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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은총/ 롬11:33-롬12:1/ 한경직 목사/ 2014-08-25
10년의 은총 롬11:33-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예배니라』(롬 十二․一) 一九四五년 十二월 二일에 약 二十명의 신앙 동지가 베다니 전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당시 일본사람이 남기고 간 천리교당 한 모퉁이에서 예배한 것이 어제인 듯 한데 어르듯 十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걸어온 자취를 잠깐 회고할 때에 실로 문자 그대로 감개무량합니다. 이 十년 간 우리 민족은 혼란한 비극적인 시대를 지내왔습니다. 三八의 마선(魔線)은 그냥 있고 참혹한 六․二五 사변의 가지 가지 처참하고 가련한 체험을 우리가 다같이 겪어 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본 교회를 세워 주시고 길러 주시고 지금까지 지켜주셔서 오늘 우리가 十주년 기념일을 당할 때에 오직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자기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모든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읽은 로마 十一장 三十三절 이하의 말씀과 같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 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런고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 예배니라』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창립 당시에 三八전이 이렇게 오래 계속될 것을 예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피난민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몰려올 줄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를 시작할 때에 이 자리에 성전을 지을 계획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 교회를 지을 필요가 생길 때 처음에는 간단히 천막 교회로 시작하려던 것이 점점 돌 천막 성전으로 변하여져서 그것이 오늘날 이와 같은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하신 일 뿐입니다. 우리는 六․二五사변으로 두 번째 눈물로 이 서울을 후퇴할 때 사실 그때까지 이 예배당이 보존되기를 기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예배당을 없이하려고 불을 놓고 달아났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이 교회를 보존해 주셨습니다. 피난 당시에도 대구나 부산 제주도에 새로운 영락교회가 서게 된 것도 우리의 특별한 경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十주년 기념 주일을 당해서 우리는 먼저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바입니다. 긍휼과 자비심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저 포악한 공산당에게 집 잃고 재산을 일고 가족은 사상되어서 허둥지둥 三八선을 넘어온 피난민을 불쌍히 여기서서 광야에 반석같이 이 교회를 세우시고 눈물 골짜기에 샘물이 되게 하신 것뿐입니다. 할 수 없는 피난민들이 이 베다니 뜰에 와서 잃었던 가족 혹은 친구를 만나게 되어 같이 울고 웃으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를 의지하고 다시 예배하게 된 것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를 민망히 여기시는 주님은 그들을 위로하셨고 그들을 격려하셨고 새로운 소망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시편의 말씀대로 저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모든 영광과 존귀(尊貴)와 감사를 우리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너희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오늘 창립 十주년 기념일을 당해서 고요히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가 밟고 다니는 이 베다니 뜰은 퍽 거룩한 땅입니다. 이 곳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이 곳에 하나님께서 일하셨고 지금도 일하시는 까닭입니다. 성신께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셔서 역사 하십니다. 베다니 뜰은 거룩한 땅입니다. 왜? 아마 제 생각에 한국 어느 곳보다도 이 베다니 뜰이야말로 북한에서 넘어온 성도들이 가장 많아 눈물 흘리고 가장 많이 땀 흘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의 기도, 땀의 봉사와 터가 곧 이 베다니 터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곳이 거룩한 땅인 것은 이곳이야말로 순교자의 거룩한 피가 이 땅을 적시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김응락 장로님께서 바로 이 예배당 문 밖에서 자기의 신앙을 위하여 뜨거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아! 베다니 뜰에 들고 나는 무리들이여 무심히 이 뜰을 밟지 마십시오. 내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十년간이나 꾸준히 축복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무엇으로 갚으려 하십니까? 옛날 시인의 말과 같이『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 고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라고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 영락의 성도들이여 十년의 은총을 무엇으로 보답하여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이 이미 몸을 하나님께 드린 줄 압니다. 이미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온전히 변화해서 새로운 몸이 되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번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리빙스토이 죽기 며칠 전에 남긴 일기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오! 내 하나님이여 나는 오늘 아침 새롭게 또 온전히 내 몸을 주님께 다시 드립니다.』 오늘 우리 영락교회의 교우들은 이 十주년 기념 주일 아침 새롭게 온전히 그 몸을 다시 드리는 이 거룩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여기 앉은 여러분의 대부분의 이름이 우리 교회 머리 돌 속에 들어간 줄 압니다. 기념할 만한 이 날 아침에 우리의 이름이 감추어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충정을 맹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남자 교우들은 피로써 이 교회를 지키고 피로써 이 교회를 위해 최후까지 일하시다가 순교하신 김응락 장로님의 신앙을 계승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앉은 영락의 여자 교우들은 함을 열고 지극히 귀한 향유를 주님의 머리와 발에 붓고 머리털을 풀어 발을 씻은 베다니 마리아의 그 진실 된 믿음, 온전한 그 헌신을 계승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찌 몸뿐이겠습니까? 몸에 있는 모든 것을 드리십시다. 우리의 자녀도 재산도 드리십시다. 자식도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요 재산도 여호와의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十주년 기념일을 당하여 우리로 하나님께서 이 영락교회에 맡기신 큰 사명을 재인식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十년 전에 우리 교회를 이 수도 서울 중앙에 세워주신 것은 그의 크신 목적이 있는 줄 압니다 나무를 十년이나 기른 것은 그 열매를 얻기 위한 목적이 있는 줄 압니다. 그 사명을 간단히 말하면 세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의 등대를 삼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 영락교회로 하여금 진리의 밝은 등대를 삼고자 하는 목적이 계신 줄 압니다. 오늘날처럼 교계가 사상적으로 또 질서 적으로 혼돈한 때는 별로이 없는 줄 압니다. 이성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경향이 너무 많습니다. 도처에 일어나는 교회의 분규와 분열 사이비 종파의 발생과 이단 사설의 횡행 이런 가운데서 길 잃고 방황하는 양의 무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압살롬을 잘못 따르던 무리가 마지막에 어떻게 된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황국주를 따르던 무리의 말로가 어떻게 된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이러한 때에 진리의 등대를 밝혀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기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케 하는 것이 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十주년 기념 사업으로 기도원을 설립하는 뜻의 일단이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복음 전파와 민족 교회의 사명입니다. 무엇이 귀하다 하지마는 제일 귀한 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영혼입니다. 이 영혼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밖에 다른 데서 얻을 데가 없습니다 현대 한국에 필요한 양이 많게T지마는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약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썩어져 가는 양심을 고치는 약이 있어야 우리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토대가 튼튼해야 튼튼히 설 것입니다. 우리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온 민족을 주님께 인도할 때가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려야 되겠습니다. 지금 二十여 곳에 전도자를 보낸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크고 중하다고 하는 것을 十주년 기념식을 당해서 재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줄 압니다. 셋째는 사회와 국가에 처한 봉사와 사명인 줄 압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봉사와 희생이 따릅니다. 지금 본 교회에서 보린 원, 경로원, 모자원 성경구락부 고등 공민학교 등 이런 것으로만 우리가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관들을 우서 완전케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의 장래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특별히 사회적으로 교육 방면에 봉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의 十주년 기념 사업 가운데 하나로서 국민학교를 건축하려고 하는 것도 여기에 일단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내 반석 위해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요 이 교회를 믿음의 반석 위에 세운 까닭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또 들으세요.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지리의 기둥과 토입니다. 이 집은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과 기초로써 영원히 이 땅 위에 남을 것입니다. 十주년의 은총을 보답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오늘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4대 은혜/ 느9:1-10/ 한경직 목사/ 1959-04-19
4대 은혜 느9:1-10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느 九·五) 주일 저녁은 흔히 구약을 중심해서 생각하였지마는 오늘 저녁은 구약의 인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경회 예배로 볼 마음이 있어서 다른 제목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역시 오늘 낮 예배시간에도 읽은 바 있는 느헤미야 가 운데서 읽었습니다,. 낮에도 생각하였지마는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적으로 또한 종교적으로 부 흥하는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사를 상고해 보면, 이 중요한 역사 적 단계에 있어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부흥이 없었던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으 로서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 있어서 이들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에 서 일어나 종교적 부흥은 심히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읽은 말씀을 여러분께서 들었습니다. 이 때에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큰 부흥의 축복을 받았는가? 먼저 그 때 사람들이 한 것은 네 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먼저 부흥의 축복을 받은 네 가지 요소 를 생각하고 또한 나아가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개인적으로 받아야 할 네 가지 은혜를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 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이와 같이 시작합니다.『그 들 二十四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이런 말로 시작하였 습니다. 이 달은 아마 七월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七월 二十四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였다고 기록하였습니 다. 다 모인 것입니다. 먼저 이 때 사람들이 영 적의 큰 부흥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개인 하나씩 흩어져 산 것이 아니고 다 한 곳에 모였습니다. 먼저 모이는 가운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물론 개인 개인의 기도와 성경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일정한 기회에 다 같 이 모이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오순절의 큰 축복도 먼저 一二十명인 당시에 예수의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열흘 동안이나 집회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오순절 아침에 큰 성신의 세례가 내린 것입니다. 사실 이 오순절 집회 이후에 교회의 부흥의 역사를 상고해 보면, 어떤 부흥이든지 먼저 모이기를 힘쓰고 이 모임 가운데서 집단적으 로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저자의 말과 같이 우리가 모이기를 경히 여기지 아니 하고 더욱 힘써 모이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또한 둘째로 여기 기록한 것을 보면『낮 四분지 一은 그 처소에서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낭독하고』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낮 四분지 一을 특별히 정해서 이 시간은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奉讀)하 고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봉독할 뿐더러 다른 곳에 보면 해석도 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 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큰 영적 부흥의 축복의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고 생각 하고 공부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인들의 실정을 보면 이 성경에 대해 무식해서 큰 걱정입니다. 학습 문답이나 세례 문답을 해 보면 아주 쉬운 말,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알만한 이런 것을 물을지라도 대답하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특별히 자 라나는 학생들인 중학교에 다니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혹은 대학에 다니고 대학을 졸업하였다고 하지마는 다른 학문 들은 아마 상당히 배운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문제를 물어 볼지라도 대답하는 사 람이 매우 적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우리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을 게을리 하는 까닭 입니다. 단순히 한 주일, 주일학교에 와서 잠깐 예배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듣는 시간은 二十분에 불과합니다. 그 렇게만 아이들이 배워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복 있는 자는 악한 자의 의논대로 하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 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묵상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 부하는 중에 부흥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여기 말씀을 보면『낮 四분지 一은 죄를 자복(自服)하면서』하나님께 경배하는데, 또한 다른 곳 을 보면 금식하며 굵은 배를 입고 티 끝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烈祖)의 허 물을 자복했다고 그 때 모였던 모양을 서술한 것입니다. 셋째 요소는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듣게 되면, 먼저 내가 죄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전에 잊어버렸 던 죄악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물론 두었던 죄악이 마음 가운데 생각납니다. 이 때 사람들이 한 것은 모든 죄를 원통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철저히 회개를 한 것은 금식을 하였고 굵은 배로써 옷을 입고 티 끝을 머리에 부었고 이방사람과 절교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과 온전히 관계를 끊고 자기의 죄뿐만 아니고 자기 열조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셋째 요소입니다. 다 우리도 이번 사경(査經)회를 당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우선 모여야 되겠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여야 되겠고 또한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자복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여야 은혜를 받겠습니다. 아는 죄, 모르는 죄, 현재의 죄, 과거의 죄, 덮어두었던 죄를 이번 기회에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즉 찬송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눈물로 죄를 회개할뿐더러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서 하나님 앞에 소리를 높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해야 합니다. 넷째로는 목소리를 합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올렸 습니다.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찬송을 통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전파합니다. 또한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 다. 우리의 심령을 순화하여 줍니다. 우리의 감정을 정화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하고 더 높은 곳으 로 이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넷째로는 이들이 찬송을 하였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상경회를 할 때에 특별히 여러분께 부탁하는 것은 열심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찬송을 배우 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저녁 예배 七시 三十부에 예배를 시작하지마는 七시에 오셔서 반시간 동안 찬송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사경회를 하는 가운데 각 개인의 받은 은혜의 목표가 분명해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네 가지 큰 은혜를 받아야 될 줄 압니다. 이번 이 사경회를 계기로 해서 우리 교우 한 사람 한사람이 네 가지 은혜를 꼭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아시는 것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중생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저녁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그 귀중한 말씀 기억하시지 않습니 까?『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느니라.』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 에 들어 갈 수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성신으로 거듭나지 아니하 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세상에 올 때에 나서 세상에 왔습니다. 부모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출생함으로 이 세상에 왔습니다. 마 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도 거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 나라에 영적으로 출생하여야 들어갑니 다. 우리가 처음 한번 육으로 낳으니까 다음에는 영으로 낳아야 되는 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거듭 난다고 하거나 혹은 중생이라고 합니다. 새로 낳는다고 합니다. 이 중생의 은혜는 내가 힘쓸 것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 시는 은혜가 있는데 이 둘이 합할 때에 중생의 은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할 것은 온전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따금 세수를 하지마는 세수만 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목욕이 필요합니다. 온 몸 전체를 온전히 씻어 버리는 목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집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방 을 쓸지마는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이따금 대청소가 필요합니다. 온전히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신을 부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듭 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영적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생명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중생의 은혜를 받은 자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중생의 은혜가 아직 미치지 못한 이들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이번 이 기회에 어떠한 때이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심령 위에 이 중생의 축복을 주시기를 바라 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로는 우리가 늘 듣는 말이지만 한번 더 생각해 봅시다.「헌신의 은혜」입니다.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 리는 은혜올시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재주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 님께서 많으나 적으나 물질을 주셨습니다. 내게 주신 이 몸을 중심으로 해서 내게 주신 재주, 내게 주신 이 물질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이 축복을 우리 믿는 사람들이 꼭 받아야 합니다. 이 헌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 께 속하고 나는 다만 이것을 받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단순히 청지기인 까닭으로 하나님 께서 맡기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마지막 날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 였는지 못하였는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 받을 때가 있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헌신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 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기회에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각 사람에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 니다. 셋째는 이것도 물론 따르는 것이지만 제목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도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 다. 제가 관찰하지 못하는지 모르지마는 가만히 보면 어떤 이들은 일생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전도는 한 사람도 못 하고 죽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 믿으면서 다른 것은 다 하지마는 전도는 못합니다. 다른 말은 다 잘 하지마는 전도에 가서는 입이 딱 붙어서 벙어리가 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내가 참으로 구 원을 얻었다고 한다면 이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아야 되겠습니다. 오순절에 一二十명이 성신을 충만히 받은 다음에는 베드로 한 사람만이 오순절에 설교를 했지마는 다음에 기록을 보면 一二十명이 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 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과연 참된 하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 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 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 아마 전에 들으신 줄 압니다. 어떤 회사의 사장이 예수를 잘 믿는 분이올시다. 꼭 자기는 주일날 이면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보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인데 도무지 전도는 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 믿으란 말을 한 마디도 못합니다. 가지의 회사의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마는 다른 이 야기를 늘 하지마는 한 번도 예배당에 가자는 전도를 못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주일날은 예배당에 가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온 잘못한 것을 깨달아서 내가 이제 는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때 결심이 그저 누 구든지 나한테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조금 앉아 있자니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비서가 예수 를 믿는지를 알 수도 없고 또 한번도 이 비서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마디로 그가 예배당에 다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 비서가 눈이 둥글 해지면서 그것을 왜 갑자기 물으시냐고 반문했습니 다.『그래, 예배당에 가는가?』『저는 예배당에 가지 않습니다.』『그럼 예배당에 가야지, 예수를 믿어야 해.』이렇 게 이 비서한테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서가 하는 말이『아 사장님 참 감사합니다. 사장님을 제가 十五년 을 모셨는데 저한테 예배당에 가자고 하는 말씀은 한 마디도 안 해서 저는 제 생각에 나 같은 놈은 아주 못 되어서 예수를 못 믿는 놈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오늘 저한테 이렇게 전도를 해 주시니 이것 얼마나 감사한지 모 르겠습니다. 제가 오는 주일부터 꼭 가겠습니다.』그런 대답을 했더랍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과 오래 사귀고 장사 거래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늘 만나고 그런 이들을 만나서 세상 정치 이야기고 하고 경제 이야기도 하고 세계 소식 이야기도 하고 모든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전도하는 말은 한 번도 안 한 그런 청년은 없습니까? 아마 여기 앉으신 여러분 친구 가운데도 이 비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친구들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예배당에 항상 가기를 하는데 자기한테 한 번도 교회에 가자는 말 한 마디 안 하니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의 친구가 있을 지 모릅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 야 됩니다. 내가 전도할 수 있는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먼저 내 성품 가운데, 내 생활 가운데 고칠 것 이 더러 있을 줄 압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왜 그 말을 못했나 생각해보면 내 마음 가운데 꺼리는 것이 있어서 말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아야겠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 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올시다. 여러분, 이번 기회에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넷째로는 마지막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끼리 화평할 줄 아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화평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전도까지 하는 사람들로 화평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 리가 이따금 봅니다. 우리 믿는 사람끼리 피차에 죄를 용서해 주고 용납해 주고 피차에 잘못을 알려 주고, 이해해 주어서 혹 어떤 때에 피차에 감정이 소원해 진다고 하지만, 그것을 피차에 삼가서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끼리 화평 해서 살 줄 아는 은혜를 우리가 꼭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저 예수를 믿는 이 가운데도 어떤 때는 예배당에 오다가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그 사람과 만나 기를 꺼리면 그가 오는 편과 반대편 문으로 예배당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말도 오래 안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떻든지 피차에 화목해서 화평한 은혜까지 받아 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여러분이 기억하시지요?『너희가 예물을 제단에 올리려갔다가 네 마음 가운데 네 아는 사람 가운데 원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예물을 거기에 놓고 먼저 가서 그 사람과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 리라.』우리가 알 것은 형제 사이에 멀어지면 그리스도와도 멀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가까이 가면 형제 사 이도 서로 가까워집니다. 어떻든지 우리 믿는 사람은 서로 화평하고 화목할 줄 알아야만 됩니다.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북에 잡혀갔다 돌아와서 말씀하시던 구세군 로드 부장의 이야기 가운데 자기가 이 경험을 통해서 특별히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비록 신조가 다르고 교파가 다르지마는 믿는 사람들이 다 한 주를 섬기고 한 하 나님을 섬기며 우리가 피차 도와주고 피차에 사랑하여야 되겠다 하는 것을 더욱 깨달았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번에 잡혀가 보니까 거기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이 다 잡혀 가 있었습니다. 혹 그 가운데는 천주교 신부, 성공 회 감독, 감리교 선교사, 그밖에 여러 교파 선교사들이 다 한꺼번에 잡혀갔습니다. 다 한 방에 있고 함께 먹습니다. 흔히 말하면 천주고 신부와 성공회 강독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신교 교파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부들과 그렇 게 사이가 가까울 이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같이 고생하고 같이 눈물 흘리며 같이 고통 하는 가운데서 비록 교파가 제각기 조금씩 다르지마는 그것은 적은 문제요 그것은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고, 우리는 다 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한 주를 믿고 다 같은 천당을 향하여 간다고 하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달았답니다. 조금도 다른 것 때문에 감정상 무엇에 소격(疏隔)된 것이 없이 한 형제와 한 자매가 되어서 피차에 눈물을 같이 흘리고 어떻든지 피차에 도와주도록 서로 서두는 그런 광경을 볼 때에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 는 간증을 제가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한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에 속하는 교인들끼리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 나 한 걸음 더 나가서 감리교나 성결교나 구세군이나 다른 교파에 이르기까지도 우리가 믿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지 마는 다른 것보다도 같은 것이 더 많다고 하는 것을 항상 기억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협조하고 공동 보조를 취할 줄 아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요즘에는 성경에 있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에큐메니칼 정신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처음 듣게 되니까 이것을 오해해서 여기에 큰 이단이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혹 있 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오해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끼리 피차에 협조하고 사랑하고 공동보조를 취할 경우에 세계적 으로 무신론과 싸우는 이러한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대동단결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넷째 은혜 즉 화목의 은 혜까지 우리는 꼭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저녁에 우리가 교회 부흥의 네 가지 비결을 생각했습니다. 제일 먼저 열심히 모여야 되겠고, 둘째로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여야 되겠고, 셋째로는 전도해야 되겠고, 넷째로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야 되겠습니 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경 회를 하는 동안에 우리 개인 개인 하나 하나가 이 네 가지 은혜를 꼭 받도록 우리가 간 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다. 제일 먼저는 중생의 은혜, 둘째로 헌신의 은혜, 셋째는 전도할 수 있는 은혜, 간증의 은혜, 넷째는 형제 화목의 은혜로 오늘 저녁 우리 이 사경 회에 큰 부흥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개인 개인이 이와 같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이제 다 공동으로 한 五분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다.(一九五九)년 四월 十九일·저녁 예배)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5천만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헌신/ 사6:1-8/ 한경직 목사/ 2014-08-26
5천만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헌신 사6:1-8 이미 이 목사님께서 말씀드린 대로, 5천만복음화를 위해서는 먼저 여기에 대한 비전을 우리가 보아야 될 것입니다. 또는 여기에 대한 전략이 분명히 서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전략에 의지해서 모든 자력을 동원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 온 교회가 일치해야 될 것을 이미 우리가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특별히 이 운동을 완수하려면 현재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5천만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헌신’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잠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이사야 6장 8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오늘 저녁에 읽은 성경의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의 소명과 헌신에 대한 기록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자기가 젊었을 때에 가졌던 영적 체험을 여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저녁,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헌신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이렇게 이사야는 자기가 젊었을 때에 얻은 체험을 회고합니다. 그때에 본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을 의미함이 아닌 줄 압니다. 신령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을 현대 우리는 흔히 외국에서 온 말이지만, 비전(vision)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한 비전을 젊었을 때에 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의 역대 제왕 중에 매우 유능한 왕으로서 50여 년간 오래 다스린 왕입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말년에 한 가지 실수로 말미암아, 범죄로 말미암아 최후에는 문둥이가 되어 죽었습니다. 온 국민에게는 참 그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고, 국가적으로 또한 큰 손실이었습니다. 바로 그 해 곧 주전 740년에, 청년 이사야는 성전에 올라가서 조용히 기도하는 중에 한 큰 비전을 보았습니다. 보통 비전이 아닙니다. 여기 기록한 대로,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요한복음 12장 41절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사야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그리스도 곧 세상에 강림하시기 전, 그 영광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본체를 물론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온전히 육신을 입으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도 주님께서 나타나셨다고 요한이 설명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곧 주님은 하늘과 땅, 그 위의 모든 것보다도 더 높으시고, 시간과 공간과 모든 변천을 초월하신 하나님, 그리고 보좌에 앉으셔서 온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을 보니 성전에 가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 뜻은 그의 옷자락 곧 그의 영광과 능력은 온 성전, 곧 온 우주에 미친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스랍들이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서 그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그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그 둘로는 날았다고 하였습니다. ‘스랍’이라는 말의 근본 뜻은 ‘불탄다’는 뜻입니다. 곧 ‘빛나는 이들’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빛나는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우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리운 것은, 비록 천사들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감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곧 경외의 뜻을 의미하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 스랍들이 소리를 높여서 찬송을 부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여기에 세 번 ‘거룩하다’라는 말이 반복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가장 거룩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또한 삼위일체를 각각 찬양하는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뜻은 본래 ‘베인다’는, 곧 ‘온전히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속된 것과 온전히 성별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다고 하는 뜻은 가장 순결하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는 한 점의 흠이 없습니다. 어두운 점이 없습니다. 오직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만군의 여호와’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천군천사, 우주 만물, 모든 권세를 통할(統轄 모두 거느려 다스림) 지휘하시는 여호와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 하도다”라고 찬송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에도 사실이거니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도 의미하는 줄 생각합니다. 현재의 땅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곳이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장차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할 때는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의 소망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스랍들의 이러한 웅장한 찬송으로 말미암아 성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곧 이 우주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충만하며, 하나님은 또한 어디나 사실은 임재한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줄 생각합니다. 이렇게 여러분, 청년 이사야는 신령한 눈으로 지극히 높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실로 위대한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얼른 생각하면 이러한 하나님을 뵙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러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큰 공포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라다 볼 때에 자기의 죄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큰 두려움이 곧 사망의 두려운 생각이 그의 마음에 사무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올시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자기의 입술이 부정함을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마음도 부정하고 행실도 부정한 것을 깨달았지만, 아마 육체의 어느 부분보다도 입술로써 먼저 죄를 짓기 쉬운 까닭으로 이런 표현을 하지 않았는가 생각이 됩니다. 사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신령한 눈으로 보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자기의 죄를 먼저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죄를 먼저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비유 가운데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대략 이러했습니다. “나는 안식일을 잘 지킵니다. 십일조도 늘 드렸습니다. 금식도 때때로 하였습니다. 저기에 서 있는 세리와 같은 생활을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바리새인은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오긴 왔지만, 사실 그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만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성전에 감히 가까이 들어오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멀리 서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얼굴을 감히 들지 못하고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왜?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신령한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들어왔다고 다 하나님의 임재를 직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이렇게 이사야도 하나님을 뵐 때,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가 죄를 고백하자마자, 그 스랍 가운데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으로 가지고 와서 그것을 그 입에 대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보라 죄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다시 말하면, 죄를 고백하자마자, 회개를 하자마자, 사죄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의 제단으로부터 온 축복입니다. 사죄입니다. 이 하늘의 제단은 어떤 제단입니까? 성경을 읽어 보니, 세상 사람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그의 죽음으로 드린 하늘의 제단임이 틀림없습니다. 곧 속죄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지극히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 신령한 눈으로 보았고, 또한 그의 죄의 고백과 같이 사죄의 축복을 받아서 그때부터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누구나 오직 이런 경험을 통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에 대한 비전을 먼저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인간이 사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 앞에서 서게 될 때에, 내 자신을 살피면서 나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죄의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를 믿으므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이 길만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청년 이사야는 그 신령한 귀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명심하여 들으세요. 이렇게 새 사람이 된 후에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곧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번엔 들었습니다. 처음엔 보고, 그다음엔 체험했고, 이번엔 들었습니다. “들은즉 이르시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높이 들린 보좌로부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은은히 들려왔습니다. 일터를 놓고 일꾼을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여기 ‘우리’란 말은 여러 천사들과 같이 의논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고, 또는 삼위일체 간에, 곧 성부 성자 성신을 의미한다고 해석도 합니다. 하여간 여기에 일꾼을 부르는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이 있습니다. 분명한 부름의 소리가 있습니다. 긴급한 부름의 소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실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뵈었고, 또 그 앞에서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다음에는 신령한 귀가 열립니다. 전에 듣지 못하던 하나님의 음성 곧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일찍이 모세도 시내산 기슭에서 불타는 가시덤불만 본 것이 아닙니다. 불타는 가시덤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직감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 또한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간단히 말해서 애굽에 돌아가 내 백성을 구원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부름의 음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만 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방의 사도가 되어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다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뵈었습니까? 주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신령한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이 일터를 놓고 일꾼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삼천리 강산을 내려다보시면서 일꾼을 부르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이 많습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치산치수(治山治水), 산도 다스려야 하겠고 물도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산에는 나무를 심어야 하겠고, 하천을 개수하여야 하겠습니다. 길도 닦고 다리도 놓으며, 황무지라도 개척하여 식량도 증산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장도 세워 각종 물자도 생산하여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38선도 하루 속히 철폐하여야 하겠고, 통일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 땅에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다 할 일인데, 그 가운데도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위해서 꼭 하시기를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 땅 위에서 죄를 없이하고, 이 백성을 깨끗게 하며, 그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먼저 이루어지면 남북통일도 쉽게 될 것입니다. 또 이 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첫째 사명은 복음 전파입니다. 주님이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고, 온 유대에 미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5천만복음화의 기치를 높이 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으로 특별히 우리 한국에는 전도의 문을 크게 열어놓으시고, 일꾼을 부르십니다. 지금 우리 한국에서는 어디서나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학교, 공장, 군대, 감옥, 거리, 어디서나 크게 복음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큰 일터를 마련하여 놓고, 지금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십니다. 주님은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느니라” 무르익은 곡식밭을 보여주면서 우리 주님은 일꾼을 지금 부르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러분, 이사야가 이런 부름을 듣고 어떻게 응답하였습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곧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대답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말하면서 몸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부름에 따라 그 몸을, 그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주목하여 보세요. 이사야는 “내 옆에 있는 제사장이 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서기관이 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주님의 부르시는 이 음성을 듣습니까? 우리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혹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목사님들이 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는 분은 없습니까? 혹은 “권사님들이 잘 갑니다.” 하는 분은 없습니까? “여기 장로들이 있습니다.” 하는 분은 없습니까? 이사야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시옵소서” 혹 우리 가운데 갈 마음은 있으되 “지금은 못가겠습니다. 며칠 후에 가겠습니다.” 혹은 “몇 달 후에 가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이는 혹은 없습니까? 이사야는 그렇게 대답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곧 그 뜻은 “내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나를 곧 보내소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청년시대에 이 대답을 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예레미야도 젊은 시절, 소년시대에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 대답을 하였습니다. 요한도 청년시대에 이 부름을 듣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야고보도 젊은 시대에 이 부름을 듣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사실 기독교운동은 청년운동이었습니다. 모두 30세 내외의 청년들이 자신의 몸을 바쳐서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이 큰 구원의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물론 청년들도 많이 있습니다. 청년시대에 주님의 부르심을 분명히 듣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런 청년들과 같이 하십니다. 또한 우리 신교의 믿는 진리 가운데 아주 중요하고 특별히 강조하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평신도와 교직자의 구별이 없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그것은 마틴 루터가 강하게 주장한 대로, 누구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원리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교역자만 하나님의 일꾼인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우리는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그 직장에서 헌신하고, 복음의 전파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직업에 이미 착수하였든지 그 자리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하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또 헌신이란 온몸과 그 몸에 속하는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받은 재능이 있습니까? 재능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이 있습니까?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물질이 있습니까?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셨어요? 전도는 어떻게 생각해 보면 현대의 전쟁과 비슷합니다. 사실은 신령한 의미에서 전도는 마귀의 나라와 싸우는 것입니다. 현대 전쟁이 일어나면, 우선 공군이 동원이 되어서 적진에 가서 넓게 모조리 폭격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적의 진지를 파괴하고, 적진을 혼란시킵니다. 그다음에 또 어떻게 하는지 압니까? 해군이 동원됩니다. 적의 해안에 있는 요새를 집중해서 함포 사격합니다. 그래서 그 요새를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만 하였다고 전쟁에서 온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한 후에 온전한 승리는 공군과 해군의 공격이 있은 후에, 곧 육군이 상륙을 해서 일보일보 적의 진지를 점령하여야 온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의 전선이 이와 비슷합니다. 전도에도 공군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혹 공군의 폭격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가령 요샛말로 매스컴 전도입니다. 라디오 방송은 어디나 가서 떨어집니다. TV방송이나 많은 전도지와 전도 책자를 발간해서 뿌리면 어디나 떨어집니다. 마치 이것은 복음의 폭탄을 공군을 통해서 던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해군과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그건 뭔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여러분, 작년 여름에 빌리 그래함 대전도대회에 가보셨지요? 여의도 광장에 100여 만을 모아 놨습니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 한 분이 그들에게 일시에 복음의 폭탄을 던집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함포 사격이오. 이거 필요합니다. 이러한 전도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만 해서 온전히 승리를 거둡니까? 그건 아니란 말이오. 이렇게 한 후에 육군이 필요합니다. 보병이 필요합니다. 곧 십자군의 보병이 들어가서 생명 하나하나를 붙잡아서 개인적으로 상담을 하고, 교회로 인도를 하고, 계속해서 도와주어야 그 영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공군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해군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육군, 십자군의 보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다 빌리 그래함과 같은 전도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20세기에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가 다 그런 전도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하나가 십자군의 보병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영적 전쟁에도 온전한 승리는 이 보병이 거두는 것입니다. 찬송가의 한 가사와 같이 “천사같이 말 못하고 바울같이 못하나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십자군의 보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이사야와 같이 오늘 저녁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하면서 헌신을 해야 하겠습니다. 5천만복음화 전선에서 우리 하나하나는 십자군의 보병으로서 헌신을 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들으니, 지금은 우리 남한의 기독교인의 수가 거의 400만에 가깝다고 합니다. 금년에 우리 이 400만이 다 십자군의 보병이 되어서 한 사람씩만 맡아서 전도를 하면, 명년에는 그리스도인의 수가 이 땅 위에 800만이 됩니다. 명년에 이 800만이 또 다 십자군의 보병 노릇을 해서 한 사람씩만 구원한다고 할 것이면, 내명년 후에는 얼마가 되죠? 1,600만입니다. 내명년 후에 1,600만이 다 보병이 되어서 한 사람씩만 인도하면 3년 후에는 얼마나 되겠어요? 이 땅에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어요? 3,200만이 거의 다 되겠어요. 여러분, 이것을 복음의 연쇄반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원자탄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시지요? 어떻게 원자탄이 이런 위력을 발휘하는가? 원자탄에 한번 불꽃을 쳐넣으면 그것이 연쇄반응이 되어서 한꺼번에 힘을 나타낼 때에 무서울 만한 파괴의 힘을 나타내고야 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복음의 연쇄반응이 일어나려고 할 것이면, 제일 먼저 불을 붙이는 데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언제부터 5천만 우리 동포를 복음화하기 위해서 복음의 불길이 타오를 불을 붙여 놓아서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오늘 저녁부터 불을 붙여야 되겠습니다. 그렇잖아요? 오늘 저녁부터 불을 붙여야 되겠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 하나하나가 오늘 저녁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비록 빌리 그래함은 못 되어서 한 번에 몇만 명 구원할 수는 없지만, 내 이웃, 내 친척, 내가 아는 한 사람은 구원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우리가 다 이런 대답을 하고 헌신하면, 이 복음의 연쇄반응이 오늘 저녁부터 시작될 겁니다. 여러분이 다 이런 은혜 받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우리 지금 다 기도합시다. 이 시간, 신령한 눈을 열어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다. 여러분, 다 그렇게 할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우리 다 기도하십시다. 다 같이 일어나서 한번 기도하십시다. 다 같이 일어나서 주님의 부르는 음성을 우리가 들으십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한 3~4분 동안 기도하십시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8.15의 마음/ 하나님의 경륜/ 시126:1-6/ 한경직 목사/ 광복절설교/ 2014-08-23
8.15의 마음/ 하나님의 경륜 시126:1-6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一二六․一-二) 이 시는 해방의 노래올시다. 우리는 누가 이 아름다운 시를 지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정녕 이 시인은 바벨론에 잡혀갔다가 파사왕 고레스 때에 해방을 받아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 온 해방 받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만은 확실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가 꼭 어느 해에 지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예루살렘에 돌아온 수년 안에 지은 것만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해서 그 시인은 여기 옮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도릴 때에 꿈꾸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일 수 있을까? 너무 기뻐서 꿈꾸는 것 같으며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찼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느끼던 해방의 감격과 해방을 감사하는 지정이 여기에 여실히 차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시를 읽을 때에 자연히 十년 전 옛일인 처음 맞은 해방의 감격을 생각하게 됩니다. 一九四五년 八월 一五일 정오에 한국이 일제 아래서 해방을 받던 그 순간을 기억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 여러분의 생각을 돌이켜서 十년 전의 해방의 첫 뉴스를 듣던 순간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개인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저는 남 신의주 보린 원에 있었습니다. 그 때에 전쟁은 점점 절박하여 남 신의주 일대는 일본 군인들이 수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보리원 일부에도 일본 군인이 점령하고 병사로 사용하고 있었던 중이며 또한 그들이 우리에게 부탁하는 말이 아무래도 이곳은 위험하고 또 우리가 이 원사((院舍)를 전부 써야할 터이니까 속히 적당한 곳을 구해서 소개해 나가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八․一五날 아침에 제가 남 신의주 十五리 북편 서한 동에 자그마한 학교로 쓰던 어떤 집이 있어서 임시 보린 원을 그 곳에 옮길 수 있을까 해서 때마침 많이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그 곳을 갔다 왔습니다. 갔다가 집에 들어왔을 때 十二시 좀 지났는데 十二시에는 뉴스가 있다고 하여 들어오자 곧 라디오를 틀어 놓았습니다. 천만 뜻밖에도 일본이 포스탐 선언을 수락했다는 일본 방송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일본 국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잠깐 마지막 말만 들었으므로 혹 내가 잘못 듣지나 않았나 해서 마음 가운데 처음부터 들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위에서 보린 원에 있는 선생들이 그 방송을 처음부터 듣고 내려오면서 너무 기뻐서, 몇 달 전에 미국서 세상을 떠낫지만 김은혜 선생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우리 방에 모였던 몇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한 시간 쯤 후에 여러 사람이 신의주에서도 나오고 남 신의주에서도 나와서 감격에 찬 눈물 흘리면 기도했습니다. 그때 신의주에 들어가니까 모두 뒤숭숭한 가운데서 눈에 눈물을 머금고 기쁨과 감격과 감사 가운데 악수를 하면서 지낸 일이 지금도 생각됩니다. 그 때에는 누구든지 너무 감격하고 감사해서 무엇으로 은혜를 갚을 수가 있을까 하는 가운데서 그저 감격과 감사의 정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예배당에는 가득히 모여서 예배를 드린 것을 여러분이 다 생각하실 것입니다. 첫 八․一五는 무한한 감격과 감사의 지정으로써 우리가 맞았습니다. 이와 같은 무한한 감격과 감사는 자연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은혜의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보은 보답의 지정으로써 사람의 마음이 채워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라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신의주에 어떤 돈 많은 부인이 예배당에 다니기는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믿는 줄은 저는 몰랐지만 저에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제 앞으로 어느 장소를 가리키며 그 장소에 내가 전담에서 예배당을 지으려고 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마 그 후에 공산당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면 그 부인이 홀로 예배당 지었을 줄 믿습니다. 자기의 사재를 내서 학교를 짓고 평안 중학교를 우리가 인계해서 좋은 중학교로 만들겠다고 유지들을 찾아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든지 그 학교를 잘 해 나아가자고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재산을 드리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심정은 우리가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으니 어떻든지 이 은혜의 만분지일이라고 보답하자고 하는 감격이 있었고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 민족을 봉사하고자 하는 그런 심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실 그 때야말로 누구나 애국자였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나 나라 일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 나라를 바로 세울까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정치가요 만나는 사람마다 국가의 경륜을 발표하던 때입니다. 일본 사람 지사는 자기가 그 자리에 더 오래 있지 못할 것을 깨닫고 항복하는 날 곧 신의주 유지 몇 분을 청해서 자기는 이 자리에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으니까 당신 네 들이 이 앞으로 연합군이 들어올 때까지 치안을 유지하기 바란다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탁을 받고 몇 사람이 자치회를 조직하여 연합군이 들어올 때까지, 소련군이 들어올 때까지 치안 유지의 일을 담당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일본 사람들은 자기가 가졌던 무기를 다 내어놓았고 한국 사람들이 치안을 유지한다고 하지만 처음이니까 모든 것이 혼란했습니다. 그렇지마는 늘 감사해 하는 것은 자치해 나가는 동안에 어디서 도적놈이 도적질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그 때는 도적놈들도 다 애국자였었나 봅니다. 자치회로 있는 동안 제가 알기에는 범죄 사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마 그 때에는 어떤 사람이든지 어른이든 아이이든, 학생이든 선생이든,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감사와 감격의 지정으로써 마음이 순화되어 도적놈도 도적질 할 것을 잊어버리고, 협잡꾼도 협잡할 것을 잊고, 누구든지 바른 마음을 가지고 이제는 우리가 해방을 받았으니 어떻든지 나라를 바로 세워서 우리 자손 만대에 복을 누릴 수 있는 국가를 만들자는 그런 참된 애국심, 참된 감사의 생각, 봉사심으로 가득히 찼었습니다. 이것이 첫 八․一五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심정은 신의주 사람과 평안북도 사람만 가진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온 한국 十四도 三천만 민중이 꼭 같은 심정을 가진 줄 압니다. 여러분 기념이란 잊지 말고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내일이 우리는 해방 十주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해방 十주년을 기념할 때에 무엇보다도 첫 八․一五의 심정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심정을 대통령도 기억하고 어른 아이도 기억하고 이 심정을 학생도 선생도 기억하고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서울 운동장에 가는 사람이나 안가는 사람이나 누구든지 첫 八․一五의 참된 마음, 이 감격의 마음, 보은 보답의 심정, 진정한 애국의 신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헌데 십 년을 지낸 오늘 우리의 마음 가운데 첫 八․一五에 가졌던 우리의 참 애국심 그 때에 가졌던 참 회개의 마음 그 때에 가졌던 참 감격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몇 조각이나 남았습니까? 유감 된 것은 이렇게 감격한 가운데 첫 八․一五를 맞았지만 그 때의 감격은 점점 식어져서 사람마다 각각 자기를 자랑하고 사람마다 한국이 해방된 것이 마치 자기의 힘으로 된 것처럼 자기의 과거를 자랑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공산당들은 자기의 조국 소련이 한국을 해방해 주었다고 떠들었습니다. 남한에 있는 사람들도 마치 자기의 행적이 한국의 해방을 가져온 것처럼 떠드는 사람이 많게 되었습니다. 보은 보답의 생각은 점점 변해서 어떻게 하면 이권이나 좀 더 얻을까, 적산이나 점령할까. 어떻게 하면 이런 때에 내 무엇을 좀더 얻을까? 하는 이런 심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해방 된지 몇 달 후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하는 것 들은 것 지금까지 기억합니다. 그 때 서울에 적산이 여러 곳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적산이 여러 곳에 너무 많이 있으니까, 이 집 저 집 가보고 하다가 지금으로 말하면 매를 가지고 꿩을 잡으려 갔는데 꿩이 너무 여러 마리 되니까, 매가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어리둥절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과 만찬가지로 너무 적산도 많으니까 너무 얻을 이권도 많으니까 어떤 것을 얻어야 할지 모르는 이런 심정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애국심이란 어떻게 하면 내 당파를 많이 모아서 권세를 얻고 내 지위를 높여 볼까 하는 권세욕 정권욕 영도 욕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해방 十주년을 무엇 하려 기념합니까? 무엇으로 기념하겠습니까? 첫 八․一五의 심정은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는 이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 동포가 이 첫 八․一五의 심정을 그 애국심, 그 봉사의 마음 그 희생의 정신을 몇 분지 일이라도 가지고 내려왔던들 오늘날 이 사회가 이 모양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첫 八․一五의 마음을 회복하는 해방 十주년 기념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무명 이스라엘 시인이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다음에 三, 四절을 읽으면 기도가 있습니다.『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 』 이것이 무슨 기도인지 아세요.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읽으시는 분은 대강 짐작하실 줄 믿습니다. 바벨론에 잡혀가서 대략 七十년을 종노릇한 다음에 바벨론이 파사 제국에게 멸망을 당해서 파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다스리면서 포로로 잡아 왔던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마음대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성전을 지으라고 조서를 내렸던 것입니다. 조서를 내릴뿐더러 일찍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왔던 기명을 도로 내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가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격한 가운데 먼저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이 약四천 五백 명, 거기에 노비까지 합쳐서 약 五만 명이 제 일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이 시를 쓴 사람은 제일 먼저 돌아온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약 五만 명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시작하고 그 동안 황무(荒蕪)했던 전답의 개척도 시작했지마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네들은 이와 같이 가나안복지 시온성에 돌아왔지마는 아직까지 바벨론 하수 가에서 돌아오지 못한 포로인 자기의 동포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해서 이렇게 시온에 돌아와서 감격의 기쁨을 누리는 자기들로서, 자기들은 이렇게 돌아왔지만 아직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돌아오지 못하고 옛 바벨론에 흩어져 있는 자기의 동포를 잊을래 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께서 해방해 주신 은혜를 감격해서 노래하는 동시에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이시여 아직도 저곳에 포로가 많이 남아 있으니 그 사람들을 남방의 시내처럼 돌려보내 주소서 했습니다. 남방의 시내란 무슨 말인가 하면 유대 나라 남방은 물이 많지 못한 곳이지만 저 높은 산에서 눈이 녹게 되고 비라 오게 되면 갑자기 홍수가 되어서 물이 많이 내려가는 그런 곳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아직도 바벨론 하수 가에 돌아오지 못한 내 동포가 많으니 이 동포들을 남방의 하수가 콸콸 흘러 내려가는 것처럼 수백 수천 수만 명 한꺼번에 돌아오게 해 주소서. 이런 길을 열어주소서 하고 아직도 채 돌아오지 못한 포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가 해방 十주년을 맞이합니다. 적어도 우리 남한은 一九四八년에 완전히 독립이 되었고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온전히 자유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三八이북에 우리 동포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남한에 내려오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동포들, 지금은 내려오려고 해도 내려올 수 없는 동포들, 해방 十주년을 맞는 우리로서 잠시라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오직 가족까지도 맘놓고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심히 혹독한 정치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압박 가운데서 매일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해방 十주년을 맞는 우리가 한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첫 八․一五의 심정을 우리가 다시 회복하는 동시에 우리가 아직까지 자유를 얻지 못한 북한의 동포들을 위해서 여호와여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남한에 있는 하수처럼 자유를 주시고 해방을 주시 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이번 삼각산에 가서 기도할 때에 특별히 하루는『주여 조국을 구하여 주소서』하는 제목으로 하루 저녁 철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해방 十주년을 맞은 우리가 아직까지도 북한에 얽매어 있는 동포들을 해방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내일 八월 一五일은 특별히 북한에 있는 성도와 동포들을 하나님께서 十년 전 우리에게 해방 주시듯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기적적으로 해방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북한 동포의 해방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기적적으로 밖에는, 사람의 다른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이 아무리 강하고 연합군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지금 정세로는 북한 동포를 해방하기 위해서 전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북한 동포의 해방은 사람의 눈에 뛰어나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 의지해사 일어나는 기적적 해방이 있기 전에 사람 보기에 용의 한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또 우리 남한의 군대가 아무리 있다고 하지만 남한 군대만으로는 북한 동포를 해방하기 어려운 줄 압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여러 공산당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천지에 대 주재되시는 공의의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나타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음으로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께만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이 해방의 노래를 지은 사람이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둘째는 아직도 해방을 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셋째로 五-六절에 해방 받은 사람의 믿음과 확신 그리고 신념을 나타낸 글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했습니다. 여러분 이 시는, 처음 이스라엘 민족의 사정을 살필 때 말씀 드린 대로 몇 만 명이 먼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여러 이방인들이 이것을 다 반대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부흥되는 것을 거기에 살던 사람은 다 반대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반대 공작을 했습니다. 고레스 왕이 죽은 다음에 아가사스트 왕이 새로 임금이 되었는데 그 왕에게 이스라엘에 대해 무고한 고소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옛날부터 아주 패역한 도성이요, 유대 사람으로 말하면 언제든지 반역자요, 언제든지 어려운 일만 일으키는 이런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이 지금 와서 성정을 짓고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으려고 하는데, 이것을 그냥 허락해 두면 필연 이 사람들이 왕을 배반하고 큰 역적이 될 터인데, 이것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하고 새로 등용된 파사 왕에게 이렇게 무고한 고소를 했습니다. 새 왕은 자기 조상들이 어떻게 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 사람들의 말만 듣고 곧 일을 중지시키라는 명령을 파사 왕국에서 내렸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성전 지대를 놓고 굉장한 기공식과 정초 식을 거행했지만 그만 성전 건축은 중지되었습니다. 十五년 동안이나 중지되었습니다. 이렇게 원수가 많은 가운데서 전답을 찾아서 개척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울면서 들로 나가서 종자를 뿌리는 일입니다. 처음에 기쁨으로 돌아왔지마는 그 후 二十년을 눈물의 역사며 그야말로 탄식의 역사며 환난과 재앙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 때 해방을 받아 돌아온 민족이 확실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확실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 울면서 씨를 뿌리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고 하는 확실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처음 돌아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지만 이 모든 고생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뜨거운 날 김을 매는 것과 같아서, 먹을 것이 없지만 씨를 내 놓아서 종자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심히 어렵고 괴로워 환난과 원수가 많지마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반드시 이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고 기쁨으로 수확을 해서 단을 가지고 돌아올 때가 있을 것이라는 장래에 대한 굳은 신념과 소망을 가졌습니다. 우주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하여 다시 시온으로 오게 했습니다. 아무리 원수가 많고 환경이 어지럽다고 하지만 반드시 우리가 꾸준히 이 고생을 참고 나아가면 장래에 큰 수확이 있을 것이다. 지금 흘리는 눈물은 다 변해서 장차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는 기쁨이 될 것이라는 신념을 굳게 가졌습니다. 이것이 해방 十년을 맞는 우리 민족의 신념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랫동안 정부와 자유를 가지지 못했던 우리가 해방을 받아서 독립한 정부를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원수가 둘러싸고 이스라엘 민족의 발전을 방해한 것처럼 지금도 三八선 이북에서 악한 사람들이 우리의 독립과 자유를 방해하고 어떻든지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합니다. 三八선을 철폐하고 통일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六․二五를 지냈습니다. 많은 눈물도 흘렸고 울음도 울었습니다. 인명도 잃었습니다. 이 땅의 흘린 눈물, 이 땅에 흘린 피를 모으면 오히려 한강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믿는 것은 오늘날 흘리는 그 눈물 그 피는 다 종자로 심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종자가 나서 좋은 수확을 거두어서 이 앞으로 완전한 통일과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민주주의 나라로 꽃을 피울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신념으로 해방 제 十주년을 맞이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四十년간 일본 압제 아래서 있게 했습니다. 여기에는 큰 경륜이 있습니다. 이 경륜을 이루는데 여러 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하지마는 반드시 이룹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험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OMC 주제강의(04)/ 새 신자 목회(1)/ 눅5:32/ 하용조 목사/ 2008-09-04
OMC 주제강의(04)/ 새 신자 목회(1) 눅5:32 ◑새신자에 대한 관심이 있으십니까? ▶우리 주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의외로 예수님의 구원과 십자가에 대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도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가 싫어서 안 믿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실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눅5:32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과연 죄인들을 위하여 문을 열어놓고 있는가요? 아니면 예수 잘 믿는 성도들을 위한 교회인가요?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설교하십니까? 예수를 잘 믿고 있는 교인들을 위해서 주로 설교하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예수그리스도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많은 영혼들을 배려하면서 설교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교회건물은 예수 믿는 사람을 위한 건물입니까, 아니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만든 건물입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상대하지 않는 버려진 죄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 창녀들, 남편 다섯 있는 여자, 세리, 정신병자들, 불치병 환자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가 하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원히 문제가 있는 곳이 되어야 정상입니다. 항상 죄인들이, 미성숙한 자들이 오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싸우고 터지고 시끄럽습니다. 여기 근처 흑석동에 후배 한분이 목회를 하는데 <친구들 교회>라고 합니다. 그 곳에 거지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었는데, 1부에 4백명이 온다고 합니다. 거지들이 밥 먹으러 오는데, 얼마나 냄새가 나는지 모른답니다. 교통비 3천원도 주는데, 서울에 있는 거지들이 다 주일만 되면 그 교회로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2부는 본 교인들 200명이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제가 그 말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존 성도’들만의 교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왜 온누리교회 건물을 이렇게 만든 줄 아십니까? 보시면 이 강대상, 소위 무대를 네 번 정도 바꿨습니다. 왜 이런 무대를 만든 줄 아십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위하여 입니다. 너무 종교적인 무대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우선 거부감을 느낍니다.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제일 인기 있는 장소가 어딘지 아십니까? 커피숍이에요. 안 믿는 사람이 익숙한 공간이거든요. ‘성전’ 그러면 그들이 두렵기도 하고, 거부감을 느낍니다. 성전에 들어가면 죄인 같거든요. 오래 못 앉아 있는 것이지요. 또 우리 교회에서 제일 인기 있는 공간이 BOOK SHOP(북 카페)입니다. 예수 처음 믿는 사람, 어색한 사람들이 와서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제 목회철학입니다. 저희 교회는 카페트를 깔았는데 새 건물에 가서 보시면, 교회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실 겁니다. 제 목적은 교회 같지 않은 건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옛날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는 교회 같은 건물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90년대 넘어가면서부터 사회 모든 분위기가 달라져가면서 사람들은, ‘교회 같은 교회는 노인네나 가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영국교회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영국에 갔더니, 데니스 레인 목사님이 유년 주일학교 다니던 교회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고색창연하고, 아주 좋은 건물이었는데 너무 답답하고 어두워서 들어가기도 싫었습니다. “이것 좀 확 뜯어가지고 고치지요?” 그랬더니 historian들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소위 말하면 우리나라도 정동채플은 못 고치지 않습니까? 문화재니까요. 교회는 문화재가, 박물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문화재로서 보존 가치가 아니라면.. 저는 교회를 너무 교회답게 꾸미는 것에 반대합니다. 심지어 영국의 어떤 교회는 디스코텍으로 변하더라고요. 교회 부동산이 팔려서 술집으로, 디스코텍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교회면 무엇합니까? 그 시대에 기능을 못하면 디스코텍, 술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새신자는 안 오고, 기존신자만 오다가.. 그 세대가 다 소천하면.. 팔리는 것입니다. ▶우선 저는 교회하기에 제일 좋은 건물을 공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항은 불특정 다수가 좋아하는 공간입니다. 전 공항에 갈 때마다, 거기서 설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그 곳, 조금 높은 무대 위에 올라가서 설교하면 기가 막히겠더라고요.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죄인(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목사의 설교의 많은 부분은 죄인들을 위한, 그들을 초청하고 위로하는, 그들은 격려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그런 설교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초신자들을 위한 설교는 하지 않습니다. 예수 오래 믿은 사람들을 위한 설교를 하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그 사람들을 감동시킨다고 하는 것은, 자기 부인 감동시키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뻔하기 때문입니다. ‘에이! 당신이나 잘하지...’ 그러니까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교인은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신자들은.. 설교하면 감동합니다. ▶집에는 며느리가 있어서, 애를 낳아야 합니다. 노인네들만 살면.. 키울 아기도 없어서.. 재미가 없고 우울합니다. 아들이 장가가고 며느리가 들어와서 아기를 낳은 것입니다. 아기가 빽빽거리고 똥 싸고 오줌 싸고.. 할아버지 할머님들이 그걸 닦으러 다니면서도, 입이 이렇게 찢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언제 건강해지느냐? 죄인들이 있을 때입니다. 초신자들이 있을 때, 빽뺵거리고 사고치고... 이런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싸우지 않습니다. 교회가 왜 싸웁니까? 싸우는 교회는 거의 보면 전도 안하는 교회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새신자가 없거든요. 새신자가 있으면요? 할아버지 할머니.. 못 싸웁니다. 기신자들은 새신자들 볼까봐 창피해서 싸우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기신자(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새신자 돌보느라 바빠서, 싸울 여력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새신자가 많기를 바랍니다. 새신자가 많은 방법은 간단하지요. 새신자가 좋아하는 교회를 만들면 됩니다. 교회는 힘 있는 사람이 다 맘대로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다 장로님하고 목사님 아닙니까? 장로님 목사님 나이들이 다 몇입니까? 목사님들은 좀 젊지만, 장로님들 나이가 보통 평균... 거의 60이라고 봅시다. 그러면 교회 칼라를 누가 선택할까요? 장로님이 좋아하는 칼라를 선택하겠죠. 그러면 신세대들이 좋아할까요, 안할까요? 안하죠. 무슨 소리입니까? 신세대는 오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60대 되신 분들은 미래를 지향하는 사람입니까?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입니까? 그래서 교회는 자꾸 과거 지향적으로 변합니다. 60대 그들은 안전주의로 갑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교회를 모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실수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라는 소리가 많겠습니까? 하지 말라는 소리가 많겠습니까? 하지 말라는 소리가 많죠.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고... 그럼 무엇을 합니까? 아무것도 안하면 되지요. 교회는 모험해야 합니다. 젊은 여자가 아기를 낳습니까, 늙은 여자가 아기를 낳습니까? 아기는 젊은 여자가 낳는 거예요. 교회는 젊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이 젊어야 합니다. 모험적이고 도전적이어야 합니다. 신세대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자라죠. 여러분의 나이에, 취향에 맞는 것을 하게 되면 교회는 끝난 것입니다. 미래가 안 보이는 거지요. ◑섬기는 게 체질인 교회 ▶예수님은 죄인들을 섬기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막10:45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섬기는데 있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왜 문제가 불거지는 줄 아십니까? 오래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교회에 왜 문제가 되는 줄 아십니까? 그 곳이 자기 그라운드니까 그렇습니다. 누가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 이상 되거나, 더 수준 있는 사람은 교회에 못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면 발로 차 버리거든요. 왜요? 자기영역이 무너지니까요. 자기 수준 정도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님들! 여러분 이상의 목회는 안 됩니다. 그거 아십니까? 여러분의 수준 이상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설교 수준을 높이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목회 역량을 더 크게 만들어야 됩니다. 다 자기 그릇입니다. 그릇이 크면 물은 많이 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릇이 작으면 아무리 담아도 쏟아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남 원망하지 마세요. 역량을 키우세요. 인격도 키우시고, 그릇도 키워야 많이 담길 것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의 존재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든 장로님이나 목사님들은 섬김을 받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의 주제곡이 있죠. ‘섭섭하다’입니다. 왜 섭섭합니까? 자기를 인정 안 해줬다는 겁니다. 자기를 무시했다는 거죠. ‘왜 이일 시켰다 저일 시켰다 그러냐?’ ‘왜 나 안 알아주느냐?, 내 이름은 왜 뒤로 빠졌느냐?’ 전부 그런 얘기입니다. 별 거 없어요. 여러분! 섭섭하다는 것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섬김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공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잊혀진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이 교회에선 내 목소리가 커야 된다. 내가 결정해야 된다는 거죠. 자아가 깨어지지 못한 분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교회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미숙하게.. 조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잘 가르치면.. 그런 일이 점점 줄어들겠죠. 저희 교회요? 금년부터 당회를 바꿨습니다. 우리 교회에 장로님들이 많으십니다. 하지만 교회 의사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모두7명입니다. 다 맡겼어요. ‘당신이 결정하나 내가 결정하나 똑같다’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내가 결정해야만 결정이고,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당회는, 실행위원 일곱 분에게 당회 모든 결정권을 다 드렸습니다. 그분들이 결정하면 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장로님들은 다 <섬기는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한국교회 지도자 세미나 축제를 하는데, 제가 참석자 여러분께 ‘이번 축제에서 제일 좋은 게 뭐냐?’고 물었더니 많은 분들이 ‘교인들이 기쁘게 세미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변소 청소하고, 인사하고, 참석자들이 제일 은혜 받은 것이 ‘할 일 없이 서 있는 것’에서 사람도 많이 안 찾는 자리인데도, 그냥 자기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은혜를 받으셨답니다. 여러분 오늘 안내 하신 분 가운데 총장님 사모님도 계시고, 그렇게 허술해 보여도 함부로 보지 마십시오. 다 굉장한 분들이 지금 저기 서 있는 겁니다. 그분들 다 휴가내고, 자기 전문직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렇게 오셨습니다. 그저 한가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다 바쁜 사람들이고 자기 전공이 있는 분들입니다. 이번 기간에 특별히 시간을 마련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여러분을 위하여! 그러고 왔습니다. 섬기는 걸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제가 보았습니다. 섬기면서 제일 기뻐하는 사람들은, 여러분이 아니고, 자기들이랍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섬기는 자신들이 고생이 아니라 더 기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뭐하기 위해 존재한다고요?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제일 보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교인들이 서로 안 싸우는 겁니다. ‘야~ 저 사람들은 서로 사랑한다... 저렇게 실수하는데도 용서하는 구나!’ 그걸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에게는 공의가 있고, 사랑도 있습니다만, 그 공의는, 사랑하기 위한 공의입니다. 죽이는 공의가 아닙니다. 정의감에 예민한 사람들 조심하세요. 정의로 따진다면 당신이 먼저 죽어야 됩니다. 당신이 말하는 정의에 당신이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도 너무 정의 외치지 마세요. 우리 문민정부 시절에 5년 동안 사정했습니다. 된 게 뭐가 있습니까? 사정하고 개혁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물은 흐르게 놔 두세요. 흙탕물 깨끗하게 만든다고 휘젓지 마세요. 그냥 놔두세요. 그러면 물이 흘러가면서 저절로 깨끗해집니다.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OMC 주제강의(04)/ 새 신자 목회(2)/ 눅19:10/ 하용조 목사/ 2009-08-12
OMC 주제강의(04)/ 새 신자 목회(2) 눅19:10 ◑한 영혼에 대한 관심과 눈물 ▶눅19:10에 보면 삭개오 얘기가 나옵니다.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던 삭개오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돈은 있지만 외로운 사람, 권력은 있지만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는 그런 사람, 겉으로는 강하게 보이지만 속으론 약한 사람.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을 이해해줬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다 싫어했습니다. 그 사람과 예수님이 만나는 것 자체도 자존심 상해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을 선택해서 만나고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은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회의 자존심을 위해서.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있었지만 그 집에 간 것이지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 교회 안에 잃어버린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잊혀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새사람을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 왔다 떠난 사람들을 다시 찾아야 됩니다. 상처받고 실망하고, 떠난 사람이 얼마나 주변에 많습니까? 여러분, 모든 교회는 다 똑같습니다. 교회에 새사람이 오는 것이 떨어진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새신자는 계속 옵니다. 문제는 뒷문으로 계속 빠져나가서 그렇지.. 새사람은 언제든지 옵니다. 전도 안 해도 옵니다. 그 사람들을 붙잡지 못한 게 문제인 것이지요. 또 하나, 그 사람들을 찾지 않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설교일 수도 있습니다. 설교가 잘못돼서 설교가 듣기 싫어 간 사람도 있고, 사람 보기 싫어서 간 사람도 있고 뭔가 교회가 못 마땅한 것입니다. 그것을 정직하게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쳐야 합니다. 왜요? 한 영혼을 위하여. 한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영혼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이 열정 때문에! ▶요10:10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려고 온 것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풍성한 삶을 주기 위하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양육이죠. 전도한 사람들을 어떻게 풍성한 꼴을 먹이고 살게 하는 것, 이것이 교회죠. 성경은 하나님으로 한 마디로 말하면 father\\\\\\\'s heart. 아버지의 마음이에요. 만약에 여러분이 성경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 그것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탕자가 있죠. 진짜 탕자는 첫째 아들이죠. 둘째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탕자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과 착각에 빠집니다. 우리 한국교회를 보면 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집 나간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는 그 집 나간 아들 때문에 그렇게 마음 아파하고 잠을 못 주무시는 겁니다. 문을 열어놓고 밤마다 뜬 눈으로 세우고 기다리는 거에요. 언제 그 아들이 올지... 나는 한국 교회를 보면서 그걸 느낍니다. 온누리 교회를 보면서 그걸 느낍니다. 온누리 교회가 97년도에 5부 예배 드리는 것 보고, 주님이 마냥 기뻐하실까요? ‘하나님, 우리 이렇게 집 잘 지었습니다. 5부 예배까지 드립니다. 우리는 만명이 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부정은 안 하실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크게 칭찬도 안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마음’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잃어버린 아들 걱정’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 97년도에) 한국은 밤에 보면 십자가의 꽃이 핀 나라입니다. 저는 한 상가 건물에 교회가 4, 5개 있는 걸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거 욕하지 마세요.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한국은 이렇게 교인이 많은데, 한 빌딩에도 서너 개가 있는데, 일본에 가 보세요. 없어요. 교회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에 가 보세요. 판잣집 교회도 없습니다. 교회가 씨가 말랐습니다. 이거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금년부터 우리교회 5부예배 드리게 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좋긴 좋다.. 그러나.. ’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거기 없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은 ‘동남아시아를 봐라, 일본을 봐라, 내 마음은 거기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은 거기 있다.’ 여러분!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아들의 효도는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갖는 것입니다. 동남아와 일본의 영혼들을 위해서, 염려하며, 그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많이 모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요.. ▶여러분 교회는 말이죠, 제가 보니까 한 2~3년 지나면 전통이 생깁니다. 50년 넘은 교회치고 부흥하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통 유지하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왜 대대로 예수 믿은 사람끼리 모여 예배드리는 겁니까? 새신자 오는 것도 귀찮아 하더라고요. 왜요? 자기들의 전통이 깨지니까. 새로운 분위기로 가는 게 싫다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가 믿었던 교회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이 교회를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 오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혼자라도 지킬 테니까! 그러니까 교회가 안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pen 안에 있는 99마리 양의 가치는, 잃어버린 1마리의 양과 같은 것입니다. 99는 1과 같은 거예요. 하나님은 숫자를 보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보시는 것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눈물, 애통, 몸부림,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루어도 그걸 하자. 바로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당신은 목회자가 맞습니다. 없으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금년에 저희 교회가 <열린 예배>를 시작했는데. 시작한 게 바로 그겁니다. 예산을 열린 예배에 많이 주자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전도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윌로우 크릭 교회를 가면서 늘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게 있어요. 그건 빌 하이블스라는 목사님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무슨 감동을 그렇게 주었는가? 그 양반이 기계같이 눈물을 흘리는 때가 있더라고요. 내내 안 울다가, 보통 때는 정신이 말똥말똥하다가 ‘예수를 믿지 않는 영혼’이라는 말만 시작하면 눈물이 핑 돌아요. 코가 시큰해요. 그래서 항상 코를 탁 만지더라고요. ‘예수 믿지 않는 한 영혼’을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는 목사가 몇 명이나 있나요? 주변에 별로 없어요. 전도 안 한다고 야단하는 목사는 있어도 전도하자고 소리 지르는 목사는 있어도 ‘예수 믿지 않는 영혼’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목사는 없더라고요. 이것이 교회요, 아버지의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로 한 것은 바로 이 눈물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 예수 믿지 못해서 방황하고 절망하고 자살하고 죽어가는 한 영혼, 내가 그 사람에게 예수만 줬더라면 저 사람은 저렇게 안 살았을 텐데.. 우리 교회가 저 사람한테 실족시키지만 않았더라면 저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우리 교회가 조금 무성의하고 부주의해서 한 영혼을 잃어버렸다면 말이죠) 여러분! 한 영혼을 잃어버리면 연자 맷돌을 메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이렇게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 저는 윌로우 크릭의 용기에 정말 감동을 합니다. 한 영혼을 위하여 그들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누가 뭐라 그래도 전통이 뭐라 그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 영혼을 사랑하는 모험을 한 것입니다. ▶작년에 우리가 그 교회에 갔을 때, 감동적인 얘길 하나 들었습니다. 그 교회가 20주년때 교인들이 큰 체육관에 다 모였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들은 전지(전구)를 하나씩 가져오라 그랬대요. 모든 행사와 프로그램이 끝나고, 설교가 끝나고, 전깃불을 다 껐답니다. 그리고 이런 광고를 했답니다. “윌로우 크릭 교회에 와서, 처음 예수 믿은 사람은 불을 키십시오.” 85%가 그 불을 켜고 서로가 울었대요. 그 말을 전해 준 사람도 그 말할 때 눈물이 글썽거리더라고요. 85%가 이 교회에 와서 예수 믿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다른 교회 가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 올 사람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 와라! 그 사람을 위한 목회를 하겠다! 그 사람을 위한 설교를 하겠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겠다! 그런 사람을 위한 성경 공부를 만들겠다!’ 는 하나의 신앙 고백이죠. 여기에 우리가 잃어버렸던 감동이 있더라고요. 제가 거기 가서 많이 울었습니다. 왠 줄 아십니까? 온누리 교회는 전도 안 해도 사람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교인들이 전도의 심각성을 몰라. 전도 안 해도, 가만있어도 1년에 3500명이 문을 두드려요. 등록을 시도하는 사람이 한 3500명이에요. 7주 과정을 마치는 사람들이 보통 1500-1800명, 1년에 그렇게 등록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회개할 게 하나 있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꾸 희박해져요. 누가 그랬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서울역 현상’이 있다고. 너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니까 사람 귀한 줄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그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윌로우 크릭 교회에 가서 한 대 얻어맞았습니다. “너 뭐하고 있냐?” 온누리 교회는 그러고 보니까 소문난 교회더라고요. 내용은 없더라고요. 우리는 가진 것 보다 소문난 게 많더라고요. ‘실질적으로 우리 교인 한 분 한 분의 영혼을 사랑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가?’ 그렇게 질문하니까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없었던 겁니다. 제가 그래서 많이 울었습니다. ‘하나님 온누리 교회는 부끄러운 교회입니다. 겉치장이 많은 교회입니다. 소문이 많이 난 교회입니다. 교인 하나하나가 영혼을 사랑하고 전도하는.. 그런 눈물이 우리는 없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선교사는 보냈는데, 개인 전도를 많이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죠. 여러분 목사님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 만날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다 매일 예수 믿는 사람만 만나요. 그래서 중요한 건 평신도들입니다. 평신도가 스타예요. 여러분! 농구 코트에서 뛰는 사람은 목사가 아닙니다. 평신도가 뛰는 거예요. 그들은 매일 세상에서 예수 안 믿는 사람 만나거든요. 그들이 세상을 변화 시킵니다. ◑구도자 seeker에 대한 관심 ▶두 번째 생각 할 주제는, 특별히 불신자에게도 관심을 갖지만, 교회는 구도자(seekers)에게 관심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도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은 있지만,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될지 모른다든지, 교회에 대해서 아직도 부정적이라든지, 시험에 들었다든지 하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에게 교회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정신 차리고 조금만 태도를 바꾸고, 조금만 말을 바꾸고, 조금만 설교를 바꾸고, 조금만 교회를 바꾸면 그들은 얼마든지 교회에 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교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제거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가운데는 ‘교회는 맨날 헌금만 하라 그런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기분 나빠서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게 할 수 있는 설교를 할 것인가요? 생각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여러분들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교회가 전도’라는 생각입니다. 전도에 대한 교회의 관점에 많이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빌리 그래함 같으신 분들은 대중 전도, TV전도를 하신 분입니다. 우리나라 부흥회, 사경회도,,, 부흥사들이 다 그런 분들이죠. 이렇게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런 전도 시절이 있었고 또 하나는 ‘개인전도’가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CCC나 네비게이토나 또는 브릿지나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개인전도하는 훈련이 한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저도 그렇게 훈련을 받고 자란 사람인데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건 ‘즉석 도너츠’더라고요. 사람을 만나면 ‘5분만 시간 있습니까?’라고 한 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생애를 향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모를까요?’ 그래서 ‘나를 따라 하시겠습니까?’ 기도해서 예수 믿으면, ‘당신에게 오늘 구원이 임했습니다. 내일부터 교회에 가십시요.’ 이렇게 해서 교회에 데리고 가는 것이지요. 참 좋은 전도법이죠. 저는 이 전도 프로그램으로 수지를 무지무지하게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도 만나 봤고요.. 별 사람을 제가 많이 만나 봤습니다. 그렇게 개인 전도를 많이 한 때가 있었습니다. 또 이것을 교회적으로 사용한 사람이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 폭발’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새로운 축복을 주셨는데 교회 안에 전도부가 있는 게 아니라 ‘교회가 전도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예수 믿지 않는 세계를 뚫고 들어가는 교회의 모든 philosophy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당회나 교육부, 문화부, 전도부 그런 게 아니라 교회 전체가 전도라는 것이죠. 잃어버린 영혼, 죽어가는 영혼, 죄인들을 위하여 교회는 존재한다라고 생각하고 교회 예배도 그렇고 모든 것을 전도라는 것에 초점을 모아 가지고 목회를 하는 이런 철학을 가진 교회들이 바로 ‘구도자 예배 seekers service’를 드리는 그런 교회들이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들백이나 윌로우 크릭들은 전부 그런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대를 다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교회 프로그램도 전부 바꿔버려요. 누구를 위하여? seeker들을 위하여 그들이 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 은혜 받도록! 여기에 초점을 모아보는 것입니다.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OMC 주제강의(09)/ 참된 설교/ 빌2:6-8/ 하용조 목사/ 2009-08-02
OMC 주제강의(09)/ 참된 설교 빌2:6-8 ◑설교에 따라.. 교회가, 성도가 조각되어집니다. ▶예배가 교회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 교회, 그리스도의 몸에서 예배가 잘 드려지면 심장이 잘 뛰는 것과 같습니다. 심장이 잘 뛰면 모세혈관에까지 공급이 잘되는 거죠. 병이 들어도 상관이 없어요. 피만 순환이 되면 다 회복이 되는 거예요. 병이라는 게 뭐냐 하면 혈액순환이 잘 안되기 때문에, 혈액이 가야할 곳까지 못가면.. 계속 그렇게 되면.. 결국 곪게 되는 거죠. 예배가 잘 드려지면.. 교회 부분, 부분 구석구석까지 살아납니다. 설교는 예배의 심장과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예배가 살아납니다. 물론 찬양을 많이 불러도 예배가 되고, 기도가 많이 돼도 예배가 되지만 그 예배의 KEY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죠.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렇죠? 하나님은 육이 아니세요. 시간과 공간 안에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세요.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그 임재를 어떻게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을 느끼는 거죠.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외우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적용하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죠. 말씀은 말씀 그대로 전달이 안 돼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야만 우리가 느끼고, 그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있어서는 말씀의 사역보다 더 중요한 사역이 없고 목회자의 부름은 말씀으로의 부름이에요. 제일 중요한 것이에요. 어떤 설교를 하느냐가.. 어떤 교회를 만드느냐를 결정합니다. 나중에 지나보면.. 설교한 방향으로.. 교회가 조각되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그 설교 속에는 여러분 교회의 비전도 있고 색깔도 있고, 그림도 있고, 크기도 있어요. 여러분이 어떻게 성도들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그 성도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설교란.. 들리는 만큼 모입니다. ▶굉장히 성실하다고.. 목회가 잘되지는 않아요. 실력 있다고 목회 잘하는 것 아니에요. 굉장히 성실하고 실력이 있어도.. 목회가 안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사이즈가지고 고민하지 마십시오. 사이즈 가지고 여러분의 인격을 결정하지 마세요. 작을 수 도 있고 클 수도 있다는 거예요. 저는 오늘 아침에 조성록 장로님의 간증을 통해서 제가 굉장히 은혜를 받았어요. 비록 교인이 10명이라도, 그 고통스러운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게 은혜요, 축복이라고요. 그리고도 계속해서6년 동안 버텼다는 것, 이게 기적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하나님은 누구를 더 칭찬하시겠어요? 교인이 많다고, 사역이 많다고.. 하나님은 그를 높이 점수 줄까요? 안 그래요. 많거나/적거나.. 그가 진실하고 충성되면 상 주실 것이고.. 그런 거예요. ▶그렇지만 어떤 분들은 설교의 gift(은사)를 하나님이 준 분이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하나의 gift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은사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얘기하면 똑같은 얘기라도 재미있게 얘기하는 분이 있고, 간결하게 얘기하는 분이 있고 그렿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어떤 사람 설교 들어보면 빤한 설교가 있어요. 한 서너 번 들어보면 뻔한 거예요. 뻔하면 졸지요. 뭐가 이렇게 기대감이 있고.. ‘다음에 무슨 얘기 하지?’ 그래야 듣지요. 이번 주 설교 끝나면, 다음 주 빨리 와야 되는데.. 설교는 어떻게 보면 연속극 같더라고요. 뻔히 아는 얘기죠. 연속극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다 아는 얘기면서도.. 그러나 연속성을 가져요. 그 드라마도 기승전결이 있어요. 거기에 웃음도 있고, 흥분도 있고, 기쁨도 있고, 감격도 있고 그러면서도 그 드라마 끝날 때는 다음 드라마 안보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모래시계 드라마> 끝날 때는 서울 시내가 다 한산했잖아요? 여러분의 설교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 끝나자마자 그 다음 설교 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교는 단회적이면 안되겠죠. 오늘은 이 설교, 다음 주는 이 설교, (신약 구약 왔다 갔다 하면.. 일년 지나고 나서 보면.. 무슨 설교 했는지 몰라요.) 드라마처럼 이렇게 연속성이 있어야 돼요.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단회성이 있어야 돼요. 다음 설교를 기대하게 하고.. 그 다음 설교를 기대하게 하고., 그래서 여행도 못가요. 그 설교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거 빠지면 큰 일 나니까요. 그렇게 열심히 들어주시는 성도님들도 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사람들의 주먹이 쥐어져야 해요. 가슴이 두근거려야 되고, 흥분이 되고 눈물이 나고, 끝나자마자 ‘그래 오늘 나는 내가 바뀌어져야 돼!’ 그러고.. 이렇게 끝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설교는 들리는 것만큼.. 사람이 모이는 법이죠. 여러분 목회자들이 서울에서 설교하셨어요. 그 설교 테이프가 미국까지 가면 여러분의 성도는 어디까지 있어요? 미국까지 있는 거죠. 1997년 당시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인터넷으로 더 쉽게 갑니다. 장소는 별 의미가 없어요. 이제 테이프로 다 돌아다니니까요. 그때 테이프를 돌려서 들었습니다. 설교는 예배의 심장과 같다고 그랬어요. 따라서 설교가 살아있으면.. 생명력이 있으면.. 설교에 성령이 기름 부으시면.. 예배전체는 살아나게 돼 있어요. 조금 성가대 잘 못해도.. 조금 어수선해도.. 말씀에 은혜가 있으면 다 살아나게 돼 있어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좋은 걸 하나 배웠어요. 설교를 잘하면.. 뭐든지 다 용서해요. 그러나 설교를 잘 못하면.. 용서 안 해요. 그게 설교더라고요. ※미녀는 다 용서받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설교자에게는 ‘설교’입니다. 설교를 하면 교회 전체가 다 이렇게 은혜의 단비를 맞는 것 같아요. 나는 여러분의 설교에 기름 부으심이 있게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설교에 능력을 얻게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설교가 살아 움직이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이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설교자가 아니었으면 몰라도, 설교자로 하나님이 불러주셨으면 죽을 각오를 하고 뚫으십시오. ▶하여튼 설교는 몸 안에 들어와야 돼요. 머리 안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하이라이트 단락1 몸 안으로 들어야 돼요.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몸 안에 들어온 얘기는 언제 어느 때나 나와요. 원고 필요 없어요. 스위치만 틀면 나오는 거예요. 똑 같은 설교를 5분에 할 수도 있고, 1시간에 할 수도 있고, 하루 종일 할 수도 있어요. 자기 몸 안에 완전히 설교가 들어와 있어야 되지요. (평소 삶에 복음적으로 살아야 .. 설교가 몸에 배이게 됩니다.) 여러분 설교는 죽은 영혼을 살린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6:63 여러분 제가 설교할 때는, 사람의 이성에 호소 안 해요. 이성이라는 과정이 필요하죠. 논리적인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듣지요. 논리가 없으면 안 들어요. 한 얘기 또 하고, 이 얘기 했다, 저 얘기 했다.. 그러면 잘 안 들어요. 그러나 제가 설교를 할 때는, 그 사람의 영에 설교를 하지 이성에 호소 안 한다고요. 영에다 설교를 하면 죽어있는 영혼들이 살아나는 것이 보여요. 얼굴에 그게 나타나요. 들어올 때는 죽은 얼굴이었다가.. 설교 들으면 산 얼굴로 나간다고요. 너무너무 좋아한다고요. 그건 이성이 설득된 것이 아니에요. 내 영이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골수와 관절을 쪼갠다는 말이죠. 영이 살면.. 육이 살아요. 따라서 여러분 육을 기쁘게 하는 설교나, 인간의 혼을 기쁘게 하는 설교는, 그것으로 끝나버려요.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나 spirit 영을, 영으로 설교하고, 영에게 설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설교란 incarnation 육화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incarnation, 육화란.. (원래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말씀이 내 삶에서 육화되어야 한다\\\\\\\'.. 는 뜻입니다. 내가 말씀을 먼저 살아내고.. 그 내용을 설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1. Incarnation (육화) 그는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6 하나님이 인간과 같이 된 것을 가리켜 ‘성육신’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거 아닙니까? 설교란 그런 거예요.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몸 안으로 incarnate 되어야 돼요. 말씀이 내 몸 속에 incarnation, 성육신이 되는 게 설교예요. 이 말씀이 통째로 내 몸 안에 육신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래서 내 이성으로, 내 언어로, 내 몸으로.. 내 삶으로 이 설교가 표현되어야 해요. 절규하는 사람이, 아주 한이 맺히는 사람이, 이혼당하고, 매 맞고 쫓겨나고 이런 사람보고 ‘남편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오’ 하면 두 시간 세 시간 거품 물면서 이야기해요, 너무 분해서... 그게 설교예요. 예수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데.. 어찌 흥분을 안 합니까? 어떻게 그렇게 맹숭맹숭하게 그 얘기를 해요? 그것도 기적이지... 아니 어떻게 교인을 졸게 해요? 그것도 기적이지... 복음을 가지고 말이죠. 한이 맺힌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젖어버린 사람들은 십자가 얘기만 하면 흥분하는 거예요. 쏟아지는 거예요. 막 쏟아지는 거예요. incarnation됐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의 설교가 incarnation되기를 바랍니다. ▶2. Identification (동일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일단 나와 동일화가 되어야 해요.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어요. 그 예수님이 인간과 identification(동일화)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도 잘 알지만, 인간도 잘 알아요. 설교자는 두 대상을 다 잘 알아야 돼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익숙해야 돼요. 동시에 인간을 알아야 돼요. 언어도.. 그냥 콩나물 장사가 얘기하는 것 같이 시장바닥에서 보통 얘기하듯이 그런 아주 생활적인 얘기를 써야지, 설교는 문어체 쓰면 안 돼요. 구어체를 써야 돼요. 그냥 생활언어! 예화도 그래요. 1800년대 나폴레옹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오늘 개똥이 엄마가 겪었던 것. 그런 거예요. 오늘 내가 설사 나서 생겼던 것, 밤 잠 못 잤던 것, 특별히 사람들은 설교를 할 때 피상적인 설교를 해요. 그렇지 않아요? 설교는 인간의 내면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돼요. 사람들은 자기 내면 속은 다 감추고 있거든요. 그 인간의 허구성, 위선, 죄성, 비밀.. 여기는 어마어마한 세계예요. 그 세계를 예리하게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말씀가지고.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냐 하면 캄캄한 방에 전기 불을 들고 찾아가는 것과 똑 같아요. 이 문 열어보고 저 문 열어보면 거기에 인간의 질투, 간계, 인간의 두 얼굴, 인간의 욕심, 인간의 음욕, 인간의 위선 이런 것들이 얼마나 멋지게 포장되어 있는데.., 그걸 다 풀어버리는 거예요. 자, 하나씩 하나씩 풀면.. 까무라치게 놀라죠. 그럼 뭐라고 그럴까요? \\\\\\\'목사님이 내 얘기하지..\\\\\\\' 그런다고요. 내가 언제 당신을 아오? 모르죠! 그런데 왜 그게 내 얘기처럼 들리느냐? 내 속의 비밀을 파헤쳤기 때문에, 그 내 속의 비밀은 나의 비밀이죠. 이렇게 설교는, 내면을 파고 들어가야죠. 겉에는 불을 켜고 있지만.. 인간의 내면 안에는 다 전기불 끄고 있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껍데기를 깨고..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죠! 여러분은 텔레비전 해설가가 아니라고요. 정치해설가도 아니고, 경제해설가도 아니예요. 조심하세요. 회중석에는 전문가들이 다 앉아있다고요. 정치 얘기 함부로 하지 말고, 경제 얘기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내가 전할 수 있는 메시지는 성경밖에 없어요. 성경 외에 넘어가지 마세요. 이게 우리의 전공이고, 우리가 전해야할 메시지예요. 왜냐하면 이 성경은 작은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까지 연결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고, 그리고 천국까지 가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것은 박사 아닌, 박사 할아버지라도 세상의 어떤 전문가라도 이 말씀은 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이런 설교자의 영적권위와 확신과 confidence 자신감이 있을 때 이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자신감이 있으면 말이 쉬워집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말이 어려워집니다. 제가 하나 배운 게 있어요. 설교 준비 안하면 말tone이 높아집니다. 괜히 소리를 지릅니다. 준비 많이 한 사람은 소리 지를 것 없어요. 또 했던 말 되풀이도 안 합니다. 그러나 준비 안 하면.. 했던 말 되풀이 합니다. 설교는 말이죠, 비행기가 landing을 잘 해야 돼요. 자꾸 활주로를 돌면 안돼요. 그냥 착 내려야 해요. 서론이 길면 안돼요. 설교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cut해 내느냐가 중요해요. 한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불필요한 가지를 다 쳐버려야 해요. ▶3. Communication (의사소통, 전달)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Incarnation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 Identification ‘자기를 낮추시고’ - 그래서 사람과 communication 합니다. 설교는 communication이다. 즉 상호교감을 통해 전달을 해야 돼요. 좋은 설교가란 유능한 communicator예요. 내가 설교준비를 다 많이 했어도, 어떤 상황에서는 이 설교를 포기할 용기가 필요해요. 그게 설교예요. 지난번에 어떤 분께 제가 아주 기분 좋은 소리를 하나 들었어요. 그분은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신 분이예요. 미국에서 온누리교회를 소개받고서(자기 교회를 한 3, 4년 다녔는데) 한국에 귀국하면, 온누리교회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서울에 왔대요. 그런데 1년 반이 되도록, 나하고 손 한번 못 잡아 본거에요. 그러니까 미국이 그리웠겠죠. 거기는 교제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는데.., 좋긴 좋은데.. 사람이 하도 많고 저를 만날 기회가 없으니까, ‘목사님 제가1년 반 만에 잡아보는 손입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이 분이 저에게 이런 격려의 말을 해주더라고요. 저는 1년 반동안 목사님 손은 못 잡았지만 여기 설교 때문에, 내가 여기 붙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까 목사님이1년 동안 굉장히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는데, 목사님이 한번도 변명을 안 하시고 똑같이 웃으시면서 설교를 하는 걸 볼 때.. 진짜 설교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1년 동안 변명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자기는 진짜 설교를 들었다.’ 그렇게 저를 격려해 주더라고요. 설교는 내가 말하는 것도 설교지만.. 내 삶이 설교예요. 이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설교는, 사기꾼이 될 수가 있어요. 설교가 나빠서 사람이 안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와 설교자의 삶이 서로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좋은 설교를 들을수록 갈등을 하는 거예요. 설교는 communication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오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같이 밥을 잡수시고, 같이 잠을 자고, 사람하고 똑같이 살았단 말이죠. 피곤하셨고 목마르셨고 주무셨고.. 사람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람들과 동일시 Identification 되시면서 그것이 자연히 communication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폼(권위) 잡고 앉았으면.. 제자들이 따랐겠어요? 안 따랐겠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셨기 때문에 진짜 communication이 된 거예요. 여러분, 목회자들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교인들하고 얼마나 communication이 되어 있으세요? 마음과 마음, 삶과 삶.. 비록 여러분들은 목사이고 설교자이지만 교인들이 느끼기에는 ‘저분은 내 친구다!’ 이렇게 느껴야 돼요. You are my friend, you are my brother. 이런 느낌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communication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교인이 목사가 되고 싶어해야 돼요. \\\\\\\'나는 목사가 제일 좋은 것 같다.\\\\\\\' 그 정도 까지, 교인들이 ‘나는 우리 자녀가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까지 말이죠. \\\\\\\'다 해도, 나는 목회자는 싫다\\\\\\\' 이러면 안 돼죠. 그 목사는 문제 있는 거예요. 모델이 안 된 거죠. ▶4. Sacrifice(희생)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 희생 sacrifice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설교자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가 보이거든요. 희생이 없는 사람에게는 예수가 안 보입니다. 낮은 데로 가면 예수가 보입니다. 손해 보면 예수가 보입니다. 희생하면 예수가 보입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핍박과 고난을 겪고도.. 가만히 있으면 예수가 보여요. 결국은 설교란 예수님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연세대학교 다니는 교수가 한분 계신데, 그 분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셨어요. 미국에서 오신 분인데, 우리 교회 등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시더라고요. 서울에 내로라 하는 교회는 다 갔대요. 왜냐하면 자기도 정착을 해야하니까. 이 설교 저 설교 다 들어봐도 잘 모르겠더래요. 그래서 부부가 이런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듣는 설교 가운데 예수님 얘기를 제일 많이 하는 설교자를 찾아가자.’ 그런 기준을 세우고 설교를 듣기 시작했대요. 그래서 큰 교회를 다 갔대요. 웬일인지 제가 설교 하면서, 예수님 얘기를 많이 했나봐요. 여기오니까 처음으로 설교에 예수님 얘기가 있더래요. ‘그래서 이 교회를 결정했습니다.’ 하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설교의 시작도 예수님이요. 끝도 예수님이예요. 결국은 설교시간에 보여지는 것은, 나의 위대한 웅변이나 논리나 아주 sharp한 지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서 끌게 하는 게 아니예요. 나는 폴 틸리히 같은 사람의 설교를 들어보면 굉장히sharp한 이 시대를 꿰뚫고 보는 그런 게 있어요. 그런데 과연 그 속에 예수님이 있느냐? 그건 별개의 문제더라고요. 칼바르트나 이런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이 거기 다 빨려들어가요. 위대한 사상가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도 아니고 예리한 지성을 갖고 있지 않지만 소박할지 모르지만, 따뜻한, 그리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격려해주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항상 거기 있어야 돼요. 이게 설교예요. 결국 예수님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설교 이전에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기릅시다. 설교의 깊이는 묵상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왜 우리의 설교가 화려한데.. 은혜가 안 되느냐.. 묵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으로부터 나오는 설교는.. 사람들이 들으면 금방 알아요. 옷도 비싼 옷하고 싼 옷보면 딱 알잖아요. 좋은 옷은 뭔가 좋아요. 선이 다르고, 질감이 다르고, 패션이 다르다고요. 그러니까 오리지널하고, 카피는 다르다니까요. 설교 딱 들어보면 ‘야, 저거 쉽게 말하는데 쉬운 게 아니구나!’ 그래요. 깊이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단순하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 격이 있구나, 저 사람은 무슨 철학자 얘기도 안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안 해도, 아 저 분은, 저 책을 다 읽었나보다..\\\\\\\' 그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거예요. 절대로 다른 유명한 사람 말 인용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고요. 성경의 설교의 깊이는 묵상의 깊이입니다. 저는 데니스 레인 목사님을 만나서 설교를 배운 사람 중에 하나인데, 늘 만날 때마다 어떻게 똑 같은 본문인데 저렇게 설교를 하나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분은 30년 동안 큐티를 했거든요. 목사님의 설교자의 제1과업이 큐티예요. 우리 두란노에 <생명의 삶>이 있고 <말씀 묵상>이 있어요. 초신자들은 <생명의 삶>을 좋아해요. <생명의 삶>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냐, 보니까 본문 때문이 아니라 예화 때문에 좋아하더라고요. 그거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음식 떠먹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자기가 만들어 먹는 거예요. 그런 분은 <말씀 묵상>을 더 좋아해요... 새벽기도 안하는 날은 제일 행복한 날 아닙니까? 그런데 새벽기도 하는 날은 더 행복한 날이예요.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말씀을 전할 사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everyday 묵상, 새벽기도는 결국 묵상이에요. 묵상된 말씀을.. 그 신령한 아이디어들을.. 그날 그날 자꾸 던져드리는 거죠. 그러다보면 적용하는 훈련이 자기도 모르게 자꾸 되고 말씀을 보고 뽑아내는 훈련이 되는 거예요. 대개 목회 2~30년 하신 분들은 웬만한 주석은 다 읽지 않았어요? 뭐 한번쯤 읽어야 되겠죠. 웬만큼 대충 되지 않습니까? 그 다음부터는 주석은 나를 방해해요. 왜냐하면 고정관념을 심어주기 때문에, 그 이상 생각을 못 넘어가게 만든다고요. 주석이라는 것은 내 생각이 맞았나/ 안 맞았나를 검증해주는 하나의 울타리 같은 역할을 해줄 수는 있지만 설교는.. 성경 읽고.. 자기가 묵상하고.. 자기가 은혜 받아야 됩니다. 메인 메시지는 성경하고 싸워야 돼요.. 일대일로.. 주석책이 아니라! 저는 주로 토요일 같은 때는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만 설교준비를 대충하면 제 아내에게 practice를 합니다. 그게 토요일 저녁의 제 시간이예요. 서론은 이렇게 잡았고, 본론은 이렇게 잡았고, 결론은 이렇게 잡았고.. 이렇게 이렇게 한다. 그러면 여자는 센스가 있어요. 그래서 그걸 딱 잡아내요. ‘가지가 너무 많은 것 같다.’ ‘또 이건 너무 하나에 치우친 것 같다.’ 그런 코멘트를 받을 수가 있어요. 목사의 설교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분은 불가능합니다. 잘못했다 말하기도 어렵고.. 잘했다 말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부인이 제일 좋아요. 부인에게 설교를 검증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서 부인으로 하여금 설교를 도와줄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좋은 방법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약점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인이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지적해주면.. 제가 자존심이 상해서 안돼요. 어려워요. 그래서 여러분의 사모님들을, 설교를 잘 평가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일이 또 참 중요합니다. 그러면 묵상된 메시지 말씀을 어떻게 설교로 끌고 갈 것이냐? 결국은 설교란.. 내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고 나면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 이런 인상이 있어야 해요. 가능하면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야’ 해요. 그러니까 너무 설교를 화려하게 하면 누가 나타날까요? 그 사람이 나타나죠. ‘말 잘하네!’ 이런 말 들으면 안돼요. ‘와~저사람 화술 좋다’ 이래도 안돼요. 하나님이 생각나야 되고,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이 설교죠...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OMC 주제강의(10)/ 비전과 영적 지도력/ 행2:17/ 하용조 목사/ 2009-07-02
OMC 주제강의(10)/ 비전과 영적 지도력 행2:17 ◑기독교 잡지에 대한 비전 제가 영국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저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꿈을 주시고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곳에 처음 갔을 때는, 하루에 보통 12시간씩을 잤습니다. 자도 자도 끝이 없어요. 한 3달, 6달 동안 잠만 잔 것 같아요. 잠이 그렇게 부족했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잠을 그렇게 계속 자고 나니까 회복되기 시작 했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저를 회복시키시고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꿈을 주셨는데 이것은 마치 엘리야가 로뎀나무 밑에 있었던 그런 시간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그 때부터 영국에 있는 책방을 돌아다니면서, 잡지에 대한 꿈을 가졌습니다. ▶연예인교회 목회할 무렵부터, 제게는 두 가지 도전이 있었는데 하나는 한창기 씨가 했던 잡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잡지가 저에게 굉장한 자극을 주었어요. 예전에는 그 잡지가 다른 형태로 나왔죠. <샘이 깊은물>로. 그 전에는 <뿌리 깊은 나무>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잡지를 만들 수가 있을까? 그 잡지를 보면서 그렇게 부러웠어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삼류 같아요. 잡지를 봐도 삼류고. 신문을 봐도 삼류고. 과거의 부흥회 포스터도 얼마나 촌스러워요. 그렇게 한국 사회를 리드했고 학교 교육을 선두 했던 기독교가 어느새 삼류가 됐더라고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다음에 제게 자극을 줬던 잡지가 이해평 씨의 <문학사상>이라는 잡지였어요. ‘문학을 가지고도 그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고 저런 매력을 줄 수 있구나... 왜 기독교는 이런 잡지를 못 만들까?’ 그래서 연예인교회 목회 시절에, 제가 잡지를 하겠다 하고 잡지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허가가 나질 않아요. 그 당시에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또 교인들이 제가 잡지 만드는 걸 이해를 못해요. 반대를 하더라고요. 우선 허가가 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엔 할 수 없이 포기를 하고 말았어요. ▶그리곤 영국엘 갔어요. 그런데 그 꿈이 사라지질 않더라고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잡지 자료를 모으고 있는 거예요. 3년 동안. 그걸 가지고 84년에 귀국을 했어요. 아무리 정부 관계를 다 쑤셔봐도 잡지 허가는 100% 불가능해요. 그렇지만 저는 잡지 자료를 계속 모으고 있었어요. 그 때 아주 소중한 자료를 25파운드 주고 산 게 있어요. 그 잡지가 바로 <빛과 소금>의 영원한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화보가 한 10년 나온 게 있는데.. 바로 그 자료에서 나온 거예요. 그 잡지는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어요. 폐간되었기 때문에. 아주 소중한 자료를 그래서 얻은 거예요. 한국의 모든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빛과 소금>을 통하여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잡지 덕분이었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들겨 봐도 잡지발행 허가는 나지 않았지만 저에게는 잡지 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리고 영국에서 돌아올 무렵에 제 마음에 또 무슨 확신이 있었냐하면 QT해야 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제가 영국에서 얻었던 보물은 QT였어요. 그곳에 QT하는 사람들, QT자료들.. 그 비전은 그 당시에 미국에는 없었어요. 영국은 있었어요. ‘나는 가서 QT를 시작해야 된다. 우리 한국 교회에 이 큐티 자료를 다 나눠줘야 되겠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저는 그렇게3년 동안 자료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제 얘기를 다 듣더니.. 정부의 관계 책임자인데.. 잡지 만들어 보자는 거예요. <빛과 소금>잡지를 만들기 위해서.. 그런데 기독교만 허가를 줄 수 없대요. 그래서 가톨릭에 ‘생활 성서’를 허가해주고, 불교에 ‘금강’이란 잡지를 허가해주는 조건으로 <빛과 소금>을 등록을 해 줬어요.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그 후로 몇 년 동안은 또 잡지 등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딱 한번 <빛과 소금>을 위하여 하나님이 잡지를 주시더라고요. 저는 그때 ‘꿈, 비전은 막을 수가 없구나...불가능을 가능케 하는구나,’ 그런 것을 그 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저희 두란노에 잡지(정기간행물)를 13개 만듭니다. 어느 신문사도 어느 재벌도, 잡지 13개 하는 회사는 없습니다. 제 마음에 불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매일 줘야 되겠다는 그 생각 때문에... 저희들은 어린이 잡지는 한 달에 천 만원씩 손해 봅니다. 손해 보더라도 내 마음을 막을 길이 없어요. 유치원 아이들 큐티도 만들고, 초등학교 1, 2학년을 위한 큐티책자도 만들고, 중고등부 학생을 위한 큐티도 두 개를 만들고, 일반인을 위한 <생명의 삶>도 만들고.. 또 목사님들을 위한 큐티책자도 또 만들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거든요? 다 손해 보는 일이에요. 영어로 라는 큐티책자를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서 일본어판으로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서 중국어판. 중국판도 하나만 만들면 좋을 걸 ‘본토 중국판’ 대만에서 볼 수 있는 대만판.. 이렇게 따로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러시아어 큐티 책자도 만들었어요. 지금은 스페인어로 큐티책자를 만들고 싶은 충동을 금할 길이 없어요.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이 생명의 양식을 번역해서 줘야 되겠다... ▶이게 꿈이더라고요. 하나님이 주신 꿈. 손해를 봐도 못 말리고요. 저희가 몇 가지 ‘두란노 사업’ 정리하면 금방 (두란노가) 흑자 나요. 그래도 못해요. 내가 죽으면 죽었지 못해요. 이건 해야 되니까. 손해봐도 해야 되니까!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성경을 읽게 하고 싶은 그 열망이 내게 있으니까. 지금도 우리 두란노는 고민하고 있어요. ‘잡지 몇개를 정리하라. 너무 적자가 많으니까.’ 스텝들은 다 결정해놓고서 저도 동의를 했어요. 그런데 집에 가면 마음이 허락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모든 민족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자. 매일매일이 자료들을 만들어 주자.\\\\\\\' 아마 제가 믿기에는 곧 스페인어 큐티책자도 나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에요 꿈! 그게 비전이에요. ▶여러분 지울 수 있는 건 비전이 아니에요. 포기할 수 있는 건 비전이 아니에요. 지울 수 없는 것, 버릴 수 없는 것, 죽어도 하는 것. 그게 꿈이에요. 땅의 꿈이 아니에요. 하늘의 꿈이에요. 내가 개인적인 야망을 가졌다면 그런 꿈을 왜 꿨겠어요? 저는 이 건물을 지으면서 그렇게 마음이 편해요. 왜 그런줄 아세요? 이 건물은 누군가 내 다음 사람이 쓸 거니까. 내가 쓸 건물이라면 난 부끄러워 했을 꺼에요. 그러나 이 건물은 누군가가 나의 다음 사람이 이것을 써야 되기 때문에 소중하게 만드는 거에요. 아낌없이 만드는 거에요. 다음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그러니 마음에 자유가 있어요. 기쁨이 있어요. 잘 해주고 싶은 거에요. ◑보니까.. 비전이 생겼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마치고 서울에 돌아올 때 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스위스의 융프라우를 갈 기회가 있었어요. 눈 꽃핀 설경. 그 높은 산. 제 아내와 아이와 함께 톱니바퀴 기차를 타고 융프라우 산 꼭대기까지 쭈욱 올라가 봤어요. 제 아내는 숨이 차서 끝까지 가기를 굉장히 힘들어 했어요. 그렇지만 얼음 빙산을 넘어서 정상 근방까지 기차를 타고 쭈욱 올라가 보니까 밑에서 상상할 수 없는 그 설경이 한눈에 쫙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렇습니다. 그걸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은 다르더라고요. 융프라우 높은 계곡에 설경이 전개되는 것을 설명하는 사람하고 그것을 본 사람하고는 달라요. ▶저는 영국에서 존 스토트를 만나는 축복이 있었어요. 그분이 두란노처럼 만든 게 에요. 여러분 다 이렇게 본 게 있으니까 만들어요. ‘난 서울 가면.. 이것보다 더 좋은 걸 만들어야지’ 그렇게해서 탄생된 것이 <두란노>에요. 존 스토트가 만들었던 시티 한 복판에서, 많은 전문인들을 훈련시켰어요. 그 존 스토트의 ‘London institute’를 보고 ‘오~ 이렇게 하는거구나!’ 제 마음에 두란노의 꿈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저는 짐 그래함의 2부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교회보다 크기는 반밖에 안되죠. 조그만 예배당이에요. 입추의 여지가 없이 사람들이 손을 들고, 젊은이들이 아니에요. 50대 60대들이 손을 들고 찬양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을 보고 ‘이게 교회지‘ 교회에 대한 환상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제가 온누리 교회를 이만큼 끌고 갔었던 것은 그 때 느꼈던. 어쩌면 실물보다 제가 더 느꼈을지 몰라요. 실제론 안 그런데 제가 너무 감격해서, 한 10배쯤 상상해서 그런 예배를 드렸을 거에요. 시간을 제한하지 않는 예배. 그 사람들은 예배를 드릴 때 먼저 사회자가 나와서 시편부터 먼저 선언을 해요. ‘다같이 묵도합시다!’가 없어요. 거기 오신 분들은 이미 30분전에 꽉 들어차 있어요. 얼굴이 상기된 채, 천정이 떠나가도록, 찬양을 드려요. 저는 그런 모습 처음 봤거든요. 찬양을 해요. 그리고 목사님이 강단에 서자마자 설교를 하는데 1시간 쯤 해요. 너무 좋으니까 사람들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 설교에 빠져 들어가요. 설교가 끝나면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요. 박수치고 춤을 추고 어느 날 성만찬 하는 걸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때 제가 느꼈던, 경험했던 것은 예배였어요. 성만찬을 드리면서 성령이, 예수님의 보혈이, 십자가가 임재하는 걸 보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참여했던 그러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온누리교회를 왜 여기까지 끌고 왔냐하면 그런 것들이 다 내 머리 속에 있기 때문에, 그 비전이, 그림이 있기 때문에.. 이런 교회를 만들어야지 그냥 기절할 만큼 좋은 교회를 만들어야지. 예배드리다 기절해 버리면 좋겠다...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4절을 부르는지 5절을 부르는지. 저는 경배와 찬양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미친 사람들 같아요. 2시간 3시간.. 저는 하용인 선교사의 별명을 ‘stop하지 않는 공‘이라 그래요. 계속 뛰어요. 밤을 꼴딱꼴딱 새요. 그런 걸 보면서 ‘찬양은 저렇게 하는거지..’ 과거에 우리 한국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이 ‘이게 무슨 찬양인가?’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저는 연예인 교회 시절에 한 설교를 잊지 못해요. 제 아내가 다니던 신학교 학장 ‘제임스 스튜트 박사’가 왔어요. 아주 훌륭한 분이세요. 그분이 한국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데 자기 졸업생이 제 아내이기 때문에 제 아내 하나 만나려고 방학 때문에 학생들을 찾아다니는 동안에 서울에 왔어요. 그런데 조건이 있다, 호텔에서 안자겠다는 거예요. 너희가 사는 집에 자겠대요. 그때 우린 결혼 초기였기 때문에 방 한 칸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아침에 일어나니까 일찍 일어나서 소파에 앉아서 편지를 쓰더라고요. 그게 큐티인 줄 몰랐어요. 난 편지 쓰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이 거기서 큐티를 하더라고요. 뉴질랜드 바이블 칼리지에서는, 제 아내가 졸업했는데 아내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거예요. 매일 그걸 보고 살았기 때문에, 강해 설교를 보고 살았기 때문에. 우리 한국에 있는 목사는 강해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다 교리 설교만 들었지, 강해 설교를 듣고 자란 교인은 하나도 없어요. 그 분이 저희 연예인교회로 오셨어요. 마태복음5장을 가지고 설교를 해 주셨는데, ‘빛과 소금’을 주제로 설교를 했는데.. 그 때 그 설교가 얼마나 제게 감동을 줬는지.. 아직도 기억해요. ‘강해 설교는 이렇게 사람에게 충격을 주는구나!’ 그분이 그 때 제 사역을 전부 관찰하더라고요. 그는 2차 대전에 쓰던 것 같은 시계를 차고 구닥다리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는 아주 기분 좋게 지내다가, 떠나던 날 공항에서 저와 제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그 멘토쉽을 발휘하는 거예요. ‘내가 네 남편의 사역을 다 봤다. 두 가지를 말하더라고요. 네 남편은 갖춰진 것보다 소문난 게 많다. 그게 첫 번째 코멘트에요. 너무 유명해졌고 사람들이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빈 깡통 되기 쉽다. 지금 숨어라. 이게 첫 번째 그분의 충고였어요. 지금 당신 계속하면 내용 없는 사람 된다. 연예인 교회를stop하라는 거예요. 두 번째 영어를 너무 못한다. 지금 네 남편 영어를 가르쳐라. 일을 stop해라 건강 나빠진다. 오래 못 간다. 이렇게 일하다가는 오래 못 간다.’ 그 말이 맞았어요. 제가 그래서 간 부위를 다쳤어요. 이게 멘토쉽이더라고요. 참 좋은 선생님이었어요. 그리고 그 분은 5년 10년 만에 또 왔어요. 자꾸 우리의 사역을 점검 해 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저는 제가 교육받지 못했던, 우리 한국에서 지도받지 못했던 그런 참 좋은 선생님들이 계시는구나. 그런 것을 그때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비전이란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새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본 게 없으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땅만 보고 살다가 예수를 믿었다. 구원받았단 얘기는 ‘하늘을 보았다..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구원받은, 거듭난.. new world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비전이에요.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다 새 세계를 본 사람들이에요.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현재만 보지요. 비전이 없는 사람은 오늘만 있어요. 그러나 새 세계를 본 사람은 내일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만들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 광활한 생각과 꿈이 있기 때문에. 저는 온누리 교회라는 것은.. 예배라는 것은 이렇게 드리고 싶고.. 성만찬이란 것은 이렇게 하고 싶고, 설교 그러면 이 정도 수준은 가고 싶고.. 교인 그러면 이런 교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교회 시작하기 전부터 내 마음에 강렬하게 있었어요. 제 마음속에 이 그림이 있었어요. 화가는 그냥 마구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영감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붓을 들지 않습니다. 위대한 작가는 영감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펜을 들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목회가 왜 이렇게 지지부진합니까?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 열망과 꿈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은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교회 시작할 때 몇 가지 꿈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12가정이 시작했을 때 기도한 것은 ‘하나님. 2천명의 젊은이를 주십시오. 세계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어떤 책에서 요한 웨슬리가 ‘3백명의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릴 사람을 주십시오, 그러면 세계를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라는 글을 읽다가 저는 온누리교회를 시작하면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2천명을 주십시오.’ 어느 날.. 2천명이 교회에 앉아 있더라고요, 10년 만에. 할렐루야! 여러분은 무슨 꿈을 꾸십니까? 개꿈 말고요. 망상 말고요. 허황된 야망 말고요.. 정말 예수님을 위한 예수님이 주신 그 꿈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잠을 못자고.. 그것 때문에 흥분하고.. ▶10년을 생각하는 사람하고, 100년을 생각하는 사람은 말도 다르고, 걸음걸이도 다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꿈은 무엇입니까? 잠 못 이룰 만큼, 밥을 못 먹을 만큼, 죽어도 그것을 해야 되는 그런 환상, 그런 꿈, 그런 비전... 바로 이것이 비전이에요. 비전을 가진것 만큼 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는 것만큼 갑니다. ▶비전을 받은 사람들은 가만있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본문 언젠가 여러분도 죽고 나도 죽어요. 제가 온누리 교회하지만 뭐 영원히 하겠어요? 언젠가 그만 두겠죠. 살면 얼마나 살고, 일하면 얼마나 하겠어요? 저 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제 황금기가 하나님이 건강하게 해 주시면 한10 년 되겠죠? 후회 없이 살아야 돼요. 미치도록 살아야 돼요. (1997년 설교) 계산하고 살지 마세요. 따지고 살지 마세요. 합리적으로? 그럼 합리적인 인간밖에 안돼요. 상식을 무시하란 말이 아니라.. 상식을 초월하세요. 내 생애를 어떻게 살 것인가? 120명.. 성령과 바람과 불이 임했을 때.. 그들은 방에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들은 뛰쳐나갔어요. 고생은 무섭지가 않아요. 고통은 무섭지 않아요. 병도 무섭지 않아요. 돈 없는 것도 무섭지 않아요. 비전이 없는 게 불행이에요. 동물과 같습니다. 동물은 꿈을 갖지 않아요. 사람에게는 비전이 있는 거에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 주님을 전하고 싶은,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이 강렬한 열망이 있는 거에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전 ▶전 오늘 이것을 여러분에게 얘기하고 싶어요. 예수님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비전을 그분은 가지셨어요.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은 결혼할 틈이 없었어요. 예수님은 학교 다닐 틈도 없었어요. 그러나 3년동안 피곤에 지치도록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다 만나줬어요. 그 예수님의 꿈은 십자가에서 죽는 거에요. 난 여러분의 꿈도 이렇게 잘 죽는 꿈이 되길 바랍니다. ‘나는요.. 죽는 데 고통없이 죽고 싶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고통 있게 죽으면 어떻습니까? 꼭 곱게 죽어야만 합니까? 예수님만 기뻐할 수 있다면, 하나님만 기뻐할 수 있다면.. 돈 많으니까, 돈 여기 있으니까, 그건 누가 못합니까? 돈이 없어도 하나님의 집을 만들어가는 그 눈물과 고통과 아픔.. 그러면서도 그걸 기뻐하는 것. 그런 거죠. 롬8:35에, 어떤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이걸 막을 수가 없는 것이죠. ▶예수님의 비전..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있었고, 예수님의 비전.. 십자가에 죽는 것이 그의 비전이었어요.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죠.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죠. 성령을 받기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은 이런 생각들로 머리속에 꽉 차 있었던 거죠. 여러분은 무슨 생각에 꽉 차 있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우리 교인들을 철저하게 훈련이 안되면 못 떠나게 합니다. 제가 그걸 발견했어요. 훈련이 된 자만이 떠나요.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이 방법 밖에 없구나.. 이제는 양적인 교육보다는 질적인 교육을 시켜야 되겠다.’ 이런 꿈이 지금 제 마음속에 움직이고 있어요. ▶그리고 교회이름은 다를지 몰라도, 교파는 다를지 몰라도, 온누리와 같은 그런 꿈을 가진 동료 교회들을 많이 격려해 주고 만들어 주자 이거에요. 옥한흠 목사님 제가 참 좋아하기 때문에.. ‘형님! 이제 우리는, 우리 교회들은 목사님이나 나나 다 한계가 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 섬기십시다.’ 전 거기에 동의합니다. 그래요. 비전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리더라고 말합니다. 이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세워주셨다고 믿습니다. 지도자는 환경이 만들거나 노력해서 되어진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거예요. 무능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세워주시면 지도자에요. 여러분 목회자님 한분 한분은 하나님이 세워 주신 걸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꿈은 내 꿈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꿈이에요.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참된 지도력이란 지배력이 아니라 영향력입니다. 우리는 내 품안에 들어온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난 여러분의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영향력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안 만났어도 그게 영향력이에요. 한 사람의 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세워졌을 때, 완전히 비상사태에 빠진 한 국가가 살아날 수 있고요, 교회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변하면 교회도 변합니다. 그걸 아십시오. 절대 목회는 장로도 뭐도 교인도 아닙니다. 목사에요. 교회의 모든 책임은 나는 목사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것 이 어떤 의미든 우리 목사가 죽기로 결심하면 저는 안되는 게 없다고 믿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들어 쓰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둘 다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외적 성장보다 내적 성장에 더 치중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앞으로 또 외적 성장을 더 치중하는 시대가 오겠지요...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OMC 주제강의(8)/ 영적전쟁과 중보기도 사역/ 마16:18/ 하용조 목사/ 2009-08-12
OMC 주제강의(8)/ 영적전쟁과 중보기도 사역 마16:18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영적 전쟁의 실전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마 한동대 사건 우는 사자처럼 집어 삼키려고 하는 그런 경험들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교회치고 이런 경험을 안 한 교회가 없을 거예요. ◑1.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탄의 조롱을 당하고 세상에 의해서 약화되어 있지만 이 고백을 하셔야 됩니다. 주님의 교회는 절대로 사탄이 건드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권력도 흩을 수 없다!’ - 이것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교회의 힘이에요.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는 사람이고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배와 바다로 비유를 했습니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바다 위에 있는 배와 같습니다. 아무리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일어도.. 그 배는 흔들릴지라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배의 위기는 무엇인가? 물이 배안에 들어올 때입니다. 그럼 배는 가라앉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에 물이 배안에 들어오지 않게만 한다면, 어떤 풍랑에서도 배는 튼튼하게, 안전하게 항해를 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죄 많은 이 세상, 유혹이 많은 이 세상, 사탄이 득실거리는.. 바벨론 같은 음녀가 가득한 이 세상 한 복판에 들어와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고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언한 거에요. 이것이 교회에요. ▶교회의 특권 중에 하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다는 거예요. 마16:18 저는 목회자님들이 이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하면 할수록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교회가 어지러워요, 시끄러워요. 이상한 사람들이 난리를 쳐요. 쑥떡거려요. 패를 만들어요. 교회가 그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루아침에 괜히 화를 내요. 좋은 일이 생기기 전에, 꼭 시험에 들어요. 마귀는 먼저 알거든요. 은혜 받을 줄 알고 미리 와서 탁탁 건드리잖아요. 얼마나 우리는 공격을 많이 받습니까? 그러나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이 믿음 하나만 가지고 기도하고 있으면, 정말 음부의 권세가 다 물러갑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에 산에서 기도하던 한 시절을 잊지 못합니다. 우리 친구들과 삼각산에 있는 어느 한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 때는 제가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 문제가 참 많았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원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그 기도원의 한 복판에서, 제단 밑 마루바닥에서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어요.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는데, 밤1시쯤 되었습니다. 갑자기 기도원의 앞에, 눈에 너무나 선해요. 크지도 않아요. 귀신들이, 숫자를 샐 수 없는 새까만 무리들이 창 비슷한 것을 들고 눈이 반짝 반짝하는 것 같았는데, 자글자글하면서 우리를 공격해오는 거에요. 그 기도원 안으로 들어오더라고요. 그렇게 안개가 오듯이 말이죠. 이 어두움의 세력들이 우리 기도하는 곳으로 방해하러 들어오는 거였어요. 쫙 들어오는데, 제가 그런 거 처음 봤거든요. 너무 놀래서 그냥 있는 소리 없는 소리를 다 지르고 기도한 거예요. 그러다 방언이 터졌어요. 마구 죽을 힘을 다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왜 그런지 모르죠. 아 그런데도 안 물러나요. 창문으로 들어오고, 문으로 들어오고, 이 성전 안으로 어두움의 세력들이 쫙 들어오는데 그 때 저희들이 기도하는 데까지 오더라고요. 그 세력들이 점령을 하더라고요. 죽을 힘을 다해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가자, 졌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더니 빠지는데.. 올 때는 점점 점진적으로 왔는데 갈 때는 썰물 빠지듯이 쫙 가버리더라고요. 산으로 그 무서운 세력들이 다 빠져나가는데.. 그러고 나니까 휴~(안도의 한숨) 찬송이 내 몸 속으로 들어오고, 기도가 들어오고 저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그 하나의 경험이 이 영적 전쟁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교회라고 마귀가 안 들어오냐, 천만의 말씀! 교회도 기도 안하면 마구잡이로 들어와서 흔들어요. 여러분 성경책을 머리 밑에다 놓고 자면 귀신이 안 와요? 그거 상관없어요. 목사라고 안 와요? 상관없어요. 목사라는 타이틀이 있으면 마귀가 안 와요? 더 잘 오지요. 평신도보다 열 배 더 오지요. 여러분 하나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니까, 마귀는 굉장히 전략적이에요. 사탄은 언제나 우리보다 한 수 앞서 있어요. 교회가 은혜 받으려면.. 미리 와서 진을 치는 거예요. ▶마귀는 베드로를 찾았어요. 베드로를 얼마나 선동한 줄 아세요?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마귀가 너를 밀 까부르듯 타작했다.’ 베드로는 거의 넘어갈 뻔 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해 주셔서, 베드로는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마귀가 선택한 사람은 가룟 유다였어요. 이게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영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두 영역을 공격합니다, 1) 첫째는 가정입니다. 가정이 파괴되면 그 부부 사이에 앙금이 생기게 하고 갈등이 생기게 하고 그래서 거기에 여러 가지 불륜을 만들어 주고, 상처를 주고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든지 부부가 일단 헤어지게 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 좋은 기억 모두를 다 깨뜨리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는 부부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공격한다는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2) 또 하나는 교회를 깨는 거예요. 일단 교회가 깨지면 제일 마귀가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목사, 장로들이에요. 그것은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에요. 거기에 마귀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 교회가 깨지고 싸우고 상처받는 이유 중에,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없습니다. 신앙적인 이유 있어요? 없어요. 교리적인 이유 있어요? 아니에요. 다 시시한 감정싸움이에요. 자존심 싸움이고요. 말은 거창하지요. (거창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수(교)’하고 ‘기독(교)’하고 싸우니까. 그 차이에요. 사실은 같은 건데 말입니다. 그냥 교회가 갈라지면 교인들은 유리방황해요. 목사, 장로 싸우는 걸 보고 교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가기 시작해요. 영적인 방황처럼 큰 방황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몰라요. 싸우지 말고 조용히 떠나세요.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여러분이 주도권 잡지 마세요. 여러분이 싸우는 동안 교인들은 말할 수 없이 상처를 받는 거예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비겁해서 떠나는 게 아니에요. 장로님이건 목사님이건.. 싸움에 개입하지 마세요. 여러분 오늘날 마귀는 우리의 가정을, 부부를 이혼 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앞으로 사회는 이혼이 더 많아질 거예요. ▶그리고 마귀의 아주 가장 큰 전략은 교회를 깨버리는 거예요. 상처 줘서 깨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들이 목회자로써 주님의 교회를 양육할 때, 이런 말을 기억해요.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리라.’ 목자 하나가 상처받고 흩어지면.. 양들은 다 흩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용서와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목회자님들이나 지도자님들이나 장로님들이 꼭 알아야 될 것 중에 하나는 공의를 요구하지 마세요. 왜 싸우냐? 공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래서 문제에요. 공의가 틀린 게 아니에요. 내가 공의롭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공의가 완전하지 못한데 문제가 있어요. 여러분 교회에서 할 일은 공의가 아니에요. 사랑이에요. 정말 사랑하면 공의가 이루어져요.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교회 본질이지, 공의를 부르짖는 게 교회 본질이 아니에요. 공의는 언제 오는가요? 사랑할 때만 공의가 완성 되요. 용서할 때만 공의가 완성이 되요. 부정을 덮어 주라는 뜻이 아니에요. 잘못을 덮어 주라는 뜻이 아니에요. 용서하셔야 합니다. 기다려야 돼요. 관용하셔야 돼요. 교회에서 그것을 보아야 돼요. 이 때 교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마귀는 예수 이름으로 떠나요. 말씀을 전하면 떠나요. 마귀 쫓는 방법 간단해요. 그러나 마귀가 궁극적으로 떠나는 것은 사랑이에요. 사랑하면 귀신은 떠나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 이름으로 면하노니 귀신아 물러갈지어다.’ 해도 나갔다 또 들어오는 걸요. 여러분 귀신 많이 쫓아봤잖아요. 제가 옛날에는 귀신을 얼마나 많이 쫓아봤는지 몰라요. 요즘은 그렇게 안 해요. 쥐구멍을 막으라는 것입니다. 귀신 쫓기 이전에. 제가 결혼해서 얻은 곳이 어느 셋방집 이었는데요, 천정에서 밤마다 쥐가 올림픽을 해요. 그것도 신혼인데. 그래서 자다가 견디다 못해서 빗자루로 천정을 탁 친다고요. 그러면, 십분 있으면 또 와글와글하는 거예요. 밤새도록 이걸 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목회하지 말라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쥐가 천정에 들어오는 구멍이 있다고요. 그걸 막으면 되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갈지어다!’ 그러면 일곱 귀신이 더 오는 걸. 그걸 어떡하시겠어요? 매일 들어와라 나가라 하시겠어요? 아니에요. 본질을 해결해야 되요. 교회가 거룩하고 순결해야 되요. 말씀의 권위가 있어야 되요. 똥이 있는 데는 파리가 있기 마련이에요. 파리 쫓지 말고 뭐를 치워요? 똥을 치워요. 그럼 간단한 거예요. 방을 깨끗하게 치워놓으면 벌레가 못 들어온다고요. 벌레 잡으려고 그러지 마세요.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에요.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무장하고 겸손하고 욕심 부리지 말고 정말 주님의 뜻이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어떤 시험이 와도 문제가 없는 거예요. 어떤 폭풍이 몰아쳐 와도 문제가 없을 줄로 믿습니다. ▶영적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엡6:12에 보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벧전5:8에 ‘헌신하라 깨어라 너희 믿음이 대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느니라.’ 여러분 성경의 말씀 가운데 ‘깨어라’는 말씀이 참 중요합니다. 근신하라 경계하라. 약4:7절 말씀 알지요? ‘마귀를 대적하라.’ 파수꾼. 깨어있어야 합니다. 목사는 깨어 있어야 됩니다. 양들이 잠을 잘 수 있도록. 그게 목자의 역할이에요. 목자가 졸거나 외출하면 안 돼요. 우리는 양 떼들을 보호하여야할 줄 믿습니다. 왜냐면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집어 삼키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영적 전쟁은 결론이 나 있다는 것을 여러분과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이미 이것은 끝난 거예요. 사탄은 이미 십자가에서 패배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여러분이 예수 이름으로 나갈 때 연약한 성도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마귀는 울며 통곡하며 떠나는 거예요. 여러분 모든 성도는 귀신을 쫓아낼 능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귀신을 쫓아낼 능력을 이미 가진 그런 곳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십자가에서 마귀의 세력을 발로 밟았습니다. 머리를 찍었습니다. ◑2. 성도들에게도 사탄의 권세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목사에게만 준 게 아니에요. 저는 저희 성도들이 저한테 와서 기도를 부탁하면 당신에게도 그 능력이 있다는 것을 항상 가르쳐주고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상담할 때, 저 분이 무슨 얘기를 해오면 제가 그 사람한테 무슨 대답을 할 지 금방 알죠. 성경 읽어주면 딱 좋죠. 그런데 안 읽어주죠. 웃기만 하죠. 그럼 막 얘기를 합니다. “어떡하면 좋죠?” 쉽게 대답을 안 해 줘요. 왜요? 대답은 누가 알고 있으니깐. 그 사람이 알고 있으니깐.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대답할 때까지 유도해 주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대답을 그 사람이 합니다. “맞아요. 당신 입으로 말했네?” 그럼 그 사람은 살아납니다. 내가 가르쳐주면 항상 나한테 옵니다. 문제가 생기면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또 나한테 오는 것입니다. 평생 병신 만드는 거예요. 그 사람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게 더 중요해요. 당신이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인들이 스스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그 능력을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해요. 성도들 자신이 귀신을 쫓아내며 마귀의 세력을 무찌를 수 있는 영적 권위가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3. 세상 끝날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끝까지 붙잡아주실 것입니다. 나의 오른 손을 붙들어 주실 것이며, 나의 떨리는 무릎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끝장이에요. 사람 두려워하지 마세요. 누구든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내가 약할 때 더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 우리가 너무 고통에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이 깊을수록 하나님은 더 가까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목회에 하나님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목회에 먼저 이런 선언을 하십시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마귀가 건드릴 수 없다” 라는 사실을 선언하십시오. ▶주님의 재림으로 사탄은 완전히 패배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됩니다. 마귀는 패배했지만 다 끝난 것은 아니에요. 따라서 믿음이 필요한 거에요. 다 완성되었다면 믿음이 뭐 필요하겠어요? 다 완성되었지만 아직 주님의 재림 때까지 마귀는 제한적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적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already, not yet 그러나 어떤 악한 세력도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는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이 믿음을 선포하시고, 여러분이 소유하시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심판 주로 오실 때, 역사가 완성될 때, 그때 사탄은 완전히 끝납니다! ▶온누리와 한동대학이 약 2년 동안 참 엄청난 고생을 했어요. ‘온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교인들한테 블랙메일(협박 편지)을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 몰라요. 전국에 만 통을 보내고 안기부, 감사원, 교육부, 검찰 안 보낸 데가 없어요. 그 중에 제가 마약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그러나 두려워할 것 없어요. 그런 일들은 여러분도 겪는 거예요. 여러분도 겪을 수 있어요. 그런데 두려워하지 마세요. 일단 그런 일에 말려들고 두려워하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일들은 앞으로 우리가 목회하는데 계속해서 파도처럼 부딪힐거에요. 파도나 폭풍은 나쁜 게 아니에요. 고생스럽지만 배는 빨리 갑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고난을 겪고 나면 하나님이 더 잘 보여요. 더 성숙해지고 더 마음이 커지고..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4. 모든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서 선포하고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마귀를 상대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상대하십시오. 마귀가 여러분을 덮칠지라도, 그리고 마귀한테 약점 잡히지 마십시오. 그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영적 전쟁 집회를 합니다. 일단 성령 사역이 시작이 되니까 성령 사역을 선포하면 귀신들이 많이 옵니다. 그리고 교회에 정신병자들이 많이 와요. 이상하게 사람들이 저희 교회도요, 한 2년 동안 별별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그리고 아주 힘들게 해요. 너무 시험 들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져요. 성령 사역을 하고나니까, 영적 전쟁 집회를 해야겠더라고요. 영적 전쟁 집회의 주제는.. 사탄의 세력을, 정체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을 선포하고 그리고 담대히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그런 그리스도의 승리를 개선가를 부르는 동안 만드는 삼일동안의 집회에요. ▶부흥 강사 중에 제일 좋은 부흥강사를 소개해 드릴께요. 여러분 자신이에요. 다른 분 와봐야 자기보다 잘 해도 문제고, 못 해도 문제에요. 여러분 자신이 없으세요? 그냥 금식하고 하세요. 처음에 우리 교회에서 제가 부흥 강사를 했습니다. 금식하고 했어요. 금식하면 왜 좋은 줄 아세요? 일단 불쌍히 여기거든요. 실력 없으면 금식하십시오. 그러면 설교 듣기 이전에 은혜를 먼저 받아요. 그렇게라도 자기 교인을 사랑하면, 정말 사랑하면 부모가 주는 밥이 제일 좋지요. 호텔에서 먹는 밥이 뭐 좋나요? 호텔에서 먹어보세요. 열흘 먹으면 질린다고요. 그냥 집에서 찬 밥 말아가지고, 멸치 볶아 먹는 게 최고로 좋은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부흥 강사가 되세요. ▶영적 전쟁과 성령 사역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동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교회의 탄생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므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직분자 중에, 성령 세례 받지 않은 분을 교회 직분자로 세우면 안 돼요. 사고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오래 나오면 뭘 시켜요. 헌금 많이 하면 시킨다고요. 그렇지 않아요. 교회는 영적인 조직이에요. 영적인 사람이, 영적인 일을 하는 거예요. 구원의 확신이 있더라도, 성령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없이 어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 사람은 다 자기 뜻대로 한다고요. 자기 생각대로 교회를 끌고 갈려다가 그것이 안 되면 신경질내고 화를 내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따라서 교회는 이 성령님을 강조해야 되요. 그런데 성령님은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성령 사역을 잘 못하면 성령 운동이 되요. 운동이 아니라고요, 이것은 성령님이 프로그램이 아니에요.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고, 성령님이 예수님이에요. 모든 프로그램에 하나님의 임재, 성령님의 임재, 이것이 있도록 하는 거예요. 온누리 교회가 성령 사역했더니 성령 사역 프로그램이 뭐냐고 묻더라고요. 그런 거 없어요. 성령 사역 프로그램 없다니까요. 성령님이 하시는 거죠. 이때까지 내가 결정하다가 지금은 누가 결정하도록? 성령님이 결정하도록 하는 마음의 태도일 뿐이에요.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어요. 찬양을 해도.. 성령님이 찬양하도록 내 마음을 거기에 드리는 거예요. 성령으로 찬양하는 것이죠. 모든 프로그램이, 모든 목회에 그분이 개입하고 그분이 움직이고 그 분이 인도하도록. 회의할 때도, 이 결정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결정인가? .. 그런 일에 민감해집니다. 그렇다고 자, 지금부터 성령님의 인도함을 기다리는. 그런 게 아니라고요. 나의 태도의 변화에요. 생각의 변화에요. ▶사도 바울이 3차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 가서 말한 것을 여러분이 주의하여 들으십시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그 사람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 질문은 여러분들에게 해야 될 사람이 많아요. 예수님은 잘 믿어요. 십자가와 부활은 열심히 주장해요. 그런데 성령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에요. 성령님 안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제한하고 있을 뿐이지... 자기 식으로 믿고 있을 뿐이지... 어떤 신앙(교리)의 이름으로 믿고 있을 뿐이에요. ▶저는 기본적인 원칙이 성경에 있는 것은 다 인정합니다. 저는 방언을 믿어요. 성경에 있으니깐. 간단합니다. 예언 믿어요. 성경에 있으니깐. 방서 난 몰라요. 성경에 없으니깐. 방언으로 글 쓰는 게 있는지...있다 그래도 난 안 믿어요. 성경에 없으니깐. 여러분 성경이 가는 것만큼 가고 성경이 말하는 것만큼 말하세요. 그러면 틀림없습니다. 이해되건 안 되건 간에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다 믿으세요. 다 인정하세요. 귀신이 있어요. 성경에 있으니깐. 성령님의 역사들이 있다고요. 나는 5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것을 믿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깐. 우리 주변에 극단적인 성령론을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귀신론도 어느 모처에 가면 성경보다 귀신을 더 잘 압니다. 이게 문제에요. 저는 다르게 비판하지 않아요. 성경을 지나쳤다는 거예요. 토착적인 귀신론까지 다 끌고 왔거든요. 즉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요. (그렇지만 성경보다 지나친 것은, 저는 안 믿습니다.) 성령 사역을 목회의 본질적 사역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인정하시고 그 분을 앞세우고 그분께 순종하고 그 분께 리더십을 드리고 그 분께 모든 것을 의지해 보십시오. 망하는 것 같으나 안 망합니다. 교회 쫓겨날 것 같으나 안 쫓겨 나갑니다. ▶제가 건강이 나빠져서 연예인 교회에 사표를 쓰고 목회를 할 수 없어서 영국으로 가려고 할 때에 (저희 멘토가 한경직 목사님이셨는데) 제 아내랑 같이 찾아 뵈었어요. 그 분이 저에게 아주 간단하지만 좋은 충고를 해주시더라고요. 본인이 프린스턴에 있을 때, 폐병에 걸려서 피를 토하던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내가 그 때 피를 토하면서 프린스턴에서 공부하던 그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영락 교회를 목회를 (잘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북한에서 피난 나온지 알았으면 (시작을) 안했습니다. 잠깐 한 달만 피신하자고 했던 것이.. 영영히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적 상황가운데서도.. 신비하게 인도하신다는 뜻인듯.. 그러니 염려말고 떠나시라?) 그분은 저에게 이런 값진 교훈을 주었어요. 연예인 교회를 사임해야 될 무렵에, 그 교회를 보낸 분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 떠나면 안 됩니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두 가지 조건. 교인이 만장일치해서 가십시오 하면 가래요. 두 번째 목회할 건강이 없으면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보고 연예인 교회를 떠나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더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빈 손으로 가라고 해요. 기대하지도 말고 가래요.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래요. 여러분, 교회를 떠날 때 어디를 보장받고 떠나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아무 보장이 없고, 누가 나를 부른데도 없어도. 그게 하나님의 인도죠. 내가 계산하고, 사람 만나서 다 작업해 놓고, 뒷거래 해놓고 가는 것이 무슨 믿음이에요? ▶성령님의 임재와 기름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저는.. 회중에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어느 날, 우리가 집회를 하는데 기도를 해요. 하는데 한참 통성 기도를 하는데 한순간에 업그레이드 하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성령이 회중 속에 바람을 확 불어 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기도 소리가 확 트여요. 사람들이 막 생기가 돌고 기도가 살아 있고 움직이고 막 역사가 막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 기도를 사모하세요. 성령의 임재가 있는 그런 설교를 사모하세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그런 (통성)기도를 사모하세요. 육신적인 기도는 밤낮 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피곤하고요, 거기가 거긴 것 같은데 매일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요. ‘아멘, 할렐루야’ 소리 크다고 성령님이 임하는 거 아니에요. 조용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내 안에 흘러넘치고, 예배에 흘러넘치고 설교에 흘러넘치고, 심령에 흘러넘치고.. 그래서 조용히 우는 거예요. 그렇게 눈물이 안으로 자꾸 흐르는 걸 경험해야 되요. 눈물을 흘리면 씻어져요. 전 예수 처음 믿을 때 사람에게 그렇게 콧물이 많다는 걸 몰랐어요. 나와도 나와도 끝이 없는 거예요. 눈물, 콧물 다 빼야 됩니다. 그래서 많이 운 사람은 얼굴이 순해 보여요. 울고 나니까. 독기가 좀 빠져야 돼요. 우리 목사들 얼굴에 독기가 좀 많아요. 하도 힘이 들어서 그걸 우리는 몰라요. 얼마나 우리 목사들이 상처가 많고 고통이 많고 말 못할 사정이 많아서 얼굴이 다 굳었다고요. 어린이 같이 그런 얼굴들이 참 없어요. 심각해요. 우리들의 얼굴들은 돌부처 같고...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 사55:1-17/ 한경직 목사/ 2014-08-23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 사55:1-1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五十五․六-七)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여기 때라고 하는 말이 두 번 거듭해서 나옵니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 가까이 계실 때,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 三장 一절에 보면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고 우리에게 교훈 하여 주십니다. 사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공부할 때가 있습니다. 사업도 할 때가 있습니다. 봉사도 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운동도 할 때가 있습니다. 일도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은 옛날부터 천시(天時)란 말을 썼습니다. 하늘의 때라 하는 말입니다. 이 천시를 바로 포착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고 사업에 성공을 할 수가 있고 학업에 큰 이룸을 얻을 수 있고 국가에 부강(富强)을 가져올 수도 있으며 민족을 중흥케 할 수도 있다고 우리에게 교훈 하여 주신 것입니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옛날부터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교훈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기회라고 하는 것을 의인화해서 그림을 그릴 때에 그 앞이마에는 털이 많이 났지마는 뒤에는 대머리가 되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그것은 기회라고 하는 것은 쉽게 잡을 수가 있지마는 한 번 지나간 후에는 다시 잡을 수가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파사의 오마라고 하는 유명한 분은 돌아오지 않는 것에 넷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뱉은 말, 쏜 살, 지나간 생활, 잃은 기회」라고 했습니다. 옛날 영국 색슨의 어떤 왕이 자기에게 반역하는 성을 점령하라고 그날 밤에 큰 촛불을 성문 위에다 켜 놓고 여러 성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누구든지 촛불이 꺼지기 전에 내게 항복을 하면 다 용서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촛불이 꺼진 후에는 다시 용서해 주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실행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데나 사업을 성취하는 데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나 할 것 없이 천하 만사에 시간적 제한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천시가 잇습니다. 촛불이 꺼지기 전에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귀한 영혼의 구원, 영생을 얻는 것도 시간적 제한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천시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십니다. 언제나 계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가까이 게실 때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일생을 흔히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인간 생활의 四기 가운데 청년 시대는 특별히 하나님을 만날 만한 시기입니다. 물론 유년 시기에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라나 유년 시기는 너무 어려서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을 다 깨달아 알기 어렵습니다. 물론 중년 시대에도 만날 수 있고 만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중년 시기에는 그 마음 밭 위에 세상의 재화나 욕심이나 가시덤불이 너무 많아서 진리의 말씀을 듣기는 듣고 싹이 나기는 나지마는 열매를 거두는 이가 적다고 말씀했습니다. 노년기에는 그 사상과 습관이 너무 굳어져서 마음 밭이 거의 길바닥 같아서 생명의 말씀을 듣기는 듣지마는 뿌리를 박기가 어렵다고 말씀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 소망이 없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청년 시기에는 대체로 그 마음 밭이 옥토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교적 양심이 맑습니다. 이상이 높습니다. 인생의 깊은 뜻을 탐구하고 영혼을 사모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이 청년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이 다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셔요. 베드로, 요한, 야고보, 디모데, 바울, 디도, 이들은 모두 다 三十대의 청년으로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 청년들, 청년 시기는 과연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이 때에 참된 신앙을 얻으셔서 일생의 방향을 바로 잡으시고 일생을 통해서 많은 봉사를 하시기를 특별히 부탁합니다. 또 우리 인간의 일생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때때로 우리는 누구나 생의 위기를 당합니다. 가령 누구나 질병을 앓습니다. 또 흔히 갑자기 앓게 됩니다. 그래서 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고 하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그만 병석에 눕게 되면 인간의 허약성, 제한성, 무능을 깊이 느낍니다. 자연히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특별히 병이 위독해서 사망에 직면하게 될 때에는 문자 그대로 인생의 깊은 뜻을 더듬게 됩니다. 그래서 병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聖) 프랜시스가 그랬습니다. 로욜라가 그랬습니다. 위대한 과학자 파스칼이 그랬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떤 때는 우리 육신에 병을 주신다ꡕ 고했습니다. 병상은 영혼이 구원을 얻을 만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에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리 오 마는 우리의 몸이 연약할 때에 하나님을 찾아서 신앙을 가지시고 일생의 삶을 위해 옳은 길을 잡고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병도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아무래도 몇 번은 슬픈 일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납니다. 어떤 때는 처자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슬픈 일은 흔히 예고 없이 오는 것입니다. 큰 슬픔이 마음에 깃 들게 되면 아무리 강퍅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도 그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온유하고 겸손해집시다. 시기나 교만이나 미움이나 질투의 마음도 큰 슬픔 아래에서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슬픔의 밀물이 들어올 때에 믿음의 배를 띄워 영생의 포구를 향하여 돛을 다는 이가 많습니다. 눈물의 렌즈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보고 내세의 실재를 깨닫고 참된 신앙에 들어오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슬플 때에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에 가면 발텐시안이라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창립한 피터 월드라고 하는 사람은 원래 중고 시대에 살던 사람인데 본래는 방탕한 생활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저녁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댄스를 하며 질탕하게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까운 친구 하나가 쓰러졌습니다. 죽었습니다. 호화로운 열락(悅樂)의 장소는 갑자기 울음의 바다로 변했습니다. 피터 월드라고 하는 이 청년은 인생의 허무를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인생의 깊은 뜻을 찾게 되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고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위대한 인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슬픔은 우리가 원하는 경험은 아닙니다. 그러나 슬플 때에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로 나오셔서 위로를 받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밖에도 우리의 인생의 인생을 보면 어떤 이는 사업에 실패를 할 수도 있고, 고독한 생활이 강요되는 이도 있고, 환난과 재난을 당하는 이도 있고, 역경을 당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 오히려 은혜와 축복을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격노를 피해서 미디안 광야에 도망하여 도피 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떤 날 오후 시내산 기슭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위대한 민족의 해방자(解放者)요 수천 년의 율법을 준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악한 왕후 이세벨의 노를 피해서 멀리 호렙산에 도망하여 굴속에 살다가 어느 날 굴 어귀에 섰을 때에 세미(細微)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더욱 위대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요한 이 큰 핍박을 만나 밧모 섬에 정배(定配)를 가서 어두운 굴속에 혼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기록한 요한계시록을 지금까지 읽고 있지 않습니까? 일제 시대에 많은 애국자들이 감옥에 들어가서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성경을 읽고 나온 사람의 많습니다. 남강 이 승훈 선생은 옥에 계시는 동안에 성경을 배독(百讀)했다고 전합니다. 위대한 애국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압박을 피해서 혹은 미국으로 도망하여 유리(遊離)하는 생활 중에 하나님을 만난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환난을 당합니까? 역경에 처하여 있습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께 지도를 받게 될 때에 여러분의 역경과 오늘의 화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은혜의 해가 있습니다. 또는 특별히 구원의 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전도하실 때에 자기가 자라난 나사렛에 갔습니다. 회당장이 성경을 올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읽은 성경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이사야 六十一장 一절 이하를 읽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사 나로 하여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케 하시기 위 하사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포로 된 자를 자유 캐 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하여 나를 보내셨느니라.\\\' 이 말씀을 읽으시고 오늘날 이 말씀이 응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를 주시는 시기가 있습니다. 주후 一 세기가 그러한 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친히 땅을 방문한 시기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열두 제자가 복음을 전파한 시기입니다. 은혜의 때가 아닙니까? 교회 역사를 통해 보면 이러한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가령 여러 종교 개혁자들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서 선포한 十六세기나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선교사를 전 세계에 보낸 대 선교 확포(擴布)시대인 十八. 十九세기가 은혜의 시기올시다. 이 시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문과 잡지를 통해서 혹 보셨을 것입니다. 인도네시아라고 하는 나라에서는 스카르노가 쫓겨난 후 이후 수십만 명이 새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나 예배를 세 번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가 부족해서 큰일 났다고 합니다. 은혜의 해가 있습니다 또 구원의 날이 특별히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오순절 같은 날은 특별히 구원의 날이 아닙니까? 하루에 三천 명이 회개하는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에 특별히 주일은 어제나 구원의 날이올시다. 이런 주일 가운데도 一년에 한번씩 지키는 이 간증주일은 구원의 날이올시다. 오늘 여러분 다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 처녀의 기회를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음으로 늦게 오는 신랑을 영접하고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미련한 처녀는 등만 준비하고 기름 준비를 못했다가 신랑이 늦게 오자 불이 꺼져 기름 사러 거리에 나간 사이에 신랑이 오고 말았습니다. 잔치 집에는 이미 다 들어갔습니다. 문은 닫혔습니다. 그때 열어달라고 하니까?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문이 닫히는 때가 있습니다. 문 열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야 합니다. 전에 헤롯왕은 위대한 세례요한 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왜?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도 구원을 못 얻었습니다. 그 이유는 교만해서입니다. 아그립바 벨릭스 같은 사람은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설교를 듣고도 구원을 못 얻었습니다. 왜?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였습니다. 강퍅한 마음, 교만한 마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겸손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사탄이 자기 부하를 모아 놓고는 어떻게 하여야 땅 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 하고 방안을 연구했습니다. 어떤 귀신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 \\\"제가 땅에 내려가서 무엇보다도 성경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선전을 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다른 귀신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 \\\"저는 이 땅에 내려가서 하나님이 없다고 선전하겠습니다. 즉 무신론을 선전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귀신이 일어서더니, \\\"저는 천당과 지옥이 없다고 선전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늙은 귀신이 척 일어나더니 \\\"그것도 다 좋지마는 저는 땅에 내려가서 믿는 것도 괜찮지 마는 차차 믿으라고 선전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한 달 기한을 두고 다 땅 위에 내려보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서는 올라와서 그 동안의 성과를 보고합니다. 누구는 몇 백 명을, 누구는 얼마를 데리고 왔습니다 하는데 그 중 넷째 귀신이 제일 많이 지옥으로 데려왔단 말입니다. 차츰 믿어도 된다고 하는 귀신 말입니다. 여러분, 시간적 제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 주실 때에 작정하고, 과거의 생활을 끊어버리고, 회개하고,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국가적으로 볼 때에 오늘날은 과연 우리 나라를 각 방면으로 건설할 때입니다. 천시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각 방면으로 건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건설을 더디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정과 부패입니다. 이런 모든 건설을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도의의 건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 뜻 깊은 간증주일에 온전히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정신적으로 정돈을 해서 새 사람이 되어 우리 나라를 바로 건설해야겠습니다. 각 방면으로 일군이 되어야겠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올시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가나안 믿음의 행보/ 수1:1-9/ 한경직 목사/ 2014-08-25
가나안 믿음의 행보 수1:1-9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 一․二) 이 말씀은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종 되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올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영도 아래 애굽을 담대히 떠나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 四十년 동안 배회한 후 이윽고 요단강 건너편 모압 평지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가서 가나안의 온 땅을 멀리 바라다본 채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불러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요단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땅으로 가라.』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지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하나님의 명령이 여호수아에게 내린 것입니다. 금년은 우리 한국 역사상에 의의 깊은 해인 줄 믿습니다.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만 七十년 되는 해입니다. 또한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로 말하자면 제四十회 총회를 지난주간 에 끝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 장로교회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四十년 동안 거친 광야에서 지내온 것과 같이 四十년 동안 거친 땅을 거닐면서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한국의 기독신자의 수를 백만으로 셉니다. 그러나 신교 七十주년을 당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四十 주년을 맞이하여 과거를 돌아보고 장래를 전망하여 볼 때 우리 한국의 교회는 아직까지 가나안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근 三천만에 가까운 남북 동포들의 심령을 우리는 정령하지 못했습니다. 이 대를 당하여 우리 한국 교회에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명령해서 하시는 말씀이『요단을 건너 내가 다 너희에게 준 이 땅으로 가라.』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거라.』또한『내가 모세에게 명하여 준 계명을 힘써 기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 하여야 네가 가는 곳마다 형통할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의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분부를 하시는 줄 압니다. 그 때의 백성의 형편을 잠깐 살펴보면 그 사람들 가운데서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거기 좀 더 있기를 원한 사람도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미 四十년 동안 많은 고생을 하면서 여기 왔는데 이제 좀 쉬어야겠고, 그 때 마침 홍수가 되어서 요단강에 물이 높아 건너가기도 어렵고, 또한 건너간다 하여도 가나안에는 가나안 七족이 건재해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있고, 그들의 쌓은 성곽은 높고 그들이 웅거한 산악은 험해서 설사 건너간다 하여도 쉽게 점령하기를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줄 생각됩니다. 더욱이 르우벤 지파나 갓 지파 혹은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 저편에서 이미 분 깃의 허락을 받을 줄 압니다. 고로 자연히 요단강을 건널 생각이 적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령하시기를『너희는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四十년 동안 긴 세월을 광야에서 훈련시켰고 모압 평지에까지 인도하셨는데 모압 평지에 머물게 하려고 그 곳까지 인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요단강이 깊고 가나안이 강하다 하여도 그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을 점령하고 이 앞으로 위대한 백성이 되고 그 곳에 위대한 나라를 세워 하나님의 백년 천 년의 경륜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압 평지가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과 경륜은 모압 평지까지 오고 마는 것이 아니고 가나안에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완전히 점령하고 완전한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빨리 건너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교 七十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 가지 핍박 가운데서도 발전되었고, 교인 수는 지금 백만으로 되었고 정부 요인도 상당히 있고, 육, 해, 공군에도 많이 들어있어서 우리 기독교의 사명을 다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만큼 해 놓았으니까 내 교회나 잘 지키고 내 책임이나 잘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 七十주년을 맞는 우리 신도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시고 지금까지 교회를 지키시고 이와 같이 육성하여 주시고 여기에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완전히 점령하듯, 남한을 점령하고 북한을 점령하고 나아가서는 삼천만 동포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 나라를 기독교 나라로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이 땅에 七十년 전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궁극적 목적이요 경륜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서 일어나 주님을 위하여 일할 줄 모르고 단순히 앉아서 앉은뱅이 믿음을 가진 앉은뱅이 신자가 많습니다. 자기는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 일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는 신자가 우리 가운데도 더러 있는 줄 압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니까. 여러 사람들 틈에 슬그머니 앉았다 나오면 누가 함께 일하자고, 연보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나, 참 편안히 예수를 믿기는 큰 교회가 제일이다 하는 이도 있습니다. 일어서야 되겠습니다. 우리 총회 전도 부에서 작년부터 선교 七十주년을 기념하여 특별히 五개년 계획을 세워 남한에 아직 교회가 없는 五백 면에 신설 교회 五백 개를 세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작년 중에 백 개를 세우려고 총회 전도 부에서 많은 힘을 썼지만 작년 총회 보고를 들어보니 백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六十八개의 교회를 신설했다는 것이올시다. 만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산하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 앉은뱅이 믿음을 갖지 말고 일어나 자기의 정성을 다하였다고 하면 어찌 백 면에 백 교회를 세우지 못했겠습니까? 우리가 전도 회 모임 때 모일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참석할 수 없어도 누구나 다 가입해서 다소를 불구하고 한 달에 얼마씩 꼭 내서 교회 없는 면에 교회를 세우기로 꼭 작정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 비를 내어 二十여 처에 전도 인을 낼 수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믿는 것은 영락교회의 四천명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일어나면 우리 영락교회에서 三十 곳을 보내지 못한 것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라. 그리하여 요단을 건너 내가 준 땅으로 가라.』 이 말씀을 같이 듣고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은『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용기(勇氣)와 담대(膽大)는 군인의 생명이올시다. 군인으로서 용기가 없고 담대하지 못하면 군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이 담대해야 할 것은, 그 곳에는 가나안 七족이 살고 있고 성곽은 튼튼하고 산악 지대는 험하고 더욱이 가나안에는 그 때 아람 자손이라고 키가 큰 장사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근 四十년 전에도 갈렙과 다른 열 두 지파 들의 대표 열두 사람이 가나안 정탐을 하고 보고할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올라가서 곧 점령을 하라고 하였으나 열 사람은 도저히 점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을 보고 우리를 보니 우리는 메뚜기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낙심해서 점령하려다 못한 기억이 그 때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에게 분명히 하시는 말씀이『너희는 믿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영적 시야를 전망할 때 가나안 七족도 있고 아랍 자손과 같은 거대한 원수도 있고 유물론을 주장하는 공산당 원수도 우리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七족과 같이 여러 가지 죄악의 아성이 우리 앞에 높이 있어서 세속주의라는 이름 아래 우리 앞을 막고 더욱이 극도로 부패한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내가 너희에게 준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셨습니다. 이 때 저 가나안 七족이 점령해 있고 아랍 족속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것입니다. 가나안 七족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고 아랍 족속이 아무리 강해도 멸망할 운명에 놓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앞의 원수도 같습니다. 내가 분명히 믿는 것은, 한국 三천만의 영혼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미 믿는 사람에게 이 민족, 이 나라를 주셨습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점령하라 명하실 때는 이미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의 소유를 우리가 점령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갈 때 나도 가고 너희가 요단을 건널 대 나도 건너고 너희들이 쉴 때 나도 쉬고 너희들이 싸울 때 나도 싸우고 너희들이 힘이 약할 때 너희를 도와주고 내가 언제든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점령하라』하셨습니다. 아무리 죄악이 관영하고 악한 세력이 북한을 점령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시간 문제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신 것은『내가 모세에게 명한 율법을 잘 지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총회 때 특별히 여러 총대들이 선교 七十저년을 맞고 장로교 四十회 총회를 맞아 우리 교회가 현하(現下) 당면한 문제를 지키기 위하여 특별히 몇 가지 점을 하나님의 교훈 가운데서 꼭 지켜야겠다고 강조했습니다. 몇 가지 중 세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우리 사명을 다하는 한국의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주님의 날을 거룩이 지켜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종래 한국의 초대교회는 주일을 거룩이 지켰습니다. 제가 학생시절에는 주일에 성경만 보았지 다른 학과 공부는 죄가 된다고 하여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꼭 거룩이 학생도 선생도 일반 교인도 으레 믿으면 주일은 문을 닫을 줄 알고 일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주일을 거룩이 지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일제 탄압 아래 제二차 대전을 겪으면서 일본 사람들이 생산을 증가한다고 하여 믿는 사람도 주일에 일을 하게 하고 문을 열어 놓게 하고 심지어 공부도 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강제로 하게 한 후부터 믿는 사람의 양심도 마비되어 주일을 지키는 양심이 둔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온전히 주일에 철시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믿는 학교에서 주일에 시험을 보는 일, 특별히 학생을 모아놓고 훈련시키는 일을 종종 우리가 목도합니다. 또한 주일에 반드시 필요성이 없지만 사고 팔고 하는 흥정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초대 교회로 돌아가서 주일을 거룩이 지켜야겠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일을 쉬는 날이요, 둘째로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바치는 알이요, 이 날 일을 한다면 병든 자의 심방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주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그 외에 주일에 무슨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제四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총회에서 강조한 것은 십일조에 대한 교훈입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소유의 十분의 一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 십일조에 대한 명령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소유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내가 집을 짓고 돈을 벌고 일을 해서 월급을 받으나 우리 믿는 사람의 소유는 모드 하나님께 속합니다. 나는 단순히 대신 맡아서 일보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 소유자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우리가 이렇게 보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 보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보물 가는 곳에 내 마음도 따라갑니다. 고로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십일조를 드립니다. 또 말라기 三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십일조 드리는 것을 통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물질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너희가 모든 소유가 내 것인 줄 꼭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의무를 잘하면 십일조를 바치고 사업을 하면 내가 네 사업에 축복하겠노라』하는 이와 같은 약조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십일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합니다. 전도 사업, 교육 사업, 자선 사업,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번 총회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발언을 많이 한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모든 계명을 잘 지키되 특별히『서로 사랑하라. 이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가 된 것을 알리라. 너희들이 어떻든지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라』하는 것입니다. 명령하신 이 사람의 계명을 지켜야겠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어도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납해서 오직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증거 하여야만 우리가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로 구원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선교 七十주년을 맞고 장로교 四十주년을 맞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오직 한 가지인 줄 압니다.『너희들은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서 내가 너희에게 준 이 땅으로 가거라.』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가나안 점령의 명령/ 수1:1-2/ 한경직 목사/ 1955-05-01
가나안 점령의 명령 수1:1-2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 一·二) 이 말씀은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종 되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올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영도 아래 애굽을 담대히 떠나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 四十년 동안 배회한 후 이윽고 요단강 건너편 모압 평지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가서 가나안의 온 땅을 멀리 바라다본 채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불러 명령하셨습니다.『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요단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땅으로 가라.』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지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하나님의 명령이 여호수아에게 내린 것입니다. 금년은 우리 한국 역사상에 의의 깊은 해인 줄 믿습니다.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만 七十년 되는 해입니다. 또한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로 말하자면 제四十회 총회를 지난주간 에 끝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 장로교회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四十년 동안 거친 광야에서 지내온 것과 같이 四十년 동안 거친 땅을 거닐면서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한국의 기독신자의 수를 백만으로 셉니다. 그러나 신교 七十주년을 당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四十 주년을 맞이하여 과거를 돌아보고 장래를 전망하여 볼 때 우리 한국의 교회는 아직까지 가나안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근 三천만에 가까운 남북 동포들의 심령을 우리는 정령하지 못했습니다. 이 대를 당하여 우리 한국 교회에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기를 원하실 까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명령해서 하시는 말씀이『요단을 건너 내가 다 너희에게 준 이 땅으로 가라.』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거라.』또한『내가 모세에게 명하여 준 계명을 힘써 기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 하여야 네가 가는 곳마다 형통할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의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분부를 하시는 줄 압니다. 그 때의 백성의 형편을 잠깐 살펴보면 그 사람들 가운데서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거기 좀 더 있기를 원한 사람도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미 四十년 동안 많은 고생을 하면서 여기 왔는데 이제 좀 쉬어야겠고, 그 때 마침 홍수가 되어서 요단강에 물이 높아 건너가기도 어렵고, 또한 건너간다 하여도 가나안에는 가나안 七족이 건재해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있고, 그들의 쌓은 성곽은 높고 그들이 웅거한 산악은 험해서 설사 건너간다 하여도 쉽게 점령하기를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줄 생각됩니다. 더욱이 르우벤 지파나 갓 지파 혹은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 저편에서 이미 분 깃의 허락을 받을 줄 압니다. 고로 자연히 요단강을 건널 생각이 적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령하시기를『너희는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四十년 동안 긴 세월을 광야에서 훈련시켰고 모압 평지에까지 인도하셨는데 모압 평지에 머물게 하려고 그 곳까지 인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요단강이 깊고 가나안이 강하다 하여도 그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을 점령하고 이 앞으로 위대한 백성이 되고 그 곳에 위대한 나라를 세워 하나님의 백년 천 년의 경륜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압 평지가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과 경륜은 모압 평지까지 오고 마는 것이 아니고 가나안에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완전히 점령하고 완전한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빨리 건너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교 七十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 가지 핍박 가운데서도 발전되었고, 교인 수는 지금 백만으로 되었고 정부 요인도 상당히 있고, 육, 해, 공군에도 많이 들어있어서 우리 기독교의 사명을 다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만큼 해 놓았으니까 내 교회나 잘 지키고 내 책임이나 잘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 七十주년을 맞는 우리 신도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시고 지금까지 교회를 지키시고 이와 같이 육성하여 주시고 여기에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완전히 점령하듯, 남한을 점령하고 북한을 점령하고 나아가서는 삼천만 동포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 나라를 기독교 나라로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이 땅에 七十년 전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궁극적 목적이요 경륜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서 일어나 주님을 위하여 일할 줄 모르고 단순히 앉아서 앉은뱅이 믿음을 가진 앉은뱅이 신자가 많습니다. 자기는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 일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는 신자가 우리 가운데도 더러 있는 줄 압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니까. 여러 사람들 틈에 슬그머니 앉았다 나오면 누가 함께 일하자고, 연보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나, 참 편안히 예수를 믿기는 큰 교회가 제일이다 하는 이도 있습니다. 일어서야 되겠습니다. 우리 총회 전도 부에서 작년부터 선교 七十주년을 기념하여 특별히 五개년 계획을 세워 남한에 아직 교회가 없는 五백 면에 신설 교회 五백 개를 세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작년 중에 백 개를 세우려고 총회 전도 부에서 많은 힘을 썼지만 작년 총회 보고를 들어보니 백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六十八개의 교회를 신설했다는 것이올시다. 만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산하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 앉은뱅이 믿음을 갖지 말고 일어나 자기의 정성을 다하였다고 하면 어찌 백 면에 백 교회를 세우지 못했겠습니까? 우리가 전도 회 모임 때 모일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참석할 수 없어도 누구나 다 가입해서 다소를 불구하고 한 달에 얼마씩 꼭 내서 교회 없는 면에 교회를 세우기로 꼭 작정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 비를 내어 二十여 처에 전도 인을 낼 수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믿는 것은 영락교회의 四천명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일어나면 우리 영락교회에서 三十 곳을 보내지 못한 것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라. 그리하여 요단을 건너 내가 준 땅으로 가라.』 이 말씀을 같이 듣고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은『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용기(勇氣)와 담대(膽大)는 군인의 생명이올시다. 군인으로서 용기가 없고 담대하지 못하면 군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이 담대해야 할 것은, 그 곳에는 가나안 七족이 살고 있고 성곽은 튼튼하고 산악 지대는 험하고 더욱이 가나안에는 그 때 아람 자손이라고 키가 큰 장사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근 四十년 전에도 갈렙과 다른 열 두 지파 들의 대표 열두 사람이 가나안 정탐을 하고 보고할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올라가서 곧 점령을 하라고 하였으나 열 사람은 도저히 점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을 보고 우리를 보니 우리는 메뚜기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낙심해서 점령하려다 못한 기억이 그 때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에게 분명히 하시는 말씀이『너희는 믿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영적 시야를 전망할 대 가나안 七족도 있고 아랍 자손과 같은 겨대한 원수도 있고 유물론을 주장하는 공산당 원수도 우리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七족과 같이 여러 가지 죄악의 아성이 우리 앞에 높이 있어서 세속주의라는 이름 아래 우리 앞을 막고 더욱이 극도로 부패한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내가 너희에게 준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셨습니다. 이 때 저 가나안 七족이 점령해 있고 아랍 족속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것입니다. 가나안 七족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고 아랍 족속이 아무리 강해도 멸망할 운명에 놓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앞의 원수도 같습니다. 내가 분명히 믿는 것은, 한국 三천만의 영혼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미 믿는 사람에게 이 민족, 이 나라를 주셨습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점령하라 명하실 때는 이미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의 소유를 우리가 점령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갈 때 나도 가고 너희가 요단을 건널 대 나도 건너고 너희들이 쉴 때 나도 쉬고 너희들이 싸울 때 나도 싸우고 너희들이 힘이 약할 때 너희를 도와주고 내가 언제든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점령하라』하셨습니다. 아무리 죄악이 관영하고 악한 세력이 북한을 점령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시간 문제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신 것은『내가 모세에게 명한 율법을 잘 지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총회 때 특별히 여러 총대들이 선교 七十저년을 맞고 장로교 四十회 총회를 맞아 우리 교회가 현하(現下) 당면한 문제를 지키기 위하여 특별히 몇 가지 점을 하나님의 교훈 가운데서 꼭 지켜야겠다고 강조했습니다. 몇 가지 중 세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우리 사명을 다하는 한국의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주님의 날을 거룩이 지켜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종래 한국의 초대교회는 주일을 거룩이 지켰습니다. 제가 학생시절에는 주일에 성경만 보았지 다른 학과 공부는 죄가 된다고 하여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꼭 거룩이 학생도 선생도 일반 교인도 으레 믿으면 주일은 문을 닫을 줄 알고 일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주일을 거룩이 지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일제 탄압 아래 제二차 대전을 겪으면서 일본 사람들이 생산을 증가한다고 하여 믿는 사람도 주일에 일을 하게 하고 문을 열어 놓게 하고 심지어 공부도 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강제로 하게 한 후부터 믿는 사람의 양심도 마비되어 주일을 지키는 양심이 둔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온전히 주일에 철시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믿는 학교에서 주일에 시험을 보는 일, 특별히 학생을 모아놓고 훈련시키는 일을 종종 우리가 목도합니다. 또한 주일에 반드시 필요성이 없지만 사고 팔고 하는 흥정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초대 교회로 돌아가서 주일을 거룩이 지켜야겠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일을 쉬는 날이요, 둘째로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바치는 알이요, 이 날 일을 한다면 병든 자의 심방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주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그 외에 주일에 무슨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제四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총회에서 강조한 것은 십일조에 대한 교훈입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소유의 十분의 一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 십일조에 대한 명령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소유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내가 집을 짓고 돈을 벌고 일을 해서 월급을 받으나 우리 믿는 사람의 소유는 모드 하나님께 속합니다. 나는 단순히 대신 맡아서 일보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 소유자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우리가 이렇게 보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 보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보물 가는 곳에 내 마음도 따라갑니다. 고로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십일조를 드립니다. 또 말라기 三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십일조 드리는 것을 통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물질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너희가 모든 소유가 내 것인 줄 꼭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의무를 잘하면 십일조를 바치고 사업을 하면 내가 네 사업에 축복하겠노라』하는 이와 같은 약조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십일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합니다. 전도 사업, 교육 사업, 자선 사업,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번 총회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발언을 많이 한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모든 계명을 잘 지키되 특별히『서로 사랑하라. 이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가 된 것을 알리라. 너희들이 어떻든지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라』하는 것입니다. 명령하신 이 사람의 계명을 지켜야겠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어도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납해서 오직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증거 하여야만 우리가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로 구원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선교 七十주년을 맞고 장로교 四十주년을 맞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오직 한 가지인 줄 압니다.『너희들은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서 내가 너희에게 준 이 땅으로 가거라.』 (一九五五년 五월 一일)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가이사 집의 성도들/ 빌4:10-23/ 한경직 목사/ 2014-08-25
가이사 집의 성도들 빌4:10-23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빌 四․二十二) 빌립보서는 바울의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올시다. 모든 권면(勸勉)을 마친 후에 마지막 문안을 하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는데 특별히 가이사집에 있는 몇 성도들도 너희들에게 문안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 성도들이라고 하는 말은 천주교에서 중세기 이래로 사용해 온 것과 같은 특별한 성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성도라는 말은 모든 믿는 사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성별(聖別)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가이사집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가이사라고 하는 말은 그 때 로마 황제의 칭호입니다. 또 가이사집이라는 말은 개인의 집을 말한 것이 아니라 궁중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황제의 궁정에서 일하는 궁내 대신을 비롯해서 비서, 궁녀, 시위대장관, 군인 등을 포함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할 것은, 이 때에 벌써 로마 제국 황제의 궁중에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올시다. 그 때의 황제가 누구였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그 때의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로마 역사상 가장 악한 제왕이라고 말합니다. 그이가 얼마나 포악하였는지 그는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 아들도 죽이고 자기 아내까지 죽인 사람이올시다. 악마의 화신 그대로였습니다. 로마 성을 자기 손으로 불 놓고 그 책임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하기 위해서 많은 기독교도들을 학살한 왕입니다. 학살을 하되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인 것입니다. 더러는 십자가에 못박고 더러는 사자 굴에 내어 던져서, 혹은 옷에다 골탈 칠을 해서 기둥에 비 끌어매고 불을 질러서 죽인 가장 잔인한 제왕입니다. 그러니 당시 궁중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포악하고 잔인했습니다. 공포와 불안에 쌓인 궁중입니다. 반면에 음란과 사치와 방탕과 온갖 죄악의 구렁텅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시위대 군인들 가운데 혹은 비서들 가운데 혹은 궁녀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에 가이사집의 성도들을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는 큰 느낌은 이런 죄악의 소굴에도 성도들이 있었던 것을 보니 신앙 생활은 어떤 환경에서나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항간에『요사이 관청에 있으면 신앙 생활 못해』하는 말이 들립니다. 혹은『요새 장사꾼으로서는 신앙 생활하기 힘들어』하는 말들이 들립니다. 여러분 가이사집의 성도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런 거슬리는 환경 가운데서 신앙 생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전에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고 장래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경건한 생활을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다녀온 어떤 분의 말 가운데, 그 곳에서 북한에서 유학 온 청년 몇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자기를 조용히 보자고 하더니 자기 포켓에서 조그마한 책을 하나 꺼내 보이면서 이것이 무슨 책인지 아세요? 이것은 우리 한국말로 된 신약성서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청년입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북한에 그리스도를 믿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북한에도 그리스도를 잘 믿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가이사집의 성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앙 생활은 쉬운 것이라 말씀하신 적은 절대로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받으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우리가 사방으로 욱여 싸임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함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기록했습니다. 『내가 비천(卑賤)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너무 가난해서 못 믿겠다. 나는 너무 고독해서 못 믿겠다. 혹은 나는 우리 부모가 믿지 않으니까 믿기 어렵다. 혹은 내 남편이 믿지 않으니 못 믿겠다. 혹은 내가 받드는 사장님이 믿지 않으니 내가 믿기 어렵다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여러분 가운데 혹 있습니까? 이 가이사집에서 예수를 믿던 성도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이 가이사집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 들어오는 생각은 참 신앙은 모든 환경을 극복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빌립보서는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기록했습니다. 감옥은 고독한 곳입니다. 감옥은 침울한 곳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안에서도『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환경을 극복하였습니다. 빌립보서 一장 十二절 이하를 보면,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알기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남이 되었다』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감옥이라는 환경을 극복한 분이올시다. 이렇게 전도함으로써 가이사집의 성도들이 생긴 모양입니다.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고, 그와 같은 이교의 궁중에서 양심적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환경을 극복하고 양심적 신앙 생활을 계속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불신 사회에서 살게 될 때에 언제나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점점 세상을 따라가면서 마지막에는 세상에 물들어 맛 잃은 소금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을 그런 가운데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점점 세상을 변화하게 해서 복음 화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을 가진 사도 바울의 신앙 생활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이사집 성도들의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 후의 역사를 보면 여러 가지 핍박과 환난을 불구하고 이 가이사집 성도의 수는 점점 많아 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콘스탄틴 황제 때는 황제도 믿게 되고 그 어머니도 믿게 되어 온 가족이 다 믿고 마지막에는 로마 전국을 영적으로 정복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환경을 극복합니다. 보통 집에 들어 가보면 한란계라는 것이 있지요. 그것 무엇 하는 겁니까? 한란계는 방안의 온도가 더운지 찬지를 얼른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사이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집에 가보면 한란계가 하나 더 있지요. 제온기(制溫器)라는 것이 있지요. 이 제온기라는 것은 온도를 내가 원하는 대로 놓으면 방안의 온도가 변해서 그 제온기의 온도만큼 됩니다. 냉난방이 자동으로 제온기를 따라 변하게 됩니다. 여러분 압니까? 믿는 사람들 가운데 두 가지 종류의 믿는 사람이 있어요. 한 사람은 한란계 비슷합니다. 자기 주위 환경의 온도에 따라서 같이 변하고 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제온기와 같은 신자가 있습니다. 어디 가든지 자기가 표준 한 그 표준대로 다른 사람을 따라오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신자입니까? 제온기와 같은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 젊은 남녀들이 새로 학습을 썼습니다. 제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마는 아마 여기 특별히 여자들 가운데 이 다음에 출가할 때에 혹 믿지 아니하는 가정으로 출가하는 여자들이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 어떤 여자가 믿지 아니하는 가정에 출가를 한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교회도 나오고 또 교회 봉사도 하느라고 애쓰다가 몇 해 지나 보면 점점 믿음이 식어져서 믿지 아니하는 가정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믿지 않고 맙니다. 그러나 어떤 여자는 꼭 같이 믿지 아니하는 가정 출가를 하였는데 그 가정에 출가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킬뿐더러 남편도 회개시키고 시어머니도 회개시키고 또 시아버지까지 교회로 인도하고 온 가정을 다 복음 화하는 그런 여자들도 있음을 많이 보았습니다. 참 신앙은 환경을 극복합니다. 첫째는 참으로 중생한 믿음이올시다.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거듭난 믿음, 새 사람이 된 믿음이올시다. 둘째는 이렇게 중생 한 후에도 계속해서 기도를 힘쓰고 성경 읽기를 힘쓰고 예배에 출석하고 성례에 참여하고 봉사와 전도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는 믿음이올시다. 그리해서 간단없이 새로운 힘과 은혜를 받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올시다. 셋째로는 행함이 따르는, 신행일치(信行一致)의 믿음이올시다. 그리해서 어디 가든지 성경과 건실(健實)과 근면과 단정함으로써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적 생활을 하는 신자입니다. 넷째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믿음이올시다. 언제나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새로운 은혜를 받는 믿음이올시다. 이런 믿음은 어디에 갖다 놓든지 모든 환경을 극복합니다. 오늘 학습을 서는 여러분들 특별히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혹 여러분 중에 불우하고 고독한 환경 가운데서 신앙 생활을 하며 때때로 낙심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가이사집의 성도들을 기억하시고 새로운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쉬운 환경이 아닙니다. 중생의 은혜와 또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산 믿음이올시다. 먼저 온전히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고 산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환경이든지 그 환경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결 가는 대로 떠다닙니다. 그러나 산 고기는 비록 쏟아지는 폭포수라도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산 믿음은 환경을 극복합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는 포악과 무도가 가득하고 음란과 방탕(放蕩)이 가득 찬 세상, 허영, 사치, 부정, 온갖 죄악이 가득한 말하자면 한 큰 가이사의 집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킬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을 이기며 이런 세상을 변화시켜 새 세상을 만드는 사명이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명을 다 하려면 옛날 가이사집의 성도들이 가졌던 신앙과 같은 신앙을 우리가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기도원에 가면 연못 둘이 있지 않습니까? 연못의 연꽃이 아주 아름답게 잘 피었습니다. 그러나 그 연꽃의 줄기를 보면 그 줄기는 더러운 진흙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은 어떻게 아름답고 깨끗한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비록 이 더러운 세상에 산다고 하지마는, 우리 몸은 이와 같은 환경에 있다고 하지마는, 우리의 심령만은 연꽃과 같이 아름답고 청아한 향기를 품는 심령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이사집의 성도들을 기억해서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낙심하지 말고 그 환경 가운데서 환경을 극복하고 내 신앙 생활을 할 뿐더러 온 환경을 변화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게 하는 큰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가인과 아벨의 후예/ 창4:16-26/ 하용조 목사/ 2009-09-15
가인과 아벨의 후예 창4:16-26 가인은 아벨을 죽인 이후에 아담과 똑같은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에는 벌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죄는 숨겨지지 않습니다. 모든 물건은 썩지만 죄는 썩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모든 문제는 잊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지 않으면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죄를 짓기 전이나 죄를 지을 때에는 죄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습니다. 죄의 대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심각하고 용서받지 않으면 영원히 지속됩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후 하나님으로 부터 형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생명나무가 감춰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하고 여자는 해산과 남자를 사모하는 고통이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때문에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연은 인간을 저주합니다. 가인에게 주어진 벌은 밭을 갈아도 땅이 그 효력을 다시 내지 않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에게 내려진 벌은 ‘방황’이었습니다. 매를 맞는 벌은 차라리 괜찮습니다. 벌 중에 가장 가혹한 벌은 방황입니다. 방황이란 안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독은 방황으로부터 옵니다. 가인은 땅을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어 앉을 자리도, 누울자리도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그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이 겪어야 했던 죄의 대가였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도, 살인할 때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후 그에게 찾아온 고독과 방황과 두려움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딜수 없는 심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 13절에는 가인이 하나님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하소연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죄의 대가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평생 죄책감이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불안과 두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그런 심판 중에서도 표를 주어 누구든지 그 표를 본 자는 그를 죽일 수 없도록 해주었습니다. 인간은 이 표를 달고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하나님앞에서 떠난 가인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불행해집니다. 집안에 있을 때는 그래도 안식할 수 있지만 가출하면 그때부터 고통입니다. 돌아갈 집이 없이 계속해서 경찰에게 쫓겨 숨어 살아야 하는 신창원과 같은 도망자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원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어 있었지만 죄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렇지만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보아 죄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과 계속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지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이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계속 다니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래야 다시 살아날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을 놓치면 영원히 미아가 되고 맙니다. 가인이 잘못된 제사를 드려서 꾸중을 듣고 야단을 맞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관계의 줄을 놓친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의 줄을 놓치지 마십시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고통이 계속되고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을 놓지 마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과거의 잘못된 것들을 청산시키십니다. 죄를 끊지 못하던 삶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이 한 순간에 찾아와 주셔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에덴의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덴의 동쪽’이라는 멋있는 영화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에덴의 동쪽은 멋있는 곳이 아닙니다. 에덴의 동쪽은 에덴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덴에서 쫓겨나서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곳에서부터 더 멀리 동쪽으로 떨어진 곳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멀어져 갔습니다. 성경에서는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는 네게로 돌아가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가운데 포기하지 마시고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여러분이 완전하지 않고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도망가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기회를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더 멀리 동쪽 놋땅으로 이동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한때 교회도 잘 나갔고 예수도 잘 믿었었는데 타락해서 영원히 교회를 떠난 사람도 보았고 다시 돌아온 사람도 봅니다. 한 때 예수를 믿었지만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던 사람보다 더 악하고 잔인한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유다입니다. 가룟유다는 3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과 함께 밥도 먹고 설교도 들었던 사람입니다. 기적도 보았고 그 조직에서 회계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시험에 들어 예수님을 은 삼십에 십자가에 팔아 넘기는 엄청난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살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아겔다마라는 피밭에서 창자가 터져 죽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던자가 더 악해질수 있어 저는 여러분이 타락해도 여기까지 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돌아오십시오. 일시적으로 시험을 받아 교회를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하나님을 믿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끝내시고 빨리 돌아오십시오. 계속 그런 모습으로 있으면 비참해 집니다. 구약에 그런 예가 있습니다. 바로 사울왕입니다. 사울왕은 처음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이 되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복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던 까닭에 다윗을 질투하게 되어 그를 죽이려 했고 반미치광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당에게 찾아가는등 그의 인생은 너무나 비참해졌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배신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놓치지 마십시오. 다시 돌아올 기회를 만드십시오. 인류 역사상 가공할 해를 끼쳤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모두 어렸을 적에 교회에 다녔거나 기독교적인 배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니체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치광이가 되어 죽어갔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산상설교와 문체가 똑같습니다. 산상설교를 백퍼센트 틀리게 말한 것이 짜라투스트라입니다. 공산주의를 창설했던 마르크스, 유태인을 6백만명을 학살했던 히틀러도 모두 기독교적인 접촉점이 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복을 놓치고 가공할 인류의 재앙을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어머니를 기억해서 칠곡교회를 만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신자보다 더 악합니다.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6절을 보면 이런 사람에 대하여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성령도 체험하고 예수도 믿었던 사람들이 바로 박태선, 문선명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모두 처음에는 예수 잘 믿고 교회에 잘 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단의 교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박태선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쳐서 죽었습니다. 너무나 불행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단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단에 빠지면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가끔 돌아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돌아오지 못합니다. 돌아왔다고 해도 영적인 상처가 너무나 깊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가인의 후예의 모습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땅에 거한 가인은 아내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에녹’입니다. 성을 쌓은 인간 17절을 보면 가인이 놋땅으로 옮겨서 처음 한 일이 바로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가인이 쌓은 성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덴을 잃어버린 인간은 에덴의 대용품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하나님대용품으로 돈이나 권력을 찾습니다. 가인은 에덴동산을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에덴동산과 비슷한 것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이었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성을 만들고 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성을 쌓는 존재입니다. 성을 쌓은 이유는 하나님의 보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적과 원수로부터 보호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만리장성이고, 동대문, 남대문입니다.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영토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간은 성을 쌓는 것입니다. 이 성쌓는 일이 창세기 11장으로 가면 바벨탑으로 발전합니다. 바벨탑을 쌓은 인간은 국경을 만듭니다. 국경이 생기면 국경분쟁이 생깁니다. 이런 분쟁의 상황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요, 삶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성을 쌓게 되고 성을 쌓는 인간은 네것과 내것을 구분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전쟁과 싸움이 생깁니다. 가인은 행복을 위하여 성을 쌓았지만 그 성은 전쟁과 불행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성을 쌓습니다. 담을 쌓고 담위에 사이다병과 같은 유리병을 깨서 꽂아 놓았습니다. 도둑이 들어오다가 다치게 하기위해서 입니다. 또는 철조망을 감아서 감옥과 같이 둘러 놓았습니다. 어떤 집은 깡통에 돌을 넣어서 흔들리도록 만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려 합니다. 돌로 성을 쌓고 철로 철장을 만들었습니다. 철로 성을 쌓은 인간의 결과는 ‘철창안에 갖힌 신세’입니다. 성을 쌓은 인간은 성안에 갖혀 외롭고 고독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가인의 생애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을 쌓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동행하십시오.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성경은 많은 인물중 중요한 인물만을 설명합니다. 가인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은 라멕입니다. 가인에서 라멕까지 5대가 흘렀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말입니다. 라멕은 보통사람과 달리 탁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기록이 있는 것 같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처음으로 일부다처제가 시작됩니다. 죄의 결과는 일부다처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남편 한 사람, 부인 한사람으로 만족하기를 바랍니다. 일부다처제는 많은 불행을 가져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첫번째 아내에게서 큰아들 야발을 얻었는데 그는 유목민의 조상이 되었고 두번째 아들은 유발이었는데 그는 퉁소와 수금을 쳤다고 하니 그는 예술인의 조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두번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이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보아 청동기문화가 이미 이때에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두발가인의 누님은 나아마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여자중에 이 여자를 소개했다는 것은 미모가 뛰어났고 유명한 여자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라멕은 뛰어난 사람이고 그의 자녀들은 모두 성공했고 훌륭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멕의 실존을 23절과 24절에 나와 있는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의 진솔한 고백의 주제는 ‘살인’입니다. 가인은 아벨 한 사람을 죽였지만 5대가 흐른 뒤, 라멕은 상처로 인해 수십명을 죽였고 심지어 소년들까지 죽습니다. ‘살인’은 인간 내면의 주제가입니다. 사람의 깊은 마음속에는 살인의식이 있고 자살동기가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면 자살이고 다른 사람을 죽이면 살인입니다. 살인은 도발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능 깊은 곳에 살인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있으며 간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음과 미움과 질투와 살인문제로 고민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 내려 있는 감정입니다. 최초의 시에서 라멕이 노래한 것은 바로 ‘살인’입니다. ‘나의 상처로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때문에 소년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24절에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라고 냉소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죄의 벌이 커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으로부터 5대가 흐른 후에 이런 사건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가인의 후예 그런데 라멕과 아내와 자식들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특징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제사라도 드린 것을 보면 가인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멕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이 없이 살인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은 청교도가 세운 나라이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미국의 학교에서 기도도 하고 십계명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십계명을 학교벽에 붙였다가 싸움이 났습니다. ‘게이, 포르노’와 같은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성경이나 기도라는 말은 학교에서 할 수 없습니다. 점점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고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무서운 세계가 옵니다. 가인 다음에 라멕이 왔고 라멕 다음에는 노아홍수사건이 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살인과 전쟁과 죽음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을 수 없는 저주스러운 세계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세계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며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인류는 가인의 후예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아벨의 후예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부터 시작하지 않고 아담으로부터 다시 시작하십니다. 아담이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그 이름이 ‘셋’입니다. 셋은 아벨을 대신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은 썩어 없어지지만 영은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갑니다. 절대로 사람은 죽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영원한 천국으로 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든지 못믿든지 그것은 두번째 일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복된 일입니다. 아벨대신에 하나님은 셋을 주셨습니다. 셋을 통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가인의 후예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에덴에서 동쪽으로 멀리 갔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에덴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자녀의 입술에도 여호와의 이름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민족이, 교회가 여러분의 가정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대가 이어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들이 나오고 선교사와 목사가 나오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러분은 가인의 후예가 아니라 아벨의 후예에 속한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선전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복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가인에게 임한 심판/ 창4:8-15/ 하용조 목사/ 2009-09-15
가인에게 임한 심판 창4:8-15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기쁘게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제물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제사는 제물만 드리면 되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제물못지 않게 사람이 중요하고 사람과 제물이, 사람과 예배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살인을 가져온 거절의 상처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의 사건이후 예배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데서 예배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벨과 그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가인에게는 거절의 상처가 생겼습니다. 거절에서부터 상처가 생깁니다. 부모로부터의 거절, 친구로부터의 거절, 아내와 남편으로부터의 거절등 누구든지 거절을 당하면 상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상처를 받으면 분노하게 되고 분노하면 얼굴색이 변합니다. 하나님은 분노하며 얼굴색이 변한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였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하고서도 도리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릅니다. 잘못하지 않은 사람들은 별로 소리지르거나 화를 내지 않습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화도 많이 냅니다. 만일 잘못을 했다면 화를 내고 얼굴색이 변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분노하고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평생에 죄가 너를 지배할 것이고 죄가 너를 따라 다니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겸손히 회개하는 사람에게서 죄는 떠나갑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죄가 평생 따라다니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겸손하게 회개하면 그 즉시 죄가 떠나갑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의 잘못된 제사를 하나님은 거절하셨고 거절로 가인은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로 인해 분노가 생겼습니다. 분노로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만일 가인이 죄를 회개하고 다시 제사를 드렸더라면 죄는 떠나가고 죄는 가인과 상관이 없어졌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가인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8절에 나옵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고했다’라고 말했는데 고했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이야기했다’이지만 사실 이말은 가인이 아벨에게 화풀이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하나님에게 거절당한 이유를 아벨에게 뒤집어 씌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를 하면 사실을 인정하기 보다는 누구에겐가 전가하고 변명하고자 하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가인 역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거절당한 상처를 아벨에 대한 화풀이로 보상받고자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인과 아벨의 관계가 나빠졌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느날 아무도 없는 들판에 둘만 있게 되었을 때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사건이나 우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계획된 살인입니다. 미움은 살인을 낳고, 분노는 살인을 가져 오게 됩니다. 저는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작은 미움과 분노까지도 예수 이름으로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분노와 갈등과 미움들이 모두 치유되기를 축원합니다. 순교할 만큼 중요한 예배 8절에서 우리가 한가지 더 살펴볼 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살인을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또는 이익이나 돈 때문입니다. 영토를 빼앗기 위하여 전쟁을 하고 윗 자리에 오르기 위해 상대방을 헐뜯고 미워하고 죽이고 파멸시킵니다. 또 사랑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삼각관계가 생기면 한 사람을 독점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 말씀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사랑이나, 권력이나 먹을 것 때문이 아닌 ‘예배’때문이었습니다. 예배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가인의 예배일수도 있고 아벨의 예배가 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도 있고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습니다. 형태는 모두 같지만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형식적으로 주일날 그저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마음과 뜻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이 예배를 받으십니다. 거짓되고 종교적이며 형식적인 예배는 몇 십년을 드려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과부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복을 내려 주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부흥하는 길은 ‘진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많지만 모두 진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며 교인이 많지만 모두 진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짜 예배를 드리면 그 사람에게서 향기가 나고 귀신이 떠나가고 성령이 임하며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들어가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벨은 최초의 순교자였습니다. 예배때문에 순교했습니다. 예배는 순교할 만큼 중요합니다. 순교할 각오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예배의 절정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 앞에서 예수께서 기도했던 것이 예배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되고 우상적이며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예배에는 언제나 사탄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에는 언제나 성령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그 영광을 받으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아담에게 질문을 하시던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나서 벌거벗었음을 알고 숨어 있는 아담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시며 찾아 가셨습니다. 그 때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면서 도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라고 질문을 계속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가인은 아벨을 살인하고 암매장한 후 그 자리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덧붙여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을 합니다. 죄는 겸손히 고백되어야 해 우리는 이 본문에서 세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돌아서지 않고 찾아가서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가인이 죄를 지었는데도 찾아가시는 이유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찢어지는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마치 죄를 지은 자식을 심판할 수도 없고 죄를 인정할 수도 없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울고 계십니다. 가슴을 치고 계십니다. ‘가인아,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은 가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와서 질문할 때는 무엇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고백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계시지만 여러분의 입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두번째, 우리가 배우는 것은 가인이 모른다고 부인하며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항변을 했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부인하고 감추었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자기의 눈을 가리면 세상이 모두 가려진다고 생각합니다. 손바닥으로 우주를 가릴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죄를 가리려고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우주를 가리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용서받지 않은 죄는 털끝만한 것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썩지만 죄는 썩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더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그 죄를 적시면 그 죄는 순식간에 모두 없어집니다. 아무리 큰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으면 없어지지만 아무리 작은 죄도 회개하지 않으면 수천년이 흘러도 여전히 남아 있고 그 죄는 여러분을 고발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가인에게 했던 질문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네 아내는 어디 있느냐 네 남편은, 네 자녀는, 그리고 네가 팽개친 부모는 어디 있느냐? 네 친구나 사랑하는 동료들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어 보십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전 몰라요. 알아서 살고 있겠죠’라고 말합니다. ‘제가 그 사람들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전 바빠요’라고 대답합니다. 바로 우리의 대답이고 가인의 대답입니다. 이 모든 대답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사랑할줄 모릅니다. 그 사람은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자살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부모는 모를수도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함께 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이 천길 만길 따로 가고 있는 부부도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자고 살아 갑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중심을 이해하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랑하고 격려하며 축복하고 전도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가인은 유감스럽게도 모른다고 변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변명하거나 부인하지 마시고 회개하십시오. 예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모든 죄가운데서 깨끗케 하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길 원하십니다. 돌아오십시오. 그분에게로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죄는 눈과 같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세번째, 이 본문에서 우리가 배우는 또 한가지 사실은 아벨이 흘린 순교의 피는 죽었다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아벨은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었고 매장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육신이 죽었지만 피는 땅으로 들어가서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가인의 죄가 부인한다고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아벨의 피도 땅에 흘려져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피는 소리를 지릅니다. 의인은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죄인도 죽지 않습니다. 죄인이 죽어 육신은 땅에 들어가겠지만 그는 영원히 삽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영광스런 신적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죽으면 그만이지’라고 말합니다. 동물은 죽으면 그만입니다. 죽은 순간부터 고기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자살해도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죽으면 영원히 지옥에서 살게 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의 댓가를 영원히 받아야 합니다. 그저 몇년동안 형을 받고 그만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라톤선수가 달리기를 하는 것에는 끝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뛸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없이 영원히 뛰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와같이 죽음으로 죄가 끝나지 않고 죄도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알고나면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절의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는 말씀은 구약에서의 첫번째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장 51절에서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은 성경에서 나타난 첫번째 제사장입니다. 선지자의 반열에 아벨이 있었습니다. 아벨의 피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 피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사건은 지금은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죽음 이후에는 큰 사건입니다. 유정란과 무정란은 겉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암닭의 품에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20일이 지난후에는 어떤 계란에서는 병아리가 나오지만 어떤 계란은 썩어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알수 없지만 육체의 죽음이 올때 한 영혼은 영원한 천국으로 또 다른 영혼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영원한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천국에 갈 확신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혹시 그런 믿음이 없는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예수를 믿음으로 말이암아 여러분의 영혼이 천국으로 갈 줄 믿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살인자에게 내린 벌 우리가 땅에 피를 쏟았기 때문에 땅은 인간을 저주합니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인류의 삶을 보면 저주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병과, 고통과, 아픔과, 배신과, 싸움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없이, 하나님없이 저주를 품어 내고 있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한 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서 모든 저주가 끝나기를 축원합니다. 아벨의 피로 인해 땅은 인간에게 저주를 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주는 사라지고 질병과, 갈등이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살인한 피를 받은 땅이 인간에게 한 첫번째 저주는 ‘밭을 갈아도 효력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든 사람은 ‘건강이 옛날같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에는 땅을 갈면 농사가 잘 되었는데 죄를 짓고난 후에는 무엇을 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무엇을 해도 잘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번째,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방황’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저주는 방황입니다.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것이 방황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에게는 방황이 있습니다. 방황이라는 말은 문학적으로는 아름다운 말일지 모르지만 실존적으로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안식이 있습니다. 방황의 끝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편안하게 영접하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네게로 돌아가리라’‘너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살인자에게 내린 벌은 ‘땅은 너를 저주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드디어 가인은 죄의 짐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힘든지 깨달았습니다. 전에는 죄에 대해 아무런 생각없이 살았는데 실제로 죄의 무거운 짐에 눌려보고 나서야 죄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붙잡고 나가서 죄의 댓가인 벌을 감당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나는 할수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죄의 짐과 고독과 아픔을 경험해본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영적인 죄의 무게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죄를 지은 가인에게 하나님은 표를 주시고 죽임을 면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시는 유산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분의 영광스러운 은혜안에 들어오셔서 인생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인생을 사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복내려 주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방황이 끝나게 하시고 죄가 우리를 따라다니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안에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가장 고귀한 생활/ 히11:1-7/ 한경직 목사/ 2014-08-25
가장 고귀한 생활 히11:1-7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五․二十四) 창세기 五장에는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족보들은 일정한 규범에 의지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가령 셋은 一O五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八0七년을 지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九一二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했습니다. 이렇게 아무개는 아무를 낳았고 아무를 낳은 후에 몇 년을 지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다고 꼭 일정한 규범에 의지해서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에 대해서는 꼭 같이 써 내려오다가 다만 마지막에 죽었더라 하는 말이 없고 지금 읽은 二十四절의 말씀이 첨가되었습니다. 에녹은 노아 전 시대에 산 사람이올시다. 이 시대는 아주 악한 시대였습니다. 결국 노아 때에 심판을 받은 패역(悖逆)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여러 시간 넓은 길을 걷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이것은 때로는 저항을 의미하며 투쟁을 의미하며 용기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그는 죄악이 관영(貫盈)한 시대에서도 가장 고귀한 생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오늘 아침에 이 문제를 중심해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은 히브리 十一장을 읽었거니와 히브리 저자는 한마디로 에녹의 생활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에녹이 믿음으로 그렇게 살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여기는 태도가 믿음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을 증거와 같이 확실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믿음입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은 것같이 그 안에서 사는 마음, 그것이 믿음입니다. 에녹은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분명히 의식하였습니다.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첫 걸음인 줄 생각합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높이 앉으신 하나님의 비전(vision)을 볼 때에 부르짖은 말씀을 여러분이 기억할 것입니다.『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 만 군의 여호와를 뵈었음이로다.』 인간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될 때에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자복(自服)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는 방향을 돌이킴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에녹도 회개하고 방향을 돌이킴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동행하려면 방향이 같아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내가 가는 길의 방향을 하나님의 가는 방향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질을 쳤지마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한번 만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방향으로 전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코자 하는 이는 곧 온전한 회개, 방향을 전환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세상 길로 가던 방향을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신 혁명을 의미합니다. 결단을 의미합니다.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둘이 같이 길을 걸으려면 뜻이 같아야 합니다. 뜻이 다르면 오래 동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에녹은 언제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람의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고 순종한 줄 생각합니다. 내 욕심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내 정욕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내 교만대로가 아니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복(順服)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뜻이 아니고 언제나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뜻에 종순(從順)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사람의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까지 희생한 것입니다. 이 순복 만이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비결은 먼저 믿음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뜻과 같게 해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악한 시대에서 그런 고귀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극기, 절제를 의미할 뿐 더러 때로는 핍박을 받았을 것이요, 곤란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면에 많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의 축복이 무엇일까? 우선 그는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긴 여행을 해 본 이는 누구나 체험하는 대로 홀로 여행하려면 고독을 느낍니다. 인간 일생은 긴 여행인데 하나님과 동행하지 아니하면 언제나 고독감을 면치 못합니다. 특별히 병들 때 슬픈 일을 당할 때는 더욱 외로워집니다. 살 때도 그렇거니와 죽을 때의 그 심령의 고독은 무엇이라 형언키 곤란할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일수록 이 고독감은 더 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고독해서 병도 나고, 고독해서 신경도 쇠약해지고, 심지어는 노이로제까지 들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그와 같이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같이 갈 터이요, 쉼을 주리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고 또한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인간 심령에 있는 이 깊은 고독감은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에녹에게는 안식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 행로는 결코 늘 평탄치는 못합니다. 때로는 태산 준령, 험곡(險)谷)이 있습니다. 장강(長江)대하(大河)가 앞을 막을 때가 있습니다. 또한 길가에는 많은 원수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가는 길은 밤길과 같아서 앞을 미리 보지 못합니다. 이 七十년대가 사실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올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행로를 걷는 이들은 언제나 불안감, 공포감에 싸여서 걷게 됩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만이 불안감이 해소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렇게 외쳤습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 하시도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주께서 동행하실 때에 불안감은 없어집니다. 이사야 四十三장 一-二절을 읽어보세요. 거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동행하는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 않을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찬송을 종종 부릅니다.『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에게는 불안감이 해소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에녹에게는 즐거움이 충만했습니다. 시편 十六편 十一절에『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다윗이 노래하였습니다. 요한 복음 十五장 十一절에『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이에게는 주님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사도 바울은 백발노인으로서 감옥에 있으면서 당시 빌립보 교우들에게 편지할 때에『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 하 노니 기뻐하라』고 외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와 동행한 까닭입니다. 또한 애녹의 생활에는 전진과 향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 인격은 장성합니다. 믿음에 덕이 더하여집니다. 덕에 지식이 더하여 집니다. 지식에 절제가 더 하여 집니다. 절제에 인내가 더하여 집니다. 인내에 경건(敬虔)이 더하여 집니다. 그 위에 형제 우애와 사랑이 더 가하여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더욱 고귀한 생활로 향상하는 것입니다. 그의 모습은 점점 주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본래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한 이는 하나님께서 거저 하늘로 대려 가십니다.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던지 안 하십니다.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던지 안 하던지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곳, 주님의 계신 곳, 천군 천사가 있는 곳, 모든 승리한 성도가 계신 곳으로 하나님이 데려가십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의 받는 축복은 사람의 형언하는 말로는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는 이 땅위에 살지마는 하늘의 기쁨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에게는 사실 죽음은 없습니다. 때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거저 데려가시는 것뿐입니다. 인생은 한 길가는 나그네입니다. 인생의 길은 외롭고 험합니다. 여러분, 동행자가 있습니까? 아무리 가족이 가까워도 항상 동행하지는 못합니다. 갈라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친구가 가깝다가도 항상 동행자는 못 되고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헤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항상, 아니 영원히 동행할 수 있는 이는 주님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한 걸음 ,한 걸음을 주님과 동행하세요.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이런 생활은 가장 고귀하고, 가장 의롭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안정하고, 사실 하나님 나라의 생활입니다. 에녹만 하나님과 동행한 분이 아닙니다. 모세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엘리야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모든 선지자들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모든 사도들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아니 세기를 통해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참된 회개와 순복, 이 축복이 우리에게 오늘 아침 같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가장 보람 있는 삶/ 막10:35-45/ 한경직 목사/ 2014-08-25
가장 보람 있는 삶 막10:35-45 뭐라고 말씀드려야 좋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제도 분에 넘치는 모임을 저를 위해서 가지는 것을 보고 참으로 참기 어려운, 말하자면 저로서는 곤욕을 좀 치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은 설교가 중심이 될 줄로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까 오늘 저녁도 계속해서 어제 집회 때에 들은 얘기가 많지 않겠나 하는 염려가 됩니다. 그저 여러분께서 이렇게 참 오신 것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는데, 제가 이 상을 받은 이후에 특별히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죄인이다.’라는 그겁니다. 하나님은 참 긍휼이 많으시고 자비하시고 은혜로워서, 이런 죄인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금까지 참아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하고 황송한지 말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이 진리를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됩니다. 또 하나님만 그러신 것이 아니고 사실 이번에 무슨 상이니 그거 처음으로 받아봤지만 이건 사실 얘기하는 거 다 들어보면 여러 교우들이 땀 흘려서 수고하신 일 대신에 제가 이 상을 받은 것입니다. 개척교회를 많이 세우고, 고아원도 하고, 양로원도 하고, 이런 말도 많이 듣습니다. 또 학교도 세운다는 이런 말이나, 또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도 한다고 하는 이런 말을 다 들었지만 제가 한 것은 없습니다. 다 여러 교우들이, 믿는 이들이 사실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열심히 전도도 하고 특별히 이북에서 이남에 내려온 피난민들이 어떻든지 어떤 곳에 가서 피난 생활을 하든지 복음을 전파해서 가령, 6?25 사변을 통해서 새로이 교회가 여러 곳에 서게 되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교회 새로 세우는 것뿐 아니고 또 아마 지금 미주에 나와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 한국 민족처럼 교회를 많이 세운 민족은 없다고 하는 말을 제가 여러 번 이번 여행에서도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어디 가시든지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복음을 전파하고, 이런 예배당을 짓고, 어디가든지 우리 교우들이 자기를 희생해서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도뿐 아니고 봉사나 교육이나 모든 방면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여러분들이 다 이 상을 받아야 되겠는데 저를 택해서 이렇게 주는 것은 아마 제가 나이가 많은 까닭인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 이런 상을 받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우리 교우들은 어질고 어떻든지 자기 하는 일을 남에게 다 이름을 옮겨 두어서 이런 자리에 있게 되고, 또 모든 허물과 죄가 아무리 많지만 용서해 주시는 우리 교우들이다 라고 하는 것을 제가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조금도 없는 사람으로서 다만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자비와 여러분의 사랑으로 그저 이런 이름도 가지게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여러분 앞에 중심으로 감사드리는 것뿐입니다. 이제 저보고 설교를 하라고 그러는데, 사실 설교 원고를 가지고 왔지만, 이거 설교를 제가 길게 하면 아마 안 될 거 같아요. 그래서 대략 그저 간단히 대지만 좀 얘기할까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많이 묻다가 마지막에 묻는 말이 “인간의 가장 보람 있는 삶이 어떤 삶일까요?” 이렇게 물어요. 그래서 맘 속에는 ‘참 물어볼 만한 질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어떻게 대답할는지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런데 조금 생각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이 생각나요. ‘아무래도 보람 있는 삶은 그 삶이 깨끗해야 될 것이다.’ 그 생각이 먼저 나요. 잠언에 이런 말이 있잖소? 아무리 향수가 좋은 향수라 할지라고 거기에 죽은 파리가 한 놈 빠지면 그 향수병이 다 더러워져서 못쓰게 된다고 하는 그런 말이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보람 있는 삶을 사실 누구든지 원한다고 하면 우선 내가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살 수 있을까? 혹은 돈 문제나 여러 가지 관계에 있어서 깨끗한 삶을 가질 수 있을까? 그 면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면 사실 깨끗하게 산다고 하는 것이 심히 어렵거든요. 깨끗한 마음을 지키기가 어렵고, 깨끗한 말만 하기가 어렵고 깨끗한 삶을 가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죠. 결국 어디에 결론이 미치는가 하면 나는 죄인인데 내 죄 사함을 우선 다 받고 깨끗한 삶을 가지려고 하면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지 아니하면 나 혼자서는 깨끗한 삶을 가질 수 없다고 하는 점을 특별히 누구나 깨닫게 될 것이에요. 사실 우리가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늘 살 것은 아니고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한 번 가서 서게 될 텐데, 누가 감히 “나는 깨끗한 생활을 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살 때에 오직 정결한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럴 사람이 만일 있다고 하면 아마 정신병자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러므로 이 깨끗한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에 자연히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로 내 죄를 깨끗이 씻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고,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고, 예수님의 공로에 의지해서 내가 깨끗한 삶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다 예수를 믿죠. 또 둘째로는, 아무래도 보람 있는 삶을 가진다고 하면, 그 삶은 소망이 있어야 될 거예요. 소망. 죽을 때에 인간은 얼마 살다가 아무래도 죽는데 죽을 때에 소망을 가지고 죽을 수 있는 삶이 보람 있는 삶이 될 거예요. 성경 말씀 그대로 “악인은 죽을 때에 소망이 끊어지느니라.” 이렇게 말했어요. ‘죽을 때에 아무 소망이 없이 나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구나.’ 이런 생각으로 살게 된다고 하면 그런 삶은 보람 있는 삶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에도 우리의 신앙문제로 또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의지하지 아니하면 죽을 때에 소망이 없이 죽어요. 그러기에 성경 말씀은 “악한 사람은 죽을 때에 소망이 끊어지느니라”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내게는 의가 없으나, 내게는 죄가 많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을 받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에요. 아무리 세상에서 권세를 많이 부리고 살았고 돈을 많이 모으고 살았고, 명예를 얻고 살았다고 하지만 죽을 때에 소망이 없이 영원한 암흑과 지옥으로 마지막 최후를 마치게 된다고 하면 그런 삶은 아무래도 보람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오직 그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죽을 때에도 소망으로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또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솔직히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것은 보람 있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살 때에 가장 남을 봉사하는 생활을 한 사람이 될 거예요. 저는 혹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과거 이조 500년간에 많은 사람이 세상에 왔다 갔어요. 그러나 역사가 다 지나간 다음에 그 많은 사람의 이름을 누가 기억합니까? 그러나 한국 사람이면 누구든지 이순신 장군은 아마 기억할 거예요. 왜?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죽도록 충성스럽게 침노해 들어오는 왜적과 싸웠고, 마지막에 희생이 되고 말았어요. 이렇게 해서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한국 사람들에게 한민족이라고 하는 긍지를 가지고 살 수 있을 만큼 만들어 놓고 자기가 희생이 되었어요. 가장 보람 있는 삶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봉사를 얼마나 많이 하고 가느냐 하는 그겁니다. 우리가 다 일생을 살고 가는데 마지막 관을 덮어놓고 이분이 이 세상에 왔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얼마나 좋은 운동이 일어났고, 이분이 세상에 왔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깨끗해졌고, 가난한 사람들이 같이 살 수 있는 나라로 이루어졌고, 얼마나 많은 봉사를 하고 가느냐? 이것이 가장 보람이 있는 삶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민족이나 한 나라를 생각할 때에 아마 하나의 은행으로 민족이나 사회와 나라를 생각할 수도 있는 줄 알아요. 가령 은행이 하나 있는데 은행에서 돈을 찾아가기만 하고 내가기만 하는 사람만 많다고 하면 마지막에는 그 은행은 파산될 것밖에 없어요. 그러나 여기 은행이 하나 있는데 은행에 입금해 놓고 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면 그 은행은 점점 더 커질 거예요. 한 민족, 한 나라, 한 사회도 그와 비슷해요. 우리 한국이나 미국이 사회를 위해서 많은 입금을 하고, 봉사를 하고, 남는 것이 있을 수 있도록 힘을 쓰고 가는 사람이 많으면 한국도 잘 될 것이고, 미국도 잘 될 거예요. 그러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 국민들이 어떻든지 혜택만 바라고,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고, 자기만 잘 살기 위해서 힘쓴다고 하면 결국 한국이나 미국이나 할 것 없이 마지막에는 그 나라가 망하고 말 거예요. 여기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읽었어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장차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할 것을 생각할 그때에 제자들은 그러한 시기를 깨닫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심정은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께서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왕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좌의정 우의정은 누가 될까? 내가 돼야지.’ 이런 생각만 해요. 그런 심리 가운데서 예수님 앞에 와서 “예수님께서 영광으로 오실 때 우리 형제 요한과 야고보를 하나는 우편에 앉고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세요.” 이렇게 요구했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 주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인내가 많은 예수님은 “너희들이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세상 사람들은 윗사람이 되면 아랫사람을 맘대로 부리고 이렇게 하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아. 먼저 너희가 으뜸이 되려고 하면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돼. 봉사를 해야 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돼.” 그러면서 “내가 세상에 온 것도 봉사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대접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을 바쳐서 십자가에 죽을지라도 만인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는 길을 얻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올시다. 가장 보람 있는 삶은 세상에 살 때에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는 것인데, 봉사 가운데는 전도 이상 또 어디 있어요? 영혼을 구원하고 삶을 바꾸는 많은 봉사를 하고 가는 것이 과연 보람 있는 삶입니다. 제가 오늘도 얘기를 너무 길게 하면 방해가 될 줄 알아서 그저 요만큼만 줄이겠습니다. 여러분, 이 뜻을 다 아십니다. “인자가 온 것도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희생물로 드려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 가장 보람 있는 삶은 가장 봉사를 많이 하고 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버지시여, 우리에게 삶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삶을 통해서 우리가 가장 보람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시여, 오늘 저녁 대략 서너 가지 면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보람 있는 삶을 가지려고 하면, 깨끗한 삶을 가져야 되겠다. 죄 짓지 않고 옳은 생각만 하고 옳은 일만 하는 이런 삶이 되도록 힘을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인간은 힘이 없습니다. 그저 원치 아니하는 악은 늘 행하지만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올시다. 오 주님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은혜를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온전히 변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또 우리가 보람 있는 삶을 생각할 때에 소망을 생각하게 됩니다. 소망 없이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도 오직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이러한 삶을 주시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하나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봉사를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봉사를 하기 위해서 왔고 내 생명까지 바쳐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이 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는데, 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가 비록 부족하나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이러한 삶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우리 하나하나를 축복하여 주시기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나성에 계신 여러 교회, 여러 교역자들, 여러 교우들을 일일이 축복하여 주셔서 가장 보람 있는 삶을 이 시대,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가정의 정신적 기초/ 마7:15-29/ 한경직 목사/ 2014-08-25
가정의 정신적 기초 마7:15-29 오늘은 전국적으로 ‘어머니 주일’ 혹은 ‘가정주일’로 지킵니다. 인간은 가정을 통하여 세상에 오고, 자라고, 살고, 일하다가 또한 세상을 이별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정이 얼마나 중한 관계를 가졌으며 또 귀한가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정은 본래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태초에 인간을 지으실 때에 1남 1녀를 지으시고 가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또한 뜻이 내재합니다. 인간은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닫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을 또한 가정을 통하여 이루어 주시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가정을 통하여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사명과 책임을 또한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가정은 문자 그대로 한 집입니다. 집을 짓는 데 제일 요긴한 것은 그 기초를 튼튼히 닦아야 합니다. 산상보훈 결론에서 우리 주님은 이 진리를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지었습니다.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지었고 다른 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지었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 두 집의 모습이 거의 같았습니다. 차이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힐 때에 모래 위에 지었던 집은 그만 쓰러졌으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튼튼히 서 있었습니다.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태복음 7장 24절의 말씀입니다. 집은 반석 위에 지어야 합니다. 가정은 반석 같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 진리를 믿고 행하는 참된 믿음 위에 건설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의 풍파가 아무리 높고 유혹의 바람이 아무리 강하게 불어도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가정은 정신적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물론 가정을 이루는 데 인간적인 요소가 포함됩니다. 인간적인 애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참 신앙의 뒷받침이 없는 인간의 애정은 언제 식은 재로 변할지 모릅니다. 학식, 경제 등의 요소도 작용이 됩니다. 그러나 참 믿음의 뒷받침이 없으면 언제 사상누각으로 변할지 모릅니다. 참된 신앙과 그 신앙의 터전 위에서 쌓아올려지는 성격, 혹은 품성만이 가정의 참된 기초가 된다고 하는 것을 잊지 아니해야 합니다. 가정은 세 방면의 관계가 원만해야 합니다. 첫째는, 물론 부부간의 관계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참된 애정은 그 기초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인간적인 애정은 신앙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헬라(그리스)어에는 남녀간의 애정을 표시하는 ‘에로스’란 말이 있고, 또 가장 고귀한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을 표시하는 ‘아가페’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에로스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이러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유명한 사랑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 아가페를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로부터 7절까지는 이러한 사랑의 내용을 분석하여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제가 성경에 있는 대로 다시 한번 읽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 가정 안에도 우선 이러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오래 참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온유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투기하지 않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만 구치 아니하고, 성내지 아니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이러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애정이 이러한 거룩한 사랑으로 승화될 때에 우리의 가정은 참된 평화와 기쁨과 행복이 언제나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터전 위에 있는 사랑으로써 같이 기도하며, 같이 성경을 읽으며, 같이 교회를 봉사하고 사회를 봉사할 때에 실로 이러한 가정은 작은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가정에는 어린이들이 옵니다. 부모가 어떻게 이 어린이들을 길러야 한다는 교훈은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여러 방면으로 많이 듣습니다. 특별히 어린이날을 계기로 하여 신문, 잡지, 라디오, TV 등을 통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모두 다 좋은 교훈들인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간 특별히 우리 주님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하였는지 알며, 또 어린이들에 대한 교훈을 분명히 기억하실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10장 13절 이하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의 어린이들에 대한 태도와 어린이들에 대한 교훈과 그리고 어떻게 어린이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는가 하는 사실을 여실히 봅니다. 우선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경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그들에게서 그 천진성과 절대 의뢰심과 순결성을 좀 배우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좀 배워야 할 점을 우리는 먼저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 참되고 맑고 전적으로 믿는 그 천국성을 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교훈과 같이 우리도 좀더 어린이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바로 가르치고, 범사에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온 세상이 한 그림책같이 보입니다. 혹은 활동사진처럼 보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들이 어떻게 서로 대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는 모두 어린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줍니다. 부모들은 어린이들 앞에서 말하자면 연극을 하는 배우들이라는 것을 잊지 아니해야 합니다. 여러 젊은 부부들 특별히 깊이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 안에서의 상호간의 말과 행동과 태도가 어린이들에게 어떠한 그림으로 혹은 연극으로 보여지겠는가, 이따금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눈을 서로 흘기며 다투는 그림을, 혹은 연극을 어린이들에게 보여주는 이들은 혹 없습니까? 기억하십시다. 어른뿐만 아니라, 특별히 어린이들은 듣는 것뿐만 아니고 보는 것으로, 대체로 눈으로 보아서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는 여러분들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어떻게 그 아기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 우리는 교회 역사를 통하여 유명한 어머니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경건한 어머니 모니카가 그릇된 길로 가는 소년 어거스틴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가 많을 줄 생각합니다. 또 근세 교회사에서 유명한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가 그 많은 아이들을 위하여 밤잠을 자지 못하고 늘 기도하면서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고 자기의 생활을 언제나 경건히 살았다는 이야기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어머니 주일인데 우리 교회 여러 어머니께서도 이러한 어머니들이 되기 위하여 새로운 마음의 다짐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셋째는, 우리 가정에는 부모님들도 혹 계십니다. 왜 혹이란 말을 넣는가 하면 없는 가정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서 없는 가정은 말할 것도 없고, 요새는 소위 핵가족 사상으로 별거하는 이들이 또한 적지 아니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가정주일을 당하여 우리는 아무래도 어버이에 대한 교훈도 잠깐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양에서는 특별히 유교전통에는 효도사상을 많이 고취하였습니다. 좋은 교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허례허식 사상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무슨 제사나 이런 데 너무 많은 재정을 허비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도 이 효도에 대한 교훈은 유교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열 가지 계명을 잘 압니다. 첫째로부터 넷째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가르쳤고, 다섯째로부터 마지막 계명까지는 인륜과 도덕을 가르쳤는데, 제일 먼저 제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가르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소위 노인 문제라고 해서 노인이 하나의 사회 문제로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좀 오래 산다고 하는 것은 실로 미안한 일입디다. 그러나 진리는 변치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는 자손들이 그들 자신이 축복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젊은 자녀들이 늙은 부모를 경시하면 이다음에 그들이 늙을 때에 또 그들의 자손들이 그들을 경시하게 됩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출호이자 반호이자(出乎爾者 反乎爾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게서 나온 것이 네게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옛날 요셉이 연로하신 아버지와 또 자기를 팔아먹은 형들에게까지 어떻게 노년에 잘 봉양하였는가 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사실입니다. 또 옛날 룻이란 젊은 여자는 남편 없는 시어머니를 멀리 베들레헴까지 따라와 그 홀시어머니를 잘 봉양하였고, 또한 마지막에 어떠한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밀레의 한 유명한 가족에 대한 그림을 보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두 젊은 부부가 밭에서 일을 하다가 멀리서 저녁 종소리가 울려 올 때에 하던 일을 멈추고, 둘이 가지런히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단순한 전원 풍경이지만, 아주 유명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 그림이 비록 간단하지만 행복한 가정은 세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첫째는 같이 머리 숙여 기도하는 경건한 믿음이요, 둘째는 부부간의 참된 사랑이며, 셋째는 부부가 같이 일하는 것, 노동하는 것, 곧 봉사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가 행복한 가정의 비결이 됩니다. 여러분이 많이 들으신 줄 생각합니다. 250여 년 전에 세워진 프린스턴 대학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라는 유명한 목사가 한 분 계셨습니다. 이 목사는 설교를 매우 엄위하게 해서 한번은 지옥에 대한 설교를 하니 모든 사람이 떨려서 머리를 숙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지 200여 년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어떤 심리학자가 에드워즈 목사의 후손을 전부 조사하고 연구를 하여서 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일일이 기억은 못하지만, 하여간 그 목사의 후손 가운데는 많은 교역자들과 교수들과 변호사들과 학자들과 경제인들과 정치인들이 일어나 과거 200년간에 미국을 위하여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학자는 그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살 때에 뉴욕에서 유명한 술집을 경영하던 쥬크스(Max Jukes)라는 사람의 후손을 또한 전부 다 조사해서 발표를 했습니다. 제가 자세히 기억은 못하지만 그 가운데는 범죄자도 너무 많았고, 정신병자들도 많았고,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좀 있긴 있으나 대체로 감옥에 들어가서 그 직업을 배웠고, 하여간 그들의 자손들 때문에 미국이란 나라가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손해를 보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참된 기독교 가정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독교 가정의 정신적 기초가 되는 성경 위에서 사는 그러한 가정을 길이 그 자손들까지 축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정을 통해서 또한 그 민족과 나라까지도 축복하여 주십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시여, 오늘 가정주일을 당해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온 가정을 친히 돌아보시고 일일이 축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가족들 하나하나가 참된 신앙을 가지고 성경의 교훈대로 사는 가운데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가정이 되고 대대손손 축복을 받는 가정들로 이 시간 하나님께서 일일이 우리 가정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감격의 신앙/ 딤전1:12-20/ 한경직 목사/ 2014-08-25
감격의 신앙 딤전1:12-20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一․十五)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 동안 三 주일 간 여행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가운데 평안히 본 교회로 돌아와서 다시 여러분과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때에 더욱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저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선교 정책을 다시 연구하기 위해서 그 연구회를 개최하였는데 거기에 참여하고 돌아왔습니다. 남장로교회에서 우리 한국에 선교사를 보낸 지가 꼭 七十년입니다. 一八九二년에 개척 선교사 일곱 사람을 한국에 파견하였던 것입니다. 한국뿐만 아니고 세계 각처에 보내는데 이번에 세계 각처에 있던 선교사들과 또 그 지방 대표들과 또 미국의 유수한 교파에서 외국에 선교하는 대표들과 또 남장로교 안에 있는 신학교 교장들과 그 유력한 교수들을 합해서 약 一백 四, 五십 명쯤 아마 모인 것 같습니다. 몬트리트라고 하는 곳은 그 남장로교회에서 특별히 여름에 수양하기 위해서 건설한 아주 아름다운 휴양처올시다. 약 四백 명이 평안히 유할 수 있는 기숙자가 있고 모든 집회를 가지기에 매우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선교사 세 사람, 또 우리 한국 교회를 대표해서 네 사람이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종교 교육부 총무 되시는 안광국 목사, 또 순천에 계신 김형모 목사, 기독교장로회 대표로 조승제 목사, 이 사람, 이렇게 네 사람이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광국 목사님과 같이 워싱턴과 뉴욕과 피츠버어크와 로스엔젤리스 등 몇 곳을 다니면서 특별히 워싱턴과 로스엔젤리스에서는 주일을 지내면서 여러 교포들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영락교회 여러 교우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평안히 계시고 또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해 주시기를 부탁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잠깐 읽은 성경 말씀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十二절부터 제가 몇 절을 다시 읽을 때에 여러분 자세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주시는 말씀 가운데 몇 절이올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 자요 포행(暴行) 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矜恤)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 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자기의 흉금을 털어놓으면서 감사하다고 하는 말씀을 합니다. 자기가 본래는 훼방 자요 핍박 자요 본래는 포행 자이었는데, 그 사실이올시다. 사실 그는 교회를 핍박하고 여러 가지로 교회를 잔해 한 그런 사람이올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풍성해서 모든 죄인을 구원하여 주실 때에 죄인의 괴수가 되는 자기까지도 구원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다고, 그 뿐더러 자기와 같이 훼방 자이었고 핍박 자이었지마는 긍휼 하심을 더 베풀어서 귀한 직분까지 맡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심정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 감격이 지극한 정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와 감격의 정은 여기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에도 역시 나타납니다. 그리해서 고린도 전서 十五장 八-九절을 읽어보면 예수 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 사도들에게 나타난 이야기를 적다가 八절에는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맨 나중에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여기에도 이렇게 자기가 포악하고 훼방하고 핍박하던 이런 자인데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뿐더러 이렇게 귀한 직분을 맡겨 주셨으니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가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우리가 살필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역시 이런 글귀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五장 八절에『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하는 말은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깊이 생각한 것을 나타내 줍니다.『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五장 十절에 보면『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하는 말을 썼습니다. 이 글귀를 쓸 때에도 역시 자기 자신을 많이 생각한 줄 압니다. 내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는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화목의 길을 열어 주셨으니 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의미입니다. 일생을 주님께 몸 바쳐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봉사한 사도 바울의 깊은 심령 속에는 이 감격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의 심정이 있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감격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복음 전파 자로 만들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파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함이로다.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심지어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큰 은혜를 받고서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깊은 감격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교회를 봉사하며 만인을 봉사하는 봉사자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였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로 함께 우는 자를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과부들을 극력(極力) 구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깊은 속의 그 감격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큰 수난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산의 위험함과 물의 위험함과 길의 위험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는 곳마다 유대 사람의 핍박을 받고 이방 사람의 비난을 받으며 혹은 매를 맞고 혹은 감옥에 갇히며 갖은 고난을 당하는 수난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깊은 감격의 신앙은 이런 가운데서도 항상 그로 하여금 승리의 생활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항상 즐거워하였습니다. 항상 찬송을 불렀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러한 깊은 감격의 신앙은 그가 마지막으로 로마 들 밖에서 붉은 피를 뿌려 최후로 자기 신앙을 순교로써 간증한 것입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의 신앙이올시다. 우리 다 같이 기억하십시다. 참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이 감격의 신앙 가운데서 만 분의 일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이올시다. 베드로의 신앙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베드로 전서 一장 十八절에 보면 이런 말을 기록하였습니다.『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의 피로 너희들이 구속을 받았으니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하겠느냐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무한한 감격의 심정을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살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역시 사도 요한 의 신앙이올시다. 그는 요한 일서 三장 十六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그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주금 내려가서 四장 十九절에는『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사랑의 감격, 그리스도의 은혜의 감격이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도를 만든 것입니다. 이 감격의 신앙을 우리가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신앙만이 아닙니다. 모든 교우들과 모든 선지자들과 모든 참된 성도들의 공통한 신앙의 특색이었습니다. 어거스틴도 일단 회개한 다음에는 그 일생을 통해서 이 감격이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내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이렇게 구원하여 주셨으니 내가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까 하는 마음입니다. 十七세기에 피난민의 적은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우리 신교도 가운데 세계적 선교 운동을 일으킨 진젠도르프의 신앙의 특색이 또한 이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 가운데는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그 사랑의 감격이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감격의 신앙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봉사와 사업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독립된 인도네시아라고 하는 나라가 있지마는, 그 인도네시아란 나라에 가면「바탁 교회」(Batak Church)라고 (그 이름이 좀 별 하지마는) 아주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조직된, 어느 다른 선교 부의 도움을 별러 안 받는 독립된 큰 교파가 하나 있습니다. 아마 세례 교인 수 약 五十만 되는 큰 교파입니다. 그런데 이 교파는 유럽에서 온 어떤 청년 한 사람이 처음에 복음을 전파해서 세웠다고 합니다. 유럽 북부에 있는 어떤 청년이 소년 시절에 중한 다리의 병을 만나서 그 때 의사들 생각에 이 아이의 생명을 구하려고 하면 이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겠다고 하는 그런 결론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해서 자기 부모도 깊이 생각하고 이 아이도 깊이 생각하고 결국 이 두 다리를 자를 것이냐,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많이 생각하는 가운데 이 아이가 한 번 하는 말이『아, 어머니,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도 다 고쳐 주셨는데 내 다리도 예수님의 능력이면 고칠 수 있지 않겠어요? 아, 이것 어떻게 고칠 수 없고 내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습니까?』그러면서 하는 말이『나는 그저 예수님께 다리를 자르지 않고 이 다리를 꼭 맡기고 나는 예수님께 기도를 하겠습니다.』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와 그 아이가 함께 간절히 그 다리가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다리가 나았습니다. 그리하여『내가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나라, 복음을 듣지 못한 나라, 다른 사람이 가보지 못한 지방, 이런 곳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겠다.』 이렇게 작정을 하고 오래 전에 인도네시아에 혈혈단신으로 나와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해서 그런 큰 교회가 섰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건강에 감격한 심정 가운데서 일생을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바친 신령한 제자를 축복하여 주신 것입니다. 왜 우리가 다 같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부모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때가 많으며 우리가 다 같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까?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줄 알지마는, 그저 보통 쉽게 말하면 그저 사람이니까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으로 우리가 은혜를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은혜를 종종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곧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면서「만족의 근원 하나님」이라는 찬송을 부르지마는 우리가 그 은혜를 깨닫고 부를 때가 많지 못합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하면서 이 십자가라고 하는 말을 입으로 부르면서 노래하지마는 사실 십자가를 통해서 오는 은혜가 너무 클 때에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대체로 은혜가 너무 클 때에 그 은혜를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갑자기 우리 한국 같은 데서 해가 한 열흘이나 보름 뜨지 않다가 처음으로 해가 뜬다고 할 것이면 아마 대단히 감사하다고 할 것입니다. 사실 북극 지대에 가면 그런 지방이 있습니다. 어떤 데는 몇 달 후에 해가 한번 뜹니다. 그런 지방에서는 해가 한 번 뜨게 되면 크게 축하를 하고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같은 데는 뭐 그저 매일 해가 뜨니까 별로 그걸 가지고 감사한 생각이 나지 아니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은혜 가운데 살게 되어서 물고기가 물의 은혜를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공기도 너무 많으니까 공기 귀한 줄 모릅니다. 물도 너무 많으니까 물 귀한 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우주, 하나님의 주신 하늘 나라, 하나님의 주신 땅, 하나님의 주신 건강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으로 살지마는 그 은혜를 잊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때 잠깐 깨닫기는 깨닫지마는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 한국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에『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 새겨서 그 며칠을 가겠습니까?『열 번 주다가도 한 번 안 주면 열 번 준 것은 잊어버리고 한 번 안 준 것은 기억한다.』그것이 우리 타락한 인간의 성품이올시다. 토리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그 미시간 호라는 호수에 한 번은 큰배가 파선을 당해서 많은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그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혼자서 열 일곱 사람을 건져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굉장히 보도가 되고 여러 사람이 그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로스앤젤리스에서 토리 박사라고(여기 한국에 나왔던 그이의 바로 아버지가 되겠습니다)그 때는 그가 지금 유명한 빌리 그래함과 같이 유명한 목사이었는데, 그이가 로스엔젤리스에서 한 번은 설교를 하면서 그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참 이렇게 용감한 것을 우리가 배워야 된다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도 힘을 써야 된다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설교를 하고 나니 그 설교를 듣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뜻으로 손을 드느냐고 하니까『제가 바로 그 사람이올시다』하였습니다. 열 일곱 사람이나 구원한 그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와서 토리 박사의 설교를 들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토리 박사가 너무 감사해서 강단으로 좀 올라오라고 해서 울려다 세워놓고 이 분을 소개하면서 아주 참 용감한 일을 했다고 칭찬을 하고 마지막에 묻기를 이와 같이 좋은 일을 했는데 그 일을 한 후에 특별히 혹 무슨 느낀 바가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조금 생각하더니『뭐 별로 특별히 느낀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내가 그 때 열 일곱 사람을 구해 주기는 주었는데 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나한데 와서 고맙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보통 인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이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고, 우리가 어떤 때에 은혜를 깨듣는다고 할지라도 이 은혜를 항상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깨닫고 기억할 수 있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어떤 성자는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오, 주님이시여, 모든 은혜를 내게 풍성히 주셨으니 이제 한 가지 은혜를 더 주셔서 감격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이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볼 줄 알고, 들을 바라볼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마음으로 곡식으로 덮인 들을 바라볼 줄 알고, 가을에 단풍을 바라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길을 가다가 예배당을 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그 예배당을 바라보고, 높이 솟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으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특별히 독립된 울이 한국의 태극기를 바라볼 때마다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내 사랑하는 부모, 내 사랑하는 처자, 내 사랑하는 친구들, 모든 다른 동포들을 바라볼 때에도 감격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 감격의 신앙,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모든 것을 바라볼 때에 감격에 넘치는 심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가 더 받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이 앞으로 한 주간 감사 주일을 지내는 동안에 우리 하나 하나가 한 가지 은혜를 더 받아서 이 감격의 믿음을 받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은 감격의 신앙이 있는 이에게는 불평이 없습니다. 이런 이는 아무리 수고를 하고도 대우를 생각지 아니합니다. 이런 이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원한을 품지 아니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는 남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는 범사에 감사합니다. 감격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감사와 전도/ 막1:35-45/ 한경직 목사/ 2014-08-25
감사와 전도 막1:35-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막 一․四十五) 오늘 아침 마가복음 一장 마지막 부분을 봉독(奉讀)하였습니다. 거기에 우리 주님께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찍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또는 주님께서 여러 마을로 다니면서 전도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나와서 고침을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 문둥병자가 예수께 나와서 꿇어 엎드려서 간구 하여 하는 말이『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한 것을 보니 이 문둥병 자는 주님께 대해서 확실한 신앙이 있은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민망히 여기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는 곧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정신요법이 아니고, 무슨 안찰 요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즉시로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이 문둥병자와 비슷합니다. 불치의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믿음을 가지고 깨끗하여지기 위해서 간절히 구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깨끗케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이 점에 대해서 길게 생각하고자 않습니다. 이렇게 고쳐 주신 후에 주님께서는 그 문둥이에게 엄히 경계해서 보내시면서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대로 드릴 것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는 제사장이 지금으로 말하면 공의를 겸한 때입니다. 문둥병자가 병이 나은 후에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이고 병났다고 하는 증서를 받아야 일반 사회에 자유로 출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와 같은 증명서를 받으려고 하면, 모세의 명한 대로 가서 제물을 드려야 하고 결례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둥병자가 그대로 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탁한 다른 말은 그대로 순종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여기 보니까 그가 나아가서 여러 사람에게 전파해서 널리 퍼지게 하였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문둥이는 주님께 대한 신앙이 확실한 사람인데 여러 사람에게 이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하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왜 여러 사람에게 전파했는가 생각해 보면, 이유는 한 가지인줄 압니다.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해서 입을 봉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七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사실이 또 하나 기록되었습니다. 한 번은 귀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서 그 귀를 어루만지시고, 그 혀를 어루만지시며「에바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리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 때에 막혔던 귀가 열리고, 붙었던 혀가 떨어져, 말을 잘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말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도 주님께서 엄히 부탁하시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경계할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였더라』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어째서 이 부탁을 그대로 듣지 않았겠습니까? 한 마디로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해서 그 기쁜 소식을 다란 사람에게 전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와 전도는 같이 갑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깨달아서 내 마음이 자연히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파하게 됩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감사와 전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각 심령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약성서를 읽어보면 위대한 전도자들이 많지마는 아마 그 가운데도 누구보다도 전도를 제일 많이 한 이는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아시아를 비롯해서 전 유럽에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많은 환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꾸준히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런 생활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우리는 그의 서신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一장 十五절에 이런 말씀을 친히 기록하였습니다.『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의 괴수인 자기까지 예수 님께서 구원하여 주신데 대한 무한한 감사의 지정(至情)이 그의 마음속에 언제나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장에 이런 말씀도 기록했습니다.『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毁謗)자(者)요 핍박(逼迫)자(者)요 포행(暴行)자(者)이었노라』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였던 자기를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실 뿐더러 직분까지 맡기신 것을 생각 할 때에 그 감격, 그 감사의 생각이, 그의 가슴 가운데 언제나 충만했던 것입니다. 이런 감사의 마음은 그로 하여금 어디 가든지 복음을 전파하게끔 구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역사를 읽어보면 물론 위대한 전도자가 거의 하늘의 별 떼처럼 무수히 일어났습니다. 그 여러 사람 가운데도 특별히 우리 신교 역사상에 세계 선교운동을 일으키며 자기 스스로 실천한 모라비아교회의 창립자요, 또 그 교회의 목사였던 진첸돌프라고 하는 이를 기억하게 됩니다. 이 분은 본래 귀족의 아들입니다. 백작의 벼슬을 가진 분입니다. 자연히 재산도 많은 분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자기의 지위도 버리고 재산도 다 바쳐서 오직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한 분입니다. 그 때에는 불행히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에 큰 충돌이 있어서 구교도의 압박을 받은 불쌍한 신교도 피난민들이 갈 데가 없어서 그에게로 찾아올 때, 이 분은 그들을 영접해서 자기의 소유한 토지를 주고, 그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같이 모여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또한 예배당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서 한 五, 六백 명되는 교회에서, 멀리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웨스트 인디아와 저 북방 그린란드까지 백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으로 평균 네 세대, 다섯 세대에서 선교사 한 사람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는가? 진첸돌프 자신이, 이 경험을 이야기함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할머니에게서 독일 경건주의의 감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그가 젊었을 때 어떤 박물관에 들어가서 여러 미술품을 구경할 때, 한편에 가보니까 그 때의 유명한 화가 스턴벅(Sternburg)이라고 하는 분이 그린 명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을 그린 그림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을 유심히 볼 때에 은혜를 받아서 주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처럼 고생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혈을 흘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되어서, 그 그림 앞에 조용히 섰는 동안에 주님께서 은연한 가운데 『나는 너를 위해서 내 몸을 주었건마는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하는 음성이 그 심령 속에 들렸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의 몸을 바치고 자기의 가진 것 전부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 감격과 그 감사한 마음 가운데서 온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 신문지상을 통해서 미국에 있는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라고 하는 분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다 들으신 줄 압니다. 아프리카 흑인 가운데서도 위대한 기독교인이 여러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물론 마틴 루터 킹 같은 사람이요. 한편 지난 세기의 저 十九세기 아프리카 흑인 중에 제일 유명하다고 생각되는 분은 나이제리아의 사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삼우엘 애드자이 크라우드(그 실제 이름은 애드자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나이제리아는 그 때까지 영국의 식민지였지 마는 지금은 독립국가입니다. 아프리카 신생국 중에 제일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이 애드자이의 큰 공로가 있다고 합니다. 十九세 초엽인 그 때에는 해적들이 아프리카네 가서 흑인들을 강제로 납치 해다 가 저 웨스트 인디아라고 하는 섬에 데려가서는 여러 나라에 종으로 팔던 그런 악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애드자이가 사는 동네에도 이와 같은 해적의 무리가 와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조리 강제로 납치 해다 가 배에 싣고서는 종으로 팔려고 대서양을 건너 웨스트 인디아 섬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영국 군함이 그 해적선을 발견하고 추격해서 해적을 다 붙잡고, 노예로 팔아 버리려던 흑인들을 다시 서 아프리카로 싣고 가서 다 놓아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열 네 살 된 이 어린아이도 시에라 레욘 이라고 하는 서 아프리카에 내렸는데 마침 거기서 어떤 선교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의 자초지경 이야기를 다 들은 선교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고 마침 그 곳에 세워져 있는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가 거기서 공부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또 공부를 아주 잘 했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선교사가 그를 영국까지 보내서 공부를 계속해서 시켰습니다. 이 학생이 영국서 공부를 다한 다음에는, 자기의 생활을 돌아보니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바다 가운데 노예로 잡혀가서 팔려 갈 신세에 있던 것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또한 대학까지 졸업하게 된 것을 생각하니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자기 고양으로 돌아가서 자기 동족들에게 이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겠다고 하는 결심으로 가지고, 一八四三년에 청년으로서 다시 자기 고국인 흑암(黑暗) 대륙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서는 일생토록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전도, 교육, 문화, 사회 각 방면에 많은 공헌을 해서 나이제리아의 사도라고 하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생활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역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니 이 귀한 복음을 내 민족에게 전파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감사한 마음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전도자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일년이 한 번씩 감사주일을 지킵니다. 한국교회에서 감사주일을 제정하게 된 동기는 둘이 있습니다. 첫째는 一년에 한 번씩 一년 동안 받은 바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우리 한국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다 이렇게 구원을 얻었으니 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은혜를 감사하고 생각하고, 이 은혜를 감사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예배를 드릴뿐더러 감사헌금을 해서 이 감사헌금을 온전히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업을 위해서 쓰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해방되기 전까지는 우리 장로교 전국 교회가 감사헌금을 전부 모두 어서 중국 산동(山東)에 있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 비로 사용했습니다. 감사와 전도! 이 두 가지가 본래 한국교회에서 감사일을 제정한 근본 동기입니다. 감사일을 통해서 외국 선교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전통을 다시 살려야 되겠습니다. 지금은 한국교회에서 감사헌금이라고 하지마는, 순전히 전도 비를 위해서 쓰지 않고 경상비와 여러 가지 다른 일을 위해서 쓰고 극히 적은 부분만을 전도 비에 쓰는 그런 풍속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본래의 근본에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읽어보면 그 때 사람들은 감사일을 두 번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은 감사일과 큰 감사일 둘이었습니다. 적은 감사일은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맥추절 이라고도 하는데 그것 무슨 감사일이냐 하면, 밀보리를 다 거둔 다음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일이었습니다. 이 때는 적은 절기로 하루만 지켰습니다. 그 다음 그 때의 달력으로는 七월이요, 지금 달력은 十월인 가을에 모든 곡식과 실과를 다 거두고 나서 감사절기를 한 번 더 지켰습니다. 그걸 초막절 이라고 했는데 이 초막절은 하루만 지킨 것이 아닙니다. 한 주일을 지켰습니다. 성회로 모였습니다. 초막을 짓고, 광야에서도 우리를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추억하면서 감사한 성회를 열면서 감사일을 지켰습니다. 여러분은 금년 우리 영락교회에서의 감사일을 다음 주일 하루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한 주일동안,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 지키던 법대로 한 주일을 성회로 모이면서 감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감사일을 지낼 때에는 흔히 멀리 갔던 아들도 모이고, 딸도 모이고, 다 함께 모여서 감사일을 지키는 그런 풍속이 있습니다. 이 즐거운 절기는 다 가족이 모이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성회로 모일 때에 온 교회가 모이도록 힘써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을 더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한 주를 믿으면서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마는, 교파가 다르므로 별로 교재가 없던 다른 교파의 대표될 만한 분도 청해서 같이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복음을 전파하기로 우리 교회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도 말씀 드렸지마는 오늘 저녁부터 시작해서 우리 한국의 주요한 교파의 대표 될만한 인물들이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저녁 전파하게 되겠습니다. 아마 이런 모임은 제 생각 같아서는 우리 한국교회 역사상에 처음 되는 모임 같습니다. 또 다음 주일에 우리가 감사헌금을 할 텐데 이 헌금의 용도는 벌써 우리가 금년의 예산을 통과시킬 때에 미리 작정했습니다. 금년부터는 우리 교회의 감사헌금은 순전히 전도사업만 위해서 쓰기로 했습니다. 다른 비용에는 안 쓸 것입니다. 순전히 외국전도와 국내전도 등 전도사업을 위해서 쓰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이 감사와 전도에 참여하실 수 있도록 들어오실 때, 감사헌금 봉투도 드린 것이고, 또 그 밖에 초청장도 하나씩 다 드렸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친구들을 초청해서 와서 같이 즐기고 같이 전도하는데 협력할 수 있기 위해서 여러분께 드린 것입니다. 살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민족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야 옳게 삽니다. 바르게 삽니다. 가치가 있게 삽니다. 영원히 삽니다. 우리 민족도 그리스도를 알아야 꼭 살겠습니다. 부패와 부정을 막을 수 있겠습니다. 사회악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다. 인보상조(隣保相助)하여 이 혼란한 때를 같이 살아 갈 수 있겠습니다. 또 오늘날 우리 민족적 화제가 된 통일도 옳은 통일을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주에도 말했지마는 통일이라고 해서 다 좋은 통일이 아닙니다. 죽는 통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를 알아야 자유와 평화가 확보되고, 정의가 확보되는, 사는 통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전파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압니까? 성서적 방법이 무엇인지 압니까? 사도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적 방법이 무엇인지 압니까? 요한 복음 一장 마지막 절을 읽으십시오. 거기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 님을 처음으로 만난 다음에, 제일 먼저 누구를 예수 님께 데리고 왔습니까? 자기 제자 요한 과 안드레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요한 과 안드레가 예수를 만난 다음에, 안드레는 또 누구를 데리고 왔는지 압니까? 자기 형 시몬을 전도해서 예수 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요한 과 안드레가 합해서 또 한 동리에 살던 사람 빌립을 예수 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선생은 자기 제자를, 동생은 자기형을, 동향 사람은, 자기 친구를, 이렇게 개인 개인이 가까운 이들을 먼저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전도방법이요.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구원의 역사를 마치시고, 승천을 하셨습니다. 거기서 천사 장 가브리엘을 만났다고 합니다. 가브리엘이 예수 님을 만나자, 크게 치하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큰 구원의 사업을 다 이루었는데, 이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여야 하겠는데, 무슨 방법을 가르치고 올라왔습니까?』그러니까 예수 님께서 대답하는 말씀이『내가 열 두 제자를 택해서 가르치고 그 열두 제자에게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내가 부탁을 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가브리엘이『참 잘 되었는데 그러나 그 사람들이 만일 주님의 부탁을 잘 받지 않고 부탁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입니까? 무슨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하고 또 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말씀이『그들이 내 부탁을 그대로 순종 안하면 다른 방법은 없다』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지금까지 전파된 것은 주를 먼저 안 사람이 자기의 가까운 사람에게 한 사람씩, 두 사람씩, 주님의 부탁 받은 대로 전함으로써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二천년을 내려오게 되었고, 이렇게 전파가 되어서, 지금은 세계 三十억 가운데 근 十억의 교도가 생기게 된 것이고, 이런 방법으로 한국교회도 발전된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운동은 어떻게 생각하면, 운동경기 가운데 릴레이경기와 같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가지고 전도하며 뛰다가 어떤 사람에게 전해 주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고 이렇게 되어서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뛸 차례입니다. 우리가 뛰지 않고 우리가 이 복음을 가지고 활동하지 않으면 이 복음이 더 계속해서 전파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감사일은 한 주일 동안을 성회로 모이겠는데, 우리가 저녁마다 같이 기쁨으로 모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십시다. 문둥이 열 사람을 고쳐 주셨는데 한 사람만 와서 감사를 드리고 아홉 사람은 오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기억하십니다. 그 축에 들지 맙시다. 또 올 때에 어떻든지 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파해서, 한 사람씩 인도해 가지고 와서 과연 문자 그대로 금년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충심으로 감사하고 많은 신령한 곡식을 거두어서 하나님 앞에 감사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