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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도 교회력에 따른 설교 계획
1996년도 교회력에 따른 설교 계획 감리교 목회자 협의회 목회개발 위원회 달 력 교 회 력 성 구 및 설 교 자 료 월 일 교 회 력 강 단 색 본문 및 제목 소 제목 및 관 련 성구 1 7 주현절후 1주 신년주일 백색 행 10:34-43 화평의 복음 예수는 평화를 위해 오셨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자녀 자기 희생의 십자가를 통한 참 평화 14 2주 신학대학주일 녹색 요 1:29-34 세례 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 먼저 계신 분(우월성)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의 아들 21 3주 녹색 고전 1:10-17 온전히 합하라 분쟁의 원인은 교만과 자기자랑에서 예수는 나누이지 않았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을 품자 28 4주 녹색 미가 6:1-8 더 원하시는 것 공의를 실천하기를 원하신다 사랑을 즐겨 행하기를 원하신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기를원하신다 2 4 주현절후 5주 은급주일 녹색 빌 4:10-13 승리의 생활 자족하는 삶 적응하는 삶 능력주시는 분에 대한 믿음 11 6주 녹색 신 30:15-20 생명의 길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하나님을 가깝게 따르라 18 주현절후 7주 백색 고전 3:10-15 지혜로운 건축자 신앙생활이란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든든한 기초(J.X) 위에 터를 닦아야 불타지 않는 반석(말씀) 사용 25 사순절 1주 3·1절기념주일 자색 갈 5:13-15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자유를 육체적 욕망을 위해 남용말라 참 자유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 3 3 2주 자색 요 3:1-8 하늘을 보는 사람 거듭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요3:3) 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마6:33) 보물을 하늘에 쌓는 사람(마6:20) 10 3주 자색 시 33:18-22 여호와를 기뻐하라 인간의 계획과 생각을 살피시는 θ 여호와를 바라라 여호와를 기뻐하라 17 4주 자색 삼상 16:1-13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은 성실한 자를 택하신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택하신다 24 5주 자색 겔 37:1-14 마른 뼈 속에 생명이 θ을 버림으로 마른뼈가 된 이스라엘 θ의 말씀으로 절망은 소망으로 바뀜 생기(J.X)로 온전한 생명으로 부활 31 종려주일 자색 사 50:4-9 주의 종은? θ의 메시지를 들을 귀를 가져야 θ 말씀을 만방에 전할 사명을 가짐 시대 사람들의 비난과 미움 각오해야 1996년도 교회력에 따른 설교 계획 감리교 목회자 협의회 목회개발 위원회 달 력 교 회 력 성 구 및 설 교 자 료 월 일 교 회 력 강 단 색 본문 및 제목 소 제목 및 관 련 성구 4 7 부활절 백색 요20:1-18 누구를 찾느냐 부활은 절망을 극복한다. 부활은 목격을 극복한다. 부활은 침묵을 극복한다. 14 부활절후 1주 백색 벧전 1:3-9 부활의 신앙 부활신앙은 산소망의 근거이다. 부활신앙은 고난을 전제하는 것이다. 부활신앙은 구원의 열매로 이어진다. 21 2주 장애인선교 주일 백색 시편133:1-3 함께하는 삶 형제의 연합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 그 연합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형제의 연합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28 3주 백색 행 2:41-47 사도의 가름침을 받아 부활신앙은 나를 극복하는 삶이다. 나를 극복하는 삶은 영적세계를 확장 한다. 확장된 삶은 공동체를 변화시킨다. 5 5 4주 어린이 주일 백색 막10:13-16 어린아이들을 안고 아이들을 주님께 데려와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부속불이 아니다. 아이들은 축복속에서 자라나야 한다. 12 5주 어버이 주일 백색 엡6:1-4 축복된 가정 가정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복된 가정은 질서가 있다. 복된 가정은 함께 만들어 가는 것. 19 6주 웨슬리회심 기념주일 백색 시1:1-6 복있는 삶 분명한 삶의 선이 있어야 한다. 반드시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종말적 심판에 준비된 것이어야 한다. 26 성령강림절 아시아주일 적색 행2:1-13 새롭게 하는 성령 성령은 생명을 일으키는 강한 바람. 성령은 탐욕을 불사르는 불꽃. 성령은 마땅히 말해야 할 바를 말하게 하는 힘. 6 2 성령강림후 1주 평신도주일 백색 막4:26-34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은밀한 가운데 이룸 하나님 나라는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 하나님 나라는 안식을 제공하는 곳 9 2주 환경선교주일 적색 창1:26-31 하나님의 세계 자연은 모두 하나님의 것. 자연은 모두 아름답게 만들어짐. 자연은 인간의 책임하에 관리될 것. 16 3주 적색 롬5:6-11 사랑의 계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근거한다. 십자가의 사랑은 화목에 이르는 것. 하나님과의 화목은 기쁨의 원천이다. 23 4주 적색 시편48:1-14 거룩한 성(교회) 시온성은 예배(찬양)이 있는 곳. 시온성은 삶의 피난처가 되는 곳. 시온성은 하나님의 정의가 충만한 곳. 30 5주 적색 롬6:3-11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연합은 자기를 죽이는 길이다. 이 연합은 생명 가운데 걷는 길이다. 이 연합은 자기를 살리는 길이다. 1996년도 교회력에 따른 설교 계획 감리교 목회자 협의회 목회개발 위원회 달 력 교 회 력 성 구 및 설 교 자 료 월 일 교 회 력 강 단 색 본문 및 제목 소 제목 및 관 련 성구 7 7 성령강림후 6주 맥추감사주일 적색 살전5:16-18 신앙인의 도리 기쁨은 신자에게 생명력을 준다. 기도는 신자의 영적 양식이다. 감사는 신장의 삶을 풍성케 한다. 14 7주 교역자보건 주일 적색 시132:11-18 주님의 터전 언약과 법도를 지키는 자의 터전 가득함과 넉넉함을 부여하시는 터전 의와 기쁨의 함성이 넘치는 터전 21 8주 적색 롬8:18-25 피조물의 해방 모든 피조물은 구원을 갈망한다. 모든 피조물은 영광된 자유를 희망한다. 참된 해방은 나눔밖에 없다. 28 9주 적색 출3:13-20 영원한 이름 믿음의 조상의 하나님 민중의 처지를 돌아보시는 하나님 민중의 해방자이신 하나님 8 4 10주 적색 롬8:31-39 사랑의 능력 사랑은 요구없이 내어주는 것이다. 사랑은 응답함으로 완성된다. 사랑은 확신에 찬 능력이다. 11 11주 남북평화공동 기도주일 적색 사9:1-7 공평과 정의의 나라 지역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 희망중에 광명과 기쁨이 있는 나라 평화의 왕이신 주님의 나라 18 12주 적색 마15:21-28 자존심을 넘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뜨거운 사랑이다. 사랑은 믿음의 가정에 우선한다. 믿음안에 자존심이 존재할 수 없다. 25 13주 적색 출17:1-7 내인생의 므리바 한계상황에도 믿음은 존재한다. 육체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 극복의 길은 오직 말씀에 순종함이다. 9 1 14주 녹색 마16:21-28 무엇을 생각하랴! 희생없이 생명없다. 아까운 마음속에 믿음도 없다. 실천없이 결과도 없다. 8 15주 교회연합주일 녹색 요15:1-8 열매맺는 신앙 주님의 편에 서는 신앙 주님의 길을 걷는 신앙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 15 16주 기독교교육 진흥주일 녹색 약3:13-18 하늘의 지혜 선한 삶과 온유함으로 드러내자. 순결함과 자비로 드러내자. 진리와 평화의 열매로 드러내자 22 17주 녹색 출32:1-14 하나님의 모습 보여지는 신은 이미 우상이다. 고집과 성급함 속에는 하나님이 없다. 간절한 기도와 확신속에서 발견된다. 29 18주 녹색 빌2:1-13 기독교인의 태도 사랑과 겸손은 믿음의 기초이다. 순종과 희생은 믿음의 가치이다. 영광과 권능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1996년도 교회력에 따른 설교 계획 감리교 목회자 협의회 목회개발 위원회 달 력 교 회 력 성 구 및 설 교 자 료 월 일 교 회 력 강 단 색 본문 및 제목 소 제목 및 관 련 성구 10 6 성령강림후 19주 세계성찬주일 백색 출 24:4-11 그리스도의 피 언약의 피(히10:29,마26:28) 구속의 피(요일1:7,계1:5) 성화의 피(히13:12) 13 20주 녹색 눅 14:7-24 그리스도의 잔치 겸손이 있다(7-11) 구제가 있다(12-14) 열정이 있다(15-24) 20 21주 녹색 살전 1:2-10 바울의 삼위일체신앙 성령 하나님 예수 27 22주 종교개혁주일 녹색 렘 31:31-34 21세기와 개혁 다가오는 영적 도전들 개혁의 참된 방향(33,34,35) 새 시대를 개혁하는 신앙인 11 3 23주 녹색 시 127편 소망을 키우자 하나님이 주신 기업 청소년 하나님이 세우시는 집 영적 부모들이 되자(살전 2:11) 10 24주 녹색 암 5:16-24 하나님의 심판의 색체 밝음인가 어두움인가? 예배보다 중한 공법과 의 찬란한 색체를 칠하자 17 25주 추수감사주일 녹색 신 8:11-18 감사하는 삶 역사속에서 함께하신 하나님을 감사 역사를 이긴 신앙인에 감사 우리의 삶의 모든 내용을 감사 24 26주 백색 살전 3:7-13 바울의 사도적 특징 겸손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권위 그리스도사신에 대한 책임과 열정 조화를 이루는 신앙인이 되자 12 1 대강절 1주 군선교주일 자색 시 122편 성전에 오늘때에 교회와 민족을 위해 평안을 구하라 붕우(朋友)의 평강을 구하라. 복은 나누는 자가 받는다. 8 2주 성서주일 자색 사 11:1-10 만민의 기호 그리스도와 인권 그리스도와 신지식 신앙의 표준,그리스도 15 3주 자색 약 5:7-11 무게있는 신앙 가볍게하는 세상, 무겁게하는 신앙 인내하는 자가 늦은 비를 보았다. 변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약속 22 4주 자색 마 1:18-25 그리스도 탄생의 신비 무로부터 탄생(요 3:8) 어두움속에서 탄생(고후 4:6,요 1:5) 가장 낮은 곳으로 탄생 29 성탄절후 1주 송년주일 백색 엡 1:3-6,15-18 그리스도인의 지표 택함받은 백성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이웃사랑 지식과 은혜안에서의 성장
52주 청소년 설교 프로그램 작성하기
52주 청소년 설교 프로그램 작성하기 1. 청소년설교 이야기(문제제기) 1) 열정없는 _______ 청소년들은 찬송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찬송가를 가르쳐 보기도 한다. 그러나 잘 모르는 것은 배워 부르려고 하 지 않고 부르지 않으려고 한다. 2) 삶과 관계없는 _______ 설교자는 청소년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성경말씀을 통하여 고민과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청소년 예배의 현장에서 선포되는 설교중에 청소년들의 삶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설교는 얼마나 선포되고 있는 것일까? 3) _______의 역사 상실 성령의 역사가 상실된 것은 회개가 없는데 있다. 오늘날 예배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예배를 통하여 예배자들이 죄(罪)를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이것은 바로 우 리의 예배가 성령 안에서 드려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청소년 설교 포인트 1) 말씀에 이 있어야 한다. 과거의 교과서적인 설교 방식을 청소년들을 피곤하게 한다. 형식보다는 내용, 내용보다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준비와 기도가 필요하다. 2) ______ 있어야 한다. 청소년 설교에는 유머와 위트가 있어야 한다. 때로는 유행어도 쓰고 청소년들의 관심 속의 세계 속에서 주위를 끌 수 있는 변칙적인 설교를 한다. 3) 청소년들의 _____과 연결되도록 한다. 청소년 설교는 그야말로 청소년 설교이다. 어른 설교집을 그대로 설교하면 핀트가 안 맞는다. 청소년들의 삶에 연결되는 설교를 하도록 하자. 4) 비젼을 주고 _____적인 설교를 하자. 청소년 설교의 특징을 미래에 대한 비젼을 주는 일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청소년들에게 꿈과 소망을 심어 주고 용기를 주는 설교가 좋다. 5) _____하게 설교하라. 설교는 칼이다. 심령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힘이 없이 설교하지 말고 목숨을 걸고 힘있게 설교하라. 3. 청소년 설교 제목 살펴보기 1) A교회 1.하나님께 칭찬듣는 신앙 생활을 합시다(마25:14-30) 2.믿음을 가진 사람이 됩시다(민14:4-12) 3.일꾼을 부르시는 하나님(마20:1-16) 4.인정 받는 믿음이 됩시다(암5:21-27) 5.성도의 삶의 징계(살후3:13-15) 6.성도의 사회 생활(레19:11-18) 7.주님의 제자가 되려면(눅14:25-35) 8.엘리에셀의 기도를 본 받읍시다(창24:10-14) 9.모세의 신앙을 본 받읍시다(민14:11-19) 10.고난 중의 처세 비결(삼하15:30-37) 11.계명을 지키는 자의 복(레26:3-13) 12.자랑하지 맙시다(렘9:23-26) 13.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사역(마9:35-38) 14.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엡6:18-20) 15.예물을 바치는 바른 자세(출35:20-29) 16.참된 회개란 무엇인가?(신30:1-2) 17.집에서 잃어버린 아들(눅15:25-32) 18.박넝쿨로 깨우친 하나님의 사랑(욘4:1-11) 19.네 부모를 공경하라(엡6:1-3) 20.예수님께서 보이신 사역(막1:35-39) 21.다니엘의 믿음(단2:14-18) 22.도대체 진리가 무엇입니까?(요8:3-11) 23.어리석은 부자(눅12:13-21) 24.주기도문(마6:9-13) 25.빌라도가 실패한 이유(마27:15-26) 26.하나님의 인자하심(시86:1-5) 27.복음 전도자의 수칙(마10:5-10) 28.이상적인 교회의 모습(행2:43-47) 29.아담의 죄(롬5:12-14) 30.죄사함을 받기 위한 성도의 자세(레5:1-6) 31.애굽왕 바로의 행위를 보십시다(출5:1-9) 32.부동산에 대한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레25:23-28) 33.하나님의 목장(시23:1-6) 34.전도자의 올바른 처세 비결(마10:16-20) 35.행동하는 믿음을 가집시다(약2:14-26) 36.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이유(신31:9-13) 37.고난 중의 처세 비결(시73:1-14) 38.사랑의 은사(고전13:1-3) 39.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고전12:12-31) 40.절기를 지키는 자들의 태도(신16:1-17) 41.신앙의 사람 느헤미야(느2:1-10) 42.다윗의 인격을 살펴 봅시다(삼하16:5-14) 43.하나님의 말씀의 능력(히4:12-13) 44.광야생활로 얻은 유익(신8:2-4) 45.많은 사람의 생명을 건진 문둥이들(왕하7:3-10) 46.하만을 통해 배우는 교훈(에5:9-14) 47.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자세(신4:1-10) 48.인간의 문제와 해답(왕하5:1-8) 49.경건한 삶을 산 아사 왕(대하15:16-19) <부활절 설교> 50.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고전15:3-19) <추수 감사절 설교> 51.하나님께 감사합시다(시136:23-26) <성탄절 설교> 52.그리스도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눅2:1-14) 2) B교회 1. 금메달은 아무나 따나 2. 갓 퍼스트 3. 당신의 마지막 선택은? 4. 너의 운명을 바꿔라 5. 기도로 인생을 바꿔라 6.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7.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살아라 8. 자랑할 걸 자랑하자 9. 도미노의 법칙 10. 면류관의 주인공 11. 하나님이 쓰시기에 편한 사람 12. 선명한 목표를 가진 사람 13. 열 명 중의 한 사람 14. 용기를 주는 사람 15. 인생 대역전 16. 감사할 수 없을 때도 감사 17. 카에르피디엠 18. 떠날 때와 돌아올 때 19. 돌아보시고, 생각하시고,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20. 믿으면 장땡이다 21. 살아 있는 믿음 22. 세상을 이기는 믿음 23. 예비자의 사명 24. 용서 25. 은혜가 적용되는 나라 26. 지도자도 지도자 나름이지 27. 작은 자의 법칙 28. 내 마음이 상할 때 29. 내게 주신 자유 30. 하나님의 결단식 31. very good, not good 32. 악조건이 기회다 33. 아브라함 - 이왕 믿을 거면 확실하게 믿어라 34. 이삭 -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려라 35. 야곱 - 축복 쟁탈전 36. 요셉 -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37. 흔적 38. 제사 지낼까요? 39. 뼈 있는 잔소리 40. 수능의 벽을 넘어 41. 노블레스 오블리제 3) C교회 1. 특급비상 1 ─── 그리스도를 향하여 2 ─── 우리가 자랑하는 것 3 ─── 예수님의 기도 4 ─── 감추인 보화 5 ─── 하나님과의 만남 6 ─── 특급비상입니다 7 ───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8 ─── 그리스도의 마음 9 ─── 하나님의 자녀 10 ─── 은혜로 받은 구원 11 ───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2. 성령충만 12 ─── 누구를 위한 기쁨인가 13 ─── 성령충만 14 ─── 기독학생의 증거를 대라 15 ─── 인생의 두 가지 16 ─── 토기장이와 질그릇 17 ─── 예수의증인 18 ───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19 ─── 가장 큰 믿음 20 ─── 배반한 베드로 3. 인생을 검토하라 21 ─── 시험을 이기려면 22 ─── 하나님과 멀어져 간 사람 23 ─── 인생을 검토하라 24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 25 ─── 네 속에 있는 것 26 ─── 주님이 가장 원하는 일 27 ─── 기도할 마음이 생겼어요 28 ─── 미래 일을 염려하지 말라 29 ─── 치료자 30 ─── 누구를 위한 삶인가? 4. 나를 쓰소서(절기와 특별예배) 31 ─── 내가 어떻게 하랴(사순절) 32 ─── 예수님의 죽음(수난주간) 33 ─── 부활절을 향해 뛰어랴(부활절) 34 ─── 성장하는 청소년(청소년주일) 35 ─── 기독교인의 효(어버이주일) 36 ─── 회개의 운동(국가기념주일) 37 ── 너희 자신을 점검하라(수련회를 앞두고) 38 ── 믿음으로 된 의인(종교개혁주일) 39 ─ 아홉은 어디 있느냐?(추수감사주일) 40 ─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성가대 헌신예배) 41 ─── 나를 쓰소서(임원선거) 4. 52주 청소년 설교 프로그램 작성하기 예배 설 교 예배 설 교 1 1주 신년 새출발을 잘해야 한다.(고후5:17) 2 1주 최고가 되는 길이 있다. 2주 미래를 바라보고 출발하라(창 12:1-3) 2주 설날 조상의 가르침이 있다. 3주 거부될 준비를 하라. (창세기 26:12-13) 3주 도전이 아름답다. (수 6:3) 4주 기도로 인생을 바꾸라. (창 36: 4주 너의 운명을 바꾸라 (민14:28) 5주 무슨일을 만나든지 잘되어 보라.(창 37:1-9) 예배 설 교 예배 설 교 3 1주 3.1절 오늘 흘린 땀은 내일 흘릴 눈물이다.(시126:5-6) 4 1주 부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다.(고전 15:57-58) 2주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다니엘 1: 8) 2주 꼭 1등을 해야 하나요? 3주 사명이 있으면 꿈이 생긴다. 3주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가요? 4주 고난 고난없이 영광없다. (롬 8:18) 4주 외모에 걱정이 있어요. 예배 설 교 예배 설 교 5 1주 어린이 부모님과 말이 안 통해요. 6 1주 술을 먹으면 안돼요. 2주 어버이 부모님과 말 좀 해요. 2주 담배가 무엇이 해로운가요? 3주 성격을 고치고 싶다. 3주 이성교제를 하고 싶어요 4주 웨슬리 성령을 알고 싶다. 4주 성에 대해 알고 싶어요 5주 자원봉사는 어떻게 예배 설 교 예배 설 교 7 1주 맥추 온몸으로 감사하고 싶어요. 8 1주 게임에 중독되었어요. 2주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2주 절대 포기하지 말자. 3주 남모르는 고민이 있어요. 3주 광복 빛이 어두움을 이긴다. 4주 가슴이 답답할때가 있어요. 4주 중간 평가하지말라 5주 난 연애인이 좋아요 5주 예배 설 교 예배 설 교 9 1주 자살이 왜 죄인가요? 10 1주 집나가고 싶다. 2주 학교 폭력 무서워요. 2주 관심을 받고 싶다. 3주 추석 가족이 있어 좋다. 3주 두려움을 이기고 싶다. 4주 왕따 정말 무서워요. 4주 담대함을 갖고 싶다. 5주 공부해서 남주자. 예배 설 교 예배 설 교 11 1주 꼭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요? 12 1주 예수가 왜 사람으로 오셨냐 2주 이단이 무엇인가요? 2주 예수가 왜 희망인가? 3주 추수 배나 감사하자. 3주 성탄 예수가 왜 좋은가? 4주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4주 끝이 좋아야 한다. 현재 준비된 설교 1. 꼭 1등을 해야 하나요?(성적) 2. 이성교제를 하고 싶어요.(이성교제) 3. 남모르는 고민이 있어요.(고민) 4. 부모님과 말이 안 통해요.(부모님과 갈등) 5.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가요?(친구관계) 6. 공부해서 남주자(공부) 7. 학교 폭력이 무서워요(폭력) 8. 담배가 무엇이 해로운가요?(담배) 9.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요.(장래) 10. 자살이 왜 죄인가요?(자살) 11. 왕따 정말 무서워요(왕따) 12. 5. 청소년 설교의 도전하기 1)___________을 주는 설교하라. 인간의 삶은 절망이다. 잘되는 것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 __________적인 사람을 쓰신다. <청소년들이여! ________를 가져라!> 2) ____________에 연구하라. 서론이 중요하다. 감동의 이야기, 유머의 이야기 본론 잘 전개하라. 3) ___________잘 묶어 주어야 한다. 전율을 느끼게 한다. 한달 설교를 미리 준비하자. 3-4편 설교 준비, 영감받고 위대한 설교 준비하며 ______먹는 사람이 되자.
The Top 25 Most Influential Preachers(최고 25명의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자들)
The Top 25 Most Influential Preachers The top 10, plus 15 honorable mentions, selected by the staff of PreachingToday.com In celebration of its 50th anniversary, Christianity Today International has selected the "25 Most Influential Preachers of the Past 50 Years." This list recognizes and honors the most-influential preachers of the period from 1956 to 2006. The chief criteria in choosing the preachers were the following: evangelical theology; outstanding preaching skills; great influence, particularly through preaching. Thus, the list does not attempt to name the best preachers or the best-known preachers, but the most-influential preachers—evangelical preachers who have significantly affected many others through their preaching. The names were nominated by respected specialists in preaching. That list was then reviewed and refined by Craig Brian Larson, editor of PreachingToday.com and Preaching Today Audio Series. He is, with Haddon Robinson, general editor of The Art & Craft of Biblical Preaching (Zondervan, 2005). The names are listed in alphabetical order. W.A. Criswell (1909-2002) served as senior pastor of First Baptist Church, Dallas, Texas, for 50 years, and preached more than 4,000 sermons from its pulpit. He received his B.A. from Baylor University, and his Th.M. and Ph.D. from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He was awarded eight honorary doctoral degrees. Dr. Criswell published 54 books, was twice elected president of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 and was the founder and chancellor of the Criswell College. Click here to listen to a workshop on the benefits of preaching or to read an article on Criswell's ministry, a sermon on suffering, or an illustration on religious liberty. Tony Evans is founder and senior pastor of Oak Cliff Bible Fellowship in Dallas, Texas. He received his B.A. from Carver Bible College in 1972, and his Th.M. and Th.D. from Dallas Theological Seminary in 1976 and 1982. He was the first African-American to graduate with a doctoral degree from Dallas Theological Seminary. Dr. Evans has written nearly 30 books. He helped organize and served as vice president of Urban Evangelical Mission. He serves as chaplain for the Dallas Mavericks. He is founder and president of The Urban Alternative, a national organization that seeks to bring about spiritual renewal in urban America through the church. The Urban Alternative radio broadcast, The Alternative with Dr. Tony Evans, can be heard on over 500 stations daily throughout the U.S. and in over 40 countries worldwide. Click here to listen to a sermon on God's Christmas Grace (outline), to read an article on Dr. Evans and his son, or to read an illustration on the Holy Spirit. Billy Graham is founder, evangelist, and chairman of the board of the 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 A graduate from Florida Bible Institute (now Trinity College) and Wheaton College, Rev. Graham has received numerous awards, including 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and the congressional gold medal. Since 1955, he has been listed 47 times as one of the Ten Most Admired Men in the World in the Gallup Poll, more than any other individual in the world. Rev. Graham has written 24 books, including Just As I Am; How to Be Born Again; Angels: God's Secret Agents; and The Jesus Generation. He and his wife, Ruth, have three daughters, two sons, nineteen grandchildren, and numerous great grandchildren. The Grahams make their home in the mountains of North Carolina. Click here to read an extended biography of Dr. Graham, articles on his leadership and impact with youth (part 1, part 2), or to view a sample of his sermon illustrations. Jack W. Hayford serves as president of the International Foursquare Churches and as chancellor of The King's College and Seminary. Dr. Hayford is perhaps best known, however, as the founding pastor of The Church On The Way, the First Foursquare Church of Van Nuys, California, a pastorate that began as a "temporary" assignment to shepherd 18 people in 1969 and continued fruitfully for more than three decades as the congregation grew to more than 10,000 members. Dr. Hayford is the author of over 50 books and has composed over 500 songs, including the world-renowned "Majesty."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s on Communion (outline) and How Preaching and Leading Intersect, to read an article on his ministry, or to view his illustrations. Bill Hybels is the founding and senior pastor of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 in South Barrington, Illinois. He received a bachelor's degree in biblical studies and an honorary doctorate of divinity from Trinity College in Deerfield, Illinois. He has authored 17 books, including Too Busy Not to Pray, Becoming a Contagious Christian, Courageous Leadership, and The Volunteer Revolution. Rev. Hybels serves as chairman of the Willow Creek Association, a fellowship of over 10,500 like-minded churches worldwide. He and his wife, Lynne, are the parents of two grown children.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s on prayer and God's impartiality, to read his sermons on suffering and Christianity 101, or to view a sample of his illustrations. John MacArthur has been the pastor-teacher of Grace Community Church in Sun Valley, California, since 1969. He graduated from Talbot Theological Seminary in 1964. Rev. MacArthur is president of The Master's College, and founder and president of The Master's Seminary. He is also president and featured teacher for Grace to You radio ministry. Rev. MacArthur has written more than 12 dozen books, including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He and his wife, Patricia, live in Southern California and have four grown children and thirteen grandchildren.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s on confronting sin and reconciliation, to read his interview with Leadership Journal, or to read his article on infant salvation. Haddon Robinson is the Harold John Ockenga Distinguished Professor of Preaching at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and senior director of the doctor of ministry program. He received a Th.M. from Dallas Theological Seminary, a M.A. from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and a Ph.D. from the University of Illinois. Rev. Robinson also served as president of Denver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 for 12 years, and taught homiletics on the faculty of Dallas Theological Seminary for 19 years. He has authored seven books, including Biblical Preaching, has written and edited for several magazines, and writes regularly for Our Daily Bread, a devotional that goes to seven million people each month. Dr. Robinson and his wife, Bonnie, reside in South Hamilton, Massachusetts, and Willow Street, Pennsylvania. Click here to listen to his workshop on using illustrations (part 1, part 2), to read his sermons on humility and Ecclesiastes, or to read his article on death. John Stott is president of Lanham Partnership International and its U.S. movement, John Stott Ministries. He attended Trinity College, Cambridge, where he studied modern languages and theology and was elected a senior scholar. He received his doctorate in divinity from Lambeth and an honorary doctorate in divinity from Brunel University. Stott was ordained in 1945 and then served All Souls Church, Langham Place, London, as assistant curate (1945-50), as rector (1950-75), and as rector emeritus since 1975. He conducted missions in universities in Britain, North America, Australia, New Zealand, Africa, and Asia for 25 years. He was director and then president of the London Institute for Contemporary Christianity. Rev. Stott has been a central figure in the resurgence of evangelicalism in the Church of England since the Second World War. He has written 49 books, including Basic Christianity, The Cross of Christ, and The Contemporary Christian. For over 30 years he was a chaplain to the Queen.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 on being Salt and Light (outline), to read articles on his global ministry and basic beliefs, and to view a sample of his sermon illustrations. Charles (Chuck) Swindoll is pastor of Stonebriar Community Church, in Frisco, Texas. After being honorably discharged from the Marine Corps, Chuck attended Dallas Theological Seminary. He graduated, returned as the seminary's fourth president from 1994-2001, and is currently its chancellor. Rev. Swindoll has authored over 65 books and has been recognized by the Evangelical Press Association for his lifetime achievement in effective writing. He also serves as Bible teacher and chairman of the board for Insight for Living. Chuck has been married to Cynthia since 1955; they have four adult children and ten grandchildren.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s on faith and gratitude (outline), to read his article on simplicity, and to view a sample of his sermon illustrations. Rick Warren is pastor of Saddleback Church, Lake Forest, California. Warren holds a B.A. from California Baptist College, an M.Div. from 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in Fort Worth, Texas, and a D.Min. from Fuller Theological Seminary in Pasadena, California. He is author of The Purpose Driven Church and The Purpose Driven Life, which topped the New York Times Bestseller List for nonfiction for over 141 weeks. He also leads Purpose Driven Church seminars. Warren is currently working in Rwanda to harness businesspeople, politicians, and pastors against the nation's biggest social problems. Warren and his wife, Kay, live in Orange County, California, with their three children. Click here to listen to his workshop on communicating to change lives (part 1, part 2), to read an article on his everyman status, and to see a sample of his illustrations. Honorable Mentions E.K. Bailey (1946-2003) was founder and senior pastor of the Concord Missionary Baptist Church in Dallas, Texas. He received his B.A. in Religion from Bishop College in 1969 and graduated from United Theological Seminary in 1991. Throughout his ministry, he was awarded with honorary doctorates from Dallas Baptist University and the Criswell College. Dr. Bailey served as board chairman for the World Christian Training Center, vice president of H.I.S. Bridge Builders in Dallas, Texas, and was the founder and president of E.K. Bailey Ministries, Inc. He wrote Confessions of an Ex-Crossmaker and was coauthor of Preaching in Black and White.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s on transformation and God's love, or to read an article about ending your sermons. Donald Barnhouse (1895-1960) graduated from Biola University and studied at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the University of Grenoble, in France, the University of Chicago, and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For 33 years, he served as the senior pastor of the historic Tenth Presbyterian Church in Philadelphia, Pennsylvania. One of the pioneers of radio preaching, Barnhouse began a radio program called The Bible Study Hour in 1928, which continues to air today as Dr. Barnhouse and the Bible. Known for his colorful illustrations of living the Christian life, he authored more than a dozen books, including Teaching the Word of Truth and Let Me Illustrate.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 on God's sovereignty, or read his devotional thoughts on Choosing Sides and Psalm 23. James Boice (1938-2000) received an A.B. from Harvard University, a B.D. from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and a D.Theol. from the University of Basel, Switzerland. For over 30 years, he served as senior minister of Tenth Presbyterian Church in Philadelphia, Pennsylvania, and delivered a continuation of Donald Barnhouse's radio program, The Bible Study Hour. Dr. Boice was also chairma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Biblical Inerrancy and served as president of Evangelical Ministries, Inc. He authored a collection of hymns and published over 50 books, including The Parables of Jesus and a 4-volume commentary on Romans.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 on death (outline) or his workshop called Preaching with Authority. Jill Briscoe and her husband, Stuart, currently serve as ministers-at-large of Elmbrook Church in Brookfield, Wisconsin. Jill has an active speaking and writing ministry that has taken her to many countries, and she is currently a board member of World Relief and Christianity Today, Intl. She is also the executive editor of Just Between Us, a magazine of encouragement for ministry wives and other women in leadership. Along with her husband and son, Peter, she operates a daily radio broadcast through Telling the Truth media ministries. Jill has written over 40 books, including study guides, devotional material, poetry, and children's books. Click here to listen to her sermons on loving God (outline) and biblical submission, or to view a sample of Jill's sermon illustrations. Tony Campolo is professor emeritus of Sociology at Eastern University, and associate pastor of Mt. Carmel Baptist Church in Philadelphia. He is a graduate of Eastern College, and earned a Ph.D. from Temple University. As founder and president of the Evangelical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Education, Dr. Campolo has worked to create, nurture, and support programs for at-risk children in cities across North America. He has appeared on Nightline, Crossfire, and Larry King Live, and currently hosts a radio program in England called From Across the Pond. He has written 32 books, including Speaking My Mind and Which Jesus. He and his wife, Peggy, have two grown children and four grandchildren.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s on The Year of Jubilee (outline) and becoming childlike (outline), to read an article called Campolo and Clinton, or to view a sample of Tony's sermon illustrations. Charles Colson is founder and chairman of Prison Fellowship, the world's largest outreach to prisoners and their families. He graduated from Brown University in 1953 and received his J.D. from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His autobiography, Born Again, chronicles his time as special counsel to President Richard Nixon, in addition to his subsequent conversion, incarceration, and promise to remember those he left behind in prison. Colson received the distinguished Templeton Prize for Progress in Religion and the Others Award from the Salvation Army. He has written over 30 books and is the commentator for BreakPoint, a nationally syndicated radio program. Click here to listen to The Gravy Train Gospel (outline), to read his articles on bioethics and Machiavellian morality, and to view a sample of his illustrations. Anne Graham-Lotz is the founder of AnGeL Ministries, a non-profit corporation dedicated to biblical exposition through speaking engagements, tapes, and books. She has received honorary doctorates from Kings College, Houghton College, and Ea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and currently serves on the board of the 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 and Gordon Conwell Theological Seminary. Anne has passionately proclaimed God's word around the world for over 29 years, and launched the Just Give Me Jesus revival ministry in 2000. She has won three Gold Medallion Awards for her writing, and recently published My Jesus Is … Everything. Click here to listen to an interview with Anne on Preaching for Revival (transcript), to read about her emergence into ministry, or to read her Faith Matters column. Martyn Lloyd-Jones (1899-1981) served as senior minister of Westminster Chapel, London, from 1943-1968. Trained in medicine at the distinguished St. Bartholomew's Hospital, Llyod-Jones achieved membership in the Royal College of Physicians-at the age of 26-before obeying God's call to pastor the Foreward Movement Church in Aberavon, England. "The Doctor," as he was called, helped lead the Evangelical movement through World War II, and served as president of the Inter Varsity Fellowship. His writings have been compiled into more than 20 books, including The Kingdom of God and Authentic Christianity. Click here to read articles on his wartime leadership and being content, and to view a sample of his sermon illustrations. James Earl Massey received his D.Div. from Asbury Theological Seminary in 1972 and holds seven honorary degrees from institutions like Ashland Theological Seminary and Huntington College. He is founder and pastor emeritus of the Metropolitan Church of God in Detroit, Michigan, and served as an international radio speaker for the Church of God's weekly program, Christian Brotherhood Hour. Dr. Massey is also dean emeritus and distinguished professor-at-large of the Anderson School of Theology. As an international speaker, he has been an avid spokesperson for reconciliation and Christian unity, and has written over 25 books.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 on the centrality of Christ (outline), his article on Dr. Martin Luther King, Jr., and to read his illustration on forgiveness. Harold John Ockenga (1905-1985) was a graduate of Taylor University and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and earned his Ph.D. from the University of Pittsburgh in 1939. He was the senior pastor of Park Street Church in Boston, Massachusetts, for over 30 years, and for over 50 years he was one of the most trusted voices in Evangelicalism. During that time, he served as founder and president of 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for United Action; president, co-founder, and board chairman of Fuller Theological Seminary; and founding president of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He also wrote 15 books, including Our Evangelical Faith. Click here for a more detailed description of the man, for an article on his place in Evangelical history, and a look at Our Evangelical Faith. Luis Palau has preached a message of hope and inspiration to an estimated 20 million people in 70 countries. He completed his graduate degree at Multnomah School of the Bible in 1961, and has received four honorary doctorates from institutions including Wheaton College Graduate School and Talbot Theological Seminary. Palau has served as president of OC International and is founder of the Luis Palau Association. His radio programs are broadcast on over 2,100 stations, and he has written nearly 50 books, including High Definition Life. Palau currently lives in Portland, Oregon, with his wife, Pat, and has four sons and ten grandchildren. Click here to listen to a sermon on missions (outline), to read his article on evangelism, and to view a sample of his sermon illustrations. John Piper has been the senior pastor of Bethlehem Baptist Church in Minneapolis, Minnesota, since 1980. He earned degrees from Wheaton College and Fuller Theological Seminary before completing his doctoral work in New Testament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Munich, West Germany. Piper served as associate professor of Biblical Studies at Bethel College before receiving the call to preach, and he can be heard daily on his radio broadcast, Desiring God. He has written over 30 books, including The Pleasures of God and Sex and the Supremacy of Christ. John and his wife, Noël, have five children and an increasing number of grandchildren.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s on God's Self-glorification (outline) and sacrificial service, to read his sermon on persecution, and to view a sample of his illustrations. Chuck Smith has served as the senior pastor for Calvary Chapel of Costa Mesa since 1965. He is the founder of the Calvary Church movement, a fellowship of approximately 1,200 churches across the country, and can be heard daily on his radio broadcast, The Word for Today. Over the years, his visionary leadership has helped a variety of ministries come into existence, including Maranatha Music, Hope for the Children International, and Calvary Chapel Bible College. He is the author of Effective Prayer Life and The Word for Today Bible. Chuck and his wife, Kay, have four children. Click here to read his articles on nurturing youth and Calvary Chapel, and an article on the Jesus Movement. Charles Stanley has been the senior pastor of First Baptist Church Atlanta since 1971. He graduated from Southwest Theological Seminary before earning his masters and doctorate of Theology from Luther Rice Seminary in Atlanta, Georgia. A leader in broadcast ministry, Dr. Stanley founded InTouch Ministries in 1982, and was inducted into the National Religious Broadcaster's Hall of Fame in 1988. Today, his InTouch program is broadcast around the world through radio and TV. He served two terms as president of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 and has written over 45 books, including The Blessing of Brokenness and When Tragedy Strikes. Click here to read his biographical sketch, advice on fighting evil, and his illustration on the relationship between grace and peace. Gardner Taylor served as the senior pastor of Concord Baptist Church of Christ in Harlem, New York, for 42 years. He graduated from the Oberlin Graduate School of Theology in 1940, and worked alongside Dr. Martin Luther King, Jr. during the Civil Rights movement. He is founder of the Progressive National Baptist Convention, and has taught at several influential divinity schools, including Harvard and Yale. In 1980, Time magazine called him "the dean of the nation's black preachers," and he was awarded the Medal of Freedom—the U.S. government's highest civilian award-in 2000. Click here to listen to his sermons on Jesus' humiliation and Psalm 23 (outline), to read his article on the inner-city pastor, and to view his illustration on renewal.
‘복음적 설교’를 위한 코칭 전문가의 해법/ 한국코칭학회 선종욱 부회장의 신간/ 2011-01-18
‘복음적 설교’를 위한 코칭 전문가의 해법/ 한국코칭학회 선종욱 부회장의 신간 한국코칭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코칭 전문가 선종욱 박사가 10여년간 ‘복음적 설교’ 방법에 대한 전수 경험을 담아 <복음적 설교를 위한 코칭(소망)>을 출간했다. 저자는 코칭 전문가답게 복음적 설교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복음의 문자적 의미는 ‘좋은 소식(Good News)’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은 죽을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소식이다. 기독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예수님을 만난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하신 모든 일과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모든 일을, ‘복음적 사고’는 현재 나의 소원이나 기쁨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원하지 않고 괴로움을 주는 일도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라 믿는 것이다. 복음적 설교에서 ‘복음적’이 뜻하는 바에 대해서는 복음의 내용만을 많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 원리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는 것이며, ‘전문성’을 넘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전인성’을 갖춰야 한다. 또 결과를 기대하는 조건제시가 아닌, 이미 얻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전제되고, 학습이나 성경공부가 아닌 ‘은혜’를 제시해야 한다. 결국 복음적 설교는 이런 부분들이 나타나는 설교다. 자, 그렇다면 이제 복음적 설교를 작성해 보자. 아무리 복음을 잘 안다 해도 표현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고,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정리된 원고는 설교를 산만하게 만들지 않고, 설교 전달에 있어 방향이 바르게 설정돼 있다. 먼저 설교의 초점과 핵심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한 명제인 ‘논지’가 있어야 한다. 명제는 복잡하지 않은 단문이어야 하고, 주어는 삼위일체 하나님, 대상과 객체는 사람과 자연으로 서술해야 한다. 주제는 설교의 핵심 내용으로, 복음적 설교라면 자신이 정하기보다 귀납법적으로 본문에서 찾아내야 한다. 일반적으로 주제는 한 단어로 압축되지만, 원고 작성 때는 약 3줄 정도 길이의 약 30초간 짧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리해도 된다. 주제는 명제를 논증하기 위한 논거가 된다. 이후에는 본론의 소주제에 해당하는 대지와 소지로 얼개를 완성할 수 있다. 설교의 제목 정하기도 설교자들의 오랜 ‘숙제’ 중 하나다. 저자는 복음적 설교의 제목 정하기에 대해 “평범하게 하려니 진부한 느낌을 주면서 호기심을 경감시키고, 파격적으로 잡으려니 복음에서 벗어난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며 “이럴 때는 명제와 논지, 주제 등을 다 잡은 뒤에 제목을 정하는 방법을 권한다”고 조언했다. 설교문 작성시 주의사항은 △주어와 서술어의 사용 △간결한 표현 △‘-것이다’ 남발 주의, 문장 종결은 서술어로 △단락마다 결론 제시 등이다. 저자는 이외에도 설교 전달, 설교자의 이미지, 복음적 설교의 성격과 유형, 설교자의 고민 등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풍부하게 정리했다.
강해및 설교자료/빌 하이벨스
강해및 설교자료 -------------------------------------------------------------------------------- 1. 설교를 흥미로 채우는 법 2. 21세기를 대비한 설교문화 3. 인터넷 설교에 대한 비평적 고찰 4. 효과적인 설교를 위한 제언 5.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12가지 원리 6. 제자훈련과 설교, 어떻게 준비할 것이가? 7. 귀납법적 성경연구 방법론 1) 강화체본문과 구문분석 2) 주문장 3) 문장분석순서 8. 강해설교를 위한 구문분석 1) 요나서1:1-3 2) 욥기 1장 3) 빌 1:1-8   설교를 흥미로 채우는 법 - 빌하이벨스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불행을 느끼고 있다. 가정이 이상적이지 못할 수 도 있다. 또는 경제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수도 있다 과중한 일에 억눌려 있을 수도 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메뉴에 대한 식욕을 억누른다. 설교자로서 내가 할 일은 복음의 향기로 근심 걱정으로 여윈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설교할 때 끊임없이, '사람들이 내게 기울이는 미약한 주의를 어떻 게 유지하고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주의를 오래 끌지 못한다. 주일에 교회 휴게실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듣고 있다 보면, 나는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빨리 거룩한 예배로부터 미식축구나 야구 또는 돈 벌이와 정치 문제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 가는가를 보고 놀라게 된다. 따라서 나의 한 주동안의 주요한 책임 중 한가지는 설교를 가지고 그들의 주의를 끄 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적절성을 알아 보기 위해서 내 설교 자료로 하여금 "그래서요?" 테스 트("So what?" test for relevance)를 거치게 한다. 성경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성 경은 적절하다. 그러나 나는 설교를 성경만큼 적절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람들이 떠나면서, "그래서요?"가 아니라 "알았습 니다"라고 말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하는 방법이 지성과 감정과 의지 에 설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성에 설교하라 신학은 지성에 도전한다. 나는 많지 않은 사람들만이 신학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아마도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 그들이 자기들의 삶의 배후에 있는 세계관-삶의 철학-을 살펴보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설교할 때 그들로 하여금 계속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자 한다. 나는 나의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의 이해를 넓혀 주고자 애쓴다. 나는 사도신경 시 리즈 설교를 하는 중에, "천지를 만드신"이라는 문구에 대해 설교했을 때 그렇게 했 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주를, 경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법칙에 따라 작 용하는 폐쇄 체계(a closed system)로 본다. 그렇다면 "천지를 지으신"이라는 표현이 어디에 맞는다는 말인가? 유물론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이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 기 때문에, 나는 폐쇄 체계에 대한 대안을 조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발견 했다. 나는 자연 과학과 이론 물리학을 건전한 신학과 연결시킨 좋은 설교를 가지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었다. 사람들의 지성에 접근하는 것은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성을 사로잡으려고 애썼다 나는 그들의 생각과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 그들이 복음 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씨름했다. 의지에 설교하라 의지에 설교할 때,나는 반응을 기대한다. 나는 사람들이 설교된 바에 기초해 행동 하기를 원한다 목사인 나는 부흥회 설교자보다 더 점잖고, 덜 요구적이 되기가 쉽다. 여러 해 동안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에 모든 것을 얻거나 잃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대개 어떤 굉장히 큰 조치보다는 방향이 올바른 작 은 운동을 기대한다.사람들의 의지란 자연히 움직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작더라 도 방향이 올바른 운동을 격려하는 말씀과 예화를 선택하려 애쓴다. 나는 의도적으 로 격려한다는 말을 사용한다. 대개 사람들은 "도전"보다는 격려에 더 잘 반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야단치는 것 보다는 자극과 격려를 필요하다. 따라서 나는 사람들에게 감당할 만한 말씀을 제공하려고 애쓴다. 의지는 교활한 피조물이다. 의지는 때로는 격려를, 때로는 도전을 받을 필요가 있 다. 의지에 설교하는 데 있어서의 비결은 어떤 종류의 자극이 여러분의 설교 대상들 에게 가장 빠른 효과를 나타내느냐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감정에 설교하라 얼마 전에, 나는 거부 당하신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하고 있었다. 그렇게 친숙한 주 제는 설교를 듣는 사람을 졸게 만들기 쉬운 주제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흥미를 추가할 수 있었을까? 감정이다. 나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전후(戰後)에 겪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나는 처칠의 팬이다. 그래서 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그의 엄청난 영향력을 회상 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딱딱 소리를 내는 라디오에서 그의 유명한 연설에 귀를 기 울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해변에서 그들과 싸울 것입니다...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 을 것입니다!" 폭탄이 떨어지고, 대공화포 소리가 들리고, 밤하늘을 가로 질러 비취 는 서취라이트의 섬광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불독 같은 결단은 우리가 그 끔찍스러 운 시기를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처칠은 전쟁 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선거가 실시되 었을 때, 놀랍게도 처칠은 낙선했다. 처칠이 행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람 들은 그를 수상으로 선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아주 조 용한 목소리로, "그는 거부당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동안, 그들은 거부가 의미 하는 바를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감정을 끌었다. 처칠이 거부된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언짢게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서부터 그들의 감정을 예수 그 리스도께서 거부당하신 사실로 옮기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혹자는 우리가 지성을 희생하여 감정에 호소할 수도 있다고 정당한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로서는 사람들의 감정을 교묘히 이용하기보다는 그 감정을 잊어버리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순전히 지적인 문제는 지나치게 무미건조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생명을 더해 준다. 감정은 사람 들을 반응으로 인도한다. 사람들은 감정과 일체가 된다. 유머는 감정을 유도하기 때문에 내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유머 는 놀라운 종이나 무서운 폭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필립 브룩스의 설교에 대 한 정의 -설교는 인격을 통해 전달되는 진리이다 -가 옳다면, 나는 유머를 통해서 진리를 전달해야 마땅하다. 내가 유머를 즐기기 때문이다. 유머는 또한 설교 중에 정신적인 휴식을 제공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따금씩 휴 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유머는 설교의 매력을 더하는 방식으로 휴식을 제공한다. 잠깐 동안의 웃음이 지나간 후에, 사람들은 더 큰 만족을 얻을 준비를 갖추게 된다. 또는 어떤 것-커다란 기침 소리 같은-이 설교의 분위기를 어지럽힐 때, 훌륭한 유머 가 담긴 말대꾸가 사람들의 주의를 설교자에게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설교자가 되라 설교할 성경 본문이 내가 일생 동안 다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나는 설교를 다 했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설교의 무미건조 한 부분들을 공략한다. 한 동안 시리즈 설교를 해 온 경우에, 나는 때때로 이렇게 생 각한다. '가만 있어봐. 이건 정말 무미 건조하군. 여기서 빨리 벗어나서 피해를 최소 로 줄이자!'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가 성경적인 자료와 씨름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잠재의식 속에서 재미없는 것으로 무시해 온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주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설교자와 청중 모두를 지 루하게 만들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새로운, 독특한 각도를 발견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다 나는 본문의 호기심을 일으키는 측면을 발견할 때, 내가 할 말에 대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해가 가면 갈수록 내 설교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내 생각을 재미있게 유지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모든 설교자에게 있어서 끝이 없는 과업이다. 아이디어들이 나를 자극해 준다. 나는 김이 빠지기 시작할 때 사람들과 대화하기 를 좋아한다. 대화는 사람들과 삶과 신앙에 관해서 계속 흥분하게 해 준다. 또한 대 화는 설교에 흥미를 더하는 방법들을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대화가 나를 세상 풍조 에 밝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주일 저녁에 열두어 명 되는 사람들을 우리 집에 초청해 커 피와 디저트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한다. 나는 단지 사람들을 불러 그들의 흥 미를 끄는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할 뿐이다. 나는 그들이 어디 출신이고, 무엇 이 그들의 흥취를 자극하고, 그들이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 는가를 듣는 것을 좋아한 다. 그런 대화들은 종종 서로의 이해를 풍성하게 해 준다. 언젠가 판사와 의료 윤리학 교수가 함께 자리에 앉았을 때, 대화 내용이 낙태로 바뀌었다. 그 교수는 밀워키의 낙태 병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시행했다. 그는 의료 윤리에 관심을 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판사는 가족들의 복지를 다룬 오랜 경험을 근거로 그 대화 에 개입했다. 이어지는 대화는 우리 모두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게 재미 있었던 것이 언제나 내 회중을 즐겁게 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 의 음악적 취향이 회중의 취향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비록 내가 유럽 역사에 큰 관 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별로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이에 덧붙여, 나는 전형적인 남성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반면에, 나의 교구민들 대부분은 당연히 여자들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취향과 관심사가 기준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나는 단 지 나와 꼭 같지 않은 사람들을 흥미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또는 항상 눈을 열어두어야 한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 「글래머 (glamour)」나 「미즈(Ms)」같은 잡지를 후딱 넘겨보곤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때때로 나는 설득 력 있게 잘 쓴 기사들이 세속적인 사고를 들여다 보는 창문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다. 나는 종종 노트를 한다. 나는 흥미 있는 자료를 접촉함을 통해서 세속적인 생각 을 접하고 세상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내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예화들을 산출해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것에 관심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동의할 필요가 없다. 전부를 다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사를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 에게 재미있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 아야 하는 것이다. ("현대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중에서) 21세기를 대비한 설교문화 황 성 철 교수 (한국교회연구소소장) 1. 21세기적 변화의 일반적 조망 2. 21세기 설교자들 의식에 있어서의 패러다임 쉬프트 3. 21세기를 위한 설교문화의 실제적 대안들 * 아래 내용은 총신대학 부설 한국교회연구소가 발행한 "한국교회"에서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 21세기에는 정보의 홍수로 말미암아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 엄청난 변화가 도래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이를 실감있게 경험하면서 살고 있는 중이다.즉 18 개월마다 100%의 비율로 새로운 정보가 걸러져서 새로운 지식으로 정리됨으로 인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는 18개월 후면 쓸모없이 되는 급격한 변화의 시대 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번씩은 해보 게 될 것이다.'시대의 변화에 맞추어서 우리의 설교도 변해야 하 는가?' '변해야 한다면 그 변화의 범위는 어디까지여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은 앞으로 변화하여 가는 시대에 복음을 이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이 분명하다, 교회가 변화하는 시대를 막을 수 없다고 한다면 교회 자체가 이 새로운 시대의 사고구조와 삶의 방식을 따라 구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주 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21세기적 교회가 수반해야 할 이상적인 설교 문화 역시 나름대로의 적절한 탈바꿈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도태되어 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누구 도 할 수 없을 것이다. 1. 21세기적 변화의 일반적 조망 1) 대체되어지는 혼돈 한때 세계는 납으로 금을 만들려는 연금술사들이 존재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유명해진 이유는 납에서 금을 창조하려 한 그들의 시도 때문이었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기술은 중세이래 오랫동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가 능한 것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혼돈의 시기에 모든 낡은 질서는 붕괴되고 새로운 변화가 문화, 기술, 교육, 정치 를 재정비해 가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연금술의 약속이라는 보다 큰 약속을 낳고 있 다. 그것은 납을 금으로 만드는 일이라기보다는 문화, 기술, 학습, 정치를 혼합해 변화 시켜 사고, 생활, 학습, 노동양식의 새로운 결합을 유도하는 것이다. 16세기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그 당시 한 사람이 일생동안 습득 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은 현재 신문 한 부에 수록된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오늘날 컴퓨터, 전화선, 모 뎀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 저녁 사이에 그의 부모가 일생동안 접할 수 있었던 정보 보다도 많은 정보에 접할 수 있게 해준다. 근자에 와서 일부 목회자들에게서는 들려지는 종래의 설교 형태를 과감히 탈피하 여, 보여지는 형태의 설교를 추구하고 있는 경향도 나타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서 종전의 수요 예배를 모뎀 통신을 통한 성경공부로 대체시키거나 대체시키려고 한 다는 말도 듣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교통량이 날로 증가되고 있는 지역에서의 교 통체증을 감안한다면 하나의 효율적인 형태의 말씀을 통한 교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시도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면이나 성도들 간의 인격적인 교제의 면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사실이지만, 재테크나 시테크의 개념으로 따져 보자면 매우 혁신적이고 고무적인 시도임에는 틀림이 없다. 2) 과학의 진보가 개인에게 초래시킬 변화들 의학적 진보, 특히 생물학과 공학 기술의 결합은 인간 수명 연장의 추세를 계속해 서 가속화시키고 있다. 일례로 예순이 넘어 백내장에 걸린 안구 대신에 과학자들은 외과 수술을 통해서 렌즈를 이식해 2.0.의 시력을 제공해 주기도 하는데, 오늘날 신체 부위의 72곳 이상을 이식할 수도 있다. 얼마 전에는 노인들의 퇴화된 기억력을 젊은이 정도의 수준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물질이 개발되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미국의 인디아나와 네바다주의 연구가들은 성 인의 골수를 양 의 수정란에 이식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이 실험양으로부터 양과 인 간의 혈액세포를 생산하는데 성공한 사례도 있다. 이렇듯 진보된 과학과 결합된 개인에게 대해서 관절염에 걸린 코끼리처럼 작동하 고 있는 정부는 더 이상 정보를 통제할 수 없다. 광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커뮤니케이 션에 편승한 성도가 날아가고 있는데 교회의 지도자들은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면 21 세기를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일본의 후지쓰 컴퓨터 회사는 일본어를 영어로, 영어를 일본어로 1분에 천 단어를 번역할 수 있는 번역기계를 가지고 있다. 이 번역 프로그램으로써 다른 언어를 사용 하는 사람들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대화가 디지털화됨으로써 음성합성도 가능하 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당시 오순절 때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각국 방언이 은사로 임했던 사건은 단회적일 필요가 더 이상은 없어진다. 이제는 모든 필요한 부족에게 얼마든지 음성 통역도 가능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3) 커뮤니케이션 걸프전 동안 바그다드에서 다른 고참 뉴스 네트워크 기자들이 전화부스를 찾고 있 을 때 CNN기자는 소형 위성 안테나와 전송장치를 갖춘 서류가방으로 그 회사의 위 성 트랜스폰더로 전송할 수 있었다. 국경이 없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양의 텔레비젼, 팩시밀리, 데이터, 전화, 라디오, 그리고 미래의 광역 멀티미 디어와 다른 커뮤니케이션들이 케이블의 이르는 어떤 곳으로도 여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광섬유 케이블 네크워크(광역 ISDN)이다. 또한 그것은 컴퓨터에 기초한 비디오 프로세싱과 전세계의 데이터 뱅크에의 접근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정보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핵이다. 유식자와 무식자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인종, 피부색, 제도, 교육, 경제의 문제가 더는 아니다. 그것은 태도로써, 정보는 지식 으로 이어지고, 지식은 지혜 로 이어질 수 있기에, 또 지혜는 힘으로 이어짐을 감안한 다면 열린 태도는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성도들은 21세기적 정보화 세계의 격동기에서,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길과 헬라의 문화에 편승해 복음을 편만히 전했던 사도들, 특히 바울을 포함해서 그들이 이뤄낸 역사를 현명하게 재현하기 위해서는 어두움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고 빠르게 효율적 으로 정보를 걸러서 믿음의 권속들에게 분배해야 할 마땅한 시대적 과업이 기다리고 있음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땅 끝까지, 모든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그것은 복음과 기독교인들의 노력과 기술의 결합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땅 끝까지 편만히 복음이 전해지기는 하겠지만, 기왕에 그것이 기독교인들의 사명이 라면 정보 고속도로가 뚫리고 있는 이 호기를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설교는 자신들의 교인들에게만 공급하는 그런 형태에서 벗어나 인터넷을 통 해서나, 위성망을 통해서 세계 각국, 특히 불신자들을 포함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해져 야 한다는 종말론적 사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어있는, 또한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목회자라야 시대와의 경쟁에서 우월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2. 21세기 설교자들 의식에 있어서의 패러다임 쉬프트 이미지 수용이 문자 수용보다 쉬운 세대인 지금보다도 더 진보해 있을 21세기의 설교자들에게는 이미 전통 운운한다는 사실 자체가 설득적일 수 없다는 것이 본 소고 의 주장이다. 멀티 미디어 시대인만큼 각종 정보와 음악 및 온갖 류의 엔터테인먼트 가 집약된 매스 메디아에 익숙해지고 있는 시대의 아들들에게 구태의연한 방법을 적 용시킨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비효율적인 방식이 될 수 밖에 없음 을 시사한다. 인터넷을 통하면 당장에라도 출처 불명의 새로운 신학사상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세계의 정보가 손에 잡힐 듯이 몰려 오는 판국인데, 어째서 강대상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의 형태는 종래와 다를 바 없이 획일적이고 판에 박은 듯하게 붕어빵모냥 양산되 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본 설교자라면 자신의 설교 형태에 대해 여러 번의 숙고와 변화를 시도해 보지 않은 이는 적지 않을 것이다. 복음의 진수를 변개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변화, 이를테면 창세기 22장의 이삭 을 젠물로 바치는 장면을 드라마로 일부 전환한 설교의 형태가 반드시 주일 예배와 교제의 빛을 흐리게 하는 위협적인 것인가 하는 점에는 다소 회의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런 형태의 설교, 예배 형식은 전통적이지는 않지만, 등장 인물들의 상이 한 목소리와 그에 맞게 세밀히 연출된 인물들의 각 배역을 통해서 이미지세대인 피설 교자들에게는 상당히 실감있게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벤허」라는 영화가 오랜 동안 관객들의 기억에서 지위지지 않는 효과를 이뤄낸 것 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헐리웃의 영화 한 편이면 세계의 숱한 젊은이들을 환상사상에로, 무신론자로 얼마 든지 전이시킬 수 있다. 그들이 이용하는 첨단 기술을 교회의 지도자들, 특별히 말씀 의 사역자로 부름받은 이들이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어떤 규제가 성경 내에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격변하는 21세기를 지향하는 설교 사역자들이 다가 오는 세기를 소극적으로만 수호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한 므나를 받고서 그대 로 묻어둔 악하고 게으른 종의 반열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부담을 반드시 안아 야 함을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수반되어져야 할 필수적인 것이 바로 설교를 맡은 말씀 사역자들의 패러다 임 쉬프트(Paradigm Shift)인 것이다. 오르간을 탐탐해 하지 않았었던 스펄전도 있었 고, 현대 음악에 놀랐을 17세기 청교도들도 존재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가상현실이 펼쳐질 미래세대들에게 적용될 현대적 방법론들, 특히 일례로 전술한 시청각적 요소 를 가미한 설교형태는 아마도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성경적 전파기재 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3. 21세기를 위한 설교문화의 실제적 대안들 1)설교 내용의 혁신 미국에서 매주 1만 4천명 이상 모이는 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 (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는 빌 하이블(Bill Hybels) 목사가 부머세대, 즉 1946년에서 1964 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를 겨냥하여 시작되어진 교회이다. 그는 전통적인 교회의 죽은 의식과 같다고 여겨진 예배 형식, 그리고 대부분의 주요 교단 교회들의 급속히 떨어 지는 출석율에 불만을 품고, 자신과 같은 세대인 베이비 부머들을 전도하기 위해 새 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발견했다. 첫째,사람들은 교회가 항상 돈을 요 구하고 있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방문자들에게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광고를 하게 되었다. 둘째,사람들은 설교가 지루하고 판에 박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교회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의사전달과 관련된 실험을 하기로 했다. 세째,사람들은 교회가 실생활과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매일의 삶을 다 루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 네째,사람들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을 무지하고 죄가 많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주장 했다. 이 비난을 들은 후 그는 결코 청중들을 무시하는 말을 하거나 그들에게 변화된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기로 결심 을 했다. 상기의 예는 윌로우크릭 교회의 단편적 사례이다. 빌 하이블 목사는 자신이 부머 세대인 만큼 그 대상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교회의 주 구성원이 될 것이란 점을 확신했고, 그에 맞는 전략을 세웠는데, 그것은 그 세대들의 보편적인 성향에 초 점을 맞춘 것으로써, 히피 세대라고도 할 수 있을 그들에게 매력적인 접촉점을 제공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이렇게 설교를 받는 세대가 어떤 세대인지를 분석하는 일은 필요한 것이다. 복음 의 내용은 성경적인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지만, 그 내용의 수용을 위한 밭을 탐 색해서 접촉점을 발견하고 씨를 뿌려야 함을 놓쳐선 안된다. 예수님께서도 농부들에 게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목자들에게는 양치는 비유를 통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그녀가 필요로 하는 물에 관해 언급하심으로써 복음의 적절한 접촉점을 찾으셨던 것 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대상을 고려하는 설교는 매우 유익이 있다. 뉴 호프 커뮤니티교회 (New Hope Community Church)의 데일 개로웨이(Dale Galloway)목사는 로버트 슐러목사 의 조언에 따라 필 요한 것이 있는 사람을 찾아 그 필요를 채워주고, 상처받은 사람 을 찾아 그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역을 한 결과,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을 위한 '승리의 새 생활' 사역, 혼혈가족사역, 별거생존, 이혼에서의 회복, 상담사역, 미 취학 아동들을 위한 어머니 및 성폭행의 희생자들을 위한 사역 등을 감당해 내고 있 다. 즉 그 대상에 따라서 유연한 복음의 내용이 결정되어지고 그에 따른 선포가 이뤄 짐을 알 수 있다. 현대는 물론 21세기에는 더욱 이혼율이 높아질 것이며, 그에 따른 결손 가정이 많 아질 것이 명약관화한데도 설교자가 그 대상에 맞는 적절한 설교를 준비하지 않는다 면, 그야말로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비정상적인 형태의 청중들이 생 겨날 것을 감안한다면, 그에 따른 복음의 핵심 이외의 부수적인 접촉점들의 개발은 불가피할 것이다. 2)설교 형식의 혁신 초대 교회 이래로 교회는 순례해 왔다. 개인을 통하던 것이 이제 는 거대한 조직 으로 탈바꿈한 경우도 적잖이 목격되고 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성도들 자신이 설 교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물론 모였다가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사명 을 감당하면서…. 그런데 현대를 지나 21세기를 맞이하게 될 차세대 믿음의 자녀들에게조차 동일한 형식의 무미건조한, 물론 성령의 감동이 충만한 선포를 통해서 회심과 성장이 이뤄지 겠지만, 그 유효 사정권 밖에 있는 방랑자들이 많아질 것이 분명한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종래의 구태의연한 틀을 수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칫 교회를 화석화 할 위험이 충분히 있음을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세기적인 정보 혁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세대들에 걸맞는 영상 및 멀티 미디어를 이용한 전도전략을 수용하여 나아가는, 즉 그들에게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접근해가 는 능동적 형식이 필요한 때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다가오는 세대를 위해 열 린 마음과 유연한 자세로 변치 않는 복음의 진리를, 마 치 쓴 약을 당의정에 싸서 먹이듯이, 전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 앞에서 형식에 연연함 이 없이 수용성의 원리를 살펴봄은 매우 현명한 결정이 되리라고 믿는다. 드라마면 어떻고, 컴퓨터 매니아에게 컴퓨팅으로 다가서면 어떻고, 음악광에게 복 음의 열린 음악회면 어떤가, 다만 복음의 진전이 방해받지 않고 진리의 왜곡이 전무 하다면 모두가 바람직한 변화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종교 개혁이 주도되어지기 전까지의 중세는 말씀의 암흑기였다. 종교 개혁은 성도 들을 말씀의 풍성한 잔치로 초대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21세기라는 전무한 변 화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20세 기 말은 아마도 대단한 영적 각축장이 될 것이다 그 전 쟁을 위해 설교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진두에 나서서 전진해가는 설교자들 은 그들의 동역자들, 넓게는 복음으로 낳은 자신의 영적 자녀들까지도 힘과 지혜를 합쳐 성령의 도우심으로 21세기를 승리의 장으로 만들어야 할 시대적 사명이 기다리 고 있다. 21세기는 급변하는 기술사회가 될 것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문명의 이기들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고 방치한다는 것은 게으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한 복음의 전파를 위한 설교의 내용이나 형태 면에서의 현명한 취사선택을 거친 변화 는 미래 세대를 위한 복음의 교두보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물결을 얼마나 슬기롭게 타느냐에 따라서 설교문화가 만개하거나 쇠락하는 역사를 이뤄내게 될 것이다
강해설교 작성법/ 전달
강해설교 작성법/ 전달 2002-07-20 08:54:39 read : 14008 10- 강해설교 작성법/ 전달 장두만 강서침례교회 담임목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교수 우리는 지금까지 설교를 작성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논의해 왔다. 본문 선택과 중심 내용의 파악, 본문의 연구, 청중의 필요와 설교의 목적, 본론 전개 방식 결정과 아웃라인 작성, 적용, 보조 자료, 서론과 결론 등을 논의하느라고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내용> (설교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집을 발행한다든지 잡지나 신문에 문자화된 설교를 발표할 경우에는 좋은 설교 내용만으로 족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만드는 주된 이유는 강단에서 구두로 전파하기 위해서이다. <내용>은 <전달>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에 있어서 그 내용이 어떠하냐 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하다. 희랍의 유명한 웅변가였던 데모스데네스(Demosthenes; 384-322 B.C.)가 "웅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전달, 전달, 전달"이라고 답변했다. 설교에 있어서도 유사한 말을 할 수 있다. 해던 라빈슨(Haddon Robinson)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설교가 효과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설교의 내용)와 함께 "어떻게 말할 것인가?"(=설교의 전달) 하는 문제가 바로 되어야만 한다.1) 설교자의 과제는 단지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참고서적을 조금만 뒤지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진리를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진리를 전하되 "어떻게 전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들을 만한 내용이 없는 설교도 청중을 참기 어렵게 만들지만, 힘없는 전달은 더 참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 설교는 청중에게 수면제 역할밖에는 못할 것이다. 전달이 시원치 않으면 청중은 내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전에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내용>과 <전달>은 자전거의 두 바퀴와 같다. 어느 하나도 없거나 고장이 났을 경우 자전거는 자전거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먼로우(Alan Monroe)와 에닝거(Douglas Ehninger)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연설이 얼마나 효과적이냐 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 좋은 내용이 없이는 전달할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요, 효과적인 전달이 없이는 당신의 생각을 분명하고 생생하게 남에게 전할 수 없다. 투수가 그 볼을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볼의 방향과 속도가 정해지듯이 연설가는 그의 전달 방식에 따라 그의 연설의 힘과 활력이 정해진다.2) 훌륭한 내용을 가진 설교도 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효과는 상당한 정도로 감소된다. 이와 반대로 내용은 그리 훌륭하지 못해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면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설교는 훌륭한 내용과 함께 효과적인 전달,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설교일 것이다. 머크라스키(James C. McCroskey)는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연설에서 좋은 증거를 사용하는 것이 설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한 논문에서("A Summary of Experimental Research on the Effects of Evidence in Persuasive Communication") 이렇게 결론 짓고 있다: "만일 메시지가 형편없이 전달된다면 좋은 증거를 포함하고 있더라도 청중의 태도 변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3) 설교에 있어서 전달이 그처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교자들은 이 분야를 너무나 경시하고 있다. 전달 능력은 마치 생득적(生得的) 능력이나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설교자가 대부분인 것 같이 보인다. 설교의 내용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는 전혀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전달과 내용은 상호 보완적이란 의미에서 함께 일한다" 4)는 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는 준비하고 다른 하나는 준비하지 않음으로 설교를 절름발이로 만드는 우(愚)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I. 전달에 있어서의 실패 이유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설교에 있어서 전달의 중요성은 설교의 내용에 못지 않은데 왜 그처럼 많은 설교자가 이 면에서 실패하고 있는가? 로이드 페리(Lloyd M. Perry)가 지적하고 있는 여덟 가지 이유는 모든 설교자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5) 첫째 이유는 에세이(essay)와 연설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세이와 연설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면 양자는 다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에세이는 문자로 표현된 것이고 청중이 눈앞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 그 순간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설에 있어서는 청중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연설의 경우에는 비록 그 내용이 에세이와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청중이 관심을 갖고 경청하도록 하지 못한다면 실패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미리 작성해 온 설교문을 읽는 것이 곧 설교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沒理解)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치명적이다. 연설이나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둘째 이유는 명백한 것만 주로 취급하려 하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청중을 무시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청중과 함께 호흡을 같이 하면서 무엇인가를 나누려 하기보다는 청중이 듣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말해 버리려는 경향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넷째 이유는 성취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 또는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유는 청중으로부터 너무 조급하게 많은 반응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기대하는 궁극적인 반응은 청중이 어떤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 반응을 얻는데 필요한 다른 요인은 무시하거나 경시한 채 최종 결과만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여섯째 이유는 설교자나 연설자가 자기 자신을 청중에게 주지 않기 때문이다. 메시지는 단순히 설교의 원고만을 읽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자의 열성, 신실함, 진지함 등이 함께 가야 하는데, 이런 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원고 내용만을 청중에게 전해 주려 할 때 실패하게 된다. 일곱째, 청중의 청취 능력이 설교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 실패한다.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원리들을 기계적으로 인간 세계에 그대로 이식(移植)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청중은 기계가 아니라 인격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복합적인 요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최선을 다해서 이런 요인들을 발견해 설교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러한 실패의 원인을 잘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이전보다 훨씬 더 향상된 상태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청중을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II. 전달 훈련의 필요성 어느 누구도 나면서부터 저절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본구적(本具的)으로 있지만, 그 능력을 계발 (啓發)하지 않으면 언어 습득 능력은 사장(死藏)되어 버리고 만다.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은 그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선천적 재능의 다소와는 관계없이 후천적인 훈련을 통해서 상당한 수준의 전달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설교자로서의 불후(不朽)의 명성을 남긴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의 경우를 보자. 그의 사역의 초기에 영국 런던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온 후 소문이 들려오기를 예배당에서 너댓줄 이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전혀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때부터 부적합한 음성에 의해서 설교가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 전달 연습을 했고, 그것이 결국은 그를 교회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길 정도의 대설교가로 만들어 주었다. 6) 조지 트루엣(George W. Truett) 목사의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어떤 공식적인 스피치 훈련 같은 것은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음은 분명했고, 그의 전달은 효과적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처한 특수한 환경에 기인한다. 대평원에서 카우보이들에게 설교함으로 그는 음성을 개발했다. 또한 농아인 그의 동생과 대화하기 위해 입모양이나 발음을 분명히 해야 했기 때문에 좋은 스피치 훈련을 받은 셈이 되었던 것이다. 7) 크롤(Woodrow M. Kroll)이 제시하고 있는 스피치 훈련의 세 가지 이유는 아무런 가감 없이 전달 훈련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8) 첫째, 그것은 논리적 사고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그것은 복음 증거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요인들을 제거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효과적인 전달 방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실제로 응용할 때 평범한 설교자가 탁월한 설교자로 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기본 원리를 습득하는 것은 교화적(敎化的)인 설교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요소라고 하겠다. III. 전달에 있어서 언어적 측면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연설과 에세이의 구별의 실패, 즉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구별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설교는 설교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다 기록해 놓은 원고도 아니고, 아웃라인도 아니다. 이런 것과는 달리 설교는 음성이나 표정이나 제스쳐(gestures) 등의 연속이다. 거기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다. 문자로 기록해 놓은 것은 다시 읽을 수도 있고, 중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에선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설교자의 입에서 말이 나오는 그 순간 이해하지 못하면 끝나버리고 만다. 설교자는 자기 설교의 전체를 다 알고 있지만 청중은 한 부분밖에는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적 측면과 비언어적 측면이 있는데, 먼저 언어적 측면부터 고찰하도록 하겠다. A. 단어 선택의 문제(또는 표현 문제) 설교는 문자 언어가 아니고 음성 언어이기 때문에 설교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에세이(essay)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달라야 한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는 설교자는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자격을 결(缺)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에서는 어떤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첫째, 평이한 단어를 사용하라. 설교자는 설교시 지나치게 난삽(難澁)하고 현학적(衒學的)인 단어 사용은 피해야 한다. <-적 (的)>을 남발한다든지, 신학적-철학적 전문 용어를 연발한다든지, 고사성어(古事成語)를 계속 사용한다든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나 알아들을 만한 난해한 어휘를 상용(常用)한다든지 하는 것은 설교자의 어휘력 과시는 될지언정 청중의 설교 이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서고금의 철학과 사상에 통효(通曉)하여 고담준론(高談峻論)이나 명론탁설(名論卓說)을 강(講)해도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명한 침례교 설교자였던 스펄전(C.H.Spurgeon)이 말한 바와 같이, 시장(市場)의 사람들은 학문적 언어를 배울 수 없기 때문에 학문하는 사람들이 시장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어려운 단어를 쉽게 번역하는 것은 목사가 해야 할 숙제이지 성도들의 숙제는 아닌 것이다. 9) 웨슬리(John Wesley)는 가끔 자신의 설교를 무식한 하녀에게 읽어주면서,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나 구(句)를 내가 쓰거든 나를 중단시켜라"고 하면서 쉬운 용어를 사용하려고 애를 썼다. 설교자는 평이한 단어를 쓰면서도 고상하고 세련된 표현을 하도록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세련되고 고상한 표현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다.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할 때 비로소 그것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난삽한 단어를 의도적으로 남용하는 설교자들은 대개 자기의 어떤 부족한 면을 가리기 위해서, 말하자면, 심리적 <보상 행위>(compensation)의 일종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결격 사유가 있을 때 이를 은폐하여 유식하게 보이기 위해서 어려운 단어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설교자라고 해서 조잡(粗雜)한 표현만 써야 한다는 이유는 없다. 교육의 다소와는 상관없이 모든 설교자는 세련된 표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어떤 부족한 면을 은폐하기 위해 어려운 단어를 남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둘째, 명쾌한 표현을 사용하라. 독일의 무신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이체(Friedrich Nietzsche)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심오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명쾌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대중에게 심오하게 보이게 하고 싶은 사람은 애매모호하려고 노력한다." 해던 라빈슨(Haddon Robinson)이 자주 말하듯이, "강단에서 아지랑이가 끼면 회중석에서는 안개가 낀다"는 말을 모든 설교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10) 설교자는 자신을 심오하게 보이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고, 진리를 숨기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이해해서 그들이 변화되게 하기 위해서 설교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는 것은 설교자의 절대적인 의무이다. 필자는 얼마전 어느 교회에서 주관하는 선교집회(mission conference)에 강사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주강사는 선교사로서의 경험도 풍부하고 학문적 수련도 제대로 된 훌륭한 분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 강사가 선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 학교를 다닐 때 어느 교수가 한 말을 설교의 서론으로 인용함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것은, "당신은 우주적 중요성이 있느냐?" (Do you have universal significance?)는 질문이었다. 영어를 아는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universal significance"라는 표현은 아주 애매하고 번역하기도 굉장히 까다로운 표현이다. 이 표현은 "우주적 중요성" "우주적 의의" "보편적 중요성 "보편적 의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는 게 한 가지 문제이고, 또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어느 번역도 이 표현의 의미를 명쾌하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교 내내 필자는 그 표현을 뭐라고 하면 의미를 명쾌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에 그 강사와 대화하면서 "당신이 사용하던 '우주적 중요성'이란 표현은 애매해서 의미 전달이 제대로 안되니 '범세계적인 영향력'(world-wide impact)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더니, 그 강사는 "그 표현이 훨씬 명쾌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이해되지 않는 애매한 표현은 설교 용어로서는 마땅히 지양(止揚)되어야 한다. 전(前)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의 체험을 통해서 명쾌한 단어의 사용이 설교자나 연설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지적인 활력이 넘치는 분이셨다. 나의 최상의 훈련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왔다. 그는 애매한 표현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셨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1903년 아버지가 타계(他界)하실 때까지--그 때 그는 81세의 고령이셨다--나는 내가 쓴 모든 것을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일일이 그것을 큰 소리로 읽도록 하셨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항상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수시로 나를 중단시키시면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셨다. "그러면 왜 그렇게 표현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곤 했다. "참새 한 마리를 쏠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 전체를 쏘지 말아라. 내가 말해야 할 그것을 향해 정확하게 겨냥하라." 11) 셋째, 문장의 길이를 가능하면 짧게 하라. 설교는 음성언어이기 때문에 듣는 순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긴 문장,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문장은 피하고 가능하면 간결한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추상적이고 애매한 말은 긴 문장으로 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짧은 문장을 통해서 청중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 문장에서 사용된 단어의 수와 문장의 난이도(難易度)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플레쉬(Rudolf Flesch)의 연구는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도표화하고 있다. 12) 8개 단어 이하 아주 쉽다 11개 단어 쉽다 14개 단어 비교적 쉽다 17개 단어 표준 21개 단어 비교적 어렵다 25개 단어 어렵다 29개 단어 이상 아주 어렵다 이 도표에 의하면 한 문장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수는 17개 단어 이내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넷째, 구체적 표현을 사용하라. 추상화(抽象化)라는 것은 자세한 부분들을 생략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지도는 어느 지역을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 제작 목적에 맞는 내용만 포함하고 나머지는 다 제외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된 몇 가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추상화(抽象化)의 과정이란 것도 우리에게 있어서 지도와 마찬가지다. 유용하기는 하지만 많은 제약이 있다. 그것은 마치 비누거품 같아서 우리 앞에서 조금 떠돌다가 손에 잡으려고 하면 터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13) 문장 표현에 있어서 사용되는 단어가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그 표현은 오해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릿핀(Duane Litfin)은 추상적 단어와 연관하여 다음과 같은 원리를 제시한다: "단어가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그 단어는 재미가 없고 기억하기도 어려워진다" 14)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를 들면, 부엌에 놓아두었던 고기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코를 막아야 할 정도로 역겹다면 옆에서 궁금해하는 어린 아들에게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새로운 화학적 물질을 형성하기 위해서 고기의 성분이 분해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면 어린 아이가 알아듣겠는가? "고기가 썩었어!"라고 표현한다면 어느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근거해서 우리의 견해와 판단을 형성한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표현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또 하나를 더 보자. "성서적, 신학적 지식의 결여는 신앙 성장 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표현보다는 "성경을 잘 모르면 신앙이 자라기 어렵다"라고 하는 표현이 훨씬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인 표현이다. 다음의 두 가지 대비(對比)를 통해서 추상적인 표현과 구체적인 표현의 차이점을 좀더 자세히 보도록 하자. 추상적 구체적 더러운 동물 돼지 위대한 영국 시인 밀턴(John Milton) 몇몇 사람 다섯 명의 우주인 오래 전에 1840년 5월 3일 많은 외제차 72%에 달하는 벤츠와 렉서스와 BMW 가까운 장래에 2주 후에 약간의 채소 홍당무, 시금치 및 배추 많은 꽃 200여 송이의 장미와 40여 송이의 튜울립 다섯째,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라. 감각적인 단어는 우리의 오감(五感) 가운데 어느 하나에 어필(appeal) 하는 단어인데, 이런 단어는 그렇지 않은 단어에 비해서 훨씬 강하고 생생한 느낌을 준다. 감각적인 표현은 단어 그 자체를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고, 의성어(擬聲語)나 의태어(擬態語)의 사용을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고, 은유법이나 직유법 같은 수사법을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다. 랠프 루이스(Ralph Lewis)의 연구에 의하면, 호세아서에서는 600여 개 이상의 감각적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각과 관련된 표현이 98개, 청각과 관련된 것이 46개, 미각과 관련된 것이 55개, 후각과 관련된 것이 6개, 촉각과 관련된 것이 34개, 근육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 129개, 내적 심상(心像, internal images)과 관련된 것이 234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15) 감각적인 표현은 성경에서는 물론 위대한 문학 작품이나 일상적 언어 생활에서도 다반사(茶飯事)로 사용되고 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공든 탑이 무너지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같은 속담들이 모두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유치환의 「깃발」에서) 이라든지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나려 /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 마음 허공에 등불을 키고 / 내 홀로 밤 깊이 뜰에 나리면 /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의 「雪夜」에서) 같은 것도 모두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문장의 경우에도 감각적인 표현이 효과적이라는 데에는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그가 길을 가고 있었다"는 표현보다는 "그는 비틀비틀 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라든지 "그는 어슬렁거리며 길을 가고 있었다"라든지 "그는 미친듯이 빠른 걸음으로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는 표현이 훨씬 더 감각적인 표현이다. 직유법이나 다른 사물과 비교하는 표현도 좋은 감각적 표현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말씀과 기도에 게을러지면 우리의 심령은 건조해진다"는 표현보다는 "말씀과 기도에 게을러지면 우리 심령은 메마른 사막같이 생명 없는 불모지로 변한다"는 것이 더 낫다. 박목월(朴木月)의 시 「나그네」는 직유법과 감각적인 표현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 속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효과적인 언어 사용은 생득적(生得的)인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계발(啓發)될 수 있는 후천적인 능력이다.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아 프리오리'(a priori)한 것이 아니라 '아 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한 것이다. 그러면 설교자로서 어떻게 하면 이 면에서 진보를 가져올 수 있을까? 다음의 몇 가지 제언(提言)은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1) 자신의 언어 사용 습관을 점검해 보라. 16) 나 자신이 사용하는 문장은 짧은가, 긴가? 단문인가, 복문인가? 어휘는 대학의 국문과 출신이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인가, 아니면 초등학교 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한가? 문장의 표현 방식은 복잡한가, 단순한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문체(style)에 대해서 이런 종류의 질문을 던지며 비판적으로 자신의 설교를 대한다면 분명한 향상이 있을 것이다. (2) 다른 사람의 문체를 주의해서 보라. 17) 좋은 수필집, 문학 작품, 다른 설교자의 설교집 등을 읽을 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에 유의를 하면서 읽고, 또 읽다가 효과적인 표현이 나오면 그것이 왜 효과적인지를 연구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표현들을 깊이 연구해서 그 이유를 발견하여, 동일한 원리를 사용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표현 자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3) 설교를 기록하라. 18) 설교는 문자로 기록된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다. 설교 전달 방식으로는 원고낭독형이나 다른 방식보다 아웃라인형이 가장 좋다. 그러나 단어 사용이나 문장의 표현에 문제가 있거나 자신이 없는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써 보는 것이 좋다. 이런 방법은 특별히 설교 경험이 없는 초보자에게 권장을 하고 싶다. 물론 이 방법을 통해서 언어 구사에 상당한 자신을 갖게 되면 설교문을 완전히 작성하는 대신 처음부터 아웃라인식으로 작성해 설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B. 음성 사용 문제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단어 선택 문제와 함께 선택된 단어와 문장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1) 고저(pitch) 전달에 있어서 피해야 될 최대의 금기(禁忌)는 <단조로움> (monotony)이다. 낮은 음성으로만 계속 설교한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높은 음성으로만 계속 설교하는 것은 전달에 있어서의 최대의 적이다. 설교자는 청중이 설교 중에 졸지 않게 하려면 음성의 고저를 변화무쌍하게 사용해야 한다. 설교할 때마다 졸음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설교자라면 결코 효과적인 설교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속삭이듯이 낮게, 어떤 경우에는 맹수가 포효하듯이 사자후(獅子吼)를 토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런 대화식으로 다양하게 해야 된다. 위대한 설교자치고 음성의 고저를 다양하게 사용하지 않는 설교자는 없다. 낮은 음성만으로 설교한다든지 높은 음성만으로 설교한다든지 하는 것과 꼭 같은 정도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동일한 패턴(pattern)을 반복하는 것이다. 음성의 고저가 있기는 분명히 있는데 똑 같은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123454321-123454321같은 식이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리듬이 생기게 되고, 리듬이 생기게 되면 그것은 음악으로 변하고, 음악은 청중을 잠재우는 자장가가 된다. 설교자는 그 음성이 고저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사용해야 된다. 필요하다면 갑자기 높이고, 또 필요하면 갑자기 낮추어야지 그 변화에 일정한 패턴이 있어서는 안 된다. (2) 속도 (rate) 음성의 고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음성의 속도이다. 말은 너무 빨리 해도 안 되고, 너무 느리게 해도 안 된다. 너무 빨리 말하면 청중이 제대로 따라오기 어렵고, 너무 느리게 말하면 박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말의 속도는 전달하려는 설교의 내용이나 설교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청중은 1분에 약 500단어 정도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한 속도로 말을 들을 때에는 듣는 내용을 다 소화시킬 수가 없다. 설교나 연설에서 정상적인 속도는 1분에 120단어에서 170단어 정도의 속도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설교 내내 고정불변이라는 뜻은 아니다. 설교의 내용이 고조되면 말의 속도도 빨라져야 한다. 또한 어떤 내용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할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출 수도 있다. 설교자는 설교가 끝날 때까지 항상 동일한 속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청중은 전달시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전달은 그만큼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음성의 속도를 변화시키면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19) 첫째, 설교자가 전하려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둘째, 그것은 독서시의 구둣점과 같은 역할을 해서 청중이 설교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그것은 한 가지 내용에서 다른 내용으로의 전이(轉移)를 용이하게 해 준다. 넷째, 그것은 중요한 개념을 강조해 준다. 다섯째, 그것은 청중의 관심을 끌게 해 준다. (3)강약(volume) 설교자의 음성의 크기는 대개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20) 첫째는 음성을 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힘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설교자와 청중의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고, 셋째는 설교하는 환경이 어떠하냐, 즉 설교를 방해하는 요소(예: 잡음,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 등)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설교의 내용에 따라서 수시로 바뀌어야지 설교 내내 항상 불변한다면 청중은 쉽게 지치고 말 것이다. (4) 휴지(休止; pause) 설교에 있어서 휴지라는 것은 '어' 또는 '에'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설교를 머뭇머뭇 거리면서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21) 설교에 있어서의 휴지는 말이 막혀서 쉬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잠깐 쉬는 것이다. 그것은 음성 변화와 마찬가지로 문장에서의 구둣점과 같은 역할을 한다. 먼로우(Alan H. Monroe)와 에닝거(Douglas Ehninger)는 휴지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휴지는 사고(思考)에 구둣점을 찍는다. 쉼표나 세미콜론이나 마침표가 문장의 단어들을 사고 단위로 분리시키듯이 상이한 길이의 휴지는 연설의 단어들을 의미 단위로 분리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연설을 할 때나 원고를 읽을 때 휴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인쇄물에서 잘못된 구둣점을 사용함으로 독자들에게 가져다주는 혼란과 같은 혼란을 청중에게 가져다준다. 22)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휴지를 사용할 때에는 하나의 사고 단위가 끝난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문장의 중간에나 어떤 논리를 한창 전개해 나가는 도중에 그렇게 하면 그것은 혼란만 가중시키고 청중의 의혹만 받게 된다. 때아닌 휴지는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가 할 말을 잊어버리지나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지언정 유익은 되지 않는다. 휴지는 종종 강조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어떤 중요한 진리를 선포한 직후에 잠시 설교를 중지하고 쉬는 것은 "내가 방금 한 말을 잘 생각해 보시오"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어떤 예화를 들려주기 직전에 잠깐 쉬는 것은 청중으로 하여금 예화에 더 큰 기대를 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설교를 잠깐 중단하고 쉬는 것은 어떤 강력한 언어보다도 설교자의 감정이나 의향을 더 잘 표현해 준다. 설교자는 절대로 휴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잠깐 쉬면 다음에 할 말을 잊어 버릴까봐, 아니면 그 사이에 청중이 설교자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할까봐 두려워서 쉬는 동안에도 '어' '음' '에'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휴지의 목적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마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잠깐 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또 쉴 때는 완전히 쉬어야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5) 기타 언어적 측면과 관련되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고저, 강약, 속도, 휴지의 어느 범주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면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설교자는 전달할 때 열정(enthusiasm)이 있어야 한다.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설교를 계속해서 고성으로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확신이 있어야 되고, 그 확신이 음성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열정이 없는 설교는 청중은커녕 설교자 자신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설교자가 불타면 청중은 불 구경하러 모일 것이다. 둘째, 설교자는 문장의 끝을 너무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어떤 설교자들은 습관적으로 각 문장의 끝을 너무 떨어뜨려서 아예 입 밖으로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삼켜 버리는 경우가 있다. 각 문장의 끝을 떨어뜨리지 않거나 높이는 것도 어색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떨어뜨려서 귀에 들리지도 않게 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각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고, 또 그 끝을 적당히 낮추어서 청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설교자는 비어(鄙語)를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강단에서 욕설이나 저속한 표현을 마구 남발하는 것은 청중에 대한 모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교육을 어느 정도 받아서 교양이 있는 청중이라면 비어를 마구 쓰는 설교자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과 일본 사람을 아무리 증오하더라도 강단에서 이들을 지칭할 때 '왜놈'이라고 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놈...' '...년' '...새끼' 같은 용어도 설교자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것이다. 넷째, 가능하면 문법에 맞는 표현을 쓰도록 해야 한다. 물론 원고 낭독형의 설교가 아닌 다음에야 문법적으로 완벽한 설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문법적으로도 흠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은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평소에 문장 수련이 잘 되어 있으면 실제 설교할 때에도 임기응변하는 능력이 탁월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섯째, 원어의 사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신학교에서 한두 학기 배운 원어 실력 가지고는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원어를 제대로 모르면서 청중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꼭 필요한 경우라면 원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웬만한 경우라면 "이 단어는 원어에서 ....라는 의미입니다"라든지 "이 구절을 원문에 좀더 충실하게 번역한다면....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라는 식의 간접적 사용이 바람직할 것이다. 여섯째, 사투리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서울, 경기도, 충정도, 강원도는 전반적으로 표준어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특히 영남 출신과 호남 출신은 사투리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 영남 사람들은 서부 경남 사람들 외에는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포항과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했다.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의 주위에는 쌍시옷을 발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고2 때 독일어를 배우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라디오에 나오는 아나운서의 표준 발음을 따라서 수년간 연습을 했다. 끈질긴 연습의 결과 지금은 쌍시옷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다. 영남 사람은 <으>와 <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또 서부 경남 출신들은 중모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확신'을 '학신'으로 발음하고, '위대하다'를 '이대하다'로, '경쟁'을 '갱쟁'으로 발음한다. "강원도의 관광사업을 진작시킨다"는 말을 "강언도의 강강사업을 진작시킨다"는 식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강하다. 호남 출신은 <예>를 <에>로 발음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예배'를 '에배'로, '예산안'을 '에산안'으로 발음하기도 하고, 소유격 조사 <의>를 <으>로 발음하는 사람도 많다. 또 조사 <과>를 경음화해서 <꽈>로 발음하는 경향이 많다. 또 일부 호남 사람들은 격음화 현상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적합하다'는 격음화 현상에 따라 '저-캅-하-다'는 식으로 발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갑-하-다'와 같이 발음하기도 한다. 표준어권에 속하는 사람도 가끔 사투리를 쓰는 경향이 있다. '겁이 많다'를 '겂이 많다'라고 하는 사람이 상당히 있다. '손을 씻는다'라고 말해야 할 경우에 '손을 닦는다'라고 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손을 물에 씻고, 수건으로 닦아야지 물에 손을 닦는 것은 아니다. 사투리는 아니지만 어법에 맞지 않는 발음을 하는 경향은 출신 지역과 상관없이 널리 퍼져 있다. <잊다>와 <잃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설교자,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너무 많다. <낫><낮><낯>이나 <빗><빚><빛>도 제대로 구별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빛이 있으니'는 '비시 이쓰니'로 발음해서는 안 된다. '비치 이쓰니'로 발음해야 연음법칙에 맞는 발음이 된다. '무릎을 꿇고'는 '무르블 꿀고'로 발음해서는 안되고 '무르플 꿀코'라고 발음해야 연음법칙과 격음화 현상을 제대로 따른 발음이 된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는 '흐그로 사라믈 비즈사'가 아니라 '흘그로 사라믈 비즈사'라고 해야 연음법칙에 맞다. 설교자는 국어 순화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영어나 외국어를 공부할 때에는 철자나 발음에 굉장히 신경을 쓰면서 왜 우리가 평생 사용하는 국어에는 무관심한가? 자기 나라말을 어법에 맞지도 않게 마구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효과적인 음성 사용에 관심이 있는 설교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목사의 사모가 좋은 비평자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설교를 녹음해서 직접 들어보는 것이다. 몇 개월 동안만 자신의 설교를 비판적으로 들어보고 개선하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천하면 음성의 사용은 물론 설교 전체가 휠씬 개선될 것이다. Ⅱ. 전달에 있어서의 비언어적 측면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언어 외적(言語外的) 측면은 언어적 측면 못지 않게 중요하다. 설교자는 양자 모두를 통해서 그의 의사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홀(Edward Hall)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언어로 무엇인가를 말하는 이외에 소리 없는 언어, 즉 행동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진짜 감정을 전달한다" 23) 설교자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강단에 올라설 때 그의 몸과 함께 서게 되고, 그 몸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큰 자산이 될 수도 있고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언어와 함께 설교자의 행동 하나 하나가 의미 전달에 매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달에 있어서 비언어적 측면의 중요성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설교자의 얼굴 표정이 어떠한지, 설교자가 손이나 팔, 머리 같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청중은 그 속에 포함된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읽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면 설교는 가일충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언어 외적인 요소로서 설교의 전달과 관계 있는 것들로는 복장 및 외모, 몸과 손의 움직임, 눈의 사용 등이 있다. A. 복장 및 외모 (dress and appearance) 밀즈(G. R. Mills)와 애런슨(Elliot Aronson)은 연설가의 복장 및 외모가 연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그들은 한 젊은 여인을 대학의 여러 클래스에 나타나게 해서 어떤 의견을 개진하도록 사전에 계획을 세웠다. 수업이 시작되면 강사는 학생들에게 교양 교육과 직업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이 어떠한가를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설문서를 배부하고 여러 질문에 응답할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이 때 강사는, 학생들이 질문에 답변을 하기 전에 어떤 자원자가 나와서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응답한 후에 학생 각자가 자기의 설문서에 답변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자원자 가운데는 그 젊은 여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강사는 그 여인을 지명해서 교양 교육과 직업 교육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라고 부탁했다. 똑같은 방식의 실험이 여러 클래스에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몇몇 클래스에서는 그 젊은 여인이 아주 말쑥하고 매력적인 옷차림, 잘 어울리는 화장과 헤어스타일을 한 모습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게 했고, 다른 몇몇 클래스에서는 똑같은 내용의 의견을 개진하게 하되 옷은 초라하고, 화장은 도무지 잘 어울리지도 않고, 머리는 헝클어진 모습으로 하게 했다. 학생들이 받은 설문서는 어떤 클래스든 간에 다 동일했고, 또 그 여인이 개진한 의견도 동일했지만 매력적인 모습으로 의견을 개진한 경우 학생들은 연설가의 의견에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휠씬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24)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복장이나 외모를 단정하게 하고서 강단에 서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최첨단 유행을 따라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25) 설교자가 너무 유행에 민감하면 경박하다는 인상을 주고, 너무 유행에 뒤지면 시대에 뒤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설교자는 중용을 취해야 할 것이다. 복장 및 외모에 관련해서 주의해야 될 것은 이것이 장소나 분위기와 잘 조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 예배 같은 경우에는 물론 정장을 해야 되겠지만 한 여름의 야외 캠프 같은 데서는 오히려 평상복 차림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머리나 구두는 제대로 손질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B. 몸과 손의 움직임(body movement and gestures) 설교자는 제스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언어외적 의미를 청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검지(檢指)는 무엇을 지적하거나 방향을 보여줄 때 사용하고, 손바닥을 위로 한 모습은 무엇을 받거나 줄 때, 손을 세워서 좌우로 흔드는 것은 거절할 때, 주먹을 쥐는 것은 무엇을 특히 강조할 때, 양손을 세워서 손등을 서로 엇갈리게 하는 것은 적대 관계에 있을 때, 그리고 세워서 마주 붙인 손등을 떼는 것을 헤어지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이 이외에도 무엇을 묘사할 때 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어떤 물건이 사각형이면 손이나 손가락 몇 개를 써서 사각형을 그리고, 삼각형이면 삼각형을 그려 보임으로 그 물건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밖에도 필요에 따라 설교자는 손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효과적인 제스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26) 첫째 그것은 자연스럽다. 인위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나오는 제스처는 어색하다. 자연스럽게 몸에 밴 대로 제스처를 사용해야 한다. 둘째, 그것은 다양하다. 어느 한 종류의 제스처만 계속 사용하는 것은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한다. 설교 내용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제스처를 사용해야 한다. 셋째, 그것은 시의(時宜)에 적절하다.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제스처를 사용해야지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좋은 제스처도 무용지물이다. 넷째, 그것은 청중의 규모와 조화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소규모의 청중 앞에서는 제스처의 크기가 작다. 그러나 대규모의 청중 앞에서는 크게 해야 격에 맞을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많은 청중 앞에서 제스처를 아주 작게, 그리고 반대로 소규모의 청중 앞에서 제스처를 크게 하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다섯째, 좋은 제스처는 분명하다. 제스처를 사용하는 것인지 아닌지 엉거주춤한 상태가 아니라 분명하다. 손의 사용과 함께 몸의 움직임도 적절해야 한다. 동상이나 조작품같이 한 자리에 부동 자세로 뻣뻣하게 서 있는 것은 어색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강단이 좁다 하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체신머리 없게 보인다. 필요한 때마다 적절하고도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야 한다. 손이나 몸의 움직임 이외에 얼굴 표정도 중요하다. 설교자가 영화 배우나 연극 배우같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효과적인 설교의 전달을 위해서 배우의 표정을 어느 정도 빌어 오는 것은 크게 해로울 것이 없다. 슬플 때는 슬픈 표정을, 기쁠 때는 기쁜 표정을, 화났을 때에는 노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이다. 설교의 내용에 맞게 얼굴 표정도 변화되어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면 너무 엄숙하고 무서운 표정보다는 온화하게 웃는 듯한 표정을 짓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계속 애쓰다 보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C. 눈의 접촉(eye contact) 우리의 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비언어적 전달(non-verbal communication)의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이다. 일찍이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Cicero)는 이렇게 말했다: "전달에 있어서 음성 다음으로 그 효과면에서 중요한 것은 얼굴 표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의해서 좌우된다." 남의 시선을 피한다든지, 계속 노려본다든지, 머뭇머뭇하면서 남을 쳐다본다든지 하는 것 모두가 다 무엇인가를 전달해 준다. 심리학자 메라비안(Albert Mehrabian)은 설교의 총체적 효과는 7%의 단어와 38%의 음성과 55%의 얼굴로 되어 있다고 했다. 설교에서 청중과의 눈의 접촉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필자는 설교할 때 전체 시간의 90% 이상을 청중에게 향하고, 오직 10% 미만을 원고를 보는데 사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설교에 있어서 원고에 있는 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보다 청중에게 시선이 향해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고에 푹 파묻혀서 그것을 전달하는 데에만 급급하고 청중의 반응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설교자는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직시해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그 시선이 거의 원고에만 고정되어 있고, 어떤 설교자는 교회당 벽만 쳐다보기도 하고, 어떤 설교자는 교회당 천장만 바라보기도 하는데,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직시해야 하지만 어느 한 곳만 계속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때로는 왼편으로, 때로는 중앙으로, 때로는 우편으로 시선을 골고루 주어야지, 그렇지 않고 어느 한 쪽만 바라보면 시선을 전혀 받지 못한 청중은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설교할 때 설교자의 시선이 청중을 향해 있지 않으면 청중은 다음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로 설교자를 송사할 것이다. 27) 첫째, 청중은 설교자가 상당히 부정적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환언하면, 설교자는 청중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설교자가 겁장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청중을 두려워하고, 설교에 자신이 없이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셋째, 설교자가 설교에 별관심이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원고만 다 읽고 끝내는 데 관심이 있지 어떤 진리를 전달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설교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청중이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청중과 눈 접촉을 많이 갖기 위해서 설교의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Ⅲ. 전달의 방식 (methods of delivery) 설교를 어떻게 청중에게 전달하느냐 하는 방식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설교자는 그 취향이나 역량에 따라 자기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사용해야 할 것이지만, 문제가 많은 방식을 사용하는 설교자는 그것을 개선하도록 노력을 많이 해야 될 것이다. A. 원고 낭독형 (reading method) 이 방식은 서론에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설교 내용 전체를 다 기록해서 이것을 설교 시간에 청중에게 읽어주는 방법이다. 이 방식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에게 안도감을 준다. 28) 해야 할 설교를 앞에 둔 설교자 치고 일말(一抹)의 불안감이 없는 설교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고 낭독형의 설교를 하면 설교하기 전이나 하는 동안에 불안감은 거의 갖지 않게 된다. 아마 이런 유형의 전달 방식을 사용하는 설교자는 토요일 밤에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될 것이다. 둘째, 이 방식은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게 해 준다. 29) 설교 내용 전체를 문자로 다 기록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나도 틀림없이 다 전할 수 있고, 설교의 길이도 미리 다 정해 놓을 수가 있다. 셋째, 이 방식은 설교자에게 좋은 훈련이 된다. 30) 원고를 계속 쓰는 것은 설교자로 하여금 충분히 준비하게 하고, 또 글을 씀으로써 설교자 자신에게 큰 훈련이 된다. 넷째, 이 방식은 설교 원고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므로 후일에 설교집을 출판할 때나 다른 데 설교를 기고할 때 특별히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잇점이 있다. 31) 원고 낭독형의 설교는 위에서 열거한 장점에 비해 그 단점이 너무 크기 때문에 별로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로 하여금 원고에 집착하게 되므로 청중에게 시선을 주기도 어렵고, 청중의 반응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렵다. 32) 이 방법에 매여 있는 설교자는 하우(Reuel Howe)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관계가 원고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 하면 복음 자체가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원고의 전달이 아니라 만남이다." 33) 원고를 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원고를 보고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원고 낭독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설교자의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원고 낭독형의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어쩌다가 한 번씩 원고에서 눈을 떼 청중을 바라볼 뿐 -- 더군다나 그것도 아무 촛점도 없이 -- 설교 시간의 대부분은 원고에 매여 거기서 꼼짝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되면 설교자와 청중은 거리감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설교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어렵다. 둘째, 이 방식은 청중에게 설교자에 대한 불신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설교자가 원고에 얽매여서 꼼짝을 못하면, 설교자가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서 남의 설교를 베껴서 하는구나, 설교를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못한 채 하는구나 하는 불신감을 청중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많다. 셋째, 이 방식은 전반적인 전달 효과에 있어서 다른 방식보다 덜 효과적이다. 이 방식은 엄밀히 말하면 설교라기보다는 글을 읽는 것이기 때문에 낭독에 아무리 숙달되어 있다 해도 눈의 접촉 부재, 제스처 부재, 낭독으로 인해 오는 부자연스러움, 읽을 곳을 제대로 찾지 못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설교의 중단 등의 문제점을 피할 길이 없다. 넷째, 이 방식은 성령이 특별히 역사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설교자가 아무리 준비를 해도 실제로 설교를 하다 보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설교 준비시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런데 원고 낭독형은 이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법은 별로 권장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꼭 이 방법을 사용하려거든 많은 연습을 통해 그 단점을 극복하고 난 다음에나 할 것이다. B. 암기형(memorization method) 이 방법은 원고 낭독형보다는 진일보했다고 하겠다. 이 방법으로 설교하는 설교자는 먼저 원고를 완전히 준비한 다음에 그것을 암기해서 설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첫째, 이 방법은, 원고 낭독형과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게 해 주고, 설교자에게 좋은 훈련이 되고, 원고를 후일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기에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외에도 암기형은 원고 낭독형이 갖지 못하는 장점이 있다. 둘째, 이 방식은 원고를 다 암기하기 때문에 원고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따라서 눈의 접촉이나 제스처 같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34) 셋째, 이 방식은 청중에게 설교자의 표현이 아주 미려하고 세련되어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35) 그러나 이 방식은 장점을 훨씬 능가하는 단점도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의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아 간다. 36) 어느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설교자는 일주일에도 여러 번 설교를 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설교를 일일이 다 암기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불필요한데 허비하는 결과가 되겠는가! 둘째, 이 방식은 암기한 것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염려 때문에 신경 과민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37) 셋째, 이 방식은 자연스럽지 못한 가능성이 많다. 38) 그냥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에 비해서 암기한 것은 아무래도 인위적이고 암기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이 많다. 넷째, 이 방식은 원고 낭독형과 마찬가지로 설교하는 도중에 성령께서 특별히 역사하셔서 미리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경우 그것을 처리할 적절한 방법이 없다. 39) 이러한 심각한 단점 때문에 암기형의 설교는 별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설교 경험이 별로 없는 초보자들이 설교를 배우는 단계에서는 이 방법으로 시작해서 설교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게 되면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바꾸는 것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 처음에는 암기형의 설교 방식을 취했다. 우리말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말로 하는 설교같이 표현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원고를 영어로 다 작성한 다음에 이것을 암기해서 여러 번 연습을 한 후 설교 시간에 그대로 했다. 이 방법이 그대로 주효(奏效)해서인지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결국은 학교내의 설교 대회에 출전해 입상했던 경험까지도 있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는 암기하지 않고 설교 아웃라인만 가지고 하는 방식으로 바꾸었고, 지금은 영어 설교나 우리말 설교나 모두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C. 즉석형(impromptu method) 이 방식은 설교자가 사전에 특별한 준비도 없이 즉석해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설교하는 방식이다. 설교자는 어떤 부득이한 경우에 사전에 준비하지도 못한 채 설교해야만 될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평소에도 이런 방식으로 설교한다면 그는 일찌감치 설교를 그만두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성도들을 위해서 유익할 것이다. 이러한 설교를 계속해서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충(不忠)이요, 자신과 성도들에 대한 기만이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점점 성장해 감에 따라 열두 사도는 구제하는 일 때문에 사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주력을 못하게 되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행 6:2)라고 하면서 일곱 사람을 택해 그들에게 세상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 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사도들도 세상일을 제쳐놓고 말씀 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했다면 오늘날의 설교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말씀 준비하는 일에 게을러서 준비 없이 설교하는 설교자는 설교자로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D. 아웃라인형(outline method, or extemporaneous method) 이 방식은 원고 낭독형이나 암기형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충분히 준비를 하지만, 설교 내용을 완전히 다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고자 하는 바를 아웃라인 형식으로 만들어서 실제 설교할 때에는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지금까지 논의한 어느 방식보다도 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이 방식이 갖는 많은 훌륭한 장점 때문이다. 첫째, 이 방식은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거의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지엽적인 것들은 일부 빼먹을 수도 있겠지만 설교 전체의 내용이나 흐름에 지장이 없는 한 사소한 것을 빼먹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방식은 전달이 아주 자연스럽다. 40) 원고에 완전히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설교의 방향이 벗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웃라인을 쳐다보기 때문에 청중과의 눈의 접촉, 제스처 등을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셋째, 이 방식은 그 내용에 다소 융통성이 있을 수 있다. 41) 청중의 반응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때 그때 일부 내용을 빼어버릴 수도 있고 설교 준비할 때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것을 추가해서 말할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은 아웃라인조차도 없이 하는 소위 <자유 전달형>(free delivery method)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42) 그러나 이 방법은 할 말을 잊어버릴 경우 엄청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설교 준비를 철저히 하고 설교 내용에 익숙해 있다 하더라도 잊어버릴 가능성은 항상 있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자유 전달형은 암기형이 갖는 단점을 모조리 다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아웃라인형 전달에 대한 반론도 몇 가지 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아웃라인형의 설교는 준비를 대충해서 설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43) 그러나 이 반대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설교 준비를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전달 방법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설교 철학과 관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웃라인형의 설교는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웃라인만 가지고 하면 설교가 횡설수설(橫說竪說)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한다. 44) 이것도 전달의 형태와 관계 있는 문제는 아니다. 설교의 조직 능력이 없는 설교자는 어느 방법을 써도 횡설수설할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아웃라인형의 전달 방식을 즐겨 쓰지만 설교가 왔다 갔다 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방식은 아웃라인을 늘 쳐다보기 때문에 설교의 맥이 끊기고 또 눈의 접촉이 좋지 못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45) 이 반대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아웃라인형의 설교에 익숙하지 못한
강해설교 작성법/ 전달/ 2015-09-20
강해설교 작성법/ 전달 우리는 지금까지 설교를 작성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논의해 왔다. 본문 선택과 중심 내용의 파악, 본문의 연구, 청중의 필요와 설교의 목적, 본론 전개 방식 결정과 아웃라인 작성, 적용, 보조 자료, 서론과 결론 등을 논의하느라고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내용> (설교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집을 발행한다든지 잡지나 신문에 문자화된 설교를 발표할 경우에는 좋은 설교 내용만으로 족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만드는 주된 이유는 강단에서 구두로 전파하기 위해서이다. <내용>은 <전달>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에 있어서 그 내용이 어떠하냐 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하다. 희랍의 유명한 웅변가였던 데모스데네스(Demosthenes; 384-322 B.C.)가 \"웅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전달, 전달, 전달\"이라고 답변했다. 설교에 있어서도 유사한 말을 할 수 있다. 해던 라빈슨(Haddon Robinson)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설교가 효과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설교의 내용)와 함께 \"어떻게 말할 것인가?\"(=설교의 전달) 하는 문제가 바로 되어야만 한다.1) 설교자의 과제는 단지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참고서적을 조금만 뒤지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진리를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진리를 전하되 \"어떻게 전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들을 만한 내용이 없는 설교도 청중을 참기 어렵게 만들지만, 힘없는 전달은 더 참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 설교는 청중에게 수면제 역할밖에는 못할 것이다. 전달이 시원치 않으면 청중은 내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전에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내용>과 <전달>은 자전거의 두 바퀴와 같다. 어느 하나도 없거나 고장이 났을 경우 자전거는 자전거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먼로우(Alan Monroe)와 에닝거(Douglas Ehninger)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연설이 얼마나 효과적이냐 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 좋은 내용이 없이는 전달할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요, 효과적인 전달이 없이는 당신의 생각을 분명하고 생생하게 남에게 전할 수 없다. 투수가 그 볼을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볼의 방향과 속도가 정해지듯이 연설가는 그의 전달 방식에 따라 그의 연설의 힘과 활력이 정해진다.2) 훌륭한 내용을 가진 설교도 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효과는 상당한 정도로 감소된다. 이와 반대로 내용은 그리 훌륭하지 못해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면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설교는 훌륭한 내용과 함께 효과적인 전달,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설교일 것이다. 머크라스키(James C. McCroskey)는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연설에서 좋은 증거를 사용하는 것이 설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한 논문에서(\"A Summary of Experimental Research on the Effects of Evidence in Persuasive Communication\") 이렇게 결론 짓고 있다: \"만일 메시지가 형편없이 전달된다면 좋은 증거를 포함하고 있더라도 청중의 태도 변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3) 설교에 있어서 전달이 그처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교자들은 이 분야를 너무나 경시하고 있다. 전달 능력은 마치 생득적(生得的) 능력이나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설교자가 대부분인 것 같이 보인다. 설교의 내용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는 전혀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전달과 내용은 상호 보완적이란 의미에서 함께 일한다\" 4)는 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는 준비하고 다른 하나는 준비하지 않음으로 설교를 절름발이로 만드는 우(愚)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I. 전달에 있어서의 실패 이유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설교에 있어서 전달의 중요성은 설교의 내용에 못지 않은데 왜 그처럼 많은 설교자가 이 면에서 실패하고 있는가? 로이드 페리(Lloyd M. Perry)가 지적하고 있는 여덟 가지 이유는 모든 설교자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5) 첫째 이유는 에세이(essay)와 연설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세이와 연설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면 양자는 다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에세이는 문자로 표현된 것이고 청중이 눈앞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 그 순간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설에 있어서는 청중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연설의 경우에는 비록 그 내용이 에세이와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청중이 관심을 갖고 경청하도록 하지 못한다면 실패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미리 작성해 온 설교문을 읽는 것이 곧 설교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沒理解)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치명적이다. 연설이나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둘째 이유는 명백한 것만 주로 취급하려 하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청중을 무시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청중과 함께 호흡을 같이 하면서 무엇인가를 나누려 하기보다는 청중이 듣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말해 버리려는 경향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넷째 이유는 성취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 또는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유는 청중으로부터 너무 조급하게 많은 반응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기대하는 궁극적인 반응은 청중이 어떤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 반응을 얻는데 필요한 다른 요인은 무시하거나 경시한 채 최종 결과만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여섯째 이유는 설교자나 연설자가 자기 자신을 청중에게 주지 않기 때문이다. 메시지는 단순히 설교의 원고만을 읽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자의 열성, 신실함, 진지함 등이 함께 가야 하는데, 이런 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원고 내용만을 청중에게 전해 주려 할 때 실패하게 된다. 일곱째, 청중의 청취 능력이 설교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 실패한다.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원리들을 기계적으로 인간 세계에 그대로 이식(移植)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청중은 기계가 아니라 인격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복합적인 요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최선을 다해서 이런 요인들을 발견해 설교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러한 실패의 원인을 잘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이전보다 훨씬 더 향상된 상태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청중을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II. 전달 훈련의 필요성 어느 누구도 나면서부터 저절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본구적(本具的)으로 있지만, 그 능력을 계발 (啓發)하지 않으면 언어 습득 능력은 사장(死藏)되어 버리고 만다.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은 그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선천적 재능의 다소와는 관계없이 후천적인 훈련을 통해서 상당한 수준의 전달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설교자로서의 불후(不朽)의 명성을 남긴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의 경우를 보자. 그의 사역의 초기에 영국 런던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온 후 소문이 들려오기를 예배당에서 너댓줄 이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전혀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때부터 부적합한 음성에 의해서 설교가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 전달 연습을 했고, 그것이 결국은 그를 교회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길 정도의 대설교가로 만들어 주었다. 6) 조지 트루엣(George W. Truett) 목사의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어떤 공식적인 스피치 훈련 같은 것은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음은 분명했고, 그의 전달은 효과적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처한 특수한 환경에 기인한다. 대평원에서 카우보이들에게 설교함으로 그는 음성을 개발했다. 또한 농아인 그의 동생과 대화하기 위해 입모양이나 발음을 분명히 해야 했기 때문에 좋은 스피치 훈련을 받은 셈이 되었던 것이다. 7) 크롤(Woodrow M. Kroll)이 제시하고 있는 스피치 훈련의 세 가지 이유는 아무런 가감 없이 전달 훈련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8) 첫째, 그것은 논리적 사고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그것은 복음 증거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요인들을 제거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효과적인 전달 방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실제로 응용할 때 평범한 설교자가 탁월한 설교자로 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기본 원리를 습득하는 것은 교화적(敎化的)인 설교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요소라고 하겠다. III. 전달에 있어서 언어적 측면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연설과 에세이의 구별의 실패, 즉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구별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설교는 설교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다 기록해 놓은 원고도 아니고, 아웃라인도 아니다. 이런 것과는 달리 설교는 음성이나 표정이나 제스쳐(gestures) 등의 연속이다. 거기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다. 문자로 기록해 놓은 것은 다시 읽을 수도 있고, 중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에선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설교자의 입에서 말이 나오는 그 순간 이해하지 못하면 끝나버리고 만다. 설교자는 자기 설교의 전체를 다 알고 있지만 청중은 한 부분밖에는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적 측면과 비언어적 측면이 있는데, 먼저 언어적 측면부터 고찰하도록 하겠다. A. 단어 선택의 문제(또는 표현 문제) 설교는 문자 언어가 아니고 음성 언어이기 때문에 설교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에세이(essay)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달라야 한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는 설교자는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자격을 결(缺)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에서는 어떤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첫째, 평이한 단어를 사용하라. 설교자는 설교시 지나치게 난삽(難澁)하고 현학적(衒學的)인 단어 사용은 피해야 한다. <-적 (的)>을 남발한다든지, 신학적-철학적 전문 용어를 연발한다든지, 고사성어(古事成語)를 계속 사용한다든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나 알아들을 만한 난해한 어휘를 상용(常用)한다든지 하는 것은 설교자의 어휘력 과시는 될지언정 청중의 설교 이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서고금의 철학과 사상에 통효(通曉)하여 고담준론(高談峻論)이나 명론탁설(名論卓說)을 강(講)해도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명한 침례교 설교자였던 스펄전(C.H.Spurgeon)이 말한 바와 같이, 시장(市場)의 사람들은 학문적 언어를 배울 수 없기 때문에 학문하는 사람들이 시장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어려운 단어를 쉽게 번역하는 것은 목사가 해야 할 숙제이지 성도들의 숙제는 아닌 것이다. 9) 웨슬리(John Wesley)는 가끔 자신의 설교를 무식한 하녀에게 읽어주면서,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나 구(句)를 내가 쓰거든 나를 중단시켜라\"고 하면서 쉬운 용어를 사용하려고 애를 썼다. 설교자는 평이한 단어를 쓰면서도 고상하고 세련된 표현을 하도록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세련되고 고상한 표현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다.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할 때 비로소 그것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난삽한 단어를 의도적으로 남용하는 설교자들은 대개 자기의 어떤 부족한 면을 가리기 위해서, 말하자면, 심리적 <보상 행위>(compensation)의 일종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결격 사유가 있을 때 이를 은폐하여 유식하게 보이기 위해서 어려운 단어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설교자라고 해서 조잡(粗雜)한 표현만 써야 한다는 이유는 없다. 교육의 다소와는 상관없이 모든 설교자는 세련된 표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어떤 부족한 면을 은폐하기 위해 어려운 단어를 남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둘째, 명쾌한 표현을 사용하라. 독일의 무신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이체(Friedrich Nietzsche)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심오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명쾌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대중에게 심오하게 보이게 하고 싶은 사람은 애매모호하려고 노력한다.\" 해던 라빈슨(Haddon Robinson)이 자주 말하듯이, \"강단에서 아지랑이가 끼면 회중석에서는 안개가 낀다\"는 말을 모든 설교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10) 설교자는 자신을 심오하게 보이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고, 진리를 숨기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이해해서 그들이 변화되게 하기 위해서 설교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는 것은 설교자의 절대적인 의무이다. 필자는 얼마전 어느 교회에서 주관하는 선교집회(mission conference)에 강사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주강사는 선교사로서의 경험도 풍부하고 학문적 수련도 제대로 된 훌륭한 분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 강사가 선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 학교를 다닐 때 어느 교수가 한 말을 설교의 서론으로 인용함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것은, \"당신은 우주적 중요성이 있느냐?\" (Do you have universal significance?)는 질문이었다. 영어를 아는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universal significance\"라는 표현은 아주 애매하고 번역하기도 굉장히 까다로운 표현이다. 이 표현은 \"우주적 중요성\" \"우주적 의의\" \"보편적 중요성 \"보편적 의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는 게 한 가지 문제이고, 또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어느 번역도 이 표현의 의미를 명쾌하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교 내내 필자는 그 표현을 뭐라고 하면 의미를 명쾌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에 그 강사와 대화하면서 \"당신이 사용하던 \'우주적 중요성\'이란 표현은 애매해서 의미 전달이 제대로 안되니 \'범세계적인 영향력\'(world-wide impact)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더니, 그 강사는 \"그 표현이 훨씬 명쾌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이해되지 않는 애매한 표현은 설교 용어로서는 마땅히 지양(止揚)되어야 한다. 전(前)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의 체험을 통해서 명쾌한 단어의 사용이 설교자나 연설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지적인 활력이 넘치는 분이셨다. 나의 최상의 훈련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왔다. 그는 애매한 표현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셨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1903년 아버지가 타계(他界)하실 때까지--그 때 그는 81세의 고령이셨다--나는 내가 쓴 모든 것을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일일이 그것을 큰 소리로 읽도록 하셨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항상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수시로 나를 중단시키시면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셨다. \"그러면 왜 그렇게 표현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곤 했다. \"참새 한 마리를 쏠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 전체를 쏘지 말아라. 내가 말해야 할 그것을 향해 정확하게 겨냥하라.\" 11) 셋째, 문장의 길이를 가능하면 짧게 하라. 설교는 음성언어이기 때문에 듣는 순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긴 문장,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문장은 피하고 가능하면 간결한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추상적이고 애매한 말은 긴 문장으로 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짧은 문장을 통해서 청중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 문장에서 사용된 단어의 수와 문장의 난이도(難易度)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플레쉬(Rudolf Flesch)의 연구는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도표화하고 있다. 12) 8개 단어 이하 아주 쉽다 11개 단어 쉽다 14개 단어 비교적 쉽다 17개 단어 표준 21개 단어 비교적 어렵다 25개 단어 어렵다 29개 단어 이상 아주 어렵다 이 도표에 의하면 한 문장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수는 17개 단어 이내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넷째, 구체적 표현을 사용하라. 추상화(抽象化)라는 것은 자세한 부분들을 생략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지도는 어느 지역을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 제작 목적에 맞는 내용만 포함하고 나머지는 다 제외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된 몇 가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추상화(抽象化)의 과정이란 것도 우리에게 있어서 지도와 마찬가지다. 유용하기는 하지만 많은 제약이 있다. 그것은 마치 비누거품 같아서 우리 앞에서 조금 떠돌다가 손에 잡으려고 하면 터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13) 문장 표현에 있어서 사용되는 단어가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그 표현은 오해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릿핀(Duane Litfin)은 추상적 단어와 연관하여 다음과 같은 원리를 제시한다: \"단어가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그 단어는 재미가 없고 기억하기도 어려워진다\" 14)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를 들면, 부엌에 놓아두었던 고기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코를 막아야 할 정도로 역겹다면 옆에서 궁금해하는 어린 아들에게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새로운 화학적 물질을 형성하기 위해서 고기의 성분이 분해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면 어린 아이가 알아듣겠는가? \"고기가 썩었어!\"라고 표현한다면 어느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근거해서 우리의 견해와 판단을 형성한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표현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또 하나를 더 보자. \"성서적, 신학적 지식의 결여는 신앙 성장 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표현보다는 \"성경을 잘 모르면 신앙이 자라기 어렵다\"라고 하는 표현이 훨씬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인 표현이다. 다음의 두 가지 대비(對比)를 통해서 추상적인 표현과 구체적인 표현의 차이점을 좀더 자세히 보도록 하자. 추상적 구체적 더러운 동물 돼지 위대한 영국 시인 밀턴(John Milton) 몇몇 사람 다섯 명의 우주인 오래 전에 1840년 5월 3일 많은 외제차 72%에 달하는 벤츠와 렉서스와 BMW 가까운 장래에 2주 후에 약간의 채소 홍당무, 시금치 및 배추 많은 꽃 200여 송이의 장미와 40여 송이의 튜울립 다섯째,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라. 감각적인 단어는 우리의 오감(五感) 가운데 어느 하나에 어필(appeal) 하는 단어인데, 이런 단어는 그렇지 않은 단어에 비해서 훨씬 강하고 생생한 느낌을 준다. 감각적인 표현은 단어 그 자체를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고, 의성어(擬聲語)나 의태어(擬態語)의 사용을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고, 은유법이나 직유법 같은 수사법을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다. 랠프 루이스(Ralph Lewis)의 연구에 의하면, 호세아서에서는 600여 개 이상의 감각적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각과 관련된 표현이 98개, 청각과 관련된 것이 46개, 미각과 관련된 것이 55개, 후각과 관련된 것이 6개, 촉각과 관련된 것이 34개, 근육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 129개, 내적 심상(心像, internal images)과 관련된 것이 234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15) 감각적인 표현은 성경에서는 물론 위대한 문학 작품이나 일상적 언어 생활에서도 다반사(茶飯事)로 사용되고 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공든 탑이 무너지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같은 속담들이 모두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유치환의 「깃발」에서) 이라든지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나려 /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 마음 허공에 등불을 키고 / 내 홀로 밤 깊이 뜰에 나리면 /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의 「雪夜」에서) 같은 것도 모두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문장의 경우에도 감각적인 표현이 효과적이라는 데에는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그가 길을 가고 있었다\"는 표현보다는 \"그는 비틀비틀 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라든지 \"그는 어슬렁거리며 길을 가고 있었다\"라든지 \"그는 미친듯이 빠른 걸음으로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는 표현이 훨씬 더 감각적인 표현이다. 직유법이나 다른 사물과 비교하는 표현도 좋은 감각적 표현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말씀과 기도에 게을러지면 우리의 심령은 건조해진다\"는 표현보다는 \"말씀과 기도에 게을러지면 우리 심령은 메마른 사막같이 생명 없는 불모지로 변한다\"는 것이 더 낫다. 박목월(朴木月)의 시 「나그네」는 직유법과 감각적인 표현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 속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효과적인 언어 사용은 생득적(生得的)인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계발(啓發)될 수 있는 후천적인 능력이다.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아 프리오리\'(a priori)한 것이 아니라 \'아 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한 것이다. 그러면 설교자로서 어떻게 하면 이 면에서 진보를 가져올 수 있을까? 다음의 몇 가지 제언(提言)은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1) 자신의 언어 사용 습관을 점검해 보라. 16) 나 자신이 사용하는 문장은 짧은가, 긴가? 단문인가, 복문인가? 어휘는 대학의 국문과 출신이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인가, 아니면 초등학교 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한가? 문장의 표현 방식은 복잡한가, 단순한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문체(style)에 대해서 이런 종류의 질문을 던지며 비판적으로 자신의 설교를 대한다면 분명한 향상이 있을 것이다. (2) 다른 사람의 문체를 주의해서 보라. 17) 좋은 수필집, 문학 작품, 다른 설교자의 설교집 등을 읽을 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에 유의를 하면서 읽고, 또 읽다가 효과적인 표현이 나오면 그것이 왜 효과적인지를 연구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표현들을 깊이 연구해서 그 이유를 발견하여, 동일한 원리를 사용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표현 자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3) 설교를 기록하라. 18) 설교는 문자로 기록된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다. 설교 전달 방식으로는 원고낭독형이나 다른 방식보다 아웃라인형이 가장 좋다. 그러나 단어 사용이나 문장의 표현에 문제가 있거나 자신이 없는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써 보는 것이 좋다. 이런 방법은 특별히 설교 경험이 없는 초보자에게 권장을 하고 싶다. 물론 이 방법을 통해서 언어 구사에 상당한 자신을 갖게 되면 설교문을 완전히 작성하는 대신 처음부터 아웃라인식으로 작성해 설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B. 음성 사용 문제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단어 선택 문제와 함께 선택된 단어와 문장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1) 고저(pitch) 전달에 있어서 피해야 될 최대의 금기(禁忌)는 <단조로움> (monotony)이다. 낮은 음성으로만 계속 설교한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높은 음성으로만 계속 설교하는 것은 전달에 있어서의 최대의 적이다. 설교자는 청중이 설교 중에 졸지 않게 하려면 음성의 고저를 변화무쌍하게 사용해야 한다. 설교할 때마다 졸음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설교자라면 결코 효과적인 설교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속삭이듯이 낮게, 어떤 경우에는 맹수가 포효하듯이 사자후(獅子吼)를 토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런 대화식으로 다양하게 해야 된다. 위대한 설교자치고 음성의 고저를 다양하게 사용하지 않는 설교자는 없다. 낮은 음성만으로 설교한다든지 높은 음성만으로 설교한다든지 하는 것과 꼭 같은 정도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동일한 패턴(pattern)을 반복하는 것이다. 음성의 고저가 있기는 분명히 있는데 똑 같은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123454321-123454321같은 식이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리듬이 생기게 되고, 리듬이 생기게 되면 그것은 음악으로 변하고, 음악은 청중을 잠재우는 자장가가 된다. 설교자는 그 음성이 고저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사용해야 된다. 필요하다면 갑자기 높이고, 또 필요하면 갑자기 낮추어야지 그 변화에 일정한 패턴이 있어서는 안 된다. (2) 속도 (rate) 음성의 고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음성의 속도이다. 말은 너무 빨리 해도 안 되고, 너무 느리게 해도 안 된다. 너무 빨리 말하면 청중이 제대로 따라오기 어렵고, 너무 느리게 말하면 박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말의 속도는 전달하려는 설교의 내용이나 설교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청중은 1분에 약 500단어 정도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한 속도로 말을 들을 때에는 듣는 내용을 다 소화시킬 수가 없다. 설교나 연설에서 정상적인 속도는 1분에 120단어에서 170단어 정도의 속도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설교 내내 고정불변이라는 뜻은 아니다. 설교의 내용이 고조되면 말의 속도도 빨라져야 한다. 또한 어떤 내용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할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출 수도 있다. 설교자는 설교가 끝날 때까지 항상 동일한 속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청중은 전달시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전달은 그만큼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음성의 속도를 변화시키면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19) 첫째, 설교자가 전하려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둘째, 그것은 독서시의 구둣점과 같은 역할을 해서 청중이 설교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그것은 한 가지 내용에서 다른 내용으로의 전이(轉移)를 용이하게 해 준다. 넷째, 그것은 중요한 개념을 강조해 준다. 다섯째, 그것은 청중의 관심을 끌게 해 준다. (3)강약(volume) 설교자의 음성의 크기는 대개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20) 첫째는 음성을 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힘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설교자와 청중의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고, 셋째는 설교하는 환경이 어떠하냐, 즉 설교를 방해하는 요소(예: 잡음,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 등)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설교의 내용에 따라서 수시로 바뀌어야지 설교 내내 항상 불변한다면 청중은 쉽게 지치고 말 것이다. (4) 휴지(休止; pause) 설교에 있어서 휴지라는 것은 \'어\' 또는 \'에\'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설교를 머뭇머뭇 거리면서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21) 설교에 있어서의 휴지는 말이 막혀서 쉬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잠깐 쉬는 것이다. 그것은 음성 변화와 마찬가지로 문장에서의 구둣점과 같은 역할을 한다. 먼로우(Alan H. Monroe)와 에닝거(Douglas Ehninger)는 휴지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휴지는 사고(思考)에 구둣점을 찍는다. 쉼표나 세미콜론이나 마침표가 문장의 단어들을 사고 단위로 분리시키듯이 상이한 길이의 휴지는 연설의 단어들을 의미 단위로 분리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연설을 할 때나 원고를 읽을 때 휴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인쇄물에서 잘못된 구둣점을 사용함으로 독자들에게 가져다주는 혼란과 같은 혼란을 청중에게 가져다준다. 22)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휴지를 사용할 때에는 하나의 사고 단위가 끝난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문장의 중간에나 어떤 논리를 한창 전개해 나가는 도중에 그렇게 하면 그것은 혼란만 가중시키고 청중의 의혹만 받게 된다. 때아닌 휴지는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가 할 말을 잊어버리지나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지언정 유익은 되지 않는다. 휴지는 종종 강조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어떤 중요한 진리를 선포한 직후에 잠시 설교를 중지하고 쉬는 것은 \"내가 방금 한 말을 잘 생각해 보시오\"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어떤 예화를 들려주기 직전에 잠깐 쉬는 것은 청중으로 하여금 예화에 더 큰 기대를 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설교를 잠깐 중단하고 쉬는 것은 어떤 강력한 언어보다도 설교자의 감정이나 의향을 더 잘 표현해 준다. 설교자는 절대로 휴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잠깐 쉬면 다음에 할 말을 잊어 버릴까봐, 아니면 그 사이에 청중이 설교자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할까봐 두려워서 쉬는 동안에도 \'어\' \'음\' \'에\'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휴지의 목적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마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잠깐 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또 쉴 때는 완전히 쉬어야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5) 기타 언어적 측면과 관련되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고저, 강약, 속도, 휴지의 어느 범주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면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설교자는 전달할 때 열정(enthusiasm)이 있어야 한다.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설교를 계속해서 고성으로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확신이 있어야 되고, 그 확신이 음성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열정이 없는 설교는 청중은커녕 설교자 자신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설교자가 불타면 청중은 불 구경하러 모일 것이다. 둘째, 설교자는 문장의 끝을 너무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어떤 설교자들은 습관적으로 각 문장의 끝을 너무 떨어뜨려서 아예 입 밖으로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삼켜 버리는 경우가 있다. 각 문장의 끝을 떨어뜨리지 않거나 높이는 것도 어색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떨어뜨려서 귀에 들리지도 않게 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각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고, 또 그 끝을 적당히 낮추어서 청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설교자는 비어(鄙語)를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강단에서 욕설이나 저속한 표현을 마구 남발하는 것은 청중에 대한 모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교육을 어느 정도 받아서 교양이 있는 청중이라면 비어를 마구 쓰는 설교자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과 일본 사람을 아무리 증오하더라도 강단에서 이들을 지칭할 때 \'왜놈\'이라고 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놈...\' \'...년\' \'...새끼\' 같은 용어도 설교자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것이다. 넷째, 가능하면 문법에 맞는 표현을 쓰도록 해야 한다. 물론 원고 낭독형의 설교가 아닌 다음에야 문법적으로 완벽한 설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문법적으로도 흠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은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평소에 문장 수련이 잘 되어 있으면 실제 설교할 때에도 임기응변하는 능력이 탁월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섯째, 원어의 사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신학교에서 한두 학기 배운 원어 실력 가지고는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원어를 제대로 모르면서 청중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꼭 필요한 경우라면 원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웬만한 경우라면 \"이 단어는 원어에서 ....라는 의미입니다\"라든지 \"이 구절을 원문에 좀더 충실하게 번역한다면....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라는 식의 간접적 사용이 바람직할 것이다. 여섯째, 사투리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서울, 경기도, 충정도, 강원도는 전반적으로 표준어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특히 영남 출신과 호남 출신은 사투리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 영남 사람들은 서부 경남 사람들 외에는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포항과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했다.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의 주위에는 쌍시옷을 발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고2 때 독일어를 배우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라디오에 나오는 아나운서의 표준 발음을 따라서 수년간 연습을 했다. 끈질긴 연습의 결과 지금은 쌍시옷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다. 영남 사람은 <으>와 <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또 서부 경남 출신들은 중모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확신\'을 \'학신\'으로 발음하고, \'위대하다\'를 \'이대하다\'로, \'경쟁\'을 \'갱쟁\'으로 발음한다. \"강원도의 관광사업을 진작시킨다\"는 말을 \"강언도의 강강사업을 진작시킨다\"는 식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강하다. 호남 출신은 <예>를 <에>로 발음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예배\'를 \'에배\'로, \'예산안\'을 \'에산안\'으로 발음하기도 하고, 소유격 조사 <의>를 <으>로 발음하는 사람도 많다. 또 조사 <과>를 경음화해서 <꽈>로 발음하는 경향이 많다. 또 일부 호남 사람들은 격음화 현상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적합하다\'는 격음화 현상에 따라 \'저-캅-하-다\'는 식으로 발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갑-하-다\'와 같이 발음하기도 한다. 표준어권에 속하는 사람도 가끔 사투리를 쓰는 경향이 있다. \'겁이 많다\'를 \'겂이 많다\'라고 하는 사람이 상당히 있다. \'손을 씻는다\'라고 말해야 할 경우에 \'손을 닦는다\'라고 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손을 물에 씻고, 수건으로 닦아야지 물에 손을 닦는 것은 아니다. 사투리는 아니지만 어법에 맞지 않는 발음을 하는 경향은 출신 지역과 상관없이 널리 퍼져 있다. <잊다>와 <잃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설교자,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너무 많다. <낫><낮><낯>이나 <빗><빚><빛>도 제대로 구별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빛이 있으니\'는 \'비시 이쓰니\'로 발음해서는 안 된다. \'비치 이쓰니\'로 발음해야 연음법칙에 맞는 발음이 된다. \'무릎을 꿇고\'는 \'무르블 꿀고\'로 발음해서는 안되고 \'무르플 꿀코\'라고 발음해야 연음법칙과 격음화 현상을 제대로 따른 발음이 된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는 \'흐그로 사라믈 비즈사\'가 아니라 \'흘그로 사라믈 비즈사\'라고 해야 연음법칙에 맞다. 설교자는 국어 순화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영어나 외국어를 공부할 때에는 철자나 발음에 굉장히 신경을 쓰면서 왜 우리가 평생 사용하는 국어에는 무관심한가? 자기 나라말을 어법에 맞지도 않게 마구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효과적인 음성 사용에 관심이 있는 설교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목사의 사모가 좋은 비평자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설교를 녹음해서 직접 들어보는 것이다. 몇 개월 동안만 자신의 설교를 비판적으로 들어보고 개선하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천하면 음성의 사용은 물론 설교 전체가 휠씬 개선될 것이다. Ⅱ. 전달에 있어서의 비언어적 측면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언어 외적(言語外的) 측면은 언어적 측면 못지 않게 중요하다. 설교자는 양자 모두를 통해서 그의 의사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홀(Edward Hall)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언어로 무엇인가를 말하는 이외에 소리 없는 언어, 즉 행동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진짜 감정을 전달한다\" 23) 설교자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강단에 올라설 때 그의 몸과 함께 서게 되고, 그 몸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큰 자산이 될 수도 있고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언어와 함께 설교자의 행동 하나 하나가 의미 전달에 매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달에 있어서 비언어적 측면의 중요성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설교자의 얼굴 표정이 어떠한지, 설교자가 손이나 팔, 머리 같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청중은 그 속에 포함된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읽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면 설교는 가일충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언어 외적인 요소로서 설교의 전달과 관계 있는 것들로는 복장 및 외모, 몸과 손의 움직임, 눈의 사용 등이 있다. A. 복장 및 외모 (dress and appearance) 밀즈(G. R. Mills)와 애런슨(Elliot Aronson)은 연설가의 복장 및 외모가 연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그들은 한 젊은 여인을 대학의 여러 클래스에 나타나게 해서 어떤 의견을 개진하도록 사전에 계획을 세웠다. 수업이 시작되면 강사는 학생들에게 교양 교육과 직업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이 어떠한가를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설문서를 배부하고 여러 질문에 응답할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이 때 강사는, 학생들이 질문에 답변을 하기 전에 어떤 자원자가 나와서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응답한 후에 학생 각자가 자기의 설문서에 답변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자원자 가운데는 그 젊은 여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강사는 그 여인을 지명해서 교양 교육과 직업 교육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라고 부탁했다. 똑같은 방식의 실험이 여러 클래스에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몇몇 클래스에서는 그 젊은 여인이 아주 말쑥하고 매력적인 옷차림, 잘 어울리는 화장과 헤어스타일을 한 모습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게 했고, 다른 몇몇 클래스에서는 똑같은 내용의 의견을 개진하게 하되 옷은 초라하고, 화장은 도무지 잘 어울리지도 않고, 머리는 헝클어진 모습으로 하게 했다. 학생들이 받은 설문서는 어떤 클래스든 간에 다 동일했고, 또 그 여인이 개진한 의견도 동일했지만 매력적인 모습으로 의견을 개진한 경우 학생들은 연설가의 의견에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휠씬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24)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복장이나 외모를 단정하게 하고서 강단에 서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최첨단 유행을 따라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25) 설교자가 너무 유행에 민감하면 경박하다는 인상을 주고, 너무 유행에 뒤지면 시대에 뒤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설교자는 중용을 취해야 할 것이다. 복장 및 외모에 관련해서 주의해야 될 것은 이것이 장소나 분위기와 잘 조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 예배 같은 경우에는 물론 정장을 해야 되겠지만 한 여름의 야외 캠프 같은 데서는 오히려 평상복 차림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머리나 구두는 제대로 손질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B. 몸과 손의 움직임(body movement and gestures) 설교자는 제스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언어외적 의미를 청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검지(檢指)는 무엇을 지적하거나 방향을 보여줄 때 사용하고, 손바닥을 위로 한 모습은 무엇을 받거나 줄 때, 손을 세워서 좌우로 흔드는 것은 거절할 때, 주먹을 쥐는 것은 무엇을 특히 강조할 때, 양손을 세워서 손등을 서로 엇갈리게 하는 것은 적대 관계에 있을 때, 그리고 세워서 마주 붙인 손등을 떼는 것을 헤어지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이 이외에도 무엇을 묘사할 때 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어떤 물건이 사각형이면 손이나 손가락 몇 개를 써서 사각형을 그리고, 삼각형이면 삼각형을 그려 보임으로 그 물건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밖에도 필요에 따라 설교자는 손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효과적인 제스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26) 첫째 그것은 자연스럽다. 인위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나오는 제스처는 어색하다. 자연스럽게 몸에 밴 대로 제스처를 사용해야 한다. 둘째, 그것은 다양하다. 어느 한 종류의 제스처만 계속 사용하는 것은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한다. 설교 내용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제스처를 사용해야 한다. 셋째, 그것은 시의(時宜)에 적절하다.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제스처를 사용해야지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좋은 제스처도 무용지물이다. 넷째, 그것은 청중의 규모와 조화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소규모의 청중 앞에서는 제스처의 크기가 작다. 그러나 대규모의 청중 앞에서는 크게 해야 격에 맞을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많은 청중 앞에서 제스처를 아주 작게, 그리고 반대로 소규모의 청중 앞에서 제스처를 크게 하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다섯째, 좋은 제스처는 분명하다. 제스처를 사용하는 것인지 아닌지 엉거주춤한 상태가 아니라 분명하다. 손의 사용과 함께 몸의 움직임도 적절해야 한다. 동상이나 조작품같이 한 자리에 부동 자세로 뻣뻣하게 서 있는 것은 어색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강단이 좁다 하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체신머리 없게 보인다. 필요한 때마다 적절하고도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야 한다. 손이나 몸의 움직임 이외에 얼굴 표정도 중요하다. 설교자가 영화 배우나 연극 배우같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효과적인 설교의 전달을 위해서 배우의 표정을 어느 정도 빌어 오는 것은 크게 해로울 것이 없다. 슬플 때는 슬픈 표정을, 기쁠 때는 기쁜 표정을, 화났을 때에는 노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이다. 설교의 내용에 맞게 얼굴 표정도 변화되어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면 너무 엄숙하고 무서운 표정보다는 온화하게 웃는 듯한 표정을 짓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계속 애쓰다 보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C. 눈의 접촉(eye contact) 우리의 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비언어적 전달(non-verbal communication)의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이다. 일찍이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Cicero)는 이렇게 말했다: \"전달에 있어서 음성 다음으로 그 효과면에서 중요한 것은 얼굴 표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의해서 좌우된다.\" 남의 시선을 피한다든지, 계속 노려본다든지, 머뭇머뭇하면서 남을 쳐다본다든지 하는 것 모두가 다 무엇인가를 전달해 준다. 심리학자 메라비안(Albert Mehrabian)은 설교의 총체적 효과는 7%의 단어와 38%의 음성과 55%의 얼굴로 되어 있다고 했다. 설교에서 청중과의 눈의 접촉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필자는 설교할 때 전체 시간의 90% 이상을 청중에게 향하고, 오직 10% 미만을 원고를 보는데 사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설교에 있어서 원고에 있는 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보다 청중에게 시선이 향해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고에 푹 파묻혀서 그것을 전달하는 데에만 급급하고 청중의 반응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설교자는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직시해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그 시선이 거의 원고에만 고정되어 있고, 어떤 설교자는 교회당 벽만 쳐다보기도 하고, 어떤 설교자는 교회당 천장만 바라보기도 하는데,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직시해야 하지만 어느 한 곳만 계속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때로는 왼편으로, 때로는 중앙으로, 때로는 우편으로 시선을 골고루 주어야지, 그렇지 않고 어느 한 쪽만 바라보면 시선을 전혀 받지 못한 청중은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설교할 때 설교자의 시선이 청중을 향해 있지 않으면 청중은 다음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로 설교자를 송사할 것이다. 27) 첫째, 청중은 설교자가 상당히 부정적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환언하면, 설교자는 청중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설교자가 겁장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청중을 두려워하고, 설교에 자신이 없이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셋째, 설교자가 설교에 별관심이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원고만 다 읽고 끝내는 데 관심이 있지 어떤 진리를 전달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설교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청중이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청중과 눈 접촉을 많이 갖기 위해서 설교의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Ⅲ. 전달의 방식 (methods of delivery) 설교를 어떻게 청중에게 전달하느냐 하는 방식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설교자는 그 취향이나 역량에 따라 자기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사용해야 할 것이지만, 문제가 많은 방식을 사용하는 설교자는 그것을 개선하도록 노력을 많이 해야 될 것이다. A. 원고 낭독형 (reading method) 이 방식은 서론에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설교 내용 전체를 다 기록해서 이것을 설교 시간에 청중에게 읽어주는 방법이다. 이 방식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에게 안도감을 준다. 28) 해야 할 설교를 앞에 둔 설교자 치고 일말(一抹)의 불안감이 없는 설교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고 낭독형의 설교를 하면 설교하기 전이나 하는 동안에 불안감은 거의 갖지 않게 된다. 아마 이런 유형의 전달 방식을 사용하는 설교자는 토요일 밤에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될 것이다. 둘째, 이 방식은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게 해 준다. 29) 설교 내용 전체를 문자로 다 기록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나도 틀림없이 다 전할 수 있고, 설교의 길이도 미리 다 정해 놓을 수가 있다. 셋째, 이 방식은 설교자에게 좋은 훈련이 된다. 30) 원고를 계속 쓰는 것은 설교자로 하여금 충분히 준비하게 하고, 또 글을 씀으로써 설교자 자신에게 큰 훈련이 된다. 넷째, 이 방식은 설교 원고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므로 후일에 설교집을 출판할 때나 다른 데 설교를 기고할 때 특별히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잇점이 있다. 31) 원고 낭독형의 설교는 위에서 열거한 장점에 비해 그 단점이 너무 크기 때문에 별로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로 하여금 원고에 집착하게 되므로 청중에게 시선을 주기도 어렵고, 청중의 반응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렵다. 32) 이 방법에 매여 있는 설교자는 하우(Reuel Howe)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관계가 원고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 하면 복음 자체가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원고의 전달이 아니라 만남이다.\" 33) 원고를 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원고를 보고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원고 낭독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설교자의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원고 낭독형의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어쩌다가 한 번씩 원고에서 눈을 떼 청중을 바라볼 뿐 -- 더군다나 그것도 아무 촛점도 없이 -- 설교 시간의 대부분은 원고에 매여 거기서 꼼짝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되면 설교자와 청중은 거리감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설교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어렵다. 둘째, 이 방식은 청중에게 설교자에 대한 불신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설교자가 원고에 얽매여서 꼼짝을 못하면, 설교자가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서 남의 설교를 베껴서 하는구나, 설교를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못한 채 하는구나 하는 불신감을 청중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많다. 셋째, 이 방식은 전반적인 전달 효과에 있어서 다른 방식보다 덜 효과적이다. 이 방식은 엄밀히 말하면 설교라기보다는 글을 읽는 것이기 때문에 낭독에 아무리 숙달되어 있다 해도 눈의 접촉 부재, 제스처 부재, 낭독으로 인해 오는 부자연스러움, 읽을 곳을 제대로 찾지 못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설교의 중단 등의 문제점을 피할 길이 없다. 넷째, 이 방식은 성령이 특별히 역사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설교자가 아무리 준비를 해도 실제로 설교를 하다 보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설교 준비시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런데 원고 낭독형은 이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법은 별로 권장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꼭 이 방법을 사용하려거든 많은 연습을 통해 그 단점을 극복하고 난 다음에나 할 것이다. B. 암기형(memorization method) 이 방법은 원고 낭독형보다는 진일보했다고 하겠다. 이 방법으로 설교하는 설교자는 먼저 원고를 완전히 준비한 다음에 그것을 암기해서 설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첫째, 이 방법은, 원고 낭독형과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게 해 주고, 설교자에게 좋은 훈련이 되고, 원고를 후일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기에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외에도 암기형은 원고 낭독형이 갖지 못하는 장점이 있다. 둘째, 이 방식은 원고를 다 암기하기 때문에 원고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따라서 눈의 접촉이나 제스처 같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34) 셋째, 이 방식은 청중에게 설교자의 표현이 아주 미려하고 세련되어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35) 그러나 이 방식은 장점을 훨씬 능가하는 단점도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의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아 간다. 36) 어느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설교자는 일주일에도 여러 번 설교를 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설교를 일일이 다 암기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불필요한데 허비하는 결과가 되겠는가! 둘째, 이 방식은 암기한 것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염려 때문에 신경 과민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37) 셋째, 이 방식은 자연스럽지 못한 가능성이 많다. 38) 그냥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에 비해서 암기한 것은 아무래도 인위적이고 암기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이 많다. 넷째, 이 방식은 원고 낭독형과 마찬가지로 설교하는 도중에 성령께서 특별히 역사하셔서 미리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경우 그것을 처리할 적절한 방법이 없다. 39) 이러한 심각한 단점 때문에 암기형의 설교는 별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설교 경험이 별로 없는 초보자들이 설교를 배우는 단계에서는 이 방법으로 시작해서 설교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게 되면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바꾸는 것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 처음에는 암기형의 설교 방식을 취했다. 우리말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말로 하는 설교같이 표현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원고를 영어로 다 작성한 다음에 이것을 암기해서 여러 번 연습을 한 후 설교 시간에 그대로 했다. 이 방법이 그대로 주효(奏效)해서인지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결국은 학교내의 설교 대회에 출전해 입상했던 경험까지도 있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는 암기하지 않고 설교 아웃라인만 가지고 하는 방식으로 바꾸었고, 지금은 영어 설교나 우리말 설교나 모두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C. 즉석형(impromptu method) 이 방식은 설교자가 사전에 특별한 준비도 없이 즉석해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설교하는 방식이다. 설교자는 어떤 부득이한 경우에 사전에 준비하지도 못한 채 설교해야만 될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평소에도 이런 방식으로 설교한다면 그는 일찌감치 설교를 그만두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성도들을 위해서 유익할 것이다. 이러한 설교를 계속해서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충(不忠)이요, 자신과 성도들에 대한 기만이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점점 성장해 감에 따라 열두 사도는 구제하는 일 때문에 사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주력을 못하게 되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행 6:2)라고 하면서 일곱 사람을 택해 그들에게 세상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 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사도들도 세상일을 제쳐놓고 말씀 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했다면 오늘날의 설교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말씀 준비하는 일에 게을러서 준비 없이 설교하는 설교자는 설교자로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D. 아웃라인형(outline method, or extemporaneous method) 이 방식은 원고 낭독형이나 암기형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충분히 준비를 하지만, 설교 내용을 완전히 다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고자 하는 바를 아웃라인 형식으로 만들어서 실제 설교할 때에는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지금까지 논의한 어느 방식보다도 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이 방식이 갖는 많은 훌륭한 장점 때문이다. 첫째, 이 방식은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거의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지엽적인 것들은 일부 빼먹을 수도 있겠지만 설교 전체의 내용이나 흐름에 지장이 없는 한 사소한 것을 빼먹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방식은 전달이 아주 자연스럽다. 40) 원고에 완전히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설교의 방향이 벗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웃라인을 쳐다보기 때문에 청중과의 눈의 접촉, 제스처 등을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셋째, 이 방식은 그 내용에 다소 융통성이 있을 수 있다. 41) 청중의 반응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때 그때 일부 내용을 빼어버릴 수도 있고 설교 준비할 때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것을 추가해서 말할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은 아웃라인조차도 없이 하는 소위 <자유 전달형>(free delivery method)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42) 그러나 이 방법은 할 말을 잊어버릴 경우 엄청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설교 준비를 철저히 하고 설교 내용에 익숙해 있다 하더라도 잊어버릴 가능성은 항상 있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자유 전달형은 암기형이 갖는 단점을 모조리 다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아웃라인형 전달에 대
강해설교 준비 10단계 방법론(The 10-Stage Methodology for Preparation of Biblical Preaching)/ 2014-02-12
강해설교 준비 10단계 방법론(The 10-Stage Methodology for Preparation of Biblical Preaching) 여는 말 설교자는 성경 말씀을 실제 삶과 관련시켜 올바르게 전해야겠다는 끊임없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설교단으로부터 은혜롭고 의미 있는 말씀이 넘쳐흐르려면 먼저 설교학의 원리들과 말씀을 전하려는 이 열정이 하나로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본 글에서는 효과적인 강해설교 준비 방법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효과적인 성경적 강해설교는 “통찰력과 상상력과 영적 감수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원숙한 강해를 위해서는 성경과 더불어 사람들과 일생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 자신은 사고하는 힘든 훈련을 계속하면서 연습을 반복함으로써 자기 나름의 방법을 발전시켜야 한다.1) 효과적인 강해 설교 준비 10단계 1. 설교할 본문을 잡아라 1) 생각의 단위(Thought Units) 2) 설교의 길이 3) 주제 강해(Topical Exposition) 2. 본문을 연구하고 초고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라 1) 문맥(context)2) 2) 원어사전(lexicon) 3) 성구사전(concordance) 4) 문법 5) 어휘 연구서들 6) 성경 사전(Bible dictionary; encyclopedia) 7) 주석류 8) 다른 도구들 3. 본문을 연구할 때 그 주석적 관념(exegetical idea)과 그것의 발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 부분을 서로 관련시켜라 1) 주제 : 5W1H 2) 보어 : 주제를 완전하게 해주며 그 주제를 하나의 관념으로 만들어준다. <예> 약 1:5-8, 엡 4:11-16 3) 다른 문학적 형식들 설교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로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로, 자신의 주제와 보어를 한 문장으로 결합시켜 주는 본문의 관념을 진술할 수 있어야 하고 둘째로, 본문으로부터 그 관념의 발전을 개관할 수 있어야 한다. 4. 세 가지 발전적 질문(three developmental questions)을 통해 주석적 관념을 내어 놓으라 1)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성경과 청중 (설명이 요구된다!) 2) 그것은 사실인가? 그것은 진실한가? 나는 그것을 믿고 있는가? ⇨ 정당성(validity) / 강해자는 주석의 개관에 나타난 관념을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다음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서 발전될 수 있다. 첫째로, 나의 청중은 이 말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일까? 둘째로, 만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그것이 무슨 변화를 가져오는가? 그래서 어떤가? 그것은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 적용과 함의(含意, implication) 사실의 분석과 신앙의 해석 ⇨ 설교학적 관념 형성3) 5. 청중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서 석의적 관념을 충분히 고찰하라. 그리고 그것을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고 쉬운 문장으로 만들어라 1) 보편적인 원리 제시 2) 정확하고 개인적으로 직접적인 의미부여 3) 현대적 관념 제시 4) 선동적이 아닌 매력적 언어 구사 설교적 관념(homiletical idea)이란 성경적 개념의 진술로서 그것이 성경을 정확히 반영하고 의미 있게 회중들에게 관련되도록 진술된 것이다. 6. 설교의 목적을 결정하라 “신학적 진리는 그것을 순종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모든 교리의 배후에 있는 목적은 도덕적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다.”4) 관념은 진리를 진술하고, 목적은 그 진리가 무엇을 성취시켜야 하는지 규정해 준다. 설교자는 설교본문의 배후에 있는 목적을 찾아냄으로써 설교의 목적을 결정한다. 1. 왜 이 본문을 기록 했는가? 2. 처음 독자들에게 그가 기대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측정할 수 있는 결과를 제시하는 목적 설정은 설교자로 하여금 어떻게 태도나 행위가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반성 할 수 있게 해준다. “설교는 행동으로 결론지어지는 말이다.”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 - 7. 설교적 관념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설교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관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근본적으로 관념은 설교의 광범한 목적에 따라 전개된다. 설교의 관념도 역시 설명이나 확인(validation)이나 적용을 요구한다. 1. 관념 설명형(idea explained) 설교 관념이 서론에서 제시되고 설교의 각 대지는 그것을 설명해 나가는 단계가 된다. 즉 성경 본문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설교자의 최대의 사명인 것이다. 일단 설교의 전체를 개관하고 각 단계마다 구체적인 설명을 해 나아가는 것이다. <골 1:15-18> 2. 명제 증명형(proposition proved) 설교 관념은 어떤 토론회의 명제처럼 서론에서 제시된다. 그리고 각 대지는 그 명제의 증명이 된다. 이런 형태의 설교를 위한 발전적 질문은 정당성을 묻는다. 설교자의 자세는 토론가의 자세를 닮아서 그의 관념에 대한 추리(reasons)나 증명(proofs)이 설교의 중심이 된다. <고전 15:12-19> 위의 두 가지 설교가 같은 것처럼 보이나 서로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5) 3. 원리 적용형(principle applied) 설교 관념은 서론이나 첫 대지에서 신앙이나 생활의 원리로 제시된다. 설교의 남은 부분은 그 원리를 일상의 경험에 적용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형태의 설교에서 강해자는 성경적 원리를 서론에 넣거나 첫 대지 또는 그 원리의 의미를 밝혀나가는 설교의 다른 부분에 가서 넣을 수도 있다. <벧전 2:11-3:9> 4. 주제 완성형(subject completed) 설교 서론에서 주제만을 제시하고 전체 관념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지들이 그 주제를 완성시켜 나간다. 이러한 주제 완성형이 가장 일반적인 설교의 형태이다. <히 12:22-25> 5. 이야기 진술형(story fold) 설교 관념이 직접적으로 암시적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성경 이야기를 진술하는 형태이다. “강해자가 성경 이야기를 통찰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해줄 때에도 설교는 관념을 전달한다.”6) 6. 연역적 배열법(deductive arrangement) 관념이 서론에서 제시되어 본론에서 설명되거나 증명되거나 적용되는 방법이다. 7. 귀납적 배열법(inductive arrangement) 서론에서는 단지 설교의 첫 요점만 제시되고 강력한 연결어를 통하여 새로운 요점이나 대지가 앞부분과 연결되게 하며 결론에 가서 관념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형식을 선택하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첫째로, 이러한 발전은 본문이 가르치는 바를 전달하고 있는가? 둘째로, 그것은 이 청중들에게서 나의 목적을 성취시켜 줄 것인가? 만일 어떤 형식이 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 형식을 이용하라. 만일 그것이 방해가 된다면 그 관념과 성경 말씀의 목적과 조화되는 좀 더 나은 형식을 생각해 보라. 8. 당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그 관념을 발전시켜야 할지를 결정했다면 설교의 개요를 만들어라 내용은 형식 없이도 존재할 수는 있으나 구조는 설교에 질서와 통일성과 진행감을 준다. 분명히 훌륭한 개요(outline)를 가지고 있었기에 실패하는 설교는 없다.7) 개요는 적어도 네 가지 목적에 기여한다. 1. 설교의 각 부분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설교자의 눈과 마음에 분명하게 해준다. 2. 설교자는 자기 설교를 하나의 전체로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통일성에 대한 감각을 높일 수 있다. 3. 개요는 관념의 순서를 정연하게 해줌으로써 듣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순서로 그것을 전해줄 수 있다. 4. 설교자는 개요에서 설교의 각 대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보충 자료를 더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개요는 때대로 본문에 나타난 관념의 순서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대가 있다. 이것은 본문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제에 맞춰서 개요를 작성해야 한다. 논문의 개요와 설교의 개요가 비슷하지만 설교의 개요는 보다 더 단순하고 명확하고 비교적 항목이 적어야 한다. 그리고 개관에 나오는 각 대지나 항목은 하나의 관념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그것은 반드시 문법적으로 완전한 문장이어야 한다.8) “설교단에 올라갈 때는 요약된 개관만을 들고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서재에서 그렇게 준비한다면 그것은 실패작을 낳을 것이다.” 각 대지는 의문문이 아닌 서술문이어야 한다. 개관에 나온 각 대지나 요점은 질문의 제기가 아니고 질문에 대한 대답이어야 한다. 질문은 설교를 할 때 다른 대지로 넘어갈 때 사용될 수 있다. 그런 과도적 질문(transition)은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넣되 괄호로 묶어둔다. 다음 대지나 항목으로 넘어가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말은 즉석에서 쉽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질문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고 적절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즉 이러한 말은 논리적 혹은 심리적 교량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기록되어야 하고 또 개관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설교할 때에는 그것이 확대되어 훨씬 길어질 수도 있다.9) 9. 요점을 설명해 주거나 증명하거나 적용하거나 확대시켜 주는 보충자료로 개관을 채우라 개관은 사고의 골격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설교에서의 골격은 대부분 감추어져 있다. 설교의 뼈대를 감추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골격을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살로 덮는 것이다. 청중은 추상적 관념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도 개관을 읽어주고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소력 있는 설교가 되도록 하기 위한 보충자료를 사용한다. 1. 재 진술(restatement) : 어떤 관념을 다른 말로 바꾸어 진술하는 것이다. 첫째로, 재 진술은 명확성을 얻어준다. 둘째로, 재 진술은 듣는 사람에게 진리를 심어준다. 셋째로, 재 진술은 반복과는 다르다. 반복(repetition)은 똑같은 것을 똑같은 말로 하는 것이고, 재 진술은 똑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것이다. 2. 설명(explanation)과 정의(definition) : 정의는 한계를 설정한다. 포함되어야 할 것과 배제되어야 할 것을 구분해 준다. 정의는 어떤 개념이나 진술이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것과 배제해야 하는 것을 규정한다. 그리고 설명은 어떤 관념이 다른 관념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또는 어떤 관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설교자는 분류, 동의어, 비교와 대조, 보기 등을 통하여 모든 중요한 개념을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3. 사실적 자료(factual information) : 관찰, 실례, 통계 등의 자료를 사용하여 진술의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 설교자와 상관없이 확인될 수 있는 조사 보고, 보기, 통계 등의 자료가 사실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4. 인용(quotation) : 강한 인상과 권위를 주기 위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효과적이고 탁월한 표현을 인용한다. 권위는 인정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1) 경험이나 훈련을 통하여 이 주제에 관해 권위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가? (2) 그 증거는 직접적인 지식에 근거한 것인가? (3) 그 권위는 편견에 사로잡혀서 나온 것인가? (4) 청중은 그의 증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를 알고 존경하는가?10) 설교에서 인용은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인용은 짧아야 한다. 때로는 약간 고쳐서 더 많은 열매를 얻도록 하는 것이 더 좋다. 5. 이야기(narration) 이야기는 성경 본문을 설명할 때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무슨 목적으로 하였는지에 대한 묘사이다. 이것은 보통 본문의 역사, 환경 도는 인물을 논함으로서 설교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된다. 이야기란 상상력을 발휘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은 신앙의 통찰력을 반영한다. 6. 실례(illustrations) 실례는 관념을 실제 경험에 관련시킴으로써 그 관념을 재 진술해 주거나 설명해 주거나 적용하는 것이다. 실례는 설교의 주제에 부합되고 회중에게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예화는 개인의 체험이나 독서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수집되고 정리될 수 있다. 10. 설교의 서론과 결론을 준비하라 1. 서론(introduction)의 준비 효과적인 서론의 주요 특징은 설교의 관념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필요성을 제기하며, 회중으로 하여금 설교의 본론과 그 발전에로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1) 주의를 끌어라 (2) 필요를 충족시켜라 (3) 설교의 본론을 소개하라 (4) 다른 여러 가지 특징들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성경 봉독, 유머, 제스처, 태도 등도 중요하다. 세 가지 형의 설교자가 있다. 첫째로, 도저히 귀를 기울여 그 설교를 들을 수 없는 설교자, 둘째로, 귀를 기울여 설교를 들을 만한 설교자, 셋째로, 귀를 기울여 설교를 듣지 않으면 안 되는 설교자가 있다. 설교의 서론을 하는 동안에 회중은 보통 설교자가 어떤 부류인지를 결정해버린다. 2. 결론의 준비 결론이란 “회중들에게 관념에 대한 전체적이고 완벽한 견해를 주는 것으로 그 진리로 하여금 마음과 생활 속에 깊이 박히게 하는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조종사는 비행기를 착륙시킬 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유능한 설교자는 결론을 위해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한다.” (1) 요약 : 강조점의 재 진술이지 재 설교가 돼서는 안 된다. (2) 예화 : 관념의 요약이나 실천을 보여주는 예화가 정곡을 찌르는 예화가 된다. (3) 인용 : 인용구, 찬송가, 설교 요약문 등이 될 수 있다. (4) 질문 : 적절한 질문을 통하여 효과적인결론을 지을 수 있다. (5) 기도 : 설교와 관련된 정직한 간구일 때 적절한 결론이 된다. (6) 특수한 방향 제시 :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7) 가시화(visualization) : 미래의 상황을 그려보고 설교에 따라 대처하게 해준다. 참고문헌 Barclay, William. A Spiritual Autobiography. Grand Rapids: Eerdmans, 1975. Brigance, William Norwood. Speech: Its Techniques and Disciplines in a Free Society. New York: Applet!!on-Century-Crofts, 1952. Davis, H. Grady. Design for Preaching. Philadelphia: Muhlenberg, 1958. Haselden, Kyle. The Urgency of Preaching. New York: Harper & Row, 1963. Miller, Donald G. The Way to Biblical Preaching. New York: Abingdon, 1957. Monroe, Alan H. Principles and Types of Speech. Chicago: Scott, Foresman, 1949. Robinson, Haddon W. Biblical Preaching. 정장복 역. 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Schaeffer, Francis A. True Spirituality. Wheaton, Ill.: Tyndale, 1971. Simpson, Matthew. Lectures on Preaching. 설교학 강의. Tozer, A. W. Of God and Man. Harrisburg, Pa.: Christian, 1960. 임태우 교수(한국개혁신학연구원)
강해설교 준비 10단계 방법론(The 10-Stage Methodology for Preparation of Biblical Preaching)/ 2015-09-20
강해설교 준비 10단계 방법론(The 10-Stage Methodology for Preparation of Biblical Preaching) 여는 말 설교자는 성경 말씀을 실제 삶과 관련시켜 올바르게 전해야겠다는 끊임없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설교단으로부터 은혜롭고 의미 있는 말씀이 넘쳐흐르려면 먼저 설교학의 원리들과 말씀을 전하려는 이 열정이 하나로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본 글에서는 효과적인 강해설교 준비 방법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효과적인 성경적 강해설교는 “통찰력과 상상력과 영적 감수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원숙한 강해를 위해서는 성경과 더불어 사람들과 일생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 자신은 사고하는 힘든 훈련을 계속하면서 연습을 반복함으로써 자기 나름의 방법을 발전시켜야 한다.1) 효과적인 강해 설교 준비 10단계 1. 설교할 본문을 잡아라 1) 생각의 단위(Thought Units) 2) 설교의 길이 3) 주제 강해(Topical Exposition) 2. 본문을 연구하고 초고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라 1) 문맥(context)2) 2) 원어사전(lexicon) 3) 성구사전(concordance) 4) 문법 5) 어휘 연구서들 6) 성경 사전(Bible dictionary; encyclopedia) 7) 주석류 8) 다른 도구들 3. 본문을 연구할 때 그 주석적 관념(exegetical idea)과 그것의 발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 부분을 서로 관련시켜라 1) 주제 : 5W1H 2) 보어 : 주제를 완전하게 해주며 그 주제를 하나의 관념으로 만들어준다. <예> 약 1:5-8, 엡 4:11-16 3) 다른 문학적 형식들 설교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로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로, 자신의 주제와 보어를 한 문장으로 결합시켜 주는 본문의 관념을 진술할 수 있어야 하고 둘째로, 본문으로부터 그 관념의 발전을 개관할 수 있어야 한다. 4. 세 가지 발전적 질문(three developmental questions)을 통해 주석적 관념을 내어 놓으라 1)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성경과 청중 (설명이 요구된다!) 2) 그것은 사실인가? 그것은 진실한가? 나는 그것을 믿고 있는가? ⇨ 정당성(validity) / 강해자는 주석의 개관에 나타난 관념을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다음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과정을 통해서 발전될 수 있다. 첫째로, 나의 청중은 이 말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일까? 둘째로, 만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그것이 무슨 변화를 가져오는가? 그래서 어떤가? 그것은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 적용과 함의(含意, implication) 사실의 분석과 신앙의 해석 ⇨ 설교학적 관념 형성3) 5. 청중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서 석의적 관념을 충분히 고찰하라. 그리고 그것을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고 쉬운 문장으로 만들어라 1) 보편적인 원리 제시 2) 정확하고 개인적으로 직접적인 의미부여 3) 현대적 관념 제시 4) 선동적이 아닌 매력적 언어 구사 설교적 관념(homiletical idea)이란 성경적 개념의 진술로서 그것이 성경을 정확히 반영하고 의미 있게 회중들에게 관련되도록 진술된 것이다. 6. 설교의 목적을 결정하라 “신학적 진리는 그것을 순종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모든 교리의 배후에 있는 목적은 도덕적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다.”4) 관념은 진리를 진술하고, 목적은 그 진리가 무엇을 성취시켜야 하는지 규정해 준다. 설교자는 설교본문의 배후에 있는 목적을 찾아냄으로써 설교의 목적을 결정한다. 1. 왜 이 본문을 기록 했는가? 2. 처음 독자들에게 그가 기대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측정할 수 있는 결과를 제시하는 목적 설정은 설교자로 하여금 어떻게 태도나 행위가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반성 할 수 있게 해준다. “설교는 행동으로 결론지어지는 말이다.”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 - 7. 설교적 관념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설교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관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근본적으로 관념은 설교의 광범한 목적에 따라 전개된다. 설교의 관념도 역시 설명이나 확인(validation)이나 적용을 요구한다. 1. 관념 설명형(idea explained) 설교 관념이 서론에서 제시되고 설교의 각 대지는 그것을 설명해 나가는 단계가 된다. 즉 성경 본문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설교자의 최대의 사명인 것이다. 일단 설교의 전체를 개관하고 각 단계마다 구체적인 설명을 해 나아가는 것이다. <골 1:15-18> 2. 명제 증명형(proposition proved) 설교 관념은 어떤 토론회의 명제처럼 서론에서 제시된다. 그리고 각 대지는 그 명제의 증명이 된다. 이런 형태의 설교를 위한 발전적 질문은 정당성을 묻는다. 설교자의 자세는 토론가의 자세를 닮아서 그의 관념에 대한 추리(reasons)나 증명(proofs)이 설교의 중심이 된다. <고전 15:12-19> 위의 두 가지 설교가 같은 것처럼 보이나 서로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5) 3. 원리 적용형(principle applied) 설교 관념은 서론이나 첫 대지에서 신앙이나 생활의 원리로 제시된다. 설교의 남은 부분은 그 원리를 일상의 경험에 적용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형태의 설교에서 강해자는 성경적 원리를 서론에 넣거나 첫 대지 또는 그 원리의 의미를 밝혀나가는 설교의 다른 부분에 가서 넣을 수도 있다. <벧전 2:11-3:9> 4. 주제 완성형(subject completed) 설교 서론에서 주제만을 제시하고 전체 관념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지들이 그 주제를 완성시켜 나간다. 이러한 주제 완성형이 가장 일반적인 설교의 형태이다. <히 12:22-25> 5. 이야기 진술형(story fold) 설교 관념이 직접적으로 암시적으로 발전될 수 있도록 성경 이야기를 진술하는 형태이다. “강해자가 성경 이야기를 통찰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해줄 때에도 설교는 관념을 전달한다.”6) 6. 연역적 배열법(deductive arrangement) 관념이 서론에서 제시되어 본론에서 설명되거나 증명되거나 적용되는 방법이다. 7. 귀납적 배열법(inductive arrangement) 서론에서는 단지 설교의 첫 요점만 제시되고 강력한 연결어를 통하여 새로운 요점이나 대지가 앞부분과 연결되게 하며 결론에 가서 관념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형식을 선택하기 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첫째로, 이러한 발전은 본문이 가르치는 바를 전달하고 있는가? 둘째로, 그것은 이 청중들에게서 나의 목적을 성취시켜 줄 것인가? 만일 어떤 형식이 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 형식을 이용하라. 만일 그것이 방해가 된다면 그 관념과 성경 말씀의 목적과 조화되는 좀 더 나은 형식을 생각해 보라. 8. 당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그 관념을 발전시켜야 할지를 결정했다면 설교의 개요를 만들어라 내용은 형식 없이도 존재할 수는 있으나 구조는 설교에 질서와 통일성과 진행감을 준다. 분명히 훌륭한 개요(outline)를 가지고 있었기에 실패하는 설교는 없다.7) 개요는 적어도 네 가지 목적에 기여한다. 1. 설교의 각 부분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설교자의 눈과 마음에 분명하게 해준다. 2. 설교자는 자기 설교를 하나의 전체로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통일성에 대한 감각을 높일 수 있다. 3. 개요는 관념의 순서를 정연하게 해줌으로써 듣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순서로 그것을 전해줄 수 있다. 4. 설교자는 개요에서 설교의 각 대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보충 자료를 더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개요는 때대로 본문에 나타난 관념의 순서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할 대가 있다. 이것은 본문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제에 맞춰서 개요를 작성해야 한다. 논문의 개요와 설교의 개요가 비슷하지만 설교의 개요는 보다 더 단순하고 명확하고 비교적 항목이 적어야 한다. 그리고 개관에 나오는 각 대지나 항목은 하나의 관념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그것은 반드시 문법적으로 완전한 문장이어야 한다.8) “설교단에 올라갈 때는 요약된 개관만을 들고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서재에서 그렇게 준비한다면 그것은 실패작을 낳을 것이다.” 각 대지는 의문문이 아닌 서술문이어야 한다. 개관에 나온 각 대지나 요점은 질문의 제기가 아니고 질문에 대한 대답이어야 한다. 질문은 설교를 할 때 다른 대지로 넘어갈 때 사용될 수 있다. 그런 과도적 질문(transition)은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넣되 괄호로 묶어둔다. 다음 대지나 항목으로 넘어가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말은 즉석에서 쉽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질문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고 적절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즉 이러한 말은 논리적 혹은 심리적 교량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기록되어야 하고 또 개관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설교할 때에는 그것이 확대되어 훨씬 길어질 수도 있다.9) 9. 요점을 설명해 주거나 증명하거나 적용하거나 확대시켜 주는 보충자료로 개관을 채우라 개관은 사고의 골격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설교에서의 골격은 대부분 감추어져 있다. 설교의 뼈대를 감추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골격을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살로 덮는 것이다. 청중은 추상적 관념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도 개관을 읽어주고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소력 있는 설교가 되도록 하기 위한 보충자료를 사용한다. 1. 재 진술(restatement) : 어떤 관념을 다른 말로 바꾸어 진술하는 것이다. 첫째로, 재 진술은 명확성을 얻어준다. 둘째로, 재 진술은 듣는 사람에게 진리를 심어준다. 셋째로, 재 진술은 반복과는 다르다. 반복(repetition)은 똑같은 것을 똑같은 말로 하는 것이고, 재 진술은 똑같은 것을 다른 말로 하는 것이다. 2. 설명(explanation)과 정의(definition) : 정의는 한계를 설정한다. 포함되어야 할 것과 배제되어야 할 것을 구분해 준다. 정의는 어떤 개념이나 진술이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것과 배제해야 하는 것을 규정한다. 그리고 설명은 어떤 관념이 다른 관념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또는 어떤 관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설교자는 분류, 동의어, 비교와 대조, 보기 등을 통하여 모든 중요한 개념을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3. 사실적 자료(factual information) : 관찰, 실례, 통계 등의 자료를 사용하여 진술의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 설교자와 상관없이 확인될 수 있는 조사 보고, 보기, 통계 등의 자료가 사실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4. 인용(quotation) : 강한 인상과 권위를 주기 위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효과적이고 탁월한 표현을 인용한다. 권위는 인정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1) 경험이나 훈련을 통하여 이 주제에 관해 권위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가? (2) 그 증거는 직접적인 지식에 근거한 것인가? (3) 그 권위는 편견에 사로잡혀서 나온 것인가? (4) 청중은 그의 증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를 알고 존경하는가?10) 설교에서 인용은 너무 많아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인용은 짧아야 한다. 때로는 약간 고쳐서 더 많은 열매를 얻도록 하는 것이 더 좋다. 5. 이야기(narration) 이야기는 성경 본문을 설명할 때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무슨 목적으로 하였는지에 대한 묘사이다. 이것은 보통 본문의 역사, 환경 도는 인물을 논함으로서 설교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된다. 이야기란 상상력을 발휘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은 신앙의 통찰력을 반영한다. 6. 실례(illustrations) 실례는 관념을 실제 경험에 관련시킴으로써 그 관념을 재 진술해 주거나 설명해 주거나 적용하는 것이다. 실례는 설교의 주제에 부합되고 회중에게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예화는 개인의 체험이나 독서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수집되고 정리될 수 있다. 10. 설교의 서론과 결론을 준비하라 1. 서론(introduction)의 준비 효과적인 서론의 주요 특징은 설교의 관념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필요성을 제기하며, 회중으로 하여금 설교의 본론과 그 발전에로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1) 주의를 끌어라 (2) 필요를 충족시켜라 (3) 설교의 본론을 소개하라 (4) 다른 여러 가지 특징들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성경 봉독, 유머, 제스처, 태도 등도 중요하다. 세 가지 형의 설교자가 있다. 첫째로, 도저히 귀를 기울여 그 설교를 들을 수 없는 설교자, 둘째로, 귀를 기울여 설교를 들을 만한 설교자, 셋째로, 귀를 기울여 설교를 듣지 않으면 안 되는 설교자가 있다. 설교의 서론을 하는 동안에 회중은 보통 설교자가 어떤 부류인지를 결정해버린다. 2. 결론의 준비 결론이란 “회중들에게 관념에 대한 전체적이고 완벽한 견해를 주는 것으로 그 진리로 하여금 마음과 생활 속에 깊이 박히게 하는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조종사는 비행기를 착륙시킬 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유능한 설교자는 결론을 위해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한다.” (1) 요약 : 강조점의 재 진술이지 재 설교가 돼서는 안 된다. (2) 예화 : 관념의 요약이나 실천을 보여주는 예화가 정곡을 찌르는 예화가 된다. (3) 인용 : 인용구, 찬송가, 설교 요약문 등이 될 수 있다. (4) 질문 : 적절한 질문을 통하여 효과적인결론을 지을 수 있다. (5) 기도 : 설교와 관련된 정직한 간구일 때 적절한 결론이 된다. (6) 특수한 방향 제시 :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7) 가시화(visualization) : 미래의 상황을 그려보고 설교에 따라 대처하게 해준다. 참고문헌 Barclay, William. A Spiritual Autobiography. Grand Rapids: Eerdmans, 1975. Brigance, William Norwood. Speech: Its Techniques and Disciplines in a Free Society. New York: Applet!!on-Century-Crofts, 1952. Davis, H. Grady. Design for Preaching. Philadelphia: Muhlenberg, 1958. Haselden, Kyle. The Urgency of Preaching. New York: Harper & Row, 1963. Miller, Donald G. The Way to Biblical Preaching. New York: Abingdon, 1957. Monroe, Alan H. Principles and Types of Speech. Chicago: Scott, Foresman, 1949. Robinson, Haddon W. Biblical Preaching. 정장복 역. 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Schaeffer, Francis A. True Spirituality. Wheaton, Ill.: Tyndale, 1971. Simpson, Matthew. Lectures on Preaching. 설교학 강의. Tozer, A. W. Of God and Man. Harrisburg, Pa.: Christian, 1960. 임태우 교수(한국개혁신학연구원)
강해설교와 내러티브 설교/ 2005-09-02
강해설교와 내러티브 설교 1. 서론 1970년대부터 미국의 main stream 교회들을 중심으로 신설교학의 바람이 불고 있으며, 이에 관한 저술들로는 Thomas Long의 일련의 저서들이 도움이 되며, 한국에서는 신설교학계 저술들이 ‘이야기식 설교’라는 부류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북미대륙에 불고 있는 신설교학 바람에 아직 둔감하다. 북미대륙의 강해설교와 오늘날 한국의 강해설교는 비슷하다. 신설교학자들은 자기들의 움직임이 종교개혁 이후 가장 획기적인 설교학계의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해설교자들은 신설교학에 대한 경계심이나 거부감을 감추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설교학자들이 강해설교를 싸잡아 비난했던 것과 신설교학의 발생 과정이나 기술, 관계 등에서 배타적이었던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2. 강해설교란 2.1 정의: Farris Whitesell1) ① 강해설교는 성경본문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② 강해설교는 본문의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의미를 찾는다. ③ 강해설교는 본문의 근본적 의미를 문맥에 연관시켜 찾는다. ④ 강해설교는 본문의 근본적인 의미에서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한다. ⑤ 강해설교는 이 보편적인 진리를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한다. ⑥ 강해설교는 본문의 진리를 회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수사학적인 요소인 설명, 논증, 예화, 적용을 사용한다. ⑦ 강해설교는 회중들로 하여금 본문의 진리를 순종하도록 설득한다. 2.2 중심 아이디어의 중요성 ∙ 위의 강해설교 정의를 따르면 본문을 오래 묵상하고 연구해서 본문의 중심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설교자는 한 가지 중심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설교를 작성해야 한다. 중심 개념을 전달할 때 설교 초기에 중심 아이디어를 밝힌 다음 연역적인 방법으로 3 대지 설교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다. 이동원 목사의 경우 귀납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3 삼 대지 설교 개요 말씀: 시편 19:1-14 제목: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 I.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말씀하신다. (19:1-6) A. 삶의 조용한 과정에서 B. 세상의 우주적 경이에서 II.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신다. (19:7-11) A. 성서에서 B. 하나님의 사람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III. 하나님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19:12-14) A. 실패와 죄의식에서 B. 좀 더 신앙적이 되기 위한 굶주림에서 2.4 점검표 ∙ 강해설교가들은 중심 아이디어를 축으로 설교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아래의 점검표를 갖는 것이 좋다고 한다. ① 일관성: 각 대지와 지는 논지를 지원해야 한다. ② 순서: 주요 단락들은 다같이 중요성이 부과되어야 한다. ③ 이동: 주요 단락은 이전단락과는 구별되게 전진하는 사상을 갖고 있어야 한다. ④ 배열: 주요 단락은 평행한 입장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⑤ 주요 단락들은 상향적으로 꾸며져야 한다. ∙ 한국의 강해설교가 위의 점검표를 따라 강해설교를 작성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은 많은 사람들이 강해설교라고는 하나 실상은 사뭇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 미국에서도 다른 종류의 설교들이 등장하면서 강해설교는 그 인기를 많이 잃었다. 3. 한국 교회 강해설교 약사 ∙ 한국 교계에 강해설교는 신학교의 설교학 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선교단체 출신의 중진 목회자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1980년대 초반 당시 40대 목사들이 Lloyd Johnson, John Stott 등의 설교를 접하면서 강해설교를 접하고 그 기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 데니스 레인 목사의 강해설교 세미나가 두란노에서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강해설교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졌다. ∙ 여러 선교단체의 성경공부 교재를 통해 강해설교를 향한 접근이 이루어졌다. ∙ 한국에 강해설교가 소개된 역사가 사실 이렇다면 미국의 신학교에서 교육받은 미국의 강해설교가들의 강해설교와는 차이가 날 것을 의심할 수 없다. 4. 강해설교자에 의한 강해설교의 수난 ∙ 강해설교의 대가인 Haddon Robinson은 “오늘날 강해설교가 강해설교가들에 의해 수난을 받고 있다”고 통탄한다. 장두만 박사 역시 한국 기독교계의 강해설교라는 옷을 입은 많은 강해설교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1986년에 지적했다. ∙ 강해설교를 잘한다고 하는 목사들조차도 기실은 강해설교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문맥 안에서 성경 본문이 말하는 원래의 의미를 찾아 청중들에게 던지고 도전하고 있는가의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5. 전통적 강해설교의 내용적 문제 5.1 설교의 중심명제가 본문의 중심명제가 아님 ∙ 본문의 중심사상을 교인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강해설교의 목적이어서 첫 번째 과제는 본문의 중심사상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강해설교가들의 경우 설교의 중심명제가 본문의 중심사상이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 특별히 한국의 저명한 강해설교가들 가운데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정통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도 중요하게 지적할 문제이다. 원어를 모르더라도 강해설교를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릇된 인식이다. 5.2 본문의 성격 오해 ∙ 성경 본문 한 절 한 절을 독립적으로 떨어진 덩어리로 보고, 한 절 한 절에서 설교 대지 혹은 소지를 찾는 문제이다. 5.3 중심 명제를 전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 강해설교에서는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디어를 전하는 것이 성경적 설교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소설이나 영화의 경우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외에도 많은 것들을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 역시 아이디어 뿐만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전달하고 있는 장르와 기법, 형식 등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6. 전통적 강해설교의 형식적 문제 6.1 전통적 3 대지 설교의 불만 ∙ 대지와 소지를 나누고 설교를 진행하는 것은 일련의 사상들의 집합이 된다. 복음을 전달할 때 연역적 전달뿐만 아니라 은유적 논리, 이야기 논리를 통한 전달도 가능하다. ∙ 하나의 대지에서 다른 대지로 넘어가는 데 있어서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인위적인 전이를 보게 된다. 6.2 연역적 접근의 한계 ∙ 초반에 설교의 중심사상이나 명제를 제시하고 세 개 혹은 네 개의 대지로 그 중심사상을 설명한다. 연역적 접근은 명료하고, 조직적이며, 설교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지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 그러나 연역적 접근은 삶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무시하고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삶의 정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7. 신설교학의 등장 ∙ 1971년 Fred Craddock은 As One Without Authority라는 책을 통해 그동안의 연역적인 설교를 통해 설교가들이 권위있는 자처럼 접근했는데, 이제는 권위없는 자처럼 귀납적인 접근으로 설교하자는 주장을 폈다. 이 저서가 바로 신설교학의 출발점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회중을 설교의 모든 부분에, 처음부터 참여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설교의 끝에 적용에서만 회중을 끌어들이는 기존의 관례를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 아래의 것들이 신설교학의 한 군을 이룬다. 이들 설교의 공통적인 특징은 ① 결론을 미리 애기하기를 거부하고, ② 순차적으로 이동하며, ③ 설교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략적으로 지연시키며, ④ 7.1 귀납법적 설교(inductive sermon) ∙ 성경을 주해할 때 성경 본문의 중심 아이디어를 가지고서 주해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귀납적인 접근으로 중심 아이디어를 찾아가는데, 왜 설교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우리의 삶은 귀납적인 요소들이 참 많다. 부부 사이의 사랑의 확인, 우리에 대한 타인의 인식 등등이 귀납적인 절차를 거친다는 것이다. ∙ 미국의 히피 운동의 영향으로 Craddock의 전알서는 대히트를 치고, 저자는 신설교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7.2 스토리 설교(story sermon) ∙ 스토리 설교와 내러티브 설교는 다르다. 스토리 설교는 설교를 하나의 스토리로 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 접근에 대해 상당히 제약을 받는다. 창의력이 없기 때문에. ∙ 미국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해주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에 본문과 상관없는 것같은 데로부터 본문으로 끌어오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 성경적 근거는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 비유 자체가 한 편의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심스럽게 준비되지 못한 경우 성경의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개인 잡담에 그칠 수밖에 없다. 7.3 내러티브 설교(narrative sermon; 이야기식 설교, 혹 이야기체 설교) ∙ 내러티브 설교는 한국어로 “이야기식” 설교 혹은 “이야기체” 설교 등으로 알려져있다. 스토리 안에서는 플롯이 있다. 갈등과 호기심으로 시작되어 반전을 거쳐 해소되는 것이다. 이러한 플롯을 가진 설교를 내러티브 설교라고 한다. ∙ 청중으로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다음 청중의 주의집중을 끌고 가서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증폭시킨 호기심을 갈등의 구조를 통해 반전시킴으로써 해소하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의 경우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왜 잘못된 것인가? 그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변론과 같은 질문을 던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주인이 잘못된 주인이라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이 때 지나치게 증폭시키면 자신이 처리할 수 없는 단계까지 가고 만다. 따라서 증폭은 자신이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자제하는 것이 좋다. 증폭된 호기심을 반전할 때는 생경한 용어와 다소 과격한 언어를 구사하기도 한다. ∙ 내러티브 설교를 주창하는 Lowry는 공간을 조직하는 사람(space construction)이 아니라 시간을 조직하는 사람(doing time player)이라고 한다. 즉 청중의 시간을 가지고 그 시간 내에 효과를 노린다는 것이다. ∙ 자칫 내러티브 설교는 복음의 핵심이 빠져버리기 쉽다. 성령과의 밀착된 관계, 깊은 기도, 성도와의 친밀한 교제, 성경 연구 등등의 바탕 위에 내러티브 설교가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7.4 초의식적인 African American 설교(transconscious African American sermon) 7.5 현상적 이동설교(Phenomenological move sermon) ∙ 인간의 의식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데, 설교가들은 성경 가운데 흥미있는 장면 흥미있는 아이디어를 던져주면서 그것들에 대한 사진을 찍도록 한다는 것이다. 아이디어를 그림 그리듯이 설명하면서 계속 다른 아이디어로 넘어가면서 청중이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 7.6 대화체-삽화체 설교(conversational-episodal sermon) ∙ 최근 대학로의 어떤 교회에서 시도했다고 한다. 한 주제나 본문을 놓고 벌이는 소그룹 토의처럼 설교가와 예배자들이 원탁에 둘러 앉아 모두가 말씀의 신비를 토의해가며 추구해가는 것이다. 8. 내러티브 설교의 장단점 ∙ 성경 자체가 다양한 장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설교가는 설교본문에 따라 적합한 설교 양식을 선택해야 한다. 따라서 설교 양식을 선택하는 것은 목양활동의 일부이다. 그런 면에서 다양한 설교 양식을 접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8.1 장점 ∙ 성경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종교의 경전들은 철학적 교훈, 신비스러운 이야기, 환상 등인데 반해, 성경, 특히 구약의 75%가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다. ∙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설교방식도 내러티브이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스토리 형식)로 말씀하셨고, 초대교회 역시 함께 떡을 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 현대 매체들이 모두 이야기식이다. 8.2 단점 ∙ 회중을 즐겁게 하는 데에는 강하나 말씀으로 교훈하고 가르치는 데는 약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별히 미국의 경우 성경보다는 설교가 자신의 일상 체험을 이야기하고 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 내러티브 설교의 경우 교인 스스로 결론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9. 결론 ∙ 내러티브 설교 방식은 강해설교를 더욱 성경적으로 만드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것같다. 즉 본문의 중심 주제를 드러낸 다음, 그 주제를 성경의 형식에 민감한 내러티브 형식으로 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 강해설교는 청중에 맞게 설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청중이 좋아하는 이야기식으로 본문의 중심 주제를 전달하는 것은 성경적이면서 강해설교가 추구하는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 특정 설교 형식이 성경적 설교라고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이다. 다양한 설교 형식의 장단점을 살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드러내고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 1) Farris D. Whitesell, Power in Expository Preaching (Old Tappan, NJ: Rebell, 1963), xv. 김지찬 목사
교회와 식당의 성장 이치 똑같다/ 2009-03-27
교회와 식당의 성장 이치 똑같다 좋은설교연구소 ‘완성도 높은 설교 컨퍼런스’···이동원 목사 등 강연 정윤석 완성도 높은 설교 컨퍼런스’ 두번째 날 곽선희 목사(소망교회 원로)는 ‘명쾌한 논리가 설교 완성도를 높인다’는 주제로 후배 목회자들에게 강연을 전하면서, 자신의 목회 경험을 통해 좋은 설교 전하는 방법들을 설명했다. 그는 “설교를 쉬지 말아야 한다”며 “설교를 통해 상대방이 알아듣고 결단한 이후 모든 것까지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전했다. 곽 목사는 “책임지지 못한다면 이는 설교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력하게 말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한국, 수직적·성전적 교회 필요 곽선희 목사는 설교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그가 생각하는 교회성장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교회성장에 있어 교회의 ‘인상’(이미지)과 목회자의 ‘설교’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경영적인 목회는 잘못된 것이라고 질타했다. 또 자신이 목회했던 소망교회에서는 예배를 위한 버스운행도 없었다는 사실을 들어 “복음을 맛본 사람들은 스스로 찾아온다”며 설교의 권위를 강조했다. 특히 그는 “한국교회 교인 쟁탈전이 심각한데, 개교회의 특성을 갖고 다양한 목회가 이뤄져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오늘날 교회는 ‘회당’적 이미지의 교회와 ‘성전’ 이미지의 교회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밖에 없었고 그곳이 만민이 기도하는 처소가 됐다”며 “현재의 한국교회들은 교인들과의 만남과 수평적 기능을 갖는 회당적 교회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말씀 선포와 기도 응답이 이뤄지는 수직적 기능을 담당하는 성전적 교회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또 “성전적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의 경건지수는 높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곽선희 목사는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므로, 교인들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라며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응답이 이뤄지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설교에 있어 치유역사 등 영적 역사가 일어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고 전하면서,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설교의 조건 몇 가지를 풀어 설명했다. 훌륭한 설교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곽선희 목사는 “훌륭한 설교를 전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영감이 있는, 복음적인 설교가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니, 목회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처럼 들려오면,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 자체가 생명력 있게 된다. 이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설교를 위해) 성경본문을 무릎꿇고 경건한 자세로 소리 내서 50번은 읽어보라”며 “성경을 영적으로 읽어나가면, 전할 것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특히 곽 목사는 “보는 것이 많아지면 듣는 것이 약해지고, 듣는 것이 많아지면 생각하는 것이 힘들어진다”며 “성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고 은은한 분위기 가운데 하나님과 내가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는 “예배 시간 전에는 조용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 “설교자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며, 그를 위해 성경을 많이 봐야 한다”고 말하고, 복음지향적인 설교에 대해 강조하면서 “목회자의 가치관과 생각이 완전히 복음적이어야 하며, 진리로 충만하고 확신에 가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번째로 곽선희 목사는 “훌륭한 설교를 전하기 위해 ‘효과적인 소통’이 필요하다”며 “교인들이 잘 아는 말(언어, 그들의 문화)로 설교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때문에 곽 목사 스스로도 교인들의 취미생활을 연구하고, 목회적으로 TV를 시청하는 등을 교인들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한다며 “현대인들의 정신세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설교를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책을 많이 읽어서 적어도 베스트셀러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덧붙여 전했다. 세번째로 곽선희 목사는 훌륭한 설교를 전하기 위해 검증된 진리를 통해 신뢰를 얻을 것을 강조했다. 그는 “군대 다녀와 본 목회자가 군인들에게 설교할 수 있다”며 목회에 있어서 삶과 생활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교회는 영적 권세도 있어야 하겠지만, 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때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곽 목사는 “뜨거운 가슴으로 복음을 실천해야 한다”며 행동적, 사건적, 역사적, 삶의 현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히브리식 설교’를 지향하라고 목회자들에게 촉구했다. 곽 목사는 마지막으로 “설교를 할 때 결론을 내지 말고, 듣는 교인들이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설교자의 결론이 길어지면 ‘잔소리’로 들린다”며 “서로 뻔히 다 아는 이야기인데 설교의 ‘부록’이 너무 길면 안된다. 설교를 통해 듣는 이들을 결론으로 유도하되, 결론은 각자 스스로 맺도록 만들라”고 말했다. 바울과 같은 십자가 중심의 설교가 진짜 설교 곽선희 목사는 가장 중요한 설교의 요건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강조했다. 그는 “설교는 지식을 주는 것도 아니고, 윤리 도덕 강연도 아니다”라며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잘 설명할 때 듣는 이들로 하여금 그 은혜에 감격해 세상을 밝게 만든다. 십자가 중심의 설교가 진짜 설교”라고 강조했다. 반면 “제일 큰 죄가 윤리적 설교, 다시 말하면 율법적인 설교”라며 “도덕 강연처럼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설교는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근본적인 것은 복음으로, 복음 안에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곽선희 목사는 훌륭한 설교자의 좋은 예로 바울을 소개하고, 바울처럼 ‘십자가 중심의 설교’를 전할 것을 강조했다. 곽 목사는 “한국교회에 구약설교가 많은데, 될 수 있으면 구약설교는 적게 하고 복음서 설교에 집중하면 좋겠다”며 “십자가 중심의 설교를 전할 때 설교자에게 권세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곽 목사는 바울이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큰 섭리로 바라보면서 불평불만을 갖지 않았던 점을 설명하면서 “목회자는 불평의 마음을 품지 말고, 인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영적 성찰과 통찰력, 하나님의 큰 섭리로 성경과 세상, 사건을 바라보는 훌륭한 설교자가 되라”고 요청했다. 이외에도 곽선희 목사는 “설교를 할 때 원고를 읽어서는 안 된다”며 “설교는 복음의 연출이다. 말로 음성으로 얼굴 표정으로 몸짓으로 연출하라”고 전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설교하라 또 곽선희 목사는 “긍정적인 사고 만이 복음은 아니다”라며 “십자가 안에 소망이 있는 것이지, ‘긍정’만을 추구하지 말라”고 한국교회 내에 만연한 성장주의, 기복신앙 등을 우려했다. 특히 참석자들에게 “교회성장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곽 목사는 마지막으로 “설교는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하는 것으로, 즐거움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마치 십자가 지는 마음으로 설교하고 새벽기도를 이끌지 말라”며 “목회자가 목회를 노동으로 생각하면 은혜가 없다”고 지적했다. ------------------------ 서울 신사동엔 유명한 설렁탕 집이 있다. 아침부터 사람들은 한 끼 식사를 위해 그곳에 간다. 그곳은 늘 문전성시다. 이유가 있다. 뭔가 특별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곽선희 목사(예수소망교회)가 <완성도 높은 설교컨퍼런스>에서 ‘명쾌한 논리가 설교 완성도를 높인다’는 주제로 강연하며 “교회성장과 식당성장의 이치가 똑같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곽 목사는 2009년 3월 23일부터 24일까지 국민일보와 좋은설교연구소(박영재 목사)가 주최한 행사에서 주강사로 나와 “잘되는 식당은 같은 음식을 해도 맛이 다르든지, 양념이 다르든지 반드시 이유가 있다”며 “현대 목회는 비빔밥이나 잡탕으로 승부해서는 안 되고 목회자와 교회가 고유한 ‘speciality’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곽 목사는 특히 목회자의 ‘스페셜리티’는 설교에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교인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이유의 99%가 설교 때문이다”며 “목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사람이고, 성도들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곽 목사는 설교를 잘하는 세 가지 비결을 제시했다. 첫째로 확신있고 영감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의 핵심은 목사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를 잘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불신앙이다. 목사는 설교를 하기 전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감사와 감격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그런 감사와 감격에 빠지려면 성경 읽는 방법부터 바꿔야 한다. 설교를 위해 성경 본문을 택했으면 50번을 읽으라. 파자마 바람에 츄리닝 입고 읽지 말고 무릎 꿇고 정장을 입고 경건한 자세로 소리 내어 읽어보라. 마음으로 감동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감동과 감격을 갖고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들어야 한다. 머리에서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다음에 가슴에서 불꽃이 튀길 때 그때 설교해야 감동있는 설교가 된다.” 둘째로 곽 목사는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인들의 언어에 익숙해야 한다. 그들의 상황과 마음을 잘 알아야 소통이 된다. 설교할 때 내가 일부러 골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골프를 치는 게 아니다. 서울 강남에 교회가 위치했다는 특수성 때문에 성도들과 소통을 해야 했다. 일부러 골프 책을 몇 권 사서 골프용어를 익혔다. 어느 날 설교를 하면서 ‘골프를 잘하는 비결’을 설명했다. 내가 교인들의 언어에 관심을 갖자 교인들이 내 설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드라마도 열심히 봐야 한다. 교인들이 보기 때문이다. 그래야 설교할 수 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 특히 베스트셀러를 놓쳐서는 안된다.” 셋째로 십자가의 진리를 전하라는 것이다. “구약 본문보다는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설교에서 많이 전하라. 핵심은 복음서에 두는 것이 좋다. 설교의 초점은 십자가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십자가가 곧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엔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려는 경륜적 신앙고백이 있다. 이것을 잘 설명할 때 위대한 설교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설교를 하다보면 적잖은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곽 목사는 자신이 평생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는 쪽지 하나가 있다고 소개했다. “미국 사람 하나가 예배에 와서 내 설교를 들었다. 설교가 끝난 뒤에 그가 메모를 써서 내게 줬다. ‘내가 20년 동안 기도해오던 게 있는데, 목사님 통해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멋지지 않은가? 목회는 이 재미로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많다. 자살하려고 했다가 설교를 듣고 마음을 고쳐먹은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가 많다.” 설교와 관련한 곽선희 목사의 주요 멘트 - 운전을 쉬면 운전이 어색해진다. 목회자는 설교를 쉬면 안된다. - <곽선희 목사로부터 배우는 설교>를 정독 3번 하라. 그러면 목회가 달라진다. - 교인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이유의 99%가 설교 때문이다. - 버스 운행을 하지 말고 교인들이 복음 때문에 스스로 교회를 찾아오도록 하라 - 난 45년간 새벽기도회를 개근했다. - 새벽기도회에 교인들보다 1시간 먼저 나가고, 기도회 끝나고도 1시간 나중에 나가라. - 원고를 보면서 설교하면 안 된다. 눈은 항상 교인들을 보면서 해야 한다. - 설교를 다 외워라. 그렇게 3년만 하면 도가 튼다. 이건 필수다. - 오는 사람 환영하고 가는 사람 붙들진 말라. 코드가 안 맞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성도들 다 붙들려고 하면 다 놓친다. - 목사가 강단에 섰을 때 얼굴 자체에 빛이 있어야 한다. 목사의 얼굴에 미소가 있어야 한다(이건 은혜가 있을 때 가능하다). - 설교도 심방도 목회도 모두 즐겁게 하라. 이걸 노동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목회자의 운명은 결정됐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곽선희 목사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책 서 문/ 김성수목사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책 서 문/ 김성수목사 2015-07-21 19:16:48 이 세상 어느 누가 과연 자신의 인생은 만족한 인생이었노라고 고백하며 이 땅을 떠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푸쉬킨처럼 은연중에 삶은 우리를 속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실제로 자신들은 삶에게 그렇게 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삶이라 표현을 했지만 사람들이 정작 섭섭해 하는 것은 그 삶을 주관하고 있는 어떤 힘 있는 존재에 대한 투정일 겝니다. 인생을 앞에 두고 단지 허둥대기만 했던 무능하고 가련한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 대학 시절은 그야말로 삶에 대한 공상으로 웃었다 울었다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인생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나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이러한 부모와 이러한 가정과 이러한 나라에 태어나게 된 것인지,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로부터 주어진 이 인생의 기간 동안 무엇을 하며 지내야 하며, 종국에는 이 땅을 떠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말 깜깜한 동굴을 지나는 듯 했습니다. 미국의 어느 조종사가 정리를 했다는 머피의 법칙은 꼭 나를 위하여 만들어진 법칙처럼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희망과 상상과는 늘 반대 방향으로 자리를 하는 것 같았고, 저는 그 때마다 누군가 나를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삶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마에 첫 주름이 생겨날 즈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프랑스 시인의 고백처럼 인생에 대한 신뢰와 동의가 제 안에 일어난 것입니다. 삶은 한 번도 나를 속인 적이 없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이지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않았든 내가 지나간 그 시간은 분명 나에게 유익이었다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어려움은 어려움으로 나의 인격적 성숙에 기여를 했고, 기쁨과 흥분은 그 나름대로 나의 인생의 맛깔스러움을 보태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후에도 삶의 이정표가 좀 더 명확했으면 하는 바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때마다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그 큰 손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이끄심에 전적인 동의를 하게 되었지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경륜하시는 창조주이시면서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의 벗이며 나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어둡고 추악한 세상 속에서도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며 동의하고 그 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잠시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이 땅에서 억지스러운 일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소망은 이곳이 아닌 하늘에 있기에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가슴 깊은 진심으로 기도를 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는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십자가의 원리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의 저주의 나무 막대기에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과 나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 나를 비우고 나를 죽여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입니다. 이 세상의 삶의 원리는 힘의 원리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언제든지 남을 밟을 수 있고 하나님마저도 어르고 달래서 나를 돕는 힘으로 동원해 버리는 그런 원리이지요. 이 둘은 언제나 충돌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땅에서 순조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대시대의 나그네와 이방인은 사회법 밖의 외인들이었습니다. 누가 괴롭혀도, 심지어 목숨을 위협해도 그들을 지켜 줄 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바로 그러한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창세전에 택함을 받습니다. 이 우주가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그 생명책을 근거로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신 것이며, 여전히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의 지킴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식을 자식답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삶에 깊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반성문도 쓰게 하시고 때로는 회초리를 대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를 번쩍 들어 올려주시며 ‘잘 했다’ 칭찬해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우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다정히 보듬어 안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 인생이 이만큼 온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삶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로 정확하게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지금 칠흑 같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계신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우리의 삶은 정직하고 정확하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혹 자신이 저질러 놓은 엄청난 죄 때문에 하늘나라 백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자신이 삶에게 속았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더럽고 추악한 존재가 맞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본 모습을 망각해 버리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떠난 자들의 추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우리에게 직접 경험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지만, 그 지저분한 놀라움을 추스르고 더 이상 그러한 어두움과 더러움이 없는 새 몸과 새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를 향한 정직한 삶의 기여입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우리 인생을 겪으면서 영원한 집인 하늘나라로 한발 한발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 하늘의 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성도다움을 훈련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이 땅의 무대 세트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더러운 죄를 반복하는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왜 나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한 가를 배우는 것이고, 허무(虛無)를 향해 돌진하는 역사를 바라보며 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쌓아놓은 물질과 공간은 불 타버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결국 어떻게 그들의 최후를 맞는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만이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들의 더러움이 폭로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뜻에 동의하는 자들의 행복이 드러나는 한시적인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와 물질과 공간의 한시적 역할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나라를 가르치고 하늘의 소망을 공고히 하는 사명을 가진 교회가 병이나 고치고 사업의 흥왕이나 빌어주고 자녀들의 입신양명을 기원하는 무당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린 시절 저녁 여섯시만 되면 어김없이 울려오는 애국가에 발길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마음에도 없는 경의를 표하던 기억이 납니다. 예배당에 앉아 혹시 그런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예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지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이며, 어디를 목적지로 삼아야 하는 것인지 정말 여러분은 아십니까?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저 어떤 힘 있는 존재의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이나 이루고 문제해결이나 하는 무속신앙의 모습과 섞여서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처럼 한국의 기독교는 이제 비빔밥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기복교가 되었다는 웃지 못할 농담이 정설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처럼 구복(求福)자가 어떤 큰 힘을 가진 존재에게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샤먼이라는 무당을 중재자로 세우고 그를 통해 치성을 드리는 것은 샤머니즘이라 불러야 옳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목사라는 샤먼을 중재자로 세우고 하나님이라는 그저 힘만 센 비인격적인 어떤 존재를 달래고 닦달해서 복이나 받아내려고 하는 그런 무당종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게 되면 첫 번째로 찾아오는 것이 ‘고난’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수많은 샤먼들은 자신의 세(勢)를 늘리고 과시하기 위해 그 ‘고난’ 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어줍지 않은 ‘복(福)’으로 포장을 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청중이 듣기 싫은 소리는 안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교회의 강대상에서 ‘죄’와 ‘회개’와 ‘고난’과 ‘심판’ 그리고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 같은 주제들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들이 ‘만사형통’ ‘질병치유’ ‘신비한 체험’ 같은 것들입니다. 과학적 논리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과학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신기한 현상 앞에서 맥을 못 추고 넘어갑니다. 물질주의, 실용주의, 역사 낙관주의, 성공주의, 소유 지향성, 맘모니즘에 젖은 현대인 들은 만사형통의 당근 앞에서 허리를 조아리고 연신 ‘주옵소서’를 외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아담의 자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掌中)으로 회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 보겠다는 타락한 인간들의 수많은 시도들과 열매들이 참으로 부질없음을 이 역사 속에서 올바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할 수 있도록 실수와 실패와 더러운 범죄도 때로 허락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절대 영원한 왕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기 위해 질병도 허락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참 행복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게 만드시기 위해 이 옛 하늘과 옛 땅이라는 물질과 공간에 정나미가 떨어지게도 만드십니다. 그러한 사건과 상황과 정황들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만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한 ‘자기’가 부인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자기를 왕처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다른 이들을 밟아왔던 옛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다 가신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가 진정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배우는 것이고 그렇게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의 삶을 기꺼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성경은 ‘천국’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자신의 손해로 남의 유익을 챙기는 삶이 과연 만사형통이요 일사천리로 나타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치성(致誠)을 드려 강청(强請)하기만 하면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기독교라면, 그 탐욕스런 기도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삶을 달게 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날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이 책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지가 올바로 제시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금주(5월 28일)의 설교를 위하여
금주(5월 28일)의 설교를 위하여 1. 사회력을 따라가던 본문은 이제 오순절 후 두번째 주일을 맞아 다시 교 회력으로 일시 환원되어 갈 1:1-1O이다. 6월에는 현충일 자료(6월 4일)와 6.25자 료가 사회력을 쫓아간다. 2. 사이비가 득세하고 있다. 정세가 어지러운 까닭은 무엇일까? 사이비는 구분되어져야 한다. 사이비는 추방되어야 한다. 사이비 기독교인, 사이비 목사, 사이비 부모, 사이비 지도자, 사이비 경찰, 사이비 기자, 사이비 정치인, 이 사회 구석 구석을 누비고 있는 사이비의 행렬을 주목하자. 3. 성도는 "의인인가? 죄인인가?" 구원의 전제조건은 "행위인가? 믿음 인가?" 교회의 사명은 "사회구원인가? 개인구원인가?"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바울의 심정으로 복음은 외쳐져야 한다. 다른 복음 은 안된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외쳐져야 한다. 한편 두편의 참고자료를 제공하면서 예시적으로 설교자료 내에 예화가 삽입 되어 있다. 회원 목회자들의 날카로운 지적을 기다린다.
김진홍 목사 설교는 무협지/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펴낸) 정용섭 목사/ 2007-01-11
김진홍목사 설교는 무협지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펴낸 정용섭 목사 목회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국 교회 풍토에서 목회자의 설교를 대놓고 비평하는 일은 드물었다. 특히 대형교회 목회자들, 설교 잘하기로 소문난 ‘인기’ 목회자들의 설교를 비평하는 일은 거의 금기시돼 왔다. 그런데 한국의 대표적 설교자들의 설교에 대한 비평을 사석이나 개인적 충고 차원이 아닌, 공적 매체를 통해 5년째 해오고 있는 인물이 있다.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이자 경북 경산에서 샘터교회를 이끌고 있는 정용섭 목사(53)가 그 주인공이다. 정 목사는 지난 2003년부터 월간 ‘기독교사상’에 연재했던 설교비평 중,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 등 내로라 하는 한국교회의 대표적 목회자 14인에 대한 것을 모아 최근 한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속 빈 설교, 꽉찬 설교’(대한기독교서회)라는 제목의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경향, 동아, 문화, 한겨레 등의 일반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반면 교계 언론들로부터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기독교 잡지에 이미 실린 글들의 모음이라는 점에서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일 수도 있고, 교계를 대표하는 분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애써 외면한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 목사는 곧 이어 대전중문침례교회 장경동 목사,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목사,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 등의 설교를 비평한 두 번째 설교비평서를 내놓을 계획이다. 그는 이 책의 머리글에서 국내 명망있는 목회자들의 설교에 대해 ‘성서 읽기의 아마추어리즘’이 두드러진다고 비판했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본질과 거리가 먼 기복주의나 성속(聖俗) 이원론, 신앙의 도구화 등이 설교에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책에서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설교는 ‘종교 강연’, 김진홍 목사(두레교회)의 설교는 ‘무협지’,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의 설교는 ‘시국 강연문’과 같다고 평했다. 뿐만 아니라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의 설교는 ‘사이비’, 이단 여부로 문제가 있는 김기동 목사(서울성락교회)의 설교는 ‘무당의 그것’, 박옥수 목사(기쁜소식강남교회)의 설교는 ‘타락한 구원론’ 등과 같이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해 비평했다. 반면 교회력과 해석학을 기반으로 성서 텍스트를 다각적ㆍ중층적으로 접근하는 박종화 목사(경동교회)나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임영수 목사(모새골공동체) 등은 ‘꽉 찬 설교’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직설적인 내용 탓에 이 책이 발간되자 (기 발표된 설교비평 모음집이라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독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 ‘비평하는 기준이 무엇이냐’, ‘그분들의 설교를 얼마나 들었다고 비평이냐’, ‘자기는 얼마나 설교를 잘하기에’, ‘설교학자도 아닌 사람이 웬 설교비평이냐’는 등의 격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다. 심지어 이번 책에서는 아니지만, 지난해 1월호 ‘기독교사상’ 설교비평의 당사자인 방인근 목사(수유리교회)는 월간 ‘활천’ 2007년 1월호에서 ‘정 목사가 독일에서 공부한 탓에 미국식 설교의 영향을 받은 목사들의 설교가 (정 목사의 입맛에) 잘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정 목사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세 명의 목사 중 독일에서 공부한 사람은 박종화 목사뿐이다.) 이에 기자는 정 목사와의 직접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의 독자들뿐 아니라,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접한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궁금증에 대해 그의 설명을 들어보았다. - ‘설교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서로 입장이 다르긴 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설교도 역시 비평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가 사이비 이단이라고 부르는 분들의 설교를 비평하는 이유는 그들의 가르침으로 많은 영혼이 잘못된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자칭 정통에 속하는 설교자들의 설교라고 해서 잘못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사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서로를 향해서 거짓 예언자라고 비평하기도 했고, 신약의 바울도 베드로와 바나바를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 설교학자들은 설교비평을 하지 않는데, ‘무식이 용감하다’는 표현처럼 설교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설교비평에 나서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설교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건 설교학자들의 몫입니다. 다만 조직신학을 전공한 저는 그들의 설교 내용이 기독교의 근본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 있는지를 말할 뿐입니다. 제 생각에 오늘의 설교학은 지나치게 방법론에 치우쳐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설교자가 기독교의 근본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면, 방법론을 잘 알면 알수록 그 피해는 훨씬 더 심각해지는 게 아닐까요? 저는 설교 전반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설교의 내용에 대해서만 평가하고 있습니다. 제 평가가 잘못됐다면 다른 학자들이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설교비평의 대상인 설교자 또는 청중(해당 교회 교인 또는 매니아)들로부터의 직접적인 반응들은 없었는지요 ▲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기 전에 <기독교 사상>에 이 글을 연재했었습니다. 지금도 물론 연재하고 있고요. 대상이 되었던 분들 중에서 최근에 두 분이 연락해 오셨습니다. 그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다수의 목사님들이 제 글을 접하지 못하셨든지, 아니면 반응을 보일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셨겠지요. 연락을 주신 두 분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적극적으로 저에게 말씀하신 분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두 세 분 정도 됩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자신들이 존경하는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비평했으니,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이게 바로 설교비평에 나선 저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신앙생활하는 평신도들에게 공연히 마음의 부담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는 그런 분들의 마음이 아플지 모르겠으나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본다면 결국 신앙의 심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그걸 기대합니다. - 설교비평은 어떤 기준에 따라 하시는지요 ▲ 핵심적으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 설교가 성서 텍스트에 충실한가’입니다.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많은 설교가 성서 텍스트보다는 설교자의 주관적인 신앙경험에 머물고 있습니다. 둘째, ‘설교자가 성서를 해석하고 있는가’입니다. 대개의 설교자들은 성서를 언급하더라도 그것을 신앙 정보의 차원에서만 다룰 뿐이지 해석하지 않습니다. 해석의 문제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한 대목인데, 간단히 말해서 설교자가 성서 텍스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의 두 가지 기준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설교학자들도 동의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동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설교’란 무엇인지요 ▲ 설교는 성서 텍스트에 근거해서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경험하게 돕는 행위입니다. 위의 언급에는 세 가지 핵심 주제가 있습니다. △성서 텍스트, △청중,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그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강단은 성서 텍스트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소홀하게 취급되고, 오직 청중들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교회 강단의 특징이 바로 ‘포퓰리즘’(populism)입니다. - ‘거짓말이다’, ‘사이비다’, ‘무협지같다’, ‘종교강연이다’… 등 비평에 사용된 용어들이 거칠다는 지적도 있는데, 이런 표현들이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글 쓸 당시의 격한 감정 때문인지요 ▲ 의도성은 없습니다. 다만 글을 쓸 당시의 감정이 거친 언어로 표출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제 눈에 그렇게 보인 걸 그대로 묘사한 것뿐입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제 언어를 상당히 순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만약 잘못 본 부분을 누가 지적해 주시면, 달게 받겠고, 제 잘못을 인정하겠습니다. - 설교 본문에 대한 비평이라기보다는, 설교를 통해 나타난 설교자의 신학 내지 설교자 개인에 대한 비평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설교 본문과 설교자의 신학 내지 신앙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덱거의 말처럼 설교자의 설교 본문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대상에 따라서 사람에게 무게를 두거나 또는 본문에 무게를 더 두는 경우가 없지 않았겠지만 설교본문과 설교자의 신학을 구별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문제점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 박옥수, 김기동 목사의 설교를 함께 평함으로써 이단 또는 이단 판정에 휘말린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나름대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단, 사이비에 대한 선입견 없이 단지 그들의 설교만을 평가했습니다. 나머지 판단은 독자들의 몫입니다. - 월 1회 기고하는 설교비평 작성을 위해 얼마만한 노력을 기울이시는지요. 보통 몇 편의 설교(문)를 들(읽)으시는지요 ▲ 대상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평균 두 주일 정도 이 일에 매달립니다. 살펴보는 설교 편수는 최소한 50편에서 200편 정도 됩니다. - 목사님의 설교비평을 보면 설교자는 조직신학과 성서해석학에 뛰어나야 할 것 같은데, 반대로 조직신학자나 성경해석학자가 탁월한 설교자가 못되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탁월한 설교자의 기준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아마도 대중성을 말씀하겠지요. 대중성 확보는 진리 여부와 상관없습니다. 대중을 선동할 줄 알면 대중성은 가능합니다. 기독교는 대중성이 아니라 진리에 천착해야 합니다. - 통상 설교학에서는 설교를 케리그마, 곧 하나님 말씀의 선포이므로 설교자가 강단에서 강하게 선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이 문제는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설득력 있게 말씀드릴 수가 없겠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사람의 구원은 설교자가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하십니다. 설교자가 자신의 신앙경험을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내세우면 결국 성령의 활동 영역이 줄어드는 게 아닐런지요. 설교자가 죽어야 성령이 산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군요. 성령의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서 설교자는 소극적인 선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 제 설교비평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신 분들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진리의 영이신 성령에게 의존하고 있다면 결국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이 차츰 밝혀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기독교의 진리는 무조건 감싸 안는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라 논쟁의 장으로 올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특히 우리는 중세시대의 로마가톨릭과 진리 논쟁에 적극적으로 나선 종교개혁자의 후예라는 사실도 아울러 기억했으면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김진홍 목사, 쉽고 즐거우나 깊이 없는 설교는 만담/ 목회와 신학단상/ 2010-07-07
김진홍 목사, “쉽고 즐거우나 깊이 없는 설교는 ‘만담’” “제 설교, 나아가 목회, 더 나아가 신앙의 기준은 ‘쉽게, 즐겁게, 깊이 있게, 적용할 수 있게, 변화되게’ 이상 5가지입니다. 제 설교는 ‘입’으로의 설교가 아닌 ‘발바닥’의 설교입니다.” ▲5일 연동교회에서 열린 미래목회포럼에서 강연 중인 김진홍 목사©뉴스미션 설교 인생 40년을 정리, 후배 목회자들에게 들려주다 한국교회 최고의 이야기꾼이자 설교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김진홍 목사(두레교회)가 자신의 ‘40년 설교 인생’을 고백했다. 5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연동교회에서 열린 ‘미래목회포럼 7주년 감사예배 및 기념강좌’에서다. 김 목사는 당초 ‘시대정신과 이야기 설교’를 주제로 강의할 예정이어서, 최근 뉴라이트연합 의장에 재추대된 것과 관련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한 발언들이 이날 강연에서 있지 않을까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사회자의 발언처럼 열흘간 독감에 시달리느라 준비를 못해서인지, 당초 주제와는 달리 자신의 설교 인생 40년을 정리해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1시간여 진행된 그의 강의는 그가 왜 한국교회 최고 이야기꾼이자 설교가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지를 잘 보여줬다. “사람을 재우면서 존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김 목사는 먼저 40여년간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지켜온 원칙 5가지를 하나하나 풀어놓으며 후배 목회자들도 그와 같이 하기를 권고했다. 그것들은 ‘△쉽게 △즐겁게 △깊이 있게 △적용할 수 있게 △변화되게’였다. 김 목사는 신대원 2학년 시절 청계천 활빈교회를 개척할 당시, 6개월여 설교시간에 교인들이 잠만 자는 것에 대해 나무랄 때 한 할머니로부터 접했던 충격적인 반응을 소개하며 ‘설교는 절대 쉽게 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할머니로부터 ‘사람을 재우면서 존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당최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며 “그 소리에 충격을 받아, 그 다음날 가지고 있던 모든 철학책들을 엿장수에게 팔아버리고, 교인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현장 언어를 배웠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어 “이후로는 책을 읽을 때도 ‘어떻게 교인들에게 쉽게 전달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읽었다”며 “그로부터 설교시간에 조는 사람이 없었고, 나중에 보니 지식인들도 쉽고 간결하게 설교하는 것을 더 좋아하더라”고 밝혔다. 쉽고 즐겁지만 깊이 없는 설교는 ‘만담’ 김 목사는 ‘쉽게’와 함께 ‘즐겁게 설교할 것’을 후배 목회자들에게 권고했다. 설교하는 자가 즐겁게 설교해야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즐겁다는 것이다. 그래야 교회 문을 나서는 교인들이 ‘그래, 말씀대로 부딪히며 살자’며 힘을 내고, 실제로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목사는 ‘쉽고 즐겁게만 설교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됨’을 강조했다. 쉽고 즐겁게 설교하되 깊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쉽고 즐겁기는 한데 깊이가 없는 설교는 ‘말재주’로 끝나게 되고, 웃고 즐겁게만 끝나면 ‘만담’이 되고 만다”며 “설교는 성경의 깊은 진리를 압축한 후 그것을 쉬운 말로 즐겁게 전달해 교인들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김 목사는 자신이 설교할 때 말을 천천히 하는 것도 바로 ‘깊이 있게 전하고자 함’ 때문이라고 밝혔다. 설교를 듣는 이들이 천천히 생각하면서 들을 수 있게 하려고 설교 속도를 의식적으로 한 박자 늦췄고, 그것이 몸에 뱄다는 것이다. ‘입’으로의 설교가 아닌, ‘발바닥’의 설교 특히 김 목사는 ‘적용’과 ‘변화’, 곧 ‘말씀의 살아 역사함’에까지 설교가 연결돼야 비로소 설교다운 설교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설교 내용이, 듣는 이들의 삶의 현장에 적용될 수 있게 그래서 삶이 변화되게 설교를 작성하고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내 설교에는 내 삶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이는 내가 실천하고 고민하는 것을 설교하기 때문”이라며 “내 설교는 ‘입’으로의 설교가 아닌, ‘발바닥’의 설교이며 ‘몸’의 설교”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그는 설교를 금요일, 토요일 서재에서가 아니라 일주일 내내 삶 전체로 준비한다. 월요일에 설교 구상 및 제목을 잡고, 이후 책ㆍ신문ㆍ경험 등을 통해 설교 구상을 발전시킨 뒤, 토요일에 윤곽을 잡아서 주일에 설교를 한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원고가 없다. 이를 위해 필요한 세 가지로서 김 목사는 △말씀에 대한 묵상 △폭넓은 독서 △삶에서 우러나오는 체험 등을 추천했다. 하지만 김 목사는 “매일 12시간씩 독서를 하는 목회자가 있다는 얘길 들었는데, 그건 아니다 싶다”며 “앞서 말한 세 가지가 균형을 이뤄야 하되, 독서는 반드시 말씀에 부차적이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는 설교를 이렇게 준비했다/ 2015-087-12
나는 설교를 이렇게 준비했다 초년생 목회자 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설교 준비의 전 과정을 수록하였습니다. 1. 설교를 이렇게 (1) 머리 말 목사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이다. 설교는 우선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목회의 성공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도시의 교회들은 한 주일의 설교가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유동하는 많은 성도들을 고정시키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요즘은 성도들이 교회를 정할 때 교파와 교단을 떠나 자신들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는 메시지가 있는 교회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명 설교자가 될 수 있을까? 이런 과제는 목사가 평생토록 갖는 고민이다. 이런 부분에 대하여 정답을 주고 또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모두 본 받을만한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다만 나름대로의 고민과 몸부림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고민을 들으면서 자신도 서서히 자신의 스타일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기록하려는 “나는 이렇게 설교를 하였다”는 글도 평생토록 이런 고민과 몸부림을 하면서 지내온 한 사람의 경험을 소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 주었으면 한다. 목사가 되기로 내가 목사가 되기로 작정한 것은 죽음의 고비를 넘는 질병에서 하나님께 약속을 하면서 시작된다. 1950년은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다가온 해였다. 결핵성 관절염과 맹장 주위염과 복막염, 늑막염과 위염 등등의 많은 질병이 동시에 나에게 다가오면서 병석에 눕기 시작하였는데 그로부터 무려 3년 반 동안을 병석에 누어 있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6.25 사변으로 치료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2년 12월 3일 오전 7시는 나에게 제 2의 삶이 허락되는 순간이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생명의 연장과 아울러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준비 단계 그 후 몸의 회복을 기다리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처음 성경을 완독한 것은 6.25 사변 도중이다. 그러나 회복을 기다리면서 완독한 것은 총회에서 나온 성경 통신과를 교재로 하여 완독 한 것이다. 이 경험은 참으로 유익한 성경 공부 방법이었다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면서 다독을 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읽은 성경은 약 70여독이라고 기억한다. 참고 서적 성경을 읽으면서도 난해한 부분이 있을 때마다 소화하기가 매우 어려웠었는데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건강이 호전되면서 보행이 가능해 지고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면서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1.4후퇴로 진해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고신측 교회인 남부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이 교회는 고신 독노회장 이약신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였다. 이 교회의 남 전도사는 많은 서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연히 전도사 사택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많은 서적을 보고 어려운 부탁을 하였다. 서적을 빌리는 것이다. 그때 전도사는 나의 제안을 쾌히 허락해 주었고 그래서 처음 빌린 서적이 일본 사람 黑崎幸吉의 신약성경 주석이다. 이 성경주석 전권을 한 권, 한 권 탐독하면서 많은 성경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그분의 소개로 일본 사람들이 번역 출판한 칼빈의 基督敎綱要 역시 탐독할 수 있었다. 당시 읽었던 성경과 성경 주해 그리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나의 목회 생활에서 가장 좋은 토양이 되어 주었다. 만일 후배들이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면 좋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설교준비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였느냐고 묻는다면 성경을 많이 읽는 것으로 설교를 준비하였다고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의 일이다. 어느 해 여름, 성경 전권을 읽으면서 매장마다 제목을 붙이고 또 설교 제목과 대지들을 성경책 여백에 기록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것은 어떤 경우, 어떤 본문이 주어져도 설교를 즉시 할 수 있는 준비로 이렇게 한 것이다. 사실 이런 수고를 거두어 드릴 기회는 목회 현장에서 극히 드물었지만 기억되는 경험도 있다. 성도들과 산 기도를 하는 과정에서 어느 여 성도가 자기가 좋아하는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를 본문으로 말씀을 한번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즉시 응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본문과 설교대지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 처녀 목회 시절 설교를 이렇게 (2) 처녀 목회 시절 나의 목회는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는데 당시는 농촌에 목회자들이 없는 교회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소속되어 있던 교회 목사님이 시찰장으로서 많은 교회들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주선으로 1957년 4월 첫 주일 부활절에 갈현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 교회는 파주군 대동면 갈현리에 위치한 교회로서 교세는 약 50명 정도의 장년이 모이는 교회였다. 장로는 없고 영수가 교회의 주동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교회에 토요일 저녁에 내려가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월요일 오전에 심방을 하고 저녁 기차로 상경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처녀 목회였지만 매우 인상이 남는 교회이다. 이 당시 설교 준비는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금촌역에 도착할 때까지 약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이 때가 설교 준비시간이다. 모든 잡념을 버리고 지금까지 읽었던 성경을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까지 머리 속으로 두루 살피면서 깊이 묵상하는 중에 설교 본문을 찾고 대지를 구상하고 그리고 전할 내용들을 약간씩 메모를 해나가는 것이 설교 원고의 전부였다. 설교 준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이때의 설교는 원고 중심이 아니라 영감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설교 도중에도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시어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들을 생각나게 하고, 더 좋은 말씀의 양식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신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라 당시의 설교는 성경 중심의 설교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는 것이 성경밖에 없으니 자연적으로 성경 말씀에서 설교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할 뿐이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설교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 성경을 여기 저기 찾아 읽어가면서 설교를 하였다. 이런 모습을 본 그 교회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는 젊은 남자 집사가 나의 설교를 듣고 성경을 얼마나 아시기에 설교 도중에도 계속 성경을 여기 저기 찾아가면서 설교를 하는가고 반문을 한 일이 있다. 우선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은 설교자에게는 큰 자산이다. 그러나 이때 잘못된 습관이 생겼는데 그것은 성경 본문을 보지 않고 머리에 남아 있는 성경 본문만으로 설교 준비를 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사실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면서 준비한 설교는 어딘가 모르게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 그리고 설교자인 나 자신도 은혜가 되었다. 그러나 본문을 읽지 않고 준비한 설교는 우선 강단에서 말씀을 읽을 때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설교자 자신이 은혜를 잃고 만다. 그래서 설교 준비는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면서 준비를 하여야 한다. 처녀 목회이고 목회 초년생이지만 성도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3. 모방 시대 모방 시대 갈현 교회의 목회는 매우 짧게 끝내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많은 은혜로운 사역을 주신 까닭이다. 첫째로 성도들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은 것이고, 둘째는 교회도 생기가 넘치면서 부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정의 사정으로 사임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48년 황해도에서 월남하여 정착한 곳이 금촌이다. 당시는 아동면 면소재지에 불과하였다.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선친이 월남 전, 이곳에 정미소를 구입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금촌 교회에 출석하였고 6.25 사변 후에도 역시 진해에서 상경하여 이곳에 정착을 하였다. 그러나 선친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상경하므로 가족은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기차로 매 주일 왕래를 하였는데 고등하교 시절은 기차통학을 하였으나 이때는 허약한 체력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어느 날 편지로 사임을 통고하고 친구 전도사를 대신 파견하였으나 성도들은 마음을 돌리고 다시 찾아주기를 바라면서 6개월간 전도사를 채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감사하고 미안하고 죄송한 일이다. 그후에는 서울에서 교육 전도사로서 사역을 하였기 때문에 별로 설교에 신경을 쓰지를 아니하였다. 그러나 신학을 졸업하고 첫 사역지로 충청남도 서산군 안면도의 복도교회에서 단독 목회를 시작하면서 설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이때는 국내에서 출판된 주석은 어드맨 성경 강해 정도였고 설교집도 별로 없었다. 이때에 나의 설교에 많은 힘과 자료를 제공한 설교집은 박형룡 박사와 한경직 목사의 설교집이다. 때로는 이 설교집을 표절도 하고 모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설교는 다른 분들의 설교를 모방하는 시기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떻게 설교를 구성하고 성경을 해석하고 인용했는지를 배우면서 나 스스로의 설교체를 정립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절에는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음 주일의 설교를 구상할 때가 많았다. 이런 습관은 그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이때 하나님은 새롭고도 신선한 영감을 주셨고 그때마다 그것을 기억하고 메모를 하는 것이 일과였다. 사실 바쁜 목회일정은 조용히 앉아서 설교를 준비하도록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새벽시간의 묵상은 매우 유익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토요일에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일주일동안 해산의 수고와 같은 노력과 수고가 있은 후 그것을 정리하는 것이 토요일의 작업이라고 하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4. 매튜 헨리 주석 매듀 헨리 주석 안면도의 사역은 나의 목회 인생 중에서 잊을 수 없는 많은 것을 가져다 준 기간이었다. 교회는 비록 빈약하였지만 성도들은 순진하였고 말씀을 갈망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은 학식이 많은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다. 낮에는 뙤약볕에서 일을 해야 하고 저녁에는 피곤한 몸으로 교회에 나와야 하는 처지의 신자들이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대도시의 큰 교회에서 하는 설교보다 더 힘들면서도 또 가치 있는 일이었다. 이들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강조하니 읽기는 읽으나 그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다. 이들을 위한 설교는 그래서 가능하면 쉽게 풀어야 했다. 이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결혼은 많은 부분에서 유익하였지만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고 주일에 설교를 하는데도 결혼은 유익하였다. 그 이유를 두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사도행전 3장에 있는 앉은뱅이를 고친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한 때의 일이다. 그 설교를 듣고 신혼의 아내가 “오늘 설교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둘째는 어느 날 동양의 명언을 소개하면서 설교 서두를 열어간 일이 있다. 이 설교를 들은 아내의 반응은 “어찌 설교 서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열지 않고 동양의 명언으로 열어가지요? 하나님의 말씀보다 동양의 명언이 더 중요한가요?”였다. 그렇다. 인간의 말이 아무리 좋은 말일지라도 인간 세상에 일어난 사건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는 필적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하는 목사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 사람들의 말이 더 높여져서는 안 된다. 세상의 사건이 우선되면 안 된다. 설교 서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식을 하자. 다시 한번 새길만한 말이다. 국내에는 설교를 위한 특별한 자료가 없는 이때에 특기할 사건이 생겼다. 미국에서 나의 개척을 돕는 할머니 한 분이 목회를 위해 어떤 책이 필요한가를 물어온 것이다. 그래서 매튜 헨리의 주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서신을 보냈더니 그분이 전권을 보내주었다. 이후 나 자신이 생각하여도 더욱 좋은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5. 문제 있는 교회의 설교 문제 있는 교회에서의 설교 목회란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생각이 다르고 습관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목회이기 때문에 그 모든 사람들을 모두 만족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설교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설교는 하여야 하고 성도들은 설교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목사의 설교를 통해 복음에 대하여 많은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목사의 설교가 성도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설교가 교회의 물의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설교는 신중하게 준비하여야 한다. 충남에서 목회를 할 때의 일이다. 이 교회는 6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많은 우여곡절도 갖고 있었다. 내가 부임할 당시도 역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렇게 문제가 있는 교회에서의 설교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이 교회에서 실시한 것은 첫째, 설교 원고에 번호를 매기고 참고서에도 번호를 매기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내용의 참고문헌은 다시 인용하지 않기로 원칙을 세운 것이다. 둘째, 예화도 철저하게 성경에서 인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한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박윤선 박사의 글에 성경에는 예화가 약 2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일생을 두고 사용해도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에서 예화를 들지 않고 세상 사건에서 예화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나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왔고 그후로는 가능하면 예화도 성경에서 인용하기로 결심하였다. 또 하나의 이유는 실제로 설교가 문제 거리가 되어 돌아온 일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 거리는 어느 주일 낮 예배를 마친 후의 일이다. 어느 남 집사가 사택으로 나를 찾아왔는데 그는 어느 집사님이 설교를 듣고 시험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 날 설교는 자기를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도를 알아보라고 하여 자기가 왔다는 것이다. 이때 나는 “설교란 그 곳에 앉아 있는 모든 성도들 곧 그분까지 포함된 모든 상도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인데 그 집사님이 자기에게 한 설교라고 생각되었다면 참으로 잘 들은 것이다. 그것은 매우 옳은 판단이다. 모든 성도들이 설교를 그렇게 들어야 한다. 그런데 한가지 미흡한 것이 있는데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으로서 듣고 마음에 찔림이 있으면 회개하여야 하고 은혜가 되면 아멘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누구를 공격하는 설교였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다니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일이라”고 하였다. 이런 저런 사건들은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고 가급적이면 예화까지 성경에서 들기로 하였다. 그래서 설교가 성경의 내용이 아니라고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사실 문제 있는 교회에서 설교 때문에 장로의 도전을 받은 일도 없지 아니하다. 그 사례는 다음과 같다. 루우벤은 이스라엘의 장자이지만 간음죄를 범함으로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갔고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각각 기업을 얻게 된다. 이 사실을 창세기를 강의하면서 설교를 하였는데, 그후 말썽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장로 한 분이 사택에 들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목사와 장로가 성경에 대하여 토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를 하였다. 그래서 승낙을 하였더니 요셉이 장자가 된 것이 성경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대상 5:1-2절을 제시하였더니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이런 것이 문제 있는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를 할 때 조심하여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준비하여야 하는 것이다. 6. 열정적인 설교 준비 열정적인 설교 준비 지방의 목회를 끝내고 서울로 부임한 이후의 일이다. 이 시기는 목회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었다. 교회는 비록 작았지만 그래도 열정을 품고 목회에 임하였고 설교 준비도 착실하게 하였다. 이때는 많은 주석과 신앙서적들이 서점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자료를 많이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책을 읽었고 또 주석도 많이 상고하였다. 그러면서도 잊지 않은 것은 한번 인용한 구절에는 참고 서적이든 주석이든 혹은 예화이든 모두 번호를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인용한 것은 다시 인용하지 않는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에 읽었던 책에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특징 중에 하나는 녹음기를 이용하여 설교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참고도서를 읽든지 성경을 읽든지 아니면 새벽기도회를 할 때 하나님께서 영감 어린 생각을 주시면 그때마다 이것을 모두 메모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목요일 저녁에 지금까지 메모하였던 단편들을 종합하여 어설픈 설교이지만 녹음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녹음한 설교를 들으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교의 내용과 조직, 그리고 표현과 언어의 선택 등을 생각하였고 최종적으로 이 설교를 통하여 무엇을 성도들에게 줄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묵상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 토요일에는 원고지에 기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된 원고를 보면서 다시 녹음을 하고 그것을 들으면서 억양과 강조해야 할 부분을 찾고 그리고 강조하는 방법도 표시를 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준비한 결과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읽었던 참고 도서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창작에 가까운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이렇게 준비한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섰을 때는 나 자신이 항상 은혜가 충만하였고 또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한가지 더 보충해 두고 싶은 것은 주일 예배 시에 설교를 녹음하고 그것을 잠자리에서 듣는 것이다. 자신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무엇인가 약간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은 퍽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7. 삶에의 적용 삶에의 적용 열정적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시기는 다른 분들의 설교를 인용하기보다 나 자신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설교를 많이 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이때도 약간의 어설픈 부분이 있었다. 즉 이때의 설교는 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주로 하였고 좀더 깊이 묵상하는 경우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는 것 정도였다. 그래서 영적 교훈을 많이 발견하면서 감격하였지만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말씀과 성도들의 삶을 연결시켜 주는 부분 곧 적용하는 부분에서 아직 미숙하였다. 삶에의 적용은 설교자로서 항상 고민해야 할 문제이지만 그래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도전을 준 사람은 역시 아내이다. 그는 삶에 적용이 잘 되지 않은 부분을 꼬집어 말하기를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냐”고 반문하곤 하였다. 설교가 성경을 잘 해석하여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고 또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를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제시하고 호소하는 것이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백번 타당한 말이다.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요구가 이것이니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소하는 것이 더 중요한데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내로부터 도전적인 말을 많이 듣곤 하였다. 그리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이때쯤부터 또 한가지 변화가 있은 것은 원고를 꼬박 꼬박 쓰는 것이다. 그 동안은 대소 요지를 적고 간단하게 요약된 것들을 기록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설교원고에 “했습니다”까지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했습니다”까지 기록하였어도 그것을 정확하게 읽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초등학교 학생들이 책을 읽는 어조로 읽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설교원고를 기록하는 것은 앞으로 큰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되면서 매우 유익하였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해방촌 교회 장로로 오랫동안 시무하신 백부님이 설교원고를 쓰는 것이 청중들에 대한 설교자의 예의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원고 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8. 큰 목회 큰 목회 젊은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설교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목회자들이 모이면 설교에 대한 정보를 서로 교환하기 일쑤이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 자기가 한 설교를 친구 목사에게 소개하면서 서로를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이런 사적인 모임이면서도 목회에 도움이 되는 모임을 수없이 가졌고 친구 목사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였다. 더욱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관점과 시각을 많이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런 모임은 통상적으로 월요일 오전에 다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친구 목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목사가 월요일 날 쉬어야 하는데 사실 쉴 수 없는 것은 다음 주일의 설교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의 휴일은 월요일이 아니라 주일 저녁예배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월요일부터는 다시 다음 주일 설교 본문과 제목 그리고 대소지를 구상하기 시작하고 내용을 채우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규모가 작은 교회에서는 이런 방법도 그나마 통하지만 대 교회가 되면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월요일도 한가하게 지낼 수 없는 것이 목사의 시간이다. 그래서 어영부영하다 보면 월요일이 지나가는데 그렇게 되면 더욱 목사에게는 다음 주일 설교가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은 목사만이 알고 있는 고민이고 사실이다. 그래서 자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년분 설교 본문과 제목을 12월에 미리 정해 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월요일에 설교 본문과 제목 때문에 고민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12월에 기도원에 올라가 조용히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면서 일년분 설교 본문과 제목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우선 절기를 위한 설교 본문을 정하고 그 중간 중간의 공간을 메우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그 결과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균형있게 설교 본문을 인용할 수 있었고 아울러 월요일에 설교 본문과 제목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월요일에 심방이나 기타 행사가 있을지라도 부담없이 임할 수 있게 되었고 새벽기도 때 혹은 성경을 읽든지 일반 서적을 읽는 과정에서 수시로 떠오르는 영감이나 좋은 인용구들을 놓치지 않고 인용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아울러 당시 섬기는 교회는 비록 작았지만 큰 교회를 섬길 수 있는 목회자가 된 것도 감사하였다. 9. 본문 설교 본문 설교 또 하나의 변화가 나의 강단에 찾아 왔다. 그것은 본문 설교이다. 요즘은 본문 설교에 대한 강의도 많고 또 본문 설교를 선호하는 목사도 많지만 나의 강단에 본문 설교가 들어오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인고의 진통 과정이 있은 다음의 일이다. 이를 위한 몸부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으나 10여 년간 설교한 제목과 본문을 종합하여 통계를 낸 일이 있다. 예를 들어 교리 설교는 전체의 몇%, 축복 설교는 전체의 몇%, 윤리 설교는 전체의 몇% 하는 식으로 설교의 제목을 따라 항목을 나누고 그 항목에 따라 통계를 낸 것이다. 그 결과 교리 설교는 극히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또 약간의 교리 설교 중에도 전체적인 교리가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어진 편중된 설교를 하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윤리 설교도 역시 빈약한 반면 축복 설교만은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었다. 이렇게 설교가 한쪽으로 편중되었을 때 성도들의 신앙이 균형있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성도들의 신앙을 균형있게 키우지 못하는 목사의 고민은 그래서 시작된 것이다. 이런 고민으로 몸부림을 하고 있을 때 교직자 수련회가 승동교회에서 개회되었고 어느 날 저녁, 김희보 학장의 특강이 있었는데 그분은 이런 고민을 본문 설교에서 찾았다고 하였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강의 내용은 자신은 요한 복음 1장을 18차례나 본문으로 삼고 주일 낮 예배시간에 강해 설교를 하였다는 것이다. 참으로 도전적인 강의였다. 지금까지 설교에 한 차례 사용한 성경 본문이나 예화는 절대로 다시 사용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는 나에게는 참으로 파격적인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본문 설교를 하기로 굳게 작정하고 처음 선택한 성경이 에베소서이다. 에베소서를 강해하면서 첫 번째로 지금까지 금과옥조로 생각하고 있었던 나의 고집을 깨끗이 씻었는데 그것은 엡 1장 3절에서 14절까지를 무려 8차례나 본문으로 삼고 하나님의 신령한 복에 대하여 설교를 한 것이다. 이것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더욱이 놀란 것은 에베소서를 강해하면서 그 속에서 기독교의 전체적인 교리와 성도의 생활 전반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신론에서 기독론을 거처 교회론에 이르기까지 가르칠 수 있었고 가정과 직장 생활에 이르는 모든 삶의 영역을 구체적으로 스스럼없이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설교를 하면서 또 하나 자신감을 얻은 것은 헌금 설교이다. 평소에는 헌금에 대하여 설교를 자제하는 형편이고 또 성도들 입장에서는 바르게 지도를 받아야 할 부분이면서도 오해의 소지를 갖고 있는 부분이 헌금에 대한 말씀인데 어떤 의도에서가 아니라 본문의 순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담 없이 헌금도 강조할 수 있었고 또 성도들도 그렇게 말씀을 부담 없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에베소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신령한 8복을 소개한다. 신령한 복이란 말의 출처는 1장 3절이고 첫 번째 복은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고(4절), 두 번째 복은 그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고(5절), 세 번째 복은 이런 은혜를 거저 주신 것이고(6절), 네 번째 복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이고(7절), 다섯 번째 복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넘치게 하신 것이고(8절), 여섯 번째 복은 그리스도안의 통일이고(10절), 일곱 번째 복은 그의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고(11절), 여덟 번째 복은 성령으로 인 치신 것(13절) 이다. 10. 개척교회 시절 개척교회 시절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일에 약간 틀을 잡아가고 있을 때 돌연 삶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1977년 3월 6일 화곡동에서 교회를 개척한 일이다. 개척교회를 처음 해 보는 입장에서 설렘도 있었지만 불안도 많았다. 그때의 일은 여기서 취급할 과제가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고 약간은 “나는 이렇게 개척을 하였습니다”에서 밝혔다고 생각한다. 여하간 개척이란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표현하면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것”이 개척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떻게 하면”을 반복적으로 생각하면서 활동하고 또 움직여야 했다. 그러니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할 시간이 줄어들게 되었고 그렇다고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일을 소흘히 할 수 없는 것이 개척 목사의 몸부림이다. 그때의 심정은 “주일마다 전쟁을 치르고 있다”라고 표현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한 시간의 설교가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한 시간의 설교에 한 영혼의 삶과 죽음이 달려 있는 것은 어느 목사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설교하는 목사가 얼마나 될까? 그러나 한시간의 설교가 교회를 부흥시킬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개척 목사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요즘 교인들은 새로 이사를 하면 주변의 많은 교회들을 모두 설렵하면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자기들의 마음에 맞아야만 등록을 한다. 따라서 목사의 설교는 그 교회의 부흥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개척을 하면서, 더욱이 많은 유동 인구가 있는 아파트지역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없는 시간은 어찌 할 수 없었다. 한계가 있는 체력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여 새로운 설교를 구상하고 준비하기는 하였지만 때로는 이전에 하였던 설교를 다시 사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때마다 신선한 꼴을 준비하지 못한 자책감으로 괴로워해야 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렇게 바쁜 시간 속에서도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표절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11. 재탕할 때 재탕할 때 설교자에게 가장 부끄러운 시간은 설교를 재탕할 때이다. 그것은 목사의 나태함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특별한 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탕은 재탕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재탕 설교를 할 때도 목사는 스스로를 위로할 때가 있다. 첫째, 부흥강사들은 새로운 메시지를 항상 준비하여 집회 시마다 새로운 설교를 할까 아니면 재탕 설교를 할까? 부흥 강사들에게 집회 시마다 새로운 설교를 요구한다면 아마 부흥강사를 할 수 있는 목사들이 얼마나 될까? 그들은 집회 시마다 재탕을 하고 또 하는 것이다. 그래도 성도들은 은혜를 받는다. 이런 경험은 진짜 부흥강사는 아니지만 나도 경험을 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또 본 교회에서 부흥회를 준비하면서 강사들의 설교를 미리 듣고 초청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유명한 부흥 강사도 역시 다른 교회에서 한 설교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둘째, 박형룡 박사의 설교집을 보면 설교 마지막에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분도 역시 한 원고를 가지고 여러 번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설교를 듣는 청중이 다르기 때문에 괜찮다고 자위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역시 재탕 설교인 것만은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면 설교자가 한 교회에서 재탕 설교를 하였을 때 어떻게 이것을 소화해야 할까? 성도들은 특별한 경우 곧 자신의 성경책에 설교 본문과 대지 혹은 날짜를 기록해 두지 않는 이상, 은혜 받은 설교를 7년 이상 기억하지를 못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말은 설교자가 7년을 일주기로 재탕을 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례가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은 재탕 설교를 하는 경우에도 이전의 설교 원고를 그대로 들고 나가라는 것은 아니다. 원고를 다시 읽고 다시 묵상을 하면서 때와 상황에 맞게 다시 조리를 해서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에 맞게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재탕 설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노력조차 없을 때 설교자는 성도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하면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고 말 것이다. 12. 절기 설교 절기 설교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해마다 돌아오는 교회의 절기이다. 부활절이나 성탄절 등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가 있다. 그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줄 수 있는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2, 3년 정도는 그런 대로 말씀을 준비하겠지만 장기 목회인 경우는 또 다르다. 새롭게 묵상하면서 작성한 설교이지만 작년도의 메시지와 거의 대동소이할 때가 많다. 이것도 역시 목사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작년도의 설교 원고를 약간 수정하여 재탕할 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목사의 양심이다. 내용상 작년도 설교와 대동소이하지만 새로운 감동을 위해 하나님께 더 많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기 위해 노력하였는가 아니면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작년도 설교와 50보 100보이기 때문에 적당히 준비하였는가 하는 차이는 있을 것이고, 이것은 목사가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입장이다. 목사의 설교는 자신의 이론이나 주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한 예언을 보면 반복된 말씀도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 그들은 같은 말을 반복하였을까?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준비하지 않은 설교와 그들의 메시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단 한가지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노력하였고 목사는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용에 큰 변화는 없을지언정 하나님께 오늘 주시는 말씀을 받기 위해 목사가 노력하였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새롭고도 훌륭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노력은 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이론으로 말씀을 준비하려고 하기 때문에 때로는 목사들도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13. 부목사와 교체하여 설교를 부목사와 교체하여 설교하는 경우 한국교회 목사들은 설교 때문에 참으로 많은 고생들을 한다. 동기생 가운데는 고인이 된 분들도 있고 은퇴를 한 분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단독 목회를 일찍 시작한 분도 있고 부목사로 오랫동안 섬긴 분도 있다. 각기 다른 처지에서 섬기는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의 일이다. 강도사 고시 합격이 늦어져 부목사로 있는 친구가 자기는 새벽 강단을 담당하고 있는데 새벽 3시에 일어나 설교를 준비하고 또 낮에는 심방을 하는데 참으로 피곤하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런 푸념을 들은 어느 친구가 귀엣말로 “목사가 새벽 설교 안하고 심방 안하는 사람 어디 있나? 우리는 주일 낮 설교, 주일 저녁 설교, 삼일 저녁 설교까지 하는데 말이야”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목사는 이렇게 많은 설교를 담당하여야 한다. 그리고 또 그 모든 설교는 항상 신선하여야 하고 은혜로워야 한다. 여기에 목사의 고민이 있고 또 몸부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서 말한 친구의 경우와 같이 부목사들과 설교를 나누어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필자도 나이가 들면서 부목사들에게 새벽강단을 위탁한 일이 있다. 그들은 참으로 많은 연구와 기도로 준비하였고 또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였다. 그런데 교인들의 반응은 “작은 목사의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큰 목사의 말씀에는 미치지 못한다”였다. 이런 견해는 말씀의 내용의 차이보다는 교인들의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식이 깨어지기 전에 부목사와 설교강단을 나누어 담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조심하여야 할 일이다. 도시 목회를 하다보면 새벽기도회에 타 교회 교인들도 다수 참석하는 경우를 본다. 이럴 때도 역시 담임목사의 설교를 사모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경우 담임목사가 강단을 지키는 것이 도리이다. 그리고 부득이하여 강단을 나누어 감당하여야 할 때는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참으로 송구스런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목사의 설교가 좋아서 은혜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부목사를 모시지 못하는 개척교회에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역시 모든 설교는 목사의 차지가 될 수밖에 없다. 목사는 설교 준비에 최선을 다 하여야 한다. 목사에게서 설교 준비는 죽음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죽음을 준비하듯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여야 한다. 14. 1부, 2부 예배 설교 1부 예배와 2부 예배 설교 화곡동에서 교회를 개척한 후 교회가 급성장하였다. 그때의 교회 이름은 성인 교회인데 친구 목사들 중에는 교회 명칭이 성인(成人)이기 때문에 유년기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성장을 하였다고 농담을 하는 분들이 있었다. 여하간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목사들에게는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스런 일이다. 당시 교회 건물이 50평밖에 돼지 않는 단층 건물이기 때문에 얼마가지 아니하여 2부 예배를 드려야 했다. 처음 예배를 1. 2부로 드려야 했을 때 목사의 새로운 고민은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같은 내용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같은 내용으로 한다는 것은 목사가 약간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고, 그렇다고 전혀 다른 내용으로 설교를 한다면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민 끝에 동일한 내용으로 설교를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다. 목사는 설교를 할 때 이것이 나의 마지막 설교가 될 수도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준비에서부터 설교를 마치는 순간까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최선을 다하여 준비된 모든 말씀을 전부를 남김없이 쏟아 놨을 때 설교를 하는 나 자신도 만족하였을 뿐 아니라 성도들도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후에 오는 이상한 현상이 생기곤 하였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고 또 그런 느낌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시간의 설교를 위해서는 다시 준비를 하여야 하고 또 무엇인가를 자신이 충전을 해야 했다. 그래서 다시 기도하고, 설교 원고를 다시 읽어가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곤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말할 수도 없었고 전할 수도 없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서 1,2부 예배의 설교가 동일한 내용이라도 재충전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하는 나도 새로웠고,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성도들도 재탕 설교라는 의식 없이 받을 수가 있었다. 15. 토요일에 행사가 있을 때 토요일에 행사가 있을 때 교회도 성장하고 목회자도 성장하면 자연적으로 목사는 많은 행사 때문에 말씀을 묵상할 시간을 뺏기게 된다. 노회와 총회 혹은 지역 사회의 일 뿐 아니라 교회의 일에도 토요일에 말씀을 묵상해야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요즘은 결혼식을 위시하여 회갑이나 70순 행사를 주말을 기하여 할 때가 많을 뿐 아니라 교회도 각종 임직식을 주말에 할 때가 많은 편이다. 나의 경험에는 1월 1일 장례식을 거행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목사들을 성경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곤혹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목사는 어떤 경우에도 주일 낮 설교와 저녁 설교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행사가 몇 주전부터 예정된 것이라면 사전에 준비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돌발적일 때는 더욱 곤혹스럽다. 이렇게 바쁜 일정 때문에 설교준비가 약간 소흘하면 성도들은 그것을 아주 쉽게 알아챌 뿐 아니라 그것을 오래 간직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은혜스럽지 못한 한편의 설교 때문에 성도들은 한 주간 동안 영적 빈곤을 느끼며 살아야 하고 그 영적 빈곤은 실제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때가 있으며 그렇게 되었을 때 성도는 목사의 설교와 영력에 회의를 갖게 된다. 이런 결과는 교회의 성장과도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이다. 목사는 아무리 바쁜 일정에 짓눌려 있을지라도 설교 준비만은 철저하여야 한다. 밤잠을 자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철저하여야 한다. 이것이 목사가 하여야 할 최선의 목회 일정이다. 16. 용어의 선택 용어의 선택 요즘 한국교회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서도 과연 그럴까 싶은 생각을 갖게 할 때가 많다. 더욱이 부흥강사들이나 간증강사들 중에는 저속한 말들을 사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과연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다면 어떤 용어를 사용하실까? 저속한 낱말들을 사용하실까 아니면 교양있는 낱말을 사용하실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낱말들을 사용하실 것만은 확실하다. 퍽 오래된 이야기다. 총각 집사로 주일학교 교육을 담당하고 있을 때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부흥회로 오시어 설교를 하시는 중 “도둑놈”이란 호칭을 “도둑놈”이라고 하지 않고 “도둑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도둑놈은 도둑놈이라야 격에 맞는 말이지만 그분은 “도둑 사람”이라고 표현했을 때 격에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떤 낱말들을 사용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해야 하는가를 망설이고 있을 때마다 그 목사님의 도둑 사람이 생각나곤 하였다. 그래서 목사가 강단에서 사용하는 낱말은 격에 맞는 말보다는 고급스런 말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나를 지배하곤 하였다. 그래서 사용하지 않는 낱말 중에 “자”가 있다. 예를 들어 믿는 성도들을 “믿는 자” 혹은 불신자를 “안 믿는 자”라고 한다. 물론 신자 불신자라고 표현할 때는 “자”를 사용해야겠지만 풀어 사용할 때는 결코 믿는 자, 안 믿는 자라고 하지 않고 “믿는 성도” 혹은 “안 믿는 분”이라고 존칭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유는 자(者)는 “놈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는 자”란 한글로 풀어쓰면 “믿는 놈”이란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낱말을 엄격하게 선택하다 보면 우리 주변에는 많은 부분에서 수정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 예를 몇 가지 들면 ”.... 되었던 것입니다”라든지, “.......하도록 하겠습니다”든지,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는 말들은 평범하게 거부감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렇게 표현한다고 잘못된 것은 전혀 없다. 그러나 “.... 되었던 것입니다” 보다는 “..... 되었습니다”가 더 분명하지 않을까? “......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다는 “.... 하겠습니다”가 더 명확하지 않은가? “......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보다는 “...... 감사합니다”가 더 분명한 감사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목사들 중에는 이렇게 간접 화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데 그것은 결코 성도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더 예를 들면 성경을 해석하면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표현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 합니다”라고 표현하여야 성도들이 강한 확신을 갖게 되지 않을까? 설교를 할 때는 옳고 교양있는 낱말을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확신 있는 말로 표현하여야 성도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7. 음성의 높낮이 음성의 높낮이 이런 경험을 소개하면 어떤 생각을 할는지 알 수 없으나 역시 좋은 경험이었기에 소개를 한다. 농촌 목회를 8년만에 끝내고 서울 평창동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로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어느 해, 서울 교직자회에서 목회자 수련회를 삼각산에 있는 기도원에서 개최한 일이 있다. 이때 어느 목사가 광고를 하였는데, 그 음성이 너무 부드럽고 고상하였다. 거칠고 큰 소리가 아니라 편안하면서도 가슴에 스며드는 음성이었다. 평생 그런 음성을 들어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았다. 이 경험은 나의 설교 음성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동기가 되었다. 큰 소리는 아무래도 거칠다. 성도들은 거칠고 시끄러운 소음을 듣는 것보다 부드럽고 편안한 음성, 호렙산의 엘리야에게 들려왔던 세미한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 그래서 최고로 아름다운 음성을 찾기 시작하였고 성도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음색으로 설교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이런 음성에 익숙해 있는 우리 교회 성도들은 외부 강사가 때로는 거칠게 큰 음성으로 설교를 하면 “왜 그 목사님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요? 귀머거리도 아닌데 말입니다”라는 반응이다. 그렇다. 성도들은 결코 귀머거리가 아니다. 지금은 각종 소음 공해로 노이로제가 될 지경인데 주일 날, 교회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사님의 설교마저 소음으로 느껴진다면 그 설교는 결코 은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음성 혹은 음색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몇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첫째, 설교준비가 덜되었으면 큰 음성으로 소리를 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설교의 내용이 깊지 못하면 성도들은 설교 시간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설교자 자신도 성도들의 반응을 읽어가면서 음성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기교를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는 조용한 음성으로 차분히 해도 내용만 깊으면 성도들은 은혜를 받는다는 사실을 설교자는 잊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설교를 더 좋아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젊은이 넘치는 목사님들은 자신의 성격과 감정을 그대로 설교에 표출할 때가 있다. 이것은 백 번 실패하는 설교이다. 18. 논리의 전개 방법 논리의 전개 방법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성과 논리의 전개이다. 그래서 대지가 있고 또 소지가 있는 법이다. 칼빈주의 설교의 기초는 3대지 설교이다. 그러나 본문 설교가 강단마다 유행하면서 이런 전통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전통에는 무엇인가 중요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내용이란 무엇일까? 첫째로 성경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명확하게 성도들에게 인식시키는 방법이 3대지 설교이다. 성경의 지식이 부족하고 또 복잡한 일상 생활에 젖어 있는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주어도 그것을 다 소화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지워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말씀의 요지를 명확하게 3개 정도로 추려서 전달하면 성도들도 기억하기가 쉽기 때문에 3대지 설교는 매우 좋은 설교 방법이다. 둘째로 설교자의 입장에서도 좋다. 많은 것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것보다 말씀의 요지를 3개 정도로 요약해서 집중적으로 설파해 나가는 것이 효과적인 설교 방법이다. 그러나 본문 설교에서는 첫째 대지는 무엇이고 둘째 대지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성경은 그렇게 대지 소지를 나누어 기록한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의 능력에 따라 국면을 전환하고 성도들의 환심과 생각의 방향을 유도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본문 설교에서도 얼마든지 3대지 설교는 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위해 필자가 사용한 방법은 설교 중에 성도들과 성경을 함께 읽는 방법이다. 다음은 설교를 진행하면서 어떻게 논리를 전개해야 할까 하는 문제이다. 첫 번째는 읽은 성경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여야 한다. 이것을 위해 그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잘 설명하여야 한다. 성경은 특수한 배경을 갖고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대지로 생각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셋째는 대지로 생각하고 있는 부분의 가장 중요한 내용 곧 중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설파해야 한다.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가 가장 역점을 두고 고민하여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고 요구하시는가? 이것을 위해 깊은 묵상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묵상과 고민이 없는 설교를 성도들은 쉽게 알아차리고 또 은혜도 받지 못한다. 이것을 위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는 방법 중 좋은 방법이 Q. T이고, Q.T 중에서도 필자가 소개하고 있는 육하원칙에 의한 Q.T이다. 넷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답안도 준비되어야 한다. 그 다음 두 번째 대지를 소개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방법도 역시 동일하다. 마지막 결론은 어떻게 맺어야 할까? 지금까지 말씀한 모든 것을 다시 반복하면서 복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성도들의 가슴에 심어주고 결단을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19. 예화의 가치 예화의 가치 어떤 분이 예화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설교에서의 예화는 창문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방에 창문이 없으면 아무리 화려하게 꾸민 방과 가구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설교라도 일반 평신도들이 듣고 소화하지 못하면 가치가 없는 설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적절한 예화는 설교를 빛나게 하는 역할 곧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잘 이해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예화에서도 부적절한 예화가 있다. 부적절한 예화란 첫째로 간증을 빙자한 자기 자랑은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의 간증은 아무리 소중하고 감동적인 것이라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간증은 자기만의 것이지 보평타당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기 가족의 일을 빙자하는 예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거리를 안겨 주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서 간증은 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는 사회적인 일들을 많이 예로 들고 있는데 시대성도 있고 또 현실적인 면도 있겠지만 현실이란 시간과 함께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부분을 예로 들어 설명하려면 많은 생각을 하여야 한다. 셋째는 격이 떨어지는 예화도 좋지 않다. 주님은 많은 예화를 사용하여 하늘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지만 격이 떨어지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다만 생황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들어 말씀을 하시곤 하였다. 가정 좋은 방법은 성경에서 예화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을 갖고 시대를 조명하고,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 가는 방법으로 설교를 이끌어 가면 가장 좋은 예화가 될 것이다. 예화를 언제 사용해야 가장 적절할까? 처음 시작할 때가 좋을까? 아니면 중간이 좋을까? 결론에서는 예화를 사용할 수 없을까? 예화를 사용하는 부분은 어느 때라도 무방하다. 충실한 내용만 구비되었으면 언제 사용하여도 무방하다.   20. 연속 설교 연속 설교 요즘의 강단에는 연속설교의 개념이 없어진지 오래다. 그 이유는 본문설교 혹은 강해 설교가 유행하면서 연속 설교란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신학교에서 명신홍 박사에게 설교학을 배우면서 연속 설교의 이점에 대하여 배웠고 또 실제로 강단에서 시도해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본문 설교이든지, 주해 설교이든지, 강해 설교이든지 한 주제를 놓고 연속적으로 설교를 해 나갈 때 항상 문제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하였다. 한 인물을 중심으로 설교를 연속적으로 해야할 때 지난주일 혹은 몇 주일 전의 설교 내용과 중복되는 경우, 혹은 그 내용을 알고 있어야 오늘의 설교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였다. 지난주일 설교 내용을 반복하자나 설교자도 따분하고 듣는 사람도 따분하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설교를 계속하면 마음이 찜찜하다. 그래서 종종 지난 주일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는가 라는 화두로 설명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역시 찜찜한 것은 변함이 없다. 더욱이 성경을 많이 읽은 성도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올 때는 더욱 착잡해 진다.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이 명신홍 박사의 연속 설교 기법이다. 그는 연속설교를 할 때 지난 주일이란 말을 쓰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무리 한 인물을 주제로 몇 주간을 연속하여 설교를 하는 경우에도 매주일의 설교가 완성된 하나의 독립적인 설교가 되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한가지 그는 아무리 흥미 있는 설교라도 동일한 주제로 7주간 이상을 넘지 말라고 하였다. 이런 원칙들은 지키기에는 매우 힘이 드는 원칙들이지만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원칙에서 한가지 더 추가된 것이 나에게 있다면 한시간의 설교에서 반복하거나 같은 표현을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되풀이해야 할 때도 새로운 문장과 새로운 낱말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항상 주의 깊게 설교를 듣도록 하는 것이다. 21. 성경적인 설교란? 성경적인 설교란? 모든 목회자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하는 설교는 모두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성경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도들은 그 말씀에 순종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참으로 그럴까? 어떤 설교자는 읽은 본문과 전혀 무관한 말씀을 하기 때문에 왜 그 본문을 읽었는지를 이해하기가 극히 곤란한 때가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세상적인 상황들을 성경적으로 조명하여 올바른 가치관과 삶의 정의를 주는 듯 하지만 실은 성경을 세상적인 상황에 유입시키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성경을 해석하면서 자기의 생각이나 혹은 고명한 학자들의 주장들을 소개할 때가 있다. 필자도 이런 경우가 있었던 것을 고백한다. 이런 경우 필자의 고민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주장을 전하는 것인가?”였다. 그러면 성경적인 설교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첫째, 성경에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한다고 성경적인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갈의 몸에서 이스마엘을 생산하였기 때문에 일부다처도 무방하다고 설교한다면 이는 성경적인 설교가 아니다. 성경적인 설교는 성경 전체의 사상과 상치되는 부분이 없어야 한다. 둘째, 성경을 해석할 때도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내 생각 혹은 내 판단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결론이라도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베드로 사도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 후 3:16). 성도들은 성경적인 설교를 원하고 있다. 설교자는 성경의 원리를 바로 알고 설교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 혹은 자기의 요구 혹은 자기의 주장들을 성경 구절에 도입하여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설교자가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2. Q.T와 설교 Q. T와 설교 요즘은 Q.T.를 모르면 목회를 못할 정도로 Q.T.가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Q.T의 진수를 알고 있는 목사들이 얼마나 될까? 이 질문은 교만이 아니라 심각한 고민에서 출발한 질문이다. Q.T와 관련하여 나에게 도전을 준 사람은 데니스 레인이다. 그는 본문 설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 중에서 “자신은 먼저 Q.T.를 하고 그 다음에 설교 준비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는 메시지를 먼저 받고 그것을 완전히 소화한 다음에 설교준비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왜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할까? 나의 경우에 의하면 Q.T를 설교 준비에 도입한 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설교는 결코 자신의 주장이나 경험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주시는 살아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따라서 설교자는 먼저 말씀을 통하여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아울러 주시는 메시지를 묵상하며 설교를 준비하여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준비된 설교는 오늘의 말씀은 “아마 이런 것 같습니다”라는 표현이나 “이 말씀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라는 표현이나 “어느 분의 말씀을 빌리면 그분은 이 말씀을 이런 뜻이라고 해석을 하였습니다”라는 표현이 현저하게 살아진 것이다. 즉 가정이나 상상이나 다른 사람의 주장을 소개하는 일에 인색해 진 것이다. 그 대신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성도들도 확신을 갖고 말씀에 순응하는 것을 수 없이 보았다. 그래서 Q.T는 설교 준비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면 우선 성경 본문과 설교 내용이 부합하지 않을 때가 많다. 왜 그 성경 본문을 읽었는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민하며 고개를 기웃거려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성경대로 설교는 자기 멋대로 하든지 아니면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는 화젯거리를 모아 설교라고 시간을 때우는 것을 수 없이 본다. 참으로 영적 빈곤의 시대에 우리는 처해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성경을 인용하여 자기의 주장 혹은 자기가 시도하는 일들을 합리화하는 경우도
나의 목회와 설교/ 2009-06-05
나의 목회와 설교 박영선 목사(서울 남포교회) 사실을 말씀드리면 저는 아직도 설교가 무엇이며 목회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설교가로서, 목회자로서 어떤 목표나 master plan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에 대한 짧은 안목이 있다면 목회를 하는 과정 속에서 서서히 생겨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 만나게 된 문제들을 놓고 고민하고 갈등하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자 생각한 때는 아마도 고등학교 1 학년 무렵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교회에서 성장하면서 한국 교회의 보수적이고 내세적인, 그리고 결사 각오의 신앙을 갈등 없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쯤에 교회가 왜 현실에 대한 발언이 없는가, 그것은 기독교의 가난함 때문인가 아니면 가르친 사람들이 못다 가르친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때에는 교회에 일년 중 몇 차례씩 부흥회가 있어서 이름 있는 분들, 설교를 잘 하시는 분들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는데 이 분들이 하시는 설교 내용을 듣더라도 대부분이 내세적이고 결정론적이지 그 방법과 과정은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 같은 신앙을 갖자는 데, 어떻게 하면 그런 신앙을 갖게 되는지, 그 방법적인 접근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성경의 본문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설교하면 그 분들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이처럼 소명에 대한 것도 일차적으로 목사, 하나님의 종, 이런 커다란 것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아휴, 내가 하는 게 낫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언제나 가졌던 가장 큰 숙제거리들은 신앙의 현실성 문제였습니다. 즉 내세적이고 종말적이기 때문에 외면되어 있는 지금이라는 삶과 인생의 가치에 관한 문제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화 라는 차원을 이해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어서 지금이라는 시간이 다만 내세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완성되는 시간이며 기회로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인격적 특성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제게 아주 중요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저의 설교에 있어서나 목회에 있어서 이것이 하나의 큰 요소가 되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통해 발견한 또 하나의 중요한 통찰은 일반 은총에 관한 것입니다. 은혜와 초월에 관한 것만이 하나님의 영역이거나 하나님의 복이 아니고 일반과 자연 속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하나님의 복 주심들이 있다는 것, 다만 문제는 죄가 들어와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초월적이고 내세적인 형태를 가진 것만이 아니고 보다 폭넓은 영역 속에 허락된 책임이며 특권임을 깨달은 것이 저에게 귀한 깨우침으로 설교에 배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몇 가지 깨우침으로 인해서 알게 된 것은 성경 속에 이 내용들이 다 있는데 한국교회의 설교는 이런 부분들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어떻다고 얘기하는 것은 좀 주제넘지만 제가 그 동안 교회에서 크면서 듣고 경험했던 모든 설교들은 이런 내용들은 손을 못 대고 오직 구원과 종말에 관한 것에 치중되었고, 성경의 어떤 구절이든 이 주제로만 끌고 갔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성경 전체를 말씀대로 한 번 추적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저 스스로도 성경의 내용을 차근차근 확인하고 싶고, 또 교인들한테도 정확하게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강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강해 설교를 하게 된 것은 설교의 한 방법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한 얘기와 내용을 제대로 추적을 해보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강해 설교를 통해서 배운, 깨우치게 된 아주 중요한 내용은 교회의 가치입니다. 물론 조직 신학에서 교회에 대해서 배웠지만, 성경을 강해하면서 배우게 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은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교회에 관한 얘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거의 다 교회론 입니다. 교회 앞에 보낸 편지이고, 교회에 준 내용들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알다시피 유형 교회를 의미하는 것 이전에 무형교회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들이고 그 편지들은 내용상 성화에 주제를 두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성화를 위해서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게 하고 그리스도가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도가 실패치 않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장한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의 설교와 목회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로소 어떤 방향을 갖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저에게 설교의 철학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커다란 주제나 목적을 제시하기는 곤란합니다. 처음부터 이제까지 제 목표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차근차근 파헤쳐 나가 보자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우선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성경 안에 있는 풍성한 내용들을 충분하게 나타내고 있지 못하므로 제대로 추적해서 그 내용을 제대로 한 번 파악해보자 하는 것이 설교에 있어서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물려받은 내세신앙 위에 전도운동과 성령운동에 몰두하고 있어 보입니다. 운동이 신앙의 균형을 놓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전체 내용 속에서 어떤 내용을 자신의 특기와 전공으로 삼는 것과, 그것만이 신앙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이런 신앙의 충만한 내용이 먼저 정리되고 소개되는 것이 시급합니다. 신학이 정립되지 않는 운동은 획일화되고 다양성과 충만함을 오해하고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죄,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 이 세 가지가 제 설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초석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주권자이시라고 해서 인간이 꼭 은혜만 구하고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대등한 관계를 요구합니다. 사랑은 한 쪽이 상대방을 종으로 부리거나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지지만 그 은혜를 입은 자가 하나님 앞에 책임 있게 반응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은혜로 입어야 됩니다. 필요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정하시고, 그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것도 하나님 쪽에서만 하시며 우리는 생산하지 못합니다. 이런 면을 인식할 때 죄가 강조되어야 됩니다. 죄가 충분히 지적되지 않아서 필요의 가치가 인간으로 옮겨지거나 또는 필요의 내용을 인간이 만들어낸 것 같은 인본주의적인 발상이 개입되면 기독교 신앙은 설자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서 죽으실 필요가 없어집니다. 전적인 은혜가 설자리가 없어집니다. 전적인 은혜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책임한 핑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입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로 서야하는 책임을 수반합니다. 저에게 목회는 교회가 어떻게 만들어지며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성경을 추적해서 하나씩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래야 된다, 교회는 뭘 해야 된다가 아니라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작업을 계속하는 한, 성공한 목회라든가 성공한 교회라든가 하는 식의 평가나 발상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설교가 목회 성공의 한 방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틀린 말입니다. 늘 같은 얘기만 있고, 현실적인 필요에 답하지 못하는 교회에 대하여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아직도 다수는 아니지만.) 설교의 방법이 아니라 설교의 내용에 있어서 충분한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갈증을 느낀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제 설교를 목회 성공의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주 넌센스입니다. 달리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이 내용을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 저한테 성공이라는 외형적인 성과를 주시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한국 교회가 지금만큼 제 설교를 열심히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이가 성공한 목사의 설교라고 해서 들었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추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굳이 제 목회의 방향을 말하라면 성화로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성화는 거룩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이라는 것은 아직 되지 않은 것이지만 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지까지 가도록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 목적지가 장소적인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내용과 수준의 문제이기에 내가 그것을 내 것으로 가져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거룩한 자가 되야 하는 것이지 거룩이라는 외부에 있는 어떤 물질을 내 안에다가 이입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거룩해져야 됩니다. 생각과 책임과 노력과 성품과 실천에 있어서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에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우리 쪽에서는 각자의 책임과 노력 여하에 따라서 누구는 세 번 연습해서 되고 누구는 삼백 번 연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에 대해서 은혜와 책임에 대해서 제가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 편을 들고 신앙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세상과 타협할 것이냐 하는 결정과 결정한 것을 내 것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인생이라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인생 속에서 이 싸움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 번만에 어떤 부분을 통과하고 깨우치고 자기한테 채워 내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은 평생을 걸쳐 싸워야 하기도 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는 이 부분을 교인들에게 제일 많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명분 있는 어떤 사업보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현장과 일상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 목회에 있어 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와 목회에 있어 제가 초점을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입니다. 교회란 무엇을 하는 곳이기 보다 되게 만드는 곳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신앙의 내용들과 성취에 과정이 있다는 것을 제발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시행착오가 있다는 것, 단숨에 되지 않는다는 것, 열심만으로 되지 않고 진지함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 소원해야 되지만 소원 위에 노력하고 연습해서야 도달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과정을 모두가 인정해서 시행착오를 감수하고 격려하고 응원하는 분위기가 아쉽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에 큰 아쉬움이 있습니다. 완전주의적 명분에 근거한 비평으로 실패한 자를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사람이 되도록 기다려 주고 격려해줘야 합니다. 하나의 사건,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맞다 틀리다, 너는 좋다 나쁘다라고 하는 것은 못할 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박영선 목사(서울 남포교회)
나의 설교를 말한다(2)/ 이재철 목사/ 2015-07-30
나의 설교를 말한다(2)/ 이재철 목사 1. ‘순서설교’로 회복된 순전한 말씀 생명력 넘치는 한 편의 설교가 선포되기 위해서는 새가 두 날개로 날듯 설교자로 부름받았다는 확실한 소명과 바람직한 설교의 노하우가 요청된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 싶다. 하지만,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로부터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렘23:14)”던 말씀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것이 강단의 오염과 변질 때문이란 진단이 옳다면, 특히 강단의 타락이 어떤 방식으로 설교해 왔느냐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설교자들이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해결책도 달라져야 한다. 설교의 노하우 문제를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일 테니 말이다. 인터뷰를 위해 이재철 목사의 설교를 다시 읽고 들으면서 그만이 가진 설교 노하우를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을 버렸다. 이재철 목사의 설교에서 소위 ‘어떻게’의 문제를 규명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기도 하지만, 20여 년 동안 50매 분량의 원고를 토씨 하나까지 완벽하게 외우고, ‘모두의 목사’가 되기 위해 토요일은 장례나 결혼 등의 약속을 모두 거절하며 설교 준비에 매달리고, 주일설교 때만 입는 의복과 신발이 있을 정도로 설교에 헌신할 수 있던 원동력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는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9시 30부터 11시 40분까지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실에서 진행되었다. 2. 설교의 두 가지 어려움 지강유철: 20여 년 동안의 설교를 돌아보실 때 어떤 감회가 드는지요? 이재철: 주님의교회에서는 목회를 처음 시작할 당시는 이미 교회의 용어나 메시지가 세상 사람들에게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을 때였습니다. 때문에,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화나 영화나 책 등등의 소재를 설교에 활용했던 것입니다. 세상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다 들어보니 성경과 교회의 이야기가 되도록 했다고나 할까요. 사도 요한도 구약용어로 하지 않고 ‘너희가 로고스를 알지 않느냐? 그 로고스가 바로 주님이야.’라고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제 설교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때문에 굳이 바깥 이야기를 가지고 들어오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부 이야기로 깊이 있게 설교해도 되겠다는 점을 분명하게 의식한 겁니다. 제 설교에 이러한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만, 20여 년 동안의 제 설교를 주님 앞에서 되돌아보면서 저는 제 실력으로 된 게 아니고 모두 그분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끝냈을 때마다 “이건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신 것”이라고 늘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지강유철: 주님의교회 10년 동안 가장 어려웠던 게 설교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의 말씀이신지요? 이재철: 설교가 어려운 것은 제 말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나 개인적인 논리를 풀어가는 것이 설교라면 아는 만큼 하면 되겠죠.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전해야 하고, 어떤 설교를 하느냐에 따라서 예배에 참여한 교우님들의 한 주일이 달라지거든요. 잘못 전하면 교우님들의 한 주일이 망가지지만, 하나님의 바른 통로가 되어 말씀을 전할 때 그분들의 한 주일 삶이 바로 세워집니다. 그러니 설교는 항상 부담스럽고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저는 어떤 본문을 놓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가 어려운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문학에서도 그 상황에 딱 들어맞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그 한 단어를 찾으려고 밤을 지새우지요. 주님께서 제게 주신 영감들을 빈부귀천, 남녀노소, 지식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려다 보니 설교가 늘 힘들었습니다. 3. 설교 비평이 나가야 할 방향 지강유철: 한국교회 내에서는 설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일종의 금기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는 공공연하게 설교 비평이 이루어집니다. 교인들은 설교에 대해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까요? 이재철: 저는 설교 비평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봅니다. 설교자들이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거든요. 하지만 설교 비평이 순기능을 감당하려면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문학에서는 소설가, 시인, 평론가가 구분됩니다. 평론가는 평론만 하고, 소설가나 시인은 평론을 읽으며 자기 작품을 되돌아보지요. 그러나 설교 평론이라고 하는 장르만은 없거든요. 설교 비평을 하는 분들도 결국 설교자이지요. 만약 설교자가 설교 비평만 계속한다면 어느 시점에 가서는 한계에 부딪힐 것입니다. 평론이란 주관의 틀을 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비평가들은 설교 비평과 더불어 자신이 비평한 설교 본문을 놓고 “나라면 이 본문으로 30분 동안 이렇게 설교하겠다.”는 것을 직접 설교문을 써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한국교회에 설교 비평의 문을 열어주신 그분들의 수고가 아름다운 열매로 결실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설교 비평은 설교자의 목회 자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령 교인들의 지식수준이 어떤지, 그 설교자는 주일 설교 이외에 새벽기도회, 수요성경공부, 구역성경공부 등등은 어떻게 하는지를 함께 고려해 봐야 설교자에게 도움 되는 비평이 될 것입니다. 설교자의 목회 자리와 함께 선포된 설교문의 시대 상황 또한 감안해야 합니다. 11월 23일에 연평도 포격이 있었습니다. 저는 다음 주일과 그 다음 주일에만 연평도라는 단어를 썼을 뿐, 그 뒤론 물론 앞으로도 안 쓸 거거든요. 연평도와 남북경색의 시대 상황은 제가 용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선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활자만 놓고 비평하게 되겠지요. 그러면 한 부분만 보는 설교 비평으로 축소되겠지요. 이제 막 시작된 한국교회의 설교 비평은 이런 점을 보완되면서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럼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설교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소설은 읽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설교비평가들 역시 비평가의 입장에서만 설교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교인들이 자기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를 비평가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신앙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독자가 스스로 선택한 소설 속으로 들어가서 등장인물과 대화하며 즐겁게 소설을 읽듯, 자기가 선택한 교회에서 듣는 설교를 열린 마음으로 받을 수 있어야 신앙적인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강유철: 최근에 나온 설교비평집을 몇 권 읽으니 대다수 비평이 첫 부분의 상찬과 본론에 해당하는 설교 비평이 서로를 부정하는 형국이더군요. 앞부분에서는 소위 우리 문학판의 ‘주례사 비평’이나 곡학아세가 아니냐고 할 정도로 설교자에게 상찬을 하고는 뒷부분에 가서는 설교자의 이제까지의 설교 전체를 한 마디로 매도하거나 그의 인격까지 부정한다는 오해를 살 정도로 비난을 퍼붓는 식의 설교 비평이 과연 설교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나 움직여 더 좋은 설교를 위해 분발하게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상찬이나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앞의 상찬을 뒤의 비판이 무색하게 만들거나 뒤의 비판이 앞의 상찬을 ‘허무 개그’로 만들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재철; 우리나라에서는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서구에는 전기문학이란 게 있습니다. 가령 이청준 씨에 대해서 비평을 하려면 그분의 일생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프랑스에서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남긴 전기보다 다른 사람이 쓴 프루스트 전기가 더 많거든요. 비평가는 소설가의 모든 삶의 자리를 다 알아야 비평이 되는데, 우리 설교 비평은 시작 단계이다 보니 지강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본적인 신뢰의 문제가 발생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종이에 프린트된 설교만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게 아니라 그 설교자 일생의 전문가가 되어 설교 비평을 한다면 설교자의 삶의 자리, 시대 상황이 다 포함된 비평이 되겠지요. 그쯤 되면 설교비평가들이 어떤 말을 해도 잘 듣지 않겠습니까? 4. 성경 전체로 확대되어야 할 교회력에 대한 강조 지강유철: 목사님께서 강해 설교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명명하신 순서설교는 교회력을 무시할 뿐 아니라 “손오공의 도술처럼 청중들에게 필요한 영적 양식을 자유자재로 풀어낼 수 있는” 목사님의 탁월한 능력이 오히려 성서 본문의 침묵을 가져왔다는 정용섭 목사님의 지적을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이재철: 정 목사님께서 그 비평에서 말씀하신 성무 일과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변경되고 보완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원형을 모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교회의 성무 일과가 동일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기독교가 초대교회로부터 2000여 년 동안 확정되고 형식화된 성무 일과를 사용해 온 게 사실이라면, 성무 일과도 사도신경처럼 지켜야 할지 모르죠. 그러나 성무 일과는 시대마다 끊임없이 변형되어 왔거든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의 초점이 ‘오실 예수’에 맞춰져 있고 신약성경의 초점이 ‘오신 예수’가 틀림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이나 성탄절에 특정 구절만 놓고 설교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을 축소시키는 게 아닐까요. 성무 일과를 배제하거나 경시하자는 게 아니라 성경 전체로 확대시켜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순서설교입니다. 제가 순서설교를 하기 때문에 설교 뒷부분에 가서 부활절에 대해 한두 번 언급하고 끝난다는 지적에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부활에 관한 본문을 선택하거나 부활이란 용어를 많이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설교 전체에 부활의 정신이 투영되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정 목사님께서 설교 전문자의 입장에서 제 순서설교가 주일설교로는 자격 미달이고 교양강좌나 신앙강좌라고 지적하신 것은 허물 많은 제게 좀 더 잘하라고 채찍질하신 것으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지강유철: 성무 일과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절대가 아닌 것을 절대화하는 건 아닌지요? 이재철: 교회력이란 결국 그 절기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성무 일과가 생겼다면 교회력에 있는 성경 구절만이 아니라 성경 66권 어디를 갖고서라도 설명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강유철: 정 목사님은 목사님께서 ‘기독교 신앙을 우리 시대 크리스천들의 감동적인 일상 속에서 확인하려고 애를 쓴다.’고 꼬집기도 하셨더군요. 이재철: 저는 그 말씀이 명확하게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감동적인 일상이라는 게 감동을 너무 작은 데서 찾는다는 말인지…. 만약 그런 의미라면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역사에 접근하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하나는 심성사(history of mentality)입니다. 심성사는 한 시대를 관통한 역사의 정신을 가지고 개별 사건을 해석하지요. 거기에 반대되는 것이 미시사(microhistory)인데요. 미시사는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통해 세계의 역사를 살핍니다. 성경의 어떤 본문을 해석할 때 66권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본문에 접근하는 방법으로는 다른 성경을 가지고 그 본문에 접근할 수도 있지만 아주 작은 사건, 아주 작은 미시사를 통해 접근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설교를 ‘심성사로 하느냐, 미시사로 하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두 가지를 병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지강유철: 정 목사님께서는 목사님의 설교가 “일상의 과부하에 걸렸다.”는 지적을 하시고 싶었던 것으로 읽힙니다. 그분에 의할 때 교인들이 이런 설교를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청교도적인 콤플렉스에 빠지거나, 적당한 위선에 만족하는 신앙적 처세술”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재철: 정 목사님은 제 설교가 일상에 함몰되어 민족사라던가 세계사를 놓친다는 점을 지적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경에 대한 지식적인 규명이 아니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설교자는 자기 설교를 통해 성령의 성화 되는 열매가 삶 속에서 맺어져야 하고, 교인의 삶 속에서도 성령의 열매가 결실하도록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인들의 자잘해 보이는 일상에 따스한 관심을 갖는 것은 설교가 성령의 열매로 귀결 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지강유철: 목사님의 설교는 신학적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존의 신앙을 강화하거나 이 시대에 요구되는 방향으로 개혁할 뿐, 신학적 영성을 심화시키지 못한다는 지적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이재철: 그 말씀도 겸허하게 받겠습니다. 제가 신학자의 신학적 영성을 못 따라가는 거야 당연하겠죠. 그러나 설교는 신학강연이 아니고,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신학도가 아닙니다. 신학적인 설교라는 게 뭘까요? 신학적 용어를 많이 쓰거나 신학 이론을 많이 소개하는 것일까요? 하나의 신학만 있는 게 아니지요. 근본적인 신학에서부터 자유주의 신학까지, 신학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습니다. 신학은 신학적인 탐구와 신학적인 용어로 신을 알고자 하는 인간의 몸부림이고, 설교는 바른 신학의 토대 위에서 신앙적인 용어로 신앙적인 삶을 살게 만드는 몸부림이죠. 이처럼 신학자의 강연과 설교는 용어는 물론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5. 전통적 해석을 넘어섰을 때 가능했던 종교개혁 지강유철: 최근에 나온 『설교자여, 승부수를 던져라』를 보니 정인교 교수님은 목사님의 설교에서 상상이 사실을 앞지르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을 하셨던데요. 이재철: 그런 경우가 많다고 하시고는 정작 예는 하나만 드셨더군요! 저의 요한복음 19장 23-30절 설교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26절이었지요.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 말씀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예수님께서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요한을 가리켜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전통적인 이 해석을 잘 압니다. 누구든 죽기 전에 하는 말은 평상시의 말과 다르거든요. 가벼운 말을 절대 하지 않지 않죠. 목회를 하면서 임종하시는 많은 분들의 마지막 말을 들었습니다. 만약 10분 뒤에 제 인생이 끝난다면 아내나 동역자나 아들들에게 불필요한 말을 하겠어요? 그래서 마지막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무게가 담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은 가상칠언 중 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뒤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내 영혼을 당신에게 맡깁니다”라 하시고 돌아가셨지요. 27절에서 예수님은 “요한아, 너의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26절에서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26절에는 ‘당신의’ 아들이라는 소유격이 없습니다. ‘귀네’라는 극존칭을 쓰면서 “어머니,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 어머니가 누굽니까? 자기를 뱄던 사람이에요. 누가복음 2장에는 어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시므온이 예수님에 대해 마리아에게 예언하잖아요.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말입니다. 마리아가 왜 예수님의 진짜 어머니입니까? 웬만한 엄마라면 지금 자기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못 박혀 죽고 있다면 십자가에서 끌어내릴 거 아닙니까? 예수는 요셉의 씨라고 절규하겠지요. 예수님께도 “너는 하나님 아들 아니야. 네 아버지는 저기 서 있는 요셉이야.”라고 울부짖었겠지요.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한 것을 알고 있었고,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라는 예언의 말씀대로 자기 아들이 인간을 위한 제물이 되어 고난 당할 것을 오래 전부터 알았습니다. 때문에,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지금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그 앞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어머니, 아시죠? 이제 제 인생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는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길 테니 여생을 편안히 쉬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이 전통적 해석처럼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어머니, 이제 요한이 아들 노릇 할 것입니다.”라는 의미였다면 소유격을 넣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병행구는 동일한 단어가 반복되니까요. 26절은 자기 배로 낳은 여자와 그 여자의 태에서 나온 예수님하고만 아는 교감을 담고 있거든요. 게다가 그 현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때문에 ‘요한아, 네 어머니’라는 말씀을 듣고는 그때로부터 60, 70세 노인이 될 때까지 마리아를 모셨습니다. 스승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고난을 어떻게 치르는 지를 봤기 때문에 요한은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 자기 일생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인교 교수님께서는 제가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과도한 해석을 했다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모든 성경을 전통적인 해석의 틀 속에서만 해석해야 한다면 어떻게 더 깊고 새로운 영적 해석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저의 새로운 해석이 문법적으로 절대 틀렸다면 제가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제 해석이 문법적으로 옳다면 한 번쯤은 다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6. 성경에 대해 신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 지강유철: 박윤선 목사님은 1970년대 초반에 쓴 잠언 주석에서 주역이나 불경을 비롯한 동양 사상이나 경전을 거침없이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많은 설교자들이 타종교의 경전이 인용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설교에서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을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이재철: 설교에서 세상의 책들은 얼마든지 인용될 수 있고 사용되어야 하지요. 왜냐하면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수단은 수없이 많거든요. 세상의 책들이 사용될 수 없다면 예화도 사용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서 비유는 다 빼버려야죠. 예수님은 갈릴리에 있는 빈민, 배우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자연의 이야기, 자연의 텍스트를 예화로 사용했거든요. 지강유철: 목사님께서는 설교 원고 전체를 외우고 강단에 오르지만 인용되는 성경구절은 반드시 보고 읽으십니다. 성경을 대하는 목사님의 태도가 은연 중에 드러난다고 보면 될까요? 이재철: 제가 다른 설교 내용은 다 외우면서 성경 본문은 반드시 보고 읽는 것은, ‘이 부분은 제 말이 아닙니다.’라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말씀을 전할 때도 그분의 말씀과 그 말씀을 풀어내는 저의 말을 구분하는 것이 저의 철칙입니다. 지강유철: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번역 성경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목사님의 말을 엄중하게 구분하십니다.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원어를 섬세하게 설명하시는 것과 번역된 성경을 정확하게 읽는 것 사이에서 긴장을 느끼지는 않는지요? 이재철: 제가 성경 본문 말씀에 대해서 외경심을 갖는 것은 글자 자체가 아니라 그 글자를 품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 때문입니다. 글자 속에만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축소되는 거잖아요. 성경 속의 글자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 텍스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제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바의 의미는 성경의 글자 자체 또는 번역된 성경 자체에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신을 품고 계신 말씀을 내 말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항상 겸손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7. 설교자의 ‘공공의 적’인 말씀의 수단화 지강유철: “설교자가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이 어떤 설교를 하느냐를 결정짓는다.”는 존 스토트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발의 등이요 빛”이라고 고백했는데 성경에 대한 목사님의 고백이 궁금합니다. 이재철: 성경은 그 속에 담긴 그분의 뜻과 정신으로 인해 절대적이지요. 성경을 가지고 설교함에 있어서 늘 경계를 늦출 수 없었던 점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화해선 안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설교자는 은연 중에 자기 목적을 위해서 말씀을 수단화할 수 있거든요. 설교자에 의해 수단화된 말씀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그분의 수단이 될 때 바른 설교자가 되는 거죠. 제가 순서설교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순서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강해 설교를 한다면 한 주에 많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해야 되니까 꺼리는 부분은 얼마든지 슬쩍 넘어가거나, 많은 구절들 가운데서 자신이 원하는 구절만 끄집어내어 강조하고픈 유혹에 빠지기가 쉽거든요. 그러나 한 절씩 한 절씩 설교하다 보면 그만큼 설교자의 의도는 배제될 수밖에 없죠.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8-30절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에베소 장로들은 모두 바울이 전도하여 장로로 세웠던 사람들인데 이제 다시는 못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언을 남기면서 너희들 중에 너희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나올 줄을 내가 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그러진 말’이란 헬라어는 ‘디아스트렙호’로 왜곡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도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고후2:17)라고 말합니다. 그가 볼 때에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혼잡하게 한다는 뜻의 ‘카펠류어’라는 동사는 카펠로스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단어로 행상인(行商人)을 의미합니다. 붙박이 점포를 가진 사람은 크든 작든 고객이 자기 동네 사람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든 상품을 팔 수 없지요. 그러나 행상은 오늘 물건을 파는 동네에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포도주 한 병에 물을 타서 두 병을 만들어 팔 수 있거든요. 바울의 눈에는 수많은 설교자들이 행상처럼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 말씀을 우리 시대에 적용시킨다면,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의 힘’ 등등은 모두 불순물인 거죠.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긍정의 힘을 가지고 세상에서 Top이 되어야 한다면 사도 바울은 바보죠. 그 분은 참수형(斬首刑)을 받고 죽었으니까요.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2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고린도후서 2장 17절과 4장 2절을 모두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번역했지만 4장 2절에 사용된 헬라어는 ‘돌로어’인데 미끼로 쓴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볼 때 어떤 설교자는 불순물을 넣어서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목회적 야망을 위해 말씀을 미끼로 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고후2:17) 설교했습니다. 사람 앞에서 설교한 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나는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나를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할 수 있던 것 아니겠습니까? 저를 포함한 모든 설교자들이 평생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8. 강조되어야 할 ‘부담과 십자가’로서의 설교 지강유철: 많은 신학자들은 ‘설교가 기독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하면서 설교자들은 타종교의 랍비나 스승들처럼 고대의 전통이나 경전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설교자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실로 엄청난 주장을 해 왔습니다. 설교는 그 어떤 것으로 대체 불가능한 기독교만의 독특한 제도라는 것이지요. 로이드 존스는 설교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요, 가장 가슴 벅차고, 가장 짜릿하며, 가장 보람이 있고, 가장 놀라운 일”이라고 했던데요. 동의하십니까? 이재철: 기독교가 태동된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의 로마카톨릭교회는 신부조차 성경을 모르고 집전을 했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도 아닌 라틴어 성경을 안 읽는다고 불에 태워 죽이기도 했습니다. 교직 제도를 위한 수단으로 로마카톨릭교회가 전락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동으로 마르틴 루터는 ‘솔라 피데(Sola Fide)’,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문트하우스’라고 했지요. ‘문트’는 독일어로 ‘mouth’라는 뜻이기 때문에 교회는 ‘설교의 집’입니다. 이와 같이 개신교가 설교의 집으로 태동되었던 역사적인 사실은 분명합니다. 지금도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에서는 설교가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이 세상에서 설교가 가장 위대한 일이고, 가장 가슴 벅차고, 가장 짜릿하고, 가장 놀라운 일이라 생각한다면 우월감을 갖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설교자의 말이 자칫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혼동될 수 있어요.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설교가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요소라고 할지라도 설교자에게는 설교가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이고, 의무이고, 십자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수단화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수가 있거든요. 9. 하나님의 생기로 회복되어 생령으로 살게 하는 설교 지강유철: 저는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설교를 거의 듣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설교자 자신이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견고한 확신이나 기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목사님에게 설교란 무엇입니까. 이재철: 하나님께서 흙을 빚으셔서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심으로 생령이 되게 하셨는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생기를 상실했지요. 그래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잖아요.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래의 흙인데, 그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기로 회복되어 생령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설교라고 저는 나름 정의합니다. 그 하나님의 생기를 전하려면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설교는 먼저 설교자 자신을 위한 성화의 과정이고, 다음으로는 스스로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생기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사랑의 실천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설교를 듣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는 전 과정에 조금이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더 철저하게 준비하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기의 통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강유철: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확신이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옛적에 선지자나 사도를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설교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확신을 가진 설교자를 만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목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하여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사람들,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확신시키고 계십니까? 이재철: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설교하고 있느냐는 취지로 물으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했던 내용을 기록한 사도행전 13장 48절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를 온전히 던져 말씀을 전했지만,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다 믿었던 건 절대 아니란 얘기입니다. 2000년 전 기록된 말씀이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을 어떻게 믿느냐고 제게 묻는다면, 또한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 오늘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습니다. 성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작품이 아닙니다. 성경은 제게 감동을 주거나 저한테 새로운 깨달음을 준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생명의 능력으로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거든요. 허물투성이에다 부정하고 자격 미달인 저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함께 신앙생활 하시는 많은 분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간의 말로는 자기 자식도 바로 세우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다른 가정을 사람의 말로 어떻게 바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안 되거든요. 하지만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주일 예배를 드렸던 많은 교우님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제까지 버리지 못했던 것을 버리고, 잡아야 할 것을 붙잡고, 가야 할 길을 걸어가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는 설명이 불가한 일이지요. 만약 어떤 사람 설교에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똑 같이 호응을 했다면 그 사람은 재담가이지 설교자가 아닙니다. 항상 어디엔가는 반발하는 분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바울이 설교를 했어도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만 믿었지 않았습니까? 10. 세상보다 세상을 더 잘 알아야 하는 설교자 지강유철: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남아공화국 개혁교회의 앨런 부삭 목사님의 설교에서 억압받는 자의 울부짖음과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또한 사회적인 문제들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가 있던데요. 이재철: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대상이 수도원 사람들이 아니고 세상 속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 말씀이 삶 속에 적용되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만 알아서는 안 되는 거죠. 역설적이게도 의사는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기 위해서 병의 전문가가 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은 밤이나 어둠이라는 겁니다. 설교자가 이 세상에서 빛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빛으로 살게끔 하려면 왜 이 세상이 어둠인지를 알아야 하는 거죠. 설교자는 의사가 병에 대해서 전문가이듯이 세상의 병리 현상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설교가 매일 그런 것만 터치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문제를 함께 해결할 방법을 찾다 보면 설교에서 고통당하는 이웃의 울부짖음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강유철: 존 스토트는 어느 책에선가 자기도 대다수 복음주의자들처럼 너무 논리 정연하려는 욕구가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자기에게도 모든 사안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불편해하는 약점이 있다는 거죠. 존 스토트가 너무 논리적이라면 목사님의 강단 언어는 너무 정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이 보통 사람들의 시장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면 설교 언어도 시장 한복판의 생생함과 평이함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재철: 좋은 지적입니다. 제가 완성된 원고가 아니라 대지만 적어 올라가서 설교한다면 정제된 표현만 사용하는 현재의 원칙이 고쳐지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시장의 언어로 기록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을 베드로에게 주로 쓰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에서 왕립교육을 받은 모세로 하여금 모세오경을 쓰게 하셨고, 다윗처럼 제왕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시편을 쓰게 했습니다. 예언서를 쓴 선지자들 또한 당시에 공부를 많이 한 제사장이 다수였습니다. 신약성경을 1/4이나 기록한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실 때 말을 주시지 않고 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말씀’이신데 당신의 말씀을 글로 주신 것입니다! 만약 설교가 그날 한 순간의 공기의 진동으로 끝나버린다면 어떻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두고두고 곱씹어 볼 수 있으려면 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문어체로 쓰느냐, 처음부터 구어체로 생각하느냐의 차이일 터인데, 제 경우는 문어체를 선택하다 보니까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죠. 시간이 나면 저도 TV 채널을 고정시키고 장경동 목사님의 설교 동영상을 봅니다. 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고, 제가 갖지 못한 탁월한 능력을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더러 그분 흉내를 내라고 하면 못 합니다.(일동 웃음) 11. 예수님이 내 설교의 모델 지강유철: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순서설교를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주님의교회를 말씀으로 회복시키셨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는 로이드 존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재철: 한 사람이 설교자로 살아가기까지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 많은 요인들이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설교자는 태어나는 것’이라 주장했다면 그 이야기가 맞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남과는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의미였다면 거기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설교자로 태어난 게 아니라 철저하게 되어졌거든요. 누님이 다섯 분이나 계셨기 때문에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을 쑥스러워하던 저를 아버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웅변대회에 출전시켰습니다. 직접 원고를 써서 외우게 하셨고, 호흡은 어디서 끊고, 발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셨죠. 그때부터 중학교 졸업 때까지 부산과 경상도에서 있는 모든 웅변대회에 출전선수로 나갔어요. 지나놓고 보니 그때 설교자로서 기본기가 갖춰진 거 같아요.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갑작스레 가장이 되었기 때문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생각해보니 유일하게 할 수 있던 일이 소장하셨던 책들을 읽는 것이더군요. 학교에 가서는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1년 내내 아버지 서재에 있는 책들을 읽었습니다. 이광수 소설, 월탄 박종화 선생님의 삼국지 등등…. 한글로 읽을 수 있는 책은 다 읽었지요. 이때 뭔가를 읽으면 정리하는 버릇이 저도 모르게 훈련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철저하게 믿음 속에서 저를 키우셨던 것,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튕겨져 나갔다가 손들고 돌아온 것이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결혼을 하자, 제 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뭔가를 삶으로 보여주었고, 홍성사를 경영하면서는 여러 작가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그들과 함께 한 여행이 어떻게 소설로 형상화되는지를 보면서 글자만 중요한 게 아니라 글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글자와 글자 사이의 함축된 행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황할 때 신부님이나 스님들과 교제하면서 다른 세상에 대한 경험을 하였고, 카톨릭 시인이신 구상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20년 이상 교제하면서 모태신앙을 가진 개신교인으로만 살아온 제 영혼의 백태가 벗겨졌습니다.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가서 교수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섭리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저를 설교자로 만드셨습니다. 지강유철: 끝으로 목사님이 오늘의 설교자로 서는 데 무엇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이재철: 하나님이시죠! 그분이 제 인생에서 경험하게 하시고, 제 삶 속에서 정리하게 하셨고, 또한 그것들을 통해 훈련시키셨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나 우찌무라 칸조오 등의 책을 읽으면서 받은 감동도 적지 않지만, 저를 이런 모습의 설교자로 있게 한 결정적인 영향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 설교의 최고, 최선의 모델이 되어주셨습니다. 지강유철: 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재철: 덕분에 다시 한 번 저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강유철의 변: 2000년부터 거의 매월 심층 인터뷰를 해 왔지만 설교자를 인터뷰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재철 목사와는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야 하는 관계이고, 인터뷰 주제가 한국교회 내에서 성감대처럼 예민한 ‘설교비평’이다 보니 심적 부담은 결코 작지 않았다. 게다가 이재철 목사의 빠듯한 연말 일정으로 인터뷰가 늦춰졌음에도 한 주간 독일 집회를 다녀온 다음 날의 늦은 저녁에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60을 넘긴 이재철 목사는 시차가 극복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자정이 거의 다 되어 끝난 인터뷰 이후에는 교인 문상(問喪)이 예정되어 있던 터였다. 때문에, 이재철 목사의 답변을 들으며 떠오르는 많은 질문들은 목구멍으로 삼켜야 했다. 몇 가지 질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첫째, 이재철 목사는 설교 비평이 전기문학처럼 한 설교자의 삶 전체는 물론 시대 상황과 목회 자리까지 모두 안 뒤에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나 또한 그런 설교비평가의 출현을 고대한다. 하지만 전기문학과 설교비평이 비교의 대상으로 적합한지의 문제는 더 따져봐야 할듯 하다. 비평에 있어서 작품 외적인 요소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놓고 문단에서는 아직까지 합의가 도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2. 둘째, 출석교회 설교에서 비평적 관점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설교를 들어야 한다는 이재철 목사의 말씀에 원칙적으로 반대할 교인은 없지 싶다. 문제는 열린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비성경적인 설교가 범람하는 이 땅에서, 더는 교회 선택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설교에 대한 바른 비평적 관점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 묻고 싶었다. 3. 셋째, 설교가 신앙의 강화와 신학적 영성의 심화 중 어디에 무게를 두어야 하느냐의 문제 또한 그리 녹녹치 않기에, 이재철 목사의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 했으나 그 또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끝에 떠올랐던 단어는 희망이었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자의 말을 우직스럽게 구분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유익이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미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결단에 온 몸을 던진 설교자가 아직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기 때문이다. <위의 글은 기독교사상 2011년 2월호에 실린 지강유철 선생의 인터뷰 형식으로 쓴 이재철 목사의 ‘나의 설교를 말한다’임.>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의 저자) 이재철 목사(100주년기념교회 목사)
독설의 대가 박영선 목사/ 2009-09-02
독설의 대가 박영선 목사(서울 남포교회) 그를 생각하면 웬지 \'괴짜\'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모호하면서도 이만큼 잘 설명해주는 수식어가 없는 듯도 하다. 이러한 성격은 \'독설\' 즉, 독특한 설교에도 잘 드러난다. 영화와 통속잡지, 당구와 카드게임이 예화 소재로 동원되고, 은어와 속어를 거침없이 쏟아내지만 그의 설교는 언제나 새콤하고 맛난 생명의 양식이다. ▶ 목회철학 박영선 목사님은 베일에 가려 있다. 많은 저서를 낸 저자이며 꽤 유명한 설교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인터뷰나 쏟아지는 강의와 세미나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그의 강한 신념 아래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 기천 명의 청·장년 신자가 출석하지만 상가건물에 세 들어 지내며 교회의 책임자는 목회자와 몇 몇 제직이 아니라 교우들 모두라고 말한다. 이는 모든 교우들이 왕같은 제사장이요, 교회의 주인이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 있게 자신들이 몸담은 교회 공동체를 지키고 이 공동체의 색깔과 내용과 질과 격을 높이는 일에 책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교회 철학을 극명히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수련회가 아니라 철저히 \'잘 노는 휴가\'를 외치는 남포교회의 수련회도 세안의 화젯거리 가운데 하나. 새벽기도회도 없다. 아침 8시에 아침식사를 한 후 10시에 아침강의를 제외하고는 저녁 식사 때까지 잘 쉬고 논다. 처음 참여한 사람은 너무나 \'독특\'한 수련회에 어리벙벙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거창한 구호나 틀에 박힌 프로그램과 은사운동을 통한 \'나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산다는, 신앙의 본질과 자신의 신앙관에 충실한 그만의 \'고집\'이다. 순수함을 지키기 위한 핍박과 눈물 없이 교회가 먼저 시류를 타고 타협하며 속세화에 앞장서는 이때, 하나님 앞에 나의 모습과 교회의 자리는 어떠한지 돌아보게 한다. ▶ 설교특징 그의 설교 특징은 첫째, 성경 한 줄 읽어놓고 적용한답시고 \'정직하자, 용서하자, 사랑하자\'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훈화는 절대 사절.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행하신 엄청난 구원의 일을 선명하게 현재화시키고, 그분의 업적이 나의 존재와 삶을 떠받치는 유일한 은혜의 사실이 되기에 쉼없이 거룩과 성화의 길을 걸어야 함을 설득력있게 선포하는 \'구속사 설교\'를 강조한다. 둘째, 제목만 봐도 어떤 결론이 등장할지 짐작가는 판에 박힌 설교가 아니라, 본문에 대한 전혀 색다른 해석을 통해 믿음의 새로운 분별력을 탄탄하게 갖도록 하는 통찰력 넘치는 설교를 한다. 셋째, 심오한 성경의 원리와 신학사상, 신자 삶의 다양한 국면들을 탄복할 수밖에 없는 비유를 동원, 날카롭게 쪼개 들어가는 실증적 설교라는 점에서 비류(比類)를 찾기 힘들다. ▶ 사이드스토리1 그의 당구실력은 실로 수준급이다. 당구론과 당구철학, 당구관도 가지고 있다. 모든 게임은 승부가 걸려있으며 승부를 걸고 하는 모든 것은 다 유익하다라는 것이 그의 지론.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하여 승리한 사람만이 진정한 승자라고 강조한다. 목돈이 걸린 당구 경기에서 질지언정 속임수를 쓰지 않아서 사범이 아닌 \'사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니 그의 강직함과 깐깐함을 잘 나타내주는 별명이라 할 수 있다. ▶ 사이드스토리1 남포교인들이 뽑은 목사님 별명 best 5 5등. \'깬돌이\' 4등 \'단추구멍\' 3등 \'허슬러\' 2등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1등 \'맥가이버\'
릭 워렌의 설교론/ 2015-07-23
릭 워렌의 설교론 릭 워렌의 설교론, “목적이 이끌어가는 설교의 목표는 순종, 그 결과는 제자” 다음은 새들백교회 설교 세미나에서 릭 워렌 목사가 강의한 ‘목적이 이끄는 설교’의 요약이다.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제자훈련자료실 제공(http://www.discipleN.com). 목적이 이끌어가는 설교의 목표는 순종(OBEDIENCE)이다. 목적이 이끌어가는 설교의 결과는 제자(A DISCIPLE)이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이 설교를 들은 후에 뭔가 행하기를 원하셨다. 당신은 오직 당신이 행하는(DO) 성경말씀만을 정말 믿는 것이다! 우리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고, 기억하고, 행하게 만들어줄 때 그들은 분명히 변화될 것이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이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다. 성경의 목표는 삶의 변화이다 특별히 우리의 인격을 (온전하게, 장성한 분량까지,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선한 일을 행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경적인 설교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정보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삶을 변화시키는 데 초점을 두어야만 한다. 1. 모든 행동은 확신에 기초한다. 2. 모든 죄의 뿌리에는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거짓이 존재한다. 3. 변화는 언제나 마음에서부터 출발한다. 4. 성도들이 변화하도록 돕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확신을 먼저 변화시켜야만 한다. 5. 사람들의 확신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들의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6.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를 가진 성경용어는 회개이다. 7. 당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적용된 하나님의 말씀이 변화시키는 것이다. 8. 내가 행동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회개의 결과 혹은 열매이다. 9. 설교의 가장 깊은 단계는 회개하라고 설교하는 것이다. 10. 지속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당신은 반드시 마음을 밝혀주어야 하며, 감정을 다루어야 할 뿐 아니라, 의지를 향해 도전해야만 한다. 모든 메시지는 \"그렇게 하시겠습니까?\"라는 두 단어에 귀착된다. 가장 많은 기술을 요하는 부분은 행동 단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가장 많은 기술을 요하는 부분은 진리를 기억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가. 수집하고 분류하라(COLLECT & CATEGORIZE) 내가 첫번째로 수집하는 것은 성경구절들이다. 적합한 성경구절을 찾는 법 1. 성경구절을 암송하는 습관을 계발하라. 2. 당신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된 모든 단어들의 리스트를 작성하라. 3. 그 주제와 관련해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성구사전을 사용해 찾으라. 4. 성구사전을 통해 연구한 내용을 저장해 둠으로써 당신 자신만의 주제별 성경을 만들라. 내가 성경구절 외에 수집하는 또 다른 것들 1. 인용문 : 이 주제에 관해 지혜자는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2. 기사 : 사람들은 이 주제에 관해 어떤 문제점이나 상처, 저항감을 가지고 있는가? 3. 책 : 이 주제나 본문에 대해 기록한 책은 어떤 것이 있는가? 4. 설교 테이프 : 이 주제에 대해 다른 설교자는 어떻게 설교했는가? 5. 예화 : 이 주제와 연관되는 현실의 사건이 있는가? 6. 카드에 적힌 성도들의 의견 : 이 주제에 대해 우리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7. 편지 : 주제별로 분류된 성도들의 간증 편지 이런 것들을 수집하는 방법 1. 서류보관함을 만들라. 2. 끊임없이 읽으라. 3. 인터넷을 활용하라. 4. 자료조사팀에서 섬길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라. 분류하라 1. 구절들간에 유사점을 찾으라. 2.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를 찾으라. 3. 육하원칙을 따라 질문해보라. :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4. 연구 노트를 수집하고, 파일로 정리하고, 보관하고, 묵상하는 시스팀을 구축하라. 5. 매일 매일 수집하고 분류하는 습관을 계발하라. 나. 연구하고 묵상하라(RESEARCH & REFLECT) 연구란 지성을 이용해 공부하는 것이다. 묵상이란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연구하라 (설교준비의 기술적인 부분) - \"주해\" 1. 본문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2.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묵상하라(설교준비의 신앙적인 부분) 3. 묵상이란 무엇인가? 집중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4. 중요함 : 당신은 묵상으로 급하게 뛰어들 수 없다. 5. 가장 창조적인 생각은 휴식을 취한 이후에 찾아온다. 묵상하는 동안 내가 하는 일 1.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2. 묵상하는 동안 떠오른 통찰력을 모두 기록한다. 다. 적용하고 배열하라(APPLY & ARRANGE) 적용은 두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답해준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 결론적으로 어떻다는 것인가? 설교에 보다 많은 적용을 넣는 방법 1. 항상 구체적인 반응을 목표로 삼으라. 본문을 연구하고 난 이후 가장 중요한 질문은 : 어떤 구체적인 반응을 요구할 것인가? 나는 청중들이 무엇을 생각하기를 원하는가? 나는 청중들이 무엇을 느끼기를 원하는가? 나는 청중들이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는가? 당신이 원하는 행동의 목표를 명확히 하라. 2. 먼저 설교자 자신의 삶에 적용함으로 본을 보이라 3. 통찰력 있는 질문을 던지라. 4. 구체적인 행동단계를 제시하라. 5. 실제적인 예를 제시하라. 6. 청중들에게 소망을 주라. 7. 적용이 대지가 되게 하라! 8. 각 대지마다 동사를 집어 넣으라. 9. 각 대지마다 예수님 혹은 하나님을 집어 넣으라. 10. 각 대지를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해 개인화시키라. 설교의 개요에 문제점이 무엇인가? * 추상적이다. * 3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 과거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 복잡한 언어를 사용한다. * 불완전한 문장을 사용한다. * 수동태 문장이다. 설교 개요의 어떤 부분이 옳은가? * 개인적이다. * 구체적이다. * 하나님 중심적이다. 11. 구체적인 실천과제를 제시하라. 멋있는(SMART) 실천과제는… S 구체적이어야 한다(Specific) M 동기부여가 되어야 한다(Motivational) A 실천가능 해야 한다(Attainable) R 적절해야 한다(Relevant) T 실천 여부를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Trackable) 배열하라 본문이 설교의 대의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청중들이 듣고 배우는 방식이 설교의 구조를 결정해야만 한다. 설교의 핵심이 적용이라면 내가 적용한 내용이 설교의 대지가 되어야만 한다! 최대의 효과를 가져오는 설교개요 배열법 1. 단순화시키라. 멋있기보다는 명확한 것이 더 중요하다. 2. 대지를 신속하게 제시하라. 3. 대지를 완전한 문장으로 진술하라. 4. 대지가 일관성과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하라. 5. 대지들이 분명하고 논리적인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지 점검하라. 설교를 통해 청중들을 움직이길 원한다면 설교 속에 역동성이 있어야만 한다. 6. 열정을 가지고 절정을 향해 나아가도록 대지를 배열하라. 7. 긴장과 이완을 사용해 대지를 배열하라. 8. 대지를 배열할 때 각 대지가 어떻게 들리는지 생각해보라. 9. 성경구절을 적은 설교 개요를 제공하라. 이럴 때의 몇 가지 유익한 점 비교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성경 구절을 찾느라고 겪는 당혹감을 없애준다.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내용을 다룰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구절을 함께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다. 청중들이 나중에 설교 내용을 다시 복습할 수 있다. 소그룹 모임의 토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여러 번역 성경을 사용할 수 있다. 참여를 높여준다. 설교개요가 없다면 청중들은 72시간 안에 설교내용의 90%를 잊어버린다. 마. 장식하고 맛을 내라(FASHION & FLAVOR) 나의 설교방법을 변화시켜준 6가지 질문 : 삶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커뮤니케이션하는 법 1. 가장 실제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2. 가장 긍정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3. 가장 격려가 되도록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4. 가장 쉽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5. 가장 개인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6. 가장 재미있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3 가지 맛을 내는 양념 1. 예화와 인용문을 사용해 맛을 내라. 그림을 그려주지 않고는 절대로 대지를 제시하지 말라. 예화사용에 대한 제안 오래된 예화집을 버려라. 가장 좋은 예화의 원천 : TV, 잡지, 뉴스, 인터넷, 삶 개인적인 예화를 사용할 때는 사용하는 동기를 점검하라. 당신의 가족 이야기를 할 때는 가족들의 허락을 받으라. 사실을 말하라. 연결고리를 생각하라.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라. 극적인 이야기는 아껴서 사용하라. 2. 유머를 사용해 맛을 내라. 3. 특별한 대지를 사용해 맛을 내라. 바. 다듬고 종합하라(TRIM and TIE TOGETHER) 다듬으라 1. 당신이 꼭 사용해야 할 구절들을 골라내라. 2. 배경자료들을 다듬으라. 3. 대지를 다듬으라. 4. 인용문과 예화를 다듬으라. 서론의 4가지 목적 1. 서론은 청중들과 설교자를 연결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반응을 얻어내기 전에 먼저 관계를 형성해야만 한다. 2. 서론은 청중들을 집중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3. 서론은 설교의 목적을 소개하기 위해 필요하다. 4. 서론은 “내가 왜 이 설교를 들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필요하다. 결론을 만들 때 피해야 할 실수들 1. 설교내용을 요약하기만 하지 말라. 2. 정말 그럴 작정이 아니라면 “결론적으로”라는 말을 쓰지 말라. 3. 결론을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 없다고 시간을 탓하지 말라. 4. 결론에서 새로운 것을 소개하지 말라. 5. 설교에서 다루고자 했던 네번째, 다섯번째 대지를 추가시키지 말라. 결론을 만들 때 꼭 해야 할 일 1. 어떤 식으로든 항상 그리스도를 드러내라. 2. 열정적으로 마무리하라. 3. 용기를 가지고 구체적인 반응을 요구하라. 4. 개인적인 적용이 되게 하라. 결론을 내리는 법 1. 주요 대지를 강력하게, 개인적으로 재진술하라. 2. 도전적인 예화를 사용하라. 3. 마음을 꿰뚫는 질문을 사용하라. 최고의 결론 1. 마무리 기도를 기록하라. 2. 1부 예배를 드린 후 결론을 수정하라. 3. 항상 그리스도를 영접할 기회를 제공하고 청중들의 반응을 기대하라. 헌신하도록 초청하는 법 1. 청중들이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라. 2. 헌신을 요청하기 전에 미리 계획하라. 3. 비신자들이 영접기도를 따라 하게 하라. 4. 헌신 초청 시간을 지나치게 길게 갖지 말라. 5. 인위적인 장애물들을 만들지 말라. 6. 새가족 안내센터를 통해 후속양육자료를 나눠주라. 7. 청중들의 반응을 기대하라. 내가 설교할 때 던지는 8가지 질문 I. 누구를 대상으로 설교할 것인가? II. 성경은 청중의 필요에 대해 무엇이라고 답하는가? 그러나 성경말씀을 오늘날의 필요에 적용시킴으로써 성경말씀의 적절성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 주말 구도자 예배 : 해당되는 구절들을 모아서 전달하는 (주제별) 주해 • 신자들을 위한 성경공부 : 구절구절을 이어서 연구하는 (권별) 주해 III. 가장 실제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설교의 목표가 변화된 삶이라면 적용은 설교의 최우선과제이다. 당신의 설교를 보다 실제적으로 바꾸는 법 A. 항상 구체적인 행동을 목표로 삼으라. B. “왜?”라는 질문에 답해주라. C. 어떻게 하면 실천할 수 있는지 보여주라. 우리는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라는 투의 강압적 설교는 줄이고, “이렇게 하십시오”라는 실천방법을 알려주는 설교를 늘일 필요가 있다. IV. 가장 긍정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부정적인 설교는 부정적인 사람으로 교회를 가득 채우게 한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화를 내시며 회심시키려 하지 않으셨다. 불신자들에 대해 우리가 던지는 기본적인 메시지는 복음(기쁜 소식, Good News)이다. 설교준비를 할 때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라. 1. 이 설교의 메시지는 복음인가? 2. 이 설교제목은 복음을 나타내는가? 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설교하는 법 : 의로운 대안을 장려하라. 부정적인 내용의 본문에 대해 설교하는 법 : 겸손과 사랑의 태도로 설교하라. V. 가장 격려가 되도록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개인적인 변화를 격려하는 핵심원칙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 말라. 변화가 일어날 것처럼 말하라! VI. 가장 쉽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변론” 은 이미 회심한 성도들에게나 효과가 있다. 예수님은 심오한 진리를 쉽게 가르치셨다. 쉽다는 것이 피상적이거나, 깊이가 없거나, 너무나도 단순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72시간 안에 우리가 들은 것의 95%를 잊어버린다. 설교를 쉽게 만드는 법 1. 설교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 2. 종교적인 용어 사용을 피하라. 3. 설교개요를 쉽게 하라. 4. 적용이 설교개요의 대지가 되게 하라. 5. 각 대지에 동사를 넣으라. 청중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본문의 내용만을 설명하는 설교개요가 아니라 본문의 적용점을 전달하는 설교개요를 사용하라. 성경이 설교의 대의를 결정하게 해야만 한다. 청중들의 필요가 구조를 결정하게 해야만 한다. VII. 가장 개인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TV의 영향력 :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 더 회의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클리가 1,000개 이상의 교회를 연구 조사한 결과 복음전도에 관해 • 높은 성장률을 보인 모든 목회자들은 3번 유형의 설교자였다. (조작하지 않는 대화형) • 중간 정도의 성장률을 보인 교회의 94% 목회자들은 1번 유형의 설교자였다. (외판원형 독백) • 낮은 성장률을 보인 교회의 87% 목회자들은 2번 유형의 설교자였다. (정보 전달형) 설교 스타일에 대해 • 높은 성장 – 97%의 목회자들이 긍정적인 설교패턴을 유지했다. • 중간 정도의 성장 – 81%의 목회자들이 부정적인 설교패턴을 유지했다. • 낮은 성장 – 75%의 목회자들이 부정적인 설교패턴을 유지했다. 영향력 있는 설교를 하는 법 1. 당신이 삶에서 겪고 있는 몸부림과 연약함을 솔직하게 나누라. 2. 어떤 부분에서 진보를 보이고 있는지 솔직하게 나누라. 3. 당신이 지금 배우고 있는 것을 나누라 내가 세운 원칙 : 느끼지 못하면, 잊어버린다. VIII. 가장 재미있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락(entertainment)의 정의 =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하는 것” 오늘날의 문화에서 재미없는 설교는 용서 받을 수 없다. 재미있게 설교하는 법 1. 전달방법을 다양화하라. 2. 대지를 제시할 때 꼭 그림언어를 사용하라. 3. 재미있는 이야기를 사용하라. 당신이 제시하는 원칙을 성경 인물의 예로 장식하라! 4. 유머를 사용하라. 유머의 유익 • 유머는 청중들의 긴장을 이완시킨다. • 유머는 수용하기에 고통스러운 진리를 보다 기분좋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 유머는 긍정적인 감동을 자아낸다.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교의 가장 중요한 열쇠 : 사람들을 사랑하라!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중요한 요소 : 친밀함!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설교를 많이 들으십시오! 2. 실천하십시오! 3. 당신이 보다 나은 설교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