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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신학교 졸업하기/ 욥42:1-6,10-17/ 2001-08-21
고난 신학교 졸업하기 욥42:1-6,10-17 욥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어려운 고난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습니다. 욥은 잘 통과하였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고난신학교를 졸업하여 신앙의 차원을 달리하고 새로운 축복을 열어 길이 누리며 장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듬으시고 새롭게 하실 때는 고난이란 신학교를 통과하게 하십니다.다른 길은 없습니다. 고난신학교를 잘 졸업하여야 한다는 결론부터 말씀드리고 고난에 대한 주제로 은혜받고자 합니다. 1. 고난이 무조건 저주요 불행은 아닙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축복이고 고난은 저주이며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고난이 와도 몹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축복을 받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간증들을 들어보면 다 지난 날의 고난을 얘기합니다. 고난을 통해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무조건 저주가 아니며, 불행은 아닙니다. 2.고난이 다 죄값은 아닙니다. 모든 고난이 다 죄값으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작은 어려움이 돠도 곧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신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은 아닐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고난이 와도 금방 힘을 잃고 낙심합니다. 죄로 인해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면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영적 유익을 얻기 어렵습니다. 고난이 무조건 죄 때문에 오는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은 더욱 많습니다.(시34:19) 3.나 혼자만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 고난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해보면 나만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왜 이럴까, 참으로 나는 복이 없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들어 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다윗은 사울 때문에 많은 고통에 시달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도 어두움도..환난도 창조하십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2장에는 죄로 인해 매를 맞게 되는 고난과,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과, 선을 행함으로 받게 되는 고난이 있다고 했습니다(벧전 2:19-20).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겠습니까? 너희를 향한 생각은 내가 안다고 하셨습니다.(렘29:11-14) 하나님만이 아실 일입니다. 고난에 유익이 많습니다. 1. 고난으로 경건해집니다. 죄의 뿌리는 너무나 깊어서 뽑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겪으면 죄를 끊어내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4:1-2절을 보면 [육체의 고난을 받는 자가 죄를 그쳤음이여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은 경건생활에 유익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줍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회개하며 죄를 끊어내게 됩니다. 특별히 기도하게 됩니다.거룩하게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제마음대로 살았는데, 고난을 통하여 이제는 말씀대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2. 고난중에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출애굽기2장에..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하나님이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고난 중의 기도는 깊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고역에 시달리며 탄식하며 기도하는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간절해 찾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도 대부분은 병든 사람, 문제가 많은 사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환난도 없고, 아무런 문제도 없는 사람들은 좀처럼 예수님 앞으로 나오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힘들고 문제가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기가 쉽습니다. 3. 고난중에 은혜를 받습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나...제가 돌이켜 보면 그래도 몸부림치고 고생하는 중에 설교가 깊어지고 그래도 그릇이 좀 다듬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난 때문에 생각이 깊어지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내 죄와 허물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도 생깁니다. 나의 할 일이 무엇인지,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암을 고치는 것보다 새사람 되는 것이 더 큰 기적입니다. 믿음이 강해지고 온전해집니다. 성품이 변화되고 가치관의 변화가 옵니다. 행복관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물질적이고 세상적이었는데 달라집니다. 예수믿고 사는 것이 행복하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들이 충성스럽고 온전한 성도가 되게 합니다. 4.고난중에 성숙한 인격이 됩니다. 흔히 어른들은 좀 덜 된 사람보고 고생을 좀 해야겠다. 아직 고생을 안해봐서 그렇다고 합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사람을 채용할 때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너무 빨리 출세한 사람,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채용을 꺼렸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너무 쉽게 그리고 빨리 출세한 사람은 독선적이기 쉽습니다.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남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맨몸으로 달릴 때보다 등에 적당한 짐을 실을 때 더욱 빨리 달린다고 합니다. 사람도 적당한 시련을 만날 때 도전함으로 인생의 가속이 붙게되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고치 속에서 나올 때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몸부림을 치는지 차마 애처로워서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이 보고 있다가 애처로워 고치 구멍을 가위로 좀 찢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 쉽게 빠져 나온 그 애벌레의 나방은 날개를 단 뒤에도 날 수 없는 나비가 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힘들게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나방, 고난의 과정을 겪은 나방만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하찮은 벌레 한 마리에게도 그렇게 섭리하시 이유와 목적이 있는데 하물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이 올 때 우연히 오는 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좋으신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에 고난을 주신 줄 믿습니다. 이와같이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고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고난의 신학교에서 어떻게 수업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좋은 학점으로 졸업해야 합니다. 낙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제는 다시 수강해야 합니다. 일평생 신학교만 다니다가 그렇게 인생을 마쳐서 되겠습니까?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그 고난속에서 적극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어려움이 오면 반응하게 되어있습니다. 요즘 황토사우나라고 있지요, 계란이 익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계란은 익혀도 사람은 익히지 않습니다. 사람은 들어가면 즉시 반응합니다. 땀을 줄줄줄 흘리어 체온을 조절합니다. 체온조절이 안되면 익혀 죽는겁니다. 천하태평으로 살면 안됩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몸부림치라고고난이 왔는데 천하태평으로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더 큰 고난이 와야 되겠습니까? 고난때에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몸부림쳐야 합니다. 바울은 육체를 찌르는 가시라는 고난 때문에 특별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귀한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가시가 방해되는 것인줄 알았는데 응답을 받고 보니 그것 때문에 약해지고 겸손해지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되고 그래서 주님의 큰 능력으로 사역할 수 있게되는 비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약함을 자랑하고 주만 의지하면서 능력있게 사역하게 되었으니 고난신학교를 최우수상을 받고 졸업한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신학교를 잘 수학하여 깊고 큰 은혜의 체험으로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욥은 완벽을 추구하는 신앙에서 의존하는 신앙, 입을 막는 신앙으로 졸업하고 여러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직 그릇이 안될 때는 고생하고 있는것이 축복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목사님들을 뵙는 중에 강력한 영적 파워를 가진 분, 어디서 저런 영적 파워가 생겼을까 생각되는 분이 두분입니다. 저는 유심히 살펴 보았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한 것입니다. 한분 목사님은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하다보니 하루에 세번씩 기도하고 그래도 모자라 때때로 철야기도, 금식기도, 산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제게 고난이 있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 고난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고난때문에 매달리다 보니 은혜를 많이 받아 강력한 영적 능력의 목사님이 된 것이고 큰큰 목회를 하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중에 있습니까? 과정 중에 있습니까? 졸업을 했습니까? 일평생 고생만 하면서 세월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고난은 일평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너무나 짧습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이 지나가는 한 과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좋은 학점 받고 졸업하여 새로운 축복을 열고 주님과 하나님의 교회에 좋은 일꾼으로 쓰임받는 생애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훔의 신학/ 나1:1-8/ 이필재 목사/ 2008-11-05
나훔의 신학 나1:1-8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신학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므로 그렇게 많은 교파가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절대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강조점을 두다보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이지 잘못되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각자도 조금씩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시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 자체에도 이러한 문제가 확실히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이런 것이 아주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시는 사명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제목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니느웨를 보면서 오늘 말씀 나훔의 신학은 정반대의 뜻이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어떤 것이 더 훌륭하냐를 따질 필요 없이 하나님 사역의 속성이 때로는 무자비성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무한한 자비성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니느웨에 대한 저주 신학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표현이 때로는 잔인스럽고 어떤 때는 수치스럽고 또 어떤 때는 고상한 시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니느웨 성은 저주받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피의 도성이 될 것이다. 강포와 늑탈이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너희 도시는 살육 당한 시체가 무더기를 이루게 될 것이며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시체에 걸려서 넘어지게 될 것이며 너희는 떨리는 무릎이 서로 부딪칠 것이며 허리가 아프고 공허하고 황무하며 낮이 빛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매우 수치스러운 표현으로 여인에 비유해서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네 치마를 걷어쳐 내 얼굴에 이르게 하고 내 벌거벗은 것을 내 열국에 보이며 내 부끄러운 것을 열방에 보일 것이요” 수치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너는 능욕거리가 되고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사실 니느웨는 앗시리아의 수도입니다.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강국으로서 BC 721년에 이 나라에 의해 유대 나라도 함락되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그렇게 강함을 자랑하느냐? 메뚜기 같이 될 것이다. 다 망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저주로 나타나고 있는가? 또 요나서의 신학과 나훔서의 신학이 이렇게 대조적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문제인가? 같은 니느웨 대상을 놓고 요나서는 구원을 선포하고 나훔은 저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훔 신학을 이해하려면 니느웨에 대한 최초의 성경 증언부터 찾아야 합니다. 창세기 10장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10장에 보면 니므롯이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 사람이라곤 노아의 세 아들과 그 가족들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 함의 후손으로 구스라는 아들이 탄생했고 구스의 아들이 니므롯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니므롯은 당대의 영웅이라고 성경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니므롯 장군이 니느웨 성을 만든 것입니다. 창세기 10장 10절에 보면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레센을 건축하였으며”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창세기에서부터 함의 후손들이 건설한 고대 도시이며 그것이 계속 발전하여서 강대국을 이루게 됨으로서 셈의 후손들에게 큰 고통을 준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노아가 술이 취해서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 길바닥에 노인이 술이 취해 벌거벗고 드러누워 있으니까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세 아들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가려 드리는 일을 했고 함은 핀잔을 했습니다. “노인네가 주책없게 저렇게 술을 퍼먹고 길바닥에 벌거벗다니 저게 뭐냐?” 그래서 노아로부터 이 함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 창세기 9장입니다. 나훔 예언자는 그 옛날을 기억한 것입니다. “너희 니느웨가 아무리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노아가 내린 저주가 창세기 9장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너희가 다 저주받을 일만 하고 있다. 더군다나 셈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이 있고 다윗이 있고 예수님도 그 혈통 가운데 있는데, 태초부터 하나님의 약속이 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결정적으로 괴롭히는 니느웨 너희는 마침내 저주를 받아 참혹한 심판의 현장이 될 것이다.”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백성들을 오래 전에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시려고 선지자 하나를 보냈는데 요나라는 사람입니다. 요나가 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에서 선포한지 100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당시부터 지금까지 100년의 역사 속에서 니느웨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지금 니느웨 거리에 예배당이 가득하게 건축되어져 있어야 하고 니느웨 군중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요나가 와서 구원을 선포한지 100년이 지난 지금은 옛날과 똑같아졌고, 아무 죄도 없는 셈의 후손들을 끝없이 와서 괴롭히고 마침내는 자유와 나라까지 다 빼앗아 버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들을 핍박하는 너희는 망한다. 망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을 보세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온지 123년입니다. 그런 짧은 역사에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를 보세요. 이 조그만 땅에 5만개의 교회가 서 있잖아요? 주일날이면 저마다 교회 가는 버스 때문에 거리가 혼잡할 정도로 때를 이루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이제 조금 있으면 여름 동안 선교팀들이 외국으로 나갈 터인데 교회가 선교 가는 사람들을 하도 많이 보내서 비행기 예약이 안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지 “요나가 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한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계속해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에 몸을 바치고 있는 니느웨여! 너희는 참다못해 이제 하나님의 심판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다.” 그 다음에 나훔서에서는 특별한 특징이 하나 나타나는데 2장 2절에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지금 하나님께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쓰임을 받는 사역자 민족, 우리는 지금은 핍박받고 멸망당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쓰시는 사역자 백성을 회복하여 주셔서 시온의 영광이 다시 빛나게 해 주실 것이다.” 이런 대조적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선택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와 영광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된 구원 사역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게 하는 너희들은 저주를 받아서 멸망 받을 것이다.” 이것이 나훔서의 신학입니다. 하나님 구원의 속성을 세 가지로 나눕니다. 창조와 구원과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잘못된 것을 구원하시며 잘못 가는 현장을 심판하십니다. 언제나 그렇게 똑같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서론적으로 말씀드린 부분을 구체화하면 이 신학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선택 백성을 괴롭히면 하나님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신다는 부분을 성경에 증거로 우리가 발표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나훔 예언자는 니느웨의 처참한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수고하고 있는 그러한 백성을 고통스럽게 한 죗값은 너희들의 멸망이다.” 그러면 그러한 신학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것도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사역자를 선택하시는데 역사 신학에서는 최초의 부름을 받은 사람을 아브라함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 성경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 위에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 무시해 버립니다. 아브라함부터 계산합니다. 그래서 그가 열국의 아비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면서 최초의 사역자 약속을 합니다.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왜 가라고 하시는 겁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네게 복을 줄 터인데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선포해 주셨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만 복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세계를 다니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복을 싫어하거나 복을 모르는 백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온 세계는 복을 중심으로 문화가 역사화되었습니다. 보세요. “복(福)”자를 써서 복이 들어오기를 바라며 대문에 붙이고 하는 것은 중국에서 왔습니다. 문화는 복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중국 남자들은 머리를 안 감아요, 그래서 좀 지저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왜 안 감느냐? 머리 감으면 복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복 때문에 안 감는 겁니다. 제가 다녀본 나라의 국민들은 복을 모르거나 싫어하는 민족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나라나 고유문화가 있는데 복을 중심으로 역사화 되었습니다. 벨기에 브뤼셀 광장에 가면 광장 한 모퉁이에 구리로 만든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서있지 않고 예수님이 편안히 누워계신 모습으로 동상을 만들어 놨습니다. 누가 소문을 냈는지 모르겠는데 거기 가서 예수님의 배를 만지면 복을 받는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브뤼셀에 오는 사람들은 거기부터 가는 겁니다. 구리가 쇳덩어리 아닙니까? 예수님의 배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쓰다듬었는지 배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쇠가 닳아서 그런 겁니다. 그렇게 많이 만졌습니다. 사람들이 복의 개념으로 사는 겁니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하나님이 인간 삶의 기본적 요소를 복으로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것이 인간 삶의 시작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복 주심을 따라서 인간은 살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뭡니까? 다 복을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자 하면 피해 도망가도 복이 따라오고 하나님이 복을 안주고 가면 내가 복을 따라가도 복이 도망가 버립니다.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거기다가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하나 더 내려주십니다 . “네가 나의 복을 가지고 온 세상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이 구원을 선포해야 될 터인데 만약 네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너를 축복하는 자가 있다면 네가 그 사람을 복을 주겠다. 만약 너를 저주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사람을 저주하리라.” 그러고 나서 “땅의 모든 족속은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나훔 신학은 거기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너희가 때려 부셨다.” 여러분! 역사에 교회를 어렵게 하는 문화가 생기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북한을 보세요. 6·25동란 이전에 2300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지금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 봉수 교회, 칠골 교회는 전시용입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도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 둘이 그 나라에 있는 것이지 자발적인 신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까? 국가가 정책적으로 세운 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교회를 어렵게 하면 굶어 죽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래왔습니다. “너를 축복하면 내가 축복해 줄 거야. 너를 저주하면 그 땅은 내가 저주할 거야.”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험악한 고생이 예상되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선언하십니다. “너희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나를 영접하면 곧 아버지를 영접함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힘을 줘서 보내는데 “만약 어느 동네에서 너희를 박대하면 그 마을에서 발의 먼지까지 떨어버리고 나오라.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 국가에서 기독교를 어렵게 한다든지 교회를 어렵게 하는 문화가 생기면 그 나라는 큰일 납니다. 역사가 다 증명하잖아요? “만약 내 이름으로 이 소자 중에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그는 상을 잃지 아니할 것이다. 복이 나에게로부터 올 것이다.” 예수의 신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을 예수님도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몇 가지 사건을 기억합니다.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렙이라고 하는 어느 마을에 가난한 과부 한명이 사는데 그 집을 어떻게 엘리야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도 먹을 식량이 한 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그 집 사람에게 한 끼의 식량을 공급받고 나서 성경에 약속한 그는 평생 동안 먹을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훔 신학은 바로 이런 것을 보는 겁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막을 수 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훔 신학이 저주 신학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너무 지독한 성격 때문에 많은 나라 민족들에게 좋지 않은 평가가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국에서 오래 살아왔지만 미국의 정책은 변하지를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수없이 많은 혜택을 줍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의 성취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주고 그 땅에서 유태인이 가장 우수한 성취를 하는데 도움을 주고 미국이 온 세계에 그렇게 많은 일에 참견을 하고 있는데 가장 열심히 돕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미국 대통령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는 것을 한마디라도 들어보셨습니까? 미국이 무상원조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사회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영적인 뜻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나훔이 바라보는 신학적 초점은 고통 받은 선민의 위로와 영광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의 뜻 자체가 ‘위로하다, 연민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이 있는 백성은 어떠한 경우에 고난이 와도 시온의 아침이 다시 찾아오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으로 조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가 예언되어져 있고 히브리 민족은 그들의 역사에서 세 가지를 밝혀냅니다. 회복의 하나님이 어떤 역사를 우리에게 주셨는가? 하나는 출애굽 사건입니다. 노예로부터의 해방! 그래서 다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회복시키신다.’ 두 번째는 70년 바벨론 식민지로부터의 귀환! 자유함을 얻었다는 겁니다. 세 번째 역사는 20세기 시오니즘 운동! 흩어진 유대 백성들이 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1948년에 이스라엘은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하나님은 회복시키십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오늘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도 개인적으로 하나님 백성의 회복과 영광을 성경에서 수없이 찾아보는데 야곱에게는 이제 쫓겨서 거지가 되어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너를 회복시킬 것이니 잠시 가서 고생하다가 이 땅에 돌아오라.” 탕자 비유의 의미가 뭡니까? 아버지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회복되었다.” 돼지가 먹는 쥐염열매로 배를 채우던 거지가 부잣집 아들로 다시 회복되는 영광!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소를 끌어다 잡아먹고 즐기자. 내 아들은 회복되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백성! 하나님은 회복시키십니다. “민족을 회복시키시고 개인을 회복시키시고 잠시 고난에 빠졌지만 시온의 영광이 다시 찾아오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 구원의 백성으로 쓰임을 받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저 니느웨와 같은 곳은 결국 멸망의 역사를 가져올 것이다.” 수술을 받았는데 의사의 진단이 갸우뚱합니다. “허리가 결정적으로 고장이 나서 잘못하면 평생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환자는 얼마나 낙심되겠습니까? ‘이 젊은 나이에 이게 뭐야?’ “그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90퍼센트 이상입니다.” “아! 이걸 어떡하나?” 침대에 누워서 ‘내 인생은 이게 뭔가? 이제 끝이다. 평생 걷지 못한다니….’ 성가대원들과 같이 심방을 갔습니다. ‘이 환자에게 들려줄 적당한 노래가 뭔가?’ “목사님, 일어나 걸어라! 그것을 불러요.” “아, 그럽시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두 번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지금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간증을 합니다. “목사님,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만 해도 축복입니다.”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 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심방 가셔서 희망을 주는 찬송을 들려주시고 설교를 하고 기도도 하세요. 영적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회복된다.” 나훔은 지금 이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백성은 멸망의 역사가 찾아올 것이다.”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북한은 교회를 다 없애버리고 날마다 굶어죽는 이야기만 들립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데도 영적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세 번째, 나훔서의 신학의 초점은 하나님의 자비성은 무자비성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훔 예언자는 하나의 국수주의 성격의 예언자가 아니냐고 할 만큼 니느웨에게 하나님의 무자비성을 선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설교는 어땠는가? 마찬가지였습니다. “화 있을진저!” 똑같습니다. 신앙을 역사화했다는 것이 이 성경의 독특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고난은 마귀의 역사라는 겁니다. 마귀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하나님의 무자비성 성격의 심판 역사가 끝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안에서 최고로 발달하고 강대국으로 자랑했던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심판으로 연결이 되어 마침내 그들의 역사는 조롱의 만가를 들으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을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까지 내가 복을 줄 것이며 너를 저주하면 내가 그 사람을 저주하겠다.” 우리가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지만 선교사가 하나님의 복을 들고 들어가잖아요? 영접하면 그 나라가 복 받습니다. “박대하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의 결론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나 하나님의 사람을 축복하는 길이요, 또 하나는 나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하늘의 진리의 음성을 저희들에게 들려주셨으므로 나훔 신학이 밝혀주는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은 어떤 것인가 영적으로 저희들이 잘 깨닫고 지켜서 복의 근원이 되고 아버지의 축복의 역사가 내 손에 머무는 은혜를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주간도 이러한 믿음의 기초를 가지고 약속된 모든 사역을 승리할 수 있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잠4:1-19/신학교주일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잠4:1-19 오늘은 고려 신학교 주일이다. 고려 신학교 주일은 우리 고려 교단의 전 교회들이 교단 신학교인 고려 신학교를 위하여 지키는 신학교 주일이다. 이런 신학교 주일을 통하여 우리의 신학교인 고려 신학교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기도를 모으기 위함이다.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측 총회는 성도간의 불신법정 고소 문제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측 총회와 분리된 것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더라도(고전6:7).... 어찌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송사하느냐(고전6:6)....는 말씀을 버리고 고신측 총회는 재단 문제로 불신법정에 고소를 했고.... 말씀대로 살자....는 분들은 고신측 총회와 분리하게 된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고려파 본래의 이념을 이어가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이런 정신으로 고려측 총회는 조직이 되고, 고려 신학교가 개교를 하게 된 것이다. 어느 교단, 어느 신학교 못지 않게 순수한 이념으로... 숭고한 이념을 가진 교단이요, 신학교이다. 그 이념대로 살아가느냐....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의 부분이다. 신앙과 행위가 하나 되지 못한다면.... 결국 헛 구호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신앙의 숭고한 삶의 일환으로.... 우리 교단의 모든 교회가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하여 신학교를 도움으로.... 우리 고려 신학교는 수업료가 없고, 기숙사비가 없는 순수한 목회자 양성 기관으로 자리 매김을 해가고 있다. 본 교단 지교회에 속한 자로서.... 복음 전파의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에 입문하게 되면.... 다른 신학교와는 달리.... 돈 걱정 없이 선지 동산에서 수련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의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지교회가 나름대로 \\\\\\\"고려 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후원금을 부담하기도, 특별 헌금을 하기도, 오늘 같이 고려 신학교 주일을 지키기도.... 하여 신학교를 돕고 있는 것이다. 교단 신학교와 교단 총회와 지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 되어 함께 가는 이 길을 통하여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고.... 땅끝까지 말씀이 전파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전도자 솔로몬의 잠언으로(잠1:1), 솔로몬 왕이 아들들을 불러 놓고 훈계를 들려주는 말씀이다. 본문 3절/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었으며\\\\\\\".... 지금은 아버지의 위치에서 훈계를 하지만, 솔로몬 왕 자신도 아버지 다윗 왕의 아들로 아버지의 훈계를 받았다는 말씀이다. 그 아버지의 훈계를 지킨 결과 오늘에 와 있다는 것이다. 전무후무한 지혜자로, 이스라엘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솔로몬 왕은 자신의 아들들을 불러놓고, 우리 인생 앞에 펼쳐진 여러 생의 길들 중에서 바른 길을, 바로 선택하라는 훈계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길이 있고, 의인의 길이 있고, 악인의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밖에도 잠언에 나타난 길만해도 엄청납니다. 결론 부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돈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선택하라」는 말씀을 통하여.... 많은 재물보다는 명예를 선택해야 하고, 그 명예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선택해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인생들 앞에 펼쳐진 여러 삶의 길들 중에서, 우리 성도들이 선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 또한 우리 목회자들이 선택해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살펴보고져 합니다. 1.지혜로운 길이 있다. 본문 11절/ 내가 지혜로운 길로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첩경으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내가 지혜로운 길로\\\\\\\".... 여기서 \\\\\\\"지혜\\\\\\\"는.... \\\\\\\"든든함\\\\\\\"을 뜻하는 말로 사물의 본질을 밝히는 지식이나, 일반적으로 선한 일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이는 곧 총명이요, 지식이요, 여러 가지 재주이다(출31:3).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바른 삶에 대한 지식으로 종교적, 윤리적 총명을 가리킨다. \\\\\\\"내가 지혜로운 길로\\\\\\\"....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전도자 솔로몬은(잠1:1)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지혜를 받은 사람이다(왕상3:12).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길을 말하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지혜를 가진 솔로몬 왕이 말씀하는 지혜로운 길은.... 우리 인생 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길들 중에서 곧고 올바른 길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의의 길이요(잠8:20), 정직한 길이요(잠2:13), 선한 길이요(잠2:9), 바른 길이라고 했다(잠10:9). 이 길을 가는 자.... 장수하리라고 했다. 본문 1절/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아비의 훈계\\\\\\\".... 솔로몬 왕은 아들들을 자기 앞에 불러놓고 아비의 훈계를 받으라고 가르친다. 이 훈계는 자신도 아버지인 다윗 왕에게서 듣고 배운 것이라고 했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고 했다(본문3절). 본문 2절/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여기의 \\\\\\\"도리\\\\\\\"는.... \\\\\\\"받은 것\\\\\\\"을 뜻하며, 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배운 교훈을 말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다(본문4절). 그래서 \\\\\\\"아비의 훈계\\\\\\\"는.... 대를 이어 전해져 오는 유대인의 교훈이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비는 가정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곧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할 책임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자이다.(엡6:4) 그러므로 아비의 훈계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러므로 아비의 훈계를.... 네 마음에 두라고 했다. 아비의 명령을 잘 지키라고 했다. 여기에 장수의 비결이 있다고 했다(본문10절). 바로 제5계명의 축복이다(엡6:3). 잠언 8:33절/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아비의 훈계를 들음으로 지혜를 얻는다고 했다. 지혜는 배워서 익히는 지식과는 좀 다르다. 부모의 삶을 바라보고, 듣고, 함께 체험하는 고된 훈련의 삶을 통하여 얻어지는 살아 있는 지식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우리 인생이 한 평생 살아가는 길에.... 우리 앞에는 수많은 길들이 펼쳐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도 있고, 소수의 무리들이 찾는 좁은 길도 있습니다. 의로운 길도 있고, 악한 길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길도 있고, 어리석은 길도 있습니다.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지혜를 가진 솔로몬 왕은 그 아들들에게 훈계합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3:15)」.... 한마디로 \\\\\\\"지혜가 최고야!\\\\\\\"라는 말씀입니다. 그 지혜를 가지면.... 그 지혜가 너를 보호하리라고 했습니다(본문6절). 너를 높이리라고 했습니다(본문8절).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 머리에 씌워 주리라고 했습니다(본문9절). 정직한 첩경으로 너를 인도하며, 실족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본문12절). 2.악인의 길이 있다. 본문 14절/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길이요(잠15:9), 여호와께서 인정치 아니하시는 길이요(시1:6), 어두운 길이요(본문19절), 망하는 길이다(시1:6). 그래서 멸망하지 하지 아니하려면 악인의 길을 떠나야 한다. 이사야 59:7절/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악인은 악을 즐긴다. 그래서, 악을 행치 아니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의 행악은 계획적으로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고, 남을 해치고, 피를 흘리기를 즐긴다. 요즈음 문제가 되는 폭력물.... 이런 폭력물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 자체가 그만큼 사람을 해치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자꾸자꾸 늘어간다는 것이다. 잠언 9:17절/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도적질한 물이 달고\\\\\\\".... 악을 즐기는 자들의 삶의 모습이다. 도적질하여 몰래 먹는 물이 달고, 도적질하여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이 있다고 한다. 이런 악을 즐기는 자는 돈이 궁해서 도적질을 하는 게 아니다. 바로 악을 즐기는 것이다. 본문 19절/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여기의 \\\\\\\"어두움\\\\\\\"은.... 한밤중과 같은 \\\\\\\"깊은 어두움\\\\\\\"을 뜻하며, 햇빛이 없는 어두움이 아니라 생명의 빛이 되신 예수님이 없는 어두운 마음이다(요1:4). 곧 무지와 불신과 죄악을 상징하고 있다. 깊은 밤 곧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말씀하고 있다(창6:5) \\\\\\\"그가 거쳐 넘어져도\\\\\\\".... 악인을 악을 즐기며, 무죄한 피를 흘리려 어두움 속을 빨리 달려가다가 실족하여(본문12) 넘어지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왜? 넘어졌는지.... 이를 알지 못한다. 넘어짐.... 곧 실족이요(본문12절), 패망이요(겔7:25), 파멸이다(신28:20).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악인의 길을 걷는 자는 죄악을 즐기며, 그 죄악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롬3:11). 이들은 죄악이 관영한 어두움의 길을 달려가다가.... 걸려 넘어져도 무엇에 걸려 넘어졌는지, 패망을 당하여도 왜? 패망을 당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값으로 멸망을 당하나 왜? 무엇 때문에 멸망을 당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내 한 평생 살아가며 수많은 일들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수많은 일들은 내 앞에 펼쳐진 숱한 삶의 길과는 다릅니다. 솔로몬 왕이 그 아들들에게 훈계하는 것은 삶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요, 삶의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악인의 길을 좇아가는 자들은.... 불의의 떡을 먹으며 맛이 더 있다고 합니다. 강포의 술을 마시며 함께 어울려 죄악을 즐기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듯, 새가 올무에 걸리듯,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나 이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전9:12). 3.의인의 길이 있다. 본문 18절/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의인의 길은\\\\\\\".... 악인의 길과는 정반대입니다.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길이요(시1:6), 정직한 길이요, 정직하신 주께서 평탄케 하시는 길이다(사26:7). 또한 복 있는 자의 길이요(시1:1),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빛나는 길이다. \\\\\\\"의인의 길\\\\\\\"은.... 아침에 돋는 햇볕과 같다고 했다. 여기의 \\\\\\\"햇볕\\\\\\\"이란 말은.... [오르(rwOa)]란 단어로 \\\\\\\"빛, 발광체, 해\\\\\\\"란 뜻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곳의 번역은 잘못되었다. \\\\\\\"햇볕\\\\\\\"은 해가 내리 쏘는 뜨거운 기운을 말한다. ①.돋는 햇볕 의인은 지금까지의 그 어두운 마음에 빛이 임하여.... 깊은 밤은 지나가고, 찬란한 새벽빛을 발하는 떠오르는 태양이 되었다는 것이다(호6:3). 곧 중생으로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씀이다(엡5:8). 쉽게 말해서 떠오르는 태양과 같다는 것이다. 의인은 빛 되신 주님을 영접하여 그 속에 \\\\\\\"빛\\\\\\\"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곧 생명의 주를 영접하여 거듭난 자이요, 생명의 빛이 그 속에 동거함으로(요14:20).... 이 세상에서 빛이 된 자들이다(마5:14). ②.점점 빛남 이제 세상의 빛이 된 의인은 곧 예수쟁이들은....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점점 더욱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를 이루라는 말씀이다. 쉽게 말해서 믿음이 자라가야 한다는 것이다(살후1:3) 성화되는 과정.... 온전한 거룩의 영화를 향해 주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이다. 모이기를 힘쓰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삶이다(롬12:11). 자신을 깨끗이 하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는 것이다(딛2:14). 오늘의 우리 한국 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때로 욕을 먹는 것들은 따지고 보면 이 성화의 과정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예수쟁이들 때문이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파되었던 시절에는 쇄국정책으로 폐쇄된 우리 사회에 등불의 역할을 감당했다. 예수쟁이를 욕하는 사람들도 이 부분은 인정하고 있다. 이런 점을 우리 성도들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③.원만한 광명 깊은 밤을 몰아내고, 찬란히 떠오른 태양은 점점 더 밝아져, 이제는 원만한 광명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밤하늘을 비추는 달로 말하면.... 초승달에서 상현달, 보름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인 영화는.... 주님의 재림으로 부활과 변화로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우리의 이 육체로는 이룰 수 없는 영화이다. 누가 더 영화에 가까이 나아가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에베소 4: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 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바로 우리 성도들이 이루어 나아가야 할 성화의 종착역인 영화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만큼 자라고, 그 분량을 채우라는 말씀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 솔로몬이 자기 아들들에게 주는 훈계를 통하여.... 그 아들들뿐만 아니라 후대의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무후무한 지혜를 하나님께 받은 솔로몬은 잠언 3천을 말했습니다(왕상4:32). 그가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이 잠언에서 밝힌 우리 인생 앞에 펼쳐지는 길들만해도 엄청납니다. 그 엄청난 길들 중에서 바른 길을 바르게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잠언에서 말하는 길들은.... 악한 자의 길(1:15), 이를 탐하는 자의 길(1:19), 공평의 길(2:8), 선한 길(2:9), 정직한 길(2:13), 선한 자의 길(2:20), 지혜로운 길(4:11), 악인의 길(4:14), 의인의 길(4:18), 평탄한 길(5:6), 사람의 길(5:21), 생명의 길(6:23), 음녀의 길(7:25), 음부의 길(7:27), 의로운 길(8:20), 명철의 길(9:6), 바른 길(10:9), 불선한 길(16:29), 패역한 자의 길(22:5), 마땅히 행할 길(22:6), 악한 길(28:10)이 있다 했습니다. 잠언 이외의 성경에서 찾는다면 실로 엄청난 길들이 되리라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솔로몬이 말하는 이 숱한 길들은 그의 아버지 다윗 왕이 말하는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길과 어리석은 길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둘로 갈라지는 길 중에서 바른 길을 바르게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잠언 14:12절/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내 앞에 펼쳐진 길을 선택할 때.... 사람 곧 나의 눈으로 보아서 바르게 그 길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 눈에는 \\\\\\\"바른 길\\\\\\\"이지만 필경은 \\\\\\\"사망의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오늘은 고려 신학교 주일입니다. 신학교가 \\\\\\\"바른 길\\\\\\\"에 선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신학교를 통해서 교회를 담당할 목회자가 배출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가 \\\\\\\"바른 길\\\\\\\" 위에 세워지는 것 못지 않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바른 신학교\\\\\\\"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또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주님을 경배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그 믿음이 자라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른 교회\\\\\\\", \\\\\\\"바른 목회자\\\\\\\"를 선택하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고 했습니다(마15: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여러분 앞에 펼쳐진 수많은 길들 중에서 바른 길을 올바르게 선택하세요.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선택하지 마세요.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교회가 크냐, 성도들의 숫자가 많으냐, 교회당 건물이 있느냐.... 이런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겉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 고려 신학교도, 우리 고려 교단도, 우리 덕산교회도.... 겉모습으로는 다른 신학교, 다른 교단, 다른 교회에 비교하여 작은 모습입니다.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그러나, 이런 겉모습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있느냐, 거기에 성령의 역사로 생명 운동이 일어나고 있느냐.... 겉모습이 아닌 그 속을 보아야 합니다.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우리 덕산교회가 너무 작아 큰 교회에 나가보고 싶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고, 뺨을 적시고 흐르는 게 아니라 가슴속으로 흐르는 눈물이 강을 이룹니다. 물론 그런 소리가 나오도록.... 부흥하지 못하는데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둘 떠나가면... 이 덕산교회가 어떻게 부흥할 수 있겠습니까.... 큰 교회를 찾기 전에 과연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을 다 잘 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나간 그들이 지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 이 점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여러분 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길들 중에 바른 길을 올바르게 선택하세요. 말씀으로 돌아가자! 고려파 본래의 이념을 이어가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이것이 우리 고려 신학교가, 우리 고려 교단이, 우리 덕산교회가 선택한 길입니다. 이 길은 겉모습을 보고 좇아가는 길이 아닙니다. 사람의 보기에 바른 길이라 선택한 길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건축헌금과 같은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란 부적을 파는 타락한 중세 교회에서 종교 개혁을 한 것이 바로 「말씀으로 돌아가자!」입니다. 일제 36년의 치하에서 신사참배(紳士參拜),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옥살이를 하다.... 해방으로 출옥한 성도들이 신사참배(紳士參拜), 동방요배(東方遙拜)를 하고, 일제와 손잡았던 어용 교회들과 갈라져 따로 모인 것이 「고려파 본래의 이념」입니다. 이런 말씀 중심으로, 이런 이념으로....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CoramDeo)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 나가자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는 외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 앞에 펼쳐진 길을 바로 선택하라』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판단의 기준을 삼지 마세요. 겉모습으로 선택의 기준을 삼지 마세요.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고 판단하시는 게 아닙니다(행10:34). 이 세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계사는 구속사(救贖史)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러시아의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계사의 중심에 당신의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세계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주전(B.C)과 주후(A.D)로 갈라지게 했습니다. 한 사람 개인의 인생사로 말하면 예수 영접 전과 예수 영접 후로 갈라지게 됩니다. 예수 영접 전의 사람들은 예수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 것들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영원한 천국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지금 현재 나의 위치가 어디이냐가 문제입니다. 주님 재림하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면.... 큰 교회에 나가던 성도이든, 작은 교회 나가던 성도이든.... 다 한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이 땅 위에서 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주를 위해 충성했느냐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48절/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주님의 일은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내게 주시는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빌4:13). 그러므로 많이 받은 자도 있고, 적게 받은 자도 있습니다. 많이 맡은 자도 있고, 적게 맡은 자도 있습니다. 적게 받고, 적게 맡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맡은 것에 얼마나 충성했느냐.... 영광스러움과 부끄러움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런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앙고백이, 신앙간증이 체험되어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3:1-17/ 신학교주일설교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3:1-17 오늘은 고려 신학교 주일이다. 우리 교단적으로는 지난 주일에 고려 신학교 주일을 지켰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년에 하던 대로 2월 마지막 주일에 드리게 되었다. 고려 신학교 주일은 우리 고려 교단의 전 교회들이 교단 신학교인 고 려 신학교를 위하여 지키는 신학교 주일이다. 이런 신학교 주일을 통하 여 우리의 신학교인 고려 신학교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기도를 모으기 위함이다.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측 총회는 성도간의 불신법정 고소 문 제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측 총회와 분리된 것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더라도(고전6:7).... 어찌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믿지 않는 자 들 앞에서 송사하느냐(고전6:6)....는 말씀을 버리고 고신측 총회는 재단 문제로 불신법정에 고소를 했고.... 말씀대로 살자....는 분들은 고신측 총 회와 분리하게 된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고려파 본래의 이념을 이어가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이런 정신으로 고려측 총회는 조직이 되고, 고려 신학교가 개교를 하 게 된 것이다. 어느 교단, 어느 신학교 못지 않게 순수한 이념으로.... 숭 고한 이념을 가진 교단이요, 신학교이다. 그 이념대로 살아가느냐....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의 부분이다. 신앙과 행위가 하나 되지 못한다면.... 결국 헛 구호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신앙의 숭고한 삶의 일환으로.... 우리 교단의 모든 교회가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하여 신학교를 도움으 로.... 우리 고려 신학교는 수업료가 없고, 기숙사비가 없는 순수한 목회 자 양성 기관으로 자리 매김을 해 가고 있다. 본 교단 지교회에 속한 자로서.... 복음 전파의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에 입문하게 되면.... 다른 신학교와는 달리.... 돈걱정 없이 선지 동산에서 수련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의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지교회가 나름대로 \\\"고려 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후원금을 부담 하기도, 특별 헌금을 하기도, 오늘 같이 고려 신학교 주일을 지키기도.... 하여 신학교를 돕고 있는 것이다. 교단 신학교와 교단 총회와 지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 되어 함께 가는 이 길을 통하여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고.... 땅끝까지 말씀이 전파되는 역사가 이루어 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의미 심장한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요, 같은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주시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책을 가지고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의 전달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동거하는 삶을 통하여 「속에서 속으로」.... 전달되 어지는 믿음이요, 산 지식을 말합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책을 가지고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의 전달을 통하여서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세상 풍조를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 라\\\"....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 혜가 그 속에 있느니라\\\".... 그러니, \\\"네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사도 바울이 디모데뿐만 아니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맞을 성도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 그 말씀의 뜻을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 펴보고져 합니다. 1.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 본문 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이나, 성경 요절을 줄줄 암송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 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진 살아 있는 말씀의 생명력이 약동치는 삶 을 살았다는 말씀이다. \\\"알았다\\\".... 여기서 \\\"안다\\\" 하는 말은 \\\" (오이다)\\\"란 단어로 직관적으로 안다는 뜻이다. 가르침이나 경험으로 배워서 \\\"안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에 해 당하는 단어는 \\\" (기노스코)\\\"이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하는 말씀은.... 가르침을 통해 배워서 \\\"성경을 알았다\\\"하는 말씀이 아니다. 딤후 1:5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네어머니 유니게 속에서 있더니 네 속에도\\\".... 곧 「속에서 속으로」 전해진 믿음이다. 생명력 있는 믿음이다. 바로 그 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 이 「속에서 속으로」 전해진 믿음은.... 가르침이나, 훈련으로 이루어지고 전해지는 믿음이 아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동거하는 삶을 통하여.... 「속에서 속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하는 말씀도....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요절처 럼 암송한다는 말도 아니다. 「속에서 속으로」..... 외조모 로이스 속에서 어머니 유니게 속으로.... 어머니 유니게 속에서 아들 디모데 속으로.... 그렇게 「속에서 속으로 」..... 전해져 왔다는 것이다. 네 속에 거짓 없는 믿음은.... 그렇게 「속 에서 속으로」..... 전해져 온 것을 디모데야 너는 알고 있다....는 말씀이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외조모 로이스, 어머니 유니게, 아들 디모데.... 이렇게 「속에서 속으로」..... 전해져 온 거짓 없는 믿음처럼.... 「속에서 속으로」..... 외조모 로이스, 어머니 유니게, 아들 디모데로 이어지는.... 「속에서 속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디모데야 너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지금 내 속에.... 「속에서 속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거짓 없는 믿음 이 있습니까? 「속에서 속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살아 있는 하나님 의 말씀이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자녀나 그 누구에게 「속에서 속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까? 우리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나와 함께 경건자의 가는 길을 배웠다. 본문 10-11절/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 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 를 건지셨느니라/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여기서.... \\\"보고 알았다\\\"는 말은 「 (파라루데오)」란 단어 로.... \\\"가까이, 함께, 곁으로\\\"란 뜻을 가진 「 (파라)」란 단어와 \\\"동 반하다, 따르다, 제자가 되다\\\"란 뜻의 「 (아코루데오)」란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이다. 곧 「 (파라루데오)」란 단어는 \\\"가 까이 다르다, 동반하다, 이해하다\\\"라는 뜻이 된다.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이 말은.... 바울을 통해서 말과 글로서 전 달되어진 지식으로.... \\\"안다\\\"가 아니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생 활하는 가운데.... 「속에서 속으로」 전해진 산지식을 말한다.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원문 성경에는 10절 초두에 있는 말씀이다. \\\"나의 교훈, 행실, 의향, 믿 음, 오래 참음, 사랑, 인내, 핍박, 고난, 등\\\"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 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보고 안.... 그 모든 것에서 주님이 나를 건 지셨다는 승리의 고백이다.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디모데가 사도 바울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보고 알았다\\\"는 것은.... 한마 디로 \\\"경건자의 가는 길\\\"이다. 복음을 위해 사는 자가 가야 할 길을 말 한다. 본문 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경건한 삶에는 고난이 수반된다는 말씀이다. 말세가 되면 이 경건이 사 라지고.... 그 모양만 남게 된다고 했다(본문5절).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 고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딤전6:5).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기에....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 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된다(본문1-4절). 경건자가 가 는 길과는 다른 길이다. 돌아서야 할 길이다. 본문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 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로 경건자의 가는 길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 고자 하는 자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 길에는 핍박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17-18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 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경건자의 가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가야 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후사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후사가 받을 영광의 면류관은 그냥 공짜로 주어지 는 게 아닙니다. 받은 고난의 대가입니다. 경건자가 가는 길에서 겪어야 하는 현재의 고난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계15:2) 따르지 않음으로 당해야 하 는 고난입니다. 우리 성도가 그들을 짓밟고 이길 수 없기에....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의 고난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경건자의 가는 길, 고난의 길을 나도 갈 수 있는가? 내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도 있고, 경건의 능력도 부인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가.... 경건의 능력은 팽개쳐 버리고,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우리 고려 신학교의 외침이.... \\\"순교자의 고장, 경건자의 훈련장\\\"이지요. 이런 신앙 정신이 「속에서 속으로」 전해져서.... 내 속에도 있는가.... 우리 스스로를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3.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 본문 13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 」란 단어로 \\\"머물다, 거하다. 계속하 다,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함께 동거하며 산다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 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 바로 그 말씀이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하는 일은.... 말과 글을 통하여 배운 것이 아니다.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고 동거하는 삶을 통하여 「속에서 속으로」 전 해진 산 지식이요, 거짓 없는 믿음이다. 이러한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삶에 \\\"거하라\\\"는 말씀이다.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 한일\\\"은.... 함께 더불어 먹 고, 마시고, 동고동락하는 삶에 거할 때에 가능한 일이다. 나무 위의 비둘기는.... 몸은 나무 위에 있으되, 마음은 콩밭에 가 있 다. 이렇게 몸 따로, 마음 따로가 되면....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한 일\\\"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1 세기를 눈앞에 두고, 세기말을 맞이한 지금..... 세계는 지금.... 심상치 않는 기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저녁 예배 시간에 계시록에서 살펴보고 있는 대로.... 말세의 징조가 응해져 가는 징조가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세계는 하나의 정부, 하나의 정치, 하나의 경 제, 하나의 문화.... 더욱이 하나의 종교를 부르짖으며.... \\\"우리는 하나!\\\" 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유럽이 하나의 정부, 하나의 경제를 이루었습니다. 유럽연합(EU)라는 하나의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유로화\\\"로 내 나라, 네 나라가 없이.... 전 유럽은 단일통화(單一通貨)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제 그들은 남미와 통합하여 \\\"슈퍼 경제블록\\\"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2월 25일) 한국일보에.... EU-메르코수르 통합 \\\"슈퍼 경제블 록\\\" 추진이란 기사를 보면.... 유럽연합(EU)과 남미 무역블록 (MERCOSUR)의 기업 지도자 및 정부 관리들이 2개의 블록을 합쳐 거 대한 범 대서양 자유 무역지대를 창설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일이 성 사가 되면 미국이 추진 중인 미주 자유 무역지대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 의 자유 무역지대가 될 것입니다. 이렇듯 지금의 소지역(小地域) 중심의 경제블록들이 합쳐 대지역(大 地域) 중심의 경제블록들을 이루고, 이 대지역(大地域) 중심의 경제블록 들이 합쳐.... 결국 온 세계가 하나의 경제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종교 다원주의를 부르짖으며.... 세계는 지금 하나의 종교를 이루려는 세력들의 꿈틀거림이 대단합니다. 이들에게 쉽게 동조하는 이들이 바로 「나무 위의 비둘기들」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의 신자들입니다. 정통 교단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이단 교회를 두둔하고, 심지어 대변 인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나무 위의 비둘기들」입니 다. 이 「나무 위의 비둘기들」은.... 자신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의 전령사라도 되는 듯이.... 이단을 두둔하는 것이.... 사랑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나무 위의 비둘기들」에게는....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 한일\\\"은.... 없습니다.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고, 동고동락 하는 삶이 없이는....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한 일\\\" 은.... 없습니다.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한 일\\\"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고, 동고동락하는 삶에 거할 때에 가능한 일입니 다.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3:1-17/ 신학교주일설교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3:1-17 오늘은 고려 신학교 주일이다. 우리 교단적으로는 지난 주일에 고려 신학교 주일을 지켰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년에 하던 대로 2월 마지막 주일에 드리게 되었다. 고려 신학교 주일은 우리 고려 교단의 전 교회들이 교단 신학교인 고 려 신학교를 위하여 지키는 신학교 주일이다. 이런 신학교 주일을 통하 여 우리의 신학교인 고려 신학교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기도를 모으기 위함이다.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측 총회는 성도간의 불신법정 고소 문 제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측 총회와 분리된 것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더라도(고전6:7).... 어찌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믿지 않는 자 들 앞에서 송사하느냐(고전6:6)....는 말씀을 버리고 고신측 총회는 재단 문제로 불신법정에 고소를 했고.... 말씀대로 살자....는 분들은 고신측 총 회와 분리하게 된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고려파 본래의 이념을 이어가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이런 정신으로 고려측 총회는 조직이 되고, 고려 신학교가 개교를 하 게 된 것이다. 어느 교단, 어느 신학교 못지 않게 순수한 이념으로.... 숭 고한 이념을 가진 교단이요, 신학교이다. 그 이념대로 살아가느냐....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의 부분이다. 신앙과 행위가 하나 되지 못한다면.... 결국 헛 구호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신앙의 숭고한 삶의 일환으로.... 우리 교단의 모든 교회가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하여 신학교를 도움으 로.... 우리 고려 신학교는 수업료가 없고, 기숙사비가 없는 순수한 목회 자 양성 기관으로 자리 매김을 해 가고 있다. 본 교단 지교회에 속한 자로서.... 복음 전파의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에 입문하게 되면.... 다른 신학교와는 달리.... 돈걱정 없이 선지 동산에서 수련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의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지교회가 나름대로 \\\"고려 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후원금을 부담 하기도, 특별 헌금을 하기도, 오늘 같이 고려 신학교 주일을 지키기도.... 하여 신학교를 돕고 있는 것이다. 교단 신학교와 교단 총회와 지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 되어 함께 가는 이 길을 통하여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고.... 땅끝까지 말씀이 전파되는 역사가 이루어 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의미 심장한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이요, 같은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주시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책을 가지고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의 전달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동거하는 삶을 통하여 「속에서 속으로」.... 전달되 어지는 믿음이요, 산 지식을 말합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책을 가지고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의 전달을 통하여서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세상 풍조를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 라\\\"....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 혜가 그 속에 있느니라\\\".... 그러니, \\\"네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사도 바울이 디모데뿐만 아니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맞을 성도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 그 말씀의 뜻을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 펴보고져 합니다. 1.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 본문 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고 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이나, 성경 요절을 줄줄 암송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 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진 살아 있는 말씀의 생명력이 약동치는 삶 을 살았다는 말씀이다. \\\"알았다\\\".... 여기서 \\\"안다\\\" 하는 말은 \\\" (오이다)\\\"란 단어로 직관적으로 안다는 뜻이다. 가르침이나 경험으로 배워서 \\\"안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에 해 당하는 단어는 \\\" (기노스코)\\\"이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하는 말씀은.... 가르침을 통해 배워서 \\\"성경을 알았다\\\"하는 말씀이 아니다. 딤후 1:5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네어머니 유니게 속에서 있더니 네 속에도\\\".... 곧 「속에서 속으로」 전해진 믿음이다. 생명력 있는 믿음이다. 바로 그 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 이 「속에서 속으로」 전해진 믿음은.... 가르침이나, 훈련으로 이루어지고 전해지는 믿음이 아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동거하는 삶을 통하여.... 「속에서 속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하는 말씀도....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요절처 럼 암송한다는 말도 아니다. 「속에서 속으로」..... 외조모 로이스 속에서 어머니 유니게 속으로.... 어머니 유니게 속에서 아들 디모데 속으로.... 그렇게 「속에서 속으로 」..... 전해져 왔다는 것이다. 네 속에 거짓 없는 믿음은.... 그렇게 「속 에서 속으로」..... 전해져 온 것을 디모데야 너는 알고 있다....는 말씀이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그래서, 사도 바울은 외조모 로이스, 어머니 유니게, 아들 디모데.... 이렇게 「속에서 속으로」..... 전해져 온 거짓 없는 믿음처럼.... 「속에서 속으로」..... 외조모 로이스, 어머니 유니게, 아들 디모데로 이어지는.... 「속에서 속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디모데야 너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지금 내 속에.... 「속에서 속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거짓 없는 믿음 이 있습니까? 「속에서 속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살아 있는 하나님 의 말씀이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자녀나 그 누구에게 「속에서 속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까? 우리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나와 함께 경건자의 가는 길을 배웠다. 본문 10-11절/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 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 를 건지셨느니라/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여기서.... \\\"보고 알았다\\\"는 말은 「 (파라루데오)」란 단어 로.... \\\"가까이, 함께, 곁으로\\\"란 뜻을 가진 「 (파라)」란 단어와 \\\"동 반하다, 따르다, 제자가 되다\\\"란 뜻의 「 (아코루데오)」란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이다. 곧 「 (파라루데오)」란 단어는 \\\"가 까이 다르다, 동반하다, 이해하다\\\"라는 뜻이 된다.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이 말은.... 바울을 통해서 말과 글로서 전 달되어진 지식으로.... \\\"안다\\\"가 아니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생 활하는 가운데.... 「속에서 속으로」 전해진 산지식을 말한다.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원문 성경에는 10절 초두에 있는 말씀이다. \\\"나의 교훈, 행실, 의향, 믿 음, 오래 참음, 사랑, 인내, 핍박, 고난, 등\\\"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 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보고 안.... 그 모든 것에서 주님이 나를 건 지셨다는 승리의 고백이다.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디모데가 사도 바울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보고 알았다\\\"는 것은.... 한마 디로 \\\"경건자의 가는 길\\\"이다. 복음을 위해 사는 자가 가야 할 길을 말 한다. 본문 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경건한 삶에는 고난이 수반된다는 말씀이다. 말세가 되면 이 경건이 사 라지고.... 그 모양만 남게 된다고 했다(본문5절).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 고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딤전6:5).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기에....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 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된다(본문1-4절). 경건자가 가 는 길과는 다른 길이다. 돌아서야 할 길이다. 본문 5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 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로 경건자의 가는 길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 고자 하는 자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 길에는 핍박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17-18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 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경건자의 가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가야 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후사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후사가 받을 영광의 면류관은 그냥 공짜로 주어지 는 게 아닙니다. 받은 고난의 대가입니다. 경건자가 가는 길에서 겪어야 하는 현재의 고난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계15:2) 따르지 않음으로 당해야 하 는 고난입니다. 우리 성도가 그들을 짓밟고 이길 수 없기에....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의 고난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경건자의 가는 길, 고난의 길을 나도 갈 수 있는가? 내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도 있고, 경건의 능력도 부인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가.... 경건의 능력은 팽개쳐 버리고,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우리 고려 신학교의 외침이.... \\\"순교자의 고장, 경건자의 훈련장\\\"이지요. 이런 신앙 정신이 「속에서 속으로」 전해져서.... 내 속에도 있는가.... 우리 스스로를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3.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 본문 13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 」란 단어로 \\\"머물다, 거하다. 계속하 다,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함께 동거하며 산다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 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 바로 그 말씀이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하는 일은.... 말과 글을 통하여 배운 것이 아니다.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고 동거하는 삶을 통하여 「속에서 속으로」 전 해진 산 지식이요, 거짓 없는 믿음이다. 이러한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삶에 \\\"거하라\\\"는 말씀이다.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 한일\\\"은.... 함께 더불어 먹 고, 마시고, 동고동락하는 삶에 거할 때에 가능한 일이다. 나무 위의 비둘기는.... 몸은 나무 위에 있으되, 마음은 콩밭에 가 있 다. 이렇게 몸 따로, 마음 따로가 되면....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한 일\\\"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1 세기를 눈앞에 두고, 세기말을 맞이한 지금..... 세계는 지금.... 심상치 않는 기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저녁 예배 시간에 계시록에서 살펴보고 있는 대로.... 말세의 징조가 응해져 가는 징조가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세계는 하나의 정부, 하나의 정치, 하나의 경 제, 하나의 문화.... 더욱이 하나의 종교를 부르짖으며.... \\\"우리는 하나!\\\" 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유럽이 하나의 정부, 하나의 경제를 이루었습니다. 유럽연합(EU)라는 하나의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유로화\\\"로 내 나라, 네 나라가 없이.... 전 유럽은 단일통화(單一通貨)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제 그들은 남미와 통합하여 \\\"슈퍼 경제블록\\\"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2월 25일) 한국일보에.... EU-메르코수르 통합 \\\"슈퍼 경제블 록\\\" 추진이란 기사를 보면.... 유럽연합(EU)과 남미 무역블록 (MERCOSUR)의 기업 지도자 및 정부 관리들이 2개의 블록을 합쳐 거 대한 범 대서양 자유 무역지대를 창설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일이 성 사가 되면 미국이 추진 중인 미주 자유 무역지대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 의 자유 무역지대가 될 것입니다. 이렇듯 지금의 소지역(小地域) 중심의 경제블록들이 합쳐 대지역(大 地域) 중심의 경제블록들을 이루고, 이 대지역(大地域) 중심의 경제블록 들이 합쳐.... 결국 온 세계가 하나의 경제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종교 다원주의를 부르짖으며.... 세계는 지금 하나의 종교를 이루려는 세력들의 꿈틀거림이 대단합니다. 이들에게 쉽게 동조하는 이들이 바로 「나무 위의 비둘기들」입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의 신자들입니다. 정통 교단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이단 교회를 두둔하고, 심지어 대변 인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나무 위의 비둘기들」입니 다. 이 「나무 위의 비둘기들」은.... 자신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의 전령사라도 되는 듯이.... 이단을 두둔하는 것이.... 사랑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나무 위의 비둘기들」에게는....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 한일\\\"은.... 없습니다.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고, 동고동락 하는 삶이 없이는....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한 일\\\" 은.... 없습니다.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한 일\\\"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고, 동고동락하는 삶에 거할 때에 가능한 일입니 다. 「속에서 속으로」전해지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히12:1-4/ 신학교주일설교
믿음의 경주장에는 히12:1-4 오늘은 고려 신학교 주일이다. 우리 고려 신학교는 성도간의 법정 소송 문제로 인해 부산 고신측에서 갈라져 나와 세운 신학교로 우리 교단의 총회 직영 신학교이다. 현재 문산에 캠퍼스가 있으며, 재학생은 100여명이 조금 넘는다. 1976년 3월 세상 법정에서 성도간 고소를 할 수 없다는 고전 6장의 말씀을 쫓아 부산 고신에서 갈려져 나와 서울에 고려 신학교를 개교한 이래 지난 98년 2월 19일 올해의 졸업식까지 719명의 주의 종들을 배출시켰다. 졸업생의 대부분은 목회 현장에서 복음 전파에 주력하고 있으며, 6명의 신학교 교수와 교수 요원으로 미국, 구라파 지역에서 학위 취득을 위해 유학 중에 있는 몇 몇 분들과 5대양 6대주의 타 문화권에서 땅끝까지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하시는 50여명의 선교사들이 있다. 우리 고려 신학교의 마크에 \\\"CORAM DEO\\\"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말은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다. 저는 생각한다. 우리 고려 신학교의 3년간 교육은 학문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이 \\\"CORAM DEO\\\"의 정신을 훈련하고 익히는 교육 과정이라고 본다. 그래서 다른 신학교의 출신과는 달리, 이 \\\"하나님 앞에서\\\" 라는 정신이 조금은 남다르다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지난 해 고려 신학교 주일에는 \\\"CORAM DEO의 정신\\\"에 대하여 살펴본바 있다. 현재 고려 신학교의 재정은 교단 산하 지교회의 경상비의 3%의 신학교 후원금과 지교회에서 조직된 고려 신학교 후원회를 통한 후원금과 고려 신학교 주일 헌금으로 이루어진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지교회의 사랑 어린 지원으로 전교생의 기숙사 생활을 무료로 운용하고 있으며, 본 교단 소속의 학생들은 전액 장학생으로 수업료가 없다. 그런데 재정이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믿음의 경주장\\\"에 대하여 살펴 보고져 한다. 바로 이 \\\"믿음의 경주장\\\"에서 힘차게 달릴 선수들을 길러 내는 곳이 바로 우리 고려 신학교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믿음의 경주\\\"에 참여하고 있을까..... 또 어떤 경기가 이루어지고 있을까.... \\\"믿음의 경주장\\\"이기에 스포츠 경주장과는 다르다. 다시 말해서 사람 앞에서 하는 경주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경주하는 경주장이다. 스포츠 경주장에는 1등을 위하고, 상을 위해 경주한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장에는.....\\\" 1등, 2등, 3등의 순위가 없다. 다만 예수를 바라보고 달린다. 예수를 닮아 가고, 예수를 나타내고,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경주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으며, 어떻게 그들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져 한다. 1.구름 같이 모인 관중들이 있다. 본문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했다. 오늘 본문의 \\\"믿음의 경주장\\\"에 맨 처음 등장하는 이들은 바로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증인들이다. 곧 관중드이다. ①.허다한 증인들 히브리서 11:39절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라고 했다. 이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은 사람들이다. 곧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선진들이다(히11:2).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본 자들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아벨은 믿음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은 자이다(히11:4).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은 자이다(히11:5). 히브리 11장에 나타난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선진들은 다 증거를 받은 자들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이렇게 \\\"믿음으로.....\\\" 증거를 가진 믿음의 선진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허다한 증인들이 둘러서서 \\\"믿음의 경주장\\\"를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어떤 올림픽 경주장 보다도 더 많은 관중이 모여들어 환호를 지르며, 응원가를 부르며, 박수를 치며, 성원을 하고 있다. ②.모두가 메달리스트들이다. 히브리서 11:1-2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했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일반 스포츠 경주장과는 달리 관중들 모두가 승리의 메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은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경주\\\"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다. 놀러 온 구경꾼들이 아니다. 일찍이 저 \\\"믿음의 경주장\\\"에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청춘을 바치고, 한 평생을 다해 자신들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여 \\\"믿음으로.... 증거\\\"를 받은 자들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그 어느 올림픽 경기장 못지 않게 응원과 격려가 환호를 이루고 있다. 믿음의 경주장에서 지치고 스러지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힘들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달리라고 응원과 격려의 소리가 대단하다. 피로의 기색도 없이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인 예수를 바라보고 힘차게 달려가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더욱 힘내라고, 최후 승리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마지막 힘을 다하라고 응원과 격려의 소리가 환호를 이룬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이들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그 수많은 관중들의 환호속에 열기를 더해 가고 있다. 2.달리는 선수들이 있다. 본문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했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오늘 본문 말씀에 두 번째 등장하는 이들은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자들\\\"이다. 곧 달리는 선수들이다. 자신들의 생애에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는 모든 신앙인들을 가리킨다. ①.벗어 버리고 경주장에서 달리는 선수들에게는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나 인생사에 비유되는 마라톤 같은 장거리 경기에는 더더욱 옷을 벗어 버리고 가벼운 운동복 차림을 해야 한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단거리 경기도 아니고, 한 판 승부로 끝나는 경기가 치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한 평생을 달려야 하는 \\\"믿음의 경주\\\"이다. \\\"믿음의 경주장\\\"에서 자신들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면서 벗어 버려야 할 것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했다. 모든 무거운 것은 우리 범죄한 인생이 짊어지고 가야 할 모든 짐이요, 얽매이기 쉬운 죄는 죄의 유혹이다. ②.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경주자가 앞만 바라보고 달려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1/100초를 다투는 단거리 경기가 아니기에 여유를 가지게 된다.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게 된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자신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믿음의 경주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좌로나 우로 치우침이 없이 똑바로 달려가야 한다. 이유는 전후 좌우에 유혹의 눈길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③.인내로서 불과 100여리 조금 넘게, 두 시간 조금 더 달리는 마라톤 경주에도 인내로서 끈질기게 달리는 것을 요구한다. 하물며 한 평생을 달려가는 신앙생활이겠는가.... 인내로서 끝까지 달려야 한다.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세상에서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처럼(요13:1), 끝까지 인내하며 달리라고 하신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무거운 짐 벗어 주님께 맡기고(마11:28), 주를 바라보며 죄의 유혹을 피하여 인내로서 자신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한다.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빌4:13) 내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경주이다. 내 힘으로 하는 경주가 아니다. 3.목표하는 결승점이 있다. 본문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다. 경주장에서 경주를 하는 선수들은 골(Goal), 곧 목표하는 결승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골(Goal)를 보고 달려가기도, 볼을 차기도, 볼을 던져 넣기도 한다. 바로 이 골(Goal)이 경주자에게는 최고의 목표가 된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믿음으로..... 증거\\\"를 얻기 위해서 달려가는 수많은 경주자들이 있다. 이 경주자들에게도 골(Goal)이 있다. 바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이다. 우리 앞에 본을 보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 우편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①.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믿음의 경주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자신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달려가야 할 믿음의 경주자들이 바라보아야 할 골(Goal)이다. 이 경주가 바로 믿음의 경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라는 말씀의 뜻은 믿음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이요, 믿음의 끝이 예수 그리스도이라는 말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믿음이 완성된다는 말이다. ②.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예수 『믿음의 경주장에는.....』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 핍박과 환란이 도사리고 있다. 그 고난의 최후는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믿음의 경주장이 아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고, 최후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본이시오, \\\"믿음의 경주장의 골(Goal)\\\"이신 예수님도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참으셨다고 했다. 내일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다. 바로 No Cross, No Crown이다. ③.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예수 우리는 초등학교의 가을 운동회에서 꼴찌로 달리던 학생이나 학부형들이 중도에서 포기하고 덜어가 버리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왜 그럴까? 달리기 경주에서 꼴찌한다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 창피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사람들 앞에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이 없다. 왜냐하면 \\\"믿음의 경주\\\"는 하나님 앞에서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경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CORAM DEO 정신으로 하는 경주장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움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 앞에서의 실패가 하나님 앞에서 승리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숱한 장애물과 감당키 힘든 어려운 시련들이 있다. 이 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서 지치고 쓰러지면 안된다. 왜? 지치고 쓰러지는가..... 전의(戰意)의 상실 때문이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믿음의 경주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그 능력에 힘입어 경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장애물이 가로막는다 해도, 고난과 시련이, 환란과 핍박이 몰려온다 해도, 자신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믿음의 경주자는 전의를 상실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이다.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생각하라고 한다. 무엇 때문에 그분이 수치를 당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셔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분이 죄인들의 거역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참으셔야 하는가를...... 바로 내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려야 할 나에게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참으셨다고 한다. 나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나를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그분을 생각하며..... 믿음의 경주장에서 내가 낙심치 않도록 하시려..... 참으셨다고 한다.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생각하며, 피곤하여 낙심치 말고 열심을 다하여 달리자. 내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뛰자. 4.최선을 다하는 싸움이 있다. 본문 4절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 했다. 바로 우리 성도들이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그 \\\"믿음의 경주\\\"가 무엇을 말하는 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바로 \\\"믿음의 경주\\\"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경주이다. \\\"믿음의 경주\\\"는 죄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범죄치 않고 승리하는 것이다. ①.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리는 각 개인을 말한다. 각자가 자기 앞에 주어진 경주를 하라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와 같이 함께 달려서 순위를 가려서 상을 주려는 경주장이 아니다. 믿음의 경주장이다. 마태복음 16: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다. 곧 각자 각자가 자기 몫에 테인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쫓으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각자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는 말씀이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경주에 충실하라는 말씀이다. ②.피흘리기까지 『믿음의 경주장에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경주가 벌어지고 있다. 피곤하고 지치더라도 낙심치 말라고 한다. 죄와의 싸움에서 진다는 것은 곧 범죄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죄와의 싸움은 피흘리기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곧 죽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육신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의 부활이 기다리는 승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내 몫에 테인 십자가를 지고, 죄와 더불어 싸우는 믿음의 경주장에서 경주할 때, 지치고 쓰러져 낙심하기 전에..... 과연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여 싸워 보았는가..... 우리 이 시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나의 낙심이 내 몫에 테인 십자가가 정말로 너무 무거워서, 그 십자가 때문에 지치고 쓰러지는 것인가..... 과연 피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해 싸워 보고 낙심하는가..... 『믿음의 경주장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격려의 소리를 외친다. 인내라하!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주님을 생각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내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믿음의 경주자들\\\"이다. 힘들고, 지치고, 피곤하고, 낙심이 되는가..... 저 응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저 격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믿음의 경주장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믿음의 선진들이, 앞서 간 우리의 친구들이 응원과 격려의 소리를 외친다. 인내라하!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주님을 생각하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를 바라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힘내어 다시 일어나자. 우리 모두 힘내어 다시 달리자. 우리 모두 힘내어 예수를 바라보고 뛰자. 저 골인 지점에서 나를 영접하시려 두 팔 벌려 기다리시는 예수 님의 품속에 달려가 안기자.
믿음의 경주장에는/ 히12:1-4/ 신학교주일설교
믿음의 경주장에는 히12:1-4 오늘은 고려 신학교 주일이다. 우리 고려 신학교는 성도간의 법정 소 송 문제로 인해 부산 고신측에서 갈라져 나와 세운 신학교로 우리 교단 의 총회 직영 신학교이다. 현재 문산에 캠퍼스가 있으며, 재학생은 100여명이 조금 넘는다. 1976 년 3월 세상 법정에서 성도간 고소를 할 수 없다는 고전 6장의 말씀을 쫓아 부산 고신에서 갈려져 나와 서울에 고려 신학교를 개교한 이래 지 난 98년 2월 19일 올해의 졸업식까지 719명의 주의 종들을 배출시켰다. 졸업생의 대부분은 목회 현장에서 복음 전파에 주력하고 있으며, 6명 의 신학교 교수와 교수 요원으로 미국, 구라파 지역에서 학위 취득을 위해 유학 중에 있는 몇 몇 분들과 5대양 6대주의 타 문화권에서 땅끝 까지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하시는 50여명의 선교사들이 있다. 우리 고려 신학교의 마크에 \\\"CORAM DEO\\\"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말은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다. 저는 생각한다. 우리 고 려 신학교의 3년간 교육은 학문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이 \\\"CORAM DEO\\\"의 정신을 훈련하고 익히는 교육 과정이라고 본다. 그래서 다른 신학교의 출신과는 달리, 이 \\\"하나님 앞에서\\\" 라는 정신 이 조금은 남다르다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지난 해 고려 신학교 주일 에는 \\\"CORAM DEO의 정신\\\"에 대하여 살펴본바 있다. 현재 고려 신학교의 재정은 교단 산하 지교회의 경상비의 3%의 신학 교 후원금과 지교회에서 조직된 고려 신학교 후원회를 통한 후원금과 고려 신학교 주일 헌금으로 이루어진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지교회의 사랑 어린 지원으로 전교생의 기숙사 생활을 무료로 운용하고 있으며, 본 교단 소속의 학생들은 전액 장학생 으로 수업료가 없다. 그런데 재정이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운 일 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믿음의 경주장\\\"에 대하여 살펴 보고져 한다. 바로 이 \\\"믿음의 경주장\\\"에서 힘차게 달릴 선수들을 길러 내는 곳이 바로 우리 고려 신학교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믿음의 경주\\\"에 참여하고 있을까..... 또 어떤 경기가 이루어지고 있을까.... \\\"믿음의 경주장\\\"이기에 스포츠 경 주장과는 다르다. 다시 말해서 사람 앞에서 하는 경주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경주하 는 경주장이다. 스포츠 경주장에는 1등을 위하고, 상을 위해 경주한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장에는.....\\\" 1등, 2등, 3등의 순위가 없다. 다만 예수 를 바라보고 달린다. 예수를 닮아 가고, 예수를 나타내고,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경주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으며, 어떻게 그들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져 한다. 1.구름 같이 모인 관중들이 있다. 본문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 으니....\\\"라고 했다. 오늘 본문의 \\\"믿음의 경주장\\\"에 맨 처음 등장하는 이들은 바로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경주\\\"를 지켜보 고 있는 수많은 증인들이다. 곧 관중들이다. ①.허다한 증인들 히브리서 11:39절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 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라고 했다. 이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은 사람 들이다. 곧 히브리서 11장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선진들이다(히11:2). 바 라는 것들의 실상을 본 자들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를 가진 자들 이다. 아벨은 믿음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은 자이다(히11:4). 에 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은 자이다 (히11:5). 히브리 11장에 나타난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선진들은 다 증 거를 받은 자들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이렇게 \\\"믿음으로.....\\\" 증거를 가진 믿음의 선진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 었다고 한다. 허다한 증인들이 둘러서서 \\\"믿음의 경주장\\\"를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어떤 올림픽 경주장 보다도 더 많은 관중이 모여들어 환 호를 지르며, 응원가를 부르며, 박수를 치며, 성원을 하고 있다. ②.모두가 메달리스트들이다. 히브리서 11:1-2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했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일반 스포츠 경주장과는 달리 관중들 모두가 승리의 메달을 받은 사람 들이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은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경주\\\"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다. 놀러 온 구경 꾼들이 아니다. 일찍이 저 \\\"믿음의 경주장\\\"에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청춘을 바치고, 한 평생을 다해 자신들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 하여 \\\"믿음으로.... 증거\\\"를 받은 자들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그 어느 올림픽 경기장 못지 않게 응원과 격려가 환호를 이루고 있다. 믿음의 경주장에서 지치고 스러지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힘들었 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달리라고 응 원과 격려의 소리가 대단하다. 피로의 기색도 없이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인 예수를 바라 보고 힘차게 달려가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더욱 힘내라고, 최후 승리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마지막 힘을 다하라고 응원과 격려의 소리가 환호 를 이룬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이들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그 수많은 관중들의 환호속에 열기를 더해 가고 있다. 2.달리는 선수들이 있다. 본문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 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했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오늘 본문 말씀에 두 번째 등장하는 이들은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 주하는 자들\\\"이다. 곧 달리는 선수들이다. 자신들의 생애에 주어진 믿음 의 경주를 경주하는 모든 신앙인들을 가리킨다. ①.벗어 버리고 경주장에서 달리는 선수들에게는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나 인생사에 비유되는 마라톤 같은 장거리 경기에는 더더욱 옷을 벗어 버리고 가벼운 운동복 차림을 해야 한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단거리 경기도 아니고, 한 판 승부로 끝나는 경기가 치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한 평생을 달려야 하는 \\\"믿음의 경주\\\"이다. \\\"믿음의 경주장\\\"에서 자신들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면서 벗어 버려 야 할 것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했다. 모든 무거운 것은 우리 범죄한 인생이 짊어지고 가야 할 모든 짐이요, 얽매이기 쉬 운 죄는 죄의 유혹이다. ②.앞만 바라보고 달리는 경주자가 앞만 바라보고 달려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다. 그러나 1/100초를 다투는 단거리 경기가 아니기에 여유를 가지게 된다.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게 된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자신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믿음의 경주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좌로나 우로 치우침이 없이 똑바 로 달려가야 한다. 이유는 전후 좌우에 유혹의 눈길이 너무도 많기 때 문이다. ③.인내로서 불과 100여리 조금 넘게, 두 시간 조금 더 달리는 마라톤 경주에도 인내로서 끈질기게 달리는 것을 요구한다. 하물며 한 평생을 달려가는 신앙생활이겠는가.... 인내로서 끝까지 달려야 한다.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세상에서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처럼(요13:1), 끝까지 인내하며 달리라고 하신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무거운 짐 벗어 주님께 맡기고(마11:28), 주를 바라보며 죄의 유혹을 피 하여 인내로서 자신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한다.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빌4:13) 내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경주이다. 내 힘으로 하는 경주 가 아니다. 3.목표하는 결승점이 있다. 본문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 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 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 느니라\\\"고 했다. 경주장에서 경주를 하는 선수들은 골(Goal), 곧 목표하는 결승점이 있 어야 한다. 그래서 그 골(Goal)를 보고 달려가기도, 볼을 차기도, 볼을 던져 넣기도 한다. 바로 이 골(Goal)이 경주자에게는 최고의 목표가 된 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믿음으로..... 증거\\\"를 얻기 위해서 달려가는 수많은 경주자들이 있다. 이 경주자들에게도 골(Goal)이 있다. 바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이다. 우리 앞에 본 을 보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 스도이시다. 하나님 우편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①.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믿음의 경주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자신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달려가야 할 믿 음의 경주자들이 바라보아야 할 골(Goal)이다. 이 경주가 바로 믿음의 경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라는 말씀의 뜻은 믿음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이요, 믿음의 끝이 예수 그리 스도이라는 말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믿음이 완성된다는 말 이다. ②.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예수 『믿음의 경주장에는.....』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 핍박과 환란이 도사리고 있다. 그 고난의 최후 는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믿음의 경주장이 아니다. 부 활의 영광이 있고, 최후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본이시오, \\\"믿음의 경주장의 골(Goal)\\\"이신 예수님도 앞에 있 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으심을 참으셨다고 했다. 내일의 영광 을 위하여 오늘의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다. 바로 No Cross, No Crown 이다. ③.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예수 우리는 초등학교의 가을 운동회에서 꼴찌로 달리던 학생이나 학부형 들이 중도에서 포기하고 덜어가 버리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왜 그럴 까? 달리기 경주에서 꼴찌한다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 창피 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사람들 앞에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이 없다. 왜냐하면 \\\"믿음의 경주\\\"는 하나님 앞에서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경주가 아니기 때문 이다. 바로 CORAM DEO 정신으로 하는 경주장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움이 될 수 도 있다. 사람들 앞에서의 실패가 하나님 앞에서 승리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다. 『믿음의 경주장에는.....』 숱한 장애물과 감당키 힘든 어려운 시련들이 있다. 이 긴 고난의 터널 을 통과하기 위해서 지치고 쓰러지면 안된다. 왜? 지치고 쓰러지는가..... 전의(戰意)의 상실 때문이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믿음의 경주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그 능력에 힘 입어 경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장애물이 가로막는다 해도, 고난과 시련이, 환란과 핍박 이 몰려온다 해도, 자신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믿음의 경주자는 전의를 상실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이다.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부끄러 움도 개의치 않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생각하라고 한다. 무엇 때문에 그분이 수치를 당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셔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분이 죄인들의 거역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참으셔야 하는 가를...... 바로 내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려야 할 나 에게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참으셨다고 한다. 나를 위해 십자 가의 길을 가신, 나를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던 그분을 생각하 며..... 믿음의 경주장에서 내가 낙심치 않도록 하시려..... 참으셨다고 한다.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생각하며, 피곤하여 낙심치 말고 열심을 다 하여 달리자. 내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 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뛰자. 4.최선을 다하는 싸움이 있다. 본문 4절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 하고\\\"라 했다. 바로 우리 성도들이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그 \\\"믿음의 경 주\\\"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바로 \\\"믿음의 경주\\\"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경주이다. \\\"믿음의 경주\\\"는 죄의 위협에 굴하지 않 고,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범죄치 않고 승리하는 것이다. ①.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믿음의 경주장에서 달리는 각 개인을 말한 다. 각자가 자기 앞에 주어진 경주를 하라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와 같 이 함께 달려서 순위를 가려서 상을 주려는 경주장이 아니다. 믿음의 경주장이다. 마태복음 16: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 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다. 곧 각자 각자가 자기 몫에 테인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쫓으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각자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는 말씀이다. 남들과 비교 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경주에 충실하라는 말씀이다. ②.피흘리기까지 『믿음의 경주장에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경주가 벌어지고 있다. 피곤하고 지치더라도 낙심 치 말라고 한다. 죄와의 싸움에서 진다는 것은 곧 범죄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죄와의 싸움은 피흘리기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곧 죽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육신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의 부활이 기다리는 승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내 몫에 테인 십자가를 지고, 죄와 더불어 싸우는 믿음의 경주장에서 경주할 때, 지치고 쓰러져 낙심하기 전에..... 과연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여 싸워 보았는가..... 우리 이 시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나의 낙심이 내 몫에 테인 십자가가 정말로 너무 무거워서, 그 십자 가 때문에 지치고 쓰러지는 것인가..... 과연 피흘리기까지..... 죄와 더 불어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해 싸워 보고 낙심하는가..... 『믿음의 경주장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격려의 소리를 외친다. 인내라하!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주님을 생각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내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믿음의 경주자들\\\"이다. 힘들고, 지치고, 피곤하고, 낙심이 되는가..... 저 응원의 소리에 귀를 기 울여 보자. 저 격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믿음의 경주장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믿음의 선진들이, 앞서 간 우리의 친 구들이 응원과 격려의 소리를 외친다. 인내라하!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앞에 있는 즐거움 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주님을 생각하라! 하나님 보좌 우 편에 앉으신 예수를 바라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힘내어 다시 일어나자. 우리 모두 힘내어 다시 달리자. 우리 모두 힘내어 예수를 바라보고 뛰자. 저 골인 지점에서 나를 영접하시려 두 팔 벌려 기다리시는 예수 님의 품속에 달려가 안기자.
바울 사도의 신학/ 행17:24-31
바울 사도의 신학 행17:24-31 1.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쳤다 (행 17:24). 2. 우주를 하나님께 소유하셨다함 (행 17:24)은 만물을 소유하셨다함(행 17:25). 3. 하나님은 만물을 소유하셨다함 (행 17:25). 4. 하나님게서 전 인류를 한 핏줄로 지었다함 (행 17:26 상). 5. 하나님께서 인류역사를 주관하신다함(행 17:26 중). 6. 모든 영토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다함 (행 17:26하). 7. 하나님은 천하를 심판하신다 함(행 17:31). 결론 :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바울 사도의 신학을 그대로 믿으면 금 일의 인본주의 신학이 무용하게 될 것이다.
새 길과 새 천년/ 신학은 넓게, 신앙은 깊게/ 욥42:4-5, 고후3:18/ 2000-01-02
새 길과 새 천년/ 신학은 넓게, 신앙은 깊게 욥42:4-5, 고후3:18 한완상 새 천년을 맞으면서 감사할 뿐입니다. 1950년대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2000년에는 내 모습이 어떠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이승만 박사 같은 백발 노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그때까지 내가 살수 있을까를 염려했습니다. 21세기는 대학생인 저에게 까마득한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정말 빨리 흘렀습니다.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가 가속적으로 빨리 흘러내리듯, 시간은 덧없이 빨리 흐르는 듯 합니다. 마침내 저는 60대 중턱에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새 천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구경하는 세대가 바로 저의 세대 같습니다. 어릴 때 석기시대의 불이었던 광솔 불에서 오늘 우주시대의 형광등까지를 모두 사용해본 세대이기도 합니다. 달구지에서 우주선까지를 두루 거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만 하더라도 우주시대는 꿈도 꾸지 못했었지요. 이렇게 오랜 역사흐름을 모두 경험했다는 뜻에서 가장 오래 살아 온 행운의 세대이기도 합니다. 허나 역사적 예수의 그 짧은 삶을 생각해보면, 저의 삶은 길어서 오히려 부끄럽기도 합니다. 예수의 공생애는 1년 또는 3년으로 아주 짧았으나 그의 생애가 전체 역사에 끼친 영향을 보면 너무나 엄청납니다.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었고, 인류의 삶의 양태와 내용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역사적 임팩트는 너무나 컸기에 우리의 삶은 그저 〈시간 보내기〉에 불과한 듯 여겨지기도 하고, 또 게을렀고 이기적인 삶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정말 부끄러운 삶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의 삶에 있어 새길 공동체는 큰 보람과 깊은 뜻을 안겨다 주고있습니다. 만일 〈새길〉이 없었다면 저를 포함해서 적지 않은 분들이 기독교라는 제도를 떠났을는지도 모릅니다. 비록 〈새길〉이 아직도 자라고 있는 유기체이기에 부족한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하나의 조그마한 〈대안 공동체〉의 모습으로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결코 하잘 것 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확실히 기쁜 소식임이 틀림없습니다. 앞으로 〈새길〉이 계속 아름답게 자라려면 〈새길〉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새길〉의 신학이 더욱 열리면서 넓어져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더욱 깊게, 신학은 더욱 넓게 자라야만 합니다. 대체로 한국 교회는 열린 신학을 배척해왔습니다. 오히려 닫힌 신학을 선호해왔습니다. 변증론적 신학, 근본주의적 신학, 문자주의적 독선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닫힌 신학은 율법주의적 신앙을 부추겨왔습니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삶을 규범으로 삼아왔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양적 성장을 멈추고 있습니다. 그것을 크게 자랑으로 여겨왔던 한국교회는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 위기는 양적 성장 중지만 아니라 질적 퇴보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미 그러한 퇴행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을 빙자한 유치한 사이비 종교 행위, 만민중앙교회의 만행, 옷로비 사건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교회의 몰윤리성(沒倫理性), 큰 교회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투명한 재정 운영 등. 마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휴머니스트 마르크스를 계속 죽이듯이, 닫힌 기독교가 역사의 예수를 계속 죽이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성 없이 급속하게 자란 한국교회가 세상의 추문이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것은 신학 없는 한국교회가 기복적신앙(祈福的信仰)의 포로로 전락했기 때문이지요. 더 정확하게 말한 다면 닫힌 신학의 좁은 그릇에 탐욕과 성장의 기복신앙을 가득 채웠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 천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열린 신학의 큰 그릇에 뜨거운 예수의 영과 그리스도의 능력을 가득 담아내야 합니다. 역사적 예수(부활 이전 예수)에 대한 열린 신학으로 예수의 영성을 더욱 뜨겁게 체험해야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열린 신학으로 그리스도(부활 이후 예수)의 영적 능력을 온 몸과 마음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역사적 예수의 영은 참으로 역사적인 사회책임과 윤리의식을 권면해 줍니다. 앞으로 열린 신학, 곧 예수 신학의 도움을 받지 않는 교회는 스스로 문을 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닫힌 신학이나 신학 없음은 한국교회를 더욱 양적으로 위축시키고 질적으로 웃음거리로 전락시킬 것입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우리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특히 역사의 예수를 찾고, 구하고, 만나고, 체험해야 합니다. 열린 신학의 창문으로 역사적 예수의 말씀과 삶에서 더욱 감동 받아야 하고, 헌신적 신앙의 창문으로 부활의 그리스도를 더욱더 뜨겁게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때까지 복음서, 제도교회, 성직자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이 말해온 〈그리스도〉에 관해 귀가 아프도록 많이 들어왔습니다. 간접적으로 많이 들어 왔습니다. 이제는 영적 존재로 사셨던 역사의 예수를 직접 만나봐야 할 것입니다. 교리의 두터운 옷을 입은 〈그리스도〉를 통해 간접으로 예수에 관해 들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예수를 직접 만나면서, 그리스도의 영도 새롭게 직접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이룩하시려고 했던 그 뜻을 오늘 여기 우리의 상황에서 재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닮기와 그리스도 닮기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예수 닮기의 삶은 참으로 어렵고, 괴롭고, 외로운 일입니다. 20세기적 문화 사회 구조 속에서 예수 닮기는 너무 힘듭니다. 좌절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활의 예수, 곧 신앙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 영적 힘으로 그 어려운 예수 닮기를 실천해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닮아 그 영광의 힘으로, 예수 닮기를 해내야 합니다. 그것도 공동체적으로 해내야 합니다. 공동체가 예수를 직접 만나 예수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로 하여금 참신한 종교(the frist-hand religion)로 항상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새길교회는 중고품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열린 예수신학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닮기의 신학은 가능합니까? 도대체 역사적 예수를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까? 대체로 역사의 예수를 찾으려 했던 많은 신학자들이 좌절을 겪으면서 그 탐구를 포기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그 대표적 신학자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찾기란 쉽지 않은데다가, 찾는다 하더라도 그의 종말론적 예언자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는 아주 낯선 이방인처럼 여겨진다고 믿어 그 탐구를 포기했지요. 대신 신앙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케리그마(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신 메시아에 대한 메시지)를 소중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이르러 미국을 중심으로 일군의 성서학자들이 역사적 예수를 진지하게, 투명하게, 정직하게, 용기 있게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탐구하는데 끝나지 않고 공동체적으로 체계 있게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학자들이, 지난 이천년간 두터운 교리의 옷을 입고 있던 〈그리스도〉에만 익숙해진 기독교 신자들로 하여금 교리의 옷을 벗고 있는 역사의 인물 예수를 만나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연구가 정직한 만큼 또한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의 태반이 역사적 인물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체험했던 부활의 예수 곧 그리스도의 말씀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닫힌 신학을 숭상하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체험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을 체험했기에 그 체험의 빛 아래서 예수의 말씀과 삶을 새롭게 창작하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그 해석된 말씀이 역사적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과 사회, 인간과 역사를 크게 변혁시키는 힘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역시 역사적 예수의 말씀과 삶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감동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부활 이전의 예수께서 하신 행적이나 말씀은 그것대로 인간과 역사, 개인과 사회 구조를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힘이 될 것임은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역사적 예수를 모른 체 인습적으로 예수를 믿어왔습니다. 화려한 제왕의 옷과 위엄 있는 교리의 옷을 입고 휘황 찬란한 왕관을 쓰고 있는 그리스도를 역사의 예수로 믿어왔습니다. 특히 근본주의 신앙과 문자주의 신학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분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가 100% 역사의 예수요, 복음서가 충실한 역사사실의 기록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성서는 결코 역사 사실(historical fact)을 객관적으로 기록해 놓은 문집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문헌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역사적 예수의 흔적은 명백하게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찾아 낼 수 있다면 찾아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기쁜 소식을 담고 있는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예수를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 세미나 학자들은 비교문화연구(cross cultural study)의 방법, 역사적 연구방법, 그리고 본문연구(textual study) 방법을 모두 동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 사건을 보존하고 있는 전승(tradition)을 찾아내고, 이같은 전승자료로 예수에 관한 설화(說話)를 엮어내는 단계를 확인해 냅니다. 그리고 부활 이후 초대 교회가 새로운 말씀과 설화를 예수님의 것으로 귀속시키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그들 학자들의 취향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을 아주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최후의 유혹으로 표현할 만큼, 경계하면서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기에 그들의 학문적 예수탐구는 그만큼 진솔하고 정직합니다. 그들이 찾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예수말씀을 중심으로 보면 대체로 비종말론적(非終末論的) 메시지를 담고 있고 기존의 인습적 지혜를 뒤집는 창조적 대안의 지혜를 표현하고 있으며, 평등하고 열린 공동체, 무상의 치료를 통한 나눔의 공동체를 세우려는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지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메시지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 세우기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저 위에서부터 역사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는 기적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누룩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번지는 열린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웅장한 제국의 모습을 지니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로 비유하여 그것이 겨자나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 당시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 나라는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우람하고 웅장하며, 그것이 예루살렘 한복판에 우뚝 서서 하늘을 닿을 듯한 위세를 지니는 큰 중심목(中心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세계중심부에 우뚝 서서 하늘을 찌를 듯 한 기세로 서있는 우람한 나무였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겨자씨에서 자란 조그마한 나물에 불과합니다. 큰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변두리 나물이지요. 그러나 비록 그 규모는 작고 보잘것없으나, 혀끝을 쏘는 독특한 맛을 지니면서도, 그것이 쑥처럼 강인하게 번식하는 힘을 지닌 나물입니다. 게다가 쑥대밭으로 만드는 변화와 번짐의 힘을 지니면서 기득권자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새들을 유인하는 힘을 지닌 나물이었습니다. 마치 누룩이 당시 불순한 것으로 믿어 경건한 절기에는 누룩 없는 빵을 먹었던 당시 풍습을 뒤집기나 하듯,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누룩으로 비유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누룩의 비유도 겨자씨 비유와 함께 관례와 인습을 뒤집는 변혁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했지요. 그것도 활짝 열린 잔치여서 온갖 불순하고 불결했던 사람들, 곧 적빈자(赤貧者), 이방인, 여성, 지체장애자, 세리, 죄인 등이 잔치의 주인공으로 대접받습니다. 열린 식탁 공동체는 차별 없이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우리들〉만이 아니라 〈그들〉도 식탁공동체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예수의 인식은 기존의 계급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인식이기도 합니다. 열린 잔치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함께 아파하는(compassionate) 공동체요, 함께 떡을 나누는(companion) 공동체요, 서로 의사소통이 잘되는(communication) 공동체임을 부각시켜줍니다. 그리고 그 잔치를 베푸는 분도 지혜(Sophia)라는 모성(母性)의 존재입니다. 남의 아픔을 자궁처럼 느끼고, 애간장 타듯 남과 의사소통하고 싶어하는 모성의 존재입니다. 또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무상의 치유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병균만 퇴치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부당하고 억울하게 강요된 온갖 부정적 낙인을 벗겨주십니다. 이를테면 죄인이라는 딱지를 예수는 떼어주시어, 병균과 사회적 정죄(定罪)로부터 환자를 동시에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질병(disease)과 사회적 고통(illness) 모두를 무상으로 치유해 주심으로써, 계급·성·인종·문화의 벽으로 갈라지고 반목했던 인간들을 낫게 하여 그들에게 건강과 화평을 안겨주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탄(marvel)의 공동체였습니다. 초자연적 치유행위는 놀라움의 경탄을 자아내는데 이 경탄이 신앙으로 연결되면 그것이 기적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는 기적이 일어나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초자연의 힘은 자연 질서 속으로 침입하는 그 어떤 괴력이 아니라 ‘영원히 숨어있는 것이지만 끊임없이 뛰고 있는 자연의 심장‘입니다. 바로 그 심장이 예수의 심장이기도 합니다. 무상의 치유가 바로 이 끊임없이 뛰고 있는 자연의 심장의 효력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기존의 인습적 지혜를 대신할 대안적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위로부터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시청자를 공손히 초청하는 겸손한 지혜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의 지혜는 예수를 걸고넘어지게 하려했던 질문자를 정중하게 대접합니다. 그 지혜의 내용은 아주 과격함에도 말입니다. 탕자의 비유도 그러합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당시 가부장적인 전통적 아버지像과는 너무 다릅니다. 가장 엄마 같은 아버지의 모습 바로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아빠(abba)〉라고 불렀고 가까이 체험했던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한마디로 예수의 메시지가 제시했던 올곧은 삶의 길은 〈대안적 새길〉이었기에, 사람들이 많이 밟지 않은 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그 길은 어렵고 외롭고, 괴로운 길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면서 공중의 나는 새를 보든지, 길옆의 백합화를 볼 때마다 하나님을 가깝게 느끼며 체험할 수 있습니다. 새와 꽃에서 만날 수 있는 예수의 하나님은 인습의 지식이 강조했던 죄를 심판하는 무서운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까다로운 종교적 요구조건을 내세우고, 그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사람들에게만 상을 내려주는 심판주 하나님도 아니었습니다. 조건 없이 함께 아파하시고 애간장을 태우면서 의사소통을 하고 싶어하시는 〈자궁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 이같은 하나님을 예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만나고 체험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개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교회, 교리, 성직자, 누구도 중개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기쁨 그것이 곧 복음이지요. 하나님 나라의 특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부한 인습적 종교신앙으로 욥을 꾸짖었던 욥의 신앙동지들과 달리, 욥은 그의 고난을 통해, 너무나 억울한 고난을 통해 자궁의 하나님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이제껏 간접으로 종교의 귀를 통해 듣고 알았던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기 42:5) 그리스도 닮기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가 비록 역사적 예수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무익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예수부활을 체험했던 초대 교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기독교 역사에 크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는 초대 교회의 삶과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예수와 달리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현존하시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 존재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요. 진실이었습니다. 사람과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는 힘이었습니다. 이 힘은 믿음으로 은총을 통해 발휘되었습니다. 바로 바울이 강조한 이런 점이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 상통합니다. 종교적 또는 신앙적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유대교의 인습적 지혜와 달리 예수의 하나님은 값없이, 조건 없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하나님도 그러합니다. 믿음을 통해 은총으로 의(義)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바로 복음의 진수입니다(로마서 3:24) 여기 믿음을 요구 조건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깨달음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바울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가 서로 만나게 됨을 뜻합니다. 이제 우리는 새 천년을 맞아 예수 닮기의 삶이 여행의 삶임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여행의 종착지는 권력과 돈을 독점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같은 목표는 이집트 바로 왕 체제의 삶이며, 바빌론 왕국의 삶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여행은 출애굽의 여행과 같고,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향하는 여행과 같습니다. 우리 여행의 종착점은 평화와 정의, 자유와 존엄이 이슬비처럼 내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여행은 앞에서 얘기했듯이 고단하고 어렵고, 괴로운 여행입니다. 그러기에 길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으려면, 시공을 초월해서 함께 해주시는 그리스도 예수 곧 부활의 예수를 항상 만나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 닮기와 그리스도 만나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이 여행을 그리스도 닮기 여행으로 보고, 이 여행에서 매번 높은 영적 단계로 나아간다고 고백했습니다.(고린도 후서 3:18) 교리의 베일, 교권의 베일을 벗고 그리스도를 직접 쳐다보면서 그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은 한 단계의 기쁨에서 다음 단계의 기쁨으로 향상하는 영적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와 죄의식 그리고 용서 사이를 개미 쳇바퀴 돌듯 왔다갔다하는 자학적이고 정체적인 삶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신나는 삶입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예수, 새로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만날 때마다 그리스도는 마치 처음 만나는 애인처럼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신학자 보그(Borg)가 고백했듯이 예수를 다시 만나면서도 처음 만나는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제 새 천년을 맞아 새길공동체는 항상 예수를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체험하면서 예수를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새롭게 만나, 그분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 곧 부활하신 예수의 영이 더욱 소중해지는 것은 예수의 비전을 실천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여 역사의 예수께서 세우시려 했던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우리는 새 천년을 맞아 더욱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천년을 맞는 우리의 각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적 예수를 만나게 해주는 신학, 곧 열린 예수 신학에 대해서 우리 공동체는 활짝 문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열린 예수 신학의 튼튼한 그릇에 우리의 뜨거운 신앙을 담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새길공동체는 새 천년을 견딜 수 있고 겨자씨 나물처럼 자랄 수 있고, 누룩처럼 천천히 그러나 아름답고 착실하게 개인과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말씀과 삶에 대한 열린 신학적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에게 더욱 끌리게 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성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깊게 해줄 것입니다. 여기서 신학과 신앙은 서로 도와주면서 개인도 공동체도 함께 자라게 할 것입니다. 예수 닮기 여행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일이요, 사랑의 나눔으로 공동체를 아름답게 자라게 하는 일입니다. 〈신학은 더 넓게, 신앙은 더 깊게〉라는 고백이 새 천년 〈새길〉의 화두가 되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신학교 운동의 사명자! /겔3:
신학교 운동의 사명자! /겔3: 2001-09-05 21:49:26 read : 66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인류의 구속 역사를 전개해 가고 계십니다. 세계사 속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계시대로,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놀라우신 뜻을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성취해 가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세우고 그 히브리 민족을 택하여 언약을 시행해 가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저버리고 떠나갈 때는 엄위하신 징치를 가해서라도 하나님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은혜의 날개 아래로 오라고 하시는 부르심,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깨닫게 해주는 성경 역사의 단적인 표현이요, 핵심 내용입니다. 구원에의 초청인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완전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죄인들은 이러한 영생의 진리를 모르고 멸망의 길로 침몰해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 총회 산하의 모든 지교회가 \'고려 신학교 주일\'로 정하여 지키는 날입니다. 주의 종들이 강단을 교류하며 고려 신학교 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명자로서의 각오를 다지는 메시지를 나누는 날입니다. 도도한 구원 역사의 강물에 뛰어든 우리 고려 신학교의 운동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아무도 거슬릴 수 없는 교회사적 대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에스겔에게 임한 하나님의 파수군된 사명을 중심으로 하여, 고려 신학교 운동의 중차대한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자\',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심중에 간직하고 수행해 나갈 은혜로운 삶의 제목인 것입니다. 1. 소명의 고려 신학교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반드시 합당한 사명자를 부르시는 \'소명(召命)\'으로 시작됩니다. 에스겔에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에게 주심으로 거룩한 임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악의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민 중에 있던 무력한 제사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그 시대의 파숫군으로 불러 세우셨습니다. 에스겔 1장 1절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전 597년 유다왕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그발 강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바르게 살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우상 숭배를 일삼고, 자의 자행하다가 결국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 왕국은 느부갓네살의 공격에 멸망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징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바벨론 포로지에서 하늘의 이상이 에스겔에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1:!)라고 함으로 여호와의 계시가 그에게 임한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특별히 임했습니다. 1장 3절에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소망의 선지자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 에스겔이 본 환상은 그룹 천사의 환상(1:4-28)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됨으로써 놀라운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1:28)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일어서라\'(2:1)는 것이었고,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2:7)하는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은 이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 전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한 두루마리 책을 받아먹는 장면(2:8-3:3)의 체험을 통해서 확신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본문 3장 17절에 이르러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칠 소명 즉 \'내 입의 말\'을 받게 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였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자녀들이 죄악 길에 빠져 멸망하는 것을 그냥 놔두시지 않고 그들을 깨우칠 시대의 파수자를 세워 외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을 깨우치라\'라는 명령은 결코 옛적 바벨론 포로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이 시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지시하시는 거룩한 임무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깨우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숫군은 적군의 침략을 경계하는 일을 맡거나, 도시 성곽 또는 타작 마당 같은 곳을 밤에 지키는 일을 맡은 자입니다.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책임을 맡아 수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에스겔은 \"그들을 깨우치라.\"는 절대 절명의 시대적 사명을 부여받고 그 책임을 22년간 수행하여 냈습니다. 회개와 심판을 선포하며, 패역한 백성을 각성케 함으로써 끊임없이 그들을 깨우친 것입니다. 또한 절망한 백성들에게 위로와 구원의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본문 17절부터 21절까지 계속해서 \'깨우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을 볼 때, 백성들을 깨우칠 사명이 막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깨우침은 바로 우리 고려 신학교가 받은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고려 신학교는 이 시대에 택자 구원의 파숫군을 양성할 학교로 소명을 받은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 파숫군된 고려 신학교 세상은 점점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종말의 때를 향하여 줄달음치고 있다고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에스겔이 외치던 바벨론 포로기보다도 결코 덜하지 않은 부패와 타락과 혼탁이 만연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불순 세력이 우리의 신앙 세계 안에도 날로 퍼져 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자칭하는 소위 의인 가운데도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여 저 영원한 천국을 저버린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마구잡이로 해석하여 인본주의로 떨어져 버린 자유주의자들, 성령 충만을 임의로 받아들이는 잘못된 신비주의자들, 예수님이 나의 현 생애 안락을 위해 시중들도록 하는 기복주의자들이 소위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횡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세속주의, 외식주의 등 우리가 깨우쳐야 할 대상들이 많은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파수, 이것이 우리 교단이 지향하며, 신학교가 길러내고자 하는 파숫군의 길입니다. 파수군된 고려신학교의 사명은 에스겔이 받은 파수군의 사명과 똑같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악인, 즉 불신자, 무신론자들을 깨우칠 사명(3:18-19)이고, 또 하나는 의인, 즉 자칭 의인이라 하나 신앙이 잘못되어 칭의의 의인이 아닌 자들을 깨우칠 사명(3:20-21)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세워 그 시대의 파숫군으로서 깨우치게 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1) 그것은 생명을 구원케 할 사명입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라 만일 하지 않으면 나와 그들이 모두 멸망하여 같이 죽게 되는 것임을 엄중히 경고하는 말입니다. 18절에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케 할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도의 의무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에스겔 33장 11절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먼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경고를 전할 사신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죄인의 죄상을 폭로하여 죄악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도록 깨우칠 전도자의 임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은 바벨 포로지에서 에스겔에게 명하셨듯이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생명 구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생의 존재 의미이며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하지 않으면 그들도 죽고 나도 또한 심판을 면치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깨우쳐도 돌이키지 않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전도를 했는데도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일단 우리의 책임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19절에 \'네가 그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죽어 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겨 구원의 기쁜 소식 예수 십자가를 증거 하였는데 상대방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거나 불택자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죽으리라\", \"돌이키라\"고 거듭 알리고 각성을 촉구하여도 듣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는 오래 참는 사랑의 마음으로 깨우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동역자 디모데에게 중단 없이 사역을 수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16)고 간곡히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택자인지 혹은 지옥에 갈 영원한 불택자일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구원받는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권하라\"(벧후 4:2)는 가르침대로 따르는 것뿐입니다. 2) 다음으로 의인들을 깨우칠 사명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다시 악을 행하면 안됩니다. 예수 구원의 은총을 입은 신자는 모든 죄와 악이 사해졌지만, 그 믿음을 지키며 성화의 생활을 해 가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생명, 나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파수하는 성스러운 의무입니다. 의인된 성도가 그의 거룩함과 깨끗함을 지켜 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문 20절에 \"또 그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을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더욱 엄중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며 다시 죄악에 빠져들지 않게 사는 일이 순교하기보다 어렵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며 서로 깨우쳐서 각종 시험과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경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첫번째의 전도하지 않은 죄와 같은 형벌, 모두 멸망하는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 하나님은 즉시 우리의 생명을 회수해 가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자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엄연히 우리 앞에 있다는 말입니다 . 이것은 우리들 삶의 최우선 과제이므로 잠시도 잊어버릴 수 없는 사명이며 \'깨우칠 일\'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께서 어리석은 부자에게 들려주신 비유의 음성을 다시금 새겨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마6:33) 신앙과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의인을 깨우쳐 살리는 사명을 계속해야 합니다 악인이 회개하여 주 앞으로 나아 오며, 의인의 악행을 각성시키는 일에 전파자의 사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령 운동은 교회 운동을 통하여 계속됩니다. 땅끝까지 예수 세계화 운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본문 21절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 성도의 축복 받을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지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고 영생 복락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2-23절에 이르기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확실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을 보존하며 살리는 생명 운동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가장 귀중한 성도의 사명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III.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 하나님을 떠난 죄악의 도상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현대인들은 멸망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습니다. 궁휼이 무한하신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세워 그 어두운 시대를 파수하게 하셨습니다. 죄를 심판하고 의에 축복을 선포하는 사명자의 길을 가도록 강하게 붙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파수군의 사명을 받은 주의 파숫군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파숫군된 성도는 그 자격을 갖추며 임무를 잘 수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보다 강건하고 견고하며 정직하고 근면한 믿음의 일군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성실함으로 은총의 옷을 입은 자답게 선한 일을 하여 빛되신 주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분별력도 있어야 하고, 창의력과 용기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종말의 시간 즉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과 생명이 너무나 허무하도록 짧은 것을 알려야만 합니다. 위험을 경고하여 하나님의 시간 안에 들어오도록 깨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파수군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즉시 보고하며, 필요한 보호책을 강구하고 방비하듯이 구원 복음의 전파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파숫군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파숫군이기는 하지만 주님은 특별히 복음 운동에 전 생애를 다 바쳐 헌신할 사명자들을 구별하여 세우십니다.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 운동이 바로 오늘과 내일의 이 땅에, 그리고 온 세상에 개혁주의 신앙을 파수할 사명자를 양성하는 운동입니다. 고려 신학교는 확실히 시대의 파숫군을 길러 내는 영적 용광로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총회 산하 모든 지교회의 기도와 지원과 협력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경건자의 훈련소, 순교자의 고장, 세계 선교의 센타, 예수 제자들이 일어나는 축복의 산실! 이것은 내일의 세계사를 떠맡을 고려 신학교의 별칭이 될 것입니다. 이미 고려 신학교 운동을 통해 배출된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개척하여 가면서도 모교의 운영을 분담하여 갈 뿐 아니라, 고려 신학교 후원회까지 설립하며 후배 양성에 나서고 있습니다. 오대양 육대주로 파송되어 나간 선교사들의 교회 운동은 고려 신학교 출신이 세계 선교의 기수가 됨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 십자가의 빨간 피를 수혈 받아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 선한 일,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자가 되는 일은 우리 고려 총회 산하 모든 지교회 성도들의 사명이자 책무입니다. 이미 고려 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는 교회는 더욱 박차를 가하여 고려 신학교가 한국과 아시아에서뿐 아니라 세계 굴지의 명문 신학교가 되도록 기도로 물질로 후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직 후원회가 조직 운영되지 못하는 교회에서는 맹렬히 기도하여 이 귀한 사명을 감당해 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에스겔을 그 시대의 파숫군으로 세우셨듯이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파숫군으로 세우셨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는 이미 복음 운동의 사명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주의 사역자를 양성할 사명자가 되어 효과적인 복음 선교를 지원할 축복의 기회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파숫군이 되지 못하더라도 선지 생도를 배출시켜 그 몫을 대신 담당케 할 수 있습니다. 신실하고 능력 있는 신학교 교수, 개혁주의 세계 교회 건설을 선도해 갈 신학교 운동의 후원자들이 각 지교회마다 쏟아져 나와야 하겠습니다. 고려 신학교는 참으로 예수 세계화 운동의 기수들을 훈련시켜내는, 목회자와 신학자와 선교사들을 산출시키는 오늘의 제네바 아카데미가 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은 우리 고려 총회가 받은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로 물질로 후원하여 참된 파숫군을 길러 낼 수 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가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자가 된 것을 기뻐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을 감당해 내는 축복이 넘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 아멘 -
신학교 운동의 사명자!/ 겔3:1-/ 2001-09-05
신학교 운동의 사명자! 겔3: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인류의 구속 역사를 전개해 가고 계십니다. 세계사 속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계시대로,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놀라우신 뜻을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성취해 가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세우고 그 히브리 민족을 택하여 언약을 시행해 가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저버리고 떠나갈 때는 엄위하신 징치를 가해서라도 하나님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은혜의 날개 아래로 오라고 하시는 부르심,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깨닫게 해주는 성경 역사의 단적인 표현이요, 핵심 내용입니다. 구원에의 초청인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완전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죄인들은 이러한 영생의 진리를 모르고 멸망의 길로 침몰해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 총회 산하의 모든 지교회가 \'고려 신학교 주일\'로 정하여 지키는 날입니다. 주의 종들이 강단을 교류하며 고려 신학교 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명자로서의 각오를 다지는 메시지를 나누는 날입니다. 도도한 구원 역사의 강물에 뛰어든 우리 고려 신학교의 운동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아무도 거슬릴 수 없는 교회사적 대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에스겔에게 임한 하나님의 파수군된 사명을 중심으로 하여, 고려 신학교 운동의 중차대한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자\',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심중에 간직하고 수행해 나갈 은혜로운 삶의 제목인 것입니다. 1. 소명의 고려 신학교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반드시 합당한 사명자를 부르시는 \'소명(召命)\'으로 시작됩니다. 에스겔에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에게 주심으로 거룩한 임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악의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민 중에 있던 무력한 제사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그 시대의 파숫군으로 불러 세우셨습니다. 에스겔 1장 1절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주전 597년 유다왕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그발 강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바르게 살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우상 숭배를 일삼고, 자의 자행하다가 결국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 왕국은 느부갓네살의 공격에 멸망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징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바벨론 포로지에서 하늘의 이상이 에스겔에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1:!)라고 함으로 여호와의 계시가 그에게 임한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특별히 임했습니다. 1장 3절에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소망의 선지자 에스겔은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 에스겔이 본 환상은 그룹 천사의 환상(1:4-28)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됨으로써 놀라운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1:28)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일어서라\'(2:1)는 것이었고,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2:7)하는 엄중한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은 이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 전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한 두루마리 책을 받아먹는 장면(2:8-3:3)의 체험을 통해서 확신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본문 3장 17절에 이르러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칠 소명 즉 \'내 입의 말\'을 받게 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였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자녀들이 죄악 길에 빠져 멸망하는 것을 그냥 놔두시지 않고 그들을 깨우칠 시대의 파수자를 세워 외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을 깨우치라\'라는 명령은 결코 옛적 바벨론 포로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이 시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지시하시는 거룩한 임무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깨우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숫군은 적군의 침략을 경계하는 일을 맡거나, 도시 성곽 또는 타작 마당 같은 곳을 밤에 지키는 일을 맡은 자입니다.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책임을 맡아 수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에스겔은 \"그들을 깨우치라.\"는 절대 절명의 시대적 사명을 부여받고 그 책임을 22년간 수행하여 냈습니다. 회개와 심판을 선포하며, 패역한 백성을 각성케 함으로써 끊임없이 그들을 깨우친 것입니다. 또한 절망한 백성들에게 위로와 구원의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본문 17절부터 21절까지 계속해서 \'깨우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을 볼 때, 백성들을 깨우칠 사명이 막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깨우침은 바로 우리 고려 신학교가 받은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고려 신학교는 이 시대에 택자 구원의 파숫군을 양성할 학교로 소명을 받은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I. 파숫군된 고려 신학교 세상은 점점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종말의 때를 향하여 줄달음치고 있다고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에스겔이 외치던 바벨론 포로기보다도 결코 덜하지 않은 부패와 타락과 혼탁이 만연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불순 세력이 우리의 신앙 세계 안에도 날로 퍼져 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자칭하는 소위 의인 가운데도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여 저 영원한 천국을 저버린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마구잡이로 해석하여 인본주의로 떨어져 버린 자유주의자들, 성령 충만을 임의로 받아들이는 잘못된 신비주의자들, 예수님이 나의 현 생애 안락을 위해 시중들도록 하는 기복주의자들이 소위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횡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세속주의, 외식주의 등 우리가 깨우쳐야 할 대상들이 많은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파수, 이것이 우리 교단이 지향하며, 신학교가 길러내고자 하는 파숫군의 길입니다. 파수군된 고려신학교의 사명은 에스겔이 받은 파수군의 사명과 똑같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악인, 즉 불신자, 무신론자들을 깨우칠 사명(3:18-19)이고, 또 하나는 의인, 즉 자칭 의인이라 하나 신앙이 잘못되어 칭의의 의인이 아닌 자들을 깨우칠 사명(3:20-21)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세워 그 시대의 파숫군으로서 깨우치게 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1) 그것은 생명을 구원케 할 사명입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라 만일 하지 않으면 나와 그들이 모두 멸망하여 같이 죽게 되는 것임을 엄중히 경고하는 말입니다. 18절에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케 할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도의 의무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에스겔 33장 11절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먼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지 않으면 죽으리라\'는 경고를 전할 사신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죄인의 죄상을 폭로하여 죄악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도록 깨우칠 전도자의 임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은 바벨 포로지에서 에스겔에게 명하셨듯이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생명 구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생의 존재 의미이며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하지 않으면 그들도 죽고 나도 또한 심판을 면치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깨우쳐도 돌이키지 않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전도를 했는데도 만약 회개치 않는다면 일단 우리의 책임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19절에 \'네가 그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죽어 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겨 구원의 기쁜 소식 예수 십자가를 증거 하였는데 상대방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거나 불택자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죽으리라\", \"돌이키라\"고 거듭 알리고 각성을 촉구하여도 듣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는 오래 참는 사랑의 마음으로 깨우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동역자 디모데에게 중단 없이 사역을 수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16)고 간곡히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택자인지 혹은 지옥에 갈 영원한 불택자일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구원받는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권하라\"(벧후 4:2)는 가르침대로 따르는 것뿐입니다. 2) 다음으로 의인들을 깨우칠 사명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다시 악을 행하면 안됩니다. 예수 구원의 은총을 입은 신자는 모든 죄와 악이 사해졌지만, 그 믿음을 지키며 성화의 생활을 해 가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생명, 나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파수하는 성스러운 의무입니다. 의인된 성도가 그의 거룩함과 깨끗함을 지켜 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문 20절에 \"또 그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을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더욱 엄중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며 다시 죄악에 빠져들지 않게 사는 일이 순교하기보다 어렵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악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며 서로 깨우쳐서 각종 시험과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경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첫번째의 전도하지 않은 죄와 같은 형벌, 모두 멸망하는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 하나님은 즉시 우리의 생명을 회수해 가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자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엄연히 우리 앞에 있다는 말입니다 . 이것은 우리들 삶의 최우선 과제이므로 잠시도 잊어버릴 수 없는 사명이며 \'깨우칠 일\'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께서 어리석은 부자에게 들려주신 비유의 음성을 다시금 새겨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마6:33) 신앙과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의인을 깨우쳐 살리는 사명을 계속해야 합니다 악인이 회개하여 주 앞으로 나아 오며, 의인의 악행을 각성시키는 일에 전파자의 사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령 운동은 교회 운동을 통하여 계속됩니다. 땅끝까지 예수 세계화 운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본문 21절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 성도의 축복 받을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지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고 영생 복락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2-23절에 이르기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확실한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을 보존하며 살리는 생명 운동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가장 귀중한 성도의 사명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III.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 하나님을 떠난 죄악의 도상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현대인들은 멸망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습니다. 궁휼이 무한하신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세워 그 어두운 시대를 파수하게 하셨습니다. 죄를 심판하고 의에 축복을 선포하는 사명자의 길을 가도록 강하게 붙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파수군의 사명을 받은 주의 파숫군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파숫군된 성도는 그 자격을 갖추며 임무를 잘 수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보다 강건하고 견고하며 정직하고 근면한 믿음의 일군이어야 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성실함으로 은총의 옷을 입은 자답게 선한 일을 하여 빛되신 주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분별력도 있어야 하고, 창의력과 용기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종말의 시간 즉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과 생명이 너무나 허무하도록 짧은 것을 알려야만 합니다. 위험을 경고하여 하나님의 시간 안에 들어오도록 깨우쳐야 하는 것입니다. 파수군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즉시 보고하며, 필요한 보호책을 강구하고 방비하듯이 구원 복음의 전파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파숫군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파숫군이기는 하지만 주님은 특별히 복음 운동에 전 생애를 다 바쳐 헌신할 사명자들을 구별하여 세우십니다.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 운동이 바로 오늘과 내일의 이 땅에, 그리고 온 세상에 개혁주의 신앙을 파수할 사명자를 양성하는 운동입니다. 고려 신학교는 확실히 시대의 파숫군을 길러 내는 영적 용광로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총회 산하 모든 지교회의 기도와 지원과 협력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경건자의 훈련소, 순교자의 고장, 세계 선교의 센타, 예수 제자들이 일어나는 축복의 산실! 이것은 내일의 세계사를 떠맡을 고려 신학교의 별칭이 될 것입니다. 이미 고려 신학교 운동을 통해 배출된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개척하여 가면서도 모교의 운영을 분담하여 갈 뿐 아니라, 고려 신학교 후원회까지 설립하며 후배 양성에 나서고 있습니다. 오대양 육대주로 파송되어 나간 선교사들의 교회 운동은 고려 신학교 출신이 세계 선교의 기수가 됨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 십자가의 빨간 피를 수혈 받아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 선한 일,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자가 되는 일은 우리 고려 총회 산하 모든 지교회 성도들의 사명이자 책무입니다. 이미 고려 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는 교회는 더욱 박차를 가하여 고려 신학교가 한국과 아시아에서뿐 아니라 세계 굴지의 명문 신학교가 되도록 기도로 물질로 후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직 후원회가 조직 운영되지 못하는 교회에서는 맹렬히 기도하여 이 귀한 사명을 감당해 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에스겔을 그 시대의 파숫군으로 세우셨듯이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파숫군으로 세우셨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는 이미 복음 운동의 사명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주의 사역자를 양성할 사명자가 되어 효과적인 복음 선교를 지원할 축복의 기회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파숫군이 되지 못하더라도 선지 생도를 배출시켜 그 몫을 대신 담당케 할 수 있습니다. 신실하고 능력 있는 신학교 교수, 개혁주의 세계 교회 건설을 선도해 갈 신학교 운동의 후원자들이 각 지교회마다 쏟아져 나와야 하겠습니다. 고려 신학교는 참으로 예수 세계화 운동의 기수들을 훈련시켜내는, 목회자와 신학자와 선교사들을 산출시키는 오늘의 제네바 아카데미가 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은 우리 고려 총회가 받은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기도로 물질로 후원하여 참된 파숫군을 길러 낼 수 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가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자가 된 것을 기뻐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고려 신학교 운동의 사명을 감당해 내는 축복이 넘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 아멘 -
신학의 생수/ 예루살렘도 그리심산도 아닌 곳/ 요4:11-21
신학의 생수/ 예루살렘도 그리심산도 아닌 곳 요4:11-21 최만자 요즈음 시대를 파라다임 전환의 시대라고 합니다. 파라다임이란 한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 혹은 행위를 결정하는 규범의 범례입니다. 전통이 위기를 맞는 것은 그 전통으로 오늘날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을 줄 수 없을 때이며, 그렇게 되면 그 전통은 의미를 잃으며 권위를 상실하게 되고 새로운 전통이 형성되어 집니다. 즉 지금의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신뢰하여온 전통적 가치기준들이 오늘의 삶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기 때문에 파라다임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파라다임을 바꾸게 하는 요인, 곧 해석학적 요인은 자연, 문화, 여성, 민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쉽게 이 말이 이해될 수 있는 예는 자연과의 관계 이해라고 봅니다. 즉 지금까지는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여 마음대로 개발하고 인간 중심으로 이용하여 온 관계였습니다. 그 결과 자연은 황폐하여졌고 인류는 생태계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연을 대상적인 물질로 보는 이해는 인류의 문제에 답을 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인격적이고 유기체적인 관계로 상호 존중하고 의존하는 관계로 정립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요즈음 종교간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도 기독교가 타종교에서도 배워야 한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기독교가 가장 우수한 혹은 인류 구원의 유일한 진리로 믿어온 신도들에게는 혼란스러운 말이 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로 믿어온 것은 서구세계의 기독교입니다. 따라서 제3세계의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면서 진리라는 것은 하나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또 진리라고 규정하는 것이나 지금까지 규정하여 온 것은 힘있는 집단 곧 지배집단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신학에 있어서도 선교라는 개념은 서구 자본주의와 서구문화의 토양에서 발전된 것으로서 기독교를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는 기독교왕국에서 자라난 승리주의 군사주의적 태도로서 기독교는 그러한 생각으로 제3세계에 군림하였던 것입니다. 서구에서 1000-1950년대까지(동방교회와 분리된 이후의 기독교) 로마 카톨릭교회와 구라파와 미국의 개신교회는 바로 그러한 기독교 왕국 형태의 선교 모델이었습니다. 그 교회관은 교회가 절대권을 가지며,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성과 속 분리의 철저한 이원론적 사고를 가지고서 세상은 망할 곳으로 무가치하게 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태도에서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였고 일차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고 세상에는 없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 - 교회 - 세상이라는 구조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의 개념과 구조이해가 바뀐 것은 1962년-1965년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2 바티칸 공의회에서 사회와 세상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 즉 세상은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곳으로 새롭게 교회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태도의 변화와, 1968년 개신교의 세계교회협의회(WCC) Upsala 대회에서 논의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o, Mission of God)의 신학에 의하여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세상이 중심이며 하나님은 세상 안에 계시고 그 세상을 사랑하시고 그 곳에서 직접 선교하고 계신다는 하나님 - 세상 - 교회라는 새로운 관계 이해를 정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는 교권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섬기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역사와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개입하는 신학에 의하여 평신도 사역이 부상되었고 평신도 신학이 발전하였습니다. 20세기 중엽 이후 역사는 경제적 가난과 정치적 억압으로 눌려 있던 제3세계의 민중의 자의식이 확대되었고, 남성지배에 눌렸던 여성들의 자기 인식이 새로워지면서 역사의 주체의식이 발로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회는 새로운 이해지평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3세계의 문화의 다양성, 그 경험의 다양성은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이해할 것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가 제국주의적 의식으로 자기 문화를 우월하게 교육시키면서 보잘 것 없고 원시적인 천박한 문화로 파괴하여 온 제3세계 문화에 대하여 이제는 그 태도를 회개하고 그 문화의 본질, 진리를 바르게 알고 그것과 대화하며 수용함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즉 자연과 유기체적 관계를 유지하여온 원주민의 영성은 오히려 인류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서는 더 우월한 가치를 제시하고 있으므로 원주민의 영성이 더 개발되고 확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과 억압 속에 고난의 경험과 실존적 삶의 다양한 경험을 가진 민중과 여성들의 영성이 오늘 세계를 살아갈 진리를 비추는 자원이 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학의 변화를 살펴 본 것은 이런 가치들의 변화를 맞으면서 그 변화의 동력과 원리가 무엇이며 변화시키는 본질과 그 기준이 무엇인가를 오늘의 성서본문과 연결하여 생각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신학의 파라다임의 전환은 교권주의 다시 말해 그 종교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하며 그 전환된 파라다임으로 온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본문은 요한복음 4장 1-42절의 전체 단락 가운데의 한 부분입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사마리아 지역의 선교의 문을 열었던 역사적 인물로 전승되어온 이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우리에게 가까운 것은 복음성가의 주인공이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사실 이 찬송을 부를 때 우리 자신도 이 세상에서 헛된 것을 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는 허망함과 오직 영원하신 주인이 주시는 생수가 나에게도 넘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됩니다. 인생이 언제나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소유할 수 없는 갈증 속에 사는 존재이기에 이 노래는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서 주시기를 간절히 갈망하게 됩니다. 또 대체로 이 본문은 그 여성이 도덕적으로 무질서한 생활을 하였고, 인생에 실패한 불행한 여자라고 하여 동정을 받았으며, 예수 때문에 비로소 새 삶을 얻게 되었다는 주의 은혜에 초점을 두고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여성은 그가 처한 삶의 조건들이 비록 비참한 것이었어도 의식과 지향은 고고하였고,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으며, 본질적인 물음과 그 해결을 소망하는 높은 차원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이 여성에게 집중하기보다는 본문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즉 사마리아와 유다의 갈등문제에 초점을 두고 이 이야기를 생각하려 합니다. 사마리아와 유다의 갈등은 매우 뿌리깊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은 신약성서 곳곳에서 보입니다. 원래 한 통일국가였던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죽은 후 기원전 922년 남북 왕국으로 분열됩니다. 북쪽 지역은 원래 사마리아지역의 세겜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곳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 12지파들이 야훼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지파동맹의 장소입니다. 요셉의 시신을 애굽에서 옮겨와 묻었던 곳도 세겜입니다. 이 곳은 계약백성의 성립과 그들 족장들에 대한 전승과 기억을 생생히 간직한 곳이며 북쪽 지방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세겜은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 계곡에 위치한 성읍으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면서 마지막 그리심산에서 율법을 지키는데 따르는 축복을 한 곳이라고도 합니다. 이 곳은 기원전 2,000년 경 가나안의 성읍 중 중요한 곳의 하나였으며,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처음 방문한 곳이고, 야곱은 이 땅을 사서 후손에게 주었습니다. 솔로몬 후 왕국이 둘로 나뉘어지는 역사에 여로보암 1세가 왕의 거주지로 삼은 첫번 성소이기도 합니다. 이 북쪽의 비극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왕국이 멸망당하면서 더 깊어졌습니다. 앗수르는 혼혈정책을 써서 이스라엘인 상류층을 앗수르로 이주시키고 앗수르인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혼합종족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절반만의 유대인이 되어 순수혈통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유대인이 부르는 것은 순수한 혈통을 갖지 못한 자들이란 경멸에 찬 호칭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의 노예보다 더 경멸하였다고 합니다. 이 앗수르의 포로정책은 기원전 587년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간 상황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빌론은 비록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갔지만 자치구역에서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포로기 동안에 오히려 민족의 역사와 신앙을 새롭게 정립하고 미래 역사를 위한 민족 공동체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빌론 포로와 다른 상황에서 고난을 당한 사마리아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동족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고통의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538년 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된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전재건과 새 역사의 건설에 사마리아인들을 철저하게 배제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격분하게 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허락으로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경전을 모세 오경 다섯권만으로 사용하여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이단인 유대교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제 유다와 사마리아는 완전한 종교분리의 상태가 되었으며, 기원전 135-104년(마카비 하스몬 왕조 중)에 유다는 그리심산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사마리아 성읍을 공격하여 무자비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마리아와 유다 사이의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고 요한복음이 쓰여진 1세기 말 경에도 두 지역의 관계는 악화의 상태였습니다. 유다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마리아인들은 증오에 차서 유대인들을 살해하였으며 유대인들은 그에 보복하는 악순환을 가졌다고 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근친증오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5절에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마가복음 6:7 이하와 누가복음 9:1 이하에는 사마리아 고을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마태가 써넣은 구절이라고 보아야 합니다)는 예수가 제자를 파송하면서 한 말인데 마태가 당시의 유대인의 상식을 써넣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가 나눈 대화는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만난 곳은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 바로 세겜지역입니다. 예수가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요구에 대하여 이 여성은 유다 남자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라고 도전적으로 질문합니다. 이 여성은 자기의 생애에 짓눌린 가련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유다 남자에게 도전하면서 사마리아와 유다의 갈등 문제를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도전적 모습입니다. 이 여인의 질문에는 유다 남자인 당신은 사마리아와 유다 간의 이 심각한 갈등문제를 알고 있습니까? 그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봅니까? 라는 동족증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쏟아 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은 조상 야곱을 들먹입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큰 분입니까? 이것은 비록 이렇게 처참히 나뉘어진 동족이지만 원래는 한 조상의 뿌리를 가졌던 것이 아닙니까? 라는 한 종족의 뿌리를 상기시키는 물음으로 보입니다. 분열된 지역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고 있는 처지의 여인, 성 차별과 종족 차별의 이중적 고난에 대한,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한 조상의 후손으로 함께 살아야 할 민족의 생명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는 물음입니다. 이제 다음의 관심은 예배드리는 장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질문합니다.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 것과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에 의하여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된 도시입니다. 원래 가나안 성읍으로 여부스족이 살고 있었던 곳입니다. 다윗은 그 곳을 점령하여 왕국의 수도로 삼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고 성막을 세워 다윗성이라 하였으며, 나중에 그 곳에 장사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그곳에 건축하였고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역이 되었습니다. 왕국이 분열된 이후에는 남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587년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멸망당하였다가 538년 파사와 고레스의 유대인 귀환정책에 힘입어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헬라시대, 마카비시대,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유대인들에게는 신성하고도 거룩한 도시로 계속 숭경되었습니다. 예루살렘주의(Zionism)는 유대인의 배타적이며 절대적 유대우월주의를 나타내는 종교 이데올로기의 극치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은 정말 유대로부터만 구원이 옵니까? 예루살렘만 신성한 곳입니까? 예루살렘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역시 도전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두 곳 모두 아닌데서 예배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하였습니다(4장 22절의 유대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표현은 후대의 삽입으로 봅니다). 여기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말은 어떤 내면적인 신앙이나 신비적인 신앙을 뜻하기보다는 오히려 유다적인 것의 더 근본적인 부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예수가 유대인을 비난할 때 ‘거짓‘으로 표시하는데 ‘영과 진리‘는 ‘거짓‘에 대비되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거짓에서 낳고, 진리를 말할 때 알아듣지 못하며, 자신들의 죄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는 말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참 실재, 자유롭게 하는 힘,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을 말합니다. 곧 유다의 거짓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참 실재를 만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는 영과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 됩니다. 그리심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곳 - 영과 진리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는 제도와 교권에 눌린 생명들의 해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에게는 숨쉬어야 할, 온전해야 할 생명들의 자유와 해방이 모든 것보다 우선적인 것이었고, 예수는 제도, 기구, 종교 이데올로기의 권력에 의한 모든 것은 참 종교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여인과의 대화에서 두 종교 이데올로기가 한 여성의 생명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어 놓았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온 사마리아인의 고난을 보았습니다. 성서에서 사마리아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 기자는 위선적인 유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허상을 고발하면서 예루살렘 종교 이데올로기가 죄인으로 규정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생명을 존중하며 깊은 인간애를 가지고 있는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면 예수는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새 삶의 역동성을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의 뒷부분에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예언자로 인지합니다. 이것은 그의 메시아 대망에 연결됩니다. 민족분단의 문제를 인식하고 가슴아파하고 그 해결을 소망하는 메시아에 대한 대망을 반영합니다. 메시아는 현재가 고달프고 힘든 사람들이 갈망합니다. 부자는 천국을 그리워하지 않지만 가난한 이들은 새 세상을, 천국을 매일 매 순간 그리워합니다. 인생을 풍요롭게 살맛나게 하는 것은 종교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종교가 교권, 제도, 교리 등에 한정될 때 그 속에 속한 공동체의 생명은 죽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지향이 생명 자체, 삶 자체일 때 그 속에 속한 모든 생명은 살아납니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바로 그 생명사랑을 봅니다. 기독교의 미래는 생명자체에 대한 연민, 진지한 관심, 삶의 본질에 대한 궁극적 응답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질 때에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 정체성의 위기를 호교론적으로 또는 배타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이 누르고 있는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악이 물러가고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위기는 극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과 눈물을 아는 그리고 삶과 영혼의 심연에서 분출되는 삶의 에너지를 볼 수 있을 때 기독교의 능력은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신학의 전환들은 바로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께서 보이신 그 생수로부터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리심산도 예루살렘도 다 부인하고 생명과 삶의 온전함을 생수의 근원으로 보는 예수에게 신학의 생수의 근원이 있습니다.
여성신학의 고민/ 에4:13-17
여성신학의 고민 에4:13-17 이경숙 교수 오늘은 제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서 세운 이화여성신학연구소에 관련하고 있는 만큼 여러분들과 함께 여성신학에 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에스더기를 중심으로 여성신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여성의 이름으로 된 책이 두 권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룻기이고 다른 책은 에스더기입니다. 룻기는 매우 소박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목가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반면 에스더기는 왕후 에스더가 민족을 구한다는 스케일이 좀 큰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에서는 룻기 보다는 에스더기가 더 많이 알려진 것 같은데 그것은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난 94년 3월 한일여성신학 Forum에서 일본에서는 에스더기에 관해서는 설교도 강독도 별로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에스더와 같은 인물이 필요한 상황이 없어서인지 에스더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한국 교회에서는 대부분의 여신도회를 에스더회로 칭하면서 교회 여성들이 모두 에스더와 같이 민족을 구하는 여성이 되기를 희망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일본 식민지 정책의 피해국과 가해국 사이에 존재하는 성서를 보는 입장의 커다란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에스더기의 내용을 한번 요약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이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127개 지방을 다스린지 3년만에 도성 수산에서 180일간에 이르는 큰 잔치를 베푸는 데서 시작합니다. 왕은 축제 분위기에 맞게 “와스디 왕후를 화관으로 단장시켜 모셔오라“고 분부를 내립니다. 왕은 아름다운 왕후를 백성과 대신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왕후 와스디는 어쩐 일인지 이를 거절하였고 왕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분노한 왕과 대신들은 대책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다른 일반 부녀자들에게 남편을 업신여기도록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할 것이므로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결국 왕은 와스디를 폐위하고 “남편이 자기 집을 주관하여야 한다“는 칙서를 각 지방의 글과 각 민족의 말로 써서 전국에 공포하였습니다. 그 후 와스디의 후계자를 뽑기 위해 전국에서 아름다운 처녀들을 뽑아 12달 동안 단장을 시켜 왕에게 들여보냅니다. 이 왕후 후보자 중에 모르드개라는 유다 관리의 사촌 누이동생 에스더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므로 모르드개가 그를 딸로 삼았습니다. 그녀는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단정하여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충고대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궁중에 들어가 결국 왕후가 되었습니다. 에스더가 궁전으로 들어 간 후 모르드개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적발하게 됩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이를 왕에게 고했고 왕의 암살 음모자들은 모두 처형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궁중실록에 기록되었습니다. 한편 페르시아 궁중에는 하만이라는 궁내 대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거만해서 자기에게 굽히고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미워하여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결심합니다. 하만은 왕에게 허락을 받아낸 후, 주사위(브르)를 던져서 나온 날짜인 12월 13일에 모든 유대인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하도록 결정하여 공포합니다. 여기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에게 청하여 유대민족을 구하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왕이 부르지 않을 때 왕에게 나아가면 그 사람은 사형에 처해지는 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에스더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이러한 모르드개의 요청을 수락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 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궁궐에 있다고 해서 왕후만이 유다 사람이 겪는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때에 왕후께서 입을 다물고 계시면, 유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라도 도움을 얻어서, 마침내는 구원을 받고 살아날 것이지만, 왕후와 왕후의 집안은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위협합니다. 에스더는 유대인들에게 3일 동안 자신을 위해 단식 기도를 드려줄 것을 요청하고는 자신도 단식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린 성경 본문대로 법을 어겨서라도 왕께 나아가서 민족을 위해 간언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왕은 갑자기 나타난 에스더의 등장을 기뻐하였고 모르드개는 예전에 왕 암살 음모자 적발사건 때문에 크게 상을 받았으며, 하만의 유대인을 전멸시키려는 계획은 폭로가 되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마련했던 장대에 하만 자신이 매달려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하만이 제비(브르)를 뽑아 결정한 12월 13일, 즉 유대인을 죽이려고 계획했던 날에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들의 원수를 갚았고, 큰 잔치를 베풀었으며, 그 후 매년 14일에는 브르 곧 제비를 뽑았음을 기념하여 이 날을 부림절이라고 칭하고 서로 선물을 교환하면서 모르드개의 업적을 기렸다는 것이 나옵니다. 이 에스더기의 내용은 아주 박진감 있고 또 드라마틱하고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만의 아들 10명을 죽이고, 수산 도성에서도 500명을 죽였고, 전국에서 7만 5천명을 죽였다는 얘기는 무척 통쾌하지만 잔인하고 또 원시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세속적이고 흥미 위주의 비종교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성서 속에 경전으로 포함되었는지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는 에스더기가 경전에 없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기는 페르시아 당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종교관과 종교적 상황을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가령 에스더기 4장 14절에서 “왕후께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다른데서라도 구원의 손길이 와서 유대인들 앞에 살 길이 열릴 것이오“라고 말하는 것은 페르시아 통치시대에도 유대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해 철저히 신뢰하였는가를 잘 반영해 주는 말입니다. 또 악한 적대자 하만의 계획이 자꾸 어긋나고 악인이 벌을 받고 착한 사람들이 상을 받는다는 이야기 전개도 그 당시 유대인들의 뿌리 깊은 신앙 내용을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그 당시 기리던 부림절 축제를 자신들의 민족의 역사, 해방의 역사와 결부시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데에 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이야기도 페르시아의 축제를 이스라엘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래 그들의 축제를 대부분 가나안이나 그 밖에 다른 이방 사회로부터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축제를 받아들일 때에 항상 자신들의 역사와 결부시켜 “이스라엘화“하는 작업을 합니다. 무교절 즉 유월절 축제는 출애굽 사건과 결부시켰고, 신년 축제는 시내산 계약 사건과, 장막절 축제는 가나안 땅 점령 사건과 결부시켰습니다. 아마도 부림절이라는 축제도 본래는 한 해의 “운“, “재수“를 뽑고 선물을 나누어 갖던 페르시아의 축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와서 살게 된 유대인들도 이 축제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이 축제를 자신들의 역사 이야기와 결부시키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브르“(제비)가 들어가는 “멋진 이야기“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미 존재하던 에스더의 이야기가 축제의 근거로 채택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대인들은 이방의 축제였던 부림절을 자신들의 해방과 구원의 역사에 결부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분석을 하면서도 여성의 입장에서 에스더기는 무언지 석연치 않은 점을 담고 있음을 보게 되며, 그것이 매우 곤혹스럽습니다. 에스더의 용기를 찬양하기에는 무언가 주저되는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는 부귀와 영화를 위해 자신이 유다 출신인 것을 속이고 왕비가 되었으며, 민족을 위해 왕에게 간청한 것도 자신의 판단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모르드개의 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유대민족의 해방을 가져온 것도 결국 에스더의 미모와 이로 인한 왕의 총애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스더가 결과적으로 민족을 구원하고 해방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무작정 그녀를 찬양하기는 힘든 점이 있습니다. 여자는 예뻐야 하고, 모르드개 같은 남성의 지시도 잘 따라 주어야 하며, 결과적으로는 민족을 죽음을 무릅쓰고 구해야 한다는 것이 에스더기가 여성들에게 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면 이것은 바로 남성들이 바라는 이상적 여성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순종적이고, 아름답고, 요령 있는 에스더 같은 여성은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는 큰 부담감을 주고 있습니다. 여성은 미모와 순종 그리고 애교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남성주의적이고 반여성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폐위가 된 와스디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술자리에 양념으로 등장할 것을 거부한 와스디는 폐위되고 전면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성 저자의 눈에 아주 고약한 여자로 보였기 때문이겠지요. 여성신학은 “예“ “아니오“를 분명히 말한 와스디를 훨씬 더 훌륭한 여성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교회와 남성들은 남성 중심적으로 여성들에게 일반적 역할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와스디의 폐위는 아직도 계속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여성신학의 고민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와스디처럼 자기 주장을 하고 폐위 당할 것인가 아니면 에스더처럼 기존 질서의 틀을 유지하면서 자기 주장을 조금씩 할 것인가의 선택입니다. 후자는 몹시 괴롭습니다. 언제나 폐위 당하는 일이 없이 여성 스스로 자신들의 일과 자리를 찾고 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여성신학은 노력하고 있습니다. 힘있는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의 역할과 일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평등하고 신실하게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 나가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어 나가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여자나 남자나 주인이나 종이나 모두 하나님의 계약의 동반자로서 모두 존귀한 존재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인간 해방의 희망과 비전은 여성신학이 현재 처해 있는 고민과 갈등 상황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력하고 앞서 나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여성을 우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새길교회 교인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운동/ 마10:1-15/ 고려신학교주일설교
예수님의 제자 운동 마10:1-15 오늘은 고려신학교 주일입니다. 고려신학교 주일은 우리 고려교단의 전 교회들이 교단의 직영 신학교인 고려신학교를 위하여 지키는 신학교주일입니다. 이런 신학교주일을 통하여 우리의 신학교인 고려신학교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기도를 모으기 위함입니다.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측 총회는 성도간의 불신법정 고소 문제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측 총회와 분리되었습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더라도(고전6:7).... 어찌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송사하느냐(고전6:6)....는 말씀을 버리고 고신측 총회는 재단 문제로 세상의 불신법정에 고소를 했고.... ”말씀대로 살자”고 ”반고소”를 부르짖던 분들은 고신측 총회와 분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고려교단이 가는 길이 옳은 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고(고전6장), 세상의 법정이 또한 증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법으로, 교회 안에서 해결하라」는 판결문으로 세상 법정에 고소를 제기한 사건들을 기각하여 돌려보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또한 고신측의 일부에서도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고려파 본래의 이념을 이어가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이런 정신으로 고려측 총회는 조직이 되었고, 고려신학교가 개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교단, 어느 신학교 못지 않게 순수한 이념으로... 숭고한 이념을 가진 교단이요, 신학교입니다. 그 이념대로 살아가느냐....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의 부분입니다. 신앙과 행위가 하나 되지 못한다면.... 우리 교단의 외침도 결국 헛구호에 그치고 마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숭고한 삶의 일환으로.... 우리 교단의 모든 지교회가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하여 신학교를 도움으로.... 우리 고려신학교는 수업료가 없고, 기숙사비가 없는 순수한 목회자 양성 기관으로 자리 매김을 해가고 있습니다. 본 교단의 지교회에 속한 자로서.... 복음 전파의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에 입문하게 되면, 다른 신학교와는 달리.... 돈 걱정 없이 선지 동산에서 수련에 몰두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교단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말로만 하고 있고, 아직 실천하지 못하는.... 수업료도 없고, 기숙사비도 없는 순수한 목회자 양성의 신학교를 우리 교단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직영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의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지교회가 나름대로 ”고려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후원금을 부담하기도, 특별 헌금을 하기도, 오늘 같이 고려신학교 주일을 지키기도 하여 신학교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교단 신학교와 교단 총회와 지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 되어 함께 가는 이 길을 통하여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고 땅끝까지 말씀이 전파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1: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먼저 자신이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깨달아야 합니다. 읽어도 읽어도 모르겠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서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들어서 깨달아야 합니다. 특별난 계시를 받았다는 엉뚱한 사람을 찾지 말고, 자신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에게 들어야 합니다. 들어도 들어도 모르겠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그대로 지켜 행하며 살아보세요. 지켜 행하는 가운데 삶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엉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엉뚱한 사람들이 엉뚱한 목회자를 만듭니다. 엉뚱한 목회자가 엉뚱한 성도, 엉뚱한 교회를 만듭니다. 엉뚱한 교회가 엉뚱한 진리를 만듭니다. 이 엉뚱한 진리가 엉뚱한 복음을 만듭니다. 엉뚱한 예수를 만듭니다. 엉뚱한 구원을 전파합니다. 이런 엉뚱한 일을 바로 잡기 위하여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어지고, 성도들의 삶 속에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져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는 일을.... 우리 고려교단이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고려신학교가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고려교단의 목회자들이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고신측은 이미 동질의 신앙이 될 수 없는 기장측과 강단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한 두 목사, 한 두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에 엉뚱한 진리, 엉뚱한 복음을 외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물론 잘못 할 수 있습니다. 도적으로,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런 기회를 맞아 목회자도, 성도들도 모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고려신학교가 가는 길은, 순교적 신앙을 계승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며, 경건과 학문의 조화를 이루는 신학교입니다. 여기서 신학교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고려신학교 교육의 10대 특징」을 살펴보면.... 1.자격 있는 소명자(召命子)의 입학허용 신학교는 소명의식이 투철하고 목회자로서의 기본자질인 대학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합니다. 신학의 성격상 건전한 신앙인격과 학문적 소양을 갖추어야 입학 할 수 있습니다. 2.전 학생의 생활관 공동생활(共同生活) 고려신학교 신학원의 목사 및 선교사 후보생이 되면 3년간 문산에 있는 아카데미 캠퍼스의 생활관에 입소하여 공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에 입소하여 금요일 오후 2시 퇴소까지 생활관을 떠날 수 없습니다. 3.전 학생의 숙식일체(宿食一切) 무료제공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에 입소하면 숙식일체가 무료 제공됩니다. 신학후원금으로 제공되는 이 식사는 하나님 나라의 참된 일꾼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성도들의 소망과 기도가 담겨있습니다. 4.최상의 혜택을 부여하는 특별장학생(特別裝學生)제도 고려신학교는 특별 장학생제도를 두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려)소속 교회에 시무 혹은 출석하는 후보생에 대하여 모든 교육비를 면제하는 제도입니다. 단, 학기말 성적이 평점 B학점 이상 유지되어야 합니다. 5.첨단시설의 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학교생활 고려신학교 도서관은 1994.7.4 증축공사가 마무리되었으며, 정보화 사회를 대비한 전산망을 구축하여 훌륭한 정보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매일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11시까지 이 도서관을 중심으로 학문활동을 하게 됩니다. 6.개혁주의(Calvinism) 신학체계의 교육과정(敎育課程) 운영 고려신학교는 종교개혁 정신으로 체계화된 개혁주의(칼빈주의) 신학을 전수합니다. 시대가 변해도 변치 않는 성경의 최대표현을 칼빈주의로 믿기 때문에 신학의 다양한 파고에 관계없이 정통 기독교 신학을 교육합니다. 그러면서도 실제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실천적 교육을 병행합니다. 7.경건(敬虔)과 봉사활동의 체질화(體質化) 지향 신학교육은 학문과 경건이 조화를 이루어, 이론과 실제가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아카데미 캠퍼스에는 매일 새벽기도회와 낮 경건회를 가지므로 경건을 연습하고 캠퍼스를 퇴소한 금요일부터 주일까지는 소속교회에서 봉사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회와 교회봉사는 학점을 부여합니다. 8.소속교회 당회와의 유기적 입체교육(立體敎育) 신학의 목적이 교회운동에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학교가 유기적으로 협조하여 전인적인 사명자를 양성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총회, 노회, 당회의 직접적인 관할하에 신학교육을 하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9.국내외 건전한 신학교와 정보(情報 )및 학술교류(學術交流) 복음 전파를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다양한 학술활동, 필요한 정보의 습득을 위하여 고려신학교는 문을 열고 있습니다. 교수 및 학생의 다양한 교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10.내일에 필요한 사명자 배출에 교단차원의 후원 대한에수교 장로회 총회(고려) 소속 각 지교회는 1년 예산의 3%를 신학교육을 위하여 지원하고 , 뜻 있는 교회마다 고려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하여 사랑의 연보를 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기 위한 교단의 뜨거운 기도가 신학교에 집중되어 새 역사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운동』 예수님은 12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예수님을 좇고(마16:24), 예수님을 배워서(마11:29), 예수님을 전하(마10:7), 예수님의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했습니다(마28:19-20).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 운동』은 직접 12 제자들을 부르시어 가르쳐 제자 삼으시고, 그 12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전하고 가르쳐 제자를 삼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운동』 이 땅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넒은 의미에서 모두 다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복음 운동에 전 생애를 다 바쳐 일하는 사명자를 세웠습니다. 바로 12 제자들(본문1절), 70인의 전도인입니다(눅10:1). 또한 사도 시대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를 세우는 사도 시대의 제자 운동으로 이어집니다(엡4:11). 『예수님의 제자 운동』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제자 운동은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주어진 주님의 지상 최후의 명령입니다(마28:19-20). 이 제자 운동은 작게는 지교회의 제자 운동이고, 크게 교단적인 제자 운동은 신학교를 통한 목회자 양성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특별히 복음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하는 제자 운동을 살펴보며, 신학교 주일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1.예수님이 먼저 불렀습니다 본문 1절/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예수님이 먼저 제자를 불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했습니다(요15:16). 예수님의 제자들, 특별히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는 이 점에 확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교는 「자격 있는 소명자(召命子)」가 가는 곳입니다. 내가 선택하여 가는 곳이 아닙니다. 더욱이 일반 대학에 떨어져 갈 곳이 없으니 ”신학교에나 가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열 두 제자들을 보세요.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던 베드로와 안드레를 불렀습니다(마4:18). 그물을 깁던 야고보와 요한을 불렀습니다(마4:21). 빌립을 부르시고(요1:43),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나다나엘(바돌로매)을 택하셨고(요1:50),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부르셨습니다(마9:9). 나머지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12 제자들 모두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고 했습니다(막3:13). 2.예수님이 권능을 주었습니다. 본문 1절/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귀신을 좇아내고, 병을 고치는 권능은 본래 예수님이 가지신 것입니다(마4:23). 이 예수님의 권능을 복음 전파를 위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복음 전파하러 나가서 이 권능을 행하였습니다(막6:13). 이 권능은 일시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막9:18), 성령이 임함으로 이 권능을 받아(행1:8) 사도들이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과 기사를 행했습니다(행2:43; 5:15; 9:40). 예수님이 이런 권능을.... 복음을 전파하러 나가는 제자들에게, 70인 전도인들에게 주셨습니다. 또 성령이 임하는 자가 이런 권능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행1:8). 이런 권능은 ”복음 전파”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런 권능을 받아 병원을 차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마9:12). 이적과 기사의 권능.... 우상숭배로 복음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권능 앞에 굴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방신의 권능은 절대적일 수 없으며 애굽에 내린 10 재앙 때처럼 흉내내다가 마침내 굴복하고 맙니다(출8:19). 이처럼 복음 전파를 위해 절대적 권능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는 절대적 권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구주를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권능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일 뿐입니다(롬12:4-11). 또 각자는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릅니다(롬12:6-8). 그런데, 오해하여 귀신을 좇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권능 곧 눈에 보이는 능력 행사가 진짜로 알고, 말하고, 믿는 것입니다. 3.예수님이 보냈습니다. 본문 5절/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먼저 부르시고, 함께 하시며 말씀과 삶을 통해 가르치시고, 감당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셔서, 이제 복음 전파자로 보내십니다. 자신이 준비해서 자신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내시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 거기에 권능까지 갖추게 하시어 보내십니다. 복음 전파자는 자신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시며 명하십니다. ①.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본문5-6절). 이스라엘의 구원이 먼저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복음 전파는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까지」라는 말씀입니다. ②.천국이 가까왔다 하라(본문7절). 복음의 내용으로 가장 중요한데, 구체적으로 일러주심이 없습니다. 이는 말로서, 삶의 본으로서 이미 다 일러주셨다는 것입니다. ③.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했습니다(본문8절).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본문10절). 그러나, 전대에 돈이나 양식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들)이나 지팡이(들)를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에서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고 했습니다(막6:8-9). 이를 종합하면 한 벌 옷 입고, 신 신고, 지팡이 하나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오늘의 한국 교회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 중에서 그 절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병자를 고쳐준다고 돈(헌금)을 요구합니다. 사례비 문제로 말썽입니다. ”원로목사”가 있습니다. 그 자격은 교단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視務)해야 합니다. ”원로목사”에게는 사례비를 매월 지급해야 합니다. 그래서, ”원로목사”가 되지 못하도록 20년을 못 채우게 일찍 은퇴시키려 하고, 또 20년을 채우려고 억지를 부리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가 그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또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서로가 잘 받아드리면 될 터인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돈 문제가 자꾸만 부정적으로 크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④.평안을 빌라고 했습니다(본문12절). 여기의 ”평안을 빌라”는 「문안하라」는 인사를 말합니다. 그 인사의 내용이 ”평안”을 비는 것입니다. 그 빈 ”평안”을 받기에 합당한 자에게 그 ”평안”이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평안”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없으면 되돌아온다고 했습니다(본문13절). 인사→ 축복→ 복 내림으로 되어 있습니다. ⑤.듣지 아니하거든 발에 먼지를 떨어 버리라(본문14절). 유대인들은 이방 나라의 먼지까지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본국으로 돌아올 때 발의 먼지를 떨어 버렸습니다. 복음을 받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방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말합니다(느5:13). 실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그렇게 했습니다(행13:5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운동』 예수님이 먼저 부르시고, 제자로 삼으시고, 함께 생활하시면서 교훈과 친히 본을 보이시는 삶을 통해서 가르쳤습니다. 권능을 주셔서 보냈습니다.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생활이 보장된 곳이 아닙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고 했습니다(마10:16).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 것입니다. 바로 사지(死地)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사지(死地)로 보내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했습니다. 돈주머니도 양식 부대도 갖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지(死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예수님이 주신 권능을 잘못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주신 권능인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주신 권능.... 그 권능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믿고 구원 얻는 자가 생겨나고,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빛을 더욱 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권능이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빛을 발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좋아라 좇아가다 사라지고 나면, 그 원망과 욕은 고스란히 예수님에게 돌아가고 맙니다. 특별난 은사, 특별난 계시를 받았다는 ”사막의 신기루”와 같은 엉뚱한 소리에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3: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이 말씀이 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남의 영혼을 인도하는 자도, 나의 영혼이 인도함을 받는 자도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읽고 넘어갈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한 목회자의 종말이 언제입니까? 가장 확실한 종말은 죽음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은퇴일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목회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목회자의 믿음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목회자가 떠나고 난 뒤에 들려오는 불미스러운 소리들.... 바로 이 말씀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인도하는 자나, 인도함을 받는 자 모두가 깊이 묵상해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운동』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이 먼저 부르시고, 제자로 삼으시고, 함께 생활하시면서 교훈과 친히 본을 보이시는 삶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권능을 주셔서 보내신 자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택하시고, 먼저 부르십니다. 제자가 먼저 선택하고, 스승을 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방법과 다릅니다. 학생이 학교를 선택하고, 학과를 선택하고, 스승을 선택하여 배우는 것이 세상입니다. 신학교는 세상 학문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전하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교는 『예수님의 제자 운동』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제자 운동의 산실인 신학교에.... 예수님이 먼저 선택이 아닌 자신이 예수님을 선택하고, 스승으로 삼는 이들이 늘어갑니다. 그래서 세상의 일반학교와 다를 바 없는 인재들을 배출(輩出)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목회하는 교회가 기업화되어 가고, 대형화되어 갑니다. ”사막의 신기루”를 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그 ”신기루”를 좇아가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예수님의 제자 운동』 예수님이 먼저 부르시고, 제자 삼으시는 운동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는 제자 운동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내 삶에서 제일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예수님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보다 ”먼저”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 최우선」입니다. 「예수님 최우선」으로 『예수님의 제자 운동』에 진력(盡力)을 다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고려신학교는.... / 딤전6:11-16/ 2009-09-09
우리 고려신학교는.... 딤전6:11-16 오늘은 고려신학교 주일입니다. 고려신학교 주일은 우리 고려교단의 전 교회들이 교단의 직영 신학교인 고려신학교를 위하여 지키는 신학교주일입니다. 이런 신학교주일을 통하여 우리의 신학교인 고려신학교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기도를 모으기 위함입니다.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측 총회는 성도간의 불신법정 고소 문제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측 총회와 분리되었습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더라도(고전6:7).... 어찌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송사하느냐는(고전6:6) 말씀을 버리고 고신측 총회는 재단 문제로 세상의 불신법정에 고소를 했고.... \"말씀대로 살자\"고 \"반고소\"를 부르짖던 분들은 고신측 총회와 분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고려교단이 가는 길이 옳은 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고(고전6장), 세상의 법정이 또한 증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법으로, 교회 안에서 해결하라」는 판결문으로 세상 법정에 고소를 제기한 사건들을 기각하여 돌려보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또한 고신측의 일부에서도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고려파 본래의 이념을 이어가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이런 정신으로 고려측 총회는 조직이 되었고, 고려신학교가 개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교단, 어느 신학교 못지 않게 순수한 이념으로... 숭고한 이념을 가진 교단이요, 신학교입니다. 그 이념대로 살아가느냐....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의 부분입니다. 신앙과 행위가 하나 되지 못한다면.... 우리 교단의 외침도 결국 헛구호에 그치고 마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숭고한 삶의 일환으로.... 우리 교단의 모든 지교회가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하여 신학교를 도움으로.... 우리 고려신학교는 수업료가 없고, 기숙사비가 없는 순수한 목회자 양성 기관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습니다. 본 교단의 지교회에 속한 자로서.... 복음 전파의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에 입문하게 되면, 다른 신학교와는 달리.... 돈 걱정 없이 선지 동산에서 수련에 몰두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교단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말로만 하고 있고, 아직 실천하지 못하는.... 수업료도 없고 , 기숙사비도 없는 순수한 목회자 양성의 신학교를 우리 교단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직영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의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지교회가 나름대로 \"고려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후원금을 부담하기도, 특별 헌금을 하기도, 오늘 같이 고려신학교 주일을 지키기도 하여 신학교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교단 신학교와 교단 총회와 지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 되어 함께 가는 이 길을 통하여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고 땅끝까지 말씀이 전파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1: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먼저 자신이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깨달아야 합니다. 읽어도 읽어도 모르겠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서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들어서 깨달아야 합니다. 특별난 계시를 받았다는 엉뚱한 사람을 찾지 말고, 자신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에게 들어야 합니다. 들어도 들어도 모르겠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그대로 지켜 행하며 살아보세요. 지켜 행하는 가운데 삶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엉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엉뚱한 신학교의 엉뚱한 사람들이 엉뚱한 목회자를 만듭니다. 엉뚱한 목회자가 엉뚱한 성도, 엉뚱한 교회를 만듭니다. 엉뚱한 교회가 엉뚱한 진리를 만듭니다. 이 엉뚱한 진리가 엉뚱한 복음을 만듭니다. 엉뚱한 예수를 만듭니다. 엉뚱한 구원을 전파합니다. 이런 엉뚱한 일을 바로 잡기 위하여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어지고, 성도들의 삶 속에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져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는 일을.... 우리 고려교단이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고려신학교가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고려교단의 목회자들이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고신측은 이미 동질의 신앙이 될 수 없는 기장측과 강단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한 두 목사, 한 두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에 엉뚱한 진리, 엉뚱한 복음을 외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물론 잘못 할 수 있습니다. 도적으로,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런 기회를 맞아 목회자도, 성도들도 모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고려신학교는....』 우리 성도들의 신학교입니다. 우리 교회의 신학교이고, 우리 교단의 신학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신학교가 됩니다. 이런 친밀감을 가지고,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기도와 물질로 도와야 합니다. 신학교에 대한 교단 내의 모든 교회의 사랑과 관심을 모으기 위해 지키는 신학교주일입니다. 『우리 고려신학교는....』 하나님의 사람 곧 복음 전도자를 양성하는 선지 동산입니다. 그 복음 전도자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하는 도장(道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의 무기는 경건입니다. 그래서, 그 경건한 삶을 수련하는 수도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이런 내용을 살펴보고져 합니다. 1.하나님의 사람을 양성하는 선지 동산 본문 11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아!」하고 사도 바울이 부르는 사람은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입니다(딤전1:3). \"하나님의 사람\"은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신명기 33:1절에 모세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삼상 9:8절에 사무엘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왕상 17:18절에 엘리야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왕하 4:7절에 엘리사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 무명의 선지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왕상13:1). 그리고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7).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대체적으로 선지자나 복음 전도자를 가리킵니다만, 꼭 특별한 직분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넓게 성도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세상에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나가는 데는 성도들의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사람」에게 오늘 본문에서 네 가지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첫째 「이것들을 피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것,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딤전6:4-10). 이런 명령은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에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둘째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합니다. 셋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넷째 「영생을 취하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고려신학교는....』 「하나님의 사람」을 양성하는 선지 동산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옵니다. 멀리는 교단 선교사들의 사역지인 외국의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찾아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찾아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성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사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디모데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네 가지 명령을 통해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2.선한 싸움을 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하는 도장(道場) 본문 12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여기의 \"싸움\"과 \"싸우라\"는 다른 단어이나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싸움[아곤(ajgwvn)]\"은.... \"경주, 경쟁, 투쟁, 싸움\"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으로 믿음/거룩/복음 전파의 열망에 장애물이 되는 고난/환난/핍박을 이겨내는 것을 말합니다. 외적인 투쟁뿐만 아니라 내적 투쟁을 말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여기의 \"싸우라[아고니조마이(ajgwnivzomai)]\"는.... \"싸움[아곤(ajgwvn)]\"에서 온 말로, \"투쟁하다, (상 위해) 싸우다, (무엇 이루려) 노력하다, 힘쓰다\"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은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복음 전파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상을 받기 위해서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것입니다(히12:1).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여기서 말하는 \"이를\"은.... 하나님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곧 앞에서 말씀드린 네 가지 명령입니다. 소극적인 면에서 피해야 할 것과 적극적인 면에서 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곧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고, 돈을 사랑하고....「이것들을 피하라」고 합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영생을 취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고려신학교는....』 선한 싸움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하는 도장(道場)입니다. 도장(道場)은 무예를 닦는 곳으로 선수를 길러내는 곳입니다. 곧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힘차게 달려가는 자」입니다(히12:1-2; 빌3:12-14). 이런 복음의 경주자를 양성하고 훈련하는 도장이 신학교입니다. 3.경건한 삶을 수련하는 수도원 본문 11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여기의 \"경건[유세베이아(eujsevbeia)]\"은.... \"경건, 거룩, 하나님을 두려워함, 신앙심이 깊음\"을 뜻합니다. 곧 경건은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방식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의 미덕입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의 「다른 교훈」을 좇은 삶의 방식과 대조적입니다(딤전6:3).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참된 경건의 유익을 외면합니다. \"경건[유세베이아(eujsevbeia)]\"의 유익은.... 딤전 4:8절에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경건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참으로 방대합니다. \"범사에\"라고 함으로 모든 일에 미치고 있습니다. \"금생과 내생에\"라고 함으로 효력이 영원합니다. 그래서, \"비밀\"이라고 했습니다(딤전3:16).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외형적인 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같은 옷차림이나, 기도, 예배는 외식(外飾)으로 예수님의 질책을 듣습니다. 또 도덕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의와 거룩은 경건이 아닙니다.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입니다(딤후3:5). 참된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딤전3:16). 본문 1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여기의 \"나타나실[에핍하네이아(ejpifavneia)]\"은.... \"현현, 출현, 강림\"을 뜻하며, 갑자기 도적같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지난 주일에 살펴본 재림[파루시아(parousiva)]\"이란 말이 사용됩니다. 이 재림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명령 곧 계명을 지키는 마음으로 경건한 삶을 살라는 명령입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고려신학교는....』 하나님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경건자를 수련하는 도장(道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경건한 삶으로 수련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먼저 경건자가 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경건자에게서 경건한 삶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경건한 삶.... 이것은 강조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더욱 좋습니다. 경건을 수련하는 도장(道場)에서 경건을 수련했다고 해서 모두가 다 경건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고 이용하는 거짓 일군들도 다 나름대로 경건을 수련하고 쌓았습니다. 상대적으로 함량미달인 것입니다. 딤전 4: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여기의 \"연습하라[귐나조(gumnavzw)]\"는.... \"훈련하다, 연단하다, 운동하다\"를 뜻합니다. \"벌거벗은[귐노스(gumnov\")]\"이란 말에 왔습니다. 운동하기 위해 옷을 벗고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건한 삶에 전념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국가 대표 선수들이 선수촌에 들어가 올림픽의 메달을 위해 훈련하되, 견디지 못해 탈출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여기에서 \"연습하라[귐나조(gumnavzw)]\"는.... 현재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건한 삶의 수련은 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연습을 게을리하거나 중단하면 쌓아놓았던 실력도 잃어버립니다. 경건의 연습/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사람/목회자가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목회자의 타락으로 인하여 주의 몸된 교회가 세상에서 비난과 조롱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지도자가 타락하면 교회도 타락하게 됩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교회의 타락은 더해 갑니다. 오늘의 교회상도 경건의 모습을 자꾸만 잃어가고 있습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훈련해야 합니다. 주님 맞이할 그날까지 연습/훈련해야 합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연습/훈련해도 경건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새 하늘, 새 땅에서 우리 성도들의 영화(榮華)가 이루어짐으로 경건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고려신학교는....』 「하나님의 사람」을 양성하는 선지 동산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을 선한 싸움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하는 도장(道場)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사람/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경건자가 되도록 경건한 삶을 수련하는 수도원입니다. 그래서, 월요일 저녁에 입소하여 금요일까지 신학교의 캠퍼스 안에서 경건을 연습/훈련하는 생활하게 됩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목회자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는 직접적으로는 목회자인 디모데를 가리킵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 성도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 모두는 경건한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경건한 삶 속에서 재림을 고대하라고 했습니다(벧후3:11).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딤전4:8). 경건은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과 같은(마6:20), 저 영원한 천국을 위한 투자입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의 연습/훈련은 금생(今生)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생(來生) 곧 저 영원한 천국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로, 말씀 묵상으로, 예배로, 경건한 형제들과의 교제로 경건한 삶을 이룩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경건한 삶에 전념하시어, 주님 맞이하시는 그날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내생(來生)에 약속하신 복락(福樂)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고려신학교는.... / 딤전6:11-16/ 2009-09-09
우리 고려신학교는.... 딤전6:11-16 오늘은 고려신학교 주일입니다. 고려신학교 주일은 우리 고려교단의 전 교회들이 교단의 직영 신학교인 고려신학교를 위하여 지키는 신학교주일입니다. 이런 신학교주일을 통하여 우리의 신학교인 고려신학교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기도를 모으기 위함입니다.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측 총회는 성도간의 불신법정 고소 문제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측 총회와 분리되었습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더라도(고전6:7).... 어찌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송사하느냐는(고전6:6) 말씀을 버리고 고신측 총회는 재단 문제로 세상의 불신법정에 고소를 했고.... \\\"말씀대로 살자\\\"고 \\\"반고소\\\"를 부르짖던 분들은 고신측 총회와 분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고려교단이 가는 길이 옳은 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고(고전6장), 세상의 법정이 또한 증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법으로, 교회 안에서 해결하라」는 판결문으로 세상 법정에 고소를 제기한 사건들을 기각하여 돌려보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또한 고신측의 일부에서도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 고려파 본래의 이념을 이어가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 이런 정신으로 고려측 총회는 조직이 되었고, 고려신학교가 개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교단, 어느 신학교 못지 않게 순수한 이념으로... 숭고한 이념을 가진 교단이요, 신학교입니다. 그 이념대로 살아가느냐....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의 부분입니다. 신앙과 행위가 하나 되지 못한다면.... 우리 교단의 외침도 결국 헛구호에 그치고 마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숭고한 삶의 일환으로.... 우리 교단의 모든 지교회가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하여 신학교를 도움으로.... 우리 고려신학교는 수업료가 없고, 기숙사비가 없는 순수한 목회자 양성 기관으로 자리 매김을 하였습니다. 본 교단의 지교회에 속한 자로서.... 복음 전파의 사명감을 가지고 신학에 입문하게 되면, 다른 신학교와는 달리.... 돈 걱정 없이 선지 동산에서 수련에 몰두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교단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말로만 하고 있고, 아직 실천하지 못하는.... 수업료도 없고 , 기숙사비도 없는 순수한 목회자 양성의 신학교를 우리 교단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직영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의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지교회가 나름대로 \\\"고려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후원금을 부담하기도, 특별 헌금을 하기도, 오늘 같이 고려신학교 주일을 지키기도 하여 신학교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교단 신학교와 교단 총회와 지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 되어 함께 가는 이 길을 통하여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아름다운 삶이 이루어지고 땅끝까지 말씀이 전파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1: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 먼저 자신이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깨달아야 합니다. 읽어도 읽어도 모르겠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서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들어서 깨달아야 합니다. 특별난 계시를 받았다는 엉뚱한 사람을 찾지 말고, 자신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에게 들어야 합니다. 들어도 들어도 모르겠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그대로 지켜 행하며 살아보세요. 지켜 행하는 가운데 삶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엉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엉뚱한 신학교의 엉뚱한 사람들이 엉뚱한 목회자를 만듭니다. 엉뚱한 목회자가 엉뚱한 성도, 엉뚱한 교회를 만듭니다. 엉뚱한 교회가 엉뚱한 진리를 만듭니다. 이 엉뚱한 진리가 엉뚱한 복음을 만듭니다. 엉뚱한 예수를 만듭니다. 엉뚱한 구원을 전파합니다. 이런 엉뚱한 일을 바로 잡기 위하여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어지고, 성도들의 삶 속에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져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는 일을.... 우리 고려교단이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고려신학교가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고려교단의 목회자들이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고신측은 이미 동질의 신앙이 될 수 없는 기장측과 강단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한 두 목사, 한 두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에 엉뚱한 진리, 엉뚱한 복음을 외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물론 잘못 할 수 있습니다. 도적으로,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런 기회를 맞아 목회자도, 성도들도 모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고려신학교는....』 우리 성도들의 신학교입니다. 우리 교회의 신학교이고, 우리 교단의 신학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신학교가 됩니다. 이런 친밀감을 가지고,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기도와 물질로 도와야 합니다. 신학교에 대한 교단 내의 모든 교회의 사랑과 관심을 모으기 위해 지키는 신학교주일입니다. 『우리 고려신학교는....』 하나님의 사람 곧 복음 전도자를 양성하는 선지 동산입니다. 그 복음 전도자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하는 도장(道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의 무기는 경건입니다. 그래서, 그 경건한 삶을 수련하는 수도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이런 내용을 살펴보고져 합니다. 1.하나님의 사람을 양성하는 선지 동산 본문 11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아!」하고 사도 바울이 부르는 사람은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입니다(딤전1:3). \\\"하나님의 사람\\\"은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신명기 33:1절에 모세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삼상 9:8절에 사무엘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왕상 17:18절에 엘리야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왕하 4:7절에 엘리사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 무명의 선지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왕상13:1). 그리고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7).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대체적으로 선지자나 복음 전도자를 가리킵니다만, 꼭 특별한 직분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넓게 성도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 세상에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나가는 데는 성도들의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사람」에게 오늘 본문에서 네 가지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첫째 「이것들을 피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것,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딤전6:4-10). 이런 명령은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에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둘째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합니다. 셋째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넷째 「영생을 취하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고려신학교는....』 「하나님의 사람」을 양성하는 선지 동산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옵니다. 멀리는 교단 선교사들의 사역지인 외국의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찾아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찾아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성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사무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사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디모데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네 가지 명령을 통해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2.선한 싸움을 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하는 도장(道場) 본문 12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여기의 \\\"싸움\\\"과 \\\"싸우라\\\"는 다른 단어이나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싸움[아곤(ajgwvn)]\\\"은.... \\\"경주, 경쟁, 투쟁, 싸움\\\"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으로 믿음/거룩/복음 전파의 열망에 장애물이 되는 고난/환난/핍박을 이겨내는 것을 말합니다. 외적인 투쟁뿐만 아니라 내적 투쟁을 말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여기의 \\\"싸우라[아고니조마이(ajgwnivzomai)]\\\"는.... \\\"싸움[아곤(ajgwvn)]\\\"에서 온 말로, \\\"투쟁하다, (상 위해) 싸우다, (무엇 이루려) 노력하다, 힘쓰다\\\"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은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복음 전파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상을 받기 위해서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것입니다(히12:1).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여기서 말하는 \\\"이를\\\"은.... 하나님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곧 앞에서 말씀드린 네 가지 명령입니다. 소극적인 면에서 피해야 할 것과 적극적인 면에서 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곧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고, 돈을 사랑하고....「이것들을 피하라」고 합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영생을 취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고려신학교는....』 선한 싸움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하는 도장(道場)입니다. 도장(道場)은 무예를 닦는 곳으로 선수를 길러내는 곳입니다. 곧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힘차게 달려가는 자」입니다(히12:1-2; 빌3:12-14). 이런 복음의 경주자를 양성하고 훈련하는 도장이 신학교입니다. 3.경건한 삶을 수련하는 수도원 본문 11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여기의 \\\"경건[유세베이아(eujsevbeia)]\\\"은.... \\\"경건, 거룩, 하나님을 두려워함, 신앙심이 깊음\\\"을 뜻합니다. 곧 경건은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방식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의 미덕입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의 「다른 교훈」을 좇은 삶의 방식과 대조적입니다(딤전6:3).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참된 경건의 유익을 외면합니다. \\\"경건[유세베이아(eujsevbeia)]\\\"의 유익은.... 딤전 4:8절에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경건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참으로 방대합니다. \\\"범사에\\\"라고 함으로 모든 일에 미치고 있습니다. \\\"금생과 내생에\\\"라고 함으로 효력이 영원합니다. 그래서, \\\"비밀\\\"이라고 했습니다(딤전3:16).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외형적인 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같은 옷차림이나, 기도, 예배는 외식(外飾)으로 예수님의 질책을 듣습니다. 또 도덕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의 의와 거룩은 경건이 아닙니다.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입니다(딤후3:5). 참된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딤전3:16). 본문 1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여기의 \\\"나타나실[에핍하네이아(ejpifavneia)]\\\"은.... \\\"현현, 출현, 강림\\\"을 뜻하며, 갑자기 도적같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지난 주일에 살펴본 재림[파루시아(parousiva)]\\\"이란 말이 사용됩니다. 이 재림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명령 곧 계명을 지키는 마음으로 경건한 삶을 살라는 명령입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고려신학교는....』 하나님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경건자를 수련하는 도장(道場)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경건한 삶으로 수련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먼저 경건자가 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경건자에게서 경건한 삶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경건한 삶.... 이것은 강조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더욱 좋습니다. 경건을 수련하는 도장(道場)에서 경건을 수련했다고 해서 모두가 다 경건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고 이용하는 거짓 일군들도 다 나름대로 경건을 수련하고 쌓았습니다. 상대적으로 함량미달인 것입니다. 딤전 4: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여기의 \\\"연습하라[귐나조(gumnavzw)]\\\"는.... \\\"훈련하다, 연단하다, 운동하다\\\"를 뜻합니다. \\\"벌거벗은[귐노스(gumnov\\\")]\\\"이란 말에 왔습니다. 운동하기 위해 옷을 벗고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건한 삶에 전념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국가 대표 선수들이 선수촌에 들어가 올림픽의 메달을 위해 훈련하되, 견디지 못해 탈출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여기에서 \\\"연습하라[귐나조(gumnavzw)]\\\"는.... 현재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경건한 삶의 수련은 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연습을 게을리하거나 중단하면 쌓아놓았던 실력도 잃어버립니다. 경건의 연습/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사람/목회자가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목회자의 타락으로 인하여 주의 몸된 교회가 세상에서 비난과 조롱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지도자가 타락하면 교회도 타락하게 됩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교회의 타락은 더해 갑니다. 오늘의 교회상도 경건의 모습을 자꾸만 잃어가고 있습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훈련해야 합니다. 주님 맞이할 그날까지 연습/훈련해야 합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연습/훈련해도 경건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새 하늘, 새 땅에서 우리 성도들의 영화(榮華)가 이루어짐으로 경건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고려신학교는....』 「하나님의 사람」을 양성하는 선지 동산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을 선한 싸움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하는 도장(道場)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사람/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경건자가 되도록 경건한 삶을 수련하는 수도원입니다. 그래서, 월요일 저녁에 입소하여 금요일까지 신학교의 캠퍼스 안에서 경건을 연습/훈련하는 생활하게 됩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목회자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는 직접적으로는 목회자인 디모데를 가리킵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 성도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 모두는 경건한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경건한 삶 속에서 재림을 고대하라고 했습니다(벧후3:11).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딤전4:8). 경건은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과 같은(마6:20), 저 영원한 천국을 위한 투자입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의 연습/훈련은 금생(今生)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생(來生) 곧 저 영원한 천국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로, 말씀 묵상으로, 예배로, 경건한 형제들과의 교제로 경건한 삶을 이룩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경건한 삶에 전념하시어, 주님 맞이하시는 그날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내생(來生)에 약속하신 복락(福樂)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곱 촛대와 일곱 별/계1:9-20/고려신학교주일설교/2003-03-14
일곱 촛대와 일곱 별 계1:9-20 예수님의 제자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거 때문에 목회지 에서 쫓겨나 밧모라는 섬으로 정배를 당하였습니다. 절해고도의 채석장에서 채석광으로 일하는 그에게 주의 날인 어느 한날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일곱별을 그 손에 붙들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위엄 있는 주님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현재적 교회 모습과 장차 될 일을 보여 주시며 그것을 기록하여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려신학교 주일을 맞이하며 주님께서 일곱 별을 붙들고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모습을 생각하며 일곱 촛대와 일곱 별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받고 신학교 운동에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기 원합니다. Ⅰ.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뜻합니다(20)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라는 말씀은 사도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 속에서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으로 들은 것이며 그것은 일곱 교회 곧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금 촛대는 맨 처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성막을 계시 받고 그 성막 안에 만들어 비치한 금등대를 가리킵니다. 그 금등대는 금 한달란트(34㎏)로 만들어졌으며 일곱 개의 불을 밝힐 수 있는 등잔 일곱을 얹은 한 등대입니다(출 37:17~24).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여 성전 안의 좌우에 각 다섯씩 정금 등대를 두었습니다(왕상 7:49). 그러나 유다의 범죄로 바벨론에 의해 성전은 파괴되었고 성전기물들은 전부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그후 70년이 지난 후 유다가 다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려 함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성전 건축의 메세지를 전하게 하였고 그 때에 환상으로 보여준 것이 역시 순금 등대입니다(슥 4:1~10). 이러한 금 등대 금 촛대에는 성전이 있을 당시는 세상의 빚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오신 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이 땅에 신약교회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예수님은 일곱 촛대를 일곱 교회로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라는 일곱의 의미는 완전성, 거룩성, 영원성을 나타내는 영적인 수이며 하나님 자신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교회를 금 촛대에 비유함은 ① 어두운 세상에 빛을 공급함이며((마 5:14~16) ② 금의 보배로움과 불변의 가치 및 절대적 가치를 뜻하여, 교회 없는 세계의 무가치성을 보여줍니다. ③ 뿐만 아니라 교회는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동질이요 순수하며 불변함을 보여주는 순수한 동질의 공동체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의 모습은 지상의 모든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Ⅱ.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를 뜻하고 있습니다(20)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라는 말씀에서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가리킵니다. 일곱 별인 교회의 사자는 1. 예수님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는 자들입니다(16, 2:1) 이는 주의 사자는 주님의 손에 의해 다스림 받고 주님의 수중에서 통치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오른손에 붙잡혀 사는 것은 힘있는 손으로서 주의 교회의 사역자는 주의 힘있는 손에 붙잡힌 주의 힘으로 일하는 자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 주의 사자를 별이라 하였습니다. 1) 별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서 고공에서 빛나는 영광의 산물입니다(창 1:14~19). 2)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 안의 선택된 사람들입니다(창 22:17). 3) 별이 그 궤도를 따라 움직이듯 하나님의 권능의 손안에 붙잡혀 있는 자입니다. 4) 누구나 우러러보아야 하는 고매하고 이상적 존재들입니다. 5) 발광체로서 뜨거운 존재인 별같이 성령의 열정적 뜨거움을 가슴에 담은 자들입니다. 6)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7) 캄캄한 밤하늘에 갈 길과 시점을 알려주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세상을 밝게 비취는 금 촛대와 같습니다. 주의 사자는 교회 속에서 그 갈 길과 할 일을 제시하는 별과 같은 자입니다. 참된 주의 사자 없이는 교회가 교회답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의 사자가 힘있게 일하는 역사에는 그 세계가 밝히 빛이 났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를 억압하는 역사는 그 세계가 어두움의 세계였습니다. 지금도 세계는 극명하게 그 명암을 드러내어 놓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창조적인 소수가 역사를 움직인다" 라고 하였으며 “사도 바울을 싣고 간 배는 유럽을 싣고 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주의 사자의 양성은 신학교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고려신학교야 말로 이 시대 속에 참된 주의 사자를 양성하는 기관입니다. 우리는 이 학교를 위하여 기도하고 헌금하고 협력하여 이 시대 속에 빛나는 별들을 크게 키우기에 전력해야 합니다. 진정한 주의 사자 양성에 오늘의 교회가 크게 힘써 교회가 교회로서 바른 일을 더 잘하는 복을 받기 원합니다.
정복신학/ 삿1:1-2/ 2003-10-09
정복신학 삿1:1-2 가나안 정복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들어있다. 그것은 단순히 땅을 차지하는 \'땅 빼앗기 싸움\' 수준이 아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좋아하시는 것도 역시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1. 언약의 발전 여기에는 구속사(救贖史)가 깊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 창세기 수 백년 전에, 역시 수 백년 후에 이루어질 약속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직\'은 약속에 불과하지만 \'이미\' 거기까지 내다 보셨다.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창15:16,18-21) (2) 출애굽기 이 약속의 성취가 출애굽이다. a. 출애굽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인 셈이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3:8-10) b. 그리고 가나안 정복을 명하신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요구와 이스라엘의 순종 사이의 계약과 같은 것이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네가 그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나의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나의 사자가 네 앞서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 받지 말며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그러나 그 땅이 황무하게 되어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너의 지경을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하수까지 정하고 그 땅의 거민을 네 앞에서 쫓아낼지라.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과 언약하지 말라.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케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출23:20-33) (3) 민수기 다시 한번 출애굽기의 언약이 재론되고 있다.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너희의 가족을 따라서 그 땅을 제비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뽑힌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열조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얻을 것이니라.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33:50-56) (4) 여호수아 가나안 정복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을 건넌다(3-4장). 이는 \'홍해 사건\' 이후 세대들로 하여금 출애굽의 경험을 다시금 하게 함으로써 이 정복 전쟁이 단순히 영토를 빼앗는 생존을 위한 전쟁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마침내 할례를 행함으로써 거룩한 백성으로서 거룩한 전쟁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끝났다(5장). 가나안 정복은 이처럼 \'전쟁\'을 통해 얻어진다(6장). 그냥이 아니다.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전쟁을 통해 가나안은 조금씩 조금씩 정복하는 것만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성취되어진다. a. 정복 전쟁이 일단락된다(11:18-23). 그러나 불길한 불씨가 남아 있다. \'모세언약\'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이 아닌가.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과 싸운 지는 여러 날이라.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 바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18-2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21:43-45) b. 여호수아 역시 마지막까지 동일한 권고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앞날은 매우 불길할 수 밖에 없다. 과연 이 불씨가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 지는 편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뽑아 너희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으사 너희 목전에서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것 같이 하라.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23:3-8,12-13) 2. 그리고 사사기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대한 \'완전정복(完全征服)\'의 명령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여호수아도 하지 못한 일이다. 그는 이 엄청난 숙제를 이스라엘에게 남기고 그만 하나님의부름을 받고 만다. 여호수아 없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까요? 이것이 사사기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느끼는 긴장 국면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정복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어려우면 그냥 슬슬 하거나, 정복하지 못한 곳이 있어도 되는 그런 싸움이 아니다. 만약 이런 결과가 나온다면 \'여호수아 이후\'가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러한 기운을 여호수아서 곳곳에서 감지하게 된다. 올라가서 싸우리이까 가나안 정복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그 땅에 들어갔으나 가나안 족속을 진멸해야 되는 명령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이것이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이 풀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1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한 시대는 가고 또 다른 시대가 도래한다. 모세 → 여호수아로 이어지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이제 과연 어떤 흐름으로 이 지도력이 계승될 것인가? -여호수아의 죽음은 사사기의 전체 배경이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으로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간다. 이것은 중요하다. 과연 무엇을 구할까?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사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정복의 명령(신20:16-17)을 받았다. 그런데 이 사명은 아직 성취되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능력의 종 여호수아도 하지 못한 일이 아닌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문제를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아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직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가장 핵심적인 기도를 드린다. -사실 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지도자 여호수아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죽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나님이 명하신 가나안을 향한 위대한 사명을 붙잡고 있다. *내가 오늘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인가, 아니면 사사로운 개인적인 것들인가? 2절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하나님의 응답이다. 구체적인 기도(질문)에 역시 구체적인 응답(대답)이 왔다. 하나님의 응답은 대단히 빨랐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구한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연속적이다. 여호수아에게 하신 약속이 여호수아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언약에 대한 재확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