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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8-14/ 큰 기쁨의 좋은 소식 / 한경직 목사 2014-08-26 10:24:28 read : 469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먼저 이곳에 교회를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크리스마스 전 주일이 되는데, 오늘 같이 수고하시던 박 목사님, 수고하시는 이 교회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게 됨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누가복음 2장 10절 11절 다시 봉독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눅2:8-14/ 큰 기쁨의 좋은 소식 / 한경직 목사 2014-08-26 10:24:28 read : 469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먼저 이곳에 교회를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크리스마스 전 주일이 되는데, 오늘 같이 수고하시던 박 목사님, 수고하시는 이 교회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게 됨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누가복음 2장 10절 11절 다시 봉독합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 증오와 시기와 쟁투와 살벌의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크리스마스 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나온 70년대의 특별히 마지막 해인 금년은 세계적으로 국내적으로 매우 소란한 해였습니다. 이란 혁명의 과격분자들의 난동은 피해국인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세계를 분노와 놀람으로 휩쓸리게 하였으며, 또한 국내에서 일어난 그동안 불행스러운 일들은 역시 온 국민을 경악과 충격과 불안에 빠지게 합니다. 더욱 소위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의 횡포는 온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어 장래를 헤아릴 수 없는 그러한 상태에 전인류를 몰아넣고 있습니다. 때가 때이니 만치 이러한 계절에 우리는 조용히 어두운 하늘에 비치는 크리스마스 별을 보아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때일수록 신령한 귀를 기울여 크리스마스 새벽, 공포에 싸인 인간들에게 임한 천사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중 10절, 11절 다시 한 번 듣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상 메시지 가운데 세 가지 말씀을 특별히 주의하십시다. 첫째는 “무서워 말라” 무서워 말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하는 말씀이올시다. 먼저, “무서워 말라”는 말씀을 우리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다. 크리스마스 새벽에 천사들을 통하여 임하신 첫 말씀은 무서워 말라 하는 말씀이올시다. 우리 인간은 흔히 공포감에 싸여서 살기 쉽습니다. 인간은 다음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릅니다. 장래에 대한 불안이 인간의 심령 속에는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은 건강하나 내일은 무슨 병을 만날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오늘은 사업이 잘 되는 것 같지만은 내일은 무슨 우환으로 실패가 올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안전하고 평안해 보이지만은 내일은 무슨 사태가 발생할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인간 생활은 거의 매일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불행한 인간들에게 크리스마스의 첫 메시지는 무서워 말라는 말씀이올시다. 왜요? 이 세상에 어떠한 일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죄와 공포에 눌려 사는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잊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그대로 둘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독생자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이 우주의 깊음 속에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성경을 읽는 중에 “무서워 말라” 혹은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몇 번이나 있는지 한번 헤어 보았다고 합니다. 헤어 보니 그런 말씀이 366번이나 있더라고 합니다. 그러니 일년이 365일인데 하나님께서 매일 한 번씩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고, 또 하루는 한 번 더 “무서워 말라”고 했는데 아마 그것은 크리스마스 새벽이 아닌가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은, 우리는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병이 나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혹 입원을 하여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혹 수술을 받게 되어도 수술실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 믿는 이들은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하십니다. 모든 병도 나을 수 있습니다. 고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할 것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니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공포심을 몰아내고 용감하게 담대히 사시길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그리스도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둘째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 크리스마스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하여진 날입니다. ‘소식’이란 말은 흔히 지금은 ‘뉴스’라는 말을 씁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뉴스는 본래 영어지만 뉴스라는 말이 우리 한국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라디오 시간에도 뉴스 시간이 있고, 텔레비전 시간에도 뉴스 시간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는 큰 뉴스, 요즘말로 하면 좋은 뉴스, 기쁜 뉴스라 전하여졌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제일 큰 뉴스가 무엇일까 혹 생각하여 보았습니까? 제일 큰 뉴스, 제일 반가운 뉴스가 무엇일까? 아마 우리 한국 역사에 있어서는 신라의 삼국통일 뉴스, 아마 그때는 굉장히 큰 뉴스였을 거예요. 이조시대에 내려와 보면 세종대왕의 한글반포의 뉴스, 그건 굉장히 큰 뉴스예요. 혹은 임진왜란 때에 충무공 장군의 한산도 대첩의 뉴스 등은 아마 우리 한국 역사에 있어서 누구나 잊을 수 없는 큰 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전동양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큰 뉴스가 무엇일까? 한 가지 얼른 생각이 들어오는 것은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하는 뉴스는 아마도 굉장한 뉴스일 겁니다. 지금도 중공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이는 누구나 만리장성에 올라가 봅니다. 저는 일제시대 때 한 번 가 보았습니다. 또 전세계적으로 말해서 제일 큰 뉴스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1492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새로 발견한 뉴스는 굉장히 큰 뉴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러나 이것들도 유사 이래에 가장 큰 뉴스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뉴스 가운데는 큰 뉴스는 뉴스지만은 반갑지 않은 뉴스도 있습니다. 뉴스라고 다 좋은 뉴스가 아닙니다. 가령 일제말기에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져서 20여만 명이 일시에 몰사한 뉴스는 굉장히 큰 뉴스는 뉴스요. 그러나 또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우리 최근 한국에 일어난 박 대통령 시해사건 같은 뉴스도 우리에게는 큰 뉴스임에는 틀림없어요. 그러나 좋은 뉴스, 반가운 뉴스라고 하기에는 아마 어려울 거예요.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반가운 뉴스가 무엇일까? 여러분, 우리는 그 뉴스를 분명히 들어야 하겠어요. 그것은 크리스마스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뉴스입니다. 왜요? 그리스도의 신분을 생각하여 보세요. 그는 전능하셔서 천지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이러한 신분을 가지신 분이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고, 그러한 기적적인 사실이야말로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뉴스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그 결과로도 생각해 볼 수가 있어요. 결과로 생각해 볼 때에도 이 뉴스야말로 가장 반가운 큰 뉴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여 오심으로 온 세계 인류가 죄악에서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의 역사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계 역사는 주전과 주후로, BC와 AD로 갈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계 역사에는 큰 변천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작은 뉴스는 열심으로 듣지만은, 이 가장 큰 뉴스는 아직도 듣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이올시다. 또 우리는 작은 뉴스를 들어도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그 뉴스를 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뉴스, 가장 기쁜 소식을 듣고도 나 혼자만 알고 가만히 있다고 하면 그게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 가장 큰 뉴스, 가장 반가운 뉴스를 들은 우리는 전파해야 합니다. 전파할 책임이 있습니다. 옛날 목자들과 같이 큰 소리로 전파할 줄 알아야 됩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자기만 알고 전할 줄을 몰라서는 아니되겠습니다. 큰 뉴스, 가장 기쁜 뉴스는 온 세상 인류가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이 소식을 먼저 들은 우리가 큰 소리로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크리스마스 계절에 그러합니다. 셋째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세상의 가장 큰 그리고 기쁜 뉴스의 내용을 좀더 분명히, 구체적으로 말씀하여 줍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는 우리 모든 인간을 위하여 구주가 나셨습니다. 그분은 곧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여기 ‘구주’란 말을 특별히 주의하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모든 인간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단순한 선생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무슨 사회운동의 영도자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는 전인류의 구주입니다. 그 뜻은 구원의 주입니다. 죽을 사람을 건져주는 이를 구주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이 죄에 빠져 죽어가는 중에 있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들을 죄악의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서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려 함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왔노라”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영혼을 건져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는 오직 예수 한 분, 이 구주가 오신 날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해서 주님의 은혜의 해를 전하러 왔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많은 가난한 자를 도우시고 구원하셨습니다. 많은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을 소유하게 하셨습니다. 미신과 무지와 우상숭배와 온갖 불의와 죄악의 포로가 되고 불의한 권력에 눌린 많은 사람들을 지적으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해방해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주님의 영이 움직이는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따릅니다. 또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풍성케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주님은 또한 선하십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방면으로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가 충심으로 예수를 영접하면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집니다. 새 사람이 됩니다. 기쁨과 화평과 용기와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충만한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활 속에 도도히 흐르게 됩니다. 건강도 회복되게 됩니다.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생명의 힘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만 더 들으세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섬기려 하고 내 생명을 바쳐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이 되기 위하여 오셨다.”라고 했습니다. 이 풍부한 생명의 소유자인 주님께서는 그 모든 풍부한 생명을 부려서 가난하고 불쌍하고 말할 수 없이 눌림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봉사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 크리스마스 계절은 우리가 주님께 나와 이 풍부한 생명을 받고, 이 풍부한 생명으로서 아직도 이러한 생명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여러 가지로 눌린 모든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이러한 때입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이 기쁜 크리스마스 계절에 이 생명의 구주를 영접하시어서 우리들도 풍부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위대한 봉사에 동참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롬15: 1-13/소망의 하나님 / 한경직 목사 2014-08-23 06:40:47 read : 336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十五․十三) 오늘 이 시간에 소망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고린도 전서 十三장 마지막 절을 읽어보면 우리 사람이 세상에 살 때 항상 있을 것 세 가지를 가르
롬15: 1-13/소망의 하나님 / 한경직 목사 2014-08-23 06:40:47 read : 336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十五․十三) 오늘 이 시간에 소망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고린도 전서 十三장 마지막 절을 읽어보면 우리 사람이 세상에 살 때 항상 있을 것 세 가지를 가르쳤습니다.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입니다. 사람은 소망으로 살고 또한 소망이 있어야 삽니다. 어렸을 때에는 청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청년 시대에는 장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든지 장래에 대한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만일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 아주 소망이 없어졌다고 하면 그이는 얼마나 가련한 사람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낙심할 터이고 타락할 것입니다. 그러게 되면 혹은 어떤 범죄에 빠질 수도 있겠고 좀 더 심하게 되면 정신에 이상을 일으킬 수도 있겠고, 아주 심하게 되면 소망 없는 사람이 되어 자살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다른 것이 없어졌다고 할지라도 소망만 그냥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소망의 줄 하나를 잡고 능히 모든 환난을 배제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왈츠라고 하는 사람의 소망에 대한 유명한 그림을 거의 다 보신 줄 압니다. 둥근 지구 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홀로 외롭게 앉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은 수건으로 싸맸습니다. 보지 못합니다. 그 가슴에는 비파를 안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비파의 줄이 거의 다 끊어져 있습니다. 오직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만 반짝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우주에 외로이 혼자 앉아 눈을 싸맸으니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남은 줄 하나만 가지고 이 여자가 아름다운 음악을 타는 것입니다. 그 줄은 소망의 줄이올시다. 그 별은 소망의 별이올시다. 이 그림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줄이 끊어집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사업이 실패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믿었던 줄이 끊어집니다. 하지마는 소망의 줄 하나만 우리가 그냥 붙잡을 수 있다고 하면, 그 소망의 줄 하나로써 능히 모든 것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경에는 소망을 가리켜서 영혼의 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람의 심령이 풍파 높은 대해를 지나갈 때에 어떤 때에는 큰 폭풍을 만납니다. 하지만 우리 생명의 닻줄을 깊은 바다 속에 붙잡아 매었다고 한다면, 아무리 풍파가 높다고 할지라도 우리 심령의 배는 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깊은 곳에 매인 닻줄은 소망의 닻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 심령의 생활에 있어서 이 소망의 줄이 끊어진다고 한다면, 어떠한 유혹의 바람과 시험의 풍파에 휩쓸려가고 우리의 생활이 암초에 부딪쳐서 파선을 당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소망으로 살아야 하고 또한 소망이 있어야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살펴볼 것이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만 소망이 끊어져서 낙심과 절망에 휩쓸려서 생활의 파선을 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 까닭을 가만히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소망의 기초를 잘못 두는 데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소망을 물질에 둡니다. 돈에 둡니다. 그것이 그만 없어져버리면 그 사람의 소망은 없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소망을 어떤 친구에게 둡니다. 그 친구가 그만 실패하면 소망은 없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지혜, 어떤 사람은 자기의 지식, 어떤 사람은 자기의 친척, 어떤 사람은 자기의 남편, 어떤 사람은 사람이 경영하는 기관, 사람이 경영하는 어떤 것이 소망을 둡니다. 우리가 이런 것에 소망을 두면 언젠가 한 번 그것이 실패될 때에 그 소망의 줄은 끊어지고 맙니다. 성경의 말씀을 보면『너희들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사람에 속하는 모든 것은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으로 살며 또 소망이 반드시 있어야 사는데 우리가 이 풍파 높은 세상을 향해 갈 때에 우리의 소망의 기초를 어디에 두겠습니까? 『나의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주는 나의 소망이 되십니다. 여기 말씀에『소망의 하나님이 너희들의 소망이 넘치게 하기를 원하노라』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불멸의 기초 위에 두어야 될 터인데 이 불멸의 기초는 어디 잇느냐? 오직 하나님 외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소망이올시다. 주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그 줄이 끊어질 수 없습니다. 이제 여기에『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말씀을 간단하게 몇 가지로 생각해서 우리가 소망의 깊은 자리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의 소망의 기초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품성, 그 공의나 그 사랑이 영원불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소망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소만은 하나님의 불변의 품성에 둡니다. 하나님이 섭리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을 다스리시고 인간을 다스리시되, 자연계는 자연 법칙으로 하시고 인간은 도덕의 법칙으로 하십니다. 그리해서 대자연을 유지, 보호하시고 인간의 모든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믿는 자의 소망의 기초가 됩니다. 또는 이 하나님은 우리 믿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언약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이름 지어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그런고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물 가운데 지나갈지라도 물이 너를 빠지게 하지 못할 것이고 네가 불 가운데 지나갈지라도 불이 너를 불사르지 못하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같이 할 것이다.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된다.』여러 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소망이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불변하시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섭리에, 하나님의 언약에 우리 소망의 기초를 둘 때에 어떠한 환경, 어떠한 처지, 모든 세상의 것이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소망의 줄은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소망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의 저작 혹은 저작자라 하는 그런 뜻이 있는 줄로 압니다. 책을 저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실상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을 만들어 주셨단 말입니다. 그것은 무슨 a라인고 하니 우리 믿는 자들의 큰 소망은, 믿는 가운데서 금생과 내생에 받을 큰 축복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생각해 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되었을 때에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대속(代贖)의 사업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다시 오순절에 성신으로 우리에게 강림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받을 축복인 금생(今生)과 내생에 받을 이 축복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사람들의 소망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소망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우리 믿는 자의 소망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마는, 세상 사람들의 소망의 대상은 세상에 있는 줄 압니다. 세상의 모든 소망의 대상은 썩어질 때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과 같이 악한 자는 죽을 때에 소망이 끊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의 소망의 대상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요,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요, 세상에 속한 데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소망의 대상입니다. 죽어도 그리스도요, 살아도 그리스도요, 죽어도 유익함이 된다고 하는 말리 그 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소망은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좀 더 알고, 그리스도를 좀 더 얻고,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그리스도와 합일되어서 열매를 맺고,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하나님 자체가 우리 믿는 사람의 소망의 세상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믿는 사람의 소망은 썩어질 수 없습니다. 넷째로, 소망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의 소망의 완성 자이시라는 뜻이 있는 줄로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을 완전히 이루어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소망 소망하지마는 그 소망이 이루어질 소망이 없다면, 그런 소망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기루와 같이 눈에만 보이고 실상 이루어질 실재가 없다고 하면, 그 소망이 무슨 쓸 데 있겠습니까? 장래에 있을 일이면서도 완전히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 참된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이 앞으로 확실히 이루어 주실 날이 있습니다. 요한 一서 三장에 있는 말씀과 같이 언제 주님께서 나타나 실는지 알지 못하지마는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는 우리도 그와 같을 것을 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 즉 금생과 내생의 소망이 온전히 이루어질 날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믿는 사람의 소망은 참 소망임, 거짓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소망은 불멸의 소망으로 썩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산 소망으로 죽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림자와 같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영원한 소망으로 이 세상의 소망만이 아니올시다. 우리의 소망은 넘치는 소망으로 적은 소망이 아니올시다. 二十세기를 흔히 여러 역사를 연구하는 평론가들이 평하기를 환멸과 절망의 세기라 이렇게 평합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十八-十九세기까지는 진화론을 거의 다 믿었고, 과학이 발달하자 과학만 잘 발전시키면 진화론의 법칙에 의하여 인간 사회도 잘 진화되어서 온 세계가 평안히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세계가 되리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진화론과 과학의 진보로 세계에 평화와 행복이 온다고 하는 그 맹목적 소망도 결국 二十세기에 와서는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二十세기에 와서 보면 과학은 발전되었을지 몰라도 오히려 이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 세상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세상입니까? 무한히 진보되어 평안히 살리라고 믿었던 사람이 실제로 二十세기에 와 보니까 얼마나 추악하고 짐승만도 못한지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맹목적으로 믿던 이를 환멸과 절망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작년 어느 날, 어떤 미군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정말 세계 정치가들이 하는 일을 우리 같은 범인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우리가 二차 대전 때는 다 선전하기를 추축국(樞軸國)인 독일, 이태리, 그리고 일본 세 나라만 때려부수면, 온 세계에 평화가 오겠다고 해서 전 세계가 다 들어 붙어서 특별히 소련과도 연합하고 중국과도 연합해서 이 추축국을 때려 부셨습니다. 그러면 으레 평화가 올 줄 알았는데 평화는 오지 아니하고 十 연도 못 가서 그보다 더 큰 원수가 나타났습니다. 특별히 이상한 것은, 전에 손잡고 함께 싸우던 그 사람들을 향해서 다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이상한 것은 우리가 손잡고 때려 부셨던 독일이 이제는 재무장해야 되겠다. 일본도 재무장해야 되겠다. 이태리도 재무장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싸워서 때려 없애려던 이 사람들과 함께 손잡고 전에 우리와 같이 싸우던 중국 사람이나 소련 사람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계속되다 보면, 우리가 이렇게 해서 중국과 소련을 때려 없애버렸지만 그 다음에는 전쟁이 없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여러분, 이 미군의 마음을 통해 二十세기에 사는 청년들의 깊은 환멸의 비애를 엿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그 청년 한 사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청년들이 오늘날 그와 같은 환멸의 비애에 쌓인 줄 압니다. 사람의 지혜를 믿을 수 없습니다. 정치가의 정책도 믿을 수 없습니다. 환멸의 비애뿐입니다. 우리 한국 청년들은 모두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 일본만 망하면 우리 한국은 잘되리라 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八․一五에 일본이 망하고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장로님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뇌일혈이 생겨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다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해방은 되었건만 난데없는 三八선이 생겼습니다. 또 六․二五사변이 나서 많은 파괴를 당하고 사람도 죽었지마는 이 기회에 三八선이 없어질 터이니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는데 三八선은 없어지지 않고 겨우 휴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언제 통일이 될는지 우리 동포들은 폐허에서 허덕이며 그 심령 속에 당하는 고민이 얼마나 많은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전 세계 인류들은 불안과 공포와 환멸과 절망의 깊은 못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을 둘려보고 아무리 땅을 내려다보아야 인류의 소망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인류의 소망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이제라도 우리는 땅만 보지 말고, 사람이 하는 일만 보지 말고, 눈을 들어 산을 보십시오,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볼 때에 별을 볼 수 있고 소망의 새벽 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년 여름 미국에서『오직 그리스도만이 온 세계의 소망이다』하는 그런 표어아래에서 세계 기독교 대회가 모이게 된 것입니다. 과연 온 세계 인류의 소망은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하는 일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 개인의 생활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말한 것과 같이 세상의 여러 가지를 우리 소망의 대상으로 하였다가 그것이 없어질 때 절망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그 성품, 하나님의 그 섭리, 하나님의 그 언약을 믿고 의지할 때에는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 처하게 되든지 낙심할 수 없습니다. 왜? 모든 일이 합동해서 유익하게 되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와 같이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는 자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시겠다고 하는, 변치 아니하는 언약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자비와 긍휼(矜恤)과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낙심할 수 없고 절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언제든지 소망이 넘칩니다. 넘치는 소망을 가지고 어떤 환경이든지 어려운 것이든지 이기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인내가 최후 승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의 장래를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유엔만 늘 쳐다본다거나 또 미국만 늘 쳐다본다던가 또 우리 대통령만 늘 쳐다보다가는 낙심될 때가 많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견지로 볼 때 이 통일이 언제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올시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이 우리 민족이 이와 같은 도탄 가운데 빠져 있는데 이런 상태로 영원히 그냥 부려두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신원 하여 주실 날이 반드시 속히 올 것입니다. 반드시 통일이 됩니다. 반드시 자유의 나라가 됩니다. 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우리 백성을 사랑하시는 까닭입니다. 전 세계에 대하여서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사상(四相) 회의를 열어 모여서 의논한다고 하지마는, 그것을 보다가는 우리는 절망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전쟁이 일어나기 쉽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언제든지 세상 모든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가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심판이 있고 부활이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전 세계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한 마디만 말하고 그만 두겠습니다. 여러분, 밤이 다 어둡지마는 제일 어두운 때는 바로 재 밤 새벽이 되기 바로 전에 그 때가 제일 어둡다고 합니다. 제일 어두울 그 때에 하늘에 무엇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새벽 별이 나타납니다. 제일 어두운 그 때에 새벽 별이 나타나듯, 이 세계가 이렇게 어둠고 온 인류가 절망과 비애에 빠진 이 때에, 새벽 별이 되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날 날이 가까워온 줄 압니다. 우리 개인생활의 경우를 볼지라도 모든 일이 그야말로 아득해지고 캄캄해질 그 때에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소망의 별이 비쳐 옵니다. 그런 까닭으로 세상 사람이 다 어둡다고 캄캄하다고 절망이라고 하면서 죽지마는, 제일 빛나는 소망이 우리에게 비쳐 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합니다. 어두운 것은 새벽 별과 새벽의 서광이 가까워 온 증거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이와 같이 환멸과 절망에 쌓인 이런 경우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이 황폐한 강산에 헤매는 우리 동포들, 탄식하고 애타고 눈물 흘리지 말고 이런 때에 하나님께 돌아와 새 소망을 얻어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서 조국을 위하여 씩씩하게 싸우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 /요6:41-59/ 하용조 목사 2015-05-27 22:47:31 read : 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죄인을 구원해 영원한 생명 누리게 하는 ‘참 양식과 음료’ 깨진 관계를 하나로 잇는 예수님께 연결, ‘생명의 능력’ 경험해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서 핵심은 ‘생명’입니다. 참 생명을 얻게 하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면 내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복을 누릴 것입니
예수님의 살과 피 /요6:41-59/ 하용조 목사 2015-05-27 22:47:31 read : 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죄인을 구원해 영원한 생명 누리게 하는 ‘참 양식과 음료’ 깨진 관계를 하나로 잇는 예수님께 연결, ‘생명의 능력’ 경험해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서 핵심은 ‘생명’입니다. 참 생명을 얻게 하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면 내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복을 누릴 것입니다. 11월 27~29일까지 일본에서 생각지도 못한 은혜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서울 온누리교회의 모세대학, 일본어 예배 관계자들 등 90여명, 일본의 다섯 교회에서 1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또 예상치도 않았던 1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일본 집회에 대한 정의는 한마디로 ‘생각지도 못한 은혜’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모든 분들이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는 아름다운 경험을 했습니다. 내년에도 이런 집회로 다시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헌금하며 눈물 흘릴 때 보잘 것 없던 일본 교회들에 그동안 엄청난 축복이 있었습니다. 우에다에서 오신 여자 성도 한 분과 동경온누리교회(장재윤 목사) 남자 성도 한 분의 간증은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세례 받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모든 일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가 넘쳤던 기쁨이 충만한 집회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세상 교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교회를 환영하기보다 거절하고, 이해하기보다 오해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의 핵심적 가치를 말할 때 사람들은 거부감과 적개심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은 타락했다’라고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아주 싫어합니다. ‘그래도 인간은 선한 구석이 있지 않느냐’며 반발합니다. 또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있다’고 설명하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주어졌다’며 맞섭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요, 메시아다’라고 하면 버럭 화를 내고 맙니다.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 식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면 진화론자나 이성주의자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벌떼처럼 들고일어납니다. 그들은 윤회설이 더 이성적이고 타당하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또 천국이 있다고 하면 듣기 싫어하고 지옥이 있다고 하면 더욱 듣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자신이 지옥으로 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며 애써 태연한 척 합니다. 이렇듯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에 대해 사람들은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2,000여 년 전에 이스라엘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온 떡이라고 증거하실 때 함께 있던 종교인들은 부정적인 반응과 적개심을 나타냈습니다. 그 말씀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41, 42절입니다.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1절 말씀에 ‘서로 수군거렸다’고 기록하고 있고, 42절 말씀에는 ‘예수의 부모를 우리가 잘 아는데 어떻게 자기가 하늘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무신론자보다 더 묘하고 복잡하며 강퍅한 사람이 종교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편견과 오류를 범하고도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수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께서 종교인들에게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43, 4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4절 말씀에는 구원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이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간에게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끄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올 수 없다는 설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깨닫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뿐이지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미는 손, 초청하는 손’이 있기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손’과 ‘믿음의 손’ 사이의 예수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서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초청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님을 믿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나를 이끄시지 않으셨다면 응답할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허공에 손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다’며 소리 지를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계시지 않고 초청하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응답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은혜의 손’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시고 조건 없이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응답이 존재할 수 않습니다. 내가 편지를 쓰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특정인 ‘아무개’에게나 편지를 쓸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름도, 주소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편지를 쓸 수 있겠습니까? 편지는 대상이 분명히 있어야 부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는다’는 것도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겠다는 겁니까? 그분이 부르시고 초청하시며 이끄셨기 때문에 내가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손’ 입니다. 둘째, ‘믿음의 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손에 내가 응답하고 마주 뻗는 손이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미는 손과 내가 구원을 요청하는 손이 닿는 연결점에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운데에 존재하시지 않는다면 두 손은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는 일입니다. 구원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곧 죽은 자가 영원하신 자에게 연결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44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과 나를 연결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의 은혜의 손과 나의 믿음의 손 사이에 예수님께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아버지의 풍성하신 사랑이요, 조건 없는 사랑이요, 영원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초청하시고 이끄셔서 예수님께로 오게 하셨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로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끄시는 손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오신 분도 있겠지만 거기에도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오셨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그분께로 오게 됩니다. 코 꿰어 억지로 오는 분도 있고, ‘아멘, 할렐루야’하며 즐겁게 오는 분도 있습니다. 어쨌든 모든 성도들이 춤추며 기쁘게 그분께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름 ‘예수’ 45절에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보았다는 뜻인가요? 46절 말씀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나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께로 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을 뵙지 못했지만 환경, 여건, 심정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예수님께로 인도하심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살다가 실망한 나머지 자살 직전에 하나님께로 나오기도 합니다. 외로움, 실패, 절망, 질병을 통해 이끌려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 적은 없지만 여러 상황에서 자꾸 하나님께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와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7, 48절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셨기에 본인도 모르게 교회로 나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 앞에 갔을 때 은혜와 생명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삶을 경험하고서야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서 핵심은 생명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공언하셨습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살 생명의 특징은 한마디로 죽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일반적으로 나타내는 특징이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슬프거나 절망하고 싸우는 것들은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로 옷 입고 있습니다. ‘머리가 아프다, 죽고 싶다, 괴롭다, 죽이고 싶다, 불안하다, 잠이 오지 않는다’ 등은 죽음의 그림자가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모든 상담은 죽음의 그림자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로 나아오면 생명이 있습니다. 내 안에 생명이 있으면 성장하게 됩니다. 생명의 성장에는 ‘번식’과 ‘열매’가 있습니다. 생명의 성장은 절대 멈추지 않는 법입니다. 생명은 사랑이고 빛이며 영원입니다. 곧 생명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빛 가운데 서게 되고 편안해지며 용서하고 관용합니다.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다가서게 됩니다. 자녀들에 대한 희생 정신이 생깁니다. 샘솟는 기쁨이 자기 안에 움트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라는 말은 명사입니다. 덧붙여 예수님께서 스스로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생명의 떡과 비교되는 것이 구약에서 먹었던 ‘만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은 죽었지만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49절에서 51절까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고서도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겐 ‘죽음’의 개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고 죽어도 사는 것이 됩니다. 그게 생명의 특징입니다. 죽는 순간에도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을 닿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 드는 것과 상관없이 성도들의 얼굴에 생명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참된 양식과 음료 사람이 숨을 쉰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것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시체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죽어도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입에선 생명의 말이 나오고 감사와 찬양이 넘쳐납니다. 이것이 곧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재미있게 ‘생명의 떡’으로 표현했습니다. ‘떡’의 기능은 보고 감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떡’은 떼어서 먹는 것입니다. ‘떡’이라는 말은 ‘먹는다’는 말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렇듯이 신앙은 느끼고 감상하는 게 아닙니다. 보고 즐기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평생 교회에 다니면서 구경만 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가대가 노래를 얼마나 잘 하는지 봅니다. 목사가 얼마나 설교를 잘 하는지 살핍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왔는지, 헌금을 얼마나 하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그렇게 구경만 하면 10년을 왔다갔다해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떡’을 먹어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객관적 대상이 아니십니다. 지식의 대상도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는 영원하신 주님이 되십니다. 52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식인종의 관점’에서 이해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영적인 것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육은 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성으로 영적인 것을 해석하려면 식인종밖에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식인종 종교’로 만들어 버리는 꼴이 됩니다. 계속해 53~ 55절까지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감상하고 따지며 연구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나를 먹고 마셔라. 그러면 주리고 목마른 네 인생은 풍성해지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내가 녹아져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6, 57절 말씀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먹으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먹어야 삽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개념이 성만찬식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고 피를 흘려서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준 것입니다.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는 말씀은 단지 관념이 아니라 역사의 경험입니다. 오늘 성만찬을 통해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늙어간다는 것에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병든 것도 실패한 것도 상관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생명이 들어오면 모두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십시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를 위해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전달되게 하시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0년의 은총/ 롬11:33-롬12:1/ 한경직 목사/ 2014-08-25
10년의 은총 롬11:33-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예배니라』(롬 十二․一) 一九四五년 十二월 二일에 약 二十명의 신앙 동지가 베다니 전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당시 일본사람이 남기고 간 천리교당 한 모퉁이에서 예배한 것이 어제인 듯 한데 어르듯 十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걸어온 자취를 잠깐 회고할 때에 실로 문자 그대로 감개무량합니다. 이 十년 간 우리 민족은 혼란한 비극적인 시대를 지내왔습니다. 三八의 마선(魔線)은 그냥 있고 참혹한 六․二五 사변의 가지 가지 처참하고 가련한 체험을 우리가 다같이 겪어 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본 교회를 세워 주시고 길러 주시고 지금까지 지켜주셔서 오늘 우리가 十주년 기념일을 당할 때에 오직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자기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모든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읽은 로마 十一장 三十三절 이하의 말씀과 같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 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런고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 예배니라』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창립 당시에 三八전이 이렇게 오래 계속될 것을 예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피난민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몰려올 줄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를 시작할 때에 이 자리에 성전을 지을 계획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 교회를 지을 필요가 생길 때 처음에는 간단히 천막 교회로 시작하려던 것이 점점 돌 천막 성전으로 변하여져서 그것이 오늘날 이와 같은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하신 일 뿐입니다. 우리는 六․二五사변으로 두 번째 눈물로 이 서울을 후퇴할 때 사실 그때까지 이 예배당이 보존되기를 기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예배당을 없이하려고 불을 놓고 달아났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이 교회를 보존해 주셨습니다. 피난 당시에도 대구나 부산 제주도에 새로운 영락교회가 서게 된 것도 우리의 특별한 경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十주년 기념 주일을 당해서 우리는 먼저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바입니다. 긍휼과 자비심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저 포악한 공산당에게 집 잃고 재산을 일고 가족은 사상되어서 허둥지둥 三八선을 넘어온 피난민을 불쌍히 여기서서 광야에 반석같이 이 교회를 세우시고 눈물 골짜기에 샘물이 되게 하신 것뿐입니다. 할 수 없는 피난민들이 이 베다니 뜰에 와서 잃었던 가족 혹은 친구를 만나게 되어 같이 울고 웃으며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를 의지하고 다시 예배하게 된 것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를 민망히 여기시는 주님은 그들을 위로하셨고 그들을 격려하셨고 새로운 소망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시편의 말씀대로 저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모든 영광과 존귀(尊貴)와 감사를 우리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너희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오늘 창립 十주년 기념일을 당해서 고요히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가 밟고 다니는 이 베다니 뜰은 퍽 거룩한 땅입니다. 이 곳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이 곳에 하나님께서 일하셨고 지금도 일하시는 까닭입니다. 성신께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셔서 역사 하십니다. 베다니 뜰은 거룩한 땅입니다. 왜? 아마 제 생각에 한국 어느 곳보다도 이 베다니 뜰이야말로 북한에서 넘어온 성도들이 가장 많아 눈물 흘리고 가장 많이 땀 흘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의 기도, 땀의 봉사와 터가 곧 이 베다니 터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곳이 거룩한 땅인 것은 이곳이야말로 순교자의 거룩한 피가 이 땅을 적시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김응락 장로님께서 바로 이 예배당 문 밖에서 자기의 신앙을 위하여 뜨거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아! 베다니 뜰에 들고 나는 무리들이여 무심히 이 뜰을 밟지 마십시오. 내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十년간이나 꾸준히 축복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무엇으로 갚으려 하십니까? 옛날 시인의 말과 같이『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 고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라고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 영락의 성도들이여 十년의 은총을 무엇으로 보답하여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이 이미 몸을 하나님께 드린 줄 압니다. 이미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온전히 변화해서 새로운 몸이 되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번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리빙스토이 죽기 며칠 전에 남긴 일기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오! 내 하나님이여 나는 오늘 아침 새롭게 또 온전히 내 몸을 주님께 다시 드립니다.』 오늘 우리 영락교회의 교우들은 이 十주년 기념 주일 아침 새롭게 온전히 그 몸을 다시 드리는 이 거룩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 여기 앉은 여러분의 대부분의 이름이 우리 교회 머리 돌 속에 들어간 줄 압니다. 기념할 만한 이 날 아침에 우리의 이름이 감추어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충정을 맹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남자 교우들은 피로써 이 교회를 지키고 피로써 이 교회를 위해 최후까지 일하시다가 순교하신 김응락 장로님의 신앙을 계승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앉은 영락의 여자 교우들은 함을 열고 지극히 귀한 향유를 주님의 머리와 발에 붓고 머리털을 풀어 발을 씻은 베다니 마리아의 그 진실 된 믿음, 온전한 그 헌신을 계승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찌 몸뿐이겠습니까? 몸에 있는 모든 것을 드리십시다. 우리의 자녀도 재산도 드리십시다. 자식도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요 재산도 여호와의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十주년 기념일을 당하여 우리로 하나님께서 이 영락교회에 맡기신 큰 사명을 재인식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十년 전에 우리 교회를 이 수도 서울 중앙에 세워주신 것은 그의 크신 목적이 있는 줄 압니다 나무를 十년이나 기른 것은 그 열매를 얻기 위한 목적이 있는 줄 압니다. 그 사명을 간단히 말하면 세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의 등대를 삼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 영락교회로 하여금 진리의 밝은 등대를 삼고자 하는 목적이 계신 줄 압니다. 오늘날처럼 교계가 사상적으로 또 질서 적으로 혼돈한 때는 별로이 없는 줄 압니다. 이성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경향이 너무 많습니다. 도처에 일어나는 교회의 분규와 분열 사이비 종파의 발생과 이단 사설의 횡행 이런 가운데서 길 잃고 방황하는 양의 무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압살롬을 잘못 따르던 무리가 마지막에 어떻게 된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황국주를 따르던 무리의 말로가 어떻게 된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이러한 때에 진리의 등대를 밝혀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기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케 하는 것이 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十주년 기념 사업으로 기도원을 설립하는 뜻의 일단이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복음 전파와 민족 교회의 사명입니다. 무엇이 귀하다 하지마는 제일 귀한 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영혼입니다. 이 영혼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밖에 다른 데서 얻을 데가 없습니다 현대 한국에 필요한 양이 많게T지마는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약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썩어져 가는 양심을 고치는 약이 있어야 우리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토대가 튼튼해야 튼튼히 설 것입니다. 우리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온 민족을 주님께 인도할 때가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려야 되겠습니다. 지금 二十여 곳에 전도자를 보낸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크고 중하다고 하는 것을 十주년 기념식을 당해서 재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줄 압니다. 셋째는 사회와 국가에 처한 봉사와 사명인 줄 압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봉사와 희생이 따릅니다. 지금 본 교회에서 보린 원, 경로원, 모자원 성경구락부 고등 공민학교 등 이런 것으로만 우리가 만족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관들을 우서 완전케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의 장래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특별히 사회적으로 교육 방면에 봉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의 十주년 기념 사업 가운데 하나로서 국민학교를 건축하려고 하는 것도 여기에 일단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내 반석 위해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요 이 교회를 믿음의 반석 위에 세운 까닭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또 들으세요.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지리의 기둥과 토입니다. 이 집은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과 기초로써 영원히 이 땅 위에 남을 것입니다. 十주년의 은총을 보답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오늘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3.1절 집회메세지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하용조목사 2015-05-27 16:27:43 read : 4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랜만에 온누리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축제를 하니 너무 좋습니다. 오늘 축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 모습을 바라보면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3·1절을 맞아 우리 교회가 먼저 회개하고 반성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3.1절 집회메세지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하용조목사 2015-05-27 16:27:43 read : 4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랜만에 온누리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축제를 하니 너무 좋습니다. 오늘 축제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 모습을 바라보면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3·1절을 맞아 우리 교회가 먼저 회개하고 반성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 사회를 위해 피흘린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깊이 반성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3·1절인 오늘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온누리 전 성도가 한 자리에 모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축제를 벌이고, 찬양을 합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세상이 변하기 원하는 간절한 소망과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하지 않은 새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큰 일을 계획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일을 선포하고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42장 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은 새로운 계획과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처럼 흥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사야 43장 19, 2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메마른 땅에 장미꽃을 피우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교회에 이 놀라운 기적과 능력이 있는데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만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삽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실 뿐만 아니라 큰 일을 준비하십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은 새 일을 꿈꿉니다. 그 일은 내가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역사상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일을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을 통해, 피로 사신 교회를 통해 그 일을 이루길 원하십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 14:12). 저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 말씀이 제일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 말씀은 들을수록 힘이 솟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옷 입으면, 우리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됩니다. 성경에는 이런 뜻을 가진 말씀이 많습니다. 성경의 일관된 주장은 ‘당신의 과거가 어둡고, 추하고, 비참하고, 절망적이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새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 시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할렐루야. 이 귀한 말씀을 주위 분들에게 전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새 사람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 세상을 만들고,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룹니다. 과거가 단절되지 않은 사람은 미래로 갈 수 없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당신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사람이다.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사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분은 길, 진리, 생명, 빛,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민족은 기적을 체험합니다. 역사가 변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저는 온누리성도가 이 말씀에 기초해 세상에 나가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세 가지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계획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선교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한 가지 계획이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온 인류가 한 가족이 되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제가 강조하고 싶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미움, 저주, 절망, 전쟁, 폭력을 내쫓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성경은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줍니다. ‘너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린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3·1절을 맞이했습니다. 이 날은 민족과 양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억압과 압제와 불의에 항쟁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강대국의 힘을 빌어 우리에게 해방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렇게 받은 선물을 우리는 잘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해방 후에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휘말려 골육상쟁을 치러야 했고, 심각한 가난을 경험했습니다. 군사정권과 정치적 어려움으로 온 국민이 수 십년 동안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영광스러운 올림픽을 개최했지만, IMF의 처절하고 기막힌 경험을 했습니다. 최근의 국내 상황은 어떻습니까? 도덕이 해이해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교육이 몰락하고, 정치가 불안하고, 청소년은 끝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남북은 아직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회는 고속 성장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품이었습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교회, 부패한 사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통해 새 일을 하기 원한다. 온누리교회를 통해 한국사회에 나의 놀라운 꿈과 계시를 이루기 원한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께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들이 함께 기도하고, 회개하면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 영역의 변화를 선포합니다. 먼저 우리의 가정이 변하길 원합니다. 남편, 아내, 자녀, 가족이 변하기를 원합니다. 가정이 변하면 이 세상이 변할 것입니다. 깨끗한 사회가 되고 건강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 사랑으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먼저 교회가 겸허히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고통, 죄, 아픔을 교회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회의 성장에만 매달려 있지 말고, 기도, 헌신, 헌금, 은사, 정열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 굶주리는 어린이들, 절망하는 이웃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소망을 주고 그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몽둥이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몽둥이는 때릴 때 쓰는 것이지 청소할 때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모든 사람이 정의의 칼, 몽둥이를 들고 청소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청소를 하려면 빗자루를 들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깨끗해집니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 친일파 명단을 작성해서 공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명단을 공개한다고 세상이 변하겠습니까? 서로 비판하고 공격하고 저주한다고 해서 나라가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남을 고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방법으로는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남을 비판하는 일을 중지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냄새 나는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나 자신, 우리 가족, 우리 공동체부터 앞장 서야 합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투쟁하고 싸워도 역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 용서, 복음으로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누군가 피를 흘려야 합니다. 죽어야합니다.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절제하고, 희생하고, 고통을 나눠야 합니다. 세상을 훈계하고 야단칠 자격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가능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모임과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말씀과 성령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이 일을 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 큰 일을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 오늘은 새 날입니다. 복된 날입니다. 온누리교회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세상이 변한다고 믿으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면 세상은 변합니다. 우리는 운명의 사람이 아니라 섭리의 사람, 축복의 사람입니다. 말씀, 비전을 가지고 세상과 일터를 향해 나가면 세상은 조용히 변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잠실로 오면서 태극기를 단 차들을 보며 너무 기뻤습니다. 도로에 많은 차가 있었지만 온누리교회 성도의 차만 태극기를 달고 있었습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이면 물결이 되고 바다가 됩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의 기도가 모이면 물결을 이루고, 바다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전과 꿈을 키울 때입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작게 생각하면 작은 것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큼 생각하면 하나님만큼 일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한국은 변할 것입니다. 통일은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청소년도 변할 것입니다. 학교가 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누리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행복하고 활기가 생길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 깨끗한 사회, 건강한 세상을 세우기 위한 행동강령인 10계명을 선포하며 기도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천해 나갈 때 이 세상은 예수님이 원하는 놀라운 세상으로 변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온누리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믿음이 생기길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넘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장애물도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 능력으로 못할 일도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갈 때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 마음에 뜨거운 성령의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온누리교회가 주님 말씀처럼 ‘빛과 소금’이 될 때 이 세상은 변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들은 이 세상 변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으로 모였습니다. 음성을 들려주옵소서 가정과 세상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환상 갖게 하옵소서. 교회가 먼저 사랑하는 법을 깨닫게 하시고, 용서하는 법을 깨닫게 하시고, 작은 일부터 희생하고 헌신하게 하옵소서. 실천하게 도우시고 앞장서도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1절/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시144:9-15/ 홍문수 목사 2019-04-10 01:24:24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는 3월 1일은 3.1 운동 100주년 기념일입니다. 이에 앞서 오늘 전국교회가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일제 강점은 우리나라 5천 년 역사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사건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었고 이만큼 발전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3.1 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열
3.1절/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시144:9-15/ 홍문수 목사 2019-04-10 01:24:24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는 3월 1일은 3.1 운동 100주년 기념일입니다. 이에 앞서 오늘 전국교회가 기념예배로 드립니다. 일제 강점은 우리나라 5천 년 역사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사건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었고 이만큼 발전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3.1 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열들이 있었고 가슴속에 독립의 열망을 품었던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 모든 과정에 그리스도인들의 선도적인 역할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그렇고 역사 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애국애족의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저와 여러분도 동일한 신앙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아직도 우리 앞에는 남북 분단의 아픈 현실이 존재하고 우리나라의 미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열강이 존재합니다. 그런 가운데 모든 국민이 정신을 차리고 미래를 개척해 나아가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큽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애국애족의 신앙에 관해 상고해보려고 합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애국애족의 신앙으로 무장함으로 개인도 나라도 잘 되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먼저 기독교신앙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를 지향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1인칭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 그런데 주기도문은 1인칭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 그러므로 우리 각자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기도해야 되지만 동시에 가족이나 친지는 물론이고 민족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민족을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민족을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건강한 민족사랑은 건강한 민족주의로 이를 가리켜 ‘국민주의’(nationalism)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다른 민족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인종주의(racialism) 혹은 쇼비니즘(chauvinism)과 다릅니다. 인종주의나 쇼비니즘 같은 편협한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이었습니다. 자신도 망하고 남도 망하는 하는 사악한 사상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민족과 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 만민과 만국의 하나님이십니다. 시22:18에서 다윗이 증거합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의 주인이시고 실제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구주로 오신 것은 특정한 민족을 위해서 오신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이 점을 착오해서 역사의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 ‘세상’은 모든 인간을 가리킵니다. 본인이 거부하면 하는 수 없지만 만민 가운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과 구주가 되심을 믿으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애국애족은 열린 것이어야 합니다. 인류를 품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인데 세계주의(cosmopolitanism)와는 전혀 다릅니다. 세계주의는 국가를 인정하지 않고 온 인류가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장차 천국에 가서야 가능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국가와 민족의 구분을 인정하되 온 인류가 서로 사랑하며 섬길 것을 명령합니다. 본문은 다윗 왕의 기도시입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백성을 대표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 내용을 시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은 삼하10:1~19입니다. 거기 보면 이스라엘과 암몬의 전쟁이 나옵니다. 바로 그 전쟁에 출전하기 직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겁니다. 그는 먼저 과거에 하나님이 전쟁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건져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144:9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144:10절에서는 그 하나님 앞에 다시 한 번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그의 종 다윗을 그 해하려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시니이다”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신데 다윗에게 승리를 주심을 확신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그 확신 가운데 간절히 기도합니다. 시144:11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암몬이 평소에 이스라엘과 화친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속임수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그 악한 암몬과 전쟁을 벌이니 꼭 도와주십사 하는 기도입니다. 그 결과 감사하게도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둡니다. 오늘 우리도 다윗이 처한 현실과 비슷한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전쟁의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중대한 시국에 처해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 북미정상회담이 베트남에서 열릴 예정이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만 몇 번의 회담으로 모든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인 난맥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다윗이 행한 대로 따라하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1] 역사의 회고와 감사 : 고난의 역사 가운데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 다윗은 무엇보다 먼저 지금까지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 찬양했는데 우리도 그래야 마땅합니다. 지나온 역사를 회고해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모릅니다. 일제 감정에서 해방시켜 주신 후 남북 분단과 6.25 전쟁, 그 후에 숱한 소용돌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만큼 복된 나라를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대한민국은 짧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복음화의 기적, 산업화의 기적, 민주화의 기적 등입니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기독교회의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경제 규모가 세계 12위권이 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독립국 가운데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가 됐습니다. 전 국민이 열심히 살아온 결과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모든 국민이 그 은혜를 기억하면 좋겠지만 최소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도 그 은혜를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가 출애굽 후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거듭 당부했던 말씀이 바로 이겁니다. 신8:12~14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 잘 먹고 잘 살게 될 때 혹시 교만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큰일 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이나 가정은 물론이고 나라와 민족의 차원에서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를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미래의 소망 : 평화로운 나라, 풍요로운 나라, 부강한 나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다윗은 12절~14절에서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기도합니다. 당장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이런 모습을 꿈꿀 수 있었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굳게 믿었다는 반증입니다. 반드시 승전할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해 주심으로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가 꿈꾼 미래는 평화로운 나라, 풍요로운 나라, 그리고 부강한 나라입니다. 시144:12를 보면 이러게 노래합니다.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자자손손 번성할 것을 말합니다. 시144:13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경제적인 번영을 말합니다. 시144:14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수소는 튼실해서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물산이 풍부하다는 의미입니다. 외세의 침략도 받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 싸울 일이나 슬피 우는 일도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말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도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로 있는데, 종전을 하고 평화협정도 맺고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북미정상회담이 베트남에서 열리게 되는데 우리 정부가 중간 역할을 잘 한다고 말은 하지만 어느 정도일지 솔직히 의구심이 생깁니다. 우리의 문제임에도 주도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어차피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닙니다.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기대해 봅니다. 지금 경제적으로도 너무 어렵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 보면 좋다고 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열심히 살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어려운 고비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 공산권 나라들과 수교하고 무역의 길을 뚫은 일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렇게 적대시하던 과거의 관점에서 보면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셨기에 가능했던 게 아닙니까? 앞으로도 남북이 평화를 구축하고 경제협력으로 공동 번영을 이루지 말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충분히 시간을 두어야 하겠지만 적당할 시기에 평화 통일을 이루어 진정한 선진국이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얼마 전에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Jim Rogers, 1942~ )가 이런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자신이 일본을 좋아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미래는 암울해서 50년 내지 10년 후에는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한국의 미래는 희망적이라고 했습니다. 통일이 되면 일본은 통일한국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남한의 지식과 자본, 그리고 북한의 인력과 자원이 결합되면 굉장한 시너지를 낼 것이고, 자신은 북한이 개방될 경우 전 재산을 투자할 수도 있고 두 딸과 함께 한국에 와서 살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그는 다음 달 방북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기분 좋은 전망이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3]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 신앙의 부흥과 전수, 기도, 복음의 사명 우리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미래의 축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자세가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교만하면 안 됩니다. 모세가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신8:19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이스라엘은 이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다가 멸망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고 겸손해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교만해진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탄식하며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다고 야단할 게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개인도 나라도 그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망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흥합니다. 이게 공식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신앙의 부흥을 이루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쇠락해 가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다음 세대를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이런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역사상 최초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해지는 시대가 될 수도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정말 젊은이들이 어려운 시대입니다. 정치하는 분들도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되지만, 우리 각자도 자손들의 신앙을 잘 세워줘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 시키겠다는 욕심에 신앙을 소홀히 하거나 포기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에서 성공보다 중요한 게 신앙입니다. 우리 세대, 그리고 다음 세대까지 계속 번성하기를 기대하며 시128:4~6 떠올려봅니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그리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신문을 펼치면 화만 나는 시국입니다. 그렇다고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더욱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래도 기도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3.1 운동의 경우도 사실은 기도 가운데 이뤄진 것입니다. 독립선언문 서명자 33인 중 16명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결단했을 겁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학생으로 만16세에 불과한 소녀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고향에 내려가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은 주도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속에 신앙이 있었고 기도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만세운동을 앞두고 너무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매봉산에 올라가 몇날 며칠을 철야 기도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결행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계속 복된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되 그 목적을 중시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복을 나눌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웃과 만민을 복되게 해야 합니다. 이런 사명은 우리나라의 건국이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humanitarianism)인데, 무슨 뜻입니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세계복음화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동일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한국교회가 줄기차게 이뤄가야 할 3대 비전이 있습니다. 성서한국(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된 한국 사회 구현), 통일한국(남북의 평화통일), 그리고 선교한국(마지막 시대에 세계복음화에 앞장서는 한국)입니다.
3애(愛) 신앙 /마22:34-40/ 홍문수 목사 2019-04-10 01:21:01 read : 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 대표적인 한 가지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랑’이란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좋은 단어가 오늘날 애매모호한 단어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래 고상하고 아름다운 단어였는데 타락한 인간들이 오용하고 남용하다 보
3애(愛) 신앙 /마22:34-40/ 홍문수 목사 2019-04-10 01:21:01 read : 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 대표적인 한 가지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랑’이란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좋은 단어가 오늘날 애매모호한 단어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래 고상하고 아름다운 단어였는데 타락한 인간들이 오용하고 남용하다 보니까 때로는 때때로 천박한 말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다 보니까 ‘사랑’이란 단어까지 덩달아 타락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그 좋은 사랑을 정말 누리기 원한다면 사랑의 참 의미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사랑받고 또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사랑은 비유컨대 산소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사랑이 없으면 질식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부인의 간증입니다. 남편이 보증을 잘못 서서 집과 자동차를 날렸습니다. 졸지에 셋방 신세가 됐습니다. 남편의 월급은 차압되고 본인은 살림에 보태려고 가사도우미로 나섰습니다. 여려 해에 걸쳐 천신만고한 끝에 빚을 갚고 전셋집으로 이사 가게 됐습니다. 짐을 정리하다가 봉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나 보니까 남편의 유언장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물어보니까 그 어렵던 시절 자살하려고 쓴 건데 잊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매일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서 죽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부인이 멀리서 손을 흔들면서 “여보~”하고 부르더라는 겁니다. 깜짝 놀라 아무 일도 아닌 척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겁니다. 그 당시 부인은 남편이 너무 미웠지만 “그래도 신앙이 있는 내가 참고 이겨야지”하고 마음을 먹고 나니까 남편의 모습이 하도 불쌍해 보여서 그렇게 불러주었습니다. 그 후로 남편은 부인의 사랑으로 용기를 얻었고 재기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사랑에 관해 증거합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사랑 장)을 보면 사랑에 관해 언급하면서 맨 마지막 결론으로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런 까닭에 바울은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 하는 척해도 만일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게 헛것임을 증거합니다. 고전13:2,3 “2 …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NIV-I am nothing.) 3 …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NIV-I gain nothing)”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 신앙은 헛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랑에 관해 잘 정리해 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에 관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유대인들 중에 따르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적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등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골탕 먹이려고 이런 저런 곤란한 질문들을 던졌지만 번번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 율법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합니다. 율법 중에 어느 게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규정을 618개 조항으로 정해 놓고 그 중에 어떤 것은 더 중요한 것으로, 또 어떤 것은 덜 중요한 것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견해가 서로 달라서 늘 티격태격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 유권 해석을 요청한 것입니다. 정말 알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그랬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러이런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면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이 반박하고 나서서 예수님이 곤경에 빠질 것으로 계산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꼼짝 못하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간단하면서도 정확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본문 37절~40절입니다. 마22:37~40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두 가지가 온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이를 가리켜 ‘위대한 계명’(The Great Commandment)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잘 보면 둘이 아니라 셋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너의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그냥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네이웃을네 자신 같이사랑하라” ‘너’ 즉 ‘나 자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웃도 사랑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는 두 가지가 아니라 사실은 세 가지 사랑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이렇게 불러봅니다. 3애(三愛)! 트리플 러브(triple love)! 이렇게 말씀드리면 혹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당연한 게 아닙니까?” 혹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건 이기적인 게 아닙니까?”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누구입니까? 나 자신입니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사랑부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웃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자기 사랑 : 타락한 자기 사랑 vs. 건강한 자기 사랑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자기 사랑을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왜곡된 자기 사랑입니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불구자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자기 사랑’인 셈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게 되면 새사람이 되어서 ‘건강한 자기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사랑의 불구자가 됐습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랑하지 못합니다. 타락한 자기 사랑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 숭배, 그리고 자기 학대입니다. 자기 숭배는 다른 말로 하면 이기심입니다. 자기 자신을 최고로 칩니다. 늘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이익만 추구합니다. 그러면 잘 될 줄 알지만 나중에 가서 보면 자기도 손해보고 망하게 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작은 연못에 두 물고기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물고기가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 연못에 나 혼자 살면 먹이도 풍부하고 자유롭겠지? 그 생각이 간절해져서 다른 물고기를 물어 죽였습니다. 며칠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점차 연못은 고기 썩는 냄새로 오염되어 악취가 진동합니다. 결국 욕심을 부린 물고기도 썩은 물을 먹고 병들어 죽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기 숭배 혹은 이기심은 자살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무지하게 끊임없이 이기심을 추구합니다. 그렇게 사다 보면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이 혼란하고 어지러운 것입니다. 또 하나의 타락한 자기 사랑은 자기 학대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면 정반대로 자기 학대에 빠집니다. 여러 해 전에 신문에 났던 미담 기사입니다. 소년법정에서 16세 소녀가 재판을 받았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오토바이를 훔친 죄로 기소됐습니다. 그 전에 14번의 절도와 폭행을 저질러서 이번에는 무거운 법정형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성 부장판사가 판결 대신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대로 따라 하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있다.” 소녀가 머뭇거리자 계속 요구합니다. 결국 큰 소리로 소녀는 판사가 말하는 대로 따라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소녀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홀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면서 공부도 잘하고 발랄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귀가 도중 남학생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했습니다. 소녀는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며 비행청소년과 어울리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가 이렇게 망가진 이유를 알면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아이의 행복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녀를 앞으로 불러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꽉 안아주고 싶지만 법대가 가로막혀 있어 이 정도밖에 할 수 없구나. 미안하다.” 그 판사는 소녀의 죄는 다름 아닌 험악한 세상에서 자존감이 상실된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자기를 사랑하고 싶지만 세상을 살며 상처를 받다보면 망가진 자신의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자기 학대에 빠집니다. 그러면 인생이 비참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말처럼 건강한 자기 이미지를 갖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거울 앞에 서야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잘 안 보이니까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자기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재정립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모습을 세 가지 면으로 증거합니다. 창조된 인간, 타락한 인간, 그리고 구속된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하게 창조했는지 이렇게 증거합니다. 창1:27~28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 ”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축복하셔서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했습니다. 영원한 사망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구속하시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cf. 롬8:29, 골3:10)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 영생을 얻은 새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 하나님을 거역할 때, 범죄하고 있을 때, …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신 그 사랑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주였으므로 나머지 모든 것도 얼마든지 주십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예수님을 맏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심지어 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49:15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모성애를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수많은 인간들 중 한 사람이 불과한데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기억하겠어? 어떤 사업가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요즘 사업 잘 되세요?” 그러자 이렇게 대단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바쁘신지, 아니면 나를 잊으셨는지 좋은 소식이 없네요.” 물론 그분의 말은 농담이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지구 상에 있는 70억 인구 중 한 명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시고 1대 1로 사랑해 주십니다. 인간은 사랑이 나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 나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대신학자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이 세상에 나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이와 같이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면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고 ‘자기 긍정’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건강하게 자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자존감을 회복하니까 당연히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사랑의 에너지가 생깁니다. 그 에너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2] 하나님 사랑 :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응답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 사랑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응답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후5:14 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NIV-For Christ’s love compels us) … ” 강권한다는 말은 강력하게 이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랑에 감동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하나님 앞에 아까운 게 없어집니다. 그래서 물질도 시간도 내증도 하나님을 위해 비칠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가 처음에는 이기적적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이기적인 목적으로 따랐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게 되니까 손해 볼까봐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하나님의 아들 구주임을 깨닫고 그분 앞에 자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인임을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사람이 됨을! 그때 비로소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요21:15~23을 보면 베드로의 사랑 고백이 나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특별히 베드로를 지목해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베드로를 너무 죄송하고 울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 물으신 이유가 있죠. 세 번 배반했지만 그래도 용서하고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그 사랑에 감동한 베드로를 네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복음을 전파하다 붙잡혔을 때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응답한 베드로의 주님 사랑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경험했다면 순교는 아니라도 주님 위해 내 인생의 귀한 것들로 주님을 섬기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충성하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각자의 자라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주님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이웃 사랑 : 하나님 사랑을 삶에 체현 하나님 사랑은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이웃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십자가 형상이 그런 원리를 암시합니다. 주식선과 주평선이 교차되는 게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이 십자가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삶 속에서 체현되는 결과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일4:19~20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 사랑을 제자라면 당연히 이웃 사랑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명화 <최후의 만찬(1495~1497)>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일화입니다. 하루는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자신의 동료와 심한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운 마음에 가룟 유다의 자리에 그의 얼굴을 그려넣었습니다. 공개 망신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미움 때문인 줄 깨달은 그는 그 얼굴 그림을 즉시 지웁니다. 그ㅓ자 예수님 얼굴이 떠올라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렇게 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게 우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창조됐고 또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주님의 사랑만 있으면 얼마든지 승리의 인생을 상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가까운 이웃부터 멀게는 인류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흑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랠프 존슨 번치(Ralph Johnson Bunche, 1903~1971)입니다. 그는 하버드대 출신 정치학자요 외교관으로 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고 유엔 활동에 공헌한 분입니다. 그가 12세 되던 해 부모님이 연달아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운명하면서 이렇게 유언했다고 합니다. “얘야, 너무 가난해 너에게 물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지만 앞으로 어떤 시련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거라. 하나님이 늘 함께해 주신다다.” 외할머니는 그를 믿음과 사랑으로 양육 … 그는 하나님 사랑을 알았기에 자기 사랑,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결국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인생이 불행해지고 사랑이 없어서 세상이 어지러운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 앞에서 ‘3애 신앙’, 즉 자기 사랑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는 신앙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이 행복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4대 은혜/ 느9:1-10/ 한경직 목사/ 1959-04-19
4대 은혜 느9:1-10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느 九·五) 주일 저녁은 흔히 구약을 중심해서 생각하였지마는 오늘 저녁은 구약의 인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경회 예배로 볼 마음이 있어서 다른 제목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역시 오늘 낮 예배시간에도 읽은 바 있는 느헤미야 가 운데서 읽었습니다,. 낮에도 생각하였지마는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적으로 또한 종교적으로 부 흥하는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사를 상고해 보면, 이 중요한 역사 적 단계에 있어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부흥이 없었던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으 로서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 있어서 이들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에 서 일어나 종교적 부흥은 심히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읽은 말씀을 여러분께서 들었습니다. 이 때에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큰 부흥의 축복을 받았는가? 먼저 그 때 사람들이 한 것은 네 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먼저 부흥의 축복을 받은 네 가지 요소 를 생각하고 또한 나아가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개인적으로 받아야 할 네 가지 은혜를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 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이와 같이 시작합니다.『그 들 二十四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이런 말로 시작하였 습니다. 이 달은 아마 七월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七월 二十四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였다고 기록하였습니 다. 다 모인 것입니다. 먼저 이 때 사람들이 영 적의 큰 부흥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개인 하나씩 흩어져 산 것이 아니고 다 한 곳에 모였습니다. 먼저 모이는 가운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물론 개인 개인의 기도와 성경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일정한 기회에 다 같 이 모이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오순절의 큰 축복도 먼저 一二十명인 당시에 예수의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열흘 동안이나 집회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오순절 아침에 큰 성신의 세례가 내린 것입니다. 사실 이 오순절 집회 이후에 교회의 부흥의 역사를 상고해 보면, 어떤 부흥이든지 먼저 모이기를 힘쓰고 이 모임 가운데서 집단적으 로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저자의 말과 같이 우리가 모이기를 경히 여기지 아니 하고 더욱 힘써 모이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또한 둘째로 여기 기록한 것을 보면『낮 四분지 一은 그 처소에서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낭독하고』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낮 四분지 一을 특별히 정해서 이 시간은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奉讀)하 고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봉독할 뿐더러 다른 곳에 보면 해석도 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 의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큰 영적 부흥의 축복의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고 생각 하고 공부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인들의 실정을 보면 이 성경에 대해 무식해서 큰 걱정입니다. 학습 문답이나 세례 문답을 해 보면 아주 쉬운 말,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알만한 이런 것을 물을지라도 대답하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특별히 자 라나는 학생들인 중학교에 다니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혹은 대학에 다니고 대학을 졸업하였다고 하지마는 다른 학문 들은 아마 상당히 배운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문제를 물어 볼지라도 대답하는 사 람이 매우 적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우리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을 게을리 하는 까닭 입니다. 단순히 한 주일, 주일학교에 와서 잠깐 예배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듣는 시간은 二十분에 불과합니다. 그 렇게만 아이들이 배워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복 있는 자는 악한 자의 의논대로 하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 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묵상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 부하는 중에 부흥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여기 말씀을 보면『낮 四분지 一은 죄를 자복(自服)하면서』하나님께 경배하는데, 또한 다른 곳 을 보면 금식하며 굵은 배를 입고 티 끝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烈祖)의 허 물을 자복했다고 그 때 모였던 모양을 서술한 것입니다. 셋째 요소는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듣게 되면, 먼저 내가 죄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전에 잊어버렸 던 죄악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물론 두었던 죄악이 마음 가운데 생각납니다. 이 때 사람들이 한 것은 모든 죄를 원통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철저히 회개를 한 것은 금식을 하였고 굵은 배로써 옷을 입고 티 끝을 머리에 부었고 이방사람과 절교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과 온전히 관계를 끊고 자기의 죄뿐만 아니고 자기 열조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셋째 요소입니다. 다 우리도 이번 사경(査經)회를 당하여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우선 모여야 되겠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여야 되겠고 또한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자복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여야 은혜를 받겠습니다. 아는 죄, 모르는 죄, 현재의 죄, 과거의 죄, 덮어두었던 죄를 이번 기회에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즉 찬송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눈물로 죄를 회개할뿐더러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서 하나님 앞에 소리를 높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해야 합니다. 넷째로는 목소리를 합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올렸 습니다.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찬송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찬송을 통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전파합니다. 또한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 다. 우리의 심령을 순화하여 줍니다. 우리의 감정을 정화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하고 더 높은 곳으 로 이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넷째로는 이들이 찬송을 하였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상경회를 할 때에 특별히 여러분께 부탁하는 것은 열심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찬송을 배우 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저녁 예배 七시 三十부에 예배를 시작하지마는 七시에 오셔서 반시간 동안 찬송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사경회를 하는 가운데 각 개인의 받은 은혜의 목표가 분명해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네 가지 큰 은혜를 받아야 될 줄 압니다. 이번 이 사경회를 계기로 해서 우리 교우 한 사람 한사람이 네 가지 은혜를 꼭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아시는 것이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중생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저녁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그 귀중한 말씀 기억하시지 않습니 까?『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느니라.』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 에 들어 갈 수 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성신으로 거듭나지 아니하 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세상에 올 때에 나서 세상에 왔습니다. 부모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 출생함으로 이 세상에 왔습니다. 마 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도 거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 나라에 영적으로 출생하여야 들어갑니 다. 우리가 처음 한번 육으로 낳으니까 다음에는 영으로 낳아야 되는 것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거듭 난다고 하거나 혹은 중생이라고 합니다. 새로 낳는다고 합니다. 이 중생의 은혜는 내가 힘쓸 것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 시는 은혜가 있는데 이 둘이 합할 때에 중생의 은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할 것은 온전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따금 세수를 하지마는 세수만 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목욕이 필요합니다. 온 몸 전체를 온전히 씻어 버리는 목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집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방 을 쓸지마는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이따금 대청소가 필요합니다. 온전히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올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신을 부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듭 나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영적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생명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중생의 은혜를 받은 자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중생의 은혜가 아직 미치지 못한 이들도 많이 계실 줄 압니다. 이번 이 기회에 어떠한 때이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심령 위에 이 중생의 축복을 주시기를 바라 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로는 우리가 늘 듣는 말이지만 한번 더 생각해 봅시다.「헌신의 은혜」입니다.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 리는 은혜올시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재주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 님께서 많으나 적으나 물질을 주셨습니다. 내게 주신 이 몸을 중심으로 해서 내게 주신 재주, 내게 주신 이 물질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이 축복을 우리 믿는 사람들이 꼭 받아야 합니다. 이 헌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온전히 하나님 께 속하고 나는 다만 이것을 받아 가지고 있는 청지기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단순히 청지기인 까닭으로 하나님 께서 맡기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마지막 날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 였는지 못하였는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 받을 때가 있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헌신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 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기회에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각 사람에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 니다. 셋째는 이것도 물론 따르는 것이지만 제목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전도의 은혜를 우리가 받아야 되겠습니 다. 제가 관찰하지 못하는지 모르지마는 가만히 보면 어떤 이들은 일생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전도는 한 사람도 못 하고 죽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 믿으면서 다른 것은 다 하지마는 전도는 못합니다. 다른 말은 다 잘 하지마는 전도에 가서는 입이 딱 붙어서 벙어리가 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내가 참으로 구 원을 얻었다고 한다면 이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아야 되겠습니다. 오순절에 一二十명이 성신을 충만히 받은 다음에는 베드로 한 사람만이 오순절에 설교를 했지마는 다음에 기록을 보면 一二十명이 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 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야 과연 참된 하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 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 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 아마 전에 들으신 줄 압니다. 어떤 회사의 사장이 예수를 잘 믿는 분이올시다. 꼭 자기는 주일날 이면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예배당에 가서 예배보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인데 도무지 전도는 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 믿으란 말을 한 마디도 못합니다. 가지의 회사의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마는 다른 이 야기를 늘 하지마는 한 번도 예배당에 가자는 전도를 못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주일날은 예배당에 가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온 잘못한 것을 깨달아서 내가 이제 는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때 결심이 그저 누 구든지 나한테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앉았습니다. 조금 앉아 있자니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비서가 예수 를 믿는지를 알 수도 없고 또 한번도 이 비서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첫 마디로 그가 예배당에 다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 비서가 눈이 둥글 해지면서 그것을 왜 갑자기 물으시냐고 반문했습니 다.『그래, 예배당에 가는가?』『저는 예배당에 가지 않습니다.』『그럼 예배당에 가야지, 예수를 믿어야 해.』이렇 게 이 비서한테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서가 하는 말이『아 사장님 참 감사합니다. 사장님을 제가 十五년 을 모셨는데 저한테 예배당에 가자고 하는 말씀은 한 마디도 안 해서 저는 제 생각에 나 같은 놈은 아주 못 되어서 예수를 못 믿는 놈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오늘 저한테 이렇게 전도를 해 주시니 이것 얼마나 감사한지 모 르겠습니다. 제가 오는 주일부터 꼭 가겠습니다.』그런 대답을 했더랍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과 오래 사귀고 장사 거래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늘 만나고 그런 이들을 만나서 세상 정치 이야기고 하고 경제 이야기도 하고 세계 소식 이야기도 하고 모든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전도하는 말은 한 번도 안 한 그런 청년은 없습니까? 아마 여기 앉으신 여러분 친구 가운데도 이 비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친구들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예배당에 항상 가기를 하는데 자기한테 한 번도 교회에 가자는 말 한 마디 안 하니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의 친구가 있을 지 모릅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우리가 받아 야 됩니다. 내가 전도할 수 있는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먼저 내 성품 가운데, 내 생활 가운데 고칠 것 이 더러 있을 줄 압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왜 그 말을 못했나 생각해보면 내 마음 가운데 꺼리는 것이 있어서 말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아야겠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 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올시다. 여러분, 이번 기회에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전도할 수 있는 은혜까지 받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넷째로는 마지막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끼리 화평할 줄 아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화평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전도까지 하는 사람들로 화평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 리가 이따금 봅니다. 우리 믿는 사람끼리 피차에 죄를 용서해 주고 용납해 주고 피차에 잘못을 알려 주고, 이해해 주어서 혹 어떤 때에 피차에 감정이 소원해 진다고 하지만, 그것을 피차에 삼가서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끼리 화평 해서 살 줄 아는 은혜를 우리가 꼭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저 예수를 믿는 이 가운데도 어떤 때는 예배당에 오다가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그 사람과 만나 기를 꺼리면 그가 오는 편과 반대편 문으로 예배당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말도 오래 안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떻든지 피차에 화목해서 화평한 은혜까지 받아 야 되겠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여러분이 기억하시지요?『너희가 예물을 제단에 올리려갔다가 네 마음 가운데 네 아는 사람 가운데 원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예물을 거기에 놓고 먼저 가서 그 사람과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 리라.』우리가 알 것은 형제 사이에 멀어지면 그리스도와도 멀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가까이 가면 형제 사 이도 서로 가까워집니다. 어떻든지 우리 믿는 사람은 서로 화평하고 화목할 줄 알아야만 됩니다.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이북에 잡혀갔다 돌아와서 말씀하시던 구세군 로드 부장의 이야기 가운데 자기가 이 경험을 통해서 특별히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비록 신조가 다르고 교파가 다르지마는 믿는 사람들이 다 한 주를 섬기고 한 하 나님을 섬기며 우리가 피차 도와주고 피차에 사랑하여야 되겠다 하는 것을 더욱 깨달았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번에 잡혀가 보니까 거기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이 다 잡혀 가 있었습니다. 혹 그 가운데는 천주교 신부, 성공 회 감독, 감리교 선교사, 그밖에 여러 교파 선교사들이 다 한꺼번에 잡혀갔습니다. 다 한 방에 있고 함께 먹습니다. 흔히 말하면 천주고 신부와 성공회 강독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신교 교파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부들과 그렇 게 사이가 가까울 이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같이 고생하고 같이 눈물 흘리며 같이 고통 하는 가운데서 비록 교파가 제각기 조금씩 다르지마는 그것은 적은 문제요 그것은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고, 우리는 다 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한 주를 믿고 다 같은 천당을 향하여 간다고 하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달았답니다. 조금도 다른 것 때문에 감정상 무엇에 소격(疏隔)된 것이 없이 한 형제와 한 자매가 되어서 피차에 눈물을 같이 흘리고 어떻든지 피차에 도와주도록 서로 서두는 그런 광경을 볼 때에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 는 간증을 제가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한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에 속하는 교인들끼리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 나 한 걸음 더 나가서 감리교나 성결교나 구세군이나 다른 교파에 이르기까지도 우리가 믿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지 마는 다른 것보다도 같은 것이 더 많다고 하는 것을 항상 기억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협조하고 공동 보조를 취할 줄 아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요즘에는 성경에 있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에큐메니칼 정신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처음 듣게 되니까 이것을 오해해서 여기에 큰 이단이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혹 있 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오해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끼리 피차에 협조하고 사랑하고 공동보조를 취할 경우에 세계적 으로 무신론과 싸우는 이러한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대동단결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넷째 은혜 즉 화목의 은 혜까지 우리는 꼭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저녁에 우리가 교회 부흥의 네 가지 비결을 생각했습니다. 제일 먼저 열심히 모여야 되겠고, 둘째로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여야 되겠고, 셋째로는 전도해야 되겠고, 넷째로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야 되겠습니 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경 회를 하는 동안에 우리 개인 개인 하나 하나가 이 네 가지 은혜를 꼭 받도록 우리가 간 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다. 제일 먼저는 중생의 은혜, 둘째로 헌신의 은혜, 셋째는 전도할 수 있는 은혜, 간증의 은혜, 넷째는 형제 화목의 은혜로 오늘 저녁 우리 이 사경 회에 큰 부흥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개인 개인이 이와 같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이제 다 공동으로 한 五분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다.(一九五九)년 四월 十九일·저녁 예배)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5천만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헌신/ 사6:1-8/ 한경직 목사/ 2014-08-26
5천만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헌신 사6:1-8 이미 이 목사님께서 말씀드린 대로, 5천만복음화를 위해서는 먼저 여기에 대한 비전을 우리가 보아야 될 것입니다. 또는 여기에 대한 전략이 분명히 서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전략에 의지해서 모든 자력을 동원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서 온 교회가 일치해야 될 것을 이미 우리가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특별히 이 운동을 완수하려면 현재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5천만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헌신’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잠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이사야 6장 8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오늘 저녁에 읽은 성경의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의 소명과 헌신에 대한 기록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자기가 젊었을 때에 가졌던 영적 체험을 여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저녁, 이사야 선지자의 소명과 헌신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간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이렇게 이사야는 자기가 젊었을 때에 얻은 체험을 회고합니다. 그때에 본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을 의미함이 아닌 줄 압니다. 신령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을 현대 우리는 흔히 외국에서 온 말이지만, 비전(vision)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한 비전을 젊었을 때에 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의 역대 제왕 중에 매우 유능한 왕으로서 50여 년간 오래 다스린 왕입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말년에 한 가지 실수로 말미암아, 범죄로 말미암아 최후에는 문둥이가 되어 죽었습니다. 온 국민에게는 참 그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고, 국가적으로 또한 큰 손실이었습니다. 바로 그 해 곧 주전 740년에, 청년 이사야는 성전에 올라가서 조용히 기도하는 중에 한 큰 비전을 보았습니다. 보통 비전이 아닙니다. 여기 기록한 대로,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요한복음 12장 41절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사야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그리스도 곧 세상에 강림하시기 전, 그 영광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본체를 물론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온전히 육신을 입으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도 주님께서 나타나셨다고 요한이 설명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곧 주님은 하늘과 땅, 그 위의 모든 것보다도 더 높으시고, 시간과 공간과 모든 변천을 초월하신 하나님, 그리고 보좌에 앉으셔서 온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을 보니 성전에 가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 뜻은 그의 옷자락 곧 그의 영광과 능력은 온 성전, 곧 온 우주에 미친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스랍들이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서 그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그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그 둘로는 날았다고 하였습니다. ‘스랍’이라는 말의 근본 뜻은 ‘불탄다’는 뜻입니다. 곧 ‘빛나는 이들’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빛나는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우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리운 것은, 비록 천사들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감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곧 경외의 뜻을 의미하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 스랍들이 소리를 높여서 찬송을 부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여기에 세 번 ‘거룩하다’라는 말이 반복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가장 거룩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또한 삼위일체를 각각 찬양하는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뜻은 본래 ‘베인다’는, 곧 ‘온전히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속된 것과 온전히 성별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다고 하는 뜻은 가장 순결하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는 한 점의 흠이 없습니다. 어두운 점이 없습니다. 오직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만군의 여호와’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천군천사, 우주 만물, 모든 권세를 통할(統轄 모두 거느려 다스림) 지휘하시는 여호와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 하도다”라고 찬송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현재에도 사실이거니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도 의미하는 줄 생각합니다. 현재의 땅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곳이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장차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할 때는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의 소망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스랍들의 이러한 웅장한 찬송으로 말미암아 성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곧 이 우주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충만하며, 하나님은 또한 어디나 사실은 임재한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줄 생각합니다. 이렇게 여러분, 청년 이사야는 신령한 눈으로 지극히 높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 실로 위대한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얼른 생각하면 이러한 하나님을 뵙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러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큰 공포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라다 볼 때에 자기의 죄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큰 두려움이 곧 사망의 두려운 생각이 그의 마음에 사무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올시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자기의 입술이 부정함을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마음도 부정하고 행실도 부정한 것을 깨달았지만, 아마 육체의 어느 부분보다도 입술로써 먼저 죄를 짓기 쉬운 까닭으로 이런 표현을 하지 않았는가 생각이 됩니다. 사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신령한 눈으로 보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자기의 죄를 먼저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죄를 먼저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비유 가운데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대략 이러했습니다. “나는 안식일을 잘 지킵니다. 십일조도 늘 드렸습니다. 금식도 때때로 하였습니다. 저기에 서 있는 세리와 같은 생활을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바리새인은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오긴 왔지만, 사실 그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만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성전에 감히 가까이 들어오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멀리 서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얼굴을 감히 들지 못하고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왜?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신령한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들어왔다고 다 하나님의 임재를 직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이렇게 이사야도 하나님을 뵐 때,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가 죄를 고백하자마자, 그 스랍 가운데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으로 가지고 와서 그것을 그 입에 대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보라 죄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다시 말하면, 죄를 고백하자마자, 회개를 하자마자, 사죄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의 제단으로부터 온 축복입니다. 사죄입니다. 이 하늘의 제단은 어떤 제단입니까? 성경을 읽어 보니, 세상 사람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그의 죽음으로 드린 하늘의 제단임이 틀림없습니다. 곧 속죄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지극히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 신령한 눈으로 보았고, 또한 그의 죄의 고백과 같이 사죄의 축복을 받아서 그때부터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누구나 오직 이런 경험을 통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에 대한 비전을 먼저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인간이 사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 앞에서 서게 될 때에, 내 자신을 살피면서 나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죄의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를 믿으므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이 길만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된 청년 이사야는 그 신령한 귀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명심하여 들으세요. 이렇게 새 사람이 된 후에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곧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번엔 들었습니다. 처음엔 보고, 그다음엔 체험했고, 이번엔 들었습니다. “들은즉 이르시기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높이 들린 보좌로부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은은히 들려왔습니다. 일터를 놓고 일꾼을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여기 ‘우리’란 말은 여러 천사들과 같이 의논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고, 또는 삼위일체 간에, 곧 성부 성자 성신을 의미한다고 해석도 합니다. 하여간 여기에 일꾼을 부르는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이 있습니다. 분명한 부름의 소리가 있습니다. 긴급한 부름의 소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실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뵈었고, 또 그 앞에서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다음에는 신령한 귀가 열립니다. 전에 듣지 못하던 하나님의 음성 곧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일찍이 모세도 시내산 기슭에서 불타는 가시덤불만 본 것이 아닙니다. 불타는 가시덤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직감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 또한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간단히 말해서 애굽에 돌아가 내 백성을 구원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부름의 음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만 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방의 사도가 되어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다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뵈었습니까? 주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신령한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이 일터를 놓고 일꾼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삼천리 강산을 내려다보시면서 일꾼을 부르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이 많습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치산치수(治山治水), 산도 다스려야 하겠고 물도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산에는 나무를 심어야 하겠고, 하천을 개수하여야 하겠습니다. 길도 닦고 다리도 놓으며, 황무지라도 개척하여 식량도 증산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장도 세워 각종 물자도 생산하여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38선도 하루 속히 철폐하여야 하겠고, 통일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 땅에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다 할 일인데, 그 가운데도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위해서 꼭 하시기를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 땅 위에서 죄를 없이하고, 이 백성을 깨끗게 하며, 그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먼저 이루어지면 남북통일도 쉽게 될 것입니다. 또 이 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첫째 사명은 복음 전파입니다. 주님이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고, 온 유대에 미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5천만복음화의 기치를 높이 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으로 특별히 우리 한국에는 전도의 문을 크게 열어놓으시고, 일꾼을 부르십니다. 지금 우리 한국에서는 어디서나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학교, 공장, 군대, 감옥, 거리, 어디서나 크게 복음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큰 일터를 마련하여 놓고, 지금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십니다. 주님은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느니라” 무르익은 곡식밭을 보여주면서 우리 주님은 일꾼을 지금 부르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러분, 이사야가 이런 부름을 듣고 어떻게 응답하였습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곧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대답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말하면서 몸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부름에 따라 그 몸을, 그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주목하여 보세요. 이사야는 “내 옆에 있는 제사장이 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서기관이 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주님의 부르시는 이 음성을 듣습니까? 우리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혹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목사님들이 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는 분은 없습니까? 혹은 “권사님들이 잘 갑니다.” 하는 분은 없습니까? “여기 장로들이 있습니다.” 하는 분은 없습니까? 이사야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시옵소서” 혹 우리 가운데 갈 마음은 있으되 “지금은 못가겠습니다. 며칠 후에 가겠습니다.” 혹은 “몇 달 후에 가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이는 혹은 없습니까? 이사야는 그렇게 대답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곧 그 뜻은 “내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나를 곧 보내소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청년시대에 이 대답을 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예레미야도 젊은 시절, 소년시대에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 대답을 하였습니다. 요한도 청년시대에 이 부름을 듣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야고보도 젊은 시대에 이 부름을 듣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사실 기독교운동은 청년운동이었습니다. 모두 30세 내외의 청년들이 자신의 몸을 바쳐서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이 큰 구원의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물론 청년들도 많이 있습니다. 청년시대에 주님의 부르심을 분명히 듣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런 청년들과 같이 하십니다. 또한 우리 신교의 믿는 진리 가운데 아주 중요하고 특별히 강조하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평신도와 교직자의 구별이 없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그것은 마틴 루터가 강하게 주장한 대로, 누구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원리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교역자만 하나님의 일꾼인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우리는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그 직장에서 헌신하고, 복음의 전파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직업에 이미 착수하였든지 그 자리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하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또 헌신이란 온몸과 그 몸에 속하는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받은 재능이 있습니까? 재능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이 있습니까?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물질이 있습니까?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셨어요? 전도는 어떻게 생각해 보면 현대의 전쟁과 비슷합니다. 사실은 신령한 의미에서 전도는 마귀의 나라와 싸우는 것입니다. 현대 전쟁이 일어나면, 우선 공군이 동원이 되어서 적진에 가서 넓게 모조리 폭격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적의 진지를 파괴하고, 적진을 혼란시킵니다. 그다음에 또 어떻게 하는지 압니까? 해군이 동원됩니다. 적의 해안에 있는 요새를 집중해서 함포 사격합니다. 그래서 그 요새를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만 하였다고 전쟁에서 온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한 후에 온전한 승리는 공군과 해군의 공격이 있은 후에, 곧 육군이 상륙을 해서 일보일보 적의 진지를 점령하여야 온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의 전선이 이와 비슷합니다. 전도에도 공군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혹 공군의 폭격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가령 요샛말로 매스컴 전도입니다. 라디오 방송은 어디나 가서 떨어집니다. TV방송이나 많은 전도지와 전도 책자를 발간해서 뿌리면 어디나 떨어집니다. 마치 이것은 복음의 폭탄을 공군을 통해서 던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해군과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그건 뭔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여러분, 작년 여름에 빌리 그래함 대전도대회에 가보셨지요? 여의도 광장에 100여 만을 모아 놨습니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 한 분이 그들에게 일시에 복음의 폭탄을 던집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함포 사격이오. 이거 필요합니다. 이러한 전도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만 해서 온전히 승리를 거둡니까? 그건 아니란 말이오. 이렇게 한 후에 육군이 필요합니다. 보병이 필요합니다. 곧 십자군의 보병이 들어가서 생명 하나하나를 붙잡아서 개인적으로 상담을 하고, 교회로 인도를 하고, 계속해서 도와주어야 그 영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공군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해군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육군, 십자군의 보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다 빌리 그래함과 같은 전도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20세기에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가 다 그런 전도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하나가 십자군의 보병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영적 전쟁에도 온전한 승리는 이 보병이 거두는 것입니다. 찬송가의 한 가사와 같이 “천사같이 말 못하고 바울같이 못하나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십자군의 보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이사야와 같이 오늘 저녁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하면서 헌신을 해야 하겠습니다. 5천만복음화 전선에서 우리 하나하나는 십자군의 보병으로서 헌신을 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들으니, 지금은 우리 남한의 기독교인의 수가 거의 400만에 가깝다고 합니다. 금년에 우리 이 400만이 다 십자군의 보병이 되어서 한 사람씩만 맡아서 전도를 하면, 명년에는 그리스도인의 수가 이 땅 위에 800만이 됩니다. 명년에 이 800만이 또 다 십자군의 보병 노릇을 해서 한 사람씩만 구원한다고 할 것이면, 내명년 후에는 얼마가 되죠? 1,600만입니다. 내명년 후에 1,600만이 다 보병이 되어서 한 사람씩만 인도하면 3년 후에는 얼마나 되겠어요? 이 땅에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어요? 3,200만이 거의 다 되겠어요. 여러분, 이것을 복음의 연쇄반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원자탄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시지요? 어떻게 원자탄이 이런 위력을 발휘하는가? 원자탄에 한번 불꽃을 쳐넣으면 그것이 연쇄반응이 되어서 한꺼번에 힘을 나타낼 때에 무서울 만한 파괴의 힘을 나타내고야 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복음의 연쇄반응이 일어나려고 할 것이면, 제일 먼저 불을 붙이는 데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언제부터 5천만 우리 동포를 복음화하기 위해서 복음의 불길이 타오를 불을 붙여 놓아서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오늘 저녁부터 불을 붙여야 되겠습니다. 그렇잖아요? 오늘 저녁부터 불을 붙여야 되겠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 하나하나가 오늘 저녁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비록 빌리 그래함은 못 되어서 한 번에 몇만 명 구원할 수는 없지만, 내 이웃, 내 친척, 내가 아는 한 사람은 구원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우리가 다 이런 대답을 하고 헌신하면, 이 복음의 연쇄반응이 오늘 저녁부터 시작될 겁니다. 여러분이 다 이런 은혜 받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우리 지금 다 기도합시다. 이 시간, 신령한 눈을 열어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다. 여러분, 다 그렇게 할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우리 다 기도하십시다. 다 같이 일어나서 한번 기도하십시다. 다 같이 일어나서 주님의 부르는 음성을 우리가 들으십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한 3~4분 동안 기도하십시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6.25를 기억하라/ 전도서전12:1-14/ 한경직 목사/ 2009-06-25
6.25를 기억하라 전12:1-14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희 창조자를 기억하라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여기에서 \\\'기억하라\\\'고 하는 말씀이 두 번 있습니다. 성경에는 \\\'잊어버리라\\\'고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 \\\"나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서 달음질하노라.\\\"고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기억하라\\\'고 하는 말씀도 종종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였고, \\\"주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말씀하셨고, 여기에도 \\\'기억하라\\\'고 하는 말씀이 두 번 나와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잊어버릴 것은 잊어버리고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 \\\"기억하라.\\\" 이 말씀을 중심해서 성경의 말씀을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하나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의 청년의 때에 해가 다 가서 약해지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이렇게 부탁합니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신이 하나님께로 가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은 어느 때에나 유익한 권면이지만 특별히 현대인에게 있어서 적절한 권면인 줄 압니다. 20세기는 과학시대라 해서 과학이 발전됨에 따라서 우주시대를 운운하며 어떤 이들은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는 것이 사실이올시다. 신학시대는 지나갔고 철학시대도 지나갔고 이제는 과학시대가 되었는데 무슨 종교가 필요하겠는가? 이런 투의 생각을 하는 현대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마치 어떤 대학교 1~2학년생 같아서 모든 것 다 아는 줄 생각합니다. 좀더 배워야, 좀더 알게 됩니다. 전에 어떤 분이 영국의 유명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에게 가서 그의 지식이 많은 것에 대해 축하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때 뉴턴이 얼른 대답하는 말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내가 안다고 하는 지식이 마치 저 바닷가에서 조약돌 가지고 노는 아이가 바다의 깊은 속에 있는 지식을 아는 것 이상, 그 이상 제가 더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과학을 통해서 우주의 비밀을 탐사할수록 우주의 비밀은 그만큼 더 커집니다. 오히려 우주의 신비를 과학의 무기를 통해서 탐사할수록 창조자를 기억하게 됩니다. 여기에 특별히 청년들에게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왜? 청년 때에는 마음도 푸르러서 교만한 마음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청년 때에는 마음의 전환이 없어서 이리저리 풍조에 끌려가기 쉽습니다. 유혹이 많습니다. 청년시대는 일생의 갈래 길로써, 일생의 분수령으로써 길을 바로잡아야 일생토록 옳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잘못 잡으면 일생을 그르칩니다. 그러므로 젊었을 때에 창조자를 기억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에 길을 바로잡아야 일생토록 옳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이 70~80년이라고 하지만 실상 일할 시간은 30~40년 간에 불과합니다. 젊은 때에 창조자를 기억하고 옳은 길을 찾고 내 사명을 바로 깨달아서 교회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참으로 공헌할 수 있는 한국의 청년 남녀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로 배불리 먹게 할 때에 나를 잊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배가 부를 때에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고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에 가서 평안히 살게 될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사신(邪神) 우상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향락만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할 때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던 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물질이 넉넉해질 때, 배가 부를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사람 오늘날은 없습니까? 20년 전 우리가 다 피난민으로 보따리 싸가지고 이남으로 내려올 때 다 궁핍하고 집 한 칸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때에는 주를 봉사했지만, 10년, 20년이 지나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배가 불러 가는 이가 더러 있습니다.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전에와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을 봉사합니까? 한국의 경제가 증진되고 발전되어 나가는 것을 자타가 다 축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리 경계하여야 될 것은 우리 민족이 배가 불러 갈 때에 하나님을 저버리지 아니하여야 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역경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을 다시 건축할 때에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사람들을 중심해서 방해 공작이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를 합니다. 이때에 느헤미야가 여러 지도자들을 앞에 모아놓고 그들에게 한 말씀이 느헤미야 4장 14절에 있습니다.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원수가 많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 싸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의 땅은 언제나 원수로 둘러쌈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싸울 줄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반면에 환난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나 2장에 보면 거기에 요나의 기도가 있습니다. 여러분, 아신 바같이 요나는 선지자 이름을 가졌지만 하나님께 범죄를 했습니다. 명령을 거슬러서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딴 방향으로 갑니다. 그런 길이 평안할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가 그릇된 길로 갈 때는 반드시 맞는 법이 있습니다.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바다에 던짐을 당했습니다. 큰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죄를 자복했습니다. \\\"내가 범죄하였습니다.\\\" 죄를 자복했습니다. 용서해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응답이 되어서 요나가 재생의 길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한 분이라도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서 오늘날 요나가 앉은 자리와 같은 환난의 자리에 앉은 이가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십시다. 죄를 회개하십시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십시다. 그러면 다시 살 길이 반드시 열립니다. 전화위복이 될 것이올시다. 전에 히스기야 왕은 중병이 걸렸을 때 하나님을 기억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에 그 병이 나았습니다. 여러분, 중병으로 고생하는 이가 있습니까? 병석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의 섭리면 반드시 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세요. 기도하세요. 그리고 유혹이 있을 때에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셉이 그렇게 옳게 생활을 하려고 애썼지만 뜻밖의 유혹이 그 앞에 당착되었습니다. 자기가 섬기는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무서운 정욕의 유혹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요셉이 그 시험을 어떻게 이겼습니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 악한 일을 할 수가 있느냐?\\\" 유혹에 당착된 이가 있습니까? 유혹을 만난 이가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세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 일을 할 수가 있겠나? 하나님을 먼저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둘째로 제가 다른 기억에 대한 말씀을 또 계속하겠습니다. 시편 137편에서 몇 절을 읽을 때 들어보세요.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찌어다\\\" 누가 이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아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바벨론 하수가에 앉아서 거문고를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고 조국을 생각하면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이 노래를 지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시온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시온을 기억하는 마음,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 마음이 결국은 이 백성이 나라를 잃어버린 지 수천 년이 되었지만, 20세기에 와서 다시 그 나라를 건설할 수 있게 만든 거 아닙니까? 예루살렘에 가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던 데 아래에 성벽이 있습니다. 그 성벽을 무슨 이름으로 부르는고 하니 영어로 말하면 \\\'웨일링 월(wailing wall)\\\'이라고 합니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아마 \\\'통곡의 성벽\\\'이란 말일 것입니다. 왜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니,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려오면서 그 성벽에 앉아서, 거기에 붙어 서서 성벽에 손을 대고 조국을 생각하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렇게 수천 년이 흘렀습니다. 결국 그 마음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20세기에 와서 새로 독립국을 만들게 했어요. 그 마음이 이번 전쟁에도 다 전력(戰力)으로 화(化)해서 그저 며칠 동안에 원수를 쳐부수고 이번에는 구예루살렘까지 점령해서 그 통곡하던 성벽 앞에 이스라엘 군사령관이 웃으면서 서서 사진을 찍었어요. 그리고 한 가지 우스운 건 <타임> 잡지에 보니까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이 \\\'통곡의 성벽\\\'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이 둘이 있었는데 가만 보니까 공산당들이에요. 통곡하는 사람들이 바뀌었어요, 이번 전쟁에서. 시온을 기억했습니다. 이번에 하와이에 가서 우리 교포를 방문하는 가운데 특별히 그들의 공헌에 대해서 좀더 깨닫고, 저는 개인적으로 그들을 존경하고 경의를 표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에 노동자로 갔는데 그 가운데에 좋은 지도자들이 났습니다. 다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고 우리 교포가 있는 곳마다 교회가 섰어요. 또 교회와 같이 학교가 섰어요. 기독교 학교입니다. 특별히 이승만 박사가 세웠다고 합니다. 그 후에 그 기금이 한국에 나와서 인하공과대학 기금이 됐어요. 그들이 그렇게 땀흘려서 살면서 그런 가운데 돈을 모아서 계속해서 독립 운동을 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들었어요. 매달 3,000불씩 꼭 모아서 2,000불은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고 1,000불은 이승만 박사가 지도하는 구미위원부, 워싱턴에 보냈어요.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 그들이 외국에서 이렇게 한국의 민족과 독립을 위해서 꾸준히 노력했어요. 이번 그 1세들도 몇 분 만났습니다. 아직도 살아 계신 이가 얼마 계세요. 그 가운데 나이 많은 의사 한 분이 점심을 먹으면서 제게 이런 얘기를 합디다. \\\"나는 15살 나서 이 하와이에 왔는데, 사실 한국이 나를 위해서 해준 건 나를 낳아준 것밖에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건 내가 지금 80이 가까이 왔는데, 언제나 한국을 잊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외국에 나가서 우리나라를 돌아볼수록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교포들이 한국에서 뭐가 좀 잘 된다고 하면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한국에 뭐 잘못된다고 하면 얼마나 슬퍼하는지 몰라요. 사실 우리 한국의 모습이 외국에 있는 교포들과 우리 우방들에게 퍽 나아졌습니다. 그동안 몇 해 동안에 모든 게 잘 되어 간다고 다 기뻐합니다. 또 한 가지만 더, 오늘을 기억합시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오늘이 바로 6.25 날이올시다. 17년 전 6.25가 바로 주일이올시다. 17년 만에 똑같은 날을 우리가 당했어요. 주일이에요. 6.25예요. 그때에 여기 계신 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아침 예배는 무사히 봤습니다. 그러나 저녁 예배는 간단히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지기 전에. 그리고 다 흩어진 쓰라린 그 경험, 다 기억할 줄 압니다. 6.25를 기억하십시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나가서 자유를 위해서 희생한 많은 영령들을 우리가 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밖에도 많은 억울한 이 죽음을 당한 우리 순국 동포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납치된 교역자들과 외국 동포도 기억해야 됩니다. 많은 고아와 미망인들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번 하와이에 가서 펀치보울 이라고 하는 데에 있는 미국 국립묘지에 가서 화환을 놓고 왔습니다. 거기는 하와이 출신으로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순직한 군인의 묘가 있고,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군인들의 이름을 새긴 많은 비석들이 여럿 있어요. 그런데 한국 전선에 나와서 희생된 이의 이름이 수천 명이 있습니다.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른 채 한국전쟁에 나와서 이름만 남은 실종된 군인이 수천 명이 있어요. 자유의 대가는 큽니다. 우리뿐 아니라 많은 우방 청년들이 피를 흘렸어요. 이런 모든 희생을 보람 있게 하는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교육가나 공무원이나 국민이나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내 책임을 바로해서 이들의 희생이 헛된 일에 돌아가지 않게 해야 되겠습니다. 이 땅에 자유와 평화가 영원히 꽃 피고 이북도 해방이 돼야 할 겁니다. 우리 교회 안에 특별히 6.25때 순교를 당한 김응락 장로나 김창화 선생 같은 이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번 하와이를 구경하는 가운데 미처 전에 구경 못했던 한 가지 구경한 게 있는데, 그건 뭔고 하니 화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유황과 연기가 펄펄 나는 분화구 위에 서 봤어요. 갈 땐 무심코 갔지만 서고 보니 \\\"아이고, 내가 잘못 섰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이건 산 화산이에요. 언제 폭발될지 몰라요. 그 가운데 어떤 구멍에서 바로 이태 전에 용암이 폭발됐어요. 언제 폭발될지 몰라요. 그런 곳을 다니면서 \\\'위험하다\\\' 하는 생각과 함께 그다음에 들어오는 생각은 \\\'사실 이 분화구 위만 위험한가? 온 세상이 다 분화구 위에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실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사는 20세기,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말하자면 분화구 위에서 사는 거 아닙니까? 사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창조자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온을 기억해서 나라 일을 바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6.25를 기억해서 자유를 수호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다. 기도하십시다. 아버지시여! 6.25, 이 주님의 날을 당해서 우리 하나하나가 창조주이신 아버지를 새롭게 기억하고 새로운 헌신과 결심을 하는 이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온을 기억하며 6.25를 기억해서 우리가 어디 있든지 나의 맡은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한경직 목사
8.15의 마음/ 하나님의 경륜/ 시126:1-6/ 한경직 목사/ 광복절설교/ 2014-08-23
8.15의 마음/ 하나님의 경륜 시126:1-6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一二六․一-二) 이 시는 해방의 노래올시다. 우리는 누가 이 아름다운 시를 지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정녕 이 시인은 바벨론에 잡혀갔다가 파사왕 고레스 때에 해방을 받아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 온 해방 받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만은 확실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가 꼭 어느 해에 지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예루살렘에 돌아온 수년 안에 지은 것만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해서 그 시인은 여기 옮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도릴 때에 꿈꾸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일 수 있을까? 너무 기뻐서 꿈꾸는 것 같으며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찼었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이 느끼던 해방의 감격과 해방을 감사하는 지정이 여기에 여실히 차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시를 읽을 때에 자연히 十년 전 옛일인 처음 맞은 해방의 감격을 생각하게 됩니다. 一九四五년 八월 一五일 정오에 한국이 일제 아래서 해방을 받던 그 순간을 기억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 여러분의 생각을 돌이켜서 十년 전의 해방의 첫 뉴스를 듣던 순간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개인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저는 남 신의주 보린 원에 있었습니다. 그 때에 전쟁은 점점 절박하여 남 신의주 일대는 일본 군인들이 수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보리원 일부에도 일본 군인이 점령하고 병사로 사용하고 있었던 중이며 또한 그들이 우리에게 부탁하는 말이 아무래도 이곳은 위험하고 또 우리가 이 원사((院舍)를 전부 써야할 터이니까 속히 적당한 곳을 구해서 소개해 나가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八․一五날 아침에 제가 남 신의주 十五리 북편 서한 동에 자그마한 학교로 쓰던 어떤 집이 있어서 임시 보린 원을 그 곳에 옮길 수 있을까 해서 때마침 많이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그 곳을 갔다 왔습니다. 갔다가 집에 들어왔을 때 十二시 좀 지났는데 十二시에는 뉴스가 있다고 하여 들어오자 곧 라디오를 틀어 놓았습니다. 천만 뜻밖에도 일본이 포스탐 선언을 수락했다는 일본 방송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일본 국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잠깐 마지막 말만 들었으므로 혹 내가 잘못 듣지나 않았나 해서 마음 가운데 처음부터 들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위에서 보린 원에 있는 선생들이 그 방송을 처음부터 듣고 내려오면서 너무 기뻐서, 몇 달 전에 미국서 세상을 떠낫지만 김은혜 선생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우리 방에 모였던 몇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한 시간 쯤 후에 여러 사람이 신의주에서도 나오고 남 신의주에서도 나와서 감격에 찬 눈물 흘리면 기도했습니다. 그때 신의주에 들어가니까 모두 뒤숭숭한 가운데서 눈에 눈물을 머금고 기쁨과 감격과 감사 가운데 악수를 하면서 지낸 일이 지금도 생각됩니다. 그 때에는 누구든지 너무 감격하고 감사해서 무엇으로 은혜를 갚을 수가 있을까 하는 가운데서 그저 감격과 감사의 정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예배당에는 가득히 모여서 예배를 드린 것을 여러분이 다 생각하실 것입니다. 첫 八․一五는 무한한 감격과 감사의 지정으로써 우리가 맞았습니다. 이와 같은 무한한 감격과 감사는 자연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은혜의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보은 보답의 지정으로써 사람의 마음이 채워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라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신의주에 어떤 돈 많은 부인이 예배당에 다니기는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믿는 줄은 저는 몰랐지만 저에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제 앞으로 어느 장소를 가리키며 그 장소에 내가 전담에서 예배당을 지으려고 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마 그 후에 공산당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면 그 부인이 홀로 예배당 지었을 줄 믿습니다. 자기의 사재를 내서 학교를 짓고 평안 중학교를 우리가 인계해서 좋은 중학교로 만들겠다고 유지들을 찾아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든지 그 학교를 잘 해 나아가자고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재산을 드리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심정은 우리가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으니 어떻든지 이 은혜의 만분지일이라고 보답하자고 하는 감격이 있었고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 민족을 봉사하고자 하는 그런 심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실 그 때야말로 누구나 애국자였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나 나라 일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 나라를 바로 세울까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정치가요 만나는 사람마다 국가의 경륜을 발표하던 때입니다. 일본 사람 지사는 자기가 그 자리에 더 오래 있지 못할 것을 깨닫고 항복하는 날 곧 신의주 유지 몇 분을 청해서 자기는 이 자리에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으니까 당신 네 들이 이 앞으로 연합군이 들어올 때까지 치안을 유지하기 바란다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탁을 받고 몇 사람이 자치회를 조직하여 연합군이 들어올 때까지, 소련군이 들어올 때까지 치안 유지의 일을 담당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일본 사람들은 자기가 가졌던 무기를 다 내어놓았고 한국 사람들이 치안을 유지한다고 하지만 처음이니까 모든 것이 혼란했습니다. 그렇지마는 늘 감사해 하는 것은 자치해 나가는 동안에 어디서 도적놈이 도적질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그 때는 도적놈들도 다 애국자였었나 봅니다. 자치회로 있는 동안 제가 알기에는 범죄 사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마 그 때에는 어떤 사람이든지 어른이든 아이이든, 학생이든 선생이든,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감사와 감격의 지정으로써 마음이 순화되어 도적놈도 도적질 할 것을 잊어버리고, 협잡꾼도 협잡할 것을 잊고, 누구든지 바른 마음을 가지고 이제는 우리가 해방을 받았으니 어떻든지 나라를 바로 세워서 우리 자손 만대에 복을 누릴 수 있는 국가를 만들자는 그런 참된 애국심, 참된 감사의 생각, 봉사심으로 가득히 찼었습니다. 이것이 첫 八․一五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심정은 신의주 사람과 평안북도 사람만 가진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온 한국 十四도 三천만 민중이 꼭 같은 심정을 가진 줄 압니다. 여러분 기념이란 잊지 말고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내일이 우리는 해방 十주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해방 十주년을 기념할 때에 무엇보다도 첫 八․一五의 심정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심정을 대통령도 기억하고 어른 아이도 기억하고 이 심정을 학생도 선생도 기억하고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서울 운동장에 가는 사람이나 안가는 사람이나 누구든지 첫 八․一五의 참된 마음, 이 감격의 마음, 보은 보답의 심정, 진정한 애국의 신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헌데 십 년을 지낸 오늘 우리의 마음 가운데 첫 八․一五에 가졌던 우리의 참 애국심 그 때에 가졌던 참 회개의 마음 그 때에 가졌던 참 감격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몇 조각이나 남았습니까? 유감 된 것은 이렇게 감격한 가운데 첫 八․一五를 맞았지만 그 때의 감격은 점점 식어져서 사람마다 각각 자기를 자랑하고 사람마다 한국이 해방된 것이 마치 자기의 힘으로 된 것처럼 자기의 과거를 자랑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공산당들은 자기의 조국 소련이 한국을 해방해 주었다고 떠들었습니다. 남한에 있는 사람들도 마치 자기의 행적이 한국의 해방을 가져온 것처럼 떠드는 사람이 많게 되었습니다. 보은 보답의 생각은 점점 변해서 어떻게 하면 이권이나 좀 더 얻을까, 적산이나 점령할까. 어떻게 하면 이런 때에 내 무엇을 좀더 얻을까? 하는 이런 심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해방 된지 몇 달 후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하는 것 들은 것 지금까지 기억합니다. 그 때 서울에 적산이 여러 곳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적산이 여러 곳에 너무 많이 있으니까, 이 집 저 집 가보고 하다가 지금으로 말하면 매를 가지고 꿩을 잡으려 갔는데 꿩이 너무 여러 마리 되니까, 매가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어리둥절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과 만찬가지로 너무 적산도 많으니까 너무 얻을 이권도 많으니까 어떤 것을 얻어야 할지 모르는 이런 심정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애국심이란 어떻게 하면 내 당파를 많이 모아서 권세를 얻고 내 지위를 높여 볼까 하는 권세욕 정권욕 영도 욕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해방 十주년을 무엇 하려 기념합니까? 무엇으로 기념하겠습니까? 첫 八․一五의 심정은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는 이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 동포가 이 첫 八․一五의 심정을 그 애국심, 그 봉사의 마음 그 희생의 정신을 몇 분지 일이라도 가지고 내려왔던들 오늘날 이 사회가 이 모양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첫 八․一五의 마음을 회복하는 해방 十주년 기념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무명 이스라엘 시인이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다음에 三, 四절을 읽으면 기도가 있습니다.『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 』 이것이 무슨 기도인지 아세요.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읽으시는 분은 대강 짐작하실 줄 믿습니다. 바벨론에 잡혀가서 대략 七十년을 종노릇한 다음에 바벨론이 파사 제국에게 멸망을 당해서 파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다스리면서 포로로 잡아 왔던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마음대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성전을 지으라고 조서를 내렸던 것입니다. 조서를 내릴뿐더러 일찍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왔던 기명을 도로 내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가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격한 가운데 먼저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이 약四천 五백 명, 거기에 노비까지 합쳐서 약 五만 명이 제 일진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이 시를 쓴 사람은 제일 먼저 돌아온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약 五만 명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시작하고 그 동안 황무(荒蕪)했던 전답의 개척도 시작했지마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네들은 이와 같이 가나안복지 시온성에 돌아왔지마는 아직까지 바벨론 하수 가에서 돌아오지 못한 포로인 자기의 동포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해서 이렇게 시온에 돌아와서 감격의 기쁨을 누리는 자기들로서, 자기들은 이렇게 돌아왔지만 아직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돌아오지 못하고 옛 바벨론에 흩어져 있는 자기의 동포를 잊을래 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하나님께서 해방해 주신 은혜를 감격해서 노래하는 동시에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이시여 아직도 저곳에 포로가 많이 남아 있으니 그 사람들을 남방의 시내처럼 돌려보내 주소서 했습니다. 남방의 시내란 무슨 말인가 하면 유대 나라 남방은 물이 많지 못한 곳이지만 저 높은 산에서 눈이 녹게 되고 비라 오게 되면 갑자기 홍수가 되어서 물이 많이 내려가는 그런 곳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아직도 바벨론 하수 가에 돌아오지 못한 내 동포가 많으니 이 동포들을 남방의 하수가 콸콸 흘러 내려가는 것처럼 수백 수천 수만 명 한꺼번에 돌아오게 해 주소서. 이런 길을 열어주소서 하고 아직도 채 돌아오지 못한 포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가 해방 十주년을 맞이합니다. 적어도 우리 남한은 一九四八년에 완전히 독립이 되었고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온전히 자유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三八이북에 우리 동포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남한에 내려오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동포들, 지금은 내려오려고 해도 내려올 수 없는 동포들, 해방 十주년을 맞는 우리로서 잠시라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오직 가족까지도 맘놓고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할 수 없는 심히 혹독한 정치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압박 가운데서 매일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해방 十주년을 맞는 우리가 한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첫 八․一五의 심정을 우리가 다시 회복하는 동시에 우리가 아직까지 자유를 얻지 못한 북한의 동포들을 위해서 여호와여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남한에 있는 하수처럼 자유를 주시고 해방을 주시 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이번 삼각산에 가서 기도할 때에 특별히 하루는『주여 조국을 구하여 주소서』하는 제목으로 하루 저녁 철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해방 十주년을 맞은 우리가 아직까지도 북한에 얽매어 있는 동포들을 해방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내일 八월 一五일은 특별히 북한에 있는 성도와 동포들을 하나님께서 十년 전 우리에게 해방 주시듯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기적적으로 해방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북한 동포의 해방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기적적으로 밖에는, 사람의 다른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이 아무리 강하고 연합군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지금 정세로는 북한 동포를 해방하기 위해서 전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북한 동포의 해방은 사람의 눈에 뛰어나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 의지해사 일어나는 기적적 해방이 있기 전에 사람 보기에 용의 한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또 우리 남한의 군대가 아무리 있다고 하지만 남한 군대만으로는 북한 동포를 해방하기 어려운 줄 압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여러 공산당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천지에 대 주재되시는 공의의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나타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음으로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께만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이 해방의 노래를 지은 사람이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둘째는 아직도 해방을 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셋째로 五-六절에 해방 받은 사람의 믿음과 확신 그리고 신념을 나타낸 글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했습니다. 여러분 이 시는, 처음 이스라엘 민족의 사정을 살필 때 말씀 드린 대로 몇 만 명이 먼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여러 이방인들이 이것을 다 반대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부흥되는 것을 거기에 살던 사람은 다 반대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반대 공작을 했습니다. 고레스 왕이 죽은 다음에 아가사스트 왕이 새로 임금이 되었는데 그 왕에게 이스라엘에 대해 무고한 고소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옛날부터 아주 패역한 도성이요, 유대 사람으로 말하면 언제든지 반역자요, 언제든지 어려운 일만 일으키는 이런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이 지금 와서 성정을 짓고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으려고 하는데, 이것을 그냥 허락해 두면 필연 이 사람들이 왕을 배반하고 큰 역적이 될 터인데, 이것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하고 새로 등용된 파사 왕에게 이렇게 무고한 고소를 했습니다. 새 왕은 자기 조상들이 어떻게 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 사람들의 말만 듣고 곧 일을 중지시키라는 명령을 파사 왕국에서 내렸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성전 지대를 놓고 굉장한 기공식과 정초 식을 거행했지만 그만 성전 건축은 중지되었습니다. 十五년 동안이나 중지되었습니다. 이렇게 원수가 많은 가운데서 전답을 찾아서 개척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울면서 들로 나가서 종자를 뿌리는 일입니다. 처음에 기쁨으로 돌아왔지마는 그 후 二十년을 눈물의 역사며 그야말로 탄식의 역사며 환난과 재앙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 때 해방을 받아 돌아온 민족이 확실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확실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 울면서 씨를 뿌리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고 하는 확실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처음 돌아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지만 이 모든 고생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뜨거운 날 김을 매는 것과 같아서, 먹을 것이 없지만 씨를 내 놓아서 종자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심히 어렵고 괴로워 환난과 원수가 많지마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반드시 이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고 기쁨으로 수확을 해서 단을 가지고 돌아올 때가 있을 것이라는 장래에 대한 굳은 신념과 소망을 가졌습니다. 우주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하여 다시 시온으로 오게 했습니다. 아무리 원수가 많고 환경이 어지럽다고 하지만 반드시 우리가 꾸준히 이 고생을 참고 나아가면 장래에 큰 수확이 있을 것이다. 지금 흘리는 눈물은 다 변해서 장차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오는 기쁨이 될 것이라는 신념을 굳게 가졌습니다. 이것이 해방 十년을 맞는 우리 민족의 신념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랫동안 정부와 자유를 가지지 못했던 우리가 해방을 받아서 독립한 정부를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원수가 둘러싸고 이스라엘 민족의 발전을 방해한 것처럼 지금도 三八선 이북에서 악한 사람들이 우리의 독립과 자유를 방해하고 어떻든지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합니다. 三八선을 철폐하고 통일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六․二五를 지냈습니다. 많은 눈물도 흘렸고 울음도 울었습니다. 인명도 잃었습니다. 이 땅의 흘린 눈물, 이 땅에 흘린 피를 모으면 오히려 한강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믿는 것은 오늘날 흘리는 그 눈물 그 피는 다 종자로 심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종자가 나서 좋은 수확을 거두어서 이 앞으로 완전한 통일과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민주주의 나라로 꽃을 피울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신념으로 해방 제 十주년을 맞이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四十년간 일본 압제 아래서 있게 했습니다. 여기에는 큰 경륜이 있습니다. 이 경륜을 이루는데 여러 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하지마는 반드시 이룹니다. 오늘날 우리의 경험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OMC 주제강의(04)/ 새 신자 목회(1)/ 눅5:32/ 하용조 목사/ 2008-09-04
OMC 주제강의(04)/ 새 신자 목회(1) 눅5:32 ◑새신자에 대한 관심이 있으십니까? ▶우리 주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의외로 예수님의 구원과 십자가에 대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도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가 싫어서 안 믿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실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눅5:32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과연 죄인들을 위하여 문을 열어놓고 있는가요? 아니면 예수 잘 믿는 성도들을 위한 교회인가요?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설교하십니까? 예수를 잘 믿고 있는 교인들을 위해서 주로 설교하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예수그리스도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많은 영혼들을 배려하면서 설교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교회건물은 예수 믿는 사람을 위한 건물입니까, 아니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만든 건물입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상대하지 않는 버려진 죄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 창녀들, 남편 다섯 있는 여자, 세리, 정신병자들, 불치병 환자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가 하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원히 문제가 있는 곳이 되어야 정상입니다. 항상 죄인들이, 미성숙한 자들이 오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싸우고 터지고 시끄럽습니다. 여기 근처 흑석동에 후배 한분이 목회를 하는데 <친구들 교회>라고 합니다. 그 곳에 거지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었는데, 1부에 4백명이 온다고 합니다. 거지들이 밥 먹으러 오는데, 얼마나 냄새가 나는지 모른답니다. 교통비 3천원도 주는데, 서울에 있는 거지들이 다 주일만 되면 그 교회로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2부는 본 교인들 200명이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제가 그 말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존 성도’들만의 교회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왜 온누리교회 건물을 이렇게 만든 줄 아십니까? 보시면 이 강대상, 소위 무대를 네 번 정도 바꿨습니다. 왜 이런 무대를 만든 줄 아십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위하여 입니다. 너무 종교적인 무대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우선 거부감을 느낍니다.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제일 인기 있는 장소가 어딘지 아십니까? 커피숍이에요. 안 믿는 사람이 익숙한 공간이거든요. ‘성전’ 그러면 그들이 두렵기도 하고, 거부감을 느낍니다. 성전에 들어가면 죄인 같거든요. 오래 못 앉아 있는 것이지요. 또 우리 교회에서 제일 인기 있는 공간이 BOOK SHOP(북 카페)입니다. 예수 처음 믿는 사람, 어색한 사람들이 와서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제 목회철학입니다. 저희 교회는 카페트를 깔았는데 새 건물에 가서 보시면, 교회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실 겁니다. 제 목적은 교회 같지 않은 건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옛날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는 교회 같은 건물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90년대 넘어가면서부터 사회 모든 분위기가 달라져가면서 사람들은, ‘교회 같은 교회는 노인네나 가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영국교회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영국에 갔더니, 데니스 레인 목사님이 유년 주일학교 다니던 교회로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고색창연하고, 아주 좋은 건물이었는데 너무 답답하고 어두워서 들어가기도 싫었습니다. “이것 좀 확 뜯어가지고 고치지요?” 그랬더니 historian들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소위 말하면 우리나라도 정동채플은 못 고치지 않습니까? 문화재니까요. 교회는 문화재가, 박물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문화재로서 보존 가치가 아니라면.. 저는 교회를 너무 교회답게 꾸미는 것에 반대합니다. 심지어 영국의 어떤 교회는 디스코텍으로 변하더라고요. 교회 부동산이 팔려서 술집으로, 디스코텍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교회면 무엇합니까? 그 시대에 기능을 못하면 디스코텍, 술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새신자는 안 오고, 기존신자만 오다가.. 그 세대가 다 소천하면.. 팔리는 것입니다. ▶우선 저는 교회하기에 제일 좋은 건물을 공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항은 불특정 다수가 좋아하는 공간입니다. 전 공항에 갈 때마다, 거기서 설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그 곳, 조금 높은 무대 위에 올라가서 설교하면 기가 막히겠더라고요.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죄인(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목사의 설교의 많은 부분은 죄인들을 위한, 그들을 초청하고 위로하는, 그들은 격려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그런 설교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초신자들을 위한 설교는 하지 않습니다. 예수 오래 믿은 사람들을 위한 설교를 하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그 사람들을 감동시킨다고 하는 것은, 자기 부인 감동시키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뻔하기 때문입니다. ‘에이! 당신이나 잘하지...’ 그러니까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교인은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신자들은.. 설교하면 감동합니다. ▶집에는 며느리가 있어서, 애를 낳아야 합니다. 노인네들만 살면.. 키울 아기도 없어서.. 재미가 없고 우울합니다. 아들이 장가가고 며느리가 들어와서 아기를 낳은 것입니다. 아기가 빽빽거리고 똥 싸고 오줌 싸고.. 할아버지 할머님들이 그걸 닦으러 다니면서도, 입이 이렇게 찢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언제 건강해지느냐? 죄인들이 있을 때입니다. 초신자들이 있을 때, 빽뺵거리고 사고치고... 이런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싸우지 않습니다. 교회가 왜 싸웁니까? 싸우는 교회는 거의 보면 전도 안하는 교회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새신자가 없거든요. 새신자가 있으면요? 할아버지 할머니.. 못 싸웁니다. 기신자들은 새신자들 볼까봐 창피해서 싸우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기신자(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새신자 돌보느라 바빠서, 싸울 여력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새신자가 많기를 바랍니다. 새신자가 많은 방법은 간단하지요. 새신자가 좋아하는 교회를 만들면 됩니다. 교회는 힘 있는 사람이 다 맘대로 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다 장로님하고 목사님 아닙니까? 장로님 목사님 나이들이 다 몇입니까? 목사님들은 좀 젊지만, 장로님들 나이가 보통 평균... 거의 60이라고 봅시다. 그러면 교회 칼라를 누가 선택할까요? 장로님이 좋아하는 칼라를 선택하겠죠. 그러면 신세대들이 좋아할까요, 안할까요? 안하죠. 무슨 소리입니까? 신세대는 오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60대 되신 분들은 미래를 지향하는 사람입니까?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입니까? 그래서 교회는 자꾸 과거 지향적으로 변합니다. 60대 그들은 안전주의로 갑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교회를 모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실수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라는 소리가 많겠습니까? 하지 말라는 소리가 많겠습니까? 하지 말라는 소리가 많죠.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고... 그럼 무엇을 합니까? 아무것도 안하면 되지요. 교회는 모험해야 합니다. 젊은 여자가 아기를 낳습니까, 늙은 여자가 아기를 낳습니까? 아기는 젊은 여자가 낳는 거예요. 교회는 젊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이 젊어야 합니다. 모험적이고 도전적이어야 합니다. 신세대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자라죠. 여러분의 나이에, 취향에 맞는 것을 하게 되면 교회는 끝난 것입니다. 미래가 안 보이는 거지요. ◑섬기는 게 체질인 교회 ▶예수님은 죄인들을 섬기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막10:45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왔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섬기는데 있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왜 문제가 불거지는 줄 아십니까? 오래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교회에 왜 문제가 되는 줄 아십니까? 그 곳이 자기 그라운드니까 그렇습니다. 누가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 이상 되거나, 더 수준 있는 사람은 교회에 못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면 발로 차 버리거든요. 왜요? 자기영역이 무너지니까요. 자기 수준 정도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님들! 여러분 이상의 목회는 안 됩니다. 그거 아십니까? 여러분의 수준 이상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설교 수준을 높이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목회 역량을 더 크게 만들어야 됩니다. 다 자기 그릇입니다. 그릇이 크면 물은 많이 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릇이 작으면 아무리 담아도 쏟아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남 원망하지 마세요. 역량을 키우세요. 인격도 키우시고, 그릇도 키워야 많이 담길 것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의 존재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든 장로님이나 목사님들은 섬김을 받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의 주제곡이 있죠. ‘섭섭하다’입니다. 왜 섭섭합니까? 자기를 인정 안 해줬다는 겁니다. 자기를 무시했다는 거죠. ‘왜 이일 시켰다 저일 시켰다 그러냐?’ ‘왜 나 안 알아주느냐?, 내 이름은 왜 뒤로 빠졌느냐?’ 전부 그런 얘기입니다. 별 거 없어요. 여러분! 섭섭하다는 것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섬김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공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잊혀진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이 교회에선 내 목소리가 커야 된다. 내가 결정해야 된다는 거죠. 자아가 깨어지지 못한 분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교회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미숙하게.. 조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잘 가르치면.. 그런 일이 점점 줄어들겠죠. 저희 교회요? 금년부터 당회를 바꿨습니다. 우리 교회에 장로님들이 많으십니다. 하지만 교회 의사를 결정하는 사람들은 모두7명입니다. 다 맡겼어요. ‘당신이 결정하나 내가 결정하나 똑같다’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내가 결정해야만 결정이고,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당회는, 실행위원 일곱 분에게 당회 모든 결정권을 다 드렸습니다. 그분들이 결정하면 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장로님들은 다 <섬기는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한국교회 지도자 세미나 축제를 하는데, 제가 참석자 여러분께 ‘이번 축제에서 제일 좋은 게 뭐냐?’고 물었더니 많은 분들이 ‘교인들이 기쁘게 세미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변소 청소하고, 인사하고, 참석자들이 제일 은혜 받은 것이 ‘할 일 없이 서 있는 것’에서 사람도 많이 안 찾는 자리인데도, 그냥 자기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은혜를 받으셨답니다. 여러분 오늘 안내 하신 분 가운데 총장님 사모님도 계시고, 그렇게 허술해 보여도 함부로 보지 마십시오. 다 굉장한 분들이 지금 저기 서 있는 겁니다. 그분들 다 휴가내고, 자기 전문직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렇게 오셨습니다. 그저 한가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다 바쁜 사람들이고 자기 전공이 있는 분들입니다. 이번 기간에 특별히 시간을 마련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여러분을 위하여! 그러고 왔습니다. 섬기는 걸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분들을 제가 보았습니다. 섬기면서 제일 기뻐하는 사람들은, 여러분이 아니고, 자기들이랍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섬기는 자신들이 고생이 아니라 더 기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뭐하기 위해 존재한다고요?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제일 보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교인들이 서로 안 싸우는 겁니다. ‘야~ 저 사람들은 서로 사랑한다... 저렇게 실수하는데도 용서하는 구나!’ 그걸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에게는 공의가 있고, 사랑도 있습니다만, 그 공의는, 사랑하기 위한 공의입니다. 죽이는 공의가 아닙니다. 정의감에 예민한 사람들 조심하세요. 정의로 따진다면 당신이 먼저 죽어야 됩니다. 당신이 말하는 정의에 당신이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도 너무 정의 외치지 마세요. 우리 문민정부 시절에 5년 동안 사정했습니다. 된 게 뭐가 있습니까? 사정하고 개혁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물은 흐르게 놔 두세요. 흙탕물 깨끗하게 만든다고 휘젓지 마세요. 그냥 놔두세요. 그러면 물이 흘러가면서 저절로 깨끗해집니다.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OMC 주제강의(04)/ 새 신자 목회(2)/ 눅19:10/ 하용조 목사/ 2009-08-12
OMC 주제강의(04)/ 새 신자 목회(2) 눅19:10 ◑한 영혼에 대한 관심과 눈물 ▶눅19:10에 보면 삭개오 얘기가 나옵니다.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던 삭개오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돈은 있지만 외로운 사람, 권력은 있지만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는 그런 사람, 겉으로는 강하게 보이지만 속으론 약한 사람.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을 이해해줬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다 싫어했습니다. 그 사람과 예수님이 만나는 것 자체도 자존심 상해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을 선택해서 만나고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사람은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회의 자존심을 위해서.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있었지만 그 집에 간 것이지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 교회 안에 잃어버린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잊혀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새사람을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 왔다 떠난 사람들을 다시 찾아야 됩니다. 상처받고 실망하고, 떠난 사람이 얼마나 주변에 많습니까? 여러분, 모든 교회는 다 똑같습니다. 교회에 새사람이 오는 것이 떨어진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새신자는 계속 옵니다. 문제는 뒷문으로 계속 빠져나가서 그렇지.. 새사람은 언제든지 옵니다. 전도 안 해도 옵니다. 그 사람들을 붙잡지 못한 게 문제인 것이지요. 또 하나, 그 사람들을 찾지 않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설교일 수도 있습니다. 설교가 잘못돼서 설교가 듣기 싫어 간 사람도 있고, 사람 보기 싫어서 간 사람도 있고 뭔가 교회가 못 마땅한 것입니다. 그것을 정직하게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쳐야 합니다. 왜요? 한 영혼을 위하여. 한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영혼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이 열정 때문에! ▶요10:10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려고 온 것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풍성한 삶을 주기 위하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양육이죠. 전도한 사람들을 어떻게 풍성한 꼴을 먹이고 살게 하는 것, 이것이 교회죠. 성경은 하나님으로 한 마디로 말하면 father\\\\\\\'s heart. 아버지의 마음이에요. 만약에 여러분이 성경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 그것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탕자가 있죠. 진짜 탕자는 첫째 아들이죠. 둘째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탕자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과 착각에 빠집니다. 우리 한국교회를 보면 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집 나간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는 그 집 나간 아들 때문에 그렇게 마음 아파하고 잠을 못 주무시는 겁니다. 문을 열어놓고 밤마다 뜬 눈으로 세우고 기다리는 거에요. 언제 그 아들이 올지... 나는 한국 교회를 보면서 그걸 느낍니다. 온누리 교회를 보면서 그걸 느낍니다. 온누리 교회가 97년도에 5부 예배 드리는 것 보고, 주님이 마냥 기뻐하실까요? ‘하나님, 우리 이렇게 집 잘 지었습니다. 5부 예배까지 드립니다. 우리는 만명이 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부정은 안 하실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크게 칭찬도 안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마음’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잃어버린 아들 걱정’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 97년도에) 한국은 밤에 보면 십자가의 꽃이 핀 나라입니다. 저는 한 상가 건물에 교회가 4, 5개 있는 걸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거 욕하지 마세요.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한국은 이렇게 교인이 많은데, 한 빌딩에도 서너 개가 있는데, 일본에 가 보세요. 없어요. 교회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에 가 보세요. 판잣집 교회도 없습니다. 교회가 씨가 말랐습니다. 이거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금년부터 우리교회 5부예배 드리게 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좋긴 좋다.. 그러나.. ’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거기 없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은 ‘동남아시아를 봐라, 일본을 봐라, 내 마음은 거기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은 거기 있다.’ 여러분!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아들의 효도는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갖는 것입니다. 동남아와 일본의 영혼들을 위해서, 염려하며, 그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많이 모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요.. ▶여러분 교회는 말이죠, 제가 보니까 한 2~3년 지나면 전통이 생깁니다. 50년 넘은 교회치고 부흥하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통 유지하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왜 대대로 예수 믿은 사람끼리 모여 예배드리는 겁니까? 새신자 오는 것도 귀찮아 하더라고요. 왜요? 자기들의 전통이 깨지니까. 새로운 분위기로 가는 게 싫다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가 믿었던 교회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이 교회를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 오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혼자라도 지킬 테니까! 그러니까 교회가 안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pen 안에 있는 99마리 양의 가치는, 잃어버린 1마리의 양과 같은 것입니다. 99는 1과 같은 거예요. 하나님은 숫자를 보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보시는 것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눈물, 애통, 몸부림,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루어도 그걸 하자. 바로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당신은 목회자가 맞습니다. 없으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금년에 저희 교회가 <열린 예배>를 시작했는데. 시작한 게 바로 그겁니다. 예산을 열린 예배에 많이 주자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전도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윌로우 크릭 교회를 가면서 늘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게 있어요. 그건 빌 하이블스라는 목사님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무슨 감동을 그렇게 주었는가? 그 양반이 기계같이 눈물을 흘리는 때가 있더라고요. 내내 안 울다가, 보통 때는 정신이 말똥말똥하다가 ‘예수를 믿지 않는 영혼’이라는 말만 시작하면 눈물이 핑 돌아요. 코가 시큰해요. 그래서 항상 코를 탁 만지더라고요. ‘예수 믿지 않는 한 영혼’을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는 목사가 몇 명이나 있나요? 주변에 별로 없어요. 전도 안 한다고 야단하는 목사는 있어도 전도하자고 소리 지르는 목사는 있어도 ‘예수 믿지 않는 영혼’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목사는 없더라고요. 이것이 교회요, 아버지의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로 한 것은 바로 이 눈물입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 예수 믿지 못해서 방황하고 절망하고 자살하고 죽어가는 한 영혼, 내가 그 사람에게 예수만 줬더라면 저 사람은 저렇게 안 살았을 텐데.. 우리 교회가 저 사람한테 실족시키지만 않았더라면 저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우리 교회가 조금 무성의하고 부주의해서 한 영혼을 잃어버렸다면 말이죠) 여러분! 한 영혼을 잃어버리면 연자 맷돌을 메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이렇게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 저는 윌로우 크릭의 용기에 정말 감동을 합니다. 한 영혼을 위하여 그들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누가 뭐라 그래도 전통이 뭐라 그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 영혼을 사랑하는 모험을 한 것입니다. ▶작년에 우리가 그 교회에 갔을 때, 감동적인 얘길 하나 들었습니다. 그 교회가 20주년때 교인들이 큰 체육관에 다 모였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들은 전지(전구)를 하나씩 가져오라 그랬대요. 모든 행사와 프로그램이 끝나고, 설교가 끝나고, 전깃불을 다 껐답니다. 그리고 이런 광고를 했답니다. “윌로우 크릭 교회에 와서, 처음 예수 믿은 사람은 불을 키십시오.” 85%가 그 불을 켜고 서로가 울었대요. 그 말을 전해 준 사람도 그 말할 때 눈물이 글썽거리더라고요. 85%가 이 교회에 와서 예수 믿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다른 교회 가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 올 사람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 와라! 그 사람을 위한 목회를 하겠다! 그 사람을 위한 설교를 하겠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겠다! 그런 사람을 위한 성경 공부를 만들겠다!’ 는 하나의 신앙 고백이죠. 여기에 우리가 잃어버렸던 감동이 있더라고요. 제가 거기 가서 많이 울었습니다. 왠 줄 아십니까? 온누리 교회는 전도 안 해도 사람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교인들이 전도의 심각성을 몰라. 전도 안 해도, 가만있어도 1년에 3500명이 문을 두드려요. 등록을 시도하는 사람이 한 3500명이에요. 7주 과정을 마치는 사람들이 보통 1500-1800명, 1년에 그렇게 등록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회개할 게 하나 있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꾸 희박해져요. 누가 그랬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서울역 현상’이 있다고. 너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니까 사람 귀한 줄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그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윌로우 크릭 교회에 가서 한 대 얻어맞았습니다. “너 뭐하고 있냐?” 온누리 교회는 그러고 보니까 소문난 교회더라고요. 내용은 없더라고요. 우리는 가진 것 보다 소문난 게 많더라고요. ‘실질적으로 우리 교인 한 분 한 분의 영혼을 사랑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가?’ 그렇게 질문하니까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없었던 겁니다. 제가 그래서 많이 울었습니다. ‘하나님 온누리 교회는 부끄러운 교회입니다. 겉치장이 많은 교회입니다. 소문이 많이 난 교회입니다. 교인 하나하나가 영혼을 사랑하고 전도하는.. 그런 눈물이 우리는 없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선교사는 보냈는데, 개인 전도를 많이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죠. 여러분 목사님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 만날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다 매일 예수 믿는 사람만 만나요. 그래서 중요한 건 평신도들입니다. 평신도가 스타예요. 여러분! 농구 코트에서 뛰는 사람은 목사가 아닙니다. 평신도가 뛰는 거예요. 그들은 매일 세상에서 예수 안 믿는 사람 만나거든요. 그들이 세상을 변화 시킵니다. ◑구도자 seeker에 대한 관심 ▶두 번째 생각 할 주제는, 특별히 불신자에게도 관심을 갖지만, 교회는 구도자(seekers)에게 관심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도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은 있지만,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될지 모른다든지, 교회에 대해서 아직도 부정적이라든지, 시험에 들었다든지 하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에게 교회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정신 차리고 조금만 태도를 바꾸고, 조금만 말을 바꾸고, 조금만 설교를 바꾸고, 조금만 교회를 바꾸면 그들은 얼마든지 교회에 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교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제거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가운데는 ‘교회는 맨날 헌금만 하라 그런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기분 나빠서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게 할 수 있는 설교를 할 것인가요? 생각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여러분들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교회가 전도’라는 생각입니다. 전도에 대한 교회의 관점에 많이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빌리 그래함 같으신 분들은 대중 전도, TV전도를 하신 분입니다. 우리나라 부흥회, 사경회도,,, 부흥사들이 다 그런 분들이죠. 이렇게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런 전도 시절이 있었고 또 하나는 ‘개인전도’가 중요하다는 입장입니다. CCC나 네비게이토나 또는 브릿지나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개인전도하는 훈련이 한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저도 그렇게 훈련을 받고 자란 사람인데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건 ‘즉석 도너츠’더라고요. 사람을 만나면 ‘5분만 시간 있습니까?’라고 한 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생애를 향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모를까요?’ 그래서 ‘나를 따라 하시겠습니까?’ 기도해서 예수 믿으면, ‘당신에게 오늘 구원이 임했습니다. 내일부터 교회에 가십시요.’ 이렇게 해서 교회에 데리고 가는 것이지요. 참 좋은 전도법이죠. 저는 이 전도 프로그램으로 수지를 무지무지하게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도 만나 봤고요.. 별 사람을 제가 많이 만나 봤습니다. 그렇게 개인 전도를 많이 한 때가 있었습니다. 또 이것을 교회적으로 사용한 사람이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 폭발’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새로운 축복을 주셨는데 교회 안에 전도부가 있는 게 아니라 ‘교회가 전도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예수 믿지 않는 세계를 뚫고 들어가는 교회의 모든 philosophy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당회나 교육부, 문화부, 전도부 그런 게 아니라 교회 전체가 전도라는 것이죠. 잃어버린 영혼, 죽어가는 영혼, 죄인들을 위하여 교회는 존재한다라고 생각하고 교회 예배도 그렇고 모든 것을 전도라는 것에 초점을 모아 가지고 목회를 하는 이런 철학을 가진 교회들이 바로 ‘구도자 예배 seekers service’를 드리는 그런 교회들이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들백이나 윌로우 크릭들은 전부 그런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대를 다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교회 프로그램도 전부 바꿔버려요. 누구를 위하여? seeker들을 위하여 그들이 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 은혜 받도록! 여기에 초점을 모아보는 것입니다.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OMC 주제강의(09)/ 참된 설교/ 빌2:6-8/ 하용조 목사/ 2009-08-02
OMC 주제강의(09)/ 참된 설교 빌2:6-8 ◑설교에 따라.. 교회가, 성도가 조각되어집니다. ▶예배가 교회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 교회, 그리스도의 몸에서 예배가 잘 드려지면 심장이 잘 뛰는 것과 같습니다. 심장이 잘 뛰면 모세혈관에까지 공급이 잘되는 거죠. 병이 들어도 상관이 없어요. 피만 순환이 되면 다 회복이 되는 거예요. 병이라는 게 뭐냐 하면 혈액순환이 잘 안되기 때문에, 혈액이 가야할 곳까지 못가면.. 계속 그렇게 되면.. 결국 곪게 되는 거죠. 예배가 잘 드려지면.. 교회 부분, 부분 구석구석까지 살아납니다. 설교는 예배의 심장과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예배가 살아납니다. 물론 찬양을 많이 불러도 예배가 되고, 기도가 많이 돼도 예배가 되지만 그 예배의 KEY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죠.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렇죠? 하나님은 육이 아니세요. 시간과 공간 안에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세요.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그 임재를 어떻게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을 느끼는 거죠.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외우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적용하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죠. 말씀은 말씀 그대로 전달이 안 돼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야만 우리가 느끼고, 그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있어서는 말씀의 사역보다 더 중요한 사역이 없고 목회자의 부름은 말씀으로의 부름이에요. 제일 중요한 것이에요. 어떤 설교를 하느냐가.. 어떤 교회를 만드느냐를 결정합니다. 나중에 지나보면.. 설교한 방향으로.. 교회가 조각되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그 설교 속에는 여러분 교회의 비전도 있고 색깔도 있고, 그림도 있고, 크기도 있어요. 여러분이 어떻게 성도들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그 성도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설교란.. 들리는 만큼 모입니다. ▶굉장히 성실하다고.. 목회가 잘되지는 않아요. 실력 있다고 목회 잘하는 것 아니에요. 굉장히 성실하고 실력이 있어도.. 목회가 안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사이즈가지고 고민하지 마십시오. 사이즈 가지고 여러분의 인격을 결정하지 마세요. 작을 수 도 있고 클 수도 있다는 거예요. 저는 오늘 아침에 조성록 장로님의 간증을 통해서 제가 굉장히 은혜를 받았어요. 비록 교인이 10명이라도, 그 고통스러운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게 은혜요, 축복이라고요. 그리고도 계속해서6년 동안 버텼다는 것, 이게 기적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하나님은 누구를 더 칭찬하시겠어요? 교인이 많다고, 사역이 많다고.. 하나님은 그를 높이 점수 줄까요? 안 그래요. 많거나/적거나.. 그가 진실하고 충성되면 상 주실 것이고.. 그런 거예요. ▶그렇지만 어떤 분들은 설교의 gift(은사)를 하나님이 준 분이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하나의 gift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은사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얘기하면 똑같은 얘기라도 재미있게 얘기하는 분이 있고, 간결하게 얘기하는 분이 있고 그렿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어떤 사람 설교 들어보면 빤한 설교가 있어요. 한 서너 번 들어보면 뻔한 거예요. 뻔하면 졸지요. 뭐가 이렇게 기대감이 있고.. ‘다음에 무슨 얘기 하지?’ 그래야 듣지요. 이번 주 설교 끝나면, 다음 주 빨리 와야 되는데.. 설교는 어떻게 보면 연속극 같더라고요. 뻔히 아는 얘기죠. 연속극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다 아는 얘기면서도.. 그러나 연속성을 가져요. 그 드라마도 기승전결이 있어요. 거기에 웃음도 있고, 흥분도 있고, 기쁨도 있고, 감격도 있고 그러면서도 그 드라마 끝날 때는 다음 드라마 안보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모래시계 드라마> 끝날 때는 서울 시내가 다 한산했잖아요? 여러분의 설교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 끝나자마자 그 다음 설교 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교는 단회적이면 안되겠죠. 오늘은 이 설교, 다음 주는 이 설교, (신약 구약 왔다 갔다 하면.. 일년 지나고 나서 보면.. 무슨 설교 했는지 몰라요.) 드라마처럼 이렇게 연속성이 있어야 돼요.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단회성이 있어야 돼요. 다음 설교를 기대하게 하고.. 그 다음 설교를 기대하게 하고., 그래서 여행도 못가요. 그 설교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거 빠지면 큰 일 나니까요. 그렇게 열심히 들어주시는 성도님들도 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사람들의 주먹이 쥐어져야 해요. 가슴이 두근거려야 되고, 흥분이 되고 눈물이 나고, 끝나자마자 ‘그래 오늘 나는 내가 바뀌어져야 돼!’ 그러고.. 이렇게 끝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설교는 들리는 것만큼.. 사람이 모이는 법이죠. 여러분 목회자들이 서울에서 설교하셨어요. 그 설교 테이프가 미국까지 가면 여러분의 성도는 어디까지 있어요? 미국까지 있는 거죠. 1997년 당시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인터넷으로 더 쉽게 갑니다. 장소는 별 의미가 없어요. 이제 테이프로 다 돌아다니니까요. 그때 테이프를 돌려서 들었습니다. 설교는 예배의 심장과 같다고 그랬어요. 따라서 설교가 살아있으면.. 생명력이 있으면.. 설교에 성령이 기름 부으시면.. 예배전체는 살아나게 돼 있어요. 조금 성가대 잘 못해도.. 조금 어수선해도.. 말씀에 은혜가 있으면 다 살아나게 돼 있어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좋은 걸 하나 배웠어요. 설교를 잘하면.. 뭐든지 다 용서해요. 그러나 설교를 잘 못하면.. 용서 안 해요. 그게 설교더라고요. ※미녀는 다 용서받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설교자에게는 ‘설교’입니다. 설교를 하면 교회 전체가 다 이렇게 은혜의 단비를 맞는 것 같아요. 나는 여러분의 설교에 기름 부으심이 있게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설교에 능력을 얻게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설교가 살아 움직이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이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설교자가 아니었으면 몰라도, 설교자로 하나님이 불러주셨으면 죽을 각오를 하고 뚫으십시오. ▶하여튼 설교는 몸 안에 들어와야 돼요. 머리 안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하이라이트 단락1 몸 안으로 들어야 돼요.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몸 안에 들어온 얘기는 언제 어느 때나 나와요. 원고 필요 없어요. 스위치만 틀면 나오는 거예요. 똑 같은 설교를 5분에 할 수도 있고, 1시간에 할 수도 있고, 하루 종일 할 수도 있어요. 자기 몸 안에 완전히 설교가 들어와 있어야 되지요. (평소 삶에 복음적으로 살아야 .. 설교가 몸에 배이게 됩니다.) 여러분 설교는 죽은 영혼을 살린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6:63 여러분 제가 설교할 때는, 사람의 이성에 호소 안 해요. 이성이라는 과정이 필요하죠. 논리적인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듣지요. 논리가 없으면 안 들어요. 한 얘기 또 하고, 이 얘기 했다, 저 얘기 했다.. 그러면 잘 안 들어요. 그러나 제가 설교를 할 때는, 그 사람의 영에 설교를 하지 이성에 호소 안 한다고요. 영에다 설교를 하면 죽어있는 영혼들이 살아나는 것이 보여요. 얼굴에 그게 나타나요. 들어올 때는 죽은 얼굴이었다가.. 설교 들으면 산 얼굴로 나간다고요. 너무너무 좋아한다고요. 그건 이성이 설득된 것이 아니에요. 내 영이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골수와 관절을 쪼갠다는 말이죠. 영이 살면.. 육이 살아요. 따라서 여러분 육을 기쁘게 하는 설교나, 인간의 혼을 기쁘게 하는 설교는, 그것으로 끝나버려요.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나 spirit 영을, 영으로 설교하고, 영에게 설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설교란 incarnation 육화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incarnation, 육화란.. (원래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말씀이 내 삶에서 육화되어야 한다\\\\\\\'.. 는 뜻입니다. 내가 말씀을 먼저 살아내고.. 그 내용을 설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1. Incarnation (육화) 그는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6 하나님이 인간과 같이 된 것을 가리켜 ‘성육신’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거 아닙니까? 설교란 그런 거예요.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몸 안으로 incarnate 되어야 돼요. 말씀이 내 몸 속에 incarnation, 성육신이 되는 게 설교예요. 이 말씀이 통째로 내 몸 안에 육신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래서 내 이성으로, 내 언어로, 내 몸으로.. 내 삶으로 이 설교가 표현되어야 해요. 절규하는 사람이, 아주 한이 맺히는 사람이, 이혼당하고, 매 맞고 쫓겨나고 이런 사람보고 ‘남편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오’ 하면 두 시간 세 시간 거품 물면서 이야기해요, 너무 분해서... 그게 설교예요. 예수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데.. 어찌 흥분을 안 합니까? 어떻게 그렇게 맹숭맹숭하게 그 얘기를 해요? 그것도 기적이지... 아니 어떻게 교인을 졸게 해요? 그것도 기적이지... 복음을 가지고 말이죠. 한이 맺힌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젖어버린 사람들은 십자가 얘기만 하면 흥분하는 거예요. 쏟아지는 거예요. 막 쏟아지는 거예요. incarnation됐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의 설교가 incarnation되기를 바랍니다. ▶2. Identification (동일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일단 나와 동일화가 되어야 해요.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어요. 그 예수님이 인간과 identification(동일화)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도 잘 알지만, 인간도 잘 알아요. 설교자는 두 대상을 다 잘 알아야 돼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익숙해야 돼요. 동시에 인간을 알아야 돼요. 언어도.. 그냥 콩나물 장사가 얘기하는 것 같이 시장바닥에서 보통 얘기하듯이 그런 아주 생활적인 얘기를 써야지, 설교는 문어체 쓰면 안 돼요. 구어체를 써야 돼요. 그냥 생활언어! 예화도 그래요. 1800년대 나폴레옹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오늘 개똥이 엄마가 겪었던 것. 그런 거예요. 오늘 내가 설사 나서 생겼던 것, 밤 잠 못 잤던 것, 특별히 사람들은 설교를 할 때 피상적인 설교를 해요. 그렇지 않아요? 설교는 인간의 내면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돼요. 사람들은 자기 내면 속은 다 감추고 있거든요. 그 인간의 허구성, 위선, 죄성, 비밀.. 여기는 어마어마한 세계예요. 그 세계를 예리하게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말씀가지고.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냐 하면 캄캄한 방에 전기 불을 들고 찾아가는 것과 똑 같아요. 이 문 열어보고 저 문 열어보면 거기에 인간의 질투, 간계, 인간의 두 얼굴, 인간의 욕심, 인간의 음욕, 인간의 위선 이런 것들이 얼마나 멋지게 포장되어 있는데.., 그걸 다 풀어버리는 거예요. 자, 하나씩 하나씩 풀면.. 까무라치게 놀라죠. 그럼 뭐라고 그럴까요? \\\\\\\'목사님이 내 얘기하지..\\\\\\\' 그런다고요. 내가 언제 당신을 아오? 모르죠! 그런데 왜 그게 내 얘기처럼 들리느냐? 내 속의 비밀을 파헤쳤기 때문에, 그 내 속의 비밀은 나의 비밀이죠. 이렇게 설교는, 내면을 파고 들어가야죠. 겉에는 불을 켜고 있지만.. 인간의 내면 안에는 다 전기불 끄고 있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껍데기를 깨고..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죠! 여러분은 텔레비전 해설가가 아니라고요. 정치해설가도 아니고, 경제해설가도 아니예요. 조심하세요. 회중석에는 전문가들이 다 앉아있다고요. 정치 얘기 함부로 하지 말고, 경제 얘기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내가 전할 수 있는 메시지는 성경밖에 없어요. 성경 외에 넘어가지 마세요. 이게 우리의 전공이고, 우리가 전해야할 메시지예요. 왜냐하면 이 성경은 작은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까지 연결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고, 그리고 천국까지 가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것은 박사 아닌, 박사 할아버지라도 세상의 어떤 전문가라도 이 말씀은 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이런 설교자의 영적권위와 확신과 confidence 자신감이 있을 때 이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자신감이 있으면 말이 쉬워집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말이 어려워집니다. 제가 하나 배운 게 있어요. 설교 준비 안하면 말tone이 높아집니다. 괜히 소리를 지릅니다. 준비 많이 한 사람은 소리 지를 것 없어요. 또 했던 말 되풀이도 안 합니다. 그러나 준비 안 하면.. 했던 말 되풀이 합니다. 설교는 말이죠, 비행기가 landing을 잘 해야 돼요. 자꾸 활주로를 돌면 안돼요. 그냥 착 내려야 해요. 서론이 길면 안돼요. 설교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cut해 내느냐가 중요해요. 한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불필요한 가지를 다 쳐버려야 해요. ▶3. Communication (의사소통, 전달)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Incarnation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 Identification ‘자기를 낮추시고’ - 그래서 사람과 communication 합니다. 설교는 communication이다. 즉 상호교감을 통해 전달을 해야 돼요. 좋은 설교가란 유능한 communicator예요. 내가 설교준비를 다 많이 했어도, 어떤 상황에서는 이 설교를 포기할 용기가 필요해요. 그게 설교예요. 지난번에 어떤 분께 제가 아주 기분 좋은 소리를 하나 들었어요. 그분은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신 분이예요. 미국에서 온누리교회를 소개받고서(자기 교회를 한 3, 4년 다녔는데) 한국에 귀국하면, 온누리교회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서울에 왔대요. 그런데 1년 반이 되도록, 나하고 손 한번 못 잡아 본거에요. 그러니까 미국이 그리웠겠죠. 거기는 교제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는데.., 좋긴 좋은데.. 사람이 하도 많고 저를 만날 기회가 없으니까, ‘목사님 제가1년 반 만에 잡아보는 손입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이 분이 저에게 이런 격려의 말을 해주더라고요. 저는 1년 반동안 목사님 손은 못 잡았지만 여기 설교 때문에, 내가 여기 붙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까 목사님이1년 동안 굉장히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는데, 목사님이 한번도 변명을 안 하시고 똑같이 웃으시면서 설교를 하는 걸 볼 때.. 진짜 설교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1년 동안 변명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자기는 진짜 설교를 들었다.’ 그렇게 저를 격려해 주더라고요. 설교는 내가 말하는 것도 설교지만.. 내 삶이 설교예요. 이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설교는, 사기꾼이 될 수가 있어요. 설교가 나빠서 사람이 안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와 설교자의 삶이 서로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좋은 설교를 들을수록 갈등을 하는 거예요. 설교는 communication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오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같이 밥을 잡수시고, 같이 잠을 자고, 사람하고 똑같이 살았단 말이죠. 피곤하셨고 목마르셨고 주무셨고.. 사람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람들과 동일시 Identification 되시면서 그것이 자연히 communication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폼(권위) 잡고 앉았으면.. 제자들이 따랐겠어요? 안 따랐겠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셨기 때문에 진짜 communication이 된 거예요. 여러분, 목회자들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교인들하고 얼마나 communication이 되어 있으세요? 마음과 마음, 삶과 삶.. 비록 여러분들은 목사이고 설교자이지만 교인들이 느끼기에는 ‘저분은 내 친구다!’ 이렇게 느껴야 돼요. You are my friend, you are my brother. 이런 느낌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communication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교인이 목사가 되고 싶어해야 돼요. \\\\\\\'나는 목사가 제일 좋은 것 같다.\\\\\\\' 그 정도 까지, 교인들이 ‘나는 우리 자녀가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까지 말이죠. \\\\\\\'다 해도, 나는 목회자는 싫다\\\\\\\' 이러면 안 돼죠. 그 목사는 문제 있는 거예요. 모델이 안 된 거죠. ▶4. Sacrifice(희생)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 희생 sacrifice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설교자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가 보이거든요. 희생이 없는 사람에게는 예수가 안 보입니다. 낮은 데로 가면 예수가 보입니다. 손해 보면 예수가 보입니다. 희생하면 예수가 보입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핍박과 고난을 겪고도.. 가만히 있으면 예수가 보여요. 결국은 설교란 예수님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연세대학교 다니는 교수가 한분 계신데, 그 분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셨어요. 미국에서 오신 분인데, 우리 교회 등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시더라고요. 서울에 내로라 하는 교회는 다 갔대요. 왜냐하면 자기도 정착을 해야하니까. 이 설교 저 설교 다 들어봐도 잘 모르겠더래요. 그래서 부부가 이런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듣는 설교 가운데 예수님 얘기를 제일 많이 하는 설교자를 찾아가자.’ 그런 기준을 세우고 설교를 듣기 시작했대요. 그래서 큰 교회를 다 갔대요. 웬일인지 제가 설교 하면서, 예수님 얘기를 많이 했나봐요. 여기오니까 처음으로 설교에 예수님 얘기가 있더래요. ‘그래서 이 교회를 결정했습니다.’ 하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설교의 시작도 예수님이요. 끝도 예수님이예요. 결국은 설교시간에 보여지는 것은, 나의 위대한 웅변이나 논리나 아주 sharp한 지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서 끌게 하는 게 아니예요. 나는 폴 틸리히 같은 사람의 설교를 들어보면 굉장히sharp한 이 시대를 꿰뚫고 보는 그런 게 있어요. 그런데 과연 그 속에 예수님이 있느냐? 그건 별개의 문제더라고요. 칼바르트나 이런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이 거기 다 빨려들어가요. 위대한 사상가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도 아니고 예리한 지성을 갖고 있지 않지만 소박할지 모르지만, 따뜻한, 그리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격려해주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항상 거기 있어야 돼요. 이게 설교예요. 결국 예수님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설교 이전에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기릅시다. 설교의 깊이는 묵상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왜 우리의 설교가 화려한데.. 은혜가 안 되느냐.. 묵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으로부터 나오는 설교는.. 사람들이 들으면 금방 알아요. 옷도 비싼 옷하고 싼 옷보면 딱 알잖아요. 좋은 옷은 뭔가 좋아요. 선이 다르고, 질감이 다르고, 패션이 다르다고요. 그러니까 오리지널하고, 카피는 다르다니까요. 설교 딱 들어보면 ‘야, 저거 쉽게 말하는데 쉬운 게 아니구나!’ 그래요. 깊이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단순하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 격이 있구나, 저 사람은 무슨 철학자 얘기도 안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안 해도, 아 저 분은, 저 책을 다 읽었나보다..\\\\\\\' 그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거예요. 절대로 다른 유명한 사람 말 인용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고요. 성경의 설교의 깊이는 묵상의 깊이입니다. 저는 데니스 레인 목사님을 만나서 설교를 배운 사람 중에 하나인데, 늘 만날 때마다 어떻게 똑 같은 본문인데 저렇게 설교를 하나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분은 30년 동안 큐티를 했거든요. 목사님의 설교자의 제1과업이 큐티예요. 우리 두란노에 <생명의 삶>이 있고 <말씀 묵상>이 있어요. 초신자들은 <생명의 삶>을 좋아해요. <생명의 삶>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냐, 보니까 본문 때문이 아니라 예화 때문에 좋아하더라고요. 그거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음식 떠먹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자기가 만들어 먹는 거예요. 그런 분은 <말씀 묵상>을 더 좋아해요... 새벽기도 안하는 날은 제일 행복한 날 아닙니까? 그런데 새벽기도 하는 날은 더 행복한 날이예요.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말씀을 전할 사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everyday 묵상, 새벽기도는 결국 묵상이에요. 묵상된 말씀을.. 그 신령한 아이디어들을.. 그날 그날 자꾸 던져드리는 거죠. 그러다보면 적용하는 훈련이 자기도 모르게 자꾸 되고 말씀을 보고 뽑아내는 훈련이 되는 거예요. 대개 목회 2~30년 하신 분들은 웬만한 주석은 다 읽지 않았어요? 뭐 한번쯤 읽어야 되겠죠. 웬만큼 대충 되지 않습니까? 그 다음부터는 주석은 나를 방해해요. 왜냐하면 고정관념을 심어주기 때문에, 그 이상 생각을 못 넘어가게 만든다고요. 주석이라는 것은 내 생각이 맞았나/ 안 맞았나를 검증해주는 하나의 울타리 같은 역할을 해줄 수는 있지만 설교는.. 성경 읽고.. 자기가 묵상하고.. 자기가 은혜 받아야 됩니다. 메인 메시지는 성경하고 싸워야 돼요.. 일대일로.. 주석책이 아니라! 저는 주로 토요일 같은 때는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만 설교준비를 대충하면 제 아내에게 practice를 합니다. 그게 토요일 저녁의 제 시간이예요. 서론은 이렇게 잡았고, 본론은 이렇게 잡았고, 결론은 이렇게 잡았고.. 이렇게 이렇게 한다. 그러면 여자는 센스가 있어요. 그래서 그걸 딱 잡아내요. ‘가지가 너무 많은 것 같다.’ ‘또 이건 너무 하나에 치우친 것 같다.’ 그런 코멘트를 받을 수가 있어요. 목사의 설교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분은 불가능합니다. 잘못했다 말하기도 어렵고.. 잘했다 말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부인이 제일 좋아요. 부인에게 설교를 검증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서 부인으로 하여금 설교를 도와줄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좋은 방법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약점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인이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지적해주면.. 제가 자존심이 상해서 안돼요. 어려워요. 그래서 여러분의 사모님들을, 설교를 잘 평가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일이 또 참 중요합니다. 그러면 묵상된 메시지 말씀을 어떻게 설교로 끌고 갈 것이냐? 결국은 설교란.. 내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고 나면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 이런 인상이 있어야 해요. 가능하면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야’ 해요. 그러니까 너무 설교를 화려하게 하면 누가 나타날까요? 그 사람이 나타나죠. ‘말 잘하네!’ 이런 말 들으면 안돼요. ‘와~저사람 화술 좋다’ 이래도 안돼요. 하나님이 생각나야 되고,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이 설교죠...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OMC 주제강의(10)/ 비전과 영적 지도력/ 행2:17/ 하용조 목사/ 2009-07-02
OMC 주제강의(10)/ 비전과 영적 지도력 행2:17 ◑기독교 잡지에 대한 비전 제가 영국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저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꿈을 주시고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곳에 처음 갔을 때는, 하루에 보통 12시간씩을 잤습니다. 자도 자도 끝이 없어요. 한 3달, 6달 동안 잠만 잔 것 같아요. 잠이 그렇게 부족했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잠을 그렇게 계속 자고 나니까 회복되기 시작 했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저를 회복시키시고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꿈을 주셨는데 이것은 마치 엘리야가 로뎀나무 밑에 있었던 그런 시간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그 때부터 영국에 있는 책방을 돌아다니면서, 잡지에 대한 꿈을 가졌습니다. ▶연예인교회 목회할 무렵부터, 제게는 두 가지 도전이 있었는데 하나는 한창기 씨가 했던 잡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잡지가 저에게 굉장한 자극을 주었어요. 예전에는 그 잡지가 다른 형태로 나왔죠. <샘이 깊은물>로. 그 전에는 <뿌리 깊은 나무>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잡지를 만들 수가 있을까? 그 잡지를 보면서 그렇게 부러웠어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삼류 같아요. 잡지를 봐도 삼류고. 신문을 봐도 삼류고. 과거의 부흥회 포스터도 얼마나 촌스러워요. 그렇게 한국 사회를 리드했고 학교 교육을 선두 했던 기독교가 어느새 삼류가 됐더라고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다음에 제게 자극을 줬던 잡지가 이해평 씨의 <문학사상>이라는 잡지였어요. ‘문학을 가지고도 그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고 저런 매력을 줄 수 있구나... 왜 기독교는 이런 잡지를 못 만들까?’ 그래서 연예인교회 목회 시절에, 제가 잡지를 하겠다 하고 잡지회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허가가 나질 않아요. 그 당시에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또 교인들이 제가 잡지 만드는 걸 이해를 못해요. 반대를 하더라고요. 우선 허가가 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엔 할 수 없이 포기를 하고 말았어요. ▶그리곤 영국엘 갔어요. 그런데 그 꿈이 사라지질 않더라고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잡지 자료를 모으고 있는 거예요. 3년 동안. 그걸 가지고 84년에 귀국을 했어요. 아무리 정부 관계를 다 쑤셔봐도 잡지 허가는 100% 불가능해요. 그렇지만 저는 잡지 자료를 계속 모으고 있었어요. 그 때 아주 소중한 자료를 25파운드 주고 산 게 있어요. 그 잡지가 바로 <빛과 소금>의 영원한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화보가 한 10년 나온 게 있는데.. 바로 그 자료에서 나온 거예요. 그 잡지는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어요. 폐간되었기 때문에. 아주 소중한 자료를 그래서 얻은 거예요. 한국의 모든 고고학적인 자료들을 <빛과 소금>을 통하여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잡지 덕분이었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들겨 봐도 잡지발행 허가는 나지 않았지만 저에게는 잡지 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리고 영국에서 돌아올 무렵에 제 마음에 또 무슨 확신이 있었냐하면 QT해야 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제가 영국에서 얻었던 보물은 QT였어요. 그곳에 QT하는 사람들, QT자료들.. 그 비전은 그 당시에 미국에는 없었어요. 영국은 있었어요. ‘나는 가서 QT를 시작해야 된다. 우리 한국 교회에 이 큐티 자료를 다 나눠줘야 되겠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저는 그렇게3년 동안 자료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제 얘기를 다 듣더니.. 정부의 관계 책임자인데.. 잡지 만들어 보자는 거예요. <빛과 소금>잡지를 만들기 위해서.. 그런데 기독교만 허가를 줄 수 없대요. 그래서 가톨릭에 ‘생활 성서’를 허가해주고, 불교에 ‘금강’이란 잡지를 허가해주는 조건으로 <빛과 소금>을 등록을 해 줬어요.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그 후로 몇 년 동안은 또 잡지 등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딱 한번 <빛과 소금>을 위하여 하나님이 잡지를 주시더라고요. 저는 그때 ‘꿈, 비전은 막을 수가 없구나...불가능을 가능케 하는구나,’ 그런 것을 그 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저희 두란노에 잡지(정기간행물)를 13개 만듭니다. 어느 신문사도 어느 재벌도, 잡지 13개 하는 회사는 없습니다. 제 마음에 불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매일 줘야 되겠다는 그 생각 때문에... 저희들은 어린이 잡지는 한 달에 천 만원씩 손해 봅니다. 손해 보더라도 내 마음을 막을 길이 없어요. 유치원 아이들 큐티도 만들고, 초등학교 1, 2학년을 위한 큐티책자도 만들고, 중고등부 학생을 위한 큐티도 두 개를 만들고, 일반인을 위한 <생명의 삶>도 만들고.. 또 목사님들을 위한 큐티책자도 또 만들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거든요? 다 손해 보는 일이에요. 영어로 라는 큐티책자를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서 일본어판으로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서 중국어판. 중국판도 하나만 만들면 좋을 걸 ‘본토 중국판’ 대만에서 볼 수 있는 대만판.. 이렇게 따로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러시아어 큐티 책자도 만들었어요. 지금은 스페인어로 큐티책자를 만들고 싶은 충동을 금할 길이 없어요.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이 생명의 양식을 번역해서 줘야 되겠다... ▶이게 꿈이더라고요. 하나님이 주신 꿈. 손해를 봐도 못 말리고요. 저희가 몇 가지 ‘두란노 사업’ 정리하면 금방 (두란노가) 흑자 나요. 그래도 못해요. 내가 죽으면 죽었지 못해요. 이건 해야 되니까. 손해봐도 해야 되니까!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성경을 읽게 하고 싶은 그 열망이 내게 있으니까. 지금도 우리 두란노는 고민하고 있어요. ‘잡지 몇개를 정리하라. 너무 적자가 많으니까.’ 스텝들은 다 결정해놓고서 저도 동의를 했어요. 그런데 집에 가면 마음이 허락이 안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지 모든 민족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자. 매일매일이 자료들을 만들어 주자.\\\\\\\' 아마 제가 믿기에는 곧 스페인어 큐티책자도 나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에요 꿈! 그게 비전이에요. ▶여러분 지울 수 있는 건 비전이 아니에요. 포기할 수 있는 건 비전이 아니에요. 지울 수 없는 것, 버릴 수 없는 것, 죽어도 하는 것. 그게 꿈이에요. 땅의 꿈이 아니에요. 하늘의 꿈이에요. 내가 개인적인 야망을 가졌다면 그런 꿈을 왜 꿨겠어요? 저는 이 건물을 지으면서 그렇게 마음이 편해요. 왜 그런줄 아세요? 이 건물은 누군가 내 다음 사람이 쓸 거니까. 내가 쓸 건물이라면 난 부끄러워 했을 꺼에요. 그러나 이 건물은 누군가가 나의 다음 사람이 이것을 써야 되기 때문에 소중하게 만드는 거에요. 아낌없이 만드는 거에요. 다음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그러니 마음에 자유가 있어요. 기쁨이 있어요. 잘 해주고 싶은 거에요. ◑보니까.. 비전이 생겼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마치고 서울에 돌아올 때 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스위스의 융프라우를 갈 기회가 있었어요. 눈 꽃핀 설경. 그 높은 산. 제 아내와 아이와 함께 톱니바퀴 기차를 타고 융프라우 산 꼭대기까지 쭈욱 올라가 봤어요. 제 아내는 숨이 차서 끝까지 가기를 굉장히 힘들어 했어요. 그렇지만 얼음 빙산을 넘어서 정상 근방까지 기차를 타고 쭈욱 올라가 보니까 밑에서 상상할 수 없는 그 설경이 한눈에 쫙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렇습니다. 그걸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은 다르더라고요. 융프라우 높은 계곡에 설경이 전개되는 것을 설명하는 사람하고 그것을 본 사람하고는 달라요. ▶저는 영국에서 존 스토트를 만나는 축복이 있었어요. 그분이 두란노처럼 만든 게 에요. 여러분 다 이렇게 본 게 있으니까 만들어요. ‘난 서울 가면.. 이것보다 더 좋은 걸 만들어야지’ 그렇게해서 탄생된 것이 <두란노>에요. 존 스토트가 만들었던 시티 한 복판에서, 많은 전문인들을 훈련시켰어요. 그 존 스토트의 ‘London institute’를 보고 ‘오~ 이렇게 하는거구나!’ 제 마음에 두란노의 꿈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저는 짐 그래함의 2부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교회보다 크기는 반밖에 안되죠. 조그만 예배당이에요. 입추의 여지가 없이 사람들이 손을 들고, 젊은이들이 아니에요. 50대 60대들이 손을 들고 찬양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을 보고 ‘이게 교회지‘ 교회에 대한 환상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제가 온누리 교회를 이만큼 끌고 갔었던 것은 그 때 느꼈던. 어쩌면 실물보다 제가 더 느꼈을지 몰라요. 실제론 안 그런데 제가 너무 감격해서, 한 10배쯤 상상해서 그런 예배를 드렸을 거에요. 시간을 제한하지 않는 예배. 그 사람들은 예배를 드릴 때 먼저 사회자가 나와서 시편부터 먼저 선언을 해요. ‘다같이 묵도합시다!’가 없어요. 거기 오신 분들은 이미 30분전에 꽉 들어차 있어요. 얼굴이 상기된 채, 천정이 떠나가도록, 찬양을 드려요. 저는 그런 모습 처음 봤거든요. 찬양을 해요. 그리고 목사님이 강단에 서자마자 설교를 하는데 1시간 쯤 해요. 너무 좋으니까 사람들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 설교에 빠져 들어가요. 설교가 끝나면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요. 박수치고 춤을 추고 어느 날 성만찬 하는 걸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때 제가 느꼈던, 경험했던 것은 예배였어요. 성만찬을 드리면서 성령이, 예수님의 보혈이, 십자가가 임재하는 걸 보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참여했던 그러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온누리교회를 왜 여기까지 끌고 왔냐하면 그런 것들이 다 내 머리 속에 있기 때문에, 그 비전이, 그림이 있기 때문에.. 이런 교회를 만들어야지 그냥 기절할 만큼 좋은 교회를 만들어야지. 예배드리다 기절해 버리면 좋겠다...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4절을 부르는지 5절을 부르는지. 저는 경배와 찬양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미친 사람들 같아요. 2시간 3시간.. 저는 하용인 선교사의 별명을 ‘stop하지 않는 공‘이라 그래요. 계속 뛰어요. 밤을 꼴딱꼴딱 새요. 그런 걸 보면서 ‘찬양은 저렇게 하는거지..’ 과거에 우리 한국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이 ‘이게 무슨 찬양인가?’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저는 연예인 교회 시절에 한 설교를 잊지 못해요. 제 아내가 다니던 신학교 학장 ‘제임스 스튜트 박사’가 왔어요. 아주 훌륭한 분이세요. 그분이 한국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데 자기 졸업생이 제 아내이기 때문에 제 아내 하나 만나려고 방학 때문에 학생들을 찾아다니는 동안에 서울에 왔어요. 그런데 조건이 있다, 호텔에서 안자겠다는 거예요. 너희가 사는 집에 자겠대요. 그때 우린 결혼 초기였기 때문에 방 한 칸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아침에 일어나니까 일찍 일어나서 소파에 앉아서 편지를 쓰더라고요. 그게 큐티인 줄 몰랐어요. 난 편지 쓰는 줄 알았어요. 그 사람이 거기서 큐티를 하더라고요. 뉴질랜드 바이블 칼리지에서는, 제 아내가 졸업했는데 아내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거예요. 매일 그걸 보고 살았기 때문에, 강해 설교를 보고 살았기 때문에. 우리 한국에 있는 목사는 강해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다 교리 설교만 들었지, 강해 설교를 듣고 자란 교인은 하나도 없어요. 그 분이 저희 연예인교회로 오셨어요. 마태복음5장을 가지고 설교를 해 주셨는데, ‘빛과 소금’을 주제로 설교를 했는데.. 그 때 그 설교가 얼마나 제게 감동을 줬는지.. 아직도 기억해요. ‘강해 설교는 이렇게 사람에게 충격을 주는구나!’ 그분이 그 때 제 사역을 전부 관찰하더라고요. 그는 2차 대전에 쓰던 것 같은 시계를 차고 구닥다리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는 아주 기분 좋게 지내다가, 떠나던 날 공항에서 저와 제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그 멘토쉽을 발휘하는 거예요. ‘내가 네 남편의 사역을 다 봤다. 두 가지를 말하더라고요. 네 남편은 갖춰진 것보다 소문난 게 많다. 그게 첫 번째 코멘트에요. 너무 유명해졌고 사람들이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빈 깡통 되기 쉽다. 지금 숨어라. 이게 첫 번째 그분의 충고였어요. 지금 당신 계속하면 내용 없는 사람 된다. 연예인 교회를stop하라는 거예요. 두 번째 영어를 너무 못한다. 지금 네 남편 영어를 가르쳐라. 일을 stop해라 건강 나빠진다. 오래 못 간다. 이렇게 일하다가는 오래 못 간다.’ 그 말이 맞았어요. 제가 그래서 간 부위를 다쳤어요. 이게 멘토쉽이더라고요. 참 좋은 선생님이었어요. 그리고 그 분은 5년 10년 만에 또 왔어요. 자꾸 우리의 사역을 점검 해 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저는 제가 교육받지 못했던, 우리 한국에서 지도받지 못했던 그런 참 좋은 선생님들이 계시는구나. 그런 것을 그때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비전이란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새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본 게 없으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땅만 보고 살다가 예수를 믿었다. 구원받았단 얘기는 ‘하늘을 보았다..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구원받은, 거듭난.. new world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비전이에요.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다 새 세계를 본 사람들이에요.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현재만 보지요. 비전이 없는 사람은 오늘만 있어요. 그러나 새 세계를 본 사람은 내일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만들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 광활한 생각과 꿈이 있기 때문에. 저는 온누리 교회라는 것은.. 예배라는 것은 이렇게 드리고 싶고.. 성만찬이란 것은 이렇게 하고 싶고, 설교 그러면 이 정도 수준은 가고 싶고.. 교인 그러면 이런 교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교회 시작하기 전부터 내 마음에 강렬하게 있었어요. 제 마음속에 이 그림이 있었어요. 화가는 그냥 마구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영감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붓을 들지 않습니다. 위대한 작가는 영감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펜을 들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목회가 왜 이렇게 지지부진합니까?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 열망과 꿈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은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교회 시작할 때 몇 가지 꿈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12가정이 시작했을 때 기도한 것은 ‘하나님. 2천명의 젊은이를 주십시오. 세계를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어떤 책에서 요한 웨슬리가 ‘3백명의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릴 사람을 주십시오, 그러면 세계를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라는 글을 읽다가 저는 온누리교회를 시작하면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2천명을 주십시오.’ 어느 날.. 2천명이 교회에 앉아 있더라고요, 10년 만에. 할렐루야! 여러분은 무슨 꿈을 꾸십니까? 개꿈 말고요. 망상 말고요. 허황된 야망 말고요.. 정말 예수님을 위한 예수님이 주신 그 꿈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잠을 못자고.. 그것 때문에 흥분하고.. ▶10년을 생각하는 사람하고, 100년을 생각하는 사람은 말도 다르고, 걸음걸이도 다릅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꿈은 무엇입니까? 잠 못 이룰 만큼, 밥을 못 먹을 만큼, 죽어도 그것을 해야 되는 그런 환상, 그런 꿈, 그런 비전... 바로 이것이 비전이에요. 비전을 가진것 만큼 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는 것만큼 갑니다. ▶비전을 받은 사람들은 가만있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본문 언젠가 여러분도 죽고 나도 죽어요. 제가 온누리 교회하지만 뭐 영원히 하겠어요? 언젠가 그만 두겠죠. 살면 얼마나 살고, 일하면 얼마나 하겠어요? 저 같은 경우는 개인적으로 제 황금기가 하나님이 건강하게 해 주시면 한10 년 되겠죠? 후회 없이 살아야 돼요. 미치도록 살아야 돼요. (1997년 설교) 계산하고 살지 마세요. 따지고 살지 마세요. 합리적으로? 그럼 합리적인 인간밖에 안돼요. 상식을 무시하란 말이 아니라.. 상식을 초월하세요. 내 생애를 어떻게 살 것인가? 120명.. 성령과 바람과 불이 임했을 때.. 그들은 방에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들은 뛰쳐나갔어요. 고생은 무섭지가 않아요. 고통은 무섭지 않아요. 병도 무섭지 않아요. 돈 없는 것도 무섭지 않아요. 비전이 없는 게 불행이에요. 동물과 같습니다. 동물은 꿈을 갖지 않아요. 사람에게는 비전이 있는 거에요.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 주님을 전하고 싶은,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이 강렬한 열망이 있는 거에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전 ▶전 오늘 이것을 여러분에게 얘기하고 싶어요. 예수님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비전을 그분은 가지셨어요.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은 결혼할 틈이 없었어요. 예수님은 학교 다닐 틈도 없었어요. 그러나 3년동안 피곤에 지치도록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다 만나줬어요. 그 예수님의 꿈은 십자가에서 죽는 거에요. 난 여러분의 꿈도 이렇게 잘 죽는 꿈이 되길 바랍니다. ‘나는요.. 죽는 데 고통없이 죽고 싶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고통 있게 죽으면 어떻습니까? 꼭 곱게 죽어야만 합니까? 예수님만 기뻐할 수 있다면, 하나님만 기뻐할 수 있다면.. 돈 많으니까, 돈 여기 있으니까, 그건 누가 못합니까? 돈이 없어도 하나님의 집을 만들어가는 그 눈물과 고통과 아픔.. 그러면서도 그걸 기뻐하는 것. 그런 거죠. 롬8:35에, 어떤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이걸 막을 수가 없는 것이죠. ▶예수님의 비전..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있었고, 예수님의 비전.. 십자가에 죽는 것이 그의 비전이었어요.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죠.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죠. 성령을 받기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은 이런 생각들로 머리속에 꽉 차 있었던 거죠. 여러분은 무슨 생각에 꽉 차 있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우리 교인들을 철저하게 훈련이 안되면 못 떠나게 합니다. 제가 그걸 발견했어요. 훈련이 된 자만이 떠나요.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이 방법 밖에 없구나.. 이제는 양적인 교육보다는 질적인 교육을 시켜야 되겠다.’ 이런 꿈이 지금 제 마음속에 움직이고 있어요. ▶그리고 교회이름은 다를지 몰라도, 교파는 다를지 몰라도, 온누리와 같은 그런 꿈을 가진 동료 교회들을 많이 격려해 주고 만들어 주자 이거에요. 옥한흠 목사님 제가 참 좋아하기 때문에.. ‘형님! 이제 우리는, 우리 교회들은 목사님이나 나나 다 한계가 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 섬기십시다.’ 전 거기에 동의합니다. 그래요. 비전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리더라고 말합니다. 이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세워주셨다고 믿습니다. 지도자는 환경이 만들거나 노력해서 되어진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거예요. 무능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세워주시면 지도자에요. 여러분 목회자님 한분 한분은 하나님이 세워 주신 걸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꿈은 내 꿈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꿈이에요.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참된 지도력이란 지배력이 아니라 영향력입니다. 우리는 내 품안에 들어온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난 여러분의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영향력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안 만났어도 그게 영향력이에요. 한 사람의 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세워졌을 때, 완전히 비상사태에 빠진 한 국가가 살아날 수 있고요, 교회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변하면 교회도 변합니다. 그걸 아십시오. 절대 목회는 장로도 뭐도 교인도 아닙니다. 목사에요. 교회의 모든 책임은 나는 목사에게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것 이 어떤 의미든 우리 목사가 죽기로 결심하면 저는 안되는 게 없다고 믿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들어 쓰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둘 다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외적 성장보다 내적 성장에 더 치중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앞으로 또 외적 성장을 더 치중하는 시대가 오겠지요...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OMC 주제강의(8)/ 영적전쟁과 중보기도 사역/ 마16:18/ 하용조 목사/ 2009-08-12
OMC 주제강의(8)/ 영적전쟁과 중보기도 사역 마16:18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영적 전쟁의 실전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마 한동대 사건 우는 사자처럼 집어 삼키려고 하는 그런 경험들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교회치고 이런 경험을 안 한 교회가 없을 거예요. ◑1.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탄의 조롱을 당하고 세상에 의해서 약화되어 있지만 이 고백을 하셔야 됩니다. 주님의 교회는 절대로 사탄이 건드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권력도 흩을 수 없다!’ - 이것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교회의 힘이에요.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는 사람이고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배와 바다로 비유를 했습니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바다 위에 있는 배와 같습니다. 아무리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일어도.. 그 배는 흔들릴지라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배의 위기는 무엇인가? 물이 배안에 들어올 때입니다. 그럼 배는 가라앉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에 물이 배안에 들어오지 않게만 한다면, 어떤 풍랑에서도 배는 튼튼하게, 안전하게 항해를 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죄 많은 이 세상, 유혹이 많은 이 세상, 사탄이 득실거리는.. 바벨론 같은 음녀가 가득한 이 세상 한 복판에 들어와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고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언한 거에요. 이것이 교회에요. ▶교회의 특권 중에 하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다는 거예요. 마16:18 저는 목회자님들이 이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하면 할수록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교회가 어지러워요, 시끄러워요. 이상한 사람들이 난리를 쳐요. 쑥떡거려요. 패를 만들어요. 교회가 그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은 하루아침에 괜히 화를 내요. 좋은 일이 생기기 전에, 꼭 시험에 들어요. 마귀는 먼저 알거든요. 은혜 받을 줄 알고 미리 와서 탁탁 건드리잖아요. 얼마나 우리는 공격을 많이 받습니까? 그러나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이 믿음 하나만 가지고 기도하고 있으면, 정말 음부의 권세가 다 물러갑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에 산에서 기도하던 한 시절을 잊지 못합니다. 우리 친구들과 삼각산에 있는 어느 한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 때는 제가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 문제가 참 많았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원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그 기도원의 한 복판에서, 제단 밑 마루바닥에서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어요.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는데, 밤1시쯤 되었습니다. 갑자기 기도원의 앞에, 눈에 너무나 선해요. 크지도 않아요. 귀신들이, 숫자를 샐 수 없는 새까만 무리들이 창 비슷한 것을 들고 눈이 반짝 반짝하는 것 같았는데, 자글자글하면서 우리를 공격해오는 거에요. 그 기도원 안으로 들어오더라고요. 그렇게 안개가 오듯이 말이죠. 이 어두움의 세력들이 우리 기도하는 곳으로 방해하러 들어오는 거였어요. 쫙 들어오는데, 제가 그런 거 처음 봤거든요. 너무 놀래서 그냥 있는 소리 없는 소리를 다 지르고 기도한 거예요. 그러다 방언이 터졌어요. 마구 죽을 힘을 다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왜 그런지 모르죠. 아 그런데도 안 물러나요. 창문으로 들어오고, 문으로 들어오고, 이 성전 안으로 어두움의 세력들이 쫙 들어오는데 그 때 저희들이 기도하는 데까지 오더라고요. 그 세력들이 점령을 하더라고요. 죽을 힘을 다해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가자, 졌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더니 빠지는데.. 올 때는 점점 점진적으로 왔는데 갈 때는 썰물 빠지듯이 쫙 가버리더라고요. 산으로 그 무서운 세력들이 다 빠져나가는데.. 그러고 나니까 휴~(안도의 한숨) 찬송이 내 몸 속으로 들어오고, 기도가 들어오고 저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때 그 하나의 경험이 이 영적 전쟁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교회라고 마귀가 안 들어오냐, 천만의 말씀! 교회도 기도 안하면 마구잡이로 들어와서 흔들어요. 여러분 성경책을 머리 밑에다 놓고 자면 귀신이 안 와요? 그거 상관없어요. 목사라고 안 와요? 상관없어요. 목사라는 타이틀이 있으면 마귀가 안 와요? 더 잘 오지요. 평신도보다 열 배 더 오지요. 여러분 하나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니까, 마귀는 굉장히 전략적이에요. 사탄은 언제나 우리보다 한 수 앞서 있어요. 교회가 은혜 받으려면.. 미리 와서 진을 치는 거예요. ▶마귀는 베드로를 찾았어요. 베드로를 얼마나 선동한 줄 아세요?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마귀가 너를 밀 까부르듯 타작했다.’ 베드로는 거의 넘어갈 뻔 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해 주셔서, 베드로는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마귀가 선택한 사람은 가룟 유다였어요. 이게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영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두 영역을 공격합니다, 1) 첫째는 가정입니다. 가정이 파괴되면 그 부부 사이에 앙금이 생기게 하고 갈등이 생기게 하고 그래서 거기에 여러 가지 불륜을 만들어 주고, 상처를 주고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든지 부부가 일단 헤어지게 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 좋은 기억 모두를 다 깨뜨리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는 부부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공격한다는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2) 또 하나는 교회를 깨는 거예요. 일단 교회가 깨지면 제일 마귀가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목사, 장로들이에요. 그것은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에요. 거기에 마귀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 교회가 깨지고 싸우고 상처받는 이유 중에,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없습니다. 신앙적인 이유 있어요? 없어요. 교리적인 이유 있어요? 아니에요. 다 시시한 감정싸움이에요. 자존심 싸움이고요. 말은 거창하지요. (거창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수(교)’하고 ‘기독(교)’하고 싸우니까. 그 차이에요. 사실은 같은 건데 말입니다. 그냥 교회가 갈라지면 교인들은 유리방황해요. 목사, 장로 싸우는 걸 보고 교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가기 시작해요. 영적인 방황처럼 큰 방황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몰라요. 싸우지 말고 조용히 떠나세요.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여러분이 주도권 잡지 마세요. 여러분이 싸우는 동안 교인들은 말할 수 없이 상처를 받는 거예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비겁해서 떠나는 게 아니에요. 장로님이건 목사님이건.. 싸움에 개입하지 마세요. 여러분 오늘날 마귀는 우리의 가정을, 부부를 이혼 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앞으로 사회는 이혼이 더 많아질 거예요. ▶그리고 마귀의 아주 가장 큰 전략은 교회를 깨버리는 거예요. 상처 줘서 깨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들이 목회자로써 주님의 교회를 양육할 때, 이런 말을 기억해요.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리라.’ 목자 하나가 상처받고 흩어지면.. 양들은 다 흩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용서와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목회자님들이나 지도자님들이나 장로님들이 꼭 알아야 될 것 중에 하나는 공의를 요구하지 마세요. 왜 싸우냐? 공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래서 문제에요. 공의가 틀린 게 아니에요. 내가 공의롭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공의가 완전하지 못한데 문제가 있어요. 여러분 교회에서 할 일은 공의가 아니에요. 사랑이에요. 정말 사랑하면 공의가 이루어져요.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교회 본질이지, 공의를 부르짖는 게 교회 본질이 아니에요. 공의는 언제 오는가요? 사랑할 때만 공의가 완성 되요. 용서할 때만 공의가 완성이 되요. 부정을 덮어 주라는 뜻이 아니에요. 잘못을 덮어 주라는 뜻이 아니에요. 용서하셔야 합니다. 기다려야 돼요. 관용하셔야 돼요. 교회에서 그것을 보아야 돼요. 이 때 교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마귀는 예수 이름으로 떠나요. 말씀을 전하면 떠나요. 마귀 쫓는 방법 간단해요. 그러나 마귀가 궁극적으로 떠나는 것은 사랑이에요. 사랑하면 귀신은 떠나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 이름으로 면하노니 귀신아 물러갈지어다.’ 해도 나갔다 또 들어오는 걸요. 여러분 귀신 많이 쫓아봤잖아요. 제가 옛날에는 귀신을 얼마나 많이 쫓아봤는지 몰라요. 요즘은 그렇게 안 해요. 쥐구멍을 막으라는 것입니다. 귀신 쫓기 이전에. 제가 결혼해서 얻은 곳이 어느 셋방집 이었는데요, 천정에서 밤마다 쥐가 올림픽을 해요. 그것도 신혼인데. 그래서 자다가 견디다 못해서 빗자루로 천정을 탁 친다고요. 그러면, 십분 있으면 또 와글와글하는 거예요. 밤새도록 이걸 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목회하지 말라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쥐가 천정에 들어오는 구멍이 있다고요. 그걸 막으면 되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갈지어다!’ 그러면 일곱 귀신이 더 오는 걸. 그걸 어떡하시겠어요? 매일 들어와라 나가라 하시겠어요? 아니에요. 본질을 해결해야 되요. 교회가 거룩하고 순결해야 되요. 말씀의 권위가 있어야 되요. 똥이 있는 데는 파리가 있기 마련이에요. 파리 쫓지 말고 뭐를 치워요? 똥을 치워요. 그럼 간단한 거예요. 방을 깨끗하게 치워놓으면 벌레가 못 들어온다고요. 벌레 잡으려고 그러지 마세요.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에요.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무장하고 겸손하고 욕심 부리지 말고 정말 주님의 뜻이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어떤 시험이 와도 문제가 없는 거예요. 어떤 폭풍이 몰아쳐 와도 문제가 없을 줄로 믿습니다. ▶영적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엡6:12에 보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벧전5:8에 ‘헌신하라 깨어라 너희 믿음이 대저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느니라.’ 여러분 성경의 말씀 가운데 ‘깨어라’는 말씀이 참 중요합니다. 근신하라 경계하라. 약4:7절 말씀 알지요? ‘마귀를 대적하라.’ 파수꾼. 깨어있어야 합니다. 목사는 깨어 있어야 됩니다. 양들이 잠을 잘 수 있도록. 그게 목자의 역할이에요. 목자가 졸거나 외출하면 안 돼요. 우리는 양 떼들을 보호하여야할 줄 믿습니다. 왜냐면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집어 삼키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영적 전쟁은 결론이 나 있다는 것을 여러분과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이미 이것은 끝난 거예요. 사탄은 이미 십자가에서 패배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여러분이 예수 이름으로 나갈 때 연약한 성도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마귀는 울며 통곡하며 떠나는 거예요. 여러분 모든 성도는 귀신을 쫓아낼 능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귀신을 쫓아낼 능력을 이미 가진 그런 곳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십자가에서 마귀의 세력을 발로 밟았습니다. 머리를 찍었습니다. ◑2. 성도들에게도 사탄의 권세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목사에게만 준 게 아니에요. 저는 저희 성도들이 저한테 와서 기도를 부탁하면 당신에게도 그 능력이 있다는 것을 항상 가르쳐주고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상담할 때, 저 분이 무슨 얘기를 해오면 제가 그 사람한테 무슨 대답을 할 지 금방 알죠. 성경 읽어주면 딱 좋죠. 그런데 안 읽어주죠. 웃기만 하죠. 그럼 막 얘기를 합니다. “어떡하면 좋죠?” 쉽게 대답을 안 해 줘요. 왜요? 대답은 누가 알고 있으니깐. 그 사람이 알고 있으니깐.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대답할 때까지 유도해 주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대답을 그 사람이 합니다. “맞아요. 당신 입으로 말했네?” 그럼 그 사람은 살아납니다. 내가 가르쳐주면 항상 나한테 옵니다. 문제가 생기면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또 나한테 오는 것입니다. 평생 병신 만드는 거예요. 그 사람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게 더 중요해요. 당신이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인들이 스스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그 능력을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해요. 성도들 자신이 귀신을 쫓아내며 마귀의 세력을 무찌를 수 있는 영적 권위가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3. 세상 끝날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끝까지 붙잡아주실 것입니다. 나의 오른 손을 붙들어 주실 것이며, 나의 떨리는 무릎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끝장이에요. 사람 두려워하지 마세요. 누구든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내가 약할 때 더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 우리가 너무 고통에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이 깊을수록 하나님은 더 가까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목회에 하나님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목회에 먼저 이런 선언을 하십시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마귀가 건드릴 수 없다” 라는 사실을 선언하십시오. ▶주님의 재림으로 사탄은 완전히 패배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됩니다. 마귀는 패배했지만 다 끝난 것은 아니에요. 따라서 믿음이 필요한 거에요. 다 완성되었다면 믿음이 뭐 필요하겠어요? 다 완성되었지만 아직 주님의 재림 때까지 마귀는 제한적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적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already, not yet 그러나 어떤 악한 세력도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는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이 믿음을 선포하시고, 여러분이 소유하시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심판 주로 오실 때, 역사가 완성될 때, 그때 사탄은 완전히 끝납니다! ▶온누리와 한동대학이 약 2년 동안 참 엄청난 고생을 했어요. ‘온누리를 사랑하는 성도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교인들한테 블랙메일(협박 편지)을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 몰라요. 전국에 만 통을 보내고 안기부, 감사원, 교육부, 검찰 안 보낸 데가 없어요. 그 중에 제가 마약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그러나 두려워할 것 없어요. 그런 일들은 여러분도 겪는 거예요. 여러분도 겪을 수 있어요. 그런데 두려워하지 마세요. 일단 그런 일에 말려들고 두려워하면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일들은 앞으로 우리가 목회하는데 계속해서 파도처럼 부딪힐거에요. 파도나 폭풍은 나쁜 게 아니에요. 고생스럽지만 배는 빨리 갑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고난을 겪고 나면 하나님이 더 잘 보여요. 더 성숙해지고 더 마음이 커지고..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4. 모든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서 선포하고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마귀를 상대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상대하십시오. 마귀가 여러분을 덮칠지라도, 그리고 마귀한테 약점 잡히지 마십시오. 그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영적 전쟁 집회를 합니다. 일단 성령 사역이 시작이 되니까 성령 사역을 선포하면 귀신들이 많이 옵니다. 그리고 교회에 정신병자들이 많이 와요. 이상하게 사람들이 저희 교회도요, 한 2년 동안 별별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그리고 아주 힘들게 해요. 너무 시험 들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져요. 성령 사역을 하고나니까, 영적 전쟁 집회를 해야겠더라고요. 영적 전쟁 집회의 주제는.. 사탄의 세력을, 정체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을 선포하고 그리고 담대히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그런 그리스도의 승리를 개선가를 부르는 동안 만드는 삼일동안의 집회에요. ▶부흥 강사 중에 제일 좋은 부흥강사를 소개해 드릴께요. 여러분 자신이에요. 다른 분 와봐야 자기보다 잘 해도 문제고, 못 해도 문제에요. 여러분 자신이 없으세요? 그냥 금식하고 하세요. 처음에 우리 교회에서 제가 부흥 강사를 했습니다. 금식하고 했어요. 금식하면 왜 좋은 줄 아세요? 일단 불쌍히 여기거든요. 실력 없으면 금식하십시오. 그러면 설교 듣기 이전에 은혜를 먼저 받아요. 그렇게라도 자기 교인을 사랑하면, 정말 사랑하면 부모가 주는 밥이 제일 좋지요. 호텔에서 먹는 밥이 뭐 좋나요? 호텔에서 먹어보세요. 열흘 먹으면 질린다고요. 그냥 집에서 찬 밥 말아가지고, 멸치 볶아 먹는 게 최고로 좋은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부흥 강사가 되세요. ▶영적 전쟁과 성령 사역과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동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교회의 탄생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므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직분자 중에, 성령 세례 받지 않은 분을 교회 직분자로 세우면 안 돼요. 사고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오래 나오면 뭘 시켜요. 헌금 많이 하면 시킨다고요. 그렇지 않아요. 교회는 영적인 조직이에요. 영적인 사람이, 영적인 일을 하는 거예요. 구원의 확신이 있더라도, 성령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없이 어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 사람은 다 자기 뜻대로 한다고요. 자기 생각대로 교회를 끌고 갈려다가 그것이 안 되면 신경질내고 화를 내는 거예요. 여러분!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따라서 교회는 이 성령님을 강조해야 되요. 그런데 성령님은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성령 사역을 잘 못하면 성령 운동이 되요. 운동이 아니라고요, 이것은 성령님이 프로그램이 아니에요.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고, 성령님이 예수님이에요. 모든 프로그램에 하나님의 임재, 성령님의 임재, 이것이 있도록 하는 거예요. 온누리 교회가 성령 사역했더니 성령 사역 프로그램이 뭐냐고 묻더라고요. 그런 거 없어요. 성령 사역 프로그램 없다니까요. 성령님이 하시는 거죠. 이때까지 내가 결정하다가 지금은 누가 결정하도록? 성령님이 결정하도록 하는 마음의 태도일 뿐이에요.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어요. 찬양을 해도.. 성령님이 찬양하도록 내 마음을 거기에 드리는 거예요. 성령으로 찬양하는 것이죠. 모든 프로그램이, 모든 목회에 그분이 개입하고 그분이 움직이고 그 분이 인도하도록. 회의할 때도, 이 결정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결정인가? .. 그런 일에 민감해집니다. 그렇다고 자, 지금부터 성령님의 인도함을 기다리는. 그런 게 아니라고요. 나의 태도의 변화에요. 생각의 변화에요. ▶사도 바울이 3차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 가서 말한 것을 여러분이 주의하여 들으십시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그 사람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 질문은 여러분들에게 해야 될 사람이 많아요. 예수님은 잘 믿어요. 십자가와 부활은 열심히 주장해요. 그런데 성령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에요. 성령님 안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제한하고 있을 뿐이지... 자기 식으로 믿고 있을 뿐이지... 어떤 신앙(교리)의 이름으로 믿고 있을 뿐이에요. ▶저는 기본적인 원칙이 성경에 있는 것은 다 인정합니다. 저는 방언을 믿어요. 성경에 있으니깐. 간단합니다. 예언 믿어요. 성경에 있으니깐. 방서 난 몰라요. 성경에 없으니깐. 방언으로 글 쓰는 게 있는지...있다 그래도 난 안 믿어요. 성경에 없으니깐. 여러분 성경이 가는 것만큼 가고 성경이 말하는 것만큼 말하세요. 그러면 틀림없습니다. 이해되건 안 되건 간에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다 믿으세요. 다 인정하세요. 귀신이 있어요. 성경에 있으니깐. 성령님의 역사들이 있다고요. 나는 5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것을 믿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깐. 우리 주변에 극단적인 성령론을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귀신론도 어느 모처에 가면 성경보다 귀신을 더 잘 압니다. 이게 문제에요. 저는 다르게 비판하지 않아요. 성경을 지나쳤다는 거예요. 토착적인 귀신론까지 다 끌고 왔거든요. 즉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요. (그렇지만 성경보다 지나친 것은, 저는 안 믿습니다.) 성령 사역을 목회의 본질적 사역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인정하시고 그 분을 앞세우고 그분께 순종하고 그 분께 리더십을 드리고 그 분께 모든 것을 의지해 보십시오. 망하는 것 같으나 안 망합니다. 교회 쫓겨날 것 같으나 안 쫓겨 나갑니다. ▶제가 건강이 나빠져서 연예인 교회에 사표를 쓰고 목회를 할 수 없어서 영국으로 가려고 할 때에 (저희 멘토가 한경직 목사님이셨는데) 제 아내랑 같이 찾아 뵈었어요. 그 분이 저에게 아주 간단하지만 좋은 충고를 해주시더라고요. 본인이 프린스턴에 있을 때, 폐병에 걸려서 피를 토하던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내가 그 때 피를 토하면서 프린스턴에서 공부하던 그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영락 교회를 목회를 (잘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북한에서 피난 나온지 알았으면 (시작을) 안했습니다. 잠깐 한 달만 피신하자고 했던 것이.. 영영히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적 상황가운데서도.. 신비하게 인도하신다는 뜻인듯.. 그러니 염려말고 떠나시라?) 그분은 저에게 이런 값진 교훈을 주었어요. 연예인 교회를 사임해야 될 무렵에, 그 교회를 보낸 분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 떠나면 안 됩니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두 가지 조건. 교인이 만장일치해서 가십시오 하면 가래요. 두 번째 목회할 건강이 없으면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보고 연예인 교회를 떠나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더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빈 손으로 가라고 해요. 기대하지도 말고 가래요.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래요. 여러분, 교회를 떠날 때 어디를 보장받고 떠나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아무 보장이 없고, 누가 나를 부른데도 없어도. 그게 하나님의 인도죠. 내가 계산하고, 사람 만나서 다 작업해 놓고, 뒷거래 해놓고 가는 것이 무슨 믿음이에요? ▶성령님의 임재와 기름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저는.. 회중에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요. 어느 날, 우리가 집회를 하는데 기도를 해요. 하는데 한참 통성 기도를 하는데 한순간에 업그레이드 하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성령이 회중 속에 바람을 확 불어 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기도 소리가 확 트여요. 사람들이 막 생기가 돌고 기도가 살아 있고 움직이고 막 역사가 막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 기도를 사모하세요. 성령의 임재가 있는 그런 설교를 사모하세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그런 (통성)기도를 사모하세요. 육신적인 기도는 밤낮 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피곤하고요, 거기가 거긴 것 같은데 매일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요. ‘아멘, 할렐루야’ 소리 크다고 성령님이 임하는 거 아니에요. 조용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내 안에 흘러넘치고, 예배에 흘러넘치고 설교에 흘러넘치고, 심령에 흘러넘치고.. 그래서 조용히 우는 거예요. 그렇게 눈물이 안으로 자꾸 흐르는 걸 경험해야 되요. 눈물을 흘리면 씻어져요. 전 예수 처음 믿을 때 사람에게 그렇게 콧물이 많다는 걸 몰랐어요. 나와도 나와도 끝이 없는 거예요. 눈물, 콧물 다 빼야 됩니다. 그래서 많이 운 사람은 얼굴이 순해 보여요. 울고 나니까. 독기가 좀 빠져야 돼요. 우리 목사들 얼굴에 독기가 좀 많아요. 하도 힘이 들어서 그걸 우리는 몰라요. 얼마나 우리 목사들이 상처가 많고 고통이 많고 말 못할 사정이 많아서 얼굴이 다 굳었다고요. 어린이 같이 그런 얼굴들이 참 없어요. 심각해요. 우리들의 얼굴들은 돌부처 같고... 하용조 목사(서울 온누리교회)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 사55:1-17/ 한경직 목사/ 2014-08-23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 사55:1-1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 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五十五․六-七)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여기 때라고 하는 말이 두 번 거듭해서 나옵니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 가까이 계실 때,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 三장 一절에 보면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고 우리에게 교훈 하여 주십니다. 사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공부할 때가 있습니다. 사업도 할 때가 있습니다. 봉사도 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운동도 할 때가 있습니다. 일도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은 옛날부터 천시(天時)란 말을 썼습니다. 하늘의 때라 하는 말입니다. 이 천시를 바로 포착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고 사업에 성공을 할 수가 있고 학업에 큰 이룸을 얻을 수 있고 국가에 부강(富强)을 가져올 수도 있으며 민족을 중흥케 할 수도 있다고 우리에게 교훈 하여 주신 것입니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옛날부터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교훈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기회라고 하는 것을 의인화해서 그림을 그릴 때에 그 앞이마에는 털이 많이 났지마는 뒤에는 대머리가 되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그것은 기회라고 하는 것은 쉽게 잡을 수가 있지마는 한 번 지나간 후에는 다시 잡을 수가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파사의 오마라고 하는 유명한 분은 돌아오지 않는 것에 넷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뱉은 말, 쏜 살, 지나간 생활, 잃은 기회」라고 했습니다. 옛날 영국 색슨의 어떤 왕이 자기에게 반역하는 성을 점령하라고 그날 밤에 큰 촛불을 성문 위에다 켜 놓고 여러 성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누구든지 촛불이 꺼지기 전에 내게 항복을 하면 다 용서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촛불이 꺼진 후에는 다시 용서해 주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실행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데나 사업을 성취하는 데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나 할 것 없이 천하 만사에 시간적 제한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천시가 잇습니다. 촛불이 꺼지기 전에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귀한 영혼의 구원, 영생을 얻는 것도 시간적 제한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천시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십니다. 언제나 계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가까이 게실 때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일생을 흔히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인간 생활의 四기 가운데 청년 시대는 특별히 하나님을 만날 만한 시기입니다. 물론 유년 시기에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라나 유년 시기는 너무 어려서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을 다 깨달아 알기 어렵습니다. 물론 중년 시대에도 만날 수 있고 만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중년 시기에는 그 마음 밭 위에 세상의 재화나 욕심이나 가시덤불이 너무 많아서 진리의 말씀을 듣기는 듣고 싹이 나기는 나지마는 열매를 거두는 이가 적다고 말씀했습니다. 노년기에는 그 사상과 습관이 너무 굳어져서 마음 밭이 거의 길바닥 같아서 생명의 말씀을 듣기는 듣지마는 뿌리를 박기가 어렵다고 말씀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 소망이 없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청년 시기에는 대체로 그 마음 밭이 옥토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교적 양심이 맑습니다. 이상이 높습니다. 인생의 깊은 뜻을 탐구하고 영혼을 사모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이 청년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이 다 청년 시대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셔요. 베드로, 요한, 야고보, 디모데, 바울, 디도, 이들은 모두 다 三十대의 청년으로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 청년들, 청년 시기는 과연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이 때에 참된 신앙을 얻으셔서 일생의 방향을 바로 잡으시고 일생을 통해서 많은 봉사를 하시기를 특별히 부탁합니다. 또 우리 인간의 일생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때때로 우리는 누구나 생의 위기를 당합니다. 가령 누구나 질병을 앓습니다. 또 흔히 갑자기 앓게 됩니다. 그래서 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고 하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그만 병석에 눕게 되면 인간의 허약성, 제한성, 무능을 깊이 느낍니다. 자연히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특별히 병이 위독해서 사망에 직면하게 될 때에는 문자 그대로 인생의 깊은 뜻을 더듬게 됩니다. 그래서 병상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聖) 프랜시스가 그랬습니다. 로욜라가 그랬습니다. 위대한 과학자 파스칼이 그랬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떤 때는 우리 육신에 병을 주신다ꡕ 고했습니다. 병상은 영혼이 구원을 얻을 만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에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리 오 마는 우리의 몸이 연약할 때에 하나님을 찾아서 신앙을 가지시고 일생의 삶을 위해 옳은 길을 잡고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병도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아무래도 몇 번은 슬픈 일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납니다. 어떤 때는 처자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슬픈 일은 흔히 예고 없이 오는 것입니다. 큰 슬픔이 마음에 깃 들게 되면 아무리 강퍅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도 그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온유하고 겸손해집시다. 시기나 교만이나 미움이나 질투의 마음도 큰 슬픔 아래에서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슬픔의 밀물이 들어올 때에 믿음의 배를 띄워 영생의 포구를 향하여 돛을 다는 이가 많습니다. 눈물의 렌즈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보고 내세의 실재를 깨닫고 참된 신앙에 들어오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슬플 때에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에 가면 발텐시안이라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창립한 피터 월드라고 하는 사람은 원래 중고 시대에 살던 사람인데 본래는 방탕한 생활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저녁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모여 술을 마시고 댄스를 하며 질탕하게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까운 친구 하나가 쓰러졌습니다. 죽었습니다. 호화로운 열락(悅樂)의 장소는 갑자기 울음의 바다로 변했습니다. 피터 월드라고 하는 이 청년은 인생의 허무를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인생의 깊은 뜻을 찾게 되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고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위대한 인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슬픔은 우리가 원하는 경험은 아닙니다. 그러나 슬플 때에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로 나오셔서 위로를 받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밖에도 우리의 인생의 인생을 보면 어떤 이는 사업에 실패를 할 수도 있고, 고독한 생활이 강요되는 이도 있고, 환난과 재난을 당하는 이도 있고, 역경을 당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 오히려 은혜와 축복을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격노를 피해서 미디안 광야에 도망하여 도피 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떤 날 오후 시내산 기슭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위대한 민족의 해방자(解放者)요 수천 년의 율법을 준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악한 왕후 이세벨의 노를 피해서 멀리 호렙산에 도망하여 굴속에 살다가 어느 날 굴 어귀에 섰을 때에 세미(細微)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더욱 위대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사도 요한 이 큰 핍박을 만나 밧모 섬에 정배(定配)를 가서 어두운 굴속에 혼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기록한 요한계시록을 지금까지 읽고 있지 않습니까? 일제 시대에 많은 애국자들이 감옥에 들어가서 고독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성경을 읽고 나온 사람의 많습니다. 남강 이 승훈 선생은 옥에 계시는 동안에 성경을 배독(百讀)했다고 전합니다. 위대한 애국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압박을 피해서 혹은 미국으로 도망하여 유리(遊離)하는 생활 중에 하나님을 만난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환난을 당합니까? 역경에 처하여 있습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께 지도를 받게 될 때에 여러분의 역경과 오늘의 화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은혜의 해가 있습니다. 또는 특별히 구원의 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전도하실 때에 자기가 자라난 나사렛에 갔습니다. 회당장이 성경을 올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읽은 성경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이사야 六十一장 一절 이하를 읽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사 나로 하여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케 하시기 위 하사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포로 된 자를 자유 캐 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하여 나를 보내셨느니라.\\\' 이 말씀을 읽으시고 오늘날 이 말씀이 응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를 주시는 시기가 있습니다. 주후 一 세기가 그러한 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친히 땅을 방문한 시기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열두 제자가 복음을 전파한 시기입니다. 은혜의 때가 아닙니까? 교회 역사를 통해 보면 이러한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가령 여러 종교 개혁자들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서 선포한 十六세기나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선교사를 전 세계에 보낸 대 선교 확포(擴布)시대인 十八. 十九세기가 은혜의 시기올시다. 이 시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문과 잡지를 통해서 혹 보셨을 것입니다. 인도네시아라고 하는 나라에서는 스카르노가 쫓겨난 후 이후 수십만 명이 새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나 예배를 세 번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사가 부족해서 큰일 났다고 합니다. 은혜의 해가 있습니다 또 구원의 날이 특별히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오순절 같은 날은 특별히 구원의 날이 아닙니까? 하루에 三천 명이 회개하는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에 특별히 주일은 어제나 구원의 날이올시다. 이런 주일 가운데도 一년에 한번씩 지키는 이 간증주일은 구원의 날이올시다. 오늘 여러분 다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 처녀의 기회를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음으로 늦게 오는 신랑을 영접하고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미련한 처녀는 등만 준비하고 기름 준비를 못했다가 신랑이 늦게 오자 불이 꺼져 기름 사러 거리에 나간 사이에 신랑이 오고 말았습니다. 잔치 집에는 이미 다 들어갔습니다. 문은 닫혔습니다. 그때 열어달라고 하니까?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문이 닫히는 때가 있습니다. 문 열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야 합니다. 전에 헤롯왕은 위대한 세례요한 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왜?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 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도 구원을 못 얻었습니다. 그 이유는 교만해서입니다. 아그립바 벨릭스 같은 사람은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설교를 듣고도 구원을 못 얻었습니다. 왜?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였습니다. 강퍅한 마음, 교만한 마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겸손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사탄이 자기 부하를 모아 놓고는 어떻게 하여야 땅 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 하고 방안을 연구했습니다. 어떤 귀신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 \\\"제가 땅에 내려가서 무엇보다도 성경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선전을 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다른 귀신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 \\\"저는 이 땅에 내려가서 하나님이 없다고 선전하겠습니다. 즉 무신론을 선전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귀신이 일어서더니, \\\"저는 천당과 지옥이 없다고 선전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늙은 귀신이 척 일어나더니 \\\"그것도 다 좋지마는 저는 땅에 내려가서 믿는 것도 괜찮지 마는 차차 믿으라고 선전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한 달 기한을 두고 다 땅 위에 내려보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서는 올라와서 그 동안의 성과를 보고합니다. 누구는 몇 백 명을, 누구는 얼마를 데리고 왔습니다 하는데 그 중 넷째 귀신이 제일 많이 지옥으로 데려왔단 말입니다. 차츰 믿어도 된다고 하는 귀신 말입니다. 여러분, 시간적 제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 주실 때에 작정하고, 과거의 생활을 끊어버리고, 회개하고, 주님을 내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국가적으로 볼 때에 오늘날은 과연 우리 나라를 각 방면으로 건설할 때입니다. 천시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각 방면으로 건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건설을 더디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정과 부패입니다. 이런 모든 건설을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도의의 건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 뜻 깊은 간증주일에 온전히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정신적으로 정돈을 해서 새 사람이 되어 우리 나라를 바로 건설해야겠습니다. 각 방면으로 일군이 되어야겠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올시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가나안 믿음의 행보/ 수1:1-9/ 한경직 목사/ 2014-08-25
가나안 믿음의 행보 수1:1-9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 一․二) 이 말씀은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종 되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올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영도 아래 애굽을 담대히 떠나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 四十년 동안 배회한 후 이윽고 요단강 건너편 모압 평지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가서 가나안의 온 땅을 멀리 바라다본 채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불러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요단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땅으로 가라.』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지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하나님의 명령이 여호수아에게 내린 것입니다. 금년은 우리 한국 역사상에 의의 깊은 해인 줄 믿습니다.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만 七十년 되는 해입니다. 또한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로 말하자면 제四十회 총회를 지난주간 에 끝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 장로교회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四十년 동안 거친 광야에서 지내온 것과 같이 四十년 동안 거친 땅을 거닐면서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한국의 기독신자의 수를 백만으로 셉니다. 그러나 신교 七十주년을 당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四十 주년을 맞이하여 과거를 돌아보고 장래를 전망하여 볼 때 우리 한국의 교회는 아직까지 가나안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근 三천만에 가까운 남북 동포들의 심령을 우리는 정령하지 못했습니다. 이 대를 당하여 우리 한국 교회에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명령해서 하시는 말씀이『요단을 건너 내가 다 너희에게 준 이 땅으로 가라.』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거라.』또한『내가 모세에게 명하여 준 계명을 힘써 기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 하여야 네가 가는 곳마다 형통할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의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분부를 하시는 줄 압니다. 그 때의 백성의 형편을 잠깐 살펴보면 그 사람들 가운데서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거기 좀 더 있기를 원한 사람도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미 四十년 동안 많은 고생을 하면서 여기 왔는데 이제 좀 쉬어야겠고, 그 때 마침 홍수가 되어서 요단강에 물이 높아 건너가기도 어렵고, 또한 건너간다 하여도 가나안에는 가나안 七족이 건재해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있고, 그들의 쌓은 성곽은 높고 그들이 웅거한 산악은 험해서 설사 건너간다 하여도 쉽게 점령하기를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줄 생각됩니다. 더욱이 르우벤 지파나 갓 지파 혹은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 저편에서 이미 분 깃의 허락을 받을 줄 압니다. 고로 자연히 요단강을 건널 생각이 적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령하시기를『너희는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四十년 동안 긴 세월을 광야에서 훈련시켰고 모압 평지에까지 인도하셨는데 모압 평지에 머물게 하려고 그 곳까지 인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요단강이 깊고 가나안이 강하다 하여도 그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을 점령하고 이 앞으로 위대한 백성이 되고 그 곳에 위대한 나라를 세워 하나님의 백년 천 년의 경륜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압 평지가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과 경륜은 모압 평지까지 오고 마는 것이 아니고 가나안에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완전히 점령하고 완전한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빨리 건너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교 七十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 가지 핍박 가운데서도 발전되었고, 교인 수는 지금 백만으로 되었고 정부 요인도 상당히 있고, 육, 해, 공군에도 많이 들어있어서 우리 기독교의 사명을 다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만큼 해 놓았으니까 내 교회나 잘 지키고 내 책임이나 잘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 七十주년을 맞는 우리 신도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시고 지금까지 교회를 지키시고 이와 같이 육성하여 주시고 여기에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완전히 점령하듯, 남한을 점령하고 북한을 점령하고 나아가서는 삼천만 동포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 나라를 기독교 나라로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이 땅에 七十년 전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궁극적 목적이요 경륜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서 일어나 주님을 위하여 일할 줄 모르고 단순히 앉아서 앉은뱅이 믿음을 가진 앉은뱅이 신자가 많습니다. 자기는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 일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는 신자가 우리 가운데도 더러 있는 줄 압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니까. 여러 사람들 틈에 슬그머니 앉았다 나오면 누가 함께 일하자고, 연보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나, 참 편안히 예수를 믿기는 큰 교회가 제일이다 하는 이도 있습니다. 일어서야 되겠습니다. 우리 총회 전도 부에서 작년부터 선교 七十주년을 기념하여 특별히 五개년 계획을 세워 남한에 아직 교회가 없는 五백 면에 신설 교회 五백 개를 세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작년 중에 백 개를 세우려고 총회 전도 부에서 많은 힘을 썼지만 작년 총회 보고를 들어보니 백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六十八개의 교회를 신설했다는 것이올시다. 만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산하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 앉은뱅이 믿음을 갖지 말고 일어나 자기의 정성을 다하였다고 하면 어찌 백 면에 백 교회를 세우지 못했겠습니까? 우리가 전도 회 모임 때 모일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참석할 수 없어도 누구나 다 가입해서 다소를 불구하고 한 달에 얼마씩 꼭 내서 교회 없는 면에 교회를 세우기로 꼭 작정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 비를 내어 二十여 처에 전도 인을 낼 수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믿는 것은 영락교회의 四천명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일어나면 우리 영락교회에서 三十 곳을 보내지 못한 것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라. 그리하여 요단을 건너 내가 준 땅으로 가라.』 이 말씀을 같이 듣고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은『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용기(勇氣)와 담대(膽大)는 군인의 생명이올시다. 군인으로서 용기가 없고 담대하지 못하면 군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이 담대해야 할 것은, 그 곳에는 가나안 七족이 살고 있고 성곽은 튼튼하고 산악 지대는 험하고 더욱이 가나안에는 그 때 아람 자손이라고 키가 큰 장사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근 四十년 전에도 갈렙과 다른 열 두 지파 들의 대표 열두 사람이 가나안 정탐을 하고 보고할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올라가서 곧 점령을 하라고 하였으나 열 사람은 도저히 점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을 보고 우리를 보니 우리는 메뚜기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낙심해서 점령하려다 못한 기억이 그 때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에게 분명히 하시는 말씀이『너희는 믿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영적 시야를 전망할 때 가나안 七족도 있고 아랍 자손과 같은 거대한 원수도 있고 유물론을 주장하는 공산당 원수도 우리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七족과 같이 여러 가지 죄악의 아성이 우리 앞에 높이 있어서 세속주의라는 이름 아래 우리 앞을 막고 더욱이 극도로 부패한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내가 너희에게 준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셨습니다. 이 때 저 가나안 七족이 점령해 있고 아랍 족속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것입니다. 가나안 七족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고 아랍 족속이 아무리 강해도 멸망할 운명에 놓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앞의 원수도 같습니다. 내가 분명히 믿는 것은, 한국 三천만의 영혼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미 믿는 사람에게 이 민족, 이 나라를 주셨습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점령하라 명하실 때는 이미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의 소유를 우리가 점령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갈 때 나도 가고 너희가 요단을 건널 대 나도 건너고 너희들이 쉴 때 나도 쉬고 너희들이 싸울 때 나도 싸우고 너희들이 힘이 약할 때 너희를 도와주고 내가 언제든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점령하라』하셨습니다. 아무리 죄악이 관영하고 악한 세력이 북한을 점령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시간 문제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신 것은『내가 모세에게 명한 율법을 잘 지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총회 때 특별히 여러 총대들이 선교 七十저년을 맞고 장로교 四十회 총회를 맞아 우리 교회가 현하(現下) 당면한 문제를 지키기 위하여 특별히 몇 가지 점을 하나님의 교훈 가운데서 꼭 지켜야겠다고 강조했습니다. 몇 가지 중 세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우리 사명을 다하는 한국의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주님의 날을 거룩이 지켜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종래 한국의 초대교회는 주일을 거룩이 지켰습니다. 제가 학생시절에는 주일에 성경만 보았지 다른 학과 공부는 죄가 된다고 하여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꼭 거룩이 학생도 선생도 일반 교인도 으레 믿으면 주일은 문을 닫을 줄 알고 일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주일을 거룩이 지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일제 탄압 아래 제二차 대전을 겪으면서 일본 사람들이 생산을 증가한다고 하여 믿는 사람도 주일에 일을 하게 하고 문을 열어 놓게 하고 심지어 공부도 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강제로 하게 한 후부터 믿는 사람의 양심도 마비되어 주일을 지키는 양심이 둔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온전히 주일에 철시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믿는 학교에서 주일에 시험을 보는 일, 특별히 학생을 모아놓고 훈련시키는 일을 종종 우리가 목도합니다. 또한 주일에 반드시 필요성이 없지만 사고 팔고 하는 흥정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초대 교회로 돌아가서 주일을 거룩이 지켜야겠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일을 쉬는 날이요, 둘째로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바치는 알이요, 이 날 일을 한다면 병든 자의 심방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주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그 외에 주일에 무슨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제四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총회에서 강조한 것은 십일조에 대한 교훈입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소유의 十분의 一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 십일조에 대한 명령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소유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내가 집을 짓고 돈을 벌고 일을 해서 월급을 받으나 우리 믿는 사람의 소유는 모드 하나님께 속합니다. 나는 단순히 대신 맡아서 일보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 소유자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우리가 이렇게 보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 보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보물 가는 곳에 내 마음도 따라갑니다. 고로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십일조를 드립니다. 또 말라기 三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십일조 드리는 것을 통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물질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너희가 모든 소유가 내 것인 줄 꼭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의무를 잘하면 십일조를 바치고 사업을 하면 내가 네 사업에 축복하겠노라』하는 이와 같은 약조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십일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합니다. 전도 사업, 교육 사업, 자선 사업,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번 총회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발언을 많이 한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모든 계명을 잘 지키되 특별히『서로 사랑하라. 이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가 된 것을 알리라. 너희들이 어떻든지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라』하는 것입니다. 명령하신 이 사람의 계명을 지켜야겠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어도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납해서 오직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증거 하여야만 우리가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로 구원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선교 七十주년을 맞고 장로교 四十주년을 맞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오직 한 가지인 줄 압니다.『너희들은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서 내가 너희에게 준 이 땅으로 가거라.』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가나안 점령의 명령/ 수1:1-2/ 한경직 목사/ 1955-05-01
가나안 점령의 명령 수1:1-2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 一·二) 이 말씀은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종 되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올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영도 아래 애굽을 담대히 떠나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 四十년 동안 배회한 후 이윽고 요단강 건너편 모압 평지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가서 가나안의 온 땅을 멀리 바라다본 채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불러 명령하셨습니다.『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요단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땅으로 가라.』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지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하나님의 명령이 여호수아에게 내린 것입니다. 금년은 우리 한국 역사상에 의의 깊은 해인 줄 믿습니다.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지 만 七十년 되는 해입니다. 또한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로 말하자면 제四十회 총회를 지난주간 에 끝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 장로교회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四十년 동안 거친 광야에서 지내온 것과 같이 四十년 동안 거친 땅을 거닐면서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한국의 기독신자의 수를 백만으로 셉니다. 그러나 신교 七十주년을 당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四十 주년을 맞이하여 과거를 돌아보고 장래를 전망하여 볼 때 우리 한국의 교회는 아직까지 가나안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근 三천만에 가까운 남북 동포들의 심령을 우리는 정령하지 못했습니다. 이 대를 당하여 우리 한국 교회에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기를 원하실 까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명령해서 하시는 말씀이『요단을 건너 내가 다 너희에게 준 이 땅으로 가라.』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거라.』또한『내가 모세에게 명하여 준 계명을 힘써 기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 하여야 네가 가는 곳마다 형통할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의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분부를 하시는 줄 압니다. 그 때의 백성의 형편을 잠깐 살펴보면 그 사람들 가운데서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거기 좀 더 있기를 원한 사람도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미 四十년 동안 많은 고생을 하면서 여기 왔는데 이제 좀 쉬어야겠고, 그 때 마침 홍수가 되어서 요단강에 물이 높아 건너가기도 어렵고, 또한 건너간다 하여도 가나안에는 가나안 七족이 건재해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있고, 그들의 쌓은 성곽은 높고 그들이 웅거한 산악은 험해서 설사 건너간다 하여도 쉽게 점령하기를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줄 생각됩니다. 더욱이 르우벤 지파나 갓 지파 혹은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 저편에서 이미 분 깃의 허락을 받을 줄 압니다. 고로 자연히 요단강을 건널 생각이 적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령하시기를『너희는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四十년 동안 긴 세월을 광야에서 훈련시켰고 모압 평지에까지 인도하셨는데 모압 평지에 머물게 하려고 그 곳까지 인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요단강이 깊고 가나안이 강하다 하여도 그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을 점령하고 이 앞으로 위대한 백성이 되고 그 곳에 위대한 나라를 세워 하나님의 백년 천 년의 경륜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압 평지가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과 경륜은 모압 평지까지 오고 마는 것이 아니고 가나안에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완전히 점령하고 완전한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빨리 건너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교 七十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 가지 핍박 가운데서도 발전되었고, 교인 수는 지금 백만으로 되었고 정부 요인도 상당히 있고, 육, 해, 공군에도 많이 들어있어서 우리 기독교의 사명을 다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만큼 해 놓았으니까 내 교회나 잘 지키고 내 책임이나 잘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 七十주년을 맞는 우리 신도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시고 지금까지 교회를 지키시고 이와 같이 육성하여 주시고 여기에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완전히 점령하듯, 남한을 점령하고 북한을 점령하고 나아가서는 삼천만 동포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 나라를 기독교 나라로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이 땅에 七十년 전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궁극적 목적이요 경륜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서 일어나 주님을 위하여 일할 줄 모르고 단순히 앉아서 앉은뱅이 믿음을 가진 앉은뱅이 신자가 많습니다. 자기는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 일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는 신자가 우리 가운데도 더러 있는 줄 압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니까. 여러 사람들 틈에 슬그머니 앉았다 나오면 누가 함께 일하자고, 연보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나, 참 편안히 예수를 믿기는 큰 교회가 제일이다 하는 이도 있습니다. 일어서야 되겠습니다. 우리 총회 전도 부에서 작년부터 선교 七十주년을 기념하여 특별히 五개년 계획을 세워 남한에 아직 교회가 없는 五백 면에 신설 교회 五백 개를 세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작년 중에 백 개를 세우려고 총회 전도 부에서 많은 힘을 썼지만 작년 총회 보고를 들어보니 백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六十八개의 교회를 신설했다는 것이올시다. 만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산하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 앉은뱅이 믿음을 갖지 말고 일어나 자기의 정성을 다하였다고 하면 어찌 백 면에 백 교회를 세우지 못했겠습니까? 우리가 전도 회 모임 때 모일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참석할 수 없어도 누구나 다 가입해서 다소를 불구하고 한 달에 얼마씩 꼭 내서 교회 없는 면에 교회를 세우기로 꼭 작정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 비를 내어 二十여 처에 전도 인을 낼 수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믿는 것은 영락교회의 四천명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일어나면 우리 영락교회에서 三十 곳을 보내지 못한 것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라. 그리하여 요단을 건너 내가 준 땅으로 가라.』 이 말씀을 같이 듣고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은『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용기(勇氣)와 담대(膽大)는 군인의 생명이올시다. 군인으로서 용기가 없고 담대하지 못하면 군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이 담대해야 할 것은, 그 곳에는 가나안 七족이 살고 있고 성곽은 튼튼하고 산악 지대는 험하고 더욱이 가나안에는 그 때 아람 자손이라고 키가 큰 장사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근 四十년 전에도 갈렙과 다른 열 두 지파 들의 대표 열두 사람이 가나안 정탐을 하고 보고할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올라가서 곧 점령을 하라고 하였으나 열 사람은 도저히 점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을 보고 우리를 보니 우리는 메뚜기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낙심해서 점령하려다 못한 기억이 그 때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에게 분명히 하시는 말씀이『너희는 믿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영적 시야를 전망할 대 가나안 七족도 있고 아랍 자손과 같은 겨대한 원수도 있고 유물론을 주장하는 공산당 원수도 우리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七족과 같이 여러 가지 죄악의 아성이 우리 앞에 높이 있어서 세속주의라는 이름 아래 우리 앞을 막고 더욱이 극도로 부패한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내가 너희에게 준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셨습니다. 이 때 저 가나안 七족이 점령해 있고 아랍 족속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것입니다. 가나안 七족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고 아랍 족속이 아무리 강해도 멸망할 운명에 놓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앞의 원수도 같습니다. 내가 분명히 믿는 것은, 한국 三천만의 영혼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미 믿는 사람에게 이 민족, 이 나라를 주셨습니다. 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점령하라 명하실 때는 이미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의 소유를 우리가 점령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갈 때 나도 가고 너희가 요단을 건널 대 나도 건너고 너희들이 쉴 때 나도 쉬고 너희들이 싸울 때 나도 싸우고 너희들이 힘이 약할 때 너희를 도와주고 내가 언제든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점령하라』하셨습니다. 아무리 죄악이 관영하고 악한 세력이 북한을 점령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시간 문제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신 것은『내가 모세에게 명한 율법을 잘 지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총회 때 특별히 여러 총대들이 선교 七十저년을 맞고 장로교 四十회 총회를 맞아 우리 교회가 현하(現下) 당면한 문제를 지키기 위하여 특별히 몇 가지 점을 하나님의 교훈 가운데서 꼭 지켜야겠다고 강조했습니다. 몇 가지 중 세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우리 사명을 다하는 한국의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주님의 날을 거룩이 지켜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종래 한국의 초대교회는 주일을 거룩이 지켰습니다. 제가 학생시절에는 주일에 성경만 보았지 다른 학과 공부는 죄가 된다고 하여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꼭 거룩이 학생도 선생도 일반 교인도 으레 믿으면 주일은 문을 닫을 줄 알고 일하지 않고 교회에 와서 주일을 거룩이 지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일제 탄압 아래 제二차 대전을 겪으면서 일본 사람들이 생산을 증가한다고 하여 믿는 사람도 주일에 일을 하게 하고 문을 열어 놓게 하고 심지어 공부도 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강제로 하게 한 후부터 믿는 사람의 양심도 마비되어 주일을 지키는 양심이 둔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온전히 주일에 철시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믿는 학교에서 주일에 시험을 보는 일, 특별히 학생을 모아놓고 훈련시키는 일을 종종 우리가 목도합니다. 또한 주일에 반드시 필요성이 없지만 사고 팔고 하는 흥정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초대 교회로 돌아가서 주일을 거룩이 지켜야겠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일을 쉬는 날이요, 둘째로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바치는 알이요, 이 날 일을 한다면 병든 자의 심방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주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그 외에 주일에 무슨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제四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총회에서 강조한 것은 십일조에 대한 교훈입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소유의 十분의 一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 십일조에 대한 명령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소유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내가 집을 짓고 돈을 벌고 일을 해서 월급을 받으나 우리 믿는 사람의 소유는 모드 하나님께 속합니다. 나는 단순히 대신 맡아서 일보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 소유자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우리가 이렇게 보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 보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보물 가는 곳에 내 마음도 따라갑니다. 고로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십일조를 드립니다. 또 말라기 三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십일조 드리는 것을 통하여 우리 일상생활의 물질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너희가 모든 소유가 내 것인 줄 꼭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의무를 잘하면 십일조를 바치고 사업을 하면 내가 네 사업에 축복하겠노라』하는 이와 같은 약조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십일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합니다. 전도 사업, 교육 사업, 자선 사업,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번 총회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발언을 많이 한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모든 계명을 잘 지키되 특별히『서로 사랑하라. 이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가 된 것을 알리라. 너희들이 어떻든지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라』하는 것입니다. 명령하신 이 사람의 계명을 지켜야겠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어도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납해서 오직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증거 하여야만 우리가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로 구원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선교 七十주년을 맞고 장로교 四十주년을 맞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오직 한 가지인 줄 압니다.『너희들은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서 내가 너희에게 준 이 땅으로 가거라.』 (一九五五년 五월 一일)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가상칠언(1)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26-38/ 홍문수목사 2017-12-11 01:04:00 read : 8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 상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부릅니다. 이 말씀들이 매우 중요한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가상칠언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씀은 항상 진리
가상칠언(1)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26-38/ 홍문수목사 2017-12-11 01:04:00 read : 8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 상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부릅니다. 이 말씀들이 매우 중요한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가상칠언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씀은 항상 진리입니다. . 둘째, 가상칠언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지막 순간이 되면 진실되고 긴요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가상칠언은 평소 주신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가상칠언은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 상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사형 제도입니다. 화형보다, 참수형보다, 단두대보다, 총살보다 더 악랄한 ... 그래서 당시에도 모든 사형수에게 적용하지 않고 살인 강도, 반역자 등 중죄인만 공개 처형하는 제도였습니다. 매달리기 전부터 실컷 매를 맞고 피를 흘리고 지친 몸으로 무거운 십자가 나무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리고는 대못에 손목과 발목이 박힌 채 매달려 뙤약볕 아래서 물과 피를 쏟고 죽어갑니다. 가상칠언은 그런 극한 고통의 상황에서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의 애타는 마음이 농축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상칠언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비유로 가상칠언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빛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스펙트럼에 비추면 어떻게 됩니까? 통과하면서 대표적인 일곱 가지 색깔(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무지개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상칠언 한 말씀 한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볼 때 가상칠언이 얼마나 귀한 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제 곧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이 됩니다. 부활절 직전까지 이 말씀을 차례로 살피면서 주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에 새겨 보기로 합니다. 그래서 부디 주님의 마음, 주님의 진리, 주님의 은혜에 흠뻑 젖어드는 기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그 중에 첫번째 말씀입니다. 34절을 다시 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그 고통의 와중에 오랜 침묵을 깨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그런 상황에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고통으로 부르짖는 절규, 원망, 저주, 욕설 등일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씀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은 기도였습니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 기도한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욱이 그것은 자기를 위한 기도나 친구들을 위한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누구를 위한 기도였습니까? 원수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 그들의 모습이 본문에 어떻게 나타나 있나 한 번 살펴 보십시오. 35절~37절. 백성들(구경꾼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자들)과 관원들(유대인 당국자,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등), 로마 군병들, ...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조롱하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우리에게 감동적이고 충격적인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1] 십자가는 예수님의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 인간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 갑니다. 그저 단순하게 물질의 문제, 건강의 문제 등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인생에서 중요하지만 근본 문제는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모든 것들이 충족되어도 인간은 참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죽음 이후 내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모든 외적인 조건이 갖추어져도 인간이 공허하고 불안한 이유는 바로 영혼 속에 내재하는 죄 문제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을 등지고 산 종교적인 죄, 마음과 행동으로 지은 죄 등이 인간의 영혼 속에 차곡 차곡 쌓이면서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양심에 가책이 생깁니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쉽게 기억해 낼 수 있는 죄악들(굵직한 것들)도 있지만 기억조차 못하는 작은 것들도 평생 쌓이면 얼마나 심각할지 상상해 봅니다. 그것이 심령에 마치 녹처럼, 이끼처럼 끼어 양심에 고통을 줍니다. 그 고통을 다윗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32:2~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주의 손이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만일 인간이 이런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리 물질이나 세상 것을 갖고 누린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치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 이 근본적인 죄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함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이 기도에 관한 예언이 나와 있습니다. 사53:12 " ...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이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아무리 인간이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다 품어 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34절 말씀대로 원수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신 분 아닙니까? 그런 자들을 용서하신 주님이 누구를 용서하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또 그 용서하심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온 기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와 다릅니다. 이것은 일종의 요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근거로 담대히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저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니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저들이 모르지만 후일 깨닫고 회개할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 실제로 그 기도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자들조차 그랬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백부장도, 병사 론지노(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에 그의 조각상이 있음)도 ...오늘도 그 기도의 응답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 중에 있습니다. 그 어떤 죄를 지은 자라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부디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아무리 중한 죄라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며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용서와 사랑의 실천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는 용서와 사랑의 실천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십자가 사랑의 기초가 용서이듯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실천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일이 바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사랑도 못합니다. 용서하는 자가 비로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용서는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입히고 삽니다. 관계가 먼 사람들과 그런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부부 간에, 부모 자식 간에, 친구 간에, ... 서로 사랑해야 마땅하고 또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상처를 입히고, 혹은 입으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인간은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혹 남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에는 속히 용서를 구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게 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무거운 짐처럼, 밀린 숙제처럼 용서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적어도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라면 충분히 용서할 수 있고, 또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용서에 관한 몇 가지를 살펴보면서 실제로 용서의 사랑을 실천할 수있기를 바랍니다. ① 용서하기가 어려운 이유 : *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마음 * 용서하는 게 곧 지는 것이라는 생각 * 용서해도 상대방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심판권과 축복 저주권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결과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다만 용서하는 것이 성도의 당연한 의무이기에 순종한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 다윗이 아무리 용서하고 애를 써도 사울이 계속 악하게 나오니까 하나님이 손을 대셨습니다.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② 용서하지 못할 때의 부작용 : * 마음의 고통 - 홧병 * 육체의 고통 - 잠17:22 심령 근심 뼈로 마르게 함, 잠14:30 시기는 뼈를 썩게 함. 예> 코넬 의대 연구실 - 근심, 걱정, 분노 - 위산 분비 증가, 심하면 위벽에 출혈 - 소화 불량, 위궤양, 십이지장 궤양 ... * 인생의 불통 - 하나님의 은헤와 축복의 문이 막힘 예> 레오나르도 다빈치 - '최후의 만찬' 그림 그릴 때의 일 - 그리기 얼마 전 동료 화가와 심한 말다툼 - 미운 나머지 가룟 유다를 그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그리려고 함 - 그런데 맨 나중에 에수님 얼굴 그리려는데 도저히 안됨 - 미움 때문에 - 지우고 예수님 얼굴 그리자 성공! ③ 용서하는 구체적인 방법 : * 먼저 예수님의 용서를 깊이 체험할 것 - 마18:21~35 일만 달란트(6천만 데나리온) 빚진 자, 3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괴롭히자 임금이 진노 예> 성폭행한 남학생을 용서한 여학생의 어머니 - 광주경찰서에서 있었던 일 - 용서하고 석방하도록 도와 줌 - 다만 본인과 부모가 읽을 양서(어거스틴의 참회록,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구성애의 성교육 등) 제시해 줌. * 상대방을 통해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읽을 것 - 창50:20 * 기도할 것 - 시109:4 "난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다윗의 시) *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풀 것 - 롬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예> 숯불 - 팔레스타인의 풍습 - 머리에 이고 다디는 풍습. 화롯불에 불씨가 꺼지면 옆집에 가서 숯불 얻어 화로를 머리에 이고 옴 - 숯불에 채워 주는 것은 최고의 관용을 상징합니다. ④ 용서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 : * 평안 - 행7:54~60 스데반 집사의 천사 같은 얼굴로 편히 잠들었음 * 치유 - 잠17:22 마음의 기쁨=양약, 잠14:30 마음의 화평=육신의 생명 * 변화 - 몬1:10~11 감옥에서 만나 사랑을 베풀어 줌 - 오네시모가 유익한 자로 변화됨.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순절 절기에 주님의 용서의 사랑에 관한 말씀을 듣고 구원과 사죄의 확신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 가운데 밀린 숙제처럼 남아 우리의 사람을 무겁게 하는 용서치 못한 문제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결단과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