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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관한 설교(267) 가능에 관한 설교(75) 가득에 관한 설교(62) 가련함에 관한 설교(1)
가르침(가르치다)에 관한 설교(343) 가마에 관한 설교(5) 가문에 관한 설교(66) 가뭄에 관한 설교(28)
가시에 관한 설교(92) 가운데에 관한 설교(147) 가을에 관한 설교(96) 가장에 관한 설교(210)
가짜에 관한 설교(5) 가정에 관한 설교(1063) 가정예배에 관한 설교(120) 가져옴에 관한 설교(5)
가족에 관한 설교(197) 가죽에 관한 설교(14) 가지에 관한 설교(419) 가짐(가지다)에 관한 설교(127)
가치(가치관)에 관한 설교(135) 각에 관한 설교(6) 각성에 관한 설교(18) 각오에 관한 설교(20)
간구에 관한 설교(70) 간음에 관한 설교(26) 간절(간절함)에 관한 설교(17) 갈대에 관한 설교(33)
갈등에 관한 설교(39) 갈래에 관한 설교(1) 갈릴리에 관한 설교(50) 감(가다)에 관한 설교(35)
감격에 관한 설교(14) 감당에 관한 설교(3) 감동에 관한 설교(95) 감사에 관한 설교(289)
감사절에 관한 설교(5) 감옥에 관한 설교(8) 감정에 관한 설교(5) 강에 관한 설교(3)
강건에 관한 설교(1) 강령에 관한 설교(3) 강림(강림절)에 관한 설교(14) 강압에 관한 설교(1)
강청에 관한 설교(1) 강함에 관한 설교(88) 강해에 관한 설교(1) 강화에 관한 설교(1)
같음(같다)에 관한 설교(9) 개관에 곤한 설교(1) 개념에 관한 설교(1) 개미에 관한 설교(1)
개인에 관한 설교(2) 개조에 관한 설교(1) 개종에 관한 설교(1) 개척에 관한 설교(2)
개혁에 관한 설교(7) 거둠(거두다)에 관한 설교(3) 거듭남에 관한 설교(122) 거룩에 관한 설교(755)
거부에 관한 설교(1) 거울에 관한 설교(25) 거저에 관한 설교(1) 거절에 관한 설교(1)
거짓에 관한 설교(58) 거짓말에 관한 설교(1) 거침에 관한 설교(1) 걱정에 관한 설교(16)
건강에 관한 설교(325) 건넘(건너다)에 관한 설교(1) 건전에 관한 설교(1) 건축에 관한 설교(205)
걸음(걷다)에 관한 설교(3) 것에 관한 설교(8) 게으름에 관한 설교(44) 겟세마네에 관한 설교(1)
겨울에 관한 설교(89) 격려에 관한 설교(50) 겪음(겪다)에 관한 설교(1) 견고에 관한 설교(2)
견딤(견디다)에 관한 설교(1) 결과에 관한 설교(71) 결단에 관한 설교(52) 결박에 관한 설교(1)
결산에 관한 설교(24) 결실에 관한 설교(31) 결심에 관한 설교(47) 결정에 관한 설교(17)
결혼식 설교(결혼에 관한 설교)(268) 겸비에 관한 설교(7) 겸손에 관한 설교(189) 겸허에 관한 설교(3)
경건에 관한 설교(308) 경계에 관한 설교(48) 경고에 관한 설교(1) 경배에 관한 설교(49)
경영에 관한 설교(13) 경외에 관한 설교(103) 경제에 대한 설교(97) 경주에 관한 설교(47)
경험에 관한 설교(11) 곁들임(곁들이다)에 관한 설교(1) 계명에 관한 설교(387) 계수에 관한 설교(2)
계승에 관한 설교(4) 계시에 관한 설교(80) 계절에 관한 설교(16) 계획에 관한 설교(81)
고기에 관한 설교(1) 고난에 관한 설교(244) 고독에 관한 설교(27) 고민에 관한 설교(27)
고백에 관한 설교(63) 고센에 관한 설교(1) 고아에 관한 설교(1) 고인에 관한 설교(2)
고침(고치다)에 관한 설교(3) 고통에 관한 설교(145) 고향에 관한 설교(52) 곤고에 관한 설교(15)
골고다에 관한 설교(1) 곳에 관한 설교(7) 공감에 관한 설교(1) 공경에 관한 설교(3)
공동체에 관한 설교(226) 공룡에 관한 설교(1) 공부에 관한 설교(18) 공의에 관한 설교(42)
공중에 관한 설교(1) 공회(공의회)에 관한 설교(1) 과거에 관한 설교(2) 과부에 관한 설교(3)
과정에 관한 설교(10) 과제에 관한 설교(2) 관계에 관한 설교(104) 관대에 관한 설교(1)
관심에 관한 설교(165) 관점에 관한 설교(1) 광명에 관한 설교(2) 광선에 관한 설교(2)
광야에 관한 설교(3) 괴물에 관한 설교(1) 교리에 관한 설교(15) 교만에 관한 설교(110)
교사에 관한 설교(1) 교양에 관한 설교(11) 교역자에 관한 설교(2) 교육에 관한 설교(243)
교인에 관한 설교(43) 교제에 관한 설교(143) 교회에 대한 설교(2756) 교회창립기념주일설교(202)
교훈에 관한 설교(683) 구도(구도자)에 관한 설교(5) 구세주에 관한 설교(15) 구속에 관한 설교(37)
구약에 관한 설교(5) 구원에 관한 설교(1412) 구유에 관한 설교(1) 구제에 관한 설교(89)
구조에 관한 설교(13) 구주에 관한 설교(28) 구함(구하다)에 관한 설교(3) 국가에 관한 설교(0)
군사에 관한 설교(22) 굴복에 관한 설교(1) 궁극(궁극적)에 관한 설교(1) 궁금함에 관한 설교(1)
권능에 관한 설교(42) 권면에 관한 설교(39) 권사에 관한 설교(1) 권세에 관한 설교(5)
권위에 관한 설교(19) 귀에 관한 설교(1) 귀신에 관한 설교(95) 귀중에 관한 설교(2)
규례에 관한 설교(29) 균형에 관한 설교(1) 그에 관한 설교(7) 그것에 관한 설교(1)
그늘에 관한 설교(1) 그대에 관한 설교(1) 그릇에 관한 설교(2) 그리고에 관한 설교(1)
그리스도(Christ)에 관한 설교(1207) 그리스도인(Christian)에 관한 설교(831) 그물에 관한 설교(30) 극복에 관한 설교(196)
극한에 관한 설교(1) 근성에 관한 설교(1) 근심에 관한 설교(71) 근원에 관한 설교(2)
금식에 관한 설교(110) 금혼식 설교(7) 긍정에 관한 설교(53) 긍휼에 관한 설교(169)
기념에 관한 설교(59) 기다림에 관한 설교(197) 기대에 관한 설교(5) 기도에 관한 설교(3173)
기독(기독교,기독교인)에 관한 설교(159) 기둥에 관한 설교(1) 기복에 관한 설교(1) 기본에 관한 설교(16)
기쁨(기뻐하다)에 관한 설교(1015) 기사에 관한 설교(1) 기억에 관한 설교(128) 기업에 관한 설교(41)
기적에 관한 설교(570) 기준에 관한 설교(27) 기초에 관한 설교(3) 기회에 관한 설교(361)
길에 관한 설교(862) 길음(긷다)에 관한 설교(1) 길이에 관한 설교(1) 깃발에 관한 설교(1)
깊음(깊다)에 관한 설교(2) 까마귀에 관한 설교(1) 까지에 관한 설교(4) 깨끗함에 관한 설교(2)
깨달음에 관한 설교(88) 깨뜨림(깨뜨리다)에 관한 설교(2) 깨움(깨우다)에 관한 설교(1) 꽃에 관한 설교(73)
꾸준함에 관한 설교(1) 꿇음(꿇다)에 관한 설교(1) 꿈에 관한 설교(658) 끊음(끊다)에 관한 설교(1)
끝에 관한 설교(20) 끝남(끝나다)에 관한 설교(1) 끝냄(끝내다)에 관한 설교(2)
1%의 순종이 만드는 기적/ 왕상17:8-16/ 2010-11-29
1%의 순종이 만드는 기적 왕상17:8-16 우리는 지난 주 추수감사주일을 보냈습니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요 감사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세 가지임을 배웠습니다. 에벤에셀, 임마누엘,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셨고,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앞으로 모든 삶의 구석구석까지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취감사, 절대감사, 전전후감사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우쩨 이런일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너무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 해도 해도 너무 하십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혹시 이 예배의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도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는 분도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어떻게 저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아마 따지고 싶은 마음이 계신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적어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요구는 어떻습니까?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니 괜찮은 것입니까? 그것은 결과가 그랬다는 것이지 당사자인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해도 너무하신 요구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임합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훈련하십니다. 엘리야는 삼 년 가뭄을 예언하고 요단 앞의 그릿 시냇가에서 시냇물을 마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 보내 주시는 떡과 고기를 먹고 지냅니다. 얼마 후 시냇물마저 말라 들어가자, 하나님은 한 과부에게 가서 식생활을 해결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사르밧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사는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녀는 엘리야가 사르밧에 갔을 때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 그녀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전부는 가루 한 움큼과 병에 조금 남아 있는 기름뿐입니다. 극심한 가뭄에 더 이상 버틸 기운이 없어서 생명처럼 아껴 두었던 마지막 남은 한 가루 한 움큼으로 최후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 있는 여인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아무리 봐도 초라하기 모습이라 처음에는 ‘물을 조금 달라’고 합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떡 한 조각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인의 대답은 ‘만들어 먹고 죽을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요구하는 엘리야의 편에서 보면 왜 하필이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최후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음을 기다리려고 하는 한 과부의의 집으로 인도하셨는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좀 넉넉한 집으로 보냈더라면 엘리야의 입장이나 요청받는 입장도 곤란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가뭄이 심하여 견디다 못해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음식을 만들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나타나서 하는 말이 ‘물 좀 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먼저 자기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라’고 하니 정말 해도 너무 한 상황입니다. 그것은 대접이 아닌 죽음을 강요하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입니다. 이 상황은 엘리야 선지자나 홀로 사는 여인 두 사람 모두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엘리야 선지자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하나님의 선지자이고, 주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지만 상황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형편이 좋은 집을 찾아가서 오히려 그 여인을 살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다함께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과연 그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면 이렇게 담대하게 명령을 할 수 있을까? 저는 성격적으로나 믿음으로나 엘리야처럼 말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나님! 저는 도저히 제 양심상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제가 굶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정이 있고, 합리적 생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믿음의 태도는 아닙니다. 믿음의 기준은 내 양심이나 정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내 의지나 결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기준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그대로 전하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이요 주의 종의 사명입니다.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하면 서고, 전하라하면 그대로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사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환경이나 사람에게 매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의 명령하신 대로 순종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순종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사렙다 과부의 믿음과 순종, 헌신의 태도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이니까 그렇다쳐도 이 여인은 극심한 가뭄 속에서 아들과 함께 굶어죽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로 들으면 그럴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 자신의 문제라면 정말 순종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먼저 엘리야 선지자에게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줍니다. 사렙다 과부의 입장에서 작은 떡 한 개는 목숨입니다. 자신과 아들의 생명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1%의 희망이 바로 가루 한 웅큼과 바닥이 보이는 기름조금입니다. 100개 가운데 한 개 드리는 것은 맘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과 같은 1개를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여인은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14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아멘! 여인은 엘리야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1%의 자신의 희망마져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그 마지막 1%의 양식을 드린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을 만듭니다. 16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아멘! 사르밧 여인의 1%의 순종의 믿음이 바닥나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만듭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약한 자를 귀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시에 부요한 집, 권세 있는 집에 엘리야를 보내서 대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위기의 상황에서, 아무런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보잘 것 없고, 미련해 보이는 자를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부한 자나, 권세 있는 자나, 많이 배운 엘리트만이 인정받고 대접받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어느 정도는 이것이 사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미련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를 통하여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도 세상의 엘리트를 뽑지 않았습니다. 학식이 풍부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자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에 가장 미련하고 배우지 못한 어부들과 천대받는 세리를 택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약한 자들을 통하여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천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을 통해서 강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폐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약한 나를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통하여 부자를 부끄럽게도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잘난 사람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못나고 가난한 사람들을 들어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지금도 연약한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부족하고 미련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 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함께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 드리기 원합니다. ♪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 내가 지금 약하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남보다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가난한 나를 부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영적 맹인과 같은 나를 어루만지셔서 다시 보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요 축복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먼저 순종하는 믿음을 보신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2700년 전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기적들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 비밀을 푸는 열쇠는 바로 ‘먼저’ 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협상을 시도하거나 거래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주시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먼저 축복해 주시지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의 거래는 통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분과 상업적인 거래(Deal)를 통해서 내 이익을 얻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자신들이 먼저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축복의 삶, 기적의 삶은 내가 먼저 주님께 믿음을 드리고, 자신을 드릴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first)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먼저의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손에 붙잡고 있는 1%의 마지막 양식 그것을 먼저 내게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바로 마지막 1%의 그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내가 내려놓을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인 1%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것을 먼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순종의 믿음이 바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마음만 뜨겁지 교인들의 가슴은 여전히 냉냉합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감동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시장에서 광주리 장사를 하던 여인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목사님께 찾아왔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서 전 재산을 다 바치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녀의 가정생활 형편을 잘 아시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님! 예수를 믿어도 이렇게 믿으면 안됩니다. 전 재산을 다 바치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요. 안됩니다. 이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만류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 성도님은 목사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받아주세요.” 목사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 재산을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면서 그녀는 이상하게도 감격에 넘쳐 찬송과 감사가 쏟아져 나옴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길목에 어떤 아이가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면서 사람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가서 기도해 주어라. 가서 기도해 주어라.” 너무나 뚜렷하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기도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 받은 아이가 즉시로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그 뒤로 그 성도님이 기도해 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났고습니다. 기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녀에게 기도를 받는 자마다 모두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한국교회 치유은사의 어머니로 살다 하나님 앞에 간 고 현신애 권사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순종이 바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잉태하게 한 것입니다. ‘JOY’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기쁨’ 이란 선교단체인데 그 이름이 의미심장합니다. 영어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만든 단체입니다. J는 Jesus first! O는 Others second! Y는 You third!입니다. 예수님을 제일 먼저, 이웃을 두 번째로, 자신을 세 번째로 두고 헌신하자는 선교단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첫째는 무엇입니까? 내가 첫째고, 예수님이 가장 마지막은 아닌지요? 내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1%를 먼저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순종의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기적은 오늘도 임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바닥나지 않는 축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에는 놀라운 뜻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믿음을 한 번 테스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순종할 때 언제나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렸을 때 여호와 이레의 역사가 임합니다. 밤하늘의 별과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창대케 하시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복덩이가 되게 하십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관을 벗어버리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손에 지팡이를 들려주십니다. 그것은 막대기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 홍해를 갈랐습니다. 반석을 치면 물이 솟는 기적이 임합니다. 출애굽을 이끄는 지도자가 됩니다. 기도의 여인 한나는 눈물로 얻은 사무엘을 나실인의 서원으로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 결과 가장 영적으로 어둔 밤과 같았던 사사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오늘 사렙다 과부의 생명을 건 순종의 신앙은 바닥이 나지 않는 놀라운 기적이 임합니다. 불란서에 레오날드 우드경(Sir. Leonard Wood)이 어느 날 왕의 초대를 받아 왕궁에 들어갔더니 반가워하며 내일 식사나 같이 하자고 초대를 했습니다. 레오날드 경은 다음날 왕궁에 들어갔더니 왜 왔느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저를 식사에 초대해서 왔습니다.”고 했더니 왕이 말하기를 “어제 식사에 초대할 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서 안 오는 줄 알았소.” 이 때 이런 명언을 말합니다. “폐하! 왕의 초대에는 대답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A King\\\'s invitation is never to be answered, but to be obeyed.) 왕의 명령 앞에 충성된 신하는 Yes, No가 필요 없습니다. 왕이 말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태도가 바로 레오날드 우드경의 대답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대답이 필요없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대에 응답하는 자는 왕의 잔치 자리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이나 판단 때문에 1%를 내려놓지 못하면 그 삶은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 속에서 고생하게 됩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 빛납니다. 험난한 항구일수록 등대는 더 빛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사렙다 과부의 현실처럼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나의 소중한 것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붙잡고 있는 줄은 썩은 줄입니다. 고무줄일 수 있습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언젠가는 끊어집니다. 그러나 내 줄을 먼저 내려놓고 주님이 주신 줄을 붙잡으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만사가 형통한 길로 인도받습니다.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축복이 임합니다. 오늘 1%의 마지막 남은 양식을 먼저 드리는 순종으로 여러분의 지혜가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재물이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지금 약하다고, 어렵다고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내게 남겨주신 1%의 희망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1%를 먼저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바로 그 곳에 99%의 바닥이 나지 않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 1%의 순종이 하늘의 보고를 여는 축복의 열쇠가 되어 차고 넘치는 풍성한 기적으로 나타날 줄 믿습니다. 다시 한번 약한 나로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나갑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후렴)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깊은 강에서 주가 나를 일으키셨도다 구원의 노래 부르리 예수 자유 주셨네
100% 응답 받는 기도/ 눅22,39-46
100% 응답 받는 기도 눅22,39-46 캄캄한 밤 칠흑같은 어둠,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블랙홀 보다도 더 캄캄한 어둠을 날카롭게 깨트리고 오장육부를 도려내는듯한 아픔과 처절한 울부짖음이 굉 장한 폭음과 함께 산산히 흩어지는 파편처럼 뿌려지고 있습니다. 33세 인생의 절정에 이제 갓 첫발을 디딘 젊은 청년 예수! 한걸음 한걸음 다 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어떤 방법으로든 피해가고 싶은 그 처절하고도 애절한 지 극히 인간적인 몸부림, 자신이 죽어야만 함을 알면서도, 자신이 죽지않으면 안됨 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삶을 향해 간절한 호소를 간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 예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찌나 간절했던지,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 애절함이 있었던지 몸의 모든 땀을 다 쏟아낸 땀구멍은 이제 생명을 향한 갈망이 겁붉게 녹아든 핏방울을 송글송글 뱉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만일 당신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옵소서. 하나뿐인 당신의 아들이 이다지 도 처절히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버지여!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이 간절한 바램은, 이 처절한 호소는 여지없이 묵살 당해 버리고 말았 습니다. 그리곤 오직 한마디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 소서] 이 말씀만이 하나님에 의해서 냉정하고 비정하게 행해졌습니다. 청년예수의 이 간절한 기도는 과연 응답받은 것입니까? 응답 못받은 것입니 까? 오늘제목을 보고 {에구 또 기도하라는 설교구나}, [맨날하는 소리 또 듣겠구 먼]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방법, 기도의 자세, 기도의 형식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배웠고, 또 수없이 많은 기도를 지금도 해오고 있 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듣기 직전에도 예배 순서를 통해 우태수 집사님의 감동 적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때문에 기도하는 방법, 기도의 마음자세, 기도의 형식등은 다른 설교자들에게 맡겨버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도는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는 일방적인 연설이 나 하소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호흡 이란 우리몸 외부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고 몸에서 만들어진 쓸모없는 탁한 공기 를 내뿜을 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의사 소통이 있어야만 합니다. 때문에 일단 드려진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때에 비로소 온전한 기도로 끝맺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기도가 응답을 받는 기도입니까? 아니 응답을 받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먼저 기도의 응답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커다란 착각속에 빠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기도에 대해 응답을 받고서도 자기가 응답받았다는 사실 조차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신앙생활 속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 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나의 기도에 대하여서 즉각적으로 그리고 나의 뜻을 100%반영하여 일이 이루어 져야만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하나님께로부터 즉각적이고 100%나의 의견에 합당한 반응이 없으면 기 도응답을 못 받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을 얻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 만이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몇가지 요건만 갖추어 기도 한다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응답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은 하나님의 응답중 지극히 작은 일부나 내가 생각하는 정답만을 하나님의 응답이 라고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만한 자세로 기도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진짜로하나님께서 응답하실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입니 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에는 네가지가 있습니다. [그래 내가 즉시 시행하겠다], [시행은 해 주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시 행은 해주겠지만 그 방법은 안된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안된다]입니다. 그런 데 지금까지 사지선다형 문제에 익숙해 왔던 우리는 1번 답만을 기도의 응답이라 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길러 보셨으니 익히 아실 것입니다. 만일 제딸이 저에게 위인전을 보고 싶으니 책을 사달라고 하면 저는 즉시로 서점에 데려가 위인전을 사줄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수학자가 되겠다고 대학 수학교재를 사달라고 한다면 저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벌써 그런 것 이 무슨 필요가 있니 나중에 네가 능력이 되면 사줄께] 또 제 딸이 유명한 디자 이너가 되겠다고 가위를 가지고 집에 있는 옷을 자르겠다고 한다면 저는 아마도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예야 그 방법은 잘못된 것 같구나, 서점에 가면 오리 기 책들이 많으니 우선 그것으로 열심히 오리고 그리는 것을 연습하도록 하자] 그리고 [아버지 이번주일날 친구들이랑 같이 학교에서 하는 캠프를 다녀오겠습니 다.]라고 한다면 저는 한마디로 [안돼]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아홉 살 배기 자녀가 똑같은 요구를 해 왔다면 어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첫 번째 대답만이 제 응답이고 나머지는 응답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모두가 응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첫 번째의 대답만이 응답이라 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신앙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을 구하는 자세와 동기가 올바로 서지 못하면 정 말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작년 세간을 떠들석 하게 했던 가짜중 일력의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겉으로는 엄청나게 정의롭고 대단한 일인 것 처럼 포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외모를 보고 속아 넘어가서 엄청난 돈을 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풍겨나는 인간의 냄새나고 더러운 흑심이 드러났을 때에 결국 커다란 배신 감과 함께 그 사기꾼을 법의 심판대 앞에 세웠습니다. 결국 사기꾼의 흑심을 채 우기 위해 전시물 노릇을 했던 많은 불쌍한 이들은 이제는 아예 기부도 완전히 끊 긴채 더욱 불쌍하고 고된 삶을 살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겉으로 드러 난 그럴듯한 포장에 속아 넘어가지만 우리의 속까지도 완전히 살피시는 하나님께 서는 우리가 이렇게 잘못된 생각과 동기를 가지고 구하면 절대로 속아넘어가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윌의 기도에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바로 느끼기 위해 다음과 같 은 몇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항상 주님의 임재를 느끼면 살아가고 또한 기도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성령안에 산다든지 하나님의 뜻에 사로잡혀 산다든지 하는 일들 을 엄청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 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이미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깨닫느냐 못깨닫느냐는 그분께서 항상 내 안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고있느냐, 깨닫지 못하고 살 고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라는 것 은 우리가 끊임없이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 다. 우리는 성전 특히 제단 우리 교회로 말하면 강단을 엄청나게 신성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어쩐지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을 하면 큰일 날 것 처럼 생각합니다. 왜입니까? 성전에는 강단에는 성령께서 임재하셨기 때문이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성전이, 교회당이, 강단이, 목사가 신령하 고 거룩한 이유는 그 속에 성령이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시 지 않은 성전, 교회당은 단지 큰 강당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수도 페테스부르크의 공산당 당사와, 국회의사당이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이었다는 사실 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시지 않으면 성전 건물도 하루아침에 마귀 의 소굴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재하시지 않은 강단은 단지 인간적인 감화 와 감동을 구걸하는 연설회의 단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없이 선포 되는 말씀은 도한 웅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사람을 그래도목사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의 위임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 아닙니까? 교회당 그자체가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옛날 어떤 목사님은 강단에는 아무 도 못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교회당 안에는 딴따라에서 사용하는 기타나 드럼 키보드등은 절대로 들여 놓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배당이던 강단이던 목사던 간에 성령이 임재 하실 때에 비로소 거룩한 것입 니다. 한 개의 북이, 한벌의 심벌즈가 캬바레에서 두드려 지면 악의 도구가 되는 것이요, 성령의 임재하심 속에서 찬송가의 반주로 쓰이면 그 자체로 거룩한 일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 성전에 들어오시기 전에 성령께서는 어디계셨습니까? 불 교에서 말하는 구천을 떠돌고 계셨습니까? 예배당 십자가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쉬고계셨습니까? 아닙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 안에서 우리와 동행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루 24시간을 우리와 함께 지내십니다. 우리는 항상 그분과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성도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마치 예배시간에만 그리고 예배당에 와서만 우리에게 임재하시 는 성령님을 인식하고바라보고 갑니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속이기 도하고, 속기도하고, 술도먹고, 담배도피고, 욕도하고,싸움도 하고,시기도 하고,남 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마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살 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또다시 교회당 현관문만 들어서면 세상에 둘도없는 거룩한 사람이 되곤합니다. 그리곤 거룩하게 기도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삶을 우리 삶속에서 바라보고 계신 성령께서 어찌 우리의 기도 를 기뻐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정 응답받는 기도를 드리기 원한다면 항상 주님이 함께계시다는 사실을 깨 달으면서 성령께서 바라시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항상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성도라면 어떻게 살고, 생각하여야 할것인가를 깨달으면서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기도할 때에 비로소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 님의 응답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일에나 해당된다는 사실을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무슨 특별한 사실이나 일들에 대해서만 기도해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 십니다. 우리한번 자신의 하루일과를 살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님은 아마도 이렇게 인사하실 것입니다. [예 혁문아 잘잤니? 어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렴]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건 아내 몫인데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맞다 하지만 네가 그일을 하면 너는 훌륭한 남편이 되지 않겠니?.] 여러분은 혹시 이런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출근을 합니다. 출근길에 아름다운 여인이 장미꽃한다발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 저 꽃과 그 꽃을 든 여인이 매우 아름답죠?] 주님은 말씀하실것입니다. [꽃은 아름답다 하지만 여인은 아름답다고 생각하 지 말아라] 그러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것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어떻게 아름 답지 않다고 합니까?]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여인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잖니 아름다워도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훌륭한 가장이 되 는 길이다.] 그리고 회사에서 거래처 사람을 만납니다. 일이 잘 안풀립니다. 상사에게 호 되게 꾸중을 듣습니다. 욱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밉니다. 그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야 참아라] 항변합니다. 이걸 참으란 말입니 까? [그래도 참아라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리도록 참지 않았니? 이것이 참된 인격자가 되는 길이란다] 퇴근길에 생각합니다. [에이 열받아 소주라도 한잔 하 고 가야지]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야 집에서 너만 바라보며 맛있게 저녁상 차 려놓고 기다리는 아내와 자녀들을 생각해야지] 이런 음성을 들어보신적이 있습니까? 이 얼마나 자애로우시고 고마우신 주님 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 한 가운데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모든 생각과 행 동을 보시면 또한 아시고 계십니다.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옳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또한 기도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순간 순간 깨닫는 삶이 아닙니가? 우리들의 삶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주님과 대화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 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지냅니다. 그리고 주님앞에 나오기만 하면 눈물 콧물 다 짜며 회개합니다. 주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네가 잘못하는 그곳에 내가 항상 있지 않았니, 내가 그렇게도 하지 말라고 말릴 때에 너는 거들떠 보지도 않더니 이제야 나랑 대 화를 하자고 하는 구나 그 때 그 때 내 음성을 듣고 대화할 수 없었니? 우리가 일상 속에서 주님과 대화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항상 기도하는 삶이 될 수 있고 항상 응답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 그 때 우리에게 가장 알맞고 적절한 응답을 해 주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중 누가 일주일 동안 저랑 여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처신을 매우 신중하게 할 것입니다. 저역시 마찬가지 일것이고요.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항상 주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깨달으며 살아가는 것이 응답받는 기도의 첩경입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시간내어 기도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특 별히 드리는 기도는 외식혹은 특식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옛날 없던 시절에 명절을 매우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매 끼니 마다 항상 거의 똑같은 메뉴 즉 보리밥에 짠지의 식사를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곤밥에 괴기국이 나오는 명절이 너무나도 기다려 졌을 것입니다. 마 찬가지로 항상 기도하며 매 사에 주님을 인식하며 사는 삶이 매끼 식사라면 특별 히 하는 기도들이야말로 항상 기다려지는 특별한 식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기도회는 일상생활에 찌들었던 우리의 신앙에 새 활력을 찾아주는 참으로 기다 려 져야할 시간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무엇이 참 하나님의 응답인가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주장에 깊이 빠져 있으면 사물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게 마련입 니다.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게되는 경우가 많고 또한 깊은 착각에 빠지곤 합 니다. 마귀들은 오히려 이런 순간을 기회삼아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갖은 노 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응답을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응답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을까요? 첫째로 상식이 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상식이 통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오 늘날 우리사회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상식이통하지 않는 사회. 오늘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설쳐대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응답을 받아서 사회를 어지럽히지 않습니까? 작년 10 월 11 일 그러니까 오병태집사님 만년 노총각의 딱지를 떼시던 날이었 습니다. 예식준비를 위해 빠쁘게 일하는 도중 한 아주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그 리고는 바쁜 저를 앉혀놓고 손질 발짓을 하는 거였습니다. 직감적으로 구걸하러 오신 분인줄은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제 앞에 흰종이를 내밀더니 거기다 이렇게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교회에 들어가서 2만원을 구제비로 받으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제게는 그분께 2만 원을 구제비로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한 노총각 청년이 자기가 평소 흠모하던 처녀에게 불쑥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 니다. [어제 기도중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과 결혼하라고 하셨어요.] 처녀 가 무어라고 대답했을까요? [어! 이상하네 어제밤에 제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미친남자가 와서 내가 너랑 결혼하라고 했다고 할테니 절대로 속아넘어가지 말라고 하던데요.]라고 했답니다. 어던 목사님께서 홀아비 집사님과, 과부 집사님 을 맺어주기 위해서 두분을 모셔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분이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가 기도하는 중에 응답을 들었습니다.] 두분 은 목사님이 하 나님의 뜻이라고 하니까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결혼한 이 두분은 결혼 2년만에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이렇게 황당무계한게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항상 상식이 통하는 방법 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후의 보루인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응 답을 주십니다. 양심에 꺼리끼지 않을 그런 응답이 바른 응답입니다. 오늘날 자신의 양심을 팔아먹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양심에 관해서는 성도들보다도 목회자가 더 심한경우를 많이보게 됩니 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겨대서, 3년동안 엘란트 라, 소나타, 그리고 그렌져로 차를 바꾸는 그런 목사님도 본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 우리로 올바른 판 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성적인 판단 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런 판단은 자기 합리화적인 판단 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는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행동기준이 제시되어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기도에 대한 모든 응답을 성경의 범위 안에서 베풀어 주십니다. 때문에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항상 임의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의문나는 성구들이 있으면 반드시 교역자들에게 그 뜻을 물어야 합니다. 성경을 임의대로 해석하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곳에서 말씀하고 있습 니다. (여담/어떤 기도 많이하는 사업가가 부도를 내고는 기도원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를 하고나서 하나님 제가 이제 성경을 딱 피고나서 가장 먼저 보이는 성구가 하나님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라고 말한후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 때 마태복음 27장5절이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 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 사업가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기도를 한후 하나님 이번이 정말입니다. 하고 말한 후 또 성경을 펼쳐 읽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요한복음 2장5절 [그 어머니가 하 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하는 문장이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업가는 [주님 정말 죽어야 합니까?] 라고 말하고는 그래 한국사람은 삼세번인데 마지막 한 번더 하기로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또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아뿔싸 요번엔 요한복음 13장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 니]라는 성구가 가장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과연 이 사업가는 목매달아 자살을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스스로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자부하는 소경 들이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아전인수격으로 적용해서 많은 사람들을 실족케하 고 상처받게 하는일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그 속에서 삶의 열쇠와 하나님의 응답을 찾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응답받는 기도를 쉬지않고 드리는 그런 교우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항상 우리의 모든 세밀한 일상에 까지도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분께 모든 것을 아 뢰며 살아갑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이 올 때 항상 그것이 올바른 응 답인가를 상식에, 그리고 양심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올바 로 깨닫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요10:10/ 2006-01-02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요10:10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주 속에는 수많은 혹성들이 있지만 지금까지는 생명체는 지구에만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구의 나이가 얼마인가 하는 것은 과학자들에 따라 다릅니다만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구에 있는 생명공동체에 이미 심각한 종말의 징후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지구온난화현상과 오존층 파괴로 인한 기상의 이변과 생태계 파괴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가 지니고 있는 화석연료는 앞으로 50여 년간 사용할 분량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대체 에너지 개발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진행되는 사막화 현상은 식량문제와 생태계의 보금자리를 위협해가고 있으며 수질오염과 토양산성화, 산소생산량 부족 등은 모든 생명체의 목을 죄어서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식품이 상품으로 둔갑하고 농사가 사업으로 변하면서, 온갖 독성약물과 성장촉진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며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상품을 생산함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독을 먹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환경호르몬의 폐해를 입으며 불안한 미래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앞으로 생명복제기술이 보편화되어서 인간복제까지 감행할 경우에 야기될 창조질서의 대혼란을 예상할 때 지구생명공동체의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예측은 현재까지 나타나고 있는 징후들과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인간의 죄성(罪性)”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려는 악마의 계략에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야고보 장로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생명이 죽어 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종말 을 재촉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일례로 나무들을 보면 나무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는 본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지 접붙이기를 하기 위해 돌감나무 밑동을 잘라버리면, 평소 같으면 싹이 나지 않을 부위이지만 그 밑동에서 싹이 나고 왕성하게 줄기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꺾꽂이를 하기 위해 나무로부터 나뭇가지 일부를 잘라내어 땅에 꽂아 두면 가지 밑 부분에서 뿌리가 생겨나는 것도 잃어버린 뿌리 부분을 복원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 즉,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나무의 본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나무의 성질을 이용해서 접붙이기도 하고 꺾꽂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본성, 이런 본능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모든 동식물들에게는 종족유지 본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손상되어진 신체 부위가 다시 재생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치가 빠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영구치아가 생겨납니다. 피부에 상처를 입어도 손상된 부분에 새 살이 돋아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곧 우리의 생명력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생기 즉 생령을 불어넣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그것을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탐욕 즉 인간이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의 영역을 탐하는 일로 그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보았던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계곡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마른 뼈들입니다. 영적 죽음의 상태를 그렇게 묘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생기가 다시 불어와 마른 뼈들에 가죽이 덮이고 힘줄이 생기며 생명이 회복되어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본성을 주신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 인간들에게는 흔적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 끊임없이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명회복운동라이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는 생명목회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생명목회란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잃어버린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며, 예수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바울 사도는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내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신의 일부를 아니 밑동을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자아 회복을 위한 왕성한 활동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명회복 운동이나 생명목회는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다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는 것이 곧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는 지름길입니다. 생명목회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도 현대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란 항상 시대 시대마다 나타나는 문명 속에서 잘못되어진 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이룩해 온 문명은 분명히 인간들에게 편리함과 안전함과 유익을 준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문명은 결국 생명을 살리는 문명이 아니라 죽이는 문명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유심히 보세요. 문명이 생명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물을 사먹습니다. 수돗물을 불신합니다. 음료로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수도는 약을 통해서 멸균되었지만 물맛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형광등은 밝지만 세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걷다가 우마차를 타다가 자전거를 탔고 그러다가 오토바이를 탔습니다. 이제는 집은 없어도 차는 타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차는 빠르기는 하지만 걷기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걷기를 잃어버리니까 건강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이 또 다른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난1세기 동안 있었던 그 어떤 재난 보다 더 강력한 재난을 당한 모습을 매일 뉴스를 통해서 듣고 있습니다. 특히 2004년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겪었습니다. 미국과 중남미에는 4차례 대형 허리케인이 몰아쳐 플로리다에서만 가옥 2500채가 파괴됐고 아이티에서는 1500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일본에서도 10월 니가타 현 강진과 10차례의 태풍으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매년 그해의 세태를 압축해 나타내는 한자어를 선정해 온 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는 지난해 12월 13일 일본 열도에서 태풍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유난히 자주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災’를 2004년의 한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매스컴에서 해마다 선정하는 10대 뉴스가 선정되고 난 다음인 지난 12월 26일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부근 바다에서 발생한 8.9의 강진으로 인한 해일이 발생하여 여러 나라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사건은 세계 3대재앙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1970년에 방글라데시에 발생한 대홍수와 1976년 중국 탕산에 발생한 대지진, 그리고 이번 인도네시아의 지진과 해일로 인한 피해가 세 번째 큰 재앙이라고 합니다. 사망자가 얼마나 늘어날지는 모르지만 15만 명을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지진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그리고 자연재해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그리고 하나님이 예언해 주신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인도네시아 대지진으로 인한 해일 피해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시대적 변화와 문명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21세기의 초유의 문명으로 인한 생명파괴 현장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생명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반면에 사단은 생명을 죽이려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질병과 가난, 부정과 부패, 억압과 죄악으로부터의 구원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잘 돌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온 세상을 함께 구원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생명을 살려야 하지만 인간의 생명과 관계되는 자연의 생명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 모든 생명을 나의 생명처럼 여기는 의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금년의 교회의 목표를 생명 살리는 일로 정했습니다. 100년의 은혜를 한해로 마무리하고 우리끼리 자축하는 것으로 끝맺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00년의 은혜는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교회의 금년 표어는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이미 정해놓고 보니 정말 표어를 잘 정했다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친히 주관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목사를 통해서 표어를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어는 그냥 구호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말씀이 먼저 선행됩니다. 이 표어를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인 10절입니다. 특히 하반절 말씀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은 양을 훔쳐가서 잡아먹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기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키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적은 양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반면에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할 수만 있으면 좋은 꼴을 먹이고 좋은 물을 마시게 해서 살을 찌우게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마리라도 더 많이 키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파도 치료해 주고 오직 마음이 양에게 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신 사역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무한대의 사랑의 에너지로 병든 자를 고치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미움을 사랑으로, 다툼을 평화로,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시며 온갖 이적을 베푸셨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며 치유하며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스스로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 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베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진피해를 입은 나라 백성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 살리는 일에 첫 번째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이기 때문에 다음주일에는 특별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나와 교회는 언제든지 나눌 수 있어야 하고,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내 자신을 끊임없이 자유낙하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보다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고 보다 더 높은 위치에 도달할수록 더 많은 운동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를 쏟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생명을 살리는 분이 아니라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생명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고 요한복음10장 1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명을 이제 우리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함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모든 성도는 생명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금년 한해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지구상에서는 생명을 살리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을 앞장서서 해야 할 사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와 교회에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우리 교단의 생명살리기운동 10년 계획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만민에게 전파합시다. 둘째는 자연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합시다. 파괴된 자연에 창조의 새 질서를 가져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를 새롭게 하고 하나 되게 합시다. 교회의 삶에 일치와 갱신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넷째는 북한 동포와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분단된 조국에 평화통일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다섯째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 의롭게 살아갑시다. 여섯째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일곱째 장애를 가진 이웃과 함께 살아갑시다. 여덟째 청소년의 꿈을 함께 가꾸고 이루어 갑시다. 아홉째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하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닫힌 사회에 열린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 열린사회를 만들어 포용하고 협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 번째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약육강식의 대중사회에 생명살림의 새 문화를 창달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가장 우선이어야 합니다. 모든 생명 가운데서도 인간의 영혼을 먼저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동안 동성연애와 낙태지지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 운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다 같은 신앙을 가진 대통령이지만 부시 앞에 대통령이었던 클린턴과 현재의 부시 대통령과는 신앙관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낙태지지운동은 낙태를 합법화시키자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 낙태지지운동을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켜서 실제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찰스 콜슨이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싸움이 성공을 거두었군요.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낙태지지운동과 맞서서 성공을 거두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 싸움의 승리는 반쪽도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사회의 운동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정답 아닙니까? 사회운동으로 낙태지지 운동에 반대하긴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회운동으로 해결될 게 아니라 영혼이 치유받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바로 영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사회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 중요합니다. 환경 살리기 운동도 해야 합니다. 불의한 것을 정의로움으로 바꾸는 운동도 해야 합니다. 보안법폐지도 중요하고 역사바로세우기도 중요합니다. 무슨 운동을 하든지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영혼구원과 직결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는 운동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생명운동이 사회적으로 필요합니다. 전도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병원선교 중요합니다. 교도소 선교, 학원선교 등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구역별로 반드시 새 생명 전도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한 구역이 두 사람 이상씩 반드시 세례를 받도록 합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세례를 주도록 최선을 다해 봅시다. 나는 값없이 영혼이 구원을 받아 소망가운데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책망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은 구원의 방주로서의 아름다운 예배당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넓은 예배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채우라고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한 사람도 전도해보지 못한 분들은 금년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생명 살리는 해에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도록 합시다.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은 곧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할렐루야!
100배의 결실/ 눅8:4-8/ 2007-09-12
100배의 결실 눅8:4-8 이제 열매의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농사짓는 분들은 유난히도 많이 온 비로 울상 지으며 보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추수하느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감나무엔 탐스런 열매들이 맺었고, 여러 가지 열매들은 결실의 계절을 통하여 농부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실수는 때가 되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결실을 얻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 뿐 아니라 육적인 생활 속에서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매 맺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한 동네에 가셨을 때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여러 의도를 가지고 나온 것을 알고 그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는 사람은 좋은 밭에 씨를 뿌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5절). 그러니까 싹이 나기도 전에 밟히고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습니다. 길가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입니다. 사람 많은 곳은 마귀의 유혹도 많은 곳입니다. 여러분! 군중 좋아하지 말고, 인기 좋아하지 말고, 스타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휩쓸리다 보면 영혼이 밟히고, 영혼이 마귀에게 먹힐 수 있습니다. 어떤 씨는 바위 위에 떨어졌습니다(6절). 금방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니까 다시 말랐습니다. 이는 금새 좋았다가 다시 식어지는 감정적인 신앙생활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멋진 것을 좋아하지 말고, 외모를 좋아하지 말고, 너무 분위기를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신앙이 미지근하게 될 수 있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의 가장 큰 맹점이 무엇입니까? 습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합니다. 눈물 없는 신앙! 그것은 불행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도의 눈물, 헌신의 눈물, 십자가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뿌리가 깊어지고, 어떤 시험이 닥치고 고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씨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습니다(7절). 그래서 가시와 함께 같이 자랍니다. 상당 기간 잘 자라는 듯 했습니다. 결실을 할 때쯤엔 가시 때문에 기운이 막혀 결실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가시가 무엇입니까? 14절에서 주님은 3가지, 즉 염려와 재리(돈)와 일락(일시적 쾌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 잘 성장하는 듯 하다가 영적인 가시에 찔려 열매맺지 못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부정적인 생각\\\\\\\\\\\\\\\'과 \\\\\\\\\\\\\\\'나눔에 인색한 삶\\\\\\\\\\\\\\\'과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주의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씨를 뿌리는 자가 목적한 바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열매 있는 신앙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100배의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밭이 좋아야 합니다.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밭은 무엇입니까? 1.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단순히 좋은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은혜로 변화된 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이 좋아야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좋은 마음의 밭을 지녀야 합니다. 한마디로 성도는 예수의 좋은 사람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표현하는 대로 \\\\\\\\\\\\\\\'나이스(nice)\\\\\\\\\\\\\\\'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이스(nice)\\\\\\\\\\\\\\\'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친절하고, 사려 깊고, 남의 입장을 배려하고 남을 높여줄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알고, 관대한 것입니다. 또한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고, 적절한 유머도 있고, 미소와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넘치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좋은 마음의 밭을 이루어야 합니다. 겔36:26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좋은 마음을 가지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마음을 지니고 살지 못하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엡4:30-32) 오늘 우리의 사회가 안타까운 것은 나이스한 태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평하고, 너무 쉽게 분노합니다. 조금만 금전적으로 손해가 날 것 같으면 부모형제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남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의 좋은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행동을 분리시키지 말고, 늘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며칠 전의 신문을 보니 어느 식당에서 미군부대에서 먹다 남은 음식, 스테이크 등 음식 찌꺼기를 600g당 2000원씩 모두 1197kg을 400여 만원에 사들였습니다. 업주는 미군부대에서 \\\\\\\\\\\\\\\'개 사료용\\\\\\\\\\\\\\\'이라고 속여 빼돌린 음식찌꺼기를 재료로 만든 부대찌개는 무려 6만명 분이나 팔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원조 부대찌개\\\\\\\\\\\\\\\'라고 선전해 점심시간이면 손님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조사결과에 의하면 그 식당에서 압수한 스테이크와 소고기, 햄버거 고기 등에서는 대장균이 검출되었다는 것입니다. 돈만 된다면 남을 속이고, 해치며, 부당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마음과 행동으로는 복된 열매를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마음 마음의 밭, 좋은 행동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한시도 잊지 말고, 좋은 마음, 좋은 행동으로 100배의 결실을 얻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마음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랑을 품는 마음입니다. 서로 축복하며,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도 좋은 마음입니다. 이런 좋은 마음을 가질 때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심령의 밭을 지니시기를 바랍니다. 2.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핵심 원리를 잊어버리고 이상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이상한 곳에서 축복을 찾고, 열매를 찾으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8절과 15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100배의 결실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지금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미신에 사로잡혀 점을 치러 다니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합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주님께 앞날을 맡기며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미신적 신앙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혼날짜, 개업날짜, 이사날짜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미신적으로 의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년 초에 토정비결을 봤는데 점괘에서 \\\\\\\\\\\\\\\"물가에 가지 말라!\\\\\\\\\\\\\\\"고 나왔답니다. 그래서 여름 휴가도 물가로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경우는 중요한 날 수염을 깎으면 안 된다고 믿고 지저분한 얼굴로 나와 면접 시험에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잘 안되고 어려운 것이 집터 때문이고, 묘자리 때문입니까? 그래서 집을 이사하고, 묘자리를 이전하고,이름을 바꾸면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어 집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어떤 미신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8:32). 말씀 안에 사는 자가 참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운명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라, 운명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축복의 원리는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한 마음입니다. 미신을 믿으면 여전히 불안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 평안을 얻게 됩니다. 행복과 기쁨이란 열매를 얻게됩니다.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킬 때 가능한 것입니다. 3. 인내해야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됩니다. 좋은 열매가 주어지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약속의 소망을 바라며 인내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무릎은 축복을 날라주는 수레바퀴입니다. 기도할 때 흘리는 눈물은 그 수레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윤활유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눈물의 기도를 드릴 때 반드시 결실을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며, 열매맺는 비결은 얼마나 인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조급합니다. 씨를 뿌린 다음에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쉽게 낙망합니다. 포기해 버립니다. 참된 기쁨과 열매의 행복은 십자가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좀 기다려 보십시오. 믿고 기다리면 열매가 있습니다. 어떤 노인이 정원에다 어린 나무를 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을 지나던 나그네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는 언제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리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70년쯤 후면 열리겠지요\\\\\\\\\\\\\\\' 하고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나그네는 또 \\\\\\\\\\\\\\\'노인장께서는 그때까지 살아 계실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니오, 그때까지 살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게 아니라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집 과수원에는 많은 과일이 열려 있었소.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의 부친께서 나를 위해 심어 놓으신 것이었지요, 나도 아버님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당장 수확을 거두지 못해도 인내하며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그럼 반드시 후대에 이르러서라도 그 열매는 얻을 수 있습니다.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성도는 포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까지 주를 붙잡고 역경을 돌파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주를 향한 헌신이나 봉사도 좀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쉬면 좋을 듯 해도 신앙도, 영혼도 죽게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 더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인내하는 영혼이 결국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벧전1: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며, 원망, 불평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의 할 일이 아닙니다.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밝은 얼굴, 은혜의 태도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며 인내하는 신앙은 100배의 결실을 얻게됩니다. 인내의 신앙, 참된 믿음의 사람은 천국미인이 됩니다. 즉 늘 미소가 있고, 친절하게 인사하는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긍정적이고 낙관적이어야 합니다. 지금 돌아가는 내 주변의 상황이 힘들고 비참해도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수록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인내를 통해 반드시 좋은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무화과는 열매가 많이 열립니다. 이스라엘에는 무화과나무를 길에 많이 심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지나던 사람, 배고픈 사람들이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열매를 위해서 무화과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으시는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유실수에 열매가 없다면 존재 가치가 떨어집니다. 이처럼 성도에게도 주님이 기대하시는 열매가 있습니다. 열매의 계절을 맞이한 이때 내가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를 말씀 안에서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100배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 좋은 마음의 밭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하는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항상 나이스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조금 더 인내함으로 100배의 결실을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2001-08-24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생산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생산적인 것 중에서 제일 왕성한 것이 땅입니다. 대지는 별의 별 신기한 것들을 계속하여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들, 즉 갖가지 곡식들을 매년 한 차례, 혹은 두 차례씩 생산해 주기에 지구 위의 수십억의 인구들이 살고 있습니다. 4월말과 5월 초에 땅에 심은 벼가 두어 달 된 지금 많이 자랐습니다. 앞으로 두어 달만 있으면 빨리 되는 것들은 추석의 잔칫상에 흰 쌀밥을 올려 줄 것입니다. 실로 땅의 고마움을 지방에 가보면 실감합니다. 각종의 채소들을 먹으면서 땅의 생산성을 실감합니다. 김을 맨 분들의 말에 의하면 여름엔 너무 빨리 잡초들이 자란다고 합니다. 그 무성한 풀들이 아무도 씨를 심은 적이 없는 데도 매년 돋아나서 무성하게 자랍니다. 겨울에 앙상했던 정원들이 봄에 푸릇푸릇 하더니 여름이 되어 시퍼렇게 녹음방초가 되는 것을 매년 보면서 대지의 생산성에 놀라곤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도 들판에서 밭에 씨를 뿌리는 한 농부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것을 비유로 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한동안 회당에서 주로 가르치셨는데 오늘의 본문부터는 장소를 바닷가로 옮긴 것을 봅니다. 첫째는 회당에서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예수님이 방해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잘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당은 좁아서 사람들이 많이 못 들어오니, 차라리 바닷가로 나온 것이 썩 잘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밭에서 지금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시면서 예수님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 보시오! 저 농부가 씨를 지금 뿌리지 않느냐? 그 씨들이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질 것이고, 어떤 것은 밑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는 흙이 얕은 곳에 떨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나무속에 끼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씨는 좋은 옥토에 떨어지는 행운을 얻을 것이다.” 힘차게 비유설교를 하셨습니다. 팔레스틴의 농사법은 우리나라와는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을 갈아엎은 후에 땅을 잘 정리하고 그리고 씨를 조심조심 심습니다. 그래서 길가나 돌밭에 떨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한데 유대 나라는 이와는 반대로 먼저 씨를 부리고 다음에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래서 씨를 뿌릴 때는 아무 곳에라도 우선 뿌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노새 등에다가 씨를 담은 자루를 실어 놓고 그 아래쪽에 구멍을 조금 뚫어서 노새가 다니면서 씨가 땅에 떨어지도록 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 씨는 길가나 돌작밭에 마구 떨어지게 됩니다. 물론 옥토에도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제자들은 다시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18절-23절에 있습니다. 첫째로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악한 자 즉 마귀가 그 마음에 뿌린 씨를 달랑 먹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돌밭에 뿌리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인데 이유는 말씀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세 번째의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네 번째의 옥토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잘 성장하여 결실을 맺는 사람인데 잘하면 백배 좀 못하면 60배 아무리 못해도 30배의 열매는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주시는 진짜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우선 씨를 뿌리는 농부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열심으로 씨를 뿌렸지만 결과는 모두 100배의 결실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와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지만 이상하게도 소수만이 듣고 다수는 거부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에 저항하고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뿌리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받는 밭, 즉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등등은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습니다. 실로 길가 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좋아서 그 말씀을 받았는데 얼마 아니 가서 다시 옛것으로 돌아갑니다. 옆에서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핍박하고 협박하니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돌밭입니다. 흙이 얇게 덮이고 아래에는 반석이 깔려있는 돌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좋아서 받습니다. 어느 정도 그 말씀의 나무가 자랍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염려와 물질의 욕심에 끌리어 말씀대로 살지 못하다 보니 어느 사이인가 기운이 막혀 시들어 집니다. 가시떨기의 기운에 막힌 밭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악조건을 승리하고 견뎌서 자랄 때까지 다 자라 열매를 맺는 씨들이 많은데 이들이야 말로 옥토에 떨어진 씨입니다. 100배 아니면 60배 적어도 30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이 네 가지 밭이 모두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도 제자들도 열심히 천국의 씨를 뿌렸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때로는 거부하고 저항하여 씨 뿌리는 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용기를 잃을 수 있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전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전도를 해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먹혀들고 어떤 사람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밭이 똑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다가도 씨를 잘못 뿌리기 때문인가라고 회의하기도 합니다. 제발 그런 걱정일랑 말고 열심히 전도하라고 이 비유를 주십니다. 물론 전도학이 있어서 기술을 좀 더 배워서 효과적인 전도 방법은 계속적으로 개발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밭이 문제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어째서 그런 밭은 만들어 놨는가 묻는다면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의 마음을 어째서 아니 바꾸셨는가? 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원죄성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론과 비슷합니다. 인간이 책임질 것은 인간이 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여 불복종한 인간을 하나님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이사야 55:11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고로 상대가 어떤 밭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되돌아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면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가급적 많은 밭에 씨를 뿌리면서 일해야 합니다. 혹시 말씀이 되돌아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크게 둘째로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마음이 어떤 밭인가를 고찰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좋은 밭인가를 깊이 반성하여야 합니다. 각자의 믿음의 성장 내용을 검토하시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즉 우리 자신들 안에 뿌리어진 복음의 씨가 잘 자라고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길가 밭은 아닙니다. 길가 밭은 말씀의 씨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 마음이니 그런 사람은 여기 이 자리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로 왕이 그런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벨릭스 총독이 그런 마음을 소유했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몇 차례 듣고도 결국 회개하지 아니 했습니다. “다음에 보자”, “다음에 보자” 하다가 결국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의 밭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듣고, 전도를 받고 곧 반응하여 예배당에 옵니다. 그런데 몇 번 교회에 나오다가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리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에 좌우되는 성격의 사람들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학습이나 세례 같은 의무가 주어질 때 피해 갑니다. 그러다가 영원히 천국의 문에서 멀어집니다. 6절에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라는 말씀이 있는데 해는 은혜를 가르칩니다. 막상 은혜의 기회가 올 때 도망하여 오히려 조금 핀 싹마저도 타 버리고 맙니다. 의무의 짐은 은혜의 기회인데 그것이 주어질 때 오히려 타져 버리고 만다면 이 얼마나 처량한 일입니까?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봉사를 시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그 짐이 무거울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피하면 작은 믿음의 작은 싹마저 타 버리고 맙니다.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종종 논의되곤 하는 것인데 교회 개축이나 신축 시에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교회의 일은 공개적이기에 개중에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있다고 하여 교회의 큰일을 광고하지 않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광고를 하면 목사님이 돈 이야기를 한다고 빈정대면서 교회를 떠나간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여린 싹이 있기에 교회는 조심스럽게 일들을 추진하지만 때론 오해를 사기도 하고 상처를 받는 경우도 생겨서 조금 올라오던 싹이 해가 뜨면 타져 버리고 마는 경우를 봅니다. 목회자는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지만 때는 늦습니다. 저의 목회 생활 30여 년 동안에 이런 경우를 겪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세 번째의 가시덤불 밭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말씀의 싹이 제법 자라다가 가시덤불의 기운, 즉 세상에 대한 걱정과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 입니다. 이 경우는 세상을 향한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시덤불의 기운에 막혀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서 세상의 재미에 빠지고 세상의 일락에 도취하여 말씀이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질 것 다 가지고 놀 것 다 놀면서 예수를 믿고 싶으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한손에는 세상을 붙들고 다른 손에는 천국을 소유하고 살고 싶어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예수님이 오늘 배워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할 것 다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좋은 시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밖으로 나가라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님을 명심시켰습니다.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하여 최소한의 염려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한데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염려는 생존의 염려가 아니라 부하려 하고 명예를 얻으려 하고 높아지려고 하고 세상의 영광을 얻으려 하는 관심과 염려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리는 목숨 부지를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돈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 하여 다른 사람을 짓밟고 착취하면서 까지 돈에 애착을 가지고 이를 탐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아니 자라던 믿음도 기운이 막혀 죽습니다. 여러분들은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그 말씀 그대로를 달게 받아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어 버리지 말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서 꿀꺽 꿀꺽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외쳤는데 말씀이 이토록 달면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깊이 빠질 리가 없겠지요. 육신이 세상에 거주하는 동안에 필요한 최소한의 세상사를 빼고는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의무를 열심히 감당할 때 옥토가 됩니다.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가 싹이 나고 잘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적어도 길가 밭은 면했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돌밭도 되어서는 안 되고 가시떨기 밭도 돼서는 안 됩니다. 옥토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옥토라고 여기는 분들은 100배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30배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60배 정도로 좋아하지 마세요. 이왕이면 100배를 추수합시다. 결실은 겉으로 드러납니다. 생활로 드러나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나타납니다. 기도생활이나 전도생활에서 나타납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몸 된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여기 오늘 예배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은 옥토가 되어 100배의 결실을 맺어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0배의 결실을 맺는 해/ 마13:1-9/ 신년축복주일설교/ 2010-01-03
100배의 결실을 맺는 해 마13:1-9 “올해는 명성과 칭찬을 얻읍시다.” 2010년 영신예배로 새해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첫 번째 주일을 맞아 하나님 앞에 감사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게 된 것을 축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올해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는 원단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에 따라 언약 잡은 우리의 발걸음마다 하나님께서는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올 한 해 가정·직장·사업장·학업·지역·세계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제목과 같이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백배의 결실을 맺는 사실적인 응답의 한 해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도하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사단 권세 아래 놓인 창세기 3장 현장에서, 구원받은 천국 백성이 어떻게 해야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지에 대해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의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밭’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마음밭을 이릅니다. 하나님 말씀은 절대 불변, 절대 진리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사 40: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 말씀은 완벽한 성취가 보장된 언약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을 받는 마음밭입니다. 마음밭이 어떤 성태인가에 따라 언약 성취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들러리가 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언약 성취의 주인공이 되어 백배의 결실을 맺는 응답을 맛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결실의 걸림돌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네 가지 종류의 밭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 세 가지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밭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상태의 밭이 결실의 걸림돌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 13:3~4) 당시의 농지는 지금처럼 잘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 길과 밭이 정확하게 구분된 것이 아니어서 씨를 뿌리면 바람에 날려 길가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길 가에 떨어진 씨들은 지나는 사람에게 밟히기도 하고 새들이 주워 먹기도 해서 결실을 맺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19절에서 이러한 길가와 같은 마음밭이 어떤 영적 상태인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굳은 상태라고 밝히시며, 이렇게 말씀을 마음에 심지 못하고 있으면 악한 자가 와서 다 빼앗아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사단이 모든 것을 다 채간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가장 큰 공격을 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시간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사단은 여러 가지 가라지를 뿌립니다. 잡생각이 나게 하고 의심과 부정적 생각을 심어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마음 중심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은혜도 못 받고 응답도 받지 못하니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2010년에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는 응답을 받기 위해 가장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예배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배에 참석하는 수준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며 강단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영적 소통이 회복되어야 사실적인 응답을 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말씀을 들을 때 내 경험, 내 선입견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길가와 같이 마음이 굳어졌다는 것은 자기 경험, 자기 생각, 자기 기준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이를 영적 교만이라 합니다. 영적으로 교만하면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기 위해 무너뜨려야 할 첫째 걸림돌이 바로 교만입니다. 새해에는 자신의 기준이 아닌 말씀으로 기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결실을 맺는 데 방해가 되는 둘째 걸림돌은 돌밭과 같은 마음밭입니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 13:5~6) 돌밭에 뿌려진 씨는 밭에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합니다. 싹은 곧 나오지만 해가 돋은 후에 뿌리가 곧 타서 말라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 상태를 20~21절에서 해석하여 주십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 13:20~21) 돌밭과 같은 마음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쉽게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문제와 사건이 발생하면 너무나 쉬이 시험에 들고 넘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인생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완벽한 복음의 참 진리가 여러분 마음밭에 100%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문제와 사건이 올 때 쉽게 좌절하고 맙니다. 2010년 다락방 원단 메시지로 세 가지 치유에 대한 메시지가 선포되었습니다. 과거 치유·오늘 치유·미래 치유가 되어야 RUTC시대의 새로운 시작에 걸맞은 응답을 맛볼 수 있습니다. 과거가 치유되지 않으면 그것이 결국 재앙의 통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이 치유되지 않으면 그것이 미래 재앙의 발판이 됩니다. 미래 치유가 되지 않으면 후대에 임하는 재앙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상처를 오늘 깨끗이 치유받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 하루를 가장 아름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생각이 치유되면 됩니다. 오늘 하루를 후회 없는 기쁨의 날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삶이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 남은 삶이 후대를 위한 발판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인생의 과거·현재·미래 모든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히 해결되었다는 복음의 참 축복이 온전히 뿌리내려지는 증거가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결실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가시떨기밭과 같은 마음밭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 13:7) 이는 말씀을 듣고 어느 정도 자라기는 하지만 가시의 영향으로 지속적인 성장이 되지 않는 상태를 이릅니다.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가시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 말씀하십니다. 서론 때문에 본론을 놓치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의 눈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눈앞에 있는 모든 서론적 가시덤불은 성령의 불로 불살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 6:27)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를 한다고 하여 그 상황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고 권면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인생 모든 문제 해결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을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모두 맡기고 여러분 마음과 눈을 사람 살리는 현장으로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전도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왜 여러분에게 스바냐 선지자를 통하여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는 언약을 주셨을까요? 여러분으로 하여금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삶 속에서 증거를 보여야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모두가 생명 살리는 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업 현장에서, 직장 현장에서, 학업 현장에서 인정을 받으면 그것이 전도의 문이 됩니다. 여러분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으로 삼고 계신 것입니다. 영적인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실속 있는 힘찬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올해 여러분이 참되고 실속 있는 본론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결실의 걸림돌을 모두 기경하고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는 참된 언약 성취의 주역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결실의 디딤돌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8) 백배로 결실을 맺는 마음밭은 바로 좋은 땅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마 13:23) 누가복음의 내용을 보면 이와 같은 내용이 더욱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 8:15) 좋은 땅, 옥토와 같은 마음밭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것을 실제 삶 속에 적용하여 백배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성취될 언약의 말씀, 하나님의 시간표로 알고 받는 사람은 말씀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 자세가 백배 결실을 맺는 디딤돌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이 이러한 영적 자세를 가지고 백배 결실 맺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사막하면 떠오르는 동물은 낙타입니다. 낙타는 몸 구조가 사막의 극한 환경을 극복하고 생존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낙타의 여러 가지 특징 중 하나가 되새김질입니다. 낙타는 하루 종일 되새김질을 하는데 그것이 뜨거운 사막에서 지치지 않고 견디는 비결입니다. 사막 한복판에는 먹이와 물이 없습니다. 때문에 낙타는 먹이를 몸속에 저장하고 필요할 때 되새김질을 하여 에너지를 얻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낙타는 사막에서도 꿋꿋하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창세기 3장 세상은 사막과 같은 메마른 현장입니다. 이런 현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백배의 결실을 맺고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될까요?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에 마음 문을 활짝 열고 풍성히 받아야 합니다. 더함도 뺌도 없이 말씀을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을 되새김질하여 문제와 사건이 닥칠 때 적용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검을 가지고 싸워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방패로 사단의 공격을 막으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이때 비로소 백배의 결실을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맡겨진 직분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언약 잡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으며 생명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한 해 동안 건강이 회복되고, 경제가 회복되는 축복을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영혼 살리는 일에 쓰임받는 현장 전도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언약의 말씀을 통해 ‘백배로 결실 맺는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의 걸림돌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좋은 밭이 되어 말씀을 그대로 받음으로 백배로 결실을 맺게 하옵시며,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0가지 계시의 통로/ 대상28:19/ 2004-03-18
10가지 계시의 통로 대상28:19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오시는 종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나서 숨었습니다. 이때 사람은 도망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 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으셨습니다. 어디에 있는 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 오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니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개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하나님께서 찾아 오심으로 시작된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마지막날에 찾아 오심으로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우리는 계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1. 환상을 통한 계시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하여 계시를 주시는 적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세 가지 경우를 보려고 합니다. (1)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전적으로 환상을 통한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만나라는 계시를 환상으로 주셨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대(隊)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내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上達)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내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들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행10:1-8) 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도 고넬료를 만나라는 계시를 환상으로 주었습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행10:9-16) (2) 미가야에게 하나님은 하늘에서 천사들과 회의하는 장면을 환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을 꾀어서 전쟁에 이길 수 있다고 선지자들로 하여금 거짓말하게하여 전쟁에 나가 죽게 하시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로 하여금 거짓말하는 영이 붙게하여 거짓말로 이길 수 있다고 말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들은 다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데 미가야 선지자만은 환상으로 이 모습을 보고는 전쟁에 나가면 죽을 것이라고 바른 예언을 하는 장면입니다.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을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였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왕상22:19-23) (3) 하나님은 사도바울도 환상으로 통하여 선교자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은 어느 곳에 가서 선교할가를 기도하고 있는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루니이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부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 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6-10) 이같이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계시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2. 초자연적 현상을 통한 계시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계시할 뿐만 아니라 자연 현상을 통하여 계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 모세에게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아께서 그를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본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나의 선 곳은 거룩 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3-5) (2) 구름기둥, 불기둥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그 후에 구름이 회막을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40:34-38) (3) 불을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성막의 시작은 불의 계시로 나타났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 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레9:23-24) 성전의 시작도 불의 계시로 나타났습니다. \\\\\\\"\\\\\\\"솔로문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대하7:1) 교회의 시작도 불의 계시로 나타났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에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아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불로 계시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경에는 긍정적인 불이 9번 내려오고 부정적인 불이 3번 내려왔습니다. 3. 천사를 통한 계시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계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 요셉을 인도하는 천사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地境)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2:13-16) (2) 죽은 영을 인도하는 천사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16:22) (3) 롯을 인도하는 천사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니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그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19:15-17) 4. 음성을 통한 계시 하나님께서는 생생한 음성을 통하여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생생하게 육신의 고막을 울리는 경우입니다. (1) 사무엘에게 임한 음성 \\\\\\\"\\\\\\\"이미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異像)이 혼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 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 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이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시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삼상3:1-12) (2) 아담에게 임한 음성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어디 있느냐\\\\\\\"\\\\\\\"(창3:8-9) 이같이 하나님은 생생한 음성을 통하여 계시하십니다. 5. 생각을 통한 계시 하나님은 생각을 통하여서도 계시하십니다. 기도할 때 나는 생각 기도할 때 떠오르는 생각, 묵상 중에 주시는 생각등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도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6. 기적을 통한 계시 하나님은 기적을 통하여서도 계시하십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러한 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이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눅5:5-7) 이는 베드로로 하여금 앞으로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계시였습니다. 7. 꿈을 통한 계시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 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 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내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내게 전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창37:5-11)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서 꿈을 통하여 계시하셨습니다. 8. 믿음을 통한 계시 하나님은 믿음을 통하여 계시하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9. 역사적 사건을 통한 계시 하나님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을 통하여서도 계시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로 빼어 내며 그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를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출6:6-7)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신3:24) 10. 손을 통한 계시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짓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하나님의 집이라 하나님께서 직접 설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손을 하나님의 손이 내려와 붙드시고 직접 그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령을 통하여 음성을 들려 주시면서 그려주셨습니다. 나도 내가 특별하게 쓸집은 내 마음과 용도에 맞게 설계할 것입니다. 사용할 사람만 용도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손으로 그려 주시는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 곧 여호와의 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식양을 주고\\\\\\\"\\\\\\\"(대상28:12) \\\\\\\"\\\\\\\"다윗이 가로되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대상28:19) 성경에 나타난 계시 가운데 가장 정확하고 가장 놀라운 계시는 다윗에게 주신 성전 계시입니다.
10가지 재앙 /출11:1-3
10가지 재앙 /출11:1-3 2011-08-22 23:35:30 read : 3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마치 한 편의 거대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 장대한 스케일, 수많은 등장인물들, 반전을 거듭하는 탄탄한 스토리 구성, 그리고 상상을 초월한 통쾌한 장면들... 하나님께서 시나리오를 쓰시고, 하나님께서 감독하시고, 하나님께서 제작하신 하나의 우주적인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우주적 드라마 출애굽기는 내용적으로 볼 때 크게 세 편의 연속된 사건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첫째는 출애굽을 위한 준비 사건입니다.(1-6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도자 모세를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라는 한 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둘째는 출애굽 사건입니다.(7-18장)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셋째는 출애굽 이후 사건입니다.(19-40)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본문 말씀은 두 번째 사건의 한 부분입니다. 출 7:14-11:10까지 이어지는 소위 “열 재앙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바로 왕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8:1) 물론 바로가 보낼 리 만무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저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리 없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장정만 60만입니다. 남녀노소 전체를 합하면 200만 정도의 인구입니다. 저들이 노예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 막대한 노동력을 잃어버린다면 애굽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필사적으로 버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맛보기로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입니다. 이쯤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선선히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요술사들도 같은 이적을 보입니다. 그것을 본 바로가 거절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매를 드셨습니다. 바로 애굽 땅에 재앙을 퍼부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려 10차례나 계속됩니다. 바로 왕이 버티다 버티다 결국 두 손을 듭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냅니다. 10차례 재앙은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피 재앙입니다. 애굽의 모든 강과 하수가 피로 변했습니다. 둘째,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가 애굽의 온 땅을 덮었습니다. 셋째, 이 재앙입니다. 땅의 티끌들이 이로 변했습니다. 넷째, 파리 재앙입니다. 애굽의 온 천지가 파리로 뒤덮였습니다. 다섯째, 악질 재앙입니다. 애굽의 가축들이 악질로 죽었습니다. 여섯째, 악성 종기 재앙입니다 . 애굽 사람들과 짐승들이 지독한 피부병인 악성 종기에 고통을 겪습니다. 일곱째, 우박 재앙입니다. 애굽 전국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여덟째, 메뚜기 재앙입니다. 애굽 전역에 메뚜기 떼가 창궐했습니다. 아홉째, 흑암 재앙입니다. 흑암으로 애굽 전체가 어둠에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다 끔찍한 재앙들입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재앙들입니다. 이 재앙들 10가지가 쏟아짐으로써 바로가 항복을 선언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냈습니다. 이 10가지 재앙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1. 하나님을 나타내심 출애굽기의 10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7:5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7:1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8:22를 보면 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그리고 9:14, 9:16, 8:10 등을 보면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이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신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해야 함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실제로 10가지 재앙은 당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심판하시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즉 그것들은 참신이 아님을 만천하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피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나일 강은 생명의 젖줄입니다. 나일 강은 사막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입니다. 애굽은 땅 대부분이 사막입니다. 이 사막인 애굽 땅에 사람들이 살고 대제국이 세워졌습니다. 전적으로 나일 강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애굽인들은 나일 강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신의 이름이 ‘닐루스’(Nilus)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 신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나일 강이 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생명의 근원이 죽음의 자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일 강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생사는 나일 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관하신다는 엄숙한 선포입니다. 다음으로 흑암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은 사막입니다. 사막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태양입니다. 구름 한 점 없이 1년 365일 대낮에는 태양이 저 하늘에 떠서 온 천하를 호령합니다. 당연히 고대 애굽 사람들은 저 태양을 신 중에 최고의 신으로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이 바로 태양신 ‘라’(Ra)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대낮에도 3일 간이나 애굽 온 천지가 흑암으로 뒤덮혔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평생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태양 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태양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태양이 사람들의 생사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10 가지 재앙이 모두가 다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던 것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이 사건으로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호 4:1, 6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망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6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나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6:3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이점을 잘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힘써서 여호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확인시키심 이 10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시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시키신 바가 있습니다. 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시고 이 점을 다시 확인시키셨습니다. 7: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백성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바로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이 일방적인 선택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이 10가지 재앙 사건을 조금 세심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 가지 재앙 중에 치명적인 재앙들은 애굽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재앙, 악질 재앙, 우박 재앙, 흑암 재앙, 그리고 장자 재앙입니다. 이 재앙들은 애굽 땅에서도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고센 땅에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지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재미있는 관점으로 설명했습니다. 렘 31:31-3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셔서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은 혼인 서약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택하셔서 결혼 예식을 올리기 위해 애굽에서 데리고 나가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혼 예식장은 저 시내산인데 지금 그곳으로 데리고 나가시려고 바로에게 이 재앙을 내리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아주 특별한 사랑]이란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난 정말 많이 공부했어. 하나님에 대해 말야.“ 자신 있게 말하지만, 누군가를 인정할 수 없어서 누군가 부럽다 못해 미워져서 혹은 자신이 못마땅해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는 당신. 부드러운 미소와 섬김으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는 당신은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친 손에 반지를 끼우고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주시고 고운 옷을 당신에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속에 잠겨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주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심 이 10 가지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재앙이 임하자 처음에 바로는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그러다 재앙의 강도가 심해지자 한 발 물러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시 말을 뒤집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바꾸셔서 보낼 마음을 바꾸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재앙에서 이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9:12, 10:20, 10:27에 반복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바로가 악성 종기 재앙이 임했을 때, 메뚜기 재앙이 임했을 때, 그리고 흑암 재앙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생각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셔서 바로가 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이 10가지 재앙의 최종 목표가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장자 재앙까지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장자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 보이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출 12:21-2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한 마디로 유월절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 죽음의 재앙을 피할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리고 그 집 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를 보고 그 집은 유월 곧 넘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살았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을 면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 땅에서도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장자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 받고 심판에서 구원받고 이 땅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10 재앙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심을 깊이 느끼고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새 이스라엘인 우리를 위해 놀랍게 역사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0가지 재앙 /출7:14-11:10
10가지 재앙 /출7:14-11:10 2011-08-22 23:12:09 read : 3 2011년은 교회 표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로 정하였고, 이 표어를 따라 복음의 내용을 무엇으로 담을 것인가에 대하여 계속 출애굽기를 통해 강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개인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하나님 나라를 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 나라의 왕을 말해야 하고, 그 왕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면 역시 필시 왕의 권세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전의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왕의 권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성경에는 옛 하나님 나라와 새 하나님 나라의 경영이 나타나 있습니다. 옛 하나님 나라는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한 나라입니다. 신약의 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그 나라 왕은 누구며, 어떤 권세를 가졌는지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전파의 내용에 이러한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지금 전해야 하는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 왕의 권세와 비교하여 신약의 하나님 나라 왕의 권세가 얼마나 더 크고 강한 것인지 나타내 증거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여호와의 강한 손의 권세는 일반 세계 역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강한 나라의 왕이 가졌던 권세와 비교하면 그 힘과 능력을 비슷하게 말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바로 왕을 항복시키고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 아들의 권세는 이런 세상 나라의 권세와 다릅니다. 그가 가진 권세에 대하여 성경은 죄사함의 권세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권세를 가진 왕은 인류 역사에 어느 누구도 없었습니다. 로마와 징기스칸의 원나라, 그리고 중국의 당나라이든지 이런 권세를 가진 왕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의 내용에 담아야 할 것은 바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이 권세입니다. 오늘 본문이 상대적으로 다른 주일보다 분량이 매우 많았지요? 이는 10가지 재앙을 하나씩 강론하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10재앙 전체를 보고 말씀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그럼 직접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출애굽기 문맥을 다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하여 세워진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애굽에 내려간 70인의 야곱 후손들이 씨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레위 지파의 아들인 모세를 불러 애굽 바로 왕에게 보내어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어 시내산에서 처음 세워졌습니다. 모세에게 형 아론을 함께 하도록 하여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였다고 출애굽기 5장-6장이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가서 이스라엘을 내보내어 달라고 하자 바로 왕은 듣지 않고 도리어 이스라엘을 더 학대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는 모세에게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실 것을 천명하셨습니다. 바로 그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구원하심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7장-1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 강한 손을 출애굽기는 어느 특정한 형식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 요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킨 일이 그 뒤에 이어서 나오는 10가지 재앙과 전체적으로 한 세트가 된다고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10가지 재앙의 결정적인 재앙은 유월절 재앙으로 이 유월절로 말미암아 애굽 바로 왕이 항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전초전의 성격을 가진 아론의 지팡이 사건은 성경에서 자주 되풀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여리고성 전투를 들었습니다. 여리고성의 승리는 나머지 모든 가나안 땅의 성읍을 차지하는 전투의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항상 이렇게 서론에 가까운 승리가 있고 이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성경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전쟁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태평양전쟁을 들 수가 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로 말미암아 미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항복을 얻기까지 미국은 계속 일본의 본토까지 진격하며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와 같이 10재앙도 애굽을 융단폭격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10재앙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냥 10재앙이 무엇이 있었는가를 아는 정도 그칩니다. 정작 모세가 10재앙을 기록한 의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10재앙을 전쟁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모세가 기록한 방식을 추적해 가면 모세의 기록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주보의 설교개요란에 써놓은 것처럼 10재앙을 9+1로 보았습니다. 이유는 앞의 9가지 재앙을 기록한 것과 10번째 재앙을 기록한 것이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게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이처럼 모세는 10번째의 재앙을 아주 특별하게 기록했습니다. 9가지 재앙에다 한 가지 더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9가지 재앙도 그냥 첫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 나열해서 보지 말아야 합니다. 9가지 재앙을 3+3+3=9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10재앙 전부를 수식으로 나타낸다면 (3+3+3)+1=10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3가지 재앙씩 동심원과 같이 반복되며 점차 확대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재앙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7:15절에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2번째, 3번째 재앙에는 나오지 않고, 4번째 재앙에 나옵니다. 8:20절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고 합니다. 이 말이 5번째, 6번째 재앙에는 나오지 않다가 다시 7번째 재앙에 나옵니다. 9:13절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8번째, 9번째 재앙에는 이런 말이 없어요. 그러면 왜 3재앙씩을 끊어 말하려고 하는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10재앙을 보시는데 또다른 기록방식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1번째, 2번째 재앙에는 애굽의 요술사들도 모세와 아론이 행하는 재앙에 맞섭니다. 그러다가 3번째 재앙에 때는 달라집니다. 8:18, 19절을 보십시다. “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가 사람과 가축에게 생긴지라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이렇게 3번째 재앙 때는 요술사들도 맞서서 대항하지 못하고 결국 여호와의 권능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는 태평양전쟁을 살펴보아도 같습니다. 비록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했더라도 육군과 해군력을 동원하여 미국과 맞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점차 전세는 기울게 되고 많은 장수들을 전장에서 잃게 되고, 다른 장수들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게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3번째 재앙까지는 나일강을 시작으로 애굽의 모든 식탁에 그리고 애굽 온 땅으로 재앙이 확대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4째 재앙부터는 말이 바뀝니다. 어떤 식으로 바뀌냐면 애굽 땅 애굽 사람에게는 재앙이 내리지만 고센 땅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재앙이 내리지 않았다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즉 재앙을 내려도 여호와의 소유인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시켜 보호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8:22절을 보십시다.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이렇기 때문에 3번째 재앙과 4번째 재앙 사이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7번째 재앙을 보면 또다른 기록방식이 등장합니다. 우박 재앙을 내릴 때 9:14절을 보시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온 천하게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니” 그리고 9:18절에도 보면 “애굽 나라가 세워진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고 말합니다. 일찍이 애굽 땅에서 경험하지 못하였던 재앙이라고 반복하며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서 볼 때 3재앙씩 반복되면서 점점 더 강한 재앙으로 애굽을 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점점 더 강한 재앙이 애굽에 임하는 가운데 10:7절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드디어 애굽의 신하들도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내리면 누가 굴복하겠습니다. 요술사들이 굴복했고 신하들이 굴복했습니다. 그럼 당연히 바로 왕이 항복할 차례입니다. 이러한 순서는 거의 모든 나라의 전쟁역사를 살펴보면 거의 같게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양 나라의 대표적인 장수가 나와 일전을 벌입니다. 그러다 한 쪽이 패하게 되면 전세는 기울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곧바로 항복하지는 않습니다. 끝까지 대항하다가 많은 군사들을 거의 다 잃고 나서야 왕이 비로서 항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10재앙을 모세가 기록했습니다. 그냥 의미가 없는 10재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3재앙씩 점점 더 강하게 내리다가 마지막 10재앙 때는 결정적인 원 펀치를 먹여 상대를 KO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예로 든 태평양전쟁에서도 역시 같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미드웨이 해전 후 큰 전쟁의 승리를 과달카날 섬에서 미군을 얻습니다. 이 섬의 비행장에 관한 싸움입니다. 그런제 태평양전쟁 때 일본은 전술적인 면에서도 미국에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이미 중일 전쟁을 치렀고 동남아시아에서도 전쟁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상대적으로 진주만 기습을 당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 들었으니 전술적인 면에서도 매우 약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약세를 과달카날 섬의 전투에서 뒤집어 버립니다. 미국이 전술적이 면에서도 일본을 능가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미드웨이 해전은 해군력만의 싸움이라고 한다면 과달카날 섬의 전투는 육해공의 싸움이었습니다. 과달카날 섬이 전략의 요충지였는데 이 섬을 탈환함으로 비로서 미국은 확실한 공격적인 전술을 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달카날 섬을 일본이 빼앗긴 것은 애굽의 요술사들이 굴복한 것과 어쩌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많은 섬들을 빼앗기며 점점 후퇴하게 된 일본군의 모습은 마치 애굽 바로 왕의 신하들이 굴복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오끼나와의 본토로 진격한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이는 유월절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을 다 멸하신 일로 말미암아 바로 왕이 항복학 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10재앙을 통해 여호와의 강한 손이 어떻게 애굽에 나타났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교리처럼 10가지 재앙을 읽게 되면 첫 번째 재앙도 예수님의 공로로 연결시켜 버리고, 두 번째 재앙도 역시 예수님의 죄사함으로만 읽게 되어 결국 모세가 말하고자 한 것을 다 놓치게 됩니다. 10재앙에 대하여 하나 더 생각해 보십시다. 첫 번째 재앙은 나일 강을 피로 만든 것이고, 9번째 재앙은 흑암으로 애굽 땅을 어둡게 한 것입니다. 창조의 시작은 창세기 1:2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면서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고 하시며 흑암에 빛이 있게 된 창조를 말하였습니다. 이를 연상하면서 보면 애굽 땅에 흑암이 있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땅에는 빛이 있다고 했습니다. 10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할 때 애굽 온 땅에 임한 재앙을, 그 다음에는 그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과 가축, 동식물을 칩니다. 이것도 창조에서 땅을 만드시고 그 땅에 모든 동식물을 가득 채웠던 것과 대비가 됩니다. 그러니까 나일 강에서 즉 물에서 재앙이 시작되고, 이 물에서 나온 개국리가 애굽 모든 집의 식탁과 반죽그릇에까지 올라가고, 3째 재앙에는 이가 애굽 온 땅을 점령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7번째 재앙인 우박은 집 안에 들어간 것은 치지 않았지만 집 밖에 있는 것은 식물이나 가축을 다 멸했습니다. 우박 재앙 때는 삼과 보리가 아직 나기 전이었다고 하여 모든 식물이 다 멸절당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8번째 재앙인 메뚜기는 모든 식물을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갉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박 재앙보다 메뚜기 재앙이 더 무섭습니다. 이 메뚜기 재앙은 처음에 저는 별로 믿고 싶지가 않았더랬습니다. 그런데 펄벅의 대지를 읽으니까 중국의 메뚜기 재앙을 기록한 것이 있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 메뚜기 재앙은 가끔 보도도 되고 있지요. 아예 먹을거리가 없도록 싹까지 완전히 먹어치워 다음 해에 농사지을 종자까지 없애버립니다. 이러한 재앙들은 최근에 일본 지진으로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 일에 대하여 세계가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 바다 물이 지구의 모든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에 일본 근해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바다가 오염이 될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 방사능 재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출애굽기의 10재앙을 기록한 방식을 따라 보면 그 의미를 더 확실하게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마가복음을 강론하면서 출애굽기와 병행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마가복음을 보면 1장의 내용과 병행합니다. 막 1:29-45절을 보십시다. “ ... ” 여기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일, 많은 병자와 귀신들을 쫓아내신 일, 그리고 나병환자를 고친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본문만 보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신비한 능력으로 병을 고쳤다라는 정도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마가는 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한 일을 기록하는지 여간해서는 알 수가 없지요. 마가복음의 특성상 짧고 간결하게 기록하는데, 이 열병 치료는 전후 문맥에서 무얼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게 볼 때 이 열병 치료에 대하여 어떤 부가설명이 없으므로 아주 단순하게 예수님의 치료능력으로만 볼 것입니다. 마가가 연속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원어를 찾고 문법을 따라 단어 하나까지 사전으로 추적하여 그 의미를 세밀하게 연구하더라도 이 자체로는 마가가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것은 제가 여러 번 여러분 앞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출애굽기가 아니면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우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셨고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여기서 ‘저물어 해질 때’라고 하고, 35절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라고 하는 표현들은 출애굽기의 ‘아침에 일찍이’라는 말과 병행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2-34절에는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다고 하고, 39절에는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럼 이건 어떤 점진적인 모습을 나타냅니까? 장모의 집에서 시작하여 동네로 그리고 온 갈릴리로 확대가 되는 형식입니다. 즉 이것은 애굽의 온 땅으로 재앙이 점차 확대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면 읽어도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인도하며 보호한다면 그 백성 중에 누구를 가장 먼저 책임을 지고 보호해야 하겠습니까? 그건 가장 가까운 심복의 가족을 돌보는 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하들의 가족을 편안하게 해야 신하가 왕을 위하여 충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애굽에 재앙이 내릴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애굽 땅과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의 땅과 사람과 구별시키셨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낸 권세 있는 새 교훈은 궁극적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신 것을 알리시려 함을 통해 하나님 아들의 권세가 무엇인지 나타냅니다. 그러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과 많은 병자와 귀신을 쫓아낸 일과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은 죄사함의 권세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애굽에서 여호와의 강한 손은 이방인인 애굽에 재앙을 내림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죄사함의 권세로 하나님의 아들이 귀신과 병을 고치신 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중간에 보면 주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결박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굽 바로 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하나님 아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왕으로 오셔서 죄사함의 권세를 나타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아들이 가장 가까운 제자의 가정을 돌아보셨고, 그 동네 사람을 치료하셨으며, 온 갈릴리에 전도하며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럼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갈릴리가 마치 애굽의 고센 땅처럼 구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이방인처럼 천하게 여김을 받던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 주님의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가복음의 전체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천하고 가난한 이방인들이 주님의 나라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마가복음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갈릴리는 이방의 땅이고, 흑암에 앉은 백성이 거기 거하며, 사망의 땅과 그늘진 땅입니다. 이곳에 여호와의 강한 손이 아닌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가 임하여 구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여호와의 성막에 들어가지 못했던 부정한 자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로부터 배제되었던 불쌍한 자입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 아들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인자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다고 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가정, 갈릴리 땅의 사람들, 나병환자 등과 같은 이방 땅에 거하며 죄인된 사람들을 의인이라 여기는 유대인으로부터 구별시켜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장의 이런 사건들 속에 어려운 난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알면 이건 쉽게 해결됩니다. 출애굽에서 여호와의 강한 손이 구원하심을 나타내 여호와를 알리려 하신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고 도리어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시거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고까지 하셨고 소문이 나니까 동네에도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여호와의 종이 받는 고난 속에서 그는 입을 열지 않으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침묵하시었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않으신다고 이사야 42:2절에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을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을 박히실 때 그 아래 있던 자들이 ‘너 자신을 십자가에서 구원하여 보라’고 조롱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자신의 권세를 온 천하에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권세를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에도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는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겸손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제국 안에서 변방인 유대 땅 그것도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산에서 11명의 천한 어부들과 함께 그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은 나라를 갈릴리 산에 세웠노라고 마가복음은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권세를 과시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약하심을 죽었다고 고린도후서는 말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즉 베드로의 장모처럼, 갈릴리 온 땅의 비천한 이방인들처럼, 문둥병자처럼, 불쌍한 죄인들을 죄사함의 권세로 건지시러 오셨다고 마가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과 저는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베드로와 같이 주님의 제자의 가족입니까? 갈릴리 땅에 거하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나병환자처럼 그런 병자였습니까? 우리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정말 빛이 없었고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유대 땅에서 거리로 말하자면 정말 멀리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더 큰 죄인이요 하나님께 대한 악한 오랑캐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저는 마가복음 1장에 나오는 어떤 사람들 보다 더 천하고 무능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들을 구별하사 구원하시고 세상의 유명한 자들과 부한 자들과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 말했던 것처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들이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신 자들로 교회를 함께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불러 부활의 몸인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며 성찬상에서 먹고 마심으로 참으로 권세있는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으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땅에 있어도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이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죄사함의 권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권능은 소리를 높여 거리에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은 천하가 알도록 하여 두려워 떨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권세는 그렇게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이 시대 가운데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교회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강남에 교회를 짓는데 2,000억원의 공사라고 합니다. 교회를 이렇게 크게 건축하는 이유에 대하여 그 교회 담임목사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이제 교회도 세상에 대하여 말할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큰 교회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구약의 솔로몬 성전에는 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신약의 주님의 몸된 성전에는 젼혀 맞지 않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다려 돌아가실 때 옷 한 벌 입지 못하셨고, 그 있는 것도 찢기워 제비 뽑았습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 주님의 몸으로 새 성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권력이나 세력을 형성하려고 하려고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겸손함으로 낮아져 섬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은 너무 쉽고 세상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이 교회를 이루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면 이건 성령이 함께 하는 교회요, 죄사함의 권세가 함께 하는 교회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교회에 약한 자들이 들어오고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이 들어올 때 교회는 더욱 기뻐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천한 자들이 들어온다고 부담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들을 내 몸으로, 내 생명으로 여겨 보호하고 지켜내어 교회의 권세를 나타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권세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이 함께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 나라를 완성하실 때 귀한 상급을 얻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상가에 세를 들어 504호에 거하는 저희 교회가 비록 작아도 세상을 이긴 믿음과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도록 함께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가지 재앙과 출애굽/출12:29-36
10가지 재앙과 출애굽/출12:29-36 2003-12-26 12:58:46 read : 3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대로 이루실 것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다시 바로 앞에 섭니다. 그리 고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백성, 내 군대"라고 선언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 앞에 이 사실을 선언했습니다. 7:8"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곧 그대로 행하였더라" 이것은 바로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바로는 그들을 자신의 노예, 자기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나타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군대 로 말을 합니다. 바로는 마음이 더욱 더 강팍해 졌습니다. 누가 감히 내 재산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하는 교만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이런 강팍 한 마음 때문에 자기 눈 앞에 보이는 기적들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 가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였지만 그는 단지 애굽의 술사들이 하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밖에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렇게 강팍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바로와 애굽 사람 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지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무서운 것들이었습니다. 10번의 재난이 임하였는 데 그 종류들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첫 번째 재앙은 나일강이 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인들의 부요 는 바로 이 나일강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부요를 보장하여 줌으로 신으로 숭배를 받던 나일강이 피가 되 었습니다. 이것은 나일강이 죽어 버렸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들은 나일강의 물줄기를 끌어들여 못도 만들고 호수도 만들어 생을 편 리하게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라지는 무서운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거두어지기 시작하자 그 땅은 풍요의 땅에서 죽음의 땅으로 변하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재 재앙은 개구리 재앙입니다. 온 나라 안에 개구리 때가 날뛰는 것입니다. 강변에나 있어야 할 개구리들이 온 도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바로의 궁 안에 까지 개구리로 인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개구리는 무슨 공 격할 무기를 가진 짐승도 아니었지만 바로의 군대로도 이것들을 어찌할 수 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로 그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보개 하셨지만 바로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강팍한 마음을 가질 뿐 이었습니다. 세 번재 재앙은 "이"가 득실대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마 음이 변하지 않자 하나님은 아무 경고도 없이 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아주 작은 것으로 한 번 파고들면 살갗까지 파고들는 무서운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전 한 마을에 소위 "노내기"라고 하는 발 많이 달린 곤충들이 많이 생겨서 방송에까지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온 마을의 담벼락에 덕지덕지 이 벌레들이 붙어 있는 장면은 충격적이었고 너무나도 징그러운 모습이었습니 다.그런데 하물며 사람의 몸에 자신의 살갗을 파먹는 벌레가 들어왔으니 이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이런 것들은 그저 가난한 자들이나 당하는 일이라고 그들은 여겨왔었습 니다. 이런 일들은 노예들의 일이지 주인된 자신들이 당할 일이라고 생각하 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무서운 재앙으로 인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걸인과 같이 옷을 벗고 이 벌레를 잡아야 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 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것인양 차지하고 부를 누리던 자들을 한 순간에 낮추어 버리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모세와 아론의 흉내를 내던 사단의 사자들, 곧 바로의 술사들은 이 재앙 앞에서 완전히 손을 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 도 모든 것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시는 전능자 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강팍함을 버리지 않습니다. 네 번째 재앙은 파리재앙이었습니다. 수 많은 파리떼의 공격을 받은 애 굽은 그야말로 사람 살 곳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 많은 파 리 떼가 온 나라 안을 가득히 채운 모습들을 말입니다. 다섯 번째로는 가축에게 전염병이 돌게 하시는 재앙이었습니다. 가축들 은 애굽인들의 귀중한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 위에 전염병 이 돎으로 모두 죽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에 있는 것만 칠 것이 니 그 모든 것들을 피하게 하라고 미리 경고해 주셨지만 바로와 그 백성은 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토록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 치 않았던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는 직접 애굽 사람들과 가축의 몸을 독종으로 치시는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 재앙은 세 번째 것과 마찬가지로 경고가 없이 행하여진 재앙 입니다. 그리고 이 재앙부터는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훨씬 더 고통스러운 재앙들이 됩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점차로 더 무 서운 재앙으로 심판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술사들도 이 재앙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온 백성이 얼 굴과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너무나 고통스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깨닫지 못 했습니다. 일곱 번째로 주께서는 애굽 온 지역을 우박으로 치십니다. 밭에 남아 있는 채소와 곡식들을 치시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로는 메뚜기 떼를 보내셔서 최소한의 남은 것 조차 다 먹어 치 우게 하심으로 재난을 더욱 더 심화시키십니다. 애굽인들은 이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그들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욱 더 마음을 강팍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아홉번째로 하나님께서는 흑암을 보내 온 애굽 땅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빛이 없는 깜깜한 세상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 심으로 모든 빛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누리는 최소한의 은혜라도 다 감사의 조건이 되지 않을 수 없 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재앙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문제가 해결되는 즉시로 다시 마음을 강 팍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이제 모세와 아론이 다시금 자기 앞에 나타난다면 그들을 죽이겠노라고 협박하기까지 할 뿐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마침내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마지막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사람의 장자뿐 아니라 짐승의 첫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죽임을 당하는 대 재난이 애굽 온 땅에 임하게 됩니다. 결국 바로는 이 재앙 앞에서야 비 로소 이스라엘 온 백성을 놓아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 10가지 재앙이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중요한 진리들이 있습니다. 1.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애굽인들은 수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신들을 살펴 보 면 이렇습니다. 하피/나일강의 신 이시스/나일강의 여신 헤겟/개구리 머리를 한 출산의 여신 셑/광야의 신 레/태양신 우아치트/곤충의 신(파리가 대표) 하솔/소머리를 한 여신 아피스/풍요의 신(숫소의 신) 셋크메트/질병을 이기는 여신 이시스/치료의 신 눗/하늘의 여신 오시리스/풍요와 곡식의 신 세스/곡식의 보호자 민/재생의 신 10가지 재앙들은 자세히 살펴 보면 바로 애굽인들이 섬기던 이 신들 위 에 내린 것들이었음을 봅니다. 애굽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이 신들이 자신 들을 보호하여 주고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들을 결코 그들을 지 켜 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0가지 재앙을 통해 그들의 신앙이 얼 마나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께서는 다시 한 번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온 땅에 드러내게 되실 것입니다. 2.하나님만이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며 통치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이로부터 사람과 태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마음 대로 주장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 음을 선언하신 사건입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온 이스라엘은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실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3.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 처럼 소유하고 있던 바로에게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에 내렸습니다. 자 신들의 노예가 아니었던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고 탄압하던 바로에게 마침내 무서운 심판의 채찍이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모세를 통하여 계속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자신 뿐 아니라 자기 온 백성을 불행에 빠지게 하는 지도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와 모든 애굽 사람과 짐승의 첫 새끼가 다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 앞에서 늘 겸손하십시오. 주님의 뜻을 따르십시오.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고 생 명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4.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별하여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10가지 재앙에서 처음의 피재앙과 개구리 재앙 이 재앙은 애굽사람들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도 고통을 당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특별히 파리 재앙에서 부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시는 것을 봅니다. 8:23"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그들 역시도 애굽 사람들의 고통을 같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당하는 고난을 무한정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구별하여 주신 것입 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이런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 셔서 자신들을 특별하게 다루고 계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모든 고통을 무한정 버려 둔체 보고만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똑 같은 고난을 겪는 것 같이 보이지만 마침내 하나 님께서 나타나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 실 것입니다. 재앙이 임하자 바로는 타협을 하자고 모세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의 타 협안은 매우 교묘한 것이었습니다. 1.그는 애굽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좋다고 동의를 하는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 단서를 붙입니다. 그것은 애굽 땅에서 제 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는 믿되 세상에서 분리되려고 하지는 말라"는 제안과 같은 것입니다. 주일은 지켜라 하지만 생활을 바꿀 필요는 없다는 식인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생활이 변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애굽 땅을 떠나는 아품 없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광야로 나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는 믿되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는 말과 같은 제안입니다. 이 세상의 세력들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예배는 드리되 빨리 다시 이 벽돌을 찍 는 노예생활로 돌아오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지 않고는 참 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옛 질서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결단이 있어야 참 믿음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남자들만 가라고 합니다.(10:11) 여기서는 특별히 자녀들을 데리고 가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너는 예수를 믿어도 좋다 그러나 너의 자녀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길 이 있는 데 강요할 것이 무엇이냐? 너나 잘 믿어라"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 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을 상실한다고 생각해 보 십시오, 이것은 교회의 미래를 잃어 버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 세상 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4.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가라고 합니다.(10:24) 이것은 그래 이제 예수를 믿어라! 온 가족이 믿어도 좋다! "그러나 헌신 은 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은 전혀 동원되지 않고 정신적인 평안만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 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예수님 다음으로 돈이 좋아요!"라는 재목의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솔직해서 좋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돈은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 물질로 인한 시험들이 그토록 많을 수 밖 에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는 그곳에 마음도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 을 어디에 드리는가가 우리 마음의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를 위하여 물질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제와 선한 일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바로의 타협안을 과감히 거절해야 합니다. 그럴 때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19 구조대/ 빌3:1-11/ 2001-12-06
119 구조대 빌3:1-11 제가 한국에서 목회를 할 때, 하루는 L 권사님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 대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개 짖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초인종을 누르자, 그 개는 침입자에게 경고라도 하듯이 맹렬히 짖어댔습니다. 권사님이 문을 열자, 저는 심방대원과 함께 마당을 지나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도 개는 달려들 기세로 짖어댔습니다. 예배를 은혜롭게 마치고, 그 집을 나설 때였습니다. 또 다시 그 집 개가 나타나, 물듯이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개에게 아무런 적개심도 없음을 나타내려 했지만, 그 개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옆에 있던 A권사님은, “이 개가 목사님이신 줄도 모르고, 왜 이렇게 짖어대지?”하고 말했습니다. 그 집을 나와 차를 타려고 문을 여는데, 그 개가 거기까지 따라 나와 제 뒤꿈치를 물었습니다. 며칠 후 L권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개를 funeral home에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 개가 도둑을 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주인은 그 개를 칭찬하고 후한 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개는 주인을 축복하러 온 사람을 물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개들을 조심하라”고 빌립보 교우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주인 말을 듣지 않는 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걸 보면, 빌립보 교회 안에는 개가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로 불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바울은 그 개들이 악한 일꾼들이며,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2절). 그들은 아마 유대인 크리스천 (Jewish Christians)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 교우들에게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도적 가르침 (apostolic teachings)과 대치된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1:12-13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12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아브라함의 피를 물려받고,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접한다”, “그 분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바울은 로마서 2:28-29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28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29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내 몸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낙인을 찍는다 할지라도,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한, 나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크리스천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개는 오히려 너희들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못된 마음자세는 바꿀 생각을 안 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으니, 그들이 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 제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로는, 개는 따라다니면서 물려고 듭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그를 비난하고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할례 문제를 언급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개’라고 불렀고, ‘악한 일꾼’으로 간주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의 신앙적인 열심은 대단합니다. 그러니 이들은 어느 교회에서나 큰 일꾼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교회에 기여를 많이 하는 일꾼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주인의 뜻과 반대된 주장을 하는 일꾼은 악한 일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 말 듣지 않고 남을 물어뜯으려 한다면, 결국 그 개는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예수 안에서 자랑한다”는 것과, “참 할례를 받았다”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예배는 우리가 주장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주장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Worship is not the time you claim but you are claimed). 내 돈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생각하고 내가 봉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에 대한 기여도가 높을수록 교만해지고, 인정받지 못할 경우 사나운 개로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렸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힘 주셔서 봉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낙인을 영혼에 새겨놓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인의 관점과 그리스도인의 관점이 갖는 근본적인 차이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도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 사회에서 사는 한인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기회가 적기 때문에, 그들에겐 자신의 훌륭함을 교회에서 인정받고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만일 인정받지 못하면,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떠나도 그냥 떠나면 좋으련만, 사납게 짖고 이 사람 저 사람 물어뜯고서 떠납니다. 그래서 교회는 크고 작은 분쟁으로 시끄러워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엔 상처가 아물 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잘못하는 것보다 비난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걸 아는 사회입니다. 일 잘 못하는 것보다도 자랑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걸 인정하는 사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도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혀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분의 자녀로 인정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할례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육체의 증거를 자랑했고,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자랑할 것으로 따지자면, 바울에겐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귀족인 베냐민 지파의 혈통을 가졌고, 양친이 다 히브리 사람이었고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은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소수의 바리새파 사람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약 6,000명 정도에 불과하였음]이었고, 유대교의 이단인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만큼 그의 종교적 열심은 열렬했으며,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5-6절). 유대교의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은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훌륭한 이력서를 마치 전과기록처럼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7절).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공적을 벗어던지고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8절). 바울은 왜 이처럼 지난 날 자신의 자랑거리가 되었던 일들을 더러운 오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실패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실패한 경험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8b-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8b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오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를 가지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즉, 자신의 의를 버리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기 의를 버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 의가 없다면, 인간은 주장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주장이 통하고, 효력을 미칠 때, 기뻐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주장이 통하지 않고, 효력을 미치지 못할 때, 무시당했다고 느끼고 심한 좌절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섭섭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의를 바탕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자기주장이 관찰되지 않으니까 뭔가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에겐 두 아들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평가해 보면, 큰 아들이 작은 아들보다 더 착합니다. 그러나 얻는 것은 둘째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각각의 주장하는 방식에 기인합니다. 둘째는 뭔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부모에게 와서 애교를 부립니다. 그러면 부모는 처음에 주려고 계획하지 않았다가도 주게 됩니다. 그런데 첫째는 요구를 할 때, 가끔 불만조로 얘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주려고 마음먹었다가도 주지 않습니다. 뭐 마치 부모가 당연히 해 주어야 할 것을 해 주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면, 해 주려고 마음먹었다가도 그 마음이 쏙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이를 둘 이상 키워보신 분이라면, 여러 번 경험하신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 부모도 자녀들이 자기 의를 바탕으로 주장하지 않길 바랍니다. 목회자도 그러합니다. “목사님이 이렇게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은 얻을 것도 못 얻습니다. 목사가 당연히 해 주어야 할 것을 안 해 준다는 식으로 말하면, 주는 사람도 기분 나쁘고, 줄 생각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불만하면서 해 달라고 그러면, 내 자식에게도 안 해 주는데, 교인은 내가 낳지도 않은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의의 원천 (source)이 섬김의 대상을 결정합니다. 자기로부터 오는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9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정받으려 한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다.”는 것은 “자기 의를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여러분,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 붙잡혀 왔을 때, 예수님이 어떤 태도를 취하셨습니까? 자기 의를 바탕으로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죄 없는 사람만 이 여인을 돌로 치라 그러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중에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그러셨습니까? “나는 소득의 1/10을 헌금하고, 일주일에 하루를 금식하며,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자기 의를 가지고 말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감히 들어갈 용기도 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아무 의도 말하지 못하는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의론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교회란 자기 의로 서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서는 연습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 자기 의로 서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평안할 날이 없고, 그리스도의 몸엔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계속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결코 공로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부활은 자기 의를 죽이고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10-1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10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11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도대체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까? 부활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고난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까? 누구나 고난 받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까?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어떤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고난은 여러분의 어리석음이나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 때문에 발생합니다. 여러분 그런 고난도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고난은 내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나는 고난도,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써 생겨나는 고난도 아닙니다. 바로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따라오는 고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고 흠 없는 분이셨지만,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으셨고, 결국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건 그리스도와 똑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기에 고난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바라고 있었고, 초대교회 교인들은 순교로써 그 진리성을 입증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지난주에 타이완에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수천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습니다. 무너진 건물에 매몰된 생존자를 구해내기 위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구조팀을 파견했습니다. 며칠 전 모든 TV 뉴스는 6살 난 장징훙 군이 한 구조팀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는 장면을 보도했습니다. 이 구조는 흔히 생존 가능 시간의 마지노선인 72시간을 무려 18 시간 넘은 90시간이 지난 뒤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 극적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뉴스는 보도했습니다. 그러면서 화면을 보고 있는데, 구조원의 등 뒤에 “긴급구조대”라는 한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장 군을 구해낸 것은 한국에서 파견된 119구조대원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꼼짝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나를 죽음의 잿더미에서 꺼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그 소년이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은 엄청난 무게의 콘크리트 구조물에 짓눌릴 수 있습니다. 목마름, 배고픔, 추위, 외로움, 공포--이런 고난이 엄습해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번 한 주간도 수많은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2년의 고통이 한 순간에/ 막5:25-34/ 2005-12-28
12년의 고통이 한 순간에 막5:25-34 1.코미디언 중에 이주일이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을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그 사람의 본명이 정주일인데 지금은 국회의원이다.그가 코미디언 시절 기나긴 무명의 기간을 거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그 분은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스타가 되었다.아울러 기나긴 세월을 무명으로 보내면서 받았던 설움을 한 순간에 씻고 지금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3.코미디언도 인기가 오르니까 한순간에 스타가 되고 부자가 되는 것처럼 사람마다 각기 다른 문제와 소원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런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해결될수 있다는 기대를 버려서는 안되겠다. 4.오늘의 말씀에는 12년 동안이나 불치의 병을 앓으면서 온갖 고난을 겪어온 한 여인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지금 우리들의 문제가 이 여인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성격은 같은수도 있다.그 여인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우리의 문제도 해결 가능하다. I.12년 동안이나 불치병을 앓았다(본문이야기). A.혈루증을 앓고 있었다. 1.혈루증이라는 병은 매우 희귀한 병이다.그러나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이었 다.이 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대단한 불이익이 뒤따랐다. 1)가족과 격리되어야 한다(율법의 명령사항). 2)여자의 경우는 남편과 이혼해야 한다.위자료도 없다. 3)마을에 들어와서는 안된다.사회로 부터 추방당했다. 2.이 여인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12년 동안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그 결과 이 여인은 빈털털이가 되었다(눅8 ) 3.이 여인에게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노력도 문제될 것이 없었 다.오직 병의 치료만이 그의 목표였다. 4.열두해를 지나온 결론은 가산의 탕진과 육체의 고통뿐이었다. B.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1.그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간절한 필요성 때문에 예수를 찾았다. 2.야이로는 예수가 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기를 원했지만 이 여인의 경우는 예수님의 옷을 만져도 날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다.붙잡는 순간 이 여인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3.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다.심지어는 밀어도 누구가 미는지를 구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따랐다.그러나 그들은 단지 \\\\\\\"호기심\\\\\\\"때문에 따라 올 뿐이었다. 4.이 여인은 절실한 필요 때문에 예수를 찾았다.인생의 마지막 시도였을 것 이다.그래서 주님은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다. 5.너희들은 호기심 때문에 나를 따라 다니고 있지만,이 중에 단 한사람 나에 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다.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해 주셨다.6.딸아!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1)버림받았던 신분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는 뜻이다. 2)남편에게서 버림받았으나,이제는 주님께서 영원한 남편이 되신다는 뜻이 다. 3)공동체로 부터 소외당했으나 이제는 하늘나라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뜻이 다. 7.주님은 단순한 병치료로 만족하시지 않았다.그 여인을 불러서 그를 만나 주셨다. II.주님은 나도 치료해 주신다(적용). A.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1.서로가 형편이 다르고 상황이 다를 뿐이다.해아래 살아가는 인생 중 고민없는 사람이 누구인가우리는 서로 대동소이한 환경을 살아가고 있다.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도 한다. 2.그러나 어떤 문제는 매우 절실한 것도 있다.정말 심각한 압박을 주는 문제가 있다.혈루병을 앓은 여인은 그 병 때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그래도 돈푼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이름있는 의사는 모두 찾아다녔다. 3.의사라는 직업과 돈은 뗄수없는 관계인가 보다.그래서 이 여인은 가진 돈을 모두 써버리고 말았다.12년이라는 세월을 버틴 것도 알고보면 얼마간의 돈이라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돈은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돈은 죽을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살아야 할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4.묘한 것은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난 시점이 “가진 돈을 모두 써버린 때”였다는 점이다.과거에 절도행각을 벌이던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했다.그리고 어려운 개척교회를 섬겼다.교회의 형편을 알아보니 “돈”이 필요했다.그래서 이 사람은 “내가 진작 예수를 알았드라면...”하는 생각을 했다.전에는 돈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제는 빈손이 아닌가그러니 무엇하나 뜻하는 대로 할수가 없다는 탄식이다. 5.만일 이 여인이 일찌감치 주님을 만났더라면 그녀의 재산은 고스란히 보존되었을 것이다.만일 우리의 계산대로 그렇게 되었다면 이 여자는 그돈을 무엇에 사용했을까? 우리는 물질을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12년의 고통이 한 순간에/ 막5:25-34/ 2015-01-06
12년의 고통이 한 순간에 막5:25-34 송구영신 예배 때 성도님들이 내 주신 기도제목 중 가장 많은 것은 건강하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건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만약 몸이 약하여졌거나, 병에 걸렸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병에 걸렸을 때 무조건 기도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약과 의술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하나이므로 의술에 의지하면서 때로는 약도 먹고, 약도 바르면서 치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병든 사람은 의사를 만나야 치료받습니다. 그러나 인술, 첨단 의학 만으로도 치료하지 못하는 무서운 병을 치료받으려면 전능하신 치료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하던 한 여인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 보았고, 가진 모든 것을 다 허비하였으나 아무 효험이 없고 병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아 건강하게 되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혈루증(血漏症) 이란?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흐르는 병을 말합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서 자궁에서 계속하여 하혈을 하는 만성병을 가리킵니다. 레위기 15장에서 유출병으로 언급하였습니다.(레 15:15-30) 그 당시에는 율법에서 이 병은 부정한 병으로 규정되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공적인 모임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아무도 환자를 만져서는 안되고, 만약 환자가 만진 물건에 손을 대면 함께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만지거나 앉거나 눕거나 한 모든 것이 부정해지므로 깨끗이 세탁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가슴 아픈 것은 혈루병 앓는 여인은 이혼의 사유가 되었고, 가족들과도 별거해야만 했습니다. 당시의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했던 혈루증을 열 두 해 동안이나 앓고 있던 가려한 여인이 \\\\\\\"예수의 옷을 만짐\\\\\\\"으로써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는 놀라운 사건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절망과 영적인 기갈 상태에 빠져 있는 많은 영혼들에게 새로운 힘과 소망을 안겨 주는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 나타난 여인의 신앙과 그에 따른 축복 속에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먼저 여인의 형편을 살펴 보십시다. (1) 고통 당하고 산 여인이었습니다. 혈루증은 고통스러운 병일 뿐만 아니라 여인들이 수치스럽게 여겨서 말하기도 꺼리는 병이었습니다. 12년을 병으로 앓고 있다는 것은 이 여자의 고통이 매우 심했고 길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여인은 12년간이나 피를 쏟았으므로 그 육체적 쇠약과 함께 삶에 용기와 소망을 잃고 방황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코피가 3일만 계속 나와도 사람이 죽게 됩니다. 그런데 피를 12년 동안 쏟았으니 얼마나 불행한 여자입니까? 아마 이 여인의 몸은 쇠약할 때로 쇠약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몸이 건강한 것을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정말 감사해야 됩니다. 이 여인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을 오늘 성경본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26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 졌던 차에\\\\\\\" 12년 동안 이 병을 않았습니다. 25절에 보면 \\\\\\\"열 두 해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동원해 보았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양의, 한의, 한방병원, 민간의학 등 이런 노력들을 다 해보았지만 아무 효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노력과 수고를 다해보다가 이제는 지치고 또 더욱 심하여 져서 하늘만 쳐다보고 죽기만을 기다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어쩌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지만 죽는 것이 그리 쉽습니까? 이것이 여인이 처해 있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 집은 망했지 않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자기 몸을 치료한다고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이 여자는 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으나 치료되지 않았고, 도리어 많은 괴로움만 받았고, 재산은 치료비로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치료비로 모든 재산을 다 사용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병세는 더 악화 되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지경에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양 치고, 소 먹이고, 농사 지어도 부인 약값을 대느라 아이들 옷 한 벌 제대로 사주지 못햇을 것입니다. 집안에 한 사람만 중병을 앓아도 그리로 돈이 다 들어갑니다. 여러분 가족이 모두 건강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혹 여러분 자신이나 주위에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과 절망의 늪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우리의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2) 소외당하며 고독하게 산 여인 구약 때에 사람들과 함께 살수 없는 병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문둥병\\\\\\\'과 \\\\\\\'혈루증\\\\\\\' 이었습니다. 두가지 병의 환자는 사회에서 정상인으로 생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밖으로 쫓겨나 그들끼리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오늘날 수용소나 요양 시설로 보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운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 예배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회당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일반 사회와 신앙 공동체에서조차 소외당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사회, 교회, 식구들, 친구들과 단절된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요즘도 감염의 위험이 있는 백혈병 환자나, 결핵과 같은 전염병 환자들은 면회가 제한되고 있는데 이 또한 환자에게는 엄청난 고통입니다. 그러나 의료진, 가족, 보호자에게 둘러싸여 치료받고 있는 환자도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환자는 자신이 하던 일을 전혀 못하고, 일상적으로 만나던 사람들로부터 떠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2. 복된 소식을 들은 여인 절망과 소외의 수렁에 빠져 있는 여인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어느 날 혈루증 앓던 여인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은 불치병, 난치병을 고쳐주시는 치료자로 널리 알려 졌습니다.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았던 사람들과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치료자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놀라운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이 메시야 - 구세주- 라는 소문이 팔레스틴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 소문을 여인도 들었습니다. 여인에게 있어 이 소문은 반갑고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27절에 보면 중요한 동사가 두 개 있습니다. \\\\\\\"소문을 듣고\\\\\\\"와 \\\\\\\"손을 대니\\\\\\\"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사람들에 관한 성경 기사에는 반드시 \\\\\\\"듣고\\\\\\\"와 \\\\\\\"믿고\\\\\\\"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먼저 들음이 없이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로마서 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소문을 듣는 순간 그 여인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무한하신 능력과 자비와 긍휼을 가지신 분이심을 믿었으며, 능히 죄인을 구원하실 구주이심을 믿었습니다. 본문에는 믿음이란 단어 대신 \\\\\\\"손을 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표현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마음에 예수님의 옷가에 자기의 손만 대어도 자기 병이 낳겠다고 하는 믿음이 있음을 보셨고, 그 믿음을 인정해 주셔서 즉시로 그녀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여자가 치료받는 기적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병으로 고통하고 절망할 때 복음을 듣고 문제의 해결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3. 치유의 기적이 나타난 여인의 믿음 혈루증 걸린 이 여자가 예수님 옷에 손을 댔는데, 그것이 여자를 구원한 것은 아닙니다. 34절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예수님이 선언을 하셨습니다.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녀의 병을 고쳐주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 옷에 손이 닿은 사람은 이 여자만이 아니었습니다. 31절에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그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다른 사람처럼 우연히 만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병을 고치겠다는 목적과 꼭 병이 낳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에 의도적으로 손을 댔습니다. 28절에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담긴 행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치료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확고하고 적극적인 믿음으로 주께 나아가 그의 옷가를 만진 여인은 그토록 오랫 동안 괴롭혀왔던 병이 깨끗이 나음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자의 믿음은 곧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아셨습니다.\\\\\\\"(30절). 예수님이 입으신 옷에 능력이 있지 않았습니다. 능력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자에게 임합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교회에 와서 설교 한 번 듣고 인생이 바뀝니다. 딱 한 번 설교를 듣고 인생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설교를 골백번 듣고도, 10년, 2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인이 되고도 바뀌지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차이입니다. \\\\\\\"저 말씀 속에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생명이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이 말씀 속에서 내게 말씀하실 주님을 기다린다. 주님, 오늘 이 말씀으로 나를 바꾸셔야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주님의 진리를 기다립니다.\\\\\\\" 이런 목마른 심정으로, 주님에 대한 기대를 갖고 말씀을 받아들일 때 인생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찬송을 부르다가 인생이 바뀌는 사람을 봤습니다. \\\\\\\"목사님 저 오늘 찬송하다가 인생이 바뀌었어요.\\\\\\\"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찬양 그 자체가 바꾼 것은 아닐 것입니다. 찬양을 부르다가 가사 속에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찬양을 부른 것입니다. 찬양의 가사가 자신의 신앙고백이 되었고, 신앙의 구함이 되었습니다. 찬양 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눈물이 흐릅니다. 주님을 경험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내 기쁨을 드리는 찬양, 믿음으로 연결된 찬양은 인생을 바꿉니다. 세상의 음악과 노래는 아무리 불러도 인생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감상은 있지만, 평안은 없습니다. 기도하다가 인생이 바뀌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인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 앞에 나옵니다. 주님 앞에 제 문제를 내어놓습니다. 주님만이 나를 아시지요. 주님만이 내 기도를 들으시지요. 주님만이 응답이시지요. 주님만이 나의 희망, 나의 마지막 소망되신 주님, 저는 주님만을 신뢰합니다.\\\\\\\"라고 기도하는 순간, 성령이 임하시고, 주께서 내 모든 짐을 담당하시고, 나를 바꾸시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내 인생을 바꿉니다. 믿음으로 예배하십니까? 믿음으로 말씀을 들으십니까? 믿음으로 기도하십니까? 믿음으로 찬양하십니까? 인생의 절망과 소외와 고독을 끌어안고 우리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그것들은 제 삶을 바꾸지 못했고, 내 삶은 여전히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집니다.\\\\\\\" 단 한 번의 만짐으로, 주님 안에 있던 능력이 나에게 흘러들어 오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본문 속에서 이 여인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까? (1) 겸손한 믿음입니다. 그녀는 겸손한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옷깃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다릅니다. 자기가 병들었음에도 겸손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교회에 나와서 기도 받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하는 모습도 보게됩니다. 못 움직여서 그러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기 할 일은 아픈 중에도 다 합니다. 병원에는 매일 다니면서도 기도 받기 위해서는 불편해서 못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신자들은 기왕에 기도 받으러 가야 한다면 이름 있는 기도원이나 이름 있는 능력자에게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틀린 자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말씀이고 하나님의 생각이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교만한 자는 은혜를 주셔도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겸손한 자만이 작은 은혜를 받아도 큰 은혜로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오신 성도 여러분! 이렇게 겸손한 자의 기도는 지금도 응답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자는 이렇게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만져야 합니다. 철저히 자기를 죽인 겸손의 믿음만이 기적의 은혜를 받을 줄로 믿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도 예수님을 내게 데려 오라든지, 정면에서 대면하자는 자세가 아니라 그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고 하는 겸손한 자세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으므로 치유의 은혜를 받은 줄로 믿습니다. 은혜를 받고자 하는 여러분! 주님의 기적을 바라는 여러분! 우선 겸손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 받을 줄 믿습니다. 겸손한 믿음으로 매달리다가 응답 받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지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2) 이 여인은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죽어가는 가운데서도 고맙게도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여자는 갑자기 믿음이 끓어올랐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크고 위대하신 분이라면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겠구나!\\\\\\\" 이 여자는 믿음을 갖자 오래 지체하지 않고 금방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니 많은 남자들 틈에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남자들이 앞에 서고 그 뒤에 여자들이 섭니다. 아이들은 여자들 뒤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남자들을 헤치고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남자들이 \\\\\\\"이 여자가 미쳤나?\\\\\\\" 하며 야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미쳤다고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여러분, 은혜 받을 때는 정말 적극성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을 때는 체면 차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체면 차리지 않고 남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믿음으로 손을 댔습니다. 전기선을 잡으면 \\\\\\\'지르르\\\\\\\' 하고 전류가 흐르듯이, 예수님의 옷에 손이 닿는 순간 주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와 자기 몸이 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시간에도 혹 여러분 중에 병든 분이 있으면 그런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기적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어서 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믿음이 없는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여자와 같은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이 여자와 같은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가운데는 주님을 만나야 할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꼭 만져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나도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면 구원을 얻을 터인데 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생각은 옳은 생각입니다. 매우 잘 한 생각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시는 능력을 가지신 주님이 지금 우리 앞에 지나가십니다. 아니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범사에 기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몸과 마음에 병이 들어 죽게 된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아 왔습니다. 이제 손을 펴서 그 옷을 만지기만 하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의 평안을 원하십니까?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세요. 마음에 고민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세요. 우리의 마음도 육신도 고침을 받습니다. (3) 마지막으로 이 여인은 증거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8:47절에 보면 그가 \\\\\\\"손댄 연유와 낫게 된 경위를 모든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나쁜 과거나 약점을 숨기려고 합니다. 좋았던 사실은 크게 떠들지만 안좋은 일들은 숨깁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이 좀 부유하게 되면 우리는 조상 대대로 부유했다고 말합니다. 조상이 상놈이었거나 노비였던 사람도 자신의 조상은 양반이었고 좋은 집안이었다 라면서 오늘날 자신이 이렇게 되기까지의 내력을 숨기고 싶어합니다. 이 여인도 자기의 옛 병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통의 병이었으면야 상관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더럽게 생각하던 병을 앓았었기 때문에 좋게 봐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자기가 어떻게 고침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증거를 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도 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성경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태복음 10장 32절로 33절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주님을 증거하는 자는 주님께서도 증거해 주시고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님도 부끄러워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증거 자를 얻기 위해서 치료의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 여인을 고치신 목적도 거기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를 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증거하는 자는 또 다른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믿음, 확신하는 믿음, 증거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구하다가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어지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2003년 한 해 동안에도 성도님들 모두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병들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병을 미리 예방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병들었을 때는 건강을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병은 의사에게 치료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난치병, 불치의 병은 하나님이 치료해 주셔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치료됩니다. 주님을 만나야 치료받습니다. 기도로 만날 수 있습니다. 끈덕진 기도를 통해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온전히 예수님께 맡기고 그분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라고 확실히 믿을 때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주님을 아는 데서 일어나지 않고 주님을 믿고 그 분께 나아가서 그 분을 만날 때 일어납니다. 주님의 치료를 받아 건강을 얻기를 바랍니다. 건강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힘껏 봉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2월의 기도/ 시102:1-
12월의 기도 시102:1- 인간이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지만 동시에 저주요 괴로움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 가운데서 유독 인간만이 단순히 존재할 뿐 아니라 자기 존재를 의식함으로써 존재와 의식의 괴리를 낳습니다. 이 괴리로 인해 인간은 즉자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를 의식하는 대자적 존재로 되어 자기를 대상화하며 자기 소외를 체험합니다. 우리는 잘 하던 일도 의식을 하는 순간 망쳐버리는 수가 있음을 종종 체험합니다. 어떤 활동에 깊이 몰입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의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활동을 의식적으로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볼링, 연극, 음악 연주 등). 사람이 의식이 없이 즉자적으로만 산다면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며, 이 현재도 의식된 현재가 아니라 완전히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된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에게 의식이 없으면 과거의 기억도 없고 미래의 계획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쌓인 원한도 있을 수 없으며,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동물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실로 인간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의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동물들은 현재적 고통, 즉자적 고통만이 있을 뿐,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에서 오는 고통은 없습니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현재의 고통도 바로 의식이 있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고통을 그냥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비교하기도 하며 행복했던 과거와 견주어 보면서 고통을 씹어보기도 하며,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가 원망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의식이란 것이 저주만은 아닙니다. 의식이 있기 때문에 행복감이 더해지기도 합니다. 바로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행복한 순간을 음미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더 행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행복감은 아마도 동물들이 느끼는 즉자적인 만족감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입니다. 인간은 즉자적 행복감 이외에 대자적 행복감까지 느낌으로써 행복감이 배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기에 자기가 하는 여러 활동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그 활동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반성적 숙고를 함으로써 자기 행동의 의미를 물으며 철학적 사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의식적 존재로서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고민을 더해주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주체적으로, 의식적으로 자기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며, 이것은 인간만의 초월적 특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은 의식을 가진 존재이기에 자기 존재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거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의 의미를 물으며 덧없이 흐르는 시간을 의식하면서 영원을 그리워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자각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도 여타의 존재들처럼 시간의 지배를 받는 무상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시간을 의식하기에 동시에 영원을 사모합니다. 인간도 여타의 존재들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 자기가 사라질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기에 바로 그 순간 영원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이 영원을 의식하고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영원한 생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인간이 생각한다고 그것이 다 가능하거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이 자기 존재의 존재성을 의식하며 자기의 유한성을 자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초월성을 말해 주며 이것은 이미 인간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02편은 병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자기 앞에 임박한 죽음을 뚜렷이 의식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심정을 아뢰는 한 영혼의 간절한 기도문입니다. 그 내용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11절까지는 시인이 자기의 고통을 탄식하면서 이 고통에서부터 건져주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기도이며, 12-22절은 하나님께서 시온, 곧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뭇 나라들과 임금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빛나며 고통받는 사람들, 갇힌 자들, 죽게 된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기를 희망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가이며, 마지막 23-28절에서 시인은 다시 한 번 너무 일찍 찾아 온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세계와 인생의 변함 없는 기초가 됨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어떤 병으로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몸과 마음 모두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임은 분명합니다: 아, 내 날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내 뼈는 화석처럼 새까맣게 타 버렸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내 마음은 풀처럼 시들어서, 말라 버렸습니다. 신음에 지쳐서, 나는 뼈와 살이 달라붙었습니다.... 내 사는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으며, 말라 가는 풀과 같습니다(3-11절).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극심한 고통과 낙심 중에서도 이 시인은 자신의 아픔만을 생각하지 않고 시온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 민족의 고통과 슬픔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죽음만을 생각하면서 그 앞에서 모든 희망을 포기해버리는 허무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운명이 비참하다 해서 인생 자체를 혹은 역사 자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나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죽음을 의식하면서 우리는 두 종류의 허무주의적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 죽으면 그만인데 죽기 전에 실컷 즐기자는 태도입니다. 죽으면 그만인데 살아 있는 동안 가진 것 다 동원해서 최대한으로 즐기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계속해서 더 벌고 남은 것은 또 자식들한테도 물려주고 가겠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번 것 내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무어라 할 것인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얼마 안 있어서 죽을 것들이 왜 저렇게 권력과 금력에 집착하는가 하면서 그렇게 악착같이 사는 사람들을 어리석다 하면서 비웃습니다. 이미 자기가 쓸 수 있는 것 이상의 재산을 모아 놓고도 더 벌려고 애쓰는 어리석은 인생을 향해 이들은 말하기를 적당히 벌어서 만족하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상책이라고 합니다. 내일 죽을 것들이 무얼 하겠다고 저렇게 야단법석을 떠는가 하고 자기 딴에는 인생을 관조적으로 지혜롭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또 하나의 허무주의적 태도입니다.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한 많이 벌고 최대한으로 즐기자는 태도나 적당히 벌어 자족하며 살자는 태도나 다 똑 같이 허무주의입니다. 우선 이들은 인생이란 나 개인이 죽으면 그만이고 죽음 이후에, 혹은 죽음을 넘어서는 인생의 의미란 아무 것도 없다는 데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극도의 개인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동안 즐겁게 사는 것이 상책인데 다만 이 즐겁게 사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맹목적이다시피 권력과 금력을 추구하면서 죽을 때까지 누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누리겠다는 자세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은 어리석은 짓으로서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도 적당히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태도들은 모두 인생에는 즐기는 일 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으며 이 즐김은 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것이기에 죽음 이후에 아무런 인생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야말로 허무주의적 태도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회와 역사, 혹은 세계와 인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두고서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를 심으리라“라고 누군가가 말한 것입니다. 허무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야말로 허무주의를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죽음이 오던 말던 삶 그 자체가 의미 있으며 삶을 위한 행동 그 자체가 진정으로 값지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시편 102편의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우리 모두가 빠지기 쉬운 허무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그는 무너진 시온이 다시 세워지고 짓밟힌 땅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찬양이 드높이 울려 퍼지는 날이 오기를 포기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일어나셔서 시온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때가 왔습니다. 시온에 은혜를 베푸실 때가 왔습니다. 주의 종들은 시온의 돌들만 보아도 즐겁습니다. 그 티끌에도 정을 느낍니다. 뭇 나라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이 땅의 왕들이 주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주께서 시온을 다시 세우시고, 그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것입니다. 버림받았던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시온에서 주의 이름이 널리 퍼지고, 예루살렘에서 주님께 드리는 찬양이 울려 퍼질 때에, 뭇 백성이 다 모이고, 뭇 나라가 함께 주님을 섬길 것이다(13-22절). 그에게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향한 꺼지지 않는 정열이 있었고, 시온을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예루살렘의 돌만 보아도 즐겁고 티끌에도 정을 느낀다고 했겠습니까. ‘티끌에도 정을 느낀다‘는 말은 영어 성경에는 그 흙먼지에도 연민(pity)을 느낀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자신의 슬픔을 잠시 잊고 이 시인은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슬픔 속에서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 오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민족에 대한 사랑, 야훼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기에 이 시인은 자기 목전에 닥쳐온 죽음이 더욱 애절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자신의 가련한 운명을 호소합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중년기에, 한창 나이에 자기를 괴롭히고 데려가시고자 하는 이해 못할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그는 “나의 하나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주의 햇수는 대대로 무궁합니다“라고 간절히 아뢰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년에서 맞는 죽음의 비극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년과 청년기는 준비기로서 아직 인생을 살았다고 하기 어렵고, 노년기는 황혼기로서 인생을 이미 살은 것이기에 죽음이 그리 억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년기는 인생의 황금기로서 이제야말로 인생을 본격적으로 살려는 찰나이기에 이 때에 맞는 죽음은 실로 비극적입니다. 우리나라의 40대 사망률이 세계 최고라고들 합니다만 이 시인은 한창 나이에 삶을 마감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면서 우리들에게 이러한 감동적인 시와 기도를 남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간절한 기도가 어찌 중년만의 기도이겠습니까? 모든 죽음은 비극적이며 죽음은 우리가 사는 순간 순간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움 속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던 시인은 이번에는 아무런 원망이나 소망도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자기 존재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의식하면 할 수록 그는 자신의 존재와는 정반대 되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위대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생명을 내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하늘과 땅을 펼치시고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그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옛날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으시며, 하늘을 손수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모두 사라지더라도, 주님만은 그대로 계십니다. 그것은 모두 옷처럼 낡겠지만, 주님은 옷을 갈아입듯이 그것을 바꾸실 것이니, 그것은 다만, 지나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주님의 햇수에는 끝이 없습니다. 주의 종들의 자녀는 평안하게 살 것이며, 그 자손도 주님 앞에 굳건하게 서 있을 것입니다(25-28절). 이 시편 기자의 시온을 위한 기도는 오늘 12월을 맞는 바로 우리의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2월은 무엇보다도 메시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하나님의 구원을 억압받고 고통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져다주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계절입니다. 올 크리스마스는 유난히 기쁜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습니다. 독재와 억압의 사슬에서 고통 당했던 이 땅의 백성들이 올린 간절한 기도가 이제 막 이루어지려는 찰나를 우리는 맞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마침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이 입증되려는 역사의 순간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성탄절이 와도 우리에게는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우리에게는 참다운 기쁨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고 희망을 포기하지는 안았지만 우리의 웃음은 불가피하게 억지 웃음, 쓴웃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가 어딘가 공허하게만 들렸던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갇힌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죽게 된 사람들을 풀어놓으시는“(20절)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정의가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기에 올 성탄절은 참으로 의미 있는 성탄절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우리의 기대는 또 다시 좌절될 수도 있고 우리는 또 다시 인간의 역사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거기에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특별법을 만들고 과거를 청산한다고 죄인인 인간들이 창출하는 역사가 정말로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번만이라도 일그러지고 얼룩진 우리의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헛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하나의 확실한 징표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역사가 완성되거나 종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의 과거청산이란 결코 하나님 나라 그 자체를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역사를 청산하고도 또 다시 죄악의 역사를 되풀이 할 것이며 탐욕의 역사를 계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영원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며 공의로우신 하나님 스스로 통치하시는 왕국에서 이루어지는 종말적 구원을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12월은 메시아의 강림과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희망과 기쁨의 계절이지만, 동시에 한 해를 마감하면서 지나간 한 해를 성찰해 보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속절없이 지나가는 세월의 무상함, 시간의 덧없음을 의식하는 때입니다. 한 해가 시작될 때는 무언가 해야할 일이 많았던 것 같았는데 보람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또 한 해를 보내야 하는 나 자신의 초라하고 쓸쓸한 모습을 발견하는 때입니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세월을 느끼면서 나약하고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인생의 모습을 자각하는 때이기도 한 것입니다. 민족과 세계도 중요하고 정의와 평화도 소중하지만, 한 개인의 종말은 여전히 비극적입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아무런 의식도 없는 우주보다 위대한 존재라 하지만(파스칼) 한 순간 숨이 그치면 우리 인생은 대양에 이는 물거품과 같이 허무하게 사라져야 하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의식해야 하는 인간이란 참으로 비극적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와 삶의 모든 의미를 앗아가는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의 힘 앞에서 전적인 무력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도 우리가 누리는 영화도 잠깐 있다 사라질 아침 안개와 같다고 성서기자는 말합니다(시편 103:15-18). 하나님이 부르면 언제이건 떠나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이 되면 우리에게는 착잡한 마음이 드는 법입니다. 한 해가 다 가고 쓸쓸하게 붙어 있는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보노라면 우리 인생의 달력도 얼마 남은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러면서도 12월은 다른 한편으로는 크리스마스와 축제의 시기이며, 기다림과 기쁨의 계절입니다. 아직도 어렸을 때 경험했던 성탄의 설렘이 우리 어른들에게도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아니 연말 연시가 되면 우리 모두는 어쩌면 약간 어린아이들처럼 마음이 들뜨며 가벼운 흥분에 사로잡힙니다. 문득 어디선가 들려 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마음이 설레기도 합니다. 하지만 속절없이 지나가는 한 해를 지켜보면서 나 자신에게 남은 세월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내게 과연 또 한 해가 주어지려나, 새로운 해에는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러기에 결국 12월을 맞는 우리들도 시편 102편의 시인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주의 햇수는 대대로 무궁합니다“라는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연약함을 기억하면서 “그 옛날 주님께서는...“(25-28절)라고 생명의 근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12월의 우리의 기도는 한 편으로는 12 12 군사반란으로 인해 강간당한 우리의 역사, 쓰라린 상처를 입은 우리의 과거가 진정으로 치유 받아 이 땅에 시온의 영광이 빛나며 정의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만천하에 공포할 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의 주,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가져 올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는 강림절에 우리들의 시온을 향해 드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가 드릴 또 하나의 기도는 주님의 구원을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찬란한 시온의 아침을 맞기 전에, 그리고 죽음에 대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너무 일찍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하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것이 속절없이 또 한 해를 보내면서, 그리고 또 다른 한해가 우리에게 은총으로 주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시간의 주시요 생명의 근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간절한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153마리의 고기를 잡은 기적/요21:1-23/ 2004-03-10
153마리의 고기를 잡은 기적 요21:1-23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일으키신 35번째 기적은 갈릴리 호수에서 153마리의 고기를 잡은 기적입니다. 이 기적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제일 먼저 가셨습니다.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찾고 계신 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는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후 다시 만날 때도 역시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리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 하였기에 주님이 오셨는데도 주님인 줄 알아보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라고 명하셨습니다. 고기가 153마리 잡혔습니다. 그 때 한 제자가 예수를 예수로 알아보고 \\\"주시다\\\"라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다가 이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예수님에게 달려가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이 생선을 구워 떡과 함께 조반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베드로와 오고 갔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라고 결론을 내리신 후에 \\\"나를 따르라\\\"하시니 베드로가 두번째로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이 기적의 내용입니다. 요한 복음은 세상전에 다스리시던 주님의 모습으로 시작하여 세상후에 다스리실 주님의 모습을 그리면서 마치게 됩니다. 이 기적은 은혜의 성경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한 시도 살 수 가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광야를 걷고 있습니다. 사자가 쫒아 오기에 도망가다가 보니 마침 낭떨어지가 있고 칡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다행이라 여기며 칡을 붙들고 낭떨어지로 내려 갔습니다. 사자가 가버리면 다시 올라오면 되리라는 안도감에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밑을 보니 큰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만 되면 어디론가 도망갈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생겨 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왠 일입니까? 휜 쥐(낮)과 검은 쥐(밤)이 들락날락하면서 칡을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왔습니다. 그런데 위의 꿀벌의 집에서 꿀이 한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떨어지는 꿀을 받아 먹으며 맛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이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톨스토이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계상황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는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1. 은혜는 선재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21:1) (1) 부활의 주님이 스스로를 나타내셨으니 우리는 그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안나타나셨다면 우리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은혜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란 수동이지 능동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숨었을 때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속으로 들어 갔을 때 하나님이 사자굴속으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막16:11) 사람이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이셨습니다. 은혜란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은혜는 선택적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제자는 모두 7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특별히 7명을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쓰실 사람을 선택하셔서 나타내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명이 같이 갔는데 왜 바울에게만 나타나셨습니까? 다른 사람은 같이 가도 예수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선택적인 것입니다. 3. 은혜는 절망속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온 은혜는 범죄하고 숨어 있을 때 왔습니다. 다니엘에게 은혜는 사자굴속에서 죽게 되었을 때 왔습니다. 베드로에게 은혜는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았을 때 왔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두 절망이 겹쳐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잃어버린 절망이었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로 떠나는 그들의 심정은 3년이나 따라다니던 예수를 잃어버린 허전함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절망은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라도 못 잡은 절망입니다. 3년이나 고기를 안 잡았더니 고기잡이 실력이 준 것으로 착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잠 잘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성공의 순간에 축하해 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실패의 순간에 오셨습니다. 야곱에게도, 욥에게도, 요나에게도, 모세에게도 은혜는 고통의 순간 실패의 순간, 절망의 순간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절망은 하나님의 은혜가 오는 때입니다. 4. 은혜는 임마누엘입니다. 은혜는 주어진 순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영안이 열려야 알게 됩니다. 언제나 주어진 은혜를 깨달아야 아는 것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 지 못 하는 지라\\\"서셨으나 몰랐습니다. 야곱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있었으나 알지 못 하였습니다. 도단성의 엘리사의 사환들도 천사들이 둘러싸고 지켜주고 있었으나 알 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축복옆에 있습니다. 기적 앞에 있습니다. 능력속에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안에 있습니다. 못 보고 있을 뿐입니다. 5. 은혜는 약함을 고백할 때 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없나이다\\\"라고 보고 하였을 때 은혜가 왔습니다. 약함을 고백할 때 강함이 몰려옵니다. 빈곤을 고백하였을 때 부요가 다가왔습니다. 무능을 고백할 때 능력이 왔습니다. 못 한다고 고백할 때 할 수 있는 힘이 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장 약할 때가 가장 강할 때라고 고백하였습니다. 6. 은혜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기를 잡아 주신 것이 아니라 고기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리, 그리하면 얻으리라\\\"라고 고기있는 곳을 지시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고기가 많이 잡혀 그물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7. 은혜에는 보통은헤와 특별은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베드로는 예수님이라는 말에 물속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빨리 주님곁으로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거리는 한 간, 즉 90m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배를 느긋하게 왔습니다. 하나님은 특별은혜를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서 특별히 쓰시는 분이십니다. 모세가 그렇고 바울이 그렇고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8. 은혜는 십자가적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갈릴리에서 고기를 못 잡을 때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역시 같은 곳에서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점이 있습니다. 첫 기적은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셀 수가 없었고 세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기적은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그물이 찢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첫 돌판은 깨졌고 둘째 돌판은 안 깨졌습니다. 첫 반석을 깨뜨려 물이 나왔고 둘째 반석은 깨지지 않고 물이 나와야 했습니다. 모두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초림 예수는 깨져야 할 분이었지만 재림 예수는 영광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바클레이는 바다는 세상이고 그물은 교회이고 고기를 성도고 어부는 목사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먼저 교회에는 누구나가 다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시대에는 구원받는 수가 제한이 됩니다. 처음에는 깊은 곳에서 고기를 잡았고 이제는 오른편에서 잡았습니다. 모든 은혜는 십자가적임을 암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9. 은혜는 완전한 것입니다. 153마리의 고기가 그물의 찢어짐 없이 잡혔습니다. 153마리에 대한 해석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알렉산터 퀴리오스 해석 100은 완전수이고 50은 이스라엘 수이고 3은 성삼위일체주입니다. 그러므로 완전을 의미하는 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어거스틴 해석 1+2+3+4+……17=153입니다 10은 완전수이자 율법수입니다. 7도 완전수이자 은혜수입니다. 일주일은 7일입니다. 무지개 색깔도 7이고, 도레미 음도 7계음입니다. 그러므로 17은 율법수과 은혜수가 합쳐진 묘한 수입니다. (3) 제롬 해석 갈릴리 호수에는 모두 153가지 종류의 물고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고기의 대표들을 다 모은 수가 153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해석의 공통점은 완전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고 은혜도 완전합니다. 10. 은혜는 회고적입니다. 예수님은 배드로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을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부르시지 않고 처음 이름을 부르셧습니다. 이 속에는 회고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네 이름은 시몬이었지. 네가 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죽어도 안 떠나겠다고 약속할 때 나는 네 이름을 베드로라고 붙여 주었지. 그러나 너는 지금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으로 돌아 갔구나\\\"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의 아픈 곳을 푹푹 쑤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다시는 배반하지 않겠다고 3번씩이나 장담했던 일, 계집종 앞에서 맹세까지 하면 주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부인하던 일들이 상기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은혜받지 못했던 시절과 은혜받던 시절을 상기시키시고 계신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회고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11. 은혜는 사명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두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 \\\"내 양을 치라\\\" 어린양은 초신자입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을 먹여야 합니다. 그래야 자라나게 됩니다. 양은 기신자입니다. 그들은 훈련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목회자적인 사명은 초신자를 먹이고 기신자를 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이세상에서도 대통령으로부터 보직을 받는 것은 큰 자랑거리입니다. 12. 은혜중에 은혜는 순교적 은혜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제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라고 주님은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앞으로 순교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사실 가장 큰 은헤는 순교의 은혜입니다. 가장 큰 상급은 순교의 상급입니다. 순교도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성격 12가지를 본 기적은 두드러지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1) 은혜는 선재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은헤는 선택적입니다. 3) 은헤는 절망속에서 오는 것입니다. 4) 은혜는 임마누엘입니다. 5) 은혜는 약함을 고백할 때 옵니다. 6) 은혜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7) 은혜에는 보통은혜와 특별은혜가 있습니다. 8) 은혜는 십가적입니다. 9) 은혜는 완전한 것입니다. 10) 은혜는 회고적입니다. 11) 은혜는 사명으로 연결됩니다. 12) 은혜중에 은혜는 순교적 은혜입니다.
153운동과 최상의 부가가치(1)/ 마25:14-30
153운동과 최상의 부가가치(1) 마25:14-30 여러분, 예수님의 최고 관심사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사도행전 1장 1-11에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와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도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로서는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퍽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하나님나라에 관한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달란트는 우리 돈으로 약 1억원에 해당되는 돈인데, 주인이 세 사람에게 각각 1억원, 3억원, 9억원을 맡기면서 장기 외유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들에게 맡긴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계산하는 장면입니다. 드디어 주인이 돌아와서 일한 사람들의 실적을 보고 받습니다. 그러자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보고합니다. 주인님! 제가 열심히 일해서 여기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겨서 열 달란트가 되었습니다. 종의 보고를 들은 주인이 그에게 이렇게 칭찬합니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둘째 종도 와서 보고를 하는데, 첫째 종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첫째와 둘째는 각각 주인에게 받은 돈의 액수가 달랐고, 또 그들이 남긴 이윤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는데도 주인의 칭찬은 똑같았다는 점입니다. 성도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떤 달란트를 얼마나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문제는 그것을 가지고 주인이 그토록 관심하는 일에 충성하기만 한다면, 주인의 칭찬과 상급은 주어진 달란트와 상관없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평가하는 기준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직위가 무엇이냐, 또는 배움이나 재물이 얼마나 많고 적으냐, 또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정직하게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충성스럽게 일했느냐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의 세 번째 종이 등장합니다. 그가 주인에게 보고한 내용은 받은 돈을 그대로 수건에 싸서 녹슬지 않도록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24절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24절) 두려워하여 ...(25절) 여기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은다고 한말은 \\\"당신은 착취자요, 나는 희생자\\\"라는 뜻입니다. 주인은 그로부터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면서 악하고 게으런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9절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9절) 하나님나라의 법칙에는 자신이 열심히 일하지 않고 남의 덕만 보고 살려는 적당주의가 통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행위대로 검증을 받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이 소유한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사랑과 신뢰를 더하시어 그 가진 것 위에 더 많은 것을 안겨주시지만, 충성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까지 빼앗아 버립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이며 하나님나라의 원리입니다. 주인이 무엇이라고 명령합니까? 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30절) 본문 말씀은 어디까지나 비유이기 때문에 바깥 어두운 곳을 꼭 지옥이라고 해석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는 반드시 계산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이 장기출장에서 돌아오듯 주님이 재림하시면, 반드시 우리에게 주었던 각자의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사용했는지 계산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그냥 쉽게 지나칠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부류는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부류는 그렇지 못한 사람입니다. 받은 것은 많은 것 같은데 주님에게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주인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붙잡힌 사람은 내가 누구라는 것을 발견한 뒤, 한 번 밖에 없는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가장 보람되고 아름다운 삶인가를 깊이 생각합니다. 전에는 내 젊은 날이 다 가기 전에 어떻게 하면 좀더 즐길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던 사람이 변하여 주님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칩니다. 언제나 마음이 허전하여 허전한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사람이 주님 한 분만으로 족하다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삶의 질이 달라진 것입니다. 시간을 쪼개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돈을 쪼개어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더욱 많이 쓰려고 애씁니다. 젊음이 다 지나가기 전에, 재능이 굳어지기 전에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는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이 사람이 주인에게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문의 종처럼 자신이 충성스럽게 살지 못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향하여 교회가 내 인생을 착취한다, 나는 교회의 희생자라는 느낌을 갖습니다. 헌금, 충성, 헌신, 전도 등과 같은 말만 들어도 저절로 불평이 나을 정도로 마음이 꼬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절대로 주인을 위해서 모험을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다섯 달란트의 자금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은 모험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가 IMF 경제환란을 당한 이후 \\\'벤처사업\\\'(venture)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는데, 벤처라는 말은 모험이란 뜻입니다.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투자하는 사업이 벤쳐사업입니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9억이라면 적은 돈이 아닙니다. 이 많은 돈을 가지고 모험적인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이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신경 쓰일 일입니까? 밤낮이 어디 있겠습니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어떻게든 성공하려고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다른 고생이나 희생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이것이 다섯 달란트와 세 달란트 받은 사람의 생활 태도입니다. 주님께 받은 달란트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커다란 모험입니다. 시간을 뺏길 때도 있고, 돈을 뺏길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손해도 보고, 어떤 때는 몸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어리석다는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꼭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이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부담감을 안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는 것 자체가 불만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모험입니다. 세상사람이 볼 때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어디 눈에 손에 잡힙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확인하고 볼 수 있습니까? 영적인 것이기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시하고, 그것을 위해 산다는 것은 구름을 잡는 것같이 허무맹랑하게 비칠 수도 있습니다. 온 세상사람들이 다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던 인물이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것도 해변에서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맑기만 하고, 비라고는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3년, 5년, 10년이 가도 배를 띄울 만한 큰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전 재산과 시간을 바쳤습니다. 가족들까지 모두 동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노아를 향하여 어리석은 사람,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라고 하셨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노아처럼 오랜 세월 그렇게 땀흘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불만이 있거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모험을 하지 못합니다. 힘들게 신앙생활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충성스럽게 살려는 사람은 하나님나라가 다가오고 있음을 영의 눈으로 봅니다. 하나님나라가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는 날에는, 오직 그분을 위해 충성한 공력만이 영원히 남아 횃불처럼 타오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도, 핍박을 받아도, 손해를 보아도, 변함 없이 그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백성의 모습이요, 생활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오늘 당장이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나와 계산하자고 하시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냉정하게 한 번 평가해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매우 너그러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아무쪼록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충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때리거나, 징계하시거나, 일이 잘 되지 않게 방해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왕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불러 계산하실 그 날에는 소름끼칠 정도로 엄정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 전 제일은행이 외국회사로 넘어가면서 그 은행의 은행장이 사원들의 업무추진 과정에 고과점수를 매기며 고강도의 구조조정을 계속함으로 적자이던 은행을 흑자로 돌아서게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만일 그 사람의 근무성적과 고과 점수에 따라 구조조정을 하는 그런 은행에 몸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적당하게 하루 하루를 넘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머리를 싸매고 있는 힘을 다하여 발버둥쳐야만 하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재림하시면, 이 세상의 구조조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적당히 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아무런 표가 나타나질 않겠지만, 그때에는 교회 안에도 구원에서 탈락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장로님 가운데 헬륨가스를 만드는 큰 공장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사업을 개업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후 식사를 하는 중에, 그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요즘은 고부가가치를 내지 못하는 사업은 모두 망할 수밖에 없어요.\\\" 고부가가치라는 말을 처음들은 저로서는 그 뜻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대충 짐작하기로, 동일한 원료를 가지고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을 고부가가치 산업이 아니겠나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우리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드릴 가장 가치있는 고부가가치 사업이 무엇일까요? 전도입니다. 전도는 하나님나라를 완성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전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령님도 우리 모두를 전도하는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것도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보다 하나님나라에 부가가치가 더 높은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신 시간, 여러분에게 주신 재물, 여러분에게 주신 건강, 여러분에게 주신 재능,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달란트를 하나님나라에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일에 투자하고 계시나요? 이런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은 사람들은 세상이 보기에 미친 것처럼 살다갑니다. 모두가 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패하고 병든 세상과 족속으로부터 생명을 건지는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느 때는 시간을 내야 됩니다. 어떤 때는 돈을 써야 됩니다. 자존심도 접어두고 접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가치있는 일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까? 그렇다면 주인이신 그분의 말씀을 받드십시오. 그 일을 위하여 여러분의 지위를 이용하십시오. 성공한 환경을 이용하십시오. 젊음과 아름다움을 이용하십시오. 모든 것을 동원하여 생명줄잇기운동에 투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위한 일이고,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앞당기는 가장 보람있고 가치 있는 일이 됩니다. 저는 이제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이 이 주간부터 시행할 수 있는 일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이 세 명 이상을 가슴에 품고 먼저 그들을 위한 기도로 하기 시작하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장년 한 분이 세 명만이라도 가슴에 품고 전도한다면 금방 2500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이렇게 드린 우리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가슴에 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전도 계획을 짜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이디어를 주실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는 맛디아 전도 대원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전도하기를 작정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되겠다는 간증을 들으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형제 자매가 많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부터 우리는 153운동을 전개할 작정입니다. 153이라는 숫자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이 맛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썼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가득 잡게 했는데, 그 때 잡은 고기의 수가 153마리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숫자가 온 세계에 흩어진 민족들의 숫자라 하기도 하고 주님께 돌아올 열방의 수라고도 해석합니다만, 이는 예수님을 떠나 실패한 베드로로 하여금 다시 사람 낚는 어부로 시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이 153운동에 동참하기를 권유합니다. 153운동이란 한 명이 하루에 5가지를 행하여 3명을 전도하자는 운동입니다. 5가지란 먼저 기도하는 일이요, 둘째, 찾아가는 일이며, 셋째, 복음을 제시하고, 네쩨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에게 한 가지라도 돌아보며 살펴주는 일이며, 마지막으로 교회로 초청하는 운동입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 이 보다 더 할 수도 있고 덜 할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는 기회로 삼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부산진가족 여러분! 우리는 주님 앞에 너무나 귀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사용하여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전도에 아낌없이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간과 재물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면서 영혼을 구하는 일에 앞장서십시다. 그래서 열방이 주님의 백성으로 태어나는 영광스러운 그 날의 환상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멋지게 살아봅시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며 칭찬하시고, 아낌없는 영광의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칭찬과 상급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53운동과 최상의 부가가치(1)/마25:14-30
153운동과 최상의 부가가치(1)/마25:14-30 2003-07-05 22:36:16 read : 217 여러분, 예수님의 최고 관심사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사도행전 1장 1-11에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와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도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 나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로서는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퍽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하나님나라에 관한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달란트는 우리 돈으로 약 1억원에 해당되는 돈인데, 주인이 세 사람에게 각각 1억원, 3억원, 9억원을 맡기면서 장기 외유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들에게 맡긴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계산하는 장면입니다. 드디어 주인이 돌아와서 일한 사람들의 실적을 보고 받습니다. 그러자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보고합니다. 주인님! 제가 열심히 일해서 여기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겨서 열 달란트가 되었습니다. 종의 보고를 들은 주인이 그에게 이렇게 칭찬합니다. 21절입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둘째 종도 와서 보고를 하는데, 첫째 종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첫째와 둘째는 각각 주인에게 받은 돈의 액수가 달랐고, 또 그들이 남긴 이윤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는데도 주인의 칭찬은 똑같았다는 점입니다. 성도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떤 달란트를 얼마나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문제는 그것을 가지고 주인이 그토록 관심하는 일에 충성하기만 한다면, 주인의 칭찬과 상급은 주어진 달란트와 상관없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평가하는 기준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직위가 무엇이냐, 또는 배움이나 재물이 얼마나 많고 적으냐, 또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정직하게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충성스럽게 일했느냐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의 세 번째 종이 등장합니다. 그가 주인에게 보고한 내용은 받은 돈을 그대로 수건에 싸서 녹슬지 않도록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24절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24절) 두려워하여 ...(25절) 여기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은다고 한말은 "당신은 착취자요, 나는 희생자"라는 뜻입니다. 주인은 그로부터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면서 악하고 게으런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9절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9절) 하나님나라의 법칙에는 자신이 열심히 일하지 않고 남의 덕만 보고 살려는 적당주의가 통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행위대로 검증을 받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이 소유한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사랑과 신뢰를 더하시어 그 가진 것 위에 더 많은 것을 안겨주시지만, 충성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까지 빼앗아 버립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이며 하나님나라의 원리입니다. 주인이 무엇이라고 명령합니까? 30절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30절) 본문 말씀은 어디까지나 비유이기 때문에 바깥 어두운 곳을 꼭 지옥이라고 해석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는 반드시 계산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이 장기출장에서 돌아오듯 주님이 재림하시면, 반드시 우리에게 주었던 각자의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사용했는지 계산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그냥 쉽게 지나칠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부류는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부류는 그렇지 못한 사람입니다. 받은 것은 많은 것 같은데 주님에게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주인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붙잡힌 사람은 내가 누구라는 것을 발견한 뒤, 한 번 밖에 없는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가장 보람되고 아름다운 삶인가를 깊이 생각합니다. 전에는 내 젊은 날이 다 가기 전에 어떻게 하면 좀더 즐길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던 사람이 변하여 주님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칩니다. 언제나 마음이 허전하여 허전한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사람이 주님 한 분만으로 족하다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삶의 질이 달라진 것입니다. 시간을 쪼개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돈을 쪼개어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더욱 많이 쓰려고 애씁니다. 젊음이 다 지나가기 전에, 재능이 굳어지기 전에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는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이 사람이 주인에게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문의 종처럼 자신이 충성스럽게 살지 못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향하여 교회가 내 인생을 착취한다, 나는 교회의 희생자라는 느낌을 갖습니다. 헌금, 충성, 헌신, 전도 등과 같은 말만 들어도 저절로 불평이 나을 정도로 마음이 꼬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절대로 주인을 위해서 모험을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다섯 달란트의 자금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은 모험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가 IMF 경제환란을 당한 이후 '벤처사업'(venture)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는데, 벤처라는 말은 모험이란 뜻입니다.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투자하는 사업이 벤쳐사업입니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9억이라면 적은 돈이 아닙니다. 이 많은 돈을 가지고 모험적인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이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신경 쓰일 일입니까? 밤낮이 어디 있겠습니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어떻게든 성공하려고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다른 고생이나 희생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이것이 다섯 달란트와 세 달란트 받은 사람의 생활 태도입니다. 주님께 받은 달란트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하려고 하는 것은 커다란 모험입니다. 시간을 뺏길 때도 있고, 돈을 뺏길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손해도 보고, 어떤 때는 몸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어리석다는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꼭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이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부담감을 안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는 것 자체가 불만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모험입니다. 세상사람이 볼 때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어디 눈에 손에 잡힙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확인하고 볼 수 있습니까? 영적인 것이기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시하고, 그것을 위해 산다는 것은 구름을 잡는 것같이 허무맹랑하게 비칠 수도 있습니다. 온 세상사람들이 다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던 인물이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것도 해변에서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맑기만 하고, 비라고는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3년, 5년, 10년이 가도 배를 띄울 만한 큰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전 재산과 시간을 바쳤습니다. 가족들까지 모두 동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노아를 향하여 어리석은 사람,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라고 하셨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노아처럼 오랜 세월 그렇게 땀흘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불만이 있거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모험을 하지 못합니다. 힘들게 신앙생활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충성스럽게 살려는 사람은 하나님나라가 다가오고 있음을 영의 눈으로 봅니다. 하나님나라가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는 날에는, 오직 그분을 위해 충성한 공력만이 영원히 남아 횃불처럼 타오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도, 핍박을 받아도, 손해를 보아도, 변함 없이 그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 백성의 모습이요, 생활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오늘 당장이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나와 계산하자고 하시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냉정하게 한 번 평가해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매우 너그러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아무쪼록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충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때리거나, 징계하시거나, 일이 잘 되지 않게 방해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왕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불러 계산하실 그 날에는 소름끼칠 정도로 엄정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 전 제일은행이 외국회사로 넘어가면서 그 은행의 은행장이 사원들의 업무추진 과정에 고과점수를 매기며 고강도의 구조조정을 계속함으로 적자이던 은행을 흑자로 돌아서게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만일 그 사람의 근무성적과 고과 점수에 따라 구조조정을 하는 그런 은행에 몸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적당하게 하루 하루를 넘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머리를 싸매고 있는 힘을 다하여 발버둥쳐야만 하는 긴장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재림하시면, 이 세상의 구조조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적당히 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아무런 표가 나타나질 않겠지만, 그때에는 교회 안에도 구원에서 탈락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장로님 가운데 헬륨가스를 만드는 큰 공장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사업을 개업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후 식사를 하는 중에, 그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요즘은 고부가가치를 내지 못하는 사업은 모두 망할 수밖에 없어요." 고부가가치라는 말을 처음들은 저로서는 그 뜻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대충 짐작하기로, 동일한 원료를 가지고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을 고부가가치 산업이 아니겠나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우리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드릴 가장 가치있는 고부가가치 사업이 무엇일까요? 전도입니다. 전도는 하나님나라를 완성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전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령님도 우리 모두를 전도하는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것도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보다 하나님나라에 부가가치가 더 높은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신 시간, 여러분에게 주신 재물, 여러분에게 주신 건강, 여러분에게 주신 재능,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달란트를 하나님나라에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일에 투자하고 계시나요? 이런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은 사람들은 세상이 보기에 미친 것처럼 살다갑니다. 모두가 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패하고 병든 세상과 족속으로부터 생명을 건지는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느 때는 시간을 내야 됩니다. 어떤 때는 돈을 써야 됩니다. 자존심도 접어두고 접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가치있는 일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까? 그렇다면 주인이신 그분의 말씀을 받드십시오. 그 일을 위하여 여러분의 지위를 이용하십시오. 성공한 환경을 이용하십시오. 젊음과 아름다움을 이용하십시오. 모든 것을 동원하여 생명줄잇기운동에 투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위한 일이고,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앞당기는 가장 보람있고 가치 있는 일이 됩니다. 저는 이제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이 이 주간부터 시행할 수 있는 일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이 세 명 이상을 가슴에 품고 먼저 그들을 위한 기도로 하기 시작하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장년 한 분이 세 명만이라도 가슴에 품고 전도한다면 금방 2500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이렇게 드린 우리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가슴에 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전도 계획을 짜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이디어를 주실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는 맛디아 전도 대원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전도하기를 작정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되겠다는 간증을 들으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형제 자매가 많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부터 우리는 153운동을 전개할 작정입니다. 153이라는 숫자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이 맛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썼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가득 잡게 했는데, 그 때 잡은 고기의 수가 153마리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숫자가 온 세계에 흩어진 민족들의 숫자라 하기도 하고 주님께 돌아올 열방의 수라고도 해석합니다만, 이는 예수님을 떠나 실패한 베드로로 하여금 다시 사람 낚는 어부로 시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이 153운동에 동참하기를 권유합니다. 153운동이란 한 명이 하루에 5가지를 행하여 3명을 전도하자는 운동입니다. 5가지란 먼저 기도하는 일이요, 둘째, 찾아가는 일이며, 셋째, 복음을 제시하고, 네쩨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에게 한 가지라도 돌아보며 살펴주는 일이며, 마지막으로 교회로 초청하는 운동입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 이 보다 더 할 수도 있고 덜 할 수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는 기회로 삼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부산진가족 여러분! 우리는 주님 앞에 너무나 귀한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사용하여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전도에 아낌없이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시간과 재물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면서 영혼을 구하는 일에 앞장서십시다. 그래서 열방이 주님의 백성으로 태어나는 영광스러운 그 날의 환상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멋지게 살아봅시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며 칭찬하시고, 아낌없는 영광의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칭찬과 상급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살의 성숙한 교회/ 엡4:11-16/ 교회창립기념주일설교/ 2002-04-28
17살의 성숙한 교회 엡4:11-16 사람이 만 열일곱살이 되면 성숙한 청년이고 분별력을 갖춘 나이입니다. 옛날 같으면 시집갈 나이가 지난 나이입니다. 이팔청춘이라 하는 말은 2X8=16살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만 17세라면 꽃과 같은 나이이고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17살이 되었습니다. 1985년 4월 28일 날짜도 오늘과 같은 날, 오후 3시에 노회 목사님들과 저를 아는 성도들과 가족 친지들이 모여 설립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28살 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벌써 세월이 17주년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부흥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17년만이 이 정도라면 부흥한 敎會 축에 끼지도 못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도 수없이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가 사라지는 속에서 우리 교회가 이만큼 성장하고 발전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17주년을 맞아 우리는 교회를 세워 주신 하나님, 교회를 이끌어 주시고 성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들려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교회 일꾼인 저와 여러분은 우리 교회를 어떻게 섬겨 나갈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새로운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17살 된 교회, 어떻게 해야 성숙한 교회로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을까요?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성경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를 敎訓하면서 교회를 어떻게 섬길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를 敎訓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奉讀한 말씀을 통해 성숙한 교회가 되려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살피며 깊이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숙한 교회가 되려면 1.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가 바른 목회관을 가지고 목회 해야 됩니다. (11절~12절)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 11절을 보면 예수님이 직접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로 세우셨습니다. 이 직분들은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이 자신의 직분을 세우셨음을 확신하면서 올바른 牧會觀을 갖고 목회를 해야 교회가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은 어떤 목회관을 갖고 목회를 해야 하나요? 오늘 본문 12절이 그 해답입니다. 온전한 목회를 하는 목사는 목회를 통해 1)성도를 온전케 하며 2)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3)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1)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말은 구원의 확신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준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부지런히 목회를 해도 성도가 자신이 받은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전하여 성도로 하여금 구원받은 백성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한 복을 누리도록 도와주는 목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2)또한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배를 드리게 한다는 뜻도 되며 또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게 하는 것이 목회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참다운 목회자는 성도를 놀려먹는 목사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며 예배하고 봉사하게 하는 일을 해야 목회를 잘하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혹자는 목사가 너무 성도를 못살게 괴롭힌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양이므로 목자는 푸른 꼴로 먹인 후 일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젖을 짜고 새끼를 낳게 하고 해야 올바른 목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지도자들을 세우고 양들을 치게 한 것은 배불려 놀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3)세 번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말하고 세운다는 것은 성장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숙한 교회가 되려면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를 통해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고,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봉사하게 하며,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 목회를 할 때 성숙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가 무엇입니까? 당신의 목회는 무엇입니까? 누가 제게 묻는다면 저는 이 성경 구절로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답변을 할 것입니다. 목회란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종으로 삼으셔서 양들을 맡기셨는데 그 양들을 온전케 하고 그 양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봉사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나가게 하는 것\\\\\\\"이 목회라고 확실하게 답을 할 것입니다. 적어도 목회를 하는 목사가 목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 설교해야 하는지, 왜 심방해야 하는지, 왜 성도들을 보살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그 교회는 방향 잃은 배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여기 최 목사의 목회를 따르고 협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동역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좀 맘에 안 들고 좀 힘들고 어려워도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은 제게 여러분을 牧羊토록 맡기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하시며 牧羊의 권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적으로 죄가 되거나 이단적 요소가 있다거나 하면 거부할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거든 협력하고 따라 주시며 동역자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성숙한 교회 되는 길입니다. 2. 성도의 믿음이 장성해야 합니다.(13절~14절)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성숙한 교회가 되려면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한다고 13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사단의 간교한 유혹에 넘어지지 않게 되고 세상의 악한 교훈에 요동치 않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성경 말씀을 통해 성장해야 교회가 성숙해 지고 그래야만 사단의 간교한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단 말입니다. 십일조를 왜 도적질합니까? 왜 주일 성수를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못합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지만 간교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는 쉽게 유혹에 넘어 갑니다. 사탕하나에 넘어갑니다. 그러나 중 고등 학생정도 되면 절대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장성해야 합니다. 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지간한 시험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단의 유혹과 간계는 교묘합니다. 그러기에 분별력이 없으면 속습니다. 더 나아가 그 길이 진리인줄 알게 되고 결국 사단의 종노릇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적 분별력은 우리 신앙이 속히 성장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교회도 성숙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분별력이 없다고 해보세요. 엉뚱한 일을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믿음이 어떻게 해야 성장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고,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세우고 결국 우리는 성숙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면서 신앙이 성장하기를 원하는 것은 마치 밥을 먹지 않고 건강하기를 원하고 키가 크기를 기대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 영적 분별력을 갖는 성숙한 성도가 다 되시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유기체가 되어야 합니다.(15절~16절)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성도 여러분! 좀 어려운 단어를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영적 유기체입니다. 有機體란 한마디로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각 부분이 살아 움직이는 몸이란 뜻입니다. 우리 교회는 죽어 있는 시체가 아니고 살아 움직이는 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각 부분은 각자의 맡은 기능을 갖고 움직이고 결국 모든 부분은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며 서로에게 유익을 주며 존재한단 말입니다. 우리 몸에 손이 발더러 너는 필요 없다고 말을 하면 안되고 눈이 코에게 너는 왜 그리 못생겼냐고 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서로는 서로에게 다 도움을 주고 아무리 하잘 것 없는 것 같아 보여도 다 필요한 존재란 말입니다. 교회가 그렇단 말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머립니다. 그리고 몸이 교회고 우리 성도는 그 몸에 붙은 지체입니다. 내가 보기에 다른 사람이 우리 교회 없어도 될 것처럼 보여도 그 사람도 우리의 유기체에 한 부분입니다. 서로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어 돕고 도움을 받고 협력하여 일을 하여야 정상이 되는 것입니다. 제 몸을 보세요. 제 몸이 장애가 있습니다. 왼손과 오른 다리가 정상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거추장스럽고 차라리 없으면 좋아 보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짤라 버릴 수 없습니다. 그 불편한 상태로 도움을 받고 또 돕고 하여 한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나만 알면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연합하고 도움받고 도와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4. 마지막으로 교회는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성숙한 교회는 또 다른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자신만을 돌보며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계속해서 교회가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제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장하면 자식을 낳듯이 교회가 성장하며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너무나 이 부분에 미약합니다. 자기 몸 성장만을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그래서 너무 비대해 졌습니다. 심지어 몇 만명이 되어 교역자가 성도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목양이 안되는 상태에 와 있습니다. 심지어 서울 어느 교회는 권사만 3000명이랍니다. 그러기에 담임목사가 권사 이름을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얼굴도 몰라서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 저도 고민이 많습니다. 기억력이 저하되면서 성도들의 자녀들의 이름을 쉽게 잊어 버리고 까마득하게 생각이 안 날 때가 많습니다. 제가 목양하는 성도 이름도 잘 기억치 못하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안 맡겨 주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어느 정도 되면 자꾸 교회를 세워 세포 분열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처럼 잘나갔는데 왜 얼마가지 못해 엄청난 박해를 받고 초라한 교회가 되었을까요? 선교를 하지 않고 땅끝까지 가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07년처럼 다시 부흥하는 교회/합3:2
1907년 처럼 다시 부흥하는 교회/합3:2 2007-02-15 13:22:54 read : 115 부흥을 말할 때 18세기의 신앙 부흥을 일으킨 운동 3가지를 말합습니다. 그 하나는 퀘이커고 운동이고, 또 하나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옥스퍼드 운동, 다른 하나는 모라비아 형제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부흥은 소래 부흥 원산 부흥 평양 부흥을 말하기도 합니다. 일제의 침탈과 함께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매섭던 1907년1월.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는 새해인사가 막 끝난 6일 밤부터 연례행사인 열흘간의 부흥사경회 가 이 해에도 어김없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해의 사경회는 시작 전부터 예년과는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이날 설교를 맡은 평양신학교 졸업반 39세의 길선주 장로의 얼굴은 위엄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습니다. 부흥집회 마지막 날에 길선주 장로는 회중 앞에 나서더니 저는 아간과 같은 놈이외다. 저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받지 못했습네다. 언젠가 제 친구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제게 부탁하기를 \\\'나는 이제 죽지만 내 재산을 잘 처리해주게. 내 아내는 무식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꼭 부탁하네\\\' 라며 세상을 떠났습네다. 저는 그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1백원을 잘라 먹었습네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네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네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말은 모든 회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순식간에 온회중의 통회가 불일 듯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첫날밤 집회에 참석했던 정익호 장로님은 \\\"그는 눈이 멀어 나를 보지 못했을 터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습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두려워 예배당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러나 곧 되돌아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라고 후일 증언했다 합니다.(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 회개하는 교인들의 열기는 곧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에 몰아쳤던 성령의 불길 바로 그것 이었습니다. 이날 밤 집회는 초기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1907년 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운동의 맥락은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의 한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역사입니다. 모라비아 형제단의 지도자로서 훌륭한 역사를 발휘한 진젠돌프 같은 이는 우리가 무심코 생각지 못할 훌륭한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생후 6주 만에 부친이 병사했고, 어머니는 개가하므로 할머니 손에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시, 음악, 그림 등에 재능을 가진 분이었고 조직신학과 히브리어, 헬라어에 능통한 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이 할머니의 영향으로 좋은 신앙을 얻었습니다. 그는 나이 어린 6살 때부터 혼자 조용히 기도할 줄 알았고 소년기에 기도 그룹을 만들어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봉독하는 생활에 힘썼습니다. 청년기에 그는 신학, 법률학, 철학, 과학 등 다방면에 공부했고 수재적인 두뇌로서 뛰어난 성적을 가진 학도였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은 정한 시간에 기도했고 자주 철야 기도를 했고 금요일에는 안식일로 정하고 오직 기도에 힘썼다. 자기뿐 아니라 겨자씨 단이라고 하는 그룹을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교훈과 진리를 지키며 행동한다. 타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세속적인 안일을 배제하고 버린다.” 라는 목표로 신앙 운동에 부단히 힘썼습니다. 후에 이 멤버 중에서는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진젠돌프가 아직 약관인, 젊었을 때에 모라비아 교단의 대표가 됐지만 그가 전 세계에 끼친 영적인 위대한 생명 운동은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하는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1970년 2월 3일 화요일 오전 10시 미국 아즈베리 대학 약 천 여명의 학생들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던 설교자가 자기가 받은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간증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졸업반 중 악명 높은 학생 한 명이 나왔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여 주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 여기 서리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와는 딴판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제게 임하여 제 생명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비로소 회개와 구원, 사죄의 은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깊은 감격으로 가득 차게 됐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제까지의 잘못된 나의 생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는 간단히 고백했는데 그 시간에 모였던 전 학생들에게 이상한 감동이 뜨겁게 달아올라 예배 시간이 끝나고 다음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도 계속 학생들은 기도를 그치지 않고 감격에 벅차서 기도하며 신앙을 고백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이런 일이 185시간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2월 10일 그러니까 한 주간이 계속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오는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비신자까지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문, 라디오, TV, 주간지, 월간지 등 모두 이 일을 전 미국에다가 보도를 했었는데 5월 말까지 그 대학과 신학생들이 팀을 만들어 2천명에 달하는 이 불붙은 학생들이 전 미국 각처에 다니면서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변화를 일으키는 놀라운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그룹들이 각처에 생기게 되고 성경연구 모임이 아주 활발하게 운영되어 각 매스컴에서 이를 계속 보도했고 130대학과 신학교가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기도운동은 민족과 인류를 살리는 운동입니다. 우리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어떤 업적이나 사업에 성공하기 전 먼저 기도에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은 20세기초 한국 교회 부흥의 씨앗이었습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1907년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원산은 오랜 기간 동북 아시아의 요충으로 일본 러시아 중국 등이 근거지로 삼으려고 한 곳입니다. 결국 1876년 한일수호조약으로 체결로 1880년 5월에 부산에 이어 두번째로 개항되었습니다. 원산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1년입니다. 서울보다는 늦었지만 평양과는 거의 동시에 들어왔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하디는 1882년 처음 이곳에 와서 사역했습니다. 그러다가 1901년에 다시 와 사역하게 됐습니다. 하디 선교사가 원산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느낀 것은 영적 폐허였습니다. 신자들은 주일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았고 성적으로 방종했습니다. 또한 공금을 횡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디 선교사는 이들에게 성찬을 금했고 심한 경우에는 교회에서 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 하디가 원산에서 30㎞쯤 떨어진 어떤 집회소를 방문하였을 때 놀랍게도 사람들이 모여서 무당굿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디가 강원도 산간 내륙지방에 들어갔을 때 상황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게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19세기말 혼란스러운 상황속에서 교회는 이들의 피난처였습니다. 1894년 동학혁명 이후 교회 건물에는 깃대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교회라는 표시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는 표시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교회는 외국 선교사들의 소유이기 때문에 치외법권 지대로 인정했습니다. 관리 가운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원산에서 일하던 여선교사 캐럴이 강원도의 어떤 교회를 방문했을 때 한 사람이 관헌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 와서 교인으로 등록시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의 집에 숨었습니다. 다음날 관리들이 이 사람을 잡으러 왔으나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하디는 교회는 신앙공동체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 건물에서 깃대를 제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여기에 순종했으나 어떤 교회는 이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디는 이런 현실을 보며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1903년 8월 24일 원산의 미 남 감리교 선교지부가 있던 원산교회에서 중국에서 선교하던 하이트 선교사가 한국에 온 것을 기념해 기도회가 열린 자리에서 하디 선교사가 갑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날 그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이 기도회의 성령체험을 원산교회 주일예배 때 설명하며 한국인 교인들 앞에서 다시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후 기도회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죄를 고백하고 자복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원산부흥운동입니다.(<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회개와 고백의 역사입니다. 평양의 부흥운동 보다 약 10년 전에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소래교회는 만주에서 복음을 들은 한국인들이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세운 교회입니다. 1889년 한국에 도착한 캐나다인 선교사 말콤 펜윅은 복음주의 운동에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종종 소래를 방문해서 한국어도 배우고, 그들의 신앙도 살펴보았다. 청일전쟁의 상처가 짙게 배어있던 1896년 말,펜윅은 소래를 다시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약 300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으나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집회 12일째 되는 날, 펜윅은 한 사람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에 역사하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제 눈에는 감격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서로 미워하는 신자 두 사람만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이곳 신자들 중에서 누가 서로 미워하고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펜윅의 말이 끝나자 그 사람은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며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 배경을 이야기했습니다. 펜윅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미워했던 그 사람에게 가서 사과하지 않겠느냐\\\"고 권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펜윅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동안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그 사람은 그 길로 미워하던 두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서로 화해했습니다. 다음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죄 씻음\\\'을 받은 그 신자가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자 모든 신자들이 함께 회개하였습니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이 이야기를 듣고,\\\"수 천리를 걸어서라도 죄 때문에 그렇게 운 한국인을 만나보고 싶군요. 난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참된 부흥의 시작입니다.<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소래교회의 부흥운동> 영국 웨일즈의 한 작은 교회의 한 부인이 주기도문을 하다가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이 대목에 이르러 더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미워하고 있는 한 형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중단했습니다. 그는 부질없는 봉사를 중단했습니다. 그는 예배를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갔습니다. 오랫동안 찾아보지 않았던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회개한 것입니다. 우리의 갈등은 당신의 책임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라고 그 여자는 자백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했던 내 죄를 회개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웨일즈라는 도시에 부흥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의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위대한 부흥은 한 부인의 회개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원인이 되었던 1904년 영국 웨일즈에 영적 부흥이 일어났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새로워지고 있고 교회에 큰 부흥이 임했다는 소문이 요란했습니다. 교회 안나가던 보석가게를 경영하던 한 상인이 이런 부흥의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들려온 소식과 달리 교인들이 예배시간에 좀 격한 감정으로 기도하고 울고 있다는 것외에 크게 그의 마음을 감동시킬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요란하게 알려진 \\\'부흥\\\'이라는 것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부흥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만의 \\\'요란한 감정의 잔치\\\'라고 생각하고 다시는 교회에 발을 안 들여놓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자기 가게에 한 젊은이가 오더니 자기가 이 보석가게에서 보석을 훔친 일이 있다고 보석을 내놓으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마음이 성령이 임하고 부흥이 일어나서 자기가 회개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다음 주일 교회에 나가 자신도 영적 부흥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당시에도 유사한 사건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평양 대 부흥운동을 목격하고 증언한 스왈른 선교사는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교회에서 부흥을 체험한 성도들은 단순한 통회로만 끝내지 않았다. 다음날 사람들이 거리에서 마을에서 교회에서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둑맞은 물건들이 되돌아 왔다. 잃어버린 지갑도 돌아왔고 오래동안 갚지 않았던 빚도 청산되었으며 부정한 방법들도 시정되었다.\\\" 진정한 부흥은 인생을 바로 잡습니다.(진정한 부흥) 성령의 역사와 전도입니다.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의 소식을 전해들은 성도들은 부흥집회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평양 사경회에서 성령의 종 역할을 감당했던 자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길선주 장로는 서울로 떠나게 되는데 이때가 2월 16일이었습니다. 서울의 중앙교회(지금의 승동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 다음날에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로부터 성령의 역사는 날로 발전되었습니다. 둘째 날 이후 부터는, 회중은 죄에 대한 혐오가 폭발되고 미친듯이 죄를 회개하여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려고 몸부림쳤다. 그들의 심령은 불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의주로 가 11월 27일부터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여기에도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고 특기할 것은 최 재형이라는 열세살 난 소학생(지금의 국민학생)이 죄를 통회하고 주님께 몸 바치기로 한 사실이 있었고 부흥의 물결이 몰아쳐 숭덕학교의 김찬성의 인도로 300여 학생들이 죄를 뉘우치는 부흥의 열기가 타올라 이들에 의한 전도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또한 숭실대학에도 부흥의 물결이 타올랐습니다. 숭실대학의 A.L.Becker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학교 개학은 2월이었는데 그 직전에 집회 중이던 장로교 사경회에 성신 강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은혜가 학교에도 내리기를 원하였습니다..... 학교가 개학되고 학생들이 등교한 다음 우리들은 평상시의 수업시간표를 일시 중지하고 오전, 오후, 저녁을 통하여 성경공부 및 기도회의 특별시간표를 마련하여 실행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학생들의 감정을 흥분시키려 하지 않았고 또 너무 이래라 저래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의 십자가에 마음 모으기만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크게 나타나서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학생까지..... 죄를 회개하고 애통하였습니다. 한때 내가 세어보니 30명 이상의 학생들이 여러시간 서있으면서 죄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기회를 얻으려 기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의 약 10분의 9가 이때에 깊은 감화를 얻어 중생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십자가의 도리를 전하는 열정적 전도인이 되어서 이 부흥의 불길은 온 성내와 인근 촌락에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멀리 제물포와 공주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부흥이라는 말입니다. 기도할 때도 부흥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복음성가를 부를 때도 \\\'부흥\\\'이라는 찬송을 자주 부릅니다. \\\'부흥\\\'이란 무엇인가요? 쉽게 말해서 우리의 심령과 공동체가 새로워지고 변화되며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부흥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만나 주심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할 때 거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할 때 나의 실존을 정확히 바라보게 됩니다. 그 때 나의 더럽고 때묻은 심령이 치유되고 새로워지며 침체된 심령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삶의 비전과 환상을 바라보게 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달라지게 됩니다.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는 회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치유되고 사랑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것이 변화와 부흥의 역사입니다. 1907년 부흥을 다시 일으키되 말씀과 기도로 회개와 고백으로 성령으로 전도하는 모두가 됩시다.
2000년대와 교회/마16:1-4
2000년대와 교회 마16:1-4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가 목회자들에게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라.\\\\\\\"고 한 말은 유명한 말입니다. 이 말은 목회자들은 물론이고 성도들도 성경만 알아서는 안되고 세상도 알아야 한다는 말인데, 성경을 알고 세상을 알아야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성경에도 보면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세상에서 일하던, 그래서 세상을 잘 알던 사람들이 선지자가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시대를 알고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산속의 성자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세상의 빛같은 바른 남편, 바른 아내,바른 이웃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더구나 이제 막 우리 앞에 놓여진 이 2000년대는 어떤 시대가 될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본다면, 우리나라가 이조 말기에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의 흐름을 잘 못 읽은 대원군의 판단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뒤쳐지기 시작했고, 그 때 이미 명치유신으로 서양에 문명을 받아드린 일본은 우리에 앞서 달려가기 시작하여 우리가 일제 36년의 오욕의 역사도 생기게 되었고, 그런 결과로 남북한의 분단도 생겼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원군이 세상돌아가는 것을 잘못 읽은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20년, 30년 뒤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 그리스챤들이 이 2000년대가 어떤 세상이 되고 우리 그리스찬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시간으로 하나님이 은혜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앞으로 되어질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히 예측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풍조로 생각하고 보편적으로 변화될 것들 중에서 7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1. 첫째는 세계화입니다. 메가 트랜트의 저자인 존 라이스비트라는 사람은 이미 30년 전에 \\\\\\\"지구촌\\\\\\\"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고, 지구는 점점 좁아져 1일 가족개념이 생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30년 전에 이 말을 했는데 정말 지금은 그 말이 실감하는 현실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60년대에는 우리가 미국에 갈려면 배를 타고 3개월내지 6개월이 걸려서 갔습니다. 그러다가 70년대에는 비행기를 타고 20시간정도 걸렸습니다. 그런데 80년대에는 논스톱이라는 말이 생겨나서 쉬지 않고 달려서 14시간이면 미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10시간정도 걸리고 얼마전에는 4시간대의 비행기가 발명되었습니다. 이제 한 오년이나 10년만 지나면 아침에 미국에 갔다가 일보고 저녁에 돌아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현재 매일 300만명의 사람들이 비행기를 이용하여 1년이면 10억의 사람들이 비행기를 이용하고 있는데 앞으로 5년 후면 30억의 인구가 비행기를 이용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스비트의 말대로 세계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래서 생겨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소위 월드 라이프 스타일(World Life Style) 즉 세계적 생활 방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입니까? 김치나 된장국이 아니고 피자나 햄버거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10년 20년전에는 미국이나 이태리 사람들만 먹던 것인데 이제 어느새 우리의 가정에 주식으로 침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자녀들은 빵이나 피자나 햄버거 같은 것들을 주식으로 먹고 살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커다란 변화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 요리 방법만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라, 농사가 변하게 되고, 주방이 바꾸어지고 주택의 구조가 바꾸어지고 결국 많은 문화가 바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T.V, 음악, 패션,스포츠,영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컴퓨터 같은 것들이 하나의 생활권 즉 동일한 문화권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화의 경향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과 싸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은 언어입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란 말이 있는데 그 말은 경쟁이 이제 우리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다는 말입니다. 세계를 향해서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별문제 없지만 앞으로 10년 후에 우리가 무엇을 좀 해보려고 한다면 영어를 모르면 그 사람은 뭔가 발전적인 일을 해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앞으로 10년 후면 사람들이 동경으로, 뉴욕으로, 모스크바로 출장을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를 몰라 의사소통도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설사 사업상의 의사소통은 못하더라도 비행기표도 살 수 없고 어디를 찾아가지도 못하며 어떤 상품을 사도 사용설명서를 못읽는다면 여러 가지 불편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 자녀들에게는 영어가 절대 필수적인 것입니다. 또 하나가 필수적인 준비가 컴퓨터입니다. 21세기는 정보사회입니다. 이 정보사회의 핵심도구가 컴퓨터입니다. 이 컴퓨터는 단순한 정보 뿐만 아니라, 산업, 의료, 예술,학문등의 거의 모든 분야에 먹고 자는 일만을 제외하고는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지경입니다. 컴퓨터를 모르면 자연 모든 일에 뒤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영어와 컴퓨터는 기본적인 삶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지금 우리 앞에 너무 빨리 다가오고 있어서 충격적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계화는 아주 나뿐 것들도 세계화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에이즈 같은 질병들도 세계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크 맥릴란 같은 의학자는 2000년대에는 에이즈가 50년대의 폐렴처럼 흔한 것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2. 둘째는 국지(局地)화의 경향입니다. 앞에서는 세계화라고 했는데 국지화라는 무슨 의미일까요? 역설적이지만 앞으로는 세계화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 자기 찾기 운동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련이 붕괴되자 소련에 속했던 많은 소수 민족들이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카나다의 퀘백주 같은 곳에서도 독립정부를 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들이 이스라엘로부터 독립자치정부를 세웠습니다. 지방자치화도 그런 경향의 일단입니다. 한완상씨는 앞으로 남한과 북한도 정치적인 통일은 아니더라도 서로 체제를 인정하면서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씰 모드니같은 사회학자의 말에 의하면 이런 경향은 앞으로의 전쟁은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아니라 집단이기주의의 싸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의사와 약사들의 의약분업싸움에서 보듯이 그런 집단간의 이기주의가 강하게 나타나는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경쟁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것도 예상되는 미래의 어두운 문제입니다. 씰 모드니는 앞으로 지구상에 나타난 전쟁은 종교전쟁이 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교회도 이제는 교단을 배경으로 하는 것보다는 개교회주의로 흐르고 있습니다. 21세기는 민족적 이기주의, 집단적 이기주의가 강력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3. 셋째는 여성화입니다. 2차대전이 이후 즉 1945년 이후에 여성 근로자들가 300% 증가했다고 합니다. 옛날 여성들은 집을 지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들이 더 이상 집이나 지키고 아기만 키우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2000년대에는 남자들보다 여성들이 더 산업전선에서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미국은 남자 취업율이 86%이고 여성의 취업율이 72%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없는 여성의 취업율은 92%로 남자보다 높습니다. 올해는 가사만을 돌보는 여성은 10%미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소수의 상류층과 장애자들을 제외하고는 여성도 거의가 다 직업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이 여성화는 아시아에서는 늦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늦어지는 현상이 있는데 앞으로는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동시에 여성의 지위도 향상되며 여성의 사회적 영향도 커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앞으로 가정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여성이 경제문제를 남자에게만 의존하지 않으니까, 자연 여성이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가사를 여성만 해서는 안됩니다. 남자도 밥도 해야 하고 세탁기도 돌려야 하고 과일도 깍아야 합니다. 이미 중등교육에서는 남학생들에게 이런 일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남자가 바람을 피운다고 이혼소송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여자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소송을 제기하는 남자들이 많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율은 크게 늘어날 것입니다. 성에 자유로운 미국이나 유럽처럼 이혼을 한 사람이 안한 사람보다도 더 많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여성화로 인한 이혼의 문제, 자녀문제등이 사회의 윤리 가치관에 많은 혼란을 주게 될 것입니다. 또 여성화로 인하여 교회는 여자 목사나 여자 장로가 나오게 될 것이고,또 집안에 여자가 없게 되니 이제 교회에서 심방하는 문제도 어려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도 심방시대가 지나고 점점 전문목회시대가 올 것입니다. 즉 지금은 담임목사 한 사람이 설교도 심방도 교육도 행정도 다 했는데 이제는 설교 전임, 행정전임, 교육전임, 음악전임 등으로 자기 전문이 없으면 목회를 하기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 어쩌든 교회도 전문화가 안되면 5년 10년 후에는 급격히 쇠퇴할 것이 분명합니다. 4.네번째의 경향은 노인화입니다. 유엔의 보고서에 의하면 2000년대는 고령화에 의한 사회문제가 크게 대두될 것이라고 합니다. 19세기는 어린이의 인권을 되찾는 시대였다면 20세기는 여성의 인권을 되찾은 시대이고 이제 21세기는 노인의 인권과 복지를 되찾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만도 2000년에는 60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전체인구의 20%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노인들의 단독세대가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98년에만도 노인단독세대가 36.4%가 되었는데 이제 올해에는 거의 50%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에 사회적으로는 노인문제가 대두되고 우리들 각자 각자도 노후의 문제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 노인들과 함께 살려고 안 할뿐더러 또 살려고 해도 사회적 환경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교회가 양로원이나 양로당을 지어서 이들을 복음화하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5.개인화 경향입니다. 훌러 신학교 교수인 잭 볼스윈에 의하면 앞으로 21세기는 가정은 있는데 가정의 개념이 아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교적 개념에서 가정하면 \\\\\\\"부자(父子)\\\\\\\"가 있으면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기독교적인 영향으로 \\\\\\\"부부(夫婦)\\\\\\\"가 가정의 개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정이라는 개념은 부자나 부부의 개념이 아니라, 동서(同棲)의 개념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가정의 개념이 무너지고 이제는 레스비안이나 게이들이라도 결혼신고를 할 수 있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이미 동성애자들의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주(州)가 있습니다. 부산여대 김충용 교수가 여대생들 3513명을 대상으로 결혼관을 조사했는데 결혼은해야 한다는 의견이 25%였으며, 결혼은 반듯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가 75% 였습니다. 동성애도 인정해야 한다가 42%나 되었습니다. 이러한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은 전통적인 가정이 무너진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세운 기관이 가정과 교회라고 했는데 지금 이땅에는 사탄이 가정과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9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약 40만쌍이 결혼을 했으며 벌써 그 중에 약 4만쌍이 이혼을 했습니다. 옛날에는 이혼사유가 질병이나 배우자의 부정 혹은 학대들이었는데 지금은 이혼 사유가 성격차이, 애정상실, 성적인 트러불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개인화의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현상인 것입니다. 미국에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벌써 동성애자들만 다니는 교회가 많이 있으며 독신자들만 다니는 교회도 있습니다. 6.기계화의 경향입니다. 21세기는 바야흐로 생명공학시대가 도래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동물을 복제했다는 말은 진즉 들었고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복제해서 똑같은 사람을 천명도, 만명도, 수 억명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류의 숙제가 될 것입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2명 아니 10명, 만명이 있다고 해보십시요. 이 세상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만약 누가 그것을 비밀히 한다면...............! 이런 문제는 지금 무서워서 아무도 손을 못대고 있지만, 당장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으며 지금 실행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대리모 문제인데 1990년에 이미 1000명의 여인들이 이름은 모르지만 우수한 남자의 정액을 받아서 임신을 했습니다. 혼자사는 여자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이런 일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수치는 보고되지 않았지만 수만명이 대리모 혹은 실험관아기로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우수한 종족만 보존되어지고 열등한 사람들은 도태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건이 되고 기계가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지금 그런 시대입니다. 이때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문제와 함께 인간에게는 예측할 수 없는 혼란과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이제 다들 외롭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체 살벌한 삶들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교회의 큰 역할 중의 하나는 치유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7.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는 현상이기도 한데 그것은 다원화라는 것입니다. 다원화 현상이란 \\\\\\\"절대는 절대로 없다\\\\\\\"는 상대주의적 철학개념을 가지고 요즘 유행하는 포스트 모던이즘(Post Mordenism)을 바탕으로 예술계에서 불어와서 이제 모든 국면에 암묵적 사상이 되어 있는 현상이다. 광주 비엔날레에서 보면 그림은 없고 사람이 화구안에 들어가 있는데, 그것을 보고 누가 그것이 무슨 그림이냐고 묻는다면 그 화가는 되묻습니다. 그러면 그림이란 것이 무엇이냐고. 이것은 기존하는 것을 깨뜨리며 모든 것을 다 인정하자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정도 왜 부부가 있는 것을 가정으로 규정해야 하는냐고 말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자고 주장합니다. 신학에서도 기독교도 인정하고 불교도 인정하고 이스람교도 인정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교를 침략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일면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모든 질서를 부정하므로 그 결론은 사실 혼란으로 맺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앞으로의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도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며, 무엇이 가치가 되고 진실이 되는가하는 보편적인 문제도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실 우리 앞에 있는 지금의 이 21세기를 낙관하는 사람들 보다도 비관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습니다. 수많은 위기가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이러한 위기와 문제에 잘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낙오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ㅎ도 그러하고 인류 전체도 그러할 것입니다. 앞에서 시간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잘 알려진 문제 공해문제는 더욱 어두운 21세기의 암울한 먹구름입니다. 지구는 지금 낡고 낡아서 지금 공중폭발 직전인데 그 안에서 사람들이 마지막 잔치를 벌리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는 두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가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더욱 뚜렷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변할 것과 변하지 않을 것을 잘 알아야겠습니다. 세상풍조 따라살아서는 안되지만 또 세상을 배타적으로 보고 고립되어서도 안됩니다. 변할 것을 변하지 않으면 변해서는 안될 것이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예측할 수 없게 변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안할 수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28장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