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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커다란 장애/롬7:15-25
가장 커다란 장애/롬7:15-25 2003-12-18 22:42:29 read : 139 우리 모두는 인생 길에 크고 작은 장애물들을 만납니다. 때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장애물들도 있고 해결할 수 없는 장애물들 앞에 섭니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모든 강력한 장애물들, 그 중에 가장 큰 장애물들이 뭘까?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 속에 나타난 분노의 장애물, 미움의 장애물, 자기 속에 있는 상처의 장애물, 의심의 장애물, 자신을 번민 가운데에 빠뜨리는 이 무서운 번민의 장애물, 이것을 어떻게 정복할 수 있을까?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크고 유용한 자원이 있다고 하면 뭘까? 그 자원은 다름이 아닌 자기 마음의 자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자원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고 어떤 사람들은 불평과 원망 가운데에서 삽니다. 어떤 때는 자기 마음의 자원가지고 어려운 환경도 잘 넘어가는데 어떤 때는 훨씬 더 좋은 환경도 못 넘어 갑니다. 성경은 마음을 생명이라고 그랬습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그 마음에 있어 그 사람의 마음이 이러하면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음이 저러하면 저런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에 대한 것을 학교에서 우리는 배워 본 적이 없어요. 가정에서 기업에서 두뇌교육을 받고, 기술교육을 받고, 논리교육을 받고, 돈은 어떻게 모은다고 하는 돈버는 교육은 받지만 죽고 사는 권세가 붙어 있는 마음을 다스리는 교육이라던가 마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교육은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인간을 향하여 고발합니다. 내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내 속에 나타나는 나도 모르는 내가 있습니다. 내 속에 나를 웃기고 나를 울리는 또 다른 내가 불쑥불쑥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가 손에 가시가 들면 뽑아내야 됩니다. 귀찮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나의 위 속에 바늘이 들었다거나 내 속에 뭐가 들었으면 수술해서 꺼내야 됩니다. 그런데 내 안에 쏘는 가시가 내 마음속에 있다는데 무슨 수로 꺼내느냐는 말이에요. 내 속에 나를 쏘는 가시가 있느니, 내 속에 나를 썩게 하는 가시가 있으니 사람의 방법으로 뽑아 낼 수 없는 마음의 가시를 어떻게 하면 좋을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남이 나를 찌르기 전에, 남이 나를 괴롭히기 전에 내 안에 있는 내 마음의 가시가 나를 더 괴롭히는구나. 이런 말입니다. 이 세상에 깊은 곳이 많습니다. 깊은 계곡도 있고 깊은 바다도 있는데, 정말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이 어디일까? 인간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 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그것이 마음이에요. 이것들이 삶의 형태를 시간마다 결정합니다. 내 마음이 나를 결정하는 거예요. 여러분, 수많은 강줄기와 물줄기들이 인간의 모든 오염된 쓰레기들을 싣고 저 깊은 바닷가에 자꾸 던져서 잠겨 놓습니다. 그 바다 속에는 함몰된 수많은 생명과 배들이 가득가득 수장되어 있어요. 인간의 마음인 바다도 매 한가지입니다. 이런 쓴 뿌리들이 얽혀 마음 가운데에 있으면 수많은 상처와 고통들이 쌓이고 쌓여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부모와 조상들의 여러 영역에서 유전된 것도 쌓여 있습니다. 유전된 부분도 많아요. 그뿐만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쫓겨날 때 아담과 이브의 행동이 우리 속에 재현되어 있는 원죄라고 하는 것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감옥보다 더 무서운 것, 그것은 마음의 감옥이 나를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오호라, 이 쓴 뿌리, 이 쏘는 가시, 이것을 우리는 잠재의식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런 잠재의식의 형성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씨앗들이 현재의 생활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 잠재의식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우리가 시간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성화와 삶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자유, 사람 앞에 이를 때마다 일 앞에 설 때마다 문제 앞에 이를 때마다 일마다 때마다 묘한 방법으로 개입하셔서 내 마음을 편안하게 내 마음을 나 보다 더 깊이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도 좋은 옷을 찾는 것보다도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당장 우리가 찾아 헤매야 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이것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인생 길에서 여러분들이 만나게 될 가장 큰 장애물, 그것이 자기 속에 숨겨져 있는 나도 모르는 마음에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자기도 주장하기 어려운 내 마음의 장애물을 누가 좀 처리해 주세요. 인간의 마음에 네 가지 영역이 있어요. 첫째는 나도 알고 남도 아는 영역이 있어요. 두 번째는 나만 알고 남이 모르는 마음이에요. 묘한 겁니다. 그래서 이리고 속이고 저리고 속이고 골탕을 먹이고 그래요.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이 마음을 알 길이 없는 겁니다. 세 번째는 나는 모르는데 남이 아는 마음이 있어요. 나는 괜찮다고 하는데 고약하다고 하거나 신경질적이라거나... 그런데 이 네 번째가 문제입니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마음이 내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이 마음, 우리 인간 마음 속에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이 잠재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의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어요.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 나옵니다. 바로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숨겨진 마음의 70퍼센트를 어떻게 잘 다스리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성장이고 그 사람의 지혜이고 그 사람의 인생을 사는 심령의 풍요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다루는 문제가 생명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의 문제이고 이것이 교회의 문제이고 이것이 복음이고 종교예요. 바로 잠재의식 속에 한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는 뿌리가 있어요. 이 뿌리가 성장과정에서 상처를 깊게 입으면 고통스러운 상처의 축적이 잘못된 성격을 형성하고 마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은 반드시 그 삶 속에 상처로 인해서 무서운 결과를 나타내고 맙니다. 마음의 상처가 강한 사람들, 그 삶 속에 나타나는 어떤 특정적인 결과가 세 가지가 있어요. 마음의 상처가 그 삶 속에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사람은 삶에 나도 어쩔 수 없는 결과들이 나타나는 데 그 첫 번째 결과가 대인관계에 대한 어려움입니다. 내 성장과정이나 내 어떤 시기에 내가 남다른 마음의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대인관계가 힘듭니다. 무엇이든지 간섭하고 무엇이든지 주장해야만 자기의 마음이 안정이 되요. 타인의 주장을 무시하고 꼭 자기주장이 관철 되야 합니다. 강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속상합니다. 신경질이 납니다. 집안의 물건들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놓았던 대로 그대로 놓아야지 흩트리면 화가 납니다. 사람들과 깊이 사귀지 못하고 친구들도 별로 없어요. 사람을 싫어하여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집에 오는 것도 싫어하고 늘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주는 것도 모르고 그런 일에 익숙하지 못 합니다. 늘 다른 사람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남에게 후한 점수를 주기보다는 야박한 점수를 많이 줍니다. 늘 억울해 하기를 잘하고 남을 깎아 내리고 싶은 내 안에 어떤 것이 있고 예민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교만한 모습으로 남에게 비추어지고 자기는 모르는 또 다른 교만의 가면이 나를... 이렇게 되면은 부정적인 언어나 부정적인 태도가 늘 나를 괴롭히게 됩니다. 지금 자신의 고난도 고통도 다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하는, 그래서 제일 큰 피해자가 누구냐 하면 제일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배우자들이 많아요. 파트너가 많이 고난을 당합니다. 형제자매가 고난을 당합니다. 자식들이 고난을 당합니다. 다 세상이 모순이라는 겁니다. 원망 일변도로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 피해를 당한 것을 인식을 하지 못해요. 그냥 툭툭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제일 존경하고 가깝던 사람들 속에 무서운 못을 던지는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서운하고 불공평한 것은 물론이고 그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분노는 매일 싸늘하고 인정머리 없는 그런 성격으로 자꾸 발전해가고 있는 것을 자기는 모르고 그렇게 초년을 지나고 중년을 지나고 그렇게 나가고 말아요. 언어의 부정적이고 단정적인 표현 때문에 제일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면서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꼬.\'이런 고백들을 하지 않아요. 여러분, 그 유명한 수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마릴린 몬로를 알지요. 그 분이 고아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양어머니를 얻었어요. 아버지가 양어머니를 얻었을 때에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생애 속에서 당신과 아주 큰사랑을 나눈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느냐?\' \'없다. 아니다 딱 한 번 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내 의붓엄마가 내게 분칠을 해준다고 하다가 어머니의 손끝이 내게 닿았는데 그 때 짜릿한 사랑의 감각을 느꼈었다.\' 대개는 그런 감각이 없어요. 이유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상태가 나를 정복합니다. 강박적 사고가 내 모든 힘을 신경에만 쏟기 때문에 신경과민에 걸립니다. 그래서 늘 수면부족의 상태가 되고 이유 없는 우울증에 걸립니다. 대단히 밝은 줄 알고 결혼을 했더니 밝지가 않아요. 대단히 변덕이 심합니다. 걷잡을 수 없단 말이에요. 시편 32편에 뼈가 쇠하여 지고 여름가뭄처럼 그 진액이 말린다고 그랬어요. 얼마나 무서운 얘기예요. 늘 신경이 예민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평화가 없기 때문에 남에게 나누어 줄 것도 없어요. 주변에 존중할 사람도 신뢰할 사람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끈기와 일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늘 피곤하게 삽니다. 마음의 갈등이 뼛속 깊은 곳에 들어가기 때문에 번민 가운데에 있어요. 옷도 입었다가 갈아입고, 갈아입기를 잘합니다. 같다가 그만두기를 잘합니다. 물건도 샀다가 바꾸기를 잘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말의 원 뜻은 \'오호라, 나는 불운한 사람이로다.\'란 뜻입니다.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오호라, 내 속에 나쁜 사람이 나도 지배할 수 없는 사람이 또 있으니 어찌하면 좋을꼬. 내 속에 나도 모르는, 나를 울리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이 고통의 축적이 나의 잘못된 성격을 형성하고 말았구나. 여러분, 자석이 있는데 자석을 땅에 끌고 다니면은 여러 것들이 모여서 큰 덩어리를 형성합니다. 인간이 고난과 고통과 해결되지 않는 모든 마음의 아픔들을 그냥 자석처럼 끌고 다니면 다른 고통들이 끌려 다녀서 큰 덩어리를 만들고 말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는 데 다른 사람의 허락까지 받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해 가운데에 살아요. 내 마음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데에 다른 사람의 허락이 필요한 줄 알아요. 내 마음을 정복하는 데에 내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다른 사람이 꼭 개입해야 하는 줄 알아요. 인생 길의 첫 장애물은 자신이 세워놓은 정신적인 자기마음의 장애물입니다. 내 마음의 장애물은 남이 세워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의 장애물의 기준도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마음의 장애물에 내가 짓눌리고 내가 계속해서 강요받고 내 삶의 모든 자유를 반납하는 사람이야, 나는 이렇게 사는 사람이야, 난 이렇기 때문에 못 고치는 사람이야, 난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말 꺼야. 자기정체의 위기에 걸려있는 겁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내 마음의 장벽과 장애물. 이것이 피해자들입니다. 이것이 눌려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는 곳에는 자유 함이 있어요. 오늘 다 깨고 나오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떻든 우리의 경험이 어떻든 우리의 지난날의 고통이 무엇이든 오늘 하나님의 영으로 자유 함을 받으세요. 내게 모든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 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 나는 꿈의 공급자, 꿈의 조달자, 꿈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러나 제가 깨달은 것은 꿈이란 것은 귀중하고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꿈이 세계를 변화시키지는 못해요. 오직 그 꿈을 따라서 조금씩이라도 변해 가는 행동만이 자신의 미래를 변화시킵니다. 꿈만 안고 있는 사람, 꿈만 얘기하는 사람, 꿈만 꾸고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조금만이라도 변화를 시작하세요. 오늘 마음의 변화를 시작하세요. 작은 행동하나가 역사를 바꿉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우선 마음을 바꾸는 작은 행동 하나를 귀하게 여깁니다. 내가 여기 왜 왔느냐? 잘 생긴 자를 보러왔느냐? 옷 잘입은 자를 보러왔느냐? 당신이 여기 왜 왔느냐? 옳도다! 선지자의 음성을 들으러 왔도다! 아무리 작은 행동일지라도 그 행동 하나 하나가 올바르기만 하면 큰 차이점을 만들어 내고 맡기라.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꿈의 실현을 앞당기리라! 우리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는데 사실 아는 것이 힘이 아닙니다. 아는 것은 잠재 능력일 뿐입니다. 잠재력이에요. 아는 것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사람만이 늘 하나님의 기회를 낚아요. 오늘 바로! 우리 마음을 고치는 일에 행동으로 돌입하리라! 이 작은 일을 우습게 보면 안돼요. 어떤 사람이 쓴 후회의 책을 하나 봤는데 히틀러가 총독이 되려고 할 때 그 사람이 늦잠을 자서 그만 그 투표에 참여를 못해서 한 표 차이로 히틀러가 총독이 되었답니다. 만일 그 때 그 한 사람이 투표에 참여해서 히틀러가 당선이 안 됐으면 세상에 그 엄청난 전쟁, 어마 어마한 불행을 막을 수 있었어요. 그분이 자서전을 썼는데 내가 \"나 하나쯤이야 안가도 되겠지!\"작은 행동 하나를 잘못해서 세상의 어마어마한 불행을 막지 못했고 어마어마한 비극을 막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있어요. 1776의 미국의 역사를 보니까 미국이 원래 영어가 국어가 아니었어요. 독립을 할 때 회의를 했어요. 한 표 차이로 독어가 아닌 영어가 국어가 되었어요. 그 한 표 차이가 아니었으면 독어가 미국의 국어가 되었을 거예요. 옆에 분하고 인사합시다. \" 나 한사람이 이렇게 중요하군요!\" \"나 하나쯤 이렇게 사는 거지!\"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는 성격과 기질에 대해서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에 대해 잘 모르고 살아요! 성경에서만 갖고 있는 생명의 근원인 성격과 기질에 대해선 모릅니다. 성품이니 성격이니 몰라요. 성격은 후천적인 것입니다. 사실, 나를 울리고 남을 울리는 것은 성격입니다. 정말 나에게 고통을 주고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성격입니다. 정말 나와 남에게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것은 성격입니다. 정말, 결국, 성격이 주범입니다. 성격이 주범이에요! 이 성격을 어떻게 할 겁니까? 성격과의 전쟁이라구요. 일평생 자기성격과 남의 성격과의 전쟁이라는 거예요. 제가 얼마 전에 상담을 한 적이 있어요. 젊은 여인이에요. 목사님!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목사님과 상담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연예 시절과 결혼생활이 다른데요, 남편이 저를 싫어하기 시작했어요. 지금 돌이켜 보니까 저의 부모님이 저에게 좋은 학벌을 물려주는 것도 좋고 유산을 물려주는 것도 좋고 아름다운 미모를 만들어 주는 것도 좋고 아름다운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좋지만 좋은 성격을 키워 시집보내야 했어요. 이것이 잘못됐어요. 재산 떠나고 집 떠나고 믿음 떠나고 감정 떠나고 마지막 제게 남은 것은 제가 이제껏 만들어 놓은 성격밖에 없어요. 결국은 이 성격싸움을 하다가 지금 고난에 처해 있어요. 성격이 주범이군요. 목사님! 제가 예수님 안에 매일 죽고 있는데 이게 잘 안돼요. 여러분! 정말 이 성격 고칠 수 없는 것입니까? 자! 어떤 젊은 분이, 나이가 꽤 든 분입니다. 목사님! 목사님! 저의 아내가 대단히 맑고 명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나는 성격이 이렇게 밝지 못해서 이런 아내를 얻었습니다. 저는 실제로 그런 줄 알았습니다. 보니까 아닙니다. 밝았다 어두웠다 합니다. 나는 차라리 한쪽으로 우울한데 이 사람은 양면으로 가서 도저히 맞출 수 없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정말 성격은 고칠 수 없는 것일까? 이 성격이 정말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왜 사람마다 성격이 다를까? 왜 갑자기 나도 모르는 잠재된 내 성격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일까? 우선 알아야할 것은 성격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 만든 작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몇 십 년을 믿어도 제일 중요하고 아주 기초적인 것들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성격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답답한 일이 있어요? 하나님보고 책임지래요! 왜 잘못된 성격이 하나님의 책임입니까? 하나님은 그 생명 속에 기질을 만들었지 성격을 만들지 안으셨어요. 뭔가 하면, 파란 꽃이 있는데 그 위에 먼지가 쌓이고 오물이 쌓이고 더러우면 그 아래에 있는 아름다운 색은 다 없어지고 누렇게 되고 말아요. 잘못된 성격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다. 후천적인 것들의 종합입니다. 상처받은 아픔과 고통의 결과이고 우리가 그 동안 경험하고 체험하며 우리에게 끼친 모든 영향들이 모아진 자기 작품입니다. 내 작품을 내가 깨야지!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씻어 내야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성령을 붙들고 내 기질을 하나님 밑에 잠겨있는 아름다운 그 것들이 나올 때까지 씻어내야지! 그래서 인간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안에 내가 할 수 없는, 내 자아가 나를 괴롭히고 있사오니 하나님의 영으로 씻어주옵소서! 물같이 불같이 씻어주옵소서! 그런고로, 이 성격을 고칠 수도 있고 치유될 수도 있어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무조건 하나님 앞에 앉아서 치유 받겠다 라는 피동적인 자세로는 절대 성격을 고칠 수 없어요. 이 치유는 가만히 하나님 앞에 앉았다고, 교회를 다닌다고, 예배를 드린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생명을 주신 주님을 위해서 치유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 되신 주님을 위해서 내가 빛과 소금으로 내 기질을 드러내려고 하는 그런 변화에 눈을 떠야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자기 단정적인 교만을 내 버리는 단계가 우선해야 합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천만에요! 저는 저를 모릅니다. 저는 이만큼 살았지만 저는 저를 잘 모릅니다. 아무리 봐도 저를 잘 몰라요. 저의 과거를 뒤돌아 보아도 그때 내가 왜 그렇게 했는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나를 이리로 인도하고 왔어요. 지금의 모습도 보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인도하곤 합니다.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저는 저를 잘 모릅니다. 내가 나를 잘 안다고 하는 단정적인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생명을 이 땅에 내신 하나님! 내 생명을 건져주신 주님! 내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님! 그분을 바로 알 때만 나를 알 수 있다는 눈이 열리는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때마다 일마다 시간마다 붙잡힐 때에 자신의 성격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이 내 속에 장착해 놓은 기질이 나타나요. 기질을 가지고 하나님이 좋아하기를 원하지 그 사람의 성격을 가지고 사람들이 좋아하기를 착각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성격도 사용하지!\" 하나님은 그런 성격은 안 씁니다. \"하나님이 이런 성격도 만들었어!\" 이건 거짓말입니다. 자기 합리화이고 변명입니다. 하나님은 파란색, 노란색과 같은 이런 기질을 쓰는 것이지 파란색 위에 노랗게 칠하고 빨간 것 위에 노란 것을 칠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복된 소식에 귀를 기울입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를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내게 임하여 하나님의 기름이 나에게 부어졌으니, 성별의 기름이 내게 나타났으니 가난한 심령마다 복이 있도다! 마음이 상한 자마다 고침을 받고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고 갇힌 자는 놓임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와 신원의 날이 전파 되도다! 슬퍼하는 자는 위로 받고 찬양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하며 의의 나무가 생명 받아 일어나리라! 인생 길에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지금 울고 있습니다. 자신을 지배하려고 하는 지배권의 장악에 대한 그 놀라운 투쟁이,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투쟁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인간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임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눈을 뜨신 분, 바로 이런 사람이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이제 여러분! 사람 앞에 설 때에 입을 열 때에, 일 마다 때마다 내 안에 나도 정복할 수 없는 내가 나타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정복 하시옵소서! 지배 하시옵소서! 오호라!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죄악이로다! 죄악 된 자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바 악만 행하는 도다! 이 갈등과 고통과 모순에서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가 정복되게 하시옵소서! 우리 모두는 본연의 자아를 회복하고 싶은 몸부림을 갖고 사는 존재입니다. 이 내부에 강렬한 갈등, 이 삶의 고뇌! 오호라! 하나님! 나는 정말 곤고한 사람입니다. 나는 불행하고 비참한 사람입니다.
감사의 장애물(추수감사절)/단2:20-23
감사의 장애물(추수감사절)/단2:20-23 2004-05-28 16:49:39 read : 278 어느 날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땅에 보내어 한 천사에게는 기도라는 바구니를, 다른 한 천사에게는 감사라는 바구니를 주어 기도와 감사를 담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몇일 후 두 천사는 돌아왔습니다. 기도의 바구니에는 넘쳤으며 감사의 바구니는 몇 개만 담아 왔습니다. 우리에게 이 천사들을 보내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주시옵소서\" 는 많이 하면서 \"감사합니다\"는 얼마나 인색합니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새 천년이 40일 남았습니다. 한해를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올 한해 동안 나에게 배풀어 주신 많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진정으로 감사하는 믿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까? 1, 하나님은 성도가 감사하는 신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누가 복음 17장에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동네에 문둥병자 10명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보시고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고침을 받은 문둥병 자들이 너무 좋아서 각자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서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 \" 10명이 낫지 않았느냐?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주님은 은근히 저들이 고침 받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저들에게 무엇을 기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이 주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감사한 한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왔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자세가 바로 이런 것이 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위 생색을 내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2, 감사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어느 교회에 별명이 감사 목사님이 계셨답니다. 그 목사님은 무엇을 하던지 그냥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렇게 별명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는 주일날 눈보라가 치고 교통이 두절되어 예배에 성도들이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교인들이 말하기를 \'오늘은 우리 목사님이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안하시겠지?\" 예배가 시작되자 겨우 몇 사람이 참석하였는데 목사님이 기도하시기를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년 365일 날마다 이런 날씨를 주신다면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하루이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였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감사는 나의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축복을 많이 받았으니 감사하고 나는 축복을 받은 것이 없으니 감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감사는 자신의 믿음입니다. 욥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다니엘은 시련 속에서도 감사드렸습니다. 축복 받은 일이 없었는데도 저들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꼭 무슨 축복을 받아야만 감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축복을 받았을 때 당연히 감사를 드려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때 축복된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도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 좋은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믿음을 키워 나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야 성숙한 신앙인이 될 줄 믿습니다. 3, 감사는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가져다주는 지름길입니다.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까 생각합니다. 항상 마음의 소원이, 기도가 \'축복하여 주십시오.\' 이다. 우리가 더 큰 축복을 받으려면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더 축복 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조금 축복해 주십니다. 시험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조금 더 축복해 주시고, 그래도 또 감사하면 더 크게 축복해 주십니다. 그런데 축복해 주어도 감사할 줄 모르면 안되겠다. \'이제 그만,,,\' 하십니다. 저는 과일을 참 좋아합니다. 요즘 감이 싸다고 하는데, 큰마음 먹고 감 한 상자를 샀습니다. 그 감을 먹으면서 개척 교회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지난번에 심방 갔다가 김 집사님이 고구마를 두상자 주기에 그 목사님 드렸더니 얼마나 좋아하던지? 전화를 해서 오리고 하니 집사람이 \'좋지도 않는 감을,,,\' 한 상자를 다 줄 수는 없고 반 상자씩 나누어 먹자며 주었습니다. 다음날 박형제가 사무실에서 감이 들어왔다면 가져왔고, 수산에 심방을 갔더니 상혁이 엄마가 차에 감 한 상자를 실어 주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감 반상자 주고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요. 혜정이 어머니는 시골 갔다가 감을 두 상자 가져왔다고 말하던데 아직 사택에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한 장자는 가져오리라 믿습니다. 교히 가져오면 성도들이 나눠 먹지 않습니까? 문둥병을 고침 받은 사람이 열 명이지만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야 사람이 주님께 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사람은 병도 고침 받고 구원도 받는 놀라운 축복을 얻었습니다. 사실은 병 고침보다 더 큰 축복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병 고치고 물질 축복에 눈이 어두어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영혼이 구원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병 고친다 하면 사람들이 와 몰려듭니다. 이상한 이적이 일어났다 하면 사람들이 와 몰려듭니다. 이런 잘못 때문이 아직도 이단 교회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은 능력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둥병자 9명은 병 고쳤으니 잘 되었다고 좋아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한사람은 감사드리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감사 때문에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이 더 큰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더 크게 축복하실 수 있으시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감사를 열심히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4,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감사하는 신앙이 될 수 있을까요? 성도들은 감사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감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감사 신앙을 막는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고 더욱 풍성한 감사를 드리는 아름다운 신앙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미련한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졌다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마음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 신앙의 마음입니다. 믿는 자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깨닫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말씀으로 부서져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부서져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 감사가 나올 줄 믿습니다. 2) 교만한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봅니다. 그는 잘먹고 잘 살 줄 알았습니다. 재물이 많으니깐. 하나님께서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 할 줄 모르는 교만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복음찬송- 주님것을 내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아왔네 (223장) 천한이몸 내것이라고 주의일을 멀리했네 주님사랑 받기만하고 감사할줄 몰랐었네 주님말씀 듣기만하고 실행할줄 몰랐었네 아버지여 철없는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맡긴사명 맡긴재물을 주를 위해 쓰럽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자기의 노력으로 돌리는 자들입니다. 물론 우리들의 노력이나 열심도 있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측복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측복하심과 은혜를 무시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교만한 마음을 버릴 때 우리는 더욱 감사하는 신앙이 될 줄 믿습니다. 3) 인색한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다윗이 어렵고 힘들 때에 피난길에서 평소 잘 돌봐 주었던 나발을 찾아가서 음식을 요청했습니다. 나발은 별 볼일 없는 다윗에게 더 이상 도와줄 마음이 없어 거절을 하였습니다. 다윗의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 하였으니 나발의 아내이었던 아비가일이 이 일을 알고 속히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에게 가져와서 사죄를 하였습니다. 인색한 나발은 하나님의 처서 얼마 후 죽고,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삼상25;3-42) (잠언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아비가일의 풍성한 마음이 그를 왕비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귀하게 쓰실 줄 믿습니다. 더욱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4)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눅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집나 간 둘째 아들이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벌렸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이 밭에서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잡아 준 적이 있느냐? 면서,,,\' 그는 아버지 집에 살면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도 아버지게 항상 불평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에서 아침에 일하러 간 사람과 오후에 일하려 간 사람들이 한달란트씩 받았습니다. 나중 온 사람이 한달란트 받는 것보고 아침에 일찍온 사람은 생각하기를 더 주리라 생각하였던지 주인에게 불평하였습니다. 주인은 내가 너와 약속한 돈을 주었으니 무엇이 잘못이냐? 일꾼은 주인에게 원망하고 감사 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가 불평하면 감사가 사라집니다. 범사에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됩시다. 감사가 넘칠수록 축복도 넘칠것입니다. 찬송=405장-나같은 죄인
고난이란 장애물을 만날 때/ 벧전2:19-25
고난이란 장애물을 만날 때 벧전2:19-25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5) 믿음이 좋은 분들은 고난이 찾아올 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생각하고 잘 이겨나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때입니다. 특히 억울한 일을 만나거나 누명을 쓰는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라고 합니다. 억울한 일을 만났을 때, 참으면 세상은 우리를 향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욱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만약 내 권리를 찾겠다며 나서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해결을 위해 나설 수 있도록 참으시길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보이신 고난의 본을 생각해야 합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때 참는 것이 힘이 드십니까. 먼저 시범을 보이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가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고난입니다. 그것은 친히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으신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애매하게 욕을 받으셨지만 욕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받으셨지만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의 본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 고난 속에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내 권리보다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난을 통해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고난\'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한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비록 내가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고난받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법/요9:1-7
내 인생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법/요9:1-7 2006-12-27 10:57:43 read : 164 권영국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1. 여러분 혹시 살면서 하나님에 대해 실망을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왜? 하필 내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셨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하나님이 내게 이러실 수가 있어?> 지금까지 사랑했고 믿어왔던 하나님에 대한 실망으로 오늘 아침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은 없습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그동안 내 인생의 장애물로 여겨왔던 것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놀라운 축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고 내 성공을 방해했다고 생각한 그 장애가 오히려 나를 나 되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인생에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시각 장애인의 처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했을 것으로 본다면 그 사람의 인생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냉대와 조롱 속에서 자라다가, 커서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보면서 자기를 낳은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을 냉대하는 세상에 대해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보는 사람들마다 <네가 그렇게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이냐?> 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고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더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는 앞만 못 볼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가 어둠에 휩쌓였습니다. 처음에는 남들이 자신을 가두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자신을 가두어 버렸습니다. <나는 실패작이야. 이 세상에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지.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 뿐, 이제 내 인생은 끝장이야> 그런데 앞을 못 본다는 인생의 장애 때문에, 삶의 목적과 용기를 잃고 살아가던 이 사람 앞으로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반응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제자들이 맨 처음 보인 반응은,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 사람이 틀림없이 무슨 죄를 지었다> 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해졌습니다. 저 소경이 저렇게 된 것은 필시 죄 때문일 텐데, 그런데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으니 금방 나온 아기가 무슨 죄를 지을 수는 없고, 그렇다면 태중에 있을 때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 사람들에게 이것은 참 호기심이 당기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인생의 장애를 보는 두 가지 질문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런 사고와 질병과 재난을 만난 사람을 보면, 제자들처럼 묻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은 무슨 죄 때문일까?” 그러나 우리가 저들이 무엇 때문에 저런 고통과 불행을 당했을까? 그 이유를 묻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느낄 수 없으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 소경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네가 그렇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소경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항상 사람들은 불행을 당한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소?> 라고 물을 뿐,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보이는 불행을 자신들의 호기심 거리로만 삼을 뿐 그 불행으로 상처받고 울고 있는 한 영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가진 인생의 장애에 대해서 계속해서 왜? 라고 질문하는 동안에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인생에 일어난 불행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한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욥입니다. 동방에서 제일 가던 부자가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물을 잃고 한 푼 없는 알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모여 생일잔치를 하던 집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 한 자리에서 열 명의 자녀가 다 죽었습니다. 자신의 몸에는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종기가 나서 재 가운데 앉아 기와장으로 헌데를 긁게 되었습니다. 그 불행한 상황에서 옆에 있어주어야 할 아내마저 남편을 욕하며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욥은 왜?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를 하나님께 질문하며 그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거기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주시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은 갑자기 인생에 찾아온 고통의 원인을 알면 고통이 줄어들거나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자기가 왜 소경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면 고통이 줄어듭니까? 아니면 고통을 더 잘 참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소경에게 필요한 것은 왜? 라고 소경된 이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듣는 것입니다. 인생에 장애물을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왜? 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지식적인 어떤 대답을 찾는다 해도 그 장애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왜? 라는 질문이 아니라,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이 고통의 원인에 대해 침묵하시는 것은, 설명해 주어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앞에서 인간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한 작은 벌레와 같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의 비밀을 설명하는 것은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에게 색깔을 설명하는 것과 같고, 귀머거리에게 모차르트의 음악을 설명하는 것이며, 원자도 모른 사람에게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인간은 4차원 안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만 인식할 뿐, 5차원 6차원 그 이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대답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인간이 경험한 가장 무섭고 처절한 고통이었습니다. 누가 십자가에서 일어난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당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누가 인간이 되신 하나님보다 더 자신 있게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인간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며 불행입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진 인생의 모든 장애물과 우리가 당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십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기 문제의 답을 얻게 됩니다. 자신의 장애가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라는 관점으로 바뀌게 됩니다. 자신의 비참한 삶이 무엇인가의 <결과>가 아니라 무엇인가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은 <이것은 죄가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불행을 죄의 결과로 본 제자들의 생각을 뒤엎으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3절) 그 순간 지금까지 소경의 몸을 얽어매고 있던 모든 사슬이 풀어졌습니다. 그를 가두웠던 어둠이 걷히고 대낮보다 더 환한 빛이 그의 인생에 들어왔습니다. - 내가 소경이 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 이 소경된 내 인생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 쓰레기 같이 버려진 내 인생도 하나님이 쓰신다고? 지금까지 누구도 그렇게 자기에게 다가와 그처럼 마음을 만져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경이라는 자신이 가진 장애만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속에서 상처받고 부서진 그러나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한 영혼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죄 덩어리라고 비난하였지만 예수님은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자신의 장애를 더 이상 장애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이 하는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철학자, 심리학자. 교육학자. 다른 전문가들이 뭐라고 따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내 인생의 장애를 던져 버리는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질문은 대답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답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장애를 던져 버리시는 분이시고, 내 문제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상처의 원인은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을 죄의 결과로 설명해서는 풀리지 않습니다. 죄와는 관계없이 오는 불행도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인간의 불행에 대한 <왜?> 라는 질문에는 만족할 만한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질문을 바꾸어 놓습니다. <왜?> 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으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사는 우리는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제부터는 왜 나는 이런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 묻지 말고,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이 장애를 내게 허락하셨을까? 를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장애 속에 감추어진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 보냄을 받은 인생 예수님은 소경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냅니다. 실로암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면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더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은 너는 이제부터 보냄을 받은 인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냄 받은 인생임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먼저 예수님 자신이 보냄 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언제나 <나는 보냄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잃지 않았습니다. 보냄을 받았다면 보내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늘 그 보내신 분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6:38) 또 요5:3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5:30) 예수님은 한 번도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왜? 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 앞에 섰을 때에도 결코 왜? 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보냄 받은 인생은 왜? 라고 묻지 않습니다. 다만 사명만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실로암으로 내려가는 소경도 이제부터는 보냄 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실로암으로 보내시면서 그도 보냄 받은 인생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내가 보낸 인생이다. 이제 더 이상 왜? 냐고 이유만 묻지 말고, 왜? 하필 나만 그러냐고 원망 하며 주저앉아 있지 말고, 네 인생에도 할 일이 생겼다. 아직은 소경이고 어둠 속에 갇혀 살지만 가라! 내가 너를 보낸다. 실로암에 가면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곳에서 너는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나는 하나님의 보냄 받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그것을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이 맡기신 일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일에 좇기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하나남이 주신 목적을 좇아가는 인생입니까? 보냄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대신 보내신 분을 기쁘게 하는 인생을 삽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8:29) 여러분은 지금까지 누구를 기쁘게 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그리고 남은 생애는 누구를 기쁘게 하는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보내신 분입니까? 보냄 받은 자신입니까? 우리 인생의 최종 결산은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판단이나 칭찬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보내신 분 앞에 섰을 때 진정한 칭찬과 상이 있을 것입니다. 보냄 받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보냄 받은 사람은 순종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가서 씻으라 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치료행위였습니다. 그게 과연 될까? 그러나 소경은 그대로 가서 행했습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은 따져서 이해하고 그 다음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해되고 안 되고는 보내신 분의 책임이고 보냄 받은 자의 몫은 가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우리의 순종에는 어떤 때는 이해하고 가는 것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아도 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명령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명령 자체는 이해되지 않아도 명령을 내리시는 분에 대한 신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보냄 받은 자들은 환경에 집중하지 말고, 자신에게도 집중하지 말고, 오직 나를 보내신 분에게만 집중해야 합니다. 보냄 받은 자에게 중요한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보냄 받은 자를 평가하는 것은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오직 순종만이 그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둘째, 보냄 받은 인생은 때를 압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기까지 일생동안 일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그의 생애를 보면서 나태, 게으름, 대충대충, 핑계 이런 말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왜요? 십자가에 못 박힐 자신의 때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4절) 일해야 할 때가 있고 일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언제나 일할 수 있고 아무 때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변화하며 끝이 있습니다. 시간도 건강도 재물도 잃어버릴 때가옵니다. 기회도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갑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일할 수 있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아는 사람은 핑계대지 않습니다. 내일로 미루지도 않습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몫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죄의 정체는 내일 일이 내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살아있는 동안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지체하지 말고 신속히 행하시기 바랍니다. 모르긴 하지만 이곳에 오신 많은 분들이 일 때문에 상처받고 일하다고 시험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당분간 일도 맡지 않고 숨어서 지내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교회는 교인수는 많지만 교회학교, 순, 제직회 부서등 구석구석에 너무나 많은 일꾼들이 부족합니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인생이 가진 상처나 장애가 자신을 묶어두는 사슬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 고통이 나를 나 되게 만들어 갑니다. 그것을 내 인생의 걸림돌로 여기지 말고 끌어안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체험하고 그 속에서 하나의 더 깊은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보냄 받은 사람은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있는 동안은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리자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셨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는 한에는 세상이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걱정할 것이 없다. 예수님이 모든 문제의 답이니까. 소경의 장애조차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동안 내 인생에 일어날 어떤 장애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에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빛을 우리를 통해 비추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있는 동안은,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고통과 상처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되고 있습니까? 과연 이 민족과 이 나라는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를 믿고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자 그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삶의 용기와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은 빛의 아들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장애 때문에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활의 새 인류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인생의 장애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왜라는 물음에 매달리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나와서 그 장애물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보냄 받은 자로 살아가십시오. 어떤 장애를 가졌다할지라도 여러분은 이제부터 보냄 받은 인생입니다. 내가 보냄 받은 인생임을 깨달을 때 여러분의 고통은 영광으로 바꾸어질 것입니다. 인생의 장애는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능력을 가로막는 장애물/마13:53-58
능력을 가로막는 장애물 마13:53-58 사랑의 의술로 아프리카를 변화시킨 슈바이처 박사가 한 참 명성이 있을 때의 일입니다. 슈바이처(A.Schweitzer 1875-1965 독일 루터교신학자. 철학자. 음악가. 아프리카 선교사. 노벨평화상(1952)수상)가 자기 재산을 모두 병원 유지를 위해 기부했으나, 그것으로는 몰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지로 다니며 부득이 모금운동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자기 고향인 알자스에 들르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친지와 동료 그리고 각계 인사들이 도착하는 기차역에 모여 `20세기 성자\'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기차가 도착하자 환영 나온 사람들과 기자들은 1득실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슈바이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둥대는 사람들의 눈에 비로소, 맨 뒷칸 3등 열차에서 내려 초라한 모습으로 플랫폼으로 걸어 나가는 한 남자가 보였습니다. 그가 바로 슈바이처 박사였습니다. 사람들이 달려가서 그를 붙들고 \"아니, 박사님! 어째서 3등칸을 타고 오셨습니까?\"하고 원망스럽게 물었지요. 그 때 슈바이처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4등 칸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3등 칸을 탔습니다.\" 설마하니 슈바이쳐 박사가 가장 불편한 3등 칸으로 오실 줄 알았겠습니까? 선입관 때문에 고향 사람들이 슈바이처 박사를 제때 못 만난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진 선입관 때문에 주님을 만나지 못할 수가 있음을, 은혜를 받을 수 없음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속에서 하나의 완벽한 것이 있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몰려오는 군중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전하셨습니다. 많은 이적을 행하셔서 이제는 소문이 꽤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30여년 동안 살았던 고향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고향에 올라가셔도 여타지역처럼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쳤습니다. 잠시도 쉬시지 않고 어느 곳에 가든지 한결같이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바쁘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군중들이 몰려올 때마다 그들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성실했습니다. 우리도 성실해야 합니다. 내 기분에 따라, 환경에 따라서 달라져서는 안됩니다. 성실이란 한문의 뜻은 \"말씀이 이루어져 열매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예수님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드리는 성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실의 영어단어는 integrity 고결. 완전무결 본래의 모습 등의 뜻이 있습니다. 나의 성실한 믿음생활을 통해서 주님의 본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래의 모습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날 때 우리는 성실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행적을 보면 어떤 마을로 가시든지 하시는 일에 대한 성실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을 하기 싫을 때도 있고 기분이 나쁘면 안할 수도 있습니다. 크고 작은 장애물이 발생하면 또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디를 가든지 똑같았습니다. 장애물이 나타나도 줄곧 감당했습니다. 심지어 고향에 가서도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부모와 형제를 만나서 정담을 나누고 해야 할 것인데 예수님은 회당에 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성실하게 전하시는 예수 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던 자들의 반응은 다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 성실함으로 될 때에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는 반드시 사람들이 놀라게 됩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설교를 했을 때 당시 듣고 있던 사람들이 \'이 사람이 갈릴리 어부가 아니냐\'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는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성실하게 일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능력이 나타나고 이상한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선입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선입관 때문에 그 사람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는 경우가 있고 나타난 현상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현상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이 고향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칠 때에 그 가르침이 놀랍다는 반응은 하면서도 하는 말이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마가복음 6장1-6절에 똑같은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아버지 요셉의 언급은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라고 비아냥거리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모욕적인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당시의 목수는 천한 신분이기에 존경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목수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마리아가 아니냐는 것은 결국 그 사회에서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표현입니다. 즉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났으니 얼마나 수군거렸겠습니까? 결국 나사렛 사람들은 자식을 부모의 상황에 제한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중에 \"개천에서 용 났다\"말이 있는데 이 말은 하찮은 곳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바돌로매)에게 나사렛 예수를 전합니다. 그 때 나다나엘이 한 말이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때 빌립이 \"와보라\"(요1:46)고 했습니다. 내가 먼저 가지고 있던 생각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나사렛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을 때 \'아~ 예수는 그럴만한 위인이 될 수 없어\'라고 단정을 지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동네 사람인데, 우리와 함께 이웃지간으로 살아온 자인데, 그가 남쪽에 갔다오더니 우리를 가르쳐~ 그까짓게 뭔데... \" 나사렛에서 무슨 큰 인물이 나겠느냐고 했던 것을 보면 어느 나라나 사람을 평가할 때 환경에 따라 판단하여 잘못 평가할 때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목수의 아들이 대통령이 될 수 있고 어부의 아들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선산 농촌 출신입니다. 전두환 대통령도 우리 교회 합천 수련장 가는 길목 농촌의 작은 마을 출신입니다. 거기다가 대구공고를 졸업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도 팔공산 자락에 있지 않습니까? 지금 김대중 대통령은 목포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 출신입니다. 상고출신입니다. 미국의 대통령 제퍼슨, 링컨, 카트 등을 보면 출신 배경은 보잘 것 없습니다. 부모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인물이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이런 인간적인 배경을 가지고 후손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는 신앙이 좋지 않아도 아들 딸은 신앙이 좋을 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반면에 아버지와 어머니 신앙은 좋은데 자녀들의 신앙은 엉망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뿐 아니라 사회생활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사람들은 아버지 어머니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음으로 예수님도 존경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 옛날 사회에서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으로 구분해 놓고서 개망나니 짓을 하면서 양반 같은 짓을 하지 못해도 아버지가 양반이므로 아들은 양반이 됩니다. 반면에 상놈은 아무리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실력을 갖추어도 아버지가 상놈이기 때문에 아들도 상놈취급을 당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개천에서 용이 나야 합니다. 개천에서는 늘 미꾸라지와 피라미 같은 것만 나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충격을 받고도 깨우침이 없고, 도전을 받고도 변화가 없었던 그들은 끝내 예수님을 배척하고 맙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인간적인 배경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면 실수를 범하게 될 위험이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입관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큰 장애가 있다면 바로 이런 선입관입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을 계속 봅시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다시 말하기를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그러므로 예수님도 존경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느냐\" 예수님을 자신들과 똑 같은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육신적인 형제들과 같이 취급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다 알고 있을텐데도 그들은 다른 형제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판단하여 그를 경멸했습니다. 사람을 아주 무시했습니다. 사람을 주시했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큰 장애물이 교만함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자가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권세자들이 서민들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이런 무시함과 업신여김은 사람의 능력을 제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임함을 방해하는 요소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우선은 선입관과 무시함, 즉 교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한 무시함과 업신여김은 결국 자신들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로부터 임하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과 치유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보고 대단히 놀래면서도 예수님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는지, 예수님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를 의심하면서 서로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을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 같으면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고 온 동네에 다니면서 소문을 내고서 그 사람 앞에 다가가서 서로가 그 능력을 체험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너무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능력을 의심하게 되고 배척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습니다. 사기를 치고 이상한 능력이나 행하는 요술하는 사람으로 취급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않고 한 인간으로 보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과 견주어서 같이 평가를 내렸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57절에 \"예수를 배척한지라\"고 했습니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억누르다\"는 의미를 가진 어근입니다. \'그들이 걸려 넘어졌다\' \'그들의 감정이 매우 상했다\' \'그들이 적대시했다\'는 뜻입니다. 배척이란 오도된 여론으로 올가미를 씌워 내어쫓는 것을 말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동네에서 내어쫓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내용은 인정하지만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받아들일 수 없고 예수님이 전하는 말씀은 능력이 있지만 그의 신분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간혹 알량한 자존심, 사람을 우습게 보는 교만함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면 누가 손해를 봅니까? 결국 자신들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이렇게 능력을 보고도 못 믿고 듣고도 못 믿는 것은 내용을 보지 않고 껍데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간혹 부흥회에 참석하거나 우리 교회에 다른 강사를 모시고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은 완전히 비워놓아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선입관을 가지고 인간적인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은혜를 못 받습니다. 사실은 잘 안다는 것이 좋을 때도 많지만 좋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잘 안다는 것을 통해서 사기를 치고 잘 안다는 것 때문에 안심했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특히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 희롱이나 강간을 당할 때 보면 모르는 사람 보다는 평소에 잘 아는 지인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또 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는 말입니다. 구약 선지자 중의 예레미야도 아나돗의 아들로서 고향에 가서 예언을 했는데 고향 사람들이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데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렘11:21)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생긴 격언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 오기 전에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1:21∼34, 2:1∼12, 3:1∼6, 5:21∼43). 나사렛 그들은 예수님의 그런 좋은 소문을 들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오셨어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들은 놀라면서도 의심만 품었지 그 말씀과 행하신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선입관을 가지고 만나는 것입니다. 선입관을 가지고 만나면 왜곡 되기가 쉽습니다.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좋은 사람은 무조건 좋게 보고, 나쁜 선입관을 가지고 있으면 모조건 나쁜 점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하는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경공부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선입관을 보리고 항상 오늘 새로운 말씀을 듣도록 해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지난날에 같은 본문으로 다른 곳에서 다른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다 할지라도 선입관을 버리고 오늘 새로운 메시지를 사모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강압적으로 배척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주님의 능력이 덜 나타났습니다.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나타나기는 났는데 다른 지역에서의 능력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능력이 행하실 수도 없었다고 마가복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58절에 \"저희가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에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줄었거나 소멸된 것이 아닙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을 했기 때문에 다른 동네에서 일어났던 이적들이 잘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사람에게 잘 나타납니까? 예수를 믿은지 오래 된 분입니까? 예수를 믿은지 오래되지 않은 초 신자들에게서 놀라운 능력이 잘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 때문입니다. 58절에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은 당사자들의 믿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병을 고침 받은 사건들을 보면 예수님이 선언하신 내용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사가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 물론 은사를 받아야 할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안수기도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보다는 안수기도를 받고 있는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전혀 질병을 고쳐본 일이 없는 선교사님들이 외국에 나가서 기도할 때 질병이 고침받는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어떤 분들에게 안수기도를 했을 때 병이 금방 났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한다고 다 낫는 것은 아닙니다만 결국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기도하는 각자의 자신들의 믿음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불신앙은 재앙을 일으킵니다. 마태복음 8장10절에 보면 주님은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기에 주님께서 극찬하셨을까요?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었던 백부장은 이방인입니다. 1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그는 그 지역 치안 책임자입니다. 지금의 경찰서장쯤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백부장의 하인 하나가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에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 간구했던 것입니 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만 하시옵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고 했습니다. 기적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소문만 듣고도 믿는 믿음,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기적을 보고도 배척했던 나사렛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너무 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신 말씀 중에 \"믿지 않을 사람은 죽었던 사람이 부활해나가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딸의 병이 낫고 아들의 병이 나아도 부모님들이 믿지 않고 불신앙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의 임함의 차이는 신분의 차이도 아닙니다. 민족의 차이도 아닙니다. 지식 수준의 차이도 아닙니다. 다만 믿음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에 장애가 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능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다면 철저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신앙이 든든해집니다. 선입관과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트려버립시오. 그러면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이 되지 마시고 가버나움의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여 사시기를 바랍니다.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 히12:1-4/ 2003-05-12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 히12:1-4 ❏ 강아지 팝니다 어떤 사람이 “강아지 팝니다”라는 광고를 냈더니. 어린 소년 하나가 찾아와서 값이 비싸지 않으면 한 마리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25불은 내야 하는데.”라는 주인의 말에 실망에 싸인 소년이 “2불 5센트 밖에 없는데, 하여간 강아지를 보여주시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렴. 보여 주고말고. 돈이 지금 모자라면 어떻게 하는 방법이 있겠지”라고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털뭉치 같은 조그마한 강아지 다섯 마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순간 소년은 강아지들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아저씨! 이 중에 한 마리가 다리를 절름거린다고 들었는데 어떤 거지요.”라고 물었습니다.“그래. 네 말이 맞다. 바로 이 강아지가 다리를 절름거리는데 내내 그럴 거야.” 주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그 강아지가 바로 제가 원하는 강아지인데, 어떻게 돈은 차차 조금씩 갚기로 하고 살 수 있을까요.”하며 간청했습니다. “평생을 다리를 절어도?”라는 주인의 반문에 소년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한쪽 바지를 걷어 올리며 자기의 성치 않은 다리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잘 걷지 못하고 절름거리지요.”그리고는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그 강아지를 쳐다보며 “많은 사랑과 도움이 이 강아지에게는 필요할 거예요. 저 역시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았지요. 불구의 몸으로 자라는 것이 보통 힘 드는 일이 아니거든요”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그 말을 듣고“이 강아지를 가져가거라. 네가 이 강아지를 잘 보살펴 줄 주인이 될 것을 알고도 남겠다. 자. 돈은 필요 없으니 그냥 가져가거라”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인간적인 시련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주님의 인간에 대한 연민은 우리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아시는 주님은 그것을 맡아 주시기에 충분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장애자가 되기 때문에 강아지라도 장애의 어려움을 알고 있에 자신이 캍아 키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부의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장애자의 슬픔을 익히 알기에 강아지의 모든 아픈 부분을 맡아 키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하는데 우리의 장애가 있다고 하여도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 준다고 하는 것을 알아 처음부터 장애를 두려워하여 나서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우리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하여 처음서부터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거치는 것이 있겠습니까 ? 이를 생각하여 처음부터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를 지켜주시고 안아 주시고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생각하여 당한 경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달음질하는 달 세 번째 주일을 맞아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선수는 달음질하지만 반드시 기억하고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장애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단 장애는 달음질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분야에서 장애와 훼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장애가 있습니다. 악한 일이나 선한 일이나 장애가 있습니다. 세상일에도 장애가 있고 하나님의 세계 신앙에도 장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경주하는 데는 어떤 장애가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Ⅰ.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원어-옹콘 판타, 라는 말로서 과도하게 무거운 것, 거대한 짐을 말한다. 이 같은 것이 장애가 되어 운동 경기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과도하게 무겁고 짐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 육적인 문제는 커다란 파커나 신발인 워커나 아니면 무거운 짐 같은 옷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필요이상의 짐이나 배낭을 메고 뛴다면 안 된다. 운동장에 나가는 사람들이 이 같이 하고 뛰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운동선수가 몸이 가벼워야 한다. 제일 짐스러운 것이 있다면 몸무게이다. 모든 운동을 보게 되면 몸이 제일 부거운 사람은 운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복씽을 한다든지 육상경기를 한다든지 농구, 배구, 등산, 테니스, 축구, 수영 등의 많은 운동이 있습니다만 몸이 가벼워야 운동이 될 수 있고 경쟁력이 있다. 몸이 무거우면 마음대로 달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 등산의 예 문제는 영적인 무거운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 안일과 평안함이다. 이로 인한 몸무게가 나가게 된다. 먹고 자고 하면 몸무게가 자신도 모르게 하루가 다르게 몸무게가 불어나게 된다. (잠6:6-10)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나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가난이 강도 같이온다고 하였습니다. 이 같이 신앙인의 적은 게으름이다. 안일과 평안을 좋아하는 것으로 인한 신앙의 무게가 무거워 경쟁력이 없게 되며 달음질하는 일에 장애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 기도하는 일과 에배 드리는 일과 전도, 헌신, 봉사, 가르치는 일등을 들을 것입니다. 몸이 불었으므로 활동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럼으로 신앙에 안일과 평안함으로 신앙의 몸무게가 무겁게 하여 활동하기가 어렵다. ❏ 새벽기도 : 반짝 반짝 일어나야 한다. 몸이 무서우므로 일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신앙의 비만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인 비만을 위해 염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는 비만을 위해 많은 투자가 있다. 그러나 신앙의 비만 치료를 위해서는 전연 관심이 없다. ❏ 어느 드라마를 보니 비만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본적이 있다. 비만에 좋다는 운동은 하지 않은 것이 없으리만치 모두다 하고 좋다는 약들을 엄청난 비용을 들여 경제적인 낭비를 가지는 바람에 끝내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영적인 비만을 줄이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애써 본적이 있습니까 ? 한번 다시 스스로에게 자문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세상 몸매는 가벼우면서도 영적인 몸매는 엄청나게 비만이 되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 정신비만증 환자 옛날 희랍의 전제국가의 한 왕이 24시간 여색과 주지육림에 탐닉하면서 자기를 더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도와 행복도를 더 높이는 수단과 방법을 상금을 걸고 천하에 널리 구하게 하였다. 별별 기발한 새 아이디어들이 실험되었으나 그의 불만도와 갈증은 날로 가중되기만 했다. 새 아이디어의 제공자들은 그를 실망시킨 벌로 사형을 받았다. 어느 날 왕 앞에 행복의 새로운 제안자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녀는 왕 앞에 나타나서 꾸짖는 눈빛으로 “왕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기쁨을 단념하십시오. 남을 행복하게 하거나 기쁘게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쁨과 행복을 원하신다면 하나님과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십시오.”이 말을 들은 왕의 표정은 숙연해지고 두 눈에는 눈물이 맺히며“딸아 그대의 말이 옳도다”하고 상을 내렸다 한다. 이 왕은 육적인 비만으로 주지 육림속에 살아간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미국의 한 가요 가운데“행복하고 싶어라. 그러나 그대를 행복하게 못하면 나는 행복해질 수 없네”라는 것이 있다. 이 가요는 한 여인에게 속삭인 말이지만 행복의 본질을 꿰뚫은 말이다. 참 행복은 \\\'같이 누리고 나누어 갖는\\\'것이다. 미국의 사망율의 54%는 비만증 고혈압계통의 병 때문이라고 한다. 사해는 하구는 있어도 유출구가 없어 죽음의 호수가 됐다. 나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정신의 사해(死海)요. 그러한 사람은 정신의 비만증 환자다. 하나님과 남을 기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하여 냉수 한 잔, 티 없는 미소 하나일지라도 정성된 마음의 소모와 아픔을 가지고 나누어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정신의 비만증 환자요, 사해 인생이다. 얼마나 소중하고 비밀한 행복의 교훈인가? 남을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 진다는 것을 나는 예수에게서 배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인 비만증 환자로서 일생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비만의 살을 빼고 이제는 가벼운 몸매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생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는 우리의 무거운 비만의 몸으로 얼마나 수고하고 이 짐 때문에 고생하는 가운데 있습니까 ? 이 같이 영적인 비만의 살을 빼고 가벼운몸으로 헌신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인 비만의 사람들 1) 부자 청년이다. (마19: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 아버지 장예를 핑계대는 사람 (눅9:57-62)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3)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 (창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Ⅱ. 얽매이는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 어원 - 유페리스타톤 말로서 마음을 분산시키며 에워싸고 넘어지게 하는 죄를 의미한다. 즉 운동선수가 달음질할 때 펄럭이는 옷고름이나 허름하게 맞지 않는 옷으로 눈가를 덮는 것을 말한다. 펄럭 거리는 옷이 눈을 가리고 끈내 몸을 휘감아 넘어지게 한다거나 신경을 쓰이게 하는 것이 있다. 이로 인하여 운동 하는 선수가 신경쓰이기 때문에 경주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을 말한다. 나를 쉽게 넘어지게 하는 죄가 무엇일까 ? 세상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쾌락, 방종, 혀, 정욕, 교만, 욕심, 세상 친구들, 텔레비죤, 낚시 등등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신경을 자극하고 이로 인하여 휘감아 버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것들을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로 인하여 휘 감겨 넘어지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리고 주님을 좇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 내면의 거울 자기밖에 모르던 인색한 부자가 유대인 교사인 랍비를 만났다. 랍비는 그를 데리고 창가로 갔다. \\\"무엇이 보입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이번에는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무엇이 보입니까?\\\" \\\"제 얼굴이 보입니다.\\\" 그러자 랍비는 말했다. \\\"창문과 거울은 모두 유리로 돼 있으나 거울 뒤에는 수은이 칠해져 있어 밖이 안보이고 자신만 보게 되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내면이 탐욕으로 칠해진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불행한 존재지요.\\\" ❏ 아합왕의 탐욕, 유다는 얼마나 유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인가 ? 그러나 그는 인간의 욕망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휘감겨 넘어져 완주하지 못하는 불행을 입은 제자이다. (욥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사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우리를 휘감아 버려 운동을 할 수 없도록 장애가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이 같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당한 경주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Ⅲ. 인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달음질하는 선수는 인내하여야 한다. 달음질 하는 선수는 많은 고통이 따르도록 되어 있다. 복통을 일으키는 일, 힘들고, 땀흘리는 일, 가쁜 숨을 쉬어야 하는 어려움, 쉬고 싶어 하는 유혹등의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같은 유혹에 넘어가도 않되고 육적인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서 안된다. 참아야 한다.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참지 못하여 피차 챙피스러운 꼴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럼으로 참는 지헤를 발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인내란 어려움을 당할 때 참고 견디고 막아 내는 일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시련의 자리에서 일어나 정명으로 대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하기만 하는 것이 인내가 아니라 시험과 고난당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면으로 경주에 임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신앙의 어려움을 당할 때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시험에서 더욱 분발하여 신앙으로 진일보 하는 것을 의미한다. ❏ 80노인의 건강 비결 80노인이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무병 건강하다\\\'는 진찰 결과를 말하고, 노년에까지 무병 건강함에 대한 비결을 물었다. \\\"결혼 초기에 부부간의 약속한 얘기가 있습니다. 부부생활 중에 화나는 일이 있을 때 화평을 위해 아내는 부엌에 피하고, 남편은 외출하여 산책하기로 하였지요. 지금까지 이것을 지켜옴으로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 그것이지요.\\\" 맺는 말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ㄷㅇ안에 어찌 어려움이 없을수 있겠습니까 ? 신앙에 경주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1)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2) 얽매이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3)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을 감안하여 당한 경주에서 상급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 히12:1-4/ 2003-06-20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 히12:1-4 ❏ 강아지 팝니다 어떤 사람이 “강아지 팝니다”라는 광고를 냈더니. 어린 소년 하나가 찾아와서 값이 비싸지 않으면 한 마리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25불은 내야 하는데.”라는 주인의 말에 실망에 싸인 소년이 “2불 5센트 밖에 없는데, 하여간 강아지를 보여주시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렴. 보여 주고말고. 돈이 지금 모자라면 어떻게 하는 방법이 있겠지”라고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털뭉치 같은 조그마한 강아지 다섯 마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순간 소년은 강아지들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아저씨! 이 중에 한 마리가 다리를 절름거린다고 들었는데 어떤 거지요.”라고 물었습니다.“그래. 네 말이 맞다. 바로 이 강아지가 다리를 절름거리는데 내내 그럴 거야.” 주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그 강아지가 바로 제가 원하는 강아지인데, 어떻게 돈은 차차 조금씩 갚기로 하고 살 수 있을까요.”하며 간청했습니다. “평생을 다리를 절어도?”라는 주인의 반문에 소년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한쪽 바지를 걷어 올리며 자기의 성치 않은 다리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잘 걷지 못하고 절름거리지요.”그리고는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그 강아지를 쳐다보며 “많은 사랑과 도움이 이 강아지에게는 필요할 거예요. 저 역시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았지요. 불구의 몸으로 자라는 것이 보통 힘 드는 일이 아니거든요”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그 말을 듣고“이 강아지를 가져가거라. 네가 이 강아지를 잘 보살펴 줄 주인이 될 것을 알고도 남겠다. 자. 돈은 필요 없으니 그냥 가져가거라”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인간적인 시련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주님의 인간에 대한 연민은 우리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아시는 주님은 그것을 맡아 주시기에 충분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장애자가 되기 때문에 강아지라도 장애의 어려움을 알고 있에 자신이 캍아 키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부의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장애자의 슬픔을 익히 알기에 강아지의 모든 아픈 부분을 맡아 키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하는데 우리의 장애가 있다고 하여도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 준다고 하는 것을 알아 처음부터 장애를 두려워하여 나서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우리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하여 처음서부터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거치는 것이 있겠습니까 ? 이를 생각하여 처음부터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를 지켜주시고 안아 주시고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생각하여 당한 경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달음질하는 달 세 번째 주일을 맞아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선수는 달음질하지만 반드시 기억하고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장애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단 장애는 달음질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분야에서 장애와 훼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장애가 있습니다. 악한 일이나 선한 일이나 장애가 있습니다. 세상일에도 장애가 있고 하나님의 세계 신앙에도 장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경주하는 데는 어떤 장애가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Ⅰ.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원어-옹콘 판타, 라는 말로서 과도하게 무거운 것, 거대한 짐을 말한다. 이 같은 것이 장애가 되어 운동 경기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과도하게 무겁고 짐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 육적인 문제는 커다란 파커나 신발인 워커나 아니면 무거운 짐 같은 옷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필요이상의 짐이나 배낭을 메고 뛴다면 안 된다. 운동장에 나가는 사람들이 이 같이 하고 뛰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운동선수가 몸이 가벼워야 한다. 제일 짐스러운 것이 있다면 몸무게이다. 모든 운동을 보게 되면 몸이 제일 부거운 사람은 운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복씽을 한다든지 육상경기를 한다든지 농구, 배구, 등산, 테니스, 축구, 수영 등의 많은 운동이 있습니다만 몸이 가벼워야 운동이 될 수 있고 경쟁력이 있다. 몸이 무거우면 마음대로 달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 등산의 예 문제는 영적인 무거운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 안일과 평안함이다. 이로 인한 몸무게가 나가게 된다. 먹고 자고 하면 몸무게가 자신도 모르게 하루가 다르게 몸무게가 불어나게 된다. (잠6:6-10)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나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가난이 강도 같이온다고 하였습니다. 이 같이 신앙인의 적은 게으름이다. 안일과 평안을 좋아하는 것으로 인한 신앙의 무게가 무거워 경쟁력이 없게 되며 달음질하는 일에 장애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 기도하는 일과 에배 드리는 일과 전도, 헌신, 봉사, 가르치는 일등을 들을 것입니다. 몸이 불었으므로 활동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럼으로 신앙에 안일과 평안함으로 신앙의 몸무게가 무겁게 하여 활동하기가 어렵다. ❏ 새벽기도 : 반짝 반짝 일어나야 한다. 몸이 무서우므로 일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신앙의 비만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인 비만을 위해 염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는 비만을 위해 많은 투자가 있다. 그러나 신앙의 비만 치료를 위해서는 전연 관심이 없다. ❏ 어느 드라마를 보니 비만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본적이 있다. 비만에 좋다는 운동은 하지 않은 것이 없으리만치 모두다 하고 좋다는 약들을 엄청난 비용을 들여 경제적인 낭비를 가지는 바람에 끝내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영적인 비만을 줄이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애써 본적이 있습니까 ? 한번 다시 스스로에게 자문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세상 몸매는 가벼우면서도 영적인 몸매는 엄청나게 비만이 되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 정신비만증 환자 옛날 희랍의 전제국가의 한 왕이 24시간 여색과 주지육림에 탐닉하면서 자기를 더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도와 행복도를 더 높이는 수단과 방법을 상금을 걸고 천하에 널리 구하게 하였다. 별별 기발한 새 아이디어들이 실험되었으나 그의 불만도와 갈증은 날로 가중되기만 했다. 새 아이디어의 제공자들은 그를 실망시킨 벌로 사형을 받았다. 어느 날 왕 앞에 행복의 새로운 제안자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녀는 왕 앞에 나타나서 꾸짖는 눈빛으로 “왕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기쁨을 단념하십시오. 남을 행복하게 하거나 기쁘게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쁨과 행복을 원하신다면 하나님과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십시오.”이 말을 들은 왕의 표정은 숙연해지고 두 눈에는 눈물이 맺히며“딸아 그대의 말이 옳도다”하고 상을 내렸다 한다. 이 왕은 육적인 비만으로 주지 육림속에 살아간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미국의 한 가요 가운데“행복하고 싶어라. 그러나 그대를 행복하게 못하면 나는 행복해질 수 없네”라는 것이 있다. 이 가요는 한 여인에게 속삭인 말이지만 행복의 본질을 꿰뚫은 말이다. 참 행복은 \'같이 누리고 나누어 갖는\'것이다. 미국의 사망율의 54%는 비만증 고혈압계통의 병 때문이라고 한다. 사해는 하구는 있어도 유출구가 없어 죽음의 호수가 됐다. 나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정신의 사해(死海)요. 그러한 사람은 정신의 비만증 환자다. 하나님과 남을 기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하여 냉수 한 잔, 티 없는 미소 하나일지라도 정성된 마음의 소모와 아픔을 가지고 나누어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정신의 비만증 환자요, 사해 인생이다. 얼마나 소중하고 비밀한 행복의 교훈인가? 남을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 진다는 것을 나는 예수에게서 배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인 비만증 환자로서 일생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비만의 살을 빼고 이제는 가벼운 몸매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생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는 우리의 무거운 비만의 몸으로 얼마나 수고하고 이 짐 때문에 고생하는 가운데 있습니까 ? 이 같이 영적인 비만의 살을 빼고 가벼운몸으로 헌신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인 비만의 사람들 1) 부자 청년이다. (마19: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 아버지 장예를 핑계대는 사람 (눅9:57-62)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3)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 (창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Ⅱ. 얽매이는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 어원 - 유페리스타톤 말로서 마음을 분산시키며 에워싸고 넘어지게 하는 죄를 의미한다. 즉 운동선수가 달음질할 때 펄럭이는 옷고름이나 허름하게 맞지 않는 옷으로 눈가를 덮는 것을 말한다. 펄럭 거리는 옷이 눈을 가리고 끈내 몸을 휘감아 넘어지게 한다거나 신경을 쓰이게 하는 것이 있다. 이로 인하여 운동 하는 선수가 신경쓰이기 때문에 경주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을 말한다. 나를 쉽게 넘어지게 하는 죄가 무엇일까 ? 세상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쾌락, 방종, 혀, 정욕, 교만, 욕심, 세상 친구들, 텔레비죤, 낚시 등등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신경을 자극하고 이로 인하여 휘감아 버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것들을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로 인하여 휘 감겨 넘어지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리고 주님을 좇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 내면의 거울 자기밖에 모르던 인색한 부자가 유대인 교사인 랍비를 만났다. 랍비는 그를 데리고 창가로 갔다. \"무엇이 보입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이번에는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무엇이 보입니까?\" \"제 얼굴이 보입니다.\" 그러자 랍비는 말했다. \"창문과 거울은 모두 유리로 돼 있으나 거울 뒤에는 수은이 칠해져 있어 밖이 안보이고 자신만 보게 되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내면이 탐욕으로 칠해진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불행한 존재지요.\" ❏ 아합왕의 탐욕, 유다는 얼마나 유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인가 ? 그러나 그는 인간의 욕망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휘감겨 넘어져 완주하지 못하는 불행을 입은 제자이다. (욥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사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우리를 휘감아 버려 운동을 할 수 없도록 장애가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이 같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당한 경주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Ⅲ. 인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달음질하는 선수는 인내하여야 한다. 달음질 하는 선수는 많은 고통이 따르도록 되어 있다. 복통을 일으키는 일, 힘들고, 땀흘리는 일, 가쁜 숨을 쉬어야 하는 어려움, 쉬고 싶어 하는 유혹등의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같은 유혹에 넘어가도 않되고 육적인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서 안된다. 참아야 한다.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참지 못하여 피차 챙피스러운 꼴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럼으로 참는 지헤를 발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인내란 어려움을 당할 때 참고 견디고 막아 내는 일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시련의 자리에서 일어나 정명으로 대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하기만 하는 것이 인내가 아니라 시험과 고난당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면으로 경주에 임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신앙의 어려움을 당할 때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시험에서 더욱 분발하여 신앙으로 진일보 하는 것을 의미한다. ❏ 80노인의 건강 비결 80노인이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무병 건강하다\'는 진찰 결과를 말하고, 노년에까지 무병 건강함에 대한 비결을 물었다. \"결혼 초기에 부부간의 약속한 얘기가 있습니다. 부부생활 중에 화나는 일이 있을 때 화평을 위해 아내는 부엌에 피하고, 남편은 외출하여 산책하기로 하였지요. 지금까지 이것을 지켜옴으로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 그것이지요.\" 맺는 말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ㄷㅇ안에 어찌 어려움이 없을수 있겠습니까 ? 신앙에 경주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1)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2) 얽매이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3)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을 감안하여 당한경주에서 상급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 히12:1-4/ 2003-06-20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 히12:1-4 성경:(히12:1-4)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들어가는 말 ❏ 강아지 팝니다 어떤 사람이 “강아지 팝니다”라는 광고를 냈더니. 어린 소년 하나가 찾아와서 값이 비싸지 않으면 한 마리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25불은 내야 하는데.”라는 주인의 말에 실망에 싸인 소년이 “2불 5센트 밖에 없는데, 하여간 강아지를 보여주시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렴. 보여 주고말고. 돈이 지금 모자라면 어떻게 하는 방법이 있겠지”라고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털뭉치 같은 조그마한 강아지 다섯 마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순간 소년은 강아지들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아저씨! 이 중에 한 마리가 다리를 절름거린다고 들었는데 어떤 거지요.”라고 물었습니다.“그래. 네 말이 맞다. 바로 이 강아지가 다리를 절름거리는데 내내 그럴 거야.” 주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그 강아지가 바로 제가 원하는 강아지인데, 어떻게 돈은 차차 조금씩 갚기로 하고 살 수 있을까요.”하며 간청했습니다. “평생을 다리를 절어도?”라는 주인의 반문에 소년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한쪽 바지를 걷어 올리며 자기의 성치 않은 다리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잘 걷지 못하고 절름거리지요.”그리고는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그 강아지를 쳐다보며 “많은 사랑과 도움이 이 강아지에게는 필요할 거예요. 저 역시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았지요. 불구의 몸으로 자라는 것이 보통 힘 드는 일이 아니거든요”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그 말을 듣고“이 강아지를 가져가거라. 네가 이 강아지를 잘 보살펴 줄 주인이 될 것을 알고도 남겠다. 자. 돈은 필요 없으니 그냥 가져가거라”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인간적인 시련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주님의 인간에 대한 연민은 우리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아시는 주님은 그것을 맡아 주시기에 충분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장애자가 되기 때문에 강아지라도 장애의 어려움을 알고 있에 자신이 캍아 키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부의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장애자의 슬픔을 익히 알기에 강아지의 모든 아픈 부분을 맡아 키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하는데 우리의 장애가 있다고 하여도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 준다고 하는 것을 알아 처음부터 장애를 두려워하여 나서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우리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하여 처음서부터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거치는 것이 있겠습니까 ? 이를 생각하여 처음부터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를 지켜주시고 안아 주시고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생각하여 당한 경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달음질하는 달 세 번째 주일을 맞아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선수는 달음질하지만 반드시 기억하고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장애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단 장애는 달음질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분야에서 장애와 훼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장애가 있습니다. 악한 일이나 선한 일이나 장애가 있습니다. 세상일에도 장애가 있고 하나님의 세계 신앙에도 장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경주하는 데는 어떤 장애가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Ⅰ.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원어-옹콘 판타, 라는 말로서 과도하게 무거운 것, 거대한 짐을 말한다. 이 같은 것이 장애가 되어 운동 경기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과도하게 무겁고 짐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 육적인 문제는 커다란 파커나 신발인 워커나 아니면 무거운 짐 같은 옷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필요이상의 짐이나 배낭을 메고 뛴다면 안 된다. 운동장에 나가는 사람들이 이 같이 하고 뛰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운동선수가 몸이 가벼워야 한다. 제일 짐스러운 것이 있다면 몸무게이다. 모든 운동을 보게 되면 몸이 제일 부거운 사람은 운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복씽을 한다든지 육상경기를 한다든지 농구, 배구, 등산, 테니스, 축구, 수영 등의 많은 운동이 있습니다만 몸이 가벼워야 운동이 될 수 있고 경쟁력이 있다. 몸이 무거우면 마음대로 달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 등산의 예 문제는 영적인 무거운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 안일과 평안함이다. 이로 인한 몸무게가 나가게 된다. 먹고 자고 하면 몸무게가 자신도 모르게 하루가 다르게 몸무게가 불어나게 된다. (잠6:6-10)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나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가난이 강도 같이온다고 하였습니다. 이 같이 신앙인의 적은 게으름이다. 안일과 평안을 좋아하는 것으로 인한 신앙의 무게가 무거워 경쟁력이 없게 되며 달음질하는 일에 장애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 기도하는 일과 에배 드리는 일과 전도, 헌신, 봉사, 가르치는 일등을 들을 것입니다. 몸이 불었으므로 활동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럼으로 신앙에 안일과 평안함으로 신앙의 몸무게가 무겁게 하여 활동하기가 어렵다. ❏ 새벽기도 : 반짝 반짝 일어나야 한다. 몸이 무서우므로 일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신앙의 비만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인 비만을 위해 염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는 비만을 위해 많은 투자가 있다. 그러나 신앙의 비만 치료를 위해서는 전연 관심이 없다. ❏ 어느 드라마를 보니 비만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본적이 있다. 비만에 좋다는 운동은 하지 않은 것이 없으리만치 모두다 하고 좋다는 약들을 엄청난 비용을 들여 경제적인 낭비를 가지는 바람에 끝내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영적인 비만을 줄이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애써 본적이 있습니까 ? 한번 다시 스스로에게 자문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세상 몸매는 가벼우면서도 영적인 몸매는 엄청나게 비만이 되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 정신비만증 환자 옛날 희랍의 전제국가의 한 왕이 24시간 여색과 주지육림에 탐닉하면서 자기를 더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도와 행복도를 더 높이는 수단과 방법을 상금을 걸고 천하에 널리 구하게 하였다. 별별 기발한 새 아이디어들이 실험되었으나 그의 불만도와 갈증은 날로 가중되기만 했다. 새 아이디어의 제공자들은 그를 실망시킨 벌로 사형을 받았다. 어느 날 왕 앞에 행복의 새로운 제안자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녀는 왕 앞에 나타나서 꾸짖는 눈빛으로 “왕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기쁨을 단념하십시오. 남을 행복하게 하거나 기쁘게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쁨과 행복을 원하신다면 하나님과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십시오.”이 말을 들은 왕의 표정은 숙연해지고 두 눈에는 눈물이 맺히며“딸아 그대의 말이 옳도다”하고 상을 내렸다 한다. 이 왕은 육적인 비만으로 주지 육림속에 살아간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미국의 한 가요 가운데“행복하고 싶어라. 그러나 그대를 행복하게 못하면 나는 행복해질 수 없네”라는 것이 있다. 이 가요는 한 여인에게 속삭인 말이지만 행복의 본질을 꿰뚫은 말이다. 참 행복은 \'같이 누리고 나누어 갖는\'것이다. 미국의 사망율의 54%는 비만증 고혈압계통의 병 때문이라고 한다. 사해는 하구는 있어도 유출구가 없어 죽음의 호수가 됐다. 나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정신의 사해(死海)요. 그러한 사람은 정신의 비만증 환자다. 하나님과 남을 기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하여 냉수 한 잔, 티 없는 미소 하나일지라도 정성된 마음의 소모와 아픔을 가지고 나누어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정신의 비만증 환자요, 사해 인생이다. 얼마나 소중하고 비밀한 행복의 교훈인가? 남을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 진다는 것을 나는 예수에게서 배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인 비만증 환자로서 일생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비만의 살을 빼고 이제는 가벼운 몸매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생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는 우리의 무거운 비만의 몸으로 얼마나 수고하고 이 짐 때문에 고생하는 가운데 있습니까 ? 이 같이 영적인 비만의 살을 빼고 가벼운몸으로 헌신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인 비만의 사람들 1) 부자 청년이다. (마19: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 아버지 장예를 핑계대는 사람 (눅9:57-62)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3)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 (창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Ⅱ. 얽매이는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 어원 - 유페리스타톤 말로서 마음을 분산시키며 에워싸고 넘어지게 하는 죄를 의미한다. 즉 운동선수가 달음질할 때 펄럭이는 옷고름이나 허름하게 맞지 않는 옷으로 눈가를 덮는 것을 말한다. 펄럭 거리는 옷이 눈을 가리고 끈내 몸을 휘감아 넘어지게 한다거나 신경을 쓰이게 하는 것이 있다. 이로 인하여 운동 하는 선수가 신경쓰이기 때문에 경주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을 말한다. 나를 쉽게 넘어지게 하는 죄가 무엇일까 ? 세상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쾌락, 방종, 혀, 정욕, 교만, 욕심, 세상 친구들, 텔레비죤, 낚시 등등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신경을 자극하고 이로 인하여 휘감아 버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것들을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로 인하여 휘 감겨 넘어지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리고 주님을 좇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 내면의 거울 자기밖에 모르던 인색한 부자가 유대인 교사인 랍비를 만났다. 랍비는 그를 데리고 창가로 갔다. \"무엇이 보입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이번에는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무엇이 보입니까?\" \"제 얼굴이 보입니다.\" 그러자 랍비는 말했다. \"창문과 거울은 모두 유리로 돼 있으나 거울 뒤에는 수은이 칠해져 있어 밖이 안보이고 자신만 보게 되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내면이 탐욕으로 칠해진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불행한 존재지요.\" ❏ 아합왕의 탐욕, 유다는 얼마나 유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인가 ? 그러나 그는 인간의 욕망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휘감겨 넘어져 완주하지 못하는 불행을 입은 제자이다. (욥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사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우리를 휘감아 버려 운동을 할 수 없도록 장애가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이 같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당한 경주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Ⅲ. 인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달음질하는 선수는 인내하여야 한다. 달음질 하는 선수는 많은 고통이 따르도록 되어 있다. 복통을 일으키는 일, 힘들고, 땀흘리는 일, 가쁜 숨을 쉬어야 하는 어려움, 쉬고 싶어 하는 유혹등의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같은 유혹에 넘어가도 않되고 육적인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서 안된다. 참아야 한다.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참지 못하여 피차 챙피스러운 꼴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럼으로 참는 지헤를 발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인내란 어려움을 당할 때 참고 견디고 막아 내는 일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시련의 자리에서 일어나 정명으로 대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하기만 하는 것이 인내가 아니라 시험과 고난당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면으로 경주에 임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신앙의 어려움을 당할 때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시험에서 더욱 분발하여 신앙으로 진일보 하는 것을 의미한다. ❏ 80노인의 건강 비결 80노인이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무병 건강하다\'는 진찰 결과를 말하고, 노년에까지 무병 건강함에 대한 비결을 물었다. \"결혼 초기에 부부간의 약속한 얘기가 있습니다. 부부생활 중에 화나는 일이 있을 때 화평을 위해 아내는 부엌에 피하고, 남편은 외출하여 산책하기로 하였지요. 지금까지 이것을 지켜옴으로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 그것이지요.\" 맺는 말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ㄷㅇ안에 어찌 어려움이 없을수 있겠습니까 ? 신앙에 경주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1)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2) 얽매이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3)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을 감안하여 당한 경주에서 상급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히12:1-4/2003-02-20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 히12:1-4 성경:(히12:1-4)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들어가는 말 ❏ 강아지 팝니다 어떤 사람이 “강아지 팝니다”라는 광고를 냈더니. 어린 소년 하나가 찾아와서 값이 비싸지 않으면 한 마리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25불은 내야 하는데.”라는 주인의 말에 실망에 싸인 소년이 “2불 5센트 밖에 없는데, 하여간 강아지를 보여주시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렴. 보여 주고말고. 돈이 지금 모자라면 어떻게 하는 방법이 있겠지”라고 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털뭉치 같은 조그마한 강아지 다섯 마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순간 소년은 강아지들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아저씨! 이 중에 한 마리가 다리를 절름거린다고 들었는데 어떤 거지요.”라고 물었습니다.“그래. 네 말이 맞다. 바로 이 강아지가 다리를 절름거리는데 내내 그럴 거야.” 주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그 강아지가 바로 제가 원하는 강아지인데, 어떻게 돈은 차차 조금씩 갚기로 하고 살 수 있을까요.”하며 간청했습니다. “평생을 다리를 절어도?”라는 주인의 반문에 소년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한쪽 바지를 걷어 올리며 자기의 성치 않은 다리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잘 걷지 못하고 절름거리지요.”그리고는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그 강아지를 쳐다보며 “많은 사랑과 도움이 이 강아지에게는 필요할 거예요. 저 역시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았지요. 불구의 몸으로 자라는 것이 보통 힘 드는 일이 아니거든요”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그 말을 듣고“이 강아지를 가져가거라. 네가 이 강아지를 잘 보살펴 줄 주인이 될 것을 알고도 남겠다. 자. 돈은 필요 없으니 그냥 가져가거라”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인간적인 시련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주님의 인간에 대한 연민은 우리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아시는 주님은 그것을 맡아 주시기에 충분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장애자가 되기 때문에 강아지라도 장애의 어려움을 알고 있에 자신이 캍아 키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부의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장애자의 슬픔을 익히 알기에 강아지의 모든 아픈 부분을 맡아 키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하는데 우리의 장애가 있다고 하여도 우리의 형편을 아시는 주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 준다고 하는 것을 알아 처음부터 장애를 두려워하여 나서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우리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하여 처음서부터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거치는 것이 있겠습니까 ? 이를 생각하여 처음부터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를 지켜주시고 안아 주시고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생각하여 당한 경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달음질하는 달 세 번째 주일을 맞아 “달음질에는 장애가 있다.”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선수는 달음질하지만 반드시 기억하고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장애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단 장애는 달음질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분야에서 장애와 훼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장애가 있습니다. 악한 일이나 선한 일이나 장애가 있습니다. 세상일에도 장애가 있고 하나님의 세계 신앙에도 장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경주하는 데는 어떤 장애가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Ⅰ.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원어-옹콘 판타, 라는 말로서 과도하게 무거운 것, 거대한 짐을 말한다. 이 같은 것이 장애가 되어 운동 경기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과도하게 무겁고 짐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 육적인 문제는 커다란 파커나 신발인 워커나 아니면 무거운 짐 같은 옷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필요이상의 짐이나 배낭을 메고 뛴다면 안 된다. 운동장에 나가는 사람들이 이 같이 하고 뛰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운동선수가 몸이 가벼워야 한다. 제일 짐스러운 것이 있다면 몸무게이다. 모든 운동을 보게 되면 몸이 제일 부거운 사람은 운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복씽을 한다든지 육상경기를 한다든지 농구, 배구, 등산, 테니스, 축구, 수영 등의 많은 운동이 있습니다만 몸이 가벼워야 운동이 될 수 있고 경쟁력이 있다. 몸이 무거우면 마음대로 달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 등산의 예 문제는 영적인 무거운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 안일과 평안함이다. 이로 인한 몸무게가 나가게 된다. 먹고 자고 하면 몸무게가 자신도 모르게 하루가 다르게 몸무게가 불어나게 된다. (잠6:6-10)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나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가난이 강도 같이온다고 하였습니다. 이 같이 신앙인의 적은 게으름이다. 안일과 평안을 좋아하는 것으로 인한 신앙의 무게가 무거워 경쟁력이 없게 되며 달음질하는 일에 장애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앙 생활이 무엇입니까 ? 기도하는 일과 에배 드리는 일과 전도, 헌신, 봉사, 가르치는 일등을 들을 것입니다. 몸이 불었으므로 활동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럼으로 신앙에 안일과 평안함으로 신앙의 몸무게가 무겁게 하여 활동하기가 어렵다. ❏ 새벽기도 : 반짝 반짝 일어나야 한다. 몸이 무서우므로 일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신앙의 비만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인 비만을 위해 염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는 비만을 위해 많은 투자가 있다. 그러나 신앙의 비만 치료를 위해서는 전연 관심이 없다. ❏ 어느 드라마를 보니 비만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본적이 있다. 비만에 좋다는 운동은 하지 않은 것이 없으리만치 모두다 하고 좋다는 약들을 엄청난 비용을 들여 경제적인 낭비를 가지는 바람에 끝내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영적인 비만을 줄이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애써 본적이 있습니까 ? 한번 다시 스스로에게 자문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세상 몸매는 가벼우면서도 영적인 몸매는 엄청나게 비만이 되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 정신비만증 환자 옛날 희랍의 전제국가의 한 왕이 24시간 여색과 주지육림에 탐닉하면서 자기를 더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도와 행복도를 더 높이는 수단과 방법을 상금을 걸고 천하에 널리 구하게 하였다. 별별 기발한 새 아이디어들이 실험되었으나 그의 불만도와 갈증은 날로 가중되기만 했다. 새 아이디어의 제공자들은 그를 실망시킨 벌로 사형을 받았다. 어느 날 왕 앞에 행복의 새로운 제안자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녀는 왕 앞에 나타나서 꾸짖는 눈빛으로 “왕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기쁨을 단념하십시오. 남을 행복하게 하거나 기쁘게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쁨과 행복을 원하신다면 하나님과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십시오.”이 말을 들은 왕의 표정은 숙연해지고 두 눈에는 눈물이 맺히며“딸아 그대의 말이 옳도다”하고 상을 내렸다 한다. 이 왕은 육적인 비만으로 주지 육림속에 살아간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미국의 한 가요 가운데“행복하고 싶어라. 그러나 그대를 행복하게 못하면 나는 행복해질 수 없네”라는 것이 있다. 이 가요는 한 여인에게 속삭인 말이지만 행복의 본질을 꿰뚫은 말이다. 참 행복은 \'같이 누리고 나누어 갖는\'것이다. 미국의 사망율의 54%는 비만증 고혈압계통의 병 때문이라고 한다. 사해는 하구는 있어도 유출구가 없어 죽음의 호수가 됐다. 나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정신의 사해(死海)요. 그러한 사람은 정신의 비만증 환자다. 하나님과 남을 기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하여 냉수 한 잔, 티 없는 미소 하나일지라도 정성된 마음의 소모와 아픔을 가지고 나누어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정신의 비만증 환자요, 사해 인생이다. 얼마나 소중하고 비밀한 행복의 교훈인가? 남을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 진다는 것을 나는 예수에게서 배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인 비만증 환자로서 일생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비만의 살을 빼고 이제는 가벼운 몸매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생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는 우리의 무거운 비만의 몸으로 얼마나 수고하고 이 짐 때문에 고생하는 가운데 있습니까 ? 이 같이 영적인 비만의 살을 빼고 가벼운몸으로 헌신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적인 비만의 사람들 1) 부자 청년이다. (마19: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 아버지 장예를 핑계대는 사람 (눅9:57-62)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3)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 (창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Ⅱ. 얽매이는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 어원 - 유페리스타톤 말로서 마음을 분산시키며 에워싸고 넘어지게 하는 죄를 의미한다. 즉 운동선수가 달음질할 때 펄럭이는 옷고름이나 허름하게 맞지 않는 옷으로 눈가를 덮는 것을 말한다. 펄럭 거리는 옷이 눈을 가리고 끈내 몸을 휘감아 넘어지게 한다거나 신경을 쓰이게 하는 것이 있다. 이로 인하여 운동 하는 선수가 신경쓰이기 때문에 경주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것을 말한다. 나를 쉽게 넘어지게 하는 죄가 무엇일까 ? 세상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쾌락, 방종, 혀, 정욕, 교만, 욕심, 세상 친구들, 텔레비죤, 낚시 등등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신경을 자극하고 이로 인하여 휘감아 버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것들을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로 인하여 휘 감겨 넘어지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리고 주님을 좇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 내면의 거울 자기밖에 모르던 인색한 부자가 유대인 교사인 랍비를 만났다. 랍비는 그를 데리고 창가로 갔다. \"무엇이 보입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이번에는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무엇이 보입니까?\" \"제 얼굴이 보입니다.\" 그러자 랍비는 말했다. \"창문과 거울은 모두 유리로 돼 있으나 거울 뒤에는 수은이 칠해져 있어 밖이 안보이고 자신만 보게 되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내면이 탐욕으로 칠해진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불행한 존재지요.\" ❏ 아합왕의 탐욕, 유다는 얼마나 유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인가 ? 그러나 그는 인간의 욕망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휘감겨 넘어져 완주하지 못하는 불행을 입은 제자이다. (욥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사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우리를 휘감아 버려 운동을 할 수 없도록 장애가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이 같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당한 경주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Ⅲ. 인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달음질하는 선수는 인내하여야 한다. 달음질 하는 선수는 많은 고통이 따르도록 되어 있다. 복통을 일으키는 일, 힘들고, 땀흘리는 일, 가쁜 숨을 쉬어야 하는 어려움, 쉬고 싶어 하는 유혹등의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같은 유혹에 넘어가도 않되고 육적인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서 안된다. 참아야 한다.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참지 못하여 피차 챙피스러운 꼴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럼으로 참는 지헤를 발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인내란 어려움을 당할 때 참고 견디고 막아 내는 일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시련의 자리에서 일어나 정명으로 대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하기만 하는 것이 인내가 아니라 시험과 고난당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면으로 경주에 임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신앙의 어려움을 당할 때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시험에서 더욱 분발하여 신앙으로 진일보 하는 것을 의미한다. ❏ 80노인의 건강 비결 80노인이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무병 건강하다\'는 진찰 결과를 말하고, 노년에까지 무병 건강함에 대한 비결을 물었다. \"결혼 초기에 부부간의 약속한 얘기가 있습니다. 부부생활 중에 화나는 일이 있을 때 화평을 위해 아내는 부엌에 피하고, 남편은 외출하여 산책하기로 하였지요. 지금까지 이것을 지켜옴으로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 그것이지요.\" 맺는 말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찌 어려움이 없을수 있겠습니까 ? 신앙에 경주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1)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2) 얽매이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3)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을 감안하여 당한경주에서 상급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부류의 장애인/눅3:1-6
두 부류의 장애인 눅3:1-6 1976년 제 31차 유엔총회에서는 1981년을 <세계 장애인 해>로 정하고 \"모든 국가는 장애인들의 사회적 참여가 여러 분야에서 충분히 이루어지고 다른 국민들과 동일한 기회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보장되며 신장되도록 최대한으로 노력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이에 우리 나라는 유엔의 권고에 따라 <세계 장애인의 해>인 81년에 \"장애인 복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고 장애인을 올바르게 이해하며 장애인의 재활 의지를 고취\"할 목적으로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공식 지정하면서 각종 기념행사를 치러왔습니다. 그 후 1989년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되면서 장애인의 날은 정식으로 정부기념일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이러한 정부의 시책과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를 중심으로 88년 서울 장애인 올림픽이 열린 이듬해인 89년부터 장애인의 날인 20일을 전후한 주일을 <장애인 주일>로 선포하고 장애인 주일을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이란 누구입니까? 이 질문의 답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쉽게 말해 버릴 수 있지만 장애인에 대한 정확한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장애의 원인이나 유형 그리고 그 정도가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어떤 입장에서 또는 어느 측면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개념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대에 따라서 문화, 환경적 차이 혹은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 장애인의 개념에 상당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장애인 하면 휠체어를 탄 사람,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장애인이란 \"상해, 질병, 유전적인 원인으로 만성적인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됩니다. 한편 1973년 미국의 재활법에 따르면 \"주요 생활 활동분야에 있어서 한 분야 이상 실질적인 제한을 주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가진 자\"라고 정의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장애인 복지법 1장 2조에서는 \"장애인이라 함은 지체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 또는 정신지체 등의 정신적 결함으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이나 사회 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장애인이란 신체적, 지적, 정서적, 언어적 등의 어느 영역에 있어 일정한 결함이나 편차로 인해 사회가 요구하는 보통의 성취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불편을 겪는 장애인들에 대하여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한 인격으로서 마땅한 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사역의 많은 부분은 장애인들을 고쳐주시고 또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던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시는데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누가는 이 손이 오른손이라고 하였고(눅6:6) \'마른\'이란 단어가 분사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선천적으로 불구가 된 것이 아니라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후천적인 영향으로 팔이 서서히 말라 발육이 중단되고 오그라드는 병으로 중풍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우리 나라의 장애인들의 수를 400만명으로 보는데 그 중에서 89.4%가 후천적인 영향으로 인한 장애인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잠재적으로 신체장애자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손 마른 사람을 가운데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율법에 의하면 생명이 위급하지 않는 경우에는 안식일 날 치료하지 못하도록 하였기에 생명이 위급하지도 않는 병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실 지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안식일 문제로 인하여 바리새인들과 한바탕 설전을 벌인 뒤였습니다.(막2:23-28) 그러니 예수님의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더욱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물으시니 사람들이 모두 잠잠했습니다. 예수님은 저희 마음이 완악함을 보시고 노하시면서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곧 헤롯 당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의논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본문에서 두 부류의 장애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육적인 장애인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인 장애인입니다. 1. 육적 장애인 선천성 장애인들이 느끼는 삶의 불편과 아픔은 건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그 아픔의 깊이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후천적 장애인들이 가지는 삶의 좌절과 고통도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건강한 몸을 가졌다가 후에 교통사고나 다른 사고로 인하여 장애인들이 되면 그 고통과 좌절을 이기지 못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고, 인생을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만납니다. 그것은 그만큼 장애가 주는 고통과 절망이 크고 삶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게 되는 이 손 마른 장애인도 그 고통과 삶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평생을 이제 한 손을 쓰지 못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괴로웠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장애인들은 여러 면에서 건강한 사람들에 비해 많은 차별을 받습니다. 자신의 육신의 아픔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사회에서도 차별을 하기에 장애인들은 살아가기에 더욱 힘이 듭니다. 그런데 그 손 마른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함께 기뻐해 주어야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장애를 회복시켜 주심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는 많은 장애인들이 등장합니다. 소경, 다리 저는 자, 나환자, 소경, 혈루병자, 귀신들린 자 등등의 장애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기쁨으로 저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들이 고침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죽을 수밖에 없는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평생을 앉은뱅이로 소경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일어나게 되었고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 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한때 이런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제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만 되면 특히 새벽에 콧물이 줄줄 나와서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새벽기도회 때에는 수시로 나오는 콧물 때문에 설교하다가도 훌쩍, 기도하다가도 훌쩍, 성경을 읽다가도 훌쩍 훌쩍 거렸는데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가 끝난 뒤 강대상에는 콧물 닦은 화장지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제발 콧물 좀 나지 않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혹시 새벽에 제가 훌쩍 거려도 \"아 우리 목사님 알레르기가 있어서 저러시구나\"하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4월 둘째 주일날 유초등부 설교를 하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사회를 보는 아이가 감기가 걸렸는지 훌쩍거리는데 정말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새벽마다 훌쩍 거렸으니 제 자신이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교우들이 정말 신경이 많이 쓰였겠다 싶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해도 잘 낫지 않더니만 울산에 오고 부터 거의 나아진 것 같습니다. 울산 반석교회 공기가 좋은 것인지 그때 기도가 지금 열매를 맺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저의 작은 불편이 해소되어도 이렇게 기쁜데 평생을 고치지 못하여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질병을 고치고 회복되었으니 그 기쁨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삶의 희망이셨고, 그들의 기쁨이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장애인들의 희망이요 소망이 되시고 기쁨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사가 되셔서 고쳐주시기를 원하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도 육체의 장애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성도들이 계시다고 한다면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손길과 권능 아래서 회복되어지고 쾌유되어지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의 친근한 벗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 해전 SBS에서 이문열씨가 쓴 \"형제의 강\"이란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서복만은 첫째 아들이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서 그 아들만 사랑하고 그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면서도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셋째 아들 준호는 미움을 받고 자랍니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상을 받아도 무시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화가의 꿈을 키워가는 준호는 자신의 신체장애를 비관하면서 마지막으로 작품을 하나 완성해 놓고 자살을 하는데 그는 죽기 전에 평생 자신을 구박하고 폭행만 하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누어있는 자리에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부지 아픈 다리를 사랑하이소. 나도 이 아픈 다리를 사랑합니더\" 이 말을 하고 자살하게 되는데 그 아픈 다리는 다름 아닌 자신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프고 연약한 지체가 더욱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 중에 연약한 식구를 더 사랑해야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핸디캡마저도 사랑해 주어야 진정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연약함. 육체의 장애 그들을 더욱 사랑하고 아껴주는 마음으로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2. 영적인 장애인 한편 그곳에는 또한 부류의 장애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체 장애인보다 건강한 몸을 가졌지만 아주 위험한 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는 아픈 사람도 고칠 수 없다는 아주 고약한 생각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어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막2:27) 육체의 질병보다도 정신적인 질병은 무척 고치기 힘들고 치료의 시간도 많이 들어갑니다. 우리들 주변에도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신병자들만 정신적인 질병에 걸린 자들이 아니라 완악하고 교만하고 비뚤어진 사고를 가진 사람들 모두 정신적인 질병에 걸린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핸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에서 병원 원목 밑에서 임상 목회 훈련을 받는 존이라는 사람이 해리슨이라는 사람을 상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해리슨은 48세의 농부로서 다리수술을 받으려고 큰 병원에 입원한 환자입니다. 존은 이 사람과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었는데 해리슨은 지금 무척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수술 받기 위해 마취를 하면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또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그는 삶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를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고 기다리는 것이라고는 담배를 수확해야하는 고딘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상담을 마친 후 존은 돌아갔는데 바로 그 다음날 해리슨은 수술 도중에 죽고 맙니다. 핸리 나우웬은 이러한 일들을 아주 깊이 분석을 하였는데 해리슨이 죽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가 죽은 것은 삶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도 있지만 다리를 수술하여 완쾌되어 집으로 돌아가도 기다려 줄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그의 현실과 고작 기다리는 일이란 것이 힘든 담배농사이기에 그는 삶에 큰 의욕이 없었던 것입니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삶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기다려 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돈을 벌러 먼 외국에 나가서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이 들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이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힘이 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습니다. 먼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도 공항이나 역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기다림 때문에 빨리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기억조차 아니하는 이런 삶 속에서 인간은 낙망하며 괴로워하며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작은 다리 수술에서도 정신적으로 질병에 걸려 삶의 의욕을 꺾으면 죽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정신적인 질병은 정말 무서운 병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병이 들면 더욱 위험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에 잔인한 일을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막가파니 지존파니 하는 파들이 왜 생깁니까? 영적으로 병이 들어 영이 마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사고의식이 마비되고 인격이 파괴되고 윤리의식마저도 사라집니다. 지극히 명백한 선악간의 판별마저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신체장애만 있는 사람은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온갖 더럽고 추한 소식은 육체적으로는 건강하지만 정신적 영적으로는 질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요즘 홈 쇼핑 텔레비젼을 보면 홍삼 다이어트가 인기입니다. 정말 홍삼이 몸에 좋긴 좋은데. 그런데 요즘 신문에 자주 나오는 홍삼은 정말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 홍삼 때문에 스트레스 쌓입니다. 정말 짜증이 납니다. 어째서 우리 나라는 대통령의 아들들이 그렇게 모두 부정과 부패의 주범들입니까? 정말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면 청문회라도 하여서 속 시원하게 파헤쳐서 다시는 대통령의 아들들이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모두 육체적으로는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정신은 썩었으며 그들의 영은 사막처럼 메말라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소망이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실 때 그들은 손 마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은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이나 들먹이면서 긍휼과 사랑과 이해는 외면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놀라운 신적인 권세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영적으로 병이 들면 사람이 이렇게 완악 해 집니다. 사랑과 긍휼이 마음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비판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약점이나 잡아 매장시키려고 하고 불순한 목적과 비열한 행동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갑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장애아입니다. 오늘날에도 남이 잘되면 배아파하고 오히려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고 남이 잘된 것을 함께 기뻐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잘못되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삶 속에서 언제나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사람은 영적인 장애인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혹시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배가 아픈 분들이 있으십니까? 욥기에서 보는 사단처럼 두루 돌아다니면서 항상 남의 약점이나 찾아다니고 허물을 들춰내기를 즐겨하는 분들이 있지나 않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장애인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 장애인까지 고쳐주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노라 하면서 영적 정신적 장애로 살아 왔다면 모든 것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건강한 정신과 영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질병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분들도 모든 질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들도 잠재적인 장애의 가능성을 깊이 깨닫고 장애인들을 내가 그 연약한 부분을 채워주어야 할 벗이요 친구들임을 깨닫고 장애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또 하나의 장애물/행6:1-7
또 하나의 장애물/행6:1-7 2003-04-28 22:05:07 read : 113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사례를 어느 정도 수준에서 하면 적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너무 노골적인 질문을 드리는 것 같은데, 각자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① 그 교회 교인들의 평균 생활 수준만큼 지급하면 된다. ② 목사는 주의 종이니까 그 교회 교인들의 평균 생활 수준보다 조금 넉넉하게 지급해야 한다. ③ 목사는 청빈하게 살아야 하니까 그 교회 교인들의 평균 생활 수준에 조금 못 미치게 지급해야 한다. 어느 쪽입니까? 혹시 셋 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목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므로 이슬만 먹고살아야 한다. 그러니 아예 지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항목도 하나 추가할까요? ①, ②, ③번 모두 정답이 아닙니다. 요컨대 목회자 사례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 장애가 되지 않을 만큼 지급해야 합니다. 어떤 사유든지 목회자가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방해를 받는다면 목회자에게도 손해고 교인들에게도 손해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의 전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당시의 초대 교회가 어떤 교회였습니까? 그야말로 성령의 역사가 가장 흥왕했던 교회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교회가 초대 교회였습니다. 은과 금은 없어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있는 교회였고, 팝박이 있고 박해가 있어도 거기에 굴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전부 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뵌 사람들이었고 옥에 갇혀도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베드로 같은 사람이 지날 때에는 혹시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병자를 데려다가 길가에 눕히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 분쟁이 있었다는 것이 본문의 지적입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고 헬라파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지방 밖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말하는데, 둘 사이에는 지역적인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도 달랐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아람어를 썼습니다. 예전에 우리 나라도 우리말을 빼앗겼던 적이 있습니다만 이스라엘도 그렇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고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면서 자기들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다음부터는 아람어가 이들의 국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으로 이 세상에 계셨을 적에는 아람어를 쓰셨을 것입니다. 사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별로 차이도 나지 않습니다. 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나라가 망할 때도 끝까지 고국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모든 문화에 있어서 정통적이었고 보수적이었습니다. 이 사람들 생각으로는 자기들이야말로 진정한 유대인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나라가 망할 때 팔레스타인 지경 밖으로 피신해서 거기서 뿌리를 내린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있었지만 이들은 당시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를 썼습니다. 오랜 객지 생활 끝에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상당히 개방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보기에 이들은 당연히 ‘굴러온 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쟁 사유가 참 치사합니다. 고작해야 떡 몇 조각 나눠 먹는 문제로 싸우고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네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들고 일어선 것입니다. 사실 ‘공평하다’는 개념은 다분히 주관적인 개념입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공평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공평하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밀가루를 나눠줘야 하는데 한 집에는 다섯 식구가 살고 다른 집에는 네 식구가 삽니다. 똑같이 한 부대씩 나눠주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까, 다섯 식구가 사는 집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주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까? 만일 그 다섯 식구 중에 두 사람이 건장한 청년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네 식구가 사는 집보다 오히려 밀가루를 덜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혹시 그 건장하다는 두 청년이 겉으로만 건장하고 실제로는 병치레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마찬가지로 다섯 식구가 사는 다른 집보다 오히려 밀가루를 더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모든 경우를 일일이 따져야 하니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공평하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본문에서도 헬라파 유대인들이 정말로 불공정한 대접을 받았는지 아니면 자기들이 숫자가 적기 때문에 괜한 피해 의식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그런 연유로 그 은혜롭던 초대 교회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아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던 초대 교회에서 얼마 전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의해서 치사하게 헌금 떼먹는 문제(?)가 발생하여 우리를 당혹하게 하더니 이번에는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도 않는 문제로 심각하게 다투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현실입니다. 아무리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해도 아직 천사가 아닙니다. 늘 성전에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입만 열면 예수 얘기를 하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여 제 물건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고, 가는 곳마다 표적과 기사를 행해서 병든 사람을 일으키고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도 사람은 사람입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인 것과 믿음 좋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작정 어금니 앙다물면서 “믿습니다!”만 하면 그것이 진짜 신앙인 줄 압니다. 만일 그렇다면 본문에서 사도들이 집사를 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으로 기도를 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기도를 하지 않고 집사를 세웠습니다. 한 번 설교로 오천 명을 회개하게 하고 삼천 명이 세례를 받게 했는데도 이런 경우에는 그것도 통하지 않나 봅니다. 말 한 마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게 만들었던 능력은 어디 가고 이렇게 쩔쩔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떤 남자가 ‘나는 이런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 내용과 그 부모가 ‘우리 며느리는 이런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하는 내용은 다른 법입니다. 흔히 쓰는 표현 중에 ‘부잣집 맏며느리 감’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결혼 적령기의 여자에게 ‘부잣집 맏며느리 감’이라고 한다면 아마 그 말이 최고의 칭찬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는 20대 후반의 남자에게는 그 말이 별로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가 왜 있겠습니까? 나이 든 사람은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부부를 이루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 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앞둔 당사자는 그런 것을 모릅니다. 무조건 자기가 보기에 예쁘고 날씬하면 그것이 최고인 줄 압니다. 실제로 세상을 살아 보면 예쁜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쁜 것보다는 건강한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가령 눈을 생각해 보십시오. 눈은 보라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잘 보여야 합니다. 쌍꺼풀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 시력이 얼마냐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직 미숙한 나이에는 이런 것을 모릅니다. 아마 시력에는 지장이 있어도 눈이 예뻐지는 수술이 있다면 전부 다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 든 다음에 눈이 침침해지면 그때 후회할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지금 나에게는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데 이 문제는 이렇게 하면 된다!’고 확신하는 것들이 실제로 살아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자기가 미처 모르는 복잡, 미묘한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 주변의 어떤 교회에 오늘 본문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어떤 처방을 말할 것 같습니까? “그러니까 기도해야지. 기도를 안 하니까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거야. 자고로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하는데 그 교회는 대체 왜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전부 다 작정 기도해.” 아마 이런 얘기가 가장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 문제를 놓고 전심으로 기도하더라’라는 말이 없고, 집사를 뽑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기도 무용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참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힘쓰고 애써서 기도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시간을 택하여 기도해야 하고 밤을 낮 삼아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밥 먹을 겨를도 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신앙 원칙을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동원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학교에서 방학을 하는 것처럼 하절기에는 구역 예배를 쉬는 것이 어떠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일리 있는 얘기입니다. 여름에는 아무래도 더위 때문에 복장이 흐트러지기 쉽습니다. 가족끼리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복장은 아닙니다. 그러니 공연히 남의 집 들락거리면서 폐를 끼치지 말고 더위가 갈 때까지 구역 예배를 쉬자는 것입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대뜸 언성을 높였습니다. “덥다고 예배 안 드리고, 춥다고 예배 안 드리고...... 대체 예배는 언제 드려? 그럼 아예 주일 예배도 방학을 하지!” 이런 원칙론적인 얘기를 하면 아무도 반론을 말하지 못합니다. 공연히 구역 예배도 방학을 하자는 얘기를 꺼낸 사람만 믿음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폐단이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신앙적인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자주 얘기하면 자주 얘기할수록, 큰소리로 얘기하면 큰소리로 얘기할수록 그것이 곧 신앙인 줄로 아는 것입니다. 아마 대표적인 것이 기도일 것입니다. 애가 고3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애의 진로를 위해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럼, 애를 위해서 기도하면 그 애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애를 위해서 기도하면 애가 거룩해져야 합니까, 성적이 올라가야 합니까? 우리가 항상 속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예전에 제가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애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당구를 잘 칠 수 있어요?” 제가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응, 열심히 기도해 봐라.” 그랬더니, 애가 제 얘기를 안 믿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다고 당구를 잘 치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얘기입니다. 당구 잘 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애가 대학에 가는 문제는 기도하면 되는 줄 압니다. 대체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당구는 단지 오락에 불과하지만 대학 진학은 그만큼 절실하고 심각한 문제라서 그렇습니다. 자기의 절실함 때문에 눈이 가려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미처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에 속한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에 속한 것을 거둡니다. 그런데 전부 다 이 부분은 착각합니다. 육체에 속한 것을 심으면 육체에 속한 것을 거두는 것은 알면서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에 속한 것도 거두고 아울러 육체에 속한 것도 거두는 줄로 압니다. 성경에는 그런 얘기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어낸 얘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속이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인데 그런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려는 사람이 스스로 속이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심고 육체를 거두려는 사람이 스스로 속이는 사람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 나라 축구 국가 대표 감독이 차범근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경기 중에 그가 벤치에 앉아 기도하는 모습이 몇 번 TV 카메라에 잡힌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축구는 어느 만큼 기도를 많이 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만일 기도를 열심히 한 순서대로 축구를 잘한다면 굳이 경기장에서 힘들게 공을 찰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차범근 감독 입장에서는 얘기가 다릅니다. 자기가 기도를 하면 이기고 기도를 쉬면 지는 것은 아니지만 명색이 크리스챤인데 자기가 맡은 일을 놓고 기도를 안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당연히 기도를 하기는 해야 합니다. 하지만 축구는 기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입학할 적의 일입니다. 경쟁률이 아마 7:1이었고, 성경, 영어, 국사, 세계사, 철학, 심리학, 일반상식, 논문이 시험 과목이었습니다. 물론 대학 전학년 성적 증명서도 제출했습니다. 경쟁률이 7:1이었으니까 응시생 일곱 명 중에 여섯 명이 떨어졌는데 시험 과목 중에 ‘기도’는 없었습니다. 시험 과목에 없는 것은 물론이고 기도를 하루에 얼마나 하느냐는 질문은 면접 중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목사 후보생을 뽑는데 기도 열심히 한 순서대로 뽑지 않고 공부 잘하는 순서대로 뽑습니다. 누가 영어를 더 잘하고 누가 국사, 세계사, 철학, 심리학을 더 잘 하는지로 합격 여부를 따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험 과목에 기도가 없다고 해서 장차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대학원 입학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자기 진로를 놓고 전혀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되 머리 싸매고 공부해야 하는 자기 책임도 자기가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자 집사를 뽑았습니다. 구제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사도가 해야 할 사도 본연의 일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초대 교회 집사의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사가 되려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할뿐더러 칭찬도 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으면 되지,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판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합니다. 자기 생각에 자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다는 이유로 방자하게 행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면 자기가 아무리 옳다고 해도 자기 혼자 잘난 것은 무효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집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했고 거기에 더하여 칭찬도 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각자 머리 속으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그려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떠오르십니까?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3:1-13) 사도행전에서는 집사의 자격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에는 그런 얘기가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성경에 모순이 없으려면 사도행전에 있는 내용과 디모데전서에 있는 내용이 같은 뜻이어야 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기도해서 병을 고치고 입만 열면 성경 구절이 줄줄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하고 건실한 생활인입니다. 신앙 좋은 사람은 하루에 12시간 기도하고 12시간 성경 보는 사람이 아니고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잘 대접하며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녀들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을 자꾸 놓칩니다. 신앙을 자꾸만 종교적인 틀 안에 가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기에게 있는 종교적인 형태를 강화하는 것으로 자기가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책임을 외면하려고 합니다. 연애하는 것과 결혼해서 같이 사는 것은 다릅니다. 연애할 때는 어느 만큼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느냐, 어떤 영화가 재미 있느냐, 장미꽃 몇 송이를 선물하느냐, 오는 주말에 어디로 놀러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막상 결혼해서 같이 살면 그때부터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때부터는 ‘생활 책임’이라는 것이 걸립니다. 연애할 때는 걸핏하면 택시를 타지만 결혼하면 전철을 타고 다녀야 합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급해지고 전세 보증금 마련할 일이 급해집니다. 애 공부시키는 문제 때문에 언쟁도 벌여야 합니다. 미니스커트 입고 손가락마다 메니큐어를 발라서는 살림을 못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종교적인 형태 몇 가지를 취하고 있으면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찬송하고 전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온 식으로 말씀드리면 한 번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시키고, 기도했더니 병자가 낫고, 찬송했더니 옥문이 열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예수 믿는 실력이 어느 만큼 있는지 스스로 점검을 해봐야 합니다. 종교적인 행사를 할 때에는 자기의 종교성이 얼마든지 폼나게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자기에게 있는 종교적인 습관만큼 신앙적인 원칙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마치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미하며 혹 옥에 갇히고 채찍으로 맞는 수모를 당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담대히 예수를 전하면서도 실제로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떡을 나누는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아옹다옹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해물탕을 먹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남비 가득 들어 있는 해물탕을 보면 참 푸짐하게 보입니다. 큼지막한 게를 반 토막 내서 집어넣고, 대합도 몇 개 껍질째 넣고,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낙지도 넣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양은 보는 것처럼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왕게 다리 하나 뜯어봐야 부피만 크고 먹기에 번거롭기만 하지, 먹을 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안 먹고 맙니다. 그래도 관계없습니다. 해물탕에 있는 왕게는 안 먹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이 그러는 것은 곤란합니다. 종교적인 모양은 있고 종교 행사를 할 때는 그럴 듯하게 나타나는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없다면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이름을 증거할 적에는 폼이 나는데 정작 자기 앞가림을 제대로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이 부분이 치유되었습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방언을 하게 하셨던 성령께서 사도들이 옥에 갇혔을 적에는 옥문을 열어 주시더니,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아나니아, 삽비라를 죽어 넘어지게 하는 능력으로도 어쩔 줄 몰라서 쩔쩔맬 때에는 집사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들을 집사로 세우고 자기들은 오직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무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6:7) 지금까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확인한 내용이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이 세상 권세가 아무리 교회를 억누르고 핍박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막히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더 왕성했고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졌습니다. 심지어는 유대교의 골수분자인 제사장들까지도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 아무리 옥에 가두고 채찍으로 때리고 협박해도 하나님의 교회는 구속되지 않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같은 탐욕으로도 하나님의 교회를 방해할 수 없고 심지어는 우리의 미련함을 이유로 해서도 하나님의 교회는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하늘 교회에도 꼭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흩어져 있는 중에도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호하여 주시더니 이 시간도 저희들 발걸음을 이렇게 주님 몸 된 전으로 인도하여 주셨사옵나이다. 바라옵기는 저희들 저희 각자에게 주어진 생을 살아가는 동안 늘 이렇게 모이기를 힘쓰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 모인 자리에서마다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이 퍼지게 하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사랑하셔서 저희를 친히 붙들어 일으키셨사옵나이다. 저희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순간 순간이 아버지의 은혜임을 고백드립니다. 하오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살아가는 저희의 모습을 친히 헤아려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은혜로 사는 저희 마음 안에 가득한 생각이 과연 어떤 것이옵나이까? 날마다 성령의 감화로 살고 있사오면서도 아직도 세상에 속한 헛된 이기심과 교만이 있사오면 다 정리할 수 있게 하옵시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저희의 약한 모습이 발견될 때마다 아버지께서 친히 어루만져 주옵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 인하여 저희의 약한 곳 마디마디가 치유되게 하시옵소서.
마음의 장애를 넘어/ 막2:23-막3:6/ 정용섭 목사/ 2006-06-18
마음의 장애를 넘어 막2:23-막3:6 안식일에 얽힌 두 이야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유명한 안식일 논쟁에 관한 것입니다. 약간 상황이 다르지만 결국은 한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두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마가는 앞의 이야기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안식일 논쟁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한 다음, 뒤의 이야기에서 그 논쟁이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되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도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우선 각각의 이야기를 간추려봅시다. 막 2:23-28절 이야기의 시작은 목가적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는 구절은 “보리밭 사이길로 걸어가면”이라는 우리의 가곡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와 똑같습니다. 제자들은 밀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흔한 것이며, 율법적으로도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공교롭게도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겁니다. 안식일에는 모든 노동이 금지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눈에 제자들의 행위는 노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윗과 관련된 이야기를(삼상 21:1-10)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망명생활을 시작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굶주린 다윗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경우에 율법을 넘어서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다음과 같은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7,28절) 두 번째 이야기는 회당에서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배경인 전원과 비교할 때 회당은 율법적인 분위기가 훨씬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 회당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예수를 고발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장애인을 앞으로 불러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한번 둘러보시고 보란 듯이 장애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펴라.” 그의 손은 멀쩡해졌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밖으로 나가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버린 방도를 모의했습니다. 밀이삭으로 촉발된 안식일 논쟁이 이제는 살해모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여기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경건하고 모범적인 바리새인들이 무슨 이유로 예수님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웬만하면 바리새인들과의 관계를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우호적으로 만드는 게 좋았을 텐데, 예수님은 왜 상황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고 있을까요? 과연 안식일 문제가 목숨을 걸어둘 만큼 예수님에게 절실한 것이었을까요? 논리의 타당성 오늘 본문의 두 사건을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바리새인들에게는 큰 잘못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먹지 않으면 굶어죽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가능한대로 유대인들의 전통인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게 옳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을 꾸중하는 게 도리일 텐데 예수님은 별로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다윗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제자들을 변호했습니다. 다윗 이야기가 제자들 행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게 아니라는 말은 제자들의 상황이 다윗처럼 위태롭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보기에 따라서 예수님이 좀 ‘오버’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유대교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안식일에 맡겨진 게 아니라 안식일이 너희에게 맡겨졌다.” 이것에 근거한다면 바리새인들도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겠지요. 두 번째 이야기도 역시 그렇습니다. 회당에서 만난 이 장애인은 지금 당장 죽을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고치는 게 원칙적이기도 하고, 합리적이기도 합니다. 원칙이라는 말은 그것이 안식일 규정에 맞는다는 것이며, 합리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장애인이나 바리새인, 그리고 예수님 공동체 모두에게 덕스럽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가능하다면 어느 한쪽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쪽으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어쩌면 바리새인과 비슷하게 행동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과격한 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던진 다음과 같은 질문도 어떻게 보면 그 상황에 적합한 건 아닙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게 옳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도 역시 사람의 생명에 관한한 안식일에 예외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논리성으로만 따지만 예수님의 이런 질문은 무의한 것입니다. 그런 탓인지 바리새인들의 말문이 막혔다고(4b) 합니다. 이건 단순히 예수님의 질문에 논리적으로 밀렸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질문이 질문 같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의 문제 제기는 논리적으로 잘못이 아닙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분명히 평상심을 잃은 것 같고, 대신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논리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무조건 기본이 돼먹지 못한 인간으로 폄훼하고 성서를 읽는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과 같은 긴장을 쉽게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입견에 사로잡히면 바른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좀 힘들더라도 가능한 대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게 바른 해석의 초석입니다. 완고한 바리새인 여러분, 바리새인들의 논리가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매우 중요한 토대이기는 하지만 논리가 진리를 무조건 담보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언어를 통한 논리는 자칫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빠져들 위험성이 높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는데 실제 삶의 능력이 담기지 않은 경우도 있고, 신학적으로 논리를 담고 있긴 하지만 영적인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의 현실에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법관들이 내리는 선고는 나름으로 법적인 논리를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구차한 경우가 많습니다. 오랜 전 박정희 독재 시절에 대법원이 법의 이름으로 내린 인혁당 사건이 그 한 예입니다. 정부는 사형선고가 내려진지 몇 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장애인을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고쳐야 한다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이 비논리적이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생명 지향적이지 못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일반 실정법이나 종교법이나 그 기본은 생명을 살리는 일인데, 법자체가 절대적인 이데올로기가 되면 형식적으로는 논리이지만 실제로는 반(反)생명으로 작용합니다. 아무리 좋은 법도 거기에 생명 지향성이 사라지면 역시 인간을 죽입니다. 결국 법이 아니라 그 법을 다루는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이 법을 다뤄야 그 법은 생명을 담아낼 수 있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죽음을 생산합니다. 예수님이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 그 현장을 돌아보십시오. 외경인 히에로니무스의 히브리 복음서에 따르면 이 장애인은 미장이였다고 합니다. “저는 미장이였습니다. 제 손으로 생계를 마련했지요. 예수님, 부디 수치스럽게 먹을 것을 구걸하지 않도록 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십시오.”이 사람의 장애는 생존에 관계됩니다. 생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보다 생존이 우선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악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조가 바로 최소한 생존이 보장되는 쪽으로, 일용할 양식이 보장되는 쪽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건 그 무엇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문제이니까요. 예수님은 지금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로 이 장애인의 생존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안식일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애인을 당장 고치셔야했고, 바리새인들은 다음날로 미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안식일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건 유대인들의 소중한 종교전통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걸 모르셨겠습니까? 여기서 문제는 인간의 완고한 마음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예수님이 화를 내신 장면이 복음서 그렇게 자주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빌라도에게 내준 제사장들과 그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한 빌라도에게도 예수님은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성전 청결 장면을 비롯해서 예수님이 화를 내신 몇 번의 경우는 대개 인간이 구조적으로 완고해졌을 때입니다. 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답지 않게 화를 내셨는지 아시겠지요? 인간의 완고성은 불신앙의 뿌리입니다. 마음이 완고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걸 이해하고 들으십시오. 북한을 향해서 완고한 마음으로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마다 저는 안타깝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육이오를 일으킨 그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그 완고성은 흡사 오늘 장면처럼 예수님에게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손을 펴라!” 마음이 완고한 바리새인들을 노기 띤 얼굴로 둘러보신 예수님은 장애인에게 다짜고짜로 이렇게 명령합니다. 손을 펴라! 그 명령대로 손을 펴자 이 사람은 옛날처럼 비장애인으로 돌아갔습니다. 안식일에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옳다고 한 자신의 말을 이 명령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서는 좌고우면이 없었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은 생명이 위협당하는 그 상황과 투쟁하셨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난치병과 장애인의 치료입니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생명 위협의 상황이 생명 일치의 상황으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믿을 수 있습니다. 손을 펴라! 이런 명령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배타적 권위입니다. 죄도 사람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감히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병과 죄, 장애와 귀신들림은 모두 생명을 파괴하는 힘들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런 힘들이 예수님에게 굴복 당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손을 펴라!” 하고 선포할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고유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 명령에 따라서 이 세상의 손을 펴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은 곧 교회는 생명 지향적인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는 종말론적 생명 공동체입니다. 종말의 차원에서 생명을 외치고 그 현실화를 위해서 투쟁하는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오늘의 교회는 바리새인처럼 안식일 논리에만 치우쳐 있는지 모르겠군요. 한기총이 사학법 반대 투쟁에 나서겠다고 하며, 여호와의 증인들이 요구하는 군대체 복무에 반대하겠다고 하네요. 물론 실정법이 종교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경우에 반대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지만, 위의 것들은 안식일 규정에 목숨을 걸었던 바리새인처럼 공소한 논리로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려는 안간힘처럼 보이는군요. 오늘 본문은 손이 정상으로 돌아온 사람과 예수를 없애버릴 모의를 꾸민 바리새인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육체의 장애는 치료되었지만 마음의 장애는 그럴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몸의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가 고치기 더 어렵다는, 마음의 장애가 훨씬 불행하다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바래새인처럼 마음의 장애인들은 아닐까요?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법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이는지 생명을 그렇게 받아들이는지에 있습니다. 안식일인가, 손 마른 사람 치료인가, 국가보안법인가, 인권지킴인가? 법인가, 생명인가? 어디에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까? 마음의 손을 폅시다. 마음의 장애를 넘어섭시다. 예수님의 명령이십니다. “손을 펴라!”
메시야의 장애인을 향한 사명/ 눅7:1-
메시야의 장애인을 향한 사명 눅7:1- 의심과 불신앙의 차이를 아십니까? 의심이 불신앙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의심은 마음의 문제입니 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신 지,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 이해 못 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의지의 문 제입니다. 우리에게 행하라고 명령 하신 일을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것 이 불신앙이라면 의심은 상대편이 틀렸다고 확신하지 않지만 아직 도 생각 중이라는 표현입니다. 지금 믿 음의 사람 세례 요한이 의심하고 있 습니다.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 상은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심판하 실 줄 알았습니다. 그는 철창으로 만국을 다스리 고 깨뜨리되 질그릇처 럼 쳐부순다고 회개하라고 촉구했고 하나님이 임박한 진노가 심판으로 이 땅에 임한다고 거듭 거듭 말했었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악의 세력인 로마는 건재하고 있었 습니다. 악의 세력에 추종해서 빌붙 어있는 헤롯과 그 일당들은 더 승승 장구합니다. 그리고 심판주라고 여 겼던 메시야는 이상한 일을 하고 있 습 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주 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각종 장 애 때문에 괴로와하는 사람들의 친 구가 되어주 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래서 이해할 수 없는 이 세례요한은 주님께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는 일년 8개월을 감옥 에 갇혀살고 있습 니다. 제자를 보내서 \\\"오실 그 분이 바로 당신입니까? 또 다른 분이 있 습니까?\\\" 질문했습니다. 이 때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는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 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 머거 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 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고 하여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 는 복이 있다\\\" 이 내 용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입니다. 메시야가 최선의 관심 을 갖는 문제라고 친히 말씀하십니 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38년 된 환자를 찾으러 베데스다 못가에 가서 저를 고쳤습 니다. 사 람들이 모두 외면하는 문둥 이를 찾아가서 친히 손으로 어루만 져 낫게 하셨습니다. 그 앞에 보지 못한는 사람들, 듣지 못하는 사람들 이 치료받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삶의 모습입니 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모습은 어 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 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 이 주인이시고 주님의 다스림이 있 다면 교회가 하는 일은 무엇이어야 겠습니까? 밀알학교를 지은 다음 한 장애인이 학교의 화장실을 들어 가보고 나오더니 이것은 장애인을 위한 화장실이 아니라고 해서 다시 고쳤습니다. 신체가 건강하니까 장 애를 가진 사람들이 갖는 고통에 대 해서 무감각합니다. 저는 개인적 으 로 장애인과 함께 살았습니다. 제 막내 누이 동생이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자랐습니다. 장애 가진 아이 가 갖 는 비애가 어떤 것인지를 옆에 서 보았습니다. 대학교 들어갈 때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 가장 쉽게 들어 갈 수 있는 진로를 선택해서 도서관 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도서관 사서 를 하면 카드를 작성하고 책 분류하 는 작업을 하니까 장애가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 니다.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곳에 원서를 냈지만 한 곳에서 도 오라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빠로서 동생의 경제적인 문제를 평생 책임질 수는 있지만 동생이 이 땅에 와서 자기 삶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지 않겠는가 생각되어 고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막 내 누이 를 위해서 미국에 이민 가시 라고 강청했습니다. 그 나이에 미국 까지 어떻게 이민을 가겠는가 반문 하셨지만 다른 동생들이 미국 시민 권자이기 때문에 쉽게 초청이 되었 고 또 미혼 자녀도 함께 초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막내 누이 가 미국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장애인을 향 한 많은 숨겨진 기회와 제도가 있습 니다. 하워드라는 흑인학교에 처음 들어가더니 존스 홉 킨스에서 컴퓨터 공부를 했습니다. 졸업하면서 ATNT라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통신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저는 제 누이가 실력이 있어서 그곳에 입 사한 줄 알고 공부 꽤 열심히 했다 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누이가 말 하기를 \\\"오빠, 그것이 아니라 미국 의 제도 때문에 제가 취직이 되었습 니다. 미국에서는 건강한 사람보다 장애인에게 우선 권이 있습니다. 경 증 장애 보다 중증 장애인에게 우선 권이 있구요. 장애인 중에서도 유색 인종에게 우선권이 있습 니다. 유색 인종 가운데도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에 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하는 것입니 다. 그 제도를 보면서 미국이 복 받 을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나 라에서 보면 전부 불리한 여건 입니 다. 또 공정하다는 것이 이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함 께 복싱을 시키는 것은 공정이 아닙 니다. 초등학교 아이와 고등학교 학 생이 동일선상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은 공정이 아닙니다. 부족한 부분 을 메꿔 놓고 똑같이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공정입 니다. 그렇게 미국의 제 동생이 잘 적응하고 살길래 저는 장애에 대해 가족으로서 할 일을 모두 마쳤다고 안심하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1992년 남서울교회가 중 동고등학교 강당을 빌려서 개척을 했습니다. 학교에서 예배 드리니까 좋은 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일주 일 동안 학교로 쓰고 주일 하루만 강당에서 예배드리고 각 교실에서 성경공부를 할 수 있고 넓은 운동장 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등 잇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학교 를 하나 운영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 졌는데 마침 중동고등학교가 재정난 으로 재단이 부도가 났습니다. 서울 시 교육청에서 남서울교회가 학교를 인 수해달라고 요청해왔고 그래서 계 약절차를 거의 다 마쳤습니다. 그런 데 학교 동창들이 중동학교가 민족 사학이지 언제 미션 스쿨이었느냐고 반대를 해서 결국 삼성에서 재단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서울시 교육청에 가서 의 논했을 때 자폐아 학교를 세울 것을 추천받았습니다. 사실 그 전에 교회가 학교를 세운다 는 소문을 듣고 한 자매님 이 찾아와 자폐아 학교를 지어달라고, 그 일을 위하여 양보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 도하겠다며 간청한 적이 있었습니 다. 그 자매님의 기도가 승리했습니 다. 4년 여 이 학교를 짓는데 많은 애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생 길 때마다 더 좋은 것을 주 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번에 안 주시면 다음에 더 좋은 것으로 주시 고, 앞 길이 막 히면 옆에 대로를 뚫 어주시고, 법이 문제면 법까지 개정 해주시면서 이 학교를 아름답게 인 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는 이 학교를 위해서 남서울교회를 사 임해야한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주께서 \\\"네가 가라\\\"고 하신 분명한 명령 때문에 20년 9개월을 섬겼던 남서울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생 각해 보면 그 때 결정해서 떠나지 않 았으면 이 학교가 IMF에 걸려 어려 움을 당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몰랐지만 하 나님은 이 학교가 세워 질 시기까지 정확히 아셨습니다. 그 리고 학교 건축으로 진 빚을 1997년 12월 17일 대통령 선거 전날에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165억이나 든 이 학교의 건축 헌금이 어떻게 되어졌 는지 셈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건축헌금하라고 교회에서 무리하게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일을 이 땅에 펼쳐주신 것 입 니다. 또 이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 으면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장애인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 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곳마다 장애인들이 함께 갔습니 다. 주님께서 장애인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시기도 하셨습니 다. 4복음서 를 자세히 살피면 예수님의 공생애 중 장애인들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런데 장애인과 함께 예배하는 것은 사실 우리 Idea가 아 니었습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과 부시 대통령 때 법 무장관을 지냈 고 지금은 UN의 인권위원회 의장 인 딕 손버그(Dick Thornburgh) 박 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배우 게 되 었습니다. 그 분의 부인인 지니 손 버그(Ginny Thornburgh)를 먼저 만 났는데 그녀의 영어 발음이 얼마나 분 명하던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 내가 영어 못하는 줄 어떻게 알고 이렇게 알아듣도록 또박또박하는지 참 신기하다 \\\' 그런데 나중에 남편이 왔는데도 똑같이 발음하는 것이었습 니다. 그래서 나중에 물었습니다. \\\" 당신처럼 영어를 또박또박 발음해서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랬더니 그 분이 사연을 말하기를 자기 교회에 청각 장애인 들이 몇 명이 있는데 그 분들은 자 신의 입모양을 보고 구화(口話)로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는 것이었습 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지 뚜렷 한 발음을 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입 니다. 그 때 저는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다!\\\'고 탄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이 장애인에 대해 관심을 갖 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주었습니 다. 딕 손버그와 결혼했을 때 그 가 정엔 전 부인의 아들 셋이 있었답니 다. 막내 아들 피터가 생후 4개월 되었을 때 그 어머니가 세 아들을 데리고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다가 큰 교통사고를 만났답니 다. 그 때 손버 그 부인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두 아이는 경상을 입었는데 막내 아이 가 뇌에 심한 손상을 입었습 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두개골을 압박하 는 것을 뽑아내는 수술을 했고 그것 이 감염되어서 아이가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6세가 될 때까지 아이 는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11세의 지능 만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6세 되었을 때 재혼한 지니 손버그가 그 집에 넷째 아들을 낳았 습니다. 온 교회가 환영을 했습니다. 산후 몸조리 한 후 교회에 나갔더니 이 어린 아이가 언제 교회 오느냐고 많은 사람이 축하하면서 묻더랍니 다. 그 때 자기 마음 속에 들었던 생각은 자신이 예배하러 올 때마다 사람을 사서 셋째 아들 피터를 집에 서 보게하고 교회를 왔는데 교인들 중에 아무도 피터가 언제 교회 오느 냐고 물어본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 니다. 그 후 이 부인이 교회에 장애 인 부서 교회 학교를 만들자고 건의 를 했답니다. 광고를 몇 주간 한 후 시작을 했더니 그 아들 피터 손버 그 한 명만 참석했더래요. 그렇게 해서 펜실베니아 피츠버그의 작은 교회가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장애인 들이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괴성도 들으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피터가 학 교에 입학해서 가보니까 지하 창 고를 뜯어고친 교실에서 특수교사가 세 장애아를 맡아 수업을 하는데 꼭 돼지 우리 같더라는 거예요. 교장선 생님에게 흥분해서 올라와 \\\"그렇게 나쁜 환경에서 아이를 교육시키냐?\\\" 고 항의를 하니까, \\\"그 아이들은 아 무것도 모르니까 괜찮다\\\"고 그러더 랍니다. 이것이 우리 비장애인이 장 애인들을 생각하는 자세입 니다. 결 국 손버그 부부는 펜실베니아 주 전 체에 장애인을 우대하는 법을 제정 했습니다. 그 분이 레이건 때부터 부시 대통령 때까지 법무장관하면서 1990년에 장애인들을 위한 법령을 완결했습니다. 청문회에 증언하러 가면 의원 들이 예리한 칼날처럼 장 애인의 부모의 마음을 찢는 질문을 하고 \\\"Yes 아니면 No만 대답하시오 라고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몰아부치곤 했었는데, 그 모든 고통 을 뚫고 법이 제정되어서 이제는 모 든 장애인들 이 고용의 기회와 자기 삶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 남편이 그 렇게 애쓰고 수고해서 도 일이 안될 때 아내가 불평하면 \\\"여보, 다른 부 모들은 피터 같은 아들이 없어서 그 래\\\"하며 위로했답니다. 우리 교회가 장애인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 때문에 사실은 이 불편함을 다 감수합니다. 예배 분위기가 정숙하지 않습 니다. 음향 도 계속 메아리가 칩니다. 그래도 저는 이 곳에 주님이 기뻐하심이 있 다고 믿습니다. 우리 마음이 더 열 려서 장애인들이 우리와 똑같이 하 나님의 영광으로 창조한 인생인 것 을 받아들인다면 이 예배는 하나님 이 기 뻐하시는 예배가 될 줄로 믿습 니다.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을 기대한다면 우리들은 장애인들과 함 께 예배하는 이 축복 을 빼앗기지 말아야 됩니다. 주님은 재림하십니다.메시야가 이 땅에 오 시면 우리의 모든 원했 던 것, 우리 의 모든 장애들, 우리의 모든 부족 들, 우리의 모든 불편은 일시에 사 라질 것입니다. 나를 나보다 더 사 랑하시는 주님이 다시 재림하시는 그 날에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하늘 나라로 보낸 성도들의 고통도 제해 질 줄 로 믿습니다. 이 땅은 이별의 땅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떠나 보냅니다. 착각하지 말고 자만하지 마십 시오. 우리 모두 언젠 가 홀아비 되고 과부될 각오를 한번 은 해야 됩니다. 메시야 오시면 그 모든 이별은 종지부를 찍고 영원한 만남이 계속 되리라고 믿습니다. 메 시야가 오시면 우리는 또 놀라운 사 실을 목도할 것입니다. 도무지 내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내 게 뛰어와서 목을 껴안고 당신이 파 송해준 아무개 선교사 때문에 내가 천 국에 오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환 영해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들은 또 볼 것입니다. 시온 성가대 에서 찬양하 던 시각 장애인 명자와 진규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바뀌어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청각 장애 때 문에 고통받은 형제, 자매들이 수화 없이 말할 수 있는 날이, 천군천사 와 함께 찬송할 수 있는 그 날이 반 드시 올 것입니다. 그 복된 날에 휠 체어를 탄 송명희 시인이 벌떨 일어 나서 영광으로 하나님 앞에 춤을 추 는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그 영 광 의 날을 믿으십니까? 그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예배는 메시야 영 광의 그 날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구 체적 인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그 것은 보지 못하는 내 사랑하는 형 제, 자매들이 보는 그 날을 오늘로 당겨서 함께 예 배합니다. 그 영광의 그 날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청각 장 애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 앞에 찬 양하고 하나님 앞에 영 광 돌릴 날을 오늘 이 자리에서 현실로 믿음으로 누리는 복된 예배를 드려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축복이고 믿음 의 능력입니다. 그 날이 없다면 인 생을 살 맛이 없습니다. 그 날이 없 다면 인생은 절망입니다. 컴퓨터의 세 계가 아무리 펼쳐져도 우리 마음 의 곤고는 끝나지 않습니다. 한국 경제가 다시 복원되어도 진정한 마 음의 깊은 곳 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메시야의 영광의 그 날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합니다. 이 놀라운 은총의 날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이 곳에서 그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예배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남서 울은혜 교회는 더 불편해집시다. 그 분들 때문에 어떤 때는 설교가 잘 안들릴 수가 있고 철모르는 아이들이 여기 서 뛰어다니기 때문에 예배가 방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 습니다. 우리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아이들 내 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장애의 고통을 받는 형제들, 그 장애가 풀어지는 그 날 을 믿음으로 바라 보면서 예배가 드 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령 과 진정의 예배입니다. 메시아, 그 분 우리 앞에 영광의 날을 주십니 다. 이것을 사모하는 신앙고백이 계 속되는 예배가 되고 주님 앞에 드려 지는 살아있는 교회로 자라기를 주 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하라/ 대상4:9-10/ 2003-06-20
믿음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하라 대상4:9-10 세계사에 있어서 6월 6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의 분기점이 된 역사적인 노르망디상륙작전이 전개된 날입니다. 1944년 히틀러에 의해서 일어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앙에서 구원받게 된 결정적인 작전이 성공한 날입니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전사하고 부상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6월 6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쳐 충성한 애국선열(愛國先烈)들과 국군장병들의 충절(忠節)을 기념하여 온 국민이 경건하게 지켜야 할 국가적인 절기인 현충일(顯忠日)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노무현대통령은 일왕과 만나는 국빈(國賓) 대접을 받기 위해 일왕의 스케쥴이 6일(금)-9일(월)까지 밖에 비어 있는 기간이 없다는 일본 정부의 요구로 6월 6일 현충일에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보통 현충일에는 대통령과 삼부요인이 국립묘지를 방문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사명을 새롭게 하는 날입니다. 좀 아쉬움이 남는 사건입니다. 미국의 3대 국가 절기, 1)전몰장병기념일(Memorial Day)입니다. 5월 30일로 정해졌다가, 1971년부터는 5월 마지막 월요일에 지켜집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1868년 John Alexander Logan이라는 북군 장군에 의해 미국 시민 전쟁의 희생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매 절기마다 대통령은 월링턴국립묘지에 참배하고 예배를 드리고 대 국민연설을 합니다. 2)독립기념(Independent day, The Fourth of July)입니다. 7월 4일로 지켜집니다. 우리 나라와 같으면 10월 3일 개천절과 같은 날입니다. 독립전쟁 때에 2차 대륙회의 때에 독립선언문이 채택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입니다. 1812년 이후부터 성대하기 지켜지기 시작했습니다. 1817년 이리호 착공, 1828년 최초의 철도인 볼티모어 오하이오 철로공사, 1850년 워싱턴기념비 정초식, 1946년 필리핀 독립 공식 승인을 이 때에 맞추어 실시했습니다. 3)추수감사주일(Thanks Giving Day)입니다. 11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지켜집니다. 1621년 가을 플리머스의 총독 윌리엄 브래드퍼드가 청교도들을 중심으로 수확의 풍요함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축제를 3일 동안 열고 근처에 사는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초기의 개척민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데서 그 유래했습니다. 19세기 말엽까지 추수감사절은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하나의 관례적인 축제가 되었고,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국경일로 선포했습니다. 그 이후로 매년 대통령은 추수감사주일을 직접 선포하며 절기를 지킵니다. 칠면조 고기와 호박 파이의 축제라고도 하는 이 행사는 미국의 고유한 풍습으로 정착되었으며, 1941년 법령이 바뀌어 11월의 4번째 목요일로 정해지기 전까지는 11월의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기념합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시고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다시금 나라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희생한 인물들을 기억하는 현충일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자들뿐만 아니라 보통 상이용사(傷痍勇士)라고 불리는 전쟁 장애자로 일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들을 보훈대상자로 지정하여 국가에서 잘 돌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상이용사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많은 장애자들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정상인 보다 비하하는 느낌을 주는 장애자(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보다 친근한 의미에서 장애우(障碍友)라고 부릅니다. 세상에는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전도서7:20,로마서3:10). 그러므로 영과 혼과 육에 있어서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각자 나름대로의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장애”를 극복하고“장애”를 변화시키는 삶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장애를 갖은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장애를 극복하는 이야기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오직 완전하시고 모든 인간은 장애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야 진정으로 장애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장애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모든 장애를 해결해 주시는 전능과 사랑의 하나님의 은혜가 만나야 기적과 축복과 성공이 일어납니다.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으로 유명한 유다 족속의 후손이지만 장애자로 태어난 야베스는 다윗의 족보에 이름이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다 족속의 조상들의 이름만 기록되는 족보에 예외적으로 오직 그의 존귀함과 기도문이 소개되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이름만 기록되어도 참으로 크고 놀라운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름만 기록하는 성경의 족보에 야베스의 이름은 물론 야베스의 생애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는 것은 아주 놀랄만한 사건입니다. 특별히 그의 일생을 특징짓는 야베스의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그의 기도일뿐만 아니라 그 기도대로 이루어진 그의 일생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브루스 윌킨스목사가 책으로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므로 정말 그의 기도 제목 가운데 하나처럼 그의 지경이 세계적으로 넓혀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베스와 그의 기도를 통해 인생의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발견하고 합니다. 1.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더라”(장애는 불행과 저주가 아니라 인생 축복의 근거이며, 성공의 발판입니다) : 객관적인 수치를 보더라도 평범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될 확률보다 장애자가 위대한 사람으로 기록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장애에는 어떤 영적 신비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어머니의 난산(難産)을 통해 세상에 나오면서 선천적으로 장애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히브리어로“신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 슬픔, 심한 노동”을 뜻하는 오쩨브(osteb)에서 기원한 야베스(Jabez)로 지었습니다. 야베스의 형제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이름조차도 기억되지 않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존귀한 즉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존귀한” 이라는 히브리어 카보드(kabod)는“무거운, 빛나는”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는 영광(Glory)이라 단어입니다. 링컨은 9세 때에 생모와 사별하고 계모를 맞이한 결손 가정과 가난한 시골 집안으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환경적 장애가 있었지만 오히려 역사상 가장 휼륭한 대통령(지도자)이 되었습니다. 40세에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까지 지명되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갑작스러운 척수성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밖에 없는 하반신 불구의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금융회사의 부회장으로 온천에 다니며 요양을 하면서 그의 고향에서 일생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오히려 장애의 실의에 빠진 남편의 사기진작을 위해 그리고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욱 활발한 활동이 필요하다는 아내 엘러너의 적극적인 권면과 내조로 정치계에 투신하여 뉴욕주지사에 당선되었고 재선까지 하였습니다. 1932년 제32대 대통령 선거 때에 미국에 닥친 경제공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소망을 제시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경제공황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어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의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만일 편안한 평화의 시대에 장애인인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출마했다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오히려 국가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국가원수의 모습에 걸맞지 않는 다고 반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장애를 당하여 온 국민들이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었을 때에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에 도전한 그의 모습은 오히려 소망과 용기의 상징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카보드는“무겁고 빛나고 희귀하며 변하지 않는”보석을 상징합니다. 보석을 싫어하거나 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상징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 보석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보석으로 지어진 집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그 어떤 장애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보석, 영광)입니다((디모데전서4:4). 세상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을 없습니다. 장애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장애를 축복의 디딤돌로 만들어야 합니다.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장애와 결핍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장애와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기 때문입니다. 2.“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장애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을 만나는 접촉점(Encounter & Meeting Point)입니다) : 야베스가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호칭에는 세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1)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의미입니다. 2)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변화된 야곱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에서의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난 야곱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1)아브라함과 이삭의 믿음의 혈통을 이어가는 믿음의 조상과 (2)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과 (3)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한 개인의 인격과 삶과 운명을 놀랍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의미가 있습니다. 3)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모세를 통해 여러 가지 기적으로 행하여 출애굽시키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새로운 신정국가를 세우신 하나님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야베스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생명의 하나님,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킨 사랑의 하나님, 출애굽의 구원을 베푸신 기적과 구원의 하나님은 자신의 장애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과 사라도 원래는 늙도록 자녀가 없는 장애(결핍)가 있었습니다. 그러나“자녀를 주신다는 즉 자신의 장애를 해결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그들의 자손들이“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알과 같이 번성하는 축복을”받았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 사라는 열국의 어미 즉“믿음의 조상”이라는 존귀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1)행동에 불편을 주는 신체적인 장애입니다. 신체적 장애는 정상적인 삶을 방해하여 불편하게 하고 환난과 근심을 당하게 합니다. 2)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장애입니다. 그러나 신체적 장애보다 시기와 질투와 불평불만과 같은 성격적 장애가 더 불행합니다. 정상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기와 질투와 불평과 불만으로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백마의 성형 수술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백마가 해변을 달릴 때면 그 멋진 모습에 모든 동물들은 넋을 놓고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백마는 다른 동물들의 모습과 비교해서 늘 자신의 모습 가운데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백마는 천사에게 찾아가 성형수술을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깊숙한 쌍꺼풀에 긴 속눈썹을 원했고, 목과 등에 난 치렁거리는 긴 갈기보다 짧은 헤어스타일을 원했으며, 목과 다리는 더 길고 날씬하며, 등과 허리는 안장을 올리지 않고도 사람들이 더 편하게 탈 수 있도록 볼룸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천사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네 모습이 변해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백마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일어나자마자 거울을 보니 낙타가 되었습니다. 3)영적인 장애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죽음의 장애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인생의 장애입니다. 믿음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야고보서1:1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제일로 기뻐하십니다(히브리서11:6). 여러 가지 장애를 가진 자들이 믿음으로 주님께 나와 간구하여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응답하여 주셨습니다(마태복음9:29). 믿음의 사람들은 장애가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장애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만나서 장애를 극복하거나 해결함을 받았던 자들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장애가 생길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겠다는 신호입니다. 신호를 무시하면 사고를 당하지만 신호를 지키면 형통한 길을 가게 됩니다. 삼일교회 전병욱목사님은 한국에서 눈이 제일 작고, 책을 제일 많이 읽은 목사님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지적인 요구가 한창인 젊은 청년과 대학생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목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눈이 작을 뿐만 아니라 지독한 근시인 시력 장애자로 초등학교 때부터 머리가 아프고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아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장애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아예 암기하려고 했기 때문에 집중력이 뛰어나게 되었고, 집에서 책을 많이 읽는 독서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어느 날 임진왜란이라는 TV드라마를 보다가 일본의 침략을 물리친 이순신장군처럼 사탄의 침략을 물리치는 영적인 장군이 되어야 겠다는 소망과 사명을 품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바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기도이기도 합니다. 3.“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믿음의 기도를 통한 장애의 변화와 극복과 특별한 은혜와 은사) : 장애는 믿음과 기도를 통해서 1)변화되거나 2)극복되거나 3)다른 방면의 특별한 은혜와 은사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장애자들을 온전하게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다른 면에서 특별한 은사와 은혜를 주셔서 장애에 관계없이 더 휼륭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벽산그룹 기획실장 출신으로 86아시안게임 요트장을 건설했던 장사장은 원인 모를 병으로 전신마비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체중이 35kg까지 빠지고 죽음의 공포 속에서 회개하다가“니느웨 성으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자 마비가 풀리고 말문이 열렸지만 한쪽 눈은 실명이 되었습니다. 이름을 장요나로 개명하고 젊은 날 위생병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젊은 날 건강과 부귀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죄 가운데 살았는데 이제는 애꾸눈이 되었지만 침술을 익히고 특별한 신유의 은사를 받아 복음을 전파하면서 지금은 베트남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에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크리스쳔은 교통사고로 전신 화상을 입고 망가진 얼굴과 몽당손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이지선양입니다. 국민일보에“나의 길, 나의 신앙”이라는 글이 연재되고, KBS 인간극장의 주인공으로 방영되었으며, 최근에 자서전“지선아 사랑해”가 출판되었습니다. 그녀의“지선이의 주바라기”라는 홈페이지(www.ezsun.net)는 현재 총 약34,000,000만 명의 접속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리 : 장애는 변화되거나 극복될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보석의 가장 기초는 진주입니다. 자신의 살에 모래알이 박히면 조개는 그 상처에 의해 죽거나 아니면 자신의 몸에서“나카”라는 이상분비물(CaCO3, “탄산칼슘:아리고나이트”가 주성분)을 분비하여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모래알을 계속 싸 바르는데 그것이 자라서 영롱한 진주가 됩니다. 진주에도 백진주, 흑진주, 황색 진주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은 인도진주라는 장미빛 진주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사파이어 보석이라도 파란색보다는 빨간색이 더 귀하게 여겨집니다. 아마도 진주의 피도 함께 바라졌는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진주입니다. 자시에게 닥친 모든 장애를 십자가로 사랑하고, 십자가를 붙들듯이 장애를 붙잡고 인내로서 기도할 때에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듯이 영광스러운 축복의 삶에 이르게 됩니다. ★ 기도제목 1. 인도네시아의 환경적 장애를 믿음과 기도로 극복하여 사업, 가정, 자녀의 축복을 받도록 2. 이방 땅에서 한인전도와 현지선교의 기회를 살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 되도록 3. 주일성수, 수요성경공부, 속회모임, 새벽기도회 활성화 등을 통해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도록 4.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었던 평양과 북한에 다시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도록 5. 우리의 제2의 조국이 된 인도네시아의 교회의 부흥과 복음화를 위하여 6. 선교사업가, 신앙의 왕가, 21세기 세계적인 인물의 소망을 붙잡고 기도와 말씀에 더욱 집중
믿음의 장애물/롬4:9-16
믿음의 장애물/롬4:9-16 2006-12-08 12:27:43 read : 101 우리의 믿음을 가로막고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들은 많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박해나 유혹이 믿음의 장애요소로 작용하는 일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제법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했던 것이 실제로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는데 심각할 정도로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믿음에서도 감각적인 증거에 비중을 많이 두게 된다.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 자체로만은 불분명하다고 느끼기 쉽고, 그 대신에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통해 확신의 근거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예로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의인이 되었고, 구원을 얻었다는 근거도 무엇을 보았고, 느꼈느냐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믿고 고질병이 싹 나았다.” “예수님을 믿었더니 경제적인 문제가 매우 수월하게 풀렸고 이제는 부유함을 누리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니 방언이 터져 나오고 은사를 활용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체험이 전혀 없는 나는 믿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걱정하기 시작한다. “나도 최소한 마음이라도 뜨거워지는 체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는 소박한 바램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소박한 바램까지도 아직 체험하지 못한 분이라 할지라도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성경은 그런 것들을 믿음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근거에 매달리게 되면 오히려 온전한 믿음을 길러 가는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물론 성경은 예수님께서 불치병까지도 고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부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성도라면 누구든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더 많은 은사를 활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복음이 의미를 깨닫고 그것이 나를 위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게 되는 세상 무엇에서도 얻을 수 없는 감동을 맛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 모두가 의인되고 구원 얻는 믿음의 근거는 아니라는 말이다. 온전한 믿음의 근거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느낌도 아니고 사람들이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들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약속으로 주시며 그것은 빈틈없이 이루신 결과들이 우리 믿음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보았고, 느꼈고, 체험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설교의 시작에서부터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근거에서 시작해서 엉뚱한 목표로 달려가면서도 그것이 제대로 된 믿음인 양 착각하게 될 소지가 교회 안에도 다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병을 고치고, 부자가 되고, 신비한 능력을 나타내는 일은 기독교가 아니고도 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을 이루는 데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서 우러난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을 믿음의 근거로 삼아버리는 중대한 착각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만 믿음의 장애물이 많은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라도 믿음을 빗나가게 하고 엉뚱한 길로 끌고 가는 오류가 항상 존재한다. 사도는 본문말씀에서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특별히 당시 성도들이 오해해서 착각에 쉬운 두 가지 사실을 예로 들어 복음에 근거를 두는 바른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설명하고 있다. 그 두 가지 예, 믿음을 빗나가게 만들며, 오류에 빠지게 하는 두 가지가 무엇 무엇인가?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할 두 가지가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할례와 율법에 대한 이해다. 여러분 할례와 율법은 이방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가르치신 것이었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는 할례나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고 구원을 얻는데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고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가 할례를 받아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지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지키고 따르는 법이 바로 율법이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아주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사도는 할례나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의인-되는데 아무런 효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1. 할례 9절 말씀을 보자. 사도는 “이 행복이 어떤 이에게 해당하겠는가?”를 묻고 있다. 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7절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불법을 사하심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의 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인으로 여김을 받은 복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냐, 아니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이냐?”는 질문이다. 여러분은 어떤 답을 말하겠는가? 유대인이라며 어떤 답을 말하겠는가? 망설일 필요도 없이 할례 받은 사람들만 하나님의 백성-의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도 유대인이요, 출생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사도 바울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10-12에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사도는 아브라함이 의인으로 인정받은 시점과 할례를 받은 시점이 언제 인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만약 할례를 먼저 받았고 그 다음에 의인으로 인정받았다면 할례가 의인이 되는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이 먼저요 그 다음에 할례를 받았다면 할례는 의인으로 인정된 것과는 별개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의인이 된 것은 언제고, 할례를 받은 것은 언제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부르시기 시작한 것은 지난 주일에 확인해 본 것처럼 창15장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할례를 받은 것은 창17장에 나온다. 성경 전체가 시간적 순서를 따라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은 시간적으로도 17장 보다 15장이 앞선 것이 분명하다. 정확한 연대 계산으로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때가 99세(17:24)였고, 의인으로 인정된 때가 85세(16:3 가나안 땅에 거한지 10년 후)였으므로 14년의 시차를 가진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14년 전에 벌써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할례는 의인으로 여김을 받는 데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뿐인가? 성경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여기셨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여러분은 어떤 이름들이 기억나는가? 아벨, 에녹, 노아 그들은 할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할례라는 형식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여김을 받는데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할례와는 전혀 무관하게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은혜를 덧입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할례를 받게 하셨을까? 거기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키는 설명이 11,12절 말씀이다. 그 첫째 이유는 아브라함이 14년 전에 받은 칭의를 인침이었다는 것이다. 도장을 찍었다는 의미의 인침은 진짜임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진품명품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각종 골동품들을 가지고 나와서 감정을 받는다. 전문가들이 요모조모를 세심하게 살핀 후에 진위를 판정하고 가격까지 매겨주는 것을 본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거기 나온 골동품들이 비로소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이미 진품이고 명품이다. 다만 전문 감정사들이 그 진가를 확인해 주는 것뿐이다. 할례가 바로 그렇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는 순간에 비로소 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의인이었다는 사실을 할례를 받음으로써 확증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의인이었던 효력은 할례를 받기 이전부터 이미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와는 무관하게 이미 의인이 될 수 있었다는 원리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은 원리로 의인되는 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나 축복이 결코 아브라함과 똑같은 할례를 받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똑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 여기심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롬 2:28,29에서 사도는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런 복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고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와 같은 조건의 충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대인 다음으로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수많은 초등학생들이 방학이면 비뇨기과에 줄서고 있으므로) 2.율법 물론 그런 식의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로서는 할례만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니다. 또 한 가지 그들이 내세우는 자랑과 근거가 있었다. 율법을 가장 확실한 근거로 삼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다른 어느 민족에게도 주시지 않은 율법을 이스라엘은 가지고 있었고, 다른 어느 민족도 무관하게 지내는 율법을 그들은 잘 지켜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율법을 가지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며, 율법을 지키지도 않는 사람들에 비해서 자기들이 의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 더 높은 점수가 나올 수 있는 율법 지키는 열심이 믿음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믿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 역시 상당한 착각이라는 것을 사도는 밝히고 있다. 13절 이하의 내용이 그것이다. 우선 사도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과 그 약속을 믿음으로 의인으로 여김이 되었던 사실이 율법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13).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는가? 그 자신이 복의 근원이 후순 대대로 복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십자가와 구원이 포함된 약속이다. 어떤 때,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그런 엄청난 약속은 주시 것인가? 그가 하나님을 찾고 남다른 의로움을 이루던 사람이었는가? 아니었다. 우상을 섬기며, 불신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살던 사람이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불러내시고 축복의 약속을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행동이나 노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약속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행위와 노력이 있는 사람을 평가해서 약속을 주시기로 했다면 아브라함은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14절의 의미는 율법적인 태도인 행위나 노력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근거였다면 그 약속은 처음부터 무효였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불러 놓고 이렇게 약속을 했다고 하자.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초등하교에서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평균 100점을 받아오면 전 재산을 물려주겠다.” 여러분 어떤가? 그런 약속이 약속다운가?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있는가? 모든 학교의 과정의 모든 시험에서 한 문제도 안 틀리고 졸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 약속이라면 아마 처음부터 무효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그런 식으로 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하도록 조건을 걸어놓은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겠다고 제시하시고 “네가 믿느냐? 나 여호와가 이루어 줄 줄 믿느냐?”를 물으신 것이고 아브라함이 거기에 “아멘, 믿습니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맺어진 관계가 은혜의 관계다. 그런데 믿음의 좋다는 유대인들이 어떤 착각을 하고 있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결과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주셨느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 오류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고, 또 그렇게 하기를 좋아 한다. 오늘 여러분에게 “당신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질문하면 교회생활을 하면서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가를 열심히 찾는다. 거기에다가 “구원 얻을 확신이 있는가?”를 다그쳐 물으면 자신이 없어지면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말꼬리 흐리게 된다. 오늘날 믿음 좋은 교인들이란 교회가 마련한 빡빡한 프로그램을 빠뜨림 없이 참석하면서 숨을 헐떡거리며 사는 모습이기 십상이다. 능력 있는 목회자란 교인들을 쉴 틈 없이 몰아붙이면서 강압적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끌려가는 것을 믿음의 열심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아무리 열심이 드높은 교인이라고 하더라도 바리새인만큼의 수준에 이른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율법의 기준으로 평가하면 그런 사람들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인이 되려면 높은 점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만점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브라함조차도 만점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부르셨다면 그것은 분명 율법으로 판단한 결과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미 사도는 아브라함이 은혜로-일한 것이 없이 두둑한 품삯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의인이 되기에 필요한 노력이나 공로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의인으로 인정하셨으니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다윗까지도 아브라함을 부러워했다고 말했다.(4:4-8)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여기심을 받은 사실은 할례와 아무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율법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가 할례받기 전에 이미 의인이라는 말씀을 들은 것처럼, 율법이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벌써 의인이 되어 있었던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율법을 주신 때가 언제인지 기억하는가? 하나님은 누구에게 십계명을 주셨던가? 출애굽 한 다음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셨다. 여러분 모세가 더 빠른 시대의 사람인가? 아브라함이 더 빠른 시대의 사람인가? 아브라함이 모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아브라함의 까마득한 손자 모세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아브라함 시대에는 율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 당연히 아브라함은 율법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갈3:17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물론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백성의 법이다. 그렇더라도 그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율법을 지키는 노력을 통해서는 의인이 될 수가 없다. 만약 율법이 의인이 되는 조건이라면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는 꼴이 된다. “네게 율법을 주노라 이를 잘 지키면 나는 너에게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겠다.” 그런 약속이라면 먼젓번 자식에게 약속한 부모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전 재산을 물려주겠다. 그러나 대학 졸업할 때까지 평균 100점을 받아와야 한다.” 하나마나한 약속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인간이 의를 이루기에 얼마나 불가능한가를 아시기에 은예의 약속을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율법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이미 그를 의인으로 선언해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하신다. 우리가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 중에 특출하게 뛰어난 존재도 아니요, 의를 이루기 위해 남다른 열심을 가진 존대도 아니다. 그야 말로 명사십리 백사장의 모래 한 알 같은 존재에 불과 하다. 더군다나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의는 더더욱 깨닫지 못했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겠다 거나 기어코 의인이 되어야 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본 일조차 없다. 아브라함도 그랬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를 의인으로 만드시며 충만한 복으로 채우실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셨고, 아브라함이 “믿습니다.”대답하자 “그 믿음이면 너는 의인이다.”인정하신 것이다. 그 순간부터 아브라함이 의인되는 일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근거를 온통 그런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아브라함과 똑같은 약속을 주신 다음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신다. “내가 너를 구언하며 의인으로 만들겠다. 약속을 믿느냐? 내가 이룰 줄 믿느냐?” 거기에 아브라함처럼 반응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인정하신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할례를 받았는가? 율법을 얼마나 지켰는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으시고 이끌면 무엇이 가능하겠는가를 바라보면서 응답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다. 99세가 되었어도 “아들을 낳을 것이다.”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면 ‘아멘’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도무지 의를 이루는 일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이면 됩니다. 그러니 내가 온전히 하나님께만 의지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믿음의 장애물/요7:40-53
믿음의 장애물/요7:40-53 2002-11-06 15:15:08 read : 135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 이니라\"고 전제 하시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면서 성전에 모인 청중들을 예수님 자신에게로 초청 하셨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건 진리의 선언이었습니다. 성경은 당시 현장에서 설교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표현하기를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28절) 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열정적이었습니다. 대단히 명쾌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혼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믿음의 자리로 나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든 자들조차도 그 일을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30, 44절)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제사장의 하속들도 돌아와서 하는 말이 \"지금까지 이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을 우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 (46절)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힘 있고 감동적인 설교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행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종교 행위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친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토록 능력 있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믿음을 갖기를 거부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저항하고 논쟁하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 쟁론이 되니\" (40-43절)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두 양상이 생겨났습니다. 한 편은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믿음이 생기고 예수님께로 더욱 가까워지는가 하면, 다른 한편은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믿음보다는 오히려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들은 예수님처럼 힘 있고 명쾌하며 감동적인 설교는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나, 가르치는 것들을 보면 분명히 예수님께는 보통 사람들이 흉낼 수 없는 능력과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무리는 예수님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 저항하고, 예수님의 설교를 토론거리로 삼고, 논쟁을 벌이는데 열심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이들이 종교적인 것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이들은 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활동에 대단히 열심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이 사람들은 믿음의 자리에 서지 않고 계속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그 이유를 살피기 전에, 한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긴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타성적 신앙의 위험성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종교적 행위가, 자칫하면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토론과 논쟁의 수준으로 전락하는 종교적 유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욕구 충족이나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어 자랑하는 것으로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가르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을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들을 무기로 하여 예수님의 주장을 꺾어 놓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불신시켜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가진 것으로 누군가를 꺾고 나를 높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쳐 복종시키는 싸움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메달리며,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와의 싸움, 그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그래서 꺼꾸러지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항복하는 자신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의 장애물 그럼 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왜 저항하며 논쟁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본문에서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편견의식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 쟁론이 되니\"(41-43절)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날 수 있느냐\'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성경에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른 보기에는 그들의 사고관점이 대단히 성경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성경 인용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고,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성경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갈릴리에 대한 그들의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본문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참 싫어했습니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경멸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도 예루살렘 사람들과 동일한 유대인들입니다. 혈통이 유대혈통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도 동일합니다. 또한 절기 때 마다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도 드립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왜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그토록 싫어합니까? 왜냐하면 원래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갈릴리로 이주해 가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가난하니까 자연적 배움의 혜택을 입지 못했습니다. 배움의 혜택을 입지 못했다는 것은 곧 율법에 대해서도 어두운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9절) 이것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가진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동리 갈릴리에서 그리스도가 출생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자존심상 받아들일 수 없었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치우치고 그릇된 편견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의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도 편견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편견을 갖도록 만들지도 말아야 합니다. 둘째, 우월의식입니다. 물론 우월의식은 편견 의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하속(下屬)들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와서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처럼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7-49절) 갈릴리 사람들은 저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혹시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그를 믿는 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당국자들이란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주로 제사장, 장로, 서기관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한 마디로,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이나 예수님의 설교에 미혹되지 우리 같은 뼈대 있고, 배움이 있는 사람들은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들이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 가진 편견의식에 의한 상대적 우월의식입니다. 그들이 가졌던 그릇된 우월의식의 위험성을 보십시오. 52절입니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52절) 니고데모는 유대의 관원이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자였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도 거침없이 모욕적인 저주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보다 더 모욕적인 말이 또 있겠습니까? 갈릴리에서 왜 선지자가 나올 수 없습니까? 요나와 같은 대 선지자도 갈릴리 출신입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상대적 우월의식을 갖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 아느냐 모르느냐, 오래되었느냐 오래되지 않았느냐,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게 합니다. 그 교만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넘어뜨리고 맙니다.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목말라 하는 겸손한 성도가 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이 되십시오. 셋째, 진리접근에 대한 그릇된 자세입니다. 본문에는 과거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니고데모를 요한복음 3장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난 뒤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니고데모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등장합니까? 본문의 분위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1절)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듣지도 않고 왜 판단하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한번 들어 본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 자신들의 생각에 붙들려 함부로 결론을 내리느냐 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에도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그 사람의 진술을 들은 다음에 판단하도록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어떤 내용의 말씀입니까? 영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단순한 지식 제공의 차원이 아닙니다. 누구의 고향이 더 좋으며, 누가 저 잘났느냐는 정도의 말씀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진리의 선언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합니까? 어떤 자세여야 합니까? 지금 이 말씀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 짖는 엄청난 말씀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진지해야 합니다. 숨소리조차 죽이며, 먹고 마심을 잊어버린 채 그 말씀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사는 영생의 진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기득권 확보에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체면과 권위의 유지에 있었습니다. 행여 예수라는 갈릴리 출신의 사나이가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려는 생각만 했지 그 말씀에 귀 기울이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영혼입니다. 신앙입니다. 내 생각을 아시고, 마음을 아시며, 나를 나 보다 더 속속들이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가치입니다. 내 영혼을 살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신앙을 온전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게 하며, 나의 참된 존재 가치를 자리매김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겸손합니까? 진지합니까? 내 영혼의 양식으로 알고, 내 삶의 생존을 위해 메달리며 집중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그 선지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 앉은 당신은, 지금 이 시간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그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믿음의 장애물을 제거하라/ 마13:
믿음의 장애물을 제거하라 마13: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은총이 이 시간 예배 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이시간 말씀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눅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임합니다. (행10:44-46)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 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 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 말씀을 들을 때에 악한 사탄마귀와 흑암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기고 깨달음이 옵니다. *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의 걱정과, 근심과, 염려와, 재리가, 아침 안개의 사라 짐 같이 물러갈 줄로 믿습니다. * 말씀을 들을 때에 모든 죄악을 이기게 됩니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 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의 병과, 영적인 병과, 마음의 병과 육신적인 병까지 깨끗하게 고침받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요4: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 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에 실패가 변하여 성공으로 변화가 됩니다. (눅5:4-6)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 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 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 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 시간도 말씀을 들을 때에 가지 가지 모든 은혜와 은사가 여러분들에게 충만 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주셔서 천국의 복음을 가르쳐 주신「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씨가 땅에 뿌려져서 열매를 맺고 알곡이 되어서 거두어 질 때까지 수많은 어려움과 환란과 고난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통과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심령의 밭에 하나님의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열매를 맺기 까지는 수많은 역경과 고난과 환란과 또 수많은 장애물들을 잘 통과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들이 믿음의 생활을 하는데 우리들이 나아가는 천 국길을 가로막는 수 많은 장애물들이 무엇이며 그 장애물들을 어떻개 통과를 해 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장애물이란 어떤 목표를 향해서 나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장애물이라고 합니다. 전쟁터에서는 적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뢰를 매설하거나 폭발물을 설 치하고 철조망을 치곤 합니다. 나는 6.25전쟁은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였어도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투의 실상 을 피부로 체험한바 있습니다. 월남에서는 그 유명한 베트공들이 장글속에 함정 을 파고 그 함정속에는 죽창을 세워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뷰비츄렙과 죽창덫 등 등의 장애물을 설치해 놓아서 우리 아군들이 피해를 당한 것도 보았습니다. 또 우리 아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적군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온갖 장애물들을 설치해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초등학교때 운동회를 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사닥다 리라든가 그물 같은 여러 가지 장애물을 놓고 그것을 통과하는 경기가 있습니다. 또 육상경기에서 허들경기라는 장애물을 넘어서 뛰는 경기도 있습니다. 요즘 전북 무주에서는 동계 유니버시아드 경기가 한창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에 스키경기중에 활강경기가 있습니다. 바로 산 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데 중간 중간에 빨간기와 파란기를 달은 볼대를 세워 놓고 그 뽈대롤 요리 조리 피해서 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장애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출발하여 가나안 땅까지 가는 동안 수많은 장애물 을 만났습니다. 제일 먼저 홍해의 장애물을 만났고,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물 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고, 또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고, 불뱀에 물려 죽기 도 하고, 아말렉군대의 습격을 받기도 하면서 수없이 많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와 같은 장애물을 만났을 때마다 원망과 불평을 하 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최종 장애물인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 만사가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때때로 파도와 풍랑을 만나게 되고, 하늘을 나르는 비행기 도 이상기류를 만나기도 합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도 돌발사태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예기치 못했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그 모든 장애물을 극복 하고 끝까지 달려나가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은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 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 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 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 유의 뜻은 하나님의 천국 복음을 듣고 결실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 말씀에서 또 한가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한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서 결실하기 까지 수많은 시련과 고난과 위험이 있다는 것을 깨 닫게 됩니다. 새들이 쪼아 먹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위협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비가 오지 않아서 가뭄에 시달려야 하고, 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장마에 시달리기도 합니 다. 그런가 하면 각종 잡초와 병충해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모든 어려움의 과정을 다 겪고 나서야 비로서 결실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이와 같은 위험 요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장애물입니다.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고 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겨야 합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 이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서 먹게 하리라\" 고 하셨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고 하셨습니다.(계2:7,11) 그러면 우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어떤 장애물들이 있을까요? 그 장애 물들을 생각해 보면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 기를 바랍니다. 1.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입니다. (마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이 유혹이야 말로 당하지 않을 수가 없고, 또 가장 힘든 장 애물입니다. 이 유혹의 장애물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어졌는지 모릅니다. 마태19;16-22 말씀을 보면 어떤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구원의 도리를 알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 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고 말씀 하시니까 \"그 청년이 재물이 많음으로 이 말 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이 장애물에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아간이도 넘어졌습니 다. 가롯유다도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 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라고 하였습니다. 이 장애물에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신후에 제일먼저 받은 시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겼습니다. 우리도 이겨야 합니 다. 무엇으로 이길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야 합니다. G.S 예수이겼네 예수이겼네 예수사탄을 이겼네 나도이겼네 나도이겼네 나도사탄을 이겼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사탄을 이겼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도사탄을 이겼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물리칠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 님의 말씀으로 살리라\" 고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 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2. 세상을 사랑하는 장애물입니다. 딤후4:10 말씀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 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 로 갔다\" 고 하였습니다. 데마는 바울의 동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되자 바울을 떠나서 고향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데마는 세상의 물질과 향락과 쾌락을 좋와하여 바 울을 떠났습니다. 데마가 바울을 떠난 것은 곧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믿음을 떠나고 신앙을 떠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중에 부자는 날마다 연락을 즐기다가 지 옥에 갔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서도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을 배반하고 세상 길로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장애물을 이기고 넘어야 합니다. 3. 육체의 정욕의 장애물입니다. 정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까지 파멸시킵니다. 사탄이 사용하는 무기중에 아주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 장애물에 넘어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성군 다윗왕도 그만 이 장애물에 넘어져서 옥에 티가 되었습니다. 솔로문 왕도 말년에 이 장애물에 넘어졌습니다. 민25:1-8절 말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을 향하여 갈 때에 모압나라 발락이라는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려고 계교를 짤 때 발람 이라는 선지자의 자문을 받아서 자기 나라의 미녀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 여 음행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염병 을 보내에 24,000명을 죽게하였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십계명 가운데 \"간음하지 말라\" 는 계명을 주셨습니까? 지 금도 이 장애물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장애물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이 장애물에 걸리면 여지없이 넘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이 정욕의 장애물과 시험은 남자들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에는 여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시험이 옵니다. 사탄은 이제 말세가 되어서 온갖 궤계를 다하여 우리 성도들을 미혹하여 넘어뜨릴려고 하고 있고,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잠7:25-27)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자가 허다하니 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4. 나태함과 게으름의 장애물입니다. (잠6: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 어나겠느나,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 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사탄은 우리 성도들을 시험할 때 게으름의 장애물을 갔다 줍니다. \"내일하라\" \"천천히 하라\" \"다음에 하라\" 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교회가지 못하게 하고, 예 배드리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열심내지 못하게 하고, 충성하지 못하게 합니다. (잠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이 게으름과 나태함의 병에 한 번 걸리게 되면 좀처럼 헤어나기가 힘이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계2:5절 말씀에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말씀중에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 고 책망하시면서 \"회개하라\" 고 하셨고 계3:20절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신 말씀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 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고 하였습니다. 라오디게 아 교회의 믿음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고 미지근하였기 때문입니다.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대하29:11) \"내 아들들아 이제는 게으르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미 너희를 택하 사 그 앞에 서서 수종들어 섬기며 분향하게 하셨느니라\" 게으름과 나태함의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 자는 빨리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위에서는 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일어나서 빨리 달려가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5. 환난과 핍박의 장애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중에 환난과 핍박의 고난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입 니다. 이유도 없이 미워하고 핍박을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환난의 역사요 핍박 의 역사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만 예수를 믿는 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받아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오히려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 하라 고 하였습니다. (마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 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수 많은 선지자들이, 수많은 주의 종들이, 수 많은 성도들이, 온갖 핍박과 순교 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기쁨으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때로는 정치적인 탄압과 핍박도 있습니다. 사상적인 핍박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핍박을 당하는 중에 변절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6:5절에 기록 된 초대 일곱집사 중에 니골라는 유대교의 방해와 핍박에 못이겨 유대교로 돌아 갔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시대에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사람도 많지만 변절자 도 많이 있었습니다.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는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사회로 신사참배를 결의하므로 이나라 기독교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오점을 찍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 리로다\" 우리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마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 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 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6. 실패와 좌절의 장애물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언제나 성공만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때로는 실패도 하고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이 장애물을 잘 넘어야 합니다. (1)야곱의 아들 요셉은 무수한 좌절의 장애물들이 닥쳐와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애굽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좌절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2)모세도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설 때에 이스라 엘의 영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3)베드로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이 실패한 사람입니까? ① 누가복음 5장 1절 이하의 말씀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기전 에 그는 밤새워 고기를 잡으려고 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는 다 틀렸다고 포기하고 그물을 씻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니 고기가 어찌나 많이 잡 혔는지 그물을 들을수가 없어서 다른 배까지 불러 부 배에 가득 채웠습니다. 베 드로는 이때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 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②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까 그러면 않된다고 말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고 책망을 들었고 ③ 예수님이 잡히시던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기도하라고 하였지만 잠만 자다가 말고의 귀만 잘랐고 ④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한 사람이며 ⑥ 다른 제자들을 충동시켜 디베랴 바다로 고기잡으로 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실패를 딛고 일어 섯기에 훌륭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 실패하신 분이 있습니까? 좌절하지 마십시오 실패의 장애물을 넘 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백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속담이 있습 니다. 또 칠전 팔기라는 고사성어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 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는데도 이 실패라는 것은 정말로 뼈아 픈 것입니다. 사업이 실패하고, 농사가 실패했을 때 그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일어서야 합니다. 혼자서 일어서기가 힘이 벅차면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일어서서 실패를 극복하고 다시 성공의 아침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그 밖에도 성공뒤에 오는 교만과 자만의 장애물도 있습니다. 사울왕이 그랫습 니다. 다윗도 그랫습니다. 삼손도 그랫습니다. (신8: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 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 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 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1997년에도 우리들의 앞에는 수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 다. 그러나 그 어떤 종류의 장애물이라도 사전 예비지식만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 다. 아무리 어렵고 난이도가 높은 문제라도 공식만 알고 있으면 풀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각종 장애물을 이길 수 있는 정답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 다. 장애물이 닥쳤을 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① 정면승부입니다. 부딛쳐 싸워서 이기는 것입니다. 기도로 승부를 내는 것입 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철창권세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② 돌아가는 것입니다.(By Pass) 시냇물이 흘러가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슬쩍 옆으로 돌아서 흘러갑니다. 물은 절대로 무모한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앞에도 장애물이 닥쳤을 때에는 정면승부가 어려운 것은 옆으로 돌아가면 됩니 다. ③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Over Pass) 막2:1- 한명의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들것을 들고 온 네명의 친구들은 예 수님이 계신집까지 왔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포기하지 않고 지붕위 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환자를 달아내렸습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믿음입니까? 주님께서는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눅 19장에는 삭개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나왔으나 키가 작은 삭개오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이 환난이나 고난을 잘 극복하고 나면 그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헤 와 축복이 임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고 합력 하여 우익되게 해 부십니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 게 되었나이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벧전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 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예> 영국의 시인 윌리암 위즈워드가 쓴 시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가 있습 니다. 황량하고 거친 산속에 사는 새 한 마리가 어느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났습 니다. 그 새는 자기의 둥지를 떠나지 않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자기가 사는 산을 향하여 날아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자기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그 산을 떠나면 죽을 것만 같아서 안간 힘을 썼으나 허사였습니다. 푹풍이 어찌나 센지 도무지 그 폭풍을 이기고 날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새는 폭풍이 부는 대로 자기의 몸을 맡기고 그 방향으로 날기 시작하였습니다. 강한 폭풍을 따라서 한참을 날아갔습니다. 드디어 폭풍도 약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 의 눈 앞에는 푸른 초장과 멋진 수풀의 아름다운 산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살던 거친 숲의 산과는 비교가 않되는 훌륭한 수풀과 산이었습니 다. 맑은 시냇물도 흘러내렸습니다. 이 작은 새는 전보다 훨씬 좋은 숲에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우리가 금년 한해 동안 신앙생활 할 때에 어떤 형태의 장애물이 있다고 하여도 절대로 쓰러지지 말고, 넘어지지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좌절하지도 말고, 끝까지 견디고 싸워서 이기는 성도가 되어서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 과,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믿음의 청각장애/사42:18-19
믿음의 청각장애/사42:18-19 2001-11-16 08:05:49 read : 83 우리는 오늘 성령강림절 열두번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은총이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들을 생각해 보는 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왜 귀머거리가 되었는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 말씀의 앞 뒤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이사야 예언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귀머거리가 되고 장님이 된 현실을 보며 탄식을 합니다. \"너희 귀가 먹은 자들아 들어라\" 라고 하며 외치는 이런 이사야의 탄식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요 , 일꾼이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의 말은 탄식은 선택된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것에 대한 심판에 대한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깊은 연민과 다시 돌이키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속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간절히 바라던 것은 \"너희들이 지금 귀먹고 모르는 체 하지만 내가 그래도 처음에 너희를 사랑해서 선택하였기 때문에 너희들을 구원의 자리로 이끌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언자의 마음에 진정으로 담겨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방향으로 다른 대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교가 얼마나 많습니까? 요즈음에는 단군 이야기 때문에 세상이 들썩거리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대신에 무엇인가를 가져다 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 예배를 드리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우상의 현실을 오늘날에 비춰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특별히 한국사람들의 경우는 돈을 하나님 대신에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소위 맘몬숭배처럼 돈을 중심에 놓고 예배와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돈에 사회나 개인이 지배되어 버리고 기준이 되어 버리는 그런 사회, 이사야 예언자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것 때문에 너희가 귀먹은 것이 아니냐 하고 묻지 않을까 다시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 정말로 이사야가 지금 이 시대에 있다면 그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 당시 이사야가 바라본 현실에서 예언자는 우상숭배로 눈멀고 귀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게 한 까닭에 대해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너희들이 그렇게도 모르겠느냐? 이 귀머거리 소경들아!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버리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선택받은 백성답게 순리대로 살아가기를 원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말은 지금 당한 이 일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진정한 깨달음이 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두번째 본문인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쓴 내용입니다. 그 당시 예수 믿으러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 유대교를 믿다가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유대교에서 처음으로 믿게 된 이 들은 유대교적 열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유대교 크리스찬들의 빗나간 열심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복음을 믿지만 이들은 율법을 믿는데 율법을 뿌리치지 못하고 율법적인 복음, 율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이 경고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열심은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율법 때문에 그들의 귀가 막혀서 참다운 복음들 못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회심한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은 10장 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내 마음에 간절한 소원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내 동족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해 주심으로 율법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막힌 귀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옳은 얘기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말씀을 다시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 있다. 내 입에 있고 내 마음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10장 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봉독한 말씀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입으로 예수는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계속되는 말씀은 \"그리하여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그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0장 1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잘 지키던 유대교 크리스찬들에 대해서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들어도 못들은 채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때도 있었고 지금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위한 들음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말씀은 무한히 선포되는데도 그것을 못 듣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자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책망을 했지만 사실 그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듣지 못하는 사람의 치료사건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대로 예수님의 치료권능을 알고 사람들이 귀머거리를 데리고 와서 낫게 된 사건입니다. 그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청각장애된 사람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나면서부터 청각장애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인 경우도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주변 사람들의 딱한 사정과 그 연민의 정, 그리고 정말로 사람들이 원하는 기대를 주님께서는 알아차리시고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고 입에 손가락을 대면서 \"에바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열려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순간 청각장애인은 이 말씀에 접하면서 모든 것이 열렸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청각장애인의 기쁨을 말입니다. \"열려라!\"할 때 입이 열리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은 우리 주변에나 역사적으로도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신앙적인 관점에서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아마도 전생애 사건들 중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바랐던 간절한 소원이 바로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안과 의사 한 분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분 말씀이 의사로서 가장 보람이 깊은때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었다가 시력을 다시 찾게 됐을 때 그들이 희미하게 빛을 보고 외치는 소리, 그때 그들이 감격에 겨운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앞을 못 보는 이가 수술을 해서 앞을 보게 되는 기쁨말입니다. 우리의 감각 같은 것, 자잘한 것이지만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었다가 코가 뚫리는 기쁨이라든지, 감기로 맛을 느끼지 못하다가 미각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도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들입니까? 거기에 비하면 청각장애자나 시각장애자가 갖는 감격은 얼마나 더 크고 깊겠습니까? 저는 안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간의 이런 감각들 가운데 무슨 장애가 가장 심할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모두 다 마찬가지겠지만 기독교 신앙은 카톨릭처럼 보는 신앙을 강조하는 계통이 있고 우리 같은 개신교처럼 듣는 신앙을 강조하는 계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갖는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면 그 신앙은 굉장히 심각한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신앙의 모범은 우리의 감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할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 인간들에게는 원죄 때문일런지 모르지만 보기 싫은 것은 고개를 돌려서 안볼 수 있는 자유도 있고 보고 싶지 않는 본능도 있습니다. 또한 요즘 메스 미디어가 많이 발달이 됐는데 심리학적으로나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듣는 일에 있어서도 듣는 척하지만 안들어 버리는 그런 능력이 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그 만큼 우리는 유혹에 빠지기 쉽고 신앙으로부터 멀리 떠나려 하는 속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들은 우리들에게 바른 신앙을 갖도록 장애를 갖고 있는 우리의 믿음의 청각장애를 교정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전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청각장애교정을 해야 되겠는데 이 교정은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귀에다가 혹은 눈에다가 \"에바다!\"하고 말씀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가 성령강림절의 계절에 우리의 신앙의 눈과 귀가 바로 잡혀지고 입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경험을 간절히 바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가 변화될 수 있다고 하는 이런 간절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봉사하며 살자/장애인주일/마20:25-28
봉사하며 살자 장애인주일 마20:25-28 오늘은 장애인 주일입니다. 1년에 한 번 장애자를 생각하는 주일이 아니고 1년 동안 우리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기본적인 자세를 마련하는 주일입니다. 저희 교회는 감사하게도 ‘사랑부’가 있어서 지난 13년 동안 정신박약아들과 지체장애자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사랑의 학교’라는 주간보호학교를 만들어서 섬기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첫 주부터는 ‘사회복지회관’을 운영하며 지역사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며 많은 자료들을 찾는 가운데 전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봉사활동을 하는지를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반면 한국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그 비율이 적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이 일주일간에 시간을 내어서 지역사회나 교회나 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섬기고 있는 비율은 14%입니다. 즉 100명중에 14명만 봉사를 하고 나머지 86명은 봉사 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지요. 미국은 50%로, 둘 중에 한 명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중 60세 이상 된 분들이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4%에 불과하지만, 미국인 중 70세 이상 된 분들은 43%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갈 길이 멀지요?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5년 전만 해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 단 5%만이 봉사활동에 참여했었지만, 올해에는 14%, 즉 세 배가 늘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86%의 사람들은 봉사활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86%가 아직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이나 노력이나 물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장애자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함께 봉사활동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저희 교회를 조사해 보았더니, 감사하게도 55%가 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평균 14%와 비교하면 거의 네 배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 바램은 55%가 아니고, 90% 정도는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 사랑과 희생의 나눔인데, 하나님 앞에서 55%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의 삶에 도전이 되어서 90%까지 올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합시다! 섬긴다는 것, 즉 봉사란 무엇입니까? 봉사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하는 활동을 말합니다. 자기를 바쳐서 누군가를 위해 유익한 활동을 하되 대가없이 하는 것입니다. 대가를 받는 것은 직업이지요. 봉사란 자신의 시간과 몸과 재능과 물질을 드려서 아무런 대가없이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봉사기관은 봉사를 하긴 하는데 자기 회사를 선전하기 위해 하더군요. 그것은 봉사가 아니라 장사지요. 봉사에는 사랑과 희생이 따릅니다. 만일 여러분이 칭찬을 받기 위해 봉사를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너는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 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아무런 대가도, 칭찬도 바라지 않고 그저 순전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봉사입니다. “목사님, 그래도 칭찬 좀 해 주셔야지요.” 물론 칭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봉사활동을 해 보신 분은 압니다. 봉사를 하다보면 칭찬은커녕 오히려 비판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안 하면 비판도 안 받지만, 자기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봉사활동을 하면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과, 이웃과, 가족과, 직장을 섬기되,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교에 노조가 생기기 전에는 봉사활동을 많이 했답니다. 학교에서 하라는 것 이외에도 자원해서 부서를 맡아 방과후에 봉사를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는 노조가 자리를 잡으면서 심지어 봉사 활동에도 돈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봉사 활동이 재미가 없답니다. 자원해서 학생들을 지도했을 때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돈을 받으면 하고, 받지 않으면 하고 싶지도 않으니, 또 그것을 가지고 계속 타협을 해야 하니 재미가 없어서 이제는 선생을 그만두고 싶다고 합니다. 자원해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기의 사랑과 희생을 나누어줄 때 누리는 기쁨,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상이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한 태도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55%의 성도들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봉사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45%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이라도 우리 삶의 모습을 바꾸어 섬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봉사를 잘 하려면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지난 4월 18일 일본의 중앙교육 심의회는 봉사활동을 초등학교 이상의 학과 과정에 포함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입시에 봉사활동 경력을 가산시킨다고 합니다. 아주 좋은 현상이지요. 우리 나라에도 몇 년 전부터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자신의 유익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버리고 남을 섬기는 정신을 어릴 때부터 심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대학에서 최초로 서라벌대학에서는 학생 봉사 센터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체계적인 봉사를 훈련시킨다고 합니다.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앞으로 모든 대학에서 사회와 이웃과 소외된 자들을 위한 학생 봉사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일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앞장을 서야 합니다. 봉사를 받는 대상으로는, 첫째로 노인들이 가장 많습니다. 혼자 사시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도와드리거나, 어른들을 위로하는 봉사활동이 많고, 둘째로 스스로 자신의 몸을 관리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위해서 건강한 사람들이 시간을 내어 섬기고 있으며, 셋째로 소년소녀 가장들을 위한 봉사와, 넷째로 외국인 노동자들 및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이 있습니다. 봉사의 종류를 보면, 양로원을 방문하여 잔치를 벌이고 위로하는가 하면, 미처 손대지 못하는 시설들을 보수해 주는 일이 있습니다. 장애자들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빨래를 해주기도 합니다. 어느 복지회관에는 아예 세탁시설을 만들어 놓고 그분들로부터 빨랫감을 수거하여 세탁한 후 갖다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발을 해주기도 합니다. 목욕을 시켜드리기도 하는데, 이것도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운영하는 복지회관에도 지하실에 노인들을 위한 목욕탕이 있습니다. 노인들을 모시고 오는 분들은 이곳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청소해주기, 놀이터 페인트 칠해주기, 결식아동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기, 각종 의료 봉사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소방서에는 아주 재미있는 봉사가 있는데, 소방대원들이 한 달에 각각 1,650원을 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5천 만원 짜리 화재보험에 들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전국의 논밭을 다니면서 농약 병들을 수거하는 봉사를 합니다. 이제 곧 시작되는 월드컵 기간 중에는 무려 8만 명의 자원봉사자들 봉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상상력과 창의력과 능력을 총동원해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회와 가정과 교회에서 누군가를 위해 섬기는 이 섬김의 운동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앞장서기 바랍니다.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다양합니다. 화교 3세들도 봉사단체를 만들어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김해에서 비행기 추락사고 났을 때 질퍽거리는 빗속에서도 음식을 만들어 산에까지 가져다 준 사람들은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미국의 봉사활동에 대한 정보를 보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각 주마다, 군마다, 동네마다 봉사센터들이 꽉 들어차 있고, 종교별로, 인종별로 얼마나 활발하게 봉사활동이 진행되는지, 정말 우리도 빨리 따라가야 합니다. 선진국가와 문화민족이 되려면 우리 삶의 한 부분을 나누어 대가없이 사랑의 마음으로 섬길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활동의 목적을 보면, 첫째는 사회를 변화시킬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함입니다. 어린 아이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킬 지도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을 바쳐서 사회가 잘 되도록 만드는 사람입니다. 직장에서도 어떤 부분의 일은 대가를 받지 않으면서도 하는 것이 멋집니다. 월급 받고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직장인들은 남들이 하지 않는 어느 부분을 섬겨서, 크리스천의 기본적 모습인 사랑과 나눔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감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섬기는 사람과 섬김을 받는 사람이 늘 정해져 있으면 섬기는 사람이 지칩니다. 가장들도 가정의 어느 부분에서 섬길 줄 아는 기본적 섬김의 삶이 있어야 지도자답습니다. 둘째는, 젊은이들에게 이상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꿈과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현실만 아는 사람은 인생에 재미와 의미가 없습니다. 고상한 목적들을 품고 그것을 이루는 삶이 감동을 일으키는 삶입니다. 여러분 중에 학생 때 봉사활동을 해본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 때를 돌이켜 보면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아직 세상에 물들기 전에 사회와 이웃을 위해서 섬겼던 추억이 얼마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까? 저도 뒤돌아볼 때마다 그런 일을 좀 더 자주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서울 시내의 거지들을 모아서 잔치를 베풀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서울을 몇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서 가장 불쌍한 거지들, 가장 나이 많고 병들고 외로운 분들을 찾아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랑을 체험하게 하자는 취지로 대학생들이 모였던 것입니다.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찾아서 명단을 만들고 어느 다리 밑에 사는지 등을 전부 조사했습니다. 그리고는 12월 20일에 학생들을 풀어서 그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찾아가 함께 택시를 타고 목욕탕으로 갔습니다. 그 분들이 언제 택시를 타 보았겠습니까? 그 때는 서민들도 택시 타기가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목욕탕에 모시고 갔더니 목욕탕 주인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그래도 그 분들을 모시고 들어가 깨끗이 때를 밀어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이발소와 미장원으로 가서 머리를 예쁘게 해 드리고 새 옷을 한 벌씩 입힌 후 따뜻한 음식으로 잔치를 벌였습니다. 방석에 앉아서 맛있는 음식을 잡수시게 하고 학생들은 그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분들이 어떻게 하다가 거지가 되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이 들고 가족이 없어서 거지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쌀을 많이 생산하던 큰 부자였는데 그만 도박에 미쳐서 가산을 탕진하고 길로 나 앉았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그분들을 위로하면서도, 이렇게 하면 거지가 되는구나 하고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런 봉사활동을 1년에 한 번은 했어야 했는데, 대학 4년 동안 한 번밖에 못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기억이지만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 옵니다. 여러분 사람은 이상이 있어야 살맛이 나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 속에 살아도 그 한 부분을 떼어서 우리의 이상을 위하여 섬기는 모습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셋째는 청소년들에게 좋은 모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청소년들이 모두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아들은 학교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아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방학중에 최소한 2번은 봉사활동에 참여시키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한 번은 해외에서, 한 번은 국내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게 합시다. 그런 일을 위해 미리 훈련을 시켜서 보내면,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이 어려운 곳에 가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돌아온 다음에는 아이가 변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꼭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을 해서 그 아이를 훈련시켜 데리고 갖다 오니까 그 아이가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좋은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서 어릴 때 이런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대단히 유익합니다. 넷째는 우리 모두가 단합하기 위함입니다. 앞으로도 보십시오. 우리 교회에 평화가 있으려면 섬김이 많아야 합니다. 에너지는 왕성한데 섬기지 않으면 우리끼리 싸움만 하게 됩니다. 그 왕성한 에너지가 집안싸움으로 쓰여집니다. 그러나 섬김이 있는 곳에는, 자신의 에너지와 능력과 시간을 바쳐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와 이웃과 가족을 위하여 섬기는 곳에는 만족과 평화와 단합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들만 있으면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끼리 모여서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섬기는 가운데 사귐이 있고, 섬기는 가운데 서로 모범이 되어주고, 섬기는 가운데 희생이 나타나고, 섬기는 가운데 이상이 생기고, 섬기는 가운데 기쁨이 있습니다. 영어 찬송 가운데 “There is joy in serving Jesus\" 라는 곡이 있습니다. 한국 찬송가에는 없습니다. 제가 그 찬송이 너무 좋아서 10년 전부터 한국말로 번역을 하려 했는데 적절한 말로 잘 표현되지가 않습니다. 일단 번역을 하긴 했지만 저 혼자 그냥 영어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면 기쁨이 있다는 뜻입니다. 섬김에 기쁨이 있습니다. 자기를 드려 희생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삶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섬김이 절대적입니다. 다섯째는 자녀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길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가정 공동체에서 아이들이 자기의 물건들을 헤쳐놓기만 하고 남이 치워주기만 바라는 무책임한 아이들로 자라서는 안됩니다. 어릴 때부터 형제간에 서로 도와주고,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도와주는 가정이 될 때 책임감이 길러집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들고 구성원의 필요를 서로 자원해서 섬기는 모습을 통해 사회적 책임감이 길러집니다. 여섯째는 섬기면서 자기 자신을 개발시키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개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전에 개발한 것을 까먹고 있습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환영을 받지만,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가정에서도, 자손들에게도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 공동체에서든지 불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남들에게 짐이 되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잘 섬기는 사람으로 개발해야 합니다. 청년이든 중 장년이든 노년이든, 늘 섬김을 잘 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공동체 속에서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입니까? 섬기려 하지는 않고, 자신을 섬겨달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에게도 미움과 배척을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섬김을 받기만 원하지 남들을 섬길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늘 남들의 섬김을 받기만 원하는 모습으로 계속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손자들도 싫어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손자와 손녀들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나타나면 축복이 되고, 유익이 되고, 기쁨을 주니까요. 우리 교회의 신앙적 목표가 무엇입니까? 3S 신앙, 즉 Salvation(구원), Sanctification(성화), Service(섬김)입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아서, 성장하면서, 반드시 남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가정을 섬깁니다. 교회를 섬깁니다. 이웃을 섬깁니다. 직장에서도 잘 섬겨서 누구든지 인정하는 섬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입니까? 경제가 발전해서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나라보다 가난하고 약한 나라들을 돕고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나라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온 세계를 섬기는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 하나님을 모르고 섬김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권력이나 높은 지위나 지식이나 명예나 돈이 조금만 많으면, 그것들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움직여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대조적으로,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권력과 지식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것들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섬길 줄 알아야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 자신을 바쳐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누가 훌륭한 사람입니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자기 자신을 바쳐서 개인적 야망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즐겁게 자원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자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그렇게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께서 오신 최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려주고, 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그분을 따르며 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제 삶 속에 하나님께서 도전하시는 이 섬김이 분명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갈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유익과 도움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손자 손녀들도 좋아하고, 며느리도 좋아하고, 사위도 좋아하고, 자식들도 좋아하고, 성도들도 좋아하고, 다락방 식구들도 좋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웃에게는 꼭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비전의 사람은 장애물을 극복한다/수3:1/어린이,학생설교/2002-02-05
비전의 사람은 장애물을 극복한다 수3:1 우리들은 인생에서 크고 작은 장애물들을 겪게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함께 최대의 고비인 요단강을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Ⅰ. 장애물은 약속에 의지하여 극복해야 합니다. (2-6) 2-6절 사이에 장애물을 극복하는 한가지 중요한 도구가 등장합니다. 2,6절에 3번씩 등장하는 단어인데 \"언약궤\"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게 임재의 증거로 주신 궤라고 해서 증거궤, 또는 법궤라고도 합니다. 여호수아는 장애물을 건너기 위해 교육을 시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 궤를 메고 갈 때 백성들이 그 뒤를 따라가되 이천규빗 쯤 간격을 두고 따라오라고 합니다. 한 규빗이 45Cm 가량이니까 900m 쯤 되는 거리입니다. 법궤가 앞에 가고 백성이 뒤를 따릅니다. 이 가르침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도력의 한 방편이 무엇입니까? 언약이 항상 우리 앞을 가르치고 있어야 한다는 진리입니다. 이런 위치를 지시하는 하나님의 의도도 언약의 중심에 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약속을 통해 백성을 다스리겠다는 하나님의 통치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도깨비방망이가 아닙니다. (5) 하나님의 의지대로 약속을 통해 이끄시겠다는 분명한 통치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뒷짐지고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는 요구를 동시에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닥친 모든 장애물들은 우리의 성결함으로 해결해야할 것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결하지 않음으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려는 무모한 짓을 하지 마십시오. 또 내가 장애물극복을 왜 못하는지를 성결의 눈으로 검증해 보십시오. 왜! 장애물 앞에 초라하게 주저앉아서 힘없이 통곡 만하고 있는지 자기자신의 거룩함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결하지 않은 인생에게 장애물극복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참고) 공동번역- 목욕재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냐 손이 깨끗한 자\"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면서 시급하게 해결해야하는 것은 무엇입니다. 여러분의 냉철한 판단력으로 무얼 준비해야 합니까? \"무기\" 아닙니까? 무기에 따른 병법과 전략전술을 짜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는 스스로 성결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군대가 성결하지 못할 때 부정한 짓에 휘말렸을 때 기강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이 사라지면 명분이 서질 않습니다. 싸워야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왜 당나라 군사입니까? 그들의 대표적인 특색은 깨끗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건널 때 필요한 힘은 무기 ? 돈, 아이디어? 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앞세워야 합니다. 인생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한 줄 믿습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성결하게 살 때 우리 앞을 가로막는 문제가 해결될 줄 믿습니다. 2. 말씀 전달과 순종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7-15) 15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때는 요단강이 넘치는 시기입니다. 그만큼 강의 수위가 차는 장마 기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때만큼 긴장이 덜되겠지만 이 강을 건넌다는 것이 백성들의 눈에는 시답잖게 보일 수 있는 문제입니다. 강에 무슨 배가 있습니까? 다리가 놓여있습니까? 어떻게 건너라는 겁니까? 그러나 여호수아는 명령합니다. 6절: (수 3: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 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 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누구하나 요단을 건너는데 시비를 걸거나 따지는 사람이 등장하질 않습니다. 무엇을 느낍니까? 백성들의 철저한 순종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헌신하는 사람들의 장이라고 부르고싶습니다. 3절이 제사장과 12절의 각 지파 대표들입니다. 교회도 솔선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낌이 있으면 그대로 순종하여 헌신하는 이들에게 부흥을 허락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확실한 기대가 그들을 사로잡았다고 확신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언약에 대한 반응으로 헌신의 열매가 맺혀지는 분들이 발생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여러분 앞에 불가능해 보이고 나를 짓누르는 장애물들이 아른거리고 괴롭힙니까? 그때 여러분들이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모든 환경들 위에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요단에 들어섭시다. 이미 들어선 분들일수록 말씀에 철저해 집시다. 하나님의 존귀하게 여겨주신 나의 인생을 반드시 일으켜주고 극복하게 하여 강한 군사로 세워주신다는 확신을 저버리지 맙시다. 그리고 헌신합시다. 이리저리 피해가지 맙시다. 정면으로 부딪혀 보지도 않고 태산 앞에 주저앉지 맙시다. 누군가가 그 장애물을 제거해 주기를 기다리며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도는 거 아닙니까? 이제 하나님이 힘을 믿고 요단을 밟으십시오.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는 요단강이 갈라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