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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집의 멋진 결단 /수24:14-18/ 조봉희 목사 2016-01-09 07:26:25 read : 9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원전 49년 1월 11일, 줄리어스 시이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일단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의 핵심부로 진입하면 돌아올 길이 없다는 것을
나와 내 집의 멋진 결단 /수24:14-18/ 조봉희 목사 2016-01-09 07:26:25 read : 9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원전 49년 1월 11일, 줄리어스 시이저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습니다. 당시 로마를 장악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일단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의 핵심부로 진입하면 돌아올 길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남은 길은 로마를 점령하든가, 폼페이우스에게 멸망당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이저는 루비콘을 건너기로 결심한 순간, 그 목표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연한 결심으로 그는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므로 세 마디로 된 유명한 보고를 로마 원로원으로 보냈습니다.『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의 깊은 뜻대로 의연한 결단이 가져온 위대한 승리의 표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의미있는 일을 결단하면 그 입지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 강조하는 동사신앙의 본질은 한번 뜻을 정했으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살기로 결심했으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한길 가는 순례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결심과 입지가 분명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다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형통의 비결입니다.(1:7) 우리 한국교회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 1921년 4월에 그 유명한 오산학교를 마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단하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에 오산학교의 교장선생님이었던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평양 신학교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 당시 예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평양까지 먼 길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는 주기철 목사의 손을 꼭 잡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주군, 꼭 귀담아 듣게. 이것을 내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천만 동포의 생각과 의견이라고 생각해두게나.” 그리고 덧붙입니다. “나는 평생 동안 많은 인재를 봐왔지만 자네 같은 사람은 없었다네. 자네만한 인물이 없었어. 그래 내가 간곡히 부탁하네. 일본에 건너가서 동경고등사범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오산학교를 맡아주게나. 이 나라의 희망이 아닌가.” 사실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일본의 동경에 유학 가는 것이 모두의 꿈이었고 그 중에서도 세계적인 동경사범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최고의 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잠시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음과 같이 의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께 제 몸을 바쳐버렸습니다. 기독교에 헌신한 이 몸이 어찌 교육에 다시 헌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만 섬기기로 작정하고 결단한 그의 입지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공적인 신앙인들의 공통분모는 입지가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결심과 다짐은 어떤 유혹과 현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심각한 기로에서도 의연한 태도만을 표명했습니다. 오늘날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는 이와 같은 마음의 확고한 결심과 새로운 다짐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살펴본 여호수아서의 중심주제, 동사신앙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 위기의 어떤 불확실한 기로에서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입지가 분명한 신앙으로 앞만 보고 정진하는 삶이 곧 동사신앙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장부 여호수아는 그의 110년 인생을 마감하면서 다시 한 번 동사신앙의 본질을 재확인하며 다짐시켜줍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수없이 천명합니다. 인생의 어떤 유혹과 현혹 앞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단호하게 결의하고 결단하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합니다. 만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대세를 따라 우상을 섬기는 쪽으로 편향되어 간다할지라도『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길 것이라.』고 분명한 입지를 표명합니다.(15절)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지도자 여호수아의 신앙에 감동을 받고 자신들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의연하게 다짐합니다.(18절) 오늘 우리도 이런 멋진 신앙의 결단을 재 다짐하는 새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예수 잘 믿는 방법은 물에 빠지듯이 풍덩 빠져서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푹 빠져서 섬기면 됩니다. 참 간단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섬기라”는 말을 9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여호수아서 강해를 통한 동사신앙 시리즈의 결론으로 하나님만을 더 잘 섬기기로 새롭게 결심하고 다짐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더욱 더 간단합니다. 1.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여호수아는 왜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겨야한다고 강력하게 호소하며 촉구합니까? 주님만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7절)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바벨론 땅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2-3절, 5-6절)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우주 창조 전부터 웅대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사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들이 그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도 우리가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할 것은 나와 내 집이 예수님만 믿기로 작정하고 결심하는 일입니다. 본문 15절처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결정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에 있어서만큼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로 날마다 새롭게 다짐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난 사람은 한 번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한번만 태어난 사람은 육신적으로도 죽고, 또 다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니 두 번 죽어요. 육신적으로도 태어나고 영적으로도 거듭나는 사람은, 육신적으로만 한 번 죽고 그 다음에는 영생으로 부활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만을 믿고 섬기기로 작정하고 결심해야 합니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4:12)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페니실린을 발명하여 노벨상을 탄 바 있는 유명한 Alexander Fleming박사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박사님께서 발견하신 가장 위대한 발견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는 이런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나는 대단한 죄인이요, 주 예수는 위대한 구주라는 사실을 발견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굳게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다음에 그들을 얼마나 자상하게 돌보아 주셨던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적들을 일으켜 주셨던가요? ①기적적으로 애굽에 내린 재앙에서 그들만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5절) ②기적적으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6절) ③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7절) ④기적적으로 광야생활 40년을 지켜주셨습니다.(8-10절) ⑤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습니다.(11절) ⑥기적적으로 가나안 땅 정착의 모든 길목에서 보호해주셨습니다.(17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기적적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불기둥은 최초의 난방 시스템이요, 구름기둥은 최초의 냉방 시스템입니다. 4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여주셨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오게 하셨고 쓴물을 달게 하셨고, 40년 광야 여정동안 발도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광야 40년과 함께 가나안 땅 정착 기간 40년 동안에도 여전히 돌아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결심하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든든한 보호자이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나와 동행해주시는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이십니다. 그러니 어떤 경제적인 불황에서도 비상한 섭리로 돌보아주십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섬기기로 굳게 결심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큰 능력, 주는 나의 보호자, 내가 항상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3. 하나님은 우리의 승리자이십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본문 18절에서는 또 하나의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어떤 악의 세력에서도 거뜬히 이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난공불락의 장벽 앞에 놓이더라도 결국 승리하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주안점이요, 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한 축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부터 13절 사이에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승리하게 하셨음을 확신시켜 주려고『내가』라는 말을 18번이나 반복합니다.(8절,10절,11절,12절,13절)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주신다는 점을 주지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어떤 환난이나 역경, 시련, 고통도 거뜬히 이기게 해주십니다. 여호수아 23장 10절에서는 우리 한 사람이 천 명을 당할 수 있음을 천명하십니다. 신명기 32장 30절에서는 두 사람이면 만 명도 몰아낼 수 있다고 더 큰 확신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승리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세상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질병을 이기며, 마귀를 이깁니다. 역경을 이기고, 시련을 이기며, 그 어떤 암도 이기고, 세상 모든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의 세상생활은 영적 싸움이요 능력대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말씀 그대로 우리를 넉넉한 승리자가 되게 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37절)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날마다 결심과 다짐을 새롭게 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기만 하면 구약 시대의 영웅 욥처럼 멋진 결말을 보는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Your decision determines your destiny! 당신의 결심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기도 초청) (나의 맘속에 온전히 주님만 모셔놓고 …)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당신은 여러 가지 환경적 어려움 때문에 신앙적 입지가 흐려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히려 상황이 어두울수록 믿음의 결의와 다짐을 굳게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든든한 보호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넉넉한 승리자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니 당신의 신앙적 입지와 결심을 분명하게 다짐할수록 하나님은 당신에게 멋진 결말을 안겨주십니다. 당신의 그 결심이 당신의 운명을 멋지게 결정해줍니다. Your decision determines your destiny!!'
비판보다 희망의 말을 /마7:1-6/ 조봉희 목사 2016-01-11 17:26:57 read : 9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
비판보다 희망의 말을 /마7:1-6/ 조봉희 목사 2016-01-11 17:26:57 read : 9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 설교말씀 고려 말기에 무학 대사가 이성계 장군을 만났습니다. 이성계가 무학 대사를 보니 참 못생겼습니다. 그래서‘대사께서는 돼지상이군요.’라고 혹평했습니다. 그러자 무학 대사는 이성계를 향해 ‘장군께서는 부처상이시군요.’ 라고 호평해주었습니다. 무학의 응수에 이성계는 큰 감동을 받고 다시 물었습니다. ‘나는 대사를 돼지상이라고 혹평했는데, 대사께서는 어찌 나를 부처상이라고 호평해주십니까?’ 이에 대하여 무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긴 대로 남을 보는 법이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제일 많이 짓는 죄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방하는 죄일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잘할 때 비판적이 되기 쉽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6장의 설교 이후에 주시는 7장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영적 수준이 향상 될 때 자칫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나보다 믿음이 약하거나 덜 헌신하는 자를 비판하거나 정죄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설교말씀처럼 자기는 돈 문제도 초월하고, 신앙을 최우선으로 헌신하는 삶을 사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한 점을 비판할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 사람의 약점보다는 장점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 혹평보다는 호평할 줄 알아야 합니다. 헐뜯고 비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지 W. Barclay는 매우 심플하면서도 의미 깊게 해석해줍니다. 첫째, 우리는 그 사건 전체나, 그 사람 전체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전부를 알지 못합니다. 사실 비판이란 언제나 부분적입니다. 한 면만 보고, 또는 한 편 얘기만 듣고 판단하기 때문에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인도 격언에도 ‘남의 신발을 신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걸음걸이를 평가하지 말라.’고 합니다. 유대의 훌륭한 랍비 힐렐은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네가 그 사람의 환경이나 입장이 될 때까지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우리는 겉모습만 가지고는 남의 사정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완벽하게 공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우리의 판단은 편파적이고 외형적입니다. 특히 비판적 안목으로 보기 시작하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먼저 보이기 때문에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편견에 의해 비판하기가 쉽습니다. 공정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비판할 만큼 선하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남을 비판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남을 비판하되, 자신이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될 만큼 완전무결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향해 분노하고 있던 군종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이 말씀 앞에 기세등등했던 무리들은 하나씩 둘씩 소리 없이 물러갔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꼬리 내린 강아지 꼴입니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비판할 만큼 완벽하게 선하지 못한 것입니다. 완전무결하신 예수님께서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넷째, 비판과 비방은 신앙적이거나 영적이지 못합니다. 원래 비방이라는 말은 사탄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비난과 헐뜯음은 마귀가 시키는 일입니다.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기운을 빼고, 상처를 입히고, 심지어 믿음에서 떨어지게까지 합니다. 어떤 분이 비난의 부작용을 이렇게 명료하게 정리해줍니다. 첫째, 그것은 결코 치료하지 않는다. - 그것은 항상 상처를 줄뿐이다. 둘째, 그것은 결코 사람을 완전하게 하지 못한다. - 그것은 오직 관계를 파괴시킬 뿐이다. 셋째, 그것은 결코 결속시키지 않는다. - 그것은 오직 분리시킬 뿐이다. 넷째, 그것은 결코 세우지 않는다. - 그것은 오직 허물뿐이다. 다섯째, 그것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 그것은 오직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할 뿐이다. 이처럼 비판은 사람을 깎아내리고 관계를 단절시키며,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남의 허물을 들추어 내지 말고, 사랑으로 덮어주라.”고 강조하십니다. 사실 비판적인 사람일수록 인격이 병든 자요, 관대한 사람일수록 인품이 건강하고 고결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수준 높은 덕성과 영성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는 그 방법론을 간단하게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1. 한담을 즐기지 말자. 인격과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한담을 즐깁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대로 대인일수록 사상을 말하는 반면, 소인일수록 사람 얘기를 즐깁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사람 비판하는 말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사람 얘기 많이 하면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험담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판하기를 멈추라고 당부하십니다.(1절) 즉 재판장 노릇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역할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비판과 정죄는 하나님의 역할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월권 행동입니다. 우리가 한담을 즐기다보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대신, 남의 허물만 들추어내고, 훈장노릇을 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남의 단점을 꼬집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타인에게 충고하는 것이다.” 사람은 여간해서 자신의 허물을 잘 모르고, 남의 결점만 지적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매우 실제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티와 들보」라는 용어를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목공소에서 일하셨기에 톱밥이나 작은 알갱이가 눈 속에 들어가는 경험을 자주 하셨습니다. 여기서 티는 톱밥을 말하고, 들보는 통나무나 서까래를 뜻합니다. 이처럼 한담을 즐기는 자는 자신에게 있는 통나무처럼 큰 결점은 못보고, 남에게 있는 톱밥 같은 작은 허물만 들추어냅니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나 허물을 침소봉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인격이 성숙한 사람일수록 남의 얘기를 잘 하지 않는 훌륭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원래 한담이라는 말은“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안 좋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현장에 없는 사람에 관해서는 안 좋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 11장 13절을 보면,『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그래요. 한담을 즐길수록 남의 치부만을 들추어냅니다. 그래서 잠언 20장 19절에서는『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새게 하는 사람이니, 입을 벌리고 다니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한담을 즐길수록 상대방을 비난하는 험담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한담하지 말아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비판 대신 희망을 말을 하는 자가 됩시다. 깎아 내리는 자가 아니라, 높이 세워주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그는 어떤가’에서 ‘나는 어떤가’로 관점을 돌리자. 사람은 자기가 표준이 되면 비판적이기 쉽습니다. 주님 앞에서 나는 어떤가를 수시로 물어야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의 실수를 볼 때 먼저 자기를 돌아볼 줄 알고, 또 두려워할 줄 압니다.(갈라디아서 6:1) 쭉정이 일수록 남을 내려다보고, 알곡일수록 자신을 내려다봅니다. 특히 성숙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자기 허물을 정당화하려고 남의 약점을 침소봉대합니다. “가랑잎이 솔잎보고 바스락거린다고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고어에도 “자기 집 두레박줄이 짧은 것은 탓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이 깊은 것만 탓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일에는 바늘 끝처럼 예민하면서 자신에 관해서는 바다처럼 관용을 베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다른 사람을 엄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일수록 주님으로부터 엄중한 심판을 받고, 너그럽게 헤아려주는 사람일수록 주님으로부터 너그러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지시켜 줍니다. 누가복음 6:37에서는 비판하지 않으면 비판받지 않고, 정죄하지 않으면 정죄 받지 않는다고 가르쳐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의 허물을 고쳐 보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쉽게 비판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 사람의 실수나 허점을 보더라도 ‘나는 어떤가’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자기를 살핍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자는 영이 맑아지고, 밝아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냉혹하게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대신, 가슴 깊이 품어주고 세워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즉 비판 대신 희망을 심어주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영국 런던이 첫 번째 폭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런던에 있던 모든 언론계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때 한 저널리스트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영국 언론은 사회에 대하여 아주 예리한 비판적 안목을 가진 언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판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시(戰時)이고 지금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비판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제 잠시 동안만은 희망을 선전하고 희망의 기사를 씁시다. 신문에서 희망을 보게 하여 우리의 현실이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과 희망을 우리 민족에게 주도록 합시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신문 기자들은 그 저널리스트의 말에 모두 합의하여 모든 기사의 논조를 다르게 썼습니다.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실었고 군대에 출정하는 젊은이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러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의 모습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차지했습니다. 또한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희망에 찬 메시지가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영국 국토 전체는 한순간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고 승리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판과 심판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정죄와 파멸만 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판보다는 사랑의 영을 구해야합니다. 희망의 영을 구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6절에서 수준 높은 덕성과 영성을 정립시켜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판이 매우 거룩하게 보인다할지라도 그것을 정당화 내지 합리화만 시키면 결국은 나 자신과 이웃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만다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때로는 예리한 비판이 거룩하고 근엄하게 보인다할지라도 그것은 곧 ‘돼지 코에 귀걸이’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가슴 아픈 상처만 남겨놓고 만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점을 가르쳐주십니다. 거룩한 신학보다는 사랑의 신앙이 더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비판보다는 희망을 심어주자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우리 다같이 따라 하십시다. 거룩한 신학보다는 사랑의 신앙으로, 비판보다는 희망의 말로 서로를 세워주며 축복하자! (기도 초청)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 전체를 다 알지 못하며, 나 자신부터 다른 사람을 비판할 만큼 선하거나 완전무결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비방이나 비난은 사람을 세워주거나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주고, 좋은 관계마저 파괴시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이상 한담을 즐겨서는 안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인 거룩한 신학보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사랑의 신앙입니다. 우리 이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님, 저로 하여금 예리한 비판자보다는 위로와 격려의 말로 희망을 심어주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삶과 죽음의 의미 /눅16:19-31/ 주준태 목사 2016-09-24 14:28:43 read : 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공자에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공자 왈, “이 세상 삶도 다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리요?” 이로 보건대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이 세상의 처세술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전에 먼저 종교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참 종교는 정확하게 내세관을 지도합니다. 불교는 이 세상을 사
삶과 죽음의 의미 /눅16:19-31/ 주준태 목사 2016-09-24 14:28:43 read : 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공자에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공자 왈, “이 세상 삶도 다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리요?” 이로 보건대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이 세상의 처세술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전에 먼저 종교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참 종교는 정확하게 내세관을 지도합니다. 불교는 이 세상을 사파세계, 108번뇌의 세계로 봅니다. 그래서 불성을 따라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 종교의 특성은 애매모호한 내세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참된 생명의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이미 천국을 소유했으므로 이제 그 확실한 천국을 이 지상에 가져오는데 초점을 둡니다. 불교는 차세에서 내세로, 기독교는 천국에서 지상으로, 하나는 세상종교요 하나는 천국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온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음입니다. 천국이 믿는 자의 가슴에 임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인간의 자력에서가 아니라 타력,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불교는 염불을 외워 무언의 세계로 가는 나무아미타불의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의 종교입니다. 최근 Times지에서 떠들썩하게 취급한 Raymond A. Moody 박사의 “Life After Life, 사후의 생명”에서 죽음의 근처에 가 본 사람들의 체험을 여러 면에서 조사한 바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자신의 시신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볼 수 있고, 잠정적으로 그 영체가 인격적인 빛을 만나고 곧 평화를 맛보는 것이 보편적인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이 체험이 고후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들어갈 때 내가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몰랐다는 표현과 대단히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Moody 박사의 연구는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어떤 느낌을 줄 뿐, 죽음 근처에서 본 그것이 사후세계의 전체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를 떠날 때 터널을 통과하는 듯 한 느낌 또는 어떤 세찬 소용돌이를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빛 속에서 보는 영체들인 천사들의 환영을 받게 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 아무도 갔다가 돌아온 적이 없는 천국의 상급이 있고, 지옥의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러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인간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한 결과로 주어진 형벌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의 뿌리는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입니다. 물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점에서 하나님과 절대 분리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인간의 본체시고 사람은 운명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가 사랑의 관계에 있지 않고, 믿음과 신뢰의 관계에 있지 않고, 소망과 기대의 관계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실상 죽음의 관계입니다. 종교란 사실, how의 문제를 취급하는 방법상, 기술상의 문제를 취급하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why, 의미상, 인격상 문제를 취급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 이것은 근본적으로 의미상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천국에서나 지옥에서나 영생합니다. 영원한 데서 태어난 인생은 절대로 멸절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긍정적이지 못한 관계는 죽음의 관계요, 멸망의 관계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적극적인 교제가 있는 관계는 영생의 관계요, 생명의 관계입니다. 사람만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한 중학생이 제게 물었습니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글쎄” “내 바지를 누가 가져 갔노?” 그러나 인간은 죽음과 삶을 생각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죽어야 하나, 살아야 하나?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햄릿의 입을 통해 고뇌하는 인간을 부각시킵니다. 이 삶과 죽음은 근본 종교적인 문제요, 영적인 문제입니다. 이 삶을 자연과학이나 의학에서, 삶과 죽음의 현상 조사에서, 뇌사와 심장사 사이에서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R. Dawkins 교수와 R. Williams 대주교의 토론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고민하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거기로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여기로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가난뱅이는 천국에 갔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멋대로 산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여기서 첫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옥과 천국, 다시 말하면 인생의 영원한 본향은 사람의 형편과 관계에서가 아니라 이 땅을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돈이나 인력이나 세상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신적 행동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되 어떻게 만나야 되는가를 생각해야 할 수직적인 관계의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둘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땅과 내세는 연속되어 있되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마치 넓은 바다 위를 뛰어오르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영원에서 출생하여 시간선상을 비상하다가 다시금 영원으로 돌아가는 한 순간 그것이 인생입니다. 인간만이 짧지만 영생을 생각합니다. 전 3:11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러나 그 한 순간의 비상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가 영원을 두고 하나님과 화목할 것인가, 내가 영원을 두고 하나님과 등지고 살 것인가?” 이 영원에 대한 나의 태도를 이 땅 위에 사는 날 동안 결정해야 합니다. 이 운명적은 결단은 감추어진 영역에서, 찬송의 영역에서, 결론의 영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지만 나타난 영역에서, 실제의 영역에서는 인간이 결단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에 따라 영생을 선택할 수도, 영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할 수도, 하나님을 끝까지 시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 4:7, 신 6:16) 하나님을 시험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창 2:17)!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하던 마귀와 함께 영원한 형벌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요 3:31-36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명하신 법칙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예수님 자신이 말씀해 주심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 신자들이 서 있을 유일한 반석입니다. 우리는 천지는 무너져도, 세상은 변해도, 주의 약속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치 않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는 자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더 많이 벌고 출세하고 즐기는 곳으로 끝나는 장소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과 죽음을 선택하는 장소입니다. 그러한 질적인 삶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성령만이 믿는 자의 가슴속에 비취어 알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의 죽음의 현상을 넘어서 영원한 본향으로 갑니다. 영혼은 바로 가고, 육체는 변함을 받고 갑니다. 그리고 그 장소는 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 곧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누리는 세계요,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 곧 저주와 분리와 불신의 세계 곧 단테가 말한 loveless, hopeless, 사랑도 소망도 없는 세계입니다. 인간이 죄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멸망을 선고받아 천국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구주가 오셔서 당신께서 친히 천국 가는 길이 되시고 진리와 생명이 되심으로써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셔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운명적으로 지고 있는 두 가지 멍에를 보셨습니다. 그 하나는 고독의 멍에요, 또 하나는 죽음의 멍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고독과 죽음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랑과 부활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자신이 삶과 죽음, 세상과 천국 사이에 살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빌 1:20-24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나는 죽기를 원한다, 죽어 천당 가는 것이 고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지고 담대한 표현입니까? 그는 삶과 죽음의 고민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극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 믿는 자의 삶과 죽음의 의미가 되십니다. 그분의 약속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도 귀중히 보시고, 죽음은 더 귀중하게 취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믿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지금도 주의 사자들이 믿는 이를 둘러 진치고 있지만, 내가 육체를 벗어날 때 몸의 눈이 보지 못하던 천사들을 보고 그들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서 주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시 116:15과 34:7의 말씀입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할렐루야! C. Dickens는 두 도시 이야기를 썼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두 도시의 시민이요, 시민권 소유자입니다. 빌 3:20-21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지난 2. 23일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진화론 대 창조론의 Richard Dawkins 교수와 Rowan Williams 캔터베리 대주교 사이에 토론이 있었습니다. Dawkins가 대담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물리학자들을 통해서 세계와 우주 그리고 생명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의 설명은 무에서 시작한다. 아주 명쾌하고 매력적인 설명 아닌가? 왜 신이라는 혼란스러운 존재로 이 명쾌함을 어지럽히려고 하는가?” 대주교가 겸비하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상황들 속에서 세계는 신이 디자인했다는 유신론적 설명과 인간의 진화, 이 두 개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이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거대 이론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저는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나라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모호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두 개의 나라를 창조하고 다스립니다. 이곳에서 저 곳으로, 저 곳에서 이곳으로 아무도 건너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혼란스럽지도 않고 질서정연한 나라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15:50). 그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상속하는 나라입니다. 믿음의 기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장, 히 1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바랬고, 구체적인 약속의 땅을 사모했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만세 전에 특별히 준비하신 복된 기업의 땅입니다. 이 땅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온전한 영적 유대인, 아브라함의 후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안식의 땅 가나안은 신약적인 개념으로 영원한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만 살다가 죽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안내해 주고, 주 예수께서 반겨주시며, 온전해진 뭇 성도들과 풍성하고 품위 있는 교제를 나누는 하늘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의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이 땅 위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잘하고 있는 일에는 삶의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계속 잘하시길 바랍니다. 첫째, 전도사랑방의 발전입니다. 우리 교회 전도사랑방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주도적으로 개설하기도 하고 혐조하기도 합시다. 봄 전도사랑방을 통하여 더욱 은혜로운 삶을 아름답게 물들입시다. 둘째, 주중 절기가정예배의 실천입니다. 금년 상반기에 준비하여 하반기부터 실시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주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시 90:12, 17). 할렐루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수1:1-11/ 주준태 목사 2016-09-29 11:04:07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나님의 종 모세가 죽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심판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일부입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모세가 위대하지만 그를 불러가신 하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수1:1-11/ 주준태 목사 2016-09-29 11:04:07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나님의 종 모세가 죽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심판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일부입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모세가 위대하지만 그를 불러가신 하나님은 새로운 종을 불러세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을 존중하고 순종해야 하지만 그들을 너무 의지해선 안됩니다. 그들에게 너무 큰 기대를 가지면 인본주의에 빠지고 실망하기가 쉽습니다. 사람은 오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장사지내고도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당신의 계획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 강까지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가나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땅입니다. 이 약속은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계속해서 그 후손들에게 주어지고 확인되었습니다. 창 15:18, 신 1:7, 11:24에서 약속된 땅의 구체적인 경계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은 그 반복입니다. 사람은 없어져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세월이 흘러도, 시대가 바뀌어져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은 여전히 우리의 소망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한 시대, 한 시대마다 당신이 경륜하신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한 사람, 한 교회, 한 나라에 대한 당신의 뜻이 있습니다. 그 범위가 있고 기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대와 모든 종들의 삶을 종합하여 당신의 나라를 온전히 틀림없이 세워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 어떤 기회를 믿을 것이 아니라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우리 삶의 길을 인도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약속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리라’ 약속은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동시에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 다음에 발로 밟고, 순종으로 그것을 소유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저절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쟁취하도록 하십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한 다음에 복을 주십니다. 거저 주시면서도, 쟁취하여 얻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입니다. 거기에 우리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부지런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롬 12:11).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 편하게 예수 믿고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가 받을 첫째 교훈입니다. 장거리 경기에는 속도 조절이 필수적입니다. 구원은 거저 얻는 것이지만 천국은 힘쓰는 자가 소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그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습득해 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을 주시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삶의 현장에 나아갑니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은 신앙이성이 흔들리고, 두려움이 밀물처럼 몰려옵니다.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눈을 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땐 용기백배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여리고 성을 바라보고 가나안 일곱 족속을 보았을 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큰일 났구나’ 어떤 강심장도 반드시 떨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적 사고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용기를 가집니다. “내가 이 땅을 네게 주리라. 네가 취할 땅이 여기에 있다. 아직도 이 성에 나의 백성이 많이 있다! 내가 너를 통하여 성취할 새 일이 아직 남아 있다”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동인입니다. “여호수아야 일어나서 가라 내가 이 땅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행동하게 합니다. 우리의 손발을 움직이는 직접적인 원인을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계속 행동하는 힘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삶의 현장에 가보니 겁이 납니다. 이론과 실제의 간격이 느껴집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절한 또 하나의 약속을 추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역사적으로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구체적으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예언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삶의 진실이며 사실의 확인입니다. 이를테면 아이가 자다가 깨어서 옆에 있는 엄마를 보지 못하고 ‘엄마’ 하고 웁니다. 그때 엄마가 ‘애야 엄마 여기 있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느냐?”고 묻는 것은 마치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고기가 ‘물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보통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있다는 말은 가정법이 아니고 사실에 대한 서술입니다. 뗄 수 없는 연합관계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최후의 말씀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보다 더 좋은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특별한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건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십시오. 성령 강림의 역사를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확실한 사건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지금 실제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용기의 근원입니다. 성경적 행동의 보증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새로운 도전에 응답했습니다. 새로운 행동에 두려움이 일자 하나님의 임재라는 추가적인 약속의 말씀으로 극복했습니다. 다음에 부딪친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쟁취할 것인가? 하는 방법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내 방법으로 싸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내신 법칙을 따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이 있고 나의 길이 있다면 누구의 길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나의 길을 따라 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율법과 계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하나님이 계속 함께하십니다. 복을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길을 열어 주시고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본문에 말씀하십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고 정로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와 복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하고 힘써야 합니다. 목적이 좋으면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꿈과 비전도 불의와 타협하면서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불의와 함께하지 않습니다. 부정행위를 도우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특별한 계시 방법도 모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 별나게 신앙생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가 받을 둘째 교훈입니다. 이승훈 선수는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보편율 속에 진정한 위대함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중요한 인도하심은 언제나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십시오. 종종 소리내어서 낭송해 보십시오.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십시오. 말씀을 주술적으로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마시고, 그 말씀의 내용과 원리를 깨닫고 적용하십시오. 성령님의 은혜로 말씀의 진수를 맛보십시오. 그 말씀대로 지켜 행하십시오. 비전도 필요하고 용기도 담대함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따라 행할 때 진정한 성공과 번영이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 그 말씀이 우리를 정로로 걷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1). 여호수아는 들려오는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죽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후손에게 남깁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23:6). 인간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우로도 좌로도 치우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그 가능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극히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간 강한 마음이 아니면 꼭 치우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꼭 붙잡히려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성령이 주시는 은혜로운 마음, 담대한 마음을 주셔야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라고 했습니다. 내 맘으로 치우치는 것을 나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지극히 화평한 마음, 깨끗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이 와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생산하며 열매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버리고 지극히 화평한 마음으로(찬 257장) 주님의 말씀을 지킵시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정로로 달려갑시다. 이것이 성경적 감정입니다. 내 맘이 아니고 주님의 마음을 품을 때만이 주님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내 삶의 선두에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노력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행하실 때 우리의 걸음걸음마다 환히 등불이 켜집니다. 번영과 축복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시 119:105). 찬 257장을 다 같이 부릅시다. 설은 낯선 날입니다. 설은 우리에게 긴장을 가져옵니다. 신정을 쉬고 또 구정을 쉬게 될 때 왠지 두려움을 느낍니다. 무엇 때문에 새 날이 오고 새로운 사건이 생깁니까? 우리는 그 원인에 대해, 목적에 대해 불안을 금치 못합니다. 이것은 내가 원했던 일이 아닌데, 내가 구했던 것도 아닌데, 여러분이 오늘과 금년에 맞딱뜨려야 할 일 때문에 갈피를 못 잡아 하시지 않습니까? 새로운 인도, 새로운 작정, 새로운 시작이 내게 밀려왔을 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9절이 그 메시지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9절)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존재를 긍정하라는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에 대해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곧 성경적 감정을 가지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음으로 성경적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찬 445장).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네가 금년에 살 것도 내가 명령한 것이니라. 네 삶의 주도권을 내가 갖고 있느니라. 새로운 일에는 새로운 힘을 주겠노라. 모든 것은 내가 친히 이루겠노라” 사실 여호수아는 바로 그 말씀이 듣고 싶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새로운 일을 꾸미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일만 하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그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부각시키는 ‘내가’ 란 말씀에 종속될 때 용기가 생겼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도 다시 한번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합시다. 말씀과 함께 시작합시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라”(6절). 금년도 이 시대의 복의 장자로서 위대한 공급자, 은혜의 전달자로 보람있게 삽시다. 21C를 사는 사도화, Apostleship답게 삽시다. 영원 불변의 말씀 위를 페이스를 잘 조절하면서 달려갑시다.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조용기목사 2017-08-03 06:32:32 read : 18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크리스천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쁨의 기도와 감사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기 때문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조용기목사 2017-08-03 06:32:32 read : 18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크리스천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쁨의 기도와 감사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을 누리도록 힘을 써주시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흥미로운 실험을 했는데, 부부 싸움할 때 나오는 입김을 비닐봉투에 모아서 검사를 했더니 코브라의 독보다 더 강한 독성 물질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또 이와 반대로 즐겁게 웃고 난 사람의 뇌를 조사해보니 독성을 중화시키는 암세포를 죽이는 좋은 호르몬이 다량으로 분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웃음은 독을 없애주는 좋은 약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 마음에 매일같이 독이 쌓입니다. 원망과 불평의 독, 근심과 걱정의 독, 온갖 스트레스의 독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 쌓여서 여러 가지 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웃으면 독이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된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연구해서 입증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최근 과학기술이 발달로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서 엄마가 기분 좋아하면 방실방실 웃고, 엄마가 화를 내면 뱃속에서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들은 하루에 400번 내지 5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그 웃음이 건강하게 해 주는 것인데, 어른이 되면 하루에 15번 아니면 20번 밖에 웃는데요. 그러면 살아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웃으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1. 항상 기뻐하라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영향력을 줍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기뻐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 영향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기쁨을 전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우리에게 향기처럼 생명 있는 파장이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웃을 때 그냥 웃지 말고 ‘꺄르르~’ 소리 내어서 웃는다면 효과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을 왜 하나님께 맡겨버려야 하냐면, 소나무는 요즘 같은 한겨울에도 푸른 잎이 소나무를 생명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소나무는 한겨울의 혹한과 강풍을 이겨 내고, 벼락을 쳐도 죽지 않습니다. 하지마 수백 년을 버틴 소나무라도 재선충이라는 작은 벌레에게 갉아 먹히면 1년 이내에 말라 죽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재선충 같은 벌레가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17장 22절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염려와 근심이 바로 우리 마음을 갉아 먹는 재선충입니다. 염려와 근심이 마음을 갉아 먹도록 내버려두면 삶은 피폐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염려를 맡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늘 기도를 통해 염려를 주님께 맡겨놔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 욥기 1장 21절에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야훼시요 거두신 이도 야훼시오니 야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욥이 고백합니다. 사탄은 고난당하면 욥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욥은 찬송을 통해서 원망과 불평을 이긴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마귀의 전략입니다. 마귀는 불평과 원망을 통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이 습관이 되면 우리의 삶을 파멸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을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제일 확실하게 죽이는 독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어서 불평과 원망이 나오려고 하거든 감사와 찬송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떠나가고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웃음은 웃는 자도 웃음을 듣는 자도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시편 16편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는 큰 기쁨이 있고 오른편에는 즐거움이 있다고 하니깐, 주님께 더 가면, 근처에만 가도 기쁨이 넘치고 행복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웃는 자는 웃음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2.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찬송과 더불어서 박자를 맞추면 효과가 크게 나타납니다. 빌립보 감옥에 바울과 실라는 박자 있는 기도를 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고 난 다음에 찬송을 부르고 박자를 맞춰가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니 예배 효과가 굉장했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5~26) 지진이 나니까 우연히 문이 열리고, 쇠고랑이 풀리고, 수갑이 풀려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어날 수 없습니다. 튼튼하게 쇠고랑에 묶여서 수갑을 차고 감옥에 있는데, 거기 한사람 한사람에게 매였던 것이 찰칵찰칵하며 다 풀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소리에 기적인 일어난 것입니다. E.M 바운즈라는 세계적인 기도 전문가는 “기도는 믿음과 함께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의 과수원으로 들어가 거기에 있는 가장 잘 익은 풍성한 열매를 손과 마음으로 따서 먹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풍성한 약속들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낼 때 힘차게 노래를 하면 귀신들이 갈팡질팡 합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었을때, 하나님은 범죄한 사울을 마귀가 괴롭히는 것을 내버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릴 때부터 찬송 부르면 귀신이 쫓겨 나갔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사울 왕이 사람을 보내서 다윗을 궁으로 오게 했습니다. 시울에게 귀신이 이르러 막 고함을 치고 몸부림을 치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야단할 때, 다윗이 기타를 타고 이스라엘의 노래를 부르면 귀신이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의 기분이 가라 앉았습니다. 사무엘상 16정 23절에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신을 기도로 명령으로 쫓아내다가 너무 지치면 찬송을 불러야 됩니다. 저는 귀신을 많이 쫓았는데 귀신 나가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더럽고 악한 귀신아 물러가라! 이 나쁜 놈아 물러가라! 내 근처에 있지 말고 멀리 가라!” 그러는게 매우 힘이 듭니다. 그러면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귀신이 “안 물러간다. 못 물러간다. 안 물러갈거야”라며 반항하다가도 찬송을 부르면 이상하게 귀신들린 놈이 숨을 몰아쉬고 난 다음에, 찬송 소리를 견지지 못하고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34절에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며 예수님을 대단히 무서워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에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귀신은 쫓아내야 우리가 훼방을 받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에 불안한 것은 다 귀신의 일인 것입니다. 시편 28편 6절로 7절에 “야훼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야훼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일반적인 기도를 할 뿐 아니라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이 크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뜻인데,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박국 선지자는 모든 것이 다 없을지라도, 자기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겠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계시면 그는 만족한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다면 오늘 일도 걱정하고 내일 일도 걱정하니 도무지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으로 주님은 기도로 인생을 살도록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로 17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께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심리학자 데이빗 시맨스는 마귀는 인간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서 유혹을 한다고 합니다. 첫째로, “나는 무능하다”라는 생각을 집어넣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듭니다. 거기에 넘어진 신자를 마귀는, 둘째 “이제 다 끝났다” 이와 같은 생각을 집어넣어 주어서 미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셋째 단계는,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나는 버림받은 자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모든 희망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절망의 근원은 마귀에게 있습니다. 마귀가 절망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20절 21절에 보면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절망을 말하면 사망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마귀는 절망적인 생각을 통해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그러므로 절망의 근원은 마귀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하는 사람은 이미 마귀의 공격에 떨어진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절망이 들어오면 사망이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통해 모든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희망을 꿈꾸고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꿈꾸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희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귀의 일인 것인데, 사람들은 대개 큰 시련을 당할 때 “이제 다 끝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 끝났다”가 아니라 “아직 늦지 않았다”라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아직 기도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끝나야 만사가 끝난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으면 아직 늦지 않은 것입니다. 희망을 주는 말이 “아직 늦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아직 늦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셔서 문제를 해결하시고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늦지 않았습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운동을 하프타임에 전략을 짭니다. 운동이 진 것이 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프타임 시간을 내어서 다시 재정비해서 후반전을 싸우는 것입니다. 운동에는 꼭 후반전이 있습니다. 인생도 후반전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우리의 생애 속에 비참한 고난이 다가와서 “이제 다 끝났다”라고하며 손을 털고 일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인생의 운동에 반 밖에 아직 안했습니다. 후반전이 아직 남았습니다. 후반전을 잘 처리하면 운동을 재기시킬 수가 있고, 큰 실패를 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반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금년도에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꿈을 꾸어 보는 것입니다. 꿈을 꿀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절단이지요. 꿈을 꿀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야 돼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긍정적인 시인을 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고, 죽는 것을 산다고 말하고, 불행한 것을 행복하다고 말하고, 긍정적인 믿음의 말을 합니다. 주위에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도울 수 있는 길을 열기만 하면 성령이 여러분과 더불어 상상을 초월한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후반전 인생을 살아가는데 인간의 힘으로 살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능으로 살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의 힘을 보혜사로 의지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여러분은 버림받은 인생이 아닙니다. 할 수 없지 않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꿈이 있습니다. 큰 꿈도 있고, 적은 꿈도 있습니다. 꿈이 없으면 절망입니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은 희망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너는 무슨 꿈이 있느냐?”고 여러분 종종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큰 꿈 아니라도 적은 꿈이 있으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으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네 믿은 데로 될지어다.” 굉장한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생기찬 믿음의 선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나는 할 수 있다. 일이 잘 된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입술로 고백하는 이런 것이 있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이 되지 않고, 아직 늦지 않았다. 아직까지 늦지 않았으니까 좋은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끝났다”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끝났다”고 말하지 말고 “아직 늦지 않았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십시오. 한 번 따라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오늘 주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목마르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마귀는 절망적인 생각을 통해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승리하신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감사드립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아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피해의식을 극복합시다 /막5:25-34/ 주준태 목사 2016-09-28 09:31:02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십이 년을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오랜 질병으로 그 여자는 많았던 재산도 다 잃어버렸고, 또 많은 의사들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빼앗아 가는 도둑처럼 보였고 또한 자기를 이렇게 저렇게 괴롭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했
피해의식을 극복합시다 /막5:25-34/ 주준태 목사 2016-09-28 09:31:02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십이 년을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오랜 질병으로 그 여자는 많았던 재산도 다 잃어버렸고, 또 많은 의사들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빼앗아 가는 도둑처럼 보였고 또한 자기를 이렇게 저렇게 괴롭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했고 세상이 무서워졌으며 자신마저 싫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피해의식에 빠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피해의식에 빠진 근본원인은 그의 불치의 병에 있었습니다. 병은 범죄한 인생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한걸음 나아가 가장 근본적인 피해의식은 인생을 창조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날 미워하신다는 의식입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이런 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양심이 가위눌린 것처럼 정죄의식에 꽉 들어차 어디에 가도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는 복음 진리를 믿게 될 때, 그 무겁던 정죄감에서 해방 받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적인 해방이요, 흑암의 권세로부터 구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할렐루야! 오늘 아침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가책에 억눌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정죄감이란 무서운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바로 이 시간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인생을 자기의 형상으로 지으사 자신과의 관계에서 영생하도록 만드신 그 하나님 앞에 마음 문을 여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곧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 용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는 거룩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여러분 자신도 모르게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우주적인 평강 안에 여러분이 안겨있음을 느끼게 되고, 하늘 평강의 파도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영적인 해방을 얻고 새로운 존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금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 여인을 이미 영적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 믿은 후 세월을 십이 년이라 치고 지금은 어떠한가 주목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의 피해의식은 점점 더 중하여 갔습니다. 왜요? 영적으로 해방 받은 그 여자가 아직도 인간관계에서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여자에게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록 영적인 피해의식에서 해방 받아도 인간관계에서 여전히 정신적인 피해의식, 피해망상증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피해의식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여드릴까요? 첫째로, 계산적이 됩니다. 무섭게 타산적이 됩니다. 하도 사람들에게 속았으니 예방조처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베풀었으면 꼭 그만큼 되받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준만큼 받아내야 하고, 교인은 교회에 드린 만큼 지배해야 합니다. 베풀 때에도 순수하지 못하고 기쁨이 없습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줄 수 있어야 하는데 보상을 바라고 주니 받는 사람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결국 피해를 주고 맙니다. 이 여인처럼 역시 계속적으로 피해의식이란 출혈이 형태를 달리 하지만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줄 수 없다고 열린 문을 닫아 버립니다. 문이 열려 있어야 생명도 기쁨도 능력도 흐를 것인데 문을 닫아 버리면 생명이 고갈됩니다. 기쁨도 사라지고 능력도 소진되고 대신에 질병과 근심과 죽음이 선뜻 다가섭니다. “나는 손해만 볼 뿐이다 인생은 억울하다! 나는 외롭다”고 몸부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공격적이 됩니다. 피해의식은 남에게 손해를 받았으니 보복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조금만 잘못해도 참지 못하고, 조금만 섭섭하게 해도 견디지 못합니다. 아니 섭섭하다 아니다가 자기 자신의 주관뿐임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찾아서 욕하고 물어뜯습니다. 자신은 남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늘 자신을 방어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문이 닫히고 증오와 긴장의 문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피해의식에 빠진 사람과는 아예 가까이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잠 22:24-25). 성경 렘 10:25에 보면 주의 백성들의 피해의식이 적나라하게 표출됩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남이 나를 미워하니 나도 미워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복과 증오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위선적이 됩니다. 위선이란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나 실제로는 미워합니다. 입으로는 진실이라고 말하나 실제로는 속입니다. 이렇게 피해의식은 우리의 정신과 삶을 파괴합니다. 영적으로 해방 받은 사람조차도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피해의식에 젖어서 서로 속이며 서로 미워하는 생활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피해의식의 혈루증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께 나아갑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피해의식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나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가 예수께 나아오는 길은 험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를 진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여러 형태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사람들 역시 피해의식의 상처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란 다른 사람을 조금 행복하게 해준 만큼 또 불행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이 여자를 보십시오. 그녀는 전날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을 보이고 상처를 보이고 상담을 하고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병은 낫지 아니했습니다. 지식과 경험은 도리어 그 여자로 하여금 더욱 계산적이고 공격적이며 영악스러울 만큼 위선적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지금 그 방면에 철저히 실망을 느껴온 터라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환부를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을 속이고 미워하며, 독점하고 지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의 심리적, 정서적 피해의식을 누가 고치랴? 피해의식의 혈루증, 속으로 피를 흘리며 파리하게 죽어져 가는 자신을 고칠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내 영혼의 피해의식을 완전히 고쳐 준 그분을 다시 신뢰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여자의 단순하고 순수한 열정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그녀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내 영혼의 피해의식을 근본적으로 고쳐주신 그분이 내 정신적인 고질병도, 내 육체의 오랜 불치병도 그분만은 능히 고칠 수 있다. 아니 너무도 쉽게 고칠 수 있는 분이시다” 주님은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직접 주님과 대면하기로 결심한 그녀의 마음 문을 여셨습니다. 주님은 은밀하게 당신에게 나아와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만진 여인에게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본문은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여인은 자기 몸에 혈루 근원이 마른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이 그 여자 안에서 주님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정녕 주님의 것이었고, 주님 자신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주님의 치유에서 위대한 치유의 법을 배웁니다. “주님이 주심으로써 내 피해의식의 혈루 근원이 말랐구나, 오호라, 피해의식은 내가 줌으로써 낫는 것이구나! 저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떡을 엘리야에게 준 것같이(왕상 17장), 뱃세다의 빈 들에서 한 소년이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린 것같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구나!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나누어 주도록 하자, 내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기로 하자, 이미 모든 것을 받았으니 무엇을 줄까 만을 생각하자!” 피해의식은 내가 주님과 함께 주는 사람이 될 때, 주님의 것을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전에 받으려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속박 받는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경질적이 되고 타산적이 되고 공격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기 위해서 주님의 것을 주님과 함께 나누어 주기 위하여 내가 지음을 받았고, 해방 받았으며, 고침 받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능력을 주심으로써 피해의식의 치료함을 받은 여인에게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누가 네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전 같으면 그 여자는 속였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복잡하게 계산하고 방어했을 것입니다. 자존심과 교만의 방패를 들어 자신을 그 안에 감추고 위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 무엇을 드릴 것인가? 를 생각했습니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난 그녀는 주께서 그 여자의 믿음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 일을 주님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언합니다. 그 여자의 입술이 그 여자의 구원을 확실하게 증명했던 것입니다(롬 10:10). 그러자 주님은 다시 한번 피해의식, 혈루증이 완전히 극복되었음을 선언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오늘 아침 여러분의 가슴속에 흘러내리는 피해의식의 혈루 근원이 말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자신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는 그 생래적인 피해의식에서 자유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요일 4:18에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먼저 여러분의 영혼을 피해의식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그분에게 조용히 나아가십시오. 같은 피해망상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한 번도 피해의식을 갖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우리의 피해를 대신하신 그분께 진정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주시는 것을 받고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바로 그것을 주님께 드리고 이웃과 나누기를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바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 여러분의 피해의식은 치유될 것입니다. 억압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행복의 광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지극히 화평한 마음으로 천국 소망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나누는 희년을 맞읍시다.
0.1달란트도 사용하면 강해진다/ 막25:28/ 전병욱 목사/ 2008-02-21
0.1달란트도 사용하면 강해진다 막25:28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는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중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비교하여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쓰여진 책입니다. 한편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되는 7개의 구절의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23개의 구절에 해당됩니다. 행적과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진 마가복음에서는 “곧”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며 행동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실천을 가르치셨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번 배운 바와 같이 제자들을 풍랑 가운데 인도하여 그들의 믿음을 테스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배운 배운 것을 실행하기 위해 전도여행을 보내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가지 시각에서 접근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한가지 시각은 복음 전하는 제자들의 시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복음 받아 들이는 자들의 시각입니다. 먼저 복음 전하는 제자들의 시각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1.작은 능력도 사용하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 중에 하나는 과도한 교육, 즉 over education의 문제입니다. 싱가포르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고등학교 교육만 받아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너나 없이 대학 가고 더 나아가 대학원, 유학까지 갑니다. 배운 이후 써 먹을 것 생각하여야 합니다. 배운 것은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도 쓸 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어린아이가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내어 놓았을 때 비로소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중 크게 칭찬 받은 빌라델피아 교회도 계시록 3장 8절 말씀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씀처럼 적은 능력 받았음에도 지키며 받은 것 가지고 충성하였기 때문에 칭찬받았습니다. 1994년 나온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는 교훈과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는 IQ가 75밖에 되지 않았으며 몸도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달란트가 아니라 0.1달란트도 겨우 받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주위로부터 많은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불량배의 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도망하다 보조기구의 나사가 풀리고 보조기구가 다 떨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보조 기구가 없이도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얽매이고 있는 장애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 포레스트 검프에게서와 같은 시험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계속하여 불량배가 자동차를 타고 포레스트를 공격하는 장면이 전개됩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이를 피하기 위해 죽을 힘 다해 뛰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너무나 잘 뛴 나머지 미식축구부로부터 스카우트됩니다. 그리고는 스카우트된 알리바마대학 미식축구부에서도 맹활약하여 전미 슈퍼볼 대회에 우승하였습니다. 캐네디 대통령과 악수까지 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는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워 전쟁영웅이 되었습니다. 0.1달란트 밖에 안 받은 자가 뛰는 것 하나 잡고 사니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 손대다 아무것도 못하는 인생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영화에는 딘 중위가 등장합니다. 그는 명문 군인 가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쟁에서 두다리 잃자 좌절하고 낙심하였습니다. 장애인이었던 포레스트 검프가 도리어 그의 영적 스승이 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해도 되는 것과 안해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 하다 시간낭비하지 말고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 붙잡으십시오. 가장 중요한 그 한가지는 바로 예배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속하여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하나 붙드는 인생이 될 때 그 인생에는 큰 부흥이 있습니다. 영적 부흥을 위해 필요한 것은 새벽기도입니다. 경제적 부흥을 위해 필요한 것은 십일조입니다. 새벽기도는 밤문화를 깨고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더욱 부지런히 살게 합니다. 한편 십일조는 우리를 경제적 축복을 받게 만듭니다. 우리 자녀로 하여금 경제를 알 때부터 십일조를 가르칩시다. 예배는 인생의 기초입니다. 새벽기도와 십일조의 인생을 살 때 불꽂 같은 인생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못배우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지만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0.1달란트 받았지만 충성하니 크게 쓰임받았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도 비록 연약하였지만 작은 강점 하나 붙잡고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 말씀을 듣는 자의 시각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영접하는 자가 될 때 축복이 있습니다 ====================================== 본문 11절 말씀은 마태복음 10장 14~15절 말씀에 해당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영접하지 않는 자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비판하고 거부하고 벽치는 자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것 배우십시오. 성경은 손대접 하고 환대할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영접하면 형제자매도 품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창세기 18장에는 하나님이 두 천사를 데리고 아브라함을 방문하는 이야기입니다. 1절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영접”하였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송아지까지 잡아 대접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절대절명의 꿈인 아들을 주겠다는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잘 영접하고 환대하면 그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참된 복음 들어간 곳에는 영접하는 것 배우게 됩니다. 영접 잘하면 그 영접 받은 자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 주고 갈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엘리야와 사르밧의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굶주린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에게 갈 것을 명합니다.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 한줌과 기름 한방울을 그의 아들과 함께 먹고 죽겠다 말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을 자신에게 대접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는 정말 잔인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그 과부는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라야는 그 통에 가루가 마르지 않고 그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겠다는 축복의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접의 영성 가지고 있는지 테스트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접의 영성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프레스트 검프 영화로 돌아오겠습니다. 장애인이었던 프레스트 검프가 버스를 탔을 때 다른 사람이 못 앉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여자친구 제니가 그를 옆에 앉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별 볼일 없던 제니는 그와 결혼하게 되었으며 그의 인생이 꽂피게 되었습니다. 한편 바바라라는 한 흑인도 그를 영접하여 앉게 하였습니다. 바바라도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사하였습니다. 검프가 거부가 된 후 자신을 영접해 주었던 바바라의 유족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 구하십시오. 빈방 두고 손님 영접하십시오. 이 사회는 적대사회입니다. 그러나 그 적대의 사회를 환대의 사회로 바꿉시다. 영접의 영성 가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한 축복 구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끝. 전병욱 목사
100% 순 믿음을 갖자 /수5:13-15/ 조봉희 목사 2016-01-09 06:24:55 read : 8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진돗개는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에 속합니다. 그 개의 영리함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습니다. 진돗개는 무엇보다도 아무나 보고 다 짖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 매우 요란스럽게 짖고, 어떤 사람은 바로 앞을 지나가도 짖지 않는답니다. 이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어느 학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100% 순 믿음을 갖자 /수5:13-15/ 조봉희 목사 2016-01-09 06:24:55 read : 8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진돗개는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에 속합니다. 그 개의 영리함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습니다. 진돗개는 무엇보다도 아무나 보고 다 짖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 매우 요란스럽게 짖고, 어떤 사람은 바로 앞을 지나가도 짖지 않는답니다. 이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어느 학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무엇인가가 안정되지 못한 사람은 그 두려운 마음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린다고 합니다. 그 진동이 개의 촉각에 전달되어서 개가 짖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습을 보고 짖는 것이 아니라, 촉감에 의해서 알고 짖는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얘기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염려하며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몸의 진동에 의해서 개도 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학자가 인간의 두려움을 세 가지 S자로 구분하여 정의해줍니다. 즉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근원적 두려움을 세 종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피상적 두려움(surface fears)입니다. 삶의 현실에서 별로 의미가 없는 두려움입니다. 즉 은행 카드 결제일이나 공과금 납부일, 자동차의 연료 충전, 약속시간 걱정 등입니다. 둘째는 잠재의식적 두려움(subconscious fears)입니다. 이것 역시 90% 이상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두려움입니다. 실패나 거절, 배반이나 부적절함에 대한 두려움 등입니다. 셋째는 영혼의 두려움(Soul fear)입니다. 이것은 인간 본연의 두려움입니다. 삶의 현실에서 날마다 느끼는 내면적 두려움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영혼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샤머니즘이라는 무속신앙이 생긴 것입니다. 영혼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려고 정령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인간 본연의 두려움을 깨끗이 몰아내주십니다. 염려나 불안 대신 평안을 주십니다. 두려움 대신 영혼의 고요함과 평정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공교롭게도 성경에서는 두려워말라는 말을 365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움을 몰아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중해 한 복판에서 태풍을 만나 파선한 바울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오늘 우리도 이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려워 말라. 어린 양이여, 너 있는 곳에 주 늘 계시니. 이 밤이 지나 새벽 올 때까지 네 선한 목자 함께 하시리라. 오직 믿음, 오직 믿음, 만사 형통하리. 오직 믿음. XZ” 어떻게 하면 우리가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100퍼센트 순수하게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100퍼센트 순 믿음의 근저를 잘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본문의 상황을 보십시다. 여호수아는 이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읍 안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너무 조용합니다. 적막할 정도로 고요합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습니다. 그 동안 소문을 따라 철통같은 난공불락의 도성으로 알고 있었는데, 쥐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더구나 자기들은 지금 여리고 지역 안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본문 13절의 상황보고입니다. 이미 그들은 여리고성 가까이가 아니라, 그들의 진영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공격해올지 예측 불허입니다. 그러니 다소 긴장되고 두려움과 불안을 느낄 수 있는 정황입니다. 바로 이때 여호수아의 눈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십니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의 군사령관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100프로 순수하게 믿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삽니다. 아멘! 1. 예수님은 보이지 않게 지켜주시는 보호자이십니다.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만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13절을 보십시다. 『손에 칼을 빼들고 마주 서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의 이면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진입하는데 아무런 저항 세력이나 공격이 없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지켜주고 계셨음을 암시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보이지 않게 우리를 지키시는 인생의 보호자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도 동일한 방법으로 그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권능의 손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출애굽기 13:16) “하나님의 천군 천사들이 이스라엘 진영 뒤편에서 지키고 계시니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한 발자국도 접근하지 못했습니다.”(출애굽기 14:19-20) 엘리야 선지자가 말하듯이 불 말과 불 병거로 지켜주십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보호자이십니다. 저도 그 동안 러시아 땅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마피아의 포위를 당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안전하게 돌보아주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보이지 않게 지켜주시는 보호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00퍼센트 순 믿음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어느 날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다가 기차표와 함께 지갑을 분실했습니다. 이 모습을 맞은편 좌석에서 본 신사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동정을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스펄젼 목사님은 “저는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는 목사인데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터이니 걱정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후 차표를 검사하던 차장이 옆자리에 왔을 때 바로 그 신사가 몇 마디하자 차장은 정중하게 인사하더니 그냥 지나갔습니다. 스펄젼 목사는 신비스럽고도 절묘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 때 바로 그 옆의 신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철도국장인데요, 아까 목사님께서 차표와 지갑을 잃어버리시고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터이니 걱정하지 않는다는 순수 믿음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차장을 돌려보냈으니, 목적지까지 편안히 가십시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100프로 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내 인생의 든든한 보호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한 14:1)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2. 예수님은 앞서서 인도하시는 인생의 지휘자이십니다.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자신을 무어라고 소개하는지 14절을 보십시다. 『나는 여호와의 군사령관으로 여기에 왔다.』 여기에는 놀라운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도 전에 벌써 여호와의 군사령관이 미리 도착하여 길을 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과 그들의 진군을 위하여 앞서서 들어오셔서 길을 열어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나보다 앞서 가시면서 길을 내시는 내 인생의 사령관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사령관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단순히 여호수아를 돕고 협조하러 오신 정도가 아니라, 직접 지휘하러 오셨다는 중대한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협력자나 후원자 정도가 아니십니다. 내 인생의 사령관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도자이십니다. 내 인생의 지휘자이십니다. Commander와 Captain이십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이 각각 다르고, 그에 따라 의미가 풍부합니다. 고향을 떠나 순례자로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여행자로 찾아오셔서 축복하십니다. 그만큼 연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저항하고 있었던 야곱에게는 씨름꾼으로 오셨어요. 민족 구원의 꿈을 잃고 살아가던 모세에게는 호렙산에서 신실하신 구원자로 나타나셨습니다. 베들레헴 목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다윗에게는 선한 목자로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바벨로니아의 포로로 끌려가 외로운 나그네가 된 다니엘과 에스겔에게는 사랑이 많으신 인자의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시고 힘을 복 돋아 주셨습니다. 이처럼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만 했던 여호수아에게는 지휘관으로 찾아오셔서 용기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방향과 전략을 직접 진두지휘해주시겠다는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내 인생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양은 목자의 안내와 지도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내 인생의 총사령관과 지휘자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밀림의 성자 A.슈바이처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낙관적인 사람은 사방에서 청신호를 본다. 비관적인 사람은 항상 붉은 신호를 먼저 본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색맹, color-blind이다. 그래서 그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본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현실에서 푸르고 붉고, 즉 붉은 신호 청신호가 무슨 문제냐는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을 인생의 지휘자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사 신앙의 본질입니다. 동사 신앙이란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지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행보를 그분의 지휘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내 인생의 보호자요, 또한 지휘자와 Captain이십니다. 3.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100프로 순 믿음으로 살아라. 오늘 본문의 절정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실제적인 벤처 신앙의 원리를 재정립해줍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령관 앞에 엎드려 절하고는 매우 진지하게 여쭈어 봅니다.(14절) 『나의 주여! 종이 어떻게 해야 가나안 땅과 저 여리고 성을 정복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때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15절입니다. 『여호수아야, 네 발에서 신발을 벗어라.』 여기 신발을 벗는 다는 것은 많은 영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뜻이요, 특히 종으로서 항복하거나 권리주장을 포기하라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지휘권 양도입니다. 통솔권 이양입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야, 너희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거룩한 전쟁이니 단순히 너의 리더십이나, 너의 군사력, 너의 통솔력, 너의 전투경험으로 싸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곳은 하나님의 땅이다. 그리고 가나안 땅 정복은 신성한 일이다. 그러니 너는 맨손, 맨발의 백퍼센트 순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야 하느니라. 여리고성이 아무리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나가거라.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맨발의 동사신앙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맨발의 벤처 신앙을 강조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첫 출발부터 홍해를 건넌다거나,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 땅에 진입하고,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모든 과정마다 계속 강조하는 것이 맨발의 동사신앙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가는 백퍼센트 순 믿음을 거듭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일을 처리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신자들 중에는 세 가지 스타일의 생활 면모를 보여줍니다. 1)조심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Care-less) 현대 사회는 무분별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연봉제 이후로 규모 없이 되는 대로 삽니다. 2)지나치게 염려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Care-full) 수많은 사람들이 불필요한 중압감으로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M. Luther가 쓴 책의 제목처럼 의지의 노예(Bondage of the Will)가 되어 살아갑니다. 또 감정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지나친 염려나 걱정으로 중압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어느 심리학자의 말대로 “질병보다는 질병에 대한 염려 때문에 죽을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3)염려로부터 해방되어 사는 사람들입니다(Care-free)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자유인들입니다.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사는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하고 살아가는 100퍼센트 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두 날 만 염려하지 않는다면 일평생을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합니다. 그 두 날이란 어제와 내일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 어찌할 수 없는 과거, 아픔과 상처의 과거,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메여 신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내일에 대한 불안, 복잡한 잡념들, 불길한 상상이나 불안한 예측은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관한 밖에 있습니다. 미래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복된 섭리를 믿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맨발의 동사 신앙을 강조하십니다(마 10:5-15). 모든 문제를 인생의 보호자와 사령관 되시는 주님께 다 맡기고 오직 100프로 순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기도초청) (찬송 432장)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에게는 어떤 두려움과 염려가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지켜주시는 보호자이십니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들어 살펴보면 나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또한 나보다 앞서서 앞길을 인도하시는 내 인생의 사령관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욥처럼 장담할 수 있습니다. “나의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100프로 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대가 지녀야 할 돈에 대한 지배력/ 마6:/ 전병욱 목사/ 2009-03-23
20대가 지녀야 할 돈에 대한 지배력 마6: 많은 문제의 뿌리를 찾고 들어가면 돈 때문입니다. 어떤 집단이든 속성, 법칙이 있습니다. 돈도 속성이 있는데 돈의 rule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설교 중에 믿음 215절/ 구원 218절/ 돈과 재정 2489절 정도가 나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상 명령을 위해서는 믿음과 기도 그리고 ‘돈’이 필요. 돈없이 저절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돈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주인인 돈이 종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빚을 져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부하게도 하지 마시고 가난하지도 않게 하소서. -> 부해서 하나님을 부인할지 모르며, 가난하여 탐하고 도둑질하게 될 수 있습니다. 물질정복 ========= <나의 1차적인 공급은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 -1차적인 공급에 책임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과 돈의 쓰임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 -사람이 돈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사람의 전화 목록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보물(물질)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갑니다. ->그래서 먼저 돈을 보내면, 몸도 마음도 따라 갑니다. 사랑하는 곳에 물질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요, 물질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인격을 변화 시켜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은 ->’나의 돈 쓰는 방법을 바꿔 주십시오’라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빚지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 자기 수입보다 지출이 많으면 빚지게 되어 있습니다. 빚지면 주도권 놓치고 끌려 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출은 열린 원이 아니라 닫힌 원이 되어야 합니다>. 지출은 조절해야 합니다. 남아야 합니다. 단 하루도 수입보다 지출이 많으면 안됩니다. 절대로 빚지는 인생을 살면 안됩니다. 가치를 높이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 가치를 높이는 것이 그리스도 인이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부국강병> 인플레이션은 돈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은 좋아 합니다. 절대로 정당한 정권은 인플레이션을 높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애국심은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 진정한 가치가 나오는 것이 있어야 민족이 삽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가치를 높이는 인생을 사십시오. 전병욱 목사
20세기의 바라바/막15:6-15/조용기 목사/19810517
20세기의 바라바 막15:6-15 조용기 목사 19810517 날짜 : 1981년 5월 17일 제목 : 20세기의 바라바 성구 : 막 15 : 6 - 15 이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20세기의 바라바\\\"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람들은 로마의 학정 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므로 저들은 어찌하든지 때만 얻을 수 있으면 로마의 그 학정에서 쇠고랑을 꺾고 자유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종종 반란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도 특별히 크게 예루살렘 시에서 민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라바라는 한 유대인이 군중들을 선동해서 예루살렘에서 로마를 반대하는 거대한 민란을 일으키고 로마 사람들을 반대하여 예루살렘에 불을 지르고 또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곧장 로마의 군대들이 출동해서 이 바라바를 체포해서 신속히 재판에 회부하고는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형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가장 처참한 사형이었습니다. 이에서 바라바는 그 날 그 시간부터 감옥에 갇혀서 그는 불안과 초조와 절망 중에서 자기가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의 날이 지나고 또 하루의 날이 다가올수록 그의 생명의 날은 점점 단축돼가고 있었습니다. 이러므로 그는 마치 성난 사자같이 그 감방 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그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으르렁 거렸지만 그러나 그를 구출해 줄 사람도 없고 자기의 힘으로 그 감방에서 피난해 나갈 도리는 전혀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제는 마지막 죽음의 날만 기다리는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급기야 날은 다가와서 내일이면 죽게 되었고 또 그 날이 자나가서 아침이 다가왔습니다. 이제 어느 순간에 간사가 와서 그를 끌어내어 십자가를 걸머지워서 골고다 산정으로 데려가서 죽일 지 알지 못하는 그 순간에 바라바의 마음은 조바심이 나고 입술은 타고 몸은 얼어붙은 것 같고 심장은 중지한 것만 같았습니다. 바로 그럴 때 빌라도의 궁전 뜰에서 또 다른 하나의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 잡히어서 군중들 앞에서 재판관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해본 결과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잡히어서 내 준 것을 알게 되어서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군중 앞에 놓여서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심문해 본 결과 그에게 아무 죄가 없다. 이제 너희 유월절 날이면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에 좇아서 내가 예수를 놓아줌이 어떠하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은 일제히 외쳐 말하기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에게 바라바를 내어다오. 바라바를 내어다오.\\\" 그렇게 외쳤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왕 예수는 어떻게 하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군중 가운데 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빌라도가 보니까 잘못하면 민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이래서 죄 없는 예수를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그리고 바라바는 놓아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빌라도의 명령이 떨어지자 감방의 간수가 열쇠를 들고 바라바의 감방으로 찾아옵니다. 바라바가 기다리고 있는데 철거덕, 철거덕 걸어오는 사람의 발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제 마지막 자기를 데리고 나가서 죽일 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한 바라바는 그만 감옥 한 구석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움츠리고 앉아서 불안과 공포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해서 간수를 바라봤습니다. 간수는 와서 철거덕, 철거덕 철창문을 열어서 철문을 활짝 제끼고 난 다음 \\\"바라바여, 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제 거기에서 나와서 자유롭게 나가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바라바는 그 말을 곧이 듣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나는 나가지 않는다. 나는 죽을 이유가 없다.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나는 죽기 싫다. 나는 안 죽는다.\\\" 그럴 때 간수는 웃었습니다. \\\"바라바여, 너는 행운아다. 너는 지금 죽으러 갈 것이 아니라 자유의 몸이 되었다. 너를 대신해서 니가 걸머지고 가야 될 십자가를 걸머진 자가 있다. 나사렛 예수가 너를 위해서 대신하여 너의 십자가를 걸머지고 너가 죽을 자리에 오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다. 너는 짊어지고 갈 십자가도 없어졌고 너가 죽을 자리도 없어지고 말았다. 예수가 너를 대신해서 죽는다. 그러므로 너는 자유다. 나오라.\\\" 문을 열어 제꼈습니다. 바라바는 그래도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간수는 말했을 것입니다. \\\"네가 내 말을 믿든 안 믿든 상관할 것 없다. 그러나 문은 열렸다. 이제 나오라.\\\" 바라바는 그 말을 듣고 일어나서 한 발짝, 두 발짝 감옥에서 나와 비호같이 문을 뛰쳐나왔습니다. 밖에 나와도 그를 잡는 자가 없었습니다.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손발을 움직여본 결과 그는 진실로 자유의 몸이었습니다. 그는 이제야 나는 살았구나. 하는 자아의식이 떠올라 오르자 그는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예수가 누군지 나는 찾아가 봐야겠다. 일시에 그는 예루살렘 시가지로 뛰어나왔고 예수님을 찾는 것은 쉬웠었습니다. 왜냐? 온 예루살렘시가 발칵 뒤집혀 졌고 모든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데 로마군인들은 말발굽을 굴리면서 뛰어가고 예수님께 채찍으로 후려 때렸습니다. 넘어지며 쓰러지며 십자가를 걸머지고 앞서가는 예수님이 눈에 보였습니다. 바라바는 그를 보고 그는 그 마음속에 깊은 감격을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할 그 십자가를 예수님이 짊어지고 자기가 죽으러 올라가야 될 그 골고다의 산정으로 향해서 예수님께서 올라가고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20세기의 바라바된 여러분과 내 자신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바라바처럼 민란을 일으키고 불을 지르고 살인한 그런 죄인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했으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다 죽음의 감옥 속에 갇혀있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감옥 속에 갇혀서 죄의 포로 되고 질병과 저주와 마귀의 억압과 절망과 죽음에 포로된 자리에서 인간의 힘으로 이 감방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죄책과 정죄의 짓눌리고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허무와 무의미의 포로가 되고 죽음과 무의 절망에 부딪치고 거기에서 가난하고 찌들인 저주와 질병에서 허덕이는 이 인생 절망의 감옥 이 감옥에서 우리의 힘과 수단과 방법으로 나오려고 애를 썼지만 어떠한 종교도 윤리와 도덕적인 행위도 인간의 지식도 과학도 절망의 감옥에서 인간을 놓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바처럼 우리는 그 죽음의 절망을 향해서 날 수를 헤아리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즐거운 소식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소식, 예수께서 너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 걸머지고 너희들의 죽을 자리에 예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이제 너희는 자유라는 소식과 함께 여러분과 나의 영적인 절망의 감방의 문은 열려 제쳐버리고 오늘날 주께서 성령을 보내서 여러분과 나에게 말합니다. \\\"나오라. 20세기의 바라바여 너희 죄악의 감옥, 질병의 감옥, 저주의 감옥, 죽음의 감옥에서 이제 믿음으로 나오라. 나오라.\\\" 오늘날 그리스도의 즐거운 소식을 듣고 우리가 믿음으로 나오면 죄악에서 해방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질병에서 놓여남 받을 수 있고 저주를 벗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영원한 허무에서 우리는 벗어나서 영생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감옥 문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려 제쳐버리고 우리가 죽을 자리에 예수께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가 짓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찢겨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이제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새로운 세계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바라바와 같이 감옥 속, 철창에 앉아 있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감방 문을 열어 제쳐놓았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죽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바라바는 군중과 함께 섞여서 바람도 스쳐 지나가 버리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포기 나지 않는 해골동산 골고다 산으로 끌려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서 따라갔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도 오늘 우리 상상 가운데서 예수님을 따라 우리는 골고다 산정에 올라가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감옥에서 놓여남 받았는데 그 놓여남 받은 깊은 의미를 우리가 알아야 될 것입니다. 무엇에서 어떻게 놓여남 받았는지 그 의미를 알고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진실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군중과 함께 골고다 산정으로 올라갑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험한 십자가 위에 벌거벗겨 눕히시고 오른손, 왼손, 양발에 대못을 박으시고 하늘과 땅 사이에 높이 매달아 놓았습니다. 햇빛은 내려 쪼이고 피와 물은 쏟아지고 습기는 말라 그리스도의 혀는 입천장에 붙고 뼈골은 어그러졌습니다. 그는 그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서 피와 눈물과 땀을 쏟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감옥에서 놓여주고 그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당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는 자기의 죄 때문에 올라간 것도 아니요, 자기의 죽음을 짊어진 것도 아니요, 자기 때문에 저주받은 것도 아니요, 여러분과 나를 대신해서 고난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므로 말미암아 오늘 바라바처럼 감옥에서 우리가 나온 이 자리에서 진실한 우리 삶의 그리스도의 은총과 열매를 맺어야 될 것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고 그 상황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600년 전에 이미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보고 이사야서 53장에 그는...필체로써 그 사실을 노래해서 기록해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해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의미를 오늘 깨달아야 할 것이요, 그것을 우리 생활에 우리의 것으로 소유해서 받아 들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못 박힌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십자가를 바라보자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석해주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내가 질고에서 찢기고 슬픔을 당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강건하게 살아도 7-80년 살다가 없어지는 이 삶에서 더구나 영과 마음과 몸과 생활이 질고에서 찢겨서 파괴당하며 인간의 삶이 슬픔으로 꽉 들어찬 삶을 주님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건강하고 인간의 삶이 기쁨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분이요 내가 오는 것은 영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앞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해석해주는 것은 감옥에서 놓여난 너희들은 질병에서 치료함을 받고 그 슬픔에서 해방을 얻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금번 구라파로 가는 길목에서 미국 미네야폴리스에서 한 2천명의 교역자들을 모시고 교회성장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일반 선회를 가졌습니다. 제가 성회를 인도한 곳은 미국 ...폴리스에 있는 가장 큰 루트란 교회에서 성회를 열었는데 그 루트란 교회 좌석은 한 3천 석이 됩니다. 그러나 옛날 지은 건물이라 마이크 시설이 잘 안되어서 많이 울렸습니다. 저녁에 첫 날 예배를 인도하고 처음 결신 자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난 다음에 병자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성령님이 인도한데로 많은 병 나은 사람들을 불러내었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그 중에 제가 마음속에 성령께서 보이신 것은 어떤 암에 걸려서 그 암 덩어리가 돌멩이처럼 단단해져 있는 것이 주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고치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말을 해주었습니다. \\\"여기 암이 걸려서 돌멩이처럼 암이 단단한 사람이 나음을 입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그 날도 아무런 간증도 없없고 그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간증이 없었습니다. 사흘 성회를 마치고 제가 런던으로 떠나기 위해서 짐을 싸고 호텔에서 체크아웃 하려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어는 목사님께서 전화가 왔는데 저를 꼭 만나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오늘 체크아웃해서 가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데 그래도 꼭 만나야 되겠다. 그래서 그럼 호텔로 오라고 했습니다. 호텔로 찾아온 목사님께서는 저의 손을 자고 눈에 눈물이 글썽하면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부부간에 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에서 선교사로 일을 했었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다가 우리 아내가 유방암에 걸렸습니다. 더 이상 선교사로 일할 수가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수술을 받았는데 처음 수술에 실패했습니다. 암이 가슴으로 퍼져 들어가서 두 번 수술했는데 두 번째 수술이 또 실패했습니다. 이제는 세 번째 수술로 들어가는데 가슴이 돌멩이처럼 단단한 암에 걸렸습니다. 매일같이 고통 속의 날을 지내는데 목사님이 여기 와서 성회를 인도한다는 말을 듣고 내 아내와 함께 큰 희망을 가지고 첫날 성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찌 소리가 울리는지 설교의 반밖에 못 들었고 병자 위한 기도를 하고 병 나은 사람 불러낼 때도 저희 아내는 귀를 기울이면서 혹시 암으로 나은 사람 있다고 말할까 귀를 기울였지만 못 들었습니다.\\\" 나는 그날 분명히 그 말을 했는데 발코니에 앉아있어서 울려서 못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저희 집사람이 고함을 치지 않아요. 빨리 와보라고. 여보, 이 유방이 돌멩이처럼 단단하던 것이 이렇게 말랑말랑해질 수가 없으니 어디 한번 만져보라고 것입니다. 그래 만져 보니까 아주 유방이 말랑말랑해졌습니다. 그래도 설마 싶어서 또 하루를 자고 나니까 이제는 더욱 더 말랑말랑해지고 그래도 설마 싶어서 사흘째 지나고 나니깐 암의 흔적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그들이 치료받는 그 주치의에게 빨리 연락해서 가보니까 의사들이 하는 말이 \\\"희한하게 자연적으로 암이 없어졌다.\\\" 이제는 선교사로써 또 다시 돌아가도 괜찮다는 그런 언지를 받고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암에 걸려 고통 당하는 슬픔의 날은 지나가고 건강과 기쁨이 다가와서 이것을 간증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목사님이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 이것을 보고한다는 그와 같은 간증을 제가 들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는 십자가의 그 해석 우리가 감옥에서 놓여난 것은 바로 이 질병과 그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슬픔에서 주님이 놓아주신다는 아름다운 언약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여러분과 나에 의한 죄악과 이 질병, 더구나 이 질병의 감옥에서 여러분과 나를 놓아주시고 질병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마음의 한없는 슬픔에서 우리를 자유케하는 위대한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둘째로,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거기에서 성령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해석하는 또 한마디 말씀을 보실까요?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찔리고 상함을 받아 인생보다 그 모습이 이그러진 형태로서 달린 것은 여러분과 나의 일생의 모든 죄악을 그의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의를 행하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해도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없고 하나님의 법을 하나도 없이 어기지 않고 지킨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어떠한 종교도 윤리도 도덕도 인간 노력도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게 할 자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이 모든 인류의 절규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죄악의 감옥에서 놓아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 일생의 죄를 예수께 책임 지워서 예수님이 그 죄의 모든 것을 그 육신에 걸머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심판 당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은 우리 일생의 죄를 청산할 뿐 아니라 죄 그 자체를 심판해서 죄의 모든 능력을 박살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러므로 죄만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로로 잡는 죄의 힘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함께 심판해서 박살을 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 안에서 우리의 일생의 죄가 용서받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죄짓게 하는 죄의 힘도 다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그리스도안에서 들어오면 그 피로 죄사함을 받고 죄에 대한 이기는 힘을 주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루이 자신을 매일같이 이기고 날로, 날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을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 앞에 나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악의 감옥에서 놓여남을 받고 씻음을 받고 정결함을 받고 죄에 대한 승리를 얻어서 우리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십자가를 쳐다보자 성령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해석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께서 징계 받은 것은 하나님에 의해 쫓겨난 징계인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쫓겨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한 절망에 처했을 때 외쳐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처절한 외침을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쫓겨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신데 성부와 성자 이위 하나님이요 성령과 함께 삼위일체로 헤어진 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다니 그 일이 웬말입니까? 이는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에서 내어 쫓김을 받은 것을 대신 짊어지기 위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나서 그들이 걸어간 곳은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피투성이의 삶을 그때부터 산 것입니다. 가난과 저주와 절망의 인생 삶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 쫓겨난 삶에는 어느 곳에 가나 가시와 엉겅퀴밖에 나는 것이 없습니다. 이래서 그들의 마음속에 하루도 평화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이후로 오늘 그 후손인 우리들도 마음에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가시와 엉겅퀴의 인생을 사는 우리들을 대신 속량 해주기 위해서 예수게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징계를 받음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어서 이제 예수를 통하여서 우리는 화목함을 얻고 쫓겨난 땅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품으로 통해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가시와 엉겅퀴의 들에서 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예비하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열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는 가시와 엉겅퀴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가 징계를 받음으로 예수께서 쫓겨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시 예수를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예비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십자가에서 얻기 위해서 우리는 바라바처럼 감옥에 갇혔다가 놓여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평화가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평화, 여러분과 이 지상 삶 사이의 평화, 여러분과 영혼 사이에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어쫓기는 징계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쫓긴 땅에서 하나님이 예비한 에덴의 축복의 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다시는 여러분 가시와 엉겅퀴 속에 살 게 되지 말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주의 가시와 엉겅퀴에서 단호하게 일어나서 하나님품안에 안기고 믿음과 순종으로 그리스도의 예비한 젖과 꿀이 흐르는 동산에 들어갈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 우리 십자가를 쳐다볼 때 여기에 성령은 또다시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찢어진 그 등허리 줄기차게 흐르는 예수의 선지피 이와 같은 고통은 여러분과 나를 치료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상처입고 병들고 깨어진 인생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 찢겨진 인생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은 조화되고 치료받고 질서 있고 하나된 인생을 원하는 것입니다. 영과 마음과 몸이 질서를 잡히고 그래서 인간은 이 삶에서 조화를 가지고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치료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강물같이 넘쳐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우리는 다 양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 예수께 우리의 일생의 죄를 담당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내가 이제 구원받는 것은 90% 은혜요 10% 나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요, 99%의 은혜요 1%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보혈의 공로와 은혜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나는 아무 한 일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전적인 은혜로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 손든 그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예수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안에서 다 청산 당해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원을 얻어놓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한 걸음, 두 걸음 더 나은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구원은 전적인 은혜로 받고 그 다음 성령의 은혜를 입어서 우리는 성결의 삶을 향해서 발전하고 전진하는 삶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바라바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놓아준 것처럼 20세기의 바라바와 같은 여러분과 나를 죄악과 질병과 저주와 절망과 죽음의 감옥에서 오늘 이 시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나를 불러내시고 감옥 문을 열어 제끼시고 골고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놓여난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질병과 슬픔에서 놓여났으며 죄악과 정죄에서 놓여났으며 저주와 절망에서 놓여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치료함과 죄악에서의 자유의 놓여남을 얻어서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종교 이상인 것, 철학 이상인 것, 감정 이상인 것, 현실적인 삶에서 진실로 참된 자유를 얻는 길을 주님께서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주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바울 선생은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오늘 새것입니다. 이제는 바라바와 같이 그런 감옥 속에 들어앉아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감방 문은 열렸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는 예수님이 짊어졌고 여러분과 내가 죽을 자리에 예수님이 죽으셨으며 이제 여러분과 나의 속박된 모든 질병과 저주와 마귀와 절망과 죽음에서 놓여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나는 여러분께 말합니다. 그 간수 장이 바라바에게 말하듯이 \\\"일어나라. 그 감옥에서 나오라.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오라. 질병에서 나오라. 죄악에서 나오라. 저주에서 나오라. 죽음에서 나오라. 그리고 새로운 삶을 얻으라. 자유를 얻으라.\\\" 오늘 여러분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을 알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시고 살 찢으시고 값주고 사주신 그 인생을 조금도 타협 없이 마귀에게 빼앗기지 말고 무지로 말미암아 그것을 못 누리는 사람되지 말고 진리를 알고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믿습니다 하고 나아갈 때 여러분과 나의 운명과 환경을 정복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나니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었은즉 여러분께서 이 말씀을 부여잡고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수리 안 들리고 내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말씀에 서서 그 말씀대로 믿고 기도하고 나아갈 때 성령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역사 해주심으로 여러분의 운명과 환경은 변화돼 버리고 말 것인 것입니다. - 기 도 -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는 다 바라바와 같이 죄악과 질병, 저주와 절망, 죽음의 감옥에 들어가서 해방을 얻을 수 없는 처참한 존재였었습니다만 예수께서 우리 대신해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우리 죽을 자리에 죽어주심으로 우리는 매달릴 십자가가 없고 죽을 자리가 없어서 해방을 얻고 말았사오니 감사 하옵나이다. 아버지여 감옥에서 나온 우리 형제, 자매들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준 의미를 깨달아 앎으로 말미암아 진실로 새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21세기 안전보장 전략 /잠3:1-10/ 조봉희 목사 2015-12-29 10:45:05 read : 6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현재 미국이나 선진국가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은 수면제, 곧 신경 안정제와 아스피린입니다 2년 전의 통계이지만, 미국의 경우 수면제는 하루 평균 1,900만 알이 팔립니다. 그렇다면 1,900만 명이 매일 불안을 느끼며 지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아스피린의 경우는 1년에 750억 알 이상이 팔리고 있
21세기 안전보장 전략 /잠3:1-10/ 조봉희 목사 2015-12-29 10:45:05 read : 6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현재 미국이나 선진국가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은 수면제, 곧 신경 안정제와 아스피린입니다 2년 전의 통계이지만, 미국의 경우 수면제는 하루 평균 1,900만 알이 팔립니다. 그렇다면 1,900만 명이 매일 불안을 느끼며 지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아스피린의 경우는 1년에 750억 알 이상이 팔리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그만큼 어떤 두통이나 불안이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갈수록 두통 약 선전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게보린, 펜잘, 암씨롱 등 등입니다. 21세기는 테크노피아, 컴퓨토피아, 생명유전자 복제의 최첨단 과학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 불투명이 우리 마음의 어딘가에 불안을 느끼게 합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2001년 경제, 정치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분들은 하루 하루가 불안의 연속입니다. 사업가들은 더욱 예측불허이고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밝은 전망을 약속합니다. 당신의 미래에 대한 절대 확신과 안전보장을 줍니다. 미래는 우리의 마음 관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 안전보장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살얼음판 걷듯이 불안하게 살 수도 있고, 스펀지 위를 걷듯이 편안한 나날을 영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우리의 마음 관리가 중요하다고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떠하든지 마음 관리에 따라서 미래안전이 보장됨을 피력합니다. 그래서 마음이라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거듭 반복합니다(1.3.5). 솔로몬은 오늘 현대인들이 꼭 짚어 보아야할 중요한 문제를 다루어줍니다. 신앙생활이란 머리로(head)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heart)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행, 불행이 좌우됨을 주지시켜줍니다. 마음은 정원과 같아서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잔디밭이 될 수도 있고, 거친 잡초 밭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솔로몬은 잠언 4장 23절에서도 이렇게 호소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Keep your heart with all diligence, For out of it is the wellspring of life》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불안해하는 21세기의 안전보장을 약속 받고 싶지 않으세요? 새해 벽두에 우리의 마음을 확정하시기 바랍니다. 중국 내지 선교의 선구자 허드슨 테일러가 이런 좋은 말을 해줍니다. "음악회가 끝난 다음에 피아노를 조율하지 않습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조율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조율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확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확정할수록 당신의 미래 안전보장도 확실해집니다. 1.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십시오 이미 말씀드렸듯이 솔로몬은 우리의 머리를 향해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마음을 향해 간곡하게 호소합니다(1절).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놓으라는 호소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첫 번째 요소요, 또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첫 번째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원칙이 분명하게 세워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원리가 분명한 사람의 미래 역시 분명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안정과 평안(prolong & peace)"을 약속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21세기의 안전보장 전략은 참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놓으시기 바랍니다. "안정과 평안(prolong & peace)"을 보장해줍니다. 단순한 장수가 아닌 안정과 평안입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 한 권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S. Covey가 쓴 "원칙중심의 리더십"(Principle-Centered Leadership)입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사항은 참 단순합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지름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즉 원칙에 기초한 자연법칙에 순응하고 복종해야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리고 올바른 원칙은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과 같은 것입니다. 원칙은 자명하며, 변하거나 바뀌지 않습니다. 원칙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적용됩니다. 스티븐 코비는 원칙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4가지 힘을 준다고 정의합니다. 안정감을 주고, 우리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주며, 우리가 가진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지혜와 역량을 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올 한 해가 가장 어려운 불경기 시대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마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한 원칙으로 새기고 살아가기만 하면 우리의 미래는 절대 안전합니다. "안정과 평안(prolong & peace)"이 확실하게 보장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평안이 깃들고, 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으리라." (시 119:165) 2.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을 품으십시오 21세기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그 가슴에 하나님의 심정을 품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본문 3절의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창 32;10. 시 25:10). 솔로몬은 이런 맥락으로 말씀을 전개해 나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놓고 살다보면 자칫 율법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성경에 너무 철저하다보니까 융통성도 없고, 다른 사람을 쉽게 비판하거나 정죄하기 쉬어집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우리 마음이 율법적이 되지 말고, 인격적이 되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그것이 곧 "사랑과 진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대 사회에서는 똑똑하고 영악한 사람이 성공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이용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어리숭한 자로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진실"을 품고 살면, 하나님이 보장해주십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다.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대단한 축복입니다. 그래요.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 참 간단해요. 영악할 필요가 없어요. 순진하게 사는 게 지름길이에요. 내 마음속에 사랑과 진실을 품는 것입니다. 잠언 주석의 대가 Charles Bridges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금반지에 박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그 반지를 더욱 가치 있게 하고 더 빛나게 하듯이, 주님의 성품을 지닐수록 우리는 고급스런 사람이 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은 약은 사람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영악한 사람에게 호감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진실을 품은 자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깁니다. 구약 시대의 인물 요셉이 이런 성품을 지녔더니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한테 "총애와 존중"을 받습니다(창 39:2-4, 21-23. 41:37-43. 45:16). 룻이라는 여자는 보잘 것 없는 이방여인이었지만 그 가슴에 "사랑과 진실"을 품고 살았더니 만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은총과 존귀"를 받으며 사는 행복을 누립니다(룻 2:13-16). 사무엘이나 다윗도 그 내면에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았더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은총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삼 2:26. 16:18-22. 18:5,14-16). 그렇습니다. 내 마음을 낮출수록 주님이 높여주시고, 내 마음을 비울수록 하나님이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잠언 16장 7절은 이렇게까지 우리의 미래안전을 보장해줍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갈수록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천박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고급스런 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3.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만 신뢰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 단순한 원리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준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 내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은 참 간단하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Trust in Yahweh with all your heart, And don't lean on your own understanding》 이 말은 어린아이와 같은 확고한 신뢰를 뜻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어떤 것에 전체 체중을 완전히 기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위탁입니다. 예수 믿는 일은 참 쉬어요. 주님께 몽땅 다 맡기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실까요. "모든 일을 주님께 아뢰는 삶을 살기만 하면, 주님께서 곧은길을 내주신다"고 보장하여 줍니다.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위탁과 하나님의 인도하심!『Your leaning & God's leading』 이것이 다윗의 철학입니다(시 37:5).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께서 몸소 도와주실 것이다." 중국 내지 선교의 선구자인 허드슨 테일러는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기에 충분히 연약한 자를 쓰십니다" 어떤 연립주택에 불이 났습니다. 초등학교 연령의 어린 아이가 불길을 피해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불길은 계단을 타고 계속 올라가며 옥상마저도 시꺼먼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급히 달려온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용인아, 뛰어 내려. 내가 너를 받을게!" 그러나 연기가 자욱하여 소년은 밑에 계신 아버지를 볼 수가 없습니다. 아이는 울먹이며 외칩니다"아빠 안보여요."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힘차게 말씀하십니다. "용인아, 너는 내가 안보이지만, 나는 너를 정확히 보고 있어. 네가 뛰어내리기만 하면 나는 너를 받을 수 있어." 믿음은 현실을 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만큼 우리의 미래는 건강하고 탄탄할 줄 믿습니다(8절). 당신의 믿음만큼 당신은 강건해지며 번성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잠언에서는 "건강과 축복"(health & wealth)을 보장해줍니다. 4.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신앙생활의 절정과 극치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을 최우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드리라는 것입니다(9절). 헌금은 신앙고백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공경하고 있는지요? 당신은 과연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우선으로 하고 계신 것 같습니까? 우리의 우선순위가 분명하기만 하면 우리의 미래는 절대 안전합니다. 지난 1월 2일에는 어떤 집사님이 자기 회사의 2001년 첫 번째 지출로 건축헌금 1억을 드렸습니다. 얼마나 멋진 21세기 출발인가요? 첫 번째 지출을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돈이 남아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시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의 경제 사정은 어떠신가요? 당신의 지갑이나 통장 잔고에 신경 쓰지 마세요. 당신의 헌금 봉투에 관심을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다. 오늘 잠언 3장은 축복의 공식을 가르쳐줍니다. "그리하면"이라는 말씀을 거듭 강조합니다. 넘치는 축복을 보장해줍니다. "가득히 차고 넘치리라"(overflowing & brim over). 잠언 3장 10절과 말라기 3장 10절은 동일하게 넘치는 축복을 보장해줍니다. 지난 1월 10일자 신문에 이런 감동적인 기사가 실렸습니다. 경북 영덕에 사는 한 어부 교인(김상태 안수집사. 44세)이 현대판 베드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구계교회)가 재정적으로 너무 어려워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번에 고기가 좀 많이 잡혀야 성전 수리를 할 수 있을텐데요" 이런 마음으로 목사님의 축복기도를 받고 출항하여 그물을 내렸는데, 놀라운 것은 다른 사람들의 그물에는 전혀 걸리지 않고, 김 집사님의 그물에만 방어떼가 물려와 4억 원의 횡재를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 축복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소위 Require하시는 하나님께서 Reward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하면 가득히 차고 넘치리라." (기도 초청) (찬 432장)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가 시작된지도 벌써 보름이나 되었습니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불투명하고 불안한 한 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절대 안전보장의 은혜로운 전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원칙 중심으로만 살아간다면 안정과 평안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때로는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도 여전히 당신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을 픔어 본다면 당신은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들한테 은총과 존중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암울하고 암담한 상황에서도 잠잠히 하나님만 신뢰하고 나간다면 주께서 몸소, 도와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기대는 만큼 더 도와주십니다(Your leaning & God's leading). 더 나아가서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최우선할수록 당신의 미래는 안전보장입니다. "가득히 차고 넘치는 축복의 21세기 새 출발이 될 것입니다!"
30배, 60배, 100배/ 마13:1-9/ 조용기 목사/ 2001-02-18
30배, 60배, 100배 마13:1-9/조용기 목사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해변 가에 앉으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오는지라 주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으로 교훈을 베푸셨습니다. 씨 뿌리는 씨를 뿌리러 나갈 새 어떤 씨는 길거리에 떨어지니 공중에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다른 신은 자갈 밭에 떨어지매 뿌리가 나나 깊이 내리지 못하니 태양이 비취매 말라 죽었고 또 다른 씨는 가시 있는 굴 가운데 떨어지매 가시의 기운에 막혀서 자라지 못하나 옥토에 떨어진 씨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중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주의 말씀의 씨를 받아 드리면 우리의 삶 속에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수확을 거두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굉장히 큰 꿈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성경 말씀 가운데 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에 관한 주의 설명을 우리가 한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길거리에 뿌려진 씨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길거리는 어떻습니까? 길거리에는 차가 다니고 사람들이 밟고 다니고 도무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곳이 바로 길거리인 것입니다. 길거리에 씨가 뿌려지니 그 씨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무가치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무관심하게 밟고 지나가지요, 그리고 그는 버림을 당하는 씨앗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씨앗이 열매를 맺을 리가 없습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리지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무가치하게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한 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놓여버리고 무관심하게 생각하고 말씀을 버립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큰 권세와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심어지지 아니함으로 결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生水)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貯蓄)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씨앗은 저버리고 인간 스스로가 자기의 생명을 위해서 노력을 하고 애를 쓰지만은 결실이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 주위에 배회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그 말씀이 마음에 심어지지 아니한 씨앗을 빼앗아 가기 위해서 호시탐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씨앗은 돌짝 밭에 뿌린 씨앗이라고 했는데 이 돌이란 것이 단단하지 않습니까 씨가 뿌리를 내릴 수가 없지요. 이러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완악하고 깨어지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전통에 푹 젖어 있고 자기 고집이 쎄서 아주 완고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받아 드리지 않습니다. 용납하지 않아요. 아무리 말씀을 증거해도 말씀이 그 마음에 부딪혀 튕겨 나가버리고 말씀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믿는 마음이 너무나 희박합니다.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이용 가치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 믿어서 무슨 이익이 있느냐 교회에 가면 밥을 주더냐 떡 주더냐 그런 소리나 하고 신앙은 오직 자기의 유익을 위한 수단이 되면 되었지 신앙 그 자체를 받아 드리지 않습니다. 믿는 것이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나 어려움을 준다고 느낄 때는 믿음 자체를 미련 없이 버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 믿어서 상당히 이익이 있는 줄 알고 열심히 교회에 나오나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거나 불이익이 다가오면 헌신짝 같이 신앙을 버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3장 18절에서 19절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치 아니하고 믿지 아니함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완고하고 패역한 마음, 불신앙하는 마음, 오직 신앙을 유익의 가치로 여기는 그러한 마음은 돌짝 밭 같아서 조금 교회에 왔다 갔다 하다가 다 시들어 버리고 신앙을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歆饗)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그 악한 마음이 깨어지지 않고는 결코 하늘 나라가 그 마음 속에 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가시 있는 넝쿨에 떨어진 씨라고 말했는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가시가 우거진 그 가운데 그 곳에 씨를 뿌려 놓으면 씨가 자랄 턱이 있겠습니까? 싹이 나더라도 가시 기운에 눌려서 녹아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가시 넝쿨에 떨어진 씨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탐욕과 욕심이 가시처럼 우거진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이해 관계에만 관심을 가지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부귀 영화 공명을 얻으리라, 그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이 도무지 심어서 싹이 틀 도리가 없습니다. 물질 쾌락, 성공 만능 주의, 황금 만능주의로써 영적인 것이나 내세에 관해서는 전혀 흥미가 없는 그런 마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씨를 뿌려 보았자 그런 탐심의 기운에 눌려서 씨가 자리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貪心)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탐욕이 가시 있는 쿨처럼 우거져 있는 그 가슴속에 어떤 말씀의 씨앗을 뿌려도 더는 아무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하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고 하나님이 살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까?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놀라운 결실을 맺기를 원하시며 주님 말씀 속에는 최소한도 삼십 배는 더 열매 맺을 수 있는 힘이 있고 더 나으면 육십 배, 백 배로 결실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종교적인 말씀으로 받아 드린다면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은 우리가 알고 보면 그 말씀 속에는 우리의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며 생명을 얻고 넘치게 얻게 할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심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쌘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고 말했습니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씨앗은 그 속에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으면 싹이 나고 줄기가 돋고 입이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 인 것입니다. 그 속에는 약속된 그 말씀의 삼십 배 혹은 육십 배, 백 배로 결실 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 한 것입니다. 스가랴 8장 12절에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의 말씀을 받아 드릴 때에 이러한 기적이 일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의 말씀을 받아 드리고 묵상하며 그를 마음 속에 심으면 현재 우리의 삶보다 삼십 배가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혹은 육십 배 더 의롭게 살 수 있고 백 배를 더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씀 속에 의의 말씀을 받아 드려서 묵상하고 그를 심어 놓으면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3절에서 34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이 말씀을 우리가 받아 드리고 이 말씀의 씨앗을 마음에 심으면 우리가 현재의 삶보다도 삼십 배로 의롭게 살 수 있고 혹은 육십 배, 백 배로 의롭게 살 수 있는 힘이 그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서 결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 우리는 현재보다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더 성결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혼탁하고 썩어진 환경 속에 살면서 우리가 세상의 물들지 않고 살 수 있겠느냐고 탄식을 합니다. 그러나 물에 사는 우리들을 보십시오. 그는 물을 떠나 살 수 없지만은 물 속에 빠지면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 깃털에 기름을 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에 들어가서 살아도 물이 그 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물에 빠져 죽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속에 살고 있지만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에게 오시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속이 우리 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현재보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더 성결하게 살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말했으며 야고보서 3장 17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결하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리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결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말씀을 받아 드리고 그 말씀을 의지하면 그 말씀이 결실하여 우리에게 성결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삼십 배 더 성결하고 육십 배 더 성결하고 백 배로 더 성결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현재보다 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건강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주의 치료의 말씀을 받아 드리면 그 치료의 말씀 속에 우리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더 건강하고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씨앗인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는 그 말씀 하나를 묵상하고 심어 놓아도 이 말씀 속에는 현재 우리 보다도 삼십 배가 더 건강하고 육십 배나 더 건강하고 백 배나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포대교구에 사시는 우리 안갑숙 자매님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3년 전에 남편께서 간암수술을 하셨는데 이 간암이 다시 재발해서 지난 10월에 간 파열 증세가 보이더니 4000cc 정도의 피가 간에서 넘쳐 나와 배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니깐 혈압이 떨어지고 혼수 상태에 빠지고 가사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해 보니 토요일이라 담당 의사들이 다 퇴근해 버리고 응급실에 갖다 놓았으나 아무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그러자 자매님은 치료의 말씀, 하나님은 살아 있고 항상 말씀에 서서 그 말씀을 부여잡고 어마어마한 결심과 각오로써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하는 동안에 말씀이 마음에 놀라운 평안과 기쁨을 주십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중환자 실에 가니깐 남편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고 살아났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보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셨다.\" 인간적으로 생각하기에는 간이 파열되어 피가 계속 넘쳐 나오고 배에 독소가 피가 가득차고 혈압이 다 떨어졌는데 살아 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치료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중환자 실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회복을 하나님이 시켜 주었으니 그러나 사람이 한번 이런 큰 위험을 당하면 마음에 불안과 공포증이 생깁니다. 이 간암으로 죽겠지, 재발하였으니 다시 살지 못하겠지. 그런 공포가 마음을 부여잡아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작년 12월 17일날 수요예배를 마치고 안수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살아지고 치료받았다는 확신과 놀라운 평안이 오고 난 다음에 간암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치료함을 받아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서 운동력이 있으면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심으면 그 말씀 속에 현재 보다도 삼십 백로 더 건강하고 육십 배로 더 건강하고 백 배로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 드려 여러분께서 마음 속에 간증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여러분 현재 보다도 삼십 배, 육십 배 혹은 백 배로 더 성공하고 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삭은 한해에 농사를 지어 백 배의 소출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12절에서 14절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심으면 그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삶 속에 삼십 배 혹은 육십 배, 백 배로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또한 현재보다도 우리의 가슴속에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천국의 영광과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 부귀 영화 공명에 침몰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에서 꿈과 희망을 잡으려고 하지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신 놀라운 하늘 나라에 소망과 기쁨을 얻고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드려서 그것을 심으면 그 말씀이 우리 속에 현재의 우리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소망과 기쁨보다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나 더 넘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내가 구원을 받고 천국에 집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삶을 예배해 놓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이 땅에 살아도 신바람이 나고 이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에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염려 근심 좌절 절망에 포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늘나라 영광이 차고 넘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현재보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나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심어 놓으면 말씀이 결실할 때에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일생에 최소한도 삼십 명에서 육십 명, 백 명은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뭘 합니까? 나는 한 사람도 전도 못합니다. 아니지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 드리고 전도하는 말씀을 심으면 전도하는 능력을 나타내어서 여러분 한 사람이 최소한도 이 세상에 살면서 삼십 명은 전도할 능력이 있습니다. 잘하면 육십 명, 더 잘하면 백 명까지 전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거만한 마음을 넘어짐의 앞잡이 인 것입니다. 인간 교만과 자기 자랑이 있으면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와 계신 보혜사 성령님을 항상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며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검인 말씀을 늘 휴대해야 해요. 여러분 머리 두고 여러분 사무실 책상에도 성경을 두고 조그마한 성경 포켓 성경을 포켓에 두고 여행할 때는 가방에 언제나 성경을 넣고 말씀과 친근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만 있으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과 친해질 때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 속에 뿌리를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그냥 읽지 말고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 마음에 감동을 주는 말씀을 되면 빨간 줄을 긋고 그 말씀을 되씹으십시오. 소처럼 먹을 말씀을 반추해야 됩니다. 소는 많이 먹고 난 다음에 저녁에 느긋하게 누워서 먹을 것을 도로 토해 내어서 씹어서 도로 삼키지 않습니까? 반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급하게 먹지 말고 말씀을 일단 먹고 다음 다시 그것을 반추해야 합니다. 다시 씹고 생각하고 다시 말씀을 생각해 보고 골똘이 다시 묵상해 보고 그럴 때에 말씀이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시편 1편 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律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晝夜)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읽지만 하지 말고 빨간 줄을 그은 그 구절은 다시 읽어 보고 다시 생각하고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 말씀에 서서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이 여러분이 의지할 수 있는 바위가 되기 때문에 말씀이 하나님께 나갈 당당한 이유가 되기 때문에 말씀에 서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넘치게 하실 하나님인 것을 그러므로 말씀에 서서 기도해야 하고 그리고 언제나 말씀을 마음속에 되새기고 입으로 시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혀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늘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제단에 자기를 온전히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옥토가 되지요,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묵상 할 뿐 아니라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하나님이 우리를 갈아 엎어서 옥토로 만들도록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두려워 말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 일생을 맡기고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할 때에 회당장이 정신이 알딸하고 무릎이 떨려서 걸음을 걸을 수 없을 때에 예수께서 회당장 곁에 와서 귀에 대고 말씀하기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주님과 같이 계시면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할 때 두려움을 선택하지 말고 믿음을 선택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언제나 두려움이 다가옵니다. 그것을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도 다가옵니다. 믿음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마가복음 5장 36절에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이 들어오면 당장 말씀으로써 의심을 막고 의심을 내어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믿을 때는 물위로 걸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버리고 바람을 바라보고 물결을 바라 볼 때에 두려움이 들어오자 물에 빠졌습니다. 똑같은 바다요, 똑같은 베드로인데 말씀에 섰을 때는 물 위로 걸었으나 말씀을 버리고 의심을 받아 드렸을 때는 물에 빠졌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는 꾸짖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그것은 베드로가 선택을 잘 못했습니다. 계속 믿음을 선택해야지 의심을 선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들어오는 의심을 예수의 이름으로 내어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의심은 물러갈지어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러고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을 입으로 늘 시인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7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 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 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마귀가 의심을 가지고 올 때 대적해야 해요, 그대로 받아 드리고 의심대로 우리 마음을 개방해 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져오는 의심을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먼저 할 것은 먼저하고 나중 할 것은 나중 하는 순서를 지켜야 되지요. 우리의 마음속에 늘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을 점령하도록 우리가 늘 기도하면서 살아야 하고 우리의 모든 삶에 최대의 가치와 관심사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두어야 합니다. 현재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입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요, 우리의 심령을 전도해서 예수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교회에 열심히 받들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가 임하도록 전도하는 것이 그 나라를 구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의는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더 알고 예수님의 구속 사업을 더 깨닫고 예수님의 은혜를 더 깨닫고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겠다고 작정하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더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옥토가 되니깐요, 삼십 배 더하고 육십 배 더하고 백 배를 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국민일보 2000년 1월 12일날 간증란을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경북 영덕군 남정면 구개리에 사는 구개 교회 집사님인데 구개 교회는 성도가 50명 출석합니다. 김상태 안수 집사님은 20년 간 한번도 수리하지 못한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 교회에 목사와 함께 굉장히 고통 당했습니다. 비가 그냥 세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걱정을 하자, 김상태 집사님이 내가 어찌 사업이 조금 불리던 제일먼저 교회당부터 수리하겠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말만 들어도 고맙다고 안수 기도를 하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 다음 날인 장년 12월 24일날 그는 어부이니깐 어장에 그물을 칩니다. 그런데 그 어장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왼쪽에도 다른 사람이 오른쪽에도 좋은 다른 사람이 어장을 치고 가운데 어장을 칩니다. 고기가 오면 왼쪽이나 오른쪽에 걸리지 가운데까지 오지 않는데 그런데 어장 중앙에 설치한 김 집사 그물에 엄청난 방어 떼가 몰려 들어서 원래 가장 자리에 고기가 몰리고 중앙은 그냥 안 잡히는데 다른 이는 하나도 그물에 안 걸리는데 이 김 집사님 그물에만 방어 떼가 수천 마리가 걸렸습니다. 당일 건저 올린 방어만 4억 원 수입을 올리고 남은 것도 수억 원어치 있다는 기사 보도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굿하고 푸닥거리하고 고기 많이 잡으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만 했는데 하나님이 큰 기적을 베풀어서 수확을 얻는 베드로의 기적의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장 그 수확을 가지고 목사님과 의논해서 교회당 헐어진 것을 고치고 지붕도 새로 하고 교회당을 새로 수리했습니다. 그랬는데 국민일보 2001년 2월 12일날 간증을 보니 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김집사님의 방어 기적 한달 후에 1월 23일날 싯가 오천만 원하는 대형 밍크 고래가 그 그물에 걸렸습니다. 동해안 해안선을 따라서 어장에 간혹 돌고래가 걸리기는 해도 밍크 고래가 걸리는 것은 참 휘기하고 그 큰 밍크 고래가 걸리면 그물을 뚫고 나가버리고 그물이 못 잡는데 이 밍크 고개는 온순하게 김 집사님 그물 끄는대로 따라 해변까지 와서 자기 몸을 내어놓았습니다. IMF이후에 그는 3억의 부채를 걸머지고 어장을 폐쇄할 위기에 처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빚도 다 갑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으시면 닫을 자가 없고 닫아 놓으면 열자가 없습니다. 그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보수하고 수리하는 데에 헌신하자마자 안되던 어장에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속에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2절에서 13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寶庫)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 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땅을 개간하는 농부는 땅을 갈아 엎고 돌을 골라내며 가시 넝쿨과 나무 뿌리를 뽑아 내고 부드러운 옥토로 만듭니다. 거기에다 씨를 뿌리면 최소 30배에서 60배 많게는 100배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삭이 농사하여 한해에 100배나 수확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기경하고 개간해야만 합니다. 우리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죄악의 마음을 회개하고 세속적인 마음을 회개하고 갈아엎고 완고하고 불순종하며 불신한 마음을 깨뜨리고 세상 욕심과 탐심을 다 토해 내고 순전한 옥토가 되어 그곳에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을 심으면 그 말씀이 의의 말씀이든 성결의 말씀이든 치료의 말씀이든 축복의 말씀이든 영생 천국의 말씀이든 이 말씀이 마음에 심어지고 이 말씀을 묵상하고 이 말씀으로 즐거워하면 이 말씀은 우리 생애를 통해서 그에 해당하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은 거짓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보배가 이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찾아 옥토로 뿌리면 우리는 말씀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에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줘도 꾸지 않는 승리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길거리 밭이 되지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무관심하고 하나님 말씀을 무가지하고 느껴서 마귀에게 말씀을 뺏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돌짝 같이 완악하고 공리주의 적이고 이해 상관에 서서 조금만 핍박이오면 말씀을 버리는 사람 되지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탐욕이 우거져서 말씀을 녹여 버리는 자가 되지 않게 도와 주시옵시고 옥토가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므로 말씀이 뿌리를 내려서 우리의 삶 속에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3주야에 일어난 일/ 엡4:8-10/ 조용기 목사/ 1981-04-19
3주야에 일어난 일 엡4:8-10 저는 여러분과 함께 \\\\\\\'삼주야에 일어난 일\\\\\\\'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항에 관한 설교는 많이 들었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박차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 메시지도 익히 들어와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별로 듣지 못한 메시지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 영혼이 떠나가시고 난 다음 삼일 낮 삼일 밤 동안에 침묵의 세계 속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잠들어 계셨을까요? 예수께서 이 삼일 낮 삼일 밤 동안 주님은 그냥 쉬고 계셨을까요? 나는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께서 삼주야 동안에 세상에는 침묵했으나 영의 세계 속에서 무슨 일을 하셨었는가 그일에 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그렇게 하시고 그 육체는 십자가에 남겨둔 채 예수님의 영혼은 몸에서 빠져나와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첫째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흘리신 피를 받아서 들고 그 길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전지 전능 무소 부재하시고 온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아담 하와 이후로 마지막 때까지의 인류의 죄악을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예수님의 피를 뿌리심으로 말미암아 다 속량을 하신 것입니다. 원래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성경에 말씀하셨고, 죄를 지은 영혼은 죽으리라고 하셨으며 피 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로 피를 흘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옛날 주님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렸었습니다. 유대 민족들도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갈 때 언제나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잡아 피를 뿌려서 죄를 속했고 일년에 한번씩 대 제사장이 양의 피를 양푼에 담아서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의 은혜소에 피를 뿌려서 일년 동안 이스라엘의 죄를 다 덮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황소나 염소나 양의 피로서 인간의 죄는 속해지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덮어놓을 따름이지 사해지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죄는 사람이 속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 영혼이 떠나자마자 십자가에 흘리신 피를 가지고 그는 침묵의 삼일 낮 삼일 밤 그 동안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보좌 앞에 그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나의 죄를 영원에서 영원까지 속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로 1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장래의 좋은 일에 대 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하고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제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속죄는 영원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영원한 속죄의 제사라는 것은 나는 옛날에 내 영혼을 뒤흔드는 감격을 이 말씀에서 받았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신다 해도 과거의 죄를 용서받아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과거의 죄를 아무리 용서받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현재에 죄 안 짓고는 못삽니다.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 자 현재의 죄를 내가 용서받는다 해도 미래의 나의 죄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 내가 죄를 한번도 안 짓고 살겠다는 자신이 조용기에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자신이 계시면 한번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사람도 자신이 없네요. 이처럼 우리가 장차 죄를 한번도 안 짓고 살겠다는 보장을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죄의 용서라는 것이 과거의 죄만 용서해 가지고서는 소용이 없어요. 그런데 성경 히브리서 10장 12절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말했고 히브리서 10장 14절에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시느니라.\\\\\\\" 이와같이 말씀하므로 예수님의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서 영원의 제사로 받아들였고 예수를 믿고 용서하는 것도 주님이 영원히 용서해 버린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과 나의 과거의 죄도 다 청산되어 버렸고 현재의 죄도 다 청산되어 버리고 그리고 우리가 장차 아직 언제 세상을 뜰지 몰라도 미래의 죄까지도 주님께서는 아버지 앞에 제사드릴 때 그 피로써 다 청산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와같은 제사가 아니고는 여러분과 나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어떠한 종교를 통해서 아무리 우리가 적선을 쌓는다고 해도 그것으로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없습니다. 수양을 닦아도 죄 없는 완전한 수양이 안되고, 도덕을 닦아도 도덕으로서 완전한 사람 안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이런 어떠한 종교도 철학도 도덕으로도 안되고, 우리가 영원히 용서 받는 길 밖엔 없는데, 영원한 용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하나님 아들이 와서 우릴 위해서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난 다음 예수 믿는 사람을 영원히 용서해서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제사밖에 없는 것이니 여러분과 내가 구원받는 길은 천하 인간에게 예수밖에 없는 길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한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지상에서 살아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유일한 생명과 구원의 길인 예수, 예수, 예수, 예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절대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지 아니하고 구원을 받으려고 헛되이 애쓰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수고와 고생만 했지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침묵의 사흘 동안에 하신 일은 예수께서 당신의 그 영원한 피를 가지고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우리의 죄를 영원히 도말해 버리고 여러분과 나를 영원히 용서해 버린 것입니다. 이 영원이란 말을 들을 때 감격적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이제 나는 예수 앞에 나오면 나의 죄는 영원히 인정 안 받습니다. 다 청산되었어요. 이젠 매일매일 내가 죄를 짓더라도 이미 용서받은 상황이기 때문에 이것을 회개하고 또 씻어서 날로 성령과 말씀과 보혈을 통하여 거룩하고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벌거벗은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영광이 떠나가자 벌거벗은 수치를 느껴서 무화과나무로 앞치마를 해 입어도 자꾸 말라버립니다.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가 부끄러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실 때에 그대로 쫓아내지 아니하시고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에덴동산에서 처음으로 짐승을 잡아 죽였었습니다. 짐승이 비명을 지르고 죽고 그 피가 에덴동산에 뿌려지고 그 가죽을 벗겨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혀서 부끄러운 수치를 면하게 해서 내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워서 종교의 앞치마를 해 입고 윤리와 도덕의 앞치마를 해 입고 여러분께서 인간의 앞치마를 해 입어도 이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부끄러운 수치를 면하게 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시사 십자가에 못 박아 피를 쏟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벗겨서 그래서 여러분과 나에게 오늘 입혀주어서 우리를 법적으로 의롭다고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음으로 영원히 죄가 용서함 받을 뿐 아니라 의롭다하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게 되었는데 이 \\\\\\\'의\\\\\\\'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한번도 죄를 짓지 않은 상태요,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이요, 마귀에게 참소를 받지 않는 자격을 말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은 사람은 영원히 용서를 받고 이 의로운 옷을 받아 입었으므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 설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까? 예수께서 침묵의 삼일 동안에 주님께서 완성한 일이 바로 이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제는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이 영원하고 완전한 한번 제사를 하나님께 그 피로써 드려 버렸습니다. 이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회개하고 나오는 사람을 주님께서 온전히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둘째로, 침묵의 사흘 동안에 예수님이 한 것은 이 사흘 동안에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셔서 마귀의 권세를 잡아서 깨뜨려 버리고 마귀를 무장 해제해 버리고 우는 사자같이 날뛰는 마귀의 이빨을 뽑고 발톱을 뽑아서 무능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위대한 승리의 역사를 주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보면 큰 용, 옛 뱀 ,마귀 사탄이라고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인 것입니다. 마귀는 원래 천사장이었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려고 하다가 잡혀서 그래서 처음 범죄한 자요, 그리고 하나님께 내어 쫓겨서 버림받음으로 처음 죽은 자인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 당하는 것,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처음 죄지은 자요 마귀는 처음으로 죽은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귀가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를 지어서 지구를 책임 지워주고 지구의 소유자로 만들어 주고 지구의 주인으로 만들어 준 걸 보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 가슴에 못을 박기 위해서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꾀었고 그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서 마귀 앞에 아담과 하와가 무릎을 꿇고 순종하자, 마귀는 그것을 강탈해서 그래서 세상의 주인으로 점령하고 이 세상 왕으로 들어와서 이 세상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세상 자랑으로 채워넣고, 혼미케 하는 영으로 사람을 잡아서 하나님을 모르게 하고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깨닫지 못하게 하며 짐승처럼 살다가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떼를 지어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마귀의 궤계입니다. 이 마귀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미혹케 하려고 발버둥을 쳤던 존재입니다. 이 마귀가 여러분, 사람을 휘어잡고 사람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은 조건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기는 먼저 죄 지은 자거든요.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받아 죽었습니다. 자기는 먼저 죽은 자거든요. 여러분 감방에 들어가보면 세상에서 아무리 못난 놈이라도 감옥에는 먼저 들어온 놈이 감방에서 선배입니다. 세상에서 제 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감방에 들어가면 크흐! 먼저 들어온 놈이 구석에 앉아 \\\\\\\"야! 저 똥통 옆으로 가.\\\\\\\" 별 도리 없습니다. \\\\\\\"야, 밥 가져와.\\\\\\\" \\\\\\\"야, 너 밥 내놔. 꿇어 앉아.\\\\\\\" 그것도 감옥에 먼저 들어왔다고 큰 소리 합니다. 물론 나는 한번도 들어가 본적은 없지만 남에게 들어봐서 알아요. 들어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무도 거기에 들어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마귀가 바로 한 일이 그것입니다. 선배 죄인, 선배 죽은 자요. 그래서 죄와 사망의 무기를 가지고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그 조건으로 막 사람을 훑었는데 예수님께서 침묵의 사흘 동안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떠나서 음부에 내려 가셨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의 반역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다 청산해 버리고 그래서 이제는 죄의 조건을 없애버렸고 또 주님께서는 사망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바꿔쳐버린 것입니다. 사망이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사망인데 예수님을 통해서 한 손으로 하나님 손잡고 한 손으로 사람 손잡고 하나님과 연결을 해서 생명으로 연결 시켜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 안에서 마귀는 그가 죄의 조건이나 사망의 조건을 잃어버리고 무장이 해제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기 때문에 마귀는 이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역시 지금 죄나 사망으로 그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수 있지만 주 안에 들어와서 이미 죄가 다 속량되었고 사망이 철폐 되어버린 우리에게는 마귀가 조건을 잡고 우리에게 돌아올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히브리서 2장 14절로 15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이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이 함께 속했으면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 그 다음 골로새서 2장 13절로 15절에 \\\\\\\"또 너희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 즉 율법을 도말해 버리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 즉 마귀의 정사와 마귀의 권세를 벗어버려 무장 해제해 버리고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의 죄도 허물도 청산 받고 율법도 다 제해 버리고 그리고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다 무장 해제해 버리고 예수께서 이 삼일 침묵한 동안에 위대한 승리를 영계에서 이룩해 놓은 것입니다. 이러므로 마귀는 이제 죄와 사망과 미혹으로 세상을 다스렸으나 그 모든 무장이 해제되었으므로 누구든지 예수 앞에 오면 예수 안에서 이제는 마귀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분, \\\\\\\'두나미스\\\\\\\', \\\\\\\'파워\\\\\\\' 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무덤에 들어가셔서 삼일 동안 주님께서 음부에 있을 동안에 우리 죄를 다 반역죄를 속량하시고 그리고서 죽음을 피하심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이래서 여러분과 나는 \\\\\\\'익수시아\\\\\\\', 즉 권세를 예수님을 통해서 얻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내가 네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능력이란 것은 이 \\\\\\\'파워\\\\\\\'를 말합니다. \\\\\\\'두나미스\\\\\\\' 이 힘을 말합니다. 자동차는 \\\\\\\'두나미스\\\\\\\' 이 폭탄같은 힘이 있습니다. 수십 마력, 수백 마력으로 \\\\\\\'부르르르릉\\\\\\\'하고 달립니다. 그 앞에 맨손으로 섰다가는 뼈가 가루가 됩니다. 그러나 교통 순경은 그렇게 우렁차게 달려오는 자동차라도 \\\\\\\'휙! 이리 서.\\\\\\\' 신호하면 차가 덜컥 섭니다. \\\\\\\'저리 가!\\\\\\\' 하면 저리 갑니다. 왜? 자동차는 \\\\\\\'두나미스\\\\\\\', \\\\\\\'파워\\\\\\\' 이 힘이 있지만 교통 순경은 \\\\\\\'익수시아\\\\\\\', 즉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권세는 힘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무덤에 들어가셔서 사흘 동안 계신 동안에 음부에서 마귀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과 나는 이제 예수를 구주로 믿자말자 이 권세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독수리는 새끼로 태어날 때부터 새를 지배할 권세를 가지고 있고 고양이는 태어날 때부터 쥐를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여러분과 나는 태어날 때부터 마귀와 귀신을 정복할 권세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권세를 좀 여실하게 알았더라면 얼마나 그들 생활 속에 다가올 수 있는 영적인 고통, 가정적인 파괴, 자녀들에 대한 괴로움, 이런 것을 이길 수 있지 않을 것입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는 포도원의 작은 여우를 잡아라. 포도의 꽃이 피었다.\\\\\\\"고 했는데 여러분과 나의 가정에 포도의 꽃이 피고 사업에 포도의 꽃이 필 때 여러 가지 마귀의 궤계가 들어와서 이를 허물어뜨릴 때 속수 무책으로 과거에는 울고만 있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과 내가 이 권세를 가진 것을 알면 나사렛 예수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권세를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너희 원수 귀신아, 마귀야, 내가 네게 말하니 가라! 떠나가라! 손대지 말라! 나오라!\\\\\\\" 우린 명령해서 마귀의 이 능력을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의 가정, 자녀, 사업, 생활에서 전부 제하여버리고 무장 해제해버리고 내어 쫓아버리고 하나님의 믿음, 소망, 사랑, 하나님의 축복과 성령 충만한 역사를 계속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를 구주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권세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 보십시오. \\\\\\\"나는 권세가 있다. 나는 권세가 있다.나는 권세자다. 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진짜요? 할렐루야! 아멘입니다. 여러분께서 오늘 남녀노유, 빈부귀천, 교육, 무식을 불구하고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마귀와 귀신을 내어 몰아칠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해할 자가 결단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권세 위에 단호하게 서서 이제는 무장해제 받은 이 원수 마귀나 귀신이 우리의 영과 마음과 육신과 생활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대결하십시오. 성경은 말하기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저가 너를 피하리라.\\\\\\\"고 말했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여러분에게 다 넘쳐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번째로 예수께서 음부에서 하신 일은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누가복음 16장 19절로 31절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부자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물질만능주의자였습니다. 쾌락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내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같이 먹고 마시고 연락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앞뜰에는 거지가 있었는데 이건 유신론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내세가 있는 것을 알고 경건하고 참되고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자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나사로가 죽으매 천사들이 와서 그를 데리고서 낙원에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가고, 부자가 죽으매 그는 음부에 떨어져서 불 가운데서 번뇌하고 있었다.\\\\\\\" 고 말했습니다. 부자가 불 가운데서 번뇌하면서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저 위에 낙원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나사로가 있는지라 그는 외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가 이 불꽃 중에 번뇌하여 고통하오니 저 나사로를 보내사 손가락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케 하소서.\\\\\\\" 그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이 사람아,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여기서 건너가지도 못하고 거기서 건너오지도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모든 영들은 이 음부라는 세계로 떨어져 들어갔습니다. 음부세계. 음부의 세계는 이층으로 되어 있어서 상층의 음부는 낙원이라고 하고 하부는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옥은 장차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빠질 대합실이고 여기에 낙원은 천국에 올라갈 대합실이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의 죽은 모든 의인들은 이 낙원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낙원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데려갈 길을 매일같이 기다렸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의인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하고 떠나가시고 난 다음 하신 일은 이 음부에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낙원 가운데서 소망 중에 포로가 되어서 기다리고 있는 그 포로들을 붙잡았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왔다. 너희가 여태까지 기다리며 너희 조상과 너희 선지자들이 늘 예언했던 내가 바로 그다. 이제 너희를 죄악과 마귀와 영원한 슬픔에서 풀어서 내가 천국으로 데려가노라.\\\\\\\" 낙원 천지에서 할렐루야가 천지를 진동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서 모든 의인들이 다 일어나서 예수님 손을 잡고 예수께서 그 낙원에 사로잡힌 자들을 주님께서 사로잡아서 주께서 부활해서 승천할 때 천국으로 낙원을 옮겨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육신을 떠나면 이제는 음부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직행 천국으로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지금은 아직 음부의 지옥에 내려가서 기다립니다. 이곳에서도 불로써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과입니다. 앞으로 천년 왕국 이후로 주님께서 다시 죽은 자와 산 자를 다 부활시켜서 심판하시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내어 던지는 것은 성경에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요, 세세토록 불이 꺼지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이 소금으로 칠한 것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조용기의 말이 아닙니다. 우화도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은 존귀하나 회개치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보다 못합니다. 차라리 죽어서 없어지면 괜찮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영광이냐 수치냐 낙원이냐 지옥이냐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냐 영원한 기쁨이냐 영원한 고통이냐 이것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아하, 나는 그런 것 믿지 않는다.\\\\\\\' 그러한 자유도 칠십 년 팔십 년 밖에는 없습니다. 어느 누가 죽음의 날을 연장할 수 있습니까? 그 자유가 칠팔십 년 만에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설 것이냐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냐 이것은 하나님이 결정하지 여러분이 결정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러므로 세상에 영웅호걸 열사가 어디 있습니까? 누가 죽음을 두고 큰소리하며 누가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 할 사람 있겠습니까? 부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부자는 무신론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부자는 유물주의라고 주장했습니다. 부자는 자기 쾌락주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이 얼마나 갔습니까?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자 그는 음부에 내려가서 불 가운데서 번뇌하고 있었고 지금도 불 가운데서 번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중대한 것은 이 땅에 살아있을 동안에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는 이것이 인생의 주목적인 것입니다. 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인생은 \\\\\\\'진생\\\\\\\'을 살은 것이 아니고 가짜인 \\\\\\\'가생\\\\\\\'을 살았고 껍질로 살았고 그리고 나중에 먼지와 티끌같이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성경은 에베소서 4장 8절에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 사로잡은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예수님이 올라가실 때 혼자 올라가지 아니하시고 낙원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모두다 사로잡아서 그래서 천국으로 주님께서 옮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천국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그리스도 오기 전의 모든 의인들과 그리스도 이후의 모든 의인들이 그곳에서 주와함께 극락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과 나는 이 땅에서 살다가 이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맨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린 그곳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오직 예수 ,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마귀와 죽음을 멸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출하셔서 영원한 세계로 데려가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실존적 절망을 철저히 정복하고 위대한 새 삶을 주신 역사적인 하나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치고 누구든지 죄책과 정죄의 무덤 속에 들어앉아 있습니다. 허무와 무의미 속에 들어앉아서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죽음과 절대 무의 무덤을 삼고 살고있습니다. 여기에서 해방되어 나올 사람, 인간의 힘으론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보혈로 말미암아 죄책과 정죄의 무덤을 파헤쳐버리고 허무과 무의미의 무덤을 박살내어 버리고 죽음과 무를 처치해 버리고 주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여러분과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죄와 상관없고 허무와 무의미하고도 상관이 없고 죽음조차도 우리를 결박할 수 없는 해방된 자리에서 예수를 위해서 일하다가 주님 오시는 날에 조금도 미련 없이 우리는 이 낡은 세상을 떠나서 새롭고 영원한 세계로 그리스도가 만드신 낙원의 세계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살아계신, 예수님은 사셨고 살아계시고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것입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이것이 우리 크리스쳔들이 외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가슴속에 이 예수가 계십니까? 이 예수가 여러분의 주요 왕이 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인생에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인생에 태어난 목적이 구원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이미 알곡이 되었으며 여러분은 이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또 이 세상에 왜 사는지를 알았으므로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미 알곡이 되었고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늘나라를 얻었으니 세상나라 못 얻어도 상관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세상 사랑을 못 받아도 좋고 하늘의 보화를 얻었으니 세상 보화 있으나 없으나 이것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은 이미 여러분 인생으로서 성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미 축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미 행복을 얻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행인과 나그네길을 남은 여생 걸어가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이란 먹든지 안 먹든지 전도하는 길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예수 전도하는 길인 것입니다. 이것만이 여러분과 내가 이 땅에서 남아 있을 동안에 해야될 일인 것입니다. 이 이상 더 가치 있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이제 여러분 쉬이 여러분과 내가 들어갈 그 영광스럽고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준비하시고 지금 손을 활짝 펴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 기 도 -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어둡고 캄캄한 죄악과 절망, 죽음의 스산한 세계 속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무덤에 들어가셔서 죄를 다 속하시고 마귀의 무장을 해제해 버리시고 낙원에 있는 사람들을 다 사로잡아 천국으로 옮기시고 오늘날 우리에게 영광스런 구원의 선물을 주시고 계심을 감사하옵나이다. 아버지, 오늘 주일예배에 출석한 성도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알곡이 되고 이미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더 열심히 성령 충만하여 전도할 것이요, 아버지 이 가운데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혹은 믿다가 타락한 사람은 백척간두에 서있어 여기에서 죽음으로 떨어지면 영원히 멸망 받을 수 있는 위기에 있사오니 오늘 이 시간에 회개하고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가 늦기 전에 회개하고 나와서 구원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신유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예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심으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는 고아와 같이 버림받지 않은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오니 오늘 아파서 몸에 손을 얹은 사람마다 예수님의 손을 통해서 넘쳐나가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서 사망을 멸하여 주시옵시고 마귀를 멸하여 주시옵소서. 질병을 도말시켜 주시옵시며 우리 아버지여 사탄을 멸하여 주시옵소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희 질병과 고통, 너희 원수 귀신의 역사여,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각 사람 몸에서 이 시간에 묶음을 놓고 떠나갈지어다. 이 시간에 놓아라. 질병아 떠나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치료와 생명이 강물처럼 각 사람 속에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 여러 가지 문제로 짖눌린 사람들, 홍해수를 가르고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를 무너뜨린 것처럼 우리 하나님이여, 예수님의 능력으로 저주를 무너뜨려버려 주시옵소서. 우리 아버지여,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오! 밤에도 부르짖고 낮에도 부르짖사오니 문제들을 해결해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축복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조용기 목사(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4차원과 3차원 /요3:1-8/ 조용기목사 2019-06-05 09:08:26 read : 25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
4차원과 3차원 /요3:1-8/ 조용기목사 2019-06-05 09:08:26 read : 25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1~8) 어느 날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인데,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질문을 한 것입니다. 1. 죄로 인한 단절 3차원에 속한 사람은 4차원에 속한 사람과 대화할 수가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3차원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보다 차원이 높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과 대화가 단절된 것은 죄룰 짓고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은 영적으로 존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시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마귀의 꾐에 빠져 죄를 짓게 되자 영이 죽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시말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소통이 완전히 단절돼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영이 죽었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4차원의 영적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2. 막힌 담을 허신 예수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대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죽었던 영이 살아나서 4차원의 영적인 세계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살아났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예수님 오른편과 왼편에 두 강도가 같이 달렸는데 한 강도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즉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죄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사람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성령님과 함께하는 삶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요 3: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이미 4차원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4차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것을 단단히 알아야 합니다. 3차원이나 4차원은 기하학적 용어입니다. 기하학을 공부할 때 여러분은 한 쪽과 또 다른 쪽의 두 위치에 점을 찍을 수가 있습니다. 두 점 사이를 선으로 그은 것을 1차원이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수백 수천의 선을 더 그으면 2차원, 즉 평면이 됩니다. 그리고 평면을 하나씩 계속 쌓으면 3차원인 입체가 됩니다. 1차원인 선은 2차원인 면에 포함되고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2차원은 3차원의 입체에 포함되고 지배를 받습니다. 이러한 기하학적인 비유를 이용하여 우리는 물질세계도 비유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는 3차원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3차원의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무엇입니까? 4차원에 속한 영의 세계입니다. 4차원의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창세기 1장 2절을 읽으면 답이 나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고 말씀하십니다. 3차원의 세계 위에 성령이 운행하시는데 성령은 보이지도 아니하시고 붙잡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 4차원은 성령이요 성령으로 거듭난 여러분도 4차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물질적인 3차원의 세계를 뛰어넘어 이제는 영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대화가 되고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높은 차원이 낮은 차원을 다스리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4차원의 영적 세계가 보이는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니” 말씀하시니까 빛이 생겨났습니다. 또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라고 하셨습니다. 땅이 생기고 바다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4차원에 속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보이는 3차원의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4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을 통하여 꿈을 통하여 믿음을 통하여 말을 통하여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4차원에 속한 사람이 되면 그 세계 속에서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는 4차원의 영적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꿈과 생각과 믿음과 말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을 통해 성령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째,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생각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유명한 컨설턴트인 데일 카네기는 “평생 동안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생각을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생각이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는데 제일 좋은 것은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 생각 위에 역사하셔서 여러분의 삶에 변화와 창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성령님이 우리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시고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면 말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며 행동이 달라지면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시는데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삶을 살도록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님은 우리의 꿈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꿈이 없는 백성을 망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꿈이 없으면 성령님이 운행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꿈이 있을 때, 성령님이 꿈 가운데 행하여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반드시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젊었을 때, 늘 마음속에 “왜 한국은 다른 사람에게 얻어먹어야 하는가? 우리가 어려울 때, 물질적으로 얻어먹긴 했지만 영적으로까지 동냥할 필요가 있는가?”그런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나도 땅 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겠다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막막했습니다. 단돈 3원이 없어서 불광동에서 서대문까지 걸어 왔다 갔다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라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외국어를 공부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지, 나중에는 “내가 공부에 미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매일같이 영어로 생각하며 영어로 말하고 정말로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무섭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쟁 직후라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좋은 책도 사서 볼 수가 없었고 학원에 가서 배울 수도 없었고 모든 것을 독학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에 세계 선교에 대한 확실한 꿈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몸부림치면서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 꿈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꿈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꿈을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꿈을 향해 달려갈 수 목표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나빠도 마음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꿈을 가지고 있으면 성령이 그 꿈을 통해서 운행하시고 꿈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셋째는 마음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을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그런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변화되어서 “주님! 내가 믿습니다. 성령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성령님이 그 밑에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지을 때, 참으로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늘 품에 지니고 다니던 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경과 조지 뮬러 책이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무릎 꿇어 기도함으로써 약 6천 명의 고아를 먹이고 입혔던 사람입니다. 내가 막막한 현실 때문에 답답할 때면 조지 뮬러의 기적 같은 이야기가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증거도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 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조지 뮬러의 책은 나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불가능이 없다”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3차원의 삶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가 없는 장애물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4차원의 믿음을 통해 3차원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현재 눈의 앞에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시인하는 것은 감각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눈에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내 앞길 이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내 꿈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넷째, 성령님은 창조적인 선언을 할 때 운행하십니다. “건강아, 돌아오라!”라고 창조적으로 명령하면 성령께서 “그래, 돌아오도록 만들어 줄게.”하시며 역사해 주십니다. 또, “사업의 문이 열릴지어다!”하면 명령하면 성령께서 “그래, 문이 열리도록 내가 만들어 주마.”라고 말하며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일본의 모리타 요시쿠스라는 청년이 어릴 때 뇌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암의 위치가 뇌 깊숙이 있고 신경이 지나가는 위치라 수술도 치료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퇴원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는데 종양이 커지면서 뇌압이 올라가고 참기 힘든 두통과 구토가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신경마비 증상이 나타나서 팔과 다리가 마비되고 안면신경도 마비되고 시력 장애로 눈도 안 보이게 되었습니다. 잠을 자고 싶어도 마비증세 때문에 눈꺼풀이 감기지 않아서 가족들이 눈을 감겨준 후, 그 위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여 주어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고 싶은 날만을 기다리며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청년의 누나가 일본어로 녹음된 설교 테이프를 전해준 것입니다. 일본 성회에서 내가 일본어로 설교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조용기 목사 성회에 참석해서 병 고침을 받았다”하면서 누나가 설교 테이프를 구해서 동생에게 꼭 들어보라고 전해 준 것입니다. 당시에 이 청년은 TV 소리나 음악 소리를 들으면 주로 구토 증세가 더 심해졌는데 신기하게도 내 설교를 듣는 중에는 한번도 구토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24시간 내내 설교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설교 말씀을 듣고 난 뒤에 4차원의 영성을 적용해서 기도를 한 것입니다. 잠을 자기 전에 자기 신체의 한 부분과 증상에 대해 아주 구체적이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미 나았다!”선포한 것입니다. “모리타 눈은 나을 것이다. 이미 나았다! 하나님, 내 눈을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반복하면서, 마음에 평안이 올 때까지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가 더 구체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나아지고 있다. 내일 아침에 눈이 나을 것이다.” 이렇게 선포하고 기도했는데 진짜 다음 날, 잘 안 보이던 눈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귀가 나았다고 선포하면서 기도해서 났더니(기도하고 났더니) 귀가 잘 들리게 되었고 또 팔이 나았다고 선포하면서 기도했더니 팔을 들어 올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체의 한 부분씩 치료되기를 위해 기도했는데 6개월 만에 기도가 모두 응답된 것입니다. 수술조차 할 수 없었던 암 덩어리가 깨끗하게 사라지고 24년 지난 지금까지도 건강하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입술로 말을 크게 하면 입술의 고백을 통해 성령님이 운행하셔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으로서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을 통해 성령님과 함께 4차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 속에 계시고 꿈속에 계시고 믿음 속에 계시고 입술의 창조적인 선언 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4차원의 영성을 통해서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하고 소망 찬 꿈을 가지고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변화와 창조를 가져오는 말을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고 여러분은 하나님과 손을 잡고 3차원의 세계인 물질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 자리에 우리 가운데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교회를 통해 들어오며 나가며 복을 받아서,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기도> 은혜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죄와 허물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그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의 공로 힘입어 주님 앞에 나와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여 3차원의 세계에 갖혀 버린 우리의 부족한 생각과 마음이 4차원의 생각과 마음으로 꿈꾸며 입술의 고백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연약하오니 주께서 힘주시고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차원의 삶/ 생각, 꿈, 믿음, 말이 달라져야 인생이 달라진다/ 렘33:2-3/ 조용기 목사/ 성찬주일설교/ 2010-11-07
4차원의 삶/ 생각, 꿈, 믿음, 말이 달라져야 인생이 달라진다 렘33:2-3 두 점 사이의 선을 1차원이라고 합니다. 많은 선이 평면을 이루면 2차원이라고 합니다. 2차원인 면이 쌓여서 시간, 공간, 물질을 만들면 3차원이라고 합니다. 3차원을 둘러싼 영적 세계는 생각, 꿈, 믿음, 말 등 감각의 세계를 뛰어넘는 것으로 이를 편의상 4차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1차원부터 4차원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은 차원이 낮은 차원을 다스립니다. 창세기 1장 1절로 3절에는 처참히 파괴된 3차원의 세계가 영적 4차원에 둘러싸여 창조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 일을 행하시는 야훼 1) 요나의 니느웨 성 체험 -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작은 삶의 한 부분이나 식물 혹은 미물까지도 다스리심(렘 33:2; 욘 4:6-8) 2) 우리의 삶을 돌보시는 하나님 -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은혜를 베푸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32) 3) 인간은 삶이란 집을 짓고 생업이란 성을 쌓으며 살아감(시 127:1~2) 2.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1) 두로와 시돈에서 예수님께 부르짖은 가나안 여인 - 귀신 들린 딸의 치료를 위해 부르짖었으나 세 번이나 거부당하고, 결국 믿음으로 응답받음(마 15:21-28) 2) 응답하실 때까지 부르짖으라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3.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1) 3차원의 세계는 우리가 실제로 보고 들으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적인 해답 2) 4차원의 세계 - 현실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님(히 11:3) ① 새로운 생각 -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넘침(엡 3:20) ② 새로운 꿈 -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소원(빌 2:13) ③ 불가능을 믿음 -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음(막 9:23) ④ 창조적인 고백 -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4차원의 생각, 꿈, 믿음은 늘 선포해야 함(잠 18:21) 3차원의 세계는 인본주의적 삶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믿음, 하나님이 주시는 신앙고백은 4차원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3차원의 환경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4차원의 세계에 있습니다. 4차원이 3차원을 다스리고 창조하므로 믿음의 사람은 새로운 생각과 꿈, 믿음을 고백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설교 전문>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서론> “4차원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 주십시오. 4차원의 삶. 4차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기하학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두 점 사이에 선을 그으면 그 선을 기하학적으로는 선. 이렇게 말하지 않고 1차원이라고 부릅니다. 1차원. 그 1차원이 많이 그어 놓으면 뭐가 됩니까? 평면이 되지요. 그지요? 이런 평면 분석을 하면 선을 그으면 많은 선이 합쳐가지고서 평면이 됩니다. 이는 1차원이 돼요. 그리고 이 평면을 쌓아 놓으면 입체가 되지요. 3차원이 됩니다. 그러면 3차원은 더 이상은 어떻게 되느냐. 없어요. 3차원을 둘러 쌓고 있는 4차원이 있습니다. 그 4차원이 제가 늘 여러분께 말하는 우리 인간의 생각과 이해, 꿈과 환상, 믿음, 입술의 고백 이러한 것은 형체가 없습니다. 선도 없고, 평면도 아니고 입체도 아니고 형체가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은 4차원에 속해요. 여러분의 꿈과 환상도 4차원에 속해요. 여러분의 믿음도 믿습니다! 4차원에 속해요. 왜냐면 보여줘요. 믿음. 못보여주지요? 4차원에 속해요. 그 다음에 여러분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기쁩니다. 나는 성공합니다. 나는 승리합니다. 어디 행복 한번 보여줘요. 보여줘. 기쁨을 한번 보여줘. 땅팔 노릇입니다. 보여줄 수 없어요. 보여주지도 못하면서 뭘 있다 없다 하느냐? 안 보여도 있는 것은 4차원에 속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 1장 1절로 3절에 보면 처참히 파괴된 3차원의 세계가 있습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더라.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거든요.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더라. 그런데 그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더라. 비유컨대 여러분의 삶을 땅으로 취급합시다. 우리 땅에 속해 있으니까. 우리 가정, 우리 사업, 우리 생활 우리 다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내 마음이 내 삶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처참합니다. 삼차원의 세계 보이는 세계는 다 말할 수 없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어요. 병들고, 못먹고 살고 못입고 형편없어요. 그럼 이것을 누가 고치느냐. 그 위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땅, 눈에 보이지요.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 눈에 보이는데 하나님의 신은 눈에 안 보입니다. 하나님의 신을 보신 분 한번 손들어 봐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은 안보이니까 없지요 그죠? 없지요? 솔직히 말하세요. 안 보이는데 왜 있어요? 안보여도 하나님의 신은 있거든. 그것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는 것은 일차원, 이차원, 삼차원 위에 사차원인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자 성경에 삼차원의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빛이 있으라. 눈에 보이는 빛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창 1:1~3). 높은 차원이 낮은 차원을 다스립니다. 일차원은 이차원 평면이 다스립니다. 평면은 입체가 다스립니다. 입체는 사차원 생각이 다스립니다. 꿈이 다스립니다. 믿음이 다스립니다. 말이 다스립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산, 집, 생활. 이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분 속에 있는 사차원 말씀으로써 여러분 생각을 다스리면 여러분 생각이 환경을 다스리고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꿈, 환상이 현실을 다스리고 믿음이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현실을 다스리고 내 입술의 말이 현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 말한 대로 될지어다. 그러므로 이 사차원의 세계를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해도 아직까지 우주의 신비에 대해 3%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의 대부분에 대해 인간은 무지한 것입니다. 인체에 대해서도 인간은 마치 다 알고 있는 듯 말하지만 90% 이상 인간의 인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 세계적인 암 전문가는 “과학이 10년을 노력해서 이만큼 발전해서 가보면 하나님의 세계가 우주보다 더 크게 열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아무리 발견해도 이 발견한 것은 그보다 더 우주만큼 큰 하나님 세계가 앞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떠한 노력으로도 광대한 우주의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뉴욕 하이덴 천문대의 한 천문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문학자 중에서 무신론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데, 우주의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천문학에서는 우주의 위대한 설계자이신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것 뭣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이 어디 계셔? 내 주먹을 믿으라. 하나님 안계신다.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을 하지. 조금이라도 지혜 있고 학식 있는 사람은 아 숫제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하나님 계신 것은 틀림없어도 나는 너무 크시기 때문에 모릅니다. 내 생각으로는 내 지혜와 총명으로는 알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솔직한 사람이고 좋아요. 모른다는 것은 모르니까 모르는 것이지. 모르면서도 아는척하고 하나님 어디 계시냐? 내 주먹을 믿으라. 그런 건방진 소리하는 그 주먹은 얼마 안있어 썩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삼차원의 세계는 인간의 그 어떠한 과학으로도 알 수 없는 4차원의 세계에 의하여 창조되고 둘러 쌓여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은 첫째,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에 대해서 알아 보십시다. 야훼는 하나님은 영이시라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라. 사차원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차원의 근본이기 때문에 삼차원인 인간세계는 물질세계는 하나님이 다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꿈대로 하나님의 믿음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인간 세계는 다 다스려지고 운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와 만물이 움직이는 근원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 근원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엄청나게 훌륭하게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보면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궁창이 생겨나라. 명령하셨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해서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이 만물을 다스리게 하자.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이 하나님께 명령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께 사람 만들어라. 누가 만듭니까? 내가 만든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손길이 만들었는데 사람은 하나님이 하나님께 명령해서 네 형상대로 나오라. 그래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개나 고양이나 원숭이나 사자나 곰이나 사람이나 같다.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안같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었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당신 자신이 비추어서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차원적인 영인 것이므로 여러분도 영입니다. 영이 육체 속에 사는 것입니다. 사차원이 삼차원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삼차원의 세계를 매니지하고 다스리는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이 생각을 통하여 꿈을 통하여 믿음을 통하여 말을 통하여 삼차원의 생활을 매니지하고 다스리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의 인생을 매니지하고 다스리고 돌보는 일을 자기의 생각을 다스리므로 자기 소원과 꿈을 다스리므로 자기의 믿음을 다스리므로 자기 입술의 말을 다스리므로 자기의 운명을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이 내 운명이요 팔자라고 말하는데 운명이나 팔자를 우리는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꿈꾸고 하나님 말씀을 의지해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말하게 되면 그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처럼 다스리고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면서 하나님처럼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을 갖고 다스리고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 예수를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서 살면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적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같은 생각, 같은 꿈, 같은 믿음, 같은 말씀을 하므로 작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 굉장히 여러분 귀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I\'m wonderful person. 나는 귀한 사람이다. 이제 조금 더 들어 보세요. 깜짝 놀랄 말씀을 할테니까. 요나를 하나님께서 훈련하실 때 놀라운 경험을 통해서 훈련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서 바다의 파도와 기후, 여러 가지 일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나는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며,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로 하나님으로부터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40일 만에 멸할 것이다. 하나님이 40일 만에 파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외쳐라. 그런데 요나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항상 앗수르의 침략을 받으니까 40일만에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멸하겠다고 하니까 이렇게 좋은 소식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직접 칠 필요가 없이 하나님이 때려서 망하면 얼마나 기쁘고 좋은 일인가. 우리 사람들도 그런말 생각할 때가 있지요? 굉장히 내가 원치 않고 미운 상대방인데 어휴 저 사람이 손대지 않고 하나님이 그냥 막 확~ 해줘버리면 내 맘이 시원하겠다. 그래서 이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탄 것이 아니라 욥바에 내려가서 다시스로 니느웨 정반대로 가는 배를 표를 샀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데 그는 다시스로 정반대편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그 배가 지중해 가운데 가다 큰 풍랑이 와서 배가 완전히 파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사공들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창에 들어가서 잡니다. 왜, 나는 절대로 하나님 명령에 순종 안할테니까 아주 죽을 각오했으므로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걱정할 것 없다. 나는 다 맡겼다. 잡니다. 그런데 사공들이 와서 깨워 일으켜서 너 누구게 이런 풍랑에 발뻗고 자느냐? 빨리 일어나서 제비 뽑으라. 이 풍랑이 누구를 통해서 오는지 알아보자. 제비뽑자. 보통 때 다 제비뽑으라는 것은 아니에요. 이는 특별한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기도도 할줄 모르고 하니까 제비뽑을 수밖에 없지. 그 제비를 뽑으니까 제비가 딱 요나에게 떨어져요. 이는 누구냐? 왜 풍랑을 만났느냐? 요나는 솔직히 말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나님이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40일 동안만에 망한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해서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반대되는 다시스로 가는 이 배를 탔다. 나 때문에 이렇게 풍랑이 왔으니까 나는 회개 안할테니까 나를 바다에 던져라. 아 지독한 놈이지요. 어지간하면 회개할 터인데 나 죽어도 회개 안한다. 하나님이 요나가 그런 생각을 할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해 놓았었어요. 그래서 사공들이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니까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배 뒤에 따라오던 큰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왠 떡이냐? 그냥 삼켜 버렸습니다. 그러자 즉시 바람이 잠잠해지고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야~ 이것 사람의 생각과 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시는구나. 그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주와 만물을 하나님이 다스린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시다. 그 하나님이 큰 주재이시니까 여러분과 나는 조그마한 주재인 겁니다. 하나님 따라 다니면서 하나님 심부름하는 꼬마 주재에요. 요나서 1장 12절에 보면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하나님과 틀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고 순종을 잘하면 하나님이 우리 환경을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전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 복주는 자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에게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 하리니 네가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이 복을 주면 복의 근원이 돼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러분이 사는 동리나 여러분의 나라에나 여러분의 집안이나 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고 화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축복을 가져오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고 저주를 가져올 수 있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번이 G20 전세계 부자나라 세계의 85%의 생산을 하는 부자 나라들이 오잖아요. 열 나라 중에 아홉 나라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다 예수 믿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니까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도 크게 축복을 받았다 말입니다. 어제 텔레비에서 해설하는 사람도 못내 그 말을 하더군요. 하는 말이 왜 지금까지 이 G20 모임이 전부 기독교 수도에서 갖게 되었느냐.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잘사는 나라는 다 예수 믿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불교 국가나 이슬람 국가나 그런 나라에 이것을 가져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 텔레비를 보면서 그것 좀 더 보탰으면 좋은데 우리나라도 이렇게 잘살게 된 이유는 복음이 전파되어서 그렇다고… 그 말 한마디만 했으면 좋을뻔 했는데… 왜냐하면 여러분 우리나라가 60년 전에만 하더라도 이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가 우리 한국이었습니다. 제일 못살아요. 두 번째 못사는게 아닙니다. 제일 못살아요. 국민의 1년 소득이 60달러였습니다. 불과 60년 전이었어요. 60년 전. 우리가 해방 되었을 때… 거기다가 6.25사변을 겪어서 전쟁까지 겪었으니 완전히 have no 지… 그런 나라가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이 세상에서 12번째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이것은 누가 뒤에서 밀어주고 위에서 부어주고 앞에서 끌어주지 아니하면 이렇게 될 턱이 없어요. 턱이 없어. 저는 실제로 이런 좋은 날 볼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일정시대에 태어나서 자랐고 6.25를 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밥이나 안굶고 살아봤으면 좋겠다. 그런 제가 요사이 밥이 너무 많아서 감당할 수가 없어요. 우리 성도들이 다 밥주겠다고 오라고 하는데 밥만 얻어 먹으려면 죽을 때까지 스케쥴 짤 수 있어요. 말씀 전해주고 기도해주고 밥 얻어먹고…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불과 100년도 되기 전에 5만교회, 1,200만 성도가 되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세계에서 이렇게 제일 큰 교회가 세워질 줄은 온 세계에서 몰랐어요. 한국에 이런 교회가 세워질줄… 그래서 이 G20에 우리 대통령만 바쁜 것이 아니라 저도 굉장히 바뻐요. 왜냐면 모두다 오는 나라가 기독교 국가에서 오기 때문에 그들 다 하는 말이 뭐냐면 제일 첫째, G20 회의에 참석하고 둘째, 여의도순복음교회 참석하고 오느라고… 그게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아니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이시고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느웨에 가지 아니하고 다시스로 가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했습니다.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니까 기가 막히거든. 그러니 사람이 아무리 완악해도 대단히 어려우면 회개합니다. 풍랑도 회개 못 시켰는데 물고기 뱃속에 캄캄한 뱃속에 사흘동안 들어앉아 있으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니까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시매 물고기가 니느웨 해변에 와서 확 토해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밖으로 나오자 물고기도 사흘 동안 소화가 안되어서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는데 어~ 시원하다. 앞으로 인간은 절대로 먹지 말아야 되겠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성 이곳에서 저 끝까지 이틀을 걸어가는 성입니다. 자동차 탄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없었으니까 걸어서 이틀 걸리는 성이니까 굉장히 큰 성이지요. 이틀동안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40일만에 이 성이 하나님의 심판받아 망한다고 했는데 놀랍게도 그 성 사람들이 전부다 마음이 노골노골해요. 이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금식하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회개를 해서 변화되니까 하나님 마음도 변화된다 말입니다. 40일 동안 복음을 증거하고 난 다음 앉아 가지고서 니느웨 망하는 몰골을 보겠다고 요나가 기다리는데 햇빛이 내리비치고 동풍이 불어오니 얼마나 덥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하루저녁 자고 나니까 박넝쿨이 하나 생겨서 입사귀가 머리를 촥 가리우는데 어~ 시원하다. 아~ 시원하다. 이럴 수가 있느냐. 박넝쿨이 나다니… 그런데 하루만에 박넝쿨이 벌레가 기어와서 싹뚝싹뚝 잘라먹고 바짝 말라 버려요. 동풍이 불고 햇빛이 비취니 덥고 땀이 나고 못견디겠어요. 막 불평을 말하고 아~ 박넝쿨이 나서 시원하게 앉아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안돌봐주셔서 벌레가 와서 먹어버린 이 쪼글쪼글 박넝쿨이 쪼글쪼글 대고 나는 더워서 죽겠으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야 알겠지? 박넝쿨이 하루저녁에 이렇게 우거질 수 있느냐? 하나님이 아니고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축복하니까 박넝쿨이 하루저녁에 머리를 덮었다. 그러나 하루저녁에 하나님이 벌레 한 마리를 명령하니까 벌레가 와서 박넝쿨을 잘라버리니까 말라 버렸다. 하루 저녁에 박넝쿨이 났다가 하루 저녁에 말라버리는 것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데 하물며 이 성에 앞길을 가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얼마냐? 12만명이 있다. 그리고 짐승들도 많다. 어른들은 죄를 짓고 나빠도 애들은 너무나 억울하지 않느냐. 불쌍하지 않느냐.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성에 있는 생명들을 아끼는 것은 마땅한 일 아니냐?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일을 돌보신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데 큰 일도 적은 일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태복음 10장 30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그 머리털 수를 다 하나님이 헤아려 알고 계십니다. 에이~ 세세하게 이런 머리털까지 하나님이... 박넝쿨도 하나님이 일어나고 벌레도 하나님이 기어오게 만드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절로 32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얼마나 큰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 모든 것이 믿음만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환경은 삼차원의 세계는 사차원의 세계인 믿음만 가지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시편 127편 1절로 2절에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1절로 2절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삶이란 집을 짓고 생업이라는 성을 쌓는데 하나님이 안도와주시면 집을 짓고 성을 쌓는 일이 엄청나게 불가능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 삼차원의 세계에 집을 짓고 생업을 이행하는 삼차원의 세계 우리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다. 삼차원의 세계를 삼차원으로 해결하려면 힘듭니다. 그러나 삼차원의 세계를 하나님이 주시는 사차원의 세계로 해결하자면 차원이 높으니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룬 그 어떤 과학 기술 문명도 하나님이 한번 콧김을 불어 보시면 그로써 끝장입니다. 인간의 과학이나 수단이나 방법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아 놓으면 열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란 집을 짓고 생업이라는 성을 쌓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시지 아니하시면 이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게 무너지고 흐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9편 10절은 “야훼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여러분을 안 버리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찾으시면 우리는 삼차원의 세계 속에 삽니다. 사차원의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와 같아서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눈에 보이지만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이신 성령이 우리 위에 운행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생겨나라. 찾아져라. 나아라. 말씀한대로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보통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떠한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의 깊은 곳에 빠져 있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위에 성령이 운행하십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공기와 같습니다. 프뉴마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프뉴마. 프뉴마는 영이라가도 하고 공기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공기가 운행하시더라. 여러분 위에 이 프뉴마, 숨쉬는 공기와 하나님의 영 성령이 동시에 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대한 창조를 가져올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이 자리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 주의 종들이 설교하고 난 다음에 회개할 신앙고백을 시키는 것은 신앙고백을 따라 속이 새로워지니까. 그리고 아픈데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은 실제로 나으니까. 낫게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운행하고 있으니까. 문제를 가진 사람 가슴에 손얹고 기도하자는 것은 기도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성령이 운행하고 계시니까. 가짜가 아니라 진짜로, 정말 위대한 창조의 역사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보통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둘째로,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운행하면 이제 우리 부르짖어야 돼요.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에 왔을 때 예수님께 부르짖는 가나안 여인이 있었습니다.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내 딸이 비참하게 귀신 들렸으니 내 딸을 고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들은체 만체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예수님 제자들의 옷자락을 들고 선생님께 말씀 좀 해서 좀 돌봐주게 해주십시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은 유대인에게 보내심을 받았다. 지금 유대인의 때다. 이방인의 때가 아니다. 내가 이방인에게는 유대인에게 줄 것을 이방인에게는 안준다. 그러니까 여자가 와서 예수님 앞에 길을 막고 엎드려 가지고서 주님 내 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니까 예수님께서 가혹한 말을 하셨습니다. 뭐라고 하느냐면 자녀에게 줄 떡을 취해서 너 이방인 개에게는 안준다. 가혹한 말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여자가 주님! 옳습니다. 개들도 자녀가 먹는 밥상 밑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 개들이 정말 상 밑에 오면 부스러기를 주워 먹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이 말을 했으므로 집에 돌아가라! 네 딸이 귀신이 나갔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말 잘해야 돼요. 내가 이 말을 했으므로 귀신이 나갔다. 한마디 말로 천냥빚을 갚는다고 말을 잘못하면 많은 축복을 잊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끝까지 낙심하지 말고 응답할 때까지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 끝까지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8장 9절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야훼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이 말은 뒤로 물러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으니 끝까지 매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두번 기도해서 안된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이판저판 여러분과 같이 계십니다. 좋은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 위에 하나님이 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이 잘되고 아름답고 평안하면 하나님이 와 계시겠지? 아니올시다.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아주 팔자 사납고 절망적일 때 그때 거기에 하나님이 와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다 시련과 고난에 빠진 사람에게 행한 것은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잘먹고 잘입고 배부르고 등따뜻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와봤자 무슨 소용 있어요? 대낮에 여러분 촛불켜서 가지고 와서 무슨 효과가 있어요? 밤에 촛불켜서 가져와야지. 주님은 빛이시라. 어두운데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평안이시라. 폭풍우가 있는데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이시라 사망있는데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있으면 주님이 떠나지 않고 와 계시기 때문에 계속해서 믿음으로 부르짖으면 삼차원의 세계에는 사차원이 와야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3.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셋째로, 주님께서는 여기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삼차원의 세계는 물질적, 인간적인 해답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 안믿는 사람이 물질적으로 인간적으로 답을 가져오는 것은 삼차원에 대한 삼차원의 해답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차원의 세계는 삼차원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사차원의 세계 즉, 크고 은밀한 성령의 역사가 해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삼차원 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지만 사차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말씀, 기도를 통해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은 현재 보이는 그대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안보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보이는 삼차원의 세계보다 높은 차원 사차원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사차원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크고 은밀한 일이란 뭐냐 새로운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생각 아니고 새로운 생각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성경을 읽으면 문제 해답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고 은밀한 일이라는 것은 크고 은밀한 새로운 생각을 가지자. 둘째는 새로운 꿈을 가지자.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소원이 뭡니까? 꿈이 바로 소원인 것입니다. 너 소원이 뭐냐? 너 꿈이 뭐냐? 그러므로 하나님이 꿈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꿈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고 은밀한 일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생각, 새로운 꿈 그 다음 불가능을 믿는 믿음, 도저히 인간으로 믿을 수 없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느니라. 그리고 네 번째는 창조적인 고백,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어떠한 어려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새로운 생각, 새로운 꿈을 가지십시오. 새로운 믿음, 새로운 입술의 고백을 가지십시오. 아~ 그것 보통때 듣지 않은 것인데 보통으로 우리가 다 알고 듣고 보고 체험하는 것은 물질적인 환경적인 삼차원의 세계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예수 믿고 새로운 세계가 우리 속에 들어왔습니다. 사차원의 세계인 것입니다. 삼차원의 세계를 품고 변화시키는 사차원의 세계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믿음이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선언이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삼차원의 육체와 환경 속에 살면서 사는 방법은 사차원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결론> 3차원의 세계는 인본주의적 삶의 방법입니다. 잊지 마세요. 세상에 예수 안믿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인본주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믿음, 하나님이 주시는 신앙고백은 4차원의 세계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몸과 환경은 3차원 마음은 4차원으로 살아갑니다. 우린 차원이 두 개 있어요. 몸과 환경은 삼차원입니다. 여러분 지금 몸은 꼬집어 보십시오. 아프지요? 보이지요? 느낄 수 있지요? 삼차원입니다. 삼차원인 여러분이 사차원 속에 삽니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사차원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운명, 환경에 운행하시므로 기도를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찬송을 통해서 운행하시므로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4차원이 3차원을 다스리고 창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운명과 환경을 다스리고 창조하는 사차원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더불어 사차원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불가능할지라도 우리가 새로운 생각, 새로운 꿈, 불가능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나갈 때, 사차원의 능력으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평범한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두운 곳에 들어가서 빛을 가져오고 무질서에는 질서를 가져오고 무에는 유를 가져오고 절망에는 소망을 가져오고 불행에는 행복을 가져오고 변화를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속에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차원의 세계가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도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면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우리 한국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이 나라에 복음이 들어와서 우리 한국에 운행한 결과에 불과 60년만에 세계 꼴찌에서 열두번째 잘사는 나라로 변화됐습니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첫째로 갈거에요. 그러므로 저는 우리 북한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북한이 먹을 것이 없어 절절 기고 있지만은 그러나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에 가서 교회 세우고 복음만 증거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운행하면 창조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르웨이가 지금 북부에서는 제일 잘사는 나라 아닙니까? 100년 전에 노르웨이는 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헐벗고 굶주린 나라였습니다. 아무도 노르웨이가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100년 전에 한 젊은이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위해서 글을 배워가지고서 성경을 읽고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자 오늘날 100년 이내 노르웨이가 된 것입니다. 어제 그 노르웨이에서 대학 교수가 나를 찾아왔어요. 그 부인하고… 제가 노르웨이에서 집회할 때 와서 그때 자기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래서 왜 왔냐고 그러니까 가만 보니까 이렇게 한국이 잘사는 것은 기도원이 저렇게 많기 때문에 한국이 이렇게 잘된다. 그렇게 생각해서 노르웨이에 기도원을 세워야 되겠다. 그런데 기도원을 세워야 되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세우는지는 모르겠다. 저보고 가르켜 달라고 배우러 왔어요. 그래서 배우러 와서 내가 배워주겠다고 하니까 기도원을 어떻게 세우는지 배워만 줄 것 아니라 좀 돈을 주어서 지어달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내가 참 인간팔자 시간문제라고… 왜 내가 앙천대소 웃었냐면 옛날에 제가 온 세계 다니면서 조금 달라고 이랬습니다. 제가 복음 전도하고 우리 한국에 하나님 사업 위해서 조금 달라고. 왜냐하면 우리가 돈을 못버니까 선교사들이 선교하러 나가서 고생을 많이 하니까 그들 도와주는데 내가 안도와주면 도와줄 자가 없습니다. 이제 그 잘사는 나라가 나에게 와서 조금만… 사람팔자 시간 문제에요. 그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니 우리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런 날에 주님께서 성찬예배를 갖게 하시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너가 내안에 내가 너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이 말은 뭐냐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고 너 삼차원의 인생이 사차원의 영혼으로 나와 하나가 되라. 오늘 더욱 주님이 여러분 속에 계신 것으로 믿고 기도하고 믿음, 생각을 고치고 꿈을 고치고 믿음을 고치고 말을 고치고 삶이 고쳐지는 것입니다. 바다 저 건너편으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바다 건너편에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교회 와서 말씀 듣고 생각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지 아니하면 인생은 안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달라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성령이 이 자리에 여러분 속에 계시고 여러분 위에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에는 들어오며 나가며 꼴을 얻고 가는 곳마다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용기 목사(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6.25 그 참담했던 전쟁/ 사54:14-17/ 조용기 목사/ 6.25설교/ 1990-06-24
6.25 그 참담했던 전쟁 사54:14-17 전 여러분과 함께 \\\"아~ 6.25 그 참담했던 전쟁\\\"이라는 제 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전쟁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볼 때는 로맨틱하고 흥미롭습 니다. 그러나 그 전쟁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몸서리치는 악몽입니다. 1950년 6월 25일에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전쟁 도 이제 40년의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오늘날 대 다수의 우리 국민들은 역사책에서나 읽는 과거의 전쟁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그 전쟁은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속에 현실로 살아있 는 전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전쟁의 시작은 이러했습니 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240km의 동, 서로 잘라 놓 은 3.8선 일대에 순식간에 스탈린과 김일성이 주재한 전쟁 의 폭풍우가 휘몰아쳤습니다. 북한 김일성은 적화통일의 야 욕을 채우기 위하여 우리 대한민국보다 수적으로 배나 월등 한 군대를 거느리고, 242대의 T-34 탱크와 198대의 비행기 와 226문의 122mm 곡사포와 36문의 고사 포와 각종 박격 포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탱크 한 대가 없습니다. 전투기 한 대 도 없고, 곡사포 한 대, 고사 포 한 대도 없으니 무장한 수 적으로 월등히 열세였던 국군은 순식간에 경을 떼고 말았습 니다. 뭐, 상대가 안돼요. 어른과 어린아이의 씨름입니다. 그래서 3.8선은 무너져 버리고 노도와 같이 전 3.8선 일대 에서 북한군은 공격을 계속 해 왔습니다. 그 전쟁은 마치 창을 솜을 뚫듯 파죽지세로 인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진행 되었습니다. 그 비극적인 전쟁은 3년을 계속했고, 그 결과 로 남한은 초토화되고 국군, UN군, 경찰 및 민간인 56만 1 천 5백여 명이나 죽고, 부상자는 106만 9천여 명, 실종자 는 35만 5백여 명, 전재민이 362만 ,전쟁 미망인이 29만 명, 전쟁 고아가 5만 9천여 명이 거리를 헤매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수치스럽고, 비참한 우리 민족사에 영구히 잊지 못 할 동족이 동족을 죽인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전쟁은 우리 대한민국은 막지 못했나요? 능히 막을 수 있 는 전쟁이 아니였나요? 6.25 사변은 제 2차 대전 후 세계 정복의 혈안이 되었던 소련의 스탈린과 그의 충복 김일성에 의해서 치밀하게 준비된 전쟁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 방이 되자,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남에는 미군이 진주 했습니다. 3.8선이 갈려졌습니다. 그 때부터 시작해서 즉시 소련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해서 북한을 소비에트로 하고 그 리고 군대를 창설하고 계속해서 군비 증강을 했습니다. 스 탈린은 2차 대전 이후에 동구라파를 야금야금 먹어서 다 소비에트로 한 다음에 이제는 중공을 적화시키고 난 이후에 대한민국을 소비에트로 하고 나아가서 아시아 일대의 약소 국가를 다 공산화하려는 계획 가운데서 치밀하게 계획을 하 고 준비한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오늘날 역사 가 기록한 그 것과 같은 비극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충분히 예방할 수도 있었습니다. 소련과 김일성이 적화 통일의 모 험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그 틈을 주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둑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은 집에서 충분히 도 적을 미리 방지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충분히 북한의 모든 계획을 알고 거기에 대처를 했으면 전 쟁을 막을 수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도 이렇게 비극적으로 강토가 모두 짓밟히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 감히 스 탈린과 김일성이 한국을 넘볼 수 있었나요? 그것은 그 당 시에 혼란하고 무질서했던 한국 사회의 형편이 능히 적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혹이 된 것입니다. 해방 후 한국 사회 는 좌익과 우익이 갈라져서 온 전체가 소용돌이쳤습니다. 정치도 좌, 우익이 갈라지고 사회도, 학교마다 좌, 우익이 갈라져서 매일 테러요, 매일 같이 싸움이요, 매일 같이 데 모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남로당이 사 주한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 일대의 폭동은 지금도 가슴 이 섬짓합니다. 그 이후에 대한 민국 정부가 성립되고 난 다음에도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나서, 수많은 양민이 학살되고, 경찰서가 파괴되고, 경찰과 군인 가족들이 죽임 을 당했습니다. 이래서 하루도 평화로움이 없는 곳에 격렬 한 노동자들의 정치성 파업은 계속하고, 공산 게릴라들 때 문에 극히 사회가 혼란하고 경제적인 불안은 극에 달했습니 다. 한국의 생산시설이란 전쟁 이후에 조금 있는 것! 다 노 사 분쟁으로 문을 닫고, 그리고 밀수가 성행해서 그 당시에 마카오 신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카오에서 이 천을 밀수 해서 그 당시에 마카오 천을 가지고 옷을 해 입으면 마카오 신사라고 굉장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불안 가운데서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얼마나 무력합니까? 1948년 8월 10일에 남한 자체의 선거를 통해서 제헌국회 가 탄생한 이후로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되 고, 제 1공화국이 탄생되어 국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선택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 1공화국 탄생 후 1년 8개월 10일 만에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와 같은 전쟁이 비극적으로 발 발한 것은 우리 한국의 대통령 이하 그 당시 정치 지도자들 이 조금도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해안이 없었다는 것입니 다. 영국 처칠에게 지도자는 어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 까? 물으니까 처칠이 대답하기를 \\\"적어도 1년 후의 일을 바 라볼 수 있는 꿈이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 했습니다. 멀리 못 바라본다 할지라도 적어도 1년 후에 일 어날 것은 미리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 국가와 민족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도대체 그 당시에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어떻게 1년 후 아 니라 하루 앞일도 바라보지 못하는 무능력한 정치를 했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련을 업고 끊임없이 적화야욕을 키워 오던 김일성의 침략준비를 하나도 간파하지 못한 것입니다. 1945년 해방되지 말자, 1950년 6월 25일 전까지 북한에는 끊임없이 소련에서 무기가 수송되고, 군대가 훈련을 받고 있고, 침략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도 그것을 간파하지 못했 다는 것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인 것입니다. 정치 싸움에 국방력 배양은 안하고 여념이 없었던 그 때 상황이 눈앞에 훤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한국의 군인들은 어떠한 상황이 있었습니 까? 그 당시의 우리 한국은 국방경비대로써 조직되어서 한 국군도 약 10만에 가까운 육군과 해군이 있었습니다. 그런 데 6.25 사변이 터지는 그 앞날에 참모총장인 최병덕 소장 은 6월 24일 밤새도록 춤을 추고 술에 곯아떨어져서 25일 아침 전쟁 발발의 전화를 아무리 걸어도 전화조차 못 받을 만큼 술에 곤드레 만드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보가 없 는 국군을 데리고 싸움을 할 수가 있나요? 최병덕 소장이 참모 총장이라고 하면서 6월 25일 새벽에 일어난 전쟁의 정보도 못 받고 6월 24일 밤새도록 술을 처먹고,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가지고서 6월 25일 아침에 전쟁 났다고 아 무리 전화해도 전화를 못 받아요. 그러니 나라가 성하게 되 었습니까? 국방부 장관 선생모는 아예 일요일에는 방해받 지 않는다고 해서 전화를 내려놓았습니다. 자기는 영국 신 사라고 하면서 일요일에는 일하고 논다고 전화기를 내려 놨 습니다. 전쟁이 나서 국방 장관에게 보고하려고 일선에서 전화를 해도 받는 사람이 없어요. 거기에다가 전군 작전 실 무 책임자인 장창국 대령은 며칠 사이 이사를 가 주소도 전 화도 불문이었답니다. 세상에 전국군 작전 실무 책임자가 이사를 가서 집이 어디 갔는지, 전화가 몇 번인지도 국방부 에서도 몰라. 육군 본부에서도 모르고, 콩가루 집안도 되게 콩가루 집안입니다. 새벽 4시에 전쟁이 터졌는데, 아침 10 시가 되어도 지휘부가 텅 비었습니다. 4시에 전 전선에서 탱크가 막 물밀 듯이 밀려오는데 총 지휘부에서 참모 총장 으로부터 시작해서 다 텅텅 비었습니다. 거기다가 철저히 한국의 국방부와 아니면, 육군분부에 공산 끄나풀이 들어온 것이 틀림없는 것이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날 것인데, 6월 25일이 주일인데 농촌 일손 돕기 명목으로 국군의 1/3 정 도가 휴가를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선에 있는 모든 장병들을 지휘할 그러한 장교들이나 사병들 중에 중요 간부들 1/3이 전부 휴가를 가버렸습니다. 전쟁이 터질 것인데 그 앞날에 전부 휴가를 가버렸습니다. 이건 틀림없 이 한국 군 내에 철저히 이북 스파이가 들어와서 이와 같은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니깐 전쟁이 터지니 파죽지세로 인민군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미국은 일찌감 치 한국을 버렸습니다. 소련은 철저히 북한을 붙잡고 무기 원조를 주고 군사 원조를 해서 군대를 감쌌는데, 미국은 우 리 한국에게 무기를 주지 않습니다. 탱크 한 대, 비행기 한 대, 곡사포 한 대를 안줍니다. 거기다가 1949년 6월말까지 한국에 있는 미 고문단만 남겨 놓고, 미군은 다 철수해서 텅텅 빈집만 남겨놨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생각해도 한국 은 지킬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략적으로 한국은 미국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요사이도 미국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 내셔럴 프레스 클 럽에서 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을 할 때, 미국의 방위 권은 알류산열도에서 일본 오키나와를 걸쳐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까지이며, 이 선 밖에 일어나는 군사적 도발은 미국은 아 무런 책임이 없다고 해서 한국은 아무리 쳐들어와도 미국은 책임지지 않겠다. 그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알류산열도로부 터 일본과 오키나와와 필리핀은 지키지만 한국은 지킬 전략 적인 가치가 없다고 해서 미국이 한국을 버린다고 공식으로 선언했습니다. 이 연설을 들은 스탈린과 김일성은 남한 적 화통일의 천우신조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뛰고 굴리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므로 6.25를 일으킨 것은 한국 자체의 정치적인 무능력과 군사적인 태만에도 있지만 미국이 한국 을 전략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버렸기 때문인 것입 니다. 옛말에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자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미국의 일각에서는 한국은 지금 미군이 주둔해서 지킬 아무런 전략적인 가치가 없다. 한국이 미국 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군대를 지금이라도 빨리 철수하자 는 이론이 굉장히 비등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 민족이던 지,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지키지 아니하고 남에게 지켜주 기를 원하고 스스로 일어나서 살려고 노력해서 살려고 아니 하고 남이 살려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언제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이 시점에서 진실로 6.25가 지난 40년 이후에 지금 깨달아야 될 것은 미국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련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는 하나님만 믿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 를 살려 줄 자가 없고 우리 스스로가 살겠다고 정신을 차리 지 아니하면 아무도 살려줄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우리 국민은 신속히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6.25 사변 때 우리를 살린 것은 하니님이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6.25 사변의 전쟁은 하나님이 싸워주신 전쟁이었습니다. 왜냐하 면 인민군 공격 부대의 2일의 지체는 지금도 전략상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6월 25일에 전 전선을 공격하러 나온 6월 26일에 벌써 의정부를 점령했습니다. 의정부와 서울간 에는 엎드리면 코 닿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의정부에 와서 이틀동안 머뭇거렸다. 이건 도저히 군사 전략상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실수를 북한군이 했습니다. 의정부에 들어와서 그 막강한 탱크 부대를 거느 리고 서울 점령에 이틀동안 머뭇거리면서 소모를 했다. 그 래서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했을 때는 벌써 패전한 국군 들이 상당히 한강을 넘어와서 영등포 일대에서 재편성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6월 28일날 서울에 들어온 인민 군들은 그대로 밀어 붙였으면 우리 한국은 꼼짝못했을 것인 데, 서울에 들어오고 난 다음에 엿새 동안 서울에서 머뭇거 렸습니다. 그것은 일단 서울을 점령하면 온 남한 일대에 민 중 봉기가 일어나서 자동적으로 대한민국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고 민중 봉기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엿새 동안 머 뭇거렸다. 그럴 동안 영등포 일대에서 다시 재편한 한국 국 군들이 엿새 동안을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UN군이 들 어와서 한국의 군대 편성을 할 때까지 서울을 내려오지 못 하게 막았다. 이것이 이북 인민군의 역사에 남는 천추의 한 이 되는 실수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싸워주신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그렇게 안 해 주셨으면 안돼 요. 독일의 롬멜이나 미국의 패턴 장군처럼 전광석화와 같 이 밀어붙였으면 순식간에 적어도 2주일 이내에 부산까지 점령당하고 미국이나 UN군은 손도 쓰지 못하고 한국은 적 화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안 하도록 하나님이 공산군 지휘부에 바보 같은 생각을 넣어 주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의정부에서 이틀을 머뭇거리고 서울에 와서 엿새를 머뭇거리는 바람에 벌써 전광석화와 같이 한국을 밀어젖힐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한국군은 재편성되고 미군이 7 월 5일날 제 1차로 상륙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군의 적화야욕의 꿈은 거기서부터 꺾어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전선에서 1대 실수인데, 이 실수는 하나님이 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하나님이 싸워서 이겼 지. 하나님이 안 도왔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그 다음 보면 곧장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는데 1950년 6월 25일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한국의 전쟁이 일어나고 소련이 한 국을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즉시로 안전보장이사회의 소 집을 요구하고 그날 오후 2시에 UN군 파견을 찬성 9, 기권 1, 결석 1 로 채택했습니다. 원래 미국이 한국은 방위선 밖 에 있다고 한 다음에 전쟁이 일어나서 한국을 밀물 듯이 밀 려오니깐 트루만 대통령이 생각하기를 만일 한국을 놓쳐 버 리면 그 기세로 동남아 일대의 약소국을 다 먹을 것이다. 그러므로 별 도리 없이 미국은 한국에 참전해야 되겠다. 그 래서 UN의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는데, 안전보장이사회 는 전 이사회 국가들이 만장일치가 되어 결정합니다. 한 나 라라도 거부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인민군을 침략군으로 지 정하고 온 UN이 일어나서 한국에 군대를 돕자는 결의안을 하는데 그 때 소련을 UN 대사 마리끄가 불참을 했습니다. 소련이 참석을 했으면 우리 한국은 못 살아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전 세계의 적화야욕에 불타는 소련이 어떻게 해서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침략자로 결정을 내리고 UN군 참전을 결의하는 그 중대한 결정에 마르끄가 참석을 안 했습니다. 참석을 했으면 UN군은 파견 안되었습니다. 한국은 구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님이 싸 워주신 것입니다. 바로 UN 사무실에서 이 소련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오후 2시에 회의가 있는데 마리끄가 일찌감치 가려고 하니깐 보좌관들이 \\\"뭐 오후 2시에 회의가 있는데 그렇게 빨리 갈 필요가 있습니 까? 차만 타면 금방 가는데, 그러니깐 천천히 가도 좋습니 다.\\\" 보좌관이 자꾸 말렸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 여 시간을 두고서 천천히 차를 타고 뉴욕길바닥으로 출발을 했는데 차 가 중간에 와서 땅에 붙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고장이 났어 요. 적어도 UN대사가 타는 차가 고장이 나서 붙어 버린다 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차가 고장이 딱 났어요. 그래 서 기사가 나가서 고치는데 시간은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거 택시라도 잡아타고 가야겠다고 하니깐 조금만 하면 고칩 니다. 조금만 하면 됩니다. 하는 게 그만 길바닥에 앉아서 UN 총회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차를 고쳐서 타고 오니깐 이미 다 끝났습니다. 만일 그 때 차가 고장 안 나서 그대로 타고 왔으면 우리는 갔습니다. 차 고장나는 것도 참 중요하다고요. 하나님께서 그 차를 고장 안 냈으면 마리끄 가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해서 그 표를 던졌으면 UN군은 창설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6개국이 우리 한국에 군대를 파견해서 공산과 싸워주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 나 그 결과로 맥아더 장군이 UN군 총사령관 총사령관이 되 고 영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 캐나다 , 남아프리 카, 터키, 태국, 그리스,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이 군대를 파견하고 원조를 해서 3년 여 동안의 처참한 전쟁을 통해서 공산군의 의도 를 깨뜨려 버리고 만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또 하나님이 싸 워 주신 것은 낙동강 전선입니다. 약 30만 대군으로 한국을 내려 젖힌 인민군은 기어코 7, 8월에 와서는 낙동강 전선으 로 목을 쬐었습니다. 남은 것은 대구, 부산 요 일대 밖에 안 남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부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리 고 피난을 가서 저 울산에 가서 있을 때, 매일 같이 포탄이 여기까지 와서 떨어집니다. 밤이면 산에 게릴라들이 주동하 고 기관총이 불꽃놀이 같이 총탄이 날아오고, 계속해서 포 탄소리가 나고 비행기가 와서 계속 폭격을 하는 그 가운데 저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쟁 상황을 너무나 여실히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7, 8월이면 우기입니다. 그 때 이승만 대통령이 경산남도 도지사 관사에 있었는데 전 피난민 목사와 또 부산에 있는 주의 종들을 불러 모아놓고 부탁을 했습니다. 내 친구 맥아더 사령관이 끊임없이 동경 에서 B-29를 보내어서 융단폭격을 해주겠다고 하는데, 적 군에게 융단 깔듯이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7, 8월에는 한국에는 우기가 오는데 비가 오면 비 행기가 못 뜨면 하루라도 비행기가 못 뜨면 우리는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너무 공산군의 압력이 강하기 때문에 하루 라도 견뎌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비가 안 오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운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 때 제 기억 으로는 그 때 목사님들이 열흘동안 모여서 밥도 안 먹고 물 도 마시지 아니하고 밤낮을 쉬지 아니하고 하나님이여 이 민족을 살려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 때 대신동 모 교회 에서 모였는데.. 그 결과로 정말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서 그 6.25 사변 그 당시 7. 8월에 하루도 구름이 끼고 비가 온 적이 없습니다. 하늘이 푸르고 내가 매일같이 하늘을 쳐 다보면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늘을 새까맣게 덮은 B-29가 날아와서 낙동강에서 그냥 비오듯이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난 평생 그렇게 많은 비행기가 떼를 지어 날아가는 건 그 때 보고 아직까지 본 적이 없어요. 하늘을 새까맣게 덮어서 비행기가 날아옵니다. 날아 와서는 전부 폭격을 하고 그 다 음 새까맣게 덮어서 날아가고 그렇게 융단폭격을 하는데 아 무리 공산당인들 견디어 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낙동강 전선에서 공산군의 주력부대가 허리가 부러졌습니다. 그 틈 을 타서 9월 16일에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을 했고, 그 리고 포위를 당한 북한군은 괴멸되고 도주하기 시작했습니 다. 이래서 10월, 평양이 수복되고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 했으나, 그 후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후퇴했다고 현 휴전선 에서 1953년 7월 29일 전쟁이 중지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 서 우리는 3년 여 동안의 가장 처절한 민족사에 길이 길이 수치스럽게 남아있는 동족상련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대다수는 6. 25를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6.25를 체험하신 분은 손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 도 많이 있군요. 그럼 6.25를 전혀 체험하지 못하신 분은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대다수가 6.25를 체험하지 못했습 니다.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보다 더 큰 비극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제 공산주의는 소련 의 고르바초프에 의해서 와해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1917 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공산주의는 이제 70년만에 완전히 실패작으로 들어 나고 소련에서부터 공산 주의가 와해되고 동구라파가 자유를 선포하고 동독과 서독 이 통일하고, 이러한 판에 아직까지도 끝까지 남아서 공산 주의를 하겠다고 붙들고 있는 것이 이북의 김일성인 것입니 다. 자유화의 물결이 조금만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지구상에서 사라지나, 김일성 주체 사상의 20 세기 특유의 김일성 황제 독재 정권과 침략 야욕과 군사 도 발 위험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절대 로 모든 것이 가만히 있어서 그대로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 면 안됩니다. 독 안에 든 쥐는 고양이도 뭅니다. 지금 온 세계가 다 민주화되고 자유화되는데 자기 혼자 공산 독재를 하고 있자니 이젠 마지막 소외되고 몰렸습니다. 여태까지 준비한 그 많은 군사, 무기, 그 많은 군대가 그대로 스스로 풀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막다른 골목에 쳐하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데 김일성이 위험을 한 번 도발해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순 없습니다. 이러므로 우리 사회는 안정되어야 합니다. 극단적인 노사분쟁이나, 무분별한 화분 소유나,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집단 행동은 지양되어서 사회 가 안정되면 어떠한 침략군도 침략할 수 없습니다. 오랜 역 사를 통해서, 외부 침략을 통해서 망한 나라가 없습니다. 내부 분열을 통해서 망하죠. 우리 사회가 내부로 분열되고, 시끄러우면 그것은 외부에서 침략하기 너무나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보는 극단적인 노사 분쟁이나 사회혼란을 야기하는 집단 행동을 취하 해야 하 고, 무엇이든지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평화롭게 문제를 해 결하는 것을 우리 국민이 배워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폭력 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문제는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평화 위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배워서 한국 사회가 안정되어야 하는 것이고 정치적인 불안이 없어져야 합니다. 정치가들이 자기의 욕망을 다하기 위해서 국가와 민족은 생각하지 않고, 국민의 마음을 흥분 시키는 선동 정치를 하고, 국민을 져버린 집권 욕 아래서 정치 투쟁을 계속하고, 부정, 부패가 만연하고, 사회 정의 가 사라지고 국민과 정부간에 신뢰가 사라지면 어떤 나라도 망합니다. 어떤 나라도 외적이 쳐들어와서 먹어라 하고 대 문을 열어 젖힌 것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정치적 인 불안이 없어져야 하고,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은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력과 국 방력은 언제나 갖추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제국주 의로써 남의 나라 침략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또 공산 주의와 민주주의, 사상 투쟁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이제 는 경제 전쟁의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잘 사냐, 못 사냐가 그 나라가 설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지 금 소련이 북한을 버리고도 우리 대한민국과 대화를 하고 수교를 하겠다는 것은 우리 한국의 돈이 좋아서 그렇지, 한 국이 이뻐서 그런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낙후하면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마음을 다 합쳐서 과소비를 버리고, 근검절약하고 힘써서 일해서 조국을 경제적으로 강력하게 건설하면 소련도 오고, 중공도 오고, 남북 통일도 동독과 서독처럼 평안하게 되어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 한국 사람들 너무 빨리 샴페인 터트렸다고 하는 것처럼 너무 너무 빨리 과소 비 욕에 들떠 있고, 너무 신속히 일 안하고 평안하게 살려 고 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가 잘못 되어 가고 있고, 생산이 되지 않고, 수출이 되지 않는 이유 는 바로 우리 국민들의 잘못된 생각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 에서 우리는 진실로 회개하고 진실로 근검 절약하며, 열심 을 다해서 일해서 경제적으로 강력한 부국으로 달성하면 오 늘날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인정 받는 나라, 대우 받는 나 라가 될 것이고, 또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사용해서 온 세 계 만방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하늘나라를 이룩하 는 위대한 일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온 세계에서 기 도를 많이 하는 나라, 가장 급속히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 가장 이 마지막 때에 온 세계에 선교사를 보낼 수 있 는 가능성이 있는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으로 손꼽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힘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6.25 40돌을 맞이해서 우리 민족적으로 이 비극을 생각하고 다시는 6.25 같은 것이 없 도록 우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단결하는 우리들이 되어야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아니하시 면 우린 살 수 없습니다. 6.25도 실제 전쟁은 하나님이 싸 워준 전쟁이요. 하나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우리가 멸망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1백만 밖에 없던 성도들이 이 제는 천만이 넘었으니 천만이 넘은 성도들이 모두다 하나님 께 기도하고 빛과 소금이 되어서 자기 직분을 다한다면 이 와 같은 전쟁은 다시 한국에 일어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 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강성한 나라가 되고 마지막 주님 오시기 전에 그리스도의 사역을 맡아 하는 제사장의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시며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전쟁 의 피바다, 전쟁의 시신의 산더미 위에서 오늘날 한국을 건 설했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다시 생각해 보기도 끔찍스럽고, 몸서리 쳐 지는 6.25 전쟁이었습니다. 우리 아 버지 하나님이시여, 원하며 기도하오니 하나님이 도와주셔 서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도와 주시옵시고, 우리 정치인들이 깨닫고, 우리 군인들이 깨닫 고, 우리 시민들이 깨닫고, 우리 청소년들이 깨닫고, 우리 국민 전체가 깨달아서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근검절약하 고 과소비하지 말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나라 이 민 족을 붙들어 주셔서 이제 주님 오시기 전에 온 세계에 주 님의 복을 증거하고 생명을 나누는 나라와 민족이 되게 도 와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조용기 목사(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6.25가 주는 교훈/ 벧전5:7-11/ 조용기 목사/ 6.25기념주일설교/ 1989-06-25
6.25가 주는 교훈 벧전5:7-11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6.25가 주는 교훈”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6.25는 우리 민족사에 가장 참담한 전쟁이었었습니다. 우리의 강토가 초토화되고 적어도 남북한 함하여 5백만 명 이상이 죽고 상처를 입었었습니다. 그리고 일천만 이상이 이산가족이 되어서 남북으로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국민전체가 6.25라는 이 고통을 통하여 공포와 기아와 사망의 계곡에서 허덕였던 비극적인 때였었습니다. 만일 미국을 위시한 유엔 16개국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지도상에 대한민국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천리강토 육천만 동포는 김일성, 김정일이 역사가 창조한 가장 흉악한 독재자들의 발굽에 짓밟히고 시달리는 비극적인 운명을 갖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어떤 설익은 학자들이나 환상적인 공산주의자들이 6.25는 남침이 아니었고 북침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가소롭고 천인공노할 일이라서 상대를 해서 말할 가치조차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6.25가 일어난 역사적인 국제정치학적인환경은 대략 이와 같습니다. 1949년 6월말까지 한국에는 미국 고문단 5백 명만 남고 해방당시 진주했던 미국은 모두 다 철수해 버리고 말았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 1월 그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 씨가 미국 내셔날 프레스 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 연설에서 그는 말하기를 미국의 방위권은 알류산열도에서 일본 오끼나와를 거쳐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결정하며 그 선 밖에서 일어나는 군사적인 공격에는 미국은 책임이 없다고 선언을 하므로 대한민국은 미국의 보호에서 분리돼 있다고 확실하게 말을 했습니다. 이 선언을 들은 북한 김일성은 자기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무력으로 적화통일을 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남로당 박헌영 파와 충북 공산당 출신인 연안파의 알력에서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었던 터라 남침을 감행하므로 일석이조로서 북한의 공산당의 헤게모니를 자기가 잡고 그리고 남한을 적화통일 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사회는 좌우익투쟁이 심하고 정치적인 불안정이 위험수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국군은 육해공군 합쳐 십만오천여 명이었으나 그 무장은 형편이 없었습니다. 대전차포 한문, 탱크 한 대, 전투기 한 대도 없이 오직 일본군이 남기고 간 구식 장총을 가지고서 무장을 한 그러한 형편없는 군대였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은 끊임없는 소련의 원조를 받아 약 이십만 대군에 K-30형 탱크 242대, 각종 전투기 및 폭격기 200여대를 가진 강력한 군대였었습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갑자기 삼팔선 전역에 걸쳐 공산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오늘과 같은 주일이었습니다. 한국군은 농번기에 많은 사병이 휴가를 가고 또 토요일 날 오후에 외출 중이었었습니다. 저는 그때 동네 중학교에 다닐 때였습니다. 6월 26일 날 학교에 가니깐 학교분위기가 웅성웅성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서 살펴보니까 요번에도 북괴가 진짜로 남침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늘 삼팔선에서 북한군과의 대결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번은 진짜로 공격을 받았다. 6월25일 새벽 4시에 북괴군공격으로 말미암아 이미 6월26일에는 북괴군이 의정부까지 침략해 들어오고 서울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라디오 방송과 가도방송에 휴가병들은 본대로 귀대하라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수업은 그로서 끝나고 그날부터 우리 학교는 병영으로 변화 돼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이래서 삼년 동안의 6.25사변의 가장 비참한 전쟁이 출발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린 6.25사변을 통과한 사람들도 있고 요사이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6.25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오늘 확실히 하나님 앞에서 알고 싶은 것은 공산당이 무엇인가를 알고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교회가 오늘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 이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1. 첫째, 공산당의 흉악성을 우린 오늘 이 시점에 확실히 꿰뚫어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1917년 소련의 레닌이 제정 러시아를 넘어뜨리고 마르크스주의를 가지고 급진혁명을 일으키므로 시작한 것입니다. 공산당의 이론을 여러분 간략하게 말하자면 공산당은 완전히 공산당 일당 독재인 것입니다. 공산당세계속에는 민주주의란 있을 수가 없고 정당이 두 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공산당 일당 철저한 독재인 것입니다. 공산당은 모든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고 재산은 오직 당과 정부의 소유로 삼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산수단은 그것이 토지든 공장이든 정부의 소유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과 정부가 인민에게 직장을 주고 주택을 주며 먹고 입는 것 등 생활의 보장을 해준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대신 개인의 자유는 당과 정부의 소유가 됩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없습니다. 신문도 공산당이 발행하는 신문밖에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공산당에 대해서 바른말을 했다가는 그는 처형을 당합니다. 주거의 자유가 없습니다. 집도 정부가 소유하고 정부가 빌려주는 집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집을 팔고 이사를 갈 수 없습니다. 정부의 허락 없이는 한곳에서 평생 동안 살아야 됩니다. 직장의 자유 선택이 없습니다. 직장도 정부가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직장을 정부가 배정해주면 좋든 안 좋든 그곳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주의 자유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사 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여행의 자유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나라 안에서도 여행증이 없으면 여행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학업 및 결혼의 자유도 제한돼 있는 것입니다. 자유와 민주란 당과 정부의 전횡물이지 인민은 노예적인 존재로서 오직 물질생산의 도구에만 불과한 정치가 바로 공산주의 정치인 것입니다. 물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며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착취하는 수단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영혼은 없는 것으로 무지한 미신의 소산이라고 하면서 철저히 종교는 탄압해서 박멸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산주의가 오늘날 72년의 세월동안 이 역사 속에 발전돼 왔는데 과연 그 공산주의의 열매가 무엇이며 소련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지 올해 72년째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공산주의란 역사적 시험에서 완전히 실패한 제도 및 이념으로 만천하에 들어나고 말았었습니다. 소련 및 동구권과 중국과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는 군사력 이외에는 경제적 사회적 생활면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사는 낙후한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치고 오늘날 경제적인 파산에 이르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왜냐 공산주의는 그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일당독재국가를 세웠지만은 그들이 알지 못한 무지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자유 없이는 의욕상실증에 걸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철저히 박탈하고 완전히 인간을 당과 정부의 노예로 만들어놓고 강제노동을 시키고 그 대가로서 먹을 것 주고 입힐 것 주고 집을 줍니다. 아무리 먹고 입고 있을 집이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자유를 잃어버리면 인간의 삶의 의욕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볼모로 잡고 박탈한 그 대가로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일자리 줍니다. 이것은 마치 자유를 상실하고 기르는 돼지와 같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삶의 의욕과 일할 의욕을 상실해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인간은 사유재산의 즐거움이 없이는 일의 의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일해도 내 것이 안 됩니다. 모든 재산은 정부의 것이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정부가 주는 임금으로 삽니다. 자기 개인 것은 아무것도 안됩니다. 이러므로 사람들은 일하지 않습니다. 내가 일 잘해도 그 월급 받고 못해도 그 월급 받고 내가 아무리 공로를 세워도 내게 돌아오는 것 아무것도 없으니 친절하게 살 리도 없고 열심히 일할 리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에서 생산성이란 형편없이 낮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당과 정부의 절대독재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계획경제는 경제발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부가 중앙에서 통제해서 이 물건을 얼마 만들어라 저 물건을 얼마 만들어라 그렇게 하기 때문에 여름에 겨울옷이 나오고 겨울에 여름옷이 나오고 겨울에 샌들이 나오는가 하면 여름에 털 구두가 나오고 엉망입니다. 경제란 것은 자유경쟁시장에 맡겨놓아야지 정부가 전부 경제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가 발전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국가에서는 언제나 상점마다 끝없이 줄을 섭니다. 물건이 나왔다면 물건 살려고 끝없이 줄을 서는 것이 공산주의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가 무시된 사회는 삶의 의미를 빼앗아 버립니다. 교회도 없고 다른 종교도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동물적으로 자고 깨고 먹고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고 말합니다. 그것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을 수없이 숙청하고 살해해도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와 가치는 없습니다. 공산주의 노예제도는 오늘날 무너져 가는 모래성이란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국경에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파묻어놓고 사냥개를 두고 기관총을 주고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를 유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민을 외부세계와 단절시키지 않고는 자유세계하고 같이 연결시켜 놓으면 공산주의 제도는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욕구는 무자비하게 탄압해 버립니다. 요번 중공에 보십시오. 천안문 광장에서 자유를 달라, 민주를 달라고 수백만 군중이 외쳤습니다. 그 결과로 자유와 민주를 주었습니까? 공산당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공산당은 일어나서 탱크로 무장하지 않은 일반인민을 무자비하게 깔아 눕혔습니다. 그리고 기관총으로 쏘아댔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점에 와서도 철저히 계엄령 하에서 자유와 민주를 요구하던 인사들을 체포해서 공개적으로 처형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공산주의 입니다. 여러분, 이게 오늘날 환상주의적으로 우리나라에도 공산주의를 하자고 외치는 자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역사가 생겨난 이후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처절한 노예제도가 바로 공산주의 제도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이 6.25를 통해서 공산주의가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는 철저히 공산독재에 대해서 항거하는 우리들이 돼야만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자유민주주의는 둘째로 무엇일까요?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극한적으로 존중하며 국민이 선택한 대표가 정부와 국회를 결성하여 국가와 국민은 정당한 법에 의하여 다스리는 법치국가가 바로 자유민주주의인 것이요, 여러분과 저가 누리고 있는 이 삶이 자유민주주의 치하에서의 삶인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공산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국가와 당이 완전히 박탈해버린 것처럼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언론출판의 자유가 있어 마음대로 말하고 신문도 잡지도 출판합니다. 결사의 자유가 있어 마음대로 단체를 만들 수도 있고 직업의 자유가 있어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이주 및 여행의 자유가 있으며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에서 우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학업 및 결혼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 제도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철저하게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일당독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국민의 선거에 의한 정부와 국희의 대의정치 여론정치를 하는 것이지 일당이 독재해서 온전히 권력을 다 집중하여 잡고서 자기마음대로 다스리는 이러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에는 없습니다. 언제나 다당제도로서 국회를 통해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에는 자본주의가 그 경제의 원리인 것입니다. 사유재산이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산수당인 토지 및 공장의 개인소유가 인정되어서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경쟁시장체제가 있어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됩니다. 서로 이윤을 얻기 위해서 밥을 세워가며 결사적으로 일을 해서 사람들의 요구에 물자를 만들어서 응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적기에 우리 필요한 물자가 공급이 되고 그 경쟁을 통해서 경제는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결점도 많습니다. 자유의 남용으로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병폐가 있습니다. 너무 자유가 많기 때문에 나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면 된다는 내 마음대로 하면 된다는 이러한 법을 뛰어넘은 이기주의가 팽배해질 위험성이 많습니다. 또한 과도한 경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돈 벌겠다고 너무 경쟁이 심해서 스트레스가 가해지고 사람들이 인정이 메말라서 몰인정하게 되는 그러한 결점이 있습니다. 또한 이익집단의 과격한 자기주장으로 사회소요가 그치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요사이 대우조선의 노동자들처럼 나라야 망하든 회사야 망하든 우리만 월급을 많이 받고 우리만 잘살면 된다면 이런 이익집단들의 소요와 고함소리가 자유민주주의에는 시끄럽습니다. 공산주의에는 이런 것 있을 수가 없어요. 이런 것 했다가는 당장에 총살을 당하던지 탄광으로 가든지 숙청 당해버리고 맙니다. 자유민주주의에는 각개단체가 모두 다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고함치고 단체행동을 하니 시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도덕적인 타락이 자유민주주의에는 심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애써서 번 돈 자기가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뭐라고 말하냐 그래서 과소비 현상이 있고 쾌락주의 마약 성적인 방종 이러한 일들이 자유민주주의에 독버섯인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결점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또 돈벌이 잘해서 부자가 된 사람은 너무 많이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또 너무 많이 가난합니다. 이러한 것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해결하지 않고는 자유민주주의에서 큰 결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에는 이제 국회의원 선거를 하기 때문에 금권정치가 되어서 돈을 많이 쓰고 돈으로서 권력을 얻는 이와 같은 결점이 자유민주주의 사회 속에는 반드시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많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상 인간이 발견한 제도 중에 가장 좋은 제도가 자유민주주의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지금 다 같은 대한민국에 살면서도 남북이 갈려져 있으나 우리는 그 가장 좋은 자유민주주의 제도에서 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자유민주주의 제도에 자유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처럼 모여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천국 길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이북 땅에 공산주의 체제에서 어디에 이런 종교적인 자유가 있으며 예배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어림도 없는 일인 것입니다. 3. 그러면 셋째로 현실세계에 대한 우리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겠는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대치되어 있는 이 세계 속에서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떠한 일을 해야 되겠는가?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자유민주주의 세계 속에서나 생존 의미 상실증에 걸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물론 삶의 의미와 목적은 상실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인간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기 때문에 죽고 나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공산주의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은 없고 구원은 없습니다. 또 자유민주주의 세계 속에서는 사람들이 물질추구에 혈안이 되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에 취해 살다가 절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인간은 모두다 생존의미상실증에 걸린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우리는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려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 죄를 사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 땅에서 천국까지 뻗어 올라가서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사람은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 목숨 하나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자기목숨과 무엇과 바꾸겠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육신의 장막집 속에 살다가 죽어서 한주먹 흙으로 사라지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가 육신을 입고 살다가 육체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영멸이냐 영광이냐 수치냐의 갈림길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기 양심이 인간은 죽고 난 다음에 둘 중에 한 곳으로 가야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에 우리 종교는 우리 기독교는 이세계의 종말이후에 영원히 존재하는 천국의 세계에 관해서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오늘날 사랑의 실천 없이는 인류는 자멸합니다. 공산주의는 순수한 독재와 공포로서 사람들을 다스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얼마 있지 않다가 자멸합니다. 자유민주주의도 극심한 물질적인 경쟁 속에서 사랑이 식어져버리고 사람들은 소외감 속에서 몸부림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실천 없이는 인류는 망합니다. 공산주의 세계에서도 망하고 자유민주주의 세계 속에서도 망합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자연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보호해서 살려준 것입니다. 오늘 공기가 사람들을 보호하고 물이 사람을 보호하고 자연이 사람을 보호해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보호해주는 어머니 같은 자연을 훼파합니다. 아마존 강의 열대림을 훼파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세계적인 기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시아의 열대림들을 무조건하고 남벌하므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가후가 달라집니다. 환경이 달라집니다. 비가 오는 데는 너무 많이 오고 비가 안 오는 한발을 또 너무 많이 계속되고 지구에 이상기온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이 자연환경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생태계의 파괴는 바로 자기 길러준 어머니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자연만물을 귀하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함께 잘사는 운동을 전개해야 됩니다. 나만 잘 입고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생각할 것이 없다 생각하는데 여러분 함께 잘살지 못하면 자기도 파멸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주안에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면서 함께 잘사는 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부자는 늘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재산을 사용해야 됩니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또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들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도덕성의 상실을 막아야 됩니다. 도덕성의 상실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정부나 다 망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가 돈 잘 벌고 잘 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기주의 쾌락주의 탐욕주의가 팽배해지면 스스로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한국사회를 보십시오. 과소비현상과 쾌락주의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등교하는 여학생까지도 잡아서 폭행을 하고 인신매매를 합니다. 이런 흉악한 죄악이 우리 한국사회에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파멸의 전주곡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이 사회의 파멸을 막고 빛이 되고 소금이 되지 아니하면 교회가 이사회 가운데 존재하면서 무슨 일을 우리가 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러므로 교회는 이 사회 가운데서 도덕적인 삶의 기둥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밝은 빛을 비추고 식어가는 곳에 소금으로서 이를 식는 것을 막아주는 이런 역할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강림을 분명히 가르쳐야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이 이 발걸음대로 영원히 살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을 가까워왔고 하나님은 이 땅에서 거역하는 인생에 대해서 가차 없이 심판할 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말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밝히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 하는 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는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반드시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이 땅에 다가옵니다. 우린 얼마 있지 아니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실 주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과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주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우리들이 다 변화되어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 교회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나 분명하게 말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 자녀로서 구원을 받아서 이 세상과 역사가 종말 될 때 하나님이 지으신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사실을 추호도 애매함이 없이 우리는 전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6.25는 삼십구 년 전 우리 민족이 겪은 가장 비참한 수난이었었습니다. 우린 역사적인 경험을 통하여 공산주의의 흉악함과 비인도성을 뼛속같이 체험하고 알고 있습니다. 우린 이 사실을 오늘날 환상적인 공산주의 이론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깨우쳐 주어서 회개하게 만들어 줘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길은 자유민주주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옳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국민들의 가슴속에 심어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도덕성의 사상적 토대가 없이 자유민주주의는 뜬구름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철저히 수호하면서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열심히 복음을 전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이러한 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될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6.25를 통해서 공산주의가 얼마나 흉악한 단체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 동포들이 비명횡사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우리 동포가 남북으로 갈리어서 지금 고생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흉악한 공산주의 일당독재 김일성 김정일이 해방 후 사십년이 넘도록 혼자서 나라를 다스리고 혼자서 사람들의 고혈을 빨고 혼자서 인민들을 짓밟는 흉악한 악마들입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자유민주주의의 자유가 넘쳐나고 잘 먹고 잘 입고 사니 환상주의적인 공산당 사상을 가진 젊은이들이 이북을 찬양하고 흉악한 압제자 김일성을 찬양하고 이북으로 가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북의 제도를 우리 대한민국에 심으려고 하는 흉악한 짓을 하는 소수의 무리들도 있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단연히 일어나서 이 흉악한 무리들과 대결해 싸우게 도와주옵소서.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상실할 수 없고 이 땅이 하나님을 섬기고 영원한 소망을 가지는 이 신앙을 빼앗아 가고 뭉개버리려는 흉악한 공산주의의 궤계를 우린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개인이나 교회 집단으로 국민으로서 공산주의를 대결하고 다시는 6.25와 같은 비극전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되겠사옵니다. 하나님 우리아버지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젊은 대학생들이나 혹은 빗나간 우리 국민의 집단 중에 공산주의의 해독이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저들을 주님께서 회개시켜 주시옵시고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자유주의 민주주의가 창달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 민족에 충만하게 하나님이 도와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조용기 목사(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6.25가 주는 교훈/ 벧전5:8-11/ 조용기 목사/ 6.25설교/ 1989-06-25
6.25가 주는 교훈 벧전5:8-11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6.25가 주는 교훈\\\"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6.25는 우리 민족사에 가장 참담한 전쟁이었었습니다. 우리의 강토가 초토화되고 적어도 남북한 함하여 5백만명이상이 죽고 상처를 입었었습니다. 그리고 일천만 이상이 이산가족이되어서 남북으로 헤어지게 된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국민전체가 6.25라는 이 고통을 통하여 공포와 기아와 사망의 계곡에서 허덕였던 비극적인 때였었습니다. 만일 미국을 위시한 유엔 16개국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지도상에 대한민국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천리 강토 육천만 동포는 김일성, 김정일이 역사가 창조한 가장 흉악한 독재자들의 발굽에 짓밟히고 시달리는 비극적인 운명을 갖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어떤 설익은 학자들이나 환상적인 공산주의자들이 6.25는 남침이 아니었고 북침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가소롭고 천인공노할 일이라서 상대를 해서 말할 가치조차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6.25가 일어난 역사적인 국제정치학적인환경은 대략 이와 같습니다. 1949년 6월말까지 한국에는 미국 고문단 5백명만 남고 해방당시 진주했던 미국은 모두다 철수해 버리고 말았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 1월 그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에치슨씨가 미국 내셔날 프레스 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 연설에서 그는 말하기를 미국의 방위권은 알류산열도에서 일본 오끼나와를 거쳐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결정하며 그 선밖에서 일어나는 군사적인 공격에는 미국은 책임이 없다고 선언을하므로 대한민국은 미국의 보호에서 분리돼 있다고 확실하게 말을 했습니다. 이 선언을 들은 북한 김일성은 자기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무력으로 적화통일을 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남로당 박언영파와 충북 공산당 출신인 연안파의 알력에서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었던터라 남침을 감행하므로 일석이조로서 북한의 공산당의 헤게모니를 자기가 잡고 그리고 남한을 적화통일할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당시 우리사회는 좌우익투쟁이 심하고 정치적인 불안정이 위험수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국군은 육해공군합쳐 십만오천여명이었으나 그 무장은 형편이 없었습니다. 대전차포 한문, 탱크 한 대, 전투기 한 대도 없이 오직 일본군이 남기고 간 구구식 장총을 가지고서 무장을 한 그러한 형편없는 군대였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은 끊임없는 소련의 원조를 받아 약 이십만대군에 K-30형 탱크 242대, 각종 전투기 및 폭격기 200여대를 가진 강력한 군대였었습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갑자기 삼팔선 전역에 걸쳐 공산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오늘과 같은 주일이었었습니다. 한국군은 농번기에 많은 사병이 휴가를 가고 또 토요일날 오후에 외출중이었었습니다. 저는 그때 동네 중학교에 다닐 때 였었습니다. 6월 26일날 학교에 가니깐 학교분위기가 웅성 웅성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서 살펴보니까 요번에도 북괴가 진짜로 남침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당시에 늘 삼팔선에서 북한군과의 대결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번은 진짜로 공격을 받았다. 6월25일 새벽 4시에 북괴군공격으로 말미암아 이미 6월26일에는 북괴군이 의정부까지 침략해 들어오고 서울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라디오 방송과 가도방송에 휴가병들은 본대로 귀대하라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수업은 그로서 끝나고 그날부터 우리 학교는 병영으로 변화되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이래서 삼년동안의 6.25사변의 가장 비참한 전쟁이 출발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린 6.25사변을 통과한 사람들도 있고 요사이 대다수의 젊은사람들은 6.25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오늘 확실히 하나님앞에서 알고싶은것은 공산당이 무엇인가를 알고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교회가 오늘 이시점에서 무엇을 해야만할것인가 이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지않으면 안됩니다. 첫째, 공산당의 흉악성을 우린 오늘 이시점에 확실히 꿰뚤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1917년 소련의 레닌이 재정 러시아를 넘어뜨리고 막스주의를 가지고 급진혁명을 일으키므로 시작한 것입니다. 공산당의 이론을 여러분 간략하게 말하자면 공산당은 완전히 공산당 일당 독재인 것입니다. 공산당세계속에는 민주주의란 있을수가 없고 정당이 두 개도 있을수가 없습니다. 공산당 일당 철저한 독재인 것입니다. 공산당은 모든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고 재산은 오직 당과 정부의 소유로 삼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산수단은 그것이 토지든 공장이든 정부의 소유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과 정부가 인민에게 직장을 주고 주택을 주며 먹고 입는 것 등 생활의 보장을 해준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대신 개인의 자유는 당과 정부의 소유가 됩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없습니다. 신문도 공산당이 발행하는 신문밖에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공산당에 대해서 바른말을 했다가는 그는 처형을 당합니다. 주거의 자유가 없습니다. 집도 정부가 소유하고 정부가 빌려주는 집이기 때문에 내마음대로 집을 팔고 이사를 갈 수 없습니다. 정부의 허락없이는 한곳에서 평생동안 살아야 됩니다. 직장의 자유 선택이 없습니다. 직장도 정부가 주는 것이기 때문에 직장을 정부가 배정해주면 좋든 안좋든 그곳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주의 자유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이도시에서 저도시로 이사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여행의 자유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나라안에서도 여행증이 없으면 여행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학업 및 결혼의 자유도 제한돼 있는 것입니다. 자유와 민주란 당과 정부의 전횡물이지 인민은 노예적인 존재로서 오직 물질생산의 도구에만 불과한 정치가 바로 공산주의 정치인 것입니다. 물론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며 있는자가 없는자를 착취하는 수단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영혼은 없는 것으로 무지한 미신의 소산이라고 하면서 철저히 종교는 탄압해서 박멸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공산주의가 오늘날 72년의 세월동안 이 역사속에 발전되 왔는데 과연 그 공산주의의 열매가 무엇이며 소련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지 올해 72년째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공산주의란 역사적 시험에서 완전히 실패한 제도 및 이념으로 만천하에 들어나고 말았었습니다. 소련 및 동구권과 중국과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는 군사력 이외에는 경제적 사회적 생활면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사는 낙후한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치고 오늘날 경제적인 파산에 이르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왜냐 공산주의는 그들이 막스레닌주의로서 일당독재국가를 세웠지만은 그들이 알지못한 무지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자유없이는 의욕상실증에 걸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철저히 박탈하고 완전히 인간을 당과 정부의 노예로 만들어놓고 강제노동을 시키고 그 대가로서 먹을 것 주고 입힐 것 주고 집을 줍니다. 아무리 먹고 입고 있을집이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자유를 잃어버리면 인간의 삶의 의욕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인간의 자유를 볼모로 잡고 박탈한 그 대가로서 밥먹이고 옷입히고 일자리 줍니다. 이것은 마치 자유를 상실하고 기르는 돼지와 같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삶의 의욕과 일할 의욕을 상실해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인간은 사유재산의 즐거움이 없이는 일의 의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일해도 내것이 안됩니다. 모든 재산은 정부의 것이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정부가 주는 임금으로 삽니다. 자기 개인 것은 아무것도 안됩니다. 이러므로 사람들은 일하지 않습니다. 내가 일잘해도 그 월급받고 못해도 그 월급받고 내가 아무리 공로를 세워도 내게 돌아오는 것 아무것도 없으니 친절하게 살 리도 없고 열심히 일할리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에서 생산성이란 형편없이 낮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당과 정부의 절대독재 중앙정부의 통재하에 계획경제는 겅제발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부가 중앙에서 통제해서 이물건을 얼마 만들어라 저 물건을 얼마 만들어라 그렇게 하기 때문에 여름에 겨울옷이 나오고 겨울에 여름옷이 나오고 겨울에 샌달이 나오는가 하면 여름에 털구두가 나오고 엉망입니다. 경제란 것은 자유경쟁시장에 맡겨놓아야지 정부가 전부 경제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가 발전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국가에서는 언제나 상점마다 끝없이 줄을 섭니다. 물건이 나왔다면 물건 살려고 끝없이 줄을 서는 것이 공산주의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가 무시된 사회는 삶의 의미를 빼앗아 버립니다. 교회도 없고 다른 종교도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동물적으로 자고 깨고 먹고 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고 말합니다. 그것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을 수없이 숙청하고 살해해도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와 가치는 없습니다. 공산주의 노예제도는 오늘날 무너져 가는 모래성이란 것을 우리가 다 알고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국경에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파뭏어놓고 사냥개를 두고 기관총자를 주고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를 유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민을 외부세계와 단절시키지 않고는 자유세계하고 같이 연결시켜 놓으면 공산주의 제도는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욕구는 무자비하게 탄압해 버립니다. 요번 중공에 보십시오. 천안문 광장에서 자유를 달라, 민주를 달라고 수백만 군중이 외쳤습니다. 그 결과로 자유와 민주를 주었습니까? 공산당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공산당은 일어나서 탱크로 무장하지 않은 일반인민을 무자비하게 깔아 눕혔습니다. 그리고 기관총으로 쏘아 제껴습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시점에 와서도 철저히 계엄령하에서 자유와 민주를 요구하던 인사들을 체포해서 공개적으로 처형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공산주의 입니다. 여러분, 이게 오늘날 환상주의적으로 우리나라에도 공산주의를 하자고 외치는자의 어리석기 짝이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역사가 생겨난 이후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처철한 노예제도가 바로 공산주의 제도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이 6.25를 통해서 공산주의가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는 철저히 공산독재에 대해서 항거하는 우리들이 돼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민주주의는 둘째로 무엇일까요?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극한적으로 존중하며 국민이 선택한 대표가 정부와 국회를 결성하여 국가와 국민은 정당한 법에 의하여 다스리는 법치국가가 바로 자유민주주의인 것이요, 여러분과 저가 누리고 있는 이 삶이 자유민주주의 치하에서의 삶인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공산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국가와 당이 완전히 박탈해버린 것처럼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언론출판의 자유가 있어 마음대로 말하고 신문도 잡지도 출판합니다. 결사의 자유가 있어 마음대로 단체를 만들수도 있고 직업의 자유가 있어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이주 및 여행의 자유가 있으며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에서 우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학업 및 결혼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 제도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철저하게 자유를 누릴수가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일당독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국민의 선거에 의한 정부와 국희의 대의정치 여론정치를 하는것이지 일당이 독재해서 온전히 권력을 다 집중하여 잡고서 자기마음대로 다스리는 이러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에는 없습니다. 언제나 다당제도로서 국회를 통해서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에는 자본주의가 그 경제의 원리인 것입니다. 사유재산이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산수당인 토지 및 공장의 개인소유가 인정되어서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경쟁시장체제가 있어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됩니다. 서로 이윤을 얻기 위해서 밥을 세워가며 결사적으로 일을해서 사람들의 요구에 물자를 만들어서 응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적기에 우리 필요한 물자가 공급이 되고 그 경쟁을 통해서 경제는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결점도 많습니다. 자유의 남용으로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병폐가 있습니다. 너무 자유가 많기 때문에 나만 잘먹고 잘입고 잘살면 된다는 내마음대로 하면 된다는 이러한 법을 뛰어넘은 이기주의가 팽배해질 위험성이 많습니다. 또한 과도한 경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돈 벌겠다고 너무 경쟁이 심해서 스트레스가 가해지고 사람들이 인정이 메말라서 몰인정하게되는 그러한 결점이 있습니다. 또한 이익집단의 과격한 자기주장으로 사회소요가 그치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요사이 대우조선의 노동자들처럼 나라야 망하든 회사야 망하든 우리만 월급을 많이 받고 우리만 잘살면 된다면 이런 이익집단들의 소요와 고함소리가 자유민주주의에는 시끄럽습니다. 공산주의에는 이런 것 있을수가 없어요. 이런 것 했다가는 당장에 총살을 당하던지 탄광으로 가던지 숙청 당해버리고 맙니다. 자유민주주의에는 각개단체가 모두다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고함고함치고 단체행동을 하니 시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도덕적인 타락이 자유민주주의에는 심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애써서 벌은돈 자기가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뭐라고 말하냐 그래서 과소비 현상이 있고 쾌락주의 마약 성적인 방종 이러한 일들이 자유민주주의에 독버섯인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빈부의 격차가 심하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결점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또 돈벌이 잘해서 부자가 된 사람은 너무 많이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또 너무 많이 가난합니다. 이러한 것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해결하지 않고는 자유민주주의에서 큰 결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에는 이제 국회선거를 하기 때문에 금권정치가 되어서 돈을 많이 쓰고 돈으로서 권력을 얻는 이와같은 결점이 자유민주주의 사회 속에는 반드시 있습니다. 이와같은 많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상 인간이 발견한 제도중에 가장 좋은 제도가 자유민주주의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지금 다같은 대한민국에 살면서도 남북이 갈려져 있으나 우리는 그 가장 좋은 자유민주주의 제도에서 살게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자유민주주의 제도에 자유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처럼 모여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천국길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이북땅에 공산주의 체제에서 어디에 이런 종교적인 자유가 있으며 예배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어림도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셋째로 현실세계에 대한 우리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겠는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대치되어 있는 이 세계속에서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떠한 일을 해야 되겠는가?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자유민주주의 세계속에나 생존의미상실증에 걸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물론 삶의 의미와 목적은 상실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인간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기 때문에 죽고나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공산주의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은 없고 구원은 없습니다. 또 자유민주주의 세계속에서는 사람들이 물질추구에 혈안이 되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세상 자랑에 취해살다가 절망하고 말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인간은 모두다 생존의미상실증에 걸린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우리는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왜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려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몸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 죄를 사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땅에서 천국까지 뻗어올라가서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사람은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천하를 다얻고도 자기 목숨하나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자기목숨과 무엇과 바꾸겠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육신의 장막집속에 살다가 죽어서 한주먹 흙으로 사라지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존재가 육신을 입고 살다가 육체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은 하나님앞에서 심판을 받아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생이냐 영멸이냐 영광이냐 수치냐의 갈림길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어날때부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기 양심이 인간은 죽고 난 다음에 둘중에 한곳으로 가야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알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에 우리 종교는 우리 기독교는 이세계의 종말이후에 영원히 존재하는 천국의 세계에 관해서 분명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오늘날 사랑의 실천 없이는 인류는 자멸합니다. 공산주의는 순수한 독재와 공포로서 사람들을 다스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얼마있지 않다가 자멸합니다. 자유민주주의도 극심한 물질적인 경쟁속에서 사랑이 식어져버리고 사람들은 소외감속에서 몸부림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실천없이는 인류는 망합니다. 공산주의 세계에서도 망하고 자유민주주의 세계속에서도 망합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자연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는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보호해서 살려준 것입니다. 오늘 공기가 사람들을 보호하고 물이 사람을 보호하고 자연이 사람을 보호해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보호해주는 어머니같은 자연을 훼파합니다. 아마존강의 열대림을 훼파함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세계적인 기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 아시아의 열대림들을 무조건하고 남벌하므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가후가 달라집니다. 환경이 달라집니다. 비가 오는데는 너무 많이 오고 비가 안오는 한발을 또 너무 많이 계속되고 지구에 이상기온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이 자연환경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생태계의 파괴는 바로 자기 길러준 어머니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만물을 사랑하고 자연만물을 귀하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함께 잘사는 운동을 전개해야 됩니다. 나만 잘입고 잘먹고 잘살면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생각할것이 없다 생각하는데 여러분 함께 잘살지 못하면 자기도 파멸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주안에서 내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면서 함께 잘사는 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부자는 늘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재산을 사용해야됩니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또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들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도덕성의 상실을 막아야 됩니다. 도덕성의 상실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정부나 다 망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가 돈잘벌고 잘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기주의 쾌락주의 탐욕주의가 팽배해지면 스스로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한국사회를 보십시오. 과소비현상과 쾌락주의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등교하는 여학생까지도 잡아서 폭행을 하고 인신매매를 합니다. 이런 흉악한 죄악이 우리 한국사회에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파멸의 전주곡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이 사회의 파멸을 막고 빛이 되고 소금이 되지 아니하면 교회가 이사회 가운데 존재하면서 무슨 일을 우리가 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러므로 교회는 이 사회 가운데서 도덕적인 삶의 기둥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밝은 빛을 비추고 식어가는 곳에 소금으로서 이를 식는 것을 막아주는 이런 역할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강림을 분명히 가르쳐야 됩니다. 우리가 이땅에 사는 것이 이 발걸음대로 영원히 살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켜 줘야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을 가까워왔고 하나님은 이땅에서 거역하는 인생에 대해서 가차없이 심판할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말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밝히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않는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는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반드시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이땅에 다가옵니다. 우린 얼마있지 아니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실 주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과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주안에서 죽은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우리들이 다 변화되어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와함께 영원히 살게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 교회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나 분명하게 말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 자녀로서 구원을 받아서 이 세상과 역사가 종말될 때 하나님이 지으신 새하늘과 새땅과 새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된다는 사실을 추호도 애매함이 없이 우리는 전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6.25는 삼십구년전 우리 민족이 겪은 가장 비참한 수난이었었습니다. 우린 역사적인 경험을 통하여 공산주의의 흉악함과 비인도성을 뼈속같이 체험하고 알고 있습니다. 우린 이 사실을 오늘날 환상적인 공산주의 이론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깨우쳐 주어서 회개하게 만들어 줘야 될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길은 자유민주주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옳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국민들의 가슴속에 심어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도덕성의 사상적 토대가 없이 자유민주주의는 뜬구름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철저히 수호하면서 살기위해서라도 우리는 열심히 복음을 전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이러한 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될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6.25를 통해서 공산주의가 얼마나 흉악한 단체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 동포들이 비명횡사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우리 동포가 남북으로 갈리어서 지금 고생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흉악한 공산주의 일당독재 김일성 김정일이 해방후 사십년이 넘도록 혼자서 나라를 다스리고 혼자서 사람들의 고혈을 빨고 혼자서 인민들을 짓밟는 흉악한 악마들입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자유민주주의의 자유가 넘쳐나고 잘먹고 잘입고 사니 환상주의적인 공산당 사상을 가진 젊은이들이 이북을 찬양하고 흉악한 압제자 김일성이를 찬양하고 이북으로 가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북의 제도를 우리 대한민국에 심을려고 하는 흉악한 짓을 하는 소수의 무리들도 있습니다. 내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단연히 일어나서 이 흉악한 무리들과 대결해 싸우게 도와 주옵소서. 이땅에 자유민주주의를 상실할수 없고 이땅이 하나님을 섬기고 영원한 소망을 가지는 이신앙을 빼앗아 가고 뭉개버릴려는 흉악한 공산주의의 궤계를 우린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개인이나 교회 집단으로 국민으로서 공산주의를 대결하고 다시는 6.25와같은 비극전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되겠사옵니다. 하나님 우리아버지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젊은 대학생들이나 혹은 빗나간 우리 국민의 집단중에 공산주의의 해독이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저들을 주님께서 회개시켜 주시옵시고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자유주의 민주주의가 창달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 민족에 충만하게 하나님이 도와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조용기 목사(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6.25가 주는 교훈/ 삼상17:31-50/ 조용기 목사/ 6.25기념주일설교/ 1995-06-25
6.25가 주는 교훈 삼상17:31-50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6.25가 주는 교훈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45년 전 그 때는, 제가 중학교 2학년에 막 올라왔을 때입니다. 학교 공부가 그렇게 재미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침만 되면 속히 동네 중학교로 뛰어 왔습니다. 그래서 즐겁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6월 26일 날 월요일 아침 학교에 오니깐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그런데 학교 당국의 말을 들어보니 북한 괴뢰 집단이 대거 3.8선을 넘어서 침공해왔는데 이미 그 주력이 의정부에 들어왔고, 서울이 함락될 것이 시간문제라는 그런 말을 들었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학교는 무기방학으로, 학교에서 연락이 있을 때까지 집에 있고 학교오지 말라고 그러고, 순식간에 군인들이 학교에 들어와서 학교를 군용으로 변화 시켰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시작해서 3년 여 동안 우리 대한민국은 처참한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온 나라가 다 잿더미가 되고 수많은 동포들이 희생당하고, 수많은 전쟁 과부, 고아들이 생겨나고, 참담하여 눈뜨고 볼 수 없는 그런 비극을 우리가 체험했습니다. 6.25 사변을 통해서 우리 한국이 입은 피해는 인명피해만 해도 총 645만 명이 사상을 당했습니다. UN군 15만 명, 한국군 100만 명, 북한군 90만 명, 중공군 90만 명이 사상이 되었습니다. 민간인만 하더라도 우리 한국이 140명이 학살되거나 납치되어가고, 북한도 200여만 명이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남북한 합쳐서 이산가족만 해도 일천만 명이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한국의 공장은 다 파괴되고, 중소 생산 장소는 거의 다 초토화되고, 집은 파괴되고, 교통, 도량, 체신시설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이제는 남북 간에 영원히 증오하게 되고, 복수심을 가지고 대결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타협과 대화는 이제 있을 수가 없고 오직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주먹은 주먹으로, 총은 총으로, 칼은 칼로 대결하는 대결만 남아서 오늘 45년의 긴 세월을 지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6.25사변을 통해서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깊이 생각해야 될 여러 가지 하나님의 교훈이 있습니다. 왜 6.25와 같은 전쟁이 일어났을까요? 겨우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어서 살만할 때 6.25사변이 터진 것입니다. 그걸 우리는 생각할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정 30년 동안에 일본 사람이 와서 한국 사람에게 강제로 일본 신을 섬기게 했습니다.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라는 일본 신을 섬기게 했는데, 온 국민 전체가 일본 신을 섬기고, 심지어 교회까지라도 일본의 신당을 십자가 위에 세워 놓고 교회 와서 일본 귀신에게 먼저 섬기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가만히 둘 리가 없습니다. 일본은 우상 숭배의 결과로 원자탄 세례를 받고 망했지만 우리 한국도 하나님께서 일본 신을 섬긴 것을 하나님께서 증오하셔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가장 미워하십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벌하지 않고 그대로 넘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이지만은 저들이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고 따라갈 때 하나님은 이방 나라인 앗수르와 바벨론을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신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6.25로써 우리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해방 후 정치적인, 사상적인 분열로 가정과 나라가 분열되어서 물고 찢고 싸우므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채찍으로 때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극적인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다윗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목자 밑에서 작은 목자로써 아버지의 양떼를 산과 들에 끌고 다니면서 먹이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신앙이 돈독했습니다. 하나님을 늘 찬미하고 아름다운 시를 짓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사람, 야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의 양떼를 몰고 산과 들로 다닐 때에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는 인적이 끊어진 곳에서 곰이나 사자가 튀어나와서 양의 새끼를 물고 도망칠 때가 많았습니다. 그 때는 뛰어가서 야훼의 이름으로 그 입에서 새끼를 빼앗아 내었습니다. 어떤 때는 사자나 곰이 들고일어나서 다윗을 공격하려고 달려들 때 그는 야훼의 이름으로 주먹을 들고 그 곰과 사자를 치니, 곰과 사자가 죽어서 뻗었습니다. 조그만 소년의 주먹에 곰이 죽어 넘어지고, 사자가 죽어 뻗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능력이 다윗을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하고 섬기고 했지만 그가 위기에 처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야훼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하며,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올 때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나타나서 사자를 넘어뜨리고 곰을 죽이는 역사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다윗은 거기에서 큰 체험을 했습니다. 야훼의 이름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어떠한 사나운 곰과 사자도 자기를 대적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체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한국은 45년 전에 세계에서 최강의 공산주의자인 소련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이 김일성과 함께 손을 잡고 어린양과 같은 한국을 일시에 삼켜 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세계 초강대국인 소련과 저 십억의 인구를 가진 중공이 북한 괴뢰집단의 허수아비인 김일성과 손을 잡고 이 땅을 휘몰아쳐 올 때, 이야말로 양 무리를 습격하는 곰과 사자와 같았습니다. 도저히 한국 사람으로써는 이 무서운 침략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순식간에 압록강에서부터 밀려온 그들이 저 낙동강까지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UN을 일으킨 것입니다. UN이 1950년 7월 7일 안보이사회에서 한국의 파병을 결정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나라들이 주축이 되어서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 한국전에 투입되어서 이 공산군과 싸워서 이 이리와 사자의 입에 물린 우리들을 건져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6.25전쟁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방어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풍전등화와 같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뼈까지 다 꺾일 수밖에 없는 위기에 쳐했었습니다. 그럴 때 UN이 생기고 난 다음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UN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군대를 파견해서 우리 한국을 소련과 중국과 김일성의 발톱에서 건져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만일 그 때에 하나님께서 UN군을 보내어서 우리 한국을 건져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45년 전에 공산주의자들의 발바닥에 짓밟혔을 것이고, 오늘날도 북한처럼 우린 헐벗고 굶주리고 자유도 없고 노예가 되어서,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종노릇하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고, 교회도 없고 , 예배도 없고 찬송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6.25 45주년을 맞은 이때에 우리는 참으로 소련과 중공과 북한의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UN군을 보내주신 것을 우린 감사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UN은 그 때 이후로는 지역적인 분쟁에 군대를 파견해서 싸운 적이 없습니다. 우리 한국을 위해서 하나님이 UN을 만드시고, 한국을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들을 파견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하나님이 우리 한국 민족을 지극히 사랑하여 주셔서, 이 민족을 공산주의의 밥이 되지 않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생각할 때에 우린 하나님께 정말 감사하고 찬송하며, 이제 우리는 지금과 미래에 꼭 하나님을 의지하고, 야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우린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우린 6.25 전쟁에서 다시 살아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45년 동안에 이렇게 경제적으로 성장, 발전하여 잘 믿고,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민족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런 정도로 살게 된 것은 우리가 잘나서 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를 잘해서 우리가 잘살게 되었나요? 우리가 남보다 부지런해서 잘사나요? 남보다 머리가 좋아서 잘사나요? 자본이 많아서 잘사나요? 늘 전쟁으로 하루도 편하지 않고, 데모로써 날이 새고, 데모로써 날이 지며, 쿠데타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경제적으로 성장, 발전하고 복을 받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사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건져 주시고, 영원히 잘되고 교회를 세워주시고 일 천만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시고 범사에 잘되고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에 오늘날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6.25사변 45주년 기념일에는 우리 야훼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될 것입니다. 우린 다윗이 이야기를 들어보십시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블레셋은 국력을 총동원해서 군대를 결성하고 그리고 골리앗 같은 대장군을 앞세워서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었습니다. 사울 왕은 군대를 거느리고 나갔지만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골리앗이 나와서 쩡쩡대며 고함을 칩니다. 키가 8척이요, 그 창자루 하나가 베틀채만 했습니다. 옛날에는 총으로 쏘지 않고 창으로 던지고 칼로써 죽이고 하기 때문에 그런 거장 앞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골리앗이 산천을 쩡쩡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대장부 있으면 내보내라고. “나와 싸워서 내가 그를 죽으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고, 그가 나를 죽으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될 것이다.” 그의 고함 소리에 이스라엘 군인들은 혼비백산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다 숨고 도망을 칩니다. 그 때에 다윗이 형들이 군대에 나와 있기 때문에 위문하러 왔다가 그 장면을 보고 분개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가서 싸우겠다.” 그 말을 듣고 사울 왕이 다윗을 만나보니 조그마한 소년이었습니다. “네가 감히 가서 싸우겠느냐?” “내가 가서 싸우겠습니다.” “너는 싸워 이기지 못할 것이다.” “골리앗은 어릴 때부터 대용사였다. 네가 어떻게 싸워 이기겠느냐?” 그 때 말했습니다. “임금님! 제가 아버지의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아버지의 양을 물고 도망을 치면, 내가 가서 야훼의 이름으로 그 입에서 양의 새끼를 빼앗았고, 사자나 곰이 내게 덤빌 때는 내가 야훼의 이름으로 주먹을 쳐서 사자도 잡고 곰도 죽였습니다. 그런데 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 야훼의 군대를 모욕했는데 저걸 보고, 전부 두려워하고 도망을 치고 숨다니, 그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가서 싸워서 사자나 곰 같은 짐승처럼 저를 멸하겠다.” 그래서 다윗이 그 담대한 말을 하매, 사울이 자기의 투구를 씌어주고 군복을 입히고 칼을 주니 그가 사울의 투구를 쓰고 군복을 입고 칼을 가지고 끌어보니 도저히 거추장스럽고 무거워 안 되겠습니다. 그걸 다 풀어서 제쳐버리고 그는 목자의 옷 그대로 입고 그리고 지팡이 하나에 목자의 제구에 물맷돌 5개 들고 나갔습니다. 블레셋 군대의 장인 골리앗이 이 다윗을 보고 너무 분개했습니다. 뭐 저런 개 다 나를 잡으러 오느냐. 네가 나를 개인 줄 알고 부지깽이 들고 오느냐. 내가 오늘 너를 쳐서 죽여 공중의 새의 밥과 땅의 짐승의 밥으로 만들겠다. 그 때 다윗이 말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을 의지하고 나오거니와,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군대의 임금이신 만주의 주, 만주의 하나님 야훼의 이름으로 의지하고 나오노라.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으로 만들어서 온 천하로 이스라엘에 속한 것과 전쟁은 야훼께 있는 것을 알게 하리라” 그리고 나가서 그는 물매에 돌을 먹여서 날려버리니, 돌이 가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이마 속에 파고 들어가니 골리앗이 죽어 뻗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로 뛰어가서 골리앗의 칼을 빼서 그 목을 배어 피가 쫙쫙 흐르고 눈이 종발 만하게 튀어나온 그 머리채를 휘어들매, 일시에 썩은 담 무너지듯이 저 블레셋 군대는 무너지고 이스라엘은 사기 충전하여, 천지를 진동하는 고함을 치고 습격을 해서 그날에 블레셋 군대를 전멸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이 대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승리를 가져오게 된 것은 다윗이 아무도 보지 않은 외로운 곳에서 사자와 곰과 싸워, 그가 야훼의 이름으로 이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가 이제는 국가 대 국가의 전쟁에 나가서도 야훼의 이름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골리앗을 대항해서 나가 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신앙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경험으로 말미암아 담대한 믿음으로 새로운 도전에 응전해서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도 매한가지입니다. 6.25사변이라는 그 처참한 전쟁에 저 소련이라는 막강한 군사대국, 10억의 인구를 가진 중공과 그들의 배후를 도움 받아서 온 김일성이 우리를 쳐들어 왔을 때 우리는 양 새끼의 한 무리와 같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뼈까지 으스러지게 잡아먹힐 뻔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게 UN군을 보내 가지고서 우리를 공산주의의 마수에서 건져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꿈꿀 수 없는 도움이 하나님께로 왔습니다. 성경에는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여주리라” 했는데, 이야말로 크고 비밀한 역사를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경험을 통해서 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국을 사랑하시고, 선택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택하지 아니하셨으면 우리를 이와 같이 사자와 곰의 이빨과 발톱에서 건져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월남은 오히려 월맹에게 잡아 먹혔지만 우리는 잡아먹히지 않고 하나님이 건져내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국을 사랑하시고 선택했다는 것을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을 세워서 하나님은 마지막 때, 온 천하에게 복음을 전할 제사장의 국가로 삼으려고 하셨다는 사실을 6.25의 경험을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 알 것은 어떠한 원수가 다가와도 6.25때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윗처럼 만군의 야훼의 이름을 의지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나가면 어떠한 일에도 이길 수가 있다는 자신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6.25사변을 겪고 난 뒤에도 오늘날 가장 믿을 수 없고 흉악한 공산집단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것입니다. 6.25를 일으킨 북한 공산집단 들이 아직도 북한에 있어서 그들이 북한 주민 2500만을 포로로 잡고, 언제 또다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큰소리를 하면서, 우리를 호시탐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또 그것 뿐 아니라 오늘날에 와서는 이젠 주의도 이념도 사라지고, 온 세계에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경제 전쟁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일맥으로 북한 공산주의 집단에서 우리를 지켜야 되고, 경제적인 세계적인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될 일은 무엇인 것입니까? 다윗이 야훼를 의지하고 이긴 체험을 가지고서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6.25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준 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가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하시므로 북한을 능히 이길 수 있게 만들어 주시고,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남, 북이 통일되도록 해 주실 것이고, 세계의 이 경제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이겨서 영원히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형통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은총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다 잊어버리고, 인본주의 스스로 서고, 인간의 힘에 의지하고 서면, 우린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하여 나갈 때에, 그가 사울의 투구나 갑옷이나 칼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곰이나 사자와 싸울 때 입었던 그 목자의 옷 그대로 입고 나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북한 공산집단과 대결하여 싸울 때, 이 세상의 여러 가지 경제적인 도전에 임했을 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인본주의 신학이나 , 철학이나 무슨 주의의 옷이나 칼등을 입고 나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에 대한 투철한 믿음으로 무장하고 물맷돌 5개들고 나가야 됩니다. 물맷돌 5개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물맷돌 5개, 5중 복음인 것입니다. 죄 사함의 복음의 물맷돌, 성령 충만의 물맷돌, 치료의 물맷돌, 아브라함의 축복의 물맷돌, 영생 복락을 얻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물맷돌을 들고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5개의 물맷돌을 들고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고, 우리의 세계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나아갈 때 우리는 모든 골리앗을 쳐 물리치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러므로 6.25 45주년을 맞이한 우리들은 갈보리 십자가 밑에 나가서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예수께서 우리 위해 몸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를 살아갈 수 있는 무장을 해주신 이 영적인 물맷돌 5개를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으로 무장해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십자가에서 주시는 이 물 맷돌 5개를 얻어야 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이 물 맷돌 5개를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얻은 죄 사함의 복음, 성령 충만의 복음, 치료의 복음, 아브라함의 축복의 복음, 재림의 복음이라는 이 5중 복음, 물맷돌 5개로 무장하고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가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고, 야훼의 이름을 의지하고 물맷돌 5개를 가지고 강하고 담대한 용기로써 우리는 북한에 대처하고 이 경제 전쟁에 대처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므로, 모든 골리앗을 쳐 물리치고 승리의 개가를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6.25 45주년을 맞이해서 하나님이 우리 민족과 같이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공산주의의 발톱에서 건져내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신 이 경험을 가지고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아무리 우리수가 적고, 세계적인 강국인 소련이나, 중공이나 북한이 합쳐서 쳐들어와도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우리는 넉넉히 이기기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인 경험으로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민족은 하나님을 떠나면 안 됩니다. 우리 대통령도 우리의 모든 다스리는 자들이 하나님을 다 경외하고 부르짖어야 됩니다. 우리 한국의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지자체 선거에도 모두다 장들도 예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하나님을 떠나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떠나면 우리 민족은 저주받고 버림받고 말 것입니다. 6.25 기념일에 우리는 이것을 깊이 깨닫고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우리 온 교회가 회개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시 한 번 우리는 5중 복음을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무장하고, 기도와 믿음으로써 우리 모든 문제에 대처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우린 복음을 가지고 무장하고, 기도와 믿음으로 나갈 때에 어떠한 전쟁도 이길 수가 있고, 어떠한 도전도 극복할 수 있고, 어떠한 시련도 이길 수 있고, 하나님 같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기적으로 승리의 영광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45년 전에 6.25를 당해서 우리 국가가 풍전등화가 되고, 우리 민족 전체가 공산주의의 밥이 될 수밖에 없을 그 때에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UN군을 보내주어서, 우리를 공산주의의 발톱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이는 지금 돌이켜볼 때,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요. 하나님이 특별히 이 민족을 사랑하지 안하고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특별히 이 민족을 사랑하여 주셔서 구원자를 보내어서 우리를 공산주의의 발톱에서 건져내어 주시고 45년 동안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고, 부흥케 해 주시고, 형통케 해 주셔서 이 땅에서 굶주림이 없고 헐벗음이 없게 하여 주시옵고, 부유하고 풍성하게 잘 살게 하는 나라로 만들어 주시고, 1천 2백만 이상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미하게 만들어 주심을 감사하옵나이다. 이 일이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고 자복하고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찾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나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아버지. 지금도 호시탐탐 우리를 멸하려고 하는 북한의 골리앗을 주님께서 기억하여 주시옵시고, 그 골리앗을 쳐 물리쳐버려 주시옵시고, 남, 북이 통일되고 국가가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 민족을 일으켜서 온 천하에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실력 있는 경제적인 힘이 튼튼한 크리스천 국가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조용기 목사(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6.25를 되돌아 보며/ 마5:38-48/ 조용기 목사/ 6.25설교/ 2001-06-24
6.25를 되돌아 보며 마5:38-48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6.25를 되돌아 보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내일이면 6.25 발발 51년 기념일이 되는 해입니다. 51년 전 1950년 6월 25일은 천추에 잊지 못할 우리 민족사에 비극적인 참혹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 새벽 미명에 소련 공산당의 후원으로 중무장한 북한 김일성이 대군을 앞세워 남침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간 한반도는 피아간 밀고 밀리면서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격전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가 냉전의 흐름을 깨뜨리고 한반도에서 열전으로 폭발한 것입니다. 유엔이 결성된 후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미국을 위시한 16개국이 한국 전쟁에 참가했고 북한은 중국과 소련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참전한 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의 참화는 도저히 필설로 형용할 수 없고 그 전쟁의 상처는 오늘도 이산가족이라는 슬픈 현실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6.25 전쟁의 피해상황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인적 피해는 한국군민 유엔군 피해가 합해서 776,360명이었습니다. 그 많은 인명이 손상을 입었습니다. 중공군과 북한의 피해는 약 200만 명이었습니다. 민간인 피해는 남북한 합해서 250여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피난민이 320만 명이 있고 전쟁 미망인이 30여만 명 전쟁 고아가 10여만 명 이산가족이 천여만 명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 중 상당 주요 장비 손실도 막대합니다. 비행기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합쳐서 약 2천대가 파괴되고 북한군은 2천 2백대가 파괴되었으며 전차로 말하면 한국군과 유엔군 전차 약 800대가 파괴되고 북한군은 1천 2백대가 파괴되었으며 기타 장비는 막대한 손실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전쟁을 통한 재산 및 산업 공공시설 피해는 개인 가옥이 60만 채가 파괴되고 산업 시설의 80%가 대파되었습니다. 국민 생활의 터전이 완전히 상실되고 사회경제체제가 황폐화되고 붕괴되고 만 것입니다. 재산 총 피해는 총 230억 불을 달했었습니다. 우리는 51년 전 6.25 전쟁을 생각해 보고 다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민족 자멸적인 동족 상전의 전쟁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 무서운 역사적 사실을 통해 남북 공히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미래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6.25라는 역사적 배경을 두고 남북한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분단 한반도의 실상을 우리가 오늘 가슴에 손을 얻고 냉철하게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북한의 실상에 관하여 허상을 가져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북한은 주체 사상에 입각한 스탈린식 독재 공산주의 국가인 것입니다. 그들은 주체 사상을 믿고 있습니다. 주체 사상이란 철저한 인본주의로써 우주 만물의 중심은 인간이고 인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한, 하나님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그러한 정치적인 체제입니다. 인민의 주체는 당과 국가이고 당과 국가의 주체는 김일성이며 그만이 인민에게 빛과 생명을 준다고 말합니다. 김일성은 마치 사람의 머리에 뇌와 같고 당은 신경조직과 같아서 김일성 없이는 당도 그리고 수족인 국민들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죽어서나 영원히 인민의 주체로 살아 있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생산 수단을 국가가 갖고 개인 소유는 허락하지 않는 집단주의 전체주의 국가인 것입니다. 그와 비교해서 우리 개인주의의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시장 경제체제입니다. 이처럼 단순히 체제와 사상을 비교해 볼 때 도저히 동질성이라고는 추호도 발견할 수 없는 극과 극이 다른 두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양체제가 쉽게 화합이나 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는 허상을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김정일의 적화 통일 전략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 우리 한국을 기만하기 위한 전술은 변할지라도 적화 통일을 하겠다는 전략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같은 민족의 뿌리를 갖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나 실질적으로 사상적 내용과 국가 사회적 체제가 전혀 다른 이질적 문화 속에 사는 두 국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 이상 통일은 먼 나라의 꿈이요 우리 세대의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서 21장 31절에 겱恝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에스겔서 37장 19절에 겞苛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궵究缺릿 통일도 하나님의 때가 와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는 것이지 우리가 오늘날 통일이 쉽게 될 것이라고 허상을 가지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가져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할 것입니까? 공멸하는 전쟁만은 피하고 살아야되겠다는 것이 우리의 모든 가슴 속에 있는 소원입니다. 150마일 휴전선을 경계로 쌍방 각각 100만 대군이 대치하고 있는 이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화약고, 이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만일 다시 전쟁이 다시 터진다면 이젠 피난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사일이 동서남북으로 날으는데 일선이나 부산이나 제주도나 할 것 없이 평양이나 함경도나 할 것 없이 피할 곳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모두다 전쟁터가 되며 그 자리에서 살상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찌하든지 전쟁만은 피하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 길은 상호 교통과 대화와 화해와 협동을 통하여 우발적인 전쟁을 피해야 됩니다. 서로 늘 대화하고 상호 협동을 해야지 안그러고 우연히 잘못된 동기에서 오해가 발생하여 한번 전쟁이 일어나면 겉잡을 수 없이 한국은 잿더미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류 파멸을 초래하는 3대 재앙이 곧 전쟁과 공해와 마약인데 우리나라는 지구촌 유일한 동일 민족 분단 국가로써 전쟁이 났다하면 초토화되고 공멸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 한국에서 햇볕정책과 6.15 공동 선언의 화해와 협동의 길을 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늘 우리가 말하는 햇볕이라고 하는 것은 이솝이야기의 외투 벗기기 이야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루는 해와 바람이 누가 더 쎄냐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외투를 입고 걸어가는데 바람이 말하기를 누가 저 외투를 먼저 벗기느냐 벗기는 자가 이기는 자라 하자, 그 해가 좋다고 그렇게 하자고 바람보고 너 먼저 하라고... 바람이 굉장히 불고 차디찬 살을 애는 듯한 힘으로 외투 입은 사람을 파고드니깐 외투를 벗기는커녕 점점 움켜잡습니다. 그놈의 날씨 희한한 날씨다 왜이리 갑자가 추워지냐.. 외투를 벗지 않고 점점 움켜잡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나는 외투를 못 벗기겠다. 그럼 당신이 해봐라 해가 싹 구름 사이에 비쳐서 비치고 안개 구름 바람이 거치고 따뜻해지니깐 이 사람이 그 날씨 변덕도 많네 그렇게 춥더니 이제는 왜 이렇게 따뜻한가 햇빛이 비취는 땀을 뻘뻘 흘리더니만 외투도 벗어버리고 웃옷도 벗어버리고 나중에는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에는 사람의 외투를 벗기는데는 바람이 이긴 것이 아니라 햇빛이 이겨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햇볕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북한이 아무리 얼음장같은 체제에 살고 있다 하더라고 공산주의라는 외투를 아무리 껴입고 있다 할지라도 자꾸 사랑이 햇빛을 비추면 결국에는 외투도 벗어버리고 웃옷도 벗어버리고 주저 안게 된다는 그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햇빛 정책의 특정은 분단 상태의 안전적 관리를 급선무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단상태가 되었어도 서로 싸우지 말고 안정적으로 있어서 우리 한국이 점점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야 되고 대북 3대 원칙을 기조로 제일 먼저 안보를 그리고 화해와 협력을 동시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무력도발은 절대로 허락하지 말고 흡수 통일을 하겠다고 협박하지 말고 화해와 협력을 적극 추진해 나가서 결국에는 공존 공헌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과 6.15 공동 선언은 보면은 우리가 서로 자주적으로 통일하지 외세를 끌어드리지 말고 남측의 연합자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통일을 추구해 나가고 그 다음에는 비경양장기수 문제와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사회문화 협력을 활성화하고 당국간 대화를 정령화해서 전쟁만은 피하고 먼 장래의 통일을 꿈꾸자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화해와 협력이 불의가 마련되어서 우리도 북한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깊어지고 북한에 대한 나쁜 감정이 사라지고 북한도 우리와 빈번한 교제를 통해서 한국이 자유로운 나라이며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이 국민들에게 상당히 인식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북한 서해 북방 한계선에 비무장 상선들을 오락가락 통과 시켜서 온 우리 국민에게 굉장한 긴장을 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국론을 분열시키고 우리의 인내력을 시험해 보고 또 북방 한계선을 무의미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 한계선 없이 가까운 해안을 통과함으로 막대한 기름을 절약해서 경제적인 이익을 보겠다는 것이 그들이 목적인 것입니다. 만일 북한 비무장 상선이 북방 한계선을 침범해서 우리 해변 가까이를 지나갔는데 우리가 군사력과 힘으로 대적했다면 북한 사람들은 그것을 빌미로 해서 햇볕 정책을 무효화하고 군사적 긴장을 고조하고 세계적으로 억지 주장을 하고 댓가를 요구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북한의 책략에 말려 들어가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연히 일어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시비를 걸려고 몰아쳐 돌아오는 것입니다. 시비에 걸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번 우리 정부의 대응은 적절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미국 교도소 수감자 16만 명중에 92%가 자제력이 부족하여 범죄하였다고 그들을 자백했습니다. 조금만 자제했으면 범죄하여 교도소에 들어오지 않았을텐데 자제력이 부족해서 그만 폭발해서 범죄하고 교도소에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정부의 자제력을 통하여 햇볕정책의 진실성을 요번에 우리가 잘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북방 한계선을 통해서 우리 연해를 통과해 갔지만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제력을 가해서 총격을 가하던지 시비에 걸리지 않고 통과하게 한 것은 참으로 잘한 것이며 우리가 진실로 햇볕정책을 추구하겠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준 것입니다. 소인배처럼 발칵 흥분해서 대결하지 않고 대인 다운모습을 보여주고 우리가 슬기롭게 이런 상황을 다스리는 자신 있는 나라라는 것을 북한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태도를 우리 주님께서 명하신 태도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에서 42절에 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궛 했습니다. 악한 자 대결하면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중대한 일이 아닌 이상은 오른 뼘 한 대 맞으면 왼 뼘도 한 대 때려주십시오 별 손해나는 것 없습니다. 여러분 속옷 입다가 남은 속옷 달라고 하거든 입은 겉옷하나 벗어 줘도 별 손해 없는 것입니다. 오리를 가달라고 하는데 한 십리 가주고 화평하는 것이 좋습니다. 북한은 계획적으로 우리를 시비에 끌어 드리려고 작정하고 비무장 상선을 내려보낸 것입니다. 시비를 걸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비에 걸려서 분열되고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남북한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 위기가 다가오고 북한의 햇볕정책 다 짓밟아 버리고 온 세계에서 나팔불고 온갖 억지 다 부리고 하는 깡패 작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 깡패 작전에 말려 들어가면 안됩니다. 북한에 해군이 쳐들어 왔다면 우리는 단호하게 군사력으로 대적해서 침몰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비무장 상선을 가지고 우리를 시비 속으로 끌어 들려고 하는 그 작전에 말려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군과 정부가 대항하는 것은 잘한 것입니다. 대인다운 모습을 보여 준 것이며 우리의 자신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너희 그래도 우리를 까딱없다. 너희들 그래도 너희들의 시비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계책에 말려들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을 가지고 정치인들이 왈가왈가하고 우리 국민이 왈가왈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대로 조그마한 일에 시비에 걸리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악한 자의 계교에 말려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오른뼘 맞더라고 왼뼘 돌려되도 시비에 안 걸리는게 좋습니다. 속옷 달라고 하면 겉옷 주고라도 오리를 가자고 할 때 십리를 가더라고 싸우지 않고 평안하게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섭리요, 오늘 우리 한국이 북한의 시비에 말려 들어가지 않는 정부의 태도나 우리 군의 태도는 적절하고도 잘한 것입니다. 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을 초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따라 행하면은 시험에 들지 않고 벼랑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어떻게 앞으로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북한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호간 신뢰가 쌓이면 쌓일수록 긴장을 풀고 경제 교류와 문화 교류, 상부상조를 통하여 함께 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현실은 함께 망할 것이냐 함께 살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싸우면 함께 망하고 안 싸우고 잘 상부상조하면 잘살고 그런데 우리가 함께 망하는 길을 걷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대는 그 6.25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6.25를 통과한 사람들은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비참하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힘이 약하면 잡아 먹히지요, 6.25당시 전력을 보면 북한군은 20만 명이었는데 국군은 10만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전차 242대인데 우리는 한 대도 없었습니다. 장갑차나 공군기는 무려 북한보다 10분지 1정도로 약세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얍보고 북한이 일격에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씨 조선 선조 때도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해서 십만 명을 군대를 양성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한다고 할 때 조정에서 논쟁을 하고 이 이이의 주장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나라가 평화로울 때 군사를 양성하여 외침에 대비하자고 하였으나 강정으로 이것이 무시되고 결국 무방비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해서 우리 한국 전체가 일본에게 짓밟히는 비극적인 상황을 당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평화 공존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울타리를 잘해 놓고 난 다음에야 도둑놈을 막을 수 있지 우리 울타리가 무너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힘을 합쳐서 북한이 감히 우리를 넘어 볼 수 없을 만한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북한 주민에 대해서 무조건 도와 주어야 합니다. 거기 주민들과 어린이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모른다고 하고는 서로 화해와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도와 주어야 합니다. 군사력을 강화하게 될 현물인 돈은 도와 주지 않을 지라도 옷이나 약품이나 쌀은 도와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은 주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7절에서 21절에 겲틜タ“鍍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궛 말씀한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갚을 테니깐 너희들의 할 일은 원수라도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고 입히고 돌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북한의 국가는 원수라도 민족은 우리와 동질한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는 원수라도 민족은 원수가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원수지 민족은 원수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하여 무조건 도와 주어야 우리 교회에도 꾸준히 북한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 내에 NGO를 통해서 총 30억 정도를 지원했습니다. 옥수수 씨앗과 비료지원에 약 17억 2천만원... 탈북 동포 생활 정착을 99년도 부터는 매월 60명하고 있으며 어린이 급식을 지원하고 있고 또 아동복도 지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상세한 내용을 알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회로도 있는 힘을 다하여 북한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경제적인 협동으로 끌여들려서 개방세계로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에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중소 기업을 옮겨가고 그래서 북한 사람들에게 공동 고용을 창출 시켜서 그들이 돈을 벌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사람들이 배가 부르고 잘 먹게 되면 인권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인권이고 민주주의도 없어요. 밥만 주면 종살이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돈을 벌 수 있고 밥만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주면 그 다음에는 자유와 해방을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북한에 인권을 주장해도 배고픈 사람이 인권을 주장을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배가 불러야 됩니다. 우리 북한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산업 공단을 만들어주고 중소 기업을 옮겨주고 직업을 주고 그리고 생활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과 끝없는 인내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깡패 집단이니깐 깡패를 다스리는데는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희생적인 사랑과 끝없는 인내로 대화를 해야합니다. 나는 어느 회사의 사장님이 어마어마하게 성격이 사나운 사장을 알고 있는데요 화가 나면 잿더리를 내어 던져 버리고 찻잔도 내어던져버리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비서가 그 사장을 너무나 잘 섬기고 그 사장 자체도 비서 하나만은 칭찬을 하더라구요 그래 내가 하도 신기해서 이 비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어떻게 해서 저 고약하고 못된 사장을 섬기고 있느냐 했더니 목사님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이런 사장을 섬기지 못합니다. 나는 한참 우리 사장을 볼 때 정신병자로 봅니다. 그럼 나는 간호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간호원이 정신병자를 대할 때 싸우면 같이 정신병자가 되지 않아요 우리 사장님이 발짝을 하면 아, 정신병자 발짝했다 나는 간호원이니깐 잘 참고 돌봐 주어야지 항상 간호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웃을 수가 있고 마음에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진짜로 올바른 말이다. 여러분 북한 체제는 정신병자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간호원이예요 저 정신병자하고 같이 대항해서 싸우면 이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간호원이기 때문에 정신병자가 발짝을 하면 또 발짝 했구나 또 간호를 좀 해 주어야 되겠다. 그래서 우리는 희생적인 사랑과 끝없는 인내로 대화를 해야지 이성적으로 대항해서 일대일 정상적인 정부라고 대항하면 우리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미국이 남북전쟁 때,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항상 시편 37편을 읽고 그 위에 엎드려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날도 그가 일던 성경 시편 37편에는 그의 눈물 자국이 베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북한을 대할 때에 시편 37편을 읽고 북한을 대해야 합니다. 시편37편 1절에서 12절에 곀宣퓽美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찌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찌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찌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찌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북한이 저렇게 깡패같이 행악을 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만은 우리는 온유한 자로써 오른 뼘을 치면 왼 뼘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면 겉옷을 주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고 햇볕 정책을 통해서 감사하면 우리가 손해나는 것 같지만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심판자로 계셔서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 주실 것입니다. 잠시 후에 악한 자가 없어지리니 자세히 살펴도 찾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히틀러의 사건이며 이것이 공산주의 스탈린의 사건이며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 사건이 아닙니까? 그렇게 무성하던 악인들이 자세히 살펴보아도 역사의 그림자 속에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별 도리 없이 우리의 일생은 북한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다시 6.25와 같은 전쟁을 가져서는 절대로 절대로 안됩니다. 만일 한반도에 전쟁이 다시 터지면 우리 민족은 재기불능이 되고 살아남은 후손은 대대의 가난과 수욕을 덮어쓰고 삼류 국가의 슬픔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전쟁만은 피해야 하고 남북 다 함께 평화적으로 공존 공영 하다가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끝없는 인내와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께 눈물로 간절히 조국의 평화를 위하여 그리고 궁극적인 통일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해야만 되겠습니다. 우리 국민이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어 일치 단결해서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 편에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꿈과 소원을 이루어 주시게 되실 것입니다. 6.25 51년을 당해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재점검하고 북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르게 하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우리 아버지께서 도와 주심으로 6.25의 비극적인 전쟁을 통해서도 우리 대한민국이 망하지 아니하고 그 결과로 우리 한국에는 자유민주주의가 꽃피고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고 자유와 평화 중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 살게 되고 5만 교회에 10만 주의 종, 1200만 성도가 있게 되고 하늘나라가 임하여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그러나 북한은 헐벗고 굶주리고 자유가 없으며 김일성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여 그러나 아버지 북한은 중무장하여 언제고 우리와 열전을 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 땅은 이제 제기 불능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찌하든지 우리를 도와 주셔서 북한의 깡패 전략과 계획에 말려 들어가지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여 어려울 때에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우리 대통령께 지혜와 총명을 주옵소서 우리 국민들이 믿음으로 뒤를 밀어 드리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가 6.25 선언 이후 햇볕 정책을 통하여 어찌하든지 북한을 냉장고에서 나오게 하여 주시옵시고 대화와 화해의 길로 들어 서게 만들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전쟁만은 피하게 만들어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우리 국민들도 서로 대적하여 분열하고 투쟁을 일삼지 말고 화해와 일치 속에서 나라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일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조용기 목사(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