의 부활, “전인적 인간의 부활”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존재 전체”란 무엇인가?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몸을 가지고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되어 일어나는 영적-육체적 행위, 곧 몸적인 행위이다. 삶의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인간의 존재를 가리켜 우리는 신약성서가 말하는 “몸” 곧 인간의 “존재 전체”라 말할 수 있으며 이것이 역사의 마지막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4) 부활 신앙의 구성 요소로서 영혼 불멸 인간의 영혼은 몸과 구분되지만 몸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전체로서의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영혼을 이와 같이 인격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소위 영혼의 불멸을 인정할 수 있다. 이때 영혼의 불멸은 영과 육의 이원론에 입각한 영혼 불멸설이 말하는 소위 몸 없는 영혼의 불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관계들과 역사를 통하여 결정된 인간의 인격의 핵, 그의 자아의 불멸을 말한다. 우리는 인격적 의미에서 “인격적 불멸”을 인정할 수 있으며 이것을 기독교의 부활 신앙의 구성 요소로서 인정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인정되지 않을 경우 부활 신앙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영혼 불멸설로써 기독교의 부활 신앙을 대체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지 영혼을 인격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그것을 부활 신앙 속에 통합시키려는 것에 불과하다. 김명용 교수가 말하듯이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죽은 자의 부활에 있다. 이 죽은 자의 부활이란 인간의 영혼이 본질적으로 갖는 불멸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능력에 기인하는 새 생명을 의미한다.” 5) 몰트만의 부활 신앙과 영혼 불멸의 통합 최근에 몰트만도 그의 종말론 『오시는 하나님』에서 영혼 불멸과 부활 신앙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 안에는 영 혹은 정신이 있는데 이 영은 “하나님의 생명의 숨”(ruah Jahwe)으로부터 와서 인간을 생동케 하며, 인간이 죽은 후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간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이 생명의 영은 죽지 않는다. 몰트만에 의하면, 영은 몸과 영혼을 가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실현시키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전인적 관계를 모든 상황 속에서 실현시킨다. “우리의 영”을 가리켜 우리는 “삶의 형태와 삶의 역사” 혹은 “삶의 총체성”이라 부를 수 있다. 인간은 총체적으로 살고 총체적으로 죽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부활시킬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몰트만에게 다음과 같은 비판적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새로운 형태의 삶 곧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일이 이미 죽음과 함께 일어난다면,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보편적 부활”은 불필요하지 않은가? 오히려 죽은 자들의 삶의 형태와 삶의 역사, 곧 그들의 인격이 성서가 말하는 수면 상태 속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며, 보편적 부활과 함께 새로운 삶으로 변화된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2. 최후의 심판 기독교는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곧 “최후의 심판”을 믿는다. “영적 몸”(고전 15:44)으로 부활한 다음, 각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1) 최후의 심판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반적으로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따라 인간을 재판하시고 악인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벌을 내리고, 선인에게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에 대한 희망이 등장할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인간에게 상과 벌을 내리는 것 이상의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의 마지막에 인간은 모두 부활하여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도 무덤에서 부활시켜 그의 의로운 심판대 앞에 세울 것이다. 그 때에 모든 인간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들의 모든 진실과 거짓이 드러날 것이다. 각자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삶 전체에 대하여 책임을 질 것이다. (1)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에 대한 고백이다. (2)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고백이다. (3)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정(神正)에 대한 고백이다. (4) 최후의 심판은 역사의 의로운 마감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다. 2) 최후의 심판은 어떻게 끝나는가? 일반적으로 최후의 심판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의로운 자에게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며 불의한 자에게는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내리는 것, 곧 두 가지 결말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일련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반면, 다른 일련의 사람들은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이것이 최후의 심판의 마지막 귀결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쁨도 불완전하지 않겠는가? 또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절대적 사랑으로서의 하나님 상에 모순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 벌은 구원의 수단일 뿐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벌을 내린다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지옥의 벌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일시적 정화를 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부딪힌다. (1) 최후의 심판이 모든 사람의 용서와 만유의 회복으로 끝난다면, 인간의 윤리적 책임감이 해이해질 수 있다. 심지어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2) 그 반면 최후의 심판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의 두 가지 결말로 끝난다고 생각할 때, 무한한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의 상이 훼손된다. 하나님은 절대적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을 내리시는 잔인하고 무서운 하나님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은 보편적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딜레마를 고려할 때,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행위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대부분의 인류가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심판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심판의 기준으로 삼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딛 3:5)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이 결정된다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고, 아마 우리 모두는 지옥의 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대로” 판단하지 않고,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딤후 1:9)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다. 3. 삶에 대한 전도서의 교훈 1) 차안적인 하나님-차안적인 종교 성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죽음의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보다 삶의 세계에 대하여 일차적 관심을 가진다. (1) 성서의 첫 책 “창세기”는 세계와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 곧 삶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시작한다. 죽음의 세계에 대하여 창세기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2) 구약성서에서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구원은 출애굽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이 철저히 차안적이며 현실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3) 구약 오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율법”은 삶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으며, 율법의 핵심이라 볼 수 있는 십계명도 삶의 세계에서 지켜야할 하나님의 계명들을 요약하고 있다. (4) 예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하나님나라”에 있다. 그가 선포하며 또 기적을 통하여 앞당겨 일으키는 “하나님의 나라”는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 속에 실현되어야할 하나님의 새로운 현실을 가리킨다. (5) 예수의 “주기도”도 차안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 위에서도” 곧 차안의 세계 안에서도 이루어져야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곳에 와야 한다. 또한 주기도문은 이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기본적 삶의 태도를 제시한다. (6) 부활하신 예수는 차안의 세계 속에 다시 나타나시며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 위에 이룰 것을 명령한다. (7)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모든 윤리적 계명들도 차안의 삶 속에서 우리 인간이 지켜야할 하나님의 명령이다. (8)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도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 곧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 가운데 있는” 파안의 세계이다. 성서의 관심은 차안에 있다. 성서의 종교는 철저히 “차안의 종교”이다. 그 뿌리는 “하나님의 차안성”에 있다. 성서의 하나님은 철저히 “차안적인 하나님”이다. 차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삶을 누리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2) 비관적 현실주의자의 책-전도서 구약성서의 전도서는 비관적 현실주의자의 책이라 말할 수 있다. 전도자는 행위와 결과의 인과율을 부인한다. 이 세계는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하다. 이 혼돈과 모순은 먼저 의와 불의, 선과 악의 인과율적 질서의 혼돈에 나타난다. 이 세계의 혼돈과 모순은 근면과 나태, 소유와 향유의 인과율적 질서의 혼돈에 나타난다. 이 세계의 혼돈과 모순은 지혜와 어리석음의 인과율적 질서의 혼돈에 나타난다. 많은 지혜를 가졌다 하여 반드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어리석은 자가 오히려 행복하게 사는 경우가 많다. 이 세계의 혼돈과 모순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에 나타난다. 부지런하여 많은 재산을 가졌거나 많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 하여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혼돈과 모순을 보면서 전도자는 부르짖는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1:2-3) 그럼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현세의 삶을 누려라! 전도자에 의하면, 모든 것은 자기의 때를 가지고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으며, 만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다. 이러한 삶의 때에 순응하면서 삶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삶의 지혜이다. 인간이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 세계의 깊은 의미와 비밀을 해명할 길이 없다.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만이 그것을 아신다. 이 세계의 깊은 의미와 비밀을 하나님에게 맡겨 두고 자기의 삶을 향유하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는 차안의 향유와 즐거움과 기쁨을 가르친다. 그러나 전도자는 맹목적이며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계명 안에 있는 삶을 권장한다. 이와 같이 전도자는 차안의 삶을 중요시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전망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4. 인간의 표상 능력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 1)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동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동경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 요소라 말할 수 있다. 생물학적 의미에서 생명의 무한한 연장에 대한 욕망, 이것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일차적 동기라 말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동경은 삶의 성취와 삶의 완성에 대한 동경 때문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나 행복과 기쁨을 원하며 성취된 형태의 삶을 원한다. 완전한 모습의 자기를 동경한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삶을 미완성 가운데서 중단시킨다. 죽음과 함께 그의 희망은 하나의 꿈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게 되며, 영원한 생명에서 삶의 성취와 참된 자기의 모습을 기대한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위에서 기술한 것을 넘어서는 다른 동기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고백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동기는 단순히 현세의 삶의 시간적 연장이나 성취되지 못한 삶의 성취를 바라는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그의 주권에 있다. 하나님은 삶의 주관자일 뿐 아니라 죽음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이스라엘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희망의 동기는 유한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동경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주권에 대한 믿음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계시며 인간에 대한 그의 신실하심을 끝까지 지킨다. 따라서 죽음도 인간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하나님은 죽음을 넘어서 인간과 함께 계시며, 인간은 하나님에게 속한다. 죽음도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을 파괴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나님과의 교통을 단절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을 거부한다. 인간 역사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거부의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이 역사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예수는 “죽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죽음의 한계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이 예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에서 살아난 예수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11:25-26)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단순히 삶의 생물학적 시간을 연장시키거나 내세에서 성취된 형태의 삶을 누리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그의 주권과 의로우심에 대한 고백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2) “전혀 새로운 것”으로서의 영원한 생명 예수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혹은 “영원한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 가운데 완전한 형태의 영원한 생명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의 삶에서 출발하여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여러 가지 표상들은 현재의 삶에서 출발하며, 현재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즉 부정의 방법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이 세계에 속한 생명에 비하여 “궁극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가를 인간의 표상과 언어로 완전하게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한다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 인간의 희망은 공허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표상 능력과 언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가를 묘사하고자 한다. 5.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1) 삶의 “충만함”으로서 영원한 생명 “영원”이란 말은 본래 하나님에게만 해당된다. 하나님만이 영원하다. 영원이란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음”, “시간에 내맡겨져 있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나 영원이란 단순히 무한하게 연장되는 시간, 시간의 끝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을 뜻한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란 시간적으로 끝없이 연장되는 생명이 아니라 영적-정신적, 물질적으로 충만한 생명, 충만한 삶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성서는 영원한 생명을 단지 미래의 것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삶 속에서 얻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와 그를 보내신 이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1) 영원한 생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보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삶을 가리킨다. 곧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 내지 사귐, 하나님과 하나 됨에 있다. (2)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명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사랑 가운데서 이웃과 교통하며 이웃을 섬기는 삶에 있다. (3) 영원한 생명은 시간적으로 무한히 연장되는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가리킨다. 충만한 삶이란 무엇인가? 소극적으로는 이 세계의 모든 부정적인 것이 사라진 삶이요,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며,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삶이다. (4) 영원한 생명은 “영적인 몸”의 삶이다. 몸적인 삶이다. (5)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서도 노동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6) 영원한 생명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 만물이 평화롭게 사는 세계일 것이다. 이 세계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완전한 화해 속에서 “창조의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 것이다. 2) 이 세상에서 경험되는 영원한 생명 일반적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죽음 다음에 올 피안의 세계, 곧 천당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면 마지막 “보편적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거쳐 역사의 종말에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는 영원한 생명을 단지 미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이 세상의 삶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현재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 세상에 있는 현재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영원한 생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현재의 삶 속에 앞당겨 일어난다. 역사의 목적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은 모든 잘 못된 관계의 회복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로 화해되고 통일됨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경험하는 영원한 생명은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의 완성을 향한 기다림과 동경 가운데 있다. 6. 영원한 생명은 “민중의 아편”인가? 1)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무신론의 비판 프로이트에 의하면 종교의 표상들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가 간절히 소원하는 바의 성취된 현실을 하나의 대상으로 투사시킴으로써 형성되었으며, 그것들은 소위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통하여 형성된다. 개인들에게 종교적 표상들을 만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문화이다. 모든 문화적 노력들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자연과 운명의 거대한 세력들 앞에서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필요성 때문에 생성된다.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피안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독교 신앙은 “차안의 참된 삶에 대한 신앙에 불과하다” 기독교가 말하는 피안의 삶의 모든 내용들은 사실상 차안의 삶의 본질적 내용들이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세계와 영원한 생명을 설정하고 모든 긍정적 의미를 투사시킨다. 따라서 기독교가 가르치는 영원한 세계,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실현되어야 할 충만하고 행복한 삶의 투사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기독교가 가르치는 피안의 영원한 세계와 영원한 생명은 “아편”과 같은 기능을 가진다. 기독교는 피안의 영원한 세계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함으로써 이 세상의 삶 속에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을 견디게 한다. 그것은 “환상적 위로”이다. 이 세상의 삶의 가치와 삶의 생동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는 종교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 2) 비판에 대한 비판-“영원한 생명”의 해방하는 기능 무신론의 이러한 비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비판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다른 한 가지 면을 간과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의 생명을 상대화시키며 이를 통하여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무한한 집착을 금지시킨다. 이 세상의 생명이 전부가 아니다. 삶의 궁극적 의미는 단순히 이 세상의 삶에 있지 않다. 우리의 생명은 현재의 삶으로 끝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무한한 집착에서 참된 것, 영원한 것을 향하여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인격적 해방의 기능을 가진다.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생명이 죽음과 함께 완전히 끝나버리며,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의미하게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이 나의 죽음과 함께 끝난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허무감과 좌절과 절망에 빠질 것이며 탐욕과 향락 중심의 삶에 빠지게 되어 인간 세계는 지옥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삶이 있다고 생각할 때 현재의 삶은 죽음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질 것이며,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참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며 그것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가질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영원한 생명이 있는 세계는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계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나라”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바라시는 영원한 생명은 단지 피안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세상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현재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적, 물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의 무한한 연장이 아니라 삶의 내적인 충만함과 깊이를 뜻한다.
Ⅶ.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Ⅶ.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안락사의 문제와 함께- (p451~492) 치유선교학과 석사1기 김희숙 Ⅰ. 죽음의 장소로서의 병원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병원에서 맞기 때문에, 병원에서 어떻게 더 인간적이며 품위 있는 임종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많은 분야의 학자들과 전문인들이 거론하고 있다. 1) 현대병원의구조 현대산업 사회가 등장하기 이전에 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공동체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등장, 사회전체의 현대화(Modernisierung) 추세와 더불어 개인의 삶의 철저한 개인주의화(Individualisierung), 사회적 익명화(Anonymisierung)가 일어나면서, 가족과 소규모 공동체의 기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개인의 삶은 물론 그의 죽음의 공동체적 의미가 사라지고, 개인의 마지막 죽음은 철저히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배제되어 버린다. 이와 더불어 말기 환자의 임종을 도와주는 일이 병원에서 일하는 전문 의료인에게 맡겨진다. 곧 임종 과정을 도와주는 일의 전문 직업화(Professionslisierung), 제도화(Insitutionalisierung)가 일어난다. 병원은 의학 기술을 통하여 임종환자의 임종을 도와주는 업무를 체계화시키고, 이를 계획하고 수행하며 감독하는 기능을 행사하면서, 차츰 현대인의 아주 편안한 죽음의 장소가 되어 버린다. 현대의 병원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고도로 발전하는 과학 기술을 수용하고 과학 기술의 바탕위에서 체계적, 전략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말한다. 둘째는 병원의 관료적, 계급 체제적 관리에 있다. 현대의 병원은 현대의 과학 기술적 방법과 의료 기기들은 사용하는 동시에, 고도의 분업 체계를 가진 하나의 사회조직이다. 병원의 이러한 전문화는 “먼저 과학 기술적인 것이지만, 조직적으로 근거되어 있으며, 합리적 목적 추구의 원리에서 유래한다.” 고도의 훈련과 경험을 지닌 전문가들은 초현대적기기들을 가지고 병원의 엄격한 관료적 조직 속에서 환자들의 신체적 문제들은 물론, 그들의 정신적, 심리적 문제들을 치료하고자 한다. 이리하여 병원 종사자들과 환자들 사이에는 지식의 차이, 지위의 차이, 신분의 차이가있게 된다. 이러한 고도의 의학적 지식, 전문적 훈련과 경험, 엄격한 분업체계, 병원 종사자들과 환자들 사이의 지적, 사회적, 신분적 차이로 말미암아 현대의 병원은 인간성이 결여된 조직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다. 로데(J. J. Rohde)에 의하면, 인간적이며 인도주의적 목적을 달성코자 하며 또 달성해야 할 현대 병원의 또 한가지 특징은, 비인간성의 구조적 경향에 있다. 이것은 단지 현대 병원의 문제점일 뿐 아니라 현대 사회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사회 전체의 최대 목적이 더 많은 생산과 이윤에 있을 때, 인간은 이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며, 인간의 가치가 효율성과 소유에 따라 결정될 때, 사회는 점점 더 비인간적인 사회로 변모한다. 병원은 이러한 현대 사회의 위험성을 넘어서서, 그 자신의 전체 경향에 있어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구조적 특징(dehumanisiseende Strukturmerkmal)을 가진다. 2) 병원에서 일어나는 환자의 비인간화 병원은 그의 구조적특성 때문에 환자들에 대한 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어쩔수 없이 환자들을 비인격화시키고,” 개인들의 모든 특성과 자신의 의지를 묵살하며 “탈사회화 혹은 탈문화화의 과정에 복종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환자의 비인격화는 다음의 요소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1) 신체적 격리(Isolierung) : 환자는 평소 그가 살고 있던 삶의 환경에서 실제적으로 격리된다. (2) 사회적 격리 : “환자는 평소에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에서 병실로 격리된다. (3) 사회적 위치의 상실(Statusverlust) : 환자의 모든 행동과 신체적 활동들이 병원 종사자들에 의하여 관측된다. 이로써 환자는 그의 사회적 위치를 상실한다. (4) 인격적 격리 : 환자는 그 자신의 인격적 특징들, 자신의 의지를 복종해야 한다. 의료인은 환자의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한며 또 그것을 치료해야 한다. 이때 의료인은 환자를 더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 그 결과 환자는 의료인에 의하여 자신의 정체성이 고려되지 않는 하나의 “물건”처럼 다루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일어난다. 이리하여 현대의 거대한 병원 체제 속에서 의료인들과 환자는 비인격적, 객관적 관계를 가지게 되며, 환자는 자기의 정체성이 고려되지 않는, 이름 없는 하나의 “환자”로 비인격화된다.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환자들의 경우,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유명한 죽음의 사회학자 폰 페르버(Chr. von Ferber)는 병원에서 “병원 종사자들의 문화” 곧 의사, 간호사, 병원 행정 직원들의 문화와 “환자들의 문화”를 구분한다. 양자 사이에는 위치와 기능과 지식의 차이가 있다. 병원 종사자들과 환자들의 교통에 있어, 환자들은 병원 종사자들에게 의존한다. 전자는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후자는 그 명령을 따라야 할 위치에 있다. 전자는 의료학적 지식 체계를 가지고 있는 반면, 후자는 의료학에 대하여 거의 무지하다. 따라서 양자의 교통은 참된 인격적 교통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적 교통이며 피상적 교통에 불과하다. 임종이 멀지 않은 말기 환자의 경우, 이러한 일방적 교통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진다.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는 더 이상 삶의 시간과 삶의 기회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병원 종사자들과 그의 교통은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교통이다. 그는 사실상 인격적, 실존적 교통에서 단절되어, 홀로 죽음을 맞게 된다. 이것은 다음의 두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 의사, 간호사들의 과제는 일반적으로 말기 환자를 돌보는 데에 있지 않고 의학 기술을 통하여 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제거하는데 있다. (2) 말기 환자를 돌보고 그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병원이 설정하는 공적목적”에서 사실상 제외되어 있다. 그것은 병원에 대하여 이차적인 일로 간주된다. 오늘날 의사, 간호사들의 일차적 기능과 병원의 공적 주요 목적은 병원을 찾아온 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과 고통을 제거하고 환자의 건강을 회복하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이 병원의 일차 목적은 환자의 치료와 회복에 있기 때문에, 현대 병원은 치료될 수 있는 환자에 대하여 일차적 관심을 가지며, 더 이상 치료될 수 없는 환자들, 특히 말기 환자들은 병원의 공적 목적에서 제외된 존재로 간주된다. 오늘날 과학 기술은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마저 조작할 수 있고 변형시킬 수 있다. 자연과학과 의학의 이러한 발전 속에서 인간은 하나의 실험 대상으로 생각된다. 임종과 죽음은 그들이 싸워 이겨야 할 각자의 마지막 한계와 과제로 생각된다. 의사와 환자의 인격적 관계 문제는 의학 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말기 환자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그의 주변 세계로부터 분리된다. (1) 그는 병원 종사자들의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 분리된다. 병원에 일시적으로 머무는 환자들이 경험하는 분리 및 소외감과 비교할 때, 말기 환자들이 경험하는 분리와 소외감은 훨씬 더 심각하다. 말기 환자는 호전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삶의 희망을 더 이상 갖지 않기 때문이다. (2) 말기 환자의 실존적 요구들과 의료상의 요구들은 병원의 공적 목적에 조화되지 않는다. 이리하여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는 병원안에 머물지라도 병원에서 사실상 분리된다. (3) 말기 환자는 다른 환자들로부터 분리된다. 다른 환자들은 말기 환자들에 대한 불안, 경험의 결핍, 의사소통에서의 당혹감 때문에, 말기 환자들을 피하기 때문이다. 3) “인간적인 죽음”을 위하여 의사들의 개입과 의술의 도움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을 때, 말기환자는 대개의 경우 간호사들의 보호대상이 된다. 간호사는 말기 환자에 대하여 상당히 큰 책임을 안게 되는 동시에,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갈등에 빠진다. (1) 간호 교육과 실천의 갈등 (2) 병원의 공적 목적과 구체적 현실의 갈등 (3) 현대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죽음과 관련된 의사소통의 어려움이다. 간호사의 기능은 크게 나누어 네 가지로 구성된다. (1) 환자의 신체적 간호 (2) 환자와 가족에 대한 정서적 도움 (3) 환자의 교육 (4) 환자와 의사 사이의 중재 역할인데, 이 중재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간호사는 환자의 유일한 대화 상대자로서 고립된다. 그러나 이것이 간호사에게는 심리적으로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에, 말기 환자 내지 임종 환자는 결국 사회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고립되며, 홀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우리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 현상은 현대 사회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죽음의 배제”에 그 궁극적 원인을 가지기 때문이다. 죽음의 병원화(Hospitalisierung), 말기 환자 내지 임종 환자의 고립화(Isolierung)는 환자의 인격을 훼손하며, “품위 있는 죽음”을 불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기본 가능성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통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임종 환자의 위치는 “구조적 무위치성”이라 말할 수 있다. 병원은 그의 사회적 만남과 접촉을 결정함은 물론, 그의 신체적 기능들을 조정한다. 따라서 임종 환자는 인격적 훼손과 비인간성을 훨씬 더 깊이 경험한다. 임종 환자가 그의 삶의 마지막을 인간적으로 품위 있는 조건 속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임종환자의 통증을 완화시키는 요법(palliative Therapie)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통증 완화 요법은 다음과 같은 목적은 가진다. (1) 임종 환자와 그의 가족들이 마지막 작별을 하기까지 대화를 가질 수 있게 함. (2)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이 환자의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인식가운데서 죽음에 대하여 준비할 수 있게 함. (3) 고통을 느끼지 않는, 품위 있는 죽음을 가능케 한다. 임종 환자의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다음의 세 가지 차원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1) 의학적 차원 : 임종 환자를 무의식적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의 의식을 유지시키면서 고통을 완화시키는 의료 요법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2) 간호 차원 : 임종 환자가 누워 있는 공간은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이 청결해야 할 것이다. (3) 사회적 차원 : 임종 환자에게 인격적 교통을 제공하고, 그의 가족과 친지들을 그의 죽음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준비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환자의 임종 과정에 통합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 특히 말기 암 환자의 신체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김경식 박사의 보고에 의하면, 말기 암 환자는 (1) 수면부족의 어려움. (2) “못 먹고, 토하고,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나고 그렇기 때문에 피골이 상접해 가는”어려움, (3) 배를 임신부의 배처럼 팽창시키는 변비로 인한 어려움, (4) 발열로 인한 어려움, (5) 호흡 곤란으로 인한 어려움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 죽음은 인간의 삶의 마지막 사건이다. 그것은 이 세계로 부터의 단절이요 작별인 동시에 한 인간의 삶의 완결이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다. 이와 같이 죽음은 죽는 사람 자신에게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지만, 병원 종사자들에게 그것은 매일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에 불과하다. 한 의사는 신체적 죽음을 당하기 직전의 사람이 의사, 간호사, 친척 등 그 주변의 사람들의 비인간적 무관심 속에서 죽은 자처럼 취급될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이를 가리켜 “사회적 죽음”의 한 형태라고 말한다. 이러한 일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병원 종사자들이 지켜야 할 다음의 다섯 가지 “계명”을 제안한다. (1) 환자가 자신의 질병에 관하여 질문 할 때, 병원 종사자들은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태도로 그의 질문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대답해야 하며, 환자가 자신의 질병에 대하여 알고자 하지 않을 권리도 종중해야 할 것이다. (2) 병원 종사자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은 영적, 정식적으로 죽음을 앞둔 환자와 함께 해야 한다. 그들은 환자에게 인내심을 가져야 하며,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며, 그의 생각들에 대하여 존경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3) 환자의 죽음이 도래하였을 때, 의사는 그의 죽음을 수납해야 할 것이다. “의사는 피할 수 없는 것에 자기를 굽힐 도덕적 의무를 가진다.” (4) 환자의 마지막 임종의 시간에 병원 종사자들은 환자를 혼자 있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환자와 함께 있어야 하며 그의 죽음을 동반해야 한다. 그의 죽음을 동반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와 존엄성을 충분히 인정하며 그를 끝까지 사랑함을 뜻한다. 이것은 죽음을 맞는 환자에게 큰 위로가 된다. (5)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의 신체를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환자가 심한 고통을 느낄 때, 진통제 주사를 주어야 하며, 환자가 심한 불안감을 느낄 때, 정신 안정제를 투여함으로써, 환자가 품위 있는 태도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조처해야 한다. Ⅱ. 인간성 있는 의학 1) 현대 의학과 인간성의 문제 오늘날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보는 점점 더 과학에 대한 회의를 일으키고 있다. 1979년 로마 클럽(Club of Rome)의 보고서에 의하면 오늘날 인간은 그 자신이 발견한 것의 희생물이 되었다. 현대 사회의 과학 기술적, 재정적, 조직적 잠재성은 크게 발전하였으나, 이 잠재성을 이용할 수 있는 도덕적, 정치적 능력에 있어 인간성 결핍의 문제는, 현대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 편으로 인간의 자기실현의 위대한 가능성이 보이는 반면, 다른 한 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재난의 위험성이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다. 새로운 의학 기술의 발전은 일반인들에게 물론, 의학자들 자신에게 놀라움과 경이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오늘날 의학에서 방법적, 기술적 가능성들은 참으로 광대하며 거의 무제한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유전인자의 개조, 인공 수정, 인간 생명의 부화, 다양한 신체 부위의 이식, 자궁 치환 요법, 인간 복제, 컴퓨터를 통한 렌트겐 진단 방법 등은 과거의 인류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미래를 제시한다. 그러나 한계를 알지 못하는 의학 기술의 발전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불안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의학 기술의 발전은 어떤 인간적인, 개인적인, 사회적인, 또 정치적인 희생을 초래할 것인가? 인간의 자유와 참 삶이 상실되지 않을까? 인간을 하나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기계로 보고, 의사는 이 기계의 조립공이나 수리공이라고 보는 생각은 이미 심각한 후유증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일련의 의사들이 인간의 생체 실험과 인간 생명의 폐기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 이들 의사들이 전범 재판에서 그들의 행위를 합리적 과학성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고, 그들의 책임을 청지 권력자에게 전가시키고자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알렉산더 미첼리히(Alexander Mitscherlich)등 일련의 의학자들은 “인간성이 결여된 의학”을 경고한다. 인간을 컨베어 벨트에 놓여 있는 하나의 제조품처럼 취급하는 의학 기술과 환자 간호,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더 이상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전문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상징들과 측정 자료들을 상용하는 기기 의학(Apparatmedizin), 의료 요원과 환자 사이의 인격적 신뢰의 관계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며, 인간적인 관계와 접촉, 친절과 인간성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는 현대 의학의 비인간성을 그들은 경고한다. 사실 우리가 환자로서 병원 진료를 받거나 입원을 하였을 때 느끼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는 의료인들의 인간성 문제이다. 아무리 의학 기술이 뛰어나다 할지라고, 의료인들이 비인간적일 때, 환자들은 의료인들은 물론 병원 자체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환멸감을 느끼며, 그 병원에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물론 의학의 객관성, 과학성, 기술과 전문성은 결코 포기될 수 없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기술적 완전성(Perfektion)을 주요 관심으로 삼는 의학과, 환자의 인간성을 주요 관심으로 삼는 의학은 가능한 조화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전은 점점 더 인간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과학 기술을 통한 인류의 진보의 이데올로기는 많은 학자들에게 회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학 기술이 추구하는 합리성은 비합리적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과학에 대한 신뢰가 더 이상 일종의 세계관 내지 현실에 대한 총체적 설명이 될 수 없으며, 테크노크라시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사 종교로서 참된 종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많은 과학자들과 의학자들이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학 기술은 물론 과학 기술 일반의 윤리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과학 기술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직면하여 우리는 종교적 기초 없는 의학 윤리가 가능한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2) 의학 윤리와 종교의 관계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의료인들, 무신론자들도 선한 사람일 수 있고, 양심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들이 기독교 신자들보다 더 선하고 윤리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따라서 무신론적 윤리, 인본주의적 윤리도 가능하다.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기본적 규범들, 기본 가치관, 기본 태도에 최소한의 일치점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공동생활이 가능하며, 민주주의와 사회와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객관적” 구속성을 가진 행동 양식의 규범과 근거가 무엇인지 거론될 때, 개인의 양심과 도덕에 근거한 윤리적 개인주의는 유지되기 어렵다.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 타당성을 가진 윤리가 어떻게 가능한가?, “너의 의지의 원칙이 언제나 하나의 보편적 법 해석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칸트의 범주적 명령이 어떻게 가능한가? 도대체 우리 인간은 왜 항상 선하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인간의 이성을 인간의 절대적 윤리의 기초 내지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종교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을 때, 인간의 특정한 행동에 대한 절대적 구속성은 인정되기 어렵다.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구속성을 가진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보편적 구속성을 가진 의무도 인정되기 어렵다. 종교의 전제가 없을 때, 절대적으로 도덕적인 행동, 보편적 구속성을 가진 에토스가 불가능할 것이다. 참된 종교가 윤리의 근거가 되지 않을 때, 마르크시즘, 과학주의 등 유사 종교가 윤리의 근거가 될 것이다. 참 종교에서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는 유일한 권위는 결코 인간의 이성이나 국가나 교회나 어떤 사회 조직이 아니라, 절대자 곧 하나님의 존재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가 인정될 때, 절대적 윤리의 근거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성 있는 의학, “인간성의 의학”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하고 또 그렇게 끝난다. 이로써 이 선서는 법적 성격을 가지기보다, 윤리적, 종교적 성격을 더 강하게 지닌다. 인간성 있는 의학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성 있는 의학은 전체적 존재로서의 한 인간을 올바르게 파악하고자 하며, 의학의 기술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의 조화를 꾀하며, 종교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에 대하여 개방된 의학일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깊은 차원들을 간과하지 않으며, 인간의 실존과 환자의 영적, 정신적 상황과 문제들을 충분히 고려하는 의학을 가리킨다. 긍정적 형태로 말한다면, 인간성 있는 의학은 인간적으로 고려하고 인간적으로 행동할 것을 말하는 현실주의적 윤리(realistische Ethik)라 말할 수 있다. 이 윤리에서 규범과 상황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양자는, 규범이 상황을 해명하고, 상황은 규범을 결정하는 관계에 있다. 세부적 전문 지식이 도덕적 책임과 결합되며, 과학적 합리성과 정확성이 추구되는 동시에 인격적 헌신이 있으며, 환자의 인간적 가치가 충분히 고려되며 종교에 대하여 개방적인 의학을 가리켜 우리는 “인간성 있는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생명과 환자의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종교적 신념들, 기본 가치들과 절대적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의학이 인간성을 겸비 할 수 있도록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3) 질병과 치료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없을 때, 인간성에 대한 요구는 절대적으로 보편적으로 근거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 곧 초월적 존재가 인정될 때, 질병에 걸린 사람은 물론 건강한 사람에게 대한 인간성, 환자에 대해서는 물론 의료인들에 대한 인간성이 절대적 정언 명령으로 근거될 수 있고 또 요구될 수 있을 것이다. ⑴ 인간의 파트너가 되자고 하는 하나님이 인정될 때,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의 자신 안에 근거된 하나의 포기될 수 없는 현실로 인정될 것이다. 이때 사회적 역할, 사회적 기능, 효용 가치를 떠난 한 인격으로서의 인간 자체의 생명을 경외하게 될 것이며,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튼튼하든지 약하든지, 젊든지 늙었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절대적 가치를 가진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사명을 충분히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때 환자는 단순히 연구 대상이나 치료 대상으로 보이지 않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가진 주체로서, 치료의 성숙한 파트로서 진지하게 고려될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인간화의 과정 속에서 의학의 인간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⑵ 질병과 죽음의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을 홀로 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인정될 때, 의료인들과 환자는 질병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질병을 기능의 감소로, 구체적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위험과 위협으로 볼 것이며, 이 위험과 위협은 인간의 존재의 모든 영역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환자는 그 질병에 걸린 시간을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거나 하나님이 저주를 받은 절망적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인간다운 인간으로 변화될 수 있는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질병의 시간을 노동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인격적 학습 과정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는 갈등과 고난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견디며 소화함으로써, 또 자신의 유한성을 수용함으로써, 질병의 시간을 인격적 성숙에 이르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⑶ 치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 하나님이 인정될 때, 인간의 영원한 구원에 대해서는 물론, 그의 시간적 치유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잇을 것이다. 인간은 물질론적 견지에서 단지 영 없는 육체로 파악되거나, 아니면 관념론적 견지에서 육체를 지배하는 영으로만 파악되지 않고, 영과 육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총체적 존재, 총체적 인격으로 파악될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의 삶은 의미있고 가치 있는 것이며 가난하고 늙고 사회적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할 권리를 가진다. 의사는 단지 인간이 가진 질병만을 다루지 않고, 질병에 걸린 인간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모든 치료는 의학의 전문 지식과 경험과 의학적 판단에 기초하여 동시에, 윤리적 규범을 항상 배려해야 할 것이다. 의료인은 환자의 질병만을 보지 않고 그의 존재 전체를 보고, 그에게 정신적, 신체적 도움을 주고자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병원은 인간성 있는 병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의학적 과학성과 객관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인간성을 경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4) 안락사의 문제 생명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가리켜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하는가? 의학적, 생물적 견지에서 생명이란 우리말로 “목숨” 곧 bios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적, 인간학적 견지에서 볼 때, “살아 있다”는 것, 곧 생명이란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의 bios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의 제반 과정에서 참여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학적, 인간학적 차원에서 생명이란 한마디로 “관계”이며 “삶”이다. 생명이란 인격적, 사회적 제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활동을 가리킨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죽음이란 삶의 중지, 모든 관계의 중단이라 말할 수 있다. 환자의 모든 신체적, 생물학적 기능들이 정지되고, 주변 세계의 모든 과정들에 대한 참여가 중단되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죽음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죽음은 신체의 노화와 함께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의 인격적, 사회적 과정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에 완결된다. 일반적으로 의학적, 생물학적 의미의 죽음은 다음의 기준에 따라 확정된다. 의식의 상실, 호흡 기능의 정지, 눈동자의 움직임의 정지, 심장 활동과 혈액 순환의 정지, 심전도의 수평 상태. 그러나 오늘날의 의학은 고도로 발전한 의학 기술을 통하여 이러한 현상들의 나타남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 있으며, 그러하여 인간의 생명의 시간을 상당히 길게 연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거의 죽음 상태에 있는 환자의 호흡과 혈액 순환을 의료 기기를 통하여 유지시킴으로써,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생명과 죽음의 한계를 확정하는 일이 오늘날의 의학에서 매우 어렵게 되었음은 물론,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다. 의사가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각종 의료 기기와 의료 기술을 동원하여 희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생명을 유지시킬 경우, 의료보험 공단은 파산의 위기를 부딪힐 수 있다. 또한 인간의 생명을 의학 기술을 통하여 인위적으로 연장시킬 때, 노인의 수가 증가하며, 사회의 연령층 구성에서 노년층에 증대한다. 노인층의 증대는 노인들의 사회적 보호, 연금 보장 등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일으킨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일련의 사람들은 노인들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것은 자선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노인들의 “자연적 죽음”의 권리를 주장하며, 안락사(Euthanasie) 기술에 관한 법률의 개정을 요구한다. 이 문제는 오늘날 의학자, 법학자 그리고 신학자들 사이에 논의되고 잇는 뜨거운 감자와 같은 문제이다. 네덜란드는 최근에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나, 대부부의 다른 나라에서 안락사는 아직도 하나의 “죄악”으로 간주되고 있다. 본래 “안락사”를 뜻하는 영어euthanasia는그리스어“eu”(well,good)와 \\\"Thanatos\\\"(death)가 합쳐진 용어이나, 어원에서 볼 때, 그것은 “수월한 죽음”(an easy death)을 의미한다. 안락사는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는데. “회복 될 수 없거나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고 죽여주는 행위나 관행” 혹은 “한 사람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행위 또는 무위(無爲)에 의해 사람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야기하는 것” 등의 정의가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통용된다. 안락사는 관점에서 따라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죽임을 당하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서 일어나는 자의적 안락사(voluntary euthanasia)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일어나는 비자의적 안락사(involuntary euthanasia)로 분류될 수 있다. 자의적 안락사는 소위 “의사 조력 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과 구별하기 어려운 것으로, 당사자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안락사를 말한다. 현재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안락사 허용을 요구하는 캠페인에서 말하는 안락사는 이것을 말한다. 반자의적 안락사는 자신의 죽음에 동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동의하지 않은 사람에게 집행되는 안락사를 말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고 또 허용되지도 않은 유형의 안락사이다. 신생아, 중증의 정신 불구자와 같이 안락에 동의할 수 있는 이해 능력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 질병이나 노쇠 등으로 그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 혼수상태에 빠져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사람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안락사는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도기도 한다. ⑴ 강제적 안락사: 강제적 안락사는, 소위 “살 가치가 없는 생명” 곧 신체 장애자, 정신병 환자,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으며 비생산적인 사람들을 국가의 정책에 따라, 그러나 본인의 동의 없이 죽이는 비본래적 의미의 안락사를 말하며, 이러한 안락사는 거부되어야 한다. 본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안락사”는 “좋은 죽음”(eu-thanatos), “아름다운 죽음”, 곧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군인들이 고통을 오래 당하지 않고 빨리 그리고 쉽게 죽는 죽음을 가리킨다. 임종의 과정에서 고통의 경감시키는 것은 16세기 초 프란시스 베이컨(Fr. Bacon)에 의하여 의사의 과제로 인정되었으며, 19세기 이후“의학적 안락사”(Euthanasia medica)라고 불렀다. 1930년 이후 앵글로 색슨 계통의 나라에서는 고통 없는 편안한 죽음을 주장하는 안락사 단체들의 등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안락사는 인구 과잉과 사회의 노령화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20세기 초부터 무서운 방법으로 실천으로 옮겨졌다. 이미 1920년에 『삶의 가치가 없는 생명의 폐기의 허용』이라는 제목의 문헌이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출판되었다. 이 문헌은 사회가 돌아보아 주기 어려운 “빈 인간 껍데기들”과 “밑바닥 존재들”을 죽여서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히틀러는 이 이론을 “안락사프로그램을 통하여 잔인한 방법으로 실천하였다. 이리하여 “안락사”라는 말은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부정적 의미로 전락하였다. 1939년 9월 1일부터 1941년 8월까지 히틀러의 비밀 명령으로 약 60,000명에서 80,000명이 특별한 살인 시설에서 살해되었다. 어린이들의 안락사와 강제 수용소의 소위 “삶의 가치가 없는” 포로들의 대랑 학살이 1945년까지 계속 되었다.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과 집시와 슬라브 족과 다른 인종들이 잔인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안락사가 아니라, 강제적 살해였다. 이러한 강제적 안락사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위배되므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⑵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안락사: 의사가 임종 환자에게 진통제 혹은 마취제를 투여하여,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키지 않으면서 고통 없이 죽음을 맞게 하는 안락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안락사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며, 윤리적으로 책임적인 행위로 간주되며, 의학적으로도 허용된다. 인간은 품위 있고 참으로 인간적인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그의 신체적 고통의 견딜 수 있는 한도로 경감되며, 생명의 마지막 단계에 심리적 안정제를 통하여 임종 환자가 심리적, 정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 안정제가 환자에 대한 사랑과 친절한 보살핌을 대체해서는 안 될 것이다. ⑶ 수동적 의미의 안락사 : 생명의 인위적 연장을 중단시킴으로써 일어나는 안락사, 예를 들어 폐 기능, 심장 기능, 영양 섭취 기능을 인공적으로 유지시키는 의료 기기들의 가동을 중지시킴으로써 일어나는 안락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의사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치료를 무한정 계속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환자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죽음을 당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의사가 수동적 태도를 취하며, 이를 통하여 죽음이 간접적으로 일어나는 안락사의 한 종류이다. 이에 대하여 오늘날 세계의 많은 의사들과 법학자들,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긍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종류의 안락사 혹은 안락사 기술은 “생명의 인위적 연장의 중단”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4) 적극적 안락사 : 직접적으로 생명의 단축을 목적으로 하는 적극적 안락사 기술, 곧 “은혜의 죽음”은 오늘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사회 운동 단체들이 “은혜의 죽음”의 합법성을 주장한다.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자발적으로 안락사를 원하며, 환자가 안락사를 원한다는 사실이 공증을 받을 때, 안락사가 정확한 조건들에 따라 집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환자의 병이 도저히 치료될 가능성이 없으며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때, 혹은 죽음이 가깝지는 않지만 신체 기관들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을 때 (예를 들어 호흡 마비 등),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하여 뇌 기능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을 때,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인간은 자기의 삶은 물론 그의 죽음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가? 적극적 안락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권리를 인정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 권리(autonome Verfugungsgewalt)를 가지며, 자유로운 법적 국가는 이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과 법학자들 그리고 의사들은 이 권리를 부인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신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 의사의 사명은 치료에 있지, 살인에 있지 않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특이한 사실은, 노인들보다 오히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안락사를 인정하는 반면, 더 이상 치료의 희망이 없는 환자가 안락사를 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일련의 법학자들에 의하면, 법적국가는 개인이 죽음을 원한다 하여, 그에 대한 살인 곧 안락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일련의 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기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다.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이러한 상반되는 주장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인간 자신이 책임져야 할 과제가 아닌가? 물론 우리는 적극적 안락사를 쉽게 인정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으로서 “품위 있는 삶”에 대한 권리에 가지는 동시에,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권리를 갖지 않는가?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의료 기기나 약품에 인간의 생명이 무한정 의존할 경우, 이 권리가 오히려 손상되지 않는가? 인간의 존재가 식물처럼 되어 자신의 의사 표시와 감정 표시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가 과연 인간적으로 품위 있는 삶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는가?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시사한다. 카렌 앤 퀸랜(Karen Ann Quinlan)이란 소녀가 질병으로 인하여 무의식 상태에 빠졌을 때 , 그 소녀의 부모가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이 소녀의 생명을 몇 달 동안이나 인위적으로 유지시켰다. 이에 반하여 네덜란드의 한 여자 의사는 반신 마비와 우울증에 걸린 78세의 할머니에게 아편을 주시하여 잠든 상태에서 사망케 하였다. 한 편의 사람들은 이를 “살인”이라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편의 사랑들은 “동정”, “자비”, “도와주는 사랑”이라고 주장하였다 짧은 시간 후에 피할 수 없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을 경우. 중추신경 체계, 호흡 기능, 심장 활동, 혈액 순환의 기능이 심하게 손상되었고, 진행되고 있는 신체의 일반적 쇠락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으면, 혹은 의사가 다스릴 수 없는 감염 증세가 환자에게서 나타낼 때,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치료 대책들은 중단되어도 좋다. 이러한 경우,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대책을 넘어서 합병증을 치료하는 일을 중지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사가 의료 행위를 계속하느냐 아니면 중단하느냐에 대한 법적 규정이 아니라, 의사의 의료적 의무의 범위이다. 스페인 나바라(Navarra) 대학교의 병리학자인 동시에 생윤리학자(Bioethiker)인 곤잘로 헤란츠(Gonzalo Herranz)는 “품위 있는 죽음”(Sterben in Wurde)을 위하여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다섯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1) “자살을 위한 도움” 간청하는 사람과, 그에게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자살을 통한 “품위 있는 죽음”은 인간의 자율성과 자기 결정, 독립성과 자기 해방과 성숙성의 마지막 표현이다. (2) 오랜 기간 동안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다가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는, 품위있는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권리, 곧 안락사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3)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회복될 수 없는 무의식 상태에 빠졌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과 의학 기술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은 품위 있는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이런 환자의 경우, 가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숨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며 고통의 시간을 연장시키는 의료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4) 적극적 안락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죽음의 시간이 멀지 않은 환자의 모습을 비참하게 만들며 그의 품위를 하락시키는 모든 사건들과 현상들을 피하기 위하여 적극적 안락사를 통하여 “품위 있는 죽음”을 가능케 해야 한다. (5) 오늘날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자의 생명을 인공적으로 연장시키는 의료 기기들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의료보험 기관들의 지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또한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의 희생은 그들의 개인적 잠재성과 발전을 저해하며, 결국 그것은 사회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므로 의료 분야의 재정에 관계된 사람들과 일련의 사회학자들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안락사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의 과정을 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과거보다 훨씬 더 크게 되었고, 이것을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시작하는 시점에서부터 경험한다. 유전자 조작, 수태 시간의 조정, 임신 중절, 인공 수정, 생명 복제 등, 인간 생명의 시작을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과거에 일련의 신학자들은, 인간 생명의 시작을 인간이 조정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 생명의 시작을 하나님이 인간의 책임에 맡겼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 생명의 마지막도 이전보다 더 많이 인간의 책임에 맡겨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락사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1) 의사는 환자의 죽음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숨겨야 할 하나의 실패로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환자가 어떤 고통을 당하든지 개의치 않고, 모든 의학 기술을 동원하여 환자의 죽음을 몇 시간, 몇 일 혹은 몇 달 동안 지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2) 치료는 환자가 식물인간으로 되지 않고, 그의 중요한 신체 기능들이 회복되며, 그리하여 환자의 인격이 회복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수술이나 중환자실 치료도 그 자체로써 목적이 아니라, 환자가 새로운 품위 있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의사가 기술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의료상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인가의 문제는 구분되어야 한다. (3) 환자는 그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치료를 거부하고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권리, 곧 안락사의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환자가 어떤 고통을 당하든지 개의치 않고, 의료기기와 약품을 통하여 그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것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는 환자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볼 수 있다. 임종 환자는 가능한 한 병원이나 가족의 삶에 통합되어야 한다. 마지막 불안의 시간에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 (4)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될 때, 안락사는 쉽게 오용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어 버릴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만일 안락사가 허용될 경우, 세밀한 법적 규정에 따라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안락사는 가능한 환자 자신과 그의 가족들과 의료진의 합의하에 시행되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을 권리” 혹은 “품위 있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오히려 과격한 편이지만,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고통의 연장 행위가 더 비윤리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또한 한 사람이 평생 쓰는 의료비 중에서 상당 부분(혹자는 30%라고도 하고, 혹자는 50%라고도 한다.)을 마지막 몇 일 동안에 써 버리는 현실을 생각하면 경제적 자원의 낭비라는 측면에서도 소위 “비용 대비 효과”를 따져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안락사에 대한 논란이 오래 전부터 치열하게 있어 온 선진국들에서는 이미 다양한 방법들을 마련해 놓고 있다. 그 공통된 기준들이란 환자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나 회복될 가망이 없는 고통을 받고 있어야 한다.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키거나 통증을 경감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어야 한다. 여러 명의 의사가 함께 결정해야 한다. 환자나 가족의 뜻을 여러 차례 확인해야한다 등이다. 우리나라의 실정에 가장 잘 부합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다면, 그리하여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제한적인 경우에 한해 허용된다면, 가망 없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이중 삼중의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일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많은 말기 환자들은 사전에 의료진에게 “최후의 순간에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하고 있고, 의사들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다. 어느 것이 더 윤리적이고 더 인간적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다. 전통적 윤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예기치 못한 나쁜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위험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적 윤리를 고집함으로써 생겨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겨날 현실적 피해까지 고려해야만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소극적 안락사의 합법화에 대한 찬반 여부와 무관하게,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 그런 일이 닥칠 경우에는 무의미한 생명연장 행위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현실과 법 사이의 괴리를 남겨 둘 것이 아니라, 혹시 생겨날 수 있는 부작용들이 무엇이 있는지 또 그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치밀하게 검토하여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더 올바른 일일 것이다. Ⅲ.그리스도인들의 품위 있는 죽음 고대 로마의 격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um) 삶과 죽음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Si vis vitam, para mortem) 이 말은, 참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자기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 태도로 죽을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죽음의 예술”(ars moriendi)은 무엇인가?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우주의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스토아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로 죽음을 맞을 것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스토아 철학자처럼 고통과 고뇌 없이 태연자약한 태도로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통과 고뇌에 싸여 “큰소리”를 외치며 마지막 죽음을 당하였다. 따라서 자기의 죽음을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불안과 떨림을 부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양면성을 가진다. 그것은 삶의 시간의 끝남과 모든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교통” 안으로 들어감을 뜻한다. 그들에게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존재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통” 안에 있는 안식과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은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죽음의 시점과 함께 그들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함께 있음을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죽음 속에서도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존재를 그의 영원한 품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볼 수 있다. 그들의 불안한 마음, 떨리는 마음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안에 있으며, 하나님 자녀들의 자유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은 그의 무서운 힘을 잃어버렸다. 죽음은 그의 “가시”를 빼앗겨 버렸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둠과 공허 속으로, 무 속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 영원한 생명의 빛 속으로 죽는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어떤 새로운 업적을 남길 필요가 없다. 단지 그들의 모든 허물과 죄를 하나님에게 고백하고 하나님에게 자기를 맡기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을 처리하기만 하면 된다. 하인츠 챠른트(Heinz Zahrnt)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내적 논리에 따라 연역된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안전케 하고자 하였던 모든 보장들과 의지하는 것들과 다리들이 무너질 때, 우리가 서 있는 모든 기초들을 잃어버리고 완전한 무의식 속으로 가라 앉을 때, 우리가 어떤 이웃과도 더 이상 관계할 수 없고 어떤 이웃도 우리와 관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믿음은 총체적으로(total) 되며, 그의 참된 본질이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드러난다. 곧 믿음은 오직 하나님에게 자기를 맡긴다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과 죽음을 포괄한다. 죽음은 인간의 존재를 폐기시키고 침묵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 영원한 것을 느끼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확신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삶을 책임적이고 의미 있게 살고자 노력하게 되며, 또 자기의 죽음을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 하여 죽음이 쉬운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죽음의 불안과 저주를 간단히 없애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불안과 이불안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죽음에 개한 저주의 맹목성을 제거한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이해하도록 가르친다. 그것은 복음의 빛 속에서 죽음을 해명한다. 이리하여 그것은 죽음의 어둠 속에 빛을 비추어 준다.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고 짐승처럼 죽는 사람에게도 죽음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이 있고, 이 불확실설과 불안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하나의 터부로 취급한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있을 때,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죽음을 터부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죽음을 침착한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 임종환자의 가족들은 따뜻한 사랑의 마음, 내적으로 환자와 연대하는 마음으로 그의 임종을 동반하여. 그에게 죽음의 사실을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점점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으로 말미암은 당혹감, 좌절감절망,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마음의 착잡함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질병과 죽음은 좀더 쉽게 환자의 삶에 통합될 수 있고 인간적으로 감내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과 함께 인간의 모든 인격적, 사회적 관계는 중지된다. 그러나 죽음 속에서도 인간을 동반하며 그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는 하나님이 인정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인정될 때, 우리는 품위있게 살 뿐 아니라, 또한 품위있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왔음에도 불고하고 죽음을 거부하면서 마지막 생명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내적 자유와 평화와 위로 속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현실에 우리를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유족이 어떤 비용과 희생을 부담하게 될지 개의치 않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연장시키려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다. 영원한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을 믿을 때, 우리는 이런 무의미한 일을 중지하고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평안한 마지막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의사는 죽음을 자기의 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능력으로 더 이상 막아낼 수 없는 임종 환자의 죽음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동반할 수 있을 것이다. 살고자 하는 자는 먼저 죽어야 한다. 자기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죽게 하는 것은, 참으로 살기 시작함을 뜻한다. 여기서 죽음은 단순한 부정(Negation) 이상의 것을 뜻한다. 그것은 초월적인 것의 수단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발견한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요 하나님의 행위의 방법이며, 신적인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신적인 것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의 권능과 의도와 사랑을 전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에도 해당할 수 있다.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용납되고 포용되어야 할 삶의 한 측면이요, 한 발자국 더 나아감이요,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초월적 근원수단과 상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불안과 염려 속에서 죽음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웃과 이 세계 안에 있는 것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가운데서 단 하나의 관계, 곧 하나님의 관계를 신뢰하며, 이 세계의 모든 것과 작별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희망하며,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한 기다림과 내적 평정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 그들은 모든 연약함과 거짓과 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누릴 수 있었던 삶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믿음, 희망, 사랑 가운데서 맞아하는 그들의 죽음은, 헤겔이 말하는 세 가지의미에서 “자양”(Aufhebung)이라고 말 할 수 있다. ⑴ 죽음은 “자양”(Aufhebung)을 뜻한다. 죽음은 삶을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⑵ 죽음은 “보존”(Bewahrung)을 뜻한다.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는 폐기되는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교통 안에 보존되기 때문이다. ⑶ 죽음은 “고양”(Erhebung)을 뜻한다. 인간의 존재가 죽음의 한계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 차원의 영원한 생명으로 고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이러한 해석은 이간의 죽음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죽는 사람과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역시 고통스러운 이별이요, 타락한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현실적 죽음은 대개의 경우 “있어서는 안 될” 이유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길이 잘 들여진 양(羊)처럼 현대 사회의 “죽음의 행진”에 순응하고 죽음을 미화 하거나 찬양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에게 죽음을 초래하는 모든 “죽음의 세력들”, “죽음의 사자(死者)”들을 분석하고 그들에 대항하며, “이제는 죽음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는”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경험되는 새로운 세계를 죄와 죽임이 가득한 이 땅 위에 앞당겨 오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품위있게”, “인간다운 조건 속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사회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죽음의 이해와 목회적 돌봄』 논문을 읽고
『죽음의 이해와 목회적 돌봄』 논문을 읽고 과 목 명 : 사생학과 호스피스 담당교수 : 김경호 교수 학 번 : 08535104 성 명 : 윤상은 제 출 일 : 2009. 6. 15 이번학기 ‘사생학과 호스피스’ 강의를 들으면서 유익한 부분이 많았지만 사실 쉽지 않은 수업이었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것이 어둡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라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반드시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일인 만큼 그에 대한 인식과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교수님의 논문을 읽으면서 이 논문을 소장하고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겐 대단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감히 일반사람들이 다루지 않는 주제에 대한 연구 자료를 볼 수 있었던 나는 행운아이다. 논문의 초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타종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죽음과 내세에 대한 관점의 내용은 정말 유익했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에서부터 천주교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내용을 한 번에 보기 쉽게 정리해 주신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특히 천주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연옥설’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무효로 만드는 위험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천주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떻게 감히 교수님의 논문에 대해 평을 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때 느끼고 경험하고 필요로 했던 사후 돌봄에 대한 내용을 평가를 대신하여 쓰려고 한다. 9년 정도 지난 것 같다. 하나 뿐인 동생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경험이었고, 나에겐 그런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이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고 지키시는 분이라는 믿음에 금이 갔다. ‘엄마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엄마와의 사이가 각별했던 동생의 죽음은 엄마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사망신고부터 모든 장례 절차에 이르기까지 나와 아빠가 맡아서 했던 것 같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고 너무나 슬퍼서 인지, 믿어지지가 않아서 인지 처음엔 눈물도 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당시에 소속되어 있던 교회 성가대에 알렸고, 비상연락망을 통해 일사천리로 움직여 빈소를 지켜주고, 발인 예배 때 부를 곡을 준비해 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차려진 빈소라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함께 있어 준 그들에게 고마웠다. 대학부 목사님의 집례로 모든 장례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화장터에까지 많은 조문객들이 함께 해 준 것과 위로의 포옹이 우리 가족을 외롭지 않게 했던 것 같다. 지금 기억에 바쁜 티를 내며 인사치례로 온 조문객에 대해선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경황이 없는 터라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인생의 위기상황을 맞은 우리 가족은 누군가를 의지해야 했다. 그러나 장례이후 속해 있던 대학부에선 우리를 감당 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해 경험이 없을 뿐 더러 선교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모토로 여겨지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회가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우리가족은 전도사님이 소개해주신 기도원을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죽음에 대해 받아들임과 위로를 받게 되었다. 논문에 쓰여진 ‘유가족의 심리반응’은 당시 나의 경험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9년이 지난 지금도 동생이 꿈에 나오면 진짜 살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는데 아직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처음에는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 중에 대성통곡을 하게 되었고, 나의 슬픈 마음, 원망 등 속마음을 그대로 쏟아내었다. 그 이후로 점차 내면이 정리되어갔고 다른 일에도 관심을 갖을 수 있었다. 그 일을 잊기 위해 (너무도 감당하기 힘들었기에) 그곳에서 주어진 일과 다른 사람과의 교제, 그에 따른 문제에 몰두 하였고 그것이 지속되면서 조금씩 충격이 완화되고 사건에 대한 환기가 이루어 졌던 것 같다. 그 당시 가장 감사했던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해 준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빨리 우리 가족이 회복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회복은 점차적으로 일어났고,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빈자리는 있지만 이제는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도의 실제적인 힘은 크다.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하면서 몇 가지 느낀 것을 적어본다면 먼저는 유가족의 사후 관리를 해 줄 수 있는 교회의 역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기상황에 교회에서 받아주지 못한다면 유가족들은 마음 둘 곳을 찾아 잘못된 기도원 같은 곳으로 빠질 염려가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장례식이후 교회는 우리가족을 위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단체나 입증되지 않은 기도원(모든 기도원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에서 우리에게 먼저 손을 벌렸고, 쉽게 그런 곳을 접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또한 죽음의 여러 경우에 대한 대처 방안이 필요하다. 객사, 자살, 불신자의 죽음, 자녀의 죽음을 먼저 경험하는 경우 등 각각에 따른 사후관리는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은 아직도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번 수업과 과제물을 통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살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나왔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 불평하는데 사용했던 나의 잣대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의 소중함과 가족의 존재 자체가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이제는 나 자신, 부모님, 가족들 위해 구체적인 기도를 하는 것이 죽음을 바로 이해하고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구체적으로 기도제목을 적어봄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첫째, 적당한 시기에 미리 준비되어, 가족에게 둘러싸여 의미 있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 마지막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후대에 신앙의 유산을 남겨줄 수 있게 하소서 셋째, 오랜 병 치례로 큰 고통을 당하며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넷째, 천군천사에게 둘러싸여 천국에 가는 것을 본인과 가족들이 모두 보아 구원의 확신을 굳게 갖고 기쁘게 숨을 거두게 하소서 다섯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수를 다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하소서. 여섯째, 가족에게 충분히 표현하고 사랑하여 후회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하소서.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고맙습니다 성령님/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고맙습니다 성령님 손기철 2007 규장 1. 성령님의 방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다. 이상한 과학자 불교집안에서 자라 미국으로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갔지만 퇴짜를 맞고, 낙심 가운데 아내의 기도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전도를 받게 되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가 말씀에 이끌리어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게 됨.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0, 21 성령님과의 아쉬운 만남 새벽 기도를 통해 방언를 받게 되나 기쁨보다는 의무감으로 열심을 갖고 믿음 생활을 함. ‘나는 나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여기지 않고 내 아까운 시간을 쪼개어 하나님 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롬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인간적인 열심과 이성의 한계 인간적인 열심히 지혜롭지 못하게 복음을 증거하자 오히려 비난을 받게 되고, 율법에 매여 자유없이 생활을 하게 됨.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유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2:23, 24 고전 2:9, 10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2. 성령님의 포옹 : 성령님의 품속에 안기다. 내 영을 적신 성령세례의 단비 교회에서 원하지 않던 내적치유 팀에 강제적 권유에 순종하면서 성령님께 사로잡히게 된다. 사 55: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그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분의 말씀이 가짜라고 생각한다면 무시해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만약 진짜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순종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결국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집회 시간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굳게 닫혔던 마음문이 열리고 그 안에 꼭꼭 숨겨두었던 상처를 하나님께 내드리고, 죄를 회개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히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께 제 자신의 일부가 아닌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성령님, 초청합니다.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제가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때부터 나는 내가 사랑하고 추구하고 만나고 싶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노력이나 내가 이룬 결과에 상관없이 영원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나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계속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무엇보다 가장 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놓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18:32-35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나를 정화시켜가시는 성령님의 손길 ‘불법 복제 CD 사건’-출판사에서 나온 자료를 보고나서 복사한 후 그냥 돌려주고 구입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계속해서 출판사에 직접 용서를 빌라고 강권하셔서 울며 겨자먹기로 순종하자 하나님이 용서해주심.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런 죄까지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겠다고 속으로 기도만 드릴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그 사람들을 만나 먼저 용서를 구하기 바랍니다.’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능력이 임하는 기름 부으심 ‘그래서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날마다 기도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할렐루야! 나는 주께서 내 손을 들어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데 쓰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3. 성령님의 입술 : 하늘의 소리를 듣고 말하다. 제발 성경 공부 좀 해라 ‘성령 충만한 삶을 살려고 할 때, 성령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해주신 것은 제발 좀 말씀을 공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만 추구하면 이상한 길로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지도는 성경말씀으로, GPS는 성령님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 기기 안에 최신의 지도가 있다 한들, GPS 시스템이 없으면 지금 내가 어느 위치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지도가 틀렸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GPS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내비게이션 지도와 같은 성경말씀은 분명히 틀림없는 지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 안에 말씀이 있다 해도, GPS 역할을 하시는 성령님과 교제할 때만이 그분이 나의 위치를 성경의 좌표에 지적해주실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잘못된 길로 갔을 때 GPS가 다시 가야 할 길을 계산해서 나타내 보여주는 것처럼, 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성령님은 다시 돌아갈 길을 성경 지도상에 보여주십니다. 자동차가 지하로 들어가게 되면 GPS 수신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두움 가운데 들어가 죄를 지을 때는 성령님과의 교제가 끊어집니다. 그러면 아무리 내비게이션의 지도인 말씀이 있어도 위치가 혼미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인도함을 받아야합니다....오직 성령님이 함께하실 때라야 내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게 되고 우리의 삶 가운데 능력이 나타납니다.’ 요 5:39, 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빌 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모든 성령의 역사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또한 말씀은 그 말씀에 따르는 능력이 임해야 진정한 말씀입니다. 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말씀이 살아 역사하지 않는 이유 -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역사에서 말씀이 지식을 전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말씀을 예수님의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접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 말씀을 들을 때, 단지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이지 하나님을 실제로 직접 만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법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라고 말합니다. 말과 ale음이 따로따로인 것입니다. 요10:4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우리가 읽는 성경말씀(로고스)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의 말씀이 오늘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전에는 문자로만 읽고 지나쳤던 어느 한 말씀이 그날따라 마음에 강하게 꽂힐 때가 있습니다. 전에는 전혀 뜻을 모르던 말씀이 갑자기 뜻이 풀리기도 하고, ’이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는 생각을 성령님께서 부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이 바로 레마입니다. 레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서부터 올라와 마음 판에 비췰 때 레마가 되는 것입니다. 합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우리가 마음문을 열었을 때 찾아오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주변 상황이나 꿈이나 환상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주변 상황이나 꿈이나 환상을 통해 언제 어떻게 말씀하실는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내가 수시로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내 몸의 각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고 깨끗이 청소하는 것입니다.’ 롬 6:13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주님, 내 눈과 코와 입과 귀, 가슴, 심령, 손, 발 모두를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주소서. 깨끗케 해주소서. 내 눈이 음란한 곳을 두리번거리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허락하신 것을 보게 하소서! 내 귀가 세상적인 아무소리나 듣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하소서! 내 코가 벌렁거리며 좋은 냄새를 찾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내 입술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그냥 쏟아내지 않게 하시고, 성령님이 말씀하게 하시는 것을 전하게 사소서! 내 마음을 새롭게 사소서! 세상적인 정보고 채우지 않게 하시고, 성령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감동으로 받는 마음판이 되게 하소서! 내 심령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내 손이 더러운 것을 만지는 탐욕스러운 손이 되지 않게 하시고, 사랑과 치유의 손이 되게 하소서! 이 손이 빛의 손이 되어서 닿는 곳곳마다 변화가 일어나게 하소서! 내 발이 내 욕심대로 움직이지 않게 하시고, 서라 하시면 서고, 가라 하시면 가고, 춤추라 하시면 춤추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방언으로 성령님과 교제하다 ‘방언의 주도자는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시며,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그분께 우리의 혀와 입을 의탁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방언보다 성령세례가 선행되어야 하며,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는 성령 충만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혼미할 때, 방언으로 한참 기도하다보면, 영혼이 깨끗하게 청소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영혼에 붙어 있던 더러운 것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그러나 방언 기도는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훈련입니다. 나의 발성기관을 전적으로 성령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내가 이성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도 제목의 우선 순위를 따라 기도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하나미의 뜻대로 내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간구해주시는 것입니다.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방언을 말하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다보니, 입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머리가 멍하고 공허한 기분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럴 때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도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고전 14:14,15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먼저 성령충만 하도록 간구하고, 방언을 계속해보십시오.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재하신 가운데 방언을 하게 되면 절대로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만약 자꾸 의심이 든다면, 성령님께 새 방언을 부어주시기를 간구해보십시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나는 자동차를 운전할 때, 으레 방언으로 기도합니다...자가용 안에서는 마음껏 성령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방언을 자꾸 하다보면, 생수의 흐름에 따라 방언을 하게 됩니다.’ 요 7:38, 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고 그 마음까지 성령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다른 기도를 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방언에 집중하면서 성령님께 여쭤보는 것입니다. “주님! 지금 나오고 있는 이 방언이 무슨 뜻이죠?” 방언이 먼저 입 밖으로 나가고, 그 뒤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풀어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이 방언이 어떤 뜻이라는 감동을 마음에 주십니다. 예수님의 권세로 선포하다 ‘선포기도를 할 대 성령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는 일도 많았습니다. 권세 잇는 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신분을 생각할 때, 이것이 온전한 기도라고 여겼습니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병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고,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실 때 선포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눅 5: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아버지의 아들 자격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고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소서”라는 간구기도를 드렸지만, 다른 사람이나 악한 영을 향해서는 담대히 선포하셨습니다.’ ‘성령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님과 예수님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이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이 곧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고전 6:17 주와 함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선포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대상을 보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고민과 근심이 있을 때 “애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라고 선포하는 것은, 결국 마음 속 고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너보다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아느냐? 예수님이 피값으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으니, 너희는 내게 아무런 영향력과 권세가 없다. 내 안에서 떠나라!” ‘선포기도를 했을 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사탄은 우리를 비웃고 참소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 가운데 서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에 우리가 의심하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 10:12~14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로 왔노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곧 악한 영의 훼방을 이기고 올텐데, 여기서 내가 믿음을 거두고 의심한다면 그 천사는 악한 영에게 묶여서 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막 11:23,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은 생명의 씨앗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심겨질 때 비로소 생명이 죄와 죽음을 압도하게 됩니다.’ 마8:17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벧전2:24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 나쁜 생각이나 감정이 찾아올 때 할 수 있는 선포기도 ‘이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약 4:7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께 순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선포기도를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게 순복하지 못했던 죄들을 회개해야 기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야 합니다...먼저 철저히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시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노라! 보혈로 인해 내가 죄 사함 받았음을 선포하노라! 내가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에게 나쁜 영향을 준 영, 감정, 생각들은 나의 영, 혼, 육에서 완전히 떠나갈지어다!”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나를 보고 계셨고, 기다리고, 기다리셨습니다. 내 죄를 사해주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내 안에 성령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회복시켜주시고, 나와 교제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도록 나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들을 선전하는 자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려면 하나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내 안에 오신 성령님이 나타나심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자신을 똑같이 나누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이 땅에 나타내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사엥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17:16~18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십시오. 즉,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했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면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오.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이 땅을 먼저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초청해야합니다. 우선 내 자신부터 하나님나라가 되어야합니다. 성령충만은 성령님이 나를 소유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자신이 밟은 당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곳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키면 그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눅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7:20, 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는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입술로 선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지 않는 것입니다. 4. 성령님의 권능 :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쓰임 받다. 성령님의 연장통을 여는 열쇠 성경말씀도 사모하지만, 성경에 약속하신대로 은사도 사모할 뿐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고전 12: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고전 14:1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18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시는데, 마음만 치유되고 몸은 여전히 아픈 채 그냥 살기를 바라지는 않으실텐데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엇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비추셔서, 내 안에 깊숙이 숨어 있는 동기를 드러내신다는 말씀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잠 20:27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과 내 노력과 내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고 능력으로 하여 고전2:4 나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구한 은사를 마음에 심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우리 마음에 심은 말씀이 이 땅에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임신 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막4:26-29 존위버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치유가 일어나기를 사모하여 성도들에게 기도해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10개월여동안 성도들이 교회를 많이 떠났다. 그래도 계속 사모하여 간구하였더니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풍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1:6~8 은사는 한 성령님께서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랄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듯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전 12:8~11 성령님은 우리가 은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을 바라보고 성령님의 손을 잡고 사역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필요한 연장을 꼭 집어 우리 손에 쥐어주십니다. 우리는 은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사의 통로일 뿐입니다. 성령님의 손을 잡고 성령님의 마음으로 잃어버림 영혼을 긍휼히 바라볼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사용해주십니다. 만약 당신이 성령세례를 받았고,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면 감동대로 행동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 안에 필요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의 모든 판단과 태도를 하나님나라의 법에 맞추어야 합니다. 또한 당신이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모든 견고한 생각과 감정들을 버려야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8,9 나의 무능함에 대한 믿음보다 하나님의 위해하심에 대한 믿음이 더 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역사가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로 쓰임 받을 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거룩한 부담감과 감사하는 마음 나는 신유 사역자로, 성도들은 병 고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지 스스로 시험하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집회마다 얼마나 두렵고 덜리는 마음으로 오직 성령님만 붙들었는지 모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다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0 우리모두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 3:16 치유받은 사람의 간증을 듣고 동일한 질병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치유될 수 잇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계19:10 사랑을 따라 행하는 은사들 은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큼만 쓸 수 있습니다. 주시는 만큼만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며 세우는 데만 쓰겠다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합니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안 아프던 곳이 아픈 것도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일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3:10 아주 특별한 위임식 나는 지금도 교만해질까봐 매일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성령님 앞에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있습니다. 주께 쓰임 받지 못하는 인생은 빈 깡통과 같기 때문입니다. 기름 부으심을 흘려보내다 “내가 너에게 이미 다 주었는데, 너는 모르고 있구나.”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1 결국 주님께서 다 주셨으니, 주신 것을 믿고 “나가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라”는 뜻입니다. 잃어버린 영혼, 상처받은 영혼, 병으로 고통 받는 영혼들을 향해 내가 얼마나 긍휼과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열망이 있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기름 부으심을 흘려보내는 파이프의 직경이 달라질 것이다. 성령님은 정말이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능력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옛 자아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기름부으심을 받아보았자 곧 기름부으심이 땅에 쏟아지게 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붕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 9:17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내면의 상처와 쓴뿌리를 제거(내적 치유), 둘째,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그 나라의 법대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매일 그 분 앞에서 거룩한 시간을 갖는 가운데 카이로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에 의해 새로워지고,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5. 성령님의 꿈 : 성령님이 열어주시는 새 길을 따르다. 성령님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자아는 죽고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인정해야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성령 세례는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사항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그전까지 우리가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이해했던 말씀을 성령님께서 친히 풀어 이해시켜주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2, 13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성령님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으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내가 내 것을 포기하는 만큼 내 안에 계씬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성령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더욱 능력있는 삶을 사루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세례를 주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1~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개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7,18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2 오직 죄를 회개하고, 내가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임재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자녀의 삶을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고 성령을 초청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믿음으로 취하십시오. 성령님을 초청하는 실제적 방법 1. 우리가 정말 성령세례를 받고자 할 때 품어야 할 동기는 첫째, 하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고자 할 때 나를 버리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분의 영광이 이 땅에 실제로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2. 동기에 대한 점검이 끝났다면, 하나님과 독대 할 수 있는 조용한 장소로 가십시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장소에서,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9~12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 3. 회개하고 성령님릉 초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아버지, 삼위일체 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지금까지 온전히 알지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부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모두를 바르게 알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시고, 날마다 교제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만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죄를 사해주시고, 자녀 삼아주시고, 주님과 교제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나를 통해 이루도록 하신 것 또한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덮어주셔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옵소서. 주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은 나의 몸이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성령님을 초청하여, 이제부터는 나 자신이 아니라ㅣ성령님이 나를 온전히 인도하시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동안 성령님이 나를 소유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님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이용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성령님! 이 시간에 나에게 오시옵소서 내 심령의 한족 구성이 아니라 중앙 보좌에 앉으소서. 성령님을 진심으로 초청합니다. 오시옵소서 내 영혼이 날마다 성령님을 경배하고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영과 혼과 육, 전부를 성령님께 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내 삶을 인도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믿고 기다린다. 정말 믿음으로 기도했다면, 그 다음 단계는 성령세례 받을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저 마음 문을 열고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5. 성령 세례를 누린다. 이제는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믿고 그것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굴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 6. 성령님께 감사드린다. 받은 줄로 믿는다면, 이제는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신 것을 감사하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내 안에 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성령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더 친밀해지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성령님과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7.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한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그분과 늘 대화해야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작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 14:2 방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를 받은 후 삶의 변화입니다. 이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그분께 당신의 삶의 주도권을 내드리세요. 내드리는 만큼 성령님께서 지혜와 권세와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5 8. 그래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동기를 점검하고 기도하고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로부터 안수기도나, 집회를 통해서도 받을 수 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6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행10:44 우리는 무엇보다 그분의 임재 안에서 안식할 것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촌이 주르르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시63:1~7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 27:4 오감으로 아무것을 느낄 수 없다고 해도 우리 안에 그분의 영광이 함께하신 것을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어야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시 91:1,2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8:13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4:1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 23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의 임재 가운데 당신의 영, 혼, 육을 자유롭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에게 당신을 맡기고 안식하십시오.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기 위해서는 날맏 성령의 임재 안에서 그분과 교제해야 합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1:35 동시에 기름부으심을 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부담감과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을 포기하며 하나미의 능력이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실제로 나타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눅6:19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4 기름 부으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막16:20 성령님과의 교제가 내 계획표의 일부분이 아닌 전부가 되도록 드리는 훈련입니다. 모든 일을 성령 안에서 시작해서 성령 안세서 듣고 말하며 행하고 이루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지금 이 장소에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내 생각과 감정을 포기하고 그분이 나타나시도록 전심으로 기도하십시오. 심령 깊은 곳에서 그분이 나에게 주시는 감동에 따라 순종하십시오. 그분의 나타나심을 감사하고 경배하십시오. 충성하는 사도 바울의 삶 평신도 사역자에게 기름부으심을 흘려보내는 일은 내게 하나의 사명이자 성령님께서 주신 비전입니다. 당신도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받고 가정과 직장, 사회에 기름부으심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님이 주신 더 큰 비전 치유센터 걸립 에필로그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시40:2
과제물/ 죽음에 대한 성서의 기본 인식/ 김균진 저, 죽음의 신학 pp.117-200/ 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과제물/ 죽음에 대한 성서의 기본 인식 죽음에 대한 성서의 기본 인식 (교과서 117 ~200 페이지) 1. 생명의 세계를 파괴하는 죽음의 세력 1) 전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의 죽음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전통적 신학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인간이해를 취하여 물질적 육체로부터 영혼이 그의 영원한 신적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구약성서는 인간의 한 부분, 곧 육의 죽음이 아니라, 전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죽음을 뜻한다. 다시말해 죽음은 육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을 포함한 인간 존재 전체에 일어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존재가 죽음과 함께 총체적으로 없어져버린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도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의 죽음이 아니라, 전체적 존재로서 인간의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가 다른 점이 있는데 구약성서는 죽음과 함께 인간의 자아가 ‘스올’ 로 내려 간다 (시94:17, 115:17). ‘스올’ 은 들어간 다음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이며,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작용할 수 없는 무기력한 세계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죽음과 함께 인간의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살전4:16. 빌1:23). (이종성 종말론 1, 85페이지). 2) 구약성서에 나타난 죽음의 세력 구약성서에서는 죽음을 존재론적 소여로 보는 견해는 다소 빈약한 입장이고 오히려 죽음을 - 1 - 생명을 파괴하고 위협하는 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시88:12, 욥10:21~22, 시31:18, 94:17). 죽음을 하나의 공간으로 표상하는 동시에 하나의 세력으로 표상한다.(욥10:21, 12:22, 16:16). 죽음이란 인간의 존재는 물론 이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가는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세력을 뜻한다. 이 죽음의 파괴적 세력들은 의학적.생물학적 측면, 영적.정신적 측면, 사회적 측면, 정치.경제적 측면, 생태학적 측면들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며 (참고로, 신약성서에서도 죽음은 삶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O. Kaiser, E. Lohse, Tod und Leben. 89 페이지 ),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사라지고, 불신앙과 불의와 타락과 폭력과 억압과 착취가 지배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도 죽음 가운데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런 상황 속에 사는 사람들을 이사야 9장 2절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 이라 표현하였다. 3) “죄의 삯은 죽음이요...”- 신약성서에서 죄와 죽음의 인과 관계 죄가 없었다면 죽음이 없을 것이며, 죄책이 없다면 고난도 없을 것이다. (O. Kaiser, E. Lohse, Tod und Leben. 85 페이지 ).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죄 가운데서 사는 자는 “죽은 자”이다. 요한문서도 죽음을 하나의 파괴적이며 반신적인 세력으로 파악한다. 사랑 안에는 생명이 있는 반면, 증오와 미움, 곧 죄 속에는 죽음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행하지 않고 자기만을 추구하는 자는 이미 죽음 속에 있다.(요일서 3:14) 요한서신은 죽음을 어둠에 비유한다. (요일서 2:9) 공관복음도 죽음을 하나님 없는 인간과 이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파멸의 세력으로 파악한다. 무고한 예수를 잡아 죽이는 이 세계는 ‘어둠의 권세’ 곧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계이다.(눅22:53) 죄는 그 본질에서 생명의 훼손이며 파괴이다. 죄를 짓는 사람은 상대방의 생명은 물론 그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고 훼손한다. 그 속에서는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어 버리는 죽음의 세력이 작용한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 것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있다. 양자는 원인과 결과의 철저한 인과관계 속에 있다. 결론적으로 죽음의 파괴적 세력에 대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이해는 크게 차이가 없으나 신약성서는 우주적, 보편적 세력으로 파악하지만 죽음의 세력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있는 반면 구약성서에서는 파괴적 세력에 대한 구체성이 강하다. 즉 신약성서는 죽음의 세력을 온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어둠’ ‘죽음의 땅과 그늘’ 등과 같이 막연하게 묘사하였고 구약성서는 인간의 가난과 질병, 억울한 소송, 적대자로 인한 소외, 고난과 절망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 2 -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모두 죄로 죽는다는 것에서는 같지만 둘의 결정적 차이는 신약성서에서는 죽음의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미 극복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2. “귀신에게 물어보지 말아라” 1) 생명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의 엄격한 구분 죽음에 대한 성서의 이해에서 한 가지 특징은, 먼저 죽은 자들의 세계를 하나님이 그 속에서 활동하는 세계로부터 엄격하게 구분한다는 점에 있다.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무덤에서 주의 사랑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의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흑암 속에서 주의 기적을 알 수나 있겠습니까? 망각의 땅에서 주의 정의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시88:10~12) 이 시편에 의하면 죽은 자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으며 주의 사랑과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으며 주의 정의를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가지고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는 죽음과 함께 중지된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지만 죽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그에게는 사랑도 미움도 야망도 없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보상도 없다. 그러므로 인생이 아무리 고달프고 허무할지라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 2) “귀신에게 물어보지 말아라”- 두 세계의 접촉에 대한 엄격한 금지 구약성서는 죽은 자들의 세계와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를 철저히 구분하면서, 두 세계의 접촉을 엄격히 금지한다. 이것을 우리는 먼저 모든 죽은 것은 물론 죽은 것과 접촉한 것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구약성서의 사상에서 발견한다. (민 19:11 이하 참조) 생명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의 접촉을 금지한다. 죽은 짐승의 시체는 물론 이것과 접촉된 모든 물건도 부정하다.(레 11:31 이하, 레 21:11) 모든 형태의 초혼(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 냄)을 금지하며 혼과 만나는 것을 금지한다.(신 18:9~11, 레 20:27) 산 자의 문제를 죽은 자에게서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산 자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사 8:20) 3) 죽음의 탈 신화화 - 3 - 고대의 많은 종교 사상에 의하면 죽은 자들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들의 영이나 혼은 피안의 세계에 존속하며(귀신)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를 출입하면서 그들에게 복을 주기도 하고 화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신앙에 의하면 죽은 자들의 스올의 세계를 믿는다. 스올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살아있는 세계로 출입할 수 없으며 살아있는 자에게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수시로 찾아와서 그들에게 화를 내리기도 하고 복을 내리기도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나타나서 살아 있는 자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죽음의 세계로부터 생명의 세계의 해방과 자유가 죽음의 탈신화화를 통하여 일어난다. 4) 삶의 아름다운 재발견 타 종교 사상에서 발견되는 영혼 불멸설과 윤회설은 인간의 영적 삶이 죽음 후에도 피안의 세계에서 혹은 다른 생물체 안에서 연장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죽음이란 지상의 삶의 철저한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삶으로 통과하는 사건으로 이해되며 지상의 삶은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병원에서의 필자의 경험) 그러나 성서에서는 인간의 삶은 유일회적인 것으로 말한다. 삶의 유일회성은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명확하게 구분될 때 분명해진다. 또한 성서는 인간의 삶의 불가역성을 말한다. 즉 죽음을 과거로 돌이킬 수 없으며 또 반복 될 수 없는 것이다. 삶의 유일회성과 불가역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삶의 허무성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삶이 단 한번 밖에 없으며 지나간 삶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허무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또한 단 한번 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삶의 귀중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죽음 1)죽음의 세계도 다스리는 하나님 죽은 자들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첫 번째로 시편 139편 1절에서 찾을 수 있다. “주님 , 주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았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이 구절에서 ‘안다’는 단지 이론적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그와 가까이 있으며 그와 인격적 교통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안다고 할 때 그것은 깊은 사랑과 합일을 가리키며, 상대방과 언제나 함께 있음을 뜻한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내가 주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 4 -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도 주께서는 거기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께서는 거기에도 계십니다.(시139:7~8) 이 시편에 의하면 주님의 손길을 벗어난 영역은 없다. 음부에서도 하나님의 손이 인간을 붙들 것이며 그를 인도할 것이다. 죽음의 세계도 하나님을 벗어난 독립된 영역이 아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는 분이다. “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나오게도 하신다.” (삼상 2:6) 이스라엘 신앙은 죽은 자들의 세계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이라도 붙들어 주며 인도하신다. 2) 죽음의 한계를 깨뜨리는 하나님 - 구약성서의 부활 신앙 구약성서는 본래 죽음 후의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의 과정에서 부활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은 신실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은 죽음과 함께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끝나야 하는가? 에 대한 물음이 부활신앙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은 자들의 부활신앙을 공식적으로 고백한 것은 기원전 1~2세기경 그들이 셀류시스 왕가의 극심한 박해를 받던 때였다. 이 왕가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어 버렸으며 할례와 안식일 제도와 희생 제사를 금하였다. 이것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제단에 제우스의 신상을 세우고 이를 경배하게 하였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의 피를 지성소 제단에 뿌리고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대의 모욕이었고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이었다. 이스라엘의 의로운 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하였다. 그 반면에 정권에 아부하는자들은 세속적 행복과 성공을 누렸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신앙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의로운 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불의한 자들이 행복을 누리고 그런 현실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권선징악의 인과율은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은 과연 옳은가? 하고 묻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의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자연스럽게 말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의로운 자들의 순교를 이대로 끝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잔인하고 불의한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고 최후의 심판을 집행하실 것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물론 부활신앙이 그 전에는 없었느냐? 그건 아니다. 베를린의 조직신학교수 마르크 바르트에 의하면 죽은 자들의 부활신앙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늦게 고백되었다고 하였다. 즉 삼상 2:6, 삼상 2:8, 시 113:7, 호6:1-2, 사24장-27장, 겔37:1-14, 단12:2-3 등에 비추어 이스라엘의 부활신앙은 기원전 1-2세기경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 속에 숨어 있었다고 본다. - 5 - 한 가지 구약시대의 부활은 단순히 인간의 영혼의 부활로 보지 않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으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스올, 곧 죽음의 세계에 있던 인간의 총체적 존재의 다시 살아남으로(재결합이 아니라 재창조) 본다는 점이다. 3) “하나님께서 죽음을 멸하시리라” 지금까지 기술한 죽음에 대한 구약성서의 조망을 발전 단계별로 정리하면 (1) 구약성서는 죽음을 자연사적 사건으로 인식한다 (2) 죽음은 단순한 자연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세력이라는 사실에 눈을 뜬다 (3) 죽음의 세계를 하나님이 다스리고자 하시는 생명의 세계로부터 철저히 구분하며 두 세계의 접촉을 엄격히 금지한다. (귀신숭배금지) (4) 죽음과 죽음의 세계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 (5) 하나님은 죽음의 세력에서 인간을 건지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극복한다. (6) 하나님과의 친교에 참 생명이 있다. 이 친교가 없는 것에 죽음이 있다. 하나님과의 친교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중단 될 수가 없다 (7) 이제 이스라엘 신앙은 한 걸음 더 발전한다. 하나님은 불행과 고난 속에서는 물론 죽음 속에서도 그의 신실한 자들과 함께 계실 뿐 아니라 그의 창조적 능력으로써 죽은 자들을 다 시 살리는 분으로 드러난다. 이제 죽음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통하여 극복될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폐 기 될 것으로 나타난다. 이 죽음의 세력에 대한 폐기가 구약성서에서는 미래에 성취될 것으로 믿는 반면에 신약성서 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단 한 번 그러나 모든 세대에 대하여 폐기가 이루어졌다. 4.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깨어진 죽음의 세력 1)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는 예수 지상의 예수는 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선포하였는데, 이 선포는 후기 유대교의 묵시 사 상의 전통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의 미래에 이러날 종말에 대하여 말하기보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 앞에서의 회개와 현재적 상황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와 같은 예수의 지상 활동은 죽음에 대항하여 생명을 회복하는 운동이라 요약할 수 있다. 예수의 생명 회복 운동 가운데 몇 가지를 우리는 아래와 같이 기술할 수 있다. (1) 예수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 멸시와 소외를 당하였던 사람들의 친구가 됨으로써 그들의 상실된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한다. (2) 예수는 의와 불의, 경건과 불경건의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고 소위 의롭고 경건하다는 자들의 불의와 불경건을 폭로하는 반면, 불의하고 불경건하다는 자들의 의와 경건을 드러낸 다. 이를 통하여 예수는 그 사회의 기존 가치관에 따라 불의하고 불경건한 자로 낙인찍힌 - 6 - 자들의 그늘진 생명을 회복한다. (3) 죄는 사실상 생명의 파괴이다. 우리가 죄 지을 때 우리의 생명은 물론 타인의 생명에도 해가 된다. 죄 속에는 언제나 죽음의 세력이 숨어 있으며 죄를 짓는 자는 죽음의 세력의 포 로가 된다. 이러한 죄인에게 예수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그를 하나님과 화해시킴으로써 죽음의 세력에서 해방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죄인의 생명을 회복한다. (4) 예수는 병자의 병을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음으로써 그는 그들의 생명을 회복한다. (5) 예수는 희년을 선포함으로써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생명을 회복한다. (6) 예수는 유대와 사마리아와의 지역적 대립에 대하여 초연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지역적 대립으로 인해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킨다. 2)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들의 다양성과 일치점 예수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은 끝나버렸는가? 거짓과 죄와 죽음의 세력이 의와 생명의 세력 에 대하여 승리하는 이것이 역사의 진리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신약성서는 부활로써 대답한다. 신약성서는 예수의 부활의 과정에 대해서 묘사하기보다는 예수의 부활 이후에 일어난 일들 에 대하여 보도한다. 곧 막달라 마리아, 야곱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부활한 예 수를 만난 일에 대하여 증언하며 부활의 과정 자체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또한 부활의 증언들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과 부활한 예 수가 처음으로 나타났던 장소와 부활한 예수가 나타난 과정들이 복음서끼리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 신약성서의 편집자는 왜 부활의 증언들에 대해 일관성 있게 통일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부활에 대한 역사적 자료보다 다양한 증인들의 신앙적인 증언을 더 중요시하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고 해석된다. 신약성서는 이들의 증언 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였다. 예수의 부활이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일관성이나 객관성에서 차이점이 있지만 문제 삼지 않았다. 3) 죽음의 세력에 대한 생명의 승리 고린도전서 15: 3-5 은 도입부분과 네 가지 명제로 나뉜다 도입부분 : “내가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명제 1.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명제 2.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명제 3. “성경대로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명제 4.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 7 - 명제 1에서 그리스도란 칭호는 예수의 본래 이름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스도 는 곧 메시아는 이방 민족의 불의한 주권과 지배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할 왕 적 존재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그리스도란 칭호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고백과 결 합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를 복음서 기자들이 그리스도라고 고 백하면서 주권을 회복할 왕적 의미인 메시아적 의미는 사라지고, 대신에 많은 사람들의 죄 를 대속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을 가져왔다는 의미로써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게 되었고 고린도서에서는 예수를 빼고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이다. 명제 2에서 예수가 무덤에 묻히셨다고 함으로써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의 심연에 삼키워졌으며 스올의 영역으로 들어갔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명제 3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계에서 머물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셨는 데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하였다. 이는 죽음을 당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라는 뜻 과 이 세계의 역사의 한 가운데서 라는 뜻이 있다. 명제 4에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보여주셨다고 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약 속과 새로운 소명을 주심을 나타낸다. 다시 정리하면 바울의 부활 신앙은 죽음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폐기의 시작이다.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은 사실 상 깨어졌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죽음의 세계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열려졌다. (3)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과거에 끝나버린 한 사건, 혹은 사실이 아니라 성령 가 운데서 일어나는 자들의 부활의 과정의 근거로 이해된다. 세례도 부활의 과정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왜냐면 세례를 통해 죄와 죽음의 세력에 묶여 있던 인간의 존재가 새로운 생명 으로 부활하기 때문이다. (4) 부활은 불의와 폭력과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하나님의 의와 자비가 세워지 고 생명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새 창조의 시작이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영 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사건이다. (5) 죽음의 세력에게 사로잡힌 자연의 구원 없이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우리는 더 이상 말 할 수 없다. 환경이 오염되어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병든 육체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이 고통을 당하는 현실 속에서, 단지 영혼 구원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 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영혼은 물론 그의 신체를 포함하며, 인간과 사회와 역사는 물론 자연 의 영역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간의 중생이 시작할 뿐 아니라 온 우주의 다시 태어남이 시작한다. 예수의 부활은 판넨베르크가 말하듯이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 온 세계의 새 창조가 시작되는 사건이다. 온 세계의 새로운 창조는 역사의 종말에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노력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앞당겨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물론 자연까지 포함하는 총체적 구원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6)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궁극적 폐기의 약속인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다 - 8 - 4) 빈 무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의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열 수 없는 죽음의 세계의 폐쇄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 돌을 치우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람 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여자들은 누가 이 돌을 치워 줄 것인지 서로 질문한다. 바로 이때 여자들은 예수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 무덤 한 쪽으로 치워져 있음을 발견한 다. 누가 이 문을 열었을까? 하나님이다. 하나님만이 그 문을 열 수 있다. 5) “죽은 자들의 처음 태어난 자” 고전 15장 23절에 의하면 예수는 “죽은 자들의 처음 태어난 자” “죽은 자들의 첫 열매” 이 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모든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이 시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부활의 인격적 측면이라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화해된 모든 피조물이 그의 뒤를 따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 한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곧 자연의 세계 전체가 죽음의 그늘을 벗어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부활의 자연적, 우주적 측면이라 말할 수 있다. 6) 마지막으로 극복될 원수 바울은 부활의 과정의 세 단계를 말한다. 첫째 단계는 죽은 자들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이고 둘째 단계는 그가 재림할 때 그 에게 속한 사람들의 부활이다. 셋째 단계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위와 세력을 폐하 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종말이다. 종말에 그리스도는 모든 반신적 세력들 과 죽음의 세력들을 페기하실 것이다. 죽음에 대한 바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은 자들의 부활 을 부인하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이원론적 인간관과 세계관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7) 죄와 죽음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세계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없는 생명의 세계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의 만남을 통하여 일어난다고 신약성서는 말한다. 예수를 만나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죽음의 세력은 물러가 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열린다. (요5:25) 또한 세례를 통하여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으며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왔다. (롬6:4) 이것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완성은 미래에 있다. 죄가 지배하는 이 세계 속에서 많은 생명들이 죽음을 향하여 줄달음치고 있는 현실을 우리 는 지금 목격하고 있다. 15살, 16살 된 어린 소녀들이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수 백 명의 성 인 남자들과 원조교제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정경유착을 통하여 사회 극소수의 계층은 상상을 넘어서는 풍요와 특권을 누리는 반면 많은 - 9 - 국민들은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는 것마다 부패와 타락과 향락이 만연하 다. 인간이 파괴한 자연환경은 이제 인간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세계는 죽음의 세계다. 이러한 세계 속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시작하시고 그 의 자녀들을 부르신다. 죄와 죽음의 세계를 떠나도록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세 력을 극복하고 모든 피조물의 해방과 영원한 생명이 있는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깨어나라고 부르신다. 감상평 죽음은 인간의 자연적 사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치, 경제, 사회의 타락 과 불의 그러한 현상도 죽음으로 보았고 오염되고 훼손된 자연도 죽음으로 보았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권세에 눌려 있고 죽음의 세력에 눌려서 신음하고 있는 인간과 사회와 자연이 다시 생명을 얻고 살아나는 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다. 행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저가 사망에게 매어 있을 수 없었음이라.’ 더 이상 이 사회와 인간들과 자연은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풀어 살려 주시도록 기도하며, 그리고 하나님이 살리시고 부활케하신 것들은 우리들이 잘 지키고 보존해야할 사명이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의 죽음 준비
나의 죽음 준비 한 학기 동안 사생학에 대해 함께 연구하고 발표하고 토론하며 배웠다. 그러나 막상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준비함에 대해 정리된 글을 쓰려니 오히려 낯설고 막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목회현장에서 교인들의 죽음을 대하기도 하며 죽음에 대한 설교도 가끔 했다. 그래도 자신의 죽음에는 생각하는 것도 서툴고 깊이 사색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누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겠는가? 누가 죽음 앞에 자신을 진지하게 세워보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느새 죽음의 자리에서 삶의 자리로 옮겨와 있고 죽음의 정지된 현장보다는 삶의 과 현장의 소란하고 버거움이 더 익숙하며 정답기까지 하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40세까지만 살기를 원하고 죽기 전에 소설책 한권 쯤 쓸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치기삼아 얘기하곤 했었다. 나이가 오십이 넘으면서 느끼는 시차가 있다. 정서적으로는 아직 스스로에게 덜 떨어진 소년 같고, 팔팔한 청춘 같고, 신혼 같고, 아직은 여전히 청춘인데 몸은 현실을 깨우쳐 준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심지어는 마음은 벌써 저만치 달려갔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타박상을 입을 정도로 간격이 생기는 것이 이것도 정신과 육체의 아노미 현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스무 살이 된 아이들을 보면서 내 나이가 인식되는 정도이니 차라리 어설픈 쉰세대보다는 신나는 청춘으로 착각하며 살려한다. 아마 한 십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한 교인에게서 경주 힐튼호텔 숙박권을 선물 받아 아내와 함께 한가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낮 시간에 경주 관광지를 둘러보고 밤중에 호텔방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거울에 비친 어떤 남자의 모습 앞에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치 닥터 지바고 영화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연인 라라의 집에 돌아왔을 때 식탁 위에 삶은 감자가 기다리듯 놓여있었고 지바고가 벽 쪽 커튼을 젖혔을 때 그 영화의 주제음악과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만돌린 현이 긁히는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그때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뒤로 물러설 만큼 놀라는 지바고의 모습처럼, 낯선 경주의 밤이라서 그랬는지 그날 비로소 내가 사십 세가 넘었다는 것을 놀람과 함께 실감했었다. 그리고 이삼년 전 쯤으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아이들은 공부하러 타지에 보내고 아내와 두 사람만 멀뚱거리며 애틋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날, 일과를 다 마치고 아내는 멀리 잠들고 혼자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사소한 생각을 하며 거실로 나가다가 그만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과 공포에 휩싸이면서 온몸이 굳어져버렸다. 거실 소파에는 자주색 조끼가 걸쳐져 있었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내가 입고 있었는데 언제 벗겨져서 소파 위로 옮겨졌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두 손으로 윗몸을 더듬으며 이 현상을 극구 부인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아니야. 이건 무언가 잘못 되었어.’ 소파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조끼가 무서워졌다. 한밤 중의 비명에 놀란 아내가 토끼눈으로 거실로 튀어 나왔다. 나는 아무런 말도,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었다. 돌같이 굳어진 몸으로 겸연쩍고 부끄럽고 바보 같은 얼굴로 엉거주춤 서 있다가 다시 서재로 숨고 말았다. 이런 걸 보고 필름이 끊어진다고 하는 걸까. 아무리 내 행동을 재구성해 보았지만 기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죽음 준비를 생각하느라 몇 가지 기억을 떠올리며 흘러가는 대로 써 보앗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 한다기 보다는 속으로부터 죽음을 거부하는 것들이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은 죽음을 준비하고 갈 생각이 없다. 매일매일 하루가 전부인양 힘을 다래 내게 허락된 삶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더 원한다면 모세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눈이 쇠하지 않고 마치 단절되듯 이생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 원한다. 영원한 젊음으로 살다가 더 영원한 젊음으로 그 나라에 영광스럽게 입성(入城)하려 한다. 이것이 나의 죽음준비이다. 유언장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로 안에서 하늘의 생명을 살았으며 영원히 살 것이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살았던 것을 감사한다. 세상은 아름다웠고 사람들은 사랑스러웠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삶은 보배로웠다. 그리고 이제 새롭게 수여될 영원한 생명은 그 아들과 함께 영화로울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깨닫고 배우고 살며 가르쳤던 것보다 더욱 가슴 벅찰 것이다. 그동안 기다리며 사모했던 대로 그리스도와 완전한 하나가 되기 위해 짧은 여행을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용기 없고 바빠서 하지 못했던 여행을 이번에는 제대로 할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 김정숙님에게 당신은 오직 나와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소.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다 표현하지 못한 내 마음을 잘 아시리라 믿소. 당신은 아름답고 지혜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소. 잠시 후에 우리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납시다. 영원히 사랑하오. 사랑하는 아들 양금현님에게 우리를 가족으로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너의 자라는 모습은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사라진다. 오직 하나님과 말씀만이 참되고 영원하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 살기 바란다. 아들아 인생은 신나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라. 곧 다시 만나자. 사랑하는 딸 양초혜님에게 너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었다.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을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라.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사랑하는 것이다. 깊은 은혜에 들어가기 바란다. 주님의 품 안에서 만날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라. 딸아 사랑해. 사랑해. 내가 병상에 누웠을 때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의료행위는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미리 약속한대로 나의 장기들은 기증을 합니다. 장례는 최대한 간소한 예배로 치루어 주십시오.(내가 쓸 데 없는 형식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화장을 해서 묻고 조그만 묘비를 세워 주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써 주십시오. -나 부활하리라-
나의 죽음 준비에 대하여
나의 죽음 준비에 대하여 Ⅰ. 일반적인 죽음 준비: 웰다잉(Well-Dying)이란? Memonto mori!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시편 90:12) WELL-DYING! 존엄한 죽음을 디자인하라 죽음은 삶에 대한 성적표이자 완결이다. 한 사람의 삶이 진정 훌륭하게 완성되려면 잘 먹고 잘 사는 만큼 죽음 또한 평온하고 존엄해야 한다. 성실과 노력 없이 웰빙을 이룰 수 없듯이 웰다잉도 공부하고 준비해야 얻을 수 있다. 오랜 역사 동안 ‘영적(spiritual) 문화’를 간직해온 한국은 산업화란 암초를 만나 물질 문명에 더욱 매달리게 됐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현세만이 가치 있다는 편향된 생각을 갖고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지금 한국 사회를 휩쓰는 웰빙(Well-being·참살이) 못지않게 ‘웰다잉(Well-dying)’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주위 사람들과 품위 있게 이별하고, 자신의 생을 차분히 돌아보는 ‘죽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죽음을 인지함은 곧 삶을 인지하는 것과 같다. 존엄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고자 한다면 삶도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WELL-DYING! 당신의 품위 있는 마지막을 위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 그러나 생명이 있는 한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웰 다잉(well-dying)’은 그런 질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죽음을 검은 베일에 가려진 ‘금기(禁忌)’가 아니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 이야기하며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는 대상으로 보자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지나온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고, 힘든 슬픔의 여정(旅程)을 끝까지 견뎌내는 힘과 용기를 준다. WELL-DYING! 삶의 모습이 곧 죽음의 순간을 결정한다 생사학 연구소 오진탁 소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롭게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 삶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거나 성냄, 집착, 공포 같은 감정으로 크게 혼란스럽다면 평화롭게 죽을 수 없음 또한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다면 올바르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죽음의 질이 결정된다는 것.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과 직결되므로 잘 사는 사람만이 잘 죽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겐 임종의 절차나 사후 처리 등 실질적인 죽음 준비밖에 할 시간이 없다. 그러나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에게 죽음 준비는 곧 삶을 더욱 탄탄하게 계획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밑거름이자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이제 죽음을 질병에 걸린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들만의 것으로 착각해선 안된다. WELL-DYING! 웰다잉을 위한 3가지 실천 1. 삶을 돌아보라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후회가 없을 만큼 오늘을 충분히 알차고 성실하게 살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것이 죽음의 순간엔 무의미한 것이 되진 않을까? 생사학 연구의 권위자 알폰스 데켄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 먼저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라고 제안한다. ①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10가지 열거해 보라. ② 1에서 적은 항목을 가장 잃어버리기 싫은 것 순서대로 나열해 보라 ③ 실제로 당신의 삶에서 우선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순서대로 나열해 보라 ④ 2와 3을 비교해 보라 ☞ 양쪽이 동일한 항목에 똑같은 순서라고 한다면, 당신은 지금 충분히 조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2의 항목에서 첫 번째로 가정의 단란함을 거론했으면서도 지금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다면, 후회없는 삶을 위해 생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지 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中 2. 죽음을 상상하라 죽음의 순간은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한 번에 보여주는, 삶의 축소판이다. 나를 3인칭으로 하여 사망기를 작성해 보자. 나의 사망기는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죽음 준비의 한 과정이다. < 나의 사망기 > 1. ( )는 어제 (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그의 사망 원인은 ( )이었다. 3. 그의 가족은 ( )이며, 그는 ( )의 구성원이었다. 4. 그는 사망한 그 때에 ( )을 하고 있었다. 5.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 )라고 기억할 것이다. 6. 그의 죽음을 가장 슬프할 사람은 ( )이다. 7. 그가 세상에 남긴 업적은 ( )이다. 8. 그의 시신은 ( )처리될 것이며, 장례식은 그의 유언에 따라 ( ) 진행될 것이다. 3. 죽음 준비 교육을 받으라 죽음 준비교육이란 죽음의 의미를 평소에 미리 생각해보고, 삶을 보다 보람되게 영위함으로써 죽음이 갑자기 찾아오더라도 편안히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교육이다. 죽음 준비는 삶과 죽음 각각에 관련해 말할 수 있다. 첫째, 죽음 준비는 삶과 관련해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에 유념하면서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돌아보고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라는 뜻이다. 둘째, 죽음 준비는 죽음과 관련해 평소에 죽음을 미리 준비해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해 두라는 의미이다. 죽음 준비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죽음에 대비해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라는 뜻이다. 죽음준비는 삶을 이치에 맞게 살아보기 위해 임박해 있는 죽음을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따라서 죽음준비는 죽을 준비가 아니라 바로 삶의 준비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 준비를 하지 않고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죽음준비교육은 이 땅에서 제대로 살도록 하기 위한 삶의 교육이다. 삶과 죽음을 준비하는 회 www.kakdang.or.kr 한림대학교 생사학 연구소 www.huspc.ac.kr 아름다운 노년문화연구소 cafe.naver.com/deat hedy 한국죽음협회 kathana.or.kr 한국호스피스협회 hospiecekorea.com 아름다운 이별학교 beautifulfund.org Ⅱ. 나의 죽음 준비 \"죽음은 우리 삶을 완성 짓는 매듭이 될 수 있습니다.\" WELL-DYING! Theme 1) 사전 유언 리빙 윌(living will) ①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서 저는 제가 병에 걸려 치료가 불가능하고 죽음이 임박할 경우를 대비하여 저의 가족, 친척, 저의 치료를 맡고 있는 분들께 다음과 같은 저의 희망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선언서는 저의 정신이 아직 온전한 상태에 있을 때 적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저의 정신이 온전할 때는 이 선언서를 저 자신이 파기할 수도 있지만, 철회하겠다는 문서를 재차 작성하지 않는 한 유효합니다.- 저의 병이 현대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고 곧 죽음이 임박하리라는 진단을 받은 경우, 죽는 시간을 뒤로 미루기 위한 연명조치는 일절 거부합니다. - 저의 마지막 시간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족, 친지와 함께 맞고 싶습니다. 의학적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는 호스피스 병동이나 병원으로 옮겨주십시오.- 다만 그런 경우 저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는 최대한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로 인해 예를 들어 마약 등의 부작용으로 죽음을 일찍 맞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 제가 몇 개월 이상 이른바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을 때는 생명유지를 위한 연명조치를 중단해주시기 바랍니다.이와 같은 저의 선언서를 통해 제가 바라는 사항을 충실하게 실행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저의 요청에 따라 진행된 모든 행위의 책임은 저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② 사전의료 지시서 • 성 명: 강신숙 • 주민등록번호: 670818-2****** • 현주소: 대전시 서구 변동 ***** 만일 내가 지속적인 혼수상태(또는 임종 직전의 상태, 의식이 없는 상태, 치매 상태, 또는 결정능력이 없는 무능력 상태)로, 나의 주치의사와 두 명의 자문의사의 의견이, 어떠한 치료에 의해서도 의식회복 가능성이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할 경우, 이에 대한 대처나 앞으로의 어떤 추가적인 질병에 대한 나의 소망과 목적은, 의료적으로 합당하게, 다음과 같음을 밝힘. 1. 심폐소생술(임종에 앞서 앞가슴을 누르고, 투약하고, 전기적 충격을 주고, 인공기계호흡 등을 적용하는 의료시술) 원함 □ 결정하지 못했음 □ 원하지 않음 √□2. 대수술(예: 담낭제거수술, 대장부분절제술 등)3. 인공기계호흡(기도 삽관 후 기계로 숨쉬게 하는 것)4. 인공투석(기계로 혈액을 깨끗하게 정화해 주는 의료시술)5. 수혈 및 혈액제제 투약 6. 인공영양 및 수액 요법7. 간단한 진단적 검사(예: 혈액 및 X선 검사)8. 항생제(감염증을 치료하기 위한 약)9. 진통제(비록 의식이 무뎌지고 죽음의 과정을 촉진하더라도) □ 생명연장: 가능한 모든 것을 시행□ 병의 치료 시도 계속, 그러나 주기적으로 재진단을 원함□ 침습적이고 부담이 되는 진료행위를 제한함□ 완화의료만 시행할 것□ 기타(자세하게 기록할 것) ③ 인터넷 유서함 만들기 - 유서 작성: 일 년에 한 번 정도 다시 수정하기. - 사전 의료 지시서 작성 - 메일 작성 온라인 사이트 유언장은행(www.yoounjang.com) 마이윌(www.mywill.co.kr) 굿바이메일(www.goodbyemail.com) WELL-DYING! Theme 2) 죽음에 대한 이해를 높이자 ① 영화를 보며...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 믹 잭슨 감독 체리향기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윈 트루 씽 / 칼 프랭클린 감독 씨 인사이드 /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 ② 독서를 하며... 죽음의 시간 /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 / 도서출판 우석 죽음, 가장 큰 선물 / 헨리 나우웬 / 홍성사 만남, 죽음과 만남 / 정진홍/ 궁리출판 죽음, 삶이 존재하는 방식 / 오진탁 / 청림출판 춤추는 죽음 / 진중권 / 세종서적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김열규 / 궁리출판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 헬렌 니어링 / 보리 빛, 색깔, 공기 / 김동건 / 홍성사 죽음, 그 마지막 성장 / 부위훈 /휴먼필드 사후생 /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 / 대화출판사 죽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 / 히노하라 시게아키 / 궁리출판 죽음의 벽 / 요로다케시 / 재인 티벳 사자의 서 / 파드마삼바바 / 정신세계사 인생 수업 / 엘지자베스 큐블러로스 / 이레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 미치 앨봄 / 세종서적 우아한 노년 / 데이비드 스노던 / 사이언스북스 잠수복과 나비 / 장도미니크 보비 / 동문서 샘에게 보내는 편지 / 대니얼 고틀립 / 문학동네 인생이 내게 준 선물 / 유진 오 켈리 / 꽃삽 생의 수레바퀴 /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 / 황금부엉이 한 말씀만 하소서 / 박완서 / 세계사 마지막 강의 / 랜디 포시 / 살림출판사 아이와 함께 나누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 / 얼 그롤만 / 이너북스 ② 기도와 말씀으로 죽음을 준비하자 - 기도하기: 어떻게 죽기 원하는지 주님께 이야기하고 주님은 내가 어떻게 죽기를 원하시는지 물어본다. - 말씀: 말씀을 통해서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부활의 소망을 마음에 새긴다. Ⅲ. 나의 유언장 1. 인적 사항 • 성 명: 강신숙 • 주민번호: 670818-2****** • 주 소: 대전시 서구 변동 *** • 작 성 일: 2009년 6월 15일 • 작성 장소: 집 2. 시신 처리 뇌사 판정이나 소생 가능성이 없음이 판정되면 기증할 수 있는 장기를 기증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시신을 인계할 가족이 없는 경우에는 나의 시신을 대학 병원에 기증하여 주십시오. 3. 장례 방법 장례는 화장으로 간략하게 해 주시고, 혁이(아들)를 뿌린 망양정 앞바다에 뿌려 주십시오. 조문객들에게는 일체의 조화 및 조의금을 받지 말고 정중히 접대하며 방명록 만을 받아 주십시오. 4. 추모 방법에 대한 바람 추모방법에 대해서는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기일이나 생일 등에 기념하지 말아주시고, 그저 하늘나라에 조금 먼저 갔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5. 재산 및 물건 처리 방법 재산은 가족들이 어려운 경우에는 일부를 사용하고, 남는 돈은 공동모금회에 전액 지정 기부해 주십시오. 6. (기타) 남기고 싶은 말 남편에게... 그동안 내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까지 같이 살아준 것에 정말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은 당신과 결혼해서 혁이를 낳고 같이 기른 일인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에 조금 먼저 가서 혁이와 함께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남겨진 생애에 하나님의 뜻하심을 채워나가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를 부탁합니다. 다시 한 번 부족한 나와 같이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몸 고생, 마음 고생을 참 많이 시켜서 죄송합니다. 당신 곁에 살면서 행복했습니다.
나의 죽음에 대한 고찰
나의 죽음에 대한 고찰 과 목 : 사생학과 호스피스 제 출 자 : 성수영(석사 3학기) 지도교수 : 김경호 교수님 1. 서론 옛날 중국에서는 나이 든 부모님을 위해 방 안에 좋은 관을 들여놓아 주는 것이 큰 효도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이 든 부모님들을 위해 좋은 수의를 해 드리는 관습이 있는 지방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지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동네만 해도 7~8년 전 사기꾼들에게 중국산 수의를 비싸게 주고 산 사람들이 많이 있는 형편이다. 지난 번 심방을 한 노 권사님은 아들이 수의를 해 주었다며 자랑을 하며 펴 보이는 데 천이 무엇인지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꽤 좋은 것 같았고 권사님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 수의를 자랑하는 권사님의 만족함이 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을 보며 누구나 한 번 가는 길, 준비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는 중 사생학과 호스피스 과목을 접하면서 나는 과연 어떻게 죽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모습으로 죽으면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지난 번 리포트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불쑥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계획서를 써 보면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마음 속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크게 자리 잡고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 죽음일까? 그냥 막연하게 ‘잘 죽자’였다. 잘 죽는 것 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죽음이라는 것이 내가 계획을 세운대로 진행되어져 가는 것이라면 죽음 계획서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죽음에는 사실 계획이 없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오라 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야 하는 것이 죽음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내 계획대로 안 된다고 해서 되는 대로 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본 리포트를 통해 나의 죽음에 대한 계획을 세워보고자 한다. 2. 본론 1) 계획에 대한 동기 나는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음에 대한 준비는 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동기는 바로 어머니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평생을 벌어 모으신 돈을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곤 하셨는데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문제는 어머니가 그 돈을 누구에게 빌려주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빌려 주신 돈이 1억이 넘어갔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 내가 돈을 빌렸다고 고백하고 갚은 사람은 단 한 사람 200만원을 빌려간 가난한 세탁소 주인이었다. 나머지는 어림짐작으로 저 사람이다 싶은데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차용증도 없다. 그저 예전 노인들이 하던 대로 구두 약속만 있었을 뿐이었다. 한 정육점 주인은 3,000만원이 넘게 빌려간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음에도 차용증이 없다는 이유로 겨우 150만원 밖에 갚지 않았다. 덕분에 어머니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나는 연금까지 해약해야 했고 동생은 Two Job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 이후로 늘 생각한 것이 바로 갑자기 죽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생각뿐 그냥 저냥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다. 2) 내 삶에서 경험한 죽음에 대한 고찰 내가 죽음에 대해 처음 생각해 본 것은 고등학교 입학식 전이었다. 원치 않는 학교에 부모의 강요에 의해 입학하게 되면서 입학식이 되기 전에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강하게 느껴 본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죽음이라는 것은 늘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습관처럼 되고 말았다. 더구나 고 3말에 폐결핵을 심하게 앓으면서는 늘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고 결핵과 술 담배로 인해 폐인이 되다시피 한 21살 겨울에 처음으로 죽음의 문을 두드려 보았다. 당신 나는 육체적인 병 뿐 아니라 지금 생각해 보면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부모도 누구도 그런 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처음 죽음의 방법으로 택한 것은 수면제였다. 며칠을 두고 사 모은 수면제를 털어 넣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턱을 넘어서지는 않고 돌아 왔다. 그리고 며칠 후 식구들의 감시를 피해 이번에는 교살을 시도했지만 둘째 동생의 재빠른(?) 대응 덕에 또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역시 다행인지 목 주위에 시뻘건 끈 자국만 한 달 이상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그 이후로 내게는 언제나 죽음이 근처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무엇을 해도 죽음과 연결이 되었었다. 큰 장마가 졌던 어느 해 밤에 잠실대교에서 한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뛰어내리려고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지금의 아내에게 잡혀서 다시 세상에 나왔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29살 되던 해의 교통사고, 그 때도 전치 32주의 병원생활(물론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지만), 후에 또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고 폐결핵의 재발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 왔지만 그 때도 또 문턱을 턱걸이해서 돌아왔다. 결혼을 하고도 내 옆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5년 전, 또 한 번의 죽음이 문턱까지 찾아 온 적이 있었다. 밖에서 개가 갑자기 놀라 짖어대는 바람에 잠결에 침대에서 뛰어나오다 그대로 고꾸라져 넘어졌다. 아무도 없던 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깨가 심하게 아프고 팔에 감각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선 채로 거꾸로 방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문지방에 어깨를 부딪쳤던 것이었다. 간신히 교회 집사님께 전화를 하고 정신을 잃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X-Ray 촬영을 한 결과 어깨뼈가 일곱 조각이 나 있었다. 집에 아내도 없던 새벽 세시, 전화마저 할 수 없었다면 쇼크로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깨뼈와 머리뼈와의 거리는 불과 10cm이다. 그 이후 나는 언제나 죽음과 삶의 거리는 10cm라는 생각으로 살아 왔다. 3)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앞으로의 계획 (1) 건강 챙기기 내가 늘 두려워하는 것은 뇌출혈이나 뇌경색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거나 죽지도 못하고 누워있는 상태로 맞이하는 죽음이다. 부모가 모두 뇌출혈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병력으로 인해 나 역시 뇌출혈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더구나 지금 나는 혈압이 160이 넘는 고혈압환자이다. 물론 약으로 조절하고 있기는 하지만 부모의 병력과 연계지어 보았을 때 잠재적인 뇌출혈환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거기다 나는 비만이다. 정상체중이 65~70kg사이임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의 내 잉여 체중은 거의 20Kg에 육박할 만큼 비만도가 높다. 10여 년 전 갑자기 체중이 불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때는 그것이 갑상선 기능 저하증의 결과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런 것은 여자에게나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갑자기 불어난 체중으로 힘들어하며 그럭저럭 4~5년을 살다가 종합검진에서 갑상선 기능저하라는 판정을 받았다. 불어난 체중과 이로 인한 혈압의 상승, 그 이외에는 건강하다. 그러나 늘 두려운 것이 바로 고혈압이다. 내가 정상 체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혈압에 대한 부담은 덜 수 있다. 때문에 가장 시급한 것은 체중을 줄이는 것인데, 쉽지가 않다. 갑상선 기능 저하증에 대한 처방은 약을 쓰기도 애매한 증상이라고 하니 조금 피곤하면 수치가 뚝 떨어졌다가 다시 서서히 수치가 상승하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체중을 줄이는 것이 잘 죽기 위한 한 방법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2) 영적 생활 흔히들 세상에 대한 미련이 많은 사람은 잘 죽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세상에 대해 어떤 미련을 가지고 있을까? 사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면서 살고 죽는 것에 대해 나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또한 몇 년 전 기도 중에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한 환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죽을 나이까지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정말 나의 죽음에 관한 환상이고 그 나이가 확실히 내가 죽을 나이인지는 모르지만---. 사실 남은 날을 계산해보면 살아 온 날보다 훨씬 적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나는 그냥 저냥 세월만 보내고 있다. 이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종을 통해 나를 책망하셨다. “네가 허비한 세월이 너무 많다. 때문에 이제부터는 두 배의 열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 두 배의 열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주님 앞에 섰을 때 최소한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르노라. 불법을 행한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무서운 판결만은 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성경을 통해 천국의 모습을 늘 생각하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그 중에 중요한 기도가 바로 죽음에 관한 기도이다. 예전에 한 장로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고통을 못 이기고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예배드리러 간 목사님께 욕을 하며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고 적잖게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 모습이 되지 않게 기도한다. 죽음을 앞두고 초연하게 내 죽음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주님의 모습을 만나는 기쁨으로 죽음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 나아가서 나의 죽음을 보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꼭 슬픔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죽음을 맞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기도는 죽음이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며칠 전만이라도 알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 며칠 간 죽음을 맞이할 모든 준비를 끝내고 주님께 가고 싶기 때문이다. (3) 가족과의 관계 현재 나는 안구기증을 한 상태이다. 장기 기증이나 신체 기증은 아직 가족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미루고 있다. 아내나 아이들에게 늘 부탁하는 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혹시라도 내가 뇌출혈 등으로 쓰러졌을 때 절대로 병원에 옮기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부모의 경우에서 이미 뇌출혈로 쓰러진 환자의 가족이 겪는 고통을 겪어보았다. 때문에 나는 내 가족이 그런 고통을 겪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의해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다 내려놓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처지가 아니라 깨끗하게 포기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싶다. 또 하나는 화장에 관한 것이다. 매장할 곳도 없지만 매장한 후에 그 묘를 돌볼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딸만 둘을 두고 있다. 그 딸들에게 산소를 생각하며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하고 싶지가 않다. 어차피 땅에 들어가면 썩어 없어질 육체인데 이렇게 없어지나 저렇게 없어지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오히려 자식들에게도 그것이 더 부담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결론 죽음에 대한 계획서라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의 죽음에 무슨 계획이 필요하겠는가 생각해 본다.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 부르시는 날 홀연히 변화하여 주님 앞에 서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자살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세세하게 계획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계획을 세울 수 있겠는가? 그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최선을 다할 뿐이다. 황수관 박사는 99 88 234라고 해서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아프고 죽는 것이 복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이 땅에서 더 이상의 소망이 없을 때 추하게 살게 두지 마시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의 부름을 받고 싶다. 유 서 사랑하는 아내 주희에게 당신과 함께 한지 벌써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소. 그동안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을 뒤돌아보면 걸어 온 걸음마다 다 죄뿐이라고 하는 복음성가 구절이 생각이 나오. 처음 당신과 결혼할 때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같이 있는 것만 좋아서 결혼을 서둘렀을 뿐, 나는 당신에게 너무 무능한 남편이었소.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어 올 재주도 없었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고 그렇게 살았던 그 세월이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후회가 되는지--- 그래도 나름대로 당신 고생 안시키겠다고 애를 써보기도 했지만, 그런 내 바람과는 달리 나는 너무도 무능한 남편이었소. 신학을 하면서도 양식거리조차 못 구해오는 남편 때문에 처형네 집에 가서 한끼 식사를 하고 돌아오던 당신을 생각해 보면 내 마음이 얼마나 비참해지는 지---.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 때문이라고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던 내 모습이 지금도 나는 못나 보이오. 지금도 나는 당신에게 할 말이 없소. 입이 열 개라도 함구해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왜 그렇게 나는 당신에게 성질을 많이 부렸는지 모르겠소. 그 때문에 당신이 많이 힘들어 한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남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당신에게 풀어버릴 수밖에 없었소. 늘 화를 내고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화산처럼 폭발시키는 나를 보며 당신이 얼마나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는지, 때로는 그 것을 알면서도 자제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르오. 이런 남편도 그래도 목사라고 따라주고 인정해 준 당신에게 나는 정말 무엇으로도 감사의 말을 표현할 길이 없다오. 사랑하는 주희 지난 번 당신이 인터넷에서 산 10,000원짜리 옷을 입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불같이 화를 내서 미안하오. 그렇게 화를 내고 나는 방에 틀어박혀 얼마나 울었는 지 모르오. 그렇게 화를 낸 것은 정말 화가 나서가 아니라 당신에게 옷 한 벌 제대로 사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운 생각이 들어서였소. 평생 당신에게 제대로 된 정장 한 번 제대로 사 입혀 보지 못하고 늘 시장바닥에서 파는 싸구려 옷이나 입힌 것이 얼마나 내 마음을 도려내는지 모르오. 남들은 목사가 되면 그럴듯한 임지를 찾아서 잘만 가더구먼 나는 이 시골, 민통선 안에 있는 이 작은 교회로 와서 먹고 싶은 것 한 번 제대로 사 먹지 못하고 겨우 순댓국에 자장면이 전부인 우리 외식시간에도 그래도 맛있게 먹던 당신을 보면서 때로는 순댓국조차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슬픔을 느낀 적도 많았소. 당신을 생각하면 나는 미안하고 안쓰러운 감정밖에 말 할 수가 없소. 고맙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나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고마움을 그냥 말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때로는 그냥 당신을 보고 웃기만 할 때도 많았소. 나와 같이 살아 온 25년 동안, 나는 당신에게 늘 아픔만 주는 남편이었고,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나와 살아 온 당신에게 지금 이 시간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도 많지만 그래도 당신에게 해 온 지난날을 생각하면 입에 발린 소리로 들릴 것 같아서 도저히 입을 열수가 없소. 그저 당신에게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그냥 나 같은 사람하고 살아 줘서 고마워. 고마워 여보.” 그렇소. 그냥 나 같은 사람 믿고 25년이란 인생을 함께 있어줘서 정말 고맙소. 당신을 두고 먼저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연약한 당신, 언제나 물가에 내 놓은 듯, 살얼음판을 걷는 듯이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당신을 두고 먼저 가면, 이제 당신을 누가 돌 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정말 서로 기대며 살아 온 것 같소. 나는 당신에게 내 마음의 상처를 기대고 당신은 나에게 연약한 육체를 기대고--. 그렇게 살아 온 25년인데, 그래서 당신을 먼저 보내고 내가 가고 싶었는데---. 그렇게 당신을 먼저 보내면 나도 곧 뒤따라서 가고 싶었는데---. 생각나오? 예전에 죽을 때 손잡고 한 날 한 시에 죽자고 하던 말, 나는 그렇게 당신과 가고 싶었는데 이렇게 먼저 가야 하다니---. 내 마음이 너무 너무 괴로운 것은 나는 당신에게 정말 좋은 남편이고 싶었지만 뒤 돌아 본 내 모습은 당신에게 좋은 남편이 되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오. 나는 당신에게 불성실했고, 목회한답시고 너무나도 당신을 아프게 한 적이 많았소. 무슨 말을 할까? 내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 내 아내를 지켜 주소서.” 혹시라도 내가 식물인간이라도 되거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절대로 수술을 하거나 병원에 두지 마오. 평생을 당신을 고생만 시켰는데 마지막까지 당신이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것 나는 원치 않소. 그냥 조금 앞서 갔다고 생각하고 남은 인생을 당신 하고 싶은 것 하며 살기를 원하오. 그러나 이렇게 말은 해도 당신에게 아무 것도 남겨 놓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인데--. 어떻게 당신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정 힘들면 재혼을 생각해 보기 바라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한 평생 고생하며 살아 온 그 세월을 보상 받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당신이 남은 삶을 행복하게, 편안하게 살 수만 있다면 조금이나마 내 마음이 위안이 될 것 같소. 내 죽은 시신은 화장하기 바라오. 안구는 기증했으니 병원에 알리고 나머지는 다 화장해 버리기 바라오. 그리고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남겨두지 마시오. 당신은 그냥 나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고 훌훌 털고 일어서길 바라오. 그래도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셨다면 천국에서 기다릴 수 있을게요. 그곳에서도 나는 당신이 행복하길 빌겠소. 그리고 당신의 삶이 마쳐지는 날, 내가 당신을 데리러 올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을 너무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소. 소심하고 표현하지도 못하고 쑥스러워서 사랑의 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내가 당신을 목숨보다도 더 사랑했다는 것을 알아 주오. 만약 당신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데 누군가의 생명으로 되살릴 수만 있다면 그 누군가가 바로 내가 되기를 바라며 살아 왔소. 당신과 함께 있어서 나는 행복했고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기뻤고 당신을 만났기에 나는 늘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소. 주희! 사랑하오. 당신을 정말 사랑하오. 이 세상에 당신을 혼자 두고 가야 한다는 것이 나를 더욱 괴롭게 하지만 그러나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남은 모든 삶 속에 또 다른 은혜와 도우심으로 채우실 줄로 나는 확신하오. 슬퍼하지 마시오. 우리는 어차피 천국에서 다시 만날 테니까--. 그날을 기다리며 우리 조금만 헤어져 있읍시다. 사랑하오. 그동안 표현 못했던 이 말을 이렇게 마지막에나마 마음껏 표현하게 되어서 나는 행복하오. 당신은 폐결핵과 우울증으로 죽어가던 나를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의 천사였소. 당신의 못난 남편 수영.
낙태(주제 과제물)/건양대학교 보건복지대학원 치유선교학과
낙태(주제 과제물) 윤상은 교수 석사 2학기 박지혜 1. 생명의 시작에 관한 학설들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생명은 수정이 된 때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간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즉 인간이 존엄성과 가치를 갖고 보호받을 수 있는 생명의 시작에 관한 학설들은 다음과 같다. 1) 수정 수정과 동시에 유전학적 주체성을 갖게 되면서 생이 시작된다는 학설로 생명 우선론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태아의 뇌 기능이 없거나 분만 후 생존할 가능성이 없어도 태아의 생명이 임신부의 생명이나 자율권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지만 임신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유산은 반대하지 않고 있다. 수정은 약 48시간이 소요된다. 정자가 zona pellucida를 뚫고 들어가면 유전물질이 난자의 유전물질과 즉시 결합되는 것이 아니고 두 개의 세포가 완전히 합쳐지기 전까지는 나란히 놓여 있게 된다. 그 후 새로운 유전물질이 생기고 새로운 DNA가 만들어져 유전학적으로 유일하다고 한다. 여기서 분할이 일어나고 배포(blastocyst)의 세포들은 전지 전능성이 있고 동일한 DNA를 갖고 있으며 여기서 정상 혹은 비정상적인 융모조직으로 분화되어 태반, 포상 기태, 기형종 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수정을 인간 생명의 시작으로 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수정란이 모두 수태되는 것은 아니고 착상되지 않아 임신으로 진행되지 못할 수 있다. 예로 자궁내 장치나 morning after pill, RU~486처럼 착상을 방해하여 피임효과를 얻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에서는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간의 생이 시작한다는 입장이다. 2) 착상 수태된 후 태아가 자궁벽에 착상될 때부터 생명이 시작한다는 설로 인간의 인간 됨은 관계를 맺는 능력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관계가 성립될 때에 인간이 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 후반 미국 산부인과학회에서 임신의 시작은 착상이 된 후부터라고 하였으며 임신의 시작이 인간생명의 시작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피임방법으로 자궁내 장치가 큰 이슈가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3) 태동 태동이 느껴질 때 생명이 시작한다는 견해로 일반적으로 널리 수용되었으나 실제 어머니가 태동을 느끼기 전부터 태아가 움직이는 것을 초음파를 통해서 볼 수 있게되면서 이 주장은 힘을 잃게 되었다. 4) 태아가 모체 밖으로 나와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시기부터 인간으로서의 생이 시작된다는 학설로 언제부터 태아가 모체 밖에서 생존능력이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인위적으로 그 시기를 정하더라도 모든 태아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의 의문이 생긴다. 대부분의 서양에서는 임신 12주를 유산시킬 수 있는 법적인 임신 주 수로 정하는데 이는 12주까지는 통상적인 유산술에 의해서 시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5) 분만 분만 이후부터 인간으로서의 생이 시작된다는 학설로 극단적인 선택 우선론자의 주장이며 법적, 논리적, 과학적 근거는 없다. 2. 수정 후 자궁 내에서 태아에 일어나는 사건들 임신 1개월 : (만 0~3주) 수정란이 자궁벽에 착상한다 세포분열을 거듭하면서 아주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자궁벽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모체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으면서 자랄 준비를 시작한다. 태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임신 3주가 끝날 무렵 태아(胎兒)의 전 단계인 태아(胎芽)가 만들어진다. 크기는 0.5cm정도이고 그 끝에는 꼬리 같은 부분이 있어 알에서 부하된 치어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착상된 수정란은 3개의 세포 그룹으로 나뉘어 뇌와 척수의 기초가 되는 신경계, 혈관계, 순환계의 근원이 되는 조직이 거의 완성되어 피를 보내기 시작하고 3주 말쯤에는 심장 박동이 시작된다. 임신 2개월 : (만 4~7주) 눈, 귀, 입이 생긴다. 태아는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눈부신 성장을 한다. 머리와 몸통의 구별이 생기고 몸통 끝의 꼬리부분도 차츰 짧아지며 팔다리도 형태를 갖춘다. 뇌가 급속도로 발달한다. 뇌가 급속도로 발달함에 따라 눈과 귀 등의 시신경, 청각신경이 발달하고 턱과 입이 나타난다. 손가락, 발가락이 만들어질 모양새를 갖추고 위장, 간장, 신장, 폐 등도 서서히 갖추어져 간다. 태반의 기초가 만들어진다. 수정란의 표면에 돌기처럼 나와 있는 섬모조직이 늘어나면서 자궁내막으로 들어가 태아에게 필요한 영양이나 산소를 갖다 주고 태아로부터 불필요해진 탄산가스와 노폐물을 받아오는 역할을 한다. 이 섬모조직이 발달되어 태반이 만들어지며 탯줄이 될 조직도 생기게 된다. 아직 태반이 완전히 형성된 것이 아니므로 유산에 주의한다. 임신 3개월 : (만 8~11주) 성별(性別)을 알 수 있다 몸의 절반을 차지하던 머리 부분 대신에 하반신이 점점 발달하게 된다. 팔다리도 발달하며 고리 부분이 없어져 몸 전체가 사람다운 특징을 드러낸다. 8~11주 사이에 태아는 3~4배로 급성장을 한다. 발가락도 자라나 11주 무렵에는 거의 형태가 갖춰진다. 외음부도 발육이 진행되어 이 시기 끝무렵이면 외형상 남녀의 성 구별을 할 수 있다. 심장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0주 무렵부터 초음파 도프러법을 사용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양수 속에서 움직인다 초음파 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양수 속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뇌신경계가 아직 완전히 발달되어 있지 않을 때이므로 의식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팔다리의 근육이 수축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임신 4개월 : (만 12~15주) 태반이 완성된다 4개월 말 무렵 태반이 완성되어 수정란이 착상한 곳을 중심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아간다. 태반과 태아를 잇는 탯줄을 통해 모든 영양소를 비롯, 산소가 태아에게 전달된다. 장기의 기능이 좋아진다. 각 장기가 거의 발육되어 사람으로서의 기능이 한층 좋아진다. 심장도 제 기능을 다해 피를 순조롭게 순환시킨다. 외관이 발달한다. 투명했던 피부에 붉은 기운이 돌고 이 물질의 침입을 막도록 두꺼워진다. 눈이나 귀도 형태가 확실해지고 얼굴과 온몸에 가는 솜털이 돋아난다. 손가락, 발가락도 정확히 나눠지며 남녀 성별을 확실히 구별할만큼 외부 생식기도 성장한다. 임신 5개월 : (만 16~19주) 양수 속을 힘차게 돌아다닌다. 손발과 전신 운동이 활발해진다. 손발을 구부렸다 폈다하면서 양수 속에서 힘차게 돌아다닌다. 출산경험이 있거나 예민한 사람은 좀더 빨리 뱃속에서 태아가 움직이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임신 6개월 : (만 20~23주) 태지의 분비가 이루어진다 피하의 각 선에서 치즈 같은 물질을 생산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태지이다. 태지는 양수 속에 잠겨있는 태아의 피부 손상을 막고 분만 때에는 아기가 순조롭게 나오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태아의 심음을 들을 수 있다. 양수의 양이 늘어나 태아의 운동이 더욱 활발해져 태동이 더욱 확실해진다. 각 기관의 작용도 활발해져 양수를 삼키기도 하고 신장에서는 묽은 소변을 배설하기도 한다. 이 시기부터 청진기로 태아의 심음을 들을 수 있고, 재치기와 딸꾹질도 할 수 있다. 임신 7개월 : (만 24~27주) 뇌의 사고력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뇌가 더욱 커지고 복잡해지며 사고력도 발달하기 시작해 각 기능을 조절하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폐의 호흡기능이나 근육 발달은 아직 미숙한 편. 이 시기에 조산할 경우 정상적으로 살리기가 힘들다. 머리를 아래로 향하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주름투성이의 얼굴에 안구 운동도 한다. 피부핵이 불그스레해지고 주름이 많아 노인과 같은 모습이다. 피부의 지방 분비가 많아져 피부에 지방이 축적된다. 눈꺼풀의 경계선이 확실해지며 안구운동도 가능해진다. 임신 8개월 : (만 28~31주) 머리를 아래로 내리는 자세가 된다. 태아는 자궁 속을 꽉 채울 정도로 자라게 되며 자궁 속에서 위치와 자세도 일정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대부분의 태아가 머리를 아래로 하고 엉덩이와 발을 위로 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태아가 아직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더라도 두달 정도의 여유가 있으므로 태아가 제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자세를 교정하면 된다. 청각이 완성된다. 근육치 발달해 몸 전체가 단단해지고 피하지방이 붙기 시작한다. 청각이 거의 완성되어 엄마가 하는 얘기나 외부 소리에 반응을 보이며 몸을 움직이기도 한다. 이전만큼 양수의 양도 늘어나지 않아 태아의 몸이 자궁벽에 부딪히는 등의 태동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시기에 조산할 경우 인큐베이터에서 기르는 일이 가능하지만 피하지방이 부족하고 생명력이 매우 약하므로 위험할 수 있다 임신 9개월 : (만 32~35주) 신생아다운 모습을 갖춘다. 머리와 몸의 비율이 균형 잡히게 되고 피하지방이 늘어 주름이 없어지며 몸매가 둥그스름해지는 등 신생아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폐, 신장 기능이 성숙된다. 폐와 신장 기능이 많이 성숙되어 호흡을 하거나 젖을 빠는 동작도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 이 시기에는 조산이 되더라도 인큐베이터 안에서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게 된다. 성기도 거의 완성되어 남자아이는 고환이 음낭 속으로 내려오고 여자아이는 대음순이 부풀어 좌우가 밀착된다. 손톱, 발톱도 끝까지 자란다. 임신 10개월 : (만 36~39주) 몸의 균형이 잡히고 4등신이 된다. 팔다리에 근육이 붙고 태아의 몸에 나 있는 솜털이 없어진다. 하지만 등과 어깨에는 솜털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약간의 태지는 출산 때까지 남아 등 , 서혜부(샅), 겨드랑이 등에서 볼 수 있다. 몸 전체가 균형이 잡혀4등신이 된다. 머리 부분이 골반 안으로 들어간다. 머리뼈도 굳어져 머리속을 보호하게 되고 대부분의 태아가 머리를 아래로 향한 자세로 위치가 고정되어 골반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머리카락은 까맣고 2~3cm길이로 자란다. 병에 대한 면역력을 갖게 된다. 병에 대한 면역이 태반을 통해 모체로부터 전달된다. 모체로부터 항체를 받아 홍역이나 유행성 이하 선염, 백일해, 풍진 등에 대한 면역성을 일시적으로 받게 된다. 이 시기에는 뇌나 내장의 기능이 한층 충실해지고 근육도 발달해 감염에 대한 저항력도 길러진다. -수정란은 잠재적인 인간인가? 잠재적인 인간이 아니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인간이다.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기 전에는 잠재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일단 결합하고 나면 그것을 실제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자나 난자는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살아 갈 수 있는 생명체는 아니다. 정자는 유전학적으로 아버지의 세포와 동일하고 난자는 어머니의 세포와 동일하다. 그러나 이들이 수정이 되면 새로운 생명체가 생겨나고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다. 이는 질서 있는 과정을 거쳐서 성장하고 성숙하게 된다. 3. 신학적 생명의 개념 1) 개별적 인간의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사람들은 개별적 인간의 생명의 시작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하여 왔다. 여기서 나는 개별적 인간의 생명이 그가 수태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논의를 하고자 한다. (1) 이에 대해 가장 결정적인 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로부터의 논의라고 생각된다. 영원 전부터 신성을 가지고 계신 성자께서 정확히 언제부터 인성을 취하신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성경과 신학의 일치하는 대답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수태되는 때부터 성자께서 인성을 취하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 그것은 그저 일상적인 언어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장차 마리아의 몸에서 나실 이가 분명한 인성을 취하셨으니, 그저 마리아가 수태한 아기가 인성을 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성령으로 말미암은 수태\\\"라는 사실은 이런 대답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판단된다. 성자께서 마리아에게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온전한 인성을 가진 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수태된 지 14일 후, 3개월(12주) 후에야 인간적 생명을 가지신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기괴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경우에 그러하셨다면 다른 사람의 경우도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2) 이런 기독론적 논의를 보충하는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모태로부터 지으셨다고 말하는 성경 구절들에 근거한 논의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다음 같은 시편 기자와 욥의 말을 들어 보라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 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을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해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3~16)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 주께서 내 몸을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욥 10:8~12)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배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욥 31:15) 이 구절들에서는 인간의 성행위와 그로 말미암는 수태를 암시하면서 그 수태된 것이 주께서 지으시는 것이며, 생명과 은혜를 주신 것이라고 하고 있다. 모태 속에서 자라나는 태아들의 성장을 하나님이 그 아이를 지으시는 것이라고 보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를 그저 모든 생명의 과정에 하나님이 관여하심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계시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정되는 과정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위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의 관점에서는 이 수태도 명백히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한 측면인 것이다. (3) 더구나 이 구절들에서는 다른 많은 성경 말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렘 1:5, 엡 1:3ff.) 우리는 이렇게 지음 받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태되어 생물학적 생명을 부여받기 전부터도 이미 하나님의 관념 가운데서는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아시는 것과 시간과 역사 가운데 있는 것을 아시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신다고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부터 작정하시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수태시키시는 그 과정에 생명의 시작이 있다고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4) 이런 논의에서 흔히 임신한 태아의 생명적 가치를 다른 사람의 생명의 가치보다 낮추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오해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다. 그것은 출애굽기 21:22~25이다. 더구나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이런 해석에 가깝게 번역되어 있어서 우리의 오해를 증진시키기 쉽다.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흔히 이런 번역과 해석을 이 구절에 대한 \\\'낙태 해석\\\'(miscarriage interpretation)이라고 부른다. 이에 따른 우리말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겨져 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을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 갚을지니라\\\"(출 21:22~25). 그러나 사실은 이를 이와 같이 낙태를 함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이는 태아의 생명을 낮추어 보는 구절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여기서는 낙태를 고의적이지 않은 우발적인 죽음으로 다루어 그런 우발적인 경우의 살인에 대한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 이를 논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출 21:13~14, 20~21; 민 35: 10~34; 신 19:1~13). 그러므로 이 경우에 벌금을 물게 한 것이 태아의 생명을 덜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이 구절, 특히 22절은 사실 낙태가 유발된 것으로 해석되기보다는 살아 있는 아이를 조산케 한 경우로 해석해야 한다는 강한 논의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관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수태되는 그 순간에 인간적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어야만 한다. 이는 성별이 결정되는 수태 후 5~9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태아(embryo)가 생성해 내는 호르몬 작용으로 산모의 정상적 월경이 중지되는 14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심장이 형성되고 눈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18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24일째나, 혈관에서 피가 흐르고 산모의 피의 공급으로부터 분리되는 30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뇌파가 관찰될 때인 43일째로 보는 입장이나, 산모가 태동을 느끼기 시작하는 4~5 개월 째로 보는 입장들 이는 일반적으로 보고된 것들이나 나는 이 정보를 Feinberg and Feinberg, pp. 53~55으로부터 얻어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보다 좀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은 시작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적 존재가 수태되는 순간부터 존재한 것이다.\\\"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 Issues Facing the Church Today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85), p. 137. 2) 이러한 신학적 입장의 함의 인간의 생명이 수태되는 그 순간부터라고 하면 그것은 어떤 함의를 가지는 것인가? 그것의 함의는 한마디로 \\\"생명을 옹호하는 입장\\\"(pro~life posi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최대한으로 말한다면 수정(fertilization)된 모든 수정란(zygote)은 다 생명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고, 최소한으로 양보하여 말한다고 하면 수정되어 어머니 태에 착상된[nidation,수태된?] 수정란은 다 생명으로 여겨져야만 한다는 함의를 지닌다. 수태된 수정란은 이미 생명이 부여 된 것이므로 그 태아도 다른 인간과 동등하게, 아니 더 약한 존재이므로 더 신경을 써서 가장 세심한 배려와 보호 가운데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1) 그 태아가 계속 있다가는 어머니의 생명과 함께 죽을 수밖에 있는 상황과 이와 비슷하게 태아와 산모의 생명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극단적인 경우에는 인공 유산을 허용할 수 있지만, 그 외의 경우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 개개인의 생명이 시작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의 심각한 고찰과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만 너무 빠지는 것은 온전한 기독교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으로는 우리에게는 생물학적인 생명 외에 더 중요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 생명을 돌보고 치료하며, 마치 주님을 섬기듯이 우리와 다른 이들의 생명을 돌아보고 증진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생명이 전체인 것처럼 해서는 안되고, 우리는 더 고귀하고 높은 생명인,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에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고, 그것을 제시하며, 그것을 희망하도록 하고, 그것을 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의료인들도 긍극적으로는 이 영생의 생명을 위해 의료 행위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진정한 생명이 그 영생에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결국 이런 온전한 생명을 진정한 생명으로 여기는 의식과 풍토를 만들어 내는 작업의 일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하면 그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생명\\\"만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더 포괄적이고 풍성한 생명을 생각하며, 언어의 사용도 그에 부합하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4. 낙태와 생명윤리 1) 낙태의 역사적 배경 서구의 기준으로 볼 때 역사적으로 두 번(첫 번째는 그리스 로마시대와 초기 기독교 시대이고, 두 번째는 19세기 중반의 미국 사회에서)에 걸친 낙태 찬반 전쟁이 있었고(낙태는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논쟁이 아니라 사악한 인본주의적 유물론과의 전쟁이다), 지금 세 번째 전쟁이 진행중이다.) Tim Stafford, The Abrotion Wars, What most Christians don\\\'t know, Oct. 6, 1989, Christianity Today, pp. 16~17 흔히 낙태가 현대에 와서 시행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는 낙태와 유아살해를 상당히 허용하였다. 플라톤(Platon)은 [공화국(Republic)]에서 어머니가 40세 이상이면 낙태, 영아살해(infanticide)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가족수가 일정한 수를 초과하면 낙태를 의무적인 것으로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아를 \\\'formed fetus\\\'와 \\\'unformed fetus\\\'로 구별해 남아의 경우 임신 40일 후로 여아의 경우 90일 이후로 생명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는 도덕적이 아닌 형이상학적 구별로 \\\'formed, unformed fetus\\\' 모두를 낙태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나중에 일부 기독교인들(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구별을 채택했으며 이것이 현재 임신을 임의로 3기로 구분하는 기초가 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아가 출생 이전에도 생명이 있다고 믿었으나 사회와 가족의 복지가 태아의 생명권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로마는 생명은 출생 시부터 시작한다는 스토아 학파의 견해를 따랐다. \\\"로마는 가족 우선 주의였지만 근본적으로 반낙태 입장은 아니었다. 로마법상 태아는 인간(person)이 아니며, 출생한 아이들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나 가족, 심지어 로마제국에 유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평가되었다.\\\") Michael J. Gorman, Abortion and the Early church, p.32, IVP, 1982반면 기독교도들은 태아를 어머니의 신체의 일부가 아닌 독립적인 존재로 보아 클레멘트, 터툴리안, 제롬, 바질, 암브로스 등은 낙태를 분명하게 반대했다. 이런 상반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신앙으로 로마제국을 정복하였고 오늘날 서구 사회에 낙태 반대 전통을 이어오게 하였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합법화한 지 얼마 안되어 로마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죽이는 것이 불법화되었으며, 로마의 낙태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으나 교회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짐에 따라 낙태를 살인으로 여기는 것이 사회 전체적인 법이 되었다.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깔뱅, 바르트, 본회퍼에 이르는 신학자들은 낙태를 분명하게 정죄하였다. 유대 기독교의 가르침이 완벽하게 적용되진 않았지만 그 가르침은 개념과 실천에 있어 인간의 생명에 대한 수준 높은 견해를 갖도록 하는 하나의 토대를 놓아주었다고 볼 수 있다. 2) 낙태와 관련된 기본적인 질문들 인간의 존엄성(태아의 존엄성)의 기초(문제) 우리 사회에서 편만하게 이루어지는 낙태에 대해 문제제기조차 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오히려 사람들은(의사들을 포함하여) 임신한 여자의 장래,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 낙태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이유로 상당히 허용적인데 그런 사고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프란시스 쉐퍼는 이것을 \\\'유물론적 휴머니즘\\\'이 가능하게 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F. A. Schaeffer, C. Everett Koop, M.D.; 인간 그 존엄한 생명, p.29, 라브리 출판사 창조주 없이 인간에서 시작하여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는 인본주의는 그 철학이 유물론적이다. 하나님 없는 인본주의는 생명윤리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로 인한 상대적 지식, 상대적 도덕의 문제로 인해 우리 자녀들을 사형시킬 수밖에 없다는 해결책밖에 제시하지 못한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존엄성과 신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결함이 있고 판단능력이 없다하더라도 인간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삼상 2:6) 아무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할 수 없으며(출 20:13)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생명 또한 마찬가지로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이 언제 시작하는가? 맹용길, 생명의료 윤리 p.55에서 재인용, 장로회 신학대학 출판부. 1) 유전인자 접근학파(the genetic School): 이 학파는 인간을 유전적 암호(genetic code)와 동일시한다.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 생기는 염색체의 유전자 암호에 의해 머리나 눈의 색깔, 내분비까지 모든 것이 결정되며 태아의 유전자 암호가 어머니의 유전자 암호와 다르기 때문에 그 태아를 하나의 인격적 존재(person)로 주장하며, 램지(Paul Ramsey)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2) 발달 중심학파(the development School): 유전인자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태아가 인격체라고 말하려면 좀 더 생리학적인 기능을 보여야 한다든지 아니면 뇌파(뇌사를 죽음의 정의로 인정할 경우)를 보이는 시기부터 인간으로 인정하는 입장이다. 발달이 어느 정도까지 된 상태이어야 또 어느 점에서부터 태아를 인격체로 인정할 수 있는지 이들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3)사회적 결과를 중요시하는 학파(the Social consequences School): 인간의 본질(human) 자체보다는 사고, 행동, 감정 등과 같은 기능들과 연관된 사회적이고 인격적인 요인들을 중심으로 접근하거나, 사회가 인격체로서의 사람(person)을 정의하도록 결정한다고 접근하는 입장으로 태아는 사고할 수 없고 다른 사람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자아 개념이 없으므로 인격을 가진 사람(person)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적 입장 1) 생명의 기원은 하나님이며 인간은 그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 27). 2) 인간 생명은 수태된 때로부터 시작한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나이다\\\'(시 139:16).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였나이다\\\'(시 139:13).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욥 10:8∼12). 태아의 권리 문제 태아의 인권문제는 법률적, 기독교 윤리학적으로 중요하다. 인간이 가지는 존엄성으로 모든 인간은 계획적인 공격이나 부주의한 공격으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어야 한다. 1) 태아의 인권과 어머니의 권리가 부딪칠 때 그 권리는 동등한가? 인공유산이 최후적 수단으로 허용되어 어머니와 태아 중 한쪽을 선택 해야 할 경우 생명의 질에서는 원칙적으로 차이가 없으나 태아의 권리가 어머니의 권리보다 못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며, 이는 조셉 플레처의 상황 윤리적 영향을 받은 인본주의적인 조망이라기보다 는 비례적 원칙에 의해 보다 완전한 것을 선택하려는 인간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2) 태아는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기 권리를 내세울 수 없다는 문제 ·1948. 12. 10 국제 연합이 채택한 \\\"인권의 보편적 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인권은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권리로 도덕성과 보편성을 띠며 인간가족의 모든 구성원은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이는 인간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있어야 할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가 된다\\\' 고 선포하였다. ·성경적 인권사상 : 첫째, 인권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자연을 관리하게 하신 데서 볼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공동체의 평화와 전체성을 보존하는 사랑을 요구한다. 셋째, 예언자들의 생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인권이 유린되고 말살되려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깨우치고 세우려는 생활을 보임으로써 인권을 되살리려 했다. 5. 낙태를 고려하게 되는 상황- 상황낙태 상황낙태가 실제로 전체 낙태사유 중 차지하는 빈도는 많지 않다. 그러나 낙태 찬성론자는 상황낙태로부터 출발하여 전체 낙태를 허용하려는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 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원칙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1. 산모 구명 낙태 임신이 계속될 때 어머니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 낙태가 허용될 수 있는지의 문제로 필자는 레지던트시절 단 한 건의 산모구명낙태 (Nephrectomy 받은 환자가 임신하여 임신성 고혈압에 빠진 경우)를 보았을 뿐이다. 또 임신부가 자궁암에 걸린 경우 등도 고려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며 태아가 생존가능성(viability)을 갖는 시기 이후에는 태아의 생명도 구하기 위해 의사가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연후에도 임신의 유지가 태아나 산모의 생명 모두를 위협하는 상황이라면 낙태의 차원이 아니라 한쪽 생명이라도 구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2. 강간, 근친상간에 의한 경우 이미 강간으로 인해 심한 육체적, 정신적 충격을 당한 후의 임신은 희생자를 또 한번 충격으로 몰아 넣는다. 그러나 임신이 강제적으로 범죄자에 의해 사악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된 경우지만 그와는 별도로(어른들의 일과 아무 관계없이) 이 태아도 마땅히 보호받고 사랑 받아야 될 존재이다. 이 경우 임산부의 건강 뿐 아니라 임신부의 체면, 장래문제, 대외적 관계 등의 상대가치를 위해 낙태를 허용한다면 이런 가치판단은 단순히 이 태아의 죽음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생명경시 풍조를 조장시키고 인간의 생명의 시작을 다른 동물의 시작쯤으로 보거나 아니면 물질(임신산물)로만 보는 시각으로 자연스럽게 고정되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도 낙태를 통한 사회문제의 해결사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임산부의 문제를 함께 나누어지고 생명을 살리는 측면에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임을 깨달아야겠다. 3. 장애아 출산이 예상되는 경우 요즈음 산부인과 학회에서는 기형아를 출산 전에 미리 알아내기 위한 많은 검사법들이 소개되고 있으나 불행히도 태아의 치료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임신중절(Termination)로서 끝나게 된다. 생명에 지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장애의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오면 산모나 의사는 할 수 있으면 임신 중절시키는 것이 우리 나라의 실정이다. 평생불구로 사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기와 부모, 사회를 위해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허용의 범위를 넓혀주다 보면 어느 정도를 장애로 판정할 것인지, 또 장애를 가진 사람의 존재가치에 대한 근거가 없어지는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고 육체적 뿐 아니라 정신적 장애자에 대한 치료의 근거도 잃게 될 것이다. \\\'발전이 선(善)\\\'이라는 진화론적 논리와 실용주의적 관점으로는 가능한 생각이나 생명가치를 상대화 하지 않는 절대 윤리의 관점에서는 이런 장애자와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숙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장애아 일지라도 생명은 존중받고 보호받으며 사랑 받을만한 충분한 절대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사례1 35세 노령의 초산부 출산과정에서 태아의 머리가 산모의 골반에 진입한 후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음. 산모의 더 이상 분만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쳤으며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 태아의 예후도 불완전하지만 아직은 살아 있음. 그러나 이대로 진행이 멈추게 되면 죽게 될것임. - 사례2 14세 소녀가 강간을 당했다. 임신 반응 검사 결과 임신을 확인하게 되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평소 소녀를 진찰해 오던 주치의를 찾아 왔다. “애를 떼야지요” Scenario 1 소녀는 정신지체로 IQ가 40에 불과하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상황이다. 소녀는 정신 지체는 유전적인 소인이 있으며 태아의 생부도 찾을 수 없는 상태이다. Scenario 2 소녀는 연령이 낮은 것 외에는 특별한 위험요소가 없다. 소녀는 임신시킨 강간범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의 양육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 낙태수술의 부작용과 후유증 자궁 경부 무력증 임신시 자궁경부는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굳게 닫혀 있다. 낙태수술로 이것을 무리하게 개대할 경우, 중간적 자궁 경부 열상 · 출혈이 오고 자궁경부가 무력하여져서 차기 임신시 유산 · 조산을 유발할 확률이 높다. 2. 자궁천공 낙태시술시 자궁의 크기가 경관의 방향을 알려주는 쇠막대기 같은 자궁 소식자를 이용한다. 이 때 소식자가 너무 깊게 삽입하거나, 자궁개대기로 자궁을 개대하여 큐렛(curet)으로 태아의 산물을 긁어 낼 때, 자궁이 뚫어질 우려가 있다. 3. 골반 염증성 질환 낙태로 자궁 나팔관에 염증이 생긴다. 이것은 난관을 막아 불임 혹은 자궁외 임신을 초래한다. 낙태를 한 여성 중 10.9%가 골반 염증성 질환이 있고, 골반 염증성 질환이 있는 경우 다시 재발한 경우가 25%이다. 불완전한 유산이 행해질 경우 태아의 일부분이 자궁 내에 남아 부패하여 산모에게 패혈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4. 다음 임신에 악영향 낙태시술 후 다시 임신이 되면 우선 자궁내막 손상으로 인한 전반적인 자궁 기능 저하유산, 조산, 저체중아 분만의 가능성이 높다. 자궁경부 손상은 중반기 유산의 경우엔 50%정도 온다고 보며 중반기 유산의 경우는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다. 5. 자궁외 임신 낙태 때문에 자궁외 임신이 잘되는데, 그 이유는 수정란이 손상되거나 감염된 자궁내벽에 착상하지 못하고 자궁이외의 곳에 착상을 하기 때문이다. 자궁외 임신은 임신을 지속시키지 못할 뿐더러 산모에게 큰 위험을 초래한다. 6. 약물주입 부작용 약물주입(특히 프로스타그란딘)으로 인한 낙태시에 정맥염, 정맥내혈전, 색전증, 설사, 구토 및 호흡 곤란 등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약물과 수술로 인한 손상뿐만 아니라 마취 사고가 있을 수도 있다. 7. 정서적인 후유증 낙태 후 일부 여성은 일종의 상실감을 느끼며 슬픔, 공허감, 가장된 행복감, 지나치게 바쁜 체 가장함, 성적 장애 혹은 관계 장애, 분노감 등의 정서 장애를 겪는다. 다음 임신에 대한 두려움 및 가족 관계에 문제를 일으킨다. 6. 우리 나라 낙태관계법 1. 현행 형법 1) 보호 법익과 보호의 정도 태아의 생명, 신체의 안전을 일차적 보호 법익으로 하고, 임부의 생명, 신체의 안전도 부차적인 보호 법익으로 함이 타당하다. 낙태죄는 태아를 자연의 분만기에 앞서서 인위적으로 모체 밖으로 배출하여 태아 및 모체의 생명, 신체를 위험에 빠지게 함으로써 성립하는 위험법이다. 2) 형법규정 형법상 낙태죄는 자기 낙태죄(제 269조 제 1항), 동의 낙태죄(제 269조 제 2항), 업무상 동의 낙태죄(제 270조 제 1항), 부동의 낙태죄(제 270조 제 2항) 등 4개의 구성요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 269조(낙태) ①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 의 징역 또는 1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자도 전항의 형과 같다. ③ 전항의 죄를 범하여 부녀를 사상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 270조(의사 등의 낙태, 부동의 낙태) ① 의사, 한의사, 조산원,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②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 없이 낙태하게 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③ 전 2항의 죄를 범하여 부녀를 치상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치사한 때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⑤ 전 4항의 경우에는 7년 이하의 자격 정지를 병과한다. 2. 대법원 판례 \\\'인간의 생명은 잉태된 때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회임된 태아는, 새로운 존재와 인격의 근원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므로 그 자신이 이를 인식하고 있든지 또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지에 관계없이 침해되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함이 헌법 아래에서 국민이 지니는 건전한 도의적 감정과 합치되는 바이다\\\'라고 천명한 대법원의 판례) 대법원 판례집 33권 2집. 는 지극히 옳다고 생각되며 법이 앞장서서 태어날 아기들을 보호해야 한다. 3. 현행 모자보건법 동법 제14조 ①(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1.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이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히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동법 시행령 제 15조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법 제 14조의 규정에 의한 인공임신중절은 임신한 날로부터 28주일 이내에 있는 자에 한하여 할 수 있다. ③ 법 제 14조 제 1항 제 2호의 규정에 의하여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는 전염성질환은 태아에 미치는 위험이 높은 풍진, 수두, 간염, 후천성면역결핍증 및 전염병예방법 제 2조 제 1항의 전염병을 말한다. 현행 모자보건법의 문제점 1) 현재 행해지고 있는 낙태수술의 거의 대부분이 모자 보건법상 허용 사유 외의 것들로서 모자보건법 본래 목적(모성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건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도모함으로써 국민보건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과 달리 낙태를 실질적으로 허용하고 있는데 이용되고 있으며 정부의 인구정책이나 경제정책을 뒷받침하는데 이용됨으로써 헌법에서 천명한 인간의 존엄성) 낙태의 실태 및 의식에 관한 연구, pp.181~186, 1991,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과 가치를 존중한다는 법의 취지에 역행하고 있다. 2) 허용기간은 허용사유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임신된 날로부터 28주일 이내에 낙태를 가능하게 하였는데 태아의 생존가능성을 볼 때 임신 23주에서 28주 사이의 낙태허용은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 대한 살해행위이다. 3) 허용사유 중 전염성 질환) 산과학, 대한 산부인과학회, 1991. ) Cunningham, MacDonald, Gant, Williams Obsterics, 8th ed. Applet!on & Lange. 과 관련하여, 간염이나 결핵, 성병의 경우 태아에 미치는 영향이 적으며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통해 태아에 미치는 영향을 현저하게 줄일 수 있다. 전염성 질환과 관련하여 낙태를 허용하는 문제는 관계의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재조정하여야 한다 (간염의 경우, 우리국민의 약 10% 내외가 보균자 상태로 분만 후 신생아에 면역항청, 예방 접종시 아기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미미하게 되며 간염환자가 임신으로 인하여 병이 악화된다고 볼 수는 없으며 치료적 유산이 권유되지도 않는다). 7. 대안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낙태 실태 고려대 홍성봉 교수의 보고에 의하면 1년 150만건 이상으로, 태어나는 아기의 2배 가까운 수가 낙태되고 있으며 1990년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총 낙태 중 미혼여자가 32%, 기혼여자가 68% 비율로 조사되었다. 1. 낙태문제는 각자의 세계관에 따라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낙태문제를 보는 자기의 관점을 생각해보고 그것이 성경적인지 인본주의적 조망은 아닌지 다시 검토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필요할 경우 큰 희생과 값을 치루고서라도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음으로써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되는 절대가치, 즉 생명을 가장 존귀히 여기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견지하여야 한다. 2. 태아가 생명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의 탄생\\\'과 같은 비디오 테잎을 배포하며 교회의 소그룹, 사회단체에 생명의 시작과 신비에 대해 교육하며 TV를 통해 방영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실제적 으로 어떤 논증보다 효과적으로 이념이나 종교를 초월하여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다. 3. 산부인과, 소아과 학회지에 발표된 낙태나 영아 살해에 관련된 내 용을 파악하고 만약 비윤리적이라 판단되면 발표자에게 의견을 제시하며 대책을 논의한다. 4. 갈등상황에서 낙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임산부를 위해 교회나 공동체, 개인적으로 재정적 뒷받침이나 아이의 양육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각 교회에서 탁아소 운영이나 각 가정에서 일주일에 몇 시간씩 아기 돌보는 일을 맡는 등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5. 장애아를 가진 가정의 생업에 지장을 덜어주기 위해 장애아의 양육, 교육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예 : 진안 이랑공동체 ― 농번기에 무주, 진안, 장수 지역의 장애아를 맡아 돌보고 교육하기 위해 시설 준비중 임. 이런 일에 기도와 재정, 자원봉사로 돕는다.) 6.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그 파급 효과가 큰 방법은 낙태수술을 하는 동료의사들을 설득하고 권유하는 일이다. 정죄하는 입장이 나 논쟁하려 는 태도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태아가 생명임을 이해시키고 스스로 느끼도록 한다. 7. 청소년을 위한 비디오 등의 교육자료를 제작한다. 성교육뿐 아니라 책임의식을 갖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교육용 비디오를 제작, 배포한다. 8. TV토론이 광장, 세미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생명 옹호입장을 밝힌다. 그렇지 않으면 시청자는 문제의 한쪽 입장만 전달받게 되어 낙태를 필요악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않게 된다. 9. 기독교의 생명옹호(반낙태) 세력화, 법개정문제 등 정치적인 쟁점시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내고 관심을 가진다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면, 많은 아기들이 생일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내면의 상처치료(1)
내면의 상처치료(1) 사단이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생각하며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낮은 자존감이다. 낮은 자존감은 열등감, 자신을 부족하게 느끼는 것, 자신의 가치를 무시하는 감정들이다. 자신을 스스로 무시하며 비하하며 학대하며 스스로 고통을 받는 감정들이다. 개인적으로 놀라운 영적 경험과 믿음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정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면 낮은 자존감은 어떤 파괴력을 갖고 있는가? ① 낮은 자존감은 잠재력을 마비시킨다. ② 낮은 자존감은 비전, 꿈을 파괴한다. ③ 낮은 자존감은 대인관계를 해를 끼친다 ④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방해한다. 각자의 자존감을 형성시켜 주는 것은 외부의 세계와 내부의 세계로부터 온다. 외부에서 우리를 평가해 주는 것이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준다. 가족들에게 반사된 자기 모습과 평가가 내가 누군가라는 자존감을 형성한다. 그래서 부모의 태도가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어렸을 때 자녀들을 귀하게 키우지 않는 자녀들은 평생을 낮은 자존감으로 고생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주 중요한 타자(very significant others)이다. 세상에 자녀들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나서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때 자녀들은 당연히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된다. “사랑받고 있다.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것들이 말없이도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부모가 언어로 폭력을 행사하고 저주와 욕으로 비하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낮은 자화상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 누가 자신을 사랑해주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부모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누가 나를 사랑하겠어..어떻게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겠어?” 하면서 사랑을 주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한다. 또한 자기를 비하하기 때문에 결혼을 할 때에도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해서 아주 형편없는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결혼도 한다. 자신도 가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고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편하게 생각한다. 또한 우리의 자존감은 잘못된 자신의 내부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아담의 자손으로서 유전된 죄의 뿌리가 우리들 자신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낮은 자존감은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는가? 낮은 자존감은 개인의 가치와 평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때만이 회복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이렇게 질문해보아야 한다. 무슨 권한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깊이 사랑하는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높이 대우해주신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높이 가치를 부여한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완전하게 필요를 채워주시는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심하게 계획하신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존재를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값진 존재를 멸시하고 비하하는가? 무슨 권한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훌륭한 예술품으로 만든 자신을 비하하고 멸시하는가? 우리 자신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없다. 만일 계속 자신을 비하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솜씨에 대하여 비하하고 무시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길을 배워야 한다. 자신에 대하여 소중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 창조적인 예술품으로 대하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남을 귀하게 여기고 남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길도 배워야 한다. 낮은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칫 겸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것은 겸손과 다르다. 진정으로 겸손한 자들은 자기에 대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점수를 주며 사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의 외모는? 나의 학벌은? 다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근거해서 점수를 준다. 하지만 낮은 자화상을 치유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점수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잘 하느냐? 외모가 어떠하냐? 우리가 얼마나 가졌느냐? 에 따라 평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점수를 주는 것은 자녀에 대한 존재에 대한 점수이다.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존재에 근거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생명에 근거한 것이다. 생명에는 값이 다를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을 평가하는 것도 이렇게 하나님이 존재와 생명에 대하여 주시는 점수로 평가해야 한다. 그럴 때 나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귀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 자신을 볼 때만이 낮은 자화상은 치유된다. 또한 자신에 대하여 낮은 자화상을 갖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풀어놓아주어야 한다. 또한 낮은 자화상을 갖게 한 환경들도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감사함으로 수용하고 받아드려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로 다시 서는 것이 인생을 파괴하지 않고 값지게 살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제1강 내면의 상처와 치유 1. 내면이 중요합니다. 1) 사람의 삶의 질은 외적 환경보다는 내면에 의해 결정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 사람들은 외적인 환경을 만들면 삶이 행복해 지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작 그들의 삶의 질은 외적인 부분보다는 내적인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2) 내적인 건강이 진정한 건강이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 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 시며”(엡 3:14-16). - 사람들은 외적 건강과 안녕에는 몹시 예민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 만 정작 내면적 건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건강은 내면적 건강이 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에 관심이 많으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신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 라”(빌 4:7). “주께서 네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 라”(살후 3:5).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의 모든 것을 다 바꾸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지만, 자녀 인 우리의 삶을 인도하기 위하여 환경이나 외적인 요인보다는 마음을 인도하시고, 생각을 지키시는데 중점을 두신다. 4) 예수님의 사역의 중점은 마음을 고치는데 있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 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은 ‘Preaching, Teaching, Healing’ 이 세 가지의 사역인데, 이 사역의 핵심은 물론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영적으로는 ‘대속’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 구원은 ‘마음을 고치는 것’, 즉 ‘마음에 있는 상처를 고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2. 상처란 무엇인가 ? 1) 상처란 상처 난 감정이다. - 감정에 상처를 받고 그것이 적절하게 해소가 되지 못했을 때 나는 이것을 덮기 위한 방 어기재를 갖게 되고 그것이 나의 감정을 왜곡시키고 뒤틀리게 하며, 원치 않는 증상들이 나 오며, 나의 전 존재를 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2) 상처란 내면의 평강을 빼앗는 것이다. - 상처는 감정에 받는 것이기에 상처받은 사람의 경우 내면에 평강이 없다. 혹시 감정적으 로 무감각해져서 느낌이 없는 쪽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할 수 있는 데, 이것은 평강이라고 말 할 수 없다. 3) 상처는 관계의 장애를 가져온다. -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있는 가장 심각한 현실적 문제는 관계의 장애이다. 상처가 있는 사 람에게 두드러진 특징은 ‘이기적’인 것과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① 하나님과의 관계 장애 : 영적이지 못하거나 건강하지 못한 신앙 ② 자신의 내면과의 관계 장애 : 자학, 자고 등등의 잘못된 자아 인식 ③ 다른 사람과의 관계 장애 :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회피하는 것. 건강하지 못한 관계 ④ 자연과의 관계 장애 : 일이나 건강에 문제가 있음. 4) 상처를 가지고 계속 살게 되면 결국은 ‘생명력(Vitality)’을 잃게 된다. - ‘생명력’은 우리의 삶의 질을 재는 척도인데, 상처는 바로 이 생명력을 감소시킨다. <생명력 = 건강한 삶의 의욕 = 적절한 자존감 = 감동 있는 평강(행복감) = 영적 능력> 3. 상처의 원인들 1) 근원적 원인 : 원죄 모든 인간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잠재적으로). -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 모든 상처를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 그러나 주변 환경의 영향이나 문제로 이 상처가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 치유 방법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거듭남) 2) 간접적인 원인 - 자연적인 주변 환경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세상에 가난과 질병, 그리고 각종 고통이 들어 왔다. 환경적 고통은 그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특히 어린 시절에 더욱 치명적이다. * 치유 방법 : 그 열악한 환경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이 아님을 성령 안에서 깨닫 고, 이 고통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음을 체험하여 아는 것. - 가계에 흐르는 저주(조상의 유전) : 조부나 그 이상의 선대에서 영적이나 반인륜적인 죄를 범한 경우 그것이 그 후손에게 저주 가 되어 내려간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태어난 사람은 상처를 받을 수 있는 환경 가운데 태 어난 것이다. 유전적인 질병이 있어서 그것이 상처가 된다. 원인 모를 열등감이나 정신적 질환, 그리고 각종 중독에 시달릴 수 있다. 그러면서 이것이 상처가 된다. * 치유 방법 ①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결코 숙명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써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 - 성격의 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의 성격이 아닌 다양한 성격으로 만드셨다(시 139:13-14). 이 다양성은 축복이지 결코 저주나 죄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이기심)가 다른 사람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상처를 주고 받 게 되었다. * 치유 방법 ① 성격이 서로 다른 것이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아는 것. ② 나하고 다른 그 성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 것(성령의 역사). 3) 직접적인 원인 - 상처 있는 부모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상처를 주는 것은 상처 있는 부모이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자식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가깝고, 힘이 없는 상태에서 받은 상처는 그대로 깊은 상처가 된다(태아기, 영아기, 유아기, 학령기).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유전적으로 전이되는 상처도 있다. * 치유 방법 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상처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 ② 성령의 능력 가운데 부모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③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은혜체험). - 주변 사람들(형제, 친척, 친구) 우리에게 있는 상처를 가중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나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일 경 우 더욱 그렇다. 비교를 통한 상처를 내게 줄 수 있다. 언어를 통하여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다. 폭력적이거나 폭압적 행동으로 상처를 줄 수 있다. * 치유 방법 ① 그들의 행동이 상처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 나의 상처 때문임을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 배우자, 혹은 자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현실에서 보다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상처 많은 배우자이다. (혹은 자녀이다. 배우자가 상처가 많아서 나의 상처를 불러일으킬 경우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가 훨씬 심각 하게 되어 나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배우자는 때로 치유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지 못할 때는 그만큼 상처 를 많이 받게 된다. * 치유 방법 ① 배우자를 통해 얻으려는 잘못된 기대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② 성령의 능력 가운데 배우자의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이 그를 위한 치유자가 되 어야 한다. ③ 진정한 가족이고 배우자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은혜체험). - 기타 (교회, 직장 동료, 친구, 이웃 등등) 이들은 우리에게 있는 상처를 자극하는 일종의 환경과 같은 것이다. 본질적인 상처의 원인 이 될 수 없다. * 치유 방법 :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한 치유를 경험하고 그들을 용납해야 한다. 4. 상처의 종류들 1) 거절감 - 모든 상처의 출발이다. - 관계의 장애를 가져온다. 2) 굶주림(결핍) - 관계에 장애가 생기면서 오는 상처로서 애정 결핍이다. - 집착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3) 분노 -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오는 상처이다. - 분노에 대하여 억압이 시작되는 데 이것이 계속적으로 내면을 망가뜨린다. 4) 두려움 - 분노가 표출되거나, 혹 내면에서 표출했을 때 두려움이 엄습한다. -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하여 온갖 두려움을 느낀다. * 이러한 상처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자존감(Self-Esteem)’을 낮게 만들고, 이로 인해 다 음의 두 가지 뚜렷한 상처 있는 내면을 갖게 된다. 5) 열등감 -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서 가장 심하게 느끼는 상한 감정이다. 6) 죄책감 -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서 자신을 정죄하며 더욱 자신의 자존감을 끌어내리는 상한 감정이 다. * 상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상처가 다른 상처를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더욱 나쁜 쪽으로 몰고 간다. 5. 상처의 발전 과정 “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 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 여기에서 주님의 복음의 사역이 ‘마음이 상한 자(brokenhearted)’를 고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이 상한 자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① 상한 마음 - 상처받은 모든 감정을 가진 마음들을 말한다. 자각 증세가 있으나 갈등하면서 지내고 있 는 상태를 말한다. - 치유 방법 이 상한 마음에 대하여 잘 정리해 준다(상처의 거품을 제거해 준다). 상처받은 반대쪽의 영향을 주도록 한다. 특히 치유의 능력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지속적으로 덮어주면 치유가 일어난다(to bind up). ② 포로 된 마음 - 상처를 올바르게 해결하지 않고 방어 기제(defence-mechanism)를 사용하여 그 상처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상태이다. - 마귀의 영향을 심하게 받고 있는 상태이며, 각종 집착 등이 나타나고 있다. - 치유 방법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됨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집착에서, 잘못된 자기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움을 선포해야 한다 (to proclaim). ③ 갇힌 마음 - 이미 정서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장애 상태에 와 있는 상태이다. - 심한 우울이나 강박관념 등에 잡혀있을 수 있다(마귀의 영향을 심하게 받을 수 있다). - 영적으로 귀신들림이 있을 수도 있다. - 치유 방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치유의 빛을 그 내면에 비추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모든 속박을 풀어야 한다(to release from darkness). 내적치유 제2강 거절감과 분노 제2강 거절감과 분노 <거절감> 1. 거절감(rejection)이란 무엇인가 ? 1) 거절감이란 과거에 거절 받은 아픈 감정이 부적절하게 작용하는 마음이다. 과거 부당하게 거절당하거나 버림받은 경험이 감정의 형태로 속에 남아 있어서 유사한 상황 이나 혹은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부적절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거절감이다. 2) 모든 상처의 출발은 이 거절감인 경우가 많다. 거절감은 상한 마음이 되는 첫 출발이다. 어떤 형태든지 감당할 수 없는 거절이나 버림받음 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내면의 상처가 되면서 다른 상처를 불러일으킨다. 3)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더 쉽게 거절을 느끼고 그로 인해 더 많은 거절감에 시달린다. 상처가 나름대로 악순환하는 이유는 이 거절감 때문이다. 상한 마음의 소유자는 더 많은 거 절감을 느끼고 그것이 더 심한 상한 마음의 상태로 몰아가게 된다. 2. 거절감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이 거절감의 시작이다(창 3:23-24). -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거절당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지만, 인간은 거절당했다는 자체만으로 거절감을 느낀다. - 어린 시절부터 모든 인간은 소외되고 버림받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 부모가 거절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 자녀에게 유전된다. 2) 경쟁적인 환경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우리에게 시작된 것이 경쟁이고, 이 경쟁은 모든 사람에게 거절감 을 안겨 주었다. - 형제간의 경쟁과 따돌림, 부모의 편애가 거절감을 갖게 한다. - 사회에서의 경쟁이 거절감을 갖게 한다(경쟁에서 이기든 지든지 관계없이 경쟁 자체가 거 절감을 갖게 한다). 3) 상처(거절감)를 가지고 있는 부모 부모는 자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있든지, 없든지). 그러므로 상처가 있는 부모는 자 녀에게 거절감을 줄 수 있다. ① 원하지 않는 임신과 남녀 차별 - 태중의 거절감과 출생시의 거절감. ② 부모의 부적절한 거절 -일관성 없는 행동 / 지나치게 권위적인 아버지, 지나치게 신경질 적인 어머니 ③ 부모의 잘못된 배변 훈련 ④ 부모의 과잉보호 ⑤ 부모의 편애(편애를 받는 쪽이나 받지 못하는 쪽 모두 다 거절감을 가질 수 있다. ) ⑥ 부모의 조건적인 태도 - ‘하면’ 보다는 언제나 ‘하지 못하면’이 더욱 깊은 상처를 준다. * 부모와의 이별은 자녀에게 깊은 거절감을 준다(사별, 이혼에 의한 헤어짐, 환경적인 헤어 짐, 등등). 4) 주변 사람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절을 했을 때 우리는 심한 거절감에 시달리게 되고 상처 를 입는다. - 이 경우에 대부분은 원죄와 어린 시절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거절감이 심하게 다시 느껴 지는 것이다. - 거절감 가운데 가장 심한 거절감은 배신감이다. 3. 거절감의 증상들 *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벽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내면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마음의 벽이 다(개성, 자아). 사람들은 이것을 의지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마음의 벽이 하나님 의 다림줄로 재어 보면 많이 기울어져 있어서 어느 날 무너지기도 하고, 또 그것에 의해 삐 뚤어진 반응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암 7:7-9). 이 삐뚤어진 마음의 벽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파괴하기 위하여 숨어서 노리고 있 는 가장 위험한 곳이며, 이것은 마치 집안에 벽에 손을 대었다가 뱀에 물리는 것과 같은 것 이다(암 5:19). * 이렇게 우리의 마음의 벽이 삐뚤어진 이유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권위의 존재 (Authority Figure)가 잘못된 영향을 우리에게 주고 바르지 못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유아기) 잘못 되어진 이 관계는 그의 평생을 힘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겔 18:2). →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권위의 인물로는 누가 해당되겠습니까? <거절/Rejection> 1. 감정적인 경우(Emotional) 1) 슬픔 - 슬픈 상태가 반복적이고 돌발적으로 나타남 - 슬픔은 누적된 거절감에서 오는 아픔을 대치한 감정이다. - 슬픔은 일종의 감정의 순환기능 장애이다. 2) 자기 연민(Self-Pity) - 자기 연민은 나쁜 습관이면서 동시에 죄이다. - 거절을 경험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나 도망치는 하나의 방어기재이다. - 타인을 조작하여 스스로 자기 연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든다. 3) 자기 증오(Self-Hatred) - 타인에게 거절당한 상처 때문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거절하는 것이다. - 또 다른 거절감을 맛보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이다. -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자신을 포함해서 자기와 연관된 모든 것을 증오한다. 4) 실의(Depression) - 사회적인 활동에서 움츠러들면서 모든 관계에서 스스로 단절된다. - 모든 것이 슬프고 희망이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우울한 사고만을 한다. - 죄의식, 자기 비하, 자기 평가 절하 등이 나타난다. - 때때로 불면증이 나타나며 의욕이 상실된 상태가 지속된다. 5) 무관심 - ‘정열이 없이 존재함, 정신적인 나태함, 또는 감정의 부재’라고 표현될 수 있다. - 거절과 실패의 기억 때문에 나타난 일종의 방어 기제이다. 2. 지적인 면(Mind) 1) 열등의식 - 삶의 현장에서 여러 번 거절당한 상처는 지적인 영역에서 스스로를 열등하게 인정하게 한다. - 자기가 열등한 여러 가지 이유들을 늘 수집해 쌓는다. - 열등의식은 이러한 상태가 오래 방치되면서 굳어진 상태이다. 2) 불안정 - 사랑의 결핍과 어린 시절에 경험하는 거절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이다. - 한곳이나 하나의 사고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고의 방황상태이다. 3) 실패 의식 - 권위 있는 부모나 교사 등으로부터 지속적인 무가치한 대접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것이 다. -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로 강박관념에 잡히게 된다. -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고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4) 죄의식 - 내면이 상처로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경고등이다. - 어떤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한 경험이 누적되면서 나타난 내면의 상태이다. - 심한 자책감에 시달릴 때가 많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죄의식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3. 영적인 면(Spiritual) 1) 침침함, 죽어감, 꺼짐 - 영적인 부분에 대하여 스스로 관심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 반복적인 거절감의 상처가 자기 존재 속에서, 특히 영적인 면에서 문제를 일으키면서 하 나님과 단절을 해 나가는 과정이다. 2) 낙심 - 신앙생활 가운데 자주 낙심을 하는 것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영적 장애이 다. - 영적 생활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간헐적으로 계속되는 장애이다. 3) 실망 - 영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버림받은 자로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 영적인 패배상태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이다. 4. 성경에 나오는 거절감을 가진 사람들 1) 모세 - 모세는 환경적으로 거절감을 갖게 된 사람이다. 출생시의 거절감 유아시절의 경험(3개월간 숨겨짐, 나일강에 버려짐) 바로의 궁궐에서 소외를 심하게 경험 / 다른 민족 속에서의 갈등 - 40세 때의 사건은 그의 거절감을 심하게 강화 시켰다(출 2:14).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대인 공포증이 있었다(출 4:10). - 이스라엘에게 받은 거절감은 분노로 발전했다(민 20:10, 시 106:32-33). * 두 가지 중요한 사실 - 대부분의 거절감은 출생시와 유아시절에 갖게 된다. - 상처의 치유는 상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일하지 못하도록 은혜로 덮어놓은 것이다. 언제고 다시 튀어나올 수 있다. <분노하는 마음> 1. 분노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 1) 분노하는 마음이란 마음속에서 부적절한 분노가 자주 일어나는 마음으로서 그것 때문에 내면적으로, 관계에 있어서 고통 받는 마음이다. - 권위의 존재로부터 부적절한 대우를 받았을 때에, 혹은 권위의 존재와 잘못된 관계 속에 있을 때, 이에 대하여 반항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분노이고 이것은 부적절한 분노가 된다. 그러므로 분노는 상한 마음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표출로서 자신의 내면과 관계에의 어려 움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2) 분노하는 마음은 분노를 억압했을 때 갖게 되는 것이다. - 자신보다 힘센 대상에 대하여 분노할 때 억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억압은 분노를 자신의 내면에 쌓아두는 것일 뿐, 적절한 처리가 되지 못한다. 3) 분노하는 마음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뒤따른다. - 억압되었던 분노를 발하거나 혹은 속으로 분노했을 때 이제 이 분노에 대한 벌을 받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뒤따르고 그러므로 분노하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2. 분노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죄의 결과로 하나님과 단절되면서 인간은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마음을 계속 갖게 되고 이것 은 인간에게 있는 지속적인 죄와 분노의 원인 된 것이다. -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갖게 된 버림받은 마음과 굶주린 마음이 분노의 원인이 되었 다(가인의 경우). - 원죄의 유전 가운데에는 분노의 유전이 뚜렷하게 들어가 있다(가인의 후예/창 4:23-24). 2) 가정환경 ① 분노하는 부모 : 분노는 내리 분노이다. 왜냐하면 억압된 분노는 자기보다 힘센 대상에 게 가졌던 분노의 감정을 억압한 것이기에 자기보다 약한 대상인 자녀에게 표출하게 되고, 자녀는 역시 그 분노에 의해 분노를 갖게 되지만, 어쩔 수 없이 억압하면서 분노하는 마음 을 갖게 되는 것이다. ② 결손 가정 : 부모가 없음으로 인해서 오는 어려움을 겪을 때, 막연한 대상에 대하여 분 노를 품게 된다. 그러나 그 상황이 분노할 상황이 아니기에 억압을 하게 된다. ③ 사랑을 주지 않는 부모 : 부모가 사랑을 주지 않으면 굶주림이 오고 필연적으로 분노를 갖게 된다. 그러나 부모이기에 억압하거나 망각 속에 넣을 수밖에 없다. 특히 부모가 편애 를 하는 경우 분노가 심하게 된다. ④ 왜곡된 사랑 : 왜곡된 부모의 사랑은 대부분 자녀를 무시하고 자기 식으로 사랑하는 것 이다. 이런 경우 자녀의 마음속에 직접적인 분노가 있을 뿐 아니라 거절감과 굶주림에서 발 전한 분노를 갖게 된다. 그러나 부모가 힘이 있으므로 억압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분노하는 마음이 된다. 3) 주변 사람들 유아기의 거절과 억압은 분모의 마음을 갖게 하지만, 그 분노는 나중에 만나는 사람들에 의 해 강화될 수 있는 상한 마음이다. 즉, 주변에서 거절과 억압을 자꾸 느끼게 할 때 분노가 강화되는 것이다. 3. 분노하는 마음의 증상들 * 권위의 인물이 부적절하게 주는 영향력에 대하여 수동적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분노의 감정이 그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반항/Rebellion> 1. 감정적인 경우(Emotional) 1) 적개심 - 분노가 그의 내면에서 개성 발달의 장애로 나타난 경우이다. - 분노가 적절히 해결되지 못하고 내면에 깔리는 것이 반복되면 그것은 내면에서 과잉-억 압의 악순환을 하다가 삐뚤어진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 이러한 감정이 수시로 튀어나오는 것이 적개심이다. 2) 자만심 - 노골적인 공허함과 자기 중심주의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 거절당한 상처에 대하여 상대를 얕보거나 평가절하하는 식으로 덮는 방어기재이다. 3) 비속화(궤변) - 상처를 직시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궤변적인 방어기재이다. - 여러 가지 잡다한 것을 섞음으로써 거절감에서 오는 상처를 덮으려는 시도를 한다. 4) 의기 양양(Elation) - 실의(Depression)보다 더 심한 같은 부류의 방어기제이다. - 실망과 저조함을 견딜 수 없어서 인위적으로 계속 자기 기분을 최고조로 올려놓는 행동 이다. 2. 지적인 면(Mind) 1) 우월의식 - 열등의식을 감추거나 보상하기 위한 방어기재이다. - 스스로 우월한 것들을 자기 안에 수집함으로써 그런 의식을 만들어 간다. - 남을 경멸하거나 비하함으로써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그런 피해를 가져온다. 2) 경쟁의식 - 편애에 의한 거절감과 결핍에서 오는 상처가 굳어진 상태이다. - 항상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바닥에 깔고 있는 의식이다. - 다른 사람의 어떤 것도 인정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보인다. 3) 군림 - 거절 받지 않기 위해 비정상적인 관계만을 맺으려는 것이 굳어진 상태이다. -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굳어진 내면 상태이다. - 관계 맺는 방식이 일종의 횡포이다. 4) 견고성(완고함) - 심한 열등감에서 나오는 공격적 반응이다. -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 다는 것은 자기가 무너지는 것이라는 내면적인 의식 상태의 표출이다. - 고집불통, 배우기를 싫어하는 것 등이 다 여기에 속한다. 3. 영적인 면(Spiritual) 1) 망상 - 자기기만이 심화될 경우 나타나는 것으로 영적인 장애이기도 하다. - 일어나지도 않고 단서도 없는데 상상 속에서 단정해 버리는 그런 내적 문제 상태이다. - 피해망상, 의처증, 의부증 등이 여기에서 발전해 나간다. 2) 분개 및 쓴 뿌리 - 용서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감정이 분개이다. - 이것이 우리 속에 자리 잡을 때 쓴 뿌리가 된다. 3) 비판적 성향 - 비판적 성향은 자기 연민의 공격적 변형이다. - 타인을 비참하게 만듦으로서 자기 비하를 감추려는 방어기제로 영적인 피해를 가져온다. 4) 지배욕과 소유욕 - 심한 거절감에서 온 상처에 대한 공격적인 반응으로써 지배욕이 소유욕을 유도하고 소 유욕이 지배욕을 부추긴다. - 자기 인생에 대한 비하에서 나온 상처 난 감정으로 남의 인생을 대신 살려는 상한 감정 의 표출이다. 5) 조작 - 사랑을 흉내 내지만 오히려 사랑을 말살시키는 악의가 있는 반응이다. - 심한 두려움과 거절감의 상처에서 온 것으로 거짓을 통하여 배후를 감추려고 한다. - 제한된 자기 시각 속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며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 자기가 모든 것을 통제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어떠한 대가를 주고라도 상황을 주물러야 한다는 생각에 잡혀 있다. - 조작자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불신감을 가지고 있다. 4. 성경에 나오는 분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1) 가인 창 4:3-8 -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으실 수 없었던 이유는 가인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소원’ 때문이었다(창 4:7). 죄의 소원이란 ‘상한 심령’을 말하는 데 이것이 일종의 ‘반항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못하신 것은 그 상처 때문이었고, 결국 분노는 또 다른 거절을 경험하게 만드는 사실에 이르게 된 것이다. - 거절감이 분노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가인을 죄에 의해 타락한 세상 사람의 대표로 볼 때, 죄의 본질은 ‘상처’인 것이다. * 두 가지 중요한 사실 - 분노의 희생자는 반드시 소리를 지른다(창 4:10). - 상처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내고, 상처가 많은 사람은 또 다른 상처의 사람을 만들어 내어서 세상에 상처(죄)가 증폭된다. 2) 요나 -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 행 배를 탄 것은 분노하는 마음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분노가 솟았지만, 하나님이기에 항거할 수 없고, 또 사랑하시는 것이 당연하기에 불평할 수 없어서 도망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가 배를 타자마자 배 밑으로 내려가 깊이 잠든 것은 분노 이후에 오는 두려움 때문이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 폭풍은 나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 - 니느웨가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에 분노한 것과 박 넝쿨이 말라죽은 것에 분노한 것은 억 압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 세 가지 중요한 사실 - 분노가 있는 사람은 은혜를 쉽게 잃는다(쏟는다) - 물에서 구원받은 후 요나의 분노 - 분노하는 사람은 분노 때문에 자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 - 죽는 것이 낫다!! - 분노를 맞대응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을 때 분노는 힘을 잃는다 - 하나님의 사랑 내적치유 제3강 굶주림과 두려움 제3강 굶주림과 두려움 <굶주린 마음> 1. 굶주림이란 무엇인가 ? 1) 굶주린 마음이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상처가 아니라 지속적인 애정 결핍에 의해 일어 나는 것이다. - 거절감은 순간의 경험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굶주림은 지속적인 결핍상태에 의해서 형성되는 상처이다. 2) 굶주린 마음은 그 결핍감 때문에 느끼는 불안과 그 굶주림을 채우려는 잘못된 노력에 의한 관계 파괴, 그리고 채우지 못하는데서 오는 분노 등에 의해 고통 받는 마음이다. - 인간은 굶주림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굶주림을 채우려고 애 쓰게 되는데, 그 과정 전반에서 또 다른 거절감과 이로 인한 분노와 불안, 두려움 등의 문 제가 나타난다. 2. 굶주린 마음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 인간에게 찾아온 것이 굶주림이다(창 3:18-19). -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후에 인간이 겪게 된 고통은 육신적으로 배고픈 환경만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굶주린 마음의 고통이었다. - 인간은 근본적인 배고픔 속에 살고 있다(암 8:11-13). 이 근본적인 배고픔을 다른 것으 로 채우고 살려고 하지만 결국 삶의 어느 시점 에 가면 그것으로 채울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2) 가정환경 인간의 근본적인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밖에는 없다. 가정은 그런 굶주 림에 시달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울타리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거절감을 갖게 함으로써 사랑 의 공급이 끊어지고 이로 인해 굶주림의 고통에 더욱 시달리게 한 경우에 심한 굶주린 마음 을 갖게 한다. ① 결손 가정 : 부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모든 경우는 다 굶주린 마음을 갖게 만든다. ② 사랑을 주지 않는 부모 : 부모가 상처에 의해 사랑을 주지 않을 때에는 굶주린 마음을 갖게 된다 (무관심, 편애에 의한 소외). ③ 왜곡된 사랑 :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하는 방식이 자기중심적이어서 자녀에 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굶주림을 경험하게 된다. 3) 주변 사람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배우자 포함)에 의해서 굶주린 마음이 생긴다기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 는 굶주림을 채우지 못하거나 더 심하게 느끼게 하는 경우가 있다. - 굶주린 마음은 이미 상한 마음이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순간적으로 채워지는 것 같은 만족감이 있다가 곧 사라진다. 그러므로 더욱 치유가 쉽 지 않다). 3. 굶주린 마음의 증상들 1) 내면의 상태 -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인한 우울함이 있다. 언제나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 속에 살아간 다. -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또 그렇게 갈구하는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비 하한다. - 시기심과 경쟁심에 스스로 시달리고, 그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 남에 대하여 속으로라도 우월감을 가져야 편하다. 2) 관계의 장애 - 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갈구한다. 처음에는 굉장히 좋은 것 같으나 나중에는 사람의 진을 뺀다. -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주목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받을 수 없을 때에는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되고 이것이 관계를 힘들게 한다. - 사람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굉장히 공격적이 되고 비난을 하 게 된다. - 여러 사람이 더불어 친한 그룹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때로 심한 경쟁과 시기의 관계로 끌고 간다. - 이기적인 모습 (욕심이 많은 사람) - 사람들 앞에서 위선과 교만을 통해 우월감을 나타내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갖게 한다. - 공격적인 사람 - 질리게 하는 사람 - 되지 못하게 교만한 사람 3) 영적인 장애 - 이단이나 건강하지 못한 신앙 형태에 빠질 수 있다. - 이적이나 현상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신앙 스타일을 가질 수 있다(기복적인 신앙). -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 신앙의 성장이 어렵다. - 영적인 교만이나 우월감을 과시하는 신앙 행태를 보일 수 있다. 4) 포로 된 상태 - 굶주림을 채우기 위한 잘못된 집착이 일어날 수 있다(사람, 일, 돈, 명예, 물건 등등). - 심한 경우에는 ‘중독’이 일어날 수 있다(일, 술, 담배, 마약, Sex, 도박, 오락, Shopping, 등등). <중독 현상> - 몸이 피곤하고 건강을 해쳐도 계속한다. -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 가족이나 주변과의 관계를 망가뜨리면서도 계속한다. - 그것에 대한 생각이 항상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 그것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심심하고 불안하고 어쩔 줄 모른다. - 잠시는 의지로 끊는 것 같으나 곧 그런 상황을 찾아가고 거기에 빠져든다. 4. 성경에 나오는 굶주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 1) 야곱 - 야곱이 굶주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 이삭이 장자인 에서만을 편애한 것 때문이 었다. - 야곱이 장자권과 축복에 대단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아버지 이삭의 축복, 얍복 나루에 서의 축복 간구). - 야곱이 라헬과 그의 소생인 요셉을 사랑한 것은 일종의 굶주림에서 오는 집착이다. - 야곱이 주변의 사람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것은 굶주린 마음 때문이다. -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한 것은 굶주린 마음으로 살아온 삶 때문이다(창 47:9). * 세 가지 중요한 사실 - 아버지의 편애는 자녀에게 굶주린 마음을 갖게 한다. -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무리한 집착을 하게 되고 그것이 인생과 관계를 망가뜨린다. - 벧엘과 얍복 나루에서의 예배의 체험이 그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체험들이었다. 2) 다윗 - 다윗은 막내로 태어나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났고, 이것이 그에게 굶주린 마음을 갖 게 했다. - 다윗은 부인에게 집착을 했다(미갈, 아비가일, 밧세바). - 다윗의 자식에 대한 집착은 모두 굶주린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암논, 압살롬, 밧세바 사 이에서 난 아이). - 다윗이 밧세바와의 사건을 저지르게 된 것은 내면에 있던 굶주린 마음 때문이었다. * 두 가지 중요한 사실 - 굶주림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고 있을 때에는 치유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성이 사라질 때는 그 상처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 굶주린 마음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면 갈망하는 마음이 되고 그 굶주림이 하나님의 사랑의 채워지는 것이 은혜의 체험이다. / 다윗의 시편은 모두 이런 은혜 체험의 산물이다. <두려워하는 마음> 1.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 1)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마음속에 부적절한 두려움이 자주 엄습하는 것으로 그것 때문에 내면적으로 평강이 없고, 관계에 있어서 고통 받는 마음이다. - 억압되었던 분노를 발하거나 혹은 속으로 분노했을 때 이제 이 분노에 대한 벌을 받게 될 것에 대한두려움이 뒤따르고 그러므로 분노하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 그러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분노 다음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실 상처가 많은 내면의 사람은 다 이러한 두려움에 자주 잡힌다. 2) 두려움은 내면을 지탱하는 어떤 것이 무너져 내릴 때 느끼는 감정이다. - 사람은 자아를 지탱하고 있는 의지나 열정 등이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부담이나 실패, 좌절, 거절감등에 의해 내면이 무너질 때가 있다. 이때 매우 심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2.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죄의 결과로 사망이라는 엄청난 벽을 모든 인간은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지속적인 실패 와 좌절을 맛보면서 인간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나무 그늘에 숨은 것은 두려운 마음 때문이었다. - 원죄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두려움의 부분이다. 2) 가정환경 ① 상처를 자주 주는 부모 : 부모가 자주 상처를 주는 언사를 하게 되면 자녀는 거기에서 어떤 버림받음과 상처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특히 부모가 분노를 자녀에게 퍼 부을 때에는 자녀는 내면적으로 동일한 분노를 느끼면서 동시에 그 분노에 대한 두려움 을 느끼게 된다. ② 심한 싸움이 잦은 부모 : 부모가 서로 심하게 싸울 때, 자녀는 상당한 공포를 느끼고, 특 히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데서 오는 두려움이 심하게 된다. . ③ 불안정한 가정환경 : 가정이 여러 가지 이유로 안정감이 없을 때(아빠의 장기간 출장과 이로 인한 별거, 잦은 이사로 인한 전학, 부모의 사망이나 이혼 등에 의한 격심한 가정환경 의 변화 등은 두려움을 갖게 하는 원인이다. ④ 왜곡된 사랑에 근거한 자녀 교육 : 왜곡된 부모의 사랑은 자녀 교육에서 두 가지로 드러 난다. 하나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체벌이 심한 경우이다. 또 하나는 너무 과잉보호하는 경우 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다 두려운 마음의 상처를 갖게 만드는데, 특히 전자의 경우는 더 그 렇다. 3) 주변 사람들 성격적으로 강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심하게 책임 추궁을 당한 경우 이것이 상처가 되어 두려운 마음의 상처를 계속 갖게 된다. 갑자기 책임 추궁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시 달리게 된다. 3. 두려워하는 마음의 증상들 1) 내면의 상태 - 무엇인가 정리되지 않은 내면적인 불안함에 시달린다. - 갑자기 두려워지면서 불안해진다. - 어떤 일이 이어나면 필요이상으로 놀래고 두려워한다. -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2) 관계의 장애 - 강한 사람이나 심한 이야기를 들은 경우 그 사람이나 그곳에 가기를 꺼려한다. - 문제가 생기면 책임 추궁을 두려워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 전가를 하려고 한다. - 모든 종류의 훈련(Discipline)을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 - 새로운 일에 대하여 부정적이거나 추진력이 없이 중도에 그만두고 싶어 한다. 3) 영적인 장애 -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가 늘 흔들린다. - 신앙생활이 기쁨이라기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 영적인 진보가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적인 Up & Down을 경험한다. -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두렵고 멀기만 하다. 4) 포로 된 상태 - 심한 불안감을 이기기 위해 약물에 집착하거나 물질에 매어 달린다. - 피해 망상적인 감정에 시달린다(건강 염려증). - 안전하게 자기를 표출할 수 있는 술 중독, TV 등에 빠진다(두려워하는 마음 때문). 4. 성경에 나오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1) 여호수아 - 모세의 사망 이후 그가 느낀 것은 심한 두려움이었다. 모세라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 자체에서 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모세 없이 하나님과 직접 만난다는 것에 대하여 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모세 없이 인도해야하는 백성에 대하여 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 아이 성의 가벼운 패배 이후에 그가 느낀 두려움은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다(수 7:5-9). * 하나님의 전폭적인 돌보심과 함께 하심은 이런 두려움의 사람을 용사로 만드셨다. 하나 님 안에서 두려움이 치유된 모델이 바로 여호수아이다. 그가 마지막에 백성 앞에서 신앙의 선언을 담대하게 하는 순간 그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치유된 사람이었다(수 24:15). * 세 가지 중요한 사실 -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새로운 상황에 대하여 특히 못 견뎌 한다. -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사람이나 물건, 제도 등을 심하게 의지하려고 한다. -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작은 실패도 너무나 크게 받아들인다 제4강 열등감과 죄책감 <열등의식> 1. 열등감이란 무엇인가 ? 1) 모든 종류의 상한 감정은 공통적으로 열등감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원죄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은 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2) 열등감은 자기 자신에 대해 평가 절하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마음이다. 실제 능력이 있고 없고 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자 신 없어하는 것이 열등감이다. 2. 열등감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죄의 결과로 눈이 밝아져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본 것은 바로 인간 스스로가 자기 열등감속 에 빠지기 시작했음을 말한다. - 인간은 원래 조물주 하나님에 비해서 열등하게 지어졌다. 그러나 그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을 가지고 하나님 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죄에 빠졌고 그것이 열등감을 갖게 만든 것이다. - 죄 때문에 자기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더 깊이 열등감을 갖게 된다. 2) 가정환경 ① 결손 가정(고아, 편부모, Broken Family, 떨어져 사는 가정) : 결손 가정은 자녀에게 깊 은 열등감을 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상한 감정을 주기 때문이다. ② 문제가 있는 부모(사회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모, 인격적 장애가 있는 부모, 부부 싸움, 바람 피는 아버지) : 부모는 자녀에게 모델이다. 그런데 부모가 문제가 있을 경우 자 녀는 심각한 자기 비하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③ 편애와 비교가 심한 가정 : 편애와 비교는 결국 모든 자녀를 열등감속에 몰아넣는다. 3) 자기의 내적인 상태 모든 종류의 상처는 열등감을 일으킨다. ① 버림받은 마음(거절감) : 거절 받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편 거절당한 자기에 대해 스스로 비하하고 열등감을 갖는다(나는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② 굶주린 마음 :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경우 스스로가 비참해지고 열등감을 갖게 된다. ③ 분노하는 마음 : 분노를 억압하는 것은 내적으로 분노하는 것이고 이것은 심한 열등감을 갖게 한다. ④ 두려워하는 마음 : 두려워하는 마음은 벌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소외 당함에 대한 두려움 등인데 결국 이런 두려움에 떠는 자신에 대하여 열등감을 갖게 된다. 4) 자기의 외적 조건 심각한 이유는 아니지만 자신의 외모적인 특성이나 이름, 학력 등이 열등감을 갖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비교에서 나온 상처이다. 3. 열등감의 증상들 1) 내면적인 문제 - 두려움, 불안, 자기 학대 - 작은 실수나 문제에도 심하게 불안해하고 자기 비하와 자책을 한다. - 열등감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 포기한 것 같으나 굶주림에 의해서 오히려 내 적으로는 ‘욕심’을 많이 갖고,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 열등한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데서 오는 완벽주의적 증상이 있다. 2) 관계의 장애 - 지나치게 겸손하고 희생을 자처하여 겉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는 좋아 보이지만, 내적으로 는 감사가 없고 불만이 언제나 상존한다. - 이유 없는 분노를 느끼며,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같은 피해의식이 늘 있다. 3) 영적인 장애 -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지 못하고 ‘나 같은 것이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 가운데 있게 된다. -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오히려 큰 부담으로 가지거나 뒤로 후 퇴한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이 매우 늦다. 4) 포로 된 상태 - 의존적 자아를 갖게 되어 사람에게 종속된다. - 부담을 주는 일은 다 포기하게 되어 결국 무능력하고 소용없는 자로 전락한다. - 모든 정상적인 관계가 불가능해지고 대인 기피증을 갖게 된다. 4. 성경에 나오는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 1) 사울 - 처음에 나타난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다(삼상 10:22) - 열등감에서 나온 겸손 그는 출신도 훌륭하고 인물도 좋았으나 자신은 열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삼상 9:1-2, 21). -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사를 드린 것은 열등감에서 나온 두려움 때문이었다(백성이 자기를 버리고 다 떠날 것 같은 생각, 자기 자신에게 대하여 자신이 없다). - 다윗을 향해 갖게 된 열등감은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삼상 18:7-9). 스스로 자신감을 잃고 평강을 잃었다. 모든 결정이 열등감을 감추려는 부적절한 것이었다(딸의 혼사). 주변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점점 어려워졌다(아들, 딸, 사위, 제사장, 백성). 다윗을 쫓는 데 온 정력을 낭비하고 결국 불레셋에게 전사당했다. * 두 가지 중요한 사실 - 열등감은 때로 겸손으로 나타날 수 있다(드러내어 인정하고 적절히 처리되면). - 열등감을 감추려는 모든 행위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한다. 2) 베드로 - 베드로는 깊은 열등감의 소유자이다. 그가 계속 장담하고 큰소리친 것은 열등감을 감추려는 행위였다. 물 위를 걷다가 파도를 보고 빠진 것은 그의 내면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고, 결국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고기나 잡으러 가련다”(요 21:3)라고 말한 것은 이 실패의 기억으로 더욱 강화된 그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 주님 앞에 솔직히 자기의 사랑이 한계가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한 후, 성령을 받고 나서야 그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두 가지 중요한 사실 - 열등감의 소유자들 중 외향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감추려고 큰소리를 잘 친다. - 성령께서 역사 하시면 열등감이 강한 사람도 담대해지고 능력을 갖게 된다. <죄의식> 1. 죄책감이란 무엇인가 ? 1) 모든 종류의 상한 감정은 공통적으로 열등감과 함께 죄책감을 일으킨다. 이 가운데 열등 감은 막연히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고, 죄책감은 어떤 기준을 제시하고 그것에 미달된 부분 을 놓고 자기를 정죄하는 감정이다. 2) 죄책감은 부적절하게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죄의식에 시달리는 상한 감정이다. - 실제 상황으로는 넘어갈 수 있는 것을 혼자 Guilty Feeling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이 죄 책감이라는 상한 마음이다. 3) 죄책감은 자기 자신 및 남에 대해서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 죄책감은 자기 뿐 아니라 남에 대해서도 심한 정죄 속에 고통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므 로 용서를 통한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정죄를 통한 두려움을 많이 느끼는 내면을 갖게 된다. 2. 죄책감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타락의 결과로 죄인 되어 낙원에서 추방당한 후 모든 인간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 었다. - 원죄가 꽉 찬 세상은 자기중심이 되어 자기를 지키는 방법으로 남에게 죄책감을 강요하 는 세상이 되었고,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계속되어 결국 사람들이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게 만들었다. 2) 가정환경 ① Broken Family : 가정의 결손은 부모의 마음 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깊은 죄책감을 넣어 준다. 특히 부모가 결손의 책임이나 문제를 자녀에게 조금이라도 전가한다면 상태는 더욱 심해진다(너 때문에…) ② 상처가 있는 부모 : 상처가 있는 사람은 모든 문제를 본인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남 에게 전가를 하게 된다. 그런데 그 대상으로 자녀가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자녀는 죄 책감을 갖게 된다. ③ 율법주의적인 가정 : 스스로 높은 기준과 신앙적 열심을 갖는 부모(두려움과 굶주린 마 음, 버림받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의 도덕적 신앙적 기준 제시는 자녀에게 죄책감을 심하 게 넣을 수 있다. 3) 삶에 있어서의 실패의 경험 삶 가운데 심한 실패의 경험은 인간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데, 특 히 이 실패가 배신에 의한 것이어서 용서의 문제가 걸려 있을 때에는 더욱 심하다. → 죄책감의 문제는 용서의 문제와 밀접하다. 3. 죄책감의 증상들 1) 내면적인 문제 - 언젠가 나쁜 일이 닥칠 것 같은 불안감 속에 산다. - 심각한 죄책감이 작은 실수에도 찾아와 내면을 뒤흔들어 놓는다. -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 좋으면서도 그것을 잃을까하는 두려움에서 자기를 계속 정 죄 한다(더 기도하고 더 잘해야 돼!). - 정죄 받지 않기 위하여 자기를 계속 자아 비판하면서 학대해 나간다. - 감추기 : 자기를 감추려고 노력하지만 잘 감추어지지 않을 때마다 심한 고통을 느낀다. 2) 관계의 장애 - 지나친 희생과 봉사 : 남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자기 희생 을 하려고 함(일에 열심) - 죄에 대하여 민감 : 죄나 Scandal에 대하여 아주 민감하고 심하게 정죄함. - 정당한 비판도 받지 못하고 심하게 반발함. 그리고 본인은 그것 때문에 혼자 괴로워 함. 3) 영적인 장애 -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함. - 습관적인 회개로 신앙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함. - 마귀에게 공격을 받아 자주 넘어짐. 4. 성경에 나오는 죄책감을 가진 사람들 1) 사도 바울 - 사도 바울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특히 죄책감의 문제는 그에게 심각했다. 그러나 그리 스도의 용서의 사랑으로 이 죄책감을 극복한 사람이다. 로마서 8:31-39을 보면 그의 죄책감과 이것을 극복하는 치유의 장면이 다 나온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공개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딤전 1:15-16). * 바울이 이런 죄책감을 갖게 된 것은 엄격한 부모, 율법주의적 환경에서의 성장 때문이었 다. 2) 다윗 - 시편 51편에 나타난 다윗은 심한 죄책감과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한 사람이다. 3절: 심각한 죄의식 4절 : 사람들의 정죄에 시달리기를 거부하는 모습. 5절 : 자기가 근원적으로 죄인임을 인정 7-12절 : 죄로 인한 버림받음의 두려움 16-19절 : 죄 용서의 체험 내적치유 제5강 상처와 영적 전쟁 제5강 상처와 영적 전쟁 1. 상처는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온 것이고 그 거짓 선지자는 사단의 영향과 조종을 받고 있 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2. 우리 안에 있는 상처를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고 우리의 삶 을 파괴하려는 마귀의 공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것이 영적 전쟁이다. * 영적 전쟁에서 중요한 세 가지는 - 원수의 전략을 간파하는 것(Recognizing) - 그들의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것(Refusing) - 그것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는 것(Resisting) 1. 마귀가 하는 일의 세 가지 속성(요10:10) - 도적질하고(steal) - 죽이고(kill) - 멸망시키는 것(destroy) → 이것이 상처가 인간 속에서 역사하는 경우의 삶의 모습이다. *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속성(요 10:10) - 생명을 얻게 하고, - 이것이 가득 차게 하는 것이다. 2. 마귀가 우리에게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 권위(Authority) * 이 권위란 원래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일부를 위임해 주신 것이다(사랑하시므로). 이것을 자유 의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사탄 마귀는 이 권위를 갖기 위하여 인간을 유혹했고, 인간의 동의 하에 이 권위를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 다. 이것이 타락이다.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바로 이 인간이 빼앗긴 권위를 되찾아 주시는 일이 었다(골 2:14-15). 3.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마귀의 공격을 받는가? →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잃었던 권위를 되찾았지만, 우리의 권위를 다시 빼앗으려는 마귀 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면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기에 더 심하게 공격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4.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 때 주로 공격하는 네 부분은 어디인가? 1) 생각 (Mind) 2) 마음 (Heart) / 태도(마음가짐), 감정 3) 입(Mouth) / 언어 4) 관계 (Relationship) / 일치됨을 파괴하고 갈등을 유발하려 함. 1. 모든 사람에게 있는 두 개의 문이 무엇입니까? - ‘음부의 문’(The Gate of Hades/ 마 16:18) - ‘천국의 문’(The Gates of Heavenly Kingdom/ 마 16:19) 2.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주님의 사람이 된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 신 것은 무엇입니까? → 천국의 열쇠(마 16:19) 3. 천국의 열쇠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 매는 것(Binding) - 푸는 것(Loosing) * 이 매는 것과 푸는 것은 수동적으로 할 수도 있고 공격적으로 할 수도 있다. 이 중에서 수동적으로 하는 것을 ‘거부’(Refus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거부입니까? - 생각 속에서 마귀가 주는 생각은 잘라내고(Binding), 하나님이 주신 생각은 받아드린다 (Loosing). - 마음속에서 마귀가 주는 감정과 태도는 거부하고(Binding), 하나님이 주신 느낌과 마음가 짐을 붙잡는다(Loosing). - 말을 할 때 마귀가 주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고(Binding), 하나님이 주신 언어를 사용한다(Loosing). - 관계를 깨고 단절시키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Binding), 일치를 이루기 위한 부분을 노력 한다(Loosing). 1.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통해 음부의 문을 닫고 하늘의 문을 열 수 있습니까? - 기도 (Praying) - 언어 (Speaking) - 삶 (Living) 2.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영적 전쟁을 수행할 수 있습니까? - 우리에게 있는 모든 영적 장애들
내면의 상처치료(2)
내면의 상처치료(2) 9. 나에게 해를 끼친 아버지: 세상의 죄악이 관영해 감에 따라 가장 놀랍고 무서운 죄악은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이다. 성 폭력에서 시작하여 온갖 행할 수 없는 죄악을 자녀에게 행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버지에게 이러한 해를 받은 자녀의 마음에 받은 상처는 너무도 치명적이다. 어떤 훈련이나 정신 수양으로도 이러한 상처는 지워지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이 모든 것을 치유하시는 능력이 있으심을 우리는 목격한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결코 자녀를 이용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결코 자녀에게 해를 끼치는 분이 아니다. 우리를 징계함은 그분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그분은 자신의 감정 때문에 자녀에게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니며 보복하기 위해 어려움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고 자신의 일을 위해서 우리를 이용하는 분도 아니다. 그분은 자기를 죽음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돌보시고 기르시는 분이다. C. 가정환경과 저주의 굴레 < 출20 : 5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음란함, 사기, 도적질, 저주의 말들, 악독, 알콜, 거짓말, 점치는 것, 저주의 끈은 죄악의 끈이다. 성경은 이러한 끈들이 4대째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마술, 성적인 음란함, 우상숭배의 죄악, 질병, 우울함.... 이런 죄악의 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는 이 모든 죄악의 끈을 끊으신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대에서 이러한 죄악의 끈이 끊어지기를 원하신다. 자신 안에 자기의 부모에게서 발견된 죄악들과 같은 죄악들이 발견되지 않는지 살펴보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러한 죄악들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거부하고 대적해야 한다. 느헤미야는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그 민족과 조상들의 죄악을 발견하고 그리고 자신 안에서도 동일한 죄악이 있음을 보고 회개하며 그 죄악을 끊었다. 바로 나의 세대에서 이런 끊음의 역사가 일어나서 다음 세대 자녀들에게는 그 저주의 끈을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 D.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지 못하게 하는 거짓된 사고방식들 < 롬 12 : 1 - 2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지나간 모든 것들은 현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내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이제는 완전한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기에 모든 괴로움은 지나갔으며 과거의 일은 현재의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영적인 새 삶을 시작한 것이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다. 이제 변할 수 있는 완전한 가능성의 길 위에 서게 된 것이다. 2) 정서적 장벽과 성격의 장애들이 신앙생활과 성경적 지식이 쌓여 가면 자연히 없어지리라는 생각: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이나 성격의 이상들, 그리고 죄에 특히 약한 어떤 특정 부분들은 아주 어린 시절 유년기에 획득된 것들이다. 그리하여 계속 반복 실행하여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들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 3) 부모가 우리의 잘못된 삶에 있어서 영향을 끼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죄스럽다는 생각 4) 우리의 지난 시절을 생각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나의 죄에 대한 책임을 돌리는 행위라는 생각 5) 부모와 나의 어린 시절의 가정 문제를 말하는 것은 나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나의 자부심을 손상시킨다는 생각 E.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의 사고방식” < 요 8 : 32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1) 부모를 바르게 판단하는 것은 부모를 배반하는 것이나 또는 부모에게 욕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바른 진단을 내리는 필수적인 과정일 뿐이다. 2)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죄악을 용서하는 것이지 은폐하는 것이 아니다. 3) 성령께서 우리의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뒤돌아보게 하시는 것은 잘못을 캐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이다. F. 문제해결 < 느 9 : 2 >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1) 나와 부모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험해 가기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이라. 2)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숨겨진 인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런 인상을 갖게 되었는지 하나님께 여쭈라. 깨닫게 된 것을 놓치지 말고 붙잡아 하나님께 말씀드리라. 3) 부모에게 받은 상처와 아픔들이 있다면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라. 세상에 계시지 않는 부모라도 용서하고 사랑을 고백하라. 4) 조상들로부터 온 굴레들에 대해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끊어서 더 이상 나의 자녀들에게 이것을 유전시키지 않도록 기도하 라.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라. 예수의 이름은 창조와 기적을 일으킨다. 침묵기도와 내적치유 아침식사를 하면서 아내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내 삶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던 순간이 없었던것 같아요. 그 순간에는 너무 힘들고 대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 실망이 되었었는데, 지내놓고 보니 그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던 이유를 알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나를 택하셨습니다.(장로교의 예정론) 그러니까 내가 잉태되어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순간까지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내 삶의 온갖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환희와 상처와 미움과 사랑가운데 하나님이 계셨다는 말입니다. 지난 과거의 삶 가운데 아픈 기억이 있습니까? 그 기억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계셨었는지 과거의 기억 속으로 침묵기도를 통하여 주님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의 아픈 장애물들을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적치유가 됩니다. 정리하면 과거의 상처를 두 가지로 치유 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과거의 고통스런 상황 속에 예수님을 초청하여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바라보면서 치유받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과거의 기억을 상상하면서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최용우 내적치유의 정의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참으로 보기 좋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리가 인식하는 부정적인 것들이 없는 깨끗하고 순결한 상태였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상처와 악한 저주들로 묶기고 찢기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그 아름다운 상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상한 심령 때문에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이 되었다. 마음에 커다란 담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주신 것일 것이다. 이 죄악의 쓴 뿌리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도 한다. 그리고 인간들과의 관계에도 파괴적인 역할을 한다. 이 쓴 뿌리들을 마음에 계속 담아두게 된다면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내적치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상처들은 바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모두 씻어낼 수 있다. 어떤 상처나 저주일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멸하지 않을 것이 없다. 즉 내적치유란 인간의 내면에 있는 모든 쓴 뿌리와 조상서부터 내려오는 악한 저주(고집, 혈기, 음란 등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냥 씻기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직 유일한 위로자이고 치료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을 의지해서 말이다. ◎내적 치유의 필요성 내적치유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만드셨던 그 관계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물론 내적치유가 100%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과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세세한 부분까지 터놓고 이야기하며 사랑하며 나아가기 위해서 내적치유는 필요하다. 또한 인간들 사이에서 천국의 기쁨들을 온전히 나누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상처가 없이는 남에게 상처를 줄 수가 없다. 즉 모든 이들이 상처가 있고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상처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개념은 상처는 밖에서 안으로 받는 것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예전에 받은 상처가 안에 있을 때 어떤 특정한 상황을 통해서 그 상처가 드러나게 되는 것도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처를 받았다는 말은 어쩌면 대부분이 상처가 들어난 것일 것이다. 이 증거는 상처가 적고 내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누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긍정적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볼 때 증명된다. 이처럼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하실 귀한 교제들을 나눠야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내적 치유를 받아야 한다. 이 내적 치유를 받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성품들을 회복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간들과의 관계에 회복이 있을 것이다. ◎내적치유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칭함을 받은 다윗을 보면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그는 자신의 죄를 알았을 때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서 죄를 고백했고 떳떳이 주님 앞에 다시 생활했다. 그는 시편51편에서 이렇게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이다.” 이것은 내적치유의 이상저인 방법을 말해준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다. 죄가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러한 인간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과 그 사랑을 통해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내면의 상처들은 어떻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상처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물론 좋은 것들을 드려 영광을 돌릴 수 있지만 죄인인 인간으로서 우선 회복되어야하는 부분이 바로 이 죄로 인한 상처와 심령이기에 반드시 필요하다. 이 상한 심령의 고백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지만 인간은 죄책감과 사단의 정죄감 때문에 이 고백을 할 수 없다. 내적치유는 다른 사람이 치유를 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물론 충분히 효과적으로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 스스로 상처들을 갖고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성경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령님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상한 마음들을 가지고 나아가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아픔이 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또 다른 신호이다. ◎내적치유와 선교 세계의 모든 나라들의 문화란 참으로 다양하다. 그래서 그 문화에 따라서 선교의 전략이 다르게 된다. 언어, 전통, 문화, 관습 등등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지역의 전문 사역자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들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바로 죄인이라는 것과 이 죄로 인한 마음의 상처들이 있다는 것이다.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창조당시 아담과 하와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전쟁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 내적치유의 사역은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가능한 그리고 효과적인 사역이다. 위에서 언급한 전제 조건 때문이다. 또 하나의 조건을 달자면 인간은 누구나가 외로워한다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외롭지 않다고 섬에서 혼자서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 또한 깊은 곳에 외로움을 갖고 있고 자신의 행위들을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버릴 수 없는 성격이다. 바로 이것을 통해서 내적치유사역을 접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안으로 내면은 바라보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개인 개인에서 말을 할 때 감동이 없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것이 무리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개인적으로 선교를 나가면 영적인 대결을 우선 할 것이고 영혼들을 먼저 대할 때 나의 생각과 나의 것들을 전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말해줄 것이다. 나는 이 하나님 말씀을 신뢰를 한다. 이 치유의 능력들을 믿는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거룩한 통로가 되기 위해서 하루하루 회개하면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나아갈 것이다. 이 귀한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내적 치유 크리스 해리슨 (Chris Harrison) "내 이름을 경외하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말 4:2) 하나님의 치유와 사랑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정보만을 알기를 원하지 않고 진리와 은혜가 있어야 한다. 성령님을 위하여 기도하자. 1. 왜 하나님은 내적 치유를 원하시는가? 1)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요1 3:1):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2)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고후 1:3,4): 구원하다의 의미는 온전케 됨이다. 온전케 됨의 한 부분이 치유이다. 속사람이 치유를 받으면, 속사람의 치유가 필요함을 알며 다른 사람에게 나누게 된다. 성경의 원리는 전하는 것이다. Flowing은 물건과 돈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이 받는 것 중의 하나가 내적 치유이며 이것을 받아서 전하는 것이다. 고후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3)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목표가 있다 (사 61:1-3): 성경에는 많은 목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3절에서 보는 대로 의의 나무가 되어서 영광을 나타낼 자가 되는 것이다. 영혼이 아름다운 모습이 됨. 하나님은 우리가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나무처럼 되기를 원하신다. 모든 나무가 다르나 각각의 나무가 다 아름답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1)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가난한 자는 ①돈이 없는 자(인도와 필리핀)와 ②예수님을 모르는 자(부자일지라도 교회를 간다 할지라도 영원한 기쁨과 희망이 없다)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아름다운 소식이란 죄에 대한 용서함이며 이것이 가장 큰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은 정보만을 주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체험을 원하신다. 용서함은 자유함이며 우리 깊은 곳에서 그것을 안다. 우리는 성경에서 용서함에 대해서 알지만 체험이 없다는 위험이 있다. 하나님은 이 용서함을 알기를 원하신다. --왜 사람들이 용서함을 받을 자유가 없나 (5 이유)-- (1) 거듭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교회를 간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에서 해야 한다(must)를 사용하셨다. 그것이 영생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리고 죄사함을 받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2) 낮은 자아상(self-image) 때문에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온다. 자랄 때 부정적인 말을 들은 것 때문에 (너는 쓸모 없다, 너는 실패자다. 너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이런 말을 권위자로부터 들었다면 자란 후 낮은 자아상을 가지며 세대를 통해 이어져 간다 (3)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지만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오는 것을 막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용서 못하고 항상 후회 속에 산다. (4)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선택이며, 용서하지 못해라는 거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용서함을 내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5) 죄책감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지배할 때 어렸을 때 부모님들이 사랑을 전하지 못하고 격려할 줄 모르고 control하기 위해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어린이가 자랐을 때 죄책감에 익숙해 있다 (가정, 학교, 교회, 직장에서) 2)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기 위하여: 내적 치유,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온 것이다. 3)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하여 죄(sin) + 상처(hurt) = 묶임 (bondage) → 분노, 거짓말, 정욕, 나쁜 습관에 대한 묶임 3. 내적 치유는 성령의 역사이다 (엡 3:16-19). 엡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자신을 치유할 수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점점 정죄감이 생긴다. *16절. 속사람이 그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 *17절.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터(foundation)는 토대이다. *18,19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가는 것: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5): 마음은 영어에 정신(생각)과 가슴(느낌)의 두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부어지면, 우리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성령에 의해서 부어짐. 1) 좋은 토대란 진리 은혜 사랑 ①진리를 알면 우리가 자유케 되며 자유 속에 있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가 매일 필요하다. 진리를 말하고 진리 가운데 산다. ②은혜: 매일 필요함 ③사랑: 토대가 튼튼하면 문제가 올 때 흔들리지 않는다. 2) 나쁜 토대란 속임 율법 거절 ①속임: 항상 두려움. 보이지 않는 벽에 의해서 갇힌다. ②율법: 최선을 다하나 항상 비참함. 겉으로는 강하고 종교적이나 약한 사람. ③거절: 깊은 뿌리. 거절 받은 느낌. 거절 받음. 거절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고후 3:17,18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절. 성령이 계신 곳에는 어디나 자유함이 있다. 18절. 성령이 계신 곳에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변한다. 변화는 항상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한 번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욱 같아지도록 계속 변화과정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고 성령만이 변화시킨다. 4. 변화가 어려운 두 가지 중요한 이유: "수동성"과 "상한 심령" 1) 수동성 (passivity) *선택은 여러분의 것이다. 생명, 축복, 주님사랑, 순종, 부종하기(cling to)를 선택하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셨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이 유혹을 받았으나 나쁜 것을 거부하시고 좋은 것을 선택하셨다. 항상 유혹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피할 길을 주신다 (고전 10:13). 그러나 우리는 선택을 하여야 한다. 이것은 차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수동적인 사람은 변화가 어렵다 (1) 수동성의 증거는? ①선택을 할 수 없다. ②결정을 못하고 수행할 수 없다. ③해야 할 때 '예', '아니요'를 못한다. 잘못되어 있고 문제와 이웃에게 상처를 줄 때에도 항상 예라고 말함. 모든 것에 과분한 책임을 느낌. 사람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의 나에 대한 의견, 친구를 잃는 것, 거절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점점 묶임이 된다. ④문제에 대해서 흔히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아버지, 장모님, 남자친구의 잘못으로. 하나님까지도). 그렇다면, 자유롭게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시험하셨다고 하지 말라.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된 것이다.(약 1:13-15).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시나 수동적인 사람은 피할 길을 찾지 못한다. ⑤"이런 일이 생겼다 (It happened to me)." 모든 환경이 나보다 크다. 항상 환경이 나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⑥마음 깊은 곳에서 화와 좌절이 있다. ⑦다른 사람과 화해하는 것이 어렵다. 관계문제(가족과 교회에서)가 커지기만 한다. ⑧두 마음을 품는다 (약 1:6-8). 그래서 항상 변하며 일관성이 없다.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 불안정하며, 수동성 때문에 당신이 거절당할 수도 있다. 결혼했어도 외롭다. 결혼상대와 잘 관계하지 못하며, 두 사람 사이에 벽이 있다. 약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약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⑨생각에 공포가 있다. 통제가 안되며 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모른다. ⑩충동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다 한다. 생각하며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2) 수동성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세 인격이 한 분이시다. 각각 다른 인격이 하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우리의 영, 혼, 육체로 우리를 하나로 만드셨다. ① 영 : 거듭났을 때 영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영원히 산다. 영적 생활은 영의 생활이다. ②육체: 일시적이나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③ 혼 : 건강한 혼은 정신, 의지, 감정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 ★회복에 관해서 (요엘 2:25-29) 요엘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요엘 2: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요엘 2: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25절, 먹힌 횟수대로 갚아주리라 26절, 풍족히 먹을 것이다 27절,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28, 29절, 성령의 부으심에 대하여 수동성의 원인들 ①우리의 의지가 어렸을 때 상처를 받게 될 때: ⓐ항상 "하지 말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을 할 지, 어떻게 할 지 가르쳐 주지 않고, 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을 때는 십 대가 되기 전에 수동적이 된다. ⓑ"너는 틀렸어. 너는 바보야.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할 꺼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십대가 되가 전에 수동적이 된다. 무엇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항상 따라가며, 상처입고 외롭고 어려워지게 된다. ⓒ어렸을 때 너무 많은 책임감을 지는 경우: 어린이들이 놀면서 만드는 소음은 좋은 것이며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어린이들은 놀아야 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유 ㉮바쁜 부모님: 사업상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부모님들은 열심히 일해야 되며 큰 아이는 작은 아이를 돌봐야 된다. 어린 시절을 즐기는 즐거움을 뺏긴다. 10-11살이 되었을 때 대리 엄마와 아빠가 됨. 어린아이가 다치면 내가 벌받기 때문에 실수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함. 이 책임감이라는 짐은 어린아이가 지기에는 너무 크다. ㉯부모가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아이일지라도 내가 무언가 해야 된다고 생각함. 어른이 되었을 때 수동적이 된다. ②과거에 만든 잘못된 결정과 선택들: 상처받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준다. "나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으니 당신이 선택하세요." ③세대에서 내려오는 수동성 두 가지 배움의 근원이 있는데 학교에서 지적으로 정보를 모으는 것과 가정에서 삶을 배우는 것이다. 가정에서는 다른 예가 없으므로 좋은 예와 나쁜 예들을 다 배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조용하나 쉽게 화를 내는 분이라면, 본인은 아버지와 같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나 결혼 후에 아버지와 같이 된다. 수동적인 부모들이 수동적인 자녀들을 만든다. ④종교적인 수동성: 많은 종교가 운명을 믿는다 (이슬람) ⑤주술 (무당, 점쟁이, 별자리, 사악한 영들) 이 곳에서 쓰여지는 언어가 우리의 삶을 묶으며 죽은 자들과 접촉하려고 하는 것들이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⑥국가적 상황: 전쟁, 다른 세력에 선택할 수 없이 점령당했다면. 전쟁 중이나 점령당한 나라에 부모님이 계셨다면, 상처받고 그 상처 속에서 살게 되며, 해결되지 않는다. 상처(hurt) ⇒ 분노(anger) ⇒ 쓴뿌리(bitterness) ⇒ 증오(hatred) 부모님이 고통받기 때문에 아이들도 고통받으며 전쟁이 끝나고 압제하는 나라가 떠났어도 3,4대까지 이어진다. 너무 고통스럽고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기를 원하신다. ⑦수동성을 가진 문화적인 근원 ⓐ어떤 문화에서는 특정한 인종이 억압을 받는다: 호주의 원주민,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남아프리카의 흑인들, 미국의 인디안, 에스키모, 하와이 원주민들, 오사까 사람들. 원주민들은 부드럽고 친절하나 가슴 깊은 곳에 분노와 슬픔이 있다. ⓑ어떤 문화에서는 국민 전체가 억압받는다: 가난 때문에. 필리핀, 태국. ⓒ어떤 문화에서는 여성들이 억압받는다. 무슬림 여성들.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하여 이용당하며 희생물이 되고 자신들이 여성인 것을 증오한다. (3) 수동성을 파하는 능력: 어떻게? ①기도로: 믿음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끊어짐 ②열심 (초점을 맞춤) ③용서: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든 사람들을 용서함 그 이후에는. . . 우리는 자유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자유롭게 결정하고 선택하고 예 아니오를 말하며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는 긍정적인 삶을 살며 우리의 경계를 알게 된다. 우리의 경계를 아는 법 ① 우리의 몸 고전 6: 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② 우리의 태도 수 1:8,9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③ 우리의 감정 전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④ 우리의 행동 갈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빌 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⑤ 우리의 생각 고후 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⑥ 우리의 능력 롬 12:4-8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⑦ 우리의 소원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 145:19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⑧ 우리의 선택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⑨ 우리의 넘지 말아야 할 경계들 빌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고후 1:14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2) 상한 심령 (broken spirit) 잠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육신은 병들었거나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건강한 심령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심령이 상하면 누가 그것을 일으키겠느냐? 아무도 할 수 없다. 상한 심령을 가지는 것은 매우 어렵고 견딜 수 없다. 그것은 밑이 빠진 컵과 같아서 우리는 삶 속에 좋은 것을 담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개인적인 약속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가 되며 단지 견디고 견딘다.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 어렵다. (1) 상한 심령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4가지 방법 ① 슬픔 가운데 사는 것 잠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우리의 마음의 슬픔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 때때로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잠 7:4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 우리에게는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용량과 능력이 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가 싸우는 것을 보거나 들으면 감정이 손상이 된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며,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멸시치 아니하신다. ② 거칠고 삐뚤어지고 거짓말하는 혀 어떤 사람들의 혀는 너무 강하여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목사님이 교회에 거짓말을 하면, 상대방의 심령을 상하게 한다. ③역기능 가정 아버지가 문제가 있음 → 어머니가 짐을 짐 → 자녀들이 고통받음 어머니가 문제가 있음 →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신실하지 못함 → 자녀들이 고통받음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며 시간을 내어주지 않고 단지 물질만을 준다. 수동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표현되어야 하며 주어야 하며 느껴져야 한다. 골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강요하거나 억압하거나 노하게 하면 안된다. 그러면 역기능 가정이 된다. - 특히 가정에서의 사랑은 무엇인가? ⓐ가족들을 위하여 시간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양의 시간이 아니라 의사소통과 표현이 있는 질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때로는 무엇인가를 같이 하는 것을 의미한다 (등산, 운동경기에 같이 가기) ⓒ사랑은 의사소통이다. 의사소통(communication)은 말하고 듣는 것을 의미한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가 의사 소통이 필요하다. 만일 자녀들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면,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게 되고 그들에게서 나쁜 정보를 들으며 배우게 된다. 모든 어린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자신감과 자유를 줌)과 어머니의 사랑(위로와 보호를 줌)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러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치유 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 "능동적인 사랑"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리라. 내가 너를 고치리라. 고후 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어머니의 사랑 사 66: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사 66:13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사랑은 부모가 자녀를 순전하게 만지는 것이며, 또한 제자훈련이다.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제자훈련이란 아버지가 자녀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는 것이다. 제자훈련이란 배우는 것이다. 사는 법, 생각하는 법,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배우며, 재미있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역기능 가정의 원인들 ⓐ부모가 벌할 줄만을 알고 제자 훈련 하는 법을 모르는 경우: 사랑은 제자훈련이며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이 제자훈련이 시작되어야 한다. ⓑ의사소통이 없는 가정 ⓒ자신의 부모를 두려워하는 가정 : 부모에게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거칠고 분별이 없고 술을 마시는 아버지를 자녀는 두려워한다. 고통받고 부정적이며 가혹한 어머니에게는 이야기하기가 두렵다. ⓓ무책임한 아버지 : 가족을 상관 안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집에 늦게 오고 어머니가 모든 짐을 진다. 어머니는 모든 일을 해야만 하므로 사랑을 할 수 없다. ⓔ부재중인 아버지 : 아버지가 집을 나갔거나, 돌아가셨거나, 직장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일년에 한 두 번 집에 온다. ⓕ신실하지 않은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들의 심령을 상하게 한다. ⓖ보상하는 부모들 : 부부가 서로 감정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딸에게 관심을 돌려 딸에게 사랑을 보이는 경우. 아내를 사랑할 수 없는 남편이 딸과 즐긴다. 어머니는 딸을 질투하게 된다. 혹은 남편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아들을 사랑하는 경우. ④학대(abuse) - 예수님이 받으신 학대 : 십자가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간을 뛰어넘는 고통과 고문과 잔인함이었다.(골고다: 해골이라는 장소) 사람에게 얼굴이 가리운 바 되었고(3절): 너무 끔찍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벌을 받고, 사람들에게 거절과 멸시를 받았고 고통을 받았다. 그는 우리의 고통과 질고를 아신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5절). *그가 십자가에서 받으신 학대는: ⓐ 말로서 - 가장 비참하고 끔찍하게. 신성 모독 ⓑ 신체적으로-십자가에서 피흘림. 채찍에 맞음. 가시관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시 22:14). 십자가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시 22:14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 권위자들로부터 학대받으심 제사장들과 지방의 총독. 그들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것을 알았으나, 십자가에 못 박았다. ⓓ 모욕을 당하심 "나는 벌거벗었다" (시 22:17). - 학대받은 사람들이 사는 방법 (두 가지) ⓐ 희생물이 되어서 산다: 자기 연민과 더불어 자유가 없이. 나는 희생물이므로, 희생물처럼 믿고 느끼고 이야기하고 행동한다. ⓑ 영웅이 되어서 산다: 거부한다. 문제가 없어, 없단 말이야. 문제는 그러나 있다. 나는 견디어야만 해. 문제없어. - 뿌리와 터 :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뿌리들: ⓐ쓴뿌리(bitterness) ⓑ거절(rejection) ⓒ반항(rebellion) ⓓ교만(pride) ⓔ어린아이(little child, 유치한 어린 아이와 같음, childish) ⓕ돈을 사랑함(love of money):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됨(딤전 6:10) 하나님은 이러한 나쁜 뿌리들을 우리 가운데서 꺼내시기를 원하신다. - 학대의 종류 ①말로 하는 학대 (verbal abuse) *화살: 쓴 독이 묻은 화살. 어떤 사람의 입을 통해 마음으로 와서 상처와 독을 줌. 시 64:3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시 64:4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부주의한 말들: 말하는데 대하여 주의를 안한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 : 혀는 치유하며 축복하며 선한 길을 보이는 권세를 가진 반면 파괴하는 권세도 가졌다. 잠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그리스도인의 혀에 대하여 약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 3: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말로 하는 학대는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 거절감을 갖게 한다. ⓑ우리를 외롭게 한다. 사회 활동과 친구 사귐을 두려워하게 한다. ⓒ권위자를 두려워하게 한다. 희망이 없이 만든다. ⓓ우리의 가치와 행동을 부패하게 만든다. ②신체적 학대 (physical abuse) *예. 남편의 아내구타 (분노, 술):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잔인한 것이다. *부모가 분노 속에서 아이들을 때릴 때 그것은 학대이다. 자신의 분노를 없애기 위해서 아이를 이용하는 것이다. 처벌은 항상 사랑 속에서 해야 한다.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 술에 취하였거나 피로할 때 쉽게 아이들을 때리면, 아이들을 상하게 한다.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이 보고 두려워하도록 본을 보이기 위해서 한 학생을 때린다면, 신체적 학대이다. *상사가 고용인을 때린다면, 신체적 학대가 된다. *예수님의 리더십의 예: 예수님은 섬기고 구원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묶인 자들을 자유케 하려고 오셨다. 마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③권위자에 의한 학대 (abuse by authority figure): 황제의 영(emperor spirit) *황제의 영이 집과 학교와 대학과 사무실과 교회와 기독 사역 안에서 지배하고 학대한다. *황제는 항상 외롭다. 교제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상처를 준다. *황제는 외롭고 쉽게 부패한다. 황제는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일리가 없는 일이라도 시키면 하여야 한다. *IMF: 황제의 영, 어둠의 영, 적 그리스도의 영이 재정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한다. 사람들 마음에 돈만을 자리잡게 하려고. ④성폭행 (sexual abuse) - 성폭행의 4가지 유형 (어린아이들, 십대들, 성인들에게 있다) ⓐ강간 ⓑ불결한 만짐 ⓒ원하지 않는 성관계로 조종함(권위자, 장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상황 때문에) ⓓ결혼에서 비정상적인 성행위(perversion) 삼하 13:1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 삼하 13:2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 삼하 13:3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저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삼하 13:4 저가 암논에게 이르되 왕자여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뇨 내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뇨 암논이 말하되 내가 아우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연애 함이니라 삼하 13:5 요나답이 저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 하다가 네 부친이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말하기를 청컨대 내 누이 다말로 와서 내게 식물을 먹이되 나 보는데서 식물을 차려 그 손으로 먹여주게 하옵소서 하라 삼하 13:6 암논이 곧 누워 병든 체 하다가 왕이 와서 저를 볼 때에 왕께 고하되 청컨대 내 누이 다말로 와서 내가 보는데서 과자 두어개를 만들어 그 손으로 내게 먹여 주게 하옵소서 삼하 13:7 다윗이 사람을 그 집으로 보내어 다말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의 집으로 가서 저를 위하여 음식을 차리라 한지라 삼하 13:8 다말이 그 오라비 암논의 집에 이르매 암논이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 보는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삼하 13:9 그 남비를 가져다가 그 앞에 쏟아 놓아도 암논이 먹기를 싫어하고 가로되 모든 사람을 나가게 하라 하니 다 저를 떠나 나가니라 삼하 13:10 암논이 다말에게 이르되 식물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 내가 네 손에서 먹으리라 다말이 자기의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에 들어가 그 오라비 암논에게 이르러 삼하 13;11 저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삼하 13:12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비여 나를 욕되게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치 못할 것이니 이 괴악한 일을 행치 말라 삼하 13:13 내가 이 수치를 무릅쓰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괴악한 자 중 하나가 되리라 청컨대 왕께 말하라 저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치 아니하시리라 하되 삼하 13:14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하니라 삼하 13:15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삼하 13:16 다말이 가로되 가치 아니하다 나를 쫓아 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하되 암논이 듣지 아니하고 삼하 13:17 그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어 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삼하 13:18 암논의 하인이 저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 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삼하 13:19 다말이 재를 그 머리에 무릅쓰고 그 채색 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울며 가니라 삼하 13:20 그 오라비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저는 네 오라비니 누이야 시방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 이에 다말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삼하 13:21 다윗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암논과 다말은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사이였으며 실제로 암논은 다말을 사랑하지 않았다. *6절: 암논은 나쁜 계획을 세워 병이 든 척을 하였고, 다윗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나쁜 아버지였다. 다말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 소녀로서 아버지에게 순종하였다. *15절: 그는 다말을 미워했다. 그가 그녀를 사랑했으면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끔찍한 이야기를 이해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20절: 압살롬은 다말을 위로하거나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다. 단지 질문하고 아무말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네 오빠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두 목소리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아라. ⓑ이것은 너무 수치스러운 일이다. 너는 견디어야 한다. *다말은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지냈다. 처량하게: 부정적인 성격,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죄책감을 느끼며. 우리는 죄가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죄책감을 느낄 수가 있다. 불결하고 희망이 없다고 느끼며 부정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21절. 왕이 노하니라. 도움이 안되고 다말은 외롭게 지낸다. 암논은 도망한다. 5. 나쁜 씨 *복음이 좋은 열매를 맺듯이, 나쁜 뿌리는 나쁜 씨에서 온다. *그 씨는 역기능 가정에서 우리의 삶 속에 뿌려진 씨이다. (다윗, 압살롬, 엘가나의 가정) *그들이 모두다 끔찍한 죄인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에서의 유일한 완전한 인물은 예수님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①하나님은 역기능 가정을 진실로 이해하신다. ②하나님은 우리가 역기능 가정에서 나왔을지라도 우리를 도외시하지 않으시고, 역기능 가정에서 나온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③우리가 역기능 가정에서 나왔다면, 우리는 치유될 수 있다. 1) 나쁜 씨의 원인들 (1) 처음 씨를 받은 방법: 태중에서 어머니에 의하여 거절됨 하나님께서는 태중에서 나를 취하여 내셨다 시 71:6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①가난 때문에 더 이상 아이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때 ②부모의 사이가 좋지 않을 때: 남편이 해를 입히거나 불성실해 질 우려로 인해 어머니가 임신하기를 원치 않는 경우 ③어머니가 좋은 직장을 가진 경우: 좋은 경력, 지적이며, 명석하고, 일터에서 성취감을 가지고 행복해 한다면. 이 아이가 나의 성취와 친구들을 가져가 버리기 때문에 나는 이 아이를 미워해. ④결혼 안한 상태에서 임신한 경우: 남편이 없음. 수치스럽고 숨고 싶다. 낙태가 해결은 아니다. 영적으로는 저주와 같은 어두운 구름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쉽게 자유케 된다. (2) 부모님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성으로 태어난 경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참소하는 자들을 이기기를 원하신다 (계 12:9-11).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기고 승리하라.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계 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계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3) 부당한 처벌 이것은 많은 씨를 심는다. 부당한 처벌은 어린이를 두려워하게 하고 거짓말을 하게 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결혼생활의 묶임이 된다. (4) 부모의 기대 밑에서 살게 될 때 네가 잘하면, 우리는 너를 인정한다. 네가 잘하지 못하면, 너는 힘들 꺼야. (5) 부모에 의하여 버려짐 시 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①감정적인 버려짐: 차갑고 낯설고 사랑이 없고 따뜻함이 없고 의사소통이 없는 경우. 단지 의무와 공부만이 있다. 집에 있는 것은 비참하다. ②신체적인 버려짐: 부모가 자녀를 고아원에 맡기는 경우. 아이를 떠나는 경우 ③영적인 버려짐: 특별히 행복하지 않은 그리스도인 가정인 경우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좋지 않은데 그리스도인들이다. 가정생활을 즐기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교회에서 바쁜 일정을 보낸다. 이 때 자녀들은 부모와 교회에 의하여 자신이 버려졌다고 믿는다. - 때로는 성인이 되었을 때의 깨어진 관계(깨어진 결혼, 깨어진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와의 관계 경험)로부터 오는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①우리는 마음속으로 더 이상 관계를 하지 않기로 맹세하게 된다. 너무 고통스러우므로. ②더이상 위탁을 안하게 된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는 가질 수 있으나, 위탁은 더 이상 없다. ③결혼 후에는 배우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배우자 때문이 아니라 나의 과거의 경험에 의한 문제로 인하여. 6. 나쁜 뿌리 *그는 나무와 같다 (시 1:1-3; 렘 17:7,8): 신선한 나무, 열매 맺는 나무, 일관성 있는 나무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렘 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 17: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예) 망고 열매에 벌레가 있는데 뿌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원인이었다. 사단은 분노, 거짓말, 정욕으로 우리를 참소 한다. 때로는 직접 우리마음에 생각을 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통하여 말하기도 한다. 나는 나무를 베어내려고 하나 뿌리는 그대로 있게 된다. 나쁜 뿌리는 ①거절 ②쓴뿌리 ③반항 ④교만 ⑤어린아이 ⑥돈을 사랑함이다. *나쁜 뿌리의 결과는 나쁜 열매이다. 7. 나쁜 열매의 유형들 1) 공격적인 열매들 ①다른 사람들의 위로를 거절함: 나를 혼자 내버려 둬. 음식이나 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②다른 사람들 특히 권위자들을 거부함 ③가혹하며 강퍅한 태도 ④회의주의나 불신 ⑤논쟁적임: 쉽게 논쟁을 함 ⑥완고함: 권위에 순복하려고 하지 않음 ⑦살인: 다른 사람을 파괴시킴. 만일 누구를 미워하면 살인이다. 2) 거절로부터 오는 열매들: 거절이 일상화되었거나 심각한 거절 경험이 있을 때 (예. 직장해고→자기거절→열매들) ①낮은 자존감: 자신을 미워함 ②열등감: 비교한다. 성경은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님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 (고후 10:12) ③불안정함: 기질적인 불안정함. 기질적인 화. ④의사소통의 결핍 ⑤실패에 대한 두려움: 자기 거절감이 있는 사람은 항상 실패를 두려워한다. ⑥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대하여 가지는 의견에 대한 두려움 ⑦우울증: 모든 우울증이 자기 거절감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우울의 영으로부터: 다루기 쉽다. 찬양하라. 그러나 대부분의 우울은 영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 거절감으로부터 ⓒ어린 시절로부터: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슬프고 외롭다. 어린아이로서 놀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 ⓓ유전적인 우울증: 가족 안의 우울증. 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생리중인 여성들: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나 3-4일간은 정말 우울하다. 의학적인 원인이며 영적인 원인은 아니다. ⑧희망 없음: 희망을 포기한다. ⑨자살 - 자살의 네 가지 유형 정신적인 자살: 포기하는 것. 결코 끝내지 못한다. 대학에 가나 중간에 나오고 일을 시작하나 끝내지 못한다. 도덕적인 자살: 나는 내 몸이 무엇을 하던지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즐기려고 한다. 영적인 자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간다. 신체적인 자살 위의 네 유형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시 118: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나쁜 열매의 두가지 유형중 첫 번째 유형은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고 두 번째 유형의 열매는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거절은 항상 파괴한다. 사단은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왔고,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 나쁜 열매를 감추는 방법들 때로는 나쁜 열매들을 고의로 혹은 자동적으로 감추게 되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①성취하려고 힘씀: 고의로 자신을 밀어붙인다.→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자신에게 주지 않는다. ②독립성과 외로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있지 않음. 그러므로 DTS의 소그룹이 매우 중요하다. 함께 웃고 울면서 같이 성장해 간다. ③이기심: 이기심은 4가지로 표현된다. ⓐ자기 보호: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항상 자기를 보호한다. ⓑ
내면의 상처치료(3)
내면의 상처치료(3) 8. 어린 아이에 대하여 1) 어린 아이와 같은(childlike) 것 *신약이 어린이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 2가지 ①어린 아이와 같은(childlike) 것 : 긍정적인 것 마 18: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②화목케 함(reconciliation)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단어는 원어 성경에서는 이탤릭체로 되어있다. 새로운 피조물은 어떤 경험을 의미한다. *18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받은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것으로 화목을 의미한다. 마지막에 화목하게 하는 직책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19절에서도 화목하게 하는 것을 말씀하신다. 2) 어린 아이와 같음 (childishness, 고전 13)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하여 말한다. 11절에 하나님의 사랑을 막히게 하는 것이 있는데 바울이 어린 아이와 같았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아마 그가 결혼했었고 그의 결혼이 깨어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른이 되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바울은 하나님이 어린 아이의 일을 가져 갔다고 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와 같음의 예 ①비밀 단추와 같다: 누군가 이 단추를 누르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평정을 잃는다. 분노와 정욕과 연관되어 있다 ②조작(manipulation): 아버지와 어머니가 관계가 좋지 않으며 자녀는 어머니에게 매어 달리다. 아이가 커서 결혼을 하면, 남편은 분노로 아내를 조작하며, 항상 이기나 항상 외롭다. 아내는 눈물로 남편을 조작하며 항상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3) 새로운 관점으로 해결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어린 아이는 문제를 해결할 줄 모른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베드로는 베드로서에서 "나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아주 긍정적으로 말한다- 왕같은 제사장, 택하신 족속, 은혜를 입은 자들로. *잘못된 관계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법을 모르게 한다. *우리의 영혼을 거스리는 정욕과의 마지막 싸움: 정욕은 우리의 생각, 의지, 감정을 거스림. 우리는 정욕의 문제로 항상 싸워야 한다. 4) 잘못된 세 가지 관계 ①의존적인 관계: 혼이 묶임. 필요 중심. 우리를 동성이나 이성에 거머리와 같이 묶이도록 끌어 내린다. 우리의 기쁨과 순수함과 영적인 비전을 잃게 한다. ②부도덕한 관계: 육신이 묶임. 부도덕한 관계(결혼 밖에서의 성관계)로 우리의 육신을 묶는다. ③환상의 관계: 생각이 묶임 ⓐ영혼의 묶임: 관계가 끝났을 때도, 우리 안에 살아서 우리를 망친다. ⓑ외로움: 다른 사람들과 관계할 줄 모르는 사람들 ⓒ포르노: '60-'70년대에 독일, 영국, 미국의 사단 숭배자들은 많은 포르노들이 사람들 생각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포르노의 배후에는 생각을 조종하는 사단의 영이 있다. 이러한 생각의 조종은 두 가지 효과가 있는데, 첫째로 점점 더 원하게 되는 욕구(비록 죄책감을 느끼면서도)와 둘째로 영상들을 남기는 효과가 있다. 이것은 자석과 같아서 사람들을 유사한 문제를 가지도록 유혹한다. 9. 나쁜 뿌리를 뽑아내기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려면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14절. 관계,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15절. 돌아 보라. ①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함. 좋지 않은 율법적인 관계들을 돌아봄. ②쓴뿌리: 거절과 반항의 뿌리. ③잘못된 관계: 에서와 같이. *거절의 쓴뿌리에 대하여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꺼내기를 원하시는가? 그것은 성령님의 일이다. 뿌리는 수분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우리가 꺼내지 않으면 거절의 쓴뿌리 안으로 깊이 들어감. 뿌리는 온기 속으로 올라온다. 16절. 거절의 쓴뿌리가 있을 때,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생긴다. ①하나님과의 관계: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②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쓴뿌리가 나서 더럽게 하고- 두 가지 의미 히 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①많은 사람이 더러움을 입었다 (아시아: 거절, 유럽: 교만, 호주: 반항) ②만일 우리가 거절의 뿌리와 쓴뿌리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더럽힌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뿌리를 꺼내시기를 원하신다. 1) 부드러움으로 나무 주위의 흙을 파서 흙을 털고 부드럽게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한다. 성령님께서는 부드러우시다. 우리는 자유케 된다. 2) 마음을 토함으로 시 62:8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당신의 마음을 아버지께 토하라. 많은 사람들이 토하지 않고 침묵하며,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견딘다. 삼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한나는 술 취하지 않았고 마음에 있는 것들을 토하였다. 렘애 2:19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찌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찌어다 하였도다 물 쏟듯이 마음에 있는 것을 쏟는다. 물을 쏟는 일은 쉬운 일이다. 내적 치유는 자기인식과정 나는 대학시절 주님을 만났다. 청소년시절이었다면 갈등을 겪을 수도 있었겠지만 날카로운 이성의 시기였기에 만난 감격은 더욱 크고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전인격적인 것이었으며 확고한 것이었다. 그 이후 외적으론 한번도 슬럼프를 겪지 않고 현재까지 달려왔다. 적어도 사역과 비전의 측면에선 그렇다. 받은 은혜를 따지자면 말로 형용할 수 없으리라. 문제는 주님을 만난 뒤 생긴 내면의 갈등이었다. 배운 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기쁨과 감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무리 기도해도 열등감이 없어지지 않았다. 믿음과 성공은 함수관계가 아니었다. 예수 믿는 것이 곧 자동적인 행복은 아니었다. 큐티(말씀묵상) 를 하는 날은 승리의 삶을 산다는 것도 거짓이었다. 심지어 금식기도를 하고 난 후에도 자기연민과 방황은 없어지지 않았다. 신앙의 선배들의 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앙과 인격의 괴리, 신앙과 삶의 간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당혹감을 감추고 신앙생활을 오래 동안 해왔다. 그리고 사역자이라는 이름으로 그 갈등을 무마시켜 왔다. 내면의 문제를 선교지향, 사역지향으로 돌리면서 꿋꿋하게 버텨왔다.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처음 이십년 동안 사회적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주님위해 산다고 생각하며 ‘세계복음화’라는 월드비전에 몰입했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어느 순간 내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종교인으로 전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말로는 주님을 이야기하면서 인격의 에너지는 항상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인격의 에너지는 자신의 약점이나 콤플렉스가 있는 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즉 치유되지 않은 방향으로 자아의 중심이 쏠리는 것이다. 사역과 일도 주님중심이 아닌 나 중심이었다. 에너지가 끊임없이 병든 자아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치유의 시작이었다. 그렇다. 내적 치유의 비결은 병든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원주에 가면 토지 문학관이 있다. 소설가이신 박경리 선생님께서 글쟁이들을 위해 지으신 곳이다. 시편23편을 완성시켜야 하는 절박감에 나는 그곳을 찾았다. 기도원에 가면 기도가 잘되고 독서실에 가면 공부가 잘되듯 그곳은 글이 잘 써지는 곳이었다. 도착한 첫날 혹시나 해서 선생님을 뵐 수 있겠느냐고 사무실에 연락을 했더니 한참 후에 면담이 허락되었다. 오래 동안 칩거하고 계시는 분이라 만나시겠다는 연락이 반갑기 그지 없었다. 최근에는 아무도 잘 만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터라 더욱 반가웠다. 고풍스런 안방에서의 대화는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정도로 화기애애하고 정이 넘쳤다. 건강에 대해 묻자 선생님은 자신이 15년전에 수술받은 암환자임을 밝혔다. 당시 유방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 수술만 받고 항암치료는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재발하지 않고 있는 것이 놀랍다고 하셨다. 의사들도 혹시 오진이 아니었을까하며 신기해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많은 암환자를 치료해본 나에게는 집히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정색을 하고 말씀드렸다. ‘그것은 오진이 아니고 완치된 것입니다. 선생님같은 분은 암에 걸려도 다시 재발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시며 그 이유를 물으셨다. 암에 걸리면 일단 자유가 주어집니다. 상황이나 관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던 삶에서 자기가 주도권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 암이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암에 걸렸는가를 인식하게 됩니다. 과거를 재해석하게 됩니다. 그 인과관계를 파악하게 됩니다. 암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인식과정이 시작됩니다. 나무를 보던 눈이 숲을 보게 됩니다. 상황을 초월하여 포괄적인 시각에서 인생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암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암의 재발을 막으려면 과거의 삶에서 돌이키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암이 좋아하는 삶에서 암이 싫어하는 삶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처럼 통찰력과 결단력이 있는 분들은 암이 재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치유는 처절하게 나의 실체를 깨달을 때 시작된다. 내 문제를 고백하고 나의 병든 영역을 드러내는 것,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의사이신 주님께 나를 맡기는 것이다. 나의 한계를 인정할 때부터 성령의 역사가 내 인격 속에서, 사역 가운데 체험되기 시작한다 내적치유는 해방되는 것이다. 내적치유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 내적치유는 과거의 사건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재조명이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을 말한다. 내적치유는 바꾸는 것이다. 나는 종종 내적 치유 사역에서 과거의 부정적인 결과를 제거해주시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과거의 사건자체를 변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결과를 바구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에서 거부감을 없애고 그것을 용납으로 바구어 주시기를 기도하거나, 죄책감을 제거하시고 구원의 즐거움으로 채워 주시기를 간구한다. 이런 점에서 내적치유는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5:21에서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씀하셨다. 죄를 의로 대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교체인가 ! 베드로전서 2:24에도 이 개념이 반복되고 있다.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내적치유는 보통 한 사건 이상의 과정이다. 우리들의 기억들은 마치 양파껍질처럼 여러 겹으로 형성되어 있다. 양파의 껍질을 벗기면 다음 껍질이 있듯이 우리의 기억들도 겹겹이 연결되어 한 단계의 치유가 끝나면 다음 단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때대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릇을 꺼내려면 먼저 찬장문을 열어야 하듯 내적 치유에서도 문제에 맞는 과정을 잘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면 상처받은 사람에게 내적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적 치유의 일반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고통을 접한다. 고통의 원인을 찾는다. 고통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한다. 예수님이 상처 받은 사건에 임재하셔서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한다. 내적 치유는 기억의 치유이다. 보통 사건 자체는 한번의 상처를 입히지만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계속 상처를 주게 된다. 실로 기억은 강한 힘이 있어서 하나님의은혜가 없이는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시간의 흐름이 어느 정도의 기억의 고통을 무디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그것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60세가 되어도 여전히 감정적인 상처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으며 고통 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적 치유는 용서를 적용하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접근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과거의 시간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내적 치유는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원동력이며 적용방법이다. 원동력은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 적용방법은 실제 사역현장에서 성령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내적 치유사역을 하려는 사람은 그 원동력을 알고 존중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내적 치유란 주 예수님이 과거의 상처들을 해결하시도록 그 분께 의탁드리며 그 상처의 부정적인 결과들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1장 - 치유사역의 출발점1.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사역모델 예수님의 당신의 생애의 3분의 2를 치유하시는 일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전하시고 도를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는 일을 꼭 하셨다. 또한 제자들에게 치유를 명하셨다. 2. 성경적인 안수사역 방법 은혜는 받지만 치유를 일어나지 않는 안수 방법. 충분한 맡김의 자세가 기도사역 시 표현되어야 한다. 3. 다만 손만 대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을 찌어다> - 단순 명령 하나님은 이성과 판단을 버리기를 원하신다. 다만 순수하게 믿고 순종을 기다리신다. 4.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사용하는 자 그들이 손을 대면 병이 낫는다는 공식이 따르는 사람. 은사는 사용할수록 증가한다. 정기적인 사역은 기름부음을 준다. - 아귀까지 항아리를 채우라. 많은 사람들은 많은 기도와 행위적인 노력을 인하여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치유의 은사는 사역하면서 그 파워가 증가하는 것이다. 사역자의 영성관리와 꾸준한 사역이 치유사역의 꽃을 피게 한다. 5. 선택과 결과 스위치 전구 전류(동원력) 빛(치유의 기적) 신유는 선택이다. 최대한 사용해야 한다. 사랑으로 손을 얹어라. 아픈 사람에게 가까이 서라. 능력은 사역자의 모든 사방에서 흘러나온다. (옷자락의 원리) 치유의 명령을 십계명처럼 지키는 자가 되라. 믿고 행하는 것이 순종이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고 명령하셨다. 즉시 시도하라. 미루지 마라. 기쁨의 체험을 하게 되면 계속 치유의 역사와 이적은 증가가 될 것이다. - 치유사역자가 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지금 치유 사역자가 되라. 치유 받고 치유하는 자가 되어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라. 출처: 일반인들은 물론 크리스천들도 부딪히게 되는 가정 폭력과 인터넷 포르노 중독에 대한 새로 운 시각과 해법을 제시한 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인간 범죄의 배후에 언제나 마귀의 역사 가 있다는 것을 알고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본문 중에 몇가지를 발췌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엡6:12)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편142:1,2) [저자 소개 / 크리스티 김 선교사] 세계적 선교단체 YWAM(Youth With A Mission:예수전도단)이 운영하는 열방대학 (University of the Nations)에서 기독교 상담과 내적 치유를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7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열방대학은 YWAM이 하와이 코나(Kona)와 우리나라 제주도 등 지에 세운 국제적 기독교 교육기관으로서, 110개국 280개 지역에서 DTS(예수제자훈련 학교)와 같은 선교 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크리스티 김 선교사는 전 세계에 위치 한 열방대학 중에서 일부를 순회 강의하며, 하나님이 그녀에게 베풀어주신 영적 치유의 놀라운 은혜와 비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영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가능한 이중 언어자이 기에 해외 교포와 서구의 크리스천 사이에 더욱 널리 알려졌으며, 해외 한인 유학생들 의 수련회인 코스타(KOSTA:유학생선교운동)의 인기 강사로서, '승리하는 영적 전쟁'과 '용서해야 산다'는 주제로 명강의를 펼치기도 합니다. 14세에 유학길에 올라 미국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U.S.C.)을 졸업(심리학 전공)하고, 국제신학대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Theology:I.S.O.T.) 와 탈봇신학대학교(Talbot School of Theology, Biola University 바이올라대학교)에 서 상담학과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녀 자신도 하와이 코나에 있는 열방대학을 수료 했으며 1996년부터 동 대학에서 내적 치유 교수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곳에 가시면 크리스티김 강해가 동영상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바로가기] [본문 중에서] 이 자매가 아홉 살 때 위 친오빠가 중3이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집에 안 계시던 어느 날, 이 오빠가 아홉 살짜리 자기 동생을 강간하는 일 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너! 엄마 아빠한테 이르면 죽인다'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한테 말도 못했습니다. 그녀는 오빠가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그날 하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엄마 아빠가 집에 안 계실 때 오빠는 여동생을 거듭 거 듭 성폭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역시 엄마 아빠가 집에 없는 틈에 끔찍한 일 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엄마 아빠가 외출했다가 일찍 돌아오면서 아들이 딸을 강간하는 장면 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목격한 부모는 아들에게 한마디 꾸지람도 하 지 않고 '네 방으로 건너가라'라고 아주 조용히 말했습니다. 매를 들기는 커녕 야단도 안 쳤습니다. 아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무조건 떠받드는 그런 가정이 었습니다. 그러나 강간을 당한 아홉 살짜리 딸에게 돌아오는 행패는 이만저만이 아니었 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딸에게 몹쓸 욕을 하며 다그쳤습니다. '이놈의 계집애? 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애야. 오빠가 너한테 그럴 수도 있어. 넌 오빠 말이나 잘 들어.' 그 어린 나이에 오빠에게 강간 당하고 폭행당하고, 부모한테 까지 억울한 일 당하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돌아와도 오빠는 아들 이라고 안 때리고 딸만 때렸다는 겁니다. 저는 한국 여성들에게 얼마나 상처가 많은지,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많이 당하고 살아 왔는지 깨닫고 경악했습니다. 이런 아픔을 간직한 자매가 용서 기도를 시작하려고 하자 귀신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 다. 귀신 들린 자매였는지 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용서해야 산다고 강조하면서 용서 기도를 하자고 하고 실제로 용서기도를 하기 시작하자 목소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용서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용~', '용~'하더니 '서'라는 말이 안 나왔습니다. 그 리고 다시 '용~' 하더니 목소리가 바뀌어 이런 말소리가 났습니다. '얘는 내 거야. 내가 애를 통해 식구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얘도 죽이고 말거야.' 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잠잠하라'라고 하고 우선 귀신을 잠잠케 했습니다. 그 리고 자매에게 기도를 마치도록 했습니다. 물론 그때 그냥 귀신을 쫓아내면 귀신이 나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귀신이 나간 다음에도 이 자매의 영혼 이 용서할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그냥 두면 더욱 악한 것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용서 함으로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이상 용서기도를 못하자 자매는 눈을 감고 땀을 많이 흘리며 헐떡거렸습니다. 온 몸 에 힘이 빠지는 듯 했습니다.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저는 자꾸만 눈을 감으려고 하는 자매를 붙잡고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자매를 격려했습니다. '자매님, 눈을 뜨고 절 보세 요. 힘이 들더라도 기도를 마치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 엄마 아빠와 오빠를 용...'하 는데 이번에는 입술과 혀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습니다. 그 자매의 입이 굳어버리자 제가 다시 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귀신아! 너 손 떼! 너 이 자매 입에서 손 떼!' 사탄이 무서워하는 기도 중에 하나가 바로 용서하는 기도입니다. 용서기도를 하면 틈이 없어지고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용서기도를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 입니다. 자매는 다시 용서하는 기도를 시도합니다. 힘겹게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엄마 아빠, 오빠를 용~서~합니다.' 그야말로 힘겹게 기도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요청했습니다. '잘 했어요, 자매님, 한 번만 더 합시다. 다시 한번 해봅시다.' 그러자 자매가 또 다시 기 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엄마 아빠, 오빠를 용서합니다.' 조금 전보다 더 힘 있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저 역시 다시 한번 명했습니다. '예수이름으로 명한다. 더러운 귀신 아! 나가!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하품하듯이 '하~'하며 귀신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 가 나가고 다 된 줄 알았더니 귀신이 셋이나 더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자매는 그간 수없이 자살을 기도했던 터라 자매의 영혼에 자살의 영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자매에게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제 목숨을 제 마 음대로 하려 했던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주님! 회개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데 주님이 용서 안하시겠습니까?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나면 그 사람은 그 죄에 대 해서 깨끗해집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 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저는 다시 명령했습니다. '귀신아! 너는 이제 있을 곳이 없다. 이 자매는 용서 받았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나가!' 그랬더니 그 때부터 귀신은 꼼짝없이 전부 나갔습니다. 귀신이 모두 나가자 자매 의 얼굴은 몰라 보도록 훤하게 광채가 났습니다. 눈이 반짝 반짝 빛나 보였습니다. 같은 얼굴인데도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뻐지기 원하십니까?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선교사님!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저는 문득문득 음란한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교 회에서도 여자 성도들을 보면서 야하고 추잡한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저도 제 자신에게 말해보지만 그게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기도하 는 것도 힘듭니다. 기도하려고 눈을 감으면 야한 영상이 자꾸만 떠올라 미치겠습니다.' 어떤 형제님이 저에게 이런 문제를 토로했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다 듣고 그 분에게 이 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 그건 형제님의 생각만이 아닙니다.' '예? 무슨 말씀이세 요? 제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데 제 생각이 아니라뇨?' '그렇죠. 형제님 머리 속에서 떠 오르죠. 그런데 형제님, 그건 형제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사탄이 그 생각을 넣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여 말씀하실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귀 또 한 우리에게 생각을 넣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 탄이 넣어주는 생각은 죄의 생각입니다. 음란한 생각, 훔치는 생각, 속이는 생각, 거짓 된 생각, 추한 생각, 더러운 생각을 넣어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을 주 입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생 각하는 이 추하고 더러운 생각, 남자분들의 경우에는 음란하고 야한 생각들 때문에 괴 로워합니다. 이럴때에 대체로 누구를 미워하게 됩니까? 바로 자기 자신을 미워합니다. 이러한 자기 증오는 또 하나의 함정이 되고 맙니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생각을 할까? 이러고도 내가 집사냐! 내가 어떻게 장로냐? 이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나?' 그 러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지할 때 쓸데없이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무지는 사람을 잡습니다. 무지할 때 우리는 당합니다. 무지할 때 우리는 손해를 많이 봅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무 지할 때 우리는 당하고 손해 볼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무지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당합니다. 승리를 맛보지 못합니다. 저 는 그 형제님께 요한복음 13장 2절 말씀을 보여드렸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렇게 사탄은 우리에게 나쁜 생각을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귀는 흔히 만화에서 보 듯 머리에 뾰족한 뿔이 두개 나있거나 화살같은 꼬리가 달렸다거나 삼지창을 들고서 우 리에게 접근해 오지 않습니다. 사탄은 자기정체를 드러내지않습니다. 사탄은 교묘합니 다. 그런 생각이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생각을 조작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형제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제님, 사타은 대개 우리의 약점을 알고 찌릅니 다. 형제님이 지금 이렇게 야하고 음란한 생각을 하는 것도 사탄이 그 약점을 알고 찌르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제님, 혹시 포르노 잡지나 비디오를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형제님은 머리를 북북 긁으면서 멋쩍게 대답합니다. '예, 학교 다닐 때 친구들하고 좀 보고, 그 후로 조금 더 봤습니다..' '네, 귀신은 이런 일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귀신은 그것을 알고 훼방하는 것입 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려고 눈만 감았다 하면 봤던 포르노, 비디오, 잡지의 장면이 떠오 르고 교회에 와서 여자 성도들을 볼때에도 자꾸만 그런 영상이 떠오르게 하는 겁니다. 형제님, 형제님이 보셨던 것들에 관해 주님께 용서를 구하시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이제부터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피합 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 라'(약4:7) 며칠 후에 그 형제님을 만나게 되어 어떠신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형제는 흥 분하며 대답했습니다. '선교사님, 진짜 효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했더니 더러운 생각이 그 자 리에서 끊어지더라고요! 승리를 맛보니 더욱 통쾌합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의 삶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 적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 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마16:17) 교통 정리 하는 경찰을 보십시오. 그 경찰이 아무리 체구가 작더라도 호루라기를 불면서 손을 내 밀면 모든 차들이 멈춥니다. 왜냐하면 모든 차들이 그 신호에 따르도록 그 경찰에게 법 적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귀를 제압하는 권 세를 주셨습니다. 저는 다시 그 집사님께 이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집사님, 이렇게 하십시오. 이 제부터 혼자 있을 때 야한 생각이 떠오르면, 기도하려고 하다가 추한 생각이 떠오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잠잠할지어다라고 명령하십시오.' 명령할 때 큰 목소리를 내 야 귀신이 더 두려워 할까요? 그래서 떠나갑니까? 아닙니다. 큰 목소리에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큰 목소리에 권세가 있다면 우리는 귀신을 쫓을 때마다 확성기를 하나씩 들고 다녀야 합니다. 그러나 권세는 예수님의 이름에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너를 대적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 어떤 분들은 귀신을 쫓을 때 크게 소리를 질러야 능력이 있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아니면 누가 귀신 들렸을 경우, 그 사람을 때리면서 귀신을 쫓아야 된다 고 합니다. 성경에 어느 곳에서도 구타하면서 귀신을 쫓아 내라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심한 경우에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구타로 사람을 죽이는 사건들도 일어났습니다. 무지가 사람을 죽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꾸 가위눌리는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가위 눌리는 사람들의 고백을 들 어보십시오. 눈을 뜨고 있고, 정신도 멀쩡한데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언 가 자기를 누르고 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평균 세 번씩 가위 눌리는 사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끊어질지어다. 주여!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시고 보호하여 주옵소 서'라고 기도하자 더 이상 가위 눌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느 자매님은 이런 체험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혼자 누워 있는데 누가 만 지는 것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고 혼자 누워 있는데 자신의 비밀한 부분을 더 듬는 것 같아 너무나 무섭다고 말합니다. 설겆이를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팔로 쑥 끌어 안는것만 같아 집에 혼자 있기가 두렵다고 고백하는 집사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수작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두렵게 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지하면 속습니다. 특별히 성적인 부분을 만졌다고 말하는 자매의 경우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배경이 있었 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했던 혼전관계가 그 자매의 약점이었습니다. 사탄은 그것을 약점 삼아 그 자매에게 심한 두려움을 심어준 것입니다. 이 자매는 성적으로 문란했던 자신 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런 다음 '더럽고 음란한 귀신아! 떠나갈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지어다'라고 대적했더니 더 이상 그런 일이 반복되 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응어리를 풀라 / 크리스티김 > 마음에 어떤 아픔이 있습니까? 마음에 분노, 실망, 외로움, 슬픔, 답답함이 꽉 차 있을 경우, 문제는 그 상한 감정을 느끼기 싫어진다는 겁니다. 자기가 분노를 느낀다는 것도 지긋지긋하 고,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싫어집니다. 그 느낌이 싫으니까 과거의 아픔을 다루려는 생각조차 도 싫어합니다. 이런 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불륜의 관계를 맺으며, 불 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으신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심지어 사역 자들까지. 안타깝게도 하나님 앞에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는 것 같아도 교회 밖에서 보는 그들 의 삶의 모습은 너무나 부끄러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성적인 죄, 음란함이 있습니다. 결혼했는데도 다른 이성과 은밀히 만납니다. 또는 결혼하기 전에 관계를 갖습니다. 찬양대에 서 봉사하거나 더욱이 리더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감추어진 죄를 반복해서 지으며 하나님 앞 에 부끄러운 행동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척합니다. 왜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까? 상한 마음이 치유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없으면 죄를 즐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치유되면 죄가 싫어집니다. 마음이 허하고 외롭고 힘들면 배도 안 고픈데 자꾸만 먹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먹 는게 죄가 되나요?"라고 하지만 먹는 것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탐식은 죄입니다. 특히 여자 분들의 경우 남편한테 구박받거나 부부싸움하고 난 뒤, 남편 출근한 뒤 배도 안 고픈데 괜히 자꾸만 먹습니다.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나 외로움을 풉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체중이 불어나 고 더욱 울적해집니다. 체중이 늘어난 아내에게 남편이 핀잔합니다. "당신, 자꾸 둥그레진다. 못 봐주겠어. 자꾸 살찌면 이혼감이야." 남편이 이렇게 툭툭 내뱉는 말에 아내는 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시 먹 습니다. 악순환입니다. 저도 예수 믿기 전에(한동안 신앙을 가진 후에도) 마음이 허하고 울적 할 때면 굉장히 먹었습니다. 뷔페식당에 가면 무섭게 먹었습니다. 배가 불러서 트림을 꺽꺽 하면서도 계속 먹었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 먹었던 것이 아닙니다. 공허함과 외로움을 채 우려고 먹었습니다. 환갑이 넘으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신앙의 열심은 있었지만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괴 로워했습니다. 첫째, 현재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와의 관계가 평생 좋지 않았다는 점, 둘째, 옷 의 사치가 심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정적으로 축복해주셨기 때문에 물질로써 주님을 섬기고 싶은데도, 예쁜 옷을 보면 사지 않고는 못 배기기 때문에 옷을 구입하는 데 드는 돈이 엄청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옷장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수많은 옷가지 때문에 방 하나를 옷장으로 사용할 정도입니 다. 교회에서 바자회를 할 때마다 많은 옷을 내놓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계속 옷을 나눠주는데 도 옷을 둘 곳이 모자랍니다. 옷에 너무 많은 돈을 낭비한다는 죄책감에 옷을 그만 사기로 아 무리 다짐하고 결단해도 도무지 속수무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강의를 들은 권사님은 왜 자기에게 이런 문제가 있는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지 묻고 기도하던 중에 주님의 음성을 깨 달았습니다. 주께서 권사님이 태어난 날의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권사님의 어머니는 딸을 넷이나 낳고 창 피해서 더는 못 살겠다면서 갓난아이를 방 한구석으로 밀쳐놓았습니다. 같이 죽겠다고 하면 서 젖도 안 물리고 본인 역시 미역국도 안 먹고 이불을 뒤집어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환상 중에 주님께서 권사님에게 말씀했습니다. 평생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려웠던 것은 태어나자마 자 받은 거절감 때문이라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벽, 거절감의 벽이 어머니와의 사이를 갈라 놓았으니 먼저 거절감의 벽을 허물고 어머니를 용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에는 불현듯 열 살 때의 일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주 예쁜 블라우스를 사다가 셋째 언니에게 입혀주셨습니다. 그 블라우스가 어찌나 예뻐 보 이던지 열 살배기 소녀는 어머니에게 자기도 하나 사달라고 막 떼를 썼는데 어머니는 즉시 "네 언니는 무엇을 입혀놓아도 예쁘지만, 너는 아무리 예쁜 옷을 입혀도 소용 없어!"라며 면박 을 주더니 아예 사주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 같지만 그때부터 권사님 의 마음 가운데 예쁜 옷에 대한 욕심이 자리 잡게 되었고 어른이 되고 재정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니까 무절제하게 옷을 사들이게 된 것입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 니라"라는 야고보서 5장 16절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는 함께 기도했습니다. 먼저 권사님이 넷 째 딸이라고 마다한 어머니, 못생겼다고 박대하던 어머니를 용서하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 런 다음 제가 권사님을 위해 기도해드렸습니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옷에 대한 욕심 과 집착이 끊어지게 해달라고.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권사님은 백화점에 다녀오는 길이라면서 얼굴에 환하게 기쁨을 내비췄 습니다. 양손으로 제 손을 꼭 잡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교사님. 어제 우리가 드린 기도가 정말 효과가 있네요! 혹시나 해서 백화점에 가보았는데 제가 어른이 된 후 난생처음으로 백화점에 들어갔다가 옷을 안 사고 빈손으로 나왔어요! 전에 는 이 옷도 사고 싶고 저 옷도 사고 싶어 못 견디다가 적어도 한 가지 옷은 꼭 사가지고 나왔 는데 오늘은 옷을 봐도 마음이 덤덤하고 사고 싶은 충동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기뻐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누군가와 나누고 함께 기도할 수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그렇게 할 때 놀라운 평강과 기쁨, 자유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의 마음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당신은 외로울 때 무엇을 하십니까? 마음이 상할 때 당신은 어떻게 위로받고자 하 십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5,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세상으로 좇아 온 것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으 면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세상의 것은 세 가지 입니다. 첫째, 육신의 정욕입니다. 무조건 몸에 느낌이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탐하는 죄입니다. 둘째, 안목의 정욕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눈으로 보고 즐기면서 짓는 죄 입니다. 셋째, 이생의 자랑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높이기보다 자기 성취, 자기 자신을 나 타내며 그것에 자기 정체성을 두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자면, 술, 담배, 마약, 혼전관계, 간음, 근친상간, 동성연애, 음란 잡지, 비디오, 영화, 인터넷사이트, 소아성애, 동물과의 섹스, 나이트 클럽, 도박[복권, 로또도 해당됩니다. 땀흘림과 노력 없는 한탕주의는 성경의 교훈에 위배됩니다.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살후3:10)] 탐식, 충동구매, 쇼핑, 싸움 도벽, 자기학대, 잠(현실을 도피하느라 필요 이상으로 자는 것), 컴퓨터, 돈 명예, 권력, 운동, 일 봉사, 학벌, 수집, 애완동물 등이 있습니다. 술, 담배를 비롯하여 탐심, 충동구매 등 먼저 언급된 것들은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시할 때, 거기에 자기 정체성을 둘 때 죄가 됩니다. 컴퓨터부터 애완동물까지 나열된 데는 오해가 없기 바랍니다. 그것 자체가 죄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일이 죄입니 다. 특히 운동, 일, 봉사욕, 학벌욕, 애완동물 등은 우리의 삶 가운데 중요한 것들입니다. 문제 는 이런 것에 중독되거나 하나님보다 더욱 의존하게 될 때입니다. 균형과 우선순위가 중요합 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 마음이 허하고 외로울 때는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서 디스코텍에 가곤 했습니다. 또 그 당시에 '토요일 밤의 열기' (Saturday Night Fever)라는 디스코 영화가 히트 를 쳤습니다. 저는 땀을 흘리며 열심히 춤을 췄습니다. 그렇게 몇몇 친구들과 어울려서 춤을 추면 그 때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숙소에 돌아오면 또 허전하고, 외롭고, 내 자신 이 추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 원망스러웠던 것을 예수님 안에서 회개하고 용서받아 마음이 회복되자 먹는 것도 달라지고 그렇게 좋아하던 춤도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대접을 받 아 뷔페식당에 가도 예전처럼 먹지 않습니다. 먹을 만큼 먹고 수저를 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 님 앞에서 마음이 회복되면서 절제가 생깁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마 음이 변화되자 디스코텍에 가는 일도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돈 주고 가서 추라고 해도 싫습니다. 아마 제 마음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면 디스코텍 근처에만 가도 유혹과 갈등을 느꼈 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 앞에 온 몸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더욱 즐겁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예배들릴 때 저느 찬양 테이프를 틀어놓고 수화로 찬양합니다. 마음이 변하니까 옛 날에 재미있던 것은 재미없어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죄를 미워함 성숙한 사람은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당신의 마 음속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원하십니까?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전에 덧글 달아 주신 분들의 글도 같이 올립니다 (하니) 정말 좋은 말씀이네요.. 주님이 이 글을 통해서 저에게 메세지를 주시는것 같습니다.. ㅠㅠ (붉은 천사) 글의 전반부가 완전히 저를 두고 하는 얘기군요. 그래요 ,저는 천국책을 읽고 과감히 버린것이 참 많답니다. 지금도 버리고자 힘쓰고 있답니다. 감화 감동의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신과 세상의 욕심에끌려 종국에는 믿음까지 잃고 심판날에 주여 주여하지만 배척받는 일이 없도록 이미받은 구원을 잘 지켜야겠지요. (은밀한중에 계신 아...) 아버지가 일하시는 모습을 보니 즐겁내요. 우리는 연약하여 죄짓는일을 거부하기 어려우나 성령님은 우리마음속에 일하셔서 아버지의 뜻이 천국에서 이루어진것 같이 땅에서 특별히 우리의 행위가운데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읽게되어 즐겁고 고맙습니다 예수전도단이 운영하는 열방대학에서 기독교 상담과 내적치유를 가르치는 크리스티김 선교사님의 저서 '인생의 응어리를 풀라'를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고 하나님께 한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었기에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자 본문 중에 몇가지를 발췌하여 올립 니다. "하나님, 그의 마누라가 과부가 되게 해주시고, 그 아이들은 고아가 되게 해주시며, 빌 어먹게 해주시옵소서. 그 집안의 씨를 말려주십시오." 성경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109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가 이런 기도입니다. 다윗은 그 마음에 품은 것을 그대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의 장인인 사울왕은 그의 딸 을 아내로 줬다가 다시 빼앗아서 다른 남자에게 주었습니다. 이때, 어떤 기도가 나올 것 같습니까? 이럴 때 어떻게 기도하시겠느냐고 묻자 어느 장로님은 "주여, 모가지를 비틀 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마음에 있던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토해냈습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원수가 코앞에 있을 때도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마음에 원통함 을 품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솔직하게 주님께 토해냈습니 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마음을 토하고 주님을 피난처로 삼은 다윗을 향해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포장하고 나오지 않 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폼 잡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솔직히 토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용서하지 않는 자가 당하는 영적 피해] 첫째,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지고 죄를 품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죄를 품고 있는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사탄이 무서워하는 기도 중에 하나가 바로 용서하는 기도입니다. 용서기도를 하면 틈이 없어지고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용서기도를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입니다. 셋째,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거부하면서도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생각하다가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넷째, 용서하지 않으면 그런 이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상대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마음에 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익숙해집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사람을 만나면 친근감을 느낍니다.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다보니 만나면서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결혼한 다음에야 깜짝 놀라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어느 겨울 수련회 때 대학생들에게 이 주제를 가지고 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그런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니까 학생들은너나없이 용서기도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얼마나 뜨겁게 기도했는지 모 릅니다. 이미 결혼하셨습니까?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용서하시면 하나 님께서 회복시켜주십니다. 변화시켜 주십니다. 다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과 멀어집니다. 여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을 닮아갈 수 없읍니다. 일곱째, 용서하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여덟째, 용서하지 않으면 몸이 쇠약해집니다. 아홉째, 용서하지 않으면 외롭게 삽니다. 열번째,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에 묶입니다. 열한째,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열두째,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첫째, 용서는 결단입니다. 용서할 마음이 없지만 용서의 결단을 내리고 고백하는 것, 그것은 가식도 위선도 아닌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변화시켜주시고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결단입니다. 둘째, 용서는 과정입니다. 용서는 한번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했는데 그 사람이 또 밉다"라고 말씀하 시는 분이 있습니다. 한번 용서했다고 그 마음이 다 풀어지지 않습니다. 용서는 과정입 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죽을 때까지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셋째, 용서는 은혜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죄사함에 관한 깨달음과 감사가 없거나 있더라도 곧 잊어버리기 때문에 용 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할 때 복을 받습니다. 용서의 과정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용서했다고 하고 즉시 그 사람과 화해하거나 그 사람을 신뢰하며 함께 있어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간혹 상대가 전혀 화해를 원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화해는 상호간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화해하기 원하시어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주셨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 국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화목케 되길 거부한다면 그의 그러한 선 택 또한 용납해야 합니다. 물론 화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만 우리가 그들을 대신하여 결정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용서했다고 그 사람을 즉시 신뢰하거나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고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자매가 사촌오빠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그 뒤 그를 용서했고 진정한 용서의 증거로 그 오빠와 단둘이 두려움 없이 방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가산을 탕진해가며 도박하는 사람을 용서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돈을 요구할 경우 다시 돈을 줘야 합니까? 그것은 어 리석은 일입니다. 또 공금을 횡령했던 직원을 용서했다고 그 즉시 그에게 다시 재정을 맡긴다면 그것도 지혜롭지 못한 결정입니다. 우리가 용서했을지라도 그런 사람을 다시 대할 경우에는 지혜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 잘못된 기준을 주장하거나 불필요한 의무감을 떠안아 본인도 상처받고 상대 로 하여금 또 다시 죄의식에 빠지도록 길을 열어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요즘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어진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의 죄를 아무리 낱낱이 들어내고 내가 받은 상처를 아무리 들추어도.. 하나님은 그저 내가 어떻게 행동하였는가에 대하여만 초점을 맞추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만큼 나도 사랑하지 않았고 그들만큼 나도 상처 주면서 살았다는 것을 왜.. 이제야 깨닫게 된 걸까?.. 단지 그들이 나를 증오했다는 이유로 나도 그들을 사랑치 않고 미워한 것을 죄로 생각하지 못했음을 주님은 깨닫게 하시었다..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내가 죄를 지었다는 것, 악을 악으로 갚았다는 것이, 이제는 주님 앞에 아무런 설득력이 없어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했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대했는가?.. 선으로 대했는가? 악으로 대했는가? 상대가 어떤 사람이었든지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어떻게 했는가? 그들에게 무엇을 했는가? 하는 엄중한 말씀.. 상대방의 죄악을 들추어가며 합리화 시켰던 내 자신이 이제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치유는 하나님께 맡기고 심판도 하나님께 맡기고 이제는 나 자신이 스스로 내 행위를 주님 앞에 돌아보며 회개의 시간을 갖게 된다.. 회개의 시간..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시간에 나는 주님을 다시 만나는 은혜 속에 잠겼다. (4)에 계속
내면의 상처치료(4)
내면의 상처치료(4) 1. 내면이 중요합니다. 1) 사람의 삶의 질은 외적 환경보다는 내면에 의해 결정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 사람들은 외적인 환경을 만들면 삶이 행복해 지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작 그들의 삶의 질은 외적인 부분보다는 내적인 부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2) 내적인 건강이 진정한 건강이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 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 시며”(엡 3:14-16). - 사람들은 외적 건강과 안녕에는 몹시 예민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 만 정작 내면적 건강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건강은 내면적 건강이 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에 관심이 많으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신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 라”(빌 4:7). “주께서 네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 라”(살후 3:5).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경의 모든 것을 다 바꾸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지만, 자녀 인 우리의 삶을 인도하기 위하여 환경이나 외적인 요인보다는 마음을 인도하시고, 생각을 지키시는데 중점을 두신다. 4) 예수님의 사역의 중점은 마음을 고치는데 있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 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은 ‘Preaching, Teaching, Healing’ 이 세 가지의 사역인데, 이 사역의 핵심은 물론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영적으로는 ‘대속’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 구원은 ‘마음을 고치는 것’, 즉 ‘마음에 있는 상처를 고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2. 상처란 무엇인가 ? 1) 상처란 상처 난 감정이다. - 감정에 상처를 받고 그것이 적절하게 해소가 되지 못했을 때 나는 이것을 덮기 위한 방 어기재를 갖게 되고 그것이 나의 감정을 왜곡시키고 뒤틀리게 하며, 원치 않는 증상들이 나 오며, 나의 전 존재를 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2) 상처란 내면의 평강을 빼앗는 것이다. - 상처는 감정에 받는 것이기에 상처받은 사람의 경우 내면에 평강이 없다. 혹시 감정적으 로 무감각해져서 느낌이 없는 쪽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할 수 있는 데, 이것은 평강이라고 말 할 수 없다. 3) 상처는 관계의 장애를 가져온다. -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있는 가장 심각한 현실적 문제는 관계의 장애이다. 상처가 있는 사 람에게 두드러진 특징은 ‘이기적’인 것과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① 하나님과의 관계 장애 : 영적이지 못하거나 건강하지 못한 신앙 ② 자신의 내면과의 관계 장애 : 자학, 자고 등등의 잘못된 자아 인식 ③ 다른 사람과의 관계 장애 :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회피하는 것. 건강하지 못한 관계 ④ 자연과의 관계 장애 : 일이나 건강에 문제가 있음. 4) 상처를 가지고 계속 살게 되면 결국은 ‘생명력(Vitality)’을 잃게 된다. - ‘생명력’은 우리의 삶의 질을 재는 척도인데, 상처는 바로 이 생명력을 감소시킨다. <생명력 = 건강한 삶의 의욕 = 적절한 자존감 = 감동 있는 평강(행복감) = 영적 능력> 3. 상처의 원인들 1) 근원적 원인 : 원죄 모든 인간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잠재적으로). -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 모든 상처를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 그러나 주변 환경의 영향이나 문제로 이 상처가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 치유 방법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거듭남) 2) 간접적인 원인 - 자연적인 주변 환경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세상에 가난과 질병, 그리고 각종 고통이 들어 왔다. 환경적 고통은 그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특히 어린 시절에 더욱 치명적이다. * 치유 방법 : 그 열악한 환경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이 아님을 성령 안에서 깨닫 고, 이 고통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음을 체험하여 아는 것. - 가계에 흐르는 저주(조상의 유전) : 조부나 그 이상의 선대에서 영적이나 반인륜적인 죄를 범한 경우 그것이 그 후손에게 저주 가 되어 내려간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태어난 사람은 상처를 받을 수 있는 환경 가운데 태 어난 것이다. 유전적인 질병이 있어서 그것이 상처가 된다. 원인 모를 열등감이나 정신적 질환, 그리고 각종 중독에 시달릴 수 있다. 그러면서 이것이 상처가 된다. * 치유 방법 ①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결코 숙명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써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 - 성격의 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의 성격이 아닌 다양한 성격으로 만드셨다(시 139:13-14). 이 다양성은 축복이지 결코 저주나 죄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이기심)가 다른 사람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상처를 주고 받 게 되었다. * 치유 방법 ① 성격이 서로 다른 것이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아는 것. ② 나하고 다른 그 성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 것(성령의 역사). 3) 직접적인 원인 - 상처 있는 부모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상처를 주는 것은 상처 있는 부모이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자식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가깝고, 힘이 없는 상태에서 받은 상처는 그대로 깊은 상처가 된다(태아기, 영아기, 유아기, 학령기).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유전적으로 전이되는 상처도 있다. * 치유 방법 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상처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 ② 성령의 능력 가운데 부모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③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은혜체험). - 주변 사람들(형제, 친척, 친구) 우리에게 있는 상처를 가중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나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일 경 우 더욱 그렇다. 비교를 통한 상처를 내게 줄 수 있다. 언어를 통하여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다. 폭력적이거나 폭압적 행동으로 상처를 줄 수 있다. * 치유 방법 ① 그들의 행동이 상처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 나의 상처 때문임을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 배우자, 혹은 자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현실에서 보다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상처 많은 배우자이다. (혹은 자녀이다. 배우자가 상처가 많아서 나의 상처를 불러일으킬 경우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가 훨씬 심각 하게 되어 나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배우자는 때로 치유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지 못할 때는 그만큼 상처 를 많이 받게 된다. * 치유 방법 ① 배우자를 통해 얻으려는 잘못된 기대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② 성령의 능력 가운데 배우자의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이 그를 위한 치유자가 되 어야 한다. ③ 진정한 가족이고 배우자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은혜체험). - 기타 (교회, 직장 동료, 친구, 이웃 등등) 이들은 우리에게 있는 상처를 자극하는 일종의 환경과 같은 것이다. 본질적인 상처의 원인 이 될 수 없다. * 치유 방법 :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한 치유를 경험하고 그들을 용납해야 한다. 4. 상처의 종류들 1) 거절감 - 모든 상처의 출발이다. - 관계의 장애를 가져온다. 2) 굶주림(결핍) - 관계에 장애가 생기면서 오는 상처로서 애정 결핍이다. - 집착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3) 분노 -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오는 상처이다. - 분노에 대하여 억압이 시작되는 데 이것이 계속적으로 내면을 망가뜨린다. 4) 두려움 - 분노가 표출되거나, 혹 내면에서 표출했을 때 두려움이 엄습한다. -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하여 온갖 두려움을 느낀다. * 이러한 상처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자존감(Self-Esteem)’을 낮게 만들고, 이로 인해 다 음의 두 가지 뚜렷한 상처 있는 내면을 갖게 된다. 5) 열등감 -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서 가장 심하게 느끼는 상한 감정이다. 6) 죄책감 -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서 자신을 정죄하며 더욱 자신의 자존감을 끌어내리는 상한 감정이 다. * 상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상처가 다른 상처를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더욱 나쁜 쪽으로 몰고 간다. 5. 상처의 발전 과정 “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 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 여기에서 주님의 복음의 사역이 ‘마음이 상한 자(brokenhearted)’를 고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이 상한 자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① 상한 마음 - 상처받은 모든 감정을 가진 마음들을 말한다. 자각 증세가 있으나 갈등하면서 지내고 있 는 상태를 말한다. - 치유 방법 이 상한 마음에 대하여 잘 정리해 준다(상처의 거품을 제거해 준다). 상처받은 반대쪽의 영향을 주도록 한다. 특히 치유의 능력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지속적으로 덮어주면 치유가 일어난다(to bind up). ② 포로 된 마음 - 상처를 올바르게 해결하지 않고 방어 기제(defence-mechanism)를 사용하여 그 상처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상태이다. - 마귀의 영향을 심하게 받고 있는 상태이며, 각종 집착 등이 나타나고 있다. - 치유 방법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됨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집착에서, 잘못된 자기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움을 선포해야 한다 (to proclaim). ③ 갇힌 마음 - 이미 정서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장애 상태에 와 있는 상태이다. - 심한 우울이나 강박관념 등에 잡혀있을 수 있다(마귀의 영향을 심하게 받을 수 있다). - 영적으로 귀신들림이 있을 수도 있다. - 치유 방법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치유의 빛을 그 내면에 비추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모든 속박을 풀어야 한다(to release from darkness). I. 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인간의영적 문제, 심리적인 마음의 문제를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성경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가는 것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내면적인 상처의 치료이며 영성의 회복이다. 1) 하나님과 나 2) 나와 나 3) 나와 환경 총체적인 인간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 까지이다. 이것은 이미 타락해 버린 우리 마음의 전반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은 뇌와 연결되어 있고 뇌는 컴퓨터와 같은 기억 장치를 가진다. 어떤 특정한 일은 우리 안에 깊은 상처를 내며 우리가 예수님 을 믿은 후 그 상처받은 마음 중에서 의식 속에 감지되는 것은 해결할 수 있으나, 어떤 것은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버려 감지되지 못하기에 치료되지 않고 발병이 시작된 감염 부위처럼 계속적인 영향을 우리의 현재의 삶에 미치기도 한다.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 마음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잡고있는 상처들을 치료하시는 일을 하신다. 이것은 계속적으로 되어져야 하는 과정이나 내적 치유세미나를 통하여 가장 주된 문제가 드러나고 치료가 시작될 수 있도록 돕게 된다. II. 상처받은 마음 상처받은 마음은 외부적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반드시 삶 속에 그 상처로 인한 결과가 나타난 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원인 모르게 화가 나고 우울하며 심난한 상태가 계속된다. 기도를 해보고 Q.T.도 하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사실은 기도하고 Q.T.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다만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다. 만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어서 억지로 살아간다. 몸도 아프고 피곤하다. 2) 반복적으로 짓는 죄(술, 담배, Sex, 오락, 도박 등등에 중독된 것, 남을 험담하고 정죄하는 습관 등) 에서 벗어나올 수 없다. 이제 다시는 안 하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그 결심을 하는 순간에도 나는 결코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3) 늘 무엇인가 나쁜 일이 일어 날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다. 가족이 조금만 늦거나 연락이 안돼도 불길한 생각이 든다. 남들이 다 붙는다는 시험도 나는 안될 것만 같고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지가 않다. 언젠가 내 자신이 만천하에 낱낱이 다 공개 될 것 같은 두려움, 그래서 지금 이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심하다. 4)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바쁘게 나를 몰아간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무슨 큰일이 닥칠 것 같고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 신앙생활도 사실 두려움 때문에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주일을 빠지거나 기도를 조금만 게을리 해도 금방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쉬고 싶지만 조금 만 쉬고 있어도 이내 불안해서 쉴 수가 없다. 5) 예수를 꽤 오래 믿고 열심히 믿었는데도 확신이 없다. 잠깐 잠깐 감동도 있고 기쁨도 있었지만 이내 사라지고 여전히 나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확신 있게 선포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더 깊이 헌신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세상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내가 밉고 신경질 난다. 솔직히 예수 안 믿고 신나게사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잘못된 성격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아픔의 결과이며 죄의 결과이다. 이것은 반드시 치료되어야만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성격은 새롭게되고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 III.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치료하실 수 있는 이유 1) 인간에게는 네 가지 마음의 영역이 있다. - 내가 알고 남도 알 수 있는 부분, - 나만이 알고 남은 모르는 부분, - 나는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아는 부분, 그리고 -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부분이다. 그중 자신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잠재의식의 부분이 인간의 70%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 잠재 의식 속에 성격을 형성하게 만든 뿌리가 들어있다. 그러므로 잘못된 성격과 마음이 온전히 치료되기 위해 서는 잠재 의식속에 자리잡고 있는 상처들의 치료가 필수적이다. 잠재의식의 형성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 영역은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치료하실 수 있다. (시편139) 2) 인간의 잠재 의식 속에는 부모의 여러 영역이 유전 되기도 한다. 이것은 계속 거슬러 올 라가면 인간의 처음 조상인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까지 연결된다. 이러한 문제의 구체적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행(4:12) 3)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잠재 의식 속의 문제를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추론 하고 진단을 내렸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치료이다. 지나간 내 인생의 과거 문제까지를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lV. 내면의 치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하신 가장 중요한 사역은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병든 인간의 마음 (성격) 을 치료하시는 것이었다. 그분은 우리의 내면적인 상처들이 치료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 마 9:12 ~13, 사 53:5, 사 61:1~3) V. 인간이란 무엇인가? 1)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습니까? (살전5:23) 2) 몸(body) :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신 그것 (창 2:7) 동물과 동일한 부분이 많다(창2:19). 3) 영 (spirit) :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호흡 (창 2:7)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통로가 됨 (고전 2:12, 요 6:63) 4) 혼 (soul) : -몸과 혼이 만나면서 생긴 것 (창2:7) - 생령이 된지라 living being 혹은 living soul - 지(知), 정(情), 意 (의), 세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격'이라는 말로 어느 정도 대치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이 '혼' 이다. VI. 상처란 무엇인가? 1) 상처는 원칙적으로 '감정'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심한 감정의 상함을 입었을 때에 그것이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거나, 잘못된 방법으로 처 리되면 (예 :망각 속으로 처리), 그것이 상처로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나는 상처 도 있을 수 있고, 기억은 나지 않으나 어떤 순간에 감정으로 터져 나오는 경우의 상처도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지 않는 것을 미리 상상하여 분노하거나 염려하고 때로 부적절한 감정을 보이고는 당황하게 됩니다. 2) 상처라는 것이 감정에 국한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이란 '통전적(holistic) 존재'이므로 감정에 남아 있는 그 상처가 인간의 전 존재에 심각한 장애로서의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 입니다. --> 지적인 장애, 의지적인 장애, 영적인 장애, 육적인 장애 3) 이 상처들이 우리의 내면에 있을 때 여러 가지 장애들을 일으키는데 특히 관계에 있어서 어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적 치유란 관계 회복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성령의 역 사 가운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4) 상처란 비 신앙인(Non-Christian)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인에게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사역자가 되어서도 상처를 주고받으며 갈등과 괴로움 속에서 허덕일 수 있으며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죄 가운데 빠지기도 합니다. (예: 사도바울, 마틴 루터,고든 맥도날드) 5) 상처는 나름대로 고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더 상처에 민감하며, 그래 서 더 많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상처의 악순환) - 내면적으로 하나의 상처가 다른 상처를 불러일으킴 - 자신의 상처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반응하여 주변에게 상처를 주고 그러므로 본인이다시 상처를 받음 - 주변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어렵게 가져가고 분위기를 힘들게 함 6) 상처란 하나의 세력입니다. 물리적인 상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한번 치유 받았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VII. 상처의 종류들 (아픈 마음의 증상들) 상처의 종류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내면이나 경험을 대입하며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봅시다. 1) 아픈 마음의 증상들 · 거절감 (버림받음) / 창 3:23-24, 욥 6:4 - 모든 상처의 출발 - 거절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아감 - 사람과 깊은 관계를 갖지 못함 - 삶이 점점 폐쇄적이 되어 감 · 결핍 (굶주림) / 창 3:17-19, 암 8:11-13 -무엇엔가 집착하게 됨 (일,사람,물건,쾌락 등등)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지나치게 애씀 -사람을 독점하려 하여 결국 관계를 망가뜨림 -분노가 자주 일어남 · 분노 / 창 4:6-12, 요 12:5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이 된다. -이유 없이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 -화가 한번 나면 통제가 안된다. -속으로 화를 억압하므로 불안감이 늘 느껴진다. · 두려움 / 창 3:10, 4:14 - 우상 숭배에 빠짐 - 약에 집착함 -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불안감 - 문제가 있으면 바로 과거로 회귀 - 결정을 내리지 못함 2) 상처로 변형된 마음 앞에 열거한 여러 가지 증상들 때문에 일그러진 상한 마음이 보이는 증상 · 열등감 / 출 4:13-14, 렘 1:6 - 앞에서 열거한 상한 마음의 증상이 다 나타남 - 자존감(Self-Esteem)이 낮음 / 매사에 자신 없어 함 a. 낮은 자존감은 잠재력을 마비시킨다. b. 낮은 자존감은 꿈과 이상을 파괴시킨다. c. 낮은 자존감은 대인관계를 망가뜨린다. d.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부름 (Calling)을 거부하게 한다. -무책임함 / 일을 중도에 그만두고 도피함 · 죄의식 / 롬7:24, 눅 15:18-21 -불안감 /언젠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완전주의 증상들 / 지나친 희생과 봉사 -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강요 -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생활을 못함 3) 상처의 원인들 · 불행한 가정 환경 문제가 있는 부모, 너무나 무섭기 만한 아버지, 술주정이 심한 아버지, 부모님의 부부싸움 무관심한 부모, 화만 내고 잔소리가 심한 어머니, 부모의 일관성 없는 태도 etc. - 결손된 가정 · 과잉보호 - 과잉보호는 자녀에게서 선택을 통한 자신감을 박탈하고 결국 열등감을 갖게 한다. - 과잉보호는 자녀에 대한 불신감의 표현으로 열등감을 갖게 한다. · 조건적 행위 - 네가 무엇을 해야 내가 이것을 해주겠다는 식의 교육 · 비교 -비교는 강한 거절감의 표현입니다. -비교는 언제나 열등감으로 끝이 납니다. · 원죄처럼 유전되는 상처 - 내리 분노 - 자기 좌절감 : 배변 훈련 VIII. 상처들로 인하여 오는 장애들 1) 인간의 전 존재에 걸쳐 일어나는 장애들 · 육체적인 장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마 4:23-24, 왕상 19:4) - 여러 가지 신체적 질병 마음의 상처가 육체의 신진 대사에 영향을 미치므로 식사 습관, 수면 습관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 무력증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치유를 언제나 내면적 치유와 함께 하셨습니다. (요 5:14) · 인격적인 장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렘 1:6, 삼하 11:1-4, 창 4:5-6, 창 32:7) -정서 불안 (장애) -대인관계 장애/가족 관계 장애 (성적(性的) 장애,자폐성 장애) , 공동체 적응 실패 · 영적 장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삿 11:30-31, 창47:9, 갈4:9) -왜곡된 신앙 / 조건적 신앙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함/구원의 감격이 없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거부 -구원의 확신은 있으나 구원받은 자가 누릴 권리인 `평강(Salom)'을 누리지 못함 2) 인간은 네개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 하나님과의 관계 - 자신의 내면과의 관계 - 이웃과의 관계 - 자연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상처가 장애를 일으키는 영역은 이 네게의 관계 전체 다입니다. a. 상처로 인하여 오는 육체적인 장애는 우리의 어떤 관계를 어렵게 하는 것입니까? b. 상처 때문에 겪는 인격적인 (흔적인) 장애는 우리의 어떤 관계를 어렵게 합니까? c. 영적인 장애는 어떤 관계를 어렵게 합니까? *결국 상처는 "보이지 않는 변화 (소속의 변화)"에서 "보이는 변화 (삶과 인격의 변화)"에로의 전환을 어렵게 합니다. 그러면 이런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습니까? 어떤 공식이나 절차 에 의하여 치유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다만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가능할 뿐입니다. ==================================================================== I. 다음에 나오는 성경의 인물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원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가인은 왜 동생 아벨을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창 4:3-8)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으시지 않은 이유(창 4:7) -거절감의 폭발/거절감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죄의 소원이 있으나 그것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2. 야곱의 이야기 - 야곱은 왜 그렇게 장자권에 집착했습니까? (창 25:27-34) - 야곱은 왜 그렇게 병적으로 라헬만 사랑했습니까? (창 29:11-12, 창 33:2) 그리고 열두 아들 가운데 요셉과 베냐민만 사랑했습니까?(창37:3-4,33-35,42:4) - 야곱은 믿음의 사람이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a. 아버지 이삭과의 관계 (창 27:12) b. 외삼촌이면서 동시에 장인인 라반과의 관계 (창31:51-52) c. 형 에서와의 관계 (창 32:7-8) d. 부인 레아와 자녀들과의 관계(창 29:32; 37:32; 49:3-7) - 야곱이 인생의 말년에 자신의 삶에 대하여 스스로 내린 결론은 무엇입니까? (창 47:9) <이유> a. 경쟁적이고 투쟁적인 삶을 살았다. (속이고 속고) - 굶주린 마음 b. 사람과 깊이 사랑하고 교제하지 못했다. - 표면적으로는 다 좋았으나..., - 열등감 c.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난다는 의식, 즉 일종의 거절감속에 살았다. d. 자기에게는 결국 나쁜 일이 오고야 말것같은 불안감속에 살았다. (창 34:30, 38:30, 42:4) - 죄책감 e. 주변과 자녀들에게 분노를 품고 살았다. (야곱의 유언) 3.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거절한 이유는? (출 2:14,4:13) -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민 20:10, 시 106:32-33) 4. 사울왕 - 처음에 나타난 사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10:22) - 그러나 그것은 열등감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삼상 9:1-2, 9:21). -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사를 드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삼상 13:11) -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열등감은 그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삼상18:7-9) (1) 스스로 자신감을 일고 평강을 잃었습니다. (2) 모든 결정이 그런 열등감에서 나온 부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예 : 딸의 혼사). (3)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점점 어려워져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 딸, 사위, 신 하, 제사장,백성) (4) 다윗을 쫓는데 온 정력을 낭비하고 결국 불레셋에게 전사당함 5.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이유는? (시 51:11) - 다윗은 사랑 받지 못하는 잊혀진 아이였습니다. (삼상 16:11) - 다윗은 형제들에게서도 따돌림받는 아이였습니다. (삼상 17:28) 6. 요나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한 이유는? (욘1:2,4:1,4,8-9) -요나는 분노의 사람이었습니다. 7. 사도 바울이 마가 요한 문제로 바나바와 다툰 이유는? (행전15:37-39,딤후2:4-5) - 바울은 엄격한 아버지와 엄격한 교육 환경 속에서 상처받으며 성장했습니다. (행전22:3) --바울은 분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늘 괴롭히는 완전주의자적 증상이 있습니다. -바울은 내면적인 갈등이 많던 사람입니다.(롬7:24). II. 상처 있는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평강이 없었습니다. 1. 히 11:32-34 - 기드온 : 삿 8:24-27 - 바락: 삿4:8 - 삼손: 삿16:16 -입다: 삿11:35 -다윗: 삼하18:33 -사무엘: 삼상8:5-6 2. 딤후 4:6-8, 9-12, 21 (Q..T) - 6 절 : 삶의 마지막에 서 있는 사도의 입장 - 7- 8 절 : 영적인 확신과 자신감이 넘치는 부분 - 9-12 절 : 다 자신의 주변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외로움이 깊이 배여 있는 부분입 니다. - 21 절 : 내면적으로 추위를 느끼는 상태 III.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은 예배를 통해서 다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 예배를 통한 치유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아봅시다. - 야곱 : 창 28:10-22, 32:22-32 - 모세 : 출 3:5 - 4:17 (참조 민 12:3) - 다윗 : 시 23:1 (참조: 삼상 16:14-23) - 예레미야 : 렘 1:4-10 - 사마리아 여인 : 요 4:3-26 - 사도 바울 : 행전 18:9-11 (참조: 고전 1:23-24, 갈 2:20, 6:14) ==================================================================== <치유부록> I. 내면이 중요합니다. 상처 치유의 첫 단계는 우리의 내면이 외적인 모든 관계를 어렵게 하는원인이 됨을 아는 것입니다. -환경 때문에 힘들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에게서 문제를 찾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못됩니다. - 내면이 평강 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소망이 없이는 모든 관계회복이 불가능합니다. - 모든 상황에서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내면이 중요합니다. (빌4:7,11-13). II. 드러내기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치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상처받은 것이 속에 쓴 뿌리로 남아 있어서는 절대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 감춘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 피해는 어떠합니까? (관계 파괴라는 측면으로 생각해 봅시다) 창 3:8-10 창 3:7,16 창 4:7,9 요일 1:8 요 3:19-20 마 23:27 *'감추기'는 가장 일반적이고 강력한 '방어 기재(Defence Mechanism)' 입니다. 2. 십자가는 상처의 표출입니다. - 십자가는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추함의 상징이다 (고전1:23). - 십자가를 쳐다보아야 산다 (요 3:14) (민 21:8-9). 3.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이 십자가를 통한 드러냄을 현재 내게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 16:8) 4.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새로운 몸은 영,혼,육 전 존재가 다 새로워지는 것이며, 이 구원의 순간에 엄청난 치유가 우리도 모르는 순간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치유) 이 치유의 내용을 좀더 살펴봅시다. A. 십자가가 모든 방어 기재를 무너뜨린다. -버림받은 마음 : 가장 지독한 버림받음 (사53:3, 갈 3:13)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굶주린 마음 : 모든 사람에게 빼앗기고 탈취 당함 (마 27:35, 요 13:1,4, 마 26:26-28) (내가 목마르다) -분노하는 마음 : 십자가는 가장 강한 자기 부정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한 상대방 에 대한 인정이다. -주님은 모든 자의 분노의 표출을 다 받아 주셨다. -십자가는 폭력에 대한 비폭력 대응이다.(마 27:1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나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십자가는 전통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선언이다.(갈5:1, 마27:51) -열등감 :십자가는 가장 낮은 위치이다. 그리고 인간의 인위적 노력에 대한 부정 이다. (고전 1:22-29) -죄의식: 죄의 모습과 비참함을 적나라하게 보이면서도 죄의 권세를 무력하게 함. (롬6:6) (네가 오늘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 B. 상처난 감정을 보혈로 감싼다.(엡 2:13, 히 9:7-22, 계 7:14) C. 상처난 몸이 죽고 깨끗한 몸으로 부활한다. - 강력한 치유의 경험으로써 '원죄'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사건임 (롬 6:6-11) 5. 구원 받을 때 치유되지 못한 부분들은 계속 치유를 받아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배를 통한 치유입니다. A. 예배란 무엇인가 ? -구약에서 'abedah' 라는 말로서 '섬김' 이라는 뜻인데 이는 '종' 이라는 뜻의 'ebed'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의 종은 노예가 아니라 주인 에게 있어서는 자녀와 같은 친밀한 존재라는 사실은 주목해야 합니다. -신약에서 'proskuneo'라는말로서 '- - 에게 입맞추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 는데 존경과 친밀감을 가지고 엎드리어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관계 회복이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인간의 전 존재가 창조의 질서로 돌아가 는 체험인 것입니다. 흙으로 되어진 몸에 하나님의 호 흡이 임하여 생령이 되던 그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가장 강력한 치유의 순간이며, 회복의 기회입니다. 인간이 맺고 있는 네개의 관계는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이 하나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의해 파괴되기도 하고 회복되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이후로 자신에 대하여 스 스로 수치와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과의 관계 파괴를 경험하고 (창 3:10 ), 그 다음 이웃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창 3:7,12),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된 사실(창 3:18)만 보아도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예배는 치유와 관계 회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B. 예배를 통한 치유의 과정은 어떠합니까 ? - 말4:2 - 사 11:6-9 상처란 심하게 상한 감정의 흔적입니다. 그모든 관계를 어렵게 하는 쓴 뿌리입니다. 이런 상처가 왜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요? 것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있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몇 가지가 되지 않고는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없이는 상처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2. 상처받던 그 순간의 감정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치유가 어렵습니다. 3. 드러남이 없이는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4. 드러날 뿐 아니라 보혈로 덮지 않고는 치유가 어렵습니다. 5. 구원의 감격을 늘 새롭게 경험하지 않고는 완전한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 전심을 다해 도움을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고 우리는 구원받은 감격과 생명의 능력 가운데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뛸 것입니다. 이 글은 평안공주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카를로스 아나콘디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은혜출판사, 244~246p- 나의 어린시절은 매우 가혹한 고통을 당하곤 했습니다. 사춘기 시절에 남편 을 만나서 겨우 행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역시 고통스럽게 지냈습니다. 두 사람이 가정을 꾸리고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지만 과거에 내 마음 속에 깊이 심어졌던 증오심과 원한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돈이 나의 마음 속의 진실을 숨겨주리라 생각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딸에게서 남편이 직장동료인 젊은 여자아이와 불륜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증오심이 더욱더 커져서 어 떻게 남편을 죽일까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부엌칼이나 면도칼, 권총 이라도 사용하여 남편을 죽이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남편의 몸에는 그 상처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온 마음은 증오심에 사로 잡혀 있었고, 우울증 상태로까지 악화되어 갔습니 다. 체중은 15킬로그램이 줄었고, 거식증에 걸려 버렸습니다. 보통의 일상생활 을 영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고, 침대 위에 누워서만 생활하는 지경에까 지 이르러 아이들의 도움 없이는 화장실에도 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자살 욕구가 너무 심해서 혼자 있으면 자살을 시도하곤 했지 때문에 반드시 누군가가 곁에 있었습니다. 달리고 있는 자동차를 향해 몸을 던지기도 하고, 철길에서도 자살을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가 미수로 그치고, 그때마다 발각되 어 집으로 데려와 졌습니다. 식사도 하지 않고 정상적 수면도 취하지 않아서 신체의 모든 기관이 부조화에 빠지고 쇠약해 갔습니다. 그 결과 반신불수가 되 어 얼굴 전체와 신체의 우측 절반이 비틀어져 버렸습니다. 의사에게 진찰을 받 아보자 진단은 "편집정신분열증" 이라고 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 다. 어느 날 라디오를 듣던 중 나의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카를로스 아나 콘디아 형제가 치유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방송으로 듣 게 되었습니다. 그 전도집회에 가기로 마음먹고 병원 관계자를 어렵게 따돌리 고 온갖 노력을 다하여 집회장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나의 상태가 너무나도 심 하고, 한심스러웠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안내 봉사자들은 나를 곧 바로 카운 셀링을 위한 곳으로 데려 갔으며 그곳에서 카운셀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거의 광란의 상태여으며 시선은 초점이 없었고 눈을 크게 뜨고 한 쪽만 멍하니 바라보곤 했습니다. 아나콘디아 형제가 나를 위해 기도했을 때 반 신불수상태였던 몸의 우측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도 잘라 찢어내는 듯한 예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뭔가 무거 운 것이 어깨에서 떠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 기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수초동안 나의 몸은 공중에 떠 있엇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 해방의 사역이 행하여지는 천막 안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도록 카운슬러로부터 권유받았지만, 나는 그것을 거부해 버렸습니다. 그 후 아나콘디아 형제가 나를 위해 개인적으로 기도하기 위해 와서 나의 손 을 잡고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용서와 평안이 없으면, 이제부터 당신이 무엇을 해도 도움과 해결이 되지 못합니다." 라고. 그 순간 예수님께서 계신 것을 느끼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케 되기 위해 지금까지 증오해 온 남편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용서하기로 작정하고 그대로 했더니 즉시 몸이 치유되었습니다. 반신불수였 던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고 출혈도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휘어져 있던 등뼈 도 펴지게 되었고 신장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기관들도 정상적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날 이후, 모든 것을 진심으로 주님께 양도해 드리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 니다. 남편은 주 예수님을 만나고 이제는 부부가 함께 교회에서 소그룹의 리더 로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최근 남편과 불륜 관계에 있던 젊은 여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회개하고 현재는 다른 교 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 베아트리스- <거절감> 1. 거절감(rejection)이란 무엇인가 ? 1) 거절감이란 과거에 거절 받은 아픈 감정이 부적절하게 작용하는 마음이다. 과거 부당하게 거절당하거나 버림받은 경험이 감정의 형태로 속에 남아 있어서 유사한 상황 이나 혹은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부적절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거절감이다. 2) 모든 상처의 출발은 이 거절감인 경우가 많다. 거절감은 상한 마음이 되는 첫 출발이다. 어떤 형태든지 감당할 수 없는 거절이나 버림받음 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내면의 상처가 되면서 다른 상처를 불러일으킨다. 3)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더 쉽게 거절을 느끼고 그로 인해 더 많은 거절감에 시달린다. 상처가 나름대로 악순환하는 이유는 이 거절감 때문이다. 상한 마음의 소유자는 더 많은 거 절감을 느끼고 그것이 더 심한 상한 마음의 상태로 몰아가게 된다. 2. 거절감을 갖게 되는 원인들 1) 원죄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이 거절감의 시작이다(창 3:23-24). -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거절당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지만, 인간은 거절당했다는 자체만으로 거절감을 느낀다. - 어린 시절부터 모든 인간은 소외되고 버림받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 - 부모가 거절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 자녀에게 유전된다. 2) 경쟁적인 환경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우리에게 시작된 것이 경쟁이고, 이 경쟁은 모든 사람에게 거절감 을 안겨 주었다. - 형제간의 경쟁과 따돌림, 부모의 편애가 거절감을 갖게 한다. - 사회에서의 경쟁이 거절감을 갖게 한다(경쟁에서 이기든 지든지 관계없이 경쟁 자체가 거 절감을 갖게 한다). 3) 상처(거절감)를 가지고 있는 부모 부모는 자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있든지, 없든지). 그러므로 상처가 있는 부모는 자 녀에게 거절감을 줄 수 있다. ① 원하지 않는 임신과 남녀 차별 - 태중의 거절감과 출생시의 거절감. ② 부모의 부적절한 거절 -일관성 없는 행동 / 지나치게 권위적인 아버지, 지나치게 신경질 적인 어머니 ③ 부모의 잘못된 배변 훈련 ④ 부모의 과잉보호 ⑤ 부모의 편애(편애를 받는 쪽이나 받지 못하는 쪽 모두 다 거절감을 가질 수 있다. ) ⑥ 부모의 조건적인 태도 - ‘하면’ 보다는 언제나 ‘하지 못하면’이 더욱 깊은 상처를 준다. * 부모와의 이별은 자녀에게 깊은 거절감을 준다(사별, 이혼에 의한 헤어짐, 환경적인 헤어 짐, 등등). 4) 주변 사람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절을 했을 때 우리는 심한 거절감에 시달리게 되고 상처 를 입는다. - 이 경우에 대부분은 원죄와 어린 시절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거절감이 심하게 다시 느껴 지는 것이다. - 거절감 가운데 가장 심한 거절감은 배신감이다. 3. 거절감의 증상들 *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벽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내면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마음의 벽이 다(개성, 자아). 사람들은 이것을 의지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마음의 벽이 하나님 의 다림줄로 재어 보면 많이 기울어져 있어서 어느 날 무너지기도 하고, 또 그것에 의해 삐 뚤어진 반응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암 7:7-9). 이 삐뚤어진 마음의 벽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파괴하기 위하여 숨어서 노리고 있 는 가장 위험한 곳이며, 이것은 마치 집안에 벽에 손을 대었다가 뱀에 물리는 것과 같은 것 이다(암 5:19). * 이렇게 우리의 마음의 벽이 삐뚤어진 이유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권위의 존재 (Authority Figure)가 잘못된 영향을 우리에게 주고 바르지 못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유아기) 잘못 되어진 이 관계는 그의 평생을 힘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겔 18:2). →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권위의 인물로는 누가 해당되겠습니까? <거절/Rejection> 1. 감정적인 경우(Emotional) 1) 슬픔 - 슬픈 상태가 반복적이고 돌발적으로 나타남 - 슬픔은 누적된 거절감에서 오는 아픔을 대치한 감정이다. - 슬픔은 일종의 감정의 순환기능 장애이다. 2) 자기 연민(Self-Pity) - 자기 연민은 나쁜 습관이면서 동시에 죄이다. - 거절을 경험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나 도망치는 하나의 방어기재이다. - 타인을 조작하여 스스로 자기 연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든다. 3) 자기 증오(Self-Hatred) - 타인에게 거절당한 상처 때문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거절하는 것이다. - 또 다른 거절감을 맛보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이다. -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자신을 포함해서 자기와 연관된 모든 것을 증오한다. 4) 실의(Depression) - 사회적인 활동에서 움츠러들면서 모든 관계에서 스스로 단절된다. - 모든 것이 슬프고 희망이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우울한 사고만을 한다. - 죄의식, 자기 비하, 자기 평가 절하 등이 나타난다. - 때때로 불면증이 나타나며 의욕이 상실된 상태가 지속된다. 5) 무관심 - ‘정열이 없이 존재함, 정신적인 나태함, 또는 감정의 부재’라고 표현될 수 있다. - 거절과 실패의 기억 때문에 나타난 일종의 방어 기제이다. 2. 지적인 면(Mind) 1) 열등의식 - 삶의 현장에서 여러 번 거절당한 상처는 지적인 영역에서 스스로를 열등하게 인정하게 한다. - 자기가 열등한 여러 가지 이유들을 늘 수집해 쌓는다. - 열등의식은 이러한 상태가 오래 방치되면서 굳어진 상태이다. 2) 불안정 - 사랑의 결핍과 어린 시절에 경험하는 거절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이다. - 한곳이나 하나의 사고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고의 방황상태이다. 3) 실패 의식 - 권위 있는 부모나 교사 등으로부터 지속적인 무가치한 대접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것이 다. -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로 강박관념에 잡히게 된다. -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고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4) 죄의식 - 내면이 상처로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경고등이다. - 어떤 기준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한 경험이 누적되면서 나타난 내면의 상태이다. - 심한 자책감에 시달릴 때가 많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죄의식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3. 영적인 면(Spiritual) 1) 침침함, 죽어감, 꺼짐 - 영적인 부분에 대하여 스스로 관심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 반복적인 거절감의 상처가 자기 존재 속에서, 특히 영적인 면에서 문제를 일으키면서 하 나님과 단절을 해 나가는 과정이다. 2) 낙심 - 신앙생활 가운데 자주 낙심을 하는 것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영적 장애이 다. - 영적 생활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간헐적으로 계속되는 장애이다. 3) 실망 - 영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버림받은 자로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 영적인 패배상태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이다. (5)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