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07:41:20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흔히 인생을 경주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것도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경주 마라톤과 같은 경주에 비유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빨리 가는지 정신없이 지난 1년을 달려왔습니다. 어느덧 364일이란 시간을 살았
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2018 송년주일>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경주 /딤후4:5-8/ 박병은목사 2019-01-03 07:41:20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흔히 인생을 경주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것도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경주 마라톤과 같은 경주에 비유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빨리 가는지 정신없이 지난 1년을 달려왔습니다. 어느덧 364일이란 시간을 살았고 이제 하루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일 년을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그동안 어떤 일들을 겪으셨나요? 즐거운 일, 슬픈 일, 기쁜 일, 안타까운 일 등 다양한 일들을 겪으시며 이 시간까지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흐름은 그 누구도, 어떤 세력도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희랍신화에서 시간이란 머리 뒤가 대머리라고 합니다. 시간은 다가오는 앞머리를 잡을 수 있지 자나간 다음에는 잡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딥니다. 문제는 이 시점에서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또한 붙잡을 수도 없거니와 붙잡는다고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시간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 말씀 가운데서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으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회고하고 반성할 뿐 아니라 다가오는 새로운 한 해를 대비해야 하는지를 살피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시간의 주관자를 의식하라 디모데 후서는 13개 또는 14개의 서신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바울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네로 황제의 핍박하에서 2차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본서를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대략 AD 67년 경이 되는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당부하는 서신을 써서 보냈습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는 표현은 자기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내면서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직감하며 유언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디모데후서입니다. 이렇게 시간이란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며,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다가오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시간이고 때입니다. 문제는 이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시간과 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전 3:1-8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제 죽을 때가 가까이 왔음을 직면하고 디모데에게 이 서신으로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또 한해가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나의 생을 꼼꼼하게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지난 시간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살아왔는지 깊이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고 겪은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과연 내게 주어진 그 소중한 시간을 허락해 주신 주관자의 뜻과 바램에 얼마나 부합하며 살아왔는지요? 자신을 깊이 되돌아보시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2. 직무에 최선을 다하라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난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자신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선한 싸움을 싸웠고 자신에게 주어진 경주를 끝까지 완주했으며 그 경주를 믿음을 변절하지 않고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그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었고 또한 싸움의 대상이 누구였으며, 그 싸움에서 승리한 비결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울이란 “여호와께 간구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바울의 뜻은 “작은 자”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여행 가던 중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사실을 세 번 기록되어 있음을 봅니다(행 9:1-9; 22:4-16; 26:9-17). 그 이후 그는 주님의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행 9:15)에 순종하여 자신의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롬 11:13; 갈 2:8) 한평생 자신의 사명에 충성하였습니다(딤후 4:7). * 행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 롬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 갈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 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그가 대적한 대상들은 율법주의적 유대인들과 이교도들과 당시에 유행하였던 다양한 헬라 사상들과 영지주의와 같은 이교 사상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각종 이단 사설들이 유행병처럼 돌고 있습니다. 사리사욕에 빠진 스승을 따라다니며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각종 이단 사설이 난분분합니다. 쓸데없는 세속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시간을 허비하며 보냅니다. 지난날의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거짓이 참의 옷을 입고 약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꾀이고 있는 이 세태 속에 하염없이 정신이 팔려 허송세월하고 말았습니다. 이 송년의 시점에 이러한 점을 점검하고 다시금 추슬러 새롭게 출발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흐름과 현상을 잘 살펴 과연 내가 먼저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즉 영적 점검과 함께 재무장하여 새해를 맞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확신을 갖고 소망하라 사도 바울은 8절에서 확신 가운데 임종을 앞둔 자로서의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하여 지난 일 년을 살아오셨습니까? 그저 먹고 살기 위하여 동분서주(東奔西走)하셨습니까? 성도 모두는 장차 하나님 앞에 설 그날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 날의 평가가 최종적인 것임을 인식하고 세상의 풍습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부르신 분의 뜻을 따라 날마다 확인하며 그 뜻에 맞는 일들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긴장감과 목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사역에 충성했습니다. 그의 충성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 고백하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고후 11:23-28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정말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신실한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최선의 사역에 투신한 종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사역 비결을 밝히고 있습니다. * 빌 4:12-13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교회를 염려하는 일에 얼마나 상심해 하며 헌신했는지요? 저희도 숱한 시간 염려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주님을 섬기며 교회를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지난날의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요 긍휼을 베풀어 주신 사랑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의 전적인 헌신은 당시 교회의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로부터 인정받고 대접받기 위한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이름을 높이 드러내기 위한 자기의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대한 것은 바로 구원을 완성하시어 교회의 주인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며 칭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이 소망을 확신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질 “의의 면류관(딤후 4:8a)”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주어진 사명에 한평생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얻고 평가받을 것을 기대하고 한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대하고 소망한 것은 장차 임하실 주 예수께서 수여하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이 면류관은 “죽도록 헌신한 사역자에게 주어질” 뿐입니다. 그는 이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사역한 것을 말합니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께서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요계 2:10 a, c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 교회가 성도도 많지 않고 건물도 없어서 빌어 사용하는 상황이지만, 저희는 지난 26년 동안 한결같이 믿음을 잃지 않고 성도와 교회를 염려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 아래서 복음 전파 사역에 힘써 왔습니다. 특히 지난 5년 동안 교회 Web-site를 방문한 분들이 53만 8천 3백 명이나 됩니다. 매 주일 전한 설교 말씀은 매주 30여 개가 CD로 녹음돼 배포되고 있고 그동안 6집에 이르는 설교집도 500여 권이 배포되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발간한 설교집을 읽어 본 어느 한 성도를 만나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일 수는 있겠지만, “이런 말씀으로 교육받고 있는 둘로스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좋으시겠느냐고 하면서 정말 성숙한 성도들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말씀을 사모하고 교회를 염려하며 자신의 영적 성장과 성숙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둘로스교회는 섬겨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장차 자신이 받을 의의 면류관이 자기에게만 주어질 것이라고 자랑하지 않고 있음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8b 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말씀과 같이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성도가 충성스럽게 말씀에 순종하면 그에게도 역시 사도 바울에게 주어질 의의 면류관이 수여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 또한 되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십니까? 이 진리가 우리의 소망이고 희망이고 믿음입니까? 사도 바울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한평생 충성스러운 성도의 길을 갔다면 우리 역시 그런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장차 앞으로 겪게 될 영적 현장을 이제까지 보다도 더 열악하고 혼란스럽고 힘들지 모릅니다. 작년보다 내년이 더 힘든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스스로 격려하며 주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할 것을 다짐했듯이, 우리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확신하고, 내년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요구하셨습니다. *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결론 이제 내일이 지나면, 365년이란 시간이 다 지나갑니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들 이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만 하지 맙시다. 그러나 실수와 실패를 잊지 말고 주의 은혜를 기억하고 더욱 불발하여 그날에 주어질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보고 다가오는 새해의 시간을 최선을 다하여 충성합시다. 바라기는 모두가 주님 앞에 설 그날을 의식하며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셔서 새해 하루하루를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잊지 않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주인 되신 주께서 다음과 같이 칭찬하시며 영광스러운 구원에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아멘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자 /고후7:1-/ 박봉수 목사 2016-02-01 15:33:22 read : 8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조선왕조의 시작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세 곶 됴코 여름 하나니” 풀이해 보면 이런 말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 이제 막 개국한 조선왕조가 뿌리 깊은 나무가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열매도 풍성이 맺는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자 /고후7:1-/ 박봉수 목사 2016-02-01 15:33:22 read : 8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조선왕조의 시작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세 곶 됴코 여름 하나니” 풀이해 보면 이런 말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 이제 막 개국한 조선왕조가 뿌리 깊은 나무가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열매도 풍성이 맺는 것처럼 창대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뿌리가 깊은 나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당시 막 개국한 조선의 사상적이고 정신적 상황을 암시해 줍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창건된 조선은 개국 초기 정통성의 시비 때문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든든히 세워주고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어줄 사상적이고 정신적인 뿌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속히 이 뿌리가 깊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이 어서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신앙적이고 신학사상적인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패역한 세상 속에서 그리고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흔들림 없이 든든히 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부흥을 이어가며 더욱 번성하여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뿌리를 찾고, 그 뿌리를 잘 보존하며, 나아가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 교회의 뿌리는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주후 11세기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서방교회는 주후 16세기에 종교개혁으로 로마 천주교회와 개신교로 나뉘었습니다. 이 때 개신교는 로마 천주교회를 개혁하는 형태에 따라 다양한 분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심이 되는 분파가 둘입니다. 하나는 루터교회입니다. 루터가 중심이 돼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여 독일과 북유럽 중심으로 뻗어나간 교회를 말합니다. 이 루터교회는 로마 천주교의 잘못된 신학사상을 철저하게 개혁을 했지만 예배 의식은 대체로 계승했습니다. 둘은 개혁교회입니다. 요한 깔뱅이 중심이 돼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여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운동으로 발전해 나간 교회를 말합니다. 이 개혁교회는 로마 천주교의 신학사상은 물론이고, 예배 의식까지도 철저하게 개혁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교회는 교회정치의 형태까지도 철저하게 개혁했습니다. 당시 로마 천주교의 교황 중심의 감독제를 과감하게 철폐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성경에 나타나는 장로제도를 기초로 하여 장로회 중심의 정치제도를 도입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장로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같은 교회를 말합니다. 신학사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개혁교회라고 하고, 정치형태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장로교회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교단 소속의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교회의 뿌리는 멀리는 초대교회에 있고, 가까이에는 이 개혁교회(Reformed Church) 또는 장로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뿌리가 깊은 교회가 되려면 우리의 뿌리를 정확히 알고 그 뿌리를 보다 튼튼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장로교회가 정치형태로는 그 뿌리인 장로회를 유지하고 있지만, 신학 사상적으로는 그 뿌리인 개혁교회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신학 사상이 순복음 교회인지, 감리교회, 침례교회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단 사상까지 유입되어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장로교회는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뿌리 깊은 교회가 되려면 정치형태로서 장로회를 잘 유지할 뿐 아니라 신학사상적으로 개혁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그 뿌리를 굳게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즉 더욱 철저하게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의 뿌리인 개혁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 핵심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절대 주권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회의 신학사상의 핵심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있습니다. 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도텔레스의 철학사상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삶은 존재의 원리인 신을 탐구하는 삶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각색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은 하나님을 탐구하는 삶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가장 이상적인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태도는 자칫 인본주의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이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주체요 하나님은 객체가 될 수 있습니다. 개혁신앙은 이 점을 철저하게 개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은 단지 하나님을 명상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그 절대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신본주의적 신앙인 것입니다. 신 11:8-12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네가 들어가서 차지하려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모세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가나안 땅은 애굽에서 저들이 농사짓던 땅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저들이 농사를 지을 때 물이 풍부한 나일 강에서 물을 끌어들일 수 있었지만, 저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는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의지해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애굽보다 가나안 땅에 더 좋은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나안 땅은 1년에 두 차례 비다운 비가 내립니다. 하나는 우기가 시작되며 내리는 이른 비이고, 다른 하나는 우기가 끝나가며 내리는 늦은 비입니다. 가나안 땅의 흙은 석회질이 많아서 가물면 땅이 시멘트처럼 굳어집니다. 그래서 이른 비가 내려 굳어진 땅이 부드러워져야 농부들이 밭을 기경해서 씨를 뿌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하기 전 늦은 비가 와서 곡식들이 열매를 잘 맺어야 거둘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농사를 지으며 늘 하늘을 우러러보게 됩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밭에 씨를 뿌리며 뜨거운 마음으로 이른 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가을에 추수를 한 뒤에 뜨거운 마음으로 늦은 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나안 땅은 늘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땅입니다. 하나님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땅입니다. 그래서 신본주의적 관점에서 이 땅이 가나안 복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 땅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가나안 땅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사는 땅이어야 합니다. 반대로 애굽이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뜻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땅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땅에서 탈출해 나와야 합니다. 바로 출애굽해야 합니다. 2. 성경 중심의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회는 성경보다 교회의 전통과 교황의 가르침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위배되는 면죄부를 만들어 판매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게 된 배경은 교회가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헌금을 받아들여 교회의 필요를 채우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니냐는 실용주의적 발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리게 됐고, 그 결정이 권위를 가지고 집행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실용주의적 발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이 선하지 않더라도 눈 감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발상이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개혁신앙은 이 점을 단호하게 개혁해 갔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든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성경 외에 권위 있게 세워져있던 판단 기준들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목적과 과정 모두 성경의 권위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철저하게 강조했습니다. 육상이나 수영 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지켜야 할 자기 레인이 있습니다. 선수가 아무리 잘 뛰어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해도 그 레인을 이탈했다면 바로 실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경주를 할 때도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레인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말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단이나 방법이야 어떻든지 결과만 좋으면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개혁신앙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입니다. 결과도 성경대로여야 하고, 방법도 성경대로 여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사우스다코다 주의 러시모어에는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 중 네 사람의 얼굴이 조각되어있습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그리고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입니다. 그런데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성경을 사랑했고, 성경대로 살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워싱턴은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올바로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습니다. 이것이 미국 대통령 선서의 전통이 됐습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면서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 있다”라고 한 바가 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통해 지혜를 터득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중 가장 귀한 것은 성경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인생을 참되게 살기 원한다면 그에게 성경을 주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혁신앙은 이처럼 성경을 귀중히 여기고 성경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성경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3.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의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의 영적 지도하에 살아가는 신자들은 개인적 경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제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 역시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경건한 신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더 이상 경건한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라틴어로 코람 오미네(Coram homine)라고 합니다. “코람”이라는 말은 전치사로 “앞에서”라는 뜻이고, “오미네”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과 삶이 철저하게 분리되어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잠깐 동안 그리고 기도하는 잠깐 동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만 상대하며 살아갑니다. 개혁신앙은 이점을 단호하게 개혁해 갑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칭찬받을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합니다. 역시 “코람”이라는 말은 “앞에서”라는 전치사입니다. 그리고 “데오”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예배드릴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늘 하나님을 상대하며 살아갑니다.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눈동자처럼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가까운 친구 목사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중견교회가 되었습니다만 그 교회 개척 때 이야기입니다. 상가를 얻어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 간판을 걸고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개척 예배 때는 가까운 친지들과 전에 사역하던 교회 교우들이 참여해서 100여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개척 후 첫 예배를 드렸는데 자기 가족들하고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 포함해서 7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아무도 없고 자기하고 아내 둘이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배 인도하고 아내가 반주하고 새벽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중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 낙심이 돼서 그 다음날부터는 예배 인도하지 않고 단에 오르지 않고 그냥 기도만 했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성령께서 그 마음에 강하게 책망을 하시더랍니다. “새벽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회중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정식으로 인도하라”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회중이 아무도 없더라도 정성껏 설교 준비를 해서 설교도 하고 순서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3일째 되던 날 지나 가던 교인이 들어오더랍니다. 이사 온 사람인데 새벽 기도할 교회를 찾다가 교회에 불이 켜지고 찬송소리가 들려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더욱 정성을 다해서 말씀도 전하고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분이 그날부터 빠지지 않고 새벽에 나오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좋다고 전도해서 새벽기도가 부흥되기 시작했답니다. 이 목사님이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회는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사람을 보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보고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코람데오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코람데오의 신앙이 우리 개혁신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493주년 종교개혁개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부패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고 새롭게 신앙의 기치를 들었던 날을 기념해서 지키는 날입니다. 특히 우리는 개혁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개혁신앙이란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신앙, 성경중심의 신앙, 그리고 코람데오의 신앙을 핵심으로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 신앙의 뿌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이 개혁신앙을 떠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철저하게 돌아서서 이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마2:1-12/ 박한응목사 2017-08-18 09:33:39 read : 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오늘은 온 인류의 구세주시며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이 복되고 거룩한 성탄절에 하나님의 신령하신 은혜와 주님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그런데 이 성탄절이 되면 제일 먼저 성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마2:1-12/ 박한응목사 2017-08-18 09:33:39 read : 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오늘은 온 인류의 구세주시며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이 복되고 거룩한 성탄절에 하나님의 신령하신 은혜와 주님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그런데 이 성탄절이 되면 제일 먼저 성탄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돈 벌기 위해서 더 더욱 혈안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백화점과 상점들이 각종 물건들을 쌓아놓고서 손님을 유혹하고 있고 덩달아서 술집들이 매상을 올리려고 야단들을 합니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추리도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서글픈 것이 있습니다. 이 성탄절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이신데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카드가 여러 장 날라 왔는데 그 카드의 그림을 보면 우리나라의 무슨 풍경이나 산타할아버지의 수염 난 얼굴과 썰매를 끄는 루돌프 사슴의 그림이 있고 아니면 박사들이 약대를 타고 가는 그림들은 있으나 예수님은 어디에도 있지를 않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성탄절이란 거룩하신 분이 탄생하신 날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만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빙자하여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난 날을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마호멧교에서는 자기네의 교주인 마호멧이 태어난 날을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통일교의 교주인 문선명은 자기의 생일을 이 세상에 해와 달이 태어난 날이라고 하여 가장 큰 명절로 지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없는 성탄절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금년의 성탄절에는 반드시 나의 마음에 예수를 영접하고 나의 가정에 예수를 영접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이른 새벽 머나먼 동방의 바사 나라에서부터 여러 날 동안 걸어서 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그 박사들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에 대하여도 아닙니다. 머나먼 박사들에게 수개월 전에 나타나서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면서 이 시간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모두 은혜 충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별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여러 곳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창1:16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던 넷째 날에 별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 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②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너의 씨가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창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26: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③단12:3절 말씀에는 세상에서 전도를 많이 한 사람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④그리고 오늘 분문 말씀에서와 같이 동방에서부터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밤하늘에 무수히 수놓고 있는 별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하는 것과 성탄을 알리고 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이 시간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아 멘!>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라고 정하였습니다. 다 같이 한 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내 신앙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내 생활에 성탄의 별을 띄우자! 그러면 이 시간에는 별에 대하여 그 속성과 의미와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1. 별은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이후로 수천 년, 수 만년이 지나오도록 별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우주의 천문학을 연구하는 천문학자에 의하면 수억 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캄캄한 밤하늘에 은구슬을 뿌려 놓은 듯 변함이 없이 우리 인간들에게 낭만을 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가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괴로움에 고통당하는 이들이여 눈을 들어서 하늘의 별을 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너무나 변화무쌍합니다. 변질이 너무 잘됩니다. 그래서 옛 말에 이르기를 인심은 조석변(人心은 朝夕變)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변함없이 연초에 다짐하였던 것을 끝까지 잘 추진해 나가야 하며 은혜 받았을 때의 그 결심과 각오를 변치 말고 잘 행함으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것입니다. 2. 별은 항상 변함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있는것 같아도 모두가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주공간을 돌고 있는 모든 행성들은 1미리 의 착오나 편차도 없이 태양을 중심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의 갈 길을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에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때에는 그 모든 별들과 행성들의 선회하는 궤도를 슈퍼컴퓨터를 동원하여 몇 달 몇 년씩 계산을 하여서 어떤 행성과도 충돌하지 않고 궤도를 돌 수 있도록 쏘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에서 쏘아 올린 인공위성도 자기의 사명을 다하여 명령을 받은 대로 지구 궤도를 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들은 이 별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말할 것 없이 자기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남의 자리를 넘보아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에도 들에서 양들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천군 천사들의 소리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들려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까지 그 자리를 굳게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고 고백한 여호수아와 같이 세상사람 모두가 다 주님을 떠난다 해도 나는 내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별은 항상 신비한 존재입니다. 별은 아무리 연구를 하여도 그 비밀을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태고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천문학자들이 별을 보고 연구를 하여왔어도 별은 언제까지나 신비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1969. 7. 20. 미국의 암스트롱이라는 우주비행사가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을 하여 2시간동안 월면을 걸어 다녔습니다. 지난 2007년에는 우리나라의 이소연 씨가 우주선을 타고 우주정거장에 가서 14일간을 체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많은 과학이 발달을 해 왔고 미국과 러시아는 경쟁적으로 금성과 화성 등의 별을 연구하려고 우주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과학과 기술로서 아무리 연구해도 그저 추상적인 것뿐이지 아직까지 별에 대하여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인간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고 또 그 별들을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신비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존경받고 동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항상 마음은 여유가 있고, 그리고 아무런 기뻐할 것이 없는 것 같은데 항상 얼굴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도대체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신비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4. 별은 항상 우리 사람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줍니다. 세상에는 저 하늘의 별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별은 우리 인간들에게 무한한 꿈과 소망을 줍니다. 시인이 별을 보면 시가 읊어지고, 소설가가 별을 보면 한편의 소설이 되기도 합니다. 음악가가 별을 보면 훌륭한 노래가 지어집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낙심한 사람이 저 별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 힘과 소망을 얻었습니까?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별을 보면 그 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리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저 하늘의 별과 같이 축복하리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아브라함의 받은 축복을 소망하게 됩니다. 저 하늘에 무수한 별들은 아무리 검은 구름이 가리워도 구름 저편에서는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여름날 장마 속에서 여러 날 동안 별을 보지 못하다가 검은 구름 사이사이로 별이 보일 때에는 모든 사람이 기뻐합니다. (행27:20) “여러 날 동안 해도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고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하여 열나흘 동안 별 구경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항상 별과 같이 남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아무리 환란의 검은 구름이 우리의 앞을 가린다고 하여도 우리들 본연의 별과 같은 믿음을 잃지 말기를 바랍니다. 5. 별은 사람들의 갈 길을 인도해 주고 때를 알려줍니다. 지금이야 최첨단 전자 장비가 있고 최소한 나침반이 있어서 별 어려움은 없지만 전에는 그렇지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넓은 바다를 여행하든지, 또는 끝없이 넓은 사막을 여행하든지, 또는 산중에서 캄캄할 때 길을 잃었을 때에 사방을 알 수 없고 어디가 동서남북인지를 알 수 없을 때에 북극성은 항상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또 어느 별이 북극지를 알 수가 없을 때를 대비하여 왼쪽에는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있고 오늘 쪽에는 W모양의 가시오페아 별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중에 깊은 산 속에서라도, 또 넓은 사막 가운데서라도, 망망대해에서도 북극성을 보고서 방향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이미 수개월 전에 이방나라인 바사 나라의 박사들에게도 별을 통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알려 주셨고 그 별은 머나먼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박사들을 인도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별은 때와 시기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예>지금이야 누구나 시계를 가지고 있고, 시계 없는 집이 없으며, 집마다 몇 개씩의 시계가 있지만, 예전에는 시계가 없어서 자다가도 밖에 나와서 별을 보고서 시간을 측정하곤 하였습니다. 전에 나의 어머님은 나를 위하여 새벽밥을 해주실 때에 시계가 없어서 꼭 밖에 나와 새벽별을 보고 새벽밥을 하셨는데 날이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은 별을 볼 수가 없어서 그저 한숨 주무시곤 밥을 하셔서 어느 날은 한밤중에도 밥을 먹곤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별은 우리들에게 때와 시기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때와 시기를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무슨 때를 알려야 하겠습니까? 마지막 말세가 가까이 다가옴을 알려야 하고(벧전4:7), 지금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할 때(막1:15)를 알려야 하며, 또한 은혜 받고 구원을 얻을 때가(고후6:2) 되었음을 알려야 합니다. 6.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항상 앞서서 인도하였고 멈출 때에 멈추었습니다. 동방에서부터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은 항상 박사들의 앞에서 인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 땅 베들레헴에 와서는 예수님이 누우신 집 위에서 멈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바른 신앙의 생활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앞서서 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뒤에 떨어지면 따라가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마라톤의 경기에서도 한 번 뒤로 쳐지게 되면 다시 앞으로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이 시대에 앞장서서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으며 또한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멈출 때가 되면 아무리 미련이 있어도 멈추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앞서가는 것만이 운전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멈출 자리에서 잘 멈추어야 합니다. 항상 과한 것은 오히려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이 멈추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부덕이 되고 맙니다. 7. 별은 번성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5:5절 말씀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하셨고 22:17절 말씀에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별은 번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정이 아브라함의 가정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 탄생하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의 믿음이 저 동방에서 박사들을 인도하여 온 별과 같이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영원토록 빛나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① 오늘도 변함없이 저 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과 같이 ② 항상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③ 항상 신비한 존재로서 ④ 누구에게든지 소망과 기쁨을 주고 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며 ⑥ 모든 사람들보다 항상 앞서서 가면서 ⑦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과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은 번성하는 축복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부활의 선물 /벧전1:3-7/ 배진기목사 2017-12-04 13:02:51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
부활의 선물 /벧전1:3-7/ 배진기목사 2017-12-04 13:02:51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 이니라 인생의 결론은 죽음입니다. 아무리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부귀와 공명을 자랑한다고 해도 그 인생의 결국은 죽음이며 자신의 성취와 업적을 내세운다 해도 그 인생의 결론은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은 형벌로 창세기3:19 에서“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라"고 죽음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인간에게 심판을 선물합니다. 히브리서 9:27 에서 분명하게“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죽음의 선물로 주어지는 심판을 말씀 하였습니다. 인생의 필연적인 결과인 죽음에 대한 해답은 nothing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다고해도 이 죽음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지고한 인간의 이론도 죽음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많은 세상의 종교들이 죽음에 대하여 각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죽음 그 이후에 대한 막연한 제시에 그치고 맙니다. 그 제시는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추측에 지나지 않기 때문 입니다. 어떤 종교들은 윤회설을 말하기도 합니다. 내세에 대한 확실한 보장 이 없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대한 해석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세계에 한정시켜 죽은 다음에 다시 환생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허망하고 잡된 인간의 이론일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명쾌하게 죽음의 이유와 결과와 그 이후에 대해 말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죽음에 대한 명쾌하고 확실한 해답과 함께 분명한 보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성경이 말씀하는 죽음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해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3-4절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명백하게 죽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음에 대한 해답을 요한복음11:25-26에서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명쾌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많은 현인들과 종교가들이 인류역사 속에 나타나서 나름대로의 진리를 말하고 외쳤지만 우리 주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담대하고 분명하게 죽음의 해답인 부활과 생명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없습니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우리가 현세에 사는 것도 다 알지 못하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찌 알리요”라고 말했습니다. 석가는 죽은 아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에게 “사람은 나서 다 죽기 마련이니 이를 깨달음으로 위로를 받으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말씀만 하셨다면 인류 최대의 사기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제로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마가복음 5:21-43과 누가복음8:41-56 의 기록에 보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을 바로 살려내셨습니다. 누가복음 7:11-17 에 보니 죽어서 장사지내러 나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어서 장사 지낸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은 죽음의 전 과정에서 죽은 자를 살려 내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 자신이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의 죽음의 문제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셨고 우리 인류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님을 힘입어 고린도전서 15:55-58의 말씀과 같이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 담대하게 외칠 수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가졌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말하고 부활을 말하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소망을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명쾌한 해답입니다. 둘째,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증거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꾸며 낸 이야기라면 성경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의 자리를 지켜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 가장 뛰어난 문학작품이나 미술작품 그리고 음악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3-8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 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 느니라"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오백명이 넘는 증인들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거짓은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그 실체가 밝혀지고 진실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거짓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역사의 흐름 속에서 세월이 지날 수록 그 증거가 분명해지고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분명한 증거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예수 그리스 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죽음에 따르는 선물인 심판이 분명히 따라오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부활의 구체적인 선물들이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선물은 거듭남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류에게는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이 선물은 모든 사람을 위해 동일하게 준비되어진 선물입니다. 선물은 믿고 감사함으로 받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선물은 바로 우리의 거듭남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우리에게는 새생명이 주어집니다.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5:17에서"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 고 감격적인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주어지는 선물은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선물이 아닙니다. 존재적인 변화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에게는 영생의 생명이 주어집니다. 요한복음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영생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well-being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예수님이 이에 대해 친히 요한복음 5:24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 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존재이기에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8:15과 갈라디아서4:6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윤리와 도덕의 차원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위안과 안위의 차원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놀라운 생명의 선물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다. 영생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 well-being의 존재가 되었으니 우리 모두 부활의 능력을 힘입고 산 소망을 품고 well-doing의 삶을 삽시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마치는 날 well-dying하므로 본문7절에 약속하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선물은 하늘에 간직된 유업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보배롭고 풍성한 것을 받아서 누린다고 해도 그것은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쇠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썩지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이요 하늘에 간직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유업의 영광을 알기에 빌립보서3:12-14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쇠해지는 것에 매여서 추하게 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탐하지 않습니다. 의연하고 당당하게 삽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4:11-13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참 자유인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늘에 간직되어진 이 유업은 본문 3절에 사도 베드로가 언급한 '그의 많으 신 긍휼'입니다. 긍휼은 예비되어진 사랑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도 고린도전서 2:9에서"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나아가면 천국에 가서 유업을 받아 누릴 때까지 세상의 삶 속에서도 본문 5절의 보장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2012년 부활절에 바울이 소유했던 참 자유를 얻고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간직된 유업을 이을 준비를 갖추므로 범사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 호를 받는 성도들이 됩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죽음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심판이 선물로 따라오듯이 부활에도 선물이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선물은 거듭남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 더럽지 않고 , 쇠하지 않는 유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므로 거듭나서 well-being의 새로운 존재가 되어 산 소망을 가지고 well-doing의 삶을 살다가 죽음의 해답을 가지고 well-dying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새벽기도의 능력을 얻자 /출14:21-31, 계2:4-5/ 박한응목사 2017-09-04 13:56:43 read : 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어느새 7월도 셋째주일입니다.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이 시간도 한량없는 은혜와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벌써 금년 절반이 다 가고 7월도 중순입니다. 그 동안 바쁜 농번기를 지내오면서
새벽기도의 능력을 얻자 /출14:21-31, 계2:4-5/ 박한응목사 2017-09-04 13:56:43 read : 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어느새 7월도 셋째주일입니다.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이 시간도 한량없는 은혜와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벌써 금년 절반이 다 가고 7월도 중순입니다. 그 동안 바쁜 농번기를 지내오면서 우리 창정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많이 침체되었습니다. 그 한 예로 새벽기도의 열이 식었습니다. 떨어진 신앙, 침체된 믿음을 다시 회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어디서 떨어졌는지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우리 창정교회의 성도들도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기 전에 어디서 떨어졌는지 잃어버린 열심과 믿음을 다시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새 힘을 얻고 날마다 시간마다 충만한 은혜 안에서 생기 넘치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는 거의 모두 새벽에 역사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이 새벽에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왜 새벽기도를 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새벽기도를 하면 어떤 은혜를 받게 되는가? 이 시간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생기의 바람이 불어 위로부터 은혜와 새 힘을 얻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한 심령도 이 시간을 사탄에게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목하여 강단을 보시기 바랍니다.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베드로를 똑바로 주목할 때 그의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습니다.(행3:3-6) 여리고성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고 급기야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눅10장)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볼 때에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5) 이 시간도 여러분들의 신령한 눈이 열려져서 하늘 보좌를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옛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침(새벽)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특별히 적합한 시간으로 생각하여 왔습니다. (시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루가 시작되는 은밀한 시간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의무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고유한 특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 나만의 교제의 시간입니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그날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날의 첫 시간을 기도로서 시작하며, 새벽에 주님과 교제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권이고 의무입니다. 새벽에 우리들의 온 영과, 혼과, 육이 하나님께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제일 큰 유익을 주는 행위이고, 사탄 마귀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잠시도 분리시키지 못하게 하는 은총의 순간 인줄 믿습니다.<아 멘!> 새벽 시간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몰두할 수 있는 최고의 좋은 시간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이 없이는 한 순간도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새벽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와 울부짖어 기도할 때 하루 온 종일 하나님과의 동행을 할 수가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남은여생이 헛되게 낭비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영적으로 거지와 같은 신세가 되어서 인생의 찌꺼기와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서 날마다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천국 잔치에 아름다운 영적 옷을 입고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풍성한 만나를 먹고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바로 새벽기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 입은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고,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생수를 마시면서 광야생활을 잘 하였습니다.(신8:4) 이와 같이 오늘의 우리들이 하루의 삶 속에서 아니 일생의 삶 속에서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으며, 양식이 핍절치 않는 가나안 정복의 기적의 역사는 바로 새벽 시간에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알 것은 * 하루를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놀라운 영력(Spritual Power)이 새벽기도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계신 주님을 향한 열망의 불도 새벽기도에서부터 타오릅니다. * 자신의 약한 것을 깨닫고 강한 힘을 얻는 것도 새벽기도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 근심과 공포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가는 담대함도 새벽기도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 안일과 쾌락의 파멸과 멸망의 넓은 길을 가다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생명의 길을 발견하는 좁은 길을 가는 것도 새벽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의 능력도, 새벽기도를 통하여 얻을 수가 있습니다. * 깨끗한 마음과, 고상하고 경건된 심령도, 새벽기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멘> 새벽 시간에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는” 생명의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이 예속되는 축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 왜 새벽기도를 해야 하는가?(필요성) 새벽 한 시간 나의 모든 것이 성령의 지배 아래 사로잡힐 때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세주이신 것”(마16:16)을 고백할 수가 있고 “내게 능력 주시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하는 영적 자부심과 영적 자신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①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 시작할 때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어 나를 강하게 하시고 ②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바칠 때 주님께서 내 앞에 계시어 나를 붙들어 주시며 ③ 하루의 첫 시간을 간구로 시작할 때 주님이 나를 보호해 주십니다. ④ 하루의 첫 시간을 깊은 명상으로 시작할 때 하나님은 나를 붙들어 주시고 ⑤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로서 천국 문을 두드리며 시작할 때 하늘 문을 열어주십니다. ⑥ 하루의 첫 시간을 회개로 시작할 때 용서와 위로를 주시고 ⑦ 하루의 첫 시간을 부르짖음으로 시작할 때 주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나의 곁에 계시어 나를 지켜 주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길에 가장 좋은 시간이 새벽 시간입니다. ″ ″ 가장 귀한 시간도 새벽 시간입니다. ″ ″ 가장 복된 시간도 새벽 시간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시 57: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제부터는 우리 모두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이 귀한 새벽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허송세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새벽을 깨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아 멘!> 새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이 시간 주님께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다 같이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의 약함을 도우사, 강하게 하시고, 날마다 새벽마다, 하나님을 앙망 하면서,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옵소서” <아 멘> <찬385장> 1 못 박혀 죽으신 하나님 어린 양 믿습니다 죄 속함 받고서 이 몸과 맘 드려 간절히 빌 때에 들으소서 2 풍성한 은혜로 약한 맘 도우사 열심 주고 날 대속했으니 주 사랑하는 맘 불같이 뜨겁게 하옵소서 3 이 세상 어두워 길 찾기 곤하니 인도하사 그 밝은 빛으로 환하게 하시고 내 슬픈 눈물을 씻기소서 4 내 생명 꿈같이 이 세상 떠날 때 부르시고 사랑을 베푸사 평안케 하시며 영생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고단하고, 피곤하고, 뭐가 어떻고, 하는 핑계로 자신의 나태하고 게으른 것을 합리화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는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믿음 좋던 사람이 믿음이 식어지고 타락하는 과정을 보면 제일 먼저 새벽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저녁예배를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온갖 불평을 합니다. 예배 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매일 새벽기도를 해야 1주일에 11시간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대학을 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노력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그들은 오르지 대학을 가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얼마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내 볼일 다 보고, 내 할 일 다 한 뒤에 시간이 남으면 교회에 오고하는 안일한 생각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역사상 유명한 신앙가들은 모두가 새벽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새벽기도를 철저히 하셨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게 됩니다. 나도 청소년기에 나의 인생의 갈 길에 대하여 방황하고 있을 때에 새벽기도에서 은혜를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장 무서운 죄가 무슨 죄인지 아십니까? 살인하고 강도짓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도하지 않는 죄입니다. 가장 어설프고 형식적인 믿음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믿음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실수는 기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타락은 새벽기도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새벽기도를 잃어버릴 때 그 사람의 믿음은 점점 식어지고 마침내는 헤어날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내리 달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제부터 자신의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의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나아가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새벽기도 하는 성도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 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할렐루야!! 가장 심각한 파멸과 파산은 사업이 망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침체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도 식어버리고, 또 신앙생활에 대한 의욕도 상실해 버린, 텅 빈 영혼, 껍데기만 남아 있는 형식적인 믿음은 가장 큰 수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항상 기쁘게 하는 마음도 새벽기도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영적 능력도 새벽기도에서 얻는 것입니다.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삶의 자원도 새벽기도에서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감격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삶의 소망도, 생활의 승리도, 기적의 손길도, 새벽기도에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새벽기도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특히 농촌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참으로 새벽에 일어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마치 등산가들이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새벽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잠자리를 뛰쳐나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새벽에 잠자리에서부터 승리를 하여야 합니다. 시편5:3절 말씀 “여호와여 새벽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새벽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람들이 새벽기도를 잃어버렸을 때 ① 인생의 제일 귀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제일 귀한 역사를 잃어버리고 ③ 능력을 잃어버리고 ④ 빈껍데기만 남은 인본주의로 전락해서 ⑤ 빈 깡통같이 소리만 요란하게 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신자들이 새벽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새벽기도는 아예 저 먼 나라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새벽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저들의 마음속에 영적 풍요로움과 평화가 없이 미움과 시기와 원망과 불평이 저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깨달은 우리 창정교회 성도들은 내일 새벽부터 하나님 앞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새벽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합니다.(시121:1) 새벽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앞만 향하여 달려 나갈 때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인생의 최선의 길이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설계하시기 바랍니다.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창정교회 성도 여러분!! 오랫동안 새벽기도를 잃어버렸던 심령이 오늘 이 시간 다시 회복되어서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간구하기를 결심하는 여러분들의 믿음 위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성도 여러분!! 가장 무서운 죄는 기도하지 않는 죄입니다. 가장 어설픈 믿음은 하나님과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큰 실수는 기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장 치명적인 타락은 새벽기도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새벽기도를 잃어버릴 때 하늘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삼손이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에 눈이 뽑히고 혀가 잘리고 이방 나라의 우상 앞에서 연자 맷돌을 돌리면서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2. 새벽기도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새벽기도를 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새벽기도를 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새벽기도를 하면 어떤 능력이 나타나는가? (1) 새벽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시46: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2) 새벽기도를 하면 온갖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새벽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길을 며칠 가다보니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천명 2천명도 아니고, 만 명 2만 명도 아닌 적어도 2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어떻게 광야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새벽마다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할렐루야!! (3) 새벽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나왔을 때에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기병대가 추격을 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밤새 동안 동풍이 강하게 불더니 새벽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벽에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4)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새벽에)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삼상 3장에는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잠을 잘 때에 새벽에 하나님이 임하여 서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삼상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새벽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야곱이 20년 만에 하란 땅 외삼촌의 집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새벽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이 엄청난 새벽기도의 비밀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벽기도의 능력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가 새벽에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새벽에 놀라우신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여 생동감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새벽기도는 자기희생입니다. 희생 없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희생 없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희생 없이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제부터 나의 가장 귀한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나의 가장 귀한 생각을 주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날마다 날마다 기쁨과 은혜 안에서, 승리하는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다 같이 찬송을 한 장 부르겠습니다. <찬380장 1절> 나의 생명 되신 주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의 흘린 보혈로 정케하사 받아 주소서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아 - 멘!> 이제부터 잠든 영혼, 침체된 신앙, 형식적인 믿음에서 깨어납시다. 이 시간 새롭게 결심하고 깨어나는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의 단비가 흡족하게 내려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성도가 마지막 붙들고 의지해야 할 것이 바로 새벽기도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영혼의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새벽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새벽에 너를 도와주리라 아-멘! 새벽에 너를 만나주리라 아-멘! 새벽에 너와 함께 하리라 아-멘! 새벽에 너를 붙들어 주리라 아-멘! 우리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믿고 의지하세요. 이제는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성도여 일어나라 주께서 새 힘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실패와 좌절과 낙망 가운데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나태와 게으름에서 이제는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습관과 관념에서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죄악과 어둠에서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질병과 고통에서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환난과 고난 중에서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막2:11, 요5:8) 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의로운 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이 하나님의 은총이 오늘 새롭게 결심하고 새 출발하는 우리 창정교회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아 멘>
십자가를 내가 지고 /마10:34-39/ 박한응목사 2017-09-06 11:02:32 read : 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항상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 오늘밤에도 하늘 문을 열고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 멘> 조금 전에 부른 341장 찬송 “십자가를 내가 지고” 라는 찬송은 영국의 헨리 프란시스 라이트(Henry Francis Lyte) 목사가 지은 찬송가입니다. 이 찬송은 라이
십자가를 내가 지고 /마10:34-39/ 박한응목사 2017-09-06 11:02:32 read : 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항상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 오늘밤에도 하늘 문을 열고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 멘> 조금 전에 부른 341장 찬송 “십자가를 내가 지고” 라는 찬송은 영국의 헨리 프란시스 라이트(Henry Francis Lyte) 목사가 지은 찬송가입니다. 이 찬송은 라이트 목사님께서 일찍이 부모님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 폐병과 천식으로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그의 목회지인 바닷가의 억센 어부들을 상대로 전도 사업을 하다가 임종 시에 “평화와 기쁨” 이란 말을 하고 죽었습니다. 라이트 목사님은 가난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어도 고백하기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얻겠네”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고초를 겪어도 주님이 사랑하면 무엇이 걱정이냐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부러운 신앙입니다. 본받아야 할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교회를 수십 년씩 다녔어도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서 세상 사람들의 핍박이 두려워서 수십 년씩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하면서도 주일성수 하나 제대로 못하고, 자식 결혼식도 주일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를 3년씩이나 따라 다녔어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처럼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 밖에 부인을 안 했지만 오늘의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수를 셀 수 없이 예수를 부인하고, 저버리고, 배반하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다 같이 뜻을 생각하면서 찬송가 341장을 다시 한 번 불러 보겠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갑니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 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받겠네. 아 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가족 간에 불화가 일고 그로 인하여 원수시 되고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아비나 어미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치 않고,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①여러분들은 부모님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②여러분들은 자녀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만약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께 합당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 시간 회개하여야 합니다. 아직도 세상의 인연 때문에, 세상의 체면 때문에, 예수를 멀리 한다면 그는 당연히 예수님에게서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 과실나무는 봄에 전지를 합니다. 과실을 얻기에 합당치 않은 가지는 모두 잘라버립니다. 잘려진 가지는 모두 죽고 맙니다. 불땔감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께 합당한 생활과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끊쳐지지 않고 영생 복락을 얻을 수 있는 복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그러나 예수님께 합당한 생활은 어떤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는 생활입니다. 본문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자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희생하신 것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마다 져야 할 십자가는 바로 주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 우리의 희생과 봉사와 충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간절한 기도를 하셨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라고 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든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십자가일지라도 예수님께서「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지신 것처럼 오늘의 우리들도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찬339장> 내주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아 멘. 1. 십자가를 지고 어디로 가야합니까? 마27:33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즉 ‘해골’ 이라고 하는 곳으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골고다를 해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①그곳에는 사형 당한 시체의 두개골이 널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고 ②그 동산 모양이 마치 해골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③또 전설에 의하면 아담의 두골을 이곳에서 찾았다고도 합니다. 십자가는 버려진 땅, 소외당한 곳, 알아주는 이 없고 인정해 주는 자 없는 외롭고 고독한 곳에 세워져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떠나 죄악 속에서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골고다는 죽은 자들이 모인 곳이요, 인골이 널려 있는 곳이요, 냄새가 진동하는 곳입니다. 독수리들과 맹수들이 들끓는 곳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무서운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 곳에 십자가를 세우시기 위하여 오셨고 그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이와 같은 세상에 십자가가 세워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십자가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죄악이 관영한 골고다와 같은 이 세상에 주님께서 다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고 내가져야 합니다. 십자가 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2. 십자가를 누가 지고 갈 것인가?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질 때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지기 전에 내가져야 합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도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십자가를 남에게 미루지 않고 당신께서 지셨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향하여 가실 때에 뒤따라가면서 구경을 하다가 억지로 지워주는 십자가를 예수님 대신 지고 골고다에 갔습니다. 얼마의 거리, 얼마의 시간 동안 졌는지 자세한 기록은 성경에 없으나 그의 이 행함은 인류 역사상 길이길이 빛날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가 주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 희생과, 충성과, 봉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십자가를 누가 다른 사람이 할 때를 기다리면 안 됩니다.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바로 신앙의 열매요 행함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자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자기를 위하여 새로 판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감히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신앙입니다. 남들이 하지 못하고,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십자가를 어떻게 져야 하겠습니까?(방법) (1)십자가는 눈물로 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길은 눈물의 길입니다. 눈물 없이 질 수 없는 길이요 또 눈물 없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 신사 참배에 반대를 하시다가 옥중에서 순교를 하신 주기철 목사님은 이런 찬송을 불렀습니다. G. S 서쪽하늘 붉은 노을(122) 3.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 복락 얻으려면 이길 만은 걸어야해 배고파도 올라가고 죽더라도 올라가세 5.십자가에 고개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가신 길이오니 내가 어찌 못 가오랴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갔사오니 고생이라 못가오며 죽음이라 못가오랴. 아 멘.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길은 분명 고난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며 희생의 길입니다. 눈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골고다를 올라가는 심정으로 울며 울며 천국을 향하여 쉬지 말고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2) 십자가는 감사한 마음으로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구령 사업에 동참하는 축복된 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짜증과 불평과 원망이 있으면 안 됩니다. 어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원망을 하시던가요? 불평을 하시던가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3) 십자가는 기도로 지고 가야 합니다. 눅22:40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쓴잔을 앞에 놓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고 부탁하시고 예수님도 친히 엎드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아니 십자가를 질 자격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교회에 충성하는 것 본 일이 있습니까? 그래도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이 충성도하고, 봉사도 하고, 감사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주일성수도 하고, 전도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십자가는 주님의 권능으로 져야 하고, 주님의 권능은 성령이 임할 때 선물로 주시는 것이며, 성령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약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기도는 능력을 받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주시는 능력을 받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4) 십자가는 죽음으로 지고 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입니다. 죽을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생의 구원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요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막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사도 바울은 롬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하였고 고전 15:31절에는 “나는 매일 죽노라” 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으로 지는 것이며 철저하게 자기를 죽이는 자라야 온전하게 승리의 십자가를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골고다와 같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지고 눈물로서,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지고 갈 때 주님의 뜻을 이루는 충성된 주님의 종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 멘> 그런데 성도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누가 우리를 욕합니까? 우리를 핍박하고 때리거나 죽이려고 합니까? 아닙니다. 지금은 아무도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거나 잡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순교하고 예수를 위해 죽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의 고집도 자기의 성질도 자기의 욕심도 모두 죽여야 합니다. 바로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주일성수도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새벽기도도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감사 생활도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면 과연 주님께 합당한 사람은 누가 되겠습니까? 오늘의 말씀을 종합하여 볼 때 주님께 합당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서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하고, 나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라야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고 가족도 재산도 모두 버려도 십자가 없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고 예수 없는 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믿음도 없이 일시적으로 자신의 어떤 인기로써 혈기로서 무엇을 하는 것 같이 하다가는 스스로 실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창정교회의 성도들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명감당하는 충성된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우리 주님께 합당한 성도가 되어 이 마지막 말세를 당한 이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충성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 멘>
안식일 논쟁이 주는 교훈 /마12:1-8/ 박봉수 목사 2016-02-01 안식일 논쟁이 주는 교훈 /마12:1-8/ 박봉수 목사 2016-02-01 10:06:34 read : 6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님의 등장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인기가 날로 높아져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기들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이 점점 거세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논쟁이 주는 교훈 /마12:1-8/ 박봉수 목사 2016-02-01 안식일 논쟁이 주는 교훈 /마12:1-8/ 박봉수 목사 2016-02-01 10:06:34 read : 6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님의 등장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인기가 날로 높아져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기들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이 점점 거세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예수님의 문제점을 찾았습니다. 나름대로 찾아낸 예수님의 문제점을 표적으로 하여 여러 차례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그 논쟁을 통해 예수님의 기세를 꺾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논쟁을 걸 때마다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것은 자기들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논쟁으로는 예수님의 기세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본문 마 12:14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저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 이상 논쟁을 통해서는 예수님을 물리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예수님을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저들이 예수님께 걸어왔던 논쟁은 무엇이며, 예수님은 이 논쟁을 어떻게 물리치셨을까요?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밀 밭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때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 때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문제 삼아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십계명에 제 4계명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내용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고, 실천적으로는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포괄적인 규정입니다. 도대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는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포괄적 규정을 실제적 지침으로 만들어왔습니다. 즉 시행세칙을 만들어왔습니다. 그것이 구전 율법인 소위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이 장로들의 전통에서 안식일에 관한 규정은 무려 39가지나 됩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예로 들어보면 기근 등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를 제외하고 안식일에 밀 추수를 금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어린 양이 한 입에 넣을 만큼의 이삭을 잘라 취하는 것도 죄가 된다”고 엄격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명백하게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을 공격할 빌미를 찾던 저들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이 걸어온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셨습니다. 저들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저들로 하여금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문제에 답하셨을까요? 이것은 또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요? 1. 사랑의 눈을 뜨라 예수님께서 첫 번째 논증의 예로 드신 것이 삼상 21:1-6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몇 명의 부하들과 함께 놉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났습니다. 다윗이 너무 배가 고파서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은 줄 먹거리가 없었습니다. 뜻 밖에 아히멜렉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에 진설되었다 물린 진설병을 가져다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진설병은 이스라엘 12 지파 수대로 성소 안에 있는 떡 상 위에 6개 씩 두 줄로 항상 진설해 두었던 떡을 말합니다. 이것은 누룩 없이 만들었고 매 안식일 아침에 새 것으로 바꾸어 진설했습니다. 그리고 묵은 떡은 제사장과 그 가족들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윗이 성소에 도착한 날에 더운 떡이 진설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곧 이 날이 안식일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다윗과 그 부하들은 안식일에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안식일 규정을 어긴 일입니다. 그러나 후대의 유대인들은 다윗이 위대한 왕이기에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랍비 문학에서도 이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이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성전의 진설병을 먹은 것이 아니고,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안식일에 성전의 진설병을 먹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시장하게 되었고,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어 안식일에 진설병을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도 후대의 유대인들도 다 이 일을 문제 삼지 않고 이해하고 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저들이 다윗의 일을 이해하고 넘어가게 된 것은 바로 사랑의 눈으로 그 일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겪고 있는 상황도 비슷합니다. 안식일이지만 너무 시장해서 부득이 하게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잘라서 먹은 것입니다. 돈을 벌려 한 것도 아니고, 남의 것을 훔치는 재미로 한 것도 아닙니다. 다윗의 경우처럼 사랑의 눈으로 이해하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사랑 없는 싸늘한 눈으로 제자들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엄격한 법적 잣대로 문제를 삼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스개가 있습니다. 1. 남이 하면 투기이고, 내가 하면 투자이다. 2.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이다. 3. 남의 딸이 애인이 많으면 행실이 가벼워서이고, 내 딸이 애인이 많으면 인기가 좋아서이다. 4 남의 아들이 대학 입시에 낙방하면 실력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고, 우리 아이가 대학 입시에 낙방하면 워낙 경쟁률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5. 며느리에게는 “시집을 왔으니 이 집 풍속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딸에게는 “시집가더라도 자기 생활을 가져야 한다.” 고 말한다. 6. 사위가 처가에 자주 오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내 아들이 처가에 자주 가는 일은 줏대 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얼마든지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이 먼 채로 바라보면 얼마든지 문제거리를 찾을 수 있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 사랑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다 이해가 됩니다. 논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이 멀면 비난의 입이 열리고 비판의 채찍이 가해집니다. 2. 뜻을 생각하라 예수님께서 또 다른 논증의 예를 드신 것은 민 12:9-10의 제사장의 직무 규정입니다. 분명히 안식일에 관한 규정에는 안식일에 일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제사에 관한 많은 직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성전에 진설병을 올린다든지 숫양 둘을 희생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일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을 금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밀하게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을 정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점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을 금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하도록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 위의 상위법으로 안식일 규정을 어길 수 있는 예외법을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주신 의미를 잘 살릴 수 있도록 일부 안식일을 어겨도 되는 예외법을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인간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여 노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루 만이라도 이 무거운 짐을 벗게 하시고 쉼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날 성전에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면서 영적인 참 쉼을 얻습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성전에서 예배 드리는 일과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참된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며 그들이 함께 쉼을 얻을 수 있도록 돕고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본인에게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쉼을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 안식일의 의미인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밭 사이를 지나게 된 것도 예수님의 사역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안식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참된 안식을 얻도록 해 주시기 위해 동분서주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고 참된 안식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하는 것도 마치 제사장들이 성전안에서 일하는 것과 같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잊고서 겉으로 드러난 안식일 규정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규정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규정이 담고 있는 의미를 충실하게 담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 4월 28일 고양시의원 가 선거구 후보로 나선 김혜연 진보신당 예비후보자의 선거사무실 개소식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개소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내놓을 음식으로 유부초밥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선관위에서 선거법 유권해석을 내리기를 유부초밥은 안되고 김밥은 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유부초밥 준비한 것 위에 김을 말아서 김으로 싼 유부초밥을 제공했답니다. 사실 김밥이 유부초밥보다 비싼데 비싼 김밥은 되고 유부초밥은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거법을 만들면서 한 예로 정식 식사 제공은 돈이 많이 드니까 간단하게 김밥 정도 대접하는 것은 허용하자고 규정해 놓았답니다. 그런데 김밥을 한 예로 들었으나 그보다 싼 유부초밥은 불가하다고 유권해석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법이나 규정의 세부적인 조항을 그대로 지키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조항이 담긴 뜻을 생각하여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뜻을 생각지 않고 조항만 지키고자 한다면 결코 그 법을 온전히 지켰다고 볼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더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완벽하게 지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고도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뜻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으며 그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 물으라 예수님께서 이 논쟁을 마무리하시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시고, 안식일 규정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의 권한도 홀로 가지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시비비를 따지려 들기 전에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 일에 대해 주님께서는 어떻게 판단하시는 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주님과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용하신 일을 잘못되었다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묻지 않으면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기독 법무법인 로고스가 설립 10년을 맞았습니다. 양인평 장로 주도로 기독교인 법조인 12명이 중심이 돼서 법 안에서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겠다는 취지로 2000년 9월 창립되었습니다. 현재는 국내 변호사 73명, 회외 변호사 18명이 근무하는 국내 굴지의 로펌으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이 로펌은 고객과 단순 거래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이고 인격적이며 영혼까지 상담해 줄 수 있는 변호사 인재상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선교목적의 로펌으로 자리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마다 전직원이 예배를 드리고 수요일에 주변 직장인 예배를 주도하고 목요일에는 홀리클럽 모임을 통해 성시화 운동에도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의뢰인이 찾아오면 먼저 기도하고 상담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다루어야 할 사건에 대해 하나님께 묻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의뢰인이 소송에서 이기도록 돕는 것을 힘쓰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태도가 중요합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판단하는 권한은 주님께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그 일을 위임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최종 권한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먼저 기도하고 주님의 판단을 묻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판단하고 심판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록 하나님께 위임 받아 지도자의 위치에서 판단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때도 단지 위임받은 청지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판단을 늘 물어야 합니다. 본문 바로 앞 부분 11:28-3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가는 짐이 무거움을 아십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그 짐을 가볍게 해 주시기 위해 오늘도 일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짐을 무겁게 하려고 합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그 짐을 무겁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짐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짐을 가볍게 해 주려고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행여라도 남들에게 짐을 무겁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짐을 가볍게 해 주려면 우선 우리가 사랑의 눈을 떠야 합니다. 사랑의 눈을 떠야 상대방의 무거운 짐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짐을 가볍게 해 줄 방법이 보입니다. 다음으로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법조항이나 규정에 얽매이면 다른 사람의 짐을 더욱 무겁게 하게 됩니다. 그 법 규정에 담긴 뜻을 살피게 되면 짐을 가볍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끝으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판단을 주장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판단을 따라 합니다. 그럴 때 짐을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면 됩니까? /눅3:7-14/ 배의신 2018-02-12 16:50:19 read : 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누가복음 3:7-14,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
어떻게 살면 됩니까? /눅3:7-14/ 배의신 2018-02-12 16:50:19 read : 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누가복음 3:7-14,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중국의 사상가인 ‘장자(莊子)’가 어느 날 활을 메고 사냥을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긴 까치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서 멀리 있는 나뭇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그 모양이 하도 이상해서 그 까치를 사냥하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활을 쏠 수 있는 곳까지 와서 활을 당기려고 보니, 까치가 무엇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까치가 노리는 쪽을 보니 풀숲 사이에 사마귀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귀는 또 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사마귀도 까치도 눈앞의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장자는 한심한 그 미물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활을 거두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나이가 몽둥이로 들고 자기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정을 알고 본즉, 장자가 정신없이 까치를 따라가느라 남의 채소밭으로 지나가면서 채소를 망가뜨려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밭의 주인이 그 모습을 보고는 몽둥이를 들고 따라왔던 것입니다. 결국 사마귀나 까치나 장자 모두가 똑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물체들은 각자의 목적을 향하여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 인생들도 제각기 자신의 목적을 향하여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을 바쁘게 살아가는 인생들이 사는데 바빠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의 장자 이야기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따라오는 죽음의 시간을 잊은 채 육신의 삶에 매달려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으려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예고되어 있는 공개된 진리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입니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있을 심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자신의 죽음과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 됩니다. 그렇다면 죽음과 죽음 이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자 한다면 이렇게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사야 45:11절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묻게 됩니다. 여러분은 매일 하나님께 자신의 길을 묻습니까?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부탁합니까? 아니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혼자서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 물어야 할 일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봅시다. 먼저, 본문의 배경과 말씀의 의도를 찾아봅시다.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는 세례요한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소리는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소리와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여 년간을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침묵하신 이유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8: 5-7절입니다.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현상을 사도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로마서3:10-12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의 침묵하심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00여년 만에 침묵을 깨시고 세례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우둔한 사람들의 마음에 메시아의 자리를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급해 했던 유대인들이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군중들 속에는 세리들과 군인들을 비롯한 하나님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가슴을 치며 세례요한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며 순종의 결단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순종의 결단을 합니까? 그렇다면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즉 어떻게 살라고 하십니까?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청은 본문 7-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로 요약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 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말라. 사실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온 무리들은 그나마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족속들”이라는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의 모습이 전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돈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선민이지만 그들의 생활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자신들의 생각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고도 단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선민이라 할지라도 선민으로서의 행함이 없으면 찍어버리시고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십니다. 1)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주시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 하나에 연연해하지 않으십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는 변함없이 이루어져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를 통하여서도 그 뜻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면 준비 된 다른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예레미야 18:1-6절을 ‘토기장이의 비유’라고 합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로마서 9:21절에도 역시 토기장이의 비유가 나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유지하려면 세례요한의 외침처럼 ‘자신을 정비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잘못 했습니다.”를 연발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지금까지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새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죄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신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만일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회개하고서도 지금까지의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베드로후서 2:22절에서는,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날마다 새로운 삶의 길입니까? 아니면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거나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곳에 다시 눕는 그런 반복되는 삶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그에 합당한 삶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서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져 넣는다.”고 하셨습니다. ‘열매’란 ‘자신의 생활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행동이나 삶’을 말합니다. 이 열매의 구체적인 내용은 본문10-14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당시의 사회적인 환경에서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일반 군중들에게는 “옷 두벌이 있는 사람은 옷 없는 사람에게 한 벌을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없어 굶주리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 외에는 더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군병들에게는, “사람에게 포악한 짓을 삼가하고, 권력의 힘이 있다고 약한 사람을 억누르려고 하지 말고, 받는 월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습니다. 이 요구가 황당하거나 지키기 어려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지극히 당연한 요구입니다. 즉 지금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자신의 직분에서 정의롭고 정당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범위를 벗어나는 욕심을 내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을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심이, 우리 육신의 욕망이 스스로의 고난을 부른 것입니다. 이사야 59:2절에서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하려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욕심을 낸다고 더 높아지고, 욕심을 낸다고 더 많이 가지고, 욕심을 낸다고 더 행복하고 즐겁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2,3절에서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지켜야 할 삶을 살지 못하고 욕심을 내다가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가 총체적으로 부실하며 불신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계획이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이해하고 자신의 재능과 직분을 안다면 그것을 성실하게 행함으로서 충분한 것입니다. 즉 신뢰받을 수 있는 생활로 이웃에게 믿음을 심어가고, 따뜻한 마음을 퍼뜨려갈 차 한 잔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러한 생활 속에 복음을 실천하고 전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합당한 생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합당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시대가 어수선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행함으로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삶으로서 어둡고 혼란스러운 이때에 주변을 밝게 만들어가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을 무너뜨리는 작은 틈 /고전5:6-8, 왕상11:1-8/ 배의신 2018-02-06 13:09:10 read : 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고린도전서 5:6-8,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인생을 무너뜨리는 작은 틈 /고전5:6-8, 왕상11:1-8/ 배의신 2018-02-06 13:09:10 read : 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고린도전서 5:6-8,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열왕기상 11:1-8 우리가 가끔 사용하는 말 중에, ‘도루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은어’라는 항목을 찾아보면 두 종류의 물고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회귀성을 가진 20-30cm크기의 날씬한 물고기인‘은어’이며, 다른 하나는 ‘도루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잘 되다가 어그러져 원래 상태로 돌아갔을 때, ‘말짱 도루묵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생기게 된 유래가 있습니다. 조선 선조 때, 임금이 국난으로 인하여 궁궐을 떠나 피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식량이 귀하던 차에 마침 한 백성이 ‘묵’이라는 물고기를 임금께 바쳤습니다. 임금이 그 고기를 먹어보니 그 맛이 천하일품이었습니다. 그 맛이 하도 기가 막혀서 임금을 그 물고기의 이름을 ‘은어’라 부르도록 명했습니다. 물고기의 맛과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얼마 후, 난리는 끝이 났고 임금을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피난길에서 먹었던 은어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 요리를 해오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산해진미로 입맛이 길들여진 임금에게 그 물고기가 맛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토록 맛있었던 은어의 맛이 영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도루 ‘묵’이라고 불러라”고 명했습니다. 여기서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처지를 비유해서 잠언 26:11절에서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솔로몬의 경우와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사실, ‘묵’이라는 고기의 맛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입맛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음식이라도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의 맛을 달라집니다. 솔로몬의 경우에는 입맛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믿음이 변질 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믿음뿐만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믿음의 변질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변질은 무시하기 쉬운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천천히 속도를 높여가며 변질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생명체의 탄생이 하나의 작은 세포로부터 시작되며, 사람의 지식도, 일도 모두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33절에서 천국을 비유하시면서 ‘누룩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누룩의 확장성’을 말하는 것인데 좋은 쪽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멸망케 하는 죄와 악한 것의 시작도 역시 작은 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고 한 이 누룩의 비유는 좋지 않은 쪽으로 해석한 ‘누룩의 확장성’입니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저수지도 작은 개미가 구멍을 뚫는 것에서 시작하여 무너져 내린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하잘 것 없는 미혹이나 유혹을 방치하다가 결국 깊은 죄악의 구덩이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이 시간의 구약 본문에서 등장하는 솔로몬의 경우입니다. 이 두 본문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의 삶의 형태를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지금 나 자신의 믿음을 살펴봅시다. 솔로몬이 왕이 될 때의 믿음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가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의 내용이 그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8:25절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말씀 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로 좇아나서 이스라엘 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허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와 약속하신 대로 내가 그 말씀을 다 지켰으니 그 약속을 이루어주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기도대로 통치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기뻐하셨고,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부귀영화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열왕기상 8:61절에서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라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믿음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했던 솔로몬의 마음이 우상을 숭배하는 많은 이방 여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는 정략결혼을 포함하여 무려 일천 명의 처와 첩들을 두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왕의 법규를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명기 17:16-17절을 봅시다.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왕 된 자가 지켜야 하는 하나님이 명하신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그토록 훌륭하던 솔로몬의 믿음도 환경을 따라서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자리까지도 같이 가겠다.”던 제자들이 상황이 바뀌자 그들의 믿음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위하여 모두 도망가 버렸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아니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딱 잡아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26:3절에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아니하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마음이 뜨거워져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때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 때의 믿음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이 더욱 든든해지고 사랑이 더욱 깊어져 있습니까? 혹시 그 때와 달라진 환경과 상황 따라 변하여 있지나 않습니까? 요즈음 같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2. 믿음을 좌우하는 내 주변의 환경을 살펴봅시다. 환경의 힘은 대단합니다. 사람을 완전히 딴 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1920년 영국의 인류학자들이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도의 어느 지방에서 ‘늑대들의 무리 속에서 두 아이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인도로 가서 늑대 무리 속에 있는 아이들을 사로잡는데 성공했습니다. 두 아이는 여자였고, 늑대처럼 네 발로 뛰어다녔으며, 손을 사용하지 않고 입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날고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고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일반 사람들보다 귀가 훨씬 밝았습니다. 또한 야행성 동물과 마찬가지로 밝은 낮에는 잘 보지 못했지만, 어둠 속에서는 자유롭게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어떤 경위로 늑대 무리 속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환경이 그들을 늑대의 습성을 갖도록 했으며, 그들 또한 그 환경에 잘 적응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향한 든든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도 환경이었습니다. 열왕기상 3:1절에, “솔로몬이 애굽왕 바로로 더불어 인연을 맺어 그 딸을 취하고 데려다가 다윗 성에 두고…”라고 했습니다. 본문 1절에서는 ‘모압 여자들과 에돔, 시돈, 헷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법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2절에서 “여호와께서 일찌기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라고 했으며, 출애굽기 34:15-16절에서는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16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경고하신 이유는 ‘유혹의 작은 틈이 든든한 믿음의 둑을 능히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전쟁을 보면, 하나님께서 대부분의 점령지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예 죄를 부르는 모든 싹을 제거하라는 의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2절에서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고, 마가복음 9:43-47절에서는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인생을 무너뜨리는 죄악의 틈을 철저히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환경을 지배하기를 원하십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바람과 물결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은 곧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우리 성도들도 역시 세상의 환경을 지배할 수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물론 환경을 지배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유혹에 약한 육신의 의지를 부인하고, 그로인하여 다가오는 어려움과 핍박과 불이익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의 즐거움을 모두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3. 내 인생을 무너뜨리는 틈을 찾읍시다. ‘세월이 약이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마음이나 육신의 아픔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지고 치유된다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시간의 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은 개미 한 마리조차 죽이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물방울에 시간이라는 힘이 더해지면 바위도 뚫어버리는 위력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생애가 다해가는 말년에 우상을 위한 신전들을 세우고, 우상 숭배까지 했습니다(본문 4,5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징계를 결정하셨습니다. 그 위대하던 지혜와 믿음은 어디로 가고, 우상 숭배를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되었습니다. 한참 힘과 능력과 믿음이 왕성한 시기에는 유혹적인 환경들이 작은 물방울처럼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밀가루 반죽을 할 때에 넣는 누룩의 양은 밀가루의 양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적은 양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시간이라는 힘에 업혀서 바위를 뚫고, 온 반죽을 부풀게 만드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그 위대한 지혜로도 작은 죄악의 틈 하나가 자신을 무너뜨릴 줄 몰랐습니다. 아니, 알면서도 작다고 방치했을지도 모릅니다.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 작은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좋을 때는 천 명의 아내라 할지라도 그들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었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되는 아내들의 유혹에 나이 많은 솔로몬은 끝내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본문 9절에,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큰 핍박이나 환난이 아닙니다. 핍박이나 환난은 오히려 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반작용이 있습니다. 가장 큰 위협은 시간을 두고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작은 죄의 유혹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깊은 책망을 들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부터 사랑이 없었습니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켰으며,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핍박도 이겼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믿음이 식어가고 사랑을 잃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바쁘다고 예배에 한 번 빠지고, 피곤하다고 하루 기도를 쉬고,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 번 거짓말하고, 살림이 쪼들린다고 십일조 감사헌금 한 번씩 빼먹고, 나 살기 바빠서 남을 위한 봉사도 섬김도 미루다 보면, 이것이 시간의 힘을 업고 사단의 비호아래서 인생을 무너뜨릴 틈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틈을 계속 방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기 전에 잘라 내야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옛 습관들인 묵은 누룩을 내어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는 진정한 사랑을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의 입맛이 변하듯이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도 변할 수 있음을 잊지 맙시다. 또한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방치하고 있는 작은 습관과 유혹이 나를 무너뜨린다는 것도 기억합시다. 역시 작은 생활의 염려가 진리의 말씀을 자라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지금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거든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하고 실천하십시오. 그리하여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더욱 깊어지는 믿음으로, 주어진 환경을 다스리는 능력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시103:8-14/ 박한응목사 2017-09-04 15:00:50 read : 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가 오늘 저녁에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설교제목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시103:8-14/ 박한응목사 2017-09-04 15:00:50 read : 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할렐루야!!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가 오늘 저녁에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설교제목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의 속성』 속성은 그 사람의 성품을 말합니다. 속성이란 말의 뜻은 성품이나 성격, 또는 어떤 사물의 본질을 이루는 고유한 특성이나 성질 이라고 국어사전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성품을 알려고 할 때 그 사람의 취미가 무엇인가를 알아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취미가 고상하고 건전한 것이면 어느 정도 안심을 합니다. 특히 남녀가 처음 만나서 선을 본다던가 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취미가 무엇입니까?” 고 물어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즐기시는 속성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성품이나 속성을 논할진대 그 범위가 너무나 방대하여 이 짧은 시간에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오늘은 하나님의 그 속성 중에 일부만을 소개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떤 취미를 가지고 계신가? 하나님은 무슨 일을 즐겨하시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궁금하기도 하고 신비하기조차 한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은 만들기(창조)를 좋아하십니다. (1) 하나님의 성품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1일부터 6일까지 온 천지와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흠도 없고 점도 없고 완벽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좋게 창조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에는 유사품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가짜나 짝퉁 모조품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은 모두가 오리지널 제품입니다. (2) 하나님의 창조물은 계속하여 생성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물은 모두가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모두가 사람이 먹고 입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물을 이용하여 살아갑니다. 공기, 물, 바람, 천연자원, 등 인간이 사용하면 사용한 만큼 다시 생성이 됩니다. 한사람이 하루에 마시는 산소의 량은 약 2,000ℓ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는 60억 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인구가 마시는 량의 산소는 엄청난 량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다시 생성되기 때문에 산소가 고갈될 염려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은 고치시기를(재생)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고치시는 것도 좋아하십니다. 고장 나면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쳐서 다시 쓸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고치시는가? (1) 자연 환경을 고치십니다. (창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자연 환경은 자꾸만 오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염되고 있는 자연을 고치십니다. 아무리 오염이 된 자연일지라도 더 이상 오염이 되지 않게 하고 자연 그대로 보존만 잘 하면 자연은 다시 원상태로 회복이 됩니다. 바로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2) 피조물인 인간들이 죄를 범하여 사탄의 종이 된 것을 고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후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멸망의 자식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쓸모없는 인간을 고쳐서 하나님의 자녀로 쓰시려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마다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5:17)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집나간 탕자라도 회개시켜서 온전케 고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질병을 고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우리 인간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질병은 거의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불순종함으로 오는 것과, 마귀가 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질병에서 깨끗하게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출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시41:3)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병자를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마4:23-24)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예수님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도 고치시고, 38년 동안 누워있던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도 고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예>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가전제품도 고장이 나면 그 만든 회사에 가야 잘 고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농촌에서 사용하는 농기구나,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만든 회사에 가야 잘 고칠 수가 있듯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온전케 확실하게 고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이와 같이 하나님은 결코 버리는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고장이 나면 하나님이 고쳐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3. 하나님은 주기를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마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주시는가? (1) 생명과 호흡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겔37:9-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2) 천지 만물을 주셨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요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5) 물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신28:2-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간단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찌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 말씀에 이르기를 (사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드린 것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라기는 이와 같이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잊지 말고 그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14/ 산상보훈 강해 소금과 빛으로 살려면 /마5:13-16/ 박병은목사 2019-01-03 14/ 산상보훈 강해 소금과 빛으로 살려면 /마5:13-16/ 박병은목사 2019-01-03 03:54:24 read : 1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난 두 시간에 걸쳐 소금과 빛에 대하여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시간 소금과 빛인 성도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1. 소금과 빛인 성도 1) 왜 성도가 소금으로
14/ 산상보훈 강해 소금과 빛으로 살려면 /마5:13-16/ 박병은목사 2019-01-03 14/ 산상보훈 강해 소금과 빛으로 살려면 /마5:13-16/ 박병은목사 2019-01-03 03:54:24 read : 1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난 두 시간에 걸쳐 소금과 빛에 대하여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시간 소금과 빛인 성도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1. 소금과 빛인 성도 1) 왜 성도가 소금으로 빛으로 나타나야만 하나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실 때부터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즉 성도는 그렇게 되어 지도록 되어있는 존재들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것 같이(창 12:1-3),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으로 가지시고 우리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으로 가지시고 예수 안에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인 우리들에게 원래적으로 주어진 사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은 소금/ 빛이라고 설명하십니다. 2 기능 상실한 존재라면? 주님은, ‘나는 너희를 소금과 빛으로 만들었다. 소금이라면 맛을 잃을 수가 없고, 빛이라면 숨겨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소금이요, 빛인 너희는 그 맛이 나도록 되어있고, 빛은 드러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는 이러한 소금이며 빛인 신분이라고 할찌라도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또한 왜곡되어 지음 받은 목적대로 발휘되지 못할 경우입니다. 그럴 때에는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사실, 맛잃은 소금, 그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니며, 그 소금의 유용성은 상실한 것이 됩니다. 결국 그 소금은 사람들에게 밟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재활용이 불가능한 신분임을 명심하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재활용 사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료와 자재들을 재활용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음식 쓰레기와 같이 버리는 것들조차도 어떻게 하면 재활용할 수 있을 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만약 그 신분에 걸맞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다른 용도로 사용 가능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맛을 잃은 소금이 무슨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만, 과학이 발달한 요즘, 맛 잃은 소금으로 그 어떤 분야에서 사용 가능한 경우가 있는 지. 그러나 예수님 당시 맛 잃은 소금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존재요 , 그저 땅에 버려 밟고 지나가는 추락된 존재에 불과합니다. 빛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어두움 가운데 환히 비치는 전구 빛이 있는데 그 전구에 공급되던 전기가 갑자기 나갔다고 생각합시다. 그 전구는 더 이상 빛이 아닙니다. 빛의 기능이 정지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자질인 소금과 빛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들 디모데에게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 딤후 3:1-5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교훈의 말씀은 오늘날 사이비 교인들이 많은 시대에 어떤 사람들과 교제하여야 할 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참으로 소금이요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힘쓰는 자들과 함께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유감되게도 오늘날 성도이면서도 성도답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이들이 바로 경건의 모양은 내고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자기 욕심과 야욕을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배신하고 조급하고, 자만하며 무정한 사람들입니다. 요즈음 제 주변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교인입니다. 심지어 교역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맛 잃은 소금이요 빛을 잃은 빛입니다. 이러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더 이상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연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교회와 성도들이 있었는가? 초대 기독교 시대에 융성했던 교회들이 역사적으로 갑자기 사라진 역사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교회들입니다. 1-3세기 경 이 지역에는 St. Augustine과 같은 유명한 신학자가 배출되는 등 기독교 문화권이 활발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역사에서 이 교회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의 부패상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려 만연되어 이방인들에게 밟혀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그 흔적들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정말로 우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회 정치 경제 각 방면에 깊이 관여되어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문제는 이들리 소금으로 빛으로 그 자리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려고 힘쓰고 있는 줄 믿고 또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려되는 점 역시 없지 않습니다. 왜 교회가 세상의 온갖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되는 일을 이들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말합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야 말로 참으로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닙니까! 오늘날 한국 사회는 기독교에 대하여 결코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무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교회와 성도로 비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거듭나지 못한 성도들, 형식적 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진실된 교인들은 숨겨질 수 없고 세상 속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성도의 삶의 모습은 소금과 같고 빛과 같아서 그들의 존재는 소금처럼 맛이 있고 빛과 같이 등경 위에서 드러나 밝게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라고! 이 점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2. 관리에 힘써야 그러면 과연 소금이요 빛인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그 역할의 잘잘못의 여부를 어떻게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적극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잘 감당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 까요? 소금의 경우는 그 맛을 잃으면 소용이 없어서! 주님은 단호하게 더 이상의 사용가치가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맛을 잃으면 안되는 존재, 당연히 소금이면 짠 맛이 있게 마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짠 맛을 잃은 물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닌 것이라는 두려운 말씀입니다. 빛의 경우는 어떤까요? 옛날에는 빛은 내기 위해서는 기름과 심지가 필요했습니다. 용기에 기름을 넣고 그 기름에 심지를 담가서 그 심지에 불을 붙여 불을 밝혔습니다. 즉 기름과 심지는 불을 피우기 위한 꼭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당연히 불을 잘 피우기 위하여 이 기름 관리와 심지 관리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기름관리 우선 불을 피우기 위하여 등잔에 필요한 것은 기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열 처녀 비유(마 25)에서와 같이 등불에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 마 25:1-4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 마 25: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기름이 절대필수입니다. 기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심지가 좋고 길게 늘어뜨려 있더라도 기름이 없으면 불을 지속적으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죽이시고 부활시키심으로 우리의 구속 사역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귀한 구원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 요 1:3-5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요 1:9-14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귀한 구원의 진리, 생명이신 예수를 우리가 믿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무한하신 긍휼과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 놀라운 구속의 진리를 믿게 하신 성령께서 너희 속에 충만히 거하시기를 사모하고 노력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우리에게 예수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예수 생명이 우리 속에서 풍성하게 일하실 수 있도록 기름과 같이 지속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날마다 사모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2) 심지 관리 불이 없어서 촛불을 사용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촛불을 오해 사용하다 보면, 심지가 길어져서 연기가 나고, 불꽃이 제대로 붙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가위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심지를 다듬습니다. 그래서 심지의 불이 제대로 타서 환하게 되는 경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불이 제대로 역할을 하도록 하는 데도 조절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보듯이 심지 관리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제대로 불이 환하게 빛나게 하려면기름인 성령 하나님을 사모할 뿐 아니라, 심지인 우리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작업은 우리 스스로 영적 관리를 잘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날마다 말씀 묵상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심지를 손질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빛이요, 길입니다. 우리의 거울과 같습니다. *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생명이신 자신에게 와서 목마르지 말라고 초청하셨습니다. * 요 6:35,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신실한 성도는 이 귀한 진리를 의식하고 항상 말씀을 묵상하고 사모하는 일을 귀지 않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긴밀한 접촉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작업이 하나님으로부터 날마다 생명을 공급받는 길이요 이러한 작업을 성실하게 하는 이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시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마틴 로이드 목사는 “ 매일 8복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라” 고 권면하셨습니다. 둘째,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는 말씀을 마음속에 확실하게 정착하도록 자신을 다지는 작업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죄된 마음은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법대로 하려고 충동질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말씀이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혜와 구체적인 방법을 얻게 됩니다. 우리 주님도 기도로 당신에게 주어진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음을 기억합시다. * 막 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사도 바울도 권면합니다. *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자 하는 바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일을 위하여 깨어 항상 기도하라”입니다. 즉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이를 위하여 항상 깨어 기도하여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성도는 성령으로, 성령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저 입술만 들썩거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이 일을 위하여 역시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삶 속에서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성도인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관점과 기준에 의하여 적용하여 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예수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작은 예수로써 이 악한 세상에서 빛을 비추며 소금의 맛을 내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성도들이 많이 있을 때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구원의 역사는 우리 개인 속에서, 가정 속에서, 사회와 국가 속에서 풍성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결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렇게 할 때! 너희가!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는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날 교인이라고 하는 직분은 세상에서 많은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소금과 빛으로서의 신분에 걸 맞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는 생명이신 주님으로부터 빛은 받아야 합니다. 보름달이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이 세상에 환하게 빛을 비추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전히 빛을 받는 존재가 된다면, 우리의 주변은 환하게 비쳐지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소금으로서의 맛깔 나는 성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공통점은 이러한 사역 속에서 전제되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희생이라는 요소입니다. 소금이 물에 녹을 때, 초가 녹아질 때, 빛이 발하고 맛이 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진정 겸손과 희생으로 쓰임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상황들이 풍성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이 길이 고통스러운 길이라고 할찌라도 이러한 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결코 상급을 잊지 않으십니다. *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이 귀한 영광의 자리에 설 때까지 소금과 빛으로써 한 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15/ 산상보훈 강해 율법의 완성자 예수 /마5:17-20/ 박병은목사 2019-01-03 15/ 산상보훈 강해 율법의 완성자 예수 /마5:17-20/ 박병은목사 2019-01-03 03:51:07 read : 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최근에 한국에서는 안철수(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교수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어느 칼럼을 쓰시는 분은 “신기루인가 변화인가!”란 글을 쓰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매우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15/ 산상보훈 강해 율법의 완성자 예수 /마5:17-20/ 박병은목사 2019-01-03 15/ 산상보훈 강해 율법의 완성자 예수 /마5:17-20/ 박병은목사 2019-01-03 03:51:07 read : 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최근에 한국에서는 안철수(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교수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어느 칼럼을 쓰시는 분은 “신기루인가 변화인가!”란 글을 쓰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매우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 집안에 살고 있는 식구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을 잘 모르면서도 그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인식에 근거하며 쉽게 매도(罵倒)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나사렛 예수만큼 논란이 많이 되었던 사람도 역사상 드물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도 그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분입니다. 하나님, 인간, 메시야, 사회 혁명가, 민중 운동가, 종교인, 등등 다양한 명칭으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매도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신학계에는 Jesus Seminar 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장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33년 반의 인생 가운데 3년 반 동안 공생애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역 초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 사회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언사를 보고 나름대로 평가를 했습니다. * 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러한 평가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도 바울과 같이 가말리엘이라는 스승을 둔 적이 없습니다(행 22:3).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 배우지 받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학교에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학파에 소속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나타나 당시 종교적 의식과 규율과 예식을 파기하고 의도적으로 당시 유명한 율법 선생들을 비난하며 자신의 고유의 목소리를 강력하게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예수라는 사람에 대하여 매우 신경이 쓰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무슨 말을 하는지, 소문에 돌고 도는 행위가 사실인지, 어떤 행동을 하고 다니는 지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본문 17-20절의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중심 주제는 “의(righteousness)”입니다. 이는 이제까지 살펴 본 팔복의 말씀 중에 “의”을 매우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에 주린 자(6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10절), 그리고 20절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너희의 의가 더 나아야 한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의로움은 어떤 근거에서 정의가 내려지게 됩니까? 유대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본문에서 그 의의 정당성, 정의 그리고 그 근거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매우 중요한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17-1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 19-20절에서 성도와 율법을 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구절들에서 그 내용이 갖고 있는 중요성입니다. 즉 예수님의 교훈이 구약과 동일함,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교훈과 정면 충동하심의 정당성입니다. 이 시간 앞부분, 즉 예수님의 교훈과 구약의 교훈과의 동일성에 대한 말씀을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1. 오해를 불식시키심 사실 산상보훈의 말씀 가운데 8복의 말씀을 하시면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처음에는 3인칭으로 말씀하시더니(마 5:3-11), 그 다음은 2인칭으로(12-16), 그 다음은 1인칭으로 말씀하십니다(17-20). 이는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시고 최종적인 말씀을 하시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천국에 들어가지 위하여 즉 구원받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지를 가장 권위 있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의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각 동리마다 회당이 있어서 그곳에 있는 율법사들이 날마다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 근거는 구약 성경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율법서(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의로운 삶에 대하여 유대사회에 전래되어오고 있는 각종 교훈과 예식과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방법과 판이한 방법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는 이러한 군중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을 산상보훈 마지막 부분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 마 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러한 예수님에 대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를 오해할뿐만 아니라, 그를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창녀와 만나고 그들과 식사를 하는 죄인이요 그들의 친구하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율법을 폐지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때, 예수님은 이들이 비난할 만한 행동을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의 진정성을 그들은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그러한 금지된 행위를 율법이 제시하고 있다고 해석하였고 또한 적용하여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교훈을 근거로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라고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비난을 들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자유분방한 행동에 대하여 비난하는 사실을 의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 지를 밝히 해명하셨습니다. 자신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자가 아니고 도리어 완전하게 하는 역할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는 비난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발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발언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아야 합니다. 2. 구약(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 이 말씀에서 생각하게 되는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율법의 연속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구약 율법의 교훈들을 유효한 것으로 보셨는가? 둘째는 율법의 폐지성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을 주장하셨는가? 즉 이 두 문제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복음은 구약의 말씀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 주님의 말씀은 율법의 계속인가?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니면, 단절인가? 폐지인가? 주님은 이러한 주제를 한 마디로 해결하신 것입니다. 즉 자신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자가 아니요, 완전하게 하기 위해 온 자라(17절)고 주장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완전케 한다(plerosai)”는 말입니다. 이 말은 filled(채운다), finished(마치다) fulfilled(완성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의 완성자, 성취자, 종결자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0계명과 같은 도덕법과 시민들이 생활하면서 적용되는 시민법 즉 민법과 각종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사법 즉 의식법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선지서들은 구약의 예언서들로 선지자들이 율법을 설명하고 가르칠 뿐 아니라, 그 율법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통하여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는 역할을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구약의 말씀들을 한 마디로 통합하여 보는 시각을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각종 종교적 규례에 집착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증언)하는 것이니라.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나름 성경에 정통한 박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경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무지한 자들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중심이 자신임을 말씀과 행동으로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의 말씀들 즉 율법서와 시가서와 선지서 그리고 역사서들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로써 그 속에는 비유와 모형과 상징 그리고 예언들이 적절하게 담겨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 벧후 1:16-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베드로, 그는 변화산 상에서 예수님의 변화를 목격하고서(참고 마 17:1-8), 그 놀라운 관경이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 때 등장한 인물 즉 모세와 엘리야 즉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즉 더 확실한 예언 즉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의 기록된 말씀 즉 구약의 말씀이 있어서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며 날이 새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즉 깨닫기 까지 주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교훈합니다. 즉 구약이 주님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부인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말씀합니다. “구약은 신약을 품고 있고 신약은 구약을 드러낸다.” 성도들은 이 요약된 말씀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단절이 아니라 깊이 서로 연관된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입니다. 3. 율법의 완성자 예수 그래서 우리 주님은 구약의 말씀이 폐지되지 않고 역사적으로 예언된 말씀들이 자신을 통하여 반드시 성취된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한 자들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그 예로 초대교회 당시 Marcion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예수님은 자비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구약을 폐하고 신약의 말씀들만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자신들의 성경인 Marcion Bible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7절의 말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버렸습니다. “ I have come not to fulfill the law and the prophets, but to abolish them(내가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폐하러 왔다)” 주님은 구약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8절은 한글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17절과 18절 사이에는 왜냐하면(gar, because)라고 하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신 이유는 18절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서 일점일획이라는 말씀은 히브리어 글자의 dagesh, 헬라어의 요드와 같은 아주 작은 글자 한자 한자를 의미합니다. 즉 구약 성경의 그 어느 단어 하나도 버리거나 취소됨이 없이 다 성취될 것이기에 그러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약을 보고 계시는 지(구약관)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첫째, 주님은 구약성경의 완전성을 믿으셨습니다. 둘째, 주님은 자신이 율법을 성취해야함을 아셨습니다. 셋째, 주님은 그 율법에 순종하셨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이 점에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롬 8:2-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예수님의 오심은 율법이 요구하시는 바를 충족시키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시기 위하여 의롭지 못한 죄인들에게 의를 충족시키시기 위하여 스스로 죄에 대하여 율법이 정한 바 사망을 스스로 취하여서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어 온전한 의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결론 이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누구입니까? 정당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죄인들이 아닙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신약의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 롬 3:10-12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이룰 능력도 의롭게 될 그 어떤 의지와 능력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도 바울이 지적한 대로 만약 육신을 따르면 반드시 육신의 일 즉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우리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이 정한 엄중한 죄에 대한 심판을 스스로 당하시어 십자가에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완성하시고 구원의 길을 완성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시는 길 되시고 진리 되시고 생명 되신 예수를 믿어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서시기 바랍니다. 그 길은 종교적인 교훈과 절차에 따른 예식을 지킴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 힘쓸 때 이루어지는 구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롬 8:5-11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즉 말과 종교적 의식에 참여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 실천하여 참된 의를 드러낼 때 천국에 즉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16/ 산상보훈 강해 너희의 의가 더 낫지 못하면 /마5:17-20/ 박병은목사 2019-01-03 16/ 산상보훈 강해 너희의 의가 더 낫지 못하면 /마5:17-20/ 박병은목사 2019-01-03 03:48:05 read : 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윤리적인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 지상에서 여론 조사를 한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의 종교인들 중에서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천주교인
16/ 산상보훈 강해 너희의 의가 더 낫지 못하면 /마5:17-20/ 박병은목사 2019-01-03 16/ 산상보훈 강해 너희의 의가 더 낫지 못하면 /마5:17-20/ 박병은목사 2019-01-03 03:48:05 read : 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윤리적인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 지상에서 여론 조사를 한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의 종교인들 중에서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천주교인들이 가장 믿을 만하고, 그 다음은 원불교도, 마지막이 기독교인들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이들 종교인들 보다 더 많기도 하여 이러한 결과가 나왔으리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여러분들이 경험한 기독교인들의 신뢰도는 어느 정도라고 평가하시겠습니까? 고위공직자들을 선출할 때 제기 되는 문제는 그들의 날의 삶에 대한 높은 윤리적 행동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공직자 지망생들의 삶들은 다른 세상 서민들의 삶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보통 시민들의 삶의 방식을 초월한 타락된 윤리적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살아왔음이 밝혀져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봅니다. 만약 이들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라면 뭐 세상이 다 그러니까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유감 되게도 그들이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리 기독교는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정말로 신앙양심을 저버린, 말씀의 원리를 무시하는, 그 결과 세속화되어 타락된 저질 종교인들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열심히 모여서 요란스러운 콘서트와 같은 집회들을 활발하게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어떤 정직과 정의를 위한 양심집단으로서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심한 종교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소금의 맛을 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짓밟히는 한심한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드러나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성도들이 스스로 세상의 빛이요, 소금임을 자각하고 신실하게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에 집중하여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진정한 성도들이 있음을 믿고 싶습니다. 말씀 속에서 살펴 볼 때, 우리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윤리적 수준은 세상의 윤리적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하나는 17-1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 19-20절에서 성도와 율법을 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구절들에서 그 내용이 갖고 있는 중요성입니다. 그 중요함은 예수께서 이 산상보훈에서 가르치시는 모든 내용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이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훈과 동일할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사역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실로 우리 주님은 구약의 예언과 교훈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구원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그는 율법의 완성자, 종결자, 마침이라고 하셨습니다. *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제 다루려는 주제는 성도와 율법입니다. 19-20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이 구절, 20절은 상당히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의롭다고 여겨지는 부류의 사람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보다 더 의로워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1. 작은 계명 큰 계명 *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기서 주님은 작은 계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 중에서 작은 것, 큰 것을 구별하여 말씀하신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율법사들은 구별을 한 것 같습니다. 어느날 율법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 마 22:35-40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큰 계명 작은 계명을 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요, 핵심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즉 큰 계명, 작은 계명을 가려가며 그 경중에 따라 지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진정성을 갖고 준수해 갈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사실, 십계명의 구분은 1-4계명이 하나님 사랑, 5-10계명이 이웃 사랑의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 점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 약 2:8-10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사실, 예수님 당시 율법사들이 가르친 율법 준수사항 중에 해야 할 항목, 248가지, 해서는 안 될 항목 365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항들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고 그들은 이러한 항목을 준수하면 의롭다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시 율법사들의 교육 방식과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셨음을 봅니다. 2. 율법주의자들의 의 예수님께서는 20절에서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과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가 어느 정도이기에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놀랍게도 이들이 얼마나 경건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복음서 곳곳에서 이들 바리새인들의 행동에 대하여 비판하셨습니다. “바리새인(pharisees)”라는 말은 분리주의자라는 의미입니다. 구별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속인들과 자신들을 구별 지어서 바리새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것입니다. * 눅 18:9-13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우리는 이 기록에서 바리새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당하였고 또한 교만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무시하였습니다. 사실 율법은 금식을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일 년에 한번 정도 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하도록 지나치게 강조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건과 희생을 강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의미가 없고 또한 공허한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이들을 추종하여 따르는 서기관들의 종교적 행위를 비판하셨습니다. 3. 주님의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비판 주님께서는 이들 종교주의자들에 대하여 참으로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위선적 종교행위에 대해 가차 없이 지적하시며 비판하셨습니다. 1) 모세의 위치에서 대접받기 좋아하는 집단 * 마 23:1-2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 마 23:4-7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2) 구원에 가장 방해되는 집단 * 마 23:13,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3) 재물을 탐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집단 * 마 23:16-18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4) 율법의 근본정신을 상실한 위선 집단 * 마 23:23-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 마 15:4-9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5) 예수님의 저주받은 집단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저주하셨습니다. *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집요하게 이들을 비판하시고 저주까지 하셨을까요?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모세를 대신하여 스스로 구원을 베푸는 자 인양 처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에서 주장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하시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질 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사실, 바리새인들의 경건한 행동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의 위선을 낫낫이 발가벗기셨습니다. 그들의 위선과 거짓입니다. 말로는 번지르르하고 그럴듯합니다. 상당한 믿음이 있고 경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거짓이고 세속적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들의 의로움 보다 너희의 의가 더 나아야만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4. 어떻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과연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경건한 종교인들 보다 더 의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약에서 주님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 렘 31: 33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겔 36:25-28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 예언의 말씀들은 곧 성령의 임재하심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즉 참된 의와 경건은 인간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받아야만 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는 곧 거듭남의 역사를 통하여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연인 인간은 스스로 참된 경건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 지를 스스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스스로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모습이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을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몰두 하십니까? 결론 우리 모두는 위선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누구를 비판할 정당성이 나에게 눈곱만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이러한 저질의 존재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을 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이런 우리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강조하여 사모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 요 14:16-17, 16:13-14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진리의 영을 사모하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이 간곡하게 권면한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 악한 세상을 참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러한 삶의 모습은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니다. * 롬 12:9, 21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단순한 종교적 행위로서가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구원을 누리는 삶입니다. 아멘
17/ 산상보훈 강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1) /마5:21-26/ 박병은목사 2019-01-03 17/ 산상보훈 강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1) /마5:21-26/ 박병은목사 2019-01-03 03:45:06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사역은 율법을 파기하는 일이 아니라 완성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율법 선생님들로부터 배운 바에 따라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 선
17/ 산상보훈 강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1) /마5:21-26/ 박병은목사 2019-01-03 17/ 산상보훈 강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1) /마5:21-26/ 박병은목사 2019-01-03 03:45:06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사역은 율법을 파기하는 일이 아니라 완성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율법 선생님들로부터 배운 바에 따라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 선생들의 의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마 5:17, 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리고 주님은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산상보훈 말씀의 실제적인 교훈을 마 5:21-7:27에 걸쳐 살펴보게 됩니다. 이 주님의 산상보훈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해석이었고 또한 교훈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이 당시의 유명한 교사들과 확실한 차별성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 마 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1. 독특한 형식의 가르침 주님은 마 5:21-48에서 6가지 주제에 대한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살인(21절), 간음(27절), 이혼(31절), 맹세(33절), 보복(38절) 그리고 원수(43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당시 백성들이 생활 속에서 항상 겪으며 살아가는 주제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일상적인 주제들에 대한 당시의 가르침들에 대하여 원래 그 주제에 대한 율법을 재 해석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시도는 매우 독특한 시도였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이 특별한 가르침에 대하여 한 주제씩을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이기에 먼저 개론적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의 형식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마 5:21-48의 말씀의 공통적인 형식이 독특합니다. 독특한 형식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옛 사람에게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형식은 당시 유명한 교사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교훈은 청중들에게 당시 그들이 받은 가르침과 비교됩니다. 또한 이는 당시 율법 선생임을 자처하며 가르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의식하시며 말씀하신 것임을 알게 합니다. 당시 교사들이 가르치는 방식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어느 선생은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라는 식으로 어느 유명한 학파에 속한 선생의 설명을 가지고 가르쳤습니다. 전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율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항목이 권장항목 248 가지, 금지 항목 365가지였다고 합니다. 율법사들은 이러한 준수 항목을 학파와 학자에 따라 다양한 이론과 방법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당연히 백성들은 이러한 가르침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의 가르침의 교훈은 “했느냐, 못했느냐?” 로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은 이렇게 율법사들의 설명에 따라 행동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로서 자임하시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사들이 가르치는 대로 살았던 이유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한 후 유대인들은 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다 잃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부터 모세오경을 해설한 아람어로 쓰여진 미쉬라를 중심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서 귀환 후 일반 유대인들이 사용한 언어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도 아람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당시 천주교는 교황의 가르침을 성경보다 더 우위에 두고 교회의 가르침을 더 중요시 했습니다. 교인들은 무지한 라틴어로 집전하고 교회의 절차와 종교행위에 대한 것만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주교도들은 단지 미사에 참석하게 하고 그들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미신적인 교훈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부들은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여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늘날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여 집니다. 오늘날도 천주교회에서는 성경에도 찾아 볼 수 없는 마리아 숭배와 천사 숭배와 같은 교리들을 만들어 교인들을 비진리로 호도하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살펴볼 때, Wycliffe, Luther, Calvin과 같이 성경을 직접 연구한 신실한 성도들이 이에 반발하여 성경을 설명할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주장한 종교개혁의 진정한 정신과 가르침은 무엇이었습니까? “Back to Scripture!”입니다. 그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e)을 외쳤습니다. 교인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성경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외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성도들이 직접 성경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면, 이 당시의 유대인들과 종교개혁 당시의 무지한 교인들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더 성도들이 성경에 무지합니다. 직접 성경을 읽고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으로부터 교훈을 받지 않고 단순하게 들은 정보에 좌우됨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강력하게 교훈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도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 딤후 3:14-17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2. 율법의 최종권위자로서의 교훈 주님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하고 가르치시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는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강력하게 드러낸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모세의 율법의 바른 의미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은 단순한 율법 선생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분이시오,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 예수님이 바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 요 1:14-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산상보훈에서, 주님께서 하신 설명들은 새로운 율법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유대인들에게 제시한 율법의 원래의 의미(original meaning)와 정신(spirit)을 확인시키시고(confirming) 그들이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운 바를 교정하신(correcting)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은 주님의 사역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시고 완성하러 오신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3. 주님의 가르침의 의미 주님께서 하신 “옛사람들에게(by)”라고 하는 표현은 어떤 의미일까요? 당시 일반적인 가르침, 습관, 풍습을 의미합니다. 이는 당연하게 받아드리고 있는 전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비판을 하시고 또한 재 해석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율법의 의미를 재점검하고 삶을 새로운 시각에서 적용할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시 백성들이 스스로 율법을 읽고, 깨달은 바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들은 바에 대하여 해석하시고 가르치신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당시 백성들의 무지와 종교적인 습관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들은 바----”에 대하여 그 본래의 의미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배운 바에 대한 본래의 의가 훼손되고 왜곡됨에 대한 교정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이러한 교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율법의 중요성이 문자에 있지 않고 그 정신에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그 율법의 의미와 정신을 먼저 생각하고 그 항목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의미와 정신을 실천할 것인가를 생각하여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주님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 고후 3:6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마틴 로이드 목사님은 이 점에 주목하여 주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의 의미를 6 가지로 설명하였음을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이 가르침은 항목이 아닌 생명의 중요함 즉 영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둘째, 이 가르침은 결과보다 동기와 생각과 그에 따른 행동이 일치됨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바리새인들은 행동의 결과만을 중요시 했지만, 주님은 그러한 행동 이전의 동기와 의도를 중요시 하였다. 셋째, 율법은 금지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순종을 가르치고 있음을 가르친다. 이는 이웃에 대한 적극적이고 진실한 사랑 을 실천할 것을 교훈한다. 넷째, 율법은 규칙을 준수할 것을 압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순종과 헌신을 가르치고 있음을 강조한 교훈이다. 다섯째, 율법의 항목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고려하도록 하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있음을 가르치는 교훈이다. 이는 마치 선악을 구별하는 나무가 에덴동산 중앙에 있어서 그 열매를 먹고 안 먹고 그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과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어져 있는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이 교훈들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경건의 훈련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즉 예배, 금식, 기도, 구제등 과 같은 종교적 행위들은 단순히 형식적인 참여가 아니라 스스로 그 의미와 정신을 반복적으로 되새기며 항상 그 의미와 정신이 새롭게 살아나도록 성도의 삶속에서 실천되게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치신 것이다. 결론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교훈하셨습니다. * 엡 4:11-15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서 주님께서 소유하셨던 그 수준과 능력에 따지 도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그 정신과 의미를 분명한 어조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수준에 이르도록 힘쓸 것을 교훈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죽이는 율법적 사고와 행동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영과 정신의 중요성을 알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정신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정신과 의미가 우리의 삶 속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외식적, 형식적 신앙에서부터 벗어나 진정한 구원의 감격과 기쁨 속에서 참된 삶의 의미와 보람 그리고 사명을 감당하려는 열심히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아멘
2018 성탄절 2> 우리 가운데 오신 말씀 /요1:14/ 박병은목사 2019-01-03 2018 성탄절 2> 우리 가운데 오신 말씀 /요1:14/ 박병은목사 2019-01-03 07:47:29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 크리스마스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성탄절을 누가 가장 간절히 사모할까요? 아마도 성탄 절기를 가장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들이 아니라 성탄 절기에 대목을 노리는 기업과 상점 주인
2018 성탄절 2> 우리 가운데 오신 말씀 /요1:14/ 박병은목사 2019-01-03 2018 성탄절 2> 우리 가운데 오신 말씀 /요1:14/ 박병은목사 2019-01-03 07:47:29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 크리스마스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성탄절을 누가 가장 간절히 사모할까요? 아마도 성탄 절기를 가장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들이 아니라 성탄 절기에 대목을 노리는 기업과 상점 주인 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한 그룹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때를 맞아 마음에 두고 있던 연인에게 사랑의 고백하는 연인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날의 주인공인 예수 님은 뒷전으로 밀리고 다른 것이 전면에 등장한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신랑 신부가 없는 결혼식을 하객들끼리만 모여 잔치를 벌이는 형국입니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Christmas)라고 부르는 데, 이 말은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의 합성어로 ”그리스도께 예배를 드린다(Worship to Christ)"는 뜻입니다. 죄로 가득 찬 이 땅에 사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 경배하며 예수 님을 찬양하는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육신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이 성탄절에는 문자 그대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은 가장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날에 기쁘고 즐겁게 그리고 의미 있는 날로 기념하고 예배하는 것은 이를 통하여 어떤 특별한 그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죽었던 생명을 살려주시기 위하여 친히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33년 반을 사시며 인간의 모든 생로병사의 고난의 길을 친히 겪으시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보여주시고 이끌어주신 예수 님께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기 위함입니다. 이 시간 예수께서 오심을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 지를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 보려 합니다. 본문 말씀을 읽어 봅시다. *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 말씀이신 하나님의 오심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놀라운 사실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창세기 1:1의 말씀 형식으로 진술하고 있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 요 1:1a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모세가 창세기 1:1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라고 선언하면서 성경이 시작되는 것과 같이,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1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In the beginning was the Word)”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요한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and the Word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라고 그리고 2절에 와서는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절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즉 하나님이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분께서는 창조 사역도 성부 하나님과 함께 수행하셨다고 놀랍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 골 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점에서 우리는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께서 우리가 쉽게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신 인간(!) 예수로서만 인식할 수 없는 경지에 있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의 존재와 위상과 능력과 업적은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또한 상상도 할 수 없는 위치와 수준 그리고 영역에서 계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영적 지식입니까? 이 성탄 절기에 먼저 생각해야 할 근본적인 인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을 성육신(incarnation, 道成人身)이라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빌립보서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며 예수 님을 찬양했습니다. *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초대교회는 이 말씀을 신앙고백으로 예배시 마다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동격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낮아지셔서 인간이 되시고, 스스로 인간으로 낮아지신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구원해주시려고 스스로 낮아지셔서 완수하신 주님의 구속 사역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예수께서 스스로 원하셔서 이루신 우리를 향한 자발적인 사랑과 우리를 위한 희생과 이를 이루시기 위하여서 죽음으로써 이루신 구속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루신 구속 사역을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려내심으로 영원한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는 구원의 도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성탄절의 핵심 진리입니다. 즉 성탄의 메시지는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 희생, 그리고 사랑입니다. 2. 우리 가운데 오신 말씀 본문 14절에서 요한 사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말씀이신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인류의 역사 한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인간의 역사를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예수를 중심으로 BC와 AD로, 즉 예수 님 오시기 이전의 시간(Before Christ)과 예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Anno Domini-in the year of our Lord)대로 나누어 역사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Arnold Joseph Toynbee(1889-1975)는 말하기를 ”역사의 중심은 Jesus Christ 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역사(history)는 주님의 역사(His Story)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시고, 우리처럼 고통과 기쁨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며 사셨기에 우리는 예수 님과 동질성을 느끼게 되고 그분께서 이루신 구원의 도리는 큰 위로와 신뢰심을 갖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에서 다음과 같은 귀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고 우리에게 큰 위로의 말씀입니까! 왜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는 말씀의 더 중요한 뜻은 13절에서 언급된 대로 그가 우리와는 달리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 요한은 예수는 곧 말씀이며 동시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무엇으로 창조 사역을 수행하셨나요? 다름 아닌 ”말씀“입니다. 즉 창조의 말씀이신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빌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와 배경을 생각할 때 우리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비밀의 진리(실체)를 알게 될 때, 우리는 감격하며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감격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헬라어는 로고스(logos)라는 표현입니다. 이 logos는 성경에서는 ”말씀”으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logos란 단어는 ”시작(beginning), 기원(origin), 원리(principle)“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말씀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신성을 가진 신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즉 하나님입니다. 이는 말씀이 이처럼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기본 원리이자, 살아야 할 원칙이고, 그 길을 온전히 따라서 갈 때 마침내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는 내가 확인하기 전에는 인간이란 존재는 늘 의심하고 쉽게 따르지 못한다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로 인하여 제한된 인식체계를 가진 우리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신 예수 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던 것입니다. 즉, 로고스를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보고 듣고 체험하여 예수를 믿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방식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그런 방식으로 확증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 예수는 세상의 원리요, 시작이요, 새로운 질서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런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14절 중반 절에서 육신이 되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거하신다(dwell, tabernacle)"이란 표현은 두 가지의 성경의 배경을 가지고 사용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첫째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어 시내산 까지 인도한 후 시내산 밑에 백성들을 모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성막성전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동서남북으로 나눠 3 지파씩 배치하여 그 중심에 하나님께서 백성 가운데 계시는 것(민 2:7-13)을 배경으로 하고 두번째 배경은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 왕에게 지시한 한 징조를 말씀하신 예언(사 7:13) 즉 임마누엘(Immanuel)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God be with Us) 계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은 이렇게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징조입니다. *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가브리엘 천사는 요셉에게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어 마리아에게 임했음을 밝혔습니다. *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인과 함께하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성탄절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절기입니다. 성탄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나타난 극진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본받아 그대로 최선을 다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요일 4:7-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3. 영광스러운 독생자의 말씀 흔히 성탄절을 맞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고 하여 ”아들“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14절 중반 절에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영광(doxa)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타나심(presence)과 능력(power)의 출현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나타나신 방식과 능력은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보내신 독생자의 모습이며 이는 아버지와 같은 영광입니다. 즉 여기서 ”독생자”란 표현(mono genes)은 "오직(only), 유일한(unique)"의 의미로 우리가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느끼게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유일한 방식을 취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방식이 예수로 오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본자는 곧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말씀 이어서 사도 요한은 14절 하반 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말씀이 우리 가운데 계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은혜(Charis) 진리(Aletheia)는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으로 삼으시고 대응하시는 방식“을 표현한 용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이 없는 자들을 택하시고(은혜) 그 백성에게 신실함과 성실함으로 끝까지 함께 하시며(진실, 진리)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바에 대하여 말씀하셨음을 기억합니다. *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 어떤 장점이나 특징적인 요소를 보시고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선택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의 원리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진실하심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가 우리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 엡 1:5-7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안에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가 성탄의 비밀이요, 그것이 드러난 복음입니다.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로 오신 하나님은 우리 안에 말씀을 통하여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하십니다. 14절 하반 절에 충만(plelese)이란 표현은 한없이 흘러넘치는 물과 같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 은혜와 진리가 차고 넘치는 풍성함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결론 성탄 절기는 단순히 축제의 절기가 아닙니다. 내 개인의 소원을 이루고, 내가 원하던 것을 얻기 위한 기회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탄 사건은 하나님이신 말씀 곧 예수께서 죄로 인하여 캄캄한 절망과 저주의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고 거주하시며 하나님의 유일하시고 독특하신 구원의 방식으로 구속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사건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확신하며 내 속에 거주하고 있는 말씀을 믿고 사모할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역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답고 찬란한 구원의 도를 믿고 의지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임마누엘로 오신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우리 신앙 공동체 속에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하셔서 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을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됨을 풍성히 맛보시고 즐기시며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길 빕니다. * 골 1:18-20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기도> 말씀으로 오신 주 예수를 찬양합니다. 말씀으로 오신 주 예수를 환영합니다. 말씀의 주께서 우리 속에 장막을 키시고 거주하시며 충만한 진리와 충만한 은혜로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아멘
2018년 종려주일, 성찬사 1>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21:6-9/ 박병은목사 2019-01-04 2018년 종려주일, 성찬사 1>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21:6-9/ 박병은목사 2019-01-04 14:14:58 read : 1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이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셔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어린 나귀의 등에 타시고 입성하시는 것을 기념하고 찬양
2018년 종려주일, 성찬사 1>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21:6-9/ 박병은목사 2019-01-04 2018년 종려주일, 성찬사 1>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마21:6-9/ 박병은목사 2019-01-04 14:14:58 read : 1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이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셔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어린 나귀의 등에 타시고 입성하시는 것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주일입니다. 1. 환영받는 메시아 당시 예루살렘 성의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환영하며 맞았습니다. 어떤 이는 옷을 벗어서 주님 오시는 길을 존귀하게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야자수잎을 꺾어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마 21:5-9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복음서의 저자 마태가 이 사건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예언들의 성취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사야와 스가랴는 이렇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실제로 구원사역 즉 십자가로 가시는 일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주님은 이 주간 금요일에 체포, 재판, 처형까지 되십니다. * 사 62:11a 여호와께서 땅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즉 예수께서 이들 선지자가 예언한 왕 곧 메시아로 오셨고, 예수께서는 이 예언의 말씀 따라 어린 나귀의 등에 타시고 수많은 사람이 흔드는 종려나무가지의 환영을 받으시며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오시는 메시아를 영접하기 위해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외쳤습니다. 여기서 “호산나”란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확신하고 그를 다윗의 자손 즉 왕으로 영접하면서 그의 통치권의 행사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기대하며 사방에서 감동적으로 소리쳤던 것입니다. 물론 복음서 기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무리가 이를 비판하며 예수를 배척하는 세력들이 있기는 하지만 숱한 서민들은 그동안 말씀과 행위로 메시아가 지녀야 할 능력을 유감없이 펼쳐 보여준 나사렛 예수를 깊이 존경하였고 또한 그를 뜨겁게 기다리며 기꺼이 영접했던 것입니다. 2. 메시아께서 하신 일들 그러면 이렇게 입성하신 예수께서 이후에 하신 일들은 무엇일까요? 다음 몇 가지 중요한 사역을 시행하셨습니다. 첫째, 성전 숙청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셨습니다. 이 성전은 헤롯이 지은 성전입니다. 주님은 그때 성전 뜰에서 제사장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허용 아래 제사와 관련된 장사, 예를 들면 환전상, 비둘기를 비롯한 각종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꼭 필요한 제물을 파는 장사 등이 설치한 좌판들을 뒤집어엎으면서 말씀하십니다. * 마 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 즉 성전 본연의 기능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시며 실제적인 행동으로 개혁을 주도하셨습니다. 즉 강도의 소굴이 된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의로운 분노를 표출하신 것입니다. 둘째, 구속의 대업을 완수하시기 위한 마지막 시도입니다. 그것들은 종교지도자들과의 최후의 논쟁, 종말론에 대한 교훈 그리고 다랑방강화에서의 언약 체결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먼저 종교지도자와의 최후의 논쟁은 성전 숙청 후 성전 바깥으로 물러나 하루를 지내신 후 그다음 날에 벌어집니다. 이때 주님은 기도의 중요성과 능력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마 21:19-21에서 다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길 가운데에 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를 저주하시자 곧 말라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능력을 강조하시며 자신이 기도로 이 사역을 수행하고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 마 21:21-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2) 그리고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 전날 성전 숙청 사건에 대하여 따지는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살벌한 논쟁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 마 21:23-24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주님은 이들과의 논쟁에서 세례요한의 권위에 대한 주님의 반문과 포도원 농부의 반란적인 행위에 대한 비유를 통하여 이들 종교지도자의 부패와 위선을 여지없이 들어내시며 냉소적으로 비난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체포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냈으나 시도하지는 못했다고 복음서 저자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마 21:43-4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3) 다음은 종말론에 관한 교훈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2~23장에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부패상을 계속하여 지적하는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 24~25장에서 종말론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징조와 대책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가까이는 웅장한 예루살렘 성의 멸망에 대한 교훈과 멀리는 종말에 벌어질 전 세계적인 사건들과 자연현상 그리고 종말의 징조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 마 24:3-14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다 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 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우리는 이 말세에 대한 교훈들은 비유에서 이미 가르쳐 주신 내용과 연결되어 공통적인 교훈을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며 항상 깨어있으라!”는 교훈입니다. * 마 25:13 그런즉 깨어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4) 그리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 마 25:31-3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 언약식 체결 * 마 26:26-28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우리는 복음서를 통하여 우리 주께서 마지막 유월절은 제자들과 함께 보내시기 위하여 무척 신경을 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식을 이들과 체결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는 자신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임박한 때를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 눅 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요한복음 13~17장으로 이어지는 기록들은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가르치시고 또 마지막으로 함께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입니다. 우리는 일련의 이러한 기록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치밀하게 자신의 구속사역을 완수하시기 이하여 행동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즉 주께서는 구약에서 예언하신 말씀대로 충실하게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던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 시간 이러한 주님의 구속사역의 마지막 한 주간의 사건들을 묵상하며 이제 주께서 제정하신 성찬 예식을 갖고자 합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마음속 깊이 받아드리며 그 날의 도래를 사모하시며 왕 되신 주님을 환영하시고 그분께서 마련하신 언약 잔치 예식에 모두 참석하시기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이 예식을 통하여 주님과 연합된 한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거룩하고 순결한 신부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22/ 산상보훈 강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6): 보복 /마5:38-42/ 박병은목사 2019-01-03 22/ 산상보훈 강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6): 보복 /마5:38-42/ 박병은목사 2019-01-03 03:29:03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율법의 최종 권위자로써 당시 율법을 잘못 적용하여 가르쳐지고 있는 것들을 바로 잡으시는 여섯 가지의 주제 중에서 다섯 번째인 보복(38절)에 관한 교훈
22/ 산상보훈 강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6): 보복 /마5:38-42/ 박병은목사 2019-01-03 22/ 산상보훈 강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6): 보복 /마5:38-42/ 박병은목사 2019-01-03 03:29:03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율법의 최종 권위자로써 당시 율법을 잘못 적용하여 가르쳐지고 있는 것들을 바로 잡으시는 여섯 가지의 주제 중에서 다섯 번째인 보복(38절)에 관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읽은 분들 가운데는 마음이 불편한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 가르침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주님은 옛사람들이 가르친 것을 교정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악한 자들이 하는 행동이기에 그들을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더 적극적인 베품와 봉사와 헌신을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마 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소위 대체법(lex talionis, 代替法)이라는 것은 지금도 적용되는 유용한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응하는 것으로 대체하여 부상(응)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제시하는 이 대체법의 배경에는 상당히 예민한 상황이 고려된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인권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보복 수단 옛 사람들이 가르친 이 대체법은 출 21:23-25, 레 24:19-22, 신 19:21에 기록되어있습니다. * 출 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 레 24:19-22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 외국인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히 할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 신 19:18-21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 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후부터는 이런 악을 너희 중에서 다시 행하지 아니하리라.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우리는 이 말씀들에서 재미있는 상황을 알게 됩니다. 즉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이들 형법에 해당하는 이 법들은 일반 시민들에게 명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재판장에게 명하신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즉 백성들 간의 문제로 소송이 발생하였을 경우 이를 다루는 판사는 상응법에 따라 “생명에는 생명,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만큼에 상응하는 대응을 하도록 판결하라는 취지입니다. 이러한 시행에는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즉 자국민의 법에 따라 이방인에게도 시행하여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한편 이 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종(노예)에 관하여서는 신체의 일부가 훼손되었을 경우는 그 종을 방면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 출 21:26-27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을 것이며, 그 남종의 한 이나 여종의 한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 대신에 그를 놓을지니라. 우리는 일련의 이러한 법의 제정을 볼 때 그 의도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통하여 백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깊이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최초의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의 타락상은 상상을 초월해서 나타났습니다. 그 예를 모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류의 최초의 범죄가 무엇입니까? 동생의 제사를 받아드려지고 자기의 제사는 거절당한 가인은 아벨을 쳐 죽인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라멕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였습니다. * 창 4:23-24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이러한 기록들은 죄로 인하여 타락된 인간이 갖는 잔인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복수심에 불타 무서운 보복이 잔인하게 저지르게 되는 지를 아시고 최소한의 대응으로 대체법을 제시하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인권을 최대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인 것입니다. 즉 생명에는 생명,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이와 비슷한 법을 제정하여 시행해 왔습니다. 이는 지금도 이와 비슷한 법적 판단을 하여 법정에서 시행하고 있는 줄 압니다. 즉 범죄 행위에 대한 형벌로써 그에 상응한 처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인의 경우에는 최고의 형벌로 사형(capital punishment)을 허용하기도 합니다. 사실, Saudi Arabia와 같은 이슬람국가들에서는 지금도 Maximum Punishment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인의 경우 그 생명에 해당하는 돈(blood-money)으로 해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와 같은 평화주의자(pacifist)들은 법을 시행하는 경찰, 재판소, 심지어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Amish들은 스스로 평화주의자임을 주장하며 군대도 가지 않고 경찰서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경찰에게 신고하여 조사하게 되자,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논란이 되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과 인간의 타락된 현실들은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폭력은 폭력을 낳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경찰과 검사와 판사가 없으면, 사람들은 무정부 상태가 되어 더욱 더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고, 재판에 의하여 처벌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재판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계속하여 보복할 것이기에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 바리새인들의 가르침 여기서 문제는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법적조항들을 일반인들에게도 허용하여 일반화 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개인이 아니라 재판관에게 주어진 이 법을 무시하고 일반 시민들에게 시행하도록 권장하였던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지요. 즉 억제조항이 권장조항으로 바뀐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한 율법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명령으로 바뀌어 버렸던 것입니다. 3. 주님의 가르침 * 마 5:39-4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주님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갖고자 하면, 겉옷도 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동행하고, 달라고 하면 주고 꾸고자 하면 거절하지 말라!’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의 핵심을 무엇일까요? 그저 악한 자들을 대적하지 말고 오직 유화주의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일까요? 흔히들 기독교인은 유화론(宥和論)자들이며 온정주의(溫情主義)자라고 하고, 또한 우리 스스로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돈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법적으로 따지지 말고 화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싸우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조화롭게 지내며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법을 초월하고, 규율을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까? 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않고 또한 규율을 초월하여 마음대로 행동해도 그저 인정해 주고 참아주고 허용해 주어도 좋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정하신 것임을 믿습니다(롬 13:1). 그래서 치안이 경찰과 헌병과 판사에 의하여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이 가르침이 일반화 되어 믿는 사람은 누구나 유화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평화론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당연히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하고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 요 18:22-23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때린 제사장의 하속에게 당신이 정당했는데도 까닭 없이 맞으신 것을 따지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모욕당했음을 항의 한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요구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즉 자신이 모욕당하는 것은 인정하셨으나, 법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사안에 대하여서는 항의하신 것입니다. * 행 16: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여기서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 고난에 대하여는 수용적입니다. 그러나 구타와 고문당한 것에 대하여 법적 문제를 제기한 것은 법적인 점에 있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성도들이 세상의 법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포기하면서 굴욕적으로 참고 온정을 베풀라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이 법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교훈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8복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들” 즉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시는 교훈이지, 일반적인 세상의 사법적인 문제로 다루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하는 것에 대하여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 요 3:2-3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 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 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주님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영적 거듭남”에 있었습니다. 즉 산상보훈의 교훈 역시 이 말씀대로 문자 그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실제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제자로서의 삶을 나타낼 것인가를 깊이 고민할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악한 자들과 대적하고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독특한 천국시민으로서의 원리와 방법을 적용하여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악행 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음을 기억합니다. *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문제는 우리 주님의 이 가르침에서 다음의 사안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거듭난 자로서의 바른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첫째, 율법의 문자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spirit)과 의미가 드러나도록 사는 것입니다. * 막 12: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율법의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며 그 정신은 무엇입니까? 즉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법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 법의 정신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길 것을 교훈하십니다. 둘째, 세상적인 소욕을 죽이고 법적으로 허용된 그 이상으로 적극적인 섬김과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자연인이 갖고 있는 자기 보호, 자기 방어의 방식에 대한 도전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거듭난 참된 성도라면 어느 누구든지 반응하게 마련인 복수심에 따라 행동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깊은 성찰과 대응을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에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구타를 당하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소송에 걸리든지(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하기 싫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든지( 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받을 때(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든지 언제든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결론 오늘날은 철저하게 물질적이고 법적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잔인 할 정도로 메마른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앙갚고, 되갚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니 받은 것에 몇 배의 보복을 경고하고 또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져서 당연히 여기를 세상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긍휼과 자비가 메마른 삭막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세상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살 것을 가르쳤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야 한다. 이것은 율법에도 있는 바이며,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율법에 접촉이 되지 않은다고 하면서 그러한 방식의 삶이 율법적 삶이라고 적극적으로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법에 그러한 조항을 두신 것은 인간의 죄성의 타락상을 잘 아시고 인권을 보호하시기 위한 임시적인 조처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정신에 따라 복수의 칼을 갈며 대체법을 적용하여 살아갈 것이 아니라,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ㅇ;것이 주님의 제자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결코 성도는 유약한 자가 아닙니다. 또한 단순한 평화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거듭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주님의 제자의 길인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이땅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의 삶인 줄 압니다. 아멘
27/ 산상보훈 강해 아비를 닮은 자녀입니까? /마5:46-48/ 박병은목사 2019-01-03 27/ 산상보훈 강해 아비를 닮은 자녀입니까? /마5:46-48/ 박병은목사 2019-01-03 03:11:56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새해가 시작되어 한 주간이 지났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작하고 계십니까? 계획하신바 모든 일에 우리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자기만의 특별한 그 무엇
27/ 산상보훈 강해 아비를 닮은 자녀입니까? /마5:46-48/ 박병은목사 2019-01-03 27/ 산상보훈 강해 아비를 닮은 자녀입니까? /마5:46-48/ 박병은목사 2019-01-03 03:11:56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새해가 시작되어 한 주간이 지났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작하고 계십니까? 계획하신바 모든 일에 우리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자기만의 특별한 그 무엇이 있어야 대접받고 인정받는 시대입니다. 그저 평범해서는 살아가기 힘든 시대입니다. 사실, 무언가 독특하고 특징 있는 사람은 흥미롭고 재미있고 또한 유용하여 어느 곳에서나 필요한 분야에서 쓰임 받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무언가 독특한 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의 방식,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특화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보훈의 말씀을 통하여 이 점을 분명하게 각인시키시며 교훈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표현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소금과 빛으로서의 존재이기에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 지를 다양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교훈의 결론으로 마 5: 48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자식임을 알고 아버지를 닮아 온전한 삶을 살아갈 것을 의미합니다. *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서 그 부모를 닮고 그 부모에게 배워 삶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동물은 물론이고 사람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자기 부모로부터 인생을 배워 닮아갑니다. 이는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 그렇게 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이고 자연적인 법칙이며 그렇게 주어진 유전적 요소(DNA)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식만이 갖고 있는바 독특한 외모요, 성격이요, 삶의 습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이 점을 산상보훈을 통하여 분명히 하며 교훈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의 이 교훈들은 이 세상의 기준과 가치 그리고 삶의 방식으로 보면 도저히 적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믿는 자들에게 조차 무시되곤 합니다. 그리고 값싼 복음만을 좋아하며 추구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세상은 과연 기독교인이 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인가? 하고 묻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과연 오늘날 성도들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인가요? 최근 한국 사회에 있어서는 기독교인들의 삶의 형태에 대하여 무차별 비판합니다. 유감 되게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이제 도를 넘어서서 반 기독교적 여론이 형성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은 더 이상 기독교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연유에는 외부적인 요인도 있겠으나, 사실 엄밀하게 살펴보면, 내부적인 문제 즉 기독교인으로서의 본질적인 면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사회적인 냉소는 외부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내부적인 원인에 기인하는 요소가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 점에 대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자식이 아버지를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이 있지 진정으로 예수 새생명을 얻어 거듭나 아버지를 알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철이 들지 못하여 아버지의 교훈을 잊고 자식으로서 본분으로 제대로 구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심각하게 고민하며 자신의 삶을 점검하여 고쳐 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닮도록 힘써야 합니다. 1. 상식을 초월한 가치와 기준으로 살아가는 성도 주님께서는 46절과 47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 마 5:46-47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당시 세리는 백성들로부터 이방인인 로마 정권에 빌붙어 민족을 이용하고 등쳐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못된 부류라고 비난받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개와 같이 취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들이 하고 있는 수준의 교제와 예절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세리와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즉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과 삶의 방식은 끼리끼리 뭉쳐서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형제끼리만 서로 인사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은 비록 그가 기독교인이라 할 찌라도 온전한 제자의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기에 끼리끼리만의 교제 정도로는 부족하고 제자들이라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친절하게 지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으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일차적으로 이런 측면이 강하다고 봅니다. 세상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끼리 교제하는 것을 시기 질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 소, 영”이란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성경은 믿는 자에 대한 관계성을 강조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대하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진실하게 마음을 열고 교제할 것을 가르칩니다. *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 세상의 어둡고 썩어가고 있는 곳을 찾아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역할을 하여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어 맛깔 나는 세상, 환한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보다 더 탁월한 가치와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요즈음 TV나 Phone을 만들어 내는 회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더 얇게, 작게, smart하게 만드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그 기준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세운 윤리적, 도덕적 가치와 기준 보다 더 차별적인 우위의 기준을 설정하여야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설명하시면서 당시 율법적 기준에 따라 행동함을 당연시 하고 그 기준과 수준을 지키도록 가르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교훈을 뛰어 넘는 가르침을 마 5: 21-44에서 상세하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해주신 교훈의 방식은 “옛 사람에게 들은 바 ---나는 너희엑 이르노니---”의 형식입니다. 그 속에는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주제들을 담고 있습니다. 1) 미움의 문제 -분노와 욕(21-22), 2) 제사보다 먼저 화해(23-26), 3) 간음 문제(27-28), 4) 범죄를 근절하기 위하여(29-30), 5) 이혼, 간음 문제(31-32), 6) 언어생활(33-37), 7) 복수의 문제(38-42), 이웃 사랑과 원수를 대함(43-44) 등등 이 모든 교훈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신분인 성도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닮아 살아가야 할 마음과 생각 그리고 행동의 교훈들입니다. 이 교훈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새 윤리, 새 가치, 새로운 공동체를 예시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아들로써 이 땅에 오셔서 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러한 주님의 교훈을 따라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려고 힘쓴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고 천국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동기가 어떠하던지 결과가 중요합니다. 과정이 어떻든지 결과만 좋으면 됩니다. 윤리적인 것은 하나의 명분이요, 사치적인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교훈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기준이요, 가치요, 윤리적 수준입니다. 그것은 결과보다 동기를 더 중시합니다. 외모보다 속마음으로 중시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닮아 살아가는 모습니다. 2. 아버지를 닮게 마련인 자식 자식은 당연히 자기 부모를 닮게 마련입니다. 48절의 말씀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닮아 살아간 수많은 성도들(Peter, Paul, Augustine, Calvin,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의 놀라운 신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벧후 1:3-4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사실, 예수를 믿게 된 사실은 신비스러운 능력이 우리 속사람에게 미쳐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이는 창조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생명의 빛을 우리 속에 비추셔서 이루어 주신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러기에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당연히 아버지 하나님을 본받아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뜻을 추구하며 그의 행동양식을 따라 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 지를 살펴보는 자기점검은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실, 단지 정직과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만 측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분명히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 정도의 윤리적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래도 세상에서 인정받는다고 믿고 예수를 믿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러한 윤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더 높은 가치와 기준에 의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결과보다는 동기와 마음과 추구함이 온 세상을 향하여 참된 가치와 수준을 제시하며 구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요구하시는 바를 순종하여 실행함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그 요구들을 적당하게 지켜나가려 하지만, 성도들은 속사람이 기꺼이 하나님께서 양심에 심어놓으신 법을 즐겁게 순종하려 합니다. 그것은 마음과 동기로부터 출발하는 자발적 순종의 과정입니다. 성도는 매사에 마음의 동기에 집착하여 스스로의 행동양식을 평가합니다.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추구하며 겸손과 온유로 온 세상과 화평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식의 도리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 이후의 삶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심판 받아 지옥에 갈 것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당연히 이들은 천국에 대하여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현실에 있어서 최선의 가치와 수준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설 그 순간을 의식하고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를 기뻐하며 감사하게 생각하고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참된 성도는 찬송가 441장을 작사한 Wesley가 “나는 죄와 악함이 가득하게 찬 자”라고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항상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도의 세상인들과의 차이점은 환란과 죽음을 맞는 태도에서 분명해 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좌절과 절망 가운데 빠져 자포자기 하지만, 성도들은 화란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아 끈기 있게 기다리며 감당하려 합니다. 심지어 죽음을 맞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성도들은 그 이루 자신에게 주어질 영광스러운 구원을 바라보고 기꺼이 죽음을 맞으며 적극적으로 대합니다. 성도는 새로운 소망으로 죽음 이후에 주어질 영광을 바라봅니다. * 히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러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 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천국 시민으로서의 가치와 방법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 세상 가운데 그러한 것들을 실현하여 나가도록 노력합니다. 3.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항상 유지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와 항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 벧전1: 22-23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바르게 자란 자식은 멀리 떨어져서 산다고 하더라도 항상 부모와 연락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삶의 원리와 지혜 그리고 실천할 능력을 얻으려 합니다. 그는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과 항시 관계를 맺는 수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미 예수 안에서 거듭난 백성들이기에 어떤 행위로 그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난 영적생명을 얻는 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신령한 젖인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알려고 하고 들으려고 하여 그 음성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삶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갈 윤리적인 원리를 제세해 주셔습니다. *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것이 하나님을 아비로 둔 주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며 이 악한 세상 가운데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올해 이러한 원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하심을 이루어 가는 성숙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32/ 산상보훈 강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5) 기도 4 /마6:9-13/ 박병은목사 2019-01-03 32/ 산상보훈 강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5) 기도 4 /마6:9-13/ 박병은목사 2019-01-03 02:45:51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드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첫 번째 기도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 대하여 공부했
32/ 산상보훈 강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5) 기도 4 /마6:9-13/ 박병은목사 2019-01-03 32/ 산상보훈 강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5) 기도 4 /마6:9-13/ 박병은목사 2019-01-03 02:45:51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드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첫 번째 기도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의 삶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그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어지기를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 방법은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어떤 일들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인간의 모든 일들 가운데서 개입하시고 일하셔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 2 번째의 기도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두 번째 기도는 “나라이 임하옵시며”입니다. 이 기도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구함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소요리문답 질문 123번은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합니다. * 질문/ 두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 답/ “나라이 임하옵시며”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영으로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어 우리가 더욱 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기를, 하나님의 교회를 보존하며 부흥시켜 주시기를,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단의 행사들,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세력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반항하여 갖는 모든 사악한 계획들이 만유 안에서 만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이뤄질 때까지 파괴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 먼저 이 간구의 표현에 있어서 약간의 논란이 되고 있는 바 번역상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글의 바른 표현으로는 “나라이” 가 아니라, “나라가”가 맞습니다. 사실, 원문에는 “hye basileia theou (your kingdom)”이라고 되어있는데, 개혁성경에서는 “당신의(your)”라는 말을 빼고 번역했습니다. 즉 이 두 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 주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 당신의 나라를 오도록 해 주세요!”입니다.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나라”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나라가 무엇입니까? 흔히 나라라고 하면 세 가지 요소를 생각하게 됩니다. 국민, 영토 그리고 주권입니다. 한때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었습니다. 그때 백성, 국토는 없어지지 않고 그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주권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한 나라가 나라 구실하려면 다른 나라로부터 그 나라에 주권이 있음을 확실하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라의 주권이 어떻게 인정받게 됩니까? 주권은 어떻게 발휘되게 됩니까? 그것은 나라의 통치자가 미치는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곳을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라의 주권이 얼마나 강력하게 온전히 반영되어 가느냐를 의미합니다. 2. 하나님의 나라의 형성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이니 하나님이 통치자이십니다. 그리고 영토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곳입니다. 그리고 백성은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드리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세우셨습니까? 성경은 이 놀랍고 비밀스러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당신의 뜻을 계시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주권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 땅에 펼쳐 보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 히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성경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이 점을 확실하게 부각시키셨고 사도들도 이 점에 대하여 분명하게 사역의 초점을 맞추었던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의 공생애 첫 일성이 이를 증명합니다. * 막 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뿐만 아니라, 주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역에 주력하셨음을 봅니다. * 눅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모든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씨부리는 비유를 포함하여 각종 비유(마 13장)로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능력을 온갖 이적과 기사로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달려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40일을 함께 계시면서 이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그 나라의 확정을 위한 사명을 그 제자들에게 맡겨주셨던 것입니다. * 행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사도들은 이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그들의 평생의 사역으로 알고 헌신하여 전파하셨던 것입니다. * 행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전파 사역은 신약의 성도들만 담당했던 사역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구약의 신실한 성도들도 비록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살려고 하지 않고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 히 11:13-16a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를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구원의 진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파괴된 당신의 나라를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이 진리를 구약시대에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그 나라의 진실(복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권세 하에서 죄와 악의 세력 가운데 얽매어 있는 사탄의 나라 백성들을 구원하시어 당신의 나라 백성 삼으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교회에 그 임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구원의 진리 즉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단순한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 요 3:3, 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주님은 선언하셨습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천국을 볼 수 있고 또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기에 육적, 세상적인 생각과 개념과 방법으로는 이 거듭날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그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부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말미암아서만 되는 것입니다. *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중생의 사역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 즉 말씀과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거듭남의 사역은 교회에 주어져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 엡 3:10-11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정리하면,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시고 다스려 가시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인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나라의 충성된 백성이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결론적으로 기도에 대하여 교훈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도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들을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우리의 삶 속에서 온전히 드러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통치는 세상의 통치와 달라 공의롭고 정당한 다스림입니다. 성도는 주기도문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드러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즉 나의 마음속에 있는 죄된 의식과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게 해주시고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공의로운 말씀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해 주시기를 구함 그러기에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하는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확실하게 세워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 아들의 몸을 버리셔서 피흘려 죄값을 치루시고 구속하여 모으신 고백적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하는 기도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에서 강조하였듯이 하나님의 통치권이 교회 사역을 통하여 온전하게 세워지고 확실하고 강력하게 시행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가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가 어떤 일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날 교회의 부흥을 단순히 숫자적인 증가와 양적 확장을 의미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교인이 많아지고 공간을 넓게 하여 수많은 행사를 통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면 좋겠지요. 오늘날 교회가 하고 있는 바 다양한 행사들이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일들을 하면 좋겠지만, 그러한 교회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거나 부러워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친교장, 살아가는 데 유익을 주고받는 정보 center가 아닙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교회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또한 얻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그러한 활동을 통하여 영혼의 거듭남의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심각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존재와 사명을 드러내는 가장 우선적 특징과 사역은 말씀을 통한 영혼구원의 사역 즉 구령사역(救靈使役)입니다. 이는 세상의 권세와 같은 구속력이 있는 그 어떤 통치 권력이 아닙니다. 교회가 온전히 이 구령사역을 감당하고 그로 인하여 거듭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생산되어야 합니다. 이 백성들이 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주기도문의 두 번째 기도 제목으로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이는 교회만이 갖고 있는 본연의 사명을 더욱 더 감당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중생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드린 성도들로 이루어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기도하고 사모하는 이들의 헌신과 수고를 통하여 지역 사회에 놀라운 능력을 들어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행 2:42-47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영혼들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듣는 죄인들의 마음속에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리하여 사탄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던 심령을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즉 이 사역을 하는 교회가 온전히 세워지고 그 권세가 드러나서 세상 가운데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권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4. 악의 세력을 물리쳐 주시기를 기도 마지막으로 “나라이 임하옵소서”라는 이 기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형성되어 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할 뿐 아니라, 반대되는 시도들 즉 사탄의 세력, 말씀을 거역하는 행위들, 교회를 약화시키는 의식과 의도들을 파괴시켜주시기를 간구해야 함을 알게 합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을 알고 자기를 알면 백번싸워도 백번 모두 이긴다는 고사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하나님나라 백성이 어떻게 형성되는 지를 알았으면 이 나라 형성을 방해하는 세력, 즉 적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이 절대 필요할 것입니다. * 히 2:14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오늘날 교회 속에는 각종 영적으로 간교하게 포장된 세력들이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약화시키고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시도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마비시키는 세력들이 항상 있어왔습니다. 이런 세력들은 믿지 않는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력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 세력들이 교묘하게 위장을 하여 교회 안에는 들어와 그 세력을 펼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모든 세력들은 악한 사탄의 세력하게 있습니다. 개인주의, 과학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 쾌락주의, 등등 이 모든 사상의 중시에는 인본주의적인 기초를 두고 있는 악의 세력입니다. 이러한 세력들이 성도들을 현혹합니다. 교회를 흔들어 세속회하게 만드는 악의 세력들입니다. 5. 끝까지 지속적으로 드려야 할 기도 뿐만 아니라, 이 기도 즉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구하는 기도는 주님이 다시 세상에 오셔서 온전히 완성하실 때까지 계속하여 드려야할 기도입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형성을 위하여 쓰임받은 종으로써 초대 로마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그는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말씀은 교회를 세워 나아가는 기초이며 또한 사탄의 세력을 무찌를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 행 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하나님의 주권은 말씀으로 세워집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때까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 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34/ 산상보훈 강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7) 기도6 /마6:9-13/ 박병은목사 2019-01-03 34/ 산상보훈 강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7) 기도6 /마6:9-13/ 박병은목사 2019-01-03 02:39:52 read : 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데, 앞부분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기도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써 아버지의 나라를 위
34/ 산상보훈 강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7) 기도6 /마6:9-13/ 박병은목사 2019-01-03 34/ 산상보훈 강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7) 기도6 /마6:9-13/ 박병은목사 2019-01-03 02:39:52 read : 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데, 앞부분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기도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써 아버지의 나라를 위하여 기원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써 참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 죄가 관영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첫째, 생존의 문제/일용할 양식을 구함(마 6:11), 둘째, 정신적인 문제/ 인간관계 속에서 지은 죄를 용서를 구함(마 6:12), 셋째, 영적인 문제/ 시험에 들게 안고 악에서 구원을 구함(마 6:13)입니다. 즉 이 기도는 육신의 필요와 정신적인 자유와 영적인 보호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첫 번째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실제적인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필요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니까요! 1. 일용할 양식? 왜? 우리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먹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지금도 세상 곳곳에는 양식이 충분하지 못하여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TV에서 “동물의 세계” 프로그램을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동물에게 널려있는 것이 먹이지만, 그 모든 것을 항상 다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먹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먹히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것을 보고 있으면서 인간에게도 유사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얼마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東奔西走)하고 있습니까? 살기 힘들어서 간혹 우리가 먹기 위하여 사는 인생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성도여러분,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이 수고한 만큼 그 열매를 내어주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고 떨고 있는 아담에게 저주하시면서 이 사실을 적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땅에서 종신토록 힘써 노동을 해야 하고 땀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 창 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래서 우리 인간은 살기 위해서는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수고의 대가가 온전하게 주어지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 일용할 양식의 의미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용할 양식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어떤 분들은 문자 그대로 하루하루 먹을거리라고 말씀합니다. 물론입니다. 하루 세끼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육체적, 물질적, 지적 그리고 영적 능력을 의미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필요한 필수적인 요소들, 음식과 지식과 정력과 능력을 주세요!”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셔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기도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살아갈 이 땅에서의 필요를 이미 다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마 6:32b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 하늘 양식의 필요성 그러면 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답을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마실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영양분을 공급받기 위한 그 어떤 음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며 인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 출 16:1-3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들은 해방과 함께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소중함을 잊고 애굽에 살면서 누렸던 추억을 되살려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불평을 보면 얼마나 과장된 것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그들이 종살이한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었을까요? 물론 부자 주인을 만난 종들에게는 어쩌다 주어진 혜택을 받았을 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노예였습니다. 고기와 떡을 마음껏 먹고, 부추와 고추와 같은 양념을 넣어 맛있게 음식을 먹었을지 만무입니다. * 출 16:8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1) 양식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을 들어 주셨습니다. 당연히 음식을 요구하는 것의 상황을 인정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 불평을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왜요? 겉으로 보면 음식의 부족으로부터 오는 식량의 위기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즉 믿음의 위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하며 배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지 두 달 보름이 지나면서 감격 가운데 나온 그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육신의 필요를 왜 모르실까요? 당연히 아시고 공급해 주시지 않을까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셔야만 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구원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문제가 먹는 문제 가운데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조금 더 먹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들을 우리가 한다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하고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일용한 양식의 규칙 긍휼이 많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패역하고 비굴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 출 16:12-14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침에는 만나(manna-what is this?)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이 만나는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아서(출 16:31), 다양한 방법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만나와 메추라기는 광야 생활 40년 동안 그들의 양식이 되게 하셨습니다. * 출 16:35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문제는 이 만나를 공급해 주시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칙입니다. 첫째, 균등과 배려의 원칙 * 출 16:16-18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든 사람들이 각자 정해진 한 호멜(2. 2 l)필요만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혹 어떤 욕심 많은 사람이 많이 먹을 요량으로 많이 모아 장막에 들어와 재어 보면 그 량이 한 호멜에 해당되었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균등하게 먹었던 것입니다. 둘째, 신뢰의 원칙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만나의 규칙을 정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루하루 그날의 량을 매일 아침에 거두어 그날 다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치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 출 16: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 출 16:22-23 제 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두목이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육일 에는 이들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이 두 가지의 명령을 백성들이 온전히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습니다. * 출 16:20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 출 16:26-28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 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이 만나는 그냥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만나는 기적의 음식이었습니다. 한 호멜씩 공급되는 음식이며, 하루가 지나면 자동적으로 썩고 햇빛 아래서는 말라 버리는 성질이 있는 딱딱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6일째 아침에 거둔 만나는 제 7일째에는 썩지 않고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기적의 음식이었습니다. 심지어 언약궤 안에 둔 만나는 오랜 기간 동안에도 썩지 않고 모세의 언약 돌판과 함께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 출 16:24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셋째, 준비의 원칙 * 출 16:26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규칙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균등과 배려의 규칙, 신뢰의 원칙, 준비의 원칙을 다 어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만나를 공급받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이 양식의 심각성을 아셨습니다. 이미 음식의 문제로 시험하는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극복하시면서 이 먹는 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승리하셨습니다(마 4:4).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의 공급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3. 기도해야 할 이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성도여러분,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 그리고 나아가 온전한 의존을 가르치시기 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 양식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광야생활을 그저 먹이시기 위함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늘의 양식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따라 살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안식에 참여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특히 이민생활하는 우리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마치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아무런 연고 없이 이국땅에서 생존을 위하여 노심초사 수고하는 이민자들이 믿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절실하게 이것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면서 명하셨던 규칙들은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공급자이며 보호자이며 인도자인 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 출 16: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요리문답에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답합니다. * 질문 125번/네 번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우리의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려주시며, 그리하여 오직 주님이 모든 좋은 것의 근원임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복 주심이 없이는 우리의 염려나 노력, 심지어 주님의 선물들조차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함을 알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신뢰하게 하옵소서 결론 영국의 A. B. Simpson 목사님은 이런 예로 설명했습니다. “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다. 부자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은행에 많은 돈을 예치해 두고 아들에게 필요한 만큼 check를 쓰라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능력이 있어 아들에게 평생 쓸 재산을 물려주었으나 그냥 그 모든 것을 다 아들에게 주지 않고 은행에 맡겨 둔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필요한 만큼 check를 써서 아버지에게 요청을 하면 아버지는 그 check를 받아 집행하는 것이다. 그날그날 필요한 만큼 요청하는 check! 이것이 성도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구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 렘 17:5-8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 마 6:34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와 관계를 계속하여 맺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다가와 요청하는 것을 좋아하듯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고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 아버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