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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마가복음 강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 /막10:23-31/ 박병은목사 2018-12-20
(59) 마가복음 강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 /막10:23-31/ 박병은목사 2018-12-20 (59) 마가복음 강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 /막10:23-31/ 박병은목사 2018-12-20 14:30:39 read : 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유대 랍비들이 즐겨 인용하여 사용하는 속담 가운데 바벨론 Talmud에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 속담은 불가능한 것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곤 합니다. 아미도 우리나라의 속담인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과 비슥한 의미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하려 할 때 쓰는 말이지요. 지난 시간에 살펴 본대로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선한 선생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답하셨습니다. 그 때 청년은, 놀랍게도 이렇게 답합니다.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때 주님은 그를 사랑스럽고 대견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 청년에게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요구였습니다.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 주님의 말씀에 그 청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마가는 기록합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런 행동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청년에게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과 그는 슬퍼하며 근심하며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 대하여 Cranfield라는 주석가는 “아직도 이 청년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남아 있다.” 고 주석했습니다만 주님은 이 청년의 고민스러운 행동을 보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막 10:23-25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 약대가 바울귀로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표현입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함을 암시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 마 19:23-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때 주변에 있던 제자들이 깜작 놀라며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 마 19: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그들은 아마도 청년이 돈이 많아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착한 부자라는 소문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 청년은 수전노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착하고 겸손하고 성실할 뿐 아니라 사난한 사람들을 돕는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분명이 이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많이 돕는 사람이야 말로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고 그는 천국에 분명히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많은 생각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극락이 있으면 극락에 갈 것이고 천국이 있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수준과 기준은 그런 생각 즉 선행을 많이 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까?”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 막 10: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주님은 구원의 문제는 사람의 소관이 아니며 또한 사람으로는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못 박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상식적인 기준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차별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서는 사 하실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과 수준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원칙 내지 원리 그리고 방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부자가 이루기 어려운 구원, 돈으로 할 수 없는 그 구원을 어떻게 이루실까요? 이것이 오늘의 설교의 주제입니다. 1. 구원이 보상인가? 주님의 말씀에 혼란스러워하는 무리들 사이에서 성질 급한 베드로가 나섰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신들의 헌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해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 막 10: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마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의 질문의 배경에는 이런 것이 담겨있다고 생각됩니다. ‘저 부자 청연은 재물이 아까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근심하며 갔는데--- 그가 부자로서 한 선행들이 보상 받아 영생을 누리게 되지 못한다면, 그러면, 우리의 소유를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 우리들에게는 어떤 보상, 그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게 됩니까? “ 이에 대하여 주님은 놀라운 답변을 하셨습니다. * 막 10: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따라 온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가지의 말씀입니다. 첫째는 엄청난 보상을 받을 것이며 둘째는 그것을 받을 때 핍박을 겸하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어떤 보상이 주어집니까? 주님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 나선 자들에게 세상적인 부귀와 영광을 받을 것을 보장하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백배나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보상이 주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슬람 열성분자들은 이 세상에서 알라의 뜻에 충성하면 내세에 아내를 5명 혹은 7명이나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하여 자살 테러도 서슴지 않고 행하게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와 자식을 백배나 받겠습니까? 주님의 이 말씀은 영적인 복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세에 영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마태복음에는 좀 더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음을 봅니다. * 마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때가 되면 이제까지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겐 엄청난 특권이 주어지게 될 것을 보장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세상에서 인자의 제자로서 영광과 존귀와 권위를 가지고 통치권을 행사하게 될 것을 보장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가서 정말로 아름다운 지위에서 영생을 상속받게 될 것을 보장하셨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장차 믿는 성도들의 구원을 완성하러 오실 때입니다. 비록 지금 제자들은 세상적인 주관자들과 상대 할 없는 연약한 위치에 있지만, 그 날이 오면 지금의 그들이 누리는 것 보다 더 엄청난 위치에서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을 보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장래에 될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진리에 대하여 풍성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즉 이 성도의 신분 상승이 장래에만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놀랍게도 이미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 이루어 졌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주장합니다. * 엡 1:20-23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우리의 영적 신분의 놀라운 위치가 어디까지 높아졌는지를 이 말씀은 알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가운데서 굴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근거를 마련해 줍니다. * 엡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둘째, 핍박을 겸하여 받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집니까? 그들은 이 세상 적으로 영광스러운 신분을 소유하고 세상을 주관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핍박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구약의 욥과 같은 성도는 고난과 함께 풍성한 복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 욥 42:12-17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일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2. 구원의 도치 원리(倒置原理)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이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 막 10: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복음서에서 주님은 자주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포도원 비유의 마지막도 이런 말씀으로 교훈하셨습니다. *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천국의 비밀을 설명하시면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 눅 13:28-30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문맥적으로 볼 때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유대인들이 구원에서 제외되고 이방인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 여져집니다. 성도여러분, Up side Down! 이라는 말씀 아시지요? 흔히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대로 나중에 온 초신자가 먼저 다니는 성도보다 더 열심히 할 때 사용하는 말이 이 말 아닌가요! 주님께서 하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먼저 나온 교인의 봉사와 헌신보다 더 열성적인 초신자에게 하는 말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경고 말씀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자신은 의례 천국은 받아놓은 당상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자들에게 천국에서 버림받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은 버림받아 천국과 상관이 없다고 여겨졌던 자들에게 주어질 구원을 선언하시는 축복의 말씀인 동시에 먼저 된 자들은 그 구원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저주의 말씀인 것입니다. 천국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서 판결하실 때 적용되어질 원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주님은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그 영광 가운데 통치자로 임하실 그 때, 이제까지 돈과 명예와 직위와 자기의 자존심대로 살아왔던 세상 사람들과 래조적으로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면서 온갖 고초를 겪었던 주님의 제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짐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상황 속에서 해석해 보면, 주님은 그 날에는 이제까지 자칭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며 의례 천국은 자신들의 것일 거라고 확신하였던 유대인들!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준행하여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 일례로 유대인의 관원인 청년이 돈과 명예와 권세를 갖고 선행을 베풀며 자신의 의를 심어왔던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날이 되면 그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나 반대로 유대인으로부터 온갖 조롱과 비난 그리고 천대와 구박을 받으며 예수를 믿은 이방인들에게는 도리어 그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새로운 기회가 보장될 것을 쉽게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3. 은혜의 원리 마태복음 20장에서 주님은 이유를 들어 이 진리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매우 탁월한 교사입니다. 어려운 천국의 진리를 아주 쉽게 이야기로 풀어 설명해 주십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하나님 나라를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지한 인간들의 상식을 초월한 원리가 숨겨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천국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는 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인부를 인력시장에서 구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그리고 5시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노동자를 구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저녁 6시에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정산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때 벌어진 상황 속에서 천국의 비밀을 밝히셨습니다. * 마 20:9-10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정산이 다 끝난 후 벌어진 상황입니다. 모든 노동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후 먼저 노동자들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행위에 못 마땅해 했습니다. 잣ㄴ의 수고와 애씀에 대하여 적당한 예우를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정산 행위가 정당하지 않다고 불평했습니다. * 마 20:11-12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불공평하다는 불평입니다. 그 때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 마 20:13-15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구원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천국백성이 되려 하십니까? 자신의 능력과 수준과 행위에 대하여 공평한 대가만을 기대하십니까? 아니면 천국의 주인 되시는 호의를 기대하십니까? 우리 주님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결론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즉 구원은 결코 행위적인 업적에 대한 공과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만이 행사하시는 권한에 있는 것으로 이는 그 분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차원에서 시행되는 것이지 인간의 공과에 따른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성도는 자기 속에 이루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온전히 깨닫고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 구원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단지 미래에 일어날 것만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속에서 그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 엡 2: 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검겨 나아가는 제자들로서 어떠한 원리로 섬겨야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포도원에 불리워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간의 세상적인 나의 학력과 경력 그리고 물질적인 부와 세상적인 세력과 신분의 위리를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능력을 내 세우며 인간적인 냄새를 피우면서 섬길 것입니까? 아니면 이 원리를 깊이 인식하고 주님의 포도원에 불림 받은 사실 자체에 감사하며 섬길 것입니까? “한정국 선교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 5 분 전에 불림 받은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의식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 모두는 5분전 아니 2분전에 불림을 받은 자들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경력, 경험, 수준 그 어떤 조건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직 불러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겸손 그리고 충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나중된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 놀랍고 고마운 은혜가 나에게 미친 그 놀라운 사실을 항상 기억합시다. 아멘
(60) 마가복음 강해 크고자 하는 자와 섬기는 자 /막10:32-45/ 박병은목사 2018-12-20
(60) 마가복음 강해 크고자 하는 자와 섬기는 자 /막10:32-45/ 박병은목사 2018-12-20 (60) 마가복음 강해 크고자 하는 자와 섬기는 자 /막10:32-45/ 박병은목사 2018-12-20 14:26:32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최근 고국에서 회자되고 있는 말 가운데 “양극화”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있는 자와 없는 자’와의 차이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 차이가 너무 심하여 양극단에 이르게 될 정도라는 말입니다.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 2080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80%의 부를 20%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양극화 현상은 50% 아니 5%의 사람들이 국가의 부의 80-90%를 차지하고 있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온 나라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세상의 나라요, 땅의 논리입니다. 모든 것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좀 더 가지고 좀 더 누리며 살아가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애씁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적인 방면에서 그렇게 성공하기를 원하여 노력하는 것 못지않게,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자들도 교회를 통하여 세상적인 성공을 꿈꾸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교회가 앞장서서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을 강조하며 양극화 현상을 부추기고 있는 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이 나라를 실현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시며 보이셨나요?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는 이 나라의 소망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 사 11:1-10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새의 한 줄기에서 싹이 나서 등장하는 사람이 와서 세울 새로운 시대는 공평과 정의와 여호와의 지식이 풍성한 나라가 형성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싸움과 분쟁이 없고 사랑과 화평의 나라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오셔서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가 한 때 이 땅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덴 동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살던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이 나라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Vision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구원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 요계 22: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우리 주님은 이런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구체적인 질을 가르치시며 몸소 몸으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형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1. 구별되는 두 나라 우리는 본문에서 두 종류의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두 종류의 꿈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꿈는 나라와 제자들의 꿈꾸는 나라입니다. 이 두 꿈은 극도의 양극화 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꿈꾸는 나라의 방식을 봅시다. 1) 예수님이 꿈꾸는 나라를 이루기 위한 방식 * 막 10:32-34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마가의 이 기록에서 우리는 생생한 기억을 되살려 기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잊을 수없는 가르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미도 베드로는 평생 이 사건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의에 찬 의연한 모습과 단호한 가르침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놀랐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다음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우리는 이미 살펴본 대로, 이러한 예언을 하신 것이 두 번 이미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 막 8:30-31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 막 9:9, 12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즉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후, 그리고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이후 두 번에 걸쳐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예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이 예수님의 고난에는 유대인인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이방인인 로마인 모두가 개입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3일 만에 다시 살아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자세히 말씀으로 예언하셨습니다. 마가는 기록하기를 제자들은 다시금 듣게 되는 이 사실에 놀랐고 따르는 무리들은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왜 주님은 이렇게 듣기 힘들고, 두려우며 놀라운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주님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신 데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약신학자인 R. T France, 그의 주석에서 "주님은 자신과 함께한 제자들이 자신의 가르침에 공감하고 그 원리를 공유하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로부터 공감대를 얻기에는 실패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막 9:30-32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쌔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주님은 계속하여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또한 질문조차 못했습니다. 왜요? 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드리기도 불가능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동일한 현상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십자가의 길을 말하면 듣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희생과 고난의 길을 말하면 듣기 싫어합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자기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음을 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주님은 이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시면서 “인자”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인자라는 말씀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 단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 인자는 권세와 능력을 가진 막강한 인자입니다. 나라의 권세를 다 잡은 권력자 인자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고 하는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권력을 잡는 인자라는 말에는 솔깃하였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이 나서서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하게 됩니다. 2) 제자들의 꿈꾸는 나라를 이루기 위한 방식 * 막 10:35-3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예수님과 이 형제의 대화 속에서 바로 동상이몽의 상황을 보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영광중에 오실 인자임을 알고 그 때의 상황을 미리 선점하기 위하여 보장을 요구한 것입니다. 왜 이 형제들이 이런 요구를 했을까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 네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먼저 불림받은 자들입니다. 그 가운데서 안드레와 요한이 가장 먼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예수님 앞으로 소개하게 됩니다.(요 1:35-40) * 요 1:35-37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문제는 자기들이 소개한 베드로가 수제자로서 행세를 하여 자신들의 입지가 묘해졌음에 불안을 느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께 자신들의 자리를 장해 줄 것을 미리 요구한 것입니다. 이 일은 마태는 이들의 어머니가 함께 와서 예수님에게 요청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런 논의는 이들의 가정에서부터 입을 맞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마 20:20-21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주님은 이들이 영광의 인자만을 생각하지 고난의 인자는 생각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막 10:38-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셨습니다. * 마 20: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마실 잔과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잔과 세례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상징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할 수 있다’고 답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치 공짜라면 양재물이라도 먹을 수있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이들의 이 답은 나중에 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온전히 이해하고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즉 야고보는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였고, 요한은 마지막 까지 남아서 밧모섬에 유배되어 고통을 당한 제자가 된 것입니다. * 막 10: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한편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을 들은 제자들은 분개했습니다. 왜요? 그들도 말을 하지 못했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같은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나라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2. 하나님 나라의 원리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원리로 이루어지게 됩니까? 세 가지의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1) 섬김의 원리 * 막 10:42-44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주님은 으뜸이 되어 권력과 돈과 명예를 가지고 세상을 호령하고자 하는 제자들의 꿈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주님은 단호하게 장차 이루어질 그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은 권세를 부리는 나라이다. 그러나 너희 중에서 형성되는 나라를 그런 권세를 휘두르는 나라가 아니라, 섬김의 나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세상은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섬김의 나라입니다. 서로 섬기십시오. 서로 희생하십시오. 서로 남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시고 서로 존경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이 원리가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기초적인 원리입니다. * 빌 2: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2) 솔선수범의 원리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성향을 잘 아시고 마지막 그들을 떠나실 때 자신이 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시며 섬김의 원리를 실천해 보이시고 따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 요 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3) 희생의 원리 *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친히 자신의 사역이 바로 자신의 몸을 인류의 대속물로 내어주는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대속물이란 Ransom 이라는 말입니다. 속량물, 보석금과 같은 뜻을 가진 말입니다. 몸값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내어주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치를 죄의 값을 몸소 치르시고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이 대속물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 사 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죽어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를 소원하셨습니다. 3. 올바른 주님의 공동체를 위하여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소망을 가지고 예수를 따르시고 작정하셨습니까? 이 진리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나라는 권력을 가지고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섬김과 봉사, 자기 희생과 비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 즉 Doulos Leadership에 의하여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우리는 배움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는 Doulos 교회입니다. 섬김, 종의 교회입니다. 과연 우리 속에서 얼마나 섬김의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나요? 얼마나 이웃에 대하여 섬김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나요? 주님께서 원하셨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이 섬김의 원리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크고 자 하십니까? 섬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혀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사역 즉 십자가의 사역을 부활로 이끄시고 장차 영광의 자리에서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도 장차 영광된 자라에 세우실 것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고 현재 이 세상의 삶속에서 서로 서로 섬기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완성될 것입니다. 아멘,
(61) 마가복음 강해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10:46-52/ 박병은목사 2018-12-20
(61) 마가복음 강해 보기를 원하나이다. /막10:46-52/ 박병은목사 2018-12-20 14:08:09 read : 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회에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는 사람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항상 연습과 훈련을 통하여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야구에서 타자에게 홈런을 칠 기회는 0.2%라고 합니다. 그러나 선수는 34-5%의 확률을 자랑하여 홈런왕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항상 연습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3년 반 공생애 가운데 마지막 부분에 해당되는 사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동안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초반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제자들을 택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한 자신이 사역에 대하여 제자들이 확신을 가지도록 애쓰셨습니다. 주님은 이적과 기사, 교훈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인 지를 보고 느끼게 하실 뿐 아니라, 직접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고백과 충성 그리고 헌신을 갖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역을 모두 마치시고 이제 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초기 사역을 마가의 기록을 통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생긴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막 10: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우리는 여리고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잘 압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뽕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세리장 사캐오를 부르셨습니다. 사캐오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시며 사캐오의 고백 따라 그 집에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 눅19: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애 가운데 이 섬김의 사역을 충실하게 행하셨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 히 3:1-4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주님의 충성스러움이 본문 가운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그 목적을 잊지 않고 끝까지 완수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선포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사역은 결코 육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문제의 해결자로서의 사역만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시고 역사하셨던 바는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린 바 된 영혼에 대하여 구원을 선포하시는 일입니다. 한 눈먼 거지가 여리고성 길 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람어로 바디메오입니다. 이는 디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Smith II 혹은 Johnson Jr. 와 같은 식의 이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의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를 다루셨으며 그는 어떻게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1. 기회 포착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예수님의 이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마지막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 길로 가셔서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바디메오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주님을 만난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연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디메오는 주님을 만나자 전심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한 것입니다. "Timing" 이것처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가장 적당한 때, 그 기회를 잘 활용하는 지혜는 얼마나 중요합니까? 전도서 기자는 이 점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였습니다. * 전 3:1-8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생각해 보면, 이 바디메오의 인생에 있어서 이처럼 중요한 시기를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다가온 유일한 기회를 잘 포착하였습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식을 들었고 마음속에 만나면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를 굳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마침 그 때가 오자 놓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는 “어느 사람에게든지 기회는 3번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다가온 이 기회들을 잘 잡으셨습니까? 그러나 이 때가 항상 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때를 잘 포착할 수 있습니까? 항상 깨어있어서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고후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기회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구원을 위하여 절대 절명의 기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개인들에게 지금 이 순간의 꼭 해결해야할 간절함, 제일 절실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해 주시는 가운데 돌아오기를 오래 기다리셨음을 아십니까? * 롬 10:8-10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제 이 자리에서 가까이 오신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통하여 믿어 구원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2. 바른 지식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살펴볼 점은 이 소경 거지의 부르짖음입니다. * 막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가 나사렛 예수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소리쳤습니다. “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눈 멀고 가난했던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찾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간간이 들었던 예수에 관한 소문을 통하여 마음속에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자마자 그는 크게 소리쳤습니다. 물론 이런 외침이 자신의 육체적인 문제를 고침받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의 외침에서 아주 중요한 고백의 핵심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 놀라운 고백을 할 수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물론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라고 믿고 고백한 것은 아닐지라도, 소경 바디메오는 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왕의 후손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디메오가 고침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정확한 지식으로 문제를 해결합니까?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이 지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마찬가지로 구원을 얻게 위해서는 올바른 영적 지식도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나와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고백 속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3. 확신에 따른 끈질긴 노력입니다. 본문의 기록 속에서 우리는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경인 거지 바디메오는 큰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주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 막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그러나 소경은 개의치 않고 계속 부르짖었습니다. 체면과 주변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실한 문제요 다시는 올 수 없는 유일한 기회임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리 문제에 있어서 주변을 생각하고 고려해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이란 항상 정확한 것만은 아닙니다. 49절을 보십시오. * 막 10: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진리의 문제에 관한한 우리는 주변의 귀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여론은 흔들리고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중심의 확신이 무엇인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4. 모든 것을 포기한 가운데 전력질주입니다. * 막 10: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이 겉옷은 소경에게 있어서 삶의 터전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옷을 내어 버리고 포기하고 주님을 향하여 뛰어 일어나 나아갔습니다. 구걸하기 위하여 펼쳐놓았던 옷, 더 이상 구걸이 필요 없다는 확신을 갖고 나아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이런 상황을 우리 주님은 모르시지 않으십니다. 지금 주님은 자신의 구원 사역의 완수를 위하여, 오로지 그 길만을 향하여 가고 있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간절함을 갖고 확신 있게 나오는 바디메오를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물으십니다. * 막 10: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소경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쩌면 ‘그저 좋은 집에서, 평생 좀 불편하지만, 감수하며 구걸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간청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경은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I want to see! 그는 사물을 확실하게 보고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결과 이 바디메오의 요청은 육신적인 장애만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구원을 얻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이 시간 절대적으로 간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물을 밝히 보고, 올바른 삶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아가는 것,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것을 알 때 구원이 주어 질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이 구원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당신은 이 놀라운 진리의 초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의 삶을 누리고 사모하고 고백하는 생활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5.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주님은 바디메오의 이 믿음, 다윗의 자손임을 고백하고 전적으로 부르짖었던 그 믿음 그리고 진실하게 요청하는 그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소경됨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은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가 따르는 주님의 길은 십자가를 향하는 길입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집으로 가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지 않고 즉시 주님이 가시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결론 마가는 두 번에 걸친 소경이 눈을 뜬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8장에서 그리고 10장에서입니다. 이 두 사람 모두 간절함과 진실함 그리고 올바른 고백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됩니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참으로 쓸모없는 존재로 길가에 앉아서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구걸하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의미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고 자신의 삶의 목표가 설정되어진 자로 서 찬송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은 어떠하십니까? 확실하게 앞이 보이십니까? 아니면 그저 불투명한 가운데 그저 하루하루 구걸하다시피 하는 삶을 하염없이 살아가십니까? 주님의 초청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 사 55:6-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참다운 구원의 삶을 누리시기를 원하십니까? 보기를 원하십니까? 이 시간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날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확실한 지식과 순전한 헌신으로 끝까지 추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아무리 바빠도 주신을 간절히 찾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만나 주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62) 마가복음 강해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 1 /막11:11-25/ 박병은목사 2018-12-20
(62) 마가복음 강해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 1 /막11:11-25/ 박병은목사 2018-12-20 14:04:43 read : 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은 이미 어렸을 때 12살 때 올라갔었고, 요한복음에서 사역의 초기에 한번 올라가셨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 눅 2:41-42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 요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아마도 주님은 공생애 중에 2-3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문의 기록은 사역의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귀새끼의 등에 올라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환영 속에서 온 백성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입성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를 진정으로 환영하였습니다. * 막 11:7-10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마 21:10-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오늘의 말씀은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아주 흥미있는 구절입니다. 저자 마가는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두 가지 주제를 교대로 묘사하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과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입니다. 성전과 관련된 기록 11절, 15-19절, 27-33절, 그리고 12:35 무화과나무와 관련된 기록 12-14절, 20-25, 이 사이에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형식을 알기 쉽게 소위 'Sandwich stories'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이 기사는 성전과 무화과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교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전과 관련된 주님의 교훈을 먼저 다루지 않고 무화과나무에 관한 문제를 먼저 다루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이 말씀이 주시는 교훈의 근본적인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 저주받은 무성한 잎만 있던 무화과나무 마가는 본문 11절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을 간단히 언급합니다. * 막 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성전 여기저기를 둘러보시며 저녁까지 성전에서 계시다가 조용히 베다니로 되돌아 가셨습니다. 마가는 이점을 아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재빨리 무화과나무저주 사실을 기록합니다. * 막 11:12-14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주님은 베다니로부터 나와서 길에서 나무 한 그루를 보셨습니다. 잎사귀가 유난히도 푸르른 무화과 나무였습니다. 잎이 무척 무성하게 자란 나무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실런지 모르지만, 무화과란 꽃이 없는 열매란 뜻입니다. 꽃이 없이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무화과나무는 잎사귀가 어느 정도 나오면서 가지와 잎사귀 사이에 열매가 자라 나와 그것 속에 꽃이 피고 그 꽃이 담겨있는 열매가 영그러서 달게 변하여 아주 꿀과 같이 단 맛을 매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시장하셨던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나무의 잎이 무성한 것을 보시고 다가가셔서 열매가 있는 지를 확인하셨습니다. 그 나무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 나무에 대하여 “영원토록 사람들에 열매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는 24시간이 지난 다음날 아침에 저주대로 무화과나무가 발라버린 상황이 되었습니다. * 막 11:20-22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이 주님의 의외의 돌출 행동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주님께서 배가 고픈데 무화과를 따서 먹으려고 하시다가 없다 신경질이 나서 절제하지 못하고 성질을 부리신 것일까요? 소위 몽니를 부리신 것일까요? 자신이 가지고 있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막강한 능력은 이런 식으로 과시라도 하신 것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또한 더욱 더 의아하게 생각하게 하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13절 하반절에 마가는 기록하기를 “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저자 마가가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로부터 열매를 구하신 것은 아직 무화과가 나올 때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무화과의 첫 수확은 6월경, 두 번째 수확은 8월경이라고 지적합니다. 유월절이 4월 정도니까 아직 때가 아닌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당황하게 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때도 모르시고 열매를 구하였다가 열매가 없자 화를 내시고 애꾸진 무화과나무에게 화풀이를 하시고 저주하셨단 말인가! 그렇게도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단 말인가 하고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사랑과 인자가 풍성하신 예수님께서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잠시 혼란스럽게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의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2. 잎과 열매의 상관관계 이미 말씀 드린대로 잎이 무성하면, 당연히 잎과 함께 열매가 있어야만 한 것이 무화과나무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잎은 무성하여 열매가 있을 것 같은 데,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때가 아닌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우리는 당연히 이어지는 sandwich stories로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전날 늦게까지 계시면서 성전을 여기저기 둘러보셨습니다. 성전에서는 다양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 막 11:15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 요 2:15-16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거기에는 매매하는 자들, 환전하는 자들, 시장바닥과 같이 어수선하고 왁자지껄하였습니다. 이런 광경은 당시 사회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지방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은 제사 드리기 위하여 제물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비둘기와 양과 소들을 팔았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대니까 유대인의 화폐와 로마화폐가 공용으로 사용되었는데 성전에서는 오직 유대인 화폐만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환전소가 마련되게 되어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제사장들은 권세를 가지고 이들의 허가를 이유로 다양한 조건을 내걸며 장사를 하였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경건하고 조용해야할 성전이 시장바닥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주님은 거룩한 열심히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주님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에 이런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합니다. 문제는 주님의 이런 행동은 왜 나왔을까 하는 점입니다. 주님의 공생애는 육신의 치유와 영적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구원을 선포하시고 천국의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매있는 삶을 강조하여 가르치셨습니다. * 마 7:16-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주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면서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의 열매없음을 영적으로 지적하시면서 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생활은 생산성이 없고, 쓸데없는 형식적인데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창출해내는 도전과 변화와 개혁의 모습이 아니라 구태의연한 자세로 그저 형식만을 유지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껍데기만 있는 종교는 오히려 파괴적이고 죽어져 갈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전날 성전을 돌아보면서 느낀 바를 이런 돌출적인 행동으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으로 어떤 상징적인 영적 교훈을 제자들에게 강력하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은 어떠했을까요? 로마 정부의 묵인 하에서 그저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모습만을 나타내 보이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정치와 종교 사이에서 적당히 결탁하여 자신들의 종교적인 혜택만을 생각하여 온갖 죄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강력하게 개혁할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 사 1:12-14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 미 7:1-4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이와 같이 선인이 세상에서 끊쳤고 정직자가 인간에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도다 그 군장과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며 대인은 마음의악한 사욕을 발하며 서로 연락을 취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숫군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 렘 8: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타락된 종교문화에 대하여 신랄하게 경고하시며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 생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모습은 평가하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 사 1:15-17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주님의 분내심-공분(公憤)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신 거룩한 분내심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지요? 과연 잎은 무성한 데, 실제적인 열매는 열리고 있는지요? 그저 형식만 요란하고 화려하기만 한지요?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기업화가 되고 세속적인 된 것은 신앙생활하기 편한 시대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공신치하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은 생각해 봅시다. 중국, 북한, 소련, 이스람 문화권에서 신앙생활하는 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처절합니다. 그들의 찬송소리와 기도소리는 얼마나 간절하고 우렁찬지 이루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3.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중요성 주님은 무화과나무가 말라 비틀어졌다고 놀라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교훈하셨습니다. * 막 11:21-22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마가는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베드로의 증언을 통하여 상징적인 차원인 믿음의 문제로 독자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참다운 능력은 종교적인 의식과 형식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여 나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용감하게 나가는 주님의 능력은 24시간 내에 즉각적으로 나무가 말라버리는 증거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단지 예수님의 능력만을 목격하고 그저 놀라기만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몹시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과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그런 능력이 우리들에게도 주어질 것임을 강조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믿음, 기도라고 하는 통상적인 종교 개념과 형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뢰과 열심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헌신의 모습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내용과 그 내용에 대한 적대적인 신뢰를 가질 때만 의심없이 그 믿는 바가 이루어지기만을 사모하고 바라는 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막 11:23-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결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깊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않됩니다. 과연 나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뢰가 있는가? 과연 나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있는가? 과연 나에게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열심히 있는가? 아니면 그저 나 편하고, 나에게 유익하고, 나의 문제만 해결된 다는 그것으로 만족하는가? 이 점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성도의 삶속에서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갈 5:22-25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베드로 사도는 성도의 특권을 말씀하시면서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 벧후 1:4-11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과연 예수를 믿고 한 평생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나에게 하나님께 내어놓을 합당한 열매가 있는가? 이 말씀들을 점검하시며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63) 마가복음 강해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 2 : 성전회복 사역 /막11:11-25/ 박병은목사 2018-12-20
(63) 마가복음 강해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 2 : 성전회복 사역 /막11:11-25/ 박병은목사 2018-12-20 (63) 마가복음 강해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 2 : 성전회복 사역 /막11:11-25/ 박병은목사 2018-12-20 14:01:13 read : 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대로, 본문에서는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성전과 무화과저주 사건은 교차적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형식을 알기 쉽게 소위 'Sandwich stories'라고 이름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먼저 다루고 오늘은 성전과 관련된 주님의 교훈을 다루고자 합니다. * 막 11: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 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1. 민족의 자존심 성전 예수님께서 보신 이 성전은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있어서는 국가의 자존심이요, 중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은 성전중심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 나라는 제사와 함께 나라의 통치가 이루어져왔습니다. 역사적으로 모세의 성막, 솔로몬 성전, 학개 성전, 그리고 헤롯 성전 이렇게 지어진 성전들은 이스라엘백성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들은 일 년에 한번 온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대 속죄제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즉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이곳은 국가의 자존심과 애국심이 한껏 드러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헤롯성전은 성전을 중심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다양한 건물들이 들어 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 크기가 30acres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성전이 얼마나 아름다웠던 지, 어떤 랍비는 “헤롯 성전을 보지 않은 사람은 무엇이 아름다운 건축물인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였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건물에 대한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 막 13: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이는 마치 지난 1월 2일 미국 포드대통령의 장례식을 치루었던 Washington National Cathedral과 같은 곳입니다. (The state funeral service took place at the U.S. Capitol on Saturday, December 30, 2006, with further funeral services on January 2 at Washington National Cathedral and on January 3 at Grace Episcopal Church in Grand Rapids.) 유대인들은 이 성전을 모독하면 사형까지 시행할 수 있을 정도로 성전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본문 11절에서 보듯이 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구석구석 세밀하게 살펴보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행동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묵묵히 보시고만 계셨습니다. 그것은 다음 행위를 하시기 위한 준비의 성격이 강한 표현입니다. 2. 성전 회복과 믿음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날 조용히 성전을 살피신 후 조용히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다니에서 하루를 묵으신 후 아침에 성전으로 가는 중, 예수님께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저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 막 11:14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성전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팎에서 상인들과 환전상들은 몰아내셨습니다. 주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지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아무도 성전 안에서 기구들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가르치셨습니다. * 막 11:16-17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사도요한은 이러한 주님의 의외의 돌출적인 행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습니다. *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즉 요한은 주님의 거룩한 이 과격행위(Holy Violence)는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전 숙청을 하신 후 성전을 나오는 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를 목격합니다. * 막 11:21-22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의외의 답변에 약간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 저주사건과 믿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곧 이스라엘을 저주하신 것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즉 주님은 이스라엘의 중심인 성전에 가셔서 그 속에서 일어나는 타락된 모습을 보시며 스스로 안타깝게 여기시고, 저주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과격한 행위는 종교인들의 믿음없는 형식적인 모습에 대한 질책의 모습니다. 이들은 성전을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입지확립의 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세상과 타협하고, 종교적으로 형식화하여 국민들에게 종교성만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믿음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와 같은 형식과 규모는 무성한데, 그 속에는 마땅히 있어야할 열매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그 믿음에 따른 열매 즉 행위가 따라야 하는데 종교적인 형식은 화려하지만, 그 속에는 참된 믿음의 모습은 모여주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지적입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3. 메시야의 사역으로서 성전 회복 운동 메시야의 사역 가운데는 성전 회복의 사역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거룩한 과격행위는 이 성전회복사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 말라기 3:1-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 슥 14:20-21 그 날에는 말방울에 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구약의 예언자들은 장차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의 성전을 회복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하신 것입니다. 레위인들의 개혁, 제사제도의 개혁, 믿음의 개혁 이러한 주님의 개혁의지는 성전을 더럽히는 형식적인 종교행위에 대한 과감한 개혁이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질책하시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 막 11:18a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그러면 주님께서 의도하였던 성전회복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 믿음의 회복 주님의 거룩한 과격행위는 바로 회복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회복입니다. 이는 당시 종교인들이 종교의 형식을 빌미로, 각종 행사를 벌리고, 그것은 이루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그에 따른 많은 절차를 밟게 하므로 돈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성전이 시장터와 같은 속화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종교적 타락행위에 일침을 가하시며, 회복을 강조하셨습니다. “ 하나님을 믿으라!” 즉 예수님의 눈에는 당시의 종교 행위가 “하나님을 믿는 행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저 형식과 절차에 불과한 요식행위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속화된 성전 안에서의 행위를 과감하게 개혁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개혁대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이해 b. 만인 제사장 의식. - 종교 귀족의 폐지 c. 설교에 대한 인식의 전환 d. 세속화된 교회내의 금권주의와 권력주의 e. 믿음에 따른 순종의 삶 f. 세속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의 자태 등등 이러한 주제들은 오늘날 성도들이 깊은 인식을 가지고 개혁해 나가야할 주요한 주제들입니다. 주님은 당시 종교제도에 대한 비통함을 가지고 과감하게 거룩한 개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른 믿음의 개혁을 보이신 것입니다. * 막 11:2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오늘날 교회가, 성도가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게 신앙생활을 하고있는 것은 바로 믿음의 결여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읍시다. 그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능력있는 성도로서의, 교회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2) 기도의 회복 주님은 성전을 숙청하시면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 사 56:4-7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은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온 세상 사람들이 함께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전으로서의 성전이 될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성전에서 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기도합니다. 즉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지만, 그 중심의 내용은 기도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가 중심이 되고 설교가 중심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 곳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기도하는 곳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장소, 바로 그것이 성전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에 대하여 교훈해 주셨습니다. * 막 11:24-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우리는 주님의 이 기도의 교훈 가운데 아주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가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점일 뿐 아니라, 기도는 인간 사이의 관계가 회복될 때 비로서 온전한 기도가 드려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믿고 구하는 자에게 능력이 나타나고,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성도들에게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기도에 능력있는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속에서 인간간의 관계가 회복됨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산상보훈에서 이 점을 강조하여 가르치셨습니다. *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 가운데 이웃 간에, 가족 간에 관계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로 예배를 드리며 간절히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성도는 예수님을 고백하므로 성전이 되었습니다. *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이 성전이 바르게 개혁되어 온전한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이 힘있게 드러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교회는 개혁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만약 이곳에 오신다면 무엇부터 개혁하기를 원하실까요? 자신을 돌아보시며, 교회를 점검하시고 세속화되지 않고 성경말씀대로 만인이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64) 마가복음 강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어린이 주일) /막10:1-16/ 박병은목사 2018-12-20
(64) 마가복음 강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어린이 주일) /막10:1-16/ 박병은목사 2018-12-20 (64) 마가복음 강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어린이 주일) /막10:1-16/ 박병은목사 2018-12-20 13:57:47 read : 1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5월에는 어린이날과 어머니날이 있어서 가정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물론 특별히 이 날만을 기억하고 가정에 대한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5월을 맞으면서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적 교훈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계속하여 마가복음을 강해해 오는 가운데 이 때를 위하여 남겨두었던 마가복음 10:1-16의 말씀을 계속하여 생각하면서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적 교훈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읽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가정에 대한 교훈으로 결혼과 이혼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기록된 결혼과 이혼에 대한 말씀은 다음 시간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13-16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어린아이에 대한 말씀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린이 교육가인 'Irving '은 "자녀들로 하여금 나의 집이야말로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부모는 훌륭하지만 그렇게 못한 이유는 부모에게 결함이 있는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자녀들이 꼭 찾아 안기기를 원하는 보금자리입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자식들에게 항상 찾아뵙고 같이 있고 싶어하도록 존경받고 사랑받는 부모들이십니까? 미국 신문 컬럼니스트인 아비가일(Abigale)은 "부모의 기도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부모들이 자녀를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너의 자녀를 이해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는 부모가 되게 하여 주시고,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는 인자한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로 하여금 그들의 생각을 가로막거나 꾸짖지 말게 하여 주시고 그들이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혹 실수하는 일이 있더라도 비웃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제 자신의 만족이나 부모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그들을 나무라지도 말게 하시고, 매 순간마다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을 통하여 정직한 것이 옳다는 것을 나타내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정직한 삶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제가 기분이 언짢을 때에는 나의 입술을 지켜 노하지 말게 하여 주시고 그들이 어린이라는 것과 그들이 어른같이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을 만났을 때에는 그들 스스로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회를 허락할 수 있도록 저에게 참을성을 주시고 그들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나를 사랑하는 주님! 다시 한 번 간절히 비옵기는 나로 하여금 정직하고 바르며 친절한 부모가 되게 하시고 자녀들로 하여금 신임받고 존경받으며, 본이 되는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훌륭한 자녀를 원하는 부모는 먼저 훌륭한 부모가 되어야 할 것을 알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훌륭한 자녀를 갖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리라 믿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먼저 훌륭한 부모가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어린아이들을 대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 엡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1. 어린아이들을 용납하시고 축복하신 예수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진리를 가르치시는 과정 가운데서 일어난 한 일을 봅니다. * 막 10:13-16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 당시 종종 랍비와 같은 선생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기도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하나의 풍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각종 질병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오병이어로 5000명이상을 먹이시는 등, 참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시고 놀라운 내용으로 당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차원을 달리하여 천국의 도리를 놀랍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자신의 자식을 데리고 와서 안수해달라고 하는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풍경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제자들은 이런 상황이 벌어짐에 대하여 즐겁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요청을 하는 부모들을 제시하며 그들의 어린아이들이 자기의 스승인 예수께 다가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 제자들의 이런 행동은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왜 이들은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아마도 자신들의 스승의 권위에 어떤 흠이 된다고 보았을 지도 모습니다. 혹은 주변에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적들에게 어떤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스승을 보호하려고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들을 제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제자들의 그런 행동을 제지하시면서 어린아이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2. 구원의 차원에서 하신 말씀 본문에서 “이런 자”라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하신 말씀일까요? 우리는 이런 자가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시고 축복하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러면 어린아이들은 어떤 성격이 있기에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두 가지의 특징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천국이 "이런 자(such as these) 의 것" 이라고 하신 것은 막 9:33-37에 비추어 볼 때,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 막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첫째, 겸손한 성품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신 것은 어떤 대상이라도 받아드리고 섬기는 겸손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실 어린아이들의 성격 중에는 순진하고 솔직하며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지 가르쳐 주는 대로 받을 자세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천국은 이런 자에게 속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겸손하게 받아드릴 자세가 되었는 자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약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이 진리를 알았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 눅 1:50-53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이 겸손한 마음을 가르쳐야만 장차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귀하게 쓰임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줄 믿습니다. 미국 Iowa주의 작은 마을 Westbridge에 한 주일학교 교사가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4명의 소년을 만나 “애들아, 오늘 너희들에게 아주 중요한 분을 소개해주겠다.” 소년들은 교사를 따라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이날 이후로 이들은 그 주일학교교사에게서 성경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 소년들은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은 후 장성해서 각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후 십 수년이 지난 후 그 교사의 은퇴식 날. 은퇴 식장에 4통의 편지가 배달됐습니다. 한 통은 중국 선교사, 한 통은 미국 연방은행 총재, 한 통은 대통령 비서실장에게서 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봉투에는 ‘후버’(Herbert Hoover) 미국 제31대 대통령입니다. 이들은 편지에 “선생님이 저희에게 가르쳐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경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이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이들 네 소년은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는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배운 어린이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천국의 백성으로 사용하셨는 지를 잘 알게 해 줍니다. 두 번째는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 막 10:14-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 눅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들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행위” 가 있는 자에게는 천국이 주어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인정하고 그 통치를 받아드려 그 분을 높이며, 그 분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마음”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빈 마음입니다. 조건적이지가 않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거나 싸워 쟁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을 의지하고 인정하여 빈 마음으로 손을 벌리면 부모는그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사모하며 손을 벌려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스리시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 백성은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로 키우기 위하여 우리 부모된 자들이 자녀들에게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3. 천국 백성을 인도하는 부모의 의무 1) 가르쳐야 합니다. *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시편 78:1-4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오늘날 부모들은 열심히 가르치려고 애씁니다. 세상에 뒤쳐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당연히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적인 지식과 경험은 열심히 가르치는 데,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적당주의와 거짓과 한탕주의로 일확천금을 바라는 인생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충성스럽고 신실하게 사는 법을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애쓰고 힘쓰고, 땀 흘리면서 일하며 사는 것이 참으로 보람 있고 그것이 행복이란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무너트리고 자신만이 살겠다고 노력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락,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바르게 교훈 받고 단련 받지 못한 어린이는 내일의 죄수가 된다” 는 말이 있습니다. 마땅히 훈계와 징계는 어린이 속에 어리석음과 무지를 쫓고 지혜와 유익을 줍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 속에는 어리석음이 꽉 차 있습니다. 어리석음을 무엇으로 쫓아냅니까? 훈계와 징계로 쫓아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와 지식을 채워야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정직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정직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입니다. 5세 된 한 어린이가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매를 맞았습니다. 어린이는 강한 호기심으로 교회의 헌금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훔쳤습니다. 이 어린이는 그날의 실수를 교훈삼아 평생 단 한 번도 남의 것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땀 흘리지 않고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이 사람의 정직성은 갈수록 빛을 발해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그는 대통령 재직 시 ‘인기 없는 지도자’로 불렸으나 지금은 ‘사랑의 지도자’로 통합니다. 지금도 주일에는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합니다. 연장통을 들고 전 세계 집 없는 사람들의 집을 지어주는 집짓기 운동 총재인 지미 카터. 어린 시절, 부모의 따끔한 질책이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매를 아끼면 자녀를 망칩니다. 단 그 매 속에는 반드시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2) 장점을 확인하고 격려하며 교육하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자녀들을 가르칠 때, 세상의 모든 것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과 같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특화된 세상에서는 자기의 전공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자식의 장점, 특기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여 그 방향으로 집중하여 격려하며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예/ 에디슨 3) 균형잡힌 인격자로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기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앞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겸손과 신뢰의 성품을 바르게 가지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기 위하여 다음 네 가지의 덕목이 필요하다고 기독교 교육학자들을 이구동성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의식있는 성도로 키워야 합니다. 이것은 꾸준한 성경공부를 통하여 바른 교리와 건전한 신앙을 기반으로한 바른 진리의 지식을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혼잡한 세상적 가치와 기준에 따라 정처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분명한 성경적인 가치관과 인생관, 우주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의식있는 성도로 자라게 할 것입니다. 둘째, 이웃을 생각하여 살아가는 자로 키워야 합니다. 자녀들이 편견없이 어떤 부류의 사람 즉 있는 자나 없는 자,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어린이, 부녀자, 노인, 심지어 노예들에게까지도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도록 교육시켜야 합니다. 셋째, 용기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바른 것과 그른 것을 알고 그 것을 자신의 삶속에서 항상 Yes, No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이것이 참 용기입니다. 그리하여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힘있게 나타나도록 헌신하여 이웃과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겸손한 성도로 키워야 합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을 꿈꾸며 사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힘쓰는 신실한 성도가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끝으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 어거스틴의 방랑함을 견디지 못하고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Chrisostom에게 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때 Chrisostom은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에게 격려하며 조언합니다. “어머니의 자녀를 향한 기도는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마시고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이 격려에 힘을 얻어 계속하여 기도한 모니카의 기도를 마침내 이루어져서 교회역사상 가장 위대한 어거스틴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으며 주님께서 “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잘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가정이 과연 주님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가? 주님의 통치가 나를 비롯한 가정 식구 하나 하나에게 미치고 있는가? 나의 자녀가 참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그 분의 말씀과 교훈을 날마다 사모하며 그 말씀을 잘 받들고 있는가? 장차 이 자녀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잘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으로 쓰임받을 수 있기를 교육하고 있는가? * 신 11:18-21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으리라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를 생각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우리 속에, 가정 속에 교회 속에 임하시기를 기도합시다.
(65) 마가복음 강해 65 복종해야할 권세 /막11:27-33/ 박병은목사 2018-12-20
(65) 마가복음 강해 65 복종해야할 권세 /막11:27-33/ 박병은목사 2018-12-20 (65) 마가복음 강해 65 복종해야할 권세 /막11:27-33/ 박병은목사 2018-12-20 13:54:28 read : 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기 계신 성도님들 가운데 운전하면서 경찰에게 ticket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 마다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가 가진 권세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진 적이 있으십니까? 저도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복종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단속 행위는 정부로부터 주어진 권위요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권세는 그 출처와 근원에 대하여 잘 알 때 만 제대로 활용할 수 있고 또한 유용할 것입니다. * 롬 13:1-2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권세(권위)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1. 권세의 출처에 관한 설전 * 막 11:27-28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상황은 이렇게 전개되었습니다. 나귀새끼의 등위에 올라 타셔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곧바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는 성전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보신 후 저녁 늦게 성전 밖으로 나가십니다. 그러다가 다음날 아침 다시금 성전으로 가시면서 길가에 서있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마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장과 같이 되어버린 속화된 성전을 숙청하십니다. 책찍을 만드시고 환전상의 책상과 제물을 파는 상들을 뒤엎으셨습니다. 그리고 강력하게 경고하시며 그들의 타락된 종교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 막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이에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구체적으로 나섰습니다. * 막 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러한 예수 제거 작전을 짜던 일단의 적대세력들이 예수를 접촉하고 나누는 대화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1) 질문 그들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러한 난동부린 책임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무슨 권세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날카롭게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네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성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은 자기들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행위도 마음대로 할 수없음을 주장하면서 예수에게 허물을 씌울 작정이었을 것입니다. 2) 반문 주님은 이들의 이러한 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 막 11: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성전에서 일하고 있는 종교인들의 생각은 성전은 자기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성전의 근원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시고 간접적으로 반문하심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세례요한은 당시 종교의 타락상에 대하여 주님과 같이 신랄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 마 3:7-10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세례요한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의 타락상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즉 백성들은 세례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여기고 그 권위와 권세에 복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례요한은 회개를 강조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물세례를 베풀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종교지도자의 도덕적 타락상을 파헤쳐 감옥에 가게 되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게 되자 백성들은 더욱 더 세례요한을 존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막 6:17-18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그런데 그 세례요한이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 마 3:11-12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렇게 전개되었던 정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질문하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반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종교지도자들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 막 11:31-32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그리고 답하셨습니다. * 막 11:33a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그러자 주님도 답하십니다. * 막 11:33b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 권세의 의미 우리는 이런 설전의 과정을 통하여 권세, 권위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모든 상황은 어떤 권위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1) 부부간에서 참된 행복은 남편의 권위와 아내의 권위가 제대로 인식되어 제자리를 찾을 때, 그 부부는 참으로 행복한 부부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의 결혼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각자에게 부여된 권위요, 권세입니다. 2) 가정 역시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부여해주신 권위를 인정하고 그 부모님의 권위 아래서 이루어 져 갈 때, 그 가정은 바르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3) 사회 역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부여해 주신 권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 권세를 활용할 때, 그 사회는 제대로 굴러갈 것입니다. 4)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해 주신 권위를 가지고 바른 권세를 행사할 대 그 교회는 아름답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권세의 근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만들어낸 권세라고 착각하는 데서부터 발생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각자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상대를 압박할 때 그 가정을 불행해집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신의 권한만을 주장하여 자식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룬다면, 그 가정을 불행해지고 말 것 입니다. 사회에서 국가의 권력을 가진 세력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그 권력을 휘들을 때, 그 국가와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가 성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로마 권력과 타협하여 자신들의 종교제도만을 고수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성전의 전통만을 유지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제사제도의 본래의 의도를 망각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제사제도를 자신들의 체제만을 유지하는 것으로 타락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중심의 유대인들의 생활 속에서 자신들이 가진 특권, 기득권만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그들의 타락된 모습을 보시고 그들의 완악함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시며 자신이 가야할 길,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묵묵히 가신 것입니다. 3. 복종해야할 권세 그러면, 오늘날 성도들은 어떤 권위 하에서 살아가야 할 까요? 저는 세 가지의 권위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주관자시오, 구원자 이십니다. 지금도 섭리하시며 통치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훈하셨습니다. * 마 6:26-28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래서 다윗은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 시 16:1-2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2) 예수님의 권위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주신 분이십니다. 주께서 이루어 주신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구원을 항상 고백하면서 그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의 도리에 대하여 깊은 사모함과 복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3) 성경의 권위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습니다. * 딤후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결론> 주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세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하고 아울러 위로부터 주어진 권세를 남용하지 말고 겸손하게 사용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그 권세의 근원이시오, 성전의 본체이신 주님을 믿고 고백할 것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권세 아래서 살아가십니까? *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여러분이 의지하는 것은 돈의 권세입니까? 세상의 권력입니까? 아니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그리고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며 위로부터 주어진 권세를 겸손하게 활용하며 살아가십니까?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 마 6:30-33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66) 마가복음 강해 66 버림받은 돌, 머릿돌 /막12:1-12/ 박병은목사 2018-12-20
(66) 마가복음 강해 66 버림받은 돌, 머릿돌 /막12:1-12/ 박병은목사 2018-12-20 (66) 마가복음 강해 66 버림받은 돌, 머릿돌 /막12:1-12/ 박병은목사 2018-12-20 13:51:48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교포들 가운데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분들에게 물어보면, 정말로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믿고 가게를 맡길 수 있는 사람, 특히 counter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만큼 신뢰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은 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성전을 둘러보시고 그 곳에서의 종교적인 타락과 오염된 모습을 보시고 숙청을 하셨습니다. 이에 반발하는 세력들인 성전을 중심으로 일하고 있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간의 갈등은 심각하여 그들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막 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하여 음모를 꾸미고, 작전을 짜고 사람들을 동원했습니다. 지난 주일 살펴본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간의 논쟁은 두 진영 간의 갈등의 제 1 라운드라 하겠습니다. 지도자들의 날카로운 질문, 무슨 권위로 성전을 숙청하였는지? 누구로부터 그런 권세를 얻었는지? 등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하시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은 우선 세례요한의 세례에 대한 질문을 하신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두 진영은 팽팽한 평행선만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들의 부패한 모습의 실상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잘 아시는 이 본문은 소위 포도원의 비유라고 일컬어지는 비유로 공관복음(마 21:33-46; 눅 20:9-19)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의 결과 비유를 들은 세력들은 예수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발했음을 복음서 기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눅 20: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그러면, 주님의 비유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길 래, 이토록 반발한 것일까요?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어떤 영적 의미를 주시는 것일까요? 주님의 이 날카로운 비유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고용된 포도원들의 농부 우선 생각하게 되는 점은 이 포도원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고용된 일꾼들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으십니다. 1 절에서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라고 설명을 합니다. 즉 주인은 포도원의 울타리를 치고 영역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에서 포도주를 생산할 각종 시설을 완벽하게 구비한 다음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해외여행을 떠났습니다. 소작농들은 주인과 계약을 하고 그 포도원 농장을 관리했습니다. 여기에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라는 말에서 사용된 소작농(tenant farmers) 라는 말은 georgois로 이들은 농업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토지가 아니라, 임대한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당시의 사회가 이런 종류의 대지주들이 소작농들과 계약을 맺고 농사를 했음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석을 보면,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D. France는 “ 포도원의 특성상, 적어도 4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제대로 된 수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주인과 소작농들은 적어도 3-4년 정도의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부터 수확에 대한 일정비율의 계약을 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자신들의 소유로 알고 주인의 보낸 종들을 무시했을 것이다.” 얼마나 주인에게 돌려야 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소작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계약에서 흔히들 7:3 혹은 6:4 등의 계약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이들로부터 계약대로 소득을 챙기기 위하여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의 농부들이 이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정당하게 주인의 몫을 달라고 하는 이들에게 폭행을 가했습니다. 그 폭행의 정도가 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막 12:3-5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소작농들은 3 차례나 주인이 보낸 종들을 무시하고 능멸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이런 결정을 하게 됩니다. * 막 12:6-8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던졌느니라 아들을 보내서 이 농부들로부터 소작료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그들은 아들까지 죽여서 그 포도원을 자기들의 소유로 삼아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까지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묻습니다. 이후의 두 진영 간의 대화는 우리로 하여금 상당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 막 12: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이 질문에 그들은 답합니다. * 눅 20:16b 그렇게 되지 말아 지이다 하거늘 주님께서 그들에게 답하십니다. * 눅 20: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농부들은 주님의 재산(Property)를 자신들의 소유로 삼기 위하여 불법을 행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본문을 통하여 독자들인 너희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윤리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 정도의 윤리성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법적인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법으로 이런 행위를 어느 정도 제재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이 비유 속에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2. 비유 속에 담겨있는 진리들 주님은 이 포도원 비유를 통하여 무엇을 의도하셨을까요? 전통적으로 포도나무이라든지, 무화과나무, 혹은 감람나무 등은 이스라엘민족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성경은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주님의 이 비유를 이사야 5장에서 그 배경을 찾고 있습니다. * 사 5: 1-7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시는 진리의 핵심을 무엇입니까? 극상품 포도를 심었는 데, 경작하는 이들이 제대로 관리하여 재배하지 못하여 들포도(wild grapes)를 맺은 것입니다. 주인이 어떻게 이 포도원을 처리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이 이사야 선지자의 비유를 생각하시며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무능과 타락과 부패에 대하여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비유를 근거로 본문의 비유에 대하여 몇 가지 질문들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을 통하여 비유의 핵심진리가 들어나리라 믿습니다. 1) 포도원의 주인은 누구인가? 2) 포도원의 일꾼은 누구들인가? 3) 포도원에 파송된 종들은 누구들일까? 4) 아들은 누구일까?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듯이 포도원의 주인을 하나님이십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지배하는 지배 세력 즉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파송된 종들은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아들은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3. 주님의 경고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어떤 효과를 기대하신 것일까요? 주님은 개인의 생각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당시 종교지도자들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이라고 믿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사야 5장의 말씀을 인용하시어 극상품의 포도를 가지고 잘 관리하지 못하여 들포도를 맺은 책임을 물은 하나님의 행동을 빗대어 이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의 절정인 아들까지 죽인 세력들에게 대하여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문하심으로 그들의 지금 품고 있는 의도와 앞으로 행할 행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경고하신 것입니다 * 막 12:10-11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주님은 이들에게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경고하셨습니다. * 시 118:22-23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여기서 사용된 모퉁이 돌(corner stone)이란 말은 kephalen gonias 로 건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돌을 의미합니다. 즉 이 말씀은 민족은 세우고 나라를 위하여 일하겠다고 하는 자들이 행한 행위에 대하여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건축을 하면서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버린 돌이 진정으로 세워지는 나라의 머릿돌, 기초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역사가 흐른 후 뒤를 돌아보면서 그 사실을 확인해 볼 때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점에 대하여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나라와 민족을 세우겠다고 나서서 행하고 있는 의식과 자세를 문제 삼으신 것입니다. 즉 그들은 진정한 돌을 몰라보고 버리는 행위를 지금 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심으로 그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 눅 20: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로 가루를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시편 기자는 비록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나 사실은 모퉁이 돌 되시는 예수님께 나와 굴복하고 온전히 받아드릴 것을 예언하시며 경고하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 시 2:7-12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결론 본문의 주님의 비유에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이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위치와 권한이 자기들의 것으로 알고 횡포를 부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오셔서 주장하는 권리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떤 영적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까? 물론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기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포도원들이 있습니다. 개인의 인생이 그렇고, 가정이 그렇고, 교회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생 속에 이런 다양한 포도원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이 포도원들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관리하며 주장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나의 인생이 나의 것인 줄 알고 자기 멋대로 주장합니다. 그래서 장차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때 내놓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지 않고 대충대충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정을, 자녀를 그리고 교회를 마치 자기의 활동무대요, 자기의 소유물인 줄 알고 자기 멋대로 관리하여 망쳐버리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고 자기가 왕이라고 주장하며 온갖 불법을 행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정치지도자들은 선거철이 되면 주권이 백성들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온갖 아부를 떨며 공약을 하지만, 막상 자신이 권력을 잡게 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권력이 자기의 것이며 영원할 줄 알고 횡포를 부리는 경우들을 적지 않게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기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기초돌로 주셨습니다. 교회의 기초돌로 주셨습니다. 이 돌되시는 예수님을 기초로 하여 우리는 농사를 짓는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인생 속에 언젠가 어떤 농사를 지었는지 계산하자고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어떤 결과들을 내어 놓으시겠습니까? 잘못된 인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라면 언젠가 그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진리는 그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방인 모두에게 주어진 구원의 진리가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유대인이라고 해서 그들에게 특별한 유익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구원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는 우리들에게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눅 13:6-9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은혜로 얻어 관리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관리하는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왕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계산 할 때 주님의 것을 온전히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67) 마가복음 강해 67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막12:13-17/ 박병은목사 2018-12-20
(67) 마가복음 강해 67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막12:13-17/ 박병은목사 2018-12-20 (67) 마가복음 강해 67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막12:13-17/ 박병은목사 2018-12-20 13:42:42 read : 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세금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참으로 떨래야 뗄 수없는 예민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세금을 내시죠? 세금 철이 되면 모두 세금을 내야하기에 많은 신경을 쓰게 마련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유명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 본문의 배경 오늘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1장 후반서부터 이어지는 예수님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암투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부분부터 예수님의 후반기 사역 즉 십자가로 가시는 길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벌어진 상황을 생각해 보면 언중유골이라고 상당히 가시가 돋친 상황, 아니 살벌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알게 합니다. 그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13절을 봅니다. * 막 12:13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 질문자들 여기서 저희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성전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성전 숙청을 하시고, 포도원 비유를 통하여 그들의 종교적인 자인함을 지적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잡아드릴 작전을 짜게 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짜고 의논을 하던 가운데 예수를 말씀에 옭아매기로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작전에 동원할 사람들을 찾아서 보냈던 것입니다. 그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말씀을 책잡으려고 --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누구들입니까? 첫째는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골수 유대인들이지요. 이들은 BC 150년 이후 유대교 안에서서 발생한 유대교중교분파의 일종으로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하여 점령당할 때까지 엄격한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유대주의자, 철저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둘째부류는 헤롯 당원입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로마정부와 밀착하여 유대인들을 통치하였던 헤롯 가문을 지지자들의 모임으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전통 유대인들은 로마인들과 결탁하여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세력으로 간주하여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정치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공작에서는 이들은 항상 연합했던 것을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 막 3:1-6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 마 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2) 동전에 대한 설명 또 한 가지 역사적인 배경으로 살펴보아야 할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라고 하신 동전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의 통치하게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었습니다. 로마정부는 유대인들에게 재산세, 인두세, 토지세, 통행세 --국세와 지방세등 다양한 명목으로 징수하여 서민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특별히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언급한 세금은 인두세라고 하는 세금을 뜻합니다. 이는 오늘날 주민세와 비슷한 개념의 켄소스 kensos 라고 하는 유대인 성인 남자 한 사람에게 부과되는 인두세라고 하는 세금을 의미합니다. 이 세금의 성격은 바로 성인 남자는 모두 로마의 정부에 속해져 있다고 하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반감이 매우 심했다. 유대애국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세금을 낼 수 있느냐고 반대하여 AD6년경에 대대적인 반대가 있게 되었고 이는 Zealot Revolution Movement의 일정의 Civil Movement로 발전하였었습니다. 이로서 열심당이 세워져 예수님 당시도 활발한 운동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때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이었기에 유대인의 Tax에 해당되지 않았다고 France라고 하는 주석가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머리 좋은 한 바리새인의 묘안으로 예수를 꼼짝 못하게 할 계책을 생각해서 내 놓았습니다. 아마도 모르긴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계략을 생각해 내고는 너무 좋아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예수는 우리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 계책을 들은 그들은 무릎을 치고 환호를 했을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예수가 완벽하게 그들의 올무에 걸렸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는 것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더라도 바리새인들은 문제를 삼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지난 번처럼 권위에 대하여 질문할 때 대답을 회피한다면, 그것으로 대중에게 예수의 정치적인 비겁한 자세를 지적하며 비난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당장 로마의 실정법을 어기는 것이니 그것으로 예수를 로마정부에 고소하여 유대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면 될 것이고, 또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라고 한다면 이젠 유대 민중의 보편적인 애국심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에 근거하여 유대 민중은 더 이상 예수를 따르지 않고 떠날 것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들이 …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 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증언자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이 바리새인의 치밀함이며 세상의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을 대동하는 것은 대화를 법정으로 끌고 갈 의지가 있었으며, 그러자니 증인이 필요했고, 바리새인들의 증인으로는 헤롯 당원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쯤 말하면 당시 사회에서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의 관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2. 바리새인들의 질문 1) 간교한 태도 * 막 12:14a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이 태도에서 그들의 간교함을 엿보게 됩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향하여 ‘선생님이여’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를 정말로 선생님으로 생각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진정 선생님으로 생각했다면 헤롯 당원을 대동했을 리도 없고, 그것보다 먼저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고자 잔머리를 굴렸을 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간교함은 다음과 같이 추적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한껏 치켜세워 예수로 하여금 가이사를 의식하지 않도록 해야만 자기들의 계획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면 당연히 예수를 칭찬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어야 했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정말 참되십니다.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면서도 그야말로 진리에만 입각해서 하십니다. 우리 같은 것들로서는 참 어려운 일이지요. 무엇보다 그 어떤 인간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그대로 선포하시는 모습이 너무 감명 깊습니다. 우리는 선생님께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선생님께서는 사람을 그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생님께서는 그가 제사장의 옷을 입었다거나, 돈이 많고 권력을 가진 자라고 해서, 그것 때문에 할 말을 못하시는 분도 아니고, 진리 아닌 거짓을 말하는 분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육신이 약하여 ‘외모’를 의식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상하고, 또한 그만큼 더 선생님이 존경스럽습니다.” 2) 간교함 속에 담긴 비수 같은 질문 * 막 12: 14b-15a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 대 비수를 품은 이 질문 속에 담겨있는 논리는 이렇습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데 이 나라가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 그 성취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로마의 막강한 황제 가이사의 명을 어기고 독립된 나라를 건설할 만한 힘도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선생님께는 분명한 해답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친다는 게 과연 옳은 일입니까 아닙니까. 우리가 낼까요 말까요? 더욱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는 이 세금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 태어나서 호적등록을 하기만 하면 누구나 물어야 하는 주민세 개념의 인두세(켄소스kh'nsos)라는 점입니다. 즉 우리가 이 세금을 낸다는 뜻은 한편으로 우리 이스라엘이 가이사 왕국의 백성이라는 고백이기도 한 셈인데,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로서 정말 이럴 수 있는 일입니까. 인두세가 가지는 이런 상징성 때문에 우리로서는 더욱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가이사 같은 세상의 임금도 거리낌이 없으실 줄로 알기에 감히 이렇게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선생님,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우리가 낼까요 말까요?” 인간들은 속에 비수를 품고도 겉으로는 얼마든지 나긋나긋할 수 있으며, 이미 다 아는 얘기도 정말 모르는 체 너스레를 떨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후벼 파기도 한다. 사람들이 가지는 외면의 겸손과 부드러움, 상대방을 높이는 칭찬과 존경 따위는 얼마든지 상대를 죽이려는 독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간교함을 제대로 알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워낙 바리새인들이 정중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깍듯이 대하면서 공손하게 질문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름들은 이렇게 아첨하는 자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악함을 아셨습니다. * 막 12:15a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3. 예수님의 답변 * 막 12:15b-17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당시 통용되었던 모라의 동전에는 Darius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있었습니다. 그 동전에는 “신의 아들, 다리우스”라고 새겨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사용할 때 그 동전을 사용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동전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워낙 유대인들이 반발하니까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이 통용한 구리동전의 주조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 동전에는 황제의 그림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은 이 동전으로 성전세를 내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 마 17:27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갖고 온 동전이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황제의 그림이 새겨져있지 않는 동전이 아니라 새겨진 동전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 동전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들은 이미 세금을 내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셈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속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명언을 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교훈을 생각하게 됩니다. 4. 주님의 교훈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소속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가이사- 일국의 왕으로서 백성들에게 강력하게 자기의 것임을 주장하고 요구한다면, 당연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피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것을 요구하시기지 않으시겠는가?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시고 통치자이시기에 그 분께서 세우신 나라에 대한 순종으로 세금을 내고 백성의 의무를 담당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교훈하였습니다. * 롬 13:1-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바울이 예수님의 이 교훈을 받아드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권면한 교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역시 자신의 권리를 가지시며, 그것은 다른 모든 존재에 우선하는 초월적인 권한을 소유하신 분의 주장임을 알아야합니다. * 마이클 윌코크 “ 국가는 국민의 유익을 위하여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드려서는 아니된다. 특별히 국가의 화폐가 “신”으로 둔갑하여 즉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할 때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드려서는 아니된다“ 결론 흔히 사람들은 돈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느니 십일조를 드리느니 법석을 떨지만, 자신이 드린 헌금을 정말 하나님이 받으셨는가에 대한 생각은 진지하게 하지 안는것 같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으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드릴 뿐입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많은 헌금을 드릴 때에는 가슴이 뿌듯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그저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런 태도가 나타나게 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금을 바치는 한사람, 한사람의 가치관이 바로 ‘돈’ 위에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돈을 좋아하니까 하나님도 돈을 좋아하실 것으로 생각하여 신앙의 성숙도를 헌금과 직결시키고 있는 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세금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네들의 관심사가 그만큼 돈에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면서 한심하게 생각한 점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소위 당시 사회의 영적인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문제에 매여 오도 가도 못하면서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행태. 또한 하나님 나라의 삶과 세상 나라의 삶을 뒤섞어 놓는 가르침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 앞에 와서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 질문은 이미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이 ‘세상’에 붙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 계셔야 할 바리새인들 마음 속에 이미 세상이 터를 잡았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당연히 바리새인의 주인은 세상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돈이라는 것은 다만 그들 마음에 있는 ‘가치’가 투사되어 나타난 하나의 피사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정작 중요한 것은 돈에 그려져 있는 형상과 글이 아니고, 그 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있는 형상과 글과 글입니다. 즉 자신이 세상을 가치 있게 여기면 돈에 마음을 두게 되고, 그 반대의 경우라야 하나님을 마음에 두게 됩니다. 돈이라는 것은 사람이 그것을 가치 있게 보아주지 않으면, 즉 그것에게 권세를 부여하지 않으면 단지 한 수단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에 적힌 글과 돈의 형상이 능력을 발휘한다고 믿고 그것이 목적이 되고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 그 돈은 그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그들 속에 돈이 형상화되어 살아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돈에 적혀 있는 형상과 글이란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 있는 형상이나 글과 일치한다는 말이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는 돈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존재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과연 하나님의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것은 내 것이고 어느 것은 하나님의 것일까요? *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과연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으니 주님께로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교훈하셨다고 믿습니다. * 마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 마 6:30-34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아멘
(68) 마가복음 강해 68 신앙의 오해 /막12:18-27/ 박병은목사 2018-12-20
(68) 마가복음 강해 68 신앙의 오해 /막12:18-27/ 박병은목사 2018-12-20 (68) 마가복음 강해 68 신앙의 오해 /막12:18-27/ 박병은목사 2018-12-20 13:31:02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오해만 하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면,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네모반듯하다고 생각하여 땅 끝까지 가면 한없는 절벽 밑으로 떨어진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옛날 천주교회 재판국에서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는 갈릴레이를 심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젤란과 같은 항해사들이 지구를 한 바퀴를 돌아 귀환하게 되자 그 오해가 풀렸습니다. 이렇게 오해 가운데 세상을 살아가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고,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하여 잘못 알고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도 하지 않은 채, 교회에 대하여, 성직자에 대하여, 신자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입장으로 인식을 하고는 있지만 그 신앙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오해하고 곡해하여 비난부터 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재미있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두개인이라고 하는 무리와의 대화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두개인들과의 대화의 주제는 “부활”입니다. 1. 사두개인의 질문 본문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 막 12:18-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세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우선 예수님께 재미있는 질문을 한 사두개인이란 어떤 집단일까요?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합니다. BC 2 세기 경부터 AD 70년까지 존재하였던 유대주의자들 가운데 한 분파라고 합니다. 사두개인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으로부터 유래하였을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을 편애하였으며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제사장의 역할을 가장 존중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들은 대제사장에게 충성하였던 가족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대다수, 예루살렘의 부유층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당시 권력의 실세집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헤롯궁, 로마인 집정관과 밀접한 교류를 가지면서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집단이기도 했습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보다는 그 신앙을 빌어 세상적인 권력에 도취한 집단이라고 하겠습니다. 권력집착의 집단이기에 그들은 이 세상 권력을 최고의 신앙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그들이 부활을 믿을 리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부활 진리를 부인하였습니다. 한편 가끔씩 이해관계에 따라 부활을 인정하는 바리새인들과 함께 동조하기도 하여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예수님을 대적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성전을 중심하기 보다는 공회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였던 집단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정치와 권력이 집착하였던 집단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재미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아들 7명이 있었는 데, 큰 형이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자, 율법대로 동생에게 형수가 가서 자식을 낳아 형의 족보에 올려주어야 하는 법에 따라 결혼하게 되었는 데, 그 동생도 죽고, 그런 식으로 해서 7 형제가 다 자식을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부활을 가르치시는 데, 천국에 가서 부활할 때, 누가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너무 우스운 교리가 아닙니까? 질문했습니다. 이들은 이것이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합리적이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인용한 율법은 신명기 25장의 말씀입니다. * 신 25:5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사두개인들의 질문의 배경은 자신들의 상식과 이성에 따른 이해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성과 상식 그리고 경험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 현대인들과 같이 이성과 상식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경험한 것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성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며 불신하는 사람들입니다. 2. 예수님의 답변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도 아주 재미있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 막 12:24-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 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두개인들에게 그런 이해 가운데 있는 것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오해를 지적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잘 못 알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즉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였습니다. 즉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여 그런 주장을 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첫째, 성경의 무지 사두개인들은 성경에 대하여 무지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이들의 성경 상식 부족을 지적하신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에 대하여 아주 박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세를 믿지 않았고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상식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에 따라 성경, 율법이 제정하신 법에 대하여 냉소하며 불신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의 내면의 의미 즉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고, 나아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주님께서는 말도 않되는 예를 들어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 막 12: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 눅 20:35-36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 고전 15:42-43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사두개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벗어나 부활하여 변화되는 부활체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한계 너머에서 일어나는 구원의 역사를 알지 못하였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간의 이성과 경험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회복을 주시려는 의도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축복 그 자체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성경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할 것을 강조합니다. * 딤후 3:14-17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성경은 그저 종교적인 집례에 사용만 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책을 읽고 묵상하고 자신에게 적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는 지혜와 교정과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성경의 상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 속에서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알고 경험하셨습니까? 과연 성경말씀이 옳은 말씀이구나 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있으십니까? 그저 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올 때 집안 어디에 놔두었던 먼지 쌓인 성경책을 털고, 혹은 차속에 놓아둔 책을 그저 갖고 와 예배 시간에 들추어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정도라면, 어떻게 성경을 알고 그 말씀의 진위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 이러쿵, 저러쿵 냉소적으로 말하며 비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저도 그런 경우를 겪었습니다. 물론 이런 빌미를 준 것은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연약한 모습임에는 틀림없고 이에 대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차적으로 저를 비롯한 목회자의 책임입니다. 지난 주간에 고국의 성도들이 1907년의 회개운동을 기념하여 서울 상암 경기장에 모여 연합 집회를 가졌습니다. 설교하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고백하며 지적했듯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의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들이 져야한다는데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목회자부터 성경에 무지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제대로 신뢰하지 못하고 그저 세상적인 성공과 번영, 축복만을 전하는데 급급해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을 제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 예배에 출석하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방식의 신앙의 형태에 대하여 지적하셨습니다. 즉 성경의 무지함이 잘못된 신앙의 기초가 된다는 점입니다 사실 사람은 이성과 상식에 의존하여 사물을 판단하고 신앙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과정일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은 이 이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이성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를 할 수 있습니까?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순수이성 비판에서 “인간의 인성이 항상 올바른 것을 아님”을 비판했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과 상식 그리고 경험들이 항상 진리입니까? 인간의 이성과 상식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이성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신임을 진정하고 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말씀인 성경을 잘 알려고 노력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조차 성경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과 주장에 따라 성경을 좌지우지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참으로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범죄한 인간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구원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 주님은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무지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지적과 같은 말씀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믿지 않으니 어떻게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무지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사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말씀을 알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할 것 아닙니까?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믿지 못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신앙생활하십니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모세의 출애굽기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말씀을 그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 막 12:26-2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 출 3:2-6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께서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시면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이 말씀을 주님께서 예로 들으신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한번 따져 봅시다. 이 말씀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모세는 지금 430년 동안 종살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불붙는 가시떨기나무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여러분 모세에게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의 조상들을 언급하십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왜 이미 죽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들먹이십니까? 이미 그들은 오래전에 죽어 무덤에 뭍혀버린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기서 산자의 하나님이라 하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과 맺으신 언약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그 연약을 믿고 살아있는 신앙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 능력을 나타내시며 그 언약을 성취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의 회복을 향한 언약 즉 부활과 소망의 언약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 언약따라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를 믿으십니까?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예수 안에서 부활받아 영원한 영생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고후 5:2-10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빌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오늘날 성도들은 과연 내세를! 부활을! 하나님 앞에서 설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믿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이 세상이 전부인 냥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모쪼록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알고 믿음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69) 마가복음 강해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신앙 /막12:38-34/ 박병은목사 2018-12-20
(69) 마가복음 강해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신앙 /막12:38-34/ 박병은목사 2018-12-20 (69) 마가복음 강해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신앙 /막12:38-34/ 박병은목사 2018-12-20 13:27:45 read : 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가복음 강해 69번째 시간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신앙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나이가 드니까 사물이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초점이 잘 맞추기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눈의 신경 근육이 느슨해져서 생긴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초점을 잘 맞추어야만 확실하게 알고 볼 수 있고, 성적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양궁선수들의 실력은 세계 최고의 수준입니다. 일정 거리에 있는 과녁에 정확하게 활을 쏘는 실력이 최고입니다. 최고가 되려면 정확하게 과녁에 화살을 집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골프도 마찬가지입니다. 골프 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종종 합니다. 잘 맞은 데 방향이 틀렸다든지, 방향은 맞은 데 거리가 문제가 있었다든지 라고 합니다. 이 모두 거의 되었는데 완전히 되지는 않았다는 말들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진리의 핵심을 잘 깨닫고 또한 그 대로 순종하여 고백하며 살아갈 때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에는 유명한 포도원비유의 말씀과 함께 3 가지의 질문들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기사들을 수록되어 있습니다. 즉 첫째,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의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문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3-17), 둘째, 부활에 대한 사두개인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8-27절), 그리고 오늘의 본문 말씀에 있는 서기관의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등 입니다. 앞의 두 가지 질문 즉 세금, 부활에 관한 질문은 모두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력들이 예수님의 제거하려는 악의적인 의도에서 제기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악의적인 의도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대하여 탁월한 지혜와 확실한 지식 그리고 영적 권위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제기된 질문은 질문자의 진솔한 마음이 담겨 있는 질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 그리고 사두개인일당들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하여 올무를 놓으려는 의도에서 예수를 시험한 질문이라고 한다면, 이 서기관의 이 질문은 진리의 핵심을 알려는 의도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보입니다. 1. 진솔한 질문 * 막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나이까? Of all the commandments, which is the most important one? Which is the first commandment of all ? 이 질문을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왜 이와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요? 먼저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의 신분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질문을 한 사람은 서기관이라는 신분의 사람입니다. 서기관(Scriber)이란 구약성경을 한자 한자 베껴 쓰는 사람이다. 잘 아시는 대로 히브리어는 점이 많은 글자입니다. 이 복잡한 글자들을 복사하면서 일점일획이라도 틀림이 없이 쓰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한 점이라도 잘못 쓰면 전혀 다른 뜻이 되고 말기에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성경을 베껴 썼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글자의 특성을 아셔서 다음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 마 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과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고 예수님께서 답변하시는 상황에서 그 곳에 함께 있던 한 서기관이 질문했습니다. 이 서기관은 성경을 베껴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그저 시키는 대로 성경을 아무런 생각 없이 한자 한자 복사하여 기록만 하는 단순 기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쓰고 있는 말씀의의미를 알려고 노력했고 또한 그 말씀들을 진지하게 묵상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어려운 질문들을 간단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답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어 평소에 자신이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바 율법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다. 학생은 질문을 통하여 정확한 것을 알 수 있고, 가르쳐 보면 내가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서기관은 질문을 통하여 자신이 이해하고 알고 있는 바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 지를 확인하려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입니까! 얼마나 참으로 귀한 자세입니까! 앞의 세 부류, 즉 바리새인, 헤롯 당원,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파괴적으로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질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 서기관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으로 궁금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이다. 바른 신앙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경을 접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진지한 가운데 다가가느냐, 아니면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며 자신의 의도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 판이한 신앙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초대의 기록을 보면 성경에 대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 행 17:11-13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여기 두 부류의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가? 살펴는(examined) 베뢰아 교인들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 부류는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자세로 성경을 대합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자세로 구원의 진리를 대하십니까? 베뢰아 교회 성도들의 자세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바른 구원의 진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 시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이 서기관은 자신이 쓰고 있는 성경의 진정한 의미-핵심을 알기 위하여 질문했습니다. 질문할 때 자신의 입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 가운데 검증하여 그 말씀의 확실한 인도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가 참된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저 분위기 가운데서 감동받아 넘어가는 그런 감정적인 어리석고 연약한 성도는 아닙니까? 진리의 확실함 가운데 굳게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것을 강조하여 교훈했습니다. * 딤후 3:14-15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2. 하나님과 나의 이웃 사랑 이제 그 질문 내용을 살펴보고 예수님의 답변을 들어봅시다. * 막 12: 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숫한 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우선 저는 이러한 질문, 의문점을 가지고 나온 이 서기관의 자세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의 핵심을 알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구원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여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무엇이 진정으로 바른 삶의 모습인가? 어떻게 믿는 믿음이 바른 믿음인가?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은 이 서기관에게 십계명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십계명의 핵심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십계명은 모세를 부르신 그 시내산 아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리는 제시하시며 준수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십계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대별됩니다. 1-4계명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켜야 할 계명, 5-10계명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지켜야할 계명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인 이 열 가지 계명을 해설하면서 많은 법적인 교훈들을 삽입하였습니다. 율법서에서 가르치신 각종 법들을 해설하면서 많은 법적 조항들을 만들어 그 법대로 지키며 살아가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강요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계명이 가장 핵심적인 것인지 모르고 그저 하라고 하는 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생명과 같이 여기고 생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기관이 가장 제일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이 십계명의 핵심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첫째의 것만 가르치시지 않고 둘째의 것까지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신명기 6:5와 레위기 19:18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즉 먼저는 하나님을 그리고 이웃에 대하여 어떤 원리로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신 6:5는 “SHEMA- Hear로부터 나온 단어”-라고 불리는 유명한 율법의 말씀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Monotheistic confession)입니다. * 신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으로 다음의 말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신 6:6-9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묵상하고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여기서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의 전수를 위하여 최선을 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바로 그 분과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그 분의 언약에 따른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로 자신들을 온전히 그 분께 다 드리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 그 분께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언약의 은혜에 감사하는 생활 가운데 자연스럽게 율법에 대한 사랑과 순종의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구원의 감격이 있는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 진리의 말씀을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바르게 하나님을 알고 있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 번째의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 레 19:17-18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말씀은 가장 은혜 받은 자로서의 삶의 모습을 그려 준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웃에 대한 깊은 배려와 사랑을 지속적으로 하라는 교훈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을 보면 좀 더 분명한 말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마 22:35-40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주님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율법서와 선지서들의 가르침이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걸려있는 말씀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3. 응답과 격려/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간 신앙 예수님의 답변에 대한 서기관의 반응을 봅시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 막 12: 32-33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님의 이 답변은 서기관 자신이 그동안 율법을 베껴 쓰면서 깨닫고 알고 있던 구원의 핵심 진리를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바가 맞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이 사건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공생애 가운데 경험하셨던 사건들, 예를 들면, 니고데모의 방문, 베드로의 신앙고백. 삭캐오의 회심, 제자들의 전도 70인 귀향등과 함께 가운데서 가장 기뻐했던 일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 서기관은 자신의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전심의 마음은 그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 보다 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서기관은 형식적인 유대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변화된 참된 유대교도였던 것입니다. 그는 번제물보다 기타 제물보다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만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삶속에서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른 인간관계를 맺어 사랑과 용서 그리고 배려와 헌신으로 바른 성도로서의 바른 삶을 사는 생활예배를 드리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4. 1 % 부족한 신앙 서기관에게 하신 예수님의 답변과 자신의 알고 있는 바에 대한 진리를 확신하며 답하는 서기관에게 주님은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답변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 막 12: 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주님께서 이 서기관의 지혜에 대한 사랑과 격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주님은 사캐오와 같이 그 서기관에게 “구원이 오늘날 이 집에도 이르렀다”고 선언하시지 않으셨음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 눅 19:8-9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왜 주님은 율법의 핵심 진리를 알고 있는 이 서기관에게 구원을 선언하시지 않으시고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리 않다! 고만 하셨을까요? 이 말씀은 그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약간 부족하다! 이제 그대로 하면 들어갈 것이라고 하시는 격려의 말씀이라고 여겨지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데 결정적인 1 %가 부족함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 서기관이 하나님 나라의 주체이신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많은 곳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고, 율법대로 산다고 하는 자들,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음모와 시기와 질투 등으로 이웃 사랑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그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들의 위선과 교만과 거짓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참된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신을 믿을 것을 강력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온전히 들어가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의 들어간 자”로서 살고 있습니까? “거의”라고 하는 말은 아직 완전히 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자들 가운데 almost Christian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True Christian이 되지 못하고 거의 된 그런 교인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들은 외견상으로는 신잡니다. 그러나 그 속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 요 3:3, 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위로는 하나님과의 회복을, 옆으로는 인간 간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셔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구현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시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의 진리를 묵상하여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 순종하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헌신과 순종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를 믿어야지 십계명만을 가지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멘
(70) 마가복음 강해 다윗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막12:35-37/ 박병은목사 2018-12-20
(70) 마가복음 강해 다윗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막12:35-37/ 박병은목사 2018-12-20 (70) 마가복음 강해 다윗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막12:35-37/ 박병은목사 2018-12-20 13:23:34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언젠가 들은 콩트 한마디가 생각납니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있었던 재판장면입니다. 심판장 예수님 앞에 전직 코메디안이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라고 하더랍니다. 그 뒤에 전직 목사가 섰습니다. 예수님께서 몇 가지 질문하시더니 지옥으로 가라 하더랍니다. 그래서 화가 난 목사가 왜 나를 지옥에 보내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저 친구는 사람들을 재미있게 웃겼는데 너는 사람들을 졸게 했으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답니다.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의미가 이는 말이 아닐까요! 사실, 사람들 재미있게 해 주는 것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웃기고 재미있게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남들보다 좋고 잘 돌아가기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능력이요, 실력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 37절을 봅시다. * 막 12: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청중들이 재미있어 했습니다. 어떤 상황이었기에, 어떤 말씀이었기에 그렇게 재미가 있었을까요? 1. 천국에 가까운 사람에게 한 예수님의 질문 지난 시간에 이어 우리는 좀 더 흥미로운 사건의 진행 상황을 접하게 됩니다. 말씀 드린 대로 마가복음 12장에는 유명한 포도원비유의 말씀과 함께 3 가지의 질문들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기사들을 수록되어 있습니다. 즉 첫째,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의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문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3-17), 둘째, 부활에 대한 사두개인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8-27절), 그리고 서기관의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등입니다. 어느 서기관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질문하고 답변하시는 예수님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을 정확히 아시고 해석하시어 당당하시고 지혜롭게 답변하시는 모습에 그는 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율법에 대한 신념과 믿음을 확인하고자 랍비 예수님께 질문하였던 것입니다(28절). 서기관이란 성경을 Copy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단순히 기능적으로 성경을 베껴 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베껴 쓰는 성경 말씀에 대하여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을 정도로 율법의 핵심 진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또한 그 진리를 조리 있게 표현할 줄 아는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32절). 주님께서는 지혜롭게 답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막 12: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주님은 그의 율법에 대한 지혜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국의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대략의 이해를 하고 있어서 그 천국에 멀지 않는 정도였습니다. 이런 성도를 저는 지난 시간에 Almost Christian, Sunday Christian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이 서기관은 하나님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그에게 문젠가요? 주님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1 %의 부족한 진리의 핵심을 질문으로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성전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열쇄와 같은 핵심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묻는 그 질문과 지금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은 서로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리를 알도록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 막 12:35-37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쌔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어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당시 서기관들을 비롯한 랍비들은 가르치기를 장차 그리스도(메시야)는 구약의 위대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정치적으로 위대한 전사요 와이었던 다윗의 가문에서 오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가르침을 받은 백성들은 예수님의 능력 있는 사역 즉 가르침과 사역을 보고서 그의 도움을 받고 자 한 자들은 실제적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그런 구원을 요청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셨습니다. * 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 눅 18: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찾을 때 그것은 바른 신앙이요 믿음으로 인정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고백 속에 담겨있는 진리의 핵심을 안다고 주님은 인정하신 것입니다. 즉 그 정도의 믿음- 예수님의 다윗의 자손임을 인정하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 속에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간주하시고 그들의 필요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깊은 차원의 진리를 알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서기관들이 그런 구약의 말씀이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서 그런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시는 질문입니다. 즉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이 제대로 알고 있는 지, 그 1 %의 진리를 제대로 안고 있는 지를 획인하시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이 상황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알고 있는 지식의 의미를 알게 될 때 참으로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구절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될 때, 참된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고 그 말씀에 다하여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고 꿰어야 보배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진리의 말씀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나에게 느껴지고 고백되어지고 신뢰되어져서 활성화되어 질 때 바른 믿음의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은 그저 단순한 지식적인 단편이 아닌, 그저 종교적인 형식의 수단이 아닌, 참으로 믿고 신뢰하여 의지하여 자신의 삶속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이요, 구원얻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왜 다윗이 시편110:1을 말했는가?” 시 110:1을 봅니다. *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참고적으로 이 말씀은 신약의 5 군데 이상에서 인용된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마 22:44; 눅 20:42, 43, 행 2:29-36, 히 1:13; 2:8;10:13).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일까요? 여기서 다윗은 천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고백하는 광경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첫 번의 ‘내’는 다윗입니다. 즉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의 주이신 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주의 원수가 다윗의 주의 발밑에 깔릴 때까지 다윗의 주는 여호와 오른편이 앉아 있으라. 고 명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승천으로 이어지는 구속사건의 예언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여호와의 명령을 받는 그 분에게 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이 구절의 해석을 메시야에게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주님은 “다윗이 예언한 이 시편 110:1이 메시아 예언의 시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메시야를 다윗이자손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냐! 어떻게 다윗이 메시야를 주라고 했겠느냐?” 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2. 두 가지 성경 해석 서기관들은 다윗처럼 메시야도 보좌에 앉아서 실제로 온 나라를 다스릴 위대한 왕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령으로 하나님의 어전 회의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메시야를 “주“라고 부르며 그 분은 예루살렘이 아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장차 메시아가 거두실 승리는 다윗이 거둔 승리보다 더 높고 차원이 높은, 즉 정치적이 아닌 영적인 승리임을 노래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서기관들의 수준과 가르침의 한계를 지적하셨습니다. 어떻게 다윗이 메시야를 자손이라고 하지 않고 주라고 했는가! 주님의 이런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성경 해석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왕으로서의 임재를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왕이요,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성경해석은 그들의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의 해석이지 하나님의 뜻에 따른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자기중심적인 성경 이해에 대하여 지적하시며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확실한 진리 지식을 갖도록 질문하셨습니다. 이런 해석을 성경 해석적으로 이런 해석을 exegesis(output interpretation, 진리를 끄집어내는 해석)가 아닌 eisgesis(input interpretation, 내 생각을 집어넣는 해석)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오늘날 얼마나 이러한 경우들이 많이 있는가? 흔히 성경 구절은 이현령 비현령식이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고 가르치며 설교합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해석들이 진리를 호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우리 주님은 서기관들이 성실하게 성경을 베겨 쓰고 그 말씀에 능하여 거의 천국에 이를 정도의 신령한 지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의미하는 구원의 진리, 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종교적인 유희만을 즐기며 살아간다면, 천국백성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다윗과 같이 성령의 인도하심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믿을 때, 온전한 천국백성이 될 수 있음을 교훈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이 놀라운 영적 통찰력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르침을 들은 청중들은 아주 재미있게 듣고 배웠습니다. 흔히 설교가 지루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흥미의 부족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성경 지식이 여러분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 그래서 참으로 이 귀한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십니까? 단순히 성경지식으로 만족하고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만족하고 있으십니까? 그 속에는 온갖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그저 믿는 흉내만 내고 있다면 이는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같고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서기관들은 답변을 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회복의 차원에서 메시야를 기다리며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위대한 최고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차원의 소망을 백성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친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가르침을 들은 청중들은 답변하지 못하는 서기관들을 보면서 매우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필요에 따른 생각과 주장을 접고 우리를 향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말씀 속에서 그 원리를 찾아 그 원리와 뜻을 순종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여론은 어떠합니까? 세상보다 더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곳이 교회라고, 성도들이라고 비난하고 있지 않습니까? 경쟁적으로 자신의 부귀와 성공을 얻게 위하여 성경의 구원의 도리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단순하게 종교적인 의식과 열심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언젠가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만연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점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구약과 신약의 관계 속에서 구속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역사 속에서 뜻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오늘날 나에게, 우리 가정에게, 우리 교회에 적용하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좀 더 하나님께서 뜻하신 뜻을 좀 더 충실하게 이루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71) 마가복음 강해 신앙의 대비되는 모습 /막12:38-44/ 박병은목사 2018-12-20
(71) 마가복음 강해 신앙의 대비되는 모습 /막12:38-44/ 박병은목사 2018-12-20 13:19:00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가복음 12장에서 기록된 다양한 주제들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과 그를 믿는 믿음의 모습을 극한 대립의 상황 속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의 세금 문제로 예수를 시험하며 시비를 거는 사건, 것, 사두개인의 부활의 문제를 제시하며 무식한 질문을 한 것, 서기관의 율법에 대한 질문 등 다양한 주제로 예수님을 시험하였던 것을 봅니다. 그 가운데서 지난 시간 다루었던 주제는 자신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그 지혜롭게 답변 잘 하는 서기관을 의식하며 그렇게 율법의 핵심을 잘 알고 있다면 어떻게 다윗이 시편 110:1에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예언했는 지를 설명하라고 질문하십니다. 항상 율법서를 베껴쓰며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특권의식을 갖고 있는 주변의 서기관들은 그 질문에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서기관들을 백성들 앞에서 창피를 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그들의 권위적이고, 위선적이며, 가식적인 신앙의 형태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 앞에서 헌금을 드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곳에서 한 관부의 헌금을 드리는 장면을 목격하시며 제자들에게 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대비하여 지적하시므로 제자들에게 참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 지를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1. 신앙 측정의 기준 우선 생각하게 되는 점은 예수님께서 측정하시는 신앙의 기준입니다. 주님은 서기관들의 율법적인 지식과, 그들의 거룩한 직업적인 일을 하고 있음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지 않음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를 잘 아셨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하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성경에 정통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성경적인 지식과 지적인 수준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삶을 언급하셨습니다. 또한 과부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신분과 외모에 대하여 지적하지 않스셨습니다. 그 여인이 드리는 헌금을 주목하여 보시면서 그 여인의 헌금의 액수에 대한 평가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의 삶의 상황 속에서 헌금 드리는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며 그 여인의 신앙을 평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예수님의 지적을 보면서 다음의 요소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째,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시는 신앙은 나타나는 형식과 수준의 관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중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로 나타나는 모습을 보시고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롬 2: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와 형식을 보시지 않으시고 중심, 마음을 보시며 평가하신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속을 보시며 그들이 어떻게 마음의 작용을 하고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지를 보시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심판의식이 주님의 평가 기준이셨습니다. * 막 12:40b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바른 신앙인은 이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성도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평가하신 구체적인 사건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외식적인 신앙인의 전형 * 막 12: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예수님의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서기관들의 모습에 백성들은 아주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그 시편 110:1의 다윗의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그 설명을 듣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그들이 떠난 다음 예수님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서기관들의 위선적인 행실에 대하여 신랄한 지적을 하십니다. 서기관들이라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의 특권 의식으로 역겨운 행동을 어김없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드러내었습니다. * 막 12:38-40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첫째, 그들은 긴 옷을 입고 걸어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F. F. Bruce라고 하는 주석학자는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긴 옷은 급하게 걷거나, 어떤 육체적인 노동을 하기에는 합당한 옷이 될 수 없다. 당시 이런 옷을 입는 사람들은 특권층으로 여유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징이다. 아마도 이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민 15:38의 말씀을 순종하는 차원에서 입었을 것이다“라고 주석을 했습니다. * 민 15:38-40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tassel)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즉 이 긴 옷은 서기관들이 구약의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게 입혔던 옷을 흉내 내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입혔던 것 같습니다. 즉 이 긴 옷은 그들이 거룩하고 존경받을 귀한 일-성경을 베껴 쓰는 일을 하기에 그런 옷을 입혔습니다. 이 옷은 성경을 베껴 쓰는 작업을 할 때 그 작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자신이 조심하도록 하게 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이 옷을 입을 때 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과 눈의 욕심을 쫓아서 방종 하지 말 것을 다짐해야 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옷은 작업실 안에서 입고 작업을 할 때 만 입도록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옷을 입고 밖에 나와 다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둘째, 그들은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 옷을 입고 걸어 다니기가 얼마나 불편할까요? 이런 옷은 화려할 뿐 아니라, 술을 달아 길게 늘어뜨렸음으로 길을 쓸고 다닐 정도의 긴 옷입니다. 느릿느릿하게 길을 걷는 그 사람이 시장에 나갔습니다. 시장은 먹고 살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 복잡거리는 곳입니다. 그것에 느릿느릿 폼을 잡고 여유있게 거니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사람들의 눈에 띠겠습니까?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를 알아보고 그 앞에서 나와 절을 합니다. 그 서기관들은 연구실에서 성경을 연구하지 않고 그런 상황을 즐겼던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회당과 잔치 자리의 상좌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이것은 그를 지도자로 알고 그에게 자리를 주어 회당에서 가르치고 존경을 받게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들에게 “랍비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높은 자리로 안내하여 앉혔던 것입니다. 랍비란 "My great one" 저의 스승님, 위대하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그러 말을 듣고 대접받기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시 이런 백성들 앞에서 대접 받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그런 종교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 마 23:5-8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주님은 이런 소인배와 같은 사람들은 선생이 될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인생의 스승은 오직 한 분 뿐이십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나사렛 예수 한 분 뿐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이십니다. 넷째, 이율배반적이고 위선적이며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주님은 왜 이런 서기관들의 행태를 비난하신 것일까요? 그들의 실제적인 교만한 행동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외식적인 의식과 행동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 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과부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자신들이 가진 파렴치한 행동도 서슴치않고 행했습니다. F. F. Bruce는 유대인의 역사가인 Josephus의 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동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확신하기를 자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호의를 받은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간혹 그들은 자신의 특권을 이용하여 과부들을 접촉하고 그들을 온갖 꼬임으로 속여서 그들의 재신을 빼앗기도 했다. 이는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사실 율법은 성경을 베껴쓰는 일과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사례를 금지했다. 그러나 당시 타락된 종교인들은 자신의 사역에 대한 특별한 지원을 부탁하여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바치도록 강요한 것이다.“ 주님은 이런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종교적인 행위들을 지적하시며 그들을 랍비라고 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부터의 심판이 엄중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극적으로 이런 종교지도자들과 대비되는 한 여인을 지적하시며 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제시하셨습니다. 2. 모든 것을 다 드린 참 신앙인 * 막 12:41-44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 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우리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성전에 절기를 따라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제도와 현상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당시 성전에는 13개나 되는 나팔 통처럼 생긴 헌금함이 문 앞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전을 갖고 와서 각 나팔통과 같이 생긴 헌금함에 넣으면 그 동전이 굴러 들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1) 예수님이 앉으신 장소 * 막 12: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이 예수님께서 앉으신 위치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헌금함을 마주보고 앉으셨습니다. 헌금을 드리는 자들의 모습을 관찰하시는 의도이십니다. 새 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 어떻게” 입니다. (막12:41)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어떤 방식으로 등등의 의미가 내포된 단어입니다. 무슨 영적인 뜻이 있습니까? 주님은 어떤 마음으로 헌금에 임하고 계신지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헌금 생활 가운데 주님께서 지금 보고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불꽃같은 눈으로 당신들의 심장을 꿰뚫어 보시며 여러분들이 드리는 헌금 아니 그 중심을 살피고 계신 주님을 의식하시고 헌금을 하십니까? * 렘 17:9-10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우리의 심장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달아지는 현장이 바로 헌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 부자와 과부의 헌금 당시의 헌금함의 구조가 많은 동전을 집어 놓으면 소리를 내며 나팔관과 같은 구멍으로 굴러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자들은 많은 동전을 담은 헌금 주머니를 가지고 와서 그 소리나는 헌금함으로 집어넣었습니다. 그 헌금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갈채와 칭찬을 했습니다. 부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을 의식하며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고액의 헌금을 희사하였습니다. 마치 정당 공천을 받듯이 희사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주님은 눈 여겨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헌금 드림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도무지 의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다양한 종류의 헌금을 드린다는 사실을 자랑하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 앞에는 주님의 임재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시선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군중들의 눈에도 주님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 누가, 얼마나”에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를 보셨습니다. 한편 과부의 헌금은 어떻습니까? 과부가 드린 헌금은 목 이 긴 나팔관과 같은 헌금함에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굴러들어 갈 돈이 못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두 렙돈을 드렸습니다. 두 렙돈이란 얼마의 가치가 있는 돈일까요? 이 돈이 얼마의 가치가 있는 지 계산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돈의 크기: 렙돈 < 고드란트 < 앗사리온 < 데나리온 < 달란트 1 데나리온=16앗사리온 1 앗사리온=4 고드란트, 1 고드란트= 2 렙돈 흔히 1 데나리온을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1 앗사리온은 1/16 데나리온 이고 1 고드란트는 1/4 앗사리온입니다. 그리고 1 고드란트의 1/2이 1 렙돈입니다. 계산해보면 ($ 80-10*8시간/ 80*1/16=$ 5/ $5*1/4 =$ 1.25/ $ 1.25 *1/2= $ 0.65입니다. 즉 오늘날로 말하면, 1 렙돈은 대략 65Cent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두 렙돈이란 $ 1.25 정도 됩니다. Quarter 5개 정도의 돈입니다. 아주 적은 동전입니다. 사람들이 보려고 해도 잘 보이지 않은 돈입니다. 소리를 들으려고 해도 들려지지 않을 돈입니다. 그래서 무시해도 좋은 돈입니다. 과부는 조용히 헌금을 나팔관 아구에 넣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과부의 헌금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광경을 보시고 즉각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3) 주님의 평가 * 막 12:43-44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물론 다시 성전에도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부자들의 헌금은 성전의 운영비에도 크게 보탬이 되었고 또 사업과 구제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들은 드러난 자선가였고, 성전 운영의 공로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서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큰 특권으로 보상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주님은 부자의 이런 헌금을 최고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과부의 헌금을 더 칭찬하셨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주님은 당시 성전의 나팔관 헌금함 넣은 모든 사람의 헌금을 다 합친 것보다도 이 한 과부의 헌금이 더 많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희(부자)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풍족한 가운데 ” 일부를 드렸지만,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 “전부”를 드렸다고 하셨습니다. 드림의 량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질을 가지고 평가하셨습니다. 사람은 양을 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질을 보셨습니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평가의 차이점이었습니다. 결론 저는 이 시간 헌금에 대하여 설교하고 있지 않음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신앙적 모습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인지에 주목하십시다. 주님은 얼마나 높은 지위에서 어떤 일을 하는 지에 대한 것에 관심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종류의 삶을 드리느냐를 보시고 평가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찾아온 한 서기관은 이렇게 율법의 정신을 고백하여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 막 12:32-33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그러나 그들 서기관들은 이런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고 이웃을 사랑하기는 커녕, 이들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형적인 외식과 부패로 타락된 종교인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 힘없고 보잘 것 없는 과부는 오직 자신의 전부를 드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전부를 드려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지혜의 책인 잠언은 우리에게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 잠 8:17-21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함이니라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십니까? 자신의 신앙의 모습, 양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72) 마가복음 강해 주님의 인정하신 헌금 /막12:41-44/ 박병은목사 2018-12-20
(72) 마가복음 강해 주님의 인정하신 헌금 /막12:41-44/ 박병은목사 2018-12-20 11:10:36 read : 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들은 헌금함이 여러분 앞으로 지나갈 때 어떤 마음이 되십니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본문은 예수님께서 친히 성전 앞 헌금함을 마주 대하고 앉으셔서 유심히 헌금하는 것을 보시다가 한 과부의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F. F. Bruce에 설명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앉으신 이 위치는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마당 사이에 있는 미문(Gate of Beautiful) 맞은 편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 곳에는 헌금함은 나팔관 모양으로 되어있는 헌금함 13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헌금함을 Trumpet이라고 불렀습니다. 각각의 나팔관 헌금함은 용도에 따라 구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밀가루, 포도주, 기름 등 제사를 드리고 헌물을 하기 위하여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드릴 제사에 소요되는 물자들을 돈으로 환산하여 드리기 위한 목적에서 마련된 것들입니다. 1. 헌금을 주목하시는 예수님 사람들은 이 헌금함에 준비한 헌금을 했습니다. 당시 사용한 통화가 아시는 대로 동전으로 되어있었기에 나팔관 헌금함으로 들어가는 소리는 사람들에게 들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상황 가운데서 유심히 살피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면서 헌금을 합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가진 바 가운데서 준비해온 헌금을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헌금을 넣습니다. 돈 많은 부자들은 과시하듯이 소리를 많이 내면서 헌금을 넣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이 조용히 와서 헌금함에 헌금을 했습니다. 주님은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셨습니다. * 막 12: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 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우리 주님은 우리의 드리는 헌금, 우리가 드리는 헌신을 보고 계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 지, 어떤 상황 가운데서 드리는 지, 어떤 목적으로 드리는 지 살피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헌금을 드릴 때 이 점을 생각하시면서 드리십니까? 당시 어느 사람도 예수님께서 살피고 계신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성전에 올 때 의당 헌금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헌금드리는 것을 보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각자의 형편을 아시고, 드리는 마음을 아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드릴 성전을 위하여 헌금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즐거워했습니다. * 대상 29:17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함을 아시는 분이라고 인식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여기에 헌금의 정신과 자세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 앞에 헌금을 드릴 때 이 마음과 자세를 견지하시며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2. 헌금을 평가하시는 예수님 * 막 12:42-44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과부한 사람이 와서 헌금함에 헌금을 넣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주님은 즉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헌금함에 넣은 헌금보다 이 과부가 넣은 헌금이 더 많다!”고 하셨습니다. 과부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여기서 “ 더, 많이!” 하시는 예수님의 이 평가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양(量)이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규모와 크기도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기준은 비율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44절에서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주님의 평가의 기준은 비율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풍족함 가운데서 약간의 것을 드림으로 전혀 생활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의 헌금을 생활비 전체를 드림으로 그녀의 생활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과부가 드린 “생활비 전부”라는 표현은 우리의 주식비에 해당한다고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원문, Holon ton Bion(홀론 톤 비온)이란 표현은 “everything all she had to live on 살아가기 위하여 가진 바 모든 것” 이란 의미입니다. 즉 여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비용 전부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보시고 평가하시는 시각은 어떤 것입니까? 과부가 드린 돈의 양은 아주 적은 것이었습니다. 두 렙돈(lepton- a thin one이란 의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이 돈의 가치는 오늘날로 말하면 3불이 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두 개의 동전을 가지고 온 여인이 두 개 모두를 드린 것에 주목하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다른 하나는 헌금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가진 바 모든 것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은 적지 않게 부담이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니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비 전체를 요구하신다는 말인가! 생활비 전체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인가? 하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장 그렇게 갈 것이 아니라, 우선 말씀에 흐름에 있어서 제자들에게 이 상황 속에서 주님의 특별한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1) 부자 청년의 경우와 비교하심 마가복음 10장에서 다뤘던 사건 하나를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어느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 막 10:17-20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주님께서는 이 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하셨습니다. * 막 10:21-22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문제는 그 이후 이 부자 청년이 근심 가운데 떠나간 후에 발생했습니다. * 막 10:23-27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깜짝 놀라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들어가는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께 드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구원은 그것은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의 포기 여부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2) 서기관의 고백과 비교하심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가르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 막 12:29-3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그들은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제일되는 계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서기관은 말만 그렇게 했지 실제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하는 모습을 찾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고백과 삶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위선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상황 속에서 과부의 헌금을 통하여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부자 청년, 서기관!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율법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의 모습은 고백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3. 주님의 교훈에서 배우는 점들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게 되는 영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드리는 헌금 속에는 다음가 같은 요소들이 반드시 들어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헌금은 고백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여인의 헌금 속에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여인은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보호 그리고 공급하심을 신뢰하고 자신의 생명 전부를 드리는 행위입니다. 주님은 이런 고백을 보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성도의 헌금은 어디에 기초합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 전체를 주셨음에 근거합니다. 아들 예수님을 인간의 몸으로 보내시고 죽이셔서 죄 가운데 영원히 죽을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으셨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알고 있는 자 만이 진정한 헌금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모든 것을 다 헌신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주고 받는 것은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깨닫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신 것이 바로 그 점이라고 믿습니다. 둘째, 헌금은 거리낌 없는 결단으로 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두 렙돈의 양을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 여인이 드리는 자세에 주목하셨습니다. 여인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두 렙돈을 모두 드렸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두 개 모두를 드렸습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영역을 남겨두고 여유있게 헌금을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과부는 자신의 생존자금 전체를 다 드렸습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생활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 전체를 드렸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는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이런 결단을 칭찬하셨습니다. 결국 이 연인은 자신의 삶의 권한을 하나님께 드리며 의탁하신 것입니다. 과부의 고백은 하나님의 것이 자신의 것 전부였습니다. 주님은 과부의 고백과 마음 그리고 그 중심을 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존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그 분께 자신의 삶을 희생하여 드린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과부의 결단과 헌신에 대하여 책임져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도 주님께서는 이런 마음과 자세를 보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 이 모든 것이 어떤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까? 부자처럼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근심하는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네가 가진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는 한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강력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렇게 우리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과 자신의 것 전체를 드리려는 그 마음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시편기자와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 시 139: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 렘 12: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우리의 드림이 과연 어떤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셋째, 힘을 다하여 드려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한 선교와 구제의 헌금을 드리는 모습에서 그런 상황을 접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 고후 8:1-3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드린 헌금은 자원과 힘에 지나도록 힘을 다하여 힘에 지나도록 드린 헌금이었습니다. 그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온전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결론, 왜 헌금합니까? 얼마나 헌금합니까? 어떻게 헌금합니까? 여러분들은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헌금하십니까? 교회는 여러분들이 드리는 헌금으로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일은 세상적인 량과 규모, 크기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고백과 그 고백에 따른 헌신을 통하여 구체적인 사역이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그래서 단지 물질만이 아니라 시간과 배려와 사랑으로 참여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은 온전히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돈이 부족하면 시간을, 시간이 부족하면 기도로, 봉사로 하나님 앞에 바른 고백과 헌신을 하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고백-주님의 가난함으로 내가 부유해졌음을-그 주님의 가난의 사역에 동참하시려고 헌금하셔야 합니다. *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공급하심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의 가난함과 구차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유함으로 채워가는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나로 부유하게 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가난함을 위하여 일하게 되는 사역을 위하여 힘있게 헌금에 동참하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로 인하여 부요하게 된 우리의 인생임을 고백하시며 예수님의 가난하게 되심에 동참하시어 자신의 전부를 드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헌금의 바른 정신이요, 자세입니다. 둘째, 자원함과 기꺼운 마음으로 자주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교회에 권하는 사도바울의 헌금에 대한 가르침은 곧 우리로 하여금 어떤 마음가짐으로 헌금에 임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고후 9:7-9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라기는 여러분께서 항상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의 전부를 담아 헌신하시는 표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부와 같이 자신의 생존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아낌없이 온전히 주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구체적인 실천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그 중심을 보시며 칭찬하시며 드리는 자의 생명, 삶을 보장하시고 책임져 주시며, 온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런 고백과 헌신이 여러분들의 헌금생활 속에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73) 마가복음 강해 말세의 교훈 1 :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막13:1-5/ 박병은목사 2018-12-20
(73) 마가복음 강해 말세의 교훈 1 :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막13:1-5/ 박병은목사 2018-12-20 11:07:02 read : 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날은 이전 어느 세대보다도 종말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예전에는 전혀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주변에서 발생하므로 이구동성으로 종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극도의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미래를 안락하게 하고 평화롭게 할 것 같아도 오히려 그 과학적 발달은 각종 반작용을 일으켜 그로 인하여 인류가 입을 가공스러운 피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가운데는 핵전쟁, 우주전쟁, 자연재해, 생태계의 파괴 등등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과연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이런 인간의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어마어마한 돈을 드려 우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제 지구는 다 되어가니까 우주로 피해서 살자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지난 1994년 9월 한국에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하는 이방익이라고 하는 당시 고등학교 학생과 이장림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하여 한국교회와 세계를 발칵 혼란에 빠뜨린 적이 있습니다. 이에 그 영향으로 한인 사회 전체가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고, 또 전 세계적으로 뉴스가 되어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이 교회를 보는 눈과 신앙을 보는 눈이 매우 달라졌었습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고,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종말에 대한 궁금증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은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계십니까? 과연 종말이 올까요? 온다면 언제 올까요? 그리고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이런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불고 우리들에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종말을 부인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말을 무시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말에 집착합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요? 성경은 어떻게 이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을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견해를 가지시고 종말에 대하여 가르쳐주셨나요? 이런 저런 의문들을 가지고 있는 이 종말론! 참으로 의문스럽습니다. 그래서 금요성경공부 시간에 레위기공부를 다 마치고 다음 9월부터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다루다 보면, 종말론을 다루게 되겠지요. 우리 함께 열심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종말에 대한 교훈들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1. 감람산 강화 해석에 관하여 마가복음 강해 73번째 시간으로 주님께서 예언하신 말세의 교훈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합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신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중에 하나가 이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소위 “감람산강화(Discourse of Mt. Olive)” 라고 불리고 있는 이 본문의 말씀은 공관복음서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11-51, 누가복음 21:5-36입니다. 저자 마가는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은 기록하면서 자연스럽게 접근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사역으로 성전에 올라가셔서 하신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자세히 둘러보시고 그 다음날 성전으로 가시면서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기록했습니다(막11:12-14; 19-22). 이는 유대교의 종식을 선언하시는 예언적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올라가셔서 무질서하게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성전 회복을 위한 강력한 의미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 막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의 살의가 있는 질문들에 답변하시고 참된 신앙인의 모습인 한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칭찬하시며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림이 어떤 모습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후 성전에서 나가 성전 맞은 편 감람산 언덕에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말세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막 13:1-4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이들은 이 큰 건물이 무너질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가 질문합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답변을 해석할 때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첫째는 이 답변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에 국한 된 예언인가? 둘째, 종말에 관한 답변인가? 하는 것입니다. 학자들 마다 각각 다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대략 이 두 가지 주제가 섞여있다고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루살렘, 뒷부분은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간략하게 분해를 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루살렘의 멸망(1-2) 2) 예루살렘의 환란과 핍박(9-13, 14-20) 3) 종말 직전의 상황(6-8, 21-23) 4) 재림의 상황 (24-27) 5) 말세의 교훈 (28-37) 오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 하신 부분을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는 종말에 대한 말씀들을 세 시간에 걸쳐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성전에 대한 제자들의 자부심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과부의 헌금을 보시며 참으로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모습을 가르쳐 주신 주님께서는 이제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성전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여 감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 선생님 얼마나 아름다운 건물입니까? 건물의 돌들이 얼마나 굉장합니까? ” 하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살았던 이들에게 그 성전 건물은 참으로 굉장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자란 곳에는 그런 건물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당시 헤롯이 건축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은 참으로 아름답고 웅장하고 굉장한 건물이었습니다. 성경고고학자들은 말하기를 당시 성전은 로마로부터 유대인들을 다스릴 정권을 인정받은 헤롯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곤고하게 하기 위하여 솔로몬 성전못지 않은 성전을 짓겠다고 선언하고 BC 20-19경에 폐허가 된 솔로몬 성전과 학개 성전의 잔해를 분해하여 거의 10년이 걸려서 성전 기초 골격을 완성했다고 말합니다. 이 성전은 AD 64년경에야 완성이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당시에도 계속하여 성전을 짓고 있었습니다. 헤롯 성전은 성전산(Temple of Mount)이라고 하는 큰 언덕 위에 세워졌습니다. Josephus는 이 산이 모리아 산(Mount Moriah)이라고 했습니다. 헤롯은 솔로몬 성전 그대로가 아닌, 헬라-로마 양식의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높은 옹벽을 쌓아서 웅장하게 보이는 건축술을 동원한 양식이었습니다. 성전산의 대부분은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의 뜰로 되어있으며, 여인들이 들어갈 수 있게 여인의 뜰과 유대인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성전과 제사장의 뜰 사이에는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전 본 건물은 길이와 높이는 100규빗 즉 44.5m나 되는 건물입니다. 건물 외벽은 크고, 흰 대리석돌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이 돌 한 개의 규모는 길이 40ft(12m), 높이 20ft(3m), 넓이 18ft(4.8m)라고 합니다. 언덕의 남서쪽에는 Tyropoeon valley 라고 하는 골짜기가 있는 데 그 깊이가 225feet였습니다. 성전은 모리아 언덕 약 67.5m 위에 50m 높이의 건축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Tyropoen Valley에는 길이 354feet(106m), 폭 50feet(15m) 의 다리가 세워졌고 그 다리는 Royal Porch라고 불리는 성전의 서쪽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행각은 37개가 두 줄로 되어있었는데, 높이는 1/2 feet(15cm) 이 돌들은 화려한 흰색 대리석으로 되어있었습니다. Josephus는 이 성전을 멀리서 보면, 마치 산위에 흰 눈이 덮여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고 서술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정말 힘껏 이 성전 건축에 힘을 기우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아름다운 성전 건물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2. 성전에 대한 주님의 예언 * 막 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이 예언의 말씀은 40년 후인 AD 70년 로마 Titus 장군에 의하여 공격을 받아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약탈되고 맙니다. 갈릴리 시골 출신의 제자들에게는 그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 대단하게 보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인 술수와 종교적인 위선에 따른 타락의 모습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멸망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이미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되어 온 바와 일치합니다. * 미가 3:10-12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 렘 26:2-7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고하되 한 말도 감하지 말라.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법을 행치 아니하며, 내가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낸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 아니하면, 내가 이 집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에서 이 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인간이 세운 건축물을 신성시하고 그 건축물을 하나님 보다 더 중요시하는 종교적인 행태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종교적인 형식에 치중하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바른 생활을 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심하게 질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에 대하여 확인하시고 안타까워하시며 심판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라고 하겠습니다. 습관적이고 형식적이며 위선적인 종교생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이란 어떤 곳입니까? 그들의 존재가 확인되는 장소요, 그들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이 성전이 망한다고 할 때 그들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성전 파괴의 진술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되는 빌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 막 14:57-58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 막 15:29-30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3. 성전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 * 막 13:3-4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파괴의 예언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가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아 있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언제,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질문을 하게 됩니다. 과연 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발달된 이 세상이 멸망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종말을 무시하고 부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종말에 대하여 언급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떤 상황 가운데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궁금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나친 생각과 이 문제에 골똘하게 집착하다가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미선교회 이장림목사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과거 초대교회 때부터 주님 오신다는 말이 계속 되었는데 다 거짓으로 판명 났다. 왜냐하면 그들이 때를 잘못 짚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여기 소개하는 사람들의 예언을 볼 것 같으면 --- 진짜다 “ 그러나 성경은 우리들에게 종말에 대한 말씀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Campus Crusade Christ 대표인 김중곤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 성경에서 종말론적 관심은 옥중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밤중에 새벽을 기다림같이 열망적이다. 재림에 관련된 곳이 318번이나 있고 천국과 지옥과 부활과 영혼 구원문제는 백주의 태양처럼 강렬한 현실이었다. 주님께서는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7).” 라고 하셨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현세 주의자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시고 말세에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마24:38)하는 현세가 전부이며, 유물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의 가치관을 비난하고 있다. 말세 인간들은 예수 재림을 기롱한다(벧후3:3). 오늘날은 복음적 신앙을 오히려 반사회, 반문명, 반지성, 혹은 피안주의니 현실도피니 하는 낙인을 찍어 냉소하는 풍조를 만든다. 그것도 진화론 공작과 함께 악마의 반성서적, 반내세적, 반종말적 정신 풍토 조성을 위한 고등 공작의 가장 성공한 케이스다. 속지 말자. 내세와 영생과 부활과 재림을 사모하고 그 대지와 태양 같은 현실을 도피하지 말자.“ <김중곤목사> 과연 오늘의 이 시대 가운데 예수님의 재림을 문자 그대로 믿고 그 사실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우리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이 점을 매우 의식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종말을 믿으십니까? 초대 교회의 성도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을 확신하고 항상 고백하고 사모하시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며 대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십니까? 주님께서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 막 1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의 관심과 사모함이 잘못될 수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신중하고 사려 깊게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살펴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4. 종말에 대한 자세 그러면 이 종말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어떠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3장에서 세 가지 동사로서 설명하시며 경고하셨습니다. 첫째, 주의 하라! 둘째, 두려워말라! 셋째, 조심하라! 입니다. 1) 주의하라 * 막 1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사람들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신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 두려워 말라 * 막 13:6-7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3) 조심하라(Watch out, Blepete) * 막 13:9-10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이 조심하라는 말씀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 동사들은 예수님께서 장차 임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환란의 때에 주님을 증거할 제자들을 무장시키시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주관하심을 신뢰하라고 교훈합니다. 아무리 세상의 난리와 소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I 가운데서 정신을 잃지 말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담대하게 증거하며 그 때를 위하여 준비하며 기다릴 것을 교훈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구동성으로 말세라고들 합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가 얼마나 갈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름답고 웅장하며 화려한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신 것처럼, 이 세상은 영원히 우리가 살 세상이 아니라고 예언합니다. 예수님의 성전 파괴의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어졌듯이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이 세상의 심판에 대한 종말 예언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날을 준비하여 깨어있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눅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74) 마가복음 강해 말세의 교훈 2 : 제자들을 경계하심 /막13:3-23/ 박병은목사 2018-12-20
(74) 마가복음 강해 말세의 교훈 2 : 제자들을 경계하심 /막13:3-23/ 박병은목사 2018-12-20 11:02:42 read : 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말씀에 의지하여 말세의 교훈 두 번째 시간을 갖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주님의 마가복음 13장의 예언을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에 대한 예언들은 즉 묵시문학의 특징은 산문적이거나, 서술적이 아니라, 시적이고 상징적입니다. 꿈과 Vision(환상)적인 기술을 합니다. 마치 음침하고 우울하고 꿈속에서 몽롱하고 희미하게 보이는 그 어떤 환상과 같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고 확실하기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언의 말씀을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나 일어날 사건을 근거로 하여 예언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방식의 설명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며 가까운 시일에 일어날 종말의 사건들과 오랜 후에 일어날 재림과 이에 따른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예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제자들은 헤롯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에 도취되어 예수님께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건물에 대하여 붕괴 곧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예언은 이때로 부터 약 40년이 지난 AD70년에 로마 Titus 장군에게 철저하게 파괴되므로 성취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 막 13:3-4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주님께서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런 징조가 일어날 때 취해야 할 행동 지침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의 말씀은 철저하게 제자들에게 하신 예루살렘 성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1. 예루살렘 성의 멸망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예루살렘 성의 멸망에 즈음한 일반적인 징조와 그때의 상황(5-13) 2) 예루살렘 성의 멸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지침(14-23)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일반적인 징조에 대한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5절 이하의 말씀들입니다. 이때의 전조들은 이렇습니다. 1) 적그리스도들의 출현(이단의 발흥), 2) 혼란의 소문, 3) 전쟁과 기근, 심각한 지진과 자연재해 4) 핍박(9, 12-13) 등 혼란하고 힘든 상황이 전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만 할 것이기에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조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이 끌려서 공회에 서서 심문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미혹되지 말고, 스스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과 지침은 오늘날도 유효한 말세에 처한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쟁과 기근, 그리고 각종 자연 재해가 일어나면 즉시 말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때가 얼마나 되었던가요? 자연 재해가 없었던 때가 얼마나 있었나요? 어떤 인류학자는 말하기를 인류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때는 단 10년도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류는 항상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 항상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시대적이고, 자연재해로 인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이 말세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온 전조일 뿐입니다. 문제는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 벌어지나요? 주님은 그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14절입니다. * 막 13:14-23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하신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의 택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주님께서는 이때를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설 때” 라고 어떤 특정한 상황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말은 다니엘서와 연관 지어 설명을 합니다. 단 9:27; 11:31; 12:11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 단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 단 11:31-32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 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 단 12: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일을 지낼 것이요 여기서 멸망의 가증한 것(blelyugma tes eremoseos)이란 말은 지독스러운 신성모독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일련의 이 다니엘의 예언은 BC 186년에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앗시리아의 왕 Antiocheius Epipanes가 예루살렘 선전 안에 이방 우상을 섬기는 제단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돼지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뜰에다가 창녀들이 창녀촌을 세워 음란한 행위를 성전 안에서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145년경에는 성전 마당에다가 Olympian Zeus 상을 세우고 그 제우스 신상에다가 유대인들이 강제로 경배하도록 강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인용하시어 그런 일들이 장차 또 일어날 일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AD 70년경에 있었던 Titus 장군의 예루살렘성의 파괴를 이것이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때 로마군이 실제적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주께서 사용한 단어의 해석에 있습니다. 즉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단어 blelyugma tes eremoseos 가 중성형이지만, 세워진 것 이란 estekota 말은 남성형입니다. 즉 중성형과 남성형이 일치하게 사용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즉 신성모독을 하는 어떤 것이 서있는 것이 가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증한 것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 살후 2:3-4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전에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며 신성을 모독하는 자가 나타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어떤 학자들은 마지막 종말의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즉 불법의 아들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 살후 2: 7-8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Josephus는 이 예수님의 예언은 AD 40년 Caligula 황제가 예루살렘에 쳐 들어와 자기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성전에 자기상을 만들어 놓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하나님을 섬기듯 자기 상 앞에서 제사 드리도록 강요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때 Caligula의 신하들이 극력 만류했지만, 황제는 강력하게 진행 시키다가 AD 41년 갑자기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마도 주님은 이런 상황을 미리 아시고 예언하신 것은 아닐까요! 유대인 역사학자인 Josephus는 그의 책 The War of Jewish"라는 책 5권에서 AD 70년경에 침략당하여 멸망되어가는 예루살렘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9,7000명이 포로가 되었고, 110만 명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임을 당했다. 당시 기근이 점차적으로 엄습하여 다락방에 숨어 있던 여인들과 아이들 노약자들이 굶어 죽었고, 거리에는 성인 남자들의 시체가 뒹굴었으며, 약간 젊은 아이들과 청년들은 기근 속에서 방황하다가 쓰러진 사람들이 질비하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울 수도 없고, 시체를 장사지낼 수도 없었다. 깊은 침묵이 온 성을 뒤덮었다.” 주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미리 아시고 예언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 예언의 말씀은 이런 정치적인 상황이 발생할 그 때는 시작이지 아직은 종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시어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에게 그때가 임박하면 집안에 있지 말고, 산으로 들로 도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 환란의 때에 임신을 하였거나 적을 먹이면 힘이 들것이며,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면 어렵기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이렇게 예언하신 것일까요? 2. 예언하신 이유 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말세의 교훈을 주셨을까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영적 의미는 장차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할 제자들이 미리 알아서 준비하고 사명에 충실한 자들로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미리미리 앎으로 임박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 막 13:5-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예언의 말씀은 우선적으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신 예언입니다. 즉 제자들이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지혜롭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여 복음의 증언자들로서 끝까지 감당하는 원하신 것입니다(9절). 그래서 주께서는 장차 일어날 시대적인 상황과 현상을 말씀하시며 미리미리 준비하고 끝까지 인내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점을 강조하시며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이 복음의 증언자들로 예수를 전파할 때 소문과 난리와 각종 자연 재해와 전쟁으로 소란스러운 때가 올 것인데 그렇더라도 흔들림 없이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실제적으로 제자들을 끝까지 이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3. 말세에 처한 이들의 행동 지침 우리는 주님은 이런 예언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고 가르치셔서 제자들이 성공적으로 복음의 사역을 한 것에서 귀한 영적 교훈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몇 가지의 행동 지침은 무엇입니까? 1) 미혹을 받지 말라. * 막 13: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 막 13:21-22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주님은 특별히 미혹을 받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수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나 이단 사설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는 이만희라는 사람이 신천지라고 하는 이단종파를 과천을 근거로 만들어 교회 속에 사람을 침투시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요, 메시야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구원 진리의 어느 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들에게 매력적이고 쉽게 동화될 수 있는 형식을 개발하고 제공하여 호기심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넷째, 자기들에게만 와야 참된 구원이 있다고 분리적인 교리를 가르칩니다. 다섯째, 매우 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교리를 가르치려고 노력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이단의 출현을 미리 아시고 미혹을 받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2) 두려워하지 말라 * 막 13:7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3) 스스로 조심하라 * 막 13: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 4) 인내하라 * 막 13:13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5) 기도하라 * 막 13:18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6)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기대하라 * 막 13:20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 본문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세에 대처하는 의식과 요령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주님의 이 말씀을 상기하며 그 어려운 교회의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시대를 거슬러 복음 전파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기독교의 역사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이런 종말의 예언의 말씀들을 자세히 그리고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언젠가 너희가 세상으로 부터 미움을 받고 고통과 환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런 가운데서 끝까지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 미 7:4-6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숫군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사람이리로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선언합니다. * 미 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성도여러분,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미리 알려주신 말세의 교훈에 따라 신실하게 신앙을 지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제자들과 같이 말세에 처한 우리들로서 주님께서 주신 행동지침을 잘 숙지하고 장차 임할 주님의 날을 잘 맞이하도록 조심하시고, 주의하시며, 영적으로 깨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우러러 보며, 구원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눅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75) 마가복음 강해 말세의 교훈 3 : 성도의 준비 /막13:24-31/ 박병은목사 2018-12-20
(75) 마가복음 강해 말세의 교훈 3 : 성도의 준비 /막13:24-31/ 박병은목사 2018-12-20 (75) 마가복음 강해 말세의 교훈 3 : 성도의 준비 /막13:24-31/ 박병은목사 2018-12-20 10:59:11 read : 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이 말씀은 마지막 날에 대한 주님의 말씀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공부해본 결과 많은 성경학자들이 해석을 달리하고 있기에 약간의 혼란이 있기를 하지만,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음에는 다름이 없기에 말씀을 해석하며 주시는 귀한 영적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아시는 대로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란 개념은 아직 일어난 것이 아니기에 여러 가지 주장과 설명들이 있는 줄 압니다. 문제는 이 주제가 제자들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음에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자연의 현상과 정치적인 현상들에 의하여 감정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본문의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 가며 해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30절 이하에서 주의 날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이 이 세대 안에 다 이루어질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 막 13:30-3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예언의 말씀은 비단 질문을 한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임을 분명히 예언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 막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그러기에 우리는 이 종말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진지하게 살펴보며 그 말씀의 확실한 뜻을 찾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1. 혼란스러운 상황의 전개 (24-25) 우리는 지난 시간에 제자들의 질문에 따라 답하시는 예루살렘의 붕괴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독한 고통과 환란 속에서 완전히 멸망당하는 예루살렘의 현장은 곧 하나님의 통치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즉 이제까지 택한 백성 유대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던 하나님의 통치는 새로운 국면에 돌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풍성하게 예언하여 유대인들에게 자각하도록 주지시켰던 하나님의 섭리셨습니다. 이때가 되면 세상에는 자연 재해와 함께 정치계가 혼란스러울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난리와 전쟁, 지진과 기근등 재난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세계 정치계가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막 13:7-8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 막 13: 24-25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우리는 이 두 구절에서 예언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장래의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날이 오기 전에 전쟁과 기근, 각종 재난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들을 표현하는데 동원된 용어들은 이미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용어들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구약 예언서들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하셔서 하신 것입니다. * 암 8:9-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하게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 욜 2:10-11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F. F. Bruce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의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재림은 영원한 지도가 아니다. 이미 미래에 정해진 시간표를 발표하시는 것도 아니다. 주님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 즉 그들이 사용한 말과 그림들을 인용하셔서 당신의 때를 예언하신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주님께서 인용하신 구절들의 내용이 다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전쟁, 무서운 기근, 지진 등 자연 재해와 전쟁 등을 예언하셨는데, 이것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40여년이 지난 이후 다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Laodicaea 지진으로 인한 파괴, Vesuvius 화산 폭발로 인하여 발생한 Pompeii 도시의 파괴, Claudius 황제 때 일어난 심각한 기근 등등 모두가 다 예수님의 예언의 성취로 이해된다. 문제는 이 구절들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재림을 예언하시며 그때 발생할 징조들을 겪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다는 점이다“ 2 새로운 통치권의 설정(26-27) 주님께서 하신 막 13:24-25의 말씀은 이사야 13:10과 34:4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 사 13:9-10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 사 34:4-5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멸망으로 정한 백성 위에 내려서 그를 심판할 것이라 이 말씀들은 세상 종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바벨론과 에돔의 권세가 붕괴하고 새로운 세계 정치질서가 형성될 것을 인용하시어 예수님께서도 같은 교훈을 주시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마치 바벨론이 망하고 에돔이 망한 후에 역사는 계속하여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장차 한 역사가 마감되고 새로운 역사가 계속되어갈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여기서 사용하신 구약의 인용의 말씀은 예루살렘의 붕괴와 함께 이루어질 새로운 질서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옛 질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느 한 특정 도시(Jerusalem)를 중심으로 통치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권위와 구조의 변화를 가지고 임하실 새로운 왕의 임재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는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개혁의 역사로 이 세상 가운데 임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에게만 아니라, 오고 오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알아듣도록 분명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계속하여 이러한 징조들이 발생하면, 인자가 임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셔서 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 막 13:26-27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자연 재해와 정치계의 개편이 이루어지는 혼란한 상황이 지난 다음에 영광스러운 임재를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칼빈 선생은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구원의 섭리를 역사해 오셨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과 경고를 무시한 유대인들을 통한 우주적인 회복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게 된다. 십자가와 부활로 형성된 새로운 통치권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예수의 나라요, 교회이다. 즉 교회를 통하여 새로운 질서와 통치권을 가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하신 것이다. 그것은 옛 주권의 자리에 새로운 통치자가 오셔서 개혁하시고, 재편하시는 역사가 있게 될 것이다. 그 때 새로운 왕을 신뢰하고 그 왕께서 명하신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이요 영광이 될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을 주님께서는 이미 막 8:38에서 예언하셨습니다. *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여기서 인자라고 하는 용어는 다니엘 7:13-14에서 예언된 말씀입니다. 다니엘서에서 예언된 인자는 어떤 분이십니까? * 단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목격한 인자는 권세와 영광이 주어져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이 분은 구름 가운데 계시며,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히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왕이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목적은 예루살렘이 세계 정치의 중심에서 사라지게 될 때, 인자가 오셔서 왕권을 행사하시며 그 나라를 세울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온전히 택한 백성들을 모으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때 갖가지 그리스도를 자처하는 이들이 나타나서 미혹하게 되겠지만 미혹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 막 13:20-21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다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셨느니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 막 13:26-27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을 혼란스럽게 이해하는 면이 있습니다. 즉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이 예언의 말씀의 성취로 보고 긴장하곤 하는 모습을 교회는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27절의 경우를 지난 1945년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각지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신흥 이스라엘나라를 세운 것 사건이 종말이 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물론 본문은 종말의 때 즉 주의 심판의 날을 예언하시는 말씀이지만, 무조건 역사적으로 발생한 일 하나하나를 가지고 그것이 마지막 날의 증거라고 단언하기에는 성급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기서 해석의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대두됩니다. 즉 칼빈(J. Calvin)선생이 설명하고 있듯이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하늘의 권세가 영적 영역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온 세상이 회복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중심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오시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통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워 가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즉 26절의 말씀은 문자적인 해석보다는 구약에 예언된 말씀을 인용하시며 새로운 통치권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즉 한 민족, 국가에 국한되었던 시대가 종결되고, 영적으로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산지사방에서 불러 모으시고 새로운 나라를 형성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온전히 고백하는 교회시대의 도래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징조가 나타나게 될 때 주님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3. 말세에 처한 성도의 자세(28-31) * 막 13:28-31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주님의 이 교훈의 말씀을 통하여 말세에 처한 우리들이 가져야할 중요한 영적 자세 세 가지를 얻고자 합니다. 첫째, 영적 상황에 대하여 예민한 감각력을 가지라.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일상으로 접하는 무화과나무를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살기에 그 자연의 변화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 세상의 정치적, 물리적, 구조적인 변화가 있을 때, 그리고 그로 인하여 심각한 영적 변화가 있을 때 예민하게 그 현상을 예민하게 살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영적 자각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취하여 세상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흥청망청 보낼 것이 아니라, 경성하여 깨어 있을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 마 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셋째,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을 확신하라 주님께서는 이러한 종말의 일들이 이 세대 안에 일어날 것이기에 주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신뢰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제자들의 질문, 언제 성전이 붕괴되겠습니까? 그리고 그때에는 어떤 징조가 있을까요?“ 라고 묻는 물음에 대하여 그들이 살아생전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언하시면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의 말씀들을 인용하시어 장차 새로운 정치 질서가 들어와 새로운 나라가 형성되고 성취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교훈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줍니까? 이미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새로운 나라의 원리를 우리들에게 임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의 통치자는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이 지상의 교회가 심각한 혼란기를 거쳐 순결해지고 영광스럽게 임재하실 것입니다. 왕되신 주님께서는 비록 이 땅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혼란과 고난의 과정을 겪으며 단련되어 순결해지고 온전해 질 때, 주신 이 말씀들을 온전히 신뢰하고 인내로 장차 임하실 왕의 임재를 사모하고 나가갈 때, 참된 승리와 영광으로 우리들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눈으로 임하시는 왕의 모습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는 깨어서 그 날을 사모하며 고대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마라나타 하면서 주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 계 22:18-20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말세에 처한 성도들이 가져야할 중요한 영적 지식이요, 고백이요, 헌신이어야 합니다.
(76) 마가복음 강해 말세의 교훈 4 : 깨어있으라 /막13:32-37/ 박병은목사 2018-12-20
(76) 마가복음 강해 말세의 교훈 4 : 깨어있으라 /막13:32-37/ 박병은목사 2018-12-20 (76) 마가복음 강해 말세의 교훈 4 : 깨어있으라 /막13:32-37/ 박병은목사 2018-12-20 10:52:31 read : 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말씀에 의지하여 말세의 교훈 네 번째 시간을 갖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성전의 파괴당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날 때에 벌어질 시대적 상황에 대하여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말세에 일어날 징조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장차 일어날 재림의 진리를 말씀하시며 교훈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주님의 재림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 세상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라며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때를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영적교훈을 해 주셨습니다. 오늘 그 마지막 교훈의 말씀을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들은 본문과 함께 마태복음 24-25장, 누가복음 21장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말세에 대한 교훈을 하시면서 주님은 한 가지의 중요한 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은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훈은 단지 제자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37절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 막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깨있는 것! 이것은 말세에 처해 살아가는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할 교훈입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 과연 이 말은 어떤 영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1. 깨어 있음의 의미 세 가지의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첫째, 주의하라 “agrypneo” 라는 이 단어는 “keep alert, to be watchful” 경계태세를 유지하라,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라! 마치 군인이 한 밤중에 졸지 않고 경계근무를 서듯이 파숫꾼의 사명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to chase sleep away--> 잠을 쫓는 부단한 노력을 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교훈을 누가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실제적인 적용까지 해 주셨습니다. * 눅 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둘째, 인내하라. * 눅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셋째, 항상 기도하라. 기도는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 가우데 마음이 둔하여 지지 않도록 경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도록 합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기도하여 우리의 영혼의 깨어있기를 명하셨습니다. 바울도 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깨어 기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깨어 있음은 곧 기도하는 것입니다. *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 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 골 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그러면 깨어있으라는 교훈을 어떻게 적용할까요? 주님께서는 항상 깨어있을 것을 명하시며 비유를 들어 좀 더 구체적으로 교훈하셨습니다. 본문 34절 이하를 봅시다. * 막 13:34-37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 엘는지, 밤 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의 삶이 내 마음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주인이 따로 있어서 나에게 할 일을 맡겨 주시고 언젠가 오셔서 그 맡겨준 것을 계산하자고 말씀합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십니까? 주인의 오심을 기다리며 깨어있는 점에 대하여 주님은 두가지 비유를 통하여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달란트 비유(마24장)와 열 처녀의 비유(마25장)입니다. 2. 열심히 일하라 먼저 달란트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된 이 비유의 말씀을 봅시다. * 마 25:14-30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우리가 잘 아는 이 비유에서 얻는 교훈들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시간 깨어 있어야 하는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렵니다. 첫째, 맡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내 것이 아니다. 맡겨 주신 것이다. 맡겨 주신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재능대로”이다. * 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이 기준이 무엇인가? 재능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같은 것이다. 여러분께서 자신의 재능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으로 부터 온 근본적인 여건들, 재능들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학생은 자신 속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고 열심히 그 재능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계산할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깊은 도전을 받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감사와 충성으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잠 안자고 일을 했습니다. 머리를 짜고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총 동원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주인이 계산하자고 하실 때, 주인에게 아름다운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잔치에 초대되어 칭찬과 상금을 받았다. * 마 25:20-23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 마 25:24-30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1) 주제파악에 실패. -자기의 재능을 잘 평가하지 못하였다. 2) 잘못된 선입견.-주인에 대한 원망과 오해-->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해 3) 게으름-일하기 싫어함 4) 3 “무”의 행동/ a. 무식(지혜), b. 무지(주인 오심을 무시-집에서 無爲徒食하는 송충이와 같은 존재)생활자 c. 무시-계산을 무시, 심판의 무서움 이 종에게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자신의 잘못과 무능을 탓하기 보다는 타인에게 그 원인을 돌리며 원망하는 못된 성품의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성품의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게으름을, 무지함을, 못된 성품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무시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성경은 이 심판의 무서움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형벌입니다. 깨어 있는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고 일하는것을 의미합니다. 이 게으른 종은 전혀 주인의 오심에 대하여 의식하지 않고 무시하였다. 자기 식으로 행동하고 세상 가운데 취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북한의 우리 식 사회주의 !!----> 결과가 어떠한가? 현재 그동안 가져왔던 내 방식대로의 신앙생활의 결과가 어떠하여 가고 있습니까?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오심이 언제 일찌 알 수 없기에 깨어 점검하며 마지막 인생의 과정을 잘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긴장합시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생활 방식을 점검합시다. 자신을 합리화하지 마시고 언젠가는 나의 삶에 대한 평가가 온다는 사실을 직시하시기를 바랍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바는 하나님의 나라에로의 초대는 오는 자들에게 순종과 책임있는 봉사를 요구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등한히 하였을 때는 최후의 심판에서 영광스러운 천국의 잔치에서의 추방된다는 점을 교훈합니다. 이는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준비하라 또 하나 깨어있음에 대한 교훈적 비유는 열 처녀의 비유이다. * 마 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 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준비성입니다- 준비!!! 이 비유에서의 문제는 무엇인가? - 준비성에 대한 문제이다. 명색이 신랑을 맞이할 신부라는 처녀들이 맞이할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요?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시겠지요. 그것은 세상의 풍조와 시대 상황 때문입니다. * 마 24:34-3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 일상의 생활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임박한 최후를 준비하지 못하고 세상의 일상에만 취하여 살아가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의 의식과 생활 풍조가 문제입니다. 이 곳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얼마나 좋습니까? 편리하고 안전하고 즐길 수 있는 각종 시설 때문에라도 얼마나 행복합니까? 돈만 있으면 ---그래서 돈을 벌기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얼마나 취해있던지 돈을 위하여 하나님까지도 이용합니다. 그래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심 때문에 주님을 맞을 준비를 등한시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열처녀 비유에서 이 점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준비한 그룹과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당한 그룹입니다. 그 날이 옵니다. 그 때가 옵니다. 그 때 산 아 바위야 나를 가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태까지 가지 않도록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확인하며 열심히 일하며 그 날을 의식하고 사역을 해야 합니다. 준비하여야 합니다. *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 날” 영광스러운 천군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영광 가운데 재림하는 그날 우리 모두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무도 모를 그 날의 상황 그러나 우리는 변화된 몸을 입고 우리의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을 것입니다. 그 날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얼마나 충성하였느냐? 얼마나 순결하였느냐? 얼마나 열매를 맺었느냐? 얼마나 생명을 건졌느냐? 이 심판 앞에 기쁨으로 주인이여 보옵소서! 여기 당신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잘 관리하고 일하여 얻은 소득과 함께 드립니다하고 내 놓을 것이 풍성한 있는 충성된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흰세마포를 입은 순결한 신부들이 되셔서 우리의 신랑되신 주님의 혼인 잔치에 모두 참여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 계 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77)마가복음 강해 널리 전할 헌신 /막14:1-9/ 박병은목사 2018-12-20
(77)마가복음 강해 널리 전할 헌신 /막14:1-9/ 박병은목사 2018-12-20 (77)마가복음 강해 널리 전할 헌신 /막14:1-9/ 박병은목사 2018-12-20 10:49:06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십자가로 나가시는 과정 가운데 매우 의미 있는 기록이라 하겠습니다. 본문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거듭나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헌신된 삶을 살아가는 동안 감당해야할 중요한 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이 사건을 모두 자세하게 기록하여 남겨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마가복음 강해 77번째 시간을 가지며 “널리 전할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헌금 드린 성도님들의 명단을 발표하고 있지 않습니다. 발표하는 쪽에서는 영수의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의 명단과 액수까지 밝히는 것은 성경의 원리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구제를 말씀하시면서 그것은 다음과 같이 교훈하셨습니다. *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이 원칙을 주님은 구제뿐만 아니라, 기도와 금식과 같은 종교적 행위에 모두 적용하시어 교훈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원리와 반대로 오늘 본문에서는 한 여인의 헌신을 받으시면서 이 사건을 널리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심지어 이 여인의 행위와 그 여자를 기념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왜 이런 교훈을 하신 것일까요? 또한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을까요? * 막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1. 헌신의 상황 -본문의 배경 * 막 14:1-2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그 일당들이 예수를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결정하고 시기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살인 음모가 진행되어 있습니다. 또한 10절에 보시면 * 막 14:10-11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이 두 살인 음모가 진행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한 여인의 아름다운 헌신의 행위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은 유월절 잔치 1주일 전에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누구일까요 궁금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된 것을 보면, * 요 12:1-7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성경학자들은 이 여인을 막달라인 마리아로 지목합니다. 이 여인은 한때 일곱 귀신이 들어 고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그 귀신을 좇아냄으로 온전하게 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눅 8: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은 문둥이 시몬의 집이었습니다. 문둥이라고 한 것을 보니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문둥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초대한 지 모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을 볼 것 같으면 그곳에는 나사로도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나사로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한 모임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 모임에 마리아는 귀한 옥합을 깨트려 그 속에 담은 향기로운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나드 기름은 인도가 원산지입니다. 말하자면, 수입품인 셈입니다. 이 기름을 마가는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마리아가 진품이며 정품인 명품 나드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께 부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 아가서 1:12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이런 귀한 기름은 왕궁에서나 사용할 정도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드린 향유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이 향유의 가치는 노동자 한사람이 300일을 해서 버는 돈이다. 지금 돈으로는 $ 7* 8*300=$ 16,800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비싼 명품 향유였습니다. 2. 논란의 대상이 된 헌신 이 여인의 이러한 헌신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사도 요한도 이 사건을 추억하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막 14:4-5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rebuke)하는지라 * 요 12:4-5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사람들은 이 여인의 갑작스러운 돌출행동에 대하여 놀라움과 함께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 대하여 책망하며 비난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힐난했습니다. 제자 가룟 유다는 이 마리아의 이 행위가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판단하고 그 여인을 향하여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룟 유다의 속 중심에는 또 다른 욕심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가룟 유다에 대하여 놀라운 정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사실 우리 예수님은 무소유자였습니다. *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 귀한 헌신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은 마리아의 행위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녀의 헌신이 지혜로운가요? 아니면 가룟 유다의 말이 지혜로운가요? 마리아는 돈을 썼고 유다는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나요? 마리아는 오늘날까지 칭송을 받지만, 돈을 추구했던 가룟 유다는 목매어달고 죽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오늘날까지 오고 오는 세대에서 가룟 유다를 비난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유다가 <왜 허비하였는가?>라고 말한 “허비(apoleia)”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요 17:12에서 기도하시면서 가룟 유다를 멸망의 자식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멸망(apoleias)”이라는 말과는 같은 단어입니다. 즉 허비한 것은 멸망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잘못된 허비는 멸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지나치게 돈을 사용하면 망하게 되지요. 그러나 주님을 위한 헌신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당장은 지갑에서 돈이 나가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위한 헌신은 참으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축복이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에 대하여 허비한다고 화내며 비난하던 그 가룟 유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헛되게 허비하여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하여 허비한 마리아는 그녀의 낭비는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허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참된 구원이요, 영광이요, 영원한 소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교훈하십니다. * 마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주님은 한 때 부자 청년이 자신에게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지를 물을 때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 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구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방안에서의 잠간의 소란스러움에 대하여 주님을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그리고 이 여인의 행위에 대하여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셨나요? * 막 14:6-9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 요 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왜 주님은 이렇게 이 여인의 행위를 칭찬하시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여인의 행위를 기념할 것을 명하셨나요? 문제는 이렇게 비싼 향유를 주님을 기꺼이 받으셨고 그리고 이런 여인의 헌신을 널리 전하며 심지어 기념하라고까지 제자들에게 특별하게 명하셨습니다. 왜 그래셨을까요? 너무도 좋으셔서 그랬을까요? 그 비싼 향유를 주님은 바르고 싶으셨을까요? 주님께서 의도하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이 여인은 이런 헌신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3. 널리 전할 헌신 1) 헌신의 동기 우리는 이 마리아의 행동을 복음서를 통하여 깊이 살펴볼 때 그 여인의 헌신의 동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여인은 놀라운 헌신을 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그 여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 눅 7:36-50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이 기록은 막달라 마리아가 귀신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다음에 예수님을 찾아와 건강하고 정상적인 인생으로 만들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받은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하는 사람들입니까? 십자가의 복음으로 거듭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에 대한 진실된 감사가 있습니까? 사람들에게나 주님에게 받은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받은 많은 은혜를 잊지 않고 깨달아 예수님께 진정한 감사의 헌신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둘째,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하여 잘 배운 지식이 있었습니다. * 눅 10:38-42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잘 알고 있는 이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다가 지적하듯이 동생 마리아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녀 역시 중요한 일을 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 그리고 그 분의 사역이 어떤 차원의 일인지를 알려고 애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강조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확실한 영적 지식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확실한 지식을 얻고자 힘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역의 중요성을 알기에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그 여인은 엄청난 희생을 하며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귀한 옥합을 깨뜨려서 순전한 나드 향 기름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 드리는 헌신의 행위였습니다. 자신의 가장 값비싼 것을 드려 주님께 드렸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자신을 비난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구속 사역에 대한 동참의 헌신을 한 것입니다. 2) 헌신의 의미 왜 예수님은 이 여인의 헌신을 기꺼이 받으셨을까요? 그것은 그 행위가 주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그 비싼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렇게 값비싼 기름을 담은 용기를 얼마나 아름답고 그 용기 역시 얼마나 비쌀까요? 그런 마리아는 그 그릇을 깨트려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했습니다. 그리고 비싼 기름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것입니다. 이 머리에 붓는 행위는 유대인의 관습상, 장례 전에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를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받아드리신 것입니다. 결론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 전 3:1, 5-6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무조건 아낀다고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은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습니다. 이때를 잘 알아 가장 의미 있는 인생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가장 귀한 것을 버림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여 주님의 구속 역사에 동참하는 엄청난 헌신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여인은 오고 오는 주님의 교회에서 이 헌신의 중요성을 알리고 기념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주님의 사역에 대하여 얼마나 인식하고 헌신하시고 계십니까?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드리는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목적이 있는 삶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 때 우리 주님은 그를 기억하십니다. 여러분의 옥합은 어떤 것입니까? 그 옥합 속에 담긴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인생을 살뿐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의 구속 역사에 동참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아드리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아멘
(78) 마가복음 강해 가룟유다 1 : 비극적 인생 /막14:1-2, 10-11/ 박병은목사 2018-12-20
(78) 마가복음 강해 가룟유다 1 : 비극적 인생 /막14:1-2, 10-11/ 박병은목사 2018-12-20 10:45:56 read : 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독교 역사상 가룟 유다라는 인물에 대한 논란이 많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 율리우스 시저의 암살에 그의 심복 부루투스의 배반이 언급되듯이 가룟유다의 스승 예수를 배반하여 판 사건은 가장 믿었던 절친한 심복으로부터 배반이라는 전형적인 예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 때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다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들으셨겠지만, 최근에 유다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도 있습니다. 오늘 그 첫 시간으로 가룟유다에 대한 공부를 해 보겠습니다. 한 주간의 일정 본문은 11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주님의 구속사역의 마지막 주간의 계속되는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음을 기준으로 하여 본문을 근거로 그 과정을 역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토요일: 안식일이라 쉬시고(10:46-11:11) 일요일: 예루살렘 입성, 성전을 둘러보심 (11:7-10) 월요일: 성전에 들어가시며, 무화과나무 저주, 성전 숙청 화요일: 무화과 나무 저주대로 말라 버림 확인, 성전에서 논쟁(권세, 세금)과 교훈(포도원 농부비유, 서기관과의 논쟁-그리스도, 말세훈) 과부헌금 수요일: 1절의 기록- 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음모 시작됨 이 음모를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막 14:1-2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종교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든 유월절에 예수가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을 동안에 예수를 처리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까요? 아시는 대로 유대의 유월절은 민족 최대의 명절입니다. 이 때가 되면 온 유대나라에서는 온 국민이 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한 주일 간의 유월절 축제를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루살렘이 크다고 하여도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정도는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안은 물론이요 성 밖 언덕과 거리에 야숙을 하면서 유월절을 지키게 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갈릴리 출신인 예수의 무리가 예루살렘 성 주변에 있을 때 제거하려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위대한 스승 내지는 메시야로 알고 따르고 있는 것은 지난 주말에 목격하고 성전을 숙청하는 그 권위와 능력을 보았기에 함부로 선뜻 나서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폭동이 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들이 잘 알았습니다. 또한 예수가 어디에 있는 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예수의 진영 내부로부터 그 정보가 나와주는 것입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자기 발로 찾아와서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하게 됩니다. * 막 14:10-11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이런 기쁜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은 기뻐하며 가룟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 사건을 이미 예언하고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시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2. 가룟 유다의 배반 이 가룟 유다는 누구이며 왜 그는 이런 스승을 배반하는 일을 저질렀을까요? 1) 가룟유다 아시는 대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12 제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사복음서 어디에서도 이 가룟유다가 어떻게 12제자에 선택되었으며 또한 제자로서의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소명을 받았는지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Kerioth 출신의 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흔히 Kerioth이란 고장을 당시 속된 말로 “거짓말장이들”이란 의미로 비하해서 불렀다고 합니다. 유다는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회계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제자들 가운데 교육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며, 또한 정확한 사람이어서 예수님과 제자들로 부터 신임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러나 그는 12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비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성경학자들은 가룟유다가 평소에 제자들로부터 지역적 차별대접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2) 배반의 이유 문제는 왜 그가 스승 예수를 배반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수년간 스승을 따라다니며 재정까지 맡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스승을 배반하였을까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 종족 편견설(racial prejudice)- 유다사람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환경하는 것을 보고 평소에 그 반열에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관이 심각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설명함 둘째, 실망설 - 스승이 예루살렘에 다가 올수록 민족의 회복과 독립을 언급하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스승이 강조하는 것이 백성을 로마 정권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백성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죽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데 대한 실망이 커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즉 열성적으로 예수를 따르면서 예수의 신정왕국(神政王國)의 출현을 기대하였으나 그 기대가 어긋나 실망하여 스승을 배신했다는 설명입니다. 셋째, 혁명설 이는 실망설과 반대로, 평소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와 능력을 가르치시고 나타내시는 모습에 감격한 나머지 빨리 그 종교집단의 중심부에서 들어가서 그들을 물리치고 승리하시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요구하여 스승을 넘겨주었다는 설명 넷째, 탐욕설- 돈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그가 세속적이고 탐욕적이어서 돈을 탐내어 예수를 팔았다는 설입니다. 사실 예수의 그룹의 회개를 맡고 있던 그가 돈을 갖기 위하여 그런 행동을 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룟유다의 이런 행위를 지적하여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다섯째, 민족주의적 결단설 - 스승 예수가 유대 교유의 성지인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의 질서를 유린하고 종교지도자들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성전이 붕괴될 것을 예언하는 둥 유대주의자로서의 개혁자이 아니라 파괴자로 나서는 스승의 모습을 보고 격분하였다는 것입니다. 고유의 민족적 정통과 흐름이 붕괴될 수 있을 것을 직감하고 결행에 옮겼다는 설명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주장이 나오지만 가룟 유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의 원인과 과정은 확실한 것을 알려진바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가룟유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아마도 다음 구절에서 가룟유다의 생각의 한 단면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 마 27:3-5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우리는 이 기록에서 가룟유다는 스승이 정죄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는 스승의 정죄(사형언도)됨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같은 가룟유다의 행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 눅 22:3-5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그는 이제까지 따랐던 스승을 버리고 종교지도자들의 편에 가서 붙어 스승을 저버리고 배반하여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약삭빠른 행동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성경은 가룟 유다의 이런 행동의 결과에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행 1:18-19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가룟 유다를 안타깝게 여기시며 그에게 회개의기회를 주시며 도전하셨습니다. * 마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3. 불신앙의 모습 우리는 이런 유다에게서 불신앙의 모습과 그 결과를 보게 됩니다. 왜, 어떻게 가룟유다는 이런 엄청난 지를 저지른 것일까요? 그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첫째, 주님을 바르게 알고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주님의 말씀과 능력을 듣고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12 사도라는 복된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고백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3년 반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십자가의 구속의 도리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를 지실 주님의 상황속에서 그는 여전히 윤리적이고 세속적입니다. 그 예로 지난 주간에 살펴 본 마리아의 헌신적인 행동 즉 옥합을 깨트려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상황 속에서 그의 행동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 요 12:4-5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그러나 그의 이런 행동의 근저에는 세속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는 스승이 무슨일을 하시는 분이신지, 그 스승의 교훈이 무엇이며 자신이 주님의 제자로서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는 자신의 안일과 성공과 만족만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다가 그것이 만족스럽게 주어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이 서자 지체없이 스승을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입니까? 그는 한 번도 주님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스승을 랍비여 스승이라고 만 불렀을 뿐,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과 같이 메시야, 다윗의 자손, 왕 등으로 개인적인 고백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비극입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삼 년 반이나 따라다니며 교훈과 능력을 보고 경험하였습니다. * 마 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 3년간이 나 따라다녔지만, 거듭나지 못하였고 또한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마귀의 하수인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승 예수까지 팔아 버렸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면 구원은 참으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둘째, 너무 세속적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중에서 회계를 맡아본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이 사람이 아주 명석하고 체계적이고 주도면밀한 사람인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이었습니다. 혹시 그는 자신 같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 다니며 봉사하고 있음으로 당연히 그 댓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돈궤이 손을 댄 것은 아닌 지 모르겠습니다. * 요 12: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 하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는 혁명가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혁명을 위해 자금을 모으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에 대해 실망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에게 나올 때에 어떠한 동기로 나오는가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잘못된 동기로 나오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과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이 돈 때문이었을까요? 그렇다면 돈을 좀 많이 받아야 하는데, 그가 얼마를 받았습니까? 은 삼십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은 삼십은 오늘로 하면 미화 10달러에 불과합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오늘 환율로 9, 000원밖에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팔았을까요? 그것은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닌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구원이 없었기 때문이고 그의 민족해방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유혹과 예수님의 가벼운 책망에 쓴 뿌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평소에도 가룟 유다에 대한 언급을 하셨습니다. * 요 6: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온 사람이 아니고 이용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유대를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단체를 만들어서 항거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동기가 잘못되면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게 됩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스스럼없이 팔게 된 것입니다. * 요 13: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처음에는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마귀가 그를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악한 생각이 들어왔을 때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마귀는 그의 마음에 들어갔습니다. * 요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너무 세속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비록 그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탄의 꾀임에 빠저 타락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얼마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란 잡지에서 유다복음서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유다복음서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조용히 유다를 불러서 “너, 나를 팔아라, 그래야 내가 죽을 수 있고 그래야 인류가 구원받는다, 그 대신 내가 너를 위대하게 만들어주겠다, 그 대가를 지불하겠다, 네가 나쁜 짓을 한다고 하지만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팔겠느냐? 나중에 내가 보상을 하겠다, 너는 영웅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나요? 그것은 가룟 유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입니다. 가룟 유다 자신이 마귀의 역사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팔기에 이르고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지만, 멸망의 자식이 된 유다는 마귀를 영접하고 만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이런 경우를 다음 말씀으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 히 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넷째. 무뎌진 영적 감각력 때문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를 팔 생각을 하고 제사장을 찾아가 의논하며 스승을 넘겨주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를 유월절 만찬석장에 있도록 허락하시고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 막 14:17-21 저물매 그 열 둘을 데리시고 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이르시되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저버리고 자기 갈 길로 간 것입니다. 한편 마태는 그의 양심과 영적 예민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 마 27: 3-5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유다는 양심으로는 가책을 가질 수 있었으나 영적으로 예민하게 하나님께로 돌라가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스스로 뉘우치 repent himself”기는 했지만 repent unto God하지 못한 것입니다. 회개(metanoeo-180도 되돌이키는 것)는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뉘우치는 것, 반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회개의 대상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한 회개는 겉모양은 회개이나 진정한 구원과는 거리가 먼 자기 방식대로 한 후회였을 뿐입니다. 죄사함을 얻을 수 없는 “스스로의 뉘우침”에 그친 것입니다. 결론 한평생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십시다. 그는 스승 예수님을 삼 년 반이나 좇아다녔으면서도 그가 누군지 알지 못하였고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세속적이어서 영적 감각력이 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꼬임에 빠져 스승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가룟 유다의 비극적 인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저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민한 영적 감각력으로 내주하시는 성경께서 주시는 은혜를 소멸치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신의 영적 상태를 깊이 점검하시기를 바랍니다. *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