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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메고 가는 법궤 /삼상6:7-15/ 류영모목사 2018-07-28 03:11:31 read : 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법궤 손동연 시인의 동물우화 시 중 「소와 염소」라는 시가 있습니다. 소와 염소 소가 아기 염소에게 그랬대요. “쬐그만 게 건방지게 수염은? 또
눈물로 메고 가는 법궤 /삼상6:7-15/ 류영모목사 2018-07-28 03:11:31 read : 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법궤 손동연 시인의 동물우화 시 중 「소와 염소」라는 시가 있습니다. 소와 염소 소가 아기 염소에게 그랬대요. “쬐그만 게 건방지게 수염은? 또 그 뿔은 뭐람?” 그러자 아기 염소가 뭐랬게요? “쳇 아저씬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 덩치에 아직도 ‘엄마 엄마’게...” 동심의 눈으로 다툼을 웃음으로 바꾸어 내는 재미있는 시입니다. 아기 염소를 “쬐그만게/건방지게”라고 놀리다가 아기염소에게 큰 소 아저씨가 창피 를 당합니다. “쳇 아저씬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 덩치에 아직도 ‘엄마 엄마’게...” 교회 안에도 “소 아저씨”처럼 10년 20년 30년 신앙생활에도 믿음의 덩치가 커졌 건만, 직분도 덩치가 커졌건만 여전히 어린아이 믿음처럼 “엄마, 엄마”만 하는 사람 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2017년 한해의 절반을 보내는 시간입니다. 지난 하프타임동안 우리 믿음은 얼마나 성장했는지?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사역이 아름답게 다듬어져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눈물로 메고 가는 법궤」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을 괴롭힌 강대국중 하나가 블레셋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번번이 패합니다. 이번 전쟁에서도 전세는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메고 전쟁터로 나갔습 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때에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였고 하나님의 자신이었고 하나님의 능력이었고 하나님의 동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과 믿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도 법궤를 메고 가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 이라고 믿는 것은 미신적인 행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합니다.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은 하나님의 임재, 법궤를 소홀히 다루다 혼줄이 납니다. 법 궤를 자신들의 신전인 다곤신상에 갖다 놓습니다. 다곤신당과 우상들이 하룻밤 사이에 박살이 납니다. 법궤가 머무는 아스돗 전지역이 전염병에 휩싸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당황한 블레셋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지역으로 그 다음 에돔지역으로 옮겨보지만 가는 마을마다 무서운 독종으로 백성들이 수없이 죽어갔습니다. 잔뜩 겁에 질린 블레셋 방백들이 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그런데 자기 나라를 덮친 전염병들이 정말 하나님의 진노인지, 우연히 일어난 일 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실을 새수레를 만듭니다. 아직 수레 끄는 멍에 를 메어보지 않은 암소, 어린송아지 젖을 떼지 않은 암소 두 마리를 선택합니다. 그러고도 법궤를 실은 두 마리 암소가 가보지 않은 길을 따라 이스라엘로 가면 이 건 분명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앙을 내린 것이라고 해 석합니다. 그러나 송아지를 찾아 돌아오거나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한다 면 이건 우연히 일어난 일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법궤를 맨 암소들은 똑바로 달려 벧세메스로 법궤를 무사히 실어 나릅니다. 물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였지요.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고 싶은 교훈이 있었던 것입니다. 평생 법궤를 빼앗겨서는 안된다. 내 목숨이 온천하 보다 귀중하지만 이 목숨 역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준 사명, 소명을 감당할 때만이 인간은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네게 짊어 주어준 그 법궤를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잘 메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요 오늘의 교회요 우리가 오늘 감당해야 될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절대 빼앗겨서는 안되는 우리의 법궤가 있습니다. 구원은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구원사역 내려놓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복음사역 잘 감당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 하나님 나라 사역을 끝까지 잘 감당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II. 빼앗기지 마라. 우리 모두에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절대로 빼앗기지 말아야 될 이 름이 있고 직분이 있습니다. 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이 이름 잘 지켜야 합니다. ② 우리는 성도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성경 도처에서 우리를 일컬어 성도라 말 씀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이름을 잘 지켜야 합니다. ③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신랑되신 예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④ 우리는 믿음의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의롭 다 하셨으니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직분이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군을 일컬어 집사라 부릅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섬기는 자가 되라”(마20:26,막10:43) 말씀하실 때에 “섬기는 자” 헬라어로 디아코노스 = 곧 집사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싶으냐. 귀한 자리에 앉고자 하느냐. 신실한 집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소망교회에는 평신도들이 사역의 주인공, 주인이 되는 평신도 중심의 사 역교회입니다. 한소망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면류관을 쓰는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면류관, 빼앗기지 않는 종말의 승리자로, 마지막 날에 승리 자로 교인들을 세우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교회에서 어떤 직분 어떤 사역을 맡고 있습니까? 잘 감당하면 하나 님 앞에 존귀한 자가 될 것이다. 영광스런 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 두려운 일입니다. 가롯 유다처럼 받은 직분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밑에서 자라면서 가정 예배시간마다 이런 질문을 자녀들에게 하곤 했습니다. ① 너희는 너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② 교회를 섬기든, 세상일을 하든 그 일을 누가 맡겼느냐? 하나님이 맡겨주셨습니다. ③ 너희가 하는 그 일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존귀한 사역입니다. ④ 그 일들을 어떤 정신으로 감당하느냐? 소명은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게 바로 법궤를 메고 가는 우리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주차안내 사역팀의 맏형격인 이 집사님이 계십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입니다. 지난 17년동안 눈이오나 비가 오나 더우나 추우나 변함 없이 그 사역을 감당해 왔습니다. 개인택시 운전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일 예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 주차 봉사를 위해서 주일날이면 운행을 나가 지 않고 17년 그 자리를 지켜 오셨더랍니다. 가끔은 안내를 하다가 교인들에게 무 안을 당하기도 합니다. 불평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주차사역을 감당해야 될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소박한 기도제목을 내어놓습니다. 80이 넘도록 이 몸 건강해서 한소망교회에서 그 사역 잘 감당하고 싶습니다. 우리교회는 교회의 본질 가운데 예배 사역을 소중히 여깁니다. 소그룹 참여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4063목장에 전 집사님은 토목감리회사에 근무를 하십니다. 때로 지방에 파견 근 무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울산에서 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금요일 오후 4시가 되면 일주일 업무가 끝이 납니다. 차를 몰아 일산으로 달려옵니 다. 저녁 8시쯤 도착하고 8시30분 목장모임에 참여합니다. 한번은 눈발이 내리는 날 금요일 오후 차를 몰아 일산으로 달려오다가 대구 근처 에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집사님은 사고 수습하고 나중에 올라오더라도 목장식 구들이 이해를 해 줄텐데 차량을 울산으로 보내고 집사님은 KTX를 타고 목장모임 에 참석하셨습니다. 목자와 목원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 먼길 달려와 그 자리 지키는 것, 법궤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입니다. 한소망교회에서 지금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구석구석에서 이 예배를 위해 섬기 는 많은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찬양사역자들, 방송사역자들, 봉헌과 안내사역자들, 교회학교 각 부서에서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고, 또 작은 자 어려운 자들을 돕는 사역들이 수도 없습니다. 우리교회에는 성공의 사다리라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철 저하게 평신도 여러분들이 주인이 되어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You can be a Leader!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리더입니다. 여러분들이 목회자입니다. 목사가 이 자리에 존재하는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성도들이 각자 은사를 따라서 자기 재능을 따라서 자기의 비전을 따라서 그 사역 을 잘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목회 사역이 영광스럽고 주의 몸된 교회가 날로 건강 하게 성장되도록 하기 위해서 목사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난 26년 앞으로도 그 사역을 잘 감당하기에 이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눈물로, 감격으로. 오늘 본문 12절 법궤를 메고 가는 암소를 이렇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이 암소가 왜 울었을까요? 1. 우선 암소의 눈물은 젖배기 어린송아지를 떼어 놓고 가야 하는 어미소의 눈물 모정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담당케 하시고 십자가 에 달려 피 흘릴 때에 하늘에서 흘렸던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입니다. 그 눈물은 믿음이 무엇인가 순종이 무엇인가 본을 보이기 위해서 아들 이삭을 모 리아 산에 번제로 흘렸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눈물입니다. 그 눈물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고 충성할 때에 감당해야 할 고난의 눈물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메고 가는 법궤는 눈물로 메고 가는 사명입니다. 힘들어도 가야 합니다. 피곤해도 가야 하는 길입니다. 내가 내려놓을 수 있는 짐이 아닙니다. 2. 뿐만 아니라 암소의 눈물은 감격의 눈물입니다. 나처럼 죄 많고 부족한 사람이 구레네 시몬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지고 갈 수 있다니 감사의 눈물입니다. 받 은 은혜가 감사해서 우는 감격의 눈물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 아들 장례식장에서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눈물은 아파서 슬퍼서 우 는 눈물이 아닙니다. 부족한 종의 가문에 이토록 귀한 순교의 제물 똑똑한 아들 둘을 받으시다니 감사합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못박힌 길을 맨발로 걸어가시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눈물없이 못가는 길 피없이 못가는 길 영문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울며 노래하며 그 길을 가셨습니다. 이것이 법궤의 소중함, 사명의 소중함을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3. 사실은 어린송아지를 떼어 놓고 가는 어미소의 눈물과 나 같은 소 한 마리가 하 나님의 법궤를 메고 가다니 울었던 감격의 눈물은 별개의 눈물이 아닙니다. 종은 공군장교시절 대전 공군교육사령부에서 근무를 하던 그 때에 두 아이를 얻었 습니다. 주일날이 되면 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설교사역자로 살았습니다. 첫 아이를 낳았는데 우리교회 출석하는 장로님과 권사님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었습니 다. 아이가 태어나야 됩니다. 수없는 아기를 받았던 노련한 권사님이 전도사님 아 기를 받으려니까 겁이 납니다. 기도해 주세요. 제가 한손으로 의사 위에 손을 얹고 다른 한 손으로 아기엄마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돌아서서 나오 는데 권사님께서 제 옷자락을 붙듭니다. 전도사님 여기에 앉아 계세요. 아내가 아기를 낳는데 아기가 나오는데 잘 안나옵 니다. 압축기가 있더라구요. 아기 머리에 압축기를 갖다 댑니다. 유도해서 아기를 받아야 하는데 권사님의 손이 떨려서 압축기를 못 붙드십니다. 전도사님이 하세요. 제가 딸의 머리에 압축기를 붙들고 유도해서 아기를 제가 받 았습니다. 잘 씻어서 아기엄마에게 아기를 안겨주었더니 안고 엉엉 웁니다. 아파서 나는 눈물이 아닌 감격의 눈물입니다. 감사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모정의 눈물, 감 사의 눈물, 감격의 눈물입니다. 우리교회를 섬기면서 형식적인 헌신이었다면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율법적인 헌신 을 한 것이 아니라 생명처럼 소중히 교회를 지킨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아마 한소망교회의 사역을 정리하고 나면 우리교회를 섬겼던 사람들의 이름 을 떠올리며 책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조금씩 정리하다가 눈물이 나서 정리를 할 수 없습니다. 아 이분이 계셔서, 그때는 이런 분이 계셔서 그 힘든 순간 이런 분이 계셨기에 한소망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그분들 이야기를 가지고 제가 몇 권의 책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분들의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폐암 말기로 하루 하루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손 집사님을 위해 8속교회 목 장의 목자 이 집사님과 목원들은 함께 매일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작정하고, 암투 병중인 집사님을 위해 매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예배드리기를 수개월, 목원들이 병원을 방문할 수 없이 바쁜 날에 요양병원을 찾지 못했을 때는 핸드폰을 스피커폰으로 열어 음성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수개월 동안을 암투병 중인 집사님과 함께 하며 예배를 드렸지만 결국 손 집사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양병원의 환우들이 이 같은 열심으로 매일 찾아 예배드리는 모습을 가까이 지켜 보았습니다. 이 집사님께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세요. 나를 위해서도 예배해 주 세요.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입니다. 이 집사는 목원들과 함께 흔쾌히 승낙하고 그 분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 분이 퇴원하고 한소망교회에 찾아왔습니다. 마침 시 작하는 주일 알파에 참석해 수료하였으며 이후 한소망에 등록하여 신앙의 삶을 찾 아 회복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한 생명을 섬겨 또 다른 한 생명이 구원을 얻는 은혜를 보았습니다.” 누가 감히 이런 몸부림을 수고라는 값싼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분명 감사지요. 감격이지요. 스데반의 죽음의 자리에서 사도바울을 얻은 감격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IV. 함께 지고 가는 법궤. 법궤를 맨 두 마리 암소는 8개의 발을 맞추어 달려갔습니다. 교회 봉사는 독창이 아니라 합창입니다. 독주가 아니라 합주입니다. 교회 비전과 발이 잘 맞아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종이 지휘자입니다. 피아노로 조용히 섬깁시다. 힘냅시다. 포르테로 소리 지릅시다. 달려갑시다. 지휘자의 보조를 잘 맞춰야 합니다. 함께 섬기는 사람들과 잘 맞춰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 사역자들, 목장을 섬기는 사람들, 가정에서도 서로를 섬겨 주는 사람들, 세상 일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써, 주의 제자로써 섬김의 본을 보이 는 사람들, 한소망교회 다양한 성공의 사다리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 많은 찬양 팀을 섬기는 사람들, 작은 자를 섬기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누어 짊어져야 할 법궤들입니다. 나의 짐이 아니라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날개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많은 동물들을 만드셨습니다. 새들이 하나님께 찾아왔습니다. 하 나님, 다른 동물들은 다리도 튼튼해서 뛰어다니는데 우리는 이 다리로 어떻게 세 상을 살아갑니까? 이게 다리입니까? 새다리이지요. 게다가 등에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것을 매달아 주셨습니까? 이것 좀 떼어 주세요. 아 니다 날개라는 것이다. 그 날개를 펼쳐라. 한번 저어봐라. 하늘로 훨훨 나릅니다. 더 힘차게 저어라. 너무 신나서 노래부르며 온 하늘을 날아 다니는 새가 되었습니다. 예배의 자리, 이게 짐이었습니까?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날개 아니었습니까? 좋 은 일이 있을 때에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기도의 자리에 엎드려 울던 그 시 간, 그게 짐이었습니까? 나를 주님 품으로 인도하는 날개 아니었습니까? 칭찬없는 자리, 더 힘든 자리 애쓸 수밖에 없는 자리, 손해 보는 자리, 자존심 내려놓아야 하는 자리, 밤잠 자지 못하는 자리, 우리 집에 할 일 태산처럼 쌓아놓고 달려갔던 자리 그게 짐이었다면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날개였습니다. 우리교회 목장은 서로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 나누어지는 아름다운 날개 공동체입니 다. 제게 보내준 편지 한통을 읽고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5속교회 황 집사입니다. 사랑하는 남편 고 신 집사를 주님 품에 떠나보낸 지 2주가 지나갑니다. 지금도 남편이 제 곁에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문득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이 려 올 때면 감정을 조절하는 게 힘이 듭니다. 지난 6월5일 제 남편은 평소처럼 출근을 했다가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러다 상황이 급격이 나빠지면서 응급실에 들어갔습니다. 의사 선생님 말에 의하면 심근경색으로 급하게 시술을 해야 했지만, 시술을 기다리던 중 갑작스런 심장성 쇼크가 와서 심폐소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응급실에서 살려 달라 애원하며 통곡했지만 결국 남편은 주님 품에 안기고 말았습 니다. 그렇게 시간은 자정을 넘어섰는데 한 걸음에 달려와 준 지역목자님과 목장 가 족들의 모습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싸늘히 식은 남편을 안치실로 옮기면서 한 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남편의 죽음이 도 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아 무서웠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제 남편 을 안치실로 옮길 때 목장 가족들이 저와 함께 슬픔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가장 힘들고 괴로운 순간 목장 가족들이 제 곁을 그렇게 지켜 주었습니다. 천국환송예식 때 하늘문 여는 찬양단의 찬양과 위임목사님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 그리고 슬픔을 함께 나누며 참석해 주신 모든 영적 가족들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난 뒤 문득 슬픈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지역목자님과 목장 가족들이 찾아와 힘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모두 직장을 다니느라 힘들고 바쁘지만 목장 가 족들이 수요 저녁기도회에 함께 참석해 예배를 드리며 저는 그렇게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습니다.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건 목장 가족들이 제 곁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편은 주님 품에 안겼지만 주님은 제게 너무 소중한 목장 가족들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드리고 가장 귀하고 소중한 우리 목장 가족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항상 감사 /단6:1-10/ 류영모목사 2015-01-09 05:58:11 read : 151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불평 제조기 한국 초기 교회 시절 어느 시골교회에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진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뭘 제조하는 사람이길래 “제조기”, “제조업자”라는 별명을
항상 감사 /단6:1-10/ 류영모목사 2015-01-09 05:58:11 read : 151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불평 제조기 한국 초기 교회 시절 어느 시골교회에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진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뭘 제조하는 사람이길래 “제조기”, “제조업자”라는 별명을 가졌을까? 이 분은 어떤 사건,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그 문제를 비판을 합니다. 불평 원망거리로 만들어 내는 기가 막힌 재주가 있습니다. 이분은 불평 제조기, 비판 제조업자라는 별명이 붙은 집사님이십니다. 이 분이 회갑잔치를 하게 되었는데 먼곳에 있는 선교사님을 초대해서 회갑잔치 예배를 부탁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눈이 많이 와서 선교사님이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쯤 뒤늦게 도착했는데 한 시간 동안 이 제조기 집사님은 온갖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한 시간 후에 선교사님이 도착해서 예배를 인도하십니다. 선교사님이 오면서 동행하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잔치 무슨 잔치입니까?” “네. 회갑잔치입니다. 환갑잔치라고도 하고 육순잔치라고도 합니다.” 예배를 인도하는데 선교사님이 헷갈리셨습니다. 환갑, 회갑도 아니고 육순잔치도 아니고 육갑이 된 겁니다. “오늘 육갑잔치 축하합니다. 집사님 육갑 맞으셨는데...”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아이고 육갑 떨더니 오늘 육갑잔치 했네.” 이렇게 된 겁니다. 이 집사님이 크게 회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불평 제조기들이 의외로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봄이 되면 을씨년스럽다고 불평합니다. 여름이 되면 더워도 너무 덥다고 불평합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많이 떨어져 청소하기 힘들다고 불평합니다. 겨울이 되면 눈 쌓여 얼음길 외출하기 힘들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감사 제조업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봄에 꽃향기가 감사하고, 여름에 울창한 숲이 감사하고, 가을에 맛난 과일들이 있어 감사하고, 겨울에 흰 눈 쌓여 온 세상이 아름다워 감사합니다. 「불평없이 살아보기」 캠페인이 있듯이 우리 교회에서는 전반기 「기독교 명가문 만들기 캠페인」에 이어 후반기엔 「감격행사 캠페인」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여기 감격행사란 – 감사합니다. 격려합니다.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언어, 긍정적 언어를 생활화 해 보자는 운동입니다. 이 캠페인은 장년교우들 뿐만 아니라 다음세대 모든 부서에서도 함께 벌여 가정 안에서 가족이 서로 확인하고 격려하고 토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II.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오늘 감사캠페인 첫 번째 주인공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입니다. 이 세상에 어려운 일도 있고 좋은 일도 있지만 역사를 만드신 분, 시간을 만드신 분, 역사를 운행하시는 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는 겁니다. 다니엘서의 문이 열려지면 1장 1절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잃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젊은 인재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적인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은 불타고 하나님의 성전의 성구들은 약탈당하는 비극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고 싶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역사가 끝나고, 하나님의 사랑도 이제는 지속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서도 주인이십니다. 심지어 고난의 현장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은 주인이십니다. 다니엘 5장 30-31절에 본문 당시의 배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바벨론이 망하고 다리오라는 사람에 의해 “메대”라는 나라가 탄생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제국이 몰락하고 또 다른 제국이 역사의 무대에 떠오르는 모습으로부터 본문이 시작됩니다. 역사는 변합니다. 사람은 바뀝니다. 체제도 지도자도 바뀝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한 가지 사실만이 영원합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궁 젊은 정치인으로 훈련을 받습니다. 우상의 제물, 부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유혹 앞에서 이들은 왕이 주는 포도주와 산해진미를 거절합니다. 신앙의 정절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신앙, 절대 신앙을 보여줍니다. 네 젊은이들의 결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출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다.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깨끗하게 사는 것이다. 황금과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산해진미 못 먹고 보리밥 나물 먹고 살아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메시지입니다. 한 집에 진돗개 한 마리가 살고 있었고 잡종개, 소위 똥개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진돗개는 늘 입만 벌리면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 주인은 내게 먹을 것 주고, 날 보호해 주고, 날 쓰다듬어 주고 안아 줘. 우리 주인은 아마 하나님일 거야.” 잡종개 소위 똥개는 늘 입만 벌리면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 주인은 내게 먹을 것 주시고, 날 보호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안아주셔. 아마 나는 하나님일 거야.” 하나님이 주신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한없는 교만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닥터 스코프는 말했습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것과 감사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죄인은 깨어있는 순간 고민하며 지내고 참된 성도는 눈을 뜨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하루를 열어갑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수도원에 들어오면 수도원이 감옥으로 변하고 성도가 감옥에 들어가면 감옥이 수도원으로 변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생활을 하느냐, 불평불만의 생활을 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환경이 수도원이 될 수도 있고 감옥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감사와 찬양의 삶을 잃어버린 사람은 맛을 잃어버린 인생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 살면서도 물의 감사함을 잊어버리고, 공중을 나는 새가 공기의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살 듯이,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세가 되면 타락한 성도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롬1:21) 좋은 환경 속에 살면서도 사람들이 감사치 아니하고 불평 원망으로 일삼을 때 그 시대가 다 된 말세인 줄로 깨달으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III. 위기가 승리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본문의 다리오 임금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120명의 도지사와 시장을 임명하고 자기 곁에 3명의 총리를 두고 그 중에서도 다니엘을 제1총리 - 국무총리로 삼으려 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기회 때문에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자들이 음모를 꾸밉니다. 포로로 끌려온 다니엘에게 이 나라 국무총리 자리를 내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 정적들이 다니엘을 고발할 조건을 찾아 혈안이 되었습니다. 찾아본 결과 4절에서처럼 다니엘은 3무의 사람이었습니다. ① 아무 근거를 찾지 못했다. 옛 번역에 보면 아무 틈도 얻지 못했다. ② 아무 허물을 찾지 못했다. ③ 아무 그릇됨을 찾지 못했다. 요즘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그만하면 깨끗하겠구나? 청문회를 해 보면 수도 없는 그릇됨과 허물이 발견되어집니다. 털어서 먼지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추궁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털어도 먼지 하나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틈도 없었고 그릇됨도 없었고 허물도 없었습니다. 2) 다니엘을 고발할 조건을 찾던 정적들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됩니다. 다니엘은 정확한 시간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을 올무로 하여 못된 법률을 제정키로 왕에게 아부합니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단6:7) 기도금지 법령이 통과되고 왕의 인장을 찍었습니다. 이 사건의 결론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압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천사가 다니엘과 함께 함으로 사자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임금은 못된 정치인들에게 당했다 싶었습니다. 충신 다니엘을 잃을까 밤새도록 밤잠을 자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이른 새벽에 다니엘이 던져진 사자굴을 찾아옵니다.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아 다니엘아 하나님이 너를 살려 주었느냐?”(6:20) “왕이여 만수무강하옵소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막아 주었나이다.” (단6:21-22) 왕이 심히 기뻐하며 24절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라. 그 처자들과 함께 저자들을 사자굴에 쳐 넣어라. 그들이 굴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입을 벌려서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그 가족들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앞발로 받아서 낼름낼름 삼켜버렸습니다. 그 뼈까지 부서뜨렸더라. 다니엘의 행동은 이 법령 조서를 왕이 바꾸게 합니다.(26-27절)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나님을 향한 이 놀라운 고백과 선포는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나온 말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자의 연구를 통해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방 왕의 입을 통해 고백된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다니엘 한 사람을 통해 만들어진 영향력이 얼마나 크고 신비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IV. 절대 신앙·절대 감사 다니엘은 도대체 어떤 사람 이길래 이토록 엄청난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았단 말입니까? 하늘을 울리고 땅을 감동시키는 다니엘의 영향력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란 말입니까? 1) 다니엘이 어떤 사람인가를 표현하는 본문의 첫 번째 말씀은 3절에 나옵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여기 “마음이 민첩하다”는 말이 판단력이 빠리빠리하다는 뜻처럼 이해됩니다. 그러나 여기 마음이란 창세기 1:2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바로 그 “영” “루아흐”입니다. 다니엘은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매력이 넘쳤다는 뜻입니다. 다니엘 5:11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라고 다니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4:9 네 안에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다고 느부갓네살 이방 왕의 입을 통해 말합니다. 한 마디로 다니엘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21세기 초엽,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쓰실까? 어떤 교회를 쓰실까? 너무 궁금해서 책을 읽고 기도하고 전세계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종들을 만나기 위해서 지구촌 도처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한 마디 결론,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성령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맑아서 마음이 민첩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에 민감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둘째 다니엘은 절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10절을 보세요.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그는 이번 법을 어기면 사자굴속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알았고, 어인이 찍힌 문서를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다 죽으면 영광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습관을 타협하지 아니했습니다. 다니엘은 과연 신앙의 장부, 신앙의 영웅이었습니다. 30일 동안만 문을 닫고 기도해도 될 텐데, 마음으로 기도해도 될 텐데, 다니엘은 기도의 자세하나 흐트러뜨리지 아니했습니다. 어떤 생명의 위협조차도 다니엘과 하나님의 영광스런 교제의 시간을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떤 권력도 다니엘의 행복했던 기도시간을 빼앗아 갈 수도 없었고 파괴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게 다니엘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시다. 하나님만이 우주의 왕이시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재판관이시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시다. 3) 절대 위기상황 속에서 드린 다니엘의 기도는 절대 감사였습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다니엘은 목숨을 구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원수를 갚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6:10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길고 긴 시간동안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알 수 없으나 다니엘서를 기록하는 기자는 한 마디로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감사했더니 감사의 역사가 감사의 상황이 만들어 졌더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비극은 이 당연한 감사조차도 잊어버리고 있다는 데에 우리의 불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여유로운 환경을 주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내 아버지 내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내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내 남편이 될 수 있고 내 아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내 조국 땅에서 살아가는 것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이 조국이 바로 나의 조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경배하고 우리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이 교회를 향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이 교회가 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걸음마다 함께 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열심히 기도를 해도 자기에게 특별한 응답이 없어서 몹시 실망하고 있던 어느 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서 하늘 보화창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한 창고에 도착했습니다. 창고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이 창고는 어떤 창고입니까?” 물었더니 “간구창고입니다. 세상에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울며 매달려서 이것 주십시오. 저것 주십시오. 애원할 때마다 간구하고 기도할 때마다 이 보화 창고를 열고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빈 창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옆 창고로 인도해 가는데 보니까 더 큰 창고가 있었는데 보화가 하늘 천정까지 가득히 쌓여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창고는 무슨 창고입니까?” “감사 창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작은 은혜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나누어 주려고 쌓아 두었던 보물창고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하도 감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보물이 쌓여져 있습니다” 라고 얘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이 성도는 다시 성전에 엎드려 간구의 기도를 멈추고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가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눈물 흘리며 감사했습니다. 하늘 보화가 신령한 은혜가 넘치게 되었더라는 얘기입니다. 은혜 받기 원하십니까? 축복을 원하십니까? 하늘에 보화가 쌓이길 원하십니까?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 무엇 때문에 하는 감사라 한다면 위험이 따릅니다. 만약 그 무엇 무엇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원망과 불평으로 바뀌어지기 때문입니다. 저희 가정의 예배 원칙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매 주일 반드시 감사의 예물과 일천번제의 예물을 드립니다. 한 주간을 지냈는데도 감사의 조건이 없이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되겠느냐. 쌀독에 쌀이 떨어지든 가장 어려울 때도 감사의 제물, 일천번제의 제물이 없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습니다. 한 주간을 지냈는데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목이 생각이 안 난다. 심각하게 병든 것 아니겠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물이 없는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십일조, 선교, 구제 다 하지요. 그러나 반드시 감사의 제물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고 예배를 드립니다. 개척교회 시절에도 저는 어디에 가든지 노회 식구들을 만나나, 선배를 만나나 후배를 만나나, 총회에 가더라도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사회인사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밥 살 만큼 여유를 하나님이 제게 주셨습니다. 밥을 살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될 때에 여러분 창고 곡간이 비지 않습니다. V. 항상 감사 - 종은 울릴 때 종이고 장작은 탈 때 불이 되듯 믿음은 감사할 때 참된 믿음이다. -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 - 평범한 삶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감사이다. - 사람에게 가장 큰 저주는 감사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선물을 포장만 하고 주지 않는 것과 같다. - 하나님이 거하시는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이 마음이다. - 감사한다고 오늘 환경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사할 때 우리의 마음이 바뀌고 그 마음은 우리의 환경을 바꾸어 준다. 「평생 감사」라는 책에 나오는 감사 명언귀들입니다. 다니엘 그는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여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있어야 될 그 시간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범인들이 울고 있어야 될 그 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그는 세상의 도전을 회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으로 당당히 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썩어가는 세상 속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난의 현장의 한복판에 서서 절대 신앙, 절대 감사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고난의 길을 다 피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 때문에 받고 얻고 누렸던 분복만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다 버리고 하늘 면류관 쓸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좋은 것들만 감사하다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졸업했던 거창 고등학교 교훈이 있습니다. 왕관이 있는 곳으로 가지 말고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가거라. 모든 사람들이 몰려가거든 거기는 속물들이 모이는 곳이니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가거라.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해라. 역설적인 삶을 시골고등학교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서커스의 조련사도 사자를 잘 조련시켜서 사자와 함께 놉니다. 그 사자를 만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살아가게 될 때에 여러분을 사자굴 속에 던지시겠습니까? 사자에게 찢겨 죽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다니엘에게 사자굴은 하나님이 함께 할 때에 하늘 사자의 굴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에게 사자굴은 천사의 굴이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절대 신앙, 절대 감사, 범사에 감사, 항상 감사!
1등 인생 /잠3:1-10/ 류영모목사
1등 인생 /잠3:1-10/ 류영모목사 2015-01-07 22:09:33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뒤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었고, 앞에는 금강호라 불리는 거대한 호수와 같은 아름다운 바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여름은 바다에서, 봄, 가을, 겨울은 산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은 지금도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시골 아이들 누구나 그러하듯이 늘 도시를 동경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린 가슴에 도시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끔 부모님을 따라 도시의 친척집을 방문하는 것은 가슴 두근거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도시에 가보면 부러운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가끔 방학 때 시골에 찾아오는 서울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도시로 나와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가 \"촌놈\"이라는 소리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자취를 했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씩은 고향에 내려가서 쌀과 반찬을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부모님이 정성껏 싸주신 그것을 들고 시내버스를 타고 들어오다가 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의례하는 이야기가 \"어~ 촌놈, 민생고 해결해 갖고 와?\" 그때는 그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시내버스를 타는 날이면 정말 친구들을 안 만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촌놈\"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습니다. 제 아내는 도시에서만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어릴적 이야기를 하다보면 집사람은 별로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참 할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들로 산으로 뛰놀면서 놀았던 아름다운 추억이 많기 때문입니다. 문득 삭막한 콘크리트 벽 사이에서, 그리고 도시가 사람을 내몰고 있는 빠듯함 속에서 성장해 가는 제 아이들을 보면서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던 것을 더욱 귀하게 생각됩니다. 산과 바다를 끼고 있던 고향에서 보냈던 시간이 수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던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촌놈\"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부끄럽거나 숨기고 싶은 사실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추억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이 그러한 추억에 좀 젖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은데, 아빠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도시문화를 더 좋아합니다. 어쩌다 시골에 내려가면 그렇게 불편해 할 수가 없고, 삶은 감자나 옥수수는 입에 되지도 않고 피자나 햄버거를 기다립니다. 제가 알고 있는 교수님 한분은 고향이 전라남도 신안의 한 섬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목포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도 쌀과 반찬은 주말에 고향에 가서 가져오고는 했답니다. 그런데 그분의 어머니가 대단한 분이셔서 아들이 보고 싶으면 어느 때든지 김치 단지를 이고서 찾아오시곤 했답니다. 당시 어렵던 시골에서 도시로 나가 공부하고 있는 아들은 어머니에게 큰 기쁨이며 자랑거리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자취방으로 찾아가지 않고 자랑스런 그 아들을 보기 위해서 바로 학교로 찾아오시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김치 단지를 머리에 이고, 검정 고무신에 몸베를 입고,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한 어머니가 교실 유리창 밖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에게 엄마가 왔다고 반갑게 손짓을 합니다. 아이들의 눈길이 그곳으로 한꺼번에 쏠리면서 수업은 중단됩니다. \"어 촌놈 빨리 나가봐!\"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돌아갈 생각을 않으시고 밖에서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화가 나서 저만큼 앞서 가면서 \"창피하게 왜 학교로 찾아오냐고?\" 돌멩이를 발로 걷어차면서 아들이 투덜대면 대답은 간단했답니다. \"너 보고 싶어서 왔제!\" 그 어머니는 정말 숨기고 싶은 분이었답니다. 억척스럽게 자식을 사랑했고, 그 어려운 삶 속에서도 오직 자식 뒷바라지하는 일로 사셨던 어머니가 그렇게 귀한 줄 몰랐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들은 나중에 미국 유학을 가서 목회상담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수업의 과제 가운데 하나가 오늘의 자신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던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아내라는 것이었답니다. 도무지 찾아내지 못하고 끙끙대는 그에게 개인적인 삶의 기록들, personal history를 죽 듣던 교수가 그렇게 분석해 주더랍니다. \"오늘의 너는 그 어머니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숨기고 싶었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떠나신 다음에야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이제는 그 아들에게 어머니는 가장 자랑하고 싶은 분이라고 고백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고, 숨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이룬 업적이라든지, 성공이라든지, 앞섬이라든지, 가진 것이라든지, 성공한 자녀들이라든지, 혹은 가문을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고, 사소한 것 같지만 자랑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 모아져서 그의 가치관이 됩니다. 반면 사람들은 부끄러운 것은 숨기고 싶어 합니다. 부끄러운 기억들, 남보다 못한 일들, 웃음거리가 될 일들은 숨기고 싶어 합니다. 자랑하고 싶어 하는 본능과 숨기고 싶어 하는 본능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며, 숨기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Move2: 솔로몬의 자랑거리 솔로몬은 자랑할 것이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한 재산을 가졌기에 재산을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남다른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의 지혜를 자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강성한 왕국을 세운 왕이었으니 그의 치적을 자랑할 만도 했습니다. 또한 찬란한 하나님의 성전도 지어서 봉헌한 사람이니 그것도 자랑할 만했습니다. 그가 저술한 수많은 책들도 썼으니 그의 학문을 자랑할 만도 했습니다. 어느 저명한 학교의 MBA 출신에게도 뒤지지 않을 탁월한 경영능력도 가진 사람이니 그것도 자랑할만했습니다. 근방에 지혜로운 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그의 명성과 지혜를 자랑할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소유한 것, 그가 이룬 것을 자랑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자랑거리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긴 인생을 살았던 그가 인생의 노년에 그의 아들에게 이것을 자랑하고, 너는 이렇게 살라고 주신 권고와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무엇을 내세우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먼저는 이 말씀이 \"명령과 약속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일정한 구조 속에서 한 가지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선 본문에 나타나는 명령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십시다. 원어의 구조를 통해서 보면 본문은 5가지 명령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명령은 1절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것을 네 마음 안에 간직하라\"는 명령입니다. 2절에는 약속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사람들에게 장수와 평강이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어느 방송의 \"생노병사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장수의 비결을 여러 가지를 알려주더군요. 우리 몸의 세포를 죽이는 활성산소를 없애기 위해서는 비타민을 먹어야 한다든지, 야채를 많이 먹어야 한다든지, 마늘과 녹차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성경의 처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안에 간직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장수와 평강이 함께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평안이 없이 어디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명령은 3절에 나오는데 그 요지는 \"사랑과 신실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입니다. 4절에는 약속이 나오는데, 그렇게 하면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중히 여김을 받는 것,\" 그것이 우리 생의 성공비결 아닙니까? 하나님이 높여 높여주셔야 높아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지켜주셔야 지켜집니다. 양치는 목동이었어도 하나님이 높여 주시니 왕이 되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면 살수록 고백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와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다. 세 번째 명령은 5-6절에 나오는데, 두 서너가지 명령으로 등장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한가지 명령입니다. \"범사에, 네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명령입니다. 약속은 6절 후반부에 나오는데, 네 길을 지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명령은 7절에 나오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을 멀리하라\"고 명령합니다. 약속은 8절에 나오는데 이것이 보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명령은 네 제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하고 네 포도주 통에 햇 포도주가 넘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 다섯가지 명령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입니다. 그러니까 지혜의 왕 솔로몬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로 무엇을 말합니까? 그는 지금 인생의 자랑거리를 무엇을 삼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섬기는 것!\" \"에이, 그런 이야기야 목사님이니까 그렇게 말하지요.\" 아닙니다. 그는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대 권력을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에이, 돈 모으는 재미가 얼마나 큰데요. 돈 가져 보세요, 세상 모든 사람이 돈 앞에서 모두 고개 숙여요. 그는 가난해서 그런 맛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였겠지요.\" 아닙니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에이, 쾌락의 맛이 얼마나 대단한데요. 그런 즐거움을 맛을 보지 못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겠지요.\" 아닙니다. 그는 궁중에서 절대 권력, 절대 쾌락을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누려보았던 그가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해볼 수 있는 일은 다해 보았고,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려보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헛되더라.\" 그것이 잠언서 다음에 나오는 전도서의 주제 아닙니까? 전도서 1장을 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로 시작하여 1장에서는 \"지혜도 헛되다,\" 2장에서는 \"즐거움도 헛되다,\" \"슬기도 어리석음도, 수고도 헛되다\"는 내용이 나오고, 4장에서는 왕이 되고 승진을 하는 것도 헛되다, 5장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도 헛되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지막 12장에서는 결론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 요즘 방학이어서 책을 집필하는 일에 전력하고 있는데, 주시는 말씀은 그렇더군요. 전도서 12:12에서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13절은 그렇게 말합니다. 할말을 다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에 자랑할 만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했고, 모든 것을 다 누려보았지만 결국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더라는 말씀입니다. Move3: 모든 것의 출발점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을 5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명령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5가지의 명령의 센터에 무엇이 있습니까? 첫 번째, 두 번째 명령이 이것을 지향합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의 명령이 이것을 지향합니다. 그것은 세 번째, 즉 명령의 중심에 있는 말씀,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섬김의 가장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되면 나머지 명령들이 가능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대한 모든 것, 모든 명령들에 대한 순종은 언제나 이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기초가 되며, 출발점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NIV라는 영어성경을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네가 가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라\"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가장 압권적인 번역은 Philips Version이었습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놓으라\" (Put God first in everything you do). 오늘도 나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일등의 자리에 올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그분의 말씀을 마음 깊은 곳에 두고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분이심을 고백할 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고, 신실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분이시라는 고백을 가질 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싫어하시니 악을 멀리하고, 거짓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9절에서 나오는 첫 열매, 가장 귀한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게 될 것이며,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을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 하나님을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나의 행하는 모든 삶에서 그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가장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우리 인생길에서 그분이 코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 인생을 가이드하고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신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까? \"주님께서 네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인도하실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필립스 번역은 그렇게 말씀을 새롭게 들려줍니다. \"하나님이 네 하는 모든 일에 왕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지도하십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앞날을 책임지십니다. 앞날에 모든 일에 왕관을 씌워주십니다. 공부에도 왕관을 씌워주십니다. Move4: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선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여러 규정들을 보여주시는 출애굽기의 말씀 가운데에는 특별히 23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세 절기에 대해서 언급해 줍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출 23:16). 무교절이 지난 뒤로부터 49일이 지난 후인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것이므로 칠칠절이라고도 불렀던 이 절기는 밀 추수기에 밀의 첫 열매를 바치는 절기라고 하여 초실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아직 힘들기만 한 이스라엘 백성들, 아직 정착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행진해야 했던 고달픈 사막길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명령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는 맥추절을 지켜라. 농사해서 얻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쉬운 말로 하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아직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농사해서 얻은 첫 열매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입니다. 첫물은 언제나 가장 귀한 분에게 드렸던 풍습은 우리나라에도 있지만 같은 동양문화권인 이스라엘도 있었습니다. 이 명령이 무슨 말씀입니까? 너의 하나님을 너의 삶의 최고의 자리, 1등으로 놓으라는 명령입니다. 맥추절의 메시지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1등의 자리에 놓아라. 하나님을 너의 가정에 1등의 자리에 놓아라. 너의 사업에, 너의 인생에, 너의 공부에, 너의 결혼 생활에, 너의 직장생활에 1등의 자리에 놓아라. 오늘날 우리는 밀농사도 하지 않고, 보리농사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가 맥추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마치 교회 예산 확보를 위해 교인들의 주머니를 터는 주일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1등의 자리에 놓으라는 명령입니다. 넉넉해지면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이생진 시인을 개미를 관찰하다가 쓴 시 가운데 그렇게 노래합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하늘을 자주 보게 된다. 가진 것이 많은 개미는 하늘을 보지 않는다. 머리를 땅에 박고 땅만 뒤지면 된다.\" 개미만 그렇습니까? 사람도 같습니다. 조금 넉넉해지면 교만해 집니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땅만 바라보면서 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1등으로 모시고 살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그러한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섬기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삶의 자리들이 있습니다. 가정, 직장, 신앙인에게는 교회가 그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가? 그분의 왕 되심과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가?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사는가? 굉장한 것부터 꿈꾸지 말고 한가지부터 하자. 직장에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하기 전 하나님을 먼저 인정하십시오. 업무에서도, 사업에서도, 학생인 사람들은 공부하는 일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믿음 생활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으로. 예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일등으로 놓는 것에서부터. Move5: 3등 하나님, 1등 인생 비행기에도 1등칸이 있고, 2등칸이 있으며, 3등칸이 있습니다. 사실 말이 좀 그래서 이코노미 클래스(economy class)라고 말하지 사실은 3등칸 입니다. 몇년전 영국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는 길에 제 아내와 함께 간적이 있습니다. 싼 비행기표를 구하다 보니 갈때는 같은 좌석에 앉아서 갔는데, 돌아올 때는 서로 떨어져서 앉아야 하는 좌석이었습니다. 먼 여행길에 서로 떨어져 간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또 김이 새는 여행이 되는 것입니까? \"당신 나 사이에 저바다가 없었다면...\" 그러한 심정으로 그때 타고 간 비행기가 British Airline이었는데, 뉴캐슬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서 승무원에게 부탁했습니다. 우리가 사실은 부부인데 어떻게 비행기표를 사다보니 이렇게 떨어져 앉게 되었다. 같이 앉아서 갈 수 있는 자리로 좀 바꾸어 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했더니 지금은 자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참 친절한 직원이어서, 혹 런던 공항에서 바꿔 탈 때 자리가 있으면 그렇게 해주겠다면서 컴퓨터에 입력해 주었습니다. 런던 공항에서 비행기를 바꾸어 타려고 하는데 승무원이 우리 비행기 티켓을 보더니 저쪽으로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한참 만에 오더니 다른 비행기표를 가져왔습니다. 비행기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보니 2등석으로 바꾸어 주었어요. 영국에 갈 때 탔던 3등석 이코노미 크래스하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의자도 달랐고, 서비스도 달랐습니다. 이래서 두 배로 주고 Business class를 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의 일하고 왔더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하며 왔습니다.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돈을 조금 내니 3등 인생으로 취급하는 것이지요. 만약에 돈을 두 배로 내면 2등칸에 태워주고, 2등 인생 취급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보다 두 배 이상의 돈을 지불하면 1등 인생으로 대우를 해주겠지요.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몇 등 인생일까요? 성경을 여기를 보고, 저기를 보아도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1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실 만큼 사랑하셨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할 수 가 없을텐데 하나님은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이 세상에서는 사랑할 사람이라고는 단 한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몇 등 정도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지요? 우리의 인생사에서 하나님은 몇 등 정도가 되는 것인가요? 얼마 전 어느 학생이 쓴 충격적인 글 한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목도 도전적이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삼등이십니다.\" 하나님 당신은 3등이십니다/ 1등은 하고 싶은 일 2등은 해야 하는 일/ 3등은 하나님 만나는 일. 하고 싶은 다 하고/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줍니다/ 하나님은 3등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나님은 3등입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그나마도 안 될 때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3등입니다. 거리에 있어서도 3등입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내 자신, 그 다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 다음에야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3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는 1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내가 괴로워 할 때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 오십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 생각 들 때는/ 홀로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께 언제나 1등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1등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만나고 작은 고비 때마다 손을 꼭 붙잡는 내게 1등으로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1등이신 하나님을 나도 1등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시험 때입니다. 또 하나님이 3등으로 밀려날까봐 걱정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1등이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몇등이신가요? 맥추절이 무엇입니까? 1등 인생으로 사랑받고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1등으로 섬기는 연습하는 절기입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선언하는 절기입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것을 고백하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 사는 삶을 시작하는 절기입니다. 혹자는 그렇게 고백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 145:1).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 14:8) 내가 이제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면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 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 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1등 인생 /잠3:1-10/ 류영모목사 2015-01-07 22:09:33 read : 13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뒤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었고, 앞에는 금강호라 불리는 거대한 호수와 같은 아름다운 바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여름은 바다에서,
1등 인생 /잠3:1-10/ 류영모목사 2015-01-07 22:09:33 read : 136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뒤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었고, 앞에는 금강호라 불리는 거대한 호수와 같은 아름다운 바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여름은 바다에서, 봄, 가을, 겨울은 산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은 지금도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시골 아이들 누구나 그러하듯이 늘 도시를 동경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린 가슴에 도시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끔 부모님을 따라 도시의 친척집을 방문하는 것은 가슴 두근거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도시에 가보면 부러운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가끔 방학 때 시골에 찾아오는 서울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도시로 나와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가 "촌놈"이라는 소리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자취를 했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씩은 고향에 내려가서 쌀과 반찬을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부모님이 정성껏 싸주신 그것을 들고 시내버스를 타고 들어오다가 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의례하는 이야기가 "어~ 촌놈, 민생고 해결해 갖고 와?" 그때는 그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시내버스를 타는 날이면 정말 친구들을 안 만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촌놈"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습니다. 제 아내는 도시에서만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어릴적 이야기를 하다보면 집사람은 별로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참 할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들로 산으로 뛰놀면서 놀았던 아름다운 추억이 많기 때문입니다. 문득 삭막한 콘크리트 벽 사이에서, 그리고 도시가 사람을 내몰고 있는 빠듯함 속에서 성장해 가는 제 아이들을 보면서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던 것을 더욱 귀하게 생각됩니다. 산과 바다를 끼고 있던 고향에서 보냈던 시간이 수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던 귀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촌놈"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부끄럽거나 숨기고 싶은 사실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추억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이 그러한 추억에 좀 젖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은데, 아빠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도시문화를 더 좋아합니다. 어쩌다 시골에 내려가면 그렇게 불편해 할 수가 없고, 삶은 감자나 옥수수는 입에 되지도 않고 피자나 햄버거를 기다립니다. 제가 알고 있는 교수님 한분은 고향이 전라남도 신안의 한 섬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목포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도 쌀과 반찬은 주말에 고향에 가서 가져오고는 했답니다. 그런데 그분의 어머니가 대단한 분이셔서 아들이 보고 싶으면 어느 때든지 김치 단지를 이고서 찾아오시곤 했답니다. 당시 어렵던 시골에서 도시로 나가 공부하고 있는 아들은 어머니에게 큰 기쁨이며 자랑거리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자취방으로 찾아가지 않고 자랑스런 그 아들을 보기 위해서 바로 학교로 찾아오시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김치 단지를 머리에 이고, 검정 고무신에 몸베를 입고,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한 어머니가 교실 유리창 밖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에게 엄마가 왔다고 반갑게 손짓을 합니다. 아이들의 눈길이 그곳으로 한꺼번에 쏠리면서 수업은 중단됩니다. "어 촌놈 빨리 나가봐!"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돌아갈 생각을 않으시고 밖에서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화가 나서 저만큼 앞서 가면서 "창피하게 왜 학교로 찾아오냐고?" 돌멩이를 발로 걷어차면서 아들이 투덜대면 대답은 간단했답니다. "너 보고 싶어서 왔제!" 그 어머니는 정말 숨기고 싶은 분이었답니다. 억척스럽게 자식을 사랑했고, 그 어려운 삶 속에서도 오직 자식 뒷바라지하는 일로 사셨던 어머니가 그렇게 귀한 줄 몰랐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들은 나중에 미국 유학을 가서 목회상담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수업의 과제 가운데 하나가 오늘의 자신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던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아내라는 것이었답니다. 도무지 찾아내지 못하고 끙끙대는 그에게 개인적인 삶의 기록들, personal history를 죽 듣던 교수가 그렇게 분석해 주더랍니다. "오늘의 너는 그 어머니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숨기고 싶었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떠나신 다음에야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이제는 그 아들에게 어머니는 가장 자랑하고 싶은 분이라고 고백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고, 숨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이룬 업적이라든지, 성공이라든지, 앞섬이라든지, 가진 것이라든지, 성공한 자녀들이라든지, 혹은 가문을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고, 사소한 것 같지만 자랑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 모아져서 그의 가치관이 됩니다. 반면 사람들은 부끄러운 것은 숨기고 싶어 합니다. 부끄러운 기억들, 남보다 못한 일들, 웃음거리가 될 일들은 숨기고 싶어 합니다. 자랑하고 싶어 하는 본능과 숨기고 싶어 하는 본능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며, 숨기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Move2: 솔로몬의 자랑거리 솔로몬은 자랑할 것이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한 재산을 가졌기에 재산을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남다른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의 지혜를 자랑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강성한 왕국을 세운 왕이었으니 그의 치적을 자랑할 만도 했습니다. 또한 찬란한 하나님의 성전도 지어서 봉헌한 사람이니 그것도 자랑할 만했습니다. 그가 저술한 수많은 책들도 썼으니 그의 학문을 자랑할 만도 했습니다. 어느 저명한 학교의 MBA 출신에게도 뒤지지 않을 탁월한 경영능력도 가진 사람이니 그것도 자랑할만했습니다. 근방에 지혜로운 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그의 명성과 지혜를 자랑할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소유한 것, 그가 이룬 것을 자랑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자랑거리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긴 인생을 살았던 그가 인생의 노년에 그의 아들에게 이것을 자랑하고, 너는 이렇게 살라고 주신 권고와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무엇을 내세우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먼저는 이 말씀이 "명령과 약속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일정한 구조 속에서 한 가지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선 본문에 나타나는 명령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십시다. 원어의 구조를 통해서 보면 본문은 5가지 명령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명령은 1절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것을 네 마음 안에 간직하라"는 명령입니다. 2절에는 약속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사람들에게 장수와 평강이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어느 방송의 "생노병사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장수의 비결을 여러 가지를 알려주더군요. 우리 몸의 세포를 죽이는 활성산소를 없애기 위해서는 비타민을 먹어야 한다든지, 야채를 많이 먹어야 한다든지, 마늘과 녹차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성경의 처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안에 간직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장수와 평강이 함께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평안이 없이 어디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명령은 3절에 나오는데 그 요지는 "사랑과 신실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입니다. 4절에는 약속이 나오는데, 그렇게 하면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중히 여김을 받는 것," 그것이 우리 생의 성공비결 아닙니까? 하나님이 높여 높여주셔야 높아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지켜주셔야 지켜집니다. 양치는 목동이었어도 하나님이 높여 주시니 왕이 되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면 살수록 고백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와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다. 세 번째 명령은 5-6절에 나오는데, 두 서너가지 명령으로 등장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한가지 명령입니다. "범사에, 네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명령입니다. 약속은 6절 후반부에 나오는데, 네 길을 지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명령은 7절에 나오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을 멀리하라"고 명령합니다. 약속은 8절에 나오는데 이것이 보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명령은 네 제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하고 네 포도주 통에 햇 포도주가 넘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 다섯가지 명령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입니다. 그러니까 지혜의 왕 솔로몬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로 무엇을 말합니까? 그는 지금 인생의 자랑거리를 무엇을 삼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섬기는 것!" "에이, 그런 이야기야 목사님이니까 그렇게 말하지요." 아닙니다. 그는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절대 권력을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에이, 돈 모으는 재미가 얼마나 큰데요. 돈 가져 보세요, 세상 모든 사람이 돈 앞에서 모두 고개 숙여요. 그는 가난해서 그런 맛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였겠지요." 아닙니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에이, 쾌락의 맛이 얼마나 대단한데요. 그런 즐거움을 맛을 보지 못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겠지요." 아닙니다. 그는 궁중에서 절대 권력, 절대 쾌락을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누려보았던 그가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해볼 수 있는 일은 다해 보았고,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려보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헛되더라." 그것이 잠언서 다음에 나오는 전도서의 주제 아닙니까? 전도서 1장을 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로 시작하여 1장에서는 "지혜도 헛되다," 2장에서는 "즐거움도 헛되다," "슬기도 어리석음도, 수고도 헛되다"는 내용이 나오고, 4장에서는 왕이 되고 승진을 하는 것도 헛되다, 5장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도 헛되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지막 12장에서는 결론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 요즘 방학이어서 책을 집필하는 일에 전력하고 있는데, 주시는 말씀은 그렇더군요. 전도서 12:12에서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13절은 그렇게 말합니다. 할말을 다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문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에 자랑할 만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했고, 모든 것을 다 누려보았지만 결국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더라는 말씀입니다. Move3: 모든 것의 출발점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을 5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명령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5가지의 명령의 센터에 무엇이 있습니까? 첫 번째, 두 번째 명령이 이것을 지향합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의 명령이 이것을 지향합니다. 그것은 세 번째, 즉 명령의 중심에 있는 말씀,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섬김의 가장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되면 나머지 명령들이 가능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대한 모든 것, 모든 명령들에 대한 순종은 언제나 이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기초가 되며, 출발점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NIV라는 영어성경을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네가 가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라"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가장 압권적인 번역은 Philips Version이었습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놓으라" (Put God first in everything you do). 오늘도 나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일등의 자리에 올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그분의 말씀을 마음 깊은 곳에 두고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분이심을 고백할 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고, 신실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분이시라는 고백을 가질 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싫어하시니 악을 멀리하고, 거짓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9절에서 나오는 첫 열매, 가장 귀한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게 될 것이며,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을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 하나님을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나의 행하는 모든 삶에서 그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가장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우리 인생길에서 그분이 코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내 인생을 가이드하고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신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까? "주님께서 네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인도하실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필립스 번역은 그렇게 말씀을 새롭게 들려줍니다. "하나님이 네 하는 모든 일에 왕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지도하십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앞날을 책임지십니다. 앞날에 모든 일에 왕관을 씌워주십니다. 공부에도 왕관을 씌워주십니다. Move4: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선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여러 규정들을 보여주시는 출애굽기의 말씀 가운데에는 특별히 23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세 절기에 대해서 언급해 줍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출 23:16). 무교절이 지난 뒤로부터 49일이 지난 후인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것이므로 칠칠절이라고도 불렀던 이 절기는 밀 추수기에 밀의 첫 열매를 바치는 절기라고 하여 초실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아직 힘들기만 한 이스라엘 백성들, 아직 정착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행진해야 했던 고달픈 사막길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명령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는 맥추절을 지켜라. 농사해서 얻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쉬운 말로 하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아직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농사해서 얻은 첫 열매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입니다. 첫물은 언제나 가장 귀한 분에게 드렸던 풍습은 우리나라에도 있지만 같은 동양문화권인 이스라엘도 있었습니다. 이 명령이 무슨 말씀입니까? 너의 하나님을 너의 삶의 최고의 자리, 1등으로 놓으라는 명령입니다. 맥추절의 메시지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1등의 자리에 놓아라. 하나님을 너의 가정에 1등의 자리에 놓아라. 너의 사업에, 너의 인생에, 너의 공부에, 너의 결혼 생활에, 너의 직장생활에 1등의 자리에 놓아라. 오늘날 우리는 밀농사도 하지 않고, 보리농사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가 맥추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마치 교회 예산 확보를 위해 교인들의 주머니를 터는 주일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1등의 자리에 놓으라는 명령입니다. 넉넉해지면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이생진 시인을 개미를 관찰하다가 쓴 시 가운데 그렇게 노래합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하늘을 자주 보게 된다. 가진 것이 많은 개미는 하늘을 보지 않는다. 머리를 땅에 박고 땅만 뒤지면 된다." 개미만 그렇습니까? 사람도 같습니다. 조금 넉넉해지면 교만해 집니다. 조금 여유가 있으면,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땅만 바라보면서 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1등으로 모시고 살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그러한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섬기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삶의 자리들이 있습니다. 가정, 직장, 신앙인에게는 교회가 그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가? 그분의 왕 되심과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가?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사는가? 굉장한 것부터 꿈꾸지 말고 한가지부터 하자. 직장에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하기 전 하나님을 먼저 인정하십시오. 업무에서도, 사업에서도, 학생인 사람들은 공부하는 일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믿음 생활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으로. 예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일등으로 놓는 것에서부터. Move5: 3등 하나님, 1등 인생 비행기에도 1등칸이 있고, 2등칸이 있으며, 3등칸이 있습니다. 사실 말이 좀 그래서 이코노미 클래스(economy class)라고 말하지 사실은 3등칸 입니다. 몇년전 영국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는 길에 제 아내와 함께 간적이 있습니다. 싼 비행기표를 구하다 보니 갈때는 같은 좌석에 앉아서 갔는데, 돌아올 때는 서로 떨어져서 앉아야 하는 좌석이었습니다. 먼 여행길에 서로 떨어져 간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또 김이 새는 여행이 되는 것입니까? "당신 나 사이에 저바다가 없었다면..." 그러한 심정으로 그때 타고 간 비행기가 British Airline이었는데, 뉴캐슬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서 승무원에게 부탁했습니다. 우리가 사실은 부부인데 어떻게 비행기표를 사다보니 이렇게 떨어져 앉게 되었다. 같이 앉아서 갈 수 있는 자리로 좀 바꾸어 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했더니 지금은 자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참 친절한 직원이어서, 혹 런던 공항에서 바꿔 탈 때 자리가 있으면 그렇게 해주겠다면서 컴퓨터에 입력해 주었습니다. 런던 공항에서 비행기를 바꾸어 타려고 하는데 승무원이 우리 비행기 티켓을 보더니 저쪽으로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한참 만에 오더니 다른 비행기표를 가져왔습니다. 비행기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보니 2등석으로 바꾸어 주었어요. 영국에 갈 때 탔던 3등석 이코노미 크래스하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의자도 달랐고, 서비스도 달랐습니다. 이래서 두 배로 주고 Business class를 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의 일하고 왔더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하며 왔습니다.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돈을 조금 내니 3등 인생으로 취급하는 것이지요. 만약에 돈을 두 배로 내면 2등칸에 태워주고, 2등 인생 취급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보다 두 배 이상의 돈을 지불하면 1등 인생으로 대우를 해주겠지요.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몇 등 인생일까요? 성경을 여기를 보고, 저기를 보아도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1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실 만큼 사랑하셨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할 수 가 없을텐데 하나님은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이 세상에서는 사랑할 사람이라고는 단 한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몇 등 정도로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지요? 우리의 인생사에서 하나님은 몇 등 정도가 되는 것인가요? 얼마 전 어느 학생이 쓴 충격적인 글 한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목도 도전적이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삼등이십니다." 하나님 당신은 3등이십니다/ 1등은 하고 싶은 일 2등은 해야 하는 일/ 3등은 하나님 만나는 일. 하고 싶은 다 하고/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줍니다/ 하나님은 3등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나님은 3등입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그나마도 안 될 때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3등입니다. 거리에 있어서도 3등입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내 자신, 그 다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 다음에야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3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는 1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내가 괴로워 할 때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 오십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 생각 들 때는/ 홀로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께 언제나 1등입니다/ 나도 하나님을 1등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만나고 작은 고비 때마다 손을 꼭 붙잡는 내게 1등으로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1등이신 하나님을 나도 1등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시험 때입니다. 또 하나님이 3등으로 밀려날까봐 걱정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1등이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몇등이신가요? 맥추절이 무엇입니까? 1등 인생으로 사랑받고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1등으로 섬기는 연습하는 절기입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선언하는 절기입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것을 고백하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 사는 삶을 시작하는 절기입니다. 혹자는 그렇게 고백합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 145:1).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 14:8) 내가 이제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면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 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 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가난 /고후8:9/왕하4:1-7/ 류영모목사
가난 /고후8:9/왕하4:1-7/ 류영모목사 2015-01-05 00:34:59 I. 가난은 저주다 옛날 여인들은 사랑한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요즘은 돈 많다는 말이라야 심장이 뛴답니다. 사탄이 타락한 인간의 마음밭에 욕심을 심었습니다. 그리곤 성공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길을 가다 가난하고 청빈하게 사는 농부를 만나 큰 돌맹이 하나를 금으로 바꾸어 “이 금을 가지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금덩어리를 받아들고 집으로 달렸습니다. 그 다음엔 아주 큰 부자를 만나 똑같이 물었더니 부자는 한술 더 떴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재주가 있으면 아예 바위 하나를 금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번엔 천진난만한 어린이 하나를 만나 똑같이 물었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아이야, 더 큰 금덩어리를 줄까?” 그래도 아이는 고개를 흔듭니다. 실패했구나 싶어 낙망하고 있는데 아이가 말을 합니다. “내게 돌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재주를 주세요.”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큼 물질을 가진 사람도 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니면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여기에 대한 성경적 대답을 가지고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때 서점가 베스트셀러 가운데 Rich Dad Poor Dad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하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가난과 부에 대한 생각과 말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난한 아빠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구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돈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러나 부자 아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돈이 부족한 것은 악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네게 적합한 회사를 차려라. 돈은 힘이 있다. 돈을 잘 관리하는 법을 배워라. 돈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교회엔 많은 헌금을 하고 좋은 곳엔 기부금을 많이 내라. 그것이 부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여러분은 무엇이 진리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부요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빈궁한 중에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또한 부요롭게 살기를 원하지요. 가난 중에 슬퍼하고 탄식하며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산다는 건 비참한 것이지요. 성경적인 관점에서 가난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온 형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레26:14-26). 빈곤은 타락한 세상속에 자리잡은 악이요 혼란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빈곤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때로 가난 자체가 선인 것처럼 낭만적으로 미화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근본적으로 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는 가난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했고 풍부했습니다. 인간이 범죄하므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깨어지고 영적인 빈곤이 찾아왔습니다. 영적 빈곤은 환경의 가난함과 육체적인 질병과 마침내 총체적인 저주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II. 돈에 대한 바른 생각 교회에서 물질에 관한 설교를 하면 거룩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무서운 이단 사상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이단 가운데 하나가 이원론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생각이지요. 예수님은 돈에 관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에 믿음에 관한 귀절이 215개 구원에 관한 성경이 218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돈의 청지기직에 관한 귀절이 2084개나 됩니다. 예수님의 38가지 비유가운데 무려 절반에 가까운 18개가 돈에 관한 비유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돈에 관한 고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사탄도 성도들을 유혹할 때 돈 문제를 가지고 유혹합니다. 「돈, 그 끝없는 유혹」이라는 황호찬 교수의 책에 보면 사단이 인간을 타락시킨 다음 돈에 대한 잘못된 사상을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첫째 “내가 번 돈은 내 것이다”라는 잘못된 마음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일뿐이지요.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올바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둘째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때부터 돈은 이용가치 차원을 넘어 돈 귀신 즉 맘몬으로 둔갑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돈이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마귀의 전략은 못 가져도 저주 가져도 저주가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성실해야 합니다. 이 비전에 자신이 받은 자원들을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비전의 사람들은 - * 자신의 시간을 비전에 집중합니다. * 자신의 환경과 물질을 비전에 집중시킵니다. * 사람들을 비전에 집중시킵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사람들을 신뢰합니다 만은 특별히 그에게 생명을 서로 걸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그에게 시간을 맡겨놓았을 때 시간에 진실하고 성실하여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그에게 사람을 맡겨놓았을 때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고 세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섬겨 줄줄 아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그에게 돈을 맡겨 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분은 1원을 맡겨도 1억을 맡겨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이쯤되면 누구에게서도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진 시간과 사람과 환경과 물질을 비전에 집중시키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를 신뢰합니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III. 즐거운 교환 우리는 지금 즐거운 교환 그 여덟 번째 시간 -「가난을 부요함으로」라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를 지실 때 우리의 가난을 또한 담당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이 진리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함이로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우리의 가난을 담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얼마나 부유하신 분이십니까? 온 하늘과 땅이 그분의 것입니다.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내 것이요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다 내 것임이로다”(시50:9-12) 바로 그분이 나의 가난의 짐을 지시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태어나실 때 태어나실 곳이 없어 마굿간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땅에 오셔서 거할 곳이 없었고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저주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 묻힐 곳이 없어 남의 무덤을 빌려 묻히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가난의 저주를 십자가 앞으로 가져오라! 그리고 즐거운 교환을 경험하라! “너희 죽음과 죄책감을 내가 감당했듯이 가난의 짐도 감당하겠다”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활과 자유함을 주었듯이 부요함을 주겠다” 말씀하십니다. 잠언 22:6에「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있다는 것은 아시지요. 이 말씀이 그 다음 7절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아십니까?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 빚지고 살지 않도록 가르치라는 겁니다. * 바른 경제관을 가르치라는 겁니다. - 어릴 때부터. 오늘 구약 본문 열왕기하 4장에 보면 남편 잃은 전도사 부인이 엘리사 선지를 찾아옵니다. 보증을 서달라고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돈을 빌려달라고 온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재정적 위기에 신적 개입을 원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교환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자신 안에서 재정적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신뢰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하나님은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에게 재정적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존 아반지니 박사의 책 중에 「채무의 영을 결박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 채무의 영을 십자가 밑으로 끌고 오십시오. 빚지고 사는 관습이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채무의 영은 떠나라!” * 조상으로부터 계속 내려오는 가난의 저주가 있습니까? 가난의 저주를 십자가 밑으로 가져오십시오. “가난의 저주는 떠날 지어다.” * 끊임없는 재정적 압박이 있습니까? “나는 자유인이다. 물질적 압박은 떠나라!” * 우리의 구원은 총체적이요 전인격입니다. 구원의 기적, 성령의 기적과 함께 환경의 기적, 재정적 기적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네게 재물얻는 능이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질로 인하여 마음이 낮아지고 가난해 지셨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문제 해결의 능력도 있음을 믿으십니까?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셨습니까? 이제 당신에게 재물 얻는 능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6-18) 여러분의 손바닥을 경외감을 가지고 보십시오. 아! 여기에 하나님이 재물 얻는 능을 주셨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본토와 친척을 버리고 달려나온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단순히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해지는 수준이 아니라 나 때문에 가정과 친척과 셀과 교회가 잘되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장에서 부름받고 13장을 펼치면 2절에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은 모두 흉년이 들었을 때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창26:12-13)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을 통해서도 큰 재물을 일으키십니다. 저주의 가문이 축복의 가문으로 바뀌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혼의 구원과 마음의 치유 뿐만 아니라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신명기 7:13-15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 신명기 28:8, 11-12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요한 삼서 이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여러분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를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해 보십시요. 백성들이 밥을 굶고 못사는 나라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일 것입니다. 구 공산권 국가가 아니면 어떤 특정 종교를 믿는 나라들일 것입니다. 반면 잘 사는 선진국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기독교 국가들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이 지난 수천년동안 그리고 지금도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V. 크리스챤이 부요하게 되는 원리 크리스챤이 가난 중에 수치감을 가지고 사는 것 -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의 가난을 극복하려고 힘쓰지 않음은 더욱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물질을 통하여서도 사명을 감당하고 쓰임 받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크리스챤이 부요하게 되는 원리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책들의 공통적인 첫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겁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는 축복의 씨앗입니다. 농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종자를 먹지 않습니다. 정직한 십일조를 하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 이하에서는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빚을 지고 있어도 반드시 해야 할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십일조와 저축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평생 먹어야 할 종자이기 때문에 빚을 갚아도 종자를 가지고 빚을 갚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가난을 가지고 나아가 즐거운 교환을 요청할 때, 물질을 주시면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분명한 비전, 목표를 알아야 합니다. 물질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빈손으로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이 땅에 보낼 때 필요한 것을 채우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 물질을 회수해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갑자기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물질은 하나님을 위해 바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내가 물질을 가져야 할 이유, 목표를 바로 알게 됩니다. 선교를 위해서, 성전건축을 위해서, 가난한 이웃이나 자선단체를 섬기기 위해서... 라는 바른 물질관을 세워야 합니다. 마가복음 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서구 선진국의 많은 교회당들은 개인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멋진 크리스챤 부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쏟아 지은 예배당들이지요. 교회당 뿐이 아닙니다. 하바드대학은 하바드씨의 재산으로 설립된 대학입니다. 그러나 그의 자손 중 그 누구도 이 대학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카네기 공대는 카네기씨의 재산으로 설립된 학교입니다. 시카고 대학은 록 펠러의 재산으로 설립된 대학입니다. 캘리포니아 공대는 무명의 부자가 세운 대학입니다. 물질의 궁극적 목적은 드리는 기쁨과 나누는 행복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보람에 있습니다. 안산의 어느 교회에서는 권사님 한 분이 알파코스에 참여하고 자신의 돈으로 불신자를 전도할 수 있다면 이건 최고의 영광이다라고 생각하고 평생 이 교회에서 하는 모든 알파코스 비용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한 성도는 뜨레스디아스에 참여한 후 자신의 재산을 들여 수양관을 세우고 전세계에 이 운동이 확산되는데 재산을 헌납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도 모릅니다. 헌신 후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가치관이 아직 너무나 비성경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고작 돈 모으는 목적이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분명히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난 금요일 밤 비전센타가 완성될 때까지 일천번제를 드리며 기도하는 일천번제 가족들이 모여 철야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예배당 교실 하나를 드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 제목을 냈습니다. 천수림 몇 그루 몇 십 그루를 심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반드시 물질적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저도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들이 복 받아야 할 이유를 당당히 아뢸 것입니다. 잭 하트만은 그의 책 「성경은 경영학 교과서입니다」라는 책에서 “최고의 투자는 천국에 투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요의 법칙은 하나님 앞에 심는 법칙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적이 든다고 말합니다. 여기 도적은 사탄입니다. 이 사탄은 돈을 이용해서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도록 합니다. 그래서 욕망, 이기심과 함께 금생과 내생에 모든 물질적 환경을 잃어버리게 하는데 사탄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심어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하나님 앞에 심어 놓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행에 투자할 것을 저자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천국은행에 심어두면 필요할 때마다 인출도장을 가지고 가는데, 은행에 가서 비밀번호를 쓰고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비밀번호는 믿음이요 도장은 기도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바른 투자를 해야 합니다. 탐욕과 욕심에서 투자하면 안됩니다. 욕심이 앞장서는 투자는 실패합니다. 쉽게 돈을 벌고 싶어 일확천금을 꿈꾸며 투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맘몬 돈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가 물질문제 때문에 지나친 번민이 생기고 교회에서 돈 때문에 시험 당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시요. 돈은 과시의 대상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성경적으로 합당한 곳 그러면서도 안전하고 좋은 곳에 투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령 자기 집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저축하고 투자해서 주택을 구입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욕심으로 투자했다가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하고 돌이키세요. 넷째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시더라도 과소비와 사치스런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요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풍성한 삶을 주셨다는 것은 사치스럽게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청지기적인 사명을 똑바로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돈을 가지고 자기를 꾸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주님 닮아가는 아름다운 모습, 자신의 영성을 가꾸고 자신의 속사람을 가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한 사람은 자신의 돈과 재물을 자랑하며 즐기기 보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으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은 받은 사람으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결단하십시오. * 나는 물질을 통하여서도 영광스럽게 쓰임받는다. * 수입이상의 지출을 하지 않는다. * 빚을 지고 살지 않는다. 우리가정에 머무는 빚지고 살게 만들었던 채무의 영을 결박한다. * 신용카드로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다. * 내가 최악의 경우라도 책임질 수 없다면 보증 서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그릇을 준비해 놓고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VI. 부요함: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 성경에서 부요함이란 단순히 부자가 됨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부자는 소유의 표현일 뿐입니다. 반면 부요함이란 소유의 차원을 넘어 존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만족하며 그것을 통하여 넉넉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복은 받는 것 이전에 복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가 저절로 맺혀집니다. 복 받기를 원한다면 복 받을 그릇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관심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릇이 못되는 사람이 물질을 가지면 물질 때문에 망하기도 하고 물질 때문에 사람을 버리기도 합니다. 가진 돈으로 방탕해지는 사람, 뭘 좀 가졌다고 교만해지는 사람, 가지고도 바로 쓸 줄을 몰라 옹졸해지고 수전노가 되어버린 사람... 모두가 그릇이 준비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돈을 벌었는데 가정이 깨진 사람, 신앙 잃어버린 사람, 친구를 잃은 사람, 건강을 잃은 사람, 이 모두 그릇 보다 더 많이 담아서 버린 인생입니다. 게일 리버맨이란 사람이 쓴 「부자의 꿈을 이룬 14명의 보통 사람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부자가 된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부 자체보다 감당할 자격, 그릇됨이 중요하더라는 겁니다. 돈엔 영적인 의미가 있어서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나누고 사용하는가를 벌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참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나의 주님은 우리의 가난의 짐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준비되기만 하면 부요함을 주십니다. 이번에 제가 싱가폴에 가서 들은 얘기입니다. 세계적인 골프 의류 업체 회장인 아놀드 파머가 중동 석유재벌을 만나 교제를 나누며 골프 지도를 해 주었습니다. 서로 유익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중동 재벌이 내가 당신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데 뭘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놀드 파머는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 오래된 골프 셑이 있으면 하나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아놀드 파마가 미국에 도착한 며칠 후 등기 우편물이 도착했는데 열어보니 미국 안에서 가장 오래된 18홀 골프장이 파머 앞으로 등기가 된 골프장 문서였다는 겁니다. 파머는 골프 셑이라고 했는데 재벌이 잘못 알아듣고 골프장 하나를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석유재벌도 골프 셑을 원하는 파머에게 골프장을 줄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부요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부요하신 하나님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요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가난/ 고후8:9, 왕하4:1-7/ 류영모 목사/ 2015-01-05
가난 고후8:9, 왕하4:1-7 I. 가난은 저주다 옛날 여인들은 사랑한다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요즘은 돈 많다는 말이라야 심장이 뛴답니다. 사탄이 타락한 인간의 마음밭에 욕심을 심었습니다. 그리곤 성공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길을 가다 가난하고 청빈하게 사는 농부를 만나 큰 돌맹이 하나를 금으로 바꾸어 “이 금을 가지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금덩어리를 받아들고 집으로 달렸습니다. 그 다음엔 아주 큰 부자를 만나 똑같이 물었더니 부자는 한술 더 떴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재주가 있으면 아예 바위 하나를 금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번엔 천진난만한 어린이 하나를 만나 똑같이 물었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아이야, 더 큰 금덩어리를 줄까?” 그래도 아이는 고개를 흔듭니다. 실패했구나 싶어 낙망하고 있는데 아이가 말을 합니다. “내게 돌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재주를 주세요.”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큼 물질을 가진 사람도 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니면 부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여기에 대한 성경적 대답을 가지고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때 서점가 베스트셀러 가운데 Rich Dad Poor Dad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하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가난과 부에 대한 생각과 말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난한 아빠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구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돈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러나 부자 아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돈이 부족한 것은 악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네게 적합한 회사를 차려라. 돈은 힘이 있다. 돈을 잘 관리하는 법을 배워라. 돈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교회엔 많은 헌금을 하고 좋은 곳엔 기부금을 많이 내라. 그것이 부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여러분은 무엇이 진리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부요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빈궁한 중에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또한 부요롭게 살기를 원하지요. 가난 중에 슬퍼하고 탄식하며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산다는 건 비참한 것이지요. 성경적인 관점에서 가난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온 형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레26:14-26). 빈곤은 타락한 세상속에 자리잡은 악이요 혼란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빈곤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때로 가난 자체가 선인 것처럼 낭만적으로 미화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근본적으로 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는 가난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했고 풍부했습니다. 인간이 범죄하므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깨어지고 영적인 빈곤이 찾아왔습니다. 영적 빈곤은 환경의 가난함과 육체적인 질병과 마침내 총체적인 저주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II. 돈에 대한 바른 생각 교회에서 물질에 관한 설교를 하면 거룩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무서운 이단 사상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이단 가운데 하나가 이원론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생각이지요. 예수님은 돈에 관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에 믿음에 관한 귀절이 215개 구원에 관한 성경이 218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돈의 청지기직에 관한 귀절이 2084개나 됩니다. 예수님의 38가지 비유가운데 무려 절반에 가까운 18개가 돈에 관한 비유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돈에 관한 고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사탄도 성도들을 유혹할 때 돈 문제를 가지고 유혹합니다. 「돈, 그 끝없는 유혹」이라는 황호찬 교수의 책에 보면 사단이 인간을 타락시킨 다음 돈에 대한 잘못된 사상을 집어넣었다는 겁니다. 첫째 “내가 번 돈은 내 것이다”라는 잘못된 마음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일뿐이지요.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올바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둘째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때부터 돈은 이용가치 차원을 넘어 돈 귀신 즉 맘몬으로 둔갑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돈이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마귀의 전략은 못 가져도 저주 가져도 저주가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성실해야 합니다. 이 비전에 자신이 받은 자원들을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비전의 사람들은 - * 자신의 시간을 비전에 집중합니다. * 자신의 환경과 물질을 비전에 집중시킵니다. * 사람들을 비전에 집중시킵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사람들을 신뢰합니다 만은 특별히 그에게 생명을 서로 걸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그에게 시간을 맡겨놓았을 때 시간에 진실하고 성실하여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그에게 사람을 맡겨놓았을 때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고 세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섬겨 줄줄 아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그에게 돈을 맡겨 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분은 1원을 맡겨도 1억을 맡겨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이쯤되면 누구에게서도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진 시간과 사람과 환경과 물질을 비전에 집중시키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를 신뢰합니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III. 즐거운 교환 우리는 지금 즐거운 교환 그 여덟 번째 시간 -「가난을 부요함으로」라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를 지실 때 우리의 가난을 또한 담당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이 진리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함이로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우리의 가난을 담당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얼마나 부유하신 분이십니까? 온 하늘과 땅이 그분의 것입니다.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내 것이요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다 내 것임이로다”(시50:9-12) 바로 그분이 나의 가난의 짐을 지시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태어나실 때 태어나실 곳이 없어 마굿간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땅에 오셔서 거할 곳이 없었고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저주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 묻힐 곳이 없어 남의 무덤을 빌려 묻히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가난의 저주를 십자가 앞으로 가져오라! 그리고 즐거운 교환을 경험하라! “너희 죽음과 죄책감을 내가 감당했듯이 가난의 짐도 감당하겠다”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부활과 자유함을 주었듯이 부요함을 주겠다” 말씀하십니다. 잠언 22:6에「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있다는 것은 아시지요. 이 말씀이 그 다음 7절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아십니까?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 빚지고 살지 않도록 가르치라는 겁니다. * 바른 경제관을 가르치라는 겁니다. - 어릴 때부터. 오늘 구약 본문 열왕기하 4장에 보면 남편 잃은 전도사 부인이 엘리사 선지를 찾아옵니다. 보증을 서달라고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돈을 빌려달라고 온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재정적 위기에 신적 개입을 원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교환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자신 안에서 재정적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신뢰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하나님은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에게 재정적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존 아반지니 박사의 책 중에 「채무의 영을 결박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 채무의 영을 십자가 밑으로 끌고 오십시오. 빚지고 사는 관습이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채무의 영은 떠나라!” * 조상으로부터 계속 내려오는 가난의 저주가 있습니까? 가난의 저주를 십자가 밑으로 가져오십시오. “가난의 저주는 떠날 지어다.” * 끊임없는 재정적 압박이 있습니까? “나는 자유인이다. 물질적 압박은 떠나라!” * 우리의 구원은 총체적이요 전인격입니다. 구원의 기적, 성령의 기적과 함께 환경의 기적, 재정적 기적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IV. 네게 재물얻는 능이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질로 인하여 마음이 낮아지고 가난해 지셨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문제 해결의 능력도 있음을 믿으십니까?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셨습니까? 이제 당신에게 재물 얻는 능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6-18) 여러분의 손바닥을 경외감을 가지고 보십시오. 아! 여기에 하나님이 재물 얻는 능을 주셨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본토와 친척을 버리고 달려나온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단순히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해지는 수준이 아니라 나 때문에 가정과 친척과 셀과 교회가 잘되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장에서 부름받고 13장을 펼치면 2절에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은 모두 흉년이 들었을 때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창26:12-13)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을 통해서도 큰 재물을 일으키십니다. 저주의 가문이 축복의 가문으로 바뀌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혼의 구원과 마음의 치유 뿐만 아니라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신명기 7:13-15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 신명기 28:8, 11-12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요한 삼서 이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여러분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를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해 보십시요. 백성들이 밥을 굶고 못사는 나라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일 것입니다. 구 공산권 국가가 아니면 어떤 특정 종교를 믿는 나라들일 것입니다. 반면 잘 사는 선진국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기독교 국가들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이 지난 수천년동안 그리고 지금도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V. 크리스챤이 부요하게 되는 원리 크리스챤이 가난 중에 수치감을 가지고 사는 것 -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의 가난을 극복하려고 힘쓰지 않음은 더욱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물질을 통하여서도 사명을 감당하고 쓰임 받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크리스챤이 부요하게 되는 원리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책들의 공통적인 첫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겁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는 축복의 씨앗입니다. 농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종자를 먹지 않습니다. 정직한 십일조를 하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 이하에서는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빚을 지고 있어도 반드시 해야 할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십일조와 저축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평생 먹어야 할 종자이기 때문에 빚을 갚아도 종자를 가지고 빚을 갚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가난을 가지고 나아가 즐거운 교환을 요청할 때, 물질을 주시면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분명한 비전, 목표를 알아야 합니다. 물질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빈손으로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이 땅에 보낼 때 필요한 것을 채우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 물질을 회수해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갑자기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물질은 하나님을 위해 바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내가 물질을 가져야 할 이유, 목표를 바로 알게 됩니다. 선교를 위해서, 성전건축을 위해서, 가난한 이웃이나 자선단체를 섬기기 위해서... 라는 바른 물질관을 세워야 합니다. 마가복음 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서구 선진국의 많은 교회당들은 개인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멋진 크리스챤 부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쏟아 지은 예배당들이지요. 교회당 뿐이 아닙니다. 하바드대학은 하바드씨의 재산으로 설립된 대학입니다. 그러나 그의 자손 중 그 누구도 이 대학 경영에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카네기 공대는 카네기씨의 재산으로 설립된 학교입니다. 시카고 대학은 록 펠러의 재산으로 설립된 대학입니다. 캘리포니아 공대는 무명의 부자가 세운 대학입니다. 물질의 궁극적 목적은 드리는 기쁨과 나누는 행복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보람에 있습니다. 안산의 어느 교회에서는 권사님 한 분이 알파코스에 참여하고 자신의 돈으로 불신자를 전도할 수 있다면 이건 최고의 영광이다라고 생각하고 평생 이 교회에서 하는 모든 알파코스 비용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한 성도는 뜨레스디아스에 참여한 후 자신의 재산을 들여 수양관을 세우고 전세계에 이 운동이 확산되는데 재산을 헌납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도 모릅니다. 헌신 후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가치관이 아직 너무나 비성경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고작 돈 모으는 목적이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분명히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난 금요일 밤 비전센타가 완성될 때까지 일천번제를 드리며 기도하는 일천번제 가족들이 모여 철야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예배당 교실 하나를 드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 제목을 냈습니다. 천수림 몇 그루 몇 십 그루를 심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반드시 물질적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저도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들이 복 받아야 할 이유를 당당히 아뢸 것입니다. 잭 하트만은 그의 책 「성경은 경영학 교과서입니다」라는 책에서 “최고의 투자는 천국에 투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요의 법칙은 하나님 앞에 심는 법칙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적이 든다고 말합니다. 여기 도적은 사탄입니다. 이 사탄은 돈을 이용해서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도록 합니다. 그래서 욕망, 이기심과 함께 금생과 내생에 모든 물질적 환경을 잃어버리게 하는데 사탄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심어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하나님 앞에 심어 놓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행에 투자할 것을 저자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천국은행에 심어두면 필요할 때마다 인출도장을 가지고 가는데, 은행에 가서 비밀번호를 쓰고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비밀번호는 믿음이요 도장은 기도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바른 투자를 해야 합니다. 탐욕과 욕심에서 투자하면 안됩니다. 욕심이 앞장서는 투자는 실패합니다. 쉽게 돈을 벌고 싶어 일확천금을 꿈꾸며 투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맘몬 돈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가 물질문제 때문에 지나친 번민이 생기고 교회에서 돈 때문에 시험 당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시요. 돈은 과시의 대상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성경적으로 합당한 곳 그러면서도 안전하고 좋은 곳에 투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령 자기 집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저축하고 투자해서 주택을 구입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욕심으로 투자했다가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하고 돌이키세요. 넷째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시더라도 과소비와 사치스런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요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풍성한 삶을 주셨다는 것은 사치스럽게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청지기적인 사명을 똑바로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돈을 가지고 자기를 꾸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주님 닮아가는 아름다운 모습, 자신의 영성을 가꾸고 자신의 속사람을 가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한 사람은 자신의 돈과 재물을 자랑하며 즐기기 보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배운 사람으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은 받은 사람으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결단하십시오. * 나는 물질을 통하여서도 영광스럽게 쓰임받는다. * 수입이상의 지출을 하지 않는다. * 빚을 지고 살지 않는다. 우리가정에 머무는 빚지고 살게 만들었던 채무의 영을 결박한다. * 신용카드로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다. * 내가 최악의 경우라도 책임질 수 없다면 보증 서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그릇을 준비해 놓고 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VI. 부요함: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 성경에서 부요함이란 단순히 부자가 됨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부자는 소유의 표현일 뿐입니다. 반면 부요함이란 소유의 차원을 넘어 존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만족하며 그것을 통하여 넉넉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복은 받는 것 이전에 복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가 저절로 맺혀집니다. 복 받기를 원한다면 복 받을 그릇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관심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릇이 못되는 사람이 물질을 가지면 물질 때문에 망하기도 하고 물질 때문에 사람을 버리기도 합니다. 가진 돈으로 방탕해지는 사람, 뭘 좀 가졌다고 교만해지는 사람, 가지고도 바로 쓸 줄을 몰라 옹졸해지고 수전노가 되어버린 사람... 모두가 그릇이 준비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돈을 벌었는데 가정이 깨진 사람, 신앙 잃어버린 사람, 친구를 잃은 사람, 건강을 잃은 사람, 이 모두 그릇 보다 더 많이 담아서 버린 인생입니다. 게일 리버맨이란 사람이 쓴 「부자의 꿈을 이룬 14명의 보통 사람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부자가 된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부 자체보다 감당할 자격, 그릇됨이 중요하더라는 겁니다. 돈엔 영적인 의미가 있어서 어떻게 관리하고 어떻게 나누고 사용하는가를 벌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참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나의 주님은 우리의 가난의 짐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준비되기만 하면 부요함을 주십니다. 이번에 제가 싱가폴에 가서 들은 얘기입니다. 세계적인 골프 의류 업체 회장인 아놀드 파머가 중동 석유재벌을 만나 교제를 나누며 골프 지도를 해 주었습니다. 서로 유익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중동 재벌이 내가 당신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데 뭘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놀드 파머는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 오래된 골프 셑이 있으면 하나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아놀드 파마가 미국에 도착한 며칠 후 등기 우편물이 도착했는데 열어보니 미국 안에서 가장 오래된 18홀 골프장이 파머 앞으로 등기가 된 골프장 문서였다는 겁니다. 파머는 골프 셑이라고 했는데 재벌이 잘못 알아듣고 골프장 하나를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석유재벌도 골프 셑을 원하는 파머에게 골프장을 줄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부요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부요하신 하나님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요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류영모 목사
가룟 유다 /요13:21-30/ 류영모목사 2015-01-07 14:29:27 read : 115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느 날 개구리 한 마리가 논바닥을 펄쩍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참 뛰다보니 다리가 너무 아파 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독수리 한 마리가 큰 날개를 펴고 너
가롯 유다 /요13:21-30/ 류영모목사 2015-01-07 14:29:27 read : 115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느 날 개구리 한 마리가 논바닥을 펄쩍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참 뛰다보니 다리가 너무 아파 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독수리 한 마리가 큰 날개를 펴고 너무나 쉽게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지 않겠습니까? "독수리 선 생 어떻게 하면 나도 하늘을 날 수 있겠소?" 독수리가 하는 말 "날개를 달고 높은데서 뛰어 내리면 자동적으로 날게 된다오." 개구리가 닭털 두 개를 주워 옆구리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15층 빌딩 꼭대기 향하여 펄쩍거리며 뛰어 올라 가더니 닭털을 허우적거리며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그 이후 이 개구리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선의 날개를 달아도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종교 의 날개를 가지고는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지식이나 철학의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시작되던 초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거듭나지 못했던 한 흉내 신자, 흉내 제자가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니코스카찬차스키의 "최후의 유혹"을 각색한 연극 마라나 타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맡은 배역이 가롯 유다였는데 저는 그 맡은 역을 멋지게 소화하려고 노력했고 제법 좋은 연기를 보여 주위의 칭찬을 들은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러나 그 가롯 유다의 역은 멋지게 소화를 하면 할수 록 예수님과는 멀어지고 관중들로부터는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영화든 이런 배역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세상 에서 이런 배역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자신의 삶을 멋지게 소화하면 할 수록 지옥에는 가까워지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이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며 비극적인 일이겠습니까? 일찍이 단테는 "신곡" 지옥 편에서 가롯 유다가 마왕 루시퍼와 함께 가장 낮은 층의 자리에 앉아 지옥에서 조차 금해진 혹독한 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위대한 성자가 될 기회를 가졌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애석한 사람은 아마도 가롯 유다 일 것입니다. 그는 성자가 될 기회를 악역으로 바꾼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난 이천년동안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의 이름을 가 롯 유다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을 읽어 내려갈 때 가롯 유다와 자기자신을 동일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아브라함을 공부하게 되지요.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입니 다"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모세를 공부하고 여호수아를 공부합니다. "여러분 모두 여호수아와 같은 인물이 되십시오"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가 나와 서 "우리 모두가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면 "아멘"하기가 쉽지 않습니 다. 이에 대해 성서와 비평이라는 위대한 책을 썼던 고트발트라는 신학자는 이 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언제나 나 자신이 가롯 유다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 아니겠 습니까? 그 가롯 유다의 모습 속에서 오늘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 다 유다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중 가장 영예로운 몫을 차지한 유다 지파에서 비 롯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찬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과 구약 의 중간 시대에 유대민족을 구출하기 위해 피흘리며 싸웠던 독립투사 가운데 유다 마카 비우스 가족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그 훨씬 이상으로 저들은 유다 마카비우스를 존경했습니다. 이 만큼 이스라엘 민족들은 유 다라는 이름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엔 유다라는 이름 이 아주 흔했지요. 그런데 가롯 유다가 나타나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 았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이요 직분이었던 사도 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삼년동안이나 같이 살며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가 있습니다. 좋은 이름, 좋은 조건, 내세울게 없습니다. 내가 교 회의 한 구성원이 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가롯 유다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배 는 많은 곳이 부서져 바람부는 대로 떠다니게 되었지요. 여러 날이 지나 음식 과 물이 떨어져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목마름이었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는 배 한척이 있 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에게 물 한통만 건네주시구려. 그때 저쪽에서 들 려온 소리가 "배 밑에 있는 물을 떠서 마시세요. 여러분들은 이미 강 하구에 도달되어 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를 찾아 헤매다가 강 하구에 도착했지만 아직도 바다에 떠 있는 줄 알고 저들은 목말라 신음하고 있었던 게지요. 물위 에 떠 있으면서 물이 없어 목말라 죽을 뻔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바다에 떠 있어도 내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 구원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은혜로운 공동체에 참여했다 할지라도 그 공동체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 구원의 영광이 나와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무서운 가능성을 인 정하십니까? 예수를 판 이유: 왜? I 영원한 수수께끼이기는 합니다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돈궤를 메고 다니다가 돈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라 왔는데 예수께서 유다 나라 왕이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시자 실망한 나머지 예수님을 배신했다고 말합니다. 또 성경적인 근거는 전혀 없지만 상상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른 제자들은 다 갈릴리 출 신인데 자기만 비갈릴리 가롯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방색의 갈등에서 오는 소외감이 다른 제자들을 향한 질투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마침내 스승까지 파는 범위까지 가 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자는 좀더 극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유다 민족을 독립시킬 아무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면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신비한 능력을 행하게 될 것이고 그 속에 있 는 애국심이 발동되어 민족을 구원하고 나라를 세우는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살리든 그 예수께서 허무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허무감을 견딜 수 없어 목매달아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다음 설득력 있는 또 다른 한 주장이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영특한 사람인지라 세상 돌아가는 대세를 보니 제사장 편에 붙어야 목숨을 부지하게 생겼습니다. 예수가 죽고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죽어도 자기는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를 판 이유: 왜? II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는 이런 지협적이고 외적 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이고도 내면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매일 밤 보자기를 쓴 사나이가 나타나더랍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면 악한 길로 끌고 다닙니다. 나는 멋지게 승리하고 싶은데 실패를 반복하도록 만든 단 말이예요. 그래서 화가 나서 보자기를 확 벗겼더니 보자기 속에서 나타난 얼굴이 바 로 자기자신이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자기자신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롯 유다가 처음에는 예수를 잘 믿다가 나중에 타락했다고." 어떤 교단은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교단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 신학 가운데 여러 가지 고귀한 진리들이 있습니다만 "성도의 견인" 이라고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한번 내가 하나님의 자녀 관계에 들어가게 되면 이 자녀 관계는 파괴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구세주로 영 접하면 예수의 구원은 실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번씩 타락할 수 있고 교회를 떠날 수 있지만 극단적인 경우 죽음의 자리에서도 예수를 다시 믿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잘 믿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는 아예 처음부터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앙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신앙이 없으면서도 얼마든지 신앙인 행세를 하 면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영혼을 더듬어 보십시오. 정말 나의 신앙 생활 속에 신앙과 정직이 담겨져 있는가? 이 땅에 교회를 떠나고만 교인들이 얼마나 많 습니까? 그들은 배신자들이 아니고 예수를 구세주로 만난 사건과 경험이 없는 비신자들 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행여 오늘 아침에 참석했다고 하면 제로(O) 출발점부터 신 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6장 64절에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이 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느 니라." 이 말은 누구를 향한 말씀인지 또 가롯 유다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 백하게 지적하는 성경적인 증언 아니겠습니까? 제자 공동체에 몸을 담았으면서도 예수 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한 비극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 아니라 다만 종교적 환경에 동참했 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종교인과 신앙인은 다릅니다. 교인과 하나님의 자녀는 다릅니다. 한 소망공동체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천국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게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유명한 사건이 기록 된 장입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되는 말씀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 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귀한 봉사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봉사를 우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잔혹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여기서 "씻는다"는 단어는 단순히 그런 의미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 우리 영혼이 적셔져서 우리 죄가 씻김 받는 사건, 흘리신 물과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받고 거듭나고 중 생하는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전에 나와서 예수님의 보혈을 거절 하면 예수님 날 찾아온 구원과 중생의 사건을 내가 거절하면 예수와 나와는 아무런 상관 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가롯 유다는 구원받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종교적인 형식만 가졌지 그 내 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사탄이 침투하여 자리를 잡게되는 것입니다. 마치 빈 집에 일곱 귀신이 들어오듯이 말입니다. 소제해 두었어요. 품위가 있어요. 그러나 주인이 없습니다. 양복입고 그럴듯하게 예배드려요. 직분도 있어요. 그리고 착하다고 도 얘기해요. 때로는 칭찬도 들어요. 법없어도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 어요. 그런데 그 속에 예수가 아니계세요. 내 마음 중심 자리에 하나님이 아니계세요. 이런 사람들은 사탄이 침투하기가 좋은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이 사실을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 2절 말씀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 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그냥 지나치는 생각하나 이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생각 하나가 가롯 유다의 마음을 찾아왔습니다. 이 생각은 누 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요. 그러나 가롯 유다의 마음속에는 이 생각을 물리쳐 줄 예수 의 영이 아니계셨습니다. 오히려 이 사탄의 공격 앞에 자기 마음의 문을 계속 열고 있 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이었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실패감을 불어넣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 줍니다. 두려운 마음을 심어줍니다. 미움과 갈등과 원망을 심어줍니다. 사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마음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성령은 밝고 건강한 생각, 거룩한 마음, 사랑과 친절의 마음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주시 는 것입니다. 성령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귀한 마음들이 우리를 찾아 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을 어떻게 관리하며 사십니까? 우리는 이 생각관리에 실패하기 시작할 때 사탄에게 내 존재 자체를 내어 줄 수 있다는 심각한 비극을 우리는 가롯 유다의 사건 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가 왜 예수님을 팔았는가? 첫째 그는 아예 불신자였기 때문에. 둘째 예수가 지배 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사탄을 향하여 열려져 있었기 때문에. 하여 13장 2절의 말씀은 본문 27절로 연결이 됩니다.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 에 들어간지라" 이 떡을 받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 떡을 가롯 유다에 게 떼어 주셨을 때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절호의 찬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하는 가장 못된 일, 사역 가운데 하나가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탄을 향하여 내 심령이 내 영혼이 끌려가 기 시작하면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가 안되는 겁니다.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해 지고 마 는 것입니다. 이것보세요. 처음에는 "예수님을 팔아 버릴까"라는 생각 정도로 사탄은 생각만 집어 넣었습니다. 그 다음에 유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이 사탄의 생각을 수용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 나중에는 생각만 집어 넣은 것이 아니라 유다의 마음속에 사탄이 통째로 들어 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생각을 집어넣고 나중에는 사탄이 들어갑니다. 아예 그 마음속 에 사탄이 들어가서 가롯 유다를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하는 비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 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를 팔 자는 비롯 가롯 유다 뿐만아니라 당시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모두들 가운데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자들은 서로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그랬습니다. 정말 보기 흉한 광경 이지요. 이럴 때 일수록 혹시 내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그런 비극적인 인물은 아닙니 까? 하나님 날 살려주십시오. 주님께 매달렸어야 옳았습니다. 정히 자신감이 있었다고 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런 놈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물었어야 옳았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말씀 을 자신의 말씀으로 받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산상교훈을 비롯하여 매일같이 제자들에게 설교하셨고 교 훈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과 자기 자신을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는 데에 가롯 유다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쳐줄 때 저기 불쌍한 사람이 있구나 하고 쳐다보고 있었던 게지 요. 아니요. 주님 내가 영적인 소경입니다. 신령한 세계가 안보입니다. 영안을 열어 주세요. 엎드려 기도했어야 옳았지요. 나병환자를 고쳐줄 때에 내 영혼을 썩어 문들어 지게 만드는 내 심령 속에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나병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고백했어야 옳았어야 했지 않습니까? 주님 내 영혼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주님 나를 살려 주십시 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 병을 예수님의 발에 부을 때 저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주님 나는 무 엇을 깰까요. 내가 죽님을 위하여 깨야될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님께 물었어야 옳았지요.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이완되어 축 늘어진 모 습을 바라보며 주여 내 손과 발목에 힘을 주시옵소서 기도했어야 옳았을 것 아니었습니 까? 한국교회에 전해오는 고전적인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자부는 열심히 예수를 믿었고 시어머니는 뒤늦게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더랍 니다. 그래서 자부가 시어머니에게 세례공부를 부지런히 시켰지요 . 이것저것 가르치다가 "어머니, 목사님께서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물 으면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해야돼요." 그래서 목사님께서 이것저것 묻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물었더니 "아이고 그거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며느리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하더랍니다. 이 설교 우리 며느리 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남편 들었으면 좋겠다가 아니고 여기 불려 지는 찬송가 가사 하나가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셔야 됩니다. 이 강단에 서 선포되어지는 말씀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질 때 그 귀가 복받은 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그 말씀이 아이들에게만 주는 말씀으로 끝 나면 속고 있는 것입니다. 류목사가 지금 여기 설교하지만 우리 교인들에게나 설교하고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지 못한다고 하면 류목사는 지금 이 설교시간에 사탄에게 속고 있 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전에 먼저 자기자신에 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을 때에 승리하는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가 대들이 은혜를 끼쳐야지 멋있게 노래해야지 하면 이미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 버지 이 아름다운 찬양의 가사가 내 영혼을 지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을 때 하늘의 찬양대가 되는 것입니다. 왜 제자로 삼았나? 그러면 왜 우리 주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우리 주님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제자로 선택했을까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 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 면 좋을 뻔 하였도다" 이런 사람을 왜 제자로 부르셨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영원히 가롯 유다와 같은 비극적인 인물들이 존재할 것이다. 교회 속에서 가라지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가 함께 천국 문에 다다랐 을 때, 함께 신앙생활하는 동료들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뚝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말아라. 알이 차지 못한 겁데기 신앙인들은 언제나 있 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존경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너희들 조금도 놀라지 말아라. 결론 : 결단촉구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가롯 유다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런 분이 있습 니까?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이 시간 회개하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바 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우리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 다. 사탄이 당신을 지배하여 영원히 회개의 문을 닫아 버리기 전에 주님 앞에 돌아오시 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모두가 엄숙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가면을 벗고 우리 자신 에게 솔직해 지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앞에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자기자신을 올바로 발견하십시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 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정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신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지 자기 자신에 게 정직하게 한번 물어 보십시다. 만약, 이 질문을 가롯 유다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했 더라면 그의 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한번이라도 마음 속에 예수가 아니계시다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늘나라 생명 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분명히 확신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확인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경험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시간 예수님께서 피묻은 손으로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 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세상에 구원을 얻을 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 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던 모든 의지를 이 시간에 내려놓으시고 마음의 문을 진실하게 열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심을 활짝 열어 제키고 주님 앞에 드러내었을 때에 예수가 그 안에 아니계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주권 앞에 여러분들이 항복한 경험 이 없다고 한다면 이 시간에 마음의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찾아 오시옵소서. 입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아멘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을 찾아가 다스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국에서 만든 「유다의 얼굴」이라는 T.V. 드라마가 있습니다. 내용은 누 가 가롯유다의 배역을 맡을 것인가? 수많은 배후들을 찾아다니며 가롯유다 배역을 찾는 얘기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극의 마지막은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나와서 크게 한목소리로 외치면서 막이 내려지게 됩니다. 당신도 가 롯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롯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너도 나도 가롯유다가 될 수 있다!" 말씀을 맺으며 오늘 본문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을 맺어 보십시다. 마지막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0절을 여러분 어떻게 기록하시겠습니까? 가롯 유다가 갔던 밤의 길, 멸망의 길, 실패 의 길, 영원한 영원한 지옥의 길을 여러분들이 걸어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은 대낮보다 더 밝은 빛 천성을 향해 가는 길, 때로는 고난이 시련이 아픔이 내 앞을 가로 막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낮의 길 천성의 길을 걸어가시겠 습니까? 오늘 30절을 여러분이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생이 달라지고 영 원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가룟 유다/ 요13:21-30/ 류영모 목사/ 2015-01-07
가룟 유다 요13:21-30 어느 날 개구리 한 마리가 논바닥을 펄쩍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참 뛰다보니 다리가 너무 아파 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독수리 한 마리가 큰 날개를 펴고 너무나 쉽게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지 않겠습니까? \"독수리 선 생 어떻게 하면 나도 하늘을 날 수 있겠소?\" 독수리가 하는 말 \"날개를 달고 높은데서 뛰어 내리면 자동적으로 날게 된다오.\" 개구리가 닭털 두 개를 주워 옆구리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15층 빌딩 꼭대기 향하여 펄쩍거리며 뛰어 올라 가더니 닭털을 허우적거리며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그 이후 이 개구리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선의 날개를 달아도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종교 의 날개를 가지고는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지식이나 철학의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시작되던 초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거듭나지 못했던 한 흉내 신자, 흉내 제자가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니코스카찬차스키의 \"최후의 유혹\"을 각색한 연극 마라나 타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맡은 배역이 가롯 유다였는데 저는 그 맡은 역을 멋지게 소화하려고 노력했고 제법 좋은 연기를 보여 주위의 칭찬을 들은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러나 그 가롯 유다의 역은 멋지게 소화를 하면 할수 록 예수님과는 멀어지고 관중들로부터는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영화든 이런 배역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세상 에서 이런 배역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자신의 삶을 멋지게 소화하면 할 수록 지옥에는 가까워지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이 있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며 비극적인 일이겠습니까? 일찍이 단테는 \"신곡\" 지옥 편에서 가롯 유다가 마왕 루시퍼와 함께 가장 낮은 층의 자리에 앉아 지옥에서 조차 금해진 혹독한 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위대한 성자가 될 기회를 가졌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애석한 사람은 아마도 가롯 유다 일 것입니다. 그는 성자가 될 기회를 악역으로 바꾼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난 이천년동안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의 이름을 가 롯 유다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을 읽어 내려갈 때 가롯 유다와 자기자신을 동일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아브라함을 공부하게 되지요.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입니 다\"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모세를 공부하고 여호수아를 공부합니다. \"여러분 모두 여호수아와 같은 인물이 되십시오\"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가 나와 서 \"우리 모두가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면 \"아멘\"하기가 쉽지 않습니 다. 이에 대해 성서와 비평이라는 위대한 책을 썼던 고트발트라는 신학자는 이 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언제나 나 자신이 가롯 유다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 아니겠 습니까? 그 가롯 유다의 모습 속에서 오늘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 다 유다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중 가장 영예로운 몫을 차지한 유다 지파에서 비 롯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찬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과 구약 의 중간 시대에 유대민족을 구출하기 위해 피흘리며 싸웠던 독립투사 가운데 유다 마카 비우스 가족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그 훨씬 이상으로 저들은 유다 마카비우스를 존경했습니다. 이 만큼 이스라엘 민족들은 유 다라는 이름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엔 유다라는 이름 이 아주 흔했지요. 그런데 가롯 유다가 나타나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 았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이요 직분이었던 사도 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삼년동안이나 같이 살며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가 있습니다. 좋은 이름, 좋은 조건, 내세울게 없습니다. 내가 교 회의 한 구성원이 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가롯 유다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배 는 많은 곳이 부서져 바람부는 대로 떠다니게 되었지요. 여러 날이 지나 음식 과 물이 떨어져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목마름이었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는 배 한척이 있 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에게 물 한통만 건네주시구려. 그때 저쪽에서 들 려온 소리가 \"배 밑에 있는 물을 떠서 마시세요. 여러분들은 이미 강 하구에 도달되어 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를 찾아 헤매다가 강 하구에 도착했지만 아직도 바다에 떠 있는 줄 알고 저들은 목말라 신음하고 있었던 게지요. 물위 에 떠 있으면서 물이 없어 목말라 죽을 뻔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바다에 떠 있어도 내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 구원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은혜로운 공동체에 참여했다 할지라도 그 공동체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 구원의 영광이 나와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무서운 가능성을 인 정하십니까? 예수를 판 이유: 왜? I 영원한 수수께끼이기는 합니다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돈궤를 메고 다니다가 돈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라 왔는데 예수께서 유다 나라 왕이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시자 실망한 나머지 예수님을 배신했다고 말합니다. 또 성경적인 근거는 전혀 없지만 상상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른 제자들은 다 갈릴리 출 신인데 자기만 비갈릴리 가롯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방색의 갈등에서 오는 소외감이 다른 제자들을 향한 질투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마침내 스승까지 파는 범위까지 가 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자는 좀더 극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유다 민족을 독립시킬 아무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면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신비한 능력을 행하게 될 것이고 그 속에 있 는 애국심이 발동되어 민족을 구원하고 나라를 세우는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살리든 그 예수께서 허무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허무감을 견딜 수 없어 목매달아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다음 설득력 있는 또 다른 한 주장이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영특한 사람인지라 세상 돌아가는 대세를 보니 제사장 편에 붙어야 목숨을 부지하게 생겼습니다. 예수가 죽고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죽어도 자기는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를 판 이유: 왜? II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는 이런 지협적이고 외적 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이고도 내면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매일 밤 보자기를 쓴 사나이가 나타나더랍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면 악한 길로 끌고 다닙니다. 나는 멋지게 승리하고 싶은데 실패를 반복하도록 만든 단 말이예요. 그래서 화가 나서 보자기를 확 벗겼더니 보자기 속에서 나타난 얼굴이 바 로 자기자신이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자기자신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롯 유다가 처음에는 예수를 잘 믿다가 나중에 타락했다고.\" 어떤 교단은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교단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 신학 가운데 여러 가지 고귀한 진리들이 있습니다만 \"성도의 견인\" 이라고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한번 내가 하나님의 자녀 관계에 들어가게 되면 이 자녀 관계는 파괴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구세주로 영 접하면 예수의 구원은 실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번씩 타락할 수 있고 교회를 떠날 수 있지만 극단적인 경우 죽음의 자리에서도 예수를 다시 믿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잘 믿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는 아예 처음부터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앙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신앙이 없으면서도 얼마든지 신앙인 행세를 하 면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영혼을 더듬어 보십시오. 정말 나의 신앙 생활 속에 신앙과 정직이 담겨져 있는가? 이 땅에 교회를 떠나고만 교인들이 얼마나 많 습니까? 그들은 배신자들이 아니고 예수를 구세주로 만난 사건과 경험이 없는 비신자들 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행여 오늘 아침에 참석했다고 하면 제로(O) 출발점부터 신 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6장 64절에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이 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느 니라.\" 이 말은 누구를 향한 말씀인지 또 가롯 유다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 백하게 지적하는 성경적인 증언 아니겠습니까? 제자 공동체에 몸을 담았으면서도 예수 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한 비극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 아니라 다만 종교적 환경에 동참했 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종교인과 신앙인은 다릅니다. 교인과 하나님의 자녀는 다릅니다. 한 소망공동체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천국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게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유명한 사건이 기록 된 장입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되는 말씀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 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귀한 봉사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봉사를 우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잔혹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여기서 \"씻는다\"는 단어는 단순히 그런 의미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 우리 영혼이 적셔져서 우리 죄가 씻김 받는 사건, 흘리신 물과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받고 거듭나고 중 생하는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전에 나와서 예수님의 보혈을 거절 하면 예수님 날 찾아온 구원과 중생의 사건을 내가 거절하면 예수와 나와는 아무런 상관 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가롯 유다는 구원받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종교적인 형식만 가졌지 그 내 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사탄이 침투하여 자리를 잡게되는 것입니다. 마치 빈 집에 일곱 귀신이 들어오듯이 말입니다. 소제해 두었어요. 품위가 있어요. 그러나 주인이 없습니다. 양복입고 그럴듯하게 예배드려요. 직분도 있어요. 그리고 착하다고 도 얘기해요. 때로는 칭찬도 들어요. 법없어도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 어요. 그런데 그 속에 예수가 아니계세요. 내 마음 중심 자리에 하나님이 아니계세요. 이런 사람들은 사탄이 침투하기가 좋은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이 사실을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 2절 말씀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 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그냥 지나치는 생각하나 이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생각 하나가 가롯 유다의 마음을 찾아왔습니다. 이 생각은 누 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요. 그러나 가롯 유다의 마음속에는 이 생각을 물리쳐 줄 예수 의 영이 아니계셨습니다. 오히려 이 사탄의 공격 앞에 자기 마음의 문을 계속 열고 있 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이었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실패감을 불어넣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 줍니다. 두려운 마음을 심어줍니다. 미움과 갈등과 원망을 심어줍니다. 사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마음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성령은 밝고 건강한 생각, 거룩한 마음, 사랑과 친절의 마음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주시 는 것입니다. 성령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귀한 마음들이 우리를 찾아 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을 어떻게 관리하며 사십니까? 우리는 이 생각관리에 실패하기 시작할 때 사탄에게 내 존재 자체를 내어 줄 수 있다는 심각한 비극을 우리는 가롯 유다의 사건 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가 왜 예수님을 팔았는가? 첫째 그는 아예 불신자였기 때문에. 둘째 예수가 지배 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사탄을 향하여 열려져 있었기 때문에. 하여 13장 2절의 말씀은 본문 27절로 연결이 됩니다.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 에 들어간지라\" 이 떡을 받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 떡을 가롯 유다에 게 떼어 주셨을 때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절호의 찬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하는 가장 못된 일, 사역 가운데 하나가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탄을 향하여 내 심령이 내 영혼이 끌려가 기 시작하면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가 안되는 겁니다.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해 지고 마 는 것입니다. 이것보세요. 처음에는 \"예수님을 팔아 버릴까\"라는 생각 정도로 사탄은 생각만 집어 넣었습니다. 그 다음에 유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이 사탄의 생각을 수용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 나중에는 생각만 집어 넣은 것이 아니라 유다의 마음속에 사탄이 통째로 들어 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생각을 집어넣고 나중에는 사탄이 들어갑니다. 아예 그 마음속 에 사탄이 들어가서 가롯 유다를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하는 비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 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를 팔 자는 비롯 가롯 유다 뿐만아니라 당시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모두들 가운데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자들은 서로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그랬습니다. 정말 보기 흉한 광경 이지요. 이럴 때 일수록 혹시 내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그런 비극적인 인물은 아닙니 까? 하나님 날 살려주십시오. 주님께 매달렸어야 옳았습니다. 정히 자신감이 있었다고 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런 놈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물었어야 옳았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판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말씀 을 자신의 말씀으로 받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산상교훈을 비롯하여 매일같이 제자들에게 설교하셨고 교 훈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과 자기 자신을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는 데에 가롯 유다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쳐줄 때 저기 불쌍한 사람이 있구나 하고 쳐다보고 있었던 게지 요. 아니요. 주님 내가 영적인 소경입니다. 신령한 세계가 안보입니다. 영안을 열어 주세요. 엎드려 기도했어야 옳았지요. 나병환자를 고쳐줄 때에 내 영혼을 썩어 문들어 지게 만드는 내 심령 속에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나병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고백했어야 옳았어야 했지 않습니까? 주님 내 영혼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주님 나를 살려 주십시 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 병을 예수님의 발에 부을 때 저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주님 나는 무 엇을 깰까요. 내가 죽님을 위하여 깨야될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님께 물었어야 옳았지요.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이완되어 축 늘어진 모 습을 바라보며 주여 내 손과 발목에 힘을 주시옵소서 기도했어야 옳았을 것 아니었습니 까? 한국교회에 전해오는 고전적인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자부는 열심히 예수를 믿었고 시어머니는 뒤늦게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더랍 니다. 그래서 자부가 시어머니에게 세례공부를 부지런히 시켰지요 . 이것저것 가르치다가 \"어머니, 목사님께서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물 으면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해야돼요.\" 그래서 목사님께서 이것저것 묻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물었더니 \"아이고 그거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며느리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하더랍니다. 이 설교 우리 며느리 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남편 들었으면 좋겠다가 아니고 여기 불려 지는 찬송가 가사 하나가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셔야 됩니다. 이 강단에 서 선포되어지는 말씀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질 때 그 귀가 복받은 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그 말씀이 아이들에게만 주는 말씀으로 끝 나면 속고 있는 것입니다. 류목사가 지금 여기 설교하지만 우리 교인들에게나 설교하고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지 못한다고 하면 류목사는 지금 이 설교시간에 사탄에게 속고 있 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전에 먼저 자기자신에 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을 때에 승리하는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가 대들이 은혜를 끼쳐야지 멋있게 노래해야지 하면 이미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 버지 이 아름다운 찬양의 가사가 내 영혼을 지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을 때 하늘의 찬양대가 되는 것입니다. 왜 제자로 삼았나? 그러면 왜 우리 주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우리 주님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제자로 선택했을까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 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 면 좋을 뻔 하였도다\" 이런 사람을 왜 제자로 부르셨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영원히 가롯 유다와 같은 비극적인 인물들이 존재할 것이다. 교회 속에서 가라지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가 함께 천국 문에 다다랐 을 때, 함께 신앙생활하는 동료들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뚝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말아라. 알이 차지 못한 겁데기 신앙인들은 언제나 있 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존경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너희들 조금도 놀라지 말아라. 결론 : 결단촉구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가롯 유다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런 분이 있습 니까?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이 시간 회개하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바 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우리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 다. 사탄이 당신을 지배하여 영원히 회개의 문을 닫아 버리기 전에 주님 앞에 돌아오시 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모두가 엄숙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가면을 벗고 우리 자신 에게 솔직해 지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앞에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자기자신을 올바로 발견하십시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 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정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신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지 자기 자신에 게 정직하게 한번 물어 보십시다. 만약, 이 질문을 가롯 유다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했 더라면 그의 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한번이라도 마음 속에 예수가 아니계시다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늘나라 생명 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분명히 확신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확인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경험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시간 예수님께서 피묻은 손으로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 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세상에 구원을 얻을 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 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던 모든 의지를 이 시간에 내려놓으시고 마음의 문을 진실하게 열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심을 활짝 열어 제키고 주님 앞에 드러내었을 때에 예수가 그 안에 아니계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주권 앞에 여러분들이 항복한 경험 이 없다고 한다면 이 시간에 마음의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찾아 오시옵소서. 입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아멘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을 찾아가 다스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국에서 만든 「유다의 얼굴」이라는 T.V. 드라마가 있습니다. 내용은 누 가 가롯유다의 배역을 맡을 것인가? 수많은 배후들을 찾아다니며 가롯유다 배역을 찾는 얘기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극의 마지막은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나와서 크게 한목소리로 외치면서 막이 내려지게 됩니다. 당신도 가 롯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롯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롯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너도 나도 가롯유다가 될 수 있다!\" 말씀을 맺으며 오늘 본문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을 맺어 보십시다. 마지막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0절을 여러분 어떻게 기록하시겠습니까? 가롯 유다가 갔던 밤의 길, 멸망의 길, 실패 의 길, 영원한 영원한 지옥의 길을 여러분들이 걸어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은 대낮보다 더 밝은 빛 천성을 향해 가는 길, 때로는 고난이 시련이 아픔이 내 앞을 가로 막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낮의 길 천성의 길을 걸어가시겠 습니까? 오늘 30절을 여러분이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생이 달라지고 영 원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가룟유다/ 요13:21-30/ 류영모 목사/ 2016-03-06
가룟 유다 요13:21-30 말씀을 향하여 어느 날 개구리 한 마리가 논바닥을 펄쩍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참 뛰다보니 다리가 너무 아파 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독수리 한 마리가 큰 날개를 펴고 너무나 쉽게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지 않겠습니까? “독수리 선생, 어떻게 하면 나도 하늘을 날 수 있겠소?” 독수리가 하는 말 “날개를 달고 높은 데서 뛰어 내리면 자동적으로 날게 된다오.” 개구리가 닭털 두 개를 주워 옆구리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15층 빌딩 꼭대기 향하여 펄쩍거리며 뛰어 올라 가더니 닭털을 허우적거리며 빌딩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그 이후 이 개구리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흉내 낸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선의 날개를 달아도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종교의 날개를 가지고는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지식이나 철학의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시작되던 초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거듭나지 못했던 한 흉내 신자, 흉내 제자가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니코스카찬차스키의 “최후의 유혹”을 각색한 연극 마라나 타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맡은 배역이 가룟 유다였는데 저는 그 맡은 역을 멋지게 소화하려고 노력했고 제법 좋은 연기를 보여 주위의 칭찬을 들은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러나 그 가룟 유다의 역은 멋지게 소화를 하면 할수록 예수님과는 멀어지고 관중들로부터는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영화든 이런 배역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세상 에서 이런 배역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자신의 삶을 멋지게 소화하면 할수록 지옥에는 가까워지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이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며 비극적인 일이겠습니까? 일찍이 단테는 “신곡” 지옥 편에서 가룟 유다가 마왕 루시퍼와 함께 가장 낮은 층의 자리에 앉아 지옥에서조차 금해진 혹독한 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위대한 성자가 될 기회를 가졌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애석한 사람은 아마도 가룟 유다일 것입니다. 그는 성자가 될 기회를 악역으로 바꾼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난 이천년 동안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의 이름을 가 롯 유다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을 읽어 내려갈 때 가룟 유다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아브라함을 공부하게 되지요.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모세를 공부하고 여호수아를 공부합니다. “여러분 모두 여호수아와 같은 인물이 되십시오” 그러면 “아멘” 그럽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나와서 “우리 모두가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면 “아멘”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성서와 비평이라는 위대한 책을 썼던 고트발트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언제나 나 자신이 가룟 유다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 가룟 유다의 모습 속에서 오늘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 다 유다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영예로운 몫을 차지한 유다 지파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찬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과 구약의 중간 시대에 유대민족을 구출하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독립투사 가운데 유다 마카비우스 가족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그 훨씬 이상으로 저들은 유다 마카비우스를 존경했습니다. 이 만큼 이스라엘 민족들은 유다라는 이름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엔 유다라는 이름이 아주 흔했지요. 그런데 가룟 유다가 나타나 이처럼 아름다운 이름에 먹칠을 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이요 직분이었던 사도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삼 년 동안이나 같이 살며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가 있습니다. 좋은 이름, 좋은 조건, 내세울 게 없습니다. 내가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가룟 유다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배는 많은 곳이 부서져 바람 부는 대로 떠다니게 되었지요. 여러 날이 지나 음식과 물이 떨어져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목마름이었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는 배 한척이 있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에게 물 한통만 건네주시구려. 그때 저쪽에서 들려온 소리가 “배 밑에 있는 물을 떠서 마시세요. 여러분들은 이미 강 하구에 도달되어 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를 찾아 헤매다가 강 하구에 도착했지만 아직도 바다에 떠 있는 줄 알고 저들은 목말라 신음하고 있었던 게지요. 물 위에 떠 있으면서 물이 없어 목말라 죽을 뻔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바다에 떠 있어도 내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 구원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은혜로운 공동체에 참여했다 할지라도 그 공동체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 구원의 영광이 나와 상관이 없을 수 있다는 무서운 가능성을 인정하십니까? 예수를 판 이유: 왜? I 영원한 수수께끼이기는 합니다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돈궤를 메고 다니다가 돈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라 왔는데 예수께서 유다 나라 왕이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시자 실망한 나머지 예수님을 배신했다고 말합니다. 또 성경적인 근거는 전혀 없지만 상상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른 제자들은 다 갈릴리 출신인데 자기만 비갈릴리 가룟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방색의 갈등에서 오는 소외감이 다른 제자들을 향한 질투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마침내 스승까지 파는 범위까지 가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자는 좀 더 극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인데 유다 민족을 독립시킬 아무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면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신비한 능력을 행하게 될 것이고 그 속에 있는 애국심이 발동되어 민족을 구원하고 나라를 세우는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살리든 그 예수께서 허무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허무감을 견딜 수 없어 목매달아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다음 설득력 있는 또 다른 한 주장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영특한 사람인지라 세상 돌아가는 대세를 보니 제사장 편에 붙어야 목숨을 부지하게 생겼습니다. 예수가 죽고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죽어도 자기는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를 판 이유: 왜? II 그러나 성경을 깊이 연구해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는 이런 지엽적적이고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이고도 내면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매일 밤 보자기를 쓴 사나이가 나타나더랍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면 악한 길로 끌고 다닙니다. 나는 멋지게 승리하고 싶은데 실패를 반복하도록 만든단 말이에요. 그래서 화가 나서 보자기를 확 벗겼더니 보자기 속에서 나타난 얼굴이 바로 자기 자신이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자기 자신입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에는 예수를 잘 믿다가 나중에 타락했다고.” 어떤 교단은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교단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 신학 가운데 여러 가지 고귀한 진리들이 있습니다만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한번 내가 하나님의 자녀 관계에 들어가게 되면 이 자녀 관계는 파괴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진실하게 구세주로 영접하면 예수의 구원은 실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번씩 타락할 수 있고 교회를 떠날 수 있지만 극단적인 경우 죽음의 자리에서도 예수를 다시 믿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잘 믿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는 아예 처음부터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앙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신앙이 없으면서도 얼마든지 신앙인 행세를 하면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영혼을 더듬어 보십시오. 정말 나의 신앙생활 속에 신앙과 정직이 담겨져 있는가? 이 땅에 교회를 떠나고만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배신자들이 아니고 예수를 구세주로 만난 사건과 경험이 없는 비신자들 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행여 오늘 아침에 참석했다고 하면 제로(O) 출발점부터 신앙생활을 새롭게 시작해야 됩니다. 요한복음 6장 64절에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이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느니라.” 이 말은 누구를 향한 말씀인지 또 가룟 유다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지적하는 성경적인 증언 아니겠습니까? 제자 공동체에 몸을 담았으면서도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한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한 비극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 아니라 다만 종교적 환경에 동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종교인과 신앙인은 다릅니다. 교인과 하나님의 자녀는 다릅니다. 한 소망공동체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천국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유명한 사건이 기록 된 장입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 되는 말씀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귀한 봉사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봉사를 우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잔혹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여기서 “씻는다”는 단어는 단순히 그런 의미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 우리 영혼이 적셔져서 우리 죄가 씻김 받는 사건, 흘리신 물과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고 거듭나고 중생하는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전에 나와서 예수님의 보혈을 거절 하면 예수님 날 찾아온 구원과 중생의 사건을 내가 거절하면 예수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가룟 유다는 구원받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종교적인 형식만 가졌지 그 내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사탄이 침투하여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빈 집에 일곱 귀신이 들어오듯이 말입니다. 소제해 두었어요. 품위가 있어요. 그러나 주인이 없습니다. 양복입고 그럴듯하게 예배드려요. 직분도 있어요. 그리고 착하다고도 얘기해요. 때로는 칭찬도 들어요. 법 없어도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 속에 예수가 안 계세요. 내 마음 중심 자리에 하나님이 안 계세요. 이런 사람들은 사탄이 침투하기가 좋은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이 사실을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 2절 말씀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그냥 지나치는 생각하나 이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생각 하나가 가룟 유다의 마음을 찾아왔습니다. 이 생각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요. 그러나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는 이 생각을 물리쳐 줄 예수의 영이 안 계셨습니다. 오히려 이 사탄의 공격 앞에 자기 마음의 문을 계속 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이었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 가운데 실패감을 불어넣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넣어 줍니다. 두려운 마음을 심어줍니다. 미움과 갈등과 원망을 심어줍니다. 사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마음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성령은 밝고 건강한 생각, 거룩한 마음, 사랑과 친절의 마음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면 이런 귀한 마음들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각을 어떻게 관리하며 사십니까? 우리는 이 생각관리에 실패하기 시작할 때 사탄에게 내 존재 자체를 내어 줄 수 있다는 심각한 비극을 우리는 가룟 유다의 사건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가 왜 예수님을 팔았는가? 첫째 그는 아예 불신자였기 때문에. 둘째 예수가 지배 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사탄을 향하여 열려져 있었기 때문에. 하여 13장 2절의 말씀은 본문 27절로 연결이 됩니다.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 속 에 들어간지라” 이 떡을 받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 떡을 가룟 유다에 게 떼어 주셨을 때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절호의 찬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하는 가장 못된 일, 사역 가운데 하나가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탄을 향하여 내 심령이 내 영혼이 끌려가 기 시작하면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가 안 되는 겁니다.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해 지고 마 는 것입니다. 이것보세요. 처음에는 “예수님을 팔아 버릴까”라는 생각 정도로 사탄은 생각만 집어넣었습니다. 그 다음에 유다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이 사탄의 생각을 수용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 나중에는 생각만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유다의 마음속에 사탄이 통째로 들어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생각을 집어넣고 나중에는 사탄이 들어갑니다. 아예 그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가서 가룟 유다를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하는 비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예수를 팔 자는 비롯 가룟 유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들 가운데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도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서로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그랬습니다. 정말 보기 흉한 광경 이지요. 이럴 때 일수록 혹시 내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그런 비극적인 인물은 아닙니까? 하나님 날 살려주십시오. 주님께 매달렸어야 옳았습니다. 정히 자신감이 있었다고 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런 놈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물었어야 옳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세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말씀으로 받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산상교훈을 비롯하여 매일같이 제자들에게 설교하셨고 교훈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과 자기 자신을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는 데에 가룟 유다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쳐줄 때 저기 불쌍한 사람이 있구나 하고 쳐다보고 있었던 게지요. 아니요. 주님 내가 영적인 소경입니다. 신령한 세계가 안 보입니다. 영안을 열어 주세요. 엎드려 기도했어야 옳았지요. 나병환자를 고쳐줄 때에 내 영혼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드는 내 심령 속에 냄새를 풍기고 있는 나병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고백했어야 옳았어야 했지 않습니까? 주님 내 영혼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주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향유 병을 예수님의 발에 부을 때 저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주님 나는 무엇을 깰까요. 내가 죽님을 위하여 깨야 될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주님께 물었어야 옳았지요.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을 때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이완되어 축 늘어진 모 습을 바라보며 주여 내 손과 발목에 힘을 주시옵소서 기도했어야 옳았을 것 아니었습니까? 한국교회에 전해오는 고전적인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자부는 열심히 예수를 믿었고 시어머니는 뒤늦게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더랍니다. 그래서 자부가 시어머니에게 세례공부를 부지런히 시켰지요. 이것저것 가르치다가 “어머니, 목사님께서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물으면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해야 돼요.” 그래서 목사님께서 이것저것 묻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까?” 물었더니 “아이고 그거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며느리 때문에 돌아가셨지요” 하더랍니다. ‘이 설교 우리 며느리 들었으면 좋겠다’ ‘우리 남편 들었으면 좋겠다’가 아니고 여기 불려지는 찬송가 가사 하나가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셔야 됩니다. 이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질 때 그 귀가 복 받은 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그 말씀이 아이들에게만 주는 말씀으로 끝나면 속고 있는 것입니다. 류 목사가 지금 여기 설교하지만 우리 교인들에게나 설교하고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지 못한다고 하면 류 목사는 지금 이 설교시간에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 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을 때에 승리하는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가대들이 은혜를 끼쳐야지 멋있게 노래해야지 하면 이미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름다운 찬양의 가사가 내 영혼을 지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을 때 하늘의 찬양대가 되는 것입니다. 왜 제자로 삼았나? 그러면 왜 우리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우리 주님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제자로 선택했을까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도다” 이런 사람을 왜 제자로 부르셨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영원히 가룟 유다와 같은 비극적인 인물들이 존재할 것이다. 교회 속에서 가라지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가 함께 천국 문에 다다랐을 때, 함께 신앙생활 하는 동료들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뚝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마라. 알이 차지 못한 껍데기 신앙인들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존경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너희들 조금도 놀라지 마라. 결론 : 결단촉구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런 분이 있습니까?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이 시간 회개하고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바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당신을 지배하여 영원히 회개의 문을 닫아 버리기 전에 주님 앞에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엄숙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가면을 벗고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지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 앞에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올바로 발견하십시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정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계신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한번 물어 보십시다. 만약, 이 질문을 가룟 유다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했더라면 그의 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한번이라도 마음속에 예수가 안 계시다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늘나라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분명히 확신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확인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경험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시간 예수님께서 피 묻은 손으로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세상에 구원을 얻을 만 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던 모든 의지를 이 시간에 내려놓으시고 마음의 문을 진실하게 열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심을 활짝 열어 제키고 주님 앞에 드러내었을 때에 예수가 그 안에 안 계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주권 앞에 여러분들이 항복한 경험이 없다고 한다면 이 시간에 마음의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찾아오시옵소서. 입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아멘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을 찾아가 다스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국에서 만든 「유다의 얼굴」이라는 T.V. 드라마가 있습니다. 내용은 누가 가룟 유다의 배역을 맡을 것인가? 수많은 배후들을 찾아다니며 가룟 유다 배역을 찾는 얘기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극의 마지막은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나와서 크게 한 목소리로 외치면서 막이 내려지게 됩니다. 당신도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너도 나도 가룟 유다가 될 수 있다!” 말씀을 맺으며 오늘 본문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말씀을 맺어 보십시다. 마지막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0절을 여러분 어떻게 기록하시겠습니까? 가룟 유다가 갔던 밤의 길, 멸망의 길, 실패 의 길, 영원한 지옥의 길을 여러분들이 걸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은 대낮보다 더 밝은 빛 천성을 향해 가는 길, 때로는 고난이 시련이 아픔이 내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낮의 길 천성의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오늘 30절을 여러분이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생이 달라지고 영원히 달라질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일산 한사랑교회)
가시 면류관 /마27:27-31/ 류영모목사
가시 면류관 /마27:27-31/ 류영모목사 2015-01-06 00:31:22 I. 말씀을 향하여 근간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가적인 사태를 바라보면서 뜻있는 사람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의 주장들이 극단으로 치닫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국민간 편가르기는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남북 동서간의 분열도 모자라 세대간의 분열과 보수진보간의 극한 분열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가시를 온유함으로 품은 예수님의 성품이 그리운 때입니다. 이럴때 일수록 서로가 가시돋힌 언어들을 자제하고 잠시 침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왜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여당도 야당도, 청와대도 국회도 서로 상처를 주는 가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시에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고 온국민도 찔렸습니다. 서로 아프다고만 합니다. 찌른 놈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저주의 가시관을 구원의 면류관으로, 상처의 가시관을 치유의 면류관으로 패배의 가시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셨습니다. 때문에 이 시간 \"가시 면류관\"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마는 지금은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 절기입니다. 일찍이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나르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빼고 설교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챨스 스펄젼은 그의 임종시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나의 평생의 설교와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저도 설교를 하는 목사로서 한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복음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닌게며, 예수의 보혈이 없는 설교는 설교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설교를 하려면 못내 자신감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설교만큼은 하면 할수록 내게는 무한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II. 당하신 고난의 의미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예수께서 로마 군병들로부터 희롱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한 성서학자는 \"이 희롱의 순간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심리적으로는 더 아프고 힘든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을 총독의 관저로 끌고 들어갑니다. 거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님을 부서진 의자에 앉혀놓고 옷을 벗기고 낡은 홍포를 입힙니다. 머리에는 지독한 가시, 팔레스타인 아카시아 나무와 싯딤나무 그리고 잔가시가 많은 스피나 크리스티 나무를 엮어 만든 관을 씌우고 손에는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끓고 \"유대인의 왕 만세\"를 떠들며 조롱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그 조롱은 비열하고 또 한편 잔인했습니다. 이들의 희롱은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엔 깊은 계시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그 한토막도 의미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1.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감은 창세기 3장 선악과를 따먹은 죄와 더불어 왔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며 곧 모멸입니다. 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감추시기 위해, 벌거벗기움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② 주님께서는 내가 당할 수치와 창피를 덮으시기 위해 당신이 친히 수치를 감당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당신의 옷이 벗겨지시므로 장차 우리가 입게 될 흰옷 - 영광의 옷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④ 옷을 벗기움 당했다고 하는 것은 신분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여주시기 위하여 잠시나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을 만왕의 왕되신 신분을 박탈당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홍포를 입으셨습니다. 곧 자색 옷입니다. 이는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옷입니다. 예수님의 홍포는 왕의 홍포가 아니라 죄인의 홍포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1:18). 예수님께서는 주홍도포에 진홍 피를 흘려 주홍같고 진홍같은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죄의 무거운 짐으로 괴로워하며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정죄의식에 시달리시는 분 계십니까? 영혼의 진통을 안고 이곳까지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주님 앞으로 달려오십시요. 당신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눈처럼 깨끗케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채찍을 맞았습니다. 십자가 형을 지는 죄인은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납과 못, 짐승의 뼈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을 맞았습니다.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몸이 약한 죄수들은 채찍을 맞는 중에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잔인한 망나니를 만나면 물 묻은 가죽 채찍을 옆구리 쪽으로 휘감아 내리쳤고 그러면 창자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엎드려 채찍을 맞으면 등에 고랑이 패여 피 고랑을 만든다 라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바로 이 말씀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 류영모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김집사 이권사 당신이 나음을 얻었도다. 아멘! 4. 그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워 주었습니다.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놀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반드시 그들을 아니 모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그분을 재판하던 재판관들도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조롱하던 자들도 그를 찌른자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도, 나도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5. 또한 예수님의 머리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금 면류관 대신 우리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이 시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슴 졸이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받으며 조롱받으며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침 뱉음을 당하신 그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습니까? ① 천군 천사들이 흠모하는 얼굴이 아닙니까? ②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으나 결국은 보지를 못했던 그 영광스러운 얼굴이 아니었습니까? ③ 모든 나라와 권세가 경배하고 천사들이 수중들던 왕중의 왕이 아니셨습니까? ④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그 얼굴에 야만인들의 침이 튀겨야 했더란 말입니까? III. 가시 면류관 이 수없는 고난의 모습 가운데서도 오늘 아침 우리는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쪽박도 왕이 쓰면 왕의 밥그릇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 거기엔 크고도 분명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므로 저주의 면류관이 속죄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부귀, 영화, 존귀를 자랑합니다. 그 대신 저주와 고통과 아픔을 백성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왕 -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저주의 관을 쓰시고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백성들에겐 구원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갈3:13)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저주를 받은바 되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저주가 되었다\" \"저주 덩어리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내려진 저주요 우리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는 어떤 것입니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5-19) 이것이 율법의 저주입니다. 이 저주의 가시관이 우리 주님 머리에 씌워졌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박힌 이 가시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까? 이 가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표징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18).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가시는 인간의 영혼을 짓밟고 말았습니다. 여기 가시 면류관은 곧 저주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가시관을 쓰시므로 이제부터 이것은 속죄의 면류관, 구속의 면류관, 용서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아픈 가시관을 쓰셨고 내게는 속죄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저주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용서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고통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사랑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2. 주님의 머리에 상처를 주던 그 면류관이 이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은 크고 작고 굵고 가는 가시로 만들어져 그것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병정들이 막대기로 면류관을 내리치자 가시들은 더 깊숙이 찔러 들어갔습니다. 바로 주님을 찌른 이 가시가 우리를 치료하는 가시가 될 줄이야. 당신의 크고 작은 상처, 나의 굵고 아픈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아무리 큰 상처도 혼자 움켜쥐고 있지 마십시요. 주님 앞에 상처를 드러내십시오. 우리 주님, 그 상처를 지금 이 시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피 묻은 손으로, 못 자국난 손으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정에도 직장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가시가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경험, 지울 수 없는 쓴뿌리의 아픈 상처들, 용서받지 못했다는 정죄의식들이 가시가 되어 매일같이 나를 찌릅니다. 사랑의 상처, 배신의 상처, 말 한마디, 눈짓 한번도 가시가 되어 서로를 찔러 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상처를 받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가도 목회를 하다가도 가시에 찔려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일을 하다가도 찔릴 수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불만과 근심, 내적갈등도 가시가 되어 내영혼과 마음을 찔러 피나게 합니다. 인간들은 저마다 가시에 찔린 상처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너 혼자 아픈 것 아닙니다.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습니다.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모두가 상처투성이, 이게 세상사요 인간사 아니었습니까? 이 상처들은 어떻게 고침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우리의 찢기고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흘리신 예수의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가 가시에 찔림으로 우리의 아픔을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 주님께 위로가 있고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울며 도망가려 하지 마십시오. 울며 울며 달려나와 주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구세주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영원한 승리의 보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예수님 머리에 상처를 준 가시는 신비의 수술도구와 명약이 되어서 인생의 상처를 치료한다\"라고 했습니다. 치료하시는 그 주님 앞으로 나아 오십시다! 오 예수님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주님 손과 발 못 박혔고 머리엔 가시관 박히셨네 내 모든 죄와 허물 위해 말없이 피 흘려 주셨네 오 예수님 나의 손 잡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3. 가시 면류관이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죽으셨습니다. 마치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찌르고 도전해 오는 고난이 반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가 오는 것을 막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가시를 허락하신 분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엮도록 하신 것입니다. 은혜의 동산에 가면 그룹별로 이름을 짓습니다. 저는 아가페 TD 1기를 경험했는데 저희반 이름이 쓰레기통입니다. 언젠가 엿장수방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쓰레기통과도 같으신 분이라는 거지요. 우리의 저주, 근심, 걱정, 문제의 쓰레기들을 하나님께 가져가면 하나님은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다 받아 주시고 맡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엿장수 같으신 분이라는 거지요. 옛날엔 떨어진 고무신, 찌그러진 양재기, 심지어 머리카락 짜른 것들을 가져가면 엿장수 아저씨는 울릉도 호박엿을 뚝뚝 짤라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물을 호박엿으로 바꿔 주시듯 예수님은 저주의 면류관, 실패의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엿장수 같은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고물과 폐품 쓰레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무거운 죄 보따리 한숨 고통 눈물을 그 어떤 예물보다 귀하게 받으셔서 용서 자유 기쁨 행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고통, 눈물, 근심보따리를 십자가 앞으로 가지고 오길 원하십니다. 주위에는 자신의 고통과 죄와 한숨을 그냥 담아두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따리째 그걸 주님께 가져가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IV. 우리도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자 오늘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시가 괴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바라보고 그 가시로 승리의 면류관을 함께 엮어 가십시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은 이름 그대로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성경에서 종종 성도의 모델로 제시되는 사도 바울은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 불렀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 육체의 가시를 칼빈은 \"영적인 갈등\"이라고 했고 루터는 \"바울이 받았던 핍박\", 토마스 아퀴나스는 \"독신생활에서 오는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했습니다. 또 터툴리안은 \"이유없는 두통\" 혹자들은 \"외모에서 오는 콤플렉스\" 혹은 \"안질\"이었다고 말하며, 라이트 후프 같은 이는 \"간질병\"이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 괴로워 세 번씩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가시의 고통을 받으면 모르겠거니와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바쳐 헌신한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지 왜 이런 가시의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가 부귀영화 만사형통은 없다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그가 육체의 가시를 지녔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허락한 모든 은혜가 천국의 면류관이 되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도다.\" 그가 이 땅에서의 보상을 기대했더라면 그는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땅의 보상보다 하늘의 면류관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다음의 영광스런 부활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어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십니까? 그 십자가가 너무나 무겁습니까? 당신의 면류관도 그만큼 더 클 것입니다. 어느 구두회사의 사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고급 구두일수록 더 많이 두들겨 맞는다.\" 다이아 몬드도 cutting이 많이 된 것일수록 더욱 빛나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본 차이나는 뼈를 부서뜨려서 분가루처럼 고운 가루를 만든 다음에야 귀한 도자기가 됩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귀한 그릇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크게 쓰시려고 강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모세를 귀하게 쓰시려고 완전 밑바닥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다윗을 고귀한 인물로 쓰시려고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바울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드시려고 육체의 가시까지 주신 것입니다. V. 맺으며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여러분! 지금 당신의 가시가 무엇입니까? 그 가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봅니다. 주님을 붙잡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봅니다. ·당신이 고난의 가시에 찔려 울고 있을때 주님은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나도 통곡하고 울었다\" ·당신이 가난하고 배가 고플때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40일을 금식했다.\" ·입을 것 없어 부끄러울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발가벗기움을 당했다.\" ·당신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죄없는 나도 흉악범으로 취급 받았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 쓰러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상처난 어깨로 십자가를 졌느니라.\" 여러분, 주님 날 위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위해 가시 면류관 기쁨으로 쓰고 가십시다. 우리 주님 내 삶의 아픈 가시를 바꾸어 구속의 면류관, 치유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삼아 주십니다. 금세기 위대한 신학자였던 Bowman 박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선교할 때 한 노파가 길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과 한 동네의 친구였던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이 노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가 믿는 힌두교의 많은 남신과 여신들로 만족할 수 없었는가?\" 노인은 대답합니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심판대의 변호사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가시 면류관 /마27:27-31/ 류영모목사 2015-01-06 00:31:22 read : 12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말씀을 향하여 근간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가적인 사태를 바라보면서 뜻있는 사람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의 주장들
가시 면류관 /마27:27-31/ 류영모목사 2015-01-06 00:31:22 read : 12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말씀을 향하여 근간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가적인 사태를 바라보면서 뜻있는 사람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에 대한 찬반의 주장들이 극단으로 치닫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국민간 편가르기는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남북 동서간의 분열도 모자라 세대간의 분열과 보수진보간의 극한 분열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가시를 온유함으로 품은 예수님의 성품이 그리운 때입니다. 이럴때 일수록 서로가 가시돋힌 언어들을 자제하고 잠시 침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왜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여당도 야당도, 청와대도 국회도 서로 상처를 주는 가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시에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고 온국민도 찔렸습니다. 서로 아프다고만 합니다. 찌른 놈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저주의 가시관을 구원의 면류관으로, 상처의 가시관을 치유의 면류관으로 패배의 가시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셨습니다. 때문에 이 시간 "가시 면류관"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마는 지금은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 절기입니다. 일찍이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나르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빼고 설교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챨스 스펄젼은 그의 임종시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나의 평생의 설교와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저도 설교를 하는 목사로서 한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복음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닌게며, 예수의 보혈이 없는 설교는 설교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설교를 하려면 못내 자신감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설교만큼은 하면 할수록 내게는 무한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II. 당하신 고난의 의미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예수께서 로마 군병들로부터 희롱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한 성서학자는 "이 희롱의 순간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심리적으로는 더 아프고 힘든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을 총독의 관저로 끌고 들어갑니다. 거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님을 부서진 의자에 앉혀놓고 옷을 벗기고 낡은 홍포를 입힙니다. 머리에는 지독한 가시, 팔레스타인 아카시아 나무와 싯딤나무 그리고 잔가시가 많은 스피나 크리스티 나무를 엮어 만든 관을 씌우고 손에는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끓고 "유대인의 왕 만세"를 떠들며 조롱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그 조롱은 비열하고 또 한편 잔인했습니다. 이들의 희롱은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엔 깊은 계시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그 한토막도 의미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1.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감은 창세기 3장 선악과를 따먹은 죄와 더불어 왔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며 곧 모멸입니다. 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감추시기 위해, 벌거벗기움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② 주님께서는 내가 당할 수치와 창피를 덮으시기 위해 당신이 친히 수치를 감당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당신의 옷이 벗겨지시므로 장차 우리가 입게 될 흰옷 - 영광의 옷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④ 옷을 벗기움 당했다고 하는 것은 신분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여주시기 위하여 잠시나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을 만왕의 왕되신 신분을 박탈당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홍포를 입으셨습니다. 곧 자색 옷입니다. 이는 왕들이나 황제가 입었던 옷입니다. 예수님의 홍포는 왕의 홍포가 아니라 죄인의 홍포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1:18). 예수님께서는 주홍도포에 진홍 피를 흘려 주홍같고 진홍같은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죄의 무거운 짐으로 괴로워하며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정죄의식에 시달리시는 분 계십니까? 영혼의 진통을 안고 이곳까지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주님 앞으로 달려오십시요. 당신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눈처럼 깨끗케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채찍을 맞았습니다. 십자가 형을 지는 죄인은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납과 못, 짐승의 뼈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을 맞았습니다.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몸이 약한 죄수들은 채찍을 맞는 중에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잔인한 망나니를 만나면 물 묻은 가죽 채찍을 옆구리 쪽으로 휘감아 내리쳤고 그러면 창자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엎드려 채찍을 맞으면 등에 고랑이 패여 피 고랑을 만든다 라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바로 이 말씀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 류영모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김집사 이권사 당신이 나음을 얻었도다. 아멘! 4. 그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워 주었습니다.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놀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반드시 그들을 아니 모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그분을 재판하던 재판관들도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조롱하던 자들도 그를 찌른자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도, 나도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5. 또한 예수님의 머리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금 면류관 대신 우리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이 시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슴 졸이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받으며 조롱받으며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침 뱉음을 당하신 그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습니까? ① 천군 천사들이 흠모하는 얼굴이 아닙니까? ②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으나 결국은 보지를 못했던 그 영광스러운 얼굴이 아니었습니까? ③ 모든 나라와 권세가 경배하고 천사들이 수중들던 왕중의 왕이 아니셨습니까? ④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그 얼굴에 야만인들의 침이 튀겨야 했더란 말입니까? III. 가시 면류관 이 수없는 고난의 모습 가운데서도 오늘 아침 우리는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쪽박도 왕이 쓰면 왕의 밥그릇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 거기엔 크고도 분명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므로 저주의 면류관이 속죄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부귀, 영화, 존귀를 자랑합니다. 그 대신 저주와 고통과 아픔을 백성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왕 -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저주의 관을 쓰시고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백성들에겐 구원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갈3:13)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저주를 받은바 되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저주가 되었다" "저주 덩어리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내려진 저주요 우리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는 어떤 것입니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5-19) 이것이 율법의 저주입니다. 이 저주의 가시관이 우리 주님 머리에 씌워졌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박힌 이 가시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까? 이 가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표징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18).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가시는 인간의 영혼을 짓밟고 말았습니다. 여기 가시 면류관은 곧 저주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가시관을 쓰시므로 이제부터 이것은 속죄의 면류관, 구속의 면류관, 용서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아픈 가시관을 쓰셨고 내게는 속죄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저주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용서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고통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사랑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2. 주님의 머리에 상처를 주던 그 면류관이 이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은 크고 작고 굵고 가는 가시로 만들어져 그것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병정들이 막대기로 면류관을 내리치자 가시들은 더 깊숙이 찔러 들어갔습니다. 바로 주님을 찌른 이 가시가 우리를 치료하는 가시가 될 줄이야. 당신의 크고 작은 상처, 나의 굵고 아픈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아무리 큰 상처도 혼자 움켜쥐고 있지 마십시요. 주님 앞에 상처를 드러내십시오. 우리 주님, 그 상처를 지금 이 시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피 묻은 손으로, 못 자국난 손으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정에도 직장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가시가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경험, 지울 수 없는 쓴뿌리의 아픈 상처들, 용서받지 못했다는 정죄의식들이 가시가 되어 매일같이 나를 찌릅니다. 사랑의 상처, 배신의 상처, 말 한마디, 눈짓 한번도 가시가 되어 서로를 찔러 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상처를 받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가도 목회를 하다가도 가시에 찔려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일을 하다가도 찔릴 수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불만과 근심, 내적갈등도 가시가 되어 내영혼과 마음을 찔러 피나게 합니다. 인간들은 저마다 가시에 찔린 상처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너 혼자 아픈 것 아닙니다.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습니다.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모두가 상처투성이, 이게 세상사요 인간사 아니었습니까? 이 상처들은 어떻게 고침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우리의 찢기고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흘리신 예수의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가 가시에 찔림으로 우리의 아픔을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 주님께 위로가 있고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울며 도망가려 하지 마십시오. 울며 울며 달려나와 주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구세주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영원한 승리의 보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예수님 머리에 상처를 준 가시는 신비의 수술도구와 명약이 되어서 인생의 상처를 치료한다"라고 했습니다. 치료하시는 그 주님 앞으로 나아 오십시다! 오 예수님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옵니다 주님 손과 발 못 박혔고 머리엔 가시관 박히셨네 내 모든 죄와 허물 위해 말없이 피 흘려 주셨네 오 예수님 나의 손 잡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 구주가 되옵소서 3. 가시 면류관이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죽으셨습니다. 마치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찌르고 도전해 오는 고난이 반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가 오는 것을 막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가시를 허락하신 분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엮도록 하신 것입니다. 은혜의 동산에 가면 그룹별로 이름을 짓습니다. 저는 아가페 TD 1기를 경험했는데 저희반 이름이 쓰레기통입니다. 언젠가 엿장수방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쓰레기통과도 같으신 분이라는 거지요. 우리의 저주, 근심, 걱정, 문제의 쓰레기들을 하나님께 가져가면 하나님은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다 받아 주시고 맡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엿장수 같으신 분이라는 거지요. 옛날엔 떨어진 고무신, 찌그러진 양재기, 심지어 머리카락 짜른 것들을 가져가면 엿장수 아저씨는 울릉도 호박엿을 뚝뚝 짤라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물을 호박엿으로 바꿔 주시듯 예수님은 저주의 면류관, 실패의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엿장수 같은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고물과 폐품 쓰레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무거운 죄 보따리 한숨 고통 눈물을 그 어떤 예물보다 귀하게 받으셔서 용서 자유 기쁨 행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고통, 눈물, 근심보따리를 십자가 앞으로 가지고 오길 원하십니다. 주위에는 자신의 고통과 죄와 한숨을 그냥 담아두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따리째 그걸 주님께 가져가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IV. 우리도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자 오늘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시가 괴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바라보고 그 가시로 승리의 면류관을 함께 엮어 가십시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은 이름 그대로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성경에서 종종 성도의 모델로 제시되는 사도 바울은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 불렀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 육체의 가시를 칼빈은 "영적인 갈등"이라고 했고 루터는 "바울이 받았던 핍박", 토마스 아퀴나스는 "독신생활에서 오는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했습니다. 또 터툴리안은 "이유없는 두통" 혹자들은 "외모에서 오는 콤플렉스" 혹은 "안질"이었다고 말하며, 라이트 후프 같은 이는 "간질병"이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 괴로워 세 번씩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가시의 고통을 받으면 모르겠거니와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바쳐 헌신한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지 왜 이런 가시의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가 부귀영화 만사형통은 없다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그가 육체의 가시를 지녔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허락한 모든 은혜가 천국의 면류관이 되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도다." 그가 이 땅에서의 보상을 기대했더라면 그는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땅의 보상보다 하늘의 면류관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다음의 영광스런 부활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어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십니까? 그 십자가가 너무나 무겁습니까? 당신의 면류관도 그만큼 더 클 것입니다. 어느 구두회사의 사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고급 구두일수록 더 많이 두들겨 맞는다." 다이아 몬드도 cutting이 많이 된 것일수록 더욱 빛나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본 차이나는 뼈를 부서뜨려서 분가루처럼 고운 가루를 만든 다음에야 귀한 도자기가 됩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귀한 그릇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크게 쓰시려고 강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모세를 귀하게 쓰시려고 완전 밑바닥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다윗을 고귀한 인물로 쓰시려고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바울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드시려고 육체의 가시까지 주신 것입니다. V. 맺으며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여러분! 지금 당신의 가시가 무엇입니까? 그 가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봅니다. 주님을 붙잡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봅니다. ·당신이 고난의 가시에 찔려 울고 있을때 주님은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나도 통곡하고 울었다" ·당신이 가난하고 배가 고플때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40일을 금식했다." ·입을 것 없어 부끄러울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발가벗기움을 당했다." ·당신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죄없는 나도 흉악범으로 취급 받았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 쓰러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상처난 어깨로 십자가를 졌느니라." 여러분, 주님 날 위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위해 가시 면류관 기쁨으로 쓰고 가십시다. 우리 주님 내 삶의 아픈 가시를 바꾸어 구속의 면류관, 치유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삼아 주십니다. 금세기 위대한 신학자였던 Bowman 박사가 인도 캘커타에서 선교할 때 한 노파가 길에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과 한 동네의 친구였던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이 노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우리가 믿는 힌두교의 많은 남신과 여신들로 만족할 수 없었는가?" 노인은 대답합니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심판대의 변호사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가시면류관 /막15:16-20/ 류영모목사
가시면류관 /막15:16-20/ 류영모목사 2015-01-08 15:47:47 I. 서언 일찍이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나르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빼고 설교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챨스 스펄젼은 그의 임종시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나의 평생의 설교와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저도 설교를 하는 목사로서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복음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고, 예수의 보혈이 없는 설교는 설교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설교를 하려면 못내 자신감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설교만큼은 하면 할수록 내게는 무한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II. 당하신 고난의 의미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예수께서 로마 군병들로부터 희롱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멜 깁슨의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오래전 우리나라에서도 상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신적인 고통과 영적인 고통 즉 내면적 고통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한 성서학자는 “이 희롱의 순간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심리적으로는 더 아프고 힘든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을 총독의 관저로 끌고 들어갑니다. 거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님을 부서진 의자에 앉혀놓고 옷을 벗기고 낡은 홍포를 입힙니다. 머리에는 지독한 가시, 팔레스타인 아카시아 나무와 싯딤나무 그리고 잔가시가 많은 스피나 크리스티 나무를 엮어 만든 관을 씌우고 손에는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끓고 “유대인의 왕 만세”를 떠들며 조롱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그 조롱은 비열하고 또 한편 잔인했습니다. 이들의 희롱은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엔 깊은 계시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그 한토막도 의미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1.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감은 창세기 3장 선악과를 따먹은 죄와 더불어 왔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며 곧 모멸입니다. 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감추시기 위해, 벌거벗기움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② 주님께서는 내가 당할 수치와 창피를 덮으시기 위해 당신이 친히 수치를 감당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당신의 옷이 벗겨지시므로 장차 우리가 입게 될 흰옷 - 영광의 옷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④ 옷을 벗기움 당했다고 하는 것은 신분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여주시기 위하여 잠시나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을 만왕의 왕되신 신분을 박탈당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홍포를 입으셨습니다.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신 것은 예수님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는 홍포라고 했고 마가와 요한은 자색옷이라고 했는데 사실 자색옷은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라 아마 로마 군인들의 홍포 망토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홍포는 왕의 홍포가 아니라 죄인의 홍포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1:18). 예수님께서는 주홍도포에 진홍 피를 흘려 주홍같고 진홍같은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죄의 무거운 짐으로 괴로워하며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정죄의식에 시달리시는 분 계십니까? 영혼의 진통을 안고 이곳까지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주님 앞으로 달려오십시요. 당신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눈처럼 깨끗케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채찍을 맞았습니다. 유대 율법에서는 40회이상 채찍질을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5:3에 보면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지 못하는 로마 군병들은 훨씬 더 많이 더 잔인하게 채찍질을 했다고 합니다. 십자가 형을 지는 죄인은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납과 못, 짐승의 뼈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을 맞았습니다.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몸이 약한 죄수들은 채찍을 맞는 중에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잔인한 망나니를 만나면 물 묻은 가죽 채찍을 옆구리 쪽으로 휘감아 내리쳤고 그러면 창자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엎드려 채찍을 맞으면 등에 고랑이 패여 피 고랑을 만든다 라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바로 이 말씀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 류영모가 나음을 받았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김집사 이권사 당신이 나음을 받았도다. 아멘! 4. 그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워 주었습니다.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놀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반드시 그들을 아니 모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그분을 재판하던 재판관들도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조롱하던 자들도 그를 찌른 자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도, 나도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5. 또한 예수님의 머리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금 면류관 대신 우리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조롱했습니다.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에서는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번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만왕의 왕 예수를 조롱하는 이 모습이 바로 인류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온전히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예수님은 내게 조롱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슴 졸이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받으며 조롱받으며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침 뱉음을 당하신 그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습니까? ① 천군 천사들이 흠모하는 얼굴이 아닙니까? ②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으나 결국은 보지를 못했던 그 영광스러운 얼굴이 아니었습니까? ③ 모든 나라와 권세가 경배하고 천사들이 수중들던 왕중의 왕이 아니셨습니까? ④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그 얼굴에 야만인들의 침이 튀겨야 했더란 말입니까? III. 가시 면류관 이 수없는 고난의 모습 가운데서도 오늘 아침 우리는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쪽박도 왕이 쓰면 왕의 밥그릇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 거기엔 크고도 분명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므로 저주의 면류관이 속죄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부귀, 영화, 존귀를 자랑합니다. 그 대신 저주와 고통과 아픔을 백성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왕 -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저주의 관을 쓰시고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백성들에겐 구원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갈3:13)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저주를 받은바 되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저주가 되었다” “저주 덩어리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내려진 저주요 우리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는 어떤 것입니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5-19) 이것이 율법의 저주입니다. 이 저주의 가시관이 우리 주님 머리에 씌워졌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박힌 이 가시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까? 이 가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표징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18).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가시는 인간의 영혼을 짓밟고 말았습니다. 여기 가시 면류관은 곧 저주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가시관을 쓰시므로 이제부터 이것은 속죄의 면류관, 구속의 면류관, 용서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아픈 가시관을 쓰셨고 내게는 속죄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저주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용서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고통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사랑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2. 주님의 머리에 상처를 주던 그 면류관이 이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은 크고 작고 굵고 가는 가시로 만들어져 그것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병정들이 막대기로 면류관을 내리치자 가시들은 더 깊숙이 찔러 들어갔습니다. 바로 주님을 찌른 이 가시가 우리를 치료하는 가시가 될 줄이야. 당신의 크고 작은 상처, 나의 굵고 아픈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아무리 큰 상처도 혼자 움켜쥐고 있지 마십시요. 주님 앞에 상처를 드러내십시오. 우리 주님, 그 상처를 지금 이 시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피 묻은 손으로, 못 자국난 손으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정에도 직장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가시가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경험, 지울 수 없는 쓴뿌리의 아픈 상처들, 용서받지 못했다는 정죄의식들이 가시가 되어 매일같이 나를 찌릅니다. 사랑의 상처, 배신의 상처, 말 한마디, 눈짓 한번도 가시가 되어 서로를 찔러 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상처를 받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가도 목회를 하다가도 가시에 찔려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일을 하다가도 찔릴 수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불만과 근심, 내적갈등도 가시가 되어 내영혼과 마음을 찔러 피나게 합니다. 인간들은 저마다 가시에 찔린 상처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너 혼자 아픈 것 아닙니다.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습니다.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모두가 상처투성이, 이게 세상사요 인간사 아니었습니까? 이 상처들은 어떻게 고침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우리의 찢기고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흘리신 예수의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가 가시에 찔림으로 우리의 아픔을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 주님께 위로가 있고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울며 도망가려 하지 마십시오. 울며 울며 달려나와 주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구세주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영원한 승리의 보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예수님 머리에 상처를 준 가시는 신비의 수술도구와 명약이 되어서 인생의 상처를 치료한다”라고 했습니다. 치료하시는 그 주님 앞으로 나아 오십시다! 3. 가시 면류관이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죽으셨습니다. 마치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찌르고 도전해 오는 고난이 반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가 오는 것을 막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가시를 허락하신 분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엮도록 하신 것입니다. IV. 우리도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자 오늘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시가 괴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바라보고 그 가시로 승리의 면류관을 함께 엮어 가십시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은 이름 그대로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성경에서 종종 성도의 모델로 제시되는 사도 바울은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 불렀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 육체의 가시를 칼빈은 “영적인 갈등”이라고 했고 루터는 “바울이 받았던 핍박”, 토마스 아퀴나스는 “독신생활에서 오는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했습니다. 또 터툴리안은 “이유없는 두통” 혹자들은 “외모에서 오는 콤플렉스” 혹은 “안질”이었다고 말하며, 라이트 후프 같은 이는 “간질병”이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 괴로워 세 번씩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가시의 고통을 받으면 모르겠거니와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바쳐 헌신한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지 왜 이런 가시의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가 부귀영화 만사형통은 없다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그가 육체의 가시를 지녔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허락한 모든 은혜가 천국의 면류관이 되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도다.” 그가 이 땅에서의 보상을 기대했더라면 그는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땅의 보상보다 하늘의 면류관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다음의 영광스런 부활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어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십니까? 그 십자가가 너무나 무겁습니까? 당신의 면류관도 그만큼 더 클 것입니다. 어느 구두회사의 사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고급 구두일수록 더 많이 두들겨 맞는다.” 다이아몬드도 cutting이 많이 된 것일수록 더욱 빛나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본 차이나는 뼈를 부서뜨려서 분가루처럼 고운 가루를 만든 다음에야 귀한 도자기가 됩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귀한 그릇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크게 쓰시려고 강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모세를 귀하게 쓰시려고 완전 밑바닥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다윗을 고귀한 인물로 쓰시려고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바울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드시려고 육체의 가시까지 주신 것입니다. V. 고통의 보상은 천국에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신의 가시가 무엇입니까? 그 가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봅니다. 주님을 붙잡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봅니다. ․당신이 고난의 가시에 찔려 울고 있을때 주님은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나도 통곡하고 울었다” ․당신이 가난하고 배가 고플때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40일을 금식했다.” ․입을 것 없어 부끄러울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발가벗기움을 당했다.” ․당신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죄없는 나도 흉악범으로 취급 받았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 쓰러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상처난 어깨로 십자가를 졌느니라.” 여러분, 주님 날 위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위해 가시 면류관 기쁨으로 쓰고 가십시다. 우리 주님 내 삶의 아픈 가시를 바꾸어 구속의 면류관, 치유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삼아 주십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조롱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당하신 채찍의 의미요, 희롱과 조롱이 의미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 시간에 우리라는 말 대신에 자기의 이름을 넣어서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예수님이 찔리심은 ○○○의 허물 때문이요 예수님의 상하심은 ○○○의 죄악 때문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이(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이(가) 나음을 받았도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베드로전서 2:24에는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기에 치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한번 맞으실 때 내 몸의 질병이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실 때 내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아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뺨을 맞고 조롱을 당하는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죽었던 내가 다시 회복되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롱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채찍을 맞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변명하거나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욕하지 않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역사의 희생물이 되어 조용히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는 보상이 없다. 선을 행하고 희생을 해도 왜 보상이 없는지 아십니까? 보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세상에서 보상을 받으려고 너무 애를 씁니다. 직장에서 사람들의 갈등은 무엇입니까? 나를 대접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내 월급이 왜 이런가? 내 지위가 왜 이런가? 내가 몇 년동안이나 수고하지 않았는가. 왜 나한테 보상을 하지 않는가?” 또한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보상을 하지 않는다고 서로 서운해 합니다. 또 며느리는 “내가 시집에서 이만큼 고생했는데 왜 보상을 하지 않는가?”라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여러분, 그것 때문에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까? 거기에 해답이 있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그 허황된 욕구를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보상해 줘도 보상이 됩니까? 계속 목마른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착취당한 내 인생을 보상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의 착취당한 인생을 보상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는 그 보상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채찍에 상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 보상이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보상을 포기하십시오. 사람으로부터 오는 보상을 포기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잊을 수 없는 한이 있다고 합시다. 억울한 사건이 과거에 있었다고 합시다. 그것을 오늘 잊어버리셔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든지,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여러분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포기하십시오. 예수님처럼 하나님에게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세요. 그리고 울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고 우세요.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시90:15). 내가 고난을 겪은 연수대로 축복을 주시옵소서.” 차라리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살고 여러분에게 누명을 씌우고 여러분의 인생을 황충이가 먹어 버리게 했던 그 사람들도 복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살고 여러분의 아내도 살고 남편도 살고 가족도 살고 국가도 살고 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가시면류관 /막15:16-20/ 류영모목사 2015-01-08 15:47:47 read : 157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서언 일찍이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나르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빼고 설교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챨스 스
가시면류관 /막15:16-20/ 류영모목사 2015-01-08 15:47:47 read : 157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서언 일찍이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나르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빼고 설교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챨스 스펄젼은 그의 임종시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나의 평생의 설교와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저도 설교를 하는 목사로서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복음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고, 예수의 보혈이 없는 설교는 설교일 수가 없습니다.” 다른 설교를 하려면 못내 자신감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설교만큼은 하면 할수록 내게는 무한한 자신감과 확신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II. 당하신 고난의 의미들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형이 결정되고 그 형이 집행되기까지 예수께서 로마 군병들로부터 희롱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멜 깁슨의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오래전 우리나라에서도 상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신적인 고통과 영적인 고통 즉 내면적 고통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한 성서학자는 “이 희롱의 순간이 십자가의 고통보다 심리적으로는 더 아프고 힘든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예수님을 총독의 관저로 끌고 들어갑니다. 거기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님을 부서진 의자에 앉혀놓고 옷을 벗기고 낡은 홍포를 입힙니다. 머리에는 지독한 가시, 팔레스타인 아카시아 나무와 싯딤나무 그리고 잔가시가 많은 스피나 크리스티 나무를 엮어 만든 관을 씌우고 손에는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끓고 “유대인의 왕 만세”를 떠들며 조롱했습니다. 이어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그 조롱은 비열하고 또 한편 잔인했습니다. 이들의 희롱은 즉흥적으로 꾸며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엔 깊은 계시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그 한토막도 의미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1.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감은 창세기 3장 선악과를 따먹은 죄와 더불어 왔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며 곧 모멸입니다. 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감추시기 위해, 벌거벗기움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② 주님께서는 내가 당할 수치와 창피를 덮으시기 위해 당신이 친히 수치를 감당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당신의 옷이 벗겨지시므로 장차 우리가 입게 될 흰옷 - 영광의 옷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④ 옷을 벗기움 당했다고 하는 것은 신분의 박탈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여주시기 위하여 잠시나마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하나님의 외아들 되심을 만왕의 왕되신 신분을 박탈당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홍포를 입으셨습니다.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신 것은 예수님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마태는 홍포라고 했고 마가와 요한은 자색옷이라고 했는데 사실 자색옷은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라 아마 로마 군인들의 홍포 망토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홍포는 왕의 홍포가 아니라 죄인의 홍포였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1:18). 예수님께서는 주홍도포에 진홍 피를 흘려 주홍같고 진홍같은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죄의 무거운 짐으로 괴로워하며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정죄의식에 시달리시는 분 계십니까? 영혼의 진통을 안고 이곳까지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주님 앞으로 달려오십시요. 당신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눈처럼 깨끗케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채찍을 맞았습니다. 유대 율법에서는 40회이상 채찍질을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5:3에 보면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지 못하는 로마 군병들은 훨씬 더 많이 더 잔인하게 채찍질을 했다고 합니다. 십자가 형을 지는 죄인은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납과 못, 짐승의 뼈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을 맞았습니다. 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몸이 약한 죄수들은 채찍을 맞는 중에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잔인한 망나니를 만나면 물 묻은 가죽 채찍을 옆구리 쪽으로 휘감아 내리쳤고 그러면 창자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엎드려 채찍을 맞으면 등에 고랑이 패여 피 고랑을 만든다 라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바로 이 말씀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 류영모가 나음을 받았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김집사 이권사 당신이 나음을 받았도다. 아멘! 4. 그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리워 주었습니다. 갈대로 왕의 홀을 대신하여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지요. 이는 예수님을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무력한 존재라고 놀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반드시 그들을 아니 모든 인류를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십니다. 그분을 재판하던 재판관들도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를 조롱하던 자들도 그를 찌른 자들도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도, 나도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5. 또한 예수님의 머리엔 가시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금 면류관 대신 우리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조롱했습니다.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에서는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번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만왕의 왕 예수를 조롱하는 이 모습이 바로 인류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온전히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예수님은 내게 조롱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슴 졸이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사실 때문에 핍박받으며 조롱받으며 달려나오신 분 계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침 뱉음을 당하신 그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습니까? ① 천군 천사들이 흠모하는 얼굴이 아닙니까? ②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으나 결국은 보지를 못했던 그 영광스러운 얼굴이 아니었습니까? ③ 모든 나라와 권세가 경배하고 천사들이 수중들던 왕중의 왕이 아니셨습니까? ④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그 얼굴에 야만인들의 침이 튀겨야 했더란 말입니까? III. 가시 면류관 이 수없는 고난의 모습 가운데서도 오늘 아침 우리는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쪽박도 왕이 쓰면 왕의 밥그릇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 거기엔 크고도 분명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므로 저주의 면류관이 속죄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부귀, 영화, 존귀를 자랑합니다. 그 대신 저주와 고통과 아픔을 백성들에게 씌웠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왕 -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저주의 관을 쓰시고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백성들에겐 구원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갈3:13)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저주를 받은바 되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저주가 되었다” “저주 덩어리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내려진 저주요 우리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는 어떤 것입니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5-19) 이것이 율법의 저주입니다. 이 저주의 가시관이 우리 주님 머리에 씌워졌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박힌 이 가시가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까? 이 가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표징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18).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가시는 인간의 영혼을 짓밟고 말았습니다. 여기 가시 면류관은 곧 저주의 면류관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가시관을 쓰시므로 이제부터 이것은 속죄의 면류관, 구속의 면류관, 용서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아픈 가시관을 쓰셨고 내게는 속죄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저주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용서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당신은 고통의 면류관을 쓰셨고 내게는 사랑의 면류관을 씌우셨나이다. 2. 주님의 머리에 상처를 주던 그 면류관이 이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은 크고 작고 굵고 가는 가시로 만들어져 그것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병정들이 막대기로 면류관을 내리치자 가시들은 더 깊숙이 찔러 들어갔습니다. 바로 주님을 찌른 이 가시가 우리를 치료하는 가시가 될 줄이야. 당신의 크고 작은 상처, 나의 굵고 아픈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아무리 큰 상처도 혼자 움켜쥐고 있지 마십시요. 주님 앞에 상처를 드러내십시오. 우리 주님, 그 상처를 지금 이 시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피 묻은 손으로, 못 자국난 손으로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가정에도 직장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가시가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경험, 지울 수 없는 쓴뿌리의 아픈 상처들, 용서받지 못했다는 정죄의식들이 가시가 되어 매일같이 나를 찌릅니다. 사랑의 상처, 배신의 상처, 말 한마디, 눈짓 한번도 가시가 되어 서로를 찔러 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도 상처를 받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다가도 목회를 하다가도 가시에 찔려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일을 하다가도 찔릴 수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불만과 근심, 내적갈등도 가시가 되어 내영혼과 마음을 찔러 피나게 합니다. 인간들은 저마다 가시에 찔린 상처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너 혼자 아픈 것 아닙니다. 나도 찔렸고 너도 찔렸습니다.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모두가 상처투성이, 이게 세상사요 인간사 아니었습니까? 이 상처들은 어떻게 고침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우리의 찢기고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흘리신 예수의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가 가시에 찔림으로 우리의 아픔을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그 상처를 보이십시오. 주님께 위로가 있고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울며 도망가려 하지 마십시오. 울며 울며 달려나와 주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구세주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영원한 승리의 보장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예수님 머리에 상처를 준 가시는 신비의 수술도구와 명약이 되어서 인생의 상처를 치료한다”라고 했습니다. 치료하시는 그 주님 앞으로 나아 오십시다! 3. 가시 면류관이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죽으셨습니다. 마치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면류관은 승리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가시가 있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만들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찌르고 도전해 오는 고난이 반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가 오는 것을 막아 주시지 아니하시고 가시를 허락하신 분명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가시를 가지고 면류관을 엮도록 하신 것입니다. IV. 우리도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자 오늘 우리는 가시 면류관을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시가 괴롭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 바라보고 그 가시로 승리의 면류관을 함께 엮어 가십시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은 이름 그대로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성경에서 종종 성도의 모델로 제시되는 사도 바울은 남모르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 불렀습니다. 바울이 말한 이 육체의 가시를 칼빈은 “영적인 갈등”이라고 했고 루터는 “바울이 받았던 핍박”, 토마스 아퀴나스는 “독신생활에서 오는 본능적인 충동”이라고 했습니다. 또 터툴리안은 “이유없는 두통” 혹자들은 “외모에서 오는 콤플렉스” 혹은 “안질”이었다고 말하며, 라이트 후프 같은 이는 “간질병”이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 괴로워 세 번씩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 가시의 고통을 받으면 모르겠거니와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생을 하나님께 바쳐 헌신한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지 왜 이런 가시의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가 부귀영화 만사형통은 없다하더라도 주님의 일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그가 육체의 가시를 지녔다고 하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허락한 모든 은혜가 천국의 면류관이 되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외쳤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도다.” 그가 이 땅에서의 보상을 기대했더라면 그는 넘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땅의 보상보다 하늘의 면류관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다음의 영광스런 부활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No Cross, No Crow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어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십니까? 그 십자가가 너무나 무겁습니까? 당신의 면류관도 그만큼 더 클 것입니다. 어느 구두회사의 사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고급 구두일수록 더 많이 두들겨 맞는다.” 다이아몬드도 cutting이 많이 된 것일수록 더욱 빛나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본 차이나는 뼈를 부서뜨려서 분가루처럼 고운 가루를 만든 다음에야 귀한 도자기가 됩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 귀한 그릇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크게 쓰시려고 강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모세를 귀하게 쓰시려고 완전 밑바닥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다윗을 고귀한 인물로 쓰시려고 혹독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바울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드시려고 육체의 가시까지 주신 것입니다. V. 고통의 보상은 천국에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신의 가시가 무엇입니까? 그 가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봅니다. 주님을 붙잡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봅니다. ․당신이 고난의 가시에 찔려 울고 있을때 주님은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나도 통곡하고 울었다” ․당신이 가난하고 배가 고플때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40일을 금식했다.” ․입을 것 없어 부끄러울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발가벗기움을 당했다.” ․당신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죄없는 나도 흉악범으로 취급 받았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 쓰러질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상처난 어깨로 십자가를 졌느니라.” 여러분, 주님 날 위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위해 가시 면류관 기쁨으로 쓰고 가십시다. 우리 주님 내 삶의 아픈 가시를 바꾸어 구속의 면류관, 치유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 삼아 주십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조롱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당하신 채찍의 의미요, 희롱과 조롱이 의미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 시간에 우리라는 말 대신에 자기의 이름을 넣어서 다시 한번 읽어 봅시다. “예수님이 찔리심은 ○○○의 허물 때문이요 예수님의 상하심은 ○○○의 죄악 때문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심으로 ○○○이(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이(가) 나음을 받았도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베드로전서 2:24에는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여기에 치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한번 맞으실 때 내 몸의 질병이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실 때 내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아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뺨을 맞고 조롱을 당하는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죽었던 내가 다시 회복되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롱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채찍을 맞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변명하거나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욕하지 않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역사의 희생물이 되어 조용히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는 보상이 없다. 선을 행하고 희생을 해도 왜 보상이 없는지 아십니까? 보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세상에서 보상을 받으려고 너무 애를 씁니다. 직장에서 사람들의 갈등은 무엇입니까? 나를 대접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내 월급이 왜 이런가? 내 지위가 왜 이런가? 내가 몇 년동안이나 수고하지 않았는가. 왜 나한테 보상을 하지 않는가?” 또한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보상을 하지 않는다고 서로 서운해 합니다. 또 며느리는 “내가 시집에서 이만큼 고생했는데 왜 보상을 하지 않는가?”라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여러분, 그것 때문에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까? 거기에 해답이 있습니까? 누가 여러분의 그 허황된 욕구를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보상해 줘도 보상이 됩니까? 계속 목마른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착취당한 내 인생을 보상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의 착취당한 인생을 보상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는 그 보상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채찍에 상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 보상이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보상을 포기하십시오. 사람으로부터 오는 보상을 포기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잊을 수 없는 한이 있다고 합시다. 억울한 사건이 과거에 있었다고 합시다. 그것을 오늘 잊어버리셔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든지,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여러분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포기하십시오. 예수님처럼 하나님에게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가세요. 그리고 울고 싶으면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고 우세요.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시90:15). 내가 고난을 겪은 연수대로 축복을 주시옵소서.” 차라리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살고 여러분에게 누명을 씌우고 여러분의 인생을 황충이가 먹어 버리게 했던 그 사람들도 복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살고 여러분의 아내도 살고 남편도 살고 가족도 살고 국가도 살고 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가시밭 신앙 /마13:7-8/마13:22-23/ 류영모목사
가시밭 신앙 /마13:7-8/마13:22-23/ 류영모목사 2015-01-05 21:53:55 I. 말씀을 향하여 : 열매 없는 인생 벤쟈민 J. 스타인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 가운데 \"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의 8가지 습관\"이란 글이 있습니다. ① 자기 기만적인 성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이 며 나의 한계점은 무엇인가? 한계점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자기에게 속으며 살더라는 게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철학자들은 \"너 자신을 알라\" 그랬고, 국어선생님이 계신다면 \"네 주 제를 알라\" 그랬을 겁니다. 수확선생님은 \"네 분수를 알라\" 그랬겠지요. 지리선생님은 \"네 위치를 알라\" 그랬을 테고 미술선생님은 \"네 꼬라지를 알라\" 그랬을 겁니다. ② 두 번째 비 생산적인 행동입니다. 창조적인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 창조적으로 살아갈 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을 허비한다. ③ 세 번째 실패자는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하지 아니하고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 감 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을 업신여기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④ 네 번째 예의없는 행동입니다. 실패자는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고 잘못을 사과할 줄도 모르고 윗사람들이나 동료들에게 무례합니다. ⑤ 다섯 번째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더라. ⑥ 여섯 번째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실패자는 언제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 아니 말을 가지고 다 른 사람들을 오히려 오염시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⑦ Trouble maker들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 걸핏하면 논쟁을 일삼는 사람들도 실패자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논쟁을 일으키면 자기자신이 공동체 안에서 똑똑하다 인정을 받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천 만의 말씀입니다. ⑧ 여덟 번째 실패자는 우선순위를 모릅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 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에 실패한다는 것이지요. 벤자민 스타인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여 결국 실패자로 전락할 뿐 아니라 주위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알곡없는 논밭, 열매없는 과일나무, 거둘 것 없는 인생, 그것을 두고 오늘 본문은 「가시밭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가시밭 신앙」입니다. 일년동안 애써 가꾸어 왔는데 거둘 것이 없는 논밭을 바라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많 은 열매를 맺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나무가 잎만 무성이 달고 있다가 주님께 혼이 난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무화과 나무입니다. 마치 열매를 많이 맺은 것처럼 잎만 달고 폼만 잡고 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시는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 리라!\" 주님은 열매없는 나무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열매없는 신앙생활을 싫어하십 니다. II. 가시밭이 무엇입니까? 가시밭이 무엇입니까? 이곳은 토양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씨가 떨어졌을 때 뿌리가 나고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만큼 자라다 보니 땅 속에 가시나무 뿌리가 자리잡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곡식과 가시가 같이 자 라는데 가시가 훨씬 빨리 자라고 크게 자라버렸습니다. 그늘을 만들어 곡식을 약하게 만들더니 마침내 곡식을 질식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에 가시밭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를 열심히 듣습니다. 은혜도 곧잘 받습 니다. 믿음자라는 소리가 쑥쑥 납니다. 북치고 장구치고 충성하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주일 받은 은혜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월요일 밤이면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와장창 납니다. 수요일쯤되면 한숨소리가 푹푹 터져나옵니다. 금 요일쯤되면 불평소리 터져나오고 풀이 죽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침내 교회에 나오 지 못하고 한 두번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이에 믿음을 잃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봉사도 부지런히 합니다. 행동에도 빈틈이 없습 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보면 밑바닥에 가시뿌리가 보입니다. 그 가시뿌리가 은혜의 자양분들을 다 빼앗아 먹고 말았습니다. 그 가시에 남도 찔렸고 자신도 찔렸습니다. 찌 르는 인생 실패합니다. 사랑의 보자기로 감쌀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III. 왜 가시가 생겼습니까? 왜 가시가 생겼습니까? 언제부터 가시떨기가 생겼습니까? 처음 에덴 동산에는 가시 와 떨기가 없었습니다. 저주받을 때 하나님께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겠고 그래서 창세기 3장 17절 이전에는 가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주를 나타내는 이 가시는 신 앙을 방해하는 악마의 소행으로 나타납니다. 타락이후 가시떨기는 타락한 사람들 가운 데서 자라는 당연한 부산물이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서 은혜는 단절되고 가 시떨기는 풍성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산야에 가시떨기는 도처에 널려 있었습 니다.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났고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내아버지 내어머니가 죄 중 에 살았고 내가 지금 죄 중에 아이를 또 낳습니다. 원죄가 우리 깊이 뿌리 박고 있습니 다. 그 죄의 뿌리는 인간의 본성을 통해 철저하게 뿌리를 박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놀라 운 속도로 번져 인간을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멸망의 길은 쉽고\" 그랬습니다. 지옥가기는 쉽다는 얘기입니다. 가 만히만 있으면 지옥은 가게끔 되어있습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가라지는 자랍니다. 가시 는 뿌리를 박습니다.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죄악은 나를 지옥으로 데 려가 줄 것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악마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넓은 밭에 서너개의 싹이 납니다. 그 러나 얼마가지 않아 가시 떨기는 많아지고 곡식은 힘을 잃게 됩니다. 해방후 우리의 산들이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에 소나무 한두 그루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쩌다가 홍수가 나면 흙탕물이 온 내를 뒤덮곤 했습 니다. 번식력이 강한 나무가 없을까? 연구하고 있을 때에 독일의 한 산림학 자가 가시나무를 권장했습니다. 그래서 산야에 가시나무를 심었더니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는지 소나무마져 다 질식시킬 만큼 온 산에 가시나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죄는 무서운 번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죄의 문제를 해결 하지 아니하면 내 영혼을 잠식시키려는 악마를 퇴치하지 아니하면 마귀와 관계를 단절하 지 아니하면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IV. 신앙생활의 가시떨기들 이처럼 지독한 가시떨기의 구체적인 이름을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여기서 두 개의 가시를 말합니다. 첫째 세상의 염려, 둘째 재리의 유혹입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8장 14절에서는 이 두개의 가시 외에 \"일락\" 즉 세 상의 쾌락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가복음 4장 19절에서는 \"기타 욕심\"이 라는 가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공관복음을 종합해 보면 네가지의 가시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세상의 쾌락, 기타 욕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생활의 열매를 맺으려고 할 때에 행복한 신앙생활을 맛보며 살아가 려고 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은혜받는 삶을 살고자 할 때에 그것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있습니다. 내 신앙생활에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환란, 비바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무서운 적은 방해꾼은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내 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게끔 되어있습니다. 불평해도 소용없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썩었느냐? 세상이 왜 이렇게 안달라지지? 원망해도 소용없습니다. 세상이 다 달라진다 할지라도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은 그대로 있습니다. 세상이 다 썩어 문들어져도 내가 변하면 세상은 변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추운 겨울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찬 바람이 옷깃에 스며들고 단추를 잠가도 안되고 고개를 숙여도 안됩니다. 그래 서 생각다 못해 옷을 벗어 뒤집어 입었습니다. 단추부분이 뒤로 가고 뒤가 앞 으로 왔는데 달리면 달릴수록 뒤가 좍 달라 붙는게 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부르릉~ 속도를 내는 순간 바로 그 앞에 얼음짱이 있어서 꽈당! 넘어져 저만큼 날아 퍽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몇십명이 몰려 들었습니다. 아뿔사 이런 사고가? 큰 사고 같지도 않은데 목이 180°휙 돌아 가 있는 겁니다. 이거 오토바이가 문제가 아니다. 목부터 돌려놓고 보자. 어 깨 밟아라. 힘있는 청년들이 어깨를 밟고 목을 제자리 갖다 놓겠다고 180°돌 리는 사이에 모가지가 부러져 죽었답니다. 남의 목은 왜 돌려요? 내 관점을 바꾸고 내 시선을 바꾸고 나를 바꾸고 나면 세상은 달라지게끔 되어 있는 것 입니다. 1. 염려 공관복음서가 공히 첫 번째 가시 떨기로 들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염려\"입니다. 때 로 의식주에 대한 염려들이 겉보기에 무해한 것 같으나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속 에 뿌려진 은혜의 씨를 질식시키는 묘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해 무익! 백가지 해가 될지언정 유익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 바로 그것이 \"염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원문에 \"염려\"라고 하는 말이 메림네오입니다. 이 말은 물어 뜯는다. 찢는다. 쪼 갠다 + 마음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된 말입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내 인격을 파괴합 니다. 내 행복한 마음을 찢어놓는 것입니다. 그게 염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염 려는 날카로운 이빨로 갈기갈기 찢어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일을 철저히 지키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 다. 주일 날마다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찬양을 통하여 우리 삶의 존재가 바뀌어 지는 행복을 얻어야만이 우리가 이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 일거리들 때문에, 염려거리들 때문에, 우리는 믿음생활을 잃어 버리고 마는 것입 니다. 세상일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안달하고 속을 썩이는 걱정,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찌 들게 만들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실패로 만들어가는 벌레 두 마리가 있 습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을 갉아 먹는 벌레 두 마리가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요, 다른 하나는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염려입니다. 2. 재리의 유혹 두 번째 가시는 \"재리의 유혹\"입니다. 물질 자체가 가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Neutral - 중성입니다. 그러나 분명 재리의 유 혹은 가시떨기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는지 새 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물은 사람을 단번에 질식시키지는 않습니다. 재물에 의 한 질식은 아주 서서히 일어납니다. 오늘 비유의 잡초들처럼 서서히 성장합니다. 천천 히 아주 천천히 그것들은 신령한 싹들을 찌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 서 물성이 영성입니다. 돈 관리를 어떻게 하는가 보면 영성의 차원을 알 수 있는 것입 니다. 예수님께서 신앙 생활의 비유, 천국생활의 비유를 성경에 37가지를 남겨 주시고 계시는데 그 가운데 어떤 비유 보다도 많은 17가지가 물질에 관한 비유입니다. 저희 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예닮동산이라고 하는 영성훈련이 있습니다. 그 곳에 어떤 분이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들어왔어요. 여기오면 이거 할 시간 없는데 왜 가지고 들 어왔습니까? 물었더니 자기는 잠들기 전에 증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잠들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니 성경이니 생각할 겨를 없이 일단 두들겨서 내 증권이 어떻게 됐나 확인해야 그날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부득이 이곳까지 가지 고 왔다는 겁니다. 먹고 살기에 불편하지 않고 하나님 섬기기에 별로 불편하지 않으면 물질은 만족한 겁니다. 재리의 유혹! 바로 이것이 우리의 열매맺지 못하게 하는 무서 운 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설교가 스펄젼은 말하기를 \"네가 회개했다고 하나 너희 전대 돈주머 니를 회개하기 전까지 나는 너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하나 네 돈 주머니를 열기까지 열려진 네 마음을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큰 상금과 명예가 걸려있는 경마대회 가 있었습니다. 한 여자 기수가 신나게 앞장서 달리는데 그 앞에 땡그렁 금화 하나가 떨어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유혹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말에 서 내려서 금돈을 주워 챙겼지요. 한참을 달렸습니다. 속력이 막 나려고 하 는데 또 금돈이 하나 땡그렁 떨어지며 반짝 빛이 났습니다. 다시 내려서 그 금돈을 주워 챙겼지요. 마땅히 일등을 하여 명예와 상급을 차지하려고 했던 이 기수는 명예도 상급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영적인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신앙인들이 황금을 줍기위해 멈추기 때문에 상 급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미끼에 걸려들고 마는 것입니다. \"재리의 유혹\"에 결실치 못하 는 자여! 3. 세상의 쾌락 세 번째 가시떨기는 \"이 세상의 쾌락\"입니다. 좋은 장소에서 적당한 휴식을 하는 것 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현대 도시인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락이 주업이 되고 쾌락이 목적이 될 때 그건 무서운 일입니다. 오락은 마치 \"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약은 인간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유흥비 마련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쾌락을 얻기 위해 신앙과 진실을 버려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 가시떨기입니다. 오락이나 운동가운데 골프가 꽤 괜찮다고 합니다. 그런데 밥만 먹으면 골프 외에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약에 취한 것처럼 골프에 미쳐 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노래가 있습니다. 골프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골프공이 사망의 음침한 곳에 빠질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게 골프채가 있음이라. 골프의 막대 기와 골프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나를 원수의 목전에서 상 을 베푸시는 도다. 필시 그것들은 우리 영혼의 숨통을 막아 질식시키고 말게 끔 되어 있습니다. 4. 기타 욕심 이에 대하여 마가는 너무나 많은 잡동사니 가시와 찔레들을 \"기타 욕심\"이라고 표현했 습니다. 여기 기타 욕심은 끊임없는 욕심을 말합니다. 빈손 들고 온 인생 빈손 들고 하 나님 앞에 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울었다고 하는 알렉산더는 \"내가 죽거들랑 관에 구멍을 뚫어라. 그리고 내 손을 밖으로 내밀어 벌려 놓아라. 빈손 들고 온 인생 온 세상을 정복했다고 하나 빈손 들고 가는게 인생이니라. 이게 인생입 니다. 어떤 부자가 죽었습니다. 기자가 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선친께서 얼마 나 남겼습니까?\" 그 아들이 의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다 남겼습니다\" 이 짤막한 대답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습니까? 아무 리 많이 가졌고 아무리 많은 것들을 모으면서 살아왔다고 하나 다 남겼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지옥이 무엇입니까? 무저갱이라고 합니다. 심연이라고 합니다. 가져도 만족이 없습 니다. 채워보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면 더! 더! 더! 하는 소리가 제일 많이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에까지 와서도 세상염려 근심 욕심 때문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얼굴 한번 제대로 펴고 웃지 못합니다. 못된 잡초와 가 시덤불에 짖눌려 철야하며 기도를 해도 기도를 하는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됩 니다. 이시간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몸과 마음이 엉뚱한데 가 있는 사람들, 생각을 엉뚱한데 빼앗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와서 자아와 인정욕구 때문에 자기를 긁으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귀 영화 명예 너무 얻으려 하지 마세요. 그곳이 지옥입니다. V. 가시 떨기를 제거하고 옥토가 되십시다 은혜 받는 길, 옥토로 만드는 일, 열매 맺는 일, 좋은 신앙인이 되는 일, 어려운 일 아 닙니다. 내마음의 밭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습니까? 이시간 말씀을 듣는 이 자리에서 갈아 엎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신령한 단비를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걸핏하 면 남편도 찌르고 아내도 찌르고 자식도 부모도 찌르던 돌짝 밭이 되어있습니까? 영적 지도자도 찔렀고 그 돌멩이에 농부 되시는 주님도 찔렸습니다. 돌을 뽑아 내십시오. 이 제 우리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우리를 질식시켰던 가시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가지를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농부는 밭에서 잡초를 뽑아야 하고 정원사는 좋지않은 가지를 잘라야 하고 과일나무의 못된 가지는 전지전정을 잘 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농사짓는 어버이들을 보니까 모를 심어놓고 잡초를 뽑아 주고 김매기를 하더라구요. 벼가 어릴 때는 괜찮은데 이만큼 자라다 보 면 그것들이 목을 찌릅니다. 그러면 또 들어가서 김을 매 줍니다. 이런 고통 을 싫어하기 때문에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도끼로 잘라야 할 가시나무를 그냥 내버려 두었고 뿌리채 뽑아 버려야 할 찔레 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버려 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과나무보다 가시나 무에 더 호기심이 많았고 포도나무보다 찔레에 더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왜요? 영 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저 하게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투하는 사람을 보니까 눈이 찢어지고 코뼈가 부러지고 턱이 깨지고 머리가 깨져 피 가 줄줄 흐릅니다. 그러나 혈과 육의 싸움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는 처절한 싸움이 영 적인 싸움입니다. 때로는 자기를 잘라야 합니다. 친구를 잘라야 합니다. 단호하게 결단해야 됩니다. 염려를 자르고 욕심을 뽑고 유혹의 가시를 치고 쾌락을 자르고 습관을 뽑아버리고 정욕 을 불살라 버리고 잡초 인생을 알곡 인생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시밭 인생 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경상도 어느 시골 교회에 믿음 좋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앙 연조가 오 래 깊어갈수록 직분이 무거워졌고 마침내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끊지 못하고 있는게 하나 있었습니다. 담배가 끊어지지 않는 겁니다. 담배 한대 핀다고 지옥가는게 아닐테고 특별히 잘못된 것 없지만 이것 때문에 장로로써 구실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사람 분명히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 꼴을 하고 살아가니 도무지 자신감이 없습니다. 이것 끊지 않고는 내가 믿음 생활에 승리하기는 영 글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가 끊어 지지 않는 겁니다. 목사님 몰래, 교인들 몰래, 자식 몰래, 아내 몰래, 담배를 피는데 주로 시골 화장실에 앉아서 핍니다. 그 부인이 더운 여름날 구더기가 하도 많으니까 거기다가 석유를 한번씩 뿌려줍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석유가 없어서 휘발유를 한통 거기다가 뿌린 겁니다. 그래서 몰래 담배를 피고 담배 꽁초를 밑으로 딱 떨어뜨린 순간 불길이 확 솟았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 지요. 병원에 입원을 하고는 해괴망칙한 자세를 하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중얼 내뱉습니다. \"하나님 잘못 했데이. 용서해 주이소. 확 끊어버 릴 겁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아이구 아파라 확 끊어버릴 겁니다. 아이구 아파라~ 한번만 용서해 주이소\" 그러더랍니다. 끊을게 담배 뿐이겠습니까? 잘못된 것 끊지 못하면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VI. 결론 : 가시가 쓰일 곳 만일 어린아이가 가시를 가지고 놀다가 가시에 찔리면 소리를 지르고 가시를 대동댕이 치고 울면서 엄마~ 하고 달려옵니다. \"엄마, 가시가 박혔어!\" 그러면 엄마는 반지그릇 에서 바늘을 뽑아다가 머리카락에 슥슥 문지릅니다. 왜그런지 모르지만 콧김을 후~ 후~ 쐬더니 가시를 뽑아줍니다. 그것들이 좋아서 그것 얻으려고 몸부림을 하다가 찔렸습니다. 거기에 인생의 만족이 있을 줄 알고 그것 움켜쥐고 살아가다가 가슴이 멍들어 지고 말았습니다. 쾌락과 함께 놀다가 친구의 배신에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인생이 파괴되어지고 분해되어지고 와 해되어지고 찢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가시를 팽개치는 일입니다. 그 리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천부여 의지할 곳 없어 두손 들고 옵니다. 재물이 좋아 아버지를 버리고 재물따라 갔다가 창기에게 찔렸습니다. 친구의 배신에 찔렸습니다.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지만 배에 만족이 없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군과 양식이 얼마나 많은고 주여 날 받아 주시옵소서. ====== <330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 1.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 2.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 슬프던 마음 위로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 3.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 실망한 이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 4.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옵니다. ====== 멸망의 포구 헤어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옵니다 예수께로 오십시오. 가시를 버리고 가시밭 인생 집어치우고 열매맺는 행복한 신앙생 활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처럼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 입니다. 자아를 짤라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길가를 갈아 엎는 것입니다. 돌을 뽑아 내고 가시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주여 참아 주시옵소서 열매맺는 삶을 살겠습니다.
가시밭 신앙 /마13:7-8/마13:22-23/ 류영모목사 2015-01-05 21:53:55 read : 125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말씀을 향하여 : 열매 없는 인생 벤쟈민 J. 스타인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 가운데 "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의 8가지 습관"이란 글
가시밭 신앙 /마13:7-8/마13:22-23/ 류영모목사 2015-01-05 21:53:55 read : 125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말씀을 향하여 : 열매 없는 인생 벤쟈민 J. 스타인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 가운데 "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의 8가지 습관"이란 글이 있습니다. ① 자기 기만적인 성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이 며 나의 한계점은 무엇인가? 한계점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자기에게 속으며 살더라는 게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철학자들은 "너 자신을 알라" 그랬고, 국어선생님이 계신다면 "네 주 제를 알라" 그랬을 겁니다. 수확선생님은 "네 분수를 알라" 그랬겠지요. 지리선생님은 "네 위치를 알라" 그랬을 테고 미술선생님은 "네 꼬라지를 알라" 그랬을 겁니다. ② 두 번째 비 생산적인 행동입니다. 창조적인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 창조적으로 살아갈 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을 허비한다. ③ 세 번째 실패자는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하지 아니하고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 감 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을 업신여기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④ 네 번째 예의없는 행동입니다. 실패자는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고 잘못을 사과할 줄도 모르고 윗사람들이나 동료들에게 무례합니다. ⑤ 다섯 번째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더라. ⑥ 여섯 번째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실패자는 언제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 아니 말을 가지고 다 른 사람들을 오히려 오염시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⑦ Trouble maker들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 걸핏하면 논쟁을 일삼는 사람들도 실패자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논쟁을 일으키면 자기자신이 공동체 안에서 똑똑하다 인정을 받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천 만의 말씀입니다. ⑧ 여덟 번째 실패자는 우선순위를 모릅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 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에 실패한다는 것이지요. 벤자민 스타인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여 결국 실패자로 전락할 뿐 아니라 주위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알곡없는 논밭, 열매없는 과일나무, 거둘 것 없는 인생, 그것을 두고 오늘 본문은 「가시밭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가시밭 신앙」입니다. 일년동안 애써 가꾸어 왔는데 거둘 것이 없는 논밭을 바라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많 은 열매를 맺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나무가 잎만 무성이 달고 있다가 주님께 혼이 난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무화과 나무입니다. 마치 열매를 많이 맺은 것처럼 잎만 달고 폼만 잡고 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시는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 리라!" 주님은 열매없는 나무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열매없는 신앙생활을 싫어하십 니다. II. 가시밭이 무엇입니까? 가시밭이 무엇입니까? 이곳은 토양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씨가 떨어졌을 때 뿌리가 나고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만큼 자라다 보니 땅 속에 가시나무 뿌리가 자리잡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곡식과 가시가 같이 자 라는데 가시가 훨씬 빨리 자라고 크게 자라버렸습니다. 그늘을 만들어 곡식을 약하게 만들더니 마침내 곡식을 질식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에 가시밭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를 열심히 듣습니다. 은혜도 곧잘 받습 니다. 믿음자라는 소리가 쑥쑥 납니다. 북치고 장구치고 충성하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주일 받은 은혜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월요일 밤이면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와장창 납니다. 수요일쯤되면 한숨소리가 푹푹 터져나옵니다. 금 요일쯤되면 불평소리 터져나오고 풀이 죽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침내 교회에 나오 지 못하고 한 두번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이에 믿음을 잃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봉사도 부지런히 합니다. 행동에도 빈틈이 없습 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보면 밑바닥에 가시뿌리가 보입니다. 그 가시뿌리가 은혜의 자양분들을 다 빼앗아 먹고 말았습니다. 그 가시에 남도 찔렸고 자신도 찔렸습니다. 찌 르는 인생 실패합니다. 사랑의 보자기로 감쌀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III. 왜 가시가 생겼습니까? 왜 가시가 생겼습니까? 언제부터 가시떨기가 생겼습니까? 처음 에덴 동산에는 가시 와 떨기가 없었습니다. 저주받을 때 하나님께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겠고 그래서 창세기 3장 17절 이전에는 가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주를 나타내는 이 가시는 신 앙을 방해하는 악마의 소행으로 나타납니다. 타락이후 가시떨기는 타락한 사람들 가운 데서 자라는 당연한 부산물이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서 은혜는 단절되고 가 시떨기는 풍성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산야에 가시떨기는 도처에 널려 있었습 니다.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났고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내아버지 내어머니가 죄 중 에 살았고 내가 지금 죄 중에 아이를 또 낳습니다. 원죄가 우리 깊이 뿌리 박고 있습니 다. 그 죄의 뿌리는 인간의 본성을 통해 철저하게 뿌리를 박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놀라 운 속도로 번져 인간을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멸망의 길은 쉽고" 그랬습니다. 지옥가기는 쉽다는 얘기입니다. 가 만히만 있으면 지옥은 가게끔 되어있습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가라지는 자랍니다. 가시 는 뿌리를 박습니다.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죄악은 나를 지옥으로 데 려가 줄 것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악마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넓은 밭에 서너개의 싹이 납니다. 그 러나 얼마가지 않아 가시 떨기는 많아지고 곡식은 힘을 잃게 됩니다. 해방후 우리의 산들이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에 소나무 한두 그루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쩌다가 홍수가 나면 흙탕물이 온 내를 뒤덮곤 했습 니다. 번식력이 강한 나무가 없을까? 연구하고 있을 때에 독일의 한 산림학 자가 가시나무를 권장했습니다. 그래서 산야에 가시나무를 심었더니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는지 소나무마져 다 질식시킬 만큼 온 산에 가시나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죄는 무서운 번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죄의 문제를 해결 하지 아니하면 내 영혼을 잠식시키려는 악마를 퇴치하지 아니하면 마귀와 관계를 단절하 지 아니하면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IV. 신앙생활의 가시떨기들 이처럼 지독한 가시떨기의 구체적인 이름을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여기서 두 개의 가시를 말합니다. 첫째 세상의 염려, 둘째 재리의 유혹입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8장 14절에서는 이 두개의 가시 외에 "일락" 즉 세 상의 쾌락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가복음 4장 19절에서는 "기타 욕심"이 라는 가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공관복음을 종합해 보면 네가지의 가시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세상의 쾌락, 기타 욕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생활의 열매를 맺으려고 할 때에 행복한 신앙생활을 맛보며 살아가 려고 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은혜받는 삶을 살고자 할 때에 그것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있습니다. 내 신앙생활에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환란, 비바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무서운 적은 방해꾼은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내 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게끔 되어있습니다. 불평해도 소용없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썩었느냐? 세상이 왜 이렇게 안달라지지? 원망해도 소용없습니다. 세상이 다 달라진다 할지라도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은 그대로 있습니다. 세상이 다 썩어 문들어져도 내가 변하면 세상은 변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추운 겨울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찬 바람이 옷깃에 스며들고 단추를 잠가도 안되고 고개를 숙여도 안됩니다. 그래 서 생각다 못해 옷을 벗어 뒤집어 입었습니다. 단추부분이 뒤로 가고 뒤가 앞 으로 왔는데 달리면 달릴수록 뒤가 좍 달라 붙는게 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부르릉~ 속도를 내는 순간 바로 그 앞에 얼음짱이 있어서 꽈당! 넘어져 저만큼 날아 퍽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몇십명이 몰려 들었습니다. 아뿔사 이런 사고가? 큰 사고 같지도 않은데 목이 180°휙 돌아 가 있는 겁니다. 이거 오토바이가 문제가 아니다. 목부터 돌려놓고 보자. 어 깨 밟아라. 힘있는 청년들이 어깨를 밟고 목을 제자리 갖다 놓겠다고 180°돌 리는 사이에 모가지가 부러져 죽었답니다. 남의 목은 왜 돌려요? 내 관점을 바꾸고 내 시선을 바꾸고 나를 바꾸고 나면 세상은 달라지게끔 되어 있는 것 입니다. 1. 염려 공관복음서가 공히 첫 번째 가시 떨기로 들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염려"입니다. 때 로 의식주에 대한 염려들이 겉보기에 무해한 것 같으나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속 에 뿌려진 은혜의 씨를 질식시키는 묘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해 무익! 백가지 해가 될지언정 유익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 바로 그것이 "염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원문에 "염려"라고 하는 말이 메림네오입니다. 이 말은 물어 뜯는다. 찢는다. 쪼 갠다 + 마음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된 말입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내 인격을 파괴합 니다. 내 행복한 마음을 찢어놓는 것입니다. 그게 염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염 려는 날카로운 이빨로 갈기갈기 찢어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일을 철저히 지키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 다. 주일 날마다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찬양을 통하여 우리 삶의 존재가 바뀌어 지는 행복을 얻어야만이 우리가 이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 일거리들 때문에, 염려거리들 때문에, 우리는 믿음생활을 잃어 버리고 마는 것입 니다. 세상일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안달하고 속을 썩이는 걱정,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찌 들게 만들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실패로 만들어가는 벌레 두 마리가 있 습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을 갉아 먹는 벌레 두 마리가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요, 다른 하나는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염려입니다. 2. 재리의 유혹 두 번째 가시는 "재리의 유혹"입니다. 물질 자체가 가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Neutral - 중성입니다. 그러나 분명 재리의 유 혹은 가시떨기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는지 새 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물은 사람을 단번에 질식시키지는 않습니다. 재물에 의 한 질식은 아주 서서히 일어납니다. 오늘 비유의 잡초들처럼 서서히 성장합니다. 천천 히 아주 천천히 그것들은 신령한 싹들을 찌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 서 물성이 영성입니다. 돈 관리를 어떻게 하는가 보면 영성의 차원을 알 수 있는 것입 니다. 예수님께서 신앙 생활의 비유, 천국생활의 비유를 성경에 37가지를 남겨 주시고 계시는데 그 가운데 어떤 비유 보다도 많은 17가지가 물질에 관한 비유입니다. 저희 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예닮동산이라고 하는 영성훈련이 있습니다. 그 곳에 어떤 분이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들어왔어요. 여기오면 이거 할 시간 없는데 왜 가지고 들 어왔습니까? 물었더니 자기는 잠들기 전에 증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잠들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니 성경이니 생각할 겨를 없이 일단 두들겨서 내 증권이 어떻게 됐나 확인해야 그날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부득이 이곳까지 가지 고 왔다는 겁니다. 먹고 살기에 불편하지 않고 하나님 섬기기에 별로 불편하지 않으면 물질은 만족한 겁니다. 재리의 유혹! 바로 이것이 우리의 열매맺지 못하게 하는 무서 운 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설교가 스펄젼은 말하기를 "네가 회개했다고 하나 너희 전대 돈주머 니를 회개하기 전까지 나는 너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하나 네 돈 주머니를 열기까지 열려진 네 마음을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큰 상금과 명예가 걸려있는 경마대회 가 있었습니다. 한 여자 기수가 신나게 앞장서 달리는데 그 앞에 땡그렁 금화 하나가 떨어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유혹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말에 서 내려서 금돈을 주워 챙겼지요. 한참을 달렸습니다. 속력이 막 나려고 하 는데 또 금돈이 하나 땡그렁 떨어지며 반짝 빛이 났습니다. 다시 내려서 그 금돈을 주워 챙겼지요. 마땅히 일등을 하여 명예와 상급을 차지하려고 했던 이 기수는 명예도 상급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영적인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신앙인들이 황금을 줍기위해 멈추기 때문에 상 급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미끼에 걸려들고 마는 것입니다. "재리의 유혹"에 결실치 못하 는 자여! 3. 세상의 쾌락 세 번째 가시떨기는 "이 세상의 쾌락"입니다. 좋은 장소에서 적당한 휴식을 하는 것 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현대 도시인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락이 주업이 되고 쾌락이 목적이 될 때 그건 무서운 일입니다. 오락은 마치 "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약은 인간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유흥비 마련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쾌락을 얻기 위해 신앙과 진실을 버려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 가시떨기입니다. 오락이나 운동가운데 골프가 꽤 괜찮다고 합니다. 그런데 밥만 먹으면 골프 외에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약에 취한 것처럼 골프에 미쳐 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노래가 있습니다. 골프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골프공이 사망의 음침한 곳에 빠질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게 골프채가 있음이라. 골프의 막대 기와 골프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나를 원수의 목전에서 상 을 베푸시는 도다. 필시 그것들은 우리 영혼의 숨통을 막아 질식시키고 말게 끔 되어 있습니다. 4. 기타 욕심 이에 대하여 마가는 너무나 많은 잡동사니 가시와 찔레들을 "기타 욕심"이라고 표현했 습니다. 여기 기타 욕심은 끊임없는 욕심을 말합니다. 빈손 들고 온 인생 빈손 들고 하 나님 앞에 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울었다고 하는 알렉산더는 "내가 죽거들랑 관에 구멍을 뚫어라. 그리고 내 손을 밖으로 내밀어 벌려 놓아라. 빈손 들고 온 인생 온 세상을 정복했다고 하나 빈손 들고 가는게 인생이니라. 이게 인생입 니다. 어떤 부자가 죽었습니다. 기자가 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선친께서 얼마 나 남겼습니까?" 그 아들이 의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다 남겼습니다" 이 짤막한 대답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습니까? 아무 리 많이 가졌고 아무리 많은 것들을 모으면서 살아왔다고 하나 다 남겼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지옥이 무엇입니까? 무저갱이라고 합니다. 심연이라고 합니다. 가져도 만족이 없습 니다. 채워보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면 더! 더! 더! 하는 소리가 제일 많이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에까지 와서도 세상염려 근심 욕심 때문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얼굴 한번 제대로 펴고 웃지 못합니다. 못된 잡초와 가 시덤불에 짖눌려 철야하며 기도를 해도 기도를 하는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됩 니다. 이시간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몸과 마음이 엉뚱한데 가 있는 사람들, 생각을 엉뚱한데 빼앗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와서 자아와 인정욕구 때문에 자기를 긁으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귀 영화 명예 너무 얻으려 하지 마세요. 그곳이 지옥입니다. V. 가시 떨기를 제거하고 옥토가 되십시다 은혜 받는 길, 옥토로 만드는 일, 열매 맺는 일, 좋은 신앙인이 되는 일, 어려운 일 아 닙니다. 내마음의 밭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습니까? 이시간 말씀을 듣는 이 자리에서 갈아 엎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신령한 단비를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걸핏하 면 남편도 찌르고 아내도 찌르고 자식도 부모도 찌르던 돌짝 밭이 되어있습니까? 영적 지도자도 찔렀고 그 돌멩이에 농부 되시는 주님도 찔렸습니다. 돌을 뽑아 내십시오. 이 제 우리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우리를 질식시켰던 가시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가지를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농부는 밭에서 잡초를 뽑아야 하고 정원사는 좋지않은 가지를 잘라야 하고 과일나무의 못된 가지는 전지전정을 잘 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농사짓는 어버이들을 보니까 모를 심어놓고 잡초를 뽑아 주고 김매기를 하더라구요. 벼가 어릴 때는 괜찮은데 이만큼 자라다 보 면 그것들이 목을 찌릅니다. 그러면 또 들어가서 김을 매 줍니다. 이런 고통 을 싫어하기 때문에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도끼로 잘라야 할 가시나무를 그냥 내버려 두었고 뿌리채 뽑아 버려야 할 찔레 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버려 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과나무보다 가시나 무에 더 호기심이 많았고 포도나무보다 찔레에 더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왜요? 영 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저 하게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투하는 사람을 보니까 눈이 찢어지고 코뼈가 부러지고 턱이 깨지고 머리가 깨져 피 가 줄줄 흐릅니다. 그러나 혈과 육의 싸움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는 처절한 싸움이 영 적인 싸움입니다. 때로는 자기를 잘라야 합니다. 친구를 잘라야 합니다. 단호하게 결단해야 됩니다. 염려를 자르고 욕심을 뽑고 유혹의 가시를 치고 쾌락을 자르고 습관을 뽑아버리고 정욕 을 불살라 버리고 잡초 인생을 알곡 인생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시밭 인생 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경상도 어느 시골 교회에 믿음 좋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앙 연조가 오 래 깊어갈수록 직분이 무거워졌고 마침내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끊지 못하고 있는게 하나 있었습니다. 담배가 끊어지지 않는 겁니다. 담배 한대 핀다고 지옥가는게 아닐테고 특별히 잘못된 것 없지만 이것 때문에 장로로써 구실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사람 분명히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 꼴을 하고 살아가니 도무지 자신감이 없습니다. 이것 끊지 않고는 내가 믿음 생활에 승리하기는 영 글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가 끊어 지지 않는 겁니다. 목사님 몰래, 교인들 몰래, 자식 몰래, 아내 몰래, 담배를 피는데 주로 시골 화장실에 앉아서 핍니다. 그 부인이 더운 여름날 구더기가 하도 많으니까 거기다가 석유를 한번씩 뿌려줍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석유가 없어서 휘발유를 한통 거기다가 뿌린 겁니다. 그래서 몰래 담배를 피고 담배 꽁초를 밑으로 딱 떨어뜨린 순간 불길이 확 솟았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 지요. 병원에 입원을 하고는 해괴망칙한 자세를 하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중얼 내뱉습니다. "하나님 잘못 했데이. 용서해 주이소. 확 끊어버 릴 겁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아이구 아파라 확 끊어버릴 겁니다. 아이구 아파라~ 한번만 용서해 주이소" 그러더랍니다. 끊을게 담배 뿐이겠습니까? 잘못된 것 끊지 못하면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VI. 결론 : 가시가 쓰일 곳 만일 어린아이가 가시를 가지고 놀다가 가시에 찔리면 소리를 지르고 가시를 대동댕이 치고 울면서 엄마~ 하고 달려옵니다. "엄마, 가시가 박혔어!" 그러면 엄마는 반지그릇 에서 바늘을 뽑아다가 머리카락에 슥슥 문지릅니다. 왜그런지 모르지만 콧김을 후~ 후~ 쐬더니 가시를 뽑아줍니다. 그것들이 좋아서 그것 얻으려고 몸부림을 하다가 찔렸습니다. 거기에 인생의 만족이 있을 줄 알고 그것 움켜쥐고 살아가다가 가슴이 멍들어 지고 말았습니다. 쾌락과 함께 놀다가 친구의 배신에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인생이 파괴되어지고 분해되어지고 와 해되어지고 찢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가시를 팽개치는 일입니다. 그 리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천부여 의지할 곳 없어 두손 들고 옵니다. 재물이 좋아 아버지를 버리고 재물따라 갔다가 창기에게 찔렸습니다. 친구의 배신에 찔렸습니다.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지만 배에 만족이 없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군과 양식이 얼마나 많은고 주여 날 받아 주시옵소서. ====== <330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 1.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 2.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 슬프던 마음 위로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 3.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 실망한 이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 4.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옵니다. ====== 멸망의 포구 헤어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옵니다 예수께로 오십시오. 가시를 버리고 가시밭 인생 집어치우고 열매맺는 행복한 신앙생 활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처럼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 입니다. 자아를 짤라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길가를 갈아 엎는 것입니다. 돌을 뽑아 내고 가시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주여 참아 주시옵소서 열매맺는 삶을 살겠습니다.
가시밭 신앙 /마13:7-8/마13:22-23/ 류영모목사 2015-01-05 21:53:55 read : 125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말씀을 향하여 : 열매 없는 인생 벤쟈민 J. 스타인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 가운데 "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의 8가지 습관"이란 글
가시밭 신앙 /마13:7-8/마13:22-23/ 류영모목사 2015-01-05 21:53:55 read : 125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말씀을 향하여 : 열매 없는 인생 벤쟈민 J. 스타인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 가운데 "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의 8가지 습관"이란 글이 있습니다. ① 자기 기만적인 성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이 며 나의 한계점은 무엇인가? 한계점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자기에게 속으며 살더라는 게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철학자들은 "너 자신을 알라" 그랬고, 국어선생님이 계신다면 "네 주 제를 알라" 그랬을 겁니다. 수확선생님은 "네 분수를 알라" 그랬겠지요. 지리선생님은 "네 위치를 알라" 그랬을 테고 미술선생님은 "네 꼬라지를 알라" 그랬을 겁니다. ② 두 번째 비 생산적인 행동입니다. 창조적인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 창조적으로 살아갈 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을 허비한다. ③ 세 번째 실패자는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하지 아니하고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 감 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을 업신여기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④ 네 번째 예의없는 행동입니다. 실패자는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고 잘못을 사과할 줄도 모르고 윗사람들이나 동료들에게 무례합니다. ⑤ 다섯 번째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더라. ⑥ 여섯 번째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실패자는 언제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 아니 말을 가지고 다 른 사람들을 오히려 오염시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⑦ Trouble maker들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 걸핏하면 논쟁을 일삼는 사람들도 실패자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논쟁을 일으키면 자기자신이 공동체 안에서 똑똑하다 인정을 받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천 만의 말씀입니다. ⑧ 여덟 번째 실패자는 우선순위를 모릅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 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에 실패한다는 것이지요. 벤자민 스타인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여 결국 실패자로 전락할 뿐 아니라 주위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알곡없는 논밭, 열매없는 과일나무, 거둘 것 없는 인생, 그것을 두고 오늘 본문은 「가시밭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가시밭 신앙」입니다. 일년동안 애써 가꾸어 왔는데 거둘 것이 없는 논밭을 바라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많 은 열매를 맺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나무가 잎만 무성이 달고 있다가 주님께 혼이 난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무화과 나무입니다. 마치 열매를 많이 맺은 것처럼 잎만 달고 폼만 잡고 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다시는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 리라!" 주님은 열매없는 나무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열매없는 신앙생활을 싫어하십 니다. II. 가시밭이 무엇입니까? 가시밭이 무엇입니까? 이곳은 토양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씨가 떨어졌을 때 뿌리가 나고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만큼 자라다 보니 땅 속에 가시나무 뿌리가 자리잡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곡식과 가시가 같이 자 라는데 가시가 훨씬 빨리 자라고 크게 자라버렸습니다. 그늘을 만들어 곡식을 약하게 만들더니 마침내 곡식을 질식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에 가시밭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를 열심히 듣습니다. 은혜도 곧잘 받습 니다. 믿음자라는 소리가 쑥쑥 납니다. 북치고 장구치고 충성하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주일 받은 은혜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월요일 밤이면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와장창 납니다. 수요일쯤되면 한숨소리가 푹푹 터져나옵니다. 금 요일쯤되면 불평소리 터져나오고 풀이 죽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침내 교회에 나오 지 못하고 한 두번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이에 믿음을 잃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봉사도 부지런히 합니다. 행동에도 빈틈이 없습 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보면 밑바닥에 가시뿌리가 보입니다. 그 가시뿌리가 은혜의 자양분들을 다 빼앗아 먹고 말았습니다. 그 가시에 남도 찔렸고 자신도 찔렸습니다. 찌 르는 인생 실패합니다. 사랑의 보자기로 감쌀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III. 왜 가시가 생겼습니까? 왜 가시가 생겼습니까? 언제부터 가시떨기가 생겼습니까? 처음 에덴 동산에는 가시 와 떨기가 없었습니다. 저주받을 때 하나님께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겠고 그래서 창세기 3장 17절 이전에는 가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주를 나타내는 이 가시는 신 앙을 방해하는 악마의 소행으로 나타납니다. 타락이후 가시떨기는 타락한 사람들 가운 데서 자라는 당연한 부산물이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서 은혜는 단절되고 가 시떨기는 풍성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산야에 가시떨기는 도처에 널려 있었습 니다.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났고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았습니다. 내아버지 내어머니가 죄 중 에 살았고 내가 지금 죄 중에 아이를 또 낳습니다. 원죄가 우리 깊이 뿌리 박고 있습니 다. 그 죄의 뿌리는 인간의 본성을 통해 철저하게 뿌리를 박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놀라 운 속도로 번져 인간을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멸망의 길은 쉽고" 그랬습니다. 지옥가기는 쉽다는 얘기입니다. 가 만히만 있으면 지옥은 가게끔 되어있습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가라지는 자랍니다. 가시 는 뿌리를 박습니다.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죄악은 나를 지옥으로 데 려가 줄 것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악마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넓은 밭에 서너개의 싹이 납니다. 그 러나 얼마가지 않아 가시 떨기는 많아지고 곡식은 힘을 잃게 됩니다. 해방후 우리의 산들이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이곳저곳에 소나무 한두 그루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쩌다가 홍수가 나면 흙탕물이 온 내를 뒤덮곤 했습 니다. 번식력이 강한 나무가 없을까? 연구하고 있을 때에 독일의 한 산림학 자가 가시나무를 권장했습니다. 그래서 산야에 가시나무를 심었더니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는지 소나무마져 다 질식시킬 만큼 온 산에 가시나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죄는 무서운 번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죄의 문제를 해결 하지 아니하면 내 영혼을 잠식시키려는 악마를 퇴치하지 아니하면 마귀와 관계를 단절하 지 아니하면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IV. 신앙생활의 가시떨기들 이처럼 지독한 가시떨기의 구체적인 이름을 오늘 본문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여기서 두 개의 가시를 말합니다. 첫째 세상의 염려, 둘째 재리의 유혹입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8장 14절에서는 이 두개의 가시 외에 "일락" 즉 세 상의 쾌락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가복음 4장 19절에서는 "기타 욕심"이 라는 가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공관복음을 종합해 보면 네가지의 가시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세상의 쾌락, 기타 욕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생활의 열매를 맺으려고 할 때에 행복한 신앙생활을 맛보며 살아가 려고 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은혜받는 삶을 살고자 할 때에 그것을 방해하는 방해꾼이 있습니다. 내 신앙생활에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환란, 비바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무서운 적은 방해꾼은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내 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게끔 되어있습니다. 불평해도 소용없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썩었느냐? 세상이 왜 이렇게 안달라지지? 원망해도 소용없습니다. 세상이 다 달라진다 할지라도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세상은 그대로 있습니다. 세상이 다 썩어 문들어져도 내가 변하면 세상은 변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추운 겨울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찬 바람이 옷깃에 스며들고 단추를 잠가도 안되고 고개를 숙여도 안됩니다. 그래 서 생각다 못해 옷을 벗어 뒤집어 입었습니다. 단추부분이 뒤로 가고 뒤가 앞 으로 왔는데 달리면 달릴수록 뒤가 좍 달라 붙는게 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부르릉~ 속도를 내는 순간 바로 그 앞에 얼음짱이 있어서 꽈당! 넘어져 저만큼 날아 퍽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몇십명이 몰려 들었습니다. 아뿔사 이런 사고가? 큰 사고 같지도 않은데 목이 180°휙 돌아 가 있는 겁니다. 이거 오토바이가 문제가 아니다. 목부터 돌려놓고 보자. 어 깨 밟아라. 힘있는 청년들이 어깨를 밟고 목을 제자리 갖다 놓겠다고 180°돌 리는 사이에 모가지가 부러져 죽었답니다. 남의 목은 왜 돌려요? 내 관점을 바꾸고 내 시선을 바꾸고 나를 바꾸고 나면 세상은 달라지게끔 되어 있는 것 입니다. 1. 염려 공관복음서가 공히 첫 번째 가시 떨기로 들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염려"입니다. 때 로 의식주에 대한 염려들이 겉보기에 무해한 것 같으나 그것은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속 에 뿌려진 은혜의 씨를 질식시키는 묘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해 무익! 백가지 해가 될지언정 유익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 바로 그것이 "염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원문에 "염려"라고 하는 말이 메림네오입니다. 이 말은 물어 뜯는다. 찢는다. 쪼 갠다 + 마음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된 말입니다. 염려가 무엇입니까? 내 인격을 파괴합 니다. 내 행복한 마음을 찢어놓는 것입니다. 그게 염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염 려는 날카로운 이빨로 갈기갈기 찢어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일을 철저히 지키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 다. 주일 날마다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찬양을 통하여 우리 삶의 존재가 바뀌어 지는 행복을 얻어야만이 우리가 이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 일거리들 때문에, 염려거리들 때문에, 우리는 믿음생활을 잃어 버리고 마는 것입 니다. 세상일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안달하고 속을 썩이는 걱정,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찌 들게 만들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실패로 만들어가는 벌레 두 마리가 있 습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을 갉아 먹는 벌레 두 마리가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요, 다른 하나는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염려입니다. 2. 재리의 유혹 두 번째 가시는 "재리의 유혹"입니다. 물질 자체가 가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Neutral - 중성입니다. 그러나 분명 재리의 유 혹은 가시떨기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는지 새 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물은 사람을 단번에 질식시키지는 않습니다. 재물에 의 한 질식은 아주 서서히 일어납니다. 오늘 비유의 잡초들처럼 서서히 성장합니다. 천천 히 아주 천천히 그것들은 신령한 싹들을 찌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 서 물성이 영성입니다. 돈 관리를 어떻게 하는가 보면 영성의 차원을 알 수 있는 것입 니다. 예수님께서 신앙 생활의 비유, 천국생활의 비유를 성경에 37가지를 남겨 주시고 계시는데 그 가운데 어떤 비유 보다도 많은 17가지가 물질에 관한 비유입니다. 저희 교회가 실시하고 있는 예닮동산이라고 하는 영성훈련이 있습니다. 그 곳에 어떤 분이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들어왔어요. 여기오면 이거 할 시간 없는데 왜 가지고 들 어왔습니까? 물었더니 자기는 잠들기 전에 증권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잠들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니 성경이니 생각할 겨를 없이 일단 두들겨서 내 증권이 어떻게 됐나 확인해야 그날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부득이 이곳까지 가지 고 왔다는 겁니다. 먹고 살기에 불편하지 않고 하나님 섬기기에 별로 불편하지 않으면 물질은 만족한 겁니다. 재리의 유혹! 바로 이것이 우리의 열매맺지 못하게 하는 무서 운 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설교가 스펄젼은 말하기를 "네가 회개했다고 하나 너희 전대 돈주머 니를 회개하기 전까지 나는 너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하나 네 돈 주머니를 열기까지 열려진 네 마음을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큰 상금과 명예가 걸려있는 경마대회 가 있었습니다. 한 여자 기수가 신나게 앞장서 달리는데 그 앞에 땡그렁 금화 하나가 떨어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유혹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말에 서 내려서 금돈을 주워 챙겼지요. 한참을 달렸습니다. 속력이 막 나려고 하 는데 또 금돈이 하나 땡그렁 떨어지며 반짝 빛이 났습니다. 다시 내려서 그 금돈을 주워 챙겼지요. 마땅히 일등을 하여 명예와 상급을 차지하려고 했던 이 기수는 명예도 상급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영적인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신앙인들이 황금을 줍기위해 멈추기 때문에 상 급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미끼에 걸려들고 마는 것입니다. "재리의 유혹"에 결실치 못하 는 자여! 3. 세상의 쾌락 세 번째 가시떨기는 "이 세상의 쾌락"입니다. 좋은 장소에서 적당한 휴식을 하는 것 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현대 도시인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락이 주업이 되고 쾌락이 목적이 될 때 그건 무서운 일입니다. 오락은 마치 "약"과도 같은 것입니다. 약은 인간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유흥비 마련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쾌락을 얻기 위해 신앙과 진실을 버려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 가시떨기입니다. 오락이나 운동가운데 골프가 꽤 괜찮다고 합니다. 그런데 밥만 먹으면 골프 외에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약에 취한 것처럼 골프에 미쳐 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노래가 있습니다. 골프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골프공이 사망의 음침한 곳에 빠질지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게 골프채가 있음이라. 골프의 막대 기와 골프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나를 원수의 목전에서 상 을 베푸시는 도다. 필시 그것들은 우리 영혼의 숨통을 막아 질식시키고 말게 끔 되어 있습니다. 4. 기타 욕심 이에 대하여 마가는 너무나 많은 잡동사니 가시와 찔레들을 "기타 욕심"이라고 표현했 습니다. 여기 기타 욕심은 끊임없는 욕심을 말합니다. 빈손 들고 온 인생 빈손 들고 하 나님 앞에 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울었다고 하는 알렉산더는 "내가 죽거들랑 관에 구멍을 뚫어라. 그리고 내 손을 밖으로 내밀어 벌려 놓아라. 빈손 들고 온 인생 온 세상을 정복했다고 하나 빈손 들고 가는게 인생이니라. 이게 인생입 니다. 어떤 부자가 죽었습니다. 기자가 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선친께서 얼마 나 남겼습니까?" 그 아들이 의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다 남겼습니다" 이 짤막한 대답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습니까? 아무 리 많이 가졌고 아무리 많은 것들을 모으면서 살아왔다고 하나 다 남겼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지옥이 무엇입니까? 무저갱이라고 합니다. 심연이라고 합니다. 가져도 만족이 없습 니다. 채워보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면 더! 더! 더! 하는 소리가 제일 많이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에까지 와서도 세상염려 근심 욕심 때문에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얼굴 한번 제대로 펴고 웃지 못합니다. 못된 잡초와 가 시덤불에 짖눌려 철야하며 기도를 해도 기도를 하는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됩 니다. 이시간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몸과 마음이 엉뚱한데 가 있는 사람들, 생각을 엉뚱한데 빼앗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와서 자아와 인정욕구 때문에 자기를 긁으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귀 영화 명예 너무 얻으려 하지 마세요. 그곳이 지옥입니다. V. 가시 떨기를 제거하고 옥토가 되십시다 은혜 받는 길, 옥토로 만드는 일, 열매 맺는 일, 좋은 신앙인이 되는 일, 어려운 일 아 닙니다. 내마음의 밭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습니까? 이시간 말씀을 듣는 이 자리에서 갈아 엎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신령한 단비를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걸핏하 면 남편도 찌르고 아내도 찌르고 자식도 부모도 찌르던 돌짝 밭이 되어있습니까? 영적 지도자도 찔렀고 그 돌멩이에 농부 되시는 주님도 찔렸습니다. 돌을 뽑아 내십시오. 이 제 우리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우리를 질식시켰던 가시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가지를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농부는 밭에서 잡초를 뽑아야 하고 정원사는 좋지않은 가지를 잘라야 하고 과일나무의 못된 가지는 전지전정을 잘 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농사짓는 어버이들을 보니까 모를 심어놓고 잡초를 뽑아 주고 김매기를 하더라구요. 벼가 어릴 때는 괜찮은데 이만큼 자라다 보 면 그것들이 목을 찌릅니다. 그러면 또 들어가서 김을 매 줍니다. 이런 고통 을 싫어하기 때문에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도끼로 잘라야 할 가시나무를 그냥 내버려 두었고 뿌리채 뽑아 버려야 할 찔레 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버려 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과나무보다 가시나 무에 더 호기심이 많았고 포도나무보다 찔레에 더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왜요? 영 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저 하게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투하는 사람을 보니까 눈이 찢어지고 코뼈가 부러지고 턱이 깨지고 머리가 깨져 피 가 줄줄 흐릅니다. 그러나 혈과 육의 싸움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는 처절한 싸움이 영 적인 싸움입니다. 때로는 자기를 잘라야 합니다. 친구를 잘라야 합니다. 단호하게 결단해야 됩니다. 염려를 자르고 욕심을 뽑고 유혹의 가시를 치고 쾌락을 자르고 습관을 뽑아버리고 정욕 을 불살라 버리고 잡초 인생을 알곡 인생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열매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시밭 인생 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경상도 어느 시골 교회에 믿음 좋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앙 연조가 오 래 깊어갈수록 직분이 무거워졌고 마침내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끊지 못하고 있는게 하나 있었습니다. 담배가 끊어지지 않는 겁니다. 담배 한대 핀다고 지옥가는게 아닐테고 특별히 잘못된 것 없지만 이것 때문에 장로로써 구실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사람 분명히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 꼴을 하고 살아가니 도무지 자신감이 없습니다. 이것 끊지 않고는 내가 믿음 생활에 승리하기는 영 글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가 끊어 지지 않는 겁니다. 목사님 몰래, 교인들 몰래, 자식 몰래, 아내 몰래, 담배를 피는데 주로 시골 화장실에 앉아서 핍니다. 그 부인이 더운 여름날 구더기가 하도 많으니까 거기다가 석유를 한번씩 뿌려줍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석유가 없어서 휘발유를 한통 거기다가 뿌린 겁니다. 그래서 몰래 담배를 피고 담배 꽁초를 밑으로 딱 떨어뜨린 순간 불길이 확 솟았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 지요. 병원에 입원을 하고는 해괴망칙한 자세를 하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중얼 내뱉습니다. "하나님 잘못 했데이. 용서해 주이소. 확 끊어버 릴 겁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아이구 아파라 확 끊어버릴 겁니다. 아이구 아파라~ 한번만 용서해 주이소" 그러더랍니다. 끊을게 담배 뿐이겠습니까? 잘못된 것 끊지 못하면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VI. 결론 : 가시가 쓰일 곳 만일 어린아이가 가시를 가지고 놀다가 가시에 찔리면 소리를 지르고 가시를 대동댕이 치고 울면서 엄마~ 하고 달려옵니다. "엄마, 가시가 박혔어!" 그러면 엄마는 반지그릇 에서 바늘을 뽑아다가 머리카락에 슥슥 문지릅니다. 왜그런지 모르지만 콧김을 후~ 후~ 쐬더니 가시를 뽑아줍니다. 그것들이 좋아서 그것 얻으려고 몸부림을 하다가 찔렸습니다. 거기에 인생의 만족이 있을 줄 알고 그것 움켜쥐고 살아가다가 가슴이 멍들어 지고 말았습니다. 쾌락과 함께 놀다가 친구의 배신에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인생이 파괴되어지고 분해되어지고 와 해되어지고 찢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가시를 팽개치는 일입니다. 그 리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천부여 의지할 곳 없어 두손 들고 옵니다. 재물이 좋아 아버지를 버리고 재물따라 갔다가 창기에게 찔렸습니다. 친구의 배신에 찔렸습니다.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지만 배에 만족이 없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군과 양식이 얼마나 많은고 주여 날 받아 주시옵소서. ====== <330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 1.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 2.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 슬프던 마음 위로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 3.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옵니다. ====== 실망한 이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 4.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옵니다. ======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주께로 옵니다. ====== 멸망의 포구 헤어나와 평화의 나라 다다라서 ====== 영광의 주를 뵈오려고 주께로 옵니다 예수께로 오십시오. 가시를 버리고 가시밭 인생 집어치우고 열매맺는 행복한 신앙생 활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처럼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 입니다. 자아를 짤라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길가를 갈아 엎는 것입니다. 돌을 뽑아 내고 가시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주여 참아 주시옵소서 열매맺는 삶을 살겠습니다.
가장 귀한 것으로 /삼하23:13-17/ 류영모목사
가장 귀한 것으로 /삼하23:13-17/ 류영모목사 2015-01-06 14:49:35 □ 만남의 축복 우리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만남을 갖느냐에 따라서 삶의 내용과 질이 결정됩니다. 좋은 만남은 그들의 삶을 복된 삶이 되게 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만남은 인생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늘 좋은 만남을 주시도록 기도하고는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만남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하곤 합니다. 좋은 선생, 좋은 친구, 좋은 신앙의 선배, 좋은 배우자, 좋은 직장 동료, 좋은 직장 상사...를 만나는 축복을 주옵소서! 이것보다 귀한 축복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출세하고 성공했지만 그로 인해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 젊은 날의 대부분을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기가 막히는 것은 그의 장인이 군대까지 동원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들로 산으로도망 다니면서 수년을 헤매야 했습니다. 붙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이기에 늘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힘든 삶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장래가 없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곤고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한가지 축복을 주셨습니다. 만남의 축복이었습니다.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었고 미래가 없어 보이는 삶이었지만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지혜자들\"도 있었고, 의리가 있는 \"신실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용맹한 장수들\"들도 있었습니다. 참 귀한 만남의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 다윗의 간절한 바램과 강한 용사들 오랜 도망 생활 때문에 그는 수년동안 고향에를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든 부모님이 계시는 베들레헴은 언제나 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고향, 수많은 추억들이 서린 고향이었기에 단숨에라도 달려가고 싶은 곳이었고, 꿈에라도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오늘 그의 생활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더더군다나사울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제정신이 아닌 채로 날 뛰고 있을 때, 블레셋이 침공해와서 베들레헴과 그 주변을 점령해 버렸기에 이제 고향 땅은 적군의 진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영 갈 수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손꼽아 보니 고향에 간지가 벌써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어린 소년기에 고향을 떠났기에 무엇보다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했습니다. 며칠 후면 구정이어서 그날은 유난히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고향이 그리웠습니다. 작전 회의를 마치고 다른 장수들은 다 돌아가고, 오른팔과 같은 세 장수들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향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윗은 중얼거리듯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왜 이렇게 고향 생각이 많이 날까? 오늘은 유난히 늙으신 어머니가 보고 싶네, 그려. 고향마을 앞에 있는 우물의 물이라도 한 모금 먹었으면 한이 없겠어!\"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다가 세 장수들은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데, 부르는 소리에 다윗은 눈을 떴습니다. 지난밤 늦게 돌아간 세 장수들이 밤이슬에 젖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들 손에는 물 한컵이들려 있었습니다. 그 밤, 그들은 그들의 진영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적군의 진지를 뚫고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까지 가서 다윗이 원하던 물을 길어온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요새화 되었고, 블레셋 군대의 총본부(headquarter)가 있던 곳이었기에 경비가 얼마나 삼엄했을 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적진을 뚫고 간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에 물 한 모금 떠오기 위해 세 장수들은 그 일에 그들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의 스승이기도 한, Columbia 신학대학원의 유명한 구약학 교수인 Walter Brueggemann박사는 그의 \"사무엘서 Interpretation 주석\"에서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그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용기와 충성심의 모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They are \"the model of courage and loyalty).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용기와 충성심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섬길 때, 주의 일을 감당할 때 이렇게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섬긴 것입니까? 8-12절에 의하면 성경은 그들이 \"강한 용사\"였다고소개합니다. \"강한 용사!\" 그 이미지를 그려보십시오. 얼마나 듬직하며 얼마나 자랑스러운 모습입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강한 용사\"라고 서슴치 않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그들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용사였다고 말합니까? 실버 스텔론과 같이 근육질로 가득찬 몸매를 가졌기 때문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최근 작품성이나 예술성과는 별 상관없이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는 \"조폭 사모님\"에서와 같이 힘으로 밀어 부치는 근력 때문에 강한 용사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출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겁을 모르는 용감한 사람들이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전투에 나가서 싸움을 잘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남다른 \"충성심,\" 남다른 \"사랑함,\"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 생활 하는 데에도 없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용사가 되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심\'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용기\'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난주간 저희 장신대에서는 신대원 신입생들을 선발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심층면접과 인성검사를 했습니다. 그들이 기록한 자기 소개서와 신앙고백서 등을 꼼꼼이 읽고 이것 저것을 묻고 확인했습니다. 참 좋은 직장과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온 분들도 있었습니다. 굉장한 비전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틀을 면접하면서 깊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분별하여 선발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좋은 학벌과 학위를 가졌다고,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졌다고, 혹은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하나님의 좋은 용사가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강한 용사는 얼마나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졌고, 재력을 가졌느냐로 결정되어지지 않습니다. 강한 용사는 얼마나 주님을 뜨겁게사랑하는 사람이냐로 결정됩니다. 강한 용사는 얼마나 간절하게 주님을 섬기느냐로 결정됩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영적 싸움을 하는 용사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용사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날마다 계속되는 영적 전투에서 날마다 깨지고, 쫓기고, 두둘겨 맞고, 날마다 얻어터지며, 날마다 KO 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사는 충성스런 용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경험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한다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나라 밖에 서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면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입니다. 갓난아이와 같이 영적으로 새롭게 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진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용사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며, 예배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렇게 성숙해 가면서 가져야 할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강한 용사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진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오늘 하나님 나라와 그 사역을 위해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몇년전 여름 시카고 외곽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를 갔더니 넓은 주차장에 안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해 몇 가지를 물어보면서 알게 된 것은 주차장에서 안내해주는 그분이 명문 시카고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현직 교수들 가운데서 노벨상 수상자가 가장 많은 대학이지요. 시카고대학의 교수는 생업을 위한 직업이고, 오늘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 자신의 사명은 주차장에서 주차안내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0도가 넘는 더위와 싸워야 합니다. 한 겨울에 미시간 호수에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아야 합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명 감당하는 일은 우리의 땀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의 시간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의 수고를 요구합니다. 때로는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해를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사명의 길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충성스런 일꾼들, 헌신된 일꾼들은 그러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경은 \"강한 용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들을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 생명을 건 헌신 이 용감한 이 세 용사들은. 다윗 군대의 30명의 지휘관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용사들로 표현됩니다.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었습니다. James Bond가 전속으로 출현한 007시리즈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다. \"007 Never Die\"라는 제목의 영화도 있습니다만 정말 주인공 007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는 웬만한 전투와 적진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들러리들은 멀리에서 터진 폭탄 파편에 맞아 죽지만, 주인공은 기관총을 난사하는 그곳을 지나가도 총알이 다 피해갑니다. 혹 총탄에 맞았어도, 적의 손에 붙잡혀도 걱정이 없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다 살게 되어 있습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공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본이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빗발치듯 날아오는 총알을 뚫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으로 잠입한 세 용사들에게 Happy Ending의 각본이나 보장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왕을 위해서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물길으러 가면 반드시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서, 주의 일하면서 하나님과 Bargain(협상)하려고 합니다. 내가 헌금을 얼마를 하고, 내가 무슨 봉사를 하고, 내가 무슨 일을 하면 하나님은 이만큼 축복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축복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드리는 헌신, 드리는 봉사가 진짜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다윗의 고향 앞에 있는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러옵니다. 그들이 들고 온 물 한 잔은 단순한 물 잔이 아니었습니다. 왕궁의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생명을 담아온 핏잔이었습니다. 세 용사들은 너무 용감해서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어서 뛰어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술이 뛰어나서 적진을 뚫고 갈 만큼 용감무쌍한 용사들이었기 때문에 달려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헌신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헌신된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십니까? 하나님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SMU)의 Iliff School of Theology라는 신학부가 있는데, 그곳의 유명한 설교학 교수인 Thomas Troeger박사가 그의 설교 가운데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공산군이 점령해 들어오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현장에서 처형하기 위해 신문하던 공산군은 사로잡혀온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무엇하던 사람이야? 예수쟁이지?\" 그들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그리스인들에게 주님을 부인할 것을 위협적으로 요구합니다. 함께 붙잡혀온 그의 어린 아들에게까지도 총을 겨누면서 위협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목숨을 걸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귀한 헌신, 그들의 눈물의 헌신, 그들의 목숨과 자식의 목숨까지도 드리는 피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고, 한국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 복음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썩어져 없어질 인생과 그 향락을 추구하는 일에 인생의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사역을 위해서 헌신할 마음의 준비가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 교회는 살아납니다. 교회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논리 정연한 \'머리꾼\'이 아닙니다. 교회의 행정을 잘 알고, 교회 정치를 잘 아는 \'이론가\'가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는 어떻고, 교회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정확한 논리와 판단력으로 잣대질하는 \'비평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에 필요한 것은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어떤 어려움에도, 어떤 손해 앞에서도, 어떤 여건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뛰어가는 \"헌신된 믿음의 용사들\"이 필요합니다. □ 헌신된 사람들이 가졌던 확신. 그러나 헌신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세 용사들이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한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삼하 18:2-3 말씀을 보십시다. 다윗이 전투를 앞두고 군대를 편성하고 지휘관들을 세우고 작전명령을 내립니다. 어려운 전투에 임하는 군대를 편성하고 나서 다윗은 그도 전투에 나갈 것이라고 병사들을 독려합니다. \"나도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그때 전투에 나가는 다윗의 군대가 보인 반응을 보십시오. 왕은 나가시면 안됩니다. 적군이 우리들 절반이 죽어도 주의하지 않지만 그들은 가장 중요한 왕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요한 분이시니 성에 남아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스려 주시는 것이 우리를 가장 잘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왕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들이 알았던 것은 그들이 섬기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셔서 사용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다윗을 좋아했지만 하나님이 오늘 그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다윗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귀한 분이었기에 그분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대신 내놓고 있습니다. 세 용사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이 그렇게 간절히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의 샘물 한잔을 마시고 싶어할 때, 그가 귀했기 때문에 그들은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의 왕 다윗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오늘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만이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소중한 분으로 아는 사람은 헌신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내 생에 있어서 주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아는 사람만이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주님은 무엇입니까? 다윗을 그들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던 세 용사들은 헌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더 놀라운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은 무엇입니까? □ 우리가 드려야할 헌신,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 그들이 가져온 것은 그들의 핏잔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그들의 삶 전부를 담은 잔이었습니다. 1999년 미국 장로교회 한인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에 캘리포니아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과 함께 강사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만 그때 그분은 그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가서 새로 건축한 교회에 입당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건축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LA의 에너하임 시 한복판에 10.8에이커(약 13,000평)의 대지에, 약 1000만 달러(약 140억)가 넘는 대공사를 마쳤다고 했습니다. 이민교회에서는 1000만 달러라면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 감동하지는 않았습니다. 2년 전, 1차 헌신 주일에 교인 1000여명이 537만 달러(약 80억원)를 헌금했다고 했습니다. 이민자들의 삶은 아는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잘 압니다. 1불, 2불 때문에 언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다운타운 그 위험한 곳에 들어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서 번 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내놓은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 헌금은 그들의 생명을 걸고 얻은 핏잔들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헌금이요 헌신이었습니다. 이민 교회를 사역하고 있어서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엄청난 헌금을 했다는 것 때문에 감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헌금을 드리고 통성으로 기도하는데, 그러한 생명과 같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고 난 성도들이 울면서 하나님께 몸부림치면서 그런 기도를 드리더랍니다. \"하나님, 더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이 없어요.\" 그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울었습니다. 그 목사님도 울었고, 저도 울었습니다. 그들은 그 성전을 Miracle Complex--\"기적의 땅, 기적의 건물\"이라고 명명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어 주신 자리라는 뜻에서 였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헌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을 계속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적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기적을 기대한다고 해서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의 삶을 살는 사람들 속에 오늘도 하나님은 기적을 계속해서 일으키십니다. 올 한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실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십시오. 용사들이 핏잔을 가져왔을 때 다윗을 그것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한 소중한 헌신을 누가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을 하나님께 부어 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로 드립니다. 그래서 다윗과 하나님이 만남의 축복을 주셔서 만나게 하신 세 용사들의 영광스런 예배가 시작됩니다. 그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장소는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다윗의 궁궐에서 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굉장한 예물을 드렸던 희생 제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새벽, 다윗과 세용사가 아둘람 굴 앞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드렸던 예배는 최고의 예배였습니다. 그들이 드렸던 것은 물 한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피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땀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던 거룩한 희생이었습니다. 그 핏잔을 아무도 받기를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올려드립니다. 울면서 예배합니다. 감격하면서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되는대로 나오지 마십시오. 아무렇게 드리지 마십시오. 최고의 것을 드리십시오. 생명의 핏잔을 부어 하나님께 드리듯, 가장 귀한 것을 내려놓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올 한해 가장 좋은 예배를 드리는 좋은 예배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해보십시오. 오늘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충성스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헌신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기적을 원하십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 더 드리고 싶은데 더 드릴 것이 없어요!\" 그 고백을 가지고 나아와 생명의 잔을 드리는 예배자들, 한 주간 직장에서, 가정에서,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믿음으로 달려간 사람들이 핏잔을 주님께 부어드리며 예배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좋은 예배자들이 있을 때, 그곳에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기적들, 예배의 축복들을 허락하십니다. 영국의 육상 팀이 1924년 LA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100m 경주에서 유력한 우승후보인 \'에릭 리델\'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오면서, 자기의 경기 일정이 주일로 잡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에 도착해서 깊은 생각 끝에 그는 코치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저는 주일에는 달리지 않습니다.\" 감독이, 대표팀 단장이, 심지어는 영국에서 황태자까지 찾아와서 설득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기가 있던 그 시간 어느 교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며칠후 400m 경주가 있었습니다. 출전 예상자였던 친구가 자기는 도무지 우승할 가능성이 없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것을 에릭에게 양보합니다. 그는 단거리 선수이지 중단거리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단거리 선수가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신 출전했습니다. 그는 출발선에 엎드려 신호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나직히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린다. 내가 달리고 달릴 때, 하나님은 나를 더 빠르게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해주신다.\" 그는 한번도 선수로 출전해 보았던 적이 없는 400m 허들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에릭 리델의 이 이야기가 \"The Chariot of Fire\"(불수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81년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지옥과 같은 혹독한 훈련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출전해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선수들에게는 거의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금메달의 영예도, 사람들의 박수 갈채도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헌신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주님을 위해서 포기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서 바칩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올 한해가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셔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넘치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빕니다. H. B. Grose는 302장 찬송에서 그렇게 고백합니다. 2. 주님께 내 귀한 것과 내 맘과 내 생각도 주 위해 온몸을 바쳐 힘 다해 섬기면 독생자 보내신 성부 은혜로 갚아 주리. 그대의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기어라.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 3. 우리의 귀한 것 모두 주님께 바치어도 단번에 생명을 주신 그 사랑 못 갚네. 하늘의 영광을 버려 우리를 구했으니 그대의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어라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
가장 귀한 것으로 /삼하23:13-17/ 류영모목사 2015-01-06 14:49:35 read : 124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만남의 축복 우리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만남을 갖느냐에 따라서 삶의 내용과 질이 결정됩니다. 좋은 만남은 그들의 삶을 복된 삶이 되게
가장 귀한 것으로 /삼하23:13-17/ 류영모목사 2015-01-06 14:49:35 read : 124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만남의 축복 우리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만남을 갖느냐에 따라서 삶의 내용과 질이 결정됩니다. 좋은 만남은 그들의 삶을 복된 삶이 되게 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만남은 인생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늘 좋은 만남을 주시도록 기도하고는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만남의 축복"을 주시기를 기도하곤 합니다. 좋은 선생, 좋은 친구, 좋은 신앙의 선배, 좋은 배우자, 좋은 직장 동료, 좋은 직장 상사...를 만나는 축복을 주옵소서! 이것보다 귀한 축복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출세하고 성공했지만 그로 인해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 젊은 날의 대부분을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기가 막히는 것은 그의 장인이 군대까지 동원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들로 산으로도망 다니면서 수년을 헤매야 했습니다. 붙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이기에 늘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힘든 삶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장래가 없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곤고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한가지 축복을 주셨습니다. 만남의 축복이었습니다.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었고 미래가 없어 보이는 삶이었지만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지혜자들"도 있었고, 의리가 있는 "신실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용맹한 장수들"들도 있었습니다. 참 귀한 만남의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 다윗의 간절한 바램과 강한 용사들 오랜 도망 생활 때문에 그는 수년동안 고향에를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든 부모님이 계시는 베들레헴은 언제나 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고향, 수많은 추억들이 서린 고향이었기에 단숨에라도 달려가고 싶은 곳이었고, 꿈에라도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오늘 그의 생활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더더군다나사울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제정신이 아닌 채로 날 뛰고 있을 때, 블레셋이 침공해와서 베들레헴과 그 주변을 점령해 버렸기에 이제 고향 땅은 적군의 진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영 갈 수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손꼽아 보니 고향에 간지가 벌써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어린 소년기에 고향을 떠났기에 무엇보다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했습니다. 며칠 후면 구정이어서 그날은 유난히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고향이 그리웠습니다. 작전 회의를 마치고 다른 장수들은 다 돌아가고, 오른팔과 같은 세 장수들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향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윗은 중얼거리듯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왜 이렇게 고향 생각이 많이 날까? 오늘은 유난히 늙으신 어머니가 보고 싶네, 그려. 고향마을 앞에 있는 우물의 물이라도 한 모금 먹었으면 한이 없겠어!"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다가 세 장수들은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데, 부르는 소리에 다윗은 눈을 떴습니다. 지난밤 늦게 돌아간 세 장수들이 밤이슬에 젖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들 손에는 물 한컵이들려 있었습니다. 그 밤, 그들은 그들의 진영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적군의 진지를 뚫고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까지 가서 다윗이 원하던 물을 길어온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요새화 되었고, 블레셋 군대의 총본부(headquarter)가 있던 곳이었기에 경비가 얼마나 삼엄했을 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적진을 뚫고 간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에 물 한 모금 떠오기 위해 세 장수들은 그 일에 그들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의 스승이기도 한, Columbia 신학대학원의 유명한 구약학 교수인 Walter Brueggemann박사는 그의 "사무엘서 Interpretation 주석"에서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그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용기와 충성심의 모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They are "the model of courage and loyalty). 그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용기와 충성심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섬길 때, 주의 일을 감당할 때 이렇게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섬긴 것입니까? 8-12절에 의하면 성경은 그들이 "강한 용사"였다고소개합니다. "강한 용사!" 그 이미지를 그려보십시오. 얼마나 듬직하며 얼마나 자랑스러운 모습입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강한 용사"라고 서슴치 않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그들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이었기에 용사였다고 말합니까? 실버 스텔론과 같이 근육질로 가득찬 몸매를 가졌기 때문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최근 작품성이나 예술성과는 별 상관없이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는 "조폭 사모님"에서와 같이 힘으로 밀어 부치는 근력 때문에 강한 용사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출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겁을 모르는 용감한 사람들이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전투에 나가서 싸움을 잘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남다른 "충성심," 남다른 "사랑함,"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 생활 하는 데에도 없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용사가 되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심'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용기'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난주간 저희 장신대에서는 신대원 신입생들을 선발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심층면접과 인성검사를 했습니다. 그들이 기록한 자기 소개서와 신앙고백서 등을 꼼꼼이 읽고 이것 저것을 묻고 확인했습니다. 참 좋은 직장과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온 분들도 있었습니다. 굉장한 비전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틀을 면접하면서 깊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용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분별하여 선발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좋은 학벌과 학위를 가졌다고,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졌다고, 혹은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하나님의 좋은 용사가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강한 용사는 얼마나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졌고, 재력을 가졌느냐로 결정되어지지 않습니다. 강한 용사는 얼마나 주님을 뜨겁게사랑하는 사람이냐로 결정됩니다. 강한 용사는 얼마나 간절하게 주님을 섬기느냐로 결정됩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영적 싸움을 하는 용사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용사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날마다 계속되는 영적 전투에서 날마다 깨지고, 쫓기고, 두둘겨 맞고, 날마다 얻어터지며, 날마다 KO 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사는 충성스런 용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경험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한다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나라 밖에 서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면 그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입니다. 갓난아이와 같이 영적으로 새롭게 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진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용사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며, 예배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렇게 성숙해 가면서 가져야 할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의 강한 용사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진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오늘 하나님 나라와 그 사역을 위해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몇년전 여름 시카고 외곽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를 갔더니 넓은 주차장에 안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해 몇 가지를 물어보면서 알게 된 것은 주차장에서 안내해주는 그분이 명문 시카고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현직 교수들 가운데서 노벨상 수상자가 가장 많은 대학이지요. 시카고대학의 교수는 생업을 위한 직업이고, 오늘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 자신의 사명은 주차장에서 주차안내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0도가 넘는 더위와 싸워야 합니다. 한 겨울에 미시간 호수에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아야 합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명 감당하는 일은 우리의 땀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의 시간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의 수고를 요구합니다. 때로는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해를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사명의 길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충성스런 일꾼들, 헌신된 일꾼들은 그러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경은 "강한 용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들을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 생명을 건 헌신 이 용감한 이 세 용사들은. 다윗 군대의 30명의 지휘관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용사들로 표현됩니다.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었습니다. James Bond가 전속으로 출현한 007시리즈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다. "007 Never Die"라는 제목의 영화도 있습니다만 정말 주인공 007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는 웬만한 전투와 적진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들러리들은 멀리에서 터진 폭탄 파편에 맞아 죽지만, 주인공은 기관총을 난사하는 그곳을 지나가도 총알이 다 피해갑니다. 혹 총탄에 맞았어도, 적의 손에 붙잡혀도 걱정이 없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해도 걱정이 없습니다. 다 살게 되어 있습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공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본이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빗발치듯 날아오는 총알을 뚫고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으로 잠입한 세 용사들에게 Happy Ending의 각본이나 보장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왕을 위해서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물길으러 가면 반드시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서, 주의 일하면서 하나님과 Bargain(협상)하려고 합니다. 내가 헌금을 얼마를 하고, 내가 무슨 봉사를 하고, 내가 무슨 일을 하면 하나님은 이만큼 축복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축복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드리는 헌신, 드리는 봉사가 진짜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다윗의 고향 앞에 있는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러옵니다. 그들이 들고 온 물 한 잔은 단순한 물 잔이 아니었습니다. 왕궁의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생명을 담아온 핏잔이었습니다. 세 용사들은 너무 용감해서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어서 뛰어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술이 뛰어나서 적진을 뚫고 갈 만큼 용감무쌍한 용사들이었기 때문에 달려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헌신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헌신된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십니까? 하나님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SMU)의 Iliff School of Theology라는 신학부가 있는데, 그곳의 유명한 설교학 교수인 Thomas Troeger박사가 그의 설교 가운데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공산군이 점령해 들어오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현장에서 처형하기 위해 신문하던 공산군은 사로잡혀온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무엇하던 사람이야? 예수쟁이지?" 그들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그리스인들에게 주님을 부인할 것을 위협적으로 요구합니다. 함께 붙잡혀온 그의 어린 아들에게까지도 총을 겨누면서 위협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목숨을 걸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귀한 헌신, 그들의 눈물의 헌신, 그들의 목숨과 자식의 목숨까지도 드리는 피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고, 한국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 복음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썩어져 없어질 인생과 그 향락을 추구하는 일에 인생의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사역을 위해서 헌신할 마음의 준비가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 교회는 살아납니다. 교회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논리 정연한 '머리꾼'이 아닙니다. 교회의 행정을 잘 알고, 교회 정치를 잘 아는 '이론가'가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는 어떻고, 교회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정확한 논리와 판단력으로 잣대질하는 '비평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에 필요한 것은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어떤 어려움에도, 어떤 손해 앞에서도, 어떤 여건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뛰어가는 "헌신된 믿음의 용사들"이 필요합니다. □ 헌신된 사람들이 가졌던 확신. 그러나 헌신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다윗의 세 용사들이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한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삼하 18:2-3 말씀을 보십시다. 다윗이 전투를 앞두고 군대를 편성하고 지휘관들을 세우고 작전명령을 내립니다. 어려운 전투에 임하는 군대를 편성하고 나서 다윗은 그도 전투에 나갈 것이라고 병사들을 독려합니다. "나도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그때 전투에 나가는 다윗의 군대가 보인 반응을 보십시오. 왕은 나가시면 안됩니다. 적군이 우리들 절반이 죽어도 주의하지 않지만 그들은 가장 중요한 왕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요한 분이시니 성에 남아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스려 주시는 것이 우리를 가장 잘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왕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들이 알았던 것은 그들이 섬기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셔서 사용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다윗을 좋아했지만 하나님이 오늘 그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다윗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귀한 분이었기에 그분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대신 내놓고 있습니다. 세 용사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이 그렇게 간절히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의 샘물 한잔을 마시고 싶어할 때, 그가 귀했기 때문에 그들은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헌신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의 왕 다윗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셔서 오늘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만이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소중한 분으로 아는 사람은 헌신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내 생에 있어서 주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아는 사람만이 온전한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주님은 무엇입니까? 다윗을 그들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던 세 용사들은 헌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더 놀라운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은 무엇입니까? □ 우리가 드려야할 헌신,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 그들이 가져온 것은 그들의 핏잔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그들의 삶 전부를 담은 잔이었습니다. 1999년 미국 장로교회 한인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에 캘리포니아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과 함께 강사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만 그때 그분은 그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가서 새로 건축한 교회에 입당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건축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LA의 에너하임 시 한복판에 10.8에이커(약 13,000평)의 대지에, 약 1000만 달러(약 140억)가 넘는 대공사를 마쳤다고 했습니다. 이민교회에서는 1000만 달러라면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 감동하지는 않았습니다. 2년 전, 1차 헌신 주일에 교인 1000여명이 537만 달러(약 80억원)를 헌금했다고 했습니다. 이민자들의 삶은 아는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잘 압니다. 1불, 2불 때문에 언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다운타운 그 위험한 곳에 들어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서 번 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내놓은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 헌금은 그들의 생명을 걸고 얻은 핏잔들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헌금이요 헌신이었습니다. 이민 교회를 사역하고 있어서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엄청난 헌금을 했다는 것 때문에 감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헌금을 드리고 통성으로 기도하는데, 그러한 생명과 같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고 난 성도들이 울면서 하나님께 몸부림치면서 그런 기도를 드리더랍니다. "하나님, 더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이 없어요." 그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울었습니다. 그 목사님도 울었고, 저도 울었습니다. 그들은 그 성전을 Miracle Complex--"기적의 땅, 기적의 건물"이라고 명명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어 주신 자리라는 뜻에서 였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헌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을 계속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적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기적을 기대한다고 해서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의 삶을 살는 사람들 속에 오늘도 하나님은 기적을 계속해서 일으키십니다. 올 한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실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십시오. 용사들이 핏잔을 가져왔을 때 다윗을 그것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한 소중한 헌신을 누가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을 하나님께 부어 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로 드립니다. 그래서 다윗과 하나님이 만남의 축복을 주셔서 만나게 하신 세 용사들의 영광스런 예배가 시작됩니다. 그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장소는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다윗의 궁궐에서 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굉장한 예물을 드렸던 희생 제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새벽, 다윗과 세용사가 아둘람 굴 앞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드렸던 예배는 최고의 예배였습니다. 그들이 드렸던 것은 물 한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피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땀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던 거룩한 희생이었습니다. 그 핏잔을 아무도 받기를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올려드립니다. 울면서 예배합니다. 감격하면서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되는대로 나오지 마십시오. 아무렇게 드리지 마십시오. 최고의 것을 드리십시오. 생명의 핏잔을 부어 하나님께 드리듯, 가장 귀한 것을 내려놓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올 한해 가장 좋은 예배를 드리는 좋은 예배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해보십시오. 오늘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충성스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헌신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기적을 원하십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 더 드리고 싶은데 더 드릴 것이 없어요!" 그 고백을 가지고 나아와 생명의 잔을 드리는 예배자들, 한 주간 직장에서, 가정에서,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믿음으로 달려간 사람들이 핏잔을 주님께 부어드리며 예배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좋은 예배자들이 있을 때, 그곳에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기적들, 예배의 축복들을 허락하십니다. 영국의 육상 팀이 1924년 LA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100m 경주에서 유력한 우승후보인 '에릭 리델'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오면서, 자기의 경기 일정이 주일로 잡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에 도착해서 깊은 생각 끝에 그는 코치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저는 주일에는 달리지 않습니다." 감독이, 대표팀 단장이, 심지어는 영국에서 황태자까지 찾아와서 설득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기가 있던 그 시간 어느 교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며칠후 400m 경주가 있었습니다. 출전 예상자였던 친구가 자기는 도무지 우승할 가능성이 없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것을 에릭에게 양보합니다. 그는 단거리 선수이지 중단거리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단거리 선수가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신 출전했습니다. 그는 출발선에 엎드려 신호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나직히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린다. 내가 달리고 달릴 때, 하나님은 나를 더 빠르게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해주신다." 그는 한번도 선수로 출전해 보았던 적이 없는 400m 허들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에릭 리델의 이 이야기가 "The Chariot of Fire"(불수레)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81년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지옥과 같은 혹독한 훈련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출전해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선수들에게는 거의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금메달의 영예도, 사람들의 박수 갈채도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헌신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주님을 위해서 포기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서 바칩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올 한해가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셔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넘치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빕니다. H. B. Grose는 302장 찬송에서 그렇게 고백합니다. 2. 주님께 내 귀한 것과 내 맘과 내 생각도 주 위해 온몸을 바쳐 힘 다해 섬기면 독생자 보내신 성부 은혜로 갚아 주리. 그대의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기어라.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 3. 우리의 귀한 것 모두 주님께 바치어도 단번에 생명을 주신 그 사랑 못 갚네. 하늘의 영광을 버려 우리를 구했으니 그대의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어라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
가장 큰 선물 /엡2:1-10/ 류영모목사
가장 큰 선물 /엡2:1-10/ 류영모목사 2015-01-07 05:21:03 I. 인간 진단서 영어로 역사를 history라고 합니다. 이 말은 His 그분 이라는 말과 Story 이야기라는 말이 합쳐서 된 말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인류역사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금년은 2008년입니다. 이 말은 A.D.2008. Ano Domini.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 2008년이 되었다는 뜻이지요. 그 이전의 역사를 우리는 B.C. Before Christ.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전 몇 년 그런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던 바로 그날 아침, 인류 역사는 두 동강이 났습니다.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의 역사로. 한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이전의 삶과 예수 이후의 삶으로 나뉘어 집니다. 예수 이전의 삶은 그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의 종국은 멸망입니다. 예수 이후의 삶은 그가 세상사람들의 눈에 볼 때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천국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의 나를 뭐라 말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2장 1절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입니다. 죽을 지도 모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죽었다\" 과거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사랑방에 모여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자식들로부터 어떤 얘기를 들으면 가장 행복할까?\" \"우리 아버지는 참 자랑스러운 분이셨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참 사랑하셨던 분이셨다.\" \"우리 아버지는 이웃을 위해서 늘 사시던 분이시다.\"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한 어르신이 그러십니다. \"나는 내가 죽었을 때 우리 아이들이 내 주변에 둘러 앉아서 앗! 우리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셨다!\" 이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한 사형수가 사형을 받는데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고 \"마지막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죽으면 좋을지 죽는 방법에 도움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총살을 해도 좋고 교수형을 해도 좋고 죽는 방법을 제게 소원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네. 저는 늙어서 죽고 싶습니다.\" II. 사망과 그 원인 죽음이 무엇입니까? 삶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living soul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흙의 요소인 육체와 생기의 요소인 영혼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존재 living soul입니다. 죽음은 바로 흙의 요소인 이 육체와 생기의 요소인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누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마자 선악과 속에 독약의 성분이 있어서 즉사했습니까? 아니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교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천국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잃은 것이요, 이것이 곧 죽은 상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자신의 자격을 가지고, 자신이 쌓아왔던 선행을 가지고 그가 아무리 고상한 이념과 철학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것들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긴 얘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황새 한 마리가 깊은 늪에 빠졌습니다. 묘하게도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다리는 점점 더 깊은 수렁이에 빠져들어 가는 겁니다. 그렇지 내게는 긴 부리가 있지. 그래서 부리를 흙에다가 박았습니다. 그리고는 거기다 힘을 주고 다리를 부들부들 힘을 주었더니 아 다리가 쑥 빠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렇지 날개를 좍 펴고 하늘을 날려고 하는데 날아지지가 않는 겁니다. 다리는 빠져나왔는데 부리가 더 깊이 푹 빠진 겁니다. 아 부리를 아무리 흔들어도 더 깊이 빠져만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지 내게 다리가 있지. 두 다리로 버티고 부리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힘을 줘서 뽑는데 부리가 쑤욱 빠져 나왔어요. 아 그러면 그렇지. 날개를 좍 펴고 하늘을 날려고 하는데 또 날아지지가 않는 겁니다. 이번엔 다리가 푹 빠졌습니다. 다리를 아무리 뺄려고 해도 더 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그래 부리에다 힘을 주자. 다시 부리를 흙에다 박았습니다. 그리고 몸부림해서 겨우 다리가 빠져나왔습니다. 아 또 날 수가 없네요. 부리가 빠져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얘기를 10년을 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의 제목이「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입니다. 인간이라는 게 바로 이런 존재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하는 일이란 모두 그렇습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또 다른 하나의 문제가 발생되어집니다. 의롭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했는데 교만한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산업을 발전시켜야지 부지런히 공장 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했습니다. 공해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지역경제를 살려야지. 개발을 허가합니다. 식수원이 오염되어서져서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어집니다. 잘 살아 봐야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합니다. 이제는 집 한 칸 마련했는데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몸부림을 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 커지는 게 인간 아니었습니까? 내 자식만큼은 제대로 공부시키고 사회에 우등생을 만들어야지. 애착을 가지고 하나하나 간섭을 해 봅니다. 아뿔사! 벌써 반항아, 방탕아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느 담배 꼴초가 담배를 끊으려고 은단을 하루에 두통씩 먹었더니 은단 중독자가 되더랍니다. 이번엔 은단을 끊기위해 담배를 하루 두갑씩 피웠더니 다시 담배 중독자가 되더랍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모순된 공기관이 KT&G(담배인삼공사)라고 합니다. 그 기관을 놀리는 표어가 뭔지 아십니까? \"담배로 버린 몸 인삼으로 보신하자.\" 이런 인간을 향한 본문의 진단이 무엇입니까? \"그때에\"(2절) \"죽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인간의 상황을 세 가지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이미 죽었다는 \"시신의 이미지\"요. 2절에서는 악령에 사로잡힌 \"노예의 이미지\"요. 3절에서는 진노의 자녀가 된 \"죄수 이미지\"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너는 죽었다\"고 하는 사망진단서의 사망원인을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허물이 무엇입니까 ? 원문에 허물이라고 하는 말은 밟지 말아야 될 땅을 밟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것이 허물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이 허물입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이 허물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과녁이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화살로 명중시켜야 할 과녁이 있습니다. 거기 가서 박혀야 될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얘기했습니다.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할 말을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사랑해야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땅히 기도해야될 때에 기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내 주변에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해야될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친절을 베풀어야 되는데 친절을 베풀지 못했고, 헌신해야 될 시간에 헌신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얘기합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지은 죄보다 입으로 눈으로 지은 죄가 더 많고 마음으로 지은 죄는 더더욱 많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살았고 너는 반쯤 죽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었다. 모두다 죽었다. 모두 죄인이다. 누가 누구에게 죄인이라고 돌을 던질 수 있더란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한 이야기조차 싫어합니다. 철저히 회개를 거부합니다. 교회에서 죄 문제 얘기하면 즉각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때문에 교회에서는 죄 문제를 언급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병원에서 질병의 문제를 말하지 말 것이며, 질병을 치료하지 말라고, 그냥 격려해서 보내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더 나쁜 죄에 대한 태도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는 둔감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함부로 비판합니다. 회개를 말하는데 자신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나의 조금 나은 점을 들어서 다른 사람의 나만 못한 점을 부각시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작은 모래알 하나도 물에 빠집니다. 큰 바위도 물에 빠져들어 갑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크고 작은 죄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 작은 죄가 없습니다. 큰 죄도 지옥갈 죄요, 작은 죄도 지옥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죄 중에 가장 악한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던 지난 날의 우리 모든 삶이 가장 악한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고등학생이 부모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아버지도 말이 안통하고 어머니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말이 안통해. 그러고는 후딱 집을 나가더니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출을 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 세월이 흘러갑니다. 10년 세월동안 자기 나름대로 출세 해보겠다고 주유소에 가서 기름도 넣고, 철가방을 들고 배달도 하고, 우유배달, 신문배달, 아 그럴듯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 꽤나 벌어서 10년 후에 부모 앞에 나타났습니다. 착한 아이입니까? 아니요. 그 사이에 부모 속은 다 썩었습니다. 어머니는 화병으로 이미 병상에 누운지 오랜세월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10년동안 그 어떤 것 보다도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만 것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그가 아무리 착하게 살더라도 어쩌면 회복하지 못할 무서운 죄를 범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여러분이 세상에서 아무리 인정받는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아무리 존경받는 거룩한 삶을 살아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왔던 바로 그 삶이 가장 악한 죄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품인 교회를 떠나서 살았던 그 삶이 하나님을 가장 아프게 한 것입니다. 개도 주인을 아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신의 주인을 모른데서야, 내 인생의 주인 하나님을 떠나서 산데서야 말이 될 것 같습니까? 이미 죽은 자가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풍속을 좇는 자, 둘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죽은 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을 좇는 자\'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을 가리킵니까?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풍속\'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성경 원문은 \'아이온\'인데 그 의미는 상당히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생명, 시대, 수명, 영원, 기간, 등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풍속이란 말을 여기의 단어로 바꾸어 보면 \'이 세상의 수명을 좇는 자\' \'이 세상의 영원을 좇는 자\' \'이 세상의 생명을 좇는 자\' \'이 세상의 시대를 좇는 자\'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치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한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죽은 자\'란 누구입니까? 그것은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마치 영원히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의 운명을 맡기며 살아가는 자는 분명히 죽은 자라고 성경은 가리킵니다. 세상은 인간이 거처를 삼은 곳을 뜻합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풀이하면 사람이 자신이 거하는 거쳐, 보여지는 세계가 영원한 줄을 알고 사는 사람은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노예 이미지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해석하는 문제입니다. 따른다는 것의 의미는 좇는다는 것과 같은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공중은 \'순수하지 못한 영들이 거처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 곳에서 권세를 잡은 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사단입니다. 사단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그는 죽은 자입니다. 본문 3절의 말씀을 보면 세 번째 이미지 죄수 이미지가 나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쉽게 해석하면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 사는 자\' \'육정에 끌려 사는 자\'란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육체의 본능이 있습니다. 식욕과 성욕입니다. 식욕은 우리 몸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고 성욕은 인간의 삶에 대를 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먹는 것, 자녀를 낳는 것이 죽은 자로서의 삶이란 말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육체의 욕망을 제어할 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다스리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본능에 의하여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돼지에게 조금만 먹고 운동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맹수에게 네가 천하에 사자인데 힘없고 병든 짐승은 잡지말고 힘있는 짐승만 잡아먹고 살아라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산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짐승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얻어야 할 가장 귀한 선물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구원입니다. 영원히 아버지 품에서 살아가게 될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무수히 하나님을 아프게 했고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혔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 하셨습니까? III. 가장 큰 선물 - 예수 오늘 본문 4절 5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우리를 살리셨도다\" 8절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기에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최대, 최고, 최선의 선물이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왜 예수님이 가장 큰 선물입니까? 1. 이 땅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또 가장 귀한 것이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2. 예수는 오래 전부터 준비하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범죄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3:15) 인류역사, 구약의 모든 사건은 예수님을 준비하시는 내용입니다. 3. 예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멸망받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집도 좋은 옷도 예쁜 애인도 아닙니다. 그에겐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인류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최대, 최고, 최선의 선물입니다. 이 지구가 생긴 이래 제일 축복받는 날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던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인류의 자유가 탄생한 날이요, 구원의 오랜 꿈이 실현된 날입니다. 이 날 죄 중에 고민하던 사람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신음하던 자연이 \'용서의 소리\'를 들은 날입니다. 우리는 일주일 중 6일은 일을 하고 오늘은 쉽니다. 왜요? 그분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일 주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류의 고백입니다. 그분은 내가 버림받아야 할 자리에 버려지셨습니다. 어디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까? 지옥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곳입니다. 그분은 나를 죽일 수가 없어서 당신의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저주받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당신의 외아들을 저주의 자리에 내어 주시기까지 주님은 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 우리는 그분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IV. 손을 내밀어 이 선물을 받으십시요. 어떻게 이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선물이란 손을 내밀어 받기만 하면 됩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내 것이 되는 게 선물입니다. 옛날 한 마을이 큰 홍수를 만났습니다. 집은 형체를 찾을 수도 없었고 논과 밭들도 개울창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갈 길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 마을에 임금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놀랍게도 살기 좋은 낙원과 궁궐 같은 집들이 잘 지어진 마을을 준비하고 그 마을 입주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누구든지 손을 내밀어 그 입주권을 받기만 하면 그 낙원 마을에 들어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을 입구에 거지 소년이 땅굴을 파고 살고 있었는데 그 땅굴마져 홍수에 없어지고 만 것이지요. 거지 소년은 내 손이 이렇게 더러운데, 내 옷은 냄새가 나는데, 내가 잃은 것은 땅굴밖에 없는데 - 임금님이 내게 낙원 마을 입주권을 주실까? 그러나 소년은 임금님의 자비로움을 믿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임금님은 거지소년의 손을 꼭잡아 주시며 \"많이 추웠겠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 어서 낙원 마을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아라.\" 입주권을 손에 꼭 쥐어 주셨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죄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선한행위가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내 모습이 거지 소년과 같아도 좋습니다.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이제 손을 내밀어 그 선물 - 예수 그리스도 - 구원을 받으십시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 마음의 문을 엽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오십시오.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예수님만을 이제 믿고 따르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이 기도가 바로 여러분 자신의 기도가 되셨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선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이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에 가득차흘러 넘쳐도 여러분이 입을 열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구원의 길은 이 길! 한 길 밖에 없습니다. - 진리는 하나! 예수 밖에 없습니다. - 생명은 하나!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기독교가 너무 독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 모든 종교는 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종교가 가는 길은 다 같다\"라고 말하면 참 고상해 보이지요. 인격자처럼 보입니다. 도량 있고 아량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암에 걸린 사람에게 소화제 한 알만 먹으면 나을 것입니다. 좋은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입니다. 진리는 하나, 구원도 하나, 영생의 길도 하나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어떤 길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 길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독선적이라도 할 수 없습니다. 편협해 보여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믿어지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 구원하고 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요 그리하면 당신과 당신의 집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VI. 예수님을 얻으면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어느날 인생이 수학문제처럼 풀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생의 신비를 깨닫고 싶었습니다. 인생의 허무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이 되어 절간에 들어갔습니다. 중이 되고 보니 불교계가 썩어도 너무 썩었더랍니다. 그는 순수하고 깨끗한 불교대학을 세워보겠다고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사기꾼들에게 속아 감옥에 들어갑니다. 자기를 지키는 간수에게 목탁과 불경을 들여보내 달라고 요청했더니 간수가 성경책을 주더랍니다. 좋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감옥에 있는 동안 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 기독교인들을 불자로 만들어 보리라.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불경에 그런 얘기가 있답니다. 어떤 과부가 외아들을 사랑으로 키우다 그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외아들을 안고 부처님을 만나 살려달라 애원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아래 마을로 내려가 죽음을 맛보지 않은 가문을 찾아 그 집의 물 한 사발을 죽은 아들에게 먹이면 곧 살아나게 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어미는 좋아서 마을로 내려가 죽음을 맛보지 않은 가문을 찾는데 어디 그런 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실망으로 돌아온 어미에게 부처가 얘기합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감옥의 스님이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읽어가는데 마음이 이상해집니다. 그렇게도 찾고 찾든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는데 성경에도 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죽은 아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그렇다. 석가는 죽었지만 예수는 살아나셨다. 석가에겐 무덤이 있지만 예수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고 마침내 목사님이 되어 허무하게 죽어 가는 불교도들에게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극락의 불나비」「나는 예수를 이렇게 믿게 되었다」라는 책을 쓴 김성화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예수를 잃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요, 예수를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살리기 위해 준비해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엄청난 선물을 거절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갑니다. 교회는 우리를 살리려 피 흘리신 아들을 품에 안으신 하나님의 품입니다. 설교는 죽으신 아들을 품에 안고 흐느끼시는 하나님의 울음소리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그분 때문에 살아난 심령들의 감사의 외침입니다. 예수! 그분은 바로 당신의 그리스도, 당신의 왕, 당신의 주님이십니다. 예수! 그는 당신 인생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가장 큰 선물 /엡2:1-10/ 류영모목사 2015-01-07 05:21:03 read : 12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인간 진단서 영어로 역사를 history라고 합니다. 이 말은 His 그분 이라는 말과 Story 이야기라는 말이 합쳐서 된 말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인류역
가장 큰 선물 /엡2:1-10/ 류영모목사 2015-01-07 05:21:03 read : 12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인간 진단서 영어로 역사를 history라고 합니다. 이 말은 His 그분 이라는 말과 Story 이야기라는 말이 합쳐서 된 말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인류역사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금년은 2008년입니다. 이 말은 A.D.2008. Ano Domini.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 2008년이 되었다는 뜻이지요. 그 이전의 역사를 우리는 B.C. Before Christ.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전 몇 년 그런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던 바로 그날 아침, 인류 역사는 두 동강이 났습니다. 예수 이전과 예수 이후의 역사로. 한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이전의 삶과 예수 이후의 삶으로 나뉘어 집니다. 예수 이전의 삶은 그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의 종국은 멸망입니다. 예수 이후의 삶은 그가 세상사람들의 눈에 볼 때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천국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의 나를 뭐라 말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2장 1절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입니다. 죽을 지도 모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죽었다" 과거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사랑방에 모여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 받다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자식들로부터 어떤 얘기를 들으면 가장 행복할까?" "우리 아버지는 참 자랑스러운 분이셨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참 사랑하셨던 분이셨다." "우리 아버지는 이웃을 위해서 늘 사시던 분이시다."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한 어르신이 그러십니다. "나는 내가 죽었을 때 우리 아이들이 내 주변에 둘러 앉아서 앗! 우리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셨다!" 이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한 사형수가 사형을 받는데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고 "마지막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죽으면 좋을지 죽는 방법에 도움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총살을 해도 좋고 교수형을 해도 좋고 죽는 방법을 제게 소원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네. 저는 늙어서 죽고 싶습니다." II. 사망과 그 원인 죽음이 무엇입니까? 삶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living soul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흙의 요소인 육체와 생기의 요소인 영혼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존재 living soul입니다. 죽음은 바로 흙의 요소인 이 육체와 생기의 요소인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누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마자 선악과 속에 독약의 성분이 있어서 즉사했습니까? 아니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교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천국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잃은 것이요, 이것이 곧 죽은 상태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자신의 자격을 가지고, 자신이 쌓아왔던 선행을 가지고 그가 아무리 고상한 이념과 철학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것들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긴 얘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황새 한 마리가 깊은 늪에 빠졌습니다. 묘하게도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다리는 점점 더 깊은 수렁이에 빠져들어 가는 겁니다. 그렇지 내게는 긴 부리가 있지. 그래서 부리를 흙에다가 박았습니다. 그리고는 거기다 힘을 주고 다리를 부들부들 힘을 주었더니 아 다리가 쑥 빠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렇지 날개를 좍 펴고 하늘을 날려고 하는데 날아지지가 않는 겁니다. 다리는 빠져나왔는데 부리가 더 깊이 푹 빠진 겁니다. 아 부리를 아무리 흔들어도 더 깊이 빠져만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지 내게 다리가 있지. 두 다리로 버티고 부리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힘을 줘서 뽑는데 부리가 쑤욱 빠져 나왔어요. 아 그러면 그렇지. 날개를 좍 펴고 하늘을 날려고 하는데 또 날아지지가 않는 겁니다. 이번엔 다리가 푹 빠졌습니다. 다리를 아무리 뺄려고 해도 더 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그래 부리에다 힘을 주자. 다시 부리를 흙에다 박았습니다. 그리고 몸부림해서 겨우 다리가 빠져나왔습니다. 아 또 날 수가 없네요. 부리가 빠져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얘기를 10년을 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의 제목이「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입니다. 인간이라는 게 바로 이런 존재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하는 일이란 모두 그렇습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또 다른 하나의 문제가 발생되어집니다. 의롭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했는데 교만한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산업을 발전시켜야지 부지런히 공장 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했습니다. 공해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지역경제를 살려야지. 개발을 허가합니다. 식수원이 오염되어서져서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어집니다. 잘 살아 봐야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합니다. 이제는 집 한 칸 마련했는데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몸부림을 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 커지는 게 인간 아니었습니까? 내 자식만큼은 제대로 공부시키고 사회에 우등생을 만들어야지. 애착을 가지고 하나하나 간섭을 해 봅니다. 아뿔사! 벌써 반항아, 방탕아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느 담배 꼴초가 담배를 끊으려고 은단을 하루에 두통씩 먹었더니 은단 중독자가 되더랍니다. 이번엔 은단을 끊기위해 담배를 하루 두갑씩 피웠더니 다시 담배 중독자가 되더랍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모순된 공기관이 KT&G(담배인삼공사)라고 합니다. 그 기관을 놀리는 표어가 뭔지 아십니까? "담배로 버린 몸 인삼으로 보신하자." 이런 인간을 향한 본문의 진단이 무엇입니까? "그때에"(2절) "죽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인간의 상황을 세 가지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이미 죽었다는 "시신의 이미지"요. 2절에서는 악령에 사로잡힌 "노예의 이미지"요. 3절에서는 진노의 자녀가 된 "죄수 이미지"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너는 죽었다"고 하는 사망진단서의 사망원인을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허물이 무엇입니까 ? 원문에 허물이라고 하는 말은 밟지 말아야 될 땅을 밟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것이 허물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이 허물입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이 허물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과녁이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화살로 명중시켜야 할 과녁이 있습니다. 거기 가서 박혀야 될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얘기했습니다.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할 말을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사랑해야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땅히 기도해야될 때에 기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내 주변에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해야될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친절을 베풀어야 되는데 친절을 베풀지 못했고, 헌신해야 될 시간에 헌신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얘기합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지은 죄보다 입으로 눈으로 지은 죄가 더 많고 마음으로 지은 죄는 더더욱 많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살았고 너는 반쯤 죽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너도 죽고 나도 죽었다. 모두다 죽었다. 모두 죄인이다. 누가 누구에게 죄인이라고 돌을 던질 수 있더란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한 이야기조차 싫어합니다. 철저히 회개를 거부합니다. 교회에서 죄 문제 얘기하면 즉각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때문에 교회에서는 죄 문제를 언급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병원에서 질병의 문제를 말하지 말 것이며, 질병을 치료하지 말라고, 그냥 격려해서 보내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더 나쁜 죄에 대한 태도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는 둔감하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함부로 비판합니다. 회개를 말하는데 자신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나의 조금 나은 점을 들어서 다른 사람의 나만 못한 점을 부각시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작은 모래알 하나도 물에 빠집니다. 큰 바위도 물에 빠져들어 갑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크고 작은 죄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 작은 죄가 없습니다. 큰 죄도 지옥갈 죄요, 작은 죄도 지옥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죄 중에 가장 악한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던 지난 날의 우리 모든 삶이 가장 악한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고등학생이 부모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아버지도 말이 안통하고 어머니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말이 안통해. 그러고는 후딱 집을 나가더니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출을 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 세월이 흘러갑니다. 10년 세월동안 자기 나름대로 출세 해보겠다고 주유소에 가서 기름도 넣고, 철가방을 들고 배달도 하고, 우유배달, 신문배달, 아 그럴듯한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 꽤나 벌어서 10년 후에 부모 앞에 나타났습니다. 착한 아이입니까? 아니요. 그 사이에 부모 속은 다 썩었습니다. 어머니는 화병으로 이미 병상에 누운지 오랜세월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10년동안 그 어떤 것 보다도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만 것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그가 아무리 착하게 살더라도 어쩌면 회복하지 못할 무서운 죄를 범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여러분이 세상에서 아무리 인정받는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아무리 존경받는 거룩한 삶을 살아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왔던 바로 그 삶이 가장 악한 죄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품인 교회를 떠나서 살았던 그 삶이 하나님을 가장 아프게 한 것입니다. 개도 주인을 아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신의 주인을 모른데서야, 내 인생의 주인 하나님을 떠나서 산데서야 말이 될 것 같습니까? 이미 죽은 자가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풍속을 좇는 자, 둘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죽은 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을 좇는 자'란 도대체 어떠한 사람을 가리킵니까?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풍속'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성경 원문은 '아이온'인데 그 의미는 상당히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생명, 시대, 수명, 영원, 기간, 등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풍속이란 말을 여기의 단어로 바꾸어 보면 '이 세상의 수명을 좇는 자' '이 세상의 영원을 좇는 자' '이 세상의 생명을 좇는 자' '이 세상의 시대를 좇는 자'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치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한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죽은 자'란 누구입니까? 그것은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마치 영원히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의 운명을 맡기며 살아가는 자는 분명히 죽은 자라고 성경은 가리킵니다. 세상은 인간이 거처를 삼은 곳을 뜻합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풀이하면 사람이 자신이 거하는 거쳐, 보여지는 세계가 영원한 줄을 알고 사는 사람은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노예 이미지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해석하는 문제입니다. 따른다는 것의 의미는 좇는다는 것과 같은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공중은 '순수하지 못한 영들이 거처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 곳에서 권세를 잡은 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사단입니다. 사단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그는 죽은 자입니다. 본문 3절의 말씀을 보면 세 번째 이미지 죄수 이미지가 나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은 쉽게 해석하면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 사는 자' '육정에 끌려 사는 자'란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육체의 본능이 있습니다. 식욕과 성욕입니다. 식욕은 우리 몸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고 성욕은 인간의 삶에 대를 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먹는 것, 자녀를 낳는 것이 죽은 자로서의 삶이란 말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육체의 욕망을 제어할 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다스리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본능에 의하여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돼지에게 조금만 먹고 운동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맹수에게 네가 천하에 사자인데 힘없고 병든 짐승은 잡지말고 힘있는 짐승만 잡아먹고 살아라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산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짐승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얻어야 할 가장 귀한 선물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구원입니다. 영원히 아버지 품에서 살아가게 될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무수히 하나님을 아프게 했고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혔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 하셨습니까? III. 가장 큰 선물 - 예수 오늘 본문 4절 5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우리를 살리셨도다" 8절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기에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최대, 최고, 최선의 선물이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왜 예수님이 가장 큰 선물입니까? 1. 이 땅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또 가장 귀한 것이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2. 예수는 오래 전부터 준비하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범죄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3:15) 인류역사, 구약의 모든 사건은 예수님을 준비하시는 내용입니다. 3. 예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멸망받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집도 좋은 옷도 예쁜 애인도 아닙니다. 그에겐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인류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최대, 최고, 최선의 선물입니다. 이 지구가 생긴 이래 제일 축복받는 날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던 날이었습니다. 이 날은 인류의 자유가 탄생한 날이요, 구원의 오랜 꿈이 실현된 날입니다. 이 날 죄 중에 고민하던 사람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신음하던 자연이 '용서의 소리'를 들은 날입니다. 우리는 일주일 중 6일은 일을 하고 오늘은 쉽니다. 왜요? 그분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일 주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류의 고백입니다. 그분은 내가 버림받아야 할 자리에 버려지셨습니다. 어디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까? 지옥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곳입니다. 그분은 나를 죽일 수가 없어서 당신의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저주받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당신의 외아들을 저주의 자리에 내어 주시기까지 주님은 나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 우리는 그분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IV. 손을 내밀어 이 선물을 받으십시요. 어떻게 이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선물이란 손을 내밀어 받기만 하면 됩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내 것이 되는 게 선물입니다. 옛날 한 마을이 큰 홍수를 만났습니다. 집은 형체를 찾을 수도 없었고 논과 밭들도 개울창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갈 길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 마을에 임금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놀랍게도 살기 좋은 낙원과 궁궐 같은 집들이 잘 지어진 마을을 준비하고 그 마을 입주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누구든지 손을 내밀어 그 입주권을 받기만 하면 그 낙원 마을에 들어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을 입구에 거지 소년이 땅굴을 파고 살고 있었는데 그 땅굴마져 홍수에 없어지고 만 것이지요. 거지 소년은 내 손이 이렇게 더러운데, 내 옷은 냄새가 나는데, 내가 잃은 것은 땅굴밖에 없는데 - 임금님이 내게 낙원 마을 입주권을 주실까? 그러나 소년은 임금님의 자비로움을 믿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임금님은 거지소년의 손을 꼭잡아 주시며 "많이 추웠겠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 어서 낙원 마을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아라." 입주권을 손에 꼭 쥐어 주셨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죄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선한행위가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내 모습이 거지 소년과 같아도 좋습니다.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이제 손을 내밀어 그 선물 - 예수 그리스도 - 구원을 받으십시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 마음의 문을 엽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오십시오.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예수님만을 이제 믿고 따르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이 기도가 바로 여러분 자신의 기도가 되셨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선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이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에 가득차흘러 넘쳐도 여러분이 입을 열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구원의 길은 이 길! 한 길 밖에 없습니다. - 진리는 하나! 예수 밖에 없습니다. - 생명은 하나!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기독교가 너무 독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 모든 종교는 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종교가 가는 길은 다 같다"라고 말하면 참 고상해 보이지요. 인격자처럼 보입니다. 도량 있고 아량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암에 걸린 사람에게 소화제 한 알만 먹으면 나을 것입니다. 좋은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입니다. 진리는 하나, 구원도 하나, 영생의 길도 하나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어떤 길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 길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독선적이라도 할 수 없습니다. 편협해 보여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믿어지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믿어지지 않으면 구원하고 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요 그리하면 당신과 당신의 집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VI. 예수님을 얻으면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어느날 인생이 수학문제처럼 풀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생의 신비를 깨닫고 싶었습니다. 인생의 허무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이 되어 절간에 들어갔습니다. 중이 되고 보니 불교계가 썩어도 너무 썩었더랍니다. 그는 순수하고 깨끗한 불교대학을 세워보겠다고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사기꾼들에게 속아 감옥에 들어갑니다. 자기를 지키는 간수에게 목탁과 불경을 들여보내 달라고 요청했더니 간수가 성경책을 주더랍니다. 좋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감옥에 있는 동안 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 기독교인들을 불자로 만들어 보리라.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불경에 그런 얘기가 있답니다. 어떤 과부가 외아들을 사랑으로 키우다 그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외아들을 안고 부처님을 만나 살려달라 애원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아래 마을로 내려가 죽음을 맛보지 않은 가문을 찾아 그 집의 물 한 사발을 죽은 아들에게 먹이면 곧 살아나게 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어미는 좋아서 마을로 내려가 죽음을 맛보지 않은 가문을 찾는데 어디 그런 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실망으로 돌아온 어미에게 부처가 얘기합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감옥의 스님이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읽어가는데 마음이 이상해집니다. 그렇게도 찾고 찾든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을 읽는데 성경에도 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죽은 아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그렇다. 석가는 죽었지만 예수는 살아나셨다. 석가에겐 무덤이 있지만 예수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고 마침내 목사님이 되어 허무하게 죽어 가는 불교도들에게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극락의 불나비」「나는 예수를 이렇게 믿게 되었다」라는 책을 쓴 김성화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예수를 잃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요, 예수를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살리기 위해 준비해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 엄청난 선물을 거절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에 갑니다. 교회는 우리를 살리려 피 흘리신 아들을 품에 안으신 하나님의 품입니다. 설교는 죽으신 아들을 품에 안고 흐느끼시는 하나님의 울음소리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그분 때문에 살아난 심령들의 감사의 외침입니다. 예수! 그분은 바로 당신의 그리스도, 당신의 왕, 당신의 주님이십니다. 예수! 그는 당신 인생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