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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 /시50:14-15/ 피종진목사 2017-09-26 08:22:50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에 보면 ‘감사’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앙생활에 승리한 사람들을 보면 모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파크’라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 /시50:14-15/ 피종진목사 2017-09-26 08:22:50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에 보면 ‘감사’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앙생활에 승리한 사람들을 보면 모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파크’라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은 천사의 순결을 부여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천사다운 순결함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이유와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왜 감사해야 되는가? 첫째, 과거에 받은 은혜를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7:11~19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만나 그들이 소리를 높여 긍휼히 여겨 달라고 하자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평생에 먹고 마시며 살면서도 이 아홉 사람과 같이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죄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현재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의식주와 건강을 주신 은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과 기도를 하며 예배드릴 수 있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돼지는 배부르게 먹으면서도 꿀꿀대며 불평을 하지만, 병아리는 물 한 모금 먹으면서도 하늘을 보고 감사를 합니다. 잠언 3:9~10에 보면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현재의 은혜에 감사하여 주의 일을 위해 몸 바쳐 충성할 때 건강을 보장해주시고, 마음을 바칠 때 평안을 주시며, 시간을 바칠 때 장수의 복을 주시고, 재물을 드릴 때 물질에 풍성한 복을 주십니다. 셋째, 미래에 받을 은혜를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히 13:14,15) 이 땅은 아무리 좋아도 아침 안개와 같아서 잠깐이면 다 지나갑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지상에서도 오늘보다 더 좋은 내일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또 현재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내세의 천국을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 생활에 대해서 불평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없어도 내일 있을 줄 믿고 감사해야 됩니다. 오늘 어려움이 있어도 내일은 하나님께서 좋은 날 주실 줄 믿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미래에 받을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면 반드시 감사한 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지게 해주십니다. 2. 감사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첫째, 환난 날에 건짐을 받게 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시 50:15a) 하나님께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부를 때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는 환난이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6:33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전 15:57)고 말했습니다.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b)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중의 하나가 감사입니다.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입니다. 빌립보서 4:6,7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한 것밖에 없습니다. 셋째, 범사에 복을 받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양식과 물에 복을 주시고, 몸의 질병을 제거해주시며(출 23:25),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게 해주시며(출 23:26), 원수의 원수가 되어주시고(출23:27), 손대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신다(신 16:15)고 약속하셨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감사한 일을 넘치게 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에 받은 은혜와 현재의 은혜, 미래에 받을 은혜를 감사하는 자가 되어 환난 날에 건짐을 받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범사에 복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말씀]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딤전1:15-17/ 피영민 목사 2015-08-28 00:17:04 read : 9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딤전1:15-17/ 피영민 목사 2015-08-28 00:17:04 read : 9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 서론 복음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이라고 합니다. ‘유(ευ)’라는 것은 좋다는 뜻이고 ‘앙겔리온(αγγελιον)’은 하늘에서 온 천사(angel)라는 말입니다. 즉, 복음은 하늘에서 온 좋은 소식(Good news from heaven) 즉,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15절 말씀에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 15절을 가리켜 “복음이 한 절에 축소된 말씀(condensed Gospel in one verse)”이라고 했습니다. 이 한 절 안에 복음의 핵심이 다 들어있습니다. ‘미쁘다’는 영어로 'faithful'을 쓰는데 ‘참되다, 확실하다, 신뢰할만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신뢰할만한 말씀’이요 ‘거짓이 아닌 참된말씀’이요 ‘불확실한 것이 아닌 확실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라고 했습니다. 신분, 국적,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다 받아들여야 마땅한 말씀입니다. 복음의 신뢰성과 포괄성을 말합니다.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원, 죄인, 예수, 이 세 단어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세상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에는 구원이라는 단어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다 이 땅에서의 호흡이 멈추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그 순간에 가장 중요한 단어는 구원입니다.그가 얼마나 출세했느냐, 돈이 많으냐, 지식이 많으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는 순간, 우리의 육신에서 호흡이 끊어지는 그 순간 ‘그의 죄는 용서받았는가? 그는 구원받았는가? 그의 영혼은 천국에 들어갔는가? 그는 하나님과 화목했는가?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었는가?’하는 질문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제시하되 남의 얘기하듯이 제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체험으로부터 복음을 제시했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들은 모두다 죄인이되 똑같은 종류의 죄인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더 흉악하고 다른 사람은 덜 흉악한 죄인도 있습니다.수렁에 빠져 있어도온 몸이 다 빠지거나 하반신만 빠지거나 혹은 발목만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지옥의 형벌이 크고 조금 지은 사람은 형벌이 작습니다. 그런데 죄를 많이 지어도, 조금 지어도 모두다 지옥에 갑니다. 우리 중에는 천국 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 지옥형벌에 해당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 바울은 왜 “죄인의 괴수”인가?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 했는데 그 이유가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이 전에는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기 때문에 죄인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첫째,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3절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기록되었고, 9장 2절에 후반에도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 믿는 도를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극도로 미워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다니며 예수 믿느냐 물어 믿는다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잡아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뿐 아니라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집어넣으려 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죄를 생각하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도 없고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바울 수준의 죄는 아니라 할지라도 과거에 예수 믿는 아내와 자식들을 폭행한 분은 안 계십니까? 부하직원들이 신앙생활 한다고 괴롭힌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 분이 계시다면 회개하십시오. 저는 신학교 시절 교수님께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 남자가 자기 아내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성경을 갈가리 찢어 뒷간이라고 불리던 화장실에다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그는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스가랴 2장 8절 후반에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눈동자를 찌르고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암탉도 자기 병아리를 건드리는 자에게는 사자로 변하여 보호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 눈동자를 건드리고 괜찮으시리라 생각합니까? 성도와 교회를 향하여 폭언이나 폭행한 일이 있다면 마땅히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될 죄인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둘째, 언어로 훼방하였습니다. 'blaspheme'란 단어는 말로써 예수님을 모독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향해말로 모독합니다. 이웃을 향해 악한 말을 쏟아놓습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인터넷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익명이라는 이유로 막말을 늘어놓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무익한 말을 해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하물며 남을 해치는 악한 말에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귀를 지으신 하나님이 못 들으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마구 모욕하며, 성도들을 향하여 악한 언어로 지껄이는 자들은 훼방자요 큰 형벌을 받을 자인 것입니다. 악한 언어 사용을 옹호하는 자들은 정치가이던 교육자이던 훼방자의 동료요공동정범(共同正犯)입니다. 인터넷 악플 방지법을 만들자는 여론에 야당은 국민의 권리라고 반대합니다. 악한 말 하는 게 권리입니까? 죄짓는 것도 권리인 것입니까? 그러면 그 악한말로 인하여 피해를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권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권리가 아니라 훼방입니다. 대한민국은 회개해야 됩니다. 셋째, 폭력을 행사한 포행자(violent man)였습니다. 선을 방해하고 악을 조장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악에 빠뜨렸습니다. 바른길 가는 사람을 방해하고 다른 사람들을 바른길로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것도 권력과 폭력을 이용해서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포행자였고,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한 것입니다.우리도 다 죄인이지만 괴수는 아닙니다.바울이 괴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괴수는 많지 않고 하나입니다. 단수로 쓰여 있습니다. 바울이 괴수이고 우리는 죄인이로되 천차만별의 등급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죄가 있기는 해도괴수는 아닙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2. “죄인의 괴수”인 바울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사도바울은 자기가 구원받은 경험을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으로모자라 다메섹까지 가서 성도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써 빛이 임했고 바울이 고꾸라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당신이 누구시오?”하고 서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늘로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소리가 임했습니다. 가시채를 뒤발질하면 발에 가시가 찔리고 피가 나고 뒤발질하는 자에게 고통이 옵니다. 그때 사울이 “주여 뉘시니이까?”하고 묻습니다.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한 번의 경험이 핍박자 사울을 위대한 사도바울로 바꾸게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이 그를 바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마자 바울은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내가 죄인인가? 왜 나는 죄인의 괴수인가? 왜 우상숭배해서는 안되는가? 왜 귀신을 따라서는 안되는가? 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하는가? 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인가? 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가?’ 이 수많은 질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즉각적으로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구원이란 예수 믿고 죄용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길 이외에는 죄 용서받는 길이 없는 줄로 믿으십시오. 죄가 있으신 분은 용서받으시기 바랍니다. 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죄가 많으십니까? 그래도 괴수는 아닙니다. 바울이 괴수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 믿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을 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이란 죽으면 천국 가는 것이요 살아도 천국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죽을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래 죽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가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인간에게 임한 것입니다. 사망이 오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영생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죽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줄로 믿으십시오. 기독교의 핵심은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아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하는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돈으로도, 지식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단순히 예배에 참석한다고 얻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 값을 대신 갚아주신 구주심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털보다도 많은 내 죄를 위해서 대신 피 흘려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영혼으로 만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다른 만남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3절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기록되었고, 신명기 4장 29절에도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전심으로 죄를 고하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예수님은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바울의 생애도 변화시켰고 저의 생애도 변화시켰으며 여러분의 생애도 변화시킨 것입니다. 3. “죄인의 괴수”를 구원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 중에서 그래도 제일 깨끗한 죄인, 다시 말해 죄 중에 가장 작은 죄를 지은 죄인을 구원하지 아니하시고 바울 같은 죄인의 일등 괴수를 구원하셨느냐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본문 16절에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본이 되게 하려는 것이 이유입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sample’입니다. 견본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비누를 하나 사려 할 때 먼저 ‘이 비누가 좋은 비누인가?’하고 sample을 갖다 써봅니다. sample로 세탁을 할 때 옷 중에 제일 더러운 옷을 갖다세탁을 합니다.제일 더러운 옷을 세탁하자 흰 눈처럼 희게 되었다면 훨씬 덜 더러운 옷도 당연히 희어질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다 어겼습니다.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섬겼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고,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했습니다. 살인을 하고 간음했습니다. 도적질 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마음속에 탐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다 어겼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괴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괴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그 때 그 때 우리를 치지 않으시고 오래 참아오셨습니다. 바울 같은 죄인의 괴수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셨기 때문에당연히 우리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바울 같은 괴수도 예수를 믿어 죄 용서를 받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족보에도 죄인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세 여인의 이름이 나옵니다. 다말은 남편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자 시아버지에게 창녀 노릇을 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족보로부터 나왔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유명한 기생이었습니다. 밧세바는 전쟁나간 남편을 버리고 왕의 부름에 달려가 간음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런 죄인들이 즐비합니다. 또 남자들 중에도 죄인이 많습니다. 다윗왕은 밧세바와 간음했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간접 살인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 같지만 이방여인을 사랑하여 우상을 들여왔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둘로 갈라지게 만들었습니다. 므낫세는 극악무도한 왕으로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를 톱으로 잘라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도 이런 죄인들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또 한편 은혜스러운 일입니까? 천국에서 예수님이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십자가 우편에서 죽은 강도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때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대답하시고 그날 같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낙원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그 강도였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인 강도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한마디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은혜를 입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인의 괴수도 구원하셨기 때문에, 죄인이지만 괴수는 아닌 우리들도 예수 믿게 되면 죄 사함 받고 구원받아 영생을 얻어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본문 17절은 구원받은 사람의 찬양입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순종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되 만세의 왕(eternal king)이십니다. 영원한 왕이십니다. 왕이 되었다가 다시 신하가 되었다가 하는 분이 아니고 영원히 왕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왕이시되 ‘immortal king’ 즉, 썩지 않는 왕, 죽지 않는 왕, 영생하는 왕이십니다.또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왕(invisible king)이십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보이면 믿겠습니다.”라는 무지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그리고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신 왕(the only God)이십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왕은 없습니다. 신이라 칭하는 자가 나타나도 그것은 귀신, 악령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의 왕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하나님입니다. 백성이 왕에게 반역하고 대적하면 그의 생명이 살아남겠습니까? 왕을 반역하는 자는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그리고 토기장이에 반역하는 토기는 산산이 조각나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 되신 하나님께 죄를 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값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십시오. 구원 받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 믿어 죄 사함 받고 그 피로 죄 씻음 받고 그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영생을 얻게 되면 언제 이 땅을 떠나도 천국은 우리 것이 됩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긴박한 일임을 믿습니다. 제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그리하여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요2:1-11/ 피종진 목사/ 2001-02-25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 요2:1-11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서 기적을 행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가나는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이적을 행하신 곳입니다. 잔치 집에 가보면 좋은 음식을 먼저 내놓고 나중에는 맛이 좀 덜 한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가나 혼인잔치 집에는 처음보다도 나중이 더 좋아지는 이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참예한 사람들이 다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값이 없는 것 같고 미약한 것 같고, 어리석은 것 같고, 별 볼일이 없는 것 같은데, 우리 주님의 세계는 점점 더 좋아지는 세계입니다. 또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은 가치없는 것, 또 안되는 것이 되게 되고, 하나님의 기적이 함께 수반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없는 세계는 인간의 생각과 육성에 의해서 모든 일이 결정되어집니다. 또 그 결정된 사건 자체가 그것으로 마무리되어지고, 결론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없는 것도 있게 되고, 안되는 것도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기적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손으로 나타내시는 능력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현실을 보고 좌절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잘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안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계셔서 기다리고 인내하고 간구하면 잘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 집에 어떻게 해서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초청하여 모셨기 때문입니다.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1,2절) 가나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모자라 잔치를 준비한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예수님을 초청하여 모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한 이적을 행함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가, 내가 사업을 하는데 이 사업장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가, 예수님을 모시되 저 한쪽에 어떤 불청객처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주인으로 모시고, 내 생명 자체로 모시고 계신다면 그곳에는 가나 혼인잔치처럼 기적이 일어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주님께서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는 이적을 행하셨을까요? ①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스스로 나타내시고, 우리가 그 사실을 믿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②주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을 내가 어떻게 대하느냐? 주님이 나와 어떤 관계이냐? 주님이 나와 어떤 관계로 역사해주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심을, 주님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생명은 믿음입니다. 전통과 의식, 찬반 논리, 흑백 논리도 중요하지만 믿음 자체가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구주되심과 주의 능력과 기도의 응답을 믿는 것은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③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우리 인간에게 가장 긴급하고 귀중한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영생을 얻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천하를 얻었다고 해도 생명을 잃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생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총명하던 지혜도, 가졌던 지위와 명예도, 그리고 자기의 모든 인품이나 인격도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게 되지만, 영생을 얻은 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서 천군 천사와 화답하면서 영원토록 영광의 생활이 이어지고, 지속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에 살지만 죽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멸망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대적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주시는 주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7절) 하나님의 말씀이 계신 곳에는 생명이 역사하고, 축복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사탄이 두려워 도망가고, 풍랑이 잔잔하게 되며, 파도도 고요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2∼4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신 곳에는 혼돈이 물러가고, 공허가 없어지고, 흑암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흑암\\\\\\\'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보면 \\\\\\\'절망과 좌절, 어두움\\\\\\\'을 의미합니다. 인생의 어떤 좌절과 절망과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곳에 임하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세계로 바꿔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좋다고 하는 가치 평가와 주님이 좋다고 한 그 가치 평가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했으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바로 이와 같은 평가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를 10년, 20년 믿어도 성경 한 번 못 읽고 구약 찾으라고 하면 신약을 들추고, 신약을 말했는데 창세기부터 목록을 찾아보고 있다면 안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시험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달변이나 철학, 윤리, 도덕으로 마귀를 물리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시고, 공생애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마귀가 제일 먼저 나타나서 \\\\\\\'돌로 떡이 되어서 먹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신명기 8:3의 말씀을 읽어 주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둘째 시험과 셋째 시험도 신명기 6:16과 신명기 6:13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이 때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신명기 28:1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뒤에 보면 온갖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들어서 간직하고, 눈으로 읽고 우리 머리와 마음 속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받고 체험해야 됩니다.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통해서 축복을 주시고, 사탄 마귀에게서 이김을 주시며, 또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과 함께 역사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10:44에 보면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신 곳에는 성령이 함께 역사해주십니다. 인간의 이론이 전개될 때는 사탄이 역사해서 싸움과 분열, 의견 충돌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생명입니다. 주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말씀이 계신 곳에 주님이 계시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어야 됩니다. 한 말씀을 심어주어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셔요\\\\\\\"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셨어요. 이 십자가는 우리의 저주를 담당해주신 십자가예요\\\\\\\" 이것을 심어 주어야 됩니다. 저는 어릴 때 주일학교 선생님을 참 잘 만났습니다. 그 분이 지금은 목사님이 되셨는데, 참 기도를 많이 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주일학생들에게 \\\\\\\'절대 절간에 가거든 부처를 무서워하지마라. 코를 비틀어도 괜찮아. 머리를 잡고 흔들어도 괜찮아. 그것은 말도 못하고 복도 못줘. 그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니까 생명도 없어.\\\\\\\' 늘 이런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심어지는 것이 천마디 그 어떤 듣기 좋은 말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정치,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업,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국가는 승리가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5,7,8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하인들은 모든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이 있을 때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얼마나 큰 축복이 임하는지 아십니까? 신명기 15:4에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얼마나 고심합니까? 오늘도 생활 전선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면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을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물질에 궁핍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하며 애쓰고 사는데, 이 물질도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궁핍하지 않고 넉넉하게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큰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잘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백성들이 살도록 백성들과 정치인들이 함께 경성하는데 있습니다. 민족통일도 어떤 사상과 이론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으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명기 28:2에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에 보면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누릴 온갖 영육간의 복이 다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데도 가난하고 헐벗는 나라가 있습니까? 오늘날 세계의 강대국을 보면 모두 다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시편 113:4에 보면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고 말씀했고, 고린도전서 10:31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계에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기적이 날마다 나타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항상 마음 속에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냄으로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 집에 일어났던 기적을 체험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종진 목사(서울 남서울중앙교회)
가나안 땅의 삶에 대한 경고와 권면 /신6:10-25/ 피영민 담임목사 2018-07-11 01:29:19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명기는 총 3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4장까지는 왕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일을 베풀어 주었는지에 대한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주시고 광야 40년 동안 먹을 것도 주시고 또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다 물리쳐 주시
가나안 땅의 삶에 대한 경고와 권면 /신6:10-25/ 피영민 담임목사 2018-07-11 01:29:19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명기는 총 34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4장까지는 왕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일을 베풀어 주었는지에 대한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주시고 광야 40년 동안 먹을 것도 주시고 또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다 물리쳐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장 44절부터 26장까지는 왕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5장부터 11장까지는 기본적인 삶의 원리를 다루고 있고 12장부터 26장까지는 그 구체적인 원리의 적용문제를 다루고 있고 27장부터 34장까지는 왕이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게 되면 받게 되는 상벌에 관한 규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5장부터 11장에서의 기본적인 삶의 원리는 십계명으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성도에게 십계명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강력하게 요약하면 신명기 6장 5절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신명기 6장 10절 이하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받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애굽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축복받는 삶의 원리로 삼고 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축복의 조건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칭의의 조건이 아니라 성화의 조건을 말씀하는 것이고, 기본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건설구원의 조건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6장 10~25절까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겪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항상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한 7가지 권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가난안 땅의 삶에 대한 경고와 권면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 가나안 땅에서 겪게 될 위험에 대한 경고(10~12절) 첫째, 실제적이고 큰 위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모압 평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새로운 세대들에게 닥치게 될 여러가지 위험을 6~8장까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신명기 7장에는 가나안 땅에 강한 일곱 족속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이방 족속이 아무리 대적하더라도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7장 21절에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이방 원수들의 공격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공격의 위험은 있다라고 하는 것이 7장의 내용입니다. 신명기 8장에서는 광야 40년 동안 받은 교훈을 잊어 버리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의 교훈은 신명기 8장 16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마침내 복을 주려 하심이라”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영적인 교만심을 경계해야 복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7장은 가나안 일곱 족속의 위험이고 신명기 8장은 영적인 교만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둘째, 신명기 6장은 번영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두 가지 위험보다도 실제적으로 더 큰 위험을 7장과 8장에 앞서 경고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번영의 위험(danger of prosperity)입니다.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게 되면 신앙을 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위험을 지금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에게 번영을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 6장 10~11절에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모압 평야에서 모세의 강론을 듣고 있는 세대는 축복된 세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실제로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기의 묻힐 마므레 동산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갖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새로운 세대는 그 땅을 다 소유하게 되고 그 땅에서 온갖 복을 다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도시를 얻고 집을 얻고 우물을 얻고 포도원을 얻고 감람나무까지도 다 공짜로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만 했는데 이런 축복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의 기쁨과 기대감은 정말 충만했을 것입니다. 잠언 13장 22절 후반에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부지런히 돈을 벌어놓으면 의인들이 그것들을 다 쓰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대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처럼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복들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은 다 좋은 것이고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배불리 먹고 마시고 누릴 때에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일곱 족속의 위험보다도 더 크고, 영적인 교만심의 위험보다도 더 큰 위험이라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뭐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12절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번영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번영의 위험은 복을 주신 하나님을 잊게 되는 위험을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forgetting God). 그래서 다른 사람이 어떠하든지 상관치 말고 너 자신은 번영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멸시하고 아는 척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목적이 이제부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집과 우물과 포도원을 더욱 발전시키는데 관심과 목적을 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만을 신뢰하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주신 축복만 좋아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도 동일한 위험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춥고 배고프고 가난하고 살아갈 힘도 없을 때는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조금 일이 잘 되고 소득이 생기면 기도부터 포기하고 직장생활이 바쁘다면서 예배부터 빼먹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행동으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죄성입니다. 모세는 이런 위험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 세대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번영을 이룬 것을 다음 세대에 제대로 넘겨 주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그 모든 좋은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기본적인 원리를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림으로 국가적인 위기가 오게 되고 가정적인 위기와 개인적인 위기가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위기는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인식으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잊어버릴 때에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모세 이후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음으로 인해서 포로되는 고통을 겪었다고 선포를 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호세아 13장 5~6절에 “내가 마른 광야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결과 호세아의 예언대로 B.C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결국 큰 위험과 위기가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머리로만 잊어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잊어버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나 영광 돌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II. 가나안 땅에서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한 7가지 권면(13~25절) 첫째는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13절 전반부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라고 했습니다. 신명기의 가장 중요한 명령 가운데 하나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가 하면 사망과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무서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14번이나 반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능히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며 능히 부자가 되게 하시고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하게도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율법서에서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서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언 1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고 잠언 9장 10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지식과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함부로 대하는 자는 지식과 지혜의 근본도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말씀이나 잠언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 경외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13절 중반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문제나 시기와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게을리하거나 사람 때문에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13절 후반에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내 말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호소하는 궁극적인 대상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세한다’라는 말의 뜻은 만일 내 말이 거짓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시고 만일 내 말이 진실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변호해 달라는 요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이 공의의 심판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모세는 맹세하라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거짓된 맹세나 잘못된 맹세와 같은 맹세의 오용이나 남용하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경우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서는 풀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녀가 동침을 했어도 합의에 의한 것인지 강압에 의한 것인지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믿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맹세를 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맹세를 통해서 자신의 억울함이 풀릴 수 있다고 한다면 진실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른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한 것입니다. 넷째는 다른 신들을 좇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14절에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양한 신들을 믿는 가나안 일곱 족속에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면 이방 백성들은 조롱하고 비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신들도 신적인 역사를 행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적인 역사를 행하고 예언이나 능력을 행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는 다 악신이고 타락한 영물들이고 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이지 참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강조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거짓된 신들에게 미혹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세기는 다른 형태의 위험이 있습니다. 바로 모든 종교는 이름은 달라도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가나안 일곱 족속이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은 다른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만이 참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시는 참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은 악신들이고 거짓된 신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알게 되는 아버지가 참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3절에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참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젊은 시절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훌륭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노년 시절에 배교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종교 다원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솔로몬의 길을 따른 우매한 설교자요 배교자의 길을 간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길을 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침례교의 정신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 교단입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기상천외한 소리를 한다 하더라도 성경에 없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하나님만을 좇고 다른 신들을 좇지 않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다섯째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 16절에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7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에 물이 다 떨어지자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이 필요할 때 하나님이 과연 그들 가운데 계신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해서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의미로 그곳을 맛사라고 불렀고 하나님과 다투었다는 의미로 므리바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물건을 생산하면 시험을 거쳐야 합니다. 회사가 광고하는 대로 말하는 것과 동일한 성능을 가진 제품인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것은 모세가 말하는 것과 하나님이 행하는 것이 진짜 같은가를 자기들이 시험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을 주시면 하나님을 믿을 것이고 안 주시면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은 4장 6절에서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해서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발을 받쳐 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라고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을 인용해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주시면 믿고 안 주시면 안 믿는다는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여섯째는 하나님의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17~19절). “여호와의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지키는 것은 선량한 일이고 순종하면 너희 대적들을 모두 쫓아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신명기에서만 ‘삼가 지키라’는 동사가 30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옳은 일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한 일이고 원수들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규례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20~23절). 후손들에게 기록된 역사와 하나님의 규례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때가 되면 ‘여호와의 명하신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고 그런 것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라고 물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럴때 후손들을 앉혀 놓고 자세히 출애굽의 모든 역사를 사실 그대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왜곡하면 그 후세대는 장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6장 7절에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주일학교 봉사를 하고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게 되면 나중에 자녀들이 다 신앙을 떠나게 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은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러한 경고와 권면을 지켜야 했습니까? 신명기 24~25절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성도가 축복받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항상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원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참으로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전세계에 어디를 보더라도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급속도로 발전한 나라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불과 60년 전만 해도 지금의 대한민국을 감히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과 같이 복을 계속해서 누리고 받으려면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겨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성화를 이루는 의로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의롭게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칭의라는 의미의 의로움이 아니라 성화를 이루는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사는 길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불의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의롭게 사는 길은 예수 믿고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축복받고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명령과 권면을 잘 따르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복을 누릴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고 살면 우리 후손들도 항상 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성도들과 우리 후손들에게 복이 되는 말씀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나안땅-그 특징과 특권 /신11:8-17/ 피영민 목사 2015-08-31 17:31:07 read : 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단강을 건너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례예배 때 부르는 찬송 중에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가사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이처럼 요단강을 사망으로,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해석하는
가나안땅-그 특징과 특권 /신11:8-17/ 피영민 목사 2015-08-31 17:31:07 read : 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단강을 건너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례예배 때 부르는 찬송 중에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가사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이처럼 요단강을 사망으로,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해석하는 것이 좁은 의미에 국한했을 때는 옳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가나안 7족과 계속해서 싸워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승리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패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원수도 없고, 미움과 다툼도 없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천국과 동일시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출애굽 사건은 전반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애굽은 죄의 노예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는 왕도 없고 일을 해봤자 이익도 없이 항상 고생하면서 고통을 겪고, 마귀와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불신앙 시절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출애굽은 어린 양 예수의 피로 죄와 마귀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구원받은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광야생활은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도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고 불신앙과 여러 가지 의심과 혼란, 불만과 불평들에 지배받는 생활을 상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광야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구원의 확신을 통해 용기를 얻고 성령충만 해서 영적으로 승리하는 영적 충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승리와 축복의 일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할 일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8절) 어차피 얻을 땅이지만 ‘들어가서’(enter) ‘얻어야’(take over) 한다는 말입니다. 그 땅에 안 들어가도 안되고, 그 땅에 들어가서 관광이나 하면서 놀다가 몇 일만에 나와도 안되며, 그 땅의 거주민들을 완전히 쫓아낸 후에, 그 땅을 차지하여 정착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구경꾼에게 오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충만과 승리의 생활은 구경꾼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위해 순간순간 싸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천국은 가만히 구경하고 노는 사람이 얻는 것이 아닙니다. 침노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승리의 생활, 감격의 생활,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생활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고 침노하는 사람들의 몫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들은 모두 성령충만을 사모하시고 기도할 때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승리의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1. 가나안 땅의 세 가지 특징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10절) 성령충만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은 불신시절을 상징하는 애굽 땅과는 세 가지 면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물의 공급원이 다릅니다. 애굽의 물 공급원은 땅입니다. 애굽은 비가 아무리 와도 국토의 절반이 모래이기 때문에 비를 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오로지 나일강을 의지합니다. 이 나일강 만이 비를 담아 두는 곳입니다. 그래서 봄만 되면 범람하여 홍수가 나는 나일강이지만 애굽 사람들은 물의 근원이 되는 나일강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나일강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저수지에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는 관개시설을 만들어서 끌어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애굽 땅의 물의 근원은 땅과 강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물의 공급원은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가나안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에는 인공 저수지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궁무진한 저수지가 되어 그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물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께서 “우리나라는 천수답이 많아서 비가 안 오면 흉년이 들기 때문에 강을 막아서 댐도 만들고 저수지도 많이 만들어서 흉년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댐과 저수지가 여기저기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저수지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삶의 원리에 드러나는 차이점입니다. 불신자의 삶의 공급처는 자연입니다. 자연을 개조하고 이용해서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다릅니다. 신자는 자연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생명의 줄이요, 생명의 원천입니다. 세상이 삶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삶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상을 사랑하거나 타협하지 말고 오로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봉사하라는 사실을 신명기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혹시 동서남북이 다 막혀서 답답하고 고통스러우십니까?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긍휼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불신자들은 이 긍휼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늘로부터 도우심과 은혜가 내려오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물의 공급방법이 다릅니다. 10절 후반에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애굽에서는 물을 밭에 대려면 발을 이용해서 삽질을 하거나 펌프질을 해야 합니다. 길을 내서 물꼬를 트거나 물 펌프를 통해 물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육체적인 노동을 통해서 일을 해야 만이 물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다릅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물을 대기 위해서 발이나 손이나 머리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집에 들어가서 자거나 나무 밑에서 쉬면 그만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비는 사람이 노력해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성도들은 쉬면됩니다. 반면에 불신자들의 사는 방법은 얼마나 피곤합니까? 불신자들은 어려서부터 야망을 세웁니다. 돈을 버는 야망, 출세할 야망, 권력을 얻으려는 야망, 높은 학위를 따려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늦게 잡니다. 때로는 그것을 이루고자 밤잠도 못 이루다가 건강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편은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라고 말씀합니다. 애굽 땅의 원리, 불신자들의 삶의 원리는 잠도 안자고 수고하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정말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래도 돈을 열심히 벌어서 나이 먹은 후에는 수영장이 달린 큰 집도 사고, 캐딜락, BMW같은 좋은 자동차도 사서 폼 잡고 다닙니다. 그런데 간신히 고생을 마치고 즐겁게 사는가 했더니 그만 정기검진에서 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죽은 이후의 삶에서는 아무 것도 보장받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헛된 노력과 고생입니까? 이것이 불신자들의 삶의 원리입니다. 애굽에서는 수고하고 노력하고 고생해도 헛됩니다. 애굽에서는 혹시 승리와 축복이 있다고 해도 그저 ‘피루스의 승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전 3세기에 헬라에 피루스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이 25,000명의 군인과 2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을 했습니다. 격렬한 전쟁이 끝난 후에 피루스 왕은 승리를 얻었지만 그만 자신의 코끼리도 다 죽고 군인들도 3/4이나 죽어서 남은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피루스의 승리’라고 합니다. 패배나 진배없는 승리를 말합니다. 마치 헤비급 권투선수가 챔피언에게 도전을 해서 판정승을 거뒀지만, 너무 맞아서 다음날 골병이 들어 죽어버린 것과 같은 승리입니다. 방송국 유명한 PD로서 세상에서 출세한 사람이 자기의 부인을 버렸습니다. 부인은 충격을 받아서 기도원을 전전하며 하는 일이 날마다 우는 일입니다. 제가 기도원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이분에게 왜 날마다 울고 다니느냐고 물으니 자기 남편이 너무 출세해서 여자들이 많이 따라다니는 바람에 자기가 이렇게 비참해졌노라고, 자기 남편이 버렸노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세상에서 승리했는지는 몰라도 집안을 망가뜨리고 자신의 아내를 망가뜨린 피루스의 승리를 한 것입니다. 피루스의 친구이자 철학자였던 시네아스가 피루스 왕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로마를 침공해서 승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피루스 왕은 “우리가 이태리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의 대답을 들은 시네아스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태리 전체를 지배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왕은 다시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시실리도 침공하고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도 침공하여 마케도냐 전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왕의 대답을 들은 시네아스는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게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왕은 “그 후에는 집에 가서 발 닦고 쉬고 잠자고 즐겁게 놀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대답을 들은 시네아스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지금 쉬고 잠자고 즐겁게 놀면 안됩니까? 왕이시니까 얼마든지 쉬고 즐겁게 지내실 수 있는데 왜 그 많은 전쟁을 벌여서 사람을 죽이면서 고통을 겪은 후에 쉬고 먹고 주무시려고 하십니까?”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너무 애굽식 인생살이를 강요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초청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쉼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쉬어라. 너희가 쉴 때에도 나는 하늘 문을 열어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모두 내려주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쉼으로 초청하십니다. 인생이 너무나 피곤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그 분께서 주시는 쉼을 누리십시오. 쉼을 누리라는 말은 게으르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헛된 피곤을 피하라는 의미입니다. 시편 127편 1절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쉼, 이것이 참된 축복입니다. 세 번째로 물의 저장방법이 다릅니다.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11절) 애굽은 평평한 땅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는 평평한 곳에서만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땅이 높으면 나일강의 물을 끌 수가 없기 때문에 높은 땅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는 산도 있고, 골짜기도 있습니다. 산과 골짜기가 비를 흡수하기 때문에 땅 자체가 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은 조금만 파도 우물이 솟아나오는 땅입니다. 가나안 땅에 산과 골짜기가 있다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굴곡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어느 때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비전을 보며 승리하기도 합니다만, 어느 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슬퍼하며 탄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산이든 골짜기든 가나안 땅은 손을 내밀어서 땅을 파기만 하면 그 속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는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려워도 땅을 파보세요. 어려워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해보세요. 그러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성령충만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답답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간구하고 기도하면 성령께서 넘치는 생수의 강이 되어 기쁨과 능력과 위로를 주십니다.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야 기쁩니까?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야 기쁩니까? 잠깐 기쁠 수는 있지만, 조만간 고통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안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면 그 때부터 기쁨이 넘치기 시작합니다. 천지가 개벽을 하는 어려움이 온다고 할지라도 기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가나안에는 골짜기에도 물이 있고, 산에도 물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가나안 땅의 특권 가나안 땅은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도 가지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12절) 세초부터 세말까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여호와의 하나님의 눈이 1초도 빼지 않고 항상 그 위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눈이 우리 위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못하는 모습도, 우리의 프라이버시도 모두 지켜보신다면 부담스럽고 창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그런 것들만 지켜보시기 위해 거기 계신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 여호와의 눈이 우리 위에 계신 이유는 사랑하는 자녀가 마음에 무슨 고통이 있는지, 지금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를 보시고 들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도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눈은 사랑과 관심의 눈이요, 능력의 눈이며, 세초부터 세말까지 1분 1초도 빼지 않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의 눈입니다. 저는 고속도로에서 제일 위험한 운전수는 눈을 절반 감고 졸면서 운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은 사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큰 위험을 줍니다. 그러므로 고속도로를 달릴 때, 앞에 가는 차가 삐뚤거리면서 진행하면 빨리 피하십시오. 조는 눈, 잠자는 눈은 이처럼 위험한 눈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시 121:4).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삶의 터전을 지켜주시는 특권이 성도의 특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 육신적인 질병이나 사업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여호와의 눈이 오늘 나와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 여호와께서 그 눈으로 나를 살피시사 건져주시고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의 축복을 허락하시며 치료하시고 건져주시고 이 위기에서 이끌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결 론 현대인들은 자연현상과 하나님의 뜻을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자연 현상을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하셔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하늘 문을 여시고 비를 내리셔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요롭게 먹게 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나안 땅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따라 섬기면 하늘은 닫혀서 비가 내리지 않으며,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일지라도 속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연과 환경이 나를 거스르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돌이키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용서를 구하고 다시 돌이키면 하늘의 하나님은 언제나 닫힌 문을 여시고 다시 비를 내려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네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로 성령충만하십시오. 아직도 신앙에 의심이 있고 삶에 불평과 원망이 가득한 분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취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충만을 목표로 “하나님이여! 제가 성령충만케 하옵소서. 제가 성령충만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현재의 삶이 답답하고 비가 없이 황무함이 계속된다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다면 회개하시고 다시 하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손바닥만한 구름이라도 뜬다면 조만간에 은혜의 소낙비가 내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쉬십시오. 수고하고 노력하는 인생을 살았어도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고통과 질병 속에 사시는 분들은 인생의 헛됨을 탓하지 마시고 예수님 안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쉬시기를 바랍니다. 욕심도, 탐욕도, 정욕도 모두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한 쉼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쉰다고 할지라도 은혜의 비는 하늘로부터 계속해서 내려오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낙망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산 위에 있든지 골짜기에 있든지 간에 인생의 오르막 내리막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 잘 됐다고 좋아하다가 조금 어렵다고 금방 낙담하지 마십시오. 인생을 살다보면 성공이 실패가 되고, 실패가 성공이 되며, 축복이 저주가 되고, 저주가 축복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축복 때문에 자고해서도 안되며,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절망해서도 안됩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인해 한 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조 고무다리로 살았는데, 하루는 사냥을 나갔다가 그만 식인종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식인종이 이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자 이 사람은 자기의 고무다리를 떼어서 식인종에게 먹으라고 던져주었습니다. 식인종이 고무다리를 씹어보고는 “이 고기는 아주 질기고 맛이 없네?”하며 그 사람을 다시 풀어줬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네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 일 년 내내 우리의 가정과 교회, 삶의 터전 위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비를 맞으며,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생수의 샘을 맛보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난에서 탈출하자 /신15:4~8/ 피종진목사 2017-09-29 17:26:26 read : 1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명기15:4~8] 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
가난에서 탈출하자 /신15:4~8/ 피종진목사 2017-09-29 17:26:26 read : 1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명기15:4~8] 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본문은 안식년(7년을 주기로 7년째 되는 해에 1년씩 쉬는 해. 종에게 자유를 주고 빚을 탕감해 줌)과 관련하여 안식년에는 채무자에게 빚 독촉을 하지 말고, 또 안식년이 가까웠다고 하여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주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며, 구제하는 일에 힘쓰라는 명령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약한 자들을 배려하시는 분임을 알게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약한 자들에 대해 항상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친히 돌보시며 그들의 눈물을 신원하여 주시는 분입니다(사 1:17). 가난이란 돈이 없어서 빈곤한 것만 가난이 아니라, ‘건강의 가난, 마음의 가난, 믿음의 가난도 가난’입니다. 그러면 가난이 오는 이유와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가난이 오는 이유 ①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게으름에서 가난이 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란 일을 하지 않는 자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일 자체를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열심과 성실로 부지런히 일하는 자를 부유하게 해주십니다. ②술 취하고 탐식하기 때문입니다.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잠 23:21)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란 방탕한 삶을 사는 자를 의미합니다. ③잠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잠 20:13)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는 가난해집니다. ④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 11:24) 자신의 소유를 흩어 구제하지 않고,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됩니다. ⑤악한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잠 28:22) ‘악한 눈이 있는 자’란 나누어주는데 인색하고 탐욕으로 재물을 쌓기만 하는 자로 가난하게 됩니다. 성도는 성실히 일하여 얻은 재물을 자기를 위해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선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2.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첫째, 여호와의 말씀과 명령을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 15:4,5)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면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자는 가변적인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오직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소망을 두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다 지켜 행할 때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 중에서 없게 되고, 여러 나라에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고, 여러 나라를 다스릴지라도 다스림을 받지 않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둘째, 손을 펴서 나눠주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자들이 함께 거할 때에 손을 움켜쥐지 말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넉넉하게 꾸어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성도는 가난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도움을 청할 때에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심과 나의 소유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펴서 나눠주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셋째, 주님께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6,17) 주님께 제물을 드릴 때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고 했을 때, 그는 기꺼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의 후손이 헤아릴 수 없이 번성하고 대적의 성 전체를 차지하게 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며, 술 취하고 탐식하지 말며,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고, 과도히 아끼지 말며, 악한 눈을 가지지 말고 선한 눈을 가져 여호와의 말씀과 명령을 지켜 행하고, 손을 펴서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주님께 제물을 드려 가난에서 탈출하여 부유한 삶을 살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버나움에 임하신 예수님 /막1:21-28/ 피종진목사 2017-09-21 16:17:13 read : 3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다섯 가지 사역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은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행하여야 될 교훈과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해줍니다. 주님의 발자취는 모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또
가버나움에 임하신 예수님 /막1:21-28/ 피종진목사 2017-09-21 16:17:13 read : 3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다섯 가지 사역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은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행하여야 될 교훈과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해줍니다. 주님의 발자취는 모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또 우리에게 큰 신앙의 교훈을 남겨주신 그런 발자취입니다. 가버나움에 임하신 예수님은 첫째, 주의 날을 성수(聖守)하셨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막 1:21) 주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신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고, 주의 날에 하나님 앞에 안식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20:11에 보면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일은 복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을 지킬 때 ①기억을 해야 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어떤 분은 주일을 맞이했는데 교회 종소리를 듣고 교회 가는 사람들을 보고 ‘오늘이 무슨 날이냐?’라고 자기 딸에게 물었답니다. 그 딸이 ‘엄마, 오늘 주일이잖아’라고 대답하자 ‘벌써 돌아왔니?’하고 신경질을 내더랍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을 기억하고 월요일부터 손꼽아 기다리면서 그 날이 가까울수록 기뻐 찬송하면서 그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②거룩히 지켜야 합니다(출 20:8). ③엿새 동안은 힘써 일을 해야 합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 20:9) ④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 주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전도하며, 성도 간에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둘째,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막 1:21) 예수님은 주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골로새서 1:18에 보면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에베소서 1:22에 보면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교회는 만물의 지배를 받는 곳이 아니라 만물을 지배하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 UN본부나 백악관, 청와대 등 세계 왕들이 모이는 그곳에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곱 촛대 사이에 운행하신다고 했습니다(계 2:1). 여기에서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말씀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처소이고, 성도 간에 아름다운 신앙의 교제를 하는 곳이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본부가 되고, 성령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사명자를 양성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신부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단장시켜 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등불을 예비시켜 주는 곳입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거룩한 백성들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시 89:7). 그래서 교회의 권위는 이 땅의 어떤 왕의 권세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막 1:21) 여기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헬라어나 히브리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를 힘써야 합니다(딤후 4:2). 우리의 가방 속에는 항상 전도지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지를 전해줄 때 “이 전도지를 읽을 때 반드시 당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형통한 길이 열릴 것입니다. 당신이 이 말씀을 읽고 받아들인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항상 상대방에게 소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전파한다’는 말은 헬라어에 보면 ‘널리 알린다’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의 소식을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를 알게 해주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듣게 해주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게 하고, 마음 문을 열지 않는 사람에게 마음 문을 열도록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셔서 열심히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듯이 우리도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넷째, 귀신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막 1:23,25) 이 말을 듣고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그 당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때는 마술사들이 독특한 도구를 사용하여 주술적 행위를 함으로써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자신의 말씀의 권위만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나타내신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습니다(막 16:17). 다섯째, 가르치는 권세를 나타내셨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저명한 랍비들의 말을 인용하기 바빴던 유대 지도자들의 능력없는 교훈과 달리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가르치는 권세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주의 날을 거룩히 지키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며,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권세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신 예수님을 본받아 주일 성수를 잘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힘써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버나움에 임하신 예수님/ 막1:21-28/ 피종진 목사/ 2005-10-29
가버나움에 임하신 예수님 막1:21-28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다섯 가지 사역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은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행하여야 될 교훈과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해줍니다. 주님의 발자취는 모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또 우리에게 큰 신앙의 교훈을 남겨주신 그런 발자취입니다. 가버나움에 임하신 예수님은 첫째, 주의 날을 성수(聖守)하셨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막 1:21) 주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신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고, 주의 날에 하나님 앞에 안식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20:11에 보면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일은 복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을 지킬 때 ①기억을 해야 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어떤 분은 주일을 맞이했는데 교회 종소리를 듣고 교회 가는 사람들을 보고 ‘오늘이 무슨 날이냐?’라고 자기 딸에게 물었답니다. 그 딸이 ‘엄마, 오늘 주일이잖아’라고 대답하자 ‘벌써 돌아왔니?’하고 신경질을 내더랍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을 기억하고 월요일부터 손꼽아 기다리면서 그 날이 가까울수록 기뻐 찬송하면서 그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②거룩히 지켜야 합니다(출 20:8). ③엿새 동안은 힘써 일을 해야 합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 20:9) ④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 주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전도하며, 성도 간에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둘째,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막 1:21) 예수님은 주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골로새서 1:18에 보면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에베소서 1:22에 보면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교회는 만물의 지배를 받는 곳이 아니라 만물을 지배하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 UN본부나 백악관, 청와대 등 세계 왕들이 모이는 그곳에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곱 촛대 사이에 운행하신다고 했습니다(계 2:1). 여기에서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말씀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처소이고, 성도 간에 아름다운 신앙의 교제를 하는 곳이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본부가 되고, 성령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사명자를 양성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신부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단장시켜 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등불을 예비시켜 주는 곳입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거룩한 백성들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시 89:7). 그래서 교회의 권위는 이 땅의 어떤 왕의 권세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막 1:21) 여기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헬라어나 히브리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를 힘써야 합니다(딤후 4:2). 우리의 가방 속에는 항상 전도지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지를 전해줄 때 “이 전도지를 읽을 때 반드시 당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형통한 길이 열릴 것입니다. 당신이 이 말씀을 읽고 받아들인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항상 상대방에게 소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전파한다’는 말은 헬라어에 보면 ‘널리 알린다’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의 소식을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를 알게 해주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듣게 해주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게 하고, 마음 문을 열지 않는 사람에게 마음 문을 열도록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셔서 열심히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듯이 우리도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넷째, 귀신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막 1:23,25) 이 말을 듣고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그 당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때는 마술사들이 독특한 도구를 사용하여 주술적 행위를 함으로써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자신의 말씀의 권위만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나타내신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습니다(막 16:17). 다섯째, 가르치는 권세를 나타내셨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저명한 랍비들의 말을 인용하기 바빴던 유대 지도자들의 능력없는 교훈과 달리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가르치는 권세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주의 날을 거룩히 지키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며,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권세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신 예수님을 본받아 주일 성수를 잘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힘써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종진 목사(서울 남서울중앙교회)
가버나움에 임하신 예수님/ 막1:21-28/ 피종진 목사/ 2005-10-29
가버나움에 임하신 예수님 막1:21-28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다섯 가지 사역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은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행하여야 될 교훈과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해줍니다. 주님의 발자취는 모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또 우리에게 큰 신앙의 교훈을 남겨주신 그런 발자취입니다. 가버나움에 임하신 예수님은 첫째, 주의 날을 성수(聖守)하셨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막 1:21) 주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신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고, 주의 날에 하나님 앞에 안식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20:11에 보면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일은 복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을 지킬 때 ①기억을 해야 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어떤 분은 주일을 맞이했는데 교회 종소리를 듣고 교회 가는 사람들을 보고 ‘오늘이 무슨 날이냐?’라고 자기 딸에게 물었답니다. 그 딸이 ‘엄마, 오늘 주일이잖아’라고 대답하자 ‘벌써 돌아왔니?’하고 신경질을 내더랍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을 기억하고 월요일부터 손꼽아 기다리면서 그 날이 가까울수록 기뻐 찬송하면서 그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②거룩히 지켜야 합니다(출 20:8). ③엿새 동안은 힘써 일을 해야 합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 20:9) ④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 주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찬송하며, 기도하고, 전도하며, 성도 간에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둘째,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막 1:21) 예수님은 주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골로새서 1:18에 보면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에베소서 1:22에 보면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교회는 만물의 지배를 받는 곳이 아니라 만물을 지배하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 UN본부나 백악관, 청와대 등 세계 왕들이 모이는 그곳에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곱 촛대 사이에 운행하신다고 했습니다(계 2:1). 여기에서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말씀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처소이고, 성도 간에 아름다운 신앙의 교제를 하는 곳이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본부가 되고, 성령님의 임재하심 속에서 사명자를 양성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신부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단장시켜 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등불을 예비시켜 주는 곳입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거룩한 백성들을 모아 놓은 곳입니다(시 89:7). 그래서 교회의 권위는 이 땅의 어떤 왕의 권세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막 1:21) 여기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헬라어나 히브리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를 힘써야 합니다(딤후 4:2). 우리의 가방 속에는 항상 전도지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지를 전해줄 때 “이 전도지를 읽을 때 반드시 당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형통한 길이 열릴 것입니다. 당신이 이 말씀을 읽고 받아들인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항상 상대방에게 소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전파한다’는 말은 헬라어에 보면 ‘널리 알린다’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의 소식을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를 알게 해주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듣게 해주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게 하고, 마음 문을 열지 않는 사람에게 마음 문을 열도록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셔서 열심히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듯이 우리도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넷째, 귀신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막 1:23,25) 이 말을 듣고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그 당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때는 마술사들이 독특한 도구를 사용하여 주술적 행위를 함으로써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자신의 말씀의 권위만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나타내신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습니다(막 16:17). 다섯째, 가르치는 권세를 나타내셨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저명한 랍비들의 말을 인용하기 바빴던 유대 지도자들의 능력없는 교훈과 달리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가르치는 권세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주의 날을 거룩히 지키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며,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권세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신 예수님을 본받아 주일 성수를 잘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힘써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종진 목사(서울 남서울중앙교회)
가시와 담의 은혜 /호2:1-7/ 피영민 목사 2015-08-24 18:22:33 read : 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2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
가시와 담의 은혜 /호2:1-7/ 피영민 목사 2015-08-24 18:22:33 read : 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2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것이며 4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 서론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놀라운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음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끈질긴 배역(backsliding)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너무 놀랍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배은망덕할 수가 있을까요? 둘째,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오래 참으시고 계속해서 사랑(love)하시는 모습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에게 크게 두 가지 은혜를 주십니다. 첫째, 애굽에서 구원해주시는 구원의 은혜(saving grace)를 주십니다. 둘째,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계속 배역하고 우상숭배에 빠질 때 범죄하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은혜(Restraining Grace)도 주십니다. 구원하시는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죄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은혜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호 2:6) 이번 주 본문을 통해 가시와 담이라는 두 가지 상징적 표현이 의미하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I. 고멜의 죄와 호세아의 심정 첫째, 고멜의 죄는 정절을 지키지 않은 죄(infidelity)였습니다. 호세아 2장에는 호세아 아내 고멜의 죄와 그에 대한 호세아의 심정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호 1:2) 호세아는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2남 1녀를 얻게 됩니다. 첫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스르엘(하나님이 흩어버리시겠다)이라고 지었습니다. 둘째 딸을 낳아 로루하마(내가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라고 지었으며 셋째 아들을 낳아 로암미(내 자식이 아니라)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자식을 낳았으면 잘 돌보고 남편과 가정을 이루어 정절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데 고멜은 남편을 버리고 연애하는 자를 따랐습니다. 둘째, 고멜은 실수가 아니라 “집요한 고집”을 가지고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말 속담에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멜은 이 속담처럼 부부싸움 하고 나와서 돌아다니다 홧김에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닙니다.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집요하게 바람을 피운 것입니다.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호 2:5) 우리는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니리’라는 말에서 고멜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고멜이 연애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영적으로 유혹했던 “바알과 아세라”를 상징합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 숭배에 따르는 육신적인 쾌락과 함께 농사의 풍요를 준다는 거짓에 속았습니다. 바알은 남신이고 아세라는 여신입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신전 밑에 궁창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창기와 사람들이 음란한 짓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가 그것을 보고 성적인 자극을 받아 연애하게 되고 그 결과로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비는 바알과 아세라의 연애 결과라고 믿은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비를 내려주고 그 덕분에 농사도 잘되며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이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알 신전에는 언제나 창기들이 있었고 바알 신전에서의 예배는 다름 아닌 성적인 혼음의 축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젊은 사람들은 성적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바알숭배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는 바알 숭배를 고약하게 여기시고 여러 번 진노하셨습니다. 민수기 25장을 보면 싯딤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 숭배에 빠지고 모압 여인과 음행을 하자 2만 4천 명이 염병으로 죽은 사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합 왕 시대에는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모두 합해서 850명과 영적인 대결을 벌였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시는 신을 참 신으로 인정하기로 했는데 바알과 아세라는 불을 내리지 못했고 하나님께서는 불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바알 숭배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바알신이 육신의 쾌락과 풍요를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이유는 쾌락과 풍요 때문입니다. 고멜은 바알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주신 분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까지 모두 주신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연애를 해서 비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따라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는 것입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호 2:8)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넷째, 고멜을 향한 호세아의 심정은 호세아 2장 2-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호 2:2-4) 오늘날 우상숭배 하는 많은 사람이 우상을 위해 돈을 바칩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걷는다고 욕을 하지만 교회에서는 헌금으로 선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우상을 위해 사용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남편이 가정을 위해 중동에 나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보내주니까 아내가 그 돈으로 바람을 피운다면 남편은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과 금을 우상에게 가져다주고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호세아 2장 2-4절에서 고멜이 음란을 제거하지 않으면 벌거벗겨 나던 날과 같게 하겠고 광야같이 만들어 버리며 자식들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상숭배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우상숭배를 하면 결국 모두 죽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끝은 사망이고 지옥입니다. Ⅱ. 가시와 담의 은혜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이 사망을 향해 가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 바로 가시와 담입니다.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시와 담은 첫째, 외부에서 적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둘째, 내부에서 짐승이 나가지 못하도록 예방합니다. 이와같이 가시와 담은 보호와 예방의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호 2:6-7) 욥기 1장을 보면 사단이 여호와 앞에 나타나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물어보십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그러자 사단은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하고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십니다. 그러자 사단이 그때부터 욥을 송사하기 시작합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욥 1:9-10) 하나님께서 욥의 사업에 보호의 울타리를 둘러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울타리로 둘러주셔서 복을 받아 잘되니까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냐고 송사하는 것입니다. 2011년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성도의 가정과 사업과 영혼에 산울을 둘러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집회에 고훈 목사님께서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상도 안동에서 금은방을 하는데 강도 4명이 들어왔답니다. 딸과 아내의 옷을 벗기고 자신을 묶은 뒤에 돈을 내놓으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1400만 원을 내놓으니까 금은방을 하면서 겨우 1400만 원 밖에 없냐며 온통 다 뒤졌는데 감사패 하나를 발견했답니다. 정찬근 장로님이라고 하는 분이 주신 감사패인데 이분은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활동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정찬근 장로님께 금은방 주인이 헌금해서 감사하다는 패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강도가 그 감사패를 보더니 정찬근 장로를 아느냐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다고 했더니 강도 4명이 정찬근 장로님을 안다고 하니까 너희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1400만 원도 안 가져갈 테니 정찬근 장로님 하는 일에 헌금하라고 하면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강도 4명 모두 감옥에 있을 때 정찬근 장로님께 은혜를 받아 그분께 감사패를 받은 사람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가정에 울타리를 쳐놓으시면 아무리 강도가 들어와도 아무 일 없이 나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시와 담은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하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역할도 합니다. 민수기 22장은 예방의 담의 예입니다. 본문을 보면 발람이라는 거짓 선지자가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지도 말고 저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 발락에게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가게 됩니다. 근데 발람이 타고 다니는 당나귀가 갑자기 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발람이 당나귀를 때리며 길로 가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길옆 담에 발을 비벼 발람의 발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또 발람은 당나귀를 때렸는데 이번엔 당나귀가 주저앉았습니다. 발람이 또 때리자 하나님께서 당나귀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귀지만 영안이 열려 내 앞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이는데 너는 선지자가 돼서 그것도 안보이냐고 발람을 꾸짖은 것입니다. 물론 제가 조금 보태서 말했지만, 당나귀가 담에 발을 비벼서 발람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담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가 죄로 가는 길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가시와 담은 우리를 보호하는 것과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역할을 합니다. Ⅲ. 가시와 담을 두시는 궁극적 목적 첫째, 우상숭배의 결과로 형편이 비참해진 현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시와 담을 두신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호 2:7) 고멜이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다 가시에 찔리고 또 바알과 아세라를 따라가다가 담에 머리를 부딪쳐서 깨지고 피가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든 것입니다. 위대한 선지자인 남편과 자녀들을 두고 바알과 아세라와 연애하는 자를 따라간 것 때문에 형편이 비참해진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준 것들을 가지고 우상숭배를 하니까 모두 뺏어버린 것입니다. 하늘이 땅에 응하지도 않고 땅이 곡식에 응하지도 않도록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땅이 하늘에게 비를 달라고 해도 주지 않고 곡식이 땅에게 물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편이 비참해졌습니다. 형편이 비참해지자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남편 호세아 옆에 있었을 때는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며 다시 남편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탕자의 비유에서도 잘 알듯이 탕자가 유산을 들고 나와 다 탕진하고 돼지의 사료로 쓰이는 쥐엄열매를 먹어야 할 만큼 형편이 비참해지니까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일꾼들도 자신보다 형편이 나았다며 아버지 집의 일꾼으로라도 가서 얻어먹고자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진실로 돌아오는 “행동적인 회개”(active repentance)를 하게 하십니다. 탕자나 고멜 모두 돌아가려고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결코 죄와 우상으로부터 떠나가야겠다고 생각만 해서는 안 됩니다. 행동으로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고멜이 돌아오니까 남편 호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몸을 더럽힌 것이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느냐면서 박대하지 않았습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받아주었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받아줬듯이 하나님께서도 우상숭배하고 배역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받아주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호 2:14-15)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말씀으로 타이르고 위로하시며 모든 것을 다 회복시켜주십니다. 없어도 되는 포도원을 등기해서 저의 포도원이라며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골 골짜기에도 “소망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아골 골짜기는 여호수아 7장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였을 때 그것이 아간의 범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아간과 그 가족들을 모아놓고 돌로 쳐서 죽인 곳입니다. 고통의 장소, 괴로움의 장소에서 소망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하다가 형편이 비참해지고 아골 골짜기와 같이 괴로움이 있는 분이 계신다면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다고 생각만 하지 마시고 행동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아골 골짜기도 소망의 문으로 바뀌게 되고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시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해주십니다. 우상에게 기도하면 우상이 들어줄까요? 우상이 기도를 들어줄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실 능력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호 2:21-22) 하나님께서 하늘에 응답하여 구름을 주시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여 비를 주고 땅은 곡식에 응답하여 수분을 주는 것입니다. 결론 대한민국에는 유교, 불교, 선교, 샤머니즘 등이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명절만 되면 제사를 지내고 자식 장가보내려고 날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계속한다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우리를 벌거벗기시고 광야처럼 만들어 결국 목말라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숭배 하는 이유는 쾌락과 물질의 유혹 때문입니다. 하지만, 쾌락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물질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상의 유혹에 빠지지 마시고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소망의 문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가 잘해서 의로운 사람이 됐다거나 거룩한 사람이 됐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간증을 하더라도 내가 잘했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더라고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주시지 우리가 무엇을 잘했다고 복을 주십니까? 우리에게 의가 있고 거룩이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죄를 막아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나의 자랑, 나의 의, 나의 거룩을 드러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복이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 /창4:19-26/ 피영민 목사 2015-08-20 15:26:43 read : 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 /창4:19-26/ 피영민 목사 2015-08-20 15:26:43 read : 2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서론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제사는 안 받고 아벨 제사만 받으시자 아벨을 시기해서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땅에서 저주를 받아 밭을 갈아도 땅이 제대로 수확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땅은 아담이 범죄했을 때 저주받고 가인이 범죄했을 때 또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방랑자(vagabond)가 된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와 독일어, 불어도 다 똑같습니다. 저는 프랑스의 샹송보다는 이탈리아의 칸초네를 더 좋아합니다. 칸초네 가수 중에서 니꼴라 디 바리(Nicola Di Bari)라는 유명한 가수가 있는데 ‘Vagabondo’라는 곡을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우리나라의 박인희라는 여자가수가 ‘방랑자’라고 번역해서 불렀습니다. 제가 가사를 잠깐 불러드리겠습니다.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 길 방랑자여 방랑자여’ 왜 이런 노래를 사람들이 공감하느냐? 우리가 방랑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인생을 방랑자처럼 살아갑니다. 무엇 때문에 살아가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살인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리대로 하면 사형을 당해야 됩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창 9:6). 살인자는 사람을 향해서 범죄하는 것 같아도 근본적으로는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을 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판사들도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을 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왜 죽지 않았느냐? 창세기 4장에는 아직까지 국가의 사법제도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사사롭게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무리 범죄를 했더라도 개인이 사사롭게 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형의 집행은 국가 사법기관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무슨 표를 어떻게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벨이 죽고 가인은 혼자 남았을 것인데 누가 자신을 죽일까봐 걱정했을까?’ 창세기 5장 3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을 때 130세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 사건이 있기 전에도 아담과 하와는 부지런히 자식을 낳았을 가능성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60년을 살아도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담은 130세에 셋을 낳았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많이 낳았겠습니까? 성경은 중요한 인물 위주로 기록하기 때문에 가인과 아벨 이후에도 얼마든지 다른 자녀를 낳았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방랑자가 되어 살면서도 계속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다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계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인의 계보와는 다른 계보를 허락하셨습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5~26). 셋의 계보는 경건한 후손들을 이어나갔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나오는 에녹도 역시 셋의 후손입니다. 에녹은 365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죽음을 보지 않고 곧바로 하늘로 올라간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아 역시 셋의 후손입니다. 셋의 계보로부터 에녹, 노아, 다윗,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의 계보는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계보였고 셋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실 경건한 계보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두 가지 계보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가인의 계보 아니면 셋의 계보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계보에 속해 계십니까? Ⅰ.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의 삶 첫째,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은 혼인제도를 부패시켰습니다. 라멕은 가인까지 포함해서 가인의 6대손입니다. 라멕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아내 둘을 취한 사람이었습니다. 중혼제도를 처음 실시하여 결혼제도를 부패시킨 것입니다. 라멕은 왜 아내를 둘씩이나 취했느냐? 그 이유는 정욕과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여자를 볼 때 자식을 낳는 도구로 생각하고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목적으로 결혼한 것입니다. 한 여자가 낳으면 10명 낳을 것을 두 여자가 낳으면 20명 낳을 것 아니냐며 자식을 두 배로 얻기 위해서 아내 둘을 취한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 20~25절에서 하나님이 혼인제도를 정하실 때 일부일처제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만나 한 몸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는 서로 이용해먹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런 관계로 한 결혼은 파탄이 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상호 협력해야하는 관계입니다. 동반자이고 협력자인 것입니다. 남자는 자녀가 100명이라면 사랑을 1%씩 주는 것이 아니라 100%씩 100명에게 모두 줍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내가 2명이면 2명 모두에게 100%씩 가는 것이 아닙니다. 50%씩 나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는 100%씩 다 가는데 왜 아내한테는 사랑이 나뉘느냐?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의 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우리 각자를 인구수대로 나눠서 사랑하시느냐? 그러지 않으시고 우리 각자를 100% 사랑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중혼을 절대 금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구약성경을 보면 경건한 사람들이 불경건한 사람들을 따라 악을 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권하여 여종 하갈을 취했고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그 때문에 지금도 중동지방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야곱은 아내가 넷이었고 다윗은 아내 일곱과 첩 셋을 거느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후궁이 칠백명에 첩 삼백명 도합 천명을 거느렸습니다. 만약 교인이 천명이라면 이름만 외우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천명이면 이름을 어떻게 다 외우겠습니까? 이처럼 중혼제도는 언제나 질투와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와 여종 하갈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서 집안에 문제가 생겼고 야곱도 아내들끼리 서로 질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1장을 보면 사무엘의 아버지인 엘가나가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여자를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자식을 잘 낳고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자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혔고 한나가 기도하여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경건한 사람들도 가인의 계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따라서 중혼을 많이 했습니다. 성경과 어긋나는 일반적인 관습을 따라서 중혼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남들이 다 한다고 해도 성경과 어긋나는 관습은 따르지 말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인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의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이 머리가 좋아서 갖가지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라멕에게는 아다와 씰라 두 아내가 있었는데 아다는 두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야발과 유발이었습니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목축업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한 곳에서 건물을 지어놓고 육축을 치지 않고 계속 돌아다니면서 장막에 거했느냐? 그 이유는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곳에서 풀이 충분히 나지 않기 때문에 풀을 다 먹고 나면 다른 곳을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집을 짓고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발의 아우 유발은 수금과 퉁소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음악인과 예술인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라멕의 첫째 아내 아다에게서 난 야발과 유발이 각각 목축업과 음악인의 선조가 되었고 라멕의 둘째 아내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은 기계공업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동철로 각종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도 창조성(ingenuity)이 있습니다. 경건성(piety)은 없어도 창조성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은혜(Common Grace)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도록 하시는 것은 특별은혜인데 가인의 후손들은 특별은혜는 못 받아도 일반은혜는 받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불신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같이 누리며 살아야 됩니다. 아프면 불신자 의사한테 가서 진료를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배고프면 불신자가 운영하는 음식점에도 가서 먹어야 됩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만든 음악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그린 그림을 볼 수도 있는 것이고 학교에 가서 불신자 선생님에게 배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두에게 일반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일반은혜를 주셨지만 가인의 후손들은 이것을 악용되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 4:23~24). 이것은 라멕이 부른 노래입니다. 성경에서 인류 최초로 나온 노래인데 그 내용이 무엇이냐면 소년이 자신을 때렸기 때문에 그 소년을 자신의 아들 두발가인이 만든 날카로운 기계로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흉악한 내용의 노래가 인간이 최초로 부른 노래가 된 것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이렇게 악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두발가인이 만든 날카로운 기계도 올바르게 써야 되는데 그것으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음악과 기계 모두 악용한 것입니다. 사람이 원자력이라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자원을 만들어냈지 않았습니까? 원자력을 발전소를 잘 이용하면 엄청난 전기를 생산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으로 폭탄을 만들어 대량 살상무기로 사용한 것입니다. 또한 의술의 발달도 사람들을 유혹하여 장기를 적출하는데 악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도 가정을 이루고 문화도 발전시키며 살아가지만 결국 그런 것들을 모두 악용하는 것입니다. Ⅱ. 셋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의 삶 가인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번성하여 온 세상이 악해질 것 같아도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셋을 주십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 4:25).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을 끊으려고 온갖 시도를 다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끊으려고 노아의 홍수 이전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부패시켰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와 여덟 식구를 의로운 자손으로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왕 바로는 갓 태어난 이스라엘 남자아이들을 모두 죽여서 이스라엘의 후손이 끊어지게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모세를 살려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본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출애굽기 18장 11절에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출 18:11).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십니다. 예수님의 계보를 끊으려는 사단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단보다 훨씬 크고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남왕국 유다의 왕 가운데 7번째 왕이 아합의 딸 아달랴입니다. 아달랴는 아주 악한 여자입니다. 아버지는 아합이고 엄마가 이세벨인데 부모보다 더 악한 여자였습니다. 아달랴는 바알 숭배자였는데 여호와 섬기는 것을 완전히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을 모두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린 요아스를 살려두셨습니다. 요아스는 그의 고모였던 여호세바와 고모부이면서 당시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의 손에서 자랐고 요아스가 7살이 되던 해 여호야다가 혁명을 일으켜서 아달랴를 쫓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끊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 12:20).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 유다 백성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페르시아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라는 자가 모르드개를 미워해서 모르드개가 성문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 자기한테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만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모두 몰살시키기 위해서 날짜를 잡았는데 하만은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조카였고 직접 딸처럼 키웠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에스더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아가서 악한 하만이 자기 민족을 몰살시키려고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아하수에로 왕이 진노하여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준비했던 나무에 도리어 하만을 매달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셋의 후손 편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아무리 잘 살고 문화를 발전시켜도 하나님은 믿음의 자손들 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을 때 동방에서 박사 세 사람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까지 옵니다. 그리고 헤롯 왕에게 찾아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봅니다. 이 말을 들은 헤롯 왕이 서기관들을 불러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어보자 서기관들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미가서에 기록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헤롯 왕은 동방박사들을 보내면서 예수님을 발견하면 자기에게도 말해달라고 하지만 동방박사들은 꿈에서 헤롯 왕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러자 헤롯 왕은 자신이 왕인데 또 무슨 왕이 나느냐며 베들레헴 근처의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모두 죽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어 피하게 하셨습니다.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마 2:13). 요셉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해 있다가 헤롯 왕이 죽고 나사렛으로 간 것입니다. 메시아를 죽이려는 사단의 음모는 예수님의 탄생 순간까지 계속되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사단보다 한발 앞서서 역사하셨습니다. 결론 이 세상의 가인의 후손들이 아무리 번영하고 발전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믿음의 후손, 셋의 후손들의 편이 되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신명기 32장 35~36절은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확신인데 개역성경의 번역이 어려워서 제가 다시 번역을 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하는 것이다. 내가 내 백성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때가 되면 그 원수들은 실족할 것이다. 그들의 환난 날이 가까우니 그들이 당할 운명이 속히 임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나니 자기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자기 백성들이 무력해지고 종이든 자유인이든 남지 않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개입하실 것이다." 이 세상을 보면 불신자들과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성공하고 이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을 운명인 것입니다. 반면에 셋의 후손들은 세상에서 핍박도 당하고 시험에 들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이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개입하셔서 도와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보니까 공적인 예배가 셋의 후손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6). 셋의 후손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주일은 안식일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일에 하나님을 마땅히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가지신 분들은 교회를 옮겨서는 안 됩니다. 현재 직분을 가지신 분들은 이사했다고 해서 교회를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셋의 계보에 속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셋이라고 확실히 대답해야 됩니다. 우물쭈물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고 셋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가인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도 문화와 부유와 쾌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내를 둘씩 거느리고 자식도 많이 낳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계보와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믿음과 경건을 갖고 예배하는 셋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때로는 어려울 수 있고 좌절할 수도 있으며 낙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꺼져가는 심지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불을 피워주시고 상한 갈대 같을 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붙들어 주셔서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창4:1-7/ 피종진목사 2017-09-27 07:59:00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에 보면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땅의 소산과 양의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사실과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신 반면,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신 사실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의 제사는 열납된 반면 가인의 제사는 외면당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창4:1-7/ 피종진목사 2017-09-27 07:59:00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에 보면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땅의 소산과 양의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사실과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신 반면,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신 사실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의 제사는 열납된 반면 가인의 제사는 외면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이 똑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성도의 예배와 예물은 기쁘게 받으시는 반면, 어떤 성도의 예배와 예물은 외면하십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첫째, 가인의 제사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드린 무성의한 제사였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드린 정성된 제사였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 치는 자로서 양의 새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반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아벨은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생각하는 하나님 중심의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자기를 생각하는 인간 중심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삼상 16:7).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마지못해 하거나 형식적으로나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주일예배나 수요예배, 구역예배, 금요철야, 새벽예배를 드릴 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헌금을 드릴 때에도 미리 준비하여 드려야 합니다(고후 9:5). 헌금은 주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고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때, 우리의 예배를 열납하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둘째, 가인의 제사는 생명이 없는 제사였고, 아벨의 제사는 생명이 있는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생명이 없는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이 생축(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린 생명이 있는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땅의 산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자신의 의와 공로를 내세우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생축으로 하나님께 피 제사를 드림으로써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인류를 위해 대속사역을 수행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려 하거나 그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나 예물은 우리의 의나 공로로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요, 하나님께 지음받은 자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을 보면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직접 십자가를 지심으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을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롬 6:23), 그 사망에서 구원함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의 피를 통한 속죄의 원리를 세우시고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물 희생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할 때마다 동물을 잡아 희생 제사를 드렸고, 그로 인하여 죄인들을 대신하여 무죄한 동물들이 무수히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할 때마다 희생 제사를 드린 동물 희생의 피의 효과는 영원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완전히 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없는 무흠한 다른 인간이 대신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사람으로 나게 하시되, 성령을 통해 죄없이 무흠한 자로 나게 하시어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인류를 대신하여 형벌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해 대신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구주로 영접한 자는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참 자유와 생명을 얻게 해주신 것입니다. 셋째, 가인의 제사는 인격적으로 예배의 자세를 갖추지 못한 제사였고, 아벨의 제사는 착한 인격을 갖추어 드린 제사였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창 4:5,6)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시고 자신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자 심히 분해하며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즉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은 데 대하여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거짓 제사를 드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마음에 분노를 일으켜 하나님을 원망하고 동생에 대한 시기심만 불태운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가인의 시기심은 인류 최초의 살인인 동시에 골육상잔의 비극을 낳고 말았습니다. 에베소서 4장 26,27절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분을 품지 말고, 온유와 화평한 마음으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엡 5:9)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벨의 제사를 본받아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생각하는 하나님 중심의 제사, 생명이 있는 제사, 착하고 온유한 인격을 갖추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창세기 4:1~7]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의 종교와 아벨의 종교 /창4:1-8/ 피영민 목사 2015-08-20 15:31:19 read : 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가인의 종교와 아벨의 종교 /창4:1-8/ 피영민 목사 2015-08-20 15:31:19 read : 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 서론 인간은 왜 병들고 죽느냐? 하와가 뱀에게 속아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와의 남편인 아담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우리를 원죄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습니다. 죄와 사망이 인류에게 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 저주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위대한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은 '원복음'이라고 불립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후손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복수와 단수 두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offspring’은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을 다 가리키는 것으로 복수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seed’는 단수를 의미합니다. 즉, 창세기 3장 15절의 앞부분에 나오는 후손은 복수이고 뒷부분의 후손은 단수인 것입니다. 복수를 의미할 때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대대로 적대감을 가지고 갈등하게 될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단수를 의미할 때는 사단이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말씀의 의미를 얼마나 깊이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가인이라고 붙였습니다. 가인은 히브리어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아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아들을 얻었다. 이 아들이 여호와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본인을 하나님 즉, 여호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보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는 메시아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낳고 여호와라고 한 것은 바로 메시아를 얻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낳고 또 아들을 낳아 아벨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벨이 가인의 아우인 것은 틀림없지만 둘째 아들인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자녀를 또 낳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 4절에 보니까 아담이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고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90살이 되어 경수가 끊어져 출산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이삭을 낳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런 기적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800년 동안 계속해서 낳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이 둘째 아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벨이 죽고 나서 하나님이 셋을 주시고, 셋 다음에 800년 동안 자녀를 낳았다고 했으니 둘째 아들일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는 방식은 구원역사에 중요한 인물들만 기록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빼버리기 때문에 둘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벨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허무’입니다. 아벨을 낳을 때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헛되다는 것을 깨달아서 아벨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담과 하와는 가인이 메시아일 것이고 아벨은 별로 의미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자식 중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쓰지 않으시고 그냥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낳았다고 생각했던 자녀를 쓰시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다윗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이새와 그 아들들을 초청했는데 이새가 다윗은 부르지도 않습니다. 다윗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여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볼 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하나님이 크게 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메시아가 아니고 마귀에게 속한 뱀의 후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한 여자의 후손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말씀하신대로 이 둘 사이에 적대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적대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결국 둘 사이의 적대감은 인류 최초로 살인을 저지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의 유사점이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Ⅰ. 가인과 아벨의 유사점 먼저 가인과 아벨은 세 가지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두 사람은 모두 종교적인 존재였습니다. 사람은 뱀의 후손이든 여자의 후손이든 모두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 3절에 보면 세월이 지난 후 가인과 아벨은 각각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말은 공동번역을 보면 ‘때가 되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제물을 드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왔을 수도 있고 추수할 때가 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아무리 종교를 외면하고 없애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학교는 없어져도 종교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종교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가 싫다고 하는 그 사람도 종교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종교를 갖고 있는 종교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냐 하나님이 열납하시지 않는 종교냐 그 차이 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렸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것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유화’(宥和, propitiation)라고 부릅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도 유화를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 사기를 쳐서 에서가 받을 축복을 모두 가로챘습니다. 그 뒤 형이 무서워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밧단아람이라고도 불리우는 하란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아내를 넷씩이나 얻고 자녀를 열두 명이나 얻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제물을 얻어서 돌아오는데 에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것입니다. 20년 전에 자신의 축복을 빼앗은 아우를 그냥 두지 않겠다며 진노의 진군을 해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양떼와 소떼 중에서 일부를 먼저 앞으로 보냅니다. 그것을 받고 형의 진노가 누그러지길 바랬던 것입니다. 사람이 성질을 내다가도 누가 좋은 선물을 주면 진노가 풀리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쓴 정책이 바로 유화정책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양심 속에 죄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제물을 드렸다는 점이 두 번째 공통점입니다. 셋째, 두 사람 모두 제물이 하나님에게 열납되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가져갔는데 받지 않고 물리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가인과 아벨도 하나님이 제물을 열납해주시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피가 없는 곡물로 제사를 드린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양을 죽여서 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열납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기 제물은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인은 심히 분노하고 안색이 변했습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왜 분노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가인은 아벨을 향해서 분노했고 자기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해서도 분노했습니다. 가인의 종교는 하나님이 거절하셨고 아벨의 종교는 하나님이 열납하신 것입니다. Ⅱ. 가인과 아벨의 차이점 가인의 종교와 아벨의 종교의 차이점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두 사람은 내면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4). 아벨은 믿음이 있었지만 가인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까? 아벨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메시지를 믿었고 가인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메시지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하나님에게 오려면 짐승을 죽여서 피를 흘려야 올 수 있다는 것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아벨은 믿었고 가인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의 내면이 달랐던 것입니다. 둘째, 내면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외면적으로 제물의 차이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미국의 대 신학자인 프린스턴의 신학교수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가 한 사람의 내면과 외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내면의 믿음이 있었으므로 피의 제물을 드린 것이고 가인은 내면에 믿음이 없었으므로 피가 없는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5). 하나님은 가인이란 사람도 열납하지 않으셨고 그 제물도 열납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셋째, 두 사람은 속한 자가 달랐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고 아벨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일 3:12). 가인은 마귀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마귀에게 속하여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한 여자의 후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속했습니까? 마귀에게 속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중간은 없는 것입니다. 가인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피가 없는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피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Ⅲ. 갈등의 결과 하나님이 가인의 종교를 물리치시고 아벨의 종교를 열납하시니 가인이 성질을 내고 안색이 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가인이 분노하자 하나님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느냐며 악을 행하였으니까 낯을 들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 중에도 부모 앞에서 도망가고 부모 얼굴을 안 보려는 사람은 틀림없이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선을 행치 않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낯을 들지 못하는 것이라며 선을 행한다면 낯을 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가인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데 왜 계속 그 종교를 고집하느냐며 종교를 바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지 않는 종교는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로 바꿔야 합니다. 종교를 바꾸지 않고 믿음 없이 살면 죄가 맹수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그 사람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지 않는 종교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결국 죄에 사로잡혀서 죄를 짓고 살다가 죗값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음에도 종교를 바꾸지 않았고 결국 죄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 4:8). 가인과 아벨은 갈등을 겪지만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일방적으로 아벨을 미워해서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벨이 가인을 미워했다는 이야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여자의 후손들의 마음속에는 분노나 미움이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분노와 미움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하고 있다면 그것은 뱀이 준 마음인 것을 알고 갖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도리어 축복해야 합니다. 결론 인간이 살아가면서 종교는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와 경제적인 갈등 같아보여도 사실은 종교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종교를 삶의 변두리에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쫓아내려고 해도 종교는 삶의 변두리로 쫓겨나지 않습니다. 종교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종교는 우리 삶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는 종교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로 바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낯을 들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종이 되어 살다가 스스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믿음은 자기의 사사로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생각을 글로 적어보면 첫 페이지와 끝 페이지의 내용이 모순되고 다 틀립니다. 읽어볼 가치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기의 사사로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구원의 길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죗값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제물로 바쳐도 하나님이 죄 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만 제물로 받으시지 흠 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우리의 죗값을 갚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되셨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는 제사를 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받으시고 이제부터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악한 마귀에게 속하여 악한 마음을 품고 살다가 저주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인의 종교를 따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아벨의 종교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은 우리 신자들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신자를 미워하면 안 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증거입니다.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으면 그것이 하늘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상은 예수님을 믿고 고생한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을 믿고 핍박받은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항상 복음 앞에 살아야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교만해지려고 할 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낮은 자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교만이 겸손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에게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생기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과 원수 노릇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 삶에 끊임없이 적용될 수 있는 원리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를 믿고, 그 종교를 귀중히 여기시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기이한 일 /사29:9-16/ 피영민 목사 2015-08-30 19:31:52 read : 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11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
가장 기이한 일 /사29:9-16/ 피영민 목사 2015-08-30 19:31:52 read : 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11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12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15 화 있을찐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 서론 설교자들은 언제나 재미있으면서도 은혜로운 말씀을 증거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은혜롭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심판의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과 은혜는 상호간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심판에 관한 설교도 하고, 은혜에 관한 설교도 해야 합니다. 목사가 은혜롭고 재미있는 설교만 하면 나중에 왜 은혜가 은혜인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음식을 먹어도 단 음식만 먹으면 나중에 단 맛도 쓴 맛으로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된 이사야 29장도 1-16절까지는 유다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이고, 17-24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를 주시고 회복시킬 것이라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월요 산악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 어느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자동차에 단팥빵과 사이다를 싣고 장사를 했던 빵장수였는데, 빵과 사이다를 싣고 다니다보니 아침 점심 저녁식사를 매번 단팥빵과 사이다로 대신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년을 지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문득 걸어 다니기가 힘들고 살이 빠지는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검사를 했더니 당뇨병이라는 검사결과가 나왔습니다. 10년 동안 단팥빵과 사이다를 주로 먹었더니 당뇨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당뇨병을 극복했느냐고 제가 물었더니 매일 등산을 하고 ‘마’를 갈아먹어서 당뇨를 극복했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늘 달고 귀에 듣기 좋은 것만 골라 들으면 이처럼 당뇨병이 올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하는 설교만 하면 성도들이 지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의 메시지와 은혜의 메시지가 적절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런면에서 이사야 29장은 그런 점에서 심판과 회복의 은혜를 균형 있게 선포하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을 통해 그 당시 유다가 처한 정치적인 상황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일반적인 원리(principle)를 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원리는 주전 720년대인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에도 타당하지만, 원리이기 때문에 오늘날 21세기 교회 시대에도 타당한 원리가 됩니다. 이사야 28-29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기이하다(strange, wonder)’입니다. 1. 첫 번째 기이한 일 “그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 공을 이루시리니 그 공이 기이할 것임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우심할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서 들었느니라”(28:21-22). ‘공’이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기이하고 이상한데, 뭐가 이상하냐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징계하시고 징책하시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모 그룹 회장이 자신의 아들을 때린 술집 종업원들을 혼내주는 바람에 곤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동네 깡패들을 데려다가 자기 자식을 혼내주라는 아버지가 있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인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를 쳐서 멸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이한 일을 자기 백성에게 행하신다고 하니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년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필경 너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군대로 너를 에우며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거리리라”(1-4). ‘아리엘’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불타는 번제단’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아리엘이 ‘다윗의 진 친 성읍’이라고 했기 때문에 아리엘이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아리엘은 예루살렘의 별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번제단이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년부년, 즉 해가 돌아올 때마다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고 예배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백성들을 들어 예루살렘을 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방 백성들인 앗수르와 바벨론 백성들은 교만해져서 ‘우리가 강하여 여호와의 백성을 쳤구나! 여호와도 별거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친 군대도 그냥 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불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경각간에 갑자기 이룰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벽력과 지진과 큰 소리와 회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보장을 쳐서 곤고케 하는 모든 자는 꿈 같이, 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같이 시온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5-6).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와 바벨론을 들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셨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와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졌습니다. 우리가 강하여 여호와의 백성을 쳤다! 여호와가 어찌 우리 앞에 서겠느냐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진과 회리바람과 폭풍과 불꽃으로 앗수르와 바벨론을 쳐서 경각간에, 즉 하루아침에 그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쳐서 전리품을 취했을지라도 그것은 마치 꿈에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포도주를 잔뜩 먹은 것과 같을 뿐입니다. 아무리 꿈에서 산해진미와 최고급 술을 먹었다한들 깨어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치십니다.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절기를 지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치신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까 액땜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벧전 4:17).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먼저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서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 나아갑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회교도들이 모두 부숴버려서 지금은 터만 남아 터키의 관광명소가 되었을 뿐입니다. 얼마나 기이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치시다니요?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예배드리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은 나를 치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치기도 하십니다. 2. 두 번째 기이한 일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치실까요? 두 번째 기이하다는 말씀이 이사야 29장 14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하나님께서 행한 두 번째 기이한 일은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의 지혜를 없애버리시고, 총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총명을 없애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성이 필요합니다. 지식과 총명이 필요합니다. 목사도 지성이 있어야 하고, 성도들도 지성이 있어야 합니다. 지성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의 지성이요, 둘째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난 지성입니다. 이 거듭난 이성은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수납하고 정리해서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지성이 동반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덮어놓고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뭘 믿는지를 모른다면 곤란합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나 지성이 동반되지 않는 신앙생활은 역기능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거듭난 지성은 우리 신앙생활에 체계와 안정을 주지만, 거듭나지 못한 지성,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이며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버트란트 러셀은 40여권의 책을 저술한 지성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무신론자, 회의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유물론에 빠져서 좌파 사상가가 되었고, 좌파 혁명을 주도하는 이론들을 많이 세웠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가 노벨 문학상은 탔는지 몰라도 그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모두 멸하실 지혜입니다. 한국에도 요즘 이런 종류의 지혜자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신론 사상, 좌파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한다고 합니다만, 도대체 무슨 강론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지혜를 따랐기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두드러진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9-12).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묵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 십 개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대학에서 수십 년 동안 교수를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세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 말씀이 무슨 내용인지, 어떤 교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단 한 절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는 분들은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이성이 거듭나야 합니다. 이성이 거듭나지 못하면 성경을 들어도 재미가 없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대전에 사시는 한 집사님은 60세가 넘어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에 늘 약주로 살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글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나니 성경이 너무 읽고 싶어서 하나님께 성경 읽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고 있는데 글자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차츰 차츰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결국 이 집사님이 한글을 깨우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대흥침례교회에서는 지박사님으로 통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로도 깨우칠 수 있는 책이지만, 세상의 학위나 지식 앞에서는 봉인된 책입니다. 읽어도 알 수 없고, 들어도 모릅니다. 제가 예수믿기 전에도 언제나 성경책을 가방에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단 한 구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그 때부터 성경이 깨달아지고 재밌어졌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세상의 지혜 앞에서 봉인된 책입니다. 세상 지혜의 두 번째 특징은 본문 13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예배를 입술로만 드리고, 마음으로 드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자들도 교회에 올 수 있고, 목사가 뭐라고 설교하는지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16). 패리함이라는 말은 심하게 뒤집어엎어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토기장이를 진흙처럼 여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토기장이요, 인간은 진흙에 불과한 존재인데 인간이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르침은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 그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러면서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을 따릅니다. 요즘 세상의 대학에서는 창조론을 가지고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창조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부 진화론에 근거해서 논문을 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가르칩니다. 이것이 세상 지혜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이 왜 원숭이에게 가서 조상님이라고 섬기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세상의 지혜는 두 번째로 빚음을 받은 물건이 빚은 자에게 총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총명이 없으셔서 틀린 말씀만 주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평해서 오류는 갈라내고 옳은 것만 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요즘 신학자들이 연구하는 고등비평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많으니까 이 오류를 비평해서 오류는 빼고 바른 것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역사비평이란 역사가들이 역사자료를 쓸 때, 믿을만한 자료를 빼내는 도구로 사용한 방법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이 방법을 성경에 들이댄 것이 고등비평, 역사비평입니다. 이 고등비평으로 말미암아 결국 독일 교회와 영국 교회가 파괴되었습니다. 고등비평을 하는 사람들은 학자에 따라서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이 부활과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과 속죄의 교리를 부인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자유주의 신학, 고등비평 신학에 대항했습니다. 만약 자유주의 신학과 고등비평을 따라가게 되면 영국 교회는 끊임없이 미끄러져 밑으로 떨어져버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그 유명한 ‘하강 논쟁’입니다. 그 당시 영국 목사들은 스펄전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스펄전을 교단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영국 교회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진화론과 고등비평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상아탑 안에서 철밥통을 안고 떠들지 말고 목회현장으로 나와 성도들에게 설교하면서 교회를 부흥시켜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활이 지나갔다고 설교하면 성도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 재림이 없다고 하면 교회가 부흥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처럼 세상 지혜에는 참된 신앙이 없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세상 지혜의 세 번째 특징은 15절에 기록되었습니다. “화 있을찐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세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겉으로는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어두운 곳, 깊은 곳에 가서 죄악을 행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행하는 것을 보시겠는가?”라고 말하면서 거리낌없이 죄악을 저지릅니다. 지난 주 텔레비전에서 ‘묻지마 관광’에 대한 보도가 나왔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묻지마 관광을 가서 차를 타고 하루종일 이상한 짓 하면서 놀다가 저녁때가 되면 집에 들어갑니다. 어디 다녀왔느냐는 남편의 질문에는 학부모 회의에 갔다고 거짓말하는, 이런 묻지마 관광이 대한민국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보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세상의 지혜들을 따르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 세 번째 기이한 일 그러나 본문에는 세 번째로 기이한 일이 약속되었습니다. “미구에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삼림으로 여김이 되지 않겠느냐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17-19). 또한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부터는 부끄러워 아니하겠고 그 얼굴이 이제부터는 실색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 자손은 나의 손으로 그 가운데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자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22-24). 비록 이사야 29장 후반부에 ‘기이한 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기이한 변화를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레바논은 산과 돌이 가득한 땅인데, 이 레바논이 변해서 기름진 뜰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돌이 가득한 인간의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비옥한 땅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귀머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소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고,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혼미하였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총명을 얻게 될 것이며, 원망하는 인생을 살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교훈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택한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고 말씀했습니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봉인된 책을 열어주셔서 성경을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마음에 기쁨이 없던 자에게 기쁨을 주시고, 총명이 없던 자에게는 총명을 주시며, 인생철학도, 삶의 원리도 없던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교훈을 베풀어주십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내가 왜 사는지도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알고 싶으시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이런 체험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축복해주시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축복과 체험이 먼저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성경이 열리고, 기쁨이 오며,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여 레바논과 같이 산과 돌로 가득하던 심령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심판과 멸망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총명과 교훈과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어리석습니다. 미련한 자라고 합니다. 제가 28세에 예수님을 믿고 32세에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저와 함께 법학을 공부하던 동기들이 저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물론 저는 공부하느라고 고생하며 배고팠고, 동기들은 출세해서 국회의원, 변호사, 법관도 되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그들이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저는 세상의 지혜를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인 말씀을 알고, 깨달으며,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살고자 하는 이 한 가지 욕망을 가지고 살고 싶습니다. 거기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를 때에 성경이 열리고, 총명과 교훈이 오며, 7-80년뿐인 이생뿐만 아니라 영원 내세를 보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가 열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미련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만이 참된 지혜요, 하늘의 총명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값을 갚아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인생에 축복이 오며, 영원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인생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마음 속의 두려움/ 눅12:35-40/ 피종진 목사/ 2009-08-23
가장 무서운 것은 마음 속의 두려움 눅12:35-40 현대를 무한경쟁의 시대,상처의 시대라고 합니다.그러므로 지금은 자기 희생의 결단과 발상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됩니다.현실은 아직도 IMF체제 아래 갖가지 구조조정이 이어져가고 있으며 그 때문에 빚어지는 후유증으로 국민 모두가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예수님은 누가복음 12:35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하셨습니다.이 말씀은 주인을 올바로 섬기는 참된 종의 겸손한 자세와 일하는 일꾼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통령 취임식전에서 상원의 한사람인 목사님이 “예수를 본받아 백성들의 발을 씻는 종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이 말을 새겨들은 그는 곧바로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정책을 세웠고,이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8)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갈등과 대립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이러한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허리에 띠를 든든히 띠고 정신을 차려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누가복음 12:35∼40). 깨어 기도하는 자만이 죄악의 잠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해 절망과 좌절의 깊은 늪을 헤쳐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병은 절망입니다.절망은 완전한 패배를 뜻합니다.루스벨트대통령 취임전 미국은 최고의 불황이 덮쳐 실직자가 1천만명 이상에 달했습니다.그때 그는 “이 경제난 속에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두려운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마음의 빈곤은 모든 패배의 원인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역경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그리고 그 역경의 때에 인간은 세가지 유형중 한가지를 취하게 됩니다.첫째는 체념형,둘째는 도피형,셋째는 돌파형입니다.여기서 우리는 체념형이나 도피형이 되지 말고 돌파형이 되어야 합니다.용기있게 전진하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수리는 자기 새끼를 강하게 키우려고 둥지에서 일부러 돌과 나무가지를 깔아 놓습니다.그것은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입니다.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키워주시기 위해 때로는 연단과 시련의 험하고 힘겨운 고난의 돌밭과 가시밭길을 지나게 하십니다.고난이란 말은 헬라어의 ‘파스코’라는 말로 ‘경험을 가진다’는 말입니다.많은 고난은 많은 경험을 쌓는 일이 되므로 더욱 큰 인물이 될 수 있는 준비의 과정이 됩니다. 로마의 철인 세네카는 “불은 쇠를 단련시키고 고난은 인생을 단련시킨다”고 말했습니다.인생이 겪는 이 모든 고통들은 마치 식탁 위 음식의 조미료와 같은 것입니다.많은 사람들이 극에 달한 육체의 고통 속에 괴로운 나날들을 잊어보려고 마약과 알코올,환각제 등으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만사에는 때가 있습니다.지치고 피곤하다고 좌절하지 말고 절망과 불신앙의 벽을 믿음으로 과감히 뚫고 나아갑시다.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평화와 구원의 품에 늘 안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평강이 함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종진 목사(서울 남서울중앙교회)
가정을 청결케 하라 /레14:34-47/ 피영민 목사 2015-09-01 22:10:58 read : 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34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에 너희가 이른 때에 내가 너희 기업의 땅에서 어느 집에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 35 그 집 주인은 제사장에게 와서 고하기를 무슨 색점이 집에 생겼다 할 것이요 36 제사장은 그 색점을 보러 가기 전에 그 가장집물에 부정을 면케 하기 위하여 명하여 그 집을 비게 한 후
가정을 청결케 하라 /레14:34-47/ 피영민 목사 2015-09-01 22:10:58 read : 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34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에 너희가 이른 때에 내가 너희 기업의 땅에서 어느 집에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 35 그 집 주인은 제사장에게 와서 고하기를 무슨 색점이 집에 생겼다 할 것이요 36 제사장은 그 색점을 보러 가기 전에 그 가장집물에 부정을 면케 하기 위하여 명하여 그 집을 비게 한 후에 들어가서 그 집을 볼찌니 37 그 색점을 볼 때에 그 집 벽에 푸르거나 붉은 무늬의 색점이 있어 벽보다 우묵하면 38 제사장은 그 집 문으로 나와 그 집을 칠일 동안 폐쇄하였다가 39 칠일만에 또 와서 살펴 볼 것이요 그 색점이 벽에 퍼졌으면 40 그는 명하여 색점 있는 돌을 빼어 성밖 부정한 곳에 버리게 하고 41 또 집안 사면을 긁게 하고 그 긁은 흙을 성밖 부정한 곳에 쏟아 버리게 할 것이요 42 그들은 다른 돌로 그 돌을 대신하며 다른 흙으로 집에 바를찌니라 43 돌을 빼며 집을 긁고 고쳐 바른 후에 색점이 집에 복발하거든 44 제사장은 또 와서 살펴 볼 것이요 그 색점이 만일 집에 퍼졌으면 악성 문둥병인즉 이는 부정하니 45 그는 그 집을 헐고 돌과 그 재목과 그 집의 모든 흙을 성밖 부정한 곳으로 내어갈 것이며 46 그 집을 폐쇄한 날 동안에 들어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47 그 집에서 자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그 집에서 먹는 자도 그 옷을 빨 것이니라 ============================ 서론 우리나라에서는 집을 살 때에 그런 일이 별로 없습니다만 외국의 경우에는 집을 살 때에는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흰개미(termite)가 있는가’ 입니다. 흰개미가 한마리라도 보이게 되면 그 집안에는 흰개미가 대단히 많다는 증거입니다. 흰개미는 나무를 갉아먹고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흰개미가 있으면 그 집의 나무는 조만간에 사라지고 집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는 ‘mold infection’ 이라고 하는 유독성 곰팡이가 감염된 집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곰팡이는 주로 물이 새는 곳에 서식하면서 가족들의 건강을 위협합니다. 집이 곰팡이에 감염이 되게 되면 집 전체를 소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경우에는 흰개미나 곰팡이로 인해 소송이 생긴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와 비슷한 집문둥병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문둥병은 한가지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에 보면 사람의 피부에 나는 문둥병이 있고, 옷에 나는 문둥병이 있고, 주택에 발하는 문둥병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소위 한센씨 병이라는 것은 옷이나 주택에는 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문둥병과 오늘날 말하는 한센씨 병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오늘 성경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문둥병이 죄의 상징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6장 16-22절을 보면 웃시야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웃시야왕은 통치를 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라가 강성해졌습니다. 그러자 왕의 마음에 교만이 들어서게 되었고, 그만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버렸습니다. 웃시야왕은 제사장인 아론의 아들들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자기가 직접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제사장 아사야가 용감한 사람 80명을 데리고 들어가서 왕의 망령된 짓을 막고자 합니다. 그러자 웃시야왕이 “네가 감히 누구관데 내가 여호와께 분향하는 것을 막고자 하느냐?” 하면서 노를 발합니다. 그 순간에 웃시야의 이마에는 문둥병이 발하게 됩니다. 그 결과 웃시야 왕은 왕으로 통치도 못하고 별궁을 만들어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게 되고, 그 아들 요담이 뒤를 이어서 왕으로 통치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모세가 구스여인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흑인을 취했습니다.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며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흑인을 취할 수 있습니까?” 그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편을 들어주시며 미리암을 꾸짖으십니다. “내가 들어 쓰는 종인데 네가 어찌 감히 모세 비방하기를 주저하지 않느냐?” 그 벌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모세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누이인데 잠깐 잘못했다고 해서 그렇게 심히 벌하십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내가 문둥병을 발하게 하였는데 그래도 7일을 두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해서 미리암이 진 밖에 7일 동안 쫓겨나 있다가 다시 돌아온 스토리가 민수기 12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문둥병은 죄의 상징이요 죄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집문둥병이란 무엇입니까? 주택에 문둥병이 일어났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가정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 사람의 죄, 내 영혼의 죄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죄는 한 사람만 죽일지 몰라도 가정적인 죄는 온 가족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개인적인 측면도 있고 집단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적인 죄만 중요시 여기지 집단적인 죄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가정적인 죄도 있고 국가적인 죄도 있고 사회적인 죄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국가적인 죄나 사회적인 죄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가정적인 죄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 가정에 이상하리만치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원치 않는 고통이 자꾸 발생한다면 ‘아하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우리 가정에 말씀하시는 것이 있구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집문둥병을 청결케 하는 것처럼 여러분 가정의 죄악을 청결케 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집문둥병의 의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는데 왜 집문둥병과 같은 재난을 허락하실까요? 하나님이 집문둥병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4절“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에 너희가 이른 때에 내가 너희 기업의 땅에서 어느 집에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 문둥병을 발하게 하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하나님이 집안에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랑의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을 하셨을까요?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집안에 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신호입니다. 사람이 몸에 병이 들었는데 아무 징후도 없고 표식도 없으면 그 사람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위암에 걸리면 소화가 안 되는 표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수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속병이 있는데 아무 증세도 없다고 하면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가 건강한줄 알고 있다가 갑자기 죽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집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는 것은 ‘그 집안에 가정적인 죄가 있다’ ‘그 집안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 가르쳐 주는 표식인 것입니다. 둘째로는 가정에 임한 죄를 제거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흰 개미가 집에 있는데 제거하지 않게 되면 그 집은 조만간 무너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유독성 곰팡이가 보이는데 제거하지 않으면 그 가족은 곧 각색 질병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문둥병은 무언가 이 가정에 주의해야 하고 제거해야 될 죄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빨리 그것을 치우라는 하나님의 촉구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집문둥병은 가정의 경건을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경건하지만 가정적으로는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목사님은 훌륭하지만 그 가정이 경건치 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문둥병을 가정의 경건을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될 것입니다. 욥기 22장 23절을 보면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27-28절에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기도가 응답되고 경영이 성취되고 인생길에 서광이 비취게 되는 3대 축복이, 장막에 임한 불의를 제거하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은 아니고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이기 때문에 증거능력이 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장막에서 불의를 제거하라는 메시지는 성경적인 메시지인 것입니다. 장막 안에 불의를 숨겨 놓았다가 망한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아간입니다 여호수아서 7장 21절을 보면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을 취할 때에 하나님이 성안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간은 세 가지를 취합니다.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은 이백 세겔 그리고 오십 세겔의 금덩어리를 감추었습니다. 이 아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 같이 어려운 성은 무너Em렸으면서도 작은 성 아이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패배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죄의 원인을 찾고 찾다가 결국은 아간을 찾아내었고 아간과 그의 아들과 딸들은 아골 골짜기의 돌무더기에 묻히게 됩니다. 결국 완전히 그 집안이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스가랴서 5장을 보게 되면 가정적인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성전재건을 태만히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어서 성전을 재건하게한 두 명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스가랴 선지자가 어느 날 보니까 한 두루마리가 날아갑니다. 장이 이십규빗이고 광이 십규빗이나 되는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환상이 보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봅니다” 천사가 설명하기를 “그것은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그 두루마리가 곧 저주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의 두루마리가 어디에 들어갑니까? 스가랴서 5장 4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도적질하는 물건을 가득 쌓아놓은 집안에 저주의 두루마리가 들어가서 그 나무와 돌을 살라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집안에 이 집문둥병이 발하였을 때 그것을 그대로 놔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집문둥병이 발하게 되면 가족들이 다 죽게 되고 집안이 망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집문둥병 치료의 다섯 단계 그렇다면 이 집문둥병이 발하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 치료의 다섯 단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집안에는 어찌해서 이렇게 어려움이 계속되는가?’ ‘어찌해서 이렇게 고통이 계속되는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섯 단계의 치료를 들으시고 그대로 잘 행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는 영적인 지도자의 도움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3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집 주인은 제사장에게 와서 고하기를 무슨 색점이 집에 생겼다 할 것이요” 제사장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님 우리 집안에 이상한 색점이 생겼습니다. 우리 집 벽에 이상한 색점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영적인 지도자의 도움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계속되는데 그 문제를 홀로 안고 가지 마시고 영적인 지도자와 상담하고 문제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집을 일단 비우는 것입니다. 3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제사장은 그 색점을 보러가기 전에 그 가장 집물에 부정을 면케 하기 위하여 명하여 그 집을 비게 한 후에 들어가서 그 집을 볼찌니” 제사장은 그 가장집물(家藏什物)을 먼저 비워야 합니다. 가장집물이란 ‘집에 감추어둔 세간만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먼저 깨끗하게 치우라는 것입니다. 집안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먼저 집안에 도적질한 물것이 있는 것을 치워야 합니다. 도적질한 물건이 있으면 치우고, 악한 책이 있으면 버리고, 못된 비디오 폭력성 게임이 있으면 그것을 수거해서 쓰레기통에 과감하게 버리고, 우상숭배 물건이 있으면 불상이든 뭐든 그것이 아무리 비싼 것이고,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고, 금도금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한강 물에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런 재수 없는 물건을 집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집에 있으면 저주의 두루마리가 그 집안으로 날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악에 관련된 물건이 있으면 집안에서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게임을 하면 잘 봐야 합니다. 요새는 폭력성 게임이 많아서 거기에 중독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중독 되어서 며칠동안을 밥도 안 먹고 게임을 하다가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대전에 있을 때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집안의 골칫거리였습니다. 그 청년은 대학도 계속 떨어졌습니다. 마음속에 반항심이 일어나서 가족도 살해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그런 청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저를 집에 초청을 했습니다. 제가 집에 가서 보니까 얌전하게 생겼고 성품도 착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한번 마음속에 반항심이 일어나면 칼을 들고 나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청년과 대화를 했습니다. “너의 문제가 무엇이냐? 너의 맘속에는 왜 그렇게 반항심이 일어나는가?” 그렇게 물으면서 둘러보니 방안에 테이프가 가득 있습니다. 그런데 그 테이프는 대부분 락(Rock), 헤비메탈 음악이었습니다. 가수의 이름도 대부분 반 기독교적입니다. 제목이 ‘Black sabbath‘(검은 안식일), ‘Highway to hell‘(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과 같이 반기독교적입니다. 저는 이 청년의 문제가 이 악한 음악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너는 이 음악을 왜 듣느냐?” 그랬더니 그런 음악들이 듣기에 감미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악을 듣고 나면 마음속에 반항심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 너의 문제는 거기에 있구나’ 생각을 하고 “너는 그 수백개 되는 테이프를 다 태워라”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순종하고 나가서 다 태웠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그 청년은 말했습니다. “내가 이 테이프를 들을 때 귀로는 감미로웠으나 내 속에서는 자꾸 반항심이 생겨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내가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겠습니다.” 그 후에 그 청년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대학도 들어가고 군대도 잘 다녀오고 장가도 갔습니다. 제가 주례를 해서 장가들었습니다. 지금은 자녀를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건강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치울 물건이 있으면 치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적이 있으면 떼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치우면 뭔가 잘못될 것 같습니까? 그러면 저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가서 떼어 드리겠습니다. 우상에 관련된 물건이 있으면 전부 한강 물에 버리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가정에 집문둥병이 발하면 7일 동안 살펴보는 것입니다. 37-39절을 읽겠습니다. “그 색점을 볼 때에 그 집 벽에 푸르거나 붉은 무늬의 색점이 있어 벽보다 우묵하면 제사장은 그 집 문으로 나와 그 집을 칠일동안 폐쇄하였다가 칠일 만에 또 와서 살펴볼 것이요 그 색점이 벽에 퍼졌으면 그는 명하여 색점 있는 돌을 빼어 성밖 부정한 곳에 버리게 하고” 라 했습니다. 가정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면 ‘아이고 어떻게 하나?’ 할 것 없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 집안에 어찌해서 이런 어려움이 임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요소가 있는가?’, ‘우리 부부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하는 언행심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부부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하는 언행심사를 하지는 않는가?’, ‘우리 자녀들이 혹시나 죄악에 빠져 있지 않은가?’ 욥은 자녀들이 죄악에 빠졌을까봐 하나님께 늘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칠일동안 살펴보는 것입니다. 7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수입니다. 철저하게 살펴보고 반성을 해보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불러다가 “우리 집안에 어려움이 있는데 혹시나 너희들에게 죄악이 있지는 않느냐?” 하고 반성하고 가족문제를 반성해 보는 것입니다.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임하게 되면 그것을 진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진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는 진단한 결과 문제가 부분적이라고 생각이 되면 부분적으로 치료하면 되는 것입니다. 40-41절을 읽겠습니다. “그는 명하여 색점 있는 돌을 빼어 성밖 부정한 곳에 버리게 하고 또 집안 사면을 긁게 하고 그 긁은 흙을 성밖 부정한 곳에 쏟아 버리게 할 것이요.” 7일 동안 살펴보았더니 돌 한 개가 문제라고 하면 그 돌을 꺼내서 성밖에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7일 동안 살펴보았더니 부분적으로 벽에 흙이 문제였다고 하면 흙을 긁어내서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돌을 새것으로 바꾸어 끼고 흙은 새 흙으로 바르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 부분적인 죄악이 있으면 그 죄악을 꼬집어서 긁어내고 그 죄악을 고치고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죄악이 있다고 해서 집을 다 헐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그 죄가 부분적인 죄, 자녀의 죄나 남편과 아내의 죄라고 한다면 그것만 제거하면 됩니다. 돌 하나가 문제인데 집을 다 헐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이나 자녀들의 삶 속에 생기는 문제가 부분적인 것이면 부분적으로 치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를 진단해 보니까 그것이 총체적인 문제, 즉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고 도무지 알지도 못하겠고, 이 고통과 저주가 도무지 어디서부터 오는지도 모르겠다고 한다면,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문제라고 판단을 하고 전체적인 치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43-4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돌을 빼며 집을 긁고 고쳐 바른 후에 색점이 이 집에 복발하거든 제사장은 또 와서 살펴볼 것이요 그 색점이 만일 집에 퍼졌으면 악성 문둥병인즉 이는 부정하니 그는 그 집을 헐고 돌과 그 재목과 그 집의 모든 흙을 성밖 부정한 곳으로 내어갈 것이며” 부분적으로 돌 하나 빼는 것으로는 집안의 집문둥병이 해결이 안 되겠다고 하면 그러면 그 집을 헐어버리고 그 집안에 있던 모든 것을 성밖 진에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가 총체적이라고 하면 온 가족이 휴가를 함께 얻어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저주와 고통은 물러가고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 임하게 될 것입니다 니느웨성은 성에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을 멸망시키기를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느웨성이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온 백성이 회개하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은 니느웨성을 살려주시고 다시 은총을 회복한 줄 믿습니다. 결론 오늘날 우리는 개인의 경건은 강조하면서 가족 전체의 경건은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족 전체도 경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개인의 죄악도 문제이지만 가정의 죄악도 문제요, 사회적인 국가적인 죄악도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시면 하나님 앞에 조용히 진단하고 치료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제가 영적인 것이면 영적으로 치료하시고, 죄악의 문제이면 회개함으로 치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정의 여러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집안에 예수님이 갑자기 오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고 들어갔는데 예수님이 오셨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 얼른 들어오세요. 우리 집에 있는 음란한 책도 보시고, 폭력성 테이프도 좀 보시고, 우리 부부가 하는 다투는 대화도 들으시고, 우리 집에 있는 부적도 좀 보시고, 우리의 마음도 다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집안의 죄악, 가정적인 죄악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예수님 어서 들어오세요.” 하고 맞이할 수 있는 청결한 가정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 한주간은 여러분 가정에 청결을 이루셔서, 모든 악한 사단 더러운 귀신의 역사는 물러가고 하나님의 축복을 새롭게 체험하시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간음하지도 말찌니라 /신5:18/ 피영민 담임목사 2018-07-11 01:09:35 read : 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제7계명 간음하지도 말찌니라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7계명은 간단하고도 단순한 명령이며 결혼제도를 보호하고 가정의 신성함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성곽과도 같은 계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7계명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큰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고 또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 계명을 범하고 있
간음하지도 말찌니라 /신5:18/ 피영민 담임목사 2018-07-11 01:09:35 read : 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제7계명 간음하지도 말찌니라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7계명은 간단하고도 단순한 명령이며 결혼제도를 보호하고 가정의 신성함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성곽과도 같은 계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7계명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큰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고 또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 계명을 범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7계명을 잘 범하는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성적인 욕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서도 식욕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성적인 욕구는 강력한 욕구인 것입니다. 둘째, 성적인 욕구는 인간이 타락한 상태에서 더욱 강해지고, 충족되지 않은 경우에는 범죄하기 쉬운 많은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장 19절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타락한 마음속에는 간음과 음란이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타락을 안 해도 강한 욕구인데 타락을 했기 때문에 제7계명을 범하기 쉽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셋째, 현대사회는 간음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찬양하기까지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2015년 2월에 헌법재판관 9명 가운데 7명이 찬성하여 형법 241조 ‘간통죄를 범하면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하는 법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결하여 2016년 1월에 형법에서 삭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간통죄는 우리나라의 형법으로는 죄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 나라에서 간통죄는 민사소송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그 이유가 실용적인 유익때문에 간통죄를 폐지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원리와는 거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장애인들을 실용적인 유익이 없는 자들로 분류하여 장애인들을 다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용적인 유익이 없다고 하여 고귀한 생명을 죽이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7계명은 실용적인 유익 때문에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금한 것입니다. 오늘날 매스 미디어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간음을 주제로 삼거나 도리어 간음을 미화하는 분위기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혼을 조장하거나 심지어는 이혼에 성공한 것을 축하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유명한 사업가들 가운데는 간음과 이혼 사건이 비일비재하고 그런 사건이 없으면 도리어 쑥맥 취급 당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간음죄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에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간음하는 자들을 그냥 놔두시지 않으시고 심판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이 아니라 신약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제7계명 간음하지도 말찌니라를 생각하면서 제7계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제7계명의 신학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제7계명을 위반하는 일의 해악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제7계명을 어떻게 지킬 수가 있는가라는 네 가지의 소주제로 나누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I. 제7계명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제7계명의 의미입니다. 간음하다는 히브리어로 나아프(נָאַפ)라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좁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넓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좁은 의미로는 간통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다른 이성과 자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Adultery로 쓰이는데우리말로는 간통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7계명은 간통죄를 금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형법에서는 삭제되었지만 하나님의 법으로는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변경되지 않는 여전히 큰 죄인것입니다. 넓은 의미로는 간음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fornication이라고 하고 우리 말로는 간음이라고 읽습니다. 부부가 아닌 미혼인 사람들 간의 성적인 관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실제로 육신적인 간음 뿐만 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까지도 정신적인 간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나아프라고 하는 동사는 좁은 의미로는 간통이고 넓은 의미로는 간음과 정신적인 간음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제7계명의 목적은 가정의 신성함을 보존하고 결혼제도를 보호하며 부부간의 정절(fidelity)을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7계명의 강조점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간음도 금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간통을 금지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제일 좋은 번역은 간음하지 말찌니라보다 간통하지 말찌니라가 더 정확한 번역인 것입니다. 영어성경 NIV나 KJV성경을 보면 you shall not commit fornication로 번역하지 않고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더 정확한 번역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7계명은 결혼한 사람들이 간통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II. 제7계명의 신학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제7계명의 신학적인 근거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결혼제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창조규례에 속한 것입니다. 창조규례(Creation Ordinances)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피조물들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법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 6일 일하고 하루 안식하는 것, 일주일은 7일 단위로 돌아가는 것, 일 년은 365일이고 춘하추동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은 누가 법으로 바꾼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피조물 안에 주신 내재된 규례이기 때문에 인간의 법이나 다수결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피조물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문화명령의 규례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남자는 때가 되면 부모를 떠나서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 살라는 규례들은 다 창조규례에 속한 것들입니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가정이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나온 한 단계이고 이것이 더 진화하게 되면 없어질 수도 있는 제도라고 하는 생각은 창조규례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를 30시간으로 바꾸겠다는 생각과 똑같은 것입니다. 또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도 창조규례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이 법으로 정하신 창조규례이며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제도인 것입니다. 둘째로 결혼제도는 언약을 통해서 한 몸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했습니다. 또 말라기 2장 14절에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맹약한 아내라는 말은 언약으로 맺어진 아내라는 것이고 하나님이 증인이 되셔서 증거하신 아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언약은 히브리어로 베리트(בְּרִית)입니다. 이것은 시장바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계약과는 다릅니다. 언약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고 절대로 깰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지키면 반드시 복을 받고 어기면 반드시 벌을 받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약을 깨고 벌을 안 받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언약을 깬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맺었다 풀었다 할 수 있는 가벼운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증인으로 수반하는 언약적 관계인 것이며 다른 어떤 관계보다도 깊은 관계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그 아내와 연합하여”라고 하는 히브리어 다바크(דָּבַק)는 ‘아교(glue)를 붙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이 두 장을 그냥 밥풀이 아니라 강한 접착제로 붙인 다음에 떼면 두 장 다 엉망이 되는 것과 똑같다는 뜻입니다. 간음이라는 것은 이처럼 언약을 파괴하는 행위이고 벌 받을 행위이고 한 몸 관계를 깨뜨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6절에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부부가 한 몸 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을 깨고 창기와 한 몸 관계를 이룬다면 그 남자는 창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성경은 수간을 금하고 있습니다. 개와 한 몸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개가 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한 몸 관계를 이루는 것이지만 간음은 한 몸 관계를 깨는 것이고 결국은 창기도 되고 짐승도 되는 것입니다. 언약을 깨는 것이 이처럼 얼마나 큰 죄인가를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사람의 성적인 관계는 결혼생활 안에서만 허락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에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2~4절에도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부 사이에서 남편과 아내는 결국 책임을 다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는 유일한 상대라는 것입니다. 오직 결혼 생활안에서만 성적인 관계가 허락이 된다고 하는 것이 신학적인 원리인 것입니다. III. 제7계명을 어기는 죄의 해악성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간음 특별히 간통(adultery)을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큰 죄로 여기십니다. 이것은 작은 죄가 아닙니다. 큰 죄입니다. 창세기 39장 9절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이런 말로 거절합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간통을 큰 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가? 여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간음은 인간을 짐승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수준이 한 마디로 개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녀 간의 성적인 관계는 인간의 번영을 위해서 하나님이 부부에게만 허락한 완전하고 좋은 선물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 되고 또 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아닌 다른 이성과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으로 간음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을 더럽히는 것이고 스스로 창기나 짐승의 수준으로 자기 자신을 전락하고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둘째, 간음은 언약을 파괴하고 배우자에 대한 신뢰를 짓밟는 것입니다. 결혼 언약은 하나님과 맺는 신앙의 언약인 만큼 중요한 것이고 불신자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간음은 이러한 언약을 배반하고 증인 되신 하나님을 업수이 여기고 배우자를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cheater). 그러므로 결혼 언약을 배반하는 사람은 그 어떤 말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와 제일 가까운 사람과의 언약도 어기는 사람이 어떻게 진실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말은 하나도 믿을게 못되는 것입니다. 셋째, 간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간음하는 사람들은 종종 ‘나는 아무에게도 해끼친 일이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악한 말이 어디있습니까? 간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배우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고 아주 비참해집니다. 남편을 사랑하기가 어렵게 되고 신뢰를 잃고 큰 상실감을 갖게 됩니다. 고등학교 시절 컨트리 팝송 가운데 Skeeter Davis라는 가수가 부른 ‘The End of the World’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사랑을 잃으면 세상이 끝난 것과 같다는 슬픈 가사의 노래입니다. 부부 간에 서로 의지하고 살다가 남편이 배반하면 그 아내는 얼마나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정말 이기적인 말이고 잘못된 말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아내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상처와 엄청난 피해를 준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루에 수백 가정이 간통으로 인해서 파괴되고 있습니다. 영국에는 하루에 400가정이 파괴되고 있다고 합니다. 또 배우자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큰 문제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바라보고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하는데 간음으로 인해 부모가 이혼해서 갈라지게 되면 가정의 기초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이혼하게 되면 자녀들은 항상 자기들의 잘못으로 부모가 갈라진다고 생각이 들어서 큰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혼하게 되면 자녀는 부모 간에 선택을 해야 하고 심리적으로 불안과 분열증을 겪게 됩니다. 또한 이런 가운데 제5계명 부모공경을 순종하기도 어렵습니다. 제7계명을 어기는 것은 한 마디로 자녀들에게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간음한 자의 일생을 보면 비참합니다. 아내도 떠나고 자식도 떠나고 간음한 여인에게도 버림받고 다 잃게 되어 결국 본인의 인생도 파괴되는 것입니다. 넷째, 간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도 실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을 따랐는데 남편이 배반을 했다면 아내는 성도로서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음, 간통은 궁극적으로 상대방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간음, 간통이 큰 죄이기 때문에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간음한 자를 돌로 쳐 죽이라는 법도 있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 22장 22절에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간음, 간통은 큰 죄입니다. 대한민국의 법은 무죄일지는 몰라도 이스라엘의 법은 사형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간음이나 간통을 하는 사람은 지금 큰 돌이 내 머리에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큰 죄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IV. 간음이나 간통을 예방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성경에 간음이나 간통을 예방하는 네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가정을 행복한 자리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5절에 부부가 상호 간에 의무를 다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행복하거나 따뜻하지 못하면 남편은 방황을 하게 되고 결국유혹의 늪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적인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자극을 줄이는 것입니다. 성적인 자극을 안 받을 수는 없습니다. 21세기는 온통 영화, TV, 서적, 컴퓨터, 광고 등 성적인 유혹이 사방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적인 유혹은 주로 우리의 눈을 통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극을 줄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 교수시절 성적인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신학교를 왔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성적인 자극은 이처럼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눈으로 오는 자극을 줄여야 합니다. 한 번에 줄일 수는 없으니까 점차 줄여가다가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또 남에게 유혹을 줄 수 있는 옷차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9절에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유혹을 주는 옷차림도 하지 말고 성적인 자극도 줄여야 하겠습니다. 셋째, 성적인 유혹이 올 때는 은밀하게 오기도 하고 갑자기 오기도 하는 것이기에 항상 거부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길러두어야 합니다. 내적인 힘을 길러두지 않으면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말씀으로 물리칠 수 있도록 내공을 잘 길러두면 이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영적인 내공을 길러 두었기 때문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단 번에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공을 길러서 간음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넘치는 에너지는 다른 건설적인 일에 소비되도록 해야 합니다. 운동이나 건전한 취미를 하든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든지 사업이나 공부를 건설적인 것으로 활용을 해서 잘못된 길로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결론 예수님은 마음에 품는 음욕까지도 간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7계명에서 깨끗하다고 말할 수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제7계명을 위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7계명을 위반할때 가정이 파괴되는 것보다 더 궁극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복음이 주는 네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첫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죄 용서를 약속합니다. 하나님은 간음죄를 던져버리시고 잊어버리시고 기억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둘째, 복음은 간음죄로 인해서 상처 입은 영혼과 가정을 치료해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정결한 가정을 이루게 하십니다. 물론 간통을 했다면 이혼사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신 이혼사유가 바로 간통이었습니다. 물론 이혼을 할 수도 있지만 다시 용서하고 합쳐서 정결한 가정을 이루고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오는 치료입니다. 셋째, 복음은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에 유혹을 이길 능력을 줍니다. 성령이 내주하셔서 힘을 주시기 때문에 유혹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복음은 약속과 소망을 줍니다. 우리가 이런 죄와의 싸움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영화의 날이 올 수 있도록 약속과 소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7계명은 가정을 보호하라고 주신 성곽과 같은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어겼다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회개하고 용서받아서 다시 회복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한 자에게 물을 주리라 /사44:1-5/ 피영민 목사 2015-08-30 08:37:10 read : 5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4 그들이 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리라 /사44:1-5/ 피영민 목사 2015-08-30 08:37:10 read : 5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 서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응답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를 책임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많이 알고 마음에 새기면서, 기도할 때마다 그 약속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영적인 실력자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사야 43장 25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죄사함을 주신다는 약속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죄에 대한 기록이 있다면 그 기록을 모두 도말하실 것이고, 혹시라도 죄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죄 사함만 주시고 돌아서시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44장에서 새로운 약속을 더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믿는 자들은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생수의 강이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것처럼 시원하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7장에 상응하는 구약의 약속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약속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핵심내용은 3절입니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여기서 물과 시내란 하나님의 신이 후손들에게 임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나타난 생수의 강이 성령을 의미하듯, 이사야 44장에 나타난 갈한 자에게 주시는 물도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1. 약속의 대상 이 약속을 받을 대상은 누구인지에 대해 우리는 먼저 해답을 명확하게 정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이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약속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결과를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로 욕을 보게 하며 야곱으로 저주를 입게 하며 이스라엘로 비방거리가 되게 하리라”(사 43:28). 불순종하고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약속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저주와 비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본문 1절을 보면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종 된 사명을 수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이 약속의 대상입니다. 2절 후반부에는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수룬’이란 이스라엘의 애칭으로서 ‘내 의로운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아!, 혹은 이스라엘아! 부르실 때는 대개 법적인 이야기를 진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수룬이라는 애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를 때는 대개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전하십니다. 따라서 이 약속의 대상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찬하시는 믿음을 가진 유다 백성들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약속의 대상이 됩니다. 둘째로 이 약속은 육적인 유다 백성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5). 이 말씀은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이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칭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순종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동시에 주어졌습니다. 여러분도 순종하여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약속의 대상이 되는 줄로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이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문도들과 함께 기도할 때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고 말씀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모든 말씀과 행하신 모든 일들이 진리임을 증언하는 증인들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을 힘입어 예수님께서 본인의 위격에 대해 하신 모든 말씀, 본인의 가치에 대해서 전하신 모든 말씀, 또한 행하신 모든 기적이 진리임을 증언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감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하였습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죄사함을 얻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또 보이라 하느냐?”고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죽어도 다시 부활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죽여도 나는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선포하며, 그 약속대로 다시 살아나신 이가 누구입니까? 모하메드입니까? 공자와 맹자입니까? 히틀러, 나폴레옹, 모택동이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아무도 그런 말을 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이 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와 같이 말씀하셨고, 그와 같이 행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사도들에게 역사하셔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과 삶이 진실임을 함께 증거 하신 것입니다. 복음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더욱 확고한 진리로 믿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이 복음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신다면 이 약속의 대상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약속의 내용 본문에 나타난 약속은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성령을 알지 못합니다. 성령을 상상할 수도 없으며,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날마다 지혜와 권능과 용기를 주시는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만약 성령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마치 마른 땅과 같이 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의 영혼은 당연히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새 술에 취한 것처럼 사람이 변화됩니다. 반면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헌 술에 취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헌 술에 취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신기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이상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늘 헌 술에 취해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셔서 늘 새 술에 취해 있기 때문에 소주나 맥주 같은 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늘 인생이 즐겁고, 윤기가 나며, 기쁘고 행복합니다. 전 예수님을 믿기 전에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항상 마음이 공허하고 허무했었습니다. 그래서 또 먹었습니다. 술 외상 빚이 얼마나 많았는지 결혼할 때 받은 축의금은 모두 술값을 갚는데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새 출발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공허하고 마른 땅 같은 심령을 지녔지만, 성령께서 임하시자 갈한 영혼에 물이 가득차고 마른 땅 같은 심령에 시내가 흘렀습니다.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은 이사야서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다른 책 안에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9),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슥 12:10).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시되 맛보기로 잠깐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고 넉넉한 소낙비처럼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저는 비를 좋아하는데, 조금씩 내리는 가랑비보다는 소낙비를 더 좋아합니다. 소낙비가 내리는 날, 방에 조용히 앉아서 소낙비의 리듬을 듣고 있으면 운치도 있고,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되 8월의 장마비, 소낙비처럼 부어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번 산상집회의 주제도 ‘성령의 소낙비를 맞으라’로 정했습니다. 성령을 소낙비처럼 내려주시겠다는 약속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에서 최초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교회에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이 약속을 붙들고 성령을 부어주시라고 기도했고, 거듭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는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기록되었고,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빌립 집사의 증거로 예수님을 믿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의 안수로 성령충만을 받은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0장에는 이방인 고넬료의 권속들이 베드로를 초청해서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은 사건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을 통하여, 또한 교회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셨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이사야 44장 1-5절에 약속하셨으니 내 영혼에 성령을 소낙비처럼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앉을 때마다 회개기도만 하면서 시간을 다 보내지 마시고, 성령의 소낙비를 구하여 성령 충만을 체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명의 성도가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한 교회가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부흥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 국가가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대각성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영혼에 은혜를 주시며, 우리 교회에 부흥을 내려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각성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약속의 결과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면 세 가지 명백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첫째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2). 하나님께서는 갈한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도우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이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면 우리 영혼의 두려움이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정권을 가진 자들에게 끊임없는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처럼 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담대하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행 4:29). 여러분 가운데 미래에 대한 두려움, 죽음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책임지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둘째로 영혼의 갈증이 사라집니다.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면 갈증이 사라지듯, 성령을 받으면 영혼의 갈증이 사라집니다. 전도서는 성령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공허한 마음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사람은 아무리 이 세상에서 바쁘게 살고, 열심히 돈을 벌어도 왠지 이런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고 공허해합니다. 영혼의 공허함이란 지식이나 돈, 쾌락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성령으로만 채워집니다. 이렇게 성령이 부은바 되면 인간의 영혼은 만족감으로 가득 찹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와 같이 “주께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기 전에 영혼이 무척 공허했습니다. 공부를 못했거나, 친구가 없었거나, 몸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과 좌절감, 막연한 그리움과 고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불러도 허무하다느니, 슬프다느니 하는 가사가 들어간 것을 주로 불렀고, 공허함과 마음속에 흐르는 슬픔의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술도 진탕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다가 서울역 앞에서 전봇대를 끌어안고 운적도 있고, 남의 집 담벼락에 얼굴을 긁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을 받는 이사야 43장의 약속을 체험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이사야 44장을 체험하자 헌 술은 사라지고 새 술에 취하게 되었습니다. 영혼에 만족감이 찾아왔고, 갈증도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영혼이 갈하고, 슬프고, 허무하며 두려운 분들은 다른 기도 하지마시고, 내 영혼에 성령을 부어주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무슨 일을 이루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암 덩어리를 떨어지게 하실지, 은사와 능력을 주실지, 기도에 응답해 주실지, 갖가지 기사와 이적을 이루실지 알 수 없지만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삶이 활력을 띠게 됩니다. 본문 3절 후반부터 4절까지를 보면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의 인생이 번창합니다. 버드나무 한 그루만 시냇가에 심어도 몇 년이 지나면 그 시냇가를 덮을 만큼 울창해지듯이 왕성하게 번창합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가정과 사업과 교회가 번창하고, 내 인생에 왠지 모를 기름이 흘러 원활하게 흐르는 인생이 됩니다. 반면에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면 왠지 모르게 인생이 뻑뻑하고 잘 돌아가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반드시 복이 옵니다. 회복되고, 번창하며, 치료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인생의 담대함과 영혼의 내적 만족, 그리고 인생의 번영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인한 것입니다. 성령을 부으시겠다는 말씀은 이론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이 약속을 붙들고 기도한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이루어졌고, 저도 체험했던 진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체험하셨고, 반드시 체험할 수 있는 약속입니다. 복음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으십니다. 성령은 세 번째 위격의 하나님으로서 믿는 자들의 영혼 안에 들어오시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들어오셔서 기쁨과 능력과 은사와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성령의 음성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이번 산상부흥성회에 올라가시기를 결심하십시오. “내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리라! 내가 은사를 받으리라!”는 각오로 올라가십시오. 또한 여러분 가운데 방언을 받기 원하거나, 치료를 받기 원하시는 분도 결심하시고 올라가십시오. 원하면서 왜 구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신 약속을 붙들고, 기도를 통해 이 약속을 주장해야 합니다. 이 약속이 교회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부흥입니다. 우리는 부흥을 소망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다시 한 번 부흥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1907년에 부흥이 일어났고, 그 뒤로 50년 후인 1960년대에 다시 부흥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50년 후인 2010년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다시금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 부흥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흥은 오직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일어납니다. 부흥을 소망하고 꿈꾸면서 “주여! 우리 교회가 속히 부흥케 하시고, 이 나라에 대각성을 이루어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우리 가운데서 끊이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 고백의 네 요소 /신26:1-11/ 피영민 목사 2015-08-26 14:56:43 read : 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
감사 고백의 네 요소 /신26:1-11/ 피영민 목사 2015-08-26 14:56:43 read : 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찌니라 ========================== 서론 오늘은 추수감사절로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 전반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경건치 않은 사람,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가장 두르러진 특징을 말합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기준은 감사하느냐의 여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신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불신자들도 사람에게는 감사를 하지만 하나님께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미국의 건국 초창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 왕이었던 헨리 8세(HenryⅧ)가 1534년에 로마가톨릭(Roman Catholic)과 단절하고 영국교회의 머리는 국왕이다는 내용의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발표했습니다. 그때부터 영국교회는 국왕을 머리로 한 교회가 되었는데 영국교회를 성공회(Anglican Church)라고 합니다. 이 성공회도 개신교에 속한 좋은 교회이긴 하지만 국왕을 머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신앙인들에게 미흡한 점이 있었습니다. 좀 더 개혁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국민들을 다 어우러지게 하려다보니 개혁이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영국성공회 안에서 개혁을 요구하지만 성공회가 싫어합니다. 그래서 성공회에서 분리되어 나왔고 그들을 가리켜서 분리주의자(Separatist)라고 합니다. 분리주의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 한 그룹은 영국에 머물면서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신자의 침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바로 1611년도부터 침례교회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침례교회는 영국 성공회에서 나온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실한 통설입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영국 국교회에서 나와 영국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워 네덜란드(화란)로 갔습니다. 그리고 타향에서 10년가량을 지내다보니 자녀교육도 어렵고 고통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배를 만들었는데 처음 배는 너무 작아서 못 쓰고 다시 배를 만들었는데 그 배가 바로 메이플라워(Mayflower)호입니다. 102명의 사람이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용감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비행기로 가는 것도 아니라 배를 만들어 타고 간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2명이 무사하게 신대륙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해 거기서 1년을 지냈습니다. 그동안 44명이 병들거나 추워서 얼거나 배고파서 죽었습니다. 남은 58명이 1년이 지나서 농사를 지었고 농사를 짓고 나니 수확이 생겼습니다. 그 첫 수확을 가지고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것도 감사했고, 1년 동안 얼어 죽지 않은 것도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 첫 수확을 가지고 인디언을 초청해서 처음 예배를 드린 것이 바로 1621년 추수감사절의 기원인 것입니다. 그 후에 산발적으로 지키다 1863년 남북전쟁 기간에 링컨 대통령이 이 추사감사주일은 너무나 좋은 것이라며 연례적인 절기로 선포해서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추사감사주일을 11월 4째주 목요일에 지킵니다. 칠면조(turkey)를 삶아 그 안에 많은 것을 넣어 먹으면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추수감사주일을 11월 3째주로 지켜서 미국과 1주간의 차이가 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885년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들어왔고, 1889년에 침례교 선교사님이 말콤 C. 펜윅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이 들어온 주간이 11월 3째주일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이 들어온 주간을 기념하기 위해 추수감사주일을 11월 3째주로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인데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가 미국에 가서 살아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추수감사절이 미국절기인데 우리가 왜 그것을 따라서 지켜야 되느냐?”하면서 비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첫 번째 수확이 났을 때에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해야 되는 규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신명기 26장으로 “첫 열매봉헌규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첫 열매를 거두었을 때 하나님께 봉헌하고 감사하는 것은 필그림 파더스가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추석이 있으니 추석으로 하면 되지 번거롭게 추수감사절을 또 지키느냐”하면서 비판합니다. 그런데 추석은 좋은 명절이기 하지만 가족들이 모여서 거둔 것을 가지고 가족들이 먹는 절기이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1년 동안 경작한 것을 추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추수감사절기를 신명기 26장에 근거해 지키고 있습니다. 본문은 모세가 모압평야에서 가나안 입성을 압둔 이스라엘 백성들, 특별히 광야에서 자란 신세대들에게 일종의 고별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반석을 가리키라고 명하셨는데 성질을 내고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두 번이나 반석을 치는 바람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120살 나이로 죽었습니다. 태어나서 40년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고, 40년은 광야에서 고생하다가,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120살에 죽었습니다. 이처럼 모세의 일생은 외우기도 쉽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신세대였는데 모세는 광야에서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어 죽기 직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신세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면 그 다음해 가을에 첫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면 첫 열매, 그 맏물을 맨 손으로 들고 가지 말고 광주리에 담아서 그냥 너 가고 싶은데 마음대로 가지 말고 제사장에게 가라. 그리고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께 드려라. 그런데 만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는 그냥 행동만 하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마음으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로 하는 감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문 3절로 10절까지의 말을 하라고 그 말을 입에다가 집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할 때에 마음으로만 감사하는 것은 불충분합니다. 감사를 말로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도 우리의 기도와 말로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님께도 말로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사람끼리도 말로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본문의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에게 주신 것입니다. 1절의 “네(you)가 들어가서”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수 “you”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 준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개인 전체가 이 명령에 다 순종하게 되면 결국은 국가적인 행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국가적인 행사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국가가 지키라고 하면 “교회가 절기를 지키는데 나 하나는 빠져도 될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고 개인은 지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너 개인이 맏물을 광주리에 담아다가 하나님께 드리고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하십니다. 개개인이 직접 하라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찌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추수감사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분배할 때 레위인에게는 땅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너희들은 성전에서 섬기는 주의 종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땅이 없으므로 수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객들도 땅이 없으므로 수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경제적인 약자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는 그것으로 됐다하지 말고 주변에 있는 약한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주변의 약자도 배려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주간은 선교사님들에게 성탄절에 보낼 선물을 우리가 받습니다. 건어물과 카레 가루, 고춧가루 등 썩지 않는 것들을 가지고 오시면 저희교회 선교위원회에서 포장을 해서 선교사님들께 보내드립니다. 그러면 선교사님들이 얼마나 감사해 하는지 모릅니다. 강남중앙침례교회가 매년 이 성탄절에 보내줄 선물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말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개인이 직접 감사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웃 중에 약한 사람들도 이 추수 감사절에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가 가르쳐준 감사고백의 내용을 보면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증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3절) 증인이 되어서 증거를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리라고 약속하고 맹세하시더니 과연 그 약속대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증거가 여기 바구니에 담긴 첫 열매입니다.”라고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루 이틀 경험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이스라엘의 지나온 역사 가운데 검증되어진 확실한 증거임을 입으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입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성경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나는 성경을 못 믿겠습니다. 나는 하나님도 못 믿겠습니다. 나는 안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감사할리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과연 진리입니다”라는 것을 증거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분이시오 신실한 분이심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말씀하지 마시고 그렇게 믿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진실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2. 둘째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4절)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은 바로 제사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구니에 담아 맏물을 가지고 나아갈 때는 아무데나 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당시 제사장에게 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에게 그 맏물을 가지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호박과 고구마와 감자와 배와 감을 금 바구니에다가 담아서 가지고 갔더라도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가면 그것은 무효인 것입니다. 반드시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서 제사장이 바구니를 받아 하나님께 드려야 유효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투표를 해도 5명에 동그라미를 해야 유효하다는 규정이 있어도 꼭 6표 혹은 4표를 찍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효이고 정확히 5표를 찍어야 유효인 것입니다. 감사를 해도 “내가 감사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것이지 감사하는데 무슨 제한이 있느냐?”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아무나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제사장을 통하는 사람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 감사를 받으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mediator)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도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 제가 죄인인데 내 감사를 하나님이 그냥은 안 받으시는 줄로 압니다. 내가 죄인인데 내 죄를 위해서 이 짐승에게 내 죄 값을 옮깁니다.”라고 할 때 제사장이 그 죄를 기도해서 옮겨주고 짐승을 번제로 태어 죄를 사함 받아 그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감사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본인이 원하면 맞바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아무도 거치지 않고 맞바로 나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중보자를 거쳐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첫 예물을 드리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죄인이라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중보자이신 제사장을 통해서 제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중보자이신 제사장이 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었고 제가 저주대신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사장 앞에 나와서 감사한다는 것은 그런 얘기가 포함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되었고, 디모데전서 2장 5절에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저는 공자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공자님은 그 당시에 훌륭한 사람이고 저하고 동일한 인간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될 수 없습니다. 마호메트는 그 당시에 아랍사람들이 다신을 섬겨 종교가 갈라지자 굴에 들어가서 고민을 하다가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아 코란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아랍의 종교를 알라신으로 통일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하메트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될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을 하고 해탈을 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도 저와 동일하게 죽어서 깨어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도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중보자 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나는 죄사함을 받고 저주대신 축복을 받게 되었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예물도 드리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축복받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맏물을 드리고 감사하는 사람은 제사장을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예수 이름 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완전무효입니다. 3. 셋째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5-9절) 본문 5절로 9절은 잊지 말아야 될 내용입니다. 이것은 단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잊지 말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될 내용은 여러 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가나안 땅에 와서 이렇게 농사를 지어 맏물을 드리지만 우리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유리하는 아람사람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조상들도 우상숭배 하는 이방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이 택하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낳고 가나안 땅에 살았습니다. 약 70명으로 가족이 늘어 갈 때에 가나안 땅에 기근이 와서 야곱과 그 자녀들은 모두 굶어 죽을 뻔 했던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을 미리 애굽으로 보내셔서 총리대신으로 삼고 그 소수의 사람들을 애굽 고센땅으로 인도해서 굶어죽는데서 건져주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나오는데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추우니 “한 많은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6.25의 1.4후퇴 때 미아리고개를 생각해 보십시오. 1월 4일이니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애는 업고 짐은 지고 발은 얼고 귀도 동상 걸려 미아리고개를 넘어올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한 많은 미아리고개를 부르며 고통을 말했겠습니까? 흥남부두에 눈보라가 휘날릴 때에 얼마나 춥고 떨리고 배고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1953년도에 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지금은 이렇게 잘 먹고 잘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려웠던 때를 잊지 말아야 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굶어 죽을 뻔 했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때 어린애를 업고 오던 부인들 가운데 애가 울고 먹을 것은 없어 애를 전봇대에다가 눌러 죽인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교회가 회개할 때 그것을 회개하는 부인들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죽하면 자기애를 눌러 죽였겠습니까? 우리 대한민국이 그랬던 나라입니다. 1950년대만 해도 그랬습니다. 그 이전에도 상황이 더 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잘살고 교회가 부흥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아진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덕분에 애굽 고센땅에 와서 400여년이 지나는 동안에 인구가 20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이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번성하니 그냥 살려두면 안되겠다고 해서 노예로 삼고 고된 일을 시켰습니다. 국고성을 짓는 일에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왕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사람은 우리가 바로왕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노예에서 해방될 수 없었습니다만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는 사실도 잊지 마라는 것입니다. 열 재앙을 내리고 장자를 죽이고 홍해가 앞에 놓여 있어도 홍해가 갈라져 맨땅처럼 건너오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지금까지도 해방되지 않았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일제에서 해방된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원자폭탄이 그 때 나와 그것이 히로시마에 떨어져 일본이 항복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건져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 땅을 누구에게 돈 주고 사서 등기 이전해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7족을 쫓아내시고 그 땅을 강제로 뺏어주신 것입니다. 감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로 5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 이런 사실을 영적으로 해석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 되어서 감사하지만 전에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는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건져내시고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넷째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간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맏물은 영어로 “첫 열매(first fruits)”라는 뜻입니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하는 사람은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첫 열매를 거두었는데 하나님께 드리니 마지막 끝 열매를 거둘 때까지 비바람 불지 않게 하시고 서리 내리지 않게 하시고 폭풍우 불지 않게 하셔서 마지막 추수까지 성공적으로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첫 열매를 받으시고 남은 모든 추수를 성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를 드리고 천을 받는 것이 낫습니까? 아니면 하나를 갖고 천을 망하는 것이 낫습니까? 하나를 드리고 천을 받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를 드리지 않고 갖습니다. 그러면 천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우상과 귀신들은 하나를 주면 더 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상과 귀신들을 섬기면 모두 뺏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를 드리면 하나 받고 더 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를 드려도 백으로 갚으시고 천으로 갚으시고 만으로 갚으시고 억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께 봉사하고 헌신한다고 해서 “나는 많은 것을 드렸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일생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그것은 첫 열매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첫 열매를 드리면 하나님이 영원한 내세에서 우리에게 주실 축복은 억만 배 보다 더 큰 것입니다. 우리가 그 끝날까지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하면 지금 드리는 감사는 첫 열매요 아주 사소한 먼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감사하면 하나님이 뒤에 천배, 만 배, 억 배로 더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작정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회개하고 작정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다음 모든 것을 풀어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감사가 너무 적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려고 해도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감사에 대해서 설교하는 설교자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예화가 스펄젼 목사님의 감사입니다. “별 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신다.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신다.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의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고, 축복해 주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의 신실하심을 감사하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감사하고, 마귀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것을 감사하며, 작은 것을 드려도 큰 것으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도 감사하고 사람들에게도 감사해서 불평과 원망은 사라지고 마음속에 감사가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가 있는 신앙/ 골3:15-17/ 피종진 목사/ 2018-12-12
감사가 있는 신앙 골3:15-17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방송을 시청하시는 시청자 여러분! 우리는 하루하루 사는 생활 속에 무엇이 귀하고 중한 것인지 항상 생각합니다. 권세 좋은 사람은 권세에 관심을 두고, 물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물질에, 향락이나 열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가 되는 삶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칭찬받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감사가 있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형태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귀한 것은 감사가 있는 신앙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나 감사가 없는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감사의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2:7)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신앙의 터전인 믿음에 굳게 설지라도 감사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3:15)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모든 생활에 있어 선하고 착한 행실과 더불어 감사의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성도의 인격이고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감사가 있는 신앙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말씀을 상고하면서 은혜받아 날마다 감사가 넘치는 기쁨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예배의 신앙에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시 50:14) 아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감사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감사하는 말을 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하면서 실천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시 107:21,22) 아멘. 여기에서 감사제를 드리라고 말씀한 것은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추수감사절 예배를 1년에 한 번 드립니다. 추수 감사제는 가을에 추수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그날만 감사제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때로는 환경이나 여건에 의해 예기치 못한 고난이 있을지라도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로 깨달아 감사함으로 여기면 하나님께서 선한 손길로 인도하여 은총을 입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의 영적 전사들이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어둠의 권세와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빛이 없는 어두움도 있지만 사탄의 어둠이 있습니다. 죄악의 어두움, 근심의 어두움, 실패와 절망의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이 임하면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주님께서도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하여 어둠의 권세와 싸워서 이기게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지나온 과거의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하신 주님께 감사드려야 하고 현재 생활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고 있기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또한 미래의 삶에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있음을 믿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아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믿음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축복해 주시고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명의 신앙에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 3:15) 아멘.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의 자녀로 거듭난 선교사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지역은 모두 선교지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사랑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자로,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 성가대, 교사, 구역장으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대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받은 달란트로 맡은 사명에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4:4)라고 말씀했습니다. 날마다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갈 때 이전보다 더 풍성한 은혜로 감사가 넘치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2) 아멘.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사함으로 고백하며 더욱 충성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면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냈습니다. 수많은 역경이나 고난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오직 말씀의 은혜와 기도의 응답과 성령의 역사로 승리했습니다. 우리 교회 세종 평화의동산 표어이기도 한 말씀의 은혜, 기도의 응답, 성령의 역사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러하면 어떤 사명이든지 감당하고도 남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십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5~7) 아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함께하는 동역자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영광을 함께 누리며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7,58) 아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시므로 날마다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이김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공동체의 신앙에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3,4) 아멘. 교회는 신앙의 공동체이며 성도는 신앙공동체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공동체 안에서 항상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서로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가 축복하고 서로가 높여주어야 합니다. 서로 옳고 그름을 떠나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감싸주고 함께 협력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 3:8) 아멘. 사람의 입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아름답고 선한 열매를 맺기도 하고 때로는 독을 내뿜기도 합니다. 그래서 항상 은혜로운 말을, 감사한 말을, 승리, 영광, 소망 있는 말을 하는 우리 지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 4:29)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감사가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의 신앙에서 감사가 있어야 하고 사명의 신앙에서 감사가 있어야 하며 공동체의 신앙에서 감사가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피종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