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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궤의 삶/ 삼하19:31-37/ 오세용 목사/ 전주강림교회/ 은급주일설교/ 2003-10-05
공궤의 삶 삼하19:31-37 은급주일은 은퇴하신 사관님들의 생활을 후원, 또는 보조하기 위하여 일년 일차씩 특별헌금을 합니다. 일생을 목회에 바치고 나서 노년을 보내면서 거처할 집도 있어야 하고, 양식도 있어야 하고, 일상 잡비도 있어야 하고, 건강 관리해야 하고, 은퇴는 했지만 가족들과 같이 보내지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은퇴하고 나면 속 시원하다! 하고,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아서 여기저기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몇 개월이지 목회가 좋아서 하신 분들이니까 목회 더 했으면 하는 아쉬움뿐이랍니다. 그렇다고 농사를 질수 있는 힘이 있나요? 배워둔 기술이 있나요? 그 동안 못한 연구를 하자니 몸은 쇠하고 물질의 뒷받침이 없다보니 한정된 공간에서만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교단의 은퇴 목사님들도 그렇겠지만 구세군의 은퇴 사관님들은 워낙 물질이 부족합니다. 제가 목사로 있을 때입니다. 아는 사관님이 제게 목사님! 부업할 때 없어요? 부업 좀 해야겠어요. 하는 것이었어요. 얼마나 생활하기가 힘들면 그러실까? 얼마나 목회가 힘들면 부업을 해야 하겠냐고 생각하니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던 일이 있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구세군 사관은 부업도 하면 안되고, 혹 어떻게 해서 했다손 치더라도 그 돈은 본인 돈이 아니고 구세군에 납입을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참 어렵죠... 일생을 목회에만 전념하다보니 몸도 일찍 망가집니다. 건강진단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간단하게 체크하는 정도입니다. 적어도 일년 일차 정기검진을 받도록 교회에서 대주면 조기 발견할텐데, 목회라는 것이 정말 힘든 직업입니다. 제일 힘든 직업입니다. 단순 노동이 아닙니다. 단순 기술도 아닙니다. 힘 갖고 되는 것도 아니고, 지식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물질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정도 가족도 목회의 조력자입니다. 아내가 먼저 세상 떠나면 목회하기 힘들고, 목사가 먼저 떠나면 사모는 어찌되는지 아십니까? 교회라도 크면 후원자도 있겠지만 자그마한 교회라면 빈손 들고 사흘 세방 구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장로교 목사님은 장로님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외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일로 고민이 되었는데.. 때마침 중풍에 걸렸습니다. 결국 목회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이 교회 재정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거든요. 또 다른 목사님은 교회 짓고 나서 너무 몸이 쇠하여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목회자는 성도만을 생각하고, 교회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만 생각하다가 슬프게 세상을 떠나는 경우를 보고들을 때면, 사명이 아니고는 갈수 없는 길이구나... 하고, 다시금 십자가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올 여름인가? 조기 은퇴하신 사관님이 계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사관님은 수술을 몇 번하고 나서도 몸이 회복이 안되고 해서 더 이상 목회하는 것이 무리라 조기 은퇴했습니다. 은퇴 예배때 동기 사관님들이 참석하고 보니 참으로 처량하고, 안됐고, 눈물을 흘리고 왔답니다. 우리 구세군은 조기은퇴해도 은급비 안나옵니다. 65세 지나야 은급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목회하는 일이 감사하고 좋아서 부르심에 응답하여 왔지만, 그런 저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도 저러지는 않으려나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목회자를 생각하고 계시다면 관심을 두고 있다면 조용히 기도하여 주는 것처럼 후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관이 돈을 빌리러 갈 수도 없고 친구가 있어도 만나는 시간이 적고, 모임이 다르고 자연히 간격이 생깁니다. 어디다 손 벌릴 곳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후원이 아니면 안된다 이 말씀입니다. 성서 갈라디아서 6장 6절에 기록되기를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누어야 합니다” 라고 말씀했고, 신명기 12장 19절에는 ”너희는 삼가 그 땅에서 사는 동안 레위인들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여라”했으며, (공동번역)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물질이나 정신적으로 공궤를 해야 하는 일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미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쳐 성도들에게 말씀을 공급하다가 이미 은퇴하신 사관님들을 공궤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님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을 위하여 눈물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은퇴 사관님들의 수고하신 그 수고로 우리의 믿음이 자랐고, 이나마 라도 있다고 하는 감사의 표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바르실래와 다윗의 공궤의 모습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삼하19:32-33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 팔십 세라 저는 거부인 고로 왕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하였더라.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여기서 ’공궤하다’ (히: 쿨) 는 ’떠받치다’, ’제공하다’ 의 뜻으로, 특별히 물질적인 필요를 제공해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길르앗의 거부 바르실래가 다윗 왕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안 내내 왕과 그의 일행들을 공궤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일이 고마워서 그동안 자기를 공궤해 준 바실래에게 보답하겠다는 다윗 왕의 말입니다. 바르실래는 나이 80이나 되는 고령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어려움을 당하며 이리저리 쫓길 때 공궤한 사람입니다. 함께 잘 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했습니다. 성서에서는 바르실래가 무엇으로 공궤하였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삼하17:28-29) 바르실래 그가 부자이기에 다윗을 공궤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돌보는 긍휼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위험한 줄을 알면서도 다윗의 일행을 위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공궤를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르실래가 부자였기에 긍휼을 베풀었다고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공궤할 수 없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못본체 할수도 있습니다. 안들척 할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남을 돌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신입니다. 성도에게 예배는 참 중요합니다. 예배가 살면 성도의 삶이 삽니다. 그런데 주님은 예배 잘 드리는 것보다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을 더 좋아하십니다. (마9:13) 예배도 성공하고 사랑을 베푸는 일에도 성공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윗 역시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노인, 바르실래를 잊지 않습니다. (33절)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다윗은 다시 왕의 권세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고 망명 생활을 할 때 자신의 공궤한 한 노인을 잊지 않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을 받았으면 또 줄줄 아는게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세태가 각박하게 되는 것은 주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은 것을 느낄 때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원로 목사님의 말씀에 ”다 소용없어. 돈이 있어야 한다니까. 자네도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몸 망치지 말고 적당히 하며 노후대책 세워!” 좋은 충고인지 나쁜 충고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사랑의 메아리가 없음을 가슴으로 뼈아프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메아리칠 때 아름답습니다. 어제 구세군 사관학교 교장님의 말씀 중에 운동경기는 주어야 이긴다고 하시면서, 공을 주어야 하고, 받아야 하고, 받아야 하고, 주어야 하고/ 주고, 받는 것이 운동경기다. 이와같이 사랑도 주고, 받는 실제적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공궤는 실제적인 사랑입니다. 한쪽 사랑은 짝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이웃과 짝사랑하지 마세요. 특별히 부부와는 짝사랑하면 안됩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우스게 글을 소개합니다. 어느 청년이 결혼 주례를 교수에게 부탁하러 갔습니다. ”교수님! 주례를 부탁하러 왔습니다. 사례는 얼마나 해야 할까요?” 제자의 말을 들은 교수는 ”신부가 이쁜 만큼 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는 결혼 예식이 끝나고 100원을 교수에게 주었습니다. 100원을 받은 교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잠시 후 교수는 50원을 제자에게 주었습니다. ”제자는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이 돈은 무엇입니까?” ”거스름 돈 일세....” 사랑하면 모두 이쁨니다. 공궤는 마음만 아니고 실제적입니다. 십일조 드리고 성미 드리는 것이 마음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실제적일 때 복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은 마음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었습니다. 구원도 예수님을 나의 구원주로 실제적으로 영접하면 죄에서 구원받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먹고삽니다. 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입니다. 영생을 얻은 우리입니다. 이제 우리가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알고 경험했다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희생하는 분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주님 바라보고 선교비를 보내듯이 이미 일생을 쏟아 부은 은퇴 사관님들을 우리가 각자 만나 뵙지는 않았지만, 주님의 종으로서 노후를 안정되게 보내실 수 있도록 은급비를 마련한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보답입니다. 감사하는 보답의 신앙을 가지고 헌금을 합니다. 혹 오늘 잊으신 분이 있다면 다음주일에 꼭 참여하여 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우리는 상이 있기에 선행도 하지만, 마땅히 할 일이기에 한다는 마음이 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 마음, 그 신앙으로 공궤의 삶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공궤하는 삶/ 삼하19:31-37/ 은급주일설교/ 2003-04-26
공궤하는 삶 삼하19:31-37 오늘은 은급주일입니다. 일찍부터 우리 감리교회는 은급주일을 정하여 이미 은퇴하신 목사님들을 공궤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궤(供饋)란 윗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미 자신의 청춘을 바쳐 성도들에게 말씀을 공급하다가 이미 은퇴하신 목사님들을 공궤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님도 사실입니다. 오늘은 꼭 은퇴 목사님들이 아니더라도 신앙인의 공궤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배우고자 합니다.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성경의 진리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받기만을 바라는 믿음의 행태가 만연하는 이 시대의 성도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바르실래의 공궤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입니다. 그는 나이 80이나 되는 고령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기에 다윗이 압살롬의 모반으로 어려움을 당하며 이리저리 쫓길 때 마하나임에서 그를 공궤한 사람입니다. 소비와 마길과 함께 잘 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했습니다. (삼하17:28-29)입니다.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정정이 불안한 상태이기에 곤궁에 처한 다윗 일행을 돕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돌보는 긍휼을 지닌 사람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부자였기에 긍휼을 베풀었다고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다윗을 공궤할 수 없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분명히 들에서 이리저리 쫓기는 다윗과 군대가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를 것 같아 긍휼을 베풀었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남을 돌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신이어야 합니다. 성도에게 예배는 참 중요합니다. 예배가 살면 성도의 삶이 삽니다. 그런데 주님은 예배 잘 드리는 것보다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을 더 좋아하십니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배도 성공하고 사랑을 베푸는 일에도 성공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공궤 성경은 진리입니다.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성경이 바르실래와 다윗 간에 이뤄집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이 평정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노인, 바르실래를 잊지 않습니다. (33절)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다윗은 다시 왕의 권세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고 망명 생활을 할 때 자신의 공궤한 한 노인을 잊지 않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을 받았으면 또 줄줄 아는 게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세태가 각박하게 되는 것은 주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은 것을 느낄 때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원로 목사님의 말씀이 귓전에 쟁쟁합니다. “다 소용없어. 돈이 있어야 한다니까. 자네도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몸 망치지 말고 적당히 하며 노후대책 세워!” 좋은 충고인지 나쁜 충고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사랑의 메아리가 없음을 가슴으로 뼈아프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메아리칠 때 아름답습니다. 다윗은 그 사랑의 메아리의 멋을 아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바르실래를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셔 가 잘 후대하려 했지만 바르실래는 자신은 늙어서 좋은 것을 모른다고 거절합니다. (35절) “내 나이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실은 후미의 말이 그 진짜 이유입니다. 자신은 그냥 사랑으로 했을 뿐이니 상으로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대신 김함을 추천합니다. 다윗은 김함에게 바르실래가 구하는 대로 그를 위하여 베풀겠다고 약속합니다.(38절)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의 공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궤하는 삶을 명령하십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을 이렇게 공궤하였으니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공궤를 또한 이렇게 갚았으니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르실래와 다윗이 아니라 신앙인, 바로 그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두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공경하는 마음이 믿음이라면 공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행위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약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오늘 말씀에서 바르실래도 다윗도 그들의 공궤는 구체적입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그 사랑을 받은 다윗은 원하는 대로 공궤하겠다고 합니다. “공궤(供饋)”는 공경하는 마음이 아니고 공경하여 드리는 음식입니다. 실제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하나님을 공궤하는 두 가지 방법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가.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성경에는 엄연히 십일조를 말씀하는데요.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 십일조가 레위자손에게 주어졌습니다. (민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그리고 그 십일조는 이웃을 공궤하는 일에 쓰였습니다. (신26:12)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십일조는 드림으로 축복받는다는 말라기 기록이 있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 공궤의 수단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 성미입니다 사전은 ‘성미(誠米)’를 “종교 단체의 신도들이 신에게 기도하거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하여 정성껏 모아 바치는 쌀”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공궤는 항상 먹을 양식과 관계됩니다. 애굽을 비롯하여 중근동 전역에 기근이 들었을 때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초청합니다. 요셉은 야곱을 태우고 올 수레를 보냈는데 그 때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창45:23)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비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비에게 길에서 공궤할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예, 먹을 양식을 딸려보내 공궤하였습니다. 또, (창47:12) “또 그 아비와 형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식물을 주어 공궤하였더라” 애굽 땅에 온 아버지와 형제들을 또 그렇게 공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종이 성도의 공궤를 받도록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왕상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한 끼니 먹고 죽으려던 것을 주의 종에게 공궤하고 더 큰 축복을 받은 이야기는 성미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꼭 은급주일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신앙인은 서로 공궤하는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공궤를 생활화한 사람입니다. 양과 염소비유에서 오른 쪽 양들이 외칩니다. (마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할렐루야!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전도서전11:1-6/ 동인천감리교회/ 은급주일설교/ 2010-02-21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전11:1~6 은급주일은 일생을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수고하신 목회자들과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요 성취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치가 있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큰 기쁨이 소유가 아니라 나눔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29) 1. 일곰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2절) 방탕한 생활(10:16~19)과 대조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연락하고 잔치하기 보다도 남을 위하여 던지고 나눠주는 생활을 합니다. 떡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에 나눠줘야 합니다.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 얼굴을 들 것이라 (욥22:24~26)\"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 (마 6:19~20)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 19:17) 2. 풍세를 살펴보는 자 좋은 날씨와 최싱의 여건이 주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은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어떤 일이든지 어려움과 난관을 각오하고 시작해야 결실이 있습니다. 예수께 영생을 얻기 위해 찾아왔던 부자 청년은 근심하다가 예수를 따르지 못했습니다.(마19:16~22)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6)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3.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5절)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와 조화 속에서 모태에서 아기의 뼈가 자라나는 것 같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일은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않는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생활입니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한 분들/ 딤전5:17-18/ 은급주일설교/ 2010-02-23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한 분들 딤전5:17-18 우리 감리교회가 일찍부터 은급 주일을 설정하여 평생동안 성역을 마치시고 은퇴하신 목사님들의 업적을 기리며 예배드리는 것은 대단히 귀한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은급주일은 물론 은급제도는 다른 교단에서 생각도 못했던것을 우리 감리교단에서 먼저 착안하여 실시하였고 타 교단에서 우리를 본 받아 실시 해 가고 있읍니다. 또 우리 일신교회에서는 지난 20년간 본제단을 섬기고 은퇴하신 김상봉 목사님을 원로 목사님으로 추대하고 예우해드리는것도 다른 교회에 모범이 되고 있읍니다.그런의미에서 우리 일신교회는 훌륭한 교회요 자랑스런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감리교회의 90여년의 역사가운데 3700교회 120만 성도로 성장한것은 원로 목사님들과 믿음의 선배 성도들의 피땀흘린 공로를 기억하지 않을수 없읍니다. 우리 일신교회가 42년동안 이만큼 부흥성장하게 된것도 조경우 목사님,나정희 목사님, 이정엽 목사님,김상봉목사님,이덕수목사,백승배목사,김영국목사,김기정전도사,이용성전도사 어항용목사,김경실전도사님들의 노고와 이미 고인이되신 분들이나 원로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성도님들의 충성스런 봉사에 힘입은 것이였읍니다. 경로의 정신은 어느 민족 사회에서나 반듯이 갖어야할 미풍양속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우리 교회안에 있어서의 경로사상 고취는 해가 거듭할수록 고창해야 할 아름다운 전통이 돼야 할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한 분들을 배나 존경하라” 말씀의 교훈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져 합니다. 1.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신분들을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특별히 원로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을 존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것이니라” “배나 존경하라” “더 존경하라” 고 거듭 거듭 강조하고있읍니다 원로목사님 장로님들을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성도의 본연의 자세란 것입니다. 레19:32에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공경하라 나는 야훼니라” 레위기의 말씀은 부모에 대한 공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노인 앞에서라도 마음을 부드럽게하고 존경의 표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그리고 특이한것은 노인 공경과 하나님 공경을 똑같은 맥락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노인을 공경하며--하나님을 공경하라” 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노인을 존경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 많이 들면 겉 모습이 변하고 신체가 약해 집니다. 지난 여름 개인적으로 원로원을 방문한적이 있읍니다. 제가 모셨던 임목사님 내외분은 80이 넘으신 분들입니다. 목사님은 등창이 나서 고통을 견디시기 어려울 정도시구요 사모님은 귀를 전혀 못들으셨읍니다. 소시적에 대단하신 분들이였읍니다.감기 한번 안걸리고 무슨 일이든 해 내시던 분들이셨읍니다.은퇴하시기 직전만 해도 기골이 장대하시던 분들이 어린애들처럼 약해지셨읍니다.정말 눈물겨웠읍니다.그래서 지난 성탄절을 기하여 여선교회와 구제헌금중에서 적은 위문금을 원로원에 보내드렸읍니다.전달은 전도사님이 하셨는데 원로원에서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전화까지 왔읍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고 은퇴하신 원로 목사님들을 위하여 항상 관심을 가지고 정성스런 기도와 뜨거운 마음으로 위로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읍니다. 왕상1:에 보면 희안한 애기가 나옵니다. 다윗이 나이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그 신하들이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아비삭을 구하여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왕으로 따뜻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나라 임금이기도 했지만 노인을 특별히 존경하는 구체적인 실례를 보여준 것이 였읍니다. 우리도 다윗의 신하들과 같이 원로분들을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되겠읍니다. 2. 존경을 실천 합시다. “배나 존경하라” “더 존경 할 것이니라” 한것은 존경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왕상12:을 보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물려 받았을때 백성들의 청원이 들어왔읍니다.“부왕 솔로몬이 백성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하소서 선정을 베푸소서” 지극히 당연한 청원이요 호소였읍니다.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일에 대하여 부왕 솔로몬때의 충신이였던 노신하들을 불러모아놓고 자문을 들었읍니다. 노신하들은 “왕이시여,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되여 백성을 섬기고 좋은 말로 이르시면 백성이 영영히 왕의 종이되리이다.” 르호보암은 이 충언을 듣지않았읍니다. 그리고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젊은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했읍니다.그들은 ”나의 새끼 손구락이 부왕의 허리보다 굵으니 부왕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하였으나 이제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할지니라 내 부왕은 채찍으로 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정치하리라 하소서“ 라고 자문했읍니다.이건 자문이라기보다 아첨이였읍니다. 르호보암은 노신하들의 충성스런 자문을 저버리고 자기귀에 달콤한 아첨을 따랐읍니다. 그 결과는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비극을 초래하고야 말았읍니다. 부왕의 훌륭한 노신하들을 말로만 존중했을 뿐 실제는 경시했던것입니다. 잠언서 기자는 잠16:31에서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고 하였읍니다. 일생을 믿음의 덕을 쌓기위하여 수고하고 노력한 노인들,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위하여 백발이되신 원로목사님들을 더 존경하라는 말씀입니다. 생각 해 보세요 목사는 참으로 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적으로보면 불쌍한 존재입니다. 누가 욕하면 욕 먹어야되고 때리면 맞아야 하고 가두면 갇혀야하고 죽이면 죽어야 합니다.부하는 없고 상전만 있읍니다. 그래서인지 “종”이라 이름지어 주었읍니다. 성경시대 종은요 부자집 재산목록 중의 하나였읍니다.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읍니다. 돈으로 사고 팔고 주인 마음대로 죽이고 살릴수도 있었읍니다.마찬가지로 주의 종의 삶은 주님의 종이기도하고 사람들의 종이기도 합니다. 목사에 대한 인식이 괜찮아진것이 사실상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얼마되지 않았읍니다. 이런 종의 삶을 평생을 살고 은퇴하셔서 거룩한 여생을 마무리해 가며 거룩히 살아가시는 원로 분들을 보게 될때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지도자 모세-얼마나 훌륭했겠읍니까? 그런데 그도 측근들에게 배척을 받았읍니다. 모세는 그의 측근 고라라는 사람이 250명의 사람을 모아 조직적으로 모세를 배척하였고 온 백성들의 원망 불평의 소리가 극에 달하자 땅에 엎드려 어찌 할바를 모르다가 “하나님,저같은걸 왜? 이 백성의 지도자,목자로 세우셨나이까 죽고 싶다고 절규하기도 했읍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습니다. 사도가 되기전 사울은 세상적으로 힘이 대단히 센 분이였읍니다. 당시 명문 다소대학에서 유명한 교수님의 직접 사사를 받고 학박사가 되였고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였는데 이건 오늘의 국회의원직인데 평생생동안 그 지위에 있을수있는 평생직이였읍니다.게다가 부친은 천막업으로 대성하신분였읍니다.군대 군납도하여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번 당시의 대기업가였다고 합니다.이런 힘있는 사람이 예수믿고 공직에서 물러났고 물질도 버리고 그야말로 모든걸 버리고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 주의 종이 된것이였읍니다.그후 그는 정말 세상적으로는 힘이없는 사람이되였읍니다.세도 당당하던자가 욕하면 욕먹고 때리면 맞고 가두면 갇히고 약한 사람이 됐읍니다. 바울의 직접 고백을 들어보세요. 고후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하고 옥에 갇히기도 많이하고,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번하였으니 동족의 위험,이방인의 위험을 당하며 자지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리고 날마다 내속에 눌리는것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것이라“고 하였읍니다. 본래 목사의 일이라는것도 아무리 심혈을 기우려 수고한다 해도 표가나는 것도 아니요 모든 사람들의 환호와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최종 심판자 0앞에 서는 때에 비로서 인정을 받게 될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적 선언을 다시 들어보세요 고후6:8-10 “나는 무명한 같으나 유명한자요 죽은자같으나 살고,근심하는자 같으나 항상기뻐하고, 가난한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하고 아무것도 없는자 같으나 모든것을 가진자로다” 이렇게 사신분들이 바로 원로 목사님들이십니다. 그분들은 진리의 대변자로서 죄악의 어두운곳에서 고생하는 이들에게 참된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었고,신앙의 교사로서 물질주의에 사로잡혀있는 이들에게 영원한 하늘나라의 길을 가르쳐주었으며,정의의 사도로서 정의 실현되는 하늘나라 건설을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며 끝까지 달려 갈길을 달려가며 믿음의 선한싸움에 승리한 신앙의 용장들이십니다. 이런분들을 배나 존경할자로 알고 더 존경하게될때 우리 교회는 잘되고 더잘될것입니다. 3. 성경은 구체적으로 존경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읍니다. 18절에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읍니다. 이말씀은 존경하는 일에대한 아주 구체적인 표현으로 설명한 말씀입니다. 1」 일꾼이 받아야 할 마땅한 삯은 그분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존경할만해야 존중을 받는 것이지 어떻게 존중할수 있읍니까?” 라고 말하며 그 사람의 살아온 대가대로 받는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읍니다만 우리 주님께서는 세리와 창기도 존중하셨읍니다. 주님은 그들의 죄는 미워하셨지만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셨읍니다. 또 그들에게서 인격의 가능성,회개하고 새 사람됨의 가능성을 존중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존중하지못하는것은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겸손하지 못해서 입니다.더구나 평생을 복음을 전하시고 청빈하게 살아 오신 분들을 존경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교만하고 악해서 입니다. 사람은 인격의무시를 당하면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그래서 괴로와 합니다. 사람이 인격의 존중을 받으면 마음이 흐믓합니다.그래서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노인들과 원로목사님들이 받아야할 마땅한 삯은 다른 무엇보다도 “배나 존경 해드리는”것입니다. 2」 원로목사님들이 받아야할 마땅한 삯은 은퇴후 최저 생활비 보장입니다. 공직생활에 3,40년을 하고 나오면 현재 100만원 이상의 연금을 받아 노후생활을 보장받고 있읍니다. 우리가 노인들을 존경한다.원로목사님들을 치하한다 하면서 그분들의 말년의 생활에 대하여 최저 생계비조차도 마련해드리지 못했다면 문제도 큰 문제가 아닐수 없는것입니다. 자랑스럽게도 우리일신교회는 원로목사님께 좋은본을 보여준 교회로 소문이 나 있읍니다 얼마나 감사한일인지 모르겠읍니다. 계속 우리 일신교회 자랑거리가 늘어나게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약2:15-16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가라 더웁게하라 배부르게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있으리요.” 라고 형제 사랑에대한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읍니다. 전생애를 다 바쳐서 갖은 고생을 다 겪고 오르지 하나님께로부터오는 힘과 기쁨만을 밑천으로 살아오신 원로목사님들을 마음으로 존경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성의를 모아서 그분들의 말년의 생활을 보장해 드리는 제도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부터 우리 감리교단은 교역자 은급재단을 설립하여 지금 기금도 많이 확보하였고 2,30년후에는 든든한 재단이 될것입니다.오늘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바로 이 은급사업을 위하여 교단본부로 보내게 됩니다.정성껏 헌금 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장 어려운 시대에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기위하여 생명을 내 놓고 일하신 분들,100년도 안되는 짧은 선교역사가운데 세계의 선교적 기원을 만드신 우리의 자랑스런 원로목사님들께 감사와 존경을 보내지 않을수 없읍니다. 오늘 은급주일을 맞아 우리는 은퇴하신 목사님들을 생각하며 그분들을 마음속 깊히 우러나오는 존경과 나아가서 말이나 마음뿐 아니라 그분들이 필요로하는 것을 물질로 도와드리는 일에 앞장서시는 우리 일신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자만 계시는 교회/ 요10:11/ 이시백 목사/ 은급주일설교/ 2010-02-07
목자만 계시는 교회 요10:11 양들은 없고 목자만 계시는 교회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워던 60년대부터 목회를 시작하시여 평생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신 목사님내외분들이 모여서 예배하시는 교회 저에게는 하늘과 같으신 분들이시다 아버님 어머님 말씀하셔서 소식은 늘 듣지만 감히 모신다는 생각은 못했다 그런대 아버님과 말씀을 나누는 중 용기가 생기여 하늘 같으신 분들을 은급주일날 모시게 되었다 한달전부터 목자들교회에서는 이곳에 오시기 위하여 이모저모 준비하시며 기다리시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 같으신 목사님 내외분들이 오셨다 가까운 거리라 시간상 일찍 오실거라 생각은 되었지만 몇 분사이로 환영이 제대로 되지 못하였다 긴장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며 주신 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고 성도들이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맛있는 점심을 대접하였다 좋아하시고 감사해 하시는 모습에 이제야 모시게 됨이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자주 이런 기회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히 들었다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학생은 장학금 받아 드리고, 물질로 후원하고, 죽이야기에서 맛있는 죽을 선물하고 또한 말 없이 정성을 다하여 맛있는 점심을 준비하고 기회 주셔서 감사해 하는 사랑하는 성도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본이 되는 조상/ 히11:8-12/ 은급주일설교/ 2010-02-21
본이 되는 조상 히11:8-12 오늘은 우리가 매년 은퇴목사님들을 기억하며 신앙의 선배들을 기리는 은급주일입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의 수난기에 그 어려움과 고통을 극복하면서, 우리 모든 신앙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신 분들을 기억하는 날인 것입니다. 단순히 은급헌금을 준비하여 그 헌금으로 그분들을 돕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분들의 수고와 희생을 기억하며 그분들을 마음과 정성으로 공경함을 나타내는 그런 날 입니다. 우리민족은 다른 민족들에 비하여 특히 선배와 어른에 대한 섬김과 공경을 무척 중요시 하는 민족입니다. 물론 그것이 지나쳐서 족벌을 형성한다든지, 또는 필요이상의 공경으로 조상들을 신격화 한다든지, 우상화하는 잘못도 있었지만 어찌했든 어른에대한 남다른 생각과 공경의 좋은 정신은 아직도 우리민족 고유의 좋은 전통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어른 공경에대한 말씀은 성경에서도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읍니다. \\\\\\\"네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17) 잘알고있는 십계명중의 제 5계명과 시편, 잠언 등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어른 공경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우리 성도님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어른 공경의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퇴목사님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를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들은 이미 공경받을 삶을 살아오셨고 우리는 마땅히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 분들을 공경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려는 말씀은 어떻게 우리도 그 분들처럼 공경받을 수 있는 선배, 즉 “존경받을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들 중에는 우리가 자랑하고 싶은 그런 훌륭한 조상들도 많이있읍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손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어깨가 으쓱거리는 그런 어른 들도 많이 있읍니다. 그러나 때로는 역사의 오점을 남긴 어른들도 있읍니다. 그 사람이 우리조상이라는 것을 말하기가 부끄러운, 창피하고 면구스러워서 오히려 그 자손이 아닌것처럼 행동할수밖에 없는 그런 조상들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간 생애가 부끄럽고 형편없는 어이없이 손가락질 받을수 밖에 없는 그런 일생을 살아갔기때문입니다. 예) 이완용, 백담사,마르코스(필리핀 대통령),이멜다. 그들은 단순히 그들의 생애가운데 오명을 남기고 부끄러운 생을 살아간것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 대대로, 그 후손이라는 부끄러움을 안겨주고 계속되는 치욕을 남기고 만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분명히 한가지 깨닫는 교훈이 있읍니다. 그것은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이나 후배들에게까지 끝까지 오명을 남기고 부끄러움을 주는 그런 선배나 조상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못하고 우리가 어리석게 살아간것도 부끄럽고 창피한 일일진데 그것을 우리 후배들과 후손들에게까지 남긴대서야 말이 되겠읍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전해지는 역사는 분명히 그 잘못한 것이 더 보태져서 까지 전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후배들과 후손들을 부끄럽게하는 그런 인생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니 더나아가서 우리 후손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조상이, 후배들에게는 긍지와 자부심을 줄수있는 그런 선배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모습의 선배와 조상이될때 우리 후배와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선배와 조상이 될것인지 살펴 보아야 할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읍니다만 역시 그러한 존경받는 일생을 살았고 지금까지 모든 신앙인들에게 존경받는 신앙의 인물을 알아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성경속에서 존경받는 생을살아간 사람은 많이 있읍니다. 그러나 그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사람을 지적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역시 아브라함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처럼 신앙의 위대한 인물로 성경에 나타난 인물이 없기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신앙인의 본이되고 귀감이되는 그런 인물이었읍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믿음의 조상으로, 순종의 사표로, 축복의 조상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읍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어떻게 이런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될수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어떤 부분이 아브라함을 이렇게 위대한 신앙인으로 만들었을까요? 아브라람의 어떤 생애가 아브라함을 존경받는 조상으로 변화시켰을까요? 바로 이것을 우리가 알아 볼때에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위대한 신앙의 조상이 될수있는 것 입니다. 이 방법에대한 분명한 이해와 실천이 뒤따른 다면 우리도 아브람과 같은 위대한 신앙인이 될수있을 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믿음의 조상이 될수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중에 아브라함의 귀한 신앙을 본받아 본이 되는 위대한 신앙인, 자랑스러운 믿음의 조상이 다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그러면 이제 아브라함의 신앙을 살펴 보겠읍니다. 제일먼저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 의 조상으로 만든 신앙은 역시 결단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라는 우상을 섬기던 도시에서 살았읍니다. 아브라함의 가문은 우상 숭배자의 가문이었다고 합니다. 여호수아 24:2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고 말하였읍니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 장사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상을 섬기며 우상을 팔고 우상과 함께 살던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명령을 하셨읍니다. 아브라함은 정든집,정든 고향,정든 사람들 곁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읍니다. 그에게 결단이 필요하게 되었읍니다. 정든 모든 것을 떠나야 한다는 결단이 필요하게 되었읍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지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의 결단이 요구되었읍니다. 그는 이러한 결단을 단호히 내렸읍니다. 미지수에 대한 두려움도,알수없는 장래에의 공포심도 개의치 않고 믿음으로 결단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믿음의 결단으로,이 결단의 신앙으로 아브라함은 칭찬받는,인정받는,본이 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아브라함처럼 시시때때로 결단을 요구하고 있읍니다. 더우기 신앙의 삶은 더 예리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선택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속에서도 눈물을 머금고 분명히 선택해야 하는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 정말 우리에게는 정확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장소를 막론하고 우리의 태도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끊을 때 끊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유부단하게 하지 말고 망서리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분명한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포기하거나 망서리지 말고 유혹하는 사탄의 음성을 결단으로 물리치며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자랑스러운 신앙의 사람들이 되고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신앙의 조상이 될것입니다. 두번째로 아브라함의 신앙은 약속을 바라보는 신앙이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읍니다. 창세기 12:1-3에서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 많은 사람들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주셨읍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장래를 단순히 하나님의 이 약속만을 바라보고 나아갔읍니다. 알수는 없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신앙이 있어야겠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도,꿈도,소망도,비젼도, 바라보아야겠읍니다. 눈앞에 일만 바라볼때는 실망이나 좌절,어려움이 많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꿈과 약속을 바라볼 때에는 오늘의 어려움과 고난을 참고 이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째째하게 눈앞의 일에 눈물 흘리지 말고,시시한 일에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정말 아브라함처럼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작은 약속이라도 그 약속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진자는 승리하고 성공하기 때문입니다. 실망하지 않고,좌절하지 않고,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바라보고 나아갈때에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어려움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고 주신 약속을 굳게 믿고 승리와 성공을 얻어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남기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은 순종의 신앙이었읍니다. 아무리 결단하고 꿈을 바라보아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생활, 믿음대로 살아가는 행동이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 믿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한다면 바로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믿는다면 그 믿는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대로 따르는 순종이있었읍니다. 그런 순종의 신앙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는 축복의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한 순종의 사람이었읍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우리가 보통 생각할수 있는 그러한 순종이 아니었읍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해할수있고, 납득할수 있고, 알아들을수 있을대에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도저히 이해할수 없고, 납득할수없고, 알수없는 것이라할지라도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예) 떠나라(본토,애굽) , 이삭. 이 순종의 신앙으로 아브라함은 위대한 믿음 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때로 말씀중에 이해할수 없는 부분도 있읍니다. 도저히 납득할수없는 그런 부분도 있읍니다. 우리 경험이나 상식, 지식으로는 절대로 받아들이수 없는 그러한 말씀도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Amen하고 순종할수 있을때 우리 믿음이 성장하고 생활속에 승리를 축복을 가질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분명한 신앙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 주신 약속과 꿈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Amen하며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결단과 소망과 순종의 신앙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후배들과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수있는 위대한 신앙의 유산이 될뿐반 아니라 우리가 이세상을 부끄럽지않고 후회하지않고 살아갈수있는 축복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 귀한 신앙의 모습으로 위대한 신앙인, 자랑스러운 본이되는 조상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다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히13:7-9/ 은급주일/ 2008-06-09
언제나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히13:7-9 오늘은 2월 첫주일이면서 은급주일입니다. 금년부터는 매월 첫주일에는 성찬식을 갖고자 합니다. 성찬은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주어진 성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일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을 통해 우리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에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념”이 무슨 뜻일까요? 국어대사전에는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나누면서 주님이 날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당하신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그 사랑과 뜻을 되새기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성찬의 시간에만 기억하라는 것이 이 아닙니다. 날마다 시시 때때로 구원의 은총을 잊지 말고 그 은혜에 푹 젖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전에는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엡2:3절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하였는데, 구원받기 전에 우리들은 그렇게 죄로 부패하여 쓸모없고 무가치한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무가치한 죄인 괴수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죄 없고, 귀하신 그 몸을 우리 위해 내어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진노으 l자녀 버림받은 자녀가 이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부끄러운 죄인인 내가 받아야 할 멸시와 천대, 저주와 고통을 홀로 다 당하신 것입니다. 성찬은 그렇게 쓸모없는 내가 주님 십자가의 고난으로 가치있는 주님의 백성 삼아 주심을 기념하여 되새기는 예식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되새기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죠? 너무나 잊어버리기를 잘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있고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서운하게 한 일들은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것은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가 많습니다. 나를 서운하게 한 사람은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잊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은혜는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인간은 타락한 이후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쉽게 잊습니다. 내가 돌아가야 할 본향도, 인간의 본분도 잃어버렸습니다. 분별력도 잃어버려서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더러운 것들을 좋아 합니다. 결국 죄를 사랑하고, 사탄을 사랑하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이 기억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면 다시 회복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될 때 잃은 것들을 다시 되찾게 될 줄 믿습니다. 이시간 되찾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에 사랑하는 주의 제자들에게 성찬을 베푸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되새길 뿐 아니라 십자가 지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지은 죄를 회개하고 청산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결단 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주님, 그러나 다시는 죄를 범치 않고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주님의 모습을 닮아 살겠습니다. 이시간 나의 죄성과 나의 죄를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겠습니다.“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주님의 흘리신 피로 우리 모두가 한 가족이 된 것을 확인 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떡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 . .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 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한 떡에 참예 함이라”(고전10:16-17). 성찬에 참예함으로 우리 각 사람이 예수 이름을 영접함으로 주님과 하나 되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찬양>> 우리는 사랑의 띠로 . . 성도 간에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성도의 교제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수없이 많이 드리고 우리 속에 좋지 않는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 많은 예배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많은 기도들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성찬은 성도가 주안에서 사랑으로 뜨겁게 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심같이 나도 희생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양보하고, 위해주고, 봉사하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다지는 시간인 것입니다. 또 성찬은 이 몸을 주님께 드려서 주님을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입니다(롬12:1-2). 이 시간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때까지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각오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은급주일입니다. 은급주일은 일생동안 목회 사역에 최선을 다하시고 은퇴하신 주의 종들을 기억하고 그 목사님들을 섬기고자 교회가 책임을 다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일찍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헌신하신 주의 종들의 눈물어린 기도와 희생의 유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분들이 따뜻한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받들어 드리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해야 할 도리인 것입니다. 감리교회의 은급사업은 1914년 6월 3일 제7회 조선미감리회(북감리교회)에서 고 전덕기먹사님의 유족과 교회를 담임하지 못한 권신일목사님에게 월15원씩 생활보조비를 지급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 은급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2006년12월 현재 월평균 982명에게 은급비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원로목사님들이 많다는 것은 한국감리교회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 되었다는 것이고 그만큼 많은 성도들이 그 목사님들을 통해서 양육을 받았다는 뜻이고 그만큼 일을 많이 한 흔적입니다. 1. 은급주일은 사랑과 감사의 표현입니다. 목회자는 믿음의 스승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지기 가지 은퇴하신 원로목회자들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히도 열악하고 어려운 시대에도 절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굳게 서서 오직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긴 것이 오늘의 교회를 이룬 것입니다. 또 목회자는 영적인 부모입니다. 목회자도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에 노인이 되면 인간으 연약함을 드러내고 돌보아 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평생 목회의 길을 걸어 오신 원로 목회자들을 믿음의 부모로 생각하고 효도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대하듯 관심을 가지고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룻기를 보면 룻이 홀로된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유대 베들레헴까지 따라와 끝까지 봉양하고 섬기는 효성을 봅니다. 갈6:6에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출20:12에도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엡6:1이하를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물질적인 복, 자녀의 복, 재산의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결코 궁핍함이 없었고 모든 일에 자족함을 누렸고 풍족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공급, 자원하는 사랑 때문에 . . . 그 때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것을 채우실 것이라”고 복을 기원했습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풍성한 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2. 노년의 기회를 의미 있게 보내도록 도와드려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사람들이 노년의 시기에도 위대하게 쓰임 받았음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모세는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일을 시작했어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갈렙은 85세에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부르짖었던 사람입니다. 어떤 학자가 세계역사에서 400인의 위인을 선정하고 그들의 가장 위대한 능력을 발휘한 시기를 조사했더니 60세에서 70세 사이에 가장 훌륭한 일을 해낸 이가 35%, 70세에서 80세 사이에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 이들이 23%, 80세 이상이 되어서 불멸의 업적을 남긴 이들이 6%나 되었다고 합니다. 신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노인은 나자신의 미래이기도 한 것입니다. 노인을 공경함은 나의 효도요, 자녀의 교육입니다. 노인을 공경하면 훗날 내가 공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노인을 멸시, 천대, 학대함은 결국 나 자신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새 구두만 좋아 합니다. 새 구두는 반짝거리기는 하지만, 발이 아픕니다. 물집이 생깁니다 .즐거운 여행을 망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신은 구두는 발이 편합니다. 오래 사귄 친구가 편하고 좋습니다. 나무도 오래 말려야 뒤틀림이 없고, 포도주는 오래 숙성해야 짙은 향기를 냅니다. 오래된 사랑, 오래된 우정, . . 오랜 세월이 아니면 빚어낼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욥12:12) 은퇴하신 교역자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더없이 귀한 분들입니다. 원로목사님들은 참으로 한국감리교회의 영적 스승이요, 부모들입니다. 영적스승이 많다는 것은 많은 영혼들이 양육을 받고 자랐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지도자에게 순복하십시오. 7절, 17절을 보면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7절에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이거나 아니면 이전에 지도하던 자들입니다. 또 17절에 말씀하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이란 지금 있는 목회자, 인도자를 말씀합니다. 목회자들은 17절에 말씀한대로 맡은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것으로 알고 기도하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역의 중요함을 알아서 목회자가 즐거움으로 이 일을 감당하도록 교인들은 도와야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자신들에게 구원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지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질서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도자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완벽하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회생활 하면서 실망하고, 시험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 중에, 교회의 지도자들과 관련된 일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스스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 중에 대개는 그 선포되는 말씀에 집중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에 집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거 복음을 위해 살다가 순교한 지도자들은 아무런 흠이 없었던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다 훌륭한 인격자들이었을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목회자도 학력, 은사, 인격적인 부분들에서 연약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한계입니다. 이런 것은 용납해야 합니다. 나보다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목회자를 무시하거나 괴롭힌다면 몰지각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성입니다. 만일 목회자가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면 그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상대적인 것들로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우리는 선한목자와 삯꾼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선한 동기를 가지고 하려고 한 일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선한 동기를 의심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어쨌든 목회자와의 사이가 벌어져서는 안됩니다. 시험 가운데 가장 큰 시험이 목회자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무리 해도 신앙생활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교인들의 신앙생활은 아무리 바로 되려고 해도 목회자 이상으로 더 되지 못한다는 말을 선배목사님들을 통해서 많이 듣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기쁨으로 목회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생이 목회자입니다. 성도의 기도가 목회자를 키울 수 있고, 또 만들 수 있습니다. 비록 유약하고 어리고 흠집 많은 지도자일지라도 성도는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위해 자지 못하며 성도의 영광스러움을 같이 기뻐하며 성도의 슬픔과 타락을 같이 가슴 아파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들이 기쁨과 감격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에게 영적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신실한 교훈과 권고를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세우셨고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목회자를 주셨음을 언제나 기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 할 때 힘들고 상처입고 마음이 흔들리고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사람도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영원하신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주님을 늘 바라보십시오. “동일하시다”는 말씀은 “한결같으시다”, “영원하시다”, “불변하시다”는 말씀입니다. 봄, 여름, 가을과 겨울, 언제 봄이었다가 여름이 오는지 우리가 느끼지도 못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어김없이 찾아오듯이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오늘도 살아 계시며 신실하신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8절“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을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황금을 귀한 보물로 여기는 것은 일반 쇠붙이처럼 빛이 변하거나 녹슬거나 하지 않고, 언제나 그 눌한 금빛이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인격도 이랬다 저랬다 변덕스러우면 안됩니다. 침착하고 꾸준한 성품이 더 좋은 인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우리 주님의 사랑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가운데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환경에 의해 변질되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은급주일을 맞이하여.../ 시104:4/ 윤종웅 목사/ 2010-02-07
은급주일을 맞이하여... 시104:4 전 교회들이 2월 첫 주일은 은급주일로 지킵니다. 은급제도는 감리교회에 소속한 모든 교역자들에게 안심하고 교역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마련한 제도입니다. 그리고 교역을 마치고 은퇴하거나 명예퇴직 후, 혹은 별세 시 유가족들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에 기여하기 위하여 은급제도가 마련되었습니다. 은급지급 대상이 되는 이들은 감리교회 교역자로서 준회원 허입 후 70세 정년은퇴하기까지를 목회기간으로 인정하며, 각 개인 목회기간에 따라 은급비를 지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2002년도(12월 기준) 한 해 동안 은급비를 지급받으신 분들은 원로목사님은 모두 4백90명, 홀로되신 사모님들로 은급비를 받으신 분은 1백11명, 그리고 애석하게도 목회 중 불의의 사고로 또는 질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심으로 홀로되신 사모님들이 은급비를 받으신 분은 모두 1백36명으로, 지난 일년 은급비 혜택을 받으신 분은 총 7백37명입니다. 은급금 지급 기준은 은급이사회 결의에 따라 목회연한 1년 기준액 2만5천원으로 정하여 목회연한에 따라서 지급하며, 40년을 목회하신 분이면 매달 1백만 원의 은급금을 지급받게 됩니다. 2002년 은급비 총 지급액은 53억 9천 8백만원이었습니다. 은퇴하신 목사님들과 홀로되신 사모님들에게 지급되는 은급비는 아직 넉넉한 편이 못되고 있어, 별세한 유가족들의 생활안정과 복지를 위한 금액으로는 대단히 미흡한 가운데 있습니다. 앞으로 이 점을 개선하기 위해 기도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은급비의 재원확보는 각 교회의 수입결산액의 1%인 은급부담금과 은급 수익사업금, 은급주일헌금이며 준회원허입 시, 정회원 허입 후 매 10년마다 1개월 생활비를 납부하는 교역자들의 기여금으로 자원을 마련하도록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2002년도에는 은급금 지출 총액이 은급 총수입보다 많아 결손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도부터는 은퇴교역자의 증가로 지급될 은급금액이 현 수입으로는 부족액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제 은급이사회에서는 장기적인 은급정책을 세우고 법을 개정해서라도 은급부담금 증액 및 수익자 부담원칙에서 기여금 납부 방법을 확대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5천4백개 교회의 교역자 여러분, 1백40만 성도 여러분! 원로 목사님들과 은급사업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은급부담금을 정직하게 납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은급주일을 성심을 다해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역자님들은 자진하여 기여금을 납부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의 감리교회가 그 누구의 수고와 희생의 결실입니까? 선배 원로목사님들이 피땀 흘려 헌신하시고 충성을 다하신 공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은퇴목사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하고 존경해야 하며, 은퇴목사님들을 보살펴 드려야하고, 저들의 남은 생애가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드려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신앙적 도리이며, 감리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길이며 더 나아가 우리가 축복을 받는 길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감리교회는 타 교단에서 찾아 볼수 없는 제도를 마련해 모범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앞으로 은급사업이 점차적으로 확장되어 나가도록 힘써야 겠습니다. 존경하는 원로목사님들을 위하여 한 주일만이라도 온갖 정성을 기울여 기도하며 원로 목사님들을 초청하여 대접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은급주일을 거룩히 지키며 은급주일헌금에 정성을 다해 참여하도록 재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은급사업은 교회부흥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마다 온 성도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며 헌신 봉사할 때 교회가 부흥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확대될 때 은급기금의 주 원천이 되는 은급부담금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부흥을 위하여 기도하며 전도하며 헌신봉사하는 것이 곧 은급사업에 협력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5천4백개 교회가 큰 부흥성장을 이루고 더욱이 감리교회 은급사업이 활발해 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2003년도에 1백40만 성도들은 교회부흥을 위하여 모이기를 힘씁시다. 기도합시다! 전도합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놀라운 부흥을 결실케 하실 것입니다. 감리교회 은급재단 이사 전원과 은급사업 직원 모두가 은급사업의 확립과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온 감리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감리교회의 놀라운 부흥으로 은급사업에도 큰 축복이 있으실 줄 믿습니다.
은퇴 후의 근사한 삶/ 롬16:3-16/ 은급주일설교/ 2007-02-06
은퇴 후의 근사한 삶 롬16:3-16 여러분의 깊은 배려와 기도 속에 안식년 휴가를 잘 지내고 왔습니다. 약 한달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특별했던 것은 마침 서울에서 목적이 이끄는 교회 컨퍼런스에 참여할 수가 있었습니다. 2만 여명의 목사님들이 모여서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과 스탭에게 훈련받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10만 여명이 모인 집회는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또한 많은 목사님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신선한 충격과 도전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교회를 위하여 힘쓰고 애쓰신 여러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번 안식년 기간 동안 지나온 목회를 되돌아보며 점검하였고, 앞으로 저와 우리 좋은교회의 교우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오늘 설교는 안식년 휴가를 가기 전에 어느 정도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안식년 기간 동안에 구체화된 것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설교의 핵심을 잘 파악해서 그렇게 살아가신다면 현재에도 그렇지만 나중에도 틀림없이 근사한 삶이었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지난달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이 앞으로 2년 뒤인 2008년 7월에 MS에서 은퇴하고 게이츠 재단에서 자선사업에 주력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그 뉴스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세계 제일의 부자가 그것도 51살의 젊은 나이에 53살에 은퇴하겠다니, 저 같은 보통 사람의 머리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돈이 많다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돈이 좀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빌 게이츠가 무엇을 생각했길래 그랬을까?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아내인 멜린다의 영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은 빌 게이츠가 은퇴한 후에 근사한 삶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빌 게이츠의 선언을 보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그와 같은 삶을 살면 참으로 근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셨는데, 그 은사를 은퇴 후에도 사용하면서 살면 얼마나 아름답고 근사한 삶이 되겠어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먹고 사는 데에만 사용하는 것보다는 평생토록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되어진다면, 그러한 사람은 기쁘고 복된 사람이 아니겠어요? 저는 우리 좋은교회의 모든 교우들이 은퇴 이후의 삶을 한번쯤은 생각하고 오늘부터 남은 삶을 계획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 주위에 보면 은퇴 이후에도 근사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겁니다. 전에 한국감리교 목사합창단에서 함께 찬양했던 김연기 목사님은 효창교회 원로목사님이신데, 이 목사님은 은퇴 후에도 트럼펫을 연주하기도 하고 중창단을 만들어서 찬양하기도 합니다. 평생동안 목회 한 분인데, 이제는 악기연주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삶을 살고 계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림을 그려보세요. 연세가 지긋하셔서 이제는 머리카락도 별로 없으신 분들이, 또 백발의 하얀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얼굴에 주름이 있는 분들이 환한 표정으로 트럼펫을 연주합니다. 얼마나 멋지겠어요. 언젠가는 모교에서 손자뻘 되는 후배 신학생들 앞에서 연주하며 신학교를 다닐 때에 만들었던 중창단원을 불러서 다시 중창을 했답니다. 얼마나 감동적이겠어요. 알코 석유 회사의 부사장까지 지낸 어느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장로님이 어느 날 인생을 낭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60세에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그리고는 60세에 은퇴하셨어요. 이 분이 왜 60에 은퇴를 하셨는지 아세요? 자신이 평생동안 기업에서 일하면서 쌓은 노하우가 있잖아요. 알코에서 일할 때에 Seven Hundred Million Dollars, 7억불을 담당했던 분입니다. 이 분이 그 동안 자신을 위하여 살아왔는데, 이제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 이 분이 지금은 일주일에 이틀을 교회에 나와서 교회 행정에 관한 일을 합니다. 평생동안 회사에서 행정에 관한 일을 하셨으니 얼마나 잘 하시겠어요? 이 분이 교회 일을 하면서 그랬대지요. 사람들이 왜 빨리 은퇴하지 않고 이렇게 좋은 일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물론 돈이 있으니까, 먹고 살만하니까 이러한 일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분들이 현직에 있을 때에도 그랬지만, 은퇴 이후에도 근사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겁니다. 은퇴 이후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망막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람되고 의미있고 가치있고 근사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그 분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더욱더 진동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삶을, 아니 그보다 더욱 멋지고 근사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한 삶은 어느 한 순간에 되는 것도 아니라 준비해야 합니다. 물론 이미 은퇴를 하신 분들에게는 해당되는 사항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죄송스러운 설교가 되겠지만, 젊은 분들은 한번쯤은 생각하며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설교는 젊은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저를 비롯한 여러 젊은 분들이 은퇴 후의 근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한번쯤 생각하고 그것을 위하여 믿음의 그물을 내려 살아가신다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삶을 살아가도록 역사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몇 가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처음 직장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직장은 돈 벌기 위하여 일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은사 활용의 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각에서 교회에서 헌신하고 직장에서 섬기라고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활용하여 교회에서 헌신하고 직장에서 섬겨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직장은 대단히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미 직장 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은 바꿀 필요는 없지만, 아직 정하지 않은 분들은 나중까지 생각해서 정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물론 부모님들은 그런 생각을 하셔서 자녀들을 그러한 과에 보내는 것도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음 직장과 연관된 분야에서 평생토록 일하는 것을 볼 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처음 직장을 잘 선택한다면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서 나중에는 효과적으로 헌신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아는 어느 미용사는 소원이 평생토록 미용 기술로 선교하고 섬기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분은 처음부터 미용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하루씩 노인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제3세계의 선교 현장에 가서 직접 현지 사람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미용으로 선교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목수 일을 하시는 분인데, 이 분은 선교지에 망치를 들고 가서 집을 짓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 집사님이 손수 지은 건물에서 지금은 신학생이 자라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은혜받고 헌신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영광된 일인지 모릅니다. 둘째는 젊었을 때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은퇴하는 나이가 다르겠지만 몇 세에 은퇴를 하든, 은퇴 후의 근사한 삶을 살아가려면 젊었을 때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겁니다. 은퇴 후에도 대략 2-30여 년의 기간이 있는데, 이 기간 동안 살수 있는 여건이 되어야 합니다. 생활비,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무작정 나라에서 책임지라고 해서 되나요? 더군다나 이웃을 위해서 섬김의 삶을 살아가려면 젊었을 때에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자신의 현재 삶을 위해서나 자녀들의 삶을 위해서나 노후의 삶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야 합니다. 저는 솔직히 우리 교우들이 돈을 잘 벌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방법으로 정직하고 깨끗하게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이 돈을 잘 벌어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도 쓰고 이웃을 위해서도 쓰면 좋잖아요. 돈 많이 벌었다고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에요. 돈을 잘못 벌은 것이 나쁘지요. 정직하지 못하게 깨끗하지 못하게, 남을 속여가면서 벌은 것이 나쁘지, 하나님의 정신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벌은 것이 왜 나빠요? 될 수 있으면 여러분은 잘 버세요. 정직하게 버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버세요. 여러분, 정직하고 깨끗하게 돈버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나실인처럼 구별되게 살아갑니다. 돈도 구별되게 법니다. 정직하고 깨끗하게 법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인간적으로 얻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귀합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복을 사모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 예수 잘 믿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살아서 은퇴 후에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근사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건강의 복도 주세요. 지혜의 복도 주세요. 물질적인 복도 주세요. 만남의 복도 주세요.\\\" 우리가 이러한 마음을 갖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러한 복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젊었을 때에 세월 낭비하지 마세요.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시간 낭비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어도 세월을 낭비해서 근사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시간 낭비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젊은 우리 청년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에 열심히 공부하세요. 젊었을 때에 열심히 일하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일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마음껏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생각이 변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설교를 들으시면 많은 분들이 동감을 표시하거나 나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하실 겁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에 가졌던 신선한 생각이 시간이 지나면서 까맣게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젊었을 때는 누구나 신선한 생각을 하거든요.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설교를 듣다가, 참 멋있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그런데 10년 20년이 지나면서, 기성세대가 되면서 젊었을 때의 건강하고 신선한 생각들이 없어져간다는 겁니다. 우리가 좋은 생각, 근사한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노트에 적어 놓고 되새기면서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해도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잊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데, 좋은 생각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기록하는 것이 좋습니다. 종이에 기록하면 기록한 내용이 그 사람을 이끌게 되어 나중에는 변함없이 신선하고 근사한 삶을 살게 되어서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끄럽습니다만은 자랑은 아닙니다만은 저는 제 나름대로 신선하다는 생각이 있으면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책을 읽다가 도전 받거나, 성경을 통해서 영감을 얻거나, 목사님들의 강의나 설교를 통해서 나중에 이렇게 살면 좋겠다. 이렇게 목회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트에 적어 놓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거든요. 저는 기억력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머리가 둔한 사람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어버립니다. 특별히 저에게 유익한 것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젊었을 때는 잘 기억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잊어버리고 나에게 옳지 않아도 이익이 되는 것만 기억할 때가 있어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은 본성이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께 비행기를 타고 오는 데 옆 좌석에 앉은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분인데 벌써부터 노후의 삶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지금은 한국의 유명한 회사에 다니는 분인데, IT쪽에서 공부를 했음에도 노인 복지에 상당한 관심이 있어요. 앞으로도 그런 분야에서 헌신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일을 하기 위하여 다시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할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노후의 삶은 어떨 것 같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한번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우리 교우 중에, 이재훈 집사에게 기타 한번 배워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형제가 찬양을 잘 하잖아요. 이 친구가 집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여러분이 오늘 보셔서 아시지만 얼마나 잘 합니까? 지금도 잘 하지만 멋있잖아요. 한 30년 뒤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친구가 머리카락이 하얗겠지요. 주름살도 있겠지요. 그 모습을 하고 여전히 기타를 연주하며 헌신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멋있겠어요. 근사하지 않겠어요? 저는 젊었을 때에 하는 것도 멋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없이 찬양하는 것이 더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 교우 중에 자동차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 많은 형제가 있어요. 유동원 형제입니다. 앞으로도 그 분야에서 크게 일할 형제인데, 제가 듣기로 이 형제가 한국에 신앙 생활할 때에 차량 운전으로 헌신했어요. 제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깜짝 놀란 것은 나중에 은퇴 후에도 그 일을 하겠답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저 친구도 머리가 허옇게 되겠지요. 그 모습으로 예배 시간 때마다 운전으로 헌신해요. 버스 운전한다고 그러죠 아마. 새벽기도회 때도 할거래요. 얼마나 멋있겠어요. 감동적이지 않겠어요. 저는 그 때의 모습을 그려보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에 가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후임자로 앉혀 놓아서 말이 많은데, 은퇴한 후에 시골 교회에 가서 목사 직함을 놔두고 교회학교 교사로 아내와 함께 헌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 변하지 않으려고 기록해 놓고 기도하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제 욕심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처음으로 목회한 교회에 가서, 젊은 담임 목사님 밑에 가서 교사로 헌신하면 참 근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안식년 휴가를 가기 전에 아내가 저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은퇴한 후에 어려운 나라에 가서 자기는 병자를 치료하고 저는 성경을 가르치면 좋겠다는 거예요. 선교사라면 선교사이고 봉사라면 봉사인데.... 직함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아내가 한국에 있을 때에 13년 동안 1차 진료기관에서 진료하며 치료하는 일을 담당했고 지금도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자기는 치료하고 목사인 저는 가르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저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몇 년 동안 그러한 일을 할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은퇴 후에도 근사한 삶을 살아가려고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6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신분이 다릅니다. 에배네도와 같은 남자도 있고 뵈뵈와 같은 여자도 있습니다. 암블리아와 같은 싱글도 있고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같은 부부도 있습니다. 아리스도불로, 나깃수, 네레오와 같은 귀족도 있고 구아도와 같은 노예도 있습니다. 다양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멋지고 근사하게 살았다는 겁니다.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며 살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좋은교회의 모든 교우들은 인생을 세 등분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3분의 1은 본인을 위하여 살고, 3분의 1은 가족을 위하여 살고, 나머지 3분의 1은 이웃을 위하여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분의 1을 살 때에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면 좋습니다. 그 때에도 눈에 띄는 일, 젊었을 때처럼 인정받는 일 같은 것은 하지 마시고, 젊은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 인생의 경륜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요. 이러한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해야지, 돈 벌어야지, 할 일이 없어서 빈둥빈둥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은 하지 마시고 은퇴 후에 근사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펼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서 복음으로 시작하고 복음으로 마무리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주신 각종 은사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그 일을 열심으로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은퇴 후에도 그러한 부문에 일하며 섬겨서 근사하고 멋진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만한 믿음/ 마8:5-10/ 은급주일설교/ 2006-02-02
이만한 믿음 마8:5-10 오늘은 2006년도 2월 첫 주일이자 은급주일입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눈물과 땀 그리고 피를 뿌려 헌신하다가 은퇴하신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다 낭비하신 삶이요 한국 교회를 위해 ’몽땅 헌신한 삶‘이었습니다. 오늘의 감리교회와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신 분들입니다. 감리교 은급본부의 통계에 의하면 2005년도 말 약890여명의 목회자와 그의 유족들에게 은급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교회를 위해 생명바친 은퇴하신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와 사랑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사람을 찾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찾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믿을 만한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우리를 배신합니다. 믿었던 은행도 나를 배신합니다. 믿었던 증권도, 주식도, 믿었던 회사가 나를 배신합니다. 불신사회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도청하고 뒷조사를 하는 비밀경찰을 두고 스파이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시대는 불신의 시대입니다. 정부를 믿지 않습니다. 국회도 믿지 않습니다. 언론도, 지도자도, 국민연금도, 친구도 . . 시장가서 물건을 사도 주인은 싸게 판다고 하나 아무래도 속는 기분입니다. 불신의 벽이 너무 높습니다. 다 자기의 눈으로 보아야만 믿겠다고 합니다. 또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이렇게 불신의 세상을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불신의 자세가 몸에 배여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것들을 의지하려 합니다. 또 하나님도 믿지 못합니다. 어떤 학생이 꿈을 꾸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절벽에서 아래로 떨어지다가 나뭇가지를 잡았어요 다행히.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지금 힘이 자꾸 쳐지니까 나뭇가지를 잡고 소리를 칩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누구 없어요?’ 그런데 작은 소리가 들립니다. ‘나 여기 있다’ ‘누구세요?’ ‘나 하나님,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래? 염려말고 손을 놓아! 내가 구원하마 손을 놓아!’ 그러니까 자기가 한참 있다가 하는 소리가 ‘거기 누구 없어요? 하나님 말고’ 그렇게 말을 하고 나니 자기도 웃겨서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웃다 보니 잠을 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믿음이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엘리베이터를 난생 처음 본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상자에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혔다 하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가 그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이 닫혔습니다.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문이 열리는데 아주 젊고 예쁜 여자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마술과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들어가더니 젊고 예쁜 여자가 나오다니 . . . 그때 아버지가 흥분이 되어서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 너 집에 빨리 가서 네 엄마를 데려 오너라’ 아버지는 엘리베이터 안에만 들어가면 사람이 바뀐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사람을 젊게 만드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엘리베이터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잘 믿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신용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잘 믿는 것이 주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 .(요6:29) 우리가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이것이 믿음이다’라고 설명하기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종종 ‘저 분은 참 믿음이 좋다.’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준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믿음 좋다고 칭찬해도 주님이 칭찬하시지 않으시면 다 소용없습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이 좋은 믿음이요, 큰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는 믿음이 적어서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던 사람과, 믿음이 좋아서 칭찬을 들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라고 하여, ‘오라’는 말씀을 듣고 물위로 걸어 가다가, 바람과 물결을 보고 무서워 빠져들어 가게 되었고, 그 때 주님께로부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책망을 듣게 되었습니다.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 딸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으나 예수님께 무시하며 냉정하게 거절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줄 수 없다”고 . . 그 때 여인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할 때 예수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마5:21-8)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주님께 나왔다가 “지금까지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주님께 칭찬을 들었던 백부장의 좋은 믿음, 큰 믿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믿음이 좋은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본문에 믿음의 칭찬을 받은 사람은 로마의 장교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나라에 파견 나와 있던 1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장교였습니다. 로마 군대는 한 군단이 6000명인데, 이것을 100명씩 60단위 부대로 하여 그 지휘권을 백부장에게 주었습니다. 백부장은 출세가도가 활짝 열린 행운아요, 엘리트였습니다. 지위가 대단했고, 부자였습니다. 그러면 과연 어떤 믿음이었기에 그토록 칭찬을 받았을까요? 1. 존경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백부장은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존경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존경은 어떤 재주나 기교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게 사는 사람의 앞길은 안전합니다”(잠10:9). 반면에 위선은 언젠가 드러나고야 맙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존경받는 성공자 한 사람을 꼽는다면 다니엘입니다. 그가 존경받는 인물이 된 비결은 한 마디로 진실성 때문입니다. 그는 70년 이상 공직 생활을 해왔는데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단6:3-5). 다른 사람들 보다 사리분별, 신속, 지혜로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진실이 당신을 존경받게 만들어줍니다. 겸손함을 통해 존경받습니다.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잘 해도 겸손해야 존경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을 절대로 존경하지 않습니다. 겸손만이 사람을 끌어당기고, 존경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4:6)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있는 위세 높은 로마의 백부장은, 나사렛 촌에서 자란 무명의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으니, 이것은 그의 놀라운 겸손을 보여 줍니다. 또한 “내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8)라는 고백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인간 예수로 보지 않고,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백부장은 로마군대 장교인 반면에 예수님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들에게 무시 받고 천대 멸시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에수님을 높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초월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치료할 수 있는 권세자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존경받을 수 있는 조건은 초지일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가들이 왜 존경을 못 받습니까?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유리 최태섭 장로님의 사업성공 비결은 한 마디로 ‘신용’입니다. 그가 60년 동안 사업을 하면서 생명처럼 아끼고 지켜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용’이라고 말합니다. 사업에 있어서도 신용이 가장 큰 재산입니다. 성공한 기업인은 많아도, 존경받는 기업인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존경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존경받고 있습니까? 그는 유대인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적대 관계에 있던 유대 민족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로마인이었지만 유대 나라에 와서 지내는 동안, 본래 천품이 선하고 구도심이 강한 사람인지라 유대교로 개종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고 하는 속담이 있듯이, 하나님을 사랑함이 유대인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눅7장에 보면 그 증거로 백부장은 유대인을 위하여 회당도 지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백부장을 유대인들도 자연히 흠모하고 존경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최고의 인격적인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잠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하나님의 사람은 이 백부장처럼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라 백부장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교인들은 다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1) 믿음이 없는 자가 있고 믿음이 적은 자가 있으며 믿음이 큰 자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마17:1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실 때 아래에서 군중들에게 둘러 싸여 귀신에게 사로잡힌 아이 하나로 인해 쩔쩔 매고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제자들에게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제어할만한 능력을 주셨습니다.(마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런데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변화산에 올라간 사이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삶에는 기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고, 결국 믿음이 없었습니다. 2) 또 믿음이 있긴 있지만 아주 적은 자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도 의심 때문에 믿음을 버린 또는 작아지고 작아진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유명한 줄타기 선수가 줄을 타고 있었습니다. 많은 관중들이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그 줄타기 선수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맨손으로 건너갔다 올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사람들이 “예” 했습니다. 이번에는 의자를 메더니 “이 의자를 메고 갖다올 수 있다고 믿습니까?” 하니 믿습니다. 또 “예” 했습니다. 이번에는 “의자 위에 사람을 태우고 갔다올 수 있다고 믿습니까?” 하니 사람들이 “예 믿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곡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지원자 나오십시오” 하니 아무도 지원하질 못했다고 합니다. 중간에 의심 없이 끝까지 나아가는 믿음 그것이 훌륭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험한 세파 위에서 외줄 타는 우리에게 “내가 업어서 갈테니 업히기만 하여라.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수십년 믿음생활 한 사람들도 업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입니다. 죄 중에 의심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 입니다. 주님은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찬 민족을 통해서 일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11:6) 예수님은 믿지 않을 때에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13:58) 의심을 이기십시오. 의심은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3) 믿음이 큰 사람이 있습니다. 백부장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마8:10) 그는 간구하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로마의 고급 장교였지만, 자존심과 체면을 다 던져 버렸습니다. 시골 촌사람 나사렛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주여’ 하면서 겸손히 부르짖으며 간구했습니다. 간구하는 기도에는 힘이 있습니다. 약5:16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3. 사랑을 겸한 믿음을 가지라. 6절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눅7:2을 보면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고 했습니다. 5절을 보면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종은 로마인이 아닙니다. 그 당시 주인과 종의 관계는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였습니다. 종의 신분은 천덕꾸러기요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소유도, 자유도 주인의 것일 뿐 종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종은 백부장의 소유로 주인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종을 사랑했습니다. 한마디로 도량이 크고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노예를 물건으로 취급했습니다. 당시의 종이란 괭이나 호미 등과 같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단지 말할 줄 아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s)는 ‘도구가 생명이 없는 노예인 것과 꼭 같이, 노예는 살아 있는 도구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예수님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노예를 물건으로 취급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 백부장은 자기 노예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잘난 척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자기 종이 병에서 낫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그릇에 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나쁘면 신앙태도도 나쁩니다. 그러나 정말로 인격적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신앙태도도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품성이 좋은 사람은 남을 돕고, 사랑하고, 배려합니다. 늘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고 너그럽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동기는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믿음을 겸한 사랑의 사람, 사랑을 겸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말씀을 붙잡는 믿음을 가지라.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자기 하인의 중풍병이 나을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백부장의 신앙은 어떤 느낌이나 환상 같은 징표를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믿었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입니다. 시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사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종들이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안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권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종의 병을 고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은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에도 전화가 있고 지옥에도 전화가 있답니다. 천국의 전화번호는 66-3927이고, 지옥의 전화번호는 11-1111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천국에서 하는 말이 성경 66권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는 곳은 천국입니다. 그러면 왜, 지옥의 전화번호는 11국에 1111번일까요?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일일이’ ‘내가 최고다’, ‘내가 다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천국의 사람들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백부장의 말을 듣고 예수님은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기이히 여겨”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믿음 있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 있는 자를 만나면 감동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은 고객 감동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감동을 받으시면 모든 것이 OK입니다. 왜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셨겠습니까? 정작 하나님을 가장 잘 공경한다고 자부한 유대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큰 믿음을 백부장에게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 주님은 선포하십니다. 마8:10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 . .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 .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의 분량을 따라 주십니다. 믿음의 분량을 키우십시오. 믿음의 그릇을 넓혀가십시오. 어떤 것도 담을 수 있는 믿음의 그릇을 가지십시오. “이만한 믿음”은 그릇을 의미합니다. 미국의 오럴 로버트 목사는 “당신이 준비한 축복의 그릇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면 주님은 당신의 모든 요구를 채워 주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그릇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그릇들이 되십시오. ‘이만한 믿음’의 그릇‘들이 되십시오.
좋은 친구 되는 교회/ 눅10:25-37/ 은급주일설교/ 2009-02-07
좋은 친구 되는 교회 눅10:25-37 오늘은 은급 주일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몸 바쳐 헌신하신 원로 교역자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예배드리고 헌금하여 원로교역자들을 돌아보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만족을 드리지 못합니다만. . .한국 교회의 성장의 배후에는 원로 목사님들의 눈물과 기도와 희생이 어려 있습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이 필요로 합니다. 감리교회는 한국 기독교에서 최초로 은급사업을 시작한 교단입니다. 현재 원로목사와 별세교역자 유족 등 758명에게 매월 4억 4천여 만원씩 년 54억(2002년) 정도를 지급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른 교단들도 은급사업을 나름대로 하고 있습니다만 현재, 개신교 8개 교단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활발한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은퇴목회자의 대폭적인 증가 현상이 나타나면서 현행 은급사업도 시급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좋은 친구, 변화되는 세상”이라고 표어를 걸고 한 해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좋은 친구’에 대한 주제의 말씀으로 “좋은 친구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계속 드릴려고 합니다. 친구, 이웃.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 참 친구가 드물며, 참 이웃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은 많지만 친밀함이 없고 깊은 인간관계는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을 ‘고독한 군중’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사는 세상입니다. 점점 이웃이 없어지고, ‘우리’라고 말 할 수 있는 울타리는 좁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4무병에 걸려 있다고 말합니다.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 친구, 이웃이 없습니다. 사람은 많지만 속마음을 털어 놓고 이야기 할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이웃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강남에 있는 아파트 밀집 지대에서 두 집 이상 이웃을 가진 가정을 조사하였습니다. 500세대에 98세대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집만 가진 이웃은 187세대가 나왔습니다. 이웃과 단절된 오늘 사회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연세대 심리학과에서 초등학교 5, 6학년 500명을 대상으로 친구에 관한 조사를 했는데, 친구가 별 의미 없다 23%, 친구가 좋으나 사귀지 않는다 35%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38%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어린 아이들도 친구의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친구를 가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며칠전 경기도 부천에서 초등학교 두 어린이가 피살 된 사건이 있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아직 경찰의 수사가 끝나지 않았지만 얼굴을 아는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만 해도 이웃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 걱정인데, 거기에 다가 아는 사람이 범행을 저지르는 이런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의 시민들은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최근 한 기독교잡지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비 기독교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의 모습’은 이기적이다 31.4%, 비인격적이다 22.9%, 위선적, 자기중심적 18.6%, 모범적, 인격적이다 17.1%, 기타 10.0% 였다고 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비율이 73%에 달합니다. 참 부끄러운 결과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학교 1학년때 해변에서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을 보면 옷입은 채 물에 뛰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학년이 되면 튀브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졸업반이 되면 뛰어 들어가지도 않고 링을 던지지도 않고 밖에서 “어 나와” 하며 손짓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풍자적인 비유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그린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율법을 잘 아는 율법사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율법사는 쉽다는 듯이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신6:5)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러면 영생하리라”고. . 그 때 율법사는 “옳게 보이려고”다시 말하면 ‘자신만만하게’ 자신은 모든 것을 다 했으니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다시 질문합니다. 국어 사전에 ‘이웃’이란? 나란히 이어서 경계가 서로 접하여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나와 있습니다. 율법사는 ‘동족’이 나의 이웃일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옆집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 이웃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당시에 천대받았던 한 사마리아 사람이 베푼 선행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얻어맞아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때 세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지위와 명예를 지닌 제사장이었고 또 종교인 레위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신음하며 도움을 청하는 그 사람을 목격했지만 못 본체하고 지나갔다. 무서워서 도망갔던 것입니다. 제사장 레위인은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멸시와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은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고, 붓고, 싸매고, 태우고, 데리고 가고, 돌보아주고, 그뿐 아니라 여관주인에게 맡기고, 돈을 주며 돌봐줄 것을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율법학자는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서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는 너무나 의외의 대답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찬밥 대우를 받는 뉴스가 많습니다. 온갖 학대와 인종차별을 받으며 내 쫓김을 받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온 것은 우리가 우리의 노동계가 3D업종을 싫어하고 실업자는 점점 불어나지만 일군이 없어서 그들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웃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라는 것입니다. 1. 좋은 이웃은 생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좋은 이웃은 착한일 정도 하는 사람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생명을 사랑하셨습니다. 마가복음 5:1이후에 보면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쇠고랑과 쇠사슬에 묶였으나 그것들을 끊고 부수고 헐크 같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힘을 당해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밤낮 공동 묘지와 산 속을 돌아다니며 소리지르고 돌로 제 몸을 해치곤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군대입니다. 우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마침 그 곳 산기슭에 많은 돼지떼가 풀을 먹고 있었는데 귀신들은 예수님께”우리를 돼지떼에게 보내 그 속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요”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 돼지떼 속으로 들어갔는데 거의 2,000마리나 되는 돼지떼가 가파른 비탈로 내리달려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 돼지를 치던 자들이 예수님께 그 지방을 떠나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돼지 2000마리가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돼지값을 몰라서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귀신들린자 한 사람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생명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좋은 이웃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사랑의 마음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좋은 이웃은 상대의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강도의 출현이 잦았고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이런 길은 혼자 다니면 혼자 간 사람의 책임도 큰 것입니다. 책망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도와주면서 꼭 한마디씩 합니다. 도와주고는 훈시를 설교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둥. . . . . 먹을 것 조금 도와주고는 잘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둥. . .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의 부주의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이웃이 되어 줬던 것입니다. 사실은 이런 위험한 길에 혼자 왔기 때문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된 것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자신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설교가 아니라 행동입니다. 예수 오래 믿으면 굳어지고 형식화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사랑을 자꾸 입으로 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칠려고 합니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 . .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관심, 사랑이 아니라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추상적인 것을 가르치며 생각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이웃들의 삶의 현장에서 팔을 걷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들 가운데 많은 수는 저를 비롯해서 지금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내가 하지 않을려는 생각이 가득한. . .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멸시와 천대 받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에만 지역감정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세계는 다 지역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민족적인 갈등의 골이 깊이 패여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분명히 이 강도 만난 자가 자기들을 멸시하는 유대인이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역감정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도 멸시하던 원수같은 유대인의 아파하고 죽어가는 모습 속에서 쾌감을 느껴보고 싶어하는 복수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복수심을 느끼고, 상대가 조금 힘든 일을 만나면 통쾌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하나님의 심판, 진노 재앙이라고 까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합니다. 롬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우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는 사랑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자의 아픔을 보는 순간, 아무 조건 없이 불쌍히 여기는 뜨거운 가슴이 불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만 가지면 어려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저 말없이 행동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많은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기가 2.8%만 있으면 물이 썩지 않는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 .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 차원을 넘어서 희생과 봉사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강도 만나 신음하는 이웃들이 너무 많습니다. 좋은 이웃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참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노숙자, 그많은 가난한 사람, 카드 빚진 자들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3.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 슈바이쳐 박사는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돕는 사랑을 Pericanism(페리카니즘)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Pericanism이라는 말은 아프리카에 사는 페리칸 이라는 새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부리가 매우 발달한 페리칸이란 새는 큰 부리 주머니를 이용하여 다른 새들이 공격해 올 때면 새끼들을 그 부리주머니에 넣어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되어 먹이 구하기가 어려울 때면, 페리칸은 최후의 수단으로 그 커다랗고 긴 부리를 이용하여 앞가슴의 털을 마구 뜯어냅니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부리 끝으로 살점을 집어내어 새끼들에게 먹입니다. 떨어지는 살점에는 피가 낭자하고 그 고통이야말로 다 형용할 수 없지만 페리칸은 생명이 다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새끼를 위하여 사랑을 쏟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사랑을 나타낸 것을 Pericanism이라고 했습니다. 페리카니즘은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또는 질고에서 고통 당하는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려 죽으시기 까지 희생하시면서 온 인류를 구원하신 사랑입니다. 사마리아인도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환자에게 나누며, 행동하는 사랑을 하였습니다. 34절에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돌보아 주었습니다” 동사형이 계속 나옵니다. 이것이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참 사랑은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도, 아픔도. . 사마리아인의 행한 일을 살펴 볼 대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여 강도 만나 신음하는 이를 돌보며 도와주는 일을 했다고 봅니다. 이는 어떤 보상을 생각하지도 아니했고 자신의 명예나 위치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뜨거운 사랑의 감정에서 했던 일이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의무와 한계를 초월하여 돌보며 어려움을 만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되 자신의 힘이 미쳐지는 데까지 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도움이 전혀 안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좋은 이웃이 되어 살아가기를 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민감하라/ 에4:4-17/ 이성우 목사/ 왜관감리교회/ 은급주일설교/ 2010-02-07
하나님의 필요에 민감하라 에4:4-17 오늘은 금년도 은급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우리 한국 감리교회에서 은급주일을 정해서 지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목회자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고 평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주님의 몸인 교회와 하나님의 양 무리인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다가 은퇴를 하신 원로 목사님들과 그의 가족들의 헌신과 노고를 기억해서 조금이라도 그 은혜에 대하여 위로하고 보답하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신앙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었던 과거에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셨던 분들의 섬김에 대한 열매인 것을 인정한다면 그분들의 노고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보은하는 것은 후배 신앙인들의 마땅한 본분일 것입니다. 원로 목사님들은 그 시대에 한국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켜서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 일을 감당해 나갈 일꾼들이 필요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헌신할 일꾼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 하나님의 필요에 민감하게 응답했던 분들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로 목사님들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심히 적다.”고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는 그 하나님의 필요를 채워드리기 위해서 자신들의 몸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바치셔서 평생을 헌신하셨던 분들이셨던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깨닫게 되는데, 두 가지 방법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서, 혹은 사람들의 동역을 통해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일하신 대표적인 것을 말한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사역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장과 2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포함해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만드실 때 말씀으로 창조사역을 완성해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는 천지만물에 대한 설계도와 창조에 대한 의지와 능력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천지만물의 창조가 다 그렇지만 특별히 우리 인간의 창조야말로 한 마디로 말해서 신비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인체의 신비를 깨닫게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신비로운 인체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일하신 내용들은 이 외에도 구약성경이든지 신약성경이든지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기 가운데서 구원하셨던 역사와 관련된 내용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의 대 역사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 치하에서 4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감격적인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 일하신 결과였습니다. 물론 모세와 아론이 그 일에 동원되긴 했지만 그 방법론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역사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바로 앞에서 행하셨던 10가지 이적이 그러 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던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는 광야 한 복판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서 마시우신 것이 그러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리쳤던 많은 대적들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둔 승리의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법의 결과들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많은 경우에 사람들을 일꾼으로 세우셔서 그들의 헌신과 동역으로 일하신 경우들도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은 주로 하나님께서 시대 시대마다 왕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며 인도하셨던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예언자들이나 사사들과 같은 일꾼들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사사들의 경우에는 아직 왕정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왕의 역할, 제사장의 역할, 재판관의 역할 등을 복합적으로 수행했던 하나님의 일꾼들이었습니다. 사사들이 활동했던 그 시대에는 그런 지도력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왕들은 사사시대 바로 다음에 왕정시대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왕으로 세움을 받고는 기름부음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는 역할을 감당했던 하나님의 일꾼들이었습니다. 왕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였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많은 수의 예언자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통해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도록 인도하고 깨우치는 역할을 했던 하나님의 일꾼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상황이 열악하고 위험천만한 경우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저항하거나 거절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써 헌신했던 하나님의 종들이었기에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음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일하신 경우들도 이 두 가지 방법이 병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일하신 경우에 해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말한다면 죽어서 장사지낸 지 사흘이나 지났던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셔서 그를 살리신 경우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며, 귀신들린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신 일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도 많은 경우에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서 일하신 경우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하나 말한다면 요한복음 6장에 소개되고 있는 오병이어 기적의 경우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의 한 광야에서 자기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날의 사람들의 숫자가 장정만 오천 명이 넘었다는 것이며, 그들을 배부르게 먹이시고 남은 조각을 거둔 것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과정을 살펴보면, 한 아이가 오병이어가 담긴 도시락을 예수님께 내어 드림으로써 헌신하는 과정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행하시는 장면을 더 유심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그 음식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제자들에게 맡기셨는데, 그것을 그들의 참여를 통해서 그 기적을 행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훌륭한 제자들로 세워 가시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에스더 4장 4절-17절까지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벨론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70여년 세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세 번에 걸쳐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귀환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바벨론 땅에 남아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만이라고 하는 사람의 궤계로 멸절될 위기 가운데서 극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으로 구원을 받게 된 역사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졌는가를 밝혀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당시 바사 제국 내에서는 유대인들을 향한 이방인들의 적대감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두 명의 주인공은 모르드개와 에스더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모르드개는 비록 포로 민 출신이었지만 나름대로 그곳에서 출세를 해서 바사 제국의 왕궁에서 관직을 얻은 사람이었으며, 에스더는 같은 포로 민 출신으로서 놀랍게도 바사 제국의 세 번째 왕이었던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한다면 모르드개나 에스더가 그런 상황에서 그런 자리에 앉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 하에서 철저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기 위한 역할을 깨닫고 헌신하는 것은 너무도 마땅한 일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에 처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미리 일꾼들을 준비시켜 놓고 계셨는데, 그것이 바로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영광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던 과정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이 자신이 베푼 잔치 자리에서 자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와스디 왕후를 폐위시키고 나서 다른 왕후를 간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그녀가 많은 바사제국 내의 아리따운 처녀들을 물리치고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된 여인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에스더서 전반부인 1장-3장까지의 말씀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그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며, 더 나아가서 이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신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그런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관계가 인척 관계였으며, 더군다나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딸처럼 길렀던 사람으로서 에스더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으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는 관계로 설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결국은 두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과정 가운데 힘을 합쳐서 자신들의 역할을 각각 수행하게 되는 보이지 않는 고리 역할과 힘이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바로 이것입니다. 함께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한 길을 가는 동역 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도전을 주고 힘이 되어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역할을 온전하게 수행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에스더 4장의 말씀 전체는 이 두 사람, 곧 모르드개와 에스더 두 사람이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신앙적인 배경을 가지고 그들이 기울였던 노력과 함께 그들의 노력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하시고 역사하셨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자기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기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발견하고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의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섭리하셔서 그들을 그런 자리에 있도록 이끌어 오셨던 것이며 그들을 믿음으로 감동시키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들에게 미리 부어졌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러한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음을 깨닫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 민족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시대적인 역할이 있음을 민감하게 깨닫고는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뿐만 아니라 기도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인 헌신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1절과 16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참된 기도의 사람만이 자신에게 미리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민감하게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며, 기도의 힘을 통해서만 그 깨달은 사실을 행동으로 옮기는 헌신적인 실천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죄에서 구원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며, 우리의 가장 큰 영광은 그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일꾼으로 선택되어서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시대에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대에 또 다른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모르드개와 에스더처럼 일사각오의 신앙과 헌신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응답하고자 하는 새로운 헌신 자들을 찾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많고 많은 교회 중에서도 새로운 도약과 정착을 통하여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 나감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을 받기 위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이 교회에서 이 시대에 함께 믿음의 동역 자들로 만나게 하셨고, 우리들 각자에게 사명과 역할을 맡겨 주시고는 이제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며, 함께 격려하며 도전을 주고 붙들어 주고, 도와주는 동역 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고 하나님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귀하게 쓰임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