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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을 수일같이 봉사합시다 /창29:20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합시다 /창29:20 2008-05-18 17:33:47 read : 1028 한 구도자가 진리를 찾아서 유명한 선사가 거하는 산사를 찾았습니다. 막 산사 아래에 도착했을 때에 산사를 끼고 도는 계곡 물에 산사에서 버려진 콩나물 대가리와 밥알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발길을 돌려 하산했습니다. 콩나물 대가리와 밥알을 개울에 버리는 사람이라면 선사가 아니라 산신령이라도 만나볼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산사의 참됨은 산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물을 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저도 참 정리를 못하는 편입니다. 제 방이 지저분하고 제 차도 지저분합니다. 그런 모습을 그냥 보여주며 살기 때문에 저는 결코 선사가 되기 힘든 체질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기독교밖에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도 천국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윤리적인 종교는 자기를 잘 가다듬으면 진리도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한 차원 더 나아가서 섬김과 봉사를 강조합니다. 사실 진리는 봉사를 아는 마음에 찾아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진리를 가르치기 전에 밥 짓는 일부터 시켰고, 무공을 가르치기 전에 청소부터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대개 보면 봉사정신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제가 새벽제단에 일찍 나오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 청소를 위해서입니다. 정자동에 있을 때는 교회가 작았기 때문에 교회를 수도 없이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제 방은 정리하지 않았고, 제 차는 정리하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새벽에 성도들 오기 전에 교회 바닥을 닦았습니다. 교회 바닥을 닦다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쑥쑥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저는 교회 청소도 기도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 볼 때에는 성도들이 미안하게 여길 수도 있기 때문에 억지로 안 하는 척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 안 볼 때에는 열심히 청소해서 축복을 내 것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청소하면서 항상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이 축복을 나누어 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왜 나만 축복받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그런 축복을 많이 받았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청소를 한번 쉬어 봤습니다. 계속 쉬다 보면 누군가의 눈에 지저분한 것이 보일 것이고 그때 청소하면 그가 축복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의 청소할 부분이 보이고, 교회의 손질할 부분이 보이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환상을 보는 영안보다 교회의 청소할 부분이 보이는 영안이 더 진실하고 복된 영안입니다. 잘 믿는 것은 열심히 봉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가끔 구역장을 시키면 성경을 잘 모른다고 사양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구역장은 ‘가르치는 구역장’이 아니라 ‘봉사하는 구역장’입니다. 성경 지식이 해박하고, 학력이 있고, 교회 경험이 풍부해야 구역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섬길 줄 아는 봉사자세 하나만 있으면 구역장 자격은 충분합니다. 목회자는 잘 가르치는 구역장보다 잘 섬기는 구역장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잘 가르치는 사람보다 잘 섬겨주는 사람을 더 축복하실 것입니다. <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하는 길 > 우리는 지난주에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서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 7년을 수일같이 봉사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것은 성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금년 교회 표어도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합시다>로 정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할 때 야곱처럼 7년을 수일같이 여길 정도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믿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봉사는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봉사가 더욱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가끔 교회행사가 있을 때, 그 행사 때문에 예배 때에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부엌에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배드리러 온 사람에게 사랑의 식탁을 준비해 먹이려는 마음은 참 예쁜 마음입니다. 그래도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봉사보다 믿음과 은혜가 먼저입니다. 그처럼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 예배를 온전히 드리고도 사랑의 식탁을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예배도 온전히 드리고 사랑의 식탁도 잘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더욱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봉사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봉사가 더 중요합니다. 어떤 분이 모태신앙으로 학생 때부터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봉사생활에 수시로 회의가 들었습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인 것을 알고 그녀는 믿음을 더하려고 성경을 1독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신약성경을 읽어 내려가는데 신약성경 첫째 장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는 말부터 막혔습니다. 그 구절이 순수하게 믿어지지 않고 “무슨 다른 사연이 있을 거야!”라는 의심이 자꾸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 첫 장을 읽고 더 괴로웠습니다. 40년을 교회에 다니고 봉사도 열심히 했는데 신약성경 첫 장부터 믿어지지 않으니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야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성경을 읽는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부터 막힙니다. 성령 주셔서 그것부터 믿어지게 하소서!” 교회에서 혼자 울부짖고 땅바닥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며칠 후, 밤새워 철야하고 새벽기도까지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붉은 태양이 자기를 향해 쏜살같이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태양이 떨어지네요. 저 태양이 떨어지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저 태양을 붙잡아 주세요!” 그때 공중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저 태양을 붙잡고 있는 나의 손길을 의심하지 말라!” 그 순간, 마음속에 이상한 감동이 그녀를 사로잡았고, 그때부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별로 의문이 생기지 않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피부로 느껴지고,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느껴지고,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고 믿어지면서 교회 봉사가 즐거워지고, 그 뒤로 한번도 믿음생활과 봉사생활에 회의가 생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봉사하고, 교회는 살아 계신 주님의 몸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7년을 수일같이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영적인 철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철이 들면 내가 어머니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으로 어렸을 때에는 교회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하면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에 나올 때 무엇을 얻으려고 나오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얻다가 믿음이 더해지면 나중에는 주는 삶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얻을 기대도 하면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얻는 것만 좋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은 없게 됩니다. 반면에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힘써 드리려고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이 많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에 대한 개념을 수정해야 합니다. 가장 성공적인 사람은 가장 많이 주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주고, 친절을 주고, 기도해주고, 나의 물질까지 힘써 나누는 사람이 가장 성공적인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의 선한 양심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오직 사단만이 “성공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거야!”라고 속삭이면서 사람을 실패자로 만들 것입니다. 이번 지진해일로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처참하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피해 국가를 돕자고 모금을 하는데 미국이 처음에 3천 5백만 불을 내놓겠다고 했다가 얼마나 욕을 많이 먹었습니까? 어떤 기사를 보니까 부시 대통령을 ‘짠돌이’라고 불렀습니다. 결국 3억 5천만 불을 내겠다고 했지만 이미 욕을 다 먹을 대로 먹은 뒤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처음에는 60만 불을 내겠다고 했다가 짠돌이 소리를 듣고 곧 5백만 불(52억원)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어제 일본은 5억 불을 내겠다고 했는데, 그 금액의 1%입니다. 어제 문화일보를 보니까 “우리의 경제규모를 비교해볼 때 아시아의 중심국가를 꿈꾼다면서 겨우 그 정도만 내느냐? 생각해볼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국민세금에서 지출되어야 하지만 그런 곳에 남보다 조금 더 지출한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할 국민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LG 카드 회사 부도를 막으려고 이제까지 6조를 지출했고, 이번에 또 1조 가까이 지출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 경우에는 경제 전체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지출하는 것이지만 그에 비해 어려운 국가를 돕는 일에는 그 천분의 1도 안 되는 구호금을 지출해서 국민 전체를 짠돌이로 인식하게 만드는 문제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짠돌이라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는 짠돌이라는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짠돌이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응, 짠돌이 왔니? 또 달라는 소리 하러 왔지? 너는 아쉬울 때만 찾는구나!” 아마 그 짠돌이의 기도는 별로 능력 있는 기도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문제를 만나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의 무릎을 꿇는 순간,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최상의 조치를 내리실 것입니다. “미가엘! 가브리엘! 그리고 모든 관계 천사들아! 신속히 조치하라!” 결국 하나님의 축복은 헌신하고 감사하고 드릴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하는 행복한 교회생활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3. 순수하게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산이 빠른 성도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봉사를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서도 “부담이 된다!”고 교회 봉사를 멀리 하는 계산적인 성도가 있습니다. 물론 부담을 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적절한 부담까지 피해버리면 축복까지 나를 피해 지나갈 것입니다. 요새 교회가 성장이 정체되고 비판의 주 표적이 되는 이유는 순수한 마음을 잃고 계산하는 성도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이란 원래 부담을 지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삶인데 부담을 지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죽어서는 천국에 가고, 이 땅에서도 전혀 부담을 지지 않겠다고 하면 그가 져야 할 부담은 고스란히 남들이 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얄밉게 보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곱게 보시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생활이란 순수한 마음으로 부담을 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우리나라 초창기에는 엄청난 부담을 지면서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그때는 천국을 얻었으니 희생하며 살겠다는 동기를 가진 순수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점차 적어지고 있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1970년대에 목사의 인기도는 이발사 다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대형교회 목사의 인기는 판검사를 능가합니다. 옛날에는 전액 장학금을 주어도 늘 신학생 수가 미달이었습니다. 고생해야 되니까 소명이 없으면 신학교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인기 있는 신학교의 입학경쟁률은 10:1이 넘고, 그 신학교에 들어가려고 3수, 4수를 하고 신학교 입시 학원까지 생겼습니다. 그런 현상에는 희생의 냄새보다는 출세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옛날에는 장로와 안수집사를 서로 안 하려고 했습니다. 너무 부담이 많고, 희생해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부족한 것은 자기가 다 채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자리가 희생하는 자리가 아니라 대접받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중대형 교회의 장로는 상당한 권력을 누립니다.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 다스릴 수 있고, 1년에 수십억, 수백억의 재정을 장로님 몇 분이 좌지우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로 선거를 하는데 돈이 동원되고, 총 회장 선거하는데 돈 봉투가 왔다 갔다 합니다. 그처럼 교회를 출세와 성공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몰려들고 복음과는 상관없는 분들이 교회 안에 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생활에서 순수함을 잃지 말고 기쁘게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는 피하게 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십자가를 지게 하는 길입니다. 그 두 가지 길이 우리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길을 선택하겠다는 자세를 가지면 그 길에 대개 옳고, 하나님께 그 길을 축복하십니다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바로 전에 사단은 3번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그 3가지 시험은 다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시험입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쳤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는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 십자가를 지지 마세요!”라고 하니까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계산으로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6:23). 십자가를 회피하게 하는 것은 사단이 유혹하는 길입니다. 지금도 사단은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말라! 사명을 감당하지 말라! 부담 없이 편안하게 살라!” 그러나 편안이 곧 평안은 아닙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져야 진정한 평안이 주어집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편안할 수는 있어도 평안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바로 믿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면 남들이 하지 않는 고생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손해 볼 때도 많습니다. 때로 신앙 때문에 남처럼 돈을 많이 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쁘게 생각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께서 죽도로 고생만 하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기쁘게 질 때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진 것보다 열 배, 백배로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우리는 칠년을 수일같이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어려울 때 후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봉사를 하다보면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래도 우리의 봉사는 퇴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십니까? 자를 것은 자르고, 살릴 것은 살리라는 뜻입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나쁜 것은 잘라야 합니다. 나쁜 습관을 자르고, 미움과 원망을 자르고, 잘못된 언어를 자르고, 게으름과 나태를 잘라버려야 합니다. 반대로 좋은 것은 살려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의 자리를 더욱 살리고, 봉사와 섬김의 자리를 더욱 살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순간은 봉사를 후퇴할 때가 아니고 더 봉사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사단이 하는 가장 큰 일은 봉사를 못하게 하고, 헌신의 꿈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봉사의 꿈을 꾸게 하지만 마귀는 봉사의 꿈을 깨는 선수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봉사의 꿈을 무너뜨리려고 갖은 공격을 다합니다. “네가 무엇을 하겠어! 꿈 깨라! 먹고살기도 힘들잖아!” 그런 식으로 봉사를 포기하게 만들고, 봉사하다가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면 봉사의 꿈을 꾸게 만듭니다. “은퇴했지만 이제 시작이야! 그 동안 봉사하지 못한 것을 할 찬스가 왔어!” 그처럼 좋은 꿈을 꾸고 실천하면 얼마나 삶이 행복해지는 모릅니다. 우리는 좋은 꿈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돈을 엄청나게 벌겠다”는 것은 좋은 꿈이 아닙니다. “돈을 벌어 소중한 곳에 잘 쓰겠다!”는 것이 좋은 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꿈은 최종적으로 선교와 봉사의 꿈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결국 선교와 봉사의 꿈을 꾸는 자는 성공자가 되고, 선교와 봉사의 꿈을 잃어버린 자는 실패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선교와 봉사의 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점에서만은 마귀에게 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봉사의 꿈과 희망의 불씨를 살려야 합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처음에 기쁘게 시작했다가 환난이나 박해가 있다고 포기하는 사람을 돌밭과 같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봉사는 방학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이 들어도 봉사해야 합니다. 힘들 때는 마음속에 비판과 원망이 생겨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비판과 원망보다는 봉사를 더욱 각오해야 할 때입니다. 이 세상에서 칠년을 수일같이 꾸준히 봉사하는 삶만큼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삶은 없을 것입니다. < 헌신과 봉사의 축복 > 꽤 오래 전에 서울에 사는 어떤 분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구원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자기는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교회의 곳곳을 청소하고, 교회의 힘든 일은 혼자 도맡아 했습니다. 퇴직금 전부를 헌금하고, 교회명의로 대형차량을 사서 교인들을 픽업하며 봉사했고, 유산을 물려받을 때도 형제들을 설득해서 상당한 액수를 건축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그렇게 힘써 봉사하니까 교회에서 세례 후 4년 만에 집사 안수를 받으라고 했지만 때가 되지 않았다고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충성과 헌신을 보셨습니다. 얼마 후, 그는 미국 대사가 애물단지 같이 여기던 땅을 버리다시피 해서 사게 되었는데, 그 땅을 중심으로 주거지역이 형성되면서 땅값이 몇 십 배로 올라 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축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헌신을 기뻐하시고, 특히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가끔 어떤 분은 박수가 있으면 헌신하고, 박수가 없으면 헌신을 그칩니다. 그것은 순수한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헌신이 정금 같이 순수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박수를 쳐주면 고마운 일이지만 박수가 없어도 봉사의 손길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이 없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인정이 더 있게 될 것이고, 사람의 시선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시선을 더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교회의 규모 및 형편에 비해서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도울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헌신했고, 요삼일육선교회를 통해서 소리 없이 꾸준히 헌신하는 ‘거룩한 손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 중에는 일터의 경영이 어려운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헌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쓰는 규모는 줄였지만 헌신의 규모는 줄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드는 작은 복음들입니까? 우리의 헌신은 환경에 따라 왔다 갔다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인가 좋은 편 하나를 붙잡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할 수 있어야 진정한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금년에도 7년을 수일같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헌신해서 2005년을 생애 가장 복된 해로 만들어가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봉사'라는 축복 받는 키/벧전4:7-11
'봉사'라는 축복 받는 키/벧전4:7-11 2003-03-21 20:47:18 read : 263 얼마 전 보도된 바와 같이 한 시한부 삶을 살았던 젊은 자매가 인터넷에 자신의 마음을 쓰면서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 많은 네티즌들이 그의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녀 의 마지막은 이제 내가 힘이 없어서 자판을 두드릴 수 없다는 말이었고 여러분들의 사랑으 로 이제 연재를 끝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글은 어린 왕자에서 나온 이야기였 습니다. "무엇이든지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그리고 그녀는 이곳을 떠났습니다. 저는 과연 제가 마지막 인생을 보낼 때 무엇을 하면서 하나님께 가게 될 것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종말을 맞는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내가 죽어서 개인적으로 하나님 곁에 가 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지 우리에게는 다 종말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종말이 온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종말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세 가지를 하라는 것이지요. 첫째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라' 둘째는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 세 번째는 '서로 봉사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니!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은 알 수 있는데 서로 봉사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종말이 가까이 왔는데 봉사가 왠 말입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봉사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봉사는 것은 죽을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어떤 분은 그렇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쉬어야지 하는 분이 계십니다. 하기 싫으면 쉴 수는 있어도 결코 봉사를 쉬어서는 안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봉사를 쉬니 심장도 쉰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확실히 하십시오, "나는 죽을 대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 결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 다. 저는 개인적으로 찬양대에 머리색이 하얀 분이 앉아 계시는 것이 좋습니다. 감동적입니 다. 성경에 젊은이들이여! 찬양하라 라는 말만 있습니까? 아니지요.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감동이 오면 찬양대를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크레머라는 신학자는 '교회의 본질은 봉사'라고 했습니다. 즉 내가 교인이라면 어떤 봉사를 하고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봉사가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실제로 교회 봉사를 하지 않으면 항상 손님으로 지낼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하나님의 자녀임을 느끼십니까? 봉사할 때입니다. 결국 봉사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게다가 성경은 봉사를 통해서 복을 누리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37편 26절을 보면"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종일토록 봉사했더니 그 자손이 복을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봉사를 열심히 해서 많은 복을 누리신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온누리교회 권사님은 10년 동안 새벽예배가 끝나면 종이 줍고 의자 정리하면서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 다. 그 권사님 때문에 2부 새벽에 교인들이 많이 나온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때는 봉사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 하게 된 것입니다. 봉사! 이것은 내가 할까 하지 말까 문제가 아닙니다. 해야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봉사를 할 것인가? 방법론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봉사는 원망없이 해야 합니다. 벧전4 장 9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그때나 지금이 나 봉사를 하면서 불평과 원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원망을 하게 될까요? 대가, 인정, 칭찬 받으려고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그러면 봉사는 어떤 자세로 해야 되냐고요? 성경은 종의 자세로 하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님처럼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봉사하셨습니까? 막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 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라고 하였습니 다. 결국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높은 이가 낮은 이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요13장 13-14절에 "너희가 나를 선생이 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 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 라"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어요. 예수님은 선생이세요. 예수님은 주가 되세요. 그럼 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어요. 왜 그렇게 씻기셨습니까? "너희도 가서 이렇게 봉사하라. 너희도 가서 사람들을 발을 씻겨주는 자세로 낮은 자리에 서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섬겨라. 그들을 봉사하라"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종의 자세를 가지고 봉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둘째로, 받은 은사를 알고 봉사해야 합니다. 벧전 4장 10절"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다르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봉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봉사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잘 되려면 내가 봉사하는 곳이 은사의 적합한지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에 저희 교회에서 은사배치 사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긍휼, 구제, 찬양, 말씀 은사등 다 양한 사역을 알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내 은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얼마 전에 한 후배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동차 세일즈맨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말도 못 하더군요, '저 저' 하다가 '자 자' 한번 못하고 갔습니다. 안 맞는 것이지요, 사실 본인들도 은사를 잘 모릅니다. 그러면 내 은사를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있습니다. 은사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것입니다. 억지로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 새들백교회를 가면 매일 자동차부품만 만지는 은사로 교회를 봉사합니다. 교회의 모든 차들을 돌봐주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사람을 안내하면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은사는 내가 즐겁고 또 하나 다른 사람도 나를 보면 즐거워해야 합니다. 또한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하는 봉사만을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만 열심히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정신입니다. 왕상 18-19장에 엘리야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바알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자 850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탈진된 엘리야는 생각하기를 이렇게 우 상숭배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라고 교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너 혼자나 아니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에 절하지 아니한 자 7,000명이 있 다." 그랬어요. 우리 봉사하는 사람들이 겸손해야 됩니다. 따라서 봉사는 상호간에 협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전 12장에 우리가 지체이다, 우리 몸이 하나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못을 박으면 다른 한 사람은 그곳에 모자를 건다."라는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벽에다가 힘들게 못을 박았어요. 아마 그 못을 박다가 손을 찍혔는지 도 몰라요. 그런데 또 한 사람은 모자를 걸었습니다. 모자 거는 것은 얼마나 쉬워요. 그런데 못은 왜 박습니까? 모자를 걸라고 한 것입니다. 모자를 거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못박은 것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인정하는 거예요. 제가 설교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듣고 있어요. 설교를 들을 분이 없으면 설교를 준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의 은사를 인정하고 내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선을 이루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봉사는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벧전 4장 11 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 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봉사는 내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가르칠 수 있습니까? 내가 경험이 많다고 봉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 해야 합니다. 봉사란 무엇입니까? 봉사는 자기 희생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남아서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수많은 분들이 선교사로 갈 수 있습니까? 할 일이 없어서요? 아닙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그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몇 날이 못되어서 성령 이 너희에게 임한다. 성령 을 받으면 권능을 받는다.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내 가 산 것처럼 너희도 살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 저희 교회도 호스피스로 봉사하는 분이 계십니다. 말기암 환자를 도와주는 일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돈을 준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함께 해주셔야 합니다. 쉽게 말씀 드리자면 봉사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 입니다. 봉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넷째로, 봉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4장 11절 "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끝과 마무리가 중요 한 것입니다. 아무리 봉사를 열심히 잘 했다 하더라도, 그 로 인해서 자만하거나 자화자찬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자기만 자랑하려고 하면, 자 기만 드러내려고 하면, 이것은 잘못된 봉사인 것입니다. 우리의 봉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능력 받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말합니까? 고전 10장31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봉사할 수 있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니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이 있으니 움직이면서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있으니 봉사할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결국 어느 것이 진정한 봉사일까요? 탈무드를 보면 어떤 왕의 외동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내 딸의 병을 고 치는 자를 사위로 삼고, 내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도록 하겠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산골에 삼 형제가 살았는데, 그들은 저마다 신기한 보화를 하나씩 가지고 있 었습니다. 큰형은 멀리 보는 망원경을 가졌습니다. 그 망원경으로 임금님이 방을 써 붙인 것 을 봅니다. 둘째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양탄자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타고 삼 형제 가 죽어가고 있는 공주에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어느 병이라도 낫게 하는 사과 한 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 형제가 망원경으로 멀리서 보고, 양탄자를 타고 와서, 이 사과 를 먹이므로 공주를 살려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사위를 삼아야 하는데, 세 사람 모두 공 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탈무드는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망원경은 도로 가져가면 되고, 양탄 자도 도로 가져가면 된다. 그러나 사과는 먹어서 없어졌다.' 그러니 셋째야말로 큰 희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셋째가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봉사란 손해보는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 것이 없어져야 참 봉사입니다. 이것 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말세를 사는 성도에게 주님이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기도도 해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하지 만 무엇보다 봉사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봉사는 축복을 주시는 키입니다. 무조건 해야할 일 입니다. 이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가장 귀한 섬김은?/눅14:15-24
가장 귀한 섬김은? 눅14:15-24 한문 고사성어에 \\\"백문이 불여일견\\\"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이죠. 요즘은 \\\"백견이 불여일행\\\"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즉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행동하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해석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 11월을\\\"섬김의 달\\\"로 정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첫 번 째 주를 맞이하여서는 마20:20-28절까지의 말씀으로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뇨?\\\"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면서 \\\"제자들은 낮아지기보다는 서로 높아지길 원했고, 대접을 하기보다는 대접을 받는 자리에 있기를 원했기에 그들 사이에서는 적지 않은 다툼과 원망이 일어났던 것\\\"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 주에서는 마8:5-13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축복 받은 섬김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면서 권세 있는 백부장이 그의 하인의 중풍병을 위하여 주님께 나아와서 친히 간구 하였는데 그 간청을 들은 주님께서 \\\"가서 고쳐 주겠다\\\"고 하시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말씀으로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라고 하며 오히려 말씀으로 고쳐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이 주님을 향한 그 귀한 믿음의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기뻐하셔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노라 말씀을 하시면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그를 축복하셨는데 그 시로 하인의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섬김이라는 것은 비록 그가 하찮은 하인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겨 마치 나의 일처럼 간구할 자세가 될 때 그 섬김 때문에 결국은 나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두 번의 주일 예배를 통하여 섬김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아! 이런 것이 섬김이구나 하고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11월을 다 보내기 전에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한번 섬겨보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도움을 펼치되 결코 돌아올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위로하며 섬겨보는 귀한 일이 우리 모두에 있어지기를 소원 합니다. 첫 번째 주, 그리고 두 번째 주는 주로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하여야 할 것인가? 를 생각해 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가져야 할 영적인 측면에서 내가 줄 수가 있는 가장 중요한 섬김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약3:15절에서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즉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이 필요한 지를 알아서 필요한 것을 제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제일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고, 육신이 아픈 자에게는 그 육신의 아픔에서 벗어나게 치료를 받는 것이 제일 필요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어떻게 가야 생명을 얻는 길이냐 라고 묻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제일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진정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음을 발견해 봅니다. 인생의 길을 잃어버린 오늘 날 많은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가진 \\\"삶의 목적\\\"을 올바르게 세우는데 필요한 것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바쁘게 살아갑니다. 모두가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가느라 모두 바쁩니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의 삶 자체가 바쁘고 분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가 보니 진정한 삶의 의미도 또 내가 목표로 삼아야 할 삶의 방향도 상실한 채 그저 바쁘게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가장 많이 받는 인사 가운데 한가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요즘 많이 바쁘시죠?\\\" 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요즘 제가 무척 바쁩니다. 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쁘게 살아갑니다. 왜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돌아보면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사실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할 일이 많은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본문말씀에 나타난 사람들도 하나같이 바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오늘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참된 섬김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지를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초청을 받은 사람들 모두가 바쁩니다. 큰 잔치에 초청을 받고서 너무나 좋아서 모두가 참여를 하겠다고 약속은 하였지만 모두들 너무나도 바쁘게 살다가 보니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다가 보니 아무도 그 초청 받은 잔치에 참석하지를 못하였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들이 모두 꼭 참석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지만 어느 한 사람도 그 잔치에 참여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저 사람에게 꼭 복음을 제시하고 주님을 영접하도록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교회로 초청을 하고, 또 전도를 한번 하려고 하면 왜 그렇게 약속을 맺기가 쉽지 않는지요, 서로 약속이 잘 맞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바쁘게 살아가니까? 말입니다. 아마 본문에 나타난 사람들도 서로 바쁘게 살다가 보니 약속을 지키기가 어려웠고 또 분주하게 살다가 보니 약속을 잊어버리고 다른 일을 하였나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은 16절에서 볼 때는 주인은 이미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고 그 초청에 응답을 받은 그 이후에 17절에 보시면 잔치할 시간이 되었기에 그 초청에 응답을 하였던 자들에게 다시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 되었나이다 라고 그들의 약속을 다시 기억나게 해주는 것을 봅니다. 유대인들이 가지는 잔치의 절차는 복잡합니다. 그들은 적어도 1년 전에 약혼식을 하고 참석한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또 다른 사람들에게 1년 후에 있을 결혼식을 참석해서 함께 기쁨을 나누도록 요청합니다. 그러면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적어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결혼식 참석을 준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혼인을 준비하는 가정에서는 이렇게 확인 절차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통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확인과정을 다 마친 상태에서 불참을 통보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례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번 토요일 날 우리 본당에서 결혼예배를 드리는 Cara Irvin 양은 적어도 10개월 전에 본 교회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중간에 장소 사용에 문제가 없는가? 한번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우리가 본 교회의 형편 때문에 장소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그들에게 통보를 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당황하겠으며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이 혼인에 참석하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석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 사람들의 인원만큼이나 모든 것이 준비되기에 그렇습니다. 호주는 \\\"booking\\\" 문화이지 않습니까? 미리 모임을 준비하면서 host가 장소와 시간과 인원을 미리 \\\"booking\\\"을 하지 않는다면 그 모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은 이미 모든 booking 절차가 끝이 난 상태에서 그 사람들을 초청하였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바빠서 아무도 못 오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주인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으며, 얼마나 당황하였겠습니까? 화가 난 주인은 그 종들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소외 받은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booking을 한 적도 없고, 초대받은 적도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종들이 그렇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리가 비었다는 말에 그 주인은 또 다시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서 정말 절박한 주인의 마음을 발견해 봅니다. 여러분! 잔치를 준비해 놓고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이것보다 더 낭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준비한 주인의 심정은 이렇게 절박합니다. 그래서 그는 종들에게 사람들을 강권하여서라도 데려다 가 내 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한번, 두 번도 아닌 세 번에 걸쳐서 종들을 독려하면서 사람들을 잔치에 초청하고자 하는 주인의 절박한 마음을 우리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잔치를 배설한 주인은 누구를 말하고 있습니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주인의 요구에 따라 닥치는 대로 사람을 데리고 오는 종들은 또 누구를 가르치고 있습니까? 잔치를 준비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주인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종들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유대인들을 암시하는 사람들을 초청하였으나 모두가 거절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거리에 있는 소외 받은 사람 즉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을 초청하였으나 그들은 거절함이 없이 그 초청에 응답하였고 세 번째 초청은 이스라엘밖에 있는 모든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의 초청이라고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은 절박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밖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섬김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진정한 섬김\\\"은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니오,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도 아니오, 이리 저리 떠도는 자에게 잠 잘 곳을 제공해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가 깨달은 진정한 섬김은 다시는 배고프지 않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며, 다시는 헐벗지 않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며, 또 그가 다시는 떠돌아다니지 않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알았기에 그의 평생을 바쳐 복음을 전파했고 수 많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섬김\\\"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정말 중요한 섬김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것은 일회적으로 그들에게 큰 섬김은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가지고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비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던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어려움에 빠졌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국가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만 제공해 주었지 수해복구가 늦어져서 겨울이 된 그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컨테이너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수해를 입지 않도록 원인을 발견해서 고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시는 피해를 입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문제로 고민하는 그들에게 그가 가진 고민과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은 그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려주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섬김이며 나눔이라는 것입니다. 탈무드에서는 이스라엘의 자녀교육을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린 자녀가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고 하면 대부분의 한국 어머니들은 아이가 학교에 간 사이에 시장을 보아서 음식을 장만해서 아이가 돌아오면 먹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의 교육방법은 그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시장을 가서 무엇을 어떻게 구입하며, 어떻게 요리하는지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되 근본적으로 네가 가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가르쳐 주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섬김이라는 것은 일회용으로 그때 그때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것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근본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밭을 샀으니 들에 가 보아야 하고, 나는 소를 샀기에 시험적으로 사용해보기 위하여 들에 가보아야 하고, 나는 결혼을 하였기에 아내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하여 바깥출입을 못하겠다는 이 모든 것은 바쁘다는 핑계 는 될지 모르나 이것들 때문에 그들이 그 잔치에 참석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런 것들은 그들의 생명에 관계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약속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바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진정한 섬김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 복음을 제시하여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진정한 섬김이요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롬10:15절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은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어떤 사람의 인생을 말씀 드리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노래를 하였고 무대에서 춤을 추던 생활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부모 아래서 자랐기에 그도 일찍부터 무대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가 어린 자신을 돌보아 주지 않고 길거리에 버리다 시피 하였기에 그는 어려서 부터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굶기도 하면서 자랐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날은 갈곳이 없어서 따뜻한 굴뚝을 이불 삼아 남의 처마 끝에서 잠을 자곤 하였답니다. 그에게 오빠가 한 사람 있기는 하였지만 오빠로부터는 별로 따뜻한 위로 사랑을 받은 기억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아픈 어린 시절의 수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 성장한 그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에 버림을 받았고 배신을 당하는 아픔과 시련을 받아 수많은 좌절을 경험하였고 이것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던 그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그의 인생을 180도 바꾸는데 도움을 준 것은 1976년 어느 날 아침에 걸려온 어떤 한 사람의 전화 한통 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그 아침에 걸려온 그 사람의 한 통의 전화가 아니었던들 그의 인생이 바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고백합니다. 그에게 새로운 삶의 소망을 전해주고 절망과 좌절에서 용기를 갖도록 전화를 한 사람은 바로 목사가 되신 곽규석씨였고 이 전화를 받고 그날부터 성경공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지금 수원여대 교수로 재직하는 윤복희 권사입니다. 그는 지금도 찬양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가지고 주안에서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그가 어려웠던 그때를 기억하면서 그의 오빠인 윤항기목사님이 가사를 만들고 그가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것이 1979년 제1회 서울 국제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여러분\\\"이라는 복음성가입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네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친구가 되어줄게, 네가 어두운 밤 험한 길을 걸을 때 내가 너의 등불이 되어 줄께\\\"라는 가사로 된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있는 진정한 섬김은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소개하여 그로 하여금 삶의 목표를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섬김인 것입니다. 사람을 강권하여서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강권한다는 말의 뜻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마음으로\\\" 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늘 바쁘다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둘러대는 그 사람들에게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보다 풍성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분명한 섬김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1월 섬김의 달에 우리 한번 섬겨보십시다.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행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으니 11월을 다 보내기 전에 한 영혼을 섬겨보십시다. 강권하여 집을 채우라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섬겨보는 아름다운 섬김의 기쁨이 우리 가운데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가장 큰 섬김/마6:2
가장 큰 섬김 마6:2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말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생활의 모든 원리는 당연히 천국 적이어야 합니다. 행동원리는 말씀을 속에 들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에베소서1:1-3절 말씀을 봅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행동의 원리, 즉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는 겸손과 온유이며, 사랑 안에서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효과가 있도록 하는 행동의 원리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듯이, 이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행동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시간에는 이처럼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를 증거 하고자 합니다. 옛 말에,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명예라는 뜻입니다. 특히 정보 시대라고 하는 오늘에는 남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명예심은 믿지 않는 세계뿐만 아니라, 믿음의 세계에서도 일반적인 사람의 욕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는 이러한 세상의 현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은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않아야 함을 말합니다. 특히 남을 돕는 일이나, 자신의 신앙에 관한 의에 대하여는 엄격하게 적용하도록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본문을 포함하는 마태복음6:1-18절을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가 그리 쉽던가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노력과 힘과 재능을 투자하는 일이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아무에게 알려지기를 기대하지 말고 그렇게 투자하라면 과연 몇 사람이나 그렇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이력이 화려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명함에 온갖 명칭을 다 갖다 붙입니다. 어느 예비군 교육 강사의 명함에는 ‘새마을 부녀회 고문’, ‘모 동창회 회장역임’이라는 이력도 있고, 어느 교역자의 이력에는 ‘모영어학원 강사역임’이라는 명칭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자랑하고 알리고 싶었으면 그렇겠습니까! 어떤 젊은 변호사가 개업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그 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마침 변호사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어서 기다렸습니다. 변호사는 연신 예, 예 하면서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예, 회장님 그런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예. 요즘 좀 바쁩니다. 방문도 많고 손님들이 많아서ꀞ” 하고 한 바탕 떠들고 난 후에, 들어온 분에게 정중하게 “무슨 사건으로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방문자는, “예. 전화국에서 온 기삽니다. 전화선 작업이 끝나서 전화선을 이어주려고 왔는데, 전화선이 없어도 통화가 잘 되는 것 같군요.” 라면서 전화선 단자 쪽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의 자기 과시와 자랑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남들에게 있는 것이 자기에게 없으면, 있는 척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유명 회사 제품을 사용한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텐데도 마치 자신이 유명 회사의 제품만큼이나 유명해진 것처럼 여깁니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가 연예인들의 옷이나 액세서리, 말투나 태도까지 흉내를 내는 연예인 신드롬에다가,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화나 영화 속의 인물까지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타나지고 알려진다고 해서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의도적인 나타냄입니다. 이 길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은밀한 충성의 길입니다. 성경에는 선한 일을 하고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셨던 나귀를 마련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최후의 만찬을 위하여 다락방을 제공한 사람은 또 누구였을까요?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먼 길을 찾아 온 동방 박사들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을까요? 5천명을 먹이기 위해서 자신의 도시락을 바친 아이는 또 누구였을까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에서도 거의 태반은 행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대오’로도 알려진 ‘유다’와 작은 ‘야고보’도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사도’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에 충실했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들의 행적은 없습니다. 이들뿐 아니라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고 하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사실은 별로 기록 된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역사도 초대교회 이래로 지금까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충성 자들에 의하여 존속해 왔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일과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일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선악 간에 심판하시고 보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16:27절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으며, 로마서2:6-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영국 런던의 워커 미술관에는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그림은 ‘폼페이’라는 도시가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그 화산재에 묻혀 전멸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화산재와 용암이 비와 눈처럼 폼페이 성에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화산재와 불을 피해 성 밖으로 몰려 나갔습니다. 이들로 인해 대 환란이 야기되었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서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그 성의 문지기였습니다. 뜨거운 화산재와 불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그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바로 \'충성\'이었습니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 다시 말해서 죽음을 이기는 사명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생명을 다하는 충성스러움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은밀한 충성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은밀한 충성의 길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섬김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서 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른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제자들은 대답하지를 못했습니다. 서로 자신이 크다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르치셨습니다(막9:35).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10:43-44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자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섬김’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드려 죄인 된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셔야 할 사명의 길을 말없이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은밀한 충성입니다. 은밀한 충성이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주님은 누가복음17:7-10절에서 ‘종의 자세’로 가르치셨습니다. 10절이 결론인데 한 번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자랑하거나 나타내거나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하고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며 가장 큰 섬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상급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주님은 은밀한 충성에 대한 상급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나, 자신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면 지금의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평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충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자동차 경주 선수는 경기가 가까워지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말을 붙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시골을 방문했을 때, 늙수그레한 농부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너무나 어리석게 스스로를 부려먹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예전에 나는 자동차 경주할 때 눈을 목표 지점에만 두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경주에 이기려고 경주하지 않습니다. 나는 목표 선에 눈을 두지 않고 먼저 경기에 대비해서 자동차의 기계를 점검하여 최고의 속력을 낼 수 있도록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자동차의 최대 속도와 최대 마력을 내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브레이크와 크러치를 잡고 내가 가진 기술을 다해서 운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할 때 나의 기술이 다른 경주자의 기술보다 좋고 내 자동차 속력이 다른 경주자의 자동차 속력보다 더 빨리 목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그 농부가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긴장할 필요도 없고 단지 가능한 침착하게 내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농부는 확신시켜주었습니다. 승리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염려하고 과민반응을 한다고 하여 속력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섬김은 많은 일, 큰 일, 위대한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하고 은밀하게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들에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하면 언젠가 주님 앞에 설 때에 기쁨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한 구절을 인용하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6:4-5절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각각 받은 은사를 따라 섬기는 공동체/ 마25:14-30/ 은사주일설교
각각 받은 은사를 따라 섬기는 공동체 마25:14-30 교회가 무엇입니까? 많은 표현이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각각 받은 은사를 따라 섬 기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우리들이 육체로 태어날 때도 누구나 받은 달란트 와 기질이 있듯이, 영적으로 태어 날 때도 주님은 반드시 어떤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들 이 내 은사를 온전히 발견하지 못 한것 뿐이지 하나님은 반드시 영적인 은사를 주십니다. 내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들은 오늘부터 자기의 은사를 발견하시기 바라며 자 기의 은사가 무엇인지 아시는 분들은 그 받은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귀 하게 쓰임받으시고 크게 번성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번성의 축복을 주시는 것이 주님이 은사와 재능과 믿음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각각 그 재능을 따라…. 믿음의 분량대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미국에 어느 농부가 수십년 동안 경마장에서 도박을 했는데 그 동안 한 번도 경마표를 맞 추지 못하고 계속 잃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기상천외로 경마표가 당첨되었습니 다. 상금은 자그만치 2억 불이나 되었습니다. 마사회는 지혜가 있는지라 그냥 당첨자를 발 표하지 않고, 당첨발표 전에 상금 받을 사람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알 아본 결과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2억 달러를 건네주면 심장마비에 걸리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달해 주는 방법을 연 구하던 중 그가 가톨릭 신자인 것을 알고 성당 신부에게 알려 그 돈을 전달해 줄 것을 부 탁했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농부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여보 미스터 죤, 이번에도 경마표를 사셨지요? 만일 1등으로 당첨되었다면 그 상금을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 농부는 “신부님, 맞을 리 가 있나요.”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시큰둥해 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죤에게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한 2억불쯤 주실지도 모르잖아요.”그러자 죤은 상상을 하기 시작했습 니다.“글세, 2억불이라. 그 중 1억불은 신부님께 드리고여...”이야기가 여기까지 나오 자 한 사람이 꽈당하고 넘어졌습니다. 진짜 심장마비로 숨이 끊어졌습니다. 넘어진 사람 은 농부가 아니라 신부였습니다. 돈 받을 그릇이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그릇을 키우세요. 하나님께서 주실 복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제는 내 비 전, 내 성품, 내 믿음의 그릇입니다. 당신은 예수 안에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비 전의 단위를 바꾸세요. 축복의 단위가 달라집니다. cm의 단위를 km로 바꾸고 g의 단위를 kg으로 바꾸어 살란 말입니다. 킬로그램을 ton으로 바꿔 보시기 바랍니다. 다같이…당신은 믿음의 단위가 다른 사람입니다! 큰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도시와 민족과 세계 열방을 품는 큰 그릇이 되십시요. 큰 비전을 가지세요. 오늘 읽은 성경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떤 주인이 먼 나라에 가면서 자기가 부리던 종들에게 장사하라고 자본금을 맡기고 떠났습니다.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 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달란트란 말은 중량의 단위인데 금 한 달란트 하면 당시의 월급쟁이 20년 봉급입니다. 연 봉 3만불 되었다면 약 60만불에 달하는 돈입니다. 다섯 달란트라면 300만불쯤 되었으니 사 업 밑천으론 큰 돈이지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처럼 큰 밑천을 받은 사람들 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열심히 사업을 해서 이윤 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오래 있다가 주인이 다시 돌아와서 회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 은 곱을 남기고 와서 주인에게 바치니 주인은 기뻐 받으시면서 그들을 칭찬하고 상을 주었 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그냥 갖다 바치니 주인이 대 단히 노해서 책망하고 단단한 벌을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믿음 도 있고 책망 받는 믿음도 있습니다. 더 많이 받는 그릇도 있고 있는 것 마져 빼앗기는 그 릇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다 예수님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교회를 섬기기 위한 비전을 받았고 사역을 받았고 직분을 받았고 은사를 받았고 기질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장사를 해 서 이를 많이 남기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긴 만큼 복을 주십니다. 본문 25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때에 천국은” 이 말이 14절로 연결됩니다. 그러 므로 본 달란트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너는 무엇을 남겼는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 종말적인 시간 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천국 백성으로서 지혜롭 게 살아갈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1. 청지기직의 원리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천국은” 이 말이 생략되고 “또 어떤 사람 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4절) 라고 하였습니다. 종이란 본래부터 자기 소유가 있을 수 없는 신분입니다. 종이 가진 모든 것은 주인의 것입 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와 서 우리의 시간도, 몸도, 물질도, 가정도 잠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Time’s up! ‘다 되었다. 끝을 내라.’ 하시면 모든 것을 다 놓고 갈 수밖 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잠시 위탁 받아 책임지는 청지기 와 같습니다. 그래서 봉사의 출발은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부터 시작되지 않습니 다. ”주인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 라는 물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마땅합니 다. 다시 말하면 종의 의욕보다 주인의 의도를 아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 입니다. 한 달란 트 받은자가 책망을 받은 것은 한 달란트를 그냥 땅에 묻어둔 것만이 잘못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종은 주인의 의도에 대해 무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종들의 탈선은 바로 이런 청지기의식이 소유의식으로 변질 될 때 시작되는 것 입니다. 내것으로 착각하면서 봉사자들은 탈선하기 시작합니다. 건강이 내것 입니까? 시간이 내것 입니까? 재물이 내것 입니까? 내것 이라고 생각 하기 때문에 아까운 것 입니다. 시간도 아 깝고, 물질도 아깝고, 희생을 드리는 것도 아까운 것 입니다. 시간을 맡았습니다. 날 때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시간입니다. 하 나님께서 주의 뜻을 이루라고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 인생이라면 그 귀중한 시간을 주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선용해야 합니다(엡 5:15,16). 엡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 혜 있는 자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건강을 받았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려 병들게 되면 주의 일에 충성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 니다. 건강할 때 주의 일에 열심히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건강이 평생의 밑천이라고 합니 다. 밑천이 든든하면 성공합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으리라는 말씀처럼 우리 몸은 땀이 날 정도로 움직여 주어야 건강한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방탕하고 죄악된 곳에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곳에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딤전 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지혜를 받았습니다. 권력을 맡았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법관, 의사, 사업가, 공 무원, 군인…모두가 청지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누가 염려함으로 작은 키를 한 치인들 늘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머 리카락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생명과 시간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 히 속수무책입니다. 여러분! 맡겨진 달란트에 대해서는 반드시 계산하는 날이 옵니다. 그때 주인 앞에 뚝뚝 떨 어지는 땀방울을 닦으며 열심히 일한 굳은 손바닥과 발바닥을 내밀며 자신 있게 계산을 보 는 종이 되란 말이지요. 그때 주님이 눈물 닦아주시고 흘린 땀은 모두 천국 보석으로 바꾸 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때때로 어려운 일이 생기는 이유를 아십니까? 왜 질병을 허용하시고, 왜 경제 적인 손실과 타격을 경험하게 하시고, 왜 고난을 주십니까? 질병에 대한 가능한 그리스도 인들의 자세는 이것 입니다. 우리는 질병을 돌연히 만나는 순간 깨닫는 것은 ”이 건강이 내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지혜와 참 된 처세를 배우게 되는 것 입니다. 한 순간에 찾아온 ”경제적인 손실과 타격을 통해서” 우리는 내가 쥐고 있었던 그 돈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홀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개를 달고 날아가 버리는 돈과 재물… 아 내것이 아니었구나. 어느날 늙어가는 내 육체를 바라보면서 청춘이 내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 게 되는 것 입니다. 닥터 goggin이라는 기독교 교육학 교수님은 북미에서 명성있는 분이셨습니다. 여자 분이십 니다. 제가 이 분을 만나뵈었을 때 거의 할머니가 되셨던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외모도 뛰 어나시고 성품도 너무 아름다운 분 이셨습니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허스키 목소리…. 그 분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습니다…. 내용인즉 젊은 시절 닥터 가긴은 유명한 오페라 가수였는데… 어느 날 목이 붓기 시작하더 니…소리가 나오지 않기 시작하는 것 이었습니다. … 이 때 그가 홀연히 깨달은 것은 목소 리가 내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사실 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 앞에서 겸손해 지 고… 자신에게 재능을 주신 분이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기도하다가 다시 기독교 교 육학 교수로서의 꿈을 펼치기 시작한 것 입니다. 그 분은 보람있고 행복하게 사시다가 은 퇴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성경에 어리석은 부자가 쓰는 말은 모두 1인칭 입니다. 내영혼아! 내곡식! 내 창고! 내 물건! …이 부자는 너무 늦게 이 모든 것이 내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불행이었고 저주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번 특검 기회에 삼성의 이건회 회장도 그런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우중씨, 최순영씨, 노태우, 전두환씨 등 … 그 분들이 당한 수치와 능욕을 보십시오. 그 래도 정신을 못차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청지기 의식이 왜 중요합니까? ”이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겸손하게 봉사하는 자리에 설 수가 있기 때문” 입니다. 2. 은사의 원리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5절) 하나님은 각자 감당할 수 있는 재능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 는 두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겨주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능력과 풍 성과 기질 등에 따라 그에 필요하고 적절한 은사나 사명을 주셨습니다(고전 12:4~11). 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 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 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양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65억이 얼굴이 다 다릅니다. 세포도…지문도…눈의 동공도…하 늘에서 떨어지는 셀수 없는 눈송이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나뭇잎 하나 같은 것이 없습니 다. 하나님의 창조물의 다양성의 신비를 다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아름다 움입니다. 우리는 한 인간이면서 다 다르다는 다양성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카나다에 무리지어 다니는 구스는 어떻습니까? 그놈이 그놈 같지 않습니 까? 수많은 오리떼를 볼 때…양 떼를…까마귀 떼를 볼 때 어떻습니까? 그놈이 그놈 입니 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 다릅니다. 어떤 양치기 원주민 여자가 산에서 양들과 함께 평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사람들이 이 여자에게 양치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소위 특강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이 여자가 이렇게 첫 말을 띠었다고 합니다. 양들은 모두 다르게 생겨서 금방 알아 보겠는데… 사람들은 너무 똑 같아서 그 놈이 그 놈 같다고… 하나님은 은사나 사명을 주시되 무조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적합하게 주십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달란트에 대해 무거워서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거나, 반대로 과소평가하여 소홀히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감사히 여기고 온 힘과 정성을 다해 맡은 바 사명에 최선을 다하며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하여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베 드로 전서 4장 10절 우리 한국 문화의 약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양성에 대한 감사의 부족”입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획일적인 문화에 익숙합니다. 똑 같은 학교 제복을 입고 자랐습니다. 맹 목적인 복종을 강요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행동도 유니폼처럼 획일적인 것이 많습니다. 그 래서 다르다는 것을 장점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점으로 생각 합니다. 옛날에는 중국집 가 서 고참이 시키면 같은 것을 시킵니다. (해병대 50명 똑 같이) 우리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너는 왜 그 모양이야? 이 말은 너는 왜 나와 같지 않느냐는 말 입니다. 직분도, 직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그 자리에 적합한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 나님을 빼놓고는 내가 가장 잘압니다. ”이 자리에 내가 적합한가?” 이 질문에 대하여 내 가 먼저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원의 중요성입니다. 재능의 문제까지 교회가 일방적으 로 임명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 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전혀 적합하지 않은 일들이 맡겨질 때 어떻게 하십니까? ”안 하겠다고 고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정당한 것 입니다.” 맡겨진 그 일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나 은사가 없을 때 그것을 맡는다고 자청하는 자체가 잘못입니다. 그러나 맡을 수 없다는 고집이 ”일을 안하기 위한 핑계” 로서의 고집 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봉사의 삶을 사시기 원하십니까? 주신 재능의 원리를 따라 섬기시기 바랍니다. 3. 성실성의 원리 달란트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달란트, 곧 은사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활 용했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기고 간 주인은 오랜 후에 다시 돌아와서 회계(會計)했습니다. 그 때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갑절의 이윤을 남겨 주인에게 보고하여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 움에 참여할지어다.”(21,23절)라고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종들이 칭찬을 받은 것은 커다란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 하였으니” 입니다. 작은 모임… 작은 일에 대한 성실성입니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수용할 줄 아십니까? 작은 것을 가지고 세계를 놀라게 한 나라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300만대 3억), 스위스(영생 중립국), 덴마크, 룩셈부르크, 홍콩, 싱가 폴, 두바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도자 가운데 가장 큰 사랑과 존경과 흠모를 받은 사람은 다윗왕입니 다. 그는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다 스리는 목자이기 전에 양치는 목동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양치 는 목동 시절 다윗을 택하신 것 입니다. 시 78:70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71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 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2 이에 저가 그 마 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주님은 다윗의 성실함을 보시고 이스라엘의 목자로 선택하신 것 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도둑이든, 강도든, 살인자든…회개하면 누구든지 쓰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 나 불성실한 사람, 게으른사람은 쓰시지 못 하십니다. 잠언 22장 13절에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 겠다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로 안되는 방향으로만 생각합니다. 매사에 부정적 인 생각만 하게 되니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12 제자를 택하신 것도 그들이 빌빌거리며 해변에서 놀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작은 그물입 을 꿰매고 있더 사람들… 고기 잡은 현장에서 …비록 밤새 한마리도 못 잡았지만 계속해 서 그물을 내리고 있는 사람들… 그들을 찾아 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Follow me!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틴 루터 킹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항상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일에도 충성되다고 가르 쳤습니다. 그가 큰 비젼을 말할 때 마다 어머니는 청소부터 잘하라고 말슴하셨다고 회고합 니다. ”말틴 청소할 때 쉑스피어가 글을 쓰는것 처럼 충성하여라. 베에토벤이 음악을 작 곡 하듯이 청소하거라” 그가 큰 인물이 되었을 때 그는 거리의 청소부에게도 이런 말을 하 였습니다. ”형제여, 하나님이 그대에게 맡겨주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는 자부심 을 가질수는 없겠는가?” 내게 맡겨진 일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끝가지 최선을 다하시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4. 충성의 원리 하나님은 맡겨주신 달란트에 대해서 충성하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할 때 더 큰 것을 맡겨주시고, 상을 베풀어주십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 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23절) 하나님은 이와 같이 맡겨주 신 달란트에 대해서 충성하는 자에게 칭찬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상을 주십 니다. 어떤 주인이 머슴들에게 상을 주려고 짚단을 주며 새끼를 꼬라고 했습니다. 게으른 머슴 은 크게 꼬면 빨리 끝낼 수 있어서 그냥 대충대충 빨리 꼬아서 일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충성된 머슴은 새끼를 어디에 많이 쓰시려고 하는가 싶어서 정성껏 가늘고 길게 잘 꼬았습 니다. 그런데 주인이 한 자루에다가 엽전을 담아서 내놓으며 하는 말이 ‘너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수년 동안 수고했으니, 어제 꼰 새끼에다 이 엽전을 끼어서 가져가라’라고 했 습니다. 가늘고 튼튼하게 새끼를 꼰 충성된 머슴은 한 짐씩 걸머지고 가서 집도 사고 논 도 사서 부자가 되었는데, 대충대충 굵게 새끼를 꼰 게으른 머슴은 돈이 들어가지 않아 별 로 못가져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의 일에 죽도록 충성함으로 하나님께서로부터 상 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충성과 열심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맹목적인 열심은 매우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 습니다. 충성도 중요하지만 착하고…. 충성되어야 합니다. 착하다는 말은 그냥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는 그런 동기를 가지고 충성하고 있는가?” 하는 것 입니다.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것 입니다. 많 은 사람들이 여기서 걸립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언제 나 열심없는 사람보다 열심 있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 입니다. 충성의 동기를 항상 점검하셔야 합니다. 착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마지막 30절에 보면 주님의 책망 이 나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으라” 이 무익한 종을!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직분을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봉사하는 목적이 무엇입 니까?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봉사를 통해 나는 이웃을 유익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있 습니까? 열심히 일하면서도 교회를 전혀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봉사도 있습니다. 동기가 잘못된 봉사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 한가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나의 봉사를 통해서 나는 나는 나의 이웃들을 유익하게 만들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한 사람인가? 교회에 유익이 되고 있는 존재인가? 결심: 은사 주일입니다. 새롭게 교회 봉사를 결심하는 순간입니다. 작은 일라도 충성 하겠 습니다. 유익한 종이 되겠습니다.
갑절의 축복을, 갑절의 봉사로/ 왕하2:6-14
갑절의 축복을, 갑절의 봉사로 왕하2:6-14 <서론> 지금 우리 나라에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차기 대통령의 정권 인수 작업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의 시대에서 엘리사 의 시대로 전환하는 중요한 시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 리야를 불 말과 불 병거에 태워 하늘로 데려가기 전에 선지자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직분을 잇게 하셨읍니다. 그때 엘리사는 \\\"갑절의 은혜\\\"를 간절 히 구했고 또 이것을 위해서 힘을 썼습니다. 오늘은 장산교회 1998년의 표어인 \\\"갑절의 축복을, 갑절의 봉사로\\\"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 다. 첫째,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1. 갑절의 영감은 갑절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왕하 2:9)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이것은 은혜를 구하는 열망입니다. 이 시대는 달라가 없어서 문제라고 아 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달라의 부족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무 관심과 은혜에 대한 열망이 없는 것이 라 생각됩니다. 엘리사는 한 때 부유한 농부였습니다. (왕상 19: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 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 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엘리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 (왕상 19:20)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 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 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이 시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구해야 할 때입니다. 2. 민족의 신앙부흥을 위해 갑절의 영감이 필요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남쪽 유대의 선지자가 아니고 북쪽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위대한 선지자들의 말 씀이 필요합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필요 한 때입니다. 이 때는 민족적인 회개와 부흥이 필요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같은 소원을 말했 습니다. (합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 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 시옵소 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제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분발해야 하겠습니다. 이 때는 한국교회의 80년대의 부흥을 다시 일으킬 때입니다. 한국교회가 모두 간 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면 이루어 질 것으로 믿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은혜를 구했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 께로 감이니라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3.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선지자의 할 일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선지자들의 열망이며 우리의 열망입니다.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더 크고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엘리사는 기적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엘리사의 기적은 성격상 예수님의 표적과 흡사합니다. ① 요단의 물을 말렸고. ② 여리고의 물을 치료했다. ③ 벧엘에서 우상 숭배 어린이 42명이 곰에 물려 죽은 일이 있고 ④ 과부의 기름통의 기름 을 풍성하게 했고 ⑤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고 ⑥ 독이든 음식물을 해독했고 ⑦ 한끼 빵으로 백여 명을 먹었고 ⑧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침받 게 했고 ⑨ 도끼로 물위에 뜨게 했고 ⑩ 하늘 군대를 보여 준 것입니다. 만 배를 구하지 않고 갑절을 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축복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습니다. 만배 천배를 요구합니다. 왜 갑절을 구했습니까? 우리들은 만 배로 축복해 달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만 배는 성경에는 없는 말입니다. 천 배는 단 한번 나타납니다. (신 1:11)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백배가 축복의 보통 기준입니다. (창 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 서 복을 주시므로 (막 4:20)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 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 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갑절이 너무 적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갑절은 다른 사람에 게 배상 법적 기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출 22:7)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그 이웃 의 집에서 봉적하였는데 그 도적이 잡히면 갑절을 배상할 것이요 갑절은 일반적인 축복의 원칙입니다. 안식일 전날 하나님께서 갑절의 만나를 내려 주셨고, 욥에게 하나님은 갑절의 축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욥 42:10)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 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갑절이 수학적으로 1 + 1 +1 +1 라는 산수 적인 것만이 아니라. (1+ 1) × 2 × 2 라는 곱셈도 있고, 기하 급수적인 것도 처음에는 갑절로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도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전도하면 배가가 됩니다. 한국교회 모든 신자들이 한 사람씩만 전도하면 당장 2천만이 됩 니다. 엘리사는 욕심을 부리자 않고 갑절을 구한 확실한 믿음에서 시작했 습니다. 엘리사는 갑절의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 뿐 아니라 갑절로 노력했습니 다. 둘째, 갑절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갑절의 봉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받은 만큼 봉사해야 합니다. 그만큼 실천하고 수고를 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사 의 노력은 1. 지도자를 따르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때어버리기 위하여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 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피하려고 했으나 엘리사는 \\\"여호와의 사심 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나니\\\" 라고 하면서 끝까지 따라갔습니 다. (왕하 2: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 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왕하 2:4)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 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 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왕하 2: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 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 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세 번씩이나 같은 말, 같은 마음으로 따라갔습니다. 마음 상했다거나 불평하는 말은 일체 없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좇는 우리의 자세를 가리켜 줍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 라갈 때 변함없이 다라야 할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개의치 않고 끝까 지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갑절의 영감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2. 엘리사는 엘리야를 주시했습니다. (왕하 2:10)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 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에리사는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그가 본 것은 (왕하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승천하는 엘리야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후 엘리야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더불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다시 나타났습니 다. 엘리야, 에녹은 구약의 사람으로 산체로 승천한 사람들이며 천국을 증 거한 사람입니다. 엘리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그러나 당시 50명의 신학생들은 엘리야의 승천을 불신하고 엘리야의 시신을 찾았으나 헛일을 한 일도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은 예수님의 승천의 모델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승천의 증인이며 예수님의 제자들 은 예수님의 승천의 증인들입니다.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하나님과 엘리야의 능력의 갑절을 받게 되었습 니다. 그 증거가 곧 나타났습니다. (왕하 2:12)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 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 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3. 우리 교회가 1998년에 바라는 일을 위하여 (1) 갑절의 예배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남쪽 유다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북쪽 이스라엘은 벧엘과 단에서 금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나 남쪽은 형식적이었고 북쪽은 근본부터 잘 못 된 예배를 드렸습니다.\\\' 바른 예배에 대해 아모스는 말하기를 (암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 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 나가지 말 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바른 예배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 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 라 예배의 갑절의 정성으로 예배드리고 자주 드린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일주일에 주일 낮에만 나오던 분은 주일 밤도 찾고, 할 수 있으면 수요일 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벽에도 찾읍시다. 갑절로 드립시다. (2.) 갑절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사귀는 시간입니다. 갑절의 은혜란 곧 갑절의 사귐입니다. 이때는 정말 기도 할 때입니다. (3.) 갑절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왕하 2:10)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 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왕하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4.) 갑절의 감사드립시다. 엘리사는 선생님이신 엘리야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을 시간도 없이 선생님이 한 대로 겉옷으로 요단강 물을 처서 강을 건너게 됩니다. (왕하 2:12)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 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 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왕하 2: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왕하 2: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 리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우리 앞에 은혜 받을 날이 남아 있습니다. 1997년을 어려운 중에 보 냈지만 1998년에 갑절의 축복과 은혜로 시작하십시다. 받은 만큼 더 많이 드리고 봉사하십시다. 할렐루야!
값진 봉사를 하려면/ 막2:1-12
값진 봉사를 하려면 막2:1-12 한번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며칠 동안 좀 쉬려고 하 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 그곳에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 님 계신 곳으로 모여 들어 문자 그대로 입추에 여지가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람 들이 왜 이렇게 예수님께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되었습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 습니다. 마가복음 1장 41절에서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보셨을 때 민망히 여기사 그 사람의 병을 낫게 해 주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 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리고 예수님은 누구나 사랑하셨습 니다. 예수님은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신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사 람들 은 그의 말씀을 들을 때 그는 나에게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다는 사실을 깨 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 은 너무너무 중요했습니다.예수 님이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다음에 성경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의인은 그 가르치시 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 같지 아니함이로다. 했습니다. 서기관들이 많 은 지식을 가지고 법률을 알고 말씀을 전했지만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고, 생 력이 있고,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 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 해서 해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 들었습니 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모 여 들었습니다. 전문 지식을 가진 일부의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 니라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도 적게한 사람도, 나이 많은 사람도 적은 사람도, 농사하는 사람도 고기잡는 사람도 누구나 다 들을 수 있 는 말씀을 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백성들이 즐겁게 듣더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힘든 말들을 써 가면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진리 를 설명 해 주셨습니 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입추에 여지가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고 하는 것 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몹시 피곤 하셨지만 사람들이 모여 드는 것을 볼 때 짜증내지 아니하고 물리치지도 아니했습니 다. 그는 사람들의 요구와 그들을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알고 계셨습 값진 봉사를 하려면 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 시는 일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말 씀을 전하시는 중인데 어떤 사람이 지붕에서 이상한 소 리가 나더니 구멍이 둥그렇게 뚫려 있고 침상에 누운 사람 하나가 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버나움에 예수가 오셨다는 소문이 들리자 사람들은 물밀듯이 모여 갔는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뵙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은 갈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중풍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잊지 아니하 고 있는 네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거동하지 못하는 이 병든 사람 중풍병든 분을 예수님 계신 곳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시간 이 넉넉해서, 특별히 할 일이 없 어서 병든 친구와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병든 친구를 예수님 계신 곳까지 와서 들어갈려고 했더니 발을 들 여 놓을 틈이 없었다고 성 경은 말합니다. 아마 보통 사람 같았으면 아하 공연히 고생만 했다, 할 수 없다. 이 사람 아무래도 예수님 만날 팔자가 못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돌아섰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낙심하거나 좌 절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문으로 못 들 어가면 다른 곳으로 들어갈 길이 없겠나 생각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힘든 일이 지만은 좀 무례한 일이지만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사 람을 내 려 보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면 언제나 길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중단하시고 지붕을 뚫고 침상에 누워 내려오는 사람에게 눈길을 돌 렸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적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나 타내게 한 것 은 믿음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그랬 습니다. 그러니 까 침상에 누워 내려오는 환자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없었을는지도 모 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받으시고 이 환 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누가 값진 봉사를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어떤 곤란에서도 포 기하지 아니하고 계속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믿음 가진 사람 앞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 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값진 봉 사를 한 사람들은 모두 다 믿음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믿 음으로 장성해서 애굽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을 거절하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자기 백 성 이스라엘과 함께 고생하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중요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 자신의 육신적인 면만을 생각했다고 하면 그에게 믿음 이 없었다고 하면 이와 같은 사명감이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가 만히 있 으면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바로 공주의 양자로서 편안하게 고관들과 사귀면서 지낼 수가 있었을 것입니 다. 그런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 속에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 은, 내가 이 땅 위에 온 것은 나만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고생하는 내 동족을 구원하는 일에 내가 한 몫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안락한 자리, 편안한 자리, 부귀의 자리를 포기하고 이 자 리에 내려오게 된 것 입니다. 믿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더구나 이 사람들의 믿음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예수께 가기만 하면 무슨 문제 든지 해결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 습니다. 복잡한 믿음이 아닙니다. 신학공부를 하고 연구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 저 단 순합니다. 예수님은 능치 못할 것이 없으니 중풍병 환자 하나 정도는 예수님을 능치 못할 것이 없으니 예수님 을 만나 뵙기만 하면 중풍병 환자 하나 정도는 능히 고칠 수 있을 것이 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열쇠가 되신다 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 을 믿는 이 믿 음이 값진 봉사를 하게 해 줍니다. 믿음이 있을 때에 확신이 있고 믿음이 있을 때에 열의가 있습니 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낙심이란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는 절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있는 사 람은 좀 어렵다고 해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뜨거운 동정심이 있었습니다. 중풍병 환자를 볼 때 그냥 무심히 보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랬을 겁니다. 참 안 됐다 저 사람 얼 마나 불편할까? 아, 저렇게 한쪽이 완전히 마비가 되고, 입도 마비가 되고 눈도 마비 가 되고 그저 눈에서 눈물이 나고, 입에선 침 이 질질 흐르고,참 보기가 안 좋다 어쩌 다가 저렇게 되었을까? 아마 혈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옆에 있는 사람 을 향해 말 했습니다. 자네도 조심하게 혈압이 높은 것 같은데 자네도 저렇게 될 수 있다. 고 말 합니다. 아, 저 사 람 저렇게 누워 있는데 사실 저렇게 되면 빨리 가지도 않는다. 고 말합니다.아, 저것 참 야단인데 보통 그 정도 생 각했습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했지만 그 병든 사람을 어떻게 하면 도와 줄 수 있을까 생각한 사람은 바로 여 기 네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뜨거운 동정심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중풍 병이 들었으니 얼마나 불편하고 속상할까? 저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좀 도울 수 있을까? 만일 내가 저런 병에 걸린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이게 바로 동정심입니다. 영어로 동 정한다는 말 중에 하나가 콤페센(Compassion)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콤(Com) 이라는 말은 같이라는 뜻이고 페센이라는 말은 정열이라는 말도 되지만은 고통이라는 말도 됩 니다. 같이 고통한다 (passion) 하는 뜻입니다. 동정이란 같이 아파하고 같이 느끼고 나는 병들지 않고 건강하지만은 저 사람이 병들어 있 을 때 저 사람이 병들어 고통하는 것을 내가 같이 고통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배고프지 않지만 저 사람이 배고플 때 나 도 배고픈 것처럼 느끼는 것 이것이 동정입니다. 이 뜨거운 마음이 있을 때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밀 중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도중에 강도를 만났습 니다. 그 래서 있던 것 다 뺏기고 죽도록 얻어 맞고 그저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보니까 아주 불쌍하게 된 사람이 있단 말이예요. 동정심이 갑니다. 저 사람 어떡하나 강도를 만났나 그러나 나는 제사 드리러 가 니까 피를 만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 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사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 이 지나가다가 보니까 강도 만난 사람이 인사불성이 됐는데 참 안됐다.저거 큰일났다. 여기 강도가 있는 모양이야 나도 어물어물 하 다가는 강도만나서 저렇게 될거야. 빨리 도망가자. 하고 도망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지나 가다가 그 사람을 볼 때 얼 마나 마음이 안 좋은지 만일 내가 저 사람처럼 저렇게 된다면 어떡할까? 생각하며 자 기가 타고 가던 낙타 위에서 내려서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낙타 위에 싣고 주막까지 끌 고 갔습니다. 잘 돌봐 주라고 하고 만일 비용이 더 들게 되면 내가 다시 돌아와서 남 은 비용까지 모두 책임지겠으니 책임지고 좀 돌봐 달라고 하고 길을 떠났다. 그러 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세 사람 중에 강도 만난 사람에 참인 신이 누구냐? 그거야 양심이 마비된 사람도 그 정도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아, 그게 사마리아 사람이니 너 도 그렇게 하라. 고 말씀했습니다. 전에 벳세다광야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그 귀한 말씀을 즐겁게 듣고 있 었습니다. 해가 지는 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저녁은 다 되어 끼니 때가 되었는데 먹 을 것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보고 물어봐도 아무런 대책이 없 습 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아마 예수님 가까이 서서 보신 분이 있다면 저녁 햇빛이 비치는데 움푹 패인 예수님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것을 볼 수 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볼 때 그러 지 않아도 로마에서 불쌍한 내 민족인데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이렇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볼 때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떡 다섯덩이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게했다고 그랬습니다. 민망히 여기는 마음은 값진 봉사를 하게 합니다. 20세기의 성자라고 하는 알베트 슈바이쩌 박사가 어떻게 그런 위대 한 봉사를 아프리 카에 가서 할 수 있었습니까? 어릴 때 그가 살던 공원에 흑인 아이의 동상 하나가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볼 때 그는 그렇게 충격을 받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 백인들 이 아프리카 저 무식한 흑인들 그저 가서 멸시하고 식민지로 삼고 사람 대접도 안 하 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백인을 대신해서 빚을 갚아야지 그래서 음 악박사 학위를 받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많은 학위를 받고 백인 대학에 교 수직의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 포기하고 아프리카에 가서 직접 흙으로 벽돌을 이겨 집을 짓고 의술을 가지고 환자들 을 돌보며 일생을 거기에서 바쳐 일하지 않았습니까? 이 값진 봉사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뜨거운 동정심 입니다. 미 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을 잘 아실 겁니다. 그는 흑인들에게 우상처럼 계속 존경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어떻게 그 가 흑노를 해방하는 운동을 했습니까? 어린시절 에뉴 오리엔시아 노예사장에 한번 가보게 됐습니다. 다른 게 아니고 우리나라 소 파는 시장 과 비슷합니다. 저도 가 보았습니다만은 그저 다 말뚝 박아 놓고 쇠사슬로 사람들을 묶어 놓 고 사람들이 지나다가 마음에 들고 힘이 있어 보이고 일 잘할 것 같으면 흥정 해 돈을 주고, 사고 팔고 했습니다. 링 컨이 나가 있는데 어떤 젊은 노예 내외가 함께 팔려가지 못하고 짐승처럼 아버지만 따로 팔려가게 됐습니다. 아이는 아버지 사가는 쪽에 덤 붙여서 가게 됩니다. 아이가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우는 모습을 볼 때 링컨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나? 흑인도 사람인데 만일 내가 저 아이의 형편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 이때 받은 충격이 자라난 링컨으 로 하여금 장차 흑노를 방하는 위대한 봉사를 할 수게 했습니다. 뜨거운 마 음의 동정심을 우리로 하여금 인류 사회를 위해서 값진 봉사를 하게 합니 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값진 봉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협동심이었습니다. 네 사람들 은 다 다른 사람들이었지만은 잘 협력했습니다. 내려오는 말에 백지장 도 맞들면 낫다 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협력하는 일이 이처럼 중요합니다.조금 전에 우리가 성 가대의 아름다 운 합창을 들었습니다. 합창하는 게 그렇게 쉬운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 이 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거기에는 다른 소리가 있습니다. 소프라노와 알토와 테너 와 베이스 소리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니 이것이 잘 조화를 이루고 아름 다운 화음을 이룰 때 듣는 사람에게 얼마나 기쁨을 줍니까? 합창 지휘하는 분의 말씀을 들으면 제 일 중요한게 화음 이고 이 화음을 잘 하기 위해서는 호흡을 맞춰야 된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잘 한다고, 개성만을 발휘한다면 합창은 안 됩니다.얼마 전에 한국의 아주 우 수한 남자 독창자들만 모여서 합창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 독 창을 시 키면 아주 미성을 가지고 잘 하는 독창 자들입니다. 그런데 합창을 하는데 내가 생각 했던 기대에 어긋나게 도 자기 개성들만 가지고 발성을 내니까 합창으로선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여기 성가대도 합창을 할 때 내가 정 확한 음정가지고 아름다운 음색으로 정확한 박자를 가지고 감정을 살려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 소리를 상관도 하지 않고 자기 혼자 잘났다고 소리를 내면 그게 합창이 됩니까? 다 맞춰야 합니다. 옆에 사람이 어떻게 하나 하는 것 같 은 마음 가지고 해야지 옆에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하는 합창 은 합창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존경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 양보해야 합니다. 자, 여기 네 사람이 환자를 메고 올 때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물론 거기 키 큰 사람도 있었을거고, 키 작은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키 큰 사람도 들것을 드는데 더구나 중풍 병 환자는 충격을 주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조용하게 수평을 맞춰서 들어야 하니까 상당히 마음이 쓰였을거에요. 키 큰 사람 은 들다보니 좀 올라갔을 것이고 작은 사람은 들다보면 낮아질겁입니다. 키 큰 사람은 낮추고 작은 사람은 높이고 그러니까 수평이 맞았습니다. 키 큰 사람은 컴파스가 기니까 한번 움직여도 성큼성큼 나가는데 작은 사 람은 아장아 장 나가니 성큼성큼 아장아장하는 걸 맞추려니까 한 사람은 천천히 가고 한 사람은 늦게 갔을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 보조를 맞추었을 거 아니예요. 환자 하나를 움직이는데 그냥 되는 거 아니고 여기 서로 양보와 협력이 필요하 다 그 말입니 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일이든 가정일이든 나라일이든 마찬가 지입니다. 힘을 합해야 이 큰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구역을 심방할 때도 심방하는 분, 몇 분 안 돼죠. 세 사람 네 사람 정도 되는데 그 분들도 마음을 합해야 구역 심방이 잘 됩니다. 전에 제가 심방을 구역 책임자들과 같이 갔는데 한 분은 이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가야 빠릅니다. 다른 분은 아니요 왼편으로 들어가야 빠르다고 합니다. 저는 가운데서 왼편을 따라가나 오른편을 따라가나 얼마나 망설이고 힘들었는 지 모릅니다. 서로 그러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모릅니다. 가서 봐도 마음이 편 하지 않고 또 고집은 왜 이렇게강해 나는 오른편으로 가야 된다고 나는 왼편으로 가 야 된다고 해서 그저 가서 만나기는 만났는데 만나도 마음이 편하질 않았습니다. 작은 일 이예요. 그러나 협력하는 것보다 협력이 안 될 때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지구력이 있었어요. 어려운 일에 부딪쳤다고 해서 낙심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지 하면서 집념을 가지 고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선을 행하며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 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두리라. 그랬습니다.여 러분, 선한 일이라고 해서 당장에 인 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일이라고 해서 당장에 성과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오히려 선한 일이 어려움을 당하고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하 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 행하노라면 반드시 열매 맺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농사하는 사람이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고 해서 그 다음날 열매 거 두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 맺힐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꽃 이 피고 열매 맺고 익을 때까지 급해도 기다려야 합니다. 반드시 그럴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주사약 중에 606호라는 주사약이 있었습니다. 요즘엔 그런 것이 없어졌습니다. 아주 좋은 약 중의 하나였는데 어떻게 606호 가 됐는고 하니 주사약을 개발한 분이 연 구하고, 실패하고, 안 되고 하다가 606번째 성공을 해서 그 이름을 606호라 했다고 합 니다. 말이 쉽지 605번째 실패한 것을 계속 하기가 쉽습니까? 지구력입니다. 사회를 위해서 많은 봉사를 한 사람, 위대한 봉사를 한 사람들 보십시요. 단번에 한 것이 아 닙니다. 실패하면 또 하고 안 되면 또 하고 해서 값 진 위대한 봉사를 하게 된 것입니 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 사람들은 환자를 예수님 계신 곳으로 데려온 것까지는 했 습니 다. 그 다음은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의사십니다. 네 병이 나았다 하는 대신에 내게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것은 진정한 기적입니다. 그 사람의 육체가 고쳐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영혼은 이미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받 았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병까지 고쳐 주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 께 나아 가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절실한 요구를 들어 주십니다. 그는 때때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들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들어 주시는 한편 무거운 짐을 참아낼 수 있는 힘까지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의 삶 의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 과 지혜를 허락했습니다. 그는 위대하고도 값진 봉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킬 만한 믿음, 뜨거운 동정심, 훌륭한 협동심, 굴할 줄 모르는 지구력과 인내심이 불쌍한 중풍병 환자를 예수님께 돌아오게 했고, 놀라운 기적을 체 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중풍병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몸은 건강하지만 육신 은 든든하 지만 영혼 구원 받지 못했으면 중풍병 환자입니다. 지식은 아무리 많아도 영 혼 병들었으면 중풍병 환자입니다. 돈은 아무리 많아도 영혼이 구원 받지 못하면 중풍 병 환자입니다. 육신은 젊었지만 영혼이 건강하지 못하면 중풍병 환자 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한국 사회에 지금 만연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약입니다. 고등학교 학생 중에 40% 가 이 마약을 체험해 보았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가정주부 중에 마약을 체험한 분이 상당히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망국약입니다. 영혼만 병들 뿐 아니라 육신까지 함께 망하고 맙니다. 가정이 망하고 사회가 망합니다. 왜 그 런 줄 아 십니까? 영혼이 비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요즘 고등학교 학생들 마음에 제일 자리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어떻게 해서든 대학교 가야 된다고 해서 공부만 공부만 하라고 하니까 고등학교 시절에 문학작품 하나 제 대로 읽어 보는 사람이 적습니다. 노 래 한번 불러볼 여유도 없습니다. 감정이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말라 버 린 감정 에 환각제 한번 사용해 보면 희안한 세계를 맛보니까. 야! 이런 세계도 있구나! 해서 거기에 빠지고 맙니다. 이걸 누가 건질 수 있습니까? 빛의 자녀인 우리가 건질 사명입 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첫주간부터 금요 심야기도회 전에 1시간30분동안 모여서 찬양을 합니다. 은혜가 많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가족이 다함께 나와서 이 찬양하는 대열 에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한주일 내내 입에서 찬양 소 리 한번 없이 살다가 그 만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함께 찬양해 보세요. 우리 영혼이 살 찌게 되고 우리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기름진 삶에 축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 니다. 모두가 중풍병 환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나오면 주님께서 치료해 주시고 완 전 케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믿음 가지고 협력심 가지고 동정심 가지고 낙심하지 않 는 지구력 가지고 이 사회 의 중풍병자인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 수 있는, 빛에 자녀의 사명 다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값진 봉사를 하려면/막2:1-7
값진 봉사를 하려면 막2:1-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미 봉독하신 말씀 중에 6-7절 말씀을 다시 읽었습니다. 오늘 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이 말씀 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전에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 상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라고 했는데, 나에게 한 가지 말만 더하라고 하면 서슴지 않고 그것은 감사라고 하겠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성경에 보면 감사하라 는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 현대인은 불만과 불평 때문에 마음 속의 기쁨과 감격 그리고 감사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만족이 없습니다. 백만 원이 있으면 이 백만 원을 못 가져 안타까워합니다. 선풍기가 있으면 에어컨이 없어 속상해 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톨스토이의 유명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 성주가 당을 많이 가지기 를 원하는 한 농부를 만났습니다.이 농부는 땅을 준다면 무엇이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주는 이 농부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에게 내가 땅을 줄 것이니 자네가 가지고 싶은 만큼 가지게. 그런데 해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자네가 걸어서 출발점에 와 닿으면 그 안에 있는 땅은 모두 자네에게 주겠네. 이 농부는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도시락을 싸들고 그 넓은 땅을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다 리가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숨이 찬 것도 생각할 여지가 없이 계속 달렸습니다. 얼마나 달렸는 지도 모릅니다 저녁이 되어 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농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해야겠다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서산에 해가 지기 바로 전 이 농부는 성주의 발밑에 도착하며 손을 짚었습니다. 온 종일 뛰어 그 안의 땅, 그것은 약속대로 이 농부의 소유가 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주의 발 밑에 손을 짚고 쓰러진 그 농부를 일으켜 보니 그는 지치고 지쳐서 쓰러지 는 순간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가 차지할 땅은 반평으로 넉넉했습니다.너무나도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이 농부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현대인의 불평 은 상대적입니다. 좀더 좋은 것, 좀더 많이 가져 보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참된 감사는 상 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감사하는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감사는 여유있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 말 은 물질적인 여유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입니다. 우리가 감사주일을 맞으면 미국에 처음으로 왔던 청교도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감사를 드렸습니까? 오늘과 같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풍요를 만끽하면서 감사했습 니까? 아닙니다. 추위와 헐벗음 속에서도 한 해를 지내고 얼마의 곡식을 추수하게 되니 너무 감격하고 감사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욥의 감사를 기억합니다. 동방의 의인으로 가산이 넉넉하고 훌륭한 자녀 10남매를 두 고 세상적으로 볼 때도 부족할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을 스바 사람, 갈대아 사람에게 다 빼앗기고 10남매 자녀들은 맏형 집에서 즐기고 있는 데 대풍이 몰아 치며 집이 무너져 압사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욥은 얼마나 급했겠습니까? 이 고통을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 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갈 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 하신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 가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어린애는 감사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감사는 성 숙한 인간의 자기 표현입니다. 어린애는 부모가 무엇을 사다 주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 이 없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애가 자라 성숙해지면 부모가 내게 사다주는 것이 없 어도 오늘의 내가 있게 하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 감사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자녀는 장가들고 시집가서 가정을 이루어 자녀까지 낳았어도 언제나 부모님이 무엇 좀 주어야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쓴 오이 보듯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체는 자랐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사람됨이 성숙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여자는 결혼하여 첫 아기를 낳아 키워 보면서 어머니의 수고를 깨닫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숙의 체험입니 다.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얼마나 성숙한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표현이 되기도 하 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마움을 알고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 때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 다.더구나, 즐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기쁨의 표현이며, 진실한 인간의 표시입니다. 사실 청교도들의 감사절, 그것은 하나의 잔치였습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 고, 기쁨이 있고, 평화가 있고, 용서가 있었습니다. 현대인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수입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는 생산과 일치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돈 벌레는 있을지 모 르지만 참 인간은 없습니다. 거기 비인간화된 기계는 있을지 모르나 참된 사람을 즐길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참된 인간은 자기의 삶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의 삶엔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 그것은 우리의 죄사함을 받은 기쁨의 외침이며 감사의 고백인 것입니다. 예 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놀라운 감사를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감사를 넘치게 할 수 있는 마음의 기쁨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이 감사함을 넘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햇빛을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 골고루 비추십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불의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비를 내리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5장 7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 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습 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놀랍습니다. 이렇게 크시고 풍성하십니다. 이 사랑을 생각할 때 감 격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함을 넘치게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이 세상이 되어 가는 것을 가만히 보면 벌 써 멸망시키고 말았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까지 우리가 이 땅 위에 있게 해주신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악도 선용하시며, 인간의 실수도 선용하셔서 더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분이 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만 입이 있어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대하여 감사함을 넘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구원에 대하여 감사함을 넘치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삼일저녁 기도회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 고 했 습니다. 우리는 사실 조의 값으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와 같 은 우리를 누가 건지시고 누가 살려 주셨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남아 있는 것이 누구 의 은혜입니까?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옮기시며,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의 소망가지 주신 하나님 에게 우리가 더 이상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감사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돈벌이 잘 되어서 생활 여유 있게 살고, 몸에 병 없이 건강하게 지내고, 생각하는 일들이 술술 잘 풀려 나가면 그것으로 감사할 것입니 까? 그것은 현대의 물질주의, 유물론적 사고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 어디에 보아도 물질적인 것으로 인한 감사는 한 곳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가 물질적인 것과 결부될 때 복음은 장사속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기독교는 기복위주의 물질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물론과 기독교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감사의 조건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구원받은 놀라운 사 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했 습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마는 육신 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 사람과 똑같은 상황을 만나고 처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 현 실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가지는 예외적인 특권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차 이가 있다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실히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가 사는 세상엔 우리의 삶을 괴롭게 하고 슬프게 하는 현상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맑고 개인 날씨 보다 어둡고 구름 덮인 날이 더욱 많습니다. 체념과 반항, 불만의 젊은이들이 우리를 괴 롭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저녁이 되면 아침이 다가오는 창조의 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어두움 속에서 새벽을 바라보는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지난 목요일 우리 농아교회 강 주해 목사님이 결혼을 했는데 부족한 사람이 주례를 했습니 다. 아마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제가 그 동안 주례한 일이 천번은 훨씬 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농아의 결혼 주례는 처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결혼식을 주례하면서 그 가정의 지내온 이야기를 미리 들은 바 있는 저는 너무 감격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로 주례 를 했습니다. 기쁜 결혼식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강 목사님이 어릴 때 병이 나서 치료하는데 페니실린 주사를 잘못 맞아 그만 농아가 되게 된 사실을 알게 되어 가정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어머님은 지금 충현교회 권 사님으로 신앙이 좋으신 분인데 이렇게 하시는 데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겠지 생각했답니다. 그때부터 주일에는 우리 농아교회에 데리고 나오시고 주간에는 농아학교에 나가셨는데 거기에 갔더니 대개의 부모들이 하는 말이 저건 죽지도 않고 큰일 났어 하면서 귀찮아하는 모습을 볼 때, 아, 우리 애를 농아 되게 하신 하나님은 이런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고 하시는 뜻 이 계시는구나 깨닫고 감사하면서 동생들에겐 말을 가르치기 위해 선생님을 따로 모셨답니다. 그리고 권사님은 전적으로 농아된 아들을 위해 수화를 배우시고 국민학교에서부터 신학교를 졸업시키고 미국에까지 유학시켜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지난 9월 노회때 한국에서는 최초로 농아목사로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강 목사님 역시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내 사명은 불행 한 농아를 돕는 일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혼기가 되어서 가정에서는, 특히 어 머님 되시는 권사님이 내가 너보다 오래 살 것이 아니니까, 네 아내만은 정상인을 얻어 귀와 입노릇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기도하는 데 아주 훌륭한 규수들이 강 목사님의 귀와 입으로 봉사하겠다고 많이 나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강 목사님은 내가 평생을 나같이 불행한 사람 위해 일하려는데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서로 이해하고 도울 수 있어요. 하면서 같은 농아 처녀와 꼭 결혼하게 해달 라고 해서 가정에서는 또 한번 눈물의 바다를 이루고 권사님은 울음소리가 밖에 나갈까봐서 수 돗물을 한껏 틀어놓고 물소리 앞에서 우셨다고 해요. 그러나 울며 기도하고 기도하며 우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 하 나님의 뜻이 바로 여기 있었구나. 내 아들이 자기와 같은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같은 처지에서 복음을 전하려 하는데 이게 내 아들의 믿음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온 가 족이 기쁨으로 결혼을 허락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없이 이런 감사를 할 수 있 습니까? 참 훌륭한 가정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믿음 있는 목사님이 나오게 했습니다. 그런고 로 믿음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함을 넘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불평하며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서 그랬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감사함을 넘치게 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입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립시 다.우리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인데 의의 병기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 헌신하십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물질로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헌금은 물질 자체에 뜻이 있는 것이 아 니라 마음과 몸을 드리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뜻깊은 감사 주일에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축복이 우 리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강한 자의 섬김/ 롬15:1-2/ 2010-09-02
강한 자의 섬김 롬15:1-2 니이체라고 하는 철학자가 신은 죽었더라고 외쳤습니다. 그가 이야기한 신은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을 이야기한 것으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하나님을 죽였다 라고 까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니이체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인간을 나약하게 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당시의 기득권 층이었던 교회의 지도자들이 저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신앙적인 겸손처럼 가르쳤기 때문에 니이체는 기독교는 나약한 것을 숭상하는 종교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와 같은 종교의 하나님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후에 공산주의의 시조가 된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이야기 한 것과 같은 맥락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주장에는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저들이 지적하고 문제시한 것이 바로 당시의 우리 기독교의 문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이었지 기독교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이체는 그것이 곧 기독교 인줄로 착각하고 기독교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죽였다라고 잘못 주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약함을 숭상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강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는 모든 인간의 약함을 강하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약한 것들이 다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상한 갈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힘에도 쉽게 꺾이지 아니하는 백향목과 같은 나무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상한 갈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강한 백향목과 같아집니다. 하나님은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꺼져 가는 등불 같은 사람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아닙 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바람에도 쉽게 꺼지지 않는 횃불같은 사람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상한 갈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강한 횃불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는 약한 자를 위하고 섬기는 종교이지 약한 자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보면 1절에 \\\\\\\\\\\\\\\'우리 강한 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즉 예수 믿는 사람과 강한 사람을 한 말씀으로 묶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참으로 강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와 같은 능력이 없다고 우리를 속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밥 먹여 주느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된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 그 말속에는 진리는 밥을 먹여 줄 수 없다는 뜻과 똑바로 가면 서울을 갈 수 없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무능함을 주입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진리가 밥을 먹여 주고 똑바로 가야만 서울을 갈 수 있습니다. 모로 가면 서울을 갈 수 없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을 갈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청년이 오크랜드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하여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옥크랜드로 가는 탑승객들은 몇 번 탑승구에서 비행기를 타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 비행기는 미국의 오크랜드(oakland)로 가는 비행기가 아니라 뉴질랜드의 옥크랜드 (auckland)로 가는 비행기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뉴질랜드까지 갔다가 다시 미국의 오크랜드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모로 가서는 절대로 서울을 갈 수 없습니다. 서울을 가려면 똑바로 가야만 갈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좀 빗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진리에는 능력이 있고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나약한 자가 되지 아니하고 강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강해집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함은 우리의 최종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강함은 보다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과 도구입 니다. 강함의 목적인 있습니다. 그것은 섬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약한 자들을 돕고 섬기라고 강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에게 정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꾀가 우리를 강하게 한다\\\\\\\\\\\\\\\' \\\\\\\\\\\\\\\'강함은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며 강한 자가 되면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될 것이며 약한 자들의 섬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진리가 우리를 강하게 하며 강함의 목적은 섬김을 받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섬김이 우리의 삶과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지난 주 우리 교회에서는 장애인 복음화 대회가 열렸습니다. 밀알 선교단이 주최한 대회였는데 저희 교회와 교인들이 참으로 열심히 섬겼던 대회였습니다. 400여명의 장애인들이 전국에서 모여와 정말 천국의 잔치를 벌렸습니다. 장애인들이 얼마나 좋아들하는지 저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마음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섬기는 봉사자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2박 3일 동안 400여명의 장애인들과 400명이 넘는 봉사자들 의 식사를 준비하여 대접하는 일은 마치 전쟁과 같았습니다. 그 힘든 봉사를 우리 교인들이 열심히 감당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손과 발이 되어 저들을 보살펴 주었으며 뿐만 아니라 민박까지 교인들이 맡아 주어서 얼마나 훌륭하게 집회가 진행되었는지 모릅니다. 지난 주 장애인 복음화 대회 기간동안 우리 동안 교회는 천국이었습니다. 최고로 아름다웠고 최고로 교회다웠습니다. 참으로 감사했던 일은 동네 분들까지 우리 동안 교회를 칭찬하시면서 동안 교회 복받겠다는 말씀들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들의 섬김이 세상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리고 삶을 아름답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람답게 그리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듭니다. 강한 자의 섬김이 세상과 삶을 아름답게도 하지만 강한 자의 섬김이 약한 자들의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저는 장애인 복음화 대회를 지켜보면서 약한 사람들 이 강한 자들의 섬김을 받으면서 강하여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한 자들의 섬김을 받으면서 저들은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를 치유 받고 있었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를 치료받게 되자 저 들도 알지 못했던 놀라운 힘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저들에게서 나타나는 힘들은 우리와 같은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힘과 능력들이었습니다. 약한 사람들이 자신의 약함을 극복할 때 나타나는 힘은 엄청난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강한 힘은 약함을 극복할 때에 나타납니다.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어려운 일들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 의 약할 때 강하다는 말씀의 뜻이 여기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진정으로 강한 것은 강함에 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약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주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섬기면 세상과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물론이요 그 섬김이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여 강한 자들이 능히 감당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삶의 능력자들이 되게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강한 자가 되십시다. 강한 자가 되어 모든 약한 자들을 예수님 처럼 섬기십시다. 삶의 목적을 자기를 기쁘게 하는데 두지 말고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들을 기쁘게 하는데 두고 사십시다. 그와같은 삶을 통하여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며 모든 약한 것들을 강하고 아름다 운 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저와 여러 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목사(서울 높은뜻숭의교회)
겸손과 섬김/시131:1-3,마20:20-28
겸손과 섬김 시131:1-3,마20:20-28 예배로 부름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11:28,29). 개회기도 : 성령강림 여덟째 주일이며 교회학교 주일을 맞아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학교는 여름을 맞아 여름성경학교와 여름 수련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회학교 뿐만 아니라 남신도회, 여신도회도 여름행사를 통해 예수님의 삶을 배우게 하시고, 그래서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섬김의 모습으로 주님께 예배드리오니, 주님 받으시고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설교 I. 서론 > 오늘은 성령강림 여덟째 주일이지요. 이제 많이 지났어요. 그리고 오늘은 교회학교주일이에요. 항상 여름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교회학교주일을 지켜요. 여름성경학교, 여름수련회가 바로 다음 주이니, 일주일도 안 남았어요. 선생님들이 바쁘시겠구나 생각하며 감사해야 할 겁니다. 이번 여름성경학교 주제는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섬길래요\\\"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인 \\\"사랑과 섬김\\\"의 모습을 배우고자 해서 이런 주제를 정한 줄로 압니다. 교회학교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Ⅱ. 예수님의 겸손수업 > 저는 오늘 교회학교 주일을 맞아서, 이 주제와 비슷한 주제를 오늘 이 마태복음본문에서 발견하고, \\\"겸손과 섬김\\\"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이 마태복음 본문에는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 예수님께 와서 부탁을 하지요.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태복음 20:21).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내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 할 수 있습니다.\\\"(23절)..... \\\"이것은(좌우편에 앉히고 안 앉히고는) 내 소관이 아니라 아버지 소관이니라\\\"(23절)..... 이들간의 대화내용을 요약하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이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가 이런 청탁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머지 열 제자가 화가 났지요. \\\'아무리 어머니가 가자고 했다고 해도 그렇지, 애들도 아니고 너희들이 그렇게 살짝 가서 청탁을 넣을 수 있냐?\\\' ... 제자들이 그의 어머니에게 화낼 순 없고 그 두 형제에게 화를 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방인의 집권방식이나 권세형태등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제자들을 진정시키면서 \\\"겸손과 섬김\\\"의 도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태복음 20:26-27).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태복음 11:29). ...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빌립보서 2:5,8).....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보다도 섬기는 자로서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III. 후대의 겸손교육 > 겸손에 대해서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많은 교훈들이 우리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솝은 동물들을 이용해서 인간들을 교훈하고 있어요. 이것은 우리 인간이 교만하면 안된다는 것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이솝 우화 중에서 못들었을것 같은 것만 뽑았으니, 그까짓 것 하지 마시고 겸손하게 한번 들어보세요. > ①여름이 되었어요. 모기가 힘쓰는 계절이 왔어요. 모기가 여름이 되어서 돌아다녀 보니까 다닐 만 해요. 자기를 겁내지 않는 것이 없더라는 거예요. .... 그래서 내가 잘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쪼매한 것들은 빼고, 굵직굵직한 것들만 상대하기로 했어요. 황소가 힘 좀 쓰는 것 같아서, 황소에게 가 붙었어요. 붙어보니까 황소도 별게 아니에요. 작아 보였어요. 그래서 마음놓고 식사를 하다가 - 빨대를 꼽고,선지국을 들이키다가 - 그만 잠이 들었어요. 자다가 깨어보니 미안했어요. ... 그래서 \\\"황소야! 너무나 오래 있었구나. 미안하다\\\" 그랬어요. ... 그러니까 황소가 대답했어요. \\\"너 따위는 왔는지 안왔는지 알지도 못했는데...\\\" 하며 꼬리를 딱 쳤더니 모기가 죽어버렸어요. 모기는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황소를 얕잡아 보았던 거예요. > ② 그 다음 포수가 화살을 가지고 사냥을 하러 나갔어요. 동물들은 이 포수가 오는 것을 보고 피해서 도망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그 중에 사자 한 마리는 버텼어요. \\\'내가 산중 왕인데 체면이 있지, 포수의 화살정도 무서워 할 수 있나?!\\\' ..... 포수가 이 사자를 정조준해서 쏘았어요. 맞았어요. 화살을 맞았는데, 아찔해졌어요. 안 되겠어요. 어떻게 해요? ... \\\'살려 달라\\\'고 했지요. ..... 그러나 죽었어요. > ③ 사냥꾼이 이번엔 개를 몰고 사냥을 갔어요. 동물들이 다 도망을 갔어요. 이번엔 사자도 도망갔어요. 이것을 보며 사냥개는 짖으며 추격했어요. \\\"너! 사자, 사자면 별거냐? 나는 세파또인데!\\\" ... 자기가 무서워서 도망가는 줄 알고 추격하다보니, 너무 많이 갔어요. ..... 한참 가다 사자가 보니, 개가 계속 따라와요. \\\"어쭈-, 이 개 어르신이!!\\\" ... 사자는, 이 개를 넙죽 잡아서 점심을 잡수었어요. 이 날이 아마 사자의 복날이었을 거예요?!\\\' ..... > ④ 수탉은 둘이 같이 못 있어요. 그런데 둘이 있게 되어서 싸웠어요. 서로 암탉을 많이 거느리기 위해서 싸웠어요. 암탉들이 숨어서 이것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수컷들은 열심히 싸우고 있었어요. 드디어 한 수탉이 싸워서 이겼어요. 진 놈이 도망가는 것으로 끝이 났어요. 이에 숨어있던 암탉들은 나와서 만세를 불러 주었어요. 그러니까 이 수탉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담 위로 올라가 날개를 치며 외쳤어요. 뭐라고 외쳤겠어요? \\\"꼬끼오!(대-한민국!)\\\" ..... 그때 하늘을 날던 독수리가 배가 고파 먹이를 찾던 중, 이 담 위에 있는 먹이를 발견하고, 내려왔어요. 보니, 삼계탕이었어요!! ... 잡수었어요. 이 날은 독수리의 복날이었을 거예요..... > 전부 똑같은 비유지요. 그런데 똑같은 것 자꾸 말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다 맞는 말이니까.... 사람들은 보면, 모든 것을 다 아는데, 교만의 병은 모른다는 거예요. 교만보다 더 큰 병은 없는데, 그것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만 때문에 인생이 무너진 경우가 부지기수예요. ...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앞잡이)\\\"(잠언 16:18)이고,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선봉)\\\"(잠언 15:33)이라고 했어요. 어떤 목사님은 그래요. 사실 십계명보다 더 무서운 것이 \\\"교만 병\\\"이라고 하더군요. >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이것을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그런데 이것이 사실 쉽지가 않아요. 다른 것 지키는 것 보다, 십계명 지키는 것 보다 더 어려워요. 그래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것을 배우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거지요. 겸손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거예요. 속병이 없어져요. ... 그외에도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베드로전서 5: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라\\\"(시편 22:26) 등등 ... 그러니 겸손이 성공의 지름길이고, 축복의 지름길이라고 믿습니다. > 어떤 원로 목사님이 그래요. \\\"조목사! 설교를 너무 어렵게 하지마! 논리적으로도 하지마! 교인들이 그것을 듣고 받아 적을 정도가 되면, 그건 큰일이야! 듣고 웃고 끝나야지! 교인들이 잔뜩 긴장하고 설교들을 정도가 되면 안돼! 그렇게 되다보니 기장이 비판적이 된거야! 연속극 봐! 매일 똑같아도 매일 재밌잖아! 누가 그거 보고 중요하다고 받아 적는 사람 봤어? 카톨릭은 설교타령하는 걸 못봤어. 그렇다고 카톨릭이 줄어드나?\\\"..... \\\"예! 일리가 있습니다.\\\" IV.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마음도 겸손, 눈도 겸손\\\" ... >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예수님 보고 겸손해지려고 나옵니다. 겸손히 주를 섬기려고 나옵니다. 그리고 겸손히 남을 섬기려고 나옵니다. ... 오늘 시편 본문도 그런 내용이지요. 131편 1-3절까지 밖에 없어요. 굉장히 겸손하지요. ... 131편 시편 위에 제목처럼 쓰여 있는 것 읽어보세요!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 성전에 올라오면서 부르는 노래예요.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 마음이 높지 아니하고, ... 마음이 높으면 교만한 거지요. 마음이 높으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사람들도 안 좋아해요. 다 떠나요..... 그 다음 \\\"내 눈이 높지 아니 하오며\\\" - 성전에 나오는데, 눈이 높으면, 어떻게 해요? 눈이 높으면 보이는 것이 없어요. 그러면 안 돼요. 입 높으면? 입 높으면, 먹을 것이 없어요. 귀 높으면? 귀 높으면, 들리는 말이 없어요. ...... 낮추어야 돼요. 겸손해야 돼요. > 성전에 올라오실 때에는 낮추어야 돼요. 겸손해야 돼요. 그래서 이 시편 131편 처럼 노래를 불러야 돼요!!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 겸손할 때, 하나님을 믿습니다. 겸손할 때, 기도가 나와요. 겸손할 떄, 예배를 잘 드려요. 겸손할 때 능력이 나와요. ..... 겸손할 때 은혜도 받아요. ..... 겸손할 때 하나님이 찾아오세요.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사람도 다 떠납니다. 서로 겸손해야 교회가 발전할 수 있어요. 서로 잘 낫다고 하면 발전 못해요. ... 어린이들이나 학생들도 보고 배워요. 저 집사님은 정말 겸손하구나..... 배우자!! 그런데 저 집사님은 겸손하지가 않구나! 피하자!! > 성전에 오르실 때는 마음도 낮추고, 눈도 낮추고, 몸도 낮추고 입도 낮추고, 귀도 낮추고..... 그렇게 오시면 어린아이 같지요. 좋은 교회 교인들은 어린아이 같아요. \\\"어린 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시편 131편 2절에도 그러지요. 마음 낮추고, 눈 낮추고.... 하니 \\\"젖뗀 아이\\\" 같도다!!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는 것 같게 되더라는 거예요. 교회에 오실 땐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해 가지고 오세요. 젖뗀 아이가 어미 품에 있는 것 같이..... V. 결론 > 성경 몇 구절 더 보고 이제 설교를 마치지요. 에스겔 28:5을 보면, 재물로 인해서 교만해지더라는 거예요. 호세아 13:6에선 배가 불러도 교만해지더라는 거예요. 에스겔 28:17에선, \\\"네가 아름다워서\\\" - 너무 아름다워도 마음이 교만해진다고 지적해 주고 있어요. 이 외에도 원인은 많이 있겠지요... 교만은 모든 것을 잃지만, 겸손은 모든 것을 얻습니다. 우리는 사실 교만할 게 없어요. 하나님이 만가지 은혜를 주셨으니, 감사하며 사는 거예요. 그저 겸손하게 사는 거예요. ... 그래서 어거스틴도 그랬다지요. \\\"기독교인의 덕목 중에 으뜸가는 덕목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물었어요. ...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세째도 겸손.....\\\". 이것을 보고 칼빈이 이렇게 정의했다고 합니다 : \\\"신앙은 곧 겸손이다!!\\\"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self - control)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절제\\\"라고 했습니다만..... 그런데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겸손이라는 거예요. 그마만큼 어려운 것이 겸손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교육 - 겸손과 섬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때쯤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겠지요. ... 목사도 겸손해지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겸손하십시오. 그러면 청년회도, 중고등부도, 어린이부도 겸손히 주님 섬기실 줄 믿습니다. 기도 : 주님 앞에 우리는 무엇입니까? 마른 막대기입니다. 타다 남은 재입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일으켜 주옵소서. 우리는 주의 종이 아닙니까? 길 헤메는 어린양 아닙니까? 우리와 동행하시어 힘 주시고, 우리 영혼 기쁨 얻게 하시고, 우리 영혼 만족케 하옵소서. 우리가 지금 사는 것 -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 믿고 사는 것 - 더 크신 은혜입니다. 넘치는 주의사랑, 놀라운 주의 은혜, 날마다 경험하며 감사하며 겸손하게 하소서. 사랑하며 섬기게 하옵소서. -아멘-
겸손과 섬김의 본 예수님/ 요13:1-20
겸손과 섬김의 본 예수님 요13:1-20 들어가는 말 우리들은 그 동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주님의 편지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는 건강한 교회와 성도로서 살아갈 것인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을 확인하였으며, 많은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오늘부터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고별설교 부분을 생각하겠습니다. 이 고별설교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 둔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교회를 향해서 유언적인 의미로 강론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고별설교는 유언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고별설교를 통해서 주님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본문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영광의 사건인 십자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뒷 부분까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12장까지는 표적들의 책으로 예수께서 행하신 일곱 가지의 표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반부 13장부터는 영광의 책으로 영광의 사건인 십자가 사건을 목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영광의 책 부분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3-17장까지는 예수님의 고별설교와 기도에 대한 말씀이며, 18장 이하는 예수께서 영광의 죽음인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체포되시고 재판받으시고 죽으시는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속의 죽음의 상징인 겸손의 본 오늘 우리가 생각할 본문은 유월절 전날 예수께서 행하신 상징적인 행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날 즉 목요일이 되겠습니다. 이 때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자리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를 하십니다. 그 구체적인 행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행위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고 있는 이런 행위는 당시의 종들이 하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시 종들도 물을 길어다 주시는 하였지만, 직접 주인의 발을 씻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은 상전이십니다. 그 분은 보내신 자입니다. 그런데 친히 낮아지셔서 종들이 하는 혹은 종들도 하지 않는 일을 지금 하시고 있습니다. 친히 겸손히 낮아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극적인 행위입니다. 바로 내일 앞으로 나아온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드라마처럼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낮아지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을 내어놓는 데까지 낮아지실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친히 구속하실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밝히십니다. 6절부터 11절까지를 읽어 봅시다.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죄악과 사망에 갇혀있는 자기 백성을 씻어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이시며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거룩하게 씻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와 성령의 씻음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씻을 구원의 일을 가져오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이처럼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자들은 이 일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나중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이 행하신 상징적인 행위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의미를 더 깊이 알기 위해서 구약에서의 씻음과 비교해야 합니다. 구약에서의 씻음은 사람 중보자들을 통해서 짐승의 피뿌림을 통해서 씻었습니다. 그리고 물두멍의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씻음은 온전한 씻음이 아닙니다. 개혁할 때까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구약의 씻음의 일이 개혁될 때가 이르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구약의 한계 많은 씻음의 일이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새롭게 자기 백성을 창조하시는 구원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일이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주 예수께서 우리를 정결하게 씻기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친히 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 나타내셨듯이, 친히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로 죄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귀한 새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황소나 염소의 피로 씻으시거나 물로 씻은 것이 아니라 아들의 대속의 죽음의 피로 정결케 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전 인격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짐승의 피나 재나 정결케 하는 물은 육체만 씻을 뿐 마음까지는 정결케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죄악과 사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백성을 정결케 하셔서 새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새 시대의 삶의 질서의 본 예수님이 행하신 상징적인 행위는 또 다른 의미를 제자들에게 줍니다. 예수님이 주와 선생이 되어서 이런 일을 하였듯이 제자들도 서로가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15절입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새 시대의 삶의 질서를 손수 모범으로 보여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영광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의 냄새나는 죄를 용서하십니다. 주님은 겸손하게 낮아지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셨고 용납하셨습니다.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냄새나는 약점과 실수를 끌어 안으셨습니다. 서로 비판하며 판단하는 삶의 질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며 받아들이는 새 질서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손수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새 시대의 교회의 모범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병행되는 복음서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다른 복음서들은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이 장차 나타날 나라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청탁을 하며 경쟁하며 싸우는 제자들의 모습을 자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새 질서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새 시대의 나라는 이방인들처럼 큰 자가 작은 자 위에 군림하며 위세를 부리는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나라임을 천명하십니다. 따라서 크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새 나라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서로 사랑하라는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냄새나는 발처럼 형제의 약점과 실수를 용서하며 치료하며 용납하라는 말씀입니다. 손수 씻어주며 싸매주라는 가르침입니다. 상전이며 보내신 자이신 예수님이 친히 낮아져서 씻으며 봉사했듯이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서로 겸손하게 낮아지며 섬기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장차 하나님의 새 언약의 공동체가 따라야 할 새 시대의 삶의 질서에 대해 가르치는 모범이 되는 행위입니다.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대립하며 경쟁하는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추며 서로를 섬기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서 서로를 섬기며 감싸주며 돌봐주는 나라입니다. 너희 중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종이 되는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들은 예수 안에서 씻어 거룩하게 된 새 백성입니다. 구약의 백성처럼 짐승의 피와 물로 씻음으로 거룩하게 된 백성이 아닙니다. 영광의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피와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새 백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통해서 주와 선생으로 앞서가신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서로 발을 씻는 사랑의 삶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을 복되다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부름 받은 교회와 성도가 서로를 섬기며 돌보며 봉사하는 아름다운 삶이 요구됩니다. 지체의 어려움에 동참하며 관심을 가지며 친히 헌신하며 섬기는 삶이 새 백성에게 요구됩니다. 진정으로 주와 선생이 되어 겸손과 자기희생적인 사랑으로 본을 보이신 주님을 따라서 제자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경주사랑, 사회봉사/ 고전9:19-27/ 2001-09-22
경주사랑, 사회봉사 고전9:19-27 1800년 1월 9일 프랑스 남부 생세랭이라는 마을 근처의 숲에서 동물 비슷한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두발로 서서 걷는다는 것이 다른 짐승과 달랐고, 우는 소리도 산짐승과 비슷하였습니다. 조사결과 약 11세나 12세 정도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사실 인간이라기 보다는 동물에 가까웠습니다. 언제든지 어디에서나 나오는대로 용변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옷을 입혔지만 입히자마자 찢어 버립니다. 거울을 보여 주었지만 그것이 자기인줄 모르고 으르렁 거리며 대결을 벌일 태세를 갖추기도 하였고, 거울에 비치는 감자를 잡기 위해 손을 거울에 뻗히기도 하였습니다. 고아원에 수용되었으나 짐승처럼 도망치고자 하였으며, 종합검진 결과 이상은 없었지만 야수 같은 그를 인간으로 만들고자 엄청난 노력을 시도했지만 화장실이나 가고, 옷을 입으며, 몇 개의 단어를 외우는데 불과 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말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반인간처럼 살다가 1828년 사람에게 발견되어 인간훈련을 받으지 28년만에 약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생아를 통하여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능발달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그것은 어린아이시절에 크게 발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때를 놓치면 수십년을 수고해도 지능과 정서와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발달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주장처럼 인간발달은 결정적인 시기가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은 어려서부터 인간관계를 통하여 사회화되고 그것을 습득하지 못하면 사회생활의 능력은 제한된다는 사실입니다. 야생아에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인간답게 살수 있는 교육을 시켰지만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회 속에 살면서 사회화되고 인간으로서의 문화를 배우고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사회라는 말은 개인들이 모여서 상호관계를 맺고 사는 체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는 매우 큰 규모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어떤 사회는 지극히 작은 규모가 되기도 합니다. 미국, 중국, 일본, 한국은 서로 다른 하나의 사회입니다. 사회는 이런 국가적 규모 외에도 한 지역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경주는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입니다. 여기는 생활방식을 비슷하게 가진 약 30만명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주를 사랑하는 것은 곧 이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회라는 용어는 성경이 기록된 후대에 생긴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사회에 대한 개념보다 훨신 더 큰 세상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세상은 범위가 크지만 사회를 의미합니다. 사회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로 사랑의 대상이며 통치의 장소입니다. 그런 세상이 강도만난 사람처럼 쓰러져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질서가 사라지고 가족이 해체되고 삶의 의미가 붕괴된지 오래입니다. 마치 강도 만난 사람처럼 쓰러저 있습니다. 수도원은 세상을 등지고 피안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거리로 나가 세상 속에 존재하면서 세속화되지 않고 사회를 섬김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적응하면서 주의 일을 하여야 하고 결코 동화되어서는 안됩니다. 1. 종이 되어서 섬겨야 합니다. 한 시대와 그 사회를 보려면 거기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우스갯소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는 많은 유모어 시리즈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최불암 시리즈(92), 썰렁시리즈(94), 덩달이 시리즈(94), 만득이 시리즈(96), 공주병 시리즈(96)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리즈들이 나왔습니다. 공주병 시리즈 한 편만 소개하면 공주병 판정법입니다. 사진 찍을 때 보통 사람은 카메라를 쳐다보며 김치하고 공주는 먼 산을 바라보며 치즈합니다. 라면을 먹을 때 보통 사람과 달리 공주는 왼 손에 든 숟가락에 라면을 얹어 먹습니다. 이런 시리즈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우리 사회를 풍자한 유모어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시리즈를 사용하는 것이 좋지는 않습니다. 더글라스 맥그리거는 사람의 행동에 대하여 X-Y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X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게으르고, 책임지기가 싫고, 조직목표에 무관심하며, 변화에 저항하고,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통제와 위협과 처벌로 관리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Y이론의 인간은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통제하면서 목표에 접근하고, 적절한 조건만 주어지면 책임을 받아들이고, 문제 해결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상상력과 독창성과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지적 잠재력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모인 사회는 그것을 바로 세우고 이끌어갈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사회에 대한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사회봉사를 강조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셔서 봉사하셨습니다. 경주사랑을 사회봉사로써 실천해야할 이유도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람을 존중하였고, 그 사람이 모인 사회를 존중하였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유대인처럼 살았고, 헬라사회에서는 헬라사람처럼,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으로,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로,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살았습니다. 유대인의 요구가 있고, 헬라사람들의 요구가 다릅니다. 우리 사회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이며 사랑의 대상이고 통치의 장소입니다. 그런 세상이 강도만난 사람처럼 쓰러져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고 질서가 사리지고 가족이 해체되고 삶의 의미가 붕괴된지 오래입니다. 마치 강도만난 사람처럼 쓰러저 있습니다. 세상을 등진 피안의 세계가 아닌 거리의 종교이며 지역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는 사회봉사로써 세속화 되지 않고 세상을 섬김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적응할 줄 알면서도 동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좋은 소리입니다. 세상에서 복음은 예수님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의 사회에 대한 봉사는 그 목표가 복음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업으로 봉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제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봉사는 영혼구원입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일수 있지만 최종목표는 영혼구원입니다. 영혼구원을 위하여 일할 사람은 그가 먼저 영혼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경주의 29만 영혼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저희 소리 들을 때 가서 도와 줍시다 만민중에 나가서 예수사랑 전하세♬ 경주사랑을 위해 무엇을 봉사하든지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복음에 헌신된 자로 일해야 합니다. 3. 몸을 쳐 복종케 하여야 합니다. 교회가 지역사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마치 운동선수들처럼 스스로 자제하고 정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하십니다. 바울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낼 도시는 고린도입니다. 고린도는 매 3년마다 열리는 지금의 올림픽과 같은 이스무스 경기가 열렸습니다. 경마, 경주, 마차경주, 레슬링, 권투, 음악이나 시경연 등이 있었고 후대에는 짐승과 싸우는 목숨을 건 결투도 성행하였습니다. 이스무스 경기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는 끊임 없이 자기를 절제하고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경기에 승리하려는 자는 참아야 하고 노력해야 하며 더위를 겪어야 하고 사랑과 술을 끊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스무스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솔잎으로 만든 면류관을 썼고, 올림픽에서 승리한 자는 월계수 면류관을 썼습니다. 솔잎이나 월계관은 곧 시들고 맙니다. 인간의 영광도 시들고 맙니다. 그러나 주의 일은 시들지 않고 썩지 않는 면류관을 주십니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데는 비용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스스로 절제하고 자제하여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경주사랑 실천을 위하여 성육신하신 주님의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사회봉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동체를 잘 섬기는 성도/눅13:1-9
공동체를 잘 섬기는 성도 눅13:1-9 카나리아라는 새는 매우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새입니다. 그래서 어느 부자 한 사람이 카나리아 한 쌍을 사서 기르게 되었답니다. 카나리아는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고, 그 부자도 카나리아를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기에 바빴습니다. 인기가 높아진 카나리아는 우쭐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만 카나리아는 밤에도 노래를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불러 댔습니다. 그러자, 카나리아를 칭찬하던 자들이, 이제는 시끄럽다고 부자에게 항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제 멋대로인 그 카나리아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그 카나리아를 배고파서 동냥하던 거지에게 던져 주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사랑하는 태평양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 카나리아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성경 말씀을 한 단어로 압축하여 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랑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우리 인간들이 그를 본받아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시려 한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살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깨닫고 의지하려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조심 조심 살아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러나 제 잘난 멋에 빠져 착각속에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교만이요 불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카나리아도 사람들의 칭찬소리를 듣게 되자 그만 교만해져서, 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을 생각에 제 고집대로 밤새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되면, 불순종 하게 되고 결국에는 심각한 죄를 짓게 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멸망이요 사망입니다. 그래서 잠언 18장 12절에 \\\"교만에는 재난이 따르고 겸손에는 영광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반대하고 자기 생각대로만 산 사람은 이제 그 길에서 떠나 여호와께 돌아오라\\\" (사55:7)고 말입니다. 눅 13장 6절을 읽어 보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 한 그루를 심은 농부가 등장합니다. 이건 정말로 상식밖의 일입니다. 포도원이면 포도나무를 심어야 하는데 주인은 무화과 나무를 심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에게 파격적인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왜 농부는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을까요? 그것은 좋은 무화과를 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느날 포도원 땅 주인이 포도원에 와서 보니, 열매맺지도 못하는 무화과 나무가 보입니다. 그 땅 주인은 3년이나 열매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매우 안타깝게도 3년동안 열매를 맺지 못했던 것입니다. 화가 난 땅 주인은 농부에게 당장 이 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도원 주인은 누구십니까? 심판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바로 선한 열매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선물로 주시는 선한 열매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있는 말씀처럼,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한 생각, 진실 과 온유, 그리고 절제라고 하는 9가지 열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고 지켜 보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 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야 주님이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밭에 심기울 자격이 없는 이방인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포도원에 더부살이 하게 된 무화과 나무와 같습니다. 이렇게 크고 감격스러운 은혜를 입은 우리가 어찌 주님을 잊을수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부르시고 맡겨주신 직분을 소홀히 해서도 안됩니다. 내게 맡겨주신 직분이 열매를 맺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상들이 광야에서 겪은 하나님이 축복하셨던 일들을 잊지 말라고, 고린도전서 10장 1-13절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사막의 더위와 추위속에 고통당하는 그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켜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고파 하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목말라하는 그들에게 마실 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 힘을 얻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보답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러한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려 드린것은 무엇인가요? 바울은 이스라엘이 행한 보답은 오직 불순종이었다고, 고전 10장 5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마치 자식을 마른자리 진자리 갈아 누이며 키워놨더니, 부모를 패는 패륜아가 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온갖 은혜를 다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줄로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잘났다고 뽐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멸망이었습니다. 이것은 역사를 살펴보면 어쩔 수 없는 삶의 진리입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면, 파멸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교회를 핍박하고 주의 종 베드로를 죽이려고 하던 헤롯왕의 결말을 이야기 합니다. 헤롯은 백성들의 아부소리에 그만 자신이 하나님이 된 것으로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차지하다가 주님의 천사가 치니 벌레가 먹어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이 죽고 말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고 왕성해졌다고 간증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대로 살다가 재난을 당하는 노아 시대의 불쌍한 백성들처럼,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예화)고향에 우물이 여러개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 홍길이네 집 우물은 다른 집보다 두배나 깊었습니다. 두레박 줄이 아마도 사람 키로 10배 정도는 넘게 들어가는 아주 깊은 우물이었습니다. 몇달에 한번씩 동네 청년들이 그 우물안에 두레박을 타고 들어가서 청소를 합니다. 그럴때마다 샘을 너무 깊게 팠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러나 한번은 가뭄이 들었는데, 동네 다른 우물들은 다 말랐지만, 홍길이네 우물은 여전해 서 동네 사람들이 다 물통을 가져와서 퍼 가져 갔던 일이 기억납니다. 이사야 55장 9절을 보면,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내 생각도 너희가 생각할 수 있는 모 든 것보다도 높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높으신 생각보다는 인간의 천박한 생각을 고집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행복한 길을 잃어버리고 얄팍하게 살다가 가뭄을 만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주님안에서 인생들이 평안하고 한없이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성경에 담아 주셨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기만 하면 그 축복의 길이 확실하게 보여집니다. 아브라함이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그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여 큰 부자가 되는데는 30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자와 듣는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미리 선포하고 계시록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함께 살아갈 축복된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자기만 살려는 욕심에 스스로 파멸을 향하고 있습니다. 마치 카나리아가 신나게 노래를 아무때나 불러댄 것은, 단지 자기 생각만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잠을 자는 시간에 노래를 부르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지 않고, 자기 기분만 생각하고 계속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큰 식품회사가 돈 벌 생각만 하고 사람에게 해로운 재료를 식품 제조에 넣는 것부터, 버리는 사람 따로, 줍는 사람 따로 있고 그렇게 내 편한대로 사는 것이 결국에는 우리 모두에게 손해라는 사실을 생각지 못하고, 당장 내 자신이 편리하고 내게 이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고 따라가는 일이 문제입니다. 천국 백성으로 선택되신 태평양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렇게 무질서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명심보감에「食淡精神爽(식담정신상)이오, 心淸夢寐安(심청몽매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음식이 깨끗해야 정신이 상쾌하고, 마음이 깨끗해야 잠을 잘 잘잔다\\\'는 말입니다. 사실 마음을 바르게 갖지 못하면,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습니다. 예화) 어릴때 사발시계라는 탁상시계가 있었습니다. 그 시계가 에약했던 시간만 되면 \\\"따르 릉~~\\\"하고 우는 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한번은 학교에 갔다오니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드라 이버로 뒤를 따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이 시계안에는 어떤 놈이 앉아 있는가가 궁금해서 다 분해하고 말았습니다. 별게 없더라구요! 그런데 그걸 다시 조립하다 보니 순서가 안맞고 고 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대충 조립해서 가만히 두니 가질 않습니다. 밥줄이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날밤에 밥맛도 없고, 그만 밤잠도 설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실컷 두들겨 맞고서야 마음이 편하게 학교 갔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생기로 만들어진 인간은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평안을 누릴수 있습니다. 또한 그래야만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늘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말씀을 거역하면서 욕심만 채우려 하게 될 경우, 늘 불안하게 사는 것이지요. 또한 그런 사람은 자신의 삶도 만족하지 못하고 가족과 이웃에게도 실망, 고통을 줍니다. 세상사람들은 운전면허 시험을 합격하려면 요령이 있어야 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군대 가서도 요령이 있으면 편하게 군대생활 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적인 삶에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만이 가장 좋은 요령입니다. 다른 요령을 피워봤자, 그야말로 재난의 연속이요 부끄럽기 그지없는 인생을 살고 맙니다. 니느웨로 가야 할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죽을뻔 했던 3일간의 고통을 아시지요? 예수님은 누가복음 13장에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참혹하게 살해하였던 사건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의 무고한 사람이 깔려 죽은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너희도 이러한 재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눅13:3)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로움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태평양교회 성도들은 남을 배려하는 예의가 세상사람들 보다 훨씬 많아야 하겠습니다. 나만 잘 살겠다는 생각에서 이기적으로 살게 되면, 자신과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맙니다. 이것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 단체는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남의 평안과 유익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많아 질수록 그 단체는 정말로 힘있고 부 강한 단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 걸음을 온전히 그리고 묵묵히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축복이, 이웃에게는 기쁨과 평화가, 그리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십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더불어 하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에서도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롬12:3-13/ 2004-04-30
교회 봉사에서도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롬12:3-13 미국 중등 교육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교육 주간지Education Week는 지난 20세기를 대표 할 수 있는 고등학교로 엔도버에 있는 필립스 아카데미를 선정했습니다. 몇 년 전 개인적 으로 제 조카가 그 학교에 입학 했을 때 저도 직접 그 학교를 방문해서 조카를 위해 기도 해 주고 온 적이 있습니다. 필립스 아카데미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2년 후인 1778년 새 독립국가를 정치,종교,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서 이끌어 갈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청교도 부흥의 본산지인 보스톤에 사무엘 필립스에 의해 설립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의 건학 이념(建學理念)이 바로 Not for Self(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입니 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건학 이념입니다. 부시 가문이 3대에 걸쳐 교육 받은 학교이며, 케네디도 이 학교 출신 입니다. 시각장애라는 어 려움을 딛고 동양인 최초로 美 부시 행정부의 장애인 정책 차관보로 내정된 美 노스이스 턴 일리노이대 교수 강영우(57)박사! 차관보가 된 강영우 박사의 두 아들이 이 학교를 나 옴으로써 부시 가문과 1990년에 연결되었습니다. 이 학교 출신은 35명 가운데 1명 꼴로 미국 저명인사 인명 사전에 올라 있다는 사실은 옛 날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은 설립 이래 220년 이상 지켜온 전통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 다고 생각 합니다. 실력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철저한 인격형성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습 니다. 이 학교에서는 조그만 거짓말만 적발 되도 정학이고, 두 번 거듭하면 즉각 퇴학 입 니다. 그리고 적어도 일주일에 3시간 정도는 지역 사회 봉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전 영창 선생이 세운 경상도에 있는 거창 고등학교도 그런 이념 가운데 세워져 한 국의 인재들을 많이 배출 시켰습니다. 이런 교육 기관들의 특징은 학생들에게 봉사 활동이 몸에 베이게 하는 것 입니다. 한국 사람과 다른 나라 사람들의 봉사 활동에 대한 통계가 있어 읽어보았습니다. 우리 한 국사람들이 일주일간에 시간을 내어서 지역사회나 교회나 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섬 기고 있는 비율은 14%입니다. 즉 100명중에 14명만 봉사를 하고 나머지 86명은 봉사 활동 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지요. 미국은 50%로, 둘 중에 한 명은 봉사를 하고 있습니 다. 한국인 중 60세 이상 된 분들이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4%에 불과하지만, 미국 인 중 70세 이상 된 분들은 43%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5 년 전만 해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 단 5%만이 봉사활동에 참여했었지만, 올해에는 14%, 즉 세 배가 늘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86%의 사람들은 봉사활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86%가 아직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이나 노력이나 물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신장 기능이 약화돼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찰결과 건 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만 목사님께서 살 수가 있고 계속해서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누가 목사님을 위해서 신장을 기증하는가?\'였습니 다. 어느 주일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 된 다른 교회의 목사님이 전후 사정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 신장 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 리고 기증자의 조건을 이야기 한 후, 고통 받는 주의 종을 위해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 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여지 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 인 천 여명이 거의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의 것이면 되기 때문에 목사님께서는 모두 손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 럽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신장 기증자를 결정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불었습니다.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은 사람을 선정하겠습니다. 우리는 주의 뜻을 기다리기 위 해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 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이 조용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오리 털이 가까이 가는 곳에서 갑자기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리털 이 한 곳에 내리려고 하면, 그곳에 있던 성도들이 하늘을 보고 큰소리로 \"주여, 할렐루 야, 아멘\" \"주여, 할렐루야, 아멘\"하며 외치는 바람에, 오리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갔습니 다. 다른 곳으로 날아간 오리털이 한 곳에 내리려고 하면, 전과 마찬가지로 \"주여, 할렐 루야, 아멘\" \"주여, 할렐루야, 아멘 \"하며 외치는 바람에, 또 다른 곳으로 날아갔습니 다. 결국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그 오리털은 어느 누구의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 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아니면 누가 웃으려고 꾸며낸 이야기인지 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 기는 우리의 믿음생활을 다시 한번 점검하게 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말만 잘하는 사 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말만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행하는 사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이 …오늘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으 로 \'섬기는 문제\', \'봉사하는 문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좀더 폭을 좁혀서 말한다면, 교회 내에서의 봉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회에 서의 봉사, 국가에 대한 봉사도 중요하지만, 먼저 교회에서의 봉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 습니다. 봉사의 우선 순위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봉사는 교회로부터 출발해 야 합니다. 섬기는 삶은 먼저 교회에서부터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상에 나가 봉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를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 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들은 주안에 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비록 임목사, 김장로, 이권사, 박집사 등으로 부르는 호칭은 다 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에 달린 수많은 가 지들처럼,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한 나무에 달린 여러 개의 가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한 성도들은 모두 한 몸, 한 지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형제를 먼저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세상에 나가 섬겨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교회 안에서의 봉사는 교회 밖의 어느 것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 내에서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봉사해야 합니까? 오늘 교회 내에서의 봉사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1)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 교회 안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취미특기, 직업, 사업, 등 모든 것을 초월하여 모입니다. 또한 교회에는 지난주에 오셔서 예수님을 믿은 지 1주되신 초신자부터, 예수님을 믿은 지 한 달 되신 분, 1년 되신 분, 10년 되신 분, 50년 되신 분 등, 믿음 생활의 연조가 각기 다른 분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 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3절을 보겠습니 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 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품지 않으면\'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은 자기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복음인 \"네 자신을 알라\"는 말입니 다. 교회 안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자신의 분수를 파악 하지 못 하는 사람, 주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가 분명히 있 는데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설치고 다닙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를 과대평가해서 자기 식의 봉사(주체봉사?)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래도 열심이 있다고 생각하 시는 분들은 한번은 생각 하셔야 합니다. 또 3절 하반절에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교 회 내에 믿음의 정도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져서 유익한 지혜 가운데 하나가 곧 자기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사 람들에게 평안과 여유를 줍니다. 불안은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병 입니다. 키가 작으면 작은데로 살면 편할텐데 괜히 높은 힐을 신고 다니면서 불안해하는 아가씨들 이 많지 않습니까? 그냥 주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깨끗하게 휘날리고 다니면 아름다울텐 데 괜히 적갈색으로 염색을 해서는 \'이게 색깔이 잘나왔나?\'하면서 걱정하는 짓을 왜하는 지 모르겠습니다.우리는 자연 중에 나무에게서 많은 것을 얻습니다. 우 종영 선생이 쓰신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중앙 M&B, 2001)란 책을 보면 이런 글 이 나옵니다. 나는 나무에게서 인생을 배웠다. 겨울이 되면 가진 걸 다 버리고 앙상한 알몸으로 견디는 그 초연함에서, 아무리 힘이 들어도 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한결같음에서, 평생 같은 자리에서 살아야 하는 애꿏은 숙명을 받아들이는 그 의연함에서,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그 마음 씀씀이에서 나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삶의 가치들을 배운 것이다. 바울 사도도 같은 마음에서 우리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 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베이비와 같이 우유만 쭉쭉 빨고 있는 신생아 신자가 있습니다. 겨우 걸음마 단계인 한 살 박이 신자도 있습니다. 달음질치는 건장한 청년과 같은 성숙한 신자도 있습니다. 각 기 믿음의 정도가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정도가 다른 사람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비판하면 안됩니다. 비판한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비판한다고 사람이 변한다면 자꾸 비판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자꾸 정죄하십시오. 그러 나 비판한다고, 정죄한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기도해야 사람이 변합니다. 비판하 고 충고하면 도리어 화를 내며 \"당신이 뭔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거야\"라고 대꾸합니다. 여러분! 교회 내에서 다른 지체들에게 충고할 시간에 먼저 기도해 주십시 오. 담배,술,도박,부도덕,어린아이 같은 믿음…(내가 기도해 드릴께요…) 여러분! 교회 안에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지체들을 보면 비판하지 말고 기도해 주시기 바 랍니다. 기도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비판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기도는 사람을 변하게 합니다. 기도는 사람을 성숙시킵니다. 믿으십니까? 2) 은사대로 봉사하라 교회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들도 다양합니다. 6 절을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은혜는 하나입 니다. 받은 은혜는 같지만, 은사는 다릅니다. 우리는 다양한 은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습 니다. 그러나 은사가 다르다고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은사에 차별이 있는 줄 알고, 서로 자기가 받은 은사를 자랑하며 교회 내에서 싸움박질 했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구별은 있어도 차별은 없습니다. 사람의 성격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도 다릅니다. 6절하반절부터 8절을 보겠습니다.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 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 이니라.\" 본문에서는 7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어느 성경학자는 이 7가지 외에 27가지 이상의 은사가 성경에 나온다고 말 하기도 합니다 만, 구체적으로 보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유아 실에서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밥 잘 짓 는 것도 은사입니다. 밥 잘 지 어 성도들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 겠습니까? 청소 잘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청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꽃을 좋아하고 꽃을 사랑하는 것 도 은사입니다. 교회를 아름 답게 장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주어 진 은사는 다 다릅 니다. 간혹 보면 본인이 받은 은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종종 있어요. 남의 떡이 더 맛있어 보인다고 남의 은사가 더 좋아 보이는 거예요. 상대적으로 자신의 은사에 불만이 많아요. 그래서 받은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아이들 동화집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당나귀가 밖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까, 강아지가 주인의 무릎 위에서 사랑 받는 거예요. 자기 는 이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열심히 일을 했는데, 강아지는 땀도 흘리지 않고 그 저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 같았단 말이에요. 그것을 보 는 순간 샘이 났습니다. 그래서 당나귀가 주인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머리를 썼습니다. 어 느 날인가 강아지 가 없는 틈을 이용해서 그 육중한 몸을 날려서 주인 무릎으로 뛰어 올 랐습니다. 어떻게 되었 을까요? 각자 상상해 보세요. 주인에게 사랑을 받기는커녕 주인에 게 몽둥이로 죽도록 얻어맞 았다고 합니다.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은사에는 남의 것이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은사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봉사하시기 바랍니 다. 은사대로 다른 사람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욕은 아니지만 세속적인 말 가운데 “생긴 대로 놀고 있네\"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 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은사대 로 섬기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여러분! 생긴 대로 노시기 바랍니다. 받은 은사대로 봉사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어떤 사람은 은사에는 우열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은사가 있고 덜 중요한 은사가 있다는 말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의 몸에는 여 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눈이 하는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손이 말이에요 나도 눈의 역할 할래, 발이 말이에요. 나도 눈의 역할을 할래. 귀도 나도 눈의 역할을 할 래. 그러면 눈이 몇 개예요? 눈이 여기 저기에 있을 거란 말이에요. 이거 얼마나 징그러 울까요? 또 손이 중요하다고 해서 온 몸이 손으로 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코도 손 이고, 귀도 손이고, 눈도 손이라면 문어보다도 손이 더 많아서 정말 보기 흉할 것입니 다. 은사가 어떤 것은 중요하고 어떤 것은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몸 안 에는 여러 종류의 중요한 기관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간이나 폐입니다. 그런데 사 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간이나 폐를 얼마나 혹사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간이 좋 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셔대고요, 폐가 시커멓게 썩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담배를 얼마나 많이 피워 대는지 모릅니다. 간이나 폐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간이나 폐가 눈에 보인다면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머리카락이 나 얼굴에는 얼마나 신경을 많이 씁니까? 머리카락에 각종 염색을 하지요. 얼굴은 성형 수술을 하지요. 머리카락도 중요하고 얼굴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간이나 폐가 더 중요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기관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관 에 더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3) 사랑으로 봉사하라 은사는 사랑으로 행할 때 가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 5:13)에서 이렇게 말씀합니 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 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가진 은사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시 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 13:35)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 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을 추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사랑으로 봉사해야 하나님 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청송 교도소 교도관으로 계시던 박효진 장로님께서 \"사랑의 힘\"이라는 제목의 간증에서 도 말씀하셨지만,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긴 세월 동안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은 가 슴도 사랑으로 녹일 수 있습니다. 사흘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밥 한톨 먹지 않으 며 자신의 이마를 쇠창살에 부딪히며 발광을 하던 \'종하\'라는 흉악범도 사랑의 눈물 앞 에 변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10절을 자 세하게 보시면 \'먼저\'하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네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면 나도 너를 사 랑할 수 있어. 네가 나에게 사과를 하면 나도 너를 용서할 수 있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세상에서의 조건적인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나를 미워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사랑해야 합니 다. 남이 나에게 사과를 하지 않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사과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 다. 4) 열심으로 봉사하라 11절을 보겠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주님을 섬길 때, 대충 대충 섬겨서는 안됩니다. 봉사를 할 때,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열심을 품고 최선을 다해서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열심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직분이나 경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 라 열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열심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라 오디 게아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는데,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 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한다\"고 하시면서 19절에서 열심을 내라\" 열심을 내라 고 권면하시는 것 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초대교회사를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모릅니다. 초기 에는 교역자도 귀했고 교회도 귀했습니다. 그래서 한 목회자가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또 당시에는 성경도 많지 않았고 글을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기 때 문 에 그 마을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서 조사(弔師)를 임명해 놓고서 예배를 드릴 때 에 성경 을 읽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전깃불이 없으니까 호롱불 밑에서 조사가 성경을 읽 고 설교를 했습니다. 한번은 경상도 지역의 어느 산골 교회에서 저녁 예배를 드리며 조사 가 성경을 읽었어요. 그 날은 시편 23편을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 족함이 없으리 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 이 말씀을 주욱 읽는데, 호롱불 밑이니까 글자가 잘 보이지도 않고 가물가물 해하잖 아요. 그래서 그랬는지 조사가 이렇게 읽었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내게 부 족함이 없으리로다\" 조사가 성경을 읽고서 생각하니까 그날 말씀이 너무 너무 은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설 교 를 시작하면서 시편 23편을 1절을 인용합니다.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내게 부족 함이 없습니다.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온 교인들이 손을 내밀면서 \"내 두요. 내 두요\" 그랬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가 내 목을 자르셔도 나는 주님을 따르겠습 니다\"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러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 습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할 수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봉사하려고 하는 사 람을 지금도 찾으십니다. 여러분! 은사가 없다고요? 성경지식이 딸려 학생들을 가르치지 못 한다고요? 휴지 줍는 것도 은사가 없어 못합니까? 교회 밴도 은사가 없어 못합니까? 그러한 분들은 은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열심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은사가 없으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눅11:9~13)에 의하면 \'구하면 주신다\'고 했습니다.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 겠느냐\" 다시 말해서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각종 성 령의 은사를 주십니다.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우리들 가운데 말로만 섬긴다고, 말로만 봉사한다고 하는 사 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 이후부터는 교회 내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구경만 하는 구경꾼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은사가 없으면 없는 대로, 믿음이 적 으면 적은 대로, 사랑과 열심을 다해 주님과 교회 안의 다른 지체들을 섬기시며 봉사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해리 리버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분은 폴란드 사람이에요. 젊은 시절에 미국 으로 이민을 와서 살았는데 나이가 칠십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아무 낙이 없어요. 그러다가 노인들이 모이는 곳에 갔어요. 우리말로 노인회에 갔단 말입니다. 노인회에 가 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하루 종일 장기를 두고 바둑을둡니다. 그런데 하루는 장기 맞수가 결석 을 했어요. 그러니 재미가 없어요. 심심해요. 그 분이 나와야 장기를 두둔 바둑을 두둔하는데, 그 분이 나오지 않으니까 할 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 게 해야 하나\'하면서 멍하게 앉아 있는데 한 젊은이가 지나가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예 요. \"할아버지 그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계시지만 말고 그림이라도 그려보세 요.\" 그 노인은 젊은이의 권면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즉시 발걸음을 옮겨 그림을 배우 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니까요 칠순이 된 노인이 그렇게 재미있고 신나더랍니다.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정신 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후에 31년 동안 그림을 그리다 가 101살에 죽었는데, 31년 동안 총 22회의 작품전을 열었습니다. 미국의 그림 전문가들 은 그 노인을 일컬어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을 합니다. 그 노인은 나이 칠십이 될 때 까지도 자신의 잠재력 가운데 어떤 은사가 있는지 그것을 개발을 하지 못한 거예요. 70 년 동안 엉뚱한 일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비록 나이로 는 늦었지만 70에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고 그림을 그리니까 이렇게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 졌던 것입니다. -8- 오늘은 사역 박람회가 열리는 날 입니다. 친교실에 가시면 각 위원회의 부츠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은사에 따라 한 위원회를 선택하여 봉사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사를 따라 일하시며 됩니다. 은사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1인 1사역 운동에 적극 참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렇게 봉사하라/ 롬12:9-13
교회 안에서는 이렇게 봉사하라 롬12:9-13 로마서 12장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 맥을 잘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구원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 니고 우리의 몸까지도 구원 받았다고 했습니다. 몸이 구원 받았으니까 몸이 활동하는 활동영역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릴수 있는 제단이 되어야 하고,제사의 영역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산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웃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 하는 봉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디서부터 봉사할 것입니까? 교회 안에서부 터 봉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인 동시에 우리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형제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지 아니하면 세상에서 섬긴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기 쉽 습니다. 이 일을 하게하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한두가지 씩 은사를 주셨습니다. 형제를 섬기고 교회를 봉사하기에 필요한 재능도 주셨 고 능력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자기 받은 은사대로 겸손하게 형제를 섬겨야 합니다.형제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까지 제가 말씀드린 요집니다. 그러면 이시간에는 교회 안에서부터 봉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 가 꼭 따라야 될 네가지 법칙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기본적인 원리라고 해도 좋습니다. 봉사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봉사라고 해서 다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운동장에서 뛴다고 다 경기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법칙대로 해야 경기가 되듯이,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고 주님을 위하고 열 심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봉사한다고 해서 다 봉사가 아니라는 것입니 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가르쳐준 법칙대로 원리대로 봉사해야 비로소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교회마다 크고작은 시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사람의 힘으로 수습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자주 당하는 것을 봅니다.그런 교회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교회 안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렇게 어려워지는가? 그것이 아니드라는 말입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교회마다 다 있어요. 수가 적고 많고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형제들을 위해서 뛰고, 재물 바치 고,시간 바치고 정력 바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있는데 교회가 왜 어려움을 당합니까?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원리대로 봉사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 다. 어떤 교회를 보니까 너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몇 10명 있는데 이 사람 들이 어떻게 텃세를 많이 하는지 다른 사람이 붙을 수가 없어요. 몇사람은 신이나서 좋은데 새사람들이 들어 오지를 못해요. 심지어는 교역자 까지도 몇년 견디지를 못하고 자꾸만 쫑겨 나가요. 텃세를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조그만하고 교역자는 자꾸만 갈리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 다. 여러분 이것이 봉삽니까? 그 사람들이 걸리는 돌이 되고, 쓴뿌리가 되어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가지고 헤치는지 ... 통탄할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법칙대로 봉사해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봉사가 되고 교회와 형제에게 유 익을 주는 아름다운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하기 위해서 꼭 명심하고 지켜야 될 원 리를 몇가지 이야기 합니다. 하나하나 뜯어 보면 12가지 정도가 나옵니다만 그것을 간결학게 요약하면 4가 지로 말할수 있습니다. 1. 사랑으로 봉사하라. 2. 열심으로 봉사하라. 3. 어려워도 봉사하라. 4. 나누면서 봉사하라. 1. 사랑으로 봉사하라.9-10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사랑은 진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연극을 하듯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선반 사랑이라는 말들어 보셨습니까? - 선반 위에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 것을 내 손에 넣기 위해서는 아양을 떨기 도 하고,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합니다. 무엇인가 나에게 유익이 있겠다,또 무엇인가 나에게 돌아올 것이 있겠다하는 계산을 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위선잡니다.거짓된 사랑입니다. 또 진실한 사랑은 악을 미워합니다. 내 마음에 악을 가지고 형제를 대하면 반드시 그 것은 해하게 되어있습니다. 악한 마음은 다른데 가지 않습니다. 마음에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듯이 말하고 행동을 하면 겉으로 금방드러나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 마음 의 악이 언제인가는 형제를 해치게 되고 형제를 잘못된 곳으로 끌고 가게 됩 니다. 그러므로 악을 미워하고 형제를 해칠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미워해야 합니 다.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형제에게 유익이 되는 선이라고 하면 나 자신을 희생하고라고 그 것을 따를려 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선에 속하라 하는 말은 더 적극적으로 해석을 하면 선에 매달리라 하는 말입니다. 선한의도 선한 감정 선한 목적 선한 동기가 없이는 진실로 사랑할 수가 없습 니다. 그리고 10절에 가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 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들은 한 형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분이나,이제 갓들어온 분이나 안면이 있는 분이나, 없는 분 이나 가리지를 말고 일단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산돌교회에 소속이 되었으면 우리는 한형제 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을 할수가 있습니다. 동시에 형제들을 대할 때마다 인간적인 조건을 가지고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이런 교훈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들 중에 8-90%는 사람을 대할 때에 먼저 인간적인 조건을 가지고 구별을 합니다. 자기보다도 인간적으로 조금만 뒤떨어졌다면 무조건 얕잡아 볼려고 합니다. 얼마나 인간의 마음이 고약한지 생각만 하면 끔찍할 정도입니다.뭐가 잘났다 고 그런 생각들을 가지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인간적인 조건 가지고 멸시하지 말고 누구든지 남을 나보다 높게 여기고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사랑이 빠져 버리면 하나님 앞에 남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다시한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굉장한 은사를 받아서 방언을 합니다. 굉장한 은사를 받아서 성경을 풀어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굉장한 은사를 받아서 재물을 털어서 사람들을 구제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은 손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고, 사랑없이는 무엇인가 할려고 하는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왜? 해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해봐야 아무 가치도 없으니까? 해 봐야 하나님 이 받지도 않으시니까? 사랑은 주님이 주신 새 계명입니다. 요 13:3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사랑하라.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사랑하라. 옛 계명은 무엇입니까? -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차이를 아시나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자기 몸을 본능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도 없습니다.자기 몸은 누구나 다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옛 계명의 그 사랑은 뿌리가 본능에 있는지 모릅니다.\\\"네가 본능적으로 네 몸을 참 사랑하지. 네 이웃을 그 정도는 사랑해야지.세상사람을 다 그렇게 사랑하지는 못한다하더라 도 교회 안에서만은 옆에 있는 형제를 그 정도는 사랑해야지\\\" 그러나 주님은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의 뿌리는 하 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네가 구원 받았다고 기뻐하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자랑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버지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예수님이 너를 사랑한 것처럼 이 사랑 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우리의 가슴이 떨립니 까? 왜! 정말 우리가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지 조차도 상상할수 없을 만큼 우리는 연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한 것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높은 차원의 사랑을 하나님이 요구 하 시기 때문에 그 기준에 미달 되어 버리면 하나님은 무시해 버립니다. 무슨일 을 해도 그 사랑이 빠져 있으면 하나님은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얼마나 우리 가 무거운 위치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 않습니까? 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 받았다고 말할수 있는가? 하는 의문 을 한번 제기해 볼수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사랑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고 말하실 분 이 있습니다. 물론 옳은 말입니다. 자 어떤 분에게 당신은 구원에 받았습니까? 예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믿음으로요. 그래요. 어떻게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까?/ 예 하나님의 말씀 어디에 보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러므로 제가 예수를 믿는 이상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또 하나 질문을 합니다.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무엇을 가지고 증명을 할수가 있습니까? /제 믿 음을 가지고 증명을 할수 있습니다. 말이 됩니까? 왜 믿음을 가지고 증명할수 있습니까?/성경에 보니까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수 있습니까?/성경에 그랬습니다. 성경에 무엇이라고 그랬는데요/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 구원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성경에 그렇게 말했으니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말이야 옳은 말이지- 그러나 그것은 50점 밖에 안됩니다. 야고보가 분명히 말한 것처럼 네 믿음이 진짜 믿음인가를 증거를 보여라.할 때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행함이라고 했지요. 그것을 좀더 구체화 시킵시 다. 구원 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옳겼다 - 이 말이 성경에 꼭 두번 나옵니다. 요 5: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노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의 골자는 믿으면 구원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자는 사 망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믿으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는 말 씀이 또 한군데서 나오는데.. 요1서 3:14절입니다. 참무서운 말씀이 나옵니다. 들으세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 간줄을 알거니와 사 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여기는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리 네가 구원 받았다고 떠들어도 네가 사랑치 아니하면 너는 구원받은자 가 아니고 아직도 사망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 사람이다. 네가 구원 받은 사실을 증거하고 싶으냐? 그러면 사랑하라! 그러면 너는 사망 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5:24절하고,요한1서3:14을 한데 묶어놓고 생각을 해야 합니 다. 한가지만 알면 안됩니다. 예수를 믿는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동시에 그와같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반드시 구원 받았기 때문에 그 증거로 사랑합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을까 ?\\\" 충분히 의문을 가질수가 있습니다. 이만큼 사랑이 중요합니다. 흔히들 구원 문제를 이야기 하면 영원히 사는 것 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문제를 가지고 무조건 구원이라고 하면 좀 이상한 이야기 가 됩니다. 영원히 사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도 영원히 삽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에 있는 무덤을 깨고 자는 사람들이 다 부활하면 그 사람들은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질이 다르지요. 영원의 질적인 특질이 무엇인 줄 아세요. 시간인 줄 아세요. 시간으로 따지면 둘 다 영원에요. 시간가지고는 말할수 없어요. 영원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영원히 산다고 할 때에 그 것이 축복이 되는 이유는 그곳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형제들의 사랑 싸여서 영원토록 살수 있기 때문에 그것 이 복이요, 영광이요,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옥은 영원이기는 영원이지만, 사랑이 없어요.사랑이 없는데서 영 원토록 살아야 하는 것. 얼마나 무서운 저줍니까? 그러므로 구원 받았다 하면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를 교회에서 열심히 합니다만, 그들 때문에 교회가 피해를 얼마나 당하는지 모릅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랑, 형제의식이 없는 사랑, 악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랑, 멸시하는 사랑, 등등... 성령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마음에 질문을 하시고 나는 그 질문에 귀를 귀를 기울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형제여! 구원 받았느뇨? 구원 받았다면 구원 받은 증거를 무엇으로 보여 줄수 있느뇨? 에 주님 나는 형제를 사랑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대답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그것을 원합니다. 2. 열심으로 봉사해야 합니다.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여기서 열심을 품고라는 말은 가슴에 불을 품고 라른 말입니다. 좀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뼈 속에 불을 가진사람이라고 표현한 사람이 있습니다. 뜨거운 열정은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이요, 또 뜨거운 열심은 기독교의 빼놓 을수 없는 공통된 특징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교회에 미지근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열심을 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틀림없 이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열심을 내면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열심이 식어지면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입 니다. 그런의미에서 어떤 신학자는 기독교는 열심의 종교라고 정의한 것도 옳은 말 입니다. 열심을 빼버리면 기독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열심이 식어 버리면 그 교회는 부흥하지를 않습니다.건물이 아름다워도 그 교 회는 죽어 버립니다. 그런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미지근 한 것을 지독하게 싫어 하십니다. 계 3: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 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열심을 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 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미지근한 사람아 내가 너를 토하여 내겠다. 열심이 없는 살람아 교회를 다녀도 나는 너를 싫어 한다. 열심히 없는 사람아 네가 아무리 기도해도 내가 안 듣겠다. 열심이 없는 사람아 네가 아무리 아름답게 불러도 나는 그 찬송이 마음에 안 들어! -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얼마나 주님이 열심이 없는 것을 싫어 하는지! 이것보다 충격적인 말씀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열심을 가지고 주를 섬길려고 하고 열 심히 봉사할려고 하는 사람을 멸시하는 경향이 교회들마다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유식한 사람들,세상적으로 갖출 것을 갖춘 사람들이 열심을 좀 경시하 는 경향이 있고 비판합니다. 물론 잘못된 열심이 있습니다. 이단에 빠진 열심도 있습니다. 가정도 팽개치고 교회에만 와서 살려고 하는 잘못된 열심도 있습니다. 이것은 병든 열심입니다. 여기서는 병든 열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열심이 있어요. 교회를 다니지만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일에 동참 을 못하고 계시는 분들있지요.물론 남모르는 부분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도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요.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지 못하시는분 다른데서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교회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하시는 분 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이 한마디의 책임 추궁을 받을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와같은 주님의 추궁에 대해서 변명하거나 자신의 게으 름을 합리화 시킬 근거가 있는지 이시간 돌이켜 보십시요. 아마 말한마디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참으로 열심히 자기의 맡겨진 부서에서 남이 알아 주든지 안 알아 주든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저는 그들은 생각할 때마다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교회가 몇명이 모이느냐?가 문제 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형제들 때문에 저는 목회할 맛이 나는 것입니다. 알아 주지 않아서 집사도 시켜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열심이 있어서 봉사하는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기억하지 못하고, 성도들이 칭찬하지 않아도 주님 바라보고 기쁨으 로 헌신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때때로 용기 가 생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더 충성하겠다고 다짐을 하곤 합니다. 나는 지금 까지 목회를 하면서 내 교인들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자랑을 합니다. 또 그렇게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그렇지 못한 교인들도 있지요. 그러나 열심이 있고, 알아 주던 지 안 알아 주던지 묵묵히 일하는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감사하고 기뻐서 자 랑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3. 어려워도 봉사하라. 12절을 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현실적으로 보아서 기대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이제는 앞에 있는 어떤 목표를 놓고 소망하면서 즐거워 할수 있는 환경이 어떤 환경입니까? 굉장히 어려워진 환경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난 중에 참으며- 무엇인가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하는 상황은 굉장히 짊어지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있는 고통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환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힘을 써서 해야 하고, 문 을 두드리듯이 쾅쾅 두들기면서 기도해야 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처지 에 빠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12절 말씀을 종합적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기는 하되 굉 장히 어려운 처지에 지금 놓여서 봉사하기가 어려운 경우를 전제하고 하는 교 훈입니다. 교회에서 형제를 위해서 봉사하고 주님을 위해서 뛰는 것 얼마나 아름답습니 까? 이렇게 봉사를 하면 주님께서 매일매일 형통만 주시고, 어려운 일이 없이 태평세월 만 주실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봉사를 하 고, 육신을 입고 봉사를 하기 때문에 자주 자주 어려움이 일어 날수 있습니 다. 어떤 때는 내 건강이 상합니다. 어떤 때는 시간에 쫑기다가 보면 하던 일이 정상적으로 안돌아 갈 때도 있습 니다. 어떤 때는 우환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 욕을 먹기도 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땝니다. 그러면 이러한 때, 이 어려 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럴 때일수록 기뻐하면서 봉사하고, 그럴 때일수록, 인내하면서 봉사하고,그 럴 때일수록 기도를 더 힘쓰면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중단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물론 건강이 나빠지면 쉬어야 합니다. 가정에 특별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그것들 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얼마든지 이길수 있는 핑계를 가지고, 너무 힘드니까,남에게 좋은 말 못들으니까,그것 때문에 마음에 힘드니까 하던 일 그만두는 어리석은 짓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보같은 짓입니다. 어려워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시작한 일은 중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해도, 환경이 어떻게 변해도, 어떠한 괴로운 일이 있어도 끝까지 견뎌 내십시요.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어떤 것도 주님 앞에는 핑계가 될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없는, 핑계가 되지 못하는 사소한 것을 가지고 교사를 하느니 못하느니, 성가대를 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4. 나누면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13절에 - 성도들의 쓸것을 공급하며, 손대접하기를 힘쓰라. 이 로마서를 쓸 당시만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극빈자였다 고 합니다. 얼마나 생활이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제가 어릴 때 교회에 다닐 당시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가난했어요.그러므로 가난하니까 물질적인 면에서는 늘 여유가 없습 니다. 쫑깁니다. 그런데 갑자기 손님들이 찾아와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낯선 곳에 여행을 하면서 찾아 갈 곳이 교인들 가정 밖에 없습니다. <아. 저는 어느 교회에 다니는 데요. 오늘밤 여기서 좀 잘수 없을까요?>하고 들어 옵니다.호텔,장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였는지 모릅니다. 이것 때문에 시험을 받고 뒤로 넘어진 사람들도 꽤 많았을 것입니다.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자기들이 먹어야 할 것을 함께 먹어야 하고, 잠자리를 함 께 해야 합니다. 이부자리를 내어 주어야 합니다.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고 사흘이 멀다하고 사람들이 찾 아 오는데, 이런 상황에서 진정 형제를 위하고 주님을 위할려고 하면 얼굴 찡 그리지 말고 자기 가진 것을 나누어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요즈음에야 믿는 다고 해서 폐를 끼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마찬가집니다. 지금도 우리가 진정 교회 안에서 형제를 위해서 봉사하려면 내가 가진 물질 - 나누어주면서 해야 합니다. <아이고 배고프시겠네요? 오늘 저녁에 가서 많이 드세요> <아이고 날씨가 참 좋네요. 집에 가시면 에어콘이나 선풍기라도 좀 틀지요> <아이고 요즘 건강이 왜 그리 안좋으세요. 약이 얼마나 좋고, 건강식품이 얼 마나 많이 나오는데> 여러분 말만 그렇게 해보세요? 그게 얼마나 빛 좋은 개살굽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8공주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느 아파트 수위를 하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서 봉제공장에 나가 서 손이 굳은살이 밖힐 정도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딸 둘이 시집을 가고 여 섯이 남았는데, 이 애들이 똑똑해 가지고 공부를 계속하려고 하니까, 다 아르 바이트를 하느라고 학교 다니고-직장 다니랴 빠듯빠듯한 생활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것인지- 이렇게 열심히 살면서 먹을 것 안먹으면서 어떻 게 한 100만원 만들어 놓으면 주인은 200만원 전세를 올려 달라고 합니다.그 러니 가난한 사람들이 무슨 재주로 살아 가겠습니까? 이런 기사가 교회에서 발행하는 주보에 나가니까 순식간에 헌금이 들어와서 그 가정을 도울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기사를 읽고, <그집 참 안됐다!> 말한마디 하고는 잊어 버린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겠습니까? 내 주머니는 꼭 싸매어 두고, 남을 섬긴다. 봉사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 을 어떻게 합니까? 교회 안에서 그런 식으로 살면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될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벤다이크라는 사람이 쓴 대저택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떤 큰 갑부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천당에를 갔습니다. 들어가서 천사 가 인도하는대로 자기집을 찾아 갔습니다. 아주 조그만 오두막이었습니다. 지 붕도 제대로 덮히지 않은 오두막에 갔더니 <여기가 당신이 살아야 할 집입니 다.> 했습니다. 이 부자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여기서 내가 살아야 합니까?> <예 여기가 당 신의 집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집니 초라해요?> <아 그거야 당연하지요? 당신 몰라요? > <모르겠습니다.> <저 옆을 보세요?> 그 옆을 보니까 천사들이 망치를 들고 뚱땅뚱땅 집을 짓는 데 아주 큰 맨션을 짓고 있습니다. 자기 집은 변소간 만도 못해요. <아 저집은 누구집인데요> <아 그 주인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요. 천국에 오면 줄려고 짓는 중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데요?> <당신 동네에 조그만 병원 하나 차리고 있는 의사있지요? 그 의사집입니다.> <왜 저 사람은 그렇게 큰 집을 지어주고 나는 이렇게 초라한 집을 줍니까?> <몰라도 정말 너무 모르네. 자 보세요.저 사람은 자기에게 돈이 들어 오면, 자기가 쓸만큼 만 남겨 놓고는 전부 남을 위해서 썼어요.이렇게 남을 위해서 쓴 돈은 전부 천국 은행에 저금이 되거든요? 우리는 지금 그 돈 찾아 가지고 집을 짓는 거에요 그 사람은 지금도 계속 저금을 하니까 밑천이 안 딸이지요. 그러니까 자꾸만 큰 집을 짓지요? 그런데 당신요! 당신은 지금까지 저금한 것이 얼마 있소!! 고작해야 이건데 이거 지붕도 제대로 못 덮고 있잖아요? 뭐 저금을 해야 지붕 을 덮지!> 소설의 이야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슴에 무엇인가 와 닿는 것이 있어요?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 니다. 첫째는 사랑하면서 봉사하고, 둘째는 열심히 봉사하고, 셋째는 어려워도 봉사하고 넷째는 나누면서 봉사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와같은 봉사를 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주님의 자녀로서 의 바른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몸을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 로 드리기를 원합니까? 교회 안에서부터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원리대로 봉사 하자 그 말입니다.그러면 우리의 몸이 우리의 삶이 날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제사가 될수 있을 것입니다. 할수 있다 하신 이는 --
교회 안의 봉사부터 먼저/ 롬12:3-8
교회 안의 봉사부터 먼저 롬12:3-8 지난 시간에 은혜 받았던 내용을 잠시 생각해 보겠씁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았으면 그 사람의 삶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 면 인격이 구원을 받았으면 그 사람의 생활도 구원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하면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몸으로 뛰는 전생활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의 일만이 아니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전 부를 통틀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 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을 통해 서 우리는 주님께 영적제사를 드릴수 있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영적제사는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섬김의 생활,즉 봉사의 생활이라고 함께 생 각했습니다. 이와같이 섬김의 생활을 바로 할려면 시간시간마다 말씀을 통 해서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지 늘 살피고 기도를 통해서 확인한 다음에 그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몸으로 뛰는 전생활권이 다 하나님께 제사드릴수 있는 제단 이요, 또 우리의 생활전부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된다면, 구체적으 로 어떤 것인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3절 부터 시작해서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부터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산제사 로 드려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3-13절까지는 교회안에서 내 몸을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산제 사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14장 끝까지는 세상에 나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산제사드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니까 순서적으로 볼 때에 교회 안 에서 먼저 하나님을 위하고, 형제를 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봉사의 우선 순위가 교회 쪽에 먼저 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믿는 교회 사람들에게 제대로 못하는 봉사를 세상에 나가서 잘할수 있다는 것은 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설교는 이것에 근거해서 교회 안에서 하는 봉사 - 이것이 왜 우선 되어야 하는가를 자세하게 말씀 드릴려고 합니다. 한세가지로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는 우리의 몸이요,또 우리는 그 몸의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지체라고 합 니다. 말을 바꾸면 우리가 그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몸 입니다. 내 몸입니다. 5절을 봅니다.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지체가 되었느니라 이것을 보면 교회는 몸이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대원칙을 하나 세워 주셨는데,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보세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려고 한다면,네 이웃은 네 몸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교회를 놓고, 내 몸이라고 생각하고,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할 때에 이것은 훨씬 차원이 달라집니다. 교회에서 다른 형제를 섬겨라하면,그 것은 네 몸과 같이 섬겨라 하는 것보 다도 더 농도가 짙다는 것입니다.무엇을 섬기라는 말입니까? 네 몸을 사랑 하라! 네 몸을 섬기라는 말과 같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섬기라고 했습니 다. 그러니까 내 몸을 앞세워야지요. 이런의미에서 교회의 봉사는 어느것보다도 우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 기 몸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남 섬긴다고 나가서 큰소리 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교회 안에서 내 몸이라고 할수 있는 다른 형제들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위해 서 봉사한다. 이것은 헛소립니다. 먼저 할 일이 있어요. 두번째로는 우리 모두가 교회에서는 몸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체라는 말은 몸에 붙어 있는 모든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 리 역활을 할수 있고, 어떤 사람은 손의 역할을 합니다. 지체가 되었다는 말은 섬겨야 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몸은 하나 밖에 없지 않아요. 그러나 그 몸에 붙 어 있는 여러가지 기능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기서 직분이라는 것은 교회의 직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기능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체가 똑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 습니다. 손은 손대로,눈은 눈대로, 발은 발대로 다 각각 기능이 다릅니다. 왜 지체마다 기능을 갖고 있습니까? 몸을 섬겨야 될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렇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많지만 똑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을 볼까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그랬습니 다. 황목사가 받은 은사가 다르고, 이 교회에서 해야 할 책임이 다릅니다.여러 분들 개개인이 똑 같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똑 같이 믿어서, 똑 같이 예배드리고, 똑 같이 헌금하고,똑 같이 교회에서 시키는 일을 하고 다 같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만 사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사람사람 따라 서 그 사람 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 일을 하도록 성령이 그 사람에 게만 주신 특별한 재능이 있어요.재간이 있어요. 능력이 있어요. 이것을 일 컬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은사라고 합니다. 몸된 교회를 잘 섬기라고, 우리에게 사람따라 믿음따라 이런저런 은사를 주님께서 다 주셨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다 주신 것이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6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은사를 못받았다면 지체가 아닐 것입니다. 지체라면 반드시 그 지체의 역할을 하도 록 은사를 반드시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은사를 받았으면 몸을 위해서 일해 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라고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묻어 두고 있으면, 그 사람은 나중에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주님을 통해서 굉장한 꾸중을 들을수 있습니다. 그 은사는 첫째는 예언이고, 둘째는 섬기 것이고, 가르치는 것,권위하는 것는 것,구제하는 것, 다스리는 것, 긍휼을 베푸는 것, 이렇게 여섯가집니 다. 이것을 가만히 보면 이것이 무슨 은사냐, 어디 가르치는 사람이 한두명이 냐,섬기는 일을 다 해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섬긴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남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은사를 받은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있어요. 독특한 사람이 있어요. 우리 교회에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은사를 우리 성도들에게 많이 주셨으 면 좋겠어요. 가르치는 은사도 마찬가집니다. 교회학교 교사나 속장을 하면 다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러나 막연히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가르 쳐도 그 중에서 별나게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사람이 있습니다.그러므로 그 사람 밑에서 배웠다 하면 사람이 훽훽 달라지는 거예요. 생활이 바뀌어요. 놀라운 능력이 따라와요. 그 사람은 은사 받은 사람이에요. 다스리는 것은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다스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다 리더쉽이 있는 것 아닙니다. 아무리 목사가 되어도 리더쉽이 없는 사람 이 있어요. 그런데 유난히 사람을 잘 끌어가는 리더쉽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 이런 것 들을 이야기 합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특별히 구제 사업에 사명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돈 많다고 다 구제를 합니까? 돈이 별로 없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남을 위해서 쓰기를 좋아 하는지 그 것 받은 은사가 달라서 그래요. 권위하는 은사가 있지요.- 권위하는 일은, 남을 격려하고 남을 붙들어 세 우고,위로하는 상담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귀한 은삽니다. 한 사람에게 세사람이 가서 권면하고 위로 하는 데, 두 사람은 그를 감동 시키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 중의 한사람은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는 데, 그 사람 때문에 주저 앉았던 사람이 용기를 얻어서 일어 납니다. 그러 면 세 사람이 똑같이 했는데 한 사람이 그와같은 놀라운 열매를 맺느냐? 은 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여섯가지 은사가 있는데 이 여섯가지 가운데 여러분들이 특별이 알았 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있지요? 무엇입니까? 야, 예언 좀 할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래서 우리 시어머니 나이가 들어 서 망령을 부리는데 언제 돌아 가실지 탁 알아 봤으면 ....아마 그런 생각 을 하실지 모르겠어요. 나를 달달 볶아대는 상관이 있는데 그 사람이 어떻 게 될까 내가 좀 알수 있었으면 통쾌할 텐데. 예언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이런 흥미있는 상상을 불러 일으킬수 있는 매력 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울은 예언을 참 높이 평가를 했습니다. 고전 13장에 들어가서 보면, 특 별히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언과 방언을 비교해 가지고 는 방언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고,유익을 주지 못하지만,예언은 알 아 듣는 말을 가지고 하는 것이니까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고 권위하고 또 사람들을 안위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참으로 예 언이 좋은 은삽니다. 그러면 예언이 무엇이냐? 이 예언에 대해서 두가지 아주 대립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을 많은 사람에게 가르쳐 주 고,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꿈을 이야기 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해석합니 다.그것 빼놓고 나머지는 절대로 인정을 안 하는 입장을 말합니다. 특별히 성경이 66권으로 완성이 된 다음에는 예언이라는 은사- 즉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예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까지 말합니다. 제가 볼때에는 가장 건전한 해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고 교회를 지도하는 목사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평신도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히 깊이 깨닫고 신령한 지혜의 말을 할수 있는 사람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미리 파악하고 그 뜻을 이야기하는 자를 가리켜서 구약에서 는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아뢰는 사람을 제사장이라 고 합니다.그러면 예언은 어느쪽에 속하는 것입니까? 선지자의 편입니다. 그러며 오늘날 신약시대의 모든 성령 받은 사람들은 성령이 임하므로 너희 의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요,꿈을 꿀 것이요,환상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예언과 꿈과 환상은 전부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깊 고 오묘한 복음을 들어 내는 것이고,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꿈과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받은 우리는 모두다 예언하 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예언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좀 더 특별하게 은혜 받고,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야기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해석으로 예언을 보면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일각에서는 그 해석을 받아 들이지를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 다.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지요. 글자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언이 있다. 사람의 장래에 대해 서,그 사람의 신수에 대해서, 사업이 잘 될 것이냐? 못될 것이냐?를 놓고 계시를 받아서 예언을 할수 있다. 그 일례로 행 11:28절에 보면 아가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요.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계시를 받았어요. 얼마 지 나지 아니하면 저 소아시아 지역 전체가 큰 흉년이 들것이라는 계시를 받았 습니다. 교회 앞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글라디오스 황제 때 에 진짜 흉년이 들었어요. 그런 예언이 오늘날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놓고 어떻게 판단하고 받아 들일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제가 볼 때에는 이런 해석을 전적으로 틀렸다고 하면 안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전진전능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필요하면 이와같은 예언을 할수 있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 주실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있을수 있 습니다. 좋은 예를 하나들지요. 우리 나라가 일본과 합방을 하고 나서 약 30년이 흘렀습니다. 일본은 전쟁 에서 점점 불리 해 지니까 자꾸 한국교회를 조이기 시작했습니다. 지도자들 을 잡아 가두고 강제로 일본 천황에게 신이라고 고백하고 절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거룩한 성도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아주 비상시기라는 말 입니다. 이 때에 하도 급하니까 하나님이 박관준장로님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셨습 니다.그 분은 의사였고 믿음이 아주 투철한 분이었습니다. 이 분에게 하나 님이 예언의 은사와 할 내용을 가르쳐 주셨는데가[일본에 가서 이렇게 일본 지도자들에게 예언하라] 일본이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유황불을 비같이 쏟아 내려서 이 나라를 멸망시키겠다 고 말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 다.-따지고 보면 어디에 있는 내용입니까? 요나서에 있는 내용이지요. 하나 님이 요나에게 니느웨성에 가서 웨치라고 한 내용하고 똑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갈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일본 말을 할 줄을 알아야 지요. 한국말로 아무리 웨쳐 보아야 그것은 방언이지 예언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일본 말 잘할수 있는 사람을 나에게 붙여 주세요. 나와 함께 가서 이 예언을 하고 죽을수 있는 사람을 나에게 붙여 주세요.그래서 박관준 장로님을 인도해서 일본의 지도자를 찾 아가게 한 사람이 안이숙여사였습니다. 그래서 안이숙 여사를 데리고 같이 일본 국회의사당에 가서 너희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리시는 유황 불에 망한다고 말하다가 둘다 붙잡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예언한 것입니 다. 6년 후에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원자폭탄을 맞은 세계의 유일한 나 라가 되지 않았습니까?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유황불이 하늘에서 내린다고 예언하지는 못하 지요. 무언가 독특한 것을 보고 하나님이 예언을 하게 한 것이니까. 이런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경우,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위해서 무엇인가 미리 말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특별한 필요성이 있을 때,하나님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너나 없이 다 예언을 한다고 야단입니다.산에 가서 기도 좀 하고,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조금 무엇을 본 것 같으면 그 다음부터는 예언 을 한다고 법석이네.세상에 이래서 문제가 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예언에 대해서 너무 몰라서 그래요. 그런 사람을 마귀가 이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점을 칩니까? 안 칩니까? 얼마나 잘 칩니까. 99.999%의 확 률로 맞춥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이 있다면 예수의 이름으로 점쳤다는 것 밖에는 다른 것이 아니지요. 사실은 마귀가 하는 짓을 교회 안에서 그대로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지 몰라요. 어떤 사람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신령하다고 찾아 가서 사업을 할까요? 말 까요?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면 잘 될것이니까 시작을 하라. 돈을 잘 벌 면 얼마를 헌금을 해라. 말을 했습니다. 신이 나서 사업을 했는데, 가지고 있던 것까지 다 날렸어요.그래서 화가난 이 사람이 그 점을 쳐준 사람을 고 소를 했습니다. 그 예언을 해준 사람이 교회의 권사에요.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길을 무엇이냐? 말씀 안에서 깨닫고 하나님 나라에 관계 되는 것,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 되는 것, 좀 깨달은 것 있으면 그것으 로 만족해야지 그 나머지 이상한 것 하면 안됩니다. 그런 사람의 말을 들어 서도 안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시대에 이런 은사를 받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 가시면서 보혜사 성령 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려 주시죠. 또 성경을 통해서 다 보여 주셨는데, 무슨 예언자들이 그렇게 많이 필요합니까? 여러분의 은사가 무엇입니까? 그 은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 다. 그리고 한사람도 제외 됨이 없이 사람마다 다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기 억하시기를 바랍니다.그러므로 은사가 있으면 섬겨야 됩니다.은사는 바로 소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 다른 봉사의 태도를 교회에서 배우고 훈련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해서 전부가 다 유익하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덕 을 끼치는 봉사가 있고 그렇지 못한 봉사가 있을수 있습니다. 무엇이 바르 게 하는 봉사인가를 알려면 교회에서부터 배우고 봉사하는 자로서의 옳바른 인격을 내가 먼저 터득한 다음에 세상에 나가서 봉사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 려고 해야지 그것을 배우지 못하고 갖추지 못하고 함부로 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옳바른 봉사를 할수 있는 훈련이 왜 필요하냐? 무엇이 바르게 하는 봉사인가? 하는 것이 3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 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 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꼭 분수에 맞는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러므로 우리가 봉사를 할 때에는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분수 안에서 지혜 롭게 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 아닙니까? 그러므로 옳바르게 봉사하려면 겸손을 배워야 합니 다. 어떻게 겸손할 수 있습니까? 우선 자기 분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그 래야 겸손합니다. 그 이상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황목사와 여러분의 믿음이 다릅니다. 옆에 앉아 있는 형제와 여러분의 믿 음이 다릅니다. 믿음의 양이 틀리고, 그릇이 틀려요. 누가 그것을 정확하 게 아시느냐? 내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정확하게 아세요. 그러므로 그 사람 에게 꼭 맞는 분량의 은사를 주십니다. 지나치게 주시지 않아요. 너무지나 치면 옷이 커서 사람이 입고 다닐수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똑같은 은사도 받은 것이 아니며, 똑 같은 것이라고 하더 라도 같은 양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그러므로 내가 할수 있는 일을 곁에 있는 형제가 못할수도 있고, 곁에 있는 형제가 하는 일을 내가 못할수 도 있습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못 받은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 다.또 자기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다른 형제에게 내게 없는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 는 것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가? 내가 중요한 것처럼 다른 형제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교회에서 가끔 보면 굉장히 어려운 사람이 있어요. 남보다도 뜨거운 열심 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입니다.정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를 위해서 봉사 한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뭐 좋게 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 니다. 나 아니면 안된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뛰니까 문제가 됩니다. 참 이 거 문제입니다. 얼마나 골치덩어리인 줄 몰라요. 이런 사람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거예요. 하 나님 다양한 은사를 주셨는데, 나 혼자 다 가지고 있다고 하니..... 이것은 목사든,장로든 마찬가집니다. 혼자서 다 할수는 없는 것이에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평가해야 하는데, 정직하게 평가하는 눈이 없어졌어요.비록 자기가 받은 은사가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에 비해서 광이 않나는 은사일수도 있습니다.남이 알아 주지 않는 은사일수도 있습니다. 그 러나 겸손한 사람이 누구냐?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줄 알고,귀중히 여기고, 그것을 가지고 말없이 빛없이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의 미국의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서 한 나라 를 위하는 통일성을 가질 때에 나오는 힘때문이 아닙니까? 소련은 획일적으 로 하나 같이 만들어서 미국을 상대하다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난 민주당 후보로 나왔던 잭슨 목사는 듀카키스 후보에게 진후에 이렇게 명 연설을 했습니다. [듀카키스 당신하고 나하고는 너무 다르다. 당신의 부모는 의사지만 나의 부모는 하인이었다. 당신은 미국에 올 때에 이민선을 타고 왔지만,우리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왔다. 당신은 백인이지만 나는 흑인이다. 다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한 배를 탄 사람으로서 이렇게 사는 것은 바로 미국을 위해 서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파워는 누비 이불과 같은 다양성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자기집이 너무 가난해서 어머니는 아이들을 덮어줄 이불을 만들려고, 털 헝겊이라든지,방수천이라든지,부대자루라든지,실크천 조각이라든지, 내 버 리는 모든 천조각은 닥치는대로 모아서 간신히 애들을 덮어 줄수 있는 누비 이불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미국의 힘은 바로 이 누비 이불의 문화에 있다.고 했습니다. 옳은 말이 아닙니까? 우리 산돌교회에 한번 보세요. 사는 형태가 다르지요. 지식수준이 다르지요. 재능이 다르지요. 성격이 다 르지요. 특히 요즈음 새로 나오시는 성도들을 보면, 저런 분들이 우리 교회 에 어떻게 나왔을까? 참으로 놀라울 정도로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앞으로는 더 그럴 것입니다. 왜 이렇게 모아 놓았느냐? 서로가 섬김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큰 일을 해 내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몇가지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댓가지의 은사가 있어야 목사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들이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뛰어나고 어떤 것은 그저 그렇고 어떤 것은 있기는 있는데 좀 신통치가 않아. 하이벨 목사는 자기의 은사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리더쉽,둘째는 복음전하는 것,셋째는 가르치는 것,넷째는 행정,조 직 이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리더쉽과 복음 전하는 은사가 뛰어난데 그것을 활용하기 보다는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다가 이렇게 다운이 되어서 허우적 거린다고 생각를 하고는 겸손하게 자기보다 훨씬 잘 가르치 는 목사를 초빙해다가 가르치는 일을 맡기고 자기는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 을 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지를 못해서 교회들이 문제가 생기지 않아요. 여러분 저에게는 어떤 은사가 있다고 보십니까? 가르치는 것, 복음 전하는 은사, 심방- 권위하는 은사, 이것을 활용할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여러분 들은 어떤 은사가 있습니까? 교회에서 섬기지 못하면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잘 할수가 없어요. 지금보 다 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더 분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더 활 기차고 더 큰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할 것입니다. 찬송 383장 부릅시다.
교회 안의 봉사부터 먼저/ 롬12:3-8/ 2001-09-21
교회 안의 봉사부터 먼저 롬12:3-8 성경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으면 우리들의 삶도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삶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맞는지 한번 다시 확인해 보아야합니다. 신구약 성경의 말씀은 구원을 얻는 길을 제시하는 것 보다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하는가를 더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그저 감상적으로 좋아하고 기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으로 뛰는 우리의 모든 생활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헌신하는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으로 구원을 얻게된 것은 아니지만,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면 반드시 구원하신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행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3절부터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생활, 또 가정생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는 섬김의 생활, 즉 봉사의 생활이라고 함께 생각했습니다. 이와같이 섬김의 생활을 바로 하려면 이 세대를 본 받지 말 것과 시간 시간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지 늘 살피고 기도를 통해서 확인한 다음에 그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내용을 보면 3-13절까지는 교회 안에서 내 몸을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산제사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14장 끝까지는 세상에 나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 생활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져야하는데, 그러나 순서적으로 볼 때에는 교회 안에서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봉사의 우선 순위가 교회 쪽에 먼저 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제대로 못하는 봉사를 세상에 나가서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설교는 이 본문에 근거해서 교회 안에서 하는 봉사, 이것이 왜 우선 되어야 하는가를 자세하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청년들이 특별히 들어야합니다. 우리 교회 올해 표어가 무엇입니까? 충성하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 충성하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하자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봉사하자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지 않고 역사 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봉사가 우선되어야하는 이유를 한 세 가지로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또 우리는 그 몸의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말을 바꾸면 우리가 그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몸입니다. 내 몸입니다. 5절을 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지체가 되었느니라 이것을 보면 교회는 몸이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대원칙을 하나 세워 주셨는데,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보세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려고 한다면, \'네 이웃\'은 내 몸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교회를 놓고, 내 몸이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할 때에 이것은 훨씬 차원이 달라집니다. 교회에서 다른 형제를 섬겨라 하면, 그것은 네 몸과 같이 섬겨라 하는 것보다도 더 농도가 짙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섬기라는 말입니까? \"교회를 사랑하라 섬기라\"는 말은 곧 \"네 몸을 사랑하라! 네 몸을 섬기라\"는 말과 같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다음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 몸처럼 사랑하고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 몸을 앞 세워야지요. 교회 봉사를 우선하여 하라는 말씀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교회가 바로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자기 일로 보는 사람은 복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데 자기 일로 알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청년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몸인 여러분 자신인 교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십니까? 교회 안에서부터 봉사는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초절하는 신앙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봉사는 어느 것보다도 우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남 섬긴다고 나가서 큰소리 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내 몸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형제들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위해서 봉사한다. 이것은 헛소립니다. 먼저 할 일이 있어요. 그러나 문제는 이 교회를 자기 교회로 아는가, 자기 몸으로 여기는가가 문제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우리들은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가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야합니다. 두번 째로는 성령께서 오늘 교회를 붙들고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하시는 일은 인간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오늘도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교회에 각 기관을 세우고 각 지체에게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4절을 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몸은 하나 밖에 없지 않아요. 그러나 그 몸에 붙어 있는 여러가지 기능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여기서 직분이라는 것은 교회의 직분인데, 몸의 지체와 같습니다. 모든 지체가 똑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손은 손대로, 눈은 눈대로, 발은 발대로 다 각각 기능이 다릅니다. 왜 지체마다 기능을 갖고 있습니까? 몸을 섬겨야 될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많지만 똑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6절을 볼까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그랬습니다. 그 다양한 은사를 누가 주십니까? 성령께서 주셨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은사를 못 받았다면 지체가 아닐 것입니다. 지체라면 반드시 그 지체의 역할을 하도록 은사를 반드시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은사를 받았으면 몸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라고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묻어 두고 있으면, 그 사람은 나중에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주님을 통해서 굉장한 꾸중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은사는 여러가지 입니다. 첫째는 예언이고, 둘째는 섬기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 권위하는 것는 것, 구제하는 것, 다스리는 것, 긍휼을 베푸는 것, 이렇게 다양합니다. 여러분이 성령께 받은 은사가 무엇입니까? 그 은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한사람도 제외됨이 없이 사람마다 다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은사가 있으면 섬겨야 됩니다. 은사는 바로 소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땅위에 어떤 기관들 같이 시시한 곳이 아닙니다. 교회를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바로 못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직접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교회와 교회 안의 기관들인 지체들을 통해서 일하시는데 지체들에게 각종의 은사와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교회는 일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곳이기도 하지만 교회 안의 성도들은 다 역사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환난을 당했으나 그 사명 받은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몸을 드리는 일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한다 했습니다. 우리청년들은 열심히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를 해야합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하라하시는 내가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분별하시고 드리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 청년들에게 지나친 잔소리 같지만, 세상 삶은 너무 착실하게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먼저 해야할 교회를 섬기는 일에는 몸을 사리고 시간을 드리지 않습니다. 교회서 하는 행사가 있다면 청년들이 제일 먼저 움직여야합니다. 장례가 났다면 어느 부서보다 청년들이 가서 봉사해야합니다. 교회서 체육대회를 한다고 해도 청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집회를 한다해도 청년들은 아예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앞으로 청년들이 자신이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는 생활, 경건의 생활, 캠퍼스 선교도 좋지만, 교회에서 봉사하는 면들이 없으면, 말 뿐인 것이 됩니다. 우리 신일교회는 청년회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이 면에 대하여 안타깝습니다. 교회를 소중히 여겨야합니다. 신일교회가 작고 세상적으로 볼 때에 작은 교회지만, 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들이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카터는 지금도 시골 교회로 내려가서 봉사합니다. 이 사람이 잘난 사람입니다. 교회를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과는 말도 하기가 싫습니다. 그가 어떻게 다른 면에서 봉사하고 활동한다 해도 교회 중심이 안되면 잘못된 것입니다. 셋째로, 다른 봉사의 태도를 교회에서 배우고 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고 해서 전부가 다 유익하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덕을 끼치는 봉사가 있고 그렇지 못한 봉사가 있을수 있습니다. 무엇이 바르게 하는 봉사인가를 알려면 교회에서부터 배우고 봉사하는 자로서의 올바른 인격을 내가 먼저 터득한 다음에 세상에 나가서 봉사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려고 해야지 그것을 배우지 못하고 갖추지 못하고 함부로 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올바른 봉사를 할 수 있는 훈련이 왜 필요하냐? 무엇이 바르게 하는 봉사인가? 하는 것이 3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꼭 분수에 맞는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봉사를 할 때에는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분수 안에서 지혜롭게 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 아닙니까? 그러므로 올바르게 봉사하려면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겸손할 수 있습니까? 우선 자기 분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합니다. 그 이상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연습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가정과 같아서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서 봉사하고 여기서 섬기는 삶을 연습하지 않으면 어디가도 그 사람의 신앙인격은 자라지 못합니다. 고치지 못합니다. 식구많은 가정의 자녀들이 원만하게 잘 자르는 것 같이 교회는 식구가 많고 다양합니다. 이 사람들과 상관하는 데서 인격이 자랍니다. 골치 아프게 모이지 않아도 혼자서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을 것인데 왜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게하십니까? 부딪히고 깨어지면서 만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바로 이루어나가려면 교회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교회 밖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 지도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 섬기면서 자신도 도움을 입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가서 또 다른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한다면 교회 활동부터 배워야합니다. 교회를 떠나서 선교는 없습니다. 교회가 중심되어서 선교하도록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선교 그 현장에도 결국 교회를 세우는 것이 되어야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은사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따라서 교회 안에서 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해야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주일학교를 통한 교회 부흥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서 힘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라면 다들 주일학교에 봉사해야합니다. 주일에 피곤하다 힘들다 하지 말아야합니다. 세상일에는 얼마나 분주합니까? 토요일 늦게 까지 돌아다녀서 피곤하지 주일을 준비한다고 피곤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아주 약한 몸입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주일에 새벽부터 오전 오후, 성경공부 기도회 다 마치고 육신은 피곤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저녁 시간이 되면 그렇게 쾌할 할 수 없습니다. 스트레스가 다 풀리고 사명을 다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 주일 저녁에는 7시 반부터 교회에 모여 청년들이 기도회를 주최합니다. 전교인들이 다 참석해야합니다. 기도할 제목들이 너무 많습니다. 열심으로 기도해서 우리 청년들 부터 뜨거워집시다. 청년회 신입생들이 참석을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교회를 섬기고 일하는 충성이 있는 청년회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교회는 성령하나님께서 세우신 곳이고, 성령께서 지금도 교회를 붙들고 역사하십니다. 교회의 하는 일은 생명을 구원하는 너무나 귀중하고 거룩한 큰 일입니다.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해서 충성할 때에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삶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미래를 여시고 여러분들을 쓰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여러분들이 교회를 업신여기고 핍박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멸시하는 것이고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헌신하는 청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봉사의 원리/ 롬12:9-13/ 2001-09-21
교회봉사의 원리 롬12:9-13 핵심 : 교회봉사의 원리를 바로 알고 바르게 섬김의 삶을 살자! 본 롬 12:1절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섬기는 삶을 잘 살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각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6-8). 그러므로 각자가 자기 받은 은사대로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들마다 크고 작은 시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런 시험들이 생깁니까? 그것은 교인들이 교회를 봉사하되 \'교회봉사의 원리\'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회봉사의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교회봉사의 원리\'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1. 사랑으로 봉사해야 합니다(9-10절). 롬 12:9-10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그리스도인은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사랑이 빠져버리면 하나님 앞에 남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굉장한 은사를 받아서 방언을 합니다. 굉장한 은사를 받아서 성경을 풀어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굉장한 은사를 받아서 재물을 털어서 사람들을 구제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랑 없이는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왜요? 해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해봐야 아무 가치도 없으니까? 해봐야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시니까? 사랑은 주님이 주신 새 계명입니다. 요 13:3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기에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짜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말씀이 두 번나옵니다. 요 5: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노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사망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믿으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3:14절을 보면 좀 더 깊은 말씀이 나옵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 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리 네가 구원받았다고 떠들어도 네가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면 너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고 아직도 사망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 사람이다. 네가 구원받은 사실을 증거하고 싶으냐? 그러면 사랑하라! 그러면 너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이다\"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동시에 그와 같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증거로 사랑합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을까?\"하고 충분히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만큼 사랑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무엇이 다릅니까? 많은 차이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천국은 영원토록 사랑가운데서 살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사랑이 없는 가운데서 영원히 살기 때문에 고통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데서 영원토록 살아야 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그러므로 구원받았다 하면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를 교회에서 열심히 합니다만, 그들 때문에 교회가 피해를 얼마나 당하는지 모릅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랑, 형제의식이 없는 사랑, 악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랑, 멸시하는 사랑, 등등......!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교회를 봉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열심으로 봉사해야 합니다(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여기서 \'열심을 품고\'라는 말은, \'가슴에 불을 품고\'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뼈 속에 불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한 사람이 있습니다. 뜨거운 열심은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이요, 기독교의 빼놓을 수 없는 공통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미지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열심을 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열심을 내면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열심이 식어지면 은혜에서 떨어진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신학자는 \"기독교는 열심의 종교\"라고 정의한 것도 옳은 말입니다. 열심을 빼버리면 기독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열심이 식어 버리면 그 교회는 부흥하지를 않습니다. 건물이 아름다워도 그 교회는 죽어 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미지근한 것을 지극히 싫어하십니다. 계 3:15-16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심을 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미지근한 사람아! 내가 너를 토하여 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심 없는 사람아! 교회를 다녀도 나는 너를 싫어한다. 열심 없는 사람아! 네가 아무리 기도해도 내가 안 듣겠다. 열심 없는 사람아! 네가 아무리 아름답게 불러도 나는 그 찬송이 마음에 안 들어!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는 뜻입니다. 열심 없는 것을 주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아십니까? 물론 잘못된 열심이 있습니다. 이단에 빠진 열심도 있습니다. 가정도 팽개치고 교회에만 와서 살려고 하는 잘못된 열심도 있습니다. 이것은 병든 열심입니다. 여기서는 병든 열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일에 동참을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하시는 분이 주님 앞에 섰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아!\"하는 책임 추궁을 받을 것입니다. 3. 어려워도 봉사해야 합니다. 12절을 봅시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했습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라고 했지요? 현실적으로 보아서 기대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제는 앞에 있는 어떤 목표를 놓고 소망하면서 즐거워 할 수 있는 환경이 어떤 환경입니까? 굉장히 어려워진 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난 중에 참으며\"라고 했지요? 무엇인가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하는 상황은 굉장히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있는 고통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환난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힘을 써서 해야 하고, 문을 두드리듯이 쾅쾅 두들기면서 기도해야 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12절 말씀을 종합적으로 말하면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기는 하되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 지금 놓여서 봉사하기가 어려운 경우를 전제하고 하는 교훈입니다. 교회에서 형제를 위해서 봉사하고 주님을 위해서 뛰는 것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렇게 봉사를 하면 주님께서 매일매일 형통만 주시고, 어려운 일이 없이 태평세월만 주실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봉사를 하고, 육신을 입고 봉사를 하기 때문에 자주 자주 어려움이 일어 날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던 일에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또한 우환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 욕을 먹게 되기도 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때, 이렇게 어려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그럴 때일수록 기뻐하면서 봉사하고, 인내하면서 봉사하고, 기도를 더 힘쓰면서 봉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중단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너무 힘드니까, 남에게 좋은 말 못 들으니까, 하던 일을 그만두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워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시작한 일은 중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해도, 환경이 어떻게 변해도, 어떠한 괴로운 일이 있어도, 끝까지 견뎌 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어떤 것도 주님 앞에는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 내어놓을 수 없는, 핑계가 되지 못하는, 사소한 것을 가지고 교사를 하느니 못하느니, 성가대를 하느니 못하느니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4. 나누면서 봉사해야 합니다. 13절에 보면,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이 로마서를 쓸 당시만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극빈자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생활이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교회 안에서 형제를 위해서 봉사하려면 내가 가진 물질을 나누어주면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 말만 가지고 하는 것, 그게 얼마나 빛 좋은 개살구입니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내 주머니는 꼭 싸매어 두고, 남을 섬긴다. 봉사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합니까? 교회 안에서 그런 식으로 살면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 벤다이크라는 사람이 쓴 <대저택>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떤 큰 갑부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갔습니다. 들어가서 천사가 인도하는 대로 자기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주 조그만 오두막이었습니다. 지붕도 제대로 덮이지 않은 오두막에 갔더니 \"여기가 당신이 살아야 할 집입니다.\"고 합니다. 이 부자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여기서 내가 살아야 합니까?\" \"예, 여기가 당신의 집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집이 초라해요?\" \"아, 그거야 당연하지요? 왜 그런지를 모르시겠어요?\" \"예, 모르겠는데요!\" \"저 옆을 보세요!\" 그 옆을 보니까 천사들이 망치를 들고 뚱땅뚱땅 집을 짓는데 아주 큰 맨션을 짓고 있습니다. 자기 집은 변소간만도 못해요. \"저 집은 누구 집인가요?\" \"아, 그 주인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요. 천국에 오면 주려고 짓는 중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데요?\" \"당신 동네에 조그만 병원 하나 차리고 있는 의사 있지요? 그 의사 집입니다.\" \"왜 저 사람은 그렇게 큰집을 지어주고 나는 이렇게 초라한 집을 줍니까?\" \"몰라도 정말 너무 모르네. 자, 보세요! 저 사람은 자기에게 돈이 들어오면, 자기가 쓸 만큼만 남겨 놓고는 전부 남을 위해서 썼어요. 이렇게 남을 위해서 쓴 돈은 전부 천국 은행에 저금이 되거든요. 우리는 지금 그 돈 찾아 가지고 집을 짓는 거예요. 그 사람은 지금도 계속 저금을 하니까 밑천이 안 딸리지요. 그러니까 자꾸만 집을 더 크게 짓지요. 그러나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지금까지 이 천국 은행에 저금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고작해야 이건데, 이거 지붕도 제대로 못 덮고 있잖아요? 뭐 저금을 해야 지붕을 덮지?\" 소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슴에 무엇인가 와 닿는 것이 있지요? \"나누어 주면서 봉사하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 결론(決論) 자, 여러분! 우리는 오늘 교회봉사의 원리를 배웠습니다. 그러면 교회봉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사랑하면서 봉사하고, 둘째는 열심히 봉사하고, 셋째는 어려워도 봉사하고 넷째는 나누면서 봉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봉사를 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주님의 자녀로서의 바른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몸을 주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를 원합니까? 교회 안에서부터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원리대로 봉사하자 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이, 우리의 삶이, 날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제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자/딤전1:12-20
교회에서 봉사하는 자 딤전1:12-20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가장 큰 은혜와 가장 큰 비밀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문제일지라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답을 얻게 되어 있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축복을 넘치게, 내 그릇을 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볼 때에도, 내 자신을 볼 때에도,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교회에서 일하는 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면서, 내 문제를 해결하고, 앞날에 오는 불안과 어려움을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지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인간을 위한 지식이 있고, 하나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절대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위에서부터 시작되고, 인간의 지식은 언제나 아래, 땅에 제한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리는 모든 영광과 축복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는데,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땅에 있는 지식을 좇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눈이 백내장으로 가려진 것처럼, 우리의 영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어두워진 것입니다. 고전1:21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지식이 이만큼 올라가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비례해서 올라가야 될텐데, 이건 아무리 올라가도 이 지식은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눈을 뜨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범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셔서, 그의 죽으심과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 죄로 더러워진 이 눈을 벗기시고, 무거운 짐을 덜어 주셔서, 짐이 무거울수록 아래만 바라보던 우리에게,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창조자를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알게하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쳐주시고, 그의 품안에 안기워 풍성한 은혜를 힘입을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땅의 지식, 육의 지식, 잠시 사는 이 세상의 지식을 좇는 우리에게, 하늘의 지식과 영적 지식, 영원히 사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눈을 뜨게 하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참된 풍요로움과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지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번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는 것 만큼 여유가 있어야 될텐데, 더욱 인간의 생각은 좁아지고, 긴장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오는 이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입니까?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일이 말세가 된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는 직장에서 우리의 할 일을, 가정에서 우리의 할 일을, 교회에서 할 일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하던 일을 계속 할때 천국에 이르게되고, 오늘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지혜로 운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성전을 귀히 여기고 성전에서 주의 주신 직분을 귀히 여기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젊어서 충성하면, 늙어서 큰 은혜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내 머리가 백수가 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성전에서 일 한 그 열매를 내가 나이가 많을 때에 다 거둘 수 있도록, 하나님은 책임 져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젊을 때에, 힘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 거룩한 일에 충성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요사이는 평생직장이 없다고 하는데, 평생직장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우리가 노후에 어떤 보호를 받는다 할지라도, 건강과 자녀와 내게 필요한 노후의 이 모든 혜택은,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신 그 은혜로, 우리는 노후를 잘 보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충성은, 내 대에만 아닙니다. 내 노후만이 아닙니다. 내 평생에 받는 축복도 물론이지만, 성경은 자자손손 자녀들을 위해서 가장 좋은 길은, 내가 교회에서 쓰임을 받고 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자손은 버림을 받거나 걸식함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론의 자손을 복 내려 주시듯이, 교회에서 일하는 자녀들을 하나님은 축복 하여 주십니다. 성경에는 내 자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면, 이 땅을 떠나 하늘나라에 가서도, 상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딤후 4:8에 \\\\\\\"이제 이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일하고 하늘에 가서 상 받는 일, 여기서 일하고 저 나라에 가서 면류관을 쓰는 일은, 교회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주의 일은 내 대에, 내가 누리는 축복도 많지만, 내 자손 에게 주시는 축복, 또 이 땅을 떠나서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영원한 축복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십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밭인 포도원으로 우리를 들여 보내는 것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일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도 일하시고,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열심히 일하시고, 우리 모든 믿음의 선조들도 열심히 일합니다. 왜냐하면 일하는 자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셔서 일하라고 합니다. 열심히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내가 상당하게 갚아 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의 일을 맡겨 주신 것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직분은 영광스럽습니다. 땅의 직분도 영광스럽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여러 분야에 좋은 자리에 올라가면, 그 지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계급장이 붙여집니다. 의자가 달라집니다. 장군이 되면 태극기 옆에 장군기가 휘날립니다. 얼마나 직분이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갈 때에는 경호를 해줍니다. 직분을 위해서 많은 조직이 움직여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인들은 항상 남편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의 성공이 본인의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영광이 본인의 영광, 남편이 지점장이 되면 부인도 지점장 부인, 남편이 장군이 되면 부인도 장군 부인이 됩니다. 남편이 졸병이 되면 부인도 졸병 부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도 옷을 입혀 주셨는데, 갖가지 보석을 달아서 옷을 입게 하셨습니다. 가슴에도 흉배를 붙이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직분이 귀한지, 그래서 제사장이 입은 옷을 요사이 값으로 계산하면 한 3억 정도 의 돈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십니다. 직분은 다 영광스럽습니다. 고후 3:7에서부터 보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의 직분도 영광스러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받아서 돌판을 가지고 내려 오는 의문의 율법, 사람을 죽게 하는 그 율법을 받아 오는 모세도 얼굴이 빛이 났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직분이야말로 더 영광스럽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의 직분은 잠깐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은 영원한 영광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우리의 영, 육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육의 건강도 땀을 흘리든지 운동을 하든지 일을 해야합니다. 영적인 건강도 일을 해야합니다. 잘 먹기만하고 운동을 안하면 오히려 병이 됩니다. 현대인들은 운동이 부족합니다. 땀이 부족합니다. 땀을 흘릴만큼 흘려야 되는데 흘리 지 않기 때문에 병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말씀만 듣고 다니면 오히려 영적으로 병이 듭니다. 어린아이 때는 몰라도 어느정도가 되면 자기가 움직여야 합니다.땀을 흘려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어도 믿음이 자라나려면 일을 해야 되고 건강 하려면 일을 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믿음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병이 듭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비타민을 먹고 너무 많은 영양제를 먹어서 오히려 몸에 부작용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보다 너무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은 진액이 넘치도록 먹는데 일하지 않기 때문에 병드는 것입니다. 움직여야 됩니다. 하다못해 가다가 길 가에 있는 분에게라도 한 마디라도 \\\\\\\"예수 믿으세요\\\\\\\" 한 마디라도 하고 가세요. 그러면 엄청난 영적 에너지가 들어오는 것만큼 나가므로 여러분에게 건강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청소라도 하시고 안내라도 하시고 어떤 봉사라도 교회학교 교사라도, 어느 곳이라도 일을 하시는 것이 여러분이 영적인 건강에 참 좋다 라는 것입니다. 운동에도 기본이 있듯이 영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기본이 있습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 이 배워야 합니다. 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거짓말 하고 생활을 무질서하게 도덕적으로 잘못된 삶을 살아가면서 주의 일을 해서는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지를 않습니다. 사람 앞에는 속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다 아시기 때문에 속일 수가 없습니다. 주의 직분을 감당하려면 늘 깨어 있어야하고 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 나를 죄에서, 멸망에서,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나를 오늘날까지 나의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날마다 나와 함께 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그래서 내 적은 일에, 조그마한 일이지만 주님을 위해 일하므로 큰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작은 봉사가 하나님이 내려 주신 하늘 같은 큰 은혜에 내 작은 움직임이 보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일할 때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일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인하여 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지난 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늘 감사하면서 이러한 나에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분을 맡겨 주신데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이 직분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잘해서, 내가 부족함이 없어서 직분을 맡겨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핍박자요, 포행자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요.\\\\\\\" 자격이 있는 집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격 있는 목사는 이 땅 위에 한 명도 없습니다. 다 자격 없는 분에게 하나님이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자격 없다고 말해야, 나는 부족하다고 말해야 그게 자기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나에게, 부족한 죄인에게 내 죄는 용서하여 주시고 직분을 통하여 나에게 만 가지 복을 주시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 크신 은혜를 늘 감사하며 주님을 섬겨 야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직분을 감당하는데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만입니다. 국가의 멸망이나 개인, 가정, 기업의 모든 멸망이 다 교만에서 오는 것처럼 교만은 안 찾아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있을 만 하고 먹을 만 하고 배울 만 하면, 다 교만이라는 마귀가 찾아가는 것입니다. 다윗도 교만해서 시험들었고 히스기야도, 그렇게 잘 믿던 웃시야 왕도 교만했고 여호사밧, 아사 왕까지 교만이 안 지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만이 올때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은 뜨거운 열심을 식게 만들고 깨끗한 우리 마음을 녹슬게 하고 오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직분을 받았을 때는 그렇게 눈물나고 감사하던 직분이 시시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볍게 보입니다. 직분을 멀리하고, 뒤로 두고, 세상으로 나가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분을 감당 못하는 가장 큰 장애물 또 하나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 이것이 영적 장애물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영적 미숙입니다. 참지 못하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잘 이겨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직분, 하나님의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직분을 버리게 하고 경홀히 여기고 직분을 시시하게 생각하고, 이 세상으로 우리를 언제나 유혹하여 내는 것입니다. 또 교회 직분을 감당하다가 사람 때문에 속는 것이나 상처를 받으면 그만 직분을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사람 보고 실망하고, \\\\\\\'누가 그러더라, 집사님이 저럴 수 있느냐\\\\\\\', 이 건다 마귀에게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언제나 \\\\\\\'사람 봐라, 사람 봐라\\\\\\\' 자꾸 그런 실망되는 곳으로 우리를 보게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 봐라, 예 수님 봐라, 위를 바라보라,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 바라봐라\\\\\\\' 언제나 위를 바라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을 보게 하고 그래서 사람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시험들게 하는 것이 마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무거운 짐을 지면서도 무게 있게, 흔들리지 않고, 구약성경에 있는대로 소가 짐을 무겁게 싣는 것과 같이 직분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겁게 실은 그 소는 결국 주인을 유익되게 하고 자기에게도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조그만 일 하고도, 하나만 하고도 시험에 듭니다. 송아지 같이 팔짝팔짝 뛰고 토끼 같이 놀래고 하나 해 놓고는 나 잘했다고, 나 밖에 없다고, 암탉 같이 알 하나 놓고도 온 동네가 시끄럽게 혼자 잘했다고 야단부리고, 우리가 다 모두 어려서 그렇습니다. 황소와 같이 짐을 무겁게 싣고 열 가지 스무 가지 일을 하면서도 잘 감당하는, 그래서 히브리서 3장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의 수 십만을 이끌어 내면서도 말 한마디 안하고 끝까지 참는, 모세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또 모세보다도 더 귀한 분은 바로 십자가를 지면서도 말하지 않고 끝까지 참아 내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에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분을 무게 있게, 많은 짐을 운반하는 황소와 같이 거룩한 짐을 짊어지고 잘 감당하는 분은 결국 그 축복이 자기에게로 오고 그 영광이 자기에게로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사람을 위한, 인간을 위한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려 세운 교회이고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래서 시편 91편과 92편에 보면 \\\\\\\"지존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권력의 그늘이 아닙니다. 재벌의 그늘이 아닙니다. 학문의 그늘이 아닙니다. 지존자의 그늘, 창조자의 그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시편 91, 92편을 집에 가셔서 잘 읽어보세요. 지존자의 그늘에서 일하는 자를 하나님이 재앙에서도 보호해 주시고 전쟁에서도 지켜 주시고 갖가지 질병에서도 내가 보호해 주겠다. 거기서 간구하면 내가 그 간구를 들어주고 그 곳에서 나를 위하여 일할 때 내가 너에게 마음껏 축복해 주겠다는 말씀이 끝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교회는 가정과 같습니다. 육신의 가정에서도 평안을 얻고 쉼을 얻고 사랑과 행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이 가정에서 혈통을 이어가는 축복이 바로 가정에 있지 않습니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영, 육의 평안을 얻고 쉼을 얻으며 위로부터 하나님이 내리시는 한없는 사랑과 신령한 기쁨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가정도 사랑하는 연인이 만나서 귀한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도 우리 인간이, 죄인이 참 남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예수를 믿고 자라나는 곳이 교회 밖에는 없습니다. 혈통을 이어가는 곳이 가정 이외에는 없듯이, 영적인 하나님 자녀가 혈통을 이어가는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이 곳에 와서 예수를 믿고 구원함을 얻고 자라나고 또 어린아이들이 나와서 계속하여 영적인 하나님의 가정을 대신할 곳이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혈통을 이어가는 곳이 교회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를 귀히 여기십니다.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할 일을 다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늘나라로 가면 또 내 후손들이 이곳에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그 일을 계속하여 은혜를 받으면서 자라나고 주님을 섬기게 되는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귀하고 교회도 귀한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내 가정이라고 열심히 일하고, 교회에서도 내 교회라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집에 와서는 열심히 뭐라도 만지고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남들 같이 생각하고 하숙집 같이 생각하고 그렇게 다녀가면 안됩니다. 교회도 하나하나 일 하면 그 일 속에 얼마나 기쁨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은 높은 자리를 원하지만 교회는 낮은 자리일 수록 은혜가 더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쓰임받는 것이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한량없는 축복을 영원히 주시기 위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처럼, 좋은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교회와 섬김: 교회의 본질로서의 섬김
교회와 섬김: 교회의 본질로서의 섬김 김옥순(안동교회 부목사) I. 들어가는 말 한국 개신교는 개헉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교회로서 이미 과거에 개혁된 교회의 전통과 함께 끊임없이 개혁되고 개혁되어 가는 교회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는 한국교회가 현재도 개혁에로 요청받고 있음과 갱신에로 또한 도전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개혁과 갱신은 한국교회가 틀 다시 짜기와 함께 다시 새로워져야 함에로의 도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새로워진다는 것은 현재 낡아서 버려야 할 것이 있음을 전제로 그것이 버린 바 되고 고쳐져서 다시 쓸모 있게 되는 질적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다시 태어남이다. 이 거듭남이란 중생인 바, 회개와 돌이킴에 의해 따라오는 결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것은 회개와 돌이킴이 있어야 함을 뜻한다고 하겠다.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기도로서의 회개는 돌이킴의 증거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현재의 잘못된 점들을 지양하고 보다 더 좋게 만드는 일을 지향하는 돌이킴의 행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받을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룩해왔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교회가 그의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인 성숙이 결여되어 왔다는 지적이 있기도하다. 이때 질적 성숙에 대한 개념 정의가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 하겠으나 필자는 이 개념을 교회의 섬김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바, 교회는 그의 본질적인 섬김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질적으로 성숙하는 참 교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교회의 질적 성숙은 교회가 섬기는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국교회의 질적 성숙을 위한 갱신에로의 요청은 곧 섬기는 교회로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교회의 틀 다시 짜기에 대한 요청은 그의 질적 성숙을 위한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그 동안의 한국교회의 틀은 양적 성장을 위해 만들어진 틀로 볼 수 있으며, 이는 한국사회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다 하겠다. 한국사회의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추구해온 물량주의와 경제 성장주의를 위한 틀은 강자지배의 논리에 의한 수직구조다. 여기서는 힘있는 자들이 으뜸이 되어 지배하고 군림한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크게 다르다고 보기 어려운 구조는 교회 안의 물량주의와 성공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경쟁의 틀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군림하는 교회의 양태로 나타날 수 있다. 한국교회가 다시 짜는 틀은 경쟁하는 틀을 극복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그것은 소수의 이익을 위하는 지배구조가 아닌 함께 더불어 사는 평등구조여야 한다. 평등구조는 섬김 속에서 함께 사는 공동체의 구조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한국교회는 질적으로 성숙해갈 수 있으며 섬기는 교회의 양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다시 짜는 틀은 섬김의 원리에 의한 서로가 함께 사는 틀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섬기는 삶의 원리를 위한 기초를 놓아보려고 한다. 이를 위한 접근방법으로는 성서적이고도 신학적인 전거에 기초하는 것과 관련하는 것으로만 한정하기로 한다. II. 담는 내용들 먼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함께 사는 원리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선 기독교인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예수,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으로 예수를 섬겼고 또한 인간을 섬기신다. 예수는 자기를 비우는 순종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생명을 내주기까지 인간을 섬기셨다.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로부터 섬김을 받고 또한 그들을 섬기며, 탄식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과 피조물 전체를 돌보고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까지 섬기신다. 이에 상응하여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요청 받는다. 이러한 요청적 삶은 기독교인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교와 섬김을 통해 함께 사는 공동체적 관계의 삶을 유비적으로 나타내며 이 세상에서 인간들의 관계 가운데서 살아야 함을 의미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섬김의 원리를 통한 함께 사는 삶의 근거를 성서 속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1. 성서 속에서 섬김과 관련되는 단어들 1) 신약성서 속의 단어들 우리말로 사용되는 \\\'섬김\\\'은 동사형 \\\'섬기다\\\'에서 온 명사적 쓰임으로서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받드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명사형 \\\'섬김\\\'과 동사형 \\\'섬기다\\\'의 쓰임을 신약성서 속에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헬라어 동사 \\\'섬기다\\\' (diakonein)는 신약성서 속에서 37회 쓰였고, 명사인 \\\'섬김 또는 일\\\'(diakonia)의 사용은 34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명사로서 \\\'종 또는 섬기는 자, 일꾼\\\'(diakonos)으로 29회 사용되어 우리말의 섬김과 관련된 것이 전체적으로 100회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 명사형(diakonia, diakonos)과 동사형(diakonein)의 쓰임을 본문별로 구분해보면, 공관복음에서는 거의 동사형이 사용되었고 단지 누가복음(눅 10:40)에서 명사형 \\\'diakonia\\\'가 나온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을 서신 가운데 대부분은 명사형 \\\'diakonia\\\'와 \\\'diakonos\\\'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명사적 또는 동사적 사용법에 따라 다양한 강조점과 각각의 차이 있는 뉘앙스를 가진다. 신약성서 가운데 섬김과 관련하는 용어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먼저 동사 \\\'섬기다\\\' (diakonein)에 관해서이다. 이 말은 신약시대 이전 그리스 주변에서 오랫동안 세속적인 의미에서 \\\'식탁에서 시중들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여기로부터 파생되는 보다 광범위한 그 의미는 생명에 관건이 되는 일을 하는 것으로서 그 범위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넓은 분야까지도 포괄하는 생계부양의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바을 서신에서 쓰이고 있는 명사형 \\\'diakonos\\\'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직무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였고, \\\'diakonia\\\'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에 대한 뜻으로도 표현되었다. 그런데 명사의 쓰임인 섬김(diakonia)은 그리스 헬라 세계에 있어서는 거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 사고에서 섬김은 굴종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구약성서를 그리스말로 번역한 <칠십인역>(Septuaginta LXX)에 잘 나타나고 있다. 즉 구약성서에서 자주 사용된 \\\'섬기다\\\', \\\'섬김\\\', \\\'종\\\' 등의 단어들에 비해서 <칠십인역>에는 그러한 말들이 그리스말의 \\\'diakonein\\\'이나 \\\'diakonia\\\' 등으로 거의 번역되어 사용되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신약성서의 쓰임인 \\\'diakonein\\\', \\\'diakonia\\\', \\\'diakonos\\\'가 가지는 의미 전체를 포괄해서 디아코니(Diakonie)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때의 디아코니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가 있다. 디아코니란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서 복음을 받드는 사도적인 봉사와 함께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 내용으로는 인간들 사이에 개인적 혹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생명보호와 법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서 그들의 권리를 찾아 사회적 주체로 일으켜주는 일이다. 이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그리고 생태계 전체를 포함하는 창조세계 전체의 총체적인 구원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디아코니는 이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의 행동화이며, 기독교 신앙인의 그 말씀에 대한 실천적인 삶의 외연화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독일의 \\\'Diakonie\\\' 라는 용어규정과 그 개념정의에 합의하면서 그 사용에 따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 고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섬김은 그 의미에 있어서 주로 독일어 쓰임인 디아코니(Diakonie)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2) 구약성서 속에서 구약성서에서는 \\\'섬기다\\\', \\\'섬김\\\', \\\'종\\\'이라는 단어들이 모두 합해서 1,000회 이상 사용되며 또한 의미적으로 이에 상응하는 용어들도 있다. 이러한 단어들 가운데 대부분의 히브리어의 명사형 섬김에 대한 표현방법은 그리스어의 섬김과는 다른 뉘앙스를 준다. 즉 그것은 한편으로는 하나의 종속적인 관계의 표현으로서 노예의 섬기는 일과 관련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강력한 종교 의식적인 섬김을 말하는 바, 예전 또는 예배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의 섬김은 그 강조점이 일반적으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율에 놓여 있기보다는 주로 종교 의식적인 의미와 관련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그 비중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종교 의식적인 행위는 특히 계약법에서는 약자를 위한 보호와 정의 실천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이렇듯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에 나타난 섬김에 대한 의미가 다양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에 나타난 기독교 섬김에 대한 구약 신학적 기여에 대한 물음은 다른 모든 기독교 신학적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그 물음이 섬김과 관련하는 신학적인 현상 자체로부터 출발될 수 있다. 즉 고통받는 인간의 상황이 질병이나 가난, 신체적 장애 그리고 배척받는 이방인의 형태로 구체화될 때, 이때의 섬김이 고통받는 인간과 피조물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며 그 고통으로부터 인간과 피조물들을 해방하는 신학적인 주제를 가진다면, 어떻게 구약성서 속에서 인간적 고통에 관련하는 모든 주제들이나 문제들, 그리고 현재적인 경험과 실천적인 질문들에 대해 해결을 시도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즉 인간이 각각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다양하게 겪는 고통들이 어떻게 신학적으로 이해되고 그에 대한 실천적 해결들이 어떻게 신학적으로 반성되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섬김을 위한 구약 신학적 기여로서 구약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깊이 놓여 있는 문제들 가운데 몇몇 주제들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실천적 규정으로써 사회의 약자보호법에 대한 신학적 반성은 숙고될 만하다. 2. 섬기시고 섬김받는 하나님 1) 탄식을 통한 하나님의 주는 섬김과 받는 섬김 탄식은 개인적, 집단적 불의로부터 생성된 상처받은 고통에 대한 인간의 가장 우선적이고도 중요한 반응으로서 인간을 위협하고 불안케 하는 모든 것들을 가차없이 토해내는 것이다. 양식사적 연구에 따르면 탄식의 가장 중심에는 기도와 간청이 놓여 있다. 이 기도와 간청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간구다. 하나님은 위기를 토해내는 탄식에 대해 예언자나 제사장을 통해 예전적인 위탁의 말씀을 주신다. 이러한 치유의 신탁을 통해 탄식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수용됨을 인식하며 하나님과 갱신된 만남으로서의 전환을 가진다. 하나님은 위기에 빠진 탄식자에게 위기를 극복하도록 힘을 주신다. 이 힘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얻은 힘이기에 불의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고 사랄과 정의에 의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낼 수 있는 창조의 힘이다. 즉 탄식자는 신뢰 속에서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린다. 이 희망의 기다림은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으로 우선적으로는 자신을 주체로 세우며 나아가 파괴된 관계를 치유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탄식과 관련하는 최초자이시며 최종자로서 인간으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요 동시에 인간을 섬기시는 분이 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탄식은 하나님과 인간, 삶과 죽음 그리고 죄책감과 용서가 만나는 점이요 치유받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즉, 탄식의 통로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며, 치유를 통해 불의로 뒤틀렸던 관계들이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로 전환되고 서로가 주고받는 섬김을 깨닫게 된다. 2) 불쌍한 자들을 섬기시는 하나님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비참하고 불쌍한 자들의 권리를 보호해주시는 것과 연관된다.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신이야말로 공법과 정의의 신이었다. 이들에 대한 정의를 이루는 일이 신들의 존재와 신성에 대한 기준이 되었다. 불쌍한 자들의 권리를 돌보아주면 그는 참 신으로서 보증될 수가 있으나 포악한 자들의 힘을 부수는 법 권리를 제정하지 않으면 그는 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공법의 수행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자체에 대한 기준이 된다. 기독교인이 믿는 신은 고통받는 자들의 권리를 찾아주고 섬기시는 자다. 거기로부터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동이 근거를 가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고유성이란 불쌍한 자들에 대한 신원과 그들의 권리보호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섬김 없이는 생각될 수가 없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거룩성과 섬기시는 하나님 성법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성은 섬김의 거룩성이며 이것은 이웃 사랑과 이방인을 사랑하는 실천적인 활동이다. 특히 레위기 19장에 나타난 사랑에 대한 계명은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토라의 목적을 위해 약자들이 보호받고 섬김받는 보호규정들이 나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분리해내어 스스로 거룩하게 하셨다. \\\'너희는 거룩하라. 왜냐하면 나는 거룩한 너희 하나님 야웨니라(레 19:2). 이러한 거룩성은 먼저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은사다. 물론 기독교인은 이 거룩성에 상응해야 하는 바, 이때의 상응은 무엇보다도 전통적으로 의식적-예전적인 영역과 얽혀 있는 거룩성에 대한 개념이 바로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약자를 사랑하는 실천적인 행동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성과 관련하는 사랑의 섬김은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에게 성화의 신학적-윤리적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4) 약자 보호를 위한 사회법을 통해 섬기시는 하나님 구약성서에서는 그 당시 인간의 사회적 고통의 형태들에 대해 법적 수단으로 반응하였다. 이는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들의 권리를 쟁취해주고 보호해주기 위한 법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할 뿐 아니라 기업의 경제가 국가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제도적인 장치에로까지 조직화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오경(토라)의 중심이며, 정경화의 출발이었다. 성서적 사회법은 사회, 정치적으로 약자인 과부, 고아, 가난한 자. 작은 자. 그리고 이방인들을 위한 보호 규정으로 되었으며 이 보호법 제정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행동에 대한 하나의 상응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보호 규정들은 생명의 필수적인 것을 저당잡는 일을 금하는 것이다(출 21:2ff; 신 15:12ff).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자의 노예법과 관련하여서는 6년 동안 일을 시키고 제7년째에는 노예들을 해방시켜야만 한다(출 21:2ff; 신 15:12ff). 도망한 노예들을 위한 보호법은 난민법이다(신 23:16ff). 왕조 말에 나타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날품팔이꾼들에 대한 보호가 있어야 했다(신 24:14f). 이스라엘에서는 사회적 경제법으로써 이자금지와 고리대금업을 금지하였다(왕하 4:Uf). 이자 금지와 함께 규칙적인 빚 면제가 나타나기도 한다(신 15:1ff). 특히 제3년째 드려지는 십일조는 최초의 사회 세금제도로서 이스라엘에서 땅을 가지지 않은 레위인과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이방인, 고아, 과부들과 같은 약자를 위한 사회제도였다. 이는 국가세금의 삼 분의 일이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생명을 보호하는 일에 사용되도록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들이 항상 신학적으로 반성되었다. 계약의 책(출 20:22-23:33)에서는 사회적 위기와 비참함에 대한 신학적인 반응을 보인다. 즉 사회적으로 약자인 그들을 보호하고 사회의 정의를 실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종교적 의식행위를 하는 것과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특히 예언자들은 사회적 위기 속에서-특히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극단화-작은 자와 권리가 없는 자(여자, 과부, 고아, 이방인, 그리고 노예)들에게 세력을 휘두르는 자들을 향해 심판을 외쳤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법은 법 제정을 통해 인간들 사이에서 구체화될 수 있으며, 그러한 장치 속에서 큰 힘을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큰 힘의 구속력은 국가적인 힘과 권력에 의한 승인이 아니라 인간의 자발적인 승인에 의한 권위다. 이러한 법들의 실제적 효웅성은 자발성과 사회 정치적 정황들, 그리고 많은 다른 것들에 의존하나 이스라엘에서 그의 실효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함께 얽혀 있다. 기독교인은 약자들의 권리보호를 위한 사회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법은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실효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신앙인들은 사랑과 믿음에서 나오는 섬김을 통하여 사회의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3. 섬기시고 섬김받는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인과 교회에서 섬김의 활동의 근거는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섬기는 삶을 산 것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총체적 사역은 바로 인간을 위한 섬김 자체였다. 이러한 섬김은 그의 인간 되심. 세례 받으심, 시험 받으심, 그의 사역, 십자가와 부활의 삶으로 이어졌다. 1) 예수의 사역과 섬김 예수의 성육신은 높은 자리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예수의 자기 비움의 종성에 의한 섬김이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인식한 메시아적인 과제는 권력과 지배를 통한 통치가 아니라 오히려 섬김을 통한 메시아 상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세 가지 내용은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즉 인간이 쉽게 야합할 수 있는 물질, 권력과 명예를 미끼로 던지면서 유혹하는 자에게 예수는 하나의 질적인 방향전환의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지배하는 권력에의 의지가 아니라 섬기는 길이요, 영광의 길이 아니라 자기를 비우면서 섬기는 길이었다. 이러한 섬김이야말로 뭇 생명을 살리는 길임을 예수는 그의 사역을 통해 구체화시켰으며 그의 십자가의 길을 통한 부활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예수의 섬김은 그의 대리적 고난과 인류를 위한 죽음 가운데서 그 절정을 보인다(막 10:45; 눅 22:27; 빌 2:5-11; 요 3:16). 2) 하나님 나라 운동과 섬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로 출발하는 예수의 사역은 섬김 사역의 결정체다. 그는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긴급성 앞에서 회개와 돌이킴을 촉구하였다. 이때의 회개는 바로 기득권자들이 가진 가치관의 전환과 사회적 약자들의 수용에 대한 촉구였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께서는 종교적이고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절대적 가치관이 끊임없이 상대화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정체되어 고정화된 하나의 종교적-법적 이념이 아니라 시공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운동성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지금도 오고 앞으로도 올 것이다 이 운동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인간 또한 그 주체가 된다. 절박하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일이 관건이다. 이때의 하나님의 백성을 모음은 율법에 의한 종교적 제약 속에서 방향지어진 운동-바리새적이거나 에쎄네적인 운동-과는 달리 사회적, 종교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모으는 하나의 열려 있는 운동이다. 이것이 예수가 실행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었고 이 운동의 구체화로 나타난 양태들은 종교적인 법에 내몰려 죄인으로 낙인 찍힌 세리와 창녀, 병든 자와 가난한 자 등 사회적으로 치여 밀려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섬김의 돌봄이었다. 그들과 친구가 된 예수는 섬김을 통해 그들도 한 인간으로서 존엄한 가치를 가지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들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선입관으로 인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상황을 깨뜨려 부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예수의 섬김을 통해 자기를 열고 가장 작은 자들을 식탁에로 초대하여 기쁨을 나누며, 버려지고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 창조되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자녀들임을 확인시켜주는 섬김이었다. 예수의 질병치유도 그의 섬김을 통한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질병의 고통 속에서 탄식하는 병든 자에 대한 그의 연민이 질병에 대한 당시의 의식적-예식적인 부정적인 관점을 하나님 나라 속에서 상대화시키고 있다. 이때의 질병치유는 바로 종교적 규정에 의해 배타당하는 이들을 위해 열어놓은 하나님 나라였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들을 주체로 일으켜 주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기며 인간을 섬기는 모범을 보인 섬김의 원형이다. 이 세상에서 약하고 작고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셔서 그들을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이들 가운데 함께 계신다. 그가 인간들로부터 받으시는 섬김은 바로 이들이 인간들로부터 받는 섬김을 통해서다(마 25:35-45). 우리는 예수를 교회에서도 만나며 또한 사회 속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서도 만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원시공동체와 섬김 부활사건 이후의 원시공동체는 예수의 죽음을 죄인을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서 이해했을 뿐 아니라 공동체 자체 내의 섬김을 통한 교제의 모범으로서 파악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살아 계신 동안의 발자취를 섬기는 자(christos diakonos)로 규정하고 이 땅에서 섬기는 모범을 보이신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뿌리를 둔 섬기는 삶을 목표로 하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도움의 형태로 섬김의 활동에 대한 기초적인 증거는 사도회의에서 결정된 합의에서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부활의 증인들을 통해 바울이 그의 사도적 권위성을 확인 받고 복음을 가지고 나갈 때 가난한 자를 기억할 것에 대한 위임을 받게 된다.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바울의 연보는 하나의 섬김(diakonia)이었다. 이렇듯 가난한 자들과 위기에 빠진 자들을 돕는 섬김은 예배하는 일과 서로 동떨어지지 않는 바, 바울적인 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을 통한 섬김은 예배적인 등급으로 고양된다(롬 15:25-27). 여기서 돌봄으로의 섬김의 의미가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는 데까지 확장된다. 이때의 복음이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섬김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자와의 만남의 표현이다. 기쁜 소식의 역사적인 형태는 다를지라도 부활한 자는 그의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형제의 궁핍함을 돕는 일에 대한 사명을 준다. 그러므로 부활한 자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궁핍과 고통 속에 있는 형제와 자매를 돕고 섬기는 일과 뗄 수 없는 것이다. 부활신앙에 근거하는 교회는 섬기는 교회여야 한다. III.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의 섬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섬기는 실존이요 그 섬김은 교회의 본질이고 교회의 삶의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섬김에 있어서 말씀의 증언과 예전과 성례전과의 관계 속에서 함께 조명되어야 하는데, 이것들은 온전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 각각의 고유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여기로부터 나오는 교회의 섬김은 고유하면서 질적으로 높은 사랑의 섬김을 가능케 하며, 이는 섬김이 인본주의에 의한 기술성과 효율성으로 빠지기 쉬운 위헌성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1. 섬김과 말씀 선포와 예전 교회의 본질로서 섬김의 봉사는 말씀 증언과 예전과 함에 삶의 외형화로 나타나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활동하는 곳으로서 복음의 증언과 함께 사랑의 섬김을 통해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들에게 증언하는 말씀은 섬김을 통해 침묵하는 말씀의 증언이며 개인을 전도하기 위한 목적하에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섬김이 아니다. 말씀 증언과 예전 없는 섬김의 봉사는 세속화된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회복지에 머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섬김은 예전이 집행되는 제단을 그 근거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사회복지에 머무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섬김 없는 말씀 증언은 열매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과 같으며, 하나의 기계적인 예배의식 행위이거나 빈 껍데기의 경건성을 보이기 위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즉. 도상에서 강도를 만나 반쯤 죽은 자의 곁을 비켜 지나친 자비심 없는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그러므로 섬김의 실천이 없는 예전은 진정한 예배를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섬김이 곧 예배에 상응할수 있기 때문이다(롬 15:25-27). 2. 섬김과 성례전 섬김은 세례와 성만찬과 관련하는 성례전 속에서 산다. 성만찬은 신앙인을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함께 받아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 공동체로 만들어준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체들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불가 분리의 지체 공동체다. 지체들 사이에 다양성은 있으나 어떠한 존재론적 차이도 없다(엡 1:2; 2:15f). 존재론적으로 볼 때 몸이란 정치적인 은유로 사회적 존재를 의미한다. 이 때의 사회적 존재라 함은 서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서로의 연대이며 찢겨진 존재들이 하나의 통일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의 몸 성은 성도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섬김의 공동체다. 신앙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통한 서로의 섬김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시킨다. 이는 서로 섬기는 가운데 교회의 질서를 세워가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섬김은 세상 속에서 약자와 병든 자 굶주린 자와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인식하면서 그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를 세상에서 이루어가는 것이다. 나아가 교회의 섬김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사회악의 요소, 구조적인 악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응하여야만 할 것이다. 3. 교회와 사회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와 사회 내지 국가에 대한 관계성은 끊임없이 논란 되어왔다. 교회는 물론 위급한 사안이 항상 새로 발생하는 사회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교회는 원초적으로 사회와 분리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모든 사회적 그룹들의 관심과 돌봄을 위해 개방적으로 존재하는 섬김의 실존을 갖는다. 우리가 적어도 여기서 논할수 있는 것은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이 있으며 사회는 그 자체의 정체성을 가지는 바, 양자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으면서 혼동 되지 않고 서로 비판적인 연대를 할 수 있는 관계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뿐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기독성으로 사회 속에서 함께 일해가는 세상적인 것으로서 비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사회의 구성원의 책임적 자유를 수용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혹자는 이미 지나간 논의로 접어놓은-책임 사회론과 관련하여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다시 한번 짚어야만 할 것이다. 본회퍼(D. Bonhoeffer)는 책임사회는 세상의 질서를 신성화 내지 교회화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에 진정한 세상성으로의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주권성의 의미이며 그 목적이라고 보았다. 이에 상응하여 교회의 섬김의 활동도 교회 내에서의 범위를 넘어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의 섬김의 활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문제들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섬김은 인간의 육체적 위급한 상황을 제거하는 개인구호뿐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섬기는 봉사가 되어야 한다. 이때의 섬김은 단순히 사후 치료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사전 예방적인 것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의 섬김의 양태는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위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도움을 통해 나타나며 이러한 위급한 상황의 사회 구조적인 원인들을 제거하는 데까지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교회의 섬김이 교회 내부의 구조와 직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으로의 원심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섬김은 하나님으로부터 보시기에 좋았던 이 세상에 현존하는 창조물의 충만함을 위협하는 것에 대항하여 신앙인들이 함께 섬김을 통한 실천적인 활동으로 연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섬김을 위해 우리는 위급한 상황 자체, 그의 원인들, 돕는다는 것 등에 대해 인간학적, 사회학적, 생태학적 그리고 신학적인 방법으로 모든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할 것이다. 교회의 사회 섬김을 위해 연대하는 영성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위협하는 창조세계의 사회적, 생태적 위기의 상황을 통찰하는 통찰의 영이고, 탄식하는 피조물의 소리를 듣고 함께 아파하는 공감의 영이며, 이들의 생명구조를 위한 책임적인 활동을 실천하는 사랑의 영이고 이들을 주체로 일으켜세워 사회로 재통합시키는 정의의 영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연대적 섬김의 영성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싹이 나오며 성장하여 무르익는 것이다. 이것은 홀로 한적한 곳에서 명상이나 수련을 통해 얻어 지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 한복판에 서 있는 교회의 온전하지 못한 그리스도의 다양한 지체들이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 속에서 말씀 선포를 통해 동기를 부여받는 영성이며, 이 영성은 선포된 말씀에 대한 침묵의 증언으로서 세상 속에서 개인적, 사회적인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섬김에 의해 성장한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사회 속에서 성장한 이 섬김의 영성은 다시 교회 안에서 말씀으로 반성되고 재구성되면서 성숙해가는 예배와 섬김의 상호 순환적 침투성의 원리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와 섬기는 공동체의 상호 형평성을 유지하는 구조와 내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바로 모이는 것과 보내는 것의 동등한 비중을 갖는 양자의 동시 확보성에 대한 필요성과 당연성이 있다. 섬기는 실존으로서의 교회는 그의 본질적인 섬김과 그의 삶의 양태를 이 세상 속에서 구체화하는 바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는 교회는 이 땅에서 고통, 비방, 박해 속에 있는 이들과 연대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하며 때로는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파괴하는 세상의 악의 권력과 대항함속에서 고통받을 수도 있어야 한다. IV. 나가는 말 참다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한국교회의 새로운 틀은 섬김의 원리에 의한 틀이어야 한다. 이러한 섬김의 원리는 지배하고 으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섬기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섬김의 원리는 우리에게 생명의 충만함과 다양성, 그리고 통일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새로운 삶의 형태를 줄 수 있다. 자기를 비워 스스로 낮아짐에 의한 섬김만이 적자 생존의 경쟁논리에 의한 삶의 수직적 구조를 극복하고 수평적 관계를 이룩하면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찢겨진 현실 속에서 가난한 자들과 사회에서 소외되어 주변부로 쫓겨난 자들을 섬김은 바로 전체 창조물과 생명을 나누는 신의 공동체성인 삼위일체적 경륜 속에 근거하며, 이 섬김은 인격적 주체들의 주고받는 공동체적 섬김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한 틀이 바로 만인 섬김직(Diakonenamt; Diakonentum aller Glaeubigen)이며 한국교회가 다시 짜야 할 틀이다. 이는 섬김 속에서 자기 비움을 통한 화해와 정의로운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오고 있는 미래 사회를 위한 하나의 새로운 사회구조의 틀로서 자리해야 할 것이다. 우리와 한국교회에게 아직도 늦지 않게 남겨진 선택은 이러한 섬김을 통한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