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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은 진짜 모습을 가리는 좋은 가면이다/갈6:11-18/청소년주일설교/2007-11-04
겉모습은 진짜 모습을 가리는 좋은 가면이다 갈6:11-18 제가 처음에 청소년주일에 청소년설교를 맡게 되었을 때 참 막막했었습니다. 사실은 김현 집사님께서 춤을 추라고 하였기에 아 제발 그것만은 안 된다고 제가 말해서 그럼 상윤아 넌 설교해~ 라고 하시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설교라는 어마어마한 임무가 제게 부여 된 것 이였죠. 부리나케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성경책을 열심히 뒤져가며 무언가 마음에 드는 구절, 인상 깊은 구절들을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갑자기 아무데나 펴놓고 찾으려니까 하나님의 말씀들이 와 닿지 않고 따로 놀기만 하더군요. 그러던 중 갈라디아서를 우연히 피고 읽게 되었는데 그중 마지막장의 마지막 부분이 꽤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이 할례를 강요하고 또한 그들은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여 자랑하려는 것이다. 특히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는 구절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겉모습이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첫 인상에 좋은 느낌을 심어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은 외모에 많이 좌우 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외모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 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그 이상을 넘어서서 우리는 이제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자기 자신의 본모습이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봉사활동을 예로 들어보자면 양로원, 고아원 등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노인들과 어린이들과 하루를 보내고 나서는 정작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앞에 서 계신데도 옆 사람 눈치를 살피거나 노약자석을 살피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눈을 감아버리거나 더 심한 예로는 중학교 때 제 친구들은 봉사활동 시간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채 마감 시한이 다가오자 근처 양로원에서 300원을 주면 봉사활동 1시간을 준다고 해서 우르르 몰려가 봉사활동 시간을 사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신문에는 엄마들이 자기 자식들 공부 할 시간도 모자란다며 대신 봉사활동을 해주는 경우까지 났습니다. 결국 진심으로 봉사활동을 한 학생이든 돈으로 산 봉사활동이든 엄마가 해준 봉사활동이든 겉으로 나타내어지는 건 모두 같은 봉사활동 점수 이죠. 아직 사랑과 연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요즘 보고 듣는 것들에서는 이것들 에서도 본질을 왜곡하고 남자는 연봉과 능력으로 여자도 적정정도의 부와 외모가 진정한 사랑을 뛰어넘는 기준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떤 노래 가사에서는 21세기의 여자의 인격이 왜 명품백 결혼은 이력서가 필요해 마음은 서로를 향해 걸어도 먼저 차를 봐 부모님은 뭐하셔 사는 곳은 어디셔 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그 사람의 성격, 가치관, 그 사람과 나와의 통하는 점 같은 것들이 아닌 것들이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점은 씁쓸한 마음을 남깁니다. 친구 관계에서도 우리는 겉모습부터 들이대는 상황을 마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혹은 습관적으로든 자기 자식의 친구를 만나 본 뒤 자식에게 그 아이는 공부 잘하니? 반에서 몇 등 정도하니? 같은 성적과 관련된 질문과 그 아이 부모님은 뭐 하시니? 같은 가정환경에 대해서 물어보곤 합니다. 아파트 단지의 열성적인 엄마들은 그 아이의 집이 몇 평 인지도 물어보곤 한답니다. 그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요? 그 아이가 전교 1등을 하고 그 아이의 아버지는 변호사에 엄마는 의사이고 그 집은 타워팰리스 100평짜리 집에서 살면 그 아이는 정말 훌륭하고 좋은 아이일까요? 이러한 잘못된 질문들이 결국 그 자기 자식들도 그렇게 수치화된 기준들에 의해 사람을 판단하게 만들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저 또한 초등학교 때 의 친구를 사귀게 되는 계기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다 조금씩 달라져 갔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 친구가 부자이든 가난하든 신나게 놀든 책상에 앉어 있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시험도 없었던 터라 성적을 몰랐으니 누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구요. 그러나 중학교를 와서 2학년 때 처음 반 배정을 받고 1학년 때 소문으로 전교1등 이라고 들었던 애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아는 애도 아무도 없으니 쟤랑 좀 친해져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먼저 다가갔었죠. 물론 제 특유의 친화력으로 쉽게 친한 친구가 되긴 했지만 정작 그 친구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제가 도움을 받은 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친구가 도서관에 가려는 저를 꼬드겨서 항상 같이 집에 가자고 하는 바람에 집에서 노는 시간이 잦아져 그 친구와 별로 안 친했을 때보다도 더 성적이 안 좋았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다시 생각해보면 단지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려 했던 제 생각이 갓 중학교 2학년이 된 학생 생각으로는 매우 불건전 하지 않았는가 생각해봅니다. 요즘 불어 닥쳐 매우 큰 논란을 가져왔던 학력위조 사건도 결국 그 사람의 진정한 능력과 됨됨이를 보지 않고 겉에서 보기 편한 학력과 자신에게 살살 돈과 뇌물을 안기는 사람에게 기울었던 우리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가 빚어낸 안타까운 일이 었죠. 외모 지상주의가 얼굴과 몸매 뿐 아니라 학력과 돈 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폐단 이라는 것이죠. 얼굴, 돈, 학력, 성적, 몸매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의 전부 입니까? 또 겉으로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내린 진심을 거부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조금씩 의식적으로 바꾸어 나가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님들께서는 자녀들의 친구의 성적이나 부모님 직업 같은 것은 일체 묻지 않고 단지 나쁘게 엇나가는 친구만 아니라면 좋은 마음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소위 날아다니는 청소년이 아닌 이상 성적이 낮든 높든 간에 각자의 특성과 장점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가 정말 우정이 돈독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요. 그리고 청소년들도 자신이 봉사활동을 허위로 한 적은 없는지 아니면 정말 짜증과 불평 속에서 마지못해 한 봉사활동을 점수로 받고 점수 다 채웠다며 좋아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 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대학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상도 험악하고 성격도 무뚝뚝해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졌던 사람이 서울대를 나왔다고 하면 갑자기 그 사람 인상이 좋아지고 성격 좋고 항상 미소를 띠던 사람이 전문대를 나왔다고 하면 그 사람을 경시 하는 태도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가장 진실한 마음을 보시고 그 사람을 대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한 번에 빠르게 알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처럼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장 그 사람다운 모습을 알아 가려고 노력한 뒤에 그 사람을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처럼 나중에 가서는 한 사람 한 사람 마다의 장점만을 보며 모두를 사랑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승무 집사(청소년부 부장) 김 상윤 청소년이 전한 설교 내용은 너무나도 명백한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잊고 살 때가 많은 그런 종류의 것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질타했고 유교경전의 공자님 말씀도 다 그런 종류인 것 같습니다. 겉모양에 치중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 한국의 전통문화의 핵심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그런 진실 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 청소년들의 입장을 수용하고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체면치레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잘 하지는 못해도 기본은 해야 한다는 것이 그런 것인데 주로 결혼식이나 어린 아기 또는 노부모의 생일잔치, 장례식 같은 경조사에서 주로 그런 사고방식이 발동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좋은 말로 예절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인사를 할 줄 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저도 그런 체면치레나 예의 같은 것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또 그것이 인간관계를 부드럽고 원만하게 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김상윤 청소년이 이야기한 대로 우리 기성세대는 성공과 사회적 안정을 중요시하고 그런 그룹에 들어가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러다보니 학교성적, 키, 집 면적, 월급액수와 같은 숫자로 표현되는 것을 무척 중요시합니다. 그런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차별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청소년들이 보기에 얼마나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겠습니까? 기성세대들은 여기서도 웬만큼은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성적도 기본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80점 이상, 집 평수도 최소한 얼마 이상, 키도 얼마 이상 이런 식으로 남들을 크게 앞지르지는 못하더라도 반대로 크게 뒤쳐지는 것을 아주 안 좋게 생각합니다. 친구를 사귀어도 특출한 인재를 친구로 삼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기본 조건은 되는 친구를 사귀어라. 한 마디로 개성이 없고 손가락질 받기 싫어하고 멋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평가를 받아도 싸지 않겠습니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 기성세대들이 깊이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청소년들이 그런 기성세대를 못 받지 말고 정말 멋있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꼭 해 주고 싶은 말을 하려고 합니다. 기성세대들이 겉치레에 치중하고 성적을 중요시하고 모이면 주식 이야기나 부동산 이야기만 할 정도로 돈을 중요시하는 것, 그런 방면에서 뒤떨어지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첫째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둘째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 곧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 6: 12, 13) 이 두 번째 자랑하고 싶은 동기는 정치적인 것이고 투명하지 못한 것에 속합니다. 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일단은 스스로도 먹고 사는 문제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고 또 자녀들도 앞으로 좋은 직업을 가지고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밑바닥에 잠재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먹고 사는 것이야 누구나 당연히 바라는 것이고 그런 문제야 인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있었던 문제인데 그것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청소년 시절에 우리 부모 세대에게 똑같이 항변했습니다. 그러면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희들은 배고픈 것이 뭔지 모른다. 그러시면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쫄쫄 굶던 경험담을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지금 저와 비슷한 기성세대는 그런 것은 경험을 못 해 보았고 \"너희들은 IMF라는 게 뭔지 모른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논쟁을 하는 데 나이에서 오는 실제 경험보다 무서운 무기는 없으니까요. 이런 주제로 기성세대와 청소년, 부모와 자녀 간에 논쟁은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있어 왔고 앞으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입니다. 양쪽 편의 말이 다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기성세대도 또 우리 청소년도 이 논쟁에서 굳이 이기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겉모습이 아닌 진실된 모습이 더 중요하다는\" 우리 청소년의 생각이 청소년 시절에나 할 수 있는 순진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시대에 적절한 발언이라는 것이 실감이 될 시대가 닥칠 것이다 하고 저는 감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은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어느 모로 보나 21세기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우리 기성세대들은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모두가 20세기에 태어나서 20세기에 성장하고 학교를 다니고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20세기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여기 앉아 있는 교우들에게 있어서는 1950년부터 1999년까지 20세기 후반기가 우리의 몸이 성장하고 정신이 성숙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인류 역사상 인구가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경제성장이 가장 급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20세기 중에 全세계적으로 인구는 4배가 증가했고 경제는 20배가 성장했고 에너지 사용량은 16배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2005년 시점에서 과거 20년 동안만 보아도 세계인구는 35% 증가, 세계 경제생산량은 75%, 에너지 사용량은 40%, 육류소비량은 70%, 자동차 생산량은 45%, 종이사용량은 90%, 광고는 100%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지금 기성세대와 청소년 세대간의 물질적 풍요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몇 십년전만 해도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경제적 풍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초고속으로 성장하던 시대에는 부모세대보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라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부모세대보다 공부할 시간과 여건이 안 되어 공부를 더 적게 하는 것도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당연히 공부도 더 잘해야 하고 집도 더 큰 집에서 살아야 하고 학교도 더 오래 다녀야 하고 뭐든지 부모세대보다는 나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안 되면 조금 모자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사회 전체가 물질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겉모습에 관한 한 그 성장 속도는 가공할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그런 시대는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시대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계속 20세기 후반기처럼 성장을 했다가는 지구환경이 지금도 안 좋지만 완전히 망가져서 사람이 살기도 힘들게 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제는 생산이나 소비를 조금 자제하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에 물질적 성장은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 이전 시대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것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사회는 분명히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그런데도 과거처럼 숫자로 표현되는 겉모양을 중요시한다면 불행하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날보다 물질적으로 잘 살기가 그렇게 쉽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그런 것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여기 있는 우리 청소년들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지금과 같은 수준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도 매우 불투명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더 악착같이 공부를 잘 하고 재주를 배우고 기술을 익혀서라도 우리 아이만큼은 그리고 나만큼은 잘 살아야 하는 게 아니냐 하고 결의를 다지는 분도 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낮아지기 때문에 그런데 가치를 두었다가는 사회적으로 불행이 찾아오고 마음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청소년의 부모 되시는 분들이나 청소년들이나 \"그런 겉모양에 해당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초연하게 생각하고 좀더 진실된 내면을 가꾸는 데 충실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하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외모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사회풍조가 걱정스럽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정도 겉모습은 사실은 우리 기성세대들이 인간을 외부적으로 규정하는 숫자들에 치중하는 것이 비하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외모를 가꿀 수 있으면 잘 가꾸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얼짱도 나오고 몸짱도 나오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지금 점잖게 앉아 계시지만 외모에 신경을 안 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멋을 부리더라도 자기 개성을 살려야지 남을 모방하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미적인 감각을 살려서 멋있고 독특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정신과 마음씨가 받쳐주어야 합니다. 삶에 초점이 있어야 눈동자가 빛이 납니다. 마음이 넓고 너그러워야 얼굴이 밝고 아름답습니다. 물론 그것이 일대일 대응되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에 너무 실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면에 숨어 있는 진짜 모습입니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자신의 볼품없고 초라하고 추한 내면을 감추려고 자녀들에게 겉모습만을 강조하지 않았나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고 청소년들은 그런 기성세대들을 본받지 말고 내면이 훌륭해서 외모도 빛이 나는 그런 분들이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읍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함께 묵상기도 드리시겠습니다
계명을 주신 뜻은?/출19:1-6/청소년을 위한 십계명 강해설교(1)/이진우 목사
계명을 주신 뜻은? 출19:1-6 청소년을 위한 십계명 강해설교(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 19:1-6 한 형제가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목사님, 지금도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지금은 신약시대 아닙니까?" 맞습니다. 지금은 신약시대이고 은혜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 그러면 바울이 말한 바 '율법의 폐지'란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이스라엘의 율법은 세 가지, 즉 의식법, 사회법, 도덕법으로 되어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의식법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소용되던 세밀한 요구 사항들을 말합니다. 이 법이야말로 완전한 희생제물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는 다음 주일날 비행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다음 사회법은 당시 유대 사회의 유지를 위한 각종 소송과 규칙들을 말합니다. 물론 이 법이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이 도덕법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신의 백성에 대한 일반적 교훈들입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는 선에 대해 전혀 무지할 뿐만 아니라 알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히 행할 것과 피할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위대한 통치자,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법을 제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요약적으로 압축한 것이 바로 '십계명'인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율법으로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기"(롬3:20)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한 행위, 의로운 행실은 이미 구원 얻은 사람들의 징표인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위의 본문을 배경으로 십계명이 언제,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언제? 1절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온 지 3개월 여가 되어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된 가나안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인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포천쪽으로 가야하는데 서울에서 수원 쪽으로 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보름 정도면 곧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곳 시내산으로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저의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뭔가 긴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새 나라의 새 백성이 지킬 새로운 규례를 먼저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애굽에 있는 동안, 400여 년은 침묵하시더니 이제 홍해를 건너 자유의 몸이 된 뒤에야 주시는 겁니까?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계명은 이미 '출애굽' 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사람들이 알고 지켜야 할 그것입니다. 출애굽은 거듭남의 상징입니다. 계명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우리의 친구들에게 "우상을 만들지 말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얘기한다면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 요구받는 규례요, 하나님의 나라에 맞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십계명을 들먹이면서 그것이 무서워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면 그 그릇됨을 풀어줘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지켜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해방 된 후에 계명이 주어졌듯이, 누구든지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후 그것을 지킬 동기와 능력을 주신 이후 그 계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물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습니다. 출애굽은 했지만 아직 그들은 가나안 시민의 자격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과 사고 속에는 노예생활 할 때의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시나이 주변의 부족들은 무질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이스라엘을 우습게 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준은 한없이 유치했지만 신분은 분명한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학급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신자도 있고 불신자도 있습니다. 그러면 신자가 모든 면에서 불신자보다 낫습니까? 실력 같은 것은 차지하고. 그러면 생활 면에서는 어떻습니까? 슬프게도 저는 신자 학생들이 불신자들보다 더 무질서하고 인색하고 매력 없는 경우를 보곤 합니다. 물론 더 많은 경우에는 그래도 신자가 불신자보다 낫게 보인다고 저는 전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계명도 모르는 불신 친구들 중에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 예수 믿으면 다냐? 뭐 난 것이 있냐?"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슬슬 눈치 보며 피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제 막 홍해를 건너온 유치한 수준의 이스라엘을 생각하십시오. 어쩌면 당신이 그와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그래, 맞아 나는 형편없어. 그러니까 예수 믿는 거야." 십계명은 누구에게 주어졌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아직도 유치한 단계에 있던,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부끄러움과 자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수준은 어떠해야 했을까요? 결코 높은, 지키지도 불가능한 요구치를 내걸지 않았습니다. 어떤 청년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그 계명들을 다 지켰노라고." 자랑스러웠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요즘도 어떤 사람들은 자랑합니다. "나는 살인하지도, 간음하지도, 도적질하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랑할 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해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마태복음 5:21 이하에서 우리는 진정 천국시민에게 요구되는 수준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살인하지 않았어도 형제에게 노하면 살인한 자요, 간음치 않았어도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자랍니다. 십계명은 대부분 "하지 말라"(do not)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도 뭔가 악행을 하지 않으면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우리를 끔찍이도 속박하는 종교라고 내심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명을 통해 참 자유를 주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만일 한 친구가 "마약을 피우든 말든 내 자유야"라고 했다고 합시다. 어느 날 그는 마약에 사로잡혀 스스로는 자신을 어쩔 수 없음을 발견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릇된 자유, 위장된 자유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다. 진리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참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요 8:32). 예수님의 십계명 해석은 결국 마태복음 22:37 이하에서 이렇게 집약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 둘째는 이웃을 사랑할 것. 결국, 십계명을 지키는 길은 "하지 않는" 항목을 되뇌면서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라, 힘차게 일어나서 "사랑을 실천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겠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자였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자인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지겨운 멍에 같은 것이 아닙니다. 더 깊은 감사, 더 구체적인 감격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성도가 된 우리에게 있어서 계명은 기쁨이요 특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청소년 헌신예배) /갈6:1-5.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청소년 헌신예배) /갈6:1-5. 2010-07-28 17:57:24 read : 33 우리 믿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려면, 우리가 서로 짐을 나누워 져야 합니다. 내가 나의 짐을 지고 나의 할일을 다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을 다 했다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 한것은 아닙니다. 남의 짐 까지라도 필요하면 저 줘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미 합니다. 사람은 다 약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장점만 보다가 가까이 지나면서 상대방의 약점을 보게되면 실망하기가 쉽습니다. 이런때에 우리는 어떻게 대하여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까? 이 그리스도의 성취하는 힘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 주위에서 연약한 사람들이 서로 짐을 진다면 서로 중요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그곳에 예수님이 계시어 주님의 일을 하고, 우리는 주님의 사역하심에 동참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연악한자임을 알기 때문에,서로가 필요한 존재들 입니다. 사도바울은 몸이 아픈 가운데서도 갈라디아 지방에 가서 전도 하였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역사 하셔서,믿음의 사람들이 생기고, 여러 교회가 세워 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여 세워진 교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는 루스드라가 있는 곳으로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번한 곳이기도 합니다.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활 신앙으로 전도에 임하였고,갈라디아 교회는 복음 안에서 교회가 설립 되였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 율법주의 자들의 영향을 받아 믿음을 저버리고,율법주위자가 되어 사도 바울이 하는 것을 비판하고 사도 바울에게 원수가 되었습니다.(갈라디아서 4:16). 이러한 그들을 사도 바울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의 법을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사랑의 법을 어떻게 성취 합니까? 첫째로, 온유한 심령으로 범죄한 자들을 바로잡아 주고,자신도 시험에 들지 안토록 삼가 조심해야 한다고 본문 6:1절에 말씀 하셨습니다. \"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심령이 감사하고, 만족하고,기쁨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다가도 율법주의 신앙으로 형식적이요 비판적인 마음으로 굳어진 그들을 포기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님의 온유한 심령을 갖이고 그들에게 화내지 아니하고 그들을 바로 잡아 영적 신앙으로 회복 시키고자 힘을 쓰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바울과 같이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기도해서 성령님의 온유한 힘을 덧입었을 때 온유하게 타이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화가난 상태에서 말한다면, 오히려 불화만 조성 될 뿐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자기 자신도 시험에 들지 않을까 경계하고, 시험에 들지 안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 인간관계가 좋아야 하는데 그것은 먼저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것이 아주 중요 합니다. 나의 생각이 사나우면 상대자의 마음에 상처를 내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성격이 날카라워 져 있을 때에는 주님의 십자가의 뜨거운 보혈의 피에 흠벅 취하여 나의 마음이 속죄 함의 은혜와 성령님의 열매로 온유한 심령이 되어 서로 대화가 부드럽게 통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가끔 부부간에 다투는 일이 생기면 누가 먼저 말을 건네지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툼의 시험에 빠지지 안으려면 온유한 심령이 무엇보다 우선이 됨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려면,나의 짐을 내가 저야 합니다.(2절). \"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 하라!\". 사도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믿음 안에 굳게 서서 살고자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자립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불만을 토해 낼 시간적 여유 조차 없습니다. 내가 남의 도움에 의존해서 살겠다는 생각으로 남을 이용 할 마음으로 대하다가 그 일이 성취 되지 안을 때 상대와 서로 어긋나게 됨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열심히 일해서 내가 자립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줄 수있는 사람이 되면 좋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 하시는 나의 짐이란 무엇일까요? 나의 짐은 내가 해야 할 의무를 말합니다. 즉, 가장은 가족 부양의 의무가 있고, 학생은 공부하는데 의무가 있고, 국민은 납세,교육,병역,선거의 의무가 있습니다. 이와같이 교회의 직분자들도 해야 할 직무가 있습니다. 어떤때는 사업과 직장일이 바쁠 때도 있고, 또 몸이 불편해서 괴로울 때도 있지만 그러나 믿는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믿음 안에서 걸머지고 힘써 일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때로 연약 할 지라도 주님만을 의지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남의 도움을 받지 안코서라도 떳떳이 해 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얼마나 좋을까요! 세째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려면,자기의 짐과,서로의 짐을 져야 합니다.(2절과 5절 말씀). 우리모두는 완전한 사람이 없기에 우리는 서로의 짐을 지고 나갈 때 우리의 공동체가 한 몸이 되는 것이요,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2절 말씀 \"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또 5절 말씀에 \"각각 자기의 짐을 질것임이니라!\". 우리교회 속회(구역회)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짐을 저 줘야 합니다. 이유는 우리 모두가 약점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짐을 지고 나갈 때 사랑의 인격이 나의 마음에 이루워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 생활을 하다가 \'나의 약점과 과오로 모든 사람이 나의 곁을 떠났을 때에 나를 찾아 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나의 친구요, 나의 약점의 짐을 나누워 지는 사람입니다. 나의 약점을 알고도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 그리고 나의 성장이 그의 기쁨이 되는 사람이 나의 짐을 지는 참 좋은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런 친구는 내가 사람들의 약점을 감당 할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남의 짐을 지십시오! 그의 과오를 보고 기도 해 주시고, 그의 약점이 오히려 강점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요 ! 저도 목회 하면서 외롭고 답답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님은 나를 찾아 주시고 저의 죄짐을 대신 저 주심을 경험 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 감화가 되어 주님의 사역을 감당 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오랜전 월남전에서 있었던 실화 입니다. 한 미군이 전쟁터에서 지뢰 밭을 지나다가 그만 실 수 하여 지뢰가 터지는 바람에 한팔이 떨어저 나가고 병사는 쓰러저 살려 달라고 구원을 호소 했습니다. 아무도 두려워서 지뢰 밭을 드러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 지휘관이 뚜벅 뚜벅 지뢰밭을 걸어가서 병사를 등에 메고 무사히 안전지대로 나왔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 수왁츠코프 장군이 였습니다. 그는 자기 병사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그의 두려운 짐을 풀어 준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 우리 예수님도 이와 같이 우리의 죄 짐을 풀어 주시려고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마지막으로,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성취하려면, 서로의 약점을 감당해야 합니다.이러한 사랑의 힘은 곧 우리를 위해 죄짐을 져 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사랑을 의지함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찬송가 465장에 \" 구주와 함께 나 살았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 봄니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봄니다. 할렐루야! 오늘의 요절 말씀 6:2절 \"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길을 묻는 그대에게/ 마11:28-30/ 청소년주일설교
길을 묻는 그대에게 마11:28-30 *프롤로그: 1996년도 어느덧 11번째 달의 절반을 넘기고 있습니다. 이제 한달 반 정도 남아있는 올 한해를 돌아보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들을 하고 계시는지요? 요즈음은 특히 좋은일 보다는 우울한 소식들이 우리 주위에 자꾸만 쌓여 가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시야가 탁 트여저 있고 우리가 갈 길이 환하게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야기 하나:길을 잘못들어 고생한이야기 지난 8월 말경이었습니다. 고등부 교사들 모임을 봉화 청량산에서 가지게 되었었는데 제가 교회에 일이 있어서 늦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약속된 장소에 가보니(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서로 잘못알아서) 아무도 없고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찾아 올라가다가 보니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한 길은 봉화로 가는 길이라 표시되어 있고 다른 쪽은 안동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안동 방향으로 차를 몰아 갓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평탄하고 넓던 길이 자꾸 가면서 좁아지더니 갑자기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지면서 길도 바위투성이의 험한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차를 뒤로 돌릴 수도 없고 오직 앞으로만 가야 하는데 날은 어두워지고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가? 이러다가 산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아닌가?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그렇게 한 25분쯤 내려오다 보니 저만큼 어떤 아저씨 한 분이 경운기를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얼른 차를 세우고 그 분께 이길이 안동으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께서 어쩌다 이 험한 길로 들어왔느냐고 하면서 계속해서 곧장 가면 안동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길을 모르게 되면 얼마나 마음이 불안해지는지 별 생각이 다들게 됩니다. 그런데 한 아저씨로부터 이 길이 틀림없다는 말을 들으니 어찌나 마음이 놓이고 또 평안해지던지.... 그때까지 나오지 않던 노래가 저절로 나오게 되더라구요.(길은 여전히 터덜길이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참 힘들게 살아가는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들고,(6세 아이의 골치가 아파, 고민이야 등) 학생들은 또 얼마나 힘드는지..(입시 스트레스, 게다가 요즈음은 외모, 환경 등) 어른들은 편하십니까? 아니지요.? 요즈음 어른들 참 불쌍한 것 같애요. 나는 걱정없이 늘 즐겁게 삽니다라고 할 수 있는 분이 여기 몇분이나 있을까요? 이야기 둘:팔불출과 4빼 시중에 나도는 우울한 유행어 가운데 \\\\\\\"월급쟁이 팔불출과 3빼\\\\\\\"라는 것이있다. 팔불출의 첫째는 평생직장으로 착각하고 장기근속한 사원.다음은 회사가 잘되어야 나도 잘된다는 믿음 속에 가정보다 회사에 더 충실한 사람.그래봐야 명예퇴직 제1차 대상이더라는 것이다.이어 마누라 맞벌이시키지 않는사원, 회사고위층 빽이 없는 이,부업 없이 월급으로만 사는 사람,아무리 봐도 오라는 데 한 곳 없는 사원,밥벌이 될 만한 자격증 하나 없는 사람,딸린 식구가 많은 월급쟁이 순으로 되어 있다. 3빼의 첫 항목은 \\\\\\\"살 빼\\\\\\\".직장과 가정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아 퉁퉁 부어 있는데 속도 모르고 체중이 늘었다며 아내와 자식들이 \\\\\\\"살을 빼라\\\\\\\"면서 구박하는 것을 말한다.두번째는 치솟는 전세값을 감당하지 못할 때 집주인이 내뱉는 \\\\\\\"방 빼\\\\\\\",세번째는 회사가 어려우니 나가 달라는\\\\\\\"책상 빼\\\\\\\"이다. 그리고 4번째는 주차 잘못하면 듣게되는 \\\\\\\"차 빼\\\\\\\"이다. 또 요즈음의 남편들의 표어는 \\\\\\\'자는 부인 다시보자\\\\\\\'이라고 합니다.(드라마 \\\\\\\'애인\\\\\\\', 청부폭력으로 남편살해, 뇌물로 남편 자리에서 밀어낸 \\\\\\\'이성호 장관\\\\\\\'부인 등) 우리 중년의 여자분들은 어디 또 편안합니까? 그렇지 못하지요. 아이들 입시때면 아이들과 같이 수험생이 되고, 치솟는 물가 속에서 빠듯한 살림을 해나가느라 정신없이 지내다가 문득 거울을 보면 \\\\\\\'왕비\\\\\\\'는커녕 왠 늙은 무수리가 한 사람 보인다는 겁니다. 게다가 연속극을 보려고 하면 요즈음은 왠 연속극들이 전부 \\\\\\\'애인\\\\\\\'의 영향을 받아서 사람을 속상하게 만들고 .. 그래서 나도 저렇게 확 해보고 싶은데 참는다고 하는 분들이 46%나 된다는 별 웃기는 여론조사도 있더라구요. 이렇듯 힘들고 어려우니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어떻게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분명히 길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길을 찾으려 하면서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는겁니다. 1.주술적인 미신이 판을 치는 사회 분위기 *바위 앞에서 자녀 합격을 비는 사람들 *오래전부터 입시를 앞두고 행해지는 주술 문화가 암암리에 만연되어 있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수능입시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불안에 떠는 수험생들의 심정을 이용해서 \\\\\\\'합격 비방\\\\\\\'이 등장하여 급속히 번지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한 예로 자신이 지망하는 대학의 학교 건물 주변에 남몰래 연필과 지우개 같은 학용품을 묻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캠퍼스에 학용품을 묻거나, 네잎 클로버를 찾는 수험생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이처럼 근거도 없는 다소 황당한 각종 주술 행위들로 인하여 불안에 떠는 수험생들도 생겨나고 있어 입시와 관련된 주술 행위의 심각함을 말해주고 있다. *청소년들의 주술 의존 자신의 생활 속에서 라이벌 관계에 있는 사람을 병들게 하거나, 불행을 안기고, 사고를 당하도록 만드는 주술, 상대의 행운을 빼앗고 두통에 시달리게 하는 주술, 연인을 갈라놓는 주술, 미인을 차지하는 주술, 싫증난이성을 때어버리는 주술, 도박에서 이기는 주술, 자신의 미래를 말해주는 주술, 심지어는 전생에 대해서 알려주는 터무니 없는 주술들이 범람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허무맹랑한 주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술에는 그 신통력을 더하기 위해 온갖 주술도구들이 동원되는 것이다. 머리카락, 짚, 이쑤시게, 손수건, 사진, 반지 등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주술행위를 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상식 이하의 천하고 괴기한 주술 행위들은 그 목적을 위해서는 무리한 요구들도 서슴치 않고 행하게 하고 있다. 예)볼펜 귀신점. 만득이 시리즈 등 즐겨보는 책;퇴마록,마계마인전, 2.전생, 환생에서 불안을 해소하려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이른바 <전생>과 <환생>의 신드롬이 일고 있다. 김영우라는 정신과 의사가 쓴 \\\\\\\'전생여행\\\\\\\'이란 책이 10만부가량 팔렸고 양귀자 씨의 \\\\\\\'천년의 사랑\\\\\\\'도 150만부나 팔렸다. 영화 및 드라마는 \\\\\\\'은행나무 침대\\\\\\\' \\\\\\\'고스트 맘마\\\\\\\' \\\\\\\'8월의 신부\\\\\\\' 등 가요는 신승훈의 5집앨범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나 다시 태어나도 너만을 사랑할거야.다음 세상 우리 만날 때 서로 다른 모습이라도.),사랑의 완성을 위해서는 죽음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장혜진의 \\\\\\\"완전한 사랑\\\\\\\"(그대 기다릴게요.우리 남은 사랑 완전해질 저 다음 세상에서), 신성우의 \\\\\\\"슬픔이 올 때까지\\\\\\\" 윤종신의 \\\\\\\"환생\\\\\\\" 등이 신세대를 파고들고 있다. 이렇게 전생이나 환생에 집착하는 이유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어 현실도피적인 심정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피해를 가저온다. 얼마전 기독신보에서 실시한 <전생> 설문 조사의 내용을 보면 기독청소년들 중 과반수가 넘는 학생들이 자신의 전생에 대해 궁금해하고(52%) 또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전생이 있다(24.1%)고 믿는 것으로 나타나서 \\\\\\\'전생과 환생\\\\\\\' 신드롬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비 기독학생들보다 역사는 단회적이라는 기독교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는 기독학생들이 더 회의적이라고 한다. 전생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한다.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전생이나 환생, 또는 퇴마록 같은 류의 어황되고 기이한 이야기들이 범람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근래에 말하여지는 윤회나 환생에 대한 신드롬은 상업주의에 결탁하여 원래의 그 사상보다도 너무 낭만적이고 감상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전생이나 환생의 논리는 인간이 짐승으로도 태어 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명백히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인 요소(부모와 자식이 전생에 연인이었다거나, 동물들이었다는 등)가 많으며, 또 역사와 현실에 대한 책임을 회피케 할 수 있는 요소가 많으므로, 이에 깊이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까지 하고 있다. 데이브 헌트는 그의 저서 <기독교 속의 미혹>에서 \\\\\\\"환생이론이야 말로 과학주의와 동방신비주의의 결합이 탄생시킨 마지막 때 최대의 종교적 미혹\\\\\\\"이라고 의미있는 지적을 우리에게 남긴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고 한 사탄의 거짓말이, 오늘날 <전생> 또는 <환생>으로 뉴에이지 운동과 깊은 관련하여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기독교가 전하는 영생의 진리를 사탄의 교묘한 속임수인 \\\\\\\'전생\\\\\\\'과 \\\\\\\'환생\\\\\\\'이 잠식해 가고 있는 것이다. 3.이기적인 자기만족으로 벗어나려 합니다. *청소년들에게 유행처럼 번지는 \\\\\\\'왕자병\\\\\\\' \\\\\\\'공주병\\\\\\\' *한 해의 유흥비가 수천억에 이르고 전체 여성 중 200만이 향락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통계, 세계 최대의 양주 소비국으로(작년에 50% 신장) 양주 생산국의 집중공략 대상이 되고 있는 나라. 과연 이것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지금 이러한 모습들은 바로 2500여년전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진리\\\\\\\'에 대한 기갈로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달려 왕래 하되 얻지 못하는 그러한 모습이라 할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참된 평안,진정한 쉼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그것을 구하여야 하는지요? 여기 그 길을 찾아 평안을 누리는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 아볼로씨의 삶 올해 45세인 오규근 씨, 경기도 평택군(현재 평택시) 포승면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3일 만에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였지만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병마가 찾아왔다.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를 달래려던 어머니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팔과 다리에서 우드득 소리가 나더니 아이가 자지러지듯 울음을 토해낸 것이다. 마땅히 달려가볼 만한 병원도 없는 촌이었지만 치료를 받는 다고 해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을 아이가 크면서 부모는 알게됐다. 아이는 작은 충격에도 몸 안의 모든 뼈들이 부러지는 병을 앓았다. 병명도 알 수 없었다. 아이는 방 밖 출입도 할 수 없었다. 늘 누워 있어야만 했다. 학교에도 다닐 수 없었고 시골 아이들이 갖는 흙내음 물씬한 추억거리도 가질 수 없었다. 부모들조차 자식이 놀림거리가 되는 게 싫어서 나들이를 말렸다. \\\\\\\"열여덟 살 때까지 뼈가 부러지는 증상은 계속됐습니다. 열 살을 넘기면서 1년에 서너 차례씩 부러지던 뼈가 한두 차례 정도로 줄었지만 봄, 가을이면 뼈가 부러져 꼼짝달싹도 못하는 일이 계속됐습니다. 당연히 발육은 멈췄죠. 그 때까지 방에서 창으로 내다본 세상이 내가 아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었던 부모들조차 손님이 오면 그를 골방에서 나오지 못하게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스물한 살이 되던 70년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어머니가 그에게 작은 종이쪽지를 건네 주며 혀를 찼다. 그것은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 통지서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사무착오로 발생한 것이었지만 그는 한편으로 기쁜 마음도 들었다. 나도 사람은 사람인가 보구나 하는. \\\\\\\"통지서를 받은 지 10여 일 후에 아버지가 빌려온 자전거 뒷좌석에 타서 평택경찰서로 가게 됐어요. 그것이 제가 처음 본 세상이었습니다. 그때 버스도 처음 타봤죠. 그런데 승객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장애인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했으니까요.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죠.\\\\\\\" 차라리 세상을 못 봤다면 마음의 상처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세상을 보게 되고 나선 실의에 빠졌다.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동안 마음에 생긴 상처 때문에 침울한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억울했다. 원하지도 않은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살아왔는데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죠. 성치 않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더 괴롭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글을 쓸 수는 있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는 그후 10년간 혼자 글을 썼다. 소설가가 될 생각이었다. 학교라곤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던 그이지만 동생이 학교를 다니면서 가져온 교과서 따위를 어깨 너머로 익혀 글은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 습관은 정상적인 아이들에 비해 더 악착같았다. 동생이 다니던 학교에 있는 문고판 서적들을 모두 다 읽을 정도였다. 그것이 소설가를 꿈꾸게 된 동기이기도 했다. 그는 스물아홉 살 되던 해까지 10년간 꼬박 각 신문의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뼈가 부러지는 증상이 멈추고 나선 집안 일도 도와가며 저녁시간을 이용해 소설 습작을 했다. \\\\\\\"서른 살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라면 차라리 농약을 먹고 죽어버리자고 생각했습니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필사적이었어요. 그러나 스물아홉 살이 되던해에 집어치우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힘든 일이었던 거죠.\\\\\\\" 소설을 포기할 때 그의 심경은 너무나 참담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때문에 몸져눕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다. 기독교적인 가정분위기가 그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고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그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이다. 절망 속에서 주님게 자신의 짐을 내려 놓은 그에게 주님은 그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여러가지 제약이 따랐습니다. 일단은 정보도 없었고 우표 값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독교 방송을 듣다가 편지를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가 기독교 방송에 보낸 편지는 전파를 타고 전국 곳곳에 퍼졌다. 그 후 그의 뜻에 감동한 사람들로부터 편지가 왔다. 어떤 사람들은 편지봉투와 편지지, 우표 등을 보내왔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으로 세상을 등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나 음지의 사람들을 돌보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게 마련이다. 그는 그들을 `우표회원\\\\\\\'이라고 부른다. 그의 아내 윤선자 씨(31)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던 윤씨는 그의 `우표회원\\\\\\\'이 되었다가 결혼에 이르렀다. 학창시절부터 용돈을 아껴 우표를 사서 보내주곤 하던 윤씨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를 도왔다. 그리고 그를 안 지 7년 만에 중대한 결심을 했다. 변함 없는 `큰 사랑\\\\\\\'을 실천하는 그의 팔과 다리가 돼주자는 생각이었다. 부모와 가족들에게 조차 알리지 않고 몰래 그의 단칸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때가 89년이었다. \\\\\\\"8년 만에 친정 식구들이 우리 집으로 왕래를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인 남동생이 가끔 와서 매형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볼 때면 눈물이 핑 돕니다.\\\\\\\" 윤씨의 사랑도 오아볼로 씨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혼자선 외출도 할 수 없는 그의 손발이 되어 8년동안을 한결같이 그를 돌봐주었다. 결혼생활은 꿈도 꾸지 않았던 오아볼로 씨에게 무엇보다 큰 힘이 된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아내의 도움을 받아가며 지금까지 띄운 편지는 30만 통이 넘는다. 그 중에서 단 한 통이라도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재활의 힘이 되었다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그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 중에 새로운 용기를 얻고 답장을 보내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컴퓨터 옆 작은 탁자 밑에는 수백 통의 답장이 쌓여 있다. 거기에는 재소자 번호가 적혀있는 편지가 있는가 하면 힘겹게 써내려가느라 글씨가 삐뚤빼뚤한 장애인의 편지도 있다. 집배원이 한 번에 가져오는 우편물이 보통 수십 통에 이른다. \\\\\\\"편지를 띄우는 일을 계속해오면서 `문서가정복음\\\\\\\'이라는 전도지도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장애인 등 이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나누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소식을 싣고 있습니다.\\\\\\\" 정상인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15년 동안이나 해오면서 그는 저절로 삶이 고마워졌다.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나 갈수록 사람들의 도움이 더 필요해진다. 편지를 보낼 곳이 늘어나고 전도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큰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용기를 잃은 사람들이 새 삶의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편지를 보낼 수 있게 우표 몇 장이라도 보내주십사 하는 겁니다. 그 후의 일은 그 사람들의 몫이지만 용기를 북돋워주고 차별 없이 대해주어야 하는 게 정상인들의 의무일 겁니다.\\\\\\\" 거듭나기 위해 본명 대신 신약성서의 고린도 전서 3장6절에 나오는 착한 일 하는 사람의 이름, 아볼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오늘도 서울 은평구 응암동 주택가의 한 작은 다세대 주택 2층 작은 방에서 자신의 험난하고 참담했던 삶의 체험을 적어 소외되고 좌절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는 또 어떤 체념한 자의 사위어가는 삶에 의욕의 불씨를 당기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여러분 길을 찻으셨습니까? 그의 장애가 다 나아서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까? 주변의 여건이 획기적으로 나아저서 그가 느끼는 불편함이 없어졌습니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무엇이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던 증오와 좌절과 실망과 눈물과 아픔을 사라지게 했습니까? 그것은 누군가 그의 어깨 위에 얹혀 있던 그 무거운 짐들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 나아와 그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 분의 뜻에 따랐더니 비로소 눈이 열려지고 길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이 지워주는 것을 지고 인도하시는 대로 따랐더니 전에는 남에게 짐만 되던 인생이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인생으로 바뀌어지게 되어졌고, 전에는 보는이들의 동정만 받고 주위의 사람들을 가슴아프게 하던 삶을 이제는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사람, 낙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 좌절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이 오 아볼로라는 분을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필로그: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장애인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의 삶은 온갖 세상 염려와 근심으로 부러지고 뽷A藪痴ø 장애인이 아닌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서 길을 찾고 있습니까? 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유일한 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오면 짐이 바뀌어 진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온갖 염려와 근심에 눌려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의 고통과 좌절과 아픔을 다 아노니 그 짐을 내게 맡기고 내가 이끄는대로 나의 말을 들어라. 그러면 너희는 참된 평안과 쉼을 얻게 될 것이다.\\\\\\\"(사역 마태 11:28-30) 짐이 바뀐다는 것은 삶의 개념, 아니 본질 자체가 바뀌어 짐을 말합니다. 내 짐을 지고 있을 때는 나만 보이고, 세상에서의 출세, 성공만 보이고, 물질만 보이고, 잠시 있다가 썩어질 6육체의 행복만이 보이기 때문에 다투고 시기하고 헐뜯고 경쟁하고 그러다가 그 속에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하게 되고 그래서 한 순간도 평안할 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 짐을 예수 앞에 내려 놓고 예수께서 지워주시는 멍에를 메게 되면 이 모든 것이 다 사라지게 되고 오직 예수 만이 우리 속에 가득차게 되어서 진정한 평안과 안식, 참된 감사만이 우리속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이 바로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의 길을 찾은 이 기쁨과 감격을 1900년대 초 일본 기독교의 전도자였던 우찌무라 간죠(內村監三)라는 분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찬미예수 326)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나의 가난함도 슬프지 않고 남의 부요함도 부럽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오직 감사한 마음이 넘칠 따름이라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몸의 환란도 괴롭지 않고 그 행복도 사모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오직 평강과 만족만 있을 따름이라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일의 실패에 실망치 않고 그 성공에 뒤며 기뻐하지 않나니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오직 영원한 승리자이기 때문이라\\\\\\\" 오늘 여기에 참석한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들의 불투명한 앞길이 여러분을 불안하게 합니까?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음에 한가득 삶에 대한 염려를 안고 계신 여러분! 그 무거운 짐에서 놓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참된 평안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소외당하고 무시당하여 분노와 좌절을 삭이고 계십니까? 평강과 감사만이 넘치게 되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달려가는 인생의 경주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길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창37:12-19/청소년헌신예배설교/2009-02-15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37:12-19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 애칭이 있고 별명이 있습니다. 좋은 말은 애칭이요 나쁜 말은 별명입니다. 누구든 다 이런 애칭들이 있을 줄 압니다. 특히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에 다닐 때 이런 애칭이 생기게 되는데 애칭은 그 사람의 신체적 특징이나 그 사람의 삶의 행태 또는 그의 잠재적인 능력에 의해 붙여진 칭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애칭 중에 마음에 많은 상처를 주는 애칭이 있는가 하면 또 그 사람에게 절대적 확신을 주게 하는 애칭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피부색이 하얀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선배는 얼굴에 백납 병이 있기 때문에 하얀데 이 선배를 보면 학교의 친구들이 모두 백사 라는 별명을 불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선배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도 학교에 왕따를 당하는 어린이들 중에는 이런 별명 때문에 왕따를 심하게 당하는 경우가 있을 줄 압니다. 또 저희 집안 조카 중에 오줌을 오래 가리지 못해 열 한 살 까지 가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줌장이로 별명이 붙었습니다. 나중에 채를 쓰고 이웃에 가서 소금을 얻으러 갔다가 된통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집안의 조카를 보면 그 때 별명을 부르며 놀려먹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좋은 애칭을 갖는다는 것은 참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애칭은 어떻게 불리고 있습니까? 좋은 애칭이 아니라면 이 그 이미지를 벗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애칭은 살아가는 전체 인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좋은 애칭을 가진 믿음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야곱이 낳은 11번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다른 형들보다 좀 특이한 것이 있었는데 어린 아이지만 자주 꿈을 꿨습니다. 그래서 그 꿈 꾼을 아버지에게 형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꿈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그 형들은 그를 싫어했습니다. 앞 절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5절 이하를 보면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 꾼을 형들에게 이야기 해 줬습니다. 그때 형들은 동생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마음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꿈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동생의 별명을 붙어 주었는데 꿈장이 라고 붙여 줬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 싫어한 이유 중에 하나는 형제들이 배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형들이 요셉을 보고 19절에 “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비꼬는 말로 말한다면 저기 꿈쟁이 요셉이 온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그 형들에게도 꿈쟁이로 불렸습니다. 그가 그렇게 불린 것은 요셉은 꿈을 늘 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꿈은 예사로운 꿈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꾼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 그리고 그의 생애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꿈은 비전의 꿈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아주 귀감이 될 만한 꿈이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청소년들이 요셉과 같은 꿈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의 별칭은 이처럼 꿈을 꾸는 자였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그리고 형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꿈쟁이란 별칭을 가졌습니다. 그를 싫어한 사람들에게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그의 장래를 내다보았던 그 아버지가 그를 보았을 때는 예사로운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청소년들이 요셉과 같은 청소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꿈꾸는 자들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요셉의 꿈은 건설적이요 진취적이요 긍정적이요 확신적인 꿈이었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요셉은 애급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청소년들도 바로 이런 꿈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앞으로 교회와 민족을 위해 큰 인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요셉이 꿈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꿈꾸는 아이었습니다. 야곱의 12명의 아들이 있는데 요셉은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꿈을 자주 꾸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예사로운 꿈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요셉의 꿈에 대한 깊이가 없는 형들은 엉뚱한 꿈 이야기를 말한다면 동생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의 꿈 이야기를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꿈이 하나님께서 꾸게 해 주신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형들은 동생이 꿈 이야기를 하면 그 꿈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꿈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생을 비아냥거렸고 그런 동생을 엉뚱한 동생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런 형들의 판단은 동생을 엉뚱한 놈이라 생각했고 아버지는 그런 자신들의 생각도 모르시고 무조건 동생 요셉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싫어서 그를 눈앞에서 없애 버리려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심부름을 온 요셉을 보고 저기 꿈쟁이 온다. 라며 그를 이런 기회에 없애려 했습니다. 20절 이하를 보면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고 했습니다. 이처럼 형들은 동생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장자 르우벤이 피 흘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구덩이에서 건져 내어 애급으로 장사 다니는 미디안 장사꾼들의 손에 넘겨주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동생이 짐승이 물려 죽었다고 속였습니다. 이처럼 꿈의 사람들은 때에 따라서 큰 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난에 꿈에 사람들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연구해 보면 어린 시절 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꿈을 성취하기 위해 그들은 매우 어렵고 험난한 길을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교육 자문을 맡았던 강 영우 박사가 있습니다. 그 분은 어린 시절 눈의 망막이 손상되는 부상을 입어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맹아 학교에 입학하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장래사에 대한 꿈을 꿨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그의 교육을 뒷받침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중에도 강 영우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맹아 인으로는 처음으로 연세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열악한 교육 환경을 이겨내고 미국에 유학을 가 공부했습니다. 그는 분명한 신앙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좋은 아내를 얻었습니다. 두 내외는 늘 기도했습니다. 강 박사는 교육학 공부해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회 여려 분야에서 그의 실력을 들어냈습니다. 결국 그는 미국 부시 대통령의 교육 자문 위원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 들을까요? 그것은 그의 꿈이 그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은 그의 아들들에게 이어졌는데 지금 그의 첫째 아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근접한 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자문 위원은 우리나라로 친다면 교육부 장관과 같은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는 꿈을 꾼대로 애급에 종으로 팔려가 갖은 수난과 역경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애급의 바로 왕이 통치할 때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꾼 꿈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가 어린 시절 꿈을 꿀 때 열 한 별들이 절을 했다고 했는데 그의 형들이 애급에 양식을 사러 갔을 때는 요셉은 국무 총리였습니다. 형들은 그 사실도 모르고 총리인 요셉에게 절했습니다. 창42:6-7절에 보면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어린 시절 꾼 꿈이 현실에 나타난 것입니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요셉이 꾼 꾼은 일반 사람들이 꾼 꿈과는 다른 꿈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입니다. 이런 꿈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꿈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요셉과 같은 꿈은 아무나 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이 우선되어야 하고 둘째는 늘 생활에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야곱이 요셉을 좋아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들들보다 하나님을 잘 믿는 요셉을 볼 때 정말 기특했습니다. 또 요셉은 늘 아비지처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요셉에게 꿈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꿈으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여정에 반드시 이루게 해 주십니다. 요셉은 꿈으로 사람으로 그 꿈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아멘.
너희 자녀인 청소년을 위해 울라!/ 눅23:28/ 청소년주일설교/ 2008-05-18
너희 자녀인 청소년을 위해 울라! 눅23:28 가슴 아픈 시를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들어 보세요. / 하늘나라가 얼마나 멀리 있나요? / 그곳엔 강도가 없겠지요? / 고 3 시험 때 점수 뺏으려 달려든 칼든 강도는요? / 하나님 들어보세요. / 여기는 너무 답답해요. / 문학도 음악도 즐길 수 없는 고3 교실이거든요. / 서로의 자존심을 마구 짓밟는 세상 / 친구도 없고 스승도 없는 세상이 싫어요. / 오직 공부, 공부, 공부만 강요당하는 / 고3의 고통을 하나님 좀 들어보세요. / 언제쯤이면 고통 없는 세상이 될 수 있나요? / 하나님 그날을 기다리기엔 너무 힘이 들어요. 제발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 시는 20여 년 전, 전주 모악산에서 극약을 복용한 후 자살한 한 고3생의 유고집 <꿈꿀 수 없는 세상이 싫어요>(도서출판 窓, 1991년)에 수록된 시입니다. 이 아이의 자살은 정신질환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의 가정은 아주 정상적이고 화목했습니다. 부친은 초등학교 교사이고, 아버지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이 아이는 기독교인이였고, 그것도 중고등부 회장을 지낸 신앙심이 깊은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자살한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아이가 어떻게 자살이라는 것을 결심하게 되었을까요?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아이는 고3 생활이 주는 긴장, 경쟁 속에서 잃어져 가는 인간미, 고독과 외로움으로 처절하게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그의 의지박약에 책임을 돌릴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살인적 교육풍토 속에서 기쁨도, 희망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은 자살한 그 학생만의 경험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겪는 일일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교회 청소년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보시면서 권면하셨던 말씀이, 생생하게 가슴을 칩니다. “예수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주님은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내일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위하여 울라!” “가치관이 무너진 시대, 꿈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지옥과 같은 교육풍토 속에 살고 있는 자녀를 위해 울라!” 예수님이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단지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울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른들은 고민하는 아이들, 즉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인생을 고민하는 아이들, 실의에 빠져서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아이들에게 바른 대답을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척박함으로 인해 죽어가는 어린 영혼들에게 교회의 답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1. 무엇보다도 교회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쉼터와 방향전환처가 되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오랜 경쟁으로 인해서 상처받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시달린 마음들이 와서 위로 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야망을 가지고 공부하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게 하고, 그 인생의 방향을 바르게 돌려 새로운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힘있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우리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더 이상 학교에만 의존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학교는 아이들의 인격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능을 거의 상실했습니다. 교사들의 의식, 심지어 그리스도인 교사들의 의식 속에서도 알게 모르게 출세주의, 성적지상주의의 사고가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현직 교사들의 말에 따르면, 성적상담을 제외한 심리상담은 일 년 가야 한 두 번 하면 고작이랍니다. 인격과 정서 지도가 불모지인 이런 학교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자살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내면의 상처와 비뚤어진 정서를 갖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교육제도를 바꾸어가는 것은 교회의 몫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어느 정권, 어느 시민단체에서도 할 수 없는 정신의 변화를 오직 기독교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교육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 먼저 교회가 깨어나야 합니다. 교회 속에서 이제 새로이 이 나라의 잘못된 교육과 그 곳에서 신음하는 우리 아이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드리는 새로운 기도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잘못된 교육으로 신음하며 절망한 아이들이, 교회 속에서 새 생명의 말씀을 듣고, 새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교회들이 영적으로 능력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2. 청소년에 대한 기본이해를 가지고 신앙지도를 해야 합니다. 어른의 기준에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듯이, 어른과 아이들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① 청소년은 과도기에 있고, ② 그들은 생의 규모가 구체화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③ 청소년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④ 그들은 이상주의자들이고, ⑤ 능력은 있으나 경험이 부족합니다. 더욱이 ⑥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급진적 성숙기에 있기에, ⑦ 도전적인 것에 쉽게 감흥 되며, ⑧ 알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⑨ 자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십대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불완전하고, 미성숙해서 불안한 십대이기에 어느 세대보다도 주님이 절실히 필요한 세대입니다. 바로 지금 주님이 필요한 세대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는 세대입니다. 막연히,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는 안 되는 세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만나는 경험을 어른들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십대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야 하지만 이 경험을 어른들이 도와주어야 바른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정신 차려야 합니다. 십대의 문제는 어른들이 모판인 것을 안다면, 십대의 하나님 경험은 어른들이 모판이 되어야 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바짝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십대들에게 건강한 신앙의 어른으로 인정받아야겠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무력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 문제 많은 교육제도와 풍토를 바꿀 수 있는 힘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속에 우리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 땅을 고치시는 하나님이 아직 교회를 버리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우리의 자녀를 위한 울음이 시작될 때입니다.
반항하는 청소년/ 눅15:11-24
반항하는 청소년 눅15:11-24 하나님의 말씀 한 곳을 더 보겠읍니다. 신명기 21:18 21절 말씀 을 제가 봉독해 드리겠읍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 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 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 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 라.\" 즉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반항아가 있으면 그 가족들은 그를 그 마을 사람들에게 내어주어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법이 있읍니다. 실제로 자기 자식을 내어주어 죽게 한 부모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 읍니다. 그러나 적어도 복종하지 않는 반항아를 죽일 수 있다는 법 은 실제로 젊은이들의 범죄를 어느 정도 억제시킬 수 있었을 것입 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옛날 출애굽 시대와 가나안 정복 시대에도 반항하는 청소년이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입 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가정, 가족의 화목과 즐거움에 대한 말씀 도 많지만 또한 가정의 어두운 면에 대해 하신 말씀도 많이 있읍니 다. 그런 말씀들은 지금 우리에게 우리의 가정 상태를 돌아보고 가 정의 화목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기도 합니다. 잠언 17:25절에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령저  의 고통이 되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미련한 아들이란 어떤 자식 을 뜻하겠읍니까 ? 신체부자유아나 정신박약아를 뜻하는 말씀인가 요 ? --- 아버지의 근심이 되고 어머니의 고통이 되는 미련한 아들 이란 ? - 세상적으로는 똑똑해 보여도 가족 전체와 믿음이나 생각 면에서 전혀 다른 자녀가 있다면 - 문제가 됩니다. 가족 전체가 일 정한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함께 노력해 가고 있는데 자녀 중 하나 가 이에 반대하고 엉뚱하게 행동해 나간다면 다른 가족들의 마음은 어떻겠읍니까 ? 그 가정 전체가 화목하게 평안 막X 쟁 생활해 나 갈 수 있겠읍니까 ? 아주 어린 자녀들의 반항은 그리 심각하지 않고, 아버지의 위협 만으로도 잘못된 버릇이 고쳐질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 청소년들의 반항은 가정 안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 되게 됩니다. 어릴 때는 때려서라도 버릇을 고칠 수 있지만, 이젠 때리기에는 너무 컸거나, 또는 너무나 변덕스러워서 위협해도 소용이 없거나, 경고를 해도 너무 완강하게 버티는 청소년들의 반항은 부모님들의 근심과 고통이 될 수 있읍니다. 나이든 자녀의 반항이 거칠어짐에 따라온 가족들은 상처를 받게 되고 가정의 조화를 깨뜨리면서 괴 로움과 두려움과 좌절감들이 건전한 가정 생활을 위협합니다. 청소년들은 왜 반항하는가 ? 때로 그것을 {이유없는 반항}이라 고 하지만 실제로 청소년 당사자에게는 어른들이 알 수 없는, 또는 옳든 그르든 이유가 있읍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다윗을 미워할 동안 사울의 아글 요나 단은 다윗의 친구로 아버지 사울 왕 앞에서 다윗을 변호해 줍니다. 아버지인 사울 왕의 입장에서 볼 때 아들 요나단은 어리석고 불효 한 자식이라 생각되어질 것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들 요나단은 오히려 왕위를 넘 보고 있는 다윗을 좋아하다니, 만일 다윗이 왕이 되면 우리 집안을 몰살할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미련하게 아버지인 내 말은 안듣고 다윗을 돕다니 사울의 입장에서 볼 때 아들 요나단은 아버지 생각은 조금도 해줄 줄 모르는 반항아이며, 불효자이며, 아버지의 적을 이롭게 하는 배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떻습니까 ? 아무리 아버지이시지만 아버지께서 하나님 앞에서 명백하게 잘못을 저지르는데 아무리 아버지일지라도 잘못 을 따를 수 없다고 판단했겠지요 ?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에게 수 차례에 걸쳐 설득시키려 애썼고 다윗을 변호해 주었읍니다. 아 버지 사울 왕은 아들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단창을 던지기까지 했 읍니다. 결국 요나단은 아버지를 더이상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해 서 친구 다윗을 멀리 피하도록 도와줍니다. 청소년의 반항은 때로는 어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생각 하고 어른들을 무시하면서 격한 행동으로 나타나질 때가 있읍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순종치 않는 것을 좋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 다. 이치에도 맞지 않는 편협한 생각으로 어른들의 기존 질서를 따 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려는 청소년들의 행동은 때로 커다 란 사회문제로까지 번져 갈 수 있읍니다. 이러한 불행을 막기 위해 서는 가정교육이 그만큼 중요해 집니다. 어릴 때부터 자녀를 어떻 게 키웠는가가 그 자녀가 컸을 때 그의 삶의 모습이 어떨지 결정지 워 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 누가복음 15:11 32절 말씀은 주로 인간의 타락 과 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예수님의 말 씀이지만, 오늘은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가정의 문제를 중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다는 것 입니다. 좋게 말하면 분가이고, 부정적인 용어로는 가출이라고 생 각해 봅시다. 왜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가기로 결심을 했을까 ?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반항입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불현듯 싫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형님의 우월성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읍니다. 무슨 일을 하든 형님이 우선이라는 가정풍 토가 싫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이 둘 째 아들은 열등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일을 하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들 행동 하나 하나에 아버지와 형님으로부터 간섭을 받아야 한다면 ? 뭔가 견딜 수 없 는 상황들이 \"집을 나가자\"고 결심하게 했을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보통 18세 전후로 집을 나가 독립적으로 생활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혼자 집을 나가 옳바른 방법으로, 해야 할 공부 다해가며 살 수 없는 사회인 데, 이것이 서양과 우리의 다른 점을 만들어 놓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머리는 좋을런지 몰라도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는 자립 심이나 판단력에서 서양 사람들에 비해 꽤 처지게 됩니다. 누가복음의 둘째 아들은 그러나 그의 나중 생활을 보면, 뚜렷하 게 어떤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분가해 나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 읍니다. 왜 아버지는 이러한 둘째 아들의 분가를 허락했을까요 ? 둘째 아들이 분가해 나가서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서 인가요 ? 아니면 둘째 아들의 요구가 너무나 완강하고 계탔휘  수 없는 뭔가가 있었을까요 ? 두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이러한 아버지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순수하게 한 집안의 아버지라고 볼 때 혹시 이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어쩔 수 없는 약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 만일 자녀가 부모의 약점을 알고 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지 생각해 보셨읍니까 ? 우리 아버지는 회사 사장인데 기회만 나면 사기치고, 탈세하고, 회사 직원 봉급도 제 때에 안주고, 그러면서도 회사 돈으로 외국여 행이나 다니고, 그런 사실을 자녀가 알고 있을 때 아무리 아버지꿸  서 위엄을 세우려 한들 통하겠읍니까 ? 우리 아버지는 공무원인데 아무든 가서 뇌물만 주면 쓱싹 옳지 않은 일도 슬쩍 잘 해주는 공 무원이라고, 자녀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이처럼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면 그들이 아버지를 집에서 어떻게 대하겠읍니까 ? 또 그 자 녀의 앞으로의 생활태도가 어떻게 바뀌어질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지만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약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둘째 아들이 너무 나도 막무가내로 졸라대니까 어쩔 수 없이 내 보내지만 결국은顔 다 시 돌아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세상에 나가서 고생 좀 하다가 돌아오면 나아지겠지, 인간이 되어서 돌아오겠지, 하는 기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둘째 아들을 내보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세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둘째 아들의 외지 생활과 회 개입니다. 먼 나라로 떠났읍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고 작정을 하고 떠났을 지도 모릅니다. 맨날 아버지와 형님의 간섭 에 기도 못펴고 눌려 지냈지만 이젠 아무도 나의 행동에 간섭하는 사람없이 내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어 처한 대로 잘 해 나갈 수 있었읍니다. 돈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어떻게 되었읍니까 ? 유대인으로서는 할 짓이 못되는 천하 고도 천한 돼지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읍니다. 인간은 정말 묘합니다. 어느 정도 일이 벌어져 가는 것 을 보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지 하는데도 혹시나 혹시나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일이 흔히 있읍니다. 좀더 일찍 깨달을 수도 있는데 마지막까지 가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인지도 모릅니다. 그 극한 상황에서 돌아설 때,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엄청나게 큰 것이고, 죄인 인 나로서는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거저 무릎 꿇고 완전히 항복해 버리고야 마는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종종 일어나 고 있읍니다. 네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 버지의 태도입니다. 아들의 심경변화를 다시 한 번 살펴 봅시다. ---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가서 종으로 라도 써 달라고 말씀드리자, 여기서 굶어 죽는 것 보다는 낫다하 는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 해야 할 것은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아버지 께서 나를 다시 내어 쫓으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요즘은 신문에 그런 광고가 잘 나지 않지만 10년 전, 20년 전에 는 집나간 자녀를 찾는 광고를 보면 \"아무개야 우리가 잘못했다. 무조건 돌아와라. 다 용서해 주마.\"하는 내용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광고 를 보고도 거짓말이라고, 끝까지 부모님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청소년들이 많았읍니다. 또한 자기 잘못을 알고도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께서 난리치시고, 어쩌면 정말 아버지께서 내 다리를 부러뜨 리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주저하는 청소년들 도 있었읍니다. {십대들의 쪽지}라는 것이 있는데 집나온 청소년들이 맞는 것이 무서 워서 이젠 집으로 갈 수도 없다고 체념한 고백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버지께서 거절하실 것이라는 염려를 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를 볼 때 평소 아버지의 생활 태도가 어떠했을 것인지를 알 수 있읍니다. 위엄있으시면서도 온화하신 아버지의 모 습, 거절은 않으시지만 그래도 감히 아들이 돌아왔다고는 할 수 없 고, 종으로 써 달라고 말씀드리면 들어주시는 분으로 아마 그 아버 지는 평소에도 어려워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품군으로 일을 시키곤 했을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이처럼 반항하는 것입니다. 크게 두 가지의 원칙으로 생각해 봅시다. 우선 첫째로, 잘못을 저지르는, 불순종하는 자식은 꾸짖어서라 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꾸짖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과 3장을 통해서 보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에 대 한 사실이 말씀되어져 있는데 여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 스는 이유있는 반항이 아니라 불경하고 고집스러운 반항으로 결국 엘리 집안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는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입니 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제물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회막 문에서 일하는 여인을 범하는 죄악을 저지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청소년/행17:1-9
세상을 변화시키는 청소년/행17:1-9 2004-04-06 17:23:17 read : 246 서양 속담에 \'재앙은 무리를 지어 온다\'는 말이 있다. 위가 탈이 나면 설사가 나고, 설사가 나면 기운이 없어지고, 기운이 없기 때문에 운동을 못하고, 그러니 몸이 약해져서 감기가 걸리고, 그 부작용으로 폐렴이 걸리고, 병이 나니 일을 할 수 없고, 병을 고치자니 돈이 들고 등등. 이런 것은 모든 유기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도 유기체다. 한 부분이 고장 나면 다른 부분에 탈이 나고, 사회 전체가 약해진다. 그래서 한 사람의 잘못은 다만 몇몇 사람에게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아프게 하고, 결국 그 잘못은 다른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도 손해를 보게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잘못을 몰고 온 것이 사회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바울 일행은 선교지에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6절). 엄청난 영향력. 우리에게도 이런 영향력이 있어야 함. 지금 우리 나라 사람의 25%가 믿는 사람. 4명 중의 한 사람이 믿는 사람이라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엄청난 힘이 나와야 함. 그러나 믿는 사람이 환경을 변화시키기는 커녕 환경에 동화된다는 안타까운 얘기가 들려오고 있다. 우리는 좋은 의미에서 천하를 어지럽게 할 수 있어야 함. 특히 젊음과 배움이 있는 청소년들은 더욱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함. 우리가 천하를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원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집중력과 좋은 규례를 가진 삶(1-2) 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이 구절에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라는 말은 원어의 의미로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쳐서\'라는 말. 본문 바로 앞 16장에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는 장면이 나옴. 그들이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들리지 않고 바로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말. 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그냥 지나칩니까? 그곳에도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데살로니가를 그들의 타깃으로 삼고 그곳으로 직행했다. 이곳 저곳을 다 들려 혼자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기 때문. 진정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집중력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함. 이것저것 다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함.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나태함도 문제이지만, 모든 것을 다 하려고 나서는 방만함도 문제.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집중하지 못하고 여기 저기 눈을 돌리면 원망과 불평이 많아지고, 하는 일에 금방 싫증을 내게 됨.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약점투성이었다. 그는 달걀을 삶는다면서 끓는 물에 시계를 집어넣은 적도 있었다. 한번은 난롯불에 화상을 입은 줄도 모르고 연구에 몰입했다. 뉴턴은 불에 데인 곳을 어루만지며 하인에게 당부했다.“제발 저 난로를 좀 옮겨주게” 하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주인님,난로를 옮기는 것보다 주인님이 난로에서 조금 떨어져 앉으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뉴턴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음,그렇군” 뉴턴의 결혼식 날에도 결혼 사실을 깜빡 잊어버린 채 연구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또 20년 동안 준비해온 자료를 개가 물어가는 것도 모른 채 연구에 몰입했다. 약점 투성이인 뉴턴이 대학자가 된 것은 두 가지 장점 때문이었다. 그것은 ‘집중력’과 ‘낙천적 인생관’이었다. 이 장점이 많은 약점들을 상쇄시켰다. 성공한 사람들은 보통 무서운 집중력과 낙천적 인생관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의 일에 집중력을 갖고 추진하는 사람을 돕는다.(IMR) 2)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칸트는 같은 시간에 같은 거리를 같은 속도로 산책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양의 음료수를 마시는 것까지 하나의 규칙으로 삼고 지켜왔다. 이러한 칸트는 만년에 몸이 몹시 아파서 병상에 눕게 되었다. 간호원은 머지 않아 세상을 뜰 칸트를 위해서 정성을 다 쏟았다. \"간호원, 나 좀 봐요.\" 칸트는 힘없는 소리로 간호원을 불렀다. 간호원은 재 빨리 칸트의 곁으로 달려와서는 칸트의 입 가까이에 귀를 갖다 댔다. \"간호원, 나 물 눈꼽만큼 좀 줘요.\" \"예.\" 간호원은 칸트에게 컵에다 요청한 눈꼽만큼 물을 따라 주었다. \"선생님, 드셔요.\" \"응, 고마워요.\" 칸트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받아 쥐고는 천천히 마셨다. 시원해 하는 칸트를 본 간호원은 물을 더 줄려고 하니 칸트는 싫다는 것. 간호원은 얼마 남지않은 삶이라도 규칙대로 습관화된 생활을 철저히 하는 칸트의 생활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2절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자마자 3주간 계속해서 말씀 사역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규례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가 해야 할 일만은 지켰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복음 전파하는 삶을 규례로 삼아 반듯하게 살았다. 이처럼 \"한다!\"고 하면 꾸준히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적은 숫자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민족이 된 제일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안식일을 지키는 삶\' 때문이라고 함. 그래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주었다!\" 는 말까지 생겼다.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서 많은 교훈을 얻지만 안식일을 힘써 지키는 반듯한 삶 자체가 좋은 습관 형성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좋은 규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그 사람의 삶을 살찌우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일 지키는 것을 규례로 삼고 최선을 다해 지키라. \"나는 주일은 꼭 지킨다!\"고 하고 흔들리지 않고 지키면 지킬 수 있는 믿음과 여건도 주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소중히 여겨주실 것. 진정 복된 삶을 원하면 이 주일 지키는 삶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성도의 신앙의 가장 기초적인 삶은 주일을 지키는 삶. 주일 예배는 성도가 축복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간. 그래서 부족한 점이 많아도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잘될 것. 2.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2-3) 2000년을 맞이하면서 미국의 라이프 잡지는 전 국민에게 이런 앙케이트를 냈다. ‘과거 1000년 간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과거 1000년간 대략 500억여명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사라졌다. 그 중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끼친 사람이라면 도대체 누구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에디슨. 에디슨은 어떤 사람인데 500억명 중 최고로 뽑힌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공부를 못한 사람. 초등학교 3년 다니다가 그만뒀다. 2. 가장 많은 발명품을 냈다. 그는 1093가지 발명품을 만들었다. 필요한 물건들을 그가 발명했다. 3. 노력하는 사람. 그가 한 유명한 말 한마디는 ‘천재란 99%가 땀이요 1%가 영감이다’라는 말. 이 한마디는 에디슨이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바울이 시대에 영향력을 끼친 것은 복음을 전하는 노력때문이었다. 2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가는 곳마다 말씀 강론을 했다. 그런데 바울은 말씀을 강론하면서 어떤 말씀을 합니까? 본문 3절 말씀을 보라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은 성경 강론을 하면서 예수님을 전파했다. 그처럼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예수님을 높이면, 예수님도 우리를 높여주실 것. 그런데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려면 먼저 내가 예수님 때문에 이렇게 변했다는 간증거리가 있어야 함. 바울이 예수님의 증거자가 된 것은 그 간증이 있었기 때문. 구원받기 전에 바울은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다. 그러나 변화된 후 그는 예수님만 자랑하고, 자신은 만물의 찌꺼기같이 여겼다. 그래서 항상 예수님만 더 높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러므로 중요한 문제는 \"예수님을 만났느냐 못 만났느냐\"하는 문제. 예수님을 만나면 운명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고 삶이 달라졌습니까? 하나님 말씀이 꿀맛처럼 들리고, 말씀 듣는 것이 기다려지고, 예배가 기다려집니까? 취미가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었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변화된 얘기들이 많아야 함. 이제 우리의 자랑거리가 바뀌어야 함. 지식이나 돈이나 재능이나 학력이나 도덕성을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과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함. 사람들은 왜 고양이보다 개를 더 좋아합니까? 고양이는 열 번 잘해 주다가 한 번 서운하게 하면 그것만 기억하고 주인의 눈치를 본다고 함. 그러나 개는 열 번 서운하게 해도 한번 잘해주면 그것을 기억하고 주인을 최고로 여기고 따른다고 함.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는 개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함.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주님의 증거자의 비전을 변함없이 가져야 함.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반드시 높이 들어 사용하실 것. 여러분! 증거자의 비전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절대적인 신앙으로 살아가라. 내가 증거자의 삶을 산다면 주님은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손길을 한번도 철회한 적이 없다.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우리 뒤에 주님은 계심. 그러므로 이제는 뒤돌아볼 필요도 없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비전을 가지고 중단 없이 달려가야 함. 그런 사람이 이 땅에서 천하는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죽은 후에는 천국에서 주님을 기쁘게 만나 뵙게 될 것. 3. 선을 위해 자기의 안락함을 희생하는 삶(4-5) 바울의 강론을 통해 데살로니가에도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기하게 되었고, 바울 일행을 잡겠다고 성 전체를 돌아다니며 난리를 쳤다(4-5절). 그런 상황이 우리들에게도 닥쳐올 것. 그때 의연함을 잃지 말고, 흔들리지 말아야 함.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잠잠하게 될 것. 특별히 바울 일행을 살펴주었던 야손 가족에게 어려움이 닥쳐왔다. 그러나 야손은 기쁘게 그 어려움을 감당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을 위해, 그리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나의 안락함을 희생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는 싫은 일. 그러나 그 일은 얼마나 우리의 영혼에 기쁨과 보람을 주는지 모름. 그 기쁨과 보람의 크기는 우리가 희생한 안락함보다 훨씬 큰 것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돈타령 노인’으로 불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그는 재산을 물려줄 자녀도 없었으나 밤낮으로 돈을 모았다.동네 사람들은 그를 ‘돈만 아는 수전노’라고 놀려댔다.그의 재산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그는 자신의 방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그의 장례식을 치러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시청 직원들이 대신 장례를 치러주었다.그런데 그의 유언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마르세이유 시민들이 깨끗하지 못한 식수 때문에 질병에 걸려 일찍 죽는 것을 수없이 목도했다.내 삶을 희생해서라도 시민들에게 맑은 물을 공급하기로 결심했다.내가 주위의 욕을 먹어가며 돈을 모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나의 모든 재산은 시청에 기부한다.이 기부금으로 시민들에게 맑은 물을 공급하기를 바란다” 사랑은 ‘나’를 희생해 ‘너’를 돕는 것이다. 돈 버는 것은 좋다. 그러나 잘 쓸 줄 알아야 함. 잘 쓰는 사람이 돈을 벌려고 애쓰는 모습은 소중한 삶의 자세. 선교에도 잘 쓰고, 구제에도 잘 쓰는 분이 돈을 추구하는 것은 아름답기까지 함. 그러나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 돈을 벌려고 애쓰는 모습은 비극적인 모습. 그 삶의 결말도 꼭 비극이 됩니다. 톨스토이는 돈을 잘못 쓰면 그 돈이 교수대가 된다고 했다. 청소년과 성도여러분! 선을 위해 편안함을 희생하는 용기를 갖자. 그래서 세상과 가정, 교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자가 되라. 청소년과 성도여러분! 영향력이 있는 분들이 되라. 천하를 호령하는 분들이 되라. 그래서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증거자로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분들이 되라. 그런 꿈을 가지고 매일 승리하기를 기원함.
승리하는 청소년/ 단1:3-17/ 학생회헌신예배설교
승리하는 청소년 단1:3-17 할렐루야!! 오늘 저녁에는 학생회 헌신예배입니다. 학생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서 금년 마지막 주일 저녁예배를 헌신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이 저녁에 헌신예배를 드리는 학생들이나 모든 성도들이 함께 은혜 충만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다같이 한 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청소년들이여! 신앙의 절개를 지켜라! / 의지와 믿음을 가져라! / 꿈을 가져라! 뜻을 세워라! /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하라! 오늘 저녁에는 본문 말씀에 있는 다니엘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에 얼마나 힘쓰고 노력하였는가를 살펴보고 또 그와 같이 하였을 때 하나님은 다니엘을 어떻게 축복하셨는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받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요즘의 청소년들에게서는 꿈을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강인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좌절하고 쉽게 포기해 버린다고 합니다. 청소년 자살의 심각성이 오늘날 대두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보다는 현실에 즐기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모든 청소년들의 꿈은 연예인, 스포츠인등 스타병에 걸려있습니다. 군대에 간 청년들도 예전과 같이 강인함은 찾아볼 수가 없고 나약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와 같은 군인들을 데리고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세상의 청소년들은 이렇다할지라도 우리 기독 청소년들은 세상의 청소년들과 달라야 합니다. 어떻한 역경과 난관이 닥쳐도 능히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의지와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신앙과 믿음의 절개를 지켜 승리한 말씀을 통하여 함께 은혜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바벨론 제국이 하나님의 백성 유다 왕국을 3차에 걸쳐 침략함으로 유다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유다 나라는 바벨론 제국에게 끌려가서 포로생활을 하여야 하는 중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유다 나라는 3차에 걸쳐서 바벨론 나라의 침략을 당하였습니다. 첫 번째로는 B.C. 605년(여호야김왕 재위 3년경)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 이끄는 군대에 의하여 함락이 되었는데 이때 유다왕 여호야김은 비참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고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 성전의 각종 기명을 모두 약탈하여갔으며 다니엘을 비롯하여 그의 세친구와 왕족들과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두 번째로는 여호야긴왕이 바벨론을 반역하였다는 이유로 바벨론의 원정군이 또 한차례 예루살렘을 함락하게 됩니다.(B.C. 597년) 이 때에는 여호야긴 왕과 젊은 선지자 에스겔을 포함하여 약 1만명이 포로로 끌려갑니다.(겔1:1-3, 왕하24:8-20) 세 번째로는 B.C. 586년에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오랜 세월동안 포위를 한 끝에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파괴하여 유다 왕국은 완전히 멸망을 당하였습니다(왕하25:1, 렘34:1-7) 이와 같은 와중에서 오늘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제1차 바벨론의 침략 당시 되어진 일로서 이때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에 관한 내용입니다. 1.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습니다. 뜻을 정하였다는 것은 신앙의 의지를 굳게 세웠다는 말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유다에서 잡혀온 포로 중에서 잘 생기고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뽑아서 3년동안 교육을 시켜서 그 후에 왕을 받드는 시종으로 세우게 하였는데 이 때에 다니엘과 그의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환관장은 그들에게 바벨론식의 이름을 주었는데 다니엘에게는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을 주고 하나냐에게는 사드락, 미사엘에게는 메삭, 아사랴에게는 아벳느고라 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특별 대우를 하여서 왕이 먹는 고급 음식과 포도주를 먹게하였습니다. 이들은 포로들인데 이와 같은 대우를 받았으니 얼마나 복된 자리입니까? 대 제국 바벨론의 귀족과 왕족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으니 참으로 영광된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편에서 볼 때는 참으로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앙의 사람 믿음의 사람 다니엘에게는 이 자리가 영광의 자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니엘에게는 올가미와 같은 시험으로 느껴진 것입니다. 그것은 여기에 뽑혀진 사람들은 당시 바벨론 제국이 섬기는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저버리고 우상의 제물이라도 먹으면서 육신의 출세를 하느냐? 아니면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모든 부귀 영화를 버려야 하느냐? 영은 죽고 육이 살아야 하느냐? 아니면 영이 살고 육은 고역과 곤욕을 당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시험중에 가장 큰 시험이 닥쳤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이와 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다니엘은 육신의 영화보다는 영적인 신앙과 믿음을 선택하였습니다. 물질보다는 내세의 영광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모험중에서도 대 모험입니다. 본문 8절 말씀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함께 발탁된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좋아 하였는지 모릅니다.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비록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와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여전히 죄악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중에서도 다니엘은 뜻을 굳게하여 조금도 신앙생활에 게을리 하거나 멀리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1) 하나님의 계명을 멀리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왕궁에서 하사하는 특별한 음식을 거절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명철과 지혜를 주시고 이상과 몽조를 깨닫는 은혜도 주셨습니다. (단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2) 그리고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새로운 법이 공포가 되었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자굴 속에 던진다는 사실을 알고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하였습니다.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3) 또 다니엘은 말씀을 멀리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서 9:2절에 보면 다니엘은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던 예언의 말씀을 깊이 상고 하는중에 그 예언에 기록된 년수를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예루살렘이 황무하여 70년만에 마치리라는 것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말씀까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학생회원들은 바로 이 다니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극도의 이기적이면서도 위기나 긴박한 상황을 당하였을 때에는 적절한 대처도 못하고 형편없이 나약해 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 기독 청소년들은 이 다니엘과 같은 굳은 의지와 믿음으로 뜻을 정하여 모든 난관을 승리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말씀에 뜻을 세우고 승리하는 학생부. 기도에 뜻을 세우고 축복받는 학생부 목표에 뜻을 세우고 쓰임받는 학생부 2. 그러면 다니엘이 이와 같이 왕이 주는 기름진 음식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 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모세의 규례 즉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왕의 진미 가운데는 부정한 식물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레11:, 신14:1) (2)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왕의 식물중에는 저들이 섬기는 신(말둑신)에게 제물로 드렸던 식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3) 패전국민으로서 다른 동족들은 수난을 생각해서 거절을 하였습니다. 본국에 남아 있는 동족들이나 포로로 끌려온 동족들은 바벨론 사람들의 온갖 학대와 조롱을 당하면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시137:) 자신들만 궁중에서 잘 먹고 살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4) 바벨론 왕의 회유 정책을 거절한 것입니다. 만일 바벨론왕이 요구하는대로 그대로 응한다면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그들의 요구대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주는 진미를 거절하기로 뜻을 정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스러운 신앙과 믿음이며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지조를 지킨 것입니다. 다니엘은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면 어떻게 생각할 까?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하나님의 계명은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의 다니엘과 같은 시험이 있습니다. 때로는 취업 때문에 -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만 먼저 생각합니다. 때로는 진로 때문에 - 미래에 전망이 좋은 것만 생각합니다. 때로는 물질 때문에 - 당장 벌리는 돈만 생각합니다. 때로는 사랑 때문에 -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는 이유를 대며 신앙적으로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말씀속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학생부가 되시기 바랍니다. 3. 다니엘의 결심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는 반드시 시험이 옵니다. 신앙생활도 적당히 하고 믿음도 없이 사는 사람은 시험이 없습니다. 또 시험이 온다고 하여도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시험이 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을 이기고 나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축복이며,그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실 때에 얻게 될 칭찬과 영광과 존귀입니다.(벧전1:7) (2)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도와 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수고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하나님은 믿음 있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축복해 주십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이 주는 진미를 거절하였지만 열흘 후에 진미를 먹은 사람들 보다 오히려 더욱 아름다운 소년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뜻을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자굴속에 던져졌지만 다니엘은 머리터럭 하나 상치 않고 무사히 살아나왔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사자까지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다니엘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자의 성품을 바꿔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으로부터 2천6백여년전에 다니엘에게만 역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나님의 종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하여 그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주곡교회 성도 여러분과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학생회원들은 하나님께 발견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발견만 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이 다니엘과 같이 크게 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줄로 믿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이야 말로 무한한 힘이요 능력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에는 다이나마이트(dynamite)와 같은 큰 폭팔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신앙으로 홍해를 갈랐습니다(출14:21) 여호수아는 신앙의 힘으로 태양을 중천에 머물게 하였습니다.(수10:12-13) 소년 다윗은 물맷돌로 8척거구인 골리앗을 무찔렀습니다(삼상17:45-51)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서 15년의 수를 연장받았습니다(왕하20:1-11) 다니엘의 세친구는 풀무불속에 던지움을 당하였으나 머리터럭 하나 상하지 않고 기적으로 살아나왔습니다(단3:19-27) 성도 여러분들이여 !! 오늘 우리 주곡교회 학생들과 성도들은 이와 같은 신앙의 능력으로 세상을 능히 이기는 다니엘과 같은 신앙의 용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오늘 청소년들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엡1:
오늘 청소년들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엡1: 요즈음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농구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젼 연속극 프로그램 중에서 농구선수들의 삶을 소재로 한 \"마지막 승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연속극 방영이후에 농구가 청소년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되고 있습니다. 이 농구붐과 함께 등장한 것은 소위 \"오빠부대\"란 것입니다. 지금 들끓고 있는 농구붐에서 결정적인 불을 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소위 \"오빠부대\"입니다. \"오빠부대\"는 농구경기장에 몰려와서 열광적으로 응원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농구선수의 건투를 비는 청소년들 - 대부분 여학생입니다만 - 이들을 일컹는데 요즘 농구경기장의 관중석 80%는 이들로 채워집니다. 오빠부대는 경기가 벌어지면 괴성을 지르고 머리를 흔들고 자기가 챙겨온 응원도구들을 가지고 거의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정도로 광란적인 응원을 합니다. 슛이 터질 때마다 이들의 함성으로 경기장은 떠나갈 듯합니다. 이들은 누구인가? 이 오빠부대는 과연 누구이며 왜 그들은 열광하는가? 이 청소년들이 농구경기에 몰려들고 열광하는 현상에 대해 연구한 어떤 기자에 의하면 이들은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콘서트에서 몰려들어서 열광하는 다소 해이해진 청소년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건전한 학생들이고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누가 보아도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볼 때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학생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농구장에 들아가는 순간에 그들은 열광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왜 그들은 열광하는가? 이 현상은 요즈음 청소년들이 무엇을 갈망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현상이어서 오늘 성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지극히 관심있는 이 주제를 중심으로 그들을 갈망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빠부대\" 현상에 대해 탐구를 한 어떤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그들이 학교에서 대하는 대부분의 선생님이 여성이고 집에서도 주로 대하는 것이 어머니이지 아버지와는 얼굴도 마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즉 모든 그들의 환경이 여성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파격적인 남성적 힘을 그리워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그들이 외쳐되는 \"오빠\"라는 함성에서 마치 에밀레종소리의 여운처럼 \"아빠\"라는 소리가 자꾸 들려온다는 것입니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무의식적 반응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너무 비약적인 관찰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현상에서 세 가지 점을 관찰합니다. 첫째는 농구경기장은 청소년문화의 집대성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는 \"힘\"과 \"스피드\"의 시대입니다. 농구선수들은 실내공간에서 훤칠한 키와 준수한 인물과 몸매와 귀공자같은 그런 타입의 모양새를 가지고 거기다가 박력있는 힘과 스피드로 좁은 경기장을 10명의 건각들이 뛸 때 거기에는 바로 그들이 흠모하는 모든 것, 즉 큰 키와 준수한 용모와 귀공자의 모습과 힘과 스피드가 넘쳐 흐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박진감 넘치는 스피드로 전개되는 곳이 바로 농구경기장입니다. 청소년들은 이런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즐기고 싶은데 그런 청소년 문화를 즐길만한 모든 곳은 퇴폐적인 곳입니다. 디스코 텍이 그렇고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인듯해서 닥아가면 어김없이 미성년자 출입금지구역입니다. 그러나 농구경기장은 그들도 그렇고 사회에서 보는 눈도 그렇고 거기에는 공인된 장소이며 그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한꺼번에 집약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농구경기장은 그들의 \"해방구\"이자 \"점령지\"입니다. 또 다시 젊잖은 어른들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농구의 경기규칙이나 그 절묘한 스포츠의 묘기를 좋아해서 농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적 발산을 할 수 있는 곳, 위험하지 않으면서 안심하고 가서 청소년의 그 끓는 피를 발산할 수 있는 곳, 그곳이면 그들은 언제든지 그곳으로 이동해 갈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은 \"수퍼스타\"를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2m를 넘어가는 장신선수들이 코트를 휩쓰는 모습은 수퍼스타의 모습입니다. 골대에 농구공을 넣는 슛도 제일 인기가 있는 슛이 소위 \"덩크 슛\"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그 높은 골대를 잡고 아예 공을 집어넣는 슛입니다. 이것은 초인적 힘을 발휘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속에서 저는 이들이 어떤 초인적 힘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때 예수님의 이야기를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록 오페라 형식으로 한 뮤지컬이 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수퍼 스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청소년들은 자기보다 월등히 위대한 어떤 존재를 분명히 기다리고 있고 이것이 그들의 메시야관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셋째는 그들이 부르는 \"오빠\"라는 호칭이 주는 의미입니다. 왜 그들은 스타들을 보고 \"오빠\"라고 부를까요? 그것은 현대청소년들은 \"친밀감\"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농구선수나 영화배우는 스타이고 아주 만나기 어렵고 머나먼 사이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농구선수를 \"오빠\"라고 부르면서 그들과의 친밀감을 만끽하려는 의도를 상당히 짙게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현대인들, 특별히 청소년들의 삶이 외롭고 너무나 거리감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가 드물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가정에서 부모님의 위치에서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토로하고 아버지의 품속에서 어머니의 품속에서 어울어 질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과거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밖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약간 특별한 관계정도이지 옛날의 아버지, 어머니의 이미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친밀함(Intimacy)이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저는 이 \"오빠부대\"들이 농구장을 찾아가는 것, 거기에서 괴성을 지르고 열광하는 것, 그것 자체는 결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젊음을 발산하고 그들의 문화를 꽃피우는 그 해방구와 점령구가 그들에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다른 사실에서는 슬프고 외로워집니다. 그것은 첫째는 그들은 그들이 담고 싶고 존경하고 싶고 애정을 보이고 싶은 \"수퍼스타\"가 필요한데 이들에게 농구선수가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농구선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인격과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에 정치인도 없고 교육자도 없고 스승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위대한 성인도 아니고 그 모든 존재들을 제치고 농구선수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분의 학생들이지만 이 이야기를 보편화하면 과연 오늘 내 자식들의 수퍼스타는 누구일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관심은 과연 오늘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둘째로 슬픈 현실은 우리 청소년들이 집에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면서 전혀 친밀감(Intimacy)을 느끼지 않고 아버지가 안계시는 곳, 어머니가 안계시는 곳, 동생과 언니가 없는 그곳에 가서 가장 큰 \"친밀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오빠는 열광적으로 사랑할 오빠가 아닌 거기 농구경기장에서 자신들의 억압된 심리를 시원하게 헤쳐주는 그 선수들을 정말로 친밀한 어조로 오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오빠부대의 현상을 분석한 그 기자의 평가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오빠\"라고 부르면서 열광할 때 그 소리에서 에밀레종소리의 여운처럼 \"아빠...\"란 환청이 울리는 것은 우연일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들은 오늘 집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친밀감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집은 그들의 삶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있어도 너무나 가치관이 다르고 고민의 범위가 다르며 그들의 고민은 어머니의 고민, 아버지의 고민들 사이에서 고민같이도 취급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털어놓지도 않고 털어놓아도 아무도 심각한 고민으로 이해해 주질 않습니다. 오빠부대로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있는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용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없는 청소년들은 그들의 친밀감을 표시할 아무 곳도 없습니다. 학교는 어마어마한 무한경쟁의 장이 되어가고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닌 무한경쟁자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들의 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자신들의 삶에만 너무 빠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가정이 친밀감을 표시할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서 가족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밀감이 존재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한번 물어보십시다. 여러분 자녀가 있는데 내 아들이, 내 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아십니까? 내 자식이 외로울 때는 어떤 습성이 있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이 말못할 고민이 있을 때는 어떤 마음인지,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은 내가 어떤 아버지이기를, 어떤 어머니이기를 바라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점검표를 만들어 놓고 조사를 해 보시면 내 자식이지만 내 자식의 깊은 속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학비를 대 주고 밥은 해 주지만 더 이상 친밀한 관계가 아닙니다. 반대로 내 자식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자식들도 우리에 대해 그저 막연하게 아버지겠거니, 어머니겠거니 생각하지 우리의 깊은 속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현상을 그대로 우리가 묵과한다면 앞으로 함께 집에 살기는 해도 기숙사처럼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정과 사랑을 교환할 수 없는 그런 우리 가정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겠습니까? 멀어진 부모와 자녀의 사이를 가깝게 해 보려는 우리 교회의 몸부림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 어느 구석에서 마음을 터놓고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안에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관계가 새로 정립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모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재정립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먼저 하나가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아주 먼 존재였습니다. 그 분과는 감히 가까이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해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곁에 오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직접 만나게 되었고 그 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 장은 이 하나님과의 친밀해 진 관계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엡1:5) 우리 평범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엡1:7).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죄가 해결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전혀 꺼리낌이 없는 사이가 됩니다. 셋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비밀을 다 공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9). 넷째는 우리의 미래를 보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14). 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아주 거리낌이 없는 관계, 아무때든지 찾아갈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분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하나님과 무사통과(Free Way)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 이것 보다 더 큰 은사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면 그 다음에 모든 관계가 다 새롭게 정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2장에 보면 지금까지 해 온 옛 생활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옆에 있는 나의 모든 이웃은 그냥 이웃이 아닌 나와 마치 건물의 벽돌이 연결되듯이 밀접하고 절친한 관계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남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이 하나님안에서 동일한 성도요 시민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이웃이 이웃이 아닌 같은 가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한 건물을 구성하듯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5장에 오면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데 주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며 부모와 자녀가 서로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여움을 푸는 대상이 아닌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고 심지어 종과 상전의 관계도 서로 섬기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직도 벽들이 많은 모든 사이들이 전혀 벽이 없는 아주 자기와 가까운 사이로 변해간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에베소서의 메시지가 오늘 점점 친밀감을 상실해 가는 우리 가정과 사회에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이냐 하면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 멀어진 이웃과 이웃, 멀어진 남편과 아내, 멀어진 종과 상전, 멀어진 자녀와 부모를 가깝게, 친구되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이 제안은 오늘의 상황에서 들으면 지당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종과 상전은 엄연히 다르고 하나님과 인간은 하늘과 땅 만치나 다르고 남편과 아내의 신분이 다르고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이처럼 친밀한 사회적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봉건사회처럼 억압적이고 위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주 안에서는 이 모든 사이가 격이 없는 친밀한 사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요지는 우리 청소년들이 마음놓고 찾아가고 안기고 할 수 있는 자기가 친밀하다고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정말 가까워야 할 주위에서는 없고 농구코트장이나 콘서트나 이런 곳으로 옮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가슴아픈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곳곳에서 너무 높은 벽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저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그래서 그들의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농구코트장이 그들의 해방구라고 하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교회도 청소년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보면 청소년이 원하는 것 보다는 어른들이 생각하는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충정은 있습니다. 아이들이 하자는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그래도 방향을 잡고 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염려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순간에 교회와 어른에 대해 너무 벽이 높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자기들의 요구와 소원을 들어줄 다른 곳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주안에서 부모님과 가까워지고 친밀하여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적 상황이나 삶의 현실을 볼 때 옛날 봉건시대처럼 억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개인주의화되어서 이제는 부모와 자식의 혈연적 관계마저도 별의미없는 것이 되고 가기 때문에 교회는 부모와 자녀가 주안에서 이 뜨겁고 친밀한 관계를 다시 회복하도록 하는 중요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에게 친밀할 수 있는 그 자리 그 공간, 그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들의 우리곁에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이 하나님은 수퍼스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수퍼스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오빠, 내 동생으로 삼을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잔치에 참여하시고 소원해진 우리의 사이를 주안에서 다시 회복하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오늘 청소년들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엡1:1-14
오늘 청소년들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엡1:1-14 요즈음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농구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젼 연속극 프로그램 중에서 농구선수들의 삶을 소재로 한 \"마지막 승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연속극 방영이후에 농구가 청소년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되고 있습니다. 이 농구붐과 함께 등장한 것은 소위 \"오빠부대\"란 것입니다. 지금 들끓고 있는 농구붐에서 결정적인 불을 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소위 \"오빠부대\"입니다. \"오빠부대\"는 농구경기장에 몰려와서 열광적으로 응원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농구선수의 건투를 비는 청소년들 - 대부분 여학생입니다만 - 이들을 일컹는데 요즘 농구경기장의 관중석 80%는 이들로 채워집니다. 오빠부대는 경기가 벌어지면 괴성을 지르고 머리를 흔들고 자기가 챙겨온 응원도구들을 가지고 거의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정도로 광란적인 응원을 합니다. 슛이 터질 때마다 이들의 함성으로 경기장은 떠나갈 듯합니다. 이들은 누구인가? 이 오빠부대는 과연 누구이며 왜 그들은 열광하는가? 이 청소년들이 농구경기에 몰려들고 열광하는 현상에 대해 연구한 어떤 기자에 의하면 이들은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콘서트에서 몰려들어서 열광하는 다소 해이해진 청소년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건전한 학생들이고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누가 보아도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볼 때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학생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농구장에 들아가는 순간에 그들은 열광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왜 그들은 열광하는가? 이 현상은 요즈음 청소년들이 무엇을 갈망하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현상이어서 오늘 성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지극히 관심있는 이 주제를 중심으로 그들을 갈망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빠부대\" 현상에 대해 탐구를 한 어떤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그들이 학교에서 대하는 대부분의 선생님이 여성이고 집에서도 주로 대하는 것이 어머니이지 아버지와는 얼굴도 마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즉 모든 그들의 환경이 여성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파격적인 남성적 힘을 그리워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그들이 외쳐되는 \"오빠\"라는 함성에서 마치 에밀레종소리의 여운처럼 \"아빠\"라는 소리가 자꾸 들려온다는 것입니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무의식적 반응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너무 비약적인 관찰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현상에서 세 가지 점을 관찰합니다. 첫째는 농구경기장은 청소년문화의 집대성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는 \"힘\"과 \"스피드\"의 시대입니다. 농구선수들은 실내공간에서 훤칠한 키와 준수한 인물과 몸매와 귀공자같은 그런 타입의 모양새를 가지고 거기다가 박력있는 힘과 스피드로 좁은 경기장을 10명의 건각들이 뛸 때 거기에는 바로 그들이 흠모하는 모든 것, 즉 큰 키와 준수한 용모와 귀공자의 모습과 힘과 스피드가 넘쳐 흐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박진감 넘치는 스피드로 전개되는 곳이 바로 농구경기장입니다. 청소년들은 이런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즐기고 싶은데 그런 청소년 문화를 즐길만한 모든 곳은 퇴폐적인 곳입니다. 디스코 텍이 그렇고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인듯해서 닥아가면 어김없이 미성년자 출입금지구역입니다. 그러나 농구경기장은 그들도 그렇고 사회에서 보는 눈도 그렇고 거기에는 공인된 장소이며 그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한꺼번에 집약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농구경기장은 그들의 \"해방구\"이자 \"점령지\"입니다. 또 다시 젊잖은 어른들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농구의 경기규칙이나 그 절묘한 스포츠의 묘기를 좋아해서 농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적 발산을 할 수 있는 곳, 위험하지 않으면서 안심하고 가서 청소년의 그 끓는 피를 발산할 수 있는 곳, 그곳이면 그들은 언제든지 그곳으로 이동해 갈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은 \"수퍼스타\"를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2m를 넘어가는 장신선수들이 코트를 휩쓰는 모습은 수퍼스타의 모습입니다. 골대에 농구공을 넣는 슛도 제일 인기가 있는 슛이 소위 \"덩크 슛\"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그 높은 골대를 잡고 아예 공을 집어넣는 슛입니다. 이것은 초인적 힘을 발휘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속에서 저는 이들이 어떤 초인적 힘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때 예수님의 이야기를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록 오페라 형식으로 한 뮤지컬이 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수퍼 스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청소년들은 자기보다 월등히 위대한 어떤 존재를 분명히 기다리고 있고 이것이 그들의 메시야관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셋째는 그들이 부르는 \"오빠\"라는 호칭이 주는 의미입니다. 왜 그들은 스타들을 보고 \"오빠\"라고 부를까요? 그것은 현대청소년들은 \"친밀감\"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농구선수나 영화배우는 스타이고 아주 만나기 어렵고 머나먼 사이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농구선수를 \"오빠\"라고 부르면서 그들과의 친밀감을 만끽하려는 의도를 상당히 짙게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현대인들, 특별히 청소년들의 삶이 외롭고 너무나 거리감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가 드물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가정에서 부모님의 위치에서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토로하고 아버지의 품속에서 어머니의 품속에서 어울어 질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과거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밖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약간 특별한 관계정도이지 옛날의 아버지, 어머니의 이미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친밀함(Intimacy)이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저는 이 \"오빠부대\"들이 농구장을 찾아가는 것, 거기에서 괴성을 지르고 열광하는 것, 그것 자체는 결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젊음을 발산하고 그들의 문화를 꽃피우는 그 해방구와 점령구가 그들에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다른 사실에서는 슬프고 외로워집니다. 그것은 첫째는 그들은 그들이 담고 싶고 존경하고 싶고 애정을 보이고 싶은 \"수퍼스타\"가 필요한데 이들에게 농구선수가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농구선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인격과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에 정치인도 없고 교육자도 없고 스승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위대한 성인도 아니고 그 모든 존재들을 제치고 농구선수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분의 학생들이지만 이 이야기를 보편화하면 과연 오늘 내 자식들의 수퍼스타는 누구일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관심은 과연 오늘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둘째로 슬픈 현실은 우리 청소년들이 집에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면서 전혀 친밀감(Intimacy)을 느끼지 않고 아버지가 안계시는 곳, 어머니가 안계시는 곳, 동생과 언니가 없는 그곳에 가서 가장 큰 \"친밀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오빠는 열광적으로 사랑할 오빠가 아닌 거기 농구경기장에서 자신들의 억압된 심리를 시원하게 헤쳐주는 그 선수들을 정말로 친밀한 어조로 오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오빠부대의 현상을 분석한 그 기자의 평가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오빠\"라고 부르면서 열광할 때 그 소리에서 에밀레종소리의 여운처럼 \"아빠...\"란 환청이 울리는 것은 우연일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들은 오늘 집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친밀감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집은 그들의 삶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있어도 너무나 가치관이 다르고 고민의 범위가 다르며 그들의 고민은 어머니의 고민, 아버지의 고민들 사이에서 고민같이도 취급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털어놓지도 않고 털어놓아도 아무도 심각한 고민으로 이해해 주질 않습니다. 오빠부대로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있는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용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없는 청소년들은 그들의 친밀감을 표시할 아무 곳도 없습니다. 학교는 어마어마한 무한경쟁의 장이 되어가고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닌 무한경쟁자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들의 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자신들의 삶에만 너무 빠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가정이 친밀감을 표시할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서 가족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밀감이 존재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한번 물어보십시다. 여러분 자녀가 있는데 내 아들이, 내 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아십니까? 내 자식이 외로울 때는 어떤 습성이 있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이 말못할 고민이 있을 때는 어떤 마음인지,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은 내가 어떤 아버지이기를, 어떤 어머니이기를 바라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점검표를 만들어 놓고 조사를 해 보시면 내 자식이지만 내 자식의 깊은 속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학비를 대 주고 밥은 해 주지만 더 이상 친밀한 관계가 아닙니다. 반대로 내 자식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자식들도 우리에 대해 그저 막연하게 아버지겠거니, 어머니겠거니 생각하지 우리의 깊은 속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현상을 그대로 우리가 묵과한다면 앞으로 함께 집에 살기는 해도 기숙사처럼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정과 사랑을 교환할 수 없는 그런 우리 가정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겠습니까? 멀어진 부모와 자녀의 사이를 가깝게 해 보려는 우리 교회의 몸부림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 어느 구석에서 마음을 터놓고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안에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관계가 새로 정립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모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재정립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먼저 하나가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아주 먼 존재였습니다. 그 분과는 감히 가까이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해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곁에 오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직접 만나게 되었고 그 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 장은 이 하나님과의 친밀해 진 관계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엡1:5) 우리 평범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엡1:7).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죄가 해결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전혀 꺼리낌이 없는 사이가 됩니다. 셋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비밀을 다 공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9). 넷째는 우리의 미래를 보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14). 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아주 거리낌이 없는 관계, 아무때든지 찾아갈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분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하나님과 무사통과(Free Way)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 이것 보다 더 큰 은사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면 그 다음에 모든 관계가 다 새롭게 정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2장에 보면 지금까지 해 온 옛 생활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옆에 있는 나의 모든 이웃은 그냥 이웃이 아닌 나와 마치 건물의 벽돌이 연결되듯이 밀접하고 절친한 관계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남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이 하나님안에서 동일한 성도요 시민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이웃이 이웃이 아닌 같은 가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한 건물을 구성하듯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5장에 오면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데 주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며 부모와 자녀가 서로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여움을 푸는 대상이 아닌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고 심지어 종과 상전의 관계도 서로 섬기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직도 벽들이 많은 모든 사이들이 전혀 벽이 없는 아주 자기와 가까운 사이로 변해간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에베소서의 메시지가 오늘 점점 친밀감을 상실해 가는 우리 가정과 사회에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이냐 하면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 멀어진 이웃과 이웃, 멀어진 남편과 아내, 멀어진 종과 상전, 멀어진 자녀와 부모를 가깝게, 친구되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이 제안은 오늘의 상황에서 들으면 지당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종과 상전은 엄연히 다르고 하나님과 인간은 하늘과 땅 만치나 다르고 남편과 아내의 신분이 다르고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이처럼 친밀한 사회적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봉건사회처럼 억압적이고 위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주 안에서는 이 모든 사이가 격이 없는 친밀한 사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요지는 우리 청소년들이 마음놓고 찾아가고 안기고 할 수 있는 자기가 친밀하다고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정말 가까워야 할 주위에서는 없고 농구코트장이나 콘서트나 이런 곳으로 옮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가슴아픈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곳곳에서 너무 높은 벽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저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그래서 그들의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농구코트장이 그들의 해방구라고 하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교회도 청소년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보면 청소년이 원하는 것 보다는 어른들이 생각하는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충정은 있습니다. 아이들이 하자는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그래도 방향을 잡고 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염려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순간에 교회와 어른에 대해 너무 벽이 높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자기들의 요구와 소원을 들어줄 다른 곳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주안에서 부모님과 가까워지고 친밀하여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적 상황이나 삶의 현실을 볼 때 옛날 봉건시대처럼 억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개인주의화되어서 이제는 부모와 자식의 혈연적 관계마저도 별의미없는 것이 되고 가기 때문에 교회는 부모와 자녀가 주안에서 이 뜨겁고 친밀한 관계를 다시 회복하도록 하는 중요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에게 친밀할 수 있는 그 자리 그 공간, 그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들의 우리곁에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이 하나님은 수퍼스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수퍼스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오빠, 내 동생으로 삼을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잔치에 참여하시고 소원해진 우리의 사이를 주안에서 다시 회복하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우리의 미래 청소년/요일2:12-14/2001-09-12
우리의 미래 청소년 요일2:12-14 1. 서론 할렐루야!! 오늘은 5월 셋째 주일 청소년주일입니다. 오월은 산천초목의 푸르름이 마치 패기 발랄하면서도 싱그러운 청소년들과 흡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신 말씀과 함께 우리 청소년들의 소중성을 다시 한번 깊이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 우리 청소년들을 위해 기도하고 저들에게 좀더 깊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보면 청년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청년들아 너희가 죄를 이기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우리 미래의 소망인 청소년 청소년들은 우리 미래의 소망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들은 머지 않아 우리의 삶의 바톤을 이어 받아 우리가 이루어 놓은 터전 위에 더 크고 더 새로운 삶의 탑을 새워나갈 것입니다. 저들이 건강하고 바르면 우리의 미래가 그만큼 밝고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바로 서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고 불행해 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축복된 내일을 위해서 저들을 신앙적으로 양육하고 건전한 인격체로 길러내야 합니다. 저들을 바로 기르고 바로 세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통해 우리의 미래도 함께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청소년들이 짓 푸른 나무 가지처럼 번성하고 무성하게 자라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청소년들이 현주소 그러면 우리의 청소년들의 현 주소는 어떻습니까? 세상이 점점 죄악으로 어두워져가면서 우리의 청소년들도 거기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는 기성세대를 앞지르는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를 아무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부끄러움도 염치도 없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근간에는 교회에서 자라난 청년들도 세속화되고 신앙이 변질되어서 롯과 같은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익숙하여 대학학과를 선택할 때도 돈벌이가 잘되고 세상에서 세상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출세하는데 지장이 없는 과를 선택합니다. 직장을 갈 때도 대우와 직분에만 신경을 씁니다. 심지어 결혼을 할 때에도 외모와 학력 그리고 얼마나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가를 먼저 보고 신앙에 관계없이 거리낌없이 인생의 반려자를 결정합니다. 그리고는 그 결정이 주위 사람들과 부모, 나아가서 하나님께 어떠한 평가받을 것인지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마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단의 시험에 빠지는 것이요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뱀의 말을 듣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인 가정에도 서서히 불행의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녀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孟母三遷之敎\"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좋은 근거가 되고 있다. 세계적인 성인인 맹자도 공동묘지 근처에 살 때는 상여 메는 시늉만 하고, 시장 터에 살 때는 장사치들의 호객행위 등을 흉내냈지만, 서당 근처로 이사 한 뒤엔 글읽기를 즐겨한 나머지 훌륭한 사람이 됐다는 게 \"맹모삼천지교\"의 교훈입니다. 맹자 뒤에는 맹모가 있고 율곡(이이) 뒤에는 신사임당이 있듯이 우리 청소년의 교육에 있어서는 제1의 교사인 부모와 그리고 학교 나아가서 교회의 역할이 저들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양육의 책임을 떠안고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격언도 사실은 교육환경의 중요성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청소년들을 둘러싸고 있는 교육환경은 어떻습니까?. 이기주의에 빠진 기성세대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전반적인 사회환경이나 학교 주변과 가정, 사설학원, 사설도서관 주변까지 청년들의 비행과 탈선을 유혹하고 부추기는 각종 유해업소가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성적 판단능력이 무디고 감수성이 예민해서 즉흥적 충동적인 행동을 하기 쉬운 청소년들을 2중. 3중으로 포위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최근에는 인터넷이나 비디오 등을 통해서 청소년들이 안방에서 각종 음란물을 거의 무방비상태로 접할 있게 되는 등 교육환경이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는 지경입니다. 자신의 공부방에 앉아 컴퓨터 단말기만 두드리면 음란잡지나 음란비디오에 못지않는 화면이 나타나 새로운 탈선의 온상이 되고 있으며, 최근 한 학생은 이같은 컴퓨터 음란물에 충격을 받아 자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4.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소년 수년 전에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세계에 있는 은 젊은이들이 모여 세계 청년대회를 가진 일이 있었습니다. 대회에서 오늘의 청년들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논의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이 대두된 고민은 우리가 예상했던 바를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지한 대화를 통해 나타난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놀랍게도 자기 목숨과 젊음과 청춘과 정열을 던질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음을 바칠 수 있는 대상, 내 삶을 활활 불살라 버릴 수 있는 대상, 마음놓고 정말 의미 있고 정말 진지한 절대적인 가치를 위해서 내 삶을 던져 버릴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어느덧 인생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하나님마져도 잊어버린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적신호였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미래도 나아가 인류의 미래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놀랍게도 공산주의 세계에 있는 청년에게는 그들 생명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지적되었습니다. 잘못된 이론이지만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공산주의 청년들은 언제든지 그들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공산화\'라는 구체적인 목적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청소년들은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또 저들이 과연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내놓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청소년들은 우리의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이기주의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잘해보아야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청소년들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청소년들이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기주의자)은 너무 좁습니다. 삶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타주의자)도 좁습니다. 더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죽는 젊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만물을 지으시고 인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며 하나님을 위해 죽고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며 자랑이며 긍지이고 환희입니까? \'전 세계의 복음화\',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을 거쳐 헌신해야 하는 구체적인 삶의 목표이자 우리 청소년들이 가져야할 진정한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 청소년들이 이런 삶의 목표를가지기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첫째-하나님은 청소년들이 강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믿음 강력한 정신 강력한 신체를 요구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청소년들을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설사 죽음이 닥쳐와도 생명을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는 순교자적 믿음을 소유해야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걸고 적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과 정신, 사자 굴을 앞에 두고 변함없이 기도에 정진하는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청소년들은 스스로도 이런 강력한 믿음을 소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전신갑주입니다. 생명의 능력입니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충만해서 말씀을 기뻐하고 말씀을 따라 살고 죽는 청소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말씀에 매우 빈약하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말씀연구에 관심이 없습니다 . 말씀을 가까이하는 청소년들이 적습니다. 이는 우리 기성세대들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무관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전신갑주를 입지 아니하고 말씀의 검이 없이는 영적 전쟁을 치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청소년은 사탄과 영적 전쟁을 이길 강력한 십자가의 군병이어야 합니다. 청년 요셉과 같이 청년 다윗같이 청년 다니엘같이 죄와 그 도전을 이기고 이 땅에 아름다운 복음의 꽃을 피우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청년들이 말씀에 충만한 청년이 되도록 길러야 하고 우리 청소년들은 자신의 존재를 바로 알아 말씀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5.우리의 책임 우리는 우리의 내일인 청소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자라도록 기도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환경에서 자라도록 교육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들에게 체계적인 정책 지원과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오늘의 교회는 가정과 학교와 연계하여 우리의 청소년들이 건전하고 깨끗하게 성장하도록 양육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 그래서 청소년들의 정신과 육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온갖 것들을 기성세대들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스스로 청소년들의 손에 닿지 아니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중대한 책임이요 이는 우리가 해야할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망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스스로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미래의 소망인 저들을 바로 양육하는 기성세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미래 청소년/요일2:12-14/2001-10-10
우리의 미래 청소년 요일2:12-14 1. 서론 할렐루야!! 오늘은 5월 셋째 주일 청소년주일입니다. 오월은 산천초목의 푸르름이 마치 패기 발랄하면서도 싱그러운 청소년들과 흡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신 말씀과 함께 우리 청소년들의 소중성을 다시 한번 깊이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 우리 청소년들을 위해 기도하고 저들에게 좀더 깊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보면 청년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청년들아 너희가 죄를 이기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우리 미래의 소망인 청소년 청소년들은 우리 미래의 소망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들은 머지 않아 우리의 삶의 바톤을 이어 받아 우리가 이루어 놓은 터전 위에 더 크고 더 새로운 삶의 탑을 새워나갈 것입니다. 저들이 건강하고 바르면 우리의 미래가 그만큼 밝고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바로 서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고 불행해 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축복된 내일을 위해서 저들을 신앙적으로 양육하고 건전한 인격체로 길러내야 합니다. 저들을 바로 기르고 바로 세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통해 우리의 미래도 함께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청소년들이 짓 푸른 나무 가지처럼 번성하고 무성하게 자라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청소년들이 현주소 그러면 우리의 청소년들의 현 주소는 어떻습니까? 세상이 점점 죄악으로 어두워져가면서 우리의 청소년들도 거기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는 기성세대를 앞지르는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를 아무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부끄러움도 염치도 없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근간에는 교회에서 자라난 청년들도 세속화되고 신앙이 변질되어서 롯과 같은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익숙하여 대학학과를 선택할 때도 돈벌이가 잘되고 세상에서 세상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출세하는데 지장이 없는 과를 선택합니다. 직장을 갈 때도 대우와 직분에만 신경을 씁니다. 심지어 결혼을 할 때에도 외모와 학력 그리고 얼마나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가를 먼저 보고 신앙에 관계없이 거리낌없이 인생의 반려자를 결정합니다. 그리고는 그 결정이 주위 사람들과 부모, 나아가서 하나님께 어떠한 평가받을 것인지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습니다. 이는 마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단의 시험에 빠지는 것이요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뱀의 말을 듣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인 가정에도 서서히 불행의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녀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孟母三遷之敎\"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좋은 근거가 되고 있다. 세계적인 성인인 맹자도 공동묘지 근처에 살 때는 상여 메는 시늉만 하고, 시장 터에 살 때는 장사치들의 호객행위 등을 흉내냈지만, 서당 근처로 이사 한 뒤엔 글읽기를 즐겨한 나머지 훌륭한 사람이 됐다는 게 \"맹모삼천지교\"의 교훈입니다. 맹자 뒤에는 맹모가 있고 율곡(이이) 뒤에는 신사임당이 있듯이 우리 청소년의 교육에 있어서는 제1의 교사인 부모와 그리고 학교 나아가서 교회의 역할이 저들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양육의 책임을 떠안고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라\"는 격언도 사실은 교육환경의 중요성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청소년들을 둘러싸고 있는 교육환경은 어떻습니까?. 이기주의에 빠진 기성세대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전반적인 사회환경이나 학교 주변과 가정, 사설학원, 사설도서관 주변까지 청년들의 비행과 탈선을 유혹하고 부추기는 각종 유해업소가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성적 판단능력이 무디고 감수성이 예민해서 즉흥적 충동적인 행동을 하기 쉬운 청소년들을 2중. 3중으로 포위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최근에는 인터넷이나 비디오 등을 통해서 청소년들이 안방에서 각종 음란물을 거의 무방비상태로 접할 있게 되는 등 교육환경이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는 지경입니다. 자신의 공부방에 앉아 컴퓨터 단말기만 두드리면 음란잡지나 음란비디오에 못지않는 화면이 나타나 새로운 탈선의 온상이 되고 있으며, 최근 한 학생은 이같은 컴퓨터 음란물에 충격을 받아 자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4.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소년 수년 전에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세계에 있는 은 젊은이들이 모여 세계 청년대회를 가진 일이 있었습니다. 대회에서 오늘의 청년들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논의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이 대두된 고민은 우리가 예상했던 바를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지한 대화를 통해 나타난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놀랍게도 자기 목숨과 젊음과 청춘과 정열을 던질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음을 바칠 수 있는 대상, 내 삶을 활활 불살라 버릴 수 있는 대상, 마음놓고 정말 의미 있고 정말 진지한 절대적인 가치를 위해서 내 삶을 던져 버릴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어느덧 인생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을 상실하고 하나님마져도 잊어버린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적신호였습니다 . 여기에는 우리의 미래도 나아가 인류의 미래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놀랍게도 공산주의 세계에 있는 청년에게는 그들 생명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지적되었습니다. 잘못된 이론이지만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공산주의 청년들은 언제든지 그들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공산화\'라는 구체적인 목적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청소년들은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무엇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또 저들이 과연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내놓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청소년들은 우리의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이기주의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잘해보아야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청소년들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청소년들이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기주의자)은 너무 좁습니다. 삶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타주의자)도 좁습니다. 더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죽는 젊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만물을 지으시고 인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며 하나님을 위해 죽고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며 자랑이며 긍지이고 환희입니까? \'전 세계의 복음화\',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을 거쳐 헌신해야 하는 구체적인 삶의 목표이자 우리 청소년들이 가져야할 진정한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 청소년들이 이런 삶의 목표를가지기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첫째-하나님은 청소년들이 강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믿음 강력한 정신 강력한 신체를 요구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청소년들을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설사 죽음이 닥쳐와도 생명을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는 순교자적 믿음을 소유해야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걸고 적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과 정신, 사자 굴을 앞에 두고 변함없이 기도에 정진하는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청소년들은 스스로도 이런 강력한 믿음을 소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전신갑주입니다. 생명의 능력입니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충만해서 말씀을 기뻐하고 말씀을 따라 살고 죽는 청소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말씀에 매우 빈약하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말씀연구에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청소년들이 적습니다. 이는 우리 기성세대들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무관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전신갑주를 입지 아니하고 말씀의 검이 없이는 영적 전쟁을 치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청소년은 사탄과 영적 전쟁을 이길 강력한 십자가의 군병이어야 합니다. 청년 요셉과 같이 청년 다윗같이 청년 다니엘같이 죄와 그 도전을 이기고 이 땅에 아름다운 복음의 꽃을 피우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청년들이 말씀에 충만한 청년이 되도록 길러야 하고 우리 청소년들은 자신의 존재를 바로 알아 말씀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5.우리의 책임 우리는 우리의 내일인 청소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자라도록 기도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환경에서 자라도록 교육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들에게 체계적인 정책 지원과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오늘의 교회는 가정과 학교와 연계하여 우리의 청소년들이 건전하고 깨끗하게 성장하도록 양육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정신과 육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온갖 것들을 기성세대들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스스로 청소년들의 손에 닿지 아니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중대한 책임이요 이는 우리가 해야할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망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스스로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미래의 소망인 저들을 바로 양육하는 기성세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청년들아 바로 서라/요일2:12-17/청소년주일설교
청년들아 바로 서라 요일2:12-17 오늘은 청소년 주일입니다. 어느 서양의 시인은 \"젊은이를 나에게 보여다 오 나는 그 나라의 앞날을 점치리라\"고 했습니다. 젊은이의 눈동자에 맑은 정기가 빛나고 가슴속에 뜨거운 정열이 불타고 머리는 냉철한 이성이 깃들 고얼굴은 성실의 표정이 서리고 손에는 근면의 맥박이 넘치고 발걸음에 씩 씩한 활기가 충만하다면 이런 청소년이 있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는 소 망이 있고미래가 환하게 열릴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추세는 청소년들 의 타락이 도를 더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4월달 법무부가 발표한 최 근 5년간 소년 범죄 동향파악 자료에 의하면 강도,강도살인, 강도강간 등 흉악범죄를 저지른 10대소년이 전체 범위의 54.3%를 차지하고 있으며 매 년 증거하고 있다고합니다. 한 나라의 운명이 청소년 교육 여하에 달려 있 다고 말한 철인의말처럼 오늘의 심각성을 모두가 깨달아 바로 이끌어야 하 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야 합니다(13,14) 청소년기의 특징은 지극히 정열적이면서 지식에 대한 많은 욕구를 갖고 있 으나 매우 이성적입니다. 현대교육은 모든 것을 증명하여 답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증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으면 수용하기 힘이 듭니다. 수학이나 과학의 문제처럼 하나님도 증명하려드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유년부에서 열심히 자라던 어린이가 중.고등부,대학부,청년부에 올라갈수록 많은수가 탈락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보이는 것으로만 이뤄지지 않았고 증명될 수 없는 부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지식은 한게가 있고 미약합니 다. 솔로몬은 지식과 지혜가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말년에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때가 가까깁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 리의 아버지시요 그 분은 영원부터 계신 분으로(14) 모든 지식과 지헤가 하 나님께로 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14).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므로 악한 자를 이기고(13) 흉악한 자를 이기었다(14)고 했습 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와 교회 안에서도 젊은이들이 무기력한 이유는 그들의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고 세상의 지식이 가득차있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 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라(시119:9)\" 하나님을 모셔야 하는 이유는 세 상의 모든 소유물은 그것이 바로 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사용하는 사람 이 바로써야 하는데 사람은 늘 변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하신 하나님의 도움 을 받는 것입니다. 현대는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시대입니다. 곳 곳에서 부정과 부패로 썩는 냄새가 나고 무너지고 터지고 있습니다. 물질이 나 권세나 재능도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완벽하게 하실 수 있 습니다. 더구나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분별력이 약하고 인생의 경험이 부족 하니 더하지요. 세계에서 가장 범죄율이 적은 이스라엘 민족은 쉐마 교육을 통하여 어려서 부터 선악을 분별하는 말씀교육을 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 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 평생 떠나지 않도록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게해야 합니다(15). 세상은 하나님과 반대되며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본질 적으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거부하며 대적합니다.그래서 예수님도 철 저하게 대적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매력있게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 나 많습니까? 청소년 범죄의 80%가 술, 담배, 마약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러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15). 예수님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지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고 했습니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집 니까? 육신의 정욕 - 본성적으로 일어나는 죄악된 욕심입니다. 육신에 대한 탐 욕, 사치,쾌락,성욕, 물욕,등 하나님을 잊게 하고 이웃을 생각지 않게 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안목의 정욕 - 보는 것마다 갖고 싶고, 누리고 싶고,먹고 싶은 욕망입니 다. 이생의 자랑 -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영광을 생각하고 자기자랑, 자식 자랑, 남편자랑,등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세상의 것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7). 세상이 아무리 매혹적이요 수지맞는 것 같아도 거기에 소망을 두면 실망합니다. 세 상의 것은 새것이나 낡아지고 젊었으나 늙어지고 값이 비쌌으나 헐값이 됩 니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누려보고 가져보고 인정도 받아 보았으나 세월이 지나자 영화의 장면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 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고 했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영원히 거한다는 것입니다(17).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은 자요 영생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심히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젊은이의 자본은 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짧은 과거와 긴 미래를 가진 것 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현대는 세계 를 지구촌이라고 하고 세계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합니다. 젊은이의 무대는 당연히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는 경제적으로 복음적으로 한국의 지원 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세계화가 이루어진들 무슨 소용입니까? 정 신이 바로 박힌 백성들이 지도자들이 세계화를 주도해야 합니다. 세계화는 곧 복음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땅끝가지 복음을 들고 가라 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영원한 가치관에 소망을 둔다면 그곳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청소년들은 세계를 무대로 하되 천국에 대한 영원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가치관이 올바로 서게 됩니다. 결론 오늘의 세계는 넓은 바다에 수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계속하여 새로운 지 식, 새로운 유행이 오고 갑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처하지 않으 면 파도에 밀려 침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의 자녀들을 세상에 빼앗긴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교회의 청소년들을 세상에 빼앗긴다면 교회는 텅텅비게 될 것이요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러면 국가도 자연히 무 너집니다. 지금이야말로 험한 세상에서 청소년들을 지킬때입니다. 이땅의 모든 청소년들이 하나님을 알고 믿음안에서 바로서서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이루고 나라를 짊어질 훌륭한 재목이 되길 축원합니다. 첫번 크리스마스 이브 성경 본문: 사 9:1-7, 눅 2:8-20 예수가 탄생할 즈음 팔레스타인에서는 추운 계절을 피한 3월과 11월 사 이에 양들을 들판에 내어 놓고 방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그러 나 예루살렘 근방(특히 베들레헴)에서는 성전 제사에 쓸 양을 충당하기 위해 1년 내내(겨울철인 12월-2월에도) 양을 방목했다. 그래서 6세기 당 시 서방교회의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하여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잡았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은 최초의 사람이 다름아닌 베들 레헴 들판의 양치기 목자들이었다고 전한다. 구주탄생의 소식이 목자들에 게 먼저 전해진 것은 의미있는 사건이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목자들이 매 우 천한 일을 하며 그들이 늘 양떼와 같이 있어서 서기관들이 요구하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하찮케 취급하였다. 그러한 취급을 당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비천한 목자들이 예수 의 탄생소식을 최초로 듣고 이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될 수 있었을까? 오 늘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8절은 ; 목자들이 맡겨진 직분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당시 예수 탄생의 때는 팔레스타인의 겨울이었다. 더욱이 베들레헴은 해 발 600m의 고산지대였기 때문에 한밤중에 목자들이 양을 지키는 것은 매 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들은 성전에 바쳐질 희 생양(제물)을 돌보면서 들판에서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그러한 충성과 열심이 그들을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최초로 구주 탄생의 복된 소식을 접하는 축복을 얻게 했다. 15-16절은 ; 목자들이 사명감에 불타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목자들은 베들레헴 교외의 들판에서 양을 치던 중 천사들을 통해 구주 탄생의 실로 어마어마한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대망하던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듣자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주탄생 장소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즉시로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 이다. 성전의 희생 양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들에게는 참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속죄양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일이 더 중 요하고 시급한 일이었던 것이다. 17-19절은 ; 목자들은 보고 들은 대로 충실하게 증거하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아기 예수를 찾아간 목자들은 천사에게서 전해 들은 말을 그대로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하였다. 즉 목자들은 그들이 믿고 들은 내용을 한 치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예수의 부모들에게 전한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천사들이 목자에게 선포한 말씀과 당시의 상황은 목자들 밖에 아는 자들이 없었지만 그들이 충실하게 증거함으로써 또 다른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결국 누가복음에 묶여져 성서 말씀의 일부로 기록되 었으며, 이것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일점 일획의 더함 이 없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들려 주고 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 씀을 선포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를 교훈한다. 진실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해야 한다. 20절은 ; 목자들이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목자들은 당시 팔레스타인의 최하위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지만 자신의 신 분에 불평하지 않고 맡겨진 직분에 묵묵하게 충성한 결과 구주 탄생에 관 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첫번째 축복을 입었으며, 놀라운 이 소식을 널 리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아기 예수를 방문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가 사실로 나타난 것을 목도하는 두번째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 여 하룻밤의 짧은 시간에 말할 수 없이 놀랍고도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직접 체험한 목자들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 놀라 운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향해 조용히 찬양과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목자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어렵고 힘들었 지만 그들은 인생 최고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과 자기들이 본 것이 한없이 전파될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기쁨으로 발걸음을 내딛었 다. 실로 인생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며 하나님께서는 그 행복의 초점을 인간에게 두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 기 위한 방법으로 인간의 가족 어린아이를 택하셨고 베들레헴 마굿간을 찾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 다.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에게는 \'평화\'는 인생의 가장 큰 희망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인간이 요구하는 영광은 자기중심의 부귀영화이지만 예수가 행한 \'하나 님께 영광\'은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가난한 자들과 어린 것들에게 친근히 하시고 잔인과 부정을 미워하시며 모욕을 당해도 반항치 않으시며 원수의 사유를 구하신 영광, 곧 주린 자를 먹이시고 헐 벗은 자를 입히시며 실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시고 차별없이 사랑하시며 인간의 평화를 위해 일하시고 만민을 한 형제로 포용하신 그 영광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의 모습을 우리는 신약성서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식에 고통당하는 자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신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결심을 통하여 가능하며, 될 수 있으면 피해자에게 보상할 것을 명하셨고 다음에 요구되는 것은 사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확 증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크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 와 구원이 확보되었으며 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사유, 고침, 평강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근심과 공포에 싸인 자에게 평화를 주신 다. 근심과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믿음이다. 생(生)이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으며, 세상은 무관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과 능력 을 믿을 수 있을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역경에서 헤어날 수 있 다. 그러나 생의 허무, 세상의 무관심만을 주장하는 자는 살 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고뇌와 공포에서 신음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믿도 록 도와주는 동시에 사랑과 성실로 남을 돕는 과정 중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줌으로써 평화를 주신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오늘 본 문에 나타난 천사들이 노래한 평화이다. 예수가 오심으로 이루어진 유대 인과 이방인의 화해를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세계 평화도 우리가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만민을 위한 관심\'에 동참할 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의 탄생에 있어서 \'목자들의 경배\'가 지상의 반응이었다면 \'천사들 의 찬양\'은 곧 하늘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천사들은 한 입을 모아 찬양 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노래했다. 이 찬양 을 투해 예수탄생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던 것이다. 실로 인류 구 원을 위해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선하심은 정녕 찬양 받아야 마땅하다. 즉 하나님은 다른 일로도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하지만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신 사건은 특히 지극히 높은 곳에서 그 분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한편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 러한 선하심은 이 낮고 천한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으며, 참 평화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 롯되었다. 이처럼 허다한 천군천사들에 의해 증거된 믿음의 외침, 즉 하나님의 선 한 의지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가 된다는 이 말은 복음 중의 복음이요, 진리중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예수의 탄생후 최초의 경배자가 바로 목자들이었다는 오늘의 본문은 예수는 영혼의 목자장(牧者長)이시라는 것과, 선한 목자되신 예수는 양 들, 곧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신 분이라는 것, 예수는 유리방황하는 자들의 생명의 길과 안내자가 되신다고 하는 영적 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 인생의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시는 예수탄생의 소식을 기쁨으로 증거한 2,000년 전 목자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우리의 입술과 행위로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그렇게 될 때 이 기쁜 소식은 진정 모든 인류의 영혼을 구원할 복된 소식 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 시니라\" 메리 크리스마스 !! (Merry Christmas!!)
청소년 교육/신6:4-9/2002-09-20
청소년 교육 신6:4-9 . 5월에는 이미 어린이 교육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청소년 교육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새로운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를 후기 자본주의 사회, 포스트모던 사회, 디지털 사회, 네트워크 사회라고 불릴 정도로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몰고 오는 것은 컴퓨터와 전기통신의 급격한 발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집에 앉아서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까지 은행일, 관공서일, 무슨 계약하고 판매하는 일까지 다 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외국에 있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으려면 일주일씩 걸리던 일을 이제는 몇 초안에 편지를 주고받는 세상이 되었고, 어느 잡지사나 신문사에 원고를 보낼 때도 일일이 원고지에 정서(正書)를 해서 쓴 다음, 우체국에 가서 부쳐야 했는데, 이제는 인터넷 이메일로 원고는 물론, 사진까지 몇 초안에 보낼 수 있는 세상이니 너무나 편합니다. 그런 급속한 문화에 가장 영향을 받고 있는 세대가 오늘의 청소년들입니다. 그래서 그 세대를 \'N 세대\' 즉, \'네트 워크(net-work) 세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젖먹을 때부터 텔레비전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런 영상매체에 젖은 탓인지, 귀에다가 리시버를 달고 다녀야 하고 손에는 언제나 핸드폰을 들고 있어야 안정을 느끼는 것같습니다. 그리고 매일 인터넷에 들어가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공상으로만 가상세계를 그리던 우리 기성세대들의 입장에서는, 컴퓨터를 통해서 가상세계를 현실처럼 느끼고 있는 지금의 청소년들의 입장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점점 거리감을 느껴갈 것이 분명합니다. 더욱 부모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막막할 것이요, 그것은 교회학교 교사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일수록 우리 가정이나 교회는 청소년 교육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끝이 없습니다. 교육에 가장 중점을 두어야 시기는 변화기입니다. 마치 벌레가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번데기에서 나방이로 변화하는 시기가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7년을 주기로 해서 변화기가 옵니다. 이 때 잘 잡아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시기는 1-6세까지로 이 때는 인격의 80%가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신앙과 인격을 잘 교육시키면 일평생 건전한 인격을 갖고 맑고 밝은 성격으로 살아갈 것이나 이 때 마음에 상처를 입히면 비뚤어진 인격을 갖고 일생을 부정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교육학자들은 이 시기에 그 심령에 심어서는 안 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1)미움을 심어서는 안됩니다. 이 때에 억울한 일을 당하면 장성해서도 대인관계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해집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마음에 \'나는 부모에게 미움을 받고 잇다. 부모는 나를 원해서 낳은 것이 아니기에 싫으면서도 마지못해 기르고 있다\'라는 감정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죄책감을 심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죄책감이란 속으로 자기를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나 교사가 너무 심하게 꾸짖고 비평하면 그 아이 속에 죄책감이 심어집니다. 그러므로 \'너는 항상 말썽만 일으키느냐?\' \'이젠 너만 보면 지긋지긋하다\'라는 식의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3)열등의식을 심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열등의식이란 자기를 과소평가 하는 것이요, 다른 표현으로 하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의 다른 표현과 같습니다. 그런 의식은 인간관계를 원만치 못하게 만듭니다. (4) 공포감을 심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어린아이는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나 교사가 항상 무섭게 굴면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어떤 일에 대한 자신감이 점점 사라집니다. 또한 그런 감정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두려운 존재로만 알게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크게 두 번 째로 중요한 시기는 12살 때부터 16살 사입니다. 이 때가 소위 사춘기로 급격한 변화기 입니다. 이 때 바로 못 잡아주면 일생 비뚤기 쉽습니다. 1-6세 때 영향은 마음에 남지만, 12-16세 때 영향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아이는 초등학교 때는 모범생이었으나 이 때를 잘못 잡아줌으로 중고등학교에 가서는 완전히 비뚠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초등학교 때는 그렇게 속을 태우던 아이가 사춘기 때 잘 잡아주었더니 고등학교 때 모범생이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춘기는 대단히 변화무쌍한 시기입니다. 소년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시기로, 육체적, 심리적으로 폭풍우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체내의 홀몬의 변화로 콧수염이 생기고 성적으로 충동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여자인 경우에는 가슴이 커지고 경도(經度)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때는 너무나 불안하고 초조에 쌓입니다. 또한 새로운 욕구에 시달립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하고 싶고 이성(異姓)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방의 문을 걸어 닫고 부모에게도 무엇인가 숨기려고 합니다. 이유 없이 반항심이 일어나 부모나 교사, 어떤 권위에 대해 저항하고 싶어집니다. 이러한 초조와 불안, 고통의 시기에 우리 부모들이나 교사들이 잘 돌보아주어야지, 함부로 대하거나 무관심하면 비뚠 길로 빠지기 쉬우므로 일생 헤어나기 어려운 길로 빠질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시기는 18-21세 시기로 이 때는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사회로 나가는 성년기입니다. 본격적으로 대학이나 사회에서 홀로 서야 하는 때입니다. 직장이나 결혼문제는 물론이고 많은 성적인 유혹과 사상 문제에 시달리게 되기도 합니다. 이 때 우리 부모나 교사들은 그들이 홀로 서도록 조언해 주고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여러 가지 변화기에 우리 부모나 교사들은 어떻게 교육을 시키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 교육의 핵심입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민족이 있다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유대인들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계에서 가장 경이롭고 기적적인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수 천년 동안 나라를 뺏기고 세계 처처에서 추방당하고 히틀러에 의해 600만을 학살 당하는 최악의 날도 만나면서 완전히 망할 것같았으나 기적가운데 독립하고 중동의 모든 나라의 갖은 위협 속에서도 다윗처럼 우뚝 선 나라가 됨으로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을 수상한 나라이고, 스피노자, 하이네, 칼맑스, 로이첼, 와그너, 멘델스젼, 쇼팡, 샤갈, 컬럼버스, 마살,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로스 차일드, 폭스, 루즈벨트, 키신져, 럿셀, 레닌, 스타린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배출한 나라입니다. 어떻게 강원도 만한 땅, 인구가 지금 전 세계 유대인 모두 합치어 2천만도 안되는 나라에서 그런 위대한 인물들, 세계를 우지좌지할 정도의 경제가들이 나올 수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교육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교육의 방법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서 그 핵심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성경을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6절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교육의 제 일의 요지로 삼았습니다. 미국에서 목회 하는 친구 목사 이야기를 들어보면 유대인의 자녀들은 일반 미국 학교를 다녀오는 즉시, 다시 유대인의 학교에 간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서 그들은 성경을 철저히 배운다고 합니다. 유대인 교육 중 훌륭한 공부 방법 중의 하나는 아이가 한 살이든, 두 살이든,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에서라도 성경을 읽어준다고 합니다.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같지만, 아이의 무의식과 심층 깊은 곳에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무엇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까? 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가르치고 그만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면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 심령이 안정되고 그 머리에 지혜가 열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 자체의 큰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을 가르치는 것만이 인간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됩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면 인간이 바르게 될 뿐 아니라, 지혜도 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교육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과 교회에서 그 무엇보다도 성경을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유치부에서도 아직 어리다고 해서 소홀히 하지 말고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한국의 부모들은 학교가 끝나기 바쁘게 여기 저기 학원 보내기 바쁩니다. 믿음이 좋다는 부모들도 주일날 오후에 교회에 보내기 보다 한 자라도 더 배우게 할려고 야단입니다. 잘못된 모습입니다. 청소년 때도 무엇보다도 성경을 열심히 읽도록 해야 합니다. 그 때 지혜가 열립니다. 우리 딸아이가 고3 때 보니까, 그 바쁜 중에 성경 큐티(Q.T)를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목표한 대학에 가도록 지혜를 열어주신 것을 봅니다. 사랑하시는 부모님들이여, 교사 여러분들이여,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할지라도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성경만이 진리요, 성경만이 인간이 바로 되는 길이요, 지혜도 열리는 길이니 듣든지 말든지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교육의 방법은 온 가정, 온 교회의 모든 것을 교육에 활용하라는 것입 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르치는 일을 쉬지 않을 것과 온갖 기회를 다 이용하여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 했습니다. 언제, 어느 시간, 어느 환경에 있든지 성경 가르치는 일에 활용하라고 했습니다. 또 8-9절을 보면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마 율법 전체를 한꺼번에 기록한 사본들이 거의 없었고 기껏해야 절기가 되면 회막이나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낭독되는 정도가 전부였던 것같습니다. 그래서 율법 중의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 4절을 작은 가죽 주머니, 즉 \'메주자\'라는 작은 상자에 적어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적어도 하루에 두 번씩 읽도록 했습니다. 또 양피지 두루마리에 써서 손목에 걸고 다니든지 문설주나 바깥문에 기록함으로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게 되도록 온 가정, 온 모든 분위기를 신앙 교육의 분위기로 만드는 데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 교육의 분위기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태어난 때는 대단히 위험한 때로, 바로왕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모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공포적인 분위기에서 태어난 모세를 3개월을 숨겨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따라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되었고, 또 극적으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유모가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 요게벳은 자기에게 주어진 젖먹는 기간을 최대한의 신앙교육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앞으로 애굽의 교육이나 종교의 영향을 받기 전에 철저히 신앙 교육을 시키었습니다. 그 결과, 나중에는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먹을 때까지만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시켰는데 그 결과, 나중에 영적으로 타락할 대로 타락한 성전 분위기에서 조금도 악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어릴 때에 철저한 신앙교육을 시킨다는 것이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암 부드는 말하기를 \'우리는 마귀보다 먼저 손을 써야 한다. 마귀가 우리 자녀들에게 죄를 가르치기 전에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고, 뷰슈멜이라는 분은 \'어린이의 품격 형성에 있어서 세 살이 되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의 절반이 끝난다\'고 했습니다. 지금 청소년들이 자라는 환경은 대단히 유혹이 많고 많은 죄악의 함정이 파져 있습니다. 언제 실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고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때로 무슨 교육부서에서 \'신앙교육을 위해서 무슨 시청각 자재가 필요합니다\'라고 청구하면 교회 어른들 중의 어느 분은 \'무슨 그런 것이 필요한가, 성경만 있으면 되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교육을 보십시오. 나날이 그 방법이 발전되어 가고 첨단 교육자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몇 십년 전에 사용하던 낡은 방법이나 자재를 쓰고 있다면 아이들의 관심을 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앙교육을 위해서도 많은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만능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환경이나 사건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교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 식구 중 누가 갑자기 입원했거나, 혹은 대학 시험에 불합격되었다면, 그런 시련과 아픔을 통해서 성경말씀에 비취어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자라면서 몇 번의 흔들리는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같이 아파하는 심정으로, 같이 기도하는 자세로 진지하게 여러 시간 대화하면서 그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과 인도하심을 무엇인가를 가르쳤더니 신앙 안에서 바로 서는 것을 발견하고는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부모 여러분이여, 교사와 교회 어른 여러분이여, 우리는 우리 자녀들과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모든 재료와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교육방법은 먼저 부모나 교사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라고 강조하기 전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4-6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했습니다. 먼저 우리 어른이나 부모, 교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다하며 말씀을 마음에 새긴 후에 자녀들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교육의 가장 큰 영향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짐승들을 보세요. 말도 못하고 글자를 쓸 줄을 모르니 무슨 교육이 됩니까? 그러나 자세히 보면 짐승들은 어린 새끼들을 여기 저기 끌고 다니면서 자기가 먼저 시범을 보입니다. 그러면 새끼들은 유심히 보았다가 그대로 합니다. 본을 보이는 교육만큼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나쁜 본을 보이는 것만큼 악영향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많이 배운 분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모세에게 강한 영향을 준 것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모습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이를 젖을 떼고 나면 이제 영영히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요게벳의 마음은 불붙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젖을 먹이면서도 잠을 재우면서 안고 달래면서도, 혹은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모세의 뇌리에 깊이 박히어 일생 큰 영향을 주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나도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부유하지도 않았고 미모도 뛰어난 여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만은 뛰어났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켰으며 전적으로 기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무엘의 머리 속에는 그 어머니의 본이 깊이 새겨 결코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 친구 목사님의 간증을 들어보았습니다. 그가 보니까 자기 아버지는 위선자였다고 합니다. 어느 지방 도시에서 목회를 했는데, 교회 강단에서는 설교를 얼마나 잘 하는지, 그리고 교인들에게는 얼마나 자상한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에만 들어오면 호랑이로 변한다고 합니다. 조금만 잘 못해도 호령이 천둥 같고 어머니가 조금 말대답해도 어느 때는 욕을 하고 주먹질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교회를 안 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때는 대단히 탈선된 생활을 했는데 자기가 돌아선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불철주야로 기도하는지 쩍하면 철야요, 쩍하면 금식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러한 모습이 너무 싫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 기도하는 어머니 모습을 생각하면서 깨어졌고 결국 어머니의 소원대로 신학을 하고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 분은 나쁜 영향의 본을 보이고 한 분은 좋은 영향의 본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 다음 단호하게 신앙을 가르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가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십시오, 그 다음 여러분의 자녀들을 교회학교에 열심히 출석하도록 해야 합니다. 한나처럼 어린 사무엘을 성전에 맡기지는 못할 망정, 주일날은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여러분의 자녀들은 교회학교에 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맡기는 자세입니다. 성광교회 이충선 목사님은 「청소년 비행의 문제점과 그 선도대책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말하기를 \'청소년들이 교회의 중고등부를 출석하여 신앙으로 성장하는 자들은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희박하며 청년부의 90%가 중고등부 출신이라\'고 하면서 \'사춘기인 청소년 시절은 교회 외에 다른 그룹에 들지 못하게 하고 교회는 청소년들을 위한 적극적인 프로그렘을 개발하여 그들이 교회생활을 통해서 올바른 인격이 형성하도록 할 때 청소년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자녀는 교회학교에 출석하고 있습니까? 어찌든지 출석하도록 타이르십시오. 그리고 교회학교 교사들은 출석하는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돌보십시오, 어느 때는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지라도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귀하게 여기어 그 허물을 덮어주면서 잘 할 때에는 큰 칭찬을 아끼지 마십시오, 특히 이런 여름행사들을 통해서 우리 어른들은 어린 학생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청년들을 격려를 주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러한 용납과 격려를 통해서 귀한 인재로 자라갈 것입니다. 마리아 앤더슨이라는 흑인 성악가는 백년에 한번 나올 정도의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들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큰 인물이 된 것은 교회를 통해서라고 합니다. 한번은 이 성악가에게 어느 분이 질문하기를 \'당신이 이토록 유명한 성악가가 되기까지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앤더슨은 말하기를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철이 들면서 성가대에서 찬양을 했습니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독창자가 결석을 하는 날이면 지휘자가 제게 독창을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지휘자의 말에 따랐고, 예배를 마치면 목사님은 노래에 대해서 칭찬과 비평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독창하는 것이 좋았고, 목사님의 평을 듣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저는 절대로 교회에 빠지는 날이 없었습니다. 언제 제게 독창하는 기회가 주어질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제 노래 실력은 향상되어 가고, 주일마다 접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제 믿음도 노래 실력 못지 않게 커져 갔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부모님과 교사들 여러분이여, 우리 교회학교 학생들 중에 앞으로 모세나 사무엘 같은 인물, 마리아 앤더슨 같은 인물이 나오지 말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할 일은 우리들이 먼저 본을 보이면서 열심히 성경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특히 이번 여름 교육행사에 온 교인들이 동참함으로 우리 교회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청년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청소년들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엡1:
청소년들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엡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 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찬송하리로 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짂게서 그리스 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 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 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 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 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 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 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 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 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 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 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 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즈음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농구입니다. 지난해 텔레비젼 연속극 중에서 농구선수들의 삶을 소재로 한 \\\'마지막 승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연속극 방영시간이 되면 거의 모든 청소년들이 텔레비젼 앞에 모여서 심취했습니다. 이 연속극은 몇몇 탈렌트를 스타로 만들었고 심지어 노래까지 청소년들이 많이들 부르고 다녔습니다. 이 드라마는 자기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연속극이 전개되는 동안 동네마다 농구붐이 일어났고 청소년뿐만 아니라 국민학교학생들도 모이면 농구경기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그 이후 심방을 다니며 유치원아이를 두고 있는 가정에 가보면 예외없이 두 가지 놀이기구가 방에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나다라\\\' 한글배우는 표를 벽에 붙여 놓았고 다른 하나는 장난감 농구 골대를 방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이 현상을 보면 농구붐이 얼마나 우리 나라 청소년과 아이들 사이에 휩쓸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도 농구열기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어른들에겐 별로 큰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최소한 청소년들에게는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부산에서는 잠잠합니다만 요즈음 서울에서는 연일 농구대잔치가 벌어집니다.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삼성과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와 기아산업등 농구계를 주름잡는 대학팀과 실업팀이 경기를 벌일 때는 경기장은 경기시작 3시간 내지 4시간전에 표가 매진되고 자리가 잡힙니다. 지금 들끓고 있는 농구붐에서 결정적인 불을 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소위 \\\"오빠부대\\\"입니다. \\\"오빠부대\\\"는 농구경기장에 몰려와서 열광적으로 응원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농구선수의 건투를 비는 청소년들 - 대부분 여학생입니다만 -을 일컫는데 요즘 농구경기장의 관중석 80%는 이들로 채워집니다. 오빠부대는 경기가 벌어지면 괴성을 지르고 머리를 흔들고 자기가 챙겨온 응원도구들을 가지고 거의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정도로 광란적인 응원을 합니다. 슛이 터질 때마다 이들의 함성으로 경기장은 떠나갈 듯합니다. 이들은 누구인가? 이 오빠부대는 과연 누구이며 왜 그들은 열광하는가? 청소년들이 농구경기에 몰려들고 열광하는 현상에 대해 연구한 어떤 기자에 의하면 이들은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콘서트에 몰려들어서 열광하는 다소 해이해진 청소년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건전한 학생들이고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누가 보아도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학생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농구장에 들아가는 순간에 그들은 열광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왜 그들은 열광하는가? \\\"오빠부대\\\" 현상에 대해 탐구를 한 어떤 기자가 쓴 기사를 보니 납득할 것도 같고 그렇게 생각되지 않을 것도 같은 해석을 합니다. 이 기자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이 학교에서 대하는 대부분의 선생님이 여성이고 집에서도 주로 대하는 것이 어머니이지 아버지와는 얼굴도 마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즉 그들의 모든 환경이 여성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파격적인 남성적 힘을 그리워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외쳐되는 \\\"오빠\\\"라는 함성에서 마치 에밀레종소리의 여운처럼 \\\"아빠\\\"라는 소리가 자꾸 들려온다는 것입니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무의식적 반응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너무 비약적인 관찰인 것 같습니다. 저는 두 가지 현상을 분석합니다. 첫째는 농구경기장은 청소년문화의 집대성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는 \\\"힘\\\"과 \\\"스피드\\\"의 시대입니다. 10명의 농구선수들이 박력있는 힘과 스피드로 좁은 경기장을 뛸 때 거기에는 바로 그들이 흠모하는 모든 것, 즉 큰 키와 준수한 용모와 귀공자의 모습과 힘과 스피드가 넘쳐 흐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박진감 넘치는 스피드로 전개되는 곳이 바로 농구경기장입니다. 청소년들은 이런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즐기고 싶은데 그런 청소년 문화를 즐길만한 모든 곳은 퇴폐적인 곳입니다. 디스코 텍이 그렇고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인 듯해서 다가가면 어김없이 미성년자 출입금지구역입니다. 그러나 농구경기장은 공인된 장소이며 그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한꺼번에 집약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농구경기장은 그들의 \\\"해방구\\\"이자 \\\"점령지\\\"입니다. 또 다시 점잖은 어른들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농구의 경기규칙이나 그 절묘한 스포츠의 묘기를 좋아해서 농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적 발산을 할 수 있는 곳, 위험하지 않으면서 안심하고 가서 청소년의 그 끓는 피를 발산할 수 있는 곳, 그곳이면 그들은 언제든지 그곳으로 이동해 갈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은 \\\"수퍼스타\\\"를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2m를 넘어가는 장신선수들이 코트를 휩쓰는 모습은 수퍼스타의 모습입니다. 골대에 농구공을 넣는 슛도 제일 인기가 있는 슛이 소위 \\\"덩크 슛\\\"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그 높은 골대를 아예 잡고 공을 집어넣는 슛입니다. 이것은 초인적 힘을 발휘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저는 이들이 어떤 초인적 힘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록 오페라 형식으로 한 뮤지컬이 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수퍼 스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청소년들은 자기보다 월등히 위대한 어떤 존재를 분명히 기다리고 있고 이것이 그들의 메시야관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셋째는 그들이 부르는 \\\"오빠\\\"라는 호칭이 주는 의미입니다. 왜 그들은 스타들을 보고 \\\"오빠\\\"라고 부를까요? 그것은 현대청소년들은 \\\"친밀감\\\"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농구선수나 영화배우는 스타이고 아주 만나기 어렵고 머나먼 사이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농구선수를 \\\"오빠\\\"라고 부르면서 그들과의 친밀감을 만끽하려는 의도를 상당히 짙게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현대인들, 특별히 청소년들의 삶이 외롭고 너무나 거리감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가 드물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가정에서 부모님의 위치에서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토로하고 아버지의 품속에서 어머니의 품속에서 어울어 질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과거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밖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약간 특별한 관계정도이지 옛날의 아버지, 어머니의 이미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친밀함(Intimacy)이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저는 이 \\\"오빠부대\\\"들이 농구장을 찾아가는 것, 거기에서 괴성을 지르고 열광하는 것, 그것 자체는 결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젊음을 발산하고 그들의 문화를 꽃피우는 그 해방구와 점령구가 그들에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다른 사실에서는 슬프고 외로워집니다. 그것은 첫째는 그들은 그들이 담고 싶고 존경하고 싶고 애정을 보이고 싶은 \\\"수퍼스타\\\"가 필요한데 이들에게 농구선수가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농구선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인격과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에 정치인도 없고 교육자도 없고 스승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위대한 성인도 아니고 그 모든 존재들을 제치고 농구선수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분의 학생들이지만 이 이야기를 보편화하면 과연 오늘 내 자식들의 수퍼스타는 누구일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관심은 과연 오늘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둘째로 슬픈 현실은 우리 청소년들이 집에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면서 전혀 친밀감(Intimacy)을 느끼지 않고, 아버지가 안계시는 곳, 어머니가 안계시는 곳, 동생과 언니가 없는 그곳에 가서 가장 큰 \\\"친밀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오빠는 열광적으로 사랑할 오빠가 아니고 거기 농구경기장에서 자신들의 억압된 심리를 시원하게 헤쳐주는 그 선수들을 정말로 친밀한 어조로 오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오빠부대의 현상을 분석한 그 기자의 평가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오빠\\\"라고 부르면서 열광할 때 그 소리에서 에밀레종소리의 여운처럼 \\\"아빠...\\\"란 환청이 울리는 것은 우연일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들은 오늘 집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친밀감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집은 그들의 삶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합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있어도 너무나 가치관이 다르고 고민의 범위가 다르며 그들의 고민은 어머니의 고민, 아버지의 고민들 사이에서 고민같이 취급되지도 않기 때문에 함부로 털어놓지도 못하고, 털어놓아도 아무도 심각한 고민으로 이해해 주질 않습니다. 오빠부대로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있는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용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없는 청소년들은 그들의 친밀감을 표시할 아무 곳도 없습니다. 학교는 어마어마한 무한경쟁의 장이 되어가고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닌 무한경쟁자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들의 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자신들의 삶에만 너무 빠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가정이 친밀감을 표시할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서 가족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밀감이 존재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한번 물어보십시다. 여러분 자녀가 있는데 내 아들이, 내 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장 가까운 친구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아십니까? 내 자식이 외로울 때는 어떤 습성이 있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이 말못할 고민이 있을 때는 어떤 마음인지,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은 내가 어떤 아버지이기를, 어떤 어머니이기를 바라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점검표를 만들어 놓고 조사를 해 보시면 내 자식이지만 내 자식의 깊은 속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학비를 대 주고 밥은 해 주지만 더 이상 친밀한 관계가 아닙니다. 반대로 내 자식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자식들도 우리에 대해 그저 막연하게 아버지겠거니, 어머니겠거니 생각하지 우리의 깊은 속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현상을 그대로 우리가 묵과한다면 앞으로 함께 집에 살기는 해도 기숙사처럼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정과 사랑을 교환할 수 없는 그런 우리 가정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겠습니까? 멀어진 부모와 자녀의 사이를 가깝게 해 보려는 우리 교회의 몸부림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 어느 구석에서 마음을 터놓고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 안에서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관계가 새로 정립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모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재정립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먼저 하나가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아주 먼 존재였습니다. 그 분과는 감히 가까이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해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곁에 오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직접 만나게 되었고 그 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 장은 이 하나님과의 친밀해 진 관계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엡1:5) 우리 평범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엡1:7).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죄가 해결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전혀 거리낌이 없는 사이가 됩니다. 셋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비밀을 다 공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9). 넷째는 우리의 미래를 보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14). 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아주 거리낌이 없는 관계, 아무때든지 찾아갈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분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하나님과 무사통과(Free Way)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 이것 보다 더 큰 은사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면 그 다음에 모든 관계가 다 새롭게 정립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2장에 보면 지금까지 해 온 옛 생활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옆에 있는 나의 모든 이웃은 그냥 이웃이 아닌 나와 마치 건물의 벽돌이 연결되듯이 밀접하고 절친한 관계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남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이 하나님 안에서 동일한 성도요 시민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이웃이 이웃이 아닌 같은 가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한 건물을 구성하듯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5장에 오면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데 주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며 부모와 자녀가 서로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여움을 푸는 대상이 아닌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고 심지어 종과 상전의 관계도 서로 섬기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직도 벽들이 많은 모든 사이들이 전혀 벽이 없는 아주 자기와 가까운 사이로 변해간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에베소서의 메시지가 오늘 점점 친밀감을 상실해 가는 우리 가정과 사회에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이냐 하면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 멀어진 이웃과 이웃, 멀어진 남편과 아내, 멀어진 종과 상전, 멀어진 자녀와 부모를 가깝게, 친구되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이 제안은 오늘의 상황에서 들으면 지당한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종과 상전은 엄연히 다르고 하나님과 인간은 하늘과 땅 만치나 다르고 남편과 아내의 신분이 다르고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이처럼 친밀한 사회적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봉건사회처럼 억압적이고 위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주 안에서는 이 모든 사이가 격이 없는 친밀한 사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요지는 우리 청소년들이 마음놓고 찾아가고 안기고 할 수 있는 자기가 친밀하다고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정말 가까워야 할 주위에서는 없고 농구코트장이나 콘서트나 이런 곳으로 옮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가슴아픈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곳곳에서 너무 높은 벽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저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그래서 그들의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농구코트장이 그들의 해방구라고 하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교회도 청소년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보면 청소년이 원하는 것 보다는 어른들이 생각하는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충정은 있습니다. 아이들이 하자는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그래도 방향을 잡고 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염려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순간에 교회와 어른에 대해 너무 벽이 높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자기들의 요구와 소원을 들어줄 다른 곳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주안에서 부모님과 가까워지고 친밀하여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적 상황이나 삶의 현실을 볼 때 옛날 봉건시대처럼 억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개인주의화되어서 이제는 부모와 자식의 혈연적 관계마저도 별의미없는 것이 되고 가기 때문에 교회는 부모와 자녀가 주안에서 이 뜨겁고 친밀한 관계를 다시 회복하도록 하는 중요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에게 친밀할 수 있는 그 자리 그 공간, 그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이 하나님은 수퍼스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수퍼스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오빠, 내 동생으로 삼을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잔치에 참여하시고 소원해진 우리의 사이를 주안에서 다시 회복하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청소년들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엡1:1-14
청소년들은 무엇을 갈망하는가? 엡1:1-14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 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찬송하리로 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짂게서 그리스 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 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 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 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 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 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 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 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 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 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 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 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즈음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가 농구입니다. 지난해 텔레비젼 연속극 중에서 농구선수들의 삶을 소재로 한 ‘마지막 승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연속극 방영시간이 되면 거의 모든 청소년들이 텔레비젼 앞에 모여서 심취했습니다. 이 연속극은 몇몇 탈렌트를 스타로 만들었고 심지어 노래까지 청소년들이 많이들 부르고 다녔습니다. 이 드라마는 자기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연속극이 전개되는 동안 동네마다 농구붐이 일어났고 청소년뿐만 아니라 국민학교학생들도 모이면 농구경기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그 이후 심방을 다니며 유치원아이를 두고 있는 가정에 가보면 예외없이 두 가지 놀이기구가 방에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나다라’ 한글배우는 표를 벽에 붙여 놓았고 다른 하나는 장난감 농구 골대를 방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이 현상을 보면 농구붐이 얼마나 우리 나라 청소년과 아이들 사이에 휩쓸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도 농구열기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어른들에겐 별로 큰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최소한 청소년들에게는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부산에서는 잠잠합니다만 요즈음 서울에서는 연일 농구대잔치가 벌어집니다.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삼성과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와 기아산업등 농구계를 주름잡는 대학팀과 실업팀이 경기를 벌일 때는 경기장은 경기시작 3시간 내지 4시간전에 표가 매진되고 자리가 잡힙니다. 지금 들끓고 있는 농구붐에서 결정적인 불을 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소위 “오빠부대”입니다. “오빠부대”는 농구경기장에 몰려와서 열광적으로 응원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농구선수의 건투를 비는 청소년들 - 대부분 여학생입니다만 -을 일컫는데 요즘 농구경기장의 관중석 80%는 이들로 채워집니다. 오빠부대는 경기가 벌어지면 괴성을 지르고 머리를 흔들고 자기가 챙겨온 응원도구들을 가지고 거의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정도로 광란적인 응원을 합니다. 슛이 터질 때마다 이들의 함성으로 경기장은 떠나갈 듯합니다. 이들은 누구인가? 이 오빠부대는 과연 누구이며 왜 그들은 열광하는가? 청소년들이 농구경기에 몰려들고 열광하는 현상에 대해 연구한 어떤 기자에 의하면 이들은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는 콘서트에 몰려들어서 열광하는 다소 해이해진 청소년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건전한 학생들이고 공부도 잘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누가 보아도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학생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농구장에 들아가는 순간에 그들은 열광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왜 그들은 열광하는가? “오빠부대” 현상에 대해 탐구를 한 어떤 기자가 쓴 기사를 보니 납득할 것도 같고 그렇게 생각되지 않을 것도 같은 해석을 합니다. 이 기자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이 학교에서 대하는 대부분의 선생님이 여성이고 집에서도 주로 대하는 것이 어머니이지 아버지와는 얼굴도 마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즉 그들의 모든 환경이 여성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파격적인 남성적 힘을 그리워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외쳐되는 “오빠”라는 함성에서 마치 에밀레종소리의 여운처럼 “아빠”라는 소리가 자꾸 들려온다는 것입니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무의식적 반응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너무 비약적인 관찰인 것 같습니다. 저는 두 가지 현상을 분석합니다. 첫째는 농구경기장은 청소년문화의 집대성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는 “힘”과 “스피드”의 시대입니다. 10명의 농구선수들이 박력있는 힘과 스피드로 좁은 경기장을 뛸 때 거기에는 바로 그들이 흠모하는 모든 것, 즉 큰 키와 준수한 용모와 귀공자의 모습과 힘과 스피드가 넘쳐 흐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이 한꺼번에 박진감 넘치는 스피드로 전개되는 곳이 바로 농구경기장입니다. 청소년들은 이런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즐기고 싶은데 그런 청소년 문화를 즐길만한 모든 곳은 퇴폐적인 곳입니다. 디스코 텍이 그렇고 그런 문화가 있는 곳인 듯해서 다가가면 어김없이 미성년자 출입금지구역입니다. 그러나 농구경기장은 공인된 장소이며 그 낭만과 힘과 스피드를 한꺼번에 집약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농구경기장은 그들의 “해방구”이자 “점령지”입니다. 또 다시 점잖은 어른들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농구의 경기규칙이나 그 절묘한 스포츠의 묘기를 좋아해서 농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적 발산을 할 수 있는 곳, 위험하지 않으면서 안심하고 가서 청소년의 그 끓는 피를 발산할 수 있는 곳, 그곳이면 그들은 언제든지 그곳으로 이동해 갈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은 “수퍼스타”를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2m를 넘어가는 장신선수들이 코트를 휩쓰는 모습은 수퍼스타의 모습입니다. 골대에 농구공을 넣는 슛도 제일 인기가 있는 슛이 소위 “덩크 슛”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그 높은 골대를 아예 잡고 공을 집어넣는 슛입니다. 이것은 초인적 힘을 발휘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저는 이들이 어떤 초인적 힘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록 오페라 형식으로 한 뮤지컬이 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수퍼 스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청소년들은 자기보다 월등히 위대한 어떤 존재를 분명히 기다리고 있고 이것이 그들의 메시야관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셋째는 그들이 부르는 “오빠”라는 호칭이 주는 의미입니다. 왜 그들은 스타들을 보고 “오빠”라고 부를까요? 그것은 현대청소년들은 “친밀감”을 느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농구선수나 영화배우는 스타이고 아주 만나기 어렵고 머나먼 사이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농구선수를 “오빠”라고 부르면서 그들과의 친밀감을 만끽하려는 의도를 상당히 짙게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현대인들, 특별히 청소년들의 삶이 외롭고 너무나 거리감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가 드물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가정에서 부모님의 위치에서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의 인생을 토로하고 아버지의 품속에서 어머니의 품속에서 어울어 질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과거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밖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약간 특별한 관계정도이지 옛날의 아버지, 어머니의 이미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친밀함(Intimacy)이 그들에겐 존재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저는 이 “오빠부대”들이 농구장을 찾아가는 것, 거기에서 괴성을 지르고 열광하는 것, 그것 자체는 결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젊음을 발산하고 그들의 문화를 꽃피우는 그 해방구와 점령구가 그들에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다른 사실에서는 슬프고 외로워집니다. 그것은 첫째는 그들은 그들이 담고 싶고 존경하고 싶고 애정을 보이고 싶은 “수퍼스타”가 필요한데 이들에게 농구선수가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농구선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인격과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에 정치인도 없고 교육자도 없고 스승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위대한 성인도 아니고 그 모든 존재들을 제치고 농구선수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분의 학생들이지만 이 이야기를 보편화하면 과연 오늘 내 자식들의 수퍼스타는 누구일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관심은 과연 오늘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수퍼스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둘째로 슬픈 현실은 우리 청소년들이 집에서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면서 전혀 친밀감(Intimacy)을 느끼지 않고, 아버지가 안계시는 곳, 어머니가 안계시는 곳, 동생과 언니가 없는 그곳에 가서 가장 큰 “친밀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오빠는 열광적으로 사랑할 오빠가 아니고 거기 농구경기장에서 자신들의 억압된 심리를 시원하게 헤쳐주는 그 선수들을 정말로 친밀한 어조로 오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오빠부대의 현상을 분석한 그 기자의 평가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오빠”라고 부르면서 열광할 때 그 소리에서 에밀레종소리의 여운처럼 “아빠...”란 환청이 울리는 것은 우연일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들은 오늘 집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친밀감을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집은 그들의 삶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합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있어도 너무나 가치관이 다르고 고민의 범위가 다르며 그들의 고민은 어머니의 고민, 아버지의 고민들 사이에서 고민같이 취급되지도 않기 때문에 함부로 털어놓지도 못하고, 털어놓아도 아무도 심각한 고민으로 이해해 주질 않습니다. 오빠부대로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있는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용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농구경기장에 찾아갈 수 없는 청소년들은 그들의 친밀감을 표시할 아무 곳도 없습니다. 학교는 어마어마한 무한경쟁의 장이 되어가고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닌 무한경쟁자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들의 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자신들의 삶에만 너무 빠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가정이 친밀감을 표시할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에서 가족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밀감이 존재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한번 물어보십시다. 여러분 자녀가 있는데 내 아들이, 내 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장 가까운 친구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아십니까? 내 자식이 외로울 때는 어떤 습성이 있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이 말못할 고민이 있을 때는 어떤 마음인지,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내 자식은 내가 어떤 아버지이기를, 어떤 어머니이기를 바라고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점검표를 만들어 놓고 조사를 해 보시면 내 자식이지만 내 자식의 깊은 속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학비를 대 주고 밥은 해 주지만 더 이상 친밀한 관계가 아닙니다. 반대로 내 자식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자식들도 우리에 대해 그저 막연하게 아버지겠거니, 어머니겠거니 생각하지 우리의 깊은 속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현상을 그대로 우리가 묵과한다면 앞으로 함께 집에 살기는 해도 기숙사처럼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정과 사랑을 교환할 수 없는 그런 우리 가정이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겠습니까? 멀어진 부모와 자녀의 사이를 가깝게 해 보려는 우리 교회의 몸부림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 어느 구석에서 마음을 터놓고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 안에서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관계가 새로 정립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모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재정립하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먼저 하나가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아주 먼 존재였습니다. 그 분과는 감히 가까이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해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곁에 오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직접 만나게 되었고 그 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 장은 이 하나님과의 친밀해 진 관계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엡1:5) 우리 평범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엡1:7).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죄가 해결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전혀 거리낌이 없는 사이가 됩니다. 셋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비밀을 다 공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9). 넷째는 우리의 미래를 보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엡1:14). 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아주 거리낌이 없는 관계, 아무때든지 찾아갈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분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위 하나님과 무사통과(Free Way)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 이것 보다 더 큰 은사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면 그 다음에 모든 관계가 다 새롭게 정립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2장에 보면 지금까지 해 온 옛 생활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옆에 있는 나의 모든 이웃은 그냥 이웃이 아닌 나와 마치 건물의 벽돌이 연결되듯이 밀접하고 절친한 관계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남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이 하나님 안에서 동일한 성도요 시민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이웃이 이웃이 아닌 같은 가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한 건물을 구성하듯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5장에 오면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데 주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며 부모와 자녀가 서로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여움을 푸는 대상이 아닌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고 심지어 종과 상전의 관계도 서로 섬기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직도 벽들이 많은 모든 사이들이 전혀 벽이 없는 아주 자기와 가까운 사이로 변해간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에베소서의 메시지가 오늘 점점 친밀감을 상실해 가는 우리 가정과 사회에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이냐 하면 멀어진 하나님과 인간, 멀어진 이웃과 이웃, 멀어진 남편과 아내, 멀어진 종과 상전, 멀어진 자녀와 부모를 가깝게, 친구되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이 제안은 오늘의 상황에서 들으면 지당한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종과 상전은 엄연히 다르고 하나님과 인간은 하늘과 땅 만치나 다르고 남편과 아내의 신분이 다르고 자녀와 부모의 관계가 이처럼 친밀한 사회적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봉건사회처럼 억압적이고 위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주 안에서는 이 모든 사이가 격이 없는 친밀한 사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의 요지는 우리 청소년들이 마음놓고 찾아가고 안기고 할 수 있는 자기가 친밀하다고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정말 가까워야 할 주위에서는 없고 농구코트장이나 콘서트나 이런 곳으로 옮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가슴아픈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곳곳에서 너무 높은 벽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저 벽을 만나고 돌아서고 그래서 그들의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농구코트장이 그들의 해방구라고 하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교회도 청소년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보면 청소년이 원하는 것 보다는 어른들이 생각하는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충정은 있습니다. 아이들이 하자는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그래도 방향을 잡고 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염려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순간에 교회와 어른에 대해 너무 벽이 높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들은 자기들의 요구와 소원을 들어줄 다른 곳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은 주안에서 부모님과 가까워지고 친밀하여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적 상황이나 삶의 현실을 볼 때 옛날 봉건시대처럼 억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개인주의화되어서 이제는 부모와 자식의 혈연적 관계마저도 별의미없는 것이 되고 가기 때문에 교회는 부모와 자녀가 주안에서 이 뜨겁고 친밀한 관계를 다시 회복하도록 하는 중요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녀에게 친밀할 수 있는 그 자리 그 공간, 그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청소년과 부모님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이 하나님은 수퍼스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수퍼스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오빠, 내 동생으로 삼을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잔치에 참여하시고 소원해진 우리의 사이를 주안에서 다시 회복하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청소년들의 고통/ 전도서전11:9-10/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1997-07-20
청소년들의 고통 전11:9-10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청소년들의 고통”이라는 제목 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사이 청소년들의 문제가 가정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 및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청소년 폭력 문제는 중 고등학교 남녀 학생뿐 아니라 현제 초등학교에까지 전염되 고 있습니다. 그 위에 설상가상으로 청소년들의 성도덕 문 란은 이젠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 넘어 도가 지나치고 있습 니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지경이 되고 말았을까요?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문제 해답을 찾아야만 하겠습니까? 첫째로, 오늘날 이와 같이 되는 이유는 성경에 말씀한대 로 우리의 마음이 빈 집이 되어 있기 때문에 빈 집에 우환 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기를 어떠한 한 집에 주인이 없고 집이 깨끗이 정돈되었는데 옛날에 살던 귀신 이 와서 그 집은 보고 나가서 일곱 귀신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오니 그 집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빠졌다고 말 한 것입니다. 빈 집에 일곱 귀신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의 문제는 마음에 주인 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그 마음속에 의지 하고 살 수 있는 지배적인 신앙 사상이 없기 때문에 온갖 이 세상의 일곱 귀신이 다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들 의 마음에 정의와 진리와 의리가 없습니다. 힘센 자가 이깁 니다. 그러므로 폭력으로 주먹으로 그들은 인생을 살아가려 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황금 만능주의가 들어 와 서 돈벌이가 제일이다. 의리나 진리나 그런 것은 필요 없 다. 돈만 신속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면 제일이 다. 이런 사상이 그들 마음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또 쾌락 주의가 점령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유 행을 따르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행복하게 살고 더 쾌 락을 추구하고 살면 그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날 청소년들의 마음에 주인이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에 빈 집에 온갖 일곱 귀신이 다 들어와서 그 형 편이 말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청소년 문제를 해 결하려면 신속히 청소년들을 전도해서 예수님이 마음의 주 인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점령하지 아니한 마음은 청소년 뿐만 아니라 장년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 마음속에 세속의 귀신들이 꽉 들어차서 온갖 죄악을 다 저지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 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 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을 때는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으셨습니다. 이 성전에 성령이 와 계 시고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와서 계셔서 주인 있는 집이 되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도록 되어 있는 것 입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의 귀신들이 넘겨보거나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 성전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빈 집을 그대로 두니까 온 세상에 방종의 영들이 다 들어와서 마음속에 얼마나 크나 큰 혼잡을 일으키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혼돈의 성전에서 우리 청소 년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신속히 저들을 전도하여 저들의 마음속에 주인 있는 삶을 살도록 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 다. 예수님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고 하나님과 동시에 함께 사는 이러한 삶으 로 그들을 인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마음 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온다고 했는데 마음에 귀신이 가 득하니까 그들이 밖으로 나오는 행동 전체가 귀신의 행동 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주님이 와 계시면 그 들의 생활 행동에 주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둘째로, 오늘날은 도덕 부재의 시대인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이 처참하게 도덕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을까 요? 폭력을 행하고 심지어 친구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조그 마한 양심의 가책도 청소년들은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여 러분 중학생들이 포르노 영화를 보고 음란한 행동을 하고 도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도덕 적인 불감증에 걸린 것입니다. 국민일보 7월 16일자 발표에 보니깐 지난 5월 6일 경찰 청 전국 유흥업소 단속에서 적발한 4천여명의 사람들 중에 그 전부가 중학교 고등학교 여학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술집 들의 30%, 그 중에도 여중생 20%가 미성년자였습니다. 그 들은 밤에는 접대부 일을 하고 낮에는 학교를 가는 것입니 다. 그래서 번 돈으로 유흥비에 쓰고 과소비 합니다. 왜 이 런 일을 하느냐고 하니까 내가 좋아서 하는데 왠 참견이냐 고 말을 합니다. 그들은 극도의 도덕 불감증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왜 어린 청소년들이 이와 같은 도덕적인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까? 그것은 기존의 도덕적인 가르침이 그 규율을 잃 어 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농경 사회를 이끌어 가 던 유교적인 삼강 오륜이라는 도덕률이 산업화 사회에 들 어 와서는 권위를 잃어버리고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젊은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인 규범이나 법 칙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내가 무 엇을 잘못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잘못을 지적해 줄 그러한 법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검찰 ’96 범죄 100선’을 보면 소년 범죄가 지난 해보다 3 배 이상 증가했고 그 중에 강력 범죄, 살인죄 같은 그런 죄 의 3분지 1은 청소년들이 범하는 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 므로 이와 같이 매사에 열 다섯살 10대의 범죄가 오늘날 우리의 한국 사회에 적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왜 그러냐 하면 의식과 행동이 미숙한 청소년기는 충동적, 즉 흥적인 호기심 또는 집단의식 앞에서 비행에 쉽게 가담하 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회가 근검 절약 성실 이러한 미풍이 사라지 고 또 기성세대가 이런 청소년들을 퇴폐하게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술집 업주들이 말하기를 10대 소녀 를 찾는 어른들이 있는 한, 10대 소녀들의 접대부 전락은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른들이 10대 소녀들 을 좋아하고 그들에게 돈을 주고 그들의 서비스를 요구하 는 이상 돈 벌려고 하는 10대 소녀들의 타락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이끌어 갈 권위있는 도 덕률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도덕률을 우리가 어디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 도덕률은 성경이 가르치는 십계명 속에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사람의 계명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인 것입 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간 직하고 있으면 이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우리 행동을 판단해 주고 잘 했다 못했다를 분명하게 밝혀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도덕적인 규범이 없이는 무 엇이 잘못된 것이며 무엇이 잘한 것인가를 알 수가 없습니 다. 이렇기 때문에 청소년뿐 아니라 우리 장성한 사람들도 우리의 마음속에 언제나 십계명을 가지고 우리의 생활을 비추어 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계명과 인간과 인간과의 계명이 있는 것입니 다. 성경에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명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 룩히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계명인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이요 이 계명을 어기면 사람 이 하나님께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인간과 인 간과의 계명, 윤리적인 계명인 것입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 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덕질 하지 말라,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를 하질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이것은 인간과 인간과의 윤리적인 계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계명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 우리의 잘 잘못을 판단 내 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삶의 바른 길을 알고 잘못 살아갈 때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깨닫게 하는 길잡이가 바로 이 계명인 것입니다. 시편 119편 9절로 10절에 보면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 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 게 하소서” 주의 계명을 알아야,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않 는 행동을 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수가 있 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성 경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마음속에 분명한 율법, 분명한 계 명을 가지고 있으면 내 행동도 스스로 자제할 수 있고 다 른 사람의 잘못도 지적해서 기억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계명인 십계명을 뚜렷하게 가르쳐 주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계명 없이 그냥 공부만 시키고 성 공적인 인생을 만들기 위해서 애만 쓴다면 자녀 교육에 실 패하고 말 것입니다. 성경에는 잠언서 29장 17절로 18절에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 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참으로 복되게 하려면 율 법을 지킬 수 있도록 계명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여러분 우리 청소년들의 문제는 살인적인 유혹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오염된 사회에 정신적인 풍토가 청소년들이 도저 히 감당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 제일주의적인 사회적인 풍토, 배금 주의, 쾌락주의. 이러한 것들이 우리 청소년들의 마음을 완 전히 혼미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9절과 11절에서 12절에 ”부하려 하는 자 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 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오직 너 하나님을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 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 우라 영생을 취하라” 오늘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데, 벌써 청소년 시대부터 돈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들이 돈이라면 지위나 명예도 다 고사하고 윤리와 도덕 도 던져 버리고 돈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이러한 상 황이 되었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 협박도 하고 공갈도 하고 살인도 하고 몸도 팔고 음란 퇴폐 행위를 다 하게 되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염된 사회의 정신적인 풍토가 오늘 젊은이들 을 그러한 함정에 빠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면 퇴 폐한 영상물, 서적, 만화 등이 이 세상에 범람하고 있지 않 습니까? 과거의 세속적인 테잎이 든 공용매체를 통해서 청 소년들이 정신적인 안전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요사이 무 속을 조작하고 귀신프로가 그렇게 많고 환생물, UFO, 그런 정서 침해 장면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공포 장면이 나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요 사이 잡귀를 막는 장신구를 선전해서 팔지 않나, 전생을 보 는 구슬을 팔아서 학교에 모여 귀신 주문 외우고 그리고 대학 전공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굿을 들여다보는 이런 것 이 오늘날 학생 가운데에 유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적인 오염을 통해서 어떻게 정상적인 삶을 살 게 되느냐! 미래에 대한 불안, 믿음의 내용이 없는 자신감 없는 삶 속에서 이러한 TV나 영상 매체를 통한 세속적인 유혹이 젊은이들 마음을 부패하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 입니다. 더구나 퇴폐한 비디오 테잎이나 외설적인 서적, 폭 력 만화 등, 출판물은 형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비디오 가게에 가도 퇴폐한 비디오를 사서 볼 수가 있습니다. 외설적인 서적과 만화는 어느 곳에서나 범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내에 유통하는 일본 만화 그 변태, 잔인 함, 음란성은 가히 우리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여러분 1 년 동안 만화가 유통되는 것이 4백만부입니다. 그 4백만부 거의 전부가 인류를 파괴하고 학교를 파괴하고 공권력을 파괴하고 종교를 무시하는 그런 내용들로 꽉 들어 차있습 니다. 그리고 그 만화에 보면 사람 죽이는 법을 몸을 조각 조각 내라, 회칼로 난도질을 해라, 때려 부셔라 하는 그런 잔인한 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청소년 들이 매일매일 이런 퇴폐한 비디오 테잎 외설적인 서적 폭 력만화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그들이 정신적인 올바른 성장 과 발전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 23절에 보면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 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말했는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는데 악의 모양이 우리 사회 속에 범람하고 있고 그 악에 젊은이들이 심취해 들어가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학교 주변의 환경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을 상대 로 한 퇴폐 영업이 계속되고 있는 이상, 청소년들이 어떻게 유혹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학교에서 막 나오면 단란주점 이 있지요. 그리고 비디오 점이 있지요 만화가게가 있지요. 창녀촌이 있지요. 술집이 있지요. 모든 보고 듣는 것이 세 속적인 퇴폐와 방탕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청소년들 이 정신적으로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음란물 술 담배 폭력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어린아이들이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청소년들의 문제를 가지고 청소년은 이 래서는 안된다. 우리 성인들이 청소년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와 같은 환경 속에서는 퇴폐하고 방탕할 수 밖에 없는 그 런 상황 속에 서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문제는 부모의 무관심과 사랑의 결핍 같습니다. 옛 농경시대의 대가족 제도에서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하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들 간에 충분한 대화 의 시간이 있었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풍부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일이 고달프고 먹는 음식이 적었 더라고 그러나 부모와 자식과 가족들간에 서로 대화하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어서 사랑의 결 핍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독한 도시와 산업화 사회 속에서 모 두가 다 경쟁 상대자이고 모두가 다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없이 고독스럽습니다. 핵가족이 됨으로 말미암 아 인간관계가 부족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고 핵가족 이 되어서 어머니 아버지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 구와 따뜻한 사랑으로 대화를 가질 수 있는 그러한 관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시간에 쫓기는 삶과 그로 인해 부모와 자식간에 대화가 없습니다. 거의 오늘날 가정에서 아버지와 자식간에 대화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출근할 때는 자식들은 자고 아버지가 퇴근하면 또 자식들은 잡니다. 언 제 만나서 대화할 시간이 없고 공휴일에는 아버지는 놀려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거나 사업 때문에 자녀들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같이 살면서 거의 부모의 무관심과 사랑 결핍 증에 어린아이들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어린아이들은 길거리로 몰려나고 길거리가 그들의 대화 장소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요사이 제일 많이 쓰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 면 짜증나서 못 살겠다. 미쳐, 미쳐 사람 미치네, 그런 말입 니다. 애들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행복의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자녀의 양육에 대한 중대 한 책임을 가져야 됩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절로 4절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 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말했습니 다. 바로 이와 같은 고통 하는 시대가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사회에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애정 결핍과 무관심의 문제를 가정에서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가장 어린아이들의 심성이 성장하고 변화 받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여러분 자랄 동안에 부모 슬하에서 배운 모든 것이 그 일생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오 늘 청소년들에게 무엇이 제일 필요하냐고 물어 보면 그들 은 사랑이 제일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 다음 돈이 필 요하고 그 다음 친구가 필요하고 그 다음 믿음이 필요하다 고 말을 합니다. 청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 다. 그러므로 청소년들과 인간적인 대화, 인격적인 교제, 사 랑의 체온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모와 함께 서로 얼굴과 얼 굴을 마주보고 인간적인 대화를 해야합니다. 비교하지 말고 인격대 인격으로 교제하고 따뜻한 손길로 잡아 주고 얼굴 을 만져주고 함께 손을 잡고 걷고 함께 이야기하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요사이 어떤 한 부모가 자기 자식을 교육하기 위해서 신 발 닦는 직업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함께 전국 산을 같이 등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봤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식 간에 대화가 흐르고 따뜻한 사랑의 체온이 이것이 오래오 래 일생을 통해서 그 자녀의 마음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 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일체감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산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함께 이해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그런 공동체 의 식을 가정에 가져다주어야 어린아이들이 가정에 자기들이 한 인격으로서 인정받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청소년들이 고민하고 그대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에 대한 대화를 할 사람이 없습니다. 대화가 없으니 깐 자연적으로 잘못된 비디오나 만화 가게나 세속에서 배 우게 되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매일 같이 다르 게 자라납니다. 그리고 몸이 자라남과 동시에 생리적인 욕 구가 마음속에 충동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은 자라고 충동적인 욕구는 일어나는데 마음은 아직 자 라지 못하고 그것을 컨트롤 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하고 의 논할 상대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청소년들 은 잘못된 곳에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청소년 들은 왜 부모를 기피하느냐고 하니깐, 말해도 소용이 없다 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말을 하지 않자 전부 귀를 기우려 주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님께서 나를 용납해 주 시고 내가 어리석은 말을 해도 그것을 용납해 준다는 의식 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말이나, 혹시 범죄하 는 것이라고 해도 용납하고 잘 교육해 준다는 부모와의 따 뜻한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터놓고 무슨 일이든지 다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지금 지나고 보면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하고 모든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그들의 사생활 그들의 성적인 생활 그들의 생각 그들의 행동 하나도 없이 다 털어놓고 나와 이야기 했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나도 좀 부끄럽고 애 들도 부끄러웠지만 그러나 모든 그러한 충동적인 문제를 하나도 없고 나하고 무릎을 맞대고 대화하고 이야기를 했 기 때문에 그런 문제로 말미암아 폭발적인 잘못이 일어나 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부모님이 자라나는 자식들과 함께 마음 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그런 대화의 장을 열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곳에 가서 지식을 얻 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우리가 청소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 교 교육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학교가 완전 히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는 이상 인성 개발이나 도 덕 교육은 되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서 일류 대학을 가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니까 계속 암기 시키고 계속 공부시키는 일만 하지, 그들의 인성 교육이나 도덕 교육은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절에는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했는데 창조자를 기억할 시간 조차도 없습니다. 매일 경쟁 속에서 삽니다. 그러므로 만인 이 만인의 대적입니다. 모든 동료가 다 경쟁자로 대적자인 것입니다. 탈락자에 대한 것은 온 지방에서도 사회에서 냉 대를 합니다. 결과적으로 탈락한 청소년들은 꿈을 잃어버리 고 꿈을 잃어버린 청소년들은 자연적으로 탈선의 길을 걸 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므로 학교 교육이 입시 교육 위주가 되지 말고 그들 의 인성 교육을 하고 도덕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시간을 주 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많은 대학을 세워서 대학가고 싶은 사람 다 보내면 될 것인데 국가가 왜 이것을 막아 놓아서 이렇게 격렬한 경쟁을 하게 하는 것입니까? 미국과 같이 대학 들 어가고 싶은 사람 다 들어갑니다. 졸업은 다 못합니다. 공 부하지 않는 사람은 학점을 주지 않아서 졸업을 못합니다. 그런 형식을 왜 취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류병에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경찰청 집계를 보면 1996년도 자살 통계가 8632명이 그 자살 수는 세계 4위 내지 5위가 됩니다. 이중에 10대의 자 살이 615명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자살은 114명인데, 그 원인이 시험이라는 정신적인 부담과 학원 폭력 이런 것 을 통해서 낙심해서 자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학교 교육이 입시 위주로 되어서 오직 경쟁만 있고 사랑과 대화와 동정은 있을 수 없고 인류병 학력병에 걸려 있는 이상 젊은이들이 방종과 방탕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 스트레스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한 과도한 부모님 의 기대가 주는 스트레스도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부 모들이 모두 다 자녀들이 인류학교에 들어가게 되고 판사 가 되고 검사가 되고 교사가 되고 돈벌이를 잘 하게 되기 를 기대 하는데 자기는 도저히 부모와 뜻이 맞지 않고 능 력이 극에 달하면 거기에 대한 스트레스가 말로 다 할 수 가 없습니다. 부모의 기대를 이루어줄 수 없다는 마음의 가 책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부모와 사회의 권위에 그만 분노하게 되고 과다한 기대에 대해서 반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부모가 자식을 너무 그렇게 코너로 밀어서는 안됩니다. 부모는 자기가 못한 것을 왜 자식에게 걸고 밀고 합니까? 자식이 취미를 살리고 자기 스스로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도록 협조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식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자기 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 4장 18절에서 19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 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 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어린아이들은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에 좌절감, 열등의식, 고통이 꽉 들어 차 있어서 그 분노 속에 자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그런 청소 년들 부모도 이야기 할 상대가 되지 않고 이웃에게도 이야 기 할 상대가 없으니 자동적으로 이 세속에 빠져서 나쁜 환경 속에 떨어져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의 문제가 하루 이틀 만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가정과 사회와 학교 교육과 국가 의 교육 정책이 실패한 자업자득으로 일어나 생긴 것입니 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인으로써 옳게 가르치고 우리 민 족의 미래를 걸머진 청소년들을 바로 교육할 수 있도록 청 소년 전도와 사랑의 사역에 힘을 써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 교회가 나가서 이 청소년들을 돌이키고 저들에게 그 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교육해 나갈 밖 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한국 교회는 성인들을 전도하고 성인들 을 구원하는 일에 전략을 기울이고 청소년 문제에 대해서 는 형식적으로 지나 왔습니다만 이제는 청소년 문제가 폭 발적인 사회 문제가 되어서 교회가 늘 가만히 있을 수 없 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우리가 이젠 일어나서 실제적으로 청소년 사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뛰어 들어 가서 변혁을 가지고 오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교회가 고민하고 우리 성도들이 고민하고 부모들이 고민하며 청소년을 위해서 더 많은 시 간과 관심을 기울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께서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 국은 저들의 것임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청소년들은 주님께 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로 가고 세속으로 가서 허랑 방탕하고 몸도 마음도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 지! 이를 생각할 때에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요, 우리 가정 의 실패요, 오늘날 교회의 실패인 것을 우리 아버지 앞에 고백하고 자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시옵소서. 우 리의 손길을 내밀어 바로 우리의 친 자식들이 세속에서 죽 어 가고 있는데 그들을 건지지 못하는 무력함을 주님께 의 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다시 한번 우리가 기도하고 우 리의 자녀들 우리의 청소년들을 위해서 무언가 우리가 그 리스도의 사랑으로 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등지고 우환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슴 속이 텅 비어 있고 그 속에 온갖 세상 귀신이 다 들어 와서 날 뛰고 있 으니 그들이 정신적인 혼란을 견디지 못합니다. 아버지 그 들의 빈 집에 참 주인인 예수님을 전달하게 도와 주시옵소 서. 예수님이 그 마음속에 들어와서 점령하여서 귀신을 다 쫓아 내고 마음에 사랑으로 평안으로 넘치도록 도와 주시 옵소서 우리 부모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 자녀들과 대화와 서로 따뜻한 사랑의 체온을 통해서 저들의 삶을 도 와주고 받들어주고 힘을 주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옵소 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청소년들의 고통/ 전도서전11:9-10/ 청소년주일설교/ 2012-05-30
청소년들의 고통 전11:9-10 요사이 청소년들의 문제가 가정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및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청소년 폭력 문제는 중고등학교 남녀 학생뿐 아니라 현재 초등학교에까지 감염되고 있습니다. 폭력과 본드흡입, 성 도덕 문란은 일반적인 상식선을 뛰어 넘어 위험수위에 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문제 해답을 찾아야만 하겠습니까? 1. 청소년들의 마음이 빈 집이 되어 있기 때문에 빈 집에 우환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성경은 어떠한 집에 주인이 없고 집이 깨끗이 정돈되었는데 옛날에 살던 귀신이 와서 그 집을 보고 나가서 일곱 귀신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 오니, 그 집의 나중 형편이 처음 보다 더 나빠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그 마음속에 의지하고 살수 있는 지배적인 신앙 사상이 없기 때문에 온갖 이 세상 일곱 귀신이 다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의 마음에 정의와 진리와 의가 없습니다. 힘센 자가 이깁니다. 그러므로 폭력과 주먹으로 그들의 인생을 살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황금 만능주의가 들어 와서 돈이 제일이라는 가치관을 갖고 의나 진리나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게 합니다. 또 쾌락주의가 점령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좋은 유행을 따르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행복하게 살고 더 행복을 추구하고 살면 그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청소년들의 마음에 진정한 주인이 들어와 있지 않기 떠문에 빈 집에 온갖 일곱 귀신이 다 들어와서 그 형편이 전보다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려면 신속히 청소년들을 전도해서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6절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거하셔서 주인 있는 집이 되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귀신들이 넘겨보거나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빈 집으로 방치해 두면 온 세상에 방종의 영들이 다 들어와서 마음속에 크나큰 혼잡을 일으킵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저들의 마음 속에 주인 있는 삶을 살도록 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고 하나님과 동시에 함께 사는 이러한 삶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악한 영에 마음이 사로잡힌 사람은 귀신의 행동을 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주님이 와 계시면 그들의 생활 행동에 주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현대는 도덕 부재의 시대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폭력을 행하고 심지어 친구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조그마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중 고생들이 포르노 영화를 보고 심지어 자신들이 직접 어른 흉내를 내면서 포르노 영화를 만들고 음란한 행동을 하고도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불감증에 걸린 것입니다. 최근 경찰청 전국 유흥업소 단속에서 적발한 4천여명 모두가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밤에는 접대부 일을 하고 낮에는 학교를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번돈으로 그들은 유흥비로 탕진 합니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좋아서 하는데 웬 참견이냐\\\\\\\\\\\\\\\"는 식의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극도의 도덕 불감증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검찰의 [96년도 범죄 100선]을 보면 소년 범죄가 3배 이상 증가했고 그 중에 살인, 강도등 강력 범죄의 3분의 1은 청소년들이 범하는 죄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의식과 행동이 미숙한 청소년기에는 충동적,즉흥적인 호기심 또는 집단 의식 앞에서 비행에 쉽게 가담하는 충동성이 있기 떠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마음을 이끌어 갈 권위있는 도덕률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이 도덕률을 우리가 어디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 도덕률은 성경이 가르키는 십계명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사람의 계명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으면 이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의 잘잘못을 지적해 주고 우리 행동을 판단해 주고 잘했다 못했다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청소년 뿐 아니라 기성 세대들도 마음 속에 언제나 십계명을 가지고 우리의 생활을 비추어 보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계명과 인간과 인간과의 계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명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명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계명인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어기면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사이의 계명, 윤 리적 계명은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입니다. 이러한 계명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있어야 우리의 잘잘못을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바른길을 알고 잘못 살아갈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게 하는 길잡이가 바로 이 계명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분명한 율법, 분명한 계명을 가지고 있으면 행동도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계명인 십계명을 뚜렷이 가르쳐 주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계명없이 그냥 공부만 시키고 성공적인 인생을 만들기 위해서 애만 쓴다면 자녀 교육에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성경에는 잠언서 29장 17절로 18절에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참으로 복되게 하려면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계명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외설적인 유혹 환경이 청소년 탈선의 원인입니다. 오늘날 오염된 사회에 정신적인 풍토가 청소년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제일주의적인 사회풍토, 배금주의, 쾌락주의. 이러한 것들이 우리 청소년들의 마음을 완전히 혼미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9절과 11절에서 12절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는데, 벌써 청소년 시대부터 돈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들이 돈이라면 지위난 명예, 윤리와 도덕도 던져 버리고 돈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이러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염된 사회의 정신적 풍토가 오늘 젊은이들을 그러한 함 정에 빠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무속을 조장하는 귀신프로가 그렇게 많고, 환생물, UFO에 관련된 공상 장면이나 공포 장면이 나와서 청소년들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잡귀를 막는 장신구, 전생을 본다는 구슬, 귀신주문 외우기, 굿판은 오늘날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적인 오염을 통해서 어떻게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TV나 영상 매체를 통한 세속적인 유혹이 젊은이들 마음을 부패하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더구나 퇴폐적인 비디오 테입이나 외설적인 서적, 폭력 만화등 출판물은 청소년들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어떤 비디오 가게에 가도 퇴폐한 비디오를 빌려볼 수 있고 외설적인 서적과 만화는 어는 곳에서나 범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내에 유통되는 일본만화는 변태성, 잔인함, 음란, 폭력성이 우리 상상을 초월합니다. 1년 동안 일본 만화가 유통되는 것이 4백만부 입니다. 그 4백만부 거의 전부가 인륜을 파괴하고 학교를 파괴하고 공권력을 파괴하고 종교를 무시하는 그런 내용들로 꽉 들어 차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화를 보면 사람 죽이는 방법이 단순히 총이나 칼로 단번에 죽이기 보다 얼려 죽이고 몸을 조각내는 등 인간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은 매일 매일 이런 퇴폐적인 비디오, 외설적 서적, 폭력 만화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그들이 정신적인 올바른 성장과 발전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4.부모의 무관심과 사랑의 결핍이 청소년을 타락시킵니다. 옛날 농경시대의 대가족 제도에서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들 간에 충분한 대화의 시간이 있었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풍부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결핍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독한 도시와 산업화사회 속에서 모두가 다 경쟁상대자이고 모두가 다 적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고독합니다. 시간에 쫓기는 삶으로 인해 부모와 자식간의 대화가 없어졌습니다. 아버지가 출근하면 자식들은 잡니다. 아버지가 퇴근해도 또 자식들은 잡니다. 만나서 대화할 시간이 없고 공휴일에도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친구를 만나거나 사업때문에 자녀들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같이 살면서도 어린 아이들이 무관심과 사랑 결핍증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요새 제일 많이 쓰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짜증나서 못 살겠다\\\\\\\\\\\\\\\" \\\\\\\\\\\\\\\"사람 미치겠네\\\\\\\\\\\\\\\" 라는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행복의 말이 없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절로 4절은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여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고통하는 시대가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사회에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애정 결핍과 무관심의 문제를 가정에서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심성이 성장하고 모양새를 갖추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성장하는 동안에 부모 슬하에서 배운 모든 것이 그 일생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에게 무엇이 제일 필요하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사랑이 제일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청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청소년들과는 인간적인 대화, 인격적인 교제와 사랑의 체온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모와 함께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인간적인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인격대 인격으로 교제하고 따뜻한 손길로 잡아주고 얼굴을 만져주고 함께 손을 잡고 함께 이야기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와 자식간의 대화 속에 흐르는 따뜻한 사랑의 체온은 오래오래 일생동안 그 자녀의 마음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일체감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함께 이해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그런 공동체 의식을 가정에 가져다 주어야 어린 아이들이 가정에서 자기들이 인격적으로 인정받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대화가 없으니 자연적으로 잘못된 비디오나 만화등 세속적인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5.학교 교육의 문제가 청소년 문제를 낳습니다. 오늘날 학교가 입시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는 이상 인생개발이나 도덕 교육은 되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서 일류 대학을 가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하기 때문에 계속 암기 시키고, 계속 공부시키는 일만 하지, 그들의 인생교육이나 도덕교육을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전도서 12장 1절에는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청소년들은 꿈을 잃어 버리고, 꿈을 잃어버린 청소년들은 자연적으로 탈선의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므로 학교 교육이 입시위주의 교육이 되지말고 그들에게 인생교육을 하고 도덕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찰청 집계를 보면 1996년도에 자살한 사람은 8천6백32명 이며 세계 4위 내지 5위가 됩니다. 이 중에 10대의 자살이 6백 15명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자살은 1백 14명인데 그 원인은 대부분 시험이라는 정신적인 부담과 학원폭력 이런 것을 통해 낙심하여 자살한 것입니다. 그러 므로 이와같이 학교 교육이 입시 위주로 되어서 오직 경쟁만 있고 사랑과 대화와 동정은 있을 수 없고 인류병, 학력병에 걸려 있는 이상 젊은이들의 방종과 방탕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과도한 부모님의 기대가 청소년들에게 스트레스를 줍니다. 부모들은 모두다 자녀들이 인류학교에 들어가고 판사와 검사가 되고 교사가 되고 돈 벌이를 잘하게 되기를 기대하는데 자기는 도저히 부모와 뜻이 맞지 않고 능력에 한계에 달하면 거기에 대한 스트레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 다 부모의 기대를 이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코너로 밀어서는 안됩니다. 자식이 취미를 살리고 자기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협조를 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식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 4장 18절에서 19절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어린 아이들은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좌절감, 열등의식, 고통이 꽉 들어차 있어서 그 분노 속에서 자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그런 청소년들은 부모도 이야기 할 상대가 되지 않고 이웃도 이야기 할 상대가 되지 않으니 자동적으로 이 세속에 빠져서 나쁜 환경 속으로 떨어져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청소년들의 문제는 하루 이틀 만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동안 가정과 사회와 학교 교육과 국가의 교육 정책이 실패한 결과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옳게 가르치고 우리 민족의 미래를 걸머진 청소년들을 바로 교육할 수 있도록 청소년 전도와 사랑의 사역에 힘을 기울여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 교회가 나가서 이 청소년들을 끌어 안고 저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꿈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한국 교회는 성인들을 전도하고 성인들을 구원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청소년 문제에 대해서는 형식적으로 지나 왔습니다만은 이제는 청소년 문제가 폭발적인 사회 문제가 되어서 교회가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젠 일어나서 실제적으로 청소 년 사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뛰어들어 변혁을 가지고 오는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청소년을 살려야 한다/욜2:28-30
청소년을 살려야 한다/욜2:28-30 2007-05-17 10:34:21 read : 92 \\\"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序言> 청소년을 영어로 \\\'틴에이저\\\'(Teenager)라고 합니다. 13세(thirteen)에서 19세(nineteen)까지 모두 \\\'틴\\\'(teen)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10대를 가리켜 \\\'틴에이저\\\'라고 합니다. 이 때에는 신체뿐 아니라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는 때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치관의 변화가 있을 때입니다. 자존감을 찾으려 하고 자기만이 갖는 가치관을 찾으려 합니다. 전에는 부모의 가르침과 요구에 의해 살았지만 대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때입니다. 이 때 결정하는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이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신앙적 가르침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국민일보에서 수도권 중고등부 신앙생활 실태에 대해 조사한 것을 보면 86%가 스스로 하나님 자녀임을 확신하고, 87%가 기도하고 평안을 얻었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우리 어른들보다 훨씬 신앙이 좋습니다. 어른은 가치관이 변하기 힘듭니다. 어린이는 부모에 의존적입니다. 그러나 청소년은 자신이 가져야 할 가치관을 찾는 시기이기 때문에 바른 가치관을 심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그 때 형성된 가치관이 평생 갑니다. 그러므로 청소년은 그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미래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행불행을 결정짓는 주체입니다. 그들을 살리지 않는다면 가정은 파괴될 것이고 교회는 노인만 남게 될 것이고 사회는 피폐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을 위해서는 투자를 해야 합니다. 때가 늦기 전에 말입니다. <本論> 1. 마음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서울 강남교회 고등부 담임하는 홍민기 목사는 수련회에서 카지노 게임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 어른들이 무슨 교회 수련회에서 노름을 다 하느냐고 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마음 벽을 허물기 위해 카지노를 하기로 했고 이왕 하기로 결정했으니 3주에 걸쳐서 철저히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테이블도 페인트 칠해가면 만들었고 칩도 남대문 수입상가에 가서 꼬박 이틀만에 찾아 구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소문을 내고 기대감을 가지더라는 것입니다. 홍 목사님은 카지노 게임을 할 때 적극적으로 동참했다고 합니다. 직접 블랙잭 딜러를 했다고 합니다. 카드를 10세트를 섞어서 능수능란한 손놀림으로 딜러를 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다른 데서 돈을 따도 목사님 한테 와서는 잃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목사님에게 따려고 계속 도전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칩을 다 잃게 되면 그냥 주지 않았습니다. 블랙잭을 해서 돈을 다 잃으면 다른 코너에 가서 성경퀴즈를 풀어야 했고 답을 맞추면 칩을 다시 주었다고 합니다. 성경한번 안 읽던 아이들이 성경을 읽고 외우는 역사가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수련회에서 연속 이틀 카지노를 하면서 부딪히고 웃고 즐기고 나누는 동안 그들과 가로막혀 있던 벽이 무너지는 성과가 있었습니다. 웃고 재미있게 어울려 놀다보면 스스로 마음 문이 열립니다. 마음이 닫힌 상태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음 문이 확 열리기만 하면 실컷 놀다가 단 한번 예배를 드려도 건성으로 열번을 드린 것 보다 큰 효과가 있습니다 . 많은 교회가 예배만 너무 많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노는 게 없습니다. 찬양도 중세나 18세기에 만들어진 찬송가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수련회가서도 그렇습니다. 기껏 교제를 위해 프로그램 마련한 것이 6~70년대에나 했음 직한 수건놀이나 하고 마지막 날에는 캠프 화이어를 합니다. 처음부터 놀고 교제를 해야 마음을 여는데 처음에는 예배 프로그램과 성경공부 프로그램만 하다가 맨 뒤에 노는 프로그램을 하는 것을 봅니다. 청소년 사역은 그들과 함께 뒹굴지 않으면 안 하는 게 낫습니다. 같이 놀기 싫다면 설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들과 같이 뒹굴며 놀던 목사가 단상에서 설교하면 아이들이 졸지 않습니다. 자기들과 같이 놀고 먹고 운동하던 목사가 나와서 설교하는데 의리가 있지 어떻게 졸겠습니까? 저 인간이 날 위해 저렇게 노력하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졸랴? 생각하고 듣습니다. 기도라도 해주면 \\\'저 인간이 나를 위해 저렇게 열심히 기도해 주는데 내가 변해야 하겠구나 하고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2.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껴야 합니다. 서울 강남교회 고등부 담임인 홍민기 목사가 수련회에서 참담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화장실 뒤에서 한 녀석이 망을 보고 한 녀석은 담배를 빨리 피우려고 마구 빠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의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목사님이 아끼는 아이들이 목사님의 눈을 피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들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거짓으로 자기를 감추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태도를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담배를 오랫동안 많이 피운 사람이 담배를 못 피우게 되면 미칩니다. 그런 아이라 할지라도 수련회에 와야 하고 그런 아이일수록 교회를 더욱 다녀야 하겠기에 차라리 목사님이 담뱃불을 붙여주기로 했습니다. 흡연학생 일반 청소년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나오는 청소년들도 상당히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한두시간 있다가 집에 가기 때문에 괜찮지만 수련회는 몇일씩 하기 때문에 담배 피우는 아이들에게는 여간 곤욕이 아닙니다. 그런 아이들은 따로 불러 모아놓고 아예 담뱃불을 붙여 주었습니다. 물론 자유롭게 피워도 된다는 것은 아니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식후에 한번씩만 허락하고 목사님이 주는 담배만 피워야 하고 목사님 앞에서만 피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담뱃불을 붙여 주는 자는 반드시 변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미국에서 목회하면서 수련회를 할 때는 수련회 장소에서는 절대 금연을 해놓고, 담배 피우는 학생들을 15인승 승합차에 태우고 수련회 장소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담배를 한개비씩 나눠 주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담배 피우는 장소에 첫날에는 15명이 모였는데 그 다음날에는 10명 그 다음날에는 3명으로 줄어들더니 수련회가 끝날 때 쯤에는 아무도 안 나왔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여태껏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사람만 만나보았지 거꾸로 담배를 외딴곳에 데리고 가서 피우라고 주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담배를 피우라고 주는 이가 목사라는 것이 개운치 않았습니다. \\\'꼭 이렇게까지 담배를 얻어 피워야 하나?\\\' 하면서 자신이 싫어진 것입니다. 또 목사가 이런 일로 어른 교인들에게 욕먹고 오해받는 것을 보면서 \\\'저 목사님 나 때문에 고난 받는구나!\\\'생각하는 자연히 담배가 멀어지더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하루에 네갑을 피우는 학생이 수련회를 따라왔다고 합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따로 불러다가 담배를 주고 불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이 아이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다음날 식후에 담배 피우러 나오라 하는데도 안 나가겠다고 하더랍니다. 안 피우겠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웃으면서 \\\"네가 어제 예수님을 만난 일을 좋은 일이야 하지만 하루에 네갑씩 피우던 녀석이 단번에 끊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오늘은 피워라\\\" \\\"안 피워요 목사님\\\" 아이는 안 피운다고 하고 목사님은 피우라고 성화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중에는 금단현상 때문에 얼굴이 하얗게 되고 손을 떨며 힘들어 했지만 끝까지 피우지 않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교회에서 금기시되는 것이라 해도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번쯤은 피우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다보니 그들과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정이 들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그들은 목사님은 전적으로 믿게 되었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청소년들을 향해 \\\'너는 이것이 잘못이다\\\'라고 지적해서 그 아이가 변화되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변화는 그 아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감해 줄 때 일어납니다. 우리 청소년들의 외적인 모습에 촉각을 곤두세워서는 안됩니다. 담배 피우는 모습, 술 마시는 모습, 머리에 물들인 모습, 귀고리 한 모습, 코나 입술이나 혀에 피어씽 한 모습 자체를 보면 그들의 중심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우리와 사이는 더욱 멀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올 가능성이 더욱 없어집니다. 교회에서 그런 아이들을 수용해야 합니다. 대개 교회 다니는 어른 교인들은 그런 아이들이 와서 물을 흐릴까 걱정합니다. 그러나 구태여 교회까지 와서 물을 흐릴 애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냥 세상에서 놀지 교회까지 오지 않습니다. 교회에 온다는 것은 무언가 변화하고픈 몸부림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도와 상충된 교회의 분위기 때문에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돌아갑니다. 다니는 교회에 안 오려 할 것입니다. 교회는 어려움에 빠져 찾아오는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청소년은 힘듭니다. 정신적으로 갈등합니다. 방황합니다. 가보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길을 홀로 가면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바른 가치관을 제시해줄 멘토(mentor)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가치관을 제시해줄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주위에 그런 모델이 없습니다. 그래서 청소년은 인터넷, 영화, 연극, 심지어는 TV 속의 드라마 속에서 고민의 해답을 찾습니다. 여러분 청소년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대상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친구\\\'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친구는 4위입니다. 3위가 교사와 목사입니다. 2위가 놀랍게도 친척 어른입니다. 1위는 부모입니다. 진정으로 청소년을 그들 입장에서 이해하고 도와 주기에 좋은 입장에 있는 사람은 부모입니다. 그들의 고민을 들으십시오.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십시오. 그들이 결정할 수 있는 배려를 하십시오.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모델이 되어 주십시오. 3.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문화의 장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한국 부모들의 가치관은 이원론적입니다. 아무리 믿음 좋은 것 같이 해도 교회 밖에서는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삽니다. 자녀 교육에서도 공부 제일주의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 잘 나오던 아이가 안 나오기에 심방을 갔답니다. 그 부모는 집사님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 아들이 주일에 빠져서 걱정돼 왔다고 하니까 어머니 되는 여집사님이 \\\"목사님 제 아들이요 이제야 정신차렸어요 오늘 학원에 갔어요\\\"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여집사님은 학원가는 것이 정신 차린 겁니다.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이 예수 안 믿는 사람과 같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매일 같이 \\\'공부 잘해라\\\'는 말 밖에 않습니다. 조금 믿음이 좋다 싶으면 \\\'주 안에서 공부 잘해라\\\'입니다. 교회 목사와 교사들은 \\\'신앙생활을 잘해야 공부 잘한다\\\'고 속입니다. 온통 \\\'공부\\\' 잘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상숭배입니다. 이제 쉴 틈을 좀 주십시오. 1시간 내내 공부하다가 10분 쉴려고 할 때 \\\"야 또 TV냐?\\\" 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집에 가서 공부 좀 할려고 결심하고 집에 들어서는데 들어서자 마자 \\\" 야 공부 좀 해라\\\" 하지 마시시오. 대화가 온통 공부 밖에 없다. \\\"학교 갔다 왔니? \\\" \\\"예\\\" \\\"공부 열심히 했어?\\\" \\\"예\\\" \\\"학원 가야지?\\\" \\\"예\\\" \\\"공부 열심히 해라\\\" \\\"예\\\" \\\"학원 갔다 왔어?\\\" \\\"예\\\" \\\"공부 좀 하고 자야지?\\\" \\\"예\\\" 부모는 온통 공부이고 아이는 생각없이 대답한다. 조금이라도 생각있는 대답을 하면 또 이야기가 길어질까 봐 그냥 \\\"예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마침 무슨 축구나 야구 경기 하는 날이면 \\\"경기 좀 보고 공부해라\\\" 한다. 그러다가 잘하는 선수 나오고 해설자가 그 선수 어디 출신이라고 하면 \\\"야 역시 좋은 대학 가고 봐야 돼!\\\" 아주 쉴 틈이 없도록 스트레스를 줍니다. 한국 부모 미국 가서도 얼마나 공부에 열을 올리는지 다른 영어는 못해도 \\\'하버드\\\' \\\'예일\\\' \\\'프린스톤\\\'은 발음 정확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실제 가고 싶어하는 학교는 그런 학교가 아니라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입니다. 부모가 지겨워서... 어떤 부모는 자녀가 교회에 가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엔 교회 안 온다고 공부하는 것 아닙니다. 공부하는 것이 재미 없는 아이는 교회에서 놀지 못하게 하면 나쁜 곳에 가서 놀 수 밖에 없습니다. 공부는 못해도 신앙생활 잘해서 건전하게 자라는 것이 좋지 공부도 못하고 나쁜 길로도 빠지면 좋겠습니까? 설사 공부는 못해도 건전하게 자라고 행복하게 살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혹 공부를 잘한다 해도 청소년기에 가치관이 건강하게 되지 못하면 뒤에 그 인생이 행복하겠습니까? 부모를 기쁘게 해줄 것 같습니까? 부모를 순종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각 사람을 낸 때에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달란트(재능)를 주었습니다. 그 재능은 공부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미술일 수도 있고 운동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다양합니다. 인생의 행복과 성공은 그 하나님이 부여한 달란트를 잘 활용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꼭 학과 과목 성적이 좋아야 성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껏 신앙 좋다고 해 봐야 우리 아이 공부 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교회에서는 신앙생활 잘해야 공부도 잘한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보기엔 신앙하고 공부 잘하는 것이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 없어도 공부 잘할 수 있고 신앙이 있어도 공부 못할 수 있습니다. 공부 잘한 아이도 신앙이 좋으면 하나님이 쓰시고 공부 못한 아이도 신앙이 좋으면 하나님이 쓰십니다. 반대로 공부 잘해도 신앙이 없으면 불행하게 되고 공부 못해도 신앙이 없으면 불행하게 됩니다. 공부를 잘하면 잘 한대로 못하면 못 한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고 행복해야 합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권이 하나님께 달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청소년 때에는 신체의 변화도 있지만 생각의 변화도 심할 때입니다. 대부분 이 때 가치관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항상 공부만 하라고 한다면 아이가 스트레스 받게 되고 가치관의 혼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생각처럼 못하게 되면 불만과 반항과 포기 상태에 빠져 들기도 합니다. 그 굳어진 가치관은 평생가게 될지도 모르고 그 자녀에게까지 되물림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에게 달란트를 확인하고 개발하고 마음대로 펼칠 수 장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거의 장년을 위한 교회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투자는 거의 안 합니다. 기껏 소예배실 하나 마련해준 것이 다 입니다. 왜 그럴까요 헌금이 안 나오기 때문일까요? 이제 그들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그들이 마음껏 달란트를 펼질 문화의 장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타락한 아이들처럼 살지 않기 위해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하지 말라고만 하지 청소년기에 발산해야할 즐거움을 건전하게 풀 장이 없습니다.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경험하지 않는 것을 하면 변화가 두렵기 때문에 곧 정죄하고 못하게 합니다. 전에 어떤 분은 어렸을 때 보수적인 교회에 다녔는데 교회 본당에서 기타를 치다가 장로님에게 뺨을 맞았다고 합니다. 본당에서 기타를 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청소년의 뺨을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은 모르는 세대입니다. 지금도 CCM이나 랩이나 힙합을 하면 마귀 보듯 합니다. 이제 좀더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이 교회를 통해 자유롭게 생각과 행동이 성장하도록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에서 운동회 영화관람 연극 콘써트 등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그런 환경이 못될 땐 다른 곳에 데리고 다니면서라도 접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막대한 돈이 들어가더라도 어른들이 헌금해서라도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도 투자해야 합니다. 좀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가 작지만 매년 필리핀 단기선교를 데리고 갑니다. 사실은 미션트립의 의미도 있지만 비젼트립의 성격이 강합니다. 좀더 성장하면 캐나다에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벤쿠버를 보게 하므로 UN에서 지목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는 것이 어떤 개념인가 알게 해주고 싶습니다. 긴 록키 산맥을 넘어 캘거리까지 가면서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의 세계가 얼마나 웅장한지 보여 주고 싶습니다. 캘거리 루이스 호수를 보여 주면서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 곳 관광지를 돌면서 선진국의 문화와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갑니다. 세계관이 세워질 청소년기에 어른들이 투자해서라도 넓은 시야를 갖게 해야 합니다. <結言> 청소년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는 때입니다. 그 때 예수를 만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성령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아려 주어야 합니다. 말씀의 가치관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잠22:6). 청소년 한 영혼을 변화시키면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가정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변화시키고 학교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마지막 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고 성령께서 그들을 감동시키고 성령께서 그들을 헌신케 할 것입니다 (욜2:28-30). 우리의 청소년들을 사무엘처럼 온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사무엘처럼 길러야 합니다. 비록 여자이고 부모를 일찍 잃었지만 포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한 에스더처럼 길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