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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에 관한 설교(20) 효친에 관한 설교(1) 후대에 관한 설교(12) 후손에 관한 설교(36)
후예에 관한 설교(2) 후회에 관한 설교(1) 훈계에 관한 설교(1) 훈련에 관한 설교(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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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락에 관한 설교(6) 희망에 관한 설교(343) 희생에 관한 설교(68) 힘에 관한 설교(4)
10년 후 한국교회/ 마28:18-20/ 오정호 목사/ 대전 새로남교회/ 2009-08-11
10년 후 한국교회 마28:18-20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건강한 교회상 정립을 위해 고민하는 크리스천들이 한국교회가 10년 후 해야 할 일을 발표했습니다. 첫째, 인구 감소 현상 가운데 차세대 교육 문제였습니다. 둘째,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령 사회에서의 노인 목회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목회와신학 2009년 7월호). 통찰력 있는 예견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러한 일들은 교회의 본질을 세우는 일들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 이웃은 교회 외형이나 현수막을 크게 내걸고 모이는 운동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외적 소리가 클수록 \\\'너희들만의 잔치\\\'로 간주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10년 후를 진정 고민한다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 안에서 신앙의 세대 계승이 이뤄지고, 밖으로 이웃을 돌보고 섬길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위에 먼저 복종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때 세상은 우리를 다시 주목할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한국교회가 과연 그리스도의 통치에 온전하게 복종하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한국교회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듣고 보면서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현장이라고 생각할 리가 없습니다. 먼저 크리스천들이 주님을 마음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잠재적 크리스천인 이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호감을 가질 리 만무합니다. 내일의 한국교회는 오늘 성도들의 의식과 삶을 움직이는 근본 가치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의식화와 생활화를 이루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집중됩니다. 건물 재정 제도는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한국교회는 가치관이 변화된 사람을 사회에 내놓아야 합니다. 사람 만들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속성 과정도 없습니다. 쉬운 길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정도란 제자 훈련입니다. 제자는 그의 의식과 삶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에 의해 형성된 존재입니다. 제자는 주님 말씀의 작품이며 동시에 성령님의 작품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교회와 가정, 그리고 직장에서 전천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갑니다. 한국교회가 주님의 제자를 훈련해 사회 속으로 파송하는 일은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교회의 전공필수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장로, 권사, 집사 등 직분자 배출에는 많은 성과를 냈지만 제자 배출에는 소홀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교회와 확실하게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동행을 체험하면서 사는 성도는 내일 동일하게 함께하시는 주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함께 손잡고 개교회의 벽, 교단의 벽을 뛰어넘어 삶으로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나는 걸어다니는 한국교회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소원합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교회의 유일한 통치자이신 주님께서 지금도 참된 제자를 찾고 계십니다. 누가 주님의 엄위한 부르심에 온몸을 던져 응답하겠습니까?
10일간의 환난/ 계2:8-11/ 2012-03-23
10일간의 환난 계2:8-11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8∼11) 10절에서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흘 동안 서머나 교회가 핍박을 받을것이라고 했는데 이 열흘은 짧은 기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10일간의 시간은 실제 역사를 통해 볼 때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어마어마한 환난과 박해를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는 로마의 10대(代)에 이르는 황제들이 교회를 무섭게 핍박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열 명의 황제들로부터 핍박받는 역사를 대략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핍박자는 유명한 네로 황제입니다. 주후 37∼68년까지 통치한 그는 많은 교인을 투옥하고 처형시켰습니다. 네로 황제 핍박 때에 교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두 지도자, 즉 유대인을 중심으로 전도한 베드로와 이방인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한 바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번째 핍박은 주후 81년부터 96년 사이에 자칭 ‘주피터 신’이라는 도미시안 황제였고, 세번째 핍박은 주후 98년부터 117년까지 20년 가까이 신앙을 불법화하고 핍박한 트라얀 황제였습니다. 네번째 환난은 주후 161년∼180년 왕위에 있었던 오렐리우스 황제, 이어 셉티머스 세브러스 황제(주후 202∼211년), 맥시머스 황제(주후 235년∼237년), 데시우스 황제(주후 249∼253년), 발레리안 황제(주후 257∼260년), 오렐리안 황제(주후 270∼275년)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박해자는 주후 303∼312년에 통치한 디오클레시안 황제였습니다. 그는 모든 성경을 압수해 교회와 함께 불태웠습니다. 그는 ‘기독교 박멸 성공 기념비’까지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뒤 25년 만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되었습니다. 기독교 말살정책에도 기독교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본 서머나 교회로써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는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셈입니다. 별로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물론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던 그 때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겠습니까. 그러나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 비하면 고난의 시간은 짧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영광의 날이 곧 옵니다.
12제자 (제자로서의 확신이 없는 자)/ 마 10:1-8
12제자 (제자로서의 확신이 없는 자)/ 마 10:1-8 2004-01-06 19:12:34 read : 8 예수님께서 공생활에 들어가면서 제자를 뽑으셨다. 1. 평범한 사람을 불러 세우셨다. 부자나 학자나 문벌 좋은 사람이 아니고 평범한 인간이다. 세우는 까닭은? 1) 약자를 택하여 강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 2) 자기 지혜를 의지 않고 하나님 능력만 의지하기 위함이다. 3) 아무도 자기 지혜를 하나님 앞에서 자랑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2. 12제자를 세웠다. 막 3:14 원문의 뜻은 임명했다. 이다. 제자를 임명했다. 1) 주님 앞에서 임명받은 것은 큰 영광이다. 2) 배우는 자를 선택 임명한 것이다. 제자의 뜻은 배운다는 뜻이다. 무엇을 배우는가? 인격, 생활, 말씀을 배운다. 3) 임명 선택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다(막 3:14) 참 제자라면 예수님을 항상 모시고 함께 있어야 한다. 3. 제자를 사도라 불렀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는 전권대사란 말이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 제자들이다. 누구의 문하생인가 제자는 선생님의 사상과 생활 그리고 목적이 같다. 그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
12제자 강해/ 희생적 결단을 내린 제자, 마태/ 눅5:27-32/ 오길남 목사/ 2005-06-05
12제자 강해/ 희생적 결단을 내린 제자, 마태 눅5:27-32 1)이름과 배경 마태복음을 읽어보면 마태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기록한 반면 마가,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그를 레위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막 2:14)” 레위는 구약의 제사장 지파를 말씀한다. 마태는 레위 지파의 후손이었다. 마태의 부모는 새롭게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과거 레위 족속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은 바램을 아들에게 가졌다. ‘너는 커서 훌륭한 제사장이 되어라’ 이런 바램 때문에 레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마태의 본 이름은 레위였다. 마태라는 이름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새 이름이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마태는 가버나움 출신이다. 예수님은 가장 많은 사역을 여기 가버나움에서 행하셨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얻지 못하셨다. 그많은 기적을 목격하고, 예수님의 교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가장 냉담했던 마을이 가버나움이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3-24)” 예수님께 대하여 지극히 냉담하고 배타적이었던 가버나움에 아주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마태였다. 마태의 아버지는 제사장이 되라는 의미로 레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런데 그는 제사장이 되기는 커녕 세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로 연결시킬 가능성이 상당히 짙다. 그 이유는 세리는 아무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리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도 계산을 잘해야 하며, 장부를 만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실 그 당시 세리가 되기 위한 사람은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 당시 로마 정부에 고용되어 관리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언어는 적어도 필수적이었다. 그 당시 제일 유행하던 말인 아람어와, 헬라어, 그리고 히브리어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라틴어까지 요구했다. 네 가지 언어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면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어야만 가능했다는 증거이다. 마태는 레위 지파의 배경을 타고, 아버지의 그런 바램 속에서 자랐다면, 틀림없이 제사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교육을 받은 마태는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세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는 그 당시 사회 속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많은 미움을 받고 사는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정치적인 이유이다. 세리는 로마의 녹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러므로 로마 정부의 관리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이 사람들은 친로마 적 경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은 대다수의 이스라엘 민중들에 의해 매국노로 배척을 받았다. 둘째로 세리들은 대부분 부정직했다. 과중한 세금으로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 세리들은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일부만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로는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웠다. 마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은 그의 직업이 가장 배척받는 세리였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는 죄인과 창기와 세리를 하나로 묶어서 취급하였다. 이런 삶의 배경을 가진 마태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7-28)” 이 말씀 속에서는 마태를 레위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라는 이름을 기록한 것은 마태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 밖에 없다. 마태는 자신의 이름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받은 새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불러오던 옛 이름에 익숙해져 있었던 까닭에 “레위”라고 불렀던 것이다. 레위를 부르실 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 안하시고 다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 5:29,30)” 마태는 예수님을 좇게 된 사실이 기뻐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는 마태의 동료인 다른 세리들도 함께 동석하였다. 이때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렀다. 마태가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따라나서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예수님은 특별한 목적으로 당신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오신다. 그리고 당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도록 요청하신다. 당신은 마태처럼 따라 나설 수 있는가 마태는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가기로 결단한 그날 마태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아가면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감격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쁨을 잔치로 표현했다. C.S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잔치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를 사망에서 구원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기쁨! 그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시작되었다. 오천 명을 먹이던 그 자리도 사실은 잔치자리였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제자들과 이별을 하면서도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재림하실 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만나게 될 때에도,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열릴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한마디로 잔치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 현대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을 다시 읽고 공부하면서 “예배는 축제이며 잔치이다”라고 정의 하였다. 전통적인 의미없고, 내용없고, 생명없는, 일종의 형식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정말 춤추고 노래하는 잔치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제자들이 함께 어울렸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을 중심으로 그 말씀을 즐기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다. 예배에 있어 형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형식은 반드시 생명의 환희가 차고 넘치는 잔치여야만 한다. 우리가 마태를 통해 배워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마태는 세리였는데 이 세리를 제자의 하나로 받아들인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세리에 대하여 두 가지 태도를 보였다. 그 당시에 민중을 착취하고, 자기의 배를 채우고 있는 세리들을 예수님은 무섭게 책망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세리들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책망하신 것이다. 세리라는 그 인간, 그들이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인간을 주님은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세리를 사랑하셨다. 그들과 함께 앉으셨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으셨다. 2)생애와 죽음 성경에는 마태가 부름을 받은 다음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한마디도 없다.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마태복음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마태는 유대 역사에 정통했던 사람이었다. “구약성경이 이렇게 성취되었다”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 마태복음이다. 마태는 어떻게 유대의 역사에 관해서 그렇게 잘 알 수 있었을까 그는 제사장 집안에 태어나 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육신의 안일과 평안을 좇아 부모의 바램과는 반대로 로마의 앞잡이 세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바꾸어 위대한 복음서를 쓰게하셨다. 마태복음을 읽어 보면, 이것은 철저히 유대 역사를 분석하면서, 거기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신 역사를 가장 정교하게, 날카로운 필치로, 그리고 영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 한다.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사용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에디오피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애굽으로 가던 길에 핍박자들을 만나 창에 찔려 거기서 죽음을 당했다. 마태는 자신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주님을 위하여 이와 같은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3)교훈과 문제 제기 마태는 위대한 신앙적 결단을 내린 사람이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위하여 희생적 결단을 내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확신하여야 한다. 죠지 베브리 쉐아(G.b Shea)는 시카고 방송국의 프로그램 편성자였다. 그는 어려서 부터 예수를 믿었었는데 인기가 높아지자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얻고자했던 모든 것을 얻었다. 그러나 마음은 쓸쓸해지고 공허하기만 했다. 그는 어느날 시카고의 한 운동장에서 젊은 전도자 빌리 그래함이 열고 있는 전도집회에 참석하였다. 그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주님 앞에 일평생을 바치기로 헌신하였다. 집에 돌아와 얼마전 예수 믿는 어머니 친구가 작곡해보라고 주었던 가사에 곡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때 방송국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다시 전속 계약을 하면 지금까지 받았던 금액의 배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정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미안하지만 오늘밤 저는 제 목소리를 주님 앞에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제 목소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 질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아름다운 멜로다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곡을 완성시켰다. 그 곡의 가사는 이러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 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2004년 우리의 희망/ 빌2:12-18, 시37:4-6/ 신년축복주일설교/ 2004-01-04
2004년 우리의 희망 빌2:12-18, 시37:4-6 한 부부가 차를 타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길 건너 수풀 속에서 두꺼비 한 마리가 갑자기 뛰어나왔습니다. 운전하던 남편은 두꺼비를 치어 죽이기 바로 직전에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다행히 두꺼비는 죽이지 않았지만, 옆자리에 타고 있던 아내가 자동차 앞 유리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이마에 부풀어오른 커다란 혹을 쓰다듬으며 \\\\\\\"그까짓 두꺼비가 뭐가 중요하다고 급브레이크를 밟아 사람을 다치게 하느냐\\\\\\\"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차 밖으로 나온 부부는 그 두꺼비가 보통 두꺼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꺼비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구해 주신 답례로 세 가지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에 부부는 너무 기뻤지만, 서로 바라고 탐나는 게 너무 많아서 부부는 세 가지 소원을 쉽게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예배 마치고 집에 돌아가셔서 우리에게 세 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하면 무엇을 말할 것인지 한 번 상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싸우지 마시고요.> 차를 길옆에 세워 놓고 모의에 들어간 부부는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지만 도저히 의견일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한 가지 소원을 말하면 부인은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바람에 의견일치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한참을 티격태격 말다툼을 한 후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 번째 소원은 우리 둘이 다 원하는 것으로 하고, 그 다음은 각자 한 가지씩 이야기하자.\\\\\\\" 그래서 3가지 소원을 말하기로 했습니다. 부부의 공통된 소원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돈\\\\\\\'이었습니다.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돈을 달라\\\\\\\'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두꺼비는 그들에게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궐 같은 저택에서,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손 하나만 까딱 해도 온갖 시중을 들어주는 하인들을 거느리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날마다 호의호식하며 꿈같은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부부가 각자 하나씩 소원을 말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먼저 부인이 두꺼비의 귀에 대고 조용한 말로 이렇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두꺼비님, 제 소원은 젊은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돼지처럼 먹고 놀고 지내는 저 남편이 죽고 근사한 남자를 만나 재혼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두꺼비 귀에 대로 이렇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두꺼비님, 제 소원은 매일 앙알거리며 잔소리만 하는 마누라가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부부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소원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소원이 있다는 것은 바램이 있다는 것이고, 바램이 있다는 것은 희망찬 내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소원을 가지면 우리 인생은 희망이 아닌 절망으로, 행복이 아닌 불행으로 끝을 맺고 맙니다. 오늘은 2004년도에 첫 번째 맞는 주일입니다. 첫 번째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교회의 소원을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 각자에게도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소원/소망이 없다는 것은 숨은 쉬고 있을지 몰라도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엊그제 1월 1일에 2004년 처음 떠오르는 새해를 보기 위해서 예나와 함께 바닷가에 나가보았습니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린 후에 새벽기도회가 없었기에 예나를 깨워서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해돋이의 멋진 장면을 찍어보겠다고 이 앞 바닷가에 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구름이 너무 많이 끼어서 새해의 첫 해돋이를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름이 많이 끼었는데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찬바람이 부는 바닷가에 나와서 새 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거기 나온 모든 사람이 마음 속에 바라는 소원을 가지고 거기에 나왔을 것입니다. 해변도로에 세워진 차들을 보니까 전국 각지에서 온 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비록 지난 한 해는 힘들었다 하더라도 새해에는 소원하는 바대로 뭔가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들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찾아왔을 것입니다. 저는 2004년을 준비하면서 소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2004년도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루실 계획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교회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때에는 언제나 우리 안에 소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는 거룩한 소망을 가지게 만드십니다. 성경에서 \\\\\\\'소원\\\\\\\'이라는 말을 나타내는 단어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블로마이(Boulomai)\\\\\\\"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요소가 강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언가를 심사숙고한 결과 가지게 되는 바램입니다. 또 하나는 \\\\\\\"텔로(Thelo)\\\\\\\"라는 단어입니다. \\\\\\\'텔로\\\\\\\'라는 말은 체질적인 성향으로 자연 발생적인 소원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뭔가 이성적으로 생각한 결과 얻어진 마음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소원을 말합니다. 이 소원은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뭔가를 심사숙고한 결과 얻어지는 소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향하여 갖게 되는 소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식구들이 우리 교회를 향한 소원을 가지는데, 저와 같은 소원을 가지고 2004년 한 해를 열어 가셨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합니다. 우리 교회를 행해서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 속에 주신 소원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그게 우리 교회가 2004년도에 가진 꿈이요 희망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원이라는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첫 번째로 영혼 구원하는 일에 열심을 품고, 우리 모든 식구들이 한 사람이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지난 6년 동안 교회를 섬겨오면서 가장 마음이 아픈 것 가운데 하나가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에는 전도하는 일에 열심 했으면 합니다. 지난 송구영신예배 때에 말씀카드를 나눠드렸고, 거기에 전도대상자의 이름을 적으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 적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거기에 적은 그 분을 올해에는 꼭 전도하리라는 다짐을 하시고,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올 한해 동안에 한 명씩은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한 명입니다. 더 많은 분들을 전도해도 좋습니다. 아직 당회에서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올해는 전도 많이 하신 분들에게 특별한 상을 줄 생각입니다. 교회 재정이 안 된다면 제가 개인적으로 마련해서라도 드리겠습니다. 시시한 것이 아니라 좀 푸짐한 것으로 드리겠습니다. - 연말까지 5명 이상 전도하신 분에게는 세탁기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 3명 이상 전도하신 분에게는 3돈 짜리 금목걸이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선물을 내걸고 전도를 하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가 너무 전도하는 데에 열심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도의 열기를 가속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라도 하겠습니다. 아마 더 큰 상급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다니엘 12장에서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여러분이 전도할 수 있도록 지원도 하겠습니다. 전도용품도 좋은 것으로 준비해 놓을 것입니다. 또 필요에 따라서 쓸 수 있도록 전도엽서나 카드도 마련해 놓겠습니다. 도저히 시간이 없어서 엽서나 카드를 보낼 수 없는 분들은 저에게 부탁을 하시면 제가 대신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전도하기 위해서 어떤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 가능한 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전도하시면서 꼭 한 가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서 \\\\\\\'저 사람은 전도가 안 돼! 저 사람은 절대로 교회 나올 사람이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예수 믿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믿을 자격이 가장 없는 사람, 예수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한 사람 있다는 바로 \\\\\\\'나\\\\\\\'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한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예수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합니다. 제가 만난 상당수의 사람 가운데 때가 늦어서 다른 교회로 교인을 빼앗긴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만,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전도하고, 관심을 가졌다면 우리 교회로 더 일찍 전도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 사람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올해에는 그런 후회를 하지 않도록 열심히 전도하십니다. 두 번째는 주위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교회가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세상을 외면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은 자체적인 부흥과 성장만을 위해서 노력할 뿐,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정말 교회가 속한 그 지역과 사회에 필요한 존재요 빛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가름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만약 교회가 없어진다면 그 교회가 속한 지역과 사회가 안타까워하느냐 반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우리 교회가 없어진다면 우리 후포가 우리 교회가 없어진다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가 없어지지 않도록 지역사회가 발벗고 도와주는 교회라고 하면 우리 교회는 이 지역에 꼭 필요한 교회입니다. 우리 후포 지역에 10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작은 지역에 10개의 교회가 존재하면서 과연 세상은 우리 교회를 어떻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9개의 교회와 전혀 다름이 없는 교회, 하나 더 있으나마나 한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다른 교회와는 뭔가 다른 - 우리 후포를 위해서 꼭 있어야만 하는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는 크지 않는 교회이지만 우리 후포지역에 작은 빛으로서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해 왔음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교인의 숫자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교인의 숫자가 많다는 것으로 좋은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올 해 열심히 전도하자고 하는 것도 단순하게 교인의 숫자를 늘리자는 뜻이 아닙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를 해야 하고, 우리에게 복음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도 못지 않게 우리 교회에 주신 귀한 사명이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웃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듬어 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지역은 독거노인들은 많은 지역입니다. 노년을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는 어르신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은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할 귀중한 사명입니다. 우리 교회를 바로 이곳 후포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후포에 교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가 없어서 우리 교회가 세워졌습니까? 우리 교회가 없어도 교인들이 갈 수 있는 교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후포중앙교회는 후포에 있는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후포를 섬기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들과 함께 행복을 누리는 \\\\\\\'바로 그 교회\\\\\\\'여야 합니다. 섬기는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후포중앙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신 뜻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의 형편상 경로대학 하나만 운영한다고 하는 것도 벅찬 일입니다. 그러나 지난 해 경로대학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시고 봉사해 주신 여러분의 섬김으로 우리는 힘에 넘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어쩌면 내년에는 더 많은 분들이 경로대학을 찾아올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섬김이 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감사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경로대학 하나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섬김의 폭을 조금 더 넓혀가야 합니다. 지난해에 \\\\\\\'독거노인 말벗 운동\\\\\\\'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만큼 잘 하지 못했습니다. 경로대학에 오실 수 없는 분들은 찾아가서 섬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잘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포기할 수 없는 귀한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좀더 그런 섬김의 사역이 깊어지고 열매가 맺혀지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는 그동안 우리가 기도해 온 성전건축의 첫 삽을 뜨는 해가 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수년 동안 예배당 건축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또 작지만 우리들의 힘을 모아왔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는 땅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쉽지 않는 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아직도 빚이 남아 있긴 하지만, 새해에는 그 동안 우리들의 기도에 작은 열매로 성전건축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교회에 교인이 많아서 예배드릴 자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예배 자리가 부족하면 1부, 2부로 나눠서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또 예배당이 낡아서 새로 건축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새롭고 화려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495장)라고 찬송하는 것처럼, 주님을 모신 자리는 어디나 천국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해야 할 이유가 2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이들의 교육공간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당 하나에서 아동부, 학생회, 주일 예배 모두를 소화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만의 공간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자기들의 공간으로 꾸미고, 자기들의 분위기에 맞는 공간, 그들만을 위해서 교육에 투자할 수 있는 공간이 우리에게는 사실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하는 것은 교회의 미래와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 미래를 포기할 수 없기에 우리는 교육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의 공간을 가지고는 이웃을 섬기는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는데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로대학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는 것입니다. 지역의 어르신들을 초청해서 어떤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간이 협소하기 때문에 더 많은 분들을 모실 수 없고, 때로는 오신 분들에게 많은 불편을 주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을 미래를 위한 투자이고, 섬김을 위해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오늘을 위한 투자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했던 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배당건축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돈이 넉넉하다고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 교회에 건축을 위해서 몇 억씩 부담할 수 있는 재력 있는 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헌금을 해 준다면 예배당 건축뿐만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건 일시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 분이 없어서 뭔가 화끈하게 큰 사역을 만들어갈 수는 없을지라도, 작은 정성과 믿음들이 모아진 사역이 훨씬 더 보람되고,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예배당 건축이라는 참으로 귀하고 값진 일을 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사역을 함에 있어서 원망과 시비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많은 교인들이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선한 사역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시험에 빠지게 됩니까?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원망하고 시비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은 헌금을 적게 하는 사람을 원망합니다. 헌금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앞장 서 하는 사람을 보면서 시기합니다. 그러니 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역을 마음이 분열되고 서로 원망하고 시비하는 가운데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어느 누구를 원망하지도, 또 누구를 향하여 시비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거룩한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거룩한 소원을 마음에 품고 겸손하게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당 건축을 빨리 추진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올해 안에 첫 삽을 뜨는 감격을 누려보자는 것이 우리 교회의 희망입니다. 두 번째로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한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이 우리 모든 교우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함께 17-18절을 읽겠습니다. 고백하는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관제(灌祭)\\\\\\\"라는 것은 구약시대 제사에서 쓰는 말입니다.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것을 관제라고 합니다. 불에 타는 제물 위에 관제로 포도주를 붓는 것은 제물이 관제인 포도주로 인해서 향기로운 냄새가 날 뿐만 아니라, 포도주 안에 있는 알콜 성분 때문에 제물이 훨씬 잘 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그 일에 자신이 제물 위에 부어진 포도주처럼 관제가 되는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이나 교회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방관자가 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주님을 위한 헌신과 섬김과 봉사 위에 관제가 되어야 하고, 관제가 된다는 것이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 힘이 부치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2004년 이 제단에 속한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 때문에 행복하고,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행복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2004년 한해를 신앙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들에게 주신 사명을 행복함으로 감당하는 귀한 믿음의 식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1세기 사회와 한국교회/ 새길교회 창립 10주년 기념강좌(2)/ 요4:25/ 2010-02-21
21세기 사회와 한국교회/ 새길교회 창립 10주년 기념강좌(2) 요4:25 오재식 장로 1. 20세기의 의미 20세기를 마감하는 때에 서서 지나간 100년을 돌아다보면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역사적 사건들이 연대표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므로 사건의 특징과 그 사건이 오늘에 주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더 뜻이 있을 것이다. 냉전체제의 종식이란 시점에서 보면 아무래도 20세기의 대두를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에 두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일본의 사까모토(坂本) 교수의 지적도 있지만 공산주의 혁명이 이념의 절대화를 가져왔고 그것은 20세기를 이해하는데 좋은 요소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그 사건은 그보다 앞서서 발발한 세계 제1차 대전(1914-18)보다 더 긴 파장을 20세기에 남겼다. 대전은 국가권력의 절대화를 가져왔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이념의 절대화를 바닥에 깔았다. 불란서혁명으로부터 시작한 자유, 평등, 박애는 그후에 일어난 정치적 물결들에 의해 각각 분리되어서 계승되었고 정당성의 명분경쟁으로 치달았다. 정치적인 자유는 경제적인 번영을 유도한다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서 사회주의 혁명은 경제적 평등만이 더 많은 사람에게 실질적인 자유를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사상이나 이념의 절대화, 또는 주장이나 믿는 것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풍조는 냉전체제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1990년대 초반까지 7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 민족의 우월성을 절대적으로 믿고 주장한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는 다른 전쟁을 촉발시켰고 이에 동조한 일본도 자민족의 우월성을 정치 이념화했다. 이런 도전을 받은 서구라파의 자유주의는 전쟁 앞에서 무력했다. 절대권력과 이념과 대결하기 위해서 자유주의가 믿는 것을 절대화해야 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절대화의 물결은 국가의 권위 뿐 아니라 가치기준에까지 몰려왔고 국가 구성원의 충성심, 사상의 표준화, 사회규범들의 강령화 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행태들이 종교적인 열정으로 나타난 것은 물론이지만 종교 자체도 교리의 절대화가 진행되고 제도, 의식까지도 절대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신의 절대화에 그치지 않고 신에 대한 인간의 해석까지도 절대화하고 그런 해석을 담는 문화적인 그릇이나 분위기까지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풍토는 메시아주의를 가져왔다. 메시아주의의 정치적인 전개가 제국주의적인 작태요 사회적인 결과는 편견과 차별이다. 이런 생각의 뿌리를 서양의 계몽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종교에서 이교도들을 교화시켜 영입하는 것이 그들을 구원에로 인도한다고 믿는 것과 똑같이 미개한 야만인들을 개화시켜서 문명인으로 만드는 것이 정치적 행동의 목적이라고 변명했던 것이다. 이런 논리로 제국주의의 팽창을 극대화시킨 군사작전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문화적인 메시아주의는 그 양상을 달리하면서 냉전체제가 무너진 199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는 군사력을 앞세운 메시아주의를 정치언어가 두둔했는데 45년 이후에는 경제적인 힘을 내세운 메시아주의를 정치언어가 정당화하게 되었다. 전후의 세계경제질서의 틀을 만든 브레튼·우드 협약(1944)이나 국제연합을 통해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하려던 연합국 지도자들의 머리에는 “인류를 빈곤과 무지와 공포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메시아주의가 깔려 있었다. 이렇게 당당한 언어가, 또는 정치적 구호가 두 번에 걸친 국제연합의 개발연대를 엄호했던 것이다. 빈곤퇴치를 내걸었던 국제연합의 개발사업들은 세계은행을 통해 막강한 자금을 투입했으면서도 빈곤을 더 양산했다.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표방했던 국제정치는 인류를 핵무기에 의한 전멸의 공포로 휘몰아가고 있었다. 이런 자가당착의 악순환에서 인류를 구한 것이 냉전체제의 붕괴였다. 냉전시대의 종언은 절대화의 끝이기도 했다. 자기 진영의 주장을 절대시하고 또 지향하는 바를 미화해서 상대방의 그것들을 깎아 내리던 냉전시대의 체제경쟁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큰 픽션(fiction)이었다. 일부 지성인들이 그것이 허무맹랑한 픽션인 것을 간파는 했으나 거부하지 못한 것은 그런 픽션에 매달려 있는 인간심성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과대망상이나 극단적인 열등의식은 픽션을 현실로 만들어 보이려는 유혹에 약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절대적 권력과 그것을 포장한 권위의 절대화가 무너지는 징조들은 이미 제2차 대전이 끝날 때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서슬이 시퍼렇던 제국주의자들의 무기는 그 막강했던 정치적 힘을 잃게 되었다. 무기에 의한 강제행위는 없어졌으나 자본주의 경제의 시장논리는 무자비할 정도로 냉엄해서 가난한 나라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장의 억지 논리를 스스로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현대판 바로왕들의 굴레에서 벗어난 세계 대다수의 인류는 또 다른 광야 40년의 길을 가야 했다. 비록 노예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애굽땅에서는 배불리 먹던 기억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던 광야의 길이었으나 전후 40여 년의 경험은 21세기에 가시적으로 나타날 많은 징조들을 잉태하고 있었다. 냉전체제라는 가상의 구조물 아래에서 자유진영과 평등진영의 절대화 경쟁은 불란서 혁명으로부터 200년이 지난 1989년에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 혁명의 제3테마인 박애는 이미 1945년 국제연합의 세계인권선언에서 가시화되었다. 이 귀중한 20세기 인류의 대 장정은 그때까지 또는 그 이후에도 절대적인 것으로 군림했던 권력이나 권위나 체제나 집단이나 신조들을 상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새로운 세기의 꿈은 이미 20세기 중반에 한 큰 비전으로 제시되었으나 그것이 역사적인 현실로 인식되기까지는 또 다른 반세기의 시간이 필요했다. 2. 21세기의 징조들 1989년 12월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부시와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지중해의 말타에서 만나 냉전체제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을 때 나는 그 두 사람이 그 일을 주도한 것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의 심부름꾼들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메시아주의적 약속을 지탱해 온 힘이 자체 내에서 고갈되고 있었다. 절대화의 무한경쟁은 바닥사람들의 기대치를 높였고 제도 운영의 지혜나 경제경영의 실력이 그 경쟁에서 오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메우지 못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극적이었으나 사실 그 과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절대화 경쟁의 쌍벽을 이루었던 미국은 미국대로 구 소련의 붕괴에서 오는 충격을 이기는데 안간힘을 썼다. 재빨리 세계주의의 언어를 걷어들이고 국가이익을 우선시키는 상대주의로 자세를 낮추었다. 절대화 경쟁시대의 화려했던 약속들은 다 휴지가 되어버렸고 새로운 약속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노골적인 시장적 흥정을 거쳐야 하게 되었다. 제2차 대전이 종식된 후에는 군사적 힘이 상대화되었으나 냉전이 끝난 후에는 정치적 언어들이 상대화되었다. 사실은 이 두 힘의 엄호를 받고서야 그 세력을 확장해 올 수 있었던 시장의 힘이 이제는 양쪽의 쉐프론들을 젖히고서도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 경제논리가, 시장의 힘이 이때까지의 절대화 논리를 상대화시키는 첨병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사실은 또 다른 힘이 가시화되고 있다. 그것은 불란서 혁명으로부터 200년이 지난 후에야 넓은 의미의 정치적 실체로 대두하고 있는 소위 박애집단들이다. 박애집단이란 말이 어색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앞서 말한 인권대장정 이후에 생겨난 무수한 바닥집단운동을 묶어서 가리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시장과 박애집단은 분명한 것 같으면서도 정형화할 수 없는 허상 같은 실체들이다. 이 둘은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실체로 대두하고 있다. 그렇다고 국가체제처럼 뚜렷한 대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일정한 영토나 영역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은 유형화할 수 없는 실체들이란 점에서 공통성이 있으나 이 둘이 추구하고 지향하는 방향에 있어서는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시장은 박애집단의 눈치를 볼 것이나 쉽사리 매수하거나 제압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고 박애집단은 그것대로 시장행태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그것을 바로잡을 손잡이를 찾아내기가 힘들 것이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그렇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서구라파 사회들과는 달리 근대국가의 형틀이 짜여져서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이른바 시민사회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도 시민사회를 주축으로 한 시민경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국가 주도의 국민경제가 우선했다. 그래서 시장의 논리와 행동이 국가의 권위를 상대화시켰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세계적인 추세를 이야기할 따름이고 현실적으로 국가의 힘을 상대화시키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이른바 박애집단이 시민사회에 자리 매김을 이루려면 아직도 멀었고 그런 면에서도 국가는 아직도 비교적 절대성을 가지고 있다. 이 도식을 다시 풀어서 이야기하면 장차 올 시민사회와 시장의 긴장관계에서 양자는 각각 국가의 힘을 빌어서 상대방을 견제하려고 할 것이다. 자연히 국가는 양자 사이에 서게 될 것이고 일종의 조정역할을 싫어도 담당하게 될 것으로 보여진다. 1971년 일본 NHK 텔레비전의 신년 좌담회에 출연한 당시 UN 대학의 총장이었던 인도네시아인 수쟉모토씨는 이제부터 오는 세기는 민중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었다. 4 반세기 전 선각자들이 내다본 세상은 지금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여성의 참정권 확보로 시작한 금세기의 여성운동은 과거 20여 년 동안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기본 틀을 도전하는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또 사회나 가정의 뒤안길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온 장애인들의 운동은 성서해석 상의 편견을 시정하기에 충분한 힘이 되었다. 소수민족들의 주장은 일 국가 일 민족의 틀을 부수는데 충분한 힘을 발휘했다. 국가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편협한 언어정책하며 문화의 정형화, 표준화 작업들이 다 새롭게 분출하는 작은 자들의 에너지 앞에서 무색하게 된 것이다. 중앙에 대한 충성심이 상대화되고 정치권력의 중심부가 매달렸던 가치가 우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각 나라의 민간단체들(NGO)의 역할이 국경을 넘기 시작한지가 오래되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그들의 여행은 국가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국제연합을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에서 비정부단체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이 상례화되었다. 이렇게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으면서도 이른바 NGO 현상은 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우선 비정부단체들(NGO)이란 호칭은 성 안에 있는 정부대표들의 클럽회원들이 성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반사적 정체성이라고 한다. 민간단체들, 아니 시민사회들의 국제적 연대가 독자적인 자리와 과제를 드러내 보여야 할 때가 오고 있다. 사람이 만든 조직과 체제와 또는 사상이나 이념들이 절대화되어가던 것을 부수고 그것들이 다 상대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물론 종교인들에게는 해 아래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지만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몇 세기를 몰고 온 서구 근대화의 에너지가 이제는 쇠진했다고 생각하고 그 유산의 틀과 정형을 깨고 나오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현대적인 인권사상도 같은 흐름의 소산인데 그것을 으뜸가치로 생각하지 않고 쇠퇴해 가는 국가 권위의 틀 안에다 가두거나 또는 각 문화권의 자주적 평가와 판단에 맡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의 사까모토 교수도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근래에 들어서 아시아 몇몇 나라가 문화권의 상이한 가치기준을 내세워서 외부로부터 오는 자국 내 인권상황에 대한 압력을 반격하는데 이를 사용하고 있다. 상대화 과정은 인간이 만든 것들의 절대화에 대한 것이지 종교적인 대상이나 또 그런 대상에 뿌리하고 있다고 믿는 천부의 속성까지를 침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3. 교회공동체의 가능성 기독교 성도들의 사귐을 공동체라고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로 한국 교회는 권위주의적인 조직체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 개신교회는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또 그 후의 숱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면서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이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각별하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의 과제는 이 축복을 어떻게 지혜롭게 관리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교회가 인간이 만들어낸 조직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도들의 아름다운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도전을 이겨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가치의 상대화에서 오는 도전이다. 이런 상대화의 물결에서 교회를 지키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작위를 구분하는 일일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지키는 일은 그 자체의 권위와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지혜를 구분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지혜는 시대와 문화적 환경과 풍토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의 상대성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도 지성소를 간직하기 위한 인간의 조직이요 제도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교회를 세우신 이의 권위와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상대적인 능력이 구분될 것이다. 유일신의 법궤를 짊어졌다고 믿은 서구라파의 문명은 하나님의 축복을 자체 문명권에 가두어 놓으려는 유혹에 빠졌었다. 그래서 타 문명에 대한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타 문화권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결코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다 그런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 둘째 도전은 문화 상대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각 문화권에서 근본주의 내지는 원리주의가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표현들은 대부분이 종교적 열정과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자칫 종교간의 갈등으로 번지기 쉽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든 종교는 속성상 근본주의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고 외부의 자극으로 이 부분이 정도를 넘게 표현될 수 있다. 일단 이런 유혹에 빠져버리면 자기가 믿는 바를 배타적으로 또는 독선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셋째 도전은 민족주의 감성을 이기는 것이다. 물론 교회는 민족을 섬겨야 하지만 그러나 민족적 정서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민족을 도와서 민족을 넘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쳐다보게 해야 할 것이지 하나님을 민족의 과제에다 묶어두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교회의 성도들은 민족공동체의 일원이지마는 민족의 과제에 집착한 나머지 전능자의 뜻에 대해 눈이 어두워져서는 안된다. 넷째로 우리가 받는 유혹은 세속화의 물결이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절대자의 권위를 인간의 지혜에다 가두려는 당대 교회의 작태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런 정신에서 가시화된 하나님과 성도들의 영상을 예배소에서 제거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콘(icon) 문화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런 가시적인 목적물을 부쉈던 뜻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마음속에서 예배하고 공경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신도들은 잡다한 영상물들을 아이콘화하기 시작했다. 거룩한 이미지를 내재화하려던 본래의 뜻은 약해지고 세속적 이미지를 제도적인 장치 없이 자의적으로 성화 하려는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 이것은 각자가 받은 은사의 자의적인 표현과 운영이라는 다양하고 진취적인 에너지를 고취하는 반면에 카톨릭 교회 같은 권위와 위엄을 가시화, 제도화하려는 경향도 동시에 갖기 시작한 것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성도들의 교제 또는 사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안에서의 교제 즉 코이노니아가 성도들만의 클럽화를 의미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을 모시는 인간 서로간의 관계에서 하나님 창조세계의 전부를 시야에 넣은 사귐으로 해석이 확대되고 있다. 이것은 ‘피조물들의 신음소리‘에 접한 인간들의 진로 전환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코이노니아는 기독교의 역사적, 지리적 발원지로의 회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 미치는 모든 공간과 시간에로의 확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중심부를 향한 구심운동이 아니고 선교적 지평을 향한 원심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코이노니아는 봉사 즉 디아코니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섬기는 관계, 생명을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일, 쓰러져 가는 이웃을 일으켜 세우는 일, 이런 관계가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공생의 기초가 될 것이다.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는 앞서 말한 박애의 연대의 기독교적 표현이다. 이것은 일정한 정형이 없고 권위 있는 이미지가 앞서가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성도들 각인의 마음의 깊이요 손길의 폭이다. 이 가냘프고 금방 부스러질 것 같은 유동적인 믿음의 파장들이 이때까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장벽을 넘고 편견의 사슬을 끊고 또 미움과 배타의 골짜기를 메울 것이다. 이 파도는 성도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모든 사람의 가슴으로 이어지는 영감이 되어야 한다.
2가지의 환상/ 렘1:11-19
2가지의 환상/렘1:11-19 2003-10-17 12:34:53 read : 129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여저히 주저하는 예레미야에게 2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11절에 나오는 <살구나무 가지의 환상>이고 또 하나는 13절에 나오는 <끓는 가마가 북에서 기울어진 환상>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어떤 상황에서도 예레미야를 지키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17-19절). 이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교훈입니다. 예레미야가 첫 번째 본 환상은 살구나무 가지의 환상이었습니다. 살구나무는 유다 지역에서 가장 먼저 잎이 나는 나무로, \\\'성취\\\'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이 환상은 말씀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12절). 그래서 이 환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중요시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그 약속의 말씀대로 축복해 주십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신기하고 놀랍게 바다 물결같이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축복을 받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러한 축복을 주시기 전에 꼭 먼저 있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듣는 귀\\\', \\\'말씀에 열린 귀\\\'를 주시는 축복입니다. 빵보다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빵도 주십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이 빵만 사모하면 빵 문제조차도 해결하기에 급급하게 만드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 무엇으로 사단의 시험을 이기셨습니까?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세 번 모두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과 함께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마 4장). 그렇습니다. 말씀이 문제 해결의 비결입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결은 간단히 말하면 빵과 말씀의 대결입니다. 마르크스도 분명한 철학을 가졌습니다. \\\"먹는 문제, 경제 문제만 해결하면 다른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는 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철학은 먹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먹는 문제에 매달리면 먹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사십 일을 굶어서 지금 죽어가도 말씀이 먼저라는 선포합니다. 빵이 먼저가 아니라 말씀이 먼저임을 아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가장 먼저 떡으로 유혹했고, 주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절박해도 말씀이 먼저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귀히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은 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가장 싫어하신다는 교훈을 줍니다. 예레미야가 본 두 번째 환상은 끓는 가마가 북에서 기울어진 환상인데, 이 환상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요? 북방 나라들이 심판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을 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실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버리고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16절). 그리고 하나님을 믿기보다 피조물을 더 믿는 것을 말합니다. 돈, 명예, 권력 등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지는 마십시오. 그런 것들을 나쁜 것으로 보고 무조건 배척하면 우리는 바람직한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마 비판적인 인간, 율법주의적인 인간이 될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도 잘만 활용하면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절대 하나님보다 앞서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해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해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훌쩍 떠나버리면 그 배반감을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보다 무엇이든지 더 사랑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 우상숭배는 상처와 좌절과 실망을 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좋을 때는 괜찮은 것 같지만 언젠가는 그것 때문에 꼭 상처를 경험하게 됩니다. 얼마나 불안한 삶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멀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자 하려고 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경을 하지 않아도 우주만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상숭배를 멀리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일시적인 것에 몸과 마음과 영혼을 내맡기게 되면 틀림없이 실패하고 좌절하고 영혼에 상처를 입을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를 위한 배려입니다. 그러므로 상처 많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진정 원한다면 항상 하나님은 그 어느 것보다 앞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도는 환난을 당해도 반드시 승리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경우를 만나도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면 그 두려워하는 일이 임하게 되고,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움을 주는 일이 사라지게 됩니다(17절). 18-19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셔서 유다 모든 성읍과 유력한 사람들과 백성들이 다 그를 쳐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함께 하여 그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은총은 환난을 면제시키는 특권으로 나타나는 것보다는 환난을 극복하게 하는 힘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순간을 만나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왜 사람들에게 근심과 두려움이 생깁니까? 문제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어려운 순간을 만나면 더욱 주님이 내 곁에 가까이 계심을 믿고 전진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0배, 60배, 100배(교사헌신예배)/막4:1-8
30배, 60배, 100배(교사헌신예배)/막4:1-8 2003-12-11 18:47:47 read : 36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가르치실 때에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큰 무리'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군중을 뜻합니다. 아마 디베랴 바닷가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던 때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것을 의미하겠지요. 예수님이 계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강론하실 때에도 그러했습니다(막 1:21). 바닷가에서도, 육로에서도, 산 위에서도(막 3:13) 큰 무리가 운집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에게 있는 영적 생명력 때문이었습니다. 권세 있는 새 교훈의 매력 때문이었습니다(막 2:27). 사람들의 본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명력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선생님들께도 예수님의 생명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배 위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바닷가에 운집하고 있는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은 갈릴리 바다 서북쪽의 비옥한 밭에서 파종을 하고 있는 농부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보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설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밭이란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비유로 나타낸 '마음 밭'(心田)을 의미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습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길가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4). 여기에서 '길가'는 농로를 뜻합니다. 나귀나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밭이랑 사이에 만들어진 길로서 단단해진 땅을 뜻합니다. 이런 곳에 떨어진 씨앗은 흙에 묻힐 수 없어서 새들이 와서 주어먹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막 4:4). 이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사탄이 즉시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버리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막 4:15). 마태는 '악한 자'(마 13:19), 누가는 '마귀'(눅 8:12)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즉각적이요 결정적인 거부를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흙이 얇은 돌밭에 씨앗이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5). 바닥은 돌인데, 그 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기 때문에, 싹이 곧 나오지만, 해가 돋으면 돌이 열을 받아 뿌리가 곧 말라버린다고 하였습니다(막 4:6). 이런 경우는 복음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복음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는 뿌리가 없으므로 곧 넘어져 버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 4:16-17). 즉,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종류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누가는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하였는데(눅 8:6), 대체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이 없으므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므로 금방 쓰러지는 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경우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7). 가시떨기는 당시 팔레스타인 농경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가시떨기는 곡식보다 성장력이 왕성하고 활발해서 곡식이 흡수할 양분을 빼앗을 뿐 아니라, 그 무성함이 햇빛을 막아서 곡식의 성장과 결실을 방해하였습니다. 논에 가보면 가라지들이 벼보다 더 크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육체의 소욕들이 복음의 빛을 가로막아 결실치 못하는 상태라고 하셨습니다(막 4:19). 네 번째 경우는 좋은 땅, 옥토(沃土)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8). 좋은 땅은 쟁기질이 잘 되어 있어 부드럽고, 통풍이 잘 되고, 습기가 충분하여 지력(地力)이 보존된 토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좋은 땅의 경우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색을 말하고 있습니다. ① 듣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막 4:20). 여기 '듣다(ajkouvw/의 동직현능3복, 듣고 hear ajkouvousin)' 라는 말은 '주의 깊게 듣고', '바로 이해하며', 또한 '순종심이 있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마 13:23). ② 받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막 4:20). '받아(paradevcomai의 동직현주복, 받아 receive it, paradevcontai)'라는 말은 '그 가치를 인정하며 즐거이 기쁨으로 영접함'을 뜻합니다. ③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23).(sunivhmi suniwvn의 동분현능주남단, 깨닫는 understandeth) ④ 지키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 보화처럼 소중히 굳게 붙잡는 마음을 뜻합니다.(katevcw의 동직현능3복, 지키어 keep it, katevcousin ) ⑤ 인내하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uJpomonh의 명여여단, 인내patience, uJpomonh'/) ⑥ 결실이 있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4: 8절에는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와 마태도 '결실'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 마 13:23).(karpoforew의 동직현능3복, 결실하는 bring forth fruit, karpoforou'sin ) 결실이란, 주인의 곡간에 들여져 소유물이 되는 상태까지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계속적인 수확'을 뜻하고 있습니다. 연중무휴의 수확상태를 뜻합니다. 우리들이 지도하고 있는 어린이들은 어떠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 선생님들은 먼저 어린이들의 마음상태를 파악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미음 밭을 일구어 복음의 씨앗이 싹트고 자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딱딱하고 단단하게 굳어 있는 마음은 기경하여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고, 돌짝 밭 같은 마음은 돌멩이들을 모두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어서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열매맺을 수 있는 옥토가 되도록 준비하여야 합니다. 교사는 농부와 같은 심정으로 교육에 임해야 합니다. 농부와 같은 열심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농부와 같은 인내심으로 결실을 기다려야 합니다. 약 5:7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가복음 4: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3: 23절에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결실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의 마음(밭)에서 일어납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은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축복입니다(막 4:8, 마 13:23). 문제는 '좋은 땅'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 앞에 말씀을 빼앗겨버려 뿌리조차 내려보지 못한 마음입니다. 환난과 핍박 때문에 넘어져버린 마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순간적이고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돌짝 밭 같은 마음입니다. 또한 결실을 맺는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모든 욕망에 덜미를 잡혀버린 가시떨기 같은 마음도 아닙니다. 이런 마음에는 아무런 생산이나 희망이나 창조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마음은 버림당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그 결과 사망의 열매로만 가득 찬 마음입니다(롬 1:28-32). 옥토는 처음부터 옥토가 아니었습니다. 본래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7: 9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롬 3:1-12). 그러면 어디에서 좋은 땅이 생겼습니까? '좋은 땅', 곧 '착한 마음', '좋은 마음'(눅 8:15)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언약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백성, 곧 저희 죄에서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친 백성(마 1:21, 요 13:1)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 '자기 밭'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24).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행 13:48)들의 마음은 좋은 마음(땅)이요, 착한 마음(땅)인데(눅 8:15), 성령께서 천국복음을 듣게 하시고, 받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지키게하시며, 인내하여 결실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요 1:12-13, 3:5, 벧전 1:23-25), 회개하고 믿게 하여(행 2:38, 16:14, 30-31),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새 마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엡 4:23, 롬 12:1). 우리 교회학교 교사들은 이번 성경학교를 맞이하여,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어린이들에게 좋은 마음(땅), 착한 마음(땅)이 되도록, 말씀을 듣게 하고, 받게 하고, 깨닫게 하고, 지키게(붙잡게) 하고, 인내하게 하고, 결실하도록 힘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 결실은 '좋은 씨'에서 시작됩니다. '씨'는 '천국 말씀'이요(마 13:19), '하나님의 말씀'(막 4:14, 눅 8:11)입니다. 여기에서 '천국 말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에 의해서 선포되는 '복음'을 가리킵니다. '씨'는 결실의 인자(因子)가 됩니다. 씨 속에는 생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4-5). 그는 참 빛이요, 각 사람을 비추는 세상의 빛(요1:9)이요, 생명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 8:12). 씨 속에 있는 생명의 힘이 움을 터뜨리게 합니다. 순이 나게 합니다. 하늘을 향하여 자라나는 성장의 힘이 됩니다. 꽃이 피게 하고, 향기를 발하게 하며, 벌과 나비를 불러, 마침내 열매 맺게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은 썩어질 씨가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 23). 세세토록 있는 말씀, 곧 우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 25).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고, 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히 4:12). 말하자면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자기 확장, 자기 폭발, 자기 성장, 자기 발전, 자기 진보, 자기 창조, 자기 결실을 그 속에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씨는 위대한 미래와 축복의 미래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 교사들은 아이들이 품고 있는 씨앗이 발아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자기 확장, 자기 폭발, 자기 성장, 자기 발전, 자기 진보, 자기 창조, 자기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결실은 뿌리는 자에 의해서 진행이 됩니다. 세 복음서에는 똑같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다"고 하였는데(마 13:3, 막 4:3, 눅 8:5), 여기에 '씨 뿌리는 자'는 우선 예수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37). 그리고 모든 시대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모든 전도자와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마 5:13, 14, 28:19, 막 16:15). 씨를 뿌리는 농부의 행위는 바로 복음전파 행위를 뜻합니다.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던 그리스도의 사역은, 2000년 동안이나 계속 되어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강하게, 더 뜨겁게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씨'를 뿌려야 하는데, 좋은 씨 곧 천국의 복음을 뿌려야 합니다. 그것도 좋은 밭에 뿌려야 하며, 적절한 시기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면 원리에 따라서 많이 뿌려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땅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각종 농약과 생활하수, 산업폐수, 화학비료들에 의하여서 토양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토양오염에 의한 영향은, 오염물질의 먹이 연쇄를 통한 오염물질이 다시금 인간에게 유입되고, 농산물들이 잘 자라지 못하게 되며, 산성비의 원인이 되어, 토양내 산도증가와 이에 따른 식물의 생육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제 자연 친화적 농업이 필요합니다. 환경을 살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각양 세속적인 문화의 오염속에서 허덕이는 우리 아이들을 말씀으로 치료해주고, 말씀으로 튼튼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농부는 농사에 대하여 전문가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우리 교사들은 말씀에 대하여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연구하고, 부지런히 준비하여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결과는 30배, 60배, 100배 결실을 하여야 합니다. 마가는 30배, 60배, 100배의 순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막 4:8). 마태는 100배, 60배, 30배의 순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마 13:23). 어느 편의 표현이든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한 알의 종자(씨)가 땅에 떨어져 맺는 엄청난 축복의 결과입니다. 30배, 60배, 100배라고 하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① 한 알의 씨가 맺을 수 있는 결실의 결과는 모두 일정치 않다는 뜻입니다. 어떤 씨는 30배, 어떤 씨는 60배, 어떤 씨는 100배로 각각 차이 있는 결실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전도(선교) 현장에서 이러한 현실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결실을 맺는 데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② 살아있는 씨, 생명의 씨는 결코 그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요 12:24). 씨앗은 30배든, 60배든, 100배든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③ 이것은 또한 증가의 법칙을 알려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30배, 60배, 100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2).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5).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요 15:8). 즉, 열매맺음으로 인하여 다음해에 다시 그 씨앗들은 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와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은 21세기의 주인공들입니다. 21세기 역사의 현장은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큰 농장이요, 큰 밭입니다. 21세기의 역사의 현장은 곡식이 익어 희어져버린 마지막 추수기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십니다(요 4:35).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귀 기울여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고 하십니다(막 4: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막 4:9). 이제 성경학교를 맞이하여서, 우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먼저 좋은 밭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씨앗을 받아들여 싹 틔우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도록 양육해야만 합니다. 21세기의 주인공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로서, 마지막 추수기의 충성된 일꾼으로 양육하는 귀한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우리들 모두가 좋은 일꾼들이 다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30배, 60배, 100배/ 막4:1-8/ 교사헌신예배설교/ 2015-01-23
30배, 60배, 100배 막4:1-8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가르치실 때에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큰 무리\\\\\\\\\\\\\\\'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군중을 뜻합니다. 아마 디베랴 바닷가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던 때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것을 의미하겠지요. 예수님이 계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강론하실 때에도 그러했습니다(막 1:21). 바닷가에서도, 육로에서도, 산 위에서도(막 3:13) 큰 무리가 운집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에게 있는 영적 생명력 때문이었습니다. 권세 있는 새 교훈의 매력 때문이었습니다(막 2:27). 사람들의 본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명력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선생님들께도 예수님의 생명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배 위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바닷가에 운집하고 있는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은 갈릴리 바다 서북쪽의 비옥한 밭에서 파종을 하고 있는 농부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보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설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밭이란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비유로 나타낸 \\\\\\\\\\\\\\\'마음 밭\\\\\\\\\\\\\\\'(心田)을 의미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습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길가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4). 여기에서 \\\\\\\\\\\\\\\'길가\\\\\\\\\\\\\\\'는 농로를 뜻합니다. 나귀나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밭이랑 사이에 만들어진 길로서 단단해진 땅을 뜻합니다. 이런 곳에 떨어진 씨앗은 흙에 묻힐 수 없어서 새들이 와서 주어먹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막 4:4). 이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사탄이 즉시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버리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막 4:15). 마태는 \\\\\\\\\\\\\\\'악한 자\\\\\\\\\\\\\\\'(마 13:19), 누가는 \\\\\\\\\\\\\\\'마귀\\\\\\\\\\\\\\\'(눅 8:12)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즉각적이요 결정적인 거부를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흙이 얇은 돌밭에 씨앗이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5). 바닥은 돌인데, 그 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기 때문에, 싹이 곧 나오지만, 해가 돋으면 돌이 열을 받아 뿌리가 곧 말라버린다고 하였습니다(막 4:6). 이런 경우는 복음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복음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는 뿌리가 없으므로 곧 넘어져 버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 4:16-17). 즉,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종류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누가는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하였는데(눅 8:6), 대체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이 없으므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므로 금방 쓰러지는 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경우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7). 가시떨기는 당시 팔레스타인 농경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가시떨기는 곡식보다 성장력이 왕성하고 활발해서 곡식이 흡수할 양분을 빼앗을 뿐 아니라, 그 무성함이 햇빛을 막아서 곡식의 성장과 결실을 방해하였습니다. 논에 가보면 가라지들이 벼보다 더 크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육체의 소욕들이 복음의 빛을 가로막아 결실치 못하는 상태라고 하셨습니다(막 4:19). 네 번째 경우는 좋은 땅, 옥토(沃土)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8). 좋은 땅은 쟁기질이 잘 되어 있어 부드럽고, 통풍이 잘 되고, 습기가 충분하여 지력(地力)이 보존된 토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좋은 땅의 경우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색을 말하고 있습니다. ① 듣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막 4:20). 여기 \\\\\\\\\\\\\\\'듣다(ajkouvw/의 동직현능3복, 듣고 hear ajkouvousin)\\\\\\\\\\\\\\\' 라는 말은 \\\\\\\\\\\\\\\'주의 깊게 듣고\\\\\\\\\\\\\\\', \\\\\\\\\\\\\\\'바로 이해하며\\\\\\\\\\\\\\\', 또한 \\\\\\\\\\\\\\\'순종심이 있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마 13:23). ② 받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막 4:20). \\\\\\\\\\\\\\\'받아(paradevcomai의 동직현주복, 받아 receive it, paradevcontai)\\\\\\\\\\\\\\\'라는 말은 \\\\\\\\\\\\\\\'그 가치를 인정하며 즐거이 기쁨으로 영접함\\\\\\\\\\\\\\\'을 뜻합니다. ③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23).(sunivhmi suniwvn의 동분현능주남단, 깨닫는 understandeth) ④ 지키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 보화처럼 소중히 굳게 붙잡는 마음을 뜻합니다.(katevcw의 동직현능3복, 지키어 keep it, katevcousin ) ⑤ 인내하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uJpomonh의 명여여단, 인내patience, uJpomonh\\\\\\\\\\\\\\\'/) ⑥ 결실이 있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4: 8절에는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와 마태도 \\\\\\\\\\\\\\\'결실\\\\\\\\\\\\\\\'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 마 13:23).(karpoforew의 동직현능3복, 결실하는 bring forth fruit, karpoforou\\\\\\\\\\\\\\\'sin ) 결실이란, 주인의 곡간에 들여져 소유물이 되는 상태까지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계속적인 수확\\\\\\\\\\\\\\\'을 뜻하고 있습니다. 연중무휴의 수확상태를 뜻합니다. 우리들이 지도하고 있는 어린이들은 어떠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 선생님들은 먼저 어린이들의 마음상태를 파악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미음 밭을 일구어 복음의 씨앗이 싹트고 자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딱딱하고 단단하게 굳어 있는 마음은 기경하여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고, 돌짝 밭 같은 마음은 돌멩이들을 모두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어서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열매맺을 수 있는 옥토가 되도록 준비하여야 합니다. 교사는 농부와 같은 심정으로 교육에 임해야 합니다. 농부와 같은 열심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농부와 같은 인내심으로 결실을 기다려야 합니다. 약 5:7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가복음 4: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3: 23절에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결실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의 마음(밭)에서 일어납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은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축복입니다(막 4:8, 마 13:23). 문제는 \\\\\\\\\\\\\\\'좋은 땅\\\\\\\\\\\\\\\'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 앞에 말씀을 빼앗겨버려 뿌리조차 내려보지 못한 마음입니다. 환난과 핍박 때문에 넘어져버린 마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순간적이고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돌짝 밭 같은 마음입니다. 또한 결실을 맺는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모든 욕망에 덜미를 잡혀버린 가시떨기 같은 마음도 아닙니다. 이런 마음에는 아무런 생산이나 희망이나 창조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마음은 버림당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그 결과 사망의 열매로만 가득 찬 마음입니다(롬 1:28-32). 옥토는 처음부터 옥토가 아니었습니다. 본래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7: 9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롬 3:1-12). 그러면 어디에서 좋은 땅이 생겼습니까? \\\\\\\\\\\\\\\'좋은 땅\\\\\\\\\\\\\\\', 곧 \\\\\\\\\\\\\\\'착한 마음\\\\\\\\\\\\\\\', \\\\\\\\\\\\\\\'좋은 마음\\\\\\\\\\\\\\\'(눅 8:15)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언약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백성, 곧 저희 죄에서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친 백성(마 1:21, 요 13:1)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 \\\\\\\\\\\\\\\'자기 밭\\\\\\\\\\\\\\\'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24).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행 13:48)들의 마음은 좋은 마음(땅)이요, 착한 마음(땅)인데(눅 8:15), 성령께서 천국복음을 듣게 하시고, 받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지키게하시며, 인내하여 결실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요 1:12-13, 3:5, 벧전 1:23-25), 회개하고 믿게 하여(행 2:38, 16:14, 30-31),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새 마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엡 4:23, 롬 12:1). 우리 교회학교 교사들은 이번 성경학교를 맞이하여,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어린이들에게 좋은 마음(땅), 착한 마음(땅)이 되도록, 말씀을 듣게 하고, 받게 하고, 깨닫게 하고, 지키게(붙잡게) 하고, 인내하게 하고, 결실하도록 힘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 결실은 \\\\\\\\\\\\\\\'좋은 씨\\\\\\\\\\\\\\\'에서 시작됩니다. \\\\\\\\\\\\\\\'씨\\\\\\\\\\\\\\\'는 \\\\\\\\\\\\\\\'천국 말씀\\\\\\\\\\\\\\\'이요(마 13:19), \\\\\\\\\\\\\\\'하나님의 말씀\\\\\\\\\\\\\\\'(막 4:14, 눅 8:11)입니다. 여기에서 \\\\\\\\\\\\\\\'천국 말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에 의해서 선포되는 \\\\\\\\\\\\\\\'복음\\\\\\\\\\\\\\\'을 가리킵니다. \\\\\\\\\\\\\\\'씨\\\\\\\\\\\\\\\'는 결실의 인자(因子)가 됩니다. 씨 속에는 생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4-5). 그는 참 빛이요, 각 사람을 비추는 세상의 빛(요1:9)이요, 생명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 8:12). 씨 속에 있는 생명의 힘이 움을 터뜨리게 합니다. 순이 나게 합니다. 하늘을 향하여 자라나는 성장의 힘이 됩니다. 꽃이 피게 하고, 향기를 발하게 하며, 벌과 나비를 불러, 마침내 열매 맺게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은 썩어질 씨가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 23). 세세토록 있는 말씀, 곧 우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 25).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고, 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히 4:12). 말하자면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자기 확장, 자기 폭발, 자기 성장, 자기 발전, 자기 진보, 자기 창조, 자기 결실을 그 속에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씨는 위대한 미래와 축복의 미래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 교사들은 아이들이 품고 있는 씨앗이 발아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자기 확장, 자기 폭발, 자기 성장, 자기 발전, 자기 진보, 자기 창조, 자기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결실은 뿌리는 자에 의해서 진행이 됩니다. 세 복음서에는 똑같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다\\\\\\\\\\\\\\\"고 하였는데(마 13:3, 막 4:3, 눅 8:5), 여기에 \\\\\\\\\\\\\\\'씨 뿌리는 자\\\\\\\\\\\\\\\'는 우선 예수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37). 그리고 모든 시대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모든 전도자와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마 5:13, 14, 28:19, 막 16:15). 씨를 뿌리는 농부의 행위는 바로 복음전파 행위를 뜻합니다.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던 그리스도의 사역은, 2000년 동안이나 계속 되어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강하게, 더 뜨겁게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씨\\\\\\\\\\\\\\\'를 뿌려야 하는데, 좋은 씨 곧 천국의 복음을 뿌려야 합니다. 그것도 좋은 밭에 뿌려야 하며, 적절한 시기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면 원리에 따라서 많이 뿌려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땅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각종 농약과 생활하수, 산업폐수, 화학비료들에 의하여서 토양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토양오염에 의한 영향은, 오염물질의 먹이 연쇄를 통한 오염물질이 다시금 인간에게 유입되고, 농산물들이 잘 자라지 못하게 되며, 산성비의 원인이 되어, 토양내 산도증가와 이에 따른 식물의 생육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제 자연 친화적 농업이 필요합니다. 환경을 살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각양 세속적인 문화의 오염속에서 허덕이는 우리 아이들을 말씀으로 치료해주고, 말씀으로 튼튼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농부는 농사에 대하여 전문가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우리 교사들은 말씀에 대하여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연구하고, 부지런히 준비하여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결과는 30배, 60배, 100배 결실을 하여야 합니다. 마가는 30배, 60배, 100배의 순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막 4:8). 마태는 100배, 60배, 30배의 순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마 13:23). 어느 편의 표현이든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한 알의 종자(씨)가 땅에 떨어져 맺는 엄청난 축복의 결과입니다. 30배, 60배, 100배라고 하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① 한 알의 씨가 맺을 수 있는 결실의 결과는 모두 일정치 않다는 뜻입니다. 어떤 씨는 30배, 어떤 씨는 60배, 어떤 씨는 100배로 각각 차이 있는 결실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전도(선교) 현장에서 이러한 현실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결실을 맺는 데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② 살아있는 씨, 생명의 씨는 결코 그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요 12:24). 씨앗은 30배든, 60배든, 100배든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③ 이것은 또한 증가의 법칙을 알려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30배, 60배, 100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2).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5).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요 15:8). 즉, 열매맺음으로 인하여 다음해에 다시 그 씨앗들은 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와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은 21세기의 주인공들입니다. 21세기 역사의 현장은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큰 농장이요, 큰 밭입니다. 21세기의 역사의 현장은 곡식이 익어 희어져버린 마지막 추수기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십니다(요 4:35).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귀 기울여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고 하십니다(막 4: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막 4:9). 이제 성경학교를 맞이하여서, 우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먼저 좋은 밭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씨앗을 받아들여 싹 틔우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도록 양육해야만 합니다. 21세기의 주인공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로서, 마지막 추수기의 충성된 일꾼으로 양육하는 귀한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우리들 모두가 좋은 일꾼들이 다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30배, 60배, 100배/ 막4:1-8/ 교사헌신예배설교/ 2015-01-23
30배, 60배, 100배 막4:1-8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가르치실 때에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큰 무리\\\\\\\'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군중을 뜻합니다. 아마 디베랴 바닷가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던 때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것을 의미하겠지요. 예수님이 계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강론하실 때에도 그러했습니다(막 1:21). 바닷가에서도, 육로에서도, 산 위에서도(막 3:13) 큰 무리가 운집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에게 있는 영적 생명력 때문이었습니다. 권세 있는 새 교훈의 매력 때문이었습니다(막 2:27). 사람들의 본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명력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선생님들께도 예수님의 생명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배 위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바닷가에 운집하고 있는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은 갈릴리 바다 서북쪽의 비옥한 밭에서 파종을 하고 있는 농부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보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설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밭이란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비유로 나타낸 \\\\\\\'마음 밭\\\\\\\'(心田)을 의미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습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길가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4). 여기에서 \\\\\\\'길가\\\\\\\'는 농로를 뜻합니다. 나귀나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밭이랑 사이에 만들어진 길로서 단단해진 땅을 뜻합니다. 이런 곳에 떨어진 씨앗은 흙에 묻힐 수 없어서 새들이 와서 주어먹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막 4:4). 이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사탄이 즉시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버리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막 4:15). 마태는 \\\\\\\'악한 자\\\\\\\'(마 13:19), 누가는 \\\\\\\'마귀\\\\\\\'(눅 8:12)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즉각적이요 결정적인 거부를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흙이 얇은 돌밭에 씨앗이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5). 바닥은 돌인데, 그 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기 때문에, 싹이 곧 나오지만, 해가 돋으면 돌이 열을 받아 뿌리가 곧 말라버린다고 하였습니다(막 4:6). 이런 경우는 복음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복음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는 뿌리가 없으므로 곧 넘어져 버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 4:16-17). 즉,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종류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누가는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하였는데(눅 8:6), 대체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이 없으므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므로 금방 쓰러지는 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경우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7). 가시떨기는 당시 팔레스타인 농경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가시떨기는 곡식보다 성장력이 왕성하고 활발해서 곡식이 흡수할 양분을 빼앗을 뿐 아니라, 그 무성함이 햇빛을 막아서 곡식의 성장과 결실을 방해하였습니다. 논에 가보면 가라지들이 벼보다 더 크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육체의 소욕들이 복음의 빛을 가로막아 결실치 못하는 상태라고 하셨습니다(막 4:19). 네 번째 경우는 좋은 땅, 옥토(沃土)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8). 좋은 땅은 쟁기질이 잘 되어 있어 부드럽고, 통풍이 잘 되고, 습기가 충분하여 지력(地力)이 보존된 토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좋은 땅의 경우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색을 말하고 있습니다. ① 듣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막 4:20). 여기 \\\\\\\'듣다(ajkouvw/의 동직현능3복, 듣고 hear ajkouvousin)\\\\\\\' 라는 말은 \\\\\\\'주의 깊게 듣고\\\\\\\', \\\\\\\'바로 이해하며\\\\\\\', 또한 \\\\\\\'순종심이 있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마 13:23). ② 받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막 4:20). \\\\\\\'받아(paradevcomai의 동직현주복, 받아 receive it, paradevcontai)\\\\\\\'라는 말은 \\\\\\\'그 가치를 인정하며 즐거이 기쁨으로 영접함\\\\\\\'을 뜻합니다. ③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23).(sunivhmi suniwvn의 동분현능주남단, 깨닫는 understandeth) ④ 지키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 보화처럼 소중히 굳게 붙잡는 마음을 뜻합니다.(katevcw의 동직현능3복, 지키어 keep it, katevcousin ) ⑤ 인내하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uJpomonh의 명여여단, 인내patience, uJpomonh\\\\\\\'/) ⑥ 결실이 있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4: 8절에는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와 마태도 \\\\\\\'결실\\\\\\\'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 마 13:23).(karpoforew의 동직현능3복, 결실하는 bring forth fruit, karpoforou\\\\\\\'sin ) 결실이란, 주인의 곡간에 들여져 소유물이 되는 상태까지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계속적인 수확\\\\\\\'을 뜻하고 있습니다. 연중무휴의 수확상태를 뜻합니다. 우리들이 지도하고 있는 어린이들은 어떠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 선생님들은 먼저 어린이들의 마음상태를 파악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미음 밭을 일구어 복음의 씨앗이 싹트고 자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딱딱하고 단단하게 굳어 있는 마음은 기경하여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고, 돌짝 밭 같은 마음은 돌멩이들을 모두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어서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열매맺을 수 있는 옥토가 되도록 준비하여야 합니다. 교사는 농부와 같은 심정으로 교육에 임해야 합니다. 농부와 같은 열심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농부와 같은 인내심으로 결실을 기다려야 합니다. 약 5:7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가복음 4: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3: 23절에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결실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의 마음(밭)에서 일어납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은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축복입니다(막 4:8, 마 13:23). 문제는 \\\\\\\'좋은 땅\\\\\\\'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 앞에 말씀을 빼앗겨버려 뿌리조차 내려보지 못한 마음입니다. 환난과 핍박 때문에 넘어져버린 마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순간적이고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돌짝 밭 같은 마음입니다. 또한 결실을 맺는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모든 욕망에 덜미를 잡혀버린 가시떨기 같은 마음도 아닙니다. 이런 마음에는 아무런 생산이나 희망이나 창조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마음은 버림당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그 결과 사망의 열매로만 가득 찬 마음입니다(롬 1:28-32). 옥토는 처음부터 옥토가 아니었습니다. 본래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7: 9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롬 3:1-12). 그러면 어디에서 좋은 땅이 생겼습니까? \\\\\\\'좋은 땅\\\\\\\', 곧 \\\\\\\'착한 마음\\\\\\\', \\\\\\\'좋은 마음\\\\\\\'(눅 8:15)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언약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백성, 곧 저희 죄에서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친 백성(마 1:21, 요 13:1)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 \\\\\\\'자기 밭\\\\\\\'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24).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행 13:48)들의 마음은 좋은 마음(땅)이요, 착한 마음(땅)인데(눅 8:15), 성령께서 천국복음을 듣게 하시고, 받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지키게하시며, 인내하여 결실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요 1:12-13, 3:5, 벧전 1:23-25), 회개하고 믿게 하여(행 2:38, 16:14, 30-31),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새 마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엡 4:23, 롬 12:1). 우리 교회학교 교사들은 이번 성경학교를 맞이하여,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어린이들에게 좋은 마음(땅), 착한 마음(땅)이 되도록, 말씀을 듣게 하고, 받게 하고, 깨닫게 하고, 지키게(붙잡게) 하고, 인내하게 하고, 결실하도록 힘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 결실은 \\\\\\\'좋은 씨\\\\\\\'에서 시작됩니다. \\\\\\\'씨\\\\\\\'는 \\\\\\\'천국 말씀\\\\\\\'이요(마 13:19), \\\\\\\'하나님의 말씀\\\\\\\'(막 4:14, 눅 8:11)입니다. 여기에서 \\\\\\\'천국 말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에 의해서 선포되는 \\\\\\\'복음\\\\\\\'을 가리킵니다. \\\\\\\'씨\\\\\\\'는 결실의 인자(因子)가 됩니다. 씨 속에는 생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4-5). 그는 참 빛이요, 각 사람을 비추는 세상의 빛(요1:9)이요, 생명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 8:12). 씨 속에 있는 생명의 힘이 움을 터뜨리게 합니다. 순이 나게 합니다. 하늘을 향하여 자라나는 성장의 힘이 됩니다. 꽃이 피게 하고, 향기를 발하게 하며, 벌과 나비를 불러, 마침내 열매 맺게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은 썩어질 씨가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 23). 세세토록 있는 말씀, 곧 우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 25).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고, 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히 4:12). 말하자면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자기 확장, 자기 폭발, 자기 성장, 자기 발전, 자기 진보, 자기 창조, 자기 결실을 그 속에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씨는 위대한 미래와 축복의 미래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 교사들은 아이들이 품고 있는 씨앗이 발아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자기 확장, 자기 폭발, 자기 성장, 자기 발전, 자기 진보, 자기 창조, 자기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결실은 뿌리는 자에 의해서 진행이 됩니다. 세 복음서에는 똑같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다\\\\\\\"고 하였는데(마 13:3, 막 4:3, 눅 8:5), 여기에 \\\\\\\'씨 뿌리는 자\\\\\\\'는 우선 예수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37). 그리고 모든 시대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모든 전도자와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마 5:13, 14, 28:19, 막 16:15). 씨를 뿌리는 농부의 행위는 바로 복음전파 행위를 뜻합니다.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던 그리스도의 사역은, 2000년 동안이나 계속 되어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강하게, 더 뜨겁게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씨\\\\\\\'를 뿌려야 하는데, 좋은 씨 곧 천국의 복음을 뿌려야 합니다. 그것도 좋은 밭에 뿌려야 하며, 적절한 시기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면 원리에 따라서 많이 뿌려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땅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각종 농약과 생활하수, 산업폐수, 화학비료들에 의하여서 토양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토양오염에 의한 영향은, 오염물질의 먹이 연쇄를 통한 오염물질이 다시금 인간에게 유입되고, 농산물들이 잘 자라지 못하게 되며, 산성비의 원인이 되어, 토양내 산도증가와 이에 따른 식물의 생육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제 자연 친화적 농업이 필요합니다. 환경을 살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각양 세속적인 문화의 오염속에서 허덕이는 우리 아이들을 말씀으로 치료해주고, 말씀으로 튼튼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농부는 농사에 대하여 전문가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우리 교사들은 말씀에 대하여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연구하고, 부지런히 준비하여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결과는 30배, 60배, 100배 결실을 하여야 합니다. 마가는 30배, 60배, 100배의 순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막 4:8). 마태는 100배, 60배, 30배의 순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마 13:23). 어느 편의 표현이든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한 알의 종자(씨)가 땅에 떨어져 맺는 엄청난 축복의 결과입니다. 30배, 60배, 100배라고 하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① 한 알의 씨가 맺을 수 있는 결실의 결과는 모두 일정치 않다는 뜻입니다. 어떤 씨는 30배, 어떤 씨는 60배, 어떤 씨는 100배로 각각 차이 있는 결실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전도(선교) 현장에서 이러한 현실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결실을 맺는 데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② 살아있는 씨, 생명의 씨는 결코 그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요 12:24). 씨앗은 30배든, 60배든, 100배든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③ 이것은 또한 증가의 법칙을 알려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30배, 60배, 100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2).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5).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요 15:8). 즉, 열매맺음으로 인하여 다음해에 다시 그 씨앗들은 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와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은 21세기의 주인공들입니다. 21세기 역사의 현장은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큰 농장이요, 큰 밭입니다. 21세기의 역사의 현장은 곡식이 익어 희어져버린 마지막 추수기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십니다(요 4:35).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귀 기울여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고 하십니다(막 4: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막 4:9). 이제 성경학교를 맞이하여서, 우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먼저 좋은 밭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씨앗을 받아들여 싹 틔우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도록 양육해야만 합니다. 21세기의 주인공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로서, 마지막 추수기의 충성된 일꾼으로 양육하는 귀한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우리들 모두가 좋은 일꾼들이 다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3차원의 행복/ 딤전6:17-19/ 착한사마리아주일(사랑실천주일)설교
3차원의 행복 딤전6:17-19 오늘은 우리 샘물교회가 매년 10월 둘째 주일을 맞이하여 드리는 착한 사마리아 주일입니다. 작은 사랑 실천 운동을 통해 주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이웃되어 살아가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크게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차원의 행복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1차원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사업을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은 1차원의 행복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본능대로 살아가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2차원의 행복은 가족을 위한 것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자기 가족을 위해서 일생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부모, 남편, 아내, 자녀, 손자, 손녀, 친척을 위해서 피땀 흘리면서 노력을 하고, 그것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귀한 일은 3차원의 행복입니다. 3차원의 행복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전혀 다른 사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행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랑의 2중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게 되고, 3차원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를 오직 은혜로 구원해주신 이유도, 이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3차원의 행복을 얼마나 풍성히 누리시고 있습니까? 바울은 3차원의 행복의 비결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바울은 디모에게게 부탁하기를, “부한 자들로 하여금 헛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게 하라”고 하면서, 18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려야할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권면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입니다.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갑니까? 오늘 본문의 권면대로 살아간다면 그야말로 차원 높은 3차원의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인지, 바울이 19절에서 증거합니다.󰡒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여기서 ‘좋은 터’란 ‘좋은 보화’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면, 이것이 다 미래에 자기를 위해서 좋은 보화를 쌓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결국 참된 생명을 얻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기쁨이 궁극적인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 받고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 사실은 의심 없이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복이 그저 내게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의 삶에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그 때부터는 내 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피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는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우리 인류를 위해 다 부어주신 그 사랑과 능력으로 이웃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야말로 차원 높은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는 지금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1차원의 행복, 2차원의 행복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3차원의 행복으로 나아가서 그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타적 유전자가 강력히 작용해서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행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3차원의 행복! 이 행복을 놓치지 말고 마땅히 누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 행복을 끝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누릴 수 있을까? 1.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확실히 달라지는 변화 하나는 남이 점점 크게 보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나 자신, 내 가족 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십자가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면서, 남을 생각하게 되고, 남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근본적인 가치관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은 그저 1, 2차원의 행복에 머물러 있고,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란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그저 평화와 행복을 보장받으려는 평범한 종교인에 불과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세리장이요 상당한 부자인 삭개오가 어느 날 허전하고 공허한 삶을 느끼며,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했습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놀라운 기쁨과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물질이나 보여지는 현상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놀라운 행복을 맛본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쁨과 행복을 자기 안에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뺏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그저 세상의 가치관, 물질적 가치관에서 하늘의 가치관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내 것을 움켜쥐기에는 더 애를 쓰고, 나 자신, 내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차원이 낮은 것입니다.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하나님께 더 달라고, 부르짖고 매달리고 있는 것은 영적인 소리 공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강철왕으로 알려진 Andrew Carnegie는 어려서부터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고난의 과정을 잘 이긴 후에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철강사업가로 보다는 자선사업가로 생각합니다. 아마 그가 벌어들인 재산만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에서 최고의 호사를 누리면서 살아도 남고 또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시점에서 회사를 매각하고, 인생 후반부는 자선사업에 몰두했습니다. 2,509개의 공공도서관, 카네기 공과대학, 카네기 교육진흥재단, 각종 평화재단 건립 등에 전 재산의 90%를 기부했습니다. 평소에 그는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부자인 채로 죽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카네기는 그 말대로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남에게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카네기는 인간의 일생을 2기로 나누어 보면, 전기에는 부를 축적하는 일이었습니다. 후기에는 축척 된 부를 사회복지를 위해서 투자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천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천이 사랑입니다. 실천이 능력입니다. 실천이 감동을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천이 3차원의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인생의 전반기는 정직하게 땀흘려서 많이 돈도 벌고, 인생의 후반기에는 그 주어진 것들로 이웃을 위해서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를 위한 아름다운 모습이며, 3차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남에게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부자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돈 벌어서 남 주자! 남 주기 위해 더 많이 벌고, 더 잘 되자! 아멘 이것이 3차원의 행복을 소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2.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하는 삶은 분명히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과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과 함께 하면서 행복하셨습니다. 곧 3차원의 행복을 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제자들, 저와 여러분도 그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처럼 삶을 살아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번 우리 교회와 함께 체육대회를 했던 구이 찬미교회 김엽 목사님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목사님은 전혀 얼굴도 모르는 타지역의 성도에게 자신의 간의 일부를 떼어 이식하게 하여 생명을 살렸습니다. 간 이식을 받은 분은 간경화에서 간암으로 고생하는 안철경권사(42,서울세신감리교회)인데, 그 가족은 너무 고맙고 감사하면서도 주의 종에게 칼을 대개 할 수 없다며 반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님은 “간 이식을 한다고 죽지 않는다”며 오히려 설득해서 준 것입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간이식을 위한 조직검사에서 지방간 수치가 60%로 나타나 적합 가능한 20%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목사님은 식사량을 줄이고 간식을 먹지 않으며 운동하여 2달간 15kg의 체중을 줄여 지방간을 5%로 낮춘 것입니다. 그는 주기 위해서 운동했습니다. 주기 위해 온갖 땀을 흘리고 노력했습니다. 서울 아산병원에서 수술했는데, 수혜자가 병원비, 수술비의 부담이 클 것이라며 10일만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했습니다. 너무 감사한 안권사 가족은 200만원을 주었는데, 이를 찬미교회에 감사헌금을 드렸다가, 제직들과 상의 한 끝에 다시 안권사에게 선교비라는 명목으로 돌려드렸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내용을 읽으면서 정말 3차원의 행복으로 사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나와 가족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좀더 차원이 높게 이웃을 위해 관심과 사랑의 눈을 돌립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내 자신이 3차원의 행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3차원의 행복을 모르고 그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뭔가 새롭게 달라져야 할 줄 믿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주님 안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는 근본적인 행복을 4차원의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그 4차원의 행복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이 3차원의 행복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결국 3차원의 행복을 경험하는 사람이 4차원의 행복도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좀더 차원 높은 3차원의 행복으로 가득한 샘물의 가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가질 때 3차원의 행복을 누립니다. 착한 사마리아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 샘물교회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행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관심 갖는 일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밖에 벗어나면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봉사요, 섬김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저 1차원적인 행복에 머물러 있지 말고, 가치 있고,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3차원의 행복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차원의 행복은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찾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 주일을 맞이하여 드려지는 헌금은 바로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찾기 위함입니다. 또한 매 시간 마다 기회를 만들어 드리는 이삭헌금 또한 말없이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찾기 위함입니다. 이삭헌금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한 작은 결단입니다. 둘째는 작은 정성이 큰사랑과 감동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삭헌금의 의미는 물건을 사고 남은 돈, 즉 이삭을 모아 드리는 것입니다. *최근까지의 이삭헌금의 내용 여러분이 노란 봉투에 드리는 이삭헌금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 내용을 읽어드립니다. 저는 이 내용만 읽어도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동전 모은 것 지폐로 바꿔 이삭헌금 드립니다. 상한 소세지를 돈으로 바꿨습니다. 봉사와 현장을더 많이 찾기를 원합니다. 방 청소하다 발견한 봉투 속에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이삭헌금 말씀하신 후에 드리게 되어 더욱 기쁘고 감사합니다. 여름 성경학교 식사 하면서 남은 거스름돈 1360원, 장년수련회 시장 보면서 남은 동전 160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청년부 수련회 식사 예산 중 집사님들께서 고기와 닭을 지원해 주셔서 많이 남았습니다. 그것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183,140원) 지갑 속에 있는 마지막 모든 것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김봉규성도 215,000) 여행 다녀와서 세탁한 옷 속에 들어 있었던 세탁된 돈 8천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광주를 다녀와서 고속도로비 지불하고 남은 1600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제과점에서 빵을 사고 남은 돈 800원을 이삭헌금 드립니다. 빨래하고 난 후 세탁기 속에서 주운 돈 천원과 아이들이 벗어 논 세탁할 바지 주머니에서 발견한 천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몸이 아파서 약을 사먹으려고 했는데, 어떤 분이 약을 사주셔서 약값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구역식구 가정에서 청소를 도와주다 바닥에서 주운 돈 2900원을 이삭헌금 드린다고 하여 드립니다. 시장을 다녀와서 시장 본 십분의 일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차 내부청소 하다가 차안에 모아 논 동전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주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가는 도중 천원을 주었는데 이삭헌금에 동참하라는 감동이 와 드립니다. 서울에 다녀오며 쓰고 남은 비용의 일부를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택시타고 내리면서 지갑을 놓고 내렸는데 다음 손님한테 전화와서 찾게되었습니다. 담겨 있던 2만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교회 바닥에서 주운 돈 100원 마트에서 물건 사고 남은 돈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시장에서 야채 사고 남은 돈 5천원을 이삭헌금 드립니다. 대청소를 하다가 딸 방에서 주운 1천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마트에서 2950원하는 양파를 아파트 내에서 여는 장터에서 2500원에 샀습니다. 남은 450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공과금을 납부하고 남은 180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남편 사우나 다녀와서 요금 내고 남은 돈 얻어 이삭헌금 드립니다. 청소하다가 쇼파 밑에서 주운 동 500원을 이삭헌금 드립니다. 그날 그날 쓰고 남은 동전을 모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통닭을 시키고 남은 돈 500원과 통닭 값의 반절을 더해 이삭줍기 헌금드립니다. 남편 잠바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전을 꺼내서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천원 주고(교회에서) 옷을 샀는데 옷 속에서 돈 100원과 구역 밥하고 남은 돈 2790원을 드립니다. 점심 식사 대접하려고 준비했는데 대접을 받게 되어 식사 값 준비한 일부를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공원에 갔다가 자판기 커피를 빼먹으려고 했는데 기계가 고장나 주인에게 이야기했더니 미안하다며 그냥 주셔서 커피 거저 주신 것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2천원) 제가 받아야 할 돈인데 잊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안 주셨다면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있었을 것입니다. 액수는 적지만 정말 필요한 곳에 쓰여지기 원하여 이삭헌금 드립니다.(5만원) 배에서 꼬르륵 참기 어려웠지만 금식하고 그 밥값으로 이삭헌금 드립니다. 버스 비 하고 남은 돈 모아서 이삭헌금 드립니다. 전도특공대 마치고 샘물빨래나라 방문하다가 문 앞에서 주운 돈 이만원을 이삭헌금 드립니다. 쓰고 남은 돈 10원짜리 50원짜리 모아서 이삭헌금 드립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이삭까지 다 거두지 않고 사랑의 현장을 위하여 이삭줍기 헌금으로 드린 것입니다. 적은 돈이지만 참으로 소중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필요한 곳에 잘 나누어야 합니다. 이 나눔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섬김은 곧 주님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돌봄과 봉사의 현장을 찾아서 주님이 주시는 3차원의 행복을 맛보는 여러분의 생활되시기 바랍니다.
3차원의 행복/ 딤전6:17-19/ 착한사마리아주일(사랑실천주일)설교
3차원의 행복 딤전6:17-19 오늘은 우리 샘물교회가 매년 10월 둘째 주일을 맞이하여 드리는 착한 사마리아 주일입니다. 작은 사랑 실천 운동을 통해 주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이웃되어 살아가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크게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차원의 행복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1차원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사업을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은 1차원의 행복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본능대로 살아가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2차원의 행복은 가족을 위한 것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자기 가족을 위해서 일생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부모, 남편, 아내, 자녀, 손자, 손녀, 친척을 위해서 피땀 흘리면서 노력을 하고, 그것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귀한 일은 3차원의 행복입니다. 3차원의 행복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전혀 다른 사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행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랑의 2중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게 되고, 3차원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를 오직 은혜로 구원해주신 이유도, 이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3차원의 행복을 얼마나 풍성히 누리시고 있습니까? 바울은 3차원의 행복의 비결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바울은 디모에게게 부탁하기를, “부한 자들로 하여금 헛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게 하라”고 하면서, 18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려야할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권면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입니다.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갑니까? 오늘 본문의 권면대로 살아간다면 그야말로 차원 높은 3차원의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인지, 바울이 19절에서 증거합니다.󰡒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여기서 ‘좋은 터’란 ‘좋은 보화’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면, 이것이 다 미래에 자기를 위해서 좋은 보화를 쌓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결국 참된 생명을 얻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기쁨이 궁극적인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 받고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 사실은 의심 없이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복이 그저 내게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의 삶에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그 때부터는 내 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피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는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우리 인류를 위해 다 부어주신 그 사랑과 능력으로 이웃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야말로 차원 높은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는 지금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1차원의 행복, 2차원의 행복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3차원의 행복으로 나아가서 그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타적 유전자가 강력히 작용해서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행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3차원의 행복! 이 행복을 놓치지 말고 마땅히 누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 행복을 끝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누릴 수 있을까? 1.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확실히 달라지는 변화 하나는 남이 점점 크게 보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나 자신, 내 가족 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십자가의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면서, 남을 생각하게 되고, 남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근본적인 가치관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은 그저 1, 2차원의 행복에 머물러 있고,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란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그저 평화와 행복을 보장받으려는 평범한 종교인에 불과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세리장이요 상당한 부자인 삭개오가 어느 날 허전하고 공허한 삶을 느끼며,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했습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놀라운 기쁨과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물질이나 보여지는 현상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놀라운 행복을 맛본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쁨과 행복을 자기 안에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뺏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그저 세상의 가치관, 물질적 가치관에서 하늘의 가치관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내 것을 움켜쥐기에는 더 애를 쓰고, 나 자신, 내 가족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차원이 낮은 것입니다.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하나님께 더 달라고, 부르짖고 매달리고 있는 것은 영적인 소리 공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강철왕으로 알려진 Andrew Carnegie는 어려서부터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는 고난의 과정을 잘 이긴 후에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철강사업가로 보다는 자선사업가로 생각합니다. 아마 그가 벌어들인 재산만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에서 최고의 호사를 누리면서 살아도 남고 또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시점에서 회사를 매각하고, 인생 후반부는 자선사업에 몰두했습니다. 2,509개의 공공도서관, 카네기 공과대학, 카네기 교육진흥재단, 각종 평화재단 건립 등에 전 재산의 90%를 기부했습니다. 평소에 그는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부자인 채로 죽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카네기는 그 말대로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남에게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카네기는 인간의 일생을 2기로 나누어 보면, 전기에는 부를 축적하는 일이었습니다. 후기에는 축척 된 부를 사회복지를 위해서 투자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천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천이 사랑입니다. 실천이 능력입니다. 실천이 감동을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천이 3차원의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인생의 전반기는 정직하게 땀흘려서 많이 돈도 벌고, 인생의 후반기에는 그 주어진 것들로 이웃을 위해서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를 위한 아름다운 모습이며, 3차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남에게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부자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돈 벌어서 남 주자! 남 주기 위해 더 많이 벌고, 더 잘 되자! 아멘 이것이 3차원의 행복을 소유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2.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하는 삶은 분명히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과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과 함께 하면서 행복하셨습니다. 곧 3차원의 행복을 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제자들, 저와 여러분도 그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처럼 삶을 살아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번 우리 교회와 함께 체육대회를 했던 구이 찬미교회 김엽 목사님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목사님은 전혀 얼굴도 모르는 타지역의 성도에게 자신의 간의 일부를 떼어 이식하게 하여 생명을 살렸습니다. 간 이식을 받은 분은 간경화에서 간암으로 고생하는 안철경권사(42,서울세신감리교회)인데, 그 가족은 너무 고맙고 감사하면서도 주의 종에게 칼을 대개 할 수 없다며 반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님은 “간 이식을 한다고 죽지 않는다”며 오히려 설득해서 준 것입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간이식을 위한 조직검사에서 지방간 수치가 60%로 나타나 적합 가능한 20%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목사님은 식사량을 줄이고 간식을 먹지 않으며 운동하여 2달간 15kg의 체중을 줄여 지방간을 5%로 낮춘 것입니다. 그는 주기 위해서 운동했습니다. 주기 위해 온갖 땀을 흘리고 노력했습니다. 서울 아산병원에서 수술했는데, 수혜자가 병원비, 수술비의 부담이 클 것이라며 10일만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했습니다. 너무 감사한 안권사 가족은 200만원을 주었는데, 이를 찬미교회에 감사헌금을 드렸다가, 제직들과 상의 한 끝에 다시 안권사에게 선교비라는 명목으로 돌려드렸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내용을 읽으면서 정말 3차원의 행복으로 사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나와 가족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좀더 차원이 높게 이웃을 위해 관심과 사랑의 눈을 돌립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내 자신이 3차원의 행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3차원의 행복을 모르고 그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뭔가 새롭게 달라져야 할 줄 믿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주님 안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는 근본적인 행복을 4차원의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그 4차원의 행복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이 3차원의 행복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결국 3차원의 행복을 경험하는 사람이 4차원의 행복도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좀더 차원 높은 3차원의 행복으로 가득한 샘물의 가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가질 때 3차원의 행복을 누립니다. 착한 사마리아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 샘물교회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행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관심 갖는 일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밖에 벗어나면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봉사요, 섬김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저 1차원적인 행복에 머물러 있지 말고, 가치 있고,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3차원의 행복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차원의 행복은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찾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 주일을 맞이하여 드려지는 헌금은 바로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찾기 위함입니다. 또한 매 시간 마다 기회를 만들어 드리는 이삭헌금 또한 말없이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찾기 위함입니다. 이삭헌금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한 작은 결단입니다. 둘째는 작은 정성이 큰사랑과 감동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삭헌금의 의미는 물건을 사고 남은 돈, 즉 이삭을 모아 드리는 것입니다. *최근까지의 이삭헌금의 내용 여러분이 노란 봉투에 드리는 이삭헌금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 내용을 읽어드립니다. 저는 이 내용만 읽어도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동전 모은 것 지폐로 바꿔 이삭헌금 드립니다. 상한 소세지를 돈으로 바꿨습니다. 봉사와 현장을더 많이 찾기를 원합니다. 방 청소하다 발견한 봉투 속에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이삭헌금 말씀하신 후에 드리게 되어 더욱 기쁘고 감사합니다. 여름 성경학교 식사 하면서 남은 거스름돈 1360원, 장년수련회 시장 보면서 남은 동전 160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청년부 수련회 식사 예산 중 집사님들께서 고기와 닭을 지원해 주셔서 많이 남았습니다. 그것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183,140원) 지갑 속에 있는 마지막 모든 것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김봉규성도 215,000) 여행 다녀와서 세탁한 옷 속에 들어 있었던 세탁된 돈 8천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광주를 다녀와서 고속도로비 지불하고 남은 1600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제과점에서 빵을 사고 남은 돈 800원을 이삭헌금 드립니다. 빨래하고 난 후 세탁기 속에서 주운 돈 천원과 아이들이 벗어 논 세탁할 바지 주머니에서 발견한 천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몸이 아파서 약을 사먹으려고 했는데, 어떤 분이 약을 사주셔서 약값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구역식구 가정에서 청소를 도와주다 바닥에서 주운 돈 2900원을 이삭헌금 드린다고 하여 드립니다. 시장을 다녀와서 시장 본 십분의 일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차 내부청소 하다가 차안에 모아 논 동전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주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가는 도중 천원을 주었는데 이삭헌금에 동참하라는 감동이 와 드립니다. 서울에 다녀오며 쓰고 남은 비용의 일부를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택시타고 내리면서 지갑을 놓고 내렸는데 다음 손님한테 전화와서 찾게되었습니다. 담겨 있던 2만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교회 바닥에서 주운 돈 100원 마트에서 물건 사고 남은 돈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시장에서 야채 사고 남은 돈 5천원을 이삭헌금 드립니다. 대청소를 하다가 딸 방에서 주운 1천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마트에서 2950원하는 양파를 아파트 내에서 여는 장터에서 2500원에 샀습니다. 남은 450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공과금을 납부하고 남은 180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남편 사우나 다녀와서 요금 내고 남은 돈 얻어 이삭헌금 드립니다. 청소하다가 쇼파 밑에서 주운 동 500원을 이삭헌금 드립니다. 그날 그날 쓰고 남은 동전을 모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통닭을 시키고 남은 돈 500원과 통닭 값의 반절을 더해 이삭줍기 헌금드립니다. 남편 잠바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전을 꺼내서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천원 주고(교회에서) 옷을 샀는데 옷 속에서 돈 100원과 구역 밥하고 남은 돈 2790원을 드립니다. 점심 식사 대접하려고 준비했는데 대접을 받게 되어 식사 값 준비한 일부를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공원에 갔다가 자판기 커피를 빼먹으려고 했는데 기계가 고장나 주인에게 이야기했더니 미안하다며 그냥 주셔서 커피 거저 주신 것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2천원) 제가 받아야 할 돈인데 잊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안 주셨다면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있었을 것입니다. 액수는 적지만 정말 필요한 곳에 쓰여지기 원하여 이삭헌금 드립니다.(5만원) 배에서 꼬르륵 참기 어려웠지만 금식하고 그 밥값으로 이삭헌금 드립니다. 버스 비 하고 남은 돈 모아서 이삭헌금 드립니다. 전도특공대 마치고 샘물빨래나라 방문하다가 문 앞에서 주운 돈 이만원을 이삭헌금 드립니다. 쓰고 남은 돈 10원짜리 50원짜리 모아서 이삭헌금 드립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이삭까지 다 거두지 않고 사랑의 현장을 위하여 이삭줍기 헌금으로 드린 것입니다. 적은 돈이지만 참으로 소중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필요한 곳에 잘 나누어야 합니다. 이 나눔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섬김은 곧 주님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돌봄과 봉사의 현장을 찾아서 주님이 주시는 3차원의 행복을 맛보는 여러분의 생활되시기 바랍니다.
70인 전도대 헌신 예배/삿7:15-25
70인 전도대 헌신 예배/삿7:15-25 2003-12-11 20:20:47 read : 10 기드온의 300명 용사 적진을 정탐하고 적군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기드온과 부라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조용히 적진에서 물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300명의 용사를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겁하나님께서 그들을 우리들에게 그들을 붙이셨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다.겂하고 군대를 100명씩 세떼로 나누고 각 사람의 손에 횃불 하나씩을 들리고 그 횃불은 항아리에 감추고, 한 손에는 나팔을 들리고 전직을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군호가 떨어지거든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 하며 큰 소리를 했습니다. 밤 이경이 되여 체번할 때가 되여 군호가 떨어지니 적군을 포위하였던 이스라엘 군이 일제히 항아리를 깨뜨려 횃불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을 받아라 하니 적군들이 달음질을 하고 부르짖으며 도망을 하는데 다시 나팔을 일제히 부니 그들이 큰 혼란 속에 빠져 서로 자기편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미디안 군인과 앗수르 군인과 동방에서 온 군인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까지 서로 살육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은 대 승리를 하고 기드온은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평화를 누리게 되였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에서 기드온 300면 용사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을 위해 자원한 사람들입니다. 위험한 전쟁입니다. 7년 동안을 압박을 당하면서 숨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죽어 살아야 했던 상대입니다. 이 전쟁에서 그들은 생명을 잃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어차피 무엇인가에 자신을 헌신하고 살아가게 되여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헌신하고 어떤 일을 위해 살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의 가치와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는 사람을 애국자라고 하고, 돈을 위해 사는 사람을 수전노라고 하며,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은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잠언의 기자는 겁(잠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겂라고 하여 돈 보다 명예가 더 귀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겁(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겂라고 하셨으니 주님을 위해 살고 죽은 것이 가장 귀한 일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버려 죄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일을 하실 때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고 죽고자 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것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자들을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겁(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겂라 하시고 이어 겁(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겂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에게 서원하는 것을 갚은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겁(시116:12-14)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겂 여러분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아실 것입니다. 이 곡은 달밤의 말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을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고 이 곡이 한 눈먼 소녀를 위해 작곡되었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소녀는 달밤의 아름다움과 나무와 관목과 풀잎 위에 은빛으로 빛나는 달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반짝이는 영롱한 별들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소녀를 만난 베토벤은 그 소녀를 위해 아름다운 밤을 그 소녀가 볼 수 있도록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는 말이 아니라 노래로 그 밤의 아름다움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노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이 세상을 찬양하게 했습니다. 한 음악가의 한 눈먼 소녀를 위한 수고가 이렇게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거늘 전능하신 하나님을 위해 몸을 바친 하나님의 종들의 헌신이 얼마나 이 세상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까? 2. 그들은 신중한 사람입니다. 물을 혀로 핥아먹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들이 이 전쟁의 의미를 알고 지원한 것을 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을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겁(시77:12)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겂라고 하셨고 겁(잠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겂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겁(시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겂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린이 시간에 동물의 세계를 보면 한결같은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먹는 것에 대해 말하고, 둘째는 번식에 대한 것을 말하고(짝짓기), 셋째는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있습니다. 즉 동물은 짝짓기와 먹는 것과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살뿐이지 다른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사상도 없고, 사랑도 없고, 문화도 없으면 문명도 없습니다. 오직 동물적 본능에 의한 세 가지 원초적인 행동만을 본능적으로 할뿐입니다. 만일 사람도 짝짓기 하는 것, 먹는 것, 땅을 많이 차지하고 살려고 하는 것에 지배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동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자신을 깊이 생각하고, 이웃을 깊이 생각하고, 살 이유를 깊이 생각하고, 헌신할 이유를 깊이 생각하고, 죽을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것을 깊이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3.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기드온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기드온이 물을 마시라 하면 물을 마시고 기다리라 하면 기다리고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을 준비하라 하면 준비하고 조용히 하라 하면 말하지 않고 움직이라 하면 움직이고 포위하라 하면 포위하고 깨뜨리리 하면 깨뜨리고 소리를 질러라 하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이 순종을 했기 때문에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승리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살고 싶을 것입니다.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전쟁하는 사람들이 칼도 창도 없으니 무척 굼굼하고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미리 미리 어떻게 하겠다고 전략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굼굼 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과 지도자들 앞에서 똑똑한 사람을 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겁알아야 순종을 하던지 말던지 하지, 무엇을 어떻게 순종하라는 말인가겂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밖에 없으니 그것은 겁예, 예겂로 했습니다. 겁(고후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겂 모세는 그의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다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겁(신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겂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 무조건 겁아멘겂하라는 것입니다. 앗시스의 프랜시스가 경영하는 수도원에 어느 날 견습 수도사가 들어 왔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그들을 데리고 수도원의 농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배추를 심으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겁뿌리는 땅위로 드러나게 하고, 줄거리는 땅 속에 묻어라겂 그 중에 한 사람은 시키는 데로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심으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겁아, 이 사람, 자네는 너무 똑똑해서 우리 수도원에 적합하지를 않네.겂라고 하면서 내보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겁예겂라하고 아멘 이라고 합시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모자라서 거역하는 사람을 쓰시겠으며 알지도 못하고 따지고 들고 믿지도 아니하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을 쓰시겠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같은 못난 사람을 하나님의 일군 삼아 주시고 큰 축복의 소리를 듣게 해 주신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입니다.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겁(엡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 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겂 겁(골1: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겂라고 하여 하나님 일군 된 은혜에 넘치는 감사를 하고 죽도록 충성을 하였습니다. <솔론>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겁지배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라겂고 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에게도 하지만 하나님의 종들에게도 해야 합니다. 겁(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 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겂하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4. 항아리에 횃불을 가진 사람들 기드온의 군대는 실제로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이 동네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욕이나 얻어먹을 것입니다. 이 동네 사람이 미디안 군인들도 아니고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영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겁(전12: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겂 겁(애4:2)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와 정금에 비할러니 어찌 그리 토기장이의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겂하셨으니 이런 말씀들을 보면 항아리는 사람 또는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횃불은 겁(창15:17) 해가 저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겂 겁(사62:1)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겂 겁(겔1:13)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겂 겁(단10: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개 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겂 겁(슥12:6) 그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겂라고 하셔서 하나님 자신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겁항아리를 깨뜨려 횃불은 높이 쳐들었다겂는 말씀은 우리들의 마음에 깨뜨려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깨뜨려 지는 것입니까?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겁(레11:33) 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니 너는 그 그릇을 깨뜨리리겂 주님에게 정성을 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겁(막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겂 우리들의 나약한 인간성, 욕심, 이기심, 불 신앙, 어리석음, 뒤돌아보는 것, 개으름, 주저하는 것들이 깨여진 우리들의 마음 밖으로 뚱겨져 나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나타나야 합니다. 5. 나팔을 가지고 분 사람들 그들은 나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팔은 선지자들이 그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썼던 군호용 신호기였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겁(사58:1)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겂 겁(렘4:5)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겂 겁(겔33:6) 그러나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겂 겁(욜2: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겂라고 하여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나팔을 분 것은 적군들을 혼란에 빠뜨려 스스로 자기 아군을 죽이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 였지만 복음 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사단의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는 단 하나님의 무기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적들을 물리치는 가장 첨단적인 최신예 무기입니다. 마지막 주님이 사단과의 싸움에서도 말씀의 검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겁(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겂 겁(계19: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겂 겁(계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 우더라겂 6. 여호와와 기드온의 만세를 부른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여호와와 기드온에게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적들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300명으로 그들을 포위했다고 해도 촘촘히 포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듬성듬성 거리를 띄어 그들은 섰습니다. 그들이 촘촘히 섰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두려움과 무서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역경과 무서움을 믿음으로 다 극복을 했습니다. 군호가 떨어지자 그들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은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는 말이 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믿고 하나님의 종 기드온을 믿었습니다. 여호와는 그들을 승리케 해 주실 신으로 믿고, 기드온은 하나님의 종으로 믿었습니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올바른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겁(막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겂 믿음으로 죄용서를 받습니다. 겁(눅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겂 믿음으로 죽은 자을 살립니다. 겁(눅9: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겂 믿음은 우리의 소망을 확실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겁(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겂 믿음으로 우리들의 심령이 깨끗해집니다. 겁(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겂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겁(롬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겂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겁 (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겂 믿음은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십니다. 겁(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겂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를 해야 영생을 얻습니다.겁(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겂 겁(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겂 겁(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겂 여호와 만세를 부른 사람들, 기드온의 만세를 부른 사람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종을 믿는 사람들이 였습니다. 몽테뉴라는 사람은 겁알지 못하는 것만큼 굳게 믿어지는 것도 없다겂라고 말하고 톨스토이는 겁믿음은 인생의 힘이다겂라고 했습니다. 볼테르는 겁신앙은 이성의 힘을 초월하는 힘이다겂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잘 모르니 더욱 잘 믿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였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위대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이 당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큰 믿음을 바라십니다. 여호와의 만세를 부릅시다.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들고 나팔을 붑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봅시다.
70인 전도대/ 삿7:15-25/ 전도대헌신예배설교/ 2002-03-24
70인 전도대 삿7:15-25 기드온의 300명 용사 적진을 정탐하고 적군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기드온과 부라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조용히 적진에서 물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300명의 용사를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겁하나님께서 그들을 우리들에게 그들을 붙이셨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다.겂하고 군대를 100명씩 세떼로 나누고 각 사람의 손에 횃불 하나씩을 들리고 그 횃불은 항아리에 감추고, 한 손에는 나팔을 들리고 전직을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군호가 떨어지거든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 하며 큰 소리를 했습니다. 밤 이경이 되여 체번할 때가 되여 군호가 떨어지니 적군을 포위하였던 이스라엘 군이 일제히 항아리를 깨뜨려 횃불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을 받아라 하니 적군들이 달음질을 하고 부르짖으며 도망을 하는데 다시 나팔을 일제히 부니 그들이 큰 혼란 속에 빠져 서로 자기편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미디안 군인과 앗수르 군인과 동방에서 온 군인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까지 서로 살육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은 대 승리를 하고 기드온은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평화를 누리게 되였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에서 기드온 300면 용사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을 위해 자원한 사람들입니다. 위험한 전쟁입니다. 7년 동안을 압박을 당하면서 숨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죽어 살아야 했던 상대입니다. 이 전쟁에서 그들은 생명을 잃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어차피 무엇인가에 자신을 헌신하고 살아가게 되여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헌신하고 어떤 일을 위해 살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의 가치와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는 사람을 애국자라고 하고, 돈을 위해 사는 사람을 수전노라고 하며,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은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잠언의 기자는 겁(잠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겂라고 하여 돈 보다 명예가 더 귀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겁(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겂라고 하셨으니 주님을 위해 살고 죽은 것이 가장 귀한 일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버려 죄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일을 하실 때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고 죽고자 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것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자들을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겁(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겂라 하시고 이어 겁(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겂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에게 서원하는 것을 갚은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겁(시116:12-14)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겂 여러분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아실 것입니다. 이 곡은 달밤의 말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을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고 이 곡이 한 눈먼 소녀를 위해 작곡되었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소녀는 달밤의 아름다움과 나무와 관목과 풀잎 위에 은빛으로 빛나는 달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반짝이는 영롱한 별들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소녀를 만난 베토벤은 그 소녀를 위해 아름다운 밤을 그 소녀가 볼 수 있도록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는 말이 아니라 노래로 그 밤의 아름다움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노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이 세상을 찬양하게 했습니다. 한 음악가의 한 눈먼 소녀를 위한 수고가 이렇게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거늘 전능하신 하나님을 위해 몸을 바친 하나님의 종들의 헌신이 얼마나 이 세상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까? 2. 그들은 신중한 사람입니다. 물을 혀로 핥아먹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들이 이 전쟁의 의미를 알고 지원한 것을 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을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겁(시77:12)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겂라고 하셨고 겁(잠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겂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겁(시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겂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린이 시간에 동물의 세계를 보면 한결같은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먹는 것에 대해 말하고, 둘째는 번식에 대한 것을 말하고(짝짓기), 셋째는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있습니다. 즉 동물은 짝짓기와 먹는 것과 자기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살뿐이지 다른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사상도 없고, 사랑도 없고, 문화도 없으면 문명도 없습니다. 오직 동물적 본능에 의한 세 가지 원초적인 행동만을 본능적으로 할뿐입니다. 만일 사람도 짝짓기 하는 것, 먹는 것, 땅을 많이 차지하고 살려고 하는 것에 지배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동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고 자신을 깊이 생각하고, 이웃을 깊이 생각하고, 살 이유를 깊이 생각하고, 헌신할 이유를 깊이 생각하고, 죽을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것을 깊이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3.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기드온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기드온이 물을 마시라 하면 물을 마시고 기다리라 하면 기다리고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을 준비하라 하면 준비하고 조용히 하라 하면 말하지 않고 움직이라 하면 움직이고 포위하라 하면 포위하고 깨뜨리리 하면 깨뜨리고 소리를 질러라 하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이 순종을 했기 때문에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승리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살고 싶을 것입니다.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전쟁하는 사람들이 칼도 창도 없으니 무척 굼굼하고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미리 미리 어떻게 하겠다고 전략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굼굼 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과 지도자들 앞에서 똑똑한 사람을 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겁알아야 순종을 하던지 말던지 하지, 무엇을 어떻게 순종하라는 말인가겂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밖에 없으니 그것은 겁예, 예겂로 했습니다. 겁(고후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겂 모세는 그의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다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겁(신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겂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 무조건 겁아멘겂하라는 것입니다. 앗시스의 프랜시스가 경영하는 수도원에 어느 날 견습 수도사가 들어 왔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그들을 데리고 수도원의 농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배추를 심으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겁뿌리는 땅위로 드러나게 하고, 줄거리는 땅 속에 묻어라겂 그 중에 한 사람은 시키는 데로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심으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겁아, 이 사람, 자네는 너무 똑똑해서 우리 수도원에 적합하지를 않네.겂라고 하면서 내보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겁예겂라하고 아멘 이라고 합시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모자라서 거역하는 사람을 쓰시겠으며 알지도 못하고 따지고 들고 믿지도 아니하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을 쓰시겠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같은 못난 사람을 하나님의 일군 삼아 주시고 큰 축복의 소리를 듣게 해 주신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입니다.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겁(엡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 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겂 겁(골1: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겂라고 하여 하나님 일군 된 은혜에 넘치는 감사를 하고 죽도록 충성을 하였습니다. <솔론>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겁지배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라겂고 했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에게도 하지만 하나님의 종들에게도 해야 합니다. 겁(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 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겂하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4. 항아리에 횃불을 가진 사람들 기드온의 군대는 실제로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이 동네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욕이나 얻어먹을 것입니다. 이 동네 사람이 미디안 군인들도 아니고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영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겁(전12: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겂 겁(애4:2)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와 정금에 비할러니 어찌 그리 토기장이의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겂하셨으니 이런 말씀들을 보면 항아리는 사람 또는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횃불은 겁(창15:17) 해가 저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겂 겁(사62:1)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겂 겁(겔1:13)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겂 겁(단10: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개 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겂 겁(슥12:6) 그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겂라고 하셔서 하나님 자신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겁항아리를 깨뜨려 횃불은 높이 쳐들었다겂는 말씀은 우리들의 마음에 깨뜨려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깨뜨려 지는 것입니까?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겁(레11:33) 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니 너는 그 그릇을 깨뜨리리겂 주님에게 정성을 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겁(막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겂 우리들의 나약한 인간성, 욕심, 이기심, 불 신앙, 어리석음, 뒤돌아보는 것, 개으름, 주저하는 것들이 깨여진 우리들의 마음 밖으로 뚱겨져 나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나타나야 합니다. 5. 나팔을 가지고 분 사람들 그들은 나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팔은 선지자들이 그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썼던 군호용 신호기였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겁(사58:1)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겂 겁(렘4:5)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겂 겁(겔33:6) 그러나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겂 겁(욜2: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겂라고 하여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나팔을 분 것은 적군들을 혼란에 빠뜨려 스스로 자기 아군을 죽이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 였지만 복음 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사단의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는 단 하나님의 무기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것은 적들을 물리치는 가장 첨단적인 최신예 무기입니다. 마지막 주님이 사단과의 싸움에서도 말씀의 검을 가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겁(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겂 겁(계19: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겂 겁(계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 우더라겂 6. 여호와와 기드온의 만세를 부른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여호와와 기드온에게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적들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300명으로 그들을 포위했다고 해도 촘촘히 포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듬성듬성 거리를 띄어 그들은 섰습니다. 그들이 촘촘히 섰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두려움과 무서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역경과 무서움을 믿음으로 다 극복을 했습니다. 군호가 떨어지자 그들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은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는 말이 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믿고 하나님의 종 기드온을 믿었습니다. 여호와는 그들을 승리케 해 주실 신으로 믿고, 기드온은 하나님의 종으로 믿었습니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올바른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겁(막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겂 믿음으로 죄용서를 받습니다. 겁(눅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겂 믿음으로 죽은 자을 살립니다. 겁(눅9: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겂 믿음은 우리의 소망을 확실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겁(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겂 믿음으로 우리들의 심령이 깨끗해집니다. 겁(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겂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겁(롬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겂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겁 (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겂 믿음은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십니다. 겁(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겂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를 해야 영생을 얻습니다.겁(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겂 겁(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겂 겁(계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겂 여호와 만세를 부른 사람들, 기드온의 만세를 부른 사람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종을 믿는 사람들이 였습니다. 몽테뉴라는 사람은 겁알지 못하는 것만큼 굳게 믿어지는 것도 없다겂라고 말하고 톨스토이는 겁믿음은 인생의 힘이다겂라고 했습니다. 볼테르는 겁신앙은 이성의 힘을 초월하는 힘이다겂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잘 모르니 더욱 잘 믿어야 합니다. 그들은 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였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위대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이 당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큰 믿음을 바라십니다. 여호와의 만세를 부릅시다. 복음의 횃불을 높이 들고 나팔을 붑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봅시다.
7년 환난과 7인, 7나팔, 7대접 사건/ 계8:1-2/ 2006-07-19
7년 환난과 7인, 7나팔, 7대접 사건 계8:1-2 지난 시간에는 7년 환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적 그리스도와 두 증인에 대한 자세한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7년 환난 중에 있을 \\\"세 화\\\"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을 7년 환난 중에 일어날 사건이 무엇이며 그 사건들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는 가운데 앞으로 이 세상에 임할 종말적인 환난의 모습을 \\\"7인, 7나팔, 7대접 사건\\\"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7년 환난 중에 일어날 사건들 7년 환난이란 말은 7년이란 인류의 종말 기간 중에 일어날 환난때문에 부쳐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7년 환난은 요한계시록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 등장하는 모양도 여러 가지로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에는 이 다양하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등장하는 환난에 대하여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도록 질서정연하게 계시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모습이 하나의 정확한 맥으로 잇고 있는데 그 맥을 인과 나팔과 대접으로 진행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모든 사건은 바로 이 인과 나팔과 대접의 순서에 따라 해석해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이 순서를 무시하고 계시록에 나오는 사건을 그대로 해석하려고 시도한다면 사건이 이중 삼중으로 중복되고 무엇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혼돈에 빠져 해석이 해석이 아니라 혼란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할 때 이 방법을 발견한 후, 이 방법에 따라 사건 하나 하나를 해석을 시도해 보니 모든 난 문제들의 해결점을 찾게 되어 쾌재를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은 7인을 말하고 나팔은 7나팔, 대접은 일곱 대접을 의미합니다. 계 6:1절을 보시겠습니다. ( ). 6장에는 인을 떼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인이 여섯째 인까지 진행됩니다. 인의 역사는 6장에서 끝나 버립니다. 그러면 이 인은 요한계시록에서 어떤 사건을 보여 주며 왜 6장에만 등장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잠깐 뒤로 미루기로 하고 다음에 나팔에 관한 것을 보겠습니다. 계 8: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계 6장에서 여섯째 인까지 떼는 일로 인의 역사는 마감하고 8장에 와서 일곱째 인을 떼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인은 여섯째 인에서 계속되는 사건이 아니라 이 인을 떼는 일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데 곧 7나팔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으로 표현된 사건 다음에 나오는 7나팔은 무엇인가? 이 문제도 잠시 후에 그 해답을 듣기로 하고 7대접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나팔부터 넷째 나팔은 8장에 나오고 다음 9장에는 다섯째 나팔, 여섯째 나팔이 나옵니다. 그런데 일곱째 나팔은 또 다른 사건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7째 나팔은 곧 7대접 심판으로 새롭게 진행되는데 이 7대접 심판이 인류의 마지막 심판이며 이 계시가 계 16장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7대접 심판으로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모든 종말적 환난이 끝나게 되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왕국이 오는데 그 나라를 우리는 무슨 나라 ? (천년왕국)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도표로 표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7인과 7나팔과 7대접과 3화에 대한 도표 ① 인의 사건은 무엇인가? 계시록 6장에만 등장하는 인의 사건은 무엇인가? 계 6장은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한 곳에 총정리한 계시록의 총론입니다. 그러므로 계 6장에는 요한계시록에 있는 모든 내용이 아주 짧게 담겨져 있습니다. 이 7인에 대하여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는 네 말의 활동 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 인을 뗄 때에 흰말이, 둘째 인을 뗄 때에 붉은 말이, 셋째 인을 뗄 때에 검은 말이, 넷째 인을 뗄 때에 청황색 말이 등장합니다. 다음 두 번째는 다섯째 인을 뗄 때에 등장하는 순교자의 호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여섯째 인인데 이 인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으로 지구의 파멸이 나옵니다. 그런데 6장에는 하나의 인을 뗄 때마다 한 말씩 네 말이 등장하는데 이 네 말의 활동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네 말의 활동을 통해서 7년 환난의 모든 사건들을 이끄는 주도 세력들의 황동 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자세히 해석해 드리겠지만 흰말은 두 증인의 활동, 붉은 말은 전쟁을 일으키는 네 바람의 활동, 검은 말은 가뭄으로 인한 기근 현상, 네 번째 말은 온 인류를 전쟁과 기근과 짐승의 표로 죽이는 적 그리스도의 활동을 의미하는 계시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바로 이 세력들에 의해 여러 가지 사건들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것으로 7년 환난을 장식하 고 있는 것입니다. * 여기서 인과 7년 환난 기간과의 연결 관계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이처럼 7년 기간 동안에는 네 말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개시키는 예언의 사역도 하고 세계적인 전쟁도 일으 키며 세계적 기근으로 굶주림도 가져오며 적 그리스도의 통치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모든 사람들로 짐 승의 표를 받게 한다. 그러므로 인(印)의 역사는 계시록의 총론이 된다. ② 다음에 나팔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팔 사건은 계 8장과 9장 그리고 16장에 나옵니다. 나팔은 환난에 대한 경종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습 1:14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 인류의 종말에 있을 대 환난의 모습을 그려 주고 있습니다. 16절에서 \\\"나팔을 불어 경고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인의 역사가 7년 환난을 총론적으로 계시해 준 것이라면 나팔의 역사는 그 총론적인 계시를 자세히 풀어서 실질적인 사건으로 보여 주시는 사 건입니다. 그러므로 나팔 사건은 원래가 인의 역사 중에 들어가 있는 사건을 실제로 나타나는 환난 사건으로 다시 한 번 계시해 주 는 사건입니다. 나팔 사건 중에 첫째부터 넷째까지의 나팔은 8장에서 계시해 줍니다. 첫째부터 넷째 번까지의 나팔은 7년 환난을 주도할 환난 세력의 등장 모습입니다. 첫째 나팔은 적 그리스도의 등장과 장차 그로 인해 초래할 세계적 피 해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계시입니다. 둘째 나팔은 열 뿔의 등장을 보여 주며 이들의 등장으로 인한 세계적 피 해를 역시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셋째 나팔은 인류의 영적 생명을 죽이는 적 그리스도 사상의 등장으로 적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 상 입니다. 그리고 넷째 나팔은 이 같은 적 그리스도 사상으로 인한 세계적 영적 흑암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다섯 째 나팔과 여섯째 나팔은 9장에 나옵니다. 다섯째 나팔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황충이 환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섯째 나팔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죽이는 핵전쟁, 유브라데 전쟁을 말합니다. ③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나팔은 계 16장에서 7대접 심판으로 전개되는 무서운 재앙입니다. 이 7대접 심판은 인류의 최종 적 심판으로 진행되는데 예수님은 여섯째 대접을 유브라데 강에 쏟을 때에 아마겟돈에 재림하시게 됩니다. 일곱째 대접 은 이 지구가 세 갈래로 갈라져 온 지구가 최종적으로 불타 파멸되는 심판입니다. 이 심판으로 지상에 내려지는 모든 종 말적인 심판은 끝나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펼쳐져 이 땅위에 천년왕국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 여기서 나팔과 7년 환난 기간과의 연결 관계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히 복잡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인즉 7인과 7나팔과 7대접과 세 화만 이해하면 복잡한 것도 아니며 복잡할 것도 없습니다. 7년 환난에 일어날 모든 종말적인 계시는 7인 안에 들어가 있습 니다. 네 말의 등장과 활동은 대단히 간단하고 간결하게 계시되어 있지만 그 안에 7년 환난 중에 일어날 모든 환난이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7나팔은 7인 안에서 새롭게 전개되는 사건입니다. 7인의 계시와 7나팔의 계시를 혼돈해서는 요한계시록의 올바 른 해석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인의 계시는 6인으로 모두 끝마칩니다. 그리고 7나팔은 인에 나타난 계시를 나팔로 좀더 자세히 풀이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7나팔로 계시된 사건은 7인으로 나타난 계시 중에 포함된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팔 사건을 해석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7대접 사건은 7나팔 사건 중, 일곱째 나팔 사건을 7대접 사건으로 전개시켜 나가는 계시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종말적인 모든 사건의 계시는 7나팔로 모두 끝납니다. 그런데 그 일곱 번째 나팔 사건이 7대접 심판으로 전개되므로 7나팔 사건이 전부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세 화는 별도로 세 가지 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째 나팔 사건을 첫째 화로 부르고 여섯째 천사의 나팔을 둘째 화, 일곱째 천사 의 나팔을 셋째 화로 부릅니다. 그리고 첫째 화는 적 그리스도의 무리들로부터 하나님의 교회가 핍박을 받은 환난이요 둘째와 셋째 화는 후 3년 반의 대 환난에 들어간 모든 자들이 받는 재앙입니다. 2. 7인, 7나팔, 7대접의 연결 고리 그러면 여기서 잠깐 7인과 7나팔과 7대접의 연결 고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5장에서 이 세상을 심판하기에 합당하신 어린양이 등장하신 후, 6장에서 이 분에 의하여 일곱 인이 떼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계 6:1-2 ). 이 일곱 인이 떼어지는 사건을 시발로 인류의 역사는 그 종점인 7년 환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 ). 이 사건이 예수님의 재림 사건과 인류의 마지막 심판인 일곱째 대접 심판으로 이 지구가 멸망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종말적 계시는 모두 마쳐집니다. 그래서 6장을 요한계시록의 총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음에 8장으로 넘어갑니다. 8:1-2,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곱째 인을 떼면서 새로운 계시로 넘어가는데 그 계시가 7나팔로 전개되는 사건입니다. 8장에서 넷째 나팔까지 전개되고 9:1절을 보시면 다섯째 천사의 나팔이 나옵니다. 그리고 13절에 여섯째 천사의 나팔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나팔부터 넷째 나팔까지는 그 진행에 있어서 정확한 순서와 시기를 포착할 수 없지만 다섯째 나팔부터는 사건이 질서정연하게 순서대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 나팔은 첫째 화로 전3년 반 마지막 시기에, 여섯째 나팔은 후3년 반에 들어간 직후에 일어나는 둘째 화이며, 일곱째 나팔은 7년 환난 맨 끝에 가서 일어나는 셋째 화로 이 일곱째 나팔로 하나님의 심판이 마쳐지는 것입니다. 다음 일곱째 나팔에 대해서는 계 10:7절과 계 11:15절에 나와 있습니다. 10:7절의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비밀은 두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는 종말적인 심판으로, 다른 하나는 그 심판 후에 임할 메시야 왕국으로 나옵니다. 11:5절에 나오는 말씀은 결국 같은 뜻인데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게 되면 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후에 임할 천년 왕국을 의미합니다. 이 나팔은 자연히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계된 것으로 일곱 대접 심판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계 15: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는데 이 재앙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마쳐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머지 한 나팔이 바로 이 일곱째 나팔이 되는 것입니다. 이 나팔은 계 16장에서 놀랍게 전개됩니다. 첫째 대접 - 땅에 쏟음.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난다. 둘째 대접 - 바다에 쏟음,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는다. 셋째 대접 - 물과 물 근원에 쏟음. 모든 물이 피가 되어 그것을 마시게 된다. 넷째 대접 - 해에 쏟음, 해의 뜨거움으로 타서 많은 사람이 죽는다. 다섯째 대접 - 짐승의 보좌에 쏟음. 세상이 어두워진다. 여섯째 대접 - 큰 강 유브라데에 쏟음.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다. 일곱째 대접 - 공기 가운데 쏟음. 큰 지진이 발생하여 지구가 파멸된다. 이 심판 직후에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결론 : 여러분,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일에 굉장히 깊은 영적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 지식이 종말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놀라운 소망을 주며 주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 히 사모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게 할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 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신생교회 성도들은 이 놀라운 복, 7년 환난 후에 이 땅위에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 회복된 에덴 동산에서 천년간 복을 누릴 뿐 아니라, 아울 러 하늘에 간직한 신령한 모든 복을 받을 수 있는 성도의 반열에 들어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7년 환난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 계8:13/ 2006-07-19
7년 환난에 일어날 여러 사건들 계8:13 우리는 지난 시간 \\\"인류의 종말과 7년 환난\\\"에 관하여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7년 환난이란 말은 비록 명확한 어구는 없어도 단 9:27절에 나오는 70이레 중 \\\"한 이레의 언약\\\"에서 나온 말이며 다니엘서에서 계시해 주고 있는 \\\"한 이레의 절반\\\"이라든가, \\\"한때와 두 때와 반 때\\\" 등의 표현은 7년 환난 기간 중, 후3년 반에 속한 기간 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계 11장에 나오는 42달, 1260일간, 12장에 나오는 1260일 간, 한때와 두 때와 반 때로 나오는 기간, 13장에 나오는 마흔 두 달 간 등의 기간은 7년 환난 중, 어느 것이 전3년 반에 속했으며 어느 것이 후3년 반에 속한 기간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모든 사건은 모두 7년 환난과 직접 연관된 것들로 거의 모든 사건이 7년 환 난 중에 일어날 사건임을 알았습니다. 장차 될 일, 속히 될 일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시기는 주의 재림 시의 일들로 7년 환난을 전후한 사건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강해는 이 7년 환난 중에는 어떤 사건들이 어떻게 전개되며 7년 환난 어느 시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요한계시록을 체계 적으로 배우는 일에 도움을 얻으려고 합니다. 1. 7년 환난의 도래 시기 7년 환난은 언제 오는 것인가? 또 어떻게 오는 것인가? 지금은 7년 환난 중인가? 아니면 7년 환난과 얼마만큼의 역사적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인가? 이 문제는 종말론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그 일시를 알아내려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한다면 사탄의 궤휼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여기서 잘못된 방법이란 성경적이 아닌 방법을 말하는데 그런 사건의 날짜를 알아내기 위해 연대를 계산한다든가, 환상이나 어떤 계시에 의존하는 방법 등입니다. 7년 환난의 시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대하여 성경은 아무 말씀도 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언제 온다고 하는 시기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시기가 임박했을 때에 징조적인 사건으로 그 때를 알려 주신다고 하는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70이레의 계시에서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딘행 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① 인류의 역사에 7년 환난이 오려면 먼저 적 그리스도가 등장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그 자에 의해 한 이레의 언약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고 그 자에 의해 받게 되는 짐승의 표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9:27 \\\"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다불어 한 이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 이 자에 대하여 신 약 성경에서도 분명히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살후 2:1-8을 보시겠습니다. ( ). 1절에 나오는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이란 주의 재림을 말하며 \\\"우 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란 말씀은 성도들의 공중 휴거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지금만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지 얼마 안 되는 초데 교회 시대에도 꽤나 시끄러웠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주의 재림이나 교회의 휴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모든 교회나 성도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 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온 말씀을 보면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시한부 종말론 자들이 있어서 교회를 혼란시켰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는 말씀을 보게 되는데 이들 시한부 종말론 자들의 미혹에 의해서 교인들이 동심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어 교회를 온통 혼란 속으로 이끌어 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잘못된 종말론에 미혹 받은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가지게 되는가에 대하여 알게 되는 데 그들은 신앙이 흔들리게 되고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몰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의 재림이나 교회의 휴거는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과 기쁨과 감격을 주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날이 가까이 온다고 해도 결코 마음이 흔들리거 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손을 내밀고 그의 오심을 반겨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나온 말씀을 보십시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 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란 단 9:27절에 서 말씀해 주고 있는 적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인류의 종말인 7년 환난이 이르기 전에 반드시 7년 기간의 언약을 체결할 적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말씀해 준대로 적 그리스도의 등장을 통해서 세상이 인류의 종말에 이르렀다고 하는 징 조를 찾을 수 있는데 이 징조는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성경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만약 적 그리스도의 등장 모습이 계 시되어 있지도 않고 누가 적 그리스도인지도 분별할 수 도 없다면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는 종말이 오지 않을 것이란 말씀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적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적 그리스도의 등장이라고 알 수 있는 것입니까? ② 적 그리스도는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존재로 등장합니다. 계 17: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그러면 일곱 머리는 무엇이며 열 뿔은 무엇입니까? 먼저 열 뿔부터 보십시다. 12절 보십시오. ( ). 열 뿔은, 열 왕이라고 했습니다. 이 열 왕은 인류의 종말에 등장하여 하나의 큰 연합 국가를 만드는데 그 왕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적 그리스도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일곱 머리를 보시기 바랍니다. 9 - 11절까지 ( ). 일곱 머리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다섯은 어떻게 되 었다고요? (망한 다섯 나라 =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데바사, 헬라 등). 하나는 ? (있고 = 로마). 남은 하나는 ?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이 나라는 장차 적 그리스도가 나올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장차 나타날 적 그리스도가 속 한 나라입니다. 적 그리스도는 먼저 일곱 머리 중에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나라의 왕으로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자에 의해 열 뿔이 형성되고 그 열 뿔의 왕이 됩니다. 그래서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③ 이자의 등장이 계 13장에 나옵니다. 계 13:1-5 ( ). 이 짐승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뿔이 ? 머리는 ? ). 이 자가 어느 날 머리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 사건은 총격을 받아 잠정적으로 죽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14절을 보라. \\\"칼에 상하 였다가 살아난 짐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놀라운 충격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 총격 사 건보다 더 놀라운 사건, 인류의 역사상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사건이 바로 죽은 이 적 그리스도가 다시 살 아나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온 세계를 겉잡을 수 없는 충격과 환호 속에 몰아 넣게 되는데 이 때 적 그리스도 는 사탄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가지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온 세계는 이 자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신적인 경배를 보내며 인류의 구세주로 섬기게 됩니 다. 4절에 나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이 자에 의해 열 뿔이 완전히 형성되어 그야말로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의 지배자가 됩니다. 지금은 미국의 대통령이 세계를 지배하며 미국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때 가 면 적 그리스도가 미국의 클린턴 대신 클린턴보다 수백 배 인기 있고 존경받으며 온 인류가 그의 지배를 받기를 스스 로 자원하며 신적인 경배를 받는 존재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자가 역사의 무대 위에 나타나면 여러분은 아시겠어요? 모르겠어요? 그러나 신생교회 성도들이 아무리 저 자가 적 그리스도니 따르지 말라고 외쳐도 쓸데없어요. 온 인류가 그를 지지하고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자에 의해서 한 이레 곧 몇 년간요? 7년간의 언약을 맺게 되는데 이 언약이 7년간의 평화조약입니다. 이 시점으로부 터 이 세상은 어떤 기간으로 들어가요? 2. 두 증인의 등장 다음에 7년 환난이 세상에 울 시기가 돠면 두 증인의 사명을 가지고 영원한 복음을 전파할 하나님의 종들이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이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4.000명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계 7:1- 4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여기에 12지파가 나오지만 이들 144.000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모두 신령한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12지파가 이스라엘의 전체 수효를 의미하는 것처럼 계 7장에 나오는 12지파 역시 구원받은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총 수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이스라엘이 된 교회를 의미하기는 하지만 144..000명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인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뽑아 낸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3절,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종말에 다시 예언하는 일꾼을 쓰시는데 이 일꾼은 기존의 종들을 다 쓰지 아니하시고 그 가운데서 특별히 뽑아 낸 하나님의 종들을 쓰시는 것입니다. 이들의 자격이 계 14: 4절에 나와 있습니다. ( ). 이들은 마 24:45절에 나오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입니다. 이들이 마 26:5절에 나와 밤중에 외치는 소리를 들려 줄 사람들이며 순교적인 종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이 큰 권능을 받는데 이들이 전3년 반기간인 1260일간 다시 예언하는 사명을 이행하는 모습이 계 11장에 나옵니다. 계 11:3-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적 그리스도가 등장할 때는 영적으로 대단히 혼란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마 25장에서도 \\\"밤 중\\\"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날을 도적의 비유로써 말씀하시면서 경계하지 않으면 도적인 적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털릴 것이라는 경종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적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습을 사탄의 모습으로 나타내지 아니합니다. 천사의 너울을 쓰고 나옵니다. 속에는 이리가 들어 있지만 겉으로는 양의 가죽을 쓰고 나타납니다. 만약에 이 자에 대한 하나님의 경종이 따르지 않으면 온 세계의 모든 인류는 이 자를 따라 갈 것이며 결국은 이 자가 찍어 주는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이 자에게 미혹되어 음녀가 마시우는 쑥물을 마시게 됨으로 그 영적 생명을 잃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자의 등장으로 7년 환난에 들어가게 하시고 이 자와 거의 동시적으로 두 증인의 사명을 받은 144.000명의 하나님의 종들을 등장시켜 1260일간 적 그리스도의 정체를 폭로하는 예언의 사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두 증인이 외치는 영원한 복음의 메시지가 계 14:7절로부터 나오는데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 ). 여기서 말하는 천사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권능을 받고 전세계적으로 다시 예언의 사명을 이루는 두 증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나님의 종들에게 권능을 물 붓듯 부어 주시고 그들로 1260일간의 예언의 사명을 이루게 하심으로 7년 환난의 전3년 반기간의 하나님의 회개와 구원의 역사가 놀랍고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3. 7년 환난 중에 일어날 세 가지 화 오늘 봉독한 말씀에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소리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화는 세 가지 화로 7년 환난 중에 있을 환난을 의미합니다. 7년 환난 중에는 세 가지 화가 환난으로 나옵니다. 이 화가 언제 일어나는가 이에 대한 위치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첫째 화와 둘째 화는 계 9장에 나옵니다. 계 9:1-6말씀을 보시겠습니다. ( ). 첫째 화는 황충이 떼들이 무저갱에거 나와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롭게 하는 화인데 이 화를 황충이 화라고 부릅니다. 이 화는 유독 전3년 반기간 중에 일어나는 화인데 적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교회가 핍박을 받는 화입니다. 이 화의 특징은 환난을 받는 기간이 5개월로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화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말하자면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이 이 화를 통해서 나누이게 됩니다. 이 황충이 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대 회개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은 세계적인 메시야로 인기가 절정에 있는 적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고 교회에 가해지는 이들 황충이 무리들의 핍박을 받기를 싫어하여 잠정적으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의 종말에 단 한 번 만 맞이하는 이 적 그리스도의 시험의 날에 반드시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이르시기를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계 2:10절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이 고비를 넘기시려면 종말에 관한 계시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에 둘째 화가 있습니다. 이 둘째 화는 후3년 반에 들어서면서 일어나는 유브라데 전쟁을 말합니다. 계 9:13-16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 ). 이 전쟁은 세계 인구의 ⅓ 이 죽임을 당하는 세계대전을 의미합니다. 이 전쟁은 일어날 날자와 시간까지 나와 있습니다. 어떻게 ? 누구만 아셔요? 그런데 우리는 그 징조걱 시기를 알 수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면 이때는 언제 입니까? 계 7:1절을 보십시오. 144.000명에게 인을 치시고 그 예언을 마친 시기에 그의 백성들을 모두 안전한 하나님의 예비처에 옮겨 놓으신 후,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여러분은 이 전쟁을 당해요? 안 당해요? 다음에 셋째 화가 있습니다. 이 화는 인류의 마지막 심판으로 나오는 재앙입니다. 이 셋째 화는 일곱 대접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이 대접을 쏟을 때는 말할 수 없이 괴롭고 참지 못할 재앙들이 하나님에 의해 이 땅에 쏟아 부어집니다. 그리고 여섯째 대접을 유브라데에 쏟을 때 예수님이 아마겟돈에 재림하시게 되며 일곱째 되는 마지막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을 때 이 세상이 온통 불로 태우심을 받는 마지막 불의 심판으로 종말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다음 시간에 이 세 가지 화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대한 자세한 말씀을 듣 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번에 강해 하는 요한계시록은 결코 허황 된 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25년 간 기도하면서 연구한 결정이며 10여 년간 수많은 목사님들에게 강해 하는 가운데 검증을 받은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몇몇 신학교에서 강해한 내용이며 벌써 10여년 전부터 세상에 책으로 공개된 내용들이며 종교 잡지에도 게재되었던 내용들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을 동요하게 하고 두려움을 준 것 같은 잘못된 종말론이 아 닙니다. 제가 전하는 메시지는 듣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며 주의 재림을 대망하는 성도들의 축복이 얼 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아 신부의 단장을 서두르게 하는 소망적인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주의 종들에게는 두 증인의 순교적인 사역자가 되기를 원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사명을 저에게 주신 것을 믿으며, 한국의 교계와 전세계의 주의 종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함 으로 그들로 나와 똑같은 내용의 졸말론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 운동을 계속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우 리 신생교회는 이런 사명 받은 교회로서 시기가 이르면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큰소리로 사도 요한이 외친 말씀을 외치십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8.15 해방과 나의 해방 /눅4:17-19,사61:1/김충기목사
8.15 해방과 나의 해방 /눅4:17-19,사61:1/김충기목사 2003-11-23 15:39:42 read : 14 내일 모레가 55번째 되는 8·15입니다. 1939년에 독일과 일본에 의해 6년간 시작된 세계 제 2차 대전 중에 죽은 사람 숫자만 해도 우리 대한민국 인구보다 더 많은 4-5천만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동남아 지역을 식민지화 하고 우리나라는 36년동안 일본에게 통치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 김충기 목사만 하더라도 대동아 전쟁 말에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학교를 나가지 않으면 학교 선생님으로 부터 많은 체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사에 가게 되면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고 매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해방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5년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이번 8·15광복절을 맞아서 남북이산 가족이 만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국가에서는 경제사범을 비롯해서 7,000명이 광복 특사로 풀려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들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들뜰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쁜짓 하고 들어간 사람은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게 되고 또 범죄를 저지르고 또 교도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신문의 칼럼을 보니 우리 대한민국이 이렇게 들떠 있지만 또 다시 IMF가 오고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그 칼럼을 보고 '옳다'고 크게 동감을 하였습니다. 이번에 북에서 내려오는 이산가족 상봉단 또한 알고 보면 남한이 싫다고 북으로 전향한 좌익분자들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통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임시정부가 한국에 막 들어왔을 때 국민들을 통제하는 제대로 된 헌법이 없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사람을 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1등인생 2등인생 3등인생이 있습니다. 1등인생은 자기가 자기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2등인생은 자기가 50%를 통제하고 50%는 남의 통제를 받는 것이 2등인생입니다. 3등인생은 자기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100%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는 인생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도소에 가보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3등인생 되지 않고 1등인생 되기를 축원합니다.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는데 누가 발람을 통제했습니까? 바로 발람의 당나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통제를 했습니다. 우리 서울에도 차량을 통제하는 신호등이 없으면 1년에 100만명이 죽습니다. 이러한 통제가 있으니까 모든 것이 질서 있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통제했고, 시내산에서 10계명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제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통제를 받고 그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一. 영적인 죄에서 해방되자 죄를 지은 사람하고 나하고 걸어간다고 할 때 죄를 지은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떳떳하지만 죄를 지은 사람은 당황하고 억압에 눌리는 것입니다. 지를 짓고는 못삽니다. 그렇다면 이 죄의 원흉은 누구입니까? 요한 1서 3장 8절에 보면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아무리 선하고 신실한 사람도 마귀가 한번 들어가면 악한 사람이 되고 살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창세때부터 범죄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을 강화하고 죄인을 억압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의 원흉인 마귀를 물리치지 않으면 이 땅에 죄는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8절 끝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온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속일 수 없습니다. 자기를 속일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 속일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우리들이 죄를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죄를 자백하면…깨긋케 하실 것이요…"우리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게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도 않는다고 하십니다.(히브리서 10:17)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죄에서 해방된자입니다. 二. 정신적인 불안에서 해방되자 인간에게는 정신적인 불안이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에 가까왔으니…"(베드로전서 4:7) 옛말에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과학자가 3명의 청년을 데려다가 최면을 걸고서 "너는 힘이 없다"고 최면을 걸었을 때 3명이 힘을 합쳐 13Kg을 겨우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는 힘이 있다"고 다시 최면을 걸었을 때 처음보다 5배의 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지금 사회는 의료파업등으로 너무나 어렵습니다. 지금 이산가족 상봉단의 단장이 남한이 싫다고 북으로 간 사랍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운명은 칼도마 위에 있는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나라는 정신을 차려햐 합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영적무장을 하여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三. 육체적인 질병에 해방되자 우리는 육체의 질병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천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 영적인 데서 해방되고 둘째 정신적인 것에서 해방되고 세번째는 육체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영혼을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병자들도 많이 고치셨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서 "당신 천국 가시오"라고 하였을 때 그들이 굶고 병들어 있다면 그들에게는 복음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게서 병자들을 고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 2절에서 침상에 누운 병자를 고치시고, 18절에 죽은 직원의 딸, 20절에 12해를 혈루증 앓는 여인의 이야기, 32절에 귀먹어 벙어리 된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얼마 전에는 우리가 다같이 합심하여 저녁예배 시간에 교회의 환자를 위해서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환자는 매우 위독해서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의료대란이 나서 수술할 병원도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9일동안 지내던 중 어렵게 수술할 병원을 찾아서 수술날짜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술을 할려고 MRI 사진을 다시 찍어보니 수술할 필요 없이 깨끗이 다 나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치료의 기적을 주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즈음 우리 교회에 기적이 자주 일어납니다. 또 얼마 전에는 어느 권사님의 남편이 지압을 받다가 장이 파열되어서 위험한 지역에 이르렀습니다. 또 교회에서 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였더니 수술이 너무 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 교회에는 여러가지 기적이 매주 마다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영적인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정신적인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시며 육의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8.15 해방과 애국/사48:10,잠14:34
8.15 해방과 애국/사48:10,잠14:34 2003-11-23 15:38:25 read : 14 오늘은 8.15 해방을 맞이 한지 54번째 되는 날입니다. 36년 동안 나라를 빼앗기고 온갖 고통과 슬픔을 당하다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으로 나라를 되찾은 날입니다. 그 기쁨도 채 가시기 전에 6.25동란이란 처참한 전쟁을 치르며 이 나라가 폐허가 되고 거지처럼 가난하여 세계에 손벌리고 얻어먹던 나라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 만큼 부강한 나라가 되어 세계를 향하여 선교하는 나라가 된 것을 생각하면 무엇으로 다 감사하고 찬송할지 알 수 없습니다. 36년 동안이나 국토를 빼앗기고 말도 빼앗기고 성도, 이름도 빼앗겼다가 다시 찾게 된 것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계시고 6.25때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으나 기적적으로 UN 군이 상륙하여 공산군을 몰아내고 이만큼 부강한 나라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말세에 마지막 주자로 선교하는 민족으로 쓰시기 위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한국의 사명 세계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연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과 민족을 들어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말세지말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제사장 나라요, 선교의 사명을 부여받은 나라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봅시다. ① 한국은 고난으로 연단 받은 나라입니다. 이사야 48장 10절에 "보라 내가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은 많은 고난으로 연단 받은 나라를 들어 쓰십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의 생에를 보십시오.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세계 어느 나라 보다 고난을 많이 받은 나라입니다. 한국은 5,000년 동안 수많은 외적의 침략을 받으며 고난을 당하였고 일본에게 36년 동안 온갖 핍박과 고난과 슬픔을 당하면서도 나라가 망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은 사상 그 유례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이었습니다.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지만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말세에 하나님이 쓰시려는 섭리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② 한국은 약소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소 민족을 택하여 쓰십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우리 한국의 국토 3분의 1 만큼도 안돼는 약소민족이요 인구 몇백만 밖에 안됩니다. 하나님은 크고 강대한 나라에 영적 사명을 맡기시지 않습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인을 선택하시는 것도 멸시받고, 비천하고, 가난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자를 들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 ③ 한국은 신앙이 돈독한 나라입니다. 세계 선교 여행을 다녀보면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힌두교, 모슬렘교, 불교와 짬뽕이 되어서 예수 믿는다는 교회가 참 많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한국교회 만큼 말씀의 기초 위에 서서 제대로 믿고, 제대로 기도하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게다가 인도는 8억의 인구를 가졌지만 힌두교 국가로, 마귀로 꽉 찬 나라이며, 중국은 12억의 인구를 가졌지만 아직도 공산주의 국가이고 인도네시아는 1억의 인구를 가졌으나 모슬렘 국가나 다름이 없고, 일본도 경제력이 있어 보이지만 800만가지 귀신을 섬기고 기독교인은 영점 몇 퍼센트도 안돼는 귀신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100여년 만에 25% 이상의 신자를 가진 나라입니다. 한국에 신학교가 너무 많고 목사, 신학생이 너무 많다고 비난을 받지만 남북이 통일되고 중국에도 마음놓고 선교할 수 있게 되면, 그 많은 목사, 신학생도 모자르게 될 것입니다. ④ 한국은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 부흥의 씨앗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를 들어 쓰십니다. 시편 79편 10절에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중에 알리소서"라고 했습니다. 순교의 피가 많은 나라를 열방중에 알리시는 하나님입니다. 대원군 때에도 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왜정 때에도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많이 순교했습니다. 6.25때에는 535명의 목사와 셀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말세에 들어 쓰십니다. ⑤ 한국은 기도를 많이 하는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매일 새벽기도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떡 먹듯이 하는 교회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한국처럼 기도원이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시편 50편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아무나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도의 영을 부어 주셔야 됩니다. 스가랴 12장 10절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개인이나, 교회나, 기도하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⑥ 한국은 복음의 열매를 잘 맺는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21장 4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탄생한 나라이지만 2,000년 동안 복음을 빼앗기고 복음은 로마를 거쳐 독일과 영국으로 왔고 그 후 미국을 거쳐 아시아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한국만큼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영성이 잘 발달한 나라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만큼 성령 충만한 나라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교회만 해도 1971년에 100명에 불과 했으나 이제 머지않아 10만 명에 도달할 것입니다. ⑦ 한국은 셈족의 후예입니다. 창세기 9장 26절에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에게 각각 축복과 저주를 내렸는데 셈에게는 영적인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함은 종의 종이 되는 흑인의 조상이 되었고, 야벳은 백인의 조상이 되어 물질의 축복을 받아 창대케 되었습니다. ⑧ 한국은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찾는 나라입니다. 신에 대한 명칭 가운데 한국의 "하나님" 처럼 성경 적인 칭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즉 유일신을 의미하고 "한" 은 "크신 분, 위대하신 분"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범신론적인 이름이지 기독교적인 칭호가 아닙니다. "하늘님" 즉 막연하게 범신론적 의미가 들어있으므로 "하느님" 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 선민 이스라엘의 풍습과 사상과 같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 일찍이 이런 예언적인 시를 읊었습니다. "오! 코리아여! 그대 옛날에 아시아의 황금시절에 밝은 등불의 하나였도다. 이제 그대 등불 다시 밝여라. 그대 온 동방을 비치는 밝은 등불이 되리라" 우리 주위의 여러 나라가 공산화되는데도 지리적으로 가장 취약한 한국은 공산화되지 않았습니다. 2.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으려면 ①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대 로마 제국은 외부적인 조건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소돔 고모라성은 의인 10명도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해 없어 졌습니다. 잠언 14장 34절에 "의는 나라도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신실하고 정직한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덴마크 나라는 인구 500만에 작은 돌작밭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이지만 지상 낙원이라 할만큼 잘 사는 나라입니다. 그 이유는 그 국민은 정직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그 나라 제품은 시험해 볼 것도 없이 믿고 잘 사갑니다. 여행하다가 물건을 놓고 와도 틀림없이 찾아줍니다. 우리 나라도 정직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준법정신입니다. 선진국민은 준법 정신이 강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탈세라면 큰 죄로 여깁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신자들도 탈세할 수만 있다면 한다고 놀랍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고의를 행하면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했습니다. 공의를 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그 많은 사람 중에 하나도 없어서 멸망시켰다는 말씀입니다. ② 책임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위대한 성도들이나 위대한 민족이나 국가는 모두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나라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1-3절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이 땅에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는 발발하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이 민족을 사랑하여 IMF의 채찍으로 징계하심을 깨닫고 온 국민이 각성하도록 기도하고 따라서 무역 흑자가 계속 되어 외채를 갚고 IMF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고 따라서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겠고, 또한 부정 부패가 없어지고 공의가 춤을 추고, 진리가 소리 높여 노래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없어지는 나라가 되기 위해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③ 구령사업에 힘쓰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가 부흥하고 국내 복음화와 해외선교에 힘쓰는 나라가 될 때 그 나라는 번영하고 복 받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구라파가 기독교 인구가 그렇게 많으면서도 선교에 힘쓰지 않을 때 바이킹족, 해적들의 침략을 받아 그들에게 끌려간 부녀자들이 전도해서 예수 믿고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이 덴마크, 노르웨이, 스위스 같은 나라들입니다. 재정 러시아에 그렇게 기독교 인구가 많았지만 안일주의에 빠질 때, 공산주의라는 몽둥이로 두드려 부서져 비참한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한 맺힌 소원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 하나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조지 화이트필드는 "주여, 나에게 영혼을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을 가져가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으며,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장은 성령세계를 받고 열심히 선교하여 그 모라비안 교도들이 20년 동안 선교 사업한 것이 큰 교단이 200년 동안 한 일보다 더 컸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복음이 필요한 나르는 다 내 나라이다"고 했고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어디서나, 언제나 영혼구원"이라고 표어를 가지고 쉴새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후예들에게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그러므로 이 일로 시간을 보내고 이 일로 쓰임 받도록 하시오. 보시오 당신이 얼마나 설교했느냐, 또는 얼마나 많은 일에 관심을 가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최선을 다해 영혼을 구원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데려와 회개케 하시고" 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영국을 무혈혁명으로 구원하기까지 했습니다. 영혼 구원에 힘쓰는 개인, 교회, 국가를 축복하십니다.
A Life that Makes Others Happy(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삶)/ Philippians 4:4-8(빌4:4-8)/ Pastor Sou-Young Lee(이수영 목사)/ 2002-09-11
A Life that Makes Others Happy(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삶) Philippians 4:4-8(빌4:4-8) A Life that Makes Others Happy Philippians 4:4-8 We often hear that there are three kinds of people. The first kind of people is those who are necessary in a society. The second kind of people is those who are neither necessary nor harmful in a society. The third kind of people is those who are to be perished in a society. We need to reflect on ourselves in what group are we classified. Of course, all the people will agree that they are to be classified in the first group and not to be classified in the third group. Jesus says us,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as well as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We should understand these words as the commandment to be the people that are necessary for a society. We should not be such people that are neither required nor harmful. Needless to say, we should not be such people that need to be perished from this society. Then, what is the criteria of these three kinds of people? I think the most important criterion is, like the example of salt and light, instructiveness. That is, people can be classified by whether they are instructive for people and society or not. In other words, people can be classified by whether they can make others happy or not. Everyone wants to be happy and no one wants to be miserable. Therefore, there is no more precious thing than making others happy, especially as many people as possible. On the other hand, there will be no more detestable life than making others unhappy, especially making plenty of people unhappy. In fact, the most blessed are those who can make others pleasant and happy with their words and actions. When we have such reputations as “My mind becomes joyful whenever I see him” or “I become happy whenever I see her smile or laughing” from others, then we can judge that our life has been blessed and successful. On the contrary, our lives must have been failure if our words and actions have made others unpleasant, inflicted others, caused pains many others, and brought harms others. How miserable our lives will be if we have such reputations from others as “The guy? Out of luck!” “Don’t mention about the guy before me! He angers me!” “The best is not to contact with him!” “If he perish in silence, it’s the best help for us!” Why do we need to live such lives? Of course, in some cases, we can bring damages and pains to others even though we try to do good for others. However, there are some ill natured people who continually devise miserable matters for others, enjoy the misery of others, and regard them as their happiness. I believe that there is no more cursed life than such people in this world. The misery of such people is that they do not change their mind but to be more stubborn when some others tell them their wrong doings. We should reflect on ourselves whether we are not such kind of people in our community. Making others happy does not require great efforts, huge capital, much knowledge, or great preparation. It only requires little concern for, small understanding of, and warm mind for others. Small kindness, concessions, smiles, and devotion which emanates from them can make others happy. Holding the doors for a while with a smile for the following person, after you enter into the building, can make this society bright and hopeful. One praise of good doing can make people happy. One embracing with the recognition of hard work can blow away all the fatigue and agony and make a person very happy. Some days ago, I fully realized the usefulness of a dim candle light. The electricity was off for that night and nothing was possible until one family member who knew the location of a match return to home and lit a candle. The dark society of this world really requires us to be a small light. The following words of Jesus are really meaningful in these days: “Neithe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Instead they put it on its stand, and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our good deeds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Today’s scripture answers to the question of “How can we make others happy?” At first, verse 4 of today’s scripture says, “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Those who rejoice at all times can make others happy. People who frown and grumble at all times cannot make others happy. However, to rejoice without any reason is not good. Only those who rejoice with unselfish reason can make others happy. If a person is pleased with a fortunate big income when others feel bad because of lost money, can the pleasure make others happy? Our pleasure should be founded on our Lord. Those who rejoice with the faith on Jesus Christ in thankful of the grace, even in similar or worse situation to others, can make others happy. This is the meaning of verse 4 which says, “Rejoice in the Lord always.” Verse 5 says, “Let your gentleness be evident to all. The Lord is near.” The word “gentleness” is the most difficult word for Korean theologists to translate among the words in New Testament. It means “justice and something better than justice.” We may misunderstand “gentleness” as “the generosity that sacrifices justice.” But “gentleness” here means the wisdom and ability which do not sacrifice justice. Gentleness also does not allow justice to hurt the people. We can make others happy if we can forgive and love others without sacrificing justice. Although this is difficult task to do, it is required to christians. As it is required to all christians, bible says, “Let your gentleness be evident to all.” Verse 6 says,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Those who do not be anxious can make others happy and can make others feel relief. Those who illustrate all his worries before a person really make others tired, gruesome, and frustrated. If someone are to listen the grumble of others in this hard world, it will really deprive the listener’s happiness. On the contrary, those who are carefree before serious situation also make others uneasy and unhappy. We are not anxious not because we have no worries nor are we indiscreet. We are not anxious because we entrust all our worries to our God. This is the reason why Apostle Paul says,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and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Those who report everything to God, pray for the solution, and who are free from worry can make others happy. Verse 6 also says us to pray with “thanksgiving.” Prayer with thanksgiving has two meanings. First, it requires to thank the fact that we can pray God entrusting all our things. Second, it requires to pray with the faith that God will grant all our requests. When we pray in this manner, we can enjoy peace in our mind. This fact is illustrated by verse 7 which says,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Such a peace of mind and thought has the power to make others happy. Verse 8 introduces many secrets that can make others happy. It says, “Finally, broth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think about such things.” That is, it requires us to think and practice eagerly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and whatever is admirable. “What is true” here means to be truthful and to be a person that can be trusted. It makes us very happy to know or to have a person that is truthful and that can be trusted in all matters. Verse 8 says, “whatever is noble.” “Noble” here implies to be respectable, to be elegant, to be valuable, and to be earnest. Seeing a person who is respectable, elegant, and earnest in all matters at all time makes us happy. Verse 8 says, whatever is right. “Right” means keeping all the duties that should be observed in human relationships. Everyone who tries to have right relationship with God and keeps all the duties in human relations makes others happy. Verse 8 says, “whatever is pure.” Pure is translated as “chaste” in Korean bible. “Pure” here implies the trait which enables people to approach God, which reflects God, and which is enough to be used by God. Seeing a people who is pure and chaste make people happy. Verse 8 says, “whatever is lovely.” This implies the mind and character that can attract others’ mind. Seeing those who attract every others’ mind make people happy. Verse 8 says, “whatever is admirable.” Those who have good reputation in all matters also make others happy. Verse 8 also says, “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 This indicates all kinds of excellency and the matters that can be praised. If we eagerly think and practice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 then we will be able to make others happy. These words are more precious for us because Apostle Paul wrote this letter in custody in jail to the saints of Philippians who were in danger of persecution. As the political, economic, social situation we are encountering now does not make us happy in these days, we all the more need to be the people that make others happy. Our church has the slogan “Let’s live as the children of light” in this year. Thus, all of we saints need to hear such praise as “You make this world livable,” or “Saemoonan Church is providing hope for this society!” Let us be the saints that make Saemoonan Church happy. Let us be the Saemoonan Church that make Korea happy. Through such efforts, I hope that the word “Saemoonanian” in a dictionary can be interpreted as “something that makes others happy” in sometime in the future. It will be the glory of God and it will be worthwhile events for us. Such word will be the evidence to our descendants on the fact that the saints of Saemoonan Church lived their life as the children of light in this world. “People that make others happy,” I hope this is not mere a dream. I hope it becomes the goal of our life and the principle of our practice within faith in this year. Pastor Sou-Young Lee(Saemoonan Church)(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A man who is worthy of God(하나님께 가치 있는 사람)/ Matthew 10:37-39(마10:37-39)/ 2002-11-15
A man who is worthy of God(하나님께 가치 있는 사람) Matthew 10:37-39(마10:37-39) A man who is worthy of God Matthew 10:37-39 37 Anyone who loves hi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yone who loves hi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38 and anyone who does not take his cross and follow me is not worthy of me. 39 Whoever finds his life will lose it, and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Who is Worthy of Me Over the past two weeks we have been going through our autumn season of early Morning Prayer. Through this prayer we are calling out to the title, teaching the lesson and conducting our training in the Lord. In this title, how is the Lord teaching and training us? And finally what kind of apostle he wants to make out of us? This is what we were learning during Early Morning Prayer. Today, our word will be about the conclusion of all of this training and learning over the past two weeks. What kind of apostle to we want to be? That is one who will take his cross and follow our Lord. That is the kind of apostle he wants. Lets read today’s scripture Matthew 10:37-39 Anyone who loves hi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yone who loves hi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38and anyone who does not take his cross and follow me is not worthy of me. 39Whoever finds his life will lose it, and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When we look at this word, there are three times it says “not worthy of me” what does this mean? What kind of person is worthy of me? Anyone who loves me more than his father or mother. worthy of me. Anyone who loves me more than their son or daughter. worthy of me. Who ever take his cross and follow me. worthy of me. Follow me; is not the people who say they have found their life. Even though he has lost his life and takes his cross without fear, is the person who is worthy of me. This has a very deep meaning to touch your heart. Ah, when we hear this word, we see that it is not easy to truly follow our Lord. It is not too easy to be an apostle of our Lord. It is not going to be easy to work for the lord. We can feel this through today’s scripture. And yes, this is right, it is not easy. Of everything in this world, nothing is easy. Following our Lord, is actually not that simple. Well, lets look at today’s scripture with a little more detail. Today’s scripture says “not worthy of me” a lot, but when we look through this, it shows who is worthy of our Lord. First, what people are worthy of the Lord? Looking at verse 37, Anyone who loves me more than his father or mother. worthy of me. Anyone who loves me more than their son or daughter. worthy of me. When we hear this word, we feel a frightened. What does this mean? But, Maybe by looking at this word and understanding it, people with a family who are unfaithful or with a different religion and in this family one begins to love Jesus. these are the people who I think understand this word the best. Because of the fact that this family is going to start going to church, it is going to cause difficulties among the family. I wish to give you a better understanding of today’s scripture. By looking in front of today’s reading. look at verses 34-36. 34 “Do not suppose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to the earth. I did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35For I have come to turn “a man against his father, a daughter against her mother, a daughter-in-law against her mother-in-law. 36 a man’s enemies will be the members of his own household. What? What is the “good” meaning here? This is when people start to believe in the lord. The people who have no belief and those of different religions. In this kind of family, with this new religion in Christianity comes to them. It comes to them with a new and different view. it comes with a different way of doing things. Naturally, what would automatically change in this family? What is their response? I am sure it is not peace but more than likely fighting. We need to be prepared for this. Actually, if a person wants to do something. at all costs of reason they are going to get mentally prepared for this. That is how we can make it all possible. It’s like water. if you pour water into water, you get water. but if you pour liquor into water you get liquor. Two wrongs can’t be right. you cannot be right by both ways. Even in the following of Jesus. Keeping your faith and staying on the right path this is not a simple task. So, that is why it says, in verse 37 Anyone who loves hi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yone who loves hi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Secondly, who is worthy of the Lord? Let’s look at verse 38 of today’s reading, 38and anyone who does not take his cross and follow me is not worthy of me. Who takes his cross and follows me. Most people in church go to church regularly and well. But most people remove their cross. What about these people? I am not sure which of you are this kind of person, but most people are like this. Let’s think about this for a minute. What do we think of ourselves on this? Are we people of faith? Do we try really hard to know our own crosses? And do we even try to carry our crosses through our life of faith? Or do we just want to take those crosses off? Which way is your faith going? If I ask you, it might be very difficult or uncomfortable to answer. We should all check our own faith. Maybe we should all do things in a little different way. While I am living my life of faith, I want to carry the smallest cross possible. Are we like this person? Or What ever the cross that our Lord has given us we carry without complaints. Are we this kind of person? What do you think? Before we check ourselves, we need to be honest with ourselves. If we are not honest we won’t be able to take care of our problems. Third, who is worthy of the Lord? Let’s look at verse 39. 39Whoever finds his life will lose it, and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Even if they loose their lives, they do not fear. This is worthy of the Lord. This word is very important. Because, without this word, all that we have learned so far might be a great big misunderstanding. Like what the Lord said in verse 37 Anyone who loves hi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yone who loves hi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38and anyone who does not take his cross and follow me is not worthy of me. It is like these words, that it is possible for some misunderstanding, but verse 39 it makes it all easier to understand. Before closing, I would like to better organize this message. Today’s scripture tells us like this. Who is not worthy of the Lord. Anyone who loves hi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yone who loves hi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38and anyone who does not take his cross and follow me is not worthy of me. Let’s think about this one more time. Let’s look at the first and second part. Anyone who loves his own family more than Jesus is not worth of the Lord. Earlier with explanation we could understand. but let’s look at it a different way. First it says, father and mother. What does this mean? This means in our family. the people in our family that are higher than us. Of course we love, respect and support them. This is right; this is what we have to do. BUT, it is not worthy of the love of our LORD. And the second word is that of your son or daughter. and this means that in our faithful lives, we have people in our family that are of lower status than ourselves. and we love and take care of them. Yes, this is also right, but we do not do more than our love to the Lord. I hope you don’t misunderstand this part. Especially in today’s message, taking the Cross and finding our lives. This we need to look at carefully. Why do we need to look carefully? Because many people just go through the motions of church. But, we live our faith lives without worry or connection with our crosses. And, we don’t feel heavy or burdened, without pressure to believe in Jesus. There are many who live like this and come to church. Also, not just this; what I am trying to say is more important than this. That is how we try to do our faith without carrying our crosses, what kind of situation are we going to fall into? What kind of mistake will we make? What do you think of this point? Ok, we go to church, every Sunday. We do our worship service. and yep, sometimes we pray hard and learn something. We look at these people as people of faith. So, we can’t see anything in their spirit of their love for the cross of Jesus. So, when we keep our faith in this manner, how do we get in? They are falling because of their superstition. This is their mistake or error. This is very important. So, that is why the Lord said it that way as in verse 38. Anyone who wants to follow me must take his cross and follow me. Especially, we look at the middle of this word. It says, follow me. we have to be careful not to say, “Learn from me.” Follow me: How do we follow the Lord? What should we do? Not just carrying the Cross. but we must take our Crosses and follow the Lord. Maybe, not following the Lord, and just knowing of the Lord or just learning of the Lord. It is possible to do this without carrying your cross. We put our bible on our desk, and we can sit at our desk and learn. But if we follow the Lord we take our cross and follow the lord. Everything is possible. And when we follow the Lord, without carrying the cross, we can be easily tested by temptation. And we can complain and blame others easily over the smallest matters. Making it easy for us to give up and fall down. It was this point that our Lord already knew. So, anyone who wants to follow Jesus must take his cross and follow me. That is why he said clearly. 38and anyone who does not take his cross and follow me is not worthy of me. If we look at the hymnal, there are a lot of hymn’s about the cross. but I found one #365 that shows the meaning well. Verse one and two of this hymn. 1. Must Jesus bear the cross alone, And all the world go free? No, there’s a cross for every one, And there’s a cross for me. 2. The consecrated cross I’ll bear Till death shall set me free, and then go home my crown to wear; For there’s a crown for me. What does this mean? The Consecrated Cross I’ll Bear? This means the cross that is rightly mine. So, I hang mine from my neck to be my burden. This cross of mine I will always take care of and follow the Lord and then go home my crown to wear. That is what this Hymn was about. Lets all sing together. Verse one and two of this hymn. #365 Last week we began voting for our elders, and we have yet another week of voting this week. We have to choose. Like in today’s word. we have to choose those who are worthy of the Lord. We should never vote for someone who called in secret and asked us for help or offered a bribe. I want to be an elder please support me, vote for me. No, we shouldn’t vote for them. I don’t know who did it, or who asks a favor but you know who they are. So, who do we need to elect to these positions? Not the secret or covert people, but the ones who honestly and sincerely give worship to the lord. He who carries his cross and follows the Lord. It is that person we should support and elect. Why? Well, those people are worthy of the Lord. No doubt about it. It is this kind of person we should elect to work for our Church. So, those who ran their secrets and bribes should be blocked and not allowed to be an officer in our church. This should be made impossible. So, that is how our church can be a real church. I as your pastor, ask you all a very serious favor. This is our holy church. Not part of the outside world. Don’t vote in the way of the outside world. This would be absolutely incorrect. Does he really have the worth of the Lord? Can he give his life for the church or the Lord? Not thinking of his position of Honor. But is he in a good place of service? Let’s all take time to pray for this and the good decision of our congregation. I want our church to be a good example of a church here in Daegu. When the voting is all finished, I don’t want to hear or say anything bad about the way anyone was elected. When we vote we should pray and let the Holy Spirit help us make our selections so that we may truly celebrate the elected. And so that we may be able to help these people provide a great service to the Lord. We should support him or her in their needs. In the meantime, the ones who were not elected, we should pray to comfort them. Giving them support as well. Let’s make our church of one mind, and a beautiful congregation. Pastor Jung-suk Lim(임정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