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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5:14-19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2002-02-16 18:30:24 read : 1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난주에 공부한것을 잠시 복습을 합니다. 백성이 크게 부르짖어 원망하는 일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집안에서 잠잠하던 부인들도 도저히 못참겠는지 같이 일어나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크게 원망하게 된 그 당시 네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식량난입니다.. 2,먹고 살기위해서 부동산을 팔아야 했습니다.
느5:14-19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2002-02-16 18:30:24 read : 1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난주에 공부한것을 잠시 복습을 합니다. 백성이 크게 부르짖어 원망하는 일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집안에서 잠잠하던 부인들도 도저히 못참겠는지 같이 일어나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크게 원망하게 된 그 당시 네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식량난입니다.. 2,먹고 살기위해서 부동산을 팔아야 했습니다. 3,빌린돈에 이자가 너무 비쌉니다. 그 당시 근동에서 연 20%의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고 했 습니다. 4,빛을 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부채를 갚기 위해서 자신들의 자녀를 노예로 팔아야 했습 니다..(5) 사실 그동안 느혜미아는 성벽건축에 전념하며 또한 외부적인 대적들의 공격의 소문으로 긴장하며 그저 외적인 문제에 집착 해왔던 느혜미아는 내적으로 이렇게 같은 동족끼리 아픔이 있는줄 모르다가 비로서 그 소식을 듣고 난 후에 몹시 화를 냅니다. 그러나 느혜미아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잘 다스리는 지도자였다고 했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본 받자고 했습니다. 분노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4가지의 큰 손실이 있는데,. 첫째: 감정적인 면에서 손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분노가 감정을 지배하면 무서운 결과를 일 으킬 수 있다 고 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왕이었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삼상 18장에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란 소리를 듣고 심히 분노할때 악신이 틈탔고 그 순간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둘째:사회적인 면에서 큰 손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화를 잘내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며,그로인해 사람들이 화를 잘내는 사람을 싫어하게 되고 따돌림 받게 되므로 사회생활에 막대한 손실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세째:육체적인 면에서 손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분노하면 육체적으로 병이오는데 현대의학 60-70%가 신경으로 병이 오고 즉 분냄으로 오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분을 품고 화를 내무로 무려 51가지 병이 발생한다는 보고가 있었고, 화를 내다가 즉시 병이 발발한 사람이 역대하 26장 19절에 웃시야왕이라고 했습니다. 웃시아는 화를 내다가 이마에 문둥병이 순간 발생했습니다. 네째:영적인면에서 아주 큰 손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는것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지 못할뿐만 아니라 위와 같은 4가지 큰 손실이 있으므로 분노가 치밀때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므로 자신의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자고 지난 시간에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느혜미아서 5장 14-19절의 제목을 붙이면 15절 끝부분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라고의 말씀에서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라는 제목을 정하면 될 줄 압니다. 그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해보면 큰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느혜미아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14절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왕 이십년부터 삽십이년까지 십이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5절에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 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이전 총독들은? 1,백성에게 토색했습니다. 토색이란 말의 의미는? "금품을 억지로 달라고 조름"또 "속여서 빼앗거나 횡령하는것"을 토색이라고 합니다. 양식과 포도주는 물론 은 40세겔씩 백성들에게 부과 해서 받았습니다. 2,총독뿐만 아니라 총독의 종자,즉 관원들도 똑같이 백성을 압제 했었습니다 즉 그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백성들을 압제하고 금품을 요구했던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느혜미아는? 1,백성에게 토색하지 않았습니다. 총독으로서의 특권을 거부했을뿐만 아니라 뱅성들을 오히려 대접 했습니다. 14절에 보면 "유다총독으로 시무한 12년 동안 총독의 녹을 먹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총독이 되면 누리는 특권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양식제공입니다. 이것은 페르시아 관리들에 의해서 느혜미아에게 주어졌는데, 이 양식은 공식적인 손님을 접대하는데 사용되었졌었습니다. 하지만 느혜미아는 그가 당연히 받게 되어 있는 것들마저도 받지를 않았습니다. 17절에보면 많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합니다. 도한 다른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접대할때도 느혜미아는 자신의 제물로 접대를 합니다. 18절을 보면,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하나와 살진 양 여섯을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그러니 총독의 녹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매일 소한마리와 양 여섯과 많은 닭을 느혜미아는 자신의 가산을 털어서 준비하여 대접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과중한 세금을 부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중한 부역을 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며 깊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 경외하는자! 그 사람은 하나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성자를 우리위해 아낌 없이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목숨까지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뜨거운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희생하여 주신 아버지의 사랑! 그 아버지를 경외하는 느혜미아의 모습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을 경외하는 느혜미아는 성역사에 힘을 다했고, 땅을 사모으지 않았습니다. 16절"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라고 했습니다. 느혜미아의 전 관심은 백성들의 안전이었습니다. 그 안전과 보호의 울타리인 성곽건축에 온 힘을 다 쏟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을 사지 않았습니다.사사로히 사욕을 채우지 않았습니다. 3,하나님을 경외하는 느혜미아는? 자신의 형제와 측근 즉 관원들 관리를 잘했습니다. 백성에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조금도 압제하지 못하게 했을뿐만 아리라, 오히려 백성들과 함께 일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14절에 후반절에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 하였느니라"고 하였고, 16절에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느혜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이와 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축복중에 하나는 느혜미아와 같은 휼륭한 지도자를 만난 축복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지도자를 만난것이 축복입니다. 이와 같은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백성을 사랑하며,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지도자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한 국가의 운명을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날 아시아의 네마리 용이, 대만, 싱가폴, 한국, 홍콩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대만이 저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만의 지도자 장개석, 그는 비록 독재를 했지만 그가 죽으면서 남긴재산은 조그마한 집한채였다고 하니 청령한 인물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싱가폴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상으로 지낸 이광요, 고척동들은 아주 청빈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필리핀은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축재를 일삼은 마르코스라는 한 사람때문에 나라꼴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나라도 전두환,노태우 대통령때 밝혀진것인 5천억이니, 안밝혀진것 까지 합하면 얼마인지 알 수 없죠, 또 김대통령,아들 현철씨가 2000억 리베이트설에 검찰이 증거를 포착했다는 뉴스를 접할때 참 가슴이 아픕니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붕괴되고, 한보가 넘어지고, 삼미그룹이 쓸어지며, 직장을 읽고 거리를 해메는 실업자들이 나날이 늘어가며, 자금시장이 경색되어 기업들이 비병을 지르는 이와 같은 사회전반의 걸친 위기와 서민의 고통은, 백성들은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자기것이란 조금도 희생할 줄 모르는 사리사욕에 눈이먼,한 부패하고 타락한 지도자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시국에 느혜미아와 같은 지도자가 그렇게 그리울 수 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 할 줄아는 지도자!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사람은 , 그렇게 다른사람들의 고통을 빨아 자기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신앙이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중 장부 만들 수 없습니다. 농어촌교회 답사를 가는데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습니다. 공적인 일이므로 공금을 사용하므로 영수증을 주유소측에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기름을 넣는 나이 지긋한 남자분이 씩! 웃으면서 2만원치 넣었는데 3만원짜리 영수증을 끊어 줄까요? 라고 합니다. 그래서 차를 탄 장로님과 권사님이 한목소리로 2만원짜리를 끊어오라고.. 어떤곳에서는 그냥 빈 영수증을 준대요? 알아서 적어 챙기라고... 하나님이 불꼿같은 눈으로 보고 계시는데..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못하죠. 2만원치 넣고.,.3만원짜리 끊어서 만원을 착복 할 수 있습니까? 못하죠...양심이 허락치 않고, 신앙이 허락치 않습니다.절대 못합니다. 부산 양무리교회에 다니는 회사에서 경리를 보는 자매가 같은 과 과장이 이중장부를 만들라는 요구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목사님에게 상담을 해왔습니다. 목사님! 자꾸 이중장부 만들어서 횡령을 하려고 과장이 압력을 넣어오는데 못한다고 하니까? 노골적으로 괴롭혀 온다는것입니다.이 자매는 신앙이 아주 좋은 자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있는 자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고 상담을 한것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자매! 절대 이중장부 만들지 말고.,자꾸 괴롭히면 견딜까지 견뎌 보다가 안되면 마지막에는 서울 본사에다가 보고 하라고... 그래서 그 자매는 결국 견디다 견디다 못해 본사에다 보고를 했고, 감사가 나왔습니다. 사실이 밝혀 졌습니다. 그 즉시 과장은 목이 짤렸습니다. 이 자매는 한단계 진급을 했습니다. 회사측에서 고맙다는것이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 , 상사가 부정해먹자고 이중 장부만들라고 하면 할 수 있습니가? 못하죠, 하나님이 두려워서라고 못하죠.. 잠언 10장 2절에 "불의 재물은 무익하다"라고 했습니다. 잠언 13:11절 "망령되이 얻은 재물을 줄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21:6절"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 라"고 하였습니다. 속여서 재물을 모으면 죽음을 구하는것이라고 합니다. 죽으려고 하는 짖이라는것입니다. 교회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그 교회 사찰 집사님이 교회에 기름을 넣으면서 주유소 사람들하고 짜고 기름을 돈데로 넣지 않고 늘 삥땅을 해먹었습니다. 한 통을 다 넣지 않고 조금씩 들 넣어서 교회에 갖다가준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 쥬유소 사람과 잘 아는 장로님이 쥬유소 주인으로 부터 그 사실을 들었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의 아들이 고등학생때 백혈병이 진단되었다고 하는데 결국은 대학생때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 이 집사님이 참 뼈아픈 눈물의 회개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잠언 21:6절 "속이는 말로 재물을 구하는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느혜미아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전 총독과 같이 행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런 느헤미아는 ? 백성들을 위해서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하기를 , 19절에 "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내 하나님이여! (1)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 해 주시십시요. 하나님만 생각해주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2)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즉 하나님의 "생각"과 "은혜" 이 두가지를 소망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느혜미아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자 다운 삶을 살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알아주시고 생각해주시는 이, 오직 나의 하나님, 그리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 오직 나의 하나님! 그 분을 사모하며, 그 분을 소망하며 느혜미아처럼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레7:19-21 깨끗한 자만이 2002-02-18 10:28:26 read : 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 절 : (레7:19)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7장에서는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 저지른 과살로 인한 손해 배상을 위해 드렸던 속건제에 대한 설명에 이어 화목제에 대한 규례와 제사장의 분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일부는
레7:19-21 깨끗한 자만이 2002-02-18 10:28:26 read : 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 절 : (레7:19)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접촉되었으면 먹지 말고 불사를 것이라 그 고기는 깨끗한 자만 먹을 것이니 7장에서는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 저지른 과살로 인한 손해 배상을 위해 드렸던 속건제에 대한 설명에 이어 화목제에 대한 규례와 제사장의 분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일부는 화제로 태워드리고 일부는 제사장과 봉헌자가 먹는 것이 특징이다. 제물로 드려지는 희생의 고기들은 정결해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또 하나의 사실이 첨가되어졌다. 그것은 바로 그 음식을 먹는 데 동참하는 사람들의 정결성에 대한 명령이었다.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갖는 공동체의 특권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깨끗한 자만이 이 자리에 동참할 것을 명령하셨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과 직결된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의 중요성은 오늘도 새롭게 우리 가슴에 와닿는다. 1. 깨끗한 사람들의 공동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자신의 자녀들이 세속에 휩싸여 탈선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고결한 공동체로서 오늘을 승리하면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사이에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화목제는 공동체의 형태와 성격과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은 실로 엄격했다. 깨끗하게 된 사람은 누구나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불결한 상태의 사람이 먹으면 그 백성에게서 끊어지게 해야 한다는 규례에서는 공동체의 순결성을 강조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오늘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은 우리들은 과연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성결성을 진정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성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세속인들의 모임과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 아니 오히려 더 부패해졌다는 사실을 앞두고 우리는 오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실로 깊이 반성해야 한다. 2. 성만찬의 예전에서. 오늘의 화목제는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성만찬과 성례전이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공동체의 가장 핵심적인 성례전이다. 오늘의 이 귀한 예전에서도 우리는 오늘 분문에서 요구하신 "깨끗한 자"만이 함께 주의 살과 피를 받을 수 있다는 음성을 듣는다. " (고전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고전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때때로 우리 앞에 다가선 주의 살과 잔을 대할 때 깨끗한 사람으로서 동참할 수 있다면 그는 실로 복된 사람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주의 살을 먹고 그의 잔을 받으면서 오직 경배와 감사의 기도와 찬송만이 터져나올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의 주인인가! 그는 실로 측량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경지를 달리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3. 불행의 정점에 서지 말자.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불행한 정점은 어디일까? 그것은 내 자신이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는 것에서 제외되어야 하고, 성막의 거룩한 경배로 들어서는 것을 중지당하는 순간이다. 인간들이 읽을 수 있는 규정에서는 자격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 양심에서 우리는 흔히 스스로 실격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면 파문된, 또는 당연히 파문을 받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얼마든지 교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기쁨을 잃어버린 것들은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불행의 정점으로 끌려가지 말자. 그곳에 이르지 않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성령의 손목을 붙잡자. 불행의 정점에 이르는 길에서 벗어나 "깨끗한 자"만이 모이는 행복의 정점으로 발길을 옮기자. 적용 1) 우리가 성도의 교제로부터 차단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우리의 과거사를 잘 살펴야 한다. 2) 나의 인위적인 노력으로 깨끗한 자로 서지 못할 때 우리의 더러운 발을 주님 앞에 내밀어 주님의 손으로 씻김을 받자. 3) 성만찬을 대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는 어떤 준비를 계속해야 하는지 알아 쉬지 말고 준비에 힘쓰자.
삿13:1-7 삼손을 잉태한 여인 2002-02-16 10:14:50 read : 7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있는 주일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올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성탄에 대한 즐거움은 가득한데 그리스도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모습들은 희박한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해서 나 자신에 대한 책망을 해보기도 합니다. 성탄절은 분명 그리스도가
삿13:1-7 삼손을 잉태한 여인 2002-02-16 10:14:50 read : 7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있는 주일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올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성탄에 대한 즐거움은 가득한데 그리스도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모습들은 희박한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해서 나 자신에 대한 책망을 해보기도 합니다. 성탄절은 분명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자고 만들어 놓은 날입니다. 따라서 12월 25일이 예수님이 오신 날이 맞느냐에 대해서 따진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오신 정확한 날을 찾아서 그 날을 지킨다는 것이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에 성탄의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성탄은 하루가 아니라 매일 계속되어져야 할 날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날마다 계속되어져야할 것이지 일년중 하루로 끝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진심으로 성탄절을 기뻐한다면, 과연 우리의 삶의 매일은 그리스도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까? 만약 매일의 삶에서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전혀 없었는데 성탄절이라고 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그 기쁨을 진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매일 그리스도로 기뻐한다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누리는 감정적인 기쁨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고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는 그 복음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근심 걱정들로부터 해방되는 삶을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쁨의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큰 기쁨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일이 신자에게는 불안과 염려로 자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된 것을 말합니다. 즉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것이 싫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서 여러분이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들이 빼앗기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어쩌면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탄절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기뻐하지만, 진정한 성탄의 기쁨은 세상에서의 기쁨과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인 것을 생각하시고 과연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암몬자손과의 전쟁에서 승리케 하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전쟁이 없는 평화의 날을 지냅니다. 그러다가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행한 악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지만 그동안 이스라엘이 행한 악을 보면 아마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니었는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평안할 때 하나님이 주신 평안으로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평안 속에서 자신들의 안락에 깊이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평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성도 느끼지를 못하게 되고 하나님이 없어도 괜찮다는 착각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구원을 위한 신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고 쾌락에 도움을 주는 신에게 마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고 여호와 앞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힘들 때는 열심히 하나님을 부르다가도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급한 문제가 있어야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의 신앙이라면 평안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을 부를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평안할 때, 이 평안이 여호와로 말미암았음을 알고 여호와께 감사하는 신앙이라면 힘들 때도 역시 여호와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여호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안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치우쳤습니다. 지난주에 사사들의 삶은 자기 자식을 위한 것밖에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식을 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것이 삶의 목적이었고 전부였던 것이 당시 사사들이었습니다. 결국 사사의 삶이 그랬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악을 행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악에 대해서 그들을 40년 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심으로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구원하시기 위해서 단지파의 마노아라는 사람의 아내를 통해서 삼손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생각할 것은, 이왕 구원하실거면 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여서 40년을 고생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입을만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악을 본다면 40년이 아니라 영원토록 압제를 당해도 마땅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방인의 압제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고통이 무엇 때문인가를 깊이 인식할 때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포기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능히 포기할 수 있는 신자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대다수의 신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생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세상을 풍족하게 살아가는데는 보탬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삶에 있어서 번거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고 말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나면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 안되고, 머리에 삭도를 대서는 안되고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나실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지켜야 할 규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나실인이 아닌 마노아의 아내, 즉 삼손을 잉태한 여인에게까지 포도주와 독주 그리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나실인이 아닌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나실인으로 택함을 받은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유로 나실인의 삶을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 뭐 그리 힘든 일이겠는가라고 여기겠지만, 당시 이스라엘에 있어서 포도주는 일상 주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들에게 쌀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안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이것은 큰 번거로움을 안겨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싫어한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아무런 불평 없이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겠지만 늘 대하는 것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그 번거로움은 참으로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규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것들을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구별된 자라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몸에 구원자를 보내달라고 요청을 한 적이 없고, 또한 자신이 나실인으로 살겠다는 서원을 한 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이었습니다. 5절에 보면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바치운 나실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의 몸을 통해서 낳은 아이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과 비슷한 사건을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닙니다. 처녀이기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마리아와 요셉 본인은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처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처녀로서는 크나큰 불명예이고 요셉에게도 마리아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서 잉태한 아기가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이며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실 자라는 것을 말했을 때 마리아는 자기 뱃속의 아이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46-55절을 보면 마리아의 찬양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는 찬양을 보면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 예수를 잉태케 하신 것이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노래합니다. 결국 마리아가 자신의 몸에 잉태하신 구주를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비천에 처한 자임을 알았기 때문이고, 예수가 곧 자신을 비천에서 건져낼 구주로 오신 분임을 알았기에 기뻐하는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처녀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고통을 돌아보지 않게 할 만큼 큰 기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말한 비천에 처했다는 것은 가난하다거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상태를 의미한 말입니다. 즉 죄악가운데서 구원받지 못할 자로 살아가는 인간 자체가 참으로 비천에 처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실태를 마리아가 알았기에 비천에서 건져낼 구주의 오심에 대해서 기뻐할 수 있었으며 구주가 자신과 함께 한 것이 곧 복이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 역시 아이를 잉태케 하심으로서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 하라는 규례를 지킨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 아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는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들었을 때 이제 그들의 관심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규례에 대한 번거로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태어나는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에 있게 된 것입니다. 즉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태어나는 아이는 한 개인의 번거로움 따위는 돌아보지 않게 할 만큼 의미가 있는 탄생이었던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또 12절에서도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제 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있는 오늘 그리스가 오셨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나 삼손을 잉태한 마노아의 아내에게 동일한 것은 아이를 잉태한 것이 자기 개인에게는 희생을 요구하는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처녀로서의 희생, 그리고 평소 살아가던 삶에서의 구별, 이 모두가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유로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과 구별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잉태된 아이를 기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아이가 현재 자신들의 비천한 처지를 구원할 자로 오셨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40년 간 압제를 받고 있는 비천한 처지에서 구원할 자로 잉태된 아이였기 때문에 자신에게 요구되는 구별된 삶에 기꺼이 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로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처지가 어떠함을 알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이 처지란 세상의 소유나 지위 환경으로 인한 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을 의미한 처지라면 소유가 많고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따라서 성탄 역시 의미 없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주어진 환경에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환경이 좋을 때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환경이 좋지 못할 때 자신들이 처한 처지가 비참하다거나 좋지 않다고 불평들을 합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처지에서 구원할 자는 환경을 좋게 해주는 메시야일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삶에 풍족함이 주어질 때는 예수로 기뻐한다고 하면서도 풍족하지 못할 때는 기뻐하지 않게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이 잉태된 것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은 비천에 처한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자신의 처지가 어떠함을 아는 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의 오심이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자신들에게 어떤 희생이 요구되고 번거로움이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진정한 성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하나님에게 바쳐진 나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날 때부터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살아갈 자로 택함을 입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실인을 잉태한 마노아의 아내에게까지 나실인의 삶이 요구되는 것은 구별된 자를 잉태한 사람답게 구별한 삶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면 나실인으로 태어날 아이가 나실인이 안된다든지 무슨 영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나실인으로 살아감으로 인해서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아이가 어떤 아이인가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옛사람으로 살아가던 삶을 계속 살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대로 세상에 오심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하늘로 가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과 우리들의 삶이 서로 구분된 채 계속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예수님의 삶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의 삶에서 새사람의 삶으로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이 부여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한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이 있으며 그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별된 자의 구별된 삶입니다. 세상과 구분된 삶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관심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에 있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에 관심을 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분명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삶이란 생각한 것처럼 편안하고 많은 혜택과 도움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비천함, 즉 죄인된 인간으로서의 자기 처지를 가슴깊이 인식한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오심은 무엇보다 반갑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세상에서 어떤 희생과 손해가 요구된다고 해도 기쁨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오심의 기쁨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자에게 성탄이란 진정으로 기쁜 날이 아니겠습니까?
신명기강해-15 /신19:15-21 2011-02-09 15:32:31 read : 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형제를 무함하지 말라 오늘 본문은 십계명 중 아홉 번째 계명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라(출 20:16)’는 교훈에 대한 모세의 설명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악한 행동이나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벌을 주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증거로는 불충분하다는 내용입니다. 아 무리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증거만 가
신명기강해-15 /신19:15-21 2011-02-09 15:32:31 read : 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형제를 무함하지 말라 오늘 본문은 십계명 중 아홉 번째 계명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라(출 20:16)’는 교훈에 대한 모세의 설명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악한 행동이나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벌을 주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증거로는 불충분하다는 내용입니다. 아 무리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증거만 가지고 그 사람을 벌줄 수는 없습니 다.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증인을 통해 그 사람에게 범죄가 있다는 사실을 확정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둘 혹은 세 명의 증인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의 증인이 있다하더라도 범죄자 로 의심받는 사람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면 논쟁하는 쌍방이 하나님 앞과 그 당시 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서 재판을 해야 합니다. 재판장이 사실을 자세히 조사해서 만 약 증인이 거짓말을 했을 경우에는 무고한 피해를 주려고 했던 대가로 자신이 피해를 입히려고 했던 그대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 증인이 사람을 죽이 려고 했다면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거짓 증인이 상대방의 이를 뽑으려고 했다면 그 사람의 이를 뽑아야 합니다. 긍휼히 보지 말고 그대로 되갚으라는 것이 오늘 본문 의 내용입니다. 이 법이 바로 모세의 율법인데, 물론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이 법이 그대로 적 용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 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습 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거짓 증언의 죄를 제하여 백 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고 그들의 관계가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 제 9계명의 두 가지 목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아홉 번째 계명을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사회질서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짓 증언으로 사람을 무고하 게 해치는 것을 방치하면 그 사회의 인간관계는 급속도로 파괴될 것이고, 죄 없는 무 고한 생명이 희생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의 신회가 무너지고, 결국 사회질서 가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 9계명을 주셨습니다. 16세기 영국에 그레샴(Thomas Gresham)이라는 금융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당시 영국의 수장이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고 말하며 악화를 만들지 말 것을 충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돈은 지폐가 아니고 금화나 은화 같은 동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금화에 100만원이라는 금액이 찍 혀 있다면 그 돈 자체가 100만원의 가치를 갖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여 왕은 국가 재정의 궁핍을 면하기 위해 10만원 밖에 안 되는 금화에 100만원을 찍었습 니다. 그리고 만 원의 가치 밖에 안되는 은화에 10만원을 찍었습니다. 그레샴은 이런 돈을 가리켜 악화라고 칭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까요? 여러분이 100만원짜리 금화 두 개를 가지고 있는데 한 금화는 100만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고, 다른 금화는 10만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렇다면 아마 우리는 100만원의 가치를 가진 금화는 집에다 모셔놓고, 아마 10만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100만 원짜리 금화를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시장에는 온통 나쁜 돈만 유 통되고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일어나서 화폐의 가치는 악화되고, 국가 의 경제 질서는 무너지는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레샴이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충 고했던 것은 바로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경제 사회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종교계에서도, 정치계 에서도, 또 이 사회 어느 곳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단 사설을 그대로 놔두면 정통 신학이 구축될 것이고, 부도덕한 소수가 하는 말을 그대로 놔두 면 도덕적인 다수가 사회에서 구축될 것입니다. 또한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들을 그대 로 놔두면 그 사회는 진실이 구축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는 존립의 기반이 흔들 려서 건강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인간관계를 바르 게 정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짓 증언하는 사람을 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9계명 을 제정해 주신 것은 이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혀에 있는 악을 제어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모든 지체 가운데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지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세치 혀입니다. 하나님께 서는 인간의 혀를 제어하기 위해 자연적인 방어 장치 두 개를 주셨습니다. 바로 치아 와 입술입니다. 만일 나쁜 말이나 악한 말 나오려고 할 때는 이빨로 혀를 깨물어야 합 니다. 또한 혀가 치아를 뚫고 나올 때에는 입술을 다물어야 합니다. 꽉 다물어서 말 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방어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세 치 혀로 얼마든지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9계명이라는 제 3 의 방어벽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2. 하지 말아야 할 것 네 가지 하나님의 계명은 부정적인 면에서 ‘하지 말라’ 내용도 포함하고 있고, 또한 긍정적 인 면에서 ‘하라’는 명령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 9계명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 네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명백한 거짓말(obvious lie)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잠언12:22)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입술은 거짓 입술입 니다. 말을 하는 사람이 그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사실처럼 말하는 것 이 거짓말입니다. 대학생 네 명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노는 바람에 수업에 지각을 했습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지각한 사유를 물었을 때, 한 학생이 “오다가 그만 타이어가 펑 크 나는 바람에 수리하고 오느라 수업에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 다. 대답을 들은 교수님은 “타이어 펑크가 나서 지각했으니 어쩔 수 없지”라고 대답 하였습니다. 학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교수님의 말이 이어 졌습니다. “늦었지만 퀴즈는 봐야겠지? 네 사람은 각각 따로 앉게.” 교수님의 말씀 대로 각각 떨어져서 자리에 앉은 학생들에게 교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 퀴즈를 내겠네. 자네들이 타고 온 자동차의 어느 쪽 타이어가 펑크가 났는가? 답을 써서 제출하게나.” 물론 그 학생들의 거짓말은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정직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링컨의 주변에 거짓말을 아 주 유능하게 잘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링컨 대통령이 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소의 다리가 몇 개지요?” 그러자 그 사람은 “대통령 각 하, 소의 다리는 네 개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대답을 들은 링컨은 “당신은 진실 을 말하는군요. 그렇다면 당신이 소의 꼬리를 다리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러 면 다리가 몇 개일까요?”라고 되물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들은 그 사람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러면 다섯 개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대답을 들은 링컨 대통령 은 그 사람을 응시하면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잘못은 거기에 있소. 당신 이 소 꼬리를 다리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꼬리가 다리가 되는 법이 있겠소? 소꼬리를 다리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리일까요?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다리 는 네 개가 맞는 겁니다. 당신은 이처럼 거짓말을 진실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으니 그 걸 고치시오.”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에 남한테 해를 끼치지 않으면 그만이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거짓말은 보통 단순 거짓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거짓말 은 더 큰 죄를 짓는 전초전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엘하 15장 7절을 보면 다윗의 아 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 제가 하나님 께 서원한 것이 있으니 지금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압살롬의 말을 들은 다윗은 “그래?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으면 갚아야지, 다녀오너라.고 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말과는 다르게 헤브론에 내려가서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 질하고 아버지 다윗 왕을 쫓아내어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못된 음모를 꾸몄습니 다. 거짓말은 거짓말로 그치지 않습니다. 거짓말은 이처럼 언제나 다른 악으로 뻗어나 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짓말에 대해서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 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 라”(계22:15). 요한계시록은 천국을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이라고 말하는데, 거짓말 을 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와 함께 성 밖으로 쫓겨나서 천국에 들 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입술에서 거짓말을 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중상모략(slander)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말 중에서도 남을 해치기 위한 악한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거짓말을 중상모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 히 경고하고 금지하고 있는 것이 이런 형태의 거짓말입니다.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잠25:18). 이웃에게 거짓증언을 하는 사람은 이웃을 방망이로 패는 것이나, 칼로 찌르는 것이나, 화살로 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중상모략의 대표적인 예가 열왕기상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르엘에 나봇이라 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라 이름이고,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씨 를 뿌리신다’는 의미를 가진 지역의 이름입니다. 자리도 좋고 맛도 좋은 포도가 탐스 럽게 열리는 나봇의 포도원을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이 탐내기 시작했습니 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기업을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땅으로 여겼고 조 상대대로 물려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팔지 않았습니다. 혹시 팔았다고 할지라 도 50년째 희년이 되면 그것을 원소유주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법이었 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라고 해도 백성들의 땅을 함부로 빼앗거나 살 수 없었습니 다. 결국 나봇의 포도원을 얻지 못한 아합은 궁전으로 돌아가 침상에 누워서 얼굴을 돌이 키고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합의 아내였던 이세벨 왕비가 왕에게 무슨 일 이 일어났는지 물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세벨은 “당신이 왕이요, 통치자인데 백성에게 포도원 하나를 뺐지 못합니까? 저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말하고는 돈으로 비류 두 사람을 샀습니다. 비류는 ‘비열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봇을 붙잡은 뒤에 두 사람은 나봇을 세워놓고 거짓증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의 내용 은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왕을 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세벨은 나봇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이스르엘에서 돌로 쳐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나봇은 제대 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만약에 재판을 했다면 그의 무죄가 드러날지도 몰랐기 때문에 이세벨은 서둘러서 그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세 벨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 의기양양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류들이 돈을 받고 나봇을 모함했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완 벽하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은 이 모든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 해 아합과 이세벨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 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 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 21:19). 아합의 심판을 예언한 것 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 개들이 이스르엘 성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찌라”(왕상21:3)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세벨에 대한 심판의 예언입니다. 이 예언 의 말씀대로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습니다(왕상 22장). 자신의 죽음을 두 려워한 나머지 왕이 아닌 것처럼 변장을 하고 전쟁에 나갔지만, 한 병사가 쏜 화살에 심장이 꿰뚫려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아합의 시신은 이스르엘에 버려졌고, 예언의 말 씀대로 개가 아합의 피를 핥았습니다. 또한 열왕기하 9장에 보면 아합의 집안을 몰락시킨 예후가 등장합니다. 예후가 이스르 엘 성에 도착했을 때, 이세벨은 화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후는 사환을 시켜서 악한 여인 이세벨을 창 밖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역사에 보면 가끔 창 밖에 던져 죽 이는 형벌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영어에는 ‘창밖에 던져 죽이기’라는 의미를 가진 ‘defenestration’이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이세벨도 산 채로 창 밖으로 던져졌습니 다. 역시 엘리야의 예언대로 개들이 와서 이세벨의 시체를 뜯어 먹는 처참한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아합이나 이세벨 모두 거짓 증거를 통해 나봇에게 입혔던 피해를 자 신들도 고스란히 받게 된 것입니다. 중상모략해서 남을 죽이려 하면 자신도 언젠가는 죽게 되고, 중상모략해서 남을 쫓아내면 자기도 언젠가는 쫓겨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상모략을 향한 하나님의 벌입니다. 이는 사람이 공의를 집행하 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직접 공의를 집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 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거짓말이나 중상모략 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셋째로 험담(libel)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험담(libel)이라는 영어 단어는 때로 ‘명예훼손’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진실을 말하되 남을 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말하 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라”(레 19:16). 험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옛말에 ‘전갈은 꼬리에 독을 달고 다니지만 남 을 험담하는 사람은 입술에 독을 달고 다닌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험담하는 사람은 입술에 독을 달고 다니면서 독사처럼 독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험담하는 사 람은 진실을 말해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을 말할 때 에도 바르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미우라 아야꼬라고 하는 일본의 유명한 작가는 자신의 책 「사랑한다는 것과 믿는다 는 것」에서 일본 사람들도 험담하는 죄가 많이 범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가 예를 든 내용은 이렇습니다. 누군가에게 수다를 떨면서 “그 여자 남 편이 요새 새 여자가 생겼는가 봐요. 며칠 전에도 한바탕 부부싸움을 했다고 하더니 곧 도장을 찍는다나요? 호호호”, “그 여자 일류대학 출신이라고 하던데 사실 1학년 중퇴래요”, “그 집 아이 아빠하고 우리 남편하고 학교 동창인데 그 집 아빠도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했다고 하더니 그 집 아들도 학교 공부가 엉망이래요. 그런 거 보 면 부자가 닮긴 닮나봐요”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험담하고 나서 맞장구를 쳐줘야 서로 헤어질 때, “오늘 참 즐거웠어요”라고 인사를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그 험담에 맞장구를 쳐주지 않으면 괘씸한 마음을 품고 돌아간다는 것입니 다. 인간의 원래 성품이 그런 것 같지만 예수 안에서 변화된 우리는 험담하는 사람에 게 맞장구를 쳐줘서도 안 됩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 침례 요한과 같은 사람들은 얼마나 중상모략과 험담 을 많이 당했습니까? 심지어 예수님은 ‘귀신 들려서 기적을 행한다’는 중상모략도 받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폐하려고 하는 자’라는 험담도 들었습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중상모략이나 험담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부탁이 아 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 다. 넷째로 우리는 과장(exaggeration)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를 말하되 지나치게 확 대해서 말하는 것이 과장입니다. 과장을 하면 듣는 사람들이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 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과장은 인간관계를 해칠 수 있는 거짓말의 한 종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 보스톤에서 한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소년 열 댓 명이 강아지를 둘러싸고 이야 기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전도도 하고 싶어서 소년들 사이로 들어가서 “얘들아, 뭐하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소년이 “아저씨. 우리가 지금 거짓말 내기 시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가장 큰 거짓말을 했다고 합의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이 강아지를 선물로 주도 록 결정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소년의 말을 들은 목사님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얘들아. 나는 너희만한 나이 때에 거짓말은 생각도 못했단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떻 게 거짓말 내기 대회까지 할 수 있는지 걱정스럽구나”라고 말하였습니다. 목사님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야. 이게 최 고의 거짓말이다. 아저씨. 이 강아지는 아저씨가 가져야 될 것 같아요.” 우리 사회에도 과장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처녀들은 흔히 “나 시집 안가”, 장사꾼들 은 “밑지고 팝니다”, 노인들은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말하는 것들이 그것입니 다. 그러나 이 말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 3대 거짓말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 말들이 모두 과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특별히 이런 죄에 약합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스스로 반성하고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명 백한 거짓말이나 중상모략, 험담이나 지나친 과장을 늘 경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 로 축원합니다. 3. 해야 할 것 한 가지 하나님의 계명에는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 외에도 ‘하라’는 긍정적인 명령 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 9계명이 포함하고 있는 긍정적인 명령은 무엇일까 요? 바로 이웃이 거짓증거로 인해 상처를 받을 때에는 상처받는 이웃을 옹호해줘야 한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 고 있는 바람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된다면 이는 거짓 증거와 다를 바가 없습니 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침 묵의 죄’나 ‘거짓말하는 거짓 증언의 죄’가 모두 그 사람에게 같은 피해를 줄 것이 기 때문에 같은 죄가 됩니다. 제가 작년에 미국에 갔을 때 토마스 로드 침례교회(Thomas road baptist church)에서 제리 폴웰(Jerry Falwell)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제리 폴웰 목사님은 미국 사회를 주 시하며 본 결과 목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들이 부도덕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 습니다. 도덕적인 다수(Moral majority)의 침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제리 목사 님은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목사님들이나 성도들을 모셔서 소위 ‘도덕적 다수 운 동’을 일으켰습니다. 후에 이 운동은 그 규모가 엄청나게 확장되어서 대통령 선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제리 폴웰 목사님을 ‘대통령 제조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도덕적이라 해도 악과 거짓에 대해 서 침묵하면 우리 사회는 거짓말 하는 소수의 목소리가 끌고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령충만한 사도들은 보고 ‘술 취했다’고 비난할 때에 사도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저들은 술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옹호했습니 다. 또한 2세기 로마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은 피와 살을 먹으니 식인종이요, 형제끼 리 입 맞추니 근친상간하는 자들이라고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했을 때, 순교자 저스틴, 터툴리안 같은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글 로 변증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변증론자(Apologist)’라고 부릅니다. 이 들은 모두 진리에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선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진리에 침묵하면 안 됩니다. 거짓은 말하면 안 되지만 진실은 언제든지 선포되어 야 합니다. 결 론 거짓증거의 피해는 다른 죄보다 두 배나 큽니다. 왜일까요? 거짓 증거에 당한 사람들 이 피해를 입었고, 거짓 증거를 한 사람들도 똑같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니 벌이 두 배 라는 것입니다. 거짓증언은 이처럼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141편 3절의 말씀처럼 기도해야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거짓말 중상모략 험담이 나오지 않도록 내 입술을 지켜 주소 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 우리 혀로 지은 모든 죄를 자백하고 우리 가까 이 있는 거짓말 하는 악한 영을 나사렛예수 이름으로 추방해버리고 오직 진실만을 이 야기하는 우리의 입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 강해-7/ 여리고성을 정복함 /수6:1-27 2020-01-27 10:10:09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7절]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여호수아 강해-7/ 여리고성을 정복함 /수6:1-27 2020-01-27 10:10:09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7절]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7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 본장은 요단강 서쪽 가나안 땅에서의 첫 전쟁인 여리고성 정복 전쟁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들에게 하루 한번씩 여리고성을 돌고 제7일에는 일곱 번 돌라고 명하셨고 또 제사장들 중 일곱은 각각 양각나팔[양이나 소의 뿔로 만든 나팔]를 잡고 또 몇 명은 언약궤를 메고 모든 군사들 앞에서 행하라고 명하셨다. 행진 대열에는 순서가 있었다. 무장한 자들이 맨 앞에 선다. 원문에는 ‘무장한 자’라고 단수로 되어 있지만(7, 9, 13절), 아마 한 명이 아니고 몇 명이었을 것이다(NASB). 그 다음에 일곱 양각나팔을 든 일곱 명의 제사장들이 서고 그 다음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서야 했다(12절). 언약궤는 보통 때는 레위인들 중 고핫 자손들이 메지만(민 4:15) 요단강을 건널 때(수 3:6)와 이번에는 제사장들이 메어야 했다. 그런 후 그들을 따라 모든 군사들이 행진하여야 했다. [8-14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번 돌게 하니라. 무리가 진에 돌아와서 진에서 자니라.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니라. 그 제2일에도 성을 한번 돌고 진에 돌아 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였다. 그들은 외치거나 음성을 시끄럽게 떠들지 않았고 단지 일곱 양각나팔을 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다(8절). 그들은 6일 동안 매일 그렇게 했고 제7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돌았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그 당시 여리고성은 둘레가 약 600미터이고 면적이 약 28,300평방미터, 약 7,000평 정도의 작은 성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그 시대의 성은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는 용도이었고 평소의 생활은 성안에서 뿐만 아니라 성밖에서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정도 크기의 성이라면 제7일에 일곱 바퀴를 도는 것은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5-21절] 제7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일곱 째 날 그들은 여리고성을 일곱 바퀴 돌았고 양각나팔을 든 제사장들은 나팔들을 길게 울려 불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때 그 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성으로 들어가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정복의 방식에는 몇 가지 뜻이 있어 보인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여야 했다. 가나안 땅 정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셨다(창 12:7; 13:15; 15:18-21 등). 그는 이삭과 야곱에게도 그 약속을 계속하셨다(창 26:3; 28:13).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했고 하나님을 믿고 그 약속을 믿어야 했다. 그들의 행렬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운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또 제사장들이 일곱 양각나팔을 들고 행진 중에 나팔을 분 것은 하나님께 아뢰는 뜻이 있는 것 같다(민 10:10). 제사장들의 나팔소리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같다. “오 하나님, 주의 약속만 의지합니다. 주의 명령을 따라 이 시간 이곳까지 왔사오니 우리의 이 전쟁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주의 대적들을 주의 종들의 손에 붙여주소서.” 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은 한마디로 순종의 과정이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지시하신 방식대로 이루어졌고 인간 편에서는 믿음과 기도와 순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리고성의 정복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 편에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체험한 전쟁이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리한 전쟁이었으나, 가나안 사람들 편에서는 처참하고 불행한 전쟁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노라”고 말씀하셨었다(2절). 하나님께서 그런 처참한 심판을 행하신 까닭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악이 심히 컸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는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이었다. 그것들은 인간의 전형적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신다. 특히 우상숭배와 음란을 미워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다. 홍수 심판도, 소돔 성의 불심판도, 최종적 지옥도 참으로 무섭다. [22-25절]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라 하매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여호수아는 정탐군들을 라합의 집에 보내어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구출케 하였다. 모든 집들과 사람들을 불태우며 죽였고 금은동철 기구들은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다. 여호수아는 정탐군들이 라합에게 한 맹세의 약속을 지켰다. 라합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는 그 멸망의 성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다. 그는 비록 큰 죄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26-27절]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여호수아는 훗날에 여리고성을 중건하는 자에 대해 저주를 선언하였다. 이 저주는 후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다가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 말째 아들을 잃었다(왕상 16:34). 여리고성의 정복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이 사건은 죄의 결과가 멸망임을 증거한다. 여리고성이 그렇게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죄의 결과는 멸망이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이 그러하였었다. 가나안 땅의 멸망도 그러했다. 최종적으로 지옥 불못이 그러할 것이다(계 21:8). 사람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이미 지은 모든 죄들을 회개하고 그것들을 떠나야 한다. 둘째로, 여리고성의 정복 사건은 사람이 멸망의 세상 속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함을 증거한다. 라합은 멸망하는 성 가운데서, 비록 죄인의 신분이었지만, 구원을 얻었다. 그와 그의 모든 친족들이 구원을 얻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비록 그가 라합처럼 큰 죄인일지라도, 비록 그가 사는 사회가 여리고성처럼 심히 악하여 그 멸망이 임박할지라도, 오직 하나님과 그의 보내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성경은 말한다. 셋째로, 여리고성 정복의 사건은 하나님의 일들이 믿음과 기도와 순종으로 이루어짐을 증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주신 명령과 지시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라 순종해야 했다. 여리고성 정복과 같이,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일들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전도의 일과 참된 교회의 건립을 명하셨고 또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바르고 선한 삶을 살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믿음과 기도와 순종으로 살며 일해야 한다
왕하18:1-8 형통의 비결 2002-02-16 11:27:14 read : 1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히스기야왕은 그의 아버지 아하스아왕과는 달리 하나님을 섬기며 성전문을 개방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출입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대하28:24)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훼파하고 또 여호와의 전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단을 쌓고 (대하28:25)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 열조의
왕하18:1-8 형통의 비결 2002-02-16 11:27:14 read : 1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히스기야왕은 그의 아버지 아하스아왕과는 달리 하나님을 섬기며 성전문을 개방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출입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대하28:24)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훼파하고 또 여호와의 전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단을 쌓고 (대하28:25)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왕은 "(대하29:2)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대하29:3) 원년 정월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 형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 "(왕하18:3)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이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롬14:23)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서 행하는 정직이 진정한 정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요셉과 같이 신전의식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사람이 보지 아니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에도 넘어가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그 자리를 피하여 도망가고 말앗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생활인 것입니다. 즉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행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해야할 기도는 죽어도 하고 해서 안될 우상숭배는 죽어도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생활인 것입니다. 이렇게만 살면 형통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사신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본문 "(왕하18:4)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 하였습니다. 아버지 아하스왕이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한 것과는 달리 사신 우상을 제가하여 하나님의 기쁘심을 받고 사랑을 받으며 복을 받으니 어찌 형통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대하28:25)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모든 면에서 형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죄를 자식에게까지 갚아주시지만"(출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출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사신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섬기고 그의 계명대로 지키면 틀림 없이 형통한 복을 받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본문 "(왕하18: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왕하18:6)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왕하18:7)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 하였습니다. 이는 제일로 중요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그와 연합하는 아름다운 생활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회개하는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고 그를 가까이 하셔서 형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요구대로 살아드리고 하나님은 내편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시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내게 어찌할꼬 (시118: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118:8)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시118:9)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 또 방백들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야곱의 하나님께 소망을 주는 자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146: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시146: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시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요셉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형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보디발의 가정까지도 복을 주신 것입니다. "(창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창39:4)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창39: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 결론 히스기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가 변하지 아니할 동안에는 형통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히스기야왕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아드려서 형통한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사야강해-23> 사22:1-14 2011-01-06 16:06:30 read : 7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앗수르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은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갔었으나 앗수르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지 못하고 후퇴하게 됩니다. 거의 멸망할 뻔했다가 살아난 예루살렘은 극적인 승리가 꿈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기뻐하며 잔치를 열고, 다시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를 철저히 했습니다. 무기를 준비하고 물을
이사야강해-23> 사22:1-14 2011-01-06 16:06:30 read : 7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앗수르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은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갔었으나 앗수르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지 못하고 후퇴하게 됩니다. 거의 멸망할 뻔했다가 살아난 예루살렘은 극적인 승리가 꿈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기뻐하며 잔치를 열고, 다시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를 철저히 했습니다. 무기를 준비하고 물을 저장해 놓고 성벽을 튼튼하게 고쳤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이런 행동은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기는 자기들끼리 승리를 자축하고, 군사적으로 무장하는 기간이 되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간에 진정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서 비추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교만하게 살아왔는지, 진정한 신앙의 모습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깨닫기 바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살리는 것은 결코 군사적인 준비도, 겉으로만 튼튼하게 세워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살리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자세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지금 기뻐하고 자축하는 예루살렘이 앞으로 얼마나 비참하게 멸망할지 환상을 통하여 내다보고 있습니다. 1. 겸손이 필요합니다. 먼저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환상의 골짜기’로 보고있습니다. 1절,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개역에는 “이상 골짜기”) 왜 ‘환상의 골짜기’라고 불렀을까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은 오직 예루살렘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 사람들은 세상의 미래를 예루살렘에 있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또 ‘골짜기’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골짜기는 산 사이에 깊이 들어가 있어서 밖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교회 위쪽에 있는 고기동처럼(동막골)...전쟁이 나도 적들이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을 ‘골짜기’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골짜기에 위치해 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이 난리에 휩싸일 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손으로 덮으셔서 그런 난리에 잘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셨다는 뜻입니다. 저는 예전에 태백시에 있는 ‘예수원’을 몇 차례 간적이 있습니다. 가면 보통 4일씩 머물게됩니다. 그곳에서 신문이나 텔레비전도 없이 4-5일 보내다가 나오면 세상이 발칵 뒤집혀져 있는 때가 많습니다. 홍수가 나서 난리가 나기도 하고 불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 말씀을 나눌 때에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은혜에 흠뻑 젖었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그 동안 여러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예루살렘을 덮으셔서 난리가 그냥 지나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을 때에는 난리로부터 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말씀을 바로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큰 손으로 교회를 덮으셔서 이 세상의 난리가 지나가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미래에 대하여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만 바로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우리를 덮으셔서 어려움을 면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본 내용입니다. 1-3절,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3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지금까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던 앗수르 군대가 후퇴하며 돌아갑니다. 지금 예루살렘 사람들은 좋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소를 잡고 양을 잡아서 포도주와 함께 먹으면서 자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지금 기뻐하기는 이르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결코 기뻐할 때가 아니라, 근본 문제를 찾아서 해결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잠깐 동안의 시간은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신앙을 돌이킬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단지 자기들이 잘 버티었기 때문에 이런 승리가 온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의 골짜기를 다시 보면서 경고합니다. 5-7절,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 6엘람 사람은 화살통을 메었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니 7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 이사야는 ‘환상의 골짜기’를 두 번째로 보고있습니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보았다는 것은, 이것이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5절에 보니까, 환상의 골짜기에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 오는데 성벽이 무너지고 부르짖는 소리가 온 산에 사무친다고 말합니다. 특히 이번에 예루살렘을 공격해 오는 사람들은 엘람 사람들과 기르 사람들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망하는 것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엘람 사람과 기르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한다고 했습니다. 엘람 사람들은 활을 쏘고 기르 사람들은 방패를 높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예루살렘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인데 예루살렘을 망하게 하기 위하여 놀랍게 협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붙들지 않으면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이 세상 사람들이 원수가 되어 함께 공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는데 하나로 단결을 잘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저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 세상으로부터 더욱 거세게 공격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오해를 받으면 어떻게 합니까? 왜 저 사람은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할까? 하는 생각에 그 사람이 미워지면서 어떻게든지 보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나의 교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는 그런 것을 잘 깨닫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교만했구나...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상관이 없는 저 사람들을 통하여 나를 깨닫게 하시는구나’ 사실 엘람 사람들의 공격이나 기르 사람들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먼 곳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활을 쏘아야 하며 공격의 방패을 높이 들어야 합니까? 물론 그들이 약하니까 앗수르나 바벨론에 징발되어서 그랬겠죠...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교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것입니다.“너희들이 제대로 살지 않으니까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와서 너희들에게 활을 쏘며 공격하는 것이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항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는 더 더욱 목회자이기 때문에 언제나 제 생각이 옳다고 믿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그럴수록 더 겸손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소리에 항상 민감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수고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보고 단순히, 그 사람들이 나를 대적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이 사람들의 항의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 교만을 이 사람들을 통하여 책망하시는구나’...‘하나님의 백성이 교만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사용하셔서 깨닫게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일이 다급해도 하나님을 바라보라! 지금까지 환상을 통해 예루살렘의 미래를 보았던 이사야는 8절 부터는 다시 현재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재 예루살렘 사람들은 앗수르 군대를 물리친 후 사기가 하늘 끝까지 올라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앞으로는 다른 군대가 쳐들어와도 잘 무찌르기 위해 무기를 정비하고 수로를 확충하며 성벽을 다시 쌓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말씀이 11절 중반절에 나와 있습니다. 11절,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전쟁을 대비한 자체가 나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뒤에서 계획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을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모든 일을 진행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물러갔을 때 무엇보다 먼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문제가 있으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생각했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부흥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우리교회가 119새생명 큰잔치를 준비하며 부흥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데, 부흥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언약의 관계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찌꺼기들을 다 버리고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바른 관계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을 바꾸는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삶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교회신문 기사 때문에 어느 속회를 탐방하고 왔습니다. 대부분의 속원들의 이야기가 그래요. 내 딸과 아들이, 며느리와 사위가 제발 그릇된 삶의 방향을 청산하고 예수 믿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분들의 소망대로 자녀와 며느리와 사위가 속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은 전혀 바꾸지 않으면서 미래만 대비하려고 하니까, 인간적 방법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조건 무기 만들고 물 확보하고 성벽을 튼튼히 하는데만 정신이 없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방법이 전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기를 준비하거나 수로를 파고 성벽을 다시 쌓는 것은 전쟁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다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기 위해 학원도 다닐 수 있고 과외 공부도 할 수 있습니 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중에 자녀들이 해외에 나가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준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우리의 자녀들과 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전화 통화를 할 때도, “공부 잘하고 있지? 밥 먹었니?” 이런 거 하기 전에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니? 주일 성수와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한다’ 믿음부터 점검하셔야 합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준비를 잘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무기나 수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더 많이 머물면서 하나님께로 먼저 돌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 너무 빨리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순식간에 결혼한다든지(캐나다에 간 정희), 사업의 안정이라든지 집안의 문제로 돌아서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좀 오래 앉아 있어야죠...나에게 있어 불편한 부분은 감수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합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힘들고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는데, 약간이라도 소생의 가능성, 희망이 보이면 다급해져서 하나님만 붙들고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장 일이 다급해도 좀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3. 진정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앗수르가 퇴각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기뻐하고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이야말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며 회개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잘 해서 얻은 승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2절,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따라 하셨거늘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를 상대로해서 이긴 날에 통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사실 그들은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앗수르와 싸우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간에 여러번 포기하고 싶으셨으나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겼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승리한 후에 진정으로 하나님께 자신들의 교만과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내가 잘 순종했기 때문에 은혜를 주시고 승리를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순종하고 교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셨고 돌보아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승리라면 어떻게 기뻐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신실하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며 애통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때가 언제입니까?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해도 일이 잘 될 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시간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일이 다급해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강해-32> 히11:17-19, 창22:1-14 2010-12-27 17:22:12 read : 8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믿음은 최상의 것을 드립니다 지난 시간에는 내가 태어난 출발점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돌아갈 종착점을 바라보며 그 종착역을 사모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히브리서강해-32> 히11:17-19, 창22:1-14 2010-12-27 17:22:12 read : 8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믿음은 최상의 것을 드립니다 지난 시간에는 내가 태어난 출발점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돌아갈 종착점을 바라보며 그 종착역을 사모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잇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말씀하신 바로 그 영원한 거처,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저 높은 곳을 향해 걸어간 사람들,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약속된 미래를 현재에서 체험하고, 죽어서 썩어 버릴 몸에서 영원한 생명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갈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삶이란 받는 삶이 아니라 주는 삶이며,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주는 삶이며, 봉사와 순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최상(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신앙 훈련과 단계를 거쳐야 가능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는 믿음의 여러 단계를 거쳐 결국에는 자신이 가진 최상의 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는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 거쳤던 믿음의 단계를 살펴봄으로서 최상의 것을 드리는 믿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은 몇 단계를 거쳐서 성장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시련을 겪는 단계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청천병력 같은 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은 아들을, 그것도 100세에 얻은 독자를, 한창 귀엽게 자라고 있는 아들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기막힌 명령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이삭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개 15~16세 정도가 아니었나 추측을 합니다. 하나님은 한창 사랑스럽게 자라고 있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너는 네 친척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는 이 명령에 비하면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떠나면 되고, 직업을 포기하면 됩니다. 친척을 떠나면 됩니다. 직장도 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100세에 얻은 독자 아들을 지금 당장 가서 번제로 드려라, 죽여라 하는 명령 앞에서 아브라함의 심정은 참 기막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참 지혜로우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이런 명령을 신앙 초기에 하셨다면, 아브라함은 서슴치 않고 “못 합니다”라고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받아들일 만 한 때에 그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도 비슷합니다. 지금 무엇인가를 시키시면 “못 합니다” 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1, 2년이 지나면 “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꽤 있습니다. 25년이 지난 후에 “네 아들을 죽여라. 나를 위해 죽여라.”고 말했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이 기막힌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시련의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이런 명령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케 하는 명령이요, 우리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리게 하는 갈등을 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은 먼저 시련을 겪는 것이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갈등도 통과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보통은 욕심 때문에 죄를 짓고, 자기가 잘못해서 시련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키고 연단하시기 위하여 시련을 겪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릇이 차 있는지, 비어 있는지, 깨진 것인지, 완전한 것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 봅니까? 두드려 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릇을 두드려 보듯이 나를 두드려 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한번 두드려 보십니다. 그것은 미워서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장 3절과 4절에는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초기 단계에서는 시련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취감, 건강, 성공, 만족감 등 받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하나님이 자꾸 포기 하도록 만드십니다. “네 것이 아니다”하시며 재물도 포기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업을 망하게 했다고 해서 여러분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포기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건강을 포기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병을 안 고쳐 주시고 죽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성공도 포기하게 만듭니다. 세상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고, 친구까지도 포기하도록 하나님이 훈련시키십니다. 마지막으로 자기를 포기하게 하고, 자기의 분신이 누구입니까? 아들입니다. 자기 자식까지 포기하도록 만들어서 믿음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잘 섬기면 자식들이 타락하지 않아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자식이 잘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포기하도록 만드실 때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절정에서 우리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이나, 자식이나, 건강이나, 명예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포함해서 우리의 모든 것이 주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임을 철저하게 인식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독자 이삭을 드리는 것은 가장 견디기 힘든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인생 전체를 빼앗긴 듯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자식의 문제로 시련을 겪게 되면 여러분의 믿음은 연단과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원망하거나 불평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 믿음을 정상으로 끌고 가시려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시련에 처했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문제가 풀립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의 두 번째 단계는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단계입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 11장 1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히 11:17) 아브라함은 혹독한 시련에 대해 믿음으로 대처했고, 순종으로 대처했습니다. 바친다는 말은 칼로 죽이고 불에 태워 번제로 드린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남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자식의 몸을 각 떠야 합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의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지만,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최상의 것은 드리지 않고 대신 최상의 것은 누가 갖습니까? 내가 갖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잘하면 중간, 아니면 중간 이하를 갖다 바칩니다. 언제나 좋은 것은 자기가 다 챙깁니다. 교회 것은 항상 헌 것, 쓰다 남은 것, 시간도 찌꺼기 시간 그것도 늦게 한 번 와준 정도로 만족합니다. 돈도 찌꺼기 돈을 바칩니다. 다 쓰다가 그래도 조금 남으면 한 번 헌금하는 정도입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뭘 바치느냐가 여러분의 믿음을 결정합니다. 과부의 옆 전 두 닢입니까? 아니면 체면이며, 인색한 마음이며, 혹시 습관이며, 또는 돈 자랑하기위하여 헌금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어떤 질의 것입니까? 시간에 있어서, 재물에 있어서, 봉사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어떤 질의 것인지를 한 번 물어 보십시오. 시시한 것을 바치면서 불한당같이 어떻게 최선의 위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땀은 안 흘리고 먹으려고 드는 사람들처럼 어떻게 믿음이 생기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 22장 3절에 아브라함이 이런 명령을 받았을 때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창 22:3) 라고 아주 단순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 눈물을 머금고 머리를 숙이고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이유는 너무나 기막힌 아브라함의 심정을 생각해 볼 때 이런 마음이 들고요. 이처럼 엄청난 명령을 너무나 담담하게 너무나 침착하게 너무나 거룩하게 수행해 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저와 비교해 보면 저는 도저히 두 가지 다 흉내 낼 수가 없어요. 저는 내 아들 하나 있는데, 이놈을 죽이라고 하면 뭐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지도 몰라요. 솔직히 말하면, 또 순종했다 하더라도 이처럼 담담할 수가 없지 않겠느냐? 라고 나는 그렇게 솔직히 내 믿음을 반성해 봅니다. 창세기 22장 4절에서 6절까지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날 죽였으면 몰라요. 근데, 삼일 동안 동행하게 하시고 삼일 동안 같이 걷게 하십니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고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기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와 나무를 가져다가 그이 아들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창 22: 4 ~6)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자기 아들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행동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정한 인간이 아니라면, 냉혈동물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아들을 죽이는 범죄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경배 드리러 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 17절 하반 절을 보면 이 사실이 더 분명해 집니다.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 세월 동안 그 많은 세월 동안 그 많은 시련과 실패와 인내를 통해서 얻은 약속의 자녀가 이삭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18절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한 덜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이삭이 번제로 죽어야 한다면 어떻게 이삭에게서 자손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엄청난 명령 앞에서 그는 담담한 심정으로 최악의 혹독한 시련 앞에서 최선의 평안한 마음으로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단계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것 중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는 부활신앙을 발견하는 단계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최상의 것을 바칠 수 있었는가 하는 겁니다. 사실 바칠 만한 가치가 있으면 아낌없이 바치겠지요? 문제는 그 가치의 문제입니다. 그처럼 그가 서슴없이 어떻게, 왜 바칠 수 있었는가 하는 얘기입니다. 바로 19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하니까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그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그가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이 부활신앙을 구약의 아브라함은 그 당시에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임을, ‘내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은 살릴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믿음이 있다 해도 현실적으로 내 놓는 것은 어렵습니다. 여러분 죽으면 천국 갈 줄로 믿습니까? 그러면 ‘아멘’합니다. 그러면 죽으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자꾸 살길만 찾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영광스럽게 죽을 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알지만 내가 죽으면 영광스런 그 나라에 가서 천사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우편에 앉을 것을 우리가 다 알지만 그러나 세상에서는 비겁하게 살아요. 좀 더 잘 살아 보려고, 좀 더 오래 살려고 아주 비겁하게 삽니다. 알지만 그래요. 그래서 실제로 내가 그렇게 믿지만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헌금하는 것이 그렇게 실제로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다 찌꺼기 헌금합니다. 찌꺼기 봉사합니다. 찌꺼기 시간을 줍니다. 왜? 그렇게 믿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받는 것도 찌꺼기 믿음을 받는 겁니다. 시시한 믿음, 별 볼일 없는 믿음, 나 정도 생긴 하나님, 그런 하나님 밖에는 경험할 길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19절 하반 절에 완벽하게 이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천년 동안 이 기독교의 원동력은 바로 이 부활의 능력이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면 절망하던 사람이 소망을 가지고 병들어 낙심하던 사람들이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다시 생동감을 가지고 일어나기 시작을 합니다. 그 힘이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패가망신하며 소생 불가능 하던 인생의 낙오자들이 신앙의 영웅으로 변하고 성자로 탈바꿈합니다. 전혀 인생의 쓰레기들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살아 움직입니다. 두 다리가 없고, 두 팔이 잘린 사람들이 육신적으로는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 이 부활의 예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브라함처럼 독자 이삭이라도 바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삭이 안쓰럽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덜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너무나 크고 완전했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던 최상의 것, 최선의 것을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독자 이삭을 죽은 후에 다시 돌려주실 것이다.” 이렇게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칼로 이삭을 치려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렇게 두 번이나 부르시면서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하시면서 죽이지 못하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죽여서 부활시키지 아니하시고 이삭 대신에 수 염소를 죽게 함으로 부활시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 수양은 누구입니까? 우리 죄를 위하여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삭을 바치기로 결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데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못 드리겠습니까? 돈, 명예, 보석, 자식, 그 무엇을 예수님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대가도 아낌없이 바칩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간 사람들이 바로 선교사들입니다. 그들은 시간을 바친 것이 아니라, 재물 정도가 아니라, 십일조 정도가 아니라, 봉사정도가 아니라 자기 생애 전체를, 자기 학문을 포기하고 바친 겁니다. 여러분, 위클리프성경번역 선교회라는 한 선교단체만 해도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120여명이나 됩니다. 어딜 가면 그 사람들이 대학교수를 못 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돈을 못 벌겠습니까? 그런데 왜 평생 그들이 가난하게 오지에서 생활을 합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은 자기 생애 전체를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 여러분의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바쳐 보십시오. 하나님은 더 큰 것으로 여러분을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상해 주실 것이며 천국에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아낌없이 여러분의 생애를, 시간을, 생애 전체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 보십시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부활을 통한 이 많은 열매에 대한 기대와 보람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를 향하여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자신을 드린 것처럼 우리는 헌금을 드릴 때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둘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활신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 삶이 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였다면 과연 이삭을 바칠 수 있었을까요? 부활의 신앙이 거룩한 순종과 헌신을 가능하도록 아브라함을 도왔습니다. 순교자들의 헌신의 비결을 기억합시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신앙 대문에 미련 없이 바쳤던 순교자들의 헌신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히브리서 는 거기에 관하여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히 11:35)라고 그 답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들은 이 부활신앙 때문에 구차하게 신앙을 타협하면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주후 114년 안디옥 교회의 유명한 초대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가 로마 황제의 핍박으로 사형이 결정되었습니다. 많은 신도들과 그를 존경하던 불신자들까지 합세하여 그를 구명하기 위한 구명운동을 벌였습니다. 조금만 그의 신학적 입장만 양보하면 살 길이 열리도록 분위기가 바뀌어 갔습니다. 그 때 뜻밖에 이그나티우스가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제발 저의 구명운동을 중지하여 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저의 최선을 저의 주님께 바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가 바치기를 원했던 그의 최선의 것, 그것은 그의 목숨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를 기리는 시간, 이 오전에 여러분은 무엇으로 주님께 드리십니까? 하나님의 요구가 지나치다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이삭을 바치듯이 성부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이 능력 가운데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부활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부활의 신앙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5:52 read : 9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1-4) 요한 서신은 3서까지 세 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의 저자는 요한입니다. 성경에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명 있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냐는 설에 대하여 구구한 말이 있지만 사도 요한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본 서신의 문체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과 공통점이 많고 문장 전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5:52 read : 9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1-4) 요한 서신은 3서까지 세 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의 저자는 요한입니다. 성경에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명 있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냐는 설에 대하여 구구한 말이 있지만 사도 요한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본 서신의 문체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과 공통점이 많고 문장 전체에 흐르는 권위 있는 말투는 사도의 직분을 가진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서신의 기록 년대는 주후 85-95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요한이 말년을 지낸 에베소에서 이 서신을 썼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쓰면서 먼저 말씀의 증인의 입장에서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에 나오는 이 부분의 말씀은 요 1장에 나오는 말씀과 너무나도 비슷한 점이 많아서 한 눈으로 보기에도 요한의 글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태초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시간이 시작되는 태초와 시간을 초월한 태초가 그것입니다. 창1:1절에 있는 태초는 물질 세계의 시간의 시작으로서의 태초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1:1절에 나오는 태초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 전의 태초로 대개의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기원에 대한 언급에서 이 태초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요일 1:1절에 나오는 태초는 후자에 속하는 태초입니다. 1절에서 '생명의 말씀'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뜻으로 풀이되는데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곧 생명의 말씀이 되신 분입니다. 왜 이처럼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이같은 표현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증거 할 때 쓰여집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에 비로소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이미 하늘에서 존재하셨던 분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선재라고 부르는데 말씀이란 단어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선재를 나타낼 때 그의 존재에 대한 고유명사로 사도 요한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2.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를 말씀이라고 불렀습니까?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실 때 사용하셨던 표현입 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하실 때 그 입의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말씀은 곧 진리요 진리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히1: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이란 말을 인격화 시켜 그리스도와 연결시킨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1:1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결정적 증거인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14절에 있는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신 것과 18절에 나오는 말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말씀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더욱 많이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은 '말씀'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은 이 말씀의 목격자임을 증거 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이란 바로 이 말씀을 보고 듣고 만진바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요일5:13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이 메시지를 전함은 우리와 자신과 영적인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유업을 함께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큰 보람을 가졌으며 자기가 본 바 모든 것을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증거 한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일은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의 이 기쁨이 요한의 서신을 읽고 듣는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5:52 read : 9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1-4) 요한 서신은 3서까지 세 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의 저자는 요한입니다. 성경에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명 있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냐는 설에 대하여 구구한 말이 있지만 사도 요한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본 서신의 문체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과 공통점이 많고 문장 전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5:52 read : 9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1-4) 요한 서신은 3서까지 세 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의 저자는 요한입니다. 성경에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명 있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냐는 설에 대하여 구구한 말이 있지만 사도 요한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본 서신의 문체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과 공통점이 많고 문장 전체에 흐르는 권위 있는 말투는 사도의 직분을 가진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서신의 기록 년대는 주후 85-95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요한이 말년을 지낸 에베소에서 이 서신을 썼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쓰면서 먼저 말씀의 증인의 입장에서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에 나오는 이 부분의 말씀은 요 1장에 나오는 말씀과 너무나도 비슷한 점이 많아서 한 눈으로 보기에도 요한의 글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태초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시간이 시작되는 태초와 시간을 초월한 태초가 그것입니다. 창1:1절에 있는 태초는 물질 세계의 시간의 시작으로서의 태초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1:1절에 나오는 태초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 전의 태초로 대개의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기원에 대한 언급에서 이 태초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요일 1:1절에 나오는 태초는 후자에 속하는 태초입니다. 1절에서 '생명의 말씀'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뜻으로 풀이되는데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곧 생명의 말씀이 되신 분입니다. 왜 이처럼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이같은 표현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증거 할 때 쓰여집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에 비로소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이미 하늘에서 존재하셨던 분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선재라고 부르는데 말씀이란 단어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선재를 나타낼 때 그의 존재에 대한 고유명사로 사도 요한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2.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를 말씀이라고 불렀습니까?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실 때 사용하셨던 표현입 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하실 때 그 입의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말씀은 곧 진리요 진리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히1: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이란 말을 인격화 시켜 그리스도와 연결시킨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1:1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결정적 증거인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14절에 있는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신 것과 18절에 나오는 말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말씀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더욱 많이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은 '말씀'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은 이 말씀의 목격자임을 증거 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이란 바로 이 말씀을 보고 듣고 만진바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요일5:13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이 메시지를 전함은 우리와 자신과 영적인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유업을 함께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큰 보람을 가졌으며 자기가 본 바 모든 것을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증거 한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일은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의 이 기쁨이 요한의 서신을 읽고 듣는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진리도 행하는 자에 대한 기쁨 2002-02-07 21:51:22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2서 1:4-6) 사도 요한은 본문 4절에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이 말은 모든 목회자들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참 보람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요한의 고백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진리의 말씀
(2) 진리도 행하는 자에 대한 기쁨 2002-02-07 21:51:22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2서 1:4-6) 사도 요한은 본문 4절에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이 말은 모든 목회자들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참 보람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요한의 고백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진리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1. 진리에 행하는 자를 보는 기쁨 하나님의 종들에게 교인들의 존재는 참으로 귀중한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양 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종과 성도들을 양과 목자로 비유하신 것은 목회자와 성도들간에 그만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빌4:1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의 사모하고 사랑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성도들이 그의 기쁨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양 무리들을 자신의 면류관으로 생각했습니다. 양 무리들의 선한 목자로 주님의 인정을 받으면 이런 면류관을 받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양이 없으면 목자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자기 생의 전부로 여기고 기쁨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양 무리들의 목자들에게 교훈하기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양 무리들을 잘 치는 목자에게 면류관을 주시는데 이 양 무리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전4:15절에서 바울은 양 무리들을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잘 가르치고 영혼의 파수군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목자를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은 양 무리들에 대한 영혼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양 무리들이 계명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진리에 행하지 못하며 어그러진 길로 행하고 믿음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목자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가슴아픈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 무리들이 잘 순종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로 인한 기쁨이나 보람이란 다른데 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보람있는 목회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성도들 자신이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대할 태도에 대하여 히13장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 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로 보람있고 기쁘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순종하고 복종하는 일입니다. 2. 진리와 사랑 사도 요한은 진리와 계명과 사랑의 관계를 5절과 6절에서 간략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주님께 던졌지만 주님은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중생 되지 못한 자에게 진리를 설명해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바로 이 사랑을 증거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교회에 구하는 바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말이 율법에는 기록되지 아니한 생소한 말 같지만 이 사랑은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도 하나님의 사랑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두 강령에 대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풀이하셨습니다. 율법으로 밝히신 하나님의 계명도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요 복음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도 이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제쳐놓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으며 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랑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강물처럼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결론 :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계명과 진리는 사랑이며 이 사랑의 생 활이 계명을 지키며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랑은 은사로 주신다고 고전13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 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이 은사를 주시지만 우리는 더 많은 사랑의 생활을 하기 위해 사랑을 달라고 구해야 할 것입 니다.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07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5-10)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로부터 받은 바 듣고 전하는 소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메시지였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불의나 죄를 말합니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07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5-10)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로부터 받은 바 듣고 전하는 소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메시지였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불의나 죄를 말합니다. 빛은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에 빛에는 언제나 어둠이 함께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요한이 전한 소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제 빛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어둠과 함께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빛을 받아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하며 빛을 비취어야 하는 것입니다. 엡5:8-9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갔을 때에는 어두움의 자녀이더니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의 자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옮겨진 우리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빛의 자녀란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빛의 열매에 대하여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같은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의 생활은 죄에 끌려 다녀 사탄을 기쁘게 해 주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이 무엇인가' 그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살전5:5절에서는 빛의 아들이란 낮에 속한 사람들임을 말씀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이 낮에 속한 사람들이냐?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있어 근신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두움에 속하지 않으려면 오직 깨어 있어 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아직 죄와 더불어 손을 잡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 거짓말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요한은 여기서 거짓된 그리스도인과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일을 빛으로 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의 생활에 빛의 열매가 없다면 그리고 옛날과 다름없이 어둠 속에 그대로 머무는 생활을 한다면 이런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둠에 행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는 서로 사귐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귐이란 성도들의 교제로 진실한 성도간의 교제는 빛 가운데 살아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은 아직 어두움에 속한 죄악된 생활을 벗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빛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 사람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빛을 받은 사람이 혹 죄를 범하는 일과 아주 죄 가운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그 차이가 엄청납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어둠의 유혹이 와도 그 유혹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혹 죄를 범해도 곧 빛으로 그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그러므로 어둠이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하거나 죄가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스스로 속는 사람들입니다. 9절에 나오는 말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둠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의 생활에 들어왔을 때에 그 어둠을 속히 물리치면 우리는 계속 빛에 속한 자가 되며 빛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제시되어 있는데 '죄의 자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회개는 우리 중에 있는 모든 죄와 모든 불의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결론 : 빛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생활을 하려면 죄를 자백하는 회개하는 생활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참 자 백은 회개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07 read : 6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5-10)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로부터 받은 바 듣고 전하는 소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메시지였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불의나 죄를 말합니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07 read : 6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5-10)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로부터 받은 바 듣고 전하는 소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메시지였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불의나 죄를 말합니다. 빛은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에 빛에는 언제나 어둠이 함께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요한이 전한 소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제 빛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어둠과 함께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빛을 받아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하며 빛을 비취어야 하는 것입니다. 엡5:8-9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갔을 때에는 어두움의 자녀이더니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의 자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옮겨진 우리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빛의 자녀란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빛의 열매에 대하여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같은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의 생활은 죄에 끌려 다녀 사탄을 기쁘게 해 주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이 무엇인가' 그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살전5:5절에서는 빛의 아들이란 낮에 속한 사람들임을 말씀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이 낮에 속한 사람들이냐?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있어 근신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두움에 속하지 않으려면 오직 깨어 있어 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아직 죄와 더불어 손을 잡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 거짓말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요한은 여기서 거짓된 그리스도인과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일을 빛으로 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의 생활에 빛의 열매가 없다면 그리고 옛날과 다름없이 어둠 속에 그대로 머무는 생활을 한다면 이런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둠에 행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는 서로 사귐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귐이란 성도들의 교제로 진실한 성도간의 교제는 빛 가운데 살아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은 아직 어두움에 속한 죄악된 생활을 벗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빛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 사람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빛을 받은 사람이 혹 죄를 범하는 일과 아주 죄 가운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그 차이가 엄청납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어둠의 유혹이 와도 그 유혹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혹 죄를 범해도 곧 빛으로 그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그러므로 어둠이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하거나 죄가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스스로 속는 사람들입니다. 9절에 나오는 말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둠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의 생활에 들어왔을 때에 그 어둠을 속히 물리치면 우리는 계속 빛에 속한 자가 되며 빛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제시되어 있는데 '죄의 자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회개는 우리 중에 있는 모든 죄와 모든 불의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결론 : 빛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생활을 하려면 죄를 자백하는 회개하는 생활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참 자 백은 회개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온전한 상을 얻으라 2002-02-07 21:52:09 read : 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2서 1:7-1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상급의 약속들이 있지만 가장 값진 상급은 하늘에 가서 받는 최종적인 상급입니다. 이 상급을 요한은 8절에서 온전한 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교훈과 권면이 있지만 사도 요한은 요
(3) 온전한 상을 얻으라 2002-02-07 21:52:09 read : 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2서 1:7-1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상급의 약속들이 있지만 가장 값진 상급은 하늘에 가서 받는 최종적인 상급입니다. 이 상급을 요한은 8절에서 온전한 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교훈과 권면이 있지만 사도 요한은 요한 2서에서 특별한 경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이단자를 멀리 할 것을 경종해 줍니다. 1. 너희는 너희를 삼가라 8절에서 '너희는 너희를 삼가라'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에는 언제나 삼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삼가란 말은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벧후1:6절 말씀에는 '지식에 절제'를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식은 뻗어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절제가 따르지 않으면 진리에서 이탈하기 쉬운 것입니다. 요즘 성경을 인위적으로 해석하는 신 신학이나 말씀의 범위를 뛰어넘는 이단들은 거의 절제가 없는 무질서의 신앙이나 지식에서 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삼가하는 자세를 가지고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요한은 9절에서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교훈을 지나치면 안됩니다. 교훈을 지나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해야 할바를 말씀으로 나타나셨는데 그것을 인간적인 지식이나 규례로 변질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도 없는 규례를 만들어 장로의 유전이라 하여 율법보다 더 중한 생활 지침으로 삼게 했습니다. 우상 숭배는 범죄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이유로 제사상을 차려 놓고 큰절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라 효도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면 이런 교훈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내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지내치는 것입니까?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데서 지내치는 교훈이 나옵니다. 성경은 올바로 계시된 말씀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새로운 계시를 받는데서 지내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으로 완성되었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나 장래의 모든 일들이 계시 안에서 이미 나타내셨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내치는 일입니다.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씀을 잘 명심해야 합니다.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계13장에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생기기는 양처럼 생겼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용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용의 말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주의 종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는 노스틱 파라고 일컽는 이단이 머리를 들고 성경을 인간의 철학적 지혜로 해석하는 일에 힘썼는데 이들의 주장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일을 부인한 것입니다. 2. 이단자들에 대한 태도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형제들간에도 서로 사랑해야 하지만 원수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명했습니다. 이단자들은 육신적인 원수가 아니라 영적인 원수들입니다. 이단자는 사탄의 사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육체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를 미혹하여 우리의 생명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들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밝혀 주었습니다. 10절에서 이르기를 '그를 집에 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집에 들이지 말라는 뜻은 그들을 환영하거나 영접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으로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집에 들이지 말라는 말씀은 이들과 교제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교제는 어느 한편이 교제하는 사람의 사상적 감염을 받게 되기 쉽습니다. 더군다나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하여 악한 사상으로 우리의 생명을 노략질하려는 그들과의 교제는 자살 행위인 것입니다. 다음에 그들과 인사도 말라고 했습니다. 인사란 하나의 축복인데 그들에게 복을 빌어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 안에는 그들과의 대화까지도 단절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단자들과의 성경적인 토론은 절대로 삼가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성경 토론에서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인 줄 알았다 해도 결코 진리로 돌이킬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교묘히 성경을 배웠으며 거짓된 방법으로 진리를 왜곡하기 때문에 토론에 말려 들어가 이단에 물들기 쉬운 것입니다. 결론 : 진리 안에 굳게 서서 그 안에서 생활하는 태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교훈을 지내치면 안 됩니다. 이단자들에게 주의 사랑을 나눠주면 안됩니다. 우리는 종말에 살고 있는 성도들로 이 말씀을 자 명심하여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46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 1:8-10절까지의 말씀은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범한다. 그러나 그 죄를 우리가 자백만 하면 용서받으니 죄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하게 생각할 것 없이 죄를 지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역설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46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 1:8-10절까지의 말씀은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범한다. 그러나 그 죄를 우리가 자백만 하면 용서받으니 죄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하게 생각할 것 없이 죄를 지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역설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나 주장은 궤변이요 억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2:1절에서 말씀하기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를 저즈러도 좋다거나 그리스도인은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 '모든 불의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으니 죄를 범하는 일에 담대하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만드는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에 혹 죄를 범했을 때에라도 낙심하지 말고 곧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혹 죄를 범했을지라도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하여 다시는 그런 죄의 유혹에 끌리지 말고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쓰는 생활을 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1. 우리의 대언자 요한은 말하기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으며 요한은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신령한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죄는 그 죄가 가만히 어둠 속에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죄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부르짖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59:12절에서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 한다'고 했습니다. 민32:23절에서는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 낼 줄을 알라'고 했습니다. 계18:5절에서 이르시기를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죄악을 다스리는 사탄은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참소하는 자입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욥에 대하여 시기한 사탄은 하나님께 욥을 참소했습니다. 계12:10절 말씀을 보면 참소하는 자가 하늘에서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이 자는 인류의 종말에 가서 미가엘 천사에 의해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이같은 참소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신 후에는 우리들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제동이 걸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도록 방패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라고 밝힌 대상은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롬8:33절에서도 바울은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대언자는 누구라고 하신 것입니까?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의인이십니다. 죄악의 대명사가 되는 사탄의 참소는 의인의 간구 앞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손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변호하시는 그리스도의 대언은 아주 적법한 변론이십니다. 왜냐? 그 분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 사실만 선언하신다면 사탄이 아무리 그럴듯한 참소로 우리를 정죄해도 하나님의 승인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우리의 대언자로 지금도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계시다고 하는 사실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슥3:1절 이하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이 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참소를 할 때, 여호수아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그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면서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노라'고 하시며 사탄을 향하여 '내가 너를 책망하노라'고 견책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언은 그가 이루신 속죄와 그가 가지신 의로 인하여 우리를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죄를 자백하지 않고 감추면 하나님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죄를 위해 어떻게 대언 하실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령을 탄식시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이 분만 붙잡고 의지하고 순종하면 사탄의 송사도 그 어떤 참소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4) 우리의 화목 제물 2002-02-07 22:39:25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화목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까? 화목이란 말의 뜻은 서로가 틈이 나서 멀어졌던 사이가 다시 가까워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종교인
(4) 우리의 화목 제물 2002-02-07 22:39:25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화목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까? 화목이란 말의 뜻은 서로가 틈이 나서 멀어졌던 사이가 다시 가까워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종교인 것입니다. 1. 화목의 필요성 우리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화목의 조건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창2:16-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이 하나님이 명하신 조건 아래서 만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화목의 조건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화목 대신 원수의 관계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는 아담의 모든 자손에게도 아담과 똑같이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이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영원히 불가능하며 그렇게 될 때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깨어짐은 곧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의미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과의 화목의 방법을 제시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 또 깨어진 화목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소망이 없었던 인간에게 크나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이같은 장애를 없애고 화목을 실현시키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깨어진 화목의 장애를 어떻게 없애느냐? 이 장애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담이 범한 죄악인 것입니다. 아담의 죄악이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그의 모든 자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게 되어 하나님과의 화목에 거침돌이 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은 실로 시급한 일입니다. 화목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롬5:17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20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욥22:21절에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2. 구약과 신약의 화목제물 (1) 하나님과의 화목은 제물로만이 가능했습니다. 죄의 사함이 없이는 화목이 불가능했으므로 제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이므로 이 시대에는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할 속죄 제물이 없었을 때임으로 죄 값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방법으로 짐승을 제물로 삼았 습니다.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의 피로써 화목 제물로 삼아 사죄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룬 것입니다. 히9:13-14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였고 거룩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2) 그러나 이런 방법은 아직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의 시대였으므로 짐승의 피로 화목하는 방법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한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위하 화목 제물 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화목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롬5:10절에서 '우리가 원 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골1:22절에서 이르시기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과 우리 죄인들과의 화 목을 위한화목 제물로 흘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롬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 는 화목 제물이 되시려고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뤘다고 하신 말씀은 바 로 이 화목제물의 사명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이 이루신 이 화목의 혜택을 받아 무조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대언자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한 믿음으로 사탄과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4) 우리의 화목 제물 2002-02-07 22:39:25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화목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까? 화목이란 말의 뜻은 서로가 틈이 나서 멀어졌던 사이가 다시 가까워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종교인
(4) 우리의 화목 제물 2002-02-07 22:39:25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화목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까? 화목이란 말의 뜻은 서로가 틈이 나서 멀어졌던 사이가 다시 가까워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종교인 것입니다. 1. 화목의 필요성 우리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화목의 조건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창2:16-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이 하나님이 명하신 조건 아래서 만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화목의 조건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화목 대신 원수의 관계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는 아담의 모든 자손에게도 아담과 똑같이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이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영원히 불가능하며 그렇게 될 때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깨어짐은 곧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의미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과의 화목의 방법을 제시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 또 깨어진 화목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소망이 없었던 인간에게 크나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이같은 장애를 없애고 화목을 실현시키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깨어진 화목의 장애를 어떻게 없애느냐? 이 장애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담이 범한 죄악인 것입니다. 아담의 죄악이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그의 모든 자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게 되어 하나님과의 화목에 거침돌이 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은 실로 시급한 일입니다. 화목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롬5:17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20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욥22:21절에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2. 구약과 신약의 화목제물 (1) 하나님과의 화목은 제물로만이 가능했습니다. 죄의 사함이 없이는 화목이 불가능했으므로 제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이므로 이 시대에는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할 속죄 제물이 없었을 때임으로 죄 값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방법으로 짐승을 제물로 삼았 습니다.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의 피로써 화목 제물로 삼아 사죄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룬 것입니다. 히9:13-14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였고 거룩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2) 그러나 이런 방법은 아직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의 시대였으므로 짐승의 피로 화목하는 방법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한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위하 화목 제물 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화목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롬5:10절에서 '우리가 원 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골1:22절에서 이르시기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과 우리 죄인들과의 화 목을 위한화목 제물로 흘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롬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 는 화목 제물이 되시려고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뤘다고 하신 말씀은 바 로 이 화목제물의 사명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이 이루신 이 화목의 혜택을 받아 무조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대언자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한 믿음으로 사탄과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5) 주를 사랑하는 증거 2002-02-07 22:40:05 read : 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주님은 인생들처럼 누구에게 속거나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있는 것까지 소상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아직 계획하지도 아니하고 생각하지도 아니한 것까지도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하지 못한 마
(5) 주를 사랑하는 증거 2002-02-07 22:40:05 read : 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주님은 인생들처럼 누구에게 속거나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있는 것까지 소상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아직 계획하지도 아니하고 생각하지도 아니한 것까지도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하지 못한 마음, 거짓된 혀, 곧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진실하지 못한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그러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 자입니까? 4절 말씀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믿노라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거짓말쟁이로 생활해 오지 않았는지 자기를 살펴보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일을 우리는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까?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을 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배우는 학문은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머리에 집어넣으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경우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는 가질 수 없습니다. 마귀도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거짓된 지식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지식은 거짓된 지식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증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그 안에 진리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란 그 안에 생명이 들어있는 지식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는 변치 않는 수학적 공식이나 철학자나 정치가들의 유명한 금언 따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참으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생명의 공식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금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와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7:17절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것도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그 진리의 위대한 생명의 역사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신 것은 진리는 그 소유한 자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첫째로 거짓말이요 둘째로 진리가 그 사람에게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인들 중, 누구에게는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필요치 않는것이 아닙니다. 롬6:16절 말씀을 보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순종은 자신의 영적인 소속을 밝혀 주는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는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해도, 자기는 확실히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해도 그가 불순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의 소속은 빛에 있는 것도 아니요 구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하는 자로 아직 어둠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진리에 서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생활을 한다면 그는 아직 육에 속한 자요 그의 마지막은 사망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구원의 공식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일은 구원의 유일한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믿음이 확실히 있다고 하는 절대적인 증거요 열매인 것입니다. 믿음에는 가짜와 진짜가 있습니다. 가짜 믿음은 믿음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순종이 없는 경우입니다. 진짜 믿음은 그 믿음에 순종의 열매가 따르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있으니 열매가 없어도 내게 구원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 속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믿음의 확인은 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이 유일한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스스로 속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나는 구원받았다는 안일한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순종하는 생 활만이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5) 주를 사랑하는 증거 2002-02-07 22:40:05 read : 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주님은 인생들처럼 누구에게 속거나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있는 것까지 소상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아직 계획하지도 아니하고 생각하지도 아니한 것까지도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하지 못한 마
(5) 주를 사랑하는 증거 2002-02-07 22:40:05 read : 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주님은 인생들처럼 누구에게 속거나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있는 것까지 소상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아직 계획하지도 아니하고 생각하지도 아니한 것까지도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하지 못한 마음, 거짓된 혀, 곧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진실하지 못한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그러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 자입니까? 4절 말씀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믿노라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거짓말쟁이로 생활해 오지 않았는지 자기를 살펴보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일을 우리는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까?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을 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배우는 학문은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머리에 집어넣으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경우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는 가질 수 없습니다. 마귀도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거짓된 지식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지식은 거짓된 지식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증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그 안에 진리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란 그 안에 생명이 들어있는 지식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는 변치 않는 수학적 공식이나 철학자나 정치가들의 유명한 금언 따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참으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생명의 공식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금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와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7:17절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것도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그 진리의 위대한 생명의 역사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신 것은 진리는 그 소유한 자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첫째로 거짓말이요 둘째로 진리가 그 사람에게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인들 중, 누구에게는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필요치 않는것이 아닙니다. 롬6:16절 말씀을 보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순종은 자신의 영적인 소속을 밝혀 주는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는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해도, 자기는 확실히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해도 그가 불순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의 소속은 빛에 있는 것도 아니요 구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하는 자로 아직 어둠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진리에 서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생활을 한다면 그는 아직 육에 속한 자요 그의 마지막은 사망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구원의 공식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일은 구원의 유일한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믿음이 확실히 있다고 하는 절대적인 증거요 열매인 것입니다. 믿음에는 가짜와 진짜가 있습니다. 가짜 믿음은 믿음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순종이 없는 경우입니다. 진짜 믿음은 그 믿음에 순종의 열매가 따르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있으니 열매가 없어도 내게 구원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 속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믿음의 확인은 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이 유일한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스스로 속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나는 구원받았다는 안일한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순종하는 생 활만이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6) 주님의 계명 2002-02-07 22:41:03 read : 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증거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절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이냐에 대해 요한은 곧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1. 새계명
(6) 주님의 계명 2002-02-07 22:41:03 read : 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증거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절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이냐에 대해 요한은 곧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1. 새계명과 옛계명 여기서 요한은 새 계명과 옛 계명을 언급하면서 이 두 계명은 실인즉 둘이 아니라 하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옛 계명에 대하여 요한은 7절에서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것은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계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하려고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이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을 폐기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원래가 10계명을 기본으로 주신 말씀인데 실인즉 많은 계명들이 있지만 그 근본 정신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인데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계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5-10계명은 이웃에 대한 계명인데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율법은 사랑의 법이요 사랑을 완성하는 일에 율법의 존재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여러 가지 계명을 주시면서 이 계명을 이루는 일에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레19:17-18절 말씀을 보면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의 근본 정신은 사람을 정죄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종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 사랑의 법을 실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 대신 미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했으며 용서 대신 정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우리로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사랑은 무엇이냐? 우리는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 우리가 나타내야 할 사랑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야 하겠습니다. (1) 형제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18:2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결론적으로 3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을 명심해서 용서로 사랑을 나타내야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다음에 사랑은 어려운 형제를 도와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도들이 형제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이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는 이 빚을 내 이웃에게 내 형제에게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빚을 갚는 생활이 곧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사랑의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을 정확 히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는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지가 없 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의 성취에서 오는 완성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것을 완성하셨습니다. 복음은 율 법을 폐한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된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림자로 보여 주신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체로 나타남으로 복음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자인 구약적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새 계명인 사랑을 따르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이 계명에서 가르치는 교훈이 많아도 그 대 강령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그의 아들 독생자 예 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완성하는 새 계명을 따라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