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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 마22:36-40/ 추석주일설교/ 2012-09-21
가장 큰 계명 마22:36-40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나와서 물었습니다. (마 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때 예수께서 서슴치 않고 답변하셨습니다. (마 22: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의 답변에 대하여 율법사는 침묵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613가지로 나누어서 어느 계명이 더 큰 계명이냐라는 주제를 가지고 자주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 전체를 요약해서 두 가지로 말씀하셨고, 율법의 중심 사상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조항에 집착함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율법의 정신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본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 구체적이고 분명한 지침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 중에서도 1-4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1.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2.우상숭배하지 말라. 3.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이 네 가지는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의무 조항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을 지킬 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섬겨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해 내셨기 때문입니다. 출15장은 홍해를 안전하게 건넌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광을 돌리며 부른 찬송의 내용입니다. (출 15:1) 이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출 15: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이 노래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 나는 일평생 이제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며 그 분께만 영광 돌리며 찬송하며 살리라! 그러나 이 고백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으로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중심으로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그 앞에서 절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1 2 3계명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었고, -우상을 만들어 섬겼고, -금송아지를 향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구해낸 하나님이라 일컬었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컬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찌 이렇게 속히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었습니까? 그 원인은 오랜 기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우상을 섬겨 왔던 죄악의 습관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경험한 시간은 짧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을 맺었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성과 우상숭배의 근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 따라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이제 예수님만 섬기며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퇴근 후에 직장 동료들과 함께 술좌석에 앉아서 한 잔 두 잔 마시다 곤드레만드레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당에 나왔다고 갑자기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다니지 않을 때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담배에 여전히 손이 가고, 술잔에 입술을 갖다 대는 것입니다. 당장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니면서 옛사람이 습관들을 한 가지씩 한 가지씩 벗어내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살다가 4단지로 이사 간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 어느 날 퇴근을 하는데 이전에 자신이 살던 곳에 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 내가 왜 이리 왔지?” 익숙해지기까지 상당 기간 혼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40년간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굳어진 악한 습관과 죄악의 물을 빼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보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커다란 기대와 소망을 안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힘차게 들어갔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들에게는 십계명을 담은 법궤가 있었습니다. 진두에서 제사장들이 법궤를 짊어 메고 앞장서서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고 가나안 땅을 점령했습니다. 법궤가 진두에 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그들의 삶의 최우선에 두라는 교훈입니다. 그것은 또한 행복한 삶의 보장이기도 합니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역시 죄악의 습성들을 버리지 못하고 쉽게 바알 신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그들은 회개치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다가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BC 587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불러 들였고 결국 다시 노예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1948년 5월10일, 영국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이 다시 독립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무려 26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이 신세로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왔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실패는 그들을 구원해내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의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다른 신을 섬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상을 만들고 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졌을 때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젊은 남녀 간의 사랑이 불붙었을 때 직장이 부산인 남자 애인은 서울에 있는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나 KTX 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이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한 번 약속한 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번 주에 일이 너무 많이 밀렸어. 올라가기 힘들 것 같아. 가보도록 노력해 볼께.” 일주일 내내 여자 친구가 별로 생각나지도 않고, 다른 여성에게 눈이 돌아가게 됩니다. 사랑의 열기가 식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사랑의 열기가 식으면 의무감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랑이 식으면 의무감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한 시간 드리는 예배가 지루하고 빨리 끝나서 다른 재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첫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기 바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님은 먼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여 그 피 값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요 영광스러운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후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계속적으로 유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은 계명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1.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2.우상숭배하지 말라. 3.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 계명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해 보기 바란다. 이제 다음 주면 추석 명절을 지키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유쾌한 날이 되지 못합니다. 제사 드리는 문제로 인해 부모 형제간에 갈등이 불거지고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즐겁다기보다는 부담스럽고 불편한 날이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분명히 우상을 섬기는 죄악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분명히 하나님을 믿노라고 고백하는 성도라면 제사로 인해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은 제사를 없앴더니 집안이 편안치 않고, 묏자리가 나빠서 되는 일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도 조부께서 살아계실 때는 장손으로서 제주 노릇을 한 적도 있었다. 오히려 우리 집안은 제사를 치움으로 인해 복을 받았다. 제사를 잘 지내서 후손이 잘 되고, 가정이 평안할 것 같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상의 얼을 빛내는 것은 제사를 정성껏 드림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후손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면 조상이 빛이 나는 것입니다. 우상 섬겨서 잘 되는 민족이 없습니다. (사 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만 합니까? 1.먼저 제사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제사를 드릴 때 위패를 쓰는데,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 하여 신위(神位), 즉 조상귀신이 좌정하였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은 고유의 미풍양속이요 부모공경의 우선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사 행위는 분명히 종교행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원래 제사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제사 제도가 일반화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태조가 유교를 받아 드림으로 조상숭배 사상이 유교의 효사상과 결합되어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국시로 삼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모습은 미풍양속이요 부모공경의 예라 하여 맹목적으로 덩달아 제사상을 차리고 제사 드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2.제사 드리는 것에 대한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선언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후에 성대한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효사상이 기독교 사상 보다 더한 종교가 있습니까?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정말 열심히 공경하고 효도하기로 결심하고 시행하라. 그리고 자신과 가족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좋습니다. - 나와 내 가족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 - 가족들에게는 정중히 양해를 구하라. 처음에는 불편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하게 됩니다. 3.가족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오랜 전통과 습관을 하루아침에 버리거나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이나 형제들에 대하여 인내와 배려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더 관심과 사랑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번 추석 명절을 기해 제사 문제로 인해 고민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먼저 순종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결단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과 함께 부모님 공경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님과 형제 사랑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는 추석 명절이 되길 바랍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1)/ 크리스천/ 전도서전3:11-13/ 2012-03-12
가장 행복한 사람(1)/ 크리스천 전3:11-13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여리고 세관을 책임지고 있는 세리장이며 또한 재산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감격해 하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또 그동안 세리장의 직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세리장의 권세를 휘두르면서 살았지만 그 마음을 억누르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마음의 평안과 행복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눅19:8-9).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된 사람에게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자체가 행복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재물과 권력 같은 세상적인 요소를 다가지고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인 에게는 그런 것과 상관없는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I.불행의 원인을 아는 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신체적인 악조건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말합니다. 더러는 다른 사람에 비교하여 소외되고 비천한 위치에 있다고 하여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질병이나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도 건강한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평안함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있고, 그중에는 「살아 있는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산과 상관없이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부자가 부럽지 않는 만족을 누리는가 하면, 소외된 곳에서 스스로 비천한 자가 되어 남을 섬기면서도 권력자 보다 더 높은 도덕성과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이나 재물이나 권력 그 자체가 불행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질병이나 가난이나 낮은 신분의 섬김 자체가 행복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가 없는 그 어떤 것도 행복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예수가 있으면 행복이고 예수가 없으면 불행인 것입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불행은 고독(孤獨)이라고 말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는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홍수가운데 갈증이 있다고 하듯이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날 첨단문화의 이기(利器)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독이라는 병을 앓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안고 있는 불행의 원인을 죄 라고 규정합니다. 죄는 인간을 낙원의 행복으로부터 단절시키고 고독의 울타리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창3:22-24). (1)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이름을 부르며 찾아 주셨지만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며 숨어버렸습니다(창3:10). 이것은 인간이 불행의 원인이 되는 고독의 밀실에 갇혀 버린 행위입니다. 그 이후부터 눈이 밝아져서 벗은 몸을 보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것 같은 자기 과신에 도취되기도 했으나 그 마음을 억누르는 불안한 상태를 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현상을 인간의 상실된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롬1:28). 선지자 이사야는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고독 속에 허덕이도록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사59:2). 본문말씀 11절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은 영원을 향한 마음의 욕구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2)인간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을 지어놓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며 여자를 만들었습니다(창2:18). 이후부터 사람은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사회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 사람과 사람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부부간, 부모 자식간, 형제나 친지 또는 이웃 간에 벽을 쌓고도 그것이 불행인줄 모르는 것입니다. 최초의 사람 가인도 죄가 문에 들어온 후 동생을 죽이는 골육상잔의 불행을 저질렀습니다(창4:7-8). 인류 최초의 동맹으로 시도했던 바벨탑 운동 역시 죄로 인하여 무산되었습니다. 그들이 시날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거대한 금자탑을 쌓고자 하였으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대화의 벽이 생기면서부터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창11:7-8). (3)자기와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투절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외를 느끼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도 실망을 하며 회의에 빠지고 맙니다. 곧 자기가 자기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불신 하는 사람은 어느 것에서도 자신감을 갖지 못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된 상태에서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원망과 불평의 늪에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죄 문제에 기인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거기에 포위당한 채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의 과거 경험을 말하면서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하였습니다(롬7:22-24). II. 행복의 비결을 아는 자입니다. 흔히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라하고 세잎 클로버는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우연히 발밑에 있는 네잎 클로버를 발견하고 그것을 따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는 순간 머리위로 총알이 지나 갔다는 것입니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흔치 않는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찾느라 행복의 세잎 클로버를 짓밟고 다닙니다. 이것은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행복의 요소들을 무시한 채 실체도 없는 행운을 찾아 엉뚱한데다 인생을 허비해 버리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행복의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3:11). (1)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0에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73:28에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에게 진노하시고 징벌하기도 하시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치료시키는 분입니다(출15:26). 구약의 호세아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호6:1).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인줄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되 그 방법을 몰라 엉뚱한 길로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를 찾으시고 그와 동행하여주십니다. 옛날 에녹이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같은 사람은 하나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모든 역경에서 승리한 축복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은 믿음입니다(히11:5-6). (2)사람과 화목 하는 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셨습니다(눅2:52). 솔로몬왕은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16:7). 사람들 중에는 가족들과 불화 하거나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있고, 교회 안에서도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이 문제를 풀어가려는 노력을 할 때 해답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비우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12:16에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3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24에는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며 모든 일에 덕을 세우도록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3)자기와의 화목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잃어버린 자신을 도로 찾으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8:27에 보면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옷을 벗은 것은 사람의 품위를 잃은 상태요, 집에 거하지 아니한 것은 가정의 평화나 행복을 멀리한 것이며, 무덤사이에 거하는 것은 죽음의 도시에 갇혀 삶의 즐거움을 포기해버린 현대인의 불행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결국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았습니다. 상실된 인간이 자기의 모습, 곧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되면 자기의 존재의미나 가치를 알게 되고 삶의 목적을 향해서 자신 있는 걸음을 걸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자기를 회복하고 그의 삶을 행복하고 활력에 넘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가능한일입니다. III.행복한 사람의 모델이 되는 자입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즐길 수 있도록 그 가치를 깨우쳐 줍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 중에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으나 교회 다니는 사람의 얼굴에서 너무나 행복한 모습을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삶속에서 배어나오는 행복의 향기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1)영혼의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본문말씀 11절에 보면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의 욕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3:9에는 이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음식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혼의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본문성경을 기록한 솔로몬왕은 자기의 삶을 통하여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행복의 실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서 2:24에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 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이와 같은 즐거움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25절). 전도서 3:13에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줄을 또한 알았도다”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신앙가 다윗도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자기에게 진수성찬으로 풍요로운 음식과 차고 넘치는 잔을 주셔서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시23:5). (2)행복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장된 축복이 있지만 이를 누리는 행복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일수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하늘나라 영원한 집에서의 복락이 보장되어 있고(히11:16), 동시에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참으로 천당의 소망으로 영원한 행복을 확신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교회생활이나 가정생활 또는 사회생활 등 어떤 경우에도 주님과 함께 하는 최상의 행복을 즐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어떤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행사되는 전천후(全天候)의 은혜입니다. 옛날 하박국은 이방나라의 횡포가 극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수난이 그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행복에 넘치는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하박국 3:17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3)행복의 공여자(供與者)가 됩니다. 어느 곳에서나 성도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또는 후세 사람들에게 행복을 누리게 하여 줍니다. 축복의 사람 아브라함은 그의 삶을 통하여 오고 오는 후손들과 천하 모든 사람에게 행복의 공여자가 되었습니다(창22:18). 요셉도 그런 인물입니다. 창세기 39:2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자가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5절에는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게 미친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자기한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에게 파급되는 효과 또한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행복한 가정, 행복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행복이 무엇인가를 배우며 자라납니다. 행복한 학교, 행복한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그의 정서 속에 행복의 도리를 익히며 이를 실천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축복받은 사장의 행복한 모습이야말로 모든 사원과 그 가족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손상률 목사
가장 행복한 사람(1)/ 크리스천/ 전도서전3:11-13/ 2013-12-12
가장 행복한 사람(1)/ 크리스천 전3:11-13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여리고 세관을 책임지고 있는 세리장이며 또한 재산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감격해 하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또 그동안 세리장의 직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세리장의 권세를 휘두르면서 살았지만 그 마음을 억누르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마음의 평안과 행복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눅19:8-9).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된 사람에게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자체가 행복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재물과 권력 같은 세상적인 요소를 다가지고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인 에게는 그런 것과 상관없는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I.불행의 원인을 아는 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신체적인 악조건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말합니다. 더러는 다른 사람에 비교하여 소외되고 비천한 위치에 있다고 하여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질병이나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도 건강한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평안함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있고, 그중에는 「살아 있는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산과 상관없이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부자가 부럽지 않는 만족을 누리는가 하면, 소외된 곳에서 스스로 비천한 자가 되어 남을 섬기면서도 권력자 보다 더 높은 도덕성과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이나 재물이나 권력 그 자체가 불행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질병이나 가난이나 낮은 신분의 섬김 자체가 행복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가 없는 그 어떤 것도 행복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예수가 있으면 행복이고 예수가 없으면 불행인 것입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불행은 고독(孤獨)이라고 말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는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홍수가운데 갈증이 있다고 하듯이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날 첨단문화의 이기(利器)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독이라는 병을 앓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안고 있는 불행의 원인을 죄 라고 규정합니다. 죄는 인간을 낙원의 행복으로부터 단절시키고 고독의 울타리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창3:22-24). (1)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이름을 부르며 찾아 주셨지만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며 숨어버렸습니다(창3:10). 이것은 인간이 불행의 원인이 되는 고독의 밀실에 갇혀 버린 행위입니다. 그 이후부터 눈이 밝아져서 벗은 몸을 보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것 같은 자기 과신에 도취되기도 했으나 그 마음을 억누르는 불안한 상태를 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현상을 인간의 상실된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롬1:28). 선지자 이사야는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고독 속에 허덕이도록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사59:2). 본문말씀 11절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은 영원을 향한 마음의 욕구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2)인간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을 지어놓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며 여자를 만들었습니다(창2:18). 이후부터 사람은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사회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 사람과 사람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부부간, 부모 자식간, 형제나 친지 또는 이웃 간에 벽을 쌓고도 그것이 불행인줄 모르는 것입니다. 최초의 사람 가인도 죄가 문에 들어온 후 동생을 죽이는 골육상잔의 불행을 저질렀습니다(창4:7-8). 인류 최초의 동맹으로 시도했던 바벨탑 운동 역시 죄로 인하여 무산되었습니다. 그들이 시날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거대한 금자탑을 쌓고자 하였으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대화의 벽이 생기면서부터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창11:7-8). (3)자기와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투절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외를 느끼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도 실망을 하며 회의에 빠지고 맙니다. 곧 자기가 자기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불신 하는 사람은 어느 것에서도 자신감을 갖지 못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된 상태에서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원망과 불평의 늪에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죄 문제에 기인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거기에 포위당한 채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의 과거 경험을 말하면서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하였습니다(롬7:22-24). II. 행복의 비결을 아는 자입니다. 흔히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라하고 세잎 클로버는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우연히 발밑에 있는 네잎 클로버를 발견하고 그것을 따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는 순간 머리위로 총알이 지나 갔다는 것입니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흔치 않는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찾느라 행복의 세잎 클로버를 짓밟고 다닙니다. 이것은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행복의 요소들을 무시한 채 실체도 없는 행운을 찾아 엉뚱한데다 인생을 허비해 버리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행복의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3:11). (1)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0에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73:28에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에게 진노하시고 징벌하기도 하시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치료시키는 분입니다(출15:26). 구약의 호세아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호6:1).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인줄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되 그 방법을 몰라 엉뚱한 길로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를 찾으시고 그와 동행하여주십니다. 옛날 에녹이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같은 사람은 하나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모든 역경에서 승리한 축복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은 믿음입니다(히11:5-6). (2)사람과 화목 하는 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셨습니다(눅2:52). 솔로몬왕은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16:7). 사람들 중에는 가족들과 불화 하거나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있고, 교회 안에서도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이 문제를 풀어가려는 노력을 할 때 해답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비우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12:16에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3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24에는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며 모든 일에 덕을 세우도록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3)자기와의 화목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잃어버린 자신을 도로 찾으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8:27에 보면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옷을 벗은 것은 사람의 품위를 잃은 상태요, 집에 거하지 아니한 것은 가정의 평화나 행복을 멀리한 것이며, 무덤사이에 거하는 것은 죽음의 도시에 갇혀 삶의 즐거움을 포기해버린 현대인의 불행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결국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았습니다. 상실된 인간이 자기의 모습, 곧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되면 자기의 존재의미나 가치를 알게 되고 삶의 목적을 향해서 자신 있는 걸음을 걸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자기를 회복하고 그의 삶을 행복하고 활력에 넘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가능한일입니다. III.행복한 사람의 모델이 되는 자입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즐길 수 있도록 그 가치를 깨우쳐 줍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 중에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으나 교회 다니는 사람의 얼굴에서 너무나 행복한 모습을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삶속에서 배어나오는 행복의 향기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1)영혼의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본문말씀 11절에 보면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의 욕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3:9에는 이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음식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혼의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본문성경을 기록한 솔로몬왕은 자기의 삶을 통하여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행복의 실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서 2:24에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 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이와 같은 즐거움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25절). 전도서 3:13에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줄을 또한 알았도다”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신앙가 다윗도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자기에게 진수성찬으로 풍요로운 음식과 차고 넘치는 잔을 주셔서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시23:5). (2)행복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장된 축복이 있지만 이를 누리는 행복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일수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하늘나라 영원한 집에서의 복락이 보장되어 있고(히11:16), 동시에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참으로 천당의 소망으로 영원한 행복을 확신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교회생활이나 가정생활 또는 사회생활 등 어떤 경우에도 주님과 함께 하는 최상의 행복을 즐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어떤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행사되는 전천후(全天候)의 은혜입니다. 옛날 하박국은 이방나라의 횡포가 극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수난이 그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행복에 넘치는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하박국 3:17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3)행복의 공여자(供與者)가 됩니다. 어느 곳에서나 성도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또는 후세 사람들에게 행복을 누리게 하여 줍니다. 축복의 사람 아브라함은 그의 삶을 통하여 오고 오는 후손들과 천하 모든 사람에게 행복의 공여자가 되었습니다(창22:18). 요셉도 그런 인물입니다. 창세기 39:2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자가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5절에는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게 미친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자기한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에게 파급되는 효과 또한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행복한 가정, 행복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행복이 무엇인가를 배우며 자라납니다. 행복한 학교, 행복한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그의 정서 속에 행복의 도리를 익히며 이를 실천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축복받은 사장의 행복한 모습이야말로 모든 사원과 그 가족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손상률 목사
가장 행복한 사람(1)/ 크리스천/ 전도서전3:11-13/ 2015-02-12
가장 행복한 사람(1)/ 크리스천 전3:11-13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여리고 세관을 책임지고 있는 세리장이며 또한 재산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감격해 하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또 그동안 세리장의 직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세리장의 권세를 휘두르면서 살았지만 그 마음을 억누르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마음의 평안과 행복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눅19:8-9).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된 사람에게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자체가 행복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재물과 권력 같은 세상적인 요소를 다가지고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인 에게는 그런 것과 상관없는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I.불행의 원인을 아는 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신체적인 악조건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말합니다. 더러는 다른 사람에 비교하여 소외되고 비천한 위치에 있다고 하여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질병이나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도 건강한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평안함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있고, 그중에는 「살아 있는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산과 상관없이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부자가 부럽지 않는 만족을 누리는가 하면, 소외된 곳에서 스스로 비천한 자가 되어 남을 섬기면서도 권력자 보다 더 높은 도덕성과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이나 재물이나 권력 그 자체가 불행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질병이나 가난이나 낮은 신분의 섬김 자체가 행복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가 없는 그 어떤 것도 행복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예수가 있으면 행복이고 예수가 없으면 불행인 것입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불행은 고독(孤獨)이라고 말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는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홍수가운데 갈증이 있다고 하듯이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날 첨단문화의 이기(利器)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독이라는 병을 앓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안고 있는 불행의 원인을 죄 라고 규정합니다. 죄는 인간을 낙원의 행복으로부터 단절시키고 고독의 울타리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창3:22-24). (1)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이름을 부르며 찾아 주셨지만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며 숨어버렸습니다(창3:10). 이것은 인간이 불행의 원인이 되는 고독의 밀실에 갇혀 버린 행위입니다. 그 이후부터 눈이 밝아져서 벗은 몸을 보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것 같은 자기 과신에 도취되기도 했으나 그 마음을 억누르는 불안한 상태를 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현상을 인간의 상실된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롬1:28). 선지자 이사야는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고독 속에 허덕이도록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사59:2). 본문말씀 11절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은 영원을 향한 마음의 욕구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2)인간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을 지어놓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며 여자를 만들었습니다(창2:18). 이후부터 사람은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사회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 사람과 사람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부부간, 부모 자식간, 형제나 친지 또는 이웃 간에 벽을 쌓고도 그것이 불행인줄 모르는 것입니다. 최초의 사람 가인도 죄가 문에 들어온 후 동생을 죽이는 골육상잔의 불행을 저질렀습니다(창4:7-8). 인류 최초의 동맹으로 시도했던 바벨탑 운동 역시 죄로 인하여 무산되었습니다. 그들이 시날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거대한 금자탑을 쌓고자 하였으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대화의 벽이 생기면서부터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창11:7-8). (3)자기와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투절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외를 느끼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도 실망을 하며 회의에 빠지고 맙니다. 곧 자기가 자기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불신 하는 사람은 어느 것에서도 자신감을 갖지 못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된 상태에서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원망과 불평의 늪에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죄 문제에 기인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거기에 포위당한 채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의 과거 경험을 말하면서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하였습니다(롬7:22-24). II. 행복의 비결을 아는 자입니다. 흔히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라하고 세잎 클로버는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우연히 발밑에 있는 네잎 클로버를 발견하고 그것을 따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는 순간 머리위로 총알이 지나 갔다는 것입니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흔치 않는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찾느라 행복의 세잎 클로버를 짓밟고 다닙니다. 이것은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행복의 요소들을 무시한 채 실체도 없는 행운을 찾아 엉뚱한데다 인생을 허비해 버리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행복의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3:11). (1)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0에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73:28에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에게 진노하시고 징벌하기도 하시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치료시키는 분입니다(출15:26). 구약의 호세아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호6:1).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인줄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되 그 방법을 몰라 엉뚱한 길로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를 찾으시고 그와 동행하여주십니다. 옛날 에녹이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같은 사람은 하나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모든 역경에서 승리한 축복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은 믿음입니다(히11:5-6). (2)사람과 화목 하는 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셨습니다(눅2:52). 솔로몬왕은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16:7). 사람들 중에는 가족들과 불화 하거나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있고, 교회 안에서도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이 문제를 풀어가려는 노력을 할 때 해답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비우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12:16에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3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24에는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며 모든 일에 덕을 세우도록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3)자기와의 화목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잃어버린 자신을 도로 찾으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8:27에 보면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옷을 벗은 것은 사람의 품위를 잃은 상태요, 집에 거하지 아니한 것은 가정의 평화나 행복을 멀리한 것이며, 무덤사이에 거하는 것은 죽음의 도시에 갇혀 삶의 즐거움을 포기해버린 현대인의 불행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결국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았습니다. 상실된 인간이 자기의 모습, 곧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되면 자기의 존재의미나 가치를 알게 되고 삶의 목적을 향해서 자신 있는 걸음을 걸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자기를 회복하고 그의 삶을 행복하고 활력에 넘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가능한일입니다. III.행복한 사람의 모델이 되는 자입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즐길 수 있도록 그 가치를 깨우쳐 줍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 중에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으나 교회 다니는 사람의 얼굴에서 너무나 행복한 모습을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삶속에서 배어나오는 행복의 향기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1)영혼의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본문말씀 11절에 보면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의 욕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3:9에는 이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음식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혼의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본문성경을 기록한 솔로몬왕은 자기의 삶을 통하여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행복의 실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서 2:24에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 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이와 같은 즐거움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25절). 전도서 3:13에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줄을 또한 알았도다”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신앙가 다윗도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자기에게 진수성찬으로 풍요로운 음식과 차고 넘치는 잔을 주셔서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시23:5). (2)행복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장된 축복이 있지만 이를 누리는 행복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일수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하늘나라 영원한 집에서의 복락이 보장되어 있고(히11:16), 동시에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참으로 천당의 소망으로 영원한 행복을 확신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교회생활이나 가정생활 또는 사회생활 등 어떤 경우에도 주님과 함께 하는 최상의 행복을 즐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어떤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행사되는 전천후(全天候)의 은혜입니다. 옛날 하박국은 이방나라의 횡포가 극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수난이 그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행복에 넘치는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하박국 3:17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3)행복의 공여자(供與者)가 됩니다. 어느 곳에서나 성도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또는 후세 사람들에게 행복을 누리게 하여 줍니다. 축복의 사람 아브라함은 그의 삶을 통하여 오고 오는 후손들과 천하 모든 사람에게 행복의 공여자가 되었습니다(창22:18). 요셉도 그런 인물입니다. 창세기 39:2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자가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5절에는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게 미친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자기한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에게 파급되는 효과 또한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행복한 가정, 행복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행복이 무엇인가를 배우며 자라납니다. 행복한 학교, 행복한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그의 정서 속에 행복의 도리를 익히며 이를 실천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축복받은 사장의 행복한 모습이야말로 모든 사원과 그 가족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손상률 목사
네 믿음이 크도다/ 믿음, 순종/ 마15:21-28/ 이영훈 목사/ 2016-07-31
네 믿음이 크도다/ 믿음, 순종 마15:21-28 <말씀봉독>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등단 후 멘트> 귀한 찬양을 감사드립니다.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복음성가 :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생명이 되신주 반석이 되신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소망이 되신주 능력이 되신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주께 열납되기를 원한다’ 이 표현의 영어 찬송을 보면 ‘be acceptable’ ‘주님 앞에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주님께 인정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 일생에 주님 앞에 인정받고 우리 고백이 주님께 늘 받아들여지는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통성기도) 생명이 되신주 반석이 되신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말과 우리의 뜻과 생각이 주님께 열납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주님의 생각보다 앞서가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말이 주님의 영광 가리는 말이 되지 않도록 함께하여 주시고, 우리 사는 동안 주님 영광만 나타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설교말씀> 오늘 말씀의 제목은 ‘네 믿음이 크도다.’ 마태복음 15장 21-28절 말씀을 가지고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따라 하시겠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이 크도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치료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모든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특별히 믿음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기적을 다 체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한 이방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하여 주님 앞에 나아와 그 믿음을 통하여 딸의 병을 고침받은 놀라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셨는데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 딸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온 여인 먼저 딸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온 여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에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 사람들을 매우 멸시했습니다. 본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이방 사람들을 멸시하고 그저 짐승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외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서 발작을 하고 소리를 치고 그 상태가 심하여 어떻게 손을 써 볼 수도 없고 그 병을 고칠 수도 없었습니다. 절망에 처해 살던 여인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못 고치는 병이 없다. 그래서 자기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좋은 소문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소문이 날 때 그 좋은 소문을 통하여 선한 영향력이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쁜 말을 하면 나쁜 영향력을 끼치게 되고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데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좋은 소문을 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된다. 우리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문제가 해결되고 병을 고침 받고 주님의 축복이 임한다. 이 여인도 좋은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 병 고침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소문을 들을 때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구세주 메시아인 것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15장 22절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당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메시아, 헬라어로는 그리스도,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표현으로는 구세주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이 믿음을 갖고 주님 앞에 나와 외친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다른 길이 없고,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주님께 나와 불쌍히 여김을 받으면, 문제가 해결되고 치료가 임하고 구원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나의 구주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 가정이 이와 같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병원에서 치료하지 못하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사업이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병을 고치십니다.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귀한 사역을 다 이루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다 짊어지고 돌아가셨습니다. 가난과 저주의 짐을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사망의 권세까지 주님 다 짊어지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합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 우리는 병을 고침받은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지금도 우리는 병을 고침받습니다. 마음의 병이 고침받고, 육신의 병이 고침받고, 가정의 병이 고침받고, 생활의 병이 고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3대 사역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병 고치신 사역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은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셨는데, 주님께 나아온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3분의 2는 병 고치는 사역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지금도 예수님께 나오기만 하면 병을 고침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시각 장애인 두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외쳤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27절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주님 앞에 믿을 가지고 나올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치료가 임하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의 환자들의 간증이 담긴 『더 아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거기에 ‘요한이 엄마’, 이은혜 성도님의 간증이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이는 생후 56일째 되던 날 갑자기 열이 나고, 3일이 지나서 경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세균성 뇌수막염’입니다. 청천벽력입니다. 세균이 뇌수막 전체에 퍼져가지고, 척수액이 고름처럼 찐득찐득해진 것입니다. 담당 의사가 말합니다.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원래 뇌 속 백혈구가 0-5개가 정상인데, 요한이의 뇌 속에는 4만 개 이상이 있습니다. 주사도 3종류 이상 늘리고 항생제도 3종류 맞고 있는데, 아기가 버텨줄지 모르겠고, 살아남아도 뇌가 녹아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아니, 백일도 안 된 어린아이가 뇌가 세균에 감염되어서 거의 죽기 직전이라고 하니 얼마나 큰 절망입니까? 그 엄마의 고백에 따르면 처음 3일 동안은 정신이 없어서 눈물만 흘렸다고 합니다. 3일 후에 정신을 가다듬고 주님 앞에 찬양하고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찬송을 부르며 “내가 너를 지명하며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믿음으로 고백하는데 3일 만에 아이가 의식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11일 만에 일반병실로 갔고, 그래서 정밀검사를 해 보니 수술은 필요 없고 약물치료만 해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브란스병원에서 퇴원했다가 경기를 해서 다시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자주 낙심되는 상황이 다가 왔습니다. 그때 어머님이 결심합니다. “내가 감사하며 살리라.” 여러분 절망이 다가올 때, 문제가 다가올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병이 나서 커서는 아팠던 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에 감사. 제가 엄마가 될 수 있어서 감사. 가족이 하나 되어 기도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 하루 종일 요한이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감사.” 이렇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니까 마음에 평안함이 임하고 아이가 급격히 회복되어 지금 퇴원해서 잘 자라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절대긍정, 절대감사가 기적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이은혜 성도님의 고백입니다. “지나고 보니, 부모의 두려움보다는 기대, 피곤함보다는 활력, 무표정한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 정적보다는 기도 소리가 아기에게 큰 약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기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요한이는 엄청난 속도로 회복되었습니다! 오늘도 아픈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많은 분들, 지치지 말고 아이에게 웃으며 얘기하세요. ‘하나님이 너를 지키신다’라고!” 할렐루야! 여러분,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2. 믿음을 시험하신 예수님 둘째로 믿음을 시험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 원합니다. 이 여인이 소리치고 달려왔을 때 그 즉시 고쳐준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해보고, 그 믿음을 보고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23절입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그렇게 크게 외쳐대도 들은 척도 안하고 그냥 가십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계속 소리를 지르니 제자들이 와서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저 여인이 계속 소리를 지르는데 어떻게 저 여인을 돌려보내시지요.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5장 2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아주 냉정하게 그 여인의 소원을, 부탁을 거절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온 것이지 이방사람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포기하지 않고 달려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께 또 간청합니다. 마태복음 15장 25절입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할 내용은 딴 것이 없습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할렐루야. 그때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시면 우리는 모든 문제와 어려움에서 놓여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시면 병도 고침받고,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시면 우리 삶 속에 있는 모든 문제가 떠나가게 되고,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보시면 기적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아주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6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본인을 개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아주 사람취급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렇게 이방인들을 대했는데 예수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 2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부르짖어도 모르는 척하고 가시더니만 서셔서 “나는 너희들을 위해 오지 않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고. 또 도와달라고 하니까 “자녀들에게 주는 떡을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뭐가 어쩌고 어째요? 듣다듣다 보니 너무 하네요. 선생님, 뭐 잘났다고 나를 무시하고 짓밟으세요. 관둬요.” 하고 갔더라면 딸은 못 고침받아요. 자존심이 상해도 더 낮아져서 딸을 고치기 위해서 주님께 매달렸던 것입니다. 20세기 강해설교의 거장인 캠벨 몰간 목사님의 설명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가혹한 말처럼 들리는 표현을 사용하심으로써 그녀의 믿음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편견에 개의치 않고 주께 나왔으며, 주님의 침묵에도 좌절하지 않았고, 자신을 배제하는 듯한 주님의 말씀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의 핵심을 꿰뚫어보는 번득이는 기지로 답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처럼 그녀의 믿음이 끝까지 견뎌서 결국 승리하게 되었을 때, 그녀를 대하신 주님의 방법이 정당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도 늘 믿음의 시험이 다가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다가오지 않고 상황이 더 나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포기하면 안 됩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더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더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다가 사소한 일에 상처받고 자존심 상한다고 뒤로 물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 예배 나오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너무 감사해요. 왜? 주차할 자리도 없고, 들어오면 편하게 예배드릴 자리도 마땅치 않고, 특별히 가족에 믿지 않는 분을 전도해 나왔는데, 차를 갖고 나와서 교회 주변을 뱅뱅 돌다보면 주차할 공간이 없는 거예요. 세울라 그러면 저리로 가라고 쫓아내고. 그때 좀 속이 급한 분은 화를 내고. “여기 아니면 교회 없어?” 하고 그냥 가버리면. 그 날 예비된 은혜를 못 받게 되는 것입니다. 뱅뱅 돌더라도, 저 멀리 KBS 앞에 차를 세우고 걸어오더라도 예배에 참석해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날 예비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꾸준함입니다. 열정입니다. 물러서지 않는 믿음인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한 자가 빼앗는다고 했음으로 좀 불편해도, 속상해도 자리를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대성전에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사람은 많고 엘리베이터는 좁으니까 막 밀고 들어오는 겁니다. 이미 꽉 찼는데도 계속 밀고 들어오는데 “주여, 주여.” 하면서 밀고 들어온대요. 야아, 그러니 막 안에 낑긴 사람이 더운 여름에 숨도 못 쉬겠는데 막 밀고 들어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시험에 드는 겁니다. ‘아니, 은혜받고 이렇게 밀고 들어와서 또 주여는 왜 하는 거여.’ 속으로. 그런데 그것도 다 그냥 너그러이 봐주시고 사랑으로 품고 넘어가면 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남녀 선교회에다 앞으로 좀 엘리베이터 타는 곳에다 안내를 부탁했습니다만, 그렇게 불편해도 힘들어도 어려워도 자리 나와서 자리 지키고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여시고 그 믿음 보시고, 복에 복을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절대 뒤로 물러가면 안 됩니다. 다윗 왕이 너무 절망 가운데 “주님, 나를 버리셨는가?” 그런 간절한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 가운데 부르짖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13편 1절과 2절입니다. 야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그러나 금방 그의 마음이 바뀌어서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5절에서 6절입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야훼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그 마음에 강한 믿음으로 주님께 이미 응답하신 것을 믿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꿈이 이뤄지기까지 13년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나이 서른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입니다. 다니엘이 기도의 사람이었지만 즉시즉시 응답받는 기도가 어느 날 21일이 걸렸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21일 동안 기도했을 때 응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포기하지 마시고 절대 뒤로 물러가지 마시고 이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며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기적을 체험한 믿음의 여인 셋째로 기적을 체험한 믿음의 여인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나눠보기 원합니다.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고 엎드려 기도하며 부르짖고 부르짖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에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믿음의 여인의 고백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15장 27절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는 이방사람이요, 개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이 상에서 먹다가 그 흘린 부스러기들을 주워 먹는데, 저에게 부스러기를 내려주셔서 우리 딸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버리시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겸손해서 택함을 받았지만, 교만해졌을 때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끝까지 다윗을 하나님이 쓰신 것은 그가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하고 겸손히 낮아졌기 때문에 그를 쓰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늘 겸손히 낮아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 늘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해야 됩니다. 믿음을 갖고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할렐루야. 절대 뒤로 물러가지 말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서 반드시 주님의 은혜를 응답을 체험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말씀하시매 그 순간, 그 딸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귀신이 떠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셔서 안수를 해주지 않으셨어도, 그 어머니의 믿음을 보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이 크도다.” 그 순간 병을 고침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내가 주님 앞에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그와 같은 칭찬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 교회 관악대교구 문미경 성도님의 딸 다희의 간증입니다. 2014년 12월, 문미경 성도님의 딸이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병원에 갑니다. 학교에서 어지럽고 구토증상을 보이던 다희가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역 화장실에 쓰러져 몇 시간 동안 혼수상태로 있었던 것을 청소하는 분이 발견해서 긴급히 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습니다. 원인은 뇌출혈인데, 의사는 말합니다. “이 아이가 살아날 가망이 없습니다. 의식을 잃은 지 세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수술도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아이는 완전히 거기서 쓰러져 혼수상태가 돼있었습니다. 간신히 수술을 했지만, 의사가 말합니다. “깨어날 가능성은 없고, 만약 혹시 깨어난다고 하여도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식물인간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족이 믿음의 가족, 우리 순복음의 기도의 용사였습니다. 어머니가 고백합니다. “시어머니와 저는 혹시나 자리를 뜨면 아이가 잘못될까봐 중환자실 앞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주일마다 병원의 예배처소에서 예배드리고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다희를 일으켜주실 분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관악대교구의 기도에 센 권사님들이 돌아가면서 와서 기도하고 중환자실 앞이 기도처소가 되어가지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13일째 되는 날 저에게 와서 “목사님, 와서 기도 좀 해주세요.” 그래서 가보니, 아이고, 아이가 축 늘어져서 의식이 하나도 없고 호스는 많이 꽂혔는데,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면 희망이 없어요. 그런데 온 가족이 믿음으로 기도했고 저도 함께 그 자리에 가서 믿음으로 기도하는데, 기도가 끝나는데 갑자기 오른손이 톡 올라와요. 깜짝 놀랐어요. 그랬는데, (박수) 아직 박수칠 때가 아니고 이제 시작이에요. 그러니까 누가 옆에서 그러더라고요. 의사가 그랬는지 간호사가 그랬는지, 그게 몸이 반사작용으로 팔이 올라가는 거지 그 얘가 의식이 깬 게 아니라고. 그랬는데, 그날 아이가 오후에 눈을 뜨게 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가서 기도해 줄 때에는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울고요. 세 번째 가서 기도해줄 때는 눈을 감았다 떴다하면서 의사 표현을 합니다. “엄마, 알아보겠니?” 그러면 눈을 깜빡깜빡. 네 번째 가서 기도해줬는데 쓰러진지 27일 만에 “엄마, 아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병원 의사들도 놀라고 옆에 있는 환자들 가족들도 놀라고, 매일 매일이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희는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실로 옮겨졌고, 2월에는 재활전문병원으로 옮겨져서 재활치료를 받고 정상적으로 돌아오는데, 놀라운 것은 다희가 의식을 잃고 의식불명 가운데 있을 때에 환상을 본 것입니다. “다희가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큰 강 앞에 서있는데, 강에는 배가 떠있고, 배 안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표정은 침울했다고 합니다. 강 건너에는 문이 두 개가 보이고 사람들이 줄을 서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원래 다희는 요단강을 모르던 아이인데, 꿈속의 그 강을 요단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너무 무서워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데,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나타나셨고 얼굴이 빛으로 환하셨다고 합니다. 그 옆에는 예수님이 계셨는데, 다희에게 ‘사랑한다.’고 말씀을 하셨다는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아이는 깨어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건강을 회복해서 올해 3월달부터 학교도 다니고 지금은 공원도 산책하고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고백입니다. “의료진들도 처음에 가망이 없다고 한 말과는 달리 회복이 빠르다고 다들 놀라워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기도의 힘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절대긍정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할렐루야. 다희가 어머니하고 할머니하고 함께 와있는데 한 번 일어나서 인사 한번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믿음의 기도가 기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의사는 못 고친다고 했고, 만약, 만에 하나 살아나도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셔서 몇 주 전에 제 방에 기도받으러 왔는데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다 나았다고. 그래서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하나님께서 어머님의 믿음의 기도, 또 할머님, 또 온 가족, 구역식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 응답하여 주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딸을 고친 어머니처럼, 다희 가족처럼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가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이영훈 목사(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마26:47-52/ 2015-09-06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마26:47-52 친애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세 번의 설교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평화설교의 그 마지막, 네번째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네번째의 설교를 하기 전에 그동안의 평화설교에 관한 종합정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평화설교의 전체구조는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는 화해와 평화의 주체자는 성삼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를 이룩하시는 주체자란 것이고, 또한 성령께서 갈등과 분열을 하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번째의 것은 화해와 평화를 위한 인간들의 참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평화를 이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홀로 일을 하시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평화를 이룩하시는 그 일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즉 우리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역이란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동안 세번의 설교말씀을 통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삶을 살으시고, 끝내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를 희생하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평화\'를 이룩하시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랑을 우리가 실천하는 것이 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은 우리 주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두번째로 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은 대화를 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화는 독선적이고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하는 말을 삼가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이 대화는 대화의 도구가 되는 말을 순화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의 순화란 왜곡된 말이 아닌 정직한 말과 증오와 적개심과 복수심이 없는 감정이 배제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말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참회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참회해야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들 사이에, 그리고 우리 사회에 있는 갈등과 분열과 불화는 우리들의 죄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한 것을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는 불가능합니다. 동시에 이웃과의 화해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참화해와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피차간의 잘못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오늘 평화설교의 네번째, 마지막 설교의 본문은 마태복은 26장 14-52절의 말씀입니다. 본문을 \'개역개정판\'으로 봉독하겠습니다. \"47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뭉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으로 망하느니라 \"아멘 52절의 말씀 중에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이 말씀을 오늘 설교제목으로 삼아서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우리 인간들이 해야 할 네번째의 말씀을 함께 나누어 보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의 예수탄생기사는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으며,(마 2:2) 누가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그 분이 바로 이 땅에 평화를 주신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의 말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당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천군천사들이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그 당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즉 로마가 천하를 통일하고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던 시대입니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 시대는 평화의 시대이고 통일의 시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로마제국을 통치한 아구스도 황제를 평화의 황제(Friedens Kaiser)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구스도황제가 이룩한 평화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유지된 것입니다. 그 대가란 피지배국과 백성들의 피와 땀과 그리고 과중한 세금을 지불한 대가였습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경찰력과 공무원들이 채용되어야 했습니다. 각 나라의 , 즉 피지배국의 총독정치를 위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습니다. 이 모든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피지배국과 백성들이 혈세를 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평화\'는 강요된 평화이고, 백성들의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거짓평화라 하겠습니다. 로마의 평화가 얼마나 거짓되고 위장된 것이라는 증거를 복음서 기자들의 보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78절-79절의 말씀,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기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하며 마태복음 4장 15-16절의 말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복음서 기자들은 로마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던 시대를 어두움의 시대, 죽음의 그늘이 덮힌 시대, 그리하여 백성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죽음의 상태에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면에 복음서기자들은 이같은 어둠과 죽음의 시대에 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거짓평화, 로마의 평화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 참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나라의 군왕들처럼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의 권력과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여 충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비폭력주의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잡으려는 무리들이 중무장을 하여 예수께 다가와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바로 그 때 제자 중의 하나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귀를 떨어지게 햇습니다. 이 사실을 본 예수님은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이토록 우리 주님은 비폭력주의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 임금들과 또 다른 모습은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모습입니다. 그는 군마를 타고 무장을 한 군대의 호위 속에서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약한 나귀새끼를 타시고 무장을 하지 않은 힘없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은 그 당시 정치권력에 비폭력으로 대응하시고 결국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들은 기독교가 해야 할 평화운동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원칙은 여하한 일이 있어도 평화운동은 비폭력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화운동은 철저하게 비폭력운동입니다. 그러나 이 비폭력은 자기 희생을 동반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비폭력은 십자가의 희생이 그 대가로 지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화해와 평화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것은 자기 희생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무장을 해제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적으로부터 무력을 공격을 받을 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장을 해제하는 것입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는 일입니다. 최근의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운동은 철저하게 비폭력운동이며 무장해제를 촉구하는 즉 총칼을 버리라고 촉구하는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서구의 평화론자들은 \'힘의 균형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비판합니다. \'힘의 균형 이데올로기\'란 것은 상대방보다 군사적 우월을 유지하여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함으로써 안전을 유지하겠다는 논리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힘의 균형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평화주의자들은 \"전쟁방지를 위해서는 무력과 군사력의 균형이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것은 정치적 현실주의의 권력정책에서 비롯된 논리입니다. 즉 이 논리는 힘은 힘으로 대응해서 균형을 유지해야 전쟁이 발생하지 않고 평화가 유지된다는 논리입니다. 우리들은 지난 20세기의 냉전, 특히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실상을 보았습니다. 양대 세력은 군축회담을 하면서 군비축소나 핵부기 감축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을 그 때마다 늘 군사력의 균형을 먼저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군축은커녕, 오히려 비밀리에 더 많은 군비를 확장함으로서 긴장과 오랜 냉전이 계속되었습니다.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평화주의자들은 이같은 군축회담이나 힘의 균형논리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군비축소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과 소련이 군비제한을 위해 여러 차례 협상을 했지만 결국은 군비의 경쟁과 증강을 합법화시킨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고 하며 그리고 \"군비축소라는 명분을 내걸고 실제로는 계속 군사력을 증강해 왔다\"고 비판을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서구의 평화운동은 우선 핵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파멸로부터 유럽을 살리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힘의 균형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어 끝이 없는 무력의 우위경쟁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쪽부터 핵무기를 하나씩 둘씩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 평화론자들의 주장은 전쟁준비를 하지 않고,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평화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따라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야 하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말아야 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말아야 한다\"(사 2:4)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이것이 바로 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지난번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이후에 통일에 대한 희망을 더 확실하게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일들이 계속되는 회담을 통해서 구체화되리라고 믿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지난번 공동선언문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피차 무장을 해제하는 방안이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정착, 나아가 동북인의 평화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해서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 더 이상 전쟁준비를 하지 않고 군사력을 보강하지 않고 오히려 무장해제를 하는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 모두는 \'칼을 도로 칼집에 꽂는 일\'과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일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평화를 위한 기도와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노숙인을 보는 크리스천의 시각/ 신15:1-/ 2012-02-07
노숙인을 보는 크리스천의 시각 신15:1- 저는 노숙인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성도도 주로 노숙인입니다. 그래서 노숙인 섬김 사역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인간의 설움 중에 배고픔이 가장 아프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누울 집이나 방이 없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숙인은 말 그대로 집이나 방이 없어 이슬을 맞으며 길거리에서 자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노숙인은 정부 공식 집계로 현재 1만3000명이 넘습니다. 신용불량, 실직, 가족해체 같은 현상이 심화된 탓이지요. 헌데 노숙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미지는 부정적입니다. 나태, 무기력자에 혐오감을 유발하는 자이고 잠재적 질환자이며 인간쓰레기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노숙인은 늘 사회적 단속과 배제 대상입니다. 그러나 노숙인도 이 사회의 동등한 시민입니다. 어쩔 수 없이 처해진 길 위의 삶이지만 모두가 가족이며 친구이고 이웃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기독교 입장에서 바라본 그들은 모두가 한 형제이고 자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우리의 이웃인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은 부자들로 하여금 선을 베푸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이웃에게 나눔의 손을 펴는 크리스천이 돼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천의 손길을 통해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따뜻해지길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여야 할까요? 첫째,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신 15;7∼8).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 위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구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반드시’란 말씀을 세 번이나(8∼11절) 강조하셨습니다. 그만큼 구제는 중요한 것이고 성도가 꼭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제할 때에 생색을 내거나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먹고 입고 자고 남은 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땅사라고 준돈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둘째, 구제는 아끼지 말고 넉넉하게 베풀어야 합니다(8절). 구제를 하되 인색함으로 할 것이 아니라 넉넉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구제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풍성한 나눔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팔아 사도들에게 주워서 그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 초대교회 부흥의 원인 중 하나가 아름다운 선행입니다. 잠언 19장 17절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구제하는 자는 더 풍성한 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10절). 구제하면 더욱 풍족해 집니다. 잠언 11장 24절은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을 다 털어서 구제하면 더욱더 부하게 되지만 구두쇠처럼 아끼면 더욱 가난해진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대로 된 사랑을 합시다. 진리의 성경 말씀과 같이 영양가 있는 예수 사랑을 주고받아야 될 줄 믿습니다. 박희종 목사(버클리중앙교회)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의지하다니/ 삼상21:1-9/ 2006-08-23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의지하다니 삼상21:1-9 한 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하면서 물맷돌만으로 당당하게 싸워서 골리앗을 넘어뜨린 다윗 ! 그러나 이러한 다윗이 신앙의 위기를 맞아서 여호와를 찾기는 커녕 오히려 골리앗이 쓰던 바로 그 칼을 쥐고 나아가려고 하다니............. 다윗의 실패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귀한 메세지로 다가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때론 어려움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또 괴로움이 많은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정함을 받은 다윗도 그러하였습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수년동안이나 아주 어려움을 당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때로 어려움이 닥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 사울 왕을 피해서 도망 다닐 때가 있었으여 그의 시련은 자기의 목숨이 어려운 그런 시련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시련을 당하느냐 안 당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시간에 내가 어떻게 믿음을 가지고 행동을 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내 인생의 어려울 때에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어떻게 믿음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느냐 하는 믿음의 행동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의 어려운 때에 믿음의 행동에 실패 했습니다. 한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하면서 물맷돌만으로 당당하게 싸워서 골리앗을 넘어뜨린 다윗 ! 그러나 이러한 다윗이 신앙의 위기를 맞아서 여호와를 찾기는 커녕 오히려 골리앗이 쓰던 바로 그 칼을 쥐고 나아가려고 하다니 ! 그래서 초래된 엄청난 결과가 사무엘상 21장 22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다니다가 예루살렘의 북쪽인 놉이라는 곳까지 갔습니다. 그곳은 제사장들이 거주하는 작은 성읍 이었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그곳에 간 것은 하나님을 믿는 제사장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아히멜렉 이라는 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은 허겁지겁 달려온 다윗이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갑자기 혼자서 찾아온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서 떨리기도 하여서 다윗에게 떨면서 물어보았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차기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경호원도 없이 혼자서 온것이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거짓말을 제사장 앞에 합니다. 사람이 궁색해 지면 이런 술수와 꾀를 쓰게 되나 봅니다. 그렇게 올바르고 용감하여 하나님이 그 중심을 보시고 택하신 다윗이 비겁하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 왕이 비밀특별 명령을 내려서 내가 지금 혼자 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알게 하면 안 된다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혹시 제사장이여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누설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경호원 소년들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약정해 놓고 그곳에 놔두었습니다.” 사실 사울 왕의 비밀 명령이 있어서 다윗이 이렇게 파송되어 온 것이 아니라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도망 온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제사장의 입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봐 사울 왕이 비밀명령으로 보냈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고 먹을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아히멜렉 제사장은 일반 떡은 지금 없고 그러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떡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경호원 소년들이 여인만 가까이 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줄 수 있다고 하자 하나님의 거룩한 떡인데 조금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있지도 아니한 그 경호원들은 성결하다고 말합니다. 왕의 명령을 받아서 왕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으니 그것을 빨리 달라고 합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나님의 진설병인 거룩한 떡을 그냥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배가 고프니까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사울 왕의 특별명령을 받아서 이렇게 혼자 온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경호원들이 다른 장소에 있다고 했고 거룩한 떡밖에 없다고 하자 개의치 아니하고 그 거룩한 떡이라도 달라고 했습니다. 있지도 아니한 소년들은 성결하다고 하는 이 모습은 우리가 보기에도 불안할 정도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에게 어려운 시절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이렇게 거짓말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여기는 성전이고 제사장 앞입니다. 또 거룩한 떡 앞입니다 자기가 곤경에 처하자 신앙이고 뭐고 다 버리고 인간의 방법을 쓰고 있는 다윗의 졸렬함을 우리는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위대한 신앙 인이라고 할지라도 잘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래서 세상 위인전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제사장은 다윗에게 떡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다윗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이 새어 나갈까봐서 인간적인 방법을 최대한 동원하고 있었지만 성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멕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이상한 사람이 성전에 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 앞에 머물렀다는 말은 성전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다윗의 원수인 사울의 목자장이었습니다. 목자장이라고 하면 참모장쯤 됩니다. 그 사람이 왜 지금 이 성전에 들어와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다윗과 제사장이 대화를 하고 있는 그 현장에 그 사람이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이야기를 다 엿들어버렸습니다. 아주 불길합니다. 다윗도 나중에 성전에서 그 사람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성경에 나타난 다윗을 살펴 보겠습니다. 8절에 보면 다윗이 칼을 달라고 합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다윗이 가로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다윗이 전에 골리앗 장군과 일대 일로 싸우고 이길 때 신앙으로 큰칼을 이겼던 소년 다윗을 기념하기 위햇 또 이스라엘의 후손들에게 교훈이 되고자 이 성전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승리의 장본인인 다윗이 그 골리앗 장군의 칼이라도 달라고 그것이라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다윗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전에 다윗이 골리앗 장군의 칼과 싸울 때 다윗이 무엇이라고 말을 했던가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소년 다윗이 그 칼을 든 골리앗 장군에게 이렇게 하면서 담대히 나아가면서 조약돌로 물맷돌을 던져서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칼에 있지 아니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던 놀라운 신앙을 가진 다윗이 어쩌다가 신앙이 떨어져서 그 골리앗을 칼을 달라면서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합니까? 제사장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골리앗의 칼 앞에서 떨지 않던 다윗이 칼을 달라고 찾습니다. 그 다윗은 그 칼을 가지고도 겁이 났던지 10절에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라고 했습니다. 그 칼을 가졌다고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블레셋 영토로 도망 했습니다.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다윗은 죽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블레셋으로 도망을 갑니다. 참 아이러니컬합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이 다윗을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골리앗 장군을 이긴 다윗이라고 하면서 그 성에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심히 두려워서 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2절에 보면 ”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라고 합니다. 다윗은 꾀를 잘 내었지만 너무나도 안 어울립니다. 놀라운 신앙인인 다윗이 그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이기며 떵떵거리던 다윗이 미치광이처럼 보이며 침을 흘리며 그 사람들 앞에서 바보처럼 행동을 합니다. 왜 블레셋의 왕을 이처럼 심히 두려워합니까? 그 전에 골리앗도 두려워하지 않던 다윗이 왜 이렇게 되어버렸습니까? 신앙인이 신앙으로 살지 못하면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다윗도 사람입니다. 뜨거운 신앙인이 어려움을 당해서 신앙이 떨어져 버리자 성전에 와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골리앗의 칼을 찾게 되고 또 적 앞에서 두려워 떨며 미친 체하고 맙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 중에는 이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신앙인으로서 너무 비겁하게 처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은 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세상과 동화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살면서 그리스도인 답지 못하고 미친 체하며 세상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신앙인이 신앙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미친 체하고 살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과가 중요합니다. 결과가 좋아진다면 여기서 말을 할 필요가 없지만 결과가 나빠집니다. 비참해진 신앙인의 모습을 안타까움을 가지고 계속해서 보면 그 결과가 엄청나다는 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22장에 다윗의 엄청난 실패가 나옵니다. 그는 인간적인 머리로 하나님 없이 꾀를 내어서 완전하게 해 보려고 했지만 21장 7절에 나온 성전에서 엿듣던 그 도엑이라는 사람이 결국 일을 저질러 버리고 맙니다. 사울 왕에게 가서 이 일을 일러바쳤습니다. ”저 놉이라는 성읍에 들어가니 제사장 아히멜렉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숨겨주고 칼을 주었다”고 하자 사울 왕이 화가 나서 도엑을 통하여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아히멜렉 제사장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22장 18절을 보면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아히멜렉 뿐만 아니라 그 동네에 있는 제사장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 다음19절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멎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비극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갔던 놉의 제사장과 모든 사람들을 사울 왕이 다 죽여버렸습니다. 간신히 아히멜렉의 한 아들이 살짝 살아남아 피해서 도망 나와서 다윗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자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한 사람 다윗이 신앙으로 바르게 살지 못하고 비겁해지자 그 성읍에 있던 사람이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을 숨겨 주었던 이 순진했던 제사장들이 다 죽었고 젖먹이들까지 다 죽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100년 기독교 역사 중에 4천만 중에 기독교인들이 천 이백만의 신자가 있는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부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 이백만 기독교 신자들이 이 세상에 나아가 살면서 얼마만큼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신앙으로 행동하지 못하면 이 나라 전체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때로 우리도 세상에서 살다보면 신앙대로 살지 못한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 때문에 온 가정이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도 많이 당했습니다. 다윗도 바론 그런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위대합니다. 이런 실패와 눈물을 겪고 난 다음 다윗은 회개합니다. 깨닫습니다. 이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여기에 신앙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설령 과거에 실패하고 믿음대로 행하지 못하여서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다하고 어려움을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다시 깨닫고 바르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깨닫고 이제부터 바꾸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무엘상 23장에 나옵니다. 이제 다윗이 어떻게 변하는가 봅시다. 21장에서 보던 다윗이 아닙니다. 1절에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런 못된 짓을 했다고 누가 말을 합니다. 조금 전 21장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무서워서 심히 두려워했었는데 이제는 다윗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바로 다윗의 이야기에는 이처럼 하나님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다윗의 이야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신앙인의 인생 속에는 항상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아까 22장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골리앗이 들었던 칼 이야기가 나올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와야 정상입니다. 23장부터 이 깨달은 다윗이 어떻게 하는가 봅시다.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중반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또 4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21장도 이렇게 되었어야 했습니다. 또 23장 10절 ”다윗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11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그러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또 1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진작에 왜 이렇게 못되었습니까? 21장에는 자기 꾀로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이제는 크게 깨닫고 하나님 여호와께 묻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가서 싸우라고 해서 담대하게 나가서 싸웠더니 그일라의 많은 백성들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아까는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지만 이제는 신앙이 올바로 서자 자기 때문에 그일라 성읍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도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지켜주십니다. 사울이 알고 이리로 쳐들어온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물어봅니다. 기도하면서 물어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앞으로 될 일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 모든것을 알고 산에까지 와서 산을 포위하고 말았습니다.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산 하나를 두고 숨박꼭질을 하는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윗이 자기의 생각대로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물어보면서 신앙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본문 23장 26절을 보십시다. ”사울이 산 이편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편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로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갔으므로 그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이제 사울은 다윗을 잡으려고 목전에 두고 있는데 갑자기 본국에서 연락이 와서 큰일이 났다고 합니다. 저 블렛셋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옵니다. 그래서 다윗을 잡으려다가 철수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전에 다윗 다윗 사람들이 자기들을 공격했다고 해서 예루살렘을 공격했는데 시간차가 이렇게 맞아떨어져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다가 말고 성읍을 지키려고 철수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신앙의 방법으로 다윗이 했더니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이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이 세상에 나아가서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에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 한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 바르게 살지 못하면 내 가정이 고난을 당하고 목사가 잘못하면 교회가 망하고 대통령이 잘못하면 그 나라가 망하고 기름 부은 사람이 마땅히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나라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한 사람 아담이 범죄 함으로 전 세계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 예수님 때문에 전 세계에 구원이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 아브라함 때문에 그의 자손들이 많이 복을 받았습니다. 나 한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 바르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많은 사람이 나로인해 복을 받고 내가 세상에 나가서 비겁하게 신앙대로 살지 않으면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살 때 다윗의 경우를 생각하시고 지금까지는 그렇게 해 왔더라도 앞으로는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며 믿음의 생활로 믿음의 행동으로 나 한사람을 통하여 우리가정 전체가 복을 받고 나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기적의 역사를 경험하시며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수현 목사(부천 원종동 은성제일교회)
더 큰 믿음을 위하여/ 눅8:49-56/ 2011-02-06
더 큰 믿음을 위하여 눅8:49-56 요즘 저는 생명의 샘가를 통해 큐티를 하면서 많은 것을 묵상하면서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숙고하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최근 큐티의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기 위해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내용입니다. 단번에 구원할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도 번거로우시게 열 번의 재앙을 내리실까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깨달은 것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기를 원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며,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온 세상이 인정하기를 원하셔서 이런 방식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도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여러 번에 걸쳐서 다양한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생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함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 오늘 사건은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에게 열두 살 된 외동딸이 있는데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자기의 집으로 초청하여 고쳐주시기를 간구하였고 가시던 중 열두 해 혈루증으로 알던 여인의 사건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 되었습니다. 이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더 큰 믿음을 가질 것을 회당장에게 요구합니다.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시면서 병에서 고침 받을 것을 믿는 믿음에서 죽은 자라도 살릴 것을 믿는 더 큰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라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천하에 알게 하시기 위함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원자로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가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안다는 것이 사실은 쉽지가 않습니다. 세상적인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믿게 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세례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더라는 대답을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기적을 행하시고 치유를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칭찬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이를 알게 한 이는 네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지 않으시면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큰 믿음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았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큰 믿음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2. 영의 세계를 이해하는 믿음 예수님께서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부르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가 영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더 큰 믿음은 영의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보통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기적적인 역사에는 그 사건을 통해서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기를 원하시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그저 육신이 편안하고 하는 일이 잘되고 자손이 잘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좀 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은 그냥 기적이요 능력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런 역사를 보면서 영적인 것을 깨달으라는 주님의 메시지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기적을 보면서 기적이라고 열광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다 주님을 버렸습니까?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에만 열광하다가 기적이 없으니까 돌아선 것입니다. 주님은 기적을 보이신 가운데 속죄, 영생, 천국, 육체의 유한함,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와 같은 영적인 진리를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을 통해서 아!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이 기적을 통해 영적인 메시지를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더 큰 믿음을 위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기적에 매지지 마십시오. 단순히 놀라지 마십시오. 기적주의자가 되지 마십시오. 세상이라는 안경을 벗어버리십시오. 영원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망원경을 가지십시오. 주님을 아는 지식에 깊어지십시오. 그래서 더 큰 믿음을 가지는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류우열 목사(인천 복된교회)
덕스러운 크리스천의 인격/ 시34:1-10
덕스러운 크리스천의 인격 시34:1-10 얼마 전에 집사람의 동창회가 있었습니다. 30여년 동안 헤어졌던 친 구들 중에 미국에서 살다 오신 분이 \"미국에서 TV나 신문을 보면 IMF 때문에 한국이 파산을 하고 다 망하 게 된 줄로 알았는데 정작 와서보니 염려한 것보다 비교적 잘 극복해 나 아가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IMF라는 시련을 극복하려 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윌리암 로우는 이 세상 에서 가장 위대한 성자 는 바로 감사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금식 을 많이 하고 정의를 부르짖고, 위 대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성자 가 아닙니다. 크리스챤의 덕 중에 가장 큰 것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 는 사람은 덕 있는 사람이며 그렇지 못 한 사람은 부덕한 사람입니다. 고 난과 시련의 두려움속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 나님을 경배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생활을 해야함을 오늘 시편의 말씀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감사 하는 사람에게 부족함 없이 넉넉히 채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 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 하는 사 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족함이 없이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형편이든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덕스러운 인격을 갖 춘 사람입니다. 반면에 불평과 원망 을 일삼는 사람은 덕이 없는 사람입 니다.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과 긍정적 인 사람, 두 종류의 부류가 있습니 다. 전자는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 과 불평과 탐 심만을 일삼는 사람이 며 후자는 모든 일에 감사하며, 찬 양하며, 은혜에 보답하면서 살아가 는 사람입니다. 후자는 바로 덕이 있는 크리스챤의 인격을 갖춘 사람 입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 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 희를 향하신 뜻이니라\"고 말씀했습 니다. 감사하는 생활이 하나님 의 뜻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 에, 그리고 어떻게 감사해야 합니 까? 1. 생명과 건강을 주신 이에게 감 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 바 로 감사한 일입니다. 매 순간 우리 가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을 가지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하 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흡이 있는 자마다 늘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말 씀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대구의 어떤 사람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가 족들과 함께 있을 수 없는 몸이 된 그 사람은 슬그머니 가족 곁을 떠났 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구걸 을 해서 끼니를 때우고, 노숙을 하 며 살다가 기독교에서 나병 환자들 을 치료하기 위해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서 병만 치료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혼의 치료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육신의 몸은 썩어서 죽어가지만 속 사람은 예수 를 영접하고 날로 새로워짐을 인하 여 그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 습니다. 문둥병 때문에 영원한 주님 을 만나게 하신 것을 감사 하는 생활 을 하는 동안에 병 고침을 받았습니 다. 지금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이 들지만 그것만 바라보고 원망과 불 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호흡 이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하 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사람이 덕 이 있는 사람입니다. 일본 의 유명한 목회자 한 분이 각막 이 탈증이라는 병으로 42일동안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분 이 43일만에 눈을 뜨고 다시 빛을 볼 수 있게되자 그 분은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진 정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와같이 여러분들이 호흡하며 건강하게 살고 가족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할 수 있 다는 것에 감사드리기 바랍니다. 2.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심에 대 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내 육신만이 아니라 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해 주심으로 죄와 사탄의 종이 되지 않고 하나님 의 자녀가 되어서 구원받은 것, 하 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된 것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일본 의 국제복음 신학교 의 학생들이 광 림 교회 세미나 하우스에 와서 공부 하며 은혜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 들은 80%가 통일교에 넘어 갔던 사 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최근에 TIME지에서 문선명의 가족에 대해 서 기사를 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 라고 자랑을 하는 그 사람의 아들은 마약을 하고 알콜 중독자라고 합니 다. 그리고 그의 딸은 이혼을 했다 가 다시 재혼을 했습니다. 그가 천 국과 같은 그의 가족을 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전을 하고 자랑을 했 지만 실상은 정반대인 것입니다.\"라 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당신들이 통일교에 있다가 올바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으 며 그 기쁨을 가지고 예수를 증거하 기 위해 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 는 모습을 볼 때에 하나님께 감사드 린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악령 에 사로잡히고 사탄의 노예가 되었 던 인생들이 예수를 바로 믿고 거듭 나는 인생이 된 것에 대한 크나큰 감사가 제 마음을 채웠습 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여러분의 영혼이 구원을 받고 새 사람이 된 것을 믿으시고 감 사하 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덕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소록도에서 온 나 병 환자들에게 교회를 빌려주어서 연주회를 열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 는 그들이 병 으로 소경이되고 팔다 리가 뭉그러진 몸으로 여러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찬양을 하는 모 습을 보았을 때에 그 들의 몸은 썩어 가지만 영은 구원받았음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음을 보았고 동시에 부 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것 은 나병 환자들의 신앙이며 우리보다 더 덕 스러운 크리스챤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혼의 구원 받 음을 감사할 줄 아는 덕이 있는 크리스챤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앙의 자유를 주심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거룩한 전을 건축할 수 있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를 주셨음을 감사 해야 합니 다. 우리가 마음껏 성경 공부를 하고 전도하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진정 감사해야 할 것입니 다. 우리가 전도를 하지 못하면 우 리는 신앙의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 다. 다른 종교가 큰 세력을 이룬 나 라에 사는 개신교 신자들은 그 신앙 때문에 직장을 잃기도 하며 다른 이 들을 전도하는 일을 하려해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는 불교를 믿는 사람을 전 도하기도하고 카톨릭에 다니는 사람 을 전도해 개신교 신자를 만들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 나라처럼 신앙의 자 유가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의 자유에 대 해서 감사해야 합 니다. 저는 주일날 다섯 번 똑같은 설교를 할 때가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이지만 매번 설교를 할 때마다 이렇게 설교할 자유를 주신 하나님 께 감사하며 예배드릴 수 있음을 감 격해 합니다.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 기 때문에 한 번 예배드리는 것보다 다섯 번 예배를 드릴 때 더욱 성령 충만하게 되며 성령 충만한 상태에 서 안수 기도를 하면 아픈 사람들이 치유 받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신앙 의 자유, 선교의 자유, 전도의 자유 를 주심에 대해 서 하나님께 감사하 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바로 덕스러 운 크리스챤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감사하 는 사람은 첫째 섬기는 사람, 전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와 선교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감사하 는 마음이 있을 때 전도하게 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전 도하는 삶을 살기 힘듭니다. 내가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넉넉히 복 을 주시며, 은총 가운데 인도해 주심을 감사할 때에 \"때를 얻던지 못 얻던 지 전도하는 삶\"을 살게됩니다. 제 가 패튼 존 깁슨이라는 스코틀랜드 의 목사님의 이야기를 책으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남양군도에 식인종이 사는 섬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로 가셨습니다. 그분 의 친구들은 식인종에게 잡아먹힐 지도 모르는 곳에 선교사로 가는 것은 헛 된 일이라며 그를 붙잡았습니다. 그 러 자 그분은 \"너희가 죽어서 세균이 나 벌레에게 먹히는 것이나 내가 복 음을 전하다 죽어서 식인종에게 먹 히는 것이나 무엇이 틀린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중히 여기셨으며 그 결심을 실 행했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어 려움 을 피하며 기도함으로 복음을 전했 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부인과 어 린 딸을 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떠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 며 토인들의 언어를 배워서 성경을 번역했으며 계속 복음을 전파하시다 돌아가셨습 니다. 지금 그 섬은 식인 종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 음이 충만한 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전함으로서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는 것은 바로 감사할 줄 아는 사 람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받은 바 축복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 웃 에게 나누어주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바로 덕 있는 크리스 챤의 삶을 사는 사람, 감사하는 사 람입니다. 부덕한 사람은 나눔과 섬 김을 모릅니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나눌 줄 압니다. 이번 짐바브웨에 보내기 위해 옷을 모 았는데 교인들 이 좋은 물건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덕이 없는 사람은 IMF라고 말하며 다른 이들에게 베풀 줄 모르 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무리 IMF를 이겨내 야 한다고 말을 할지라도 이웃에게 베풀 줄 모르면 IMF를 극복하지 못 합니다. 더욱 하나님의 교회에서 베 풀 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12장 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 부자의 비유 를 들 어 설명하십니다. 부자의 밭에 풍년이 들어 쌓아 둘 곳이 없을 정 도로 많은 곡식을 거두어 들였습니 다. 그는 곡식 을 쌓아둘 창고를 마 련하고는 자기의 영혼에게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단 한마디 의 감사하 다는 말도 하지 않았으며 이웃에게 베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 님께서는 부자에게 오늘 밤 그의 영 을 거두어가면 그 쌓아둔 것들이 누 구의 것이 되겠냐고 하셨습니다. 감 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덕한 사람 이 며 남에게 나누어 줄줄도 모르는 사람으로 종국에는 부덕한 인간으로 끝나게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전 도의 사명을 다하고, 어 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사 업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하시기 바 랍니다. 여러분은 성경말씀이라는 어떤 것보다 더 큰 보화를 받으셨습니다. 그 은총에 감사하며 마음에 덕스러 움을 간직하 시고 갖가지 좋은 열매 를 맺음을 믿으시고 감사하는, 덕스 러운 크리스챤의 인격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말만 많은 크리스천/ 마16:5-12/ 2012-02-12
말만 많은 크리스천 마16:5-12 예수님이 12살 되시던 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들은 예수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율법사들과 성경을 논하고 계셨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였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착각이 우리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예수님을 잃어버려 전혀 예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그것도 예수를 아주 열심히 잘 믿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우리들에게 보편적으로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최소한 자신에게 예수가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예수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착각하는 것은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고 위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다행히도 하루 만에 자신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찾아서 다행히도 예수님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신이 예수를 잃어 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까딱 잘못하면 끝까지 자신이 예수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예수를 열심히 그리고 잘 믿는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평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걸어서 계단을 올라갔는데 열쇠를 1층 자동차에 놓고 올라간 것이나 같습니다. 열심히 올라가기는 하였으나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열심히 올라간다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열쇠를 가지고 올라가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봉사를 하고 직분을 맡는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예수를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끝까지 그와 같은 착각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산 대표적인 사람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저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서기관과 율법사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정말 대표적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정말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선수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는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저들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고사하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들의 입에서는 밤낮 하나님에 대한 말과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그 하나님을 팔아 밥을 먹고 권력을 누리며 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들은 열쇠 없이 계단을 오른 사람과 같아서 끝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잃어 버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떠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들은 예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는 말씀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그의 요한복음에서 단적으로 말씀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 1 : 1)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법을 의미하고 식을 의미하고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식과 하나님의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범죄 하여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법과 식 그리고 시스템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하여 타락한 이후에 세상에는 하나님의 식과 법과는 전혀 다른 식과 법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세상 식’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식과 법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고 죄는 세상의 식과 법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원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식과 법을 따라 살기 보다는 세상의 식과 법을 따라 사는 것이 편합니다. 죄인이 우리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 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식과 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식과 법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자동적으로 잃어나는 일이요, 아주 순간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잃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본능과 무의식 속에는 잃어버린 예수를 되찾고 싶지 않은 본능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착각하며 자신을 속이고 살고 싶은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고 자신이 편해하고 좋아하는 세상 식을 따라 살고 싶은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어떻게 하면 끝까지 자신을 속이고 그와 같은 착각 속에 살 수 있는가?’ 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 보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을 합리화 합니다.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속입니다. 말씀대로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니까 자기는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예수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결국 속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 보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 것이 쉽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주 재미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아주 건전하며 유익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교회는 더 재미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면서 교회 안에 돈도 있고 권력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보다 그와 같은 권력을 얻기가 쉽기 때문에 아주 매력적입니다. 아주 역설적입니다만 그런 면에서 교회는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아 열심히 봉사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오히려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예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찾을 가능성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직분을 맡아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은, 특히 중요한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려서 목사와 장로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자신들이 예수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히려 세리와 창기보다도 예수를 되찾을 확률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이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 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섬기던 교회에 아주 교회에 열심인 교인 하나가 있었습니다.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아니하고 심방을 받을 때마다 집에서 식사 대접을 하는데 그 정성이 얼마나 지극한지 작지 않은 교회의 교역자들이 모두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직분이 없었습니다. 교회가 그에게 직분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권찰 직분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부인과 가정이 있는 남자의 작은 부인 노릇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그와 같은 허물을 가리 우기 위해, 누구보다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헌금과 구제도 열심히 하고, 심방도 열심히 받고 뿐만 아니라 점심 대접도 분에 넘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교회의 권찰과 집사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무의식적이지만 그와 같은 교회의 직분을 자신의 허물과 죄에 대한 면죄부와 같이 생각하는 듯 싶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직분 얻기를 사모하며 열심히 봉사하였지만 교회는 그에게 교회의 직분을 맡길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잘못된 생활을 청산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에게는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당시 그와 같은 생활을 청산하면 당장 생계가 막막한 형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잘못된 줄을 알면서도 그와 같은 생활을 청산하지 못했는데, 제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과감하게 그와 같은 생활을 청산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일러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제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잘못된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를 교회의 권찰로 추천하였습니다. 많은 교역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잘못된 생활을 이야기하며 반대 하였을 때 제가 자세한 보고를 하였습니다. 모두가 기뻐하며 그를 교회의 권찰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마치고 여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제 목회 생활 중 가장 보람 있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드러난 죄인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히 봉사를 하고 직분을 맡는 것으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숨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직분을 맡는 것으로 자신을 얼마든지 합리화하고 숨길 수 있습니다. 그는 드러난 죄인이었기 때문에 회개하고 직분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기쁨과 은혜로 직분을 맡아 교회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나타난 현상은 회개하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자신의 허물과 죄를 감추고 합리화하기 위하여 열심이었지만 후에는 자신이 죄 사함 받고 구원 얻은 것이 너무 기뻐서 직분을 맡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 보다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되었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끝까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를 잃어버린 채 그 인생을 끝내지 않습니다. 저들은 결국 예수를 팔아먹는 자리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를 팔아 자기의 배를 채우고 욕망을 채웁니다. 예수님 당시의 교권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율법사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팔아 자신의 배와 욕망을 채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쯤 되면 회개가 불가능해 집니다. 세상 식대로 사는 세상 사람보다 더 세상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팔아먹기 위해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공통점과 특징 중에 하나는 저들이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말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이 아니라 몸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정의하고 표현하였습니다. 삶이 말씀을 몸이 되게 합니다. 몸이 없는 말씀은 그냥 말이 됩니다. 그것은 떡 없는 누룩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말로 바꾸어 말로만 예수를 믿는 것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몇해 전에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청부론’이라고 불러주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저의 ‘청부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청부’를 비판하며 ‘청빈’과 ‘자발적 가난’을 내세우는 분들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비판과 주장이 나오는 것이 솔직히 힘들지만, 기분이 좋지 않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일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주장과 이론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다 설명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단번에 동전의 양면을 보지 못하듯 진리의 양면을 한꺼번에 설명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대개 동전의 한 면 밖에는 잘 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어느 한 사람의 주장과 이론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과 이론을 가진 두 사람에 의하여 밝혀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저의 ‘청부론’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부’와 ‘청빈’을 주장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론적으로 ‘청부론’이 더 성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청부론의 기준과 표준을 세우고 참으로 힘들고 어렵지만 그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질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청부론을 쉽게 생각하여 넓은 길을 가는 것으로 오해합니다만 저는 청부론이 그 어떤 길보다 좁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끗하게 돈을 버는 것도 불가능하리만큼 어렵지만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일단 내 주머니에 들어 온 돈을 몫에 따라 나누며 다시 내 보내는 것이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얼마나 손과 마음을 많이 떨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청빈론의 이론과 주장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청빈론의 구체적인 기준과 표준은 무엇이며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표준과 기준대로 살기 위하여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논리를 좋아하지만 제가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론과 논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론과 논리대로 과연 기준과 표준을 정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말이 아주 엉뚱한 데로 갔습니다. 그리고 매우 위험해 졌습니다. 자칫 오해하면 나는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이고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분들은 다 예수를 잃어버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사람이라는 이야기 같아졌기 때문입니다. 양심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다 부족하지만 예수를 입으로만, 머리로만 믿는 사람이 되지 않고 몸과 삶으로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수는 말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식과 법 그리고 하나님의 시스템을 좇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괜히 거창한 이론과 논리를 앞세워 말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매력적인 교회 속에 숨어 자신을 합리화하지 말고 하나님의 식과 법을 회피하려고 하는 자신의 죄 된 본능을 꺽고 범사에 그의 뜻과 식대로 살기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렸다고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헌금을 하고 구제를 하며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를 섬긴다고 자신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목사라고, 장로라고, 집사와 권사라고, 교회를 다닌지 수 십 년이 넘었다고 당연히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떡 없는 누룩처럼, 예수와 말씀 없는 삶을 살면서 입으로만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하신 말씀의 참 뜻이라고 믿습니다. 예수가 열쇠입니다. 말씀이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식과 법 그리고 시스템이 키입니다. 그 열쇠와 키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 키와 열쇠로 세상과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믿음의 큰 유산/ 엡6:1-4/ 2014-09-07
믿음의 큰 유산 엡6:1-4 미국 조지아 주립대학의 경제학 박사 토머스 스탠리 교수가 부의 세습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미국을 움직이는 백만장자들의 성장 과정과 흥망성쇠의 역사를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의 재벌 중 80%는 중산층 또는 노동자 출신이었습니다. 부모로부터 기업을 물려받은 부자들은 겨우 20%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부모로부터 유산대신 좋은 습관을 물려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근면, 성실, 정직, 용기 등 정신적 유산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러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그들은 성공을 통해 얻은 물질을 이웃을 위한 선한 사업에 사용했습니다. 자녀에게 아무리 많은 재산을 남겨주어도 자녀가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그 재산을 헛된 곳에 사용하고 맙니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유산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유산은 신앙의 유산이고 정신적 유산입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남겨 주신 큰 유산은 무엇입니까? 1. 첫째, 신앙의 유산입니다. 가정이 아무리 물질로 풍요함을 갖추었다 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습이 결여되어 있다면 복된 가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가정이 복된 가정으로 살게 된 것은 부모님이 진실한 신앙 유산을 물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둘째, 사랑과 화목이라는 유산입니다. 사람은 사랑과 화목이 있어야 사람다워지고 가정다워집니다. 우리 가정은 사랑이 넘치는 친교의 장, 서로 도와주는 협동과 화목의 장 이어야 합니다. 부모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사랑과 화목이 넘치는 가정을 주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3. 셋째, 효라는 유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효도의 본을 보여 주셨고 부모공경을 약속이 있는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2-3)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효성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신 후 제사를 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가르쳐 주신 그 교훈과 그 생활을 후손 된 우리가 본받고 지키며 행하는 데 있습니다. 내일이 추석명절입니다. 우리를 낳아 주신 부모님과 조상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부모님을 잘 모심으로 효도하는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은 (1)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2) 주 안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 효도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대대로 충만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4. 결론: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유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화목과 효성과 신앙의 유산을 길이 보전하고, 우리 후대에 물려주는 가정이 되기를 다짐하며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진범석 목사(청주 소명교회)
바이블 코드/ 요5:39/ 2008-08-02
바이블 코드 요5:39 “바이블 코드“라는 책이 나와서 미국에서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드디어 우리 나라에서도 그것이 독서계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현재의 문법 구조에서 읽지 아니하고, 모든 낱말을 다 붙여 적은 다음에 거기에 나열된 알파벳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조화시켜 다시 읽어보면, 그 안에는 미래의 여러 가지 사건을 예언하는 암호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발표한 것입니다. 이 책이 관심을 끄는 것은 주제도 주제려니와, 저자가 {워싱턴 포스트}지와 {월 스트리트 저널}지의 전직 기자인 마이클 드로스닌(Michael Drosnin)이라는 유명한 지식인일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안에 숨은 암호가 들어 있다고 하면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그에게 제공한 이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두 수학자인 히브리대학교 수학과의 엘리야후 립스(Eliyahu Ribs) 교수와 도론 비츠툼(Doron Witztum)이라는 점입니다. 립스와 비츠툼은 전문적 학술 잡지인 “통계학지(Statistical Science)“에 컴퓨터 프로그램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창세기 본문 속에 ‘숨어 있는 낱말‘을 찾기 위해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이었다고 합니다. 이 두 수학자는 히브리어 본문을, 낱말들로 구성된 문장으로 보지 않고, 낱개 낱말들이 간격이 없이 히브리어 알파벳의 사슬로 연결된 것으로 볼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간격이 없이 정렬된 낱말에 나타난 알파벳을 여러 가지로 연결시켜 읽어보면 그 속에 중세의 유명한 랍비들의 이름을 찾을 수가 있는가 하면, 그 가까이에서 그들의 사망일자를 읽어낼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이클 드로스닌은 바로 이들 두 수학자들의 작업 결과를 이어 받아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습니다. 립스와 비츠툼이 구약의 창세기만을 예로 들어 어떤 코드를 읽으려 한 것에 반하여, 마이클 드로스닌은 이것을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인 오경 전체를 코드화시키고 거기에서 숨은 뜻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또한 단순히 그 코드에서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발생할 사건을 읽어내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그는 구약의 다섯 번째 책 {신명기}의 본문을 코드화시킨 것에서 이스라엘 전 수상 이츠학크 라빈의 암살을 미리 알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는 당사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을 제가 알고 있는대로 좀 자세히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히브리어 성경에서 암호를 푼다는 것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인 오경을 예로 들면,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오경의 알파벳 글자 수가 모두 30만 4천 8백 다섯 개인데, 이런 글자들이 낱말을 이룰 때 낱말과 낱말 사이가 떨어져 있는데, 그 간격을 무시하고 쫙 붙여서 배열하고, 오경 전체를 64개 줄로 나누고, 각 줄에는 4천 7백 72개의 낱 개 글자를 배열한 다음에,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대각선으로 알파벳을 조합시켜 어떤 이름이나 의미 있는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암호화시켜서 풀어 보면, 거기에는 이스라엘 수상 이츠하크 라빈,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 미국 대통령 존 케네디 등 유명 인사의 암살이 이미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닉슨 대통령의 사임도 예언되어 있고, 세계 2차 대전의 발발과 나치의 6백만 유대인 학살도 이미 예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993년에 목성에 혜성이 부딪친 것도 예언되어 있고, 셰익스피어라는 대문호가 나타나 불후의 작품을 쓸 것과, 공산주의가 붕괴될 것,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다는 것 등이 이미 다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이 이미 예언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서기 2010년에 LA 큰 지진이 일어날 것이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의 역사를 보면 유대교에서나 기독교에서 성경의 문자 뒤의 숨어 있는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거기에는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경우 미슈나 아보트 5장 25절을 보면 벤 바그-바그(Ben Bag-Bag)라고 하는 한 랍비가 한 말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이리 뒤져보고, 또 저리 뒤져보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Turn it and turn it again, for all things are in it.)“. 이런 식으로 성경 안에서 문법적이고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 외에 숨어 있는 뜻, 어떤 비밀을 찾으려한 노력이 성경 해석사에서는 줄곧 있어 왔습니다. 예를 좀 더 들면 구약성경 정경 다니엘서 9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황폐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 천사 가브리엘이 그 예언의 숫자를 문자 그대로 보지 않고 하나의 비밀 암호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해부근에 살던 쿰란 공동체 역시 성경은 그것이 보이고 있는 표면적인 의미보다는 숨어 있는 진짜 뜻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진짜 의미는 자기들은 모르고 의의 교사 한 사람만이 알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전통에서는 성경이 지닌 감추어진 진리를 찾기 위하여 영감 받은 성현들에게 의지하곤 하였습니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충실하게 파악함으로써 성경의 참 메시지에 접근하려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무수히 많은 문학적 장르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장르에 따라 메시지를 파악하는 방법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암호화하려는 의도를 지닌 본문에서는 암호를 해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글 속에는 ‘아트바쉬‘라는 것이 있습니다. 알파벳의 첫 자 대신에 마지막 자를 대신 쓰고, 둘째 자 대신에 끝에서 둘째 자를 대신 쓰고, 셋째 자 대신에 끝에서 셋째 자를 대신 쓰고 ... 하는 식으로 표기하는 것입니다. 즉 a를 써야할 자리에 z를 쓰고, b를 써야할 자리에 y를 쓰고, c를 써야할 자리에 x를 쓰는 것입니다. 어떤 폭군이나 강대국을 거명하기는 해야겠는데 직접적으로 거명했다가는 화를 입게 되거나 곧바로 들키게 되어 두고두고 희롱할 수가 없게 됨으로 이렇게 ‘아트바쉬‘라고 하는 암호 표기 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25장 26절과 51장 41절의 ‘시삭(ssk)‘은 바로 ‘바벨론(bbl)‘의 아트바쉬이고, 예레미야 51장 1절의 ‘레브카마이(lbqmy)‘는 ‘갈대아(ksdym)‘를 가리키는 아트바쉬 암호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전서의 경우 대부분은 본문 자체가 암호화를 의도하지 않은 경우라고 파악되므로, 성경 본문의 문법적 의미 탐구를 본문 이해의 일차적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이 성경해석의 주류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가 되고 있는 마이클 드로스닌의 {더 바이블 코드}는, 성경의 어느 부분이 아니라, 아예 히브리어 구약성경 본문 전체에, 미래에 대한 예언이 다 코드화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 종전의 신비적인 성경해석과 다릅니다. 종전의 신비적인 해석이 영감을 받은 이의 영감에 의존하여 해석된 것에 반하여, 바이블 코드의 경우에는 ‘코드‘를 컴퓨터 과학을 응용하여 해독하는 기술적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종전의 신비주의적 해석 방법과도 다릅니다. 언어와 글자는 의사전달의 중요한 매체입니다. 이제 컴퓨터 과학의 발달로 전자매체가 인류의 지적 유산을 다룸에 있어서, 그것이 수행하는 자료 수집과 수집된 자료의 기억과 기억된 내용의 다양한 분류와 다양한 정보의 송신과 수신이 엄청난 양으로 확대되고 세분화될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가 점점 더 확대되는 기능을 가지고서 기존의 정보와 지적 유산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일찍부터 예측된 바였을 뿐 아니라 기대되는 바였습니다. 컴퓨터 과학의 등장과 함께 성경해석의 전통적 양상들이 이제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컴퓨터 바이블이나, 씨디롬 바이블 자료가 역사적 비평적 성경 해석에 큰 도움을 제공할 수 있듯이, 전자 매체의 활용은 종전의 신비적 성경 해석에도 영향을 강하게 미칠 수 있다는 것 역시 일각에서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바이블 코드는 바로 이 후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수학자들과 신문 기자가 바이블에 어떤 숨어 있는 코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종전의 신비적 성경해석가들이 이 방법을 쓰지 않으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성경학계에서는 싫던 좋던 간에 이 문제를 하나의 과제로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더 바이블 코드}의 저자인 마이클 드로스닌에게 있어서 히브리대학교 수학과 교수인 엘리야후 립스는 이 시대의 새로운 형태의 영감 받은 스승입니다. 립스 교수야말로 히브리어 성경 속에 숨어 있는 비밀 코드를 해독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고안하여, 성경 속의 참 뜻을 처음으로 세상이 알도록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바이블 코드}의 성경 이해는 성경 본문에 대한 오용(誤用)입니다. 구약의 히브리어 본문을 낱말이나 문단 구분 없이 다 붙여서 적고, 문법적인 구조를 지닌 문장으로 읽지 않고, 히브리어 알파벳 하나하나를 개별적인 부호로 보아서, 상하 좌우 대각선 등 여러 방향으로 종횡으로 읽어, 이미 알고 있고 예측할 수 있는 어떤 정보와 맞추어, 이것이 바로 그것을 예고한 것이라고 말하는 식의 코드 해독이므로, 이것은 성경 바로 읽기에 대한 또 다른 기습입니다. 다만 다행스러운 일이 있다면, 바이블 코드의 주장자들이 해독해 낸 메시지라는 것이, 사건 발생 이후의 예언과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결국 이런 식으로 모든 본문을 읽어 낼 경우, 또 하나의 점술서나 역술서와 같은 종류의 책이 되어 별난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나 소일거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사건이 바이블 코드에 다 예언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예언은 다분히 사건 후 예언입니다. 바이블 코드가 다이애나의 교통사고 사망 이전에 나왔습니다마는 그 때는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죽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일어나고 난 후에야 바이블 코드를 다시 보니까 거기에 다이애나의 교통사고 사망이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이블 코드로는 이번 우리 나라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라도 대통령이 되고 나면 바이블 코드에서는 그의 당선이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을 읽어 낼 수가 있게 됩니다. 이것을 일컬어 ‘사건발생 후의 예언‘이라고 합니다. 마이클 드로스닌이나 엘리야후 립스 교수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결정적인 실수이자, 그들의 주장을 그 밑뿌리에서부터 흔드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요소입니다. 그들이 신의 계시를 읽어낼 수 있다고 한 그 바이블 코드의 근거가 되는 히브리어 구약성경는, 그들이 생각한 것과 같은 그러한 히브리어 원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알파벳의 수를 계산하고 코드로 사용할 목적으로 낱말 간격을 없이하고 붙여 배열한 그 히브리어 본문은 원문이 아닌, 16 세기에 여러 사본을 근거로 하여 재구성된 {제 2 랍비성경}라고 하는 절충본문 성경입니다. 이것은 10세기의 알렙포 사본, 11세기의 레닌그라드 사본, 혹은 기원전 3-2세기 경의 사해 사본 등과 비교해 볼 때, 낱말의 수에 있어서나, 각 낱말을 구성하는 낱개 낱말의 알파벳의 수에 있어서도 서로 다릅니다. 후대에 만들어진 절충본문을, 오류가 전혀 없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원문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근거하여 알파벳을 나열하고, 거기에서 어떤 암호를 읽어내려 한 것에서부터, 벌서 히브리어 구약성경 본문 역사에 대한 무지가 그들의 주장의 신빙성과 설득력을 상실시키고 있습니다. 드로스닌과 립스의 컴퓨터에 들어 있는 히브리어 구약 본문은 여러 종류의 사본 중에 하나일 뿐, 히브리어 구약의 원본도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쓰신 친필 구약도 아닙니다. 여기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우리의 성경 연구의 목적에 관하여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를 증언하고 있다. (요한 5:39) 사도 요한은 그의 독자들에게 성경이 기록된 목적에 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20: 30-31)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성경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 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쳐라. (신 명 6:4-8) 모세는 그의 백성에게 성경의 말씀이 지닌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이었다. (신명 8:3) 요한은 신도들에게 성경을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스도와의 사귐, 신도들끼리의 사귐이라는 말로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입니다. (요일 1:3) 민영진 목사(서울 새길교회)
바코드는 과연 짐승의 표인가?/ 계13:16-18/ 2015-09-06
바코드는 과연 짐승의 표인가? 계13:16-18 서달석씨(목사)는 컴퓨터를 통해 상품등에 찍는 바코드가 계 13:18이 말하는 짐승의 표 666이라고 그의 저서「현실로 나타난 666」에서 주장하였다.과연 바코드는 짐승의 표인가?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그 이유는 이로 인하여 많은 신자들이 그릇된 종말론에 유혹되어 자타를 불행케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지난해(1992년) 문제가 되었던 다미선교회 사건도(1992.10.28 자정에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는 휴거된다함) 여기에 현혹된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저들이 92년을 목표로 삼은 것은 92년에 EC12 나라가 통합국가를 이루고 단일 총통이 선출되고 바코드 666를 강제로 사용하게 됨으로 환난이 시작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서달석씨는 그의 저서「현실로 나타난 666」49쪽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설마!,참으로 그럴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읽지만 성경에 에누리가 없이 기록한 말씀은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이루어질 것이다.분명히 666을 받을 경우 지옥 유황불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고 취소될 수 없는 경고가 주어졌는데 이 엄청난 연관,적그리스도는 육신의 생명에 666을 걸고 있고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에 666을 걸어 놓으셨는데 이러한 표가 먼 훗날의 일이라면 이글을 쓸 필요도 없고,읽을 필요도 없겠지만 이미 인류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고 이제는 666 환경에 익숙해 있어 빠져 나갈 길이 없으며,독자가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666시스템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666 그것은 오늘 모든 여혼들의 운명이 걸려 있는 숫자다.그리고 \\\"바코드를 받지 않으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는다\\\"(기로틴이란 단두대에서 국제법에 따라서 목잘려 죽는다) 또한 \\\"거듭난 성도들은 666을 강제로 받게 할 때가 되면 벌써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강제로 바코드를 문신하기 전에 성도들은 휴거된다) 그리고 \\\"성전에 세워져 말하는 우상은 컴퓨터가 될 것이며,세계 각처에 있는 자는 컴퓨터의 통제를 받는다\\\"(이는 말하는 우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놓고 전세계로 경배케 하고 어디서든지 24시간 인공위성을 통하여 활동이 감시를 당하는데 만일 예루살렘 우상에게 경배할 시간에 불평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면 컴퓨터가 감시해내서 즉각 체포,사형당한다고함) 이와 같은 서달석씨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입니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바코드는 어디까지나 문명의 이기(利器)에 불과하고 우상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상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섬기고 경배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고 바코드는 섬기고 경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고 상품을 관리하며 통제하기 위해서 문명의 이기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예루살렘 성전에 말하는 컴퓨터 우상을 세워 놓고 전세계 모든 사람의 이마에 바코드를 문신해서 통제관리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그 이유는 이스라엘이나 EC 12개국이나 그 어떤 강대국이라도 세계를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그의 주장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형제앞에 올무를 놓아 함께 넘어지게 하고 있다. 2.성경에 위배된 주장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리는! ① 선택교리를 말한다.(엡 1:4-6,11,롬 8:29-30) 칼빈주의의 5대 교리중에 하나가 예지예정(豫知豫定)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 정한 사람은 한 사람도 멸망에 이르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했으나,(요 17:12,18:9) 서달석씨 는 바코드에 의해서 구원과 멸망이 좌우된다고 말하니 이는 성경에 위배되는 주장이다. ② 이신득구(以信得救)교리를 말한다. 성경에는 범죄타락한 죄인들이(선택된 자) 예수를 믿음으로 사죄의 은총을 받고(롬 3:22) 구 원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는데,(요 3:16,18,5:24) 서달석씨는 믿는 자도 바코드를 받으면 멸망한다고 가르치므로 이신득구의 교리을 부인하고 있다. ③ 성경은 궁극적구원(窮極的救援)을 말하고 있다.(요 10:28:29) 그러나 서달석씨는 인간의 구원이 적그리스도가 강제로 빼앗을 수 있다고 말하므로 하나님을 식언자로 또는 무능한 하나님을 만들고 있다. 3.논리의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그는 적그리스도가 \\\"거듭난 성도들에게 666을 강제로 받게할 때가 되면 벌써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그의 주장대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바코드의 666을 이마에 강제로 문신하기전에 거듭난 성도들은 모두 휴거된다면 거듭난 성도에게 바코드의 666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이렇게 그의 논리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론(異論)을 펴서 성경대로 믿는 순진한 성도를 현혹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바코드로 인한 노이로제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물론 바코드가 성경에서 말하는 짐승의 표라면 받지말아야 한다.그러나 바코드는 첨단과학이 가져다 준 문명이기에 불과한 것이고,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바코드를 666의 시스템을 사용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인지 짐승의 표로 위장하기 위한 고의적인 도안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분명히 짐승의 표가 아니라는 것이다.그것이 만일 짐승의 표가 되고 그것을 사용하거나 문신하므로 멸망을 받아 지옥 유황불의 형벌을 받게 된다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그렇게 주장하는 장본인도 지옥 유황불의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그 이유는 그도 바코드가 찍힌 상품을 사거나 소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유혹하기 위하여 말세에 많은 거짓 선지자가 있을 것이라는 성경 말씀(요일 4:1)을 명심하고 거짓교훈과 이단사설에 현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이 문제에 베드로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바코드는 과연 짐승의 표인가?/ 계13:16-18/ 2015-09-06
바코드는 과연 짐승의 표인가? 계13:16-19 서달석씨(목사)는 컴퓨터를 통해 상품등에 찍는 바코드가 계 13:18이 말하는 짐승의 표 666이라고 그의 저서「현실로 나타난 666」에서 주장하였다.과연 바코드는 짐승의 표인가?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그 이유는 이로 인하여 많은 신자들이 그릇된 종말론에 유혹되어 자타를 불행케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지난해(1992년) 문제가 되었던 다미선교회 사건도(1992.10.28 자정에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는 휴거된다함) 여기에 현혹된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저들이 92년을 목표로 삼은 것은 92년에 EC12 나라가 통합국가를 이루고 단일 총통이 선출되고 바코드 666를 강제로 사용하게 됨으로 환난이 시작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서달석씨는 그의 저서「현실로 나타난 666」49쪽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설마!,참으로 그럴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읽지만 성경에 에누리가 없이 기록한 말씀은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이루어질 것이다.분명히 666을 받을 경우 지옥 유황불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고 취소될 수 없는 경고가 주어졌는데 이 엄청난 연관,적그리스도는 육신의 생명에 666을 걸고 있고 하나님은 영혼의 생명에 666을 걸어 놓으셨는데 이러한 표가 먼 훗날의 일이라면 이글을 쓸 필요도 없고,읽을 필요도 없겠지만 이미 인류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고 이제는 666 환경에 익숙해 있어 빠져 나갈 길이 없으며,독자가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666시스템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666 그것은 오늘 모든 여혼들의 운명이 걸려 있는 숫자다.그리고 \\\\\\\"바코드를 받지 않으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는다\\\\\\\"(기로틴이란 단두대에서 국제법에 따라서 목잘려 죽는다) 또한 \\\\\\\"거듭난 성도들은 666을 강제로 받게 할 때가 되면 벌써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강제로 바코드를 문신하기 전에 성도들은 휴거된다) 그리고 \\\\\\\"성전에 세워져 말하는 우상은 컴퓨터가 될 것이며,세계 각처에 있는 자는 컴퓨터의 통제를 받는다\\\\\\\"(이는 말하는 우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놓고 전세계로 경배케 하고 어디서든지 24시간 인공위성을 통하여 활동이 감시를 당하는데 만일 예루살렘 우상에게 경배할 시간에 불평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면 컴퓨터가 감시해내서 즉각 체포,사형당한다고함) 이와 같은 서달석씨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입니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바코드는 어디까지나 문명의 이기(利器)에 불과하고 우상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상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섬기고 경배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고 바코드는 섬기고 경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고 상품을 관리하며 통제하기 위해서 문명의 이기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예루살렘 성전에 말하는 컴퓨터 우상을 세워 놓고 전세계 모든 사람의 이마에 바코드를 문신해서 통제관리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그 이유는 이스라엘이나 EC 12개국이나 그 어떤 강대국이라도 세계를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그의 주장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어리석음을 범하고 형제앞에 올무를 놓아 함께 넘어지게 하고 있다. 2.성경에 위배된 주장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리는! ① 선택교리를 말한다.(엡 1:4-6,11,롬 8:29-30) 칼빈주의의 5대 교리중에 하나가 예지예정(豫知豫定)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 정한 사람은 한 사람도 멸망에 이르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했으나,(요 17:12,18:9) 서달석씨 는 바코드에 의해서 구원과 멸망이 좌우된다고 말하니 이는 성경에 위배되는 주장이다. ② 이신득구(以信得救)교리를 말한다. 성경에는 범죄타락한 죄인들이(선택된 자) 예수를 믿음으로 사죄의 은총을 받고(롬 3:22) 구 원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는데,(요 3:16,18,5:24) 서달석씨는 믿는 자도 바코드를 받으면 멸망한다고 가르치므로 이신득구의 교리을 부인하고 있다. ③ 성경은 궁극적구원(窮極的救援)을 말하고 있다.(요 10:28:29) 그러나 서달석씨는 인간의 구원이 적그리스도가 강제로 빼앗을 수 있다고 말하므로 하나님을 식언자로 또는 무능한 하나님을 만들고 있다. 3.논리의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그는 적그리스도가 \\\\\\\"거듭난 성도들에게 666을 강제로 받게할 때가 되면 벌써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그의 주장대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바코드의 666을 이마에 강제로 문신하기전에 거듭난 성도들은 모두 휴거된다면 거듭난 성도에게 바코드의 666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이렇게 그의 논리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론(異論)을 펴서 성경대로 믿는 순진한 성도를 현혹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바코드로 인한 노이로제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물론 바코드가 성경에서 말하는 짐승의 표라면 받지말아야 한다.그러나 바코드는 첨단과학이 가져다 준 문명이기에 불과한 것이고,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바코드를 666의 시스템을 사용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인지 짐승의 표로 위장하기 위한 고의적인 도안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분명히 짐승의 표가 아니라는 것이다.그것이 만일 짐승의 표가 되고 그것을 사용하거나 문신하므로 멸망을 받아 지옥 유황불의 형벌을 받게 된다면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그렇게 주장하는 장본인도 지옥 유황불의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그 이유는 그도 바코드가 찍힌 상품을 사거나 소유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유혹하기 위하여 말세에 많은 거짓 선지자가 있을 것이라는 성경 말씀(요일 4:1)을 명심하고 거짓교훈과 이단사설에 현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이 문제에 베드로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반(反) 다 빈치 코드/ 눅1:1-4/ 2005-01-16
반(反) 다 빈치 코드 눅1:1-4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새해에도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교우 여러분에게 듬뿍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올 때마다 어김없이 느끼는 감정은 HOME COMING입니다. 졸업을 하고 오랫동안 사회에 나가 있다가 몇 십 년 만에 동문들과 함께 모교를 방문하는 그런 심정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선배 후배 동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오늘 여기 와서 보니까 이미 몇 분이 상상도 못할 한창 연세에 우리와는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움과 인간적 비애를 참기 어렵습니다. 저에게 새길교회는 설교의 소재(素材)였고, 저로 하여금 설교를 하게 하는 원인 제공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길교회는 내가 설교를 작성하면 맨 처음으로 해보는 장소였고 맨 처음 만나는 청중이었고 맨 처음 작업해 보는 실험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설교를 구상했고, 여기에서 제일 처음 그 설교를 하고, 그러고 나서 다른 교회에서 그 설교를 반복해서 선포하곤 했습니다. 새길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새길교회 교우여러분에게 드린다고 헌사를 써서 “하나님의 기쁨 사람의 희망”이라고 하는 설교집으로 출판한 것은 제 평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본 일입니다. 여러분과 떠나 있는 동안에는 창조적인 설교를 지을 동기 부여자가 없어졌기 때문에 설교 창작이 풍성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반(反) 다빈치 코드”는 오늘 비로소 처음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작년에 여러 곳에서 했고, 금년의 한 월간지에도 에세이 형식으로 그 중심 내용이 소개되었고, 대만의 한 간행물에도 중국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잉태된 장소가 바로 새길교회였기에 오늘 저는 이런 상례를 벗어난 긴 서론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지난해 1월 18일에 저는 여기에서 여러분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선포했었습니다. 예배 후에 공동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완상 형제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그 무렵 베스트셀러였던 Dan Brown의 신작 소설인 Da Vinci Code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시사주간지 가 2003년 연말 호에 그것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조금은 수상한 소설,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역사를 다시 회고해 보게 하는 소설, 조금은 선정성이 있는 예수와 여성들과의 관계, 특히 베일에 가려진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온갖 상상들과 관련된 금기로 여겨졌던 이야기들이 그 소설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금년에는 그 소설을 정독해 볼 필요가 있겠다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것이 작년 1월이었습니다. 작년 3월에 세계성서공회 창립 200주년 기념식이 런던의 St. Paul Cathedral에서 있었습니다. 영국에 갔던 길에 한 서점에 들러 그 책을 쉽게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는 길에 내내 그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설교를 작성했습니다. 반(反)다 빈치 코드 본문: 눅 1:1-4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눅1:1-4) 댄 브라운이라는 작가가 쓴 라는 소설은 2003년에 전 세계의 영어권 독서계 소설부문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소설입니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첫 36주 동안 4백30만부가 팔리면서 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금년 2004년에 이 책이 번역되어 서점가에서 역시 줄곧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 중에서도 상당수가 이 소설을 직접 읽으셨거나 소문을 들으셨을 줄 압니다.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인 나라들 중에는 이 책의 수입과 번역과 독서를 금하는 나라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책이 흥미 있는 소설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교회들은 가톨릭이나 개신교 가릴 것 없이 이 책을 기독교신앙에 유해한 책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에 우리 기독교의 경전에 관해 학문적인 비평적 연구를 한다면 우리의 경전인 성서에 대해 우리의 주관을 뚜렷이 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기독교 신앙에 도전적인 어떤 정보에 접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능히 잘 지켜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장편 소설이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충격은 이 소설이 역사적 예수의 후손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실제 아내이고, 가나의 혼인잔치는 바로 그 여인과 예수의 결혼식이고,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은 바로 신랑 자신인 예수가 베푼 기적이고, 예수의 부활 이후 예수의 아내인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맨 먼저 만나고(요한 20:11∼18), 그가 초기 교회의 여성 지도자로서 베드로와는 쌍벽을 이루는 지도자가 되고, 그래서 남성 성직자들을 선호한 로마교회의 교부(敎父)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감추고, 막달라 마리아와 그 여인이 이끄는 사람들이 그 대결에서 패배하고, 그 후 막달라 마리아는 이집트로 피신하여 살면서 예수의 딸을 낳고, 얼마 후 프랑스로 건너가서 살고, 그 딸에게서 프랑스를 지배하던 메로빙거왕조(447-750)가 나오고.... 이 소설이 바로 이런 전설적 이야기들을 소설의 기본 재료로 삼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정경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경이나 위경에 근거한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전설에 근거하여 소설적 사건을 흥미있게 전개해 나갑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소설의 작가가 픽션과 논픽션을 한데 섞어 소설로 만들면서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성서의 발생 배경에 관하여 의도적으로 소설적으로 역사를 왜곡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둘째 이유는, 기원후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만들면서 신약성서의 내용 중에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기록들을 고의로 훼손하여 예수의 본래의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말살하거나 감추거나 변질시켰다고 그의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셋째 이유는 진정성이 검증을 받은 신약성서는 그 내용이 많이 변경된 것으로 폄하면서, 검증을 덜 거쳤거나 검증할 가치조차도 없는 전설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오히려 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더 신빙성이 있는 자료인 것처럼 그것들을 소설의 자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흥미 위주의 왜곡된 견해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먼저 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만든 최초의 기독교 황제입니다. 교회사를 볼 것 같으면 그가 통치할 때 그의 주도 아래에서 교회의 중요한 교리가 결정됩니다. 서기 325년 그가 소집한 최초의 기독교공의회가 니케아에서 열립니다. 거기에서 예수와 하나님과 성령이 모두 한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가 만들어지고 예수의 인성(人性)은 약화되고 그의 신성(神性)이 확정되기에 이릅니다.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 곧 인성(人性)을 강조하던 아리우스(Arius)파는 이단으로 정죄됩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성서 27권도 이 때 확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소설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또 다른 충격은 이 소설이 우리의 경전인 신약성서를 두고서 기원후 4세기 이전에 쓰인 신약사본은 없고, 그나마 4세기에 기록된 사본은 본래의 것을 많이 변개한 사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다스리던 기원후 4세기에 신약성서가 다시 쓰였고, 그 때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은 지워지고 신적인 측면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영향 아래 있었던 기원후 4세기이후의 정경(正經) 신약성서 사본들은 물론이려니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외경(外經) 사본이나 위경(僞經) 사본들 중에 어떤 것들도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을 말하거나 예수의 아들이나 딸의 출산 가능성에 관한 어떤 가계(家系)를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소설은 순전히 전설에 근거한 소설적 허구입니다. 기원후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에 그의 영향력 바깥에서 기록되고 보존되어온 신약성서 사본들 중에 이집트에서 발굴된 기원후 2세기와 3세기의 파피루스 단편 사본들이 있는데, 현재 116개 파피루스 사본이 학계에 소개 되어 있는데, 이들 사본 역시 4세기 이후의 신약성서 사본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왜곡되거나 훼손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어 신약 사본만 하더라도 5,500 여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目擊者)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1:1-2) 라는 말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예수에 관한 기록들이 참으로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서 1장 1-4절은 예수를 목격했던 이들이 예수에 관해 기록하려고 붓을 들었던 이들이 많았던 사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본들은 단 두 개도, 서로 완전히 일치하는 사본이 없으리만큼 사본마다 약간씩의 차이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콘스탄티누스와 같은 왕이 본문을 날조하거나 변조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복사 과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인간적 오류에 의해 생긴 것들이 대다수입니다. 물론 그 기원을 밝히기 어려운 이문(異文)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신약성서 본문 비평학은 이들 사본들을 비교 검토하면서 원문에 가까운 본문을 회복하였습니다. 성서 사본(寫本) 연구 결과가 밝힌 바에 따르면 사본상의 이문은 필사과정에서 생긴 것으로서 그 원인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에 쓰인 파피루스 단편의 내용과 콘스탄티누스 때 쓰인 4-5세기의 대문자사본, 혹은 그 이후 9-11세기의 소문자사본에 내용상 심각한 차이를 나타내는 차이가 없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에 관한 기록을 뜯어고친 흔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2백여 년 동안 과학적으로 이루어진 성서의 사본연구, 본문연구는 신약성서의 본문이 정확하게 전달되어 왔음을 밝혔습니다. 아무런 검증도 받지 않은 전설이나 자료들이 이것을 뒤집지는 못할 것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적 필사상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전달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시절에 신약사본들이 새로 쓰였다거나 기존의 황제가 신약성서의 사본 내용을 고의적으로 훼손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복사 과정에서 생긴 오류는 본문비평의 결과로 많이 바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회복된 본문을 우리는 지금 인류가 쓰고 있는 2천 수 백 개의 언어로 번역하였고, 또 번역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려고 소설이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은 소설의 고유한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댄 브라운의 를 순수한 소설이라고 인식하고서 이 소설을 읽는다면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성서의 기록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들 중에 외경이나 위경이나 전설은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교회는 신학적 작업을 거쳐 많은 문헌 중에서 진위를 가려 정경을 만들었고, 필사본의 오류를 바로잡으면서 우리에게 올바른 신약성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지금 바로 그 성경을 손에 들고 계십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가 하신 말씀, 그가 실천한 사랑을 구두로 전해준 구전자들을 준비하시고, 구전을 기록으로 옮길 수 있도록 성서문필가들을 보내주시고, 복음서, 사도행전, 사도들의 서신, 계시록 등을 신약성서로 편집하여 경전을 만들 수 있도록 편집자들을 보내주신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구원의 역사를 쓰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았고, 그들이 쓴 저서도 많았지만 교회로 하여금 그 중에서 27권을 엄선하게 하시고 지난 2천 년 동안 정확하게 전달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이 말씀 늘 읽고 명상하고 연구하여 우리가 변화되고 우리의 삶이 풍성하여지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민영진 목사(새길교회)
불, 방망이, 칼/ 렘23:29-/ 2015-09-06
불, 방망이, 칼 렘23:29- 말씀은 크게 나누어서 \'객관적 말씀\'과 \' 주관적 말씀\'으로 분류할 수 있다.객관적 말씀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으로 내 심령에 와서 부딕치는 말씀이다. 객관적 말씀이 주관적 말씀으로 내게 부닥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함께 할 때에만 가능하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말씀의 권능\'을 세가지로 비유하고 있다. 그것은 불이요 방망이요 그리고 칼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은 \'불\'이다. 성경을 보면[우리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비유도 \'불\'이요 오늘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비유도 역시 \'불\'이다. 불의 용도는 불순한 것을 정화시키는 일이다. 금광석에서 순금이 나오려면 엄청난 온도의 풀무불 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불순물 조각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순도 99 %의 순금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권능은 불과도 같아서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록 순도는 99.9%로 정화되는 것이다. 분순물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듯이 내 속의 더러운 욕심과 쓸데없는 자존심 그리고 교만한 생각들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방망이\'라고 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내 말이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라고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표준 새번역 성경을 보면 방망이를[망치]라고 번역을 했다. 즉 \'쇠망치\'인 셈이다. 쇠망치의 권능은 뭐니뭐니해도 [깨뜨리고 부수는 기능]이다. 그야말로 다이나마이트다! (1)바위와 같이 단단하고 완악한 심령이 말씀의 쇠망치로 두들겨 맞아서 산산조각으로 부수어져서 [어찌할꼬?]하며 신음하게 된다. (2)바위처럼 내 속에서 딱 버티고 있는 죄의 세력을 산산이 깨 부수어서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것이 말씀의 쇠망치 권능이다. (3)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 의심하는 마음을 산산이 부수어서 나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고서 주님을 신뢰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쇠망치의 권능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이 여러분을 책망하는 말씀일 때, 거부반응을 보이지 말고 쇠망치 권능으로 부숴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이 선 검보다도 더 예리한 검]이다.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이 뚫고 들어가지 못할만큼 단단하고 견고한 것은 없다. 곧, 인간 안의 제 아무리 깊은 곳이라 할지라도 말씀의 검은 얼마든지 뚫고 들어갈 수가 있다.](히4:12,칼빈주석인용) 이 말씀의 검은 이처럼 강하게 뚫고 들어가고,들어갈 뿐만 아니라, 찔러 쪼개는 권능이 있다! 비유하여 말한다면 말씀이란 바로 \'사람의 심령을 수술하는 칼\'이다. 이 칼이 수술해서 심령을 고쳐 사람의 심령으로 하여금 겸손한 심령, 온유한 심령,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심령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의 검의 권능이다.사랑하는 여러분! 목사가 강단에서 외칠 때 그 말씀이 아프게 찔렀다면 여러분은 바로 그 순간 이 말씀의 검의 권능을 체험한 것임을 아시기 바란다. 부디 이 말씀의 검을 열심히 갈아서, 이 검이 더욱 날카롭게 빛날 수 있도록 축원드린다. 맺음말 : 저 유명한 무디 선생은 [성경은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켜 주기 위해서 주어진 책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책이다. ] 그렇다!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변화 시키는 권능]이다! 행19: 20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이 능력있게 퍼져나가고, 점점 힘을 떨쳤다\'라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 그것은 불이요, 쇠망치요 검인 것이다. 여러분이 성령의 역사와 감동을 구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여러분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실천함으로 말씀의 권능을 체험하고,생활의 변화를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이를 위해서 101일 성경통독 새벽기도회에 여러분 모두가 참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아멘.
불과 칼/ 창22:1-14/ 2007-07-13
불과 칼 창22:1-14 요절: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 두 사람이 동행 하더니(창22:6) 오늘도 예수님을 만나서 복된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에 대한 내용을 교훈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살펴보면,,,,. 一. 행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우리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100세 난 아들, 이삭을 번제 제물로 드리라’ 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납득이 안가지만 아브라함은 드렸습니다. 모리아산으로 3일간 걸어가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참 믿음은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손으로 만져지고, 눈으로 확인되고, 자타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행동을 보이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 참 믿음, 확실한 믿음은 행동을 증거로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출석하고, 목사님과 악수하고, 선물도 받아가니, 확실한 믿음생활이 증거 되었습니다. 몸으로 믿어야 합니다. 노아에게 방주 만들라 할 때에.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행동이 있었습니다. 몸으로 믿고 물질로 믿었습니다. 마음과 몸이 동시에 움직이고, 믿어야 정상이요, 참 믿음, 온전한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병원 원장님 오XX 의사 선생님께 식사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대답이 마음으로 믿어요 합니다. 오래동안 고민중에 성령님이 좋은 지혜를 주셨습니다. 원장님 예수 믿어세요, 교회 나가세요, 목사님! 마음으로 믿어요. 하며 또 빠져 나갑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갔는데, 요금이 만원 나왔습니다. 기사님, 요금 만원은 마음으로 드렸어요 한다면, 이 새끼하면서 따귀를 후리 칠 것입니다. 돈으로 요금 드려야합니다. 신앙도 마음과 몸이 동시에 움직이고, 믿어야 하고, 자타가 보는 물질로 믿어야 합니다. 신앙은 행동입니다. 행동만이 믿음을 증거 합니다. 내 믿음을 다른 사람이 보아야 합니다. 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내 믿음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야 합니다. 출석행동, 십일조 행동, 전도행동, 봉사행동, 사랑행동, 찬양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새벽에 내렸습니다. 이슬과 같이 내렸는데, 광야로 나가서 모아다가 먹었고, 광야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침 해가 뜨면, 썩고 없어졌습니다. 힘들어도 새벽에, 광야로 나가야 하고, 먹어야 힘을 얻어 광야 길에서 삽니다. 행동을 보인 이스라엘은 살았고, 게으른 사람은 굶고 결국은 병들고 죽었습니다. 만나 거두러 새벽에, 광야로, 가야하고 먹어야 합니다. 신앙은 새벽에, 교회 와서, 하늘양식을 먹어야, 인생길 성공합니다. 행동을 가지세요. 아브라함의 행동을 봅시다. 3절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지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더니” 이것이 아브라함은 행동입니다. 마음과 몸이 동시에 움직었습니다. 성경은 일어남에 대하여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적 일어남과 사망적 일어남이 있습니다. 요나가 일어나서 선창가로 가서 배 타고 도망가다가, 풍랑만나 죽을 고통을 다 당했으니, 사망적 일어남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어나서 하나님 지시한 모리아산으로 3일 길을 갔습니다. 생명적 일어남입니다. 우리는 일어나서 도적질하러 가고, 창녀촌으로 가고, 술집으로 가고, 싸우러 가고, 사기하려가고, 등산가고, 골퍼치려 가고, 탕자같이 방탕으로 가니, 사망적인 일어납니다. 생명적 일어남으로 교회오고, 전도 나오고, 하나님 뜻에 맞추는 일어남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일어나서 진리, 하나님께 맞추시기를 축복합니다. 二. 불과 칼 6절에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 하더니”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가지고 갔습니다. 번제 재물을 태울 때에 불이 필요하고, 제물을 잡을 때에 칼이 필요합니다. 모리산위에 가서 불을 구하지 못하고, 칼을 구할 수 없기에 집에서 미리 준비하여, 아브라함은 집에서 미리준비하였고, 꼭 필요한 연장입니다. 불과 칼 없으면 제사는 망치게 됩니다. 손으로 이삭을 잡을수 없고, 불 없이는 태울 수 없기에, 불과 칼은 제사행위에 가장 필요한 도구입니다. 터어키 아라랏산에 가서 양 잡아 제사 드리는 제사법에 대하여 실물 교훈을 받았는데, 양을 잡아 바위위에 올려놓고, 칼로 목을 땁니다. 가죽 벗기고, 레 1장에 나오는 잡는 법대로 하여, 제사법을 배우고 가죽을 가지고 오려고 하다가 피덩어리라 가져올 수 없어서, 두 뿔을 가지고 와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고, 지금 사택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사성공을 위하여 불과 칼을 가지고 간 것같이, 신약 성도들이 꼭 가져야 할 것은 두가지요, 불과 칼입니다. 천국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매일 매일 가질 핵심은 불과 칼입니다. 불은 무엇을 의미하고 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불 초대교회에 불같은 성령이 임하셨고, 성령충만으로 살았고, 영감의 감동으로 뜨겁게 신앙생활을 성공했습니다. 성령의 영감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감동 주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은 감동과 충격으로 움직입니다. 내속에 영과 마음과 몸의 기능을 감화주고, 감동주고, 느끼게 하고, 충격 주고 하여, 그 감동으로 살아갑니다. 타락한 감동, 악령귀신의 감동을 받아서 사는 자는 전부 타락하는 짓을 합니다. 롯같이 소돔 가서 악행합니다. 돈의 감동 축격받아 돈 따라가서, 하나님도 교회도 등지고, 도적질합니다. 아간같이, 게하시같이 돈이 크게 보여, 진리말씀, 선지자의 경고말도 버리고, 타락하여 돌에 맞아죽습니다. 창녀 감동받아 창녀 굴로 들어갔다가 에이즈병에 죽은 자들이 많습니다. 연속극에 감동받아 눈물 흐리는 못난 짓을 합니다. 음란과 타락으로 시작한, 불륜으로 시작한 연속극으로 악한 감동으로 교회에 안 나와요. 교회 집사가 축구에 감동받아 축국경기에 빠져 교회오지 않아, 물어보니, 3부예배 올 것입니다. 하지만 안 왔어요, 친구가 퇴근길에 술 한잔하자하니, 그 말에 감동받아, 술 먹고, 몸에 병들어 고생한자도 있습니다. 악령귀신에 감동 충격받아 과대망상하여, 자기가 이스마엘이다. 빈 라덴이다, 모세다, 예수다하면서 총으로 32을 죽인 미국 버지니아공과대학 4년 조승희씨, 결국은 자기 죽이는 자살, 남 죽이는 타살은 분명히 요8:44절에 의하면, 살인자 마귀에 하수 짓입니다.(2007년4월16일) 음란에 물든 자가, 어린이 유괴하고, 성범죄를 하여, 세상을 혼란시킵니다. 요셉은 여자의 성 유혹 감동을 이겼습니다. 꿀차를 끓어 온다, 인산차로 대접한다, 웃음으로 다가온다, 육체 향수로 다가온다, 술상으로 다가온다, 속옷을 사주고, 빨아주고, 온갖 유혹으로 감동주고, 향략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성령감동으로 사는 요셉은 이것을 이겼습니다. 하나님께 득죄할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 불의 감동, 감화로 살아야 하고, 성령의 김화가 모든 세상감동을 꺾어야 하고, 타락한 감동을 꺾어야 하고, 진리안으로 행하는 감동 감화 속에 살아야 합니다. 요13:2절에 마귀가 가룟유다 마음에 예수 팔 생각(감동)을 넣었더라 하셨으니, 그 결과는 자살입니다. 유행가에 감동받아 코 노래로 살아가는 타락한자가 교회안에 많습니다. 매순간마다 성령감동으로 진리안의 생활을 하여 신앙성공하시기를 원하시면 크게 아멘 하세요. 아멘! 아멘! 4월19일날 목사 안수를 4분이 받았는데, 그 안수식에 받은 설교, 선서 격려, 축사 등, 그 감동을 살아 있어야 목회 성공합니다. 저도 목사안수 때에 선서하면서 목사는 일생 목회 외에는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여러 증인앞에, 목사 일만 하기로 따짐하고, 감동에 잡혀 오늘까지,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남편, 아내, 동료들에 감동, 달콤한 이설, 흔들림 받아 세상길 가지 마시고, 성령감동으로 진리안으로 사는 생활만 계속 있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2)칼 칼은 엡6:17절에 성령검 곧 하나님말씀을 가지라 했으니, 칼로 성령역사 아닌 것을 짤라 버려야 합니다. 칼 즉 말씀 칼로 생활에 요리하여 취하고 버리고 해야 합니다. 사모님이 미국간 후에 혼자서 음식을 요리하여 보았습니다. 무우를 썩은 부분은 잘라 버리고, 껍질 벗기고, 깨끗한 부분을 잘게 잘라서 요리하여 먹으면 건강한 몸을 가짐같이, 성령검, 말씀 칼로 현실에서 만나는 사건 환경 모든 존재에 대하여 잘라버리고 취하고 하여 더욱 진리사람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칼을 잘 사용하여, 요리하여 먹고 더욱 천국 길을 가며, 성령감동으로 순종 삶을 살아서, 복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믿음있는 증거는 행동으로 보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맞추는 행동을 아브라함이 보였고, 생명적 일어남을 가지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이삭을 결박하여 단에 올려놓고, 죽이려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불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감동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타락한 감동들이 많습니다. 남편 아내, 친구 ,동료 문화 등등 충동받고, 감동받아 세상에 오염되어 살아 스스로 멸망하지 말고, 성령 감동으로 살아서 더욱 좋아지고, 천국길을 뜨겁게 가면서 사람구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칼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생활을 요리하여 칼로 잘라버리고 취하여,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 하시기를 주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불과 칼/ 창22:1-14/ 2007-07-13
불과 칼 창22:1-14 요절: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 두 사람이 동행 하더니(창22:6) 오늘도 예수님을 만나서 복된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에 대한 내용을 교훈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살펴보면,,,,. 一. 행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우리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100세 난 아들, 이삭을 번제 제물로 드리라’ 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납득이 안가지만 아브라함은 드렸습니다. 모리아산으로 3일간 걸어가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참 믿음은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손으로 만져지고, 눈으로 확인되고, 자타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행동을 보이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 참 믿음, 확실한 믿음은 행동을 증거로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출석하고, 목사님과 악수하고, 선물도 받아가니, 확실한 믿음생활이 증거 되었습니다. 몸으로 믿어야 합니다. 노아에게 방주 만들라 할 때에.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행동이 있었습니다. 몸으로 믿고 물질로 믿었습니다. 마음과 몸이 동시에 움직이고, 믿어야 정상이요, 참 믿음, 온전한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병원 원장님 오XX 의사 선생님께 식사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대답이 마음으로 믿어요 합니다. 오래동안 고민중에 성령님이 좋은 지혜를 주셨습니다. 원장님 예수 믿어세요, 교회 나가세요, 목사님! 마음으로 믿어요. 하며 또 빠져 나갑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갔는데, 요금이 만원 나왔습니다. 기사님, 요금 만원은 마음으로 드렸어요 한다면, 이 새끼하면서 따귀를 후리 칠 것입니다. 돈으로 요금 드려야합니다. 신앙도 마음과 몸이 동시에 움직이고, 믿어야 하고, 자타가 보는 물질로 믿어야 합니다. 신앙은 행동입니다. 행동만이 믿음을 증거 합니다. 내 믿음을 다른 사람이 보아야 합니다. 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내 믿음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야 합니다. 출석행동, 십일조 행동, 전도행동, 봉사행동, 사랑행동, 찬양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새벽에 내렸습니다. 이슬과 같이 내렸는데, 광야로 나가서 모아다가 먹었고, 광야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침 해가 뜨면, 썩고 없어졌습니다. 힘들어도 새벽에, 광야로 나가야 하고, 먹어야 힘을 얻어 광야 길에서 삽니다. 행동을 보인 이스라엘은 살았고, 게으른 사람은 굶고 결국은 병들고 죽었습니다. 만나 거두러 새벽에, 광야로, 가야하고 먹어야 합니다. 신앙은 새벽에, 교회 와서, 하늘양식을 먹어야, 인생길 성공합니다. 행동을 가지세요. 아브라함의 행동을 봅시다. 3절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지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더니” 이것이 아브라함은 행동입니다. 마음과 몸이 동시에 움직었습니다. 성경은 일어남에 대하여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적 일어남과 사망적 일어남이 있습니다. 요나가 일어나서 선창가로 가서 배 타고 도망가다가, 풍랑만나 죽을 고통을 다 당했으니, 사망적 일어남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어나서 하나님 지시한 모리아산으로 3일 길을 갔습니다. 생명적 일어남입니다. 우리는 일어나서 도적질하러 가고, 창녀촌으로 가고, 술집으로 가고, 싸우러 가고, 사기하려가고, 등산가고, 골퍼치려 가고, 탕자같이 방탕으로 가니, 사망적인 일어납니다. 생명적 일어남으로 교회오고, 전도 나오고, 하나님 뜻에 맞추는 일어남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일어나서 진리, 하나님께 맞추시기를 축복합니다. 二. 불과 칼 6절에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 하더니”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가지고 갔습니다. 번제 재물을 태울 때에 불이 필요하고, 제물을 잡을 때에 칼이 필요합니다. 모리산위에 가서 불을 구하지 못하고, 칼을 구할 수 없기에 집에서 미리 준비하여, 아브라함은 집에서 미리준비하였고, 꼭 필요한 연장입니다. 불과 칼 없으면 제사는 망치게 됩니다. 손으로 이삭을 잡을수 없고, 불 없이는 태울 수 없기에, 불과 칼은 제사행위에 가장 필요한 도구입니다. 터어키 아라랏산에 가서 양 잡아 제사 드리는 제사법에 대하여 실물 교훈을 받았는데, 양을 잡아 바위위에 올려놓고, 칼로 목을 땁니다. 가죽 벗기고, 레 1장에 나오는 잡는 법대로 하여, 제사법을 배우고 가죽을 가지고 오려고 하다가 피덩어리라 가져올 수 없어서, 두 뿔을 가지고 와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고, 지금 사택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사성공을 위하여 불과 칼을 가지고 간 것같이, 신약 성도들이 꼭 가져야 할 것은 두가지요, 불과 칼입니다. 천국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매일 매일 가질 핵심은 불과 칼입니다. 불은 무엇을 의미하고 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불 초대교회에 불같은 성령이 임하셨고, 성령충만으로 살았고, 영감의 감동으로 뜨겁게 신앙생활을 성공했습니다. 성령의 영감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감동 주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은 감동과 충격으로 움직입니다. 내속에 영과 마음과 몸의 기능을 감화주고, 감동주고, 느끼게 하고, 충격 주고 하여, 그 감동으로 살아갑니다. 타락한 감동, 악령귀신의 감동을 받아서 사는 자는 전부 타락하는 짓을 합니다. 롯같이 소돔 가서 악행합니다. 돈의 감동 축격받아 돈 따라가서, 하나님도 교회도 등지고, 도적질합니다. 아간같이, 게하시같이 돈이 크게 보여, 진리말씀, 선지자의 경고말도 버리고, 타락하여 돌에 맞아죽습니다. 창녀 감동받아 창녀 굴로 들어갔다가 에이즈병에 죽은 자들이 많습니다. 연속극에 감동받아 눈물 흐리는 못난 짓을 합니다. 음란과 타락으로 시작한, 불륜으로 시작한 연속극으로 악한 감동으로 교회에 안 나와요. 교회 집사가 축구에 감동받아 축국경기에 빠져 교회오지 않아, 물어보니, 3부예배 올 것입니다. 하지만 안 왔어요, 친구가 퇴근길에 술 한잔하자하니, 그 말에 감동받아, 술 먹고, 몸에 병들어 고생한자도 있습니다. 악령귀신에 감동 충격받아 과대망상하여, 자기가 이스마엘이다. 빈 라덴이다, 모세다, 예수다하면서 총으로 32을 죽인 미국 버지니아공과대학 4년 조승희씨, 결국은 자기 죽이는 자살, 남 죽이는 타살은 분명히 요8:44절에 의하면, 살인자 마귀에 하수 짓입니다.(2007년4월16일) 음란에 물든 자가, 어린이 유괴하고, 성범죄를 하여, 세상을 혼란시킵니다. 요셉은 여자의 성 유혹 감동을 이겼습니다. 꿀차를 끓어 온다, 인산차로 대접한다, 웃음으로 다가온다, 육체 향수로 다가온다, 술상으로 다가온다, 속옷을 사주고, 빨아주고, 온갖 유혹으로 감동주고, 향략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성령감동으로 사는 요셉은 이것을 이겼습니다. 하나님께 득죄할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 불의 감동, 감화로 살아야 하고, 성령의 김화가 모든 세상감동을 꺾어야 하고, 타락한 감동을 꺾어야 하고, 진리안으로 행하는 감동 감화 속에 살아야 합니다. 요13:2절에 마귀가 가룟유다 마음에 예수 팔 생각(감동)을 넣었더라 하셨으니, 그 결과는 자살입니다. 유행가에 감동받아 코 노래로 살아가는 타락한자가 교회안에 많습니다. 매순간마다 성령감동으로 진리안의 생활을 하여 신앙성공하시기를 원하시면 크게 아멘 하세요. 아멘! 아멘! 4월19일날 목사 안수를 4분이 받았는데, 그 안수식에 받은 설교, 선서 격려, 축사 등, 그 감동을 살아 있어야 목회 성공합니다. 저도 목사안수 때에 선서하면서 목사는 일생 목회 외에는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여러 증인앞에, 목사 일만 하기로 따짐하고, 감동에 잡혀 오늘까지,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남편, 아내, 동료들에 감동, 달콤한 이설, 흔들림 받아 세상길 가지 마시고, 성령감동으로 진리안으로 사는 생활만 계속 있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2)칼 칼은 엡6:17절에 성령검 곧 하나님말씀을 가지라 했으니, 칼로 성령역사 아닌 것을 짤라 버려야 합니다. 칼 즉 말씀 칼로 생활에 요리하여 취하고 버리고 해야 합니다. 사모님이 미국간 후에 혼자서 음식을 요리하여 보았습니다. 무우를 썩은 부분은 잘라 버리고, 껍질 벗기고, 깨끗한 부분을 잘게 잘라서 요리하여 먹으면 건강한 몸을 가짐같이, 성령검, 말씀 칼로 현실에서 만나는 사건 환경 모든 존재에 대하여 잘라버리고 취하고 하여 더욱 진리사람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칼을 잘 사용하여, 요리하여 먹고 더욱 천국 길을 가며, 성령감동으로 순종 삶을 살아서, 복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믿음있는 증거는 행동으로 보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맞추는 행동을 아브라함이 보였고, 생명적 일어남을 가지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이삭을 결박하여 단에 올려놓고, 죽이려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불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감동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타락한 감동들이 많습니다. 남편 아내, 친구 ,동료 문화 등등 충동받고, 감동받아 세상에 오염되어 살아 스스로 멸망하지 말고, 성령 감동으로 살아서 더욱 좋아지고, 천국길을 뜨겁게 가면서 사람구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칼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생활을 요리하여 칼로 잘라버리고 취하여,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 하시기를 주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불과 칼/ 창22:1-14/ 2009-08-12
불과 칼 창22:1-14 요절: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 두 사람이 동행 하더니(창22:6) 오늘도 예수님을 만나서 복된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에 대한 내용을 교훈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살펴보면,,,,. 一. 행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우리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100세 난 아들, 이삭을 번제 제물로 드리라’ 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납득이 안가지만 아브라함은 드렸습니다. 모리아산으로 3일간 걸어가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참 믿음은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손으로 만져지고, 눈으로 확인되고, 자타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행동을 보이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 참 믿음, 확실한 믿음은 행동을 증거로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출석하고, 목사님과 악수하고, 선물도 받아가니, 확실한 믿음생활이 증거 되었습니다. 몸으로 믿어야 합니다. 노아에게 방주 만들라 할 때에.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행동이 있었습니다. 몸으로 믿고 물질로 믿었습니다. 마음과 몸이 동시에 움직이고, 믿어야 정상이요, 참 믿음, 온전한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병원 원장님 오XX 의사 선생님께 식사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대답이 마음으로 믿어요 합니다. 오래동안 고민중에 성령님이 좋은 지혜를 주셨습니다. 원장님 예수 믿어세요, 교회 나가세요, 목사님! 마음으로 믿어요. 하며 또 빠져 나갑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갔는데, 요금이 만원 나왔습니다. 기사님, 요금 만원은 마음으로 드렸어요 한다면, 이 새끼하면서 따귀를 후리 칠 것입니다. 돈으로 요금 드려야합니다. 신앙도 마음과 몸이 동시에 움직이고, 믿어야 하고, 자타가 보는 물질로 믿어야 합니다. 신앙은 행동입니다. 행동만이 믿음을 증거 합니다. 내 믿음을 다른 사람이 보아야 합니다. 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내 믿음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야 합니다. 출석행동, 십일조 행동, 전도행동, 봉사행동, 사랑행동, 찬양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새벽에 내렸습니다. 이슬과 같이 내렸는데, 광야로 나가서 모아다가 먹었고, 광야 길을 걸어갔습니다. 아침 해가 뜨면, 썩고 없어졌습니다. 힘들어도 새벽에, 광야로 나가야 하고, 먹어야 힘을 얻어 광야 길에서 삽니다. 행동을 보인 이스라엘은 살았고, 게으른 사람은 굶고 결국은 병들고 죽었습니다. 만나 거두러 새벽에, 광야로, 가야하고 먹어야 합니다. 신앙은 새벽에, 교회 와서, 하늘양식을 먹어야, 인생길 성공합니다. 행동을 가지세요. 아브라함의 행동을 봅시다. 3절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지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더니” 이것이 아브라함은 행동입니다. 마음과 몸이 동시에 움직었습니다. 성경은 일어남에 대하여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적 일어남과 사망적 일어남이 있습니다. 요나가 일어나서 선창가로 가서 배 타고 도망가다가, 풍랑만나 죽을 고통을 다 당했으니, 사망적 일어남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어나서 하나님 지시한 모리아산으로 3일 길을 갔습니다. 생명적 일어남입니다. 우리는 일어나서 도적질하러 가고, 창녀촌으로 가고, 술집으로 가고, 싸우러 가고, 사기하려가고, 등산가고, 골퍼치려 가고, 탕자같이 방탕으로 가니, 사망적인 일어납니다. 생명적 일어남으로 교회오고, 전도 나오고, 하나님 뜻에 맞추는 일어남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일어나서 진리, 하나님께 맞추시기를 축복합니다. 二. 불과 칼 6절에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 하더니”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가지고 갔습니다. 번제 재물을 태울 때에 불이 필요하고, 제물을 잡을 때에 칼이 필요합니다. 모리산위에 가서 불을 구하지 못하고, 칼을 구할 수 없기에 집에서 미리 준비하여, 아브라함은 집에서 미리준비하였고, 꼭 필요한 연장입니다. 불과 칼 없으면 제사는 망치게 됩니다. 손으로 이삭을 잡을수 없고, 불 없이는 태울 수 없기에, 불과 칼은 제사행위에 가장 필요한 도구입니다. 터어키 아라랏산에 가서 양 잡아 제사 드리는 제사법에 대하여 실물 교훈을 받았는데, 양을 잡아 바위위에 올려놓고, 칼로 목을 땁니다. 가죽 벗기고, 레 1장에 나오는 잡는 법대로 하여, 제사법을 배우고 가죽을 가지고 오려고 하다가 피덩어리라 가져올 수 없어서, 두 뿔을 가지고 와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고, 지금 사택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사성공을 위하여 불과 칼을 가지고 간 것같이, 신약 성도들이 꼭 가져야 할 것은 두가지요, 불과 칼입니다. 천국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매일 매일 가질 핵심은 불과 칼입니다. 불은 무엇을 의미하고 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불 초대교회에 불같은 성령이 임하셨고, 성령충만으로 살았고, 영감의 감동으로 뜨겁게 신앙생활을 성공했습니다. 성령의 영감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감동 주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은 감동과 충격으로 움직입니다. 내속에 영과 마음과 몸의 기능을 감화주고, 감동주고, 느끼게 하고, 충격 주고 하여, 그 감동으로 살아갑니다. 타락한 감동, 악령귀신의 감동을 받아서 사는 자는 전부 타락하는 짓을 합니다. 롯같이 소돔 가서 악행합니다. 돈의 감동 축격받아 돈 따라가서, 하나님도 교회도 등지고, 도적질합니다. 아간같이, 게하시같이 돈이 크게 보여, 진리말씀, 선지자의 경고말도 버리고, 타락하여 돌에 맞아죽습니다. 창녀 감동받아 창녀 굴로 들어갔다가 에이즈병에 죽은 자들이 많습니다. 연속극에 감동받아 눈물 흐리는 못난 짓을 합니다. 음란과 타락으로 시작한, 불륜으로 시작한 연속극으로 악한 감동으로 교회에 안 나와요. 교회 집사가 축구에 감동받아 축국경기에 빠져 교회오지 않아, 물어보니, 3부예배 올 것입니다. 하지만 안 왔어요, 친구가 퇴근길에 술 한잔하자하니, 그 말에 감동받아, 술 먹고, 몸에 병들어 고생한자도 있습니다. 악령귀신에 감동 충격받아 과대망상하여, 자기가 이스마엘이다. 빈 라덴이다, 모세다, 예수다하면서 총으로 32을 죽인 미국 버지니아공과대학 4년 조승희씨, 결국은 자기 죽이는 자살, 남 죽이는 타살은 분명히 요8:44절에 의하면, 살인자 마귀에 하수 짓입니다.(2007년4월16일) 음란에 물든 자가, 어린이 유괴하고, 성범죄를 하여, 세상을 혼란시킵니다. 요셉은 여자의 성 유혹 감동을 이겼습니다. 꿀차를 끓어 온다, 인산차로 대접한다, 웃음으로 다가온다, 육체 향수로 다가온다, 술상으로 다가온다, 속옷을 사주고, 빨아주고, 온갖 유혹으로 감동주고, 향략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성령감동으로 사는 요셉은 이것을 이겼습니다. 하나님께 득죄할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 불의 감동, 감화로 살아야 하고, 성령의 김화가 모든 세상감동을 꺾어야 하고, 타락한 감동을 꺾어야 하고, 진리안으로 행하는 감동 감화 속에 살아야 합니다. 요13:2절에 마귀가 가룟유다 마음에 예수 팔 생각(감동)을 넣었더라 하셨으니, 그 결과는 자살입니다. 유행가에 감동받아 코 노래로 살아가는 타락한자가 교회안에 많습니다. 매순간마다 성령감동으로 진리안의 생활을 하여 신앙성공하시기를 원하시면 크게 아멘 하세요. 아멘! 아멘! 4월19일날 목사 안수를 4분이 받았는데, 그 안수식에 받은 설교, 선서 격려, 축사 등, 그 감동을 살아 있어야 목회 성공합니다. 저도 목사안수 때에 선서하면서 목사는 일생 목회 외에는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하나님 앞에, 여러 증인앞에, 목사 일만 하기로 따짐하고, 감동에 잡혀 오늘까지,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남편, 아내, 동료들에 감동, 달콤한 이설, 흔들림 받아 세상길 가지 마시고, 성령감동으로 진리안으로 사는 생활만 계속 있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2)칼 칼은 엡6:17절에 성령검 곧 하나님말씀을 가지라 했으니, 칼로 성령역사 아닌 것을 짤라 버려야 합니다. 칼 즉 말씀 칼로 생활에 요리하여 취하고 버리고 해야 합니다. 사모님이 미국간 후에 혼자서 음식을 요리하여 보았습니다. 무우를 썩은 부분은 잘라 버리고, 껍질 벗기고, 깨끗한 부분을 잘게 잘라서 요리하여 먹으면 건강한 몸을 가짐같이, 성령검, 말씀 칼로 현실에서 만나는 사건 환경 모든 존재에 대하여 잘라버리고 취하고 하여 더욱 진리사람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칼을 잘 사용하여, 요리하여 먹고 더욱 천국 길을 가며, 성령감동으로 순종 삶을 살아서, 복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믿음있는 증거는 행동으로 보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맞추는 행동을 아브라함이 보였고, 생명적 일어남을 가지고 모리아산으로 가서 이삭을 결박하여 단에 올려놓고, 죽이려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불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감동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타락한 감동들이 많습니다. 남편 아내, 친구 ,동료 문화 등등 충동받고, 감동받아 세상에 오염되어 살아 스스로 멸망하지 말고, 성령 감동으로 살아서 더욱 좋아지고, 천국길을 뜨겁게 가면서 사람구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칼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세상 생활을 요리하여 칼로 잘라버리고 취하여,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 하시기를 주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양복석 목사(서울 은평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