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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담, 나의 하와/창2:18-25
나의 아담, 나의 하와/창2:18-25 2011-07-11 22:40:08 read : 2 1. 태초로부터 가장 신비롭고 수수께끼같은 관계 - 남녀 관계 1) 본문의 문제 의식 - 왜 남녀는 그렇게도 하나가 되려고 하는가? 에 대한 신앙적 답변이다. 2)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홀로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배필인 하와를 창조하셨다. 방법 - 아담을 깊은 잠에 빠트리고 그의 갈빗대를 하나 빼내어 여자를 창조하였다. 이것은 여성이 남성의 전체 몸 중에서 갈빗대 하나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 또는 지배를 정당화했다. 3) 지금도 중동 지방에서는 일부 다처제. 여성은 길에 다닐 때 얼굴을 가리는 차도로를 써야 한다고 회교에서는 규정하고 있다. 중동 지방의 여성 운동은 차도르 벗기 운동에서 시작한다. 캐돌릭에서는 아직도 여성 사제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개신교에서도 바울이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고 해서, 중요한 권한을 빼앗고 있다. 세속의 제도는 이미 남녀 평등을 이루고 있는데, 세속의 법보다 진보적이어야 할 종교에서 구시대적인 남녀 불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4) 하나님이 지어주신 자신의 배필을 보고 아담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외친다. 한 사람의 남성과 여성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면 아이를 낳는다. 아기 - 남녀가 다시 하나의 육체를 이루는 신비한 사건이다. 아기를 가만히 들여다 보라 - 반드시 부모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친가, 외가 쪽 식구들의 형체까지 간직하고 있다. 부분별로 정확하게 나눌 수도 없다 - 이것은 완전한 하나다 : unity 한 아기는 그저 별개의 생명체라기 보다 남자와 여자의 완전한 결합이다. 5) 남녀가 사랑하여 아기를 통해 하나의 육체를 이루려는 욕구는 어디서 오는가? 오늘 성서는 태초에 지어주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요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담은 하와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아담과 하와는 서로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아무리 해도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일체의 관계다. 6)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과 하늘의 짐승들을 주신다. 아담은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면서 그들의 지배자가 된다. 아담 주위에는 갖가지 생물들이 모여들고 그의 친구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담의 고독이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아담과 같은 동류의 짝을 통해서만 아담은 외롭지 않은 온전한 모양을 지닌다. 그러므로, 아담은 완결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인(人)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다. 인간은 본래 남녀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을 때만 인간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누구도 나눌 수 없다'고 선언하셨을 때, 그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것 - 인부부가 서로 떨어져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2. 본질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부부가 나뉘어 지는 것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긴다. 오늘 우리는 분리할 수 없는 남녀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해야 한다. 신혼 여행 갔다 오는 길에 법원에 가서 이혼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한 평생을 같이 살아온 노부부가 함께 삶을 정리해야 할 시기에 갈라서는 황혼 이혼이 늘고 있다. 우리는 나뉘어서는 결코 인간을 이룰 수 없는 부부의 관계를 창조 본래의 모습으로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고, 미리 예방해야 한다. 진지하게 서로가 노력해야 한다. 1) 처음 사랑했던 과거를 아련한 추억 속에 묻지 말라. 연애와 결혼 사진을 자주 들여다보며, 처음 사랑을 간직하라. 결혼 등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라. 처음 결혼을 결심할 때의 마음 - 가난, 질병, 가정 분위기, 직장 등 그 어떤 것에도 우리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는 확신을 녹슬게 하지 말라. 요즘 95년부터 주보 모은 것을 들여다본다 - 참 재미있다. 느낌이 새롭다. 처음 교회 와서 지니고 있었던 감정과 사랑을 다시 끌어올리게 된다. 2)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라. 너는 너이기 이전에 나다 -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다. 나와 너는 둘이 아니다, 하나다. 타성에 젖지 말자 - 서로 가장 뜨겁게 사랑할 때의 마음과 예의를 다시 찾아야 한다. 기사도로서의 남성을 다시 회복하자. 어떤 어려움도 저 남자와 함께 라면 헤쳐갈 것이라는 여성 고유의 모성적 사랑을 잃지 말자. 3) 서로를 신뢰하라.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도 내 인생을 건 나의 반쪽은 믿어서 결혼한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주 먹으면 식상하다. 옷도, 집도, 문화 생활도 되풀이되면 싫증이 난다. 동물은 싫증내지 않는다 - 그래서 동물은 수 천년 동안 생활을 변경시키지 않는다. 인간만이 새로운 것을 찾는다 - 이것인 인류 문화 발전의 동력이다. 아무리 사랑한 부부도 오래 살면 싫증날 때도 있다. 그러면 안되지만 잠시 한눈을 팔거나 방황할 때도 있다. - 그러나, 분명 내 반쪽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신뢰를 잃지 말자. 의처증, 의부증 - 또 다른 나를 의심하는 무서운 질병이 번지고 있다. 에이즈나 홍역보다도 무서운 병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그쳐서 강제로 꼭 붙잡아 매려고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을 철저하게 믿어준다. 의심가는 구석이 있고, 신뢰를 흔드는 요소가 있어도, 추궁하고 닥달하는 것보다는 사랑과 신뢰를 계속해서 확인한다. 4) 창조 때부터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부부는 온전한 하나일 때 진정한 인간이 되는데, 그것은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가능하다. 남편이 보기 싫고 얄미운가? 그를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라. 아내가 야속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멋있지 않은가? 아내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라. 기도는 시간이 지나면 식을 수밖에 없고 싫증날 수밖에 없는 부부의 사랑을 계속해서 뜨겁게 해주는 가장 확실한 도구요, 접착제와 같다. 남편이 행복해야만 아내도 평안할 수 있다. 아내 가 마음으로 화평해야만, 남편도 건강할 수 있다. 3. 아담과 하와는 서로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아담이 곧 하와고, 하와가 곧 아담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 한 쌍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는 옛날과 비교해서, 부부가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은 시대다. 그래서, 세상은 악하다.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것도 우리를 조성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처음의 사랑을 잃지 않는 다양한 방법을 찾으라. 서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던 시절로 돌아가 서로 최선을 다하라. 아무리 의심이 독버섯처럼 돋아나도 그보다 더 강한 신뢰의 칼로 의심의 싹을 자르라. 더욱 진실하게 신뢰를 학인하라. 그리고,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라.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위기를 미리 예방하고 새로운 사랑과 생동감을 찾아가는 지혜와 믿음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란다.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문제점/ 창3:1-7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문제점/창3:1-7 2011-07-12 22:11:25 read : 4 이스라엘을 다녀온 어느 관광객의 재미있는 체험담이다. 들판 양쪽에 풀밭을 두고 가운데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는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이쪽 풀밭에서 길 건너 저쪽 풀밭으로 양떼를 건너가게 하기 위해 한 목동이 피리를 불며 양을 인도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목동이 갑자기 배가 싸르르 아파 오면 서 용변이 급해졌다. 그는 불던 피리를 멈추고 저 멀리 있는 풀밭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1,000여 마리 되는 양이 길 위에 멈추어 섰다. 오가던 수많은 자동차들이 일제히 서야 했다. 차들이 전조등을 켜보고 경적을 울리며 운전자들이 고함을 쳐도 양떼는 길 한가운데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일을 마친 목동이 돌아오고 다시 피리를 불자 양들은 서서히 움직이며 길을 벗어나 건너편 풀밭으로 갔다고 한다. 순종의 훈련이 대단히 잘된 양들이다. 목동의 피리소리에 온전히 순종하는 양떼라. 멋지지 않은가? 마약에 성도들이 그처럼 우리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목동이 피리 소리를 그치고 볼일을 보러 풀밭에 들어갔을 때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양들, 그래서 목동이 길가로 왔을 때는 이미 사방에 흩어져서 목동이 찾아다니느라 죽을 고생을 해야하는 양들, 그런 양들의 모습이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극단적인 생각일까? 사실 불순종하는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조차 보여졌던 일이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잘 다루고 있다. 1. 하나님의 명령과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1) 하나님의 명령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장) 2)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결과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함. 선악과를 따먹고 말음.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죄임. 그리고 아담과 하와 이래로 모든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함. 가인의 후예들에게서 노아의 홍수에서 바벨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서 특히 그리스도인들 속에서조차도 아마도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임.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라. 2. 하와에게서 보여지는 문제점 1) 말씀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음.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말씀에 더함. 하나님은 만지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음. 말씀을 약화시킴. 하나님은 죽을까 하노라가 아닌 정녕 죽으리라 하셨음.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장). 오늘날 성도들이 무너지는 요인. 말씀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다는 것. 설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잇다는 것. 그나마 그 설교조차도 정확하게 말씀에 기초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하는 것.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약화는 목회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자신이 말씀 위에 철저히 서지 못하고 당연히 성도들도 말씀 위에 굳건히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에 무지한 교인들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많다. 2) 사단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음 하나님의 말씀.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장) 사단의 말.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것은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심판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예루살렘에 심판이 임할 것이고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함락될 것이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찌니라 하셨다 하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렘 15장).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 심판하시고 싶지 않아서임.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임. 거짓선지자의 말. "1 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 오게 하겠고 4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렘 28장). 듣기는 좋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음.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함. 결국은 진짜 망하게 됨.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함. 오늘날도 누구 말을 들을까는 매우 중요한 문제. 성경. 하나님의 말씀. 예수만이 구원자. 행4:12. 요14:6. 세상. 예수는 여러 구원자 중의 한명이라고 함. 이 말은 예수 안믿어도 구원받을 길이 있다고 속삭이는 것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임. 세상의 사상. 흐름. 문화. 속삭임을 주의하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될 경우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분명히 하라. 하와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 3) 정욕에 마음을 빼앗긴 하와 선악과를 따 먹은 하와. 불순종. 죄.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하와의 불순종과 죄는 행동 이전에 마음의 문제였다고 하는 점. 다시 말해 마음이 먼저요 행동이 뒤를 따랐다는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마음을 빼앗기니까 나타나는 현상. 선악과가 너무 너무 좋아보임. 그 선악과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금하신 것. 그런데 그것이 너무 좋아보이는 것이다. 왜? 마음을 빼앗겼으니까. 세상이 너무 좋아보여서 그것 따라다니면 정신 못차리는 교인들. 왜 그럴까? 마음을 세상에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마음을 주님께 빼앗기면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주와 동행하는 삶이 가장 매력있어 보이는데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니까 놀러다니고 먹고 마시러 다니고 엉뚱한 짓하러 다니는 것이 재미있고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여러분의 마음은 혹시 세상에 빼앗긴 상태가 아닌가? 성경은 말씀. "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장) 4) 죄를 회개하기 보다 죄를 권함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 자신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을 알고 있음. 그런데 그녀의 행동이 이상함. 자신의 불순종을 회개하든지 남편 아담에게 상의하든지 해야지 오히려 남편에게 선악과를 권함. 남편을 공범자로 만들어버림. 교회 안에서 매우 무서운 죄중 하나. 죄를 지은 성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공범자를 만들어 버림. 자기 편을 더 만들려고 기를 씀. 교회의 내분은 이런식으로 발생하기도 함. 함께 망하려는 처사. 고라당. 250명의 족장을 끌어들임. 함께 망함. 3. 아담에게서 보여지는 문제점 1) 하와에게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음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아담. 창2:17. 그때 하와는 없음. 아담만 있음. 그러면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아는가? 아담을 통해서. 그런데 아담은 명확하게 가르치지 못함. (하와가 머리가 나빠서인가?^^) 그것이 사단이 틈타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됨. 이런 면에서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목사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함. 말씀 아닌 자기 자랑만 하는 목사 만난 교인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 그런데도 자기네 교회 목사가 최고라고 자랑하는 무식한 사람들도 있기는 함. 그러나 여러분은 분명히 깨달으시라.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목회자가 최고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함. 수산나의 교육방법 8가지 A. 벌의 공포심은 때로 아이들을 거짓말하게 하므로...이를 막기 위해 규칙을 세워 잘못을 범하고 죄책을 느껴 슬기롭게 고백하고 고치겠다고 약속하면 매질 하지 않는 것을 지켰왔다. B. 거짓말, 교회에서의 주일에 좀도둑질하는 것, 불순종, 언쟁같은 죄된 행동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지켜왔다. (내버려두면 안됨. 단 한번이라도). 주일 안지키는 것도. 효빈이에게 주일 성수를 훈련하기 시작 C. 같은 잘못으로 두 번 벌하지 않았다. (부모들이 참 못하는 것 중의 하나) D. 순종 특히 자기 고집을 억제한 순종에는 그 공적에 따라 칭찬만이 아닌 상을 주어 왔다. E. 아이들이 순종하는 행동이나(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동을 하려는 의도가 보였을 때는 비록 그것이 훌륭한 정도에 이르지 못하였더라도 받아 주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친절히 가르쳐 왔다. F. 아이들이 가진 물건의 소유권을 침해당하지 않도록 해왔다. 그것이 동전이나 핀 같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소유자의 동의없이는 가져갈 수 없도록 해왔다. G. 약속은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 요즘 젊은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약속을 지킬줄 모른다는 것) H. 딸들에게도 책을 잘 읽기까지는 일을 가르치지 않았다. (책읽게 하는 것 가장 큰 재산을 주는 것)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것. 하나님의 말씀. 철저하게 말씀대로 자녀를 훈련하고 양육함. 웨슬레. 자신은 한 책의 사람이 되겠다고 함. 부모들이여. 다른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쳐라. 철저하게. 말씀을 배우는 자리로 보내라. 2) 하와의 죄를 꾸짖지 않은 것 하와의 죄. 불순종. 아담은 꾸짖지 않음.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워서인가?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장) 그런데 잊고 있는 것. 사랑한다면 죄를 눈감아 주어선 안된다는 것. 비록 책망하다가 의가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성경은 정죄하지 말라고 했지만 책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한 책망이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다.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장). 물론 조심할 것이 있다. -너무 빈번하지 않아야 할 것임. 어떤 이는 늘 책망함. 늘 책망조임. -사랑없는 책망은 잘못임.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을 것임. -자기 의를 드러내는 책망은 죄악. 바리새인들의 외식. 다른 이를 책망함으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랑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 이런 것들을 조심한다면 책망은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요소임. 오늘 본문의 하와같이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을 경우에는 특별히 더욱. 물론 부작용이 많음. 한 여집사 책망. 죄짓지 마세요. 다른 교회로 옮김. 한 여집사. 위로만 할 수가 없었음. 원위치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했고 지금도 그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연락도 안함. 그럼에도 올바로 사명을 감당했다고 생각함. 설사 다른 교회 나가더라도 깨닫게만 되면 얼마나 귀한가? 그 상태 합리화 시켜주면서 우리 교회 머물게 하는 것보다는. 정집사님에게. 그렇게 하려면 그만두라는 말. 정당하다. 3) 하와의 잘못된 권유를 받아들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먹어버림. 궁금증. 알고 먹었을까 모르고 먹었을까. 다른 말로 하와는 선악과임을 알게 한 후 먹였을까 선악과가 아니라고 속인 후 먹었을까? 이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함. 그러나 곧 하나님이 지혜를 주심. 아담은 하와가 건내주는 과일이 선악과인지 알고 먹었음. -과일마다의 특색. 사과와 귤은 다름. 복숭아와 자두는 분명히 다름. 마찬가지로 선악과의 열매도 달랐을 것이 분명함. -게다가 선악과는 생명나무와 더불어 동산 중앙에 뚜렷히 자리잡음. 아담은 선악과 열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기회가 많고 실제로 잘 알고 있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유난히 금지된 하나의 과실. 궁금하지 않은가? 무엇을 금했는지. 어떤 과실을 금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선악과를 보았을 것임. 충분히 개연성이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아담은 왜 하와가 준 선악과를 먹었을까? 멋진 해석이 하나 나올 수 있을 것임. 너 혼자 죄짓고 떨게 하느니 차라리 나도 죄짓고 함께 떨자. 난 널 사랑하니까. 물론 이건 헛소리임. 아담은 아내 말 듣지 말아야 했던 것임. 아무리 그가 사랑하는 아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가 앞서서는 안되었던 것임. 아내 말 듣고 하나님 말씀 거역한 삼손의 운명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6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7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0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컨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11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3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되리라"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삿 16장) 한심한 삼손. 그는 힘을 잃고 불레셋의 포로가 되어 눈을 뽑힘. 이스라엘의 대 사사는 연자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됨. 다른 것 양보해도 아내에게 양보 안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관한 것. 예배. 아파 죽기전에는 나오게 했음. 아내도 당연히 여김. 헌금. 하나님의 것은 절대 손 못대게. 첫열매. 아내도 당연히 여김. 말씀에서 어긋난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음. 당연한 것 아닌가? 오늘 본문에서 아담에겐 하와지만 우리에겐 각자 다른 사람일 수 있음. 부모일 수 있음.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남편 자녀 가장친한 친구 이웃 그러나 그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난 것을 권하면 대답하라. NO. 아담은 그것을 못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못한다. NO라고 하는 것을. 결론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죄. 그 문제점들을 보았다. -하와 1) 말씀을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음 2) 사단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음 3) 정욕에 마음을 빼앗김. 마음을 지키지 못함. 4) 죄를 다른 사람에게 권함 -아담 1) 하와에게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함 2) 하와의 죄를 꾸짖지 않음 3) 하와의 잘못된 권유를 받아들임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에게도 세상 사는 동안에 여러 가지 유혹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다. 여러분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가올 때는 달콤하나 먹는 순간 독이 되는 것이 유혹이다. 부디 말씀에 굳게 서서 모든 유혹을 이기는 멋진 성도들이 되시라.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문제점/창3:1-7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문제점/창3:1-7 2003-11-03 21:36:32 read : 12 이스라엘을 다녀온 어느 관광객의 재미있는 체험담이다. 들판 양쪽에 풀밭을 두고 가운데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길로는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이쪽 풀밭에서 길 건너 저쪽 풀밭으로 양떼를 건너가게 하기 위해 한 목동이 피리를 불며 양을 인도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목동이 갑자기 배가 싸르르 아파 오면 서 용변이 급해졌다. 그는 불던 피리를 멈추고 저 멀리 있는 풀밭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1,000여 마리 되는 양이 길 위에 멈추어 섰다. 오가던 수많은 자동차들이 일제히 서야 했다. 차들이 전조등을 켜보고 경적을 울리며 운전자들이 고함을 쳐도 양떼는 길 한가운데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일을 마친 목동이 돌아오고 다시 피리를 불자 양들은 서서히 움직이며 길을 벗어나 건너편 풀밭으로 갔다고 한다. 순종의 훈련이 대단히 잘된 양들이다. 목동의 피리소리에 온전히 순종하는 양떼라. 멋지지 않은가? 마약에 성도들이 그처럼 우리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목동이 피리 소리를 그치고 볼일을 보러 풀밭에 들어갔을 때 여기저기 돌아 다니는 양들, 그래서 목동이 길가로 왔을 때는 이미 사방에 흩어져서 목동이 찾아다니느라 죽을 고생을 해야하는 양들, 그런 양들의 모습이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극단적인 생각일까? 사실 불순종하는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서조차 보여졌던 일이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잘 다루고 있다. 1. 하나님의 명령과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1) 하나님의 명령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장) 2)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 결과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함. 선악과를 따먹고 말음. 불순종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죄임. 그리고 아담과 하와 이래로 모든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함. 가인의 후예들에게서 노아의 홍수에서 바벨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서 특히 그리스도인들 속에서조차도 아마도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임.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라. 2. 하와에게서 보여지는 문제점 1) 말씀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음.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말씀에 더함. 하나님은 만지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음. 말씀을 약화시킴. 하나님은 죽을까 하노라가 아닌 정녕 죽으리라 하셨음.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장). 오늘날 성도들이 무너지는 요인. 말씀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다는 것. 설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잇다는 것. 그나마 그 설교조차도 정확하게 말씀에 기초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하는 것.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약화는 목회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자신이 말씀 위에 철저히 서지 못하고 당연히 성도들도 말씀 위에 굳건히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에 무지한 교인들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많다. 2) 사단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음 하나님의 말씀.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장) 사단의 말.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것은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심판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예루살렘에 심판이 임할 것이고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함락될 것이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찌니라 하셨다 하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렘 15장).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 심판하시고 싶지 않아서임.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임. 거짓선지자의 말. "1 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 오게 하겠고 4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렘 28장). 듣기는 좋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음.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함. 결국은 진짜 망하게 됨.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함. 오늘날도 누구 말을 들을까는 매우 중요한 문제. 성경. 하나님의 말씀. 예수만이 구원자. 행4:12. 요14:6. 세상. 예수는 여러 구원자 중의 한명이라고 함. 이 말은 예수 안믿어도 구원받을 길이 있다고 속삭이는 것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임. 세상의 사상. 흐름. 문화. 속삭임을 주의하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될 경우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분명히 하라. 하와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 3) 정욕에 마음을 빼앗긴 하와 선악과를 따 먹은 하와. 불순종. 죄.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하와의 불순종과 죄는 행동 이전에 마음의 문제였다고 하는 점. 다시 말해 마음이 먼저요 행동이 뒤를 따랐다는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마음을 빼앗기니까 나타나는 현상. 선악과가 너무 너무 좋아보임. 그 선악과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금하신 것. 그런데 그것이 너무 좋아보이는 것이다. 왜? 마음을 빼앗겼으니까. 세상이 너무 좋아보여서 그것 따라다니면 정신 못차리는 교인들. 왜 그럴까? 마음을 세상에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마음을 주님께 빼앗기면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주와 동행하는 삶이 가장 매력있어 보이는데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니까 놀러다니고 먹고 마시러 다니고 엉뚱한 짓하러 다니는 것이 재미있고 멋있어 보이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여러분의 마음은 혹시 세상에 빼앗긴 상태가 아닌가? 성경은 말씀. "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장) 4) 죄를 회개하기 보다 죄를 권함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 자신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을 알고 있음. 그런데 그녀의 행동이 이상함. 자신의 불순종을 회개하든지 남편 아담에게 상의하든지 해야지 오히려 남편에게 선악과를 권함. 남편을 공범자로 만들어버림. 교회 안에서 매우 무서운 죄중 하나. 죄를 지은 성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공범자를 만들어 버림. 자기 편을 더 만들려고 기를 씀. 교회의 내분은 이런식으로 발생하기도 함. 함께 망하려는 처사. 고라당. 250명의 족장을 끌어들임. 함께 망함. 3. 아담에게서 보여지는 문제점 1) 하와에게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음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아담. 창2:17. 그때 하와는 없음. 아담만 있음. 그러면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아는가? 아담을 통해서. 그런데 아담은 명확하게 가르치지 못함. (하와가 머리가 나빠서인가?^^) 그것이 사단이 틈타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됨. 이런 면에서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목사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함. 말씀 아닌 자기 자랑만 하는 목사 만난 교인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 그런데도 자기네 교회 목사가 최고라고 자랑하는 무식한 사람들도 있기는 함. 그러나 여러분은 분명히 깨달으시라.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목회자가 최고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함. 수산나의 교육방법 8가지 A. 벌의 공포심은 때로 아이들을 거짓말하게 하므로...이를 막기 위해 규칙을 세워 잘못을 범하고 죄책을 느껴 슬기롭게 고백하고 고치겠다고 약속하면 매질 하지 않는 것을 지켰왔다. B. 거짓말, 교회에서의 주일에 좀도둑질하는 것, 불순종, 언쟁같은 죄된 행동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지켜왔다. (내버려두면 안됨. 단 한번이라도). 주일 안지키는 것도. 효빈이에게 주일 성수를 훈련하기 시작 C. 같은 잘못으로 두 번 벌하지 않았다. (부모들이 참 못하는 것 중의 하나) D. 순종 특히 자기 고집을 억제한 순종에는 그 공적에 따라 칭찬만이 아닌 상을 주어 왔다. E. 아이들이 순종하는 행동이나(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동을 하려는 의도가 보였을 때는 비록 그것이 훌륭한 정도에 이르지 못하였더라도 받아 주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친절히 가르쳐 왔다. F. 아이들이 가진 물건의 소유권을 침해당하지 않도록 해왔다. 그것이 동전이나 핀 같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소유자의 동의없이는 가져갈 수 없도록 해왔다. G. 약속은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 요즘 젊은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약속을 지킬줄 모른다는 것) H. 딸들에게도 책을 잘 읽기까지는 일을 가르치지 않았다. (책읽게 하는 것 가장 큰 재산을 주는 것)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것. 하나님의 말씀. 철저하게 말씀대로 자녀를 훈련하고 양육함. 웨슬레. 자신은 한 책의 사람이 되겠다고 함. 부모들이여. 다른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쳐라. 철저하게. 말씀을 배우는 자리로 보내라. 2) 하와의 죄를 꾸짖지 않은 것 하와의 죄. 불순종. 아담은 꾸짖지 않음.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워서인가? "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장) 그런데 잊고 있는 것. 사랑한다면 죄를 눈감아 주어선 안된다는 것. 비록 책망하다가 의가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성경은 정죄하지 말라고 했지만 책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한 책망이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다.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장). 물론 조심할 것이 있다. -너무 빈번하지 않아야 할 것임. 어떤 이는 늘 책망함. 늘 책망조임. -사랑없는 책망은 잘못임.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을 것임. -자기 의를 드러내는 책망은 죄악. 바리새인들의 외식. 다른 이를 책망함으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랑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 이런 것들을 조심한다면 책망은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요소임. 오늘 본문의 하와같이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을 경우에는 특별히 더욱. 물론 부작용이 많음. 한 여집사 책망. 죄짓지 마세요. 다른 교회로 옮김. 한 여집사. 위로만 할 수가 없었음. 원위치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했고 지금도 그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연락도 안함. 그럼에도 올바로 사명을 감당했다고 생각함. 설사 다른 교회 나가더라도 깨닫게만 되면 얼마나 귀한가? 그 상태 합리화 시켜주면서 우리 교회 머물게 하는 것보다는. 정집사님에게. 그렇게 하려면 그만두라는 말. 정당하다. 3) 하와의 잘못된 권유를 받아들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먹어버림. 궁금증. 알고 먹었을까 모르고 먹었을까. 다른 말로 하와는 선악과임을 알게 한 후 먹였을까 선악과가 아니라고 속인 후 먹었을까? 이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함. 그러나 곧 하나님이 지혜를 주심. 아담은 하와가 건내주는 과일이 선악과인지 알고 먹었음. -과일마다의 특색. 사과와 귤은 다름. 복숭아와 자두는 분명히 다름. 마찬가지로 선악과의 열매도 달랐을 것이 분명함. -게다가 선악과는 생명나무와 더불어 동산 중앙에 뚜렷히 자리잡음. 아담은 선악과 열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기회가 많고 실제로 잘 알고 있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유난히 금지된 하나의 과실. 궁금하지 않은가? 무엇을 금했는지. 어떤 과실을 금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선악과를 보았을 것임. 충분히 개연성이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아담은 왜 하와가 준 선악과를 먹었을까? 멋진 해석이 하나 나올 수 있을 것임. 너 혼자 죄짓고 떨게 하느니 차라리 나도 죄짓고 함께 떨자. 난 널 사랑하니까. 물론 이건 헛소리임. 아담은 아내 말 듣지 말아야 했던 것임. 아무리 그가 사랑하는 아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가 앞서서는 안되었던 것임. 아내 말 듣고 하나님 말씀 거역한 삼손의 운명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6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7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0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컨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11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3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되리라"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삿 16장) 한심한 삼손. 그는 힘을 잃고 불레셋의 포로가 되어 눈을 뽑힘. 이스라엘의 대 사사는 연자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됨. 다른 것 양보해도 아내에게 양보 안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관한 것. 예배. 아파 죽기전에는 나오게 했음. 아내도 당연히 여김. 헌금. 하나님의 것은 절대 손 못대게. 첫열매. 아내도 당연히 여김. 말씀에서 어긋난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음. 당연한 것 아닌가? 오늘 본문에서 아담에겐 하와지만 우리에겐 각자 다른 사람일 수 있음. 부모일 수 있음.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남편 자녀 가장친한 친구 이웃 그러나 그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난 것을 권하면 대답하라. NO. 아담은 그것을 못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못한다. NO라고 하는 것을. 결론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죄. 그 문제점들을 보았다. -하와 1) 말씀을 두리뭉실하게 알고 있음 2) 사단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음 3) 정욕에 마음을 빼앗김. 마음을 지키지 못함. 4) 죄를 다른 사람에게 권함 -아담 1) 하와에게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함 2) 하와의 죄를 꾸짖지 않음 3) 하와의 잘못된 권유를 받아들임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에게도 세상 사는 동안에 여러 가지 유혹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다. 여러분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가올 때는 달콤하나 먹는 순간 독이 되는 것이 유혹이다. 부디 말씀에 굳게 서서 모든 유혹을 이기는 멋진 성도들이 되시라.
성경인물열전(구약)(2)/ 하와― 인류의 첫 어머니/ 창3:20/ 2009-09-01
성경인물열전(구약)(2)/ 하와― 인류의 첫 어머니 창3:20 1. 인적 사항 ① 인류 최초의 여자. ②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만드심(창 2:22). ③ \\\\\\\\\\\\\\\'하와\\\\\\\\\\\\\\\'는 \\\\\\\\\\\\\\\'생명\\\\\\\\\\\\\\\', \\\\\\\\\\\\\\\'산 자의 어미\\\\\\\\\\\\\\\'라는 뜻. ④ 아담에 의해 가인, 아벨, 셋 등을 낳음(창 4:1,2,25;5:4). ⑤ 하와는 히브리식, 이와는 헬라식, 이브는 영어식 표기법임. 2. 시대적 배경 타락 이전 에덴에서 아담이 완전한 상태에서 생활할 때 그의 배필로 창조되어 인류 최초의 가정으로서 완전한 행복을 맛보았으나 곧 이어진 타락으로 인해 인류역사 최초의 고통까지 경험하였다. 3. 주요 생애 +-----------------------------------------------------------------------------+ | 타락 전 | +-----------------------------------+------------------+----------------------+ |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짐 | 1세 B.C.? | 창 2:18-22 | +-----------------------------------+------------------+----------------------+ | 에덴 동산에 거주 | | 창 2:23-25 | +-----------------------------------+------------------+----------------------+ | 타락 후 | +-----------------------------------+------------------+----------------------+ | 뱀의 유혹으로 타락 | | 창 3:1-6 | +-----------------------------------+------------------+----------------------+ | 에덴 동산에서 추방 | | 창 3:22-24 | +-----------------------------------+------------------+----------------------+ | 가인과 아벨의 출생 | | 창 4:1,2 | +-----------------------------------+------------------+----------------------+ | 가인의 아벨 살해 | | 창 4:3-8 | +-----------------------------------+------------------+----------------------+ | 셋의 출생 | 130세 경(?) | 창 4:25 | +-----------------------------------+------------------+----------------------+ | 기타 자녀 출생 | | 창 5:4 | +-----------------------------------+------------------+----------------------+ 4. 성품 ① 아담이 한 눈에 사랑할 정도로 아름다운 영육에 소유자(창 2:23). ②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먹을 정도로 연약하고 유약한 성품(창 3:1-6). ③ 타락 후 자신의 범죄 책임을 뱀에게 돌리는 소심한 성품(창 3:13). ④ 말씀을 따르는 의지적 성품보다는 본능적으로 행하는 감정적 성품(창 3:6). 5. 구속사적 지위 ①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그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고 그의 신부 된 교회를 예표함(창 2:18-25;엡 2:22-33). ② 역사상 최초로 사단의 유혹을 받고 넘어간 인간이며 남편 아담에게도 그 죄에 동참시킴으로서 사단의 유혹에 약한 인간성을 노출시킴과 동시에 타인에 대한 유혹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죄인의 모습을 보여 줌. 6. 주요 공적 아담의 배필로서 인류 최초의 어머니가 됨(창 2:18,22,23;4:1). 7. 주요 실수 ① 뱀의 유혹으로 타락하고 남편도 타락케 해 그 안에서 모든 인간이 정죄 당하고 사망 가운데 거하게 함(창 3:6;롬 5:16-18). ② 하나님으로부터 죄악에 대한 책임을 추궁 받을 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기에 앞서 그 책임을 뱀에게 돌림(창 3:13). 8. 평가 및 교훈 ①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을 때 그에 반응함으로 결국 선악과를 따먹게 되고 타락하였다(창 3:1,2). 여기에서 우리는 사단 또는 거짓된 자들이 미혹하러 접근해 올 때 반응조차 하지 않음으로 죄악된 길을 벗어나야 함을 배운다. ②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을 때, 선악과를 따먹을 경우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소홀히 함으로 선악과를 따먹어 타락하였다(창 3:2,3). 여기에서 우리는 \\\\\\\\\\\\\\\'등\\\\\\\\\\\\\\\'이요 \\\\\\\\\\\\\\\'빛\\\\\\\\\\\\\\\'(시 119:105)인 말씀을 견고히 붙잡지 못하거나 왜곡할 때 타락하게 됨을 보아 항상 말씀을 그대로 깨달아 견고히 서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③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을 때 특히 그 선악과 나무를 보고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먹었다(창 3:6). 이는 하와가 보는 것, 육신 적인 욕구, 정신적인 욕구 등에 현혹되어 그것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까지 어기며 타락했음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우리 성도들은 요한 사도가 말한 바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두어서 타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을 배운다. ④ 하와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사단의 말에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 눈이 밝아지기는 하였으되 추하고 악한 측면으로 밝아져서 그 결과 수치심밖에 느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우리도 하나님의 명을 듣지 않고 죄의 길로 들어서면 자기 욕심대로 잘될 것 같으나 그 결과는 수치와 형벌뿐이다(롬 6:23). ⑤ 하와는 타락 후 눈이 밝아져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를 발견했을 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를 가리우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수치를 영원히, 온전히 감추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후에 짐승을 죽이시고 만들어주신 가죽옷은 그녀의 수치를 온전히 가리워 줄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 자신의 수단, 율법적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자신의 죄와 수치를 감출 수 없음을 배운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범죄 했을 때 예수님이 주신 복음을 믿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가야겠다. 9. 핵심 성구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라\\\\\\\\\\\\\\\"(창3:20). 김성만 목사(평택 송축교회)
아담과 하와의 가정/ 창2:18-25/ 2010-04-23
아담과 하와의 가정 창2:18-25 인류 최초의 결혼식이 에덴동산에서 있었습니다. 결혼식장은 에덴동산의 파아란 풀밭이었습니다. 하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과 모든 만물이었습니다. 신랑 되는 아담은 눈을 감은 채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주례자로서 신부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나타나셨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한 가정을 세워주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철저하게 가정적인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 결혼,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놀랍게도 신약에서 예수님의 사역도 결혼식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역이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배필을 만드시고 결혼식을 주례하시고 아담에게 사랑의 서약을 시켰습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서약합니다. 그러니 엄숙하게 하나님께서는 결혼의 선언을 하십니다. 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로서 이 땅에 최초의 부부와 가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신랑의 이름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 토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그릇 속에 담기지 않으면 그 생명은 공중을 떠도는, 오갈데없는 혼백일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그릇인 육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생명인 하와는 그릇인 흙인 아담이 있어서, 담기고 안정되고 평화를 누리고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흙인 아담은 생명인 하와가 있어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고 삶의 기쁨을 누리며 존재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시 이 창세기의 말씀을 살펴보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마다 6번이나 “좋았더라”를 외치시고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창조 사역을 마감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2장에서 놀랍게도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혼자 사는 모습입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동산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아직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상태였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 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 무공해 자연 식품이었고 양식도 풍족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담의 불행과 고독은 무슨 문제입니까? 그것은 영의 문제도 아니고 육의 문제도 아닌 정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정신적으로 필요한 애정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독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이 가득차도 마땅히 받을 사랑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고독을 보시고 고독한 아담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어 첫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치유책이었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흔히 사람은 나를 위해 달라, 나만을 사랑해 달라, 나를 도와달라고 요구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나만을 위해달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에게 나에게 도움을 주라고 합니다. 이 요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다른 곳에서 그러한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숙한 인간관계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입니다. 한 가정 식구들이란 서로를 돕는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더욱 사랑 하겠습니다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위해 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성장해야 합니다. 가정의 비극은 나만을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시작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의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나를 사랑해주기만을 바라는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하고 주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기심이야말로 가정의 불행의 시작이요 비극의 씨앗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 이 말을 거의 꼭 합니다. “이제 신랑 신부는 사랑하기에 결혼 예식을 올립니다. 앞으로 신랑 신부는 결혼했기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혼은 서로 돕는 배필이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받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더욱 주려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가정 생활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서로 돕는 자를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돕는 배필이 됨으로 바람직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희생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헌신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셨는데, 그 축복을 아끼고 가꾸고 간직해야 할 일은 우리의 노력 가운데 되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의 돕는 존재가 되어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이어지는 2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유대 랍비의 집을 방문해서 랍비를 골탕 먹이려고 이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도둑입니다. 남자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남의 갈비뼈를 훔쳐갔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랍비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참 이상한 일도 있지요,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서 작은 은으로 만든 잔을 훔쳐 갔답니다. 그런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몰라도 커다란 금 그릇 하나를 놓고 갔지요. 저는 도둑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그네가 말합니다.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갈비뼈 하나를 훔치셨지만 그 대신 이 세상에 하와라는 금 그릇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씀은, 여자는 남자의 몸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이 땅의 나그네 길을 걸으며 서로 기뻐하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가 넘어지면 하나가 일으켜주는 모습, 이것이 바로 바람직한 가정의 부부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부부는 한 몸임을 잊지 말아야 바람직한 가정을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유대 랍비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남자의 손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의 손 안에 있는 노리개에 지나지 않고, 만일 발뼈로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지배받는 존재가 될 것이요, 머리뼈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머리처럼 떠받들며 살아야 했을 것인데, 위에도 아래도 아닌, 남자의 한 중심에서 갈비뼈를 취했다는 것은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동등한 존재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비뼈는 뜨거운 심장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 심장을 언제나 사랑으로 품고 있게 됩니다. 또 두 손으로 품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곳이 갈비뼈입니다. 동등된 위치에서 서로 사랑하며 존중히 여기며 서로 한 몸임을 확인하면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길을 걸어가도록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줄 믿습니다. 셋째로, 23절 말씀을 보면 “이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 아내를 칭송하는 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를 본 아담이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께 묻기를 “제 아내를 어떻게 저토록 아름답게 만드셨나요?”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름다와야 네가 하와를 좋아하며 기뻐할 게 아니냐?” 하셨습니다. 아담이 너무 좋아서 또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만드셨나요?”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게 아니냐?” 하와를 자세히 드려다 보다가 아담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쟤는 좀 맹한 데가 있는데 왜 그렇죠?”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모자란 놈하고 살지 않겠니?” 그렇습니다. 혹 살다가 남편이 또는 아내가 좀 모자라 보이거나 부족한 점이 보입니까? 그렇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배우자가 너무 똑똑하고 빈틈이 없으면, 부족한 내가 그의 아내나 남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상대의 모자람을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그 모자라는 점은 거꾸로 칭찬으로 메꾸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이 말처럼 상대방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칭찬을 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세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칭찬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칭찬을 통하여 애정을 공급받게 되면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에 변화와 성장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혹 불행한 가정이라도 서로에게 꾸준한 칭찬을 통해 애정이 공급되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기적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축복과 행복은 아지랑이를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바람을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칭찬하는 말과 노력을 통해서 오는 줄 믿습니다. 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가정에 큰 어려움과 슬픔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위로와 칭찬이 있다면 그 위에 하나님이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의 가정처럼 바람직한 내일을 열어 나가시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어린이 주일입니다. 바람직한 어린이, 건강한 자녀 교육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산교육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우리 삶에 행복의 꽃이 활짝 피듯이, 행복하게 사는 어른의 모습 속에 자라나는 자녀들의 앞날은 밝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 자녀들의 본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 창2:18-25/ 2011-10-15
아담과 하와의 가정 창2:18-25 인류 최초의 결혼식이 에덴동산에서 있었습니다. 결혼식장은 에덴동산의 파아란 풀밭이었습니다. 하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과 모든 만물이었습니다. 신랑 되는 아담은 눈을 감은 채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주례자로서 신부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나타나셨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한 가정을 세워주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철저하게 가정적인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 결혼,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놀랍게도 신약에서 예수님의 사역도 결혼식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역이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배필을 만드시고 결혼식을 주례하시고 아담에게 사랑의 서약을 시켰습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서약합니다. 그러니 엄숙하게 하나님께서는 결혼의 선언을 하십니다. 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로서 이 땅에 최초의 부부와 가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신랑의 이름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 토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그릇 속에 담기지 않으면 그 생명은 공중을 떠도는, 오갈데없는 혼백일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그릇인 육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생명인 하와는 그릇인 흙인 아담이 있어서, 담기고 안정되고 평화를 누리고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흙인 아담은 생명인 하와가 있어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고 삶의 기쁨을 누리며 존재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시 이 창세기의 말씀을 살펴보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마다 6번이나 “좋았더라”를 외치시고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창조 사역을 마감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2장에서 놀랍게도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혼자 사는 모습입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동산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아직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상태였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 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 무공해 자연 식품이었고 양식도 풍족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담의 불행과 고독은 무슨 문제입니까? 그것은 영의 문제도 아니고 육의 문제도 아닌 정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정신적으로 필요한 애정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독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이 가득차도 마땅히 받을 사랑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고독을 보시고 고독한 아담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어 첫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치유책이었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흔히 사람은 나를 위해 달라, 나만을 사랑해 달라, 나를 도와달라고 요구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나만을 위해달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에게 나에게 도움을 주라고 합니다. 이 요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다른 곳에서 그러한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숙한 인간관계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입니다. 한 가정 식구들이란 서로를 돕는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더욱 사랑 하겠습니다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위해 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성장해야 합니다. 가정의 비극은 나만을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시작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의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나를 사랑해주기만을 바라는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하고 주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기심이야말로 가정의 불행의 시작이요 비극의 씨앗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 이 말을 거의 꼭 합니다. “이제 신랑 신부는 사랑하기에 결혼 예식을 올립니다. 앞으로 신랑 신부는 결혼했기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혼은 서로 돕는 배필이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받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더욱 주려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가정 생활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서로 돕는 자를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돕는 배필이 됨으로 바람직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희생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헌신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셨는데, 그 축복을 아끼고 가꾸고 간직해야 할 일은 우리의 노력 가운데 되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의 돕는 존재가 되어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이어지는 2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유대 랍비의 집을 방문해서 랍비를 골탕 먹이려고 이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도둑입니다. 남자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남의 갈비뼈를 훔쳐갔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랍비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참 이상한 일도 있지요,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서 작은 은으로 만든 잔을 훔쳐 갔답니다. 그런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몰라도 커다란 금 그릇 하나를 놓고 갔지요. 저는 도둑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그네가 말합니다.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갈비뼈 하나를 훔치셨지만 그 대신 이 세상에 하와라는 금 그릇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씀은, 여자는 남자의 몸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이 땅의 나그네 길을 걸으며 서로 기뻐하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가 넘어지면 하나가 일으켜주는 모습, 이것이 바로 바람직한 가정의 부부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부부는 한 몸임을 잊지 말아야 바람직한 가정을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유대 랍비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남자의 손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의 손 안에 있는 노리개에 지나지 않고, 만일 발뼈로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지배받는 존재가 될 것이요, 머리뼈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머리처럼 떠받들며 살아야 했을 것인데, 위에도 아래도 아닌, 남자의 한 중심에서 갈비뼈를 취했다는 것은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동등한 존재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비뼈는 뜨거운 심장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 심장을 언제나 사랑으로 품고 있게 됩니다. 또 두 손으로 품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곳이 갈비뼈입니다. 동등된 위치에서 서로 사랑하며 존중히 여기며 서로 한 몸임을 확인하면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길을 걸어가도록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줄 믿습니다. 셋째로, 23절 말씀을 보면 “이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 아내를 칭송하는 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를 본 아담이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께 묻기를 “제 아내를 어떻게 저토록 아름답게 만드셨나요?”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름다와야 네가 하와를 좋아하며 기뻐할 게 아니냐?” 하셨습니다. 아담이 너무 좋아서 또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만드셨나요?”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게 아니냐?” 하와를 자세히 드려다 보다가 아담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쟤는 좀 맹한 데가 있는데 왜 그렇죠?”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모자란 놈하고 살지 않겠니?” 그렇습니다. 혹 살다가 남편이 또는 아내가 좀 모자라 보이거나 부족한 점이 보입니까? 그렇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배우자가 너무 똑똑하고 빈틈이 없으면, 부족한 내가 그의 아내나 남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상대의 모자람을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그 모자라는 점은 거꾸로 칭찬으로 메꾸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이 말처럼 상대방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칭찬을 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세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칭찬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칭찬을 통하여 애정을 공급받게 되면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에 변화와 성장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혹 불행한 가정이라도 서로에게 꾸준한 칭찬을 통해 애정이 공급되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기적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축복과 행복은 아지랑이를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바람을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칭찬하는 말과 노력을 통해서 오는 줄 믿습니다. 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가정에 큰 어려움과 슬픔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위로와 칭찬이 있다면 그 위에 하나님이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의 가정처럼 바람직한 내일을 열어 나가시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어린이 주일입니다. 바람직한 어린이, 건강한 자녀 교육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산교육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우리 삶에 행복의 꽃이 활짝 피듯이, 행복하게 사는 어른의 모습 속에 자라나는 자녀들의 앞날은 밝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 자녀들의 본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창2:18-25
아담과 하와의 가정/창2:18-25 2011-07-12 10:16:05 read : 2 인류 최초의 결혼식이 에덴동산에서 있었습니다. 결혼식장은 에덴동산의 파아란 풀밭이었습니다. 하객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과 모든 만물이었습니다. 신랑 되는 아담은 눈을 감은 채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주례자로서 신부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나타나셨습니다. 22절 말씀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한 가정을 세워주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철저하게 가정적인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렇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 결혼,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놀랍게도 신약에서 예수님의 사역도 결혼식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은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역이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배필을 만드시고 결혼식을 주례하시고 아담에게 사랑의 서약을 시켰습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서약합니다. 그러니 엄숙하게 하나님께서는 결혼의 선언을 하십니다. 24절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로서 이 땅에 최초의 부부와 가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신랑의 이름은 아담입니다. 아담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 토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그릇 속에 담기지 않으면 그 생명은 공중을 떠도는, 오갈데없는 혼백일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그릇인 육체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생명인 하와는 그릇인 흙인 아담이 있어서, 담기고 안정되고 평화를 누리고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흙인 아담은 생명인 하와가 있어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고 삶의 기쁨을 누리며 존재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시 이 창세기의 말씀을 살펴보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마다 6번이나 “좋았더라”를 외치시고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창조 사역을 마감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2장에서 놀랍게도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혼자 사는 모습입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동산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아직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상태였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 살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전 무공해 자연 식품이었고 양식도 풍족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 아담의 불행과 고독은 무슨 문제입니까? 그것은 영의 문제도 아니고 육의 문제도 아닌 정신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정신적으로 필요한 애정을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고독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이 가득차도 마땅히 받을 사랑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고독을 보시고 고독한 아담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어 첫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치유책이었습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 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흔히 사람은 나를 위해 달라, 나만을 사랑해 달라, 나를 도와달라고 요구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나만을 위해달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들에게 나에게 도움을 주라고 합니다. 이 요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다른 곳에서 그러한 요구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숙한 인간관계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입니다. 한 가정 식구들이란 서로를 돕는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더욱 사랑 하겠습니다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달라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을 위해 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성장해야 합니다. 가정의 비극은 나만을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시작됩니다. 상대방을 향한 내 사랑의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나를 사랑해주기만을 바라는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하고 주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기심이야말로 가정의 불행의 시작이요 비극의 씨앗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 이 말을 거의 꼭 합니다. “이제 신랑 신부는 사랑하기에 결혼 예식을 올립니다. 앞으로 신랑 신부는 결혼했기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혼은 서로 돕는 배필이 되겠다는 약속입니다. 받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더욱 주려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가정 생활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서로 돕는 자를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돕는 배필이 됨으로 바람직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희생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헌신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셨는데, 그 축복을 아끼고 가꾸고 간직해야 할 일은 우리의 노력 가운데 되어지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의 돕는 존재가 되어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이어지는 2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유대 랍비의 집을 방문해서 랍비를 골탕 먹이려고 이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도둑입니다. 남자가 잠을 자고 있을 때 남의 갈비뼈를 훔쳐갔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랍비가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참 이상한 일도 있지요,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서 작은 은으로 만든 잔을 훔쳐 갔답니다. 그런데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몰라도 커다란 금 그릇 하나를 놓고 갔지요. 저는 도둑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그네가 말합니다. “그런 도둑이라면 내게도 들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갈비뼈 하나를 훔치셨지만 그 대신 이 세상에 하와라는 금 그릇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씀은, 여자는 남자의 몸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이 땅의 나그네 길을 걸으며 서로 기뻐하고 서로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가 넘어지면 하나가 일으켜주는 모습, 이것이 바로 바람직한 가정의 부부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부부는 한 몸임을 잊지 말아야 바람직한 가정을 세워 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유대 랍비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남자의 손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의 손 안에 있는 노리개에 지나지 않고, 만일 발뼈로 만들었다면 여자는 남자에게 지배받는 존재가 될 것이요, 머리뼈로 만들었다면 남자는 여자를 머리처럼 떠받들며 살아야 했을 것인데, 위에도 아래도 아닌, 남자의 한 중심에서 갈비뼈를 취했다는 것은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동등한 존재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비뼈는 뜨거운 심장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 심장을 언제나 사랑으로 품고 있게 됩니다. 또 두 손으로 품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곳이 갈비뼈입니다. 동등된 위치에서 서로 사랑하며 존중히 여기며 서로 한 몸임을 확인하면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길을 걸어가도록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신 줄 믿습니다. 셋째로, 23절 말씀을 보면 “이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 아내를 칭송하는 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를 본 아담이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께 묻기를 “제 아내를 어떻게 저토록 아름답게 만드셨나요?”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름다와야 네가 하와를 좋아하며 기뻐할 게 아니냐?” 하셨습니다. 아담이 너무 좋아서 또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만드셨나요?”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게 아니냐?” 하와를 자세히 드려다 보다가 아담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그런데 쟤는 좀 맹한 데가 있는데 왜 그렇죠?”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모자란 놈하고 살지 않겠니?” 그렇습니다. 혹 살다가 남편이 또는 아내가 좀 모자라 보이거나 부족한 점이 보입니까? 그렇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배우자가 너무 똑똑하고 빈틈이 없으면, 부족한 내가 그의 아내나 남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상대의 모자람을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그 모자라는 점은 거꾸로 칭찬으로 메꾸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이 말처럼 상대방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칭찬을 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세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칭찬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칭찬을 통하여 애정을 공급받게 되면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에 변화와 성장이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혹 불행한 가정이라도 서로에게 꾸준한 칭찬을 통해 애정이 공급되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기적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축복과 행복은 아지랑이를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바람을 타고 오지 않습니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칭찬하는 말과 노력을 통해서 오는 줄 믿습니다. 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가정에 큰 어려움과 슬픔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가정 식구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위로와 칭찬이 있다면 그 위에 하나님이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의 가정처럼 바람직한 내일을 열어 나가시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을 어린이 주일입니다. 바람직한 어린이, 건강한 자녀 교육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산교육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 때 우리 삶에 행복의 꽃이 활짝 피듯이, 행복하게 사는 어른의 모습 속에 자라나는 자녀들의 앞날은 밝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 자녀들의 본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 창2:18-25/ 대림절설교/ 2011-12-12
아담과 하와의 관계 창2:18-25 요즘은 교회에서 가정에 대한 설교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역기능적인 가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가정해체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그만큼 깨어진 가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 안에도 사별한 가정, 이별한 가정이 좀 있습니다. 눈에 띄게 문제를 가진 가정도 있습니다. 또 겉으로 볼 때는 별 문제가 없는 가정 같은데 깊이 들어가 보면 문제를 가진 가정들도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부부들 가운데 배우자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불과 4%만이 만족한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현재 미국의 이혼률이 6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98년 이후 이혼률이 33%를 넘어섰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나아간다면 2010년경에는 우리나라도 이혼률이 60%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합니다. 현재 60% 이상의 세계최고의 이혼률을 나타내는 나라는 러시아와 몽골입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구 소련연방이 무너진 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보다 가정의 붕괴를 그 원인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정은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최고의 전쟁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아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나님의 주례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타락이전의 부부의 모습을 살펴보고 부부관계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부관계를 통해서 주님과 교회의 모습까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본문과 짝이 되는 엡 5:22 이하에 보면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대해서 다룬 후에 엡 5:32에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는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적인 그림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림자를 통해서 실체를 짐작할 수 있듯이 부부관계를 통해서 주님과 교회의 관계, 주님과 성도의 관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부부는 어떤 관계인지 살펴봅시다. 1. 부부는 서로 돕는 관계입니다(18, 20절). 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0,21절에 보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돕는 배필로 아담의 배우자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성분들은 돕는 배필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을 돕는 배필이라고 해서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돕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제르’는 강한 자가 약자를 도울 때에, 하나님께서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하실 때에,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실 때에, 힘없는 자에게 용기를 더하여 주실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돕는 전능한 손길을 얘기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시121:1-2의 말씀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라고 해서 결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보다 부족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보혜사라는 말이 ‘곁에서 돕는 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니, 그분이 약한 것입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부족한 분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잠시라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은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에 아내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성분들은 하나님께서 이런 사명을 주신 것에 대해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여성의 돕는 배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미국 사람들 사이에 이런 농담이 있습니다. 한 번은 미국의 대통령 클린턴과 그의 부인 힐러리가 차를 타고서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고향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기름이 떨어져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기름때 묻은 더러운 옷을 입고 얼굴에 비지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를 자세히 보니까 힐러리의 옛날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기름을 다 채우고 난 뒤에 차를 타고 가면서 클린턴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힐러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만일 당신이 저런 남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소? 당신이 나를 만난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시오!" 그 말을 들은 힐러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만일 그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지금쯤 그 남자가 백악관 집무실에 앉아 있을 거예요." 돕는 배필로서의 아내의 역할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돕는 배필이라는 말은 남자를 돕는 여자의 역할만을 얘기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돕는 배필은 남성명사형입니다.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더 많이 도우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서로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움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도 영생을 얻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다면 기도응답도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전적인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일을 하실 때 준비된 사람, 헌신된 사람을 통해서 하십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주님의 일은 진행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있었기에 히브리민족이 세워진 것입니다. 모세가 있었기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바울이 있었기에 로마가 복음화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이 있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되고 우리가 헌신할 때 우리를 통해서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에게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2. 부부는 서로에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관계입니다(21,22절) 21, 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잠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하와를 만들기 위하여 죽음의 과정을 통과한 것입니다. 아담은 죽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자신의 갈빗대를 취하는 과정 중에도 잠들어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와가 만들어지기 위하여 아담은 자신의 갈빗대를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헌신을 의미합니다. 결혼생활은 내가 죽어지는 헌신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담이 죽어 하와가 살게 된 것처럼 내가 죽을 때 배우자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성질도 죽어야 하고, 나의 고집도, 나의 계획도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서 나만 주장하면 상대가 죽게 됩니다. 결혼 생활은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결혼 전에는 환상에 젖어 있지만 결혼생활은 현실입니다. 현실은 고달픈 일들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빗댄 유머가 있습니다. 외국에 있는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축하 편지 한 장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자식에게 뭐라고 편지 쓰나 아내가 궁금해서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남편이 편지 써 내려가는 것을 읽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남편이 편지를 씁니다. “결혼은 참으로 달콤하고 행복한 것이다. 아들아 너는 참으로 소중한 결단을 했다. 이 아버지가 행복하듯이 너도 반듯이 행복할 것이다. 아버지의 가정생활이 멋있듯이 너도 멋있는 삶을 반드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내가 읽다가 말고 흐뭇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재빨리 ‘추신’이라고 쓰더니 몇 마디를 더 써내려갔습니다. “방금 네 엄마가 나갔다. 이 바보 멍청아 결혼은 무덤이야. 너는 이제부터 죽었다” 부인은 그것도 모르고 편지를 봉하여 얼른 우체통에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주님과 신자의 관계도 희생과 헌신으로 맺어지고 아름답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죽어 하와가 살게 된 것처럼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한 희생과 헌신을 하셨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진 것입니다. 아무 흠도 없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믿는 우리들에게 주님을 위한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들에게 죽도록 충성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은 시간과 물질과 육체를 드리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말로만 헌신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들어보면 주를 위하여 사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위한 헌신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 가지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일을 위한 헌신입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감동하시고 보여주시고 명한 일이 있다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교회를 위한 헌신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사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위한 헌신, 교회를 위한 수고, 교회를 위한 시간 투자, 교회를 위한 물질 투자, 교회를 위한 땀 흘림이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주님의 사람을 위한 헌신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에게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붙여주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사역을 돕는 것입니다. 3. 부부는 하나님이 이어준 관계입니다(22절).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짝 지워주신 것입니다. 결혼의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다음이 사랑이고, 그 다음이 환경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조건을 거꾸로 접근 하는 것 같습니다. 현대 여성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남성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돈키호테입니다. 그 이유는 “돈” 돈 많고, “키” 키가 크고, “호” 호남형으로 생겼고, “테” 테크닉까지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아주 재미있는 분석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남성에 대해서 거는 꿈이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크게 두 가지 종류의 꿈이 있다고 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보통 여성들은 남성에 대해서 이런 꿈을 가진다고 합니다. 하나는 이른바 신데렐라의 꿈이고, 또 하나는 온달의 꿈입니다. 신데렐라의 꿈은 백마를 탄 왕자님이 번쩍거리는 유리 구두를 들고서 자기를 곧 찾아와 줄 것을 기대하는 꿈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출세해 있는 남자를 기다리는 꿈입니다. 반대로 온달의 꿈은 현재의 남자가 보잘 것 없지만, 자기가 헌신적인 내조를 다해서 그 남자를 훌륭한 인물로 만들어보겠다는 꿈입니다. 평강공주가 가졌던 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꿈이 겉으로 보기에는 좀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똑같은 것입니다. 이미 출세해 있는 남자냐 그렇지 않으면 가능성이 있는 남자냐 하는 차이 일뿐, 여자가 남자를 이용해서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남성들은 여성에 대해서 어떤 꿈을 가지는지 보십시다. 그 심리학자에 의하면 남성들의 꿈도 역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미스코리아의 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복부인의 꿈입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예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자기를 대신해서 돈이라도 많이 버는 것을 원하는 꿈입니다. 역시 남자가 여자를 이용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고 이와 비슷한 이상적인 배우자 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에 대한 사랑보다 하와가 가진 조건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 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엄청난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언제 아담이 하와를 본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 아담이 하와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도 없습니다. 그 런데 어떻게 아담이 하와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그 멋진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배필을 주셨을 것이다!" 이 믿음이 아담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즉석에서 그와 같이 멋진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아담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아담은 즉석에서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가진 조건보다 하나님이 맺어주셨으니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신랑이신 주님과 신부인 성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도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입니다. 요 6:44에 보면 주님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혹시 자신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온 것 같고, 자신이 주님을 선택한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끄셔서 교회로 오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은 무조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부르셔서 이 자리에 있다”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4. 부부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23절). 24절에 보면 부부는 둘이 한 몸입니다. 사랑하면 상대의 수치스러운 모습도 다 받아줄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서로에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이 나옵니다. 한 몸 되는 것은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사랑하면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몇 일전에 인터넷에서 보니까 몸무게가 25kg 밖에 나가지 않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부인의 모습은 거의 해골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여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식장에 가면 종종 주례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양손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른손은 남편을 상징하는 것이고, 왼손은 아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양손 다 손가락이 있고, 골짜기가 있습니다. 손가락은 장점이고, 골짜기는 단점입니다. 남편에게도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에게도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남편은 자기의 장점으로 아내의 단점을 메워 주고, 또 아내는 자신의 강점으로 남편의 약점을 메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사랑하면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총각이 텔레비전을 보는데 한 아가씨가 텔레비전에 잠깐 나왔는데 한 눈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아가씨의 주소를 알고 신분을 알아서 펜팔을 시작했습니다. 3년 동안 줄곧 펜팔을 했습니다. 3년 후 결혼을 약속하고 처음으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분위기 있는 곳에서 딱 마주쳤는데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남자가 애꾸눈입니다. 여자가 얼마나 화가 나는지 “3년 동안 펜팔을 주고받으면서 당신이 애꾸눈이라는 것을 왜 얘기하지 않았느냐? 당신이 애꾸눈이라는 사실 때문에 내가 화가 나는 것이 아니고 속였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자 남자가 “무슨 얘기냐?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속였냐? 나는 하나도 속인 일이 없다. 내가 처음 편지를 쓸 때 당신에게 뭐라고 썼냐? 당신을 보는 순간 내 가 한 눈에 반했다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대답했답니다. 여러분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한 눈을 감고 한 눈으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멀게 됩니다. 사랑하면 상대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스럽게 봐주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에 눈 먼 분입니다. 정말 내세울 것도 없는 연약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하는 것도 없고, 부족한 것뿐인데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면 주님은 눈먼 것이 분명합니다. 23절에 보면 아담은 사랑을 표현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와를 보는 순간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했는데 시적으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한 눈에 뽕 갔다’는 말입니다. 그는 그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은 표현할 때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신문기자가 영국의 수상 처칠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수상께서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그 질문은 "다시 태어나신다고 하더라도 정치를 또 하시겠습니까?"라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칠이 그 질문을 받자마자 아무런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지금 내 아내의 남편이 되겠습니다." 옆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처칠의 아내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여자는 정말 예민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말 한 마디에 쉽게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또 남편이 생각 없이 불쑥 내뱉는 말 한 마디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담처럼 사랑을 표현하면서 살아가야 될 줄 압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경상도 남자들은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무뚝뚝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암으로 죽어 가는데 고작 마지막으로 한다는 말 한 마디가 "임자, 죽지마!"랍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훈련되지 않아서 표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서울 아가씨가 경상도 남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너무 무뚝뚝하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이 혹시 변한 것은 아닌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내는 예쁘게 화장하고 집안의 분위기도 무드 있게 잘 꾸미고서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달라붙어 온갖 애교를 떨면서 물었습니다. "자기, 나 사랑해? 나 사랑하면 말이야......" 남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섭게 말했습니다. "와? 또 뭐 필요한 거 있나? 내가 딱 들어올 때부터 뭔가 좀 냄새가 다르다했지." "아니, 여보! 그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고? 고마 빨리 말이나 해라." 그래서 아내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날 사랑하면 당신 입으로 날 사랑한다고 한 번 말 좀 해봐요." 그랬더니 남편은 다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와 이라노? 니 뭐 못 묵을 거라도 묵었나?" 그래도 아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요구하니까, 결국 경상도 남자는 역정을 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가 와 이리 안하던 짓을 다 해쌌노? 니 참말로 돌아뿐거 아이가?" 그러면서 나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아내는 사랑한다는 말도 못 듣고 마음속에 깊은 상처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디 경상도 사람뿐이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랑 표현에 약합니다. 훈련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이 안 되면 행동으로라도 표현해야 합니다.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을 행하므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몇 일전 텔레비전에서 보니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남자가 프로포즈를 하는 것을 봤습니다. 커다란 상자가 여자 옆에 있고 여자가 상자를 열자 핑크빛 풍선들이 천장으로 올라갑니다. 그 가운데 유독 큰 풍성하나를 여자가 잡아보니 풍성 줄에 “나랑 결혼 해줘요”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고 반지 하나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말이 안 되면 이렇게 행동으로라도 표현되어야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드린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도 말로서 그리고 행동으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성탄절 장식에 사용하는 포인세티아라는 붉은 색깔의 꽃이 기억납니까? 파란 잎이 빨갛게 변하는 것입니다. 이파리가 뾰족한 꽃 있습니다. 이 꽃의 유래를 잠간 소개하겠습니다. 포인세티아라는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마음 착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명의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이 병을 고치는 좋은 약초가 있다. 그것을 구해오면 병을 쉽게 치료할 수 있다.” 소녀는 명의가 그려준 약초를 찾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추위와 허기에 지친 소녀는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절벽을 바라보니 명의가 말한 하얀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서둘러 절벽을 오르다가 그만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중상을 당한 소녀는 “하나님, 제 엄마의 병을 고쳐야 해요” 라고 소리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피 묻은 약초를 건네주었답니다. 그 순간 소녀의 상처는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절벽의 하얀 꽃은 소녀의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겨울에 잎이 빨갛게 물드는 포인세티아입니다. 이 꽃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크리스마스 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흠이 없는 흰 꽃 같은 분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린 붉은 꽃이 됐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향해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입으로 주님을 향한 사람을 고백하십시오. 기도할 때도 무엇을 달라고만 하지 말고 “주님 사랑해요”라고 사랑을 표현하시기를 바랍니다. 입으로만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주님을 향해서 사랑을 표현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주님과 만나기 위해서 시간을 작정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드리므로 주님이 내게 가장 귀중한 분인 것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성탄절을 앞둔 대강절 기간입니다. 이제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탄절까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해 보도록 합시다.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생각하시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대강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와의 복권/ 창3:17-21/ 2012-04-09
하와의 복권 창3:17-21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 근본이 바로 서야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의 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골방 문을 열고 나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가 주님이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고백은 하나의 혁명이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당한 갈릴리 출신의 한 사내가 주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정신에 사로잡힌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인류’였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가 오늘을 기념하는 것은 그 최초의 자리를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예수가 주님이시다’. 이 한 마디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다른 것들을 ‘주lord’로 섬깁니다. 성령강림절인 오늘은 또한 감리교회가 환경선교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특별한 날을 정하여 이렇게 기념하는 것은 ‘환경 문제’가 그만큼 심각한 상황임을 반증해줍니다. 엊그제 신문들은 인도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코끼리의 난동 사건을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서식지를 잃은 코끼리들이 먹을 것을 찾다가 도심에 들어와 사람을 해치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호주에서는 탄소배출권 확보를 위해 메탄가스를 많이 방출하는 야생 낙타를 대규모로 죽이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고 합니다(한겨레신문, 6월 10일 자 15면). 지금 우리나라의 남부 지역은 이미 장마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지구 도처에서 이상 징후가 감지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우리 삶의 패턴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새로 환경부 장관이 된 분이 이런 모든 문제들은 과학 기술이 해결해 줄 거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하는 구체적인 일들을 모색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의 심각한 위기 앞에서 우리가 성경을 펼치는 까닭은 삶의 근본이 바로 서야 다른 문제들도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와를 위한 변론 성경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하와입니다. 하와의 이름은 언제나 ‘선악과’, ‘타락’, ‘유혹’과 결부되곤 합니다. 순진한 아담을 꾀어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위반하도록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종교학자들은 유혹과 하와를 연결시키는 것은 여성이 갖고 있는 신비한 매력에 대한 남성들의 공포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하와는 요즘 말로 팜므 파탈(femme fatale, 남자를 몰락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 운명의 여인)이 아닙니다. 하와는 솔직합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시자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며 자기 잘못을 시원하게 시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라며 장황하게 변명했던 아담보다는 훨씬 쿨해 보입니다. 어느 여성 신학자는 우스갯소리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단단한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토기보다는 뼈가 들어간 도자기 본차이나(bone china)가 더 단단하듯이, 흙으로 만들어진 남자보다는 뼈로 만들어진 여성이 훨씬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여성은 남성보다 오래 살고, 고통을 견디는 힘도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와라는 이름의 깊은 뜻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와는 히브리어로 ‘생명’이란 뜻의 하야(hajja)에서 유래된 단어(라틴어 Eva)로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학자는 그 이름이 고대 히타이트 족의 천둥신의 아내인 헤바Heba와 연결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와에게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영예스러운 호칭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타락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습니다만 창세기에는 창조 이야기가 두 번 나옵니다. 1장과 2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혼돈과 위협을 극복하는 강인한 전사(warrior)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에게 축복을 겸해 이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1:28) 여기서 사용된 ‘정복하라rada’는 단어는 ‘힘을 행사하라’는 뜻이고, ‘다스리라kabas’는 단어는 피정복민을 다스리듯이 하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 단어에는 ‘돌봄의 책임’이 내포되어 있다는 해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존재의 위계질서가 엄연합니다.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인간은 다른 존재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예술가입니다. 물이 솟아서 땅이 젖자 하나님은 그 보드라운 흙으로 사람을 공들여 빚으시고는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생명체’라고 번역된 nepes hayya를 개역성경은 ‘생령’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이라는 말을 추가함으로써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다를 바 없는 ‘생명체’입니다. 어떻게 보면 창세기 2장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했던 동양적 사유를 닮은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와에게 부여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여성에 대한 최대의 긍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의 타락, 땅의 신음 타락 이야기를 전하는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삶의 어려움과 보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땅에 의지해 살아가다가 결국은 땅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여성들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수고를 해야 하고, 남성들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아나는 땅을 개간하며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정말 면목이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땅이 사람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굉장히 신화적으로 들리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적확하기 이를 데 없는 말입니다. 풍요의 신화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로 인해 땅이 신음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초록별 지구를 위해 인간이 기여한 바가 무엇일까요? 어느 목사님은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한 것은 아주 늦은 시간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인간은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저녁 무렵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많지 않지만 자비로운 주인은 그의 필요에 따라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거저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은혜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에 늦게야 들어온 인간이 그 포도원을 다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아가2:15)는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꿀벌들이 집단 폐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인데,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원인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지구에 있는 식물의 1/3은 곤충이 꽃가루를 옮겨주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충매화蟲媒花입니다. 꿀벌의 죽음은 결국 인류에게 심각한 식량난을 가져올 게 분명합니다. 구제역 파동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땅에 묻었던 가축들의 침출수가 지하수를 오염시킬지 모른다는 공포가 심각하고, 장마철이 다가오면서 파헤쳐놓은 강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가공할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합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통해 중국 네이멍구 지역에 사는 몽골족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몇 년째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푸석푸석해지고 풀들이 잘 돋아나지 않아 가축들을 먹일 것이 없어 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상대대로 풍요로운 초원에 의지해 살던 유목민들의 문화와 삶이 서서히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몇 년째 몽골에 은총의 숲을 조성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지만 그 땅 어딘가에 세상을 푸르게 하고 싶은 우리의 꿈이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옵니다. 저는 몽골이라는 광활한 땅 가운데 바트슘베르, 바양노르, 아르갈란트에 조성되고 있는 ‘은총의 숲’을 생각할 때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무덤을 생각합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에서 눈을 감자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막벨라 굴을 아주 비싼 값에 사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라의 주검을 정성껏 모십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의 매장지가 있기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세상 어느 곳을 떠돌고 있더라도 항상 그곳을 기억해낼 수 있었고,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던 주님의 약속을 상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에 묻은 것은 아내의 시신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이었던 셈입니다. 몽골에 조성되고 있는 ‘은총의 숲’은 황폐하게 변해가고 있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노력하였는지를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징표가 될 것입니다. 자원 고갈, 생물종들의 죽음, 대기 오염, 오존층 파괴, 원자력의 공포, 기후 변화 문제 등은 우리 모두가 외면할 수 없는 지구적 위기의 징후들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생명의 일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 살림의 원리 지금은 ‘하와’가 복권되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첫 사람인 동시에 우리 모두를 의미하듯이, 하와는 생명을 북돋고 살리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모든 사람의 이름입니다. 하와는 곧 ‘여성적 원리’입니다. 남성들이 주도해 온 세상은 지배, 정복, 경쟁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이 처음 만나 제일 먼저 하는 게 서열 정하기입니다. 나이, 학번, 군번 따위를 묻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었지만 요즘은 “어디 사세요?”라고 묻는답니다. 사는 곳과 그 사람의 경제력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남자들만 사는 세상이 있다면 여러분 거기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드십니까? 여성들의 문화는 배려, 공감, 보살핌, 양육, 협동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여성들을 그런 역할에 고정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성들은 계급적으로 위/아래를 나누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돌보는 일은 자비의 심성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훨씬 가깝습니다. 어느 여성 시인은 아기를 낳은 후 젖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이야기를 시로 형상화했습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열과 수시로 찾아드는 오한 속에서 밤을 보내야 했는데, 어머니가 곁에서 밤새 뜨거운 찜질로 젖망울을 풀어주려고 굳었던 가슴을 쓸어주시며 기도하시더랍니다. 어머니의 땀이 시인의 가슴을 흔들어 깨웠고,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있던 뭔가가 솟구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딸의 가슴에 잠들어 있던 ‘어머니성’을 불러낸 것입니다(나희덕의 <해빙>을 풀어서 적다). 이런 기적은 여성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생명을 키우는 일은 홀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여성들은 다른 이들과 협력에는 데도 익숙합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생명 이야기, 환경 이야기를 하면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대개 여성들입니다. 남성에 비해 다른 생명의 욕구와 필요를 잘 알아차리고,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겁니다. 남성 교우 한 분이 아들과 5분 이상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운 데, 아내는 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하더군요.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수용력은 남성들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다른 의미의 ‘하와’ 즉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임을 믿기에 우리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주의의 중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덜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탐욕을 부추기는 이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의 독립군들이 되어야 합니다. 홀로는 갈 수 없는 길이기에 그런 자각을 가진 이들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삶을 연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생명 살림’과 ‘평화 만들기’야말로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입니다. 이 아름다운 꿈이 백일몽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삶이 개인적인 쾌락과 만족이라는 환상을 뛰어넘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기여한다면 우리는 가히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현자가 태어나면 그 근방에 있는 강물은 더 맑아지고 식물들과 산의 나무들은 더 푸르러진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있는 곳에서는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생명 살림의 일꾼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하와의 복권/ 창3:17-21/ 2012-04-09
하와의 복권 창3:17-21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 근본이 바로 서야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은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의 생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골방 문을 열고 나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가 주님이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고백은 하나의 혁명이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처형당한 갈릴리 출신의 한 사내가 주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정신에 사로잡힌 이들이야말로 ‘새로운 인류’였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가 오늘을 기념하는 것은 그 최초의 자리를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예수가 주님이시다’. 이 한 마디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다른 것들을 ‘주lord’로 섬깁니다. 성령강림절인 오늘은 또한 감리교회가 환경선교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특별한 날을 정하여 이렇게 기념하는 것은 ‘환경 문제’가 그만큼 심각한 상황임을 반증해줍니다. 엊그제 신문들은 인도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코끼리의 난동 사건을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서식지를 잃은 코끼리들이 먹을 것을 찾다가 도심에 들어와 사람을 해치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호주에서는 탄소배출권 확보를 위해 메탄가스를 많이 방출하는 야생 낙타를 대규모로 죽이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고 합니다(한겨레신문, 6월 10일 자 15면). 지금 우리나라의 남부 지역은 이미 장마권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지구 도처에서 이상 징후가 감지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우리 삶의 패턴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새로 환경부 장관이 된 분이 이런 모든 문제들은 과학 기술이 해결해 줄 거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하는 구체적인 일들을 모색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의 심각한 위기 앞에서 우리가 성경을 펼치는 까닭은 삶의 근본이 바로 서야 다른 문제들도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와를 위한 변론 성경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하와입니다. 하와의 이름은 언제나 ‘선악과’, ‘타락’, ‘유혹’과 결부되곤 합니다. 순진한 아담을 꾀어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위반하도록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종교학자들은 유혹과 하와를 연결시키는 것은 여성이 갖고 있는 신비한 매력에 대한 남성들의 공포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하와는 요즘 말로 팜므 파탈(femme fatale, 남자를 몰락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 운명의 여인)이 아닙니다. 하와는 솔직합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시자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며 자기 잘못을 시원하게 시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라며 장황하게 변명했던 아담보다는 훨씬 쿨해 보입니다. 어느 여성 신학자는 우스갯소리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단단한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토기보다는 뼈가 들어간 도자기 본차이나(bone china)가 더 단단하듯이, 흙으로 만들어진 남자보다는 뼈로 만들어진 여성이 훨씬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여성은 남성보다 오래 살고, 고통을 견디는 힘도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와라는 이름의 깊은 뜻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와는 히브리어로 ‘생명’이란 뜻의 하야(hajja)에서 유래된 단어(라틴어 Eva)로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학자는 그 이름이 고대 히타이트 족의 천둥신의 아내인 헤바Heba와 연결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와에게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영예스러운 호칭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타락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습니다만 창세기에는 창조 이야기가 두 번 나옵니다. 1장과 2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분위기가 아주 다릅니다. 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혼돈과 위협을 극복하는 강인한 전사(warrior)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에게 축복을 겸해 이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1:28) 여기서 사용된 ‘정복하라rada’는 단어는 ‘힘을 행사하라’는 뜻이고, ‘다스리라kabas’는 단어는 피정복민을 다스리듯이 하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 단어에는 ‘돌봄의 책임’이 내포되어 있다는 해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존재의 위계질서가 엄연합니다.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인간은 다른 존재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예술가입니다. 물이 솟아서 땅이 젖자 하나님은 그 보드라운 흙으로 사람을 공들여 빚으시고는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생명체’라고 번역된 nepes hayya를 개역성경은 ‘생령’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이라는 말을 추가함으로써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다를 바 없는 ‘생명체’입니다. 어떻게 보면 창세기 2장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했던 동양적 사유를 닮은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와에게 부여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여성에 대한 최대의 긍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의 타락, 땅의 신음 타락 이야기를 전하는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삶의 어려움과 보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땅에 의지해 살아가다가 결국은 땅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여성들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수고를 해야 하고, 남성들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아나는 땅을 개간하며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정말 면목이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땅이 사람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굉장히 신화적으로 들리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적확하기 이를 데 없는 말입니다. 풍요의 신화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로 인해 땅이 신음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초록별 지구를 위해 인간이 기여한 바가 무엇일까요? 어느 목사님은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한 것은 아주 늦은 시간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인간은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저녁 무렵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많지 않지만 자비로운 주인은 그의 필요에 따라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거저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은혜입니다. 그런데 포도원에 늦게야 들어온 인간이 그 포도원을 다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아가2:15)는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꿀벌들이 집단 폐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인데,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원인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지구에 있는 식물의 1/3은 곤충이 꽃가루를 옮겨주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충매화蟲媒花입니다. 꿀벌의 죽음은 결국 인류에게 심각한 식량난을 가져올 게 분명합니다. 구제역 파동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땅에 묻었던 가축들의 침출수가 지하수를 오염시킬지 모른다는 공포가 심각하고, 장마철이 다가오면서 파헤쳐놓은 강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가공할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합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통해 중국 네이멍구 지역에 사는 몽골족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몇 년째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푸석푸석해지고 풀들이 잘 돋아나지 않아 가축들을 먹일 것이 없어 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상대대로 풍요로운 초원에 의지해 살던 유목민들의 문화와 삶이 서서히 파괴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몇 년째 몽골에 은총의 숲을 조성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지만 그 땅 어딘가에 세상을 푸르게 하고 싶은 우리의 꿈이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옵니다. 저는 몽골이라는 광활한 땅 가운데 바트슘베르, 바양노르, 아르갈란트에 조성되고 있는 ‘은총의 숲’을 생각할 때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무덤을 생각합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에서 눈을 감자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막벨라 굴을 아주 비싼 값에 사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라의 주검을 정성껏 모십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의 매장지가 있기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세상 어느 곳을 떠돌고 있더라도 항상 그곳을 기억해낼 수 있었고,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던 주님의 약속을 상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에 묻은 것은 아내의 시신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이었던 셈입니다. 몽골에 조성되고 있는 ‘은총의 숲’은 황폐하게 변해가고 있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노력하였는지를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징표가 될 것입니다. 자원 고갈, 생물종들의 죽음, 대기 오염, 오존층 파괴, 원자력의 공포, 기후 변화 문제 등은 우리 모두가 외면할 수 없는 지구적 위기의 징후들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생명의 일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 살림의 원리 지금은 ‘하와’가 복권되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첫 사람인 동시에 우리 모두를 의미하듯이, 하와는 생명을 북돋고 살리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모든 사람의 이름입니다. 하와는 곧 ‘여성적 원리’입니다. 남성들이 주도해 온 세상은 지배, 정복, 경쟁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자들이 처음 만나 제일 먼저 하는 게 서열 정하기입니다. 나이, 학번, 군번 따위를 묻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었지만 요즘은 “어디 사세요?”라고 묻는답니다. 사는 곳과 그 사람의 경제력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남자들만 사는 세상이 있다면 여러분 거기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드십니까? 여성들의 문화는 배려, 공감, 보살핌, 양육, 협동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여성들을 그런 역할에 고정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성들은 계급적으로 위/아래를 나누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돌보는 일은 자비의 심성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훨씬 가깝습니다. 어느 여성 시인은 아기를 낳은 후 젖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이야기를 시로 형상화했습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열과 수시로 찾아드는 오한 속에서 밤을 보내야 했는데, 어머니가 곁에서 밤새 뜨거운 찜질로 젖망울을 풀어주려고 굳었던 가슴을 쓸어주시며 기도하시더랍니다. 어머니의 땀이 시인의 가슴을 흔들어 깨웠고,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있던 뭔가가 솟구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딸의 가슴에 잠들어 있던 ‘어머니성’을 불러낸 것입니다(나희덕의 <해빙>을 풀어서 적다). 이런 기적은 여성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생명을 키우는 일은 홀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여성들은 다른 이들과 협력에는 데도 익숙합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생명 이야기, 환경 이야기를 하면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대개 여성들입니다. 남성에 비해 다른 생명의 욕구와 필요를 잘 알아차리고,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겁니다. 남성 교우 한 분이 아들과 5분 이상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운 데, 아내는 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하더군요.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수용력은 남성들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다른 의미의 ‘하와’ 즉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임을 믿기에 우리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주의의 중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덜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탐욕을 부추기는 이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의 독립군들이 되어야 합니다. 홀로는 갈 수 없는 길이기에 그런 자각을 가진 이들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삶을 연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생명 살림’과 ‘평화 만들기’야말로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입니다. 이 아름다운 꿈이 백일몽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삶이 개인적인 쾌락과 만족이라는 환상을 뛰어넘어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기여한다면 우리는 가히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현자가 태어나면 그 근방에 있는 강물은 더 맑아지고 식물들과 산의 나무들은 더 푸르러진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있는 곳에서는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생명 살림의 일꾼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한나의 감사/ 삼상1:21-28/ 추수감사주일설교/ 2003-11-23
한나의 감사 삼상1:21-28 오늘은 우리교회의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비록 농사를 짓지 않아도 감사절은 언제나 수확의 계절에 드리는 것이기에 추수감사로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가을에 거두는 곡식만을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농사도 수확하는 계절이기에 추수는 언제나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사무엘 상 1장에 나타난 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하여 늘 슬픔에 잠겨 있었던 여인으로 성소에 올라가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린 후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나는 그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쳐 성소에서 자라게 했고, 나중에 그가 제사장 겸 예언자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한나의 고통 한나는 남편 엘가나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아기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엘가나의 다른 부인 브닌나는 자녀들을 낳아 큰소리치면서 항상 한나를 구박하였습니다. ‘풍성한 은혜’라는 뜻을 가진 한나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기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엘가나는 매년 한 번씩 두 아내를 데리고 실로에 있는 성소에 올라가 제사를 드리곤 하였는데, 그 때마다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습니다. 남편은 비록 한나가 아기를 낳지 못하였어도 그를 지극히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한나는 더욱 괴로웠고 미안한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옛날에는 여자가 결혼하여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큰 수치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중죄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 집안의 신앙의 대를 끊어 놓는 일이며, 가문을 약화시키므로 결국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한나는 몇 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심정으로 성소에 올라가 홀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군의 주님, 주께서 주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나를 기억하셔서, 주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그의 마음을 주 앞에 쏟아 놓았습니다. 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하면 자기의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가 아기를 낳은 후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께 바친 것을 보면, 자기 아이를 자기 품에 두고 그를 통해 기쁨을 얻으며, 노후에 그에게 의지하고자 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는 일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며, 자기 책임을 완수하는 일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한나의 생각은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어 그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그가 원하시는 열매를 마땅히 맺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가 주신 사랑의 계명을 온전하게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신앙인들이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면 마땅히 부끄러워하고 슬퍼하며 어찌하든지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한나처럼 안타까워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눈물로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고 그 뜻을 따라 영적 존재로 거듭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은 없고, 뻔뻔스럽게 더 많은 내 요구를 그 앞에 들이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된 그 책임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그것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주님께 나가 용서를 빌면서 간절하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의 발견에서 오는 감사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열어 잉태하게 하셨고, 마침내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주신 아들이라고 하여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한나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그 기쁨을 표현하였습니다. 주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것은 그의 존재가 인정받았다는 뜻이며, 그의 모든 수치가 물러가고 이제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비로소 그의 이름 뜻대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그에게 임하였음을 체험하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 엘가나도 기뻤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은 후 처음 올라가는 실로 성소에 한나도 동행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려고 했으나 한나는 사양하고 빠졌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아기를 젖을 떼면 그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의 기도의 서원이기도 하였고, 서원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귀하게 얻은 아들이라면 정말 애지중지 하면서 자기 옆에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주저하지 않고 아기를 하나님께 스스로 드리기로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아들을 얻자 정말로 기뻐하며 애지중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그 아들을 마지못해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지나치게 이삭에게 집착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신 차리게 하시려고 주신 시험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신 것도 아닌데 스스로 먼저 하나님께 그 아이를 바치겠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신앙이 어쩌면 아브라함보다 뛰어났다고 하겠습니다. 사무엘이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와 더불어 수소 세 마리(표준새번역에는 삼년 된 수소 한 마리로 되어 있다)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부대를 가지고 실로 성소에 올라갔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주신 풍성한 은혜를 감사하면서 자기의 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준비하였고, 그리고 귀한 아들 사무엘을 주저하지 않고 엘리에게 맡겼습니다. 수소 세 마리는 제물로는 너무 많은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 한 마리로 예물을 드리고 보통은 양 한 마리면 충분한 제물이 됩니다. 소를 제물로 삼는 경우는 거국적인 큰 절기 제사 때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제사를 드리면서 수소를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나 가져갔다는 것은 한나가 그만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감사의 직접적인 동기는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드린 감사 찬송의 내용을 보면, 단순하게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약한 자를 반석처럼 보호해 주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쁨 때문에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이다. 그분이 땅덩어리를 기초 위에 올려놓으셨다. 삼상 2:8 힘 있고 강한 자들, 혹은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의 기도나 응답하시는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의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은 그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서 고개를 떳떳이 들고 다닐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주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갖게 되면서 한나는 더 이상 울면서 한숨이나 짓는 나약한 여자가 아니라 자신감과 긍지를 지닌 용기 있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한나는 자기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온 정성을 다한 감사의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발견하지 못하면 기껏해야 우리는 지난 일 년 건강하게 하시고, 가정에 평화를 주시며, 하는 일들이 별 탈 없이 이루어진 일에 대하여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감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가 거기에 머문다면 그것은 너무도 피상적이며,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나처럼 보잘 것 없는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구원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분명히 알고, 자녀답게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나라를 이 땅에 확신을 가지고 실현해 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깨달을 때 우리는 감격을 맛보게 되며, 온 힘을 다한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와 예배가 잘못하면 그저 의례적인 요식행위(要式行爲)로 끝나기 쉽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당에 나오면 하나님의 자녀인 것 같고 사회로 나가면 믿지 않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속세인(俗世人)으로 돌아가는 불명확한 자기 인식이 항상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화끈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악을 행하는 자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로 머물러 있을 때 그 입에서 감사 찬송이 나올 수 없고, 긍지와 자부심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그래서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존재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교만한 자들을 내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믿을 때 우리는 이 땅의 사람들이 나를 외면하여도 두렵지 않으며, 비록 가난하고 힘없어도 부끄러울 것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일 년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열심히 신앙의 농사를 지으셨습니까? 그래서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지난 일 년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지난 일 년 동안 교회에 나오면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 됨을 발견하고 자녀의 본분을 다하고자 최선을 다했던 여러분의 삶에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가 맺힌 줄로 믿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더욱 힘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나라 건설에 함께 동참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