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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준곤 목사 빈소 이틀째/ 오직 십자가만 사랑하신 분/ 2009-09-30
고 김준곤 목사 빈소 이틀째/ 오직 십자가만 사랑하신 분 고 김준곤 목사는 마지막 가는 길에도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30일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한국교회 주요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오전 6시50분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에 이어 7시20분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와 이영훈 담임목사가 빈소를 찾았다. 또 영등포교회 방지일 원로목사,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 신원 박성철 회장, 탤런트 임동진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서정배 총회장을 비롯한 총회 임원들이 조문했다. 오전 10시30분에 열린 위로예배에서 김명혁(한국복음주의협의회장) 목사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준곤 목사님을 그리며’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고인을 추모했다. 김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은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을 전하고, 십자가만 사랑하신 분”이라며 “사랑하는 가족을 총살한 사람들에게 분노와 증오 대신 용서와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신 거룩한 분”이라고 애도했다.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엄신형 목사는 “목사님이 병석에서 당부하신 대로 11월 16일부터 오산리기도원에서 7000명의 교역자가 모여 사흘 금식기도를 결정하고 그때 목사님이 꼭 축사를 하시기로 약속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엄 목사는 “목사님의 장례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것”이라며 철저히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오후에는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김 목사의 제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입관예배를 드렸다. 김상복(할렐루야교회) 목사는 요한계시록 14장 13절 말씀을 인용, “목사님은 이 땅의 몸을 벗고 완전한 자유를 얻어 평생 사랑해온 예수님을 직접 만나셨다”면서 유가족과 제자들을 위로했다. 그는 “이 땅에 많은 영적 리더를 세우신 목사님의 신앙을 좌표로 삼고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 김경란 간사는 스승이자 아버지인 김 목사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내 제자들은 미소짓고 있는 김 목사의 영정을 보며 서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고 외쳐온 김 목사의 말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노희경 기자
고 김준곤 목사 빈소 이틀째/ 위대한 영적 리더 잃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 2009-09-30
고 김준곤 목사 빈소 이틀째/ 위대한 영적 리더 잃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 국제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International)가 김준곤 목사의 별세 소식에 위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또 조문단도 파견해 1일 위로예배를 갖는다. 국제 CCC 스티브 더글러스 총재는 30일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 조문 메시지를 보내고 “국제 CCC는 김준곤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을 애도한다”며 “위대한 영적 리더를 잃은 것을 슬퍼한다”고 밝혔다. 더글러스 총재는 “하나님은 고(故) 김준곤 목사를 CCC 사역과 그 이상의 영역에서 힘 있게 사용하셨다”며 “한국 CCC의 스태프와 가족, 그리스도의 몸 된 신실한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전했다. 그는 개인적 회고를 통해 “김준곤 목사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며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으로 가능케 했던 거인과 같은 존재였다”고 회고했다. 또 김 목사를 만나 상호 의견을 나눌 때마다 항상 영감을 받았다고 개인적 소감을 덧붙였다. 국제 CCC 설립자였던 빌 브라이트 박사의 미망인 보네트 브라이트 여사도 김 목사의 별세에 앞서 편지를 보내왔다. 브라이트 여사는 지난 23일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 목사를 위해 위로와 천국에 대한 소망을 담은 기도 편지를 보냈다. ‘김준곤 형제에게’로 시작한 브라이트 여사의 편지는 치유와 평안을 위해 기도한다고 밝히고 요한복음 14장 3절과 14장 28절을 위로의 메시지로 전했다. 브라이트 여사는 “김 목사님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날을 고대하고 있겠지만 너무 서두르지 마시라”며 “우리 모두는 당신을 사랑하고 여전히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브라이트 여사는 “나의 소중한 남편 빌이 천국 문에서 김 목사의 도착을 맞이할 것을 기대한다”라고도 표현해 김 목사가 곧 죽음을 맞이할 것을 예견했다. 한편 국제 CCC 본부는 더글러스 총재를 단장으로 조문단을 구성했으며 이들은 1일 오후 4시 서울에 도착해 저녁 7시 위로예배를 드린다. 더글러스 총재가 설교를 맡을 예정이다. 조문 일행에는 1958년 김 목사를 도와 한국 CCC 창립을 도왔던 나일스 베이커 목사 등도 포함됐다. 베이커 목사는 미국 CCC가 배출한 1호 선교사로 한국을 비롯, 아시아 지역 CCC 설립에 항상 참여했다. 신상목 기자
김준곤 목사 설교 예화/2006-03-08
김준곤 목사 설교 예화 1. 사랑의 절정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인이 다섯 살과 세 살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철길 가에 있는 신발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기 때문에 안고, 업고, 공장으로 출근하여 공장 안에 조그만 방에서 놀게 하고 부인은 일을 했습니다. 따뜻한 어느 봄날, 방안이 답답하다고 두 아이들이 엄마 몰래 철길로 나갔습니다. 철길에서 조약돌 치기도 하고 가위, 바위, 보 놀이도 하면서 놀고 있을 때 기차가 달려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애들이 없다는 소리에 엄마가 뛰어나가 보니 철길에서 놀고 있고 있었습니다. 쏜살같이 달려가 두 아들을 철길 밖으로 던져 낸 순간 기차가 뛰어들어 엄마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두 형제는 고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라서 어른이 된 후 어머니의 무덤에 조그마한 묘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습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라고. 그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일당 몇 백원을 받으며 일했던 그것이 아닙니다. 두 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굶고 아이들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던 그것이 아닙니다. 그 기찻길에서 놀고 있던 두 아이의 생명을 건져내고 자신의 목숨을 버렸던 그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정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찬송 작사자 하버겔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주느냐"라고 읊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발렌타인 발렌타인은 고대 로마에 살았던 한 젊은 그리스도인의 이름입니다. 많은 초대교인들처럼 발렌타인은 그의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자주 깊이 사랑하는 자들을 생각했고, 그 자신의 안녕과 그들을 향한 사랑을 알리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감옥 독방 창문 너머, 손이 닿지 않는 한 곳에 제비꽃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그는 몇 개의 하트 모양의 잎들을 뜯어 구멍을 뚫어서 "발렌타인을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냈습니다. 다음날 또 다음날 계속하여 그는 더 많은 메시지들을 보냈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내용의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시작된 성 발렌타인 데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을 전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의 사랑을 보여 주시려고 많은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독생자를 주시어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십시오. 그분께 그분의 사랑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드리십시오. 3. 도자기공 한 전도사가 도자기 공장 지대에 사는 한 사람을 방문하였다. 그 사람은 젊었을 때는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었다. 전도사는 그 집에 도착하여 유리 상자 속에 든 두 개의 좋은 꽃병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야! 참 멋있군요. 아주 귀한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얼마면 파시겠습니까?" 주인은 고개를 휘저으며 전도사에게 말했다. "이 세상 돈을 다 준다 해도 저 두 개의 꽃병은 절대로 팔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몇 년 전만 해도 술주정뱅이에다 노름꾼이었지요. 말하자면 마귀에게 영혼을 맡겨 놓고 다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쓰레기 더미에서 흙 한 무더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쓸데가 없어서 버린 것이었지요. 나는 그걸 집에 가져와 반죽을 하고 모형을 만들어 구워 보았습니다. 결국 나는 쓸모 없던 흙으로 두 개의 아름다운 꽃병을 만들었습니다. 그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가지고 똑같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거야!' 그때부터 저는 제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내맡기고 하나님께서 저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길 바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쓰레기장의 흙무덤 같은 나를 아름다운 꽃병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4. 돌아온 딸 어느 시골의 한 가정에서 딸이 가출을 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자 소녀는 자살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죽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이 그리워 고향집에 내려갔다. 밤중에 가 보니 자신이 가꾸던 장미꽃도 보이고 뛰어 놀던 잔디밭도 보였다. 달밤에 자기 집을 바라보니 담장 옆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그 소녀는 문 가까이 가, "아버지-" 조용한 음성으로 불렀다. 그러자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뛰어 나왔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느냐? 네가 집을 나간 뒤 대문을 닫아 보지 못했단다. 언젠가는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혹시 밤중에 딸이 돌아올까 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던 아버지가 딸이 부르는 작은 소리를 듣고 뛰어나와 그 딸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5. 목숨을 바친 사랑 전쟁 중 우리나라에 있었던 실화라고 한다. 한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기를 낳기 위해 어떤 집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 어머니는 그만 그 집을 다가지 못하고 길에서 진통을 하기 시작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어머니는 어느 다리 밑에 겨우 자리를 잡아 아기를 분만하게 되었다. 추운 겨울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어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고는 아기가 춥지 않도록 자기 옷을 모두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었다. 해산 직후 추위에 어머니는 그만 얼어죽고 말았다. 얼마 후 어느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휘발유가 떨어졌다. 그는 부대로 연락을 취해 놓고 차에서 내려 그 부근을 거닐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아기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 군인은 그 소리를 따라 다리 밑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거기서 그 군인은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했다. 어머니는 벌거벗은 채 얼어죽어 있었고 어머니의 옷에 둘러싸인 갓난 아기가 몹시 울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기름이 떨어진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시기 위함인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군인은 그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 잘 키웠다. 그 아들은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라 성인이 되었다. 늘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고 싶어하던 그 아들은 어느 날 자기를 키워 준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아들은 무덤을 찾아 한국에까지 나왔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옷을 벗어서 무덤 위를 덮으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런 희생을 치르셨군요!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벌거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 *사랑과 행복에의 초대, 양은순 6. 소년과 보트 신문배달을 하는 소년이 있었다. 하루는 장난감 가게 앞을 지나가다 중세의 범선을 본떠 만든 깜찍한 보트를 보게 되었다. 그 보트를 꼭 갖고 싶었지만 소년이 사기에는 값이 너무 엄청났다. 그래서 소년은 스스로 보트를 만들기로 했다. 소년은 날마다 가게의 진열장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책도 보면서 틈틈이 모은 돈으로 재료를 샀다. 나무를 자르고, 돛을 달고, 페인트를 칠하고, 자기의 모든 기술과 정성을 쏟아 드디어 멋있는 보트를 만들었다. 소년은 완성된 보트를 들고 강물에 띄었다. 강물에 뜬 보트는 아름답고 훌륭했다. 소년의 가슴은 뿌듯했다. 아, 그런데 보트가 강 한가운데에서 하류 쪽으로 급히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애써 만든 보트를 잃은 소년은 날마다 신문배달을 마치고 강가를 뒤졌지만 보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일이 지난 어느 날, 소년은 어느 고물상에서 우연히 자기의 보트를 찾아냈다. 주인에게 자기의 것이라고 사정을 했지만 갖고 싶으면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석 달이나 신문배달을 하며 돈을 모았다. 드디어 돈을 마련하여 보트를 샀다. 보트를 사 오던 날, 소년은 보트를 끌어안고 얼굴에 비비며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돈이 보낸 편지, 이의용 7. 사랑의 희생 13세기 스페인의 귀족이며 명문 대학의 교수였던 라몬 럴은 자신의 유망한 장래를 포기하고 모슬렘교도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갔었다. 그는 두 번이나 그 나라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일년 반을 감옥에 감금당했다. 노인이 되어 성벽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어 갈 때에 그의 마지막 말은, "오직 예수"였다. 죽기 직전에 그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의 목사 안수식 때에 "오, 주 하나님 당신께 나 자신, 나의 아내, 나의 자녀, 그리고 나의 모든 소유를 드립니다"라고 말했으며 죽는 날까지 그리스도만을 향한 독점적인 사랑을 취소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핍박이 심해질 때에, 겔린드 물러는 믿음을 버리고 성경 읽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화형당하게 된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에게는 아내와 네 자녀가 있었다. "당신의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는가?"라고 재판관이 물었다. "만일 하늘이 진주이고 땅이 금덩어리이고, 내가 그 모든 것의 소유자라면, 우리가 겨우 빵과 물만 먹고 살게 될지라도 내 가족을 위해 그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신다. 그러나 결단코 그리스도만은 포기할 수 없다." 그는 교살되어 화장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랑의 희생을 잊지 않으셨다. *기쁘게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J. 오스왈드 샌더스 8. 사고 싶었던 관심 어느 학교 선생님에게 열 두 살 먹은 딸이 있었습니다. 그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딸에게 어머니 역할까지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일 때문에 딸에게 시간을 충분히 내주지 못하는 게 문제였고, 그것 때문에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서 크리스마스 휴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크리스마스 휴가 때는 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휴가가 시작된 첫날 딸아이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혼자 지내면서 식사 시간 이외에는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도 그랬고, 또 다음 날도 그랬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계속 그랬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하루 하루를 외롭게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자 크리스마스 트리에 선물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뜨개질로 짠 한 켤레의 양말이었습니다. 딸아이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까지 이걸 다 짜야 한다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제가 방문을 잠그고 지금까지 했던 건 바로 이 뜨게질이었어요. 이젠 다 짰어요. 아빠 양말이에요! 좋으세요?" "암, 좋고말고, 얘야, 정말 예쁘게도 짰구나, 고맙다." 아빠는 딸아이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딸을 덥석 껴안았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 이 철없는 아이야. 양말은 시장에 가서 사면 되지 않니? 난 양말 같은 건 원하지 않아.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단 말이야! 난 너와 함께 지내며 너의 사랑을 받고 너의 관심을 사고 싶었던 거야." *잠잠하라 고요하라, 캐롤 메이홀 9.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 무엇보다도 먼저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실 것이다. 우리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지상의 가장 귀중한 관계들을 배제하시고 "너는 이 모든 것들을 미워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인상적인 말씀을 하신다. "미워하다"라는 용어는 상대적인 용어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용어는 아니다. 그는 여러분과 나에게서 우리가 최초로 느끼는 사랑, 즉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랑을, 우리의 가장 귀중한 사랑 즉 우리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신다.
김준곤 목사/국민일보
김준곤 목사 국민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명예총재인 김준곤 목사는 지난 3일 제주에서 열린 한국 CCC 50주년 행사 기간 중 가진 인터뷰에서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예수님”이라면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절망과 허무와 고통이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소망을 갖게 된다”고 주장했다. 김목사는 자신도 예수님을 만난 사건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으며, 그 후 일관되게 대학생 선교와 민족 복음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신문에 따르면, 김 목사는 앞으로 남은 여생 동안 기독교인의 표를 모으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예수님을 절대화하지 않으면 히틀러, 모택동, 김일성과 같은 자기를 절대화하는 독재가 나타나기 때문에 국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많이 보내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일보는 이런 김목사에 대해서, 인간의 본성은 권력 의지를 갖고 있고 민주주의가 사회체제나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김목사가 민주주의의 완성은 예수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터뷰 해석을 내렸다. 김준곤 목사의 말처럼 어차피 죽을 인간이 살아야 이유가 바로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은 왜 인간의 소망이 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살아야 할 이유를 주시는가에 대한 해답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목사의 인터뷰 내용을 보자면, 그의 평생 모토였던 대학생 선교와 민족복음화의 궁극적 종착지는 ‘예수님을 통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분위기가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 정치에 있어서의 예수님의 절대화를 통한 인간 독재의 종식과 민주주의의 완성,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던가? 『14 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에 참여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시며 15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 함이니라』(히브리서 2:14, 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피와 살에 참여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멸망시키고 인간들을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시려는 것이었다.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더 이상 죽음에 지배되지 않고 영생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55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음부야,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55, 57).『죄가 군림하여 사망에 이른 것같이 은혜도 의를 통하여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인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니라』(로마서 5:21). 김목사는 인터뷰에서 “지구는 사형수를 싣고 가는 배입니다. 인간은 모두 죽음으로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라고 했다. “먹고, 마시고, 사랑에 취하고, 결혼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고, 그래봤자 다들 죽음에 매여 살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는 “목사”라면 그와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성경에도 없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서 교인들의 표나 모으러 다녀야 하겠는가? 죽음에 속박되어 있는 죄인들에게 그들을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요, “복음화”이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된 죄인이라면 그분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김목사는 성경이 아닌 자신의 신념에 사로잡혀 진리를 오도하고 있으며,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에 복음과 정치 사이에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세상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시지 않은 일인데, 김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위라서 그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는 김목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의 지상 왕국을 기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2 이 영생의 소망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약속하셨다가 3 때가 되어 그의 말씀을 복음 전파를 통해 나타내셨는데, 이 일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내게 맡겨진 것이라』(디도서 1:2, 3)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된 사람은 그와 더불어 복음을 전파할 의무도 갖게 된 사람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이유이다. 말로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 복음은 전하지 않고 영생과 무관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일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저버린 사람이요 보혈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하나님의 피”(사도행전 20:28)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쓰라고 흘리신 피가 아님을 알고, 그 피를 본래의 목적에 맞게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에 증거해야 할 것이다.
김준곤 목사/나는 무임승차한 사람/시51:17
김준곤 목사,“나는 무임승차한 사람” 13일 한복협 월례기도회 <제가 잘못했습니다> 설교 한국 교계의 대표적인 원로지도자들의 회개가 물꼬를 튼 가운데 13일 오전7시 강변교회당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협의회(대표회장 김명혁) 월례조찬기도회 발표회에서 김준곤 목사(대학생선교회 총재)도 참석, 참회의 입장을 밝히는 등 회개 대열에 합류했다. 김준곤 목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시편 51:17)'이란 제목으로 이날 설교했다. 지난 월례조찬기도회에 대해 김 목사는 "지난번에 교계 제일의 별과 같은 원로 세분이 길선주,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고백을 했다"며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일으켰다"고 평가했다. 김준곤 목사는 발표회를 맡은 조용기, 강원용, 김창인 목사에 대해 "굉장히 자아가 강한 분들이고 무서운 분들인데 그렇게 낮아져서 '나는 죄인입니다'고 구체적으로 자백하셨다"며 "목사로서 회개하라는 설교는 많이 했지만 나 자신이 발가벗고 나는 이런 죄인이라고 말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고 말했다. 김준곤 목사는 "제가 제일 존경하는 성자 목사님은 나이가 들수록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 강조를 많이한다"며 "그런데 나는 선한일도 없는데 칭찬이나 존경은 엄청나게 받고 있어 무임승차한 사람같다고 생각하고 살고있다"며 자신의 심경을 고백했다. 김준곤 목사는 한국 민족이 사과에 인색한 반면, 일본인들안에 할복 자살을 하면서까지 부끄러움을 뉘우치는 단면을 비교하기도 했다. 김 목사는 "(일본이)이번에 독도문제나 역사 왜곡 문제로 관계가 굉장히 냉각되고 미운 마음도 생기는게 정서이다"며 "그런데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람의 후손이 묘앞에 나와서 무릎꿇고 사죄하는 진솔한 모습을 볼때 굉장히 마음이 녹아드는 효과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회개 발표회에 나란히 앉은 이성택 목사(합동총회 증경총회장), 홍순우 목사(기성총회 증경총회장), 이종성 목사(통합총회 증경총회장) ⓒ 김근영 기자 김준곤 목사는 '성어거스틴의 고백'을 인용하며 "자신의 추한 모습에 대한 자백도 좋지만 특별히 좋은 건 '뜨거운 사랑으로 나아온 회개'였다"며 "뜨거운 사랑없이 세례 요한의 언어를 써가면서 정의의 칼날을 날리는 검사처럼 소리지르고 회개를 말하며 자기 자신은 종종 죄를 감추는 사례를 보게 된다"며 회개에 인색한 교계의 풍토를 꼬집기도 했다. 김 목사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르고 주 앞에 엎드린 다윗왕의 회개를 높이 평가하며 "한국교회에서 남보고 회개하라고 하고 서릿발을 치는 설교를 하고 사회에서는 386 고발세대가 나와 과거사를 들추고 있다"며 "먼저는 나 자신이 주님앞에 다윗의 심정을 가지고 겸허한 모습으로 살아야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준곤 목사는 현재 시국과 관련하여 "굉장히 살벌한 시대에 살면서 다윗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건 회개다"며 "그런데 교역자나 목사라고 하면 굉장히 많은 베일로 가려져있지 않은가. 참 정직하기가 힘든것 같다"고 교계 지도자들의 폐쇄성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끝으로 회개운동과 관련해 김준곤 목사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이같은 운동이 나온 것은 칭찬받을만한 일이다"며 "한국교회 전체 분위기가 자신을 고백하고 참회하는 상하고 깨어진 심령으로 바꿔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박종화 목사, 손봉호 장로 '이웃과 나의 죄' 참회 김준곤 목사의 설교에 이어 박종화 목사(경동교회)와 손봉호 장로(동덕여대 총장)가 '이웃과 불화한 죄'와 '주 앞에 외식한 죄'에 관하여 각각 회개했다. 박종화 목사는 "저희가 몸을 다스리는 것을 잘못 알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가르고 찢은 죄를 용서하소서"라며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교회가 있을진대 교회만 세우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잘못 생각하고 저희의 욕심을 채운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고 고백했다. 박종화 목사는 "지체들간에 서로 시기질투하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이웃의 지체를 모욕하고 질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기를 즐겨하며 살아왔다"며 '용서해달라'고 다시 한번 고백했다. 또 박종화 목사는 "저희가 만든 교리와 신학, 이기적인 생각을 다시 율법화 시켜 주님이 주신 자유의 복음을 율법주의로 만들었음을 고백한다"며 "서로를 끌어안고 함께 슬퍼하고 위로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라고 교회의 일치를 간구했다. 이어 손봉호 장로는 개인의 죄에 대해 돌아보며 "주님의 이름으로 출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했음을 용서해달라"며 "중요한 일이 생겼을때 인간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 뜻을 살피지 않았음을 용서해달라"며 고백했다. 손봉호 장로는 자신의 지체를 가리켜 "거짓과 정욕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거룩한 척하고 행동한 외식을 용서해달라"라며 "사람들이 저를 과대 평가하여 칭찬하면 우쭐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한 것을 용서해주시옵서"라고 기도했다. 손봉호 장로는 또 "정의의 원칙을 핑계로 제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 교회와 다른 사람의 눈에 티끌을 너무 많이 비판했다"고 회개하는 한편,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를 위한다고 떠들면서 그들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너무 편하게 살고있다"며 "사람의 눈치를 보고 비겁해지고, 기도조차 사람을 의식한 것이였음을 용서해주시옵소서"라고 회개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종성 목사, "한국 교계의 분열...통전적 신학 정립 못해" 책임 통감 이날 이종성 목사(통합 증경총회장, 한국기독교학술원 원장)는 특히 한국교회 분열에 대해 신학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종성 목사는 1957년3월, 영락교회 부목사에 재임했을 당시를 회상하며 "장로교회가 셋, 감리교와 침례교는 각각 하나에 신학교는 장로교회 계통이 셋이였고 감리교와 침례교는 각각 하나였다"며 "(교계)주간지는 하나에 계간지는 두개밖에 없었다"며 당시의 교계 상황을 정리했다. 이종성 목사는 그러나 "지금은 교파 수가 135개, 예장장로교회 98개, 감리교와 성결교가 각각 2개, 침례교는 1개이다. 더 놀라운 것은 신학교의 난립 상태다"며 "정부가 허가한 신학대가 58개, 무인가신학교가 151개, 기독교 기관은 347개, 선교단체가 적어도 300개 이상으로 추산된다"며 개탄했다. 이종성 목사는 "이렇듯 한국교회가 완전히 난맥상태에 빠져있다"고 지적하고 이같은 현상에 대해 "'군웅할거'와 '소영웅주의'라고 생각한다"며 '파벌주의가 1960년에서 85년 사이에 일어났다는 점'과 '한국의 신학이 혼란에 빠진 점'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장로교가 넷으로 나뉘었을 때에 통합할 수 있었는데 지금과 같이 난립한 데에 큰 죄책감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한편, "한국교회의 신학, 특히 통합측 목사 양성에만 치중해서 신학교 난립상이 있었음을 느낀다"며 하나의 복음을 가르치는 신학이 되지 못하였음을 회개했다. 이종성 목사는 또 "기독교 신학에는 크게 네가지 조류, 보수정통주의와 자유주의, 근본주의와 신비주의가 있다. 이러한 신학조류는 다같이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다"고 전제하고 "네가지 중 어느 하나만 고집하여 이것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다고 하는 비성서적 고집을 부리지 말고 통전적 신학을 빨리 개발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고 참회했다. 이종성 목사는 교회의 분열, 신학사조의 혼돈, 신학교육의 난맥, 신비주의의 창궐과 사회와 민족의 대립과 분열에 대하여 "신학교가 교회에 아무런 지도력도 발휘하지 못했다"며 "진심으로 나의 우매함과 무력함을 자인하며 나의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한다"고 밝혔다. <크리스천투데이>김근영 기자
김준곤 목사는 한국 교회를 비춘 횃불/ 첫 위로예배설교/ 마18:18-20/ 옥한흠 목사/ 2009-09-30
김준곤 목사는 한국 교회를 비춘 횃불/ 첫 위로예배설교 마1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8장 18절~20절) 이 말씀을 김준곤 목사님이 평생 마음속에 담고 사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김준곤 목사님은 이 말씀대로 살려고 평생을 헌신한 주님의 진실한 종이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김 목사님이 소천하셨다는 말을 듣고, 한국교회를 환하게 비추고 있던 횃불이 꺼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CCC에서 실제로 몸을 담고 사역한 적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40여 년간 사역하면서 김 목사님을 짝사랑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 \"하나님 제2의 김준곤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세계 교회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김 목사님을 항상 흠모하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사역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항상 먼 발취에 서서 목사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도전을 받으면서 김 목사님을 마음으로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마다 김준곤 목사님의 발자취를 발견하지 못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오늘 아침에 김 목사님이 천국으로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일 먼저 \"주님 제2의 김준곤이 필요합니다. 데리고만 가지 마시고 또 한 명을 보내주세요\" 라는 기도가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느껴졌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김 목사님은 제가 볼 때 우리가 경험한 한국교회의 부흥의 시작인 1950년대와 1960년대 1980년대 중반까지 부흥의 놀라운 일에 결정적인 밑거름 역할을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로 교회사적으로 분석할 수 있고 목회적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오늘의 한국교회에 이만한 기반을 닦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김준곤 목사님의 사역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사역을 통해서 엄청난 청년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목회자가 되어서 교회의 문화를 바꿨습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회 각 분야에 흩어져서 기독교 문학, 기독교 철학이, 기독교 세계관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알게 모르게 역할을 해 왔습니다. ▲ 오정현 목사가 기도하는 동안 눈물을 닦는 옥한흠 목사. 한 사람이 한 생을 통해서 사역할 수 있는 분량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김준곤 목사님의 사역을 따라갈 사람이 한국교회의 역사에 있었느냐고 반문을 하면 찾기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목회자 입장에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김준곤 목사님이 목회자들로부터 평가를 덜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역사가들이 평가하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서 김준곤 목사님의 역할은 놀라운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있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가감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김 목사님을 한국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동안 은혜 입은 우리가 머리 숙여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가셨지만 그분보다 더 탁월한 지도자를 보내주셔서 축복해 주실 것을 믿고 소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유족들은 훌륭한 남편, 훌륭한 아버지, 훌륭한 형제와 함께했던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분이 기도하고 그분이 평소에 말씀하셨던 자자손손이 축복을 누리고 큰 역할을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옥한흠 목사(서울 사랑의교회)
김준곤 목사님의 간증
김준곤 목사님의 간증 김준곤 목사님의 간증은 눈물난다는 표현보다는 너무나 애절하고 가슴 뭉클하다. 때로는 힘들고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할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음을 알게 되면 금방 감사가 나오게 될 것이다. 김준곤 목사 간증 김준곤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 은혜를 같이 나누고자 소개하고자 한다. 동일한 은혜가 임하길 축원을 드린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간절하고 목마른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사랑하는 딸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평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온 나에게도 한동안 주님에게 섭섭함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 즈음 나는 말도 행동도 생각도, 심지어는 존재조차도 얼어붙듯이 정지해 버린 어떤 제로점에 서 있었다. 그 뒤로 나에게 한 기적이 일어나 주님에 대한 감사함이 되살아날 때까지 나는 그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주님을 원망하고 서운하게 생각했던 것이 분명했다. 16년전, 82년 4월 26일 만 29세를 일기로 둘째 딸 신희가 위암으로 숨진 뒤, 나는 딸의 영전에 바치려고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란 글을 썼다. 딸만 넷인 나에게 둘째인 신희는 유난히 착하고 여린 딸이었다. 몸매는 가냘프고, 순하고 영리하고 얼굴도 빼어나게 곱고, 심성은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저만치 호젓이 피어난 꽃처럼 곁에 있어도 없는 듯이 조용하던 신희었다. 얘야, 너는 왜, 어쩜 그리 미안하게 태어나 사는 아이처럼 그러느냐.”고 혼자 물어볼 때가 종종 있었다. 신희가 갓난아기였을 때 나는 중·고등학교 교장이었고, 아내는 중학교 과학 교사로 맞벌이를 하고 있었다. 출근할 때면 아내가 젖병에 우유를 타 놓고 나가면, 집 보는 소녀가 그 우유를 다 먹어 버려 하루 종일 입술이 마를 정도로 굶었어도 울질 않았던 신희었다. 털털거리는 시골길 만원 버스를 타도 쌕쌕거리며 예쁘게 잠을 잘 자던 아이였다. 신희에게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찾아온 것은 1981년 여름 무렵, 신희가 C C C 에서 만난 심종택이와 결혼을 하고, 5년 남짓하게 미국에 유학하여 경제학을 공부하는 남편뒷바라지를 하면서 두 살 터울지는 딸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그 때였다. 숨도 못쉴 정도의 고통을 견디다 못한 신희는 국내의 어느 대학 병원에서 정밀 검진을 받았을 때는 이미 위암 말기였다.1981년 12월 10일 신희는 S병원에서 개복 수술을 받았다. 위와 비장 전부, 간장과 췌장 일부를 절제해 버리고 소장 일부를 잘라내 대용 위를 만드는 대수술이었다.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었지만 반년 이상 더 살지는 못할 거라고 주치의가 말했다. 소생 가능성을 묻는 나에게 십만 분의 일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병마와 싸우는 동안 신희는 밤마다 몸을 뒤틀며 신음하고 혼자 몰래 울어 눈이 부었는데도 아침이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식구들 앞에선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으며, 문병 온 사람들이 울어도 일부러 태연하려고 애썼다. 마지막 한 달 가량은 목 밑 어깨 쪽에 주사 바늘을 꽂고 심장에 직접 주입하는 영양 주사만으로 연명했는데, “아빠, 내 몰골이 말이 아니지요?” 하며 쓸쓸한 웃음을 지었을 때는 내 가슴은 미어지는 뜻했다. 신희의 가장 큰 걱정은 어린 두 딸의 문제였다. 장마에 햇빛 나듯 잠깐 통증이 멎으면 신희는 두 아이를 안고 창가 의자에 앉아 "엄마가 나으면 동물원에도 가고 자장면도 먹으러 가자!”며 기약없는 약속을 하곤 했었다. 속으로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혀를 깨물면서도 병실 창문 너머로 개나리꽃이 만발한 4월 어느 날, 살고 싶어요. 살 길이 없을까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해 또 한 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신희의 생명여동생 윤희와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즐거웠던 옛날 생각이 났는지 일어나 앉아 나의 손을 꼭 잡더니, “아빠, 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들었을 때, 나는 조용히 신희에게 말했다. "신희야 이제 너는 주님 만날 준비를 해야겠다." 그때 신희는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며 빛나는 얼굴로 영감에 찬 기도를 드렸다. “주님, 만약 다시 살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면 제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주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잔을 주시더라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마시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습니다. 제 고통과 눈물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게 해 주십시오…” 신희는 사경을 헤매면서도 남편과 두 딸과 부모를 위해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기도를 드렸다. 세상 떠나기 전날 신희는 모처럼 만에 편안한 잠을 잤다. 깨어나서는 맑고 평화로운 눈동자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응시하며 반갑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하도 편안하게 보여 나는 내심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작은 기대를 가졌을 정도였다. 나는 이튿날 아침, 기도를 마치고 사무실에 있는데 간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곧장 달려가 보니 신희는 숨을 거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주님의 품에 안긴, 종잇장같이 마르고 창백한 신희의 얼굴은 태풍이 지나간 뒤의 호수 표면처럼 잔잔했다. 지상에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그토록 성스럽고 가난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까? 그 얼굴은 분명 티없이 해맑은 천사의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나도 잔뜩 감겨 터질 것만 같던 고통의 태엽이 한 가닥 풀리는 느낌이었다. 수술한 날로부터 1백 67일 동안 끊임없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나 수술 직후 신희는 간호사에게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신희는 끝내 자신의 병명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자신이 모르는 척 견디다가 눈을 감은 것이다. 그렇게나 착하고 효성스러운 아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세상 욕심을 다 버리고 마음이 가난해졌다. 가난해짐으로써 풍요로워졌다. 한없이 자유로워졌다. 주님은 신희를 땅 위의 아버지인 나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필요로 하셔서,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방식으로, 더 좋은 곳에 신희를 데려가신 거라고 생각하니 절로 찬송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죽음이요 사위에게는 아내의 죽음이요, 나와 집사람에게는 딸의죽음이니, 아비된 내가 열두 번도 더 딸의 고통과 죽음을 대신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대신할 수 없었다. 오로지 주님만이 대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은 끝내 빼앗아 가셨지만, 빼앗은 그 손보다 다른 손에 예비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생명이다. 지금 사랑하는 내 딸 신희는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 찬란하고 황홀한 주님 곁에서 천사들과 뭇 성도들의 찬송을 들으며 안식과 희락과 사랑과 건강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후일 내 생명이 끝나 주님 품에서 깨어날 때, 그 애가 제일 먼저 꽃다발을 들고 아빠를 마중 나와 줄 것이다.
김준곤 목사를 보내며…/ 2009-09-30
김준곤 목사를 보내며… ▲故 김준곤 목사의 위로예배가 29일 오후 5시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에서 진행됐다. ▲CCC 출신으로 고인으로부터 신앙을 배웠던 사랑의교회 원로 옥한흠 목사(좌)가 박성민 목사를 위로하고 있다. ▲고인의 사위이자 한국 CCC 대표인 박성민 목사가 두상달 장로의 위로를 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청년 복음화의 아버지요 민족 복음화의 파수꾼과도 같았던 김준곤 목사의 갑작스런 소천 소식에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고인의 수많은 제자들이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방문했다. 유가족들은 29일 오후 5시 위로예배를 드렸으며 주서택 목사의 사회, 오정현 목사의 기도에 이어 옥한흠 목사가 설교를 전했다. 축도는 이만신 한기총 명예회장이 맡았다.
김준곤목사 '반기독교적 촛불집회'
김준곤목사 "반기독교적 촛불집회" 서울 시청 앞에서 열린 6·25 국가기도회에 참석한 김준곤 목사가 “국가적 위기를 맞아 1백만명이 시청 앞 광장으로 모두 나와 함께 찬송하며 금식 기도한다면 나라에 새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촛불집회로 소란한 가운데 서울시청 광장 한쪽편에 마련된 기도회 장소에서 설교에 나선 김준곤 목사는 “이곳에서 어떻게 기도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는지 놀랍다”며 “초라한 모임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저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또 “저들이 물리적이고 폭력적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결코 일체 물리적인 대응을 하지 말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 침묵으로 계속 기도하고 소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며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 바로 승리의 방법”이라고도 했다. 김 목사는 최근 과격 양상을 띠고 있는 촛불집회에 대해 반미·반기독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걱정이 돼서 오후 11시에 두 번이나 나와봤고 오늘도 나왔지만, 저들은 너무 살벌하고 언어 폭력이 극에 달하고 있으며 증오에 차 있다”며 “아이들도 다 보고 있는데…”라며 걱정했다. 김 목사는 “현재 우리나라는 몸살을 앓고 있다. 홍역을 앓고 있다”며 “홍역을 앓을 때는 체온이 40도가 될 때까지 놔 둬야 한다. 그 전에 해열제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다. 김 목사는 이스라엘이 외침과 전염병 등 국가 위기를 맞았을 때 선지자들이 남녀노소 모든 백성들을 다 불러내 회개와 금식기도를 선포한 것을 언급하며 지금이 그 때라고 밝혔다. 그는 “오늘은 수요일이라 교회 안에서 기도하는 날이기 때문에 많이 나오지 못했지만, 전국적으로 이 기도의 행진을 확산시켜야 한다”며 “교회 안에서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는 다 나와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지난 1974년 엑스플로 대회처럼 1백만명의 성도들이 광장으로 나와 나라를 위해 회개하며 기도해야 한다며 “도시마다 1백만명이 나와서 이 나라를 주님 주권 아래 있도록 기도하면서 일곱 바퀴를 돈다면 세계사에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 최근 심각해지고 있는 인터넷상의 반기독교적 움직임에 대해서는 “다음 아고라에 글을 올리면 한주에 130만명이 댓글을 단다고 한다”며 “인터넷과 문자메시지를 이용해 전도하고 기도하는 사이버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목사는 지금이 안보·도덕·교회의 위기 상황이라고 밝히고, 특히 교회의 위기에 대해 “젊은이들이 교회를 모두 떠나고 있으며, 80%의 불신자들이 모두 안티기독교인들이 돼 가고 있다”며 10년 뒤에는 유럽의 교회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경고했다. 이날 국가기도연합이 주최하고 에스더기도운동본부에서 주관한 6·25 국가기도회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됐다.
너희의 사랑이 보이게 하라/김준곤 목사/한국대학생성교회 총재
너희의 사랑이 보이게 하라 김준곤 목사 한국인은 에델바이스같은 민족입니다. 이 꽃은 한풍이 몰아치는 눈 속에서 꽃봉오리를 맺습니다. 그리고 봄바람에 눈이 녹아내릴 즈음 그 앙증맞은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극히 작고 청초한 에델바이스에 숨겨진 그 엄청난 생명의 에너지가 우리를 전율하게 만듭니다. 태풍 루사가 할퀴고 간 자리에 남은 절망의 생채기마다 에델바이스 꽃같은 선혈이 낭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평생 모은 재산,추수를 앞둔 곡식을 잃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당신은 바로 우리의 형제입니다. 우리 민족은 질곡의 역사속에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항상 특유의 강인한 의지와 생명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는 교회가 중심이 돼 국산장려운동을 벌였습니다. IMF관리체제 때에는 저마다 장롱속에 묻어둔 금을 꺼낸 민족입니다. 2002 월드컵 때 용광로같은 에너지로 세계를 놀라게 만든 희망의 민족입니다. 흥도 많고 정도 많은 착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어려운 숙제처럼 시련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 시련을 통해 혈연·지연·운명공동체로서의 한 민족임을 확인합니다. 아픈 상처를 서로 싸매주고 중보기도를 해주고 어루만져주면서 말입니다. 지금이 바로 갈기갈기 찢긴 이념·지역·노사·남남 갈등 등 화합의 불순물을 말끔히 씻어낼 기회입니다. 역경은 가끔 교사처럼 우리를 가르칩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교회는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을 실천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이 민족을 향해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사랑이 보이게 하라” 그렇습니다. 지금은 모든 정쟁과 노사 갈등을 중단할 때입니다. 수마에 할퀸 형제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는 사랑’입니다. 관심입니다. 희망입니다. 정부는 비상 예산을 동원해 ‘강도 만난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하나로 뭉치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줄 때입니다. 이 땅의 교회와 젊은이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수해 복구 현장에 뛰어들기를 기대합니다. 교단과 교파가 무슨 소용입니까. 군인과 청년들이 땀흘려 봉사하는 모습에서 또 하나의 희망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능히 감당할 만한 시련을 주십니다. 희망 많고 소명 많은 민족이기에 그만큼 시련도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시련을 만날 때마다 더욱 강인해지는 것은 우리만의 저력이요,고유의 민족성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여,지금은 정말 고통스러운 절망의 밤입니다. 그러나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습니다. 운외창천(雲外蒼天). 구름 밖에는 맑은 하늘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직도 보람있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수줍은 무궁화같고 여린 에델바이스같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마지막까지 사랑 실천한 '헌혈 전도사' 김준곤 목사 소천/2009-09-30
마지막까지 사랑 실천한 \'헌혈 전도사\' 김준곤 목사 소천 <앵커>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원로인 김준곤 목사가 어제(29일) 소천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헌혈을 전파한 고인은 마지막 순간에는 각막을 기증하며 나눔과 사랑의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테마기획, 하대석 기자입니다. <기자> 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헌혈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습니다. 치료에 필요한 혈액은 돈으로 거래됐고, 이마저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땅에 헌혈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68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고 김준곤 목사가 혈액을 나눠 사랑을 실천하자며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헌혈 운동을 전파하면서부터입니다. [박진탁 목사/사랑의 장기기증운동 본부 :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미국 유학시절에 처음 헌혈을 했고, 한국교회가 다 참여할 수 있는 이분의 역량을 널리펴서 헌혈운동의 초석을 만들어주신 분이시죠.] 지난 91년에는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를 세워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스스로 각막 기증을 약속했습니다. 어제 향년 85세로 소천한 김 목사의 각막은 약속대로 시각 장애인 2명에게 이식됐습니다. [김응권/신촌 세브란스 병원 안과 전문의 : 목사님의 각막으로 사회적으로 거의 실명 상태에 있는 분, 거의 못보는 분이 0.6 이상의 시력, 상당히 쓸모있는 시력을 갖게 되시는…] 고인의 장례식장에는 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추모 행렬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최일도 목사/다일공동체 대표 : 이땅에서 다시 뵐 수 없다는 슬픔에 목이 매입니다.] 고인은 떠났지만 가장 큰 사랑은 생명을 나누는 것이라는 고인의 가르침은 종교의 벽을 넘어 이 땅에 오롯이 남아있습니다. SBS.
애통해하는 교계 지도자들/2009-09-30
애통해하는 교계 지도자들 ▲한기총 엄신형 대표회장, 회계 김동근 장로(우측부터) 등이 김준곤 목사의 빈소를 찾아 기도하고 있다. ⓒ 송경호 기자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가 빈소를 찾아 기도하고 있다. ⓒ 송경호 기자 ▲한국교회 원로 방지일 목사(가운데)를 김준곤 목사 총재특보 김철영 목사(좌)가 인도하고 있다. ⓒ 송경호 기자 ▲한국교회 최고 원로인 방지일 목사가 빈소를 찾아 헌화한 뒤 고인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 송경호 기자 ▲방지일 목사가 박성민 CCC 대표 등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 송경호 기자 ▲서정배 총회장(가운데) 등 예장 합동 총회 임원단이 빈소를 찾아 기도하고 있다. ⓒ 송경호 기자 ▲이날 오후 4시에 한국교회희망연대(상임대표의장 최이우 목사)를 중심으로 위로예배가 드려졌다. ⓒ 송경호 기자 ▲유인촌 문화부장관이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 송경호 기자 ▲빈소를 찾는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 송경호 기자 故 김준곤 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총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는 하루종일 교계 지도자들을 비롯한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송경호 기자 khsong@chtoday.co.kr
잊을 수 없는 김준곤 목사의 발자취/2009-09-30
잊을 수 없는 김준곤 목사의 발자취 故 김준곤 목사 입관예배 드리고 고인의 뜻 새겨, 김상복 목사 설교 오늘 30일 오후 2시 故 김준곤 목사 입관예배가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결식장에서 있었다. 한국 교회의 스승이자 어버이와 같은 김준곤 목사를 떠나보내는 300여 명의 조문객들은 안타까움에 눈물을 훔치면서도 평생을 주님께 헌신한 고인의 유지를 이어가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 고 김준곤 목사의 입관예배를 드린 신촌 세브란스병원 영결식장 © 뉴스파워 김준곤 목사의 제자인 두상달 장로(기아대책 이사장)의 사회로 진행된 가운데, 김학영 목사(태국선교사)와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기도하고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는 요한계시록 14장 13절 말씀으로 설교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국의 성자 김준곤 목사님’이라며 설교를 시작한 김상복 목사는 “우리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영성을 김 목사님에게 받았다. 젊은이에게 미래를 보이고 인생을 위한 목표와 헌신을 보여 주며 많은 영적 리더를 키워놓았다. 이 땅에 아들과 딸을 가장 많이 낳은 분”이라며 김준곤 목사의 삶을 평가했다. “떠나신 그 자리를 누가 메울지 염려되지만 그가 양육한 신앙의 용장들이 국내와 전 세계 각계각층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CCC뿐 아니라 한국 교회, 세계에 잊을 수 없는 영향을 준 목사님이 남긴 발자국을 우리가 따라야한다.”고 참석자들에게 강권했다. ▲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영향을 준 목사님의 발자국을 따라야 합니다." 설교하는 김상복 목사 ©뉴스파워 최일도 목사(다일공동체 대표)는 김준곤 목사의 시 ‘민족 복음화의 꿈’을 인용하며 ‘영원한 청년, 민족 복음화의 파수꾼 김준곤 목사님을 보내드리며’라는 조시를 직접 낭독하며 고인이 평소에 꿈꿨던 복음화의 비전을 참석자들과 다시 새겼다. 이어서 평소 김준곤 목사와 함께 했던 따뜻하고 다정했던 추억들을 풀어놓은 김경란 간사(CCC 리더십전도학교)의 조사에는 모두가 마음이 뭉클해졌고, “목사님, 사랑해요”라는 고백에 함께 눈시울을 붉혔고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쳤다. 또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교회사연구소장)는 김준곤 목사의 업적 중 대표적인 다섯 가지를 들어 교회 사학자로서 고인에 대해 평가했다. 특히 70년대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이끌었던 엑스폴로’74를 언급하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길선주 목사님이 했던 역할을 1970년대에는 김준곤 목사님이 하셨다.”고 이야기했다. 추모사에는 전 국가조찬기도회장이었던 김영진 의원(민주당)이 맡았다. 김준곤 목사는 1965년 국회조찬기도회를 창설했고 이듬해 국가조찬기도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매년 이어오고 있다. 김영진 의원은 “목사님은 국가조찬기도회의 소중한 전통을 오늘까지 이어오게 하시고 민족복음화운동의 횃불을 높이 드셨다. 마침내 목사님께서 CCC 총재와 성시화운동 세계총재직을 끝으로 그 장엄하고 위대하신 성업을 내려놓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며 추모의 말을 남겼다. ▲ 300여 명의 조문객들이 김준곤 목사의 삶을 생각하며 기리고 있다. © 뉴스파워 예배의 축도는 CCC 전 총무로 김준곤 목사와 오랜 인연을 간직해 온 윤남중 목사(새순교회 원로목사)가 맡았다. 축도에 앞서 윤 목사는 김준곤 목사의 사려 깊은 배려와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떠나보내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발인예배는 10월 2일 오전 9시 서울 영락교회 본당(서울 중구 저동)에서 드리며, 이에 앞서 오전 6시 반에는 빈소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영락교회로 출발하기 전에 출발예배를 드린다. ▲ 송월주 조계종 전 총무원장이 보낸 화환이 눈에 띈다. 김준곤 목사와 함께 우리민족서로돕기 상임대표를 여러해 역임했다. ©뉴스파워 한편 오후에도 드려진 추모예배에는 유인촌 문화부장관이 김덕룡(청와대 국민통합특보) 참석하기도 했다. 유 장관은 “오래 전부터 CCC에 대해 알아왔다. 한국CCC를 시작한 기독교계의 어른인 김준곤 목사님이 천국에 가셨으니 우리가 가슴속에 고인의 뜻을 담자.”고 했다. 최이우 목사(종교감리교회)는 “김목사는 영원한 청년이었고, 위대한 축복의 통로였고, 꿈꾸는 행동가였다.”며 말씀을 전하고 고인에 대해 설명했다. 축도는 피종진 목사(남서울중앙교회)가 했다. 또 송월주 조계종 전 총무원장이 화환을 보내 눈길을 끌었다. 이는 김준곤 목사와 함께 우리민족서로돕기 상임공동대표를 여러해 같이 활동해 왔던 것이 인연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오후와 저녁에도 각계 인사들이 찾았다. 김선도 감독(광림교회 원로), 엄두섭 목사(은성수도원), 서경석 목사(기독교사회책임), 윤희구 목사(예장고신 총회장), 서영훈 장로(전 적십자사 총재), 가수 주영훈, 국민일보 노승숙 회장, 조민제 사장, 기독교텔레비전 감경철 사장, CBS 이재천 사장, 김성혜 한세대 총장, 한화갑 민주당 전 대표, 정근모 전 명지대 총장 등이 조문했다. ▲ 박성민 목사를 위로하고 있는 김근태 전 의원 ©뉴스파워 CCC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김근태 전 의원은 빈소를 찾아 김준곤 목사에 대해 "1965년 처음 뵈었는데 따듯한 분이셨다. 그 분에게 느꼈던 따뜻함이 삶에 동력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외에도 전국에 있는 CCC 출신 제자들이 찾아와 슬픔과 위로를 같이했다.
한국 기독교의 반공산주의적 반사회주의적 사상 형성 과정/2008.10.30
한국 기독교의 반공산주의적 반사회주의적 사상 형성 과정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를 모르면, 왜 우리 교회 담임목사가 좌파정권에는 그다지 호응적이지 않았는지를 모른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독실한 기독교 교회 집사였고 미국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독립운동을 한 교회 세력이었다. 한국 교회는 해방 이후 전쟁 같은 60년을 살아낸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는 거울이다. 1987년 6월 항쟁을 겪기 전까지 한국 사회를 규정한 다양한 요인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변수가 ‘반공’이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공산주의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워 반드시 꺾어야 할 적이었고, 그를 위해선 인권도 민주주의도 웬만한 정도의 국가 폭력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국 교회가 공산주의에 대한 열렬한 반대를 정체성의 기원으로 삼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교회는 공산주의와는 서로 맞지 않은 사상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세력에 심한 핍박과 잔인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공산주의에 가장 피해를 입은 서북 지역의 교회가 한국 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 교회의 보수성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꾸준히 축적돼왔다. 한국 개신교를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한 가장 큰 두 변수는 ‘신사 참배’라는 원죄와 동족끼리 피 흘린 3년간의 ‘한국전쟁’이었다. 강인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기독교와 역사> 24호에 발표한 논문 ‘해방 이후 4·19까지의 한국 교회와 과거 청산 문제’에서 “만약 반민특위가 조기에 무력화되지 않고 교단의 현직 지도자들을 줄줄이 소환해 재판정으로 보냈다면, 그리고 가공할 3년간의 전쟁이 친일파 청산과 관련된 모든 논란을 일거에 덮어버리지 않았더라면 남한의 개신교는 시민사회에서 정체 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적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해서 하나님을 배반해 버린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라는 (어쩌면 영원히 씻어지지 않을지 모를) 고통스런 과거를 잊기 위해서라도, 그보다 더 크고 흉악한 ‘사탄’을 끌어내야 했다. 그것은 공산주의였고, 그들은 6·25라는 비극을 일으킴으로써 공산주의가 사탄임을 몸소 증명해냈다. 공산주의에 대한 한국 교회의 혐오는 공산주의를 사탄 또는 적(敵)그리스도로 등치하는 ‘사탄론’, 한국을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최전선으로 꼽는 ‘선민의식’과 결합해 폭발력을 얻었다. 그들의 교의는 단순했고, 그만큼 대중 호소력도 높았다. 공산주의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서북(평안남북도) 지역 기독교도들이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점이나 한국에 기독교를 이식한 남장로회·남침례회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 자체가 매우 보수적이어서 한국 기독교 역시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도 한국 교회의 보수성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로 꼽힌다. 한국 교회에서 서북 지역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1938년을 기준으로 볼 때 평안북도(8만5822명)와 평안남도(7만9229명)의 기독교 신도 수는 전국의 1, 2위를 다툴 정도로 교세가 컸고,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장자 교단’으로 자리매김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두 거두 박형룡(1897~1978)과 한경직(1902~2000)도 이 지역 출신이었다. 보수적인 한국 교회는 반공을 앞세우기만 한다면 독재 정권과 타협하는 일도 불사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이승만 정권 아래서 한국은 사실상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했고, 한국 교회는 공휴일 제정·적산 불하·군종 제도·포로수용소 선교·기독교식 국가 의례 등 특혜를 입었다. ‘예장’ 교권다툼 중에 제기된 색깔론 그러는 사이 교회는 정교 유착에 길들여져갔다. 그들은 5·16 군사 쿠테타에 대해 “이번 5·16 군사혁명은 조국을 공산 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과 부패로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개선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1961년 5월29일 한국기독교연합회 성명)라 했고, 10월 유신에 대해서는 “긴박한 우리나라 상황으로 보아 현 정치 체제는 김일성 유일 체제에 대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대안”(한국대학생선교회(CCC) 김준곤 목사, <크리스챤신문> 1975년 7월26일)이라고 칭송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정교유착의 상징은 1968년부터 연례행사로 정착된 대통령 조찬기도회였다. 1980년 8월6일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치러진 조찬기도회는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의 장도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규식 중앙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군사정권기 한국 교회와 국가 권력’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광주의 숱한 인명을 학살하고 정권 찬탈에 성공한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는 한국 교회사에 지울 수 없는 오욕과 굴종의 기록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정치와 종교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면서도 정교유착을 일삼았고,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는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들이대며 민주화를 바라는 교회 내 혁신 세력들을 억눌렀다. (참조글: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0&articleId=435289) 우리나라는 교회의 보수세력이 반공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여러 갈래로 쪼개는 교권 다툼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의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장자 교단으로 여겨지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박형룡 박사의 ‘합동’과 한경직 목사의 ‘통합’으로 갈라서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다. 갈등의 시작은 1957년 보수적 신학의 지도자였던 박형룡 박사가 학교(총신대) 부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정부에 뇌물을 먹이려다 사기꾼에게 속아 3천만환이라는 거액을 날린 이른바 ‘3천만환 사건’이 불거지며 시작됐다. 이 사건으로 박형룡은 학교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보수파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NAE·전국복음주의협의회)은 이듬해인 1958년 부지 매입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학 논쟁을 일으켜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려는 반대파 에큐메니칼(교파를 초월한 기독교 연합운동) 쪽과 갈등을 일으켰다. 당시 WCC 쪽은 중공 승인, 공산국가와의 공존을 미국 정부 쪽에 건의하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 보수파들의 눈에 WCC는 ‘용공’이었고, 그에 가입하려는 에큐메니칼 쪽은 불순분자들이었다. 그 갈등 이후 한국의 ‘장자 교단’은 1959년 경기노회 총회 부정 선거 사건을 거치며 합동과 통합이라는 두 갈래로 찢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무서운 속도로 산업화하고 있었고, 한국 교회도 성장을 제일로 아는 물량주의적 가치관을 내면 깊숙이 체화했다. 한국 교회의 최고 목표는 ‘양적 성장’이었다. 이는 해마다 목표를 세워놓고 되풀이되는 전도대회와 ‘절대 배가’라는 구호 속에서 현실화된다. 신도가 늘어난 뒤 필요한 것은 새 ‘성전’ 건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신자들에게 거액의 헌금을 요청했고, 이를 믿음의 척도로 삼았다. 그로 인해 축적된 몇몇 대형 교회의 부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했을 빈자나 약자와 공유되지 못했고, 부자세습이라는 불협화음을 낳았다. 사회는 변하는데 수구로 퇴락해 문제는 ‘다름’을 인정하는 일반적인 사회 논쟁과 달리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자신과 생각이 다른 타자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숨지고 부활한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결국 하나라는 것과 같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와 관계없는 견해 차이들로 서로를 ‘이단’이라 욕하고 ‘사탄’이라 정죄해왔다. 그런 소모적인 논쟁 속에 한국의 보수 교회는 사회의 민주적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반공과 친미의 논리에 갇힌 ‘수구’로 퇴락해갔다. 1970년대까지 시대를 바라보는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의 인식이 크게 달랐다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2007년 그 차이는 점점 건너기 힘든 절망적 간극으로 변하고 말았다. 2003년 이후 한국의 주류 교회는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모여 반공·친미 기도회를 여는 등 공세적인 모습으로 사회 참여에 나서고 있다. 2004년 10월4일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김한식 목사는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마수에 적화되려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은 미국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존경하는 부시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께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고 말했다. 그들은 한-미 동맹의 약화를 가슴 아파했고, 베트남 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아프간·이라크 전쟁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개정 사립학교법을 재개정하라며 머리를 깎았다. 구교형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은 “역대 정권들에게 특혜를 받아온 교회들이 교회와의 관계를 객관화하려는 김대중 정부 이후 많은 소외감을 느꼈고, 노무현 정권 들어 단행된 사학법 개정은 이에 기름을 부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 한국 교회가 이상 모델로 여기고 있는 미국 교회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점이나, 보수적 ‘자기 체험’에 갇힌 대형 교회 목사들이 최근의 사회 변화를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분석들도 있다. 그렇지만 절망의 극한 속에 희망은 있다. 김진호 한백교회 목사는 “대형 교회들이 본격적인 세력화에 나서면서 일정 부분 사회적인 검증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강단 위의 설교와 대중을 향한 정치 연설은 다르다.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졌던 목사들의 언행이 이제는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와중에 보수적인 목사들도 사회 변화를 일정 부분 학습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들도 변할 것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좀 걸려야 할 것 같다.” 김진호 목사가 말했다. 그 시간이 길어질 수록 교회와 사회와의 갈등은 점점 더 심해질 것 같다. 출구가 막혀버린 진보 교회 신자수 감소하자 진보적인 중소형 교회들만 직격탄 맞아 한국 교회의 주류가 보수 일색이라는 데는 이견을 달 수 없지만, 군사독재 정권에 탄압받은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1970년대 주요 사건으로는 △강희남 목사 구속 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 △도시산업선교회 사건 등이 있다. 1988년 2월29일에는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에 균열을 일으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선언’이 있기도 했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 왔다.” ..... 그에 대한 반발로 최근 들어 서울시청 앞 ‘기도회’를 기획·주도하고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이 1989년 12월 설립됐다. 이로써 현재 한국 교회는 보수 중심으로 재편돼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나올 출구가 막혀 있다. 이는 한국 교회 위기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수는 2005년 현재 861만6438명으로 1995년보다 15만 명 줄어들었다. 1985∼95년에 230만 명이 늘어난 것에 견주면 놀라운 감소세다. 직격탄을 맞은 것은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중소형 교회들이었다. 이미 탄탄한 물적 토대를 갖춘 보수적 대형 교회들은 신자 감소 수를 견딜 만한 체력을 갖추고 있다. 교회의 위기 앞에서 진보적 교회들의 목소리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한국교회 지도자 C.C.C. 김준곤목사 별세/2009-09-29.
한국교회 지도자 C.C.C. 김준곤목사 별세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원로 지도자인 김준곤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설립자, 이사장, 성시화운동 총재)가 오늘 오전 11시 11분 85세의 일기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 김목사는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설립하여 일평생 대학생선교에 힘쓰고, 민족 복음화 운동에 헌신해왔다. 2002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한 바 있다. 빈소는 서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어 있으며, 오후1시부터 조문객을 맞고 있다. 영결식은 오는 2일 금요일 오전 9시 영락교회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약력 1925.03.28 전남 신안군 지도읍 봉리 원동에서 부친 김면주와 모친 김통안 사 이에서 8남 중 넷째로 출생 1940.03 ~ 1941.02 무안농업실수학교(현 무안중학교) 1946.03 ~ 1948.09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제1회 졸업 1951.09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 1952.03 ~1953.02 조선대학교 문학과 졸업 1953.04 ~ 1955.10 광주 숭일 중.고등학교 교목 1955.04 ~ 1956.10 광주 숭일 중.고등학교 교장 1956.03 ~ 1956.07 한성신학교(여수 애양원 나환자 신학교) 교수 1957.09 ~ 1958.11 미국 풀러신학교 1년간 연구 수학 1958.10 ~ 현재 (재)한국대학생선교회(CCC) 창설. 총재. 재단이사장 1966.02 국립 전북대학교 명예문학박사 1966.03.8 국가조찬기도회 창설 (4번의 대통령 조찬기도회 설교) 1969~ 전군신자화운동 전개(영관급 2400명에게 기독교와 반공 강연) 1972.07.31~8.3 춘천성시화대회(한국 최초) 1974.08.13~18 엑스플로‘74 전도대회 준비위원장. 주강사 1979.03 ~ 1980.08 ‘80 복음화대성회 대회장. 주강사 1980.08 한국창조과학회 창설 1980 ~ 1981 조선일보(2년). 동아일보(1년)에 매일(주일 제외) 예수칼럼 게재 1981.05 ~ 1990.06 국제대학생선교회 동아시아 대표 1983.05 세종대학교 명예교육학박사 1983.07 Southwest Baptist University, Missouri, U.S.A 명예신학박사 1984.05 세계기도성회(International Prayer Assembly) 준비위원장. 주강사 1985.09 엑스플로’85 인공위성 세계대회(세계 50개 도시 동시 개최) 준비위 원장. 주강사 1988.12 ~1990.12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현 자문위원) 1990.06 ~ 현재 대학생선교회 국제 원로디렉터 1990.07~08 마닐라 뉴라이프2000 준비위원장(대학생 3,000명 단기선교사 파송) 1992.07 ~‘95.06 기독교 21세기운동(AD2000 and Beyond Movement) 준비위원장 1994.03 한국 기독교계 원로간담회 창설 1994.06 세계기도성회(세계 2,000도시 위성 연계 동시 개최, 여의도 기도회) 준비위원장. 주강사 1995.05 GCOWE(Global Consultation On World Evangelization)’95 세계선교대회 (187개국 4,000여명 참석) 준비위원장. 주강사. 1996.12 국민일보 주최‘국민선교대상’ 한국교회부흥 부문 수상 1997 ~ 현재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한국기독교시국대책협의회 대표 1999.03 ~1999.08 엑스플로’99 민족복음화 인천대성회 준비위원장. 주강사 1999.09 ~ 2003.04 사단법인 2002년 월드컵 기독시민운동협의회 대표회장 1999. 8~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 (황해북도 봉산군 은정목장 완공) 1999.03 ~ 현재 기독교 민족화합운동 대표회장 2000.06.4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 특별연합 예배(한기총. KNCC 공동주최) 준비위원장 2002. 2 북한 방문(우리민족서로돕기 상임공동대표 자격으로 송월주, 강문규, 서경석 목사 등과 함께) 2002.12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2005.06 ~ 현재 성시화운동 세계총재 2006.02 명지대학교 명예철학박사 2009.09.29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소천 저서(著書): 『예수 칼럼』, 『김준곤 문설집』, 『영원한 첫사랑과 생명언어』, 『리바이벌』, 『김준곤 예화』, 『김준곤 명상』외 다수
항상 꿈을 꾸시며 청년으로 사신 김준곤목사님의 소천을 애도하며/2009-09-30
항상 꿈을 꾸시며 청년으로 사신 김준곤목사님의 소천을 애도하며 목사님 가신 것이 너무도 안타깝고 섭섭합니다.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천국으로 가신 것을 슬퍼만 할 수 없지만 목사님이 떠나신 빈 자리가 너무 커서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김준곤목사님의 제자지만 그렇다고 정통파 제자群에 속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CCC를 다녔지만 오래 다니지도 못했고 진보적인 기독학생운동인 KSCF에 속해서 Explo74 행사를 비판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랜 신앙적인 방황을 거쳐서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는 다시 복음주의자가 되었고 경실련 사무총장 시절에 목사님을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반갑게 맞아 주셔서 목사님과의 만남이 다시 이어졌지요. 지금도 정동CCC채플에서 신앙간증을 하던 기억, CCC하기수련회에서 간증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년 가까이 목사님과 깊은 친분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저를 특별히 사랑해 주시고 항상 지지해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오해하는 많은 분들에게 저를 변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請을 들어주셔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상임대표도 되셨고, 나눔과 기쁨, 기독교사회책임에도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제 주위에서 제가 김준곤목사님과 가깝게 지내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간 길과 목사님이 간 길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목사님은 그랬기 때문에 저를 특별히 돕고 싶어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저를 돕는 것을 통해 지난 날을 보상하고자 하셨습니다. 김준곤목사님께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상임대표를 하시면서 황해도 봉산군에 CCC젖염소목장을 만드신 것은 감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젖염소는 풀을 먹기 때문에 사람과 먹이 경쟁을 하지 않지요. 그러고도 염소젖은 우유와는 달리 사람이 완전히 소화를 하지요.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너무 좋은 식품이지요. 그렇지만 북한의 재래종 염소는 젖이 잘 나오지 않아 뉴질란드의 자넨종을 북에 보내어 종축개량을 하는 것이 꼭 필요했는데 김준곤 목사님이 결심을 하셔서 봉산군에 대규모 목장이 건립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제게 젖염소 목장의 아이디어를 준 것이 너무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김준곤목사님은 아내와 아버지가 공산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당신 자신도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셨는데 이러한 공산군의 악행을 북한주민에 대한 사랑으로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과 함께 봉산군 CCC목장을 함께 걸으면서 목사님이 지난날의 감회를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글썽거리시던 모습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또 목사님은 제가 나라걱정을 하면서 사회원로성명을 조직할 때마다 항상 서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행해 바른 말을 하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을 사람들은 민족복음화의 역군으로만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구원 뿐 아니라 사회구원 문제에서도 똑같은 관심을 가지고 애써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목사님을 CCC 실무자들은 때로는 따라가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김목사님이 바로 그렇게 비젼을 꿈꾸고 비젼을 실현하려고 애쓰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오늘의 CCC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또 참으로 아쉬운 때도 있었지요. 한번은 목사님께서 식량은행(Food Bank)을 시작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지요. 각 교회가 전부 통장을 만들어 저축을 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북한을 위해 쓰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뜻을 따라 이 일을 시작했는데 마침 같은 시기에 비슷한 단체가 생기는 바람에 그 운동과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 목사님께서 할 수 없이 이 생각을 접으실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고집을 부려서라도 그 일을 했으면 지금쯤 식량은행은 엄청나게 켜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소천하신 지금 목사님의 유지를 받들어 다시 식량은행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의 앞날이 극히 불투명한 지금, 김준곤목사님이 꾸셨던 꿈이 기필코 실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일년에 몇 번씩 목사님을 만나 뵐 때마다 목사님은 적어도 30분 동안은 제게 한국교회가 큰 위기에 처해 있다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큰 교회들이 물질주의, 상업주의에 빠져서 참된 복음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해 하셨습니다. 미자립교회는 매년 3천교회씩 문을 닫는데 교인들의 수평이동으로 커진 대형교회들은 개교회주의에 빠져 있다며 크게 개탄해 하셨습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와의 갈등의 문제를 김준곤목사님처럼 개탄해 하신 교회지도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김목사님께서 그토록 안타깝게 문제시하는 데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목사님께서 작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셨기 때문에 제가 <나눔과 기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작은 교회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운동을 시작할 때에도 목사님께서는 기꺼운 마음으로 오셔서 설교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해주신 문준경 전도사님의 대신거지 이야기와 119 아줌마 이야기는 <나눔과 기쁨>의 작은 교회 목사님들에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씀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항상 나라를 걱정하시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그런 모습에서 항상 자극과 격려를 받은 사람입니다. 목사님이 나라를 걱정하신 나머지 기독당을 만드는 일도 하셨지요. 저는 기독당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목사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목사님은 전략가나 정치가가 아니시지요. 그래서 우리가 목사님을 이해할 때에는 전략적 판단의 옳고 그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속 마음을 보아야지요. 목사님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세상 속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면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나서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도 열심히 나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난주에 목사님께 병문안을 갔을 때 김준곤목사님께서 주신 마지막 말씀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출세할 생각 말고 겸손하게 나라와 교회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사회책임>이 교회의 희망이라며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제시대에 국적도 없이 고생하며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들을 생각하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 힘이 드신데도 힘들여 말씀해 주신 그 말씀들 고히 간직하며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처럼 꿈을 꾸고 그 꿈을 실천하며 사는 비젼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이가 70, 80이 되어도 청년처럼 꿈꾸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