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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5:52 read : 9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1-4) 요한 서신은 3서까지 세 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의 저자는 요한입니다. 성경에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명 있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냐는 설에 대하여 구구한 말이 있지만 사도 요한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본 서신의 문체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과 공통점이 많고 문장 전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5:52 read : 9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1-4) 요한 서신은 3서까지 세 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의 저자는 요한입니다. 성경에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명 있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냐는 설에 대하여 구구한 말이 있지만 사도 요한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본 서신의 문체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과 공통점이 많고 문장 전체에 흐르는 권위 있는 말투는 사도의 직분을 가진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서신의 기록 년대는 주후 85-95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요한이 말년을 지낸 에베소에서 이 서신을 썼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쓰면서 먼저 말씀의 증인의 입장에서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에 나오는 이 부분의 말씀은 요 1장에 나오는 말씀과 너무나도 비슷한 점이 많아서 한 눈으로 보기에도 요한의 글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태초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시간이 시작되는 태초와 시간을 초월한 태초가 그것입니다. 창1:1절에 있는 태초는 물질 세계의 시간의 시작으로서의 태초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1:1절에 나오는 태초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 전의 태초로 대개의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기원에 대한 언급에서 이 태초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요일 1:1절에 나오는 태초는 후자에 속하는 태초입니다. 1절에서 '생명의 말씀'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뜻으로 풀이되는데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곧 생명의 말씀이 되신 분입니다. 왜 이처럼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이같은 표현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증거 할 때 쓰여집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에 비로소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이미 하늘에서 존재하셨던 분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선재라고 부르는데 말씀이란 단어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선재를 나타낼 때 그의 존재에 대한 고유명사로 사도 요한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2.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를 말씀이라고 불렀습니까?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실 때 사용하셨던 표현입 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하실 때 그 입의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말씀은 곧 진리요 진리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히1: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이란 말을 인격화 시켜 그리스도와 연결시킨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1:1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결정적 증거인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14절에 있는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신 것과 18절에 나오는 말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말씀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더욱 많이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은 '말씀'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은 이 말씀의 목격자임을 증거 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이란 바로 이 말씀을 보고 듣고 만진바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요일5:13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이 메시지를 전함은 우리와 자신과 영적인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유업을 함께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큰 보람을 가졌으며 자기가 본 바 모든 것을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증거 한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일은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의 이 기쁨이 요한의 서신을 읽고 듣는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5:52 read : 9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1-4) 요한 서신은 3서까지 세 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의 저자는 요한입니다. 성경에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명 있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냐는 설에 대하여 구구한 말이 있지만 사도 요한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본 서신의 문체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과 공통점이 많고 문장 전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5:52 read : 9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1-4) 요한 서신은 3서까지 세 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의 저자는 요한입니다. 성경에는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명 있기 때문에 요한이 누구냐는 설에 대하여 구구한 말이 있지만 사도 요한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본 서신의 문체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과 공통점이 많고 문장 전체에 흐르는 권위 있는 말투는 사도의 직분을 가진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서신의 기록 년대는 주후 85-95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요한이 말년을 지낸 에베소에서 이 서신을 썼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쓰면서 먼저 말씀의 증인의 입장에서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에 나오는 이 부분의 말씀은 요 1장에 나오는 말씀과 너무나도 비슷한 점이 많아서 한 눈으로 보기에도 요한의 글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태초는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시간이 시작되는 태초와 시간을 초월한 태초가 그것입니다. 창1:1절에 있는 태초는 물질 세계의 시간의 시작으로서의 태초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1:1절에 나오는 태초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 전의 태초로 대개의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기원에 대한 언급에서 이 태초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요일 1:1절에 나오는 태초는 후자에 속하는 태초입니다. 1절에서 '생명의 말씀'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뜻으로 풀이되는데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곧 생명의 말씀이 되신 분입니다. 왜 이처럼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이같은 표현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증거 할 때 쓰여집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에 비로소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이미 하늘에서 존재하셨던 분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선재라고 부르는데 말씀이란 단어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선재를 나타낼 때 그의 존재에 대한 고유명사로 사도 요한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2.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를 말씀이라고 불렀습니까?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실 때 사용하셨던 표현입 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하실 때 그 입의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말씀은 곧 진리요 진리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히1: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이란 말을 인격화 시켜 그리스도와 연결시킨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1:1절 말씀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결정적 증거인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14절에 있는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신 것과 18절에 나오는 말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말씀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더욱 많이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은 '말씀'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은 이 말씀의 목격자임을 증거 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이란 바로 이 말씀을 보고 듣고 만진바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요일5:13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이 메시지를 전함은 우리와 자신과 영적인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유업을 함께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큰 보람을 가졌으며 자기가 본 바 모든 것을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증거 한 것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증거하는 일은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의 이 기쁨이 요한의 서신을 읽고 듣는 여러분에게도 함께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진리도 행하는 자에 대한 기쁨 2002-02-07 21:51:22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2서 1:4-6) 사도 요한은 본문 4절에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이 말은 모든 목회자들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참 보람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요한의 고백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진리의 말씀
(2) 진리도 행하는 자에 대한 기쁨 2002-02-07 21:51:22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2서 1:4-6) 사도 요한은 본문 4절에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이 말은 모든 목회자들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참 보람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요한의 고백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진리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1. 진리에 행하는 자를 보는 기쁨 하나님의 종들에게 교인들의 존재는 참으로 귀중한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양 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종과 성도들을 양과 목자로 비유하신 것은 목회자와 성도들간에 그만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빌4:1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의 사모하고 사랑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성도들이 그의 기쁨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양 무리들을 자신의 면류관으로 생각했습니다. 양 무리들의 선한 목자로 주님의 인정을 받으면 이런 면류관을 받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양이 없으면 목자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자기 생의 전부로 여기고 기쁨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양 무리들의 목자들에게 교훈하기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양 무리들을 잘 치는 목자에게 면류관을 주시는데 이 양 무리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전4:15절에서 바울은 양 무리들을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잘 가르치고 영혼의 파수군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목자를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은 양 무리들에 대한 영혼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양 무리들이 계명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진리에 행하지 못하며 어그러진 길로 행하고 믿음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목자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가슴아픈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 무리들이 잘 순종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로 인한 기쁨이나 보람이란 다른데 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보람있는 목회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성도들 자신이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대할 태도에 대하여 히13장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 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들로 보람있고 기쁘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순종하고 복종하는 일입니다. 2. 진리와 사랑 사도 요한은 진리와 계명과 사랑의 관계를 5절과 6절에서 간략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주님께 던졌지만 주님은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중생 되지 못한 자에게 진리를 설명해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바로 이 사랑을 증거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교회에 구하는 바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말이 율법에는 기록되지 아니한 생소한 말 같지만 이 사랑은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도 하나님의 사랑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두 강령에 대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풀이하셨습니다. 율법으로 밝히신 하나님의 계명도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요 복음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도 이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제쳐놓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으며 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랑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강물처럼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결론 :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계명과 진리는 사랑이며 이 사랑의 생 활이 계명을 지키며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랑은 은사로 주신다고 고전13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 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이 은사를 주시지만 우리는 더 많은 사랑의 생활을 하기 위해 사랑을 달라고 구해야 할 것입 니다.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07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5-10)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로부터 받은 바 듣고 전하는 소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메시지였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불의나 죄를 말합니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07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5-10)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로부터 받은 바 듣고 전하는 소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메시지였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불의나 죄를 말합니다. 빛은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에 빛에는 언제나 어둠이 함께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요한이 전한 소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제 빛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어둠과 함께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빛을 받아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하며 빛을 비취어야 하는 것입니다. 엡5:8-9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갔을 때에는 어두움의 자녀이더니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의 자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옮겨진 우리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빛의 자녀란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빛의 열매에 대하여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같은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의 생활은 죄에 끌려 다녀 사탄을 기쁘게 해 주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이 무엇인가' 그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살전5:5절에서는 빛의 아들이란 낮에 속한 사람들임을 말씀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이 낮에 속한 사람들이냐?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있어 근신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두움에 속하지 않으려면 오직 깨어 있어 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아직 죄와 더불어 손을 잡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 거짓말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요한은 여기서 거짓된 그리스도인과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일을 빛으로 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의 생활에 빛의 열매가 없다면 그리고 옛날과 다름없이 어둠 속에 그대로 머무는 생활을 한다면 이런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둠에 행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는 서로 사귐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귐이란 성도들의 교제로 진실한 성도간의 교제는 빛 가운데 살아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은 아직 어두움에 속한 죄악된 생활을 벗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빛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 사람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빛을 받은 사람이 혹 죄를 범하는 일과 아주 죄 가운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그 차이가 엄청납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어둠의 유혹이 와도 그 유혹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혹 죄를 범해도 곧 빛으로 그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그러므로 어둠이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하거나 죄가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스스로 속는 사람들입니다. 9절에 나오는 말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둠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의 생활에 들어왔을 때에 그 어둠을 속히 물리치면 우리는 계속 빛에 속한 자가 되며 빛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제시되어 있는데 '죄의 자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회개는 우리 중에 있는 모든 죄와 모든 불의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결론 : 빛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생활을 하려면 죄를 자백하는 회개하는 생활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참 자 백은 회개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07 read : 6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5-10)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로부터 받은 바 듣고 전하는 소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메시지였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불의나 죄를 말합니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07 read : 6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1:5-10)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로부터 받은 바 듣고 전하는 소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메시지였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불의나 죄를 말합니다. 빛은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에 빛에는 언제나 어둠이 함께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요한이 전한 소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제 빛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어둠과 함께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빛을 받아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하며 빛을 비취어야 하는 것입니다. 엡5:8-9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갔을 때에는 어두움의 자녀이더니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의 자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옮겨진 우리의 신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빛의 자녀란 빛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빛의 열매에 대하여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같은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의 생활은 죄에 끌려 다녀 사탄을 기쁘게 해 주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쁘시게 해 드릴 것이 무엇인가' 그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살전5:5절에서는 빛의 아들이란 낮에 속한 사람들임을 말씀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이 낮에 속한 사람들이냐?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있어 근신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두움에 속하지 않으려면 오직 깨어 있어 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아직 죄와 더불어 손을 잡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 거짓말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요한은 여기서 거짓된 그리스도인과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일을 빛으로 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의 생활에 빛의 열매가 없다면 그리고 옛날과 다름없이 어둠 속에 그대로 머무는 생활을 한다면 이런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둠에 행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는 서로 사귐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귐이란 성도들의 교제로 진실한 성도간의 교제는 빛 가운데 살아갈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 것은 아직 어두움에 속한 죄악된 생활을 벗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빛을 받은 사람이라고 그 사람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빛을 받은 사람이 혹 죄를 범하는 일과 아주 죄 가운에서 살아가는 것과는 그 차이가 엄청납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어둠의 유혹이 와도 그 유혹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혹 죄를 범해도 곧 빛으로 그 어두움을 물리칩니다. 그러므로 어둠이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하거나 죄가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스스로 속는 사람들입니다. 9절에 나오는 말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둠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의 생활에 들어왔을 때에 그 어둠을 속히 물리치면 우리는 계속 빛에 속한 자가 되며 빛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제시되어 있는데 '죄의 자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회개는 우리 중에 있는 모든 죄와 모든 불의를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결론 : 빛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이 빛의 생활을 하려면 죄를 자백하는 회개하는 생활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참 자 백은 회개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온전한 상을 얻으라 2002-02-07 21:52:09 read : 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2서 1:7-1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상급의 약속들이 있지만 가장 값진 상급은 하늘에 가서 받는 최종적인 상급입니다. 이 상급을 요한은 8절에서 온전한 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교훈과 권면이 있지만 사도 요한은 요
(3) 온전한 상을 얻으라 2002-02-07 21:52:09 read : 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2서 1:7-1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상급의 약속들이 있지만 가장 값진 상급은 하늘에 가서 받는 최종적인 상급입니다. 이 상급을 요한은 8절에서 온전한 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교훈과 권면이 있지만 사도 요한은 요한 2서에서 특별한 경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이단자를 멀리 할 것을 경종해 줍니다. 1. 너희는 너희를 삼가라 8절에서 '너희는 너희를 삼가라'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에는 언제나 삼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삼가란 말은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벧후1:6절 말씀에는 '지식에 절제'를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식은 뻗어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절제가 따르지 않으면 진리에서 이탈하기 쉬운 것입니다. 요즘 성경을 인위적으로 해석하는 신 신학이나 말씀의 범위를 뛰어넘는 이단들은 거의 절제가 없는 무질서의 신앙이나 지식에서 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삼가하는 자세를 가지고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요한은 9절에서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교훈을 지나치면 안됩니다. 교훈을 지나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해야 할바를 말씀으로 나타나셨는데 그것을 인간적인 지식이나 규례로 변질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도 없는 규례를 만들어 장로의 유전이라 하여 율법보다 더 중한 생활 지침으로 삼게 했습니다. 우상 숭배는 범죄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이유로 제사상을 차려 놓고 큰절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라 효도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면 이런 교훈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내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지내치는 것입니까?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데서 지내치는 교훈이 나옵니다. 성경은 올바로 계시된 말씀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새로운 계시를 받는데서 지내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말씀으로 완성되었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나 장래의 모든 일들이 계시 안에서 이미 나타내셨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내치는 일입니다.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씀을 잘 명심해야 합니다.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계13장에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생기기는 양처럼 생겼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용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용의 말을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주의 종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에는 노스틱 파라고 일컽는 이단이 머리를 들고 성경을 인간의 철학적 지혜로 해석하는 일에 힘썼는데 이들의 주장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일을 부인한 것입니다. 2. 이단자들에 대한 태도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형제들간에도 서로 사랑해야 하지만 원수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명했습니다. 이단자들은 육신적인 원수가 아니라 영적인 원수들입니다. 이단자는 사탄의 사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육체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를 미혹하여 우리의 생명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들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밝혀 주었습니다. 10절에서 이르기를 '그를 집에 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집에 들이지 말라는 뜻은 그들을 환영하거나 영접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으로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집에 들이지 말라는 말씀은 이들과 교제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교제는 어느 한편이 교제하는 사람의 사상적 감염을 받게 되기 쉽습니다. 더군다나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하여 악한 사상으로 우리의 생명을 노략질하려는 그들과의 교제는 자살 행위인 것입니다. 다음에 그들과 인사도 말라고 했습니다. 인사란 하나의 축복인데 그들에게 복을 빌어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 안에는 그들과의 대화까지도 단절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단자들과의 성경적인 토론은 절대로 삼가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성경 토론에서 그들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인 줄 알았다 해도 결코 진리로 돌이킬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교묘히 성경을 배웠으며 거짓된 방법으로 진리를 왜곡하기 때문에 토론에 말려 들어가 이단에 물들기 쉬운 것입니다. 결론 : 진리 안에 굳게 서서 그 안에서 생활하는 태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교훈을 지내치면 안 됩니다. 이단자들에게 주의 사랑을 나눠주면 안됩니다. 우리는 종말에 살고 있는 성도들로 이 말씀을 자 명심하여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46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 1:8-10절까지의 말씀은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범한다. 그러나 그 죄를 우리가 자백만 하면 용서받으니 죄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하게 생각할 것 없이 죄를 지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역설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2002-02-07 22:38:46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 1:8-10절까지의 말씀은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범한다. 그러나 그 죄를 우리가 자백만 하면 용서받으니 죄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하게 생각할 것 없이 죄를 지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역설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나 주장은 궤변이요 억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2:1절에서 말씀하기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를 저즈러도 좋다거나 그리스도인은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 '모든 불의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으니 죄를 범하는 일에 담대하다면 이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만드는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을 때에 혹 죄를 범했을 때에라도 낙심하지 말고 곧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혹 죄를 범했을지라도 통회하는 심령으로 회개하여 다시는 그런 죄의 유혹에 끌리지 말고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쓰는 생활을 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1. 우리의 대언자 요한은 말하기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으며 요한은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신령한 영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죄는 그 죄가 가만히 어둠 속에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죄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부르짖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59:12절에서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 한다'고 했습니다. 민32:23절에서는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 낼 줄을 알라'고 했습니다. 계18:5절에서 이르시기를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죄악을 다스리는 사탄은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참소하는 자입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욥에 대하여 시기한 사탄은 하나님께 욥을 참소했습니다. 계12:10절 말씀을 보면 참소하는 자가 하늘에서 쫓겨났다고 했습니다. 이 자는 인류의 종말에 가서 미가엘 천사에 의해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이같은 참소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신 후에는 우리들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제동이 걸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도록 방패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라고 밝힌 대상은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롬8:33절에서도 바울은 이처럼 말씀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대언자는 누구라고 하신 것입니까?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의인이십니다. 죄악의 대명사가 되는 사탄의 참소는 의인의 간구 앞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손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변호하시는 그리스도의 대언은 아주 적법한 변론이십니다. 왜냐? 그 분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 사실만 선언하신다면 사탄이 아무리 그럴듯한 참소로 우리를 정죄해도 하나님의 승인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우리의 대언자로 지금도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계시다고 하는 사실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슥3:1절 이하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이 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참소를 할 때, 여호수아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그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면서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노라'고 하시며 사탄을 향하여 '내가 너를 책망하노라'고 견책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언은 그가 이루신 속죄와 그가 가지신 의로 인하여 우리를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죄를 자백하지 않고 감추면 하나님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죄를 위해 어떻게 대언 하실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령을 탄식시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이 분만 붙잡고 의지하고 순종하면 사탄의 송사도 그 어떤 참소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4) 우리의 화목 제물 2002-02-07 22:39:25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화목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까? 화목이란 말의 뜻은 서로가 틈이 나서 멀어졌던 사이가 다시 가까워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종교인
(4) 우리의 화목 제물 2002-02-07 22:39:25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화목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까? 화목이란 말의 뜻은 서로가 틈이 나서 멀어졌던 사이가 다시 가까워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종교인 것입니다. 1. 화목의 필요성 우리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화목의 조건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창2:16-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이 하나님이 명하신 조건 아래서 만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화목의 조건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화목 대신 원수의 관계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는 아담의 모든 자손에게도 아담과 똑같이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이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영원히 불가능하며 그렇게 될 때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깨어짐은 곧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의미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과의 화목의 방법을 제시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 또 깨어진 화목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소망이 없었던 인간에게 크나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이같은 장애를 없애고 화목을 실현시키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깨어진 화목의 장애를 어떻게 없애느냐? 이 장애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담이 범한 죄악인 것입니다. 아담의 죄악이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그의 모든 자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게 되어 하나님과의 화목에 거침돌이 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은 실로 시급한 일입니다. 화목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롬5:17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20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욥22:21절에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2. 구약과 신약의 화목제물 (1) 하나님과의 화목은 제물로만이 가능했습니다. 죄의 사함이 없이는 화목이 불가능했으므로 제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이므로 이 시대에는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할 속죄 제물이 없었을 때임으로 죄 값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방법으로 짐승을 제물로 삼았 습니다.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의 피로써 화목 제물로 삼아 사죄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룬 것입니다. 히9:13-14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였고 거룩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2) 그러나 이런 방법은 아직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의 시대였으므로 짐승의 피로 화목하는 방법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한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위하 화목 제물 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화목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롬5:10절에서 '우리가 원 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골1:22절에서 이르시기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과 우리 죄인들과의 화 목을 위한화목 제물로 흘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롬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 는 화목 제물이 되시려고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뤘다고 하신 말씀은 바 로 이 화목제물의 사명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이 이루신 이 화목의 혜택을 받아 무조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대언자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한 믿음으로 사탄과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4) 우리의 화목 제물 2002-02-07 22:39:25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화목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까? 화목이란 말의 뜻은 서로가 틈이 나서 멀어졌던 사이가 다시 가까워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종교인
(4) 우리의 화목 제물 2002-02-07 22:39:25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화목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까? 화목이란 말의 뜻은 서로가 틈이 나서 멀어졌던 사이가 다시 가까워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종교인 것입니다. 1. 화목의 필요성 우리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화목의 조건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창2:16-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이 하나님이 명하신 조건 아래서 만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화목의 조건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화목 대신 원수의 관계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는 아담의 모든 자손에게도 아담과 똑같이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이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영원히 불가능하며 그렇게 될 때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깨어짐은 곧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의미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과의 화목의 방법을 제시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 또 깨어진 화목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소망이 없었던 인간에게 크나큰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이같은 장애를 없애고 화목을 실현시키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깨어진 화목의 장애를 어떻게 없애느냐? 이 장애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담이 범한 죄악인 것입니다. 아담의 죄악이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그의 모든 자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게 되어 하나님과의 화목에 거침돌이 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은 실로 시급한 일입니다. 화목하지 못한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롬5:17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20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욥22:21절에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2. 구약과 신약의 화목제물 (1) 하나님과의 화목은 제물로만이 가능했습니다. 죄의 사함이 없이는 화목이 불가능했으므로 제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구약 시대는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이므로 이 시대에는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할 속죄 제물이 없었을 때임으로 죄 값으로 피를 흘리게 하는 방법으로 짐승을 제물로 삼았 습니다.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의 피로써 화목 제물로 삼아 사죄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룬 것입니다. 히9:13-14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정결케 하였고 거룩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2) 그러나 이런 방법은 아직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의 시대였으므로 짐승의 피로 화목하는 방법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한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위하 화목 제물 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화목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롬5:10절에서 '우리가 원 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골1:22절에서 이르시기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과 우리 죄인들과의 화 목을 위한화목 제물로 흘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한 순간이라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롬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 는 화목 제물이 되시려고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뤘다고 하신 말씀은 바 로 이 화목제물의 사명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이 이루신 이 화목의 혜택을 받아 무조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대언자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한 믿음으로 사탄과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5) 주를 사랑하는 증거 2002-02-07 22:40:05 read : 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주님은 인생들처럼 누구에게 속거나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있는 것까지 소상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아직 계획하지도 아니하고 생각하지도 아니한 것까지도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하지 못한 마
(5) 주를 사랑하는 증거 2002-02-07 22:40:05 read : 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주님은 인생들처럼 누구에게 속거나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있는 것까지 소상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아직 계획하지도 아니하고 생각하지도 아니한 것까지도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하지 못한 마음, 거짓된 혀, 곧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진실하지 못한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그러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 자입니까? 4절 말씀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믿노라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거짓말쟁이로 생활해 오지 않았는지 자기를 살펴보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일을 우리는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까?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을 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배우는 학문은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머리에 집어넣으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경우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는 가질 수 없습니다. 마귀도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거짓된 지식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지식은 거짓된 지식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증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그 안에 진리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란 그 안에 생명이 들어있는 지식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는 변치 않는 수학적 공식이나 철학자나 정치가들의 유명한 금언 따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참으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생명의 공식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금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와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7:17절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것도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그 진리의 위대한 생명의 역사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신 것은 진리는 그 소유한 자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첫째로 거짓말이요 둘째로 진리가 그 사람에게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인들 중, 누구에게는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필요치 않는것이 아닙니다. 롬6:16절 말씀을 보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순종은 자신의 영적인 소속을 밝혀 주는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는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해도, 자기는 확실히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해도 그가 불순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의 소속은 빛에 있는 것도 아니요 구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하는 자로 아직 어둠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진리에 서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생활을 한다면 그는 아직 육에 속한 자요 그의 마지막은 사망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구원의 공식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일은 구원의 유일한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믿음이 확실히 있다고 하는 절대적인 증거요 열매인 것입니다. 믿음에는 가짜와 진짜가 있습니다. 가짜 믿음은 믿음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순종이 없는 경우입니다. 진짜 믿음은 그 믿음에 순종의 열매가 따르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있으니 열매가 없어도 내게 구원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 속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믿음의 확인은 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이 유일한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스스로 속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나는 구원받았다는 안일한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순종하는 생 활만이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5) 주를 사랑하는 증거 2002-02-07 22:40:05 read : 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주님은 인생들처럼 누구에게 속거나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있는 것까지 소상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아직 계획하지도 아니하고 생각하지도 아니한 것까지도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하지 못한 마
(5) 주를 사랑하는 증거 2002-02-07 22:40:05 read : 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주님은 인생들처럼 누구에게 속거나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있는 것까지 소상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아직 계획하지도 아니하고 생각하지도 아니한 것까지도 알고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하지 못한 마음, 거짓된 혀, 곧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진실하지 못한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그러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 자입니까? 4절 말씀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믿노라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거짓말쟁이로 생활해 오지 않았는지 자기를 살펴보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일을 우리는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까?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을 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 배우는 학문은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머리에 집어넣으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경우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는 가질 수 없습니다. 마귀도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거짓된 지식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지식은 거짓된 지식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증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그 안에 진리가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란 그 안에 생명이 들어있는 지식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는 변치 않는 수학적 공식이나 철학자나 정치가들의 유명한 금언 따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참으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생명의 공식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금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와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7:17절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것도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그 진리의 위대한 생명의 역사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신 것은 진리는 그 소유한 자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첫째로 거짓말이요 둘째로 진리가 그 사람에게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인들 중, 누구에게는 필요하고 누구에게는 필요치 않는것이 아닙니다. 롬6:16절 말씀을 보면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순종은 자신의 영적인 소속을 밝혀 주는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는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해도, 자기는 확실히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해도 그가 불순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그의 소속은 빛에 있는 것도 아니요 구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말하는 자로 아직 어둠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진리에 서지 못하고 육신에 속한 생활을 한다면 그는 아직 육에 속한 자요 그의 마지막은 사망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구원의 공식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일은 구원의 유일한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믿음이 확실히 있다고 하는 절대적인 증거요 열매인 것입니다. 믿음에는 가짜와 진짜가 있습니다. 가짜 믿음은 믿음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순종이 없는 경우입니다. 진짜 믿음은 그 믿음에 순종의 열매가 따르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있으니 열매가 없어도 내게 구원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 속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믿음의 확인은 순종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이 유일한 증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는 스스로 속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나는 구원받았다는 안일한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순종하는 생 활만이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6) 주님의 계명 2002-02-07 22:41:03 read : 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증거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절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이냐에 대해 요한은 곧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1. 새계명
(6) 주님의 계명 2002-02-07 22:41:03 read : 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증거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절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이냐에 대해 요한은 곧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1. 새계명과 옛계명 여기서 요한은 새 계명과 옛 계명을 언급하면서 이 두 계명은 실인즉 둘이 아니라 하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옛 계명에 대하여 요한은 7절에서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것은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계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하려고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이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을 폐기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원래가 10계명을 기본으로 주신 말씀인데 실인즉 많은 계명들이 있지만 그 근본 정신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인데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계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5-10계명은 이웃에 대한 계명인데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율법은 사랑의 법이요 사랑을 완성하는 일에 율법의 존재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여러 가지 계명을 주시면서 이 계명을 이루는 일에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레19:17-18절 말씀을 보면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의 근본 정신은 사람을 정죄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종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 사랑의 법을 실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 대신 미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했으며 용서 대신 정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우리로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사랑은 무엇이냐? 우리는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 우리가 나타내야 할 사랑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야 하겠습니다. (1) 형제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18:2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결론적으로 3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을 명심해서 용서로 사랑을 나타내야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다음에 사랑은 어려운 형제를 도와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도들이 형제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이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는 이 빚을 내 이웃에게 내 형제에게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빚을 갚는 생활이 곧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사랑의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을 정확 히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는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지가 없 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의 성취에서 오는 완성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것을 완성하셨습니다. 복음은 율 법을 폐한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된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림자로 보여 주신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체로 나타남으로 복음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자인 구약적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새 계명인 사랑을 따르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이 계명에서 가르치는 교훈이 많아도 그 대 강령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그의 아들 독생자 예 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완성하는 새 계명을 따라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6) 주님의 계명 2002-02-07 22:41:03 read : 4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증거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절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이냐에 대해 요한은 곧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1. 새계명
(6) 주님의 계명 2002-02-07 22:41:03 read : 4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3 - 6)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증거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절에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계명이 무엇이냐에 대해 요한은 곧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1. 새계명과 옛계명 여기서 요한은 새 계명과 옛 계명을 언급하면서 이 두 계명은 실인즉 둘이 아니라 하나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옛 계명에 대하여 요한은 7절에서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것은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계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하려고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이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을 폐기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원래가 10계명을 기본으로 주신 말씀인데 실인즉 많은 계명들이 있지만 그 근본 정신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인데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계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5-10계명은 이웃에 대한 계명인데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율법은 사랑의 법이요 사랑을 완성하는 일에 율법의 존재 목적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여러 가지 계명을 주시면서 이 계명을 이루는 일에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레19:17-18절 말씀을 보면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의 근본 정신은 사람을 정죄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종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 사랑의 법을 실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 대신 미움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했으며 용서 대신 정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우리로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사랑은 무엇이냐? 우리는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 우리가 나타내야 할 사랑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야 하겠습니다. (1) 형제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마18:2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결론적으로 3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말씀을 명심해서 용서로 사랑을 나타내야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다음에 사랑은 어려운 형제를 도와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도들이 형제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이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는 이 빚을 내 이웃에게 내 형제에게 갚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빚을 갚는 생활이 곧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사랑의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을 정확 히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는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지가 없 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의 성취에서 오는 완성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이것을 완성하셨습니다. 복음은 율 법을 폐한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된 기초 위에서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림자로 보여 주신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체로 나타남으로 복음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자인 구약적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새 계명인 사랑을 따르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이 계명에서 가르치는 교훈이 많아도 그 대 강령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그의 아들 독생자 예 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완성하는 새 계명을 따라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7) 장성한 성도의 신앙 2002-02-07 22:42:03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2 - 14)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중에 하나도 빠진 것도 없고 더한 것도 없이 완전하게 기록된 책임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책은 과연 누구를 위해 기록한 책이며 누구에게 읽힘이 되라고 주신 책
(7) 장성한 성도의 신앙 2002-02-07 22:42:03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2 - 14)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중에 하나도 빠진 것도 없고 더한 것도 없이 완전하게 기록된 책임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책은 과연 누구를 위해 기록한 책이며 누구에게 읽힘이 되라고 주신 책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거나 그들을 위해 주신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하시고 그리하여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고자 주신 책이 성경입니다. 성령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이 말씀을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자는 제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요한이 이 서신을 쓴 대상 사도 요한이 요한 서신을 써서 보낸 대상자는 영적으로 장성한 자리에 있는 성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 14절에서 요한이 이 말씀을 들려주려고 하는 대상을 넷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아이들아' 이처럼 구분했는데 이것은 교인 전체에게 들려주려는 내용을 몇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1) 처음에 나오는 자녀들에 관한 언급에서 요한은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 아 사함을 얻음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사죄의 은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죄입니다. 죄가 사망을 가져왔고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으며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 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사죄는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어서의 첫째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죄가 그의 이름으로,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함을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인들에게는 이 메시지가 가장 중 요한 내용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일은 구원을 얻은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첫 번째 지식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 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이 사실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해졌다고 말씀해 주시는데 우 리는 아니다 내 죄는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죄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확 실한 지식을 갖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죄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사실과 하나는 그리스도의 의가 자기에게 완전히 옮겨졌다고 하는 사실입 니다. 이것을 죄의 소멸과 의의 전가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로 인하여 우리의 구원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아비들에 대해서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말씀해 주었 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신 그의 신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 신앙은 아이들의 속죄의 지식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영적 지식입니다.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예수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아는 믿음은 성장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청년들에게는 13절과 14절 두 곳에서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 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 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나 '흉악한 자'는 모두 사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청년의 믿음은 이 사탄을 이기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들이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라' 고 했습니다. 강하다는 말은 믿음으로 강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신앙의 성장의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믿음으로 능히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한 것입니다. (4) 14절에서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알 았다는 말은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는 알지만 아들은 모릅니다. 그들은 아들이 없는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아들 과 아버지를 아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결론 : 우리의 신앙은 여기서 요한이 이 서신을 받는 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버지에 대해서, 사죄에 대 해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실 뿐 아니라 강한 믿음으로 흉악한 사 탄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생화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7) 장성한 성도의 신앙 2002-02-07 22:42:03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2 - 14)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중에 하나도 빠진 것도 없고 더한 것도 없이 완전하게 기록된 책임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책은 과연 누구를 위해 기록한 책이며 누구에게 읽힘이 되라고 주신 책
(7) 장성한 성도의 신앙 2002-02-07 22:42:03 read : 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2 - 14)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중에 하나도 빠진 것도 없고 더한 것도 없이 완전하게 기록된 책임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책은 과연 누구를 위해 기록한 책이며 누구에게 읽힘이 되라고 주신 책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거나 그들을 위해 주신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하시고 그리하여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고자 주신 책이 성경입니다. 성령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이 말씀을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자는 제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 요한이 이 서신을 쓴 대상 사도 요한이 요한 서신을 써서 보낸 대상자는 영적으로 장성한 자리에 있는 성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 14절에서 요한이 이 말씀을 들려주려고 하는 대상을 넷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아이들아' 이처럼 구분했는데 이것은 교인 전체에게 들려주려는 내용을 몇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1) 처음에 나오는 자녀들에 관한 언급에서 요한은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 아 사함을 얻음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사죄의 은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죄입니다. 죄가 사망을 가져왔고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으며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 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사죄는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어서의 첫째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죄가 그의 이름으로,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함을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인들에게는 이 메시지가 가장 중 요한 내용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일은 구원을 얻은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첫 번째 지식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 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이 사실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해졌다고 말씀해 주시는데 우 리는 아니다 내 죄는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죄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속죄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확 실한 지식을 갖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죄는 두 가지 의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사실과 하나는 그리스도의 의가 자기에게 완전히 옮겨졌다고 하는 사실입 니다. 이것을 죄의 소멸과 의의 전가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로 인하여 우리의 구원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다음에 아비들에 대해서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라고 말씀해 주었 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신 그의 신성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 신앙은 아이들의 속죄의 지식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영적 지식입니다.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예수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아는 믿음은 성장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청년들에게는 13절과 14절 두 곳에서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 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 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나 '흉악한 자'는 모두 사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청년의 믿음은 이 사탄을 이기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들이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라' 고 했습니다. 강하다는 말은 믿음으로 강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신앙의 성장의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믿음으로 능히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한 것입니다. (4) 14절에서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알 았다는 말은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는 알지만 아들은 모릅니다. 그들은 아들이 없는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아들 과 아버지를 아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결론 : 우리의 신앙은 여기서 요한이 이 서신을 받는 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버지에 대해서, 사죄에 대 해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실 뿐 아니라 강한 믿음으로 흉악한 사 탄의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는 생화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8)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2002-02-07 22:42:38 read : 4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5 - 17)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세상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
(8)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2002-02-07 22:42:38 read : 4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5 - 17)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세상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1.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듣고 우리의 생활에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은 육신으로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를 전면 부정하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 도피주의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직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생계를 위해 장사도 하고 열심히 일도 해야 합니다. 옷도 입어야 하고 아이들 공부도 시켜야 하며 여유 있는 문화 생활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잘 먹고 잘 살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극심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 세상에 있는 것들이며 우리는 이것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많이 누리고 싶어하고 이런 것들로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그의 생활에 하나님이 없이 세상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의 생활에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하고 집을 짓는 일 등, 세상일에만 열중했을 뿐,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120년간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건만 자기 식구들 외에는 단 한 명도 귀를 기울이거나 경종으로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눅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를 봅니다. 그는 열심히 일한 결과 많은 소출을 걷어 드렸습니다. 이 일은 축복 받을 일이요 칭찬들을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길 계획만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식의 삶을 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2.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여기 나오는 사랑하지 말라고 한 말의 단어가 헬라어로 쓰여진 원어를 보면 '아카페하지 말라'는 말로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에는 사랑이란 말이 세 가지 의미로 나옵니다. 필리아는 친구간의 사랑을, 에로스는 이성간의 사랑을, 그리고 아카페는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나타날 때 사용됩니다. 독생자까지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 역시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경계한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릴 사랑을 세상에 쏟으면 '아버지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있을 것이냐'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과 견주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는 뜻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물질과 연결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은 내 것이니 내게 바치라고 하신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증거로 삼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신약 시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십일조를 구별해서 헌금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같은 생각은 더 무서운 죄악을 쌓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봉헌할 일이지 왜 자기가 사용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것은 내 것이니 내게 바치라고 한 것 하나 바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소유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입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의 정욕 때문에 그의 생활이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세상을 좇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17절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지나가는 것에 매달려 저기 인생을 걸면 그에게 무슨 소망 이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건 정욕 가운데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8)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2002-02-07 22:42:38 read : 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5 - 17)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세상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
(8)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 2002-02-07 22:42:38 read : 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일서 2 : 15 - 17)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세상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1.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듣고 우리의 생활에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은 그리스도인은 육신으로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를 전면 부정하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 도피주의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직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생계를 위해 장사도 하고 열심히 일도 해야 합니다. 옷도 입어야 하고 아이들 공부도 시켜야 하며 여유 있는 문화 생활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잘 먹고 잘 살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극심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 세상에 있는 것들이며 우리는 이것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많이 누리고 싶어하고 이런 것들로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그의 생활에 하나님이 없이 세상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의 생활에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하고 집을 짓는 일 등, 세상일에만 열중했을 뿐,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120년간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건만 자기 식구들 외에는 단 한 명도 귀를 기울이거나 경종으로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눅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를 봅니다. 그는 열심히 일한 결과 많은 소출을 걷어 드렸습니다. 이 일은 축복 받을 일이요 칭찬들을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길 계획만을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식의 삶을 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2.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여기 나오는 사랑하지 말라고 한 말의 단어가 헬라어로 쓰여진 원어를 보면 '아카페하지 말라'는 말로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에는 사랑이란 말이 세 가지 의미로 나옵니다. 필리아는 친구간의 사랑을, 에로스는 이성간의 사랑을, 그리고 아카페는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나타날 때 사용됩니다. 독생자까지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 역시 이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경계한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릴 사랑을 세상에 쏟으면 '아버지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있을 것이냐'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과 견주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는 뜻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물질과 연결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은 내 것이니 내게 바치라고 하신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생활을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증거로 삼으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신약 시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십일조를 구별해서 헌금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같은 생각은 더 무서운 죄악을 쌓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봉헌할 일이지 왜 자기가 사용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것은 내 것이니 내게 바치라고 한 것 하나 바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소유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입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의 정욕 때문에 그의 생활이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세상을 좇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 17절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지나가는 것에 매달려 저기 인생을 걸면 그에게 무슨 소망 이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건 정욕 가운데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롬1:1-7) 2002-08-13 12:52:47 read : 1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구약 성경은 제일 앞에 창세기가 있고 제일 뒤에 요한계시록이 있습니다. 천 지가 창조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인류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성경은 한 권 한 권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모두 중요합니다. 그래도 신구 약 성경 66권을 중요한 순서대로 놓으라고 하면 어떻게될까요? 아마도 제일 뒤에는 아가서가 있
1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1:1-7) 2002-08-13 12:52:47 read : 1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구약 성경은 제일 앞에 창세기가 있고 제일 뒤에 요한계시록이 있습니다. 천 지가 창조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인류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성경은 한 권 한 권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모두 중요합니다. 그래도 신구 약 성경 66권을 중요한 순서대로 놓으라고 하면 어떻게될까요? 아마도 제일 뒤에는 아가서가 있게 되기 쉬울 것입니다. 아가서는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시가 문학서인데 성도들을 향한 그리스 도의 참 사랑을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다는 점에서 정경(正經)이 되었습니다만 외국에는 아직도 아가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교파가 있고 또 열여덟 살 밑의 청소년들에게는 아가서를 읽지 못하게 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제일 앞에는 어떤 성경을 놓아야 할까요? 사람에 따라 답이 다를 수 있겠지만 로마서를 제일 앞에 놓아야합니다. 로마서 안에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별명들을 잠깐씩 살펴보면 로 마서가 얼마나 귀중한 성경인지를 알게 됩니다. 먼저 "기독교 교리의 등뼈"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에스겔서 37장, 마른 뼈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일어나는 순서를 보면 먼저 뼈들 이 들어맞아 서로 연결되고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가 들어갔습니다. 먼저 뼈들이 들어맞았었습니다. 이제 새벽기도회에서 로마서를 살피는 가운데 우리들의 신앙의 뼈가 튼튼해지 기 바랍니다. "성경이 반지라면 로마서는 반지에 물린 다이아몬드이다"라고 한 분도 있습니 다. "세계의 심장에 쏜 복음의 화살"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그 때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올해 사순절에 우리 모두가 이 복음의 화살을 정통으로 맞아야하겠습니다. 그래 서 나 중심의 나는 죽고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나로 거듭나야하겠습니다.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종'이란 말 은 '노예'라는 뜻인데 노예는 자기 주장이 없습니다. 주인에게 온전히 속해야 합 니다. 복음의 화살을 맞아 하나님의 종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로마서의 요절은 1장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을 하늘나라의 호적 갖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의'란 말은 '의인'(義認)이라는 말의 준말이기도 합니다. '의롭다 고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국민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고 호적에 올리고 성인이 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해 줍니다. 필요하면 여권도 발급해 줍니 다. 호적이 있어야 학교도 가고 취직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호적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 의 여권을 가지고 이 땅에 여행 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1장1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 정함을 입었으니" 먼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약 성경의 바울 서신이 열세 권인데 1장 1절에 빠짐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옵니다. 여러분, 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뒤에 있으면 이 사순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제일 앞에 갖다 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바울도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나도 없습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여러분, 어떻게 해서 교회에 나오시게 되었고 또 오늘 이 새벽 기도회에 나오셨 습니까? "예, 웬일인지 답답한 것이 있어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오늘은 설 연휴 중이 라 안 나오고 싶었지만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가 시작되는 날이어서 졸린 것을 이기고, 더 자고 싶은 것을 이기고 일어나서 나왔습니다" 라고 하실 것입니다.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대답은 "전등이 어떻게 켜졌습니까?" 하는 질 문에 대해 "스위치를 올리니까 불이 들어 왔지요"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발전소나 변전소의 존재는 아예 생각하지 않은 대답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교회에 나올 수 있었으며 이 새벽 기도회에 나올 수 있었 습니까? 하나님이 불러 주셔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복음'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는 적군이 침입해 들어와서 변경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겼는지, 졌는지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프간 전쟁이 그 때 벌어졌다면 미국 국민들은 미군이 이겼는지 이기지 못했는지 가슴을 졸이며 소 식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 때 전령이 달려와서 "우리가 이겼다!" 승전보를 전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기 뻐했겠습니까? 이 전령에게 상을 주었는데 그 상을 "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유앙 겔리온"의 뜻이 점점 변해서 그 전령이 전하는 소식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늘날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보다 훨씬 더 기쁜 것입니다. 대입 시험이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지금 합격 통지서가 온다면 그 것보다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복음은 그 것보다 더 기 쁜 것입니다. 입원환자들에게 "당신은 건강해졌으니 퇴원해도 좋습니다"하는 말보다 더 기쁜 것이고 감옥에 있는 사형수에게 '대통령께서 당신을 특별사면하셨습니다' 하는 소식보다 더 기쁜 것입니다. "당신은 죄 때문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 습니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로마서 1장1절을 읽으며 '바울이 이렇게 말했구나!'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하나의 참고서적에 그치고 맙니다. 오늘 나의 고백이 될 때 로마서는 생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 정함을 입었으니", 여기 '바울' 대신에 '나'를 넣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 함을 입었으니" '내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어? 내가 사도야?' 하기 쉬운데 사도는 '보내심을 받 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모두 해당되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 1절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바울은 로마서의 첫 부분인 1장7절을 축복의 인사로 끝내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 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 첫 날에 이 성전에 나온 성도들에게 저도 같은 말로 축 복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아 오늘 새벽기도회에 나온 모든 분 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1)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하나님 2002-02-07 21:50:03 read : 10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2서 1:1-5) 요한 2서는 사도 요한이 그의 노경에 요한 3서와 함께 에베소에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요한은 이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진리를 대적하는 자를 정죄하고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끊을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교회에 대한 사랑 요한은 1절에서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
1)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하나님 2002-02-07 21:50:03 read : 10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2서 1:1-5) 요한 2서는 사도 요한이 그의 노경에 요한 3서와 함께 에베소에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요한은 이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진리를 대적하는 자를 정죄하고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끊을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교회에 대한 사랑 요한은 1절에서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편지를 받는 대상자가 부녀와 그의 자녀라고 했는데 이같은 표현은 글자 그대로 한 여인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서신 전체에 나타난 내용이 한 공동체에 주는 교훈으로 볼 때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들에 대한 사랑을 진리와 연관시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자라면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참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진리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우리는 그 지체들이기 때문에 그 지체들인 우리는 교회와 성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은 요한의 축도인데 요한은 이 축도에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성부가 계획하시고 성자가 이루신 구원의 선물을 말합니다. 이 선물은 공로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하신 마음입니다. 죄인의 용서도 하나님의 은혜도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긍휼 하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긍휼을 거두시면 우리는 구원도 소망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히4: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평강을 기원했습니다. 평강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평안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속에 평강의 강물을 공급합니다. 이 강물이 우리의 심령에 넘칠 때, 우리의 마음에 참 평안이 깃들게 되고 생의 무한한 활력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얻으려는 평강은 그 평강을 이루게 하는 대상이 세상적입니다. 재물이라든가 권세라든지 명예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취해도 원하는 평강은 오지 않고 더 큰 욕심으로 인하여 불안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그의 생애를 주장하여 결국 그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2. 은혜와 긍휼과 평안은 누구에게 임하는가? 그러면 이같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누구에게 임하는 것입니까? 사도 요한은 3절 끝에서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만이 거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곳에는 은혜도 없고 긍휼 하심도 없으며 평강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도 은혜도 없고 긍휼도 없으며 평강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와 사랑이 있어야 그곳에 이런 것들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이런 은혜를 사모하고 긍휼을 받기를 원하며 마음의 평강을 원해도 그런 사람의 마음이나 인격 안에 머물 곳이 없기 때문에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오신 분을 진리라고 부릅니다. 그 분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시면 그 말씀 안에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깃들이어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언제나 사랑과 진리 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도의적인 감성적인 이성적인 육정적인 사랑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온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만 사랑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과 진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 우리에게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하나님이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의 생애를 은혜와 긍휼과 평강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충만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여러분의 생애에 충만하여 여러분의 인생을 아름답게 인도하 실 것입니다.
1- 에배소서강해>엡1:1-2 2010-12-27 15:05:09 read : 7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교회란 무엇인가? 제가 주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 사역에 헌신한지 금년으로 4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만일 이 40년의 세월 중 가장 의미 있게 기억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저는 서슴없이 그중의 하나가 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워싱톤 지구촌 교회에서 사역하던 당시 1986년만 해도 소위 미주내 유학생들의
1- 에배소서강해>엡1:1-2 2010-12-27 15:05:09 read : 7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교회란 무엇인가? 제가 주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 사역에 헌신한지 금년으로 40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만일 이 40년의 세월 중 가장 의미 있게 기억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저는 서슴없이 그중의 하나가 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워싱톤 지구촌 교회에서 사역하던 당시 1986년만 해도 소위 미주내 유학생들의 유학생 촌에는 교회들이 별로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더라도 그들의 영적 필요를 공급해 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다가 기도 중에 일년에 한번이라도 그들에게 영적 축제를 제공하여 그들에게 전도도 하고 믿는 이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학문과 신앙의 통합의 비전을 제공하여 그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게 한다면 굉장한 영적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워싱톤 지구촌 교회의 전적인 지원으로 시작한 사역이 바로 KOSTA(Korean Students in America)사역이었습니다. 이 사역이 이제는 전 세계 13개국에서 해마다 1만 명이상의 유학생들과 디아스포라 한인 청년들이 참여하는 사역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KOSTA의 의미도 이제는 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전까지 이 코스타 25년을 기념하는 “복음/ 조국/ 땅끝”을 주제로 하는 축제(시카고 휘튼대학)에 강사로 섬기고 돌아왔습니다. 25년은 긴 시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25년 동안에 코스타 시작 초기 모이기만 하면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안타깝게 기도하던 조국은 민주화되었고, 참으로 가난에 울어야 했던 조국은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하는 나라가 되었고, 복음을 받기만 하던 피선교국 한국은 전 세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선교 한국이 되었습니다. 미주 코스타는 지금은 대학원생 이상으로 모이는 모임과 대학생들의 모임으로 나누어 모이고 있는데 본래 미주 코스타 초기에는 주로 대학원생과 많은 연구원생(포스닥)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이번 강사중 한분이 전 외무장관 윤영관 님이셨는데 그는 제1회 코스타 모임에 참여하여 도전을 받고 기독교인으로 조국을 향한 헌신의 비전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을 통해 민족의 평화 통일 연구에 정진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카이스트의 장평훈 교수, 연변 과기대의 정진호 교수, 의 저자로 몽골 국제대학을 섬기는 이용규 교수등 수많은 기독교 지성들이 모두 코스타의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바울 사도에게 당신의 생애를 통해 가장 의미 있는 사역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 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두란도 사역이 무엇이었습니까? 행전 19:8-10을 먼저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달동안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두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처음 회당에서 3개월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2년여 모두 약 3년의 사역(제3차 선교 여행 기간, AD 53-57)을 펼쳤던 곳이 바로 에베소라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중심도시였고 사역의 결과는 행전19장의 증언처럼 온 아시아에 복음적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에베소 사역이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잠시 돌아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체포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최종적인 재판을 받기 위해 가아사랴 항구에서 압송되어 배편으로 로마로 오게 됩니다. AD60년대 초기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었지만 바울의 관심은 자신의 안위나 편안함이 아닌 에베소 교회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회가 굳게 서야 아시아를 변화시키는 희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의 핵심은 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때 교회는 진정한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어린 교회 에베소 교회를 향해 교회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교회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에베소서의 서론인 1-2절에서 벌써부터 교회의 본질을 규명하는 정의를 만나게 됩니다. *교회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1.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두 가지 별명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성도”이며, 동시에 “신실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도들과 신실한 자들의 공동체인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성도와 신실한 자라는 표현은 흔히 어떤 사람들의 도덕적 특성을 묘사하는 단어로 오해되기 쉬운 단어들입니다. ‘성도’는 본래 영어로는 saints ‘성자’로도 번역되는 단어인데 본래 원어인 희랍어의 뜻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하신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구별한 사람들, 영어로 다시 풀어 말하면 ‘set apart’란 의미입니다. 제가 가진 몇 벌의 옷 중에서 오늘 저는 이 입고 있는 옷을 구별하여(선택하여) 오늘 입고 나왔습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 모두는 이런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실 목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 자신이 1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것을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됨의 의미입니다. ‘성도’가 이 땅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해 주신 사역을 강조하는 단어라면, ‘신실한 자들’이란 단어는 인간 편에서 그 하나님을 믿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우리말이나 한문에서 ‘신실’을 말할 때 이 단어의 핵심은 ‘믿을 신(信)’입니다.(신실한 자의 반대는 거꾸로 실신[失信]한 자, 믿음을 상실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선택은 우리의 믿음으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신실한 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본래 희랍어에서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단어로 표기됩니다. 곧 <-부터, from>이란 의미의 단어와 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에서 나와 하나님께 속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성도’와 ‘신실한 자’의 의미를 추가한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믿는 백성들의 공동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을 더 단순하고 쉽게 말하면 라고 할 것입니다. 2.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바울 사도는 2절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인사에 사용된 두 개의 단어에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하나가 은혜이고 또 하나가 평강입니다. 본래 은혜(karis)라는 단어는 희랍인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사모하던 가치의 단어이었고 그래서 희랍인들의 인사에 사용되던 단어이었습니다. 반면 평강(shalom)은 히브리인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사모하던 가치의 단어로서 그들의 인사에 사용되던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에는 희랍인들과 히브리인들이 갈망하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사랑이나 호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세상은 이런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조건과 흥정으로 경영되기 때문에 이런 조건 없는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장사와 흥정에 밝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쉽게 수용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구약은 수많은 계약을 보여 줍니다. 구약은 계약의 책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런 계약은 조건적입니다. 아브람과의 계약(창12:3-너를 축복하면 복을 내리고 저주하면 저주를 내리고)도 그렇고, 시내 산의 계약(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고)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의 은혜는 무조건적입니다. 이것이 엡2:8에서 복음으로 선포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선물에 조건이 따르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조건 없는 구원의 선물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한 조건 없이 이 사랑을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은혜위에 세워진 은혜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의 변질은 이런 은혜의 감격을 상실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3. 교회는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세상은 진정한 은혜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평화도 알지 못합니다. 참된 은혜와 평화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평화를 말하고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흥정해 왔지만 평화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인류의 인류 평화를 향한 노력은 박수 받을 만한 것이고 고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위적인 추구로 평화가 이 땅에 장착하리라는 허상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왜 인류 평화의 노력이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일까요? 영국 왕실의 주치의였고 우리 시대의 탁월한 강해 설교가인 말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말을 빌리자면 평화를 상실한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것은 성경 외에서는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성경은 인류가 애당초 평화를 상실한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불화하게 했고 인간과 인간사이를 낸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는 순간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고 그를 두려워 하기 시작해했으며 그의 임재를 피해 도망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비난하고 다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습니까? 엡2:13-14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발견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는지라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6을 보십시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해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비로소 화해하는 평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이 중보자 예수를 받아드린 사람들은 이 복음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나누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의 변질은 이 복음을 외면하고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교회 중에는 교인들의 친교를 증진하고 주변 불신 이웃들도 교회에 오게 하고 교회 수입을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빙고를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 시도가 성공하겠습니까? 될 리가 없지요. 그러나 아직도 순수한 십자가의 원색적인 복음이 선포되고 뜨거운 말씀의 교제가 있는 교회들에는 온갖 사람들이 와서 교회의 영적 사귐 안에서 녹아지고 하나 되는 부흥의 열매가 맺고 있습니다. 제가 만나는 언론인들 혹은 뜻있는 목회 동역자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의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도대체 건강한 교회, 이상적인 교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저는 한마디로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참된 은혜가 필요하십니까? 참된 평화가 필요하십니까? 그러면 우리 교회로 오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계속 그런 교회로 머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