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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중에서 믿음을 찾은 하박국 2002-03-29 14:46:39 read : 9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박국 2:1-4) 1. 이름과 배경 [하박국]이란 '박하' 혹은 '포옹'이란 뜻을 가진다. 하박국은 그의 부족의 이름이나 연대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을 미루어 볼 때, 요시야왕의 재위 말기인 B.C 612-589년경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박국은 [하박국서]를 통해 그의 활동 모습을 보이는데, 레위인으로서 성
고난 중에서 믿음을 찾은 하박국 2002-03-29 14:46:39 read : 9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박국 2:1-4) 1. 이름과 배경 [하박국]이란 \'박하\' 혹은 \'포옹\'이란 뜻을 가진다. 하박국은 그의 부족의 이름이나 연대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을 미루어 볼 때, 요시야왕의 재위 말기인 B.C 612-589년경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박국은 [하박국서]를 통해 그의 활동 모습을 보이는데, 레위인으로서 성가대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3:19) 한 마지막 구절에서 가늠할 수 있다. 유다의 세력이 위축될 정도로 바벨론(갈대아인)이 발흥하던 시기에 활동하였다. 이스라엘로써는 위기의 시기이다. 환난과 역경 중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결국 승리하게 하는 길임을 가르친다. 갈대아인의 침공은 곧 유대의 멸망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의지할 때 승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것이다. 예레미야가 눈물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한 이래 요시야왕에 의해 종교개혁이 단행되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요시야가 B.C 609년에 전사하고 이스라엘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속에 있었다. 이 때 나타난 선지자가 바로 하박국이다. 2. 질문으로 시작된 예언 하박국의 예언은 의문을 제기하는데서 시작하고 성숙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법에 대해서 최초로 회의를 품었다. 즉, 하나님은 왜 유다 백성이 죄를 범하는데도 징계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하나님께 반항하면서 의문점을 풀려고 하였다. 이는 그가 의심을 잘하는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신뢰의 사람이요, 진지한 인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바벨론을 이용하여 유다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신다.(1:5-10) 의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을 의심함으로 질문하는 의문이 있다. 이것은 의심으로 시작하여 의심으로 끝나는 악의의 의문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을 신뢰하기 때문에 주저할 것 없이 피력하는 의문이다. 이는 좋은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묻는 의문이다. 유다 안에는 간악함과 패역함이 가득하고, 헛된 변론과 분쟁은 쉬지 않고, 겁탈과 강포가 있으나 율법은 해이하였고,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여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며 공의가 굽히게 되었다. 하박국이 알고 있는 신명기법에 의하면 의인에게는 복이, 악인에게는 저주가 내려져야 하는데, 유다 백성들은 학정에 시달려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침묵만 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박국의 의문에 대하여 하나님은 갈대아인을 도구로 삼아 치겠다(1:5-11)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하여 하박국은 더욱 의문을 품게 된다. 그것은 아무리 유다가 죄가 극에 달했다 해도 유다는 선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이방 민족을 데려다가 선민을 심판하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유다의 악한 자를 징벌하기 위해서 바벨론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지만 그들이 한계를 넘어서 유다의 의인들까지 억누르고 탄압한다면 어찌하시겠느냐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3.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그때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셨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하박국은 유다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호와께 변치 않고 충성(믿음, 진실)하는 것임을 알았다. 의인이란 하나님과 계약관계 속에 있는 백성이며, 변치 않고 그 계약을 준수하는 백성이다. 마음이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그 속에 생명이 있을 수 없다. 바벨론 사람들처럼 강포함으로 날뛰는 자가 일시 천하를 차지하는 듯하나 거기에는 진실이 없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이 정직한 자는 믿음으로 산다. 믿음에는 아무 것도 섞인 것이 없고 순수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유다가 비록 부패하였고 진실과 충성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자가 비록 소수이나 이 소수의 의인으로 인하여 멸절되지 않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한 구절은 바울 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종교개혁의 중심이 되었고 오늘날 개신교의 신앙 중심이 되고 있다. 성경 한 절을 가지고 이처럼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 4. 배울 점 1) 하나님은 악인을 도구로 사용하실 수도 있다 바벨론(갈대아)은 악한 도구이다. 비신앙인으로 신앙인을 다스리고 징치하실 수도 있음을 하박국서는 말해 준다. 여기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억울해 할 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 이방인을 좋아하시기 때문이 아니고 불의한 자신의 아들딸들을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인 것이다. 사용된 도구인 이방은 결국은 멸망할 나라이다. 바벨론도 그렇게 쓰임 받았을 뿐이다. (2:4-17)에 보면 유다를 징계하는 도구로 쓰였던 바벨론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여 망하게 하실 것임을 말씀한다. 2) 신앙인의 징계는 돌이키면 철회된다. 때리지 않는 게 사랑이 아니라 때리면서 자신의 도구로 만드시려는 게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돌아오기만 하면 철회된다. 더 큰 축복으로 돌아온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3) 의인은 결국 믿음으로 승리한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기독교 신앙의 대명제이다. 외관상 악이 승리하는 것 같아도 세상의 주관자는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을 지킨 의인의 결국은 승리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 악인 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거기에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
기도로 나타난 한나의 믿음 2002-03-28 09:26:47 read : 7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삼상2:1-10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이어지는 과도기때 가장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또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사사였습니다. 사사라는 말은
기도로 나타난 한나의 믿음 2002-03-28 09:26:47 read : 7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삼상2:1-10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이어지는 과도기때 가장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또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사사였습니다. 사사라는 말은 최고의 통치자란 뜻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왕과 같은 위치에서 백성을 다스려나갔습니다. 이렇게 한 몸으로 선지자와 제사장과 그리고 왕과 같은 일을 맡아서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족들이 끊임없이 이스라엘백성들을 쳐들어오기는 했지만은 그러나 사무엘의 기도와 사무엘이 세운 그 왕들이 사무엘의 말을 듣고 나갔을 때는 언제나 승리를 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무엘을 낳은 한나의 믿음에 대해서 1장과 2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의 기도로 나타납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 내용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지적 수준, 인격, 교양이 말속에 다 들어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기도 속에는 그 사람의 신앙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한나의 기도 속에 들어있는 그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1절 말씀에 보면,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랬습니다. 한나의 기도에서 보여지는 그의 믿음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즐거움을 얻고 누구로 인하여 기쁨을 얻습니까? 여호와로 인하여 기쁨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나는 기도하여 얻은 사무엘로 인하여 기뻐하며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구한 어떤 것, 그것을 얻어서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가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그 선물을 받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선물이 좋습니까? 그 선물을 나에게 주신 그 분이 좋습니까? 선물만 좋아하는 사람은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선물을 안주면 그 사람 미워합니까? 저는 선물을 많이 받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선물보다는 그 선물을 주신 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혹시 저한테 선물 받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다 못 해 생일카드라도. 그랬을 때 생일카드를 보고 카드가 좋았습니까? 아니면 목사가 그 속에 써낸 성경구절이나 여러분들을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목사가 좋았습니까? 카드가 예쁘다, 카드가 좋다하고 카드만 만지작거렸습니까? 아니면 카드를 보낸 사람이 좋았습니까? 물어보는 내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한나는 자기가 구한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기뻐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를 나에게 주신 여호와로 인하여 나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병을 고침받았다든지 맺힌 문제가 풀렸다든지 막힌 길이 열렸다든지 어떤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든지 그래서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무언가를 얻은 것때문에 지위를 얻었거나, 명예를 얻었거나, 재물을 얻었거나 돈을 많이 벌었거나 권세를 누리거나 그런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것들을 나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37:4절 말씀에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인격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하면 좋아하는 그 분을 함께 좋아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그 분에게 실망을 시키지 않겠다는 책임의식도 가집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을 좋아하고 그 분을 기뻐하고 그 분없이는 살 수 없다고 그렇게 살아가면 하나님은 자존심이 대단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분이 아닌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이 한나의 기도에서 나타난 그의 믿음은 여기 보면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그랬습니다. 여기서 내 뿔이 여호와로 인하여 높아졌다는 말은 자기가 아들, 사무엘을 낳기 이전에는 아들을 낳지 못한 일로 인해서 자기 이름이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수치 속에 지냈는데 이제는 내 기도를 들어주신 여호와를 인하여, 또 아들을 얻음으로 인하여 내게는 영예와 능력이 주어졌다. 이 뿔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능력을 상징합니다. 어떤 명예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했을 때는 수치가 돌아옵니다. 소외감을 갖게 됩니다. 열등의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당하게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을 하고 나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떳떳함이 생깁니다. 수치가 물러갑니다. 그런데 내 뿔을 높이신 나로 명예롭게 하고 나로 힘있게 하신 삶의 의욕을 갖고 하고 용기를 얻게 하신 것은 내 스스로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내 뿔을 높이셨다. 날마다 모든 일마다 모두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도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다. 히스기야라고 하는 왕이 있습니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군대장관 랍사게와 함께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욕하는 그들의 편지를 받아서 성전에 들어가서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놓고 도움을 청합니다. 간구합니다. 철야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18만5천명 앗수르 군대를 다 멸했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의 몸에 병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병을 고쳐주시며 15년동안 생명을 연장시켜 줍니다. 그런데 한편 바벨로니아의 왕이 히스기야왕이 병들었다가 나았다 하는 이 소식을 듣고 축하하기 위해서 몇 사람의 사신을 보냅니다. 그때에 그 사신들에게 하나님께서 나의 건강을 이렇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이 연장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높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 높이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은과 금과 보배를 자랑합니다. 무기고의 문을 열어 우리가 이렇게 군사력이 있고 무력이 있다,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예언합니다. 네가 자랑한 그 모든 것을 바벨로니아에 빼앗기게 될 것이다. 훗날 그가 자랑했던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주님만 자랑하고 하나님만 높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켜주지만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자랑하면 자랑한 것때문에 꼭 망합니다. 여러분에게 남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습니까? 그 재능을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쓰라고 주신 줄 믿고 그 재능으로 인해서 주의 이름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이루었을 때 자기 힘으로 얻은 것처럼 하나님 외의 그 누구도 자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힘, 재물, 지식, 지위, 명예, 그 어떤 것도 자랑하면 주님은 질투하십니다. 주님을 질투나게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요 누구든지 나보다 아내나 남편이나 아들이나 딸이나 심지어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마가복음 10장 28절 이하 말씀보면 주와 복음을 위해서 처자나 전토나 아들이나 딸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금세에서 백배나 얻고 핍박을 겸하여 얻으며 내세의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나의 믿음으로 변하고 바뀌어지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한나는 내 뿔을 하나님이 높였다고, 내 잃어버린 이름을 하나님이 높이셨다고 그렇게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또 내 원수들을 향하여 내 입이 크게 열리게 했다,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나는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지 못함으로 브닌나가 자기를 격동할 때 입이 열이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고 보니 입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벙어리된 자에게 주님께서 에바다! 열리라고 외쳤을 때 말하지 않던 사람이 말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이 기도하게 되고, 찬송할 줄 모르는 사람이 찬송하게 되고, 전도, 예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없던 사람이 예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입이 열린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나처럼 입이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입이 열려야 합니다. 그가 브닌나에게 구박받은 이야기가 1장6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심으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그러나 이제는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전날의 한숨 근심이 변하여 이제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2절에서 주님밖에는 구원자가 없다고 외칩니다. 한나의 기도 속에 나타난 그의 믿음, 구원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 하나님만이 구원자라고 외칩니다. 2절에 여호와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아멘. 구원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누가 우리 죄를 담당할 자가 있습니까? 예수님 외에 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까?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창조자 그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의 말씀만 순종합니다. 주님만 따라갑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만 의지하면 한나가 기도해서 응답받았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 다음에 한나의 기도 속에 나타난 그의 믿음은 3절에 나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니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아멘. 그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았냐 하면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는 저울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달아보는 저울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달아보는 저울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저울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무게가 나가지 않으면 버립니다. 이 말씀은 다니엘서 5장 20절 이하에서 나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아들 벨사살 왕이 자기 부친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성물, 금으로 된 그릇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술에 취했습니다. 그날 밤 손가락 하나가 나타나서 벽에다 무슨 글을 썼습니다. 그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그러나 글의 내용을 모릅니다. 그 글을 해석하는 사람은 다니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글에 뭐라고 쓰여 있느냐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이 메네라는 말은 세어보고 끝나게 했다. 메네 메네 반복한 것은 강조한 것입니다. 세어봤다, 세어봤다, 그런 뜻입니다. 데겔이란 말은 무게를 달아보니 모자라서 치워버렸다, 우바르신은 무어냐, 나라가 나뉘어서 다른 데로 넘어간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어보고 달아보고 그래서 하나님이 세어보고 달아보니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함으로 너를 하나님이 버렸다, 그리고 네 나라가 쪼개진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개인에게도 주님이 하신 경고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 대한 주님의 경고이고, 오늘날 우리 교회에 대한 주님의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가짐과 행실을 주님이 갖고 있는 저울대에 우리를 올려놓고 주님이 원하는 만큼의 무게가 나가지 못하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종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맡겼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주님의 저울대 위에 다는 날이 왔습니다. 그걸 평가하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울대위에 만족했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겨서 하나님의 저울대에서 만족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한 달란트만 더 남겼더라면 하나님의 저울대에서는 만족했을 것인데 그는 남기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어보고 달아보니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일이나 하나님 앞에 연보를 드리는 일이나 직분에 충성하는 일이나 전도하는 일에나 하나님의 저울을 갖고와서 하나 하나 재어보고 세어보고 달아봅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버립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19장 므나비유에서는 충성된 종은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겼기에 하나님 저울대에 만족하였음으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네게 많은 것으로 맡기리니 하면서 열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십시오. 하나님의 저울대위에 충성된 자로 인정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이 땅에서도 열 고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충성된 자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복, 하나는 더 많은 일을 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인생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살아가야 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하기 위한 것이니 어떤 일,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고 보람된 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 교회생활하면서 하나님 일에 바쁘고, 하나님 일이 막 밀리고 하는 사람은 이미 복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충성된 자로 인정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생활하면서 아무데도 쓸데가 없다. 난 할 일이 없다.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일 많은 것이 복입니다. 회사에도 일 많아야 복이고, 공장에도 일 많아야 복입니다. 한나의 믿음은 행동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한나가 울었던 것, 그 눈물이 하나님의 저울대에 올려졌습니다. 한나의 기도의 양이 금향로에 담겨지는 그 무게가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할만큼 되었습니다. 그래서 행동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으로 그는 외칩니다. 사람은 모릅니다.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지 그러나 성령님은 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감독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신 하나님, 사람이 보는데서만 열심이 있는 것과 사람이 안보면 게으른 사람은 외식하는 사람이요, 위선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보든지 안보든지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하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저울대위에서 내가 하나님이 기뻐할만큼 행동을 해야될 줄로 믿습니다. 주여! 주여! 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 행함의 저울대위에 우리가 올라가서 하나님 편으로 우리가 기울어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전도라고 하는 그 부분을 하나님의 저울대위에 올려놓는다면 어떤 무게가 나가겠습니까? 베드로는 하루에 3천명씩 전도했다고 합니다. 무디(D. L. Moody)는 백만명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3백만명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평생에 몇 명을 전도합니까? 전도의 저울대위에 나는 과연 얼마나 나갈까? 주님이 기대하는 데까지. 벨사살왕은 하나님의 저울대위에서 세어보고 달아보니 모자라서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버림받는 사람이 아니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네게 많은 것으로 맡기리니 네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는 이런 복된 음성이 들려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저울대위에 언제 달리는가? 그것은 시험을 당할 때 저울대에 달립니다. 그 사람이 유능한 사공인지 아닌지는 홍수 날 때 노 젓는 모습 보면 알고, 힘이 얼마나 센지는 씨름 시켜보면 알고, 실력을 알려면 시험 쳐보면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 저울대 위에서 만족할 만큼 무게가 나갈 수 있는지 언제 드러날 수 있느냐면 시험 당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 저울대에 올려놓아 보았습니다.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백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하나님보다 이삭을 더 사랑하는지 시험해보는게 바로 저울대위에 놓는 것입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저울대위에서 모자란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믿음을 보였으니 그 아들을 믿음으로 바쳤습니다. 바쳤을 때 신바람 나서 바쳤습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인정과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킬 때 모든 말씀을 다 기쁨으로만 지키는게 아닙니다. 때로는 억지로 십자가 질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가 마지막 한 움큼 되는 밀가루 가지고 음식 만들어 가지고 오라고 할 때 콧노래 부르면서 신바람 나서 갖다 바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배가 고픈데, 내 아들 굶고 있는데, 그렇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한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 지겠다고 달려나와서 십자가 졌습니까? 구경나왔다가 억지로 붙잡혀서 십자가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억지로 십자가 져도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기쁜 것만 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완전히 내가복음에 사로잡혀서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때로는 부담될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눈물 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저울대위에서 하나님 편으로 기울어지기 위해서 순종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시험을 만나면 두 마음으로 갈등에 빠집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우리를 갈등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때에 깨어있고 말씀에 무장되어 있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워도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생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해 하고 좁은 길로 갑니다. 그런데 영성이 약한 상태에서 시험을 만나면 넘어져버립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시간마다, 매일마다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데 그 때 여러분, 주님을 위하는 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있어서 때로는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고, 기쁜 마음이 아니고, 억지로 할 때도 있다는 것 기억하십시오. 억지로라도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제가 요한 웨슬레의 전기를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는데 1738년 5월24일 올드스게이트라고 하는 조그만 마을에서 수요일 밤예배에 요한 웨슬레가 참석했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교회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때로는 교회 가고 싶지 않은 때도 있지 않습니까? 비바람 몰아치고, 눈보라 휘몰아칠 때도 그렇지만 하여튼 이러저러한 일로 교회 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겼습니다. 그래도 오늘 삼일기도회니까 가야지! 그런데 그 날밤에 주님을 만나고 그 날밤에 성령 받고 그날 밤에 새로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제 경험도 평신도 때 때로는 어떤 사정이 있어서 힘들어 오늘만은 쉴까? 오늘은 그만둘까? 그렇게 생각이 들어왔을 때 물리치고 그 날 가면 그날따라 눈물 콧물 흘리고 은혜 받았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교회 오고 싶을 때도 오십시오. 오기 싫을 때도 오십시오. 그러면 더 은혜 받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밤에도 오고 싶어서 온 분도 있지만, 그냥 마지못해서 오신 분도 있을텐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은혜가 더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기쁨으로 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쁨으로 하면 좋지만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기뻐서 찬송 부르면서 십자가 지셨습니까? 넘어지고 쓰러지셨다는 그 말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꼭 자기 감정에만 맞추지 말고 말씀에 맞추어 사십시다. 한나의 믿음은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감정은 자꾸 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그 믿음을 그가 가졌습니다. 기도하는 한나의 기도 속에서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을 볼 수 있는데 그는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을 믿었습니다. 5절 말씀에,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들은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식을 둔 자는 쇠약하도다. 이것은 역전된 새로운 변화를 말합니다. 전에 유족하던 부자였던 사람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잉태치 못하던 임신이 되지 않던 자는 자녀를 일곱을 낳았다. 한나는 전에는 정말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기도하고 하나님 기뻐하는 대로 행했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는 일곱 자녀를 낳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가 일곱을 낳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곱이란 말은 많은 자녀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나는 세 아들과 두 딸, 사무엘까지 여섯을 낳았습니다. 아이를 하나도 낳지 못하던 한나가 육남매를 낳았습니다. 결국 나중된 자가 먼저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열매가 없고 지금은 내가 곤고한 것같고 누군가로부터 멸시 천대를 받은 것같고 너무 힘들고 어렵고 그래서 한나가 아이를 낳기 전에 번민에 쌓이고, 번뇌에 쌓여서 울면서 몸에 경련이 일어나기까지 기도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중된 자로 먼저 되게 하신 6남매의 자녀를 낳게 하신 그런 은혜가 있는 것이니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에 나타난 한나의 믿음, 6절에서 8절 말씀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느니라.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느니라.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한나의 이 기도 찬송, 찬송하며 기도하는 한나의 모습 속에서 위대한 믿음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 죽고 사는 것, 부자 되고 가난하고 높아지고 낮아짐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 믿음이 위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욥이 그 믿음을 가졌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라. 사람이 어떠한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모든 것은 내 노력에 달려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에 따라서 죽은 믿음을 가지면 어떤 역사도 없습니다. 적은 믿음의 사람은 책망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해서 순종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는 그런 사람에게는 표적이 따르는 역사가 있게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한나의 슬펐던 날들이 기쁨의 날들로 바뀌어졌습니다. 가장 상처많은 여인이 가장 영광스러운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의 사람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신앙생활이나 생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이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지시기를 바랍니다. 이전에 주 앞에 돌렸던 영광보다 이후에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손에 인간의 생명이 달려있습니까? 살고 싶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자로 낙인찍히면 하나님이 그 생명을 거두어 갑니다. 헤롯왕을 하나님의 사자가 치니 충이 먹어 죽었더라. 그러나 다니엘은 죽기를 각오하고 기도했더니 사자굴에서도 살려 주셨더라. 죽었던 나사로, 나흘이 되어서 몸이 썩어가고 있는데도 주님이 살리셨더라. 하나님 앞에 쓸모있는 사람, 하나님의 교회에 공적인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 세계선교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이면 병든 사람도 고쳐 쓰시고, 망한 사람도 복빌어 쓰시고, 죽은 사람도 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는 사람은 죽기까지 충성하고 전부 주앞에 맡겨드리고 말씀 지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되는 줄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3: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또한 내가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하나님 그 기둥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리라.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우리 모두 한나가 믿었던 하나님, 우리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한나에게 응답하신 하나님, 우리에게도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한나에게 복주신 하나님, 우리에게도 복주실줄 믿습니다. 우리는 한나처럼 기도합시다. 우리도 한나처럼 우리의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합시다. 우리도 한나처럼 제사장을 의지하며 나는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한다고 무릎꿇고 기도를 받는 이런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실 때 한나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기도에 나타난 그의 믿음이 9절-10절에 나옵니다.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중에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이 한나의 입을 통해서 장차 나타날 왕, 거룩한 왕, 다윗이 왕으로 성장될 것을 예언했고, 이 다윗은 결국 기름부음 받은 자로 표현한 것은 장차 메시야가 올 것까지 예언했으니 성령충만을 받게 되면 장래 일까지 말하게 되었습니다. 한나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더니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까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나처럼 믿음을 갖고 살면 육신의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신령의 세계의 비밀도 알려주시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실 줄 믿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 그리스도 그 분이 거룩한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는 날, 한없는 평안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만족함을 줄 것이니 그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 외에 구원자가 없음이니라/ 호세아/ 호13:1-4/ 2002-03-28
나 외에 구원자가 없음이니라/ 호세아 호13:1-4 에브라임이 떨면서 말할 때에는 이스라엘에서 자기를 높였거니와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할 때에는 죽었느니라 이제 그들이 더욱더 죄를 범하여 자기들의 은으로 자기들을 위하여 형상들을 부어 만들되 자기들이 깨달은 대로 우상들을 만들었으니 이 모든 것은 장인들이 만든 것이라 사람들이 그것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희생을 드리는 자들은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사라지는 새벽 이슬 같으며 타작마당에서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겨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니라 그러나 나는 이집트 땅에서부터 주 네 하나님이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알지 말지니 이는 나 외에 구원자가 없음이니라(호세아13:1-4) 우리는 가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어린 아이일수록 자신의 자리를 알고 더욱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가령 예를 들면 아이들은 그들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필요하면 엄마에게 다가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 비싼 장난감이 필요하면 아빠에게 달려가 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상황은 매우 달라집니다. 그들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를 모른 채 서 있습니다. 그리고는 망설임을 거듭하다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하지만 그들은 돕는 채 하고는 곧 상처만을 남기고 그의 곁을 떠나 버립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그뿐께 데려오매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거늘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하늘의 왕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마태복음19:13-15) 예수님께서 하늘의 왕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그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분명하게 구하고 의지하는 자들의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오직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하나님 한 분뿐임을 알고 그분께 구하며, 의지하고 충성하는 생애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문제를 해결하셨고, 그들이 필요할 때마다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난 후에는 그들의 구할 대상을 잃어버리고 방황을 거듭하다가 오히려 우상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문제를 말하고 해결 받으려는 어리석음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집트 땅에서부터 주 네 하나님이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알지 말지니 이는 나 외에 구원자가 없음이니라(4) 하나님은 지속해서 그들을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는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버지를 곁에 두고 다른 사람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곁에 두고 우상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은 이유 하나님은 그들의 심각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따라야 할 이유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기 전 광야에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계셨습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외면했고,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초장이 내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매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서 나를 잊었느니라(6) 하나님께서 광야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들을 지키시고 돌보심으로 그들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풍족한 생활은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편안한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고 오히려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잊고 오히려 우상에게 다가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곤고하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다가와서 은혜를 구함으로서 평안하고 풍성한 삶을 지내지만 오히려 점차 하나님을 잊어가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들이 가진 물질은 자신의 정욕대로 사용하고, 교회에서 적당한 명예나 지식을 소유하게 되면 오히려 교만해져서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가난이 주는 유익함 때로는 가난함이 우리의 신앙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이 가난은 우리의 영까지도 가난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을 훼손시킬 부요함이라면 우리는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5:3) 그 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마태복음19:23,24)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생각한다면 주님 앞에 부요함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자들이 복음의 순수함으로부터 이탈하여 거짓 진리와 속임수로 교회들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들일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복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육신이 가난하다 할지라도 전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우리의 구원에 있습니다. 부자가 되어서 더욱 큰 구원을 이룰 수 있다면 부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이 그에게 유익하다면 가난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의지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이 있다면 야게의 아들 아굴의 대언의 말씀인 아래와 같은 내용일 것입니다. 헛된 것과 거짓말들을 내게서 아주 멀리 옮기시오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알맞은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는 내가 배불러서 주를 부인하며 말하기를 주가 누구냐? 할까 염려함이오며 또는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할까 염려함이니이다(잠언30:8,9)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의 멸망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들의 멸망은 실로 비참합니다. 새끼 잃은 곰같이 그들을 만나서 그들의 심장 꺼풀을 찢고 거기서 사자같이 그들을 삼키며(8),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이 오래 머무름과 같다고(13)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의 최후는 멸망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보실 수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일에 대하여 관대하시며,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언제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와 함께 머물러 있는 동안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일을 하실 수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지식으로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함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함도 아니라 오직 너희 불법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서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고자 하지 아니하심이라(이사야59:1,2)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계속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와의 관계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 안에서 머물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으십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받은 구원에는 변함이 없을 수 있겠지만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면 우리는 결국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로마서8:13) 이 일들을 위해서 주님은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즉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모습들을 제거해 가실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의 모습들을 몰아 내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성령 안에서 사는 자들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참 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와 더불어 살지 않습니다. 그도 성령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죄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멸망 가운데서 구원을 약속하심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분명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그들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약속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무덤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으로부터 구속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4). 결국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멸망받기를 원치 않으시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린도전서15:55-57) 무덤과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결국 율법아래 살던 자들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온 인류의 유일한 희망임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의 죄로 인한 멸망의 상태에서 건져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이미 예비 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한 이후로는 더 이상 상관이 없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 예수님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멸망에 이르지 않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아는 자라면 그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가 될 것입니다. 즉 많은 이들을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전하는 일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부디 이 멸망의 세대에 주님의 복음을 들고 충성스럽게 전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아담, 나의 하와/창2:18-25
나의 아담, 나의 하와/창2:18-25 2011-07-11 22:40:08 read : 2 1. 태초로부터 가장 신비롭고 수수께끼같은 관계 - 남녀 관계 1) 본문의 문제 의식 - 왜 남녀는 그렇게도 하나가 되려고 하는가? 에 대한 신앙적 답변이다. 2)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홀로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배필인 하와를 창조하셨다. 방법 - 아담을 깊은 잠에 빠트리고 그의 갈빗대를 하나 빼내어 여자를 창조하였다. 이것은 여성이 남성의 전체 몸 중에서 갈빗대 하나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 또는 지배를 정당화했다. 3) 지금도 중동 지방에서는 일부 다처제. 여성은 길에 다닐 때 얼굴을 가리는 차도로를 써야 한다고 회교에서는 규정하고 있다. 중동 지방의 여성 운동은 차도르 벗기 운동에서 시작한다. 캐돌릭에서는 아직도 여성 사제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개신교에서도 바울이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고 해서, 중요한 권한을 빼앗고 있다. 세속의 제도는 이미 남녀 평등을 이루고 있는데, 세속의 법보다 진보적이어야 할 종교에서 구시대적인 남녀 불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4) 하나님이 지어주신 자신의 배필을 보고 아담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외친다. 한 사람의 남성과 여성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면 아이를 낳는다. 아기 - 남녀가 다시 하나의 육체를 이루는 신비한 사건이다. 아기를 가만히 들여다 보라 - 반드시 부모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친가, 외가 쪽 식구들의 형체까지 간직하고 있다. 부분별로 정확하게 나눌 수도 없다 - 이것은 완전한 하나다 : unity 한 아기는 그저 별개의 생명체라기 보다 남자와 여자의 완전한 결합이다. 5) 남녀가 사랑하여 아기를 통해 하나의 육체를 이루려는 욕구는 어디서 오는가? 오늘 성서는 태초에 지어주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요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담은 하와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아담과 하와는 서로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아무리 해도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일체의 관계다. 6)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과 하늘의 짐승들을 주신다. 아담은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면서 그들의 지배자가 된다. 아담 주위에는 갖가지 생물들이 모여들고 그의 친구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담의 고독이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아담과 같은 동류의 짝을 통해서만 아담은 외롭지 않은 온전한 모양을 지닌다. 그러므로, 아담은 완결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인(人)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다. 인간은 본래 남녀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을 때만 인간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누구도 나눌 수 없다'고 선언하셨을 때, 그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것 - 인부부가 서로 떨어져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2. 본질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부부가 나뉘어 지는 것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긴다. 오늘 우리는 분리할 수 없는 남녀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해야 한다. 신혼 여행 갔다 오는 길에 법원에 가서 이혼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한 평생을 같이 살아온 노부부가 함께 삶을 정리해야 할 시기에 갈라서는 황혼 이혼이 늘고 있다. 우리는 나뉘어서는 결코 인간을 이룰 수 없는 부부의 관계를 창조 본래의 모습으로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고, 미리 예방해야 한다. 진지하게 서로가 노력해야 한다. 1) 처음 사랑했던 과거를 아련한 추억 속에 묻지 말라. 연애와 결혼 사진을 자주 들여다보며, 처음 사랑을 간직하라. 결혼 등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라. 처음 결혼을 결심할 때의 마음 - 가난, 질병, 가정 분위기, 직장 등 그 어떤 것에도 우리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는 확신을 녹슬게 하지 말라. 요즘 95년부터 주보 모은 것을 들여다본다 - 참 재미있다. 느낌이 새롭다. 처음 교회 와서 지니고 있었던 감정과 사랑을 다시 끌어올리게 된다. 2)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라. 너는 너이기 이전에 나다 -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다. 나와 너는 둘이 아니다, 하나다. 타성에 젖지 말자 - 서로 가장 뜨겁게 사랑할 때의 마음과 예의를 다시 찾아야 한다. 기사도로서의 남성을 다시 회복하자. 어떤 어려움도 저 남자와 함께 라면 헤쳐갈 것이라는 여성 고유의 모성적 사랑을 잃지 말자. 3) 서로를 신뢰하라.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도 내 인생을 건 나의 반쪽은 믿어서 결혼한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주 먹으면 식상하다. 옷도, 집도, 문화 생활도 되풀이되면 싫증이 난다. 동물은 싫증내지 않는다 - 그래서 동물은 수 천년 동안 생활을 변경시키지 않는다. 인간만이 새로운 것을 찾는다 - 이것인 인류 문화 발전의 동력이다. 아무리 사랑한 부부도 오래 살면 싫증날 때도 있다. 그러면 안되지만 잠시 한눈을 팔거나 방황할 때도 있다. - 그러나, 분명 내 반쪽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신뢰를 잃지 말자. 의처증, 의부증 - 또 다른 나를 의심하는 무서운 질병이 번지고 있다. 에이즈나 홍역보다도 무서운 병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그쳐서 강제로 꼭 붙잡아 매려고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을 철저하게 믿어준다. 의심가는 구석이 있고, 신뢰를 흔드는 요소가 있어도, 추궁하고 닥달하는 것보다는 사랑과 신뢰를 계속해서 확인한다. 4) 창조 때부터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부부는 온전한 하나일 때 진정한 인간이 되는데, 그것은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가능하다. 남편이 보기 싫고 얄미운가? 그를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라. 아내가 야속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멋있지 않은가? 아내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라. 기도는 시간이 지나면 식을 수밖에 없고 싫증날 수밖에 없는 부부의 사랑을 계속해서 뜨겁게 해주는 가장 확실한 도구요, 접착제와 같다. 남편이 행복해야만 아내도 평안할 수 있다. 아내 가 마음으로 화평해야만, 남편도 건강할 수 있다. 3. 아담과 하와는 서로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아담이 곧 하와고, 하와가 곧 아담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 한 쌍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는 옛날과 비교해서, 부부가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은 시대다. 그래서, 세상은 악하다.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것도 우리를 조성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처음의 사랑을 잃지 않는 다양한 방법을 찾으라. 서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던 시절로 돌아가 서로 최선을 다하라. 아무리 의심이 독버섯처럼 돋아나도 그보다 더 강한 신뢰의 칼로 의심의 싹을 자르라. 더욱 진실하게 신뢰를 학인하라. 그리고,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라.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위기를 미리 예방하고 새로운 사랑과 생동감을 찾아가는 지혜와 믿음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란다.
네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호세아/ 호12:3-6/ 2002-03-28
네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호세아 호12:3-6 야곱이 모태에서 자기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았고 또 자기 기운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겨루되 참으로 그가 천사와 더불어 이겼고 울며 간구하였으며 그분께서는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곧 주 만군의 하나님이시로다 주는 그분을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러므로 너는 네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긍휼과 공의를 지키며 계속해서 네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세아 12:3-6) 이스라엘은 본래 보잘 것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집트로 들어갈 때만 해도 야곱의 식구 70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초라하기 짝이 없는 민족을 번성하게 하셔서 이제는 한 민족에 두 나라를 이룰 정도로 강대한 민족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의 민족을 축복하신 결과입니다. 에브라임이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황폐함을 더하여 아시리아 사람들과 언약을 맺고 기름을 이집트에 실어 보내는도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오히려 주변의 강대국을 의지함으로서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람을 먹는다는 말은 헛된 일만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동풍을 따라간다는 것은 멸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나라가 겉으로는 강대해져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감으로서 멸망을 목전에 두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부족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 가장 막강한 나라를 형성할 수 있었으며, 가장 안전한 상태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요함은 오히려 극심한 불안의 상태에 이르도록 만들었습니다.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사2:22)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육신의 부요함은 때때로 나태한 신앙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유혹과 욕심이 그들을 잡아 끌 것이며, 혼란스럽게 할 것입니다. 그 까닭에 사도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의 뒤를 쫓았으며, 스스로 연약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흔적도 보입니다. 바울과 같은 사도은 스스로 가진 지식, 명예, 권세 등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만큼 자신을 버리는 일에 집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빌3:4-9). 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부요함을 누리기 위하여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에큐메니칼을 추구하고 있는 단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자신들이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적당한 타협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한국의 기독교 역사도 그야말로 순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초기 순교자들의 자녀들이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이 나라의 교회 역사를 주도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부요함과 더불어 이제 그들은 변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더 이상 복음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가톨릭을 포함한 비진리 단체와 연합을 시도하고 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진리 안에서 온전함을 추구하는 교회들을 핍박하는 자리에 서서 열심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요함이 주님과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요하거나 가난하거나 변함 없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깨어있는 자세로 주님의 뜻을 알고 행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이 주는 교훈 주님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2) 야곱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까닭은 현재 이스라엘의 상태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의 야곱의 상태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돌아오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포함한 것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야곱의 어떠한 모습을 닮았을까요? 야곱이 모태에서 자기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았고(3)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말은 히브리 말로 '아캅'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속이다', '배반하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장자권을 빼앗는 장면과 에서를 대신하여 축복을 받는 장면을 통하여 그의 이름에 걸맞는 교활함과 속임수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간교함은 후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듯 했지만 사실상 우상을 섬기는 이중적인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결코 속으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미 그러한 그들의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며, 급기야는 그들을 멸망시키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바로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들은 겉으로 순수한 복음을 말하면서 참 진리, 참 교회를 주장하지만 실상은 물질과 성도의 수, 그리고 목회자의 명예가 우선되어 움직이고, 성도들은 물질, 건강, 육신의 형통함에 매달리는 모습은 바로 속이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적인 것들이 이미 그들 가운데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은 반드시 멸하실 것입니다. 자기 기운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겨루되 참으로 그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겼고 (3,4) 야곱이 주님과 그의 가족들을 속인 이후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겨루어 이기는 놀라운 능력을 과시합니다. 이 말씀이 때로는 하나님께 갈급한 심정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져서 많은 이들에게 은혜를 끼치기도 하지만 그가 아직도 육신적인, 즉 인간적인 힘으로 하나님과 겨루었다는 사실만을 생각한다면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리 권할 만한 방법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조심스럽게 취급되는 이유는 이러한 육신적인 행위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잘 못 된 진리에 오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상태와 야곱을 비교한 이유는 야곱의 육신적인 행동을 지적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이미 이삭의 축복을 받은 상태였지만 아직도 육신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이유로도 하나님 앞에 인간적인 방법을 가지고 성공적인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인간적인 행동의 모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뜻대로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전적인 순종의 삶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에 우리는 그분을 주님(Lord)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요구사항은 대부분이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요구를 집요하도록 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 보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자신의 뜻을 포기했고, 바울 역시 자신의 질병에 대한 치유의 기도도 포기하고 오히려 약한데서 더욱 강한 능력이 나옴을 믿고 그의 사역을 지속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있는 기도나, 간구가 더욱 훌륭한 신앙으로 이끌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청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시될 수는 없지만 기도량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육신의 욕심들을 버리고 온전한 순종이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이 시리아 지방으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한 아내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한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지켰고(12) 야곱은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약속의 땅을 떠나 시리아(메소포타미아)로 떠났습니다. 그는 떠날만한 충분한 명분과 사연을 가지고 떠나지만 그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사실은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떠났고 시리아에서 아내를 얻기 위하여 종 생활을 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 나그네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야곱이 그의 부모의 곁을 떠나서는 종의 신세가 되었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자리는 종입니다. 결국 세상은 그를 이용할 것이며, 그가 속이는 것보다 더욱 많은 속임수로 그를 괴롭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이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연약했을 때에도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할 때에는 감히 그들을 당할 민족이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안전한 나라를 이어갔지만 하나님을 떠나서는 비록 강해진 것 같이 보였지만 오히려 약하고 굴복하며 이웃 나라에 뇌물을 바치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1).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없었을 때 종의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없다면 어떤 상태일까?'를 생각한다면 사실 끔찍한 일입니다. 그 신분은 즉시 자녀의 신분에서 종의 신분으로 바뀌어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떠났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속이는 자들과 고통스럽게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눅15:11-3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버지의 품에 있던 아들이 그 곁을 떠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뿐이었습니다.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출석해온 어떤 이들도 교회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막상 그들에게 닥치는 것들은 힘겨운 삶의 투쟁에 대한 것들입니다. 아들은 아버지 품에 돌아옴으로서 행복한 삶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네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그러므로 너는 네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긍휼과 공의를 지키며 계속해서 네 하나님을 바랄지니라(6) 비록 야곱의 생애가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보여질 수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복 주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심각한 죄의 상태에 머물고 있는 그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인들이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은 죄로부터 돌이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과 공의를 지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돌이킴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우리의 상태를 대변해 줍니다. 그들은 죄인의 모습 그대로이며, 교만한 삶과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 생활을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사실상 그들에게 희망이 없듯이 우리에게도 희망이 없습니다. 이미 멸망을 결정하시듯 우리 또한 멸망을 결정하신 상태입니다. 끝없는 속임수와 인간적인 열심,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모습들은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돌아오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셨고 우리는 지금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할렐루야.
방황하는 인생 하갈/ 창21:12-19/ 2002-03-21
방황하는 인생 하갈 창21:12-19 할렐루야 ! 이 시간은 " 방황하는 인생 "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인생이 세상에서 방황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방황하고 싶어서 스스로 방황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한 여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모자의 모습을 그들의 방황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곧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방황하는 자는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길을 찾아야 할 줄을 믿습니다. 1)방황하는 이유부터 생각해 봅니다. 1: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쫓겨난 인생들도 여럿이 보입니다. ①아담과 하와입니다.(창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내어 보내어" 라는 말은 버리다. 내던지다, (멀리)보내다, 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단의 유혹하는 말을 듣고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명하고 강경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단의 거짓말에 속았던 것입니다. 거짓말에 유혹되어 죄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났는데 하나님이 버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버려진 인생에 찾아온 것은 죽음, 늙음, 고통스러운 질병, 불안, 미음, 시기, 증오, 온갖 가시덤불 같은 저주의 환경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이 결과로 인생은 죄악된 세상에서 방황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②하갈과 이스마엘입니다. (창21:14)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습니다. 이스마엘을 잉태중에 쫓겨났고 본문의 경우에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것이 화근이 되어 쫓겨난 것입니다. (창16:4)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고 하였습니다. "멸시" 하였다는 말은 어렵게 생각하며 섬기던 주인을 아주 가볍게 생각을 한 것이고, 천하게 생각한 것이고 없신여긴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종의 위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후에 이스마엘이 하갈과 같이 쫓겨난 것에 대해서 (창21: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고 하였습니다. 희롱이란 말은 경멸하면서 비웃다, 놀다, 조롱하다. 인데 이스마엘은 이삭을 완전히 바보 이상으로 취급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이스마엘은 하갈과 더불어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③탕자가 집을 나가 방황하였습니다. (눅15: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 말은 탕자에게 있어서 고통과 방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는 불씽한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2)길을 찾지 못할 때 인간은 방황합니다. 1:요셉이 방황을 하였습니다. (창37: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이는 요셉이 아버지의 지시로 형님들을 만나기 위해 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찾아가니 형들은 아버지가 일준 장소에 있지 아니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방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길을 잃은 자는 방황하게 됩니다. 헤매이게 됩니다. 어디에 가서 형들을 찾아야 할지 참으로 답답하였습니다. 성도에게는 믿음으로 인하여 여유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기도해야 할 줄을 믿습니다. 죄로 타락한 세상에는 영적으로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생들이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길이 생명과 구원의 길인지 어느 길이 멸망으로 가는 길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백성들에게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잠 3: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간이니라 고 하셨지요.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하셨고,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라고 하셨습니다.(사8:21-22)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절망속에 방황하면 더 큰 절망속으로 빠져들고 시험중에 방황하면 더 큰 시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사울왕이 방황하였습니다. (삼상13:8)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울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실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흩어지고 사기는 저하되는 상황속에서 사울은 몹시 난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곤란한 일이 생겨도 방황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에게 응답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기다리지를 못하였습니다. 자신이 선지자를 대신하여 벗어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경우는 방황하지 않지 않았습니다. 앞에는 홍해바다가 그를 가로막았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하여 좇아온 가운데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출14:15-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길을 찾지 못할 때 방황하며 헤메이지만 믿고 기도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크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믿으기 바랍니다. 3)방황하는 하갈의 방성대곡을 봅니다.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라고 본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하갈의 모습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1:살 한 바탕쯤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화살을 쏟았을 때 날아가서 표적물을 맞추는 사정 거리를 말합니다. 왜 이러한 거리를 띠고 기도하게 되었을 까요? 여기에 대해서 본문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첫째는 기도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을 때에는 그 무엇에도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가족은 먼저 강을 건너게 한 후에 자기 혼자 남아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그 무엇에도 걸림이 되지 않아야 하고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2: 마주 앉아 바라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 이스마엘이 죽어가려고 고통하는 모습을 보면 하갈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여유있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자기 아들을 보면 어머니로서 태평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방성대곡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나인성의 한 외로운 여인이 자기 아들 독자를 의지하며 키웠는데 그 아들이 그만 죽었습니다. 여러분 죽음이란 서열이 없습니다. 나인성 과부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고 참으로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관을 따라가며 목놓아 방성대곡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죽은 그 아들을 살려 주셨던 것입니다. 하갈도 그랬습니다. 결론 세상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방황토록 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길로 인도 하셨습니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방황하는 하갈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의미하고 기도하여 응답 받아 복을 받는 성도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부흥케 하옵소서/ 하박국/ 2002-03-29 14:50:03 read : 1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박국3:1-19 우리는 나를 잘되게 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나를 망하게 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복을 주고 교인수를 많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성경과는 동떨어진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박 국 선지자가 말씀을 통해 깨닫고 찬양하며 그 구원의 하
부흥케 하옵소서 2002-03-29 14:50:03 read : 1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박국3:1-19 우리는 나를 잘되게 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나를 망하게 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복을 주고 교인수를 많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성경과는 동떨어진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박 국 선지자가 말씀을 통해 깨닫고 찬양하며 그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 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하나님입니다. 유다가 언약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오히려 피와 강포가 가득함으로 인하 여 하박국 선지자는 고민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바벨론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더욱 놀라며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가 발견하 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으로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입 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義)가 와야 함을 발견합니다. 즉 메시야를 통하여 죄 인의 부패한 중심을 바꾸어 놓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교회가 많아지고 많은 사람이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 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많은 것같습니다. 또 우리는 교인이 많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예루살렘 을 폐허로 만드시고는 그 위에 새로운 주님의 공동체를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 하박국 선지자는 하 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박국 3장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받은 충격에 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먼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 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2 절)라고 했습니다. 보통 이 구절의 일부 특히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 옵소서"라는 구절만 떼어서 교회의 일년 표어로 사용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 습니다. 마치 이 구절에서 "주의 일"이라는 것이 교회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 이 다 주의 일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숫자적으로 부흥하 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흥인 것처럼 생각되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라면 반드시 부흥, 성장, 발전이라는 것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성장, 발전, 부흥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를 우리 교회에 모실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우리 교회를 얼마만큼 부흥 시킬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목회자도 신학교를 처음 나왔을 때 에는 말씀대로 순수하게 해 볼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요구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에는 목회자도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목회의 방향을 잡습니다. 교인들이 원 하는대로 하는 것이 교회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고 좋은게 좋은 것 아니냐고 자위하면서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언(?)을 들먹이면서까지 교인수 늘 리기에 급급합니다. 서로가 교회를 통해 살아남자는 의도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말씀은 결코 오늘날 교회의 숫적인 부흥을 지지해 주거나 그 당위성을 뒷받침 해 주는 구 절이 아닙니다. "주께 대한 소문"이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여기서 "주의 일"이란 바벨론을 들어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시겠다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즉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벨론을 들어 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시겠다는 주의 일이 수년 내에 속히 이루어지게 해 달 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 고 하는 간구는 속히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루어주옵 소서라는 간구입니다. 그러면 하박국 선지자가 지금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 입니까?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 유다를 멸망시키고 그 위에 하 나님의 새로운 백성들로 세우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절 하반절에 보면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베푸시는 중에 긍휼을 입은 자를 남기셔서 자기 백성으로 자기 나라를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유 다(이스라엘)를 다시 살게해 달라는 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3 절)라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데만"은 에돔이 있는 세일 산입니다. 신 명기 33:2에 의하면,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 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 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바로 이 장면을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불러서 유다 를 멸망케 함으로 스스로 언약을 파기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이방인들 가운데 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시고 자기 백성을 찾으신다는 것입 니다. 8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라는 말 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 이하부터 언급된 표현들은 전부 출애굽을 연상케 하는 말씀들입니다. 특히 11절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서 싸울 때에 해와 달이 기브온과 아얄 론 위에 머문 것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참고 수10:12이하). 그러한 출애굽과 같은 구원을 새롭게 다시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 보다 더 크고 놀라운 구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남은 자를 새롭 게 부르시어 언약을 이루어 가시겠다는 뜻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에 의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로 이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 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다 드러내셨나이다"(13절)라고 노래하고 있 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인간들의 죄인됨을 폭로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서입니다. 하박국은 바벨론의 침략이 엄청나게 무서운 것이고 이번 전쟁으로 인해서 모든 나무의 소출을 다 잃어버리고 가축까지도 다 빼앗겨버릴 것을 알았습니 다. 그래서 그것을 들었을 때에 "창자가 흔들렸고 입술이 떨렸으며, 뼈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두려움이 갑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메시야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 자신의 새 생명을 보존하실 것을 바라보았기에 바벨론의 침공을 두려워할 수 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렐론의 침공으로 이제 더 이상 율법으로 버틸수 없 는 유다는 빨리 망하고 율법을 온전케 하실 메시야가 빨리 오시기를 기대하면 서 속히 언약이 성취되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이러한 구원의 하나님이 오히려 자신에게 힘 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자신의 언약대로 구원을 이루시 는 하나님만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사슴과 같이 자유롭게 다니 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죄에게 자유하게 하신 주님의 십자가만 이 우리를 죄악의 험난한 곳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의 소출이나 밭의 식물, 소나 양이 풍성하다 는 것은 부유함의 상징입니다. 먹고 살 수 있는 조건들이 완벽하다는 것입니 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다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마음이 뺏길 수 없 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세상적인 풍성함이나 부유함의 상징이 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신다고 할지라도 세상 것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망하게 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의 양입니까? 외양간의 소입니 까? 우리의 소출입니까? 내 직장입니까? 나의 자존심입니까? 무엇입니까? 우 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주님께서 허물어 버리실 때에 다시 주님의 십자가 가 되새겨지고 그 앞에 무릎 끓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신자입니다.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문제점/ 창3:1-7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문제점/창3:1-7 2011-07-12 22:11:25 read : 4 이스라엘을 다녀온 어느 관광객의 재미있는 체험담이다. 들판 양쪽에 풀밭을 두고 가운데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는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이쪽 풀밭에서 길 건너 저쪽 풀밭으로 양떼를 건너가게 하기 위해 한 목동이 피리를 불며 양을 인도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목동이 갑자기 배가 싸르르 아파 오면 서 용변이 급해졌다. 그는 불던 피리를 멈추고 저 멀리 있는 풀밭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1,000여 마리 되는 양이 길 위에 멈추어 섰다. 오가던 수많은 자동차들이 일제히 서야 했다. 차들이 전조등을 켜보고 경적을 울리며 운전자들이 고함을 쳐도 양떼는 길 한가운데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일을 마친 목동이 돌아오고 다시 피리를 불자 양들은 서서히 움직이며 길을 벗어나 건너편 풀밭으로 갔다고 한다. 순종의 훈련이 대단히 잘된 양들이다. 목동의 피리소리에 온전히 순종하는 양떼라. 멋지지 않은가? 마약에 성도들이 그처럼 우리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목동이 피리 소리를 그치고 볼일을 보러 풀밭에 들어갔을 때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양들, 그래서 목동이 길가로 왔을 때는 이미 사방에 흩어져서 목동이 찾아다니느라 죽을 고생을 해야하는 양들, 그런 양들의 모습이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극단적인 생각일까? 사실 불순종하는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조차 보여졌던 일이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잘 다루고 있다. 1. 하나님의 명령과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1) 하나님의 명령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장) 2)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결과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함. 선악과를 따먹고 말음.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죄임. 그리고 아담과 하와 이래로 모든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함. 가인의 후예들에게서 노아의 홍수에서 바벨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서 특히 그리스도인들 속에서조차도 아마도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임.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라. 2. 하와에게서 보여지는 문제점 1) 말씀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음.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말씀에 더함. 하나님은 만지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음. 말씀을 약화시킴. 하나님은 죽을까 하노라가 아닌 정녕 죽으리라 하셨음.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장). 오늘날 성도들이 무너지는 요인. 말씀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다는 것. 설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잇다는 것. 그나마 그 설교조차도 정확하게 말씀에 기초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하는 것.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약화는 목회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자신이 말씀 위에 철저히 서지 못하고 당연히 성도들도 말씀 위에 굳건히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에 무지한 교인들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많다. 2) 사단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음 하나님의 말씀.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장) 사단의 말.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것은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심판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예루살렘에 심판이 임할 것이고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함락될 것이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찌니라 하셨다 하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렘 15장).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 심판하시고 싶지 않아서임.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임. 거짓선지자의 말. "1 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 오게 하겠고 4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렘 28장). 듣기는 좋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음.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함. 결국은 진짜 망하게 됨.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함. 오늘날도 누구 말을 들을까는 매우 중요한 문제. 성경. 하나님의 말씀. 예수만이 구원자. 행4:12. 요14:6. 세상. 예수는 여러 구원자 중의 한명이라고 함. 이 말은 예수 안믿어도 구원받을 길이 있다고 속삭이는 것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임. 세상의 사상. 흐름. 문화. 속삭임을 주의하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될 경우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분명히 하라. 하와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 3) 정욕에 마음을 빼앗긴 하와 선악과를 따 먹은 하와. 불순종. 죄.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하와의 불순종과 죄는 행동 이전에 마음의 문제였다고 하는 점. 다시 말해 마음이 먼저요 행동이 뒤를 따랐다는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마음을 빼앗기니까 나타나는 현상. 선악과가 너무 너무 좋아보임. 그 선악과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금하신 것. 그런데 그것이 너무 좋아보이는 것이다. 왜? 마음을 빼앗겼으니까. 세상이 너무 좋아보여서 그것 따라다니면 정신 못차리는 교인들. 왜 그럴까? 마음을 세상에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마음을 주님께 빼앗기면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주와 동행하는 삶이 가장 매력있어 보이는데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니까 놀러다니고 먹고 마시러 다니고 엉뚱한 짓하러 다니는 것이 재미있고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여러분의 마음은 혹시 세상에 빼앗긴 상태가 아닌가? 성경은 말씀. "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장) 4) 죄를 회개하기 보다 죄를 권함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 자신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을 알고 있음. 그런데 그녀의 행동이 이상함. 자신의 불순종을 회개하든지 남편 아담에게 상의하든지 해야지 오히려 남편에게 선악과를 권함. 남편을 공범자로 만들어버림. 교회 안에서 매우 무서운 죄중 하나. 죄를 지은 성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공범자를 만들어 버림. 자기 편을 더 만들려고 기를 씀. 교회의 내분은 이런식으로 발생하기도 함. 함께 망하려는 처사. 고라당. 250명의 족장을 끌어들임. 함께 망함. 3. 아담에게서 보여지는 문제점 1) 하와에게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음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아담. 창2:17. 그때 하와는 없음. 아담만 있음. 그러면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아는가? 아담을 통해서. 그런데 아담은 명확하게 가르치지 못함. (하와가 머리가 나빠서인가?^^) 그것이 사단이 틈타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됨. 이런 면에서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목사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함. 말씀 아닌 자기 자랑만 하는 목사 만난 교인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 그런데도 자기네 교회 목사가 최고라고 자랑하는 무식한 사람들도 있기는 함. 그러나 여러분은 분명히 깨달으시라.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목회자가 최고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함. 수산나의 교육방법 8가지 A. 벌의 공포심은 때로 아이들을 거짓말하게 하므로...이를 막기 위해 규칙을 세워 잘못을 범하고 죄책을 느껴 슬기롭게 고백하고 고치겠다고 약속하면 매질 하지 않는 것을 지켰왔다. B. 거짓말, 교회에서의 주일에 좀도둑질하는 것, 불순종, 언쟁같은 죄된 행동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지켜왔다. (내버려두면 안됨. 단 한번이라도). 주일 안지키는 것도. 효빈이에게 주일 성수를 훈련하기 시작 C. 같은 잘못으로 두 번 벌하지 않았다. (부모들이 참 못하는 것 중의 하나) D. 순종 특히 자기 고집을 억제한 순종에는 그 공적에 따라 칭찬만이 아닌 상을 주어 왔다. E. 아이들이 순종하는 행동이나(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동을 하려는 의도가 보였을 때는 비록 그것이 훌륭한 정도에 이르지 못하였더라도 받아 주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친절히 가르쳐 왔다. F. 아이들이 가진 물건의 소유권을 침해당하지 않도록 해왔다. 그것이 동전이나 핀 같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소유자의 동의없이는 가져갈 수 없도록 해왔다. G. 약속은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 요즘 젊은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약속을 지킬줄 모른다는 것) H. 딸들에게도 책을 잘 읽기까지는 일을 가르치지 않았다. (책읽게 하는 것 가장 큰 재산을 주는 것)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것. 하나님의 말씀. 철저하게 말씀대로 자녀를 훈련하고 양육함. 웨슬레. 자신은 한 책의 사람이 되겠다고 함. 부모들이여. 다른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쳐라. 철저하게. 말씀을 배우는 자리로 보내라. 2) 하와의 죄를 꾸짖지 않은 것 하와의 죄. 불순종. 아담은 꾸짖지 않음.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워서인가?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장) 그런데 잊고 있는 것. 사랑한다면 죄를 눈감아 주어선 안된다는 것. 비록 책망하다가 의가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성경은 정죄하지 말라고 했지만 책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한 책망이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다.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장). 물론 조심할 것이 있다. -너무 빈번하지 않아야 할 것임. 어떤 이는 늘 책망함. 늘 책망조임. -사랑없는 책망은 잘못임.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을 것임. -자기 의를 드러내는 책망은 죄악. 바리새인들의 외식. 다른 이를 책망함으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랑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 이런 것들을 조심한다면 책망은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요소임. 오늘 본문의 하와같이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을 경우에는 특별히 더욱. 물론 부작용이 많음. 한 여집사 책망. 죄짓지 마세요. 다른 교회로 옮김. 한 여집사. 위로만 할 수가 없었음. 원위치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했고 지금도 그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연락도 안함. 그럼에도 올바로 사명을 감당했다고 생각함. 설사 다른 교회 나가더라도 깨닫게만 되면 얼마나 귀한가? 그 상태 합리화 시켜주면서 우리 교회 머물게 하는 것보다는. 정집사님에게. 그렇게 하려면 그만두라는 말. 정당하다. 3) 하와의 잘못된 권유를 받아들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먹어버림. 궁금증. 알고 먹었을까 모르고 먹었을까. 다른 말로 하와는 선악과임을 알게 한 후 먹였을까 선악과가 아니라고 속인 후 먹었을까? 이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함. 그러나 곧 하나님이 지혜를 주심. 아담은 하와가 건내주는 과일이 선악과인지 알고 먹었음. -과일마다의 특색. 사과와 귤은 다름. 복숭아와 자두는 분명히 다름. 마찬가지로 선악과의 열매도 달랐을 것이 분명함. -게다가 선악과는 생명나무와 더불어 동산 중앙에 뚜렷히 자리잡음. 아담은 선악과 열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기회가 많고 실제로 잘 알고 있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유난히 금지된 하나의 과실. 궁금하지 않은가? 무엇을 금했는지. 어떤 과실을 금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선악과를 보았을 것임. 충분히 개연성이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아담은 왜 하와가 준 선악과를 먹었을까? 멋진 해석이 하나 나올 수 있을 것임. 너 혼자 죄짓고 떨게 하느니 차라리 나도 죄짓고 함께 떨자. 난 널 사랑하니까. 물론 이건 헛소리임. 아담은 아내 말 듣지 말아야 했던 것임. 아무리 그가 사랑하는 아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가 앞서서는 안되었던 것임. 아내 말 듣고 하나님 말씀 거역한 삼손의 운명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6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7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0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컨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11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3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되리라"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삿 16장) 한심한 삼손. 그는 힘을 잃고 불레셋의 포로가 되어 눈을 뽑힘. 이스라엘의 대 사사는 연자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됨. 다른 것 양보해도 아내에게 양보 안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관한 것. 예배. 아파 죽기전에는 나오게 했음. 아내도 당연히 여김. 헌금. 하나님의 것은 절대 손 못대게. 첫열매. 아내도 당연히 여김. 말씀에서 어긋난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음. 당연한 것 아닌가? 오늘 본문에서 아담에겐 하와지만 우리에겐 각자 다른 사람일 수 있음. 부모일 수 있음.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남편 자녀 가장친한 친구 이웃 그러나 그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난 것을 권하면 대답하라. NO. 아담은 그것을 못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못한다. NO라고 하는 것을. 결론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죄. 그 문제점들을 보았다. -하와 1) 말씀을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음 2) 사단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음 3) 정욕에 마음을 빼앗김. 마음을 지키지 못함. 4) 죄를 다른 사람에게 권함 -아담 1) 하와에게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함 2) 하와의 죄를 꾸짖지 않음 3) 하와의 잘못된 권유를 받아들임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에게도 세상 사는 동안에 여러 가지 유혹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다. 여러분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가올 때는 달콤하나 먹는 순간 독이 되는 것이 유혹이다. 부디 말씀에 굳게 서서 모든 유혹을 이기는 멋진 성도들이 되시라.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문제점/창3:1-7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문제점/창3:1-7 2003-11-03 21:36:32 read : 12 이스라엘을 다녀온 어느 관광객의 재미있는 체험담이다. 들판 양쪽에 풀밭을 두고 가운데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는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이쪽 풀밭에서 길 건너 저쪽 풀밭으로 양떼를 건너가게 하기 위해 한 목동이 피리를 불며 양을 인도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목동이 갑자기 배가 싸르르 아파 오면 서 용변이 급해졌다. 그는 불던 피리를 멈추고 저 멀리 있는 풀밭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1,000여 마리 되는 양이 길 위에 멈추어 섰다. 오가던 수많은 자동차들이 일제히 서야 했다. 차들이 전조등을 켜보고 경적을 울리며 운전자들이 고함을 쳐도 양떼는 길 한가운데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일을 마친 목동이 돌아오고 다시 피리를 불자 양들은 서서히 움직이며 길을 벗어나 건너편 풀밭으로 갔다고 한다. 순종의 훈련이 대단히 잘된 양들이다. 목동의 피리소리에 온전히 순종하는 양떼라. 멋지지 않은가? 마약에 성도들이 그처럼 우리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목동이 피리 소리를 그치고 볼일을 보러 풀밭에 들어갔을 때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양들, 그래서 목동이 길가로 왔을 때는 이미 사방에 흩어져서 목동이 찾아다니느라 죽을 고생을 해야하는 양들, 그런 양들의 모습이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극단적인 생각일까? 사실 불순종하는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조차 보여졌던 일이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잘 다루고 있다. 1. 하나님의 명령과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1) 하나님의 명령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장) 2)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결과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함. 선악과를 따먹고 말음.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죄임. 그리고 아담과 하와 이래로 모든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함. 가인의 후예들에게서 노아의 홍수에서 바벨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서 특히 그리스도인들 속에서조차도 아마도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임.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라. 2. 하와에게서 보여지는 문제점 1) 말씀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음.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말씀에 더함. 하나님은 만지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음. 말씀을 약화시킴. 하나님은 죽을까 하노라가 아닌 정녕 죽으리라 하셨음.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장). 오늘날 성도들이 무너지는 요인. 말씀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다는 것. 설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잇다는 것. 그나마 그 설교조차도 정확하게 말씀에 기초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하는 것.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약화는 목회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자신이 말씀 위에 철저히 서지 못하고 당연히 성도들도 말씀 위에 굳건히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에 무지한 교인들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많다. 2) 사단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음 하나님의 말씀.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장) 사단의 말.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것은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심판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예루살렘에 심판이 임할 것이고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함락될 것이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찌니라 하셨다 하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렘 15장).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 심판하시고 싶지 않아서임.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임. 거짓선지자의 말. "1 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 오게 하겠고 4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렘 28장). 듣기는 좋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음.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함. 결국은 진짜 망하게 됨.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함. 오늘날도 누구 말을 들을까는 매우 중요한 문제. 성경. 하나님의 말씀. 예수만이 구원자. 행4:12. 요14:6. 세상. 예수는 여러 구원자 중의 한명이라고 함. 이 말은 예수 안믿어도 구원받을 길이 있다고 속삭이는 것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임. 세상의 사상. 흐름. 문화. 속삭임을 주의하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될 경우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분명히 하라. 하와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 3) 정욕에 마음을 빼앗긴 하와 선악과를 따 먹은 하와. 불순종. 죄.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하와의 불순종과 죄는 행동 이전에 마음의 문제였다고 하는 점. 다시 말해 마음이 먼저요 행동이 뒤를 따랐다는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마음을 빼앗기니까 나타나는 현상. 선악과가 너무 너무 좋아보임. 그 선악과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금하신 것. 그런데 그것이 너무 좋아보이는 것이다. 왜? 마음을 빼앗겼으니까. 세상이 너무 좋아보여서 그것 따라다니면 정신 못차리는 교인들. 왜 그럴까? 마음을 세상에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마음을 주님께 빼앗기면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주와 동행하는 삶이 가장 매력있어 보이는데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니까 놀러다니고 먹고 마시러 다니고 엉뚱한 짓하러 다니는 것이 재미있고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여러분의 마음은 혹시 세상에 빼앗긴 상태가 아닌가? 성경은 말씀. "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장) 4) 죄를 회개하기 보다 죄를 권함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 자신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을 알고 있음. 그런데 그녀의 행동이 이상함. 자신의 불순종을 회개하든지 남편 아담에게 상의하든지 해야지 오히려 남편에게 선악과를 권함. 남편을 공범자로 만들어버림. 교회 안에서 매우 무서운 죄중 하나. 죄를 지은 성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공범자를 만들어 버림. 자기 편을 더 만들려고 기를 씀. 교회의 내분은 이런식으로 발생하기도 함. 함께 망하려는 처사. 고라당. 250명의 족장을 끌어들임. 함께 망함. 3. 아담에게서 보여지는 문제점 1) 하와에게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음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아담. 창2:17. 그때 하와는 없음. 아담만 있음. 그러면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아는가? 아담을 통해서. 그런데 아담은 명확하게 가르치지 못함. (하와가 머리가 나빠서인가?^^) 그것이 사단이 틈타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됨. 이런 면에서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목사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함. 말씀 아닌 자기 자랑만 하는 목사 만난 교인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 그런데도 자기네 교회 목사가 최고라고 자랑하는 무식한 사람들도 있기는 함. 그러나 여러분은 분명히 깨달으시라.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목회자가 최고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함. 수산나의 교육방법 8가지 A. 벌의 공포심은 때로 아이들을 거짓말하게 하므로...이를 막기 위해 규칙을 세워 잘못을 범하고 죄책을 느껴 슬기롭게 고백하고 고치겠다고 약속하면 매질 하지 않는 것을 지켰왔다. B. 거짓말, 교회에서의 주일에 좀도둑질하는 것, 불순종, 언쟁같은 죄된 행동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지켜왔다. (내버려두면 안됨. 단 한번이라도). 주일 안지키는 것도. 효빈이에게 주일 성수를 훈련하기 시작 C. 같은 잘못으로 두 번 벌하지 않았다. (부모들이 참 못하는 것 중의 하나) D. 순종 특히 자기 고집을 억제한 순종에는 그 공적에 따라 칭찬만이 아닌 상을 주어 왔다. E. 아이들이 순종하는 행동이나(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동을 하려는 의도가 보였을 때는 비록 그것이 훌륭한 정도에 이르지 못하였더라도 받아 주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친절히 가르쳐 왔다. F. 아이들이 가진 물건의 소유권을 침해당하지 않도록 해왔다. 그것이 동전이나 핀 같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소유자의 동의없이는 가져갈 수 없도록 해왔다. G. 약속은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 요즘 젊은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약속을 지킬줄 모른다는 것) H. 딸들에게도 책을 잘 읽기까지는 일을 가르치지 않았다. (책읽게 하는 것 가장 큰 재산을 주는 것)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것. 하나님의 말씀. 철저하게 말씀대로 자녀를 훈련하고 양육함. 웨슬레. 자신은 한 책의 사람이 되겠다고 함. 부모들이여. 다른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쳐라. 철저하게. 말씀을 배우는 자리로 보내라. 2) 하와의 죄를 꾸짖지 않은 것 하와의 죄. 불순종. 아담은 꾸짖지 않음.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워서인가?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장) 그런데 잊고 있는 것. 사랑한다면 죄를 눈감아 주어선 안된다는 것. 비록 책망하다가 의가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성경은 정죄하지 말라고 했지만 책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한 책망이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다.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장). 물론 조심할 것이 있다. -너무 빈번하지 않아야 할 것임. 어떤 이는 늘 책망함. 늘 책망조임. -사랑없는 책망은 잘못임.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을 것임. -자기 의를 드러내는 책망은 죄악. 바리새인들의 외식. 다른 이를 책망함으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랑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 이런 것들을 조심한다면 책망은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요소임. 오늘 본문의 하와같이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을 경우에는 특별히 더욱. 물론 부작용이 많음. 한 여집사 책망. 죄짓지 마세요. 다른 교회로 옮김. 한 여집사. 위로만 할 수가 없었음. 원위치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했고 지금도 그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연락도 안함. 그럼에도 올바로 사명을 감당했다고 생각함. 설사 다른 교회 나가더라도 깨닫게만 되면 얼마나 귀한가? 그 상태 합리화 시켜주면서 우리 교회 머물게 하는 것보다는. 정집사님에게. 그렇게 하려면 그만두라는 말. 정당하다. 3) 하와의 잘못된 권유를 받아들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먹어버림. 궁금증. 알고 먹었을까 모르고 먹었을까. 다른 말로 하와는 선악과임을 알게 한 후 먹였을까 선악과가 아니라고 속인 후 먹었을까? 이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함. 그러나 곧 하나님이 지혜를 주심. 아담은 하와가 건내주는 과일이 선악과인지 알고 먹었음. -과일마다의 특색. 사과와 귤은 다름. 복숭아와 자두는 분명히 다름. 마찬가지로 선악과의 열매도 달랐을 것이 분명함. -게다가 선악과는 생명나무와 더불어 동산 중앙에 뚜렷히 자리잡음. 아담은 선악과 열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기회가 많고 실제로 잘 알고 있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유난히 금지된 하나의 과실. 궁금하지 않은가? 무엇을 금했는지. 어떤 과실을 금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선악과를 보았을 것임. 충분히 개연성이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아담은 왜 하와가 준 선악과를 먹었을까? 멋진 해석이 하나 나올 수 있을 것임. 너 혼자 죄짓고 떨게 하느니 차라리 나도 죄짓고 함께 떨자. 난 널 사랑하니까. 물론 이건 헛소리임. 아담은 아내 말 듣지 말아야 했던 것임. 아무리 그가 사랑하는 아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가 앞서서는 안되었던 것임. 아내 말 듣고 하나님 말씀 거역한 삼손의 운명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6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7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0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컨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11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3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되리라"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삿 16장) 한심한 삼손. 그는 힘을 잃고 불레셋의 포로가 되어 눈을 뽑힘. 이스라엘의 대 사사는 연자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됨. 다른 것 양보해도 아내에게 양보 안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관한 것. 예배. 아파 죽기전에는 나오게 했음. 아내도 당연히 여김. 헌금. 하나님의 것은 절대 손 못대게. 첫열매. 아내도 당연히 여김. 말씀에서 어긋난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음. 당연한 것 아닌가? 오늘 본문에서 아담에겐 하와지만 우리에겐 각자 다른 사람일 수 있음. 부모일 수 있음.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남편 자녀 가장친한 친구 이웃 그러나 그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난 것을 권하면 대답하라. NO. 아담은 그것을 못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못한다. NO라고 하는 것을. 결론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죄. 그 문제점들을 보았다. -하와 1) 말씀을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음 2) 사단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음 3) 정욕에 마음을 빼앗김. 마음을 지키지 못함. 4) 죄를 다른 사람에게 권함 -아담 1) 하와에게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함 2) 하와의 죄를 꾸짖지 않음 3) 하와의 잘못된 권유를 받아들임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에게도 세상 사는 동안에 여러 가지 유혹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다. 여러분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가올 때는 달콤하나 먹는 순간 독이 되는 것이 유혹이다. 부디 말씀에 굳게 서서 모든 유혹을 이기는 멋진 성도들이 되시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2002-03-28 09:23:35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삼상1:21-28 구약시대 마지막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져 합니다. 1. 한나의 신분 1) 이름 : 한나 - 은혜, 호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2) 남편 : 엘가나 였습니다. 2. 한나가 가지고 있는 문제 1) 자녀가 없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엄청나게 받았지만 자녀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2002-03-28 09:23:35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삼상1:21-28 구약시대 마지막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져 합니다. 1. 한나의 신분 1) 이름 : 한나 - 은혜, 호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2) 남편 : 엘가나 였습니다. 2. 한나가 가지고 있는 문제 1) 자녀가 없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엄청나게 받았지만 자녀가 없으므로 괴로워하면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남편 엘가나가 갑절로 제물의 분깃을 주며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라고 위로하여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2) 이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문제였습니다. 삼상 1:5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3. 문제를 해결 받는 방법 한나는 자녀를 낳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해결 받았습니다. 한나는 1) 믿음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다시는 걱정을 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2) 통곡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나는 괴로운 마음을 하나님께 다 털어놓고 엉엉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통곡의 기도는 진실된 기도이며 성경에 보면 울부짖으면서 기도한 사람을 단 하 사람도 응답 받지 못한 자가 없습니다. 3) 의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헌신을 약속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 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여러 명이 아들을 주시면 그중 한 아들을 드리겠다는 기도가 아니라 한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드리겠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는 의의 기도입니다. 4) 끈질기게 기도하였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기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것이 믿어질 때까지 기도하였습니다. 본문12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 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 즉"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믿어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5)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나는 깊은 기도의 경지에 들어가서 입술을 움직였지만 음성이 들리지 않은 영적인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나는 처음에는 엉엉 울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성령에 게 붙들림 받아 그녀 자신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영적인 기도를 하였습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고 하였습니다. 1) 엘리 제사장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을 하였습니다. 2) 하나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시고 잉태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본문 19-20에 보면 한나가 남편 엘가나와 함께 라마에 있는 자기 집에 돌아 가 동침할 때 하나님께서 한나를 생각하시고 잉태케 하셨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라는 말입니다. 4. 한나의 자녀교육 1) 기도하는 자로 키웠습니다. 한나는 자기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자녀에게 기도 교육을 시켰 습니다. 기도하여 응답 받은 이야기도 아들에게 들려주었을 것이고 기도하 는 모습을 보였을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어머니의 기도교육을 받은 사무엘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12:23에 보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겠다고 하였습니다. 2) 대범하게 키웠습니다. 한나는 젖을 떼기까지 키우고 젖을 뗀 후에는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서 교육 을 받게 하였습니다. 젖을 떼는 시기는 생후 22-24개월이었음으로 한나는 이제 겨우 만2세 밖에 되지 않는 한나를 대범하게 교육을 시켰습니다. 한석봉 어머니도 아들을 대범하게 키웠습니다. 창37장에 보면 야곱도 11번째 아들 요셉이를 너무너무 사랑하였지만 대범 하게 키운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17세 된 어린 소년을 길이 믿고 험하고 맹수도 많이 있어 위험이 따랐지만 헤브론에서 서울에서 거의 대구까지의 거리입니다. 자동차로 가도 3-4시간 가는 먼 거리를 홀로 심부름을 보낸 대범하게 자녀를 키운 증거라고 하겠습 니다. 오늘 현대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너무 과잉 보호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 갈 때 학원 갈 때 자가용으로 데려다주는 부모님들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어린 자녀들을 대범하게 신앙으로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들의 부모님들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도 몇 번만 울리면서 까지라도 유치부를 보내서 예배드리게 하면 어린 자녀들의 그 세계에서 찬송과 기도 를 배우고 익히면서 성숙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자녀들을 대범하게 양육시켜 재목을 만드십니다. 5. 한나가 받는 복 1) 자녀가 복을 받았습니다. (1) 사무엘 외에 아들 3명과 딸 2명을 낳고 두게 되었습니다. 삼상 2:21에 보면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고 세아들과 두달 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2) 사무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앞에 크게 쓰임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사사로 제사장과 선지자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2) 칭송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한나는 약 3000년간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들로부터 칭송을 받아왔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나 같은 부모가 되시고 하나님께서 기업과 상급으로 주신 자녀를 아들딸 구별하지 말고 한나처럼 양육하시기를 바랍니다.
선지자 학개에게 임한 예언 2002-03-29 14:59:02 read : 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학2:1-11 유대나라는 BC 606년대에 바벨론 침략으로 멸망하였으며 국민은 바벨론에 끌려가 70년간 포로생활을 하였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친 BC536년에 4만2천3백60명이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예 루살렘에 돌아왔다. 귀국한 이들은 그 해 7월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으며 6개월 후인 BC535년 2월
선지자 학개에게 임한 예언 2002-03-29 14:59:02 read : 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학2:1-11 유대나라는 BC 606년대에 바벨론 침략으로 멸망하였으며 국민은 바벨론에 끌려가 70년간 포로생활을 하였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친 BC536년에 4만2천3백60명이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예 루살렘에 돌아왔다. 귀국한 이들은 그 해 7월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으며 6개월 후인 BC535년 2월 에 성전건축을 시작하였으나 어려운 경제사정에다, 강서편 사람, 산발랏, 도비야등 방해로 인하여 공사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성전건축을 중지하게되니 자연히 신앙은 해이해지고 사람들은 각기 살림 차리기와 또 자기 집을 짓는 일에 골몰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보내어 유대백성들에게 속히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을 전했으니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자 한다. 1. 성전 재건 하라는 명령 (다리오왕 2년6월 초하루) 1:8-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내가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본체인 말씀에 대한 모형이며 우리가 건축한 이 성전은 보이지 않 는 영적 성전의 모형인 것이다. 에스라서와 느혜미야서, 학개서를 보면 성전 건축을 중단하므로 인한, 개인, 가정, 경제, 국 가적으로 엄청난 피해가 왔는데 학개 선지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1:4-이전이 황무 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9-내 집은 황무 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라 10-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의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 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당시 성전건축이 중단되므로 공사장에는 잡초만 우거져 황폐한 상태로 방치 되었던 것 같이 우리의 영적 성전 건축도 중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2. 성전 재건축의 방법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전에 대한 개념을 다시 가져야 한다. 고전3: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요2:1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 21-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의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 (1)성전 재건은 전힘을 기울여야 한다. 학1:8-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 하여 기뻐하여 또 영광을 얻으리라 예: 등산(히말리야)더욱이 나무를 베어오라 (2)성전 재건은 믿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4-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상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 할찌어다 본문에 보면 세 번이나 굳세게 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성전을 재건하는 길은 어떠한 방법이 아니라 굳세고 담대한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재건해야 할 성전은 내 자신이며, 오직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그의 통 치를 받으며 전적으로 그를 찬양하며 그 나라를 위한 군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3)성전 재건은 하나님이 하심을 알아야 한다. 13-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명을 의지하여 백성에게 고하여 가로되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였느니라 보이는 성전을 짓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모를 때 실패한 사람 많다. 더욱이 영적인 성전은 아무리 사람이 할려고 해도 되지 아니하며 다만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목회를 할 수 있고 또는 인도자가 될 수 있다. 고전3: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 는 하나님뿐이라 8-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 리라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 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 3. 성전을 속히 재건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6-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 시킬 것이요 (1)잠자는 교회를 깨우기 위하여 우리에게 성전건축을 명하셨다 지금 한국교회는 마치 가위에 늘린 사람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듯이 사탄의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고 씨름하고 있다. 예: 교회 영상 시공회사인 두성 멀티미디어 강병성사장의 말이다. 요사이 사업상 여러 교회를 다니며 목사님들을 만나 대화하는 중 한국교회 전체가 경신 교회에 대하여 민감한 태도로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그분이 절대로 그렇게 할 분이 아닌데 2)전통적인 예배의식에 대한 아쉬움에서 3)경신교회만은 전통을 지킬 마지막 보수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 이 문제는 내자신도 많은 근심을 하였던 일이며 그러나 우리 교회는 물론 한국교회가 사는 길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간구 하는 중에 결단을 내리고 새 천년을 맞기에 앞서 예배의식 교 회 조직개편, 신학적인 재평가를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첫째 --- 현 시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예배의식에 대한 개혁 둘째 --- 기독론과 구원론에 대한 신학적인 재평가 셋째 --- 인간의 이분설 내지 삼분설에 대한 잘못된 이해 7-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2)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복음사업에 대 역사를 일으키시기 위하여 8-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가 성전을 건축한 후 IMF를 만나게 되니 엎친데 겹친격으로 지쳐있는 것은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복음사업, 또는 참여에 있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 성전을 재건축 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새로운 헌신으로 도약 해 야 할 것이다. 예: 초대교회는 우리의 현실보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몇 배나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하나 님께 물질을 바치고, 모여 기도하고 복음 전하는 일에 전력한 것을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알 수 있다. 행2: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니라 우리가 이와 같이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영적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며 하나님 의 성전을 짓는 자에게 은도, 금도 우리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 (3)성령이 충만하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시려고 9-이전의 나중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우리교회는 두 부류의 교인이 있다. 1)경신교회 창립당시 ---방배동에 성전 건축할 때까지 2)성전건축 이후 세대 3-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 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 9-이전의 나중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은 옛날 영적 성전 역사를 경험한 사람은 현재의 심히 미약한 영적 성전상태를 보고 무시하지 말며, 이전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은 교회가 세워지기까지의 각고를 겪어온 신앙 의 선배들의 아름다운점을 피차에 수용하면서 은혜의 세계로 나갈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다. (4)환난의 날에 붙들어 주는 교회가 되게 한다 20-그 달 24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2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 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를 취하고---구원하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다. 인을 삼으리니---가장 귀중히 여기는 대상이 됨을 말해준다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만세 전에 나를 부르고 택하신 하나님의 섭리 만군의 여호와---세 번이나 거듭했는데 그 누구도 대항 할 자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하심 을 변개할 자 없다는 말이다.
성경인물열전(구약)(2)/ 하와― 인류의 첫 어머니/ 창3:20/ 2009-09-01
성경인물열전(구약)(2)/ 하와― 인류의 첫 어머니 창3:20 1. 인적 사항 ① 인류 최초의 여자. ②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심(창 2:22). ③ \\\\\\\\\\\\\\\'하와\\\\\\\\\\\\\\\'는 \\\\\\\\\\\\\\\'생명\\\\\\\\\\\\\\\', \\\\\\\\\\\\\\\'산 자의 어미\\\\\\\\\\\\\\\'라는 뜻. ④ 아담에 의해 가인, 아벨, 셋 등을 낳음(창 4:1,2,25;5:4). ⑤ 하와는 히브리식, 이와는 헬라식, 이브는 영어식 표기법임. 2. 시대적 배경 타락 이전 에덴에서 아담이 완전한 상태에서 생활할 때 그의 배필로 창조되어 인류 최초의 가정으로서 완전한 행복을 맛보았으나 곧 이어진 타락으로 인해 인류역사 최초의 고통까지 경험하였다. 3. 주요 생애 +-----------------------------------------------------------------------------+ | 타락 전 | +-----------------------------------+------------------+----------------------+ |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짐 | 1세 B.C.? | 창 2:18-22 | +-----------------------------------+------------------+----------------------+ | 에덴 동산에 거주 | | 창 2:23-25 | +-----------------------------------+------------------+----------------------+ | 타락 후 | +-----------------------------------+------------------+----------------------+ | 뱀의 유혹으로 타락 | | 창 3:1-6 | +-----------------------------------+------------------+----------------------+ | 에덴 동산에서 추방 | | 창 3:22-24 | +-----------------------------------+------------------+----------------------+ | 가인과 아벨의 출생 | | 창 4:1,2 | +-----------------------------------+------------------+----------------------+ | 가인의 아벨 살해 | | 창 4:3-8 | +-----------------------------------+------------------+----------------------+ | 셋의 출생 | 130세 경(?) | 창 4:25 | +-----------------------------------+------------------+----------------------+ | 기타 자녀 출생 | | 창 5:4 | +-----------------------------------+------------------+----------------------+ 4. 성품 ① 아담이 한 눈에 사랑할 정도로 아름다운 영육에 소유자(창 2:23). ②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먹을 정도로 연약하고 유약한 성품(창 3:1-6). ③ 타락 후 자신의 범죄 책임을 뱀에게 돌리는 소심한 성품(창 3:13). ④ 말씀을 따르는 의지적 성품보다는 본능적으로 행하는 감정적 성품(창 3:6). 5. 구속사적 지위 ①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그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고 그의 신부 된 교회를 예표함(창 2:18-25;엡 2:22-33). ② 역사상 최초로 사단의 유혹을 받고 넘어간 인간이며 남편 아담에게도 그 죄에 동참시킴으로서 사단의 유혹에 약한 인간성을 노출시킴과 동시에 타인에 대한 유혹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죄인의 모습을 보여 줌. 6. 주요 공적 아담의 배필로서 인류 최초의 어머니가 됨(창 2:18,22,23;4:1). 7. 주요 실수 ① 뱀의 유혹으로 타락하고 남편도 타락케 해 그 안에서 모든 인간이 정죄 당하고 사망 가운데 거하게 함(창 3:6;롬 5:16-18). ② 하나님으로부터 죄악에 대한 책임을 추궁 받을 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기에 앞서 그 책임을 뱀에게 돌림(창 3:13). 8. 평가 및 교훈 ①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을 때 그에 반응함으로 결국 선악과를 따먹게 되고 타락하였다(창 3:1,2). 여기에서 우리는 사단 또는 거짓된 자들이 미혹하러 접근해 올 때 반응조차 하지 않음으로 죄악된 길을 벗어나야 함을 배운다. ②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을 때, 선악과를 따먹을 경우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소홀히 함으로 선악과를 따먹어 타락하였다(창 3:2,3). 여기에서 우리는 \\\\\\\\\\\\\\\'등\\\\\\\\\\\\\\\'이요 \\\\\\\\\\\\\\\'빛\\\\\\\\\\\\\\\'(시 119:105)인 말씀을 견고히 붙잡지 못하거나 왜곡할 때 타락하게 됨을 보아 항상 말씀을 그대로 깨달아 견고히 서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③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을 때 특히 그 선악과 나무를 보고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먹었다(창 3:6). 이는 하와가 보는 것, 육신 적인 욕구, 정신적인 욕구 등에 현혹되어 그것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까지 어기며 타락했음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우리 성도들은 요한 사도가 말한 바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두어서 타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을 배운다. ④ 하와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사단의 말에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 눈이 밝아지기는 하였으되 추하고 악한 측면으로 밝아져서 그 결과 수치심밖에 느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우리도 하나님의 명을 듣지 않고 죄의 길로 들어서면 자기 욕심대로 잘될 것 같으나 그 결과는 수치와 형벌뿐이다(롬 6:23). ⑤ 하와는 타락 후 눈이 밝아져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를 발견했을 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를 가리우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수치를 영원히, 온전히 감추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후에 짐승을 죽이시고 만들어주신 가죽옷은 그녀의 수치를 온전히 가리워 줄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 자신의 수단, 율법적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자신의 죄와 수치를 감출 수 없음을 배운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범죄 했을 때 예수님이 주신 복음을 믿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가야겠다. 9. 핵심 성구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라\\\\\\\\\\\\\\\"(창3:20). 김성만 목사(평택 송축교회)
성전 재건을 격려한 학개 2002-03-29 14:59:44 read : 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학개 1:1-6) 1. 이름과 배경 학개는 '축제' 또는 '하나님의 잔치'라는 뜻이다. 스가랴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추정된다. 그가 제사장 가문 출신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남다른 성전재건을 향한 열정이 이를 입증해 준다. 다른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부로 백성의 죄악과
성전 재건을 격려한 학개 2002-03-29 14:59:44 read : 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학개 1:1-6) 1. 이름과 배경 학개는 '축제' 또는 '하나님의 잔치'라는 뜻이다. 스가랴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추정된다. 그가 제사장 가문 출신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남다른 성전재건을 향한 열정이 이를 입증해 준다. 다른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부로 백성의 죄악과 타락을 책망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며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한 것과는 달리 학개는 성전 건축을 독려한 독특한 사명을 수행했던 선지자였다. 종교적 자유를 선포한 고레스의 칙령(B.C 538년경)에 의해서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시 학개도 함께 돌아왔다. 1) 바사왕 고레스의 도움 학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한 이는 바로 고레스 왕이다. 고레스는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바사제국을 중근동지방의 패권국가로 만든 위대하고 용맹스런 왕이었다. 특별히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본국으로 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다. 학개는 그가 칙령을 내려 스룹바벨을 지도자로 임명하고 보냈던 1차 예루살렘 귀환 때 합세했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였다. 2)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학개가 예언활동을 할 때는 80세의 나이였다. 유다의 사회상과 정치적 상황은 암담했다. 성전공사는 중단되고 있었으며(B.C 520-516) 귀환동포들은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등장 실의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강력히 역설했다. 나이는 80세였지만 메시지는 강력했다.제1차 성전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사마리아가 성전 건축 공사에 참여하기를 거부당하자 앙심을 품고 바사왕에게 예루살렘 반란을 꾀하기 위하여 성벽을 쌓는다고 거짓 진정을 하여 공사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암몬 등 이웃 나라들이 끊임없이 반대공작을 폈다. 성전공사는 중단된 채 16년이 지속되었으며 유다에는 연이어 흉년이 계속되었다. 유대인들은 아직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니라고 하며 변명만 했으나 학개는 성전재건과 예배의 회복이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함을 상징(하나님의 임재)하는 것이므로 성전이 황폐한 채 방치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떠난 것과 같다. 이 때 성전 건축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이요 뜻임을 전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 이가 학개 선지자였다. 2. 성전 재건을 격려한 학개 학개가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할 때 유다 총독으로 스룹바벨이 임명되었고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다. 이들 통치자와 백성들 모두는 유다 재건과 성전 건축공사를 중단 포기했다. 유다는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의 그 희망과 감격, 그리고 재건의 꿈은 사라졌다. 너무 강한 사마리아인들의 조직적인 반대에 봉착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앞으로 나갈 용기를 잃었던 것이다. 이 때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2:4)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때에 이들을 향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학개가 예언을 했다. 그의 모든 희망과 유다의 정신적 재기는 오직 성전 건축에 있었다. 성전은 유다인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어야 하며, 정신적 부흥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전 공사가 중단된 것은 바사정부의 간섭에 의함이라고 하나 실상은 그보다도 유다 백성 자신의 열성 부족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뜨겁지 못한 때문이라고 학개는 말하였다. 계속 성전 건축을 미루기만 하는 유대인들에게 미루면 미룰수록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믿음은 결단을 내릴 때만 축복으로 다가온다. 시작을 결단시키는 일에 공헌한다. 3.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성전 학개는 하나님의 성전을 세움으로 새로운 메시아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성전에서 평화가 선포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유다의 공동체는 물론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2: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 성전의 규모는 솔로몬의 옛 성전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공사하는 백성들도 실망했다. 그러나 힘을 내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학개는 예언을 했다. 비록 규모는 작고 찬란한 모습은 사라졌으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영이 유다 가운데 머물러 있을 것이니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했다.학개는 성전이 완성됨으로 유다에서 환난과 고난과 질고가 사라지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성전재건을 위해 수고하는 백성들을 격려하고(2:4,5) 성전의 영광과 현실적 축복, 더 나아가서 메시아의 통치로 인한 열방의 심판과 유다인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다(2:15-23). 4. 배울 점 1) 내 일보다 하나님의 일이 먼저임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이 자기가 먹고사는 일에 급급하여 성전을 돌보는 일을 감당하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다. 물론 그들도 핑계는 있다.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성정을 건축하길 원하신다. 그것을 이유로 하여 자신들의 집만 건축한 것은 잘못이다. 그것을 깨우친 이가 바로 학개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2) 실망한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학개가 한 일은 바로 실망하고 낙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때론 주님의 책망을 전달하면서도, 결국은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요, 격려의 메시지를 준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비판하는 것보다 칭찬하고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성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성전에 계신다. (왕상8: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성전으로부터 흐르는 생명의 강, 축복의 강을 체험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성전을 모르는 신앙생활은 배를 버리고 바다를 횡단하는 것과 같다. 교회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진정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성전 재건을 이룬 학개 2002-03-29 14:58:26 read : 5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학1:2-15 학개 선지자는 12소선지 중에 한 사람으로서 학개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학1:1,12,13, 2:1) 그는 아마도 포로 당시에 출생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스가랴와 동시대 사람인데 주전 536년에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하여 성전 재건을 진행하는 중에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14년간 중단하였다가 다리오 1세의 도움으로 주전 52
성전 재건을 이룬 학개 2002-03-29 14:58:26 read : 5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학1:2-15 학개 선지자는 12소선지 중에 한 사람으로서 학개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학1:1,12,13, 2:1) 그는 아마도 포로 당시에 출생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스가랴와 동시대 사람인데 주전 536년에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하여 성전 재건을 진행하는 중에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14년간 중단하였다가 다리오 1세의 도움으로 주전 520년에 다시 공사를 진행하여 주전 516년에 헌당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스6:14-18) 학개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쾌락"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하여 제일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집을 짓고 가꾸고 단장하는 일로 세월을 소비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너희의 행위를 살펴 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전을 짓도록 독려한 사람이 학개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Ⅰ. 먼저 성전을 재건하라고 강조한 사람입니다. 학1:8에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참고로 예루살렘 성전은 세 번 건축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주전 966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7년 6개월 만인 주전 959년에 완성한 솔로몬의 성전이 있고, 둘째로 포로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귀환하여 주전 536년에 성전 재건을 시작하여 도중에 방해에 부딪쳐 14년간 중단되었다가 주전 520년에 다시 시작하여 주전 516년 3월 12일에 완공시킨 스룹바벨 성전이 있고, 셋째로 주전 20년경에 자신의 정치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헤롯왕이 주전 20년경에 건축을 하였는데 그 성전을 이름하여 헤롯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주후 70년 경애 로마의 티토 장군의 부대가 예루살렘을 진격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 완전히 소실되고 지금은 유일하게 그 당시에 쌓았다는 성벽 조금이 남았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통곡의 벽이라고 하면서 그 앞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지금도 심심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은 둘째 성전, 스룹바벨 성전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전 586년에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침략으로 유다가 완전히 망하면서 솔로몬 성전이 그 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망한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설음을 70년 동안 당하고 주전 536년에 바사 왕 고레스의 도움으로 유대인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게 됩니다. 그 때 학개 선지자가 격려하면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성전을 지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좋은 집에서 살면서 좋은 분위기를 가꾸려고 힘쓰고 애쓰면서 하나님의 전을 지어 드리자고 하면 "아직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핑계를 댑니다. 지금은 지을 때가 안되었다고 힘도 쓰지 않고, 지을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70년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십니까! 바벨론 에서는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입니까! 거기서는 집을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까! 거기서는 시집 장가를 갈 수 없기 때문입니까! 여호와의 전을 재건하라고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목적이 있음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개 선지자의 마음을 하나님께 감동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합니다. "여호와의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라고 하면서 그렇게 핑계나 대면서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면 안 된다고 독려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에 건너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예배당을 세우고 그 다음에 자녀들을 가르칠 학교를 세우고, 그 다음에야 저들이 살집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분별할 줄 아는 민족이 세계 위에 으뜸의 나라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Ⅱ. 하나님의 일에 태만히 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십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70년만에 바벨론 에서 귀환한 것은 성전 재건을 위함인데 사마리아인이 방해하고 힘들게 한다고 14년이나 하나님의 전을 방치하고 자기 집이나 살피고 안일한 생활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을 세우기를 시작하자고 하면 아직 시기상조라고만 합니다. 과연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학1:5,6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하노라 너희는 자기의 소유를 살펴볼지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첫째는 많이 뿌릴 지라도 수입이 적었습니다. 둘째는 먹었으나 배부르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넷째는 입어도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다섯째로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대로 구멍 뚫린 전대에 담는 꼴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섬기기를 게을리 하고 태만히 하면서 자신들의 사리 사욕만을 채우고자 했을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벌입니다. 주의 일을 하자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로 핑계를 대면서 여전히 자기 일에 빠른 이 같은 행위는 하나님을 속이는 죄이며, 더 나아가서는 자기를 속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과 싸우고 하나님을 속이고서 잘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소홀히 하고 태만히 하는 것은 헛수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일에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가 있을 것이라."(렘48:10)고 하는 무서운 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홀이 여기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소홀히 하는 것은 실패하기 위해서 열심히 바쁘게 뛰어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9절에 보십시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10절에도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절에도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이 사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황무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안일만 생각하고, 여호와만 섬기기를 게을리 하고 육신의 번영과 안일만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은 점점 더 황폐해 질 것이고, 우리의 손으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될 것이며, 그런 삶을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과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어 버리시고 막으신다면 우리는 끝장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기 때문에 천지의 운행과 자연까지도 움직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축복하시기도 하고 징계로 환난을 주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일을 힘쓰고 주안에 거하기를 힘쓴다면 무궁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주의 백성들이 되어서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고 자신의 안일만 추구하고 주의 뜻을 거슬려 범죄 한다면 징계하실 것입니다.(삼하7:14, 히12:17) Ⅲ. 학개는 여호와의 일에 순종하고 열심을 품으면 복을 주신다고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학2:8,9을 봅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 우리에게 물질을 주셔서 우리가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물질을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전을 지으라고! 주님의 일에 헌신하려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일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힘써 벌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하실 때에 드리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430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그들이 나올 때 하나님의 강력한 권세로 받아 가지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애굽사람들에게 은혜를 입혀 주시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하는 대로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는 대로 주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들에게 돈이 왜 필요했습니까! 광야에서 사업을 했습니까! 공장을 지어 생산을 하였습니까! 단순히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물을 마셨을 뿐입니다. 그러면 왜 그것을 가지고 나가게 하셨습니까! 그들에게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우리 대선의 성도들이 이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학개의 말을 듣고 온 이스라엘이 순종하여 하나님의 전 지대를 놓기 시작하였고 주의 일에 열심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학2:19절에 말씀하십니다. 전에는 너희에게 아무 것도 없었으나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학개 선지는 하나님의 성전 재건 운동에 힘을 쓴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힘썼고 백성들로 하여금 힘쓰게 하여 복을 받게 한 사람입니다. 우리 대선의 성도들이 학개와 같은 신앙 정신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에 쓸데없이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하는 그런 말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재한 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기회 주시는 대로 힘써 여호와의 일을 감당하여 우리의 손으로 하는 모든 수고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주님의 일에 힘쓰므로 더 많은 일로 주님께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2002-03-20 10:35:17 read : 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창3:21 어떤 분이 쓴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친정 아버님의 생신 날 아침에 아침 식사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급하게 가다가 화장을 하지 못하고 도착을 하게 되어졌습니다. 도착해서 안방에 들어가서 어머니의 화장품을 찾았습니다. 어머니의 화장품을 보는 순간에 이분은 자기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어느 하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2002-03-20 10:35:17 read : 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창3:21 어떤 분이 쓴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친정 아버님의 생신 날 아침에 아침 식사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급하게 가다가 화장을 하지 못하고 도착을 하게 되어졌습니다. 도착해서 안방에 들어가서 어머니의 화장품을 찾았습니다. 어머니의 화장품을 보는 순간에 이분은 자기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어느 하나도 사용할 수 있는 화장품이 없었습니다. 샘플용으로 얻어놓은 스킨과 로션, 그리고 몇 년이나 되었을 법한 값싼 화장품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화장품을 담아놓은 그릇도 빨강 색 플라스틱 통인데 오래되어서 양쪽이 깨어지고 색깔은 검게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순간에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먹지도 아니하시고, 입으시지도 아니하시고, 구경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시고, 자식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셨구나! 이 겨울에 까칠해 지고 깊은 주름이 가득 찬 어머니를 위해서 고운 화장품 하나를 사드려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 어머니는, 그분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어머니의 모습일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위해서는 그 어느 것도 하지 아니하시고,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사랑한다는 이름은 있지만, 사실은 자기를 위하여 사랑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다시 한번 오직 자식을 위하여 사랑하시는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어머니의 사랑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만들어서 입혔다는 내용입니다. 이때의 아담과 하와의 상황이 어떠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까? 아니면, 아담과 하와가 상을 받을 수 있는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신뢰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이러한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어버렸고, 따먹은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 일을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을 배신해버린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까? 오늘 21절의 말씀처럼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다시 말씀드리면 다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처럼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조건 없이 베푸신 사랑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본문의 말씀에서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이 가죽옷은 아담과 하와가 만든 옷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자기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서 만든 것은 인류 최초의 옷인 무화과 나무잎으로 만든 옷입니다. 우리가 짐작해 보기로는 -그림을 통하여서 많이 봤습니다만은- 아마 수치의 부분을 가리는 아주 부분적인 몸을 가리는 옷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은 이들의 수치를 온전히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넓게 이해를 해보면, 이들이 스스로 만든 무화과 나무잎으로 만든 것은 자기들의 죄를 온전히 가릴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은 일시적이었고, 임시적이었습니다. 햇빛이 나서 그 잎사귀가 말라지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옷이 되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들어서 입히신 가죽옷은 어떤 옷입니까? 어떤 주석가는 본문의 말씀을 주석하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죽옷은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과는 달리 몸 전체를 감쌀 수 있는 옷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은 부분적인 수치를 가리는 옷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죽옷은 아담과 하와의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긴 옷이었을 것이다"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가죽옷은 바로 이들의 수치를 영원히 가릴 수 있는 옷이었을 것입니다. 좀더 바꾸어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가죽옷은 이들의 죄를 완전하게 가릴 수 있는 옷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수치와 죄를 가릴 수있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서는 효과가 없습니다. 내가 만든 것은 모두가 다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수치와 우리의 죄를 가릴 수 있는 옷이 아닙니다. 다만 오직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죽옷으로 말미암아서만 수치와 죄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을 본문말씀을 통하여서 우리는 먼저 알아야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의미를 좀더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죽이 만들어지자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가죽이 만들어지자면 가죽의 임자가 죽어야 합니다. 가죽의 주인이 죽지 않으면 가죽옷을 만들 수가 없는 것이지요. 아마 이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만드실 때는 소나 양을 죽여서 가죽옷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소나 양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가죽옷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이 죽지 않으면 가죽옷을 만들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소나 양들의 죽음이 없이는 바로 사람의 죄와 수치를 가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가죽옷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가죽옷의 중요한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아담과 하와의 죄와 수치를 죽은 짐승이 대신 졌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타난 가죽옷은 대속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도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의 가죽옷의 예표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말씀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옷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와 하나가 된 그 은혜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결국 누구를 죽게 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누구를 죽게 해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까?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다" 교회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가죽옷이 만들어지는 것은 무엇으로 만든 것입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이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수치를 가렸다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대속의 의미가 이 가죽옷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이러한 결론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로는 어떤 수치와 죄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착하다. 저 사람은 불의한데 나는 의롭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착한 일을 많이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의로도 자기의 수치와 죄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이사야서 64장 6절에 보면,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가 만든 옷, 우리가 만든 의의 옷, 우리가 만든 옷은 다 더러운 옷이고, 쇠패한 잎사귀와 같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로 우리의 죄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 아셔야 됩니다. 다 무화과 나무잎으로 만든 옷과 같은 것이예요.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이 지어주신 가죽옷을 입을 때에만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다시 한번 믿음을 회복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로는 내 죄와 수치를 가릴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또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게 입혀준 이 가죽옷으로 내 수치와 죄악을 다 가릴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면 우리는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설악산에 여러 번 가 본적이 있습니다. 어느 겨울에 설악산에 갔는데, 심하게 바람이 몹시 불었습니다. 그런데 설악산에는 잡목이 많기 때문에 겨울의 설악산은 너무 쓸쓸합니다. 얼마나 외로운지 몰라요. 다 나무들이 옷을 벗었습니다. 앙상한 가지를 가지고 있는 이 설악산의 겨울 산의 모습은 너무 의미가 없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초라한 모습입니다. 지난 여름에 푸른 잎을 가졌던 설악의 아름다운은 간 곳이 없습니다. 지난가을에 그렇게 붉게 물든 단풍잎으로 옷으로 갈아입었던 그 모습은 다 없어져 버립니다. 참으로 설악의 겨울산은 너무 쓸쓸합니다. 의미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겨울에 설악산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눈이 많이 내렸어요. 제 일생에 가장 아름다운 산을 보았습니다. 눈꽃이 얼마나 아름답게 피었는지 '설악산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지난가을의 고운 단풍잎으로 갈아입었던 설악의 단풍산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지난봄과 여름에 푸른 옷을 입었던 설악산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여러분들! 설악산의 겨울의 눈꽃을 본적이 있습니까? 이름 그대로 설악산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이 겨울에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그냥 두었으면 멸망과 파멸로 갈 수밖에 없는 절망의 그릇들이 그러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가죽옷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었어요.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값없이 주시는 사랑과 희생과 헌신의 가죽옷을 입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들 오늘 모두가 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내게 입혀주시는 가죽옷을 입으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 하나님의 자녀, 생명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천국백성이 되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하신 분들 계시지요? 여러분들은 다 구원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대속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 수록,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 갈수록, 자꾸만 자기 의의 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이상합니다. 믿음의 연륜이 많아 질 수록 바리새인처럼 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연조가 많아 질 수록 자꾸만 초대교회의 율법주의자와 같은 자기의 의의 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그 속에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새로운 소명을 감당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만약 지금도 자기의 의의 옷을 입고 있다면, 오늘 이 시간 자기의 의의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주님이 만들어 주시는, 가죽옷을 새로 입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구원의 새 감격을 가지십시오. 다시 한번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십시오. 다시 한번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저희 교회에 등록하는 교인 중에 이런 교인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지요. "교회 처음 나왔습니다." 이런 분들이 계세요. "처녀 총각 때 교회 나갔는데 결혼하고 한 동안 예수 믿지 않다가 이제 다시 교회 나왔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확신이 없습니까? 오늘 이 말씀의 은혜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여러분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다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 앞에 서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가지는, 새로운 사람이 되시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자기의 의의 옷을 입고 있다면 버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내게 입혀주시는 대속의 가죽옷을 입으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구원의 은총을 회복하는, 귀한 감격을 새로 회복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가죽옷이 입혀진 때가 언제입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입히시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의 앞, 뒤 문맥을 보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7절, 18절, 19절의 말씀을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심판의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엄중하고 무서운 심판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수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열매를 따먹고 양식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심판이 무엇인가 하면, "땅이 저주를 받아서 종신 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다. 바로 너희들이 이마에 열심히 땀을 흘려야 저주받은 땅에서 나는 생산물을 가지고 양식을 삼을 수 있다"라는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리고 수고하는 인생의 길을 걸어가다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간다.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파멸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한 말 그대로 너희들의 영과 육이 죽는 파멸의 길을 걸어간다"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끝나 버렸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모두다 멸망의 길을 걸어갑니다. 다 파멸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을 하시고 난 다음에 바로 가죽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그리고 24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었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 보내실 때 그냥 좇아 내었습니까? 만약에 가죽옷을 입히지 않고 좇아 내었다면, 영원히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잎으로 만든 옷으로 에덴동산을 나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망을 안고 에덴동산에서 나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보내셨다는 것은 에덴동산으로 나가게 하시면서 생명의 소망을 주신, 사랑을 주셨다는 의미가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주위 깊게 보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20절을 제가 봉독 해 드리겠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바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기 직전에 하신 일이 무엇이냐 하면, 또 하나님이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고 난 바로 직후에 아담이 한 것이 무엇이냐?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이름하였고, 그 하와라는 이름의 뜻은 모든 산 자의 어미라는 의미를 가지는 이름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주석가들이 동의합니다. 어떤 해석을 하는가 하면,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의 조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창세기 3장 15절을 믿는 아담의 모습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후손을 통하여서, 여성의 후손을 통하여서 성취될 뱀에 대한 승리를 확실히 믿는 아담, 그리고 하와의 믿음이 이 20절 한 절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심판을 말씀하시는데, 이 심판 가운데서도 아담은 바로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었다는 것은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뱀의 머리를 쳐서 승리할 수 있는,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사망의 심판 앞에서 "생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는 믿음의 모습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여인인 수로보니게의 여인이 예수님께 앞에 와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으니 고쳐주십시오."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옆에 있다가 "예수님 지금 이 사람이 와서 이렇게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어떤 대답을 했습니까?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 무슨 말입니까? 거절입니다. 안 고쳐주겠다는 말이지요. 그랬더니 이 여인이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래도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저를 도우소서"했더니, 이번에는 더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개라고 낮추었습니다. 개라는 말은 우리 한국에서도 욕설이지 않습니까? 멸시하는 욕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사용하신 거예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저 같았으면 물러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주여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나이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어요? "네 믿음이 크도다" 그냥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좋다라는 말이 아니라 "네 믿음이 크도다. 믿음대로 네 소원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지어주신 가죽옷이 어떻게 입혀집니까?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은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는 것을 본문의 말씀의 맥락에서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 말씀을 자세히 한 번 보세요.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이렇게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새해를 시작한 지도 이미 한 달이 다 되어져 갑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통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심판으로 말미암아 절망과 아픔과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그 가운데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믿음의 눈을 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죄로 인하여 두려워 떨고, 고통하고, 절망하고 있습니까? 이 죄 한가운데에 주님이 찾아오시어서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을 회복해야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회복하고 이 해를 걸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회복 없이 새 천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가장 절실하고 중요하게 회복해야 될 것은 아담이 그 아내 이름을 하와라고 지은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할 때에 그리스도인의 제자리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가 되기 위해서는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 보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옛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라는 것은 과거의 죄를 깨뜨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십니다. 이 은혜를 여러분들 마음에 다 받아들이는 믿음을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회복하실 때에 여러분들의 삶은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사명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들 모두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앞에 서서 그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믿음을 회복하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명과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우리에게 허락된 오늘과 내일을 힘차게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 2002-03-20 10:33:13 read : 5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
아담과 하와의 가정 2002-03-20 10:33:13 read : 5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가정이란 어쩌다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가정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시조로 만드시고 또한 가정의 시조로 삼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만큼 인류의 역사상 가장 행복한 결혼식을 올린 사람이 없을 것이며, 이 땅에서 아담 하와만큼 행복하고 잘 어울리는 부부가 없었을 것이란 점입니다. 이들의 결혼식 주례는 누가 하셨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직접 하셨습니다. 이 결혼식 하객들은 누구였습니까? 에덴 동산의 모든 짐승들과 새들과 그리고 나무들과 꽃과 풀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신혼 여행을 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거기가 세상에서 제일로 아름다움 곳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이었습니다. 온전하게 만들어진 인간들이었으니 완벽한 조화와 완벽한 미가 흐르는 관계였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시기도, 질투도, 다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배고픔도, 아픔도 없었습니다. 완벽한 남녀가 만나서 완벽한 동산에서 사랑을 나누고 살았으니 이보다 더 어울리는 부부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고,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목사로서 결혼식 주례를 자주 하면서 목사가 주례하고 이혼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현재 세 쌍 중에 한 쌍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우리도 미국처럼 이혼율이 50%에 육박할 가능성이 큽니다. 러시아는 무려 70-80%가 이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제가 주례하고 이혼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인들을 살펴볼 때 가정들이 비교적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감사헌금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살아주어서 고마워서 말입니다. 오늘 날 가정이 파괴되고 무너지는 것은 가정의 본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살펴보고 우리 가정에 그 본래 의미를 잃었다면 그 의미를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부부를 만들어주신 이유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서로 위로하고 위로 받으며 살라고 부부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가정이 출세의 출발도 되고 목적도 될 것입니다. 또 가정이 종족을 보존하게 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고 또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정의 시작이 아니고 또 가정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로 위로하고 위로 받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비록 가정에 돈이 있고, 자식이 있고, 집과 좋은 가구와, 그리고 성공이 있다고 해도 부부가 서로 위로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그 가정은 병든 가정이요 문제가 있는 가정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는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가정이 없으면 고독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좋은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웠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혼자 있는 것이 고독하였다는 것을 보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부부가 없으면 고독하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혼자는 고독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경치를 구경해도 혼자는 고독합니다. 저는 아름다운 곳에 혼자 있으면 더 고독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에 부부처럼 좋은 인간관계, 부부처럼 좋은 제도, 부부처럼 좋은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가지쟁이 아내를 불평하는 남자에게 홀아비 친구가 말하기를 "여보게 나는 그렇게 바가지 긁은 부인이라도 기다려줄 아내가 있으면 좋겠네!"라고 하더랍니다. 병석에서 누워 있는 남편을 불평하는 여자에게 옆에 있는 한 홀어미가 말하기를 "나는 그런 남편이라도 집에 있기만 하면 좋겠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요즈음 미국 국민은 물론 세계가 전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부인 낸시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레이건은 소위 치매에 걸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고 자신이 전에 대통령이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기자가 낸시에게 "지금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은 진정 길고도 긴 이별이지요. 하지만 이 이별은 내게 있어 우리가 함께 하는 삶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비록 지금 매우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이 순간들을 어느 것과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부란 근본적으로 조화 있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고 하기도 하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결혼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결혼을 통하여 위로를 받기보다 오히려 힘을 상실하고 절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부부는 갈등이 없고 아름답고 위로만 넘치는 상태로 만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자와 남자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려는 자가 주려는 것과 받으려는 자가 받으려고 하는 것이 서로 모순 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부부는 행복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부가 진정으로 행복한 부부는 결혼 한 후에 시간이 흐를수록 행복의 농도가 짙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처음에는 뜨겁게 사랑하는데 갈수록 그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가정의 모습을 유지하면 세월의 흐름 따라 행복도가 더 높아져야 합니다. 세월이 흘러 상대를 더 알면 알수록 그 사랑의 농도도 더 짙어져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왜 결혼 초에는 사랑하다가도 살면 살수록 그 사랑이 식어질까요? 사랑에 대한 오해 때문이요 그리고 사랑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할 때 사랑의 주체는 "나"요 사랑의 대상은 "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가능하려면 나도 잘 알아야 하고 너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모르고 더욱이 너를 모르니 모르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 됩니다. 사실 너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너를 필요로 하고 너를 이용한다는 말이 더 맞을 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너를 사랑한다면 너를 알아야 할 것이고, 그리고 너를 알면 알수록 그 사랑이 더 깊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알면 알수록 사랑이 식어지고 그 농도가 떨어진다면 바로 그것은 이기심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데 너를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등 많은 부부 중에 남편이 상담자를 찾아왔습니다. 첫마디가 이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상담자가 "이혼하고 싶으면 마땅히 해야죠"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화를 내면서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해서라도 이혼을 하지 않도록 해주셔야지요?"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혼을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십시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혼을 하고 싶어졌는지 말해 보라"고 하였더니, 핵심은 이렇습니다. 아내가 결혼 전에는 청순하고 순종도 잘 하더니 결혼생활 5년이 지난 지금에는 남편에게 너무나 함부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집안은 늘 엉망이고 자신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을 높여줄 줄 모르고 무엇이든지 내 잘못이라고 핀잔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자기 아내와 자기 회사에 한 여직원과 비교하여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여성스럽고 친절한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의논하면 잘 들어주고 적절한 충고도 해주고 심지어 격려도 해주는데 아내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상담자는 알았습니다. 그의 부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러나 바로 그 남편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자기 아내와 견줄만한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속에 먼저 다른 여자를 제거하도록 상담을 하여 치료하였다는 얘기입니다. 부부관계는 무인도에 둘이 만 살고 있는 것처럼 인식해야 합니다. 무인도에 둘만이 있는데 누구와 이야기할 것이며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 것이며 누가 누구를 도울 것입니까? 오직 부부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관계와 부부관계는 다른 것입니다. 바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둘이 만 살던 그 생활이 부부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둘이 만 있었습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단 둘이서 살았습니다. 거기에는 친구도 없고,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었습니다. 오직 둘이서만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의지하고 도와주고 일평생같이 동반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부부입니다. 세상에 나의 배필은 오직 한 사람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아무도 없는 곳에 둘이 만 있어도 행복한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자식이 있어도 친구가 있어도 부부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모든 문제는 부부가 같이 나누고 같이 해결해야 합니다. 헨리 포드 부부가 금혼식 기념 축하회를 가졌는데 그 때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결혼생활을 50년 동안 성공적으로 살아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포드는 한 마디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 비결은 내가 자동차를 만들 때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비결이라네. 오직 한 모델만을 고집하는 것이라네". 이 세상에는 아내 외에 다른 모델을 가지면 불행해집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남자를 꽁생원이라고 말하는 여자들이 있는데 그 마음속에 다른 남자와 비교하는 생각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우리가 부모와 자식 사이를 일촌이라고 하고, 형제들의 자식과는 삼촌이라고 하고, 그 자녀들끼리는 사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부는 무촌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무촌은 나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일심동체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불행해지면 같이 불행해지고, 한 사람이 행복해지면 함께 덩달아 행복해지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러므로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서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부부입니다. 이것은 행복의 비밀입니다. 결혼생활이 행복을 보증해 주지 못하지만 그러나 행복한 마음은 결혼생활을 보증해 줄 수 있습니다. 여기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말에는 정신적 의미와 육체적 의미가 다 있다고 봅니다. 부부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육체적 의미로만 부부가 이어오면 늙어서는 소 닭 보듯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부부가 정신적 사랑만 나눈다고 하면 굳이 결혼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부부가 성생활이 불만족해서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결혼에서 성적 의미는 큽니다. 그러나 정신적 사랑을 나누지 않으면서 성에 대한 관심과 정보와 지식이 아무리 높아져도 결국 성 문제로 이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부부는 그것이 육체적 사랑의 깊이를 더하지만 그러나 육체적 문제로 이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늙으면 대화하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부부의 모습에서 그 대화가 중단된 시간은 결혼한 연수와 비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한지 10년이 지나면 10분간 말을 안하고, 결혼한지 30년이 지나면 30분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부부는 위로하고 위로 받는 부부가 제일로 좋은 것입니다. 이삭을 보십시오. 어머니를 잃고 아내를 얻어 위로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 24:67) 그리고,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21절).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남자와 여자의 논쟁 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남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남자의 우월성을 나타내려 합니다. "여자들이 까불어도 남자의 갈비뼈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재료가 다르다. 남자는 흙으로 만들었고, 여자는 뼈로 만들었으니 그 재료가 다르다. 보아라 그릇도 흙으로 만든 것과 뼈로 만든 자기는 값이 다르지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아담이 잠들었을 때 그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아담의 것을 도둑질을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이 "이 사람아! 도적놈이 도적질하고 그보다 더 좋은 물건을 놓고 가는 경우를 보았나?" "고작해야 갈비뼈 하나 도적질하고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놓고 가셨으니 그런 도적이야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의미는 남녀는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많은 차이지만 그러나 인간으로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곧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이 차이가 있으면서도 동등하듯이 여자와 남자도 차이가 있지만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23절)고 한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에게 계시를 받아서 화와가 자기 뼈로 만들어진 것과 자신의 분신이요 동등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녀를 보는 즉시 그녀가 자신의 분신이며 동등하며 배우자이고 보완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와는 아담의 모습에서 남편이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기에 남편의 행동이 아내의 행동이고 아내의 행동이 남편의 행동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세르비아>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남편의 인품은 아내의 표정으로 알 수 있고, 아내의 인품은 남편의 와이셔츠로 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배우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하며,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만족을 주어야 합니다. 배우자에게 "어떤 기쁨을 줄까"를 늘 생각하고 만족을 주는 삶을 제일의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아담이 하와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23절) 했던 고백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부부는 상대를 높이며 살아야 합니다. 평소에도 부부를 높이며 사는 부부가 있고 내리 누르며 사는 부부도 있습니다. 어떤 부부는 "웬수 중에 웬수로다"라고 말하며 살아가는 부부가 많습니다. 자기 배필에게 욕하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서로서로 높이며 살라고 부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토마스 칼라일>은 영국에서 가장 현명한 여인과 결혼했다고 말합니다. 부인은 남편을 존경했으며 칼라일 역시 다른 어떤 여인을 사랑한 일이 없었으며 부인만을 끔찍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칼라일은 나를 한 번도 칭찬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으면 그것으로 모든 게 제대로 되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부인이 죽은 후에야 칼라일은 그 일기를 읽었다고 합니다. 그제야 자신이 아내에게 한 번도 칭찬을 해 본 일이 없다는 자신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 <디즈레일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부인의 내조 덕택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항상 뒤에서 그를 돕고 격려하고 지혜를 주었습니다. 어느 해 <빅토리아> 여왕이 <디즈레일리>에게 자작을 수여하고자 하였을 때 <디즈레일리>는 사양하며 말하였습니다. "제가 오늘까지 국가를 위하여 다소라도 공헌이 있다면 이것은 실로 제 아내의 공입니다. 제 아내에게 수여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디즈레일리>가 아내보다 늦게 사망하였는데 그의 공적을 기려 국장으로 하려고 하였으나 고인의 유언대로 아내 옆에 묻혔다고 합니다. 첫 번째 가정은 에덴에 세워졌습니다. 에덴이란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으로 즐거움이 가득 해야 하고, 나아가 또 부부의 교제로 즐거워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에덴의 가정이 되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1-12)
아담과 하와의 가정/ 창2:18-25/ 2010-04-23
아담과 하와의 가정 창2:18-25 인류 최초의 결혼식이 에덴동산에서 있었습니다. 결혼식장은 에덴동산의 파아란 풀밭이었습니다. 하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과 모든 만물이었습니다. 신랑 되는 아담은 눈을 감은 채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주례자로서 신부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나타나셨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한 가정을 세워주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철저하게 가정적인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 결혼,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놀랍게도 신약에서 예수님의 사역도 결혼식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역이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배필을 만드시고 결혼식을 주례하시고 아담에게 사랑의 서약을 시켰습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서약합니다. 그러니 엄숙하게 하나님께서는 결혼의 선언을 하십니다. 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로서 이 땅에 최초의 부부와 가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신랑의 이름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 토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그릇 속에 담기지 않으면 그 생명은 공중을 떠도는, 오갈데없는 혼백일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그릇인 육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생명인 하와는 그릇인 흙인 아담이 있어서, 담기고 안정되고 평화를 누리고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흙인 아담은 생명인 하와가 있어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고 삶의 기쁨을 누리며 존재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시 이 창세기의 말씀을 살펴보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마다 6번이나 “좋았더라”를 외치시고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창조 사역을 마감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2장에서 놀랍게도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혼자 사는 모습입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동산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아직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상태였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 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 무공해 자연 식품이었고 양식도 풍족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담의 불행과 고독은 무슨 문제입니까? 그것은 영의 문제도 아니고 육의 문제도 아닌 정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정신적으로 필요한 애정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독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이 가득차도 마땅히 받을 사랑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고독을 보시고 고독한 아담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어 첫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치유책이었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흔히 사람은 나를 위해 달라, 나만을 사랑해 달라, 나를 도와달라고 요구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나만을 위해달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에게 나에게 도움을 주라고 합니다. 이 요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다른 곳에서 그러한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숙한 인간관계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입니다. 한 가정 식구들이란 서로를 돕는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더욱 사랑 하겠습니다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위해 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성장해야 합니다. 가정의 비극은 나만을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시작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의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나를 사랑해주기만을 바라는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하고 주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기심이야말로 가정의 불행의 시작이요 비극의 씨앗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 이 말을 거의 꼭 합니다. “이제 신랑 신부는 사랑하기에 결혼 예식을 올립니다. 앞으로 신랑 신부는 결혼했기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혼은 서로 돕는 배필이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받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더욱 주려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가정 생활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서로 돕는 자를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돕는 배필이 됨으로 바람직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희생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헌신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셨는데, 그 축복을 아끼고 가꾸고 간직해야 할 일은 우리의 노력 가운데 되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의 돕는 존재가 되어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이어지는 2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유대 랍비의 집을 방문해서 랍비를 골탕 먹이려고 이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도둑입니다. 남자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남의 갈비뼈를 훔쳐갔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랍비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참 이상한 일도 있지요,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서 작은 은으로 만든 잔을 훔쳐 갔답니다. 그런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몰라도 커다란 금 그릇 하나를 놓고 갔지요. 저는 도둑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그네가 말합니다.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갈비뼈 하나를 훔치셨지만 그 대신 이 세상에 하와라는 금 그릇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씀은, 여자는 남자의 몸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이 땅의 나그네 길을 걸으며 서로 기뻐하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가 넘어지면 하나가 일으켜주는 모습, 이것이 바로 바람직한 가정의 부부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부부는 한 몸임을 잊지 말아야 바람직한 가정을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유대 랍비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남자의 손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의 손 안에 있는 노리개에 지나지 않고, 만일 발뼈로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지배받는 존재가 될 것이요, 머리뼈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머리처럼 떠받들며 살아야 했을 것인데, 위에도 아래도 아닌, 남자의 한 중심에서 갈비뼈를 취했다는 것은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동등한 존재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비뼈는 뜨거운 심장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 심장을 언제나 사랑으로 품고 있게 됩니다. 또 두 손으로 품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곳이 갈비뼈입니다. 동등된 위치에서 서로 사랑하며 존중히 여기며 서로 한 몸임을 확인하면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길을 걸어가도록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줄 믿습니다. 셋째로, 23절 말씀을 보면 “이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 아내를 칭송하는 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를 본 아담이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께 묻기를 “제 아내를 어떻게 저토록 아름답게 만드셨나요?”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름다와야 네가 하와를 좋아하며 기뻐할 게 아니냐?” 하셨습니다. 아담이 너무 좋아서 또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만드셨나요?”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게 아니냐?” 하와를 자세히 드려다 보다가 아담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쟤는 좀 맹한 데가 있는데 왜 그렇죠?”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모자란 놈하고 살지 않겠니?” 그렇습니다. 혹 살다가 남편이 또는 아내가 좀 모자라 보이거나 부족한 점이 보입니까? 그렇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배우자가 너무 똑똑하고 빈틈이 없으면, 부족한 내가 그의 아내나 남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상대의 모자람을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그 모자라는 점은 거꾸로 칭찬으로 메꾸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이 말처럼 상대방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칭찬을 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세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칭찬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칭찬을 통하여 애정을 공급받게 되면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에 변화와 성장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혹 불행한 가정이라도 서로에게 꾸준한 칭찬을 통해 애정이 공급되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기적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축복과 행복은 아지랑이를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바람을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칭찬하는 말과 노력을 통해서 오는 줄 믿습니다. 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가정에 큰 어려움과 슬픔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위로와 칭찬이 있다면 그 위에 하나님이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의 가정처럼 바람직한 내일을 열어 나가시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어린이 주일입니다. 바람직한 어린이, 건강한 자녀 교육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산교육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우리 삶에 행복의 꽃이 활짝 피듯이, 행복하게 사는 어른의 모습 속에 자라나는 자녀들의 앞날은 밝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 자녀들의 본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 창2:18-25/ 2011-10-15
아담과 하와의 가정 창2:18-25 인류 최초의 결혼식이 에덴동산에서 있었습니다. 결혼식장은 에덴동산의 파아란 풀밭이었습니다. 하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과 모든 만물이었습니다. 신랑 되는 아담은 눈을 감은 채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주례자로서 신부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나타나셨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한 가정을 세워주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철저하게 가정적인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 결혼,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놀랍게도 신약에서 예수님의 사역도 결혼식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역이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배필을 만드시고 결혼식을 주례하시고 아담에게 사랑의 서약을 시켰습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서약합니다. 그러니 엄숙하게 하나님께서는 결혼의 선언을 하십니다. 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로서 이 땅에 최초의 부부와 가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신랑의 이름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 토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그릇 속에 담기지 않으면 그 생명은 공중을 떠도는, 오갈데없는 혼백일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그릇인 육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생명인 하와는 그릇인 흙인 아담이 있어서, 담기고 안정되고 평화를 누리고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흙인 아담은 생명인 하와가 있어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고 삶의 기쁨을 누리며 존재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시 이 창세기의 말씀을 살펴보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마다 6번이나 “좋았더라”를 외치시고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창조 사역을 마감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2장에서 놀랍게도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혼자 사는 모습입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동산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아직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상태였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 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 무공해 자연 식품이었고 양식도 풍족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담의 불행과 고독은 무슨 문제입니까? 그것은 영의 문제도 아니고 육의 문제도 아닌 정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정신적으로 필요한 애정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독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이 가득차도 마땅히 받을 사랑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고독을 보시고 고독한 아담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어 첫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치유책이었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흔히 사람은 나를 위해 달라, 나만을 사랑해 달라, 나를 도와달라고 요구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나만을 위해달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에게 나에게 도움을 주라고 합니다. 이 요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다른 곳에서 그러한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숙한 인간관계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입니다. 한 가정 식구들이란 서로를 돕는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더욱 사랑 하겠습니다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위해 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성장해야 합니다. 가정의 비극은 나만을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시작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의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나를 사랑해주기만을 바라는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하고 주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기심이야말로 가정의 불행의 시작이요 비극의 씨앗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 이 말을 거의 꼭 합니다. “이제 신랑 신부는 사랑하기에 결혼 예식을 올립니다. 앞으로 신랑 신부는 결혼했기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혼은 서로 돕는 배필이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받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더욱 주려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가정 생활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서로 돕는 자를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돕는 배필이 됨으로 바람직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희생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헌신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셨는데, 그 축복을 아끼고 가꾸고 간직해야 할 일은 우리의 노력 가운데 되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의 돕는 존재가 되어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이어지는 2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유대 랍비의 집을 방문해서 랍비를 골탕 먹이려고 이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도둑입니다. 남자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남의 갈비뼈를 훔쳐갔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랍비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참 이상한 일도 있지요,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서 작은 은으로 만든 잔을 훔쳐 갔답니다. 그런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몰라도 커다란 금 그릇 하나를 놓고 갔지요. 저는 도둑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그네가 말합니다.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갈비뼈 하나를 훔치셨지만 그 대신 이 세상에 하와라는 금 그릇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씀은, 여자는 남자의 몸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이 땅의 나그네 길을 걸으며 서로 기뻐하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가 넘어지면 하나가 일으켜주는 모습, 이것이 바로 바람직한 가정의 부부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부부는 한 몸임을 잊지 말아야 바람직한 가정을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유대 랍비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남자의 손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의 손 안에 있는 노리개에 지나지 않고, 만일 발뼈로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지배받는 존재가 될 것이요, 머리뼈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머리처럼 떠받들며 살아야 했을 것인데, 위에도 아래도 아닌, 남자의 한 중심에서 갈비뼈를 취했다는 것은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동등한 존재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비뼈는 뜨거운 심장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 심장을 언제나 사랑으로 품고 있게 됩니다. 또 두 손으로 품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곳이 갈비뼈입니다. 동등된 위치에서 서로 사랑하며 존중히 여기며 서로 한 몸임을 확인하면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길을 걸어가도록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줄 믿습니다. 셋째로, 23절 말씀을 보면 “이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 아내를 칭송하는 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를 본 아담이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께 묻기를 “제 아내를 어떻게 저토록 아름답게 만드셨나요?”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름다와야 네가 하와를 좋아하며 기뻐할 게 아니냐?” 하셨습니다. 아담이 너무 좋아서 또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만드셨나요?”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게 아니냐?” 하와를 자세히 드려다 보다가 아담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쟤는 좀 맹한 데가 있는데 왜 그렇죠?”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모자란 놈하고 살지 않겠니?” 그렇습니다. 혹 살다가 남편이 또는 아내가 좀 모자라 보이거나 부족한 점이 보입니까? 그렇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배우자가 너무 똑똑하고 빈틈이 없으면, 부족한 내가 그의 아내나 남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상대의 모자람을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그 모자라는 점은 거꾸로 칭찬으로 메꾸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이 말처럼 상대방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칭찬을 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세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칭찬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칭찬을 통하여 애정을 공급받게 되면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에 변화와 성장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혹 불행한 가정이라도 서로에게 꾸준한 칭찬을 통해 애정이 공급되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기적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축복과 행복은 아지랑이를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바람을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칭찬하는 말과 노력을 통해서 오는 줄 믿습니다. 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가정에 큰 어려움과 슬픔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위로와 칭찬이 있다면 그 위에 하나님이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의 가정처럼 바람직한 내일을 열어 나가시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어린이 주일입니다. 바람직한 어린이, 건강한 자녀 교육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산교육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우리 삶에 행복의 꽃이 활짝 피듯이, 행복하게 사는 어른의 모습 속에 자라나는 자녀들의 앞날은 밝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 자녀들의 본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창2:18-25
아담과 하와의 가정/창2:18-25 2011-07-12 10:16:05 read : 2 인류 최초의 결혼식이 에덴동산에서 있었습니다. 결혼식장은 에덴동산의 파아란 풀밭이었습니다. 하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과 모든 만물이었습니다. 신랑 되는 아담은 눈을 감은 채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주례자로서 신부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나타나셨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한 가정을 세워주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철저하게 가정적인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 결혼,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놀랍게도 신약에서 예수님의 사역도 결혼식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역이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배필을 만드시고 결혼식을 주례하시고 아담에게 사랑의 서약을 시켰습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서약합니다. 그러니 엄숙하게 하나님께서는 결혼의 선언을 하십니다. 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로서 이 땅에 최초의 부부와 가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신랑의 이름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 토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그릇 속에 담기지 않으면 그 생명은 공중을 떠도는, 오갈데없는 혼백일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그릇인 육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생명인 하와는 그릇인 흙인 아담이 있어서, 담기고 안정되고 평화를 누리고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흙인 아담은 생명인 하와가 있어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고 삶의 기쁨을 누리며 존재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시 이 창세기의 말씀을 살펴보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마다 6번이나 “좋았더라”를 외치시고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창조 사역을 마감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2장에서 놀랍게도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혼자 사는 모습입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동산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아직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상태였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 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 무공해 자연 식품이었고 양식도 풍족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담의 불행과 고독은 무슨 문제입니까? 그것은 영의 문제도 아니고 육의 문제도 아닌 정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정신적으로 필요한 애정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독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이 가득차도 마땅히 받을 사랑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고독을 보시고 고독한 아담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어 첫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치유책이었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흔히 사람은 나를 위해 달라, 나만을 사랑해 달라, 나를 도와달라고 요구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나만을 위해달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에게 나에게 도움을 주라고 합니다. 이 요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다른 곳에서 그러한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숙한 인간관계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입니다. 한 가정 식구들이란 서로를 돕는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더욱 사랑 하겠습니다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위해 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성장해야 합니다. 가정의 비극은 나만을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시작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의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나를 사랑해주기만을 바라는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하고 주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기심이야말로 가정의 불행의 시작이요 비극의 씨앗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 이 말을 거의 꼭 합니다. “이제 신랑 신부는 사랑하기에 결혼 예식을 올립니다. 앞으로 신랑 신부는 결혼했기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혼은 서로 돕는 배필이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받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더욱 주려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가정 생활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서로 돕는 자를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돕는 배필이 됨으로 바람직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희생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헌신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셨는데, 그 축복을 아끼고 가꾸고 간직해야 할 일은 우리의 노력 가운데 되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의 돕는 존재가 되어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이어지는 2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유대 랍비의 집을 방문해서 랍비를 골탕 먹이려고 이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도둑입니다. 남자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남의 갈비뼈를 훔쳐갔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랍비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참 이상한 일도 있지요,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서 작은 은으로 만든 잔을 훔쳐 갔답니다. 그런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몰라도 커다란 금 그릇 하나를 놓고 갔지요. 저는 도둑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그네가 말합니다.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갈비뼈 하나를 훔치셨지만 그 대신 이 세상에 하와라는 금 그릇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씀은, 여자는 남자의 몸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이 땅의 나그네 길을 걸으며 서로 기뻐하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가 넘어지면 하나가 일으켜주는 모습, 이것이 바로 바람직한 가정의 부부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부부는 한 몸임을 잊지 말아야 바람직한 가정을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유대 랍비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남자의 손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의 손 안에 있는 노리개에 지나지 않고, 만일 발뼈로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지배받는 존재가 될 것이요, 머리뼈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머리처럼 떠받들며 살아야 했을 것인데, 위에도 아래도 아닌, 남자의 한 중심에서 갈비뼈를 취했다는 것은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동등한 존재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비뼈는 뜨거운 심장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 심장을 언제나 사랑으로 품고 있게 됩니다. 또 두 손으로 품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곳이 갈비뼈입니다. 동등된 위치에서 서로 사랑하며 존중히 여기며 서로 한 몸임을 확인하면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길을 걸어가도록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줄 믿습니다. 셋째로, 23절 말씀을 보면 “이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 아내를 칭송하는 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를 본 아담이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께 묻기를 “제 아내를 어떻게 저토록 아름답게 만드셨나요?”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름다와야 네가 하와를 좋아하며 기뻐할 게 아니냐?” 하셨습니다. 아담이 너무 좋아서 또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만드셨나요?”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게 아니냐?” 하와를 자세히 드려다 보다가 아담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쟤는 좀 맹한 데가 있는데 왜 그렇죠?”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모자란 놈하고 살지 않겠니?” 그렇습니다. 혹 살다가 남편이 또는 아내가 좀 모자라 보이거나 부족한 점이 보입니까? 그렇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배우자가 너무 똑똑하고 빈틈이 없으면, 부족한 내가 그의 아내나 남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상대의 모자람을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그 모자라는 점은 거꾸로 칭찬으로 메꾸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이 말처럼 상대방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칭찬을 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세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칭찬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칭찬을 통하여 애정을 공급받게 되면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에 변화와 성장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혹 불행한 가정이라도 서로에게 꾸준한 칭찬을 통해 애정이 공급되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기적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축복과 행복은 아지랑이를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바람을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칭찬하는 말과 노력을 통해서 오는 줄 믿습니다. 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가정에 큰 어려움과 슬픔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위로와 칭찬이 있다면 그 위에 하나님이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의 가정처럼 바람직한 내일을 열어 나가시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어린이 주일입니다. 바람직한 어린이, 건강한 자녀 교육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산교육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우리 삶에 행복의 꽃이 활짝 피듯이, 행복하게 사는 어른의 모습 속에 자라나는 자녀들의 앞날은 밝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 자녀들의 본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 창2:18-25/ 대림절설교/ 2011-12-12
아담과 하와의 관계 창2:18-25 요즘은 교회에서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역기능적인 가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가정해체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그만큼 깨어진 가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 안에도 사별한 가정, 이별한 가정이 좀 있습니다. 눈에 띄게 문제를 가진 가정도 있습니다. 또 겉으로 볼 때는 별 문제가 없는 가정 같은데 깊이 들어가 보면 문제를 가진 가정들도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부부들 가운데 배우자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불과 4%만이 만족한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현재 미국의 이혼률이 6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98년 이후 이혼률이 33%를 넘어섰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나아간다면 2010년경에는 우리나라도 이혼률이 60%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합니다. 현재 60% 이상의 세계최고의 이혼률을 나타내는 나라는 러시아와 몽골입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구 소련연방이 무너진 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보다 가정의 붕괴를 그 원인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정은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최고의 전쟁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나님의 주례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타락이전의 부부의 모습을 살펴보고 부부관계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부관계를 통해서 주님과 교회의 모습까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본문과 짝이 되는 엡 5:22 이하에 보면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대해서 다룬 후에 엡 5:32에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는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적인 그림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림자를 통해서 실체를 짐작할 수 있듯이 부부관계를 통해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 주님과 성도의 관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부부는 어떤 관계인지 살펴봅시다. 1. 부부는 서로 돕는 관계입니다(18, 20절). 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0,21절에 보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돕는 배필로 아담의 배우자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성분들은 돕는 배필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을 돕는 배필이라고 해서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돕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제르’는 강한 자가 약자를 도울 때에, 하나님께서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하실 때에,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실 때에, 힘없는 자에게 용기를 더하여 주실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돕는 전능한 손길을 얘기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시121:1-2의 말씀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라고 해서 결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보다 부족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보혜사라는 말이 ‘곁에서 돕는 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니, 그분이 약한 것입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부족한 분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잠시라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은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에 아내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성분들은 하나님께서 이런 사명을 주신 것에 대해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여성의 돕는 배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미국 사람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있습니다. 한 번은 미국의 대통령 클린턴과 그의 부인 힐러리가 차를 타고서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고향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기름이 떨어져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기름때 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얼굴에 비지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를 자세히 보니까 힐러리의 옛날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기름을 다 채우고 난 뒤에 차를 타고 가면서 클린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힐러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만일 당신이 저런 남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소? 당신이 나를 만난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시오!" 그 말을 들은 힐러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만일 그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지금쯤 그 남자가 백악관 집무실에 앉아 있을 거예요." 돕는 배필로서의 아내의 역할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남자를 돕는 여자의 역할만을 얘기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돕는 배필은 남성명사형입니다.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더 많이 도우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서로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도 영생을 얻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다면 기도응답도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전적인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일을 하실 때 준비된 사람, 헌신된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주님의 일은 진행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있었기에 히브리민족이 세워진 것입니다. 모세가 있었기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바울이 있었기에 로마가 복음화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이 있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되고 우리가 헌신할 때 우리를 통해서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에게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2. 부부는 서로에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관계입니다(21,22절) 21, 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잠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하와를 만들기 위하여 죽음의 과정을 통과한 것입니다. 아담은 죽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자신의 갈빗대를 취하는 과정 중에도 잠들어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와가 만들어지기 위하여 아담은 자신의 갈빗대를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헌신을 의미합니다. 결혼생활은 내가 죽어지는 헌신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담이 죽어 하와가 살게 된 것처럼 내가 죽을 때 배우자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성질도 죽어야 하고, 나의 고집도, 나의 계획도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서 나만 주장하면 상대가 죽게 됩니다. 결혼 생활은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결혼 전에는 환상에 젖어 있지만 결혼생활은 현실입니다. 현실은 고달픈 일들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빗댄 유머가 있습니다. 외국에 있는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축하 편지 한 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자식에게 뭐라고 편지 쓰나 아내가 궁금해서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남편이 편지 써 내려가는 것을 읽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남편이 편지를 씁니다. “결혼은 참으로 달콤하고 행복한 것이다. 아들아 너는 참으로 소중한 결단을 했다. 이 아버지가 행복하듯이 너도 반듯이 행복할 것이다. 아버지의 가정생활이 멋있듯이 너도 멋있는 삶을 반드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내가 읽다가 말고 흐뭇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재빨리 ‘추신’이라고 쓰더니 몇 마디를 더 써내려갔습니다. “방금 네 엄마가 나갔다. 이 바보 멍청아 결혼은 무덤이야. 너는 이제부터 죽었다” 부인은 그것도 모르고 편지를 봉하여 얼른 우체통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주님과 신자의 관계도 희생과 헌신으로 맺어지고 아름답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죽어 하와가 살게 된 것처럼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한 희생과 헌신을 하셨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진 것입니다. 아무 흠도 없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믿는 우리들에게 주님을 위한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들에게 죽도록 충성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은 시간과 물질과 육체를 드리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말로만 헌신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들어보면 주를 위하여 사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 가지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일을 위한 헌신입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감동하시고 보여주시고 명한 일이 있다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교회를 위한 헌신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사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위한 헌신, 교회를 위한 수고, 교회를 위한 시간 투자, 교회를 위한 물질 투자, 교회를 위한 땀 흘림이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주님의 사람을 위한 헌신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에게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붙여주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사역을 돕는 것입니다. 3. 부부는 하나님이 이어준 관계입니다(22절).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짝 지워주신 것입니다. 결혼의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다음이 사랑이고, 그 다음이 환경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조건을 거꾸로 접근 하는 것 같습니다. 현대 여성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남성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돈키호테입니다. 그 이유는 “돈” 돈 많고, “키” 키가 크고, “호” 호남형으로 생겼고, “테” 테크닉까지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아주 재미있는 분석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남성에 대해서 거는 꿈이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크게 두 가지 종류의 꿈이 있다고 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보통 여성들은 남성에 대해서 이런 꿈을 가진다고 합니다. 하나는 이른바 신데렐라의 꿈이고, 또 하나는 온달의 꿈입니다. 신데렐라의 꿈은 백마를 탄 왕자님이 번쩍거리는 유리 구두를 들고서 자기를 곧 찾아와 줄 것을 기대하는 꿈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출세해 있는 남자를 기다리는 꿈입니다. 반대로 온달의 꿈은 현재의 남자가 보잘 것 없지만, 자기가 헌신적인 내조를 다해서 그 남자를 훌륭한 인물로 만들어보겠다는 꿈입니다. 평강공주가 가졌던 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꿈이 겉으로 보기에는 좀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똑같은 것입니다. 이미 출세해 있는 남자냐 그렇지 않으면 가능성이 있는 남자냐 하는 차이 일뿐, 여자가 남자를 이용해서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남성들은 여성에 대해서 어떤 꿈을 가지는지 보십시다. 그 심리학자에 의하면 남성들의 꿈도 역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미스코리아의 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복부인의 꿈입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예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자기를 대신해서 돈이라도 많이 버는 것을 원하는 꿈입니다. 역시 남자가 여자를 이용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고 이와 비슷한 이상적인 배우자 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에 대한 사랑보다 하와가 가진 조건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 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엄청난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언제 아담이 하와를 본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 아담이 하와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도 없습니다. 그 런데 어떻게 아담이 하와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그 멋진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배필을 주셨을 것이다!" 이 믿음이 아담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즉석에서 그와 같이 멋진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아담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아담은 즉석에서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가진 조건보다 하나님이 맺어주셨으니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신랑이신 주님과 신부인 성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도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입니다. 요 6:44에 보면 주님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혹시 자신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온 것 같고, 자신이 주님을 선택한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끄셔서 교회로 오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무조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부르셔서 이 자리에 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4. 부부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23절). 24절에 보면 부부는 둘이 한 몸입니다. 사랑하면 상대의 수치스러운 모습도 다 받아줄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서로에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이 나옵니다. 한 몸 되는 것은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사랑하면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몇 일전에 인터넷에서 보니까 몸무게가 25kg 밖에 나가지 않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부인의 모습은 거의 해골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여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식장에 가면 종종 주례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양손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른손은 남편을 상징하는 것이고, 왼손은 아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양손 다 손가락이 있고, 골짜기가 있습니다. 손가락은 장점이고, 골짜기는 단점입니다. 남편에게도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에게도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남편은 자기의 장점으로 아내의 단점을 메워 주고, 또 아내는 자신의 강점으로 남편의 약점을 메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사랑하면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총각이 텔레비전을 보는데 한 아가씨가 텔레비전에 잠깐 나왔는데 한 눈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아가씨의 주소를 알고 신분을 알아서 펜팔을 시작했습니다. 3년 동안 줄곧 펜팔을 했습니다. 3년 후 결혼을 약속하고 처음으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분위기 있는 곳에서 딱 마주쳤는데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남자가 애꾸눈입니다. 여자가 얼마나 화가 나는지 “3년 동안 펜팔을 주고받으면서 당신이 애꾸눈이라는 것을 왜 얘기하지 않았느냐? 당신이 애꾸눈이라는 사실 때문에 내가 화가 나는 것이 아니고 속였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자 남자가 “무슨 얘기냐?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속였냐? 나는 하나도 속인 일이 없다. 내가 처음 편지를 쓸 때 당신에게 뭐라고 썼냐? 당신을 보는 순간 내 가 한 눈에 반했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대답했답니다. 여러분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한 눈을 감고 한 눈으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멀게 됩니다. 사랑하면 상대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스럽게 봐주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에 눈 먼 분입니다. 정말 내세울 것도 없는 연약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하는 것도 없고, 부족한 것뿐인데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면 주님은 눈먼 것이 분명합니다. 23절에 보면 아담은 사랑을 표현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와를 보는 순간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했는데 시적으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한 눈에 뽕 갔다’는 말입니다. 그는 그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은 표현할 때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신문기자가 영국의 수상 처칠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수상께서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그 질문은 "다시 태어나신다고 하더라도 정치를 또 하시겠습니까?"라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칠이 그 질문을 받자마자 아무런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지금 내 아내의 남편이 되겠습니다." 옆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처칠의 아내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여자는 정말 예민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말 한 마디에 쉽게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또 남편이 생각 없이 불쑥 내뱉는 말 한 마디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담처럼 사랑을 표현하면서 살아가야 될 줄 압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경상도 남자들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무뚝뚝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암으로 죽어 가는데 고작 마지막으로 한다는 말 한 마디가 "임자, 죽지마!"랍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훈련되지 않아서 표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서울 아가씨가 경상도 남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너무 무뚝뚝하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이 혹시 변한 것은 아닌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내는 예쁘게 화장하고 집안의 분위기도 무드 있게 잘 꾸미고서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달라붙어 온갖 애교를 떨면서 물었습니다. "자기, 나 사랑해? 나 사랑하면 말이야......" 남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섭게 말했습니다. "와? 또 뭐 필요한 거 있나? 내가 딱 들어올 때부터 뭔가 좀 냄새가 다르다했지." "아니, 여보! 그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고? 고마 빨리 말이나 해라." 그래서 아내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날 사랑하면 당신 입으로 날 사랑한다고 한 번 말 좀 해봐요." 그랬더니 남편은 다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와 이라노? 니 뭐 못 묵을 거라도 묵었나?" 그래도 아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요구하니까, 결국 경상도 남자는 역정을 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가 와 이리 안하던 짓을 다 해쌌노? 니 참말로 돌아뿐거 아이가?" 그러면서 나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아내는 사랑한다는 말도 못 듣고 마음속에 깊은 상처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디 경상도 사람뿐이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랑 표현에 약합니다. 훈련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되면 행동으로라도 표현해야 합니다.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을 행하므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몇 일전 텔레비전에서 보니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남자가 프로포즈를 하는 것을 봤습니다. 커다란 상자가 여자 옆에 있고 여자가 상자를 열자 핑크빛 풍선들이 천장으로 올라갑니다. 그 가운데 유독 큰 풍성하나를 여자가 잡아보니 풍성 줄에 “나랑 결혼 해줘요”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고 반지 하나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말이 안 되면 이렇게 행동으로라도 표현되어야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드린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도 말로서 그리고 행동으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성탄절 장식에 사용하는 포인세티아라는 붉은 색깔의 꽃이 기억납니까? 파란 잎이 빨갛게 변하는 것입니다. 이파리가 뾰족한 꽃 있습니다. 이 꽃의 유래를 잠간 소개하겠습니다. 포인세티아라는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마음 착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명의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이 병을 고치는 좋은 약초가 있다. 그것을 구해오면 병을 쉽게 치료할 수 있다.” 소녀는 명의가 그려준 약초를 찾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추위와 허기에 지친 소녀는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절벽을 바라보니 명의가 말한 하얀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서둘러 절벽을 오르다가 그만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중상을 당한 소녀는 “하나님, 제 엄마의 병을 고쳐야 해요” 라고 소리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피 묻은 약초를 건네주었답니다. 그 순간 소녀의 상처는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절벽의 하얀 꽃은 소녀의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겨울에 잎이 빨갛게 물드는 포인세티아입니다. 이 꽃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크리스마스 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흠이 없는 흰 꽃 같은 분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린 붉은 꽃이 됐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향해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입으로 주님을 향한 사람을 고백하십시오. 기도할 때도 무엇을 달라고만 하지 말고 “주님 사랑해요”라고 사랑을 표현하시기를 바랍니다. 입으로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주님을 향해서 사랑을 표현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주님과 만나기 위해서 시간을 작정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드리므로 주님이 내게 가장 귀중한 분인 것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성탄절을 앞둔 대강절 기간입니다. 이제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탄절까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 보도록 합시다.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생각하시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대강절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