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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베투스 처형한 칼빈에게 생명신학이란?/ 2010-03-03
세르베투스 처형한 칼빈에게 생명신학이란? 기독교학술원 제4회 월례회서 ‘영성과 생명’ 논의 ▲기독교학술원의 제4회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에 참석한 한영태 박사, 김영한 박사, 심창섭 박사, 이상직 박사(왼쪽부터) ⓒ 기독교학술원 제공 웨슬리와 칼빈, 본회퍼는 영성과 생명을 각각 어떻게 이해했을까?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은 2일 아침 서울 송천동 반도중앙교회에서 ‘영성과 생명의 이해’를 주제로 제4회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를 가졌다. 한영태 박사(서울신대 전 총장)가 웨슬리의 관점에서, 심창섭 박사(총신대 대학원장)가 칼빈의 관점에서, 이상직 박사(호서대 신대원장)가 본회퍼의 관점에서 각각 발표했다. 먼저 한 박사는 “하나님은 인간 뿐 아니라 식물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계의 원천”이라며 “이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면 모든 생명은 다 같이 존귀하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하나님의 영상을 반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창조주를 반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생명의 존귀함을 역설한 한 박사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거듭난 생명, 즉 ‘중생’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장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라지게 되면, 성령과 우리 영의 교제가 회복된다”며 “이것이 중생이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한 박사는 ‘성화와 성결’을 강조했는데, 웨슬리에게 있어서 이 부분이 특히 강조되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웨슬리신학은 구원론이 중심이요, 구원론의 핵심은 성화론이다. 이 말은 웨슬리의 성화론이 기독교 윤리가 아닌 구원론에 속한다는 것”이라며 “웨슬리는 성결과 구원을 동의어로 보았다. 그는 ‘성결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이며, 이런 의미에서 구원과 성결은 동의어가 된다’라고 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한 박사는 생명을 ‘우주적 구원’이라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고찰했다. 그는 “웨슬리의 구원론은 종말론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종말론적인 구원은 우주적”이라며 “즉 타락한 인간은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온전한 구원을 받게 되며, 인간의 타락 때문에 고통 가운데 있던 자연도 함께 구원받게 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발제한 심 박사는 “칼빈을 중심으로 생명신학을 논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졌다. 그에 따르면 칼빈이 살던 시대에는 생명신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더러, 특히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칼빈은 방조 내지 깊이 연계되어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이 한 인간의 생명을 사형에 처하도록 방조한 칼빈의 처사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를 생명존중의 개혁자라고 볼 수 없다”며 “그러나 세르베투스의 한 사건만 가지고 생명에 대한 그의 신학적 이해를 전체적으로 조명해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비록 생명신학이란 용어가 그의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칼빈이 개혁하고 바로 세우려 한 기독교 신앙자체가 생명의 종교이므로 칼빈의 신학 속에서 생명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신학적인 근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 박사에 따르면 칼빈의 생명신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칼빈은 철저하게 기독론 중심의 생명신학을 말하고 있다. 칼빈의 생명신학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나타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둘째, 칼빈은 생명에 관해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적인 삶을 강조하므로 성화론적인 관점에서 생명신학을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생명을 선물로 부여받았으므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칼빈의 생명신학은 미래의 영원한 삶을 최종적인 목적지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에서 생명을 이해할 때 현세의 삶은 영원한 미래의 삶에 비해 무가치하다고 말할 정도로 종말론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늘의 삶에 비해 세상의 삶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경고한다.] 마지막 발제자로 나선 이 박사는 본회퍼의 생애를 살핀 후 그의 영성 이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개인주의적 신앙관을 극복하고 교회 공동체로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교회 울타리를 높이 쌓는 수성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세상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이 중요하다. 셋째, 교회 공동체는 말씀과 기도의 삶을 공동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넷째, 은밀한 제자직의 중요성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약한 자로 고난을 당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니치게 성공신화에 빠져 타인을 섬기는 자세를 망각할 때 교회는 타락하고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세상의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과제를 본회퍼는 던져주고 있다. 이 박사는 여기에 “본회퍼의 이러한 영성신학에 미흡한 점이 있다면 인간을 새롭게 하시고 일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다는 점”이라며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며 인간의 업적과 노력, 도덕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에 대한 강조가 본회퍼에게서 더욱 발견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기독교학술원의 제5회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는 다음달 6일 오전 7시 서울 송천동 반도중앙교회에서 열릴 예정이며, ‘죽음에 대한 이해’를 주제로 김홍기 박사(감신대 총장),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담임), 강승삼 박사(KWMA 대표회장)가 발제한다. 김진영 기자
죄와 의지의 자유/John Calvin(존 칼빈)/ 롬7:23
죄와 의지의 자유 John Calvin 롬7:23 죄의 노예가 된 의지 선한 것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으며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가장 비참한 필연성에 포위 당하여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배워온 인간은 자기에게 결핍한 선과 잃어버린 자유를 갈망하도록 훈육(訓育)을 받아야 한다. 도한 자기가 가장 위대한 힘을 소유한다고 가상할 때보다 더 강한 열심을 가지고 게으름을 버려야 한다. 과연 철학자들은 이의없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이성이 주인 노릇을 한다고 한다. 이 이성은 등불과 같이 이성의 지혜로써 마음을 비치며, 여왕과 같이 의지를 주관한다. 그 반면에 감성은 시력이 미약하므로 활발치 않고 괴로움을 당한다. 그 결과그것은 언제든지 땅 위를 기어다니며 가장 거칠은 목표물 속에 빠지고 만다. 안약 어떤 욕망이 이성에게 복종하고 감성의 미혹에 저항할 수 있다면 그 욕망은 덕을 실천하고 바른 길을 거쳐서 의지에 연결된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그 욕망이 감성의 노예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므로 육욕으로 변질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들은 의지를 이성과 감정의 중간점에 두어서 그것이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원하는 대로 이성에 복종하기도 하고 감성의 폭력에 복종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이성이 그 자체를 정당히 통할(統轄)하기에 충분하며, 이성에 종속하는 의지는 과연 악한 목표를 지향하는 감성에게 미혹을 받으나 자유 선택력을 소유하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주도자가 되는 이성에게 추종하는데 아무 장애물이 있을 수 없다고 모든 철학자들은 생각한다. 신학자로서 인간 이성이 죄로 인하여 심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과 의지가 부패된 감정에 극도로 엉클어져 있다는 점을 용인하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었으나, 그 중의 어떤 신학자는 정당한 한계선을 넘어서 철학자들에게 접근한다. 사람의 일상 판단에 있어서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은 성서의 교리와 철학자들의 교의(敎義)를 타협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을 제외한 모든 교부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생각했고 때로는 불분명하게 생각했으므로 그들의 문서에서는 아무 것도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오리겐이 선악을 이해하는 것은 이성의 힘이요, 무엇을 택하는 것은 의지의 힘이라고 한 것을 모든 교부들이 만족하게 생각한 것을 볼 때 그가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이해한 것 같다. 신국(神國)에는 합당치 않은, 일상적이고 외부적인 것을 그들은 대체로 인간의 자유 결정에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참 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영적 중생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자유의지를 취급할 때 그들의 첫째 관심은 자유 의지가 사회활동과 외부적 행동에 대해서 가지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는 능력에 있었다. 후자가 주요 문제라고 나는 인정하나 전자를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된다. 사람이 은총의 도움과,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중생할 때 받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의 도움 없이는 선행을 위한 자유의지를 소유하지 못한다.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선이나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강요당함 없이 자진해서 악을 행한다는 의미에서 사람은 자유의지를 소유한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 말이 옳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이 극히 적은 문제가 큰 제목으로써 취급되는 것일까? 나는 정말 아무 유익된 결과를 이루지 못하면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어귀에 관한 논쟁을 싫어한다. 그러나 어떤 모순을 의미하는 어귀는 종교적 분야에 있어서는 피하여야 한다. 특히 그 어귀가 치명적 과오를 가져올 때는 그것을 피해야 한다. 자유 의지가 인간의 속성이라는 말을 들을 때,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생득적 힘으로써 자기의 마음과 뜻을 주장하며 또한 할수 있다고 직각적으로 생각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의지를 노예의지라고 부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어거스틴은 분명히 말하기를 인간의 의지는 성령 없이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자유의지가 은총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하고서 그는 자유의지를 은총 없이 자기 자신에게 참칭(僭稱)하는 자들을 날카롭게 비난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용어를 아무 그릇된 의의를 첨부하지 않고 옳게 사용한다면 내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해석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큰 위험 없이는 그것을 유지할 수 없으며 그 반면에 그것을 폐지하는 것이 교회에 많은 도움이 될 줄 생각하므로 나 자신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또 누구든지 나의 의견을 참작하는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를 원한다. 아마 내가 말하기를 어거스틴 이외의 모든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막연하게 또 부정확하게 취급하므로 그들의 글에서는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을 배울 수 없다고 한다고 해서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큰 편견을 가진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그들의 의견이 나와는 반대된다고 해서 그들의 의견 발표권을 내가 박탈하는 것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경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적으나마 충성스러이 고려하는 것 이외에 아무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이 이 문제에 관한 교부들의 의견을 발견하기를 기다린다면 그들은 영원한 불안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나는 겸손히 철학의 기반이라고 말한 크리소스톰의 관찰에서 언제든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어거스틴에게서는 더 큰 기쁨을 느낀다. 한 수사학자가 웅변의 법칙 중에 무엇이 제일가는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발음\\\"이라고 대답했다. 다시 제2와 제3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러므로 만약 누가 그리스도교의 법칙 중에 제1과 제2와 제3이 되는 것에 관하여 질문을 할 것이면 나는 언제든지 겸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약함의 도가 크면 그 도에 비례해서 주가 우리를 더 도와 주신다. 인간 속에 있는 자연적 재능은 죄로 인하여 부패되었고 초자연적 재능은 전적으로 박탈되었다는 어거스틴에서 차용된 공통된 관찰을 나는 옳다고 승인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악을 구별하거나 이해하거나 판단하는데 사용하는 자연적 재능은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이성이 전적으로 파손될 수는 없다. 단지 그 일부분이 약하게 되고 부패해서 결함과 폐허를 보여 주는 것 분이다. 가령 부패되고 퇴화(退化)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본질 속에는 섬광이 계속해서 반짝거린다. 이것은 사람이 이성적 피조물이라는 것을 증거하며, 그것이 바로 야수와는 다른 점이다. 사람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빛은 많은 무지로써 덮여 있으므로 그것은 아무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의지는 인간의 본질에서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며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패되고 무질서한 욕망에 속박되어 있다. 그 결과 어떤 종류의 선이라도 동경(憧憬)할 수 없게 되었다.
칼빈과 설교/ 고후5:20
칼빈과 설교 고후5:20 A. 서 론 설교에 대한 인식은 그의 설교 사역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설교자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자기 인식도 설교자로서의 자세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에 대한 인식은 그의 설교 사역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을 것이며 목회자로서의 자기 인식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목회자요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살펴보면서 칼빈이 인식한 설교와 설교자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의 실제 설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은 종교 개혁 당시 교회의 개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인물임엔 틀림없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와 신구약 주석을 통해 신학자로서 주석가로서 널리 알려 졌다. 그리고 이 문서들을 통해 종교 개혁의 큰 일들을 이루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설교자로서의 칼빈보다는 신학자요 주석가요 행정가로서의 칼빈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사역은 바로 그의 설교 사역이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보통 격주로, 주일에 두차례(신약과 시편에 관하여) 그리고 주 중에는 매일 설교를 했다. 그는 불어로 설교했다. 그 자신의 시대에나 그가 고인이 된 이후 수십년 동안, ‘기독교 강요’가 인기를 얻었던 것도 그의 설교 때문이었다. 목회자가 없는 교회에서는 자주 그의 설교를 강단에서 낭독하곤 했다. 이렇게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그의 사역의 중심에 있었다. 우리는 설교 없는 종교 개혁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종교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입”이 되어 종교 개혁의 큰 일을 수중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의 시대와 매우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 따라서 “과연 당시의 설교 행태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와 문화는 바뀌어도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타락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여전히 진리며 인간은 여전히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시나 오늘이나 본질상 변화된 것은 없다. 우리가 칼빈의 설교를 살피려는 것은 그 설교를 모방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칼빈이 설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으며 설교자로서 그는 무엇을 말했는가를 알아 오늘날 우리의 설교에 대한 자세에 도전을 삼고 성경적 칼빈주의적 설교로 돌아가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당시의 말씀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그 말씀의 사역자로서 헌신했던 한 시대의 개혁자를 통해 우리의 자세를 되돌아보고자 함이다. 최근 칼빈의 설교에 대한 연구가 확산되면서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이해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국내에도 칼빈의 설교집이 속속 출판됨으로써 설교자로서의 칼빈의 면모를 다시 대할 수 있게 됨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B. 본 론 1. 칼빈의 설교자(목회자) 직분에 대한 인식 1) 하나님을 대표하는 설교자 우리는 칼빈의 설교의 연구에 앞서 교회의 직분자인 목사에 대한 칼빈의 생각을 알아보고자 한다. 설교자에 대한 칼빈의 인식은 그의 설교에 대한 인식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교회의 권위에 있어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다스리시는 유일한 권위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 강요 4권3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를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눈에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은 그의 이 권위를 사람들의 봉사를 통해 이루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마26:11),사람들의 봉사를 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말로 명백하게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직분은 최고의 영광스런 직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먼저는 우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심인데 사람들을 택하여 자기의 사자(고후5:20)가 되게 하시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대표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사람들의 겸손을 위한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훍에서 나온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 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증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임명된 한 사람의 목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제자로 부름받은 많은 사람들이 한 입으로 공통된 교훈을 받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일을 통해 교회를 한 끈으로 묶으셔서 연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2) 사도의 계승자인 설교자 그리고 칼빈은 “현대의 교사들(오늘날의 주일학교 교사가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맡은 사람으로서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세운 직분 혹 신학 교수들)은 고대의 선지자에(듣지 못한 새로운 복음을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목사(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제자 훈련과 성례를 집행하며 경고와 권면하는 일을 하며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직분)는 사도에 해당한다”고 했다(기독교 강요 4권 3장 5). 그는‘“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인데 교회의 사역자들은 주께서 자기의 사자로서 파견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나 12사도와는 구별되는 직분(듣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전하는 사명에 있어서)이라고 했다. 목사가 사도와 같은 책임(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하고)을 맡았다는 것은, 주님이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 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오늘날의 목사들이 동일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4권 3장 5). 그리고 칼빈은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한 말이 오늘날의 목사에게도 해당된다’고 하였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9:16-17).(기독교 강요 4권 3장 5). 사도는 전 세계를 위해 활동했지만 목사는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 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사도와 동일한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10:16)라는 말씀을 목사의 말씀 사역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목사에 대한 고등한 관점이 그를 말씀 사역에 더욱 정진토록 했던 것이다. 2. 설교에 대한 칼빈의 인식 이러한 칼빈의 설교자에 대한 관점은 그의 설교에 대해서도 고등한 관점을 갖고 행하게 했다. 오늘날 설교를 마치 “도적적 훈화”나 교장 선생님의 “지당한 말씀” 정도로 생각하는 일부의 사람들은 이런 칼빈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 칼빈은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고 선언했다. 그는 Person(인격)과 Funtion(기능)을 구분하였다. 그는 기독교 강요 4권3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말은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입을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행하시는가? 칼빈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먼저는 우리에 대한 자기의 관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택하여 자기의 사자(고후5:20)가 되게 하시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대표하게 하셔서 인간들에 대한 자기의 관심(사랑)을 보여주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사람들의 겸손을 위한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훍에서 나온 보잘 것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 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증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목적에 의해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시어 자신의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4권 3장 1) 그래서 그는 자기도 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됨을 이렇게 말했다.“말은 내가 하지만 교육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도 내가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만일 저 높은 곳으로 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 (=복음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이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나를 유익되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소리는 허공에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설교는)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라고 했던 것이다. 2) 성례전의 신비와 동일한 신비로운 설교 그러나 칼빈은 설교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칼빈은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동안 성령께서 계속 감동할 여지가 있어야 함을 확고히 믿고 있었다. 칼빈은 (딤후1장 9,10절)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거나 역사함이 없이는 또는 믿음으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다. 그러므로 청중의 가슴 속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조명과 믿음의 수반없이는 말씀의 성실한 설교일찌라도 청중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는 성령의 내적 사역을 강조하는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설교는 성령의 권능으로써만 능력을 부여받을 수 있을 뿐이며, 외적인 말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효력도 청중에게 미칠 수 없다” 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능력이 말씀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주이시고 구주이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설교자는 설교에 앞서 기도로써 준비하여 말씀을 전달하는 그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설교가 그 자체로서는 듣는 이들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없음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성경은 회개의 은사도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이 없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회심의 역사, 구속과 영생의 기쁨이 죄인들의 영혼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설교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의 결과인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칼빈은 성령의 감동을 설교의 효력에 결정적 요인으로 말했다. 그러나 칼빈은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은 기록된 성경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루터와는 달랐다. 또한 쯔빙글리나 재침례파와 같이 설교를 단순히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로 보지도 않았다. 칼빈은 성경을 성령의 독특한 영감을 통해 기록된 형태로 주어진 하나님의 객관적 말씀으로 믿었다. 그리고 설교는 기록된 말씀을 풀어 해석하는 것으로써만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칼빈은 객관적 계시로서의 기록된 성경과 기록된 성경을 풀어 해석하며 적용하는 설교와는 구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령께서 설교자와 청중들을 다 감동하실 때만이 설교가 구속적(救贖的)인 효과를 가진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객관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설교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록된 말씀과 같은 권위로 임하고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례 전에 관한 그의 교리와도 통하는 견해인 것이다. 즉 성례전에서 주님의 은총이 임하듯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이다. 성례전의 떡과 포도즙은 객관적 실체이다. 그것은 떡과 포도즙 그대로 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무 효력이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주님이 약속하신 실재(예수님의 피와 살)를 먹게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에게 효력이 나타난다. 이와같이 설교자의 설교를 청중이 믿음으로 받을 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약속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이 말씀이 믿는 자의 속에서 역사 한다는 것이다.(살전2:13). 설교는 기계적으로 효력을 발(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 효력을 발(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령의 감동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어떤 설교도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신비로운 감동하심의 역사로 말씀을 사용하실 때 그 설교는 효과적이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성례에 참예하는 자들이 주님이 약속하신 살과 피를 먹음같이 믿음으로 설교자의 말씀 듣는 자가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례(聖禮)와 설교가 기록된 말씀에 의존해야 하나, 둘다 성령의 은혜로운 임재로 채워질 때에만 실재적 은혜의 방편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 구원과 심판의 이중 음성의 설교 칼빈에 의하면 설교에는 두 가지 목소리 (이중 음성)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한 음성이고,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노성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사야 주석 55:11에서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 데에 효과적인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증거의 역할은 죄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까지 반발심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과를 나타내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 향기가 이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다른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 역사함과 같은 의미(고전2:15-16)인 것이다. 실제로 칼빈은 자신에 대한 많은 비난과 반대자들을 극복해야 했다.베자(Beza)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제네바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르는 개들을 “칼빈”(Calvin)이라고 부름으로써 개혁자에 대한 자신의 경멸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는가 하면, 혹자는 칼빈의 이름을 줄여 가인(Cai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 칼빈에 대한 증오심”을 핑계삼아 성찬에의 참여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무익하게 된다... 만족할 만한 복음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라는 말만이 필요하다. 선하고 진실한 목자는 성경을 간신히 해설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주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는 어려움이 많아도 진실해야 됨을 가르친다. 무엇이 선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청중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비록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복음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미암아 설교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자가 곧 내 말을 듣는 자라고 말하셨습니다. 모든 교직자가 주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야 된다는 것을 배웁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그 설교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또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 듣기를 멀리하는 자들은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힘을 거절하고 또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멀리 뿌리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그의 구속적 간섭을 거절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복종하지 않으려 한 \"여러 사람들의 반역\"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사역을 옹호하였다. \"아무것도 아닌 이 버릇없는 인간들은 자기네들이 잘못을 범하였을 때 그 사실을 자기들에게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곧 \'당신들이 우리에게 명령할 순 없어!\'라고. 그렇다면 하나님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임하신 때문입니다....\" \"누구든,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쪽으로 가야 한다는 식으로 명령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전념해 가르치기란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한 분 주님이 계시고 그 분은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이름으로 여기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무엇도 나를 통해 전진시키기 원치 않으며, 내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올 생각도 없으며 오직 내가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반박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복종해야 하며, 모든 거만한 것들이 꺾여야만 하고 또 큰 자나 작은 자 할 것 없이 자신이 복종해야 할 이에게 주둥이를 내밀거나 눈울 치켜 뜨는 피조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고 하여 설교를 통해 다스리시고 명령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항해서는 안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복음의 제시는 꾸밈없이 용기 있게 제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우리가 하나님과 전쟁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할 내가 악을 허용하고자 한다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같은 일이 정당하게 되거나 또는 우리가 이런 것을 구실로 이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무리 이것 저것 갖다 붙여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매우 꾸짖게 됩니다“.또한, 그는 사도행전 20장 18절 이하를 설교하면서 “...나는 이처럼 내가 내 양심에 따라 해야 할 바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이 허락지 않든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내게는 전혀 합법적이지 않는 일을 하라고 사람들이 날 강요하든 간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 이외의 것을 넘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이 설교하고 또 여러분에게 봉사할 수 있는 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이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는 그의 욥기33:1-7 설교에서 말씀 사역자와 청중에 대해 이렇게 설교했다. “...하나님을 따라 곧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에 시선을 돌려서는 안됩니다. 만일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거나 칭찬을 받는 일에 좌우된다면 우리에게 선한 원리가 하나도 없을 것이고, 결국 고통밖에는 당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문제가 될 때에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만일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들을 보고서 두려워져 마땅히 말해야 할 바대로 자유롭게 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처사가 아닐까요? 어떤 세상 군왕이 한 사람을 파송하였는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비웃고 그 임무를 마땅히 행하지 못하게 해도 가만히 있으며, 자기가 위임 맡은 메시지를 감히 전하지 않고 있다면, 그 겁쟁이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먼지에 불과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당신을 섬기도록 받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영예로운 임무를 주시고, 모든 권위와 경외심을 옷입혀 그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무섭게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왜곡시켰다 합시다. 아니면 그 하나님의 진리가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위를 더 이상 갖지 못하게 그 진리를 전한다고 합시다. 그만큼 하나님의 질책을 받을 만한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목에서 두 가지의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목회자로 가르침의 직무를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은 결연한 자세를 가지고 예레미야가 말하듯이 어느 것에도 관여치 말고 싸우는 날의 장수처럼 담대해야 합니다(참조,예레미야 15:20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왜냐하면 세상에는 말할 수 없이 강퍅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망각하여 자기들을 창조했고 조성하신 하나님께 복종할 수 없는 때, 도저히 남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관성을 지니고 우리의 의무를 감당할 때도, 적수를 만나거나 불쾌함을 맛보게 될 것임을 당연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적과 불쾌함을 만나더라도 결코 믿음을 굽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목회자로 장립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그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또한 여기서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인 교훈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우리 죄를 책망하는 것을 듣고 오만한 자세를 취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노를 격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등을 가볍게 문질러 주는 것을 가지고 노를 격발할 정도로 분개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해야 마땅한 것처럼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거나 주제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 속에 어떤 선한 기질이 있는 체하면서 우리를 아껴 달라고 요구해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전파된 것은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들을 내맡기게 함이기 때문입니다....우리는 각자 누구나 다 그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왕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마땅히 하나님의 진리가 전파될 때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압시다. 왜 그렇습니까? 왕들이라 할지라도 그 점을 의식해야만 함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는 그 사람이 어떠한 주인, 어떠한 상전으로부터 보냄 받았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복종을 받아야 하고 온 인류를 지배하는 주권적인 통치권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까불댄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더러 본성을 바꾸시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낮추라고 덤벼드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마귀적인 무모함이 아닙니까? 그러니 모든 겸손과 겸비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웁시다. 우리의 순종이 이러한 방면에서 시험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응당 그래야 하듯이 어느 누구도 그러한 시금석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모든 허물이 곧바로 드러나고야 맙니다. 이렇게 칼빈은 설교자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은 그 말씀을 변개할 수 없고 청중은 그 말씀을 거부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교인들의 취미와 즐거움에 영합하여 자기 인기를 위해 온전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설교자들은 이런 칼빈의 음성을 들어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의 설교를 비판이나 하고 경청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거절하는 자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3. 칼빈의 설교 연구 칼빈은 이런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설교 사역을 이루어 갔다. 그럼 칼빈의 설교 내용의 특징은 어떠한가? 1) 성경을 그 본래의 의미를 찾아 간결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종교 개혁 초기 교회의 사역자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철저히 아는 것을 제 일차적인 임무로 삼았다. 말씀을 전하는 그들의 태도 자체가 이 일을 불가피하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제일차적 참고 자료는 성경이었다. 그리고 성경 강화가 그들의 설교였다. 칼빈도 예외일 수 없었다. 칼빈은 그의 주석의 원칙을 명료성과 간결성에 두었듯이 설교에서도 이 원칙을 따르려 노력했다. 칼빈의 설교집을 출판한 스위스의 인쇄업자인 콘라드 다비우스는 칼빈의 설교집 머릿글을 통해 설교에 대한 그의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바디우스는 칼빈의 설교집(1557년 판)을 내면서 자신의 설교에 대한 관점이 칼빈과 일치함을 표명했다. 바디우스는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의 교회를 풍요롭게 하시려고 사용하신 훌륭한 선물들 가운데서, 가장 유용하고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설교라는 은사이다. 이 은사는 성경의 내용이 가지는 참되고 본래적인 의미(Very et neturel sens)를 따라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또한 그 뜻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순전하게 설명하기 위한 목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설교자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 말씀을 자기 자신의 시대에 바르게 적용하는 방법을 깨닫기 위한 목적에서 존재한다” 바디우스는 칼빈의 설교야말로 이런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설교임을 칼빈의 설교집 머릿글에 밝혀 놓은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출판)을 통하여, 즉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 우리들에게 말씀의 꼴을 공급해 주고 있는 푸른 목장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나라에 있는 자신의 양떼들을 위한 목자들로 임명하신 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단순하고, 순수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어떠한 두려움과 열심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선포되는가를 알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바디우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살스러운 재담과 “세속작가들이 쓴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이야기들”을 섞어서 멋들어지게 말하는 “훌륭한 웅변가들”을 더 좋아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경건성을 잠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바디우스의 설교관은 바로 칼빈에 의해 만족감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성경을 본래적 말씀을 각자의 시대에 단순하고 순수하게 적용시키되 관계되는 사람에게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순히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훈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도록 권고하는 것도 포함되는 것이다. 칼빈은 연속적 강해를 했기 때문에 특별한 서론이 없다. 단지 지난 번에 한 강해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는 것으로 서론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그리고 그는 설교할 때 미리 정한 어떤 사상의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다만 본문의 말씀이 놓여진 순서를 따라서만 해 나갔다. 그래서 어떤 주제나 제목을 잡지 않았다. 욥기 강해 설교(욥38:1-4)의 설교를 살펴보면 “우리는 앞에서 엘리후 자신도 죽을 인생이라는 걸 단언한 것이 욥을 책망키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엘리후가 그렇게 말한 것은 욥으로 하여금 너무 높은 권세로 취급받는다는 불평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 그의 설교를 시작하고 있다. 그의 서론이 그의 설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사람들을 방편으로 사용하시어 말씀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하고 명료하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보다 더 자유롭게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하려 함이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분량밖에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전혀 회개의 가망이 없이 굳어지고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 자에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시기 위해 위엄을 입고 서신다고 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충성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을 이렇게 강해해 갔다.‘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임재의 표증을 욥에게 보여주시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하여 폭풍같이 자신을 내 보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뇌성을 타신다는 말씀을 자주 합니다. 자기를 안 믿는 미친 자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실 때 말입니다. 그러나 특히 여기서는 그 장소와 상황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욥은 아직 완전히 유순한 자세를 가지지 않고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 욥에게 무서운 권세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이 까닭에 욥으로 하여금 주인(主人)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천둥을 치시며 폭풍 속에서 운행하신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패역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무섭게 드러내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근하게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 수 있기만을 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꺼이 복종할 때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한 인정어리게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함이 있음을 보시면 처음부터 우리를 납작하게 만드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멸시를 받거나 아니면 그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전혀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반포하실 때 천둥으로 두렵게 하며, 나팔 소리가 들리게 하며, 모든 사람들이 그걸 듣고 무서워 떨게끔 하신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모두 죽고 엎드러지겠나이다”라고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째서 그처럼 온 땅을 요동케 하셨고 그의 목소리로 무섭게 만드셨습니까? 백성들을 철저하게 견책하사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하나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오히려 백성들의 거만함을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표적이 함께 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엎드리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 욥에게 말씀하신 것이 쓸데없지 않았음을 잘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온 힘을 쏟았던 그처럼 거룩한 사람에게도 그런 식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면 우리야 어떠하겠습니까? 욥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 봅시다.욥은 마치 천사적인 거룩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인물입니다... 그가 인간으로서는 가장 극한 고난을 받으며, 불만을 토로했고, 과격한 진술을 했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원리만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부분적으로 넘어지기는 했지만 보편적으로 그 원리는 갖고 있었습니다.... ... 이제 우리는 다음 말씀으로 넘어가 봅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 지니라” 먼저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비웃음 어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욥이 패역한 것만큼 말입니다. 욥이 생각할 때는 이치를 통해서 자기의 입장을 아뢰어 지기가 이길 것 같이 느꼈으니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는 누구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누구인지를 보여줄 때, 그것은 우리의 모든 거만을 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사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신들을 자랑합니다. 자기들이 어떤 존귀함이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잘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서 악취만을 맡으실 뿐이라 그들을 슬어 버리십니다. ...비록 우리가 그처럼 어리석어, 우리 자신이 어떤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함으로 자랑하는 주제넘음에 빠진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비웃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을 잃도록 하기 위해 단 한마디 말씀이면 족합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사람이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은 우리에게서 모든 자랑할 기회를 한꺼번에 박탈해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한 방울의 선도 없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 자신을 앞세워 내세울 만한 어떠한 경우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라고 덧붙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네가 갖고 싶은 것으로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마치 거인인 양 스스로 생각하며, 잘 차려입고, 네가 할 수 있는 한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장을 해 보거라. 그런다 할지라도 네가 결국 그것을 통해서 무슨 유익을 얻겠느냐? 이 불쌍한 피조물아, 내가 너를 대적할 것이면 네가 스스로 버틸 한 가지 길이라도 생각해 낼 수 있겠느냐? 네가 무엇을 가졌느냐?”....하나님께서 이러한 차원에서 말씀하실 때 한 두사람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인류 전체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까지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영광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수치와 혼미스러운 것밖에 아님을 알고서 말입니다. “너는 누구냐?”라는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사도 바울이 다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과 같습니다.“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하나님께서 어째서 자신이 창조한 자들을 버릴 것인가? 어째서 까닭없이 하나님은 사람마다 차별하시는가? 이 사람은 구원받도록 부르시고, 저 사람은 버려 두시니 그게 어찌 이치에 합당한 일인가?”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논박할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의 도전을 사도바울은 그렇게 제압합니다.....사도 바울이 하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너의 인생이여, 너는 누구냐? 네가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려 드느냐?” “너는 누구냐?”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요점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각자 거만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뿔사! 너는 누구냐?”... 자 이제 특별하게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으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은 온 세상이 있는 힘을 다해 무장하고 과시한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 욥이여 스스로 무장하고 거인처럼 차려 입거라. 아니면, 이 세상에서 가장 날센 사람처럼 차려 입거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욥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을 훨씬 더 분명히 나타내신 것입니다........또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선언하시는 것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밀한 것에 대한 생각 다음에는, 분명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모든 두려움을 진지하게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치’란 말을 통해서 욥이 말한 높은 것들을 나타내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자, 이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높은 비밀들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경외심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그러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순전하신 선하심을 통하여 그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실 의향을 가지지 않는 한,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알아내려고 주제넘게 굴어서는 안됩니다....그러면 어째서 그러한 논란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에 감동 받은 사람들이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술 취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민활한 사람들이고, 성경을 가장 많이 체험한 삶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마당히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런 방식으로 성경이 기록된 순서에 따라 설교해 나갔다. 그래서 한 설교에 여러 개념들이 설명되고 있다. 그는 성경의 구절 구절을 기록된 순서대로 강론하며 그때 그때 적용을 했던 것이다. 그는 흔히 대지를 구분하는 식으로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본문의 흐름에 따라 본문의 순서대로 설교해 나갔다. 그리고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고 설명하여 성도들의 삶에 적용토록 호소했다. 2) 칼빈은 성경 중심의 설교를 했다. 오늘날 흔히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신문” 들고 설교하라고 말한다. 어떤 때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성경을 선택하여 설교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상황과 성경 말씀에 의한 조명은 무시할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대 프로테스탄티즘에 있어서는, 설교학의 주요 원천이 성경이나 신조가 아닌 시구(詩句)나 매일 발행되는 신문이 되어 가고 있다. 국제적 회합에 대한 논문들이나 잇슈(issue)가 설교의 자원이 되기도 한다. 비록 이런 일이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의 두드러진 특징이긴 하지만, 보수주의자들도 그런 기풍에 젖어 들고 있다. 종교개혁 초기의 사역자들은 성경 연구를 철저히 하여 제일차적 참고자료는 성경이었다. 그후 17세기엔 설교자들의 주 자원이 교의와 신조였다. 성경이 무시된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수사술(修辭術)이 설교의 구조를 장악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성경이나 신조가 아닌 당시의 시사성 있는 문제나 일간 신문, 잡지 등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상황에 따라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소위 오늘날 흔히 말하는 상황에 따른 설교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절기에 대한 설교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쫓겨났다가(스트라스부르그에서 사역함) 제네바로 다시 돌아온 날 그는 그의 설교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서나 자신의 처지와 심경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 기대했으나 그는 쫓겨나던 당시의 본문을 가지고 계속하여 강해해 나갔던 것이다. 칼빈은 이 일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나는 설교하기 위해 회중 앞으로 갔습니다. 각자는 큰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분명 기다렸던 사건들에 대한 언급은 완전히 침묵 속으로 흘러 보냈고, 나는 나의 사역의 원리들을 간단하게 발표했으며, 그 다음, 나를 부추겼던 신앙과 공명정대함을 상기시켰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다음 나는 강해 할 본문을 택했는데 그것은 내가 전에(추방 전에) 멈추었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통해 내가 가르치는 임무를 그만 두었었다가 보다는 잠시 중단했었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성경을 최고의 본문으로 삼고 상황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대와 상황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죄인 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상황이 설교를 좌우하는 경향이 있으나 칼빈은 성경이 상황을 극복해 가도록 했던 것이다. 3) 칼빈은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했다. 또한, 칼빈의 설교는 항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섭리를 확신하는 가운데 전달되어 졌다. 하나님은 설교자를 위한 권위요 동기일 뿐 아니라, 모든 설교의 자원과 대상이요, 모든 설교의 중심적인 요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삼위적인 충만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매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신다. 그는 신명(神名)을 칭할 때 ‘하나님’이라는 포괄적인 칭호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였다. 루터는 매우 의도적으로 성경의 매 대목을 강해 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았다. 루터가 그리스도를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설교한 반면에, 칼빈은 성삼위 구속주 하나님을 보다 더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설교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칼빈은 복음을 제시할 때 하나님 중심적으로 복음을 제시했다. 칼빈은 교회를 중심에 삼고 있는 로마 교회 체계와 사람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자유 사상가들의 철학을 배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성삼위의 제 2격위나 제3격위에만 초점을 맞추어 강조하려는 종파들의 잘못된 경향을 논박할 의도도 갖고 있었다. 칼빈은 성령을 중심 삼는 종파는 치명적인 주관주의로 빠져들어가는 제일보를 내디딘 것이라고 확신한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에 삼고 있는 것은 휴머니즘에 한 발짝 더 가까와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칼빈에게 있어서 모든 영광스로운 충만함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은 모든 설교안(說敎案)의 근원이요 꽃이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중심의 설교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강조에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교리는 마음의 주림을 채워 주는데 있어서 끈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상처를 싸매는 붕대였다. 칼빈의 사상에 있어서 섭리와 보전의 교리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지를 주목하는 것은 흥미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구별되어 있으면서도, 자주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데 함께 처방되는 일이 흔하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통일된 과정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섭리적이고 구원론적이고, 자연적이고 영적으로 통일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칼빈은 창조와 구속, 곧 성삼위 하나님 안에 포용되어 있는 창조와 구속 속에서 드러난 그 섭리를 힘있게 전하는 설교자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의 궁극적인 차원은 계시된 뜻이라기 보다는 계시되지 아니한 뜻이다. 이러한 관점이 드러나지 아니한 칼빈의 설교는 거의 없다. 칼빈의 목회신학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는 것들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다루시는 모든 행사의 모든 궁극적 비밀을 역시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고통 당하는 심령들에게 주권적인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게 가지고 계신 비밀스러운 목적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처럼 좋은 위로는 없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그의 욥기34:21-26의 설교에서 이렇게 설교한다.“...우리가 이미 논의한 진술 바로 다음에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완력으로 그러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님을 덧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큰 징계가 주어져, 능한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쓰러지고 나라가 적에게 정복당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시행하시는 까닭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공의를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냉혹하게 처리하시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지각할 수 없지만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아는 지식을 활용하여, 여기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만족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째서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에 대하여 변론하거나, 그 판단이 우리에게 이상하게 보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길을 판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에 동조해야 합니다. 어째서 그러시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행사는 언제나 정당하고 선한 이유를 기초하고 있음을 인식합시다.” 또한 칼빈은 (욥기1:20-22)의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고난받을 때 까닭없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도록 역사하심을 확신할 은혜를 주십사고 기도합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환난을 잘 참아 내게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게 만들것입니다...” 라고 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믿고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가 안식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맹목적인 절망을 꾸짖었다. 삶을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마치 밝혀지지 않은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온전히 다 이해할 것처럼 생각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에 대해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도가 엿보이는 곳에선 승리에 차서 그 하나님의 의도를 펼쳐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하는 여러 가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풀려고 애를 쓰거나, 그들의 슬픔을 완벽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가 회중들에게 목회자로서 주었던 위로는 결국한 가지만으로 충분하였다. 다시 말하면 주권적인 하나님의 감추어진 은혜였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신적 난해성(難解性)에 대해 하나님 중심으로 강조하는 것과 함께 선택교리에 대한 강조가 그의 설교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선택은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광범위하고 사활적인 요점이다. 그것은 하나의 신학적 파편이거나, 성경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또한 본문이 요구할 때만 간헐적으로 언급된 것도 아니다. 모든 설교에서 이 선택교리는 은연 중에 깔려 있고, 하나의 분명한 선(善)으로 자주 힘있게 두드러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예정론의 입장에서 모든 거짓된 교리를 논박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의 근본적 오류는 믿음으로 의롭다하는 문제였던 반면에, 칼빈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의 근본적 오류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주도권을 준다는 점이었다. 셀베투스(Servtus)로부터 재침례파등, 칼빈에게 정죄당한 모든 사람들은, 다른 실수는 고사하고라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고 선택을 거부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것이 결국에는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이 기각당한 것이다. 칼빈이 선택을 설교한 방식,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다. 그것은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Heidelberg Catechism)이 정의하는 것과 같다. 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사람의 ‘죄와 비참’에 대한 ‘오직 유일한 위로’로 전한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추상적이거나 교의학의 한 페이지로 장식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이 은혜와 떨어진 것은 더욱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주권적 은혜가 모든 설교의 테마였던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욥의 고난도 주권적 은혜의 한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칼빈은 (욥기5:17-18) 설교에서 “...언뜻 보기에 하나님께서 상처를 내 놓고 그 상처를 치료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평안하고 풍부한 자리에 앉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실까?....여기서 우리는 이중적 은혜를 엿보게 됩니다...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게 하실 때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고, 우리로 회개케 하시며,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에서마저 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그것이 첫 번째 은혜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은혜가 여기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내신 상처를 싸매시고 치료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언급한 바입니다(고전10:1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밖에는 허락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으로 유익을 얻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유익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해 나갔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그의 설교의 날줄과 씨줄이었다. 4) 칼빈은 문답을 사용하여 청중의 이해를 돕는 교육적 설교를 했다. 칼빈은 그의 설교에서 자주 질문을 사용한다. “그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질문하고 그리고 답하면서 그의 강해를 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설교의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질문을 통해 문제를 좀더 확대해 나가거나 심층적으로 다루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청중이 알아듣고 이해하기까지 반복적인 설명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말하면” “왜냐하면” “좀더 설명하면” “바꾸어 말하면” 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따라서 문자로 기록된 칼빈의 설교들을 보면, 흔히 한 가지 요점을 전개시켰다가 다시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확인하느라고 되돌아오곤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것은 어떤 요점들을 청중들이 이해하기까지 그 요점을 떠나지 않는 지극한 섬세함을 보이는 대목들인 것이다. 그는 그의 설교에서 재빨리 눈치채지 못하게 이 일을 다루어 가고 있다. 그는 이렇게 청중의 이해를 돕고자 그의 재능을 다 사용하기에 힘썼다.예를 들면, 칼빈은 그의 십계명 설교(신5:21)에서 죄의 깊이와 멸망케하는 성격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거듭 거듭 설명하고 있다.“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단지 하나, 혹은 둘, 아니면 세 가지 정도의 죄만을 지었습니까? 정확히 말해서 일단 우리가 지은 죄의 수를 세기로 한다면, 우리 모두는 지옥에 던지우는 것이 마땅하며, 우리가 당혹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여기에서 우리들이 헤아린 수십만 가지의 죄들은 실상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저지른 죄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죄에는 끝이 없고 또 그것을 헤아릴 만한 방법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한량없으신 긍휼로써 우리를 받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마치 우리가 율법 전체를 다 이루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완전 무결한 상태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들을 그렇게 의로운 자들로 여기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므로, 우리들은 주님을 믿는 그 믿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깨달아야 하겠으며, 아울러 주님을 향하여, “주여, 우리의 구원이 당신의 순전하신 선하심과 은총 가운데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영광을 그 분께 돌려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의 무수한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또한 우리를 자신의 의의 옷으로 다시 입혀주시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가 우리들의 연약한 부분을 얼마나 극진히 떠 받쳐 주고 계신가 하는 것을 입증해 보이시는 증거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고로 비단 우리의 욕심이 셀 수 없이 많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마치 거대한 산들에 의하여 파묻혀 있는 것처럼 엄청난 죄악에 묻혀 있다는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겨 줄 때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너무나 가혹하게 대하시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절망 가운데 버려두시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오히려 우리가 쓰러지더라도 지체없이 다시 일어나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까닭에 믿는 자들은, 비록 자신들이 정죄된 자리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멈춰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죽음의 심연에서 건지시고 또 우리들이 하나님의 순전하신 은혜 가운데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이와 같은 파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더욱이, 설사 우리들이 매일 우리의 몸 안에 수 백만의 죄가 있음을 느끼게 되더라도, 우리가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것을 밀쳐 내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죄를 멀리 할 것을 권고하는 가운데, ‘너희 안에 죄가 거할 곳이 없도록 하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죄로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바꾸어 말해서, 죄가 언제나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고 했을 때, 그렇게 말하는 근본적 목적은 우리에게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 대하여 일깨워 주려는데 있으므로, 우리들에게는 죄를 상대로한 매일 매일의 전투가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으며, 이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힘과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보다 더 강건하게 해 주실 것을 그 분께 기도하면서 한층 더 뜨겁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칼빈의 자신의 청중들이 충분히 깨달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질문과 함께 다시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C. 결 론 칼빈의 설교는 성경의 충실한 해설과 적용이었다. 그의 설교는 설교자로서의 자기 인식과 설교에 대한 성경적 확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적확(適確)한 뜻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칼빈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10:16)라는 말씀을 목사의 말씀 사역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입이며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고한 신앙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또한 설교란, 성경이 충실히 그 본래의 의미를 찾아 설명되어지고 가르쳐 질 때, 하나님의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성경 강설(講說)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그는 “말씀의 사역자” “말씀의 종”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의 생애를 말씀 사역에 헌신했다. 설교자의 자기 인식 없이는 설교 사역의 변혁도 없는 것이다. 설교자의 자기 인식과 설교에 대한 개혁자의 인식을 재발견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설교 사역을 새롭게 변혁시킬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불행히도 설교 사역에 대한 회의와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설교에 대한 확신이 사라져 가고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표자요 하나님의 입” 이라는 설교자의 자기 인식이 없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10:16)라는 말씀을 믿으려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대일수록 개혁자 칼빈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개혁자 칼빈의 설교에 대한 확신이 오늘 우리들의 사역에 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해 동안 제네바에서 칼빈의 동료로 활동했던 니콜라스 데 걀라르(Nicolas des Gallars)의 말을 끝으로 이 논의를 마치고자 한다. 니콜라스 데 걀라르(Nicolas des Gallars)는 칼빈의 목회 활동을 다음 말로 요약했다. “얼마나 많은 일과, 얼마나 많은 철야와 얼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1)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1) 기독교 강요 : 역사, 저작, 목적, 사상적 배경(17쪽) 1534년 칼빈은 파리 대학 취임 연설문이 문제가 되어 방랑 길에 올라 여기 저기를 떠돌다가 1535년 1월에 바젤로 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케도릭으로부터 잔인한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유명한 기독교 강요가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6세에 불과했다. 그의 저서를 본 많은 학자들이 그를 \'복음주의 신앙의 최상 위에 있는 개혁파 신학의 토마스 아퀴나스\'라 하면서 극찬을 했다. 케도릭에서는 이 책에 대해 혹독한 비평을 하고 말살하려 했지만 복음 주의자들은 이 책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명석하고 확신에 넘치는 기독교 진리의 변호라고 했다. 그는 이 책의 첫 출판으로부터 23년 동안 끝임 없이 수정 개정 작업을 했다. 그의 첫 출판은 1536년에 시작이 되고 그의 마지막 출판은 1559년에 마쳣는데, 그 두 사이에 사상적인 변화와 차이가 전혀 없었다. 즉 성경에 관한 지식은 점점 깊어졌으나, 처음의 사상과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니, 그가 처음부터 성경에 대한 정확한 학식을 가졌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성경에 입각하여 추호도 틀림이 없는 상태에서 첫 출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칼빈의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심원한 지식,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저자의 특징이 되는 충실한 해석과 조직화를 위한 세심한 관심\" 등을 보게 된다. 만일 이 저서가 없었다면 루터가 죽은 후 신교는 극심한 신학적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말씀 위에 바르게 선 교회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1. 기독교 강요의 역사 초판은 1536년 1월에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Christian Religions Institutio)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초판은 총 6장으로 되어 있는데 첫 4장은 율법(십계명 해설), 신앙(사도신경 해설), 주기도, 성례 전으로 되어 있고(루터의 요리 문답 순서에 의해 배열) 5장과 6장은 논쟁적인 기술 법으로 거짓 성례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기록을 했다. 5장에서 그는 이제까지 성례 전이라고 불리는 케도릭의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등이 성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개념을 해설할 뿐 아니라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말했다. 1년이 못되어 라틴어로 쓰여져 소수의 사람밖에 볼 수 없었던 초판이 매진되고 1539년 새로운 라틴어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다. 이 때 그는 책이름을 바꾸어 (Institutio Christian Religions )라고 했고, 6장이던 것이 17장이 되었다. 재판에서 칼빈은 그 서두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그는 삼위일체론을 상당히 확대해서 해석했다. 1541년 재판이 나온지 2년 후에 기독교 강요는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이 책을 번역 출판했다. 그리고 이 책은 프랑스의 고전이 되었다. 1543년 그는 라틴어판 기독교 강요를 다시 출판했다. 그리고 1545년에 이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했다. 세 번째 판은 17장에서 21장으로 늘어났다. 그는 이 증보판에서도 서약과 인간의 전통에 관한 것들을 논했다. 프랑스 판이 나온지 5년 후에 즉 1550년에 또 증보된 라틴어판이 나왔으며, 1551년에 프랑스 번역판이 다시 나왔다. 그리고 그 해 다시 재판을 만들었다. 1550년과 1557년 사이에 이 책은 무려 7판을 출판해야 했다. 1550년 판에서 그는 성경과 그 권위, 성자의 형상 예배, 양심에 관한 설명을 했다. 그는 새로운 판을 낼 때마다 새로운 인용문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그가 끊임없이 고대의 저작들을 읽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기독교 강요의 결정판은 1559년 라틴어판과, 1560년 프랑스어 판이다. 이 때 칼빈은 四日熱이라는 병에 걸려 죽을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나, 그의 저서를 계속 精査하여 증보하므로 21장에서 배가되는 80장이 되도록 하여 증보판을 냈다. 2. 기독교 강요의 목적. 앞에서도 말했듯이 케도릭으로부터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을 변호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급히 이 책을 출판하게 된 또 다른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1534년 7월 17일 밤에 일어 난 벽보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느카텔(Neuchatel)교회 목사인 \'앙트완느 마르코르트\'(Antoine Marcourt)에 의해 벌어진 일이 였다. 그는 미사의 남용을 비판하는 벽보를 사방에 부착했는데, 그 내용은 \"유일하신 증보 자시오,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성찬을 직접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의 미사의 그 무섭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라는 것이 였다. 그의 논조는 매우 날카롭고 실랄 했다. 로마 케도릭은 이 일을 빌미로 여러 명의 복음 주의자들을 체포 화형을 시켰고 그 첫 번째 순교자는 \'바델르미 밀론\'이였다. 이 사실이 유럽 전역에 전해지자 독일 교회는 크게 개탄하고 폭군들의 폭력을 성토했다, 그러자 케도릭에서는 자기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로 가득한 야비하기 그지없는 소책자를 만들어 배포했는데, 그 내용은 이런 야비한 폭력이 제세례파에 의해 감행되었으며 그 폭도들은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적 야욕을 가지므로 자행된 것이라는 모략이 였다. 독일과의 관계를 중하게 여겼던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는 독일 교회와 국민들의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이와 같은 거짓말을 정당화 하는 선언을 1535년 2월 1일에 공포했다. 그는 이 잔인하기 짝이 엇는 살인은 제세례파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했으며,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거짓 말에 대해 칼빈은 크게 분노해서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글\'을 이 저서의 첫머리에 기록했다. 여기서 그의 기독교 강요 강요를 기록한 두 가지 목적이 나타나 있다. 첫째는 기독교의 교리를 가능한 한 단순하고 쉽게 기록하고 조직화하므로 써, 그리스도교를 탐구하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쉽게 이해하도록 했으나, 라틴어로만 출판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질 수 없었으며 둘째는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3. 그가 죽기 전 5년까지 줄기차게 저술을 계속했는데, 그의 이런 저술은 그의 독창적인 특징이 있지만, 그가 다른 개혁자들을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개혁자들은 어거스틴, 루터, 쭈빙글리, 멜란히톤, 부처 등이 였으며 칼빈은 그들의 사상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했다고 해도 잘못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런 신학자들의 저술이나 사상만 의존한 것이 아니다. 그의 제일 되는 신학적 원천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경이다. 그는 성경 전체를 면밀하게 연구했고, 구약에 대한 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성경에 대해 완전히 깨달아 아는 지식을 가졌으며, 사상적으로는 어거스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리고 다른 고전들을 많이 인용했다. 칼빈이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사상을 곡해한 잘못된 생각이다. (신복윤)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獻辭) 생략 제 1 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75쪽) 주: 하나님의 존재라는 말을 쓰지 않고 지식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칼빈 신학의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계시가 중심이 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제 1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을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1. 우리 가진 모든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사람에 관한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하는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사람이 먼저 자기 자존적인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 (행 17:28)하고 있게 된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바르게 살펴 볼 수가 없으며 알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받은 은사 중 어느 것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없으며, 심지어 우리들 자신의 존재 자체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이 축복들로 인하여 우리는 그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께서 올라감을 얻게 된다. 실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의 빈곤은 우리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잘 들어낸다. 특히 아담의 타락은 더욱 더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들의 영적 굶주림과 결함으로 인한 공포는 우리들을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을 찾게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알도록 자극을 받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소라도 얻게 된다. 우리들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관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의 죄악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한,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며, 잊어버리고 있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만족해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즉 우리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죄악에 대한 깨달음 들은) 우리를 일깨워 하나님을 찾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빈곤, 또는 어리석음은 그것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지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명백한 증거가 있다.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이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만은 인간에게 본유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런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원래 위선으로 기우려 져 있으며, 일종의 공허한 의의 형상이 의 자체를 대신하여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허한 의의 형상에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속과, 주위는 너무나 부패해져서 더러워지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신이 인간 부패 내에서만 모든 것을 보게 되면, 우리들의 속과 주위가 마치 깨끗한 것처럼 느껴져,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즐겁게 하지만 사실, 그것은 검은 것밖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에 히끄무례한 것이나, 갈색인 물체를 보았을 때, 완전한 흰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우리들의 영혼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얼마나 과대 망상증에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더욱 명백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대 낮에 땅을 내려다보거나,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을 본다면 아마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예리한 시선을 가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눈을 들어 태양을 처다 보게 되었을 때, 우리의 시력은 당장 그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후에 우리가 지구상의 사물을 볼 때는 그렇게 예리하던 시력이 아주 흐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사실을 영적 은사를 생각할 때도 적용된다. 우리가 이 지상 넘어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산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半神的적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돌려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의 절대 완전함을 생각할 때,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들을 즐겁게 했던 모든 것들이 최대의 불의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것으로 우리를 교묘하게 속이던 것들은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 능력의 탈을 쓰고 있던 것들은 가장 비참한 무력 자로 증명될 것이다. 우리에게 완전하게 보이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를 당한다고 성경이 말하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 바로 여기서(인간의 부패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은 안 계신다고 생각할 때에는, 보통 완전하며 확고하게 서 있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놀라다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이런 놀라운 사실의 사례들을 사사기나 여러 예언서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삿 13:22; 사6:5, 1:28; 삿 6:22-23) 욥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함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능함과 부패를 인식케 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이 된다.(욥 38:1 이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티끌과 재\"(창18:27)에 지내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며,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곁 옷으로 가리우지 않고는 주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나타나심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왕상 19:13) (모세, 이사야, 사도 요한 등에게서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룹들까지도 두려움을 피해 그들의 얼굴을 가리우지 않으면, 안되었거늘(사 6:2), 하물며 부패하고(욥 13:28), 버러지에 지내지 않는(욥 7:5; 시 22:6),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하여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왕이 되시고----\"(사 24:23) 곧 주님께서 자신의 광채를 나타내시며, 보다 더 가까이 나타나실 때에는 가장 빛나던 광채들도 그 앞에서 어두워진다는 것이다.(사 2:10,19)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해도 먼저는 전자에 대하여 논하고 다음에 후자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 제 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1.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그의 영광에 얼마나 유익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바로 말해서 종교나 경건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간의 중보자 그리스도를 구속 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아담이 자기의 무죄함을 그대로 보전하였더라면, 우리는 자연의 참된 질서에 따라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그 기초적이며, 단순한 지식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성이 현재와 같이 파괴된 상태에서 증보 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목 시키시지 아니하는 한, 하늘 아버지로 알거나, 구원의 창시자로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호의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섭리로 다스리시며, 선하심으로 양육하시며, 각종의 축복으로 우리들에게 체워 주신다는 것을 아는 지식을 가지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화목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신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고후 4:6 참조) 자신을 구속 주로 보여 주셨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이중의 인식이 생기는데 우리는 여기서 전자(자신을 창조주 나타내신 하나님)를 먼저 생각하고 후자(자신을 구속 주로 보여 주신 하나님)는 다른 곳에서 다루도록 한다. 더욱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성결의 근원이시며, 그 분 밖에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신(믿지 않은 한)하지 않는 한,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와 찬양의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를 권능으로 유지하시며, 선으로 보존하시며, 특히 인류를 의와 심판으로 지배하시며, 자비로 참으시며, 보호하심으로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지혜, 빛, 의, 권능, 공의, 참된 진리등,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님을 그 원인으로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에게 기대하며, 그에게 찾으며, 또한 이미 받은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돌리기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식하는 것은 \"종교를 낳게하는 경건\"을 우리에게 바르게 가리켜 주기 때문이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을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 이런 모든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단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누리는 모든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진정으로, 그리고 그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께 관한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라는 질문은 헛된 생각의 장난질이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질문은 \"하나님의 본성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그의 본성과 일치된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안내자가 되고, 교사가 되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 일체의 선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아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받았음으로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함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계획과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인간의 마음을 점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받쳐지지 아니하는 한, 그것은 극도로 부패해져 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야말로 인간 생활의 법칙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분명히 바라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부패성이 그의 마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올바르게 찾지 못하게 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 매달리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경건한 마음은 처음부터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뿐, 어떤 공상적인 신을 꿈꾸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공상을 하나님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믿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혹은 경솔하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의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최대의 열심과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창시자이심을 알고 믿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나, 궁핍할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보호를 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알고 있음으로, 그를 완전히 신뢰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재난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주요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위엄을 경외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힘쓰며, 또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심판자로써 죄를 엄하게 벌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심판석이 자기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여 행동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이 매우 무서운 것이지만, 그런 사람은 비록 피할 길이 열려 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사람을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건한 신자에게 여생의 상급을 주시고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 다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가 죄를 억제하는 것은 다만 형벌에 대한 공포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주로 예배드리며, 찬양하는 것이다. 만일 지옥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는 몸서리쳐 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실로 순수하고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내포하고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곧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되 아무 끝없이 하고 있으며,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식이 허식으로 흐르고 있는 곳마다 마음의 진실성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제 3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 속에 뿌리 박혀 있었다. 본 문 : 롬 1:8-15 1. 이 자연적 은사의 특징 하나님은 사람 모두에게 하나님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지각을 주셨다. 이것은 아무도 무지를 핑개삼아 하나님를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는 이 하나님를 아는 지식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계속 하신다. 칼빈은 그의 주석 요 1:5에서 \"부패한 인간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두가지 빛의 요소가 있다. 그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종교적인 씨앗이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다\"라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를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으나 하나님를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를 경배하지 않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는 그들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는다. 사람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증거는 많다. 특히 문명인들 보다 원시적인 사람들에게 그 증거가 많이 있다. 짐승과 다를바 없는 생활을 하는 미개인들은 그들 속에 종교적인 씨앗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종교가 없는 곳은 없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좋은 실례다. 사실 우상 숭배도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좋은 증거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하는 종교적 행위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를 아는 인식을 부인하고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타고난 천성적인 버릇을 고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이와같은 전재 아래 인간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발견될 것이다. 2. 종교는 임의의 발명품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우매한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를 만들었으며, 그들은 그들이 만든 하나님를 믿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와같은 종교적 사교 집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를 찾는 본성 속에 씨앗이 새 봄에 굳은 땅을 뚫고 움을 돋듯 하나님를 아는 지식이 없었다면 오늘의 하나님를 믿는 기독교는 없을 것이다. 인간을 속여 사교 집단으로 만드는 거짓이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기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종교를 부인하고 하나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오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 속에도 하나님를 아는 지식이 있어서 가이우스 칼리쿨라(Gaius Caligula)-로마 황제, AD 37-41까지 로마를 다스린 Tiberius Caesar의 증손-는 방자하게 하나님를 부인하고 기독교도를 핍박한 사람이였지만 천둥만 처도 벌벌 떨면서 침대 밑으로 숨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이런 우수꽝스러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피해 보고자하는 본능적인 행동이다. 하나님를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온 갖 구실을 찾지만 그럴 수록 더 하나님의 두러움이 떨게된다. 그들이 그들의 양심의 두러움에서 잠시 놓임을 받는 것은 술이 취했을 때나 깊은 잠에 빠졌을 때다.그러나 깊은 잠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에 쫒기는 자의 두러움에서 피할 수 없다. 3. 실제적인 불신앙은 불가능하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면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의식을 지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신에 대한 인식은 모든 사람이 나면서 부터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념은 인간의 골수와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을 처도 이 하나님의 의식에서 벗어 날 수 없다. 키케로(Cicero))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것들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종교는 점점 개량되고 왕성해 진다. 이 세계를 주장하는 사단은 될 수 있으면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지식을 몰아 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예배를 부패하게 하려 온갖 짓을 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더욱 왕성하고, 하나님를 섬기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학교서 배우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모태에서 부터 터득한 하나님를 부인하는 지식이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에 하나님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모든 사람은 살아 가는 목적이 하나님를 인식하고 그 분을 섬기며,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이런 본연의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면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괴로움을 당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자연 법칙을 거스려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며, 그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잡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플라톤(Plato)의 말을 아주 잘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악을 피하고 참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고 지혜로워야 한다\"라고 했다. 그릴루스(Gryllus)도 역시 플루타크(Plutarch)의 저서에서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낳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그들은 끝임없는 불안과 혼란과 불안 속에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를 경배하는 것 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이 인간은 영생을 동경하게 된다. 제 4장 :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의에 의해 질식 부패되었다 1. 迷信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다는 것은 인간 경험이 잘 말해 준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이 소중한 씨앗을 자리 키우고 있는 사람은 백에 한 사람 정도도 안된다. 더욱이 그것을 무르익게 하여 때 가되면 열매를 거두도록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시 1:3 참조) 게다가 어떤 사람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지만, 어떻든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버린 사람들이다. 그 결과로 이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미신에 빠져 버렸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수고하고 있으며 그 맹목은 항상 거만한 허영으로 완고한 것들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수준 이상의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을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억측에 따라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연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발을 내디디던 간에 그들은 필경 파멸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다. 그 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시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악에 대해 설득력 있는 발언을 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롬 1:22)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이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곧 그들은 절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분에 넘치는 것을 요구하여 제 멋대로 어두움을 자초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우준 하고 완고한 교만으로 우둔해졌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로 눈이 어두워 졌다고 부언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이와 같이 허망한 호기심 뿐 아니라, 거짓된 신뢰에 따라 제한된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 보려는 지나친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조금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53:1) 다윗의 이 말은, 다른 곳에서도 곧 찾아 볼 수 있겠지만 먼저 자연의 빛을 끄며,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자들에 대한 말이다. 우리들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生來的인 감각에 의하여 아낌없이 내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 내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다윗은 그들의 광란이 한층 더 증오스러운 점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시의 본질을 아직 제거하시지 않으셨으나 그 심판과 섭리는 박탈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개으름뱅이로 가두어 둠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단호히 부정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세계의 통치를 포기하고 이 역시 운명에 마끼며, 인간의 악한 행위를 묵과함으로 인간이 형벌을 받지 않고 육욕에 빠져 살게 한다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본성과 불일치한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말살시키고 무분별한 욕망에 빠진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이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이 눈을 감은 후, 보아도 보지 못하게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인 것이다. (마 13:14-15; 사 6:9-10; 시 17:10 참조) 다윗은 자기의 사상을 가장 잘 해석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시 36:1)라고 말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행을 도도히 자랑한다고 했다(시 10:11). 그들이 어떤 신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고 해도, 그들이 인정하는 신의 능력을 제거함으로써 그 영광을 박탈한다. 바울이 증거 한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분\"(딤후 2:13)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허하며 죽은 우상으로 만드는 자들은, 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잇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아무리 그들 자신의 의식을 거슬려 싸우며, 하나님을 그 의식에서 몰아 내고, 천상에서 파멸되기를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 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공포로도 하나님을 맹렬히 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들은 무감각으로 인해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 망각은 계속 그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미신에 애한 변명과 공허한 변호가 허물어진다. 그것은 그들은 종교에 대한 열심만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터부니 없는 것이라고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종교는 마땅히 우주 법칙에 따라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야 한다는 것,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시하시다 는 것,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망상에 따라 변질되는 그런 亡靈 혹은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때에도, 그것이 가면을 쓰고 하나님을 얼마나 조롱하려 하고 있다는 명백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미신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것만을 붙잡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 기뻐하시는 것들을 공공연히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들의 거짓된 의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망상을 예배하며 찬양한다. 마일 그들이 처음에 어리석고 강퍅한 그들의 신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모호하고 거짓된 견해를 가진 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8)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에베소\"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지낸 자들이며 그때에는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데 있어서 그들은 외인이 였다고 했다(엡 2:12). 적어도 이런 상황 속에서는 유일신을 생각하던, 다신을 생각하던,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다같이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이 하나님을 저버렸음이며 또한 그를 버림으로써 저주받은 우상이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라고 말 할 수 없다고 단정해야 한다. 4. 僞善 여기 또 두 번째 죄가 있다. 그것은 적어도 강요를 당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며 끌려가지 전까지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는데서 생기는 자발적인 두려움에 감동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강요되는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혐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포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신들을 만들어 냈다고 한 스타티우스의 말은 이런 종류의 무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이에 대해서만은 잘 부함이 되는 말이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범한 죄를 심판하기 위한 심판대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심판대가 없어지기를 열심히 염원한다. 그런 심정으로 심판하시지 않고는 참으실 수 없는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능력이 가해짐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을 멀리할 수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서워서 후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그들을 위압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여러 가지 죄악으로 자신을 부패하는데 열심이며, 악에 악을 더하여 마침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여 그 모든 의를 파기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체 위장하여 죄의 탐닉을 제재하지 않고 자기로 만족하며, 자신의 육체적인 방종에 빠지길 좋아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공허하며 거짓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종교의 그림자라고 부를 가치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이런 혼란한 지식과 정교의 기원인 경건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경건은 오로지 신자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이런 왜곡된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이 멀리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전 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재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열심이다. 또한 그들은 마땅히 성결한 생활과 완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천박한 것들과 무가치한 의식들을 날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한다. 아니, 그 뿐인가? 그들은 더욱 방종하여 자신을 불결한데 팽개치고 있다. 이는 그들이 속죄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신뢰해야 함에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그들 자신을 더 신뢰한다. 그들은 마침내 그들의 이런 거대한 오류에 그들 자신들을 얽어맴으로써 한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해 번쩍였던 그 섬광을 우매한 죄악으로 질식시켜 꺼져 버리게 한다. 그러나 그 씨앗을 그대로 남아 있으며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신성에 대한 어떤 관념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씨앗이 매우 부패해 있기 때문에, 가장 나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본래부터 하는 나의 주장은 더욱 명백해 진다. 이는 遺棄者 자신들도 이에 대하여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온한 때에는 익살스럽게 하나님을 회롱하며, 허튼 소리로 수다를 떨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일단 절망이 그들 속에 엄습해 오면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찾게 되는데, 형식적이지만 하나님께 기도를 들이게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것이 아니며 벌써부터 나타났어야 할 것이 완고함으로 말미암아 억제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제 5 장: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지식은 우주의 창조와 섭리에 빛을 발한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본문 : 시 139:15 1. 하나님의 自己 顯現은 명백하여 어떤 변명도 용납될 수 없다. 사람의 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고 요 17: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에서 제외시키시지 않기 위해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이 알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모습이 그의 창조물에 너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시 104:2 \"주께서 옷을 입은 같이 빛을 입으시며\"라는 말씀은 이런 하나님을 잘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우신 모습을 세상의 어떤 것을 통하시던 사람에게 보여 주신다. 시편 기자는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시 104:3]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4]\"라고 말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과 지혜를 더욱 찬란히 나타내시기 때문에 흔히 하나님의 궁전이라고 부른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히브리 기자가 이 세상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상이라고 말씀한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거울로 빛을 발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2]\"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다. 시인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2]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시 19:3]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4]\"라고 말씀하시므로 온 우주에 하나님의 언어가 통하고 있음을 말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명백히 밝혔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2. 하나님의 지혜가 온 인류에게 제시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천문학, 의학, 기타의 자연 과학에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많고, 그런 지식이 없는 사람도 눈을 똑바로 뜨면 반드시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천문학이나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적 기술에 감탄을 한다. 그리고 무식한 사람들도 우주의 신비한 현상을 알면 감탄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다. 우주와 만물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갈렌이라는 고대 헬라의 최고의 의학자요 철학자며 해부학의 권위자였던 그는 인체의 각 부분의 기능을 기록한 그의 저서에서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성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3. 사람은 신적 지혜의 최상의 증거다. 옛날의 철학자는 사람을 가르쳐 소우주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며, 사람의 마음을 깜짝 놀라게 할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하도다[행 17:27]\"라고 하셨다. 다윗도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라 하시고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 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나이다[시 8:2]\"라고 하셨다. 다윗의 말은 어린아이들이라도 하나님의 우주에 가득찬 섭리와 은혜를 안다는 말이다. 바울도 아라투스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탁월하신 재능과 은총을 인간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의 자녀며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이다. 4. 인간은 배은 망덕하여 하나님을 대적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고로 하여 아름답고 복된 모든 삶의 은총들을 무수히 준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들을 마치 자기들의 것인 양 마구 파괴하고 남용하면서 교만을 떨었다. 만일 사람이 이 우주에 가득찬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면 탐욕이나 더 가지기 위한 싸움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인간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빌미로 오히려 더 하나님을 대적이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구실로 하여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이 탁월한 기능과 은혜들은 자연의 한 법칙으로 돌리고 하나님을 불신한다. 5. 피조물과 창조주의 혼돈. 어떤 사람은 영혼이 유기적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 육체 없는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하여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는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영혼의 여러 능력이 육체를 돕는 기능만 가지고 있지 안다. 우주의 신비를 캐고, 인간의 신비를 캐는데 육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천문학의 경이로운 발견들은 사실 육체적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활동에 있는 것이다. 천체를 관찰하여 별의 신비를 캐며,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알고, 그 운행의 신속함과 완만함을 알고, 궤도의 여러 모양과 斜行의 정도를 아는 것이 어찌 육체의 힘이겠는가? 하늘과 땅을 관찰하고, 과거와 미래를 결합하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기억 속에 담아 두고, 즐거운 것을 즐거워하고, 훌륭한 것에 대한 감탄을 하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좋은 것을 분별하고, 훌륭한 판단과 그릇된 판단을 하며,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이 어찌 육체에 속한 일인가?사람이 잠자는 시간에도 여기 저기를 배회하고 신기한 일을 행하며, 심지어 좋은 발명품을 만들기도 하는데, 사람이 어찌 육체 밖에 없다 하여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를 인정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인가? 잠자는 중에도 우리의 신비한 모과 정신은 움직이고 있듯이 하나님은 잠시도 수시지 아니하시고 일하시며 하나님은 온 세계를 다스리시고 계신다. 바젤의 詩 \"최초에 한 영이 있어/ 이것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먹인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 이 영으로 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아름다운 새들 그리고 빛나는 태양과 대양 밑의 고기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한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빨아들인다. 그것은 /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제해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여 날 때 실날 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민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도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만은 하늘 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 6. 하나님은 자신의 주되심을 창조에서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며, 자연계를 다스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며, 예배드리게 하시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무한한 우주를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머리 신호로 만으로도 우주를 놀라게 하시며 격동하게 하셨다가 잠잠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들어내시기 위함이다.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의 자연의 일반적인 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일도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한다. 하나님이 인류 사회를 다스릴 때 경건한 사람에게는 관대하심을, 악한 사람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와 은혜다.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보호자요 변호사요, 선한 사람을 벅 주셔서 축복하시고 그들의 생활을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재난에서 피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어떤 경우에 그렇지 않게 보이는 점이 있으나 이런 사실이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한가지 범죄에 대하여 엄격한 심판을 하심은 모든 죄에 대하여 엄격한 다스림을 행사한다는 것이며, 여러 가지 죄를 즉시 다스리지 않으시는 것은 장차 올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8.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신다. 하나님이 인간의 생활을 주관하신 다는 증거는 많다. 선지자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갑자기, 기적적으로, 예상 밖의 사건을 통해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강조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시 107:4]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시 107:5]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시 107:6] 또 바른 길로 인도 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시 107:7]\" 궁핍하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8]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 107:9]\" 사로잡힌 자들을 침침하고 고통스러운 자리에게 놓아주시고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시 107:10]\" 파선 당한 자들을 항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며, 병으로 죽어 가는 자들을 고쳐 주시며(17-20)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교만한 자들을 그들의 위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신다. 이런 사건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연한 사건으로 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분명하고 찬란한 섭리에 대하여 깨달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의 편견과 오만과 뻔뻔스러움이 하나님의 이런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걸음 무더기에서 드셔서[시 113:7]\"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퀘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고전 3:19]\" \"간교한 자로 자기 퀘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며[욥 5:13]\"하셨을 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신다. 9.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숙고하므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다른 어떤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리고 또 다른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 명백히 이 온 세상에 들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더 상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상고는 공허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들의 심령과 생활에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지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식은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식에 대해 더욱 감동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식이 아닌 다른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기 위한 공상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이나 지나친 사색에 의해 하나님을 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써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찾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하도다[행 17:27]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행 17:28]\"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라고 했고, 자기도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선포하겠다고 했다.(시145:3; 145:5-6).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를 당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워지기 위해 하나님의 사역을 주시해야 한다\"고 했다. 10.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도록 하며, 내세의 소망을 가지게 하며, 삶의 용기를 준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이제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가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 경건한 사람들이 경건치 않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핍박을 당하는 것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며 경건히 사는 사람들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의롭게 되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알고 주님이 세상을 사신 것처럼 살게 될 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그의 선하심과, 의, 자비, 겸손을 보여 주셨는지를 자세히 살펴 그 분의 모범을 따라야 할 것이다. 11. 창조에는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 있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우둔함과 미련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하심을 깨달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인간은 죄와 자신의 육신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빠져서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 특히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는 어리석은 철학자들과 미신에 의해 더욱 더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되었다.(생략) 13. 성령님은 인간이 고안한 일체의 예배 행위를 거절하신다. 따라서 자신의 견해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자는 사실 하나님의 법을 떠나 자기의 종교에 만족한 사람들로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던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배교적인 행동이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0:20]\"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는 법을 배우기 전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엡 2:13]\"라 하셨다. 근본적으로 죄를 짖은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하신 말씀대로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 드리는 방법을 계시하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잘 몰라서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할 때 비록 무지로 말미암은 죄라 해도 그 죄가 가벼워 사죄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또한 마땅히 섬기고 예배 드려야 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가르치지 않는 자도 죄의 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나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어떤 세상적 전통이나 습관에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한 그 방법대로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14. 이런 점에서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매우 미급하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충분히 알려 줄 수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2)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2) 6. 모세의 이적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없다. 모세의 이적은 어떤 사람들이 모세를 반박하고 반대하여 군중들을 동원하므로 떠들썩한 분위기와 불유쾌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어떤 가증한 사람들은 모세의 이적은 마술에 의한 것이라고 모략했다.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출 7:11]\" 그러나 그들은 모세 앞에 설 수 없었다. \"술객도 독종으로 인하여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독종이 술객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발하였음이라[출 9:11]\" 모세는 박수나 술객들을 아주 싫어해서 그들을 그들이 있는 곳에서 추방했다.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20:6]\" 그런 그가 어떻게 공공연히 많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뿐 아무 것도 아님을 밝히므로서 일체의 비난들을 일축해 버렸다.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출 16:7]\" 그리고 어떻게 마술을 가지고 날마다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신선한 음식을 백성들이 먹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 16:19-20]\" 백성 중에는 날마다 모세를 괴롭히는 무리들이 있어서 모의를 하고 작당을 해서 모세를 제거 시킬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런 사실들을 마술로 미리 알고 막을 수 있었겠는가? 마술로 그 백성을 기만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백성들을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3번씩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7. 예언은 사람의 기대와 다르게 성취되는 일이 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 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라는 예언이 있다. 이 말씀은 야곱에 의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세가 말하기 300년에 말씀된 것을 모세가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엄격한 말씀은 400년 후에도 이루워 지고, 2,400년 되는 지금도 이루워 지고 영원히 이루워지는 말씀이다. 어떤 경우에 유다의 왕권이 유다 지파가 아닌 베냐민 지파에게 이월된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삼상 11:15]\" 그러나 사울은 그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아니다. 그 사람은 백성들이 억지로 하나님에게 때를 써서 세운 백성들의 왕이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 즉시 이세의 집을 찾아가 유다 왕을 따로 기름 부어 세운다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세운 왕이 되는 것이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3]\" 이렇게 해서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엄격히 이루워 진다. 8.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신다. 이와같은 예언은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더욱 확실히 증거된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은 바벨론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므로 바벨론에 대한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 살던 이사야는 그들의 나라와 민족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공공연히 예언한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사 39:6-7]\" 그들에게는 전혀 들을 필요 없는 사건의 예언이었는데, 그 예언이 사실로 그들에게 닫친다. 이사야는 그들의 멸망만 예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레스라는 사람을 통해 구원 얻을 것도 예언한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사 45:1-2]\" 그리고 이사야가 예언한 고레스라는 메데 왕은 이사야 사후 100년에 세상에 나타나 이사야가 말한데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여기서 고레스가 이사야의 글을 읽고 그 글에 쓰인데로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또 예레미아는 그들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가서 70년이 되면 고향 에 돌아 오게 될 것을 예언하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렘 25:11-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그리고 이 예언들은 모두 사실로 이루워 진다. 이런 사실 앞에서 누가 감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선지자들이 예언 한 것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사 42:9]\" 선지자들은 600년에 될 일들을 이렇게 예언하고 그 후에 있을 일들도 이렇게 예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9. 율법의 전승 어떤 사악한 자들은 모세나 이사야의 글로 읽히고 있는 책들이 실제로 그들의 책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고 반박한다. 심지어 모세가 실제 인물이었는가를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 만일 우리가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해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입을 봉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쓰셨다. 어리석고 미련한 왕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 보존을 개을리 하여 한때 하나님의 말씀이 유실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왕 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들어 내셨다.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왕하 22:8]\" \"서기관 사반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대하 34:15]\" 이렇게 발견된 성경은 대대로 게승되어 내려 왔다. 요시아는 그 성경의 원본을 성전에 보관하고, 그 사본을 만들어 왕의 서고에 두게 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8-19]\"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자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말씀을 특별한 방법으로 보존하시고 오늘 우리들에게 까지 허락하셨다. 10. 하나님은 말씀을 기적적으로 보존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의 마카비 일로 로마의 안티오커스가 유대의 모든 책을 다 불태우라 했는데 어떻게 성경이 남아 있겠는가 하면서, 오늘의 성경은 모조품이요 가짜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사본들은 박해가 가라않자 즉시로 사람들에게 전해 졌는데,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개편되지 않은 성경이 경건된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사람들에게 믿어 질 수 있겠는가? 아무도 감히 유대인들이 성경을 위조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로마에게 지독한 핍박을 당했고 그들이 쓰는 히브리 말은 죽은 언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하 나님의 말씀을 보존하시고 계승 시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을 통해 매시아가 곧 오시리라는 말씀의 성경책을 보존 하셨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의 말씀을 죽도록 믿고 사는 유대인들을 통해 해 주셨다. 그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필요도 없는 말씀-믿지 않으므로-을 생명을 걸고 지킨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들을 \"書籍商\"이라고 했다. 11.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 특성 및 권위 구약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보존되고 전파되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그 진리가 얼마나 튼튼히 서 있는지를 알게된다. 세 사람의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평범한 문체로 기록했다. 그러나 많은 거만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그 평범한 문체에 경멸과 조소를 보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의 문체만 보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이 구원의 진리를 볼 수만 있다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아주 쉽게 기록하여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할 것이다. 진정 조금이라도 겸손한 사람은 눅 1장을 읽은 것만으로도 스스로의 교만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세 복음서의 저자들이 간단히 기록한 그리스도의 강화는 그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도 멸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위엄있게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순종치 않는 자들의 그 완고함을 벼락을 치듯 강하게 책망하신다. 그들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성경에서 일체의 존경심을 몰아내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알고 있는 트집장이들은 모든 사람 앞에 끌어 내어 요한 복음을 읽게 하자. 그리고 그들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구경하자.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는 무수한 하나님의 말씀, 그들을 각성시키시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 그들을 회개하여 옳바른 사람이 되게하시는 능력의 말씀을 접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런 방법을 쓰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저작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그 속에 있는 천적인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사로잡는다. 원래 마테는 이전에 그의 책상 앞에 앉아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이며 베드로와 요한은 고깃 배를 몰아 고기를 잡던 사람이 아닌가. 그들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었다. 그들이 무식한 사람이라는 것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요 7:15]\"했다 그들이 말한 글도 모르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울은 이전에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잔인하고 살기 등등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는 이 변화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에 의하여 그가 반대하던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성경이 공포된 후 장구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은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성경을 억압하고, 파괴하며, 인간의 기억에서 성경을 전적으로 제거, 말살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성경은 마치 종려나무 자라뜻 점점 더 자나라서 감히 공격할 수도 말살 할 수도 없는 탁월한 위취를 차지하며 자랐다. 사실 탁월한 괴변가나, 웅변가나 사상가들 치고 성경을 공격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평생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와같은 사실이 사소한 사건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무장했으나, 그런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만일 성경이 인간들의 보호에만 의존되었다면 어떻게 사방으로부터 오는 그 강력한 공격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이런 일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으로 부터 온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성경은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우려 학대하고 말살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자체의 힘으로 지금까지 널리 보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을 받아 들이고 포용하는데 일치한 것은 한 민족이나 한 국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면에서는 전혀 공통성이 없는 지구에 있는 여러 민족들이 거룩한 일치에 의해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다. 또 근본적으로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 생각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을 크게 감동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일치한 사람들의 경건을 고려할 때 적지않는 중요성이 이에 더해진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새 사람이되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사람을 변회시키는가? 사람을 용감하게, 대담하게, 심지어 큰 정렬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일까지도 불사하게 한다. 사실 이 성경 말씀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위대한 사명과 열정을 가지고 순교를 했는가? 그들은 이 말씀을 지킬 때 광신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가장 경건하게, 가장이 진실하게, 가장 탁월한 믿음으로, 이 일을 했다. 이렇게 보존되여 내려 온 이 성경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그러나 성경이 다만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보존 되여 내려 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더 확실하개 작용을 하고 있었던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을 확실히 보존하도록 사람들을 사로 잡으신 것이다. 그럼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지키고 전해야 할 것이다. 제9장 :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관심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 돌아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오도되었다기 보다는 광란에 사로잡혔다고 해야 한다. 아주 교만해지고 오만해진 사람들이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아서 성경 읽은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고, 그들의 표현대로 라면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다. 그렇게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박하다고 할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 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 도대체 어떤 영인가를 묻고 싶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그들이 대답을 한다면, 그 확신은 참으로 조소 거리가 될 것이다. 그들도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영으로 조명되지 않았다고 그들도 생각할 것이다. 이들 중 한 사람도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저작에서 훌륭하게 증명된 대로 보다 더 높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다. 그는 \"내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내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내 입에서와 내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마치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들처럼 외부적인 교리에만 묶여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새 교회가 이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한다. 곧 성령에 의해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지배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잇는 것은 예언자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결속시켜 놓은 것들을 이 악한 자들은 가증하고 참람되게 분리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삼층천 이끌려 다녀온 후에도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후 12:2). 또한 그는 훌륭한 교사 디모데에게도 읽은 것이 착념하라고 권했다(딤전 4:13).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성경에 대한 찬사를 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딤후 3:16-17). 성경의 효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지에 인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간적인 거시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관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한 영과는 전혀 다른 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이 완전히 정신 착란증에 걸려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광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떤 영을 약속하신다고 하셨는가? 성령으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영으로서 예수 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요 16:13).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ㅂ무는 아직 들어 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처 주는 데 있는 것이다. 2. 성령은 성경에 의해 인정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무슨 우익이나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성경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실은 복음의 빛이 나타난 후에는 물러갔다고 생각되었던 예언자들의 교훈을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을 베드로가 칭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벧후 1:19).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제쳐 두고 다른 교리를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영이 있다고 하면 이는 마땅히 허망하고 거짓된 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갈 1:6-9). 그 이유는 \"사탄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고후 11:14)하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한 특징에 의해 그가 식별되지 않는 한 성령이 우리를 향해 어떻게 권위를 행사하실 수 있는가?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가장 분명히 우리들에게 지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찾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찾기 때문에, 스스로 이 가련한 파멸에 이르는 사람들은 예외이다. 더욱이 그들은, 만물이 예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을 성경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마치 성령은 어디서나 동일하시고 자신과 일치하시며 만사에 시종일관하셔서 변함이 없다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투다. 만일 성령이 인간이나 천사, 또는 다른 어떤 무엇의 규범에 따라 판단된다고 하면 틀림없이 성령님은 그 지위에서 격하될 것이다. 즉 노예 상태로 떨어 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자신과 비교되고 자신 안에서 고려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손상을 입었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종의 검토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겋지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대하여 자신의 위엄을 확림하려고 하시는 검토인 것이다. 우리로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임재하신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그러너 사턴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산대로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자자이시다. 그는 변하실 수도, 자신거ㅏ 다를 수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존속하실 것이다. 성령이 자신을 퇴화 타락시키는 것이 명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이 말은 성령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가 아니다. 3.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들은 우리가 죽이는 문자에 의존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성경을 경시 한데 대한 형벌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은 바울이 고후 3:16에서 거짓 사도들을 대항해 싸우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들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을 추천하며, 주께서 \"그의 법을 그들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렘 31:33)하기로 약속하신 계약의 축복들을 사람으로부터 탈취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총과는 관계가 끊어져서 다만 귀에만 울릴 뿐, 마음에는 아무런 가동도 주지 못하는 그런 문자는 죽은 글이며(고후 3:6), 따라서 주의 율법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을 죽인다. 그러나 그 문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효과적으로 세겨지며 그리스도를 제시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는\"(시 19:7)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다(빌 2:16). 더욱이 사도는 같은 곳에서 자기의 설교를 \"영의 직분\"이라고 말하였다(고후 3:8).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말은,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서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자체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하여 큰 확실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할 수 잇다. 그것은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 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머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신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이 없이 성령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눈 성령이 임하시면 즉시 말씀을 패기할 생각으로 일시적인 전시를 위해 말씀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동일한 성령을 보내셔서 그 권능으로 말씀을 나누워 주신 것은, 그 말씀에 대한 효과적인 확증으로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함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두 제자의 마음을 열어 주셨는데(눅 24:27, 45), 이는 그들이 성경을 거절하고 지혜를 믿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20)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권면할 때에도, 그는 말씀을 떠난 공허한 사색으로 그들을 이끌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언이 멸시를 당해서는 안된다고 즉시 덧붙여 말했다. 이 사실을 통해서 그는, 예언이 경시될 때에 성령이 소멸된다는 것을 확실히 암시했다. 이에 대하여 거만한 광신자들은 무엇을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결솔하게 버리며 그 말씀에 걀별을 고하면서도 대담하고 뻔뻔스럽게, 자신들의 마음에 일어 나는 몽상들을 확고히 붙잡는 것만이 곧 유일하고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바로 저들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이와는 훨신 다른 절제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전적으로 진리의 빛을 잃게된다고 생까하는 사라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께서 자기 영의 조명을 모든 신자들에게 나누워 주시는 도구로 알고 잇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영은 사도들 안에 거하셨고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씀하시는 성령 이외의 어떤 다른 영이 아니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끊임없이 말씀을 듣도록 부르심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제 10 장 :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을 지정하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교리 우리는 앞서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에서 당신에 대한 계시를 하셨다. 그리고 그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해 말씀을 주시어 더욱 생생하고 상세히 계시해 주셨다. 이제 우리는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일치하는지를 살펴보겠다.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에게 일정한 목록과 같은 정도를 마련해 주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인도하는 정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원수로 행하던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맞아들일 때는 그 사람들에게 이미 구속 주로서 나타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하신 것과 같이----\"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 국의 아비가 될지라[창 17:4]\" 그러나 이 장에서 우리는 천지의 주제이신 친히 세우신 우주를 어떻게 통치하시는 가를 연구하기로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부성적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이 엄격하신 분임을 기록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징벌을 주시는 가도 기록되어 있다. 2.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에게서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하나님을 계시할 때 간결히, 그러나 확실히 묘사하려 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 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7]\" 여기서 우리는 그 장엄한 이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이 선언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성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의 공허한 사색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순종에서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본 대로 하늘과 땅에서 빛나고 있는 똑같은 완전성이 여기 열거되고 있는바 그것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로우심, 공의, 심판, 그리고 진리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권세와 능력은 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충분히 나타내고자 할 때는 그 이름을 사용한다. 그 예로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1]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2]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시 145:3]\"에서 볼 수 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이 총체적으로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시 145:5]\" 이 시편에는 피조물이 볼 수 없는 것들이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을 정확히 볼 수 있다. 예레미아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4]\"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 라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1). 인애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구속 사역이 여기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2). 공평한 심판 : 행악자들은 날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고 영원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3). 정직 또는 의이다. 이것으로 신자는 보존되며 가장 자애로운 양육을 받고 있다. 예레미아는 이러한 속성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충분한 방법을 터득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 거룩하심, 권세 등을 정확히 말씀하시고 있다. 시인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 하시리로다[시 25:8]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길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고 말씀했다. 실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에 세겨져 있는 빛나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지식은 먼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한다. 이 지식으로 우리는 완전 무결한 생활과 거짓이 없는 생활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그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3. 이러한 하나님의 유일성이 이교도들에게도 계시되었기 때문에 우상 숭배는 더욱 핑계할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리로 올바르게 인도하시기 위해 이교도들의 모든 우상을 배격한다. 그것은 거의 모든 시대의 다른 종교들은 일반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서도 알려 졌으며 존경받은 것은 사실이다. 많은 신들을 섬기는 이교도들도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마치 유일신으로 만족이나 하는 듯 \'하나님\'의 이름을 단수로 쓴다. 그리고 이를 지혜롭게 일아 차린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유일성이 사람의 마음에 세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터툴리안도 이와 같은 것을 흔히 사용되는 구절로 입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허망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들어 그 지각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다신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대한 핑계를 댈 수 없음에도 어리석게도 다른 여러 신들을 함께 섬기는 스스로를 속이고 사단의 꾀임에 빠지는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그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언젠가를 뼈아프게 경험할 것이다. 하박국은 일체의 우상을 정죄한 후에 \"성전에 계신\" 유일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하신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산 자로 하여금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다른 신도 용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 11 장 :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 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1. 하나님은 가시적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떤 노력도 금하신다. (예배에 있어서의 형상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참되신 신임을 증명하시기 위해 우상과 대립하신다. 그것은 어떤 철학자나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서나 인간이 만든 신을 무로 돌린다. 인간은 그들이 신을 만들 때 언제나 물질로 신을 조형화 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수한다.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게 되면 그 불 경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파괴된다\"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라고 하셨다. 그리고 오래 전에 미신이 하나님을 거짓 것으로 바꾸고 있음을 경고하셨다. 페르시아 인들은 태양과 별들을 형상화하여 신으로 섬기고, 애급 사람들은 모든 동물을 신으로 섬기고 희랍인들은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전능한 신이라 했다. 이런 많은 우상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쁜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모두 나쁜 것으로 거절하셨다. 2. 하나님은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 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신 4:15]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신 4:16]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신 4:17]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신 4:18]\"라고 하였고 이사야는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강조해서 말씀을 하셨다.\"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사 40:18] 우상은 장인이 부어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사 40:19]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사 40:20]: (41:7,29, 45:9, 46:5-7) 바울은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9]\"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말씀은 인간이 만든 조상과 화상은 모두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다. 세네카는 \"그들은 거룩하고 썩지 아니하며 가히 침범할 수 없는 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나쁘고 천한 물건들을 사용했다.\" 어떤 사람은 그것에 사람의 형상을, 어떤 사람은 물건에게 짐승의 형상을, 어떤 사람은 야수와 괴물의 형상을 새겼으며, 어떤 것은 남녀의 추잡한 모습을, 어떤 것들은 몇 개의 다른 몸을 가진 괴물로 만들었다. 만일 그런 것들이 생기라도 가져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아무도 그것을 신성시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3. 신적 임재의 직접적인 표징도 형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말씀은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인간들을 어떤 목적에 의해 적절히 교훈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엄의 임재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임재를 사람에게 명백히 말해 주는 것들이 있다. 즉 \"구름과 연기와 화염\"(신 4:11)은 비록 이것들이 천적 영광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굴레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제어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이상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를 응답 받지 못하고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라는 말씀만 받았다. 신약에서 성령님은 한번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그러나 그 비둘기 모양의 성령님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하나님이 이렇게 임재 하신 것은 성령님이 눈에 보이는 분으로 믿는 것을 경고 받고 다만 성령의 권능과 능력으로 만족할 것이요 어떤 외부적인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심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종종 나타나신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서곡일 뿐이다. 구약의 제단에 속죄소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임재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그룹들은 그들의 날개를 펴서 속죄 소를 덮었다. 그리고 그 속죄소는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었으며, 그곳은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다 볼 수 없이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출 25:17-21). 그것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속죄소를 가리고 있는 소 형상을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자들이 있으니 한심하다.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사 6:2]\"라고 해서 스랍들도 하나님을 볼 수 없이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4. 형상과 화상은 다 같이 성경에 반대된다. 우상은 물질로 만들어 진 것이요 신아 아니며, 그 형상은 금과 은으로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막연히 만들어 숭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열 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 물이라[시 135:15]\"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 물이라[시 115:4]\" 이와 못지 않게 나쁜 것은 사람들이 이런 우상을 신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이다. 철공은 철을 숯불에 불리고 메로 치고 강한 팔로 갈리므로 심지어 주려서 기력이 진하며 물을 마시지 아니하여 곤비하며[사 44:12] 목공은 줄을 느려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정규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인형을 새겨 집에 두게 하며[사 44:13]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사 44:14]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 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사 44:15]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사 44:16]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 도다[사 44:17]\" 그리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자들에게 무서운 저주를 퍼부었다.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우상을 만드는 것 뿐 아니라 화상을 그리는 것도 금지되었다. 희랍인들은 화상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 5. 우상에 대한 성경적 판단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다 라는 말은 그레고리우스가 한 말이다. 이 말은 우상을 통해 하나님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한 그 자신도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졌다. 예레미아는 \"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렘 10:8]\"이라고 했고, 하박국은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합 2:18]\"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상을 통해 하나님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은 순전한 거짓임을 들어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무식한 자들이 우상을 보고 하나님을 배운다는 억지 주장이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예언자들이 그렇게 꾸준히 우상을 버리도록 백성들에게 강요했겠는가? 그러나 교황 주의자들은 확실한 원리로 우상이 책의 역할을 한다고 한 결정은 예언자들에 의해 전적으로 정죄 되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참되신 하나님과 우상을 대립시키고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예배한 것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사악한 일이요 거짓된 일이다. 그리고 그런 형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는 자들이야말로 비참하게 속고 있는 자들이다. 요컨대 우상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한다는 것은 거짓이요 허위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렇게까지 꾸준히 이를 정죄 하지 않았을 거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이며 거짓된 다고 우리가 주장할 때, 다시 예언자들이 가르친 그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6 교회의 교리도 우상에 대하여 달리 판단한다. 락탄티우스와 유세비우스는 형상으로 보이는것은 모두 可死的이라고 주장했다. 어거스틴도 이와 마찬가지로, 형상에 예배드리는 것 뿐 아니라 그 형상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명백히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오래 전에 에빌라 교회 회의에서 제정된 것이 였다. 그 중 36장에서 \"교회 안에 화상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예배를 받던가 찬양을 받아야 할 것이 벽에 그려져서도 안된다.\"라고 기술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은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바르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이에 찬동하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곧 \"신들의 조상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제거하고 그 대신 오류를 가했다\"라는 말이다. 한 이방인이 이 말을 한 것으로 끝이 났다면 그 말은 권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어둠 속에서 광명을 찾은 이 말, 즉 유형적인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외를 감소시키고 오류를 다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은, 우리를 충분히 부끄럽게 하고 남음이 있다. 이것은 진실과 지혜로 말한 것임을 사실 자체가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말을 바르로에게서 인용했지만 자신의 사상에 따라 진술한 것이다. 그리고 첫째로, 인간이 저지른 하나님께 대한 최초의 오류는 형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요소(형상)가 가해지자 오류가 증가한 것이라고 했다. 둘째로, 형사의 어리석음과 그 둔하고 불합리한 고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이 쉽게 멸시를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감소되고 심지어는 파괴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둘째 사실에 대하여서,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기를 지심으로 바란다. 그러므로 바르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을 형상이 아닌 다른 자료에서 배워야 한다. 7. 교황 주의자들의 형상물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황주의 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치를 느낄 줄 안다면, 하나님이 무식한 자의 책이라고 속임수를 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많은 증거에 의해서 명백히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양보해서 그런 주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의 우상을 옹호하는데 아무런 유익이 안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와 같은 괴물들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만든 성자의 화상, 혹은 彫像은 가장 음란한 실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아무라도 그들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체형을 받아야 한다. 실로 그들의 교회에서 동정녀의 조상(彫像)이라고 여겨지기를 바라는 형상물보다 오히려 창녀의 복장이 더 정숙하고 순수하게 보인다. 그들은 순교자들에게 좀더 잘 어울리는 복장을 입힐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 주의자, 우상을 일종의 성결의 책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순수하게 보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적당히 징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민일 교회가 의무를 다했다면 무식한 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성스러운 곳에서 신자들을 가르칠 분 아니라고 답변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교리를 배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의 전파와 성례 전을 통하여 한 공통된 교리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상을 생각하여 그 눈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는 자들은 이 교리에 대하여 마음과 주의를 성실히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해서 다만 우상 이외에는 배울 것이 없다고 교황 주의자 말하는 그 신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바로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의 제자로 인정한 자들이며, 하늘 나라의 철학의 계시로 광명의 옷을 입은 자들이며, 또한 천국의 구원의 신비로 교육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실로 나는 오늘날도 그러한 \"책\"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그렇게 무식하게 된 것이, 그들은 교육하기에 적합한 교리를 탈취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겠는가? 실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직무를 우상에게 넘겨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벙어리였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가 없다. 바울은 이 복음을 진지하게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1)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갈 3:13), 자기의 육체를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히 10:10), 자기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며(계 1:5) 성부 하나님과 화목케 해 주셨다는 것을(롬 5:10), 충분히 또는 진실히 배웠다고 한다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으로 그렇게 많은 십자가상을 교회 도처에 세웠겠는가? 이 한가지 교리만으로도 나무와 돌로 만든 천개의 십자가상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적인 사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오히려, 금, 은으로 만든 십자가상에 저들의 마음과 눈을 더욱 더 집착하게 된다. 8. 형상의 기원: 유형적 신격에 대한 인간의 욕구 (교회의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과 예배 부패의 원인이 된다) 우상에 대한 잠언의 말은 거의 일반적으로 동의를 얻고 있다. 곧 우상을 처음으로 창시한 자들은 죽은 자를 존경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들은 미신적으로 예배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인간의 천박한 갈망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악한 우상 숭배의 최초의 원인은 아니다. 이교의 저술가들이 자주 말하는 死者像을 신성시하려는 열망이 유행하기 전에, 벌써 우상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모세로부터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라헬이 그 아비의 우상을 훔쳤다고 말하면서 우상을 사용하는 일을 흔히 있는 죄악이라고 바랬다(창 31:19). 이 사실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工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홍수 이후에 세계는 새롭게 재생되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신들을 만들어 냈다.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무서운 심판으로 정화시킨 땅에 우상이 득실거리는 것을 노아는 고통 없이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증거한 대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데라 와 나홀은 거짓 우상을 섬긴 자들이 였다(수 24:2) 인간의 마음은 교만과 무모로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기호에 따라 감히 신을 상상하여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완만하게 어리석음과 무지로 완전히 젖어 버리기 때문에 그 공허하고 허망한 환영( 幻影)을 하나님으로 상상해 버린다. 이런 악에는 또 다른 악이 함께 하는 법이다. 즉 인간은 내적으로 상상한 하나님을 手工으로 표현하려 애를 쓴다. 그러므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 우상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유형적으로 나타내지 아니하는 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우상의 기원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는 일들이 증명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애급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했다. 그러나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어떤 유형적인 상징으로 볼 수 없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 에서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故國 行進의 인도자가 바로 하나님이 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이 인도한다고 인정하려 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육신은 자기들과 비슷한 허구를 얻고 나서는 부분별 하게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상인 것처럼 위안을 얻는데, 이렇게 하기 전에는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그 맹목적인 욕망에 따라 볼 수 있는 상징 물들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믿었다. 9. 형상물의 사용은 마침내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다. 여러 종류의 공상(우상 숭배)에는 즉시 예배가 따르게 마련이다. 인간이 형상에서 하나님을 보냈고 하면 역시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의 마음과 눈이 전적으로 우상에게 얽매이게 되고, 점점 무감각해져서 마치 거기에 신적인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것들에게 완전히 감탄하게 되고 만다. 그런데 인간이 지나치게 우둔하게 되기 전에는 우상 숭배에 뛰어 들어 가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 그들은 우상을 신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에 내 주 한다고 상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어떤 신들을 형상으로 표현하여,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끓어 엎드릴 때에는, 어떤 미신에 매혹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과, 예배를 유도할 만한 비문이나, 석비의 어떤 것도 금하신 것이다(출 20:25). 같은 이유에서 제 2 계명에는 예배에 대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 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나서는 여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고, 마침내 그것에 예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만다. 단순한 우상만을 예배하던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예배하던 지의 차이는 전혀 있을 수 없다. 여하한 구실을 막론하고, 우상에게 하나님의 존영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우상 숭배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신적으로 경배를 받기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상에게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참된 종교를 매몰시키고 전복하였다., 그 저주받아 마땅한 우상 숭배를 변호하기 위해 구차한 구실을 찾고 있는 자들은 이 점을 유의하라. 그들은 (케도릭) 형상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도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는(출 32:4), 하나님[서 친히 그들 손으로 그들을 애급에서 인도해 내신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하지 않았다(레 26:13). 그러나 금송아지가 바로 그들은 애급에서 구원한 신이라고 아론이 말하자, 그들은 이에 동의하여(출 32:4.8),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굼송아지에게서 볼 수만 있다면, 해방자이신 하나님을 금 송아지 형상을 그대로 존속시키기를 원하다고 했다. 그들은 마음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냈으나 언제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동일한 신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 많은 형상들의 신이 각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하는 것들은 보이는 형상물이 아니라 그 속에 보이지 않게 내 주 하시는 한 실재라고 주장했다. 즉 유형적인 형상물을 통해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대상에 대한 記號를 바라본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영적 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형상물을 통해 더욱 확실하고 친근한 이해가 그들에게 주어진다고 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왜곡된 우상으로 만들고 나서 끊임없는 새로운 계교에 미혹이 되어, 마침내 하나님이 우상을 통해 그 권능을 나타내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천지의 대주제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오 같은 형상으로 예배해도 된다고 확신했다. 한편 이방인들은 거짓된 신이기는 하지만, 이 신들이 하늘에 거주한다고 상상하고 그들에게 예배했다. 10. 교회에서의 형상물 예배 이런 일이 이전에는 행해지지 않았고,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는 뻔뻔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어찌해서 우상 앞에 부복하는가? 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귀를 향하는 것처럼 우상을 향해 하는가? 실로 어거스틴은 \"우상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예배드리는 사람 치고, 그 우상이 자기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과, 자기의 원하는 바를 이루워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한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형상물 가운데 어떤 것은 무시를 당하고, 어떤 것은 존경을 받는가 하면, 어떤 것은 가장 엄숙한 존영을 받는데, 어찌해서 동일한 하나님의 상들에게 이처럼 차별을 한다는 말인가? 어찌하여 그들은 자기들 집에 우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우상을 보기 위하여 서원(誓願)을 위한 순례의 길을 떠나, 자기 몸을 피곤하게 하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제단과 火床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살육과 유혈을 무름 쓰고 형상물을 위해 싸우면서 우상보다는 오히려 유일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쉽게 떠날 수가 있는가? 그들은 우상 숭배에 대한 자신들의 결백을 \"우리는 결코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 부르지 않는다.\"라고 말하여 주장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들도 우상을 그들의 신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을 목석으로 더불어 간음한다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렘 2:27; 겔 6:4이하; 사 40:19-20; 함 2:18-19; 신 32:37). 그런데 이런 행위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매일 행해지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만들어 놓고 육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11. 교황 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그러나 그들이 아주 교묘하게 구별을 함으로써 회피하려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며 또한 감추어도 안 되지만 이에 대하여는 조금 후에 언굽하기로 한다. 그들은 형상물에 표시하는 존경을 우상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로써 하나님께 아무련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둘리아\' 곧 영광이라는 것이 彫像이나 畵像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우상의 봉사자일 뿐 예배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련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로 이것은 마치 \"예배하는 것:이 \"봉사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들은 희랍어에서 피할 곳을 찾으려 하나 그것은 매우 유치한 방법으로 모순을 일심고 있다. 왜냐하면 라트류에인이라는 말은 희랍인들 사이에서 \"예배하다\"는 뜻을 지니는데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내가 말에서 그들을 책잡으려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련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순박한 사람들의 눈을 어두움으로 덮을 때,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샘이다. 그러나 아무리 능변이라고 해도 그들의 웅변술로는 결코 동일한 것을 가지고 두 개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과 옛날의 우상숭배자들과의 사실상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지적해 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간음하는 자나 살인자가 자기 범죄에 대하여 디른 별명을 붙인다고 해도 죄책을 면할 수 없는 것처럼, 만일 그들이 응당 정죄를 받아야 할 우상 숭배자들과 실제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이 명칭을 교묘하게 고안해 내어 변명을 일삼으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우상 숭배자들의 동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체 악의 근원은 그들의 터부니 없는 경쟁심에 있었다. 그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3)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3)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位)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회피하는 거짓 비난 자들을 대항해서 진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이러한 신기한 용어(민일 이와 같이 불러져야 한다면)는 특히 유용하다. 오늘 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패주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을 용감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짓밟아 버리지 않는 한, 비뚤어지고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자들은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그리하여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쟁에서 부패한 교의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오류를 감추기 위해 장광설을 늘여 놓는 불경 자들이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리우스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 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것을 당연한 일이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동의하는 척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하였기 때문에 시초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인간의 이와 같이 교활함을 그 숨은 장소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아리우스 파가 호모우시오스(동일 본질)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저주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 신앙을 들어내었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 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했더라면, 저들은 까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선한 사람들을, 사소한 용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잇겠는가? 그러나 그 단순한 용어가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 파와의 구별지은 것이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이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은 구별을 위해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구별하는 데 불과하며, 이런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가 논쟁에 올랐을 때 그는,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우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해서 위의 고백을 쉽게 회피해 버렸다. 이와 같이하여 그는,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어떤 순서나 구별이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옛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중심에 경건을 소유한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이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벨리우스의 그 사악함을 대항하여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삼위가 계시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그러므로 이런 용어들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들 용어들을 거절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로 나는 단순한 용어 때문에 완강하게 싸울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경건한 이 문제를 다룬 고대의 교부들도 서로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개인적으로 일괄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 그 예로, 힐라리는 여러 회의에서 채택된 條文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했던가? 어거스틴은 얼마나 자유스럽게 이런 문제를 다루었던가? 희랍의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던가? 그러나 이 여러 차이점들 중, 여기서는 다만 한가지 실례만을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번역하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하나라는 것을 가르치는 \"동일 본질\"(consubstantial)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이리하여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했다. 제롬은 역시 다마수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있다는 말을 독자들은 힐라리의 글에서 백 번 이상이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롬은 \"본체\"(hypostasis)라는 용어에 대하여 얼마나 혼란을 일으켰던가?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毒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용어를 경건한 의미에서 사용했다고 해도 그는 그것이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안았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이 미워하였던 동방 교회의 감독들을 아무 근거도 없이 고의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성실히 주장하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 였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세속 학파에서 \"우시아\"(ousia)가 본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정성이 결여되었다고 그는 보았는데 이런 견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용법에 의해 끊임없이 반박되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더욱 온건하고 정중하였다. 그는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라틴 교부들에게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희랍 교부들이 사용한 어법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희랍 교부들의 용어를 모방한 라틴 교부들을 관대히 허용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의 \'삼부사\'(三部史) 제 6권에서 \"휘포스타시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그것을 무시한 사람들에 의해 이 문제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말한 힐라리는. 경건한 마음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것들을 이단자들이 그들의 사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 언어의 위험에까지 빠뜨렸다고 하여, 그들의 커다란 범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분명히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며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가정한 것이라고 솔직히 공언했다.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이 대담하게 새로운 용어를 제시 한데 대하여 충분히 변명하고 있다. 즉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명칭들을 제시한 후에 즉시 첨가하여 말하기를, 이들 명칭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감각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갈리아의 감독들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저들이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교회가 받아들인 그 고대의 아주 단순한 신앙고백 이외에는 어떤 신앙고백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변명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불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사람들의 신중함은, 우리가 받아들인 용어에 대하여 보증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에 대하여 마치 검열관과 같이 당장 독필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며 혹독하지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저들이 교만과 완고함과 악의에 찬 교활해서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필요성을 그들로 하여금 신중히 고려하게 하며, 점차로 그 용어의 유용함에 익숙해지게 하자. 그들이 한편으로는 아리우스 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 파에게 대항해야만 할 때, 논쟁을 피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이 혹 아리우스의 제자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자.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창조되었던 시초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가 \"성부와 하나\"라고 했다. 그러나, 까 어떤 특수한 특권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다른 신자들처럼 성부에게 연합되었다고 은밀하게 자기 제자들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다고 주장해 보라. 그리면 그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엇을 더 하는 것은 아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면, 사벨리우스는 그것이 세 신을 말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해 보자.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런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잡혀 이 용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는 그 말이 본체가 하나라는 말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 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리 간계 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의 숱한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저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더 낳을 것이다.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의미.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실재를 의미하는 말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관계를 가지며 교통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 다른 뜻을 가진다. 만일 \'말씀\'이 다만 하나님일 뿐 아무 특징도 없다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1)라고 한 요한의 말은 부당하다. 그는 즉시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을 첨가하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을 상기시킨다. 즉 말씀이 하나님의 본질 안에 계시므로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실재의 관념이 분명해 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히 본질과 밀접히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 없지만, 그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삼위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을 가진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님이 대조될 때 삼위의 두드러진 특징을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위는 서로 잘 전달될 수 없는 특징을 가진다. 성부에 대한 독특한 구별의 표시가 성자에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는 없다. 7. 말씀의 신격 (성자의 영원한 신격) 이 장에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증명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말씀을 발전시킨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해 줄 때 그 말씀을 다만 공중에 던져진, 하나님 바깥쪽에서부터 나온 일시적인 덧없는 소리로만 상상하는 것과 또 족장들에게 주신 말씀과 모든 예언이 다 이런 소리로만 생각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덧없는 소리가 아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영원한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해 베드로는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벧전 1:10]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벧전 1:11]\"과 같이 사도들이나 전대의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아직 육신으로 나타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말씀이 창세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오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준 영이 말씀의 영이라 한다면, 그 말씀은 진실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그리고 모세는 우주 창조 기사에서 이 말씀을 매개자로 제시하시므로 이를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것이 있으라\' \'저것이 있으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이 그의 형상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사도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 바로 성자라고 증거한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성부의 영원하시며 본질적인 말씀이신 성자의 명령 혹은 위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일에 대하여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잠 8:22]\"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은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괄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시적이며 감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당신의 계획을 말씀을 통해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주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말씀으로 일하셨다는 것을 모세가 말한 것보다 더욱 분명히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세 분의 실제가 함께 일하셨다는 것을 명백히 말씀하시고 게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부분에 대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이라고 선언을 했다. 요한은 이 말씀에서 영원하신 본질을 말씀하시고 특수하신 실재 즉 위를 귀속시켰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가도 보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어야 옳은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이 본체적인 말씀을 모든 말씀의 게시의 원천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두어야 하며 이 말씀은 불변하시고 하나님과 영원히 동일하시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8. 말씀의 영원성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거시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실 때 즉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새롭게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때 없었던 무엇이 새롭게 생성된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외부적인 사역에 대한 명칭들은 창조 사역 이후에 그에게 적용된다. (예: 창조주) 그러나 그런 것까지도 없었던 것이 우발적으로 새롭게 생겨진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부터 내려 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역 1:17)\"이라고 하신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즉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셨을 때 말씀의 능력이 세상에 뚜렷하게 들어 난 것이지 없던 말씀이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니다. 그 무엇이 어떤 시간에 나타나기 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라는 말처럼 어리석은 말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래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오래 전은 시작이 없는 오래 전이다. 주님은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시간의 어떤 기간을 정하시므로 존재하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명백히 하셨다.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말씀이 우주 창조에 참여하기 전에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라고 분명히 못을 밖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은 시간의 시작 저편에서 벌써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실로서 주님의 영원하신 참된 본질, 주님의 신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9.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시 45:6]\"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여기 쓰인 엘로힘이라는 말씀은 천사라는 말도 되지만 하나님이라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 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하신 말씀도 하나님의 유일하신 성격이 성자에게만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10. 영원하신 하나님의 천사 구약에 나타난 천사는 자신을 영원한 하나님으로 불렀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느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삿 6:11]\"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 도다[삿 6:12]\"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전병을 가져 이 반석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삿 6:20]\"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삿 6:21]\"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 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삿 6:22]\"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무릇 개의 핥는 것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는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무릇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도 그같이 하라 하시더니[삿 7:5]\"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삿 7:9]\"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 리나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지 못함을 인함이었더라[삿 13:16]\"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올라 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으리니라[삿 13:20]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다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삿 13:23]\"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 13:18]\" 야곱의 경우에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 32:30]\" 주님은 창조된 천사가 아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하셨고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매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슥 2:3]\"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 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슥 2: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 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사 25:9]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 물 속의 초개의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사 25:10]\" 말라기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 3:1]\"하셨다. 11. 신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 사도들의 증거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증거가 많다. 그 수많은 증거들을 다 말할 수는 없고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추려 말한다. 1)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증거된 신성이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신성이다. 로마서에서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롬 9:23]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24]\"은 이사야의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사 8:14]\"의 예언이라고 바울은 말했다. 즉 그리스도는 만군의 주되신 다는 것이다. 바울은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 14:11]\"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 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사 45:23]\"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신 것도 주님은 만군의 주되신 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이 영광을 자신에게 나타내신 것이다. 또 바울이 적용한 시편에서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시 68:18]\"하신 말씀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를 인용하시므로 그 하나님이 바로 주님이심을 증거했다. 사도 요한은 환상을 통해 계시된 것은 성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 6:1]\" 이 말씀에서도 이사야 자신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말한다. 히브리 서에서 사도들이 성자에게 드린 명칭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들이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하셨는데 이 말씀은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 101:26]\"에서 다윗이 하나님에게 돌린 영광이었다. 또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시 96:7]\"라고 하신 말씀은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히 1:6]\"에서 예수 님에게 돌려지고 있다. 주님은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시 102:14]\"와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의 은혜를 베푸신 분이심을 스스로 말씀하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바울은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5]\"이라고 하셨고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라고 확실히 말씀하셨다. 주님은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이다 아멘[딤전 1:17]\"의 말씀과 같이 영광을 세세히 받으실 분이시다. 또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히 하시기 위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7]\"를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도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라고 하셨다. 바울은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고전 8:5]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하셨으며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라고 하셨다. 그렇게 의심이 많은 도마도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요 20:28]\"라고 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겠으며, 하나님의 제 이의 위인 신임을 부인하겠는가? 12. 사역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주님은 태초에 성부와 함께 일하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주님의 말씀에 극도로 무관심했던 유대인들은 이 말씀에 큰 자극을 받아 주님을 죽이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라고 기록을 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신성에 대해 이토록 어리석게 판단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주님은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자신의 대권으로 만물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적을 통해서도 주님은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마 9:6]\" 또한 그리스도는 만물을 꿰뚫어 보실 수 있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능을 소유하셨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 9:4]\"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해 증명된다. 선지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도 이적을 행한바 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적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서 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적은 주님 자신이 행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시기 위해 가끔 기도를 하셨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 그러나 대부분 주님 자신이 직접 이적을 행하셨다. 주님은 당신의 권위로 사도들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막 3:15. 6:7] 그리고 사도들은 그들의 능력이 오직 그리스도에게 왔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 능력을 사용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나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 3:6]\"말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이적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것이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요 5:36]\"\"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요 10:37]\"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 얻을 우리들에게 전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구원 그 자체가 되신다. 주님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이라고 하셨는데 그리스도 역시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 아니라 선 그 자체인 것이다. 즉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이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리를 근거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는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 10:11]\"라 하신 말씀을 믿고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가 말한 대로 우리는 그 분에게 영원한 소망을 둔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도 역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구세주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하셨고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잠 18:32]\"라고 하셨다. 더욱이 우리는 스데반에게서 주님이 우리의 구세주 되심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마지막에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행 7:59]\"라고 기도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라 하셨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4]\"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 성자의 이름만이 전해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자랑인데 누가 감히 주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그의 서신 첫머리에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는 영광을 성자에게도 동일하게 돌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등) 이와 같은 모든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며 주님이 성부의 모든 일에 동일하게 참여하심으로서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실로 경건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14. 성령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성령 님의 신격도 그의 사역에서 찾아야 한다. 모세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세계는 성령 님에 의해 보존되고. 이 아름다운 세계가 있기 전에 성령 님은 혼돈 된 세계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 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은밀히 말하지 아니 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의 말씀은 아무도 교묘하게 다른 말로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은 파송하실 때 그 최고의 권능을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님은 온 우주에 편제하셔서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을 성장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분은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아니하시며 이 우주와 자연을 초월해 계신다. 그러나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본질과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대하여 확실히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한 성령 님은 죄인을 중생케 하신다. 이 중생은 어디서 빌려 온 능력이 아니라 성령 님 자신이 영생의 창시자로서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것이다. 또한 성령 님에게는 성자에게 속한 모든 속성들이 있으시다. 피조물들 중에 누구도 성령 님의 모사가 될 수 없으나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4]\" 성령 님은 스스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이라 하셨다. 또한 성령 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 나니[고전 12:10]\"를 셨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런 일들은 하나님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출 4:11]\" 즉 하나님 자신만이 하실 수 있으신 일을 성령 님이 하신다는 것은 성령 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가 된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고 의롭다 함을 받고 진리, 구원, 사랑, 은혜, 성화가 모두 성령 님의 하시는 구원 사역이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우리는 바울이 말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성령 님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일 뿐 아니라 창시자이시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더욱 분명히 말씀을 하셨는데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11]\"라고 하셨다. 15. 성령의 신격에 대한 명백한 증거 실로 성경은 성령 님의 명칭에 대해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쓰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씀하신다. (고전 3:16-17; 6:19; 고후 6:16). 우리는 이 말씀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는 말씀은 성령 님으로 내주 하시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했다 \"만일 우리가 나무나 돌로 성령의 전을 세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해도 이 영광은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령은 성령 님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성령 님을 위해 성전을 세우라 하시지 않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성전이라 하셨으니 이 얼마나 분명한 증거인가?\" 사도들은 성도들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이라고 부르셨다. 성령 님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하시면서 베드로는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사야가 만군의 주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하여 바울은 그 만군의 주가 성령 님이시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사 6:9]\"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행 28:25]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행 28:26]\" 베드로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모든 예언의 저자이신 성령 님이야말로 여호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이사야는 그 백성들의 완고함에 하나님께서 노하셨다는 말을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라고 하시므로 성령 님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했다. 주님은 성령 님에 대한 범죄에 대하여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막 3:29]\"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이라고 엄하게 말씀하시므로 성령 님의 신적 위엄에 대해 말씀하셨다. 또 시인은 우주 만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일임을 말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이라고 하셨다. 16. 하나님의 하나 되심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 자신을 사람들에게 더욱 명백히 계시하셨다. 삼위를 통해 사람들에게 친밀한 하나님을 알리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증거들 중에 탁월한 증거가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님(주),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을 시켜 놓았다. 그는 믿음이 하나요 주도 하나며, 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삼위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이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신앙은 여기 저기를 두루 다녀 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강론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한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만일 참 신앙이 여럿이라면 그 신앙을 위한 신도 여럿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례는 신앙의 성례다. 그것은 유일한 하나님에게 기초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나서는 세례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 님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삼위 하나님을 함께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님이 한 분이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7. 삼위 한편, 성경은 성부의 말씀,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구별이지 분활이 아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 13:7]\" 이 말씀들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시고 계신다는 뜻이지 말씀이신 성자와 성부가 다른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주님은 성부와 자신을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 5:32]\"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 8:16]\"이라고 하셨지만 다른 성경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이라고 하셔서 만물을 함께 창조하셨다고 하셨다. 성부는 이 세상에 죄인을 위해 죽으려 오시지 않으셨다. 성자 되신 예수 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님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셨으며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신 분이시다. 그리고 성부와 상자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라 하심으로 삼위 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증명하셨다. 18. 성자, 성령의 차이점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민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령 님께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존재하실 수 없으시고, 또한 영원에 있어서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의 영원성은 동일한 영원성이다. 그러나 구태여 순서를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 옳다. 모든 인간은 먼저 하나님을 그 다음은 지혜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계획을 수행하는 능력을 생각하는 것이 편해 한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성자는 성부에게 발생되고 성령 님은 성부와 상자에게서 발생되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의 말씀에 나타나 있고 베드로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이라 말씀하셨다. 1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이 구별은 하나님의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영을 소유하시기 때문에 성부와 상자와 성령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입증한다. 삼위의 하나님은 모든 신적 성품이 각 실제 안에서 이해되고 각자가 자신의 독특한 특성을 소유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님이 전적으로 피차의 안에 거하신다. 이 사실을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이라 하셨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자라 불린다. 마찬가지로 성부도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는 성부라 불린다.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 불리우신 그 분은 성부가 아니며,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 불리우신 그 분은 성자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 불리우신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 불리우신 그분은 한 하나님이시다.\"라고 했다. 20, 삼위 일체 하나님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고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이 없이 언급될 때, 이 명칭이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位)들을 구별해 내는 거이다. 그러나 각 위의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또는 상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특별히 성부에게 적용된다. 이와 같이하여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신해 보았기 때문에,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 갈 필요가 잇다. 그러므로 성자를 가르쳐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 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떤 상관 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또는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으시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도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 말에도 밝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런데 ,여기서의 \'주\'라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주라는 말을 중보자의 인격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기도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랍어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사도들이 \"큐리오스\"(주)라는 말을 보통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런 신들메를 찾는다면 구태여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욜 2:32)고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의미에서 주님께 기도를 했던 것이다. 이 명칭이 특별히 성자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은 적절한 곳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여기서는, 바울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곧 이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첨가했다는 것으로 우선 만족하자. 심지어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을 온전히 \"영(靈)\"(요 4:24)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 본질은 영적이시며, 이 영적인 사실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히 말하고 잇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全 本質의 한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된다. 21. 모든 이단의 근거 : 모두에 대한 경고(반 삼위 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 사탄은 우리의 신앙을 그 근본부터 뒤집어엎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질에 관하여, 부분적으로는 위의 구별에 대하여 언제나 커다란 분쟁을 선동했다. 사탄은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불경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선동하여 이 문제로 정통주의적 교사들을 괴롭혀 왔으며, 오늘날까지 그 타다 남음 불로 새로운 불을 붙이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람의 그 왜곡된 광란을 반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이 문제를 연구함에 있어, 냉정하고 신중히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들의 사상과 우리들의 언어 그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 작은 재능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본질을 측량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매일같이 바라보면서도 그 태양의 구성 요소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실로 인간이 자기 자신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은 기꺼이 하나님 자신에게 아끼기로 하자. 힐라리(Hilary)가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유일하신 충분한 증거 자이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떠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하나님 자신에게 마끼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크리소스톰이 아노모에오스파를 반박하여 행한 설교가 다섯 편이나 있다. 그러나 이 설교들이 그 건방진 쾌변론 자들의 횡설수설하는 입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저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다른 모든 곳에서 행한 것보다 더 신중히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의 그런 경솔한 행동의 불행한 결과로, 우리가 이 문제를 난해하게 연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다 알기 쉽게 연구하도록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이외에는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아니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이외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생각도 하지 아니할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한다. 그러나 한 신성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여 그것이 어떤 사람의 이해력에 대한 기대 이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인간의 마음은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에는 미궁에 빠져들어 가게 된다는 것을 저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자. 그리고, 저들이 비록 이 신비한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天來 神言에 스스로 복종하여 지배받게 하자. 22. 세르베투스의 반 삼위일체론. 이 교리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공격하는 여러 오류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들은 야수와 같이 광란하며, 하나님의 영광 전체를 훼손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무신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수에 불과하던 분파가 많은 분파로 갈라졌으며,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갈기갈기 찟어 놓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위의 구별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참으로 하나님의 본질은 이미 성경에서 입증이 되었듯이, 단일하시며, 분할되지 아니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에게 다 같이 속한다는 것, 한편 성부는 어떤 특성에 의하여 성자와 구별되시며 성령도 성자와 구별되신다는 것을 확고하게 견지한다면,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뿐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오류들을 주장한 자들에 대해서도 문은 굳게 닫쳐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세르베투스나 그의 동료들과 같은 광신자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속임수로 만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저들의 허위를 논하는 게 필요하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르베투스에게 있어서는 몹시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이기 때문에 모든 삼위일체론 자들을 향하여 보통 무신론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상치하기 때문에, 공상적인 삼부조(三部組)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위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표현해 주는 어떤 외적인 관념일 뿐이라고 말한다. 말씀과 성령이 원래는 하나요 도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에게는 구별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심에 따라 그로 인하여 다른 하나님인 성령이 유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종종 자기의 불합리한 주장을 비유로 말했는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의 관념의 반영이고 따라서 성령은 신격의 그림자라고 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마치 우리들 안에와 나무와 돌 가운데 동일한 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여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의 분배의 양식에 따라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이 있다고 주장함에 따라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파괴하였다. 그는 실로 \"위\"를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으로 보았던 이 기괴한 허설에 대하여 장황히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요한은 확언을 하였지만 그는 말씀과 관념을 완전히 구별하였기 때문이다.(요 1:1)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소유하였다고 하면(요 17:5), 그는 확실히 외부적인 또는 상징적인 관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한 실제이시다 는 결론이 나온다. 23. 성자는 성부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어떤 자들은 세르베투스의 불 경건한 혐오와 수치를 피하기 위해 삼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그와 비슷한 괴물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성부만이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4)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요약(4)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레니우스에게서 많은 구절들을 수집했다. 이것은 저들의 수치스러운 미지를 들어내는 것이며 극단적인 부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거룩한 인물이, 옛날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오히려 세계의 부패에서 생긴 일종의 유령을 상상하였던 광란 자들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저들과 논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는 전적으로 이 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과 다른 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높인 하나님과 다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그가 자주 주장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다른 오류에 대하여 반대 할 경우, 옛날 종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진실로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누가, 사실상 성부였다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즉, 우리는 성자의 신성에 대하여 논쟁하는 동안에도 이것 때문에 성부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레니우스의 이 의도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아마도 일체의 논쟁이 종식될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저서 제 3권 6장을 일고 보면 모든 논쟁은 쉽게 끝이 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한다. "성경에는 절대적으로 또는 아무 구별이 없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신 분은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셨다." 실로 전체의 취지에서 특히 제 2권 제 46장에서 밝힌대도, 그는 수수께끼나 또는 우화적으로 성부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기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외에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자와 성부를 다 같이 하나님이라고 불렀다고 주장했다(제 3권 제 9장).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 순종과 관련하여, 만물의 주시며 왕이시오 하나님이시며 심판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물의 하나님이신 자신에게서 그와 같은 권능을 받으셨는가를 진술한다( 제 3권 제 12장). 다시 조금 후에 성자는 천지의 창조 주시며 모세의 손을 통해 율법을 주셨고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분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성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는 것이 이레니우스의 주장이 였다고 터부니 없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데만 에서부터 오시며(합 3:3)라고 한 하박국의 예언의 말씀이 성자에게 적용된다는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을 제시할 것이다(제 3권 제 18장, 제23장). 제 4권 제 9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은 성부와 함께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잇는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동권 제 12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 자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그는 설명한다. 28. 터툴리안을 인용한 것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저들이 터툴리안을 저들의 옹호자로 채택한 것은 더욱 무의미하다. 그것은, 그의 표현 방법이 거칠고 모호 한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옹호하는 그 교리 전체를 에메하게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되 그의 말씀은 분배 혹은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터툴리안의 견해인데, 곧 하나님은 본체의 단일성에 있어서 유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은 분배의 신비에 의해 사위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가 존재하되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품위에 있어서 그러하고,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 그러하며, 권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현에 있어서 그러하다라는 것이다. 실로 그가 말한 대로, 자기는 성자를 성부 다음 가는 분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다만 위를 적응할 때만 이라고 했다. 그는 어디선지 성자를 가시적인 존재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문제의 양면을 논한 후에는 성자는 바로 말씀이 되신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터툴리안은 성부가 자신의 위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부정하고 있는 저들의 날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성부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음 구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가 성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위의 구별에 의해 하나님의 단일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의 일괄된 의도에서 우리는 쉽게 그의 말의 의미를 추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락세아스를 반대하여, 하나님은 삼위로 구별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한 분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그의 단일성이 분할되는 것도 아니라고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까 성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닌 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프락세아스가 거짓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터툴리안은 이런 구별에 대하여 강력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거칠게 표현된다고는 한, 그가 말씀과 영을 전체의 부분으로 칭한 것은 아직도 용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 자신이 입증한 대로, 이것은 본체에 적용된 것이 아니고 단순한 위에만 관계되는 배열과 섭리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도 말한다. "가장 사악한 프락세아스여, 그대는 이미 불리고 있는 이름 이외에 얼마나 많은 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후에 다시 "저들이 성부와 성자를 그 이름과 위에 따라서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상의 논의로 터툴리안의 권위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자들의 그 뻔뻔스러움을 넉넉히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9. 교회의 인정을 받은 학자들은 모두가 삼위 일체의 교리를 인정했다. 고대 교회의 저서들을 열심히 비교 연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레니우스의 사상이 그를 계승한 사람들의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알 것이다. 순교자 져스틴은 아주 먼 고대 교회의 인불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점에서 우리들을 지지한다. 져스틴과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데 대하여 저 사악한 사람들은 반대를 할 것이다. 힐라리는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으며, 영원성이 성부 안에 있다고 한층 예리하게 역설했다. 이것이 성자에게서 신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이 되는 것인가? 아니 그와 반대로, 오히려 그는 우리가 고수하는 바로 그 신앙을 옹호하는데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힐라리가 자기네 오류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연결이 안되는 산만한 문구들을 마구 수집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만일 이그나티우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면, 저들은 사순절과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부패한 것들에 관한 법칙들을 사도들이 만들어 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그 수치스럽고 불합리한 것들 보다 더 욕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으로,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저들의 파렴치함에는 더 참을 수가 없다. 실로 고대인들이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더욱 명백해 진다. 즉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어떤 인정된 저자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으며, 희랍 교부나 라틴 교부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자기의 이전 학자들이 자기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명하지는 않았다. 이 악한 자들이 가장 적대시하던 어거스틴이 고대인들의 저작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검토하였으며 얼마나 존경하는 태도로 그 저작들을 받아 들었던가를 말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그는,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교부들과 의견을 달리할 경우가 생기면 그 달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논의에 있어서도, 다른 저자들에게 에메하거나 모호한 점이 있을 때에는 그는 이를 눈감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반대하는 교리가 먼 옛날부터 아무런 異論도 없이 받아 들여졌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가르쳤던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해 진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하여"라는 저서 제 1권에서 성부 안에 단일성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도 저들은 어거스틴이 그 때 자신을 망각했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을 해병하며,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신격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돌려진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 시작이 성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단일성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온갖 쾌변으로 오늘까지 이 교리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왜곡, 또는 모호하게 하려는 시도를 계속하는데, 이제까지의 고찰로 인해 사탄의 일체의 쾌변을 물리쳤다고 생각이 된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제어하고, 필요 이상으로 골치 아픈 논쟁들을 분별없이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 교리의 전체 내용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찰한 내용들은 무분별한 사변들을 즐기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만족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교회의 건덕을 열망하였기 때문에 별로 유익 되지 않는 일이나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성부가 항상 발생하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더 있겠는가? 실로 성부의 발생이 계속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끝)
칼빈의 설교관/ 롬10:17
칼빈의 설교관 롬10:17 1. 서 론 종교개혁의 원동력과 그 지속적 능력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선포되는(설교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이었다는 주장은 결코 과장된 것일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재발견과 선포라 할 수 있는 사건이 다름아닌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 의해 종교개혁은 일어났고, 말씀의 선포에 의해 종교개혁은 성취되어 갔다. 개혁자들은 이 말씀에 사로잡혀 그들의 소명을 이루어 갔던 것이다. 진실로 말씀의 선포가 없는 종교개혁, 열정과 확신 가운데 말씀이 설교되어 지지 않는 종교개혁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었고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의 도구 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가능 했던 그 중심 이유는 그들이 인식한 설교에 대한 신학이었다. 우리는 개혁주의 성경관, 구원관, 교회관, 세계관(철학관)등은 이야기 하면서 정작 실천신학의 꽃이라 하는 설교관에 대해선 무시하고 있는 실태임을 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종교개혁자들 중에 스스로를 ‘말씀의 사역자’로 불리우길 원했던 요한 칼빈의 설교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시대에 다시금 개혁자의 후예인 우리들을 통해 선포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의 입과 입술을 친히 준비하시기 때문이다. 2. 본 론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 칼빈은 설교할 때 스스로를 하나님의 대사로 여겼다. 그러므로 설교는 단순히 예배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든가 교회의 임무들 가운데 하나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현현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부언하여 말하기를 “말은 내가 하지만 교육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도 내가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만일 저 높은 곳으로 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 (=복음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이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나를 유익되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소리는 허공에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선택교의” 라는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파되어질 때마다, 이것은 마치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열리어 하나님이 자기 손을 내밀면서 생명이 가까왔으니 너희가 이 하늘나라 상속에 참여케하마고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거나 같습니다.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우리 앞에 생명과 불멸을 펼쳐 보이는 것을 보는 우리로서 고의적으로 못 본체 하지 맙시다” 칼빈은 성경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임을 확신했으며 또한 인간을 통해 전달되어지고 말씀되어졌음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천둥소리로 그의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시고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였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때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말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임을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말씀을 드러내셨고 이로써,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것을 듣고자 하는 자들에게 전파됨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사야 주석 55:11에서 “어느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온 말씀은 인간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과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아니라 인간을 그 도구로써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말씀 안에서 빛나고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하나님과 가까이 마주 대한 것처럼, 말씀으로 무한한 감화를 받아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의 거룩성과 권위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증거자는 중보자되신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파된 곳에 오시리라는 대망을 들려주어야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목회자의 목소리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1549년 8월 16일에 행한 예레미야 강해 설교 제 25번째에서 자신을 가혹하다고 비난 하는자들을 향해 그는 이렿게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에게 던져지는 훈계의 말씀을 거역하여 일어나는 모든자들, 그들은 하나님께 맞서 그에게 반역하는 자들입니다. 내 혀가 하나님 의 심판을 선포한다해서 내 혀를 탓할 수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날 사용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전달하시고자 할 때 사람들이 내 인격에 맞서서는 안됩니다. 만일 내게 맞선다면 악인들은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보증이 되시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고, 다니엘서 21번째 설교에서는 “만약 내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아니라고 그들이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가 선포한 것과 동일한 말씀을 전달하고 있고, 뿐만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내게 주신 분량에 따라 그를 신실하게 섬겼음을 그 분 앞에서 주장할 수 있읍니다. 그리고 이것을 헐뜯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여 불경한 짓을 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들을 할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그것은 드러나고야 말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후 에스겔서 5번째 설교에서도 “오늘날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하는 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저 칼빈을 보라! 그는 스스로 그것을원한다. 그러면 그가 선지자 인가?’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선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교설인 까닭에 나는 이런 어투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여기 에스겔에서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에 나는 이 선지자가 말한것을 변형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때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 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선포되기도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칼빈은 자신의 사명의 중대성을 확신하고 또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었다. 이러한 칼빈에게 있어서 그의 사역을 수행케 했던 제일의 주된 확신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내가 율법을 모세가 쓴 것으로, 시편을 다윗과 다른 선지자들의 것으로 여기며, 이런 식으로 모든 성경에 담겨진 것을 파악한다면, 이사역은 어떻게 될까요? 나는 말씀의 사역이 유지되어야 한다, 또는 유지되어서는 안된다는 식의 토론을 벌일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나는 죽을 운명의 사역자들에 대해 반박하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과, 그리고 성경에 들어있는 모든 교리에 권위를 부여하신다면 이러한 핑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는 말이 교회에서 흔히 쓰여지는 용어라 하여 결코 공연한 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이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청할 것을 강요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오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 . 나는 새로운 법률이나 신조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라고 하여 성경의 권위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며 그의 설교가 그것을 바탕으로 선포되기 때문에 동등한 권위가 있음을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해석과 강해에 주력했고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기록된 말씀에 대한 진실되고 순수한 주해” 와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의 생활에 적용시키려” 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자들의 할 일 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 이러한 칼빈의 설교관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의 행태와 얼마나 상치되고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개혁자의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임무에 대한 깨우침에 귀기울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시편 119편 설교를 시작하며 “나는 하나님께서 취하신 방법에 맞춰 본문의 진정한 흐름을 그대로 따르려 할 것입니다. 나는 권면을 지루하게 고집하지 않고 다만 다윗의 시 (흔히 말하는 대로)를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으로 만족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은헤로 말미암아 각 8절을 한편의 설교로 완성시킬 생각을 했었고, 또 가장 배우지 못한 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만 본문의 단순한 핵심을 밝히는 것으로 그치려 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 신약 성경은 주님이 자신의 뜻을 표명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그의 설교를 이용해 자기 고유의 사상을 표현할 권리란 없다는 것을 믿었다. 칼빈은 그의 설교집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말하였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도록 하자. 즉 경솔하게 그 자신을 신뢰하거나 자기 자신의 업적을 미뵹책으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리도록 하라. 그는 마땅히 그의 교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는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 있어서 성경본문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성경을 읽는 사람이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어리석은 사색을 구한다든지 그들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 개조해 보려고 교회로 나온다면 그들은 복음을 더럽히는 꼴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칼빈은 확신과 겸손을 진실히 갖고 성경 본문에 접근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이 우리 마음 속에 말하여질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귀담아 들으려했고, 들은 바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 본문 해석에는 언제나 인간을 통하여 그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그의 성경관이 그의 설교에 반영되어 그의 설교는 언제나 무겁고, 심각하고 열정적이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으로서의 설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칼빈의 설교관은 설교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임을 보여준다. 칼빈의 설교에서 특기할 만한 것 세가지 정도를 지적 할 수 있는데, 첫째로, 인간이 하나님과 만날수 있는 장소는 바로 성경의 말씀이 설교되어지는 곳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설교와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칼빈은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엄선된 수사학적도구를 채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의도는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의 것을 인식한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로, 칼빈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책임을 가지고 그의 청중의 편에 서서 계속 일깨워 주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의 특징은 그의 설교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의 행위임을 의식한 것임을 보여준다. 칼빈은 설교자의 입을 주저함없이 “하나님의 입” 이라는 칭호로 불렀는데 이것은“사자” 라는 칭호보다 더 우월할 것이다. 이는 설교자가 강단에 섰을 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말씀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 의해 설교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닌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강단에서 외치는 이는 한 인간이고 우리는 그 가르침이 요구하는 정도의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곳에는 하늘의 위엄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여 청중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에 대한 인식에서 설교란 신적행위인 것이었다.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며”,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시고 가까이 오신다.”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우리가 소유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와 일반적이고도 평범한 방법으로 대화하신다... 이렇게 복음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하강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로마서 10:17에 “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함과 같이 만약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장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만남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는 곳에서 인 것이다. 이렇게 설교자들에 의한 말씀의 설교는 인간이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만의 베일에 싸인 채 인간에게 다가오는 은총의 형태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입과 같이 그들의 입도 사용되고, 또 그의 입술과 같이 그들의 입술도 사용되기를 원하시는 태도로 그들 중에 행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계시의 역사적 사역 안에서 (자신의) 존재와 은헤의 징표를 사용하심으로써, 동일한 많은 방법에 있어서 계시와 자기 교통의 수단으로서 말씀 선포를 사용하신다. 이 때문에 칼빈은 설교를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징표로서 혹은 항상 우리곁에 계시는 하나님의 징표로서 언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의 선포로 오시며 때로는 다양하게 베푸시는 갖가지 은사로서도 오신다.” 어떻든,“ 설교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주님의 선물이며, 그 자체는 죽어야 할 인간의 목소리가 영생을 얻도록 교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하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성경이 설교자에 의해 설교되어질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 되며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의 눈에 비친 설교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현현, 혹은 하나님의 현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목사가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은 실재로 임하시고, 임재하시되 성례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임재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서 먼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주고 그 후에 그 교훈이 사람의 심령에 생생하게 접촉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셩령이 그 설교자 자신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로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인간은 말씀안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쳤던 것이다. (3)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으로서의 설교 설교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심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인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수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 설교자가 설교할때는, 비록 그가 우리와 동일하게 보이고, 대단한 존경을 받거나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하더라도, 어쨋든 예수그리스도는 여전히 이곳(=설교)에 계시고 그의 왕적 보좌를 그 곳에 두시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탄이 우리의 주인이니 타락과 비참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변형 시킴으로 우리는 복된 왕국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왕국은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다. 복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반역자에서 시민으로 바꿔 놓으셨다. 말하자면 복음은 그것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설교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지배의 세력아래에 두기 위함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라 불려 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서 복음이 설교 되든지 그것은 그 땅위에 그가 주되심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치하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의 설교를 통해 통치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왕실은 바로 복음이요.” “복음의 교리가 아닌 것은 어떤 것도 그의 통치 수단이 될 수 없다.” 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인 성경에 주어진 내용을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단순하게라는 부사를 통해 설교란 “청중들의 이해력에 부응하여” 각 신자가 그 설교에서 “자신의 몫과 분깃을”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고, 둘째는 간결하게 “평이한 간결성과 결코 애매모호함이 없도록 하여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야 한다” 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용기있게, 하나님께 반항하는 악한 인간성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 말씀의 사역자는 “우물우물” 말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교회가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차없이 혹은 꾸밈없이” 제시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자의 자세는 말씀의 선포를 통해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확실히 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당시에 설교는 번창할 수 있었다. 교회와 강단 설교자들은 “너희 말을 듣는 자는 내 말을 듣는 것” 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강단은 교회 내에서와 세속적인 사회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설교란 그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왕권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치하고 나라들을 심판하기 위해 교회 그 자체에도 비밀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의 장중에 있는 검인 것이다. 교회중의 그 검은 적들을 쳐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칠 것이냐, 혹은 회개하지 않는 무리들을 또 다시 영원히 파멸시켜 버릴 것이냐 하는 택일성의 문제를 지닌 채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엡 6:7).”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에 따르지 아니한다면 하나님께는 패역이요, 우리 또한 어떠한 종류의 은사도 부여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복종하지 않으려한 “여러 사람의 반역”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사역을 옹호하였다. “아무것도 아닌 이 버릇없는 인간들은 자기네들이 잘못을 범했을 때 그 사실을 자기들에게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곧 ‘당신들이 우리에게 명령할 순 없어!’라고. 그렇다면 하나님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임하신 때문입니다...” “누구든, 이렇게되어야 한다. 이쪽으로 가야한다는 식으로 명령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전념해 가르치기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한분 주님이 있고 그분은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을 결코 허락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이름으로 여기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무엇도 나를 통해 전진시키기 원치 않으며, 내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올 생각도 없으며 오직 내가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모든 반박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복종해야 하며, 모든 거만한 것들이 꺽여야만 하고 또 큰자나 작은 자나 할것없이 자신이 복종해야 할 이에게 대항하여 주둥이를 내밀거나 눈을 치켜 뜨는 피조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라고 하여 설교를 통해 다스리시고 명령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항 해서는 안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어느 누구든지 복종해야 할 것을 말한 성경관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설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곳 어디에나 크고 넓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인 것이다. (4) 효력있는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 칼빈은 교회나 세상에 있어서 설교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말씀이 연약한 인간에 의해 나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그의 명령과 약속 이행으로써의 전능한 힘을 지녔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려고 준비하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 누구에게나 공평한 댓가를 지불하시기 때문이다. 즉, 그가 명하신 말씀은 바로 행하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증거자의 입을 통하여 용서를 베푸실 때에,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는자는 진실로 그들의 죄를 용서 받을 것이다. 이는 선포된 말씀이 효력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효력있는 말씀의 능력이 바로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인 것이다. 칼빈은 디모데전서 2장 3-5절에 관련된 설교에서 “인간은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어떤 지식이 있는가? 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놀라운 지식을 갖고 있는가? 인간은 천사와 같이 그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주의 깊게 생각해보자 그가 우리의 눈을 뜨게할 것이며, 그 자신이 우리의 귀를 열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의 어느 부분이라도 깨달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시기까지는 부패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우리는 소경과 같다. 그러한 사실을 일깨워 주는 성경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단지 성경의 몇몇 구절을 가지고 운운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인간은 성령께서 일깨워 주고 이끌기까지는 하나님께 올 수 있는 어떤 지혜도 없다.” 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에 대해 “그리스도는 말씀 전파자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을 비추고 그들의 정신을 새롭게 하며, 즉시 그들을 온전히 거듭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은 ... 살아 있는 것이며 바로 효력과 연결 된 것이로되; “권능과 통하는 강력한 도구이니; ” 주님의 신성한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이 온전히 효력을 발휘하리로다.” “복음은 단지 들려주기 위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위한 씨앗으로써 우리를 거듭나게 하려 함이며,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증거되게 하기 위하여 전파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안식을 얻고 구원을 확신함으로써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고 하여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설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경, 특히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은총의 선물로서의 성경관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양면적인 효력을 발생시키는 권능으로서의 설교 따라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셈인데 여기에는 두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메시지를 반항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은 가혹한 형벌을 가중시킬 뿐이다. 반면 하나님의 은밀하신 능력에 이끌림을 받은 피선택자들은 성령이 말씀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데에 효과적인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고 그의 이사야 55:11의 주석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게 갈 수 없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하나님과 약속을 굳게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선포에 덧붙여 그들로 하여금 그에게 올 수 있는 비밀의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은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심판의 부정적인 면은 “복음의 본성이 아닌 우발적인 것들” 이라고 덧붙인다. “복음의 본성을 떠난 인간의 과오로 부터 발생되는 것”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제시는 꾸밈없이 용기있게 제시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전쟁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읍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꾸짖어야 할 내가 악을 허용하고자 한다면 뭐가 되겠읍니까? 그 같은 일이 정당하게 되거나 또는 우리가 이런 것을 구실로 이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무리 이것 저것 갖다 붙여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매우 꾸짖게 됩니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 20장 18절 이하를 설교하면서 “... 나는 이처럼 내가 내 양심에 따라 해야 할 바를 수행하도록 사람들이 허락지 않든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때 내게는 전혀 합법적이지 않는 일을 하라고 사람들이 날 강요하든 간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 이외의 것을 넘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자유로이 설교하고 또 여러분에게 봉사할 수 있는 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칼빈의 신념은 복음 선포의 이중적 효과를 아는 자로서의 고백인 것 같다. 그는 “타락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러 자칭 심장에 강철을 두르고 있지만 결국 자신의 죄로 인해 사슬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웃음을 삼킨 채 냉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들도 사함을 받을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오지 않으려하나 그들이 조소했던 그 말씀에 의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이끌려 나오게 된다. 이는 마치 쇠사슬에 묶인 개들이 그곳에서 헤어나려고 물고 찢고하는 격렬한 모습과도 흡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증거의 역할은 죄인들에게 반발심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까지 반발심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과를 나타내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칼빈은 자신에 대한 많은 비난과 반대자들을 극복해야 했다. 아마 1549년대의 것으로 보이는 ‘우리시대에 매우 유용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설교들 중의 첫번째 설교에서 칼빈은 복음의 대의 명분에 가담했다가 다시 “교황 체제에” 돌아간 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어느 시기에 그는 이들에게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요구하였으며 특히 미사에 참석치 말것을 요구하였다. 그의 이런 당부는 위험하게 여겨젔음에 분명했는데 그의 이런 신신당부는 죽음이나 추방외의 다른 어떤 선택의 길도 남겨두고 있지 않은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그들의 비난과 경고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비난과 경고에 부딪힌 칼빈은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서 행동하려는자들에게 이 엄격한 처방이 얼마나 힘들고 견딜 수 없는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목사로서의 내가 거기서 어떻게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목사로서의)나는 그들의 처지가 이처럼 곤란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한 그들을 너그럽게 봐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곧 정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나보다 결코 더 가혹한 형벌을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들을 너무 부드럽게만 다루어 왔다는 점을 그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런후 그는 그를 권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향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한 부분만을 트집잡아 날 비난하면서 판단자로서의 하나님은 더 이상 없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은 너무나 막중한 잘못입니다. 이러한자들이 자기들의 서류에서 내 이름을 긁어내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에게 순종하는것만을 요구하고 결코 내 기호에 따라 개인의 양심들을 지배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불가피한 것이나 법을 부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복음의 대적자들에게 자신의 요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 것으로 권위가 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는 구원의 은혜와 강퍅케하는 권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의 증거로서, 반동적인 마음을 지닌 이들을 부분적으로는 교화시킬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자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바 대로 주님의 품을 떠나 버린다” 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의 설교관에 의하면 설교에는 두 가지 목소리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한 음성이고,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노성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한다면 무익하게 된다... 만족할 만한 복음설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라는 말만이 필요하다. 선하고 진실한 목자는 성경을 간신히 해설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주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는 어려움이 많아도 진실해야 됨을 가르친다. 무엇이 선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된다.” 한 것이다. “성경은 목자에게 양떼를 모으고, 또 도적떼와 늑대를 쫓기 위한 두 목소리를 제공한다.” 는 칼빈의 주장은 그의 성경권위에 대한 믿음과 결코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절대 권위를 갖고 선포되는 말씀은 구원과 심판의 양면적 효력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의 면전에서 거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칼빈은 교리의 대적자나 복음을 듣고도 배척하는 자들에 대해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난 후에도 금수와 같이 되어 모든 이성을 상실하는 자들을 보거든,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당신의 말씀을 높이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위대함을 깨닫도록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대해 모독하는자들을 악마에게 내어 주시어 그의 지배를 받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오용하거나 망령되이 대하거나, 위장하거나, 속되게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허용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말씀을 제공하여 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만큼 그릇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과 반역자들은 마치 그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처럼 그(하나님)의 이름을 경거망동하게 모욕하는 그들의 입을 막지 않고 있음이 그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헤와 자비에 대해 겸손하게 그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왜 그가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부르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부르고 계시는데 그들은 오기를 거절하는 커다란 배은망덕 때문에 죄값을 치르게 되어있다”는 말을 통해 볼때 칼빈은 설교가 하나님의 권능임을 확실히 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스려 행하려는 자신들 속에 존재하는 본성을 교화시키도록 스스로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이 권능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 속에서도 악을 죽이고 굴복시키며 쫓아 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은 모든 조소를 기록할 자를 두셨다... 우리의 교훈으로 이 말씀이 주어졌으니, 우리는 자신을 겸손히 함을 배우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자. 그는 천사의 왕으로 천사도 그에게 복종하니까” 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기를 배웠다. 비록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복음은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미암아 설교되어 진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자가 곧 내말을 듣는 자라고 말하셨다. 모든 교직자가 주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야 된다는 것을 배우자. 그리고 우리자신은 그 설교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또한 배워야 한다.” 그러나 “설교 듣기를 멀리하는 자들은 마치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힘을 거절하고 또한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멀리 뿌리치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그의 구속적 간섭을 거절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이다.” 라는 이러한 칼빈의 주장은 그의 철저한 성경관에 그 뿌리를 둔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을 들고 강해하며 설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앞의 청중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 설교되는 말씀을 통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칼빈을 ‘말씀의 종’으로 이끈 위대한 확신이요 강단 설교자로서의 설교 자세 였던 것이다. (6) 성령의 능력의 현현으로서의 설교 칼빈이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성경을 중요시한 이유는 성경의 저자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칼빈은 딤후 1장 9, 10절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거나 역사함이 없이는 또는 믿음으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중의 가슴 속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조명과 믿음의 수반없이는 말씀의 성실한 설교일찌라도 청중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칼빈의 설교관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대한 교리’ 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의 어느 부분이라도 깨달을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는 성령의 내적사역을 강조하는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설교는 성령의 권능으로써만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을 뿐이며, 외적인 말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효력도 청중에게 미칠수 없다” 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능력이 말씀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주이시고 구주이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설교자는 설교에 앞서 기도로써 준비하여 말씀을 전달하는 그 자신이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렇게 칼빈은 설교가 그 자체로서는 듣는 이들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없음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말할때, 그것은 내 자신의 마음이 감동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또 듣는 이 각자에게 내가 제시하는 교리를 받도록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요?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가치있게 하셔야 하고, 또 그 말씀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 뿌리를 내려 우리에게 썩지 않는 생명의 씨가 되도록 생기를 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라 하여 설교는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 없이는 아무 효력이 없음을 주장했다. 따라서 이것은 설교를 통해 나타난 구원의 증거와 그 효력의 발생은 전적으로 성령의 나타나심인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회개의 은사도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이 없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회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회심은 하나님이 은밀히 역사하시는 사람 즉 선택받은 사람들 안에서만 열매와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 이기 때문인 것이다. 회심의 역사, 구속과 영생의 기쁨이 죄인들의 영혼에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설교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그 말씀을 그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의 결과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강조되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통하여 선포될 때에 그 말씀 선포의 효력은 청중의 수용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설교자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래서 “단언하건데, 인간의 입에서는, 즉 단순한 소리 중에서는 어떠한 능력도 나올 수 없으며 이는 오로지 성령이 임하실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리고 그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를 “소경이 태양의 밝기를 즐기지 못할지라도 태양은 비추이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눈을 주사 그의 얼굴을 응시 할 수 있게 하시기 까지는 우리는 교화되지 못한 채 설교를 듣는 것이다”고 하여 설교가 우리 안에 활동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지성을 “조명” 하거나 우리의 마음을 “감동” 해야함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내적 증거의 사실은 그의 성경관에도 나타나 있는 것임을 우리는 확인 할 수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한 주관적인 확신은 바로 이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가 아닌가? 이러한 그의 성경관은 그의 설교에 대한 관점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성경에 영감을 주고 오늘날 신자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밝히 보여 주어 우리가 성경의 신적 권위와 성경의 영감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과 성령의 관계는 칼빈에게 있어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설교에 있어서도 성령의 현현과 신비스런 역사는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의 설교관은 그의 메시지를 대하는 일에 경외심과 신중함을 갖도록 촉구하였다. 왜냐하면 설교의 효과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면 신자들은 자기들과 흡사한 한 인간이 강대상 높은 곳에서 던져준 메시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유혹을 조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설교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는 것과 “단순히 허공에만 울려 퍼지고 사라지는 목소리란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능력을 그의 설교에 더 하신다” 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서 “존경심을 갖고 설교를 들으러” 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설교의 필요성을 의문에 붙일 권리가 없다는 것 못지않게 목사들은 “주님께서 설교에 축복을 해 주시지 않는 한 그들의 노력과 근면을 통해서는 유익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때 무기력해 져서는 안된다” 고 그는 덧붙인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사역자의 역할은 밭을 가꾸고 씨를 뿌린 후 기도로 하나님께 자신의 노력을 축복해 달라고 비는 경작자의 역할에 비할 수 있다고 하며 “사역자들은 일을 하고 씨를 심는 노동자들과도 같다” 고 하였다. “또한 사역자들은 일꾼들이 땅에 씨를 뿌린 후, 그 씨기 배태한 것을 생산해 낼 때까지 할 수 있는대로 땅을 도우는 책임상 그와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동에 열매를 맺게하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지 인간 근면의 결과가 아니다” 고 하여 오직 하나님의 기적만이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직에 성실히 임하는 자는 누구나 그 만큼의 성과를 원한다.” 는 사실을 인식하는 칼빈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노력만큼의 결실을 맺지 못했을 때는 한없이 애석해 하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으리라 본다” 고 하며, 그 저조한 결실의 책임의 일부는 우리에게 있음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진리란 설령 그것을 들어 주는 이가 없어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입술로써 끊임없이 들려 주어야 하는 것이니,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명을 다함에 족할 뿐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에베소서 3장 14절의 주석 가운데서 설교의 신비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는 목사와 신도들을 하나의 동일한 태도(기도함) 가운데로 연합하는 초대를 하였다. 곧 설교를 효과 있도록 복을 부여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대의 표명은 칼빈의 주된 신학 사상을 적용케 하는데, 그것은 죄된 인간성 앞에 하나님 만이 모든 은혜의 유일한 조성자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 모든 목회자의 사역을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어 놓았던 것이다. 설교는 성경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할 때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설교에서 나타나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 자신이 가진 신학의 입장과 성경관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성경관에 따라 설교의 방법과 방향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만나신다. 그때는 인간의 말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백성을 깨우치며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며 이때의 설교자는 오직 말씀 증거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의 나타남과 능력만이 그의 설교를 통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령의 능력만이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신다. 이러한 확신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권위와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에 대한 철저한 성경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관은 곧바로 그의 설교사역과 주석사역에 전적인 헌신을 가져다 주었고 그는 자신을 ‘말씀의 종’, ‘말씀의 사역자’로 인식케 했던 것이다. 3. 결 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성경관과 설교에 대한 인식은 결코 무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관이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었던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리요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과 그 말씀의 선포가 갖는 의미는 곧바로 개혁자의 사역과 연결되고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말았다. 이것은 다른 말로 신학과 설교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신학의 과제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사적 고찰로부터 칼빈의 성경관과 그의 설교에 나타난 설교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의 성경관이 그대로 그의 설교와 강해에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그의 신학과 설교는 항상 일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신학은 신학대로 설교는 설교대로 각기 제 나름대로 나갈 뿐이요 이 두 사이에 만남이 없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설교와 강단의 문제는 실천되어지는 성경관, 구호가 아닌 확고한 신앙에 뿌리를 둔 성경관의 정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는 일차적인 과제가 바른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은 단순히 학리적인 연구대상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외쳐져야 하는 것이며, 선포되기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실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예배 중에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강단은 어떠한가? 교역자들은 설교 대신 간증을 나누고, 축복을 선포하는 대신 기도를 한다. 강단 설교의 본질을 확실히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에도 위협을 느끼면서 수고하고 있다. 설교의 독특하고 신비스런 성격에 대한 몰 이해는 설교를 단순한 인간적 연설 중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강단은 또 하나의 연설대 내지는 강의 장소다. 심지어는 이를 개인 연기 장소로까지 보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설교 보다 상담이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말씀 선포에 대한 경시의 경향은 결국 강단 사역 자체 뿐 아니라 사역자 자신까지도 천대받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쇠퇴와 경시는 교회의 쇠퇴도 불러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서구교회의 진상이 아닌가? 이러한 사실은 이미 교회사적 고찰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따라서 이러한 모든 이유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격의 몰이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할 때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강단에 선 인간을 통해 직접 말씀하신다는 사실, 설교 가운데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권능을 행하시고 현현하신다는 것이다. 강단은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다. 진실로 강단은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다. 칼빈은 이러한 설교의 신비를 이해했고 알았기에 그것을 실천했던 것이다. 칼빈은 그의 성경관과 설교관을 결코 나누어 놓지 않았다. 그의 성경관이 그의 설교를 결정했고 그의 주석을 인도했던 것이다. 그는 강단에서의 설교사역을 통해, 그의 주석 사역을 통해, 그의 성경관을 철저히 지켜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성경을 강해하고 선포해야 할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설교 패턴과 특징들/ 벧전1:25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설교 패턴과 특징들 정성구 박사 벧전1:25 1.서론 종교 개혁자 칼빈은 목회자요 설교자였다. 칼빈의 설교는 강해 설교이며, 그것도 연속강해 설교이다. 우리가 칼빈을 말할때 지나치리 만큼 그를 교의학자로 또는 주석가로 연구하기 때문에, 목회자요 설교자로서의 그의 면모는 비교적 강조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칼빈은 신구약 성경 거의 모두를 설교했으며, 당시 그의 설교집은 영어나 화란어 등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칼빈의 설교를 연구해 보면, 종교 개혁이 실제로는 강단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말씀 운동에 기초한 것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이 소론에서는칼빈의 설교 방법들과 특성들\' 만을 특별히 다루어보고자 한다. 2.본론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의 두드러진 교리를 붙들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신전(神前)의식은 그의 목회 생활, 특히 설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¹ 즉 칼빈에게 있어서는 신학과 생활이 연결되어 하나의 완전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그는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는 조직적인 사람인 동시에, 설교자로서, 결국 설교를 통하여 제네바 시 (Genevecity)를 새롭게 만든 사람이다. 설교 학자들이 칼빈을 가리켜서 말한 \'말씀의 종으로서의 칼빈 (Calvijn als Bedienaar Des Woords)이란 표현은 적절하다고 본다.² 칼빈의 신학서 어디서든지, 항상 인간을 하나심의 면전에 세우려는 노력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입장은 칼빈의 설교 가운데도 너무나 명백히 나타나 있다. 칼빈은 어느 설교든지간에 5분정도이면 이런 사상이 나타난다고 한다.³ 그의 성경 본문해석 어디든지,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그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절대로 피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⁴칼빈의 설교는 언제나 무겁고, 심각하고 결정적이었다. 그의 설교를 듣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설교 중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확신 없이는 교회당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칼빈의 설교가 끊임없이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경건의 삶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것 세가지 정도를 지적해보면, 첫째, 그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수 있는 장소는 바로 성경 말씀이 설교되어지는 그 곳임을 분명히 가르쳤다. 이런 강조는 그의 설교에서 계속 설명되고 발전되고 논증되었다. 둘째,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엄선된 수사학적(rhetorical) 도구를 사용하였다. 셋째, 하나님의 면전에서, 책임을 가지고 그의 청중의 편에 서서 계속 일깨워주었다. 즉 이런 끊임없는 노력은 교리를 취급하는 성경 구절을 설명할 때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대한 특수한 문제를 해결하는 성경구절을 설명할 때 항상 인간이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실감 있게 설교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가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선 인관을 말하게 될 때, 이 말은 어떤 장소와 위치를 말함이 아니고 그 방법이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서도록 경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칼빈의 설교가 어떤 주된 교리 설교나 윤리적인 설교든지 간에 청중이 하나심의 면전에서 책임 있게 설 수 있도록 일깨워준다.5 1)설교 방법 그러면 칼빈의 설교 방법을 간단히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칼빈은 강해 설교가인 동시에 즉석 설교가였다. 그는 노트를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칼빈의 설교준비는 종교개혁 동역자들의 책을 읽는 일이며, 초대 교부들을 포함한 스콜라 철학자들, 그리고 자기와 다른 학문적 입장을 표방하는 자들의 주해서를 깊이 있게 탐독하는 일이었다. 그 외에 그의 탁월한 성경 원어와 라틴어 지식, 그리고 놀라운 성경 지식이 성경 본문을 주의 깊게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설교는 간단히 어떤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풍성한 성경 지식과 원어 지식, 그리고 성경 본문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당시의 청중들에게 올바르게 적용하려는 데에 있었다.6 칼빈이 당시의 설교가들에게 권고했던 설교 준비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설교 준비가 너무 체계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교는 미리 작성된 설교문을 준비해서 단어들을 암송하는 것으로 속박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설교란 성령님의 영감이 계속되는 가운데 행해져야 된다고 굳게 믿었다. 칼빈의 설교관은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감으로 기록된 진리임을 우선적으로 굳게 가진다. 한편 설교는 성령께서 설교자와 듣는 자에게 동시에 작용할때 구속의 효과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7 칼빈에 있어서 설교와 성례는 기록된 말씀에 의존하여 성령님의 은혜의 수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의 방법은 외부적인 환경을 잘 채용할 뿐 아니라 근본적인 교리를 바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설교는 살아계신 말씀으로부터 와야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말씀을 외치는 그 순간, 성령에 붙들린 바 유연한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칼빈은 설교 본문을 선택할때, 교회력에 있는 대로 따르지 아니했다. 그는 강해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의 일반적인 방법은 성경전체를 차레로 설교하는 것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 교회의 절기 때는 변경하기도했다. 2)설교 구조 이어서 칼빈의 설교 구조를 보기로 하겠다. 종교 개혁 당시 개혁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분야들이 많이 있었지만, 설교 분야에 대해서는 고대 교회의 관례와 교리로 돌아감을 의미했다. 스콜라적인 표준설교와 비교해보면 개혁자들의 설교는 ‘주제 설교’ (topical sermon)라기보다는 ‘강해 설교’ (expository sermon)였다. 그리고 틀에 매인 설교가 아니고 자유롭게 흘러가는 설교였다. 또 개혁자들의 설교는 종합적이라기보다는 분해적이었으며, 논리적이고 난해한 설교가 아니라 평범한 표현으로 진리를 말하는 설교였다.그리고리고 수사적 (rhetoric) 정확성보다는 회화적인 방법을 택한 설교였다. 칼빈도 예외는 아니었다. 칼빈의 설교는 더 단순했고, 어떤 면에서 보면 그의 설교는 다른 신학적 작품의 조직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있었다. 칼빈은 강해 설교를 할때 연속적인 문장을 각 절씩, 혹은 각 구절씩 설명과 주를 달면서 본문을 대하곤 했다. 칼빈은 늘 원문대로 설교하면서도 성경 각 권과 각 장의 중요성을 철저히 고려했다. 그의 강해 설교 원리는 언제든지 성경은 성경으로 강해되고 해설되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9 강해 설교자로서의 칼빈은 실제로 설교를 전개해갈 때 본문 자체의 구조 외에는 특별한 구조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에는 정연한 윤곽과 조직으로만 빠지기 쉬운 어떤 구성이 없다. 이처림 칼빈이 특별한 조직으로서 설교를 구성하지 않은 것은 그가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떤 순서대로 배열하지 않았다는 데서도 볼수 있다. 칼빈의 입장은 미리 정해진 사상의 배열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본문으로 택한 말씀은 미리 정하는 것이 올다고 했다. 그래서 칼빈은 한번도 어떤 주제를 미리 내걸고 거기에 맞추어서 설교하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강해 설교자로서의 칼빈의 설교는 처음부터 설교자의 어떤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제목을 향해서 가는 제목 설교와는 퍽 달랐다. 이렇게 볼때 칼빈은 최대의 강해 설교자요, 순수한 강해 설교자라 할 수 있다. 칼빈의 설교를 잘 관찰해보면 그 설교들은 모두 하나의 덩어리라고 할수 있다. 칼빈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이것은 교리 설교이며 저것은 강해 설교다” 라는 식으로 구분할 수도, 구분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은 칼빈이 교리나 실제를 무시했다는 뜻이 아니고, 그가 성경 전체를 설교할 때 교리와실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칼빈에게 있어서는 ‘강해’ 나 ‘적용’의 구분이 없었다. 그 이유는 강해는 적용의 씨줄과 날줄이고. 적용은 강해의 옷과 같았기 때문이다.10 그에게는 교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 윤리적인 것과 신앙 생활의 조화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칼빈의 설교는 개혁파 설교의 모델을 제시했고, 그의 강해 설교는 바로 ‘오직 말씀만’(Scriptura Sola)으로 하며, 하나님의 \'말씀전부’(Scriptura Tota)를 증거한 것이다.\" 3) 설교 스타일 칼빈의 설교의 스타일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칼빈의 설교 방식은 매우 단순하고 선명하다. 그의 설교는 매혹적이리 만큼 명백하다. 또한 그의 설교는 잘 이해되도록 짜여졌다. 번역가인 닉슨(Leroy Nixon)은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책머리에, 칼빈의 설교는 그 설교의 전체 효과를 얻기 위해 큰 소리로 읽혀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왜냐하면 설교들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귀로 전해질 때 그 내용이 가장 마음에 잘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칼빈의 설교 스타일의 가장 큰 특성은 그의 설교의 진지함과 솔직함과 함께 명확함과 단순함에 있다고 본다. 이것은 당시의 다른 개혁자들의 설교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당시의 설교자들은 아직도 화려함과 모호함을 자랑하는 중세 시대의 특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학문적이며 기교적인 방법을 그의 설교에 도입하지 않았으며, 가능한한 모호한 단어 사용을 피하였다. 칼빈의 설교에서 그의 문장은 매우 구체적이고도 활기있는 단어들로 빛나고 있다. 특히 칼빈은 주목받을 만한 예화를 사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생활 가운데서 이끌어낸 것들이었다. 칼빈의 설교는 표현의 면에서 충분한 효과를 주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고 간결하게 전했다. 칼빈은 청중들에게 그들이 듣고, 하나님앞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진리의 중요성에 대해 좀 더 날카롭게 깨닫게 하기 위한 표현(exposition)뿐만 아니라 묘사(서술, description)와 예증도 사용하였다. 그런데 칼빈이 사용한 언어들이 성경 자체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설교할 때 사용하는 궤변이나 이른바 설교를 윤택하게 한다는 노력이 자칫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효과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칼빈은 그의 설교언어를 사용할 때 무엇을 꾸미려고 하지 않고 다만 회중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선택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설교 스타일에 있어 장식적이거나 기교적인 것을 피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방식을 사용했던 것이다. 즉 칼빈의 설교 방식은 한마디로 ‘단순성, 명쾌함, 힘찬’ 하나님의 말씀의 사용이 그의 특성이라고 할수있다. \" 4) 교회의 무질서에 대해서 칼빈은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리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핑계 속에서 해야할 바를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큰 부잣집을 방문하는 중에 부엌에 가서 쓸데없거나 하찮은 그릇을 보았다 하자. 혹시 그것이 쓰레기통이라면, 그것은 이 집의 청결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그는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그 그릇을 보고, ‘이 집에는 다시 들어오지 않겠다’ 고 말한다면 얼마나 바보스러운가?14 칼빈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신자들이 평가하는 것에도 이것을 적용시킨다. “하니님의 교회에서 무질서(disorder)를 본다고 해서 완전히 망했다고 또는 예수님도 더 이상 어찌할 수없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한다. 오히려 교회의 아름다움을 추락시키는 그런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비열함 속에서도 섭리하셔서 마귀나 악한사람이라도 그를 찬양케 하는, 놀랍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인내하자.”15 5)벌레에 비유되는 인간 칼빈이 흔한 비유나 직유를 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칼빈은 때때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을 ‘벌레\'나 ‘해충’ 혹은 또 다른 특별한 종류의 곤충으로 비유한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벌레처럼, 죄와 마귀에게 지배당하는 지구상의 헛된 존재임을알게 된다.16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는데, 지구상의 이 벌레 같은 우리가 새 율법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마치 하나님이 충분히 지혜롭지 못한 것처럼….”17 6) 훈계에 관해서 칼빈은 수사법과 묘사(exposition)를 쓸 뿐 아니라 청중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을 깨우치기 위한 ‘훈계’ 도 사용한다. 칼빈은 훈계를 경고나 타이르는 목적으로 쓰기도 하며, 때로는 성경의 위로를주려고, 또는 삶에서의 행동 방향을 지시해주기 위해 사용한다. 마태복음 27장 11-26절에 관한 설교에서 칼빈은 이렇게 경고한다. “말씀으로 배우자. 하나님이 입증하시는 열심을 갖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참 지식으로 무장하고 그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에 학자처럼 대담하지 못하다면‥‥ 단지 사탄과 논쟁만 벌이다가 말것이다.18 또한 훈계는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위로를 주기 위해 쓰인다. 사도행전 1장 9-11절에 대한 설교에서 칼빈은 이렇게 외친다. “그가 다시 오셔서 우리를 모아 그와 연합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은, 우리가 위로 받을 구절이다. 이 구절은 사도들을 위한 말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가 비록 그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음은, 그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으며, 우리 머리를 들게 하셔서 우리 앞에 일어날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19 7)교회의 불신과 거역에 대하여 칼빈은 교회의 불신과 거역에 대해 경고하면서 믿음과 순종을위해 훈계를 사용함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장 9-11절에 관한 아래 설교의 예문은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전형적 형식이다. 여기서 그가 얼마나 적절하며 꼭 들어맞는 훈계를 하는지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심판주로만 이해하는 것도 그럴 만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대속주로 주시려 할 때 쉽사리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비웃어, 지난 수요일 이 자리에서 조롱하며, 불만족해 하며 ‥‥ 무가치하게 되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반항하며, 이곳에 와서 그들의 불경건과 뻔뻔스러움으로 괴물과 같은 첫을 한다 ‥‥ 이제 그들은 누구를 조롱할까? 그들이 거절한 그분이리라. 그러나 그는 오시리라. 그는 하늘에 올라가시어 그를 조롱하는 사악한 조소자에게 참으시지만은 아니하신다. 그는 모든 조롱을 기록할자를 두셨다 ‥‥우리의 교훈으로 이 말씀이 주어졌으니 ,우리 자신은 겸손함을 배우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자. 그는 천사의 왕으로. 천사도 그에게 복종하니까.\"20 불신과 불순종에 대한 경고, 믿음과 순종에 대한 훈계적인 유형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는 믿음과 순종의 행위에 특별한 유형으로 청중을 훈계한다. 욥기 31장 16-23절에 관해서 신자들이 구제에 대해 교회를 권면한다. “전에도 말했듯이 더 자비로와지자. 어떤이가 ‘더 많이 줄지니라’ 는 말로 율법을 부과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여 그 자신의 능력을 헤아려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을 때에도 완전히 다 갚은 것은 아님을 알자.\"21 8)감탄법과 수사법의 사용 칼빈은 청중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책임에 대해 느끼게 하고, 좋은점과 헛된 점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감탄법을 쓴다. 이사야 53장 12절에 관해 말할 때 칼빈은 감탄법과 수사법을 사용했다. “기도할 때 천국에 있는 천사와 같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큰 특권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친밀하게 되는 겸손을 나타내시어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며, 내가 너희의 대변자가 되리라\' 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기뻐서 황홀케 되지 않겠는가?”23 이와 같은 것이 욥기 22장 1-8절에 관한 설교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그의 무한한 광대하심을 이해하고, 그가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둘 만큼, 그리고 걱정하실 만큼 겸손하다는 것을 생각할때, 우리는 진실로 감동하지 않겠는가? 또한 그처럼 선하심에 감탄하지 않겠는가?”23 감탄법은 칼빈의 설교에서 비난과 연관지어 때때로 쓰인다. 디모데후서 2장 16-18절의 설교에서 칼빈은후메네오와 빌레도가 바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임을 긍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믿음의 가장 핵심인 부활을 믿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러한 천한 무지에 이를 수 있었다니 ‥‥ 그것이 어찌 가능한가?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남용하는 조소자와 책하는 자에게 어떻게 갚으시는지 보았다.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의 자리에 던지셔서, 다시는 그들이 가르치지 못하게 하셨다.”24 9) 목사와 청중의 임무 또 칼빈은 설교 가운데 ‘우리, 우리의’ 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는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이 목회자를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말하는 것이라고 여겼다(v.d.Vegt25,Bie-sterveld\"). 칼빈은 조소자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불신에 대해서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들에 대해 언급할 때는 보통 ‘그’ 또는 ‘그들’ 이라는 3인칭을 사용했다. 칼빈은 계속해서 경고하며, ‘구하며’ (seeking), ‘공감’(sympathetic)하는\' 이들에게는 위로하였다. 칼빈의 설교에는 그리스도의 교회 일원임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보이는데, 이는 칼빈이 불신, 위선을 경고하며 믿음 갖기를 훈계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러나칼빈은 청중과 그들 사이에 늘 \'우리\'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설교자 칼빈은 하나님의 대변자로 사람들 앞에 서 있음을 인식했을 뿐 아니라, 청중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항상 강조하였다. 욥기 33장 1-7절에 관한 설교에서 목사와 청중의 임무를 보여주는 구별(distinction)과 동일시 (identification)의 방법이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교훈인데‥‥ 이 세상에는 완고함이 있기 마련이고, 높은 지위는 하나님께 복종함을 싫어하고 ‥‥ 늘 하나님을 대적하는 뿔을 내밀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잊을때‥‥ 우리는 굽힐줄 모르는 정절을 지녀야 하며 ‥‥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로 임명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를 알 것이다. 또한 모든사람은 일반적인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의 거만함 때문에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날 때, 하나님 앞에 분노를 드러내서는 안된다. 또 우리의 아픈 곳을 건드릴 때 화를 내는 무정함은 없어야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늘 그의 평안을 유지시켜주시리라는 어리석고 주제넘은 생각은 버리도록 하자.\"27 설교의 대상이 그 자신과 청중이 되어야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설교자가 교회에서 그들의 특별한 위치에 동의할 뿐 아니라, 설교하는 입장에서 자신과 듣는 이들에게 공통되는 복음의 도전과 훈계에 응답하며, 설교자와 청중이 같은 입장에서 함께 회개와 믿음과 복종의 겸허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 얼굴에 나타내는 계시라는 것을 칼빈이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 절대 주권에 관하여 청중이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칼빈이 쓴 여러가지 수사학적 방법과 교리와 생활의 문제를 제시한 방법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누군가가 하나님 , 인간. 구원의 교리에 대한 청중의 종교적 반응에 ‘실행’ 이라는 말을 포함한다면, 칼빈의 교리 및 학설은 \'실행\' 에 있어 직접적인 증요성을 가짐을 알 수 있다. 또 \'실행\' 이라는 것이 교리를 확실히 깨닫는 것에 기초를 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적 설교와 윤리적 설교에 대한 구별은 가능케 된다. 여기서는 교리적이냐, 윤리적이냐 하는 칼빈의 설교에 관한 것만 생각하겠다. 칼빈의 교리와 설교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도 스스로 계시며, 그의 행함이나 계시에 있어서도 완전히 자유로운 절대적 주권자이다.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는가운데 나타나는 주권적 광대하심은 욥기 22장 1-8절에 관한 칼빈의 설교에 잘 나타나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를 더 잘 섬기기 위해 받는 수고가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은 얼핏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이것을 모른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뭔가 부족해서 우리로부터 무슨 이익을 취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이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늘이거나 줄이지 못할뿐 아니라, 모든 선함이 샘솟는 그의 지혜는 너무도 커서 무엇을 빌리지도 않으며, 인간이 그에게 바치는 것은 전혀 그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고, 하나님과 어떤 방법으로든지 논쟁한다는 것은 더욱더 있을수 없는 일이다.\"28 하나님의 스스로 만족함, 즉 자족성에 대한 표현에서 칼빈은 청중이 하나님에게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이 광대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봉사하기를 요구하신다. 피조물이 채워줄 그의 요구가 없다면, 왜 하나님은 이 일을 원하는가? 칼빈은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넘은 하나님의 법 안에서 이익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구원의 방편과 더불어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여기신다.”29 우리로부터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봉사하라고 하심은 ‘매우 드물고 특이한 사랑’의 표시이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낮게 내려오셔서 그 자신을 죽여 씩어가는 인간의 위치에 두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게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가 형제에게 하는 것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의무와 짐을 지셨다. 우리 입장에서 이렇게 모든 것을 보았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인자하심에 감탄과 놀람을 어찌 금할수 있겠는가?\"30 청중은 자족하시나 스스로 복종하는 주권자와 얼굴을 맞대고 있으며, 설교자에 의해 그의 자발적인 선함으로 관대한 하나님께 경배를 올리라고 요구되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할 수 있는. 또는 말할 수 없는 속성에 대한 학문적 구별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봉사하기를 요구하며 우리를 가까이 끌 때.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며 자족하시는 이를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주권적 자족함과 주권적 선함이 개인에게 나타나서 청중들이 하나님을찬양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권적 광대하심(Sovereign Majesty)에 거하심으로, 인간이 그의 모든길은 알아낼 수 없다. 그의 주권을 드러내는 모든 표현들 가운데, 우리는 그의 뜻을 드러내는 분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칼빈은 사도행전 1장 6-8절에서, 아버지가 감추신 주권을 드러내시는 시간과 계절에 대해 제자들에게 한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 교훈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뜻을 알게 하지 않으실 때, 하나님의 역사와 관련하여 ‘왜’ 라고 묻는 이가 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는 무엇을 했는가”라고묻는다. 칼빈은 이에 대해 대답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런 사악한 호기심이 많은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만드셨다. 그런 생각에 이르게 하는 비난할 만한 호기심은, 하나님의 사업이 우리에게 선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일에 대항해서 우리 자신을 치켜 세우고 맞서게 하는 데 뻔뻔스러운 일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그 일로만 만족해야한다. 그것을 생각하는 데 우리 모든 삶을 다 써버리기 때문에, 그 나머지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시간이 없으므로 개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에 각자 순종하며, 아버지가 감춰 놓으신 일, 즉 성경이 밝히고 있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묻지 말아야한다.”31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는 ‘어떤 이는 택하고 어떤 이는 버리시는가’ 하는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스스로가 드러내심에 응답하여 청중들이 이 진리를 고수하기를 요구하시며, 그의 청중을 택하고 버리시는 주권에 대해 칼빈이 강조하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2장 3-5절에 관한 설교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왜 하나님은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버리실까?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음을, 그리고택함 받은자라도 그 동료보다 더 사랑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우리는 안다 ‥‥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첫 머리에서 말했듯이,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하는 이를 택하셨다. 우리는 왜 이 사람을 하나님이 택하셨는지는 모른다.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공의로 행하졌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 가운데 우리가 분명히 증명하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그냥 받아들이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하면서 첫된 이성의 잔상 아래에서 우리를 방황으로 이끄는 그런 사람 때문에 고통 당하지 말자.”32 칼빈은 주권적 하나님은 언제나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욥기 9장 1-6절에 관한 설교 가운데 아래의 인용은, 설교자 칼빈이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에 대해 긍정할 뿐만 아니라, 항상 옳으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 스스로 겸허하게 행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정당하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악하고 방종한 이에게 벌주시고, 그런 나라에 복수하시며 보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유해하고 전염성있는 악취와 같으니까’ 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는 방법에 상관 없이, 하나님은 항상 옳다고 여기는 고차원적 사고에 이르러야 한다.\"33 칼빈은 이 학설을 계속 적용시키다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이 계시 앞에서 갑자기 멈춘다. “나는 우리가 이 두가지 사항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의로 다스림을 아는 것과 인간은 그가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과 논쟁이나 토른을 해서는 안되며, 크건 작건 간에 인간은 하나님께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각자 자신을 살펴보고.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비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후 우리가 그에게 얼마나 은혜를 입었는지를 알기 위해 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정죄와 벌에 대해 알아야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 눈 앞에서 다른 사람을 징계하여 우리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런 예를, 우리에게 들이닥칠 하나님의 존재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를 훈육함에 사용하자.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징벌로 우리는 이익을 얻었으니까…\"34 11) 인간학 인간학에 대한 취급에서, 이 교리에 대한 설교적 표현의 목적은, 청중들이 성경 가운데 계시된 하니님의 ‘얼굴’을 대한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때로 ‘하나님 앞’의 설교에서, 자기 생각으로 인간에 대해 장황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칼빈은 그에 앞선 설교에서 명백히 다루지 않은 용어를 소개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아마 인간의 본래 지위와 상태에 대한 광범위한 숙고가 없었던 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에 관심을 둔 이유라고 하했다. 인간의 본래 상태는 \'인간의 타락이 없었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에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타락 이후로 죄인이 겪는 무서운 곤경을 지적하는데 도움이 된다. 요한복음 1장 1-5절에 관한 설교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확실히 그의 모든 창조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낼 때, 말하자면,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다른 피조물에 나타난 그를 생각한다함은, 말하자면, 뒤에서 희미하게나마 그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에서 하나님이 보인다고는 하나,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다리나 손이나 잔등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가운데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완전하게 생각(상상)하기 위해서는 얼굴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천상천하에서 알려지기 원하는 모습에 대해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35 칼빈은 “빛이 어둠에 비추되 어둠이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는 요한의 말에 의미를 더하고 있다. “그는 마치 \'나의 작은자여.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참으로 우리는 지금 보는 것처럼 손상당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어디서나 비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 끈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이 남긴 어떤 광채나 그 빛의 강렬한 발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36 칼빈은 인간은 아직도 ‘창조의 본래 모습의 남은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사악하고 타락한 속에서도 하나님 형상(Image of God)의 영상이 있음을 본다. 이것은 우리가 더욱 변명할 수 없게 만든다. 그들이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든 만큼, 그들의 죄는 더욱깊어지고 두배로 가중되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이 그렇게 부패했음에도,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조상 아담에게 주었던 은총의 섬광을 여전히 보유할 수 있는 방법이다.”37 칼빈은 때로 인간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나 인간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잔상을찾아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마태복음 27장 11-26절의 설교에서. ‘하나님’ 이라는 이름에 대한 빌라도의 두려움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공공연히 경멸하는 이들의 조롱을 대조시키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빌라도의 두려움은 결국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 우리는 또한 인간이 가진 두려움을 본다. 이것은 그들의 눈 앞을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 금방 꺼져버리는 섬광 같은 것이라 하겠다.\"38 그러나 아직 이교도적인 특성도 있어서 .하나님의 모습(God\'s sight)에 영원한 가치를 갖지 못하고 크리스천이라 내세우는 것을 부끄럽게 한다. 이것이 ‘인간다움’ (humaneness)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고통 당하는 혹독함을 없애 버리지는 못하지만, 칼빈은 이 문제에 관해서 이교도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감정이 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교도에게는 비록 그들이 악하고, 그들에게는 복수라는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원수가 너무 고통을 당해, 그들의 손으로 더 이상 해를 끼칠 필요가 없을때, 그 생각은 덜어질 것이다.”39 칼빈은 이교도의 이 자연적 경향을, 그 자신의 시대에 그들의 적이 말할 수 없이 박해받는 것을 보고도 만족할 줄 모르고 오히려 삼키려는 잔인성과 비교한다.40 그외에 칼빈은 이 말에서 ‘humaneness’ 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교도들은 이것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우리는 세낸 사람에게. 삯꾼이라는 말처럼 종이라는 말을 써야겠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말이다. 그때에 살았던 불신자들은 비록 그가 종에게 합당하다고 여긴 일을 할특귄이 허락되기는 했지만, 이것을 ‘humaneness’ 라고 여겼을까?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법을 부과시켰을까? 우리가 적어도 그런 생각조차 못 가진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친 우리에게 어떤 핑계가 있을까?”41 이러므로 이교도의 ‘인간다움’ 은 히나님이 그들 안에 죄를 제한시켰다는 것을 드러낼 목적으로 인용된 것이 아니고, 크리스천이라 내세우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더욱 완전히 복종하게 하려고 인용되었다. 12) 타락자의 반역성 인간의 타락은 그 자체가 반역(rebellion)이라 되풀이되어 밝혀진다. 하나님은 징계의 방법을 통해 인간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욥기 5장 17-18절에 관한 설교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타락한 이들에 대해 하나넘이 일하시는 방법을 주시하자. 그는 징계하심으로 그들이 회개하기를 권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말한 벌이 모든 이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며, 그에게 돌아오도록 하는 은총을 모든이에게 다 베푸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강퍅함을 녹이시지 않는다면, 바로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인간이란 그들이 매 맞는다고 그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 ‥‥ 사실 인간의 죄악이 너무도 완고하며 지독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벌하면 벌할수록 그들의 불경함을 더욱 드러내어, 자신을 더욱 고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한다.”42 하나님의 반역은 타락한 이들에게도 합당하게 드러난다. “악한 자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악에서 악으로 치닫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여 공공연하게, 분명한 거역의 반응을 보일 때,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입이 막히는 것이다.\"41 그러나 칼빈이 타락자의 반역성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그들의 곤경을 고소하려 함이 아니다. 불신자와는 반대로,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위치를 생각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울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는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손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겸손하자‥‥ 그는 특별히 우리에게 선을 행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자녀들에게만 주는 특권인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징계를 당할 때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오히려 더욱 싫어하고, 그 앞에서 한숨 쉬고 짜증내므로 그의 자비를 분노로 바꾸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느낄 때 그것은 그가 성령님으로 우리 마음에 써 놓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키워주기에는 너무도 높은 차원의 지혜이기에 하나님의 자발적인 선함(free goodness)으로 나오는 성령님이 먼저 우리가 고집하던 그 저주받을 강퍅함과 완고함을 녹이셔야 한다.”44 13) 선택의 교리 칼빈은 선택의 교리가 교회에서 공공연히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고, 다른 이들은 택하지 않았다. 용납과 거절이 포함되는 선택의 원리는 복음의 실제성을 가지려면 지속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구원에 대해 생각할때 ‘우리가 택함받았나’ 라고 물어서는 안된다. “복음에서 말하는 것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약속을 받게 하셨으니,이는 그가 온 맘을 열어 보이셔서 우리가 택함 받았음을45 알게 하신다. 선택이란 봉한 편지와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과 믿음으로 그에게 갈 때 하나님이 친히 그 내용을 증거해 주심으로 우리는 편지를 읽을 수 있다.\"4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안내자라면, 우리는 그를 의지하고 믿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택한 모든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께 사랑받도록 하는 가치를 그 안에 지님을 알게 되니, 우리가 그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그와 한 몸이 된 것만으로 충분하다.47 그리스도 안의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표이다. 그가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음에 따라 우리는 영원한 택함으로 인도된다.\"48 그러나 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분명한 자기 계시 앞에 그들이 설 때 선택된 유기(遣棄)의 교리(doctrine of reprobation)를 어떻게 포함할 수 있을까? 칼빈은 유기의 교리는 방만함에만 적용된다고 말한다. 14) 그리스도의 복종에 관하여 하나님은 택함을 위해 대속자 역할을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타락한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으셨다. 구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그 유익을 어떻게 해야 얻을수 있는가? 우리는 칼빈 설교의 중요한 주제의 일부분만을 여기서 고찰해볼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죄인의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해 완성되었다. 칼빈이 그리스도의 복종에 관해 능동적, 수동적인 구별을 보이는 반면, 그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이 두면을 나눌 수 없는한 단위로 여겼다. 이사야 53장 7-8절에 관한 설교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고소 앞에서 묵묵했던 사실에 대해 주석한다 “그러므로 유대인도 그리스도가 을법에 나타난 모든 것을 완전케 하였음을 알리라. 양(lamb)이라는 표현은 특히 그리스도에게 합당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지자가 말한것을 이해했다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우리 모든 죄를 없애고, 양과 같이 희생이 되어 피를 흘리므로 우리 죄는 씻기우고 사함을 받으리라.\"49 칼빈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때, 이 진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계속 지적한다. 우리가 범한 죄로 고소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그리스도가 순종적 침묵을 지켰다는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구 하나님은 그에게 십자가의 쓰라림을 주셨지만, 그는 모든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셨다. 그의 순종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50 이 진리는 하나님 앞에 선 신자들에게 더욱 유용하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의 손아래에서 잠잠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대속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침묵을 잘 연결시킨다. 이 관계는 우리를 위해 말 없이 고난 당하셨던 그가, 이제는 아버지께 우리의 중보자, 즉 옹흐자가 되셨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침묵을 지켰고. 그 침묵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와 반역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였기에, 우리를 위해 우리의 중보자로서 입을 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가 입을 열어 중재하실 때에야 우리가 범한 죄는 치료되는것이다. 15)연합에 관하여 택함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유익을 나누는 것이며, 참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함을 깨닫는 것이다.이 연합을 이해하는 것은 성육신을 믿음으로 이해하는 데서 얻어질 수 있다. 우리는죄와 비참으로 가득 찼으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오셨다.51 성육신을 통해 그리스도와 우리는 연합되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하나되었고, 우리가 그와 하나되었음이 칼빈 설교에 잘 나타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고통 안에서 연합되고,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 이것은 욥기 19장 17-25절에 관한 설교의 아래 인용에서 분명히 보인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형상을 닮으려다 너무 많이 손상 당하지(offend) 않게 하려고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이 말이 신자들의 마음 가운데 가득 채워져야했다.\"52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리스도와 연합함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도 하나되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와 일치시켜 신자들에게 큰 변화를 일으켰다. 복음은 모든 신자들이 승천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공유했음을 약속하셨다. 그가 비록 높이 계시지만 그는 한몸이 된 그의 지체와 함께 하신다. 그리스도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우리는 양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가 그의 지체와 영원한 우정으로 연결되었고,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진리를 던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형제 됨을 막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응답해 주실줄 굳게 믿고 하나님을 담대히 부를 수 있는 것이다.53 우리는 그와 개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가졌으나, 복음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완전히 동참할 것이라 약속한다. 우리가 그와 연합함을 확신케 하신 것은, 설교 가운데 복음의 교통하는 말씀에 참여하는 성찬식을 통해서이다. 사도행전 1장 4-5절에 관한 설교에서, 칼빈은 세례가 우리와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세례에 대해 가질 중요한것은, 첫째는 우리가 옛 아담을 벗어서 새로워짐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했고.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성결케 했을 때 우리의 오명은 씻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의 요점이다.54 16) 전도와 기도 또한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의 크리스천의 실행’ 을 진지하게 가르쳐준다. 사도행전 2장 18-21절에 관한설교에서, 이웃을 복음으로 교육하려는 우리의 자비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라고 칼빈은 강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친 그 교리를 이웃에게 전함으로 우리의 자비를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사도를 통해 확장하신 진리의 발판은 전세계에 퍼졌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만 위해 받을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전파하기 위해’ 받았다. 칼빈은 덧붙인다. “모두가 다 가르칠 생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라면 우리 이웃을 충분히 권할 능력이 있다.”55 우리는 그를 전함으로써만 이웃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를 위해 또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에서 멀리 떨어진 듯한 이들’을 이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 위에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선한 뜻을 보여 주었듯이 그들에게도 보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실 때까지 인내로서 기다리도록 기도하자.\"56 칼빈 설교의 끝 부분에 기도에 대한 강조가 반복된다. 회중이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들을 나열한뒤 그는이렇게 덧붙인다. “그(He)는 우리에게 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에게 이 은총을 허락하셨다.”57 청중이 성경에 선포된 하나님의 뜻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도움을 주도록 칼빈의 교리적, 윤리적 설교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이 인용될 수 있다. 17) 신학적 특성 그 다음은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일관된 신학적(神學的)특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칼빈은 논리적인 사람이고, 조리 있는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의 기본 구조는 그가 「기독교 강요」 첫 판을 써냈던 25세 때부터 마지막 개정판을 냈던 50세까지 변화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사상의 일관성은 그의 신학 논문, 편지, 주석, 그리고 그의 설교 가운데 한결같이 나타난다. 칼빈의 설교 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칠저한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칼빈의 설교의 사상은 그의 ‘하나님 중심 사상’과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그 주축으로 한다. 칼빈 신학의 ‘하나님 면전\'(Coram Deo)의 사상은 그의 설교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칼빈의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58 그래서 크로밍가 교수는 칼빈의 설교에 대해서 언급할때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인간(Man Before God’s Face in Calvin\'s Preach-ing)을 강조했다.59 그리고 칼빈의 설교는 ‘하나님’ 이란 통괄적인 명칭으로 신성을 강조한다 루터는 성경의 모든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강해(a Christ-Centered exposition of every passage of Scripture)하였다. 그런데 칼빈은 알기 쉽게 삼위일체이신 구세주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칼빈의 설교에는 삼위일체 중의 어느 위(位)를 특별히 강조할 때 생기는 위험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이 그가 위(位)란 용어를 꺼려하고 오히려 본체(substance)란 용어를 택한 이유이다.60 위대한 종교 개혁가 칼빈은 교회 중심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체제와 또 인간 중심의 자유주의 철학도 논박했다. 또한 그는 삼위일체 중에서 제2위 또는 제3위와 같은 어느 한 위만을 특별히 강조하는 일단의 종파들 사이에 만연된 사조를 논박한다. 칼빈의 설교에서 볼수 있는 것은, 논증적인 구절들을 늘 명백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61 칼빈은 성령 중심의 신학만 강조하게 되면 운명론적 주관주의(Subjectivism)로 향하는 첫 단계가 되기 쉽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만을 강조하는 것은 인본주의로 조금씩 다가가는 처사라고 경고했다62 이 두사실은 칼빈의 설교의 줄기며, 꽃이며, 뿌리이다. 이것을 볼 때 칼빈의 설교의 입장과 현대 설교에서 나타난 이론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오늘날의 설교가들은 대부분 삼위 일체 하나님을 각 위(位)별로 독립적으로 분산시켜서 언급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런 경향은 설교에서 뿐 아니라 목회 기도에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하나님이라는 포괄적이고 함축성이 풍부한 명칭으로 삼위일체를 동시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적(theocentri-city)인 신학적인 틀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63 뿐만 아니라 칼빈 설교의 신학적 특징 중의 하나는 역시 \'하나님의 섭리\' 에 대한 강조이다. 특히 칼빈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강조점은 욥기의 강해 설교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섭리에 대한 강조라든지 선택에 대한 강조점도 역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절 대 주권에 대한 고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설교자로서의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 교리를 성도의 위로로서 사용하였던 것이다.64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결코 추상적인 것으로 보여지지 않았으며, 교의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주권\' 에 대한 강조는 바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와 연관지어져 있다. 칼빈의 설교에서 주권적 은혜는 선택의 계속적인 강조와 더불어 모든 설교의 주제였다. 칼빈의 설교는 그것이 단순히 신학의 일부분이거나 성경의 한 조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구원의 성도들의 삶 전체를 다루며,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서의 설교였다.65 3.결론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상에서 강해 설교자로서의 칼빈의 모습과 그의 설교 방법을 개괄적이나마 살펴본 셈이다. 사실 우리는 칼빈의 다른 신학 작품도 그러하지만 그의 방대한 설교를 모두 읽을 수는 없다. 더욱이 칼빈의 저작 전집(Calvini Opera Omnia)에 포함된 방대한 라틴어 설교집들은 퍽 난해한 것들이다. 66 다만 우리는 영어로 번역된 극히 일부분의 칼빈의 설교집과 칼빈 연구의 2차 자료를 이용해서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살펴본 셈이다. 하여튼 서론에서도 살펴보았거니와 신학자로서, 교회 개혁자로서의 칼빈의이미지가 너무 부각된 나머지 설교자로서의 칼빈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가려졌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그 자신도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강단의 사람이었고 전무후무한 강해 설교자였다. 그가 이룩한 종교 개혁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를 통해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구원의 복음, 위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개혁 교회가 개혁 교회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설교의 현장에서인 것이다. 그의 설교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는 설교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교회가 개혁 교회로서의 바른 모습을 찾는 1차적인 작업은 개혁자 칼빈이 이루어놓았던 강해 설교의 방법을 다시 재발견하는데 있다고 본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적 신학을 정립했다고 하나, 설교의 현장은 그것과 무관한 모순 속에 살고 있다. 칼빈이 말한대로, 우리가 강단에 오르는 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의 비전과 환상을 증거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67 이제 칼빈이 깨달았던 단순한 복음, 순수한 복음증거의 도구로 쓰여질 우리들은, 4세기 전의 개혁자 칼빈의 설교 철학과 그 방법에 다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주(註) 1. johannes Calvin, Preeken, Het Gepredikte Woord, Vertald door Ds. J. Douma en DS.W.H.V.d. Vegt, Deel I(T.Wever N.V.Franeker),p.1 2 P.Biesterveld, CaIvin als Bedienaar des Woords,(Kampen:J.H Bos.1897). Biesterveld는 화란의 캄펜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었다. 이 책은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학문적으로 다룬 고전적인 책이다. 3. C.G. Kromminga, Man before God\'s Gace in Calvin\'s Preaching. 4 E.Muhlhaupt, Die predigt Calvins, ihre geschichte, ihre From, Und ihre religiosen grundgedanken, pp. 24-38. 또한 R.S.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pp.82-83,94. 5 Kromminga,op.cit.,p.6. 대개 영문으로 번역된 칼빈의 설교들은 다음과 같다. John Calvi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와 The Mystery of Godliness and other Selected; Sermon from Job(trans, L. Hinon), Sermon on Isaiah\'s Prophecy of the Death and Passion of Christ(trans.T.H.L.Parder)등과 같이 Corpus Reformatorum 또는 Calvini Opera 에서 부분적으로 번역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칼빈신학연구회편, “칼빈 서거 400주년 기념 논문집, PP.113에 Wilhelm Niesel의 글” 최근에 발행된 칼빈 설교집의 ‘신학적 내용’ 을 참고할것. 6. John Calvin, Sermons from job, Introduction by Harold Dedkker, p. xlii. 7. Ibid.p.xiv. \"the Sermon becomes redemtively effective only when the Holy Spirit is operative in both the preacher and the hearers.\" 8. ibid. 9. Ibid. p. xvii. \"… Scripture must be interpreted with Scripture.\" 10. Ibid, p. xxiii. 참조 Harold Dekker, \'Calvin\'s Sermons\' ; Their structure and style, Calvin Forum, May(1951),p.205. 11.T.Hoekstra, Gereformeerde Homiletiek(Wageningen,1926),pp. l62f. 12 L.Nixon ed.,J. Calvin\'s Sermon from Job. Introduction by H. Dekker(Baker,1952),p.xxiv 13.Ibid.p.xxvii. 칼빈의 설교의 서두에서는 \"우리는 어제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아침에 보았습니다” 등의 말을 했으며, 마감할때는 “요약컨대,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의미한 바를 지금 깨닫습니다. 나머지는 내일까지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칼빈에게는 대지 구분, 변화, 그리고 설교학적 기술같은 것은 없었다. 문단을 구분하는 말은 대략 이렇게 넘어간다. 즉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번째 사항입니다\" 또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구절로부터 결론지어야 할요점입니다\'라고 말하고 다음 강해로 넘어가곤 했다. L. Nixon, John Calvin, Expository Preacher(Eerdmans, 1950) 14. The Mystery of Godliness and other Selected Sermons,p.146. 15. Ibid,p.147. 16. Parker, Sermon on Isaiah\'s Prophecy of the Death and Passion of Christ.p.32 17. The Mystery of Godliness and other Selected Sermons.p.72. 18.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ans. by L. Nison, p. 127. 19. Ibid., p.240. 20.Ibid.,pp.241f. 21. Sermons from Job, trans. by L. Nixon 화란어로의 최근 번역은 Stemmen uit Geneve, Preeken, Artikelen, brieven enz, Van Johannes Calvin Bundel VII(preeken over Job) De geref, Bibliotheek Meeuwen(N. Br) Fcb. 1969, Sermons on Isaiah\'s Prophecy of the Death and Passion of Christ, trans, T.H.L. Parker,p.146. 22. Parke의 저작(1975)가운데 John Calvin은 지금까지 어느 칼빈 연구보다 자세하고 내용이 풍부하다. 그는 현재 The University of Dunham의 신학부 교수로 있는데, 그의 저작가운데 특히 Oracles of God은 칼빈의 설교 연구를 영어로 출판한 가운데 처음이었다. 23. Sermon from Job. trans., L. Nixon. p.139. 24 The Mystery of Godliness and other Selected Sermons p.63. 25. Het Gepredikte Woord, preeken van Johannes Calvijn,Del I, \"Inleiding\", p. 31의 IX Het Adres der prediking을 참고할 것. 26. P.Biesterveld, Calvijn als Bedienaar des Woords, Kampen,J. h. Bos, 1897, p. 1ff. 여기서는 말씀 봉사에 대한 진리와 능력 필요성 등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27 Sermon from Job, trans. by L. Nixon, P. 245. 28 Ibid.,pp.137f. 29 Ihd,p.138. 30 Ibid, p. 140. 31.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ans. by L. Nixon, p. 227 32. The Mystery of Godliness and Other Selected Sermons. pp. lOOf 33. Sermons from Job. trans. by L Nison. p 48 34 Ibid, p.49 35.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ans. by L. Nixon. pp. 31f 36. Ibid.,p.32 37. Ibid.,p.33. 38. Ibid,p.128 39. Sermom from Job.trans.by L.. Nixon.p.1l4 본문은 욥기 19:17-25의 말씀이다 40. Ibid. 41. Sermon from Job.trans.by L. Nixon.p.193.본문은 욥기 31: 9-15의 말씀이다 42 Ibid.p.34 43. Ibid. 44. Ibid,pp.35f. 45. Ibfd,p.44 46. Ibid.,pp.44f 47. Ibid. 48. Ibid.,p.46. 49. Sermons on Isaiah\'s Prophecy Death and Passion of Christ.trans.,T. H. L.Parker. p. 88. Cf. The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ans, L. Nixon p. 156. 또한 J. Douma,Het gepredIikte woord Preeken Van Johannes Calvijn, Deel II을 참고할 것. 이 책에는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이사야의 그리스도 예언에 대한 설교이다. 즉 Preeken Over de profetie Van Christus, betreffende Aijn Dood en Lijden outleend an Jesaja이다. 이 부분의 설교는 Calvini Opera XXXV, pp. 608-688에 수록된 것이다. 50. Ibid. 51. The Mystery of Godleness and Other Selected Sermons. p. 13 52. Sermon from Job trans, L. Nixon. p. 108. 53. Ibid., p. 194. 54.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m, trans. by L. Nixon. p. 214. Cf. Ronold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pp. 173-183. 55.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trans. by L. Nixon. p. 272 56. The Mystery of Godliness and other Selected Sermons.p.110. 57. Sermons on Isaiah\'s Prophecy of the Death and Passion of Christ. Parker. p. 44. 58. Carl G Kromminga, Man Before God\'s Face in Calvin\'s Preaching, Calvin Theological Seminary Monograph Series, I.(Michigan: Grand Rapids, 1961),p.5f. 59. Ibid. 60. Sermon On Job, p xxviii. \"To treat them independently was for him to hazard idolatry. It was for this reason that he hesitated to use the term \'person\', preferring the term \'Substance\' (hypostasis).\" 61. Ibid., p. xxix. 62. Ibid 63. Herold Dekker, Theological Accent of Calvin\'s Preaching\', The Calvin Forum, June-Ju1y(1951), p.225 64. Ibid. \"As a preacher Calvin used the doctrine of divine sovereignty primarily as a comfort to believers.\" 65. Ibid. 66. 이 저작 전집(Joannis Calvini Noviodunensis Opera Omnia)은 칼빈의 서거 100년 뒤인 1667년에서 1671년까지 흩어져 있던 칼빈의 저작을 한꺼번에 집대성한 것이다 .전 9권 으로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칼빈의 주석, 칼빈의 설교, 신학 논문, 편지 등이 모두 실려 있다. 67. 20Centuries of Great Preaching, Vol.II.p.144. 또한 T.H.L.Parker, The Oracles of God(London: Lutterworth Press, 1947),p.39f
칼빈의 예정의 논리/ 신10:14/ 고광필
칼빈의 예정의 논리 신10:14 고광필(學校法人 光神學園 長老會光州神學校 조직신학 교수)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여러가지 우려와 비판이 칼빈 당시뿐만 아니라 그의 후계자들 가운데도 많은 논란이 되어 왔음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카톨릭에서 장로교회로 개종했다가 칼빈과 예정론에 대해서 싸운 후 다 시 카톨릭으로 개종한 Jerome Bolsec은 강력하게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서 반 대했다. 그 이유는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고 죄의 조성 자 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칼빈은 말하기를 볼섹이 진정한 의미에서는 예정론 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기 때문에 신성 모독이 된다고 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 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더치(Duchess)의 페라라 공작(duke of Ferrar) 부인인 프랑스의 르네(Renee of Franc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변질시키는 자는 설령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다 고 했다. 1) 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칼빈의 자세를 시사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칼빈은 볼섹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볼섹은 우리가 선택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하면 서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안했다. 제네바 시의회는 볼섹의 주장이 이단임에 는 사실이지만 그를 처벌 규정에 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기회를 포착 한 방종 파들은 다른 도시 개혁자들의 자문을 구하자고 제의해서 시의회는 그 렇게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제네바시의 규정에 의하면 이단은 처형이 아니라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볼링거나 파렐은 심한 처벌을 요구했지만 베른주나 바 젤 지도자들은 예수님은 진리를 사랑하고 자기를 배반한 사람도 사랑했다고 하면서 관용을 베풀기를 원했으며 아무튼 예정론은 인간을 고뇌케 만드는 교 리라고 각주를 달아서 회신했다. 나중에 칼빈은 파렐과 볼링거에게 편지를 내 면서 볼섹은 처형되어야 하는데 영원한 추방은 만족스러운 처벌이 아니라고 했을 때 칼빈은 볼링거로부터 인정과 관용이 적다는 책망의 편지를 받고 칼빈 과 볼링거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2) 칼빈은 자신의 무조건적인 예정론에 반대하여 조건적인 예정론을 말한 위 트레트의 부감독인 알버투스 피기우스와 베네딕트 수도승인 게오르기우스의 견해를 반박하고 변증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1552)\" 논문을 쓰기도 했다. 칼빈의 예정론은 그가 살았을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칼빈의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의 전택설(타락전 예정론)에 반대한 알미니 우스의 반대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심대한 논란 이 있었다. 이들은 칼빈주의에 반대해서 다섯 가지 항목을 제안했다. 칼빈주의 에 반대했기 때문에 항론파로 불려지게 되었다. 항론파가 제안한 다섯 가지 항목을 성경의 입장에서 변증하고 항론파의 오류를 고침으로서 구원 교리의 핵심을 잘 요약한 돌트신조를 낳게 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정론은 칼빈이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교리이다. 예정론은 칼빈이 말한 데로 성경적인 교리이며 이 교리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음으로 영접할 때 많은 이익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 리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일 먼저 예정 교리를 확립한 사람은 성 어거스틴 이다. 독일 엘랑겐 대학(the university of Erlangen)의 뮬러(E.F. Karl Muller)교 수는 초기 장로교회에서 예정 교리는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기 때문에 교회 가 구원의 확실성을 준다는 주장에 반대했으며 모든 종교 개혁자들의 중요한 교리라고 설파했다. 3) 그래서 장로교인은 예정론자라는 정치성을 갖게 되었다 고 한다. 4) 삼대 칼빈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불린 벤자민 워필드도 말하기를 종 교개혁이란 영적인 관심에서 비롯한 종교부흥이요, 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어거스틴주의 부흥(a great revival of Augustinianism)이라고 했으며, 예정론은 칼빈이 창설한 교리가 아니며 칼빈주의가 필연적으로 도출한 논리적 귀결로 서, 성 어거스틴, 루터, 부처로부터 영향받은 교리이라고 했다. 5) 루이스. 벌코프(L. Berkhof), 헤르만 바빙크(H. Bavink), 헌터도(A.M. Hunter) 등도 예정론은 종교 개혁자들 모두가 중요시한 교리이며 장로교회의 중요한 교리의 하나라 고 했다. 6) 오늘날에는 많은 신학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서 신학의 혼수에서 살고 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신학을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사람 도 있다. 그 시대의 이슈를 성경을 통해서 변증하고 험증하는 것도 신학의 임 무 중의 하나라고 헐 수 있다. 그 시대 그 시대마다 상황이 다르고 이슈가 다 르기 때문에 신학의 강조 점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 이란 단순히 시대의 산물은 아니다. 성경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그 시대를 진단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바로잡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을 살도 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의 시대를 성령의 조명 을 통하여 성경의 눈으로 이 시대를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2000년대를 준비하고 바라보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한 다. 그래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하고 새로운 기술과 이론 을 개발해야 한다고 한다. 선지자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과학적 인 사고와 논리를 신학에 직접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가? 신학을 과학의 논리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을 지배하는 논리와 신학을 지배하는 논리는 두 개의 다른 논리이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면에서 2000년대를 준비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신자들 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성직자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한다. 사실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고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문제는 많이 안다고 하는 것이 깊이 이해한다는 말일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논리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더 깊은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공 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깊이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두 개의 다른 논 리라고 생각되어진다.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를 알아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혼탁하고 개 방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구원의 메시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을 확신하며 감격과 환희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명료하게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존재의 절대성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 데로 사는 것인가? 우리 신앙의 뿌리는 어 디에 있는가? 어떻게 이 세상을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가? 하나님 은 정말로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부르심을 확신 할 수 있는가? 등등의 문제가 예정론에서 다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정론은 구원의 근본 문제를 다루며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에도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예정론은 성경에 계시된 교리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향하여 사는 우리들에게 우리 믿음의 선배요 종교개혁을 완성한 칼빈의 예정론을 살핌으 로서 오늘의 교회와 자신의 신앙 뿌리를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앙생활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유산인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도 오늘 도 내일도 우리의 신앙의 뿌리는 성경에 있어야하며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올바르게 가르 치려면 우리 신앙의 뿌리를 늘 새롭게 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새롭게 보려면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요 성령의 역사이다. 새롭게 하는 역사의 뿌리는 예정론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칼빈의 예정론을 그의 생애와 작품속에서 살펴봄으로서 우리 신앙의 뿌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예정의 논리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I. 예정론의 역사 성 어거스틴을 제외한 초대 교부들은 예정론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안했다 고 한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과 세계, 영과 육, 영혼과 육체, 빛과 어둠, 악과 선, 죽음과 생명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원론적인 사고에 기초하며 타락한 신에 의해서 이 세계는 창조되었기 때문에 물질계는 근본적으로 악하며 그로 인한 인간 자유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맹목적인 운명에 맡기는 영지주의를 반 박하면서 초대 교부들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는 약화된 것이 지 말살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한다. 최초의 조직 신학자로 불 려진 오리겐도 하나님은 예지에 의해서 예정했다고 함으로서 조건적인 선택 을 강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나 안디옥 학파간의 다소의 차 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중생이란 성령과 인간 의지의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고 봤다고 한다. 여기서 의지의 협력설은 아주 적을지라도 여하간 중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신인협동설(synergism)이 라고 한다. 7) 어거스틴도 초기에는 무조건적인 예정론이 아니라 조건적인 예정론을 가르 쳤으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에서 그의 분명하고 성경적인 예정론을 확립 했다 고 한다. 처음에는 그는 말하기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인간에게 속해 있으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을 통해선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에 게 믿음과 의지를 준다고 했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믿을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 에 하나님이 예정하셨다고 했다. 8) 이와 같은 사상은 다분히 초대 교부들의 사 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 있어서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 며 예정은 예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예정이며 이중 예정론을 강조 했다. 죄를 다분히 환경의 탓으로 돌리며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유의지 를 갖고 있다고 가르쳤던 펠라기우스에 반대해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가르쳤으며 아담의 타락에 의한 의지의 왜곡을 가르쳤다. 9) 따라서 하나 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왜곡된 의지는 회복될 수 없다. 하나님 의 은혜로 의지는 회복되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수 있다고 했다. 주여 이제 명령하소서라고 했다. 칼빈 자신이 고백한 대로 자신의 예정론은 어거스틴에게 힘입은바가 크다. 어거스 틴의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도그의 유명한 에리스무스와의 자유의지 논쟁에 서 인간의 의지란 은혜 없이는 자유 하지 못한다는 노예 의지 (bondage of will) 를 천명하므로서 절대적 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을 역설했다. 루터에 의하면 가롯 유다의 배반의 경우에 있어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 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강제가 아니며 사탄의 노예(slave of satan)가 되어서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다. 그래서 배반은 유다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유다를 회개시키지 안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에서 루터는 말하기를 그것은 하나님의 숨은 뜻이라 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순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 루터는 그것은 하나님께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우리 인간이 왜곡된 논리로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정론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대 한 인간 무지의 고백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기뻐하시 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고백이라고 했다. 10) 어거스틴과 루터 , 칼빈 이전의 모든 종교 개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무조건적인 예정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정 교리는정통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교리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II. 칼빈의 생애와 예정론 칼빈의 생애를 회고해 볼 때 정말로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 운데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윌리암 파렐과 제네바에서 처음 만남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라고 말했으며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다 시 눈물을 머금고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 것도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봤다. 1541년 3월 1일 제네바의 James Bernard 목사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자신 이 스트라스버그를 떠나기를 주저하는 이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중의 하 나가 하나님 안에서 부르심에 대한 확신 문제였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양심상 나는 현재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지 않으며 안된다. 양심의 소리 때문에 스트라스부르그를 쉽게 떠나지 못하겠다. 양심은 타당하고 거룩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증거이다. 나의 사역이 나에게 불행하고 불운한 것처럼 보였던 재난의 시간(칼 빈이 제네바로부터 추방된 때)이후 나는 주님께서 직접 나에 게 분명한 음성으로 부르시지 않은 한, 즉, 주님께서 내가 도저 히 거역할 수 없도록 어떤 필요를 제시해 주시지 않은 한 내가 먼저 교회의 어떤 지위를 떠맡지는 않겠다고 결심 했다.\" 11) 칼빈에 있어서 부르심이란 우리의 선택의 확신을 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강 요에서 맡했다. 이점에서 본다면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그 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직 자에게 부르심이란 아주 중요한 것임을 일깨워 주며 부르심은 선택의 확신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을 복음을 위해서 사도로 부르신 것을 분명히 했으며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받아 드렸다(롬 1:1). 칼빈은 그가 죽기 전 고별사와 유언에서도 나의 전 구원이 근거해 있는 하 나님의 자비스러운 예정 외에는 다른 소망이나 피난처를 내가 갖고 있지 않으 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믿음 안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고 백합니다 라고 했다. 12) 이 고백을 통해서 볼 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칼빈은 자기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있었음을 체험했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와 은혜 가운데 잠자는 것처 럼 죽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예정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근거 해 있다. 셋째, 칼빈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예정에 기초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넷째,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굳게 믿어야 함을 배울 수 있다. 오늘의 상당수의 성직자들은 성경의 중요한 교리를 믿지도 않으면서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칼빈의 입장에서 본다 면 이런 사람은 아직 주님의 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칼빈의 신학의 중요한 특성의 하나는 그의 예리하고 명석한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깊이 체험 하고 창세 전에 모든 것의 미래를 예정하신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온 신학 (theology form the fear of God ) 이라는 점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당시에 개혁 신앙을 고백한 믿음의 동역 자들과 성도들의 순교와 고난과도 관계가 있다. 그들은 고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로 개종한 후부터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내일의 소망이 없이 불안과 초조가운데 살아야 했으며 그 중의 어떤 성도는 불안과 회의 가운데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예정 신앙에 굳게 서서 구원을 확신하며 개혁 신앙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선조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살 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13)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믿는 신앙만이 이 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희망과 확신을 갖고 살 수 있음을 우리는 칼빈의 생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III. 예정론의 위치 칼빈은 1536년에 강요 초판을 발행했으며 그후 2번(1539년, 1543-50년)에 걸쳐서 23년의 수정을 거처 강요 최종판(1559)이 나왔다. 초판 강요에서부터 최종 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예정과 선택을 같이 다루고 있지만 최종 판에서는 섭리는 신론에서 다루며 예정론은 구원론에서 분리시켜 다루고 있다. 14) 논리적으로는 예정이 섭리의 앞에 있지만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예정은 예수 님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진다. 예수님이 우리의 예정을 보는 거울 기 때문이 다. 경험론적으로 보더라도 예정과 섭리는 직접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 고 지난 후에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강요 제 삼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환언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내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변화 받게 한다. 이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선택의 확신은 단순히 경험적 인 것도 아니며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확신시켜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상향식이 아닌 하향식으로 예정론을 다루고 있다. 이 사실이 그의 후계자인 베자와 다르다. IV. 예정론 이해의 전재 조건 칼빈의 예정론을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선택을 유기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 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환언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다루기 위해서 유기가 필요한 것이지 유기를 위해서 선택이 필요한 것은 아니 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요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 은 아니다. 에베소서에 사도 바울은 선택을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이라고 했다 (엡 1:3). 다른 한편으로는 칼빈의 예정론은 이론이나 사변이 아니라 성경의 교리라 는 것이다. 칼빈은 위트레트(utrecht) 부감독인 알버투스 피기우스(Albertus Pighius)와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승인 게오르기우스(Georigius of Sicily)의 조건적 예정론에 대한 반박 논문인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에서 예정론의 교리의 창시자는 어거스틴도 아니고 자신도 아니며 성경이라고 했 다. 칼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말하도록 하지 안했다면 예정론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안했을 것이라고 했다. 15) 성경이 예정론의 창시자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자동차가 고장이 났을 때 정비소에 가서 고치게 된다. 그러나 정비소에서도 고치지 못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이 만든 데로 가지고 가시오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가 시사하는 것이 무엇안가? 결국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동차를 설계하고 만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 찬가지로 예정론의 창시자가 성경이라고 한다면 성경이 제시하는 대로 이해 하는 것이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이성 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는 겸손히 참 지혜이며 인간의 지혜를 규율하는 원 리라고 했다. 16) 그렇다. 하나님의 예정의 비밀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은 설 명이 아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깊이 이해한 사람에게는 설명이 먼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먼저 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 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어느 사형수가 고백했 듯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는 사실을 그 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라고 고백한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예정론을 인간의 사변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피상적인 이해이요 번뇌케 하며 양심에 고통을 당 하게 하며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영접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깊은 이해이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30배, 60배, 100배의 행복하고 환희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 다. V. 예정론의 정의, 중요성 및 목적 i)정의 칼빈은 예정론은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선택에 의해 사람을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신다\" 라고 정의했다. 어떤 사 람은 구원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예정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칼빈의 이중 예정 론(double predestination)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예정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언어는 예지가 아니라 예정이라는 단어이다. 하 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항상 현재로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 미래의 조건을 예견하시고 예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7) ii) 중요성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예정론의 유익과 중요성, 목적을 아주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예정론은 그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 아무 유익도 없이 마음을 권태롭게 하는 교묘한 사변이 아니다. 오히려 이 교리는 경건한 사람들의 필요에 아주 적합하고 확실한 교리 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우리의 믿음을 건전하게 세워 주며, 우리로 하여금 겸손케 하며,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을 고양시키며, 이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우 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세우는 데 있어서, 이 선택 교리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더 적 절한 것은 없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선의(good will)에 기초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풍파와 사탄의 모든 공격, 그리고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취소되 지 않을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선택을 우리의 심령 속에 확실 히 증거 하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의 이유를 하나님의 품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에 게 보장되어진 것이다.\" 18) 칼빈에 의하면, 첫째, 예정론은 우리 마음을 고뇌케 하는 사변이 아니다. 둘 째, 예정론은 경건한 사람에게 필요한 교리이다. 셋째, 예정론은 우리의 믿음 을 건전하게 세워 준다. 넷째, 신자로 하여금 겸손케 해준다. 다섯째, 선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준다. 여섯째,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을 가질 수 있다. 하 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강요에서도 예정론은 우리 인간의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옴을 말해 준다고 했다. 하나님은 무차별적으 로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어떤 사람에게 는 유기의 대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를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19) ⅲ)목적 첫째,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찬양하게 해준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서에서 이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 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라고 예정의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성화된 삶을 의미한다. 칼빈에게서 성화된 삶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종속된 삶이다. 따라서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선택된 자는 아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선택된 자의 삶인 것이다. 20) VI. 선택과 유기의 근거 i) 선택의 이유와 근거 세상에 보면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살며 어떤 사람은 아무리 전도해도 받아 드리지 않은가?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 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그렇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 람은 유기에 처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다. 그 이 유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요 사랑이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땅과 그 위의 만 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 뻐하시고 그들을 사랑 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신 10:14, 15, 4:37, 7:7-8, 10:14-15, 23:5)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을 택하심은 그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택의 이유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잘나서 또한 앞으로 좋은 신자들이 될 것을 예견하시고 택한 것은 아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요 사랑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창세 전(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εξελεξατο)하셨다. εξελεξατο는 εκλεξαΥω(선택하다)의 부정 과거 시제(aor. mid. ind.)로서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선택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엡 1:4) 또한 이 선택이라는 언어가 시사하는바와 같이 선택에는 유기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베소서 1:5절에서 \"그 기쁘신 뜻 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προοριοα ημαει υιοθεσιανδια Ⅰ ησουχριστου ει αυτον) 여기서 προοριοα는 부정과거시제(aor.act. part)로서 하나님이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칼빈은 에베소서(1:4-6) 주석에서 예정은 첫재,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의 주체이지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인간은 전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고 했다. \"너ㅡ히가 나를 택(εξελεξασθ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εξελεξαμην)하여 세웠나니\"(요 15: 16) 둘째, 선택은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결정이요 예수 안에서 하신 것이다라고 했다. 선택은 누구의 압력을 받아서 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εν Χρισιω)와 \"그리스도를 통하여\"(δια Χριοτου)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택자의 선택의 근거가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다. 그래서 선택의 확신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숨겨져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을 볼 수 있는 거울이며 약속이다.21)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은 창세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지 우리의 공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셋째, 선택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κατα την ευδουκιαν του θελεματο αυτου)에 기인한다. 선택은 우리가 잘 이 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신앙의 최고의 표현은 찬양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의 자비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formal cause 예수님을 material cause 하나님의 기뻐한신 뜻을 efficient cause 하나님의 은혜의 찬양을 final cause 라고 했다.22)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 여기서 창세전이라는 말은 우리 가 선택된 것은 시간적으로 보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다. 그래서 선택의 근 거가 절대적으로 우리 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다. 여기서 기뻐하신 뜻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역사 하시는 뜻을 의 미한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를 때가 차매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보내시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택자를 부르셔서 중생 하게 하시고 하나 님의 자녀 삼으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도 록 당신의 섭리로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다가 때가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에 가게 하실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자비스러운 하나님의 계획이며 은혜 가 아닌가! 23) 시간적으로 본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선택은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은혜로운 뜻이며 시간 속에서 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진다. 전자는 선택의 이유요 후자는 근거가 된다. ii) 유기의 근거 선택이라는 언어 속에 유기라는 말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선택과 마찬가지 로 유기도 하나님이 창세 전에 정하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선택 과 유기를 예정하셨기 때문에 유기의 일차적인 원인은 죄가 아니다. 죄는 이 차적인 원인이다. 칼빈에 의하면 전자는 遠因며 후자는 近因이라고 한다. 환언 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예정에 따라 이미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개인과 모든 인간의 운명을 정하신 것이다. 아담은 그 자신의 죄로 유기 된 것이다. 모든 인 류는 아담 안에서 타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 신의 은혜로 선택하신다 24) 둘째, 유기의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지을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예지 하셨지만 그것이 유기의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신 것(롬 9:13)에서 사도 바울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에서와 야곱의 쌍둥이 중에서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롬 8:18)하나님의 선택에도 선하신 뜻이 있으며 유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선택 자나 유기 자나 다 같이 유혹과 악을 행할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선택 자에게 고난은 다른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택자에게 환관과 고난은 택자를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택자를 훈련시키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택자의 구원을 보호하시는 것이다. 25) 유기 자에게 고난과 환난은 그들의 잘못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환난이나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공의를 보 여주신다. 따라서 유기에 있어서 원인(遠因)은 하나님의 예정이나 근인(近因) 은 유기자의 죄이기 때문에 유기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판단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기된 자의 깊은 원인은 우리에게는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말했다. 2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하나님은 왜 어떤 자는 구원에 어떤 자는 멸망에 예정하셨다면 어떻게 하나 님은 공의로우시고 우리 인간의 죄를 판단하실 수 있는가 누가 묻는다면 칼빈은 성경에 있는 데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노\"(롬 9: 20). VII.선택의 확신 칼빈에 의하면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증되지만 유기된 자는 그들에 게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은혜의 사역이다. 여기서 전적인 은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주는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그리스 도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존 녹스가 1527년에 죽음의 침대에서 그 아내가 읽어 주었던 설교가 칼빈의 에배소서 설교라고 한다. 칼빈의 에베소서 설교는 확신에 차고 감격과 환희에 넘치는 설교이다. 하나님의 창세 전의 비밀을 우 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도 늘 하나님께서 복 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에 대하여 늘 감사했다(롬 1:1). 우리는 누가 선택을 받고 누가 유기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칼빈은 예베소서 설교에서 우리의 선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 책에 우리 이름을 기록하는 서 기 (registra)이며 하나님이 당신의 선택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거울이라고 했 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과 유기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환언하 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선택을 복사할 수 있다고 했다. 27) 여기서 믿음은 선택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한 볼섹이나 피기우스, 게오르기우스처럼 믿음의 결과로 선택된 것은 아 니다. 칼빈이 에베소서 설교에서 사용한 선택의 확신에 관한 세 가지 메타포를 통 해서 우리는 선택의 확신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이 생명 책에 택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서기라고 하는 것은 선택의 확실성을 말해 주며 거울이라는 메타포는 우리의 선택을 보는 인식론적인 방법을 말해 주는 메타 포요 믿음의 복사는 선택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경험적인 방법을 말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VIII. 칼빈 이후의 예정론 칼빈의 후계자요 제자인 데오도르 베자는 그이 저서 신학 대전(summa toitus christianismi)이라는 책은 예정론을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 교리를 재구 성했다. 칼빈은 예정을 하향식으로서 창조에서 시작하여 타락 예정으로 나아 가지만 베자는 상향식으로 예정에서 시작에서 창조 타락 구속 성화로 나아간 다. 28)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배자의 신학은 예정론을 중심으로한 신학 체계 라고 말할 수 있다. 베자 밑에서 배우고 그의 제자인 알미니우스가 배자의 전 택설(타락전 예정)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 나중에 항론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항론파의 예정론은 무조건적인 선택이 아니라 조건적인 선택이 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도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신 인 협동적인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돌트 신조에서 항론파의 다섯 가지 반대를 성경에 입각하여 무조건적인 선택을 재 천명했으며 칼빈주의 구원의 교리를 잘 요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원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재 천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임스 페커(J.I. Packer)는 돌트 신조는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신다\" (God saves sinners)는 말 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29) 돌트 신조나 웨스민스터 신조에서 타락전 예정설 과 타락후 예정설을 다 수용했지만 타락후 예정론 입장에 예정론을 기술하고 있음은 시사하는바 가 크다고 생각한다. 30) 돌트 신조에서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중보 자로 또한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서 세우신 그 분 안 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라 은혜로 인하여 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이 되었다. 택함을 받은자들이 그 본성에 있 어서는 그 밖의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낫거나 더 값어치 있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똑같은 비참한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를 통하여 텍함 받은 자들 이 구원 얻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말씀과 성령으로 그 분과 교통하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참 믿음을 주시어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또 한 그 아들과의 교제를 통해 능력 있게 그들을 보존해 주시면 서, 결국은 하나님 게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자비로우심에 영광 을 돌리고 그의 풍성한 은혜를 찬양케 하신다.\" 31)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에서는 \"1.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한 자기 뜻에 따라 되어 갈 일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또는 변할 수 없게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에 의하여 하나님이 죄의 조성 자로 되지도 않으시고 인간의 의지를 억제하심도 없으며, 제이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이 제거되지도 않고 도리어 확립되게 하 셨다. 2.하나님은 장차 일어날 듯한 혹은 일어날 일을 무엇이든 지 아시지만 장래 일로, 혹은 일어날 것으로 선견 하신 때문에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 3.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 하여 그의 작정으로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 정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선 정하셨다. 5.인류 중에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들은 하나 님께서 세상이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목 적 과 그 마음의 은밀한 계획과 기뻐하심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 서 택하셔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셨다. 이렇게 결정하실 때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 안에 하신 것이요, 어떤 선견된 신앙 이나 선행, 오래 참는 일, 피조물 안에 있는 어떤 조건, 혹은 하 나님을 그렇게 하도록 움직이는 원인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 6.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 의 뜻의 영원하며 지극히 자유로운 목적을 따라 그들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할 모든 방편들을 먼저 정하셨다. 그 러므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나, 그리 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았고 때가 되어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도록 유효 적으로 부름을 받고 의롭다 청함을 얻고 양자 됨을 얻고 성화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그의 권능으로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지 못하고 유효 적으로 부름을 받지 못하고 칭의, 양자, 성화, 구원을 받지 못한다.\" 32) 소요리문답 19번과 20번에도 후택설 입장으로 전개한다. \"모든 인류가 타 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또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되어 생전의 모든 비참함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벌을 받게 되었다 (19번).\" 하나님께서는 다만 자기의 선하신 뜻대로 영원 전부터 어떤 자들을 영생하도록 선택하시듯, 은혜의 언약을 세워 구속자로 말미암아 그들을 죄와 비참한 처지에서 건져내어 구윈의 자리 에 이르도록 하셨다(20번) 33) 신 정통파로 알려진 칼 바르트가 예정론을 그의 교의학의 중요한 뼈대로 삼 으면서 신중심의 예정론이 아닌 극단적인 기독론중심(exclusive Christ monism) 의 예정론을 기술함으로서 종교 개혁자들의 이중 예정론을 부인했으며 예수님 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으며 보편 구원론으로 가 게 했다고 한다. 34) 이 견해는 참다운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론이 아니다. IX. 신학적 적합성 예정론이 칼빈의 핵심적인 교리가 아님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지엽적 인 교리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예정론 성경이 가르친 실제적인 교리로서 성 어거스틴에서 시작하여 종교 개혁자뿐만 아니라 신 정통주의에서도 중요한 교리이다. 예정론의 신학적인 적합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구 원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장 깊이 말해 주며 구원의 절대적 확신을 보여주는 교리가 예정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예정론은 신자의 선행과 경건의 뿌리라고 칼빈은 말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 성으로서 정체성(Christian identity)을 갖게 하는 뿌리가 예정론이라고 할 수 있 다.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한 중요 한 이유 중의 하나가 신자의 정체성의 문제이다. 미국에 이민의 자녀들의 커 다란 문제가 정체성의 문제라고 한다. 미국 사람도 아니오 그렇다고 해서 한 국 사람도 아니라는 정체서의 위기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처럼 신자 는 신자다운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 사상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신자는 예정론에 기초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여기에 개인 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의 확실성과 소망을 주는 확신이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셋째, 인류 역사는 인간의 의지나 결단에 의해서 펼쳐지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 인간을 통해서 펼쳐지는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우리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그분의 선하신 뜻과 섭리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이 세상에서 탄탄 대로를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많은 사가들이 역사의 주체를 민중, 인간 의지에 두고 있다. 이런 사관의 견해가 다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 중심의 사관이다. 인류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나, 자 연의 순리에, 무산자와 유산자의 계급 투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하나님은 선택자 를 통해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고 계신다는 예정과 섭리에 기초한 역사관을 확 립하며 살아가는 것이 칼빈주의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확신 과 소망 가운데서 완수해 나갈 수 있다. X. 맺음말 칼빈의 예정론은 그가 고백 한데로 사변으로서 이해되어지는 교리가 아니 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해되어져야 할 교리이다. 성경이 이 교리의 창시자 이기 때문이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의지에 기초한 것이다. 이 의지는 폭군의 의지가 아니라 은혜스럽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의지이다. 선택과 유기는 인간의 공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 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믿음으로 그것을 복사할 수 있다. 그래 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 을 믿는 자에겐 우연은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예정과 선하신 섭리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때가 차매 부모를 통 해서 이 땅에 오게 하시며 지금까지 당신의 능력으로 양육하시고 보호하시며 선하신 섭리 가운데 인도하시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당신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양육하시고 섭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 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생명을 바쳐서 감당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돌리는 생활일 것이다. 이것이 칼빈이 성경을 통해서 발견한 예정의 논리일 것이다. -------------------------------------------------------------------------------- 각 주 1) F. Whitfield Barton, Calvin and the Duchess(Westminster/John Knox Press,1989), p.42. 2) E. Whitfield Barton, Calvin and the Duchess(Westminster/John Knox Press, 1989), p.58. 3) E.F. Karl Mueller, predestination in the 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 Vol. Ⅸ, p. 196. 4) J.H. Babington, the Reformation, p.84. 5) 벤자민B. 워필드,구원의 계획, 모수환 옮김(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1), 121. 6) L. Berkhof,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p.153. H. Bavink, The Doctrine of God, p.353. A. M. Hunter, The Teaching of Calvin, p.96. 7) Harry Buis. Historic Protestantism and Predestination,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58), p.8. 8) St. Augustine, Expositio Quarumdam Propositionum ex Epistola ad Romanos, 61. p. 55. 9)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반대해서 반펠라기우스파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들은 어거스틴의 무조건 예정과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거부했다. 10)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뜻(복음 안에 계신 된 뜻)이요 다른 하나는 숨겨진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복음 안에 계시된 뜻(the revealed or Preached will of God)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가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숨은 뜻(the hidden will of God)이 있다. 11) 존 칼빈, 칼빈의 경건, 이형기 옮김(크리스찬 다이제스트,1989), PP.204-205, 각주 25의 번역을 인용. Henry Beveridge and Jules Bonnet(eds),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tracts and Letters Vol.4. (Baker Book House, 1983), p.234, LXII. 12) The Reformation, Hans J. Hillerbrand(ed), (Baker Book House,1987), p.207. 13) Joseph Haroutunian(ed), Calvin: Commentaries(The Westminster Press,), p.42. 14) 강요 초판에서는 예정론을 사도 신경에 있는 교회론을 설명하는 데서 발견되어지며 그 의 강요 최종판 전까지는 예정과 섭리를 같이 다루고 있으며 구원론에서 다루고 있다. 15) 존 칼빈, 칼빈의 예정론,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편역, (기독교 문화 협회, 1988), pp.83(각주 9),86. 16) 칼빈의 예정론, p.86. 17) 하나님의 예지라는 말은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항상 현재로 이해하신다. 모든 것을 현재 우리가 기억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계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지이다.(강요 3,21,5.) 고 계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지이다. 1딴요 3.21.5.)우리가 기억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 18) 칼빈의 예정론, pp.77-78. 19) 강요 (1559), 3,1,1. 20) John Calvin, Commentaries, Vol XXI(Grand Rapids, Michigan: Baken Book Housc,1989), pp.198-99. Citedao CM. 21) 칼빈의 예정론,180. 22) Calvin: Commentaries, Joseph Haroutunian (ed), pp.305-306. 23) Joseph Haroutunian, Calvin: Commentaries, pp.305-306. 24) 칼빈주의자들 중에 하나님의 계획 순서에 대해서 두 견해가 있다.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를 결정했을 때 인간은 타락될 자로 간주되었는가 타락되지 않을 자로 되었는가 문제이다. 환언하면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의 대상을 하나님이 타락할 자로 봤는가 아니면 단순히 창조한 사람으로 봤는가 문제이다. 타락전 선택 설에 따르면 1)창조될 자들 가운데서 어떤 자들은 영생하도륵 선택하고 어떤 자들은 멸망하도륵 정한다. 2)창조한다. 3)인간의 타락을 허락한다. 4)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낸다. 5)이 구속을 효력 있게 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낸다. 타락후 선택 설은 1)하나님은 창조하고 2)타락을 허용하고 3)타락한 사람 가운데 어떤 자들에게는 영생을 어떤 자들에게는 유기에 내버려두시고 4)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고 5) 그리스도에 의해서 획득된 구속의 적용을 위해서 성령을 보낸다. (칼빈주의 예정론, 로레인 뵈트너, p.151) 타락 전 선택 설은 차별에 강조를 두며 이 관념을 전 과정에 관련시킨다. 차별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유기와 선택에 모순이 생긴다. 왜냐하면 창조하기로 결정된 대상은 인류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이며 똑같은 본성의 소유자이 니라 전체였기 때문이다. 벤자민 워필드도 말하기를 이 문제의 제출이 그 해답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어 있는 인간의 실제적 처리는 택함 받은 자들이나 버림 받은 자들을 막론하고 둘다 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구원이나 유기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죄는 펼연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는 차별의 구체적 사실 구원이나 형벌 그 어느 것이든지 다 포함한 운명에 관한 차별에 선행하는 것이지 차별의 추상적 관념에 선행하는 겻이 아니다. 구원을 제정하는 근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죄가 예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적인 순서로 봐서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생각지 않고는 구원과 형벌에 관 한 차별 제정에 대해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the plan of salvation p.28.) 25) Calvin: Commentaries, p.307. 26) John Calvin, Calvin\'s Commentaries, Vol. 19, (Baker Book House, 1989), p. 417. 27) Jon Calvin, Sermons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The Banner of Truth TrusL 1973), p.33,47. 28) Wilhelm H. Neuser(ed), Calvinus Sacrae Scripturae Professor Calvin as confessor of Holy scripture(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1994), p.39. 29) James Owen,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Biling and Sons LTD.,1963), p.6. 30) James Orr는 돌트 회의시 우세했던 견해는 온건한 타락 후 예정설이었다고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는 이미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기된 것이라고 한다. 커닝함은 전 예정설은 비교적 소수의 칼빈주의자 신학자들게 의해 주장되어 왔다고 말하고 있다. The Reformers‥‥, p.359그러나 페어번은 그 이름들을 상세히 거론치 않은 채 말하기를,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들은 타락 전 예정설을 옹호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Op.cit. p.168.(이 각주의 인용은 알란 셀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김경진역, 생명말씀사,1989, p.21 각주 18에서 인용했음) 31)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목사 편저(생명말씀사,1984 제7장 p.264. 32) 개혁 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목사 편저, 제 3장, pp.23-24. 찰스 하지도 말하기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타락 후 예정론을 주장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 했다. 그 경애할 만한 단체 (웨스트민스터회의)의 회장 튀쓰 (Twiss)씨는 대단한 타락전 선택론자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회원은 타락 후 선택론자들이었다. 그 회의의 신조는 분멍히 타락 후 선택설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가급적이면 타락 전 선택론을 취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륵 작성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영생으로 정하시고 남은 자들은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율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신장 혹은 억제하시는 오묘하신 뜻에 따라 간과하시며,그의 영화로운 공의를 찬송케 하기 위해 그들의 죄값으로 치욕을 받도륵 내버려 두기로 정 하셨다고 했다.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Ⅱ., p. 317.) 헤르만 바빙크에 의하면 세 사람의 개혁자 루터 쯔빙글리, 칼빈은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한다. 선택과 유기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의 행위이고, 논리적으로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에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종종 타락 후 선택론적 추론을 따랐다고 말했다. 또한 바빙크에 의하면 타락 전 예정론은 예정-원죄-자법죄의 순서이고 닥락 후 예정론은 원죄-예정-자범죄의 순서이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신론, 이승구역 기독교 문서 선교회,1989, pp.518-526) 33) 개혁주의 신앙고백집,김의환 목사편역, p.149, 문답 19-20번. 34) Harry Buis, Historic Protestantism and Predestination, pp.99-104. 바르트에 의하연 예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요 동시에 선택된 인간이다. 그래서 예정의 확신을 갖게 한다.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요 선택받은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영원 전에 하나님 의해서 인간의 죄를 위해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예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당하신 예수님은 동시에 창세 전에 인간과 교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정하신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르트의 이중 예정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종교 개혁자들의 이중 예정을 부인하며 보편 구원으로 가는 논리의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된 것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바르트의 예정론은 성경적인 것 같으면서도 비성경적이며 합리적 사고가 짙은 예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 David L. Mueller, Karl Barth, Word Books, Publisher,1976, pp.96.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