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3대 절기/ 신16:13-17/ 추석설교/ 2008-10-08
3대 절기 신16:13-17 어느 나라 어떤 민족이든지 그들만의 역사가 있고, 고유의 풍습과 전통 따라 지켜지는 명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월 초하루 설날과 팔월 한가위라 불리는 추석이 오래도록 전해저온 대표적인 명절입니다. 명절의 의미나 행하는 의식은 민족의 정서와 뿌리 깊은 사상이 베어져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지키는 명절의 행사들은 대부분 이교적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기독교의 의식과 상반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번 주간 민족의 대 명절이라고 불리는 추석을 맞이하게 되는데 성도들의 입장에서 신앙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본문말씀에 나오는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3대 명절과 이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절기의 종류 출애굽기 23:14에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고 하였습니다. 15-16절에는 그 절기를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 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말씀 16절에는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1)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은 그들의 조상이 오래도록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탈출해 나 온 해방 기념일입니다. 유월절(逾越節)이라는 말은 ‘넘어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날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보내시고 바로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바로왕이 순순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마지막 재앙은 애굽의 바로왕을 위시하여 모든 신하와 백성들의 장자를 치고 심지여 짐승의 첫 새끼들까지 죽게 하는 재앙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이 죽음의 심판이 내려지는 날 이스라엘 집은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 갔기 때문에 유월절이라고 부릅니다. 2) 맥추절입니다. 출애굽기 23:16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그곳 땅을 경작하고 밭에 뿌린 곡식이 자라 열매를 맺었을 때 그것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를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의 수고와 노력위에 하나님께서 축복 하신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맥추절을 다르게는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본문말씀 16절에는 칠칠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유월절 다음날부터 칠일을 일곱 번 계수하여 맞이하는 날이기 때문에 칠칠절이라고 부릅니다. 오순절(五旬節)이라는 말은 유월절로부터 오십일 째 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훗날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게 되고 그 결과 신약교회가 탄생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수장절입니다. 출애굽기 23:16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밭에서 곡식을 추수하고 거두어들인 후 그것을 곳간에 저장할 때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말씀 13절에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수장절을 다르게는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광야 여행길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이 40년간의 광야 행진을 하는 동안 고달픈 장막생활을 했던 것을 기억하며 오늘의 풍요를 감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2. 절기가 지니는 의미 어떤 명절이나 절기든지 그 고유한 의미가 있고 거기에 따르는 행사의 의식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지켰던 절기는 모두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정해졌고 그 의미도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으로 나타나져 있습니다. 이런 것은 신약의 교회 운동과 관련되어 예배행위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1) 구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시대 삼대 절기는 유월절을 중심으로 시기가 정해지는 것이며 또 의식이나 방법도 거의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절기들이 모두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명시되었는데 그중 유월절이 제일먼저 제정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해 나온 해방 기념일 이라는데 기인되기 때문입니다(출 12:11). 유월절의 상징은 어린양인데 이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에서 유래합니다. 애굽 전역을 휩쓸던 죽음의 사자가 양의 피가 있는 집을 건너뛰었다는 뜻으로 그 의미가 큰 것입니다. 이것이 근거가 되어 구약의 제사 제도에 사람을 대신하여 어린양이 제물로 드리게 되었습니다(레 1:2). 훗날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29). 2) 성별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말씀에는 유월절을 무교절(無酵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누룩 없는 떡 곧 무교병(無酵餠)을 먹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유월절 의식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양을 잡는 것과 누룩을 넣지 않고 반죽한 떡을 먹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8에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독한 누룩이란 사람의 마음을 부패하게 하는 잘못된 교훈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마 16:6, 갈 5:9).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유월절 절기를 지킬 때 먼저 성결케 하는 의식을 행한 후 음식을 먹도록 하였습니다(스 6:20-2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때도 백성들과 함께 애굽의 모든 수치를 굴러가게 한다는 뜻으로 할례를 행한 다음 절기를 지켰습니다(수 5:8-10). 3) 축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의 경우 노예 생활을 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사실에 근거하는 것으로써 이는 구속의 축복을 나타냅니다. 맥추절이나 수장절도 모두 인간이 행한 수고 위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축복의 열매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드리는 감사의 절기는 먼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나게 많이 받은 축복의 내용을 인식하는데서 시작됩니다(신 16:10). 이는 또 이미 받은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받게 될 복을 바라보면서 드리는 절기입니다. 본문말씀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3. 절기를 지키는 방법 모세의 율법에는 매 절기마다 고유한 의미와 함께 거기에 맞는 의식이 정해져 있습니다. 유월절의 경우 정월 14일부터 7일간 지키는데 그 기간에는 누룩 없는 떡 곧 무교병을 먹어야 됩니다(출 12:18-19). 곡식을 거두는 절기인 맥추절에는 곡식의 첫 이삭을 단으로 묶어 제사장에게 가져다 드립니다(레 23:10). 수장절에는 7일 동안 초막을 지어놓고 그 안에 거하면서 절기를 지키게 하였습니다(레 23:42-43). 이처럼 제각기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의식을 행하더라도 여기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1)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이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상 앞에 제사하는 것을 가장 자랑스러운 미풍양속(美風良俗)이라고 하여 명절의 가장 큰 행사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일러줍니다. 이사야 40:18-19에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택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모든 정성을 다 드려야만 됩니다. 시편 116:12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라”고 하였습니다. 2) 이웃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명절을 맞이하게 되면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데 모이고 여러 가지 놀이와 축제 문화를 통하여 누구나 격이 없이 어울려 한마당이 되는 즐거움을 가집니다. 정성껏 음식을 장만하여 함께 먹으며 정을 나누곤 합니다. 이런 일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절기가 되면 자기 가족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살피고 고아와 과부 같은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도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지나가는 나그네나 자기 집에 있는 종들과 이방인까지도 한 가족처럼 돌보고 나누어 주며 사랑을 실천하게 하였습니다. 3) 예배적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절기를 지키는 것이나 안식일 제도와 같은 것은 구별된 백성들의 거룩한 삶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서 일회용에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곧 이와 같은 의식이나 행사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신령한 생활로 길들여지게 하고 그것이 목적 있는 삶의 특징으로 연결되게 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과 봉사를 통하여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주므로써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행복으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괴로움과 죄가 많은 세상에서도 예배적인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령으로부터 공급되는 신령한 은혜와 능력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 잠22:1-2,8-9/ 추석설교/ 2004-10-12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 잠22:1-2,8-9 어떤 명절이든지 명절이 되면, 대개 사람들은 즐거운 기분으로 명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습 니다. 경제형편이 여유롭지 못해서 명절을 명절답게 지내기가 어려 운 가정이나, 또는 찾아올 사람이 없어서 쓸쓸하게 지내야 할 형편 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명절이 반갑거나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평소보다 걱정과 근심이 더 많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홀로 사시는 분들에게는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더욱 외롭 고 쓸쓸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변에서 먹을거리는 어느 정 도 갖다 주겠지만, 어찌 그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음식만으로 채 울 수 있겠습니까? 가정적으로 우환이 있거나, 농사지은 결과가 영 탐탁치 않은 가정들도, 어쩌면 이번 추석명절이 별로 반갑지 않으 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위로하여 주 시리라 믿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성도님들 중에서도, 이 번 추석이 그다지 즐거운 명절이 될 수 없으리라 생각한 나머지, 그 마음이 우울하거나 슬픈 생각이 드시는 분이 있습니까? 사랑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거나 연약한 자를 더욱 특별히 돌아 보십니다. 찬송가 411장에 있는 가사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수록 더욱 귀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 탈이 없 거나 건강할 때보다 병들거나 연약해졌을 때에 하나님을 더 열심히 찾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넉넉하고 여유로워야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면서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잠언서 기자도 「너무 가진 것이 많아 배가 불러서 ‘여호와가 정말 누구란 말이냐?’ 하면서 주 님을 모른 체 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30:9)」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가난하거나 연약한 자를 더 가까이 하신다기보다는, 그런 형편에 놓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찾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돌아보시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이 그 스스로 지혜와 능력이 아주 많은 줄 착각하고 실컷 뽐내 면서 잘난 척 할 경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외면하십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은 훌륭하고 잘난 사람 보다는 허물이 많거나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을 선택하여 사용하셨 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야곱과 같 은 인물은, 우리가 보아도 도무지 인간다운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인데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뽑아서 이스라엘의 실질적 인 조상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머슴살이를 하던 사 람이고, 다윗은 양치는 소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그 당시에는 천직이라 할 수 있었던 목수 출신이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들 중에서도, 그 출신 배경이나 과거 이력이 형편없었던 사람들이 많 습니다. 그 유명한 무디 목사는 구둣방 점원이었고, 셰익스피어는 도살자의 아들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가난한 정련업자의 아들이었고, 성경을 인도어로 번역한 케리어는 구두직공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인물들 중에서도 그런 분이 참 많습니다. 실질적으로 삼일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신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유기전에서 유 기그릇을 팔던 점원이었고, 해방 후 이승만 김 구와 함께 삼대거두 로 지목되었던 김규식 박사는 고아출신이었습니다. 의적(義賊)으로 유명한 임꺽정과 승동교회 초대 장로 박성춘은 백정 출신이었습니 다. 이처럼, 그 이름을 들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 니까,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노 력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께서는 강제적으로라도 이 세상을 공평하 게 하시려는 역사(役事)를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라’는 기록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가난한 자를 착취하거나 억울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나님은 엄히 명령하셨습니다. 만일 가 난한 자가 그 억울함을 호소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소연을 일일이 다 들어주신다고, 잠언22장 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 님은 ‘착취한 자들의 목숨을 빼앗아 가신다(23)’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말라(2:1)’고 말했 습니다. 그리고 만일 ‘믿음이 있다면, 남 돕는 일을 행동으로 옮겨 야 한다.’고 하면서 ‘말만 할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믿음이 있다는 것을 선 한 행실로써 증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게 될 경우, 그 런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진리는 ‘이 세상에서는 몇 몇 사람만 잘 살아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이 다함께 더불어 잘살 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려면, 능력이 많거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 니다. 만일 재능이나 물질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믿는 사람이 라면,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진리를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 동감이 가신다면, 우리는 잠언서 22장 8-9절의 말씀을 잘 읽고 바로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8절에서는 ‘악의 씨를 뿌리 는 사람은 재앙을 거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7절은 ‘가진 것 이 많은 부자는 가난한 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큰소리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8절에서 말하는 ‘악의 씨’란 ‘가난한 자를 억누 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재앙을 거두게 된다.’고 했습니다. 반 면에, 9절에서는 ‘남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과 음식을 나눠먹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우리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잠언서 22장 1절에 ‘수많은 재산을 긁어모으는 것보다 명예를 얻 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하고, 이웃을 따뜻하게 대하고 아껴 주는 것 이 은과 금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의 모든 것, 곧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공적으로 활동하신 3년 동안은, 그야말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 그리고 죄인들과 귀신들린 사람들, 이런 소외된 사람들을 위 하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 하고 있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7:24 이하에는, 예수께서 이방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이 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리스의 ‘수로보니게’ 출신 한 여인이 주께 찾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귀신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주께서는 “강아지 보다 못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한 마디로 거절하셨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이신데, 어떻게 그 불쌍한 여인의 부탁을 그 처럼 냉정하게 뿌리치셨을까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여인의 믿음 을 시험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가 흘린 부스러기를 얻어먹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네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 유대나라에서는 이방인을 개만도 못한 존재로 업신여겼습니다. 결국 주께서 그 여인에게 ‘강아지보다 못한 사람’ 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 내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던 불쌍 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냥 지나가면서 던져주듯이 사랑을 베푸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들에게 직접 다가가 따뜻이 어루만져주시면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 시거나 그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형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참마음을 가지고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답게 사랑 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2.이웃사랑 실천으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영국의 ‘런던타임즈’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 구일까?’를 알아보는 조사를 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결 과는 의외로 나왔습니다. 1위는 한 소녀를 위하여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소년이 선정되었고, 2위는 아기를 목욕시키고 젖을 먹이는 엄마, 3위는 죽 어가는 환자를 살려내고 막 수술실을 나서는 의사, 4위는 땀 흘리 며 도자기를 빚는 공예가가 뽑혔습니다. 그러니까, 그 누군가를 위 하여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위한 것이 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진실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께서 일러주신 말씀대로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사정으로 무엇 때문에 가난하게 살고 있던지, 우리는 그 이유를 알 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서라도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그 이웃사랑이 형식적이거나 차별이 있어 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하기를 ‘부자에게만 친절하게 대 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며 죄를 짓는 일이다(약2:9).’라고 했 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거나 가리지 말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을 어루만져주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저는 이런 설교를 할 자격이 없습니 다. 가난하거나 소외된 이웃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사랑을 제대로 베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여유가 없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꼭 도와주어야 할 경우가 생기더 라도, 그 상대방에게서 도와주어서는 안 될 이유를 어떻게든지 찾 아내어서, 그 핑계로 도와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좋은 사과나무는, 그 주인이 선하고 악한 것을 가리지 않고, 좋 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일 훌륭한 믿 음을 갖고 있다면, 그 이웃이 어떠하든지 가릴 것 없이 사랑을 베 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지, 상대방에게 사랑받을만한 무 슨 자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베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잠언서 기자가 말하기를 ‘남을 보살펴주면 복을 받는다 (22:9)고 했습니다. 물론, 이 복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때에 맛보 게 되는 기쁨과 보람일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엄 청난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에게 무슨 사 랑을 베풀게 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을 나누어주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스스로 평등한 세상을 만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강제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평등한 세상을 만 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손을 쓰시기 전에, 우 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열심히 돌아봐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 리의 이웃을 돕지 않게 될 경우,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그 책 임을 물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 부자는 그다지 큰 잘못을 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거지에 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 뿐인데, 그는 지옥에 갔습니다. 한편, 거 지 나사로는, 그가 세상에 있을 때에 잘한 일도 없건만 천국에 갔 습니다. 성경에는 나사로의 선행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세상에 있을 때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불행하게 살았기 때문에, 천국에서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 입니다. 반면에, 부자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좋은 것을 맘껏 누리 며 살았기 때문에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부자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주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자기 맘 대로 사용했다는 점이, 주께서 보시기에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무엇을 많이 알고 있거나 가진 것이 많더라도, 결코 교만하거나 자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을 소유 하게 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기셨을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 을 주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을, 우 리는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나를 낮추고 비워야 합 니다. 내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주 님의 것임을 깨닫고, 주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 님은, 그 누구든지 그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하게 되었을 때에, 그를 선택하여 사용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잠언서에 있는 말씀처럼, 항상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 웃을 잘 보살펴주고 아껴줌으로써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으시는 저 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장 중요한 첫 계명/ 출20:1-6/ 추석설교
가장 중요한 첫 계명 출20:1-6 죄는 하나님 앞에서 다 똑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특별히 큰 죄, 무서운 죄가 있다고 봅니다. 가장 크고 무서운 죄는 바로 십계명 중 제일 첫 계명이라고 봅니다. 곧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 숭배의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몹시 분노하시고 무서운 진노가 임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계명을 범할 때 하나님의 분 노를 격발시켰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내리시고 선민일지라도 내동 댕이 쳐버린적이 그 얼마인지 모릅 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 혜를 남달리 많이 받기를 원한다면 이 첫 계명을 범하는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 야 합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여러분의 아내 가 음식을 잘 못한다던가, 진안 정 돈을 잘 못한다던가, 예쁘지 않다던 가 하는 것은 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지만, 여러분의 아내 가 자기를 놔두고 다른 남자를 사랑 하고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다던가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거나 그냥 봐 넘길 수가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눈물로 용서를 구 한다면 용서할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고는 남편의 진노를 풀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음행한 연고가 있으면 이혼할 수 있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제 2계명도 제 2계명이 너무 중 요하고 무서운 계명이기 때문에 \\\\\\\"우 상 숭배하지 말라\\\\\\\"는 둘째 계명으로 덧붙여 설명한 것이라고 봅니다. 들 어보십시오. 얼마나 자세하고 엄격 하게 명령하셨는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 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 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 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 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 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 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 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 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계명과 둘째 계명은 너무나 중요하고 무서 운 계명입니다. 목숨을 내 놓고라도 이 계명을 범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영적 분별력이 없는 신자들은 살인 죄나, 간음죄나, 도적질죄같은 것만 큰 죄로 여기는데, 이것들도 물론 큰 죄이지만 첫 계명과 둘째 계명은 열배, 백배 더 큰 죄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 시키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범하면 삼사 대까지 죗값을 받고 이 계명을 잘 지키면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 144편 15 절에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 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고 신명기 33장 12절에는 \\\\\\\"여호와의 사랑을 입 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맞도록 보호 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 게 하시리로다\\\\\\\" 미국 청교도들이 미 국 대륙에 착륙하여 유일신 하나님 을 잘 섬기는 가운데 그들이 쓰는 돈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In God We trust)\\\\\\\"고 동전부터 100불짜리 전체에 새겨 넣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IMF는 돈을 잘못 만 들어서 얻어맞은 것이라고 까지 말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 돈은 10원짜리 부터 만원짜리까지 사탄의 상징인 뱀 두 마리와 절간,연꽃,부 처상 등이 수없이 많이 들어 있습니 다. 이 우상이 가득한 돈이 거룩한 제단에까지 올라온다고 생각해 보십 시오. 또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우하 사 우리 나라 만세\\\\\\\'라고 불렀는데, 이제 \\\\\\\'하느님이 보우하사\\\\\\\'라고 부르 는데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유 일신을 의미하고 \\\\\\\'하느님\\\\\\\'은 \\\\\\\'하늘 님\\\\\\\'에서 나온 범신록적 표현이라고 봅니다.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고 다른 신과 우상 숭배를 배격하면 그 나라, 그 민족은 복을 받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숭 배하면 저주와 고통이 따를 뿐입니 다. 신명기 16장 22절에 \\\\\\\"자기를 위 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하셨고 출애굽기 23장 13절에\\\\\\\"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 리게도 말지니라\\\\\\\"고 했고 신명기 13 장 6-8절에 보면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 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에 둘 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던지 땅이 끝에서 저 끝까 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 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 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며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고 까지 강력히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0절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 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 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 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 치 아니하노라\\\\\\\" 하나님을 보는 관점에 따라 세 가지 관점이 있는데 그 첫째가 유일 신주의(Monotheism)이고, 둘째는 단일신주의 (Henotheism)이고, 셋째 는 다신주의 (Polytheism)입니다. 유일신주의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단일신 주의는 다른 나라의 종교의 신을 인정하되 여호와 하나님만이 으뜸가는 신으로 인정하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신교주의는 모든 종교를 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 교는 유일신주의 (Monotheism)이며 유일주의 (Exclusivism)입니다. 1. 하나님은 오직 한 분입니다. 이사야 45장 5-6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해 뜨는 곳 에서든지 해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 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 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하셨고 이사야 45장 22절 에도 \\\\\\\"땅들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 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 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13 장 4절에 \\\\\\\"그러나 네가 애굽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 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 니라\\\\\\\"고 하셨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여 호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 외 에는 우상이요 귀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사실을 애굽땅에서 나올 때에도 가 르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에도 또 가르치셨습니다. 가나안 땅 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신을 섬기면 이방 나라를 들어치셨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구원해 주시곤 했습 니다. 어떤 면에서 무신론보다 혼합 종교는 하나님이 더 가증히 여기시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 다원 주의(Religion pluralism)이나 후기 근대주의 (Post-Modernism) 가 얼 마나 무서운 사탄의 사상인가를 알 아야 합니다. 2. 구세주도 오직 한 분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 은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며 누구 나 다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합 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완전히 부인합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말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 니라\\\\\\\"고 했고 요한복음 1장 12절에 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지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받는다는 말씀 은 한 곳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 고 영접할 때에만 영생을 얻고 하나 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을 안 믿어도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 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고 십 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필요도 없습 니다. 마태복음 1장 21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할 자이 심이라\\\\\\\"하였고 누가복음 2 장 11절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천사도 일러 주었습니다.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 도 오직 한 분뿐입니다. 다른 곳에 도 구원이 있다고 하면 무시무시한 죄를 범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 를 격발하는 죄인 것입니다. 3 구원의 길도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 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 씀하셨는데 영어 성경에는 다 \\\\\\\"The way The trust The life\\\\\\\"라고 \\\\\\\'The\\\\\\\' 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다른 데는 구원의 길이나, 영원한 진리나, 영원 한 생명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서만 하나님 아버지께로 혹은 천국 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계획을 세 우셨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구덩이 를, 혹은 사이(Gab)를 건널 수 있도 록 다리를 놔 주신 것입니다. 만인 구원론자들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 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아무도 정죄 하지 않고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그 러나 성경은 이것이 틀렸음을 증명 해주고 있습니다. 시편 9편 17절에 \\\\\\\"악인이 음부로(Hell)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 리하리로다\\\\\\\"하고 했습니다. 요한계 시록 20장 15절에도 \\\\\\\"누구든지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 지우리라\\\\\\\"고 했습니다. 이 생명책은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힘입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 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다는 말 씀입니다. 이것은 겁주기 위한 말씀 이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인간에게 는 두 가지 운명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고, 그리스도를 믿 기 거절하고 사탄을 따르는 자에게 는 영원한 지옥이 있을 뿐입니다. 이외에 다른 중간 길은 절대로 없습 니다. 4. 구원의 문도 오직 하나입니다. 노아가 가족을 데리고 방주로 들 어갈 때에 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달팽이가 들어가는 문 다르고, 목이 긴 기린이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 는 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 문 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나 짐승 은 다 홍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 다. 우리를 위한 구원의 문도 오직 하나입니다. 곧 회개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 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 다. 회개란 죄에 대하여 슬퍼하며 하 나님께 대하여 슬퍼하며 통회하는 것입니다. 통회하는 마음은 죄에서 돌이키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해 줍 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에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 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습 니다. 내가 선택받지 못했으면 어떻 게 하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에서 돌이키고 예수를 믿었으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아사야 55장 7 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 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 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여호와 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 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었는데도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란 없고,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습니다.
가장 큰 계명/ 마22:36-40/ 추석주일설교/ 2012-09-21
가장 큰 계명 마22:36-40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나와서 물었습니다. (마 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때 예수께서 서슴치 않고 답변하셨습니다. (마 22: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의 답변에 대하여 율법사는 침묵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613가지로 나누어서 어느 계명이 더 큰 계명이냐라는 주제를 가지고 자주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 전체를 요약해서 두 가지로 말씀하셨고, 율법의 중심 사상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조항에 집착함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율법의 정신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본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 구체적이고 분명한 지침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 중에서도 1-4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1.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2.우상숭배하지 말라. 3.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이 네 가지는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의무 조항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을 지킬 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섬겨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해 내셨기 때문입니다. 출15장은 홍해를 안전하게 건넌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광을 돌리며 부른 찬송의 내용입니다. (출 15:1) 이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출 15:2)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이 노래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 나는 일평생 이제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며 그 분께만 영광 돌리며 찬송하며 살리라! 그러나 이 고백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으로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중심으로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그 앞에서 절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1 2 3계명이 일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었고, -우상을 만들어 섬겼고, -금송아지를 향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구해낸 하나님이라 일컬었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컬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찌 이렇게 속히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었습니까? 그 원인은 오랜 기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우상을 섬겨 왔던 죄악의 습관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경험한 시간은 짧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을 맺었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성과 우상숭배의 근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 따라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이제 예수님만 섬기며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퇴근 후에 직장 동료들과 함께 술좌석에 앉아서 한 잔 두 잔 마시다 곤드레만드레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당에 나왔다고 갑자기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다니지 않을 때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담배에 여전히 손이 가고, 술잔에 입술을 갖다 대는 것입니다. 당장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니면서 옛사람이 습관들을 한 가지씩 한 가지씩 벗어내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살다가 4단지로 이사 간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 어느 날 퇴근을 하는데 이전에 자신이 살던 곳에 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 내가 왜 이리 왔지?” 익숙해지기까지 상당 기간 혼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40년간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굳어진 악한 습관과 죄악의 물을 빼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보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커다란 기대와 소망을 안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힘차게 들어갔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었습니다. 대신 그들에게는 십계명을 담은 법궤가 있었습니다. 진두에서 제사장들이 법궤를 짊어 메고 앞장서서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고 가나안 땅을 점령했습니다. 법궤가 진두에 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그들의 삶의 최우선에 두라는 교훈입니다. 그것은 또한 행복한 삶의 보장이기도 합니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28: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4)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5)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역시 죄악의 습성들을 버리지 못하고 쉽게 바알 신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그들은 회개치 않고 계명을 지키지 않다가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BC 587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불러 들였고 결국 다시 노예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1948년 5월10일, 영국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이 다시 독립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무려 26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이 신세로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왔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실패는 그들을 구원해내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의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다른 신을 섬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상을 만들고 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졌을 때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게 되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젊은 남녀 간의 사랑이 불붙었을 때 직장이 부산인 남자 애인은 서울에 있는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나 KTX 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이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한 번 약속한 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번 주에 일이 너무 많이 밀렸어. 올라가기 힘들 것 같아. 가보도록 노력해 볼께.” 일주일 내내 여자 친구가 별로 생각나지도 않고, 다른 여성에게 눈이 돌아가게 됩니다. 사랑의 열기가 식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사랑의 열기가 식으면 의무감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랑이 식으면 의무감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한 시간 드리는 예배가 지루하고 빨리 끝나서 다른 재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첫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기 바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님은 먼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여 그 피 값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요 영광스러운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후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계속적으로 유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 실천 방안은 계명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1.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2.우상숭배하지 말라. 3.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 계명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해 보기 바란다. 이제 다음 주면 추석 명절을 지키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유쾌한 날이 되지 못합니다. 제사 드리는 문제로 인해 부모 형제간에 갈등이 불거지고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즐겁다기보다는 부담스럽고 불편한 날이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분명히 우상을 섬기는 죄악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분명히 하나님을 믿노라고 고백하는 성도라면 제사로 인해서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은 제사를 없앴더니 집안이 편안치 않고, 묏자리가 나빠서 되는 일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도 조부께서 살아계실 때는 장손으로서 제주 노릇을 한 적도 있었다. 오히려 우리 집안은 제사를 치움으로 인해 복을 받았다. 제사를 잘 지내서 후손이 잘 되고, 가정이 평안할 것 같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상의 얼을 빛내는 것은 제사를 정성껏 드림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후손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면 조상이 빛이 나는 것입니다. 우상 섬겨서 잘 되는 민족이 없습니다. (사 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만 합니까? 1.먼저 제사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제사를 드릴 때 위패를 쓰는데,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 하여 신위(神位), 즉 조상귀신이 좌정하였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은 고유의 미풍양속이요 부모공경의 우선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사 행위는 분명히 종교행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원래 제사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제사 제도가 일반화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태조가 유교를 받아 드림으로 조상숭배 사상이 유교의 효사상과 결합되어 국가적으로 장려하고 국시로 삼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모습은 미풍양속이요 부모공경의 예라 하여 맹목적으로 덩달아 제사상을 차리고 제사 드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2.제사 드리는 것에 대한 분명한 자신의 입장을 선언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후에 성대한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효사상이 기독교 사상 보다 더한 종교가 있습니까?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정말 열심히 공경하고 효도하기로 결심하고 시행하라. 그리고 자신과 가족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좋습니다. - 나와 내 가족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 - 가족들에게는 정중히 양해를 구하라. 처음에는 불편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하게 됩니다. 3.가족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오랜 전통과 습관을 하루아침에 버리거나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부모님이나 형제들에 대하여 인내와 배려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더 관심과 사랑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번 추석 명절을 기해 제사 문제로 인해 고민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먼저 순종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결단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과 함께 부모님 공경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님과 형제 사랑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는 추석 명절이 되길 바랍니다.
가정 내의 상처 치유하는 길/삼하13:20-22/추석설교/이한규 목사/2009-09-19
가정 내의 상처 치유하는 길 삼하13:20-22 < 상처를 아물게 하는 보금자리 > 어떤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그분이 사는 아파트 단지는 아파트 평수가 크면 차 2대의 주차공간이 주어지고, 평수가 작으면 1대의 주차공간이 하나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아파트에 사는 어떤 변호사는 2대의 주차공간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항상 주차선 가운데에 주차합니다. 경비가 말려도 자기 것인데 왜 그러냐고 하니까 주민들이 그 변호사를 비웃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 목사님의 아들이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하고 한참 돌다가 씩씩거리며 들어와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지금 변호사 차를 칼로 긁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입으로는 \"그러면 되겠니?\"라고 했지만 마음속에는 10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원하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저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옛날 혈기를 아들이 그대로 가진 모습을 보고 등골이 오싹했다고 합니다. 대개 보면 부모의 것이 그대로 아들에게 물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것도 물려지고, 나쁜 것도 물려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넉넉하면 자녀도 넉넉한 마음을 가진 자녀로 자랄 것이고, 부모가 상처가 많으면 자녀도 상처가 많은 자녀로 자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본을 보이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다녀 간 임병철 목사님 바로 앞집에 피터(Peter)라는 이태리 계통의 목사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성도가 1500명 정도 되는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고, 베스르셀러 작가이고, 뉴욕의 떠오르는 별처럼 목회를 잘 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임병철 목사님과 형제처럼 지내는데, 저도 1997년 미국에 갔을 때 그분과 함께 바비큐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피터 목사님의 가족 사랑은 대단합니다. 서양 목사님들은 \'9 to 5\'가 생활화되었습니다. 아침 9시에 교회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합니다. 새벽기도도 없고, 심방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 목사님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는 것을 보면 오히려 이상하게 봅니다. 그런데 이 피터 목사님은 드물게 매일 새벽기도를 하는 목사님입니다. 그처럼 열정적으로 사역을 하면서도 한 달에 최소한 한번은 두 부부만의 데이트 시간을 갖고, 일년에 두 번은 꼭 두 부부만 여행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터 목사님 친척들은 거의 마피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피터 목사님의 친척 장례식이 있어서 임병철 목사님도 갔는데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마피아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마피아들은 인상도 아주 험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에 참석한 마피아들을 보니까 하나같이 잘 생겼고, 매너도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마피아들도 가족을 참 아낀다고 합니다. 그들이 비록 밖에서는 총을 쏘고, 무섭게 싸워도 그들의 자식 사랑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피아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일은 자식을 해치는 일이라고 합니다. 마피아지만 가족의 연대 의식이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합니다. 그처럼 마피아도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데 우리는 더욱 가족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가끔 가족끼리 서로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생기지만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름답게 이뤄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은 우리의 각종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한 보금자리이지 서로 상처는 입히는 전쟁터가 아닙니다. < 상처 입은 다윗의 가정 > 오늘 본문이 있는 사무엘하 13장에는 한 콩가루 집안이 나옵니다. 형제 사이에 강간도 벌어지고, 살인도 벌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콩가루 집안의 가장이 바로 다윗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그의 가정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통 사건 때문입니다. 그 당시 다윗은 이미 여러 명의 아내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한 명을 더 원한 것입니다. 이 \'하나 더\' 혹은 \'한번 더\'가 인생을 망치고 가정을 망칩니다. 간통 후에 다윗은 그 일을 은폐하려고 충신 우리야까지 죽였습니다. 그 뒤 다윗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됩니다. 첫 아들 암논이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다말을 강간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다윗이 심히 분노했지만(21절),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인데 어떻게 제대로 벌을 내리겠습니까? 그러니까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한을 품고, 이년 후에 계략을 꾸며 그의 이복 형 암논을 죽였습니다. 가족들이 서로를 혐오하고 죽이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다윗이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왜 가정이 깨집니까? 통제(control)는 너무 많이 하고 영향력(influence)은 너무 적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려면 통제는 가급적 적게 하고, 영향력은 많이 끼쳐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합니다. 부부도 서로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서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합니다. < 가정에서의 상처 치유 방법 > 오늘날 많은 가정들을 살펴보면 압살롬처럼 한을 품은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가정에서의 상처 치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첫째, 정직한 자백이 필요하고, 둘째, 잘못에서 돌아서는 회개가 필요하고, 셋째,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가정 내에서의 상처 치유를 위해서도 이와 같은 3가지와 함께 기도가 필요합니다. 첫째, 정직한 자백이 필요합니다. 가정 내의 갈등이 일어날 때 한 사람만 일방적으로 잘못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 말은 자기 잘못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태도가 바로 용기이고 성숙함입니다.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정말 낫고자 하고,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면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르게 될 희망은 없습니다. 몸에 이상 신호가 와도 \"괜찮다!\"고 하면 병은 더 커지게 됩니다. 병원에 가서 \"제가 여기가 아픕니다\"고 인정해야 그때부터 치료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정 내의 상처가 치유되려면 자신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자백이 없으면 용서도 없고, 치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자기 약점을 보는데 자기만 그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문제가 없다!\"고 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치료의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다!\"라는 책 등으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척 콜슨(Chuck Colson)이 최근에 칼리 샌티(Carly Santi)라고 하는 젊은 소녀에 관해 쓴 글을 며칠 전에 인터넷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칼리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그녀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칼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수치심이 밀려왔고, 삶의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에서 거의 1년간 말도 없이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이듬해 여름, 그녀는 한 기독교 캠프에 떠밀려 참석했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얼마 후에 칼리는 어머니와 함께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방문하고, 아버지에게 감옥에서 진행되는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하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간청을 듣고 그녀의 아버지 데니스 샌티(Dennis Santi)가 성경 공부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데니스는 면회를 온 딸 칼리에게 \"네게 수치를 안겨 준 이 아빠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그 가정에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직한 자백은 인간 관계의 치유를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둘째, 상처 입히는 행동을 그쳐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입니다. 가정 내에 상처가 생겼으면 먼저 자신이 고칠 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서서히 변화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배우자의 잘못을 꼭 고쳐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잘못이 고쳐지기는커녕 배우자에게 더 상처만 입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낫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막는다고 \"내 맘대로 할 거야!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폭발해!\"하고 소리치면 남편이 겁나서 물러섭니까? 더 반발합니다. 그런 식으로 나가면 서로 상처만 입히게 되고, 아무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 문제는 더 꼬이고 악화됩니다. 그러나 갑자기 아내의 말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조용히 있다가 어느 날 한 마디 합니다. \"여보! 요새 사는 맛이 안나요!\" 그처럼 작전상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해 보십시오. 물론 그 방법을 너무 심하게 쓰면 남편까지 삶의 용기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전상 적절한 방법으로 우울증이 걸린 사람처럼 행동하면 대부분의 남편들은 겁이 덜컹 나서 말할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라도 열심히 해봐!\" 그처럼 상처가 없는 방법을 써야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아이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하게 하면 부러지고, 상처만 입습니다. 부드러운 것이 아이들 교육에 훨씬 효과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엄한 아버지로부터 많이 맞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이 때리면 매의 효과도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어머니는 한번도 때린 일이 없었습니다. 그냥 손을 붙들고,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데 그러느냐?\"고 하면 꼼짝 못하고 어머니 말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강하게 우격다짐으로 남을 바꾸려고 하면 상처가 생기고, 상처는 또 상처를 부르고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에 최선을 다하고 상처를 주는 행동을 멀리해야 합니다. 특히 사소한 행동으로 인한 상처를 잘 요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소한 일이 커져서 가정이 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미국 서부 시대에 햇필드 가(Hatfields)와 맥코이 가(McCoys)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돼지 한 마리가 누구의 돼지냐 하는 문제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 싸움이 점차 커졌습니다. 12년 동안 서로 원수처럼 지내며 싸웠습니다. 그 싸움으로 햇필드 가의 3명, 맥코이 가 7명, 외부 사람 2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 양쪽 집안 중의 어느 누구도 돼지 한 마리가 12명의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상처를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때로 아주 사소한 일에서 큰 싸움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잘못이라도 생각나면 그 잘못에서 과감히 돌아서고, 특히 잘못된 언어를 주의해야 합니다. 옛말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곱지 않은 말을 들어도 곱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을 그 애쓴 만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 마음을 열고 상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정 내의 갈등은 하루 속히 털어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화해를 손을 내미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화해를 잘 받아들이는 너그러움도 있어야 합니다. 남이 화해를 요청할 때 마음을 닫고 있는 것은 화해의 싹을 자르는 것이고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잘못을 많이 저질렀다고 해도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은 더 잘못된 마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기꺼이 용서하고, 기꺼이 용서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은 말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처럼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갈등을 풀려고 애써야 합니다. 갈등이 풀어지면 친밀성은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갈등을 풀지 않으면 더 비참하게 되고, 언젠가는 그 갈등이 인생 전체를 불태울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을 통해 로드니 부캐넌 목사님의 글을 즐겨 보는 편입니다. 그분이 작년에 캐나다의 앨곤퀸 주 공원(Algonquin Provincial Park)에 가서 카누를 타고 어떤 조그만 섬에 도착했는데, 공원 관리인들이 미친 듯이 구멍을 파고 호수의 물을 바께스로 퍼 넣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불을 끄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불길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어디에서 불이 났느냐고 물었더니 나무 뿌리에서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표면 가까운 뿌리가 있는 곳에서 캠프파이어를 했는데, 그 불이 땅 아래에서 몇몇 나무로 옮겨 붙은 것입니다. 그것을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공원 관리인들은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불이 났다는 것을 느끼는데, 만약 그 불을 끄지 않으면 그 불은 섬 전체를 태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가정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불붙은 화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감춘다고 감추지만 대개 그 열기가 느껴집니다. 만약 그것을 끄지 않으면 그것은 전 가정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뿌리에 붙은 불을 하루빨리 꺼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마음문을 열고 상대방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틀리고 내가 옳다고 해도, 옳고 틀린 것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더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겉으로는 가장 성숙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가장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정의감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으로 덮을 수 있어야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넷째, 기도로 성령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통해서 이론적인 무장을 잘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가족들에게 잘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가족을 매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도해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제일 먼저 성품이 부드럽게 됩니다. 거기에서 문제 해결이 시작되고, 거기에서 상처 치유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한때 전투적이 되고, 표정이 근엄하게 되고, 목소리가 쉰 소리가 되고, 눈빛이 날카롭게 되는 것을 성령 충만의 표시로 오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야 하는데, 비정상을 성령 충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에는 쉰 소리가 더 성령 충만한 소리라고 여겨서 하나님이 주신 목소리를 일부터 망가뜨리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허영심이 충만한 것이지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지하철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하고 소리지르고, 식당에 15명이 와서 10인분만 시키고, 악을 쓰고 기도한 후에 계속 밑반찬을 달라고 해서 원가보다 더 먹어치우는 성령 충만한 교인들을 보면서, 그분은 고등학교 때에 \"주님! 저는 성령을 주셔도 충만하게는 주지 마세요.\" 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나오는 말마다 \"예수!\"가 안 들어간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에 상처를 입는지 모릅니다. 남에게 말로 상처를 입혀 놓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야! 그래서 뒤끝이 없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 뒤끝이 없는 분들이 무섭습니다. 자신이야 상처를 입혔으니까 뒤끝이 없지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얼마나 뒤끝이 많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분들을 보면 친구들이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이웃들이 혀를 내두르고, 심지어는 가족조차 외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성령 충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인간관계가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부부관계가 좋고, 상하관계를 잘 하고, 고부관계, 친구관계, 교회 내의 성도관계를 잘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가장 큰 증거입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는 \"내게 이런 은사가 있느냐?\"가 아니라 \"나의 인간관계가 아름다우냐?\"에 있습니다. 자동차에는 2만개의 부속품이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무쇠 덩어리들입니다. 그래도 아무 마찰 없이 굴러가는 이유는 윤활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성령 충만하면 아름다운 관계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그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때 우리의 각종 상처는 급속히 치유될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가족들이 함께 모일 것입니다. 그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다른 식구들에게 자신의 한을 터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섭섭 마귀가 가장 많이 틈탈 때가 바로 명절 때입니다. 이때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섭섭한 일을 당해도 믿는 사람답게 결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을 생각만 하면 섭섭 마귀가 틈타지만 줄 생각을 하면 별로 섭섭할 일이 없습니다. 이번 추석에 가족들과 모이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 이번 추석을 상처를 입히는 명절이 아니라 상처를 회복하는 명절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기주의와 욕심을 버리면 됩니다. 그 두 가지만 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해 사랑과 헌신을 다짐하고, 이번 명절을 가정의 각종 상처가 치유되는 뜻깊은 명절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 은혜가 필요한 곳입니다/ 민6:25/ 추석주일설교/ 2013-09-17
가정, 은혜가 필요한 곳입니다 민6:25 추석을 맞아 우리 가정에 왜 은혜가 필요한지, 풍성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왜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할까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아담의 갈빗대를 빼셔서 하와를 만드시고 그의 아내가 되게 하셔서 인류 최초의 가정이 탄생했습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가정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초가 든든해야 건물이 튼튼하듯 가정의 기초인 은혜가 넘쳐야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가정은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집에 가면 무장해제를 합니다. 아무리 비싼 메이크업 숍에 가서 화장을 하고 비싼 옷을 사 입었을지라도 집에 들어오면 다 지우거나 벗습니다. 반면 가정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기 때문에 약점과 단점과 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가정생활에서 우선 요구되는 것은 은혜와 사랑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할 수 있을까요. 1. 첫째,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가정을 지킬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우리의 가정을 지킬 수 없습니다(시 127:1∼2). 2. 둘째, 은혜의 전달자가 돼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조상은 게르만족 계열인 바이킹족입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해적이었습니다. 당시 해적들은 배를 타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바다를 무대로 강도질을 일삼던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강탈할 때에 재물만 하지 않고 여자들도 강제로 잡아다가 결혼해 자녀를 낳게 했습니다. 그런데 해적에게 잡혀간 자들 중에 기독여성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날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합니까?”라고 한탄만 하고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비록 해적의 아내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곳에 보내신 뜻이 있는 줄 알고 남편을 용서하고 자녀들을 말씀으로 잘 키웠습니다. 그러자 해적들이 변해서 마침내 기독교인이 됐고, 그들이 바로 퓨리턴, 곧 청교도의 뿌리가 된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처가와 시댁을 욕하지 말고 은혜를 받은 자답게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3. 셋째,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엡6:24). 상황에 따라 마음이 바뀌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26: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셨습니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계2:3∼4). 추석 명절을 계기로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창천 목사(서울 동신교회)
가정과 가문을 위해 울며 씨를 뿌립시다 /행16:29-34/추석
가정과 가문을 위해 울며 씨를 뿌립시다 /행16:29-34/추석 2008-11-13 04:50:03 read : 131 추석에 하는 일 오늘은 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입니다. 자, 그렇다면 추석특집으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 집안은 추석에 모이면 보통 뭘 합니까? 사람들에게 조사해보니 “밥 먹고 치우고 설거지하고 또 밥 먹고”가 1위였습니다. 가정주부들이나 며느리들에게는 별로 안 좋은 기억이지요 . 솔직히 이런 식으로 추석을 보내면 가정주부나 며느리들은 너무 힘듭니다. 그러니 우리 남자 분들 아무리 경상도 사나이라도 일을 좀 도우세요. 이젠 남자들 부엌 들어가는 것이 흠 될 일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 중엔 목사의 말에 별로 동의가 안 되는 분도 계시겠지만 추석이니 명절이 중노동 하는 괴로운 시간이 안 되도록 우리 부인들과 딸과 며느리들을 조금이라도 도울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저는 적어도 우리 교회 성도들은 고리타분하지 않고 좀 열리고 깨인 어른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추석에 대한 두 번째 기억이 바로 “하루 종일 TV 보기”라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적어도 가족이 모여 좀 즐거운 이야기도 하고 윷놀이라도 하며 친목을 다져야 할 텐데 하루 종일 집구석에서 추석 특선 TV 프로그램만 보다 명절 다 보내는 집안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기껏해야 “전 가족 친목도모 고스톱” 아니면 “성묘와 벌초” 혹은 “추석 성묘 미리 하고 추석 연휴에 여행 가기” 정도라고 하니 참 답답한 일입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어요. 다른 건 다 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일이 빠진 것입니다. 바로 온 가족이 모여 신앙공동체로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추석은 TV 보기나 고스톱 치기 좋은 때가 아니라 온 가족이, 나아가 온 가문이 한 자리에 모여 신앙적으로 하나 되고,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영적인 일체감을 갖는 가장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기회를 무의미하게 밥 먹고 TV나 보다가 헤어지는 시간으로 허비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가정 공동체 성경은 신앙 공동체로서의 가정이나 가문의 의미를 참으로 중요하게 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철저하게 가정 중심 공동체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아간의 도적질’ 사건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분명 가나안을 점령할 때 남녀노소 모든 사람과 가축까지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우상숭배가 전염될까봐 그토록 철저하게 진멸하라 하신 것입니다. 또한 성 안에 있는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절대 개인이 갖지 말고 하나님께 모두 바치라고 했는데 아간이라는 자가 그 명령을 어기고 재물을 착복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아이 성에서 크게 패한 후 범인을 찾아내는 장면이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데 온 이스라엘 ‘민족’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후에 그 중에 제비를 뽑으니 열두 지파 중 유다 지파가 뽑힙니다. 그 유다 지파 중 제비 뽑아 세라 ‘족속’을 뽑습니다. 그 다음 세라 족속 중에서 삽디 가족이 제비 뽑히고 그 가족 중에서 아간이 뽑혀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순서를 보면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철저하게 가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순서를 거꾸로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운데 먼저 한 남자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가족’(family)을 이룹니다. 그 다음에 이 가족이 여럿 모여서 대가족 형태의 족속(clan)을 이룹니다. 이것을 ‘씨족’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이 족속들이 모여 열두 지파(tribe)를 이룹니다. ‘부족’이라고도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이 열두 개의 지파가 모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가족 중심으로 민족이 이루어지다 보니 각 가족마다 가장이 있고, 또 족속과 지파를 이끌어 가는 어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이끌어가는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도 있었던 것이고요.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이름이 본디 ‘아브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이란 ‘한 가족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가장(家長)입니다. 또 그의 아내 사래도 그 뜻이 ‘한 집안의 어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의 이름을 아브람과 사라, 즉 열국의 아비와 어미로 바꾸십니다. 그만큼 이들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이들을 통해 한 가정이 점점 더 커져서 큰 민족을 이루고 마침내 열국, 세상 모든 민족을 다스릴 민족으로 성장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공동체에 있어서 가장과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선민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탁월한 민족의 지도자도 있었지만 민족을 구성하는 단위인 ‘족속’과 ‘가족’들 모두 그 집안의 가장과 어른들을 통해 신앙을 잘 지켜나갔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결국 가정과 가정이 모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무수히 많은 가정들이 모이고 모여 대한민국 전체를 이루고 있는데 만약 이 가정들이 건강하면 대한민국 전체도 건강할 것이요, 가정이 약해지고 무너지기 시작하면 이 나라 민족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가 큰 위기를 맞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가정이 붕괴되고 가족이 해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가정이, 나아가 그 가정이 모인 가문이 중요합니다.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도 너무나 중요하고 더욱이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더욱 중요합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일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납니다. 그 여종은 귀신의 힘을 빌려 점을 쳐서 주인이 큰 이익을 얻고 있었는데 그만 그 여종이 두 사람을 끈질기게 쫒아오면서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괴롭히는 바람에 바울은 그 여종을 도와 귀신을 쫓아내게 됩니다 . 그러니 큰 수입원이 떨어진 주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점쟁이라고 다 똑같은 점쟁이가 아닙니다. 저 서울 미아리 고개에 점집, 무당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평범한 점쟁이가 아니라 우리나라 1,2위를 다투는 재벌들만 찾아가는 재벌 전담 점쟁이나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줄을 서는 정치인 전담 점쟁이도 있다는데 이런 점쟁이는 한 번 점 봐주는데 최소 수백 만 원에서 수천 만 원까지 된다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만약 제가 그 점쟁이를 찾아가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고 귀신을 쫓아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그 사람으로 먹고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가만히 안 놔둘걸요? 똑같은 현상이 지금 바울과 실라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종의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날 밤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려버립니다. 죄수들은 이게 왠 떡이냐 하며 다 도망가고 마는데 이를 본 간수는 칼을 빼어 자결을 하려 합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죄수를 도망하게 한 간수는 그 죄수가 받은 형량만큼 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받을 벌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그만 칼을 빼서 자결하려 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 간수가 정말 자살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분명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이 도망한 것은 하나님이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기 위해 일으키신 일인데 아마 사람들은 간수가 죄수들을 다 풀어주고 자기도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게 되는 것이지요. 또 자살한 간수도 안 됐지만 그 가족들은 어떻게 됐겠습니까? 나중에 이 간수가 예수 믿게 될 때 간수만 아니라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고 예수 믿게 되는 것을 볼 때 이 간수는 한 가정의 가장이며 아마도 모든 수입까지도 책임 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요즈음처럼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만약 간수가 자살을 했다면 그 가족 모두 파탄을 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지고 나아가 죄수들을 풀어주고 자살한 비겁한 죄인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이나 받고 살게 되었겠지요. 이 얼마나 간수 자신에게나 온 가문에게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간수가 칼을 빼서 자결하려는 순간 바울이 크게 소리 지르며 말립니다. 그러자 간수는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묻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이는 “선생님들, 도대체 내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살겠습니까?” 하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울은 그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간수가 사는 방법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오직 주 예수를 믿는 것뿐이듯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도 예수 믿어야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가 아니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 점입니다. 그래서 32절부터 보면 정말 바울이 그 집에 가서 그 집 모든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간수와 함께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이 빌립보 감옥 사건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영적인 가르침을 주는 사건입니다. 첫째, 우리도 다 이 간수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이런 죄인이 예수님 믿고 구원 받는 것 외에는 살 길이 없다는 복음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둘째, 우리 기독교는 물론 ‘내가’ 구원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혼자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 온 가족이 함께 예수 믿고, 함께 구원 받고, 함께 천국 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에서, 혹은 우리 가문 전체에서 나 한 사람이 예수 믿게 된 것은 나로 인하여 온 집안이, 온 가문이 예수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 복음화, 가문 복음화의 사명입니다. 셋째, 이렇게 되기 위해 나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본문에 보면 그 집 가장인 간수가 믿으니 온 가족이 믿게 됩니다. 물론 가장의 권위로 “오늘부터 우리 집은 모두 예수 믿는다”고 선포했겠지만 아무리 가장이라도 이게 가능합니까? 더욱이 그 당시에는 이런 권위가 좀 통했을지 모르지만 요즘 같이 가장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는 더욱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가 평상시에 잘해야 합니다. 요즘 세상이 어찌 된 셈인지 남편이 믿는다고 아내가 무조건 교회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 신앙의 자유를 존중한다며 남편은 교회 나와도 아내는 안 나오거나 성당이나 절에 다니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아내가 믿는다고 남편이 당연히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또 부모가 믿는다고 자녀가 옛날처럼 무조건 순종하고 교회 나옵니까? 아니지요. 그러니까 점점 더 가정 복음화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자유로워지고 서로를 존중한다는 구실로 가정 안에서 권위가 없어지고 기강이 해이해 지다보니 가정 복음화는 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가정 안에서 가족들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너무 중요합니다. 먼저 가장인 아버지요 남편은 한 가정의 제사장입니다. 영적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임명하신 가정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성경에서 영적 권위를 아버지에게 준 것은 남편과 아버지들이 그 가정을 영적으로 잘 이끌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가장이 바로 서서 영적으로 그 가정을 이끌어 가면 그 가정이 다 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것처럼 가장이 영적으로 책임을 다하면 온 가정이, 가문이 다 복을 받지만 반대로 영적 가장이 잘못하면 온 가정의 복을 까먹게 만들고 맙니다. 얼마나 중요한 사명입니까? 또 아내와 어머니는 가정 안에서 역할이 이렇습니다. 가족들 밥해 먹이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살림 잘하고 애들 잘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아내와 어머니의 사명은 기도하는 아내,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가정 안에서 가장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뒤에서 기도로 뒷받침 해주는 아내의 영적 내조 없이는 어렵습니다. 또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 축복기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머니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기도하고 또 낳아서도 품에 안고 기도하는 그 기도가 자녀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역할은 이렇습니다. 아들과 딸뿐 아니라 사위, 며느리 모두 한 가정의 자녀로서 그 가정의 신앙의 맥을 이어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집안의 대를 잇고 신앙의 맥, 영적인 대를 이어간다고 여긴 장자뿐 아니라 모든 아들과 딸이 모두 이 영적인 대를 이어가야 합니다. 자녀가 여럿인데 그 중에 어떤 자녀는 예수 잘 믿지만 어떤 자녀는 부모 곁을 떠나 타지에 나가서 공부하거나 취직한 후에 예수 안 믿게 되었다면, 또 시집 장가 간 후에 신앙을 잃어버렸다면 부모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과연 그 가정을 정말 예수 믿는 온전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집안은 그래도 장남이 믿으니 됐지, 자녀들 중 반타작은 했으니 이만하면 예수 믿는 가정이지”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위나 며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이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후 역시 과부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시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며느리들이 안쓰러워 나를 따라오지 말고 각자 살 길을 찾아 가라고 하는데 두 며느리 중에 오르바는 그렇게 했지만 룻은 말을 안 듣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룻기 1장 16절입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요즘 이런 며느리 감 있습니까? 있으면 좀 소개해 주세요. 당장 우리 며느리 삼게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요즘 며느리들 시어머니 예수 믿는다고 같이 신앙생활 잘 안 합니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 더 어렵고요. 하지만 며느리와 사위가, 또 아들과 딸 모두가 이렇게 가문의 신앙을 잘 따라주고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다면 정말 복 받은 가정입니다. 또 복 받을 가정이기도 하고요. 여러분, 우리 가정, 우리 가문, 어떻게 해야 복 받은 가정이요 가문 될까요? 부모 모두 건강하게 장수하고 자녀들 모두 성공하고 잘 사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온 가정이 다 예수 믿어 구원 받고 부모와 형제, 자녀들, 그리고 사위와 며느리까지 온 가정이 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면 이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코 쉬운 일 아닙니다. 그러기에 더 복된 일인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 가문을 위해 뿌립시다 이제 마지막으로 “온 가족 중에 나만 예수 믿는다,” 혹은 “온 가문 중에 우리 집만 교회 다닌다”는 분들 이야기를 잠시 하지요. 이런 분들 참 예수 믿기 너무 힘듭니다. 어떤 분이 제게 그럽디다. “목사님, 명절이 되어도 부모님 집에 가기 싫어요. 온 집안이 다 불교, 유교라 제사 지내야 되는데 우리 집만 예수 믿어서 제사상에 절 안 하니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형제들, 가족들하고 말을 해도 너무 안 통해서 참 힘듭니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그러면 안 됩니다. 안 만나면 편한지 모르지만 그래서는 평생 전도 못합니다. 평생 가정 복음화, 가문 복음화 불가능합니다. 힘들지만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섬기세요. 구박도 받고 눈치도 봐야 하고, 때로는 자존심 구기는 일도 있고 더럽고 치사한 꼴도 보겠지만 그럴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낮아지고 더 머리 숙이고 섬기고 더 굳은 일 앞장서서 열심히 하세요. 그래야 역사가 서서히 일어납니다. 비록 너무 힘들고 오랜 세월이 걸릴 수 있지만 이렇게 씨를 안 뿌리면 열매 없습니다. 그리고 잘 섬기고 열심히 일하는 것뿐 아니라 안 보는 데서 눈물 뿌리세요. 너무나 힘든 일이기에 더군다나 눈물의 씨를 뿌리지 않으면, 기도의 씨를 몇 동이씩 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사명감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온 집안에 나 혼자만 믿는다, 온 가문에 우리 집만 믿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 어떤 사명이요? 가정 복음화, 가문 복음화의 사명 말입니다. 이 사명은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나는 가족 전체와 가문 전체의 기도 후원을 받는 든든한 처지가 됩니다. 이 일이 어렵다고 못하고 시간 오래 걸린다고 못하면 평생 예수 믿어도 가족과 가문 눈치 보며 믿어야 하고 평생 내 마음에 무거운 짐을 안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해야 합니다. 사명감으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추석에 가족들 모이거든 먹고 설거지하고 또 먹고 하는 일보다, 추석 특선 TV 프로그램 보는 일보다, 고스톱 치고 수다 떠는 일보다 내 가정 위해, 내 가문 위해 함께 예배드리고, 온 가족이 함께 눈물의 씨를 뿌려봅시다. 그것이 어렵다면 가족들 안 보는 데에서라도 남몰래 눈물의 씨를 뿌립시다. 이 씨를 눈물로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것이 이번 추석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가정과 가문을 위해 울며 씨를 뿌립시다/ 행16:29-34/ 추석설교/ 2008-09-25
가정과 가문을 위해 울며 씨를 뿌립시다 행16:29-34 추석에 하는 일 오늘은 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입니다. 자, 그렇다면 추석특집으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 집안은 추석에 모이면 보통 뭘 합니까? 사람들에게 조사해보니 “밥 먹고 치우고 설거지하고 또 밥 먹고”가 1위였습니다. 가정주부들이나 며느리들에게는 별로 안 좋은 기억이지요 . 솔직히 이런 식으로 추석을 보내면 가정주부나 며느리들은 너무 힘듭니다. 그러니 우리 남자 분들 아무리 경상도 사나이라도 일을 좀 도우세요. 이젠 남자들 부엌 들어가는 것이 흠 될 일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 중엔 목사의 말에 별로 동의가 안 되는 분도 계시겠지만 추석이니 명절이 중노동 하는 괴로운 시간이 안 되도록 우리 부인들과 딸과 며느리들을 조금이라도 도울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저는 적어도 우리 교회 성도들은 고리타분하지 않고 좀 열리고 깨인 어른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추석에 대한 두 번째 기억이 바로 “하루 종일 TV 보기”라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적어도 가족이 모여 좀 즐거운 이야기도 하고 윷놀이라도 하며 친목을 다져야 할 텐데 하루 종일 집구석에서 추석 특선 TV 프로그램만 보다 명절 다 보내는 집안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기껏해야 “전 가족 친목도모 고스톱” 아니면 “성묘와 벌초” 혹은 “추석 성묘 미리 하고 추석 연휴에 여행 가기” 정도라고 하니 참 답답한 일입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어요. 다른 건 다 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일이 빠진 것입니다. 바로 온 가족이 모여 신앙공동체로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추석은 TV 보기나 고스톱 치기 좋은 때가 아니라 온 가족이, 나아가 온 가문이 한 자리에 모여 신앙적으로 하나 되고,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영적인 일체감을 갖는 가장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기회를 무의미하게 밥 먹고 TV나 보다가 헤어지는 시간으로 허비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가정 공동체 성경은 신앙 공동체로서의 가정이나 가문의 의미를 참으로 중요하게 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철저하게 가정 중심 공동체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아간의 도적질’ 사건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분명 가나안을 점령할 때 남녀노소 모든 사람과 가축까지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우상숭배가 전염될까봐 그토록 철저하게 진멸하라 하신 것입니다. 또한 성 안에 있는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절대 개인이 갖지 말고 하나님께 모두 바치라고 했는데 아간이라는 자가 그 명령을 어기고 재물을 착복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아이 성에서 크게 패한 후 범인을 찾아내는 장면이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데 온 이스라엘 ‘민족’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후에 그 중에 제비를 뽑으니 열두 지파 중 유다 지파가 뽑힙니다. 그 유다 지파 중 제비 뽑아 세라 ‘족속’을 뽑습니다. 그 다음 세라 족속 중에서 삽디 가족이 제비 뽑히고 그 가족 중에서 아간이 뽑혀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순서를 보면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철저하게 가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순서를 거꾸로 보면 더 이해하기 쉬운데 먼저 한 남자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가족’(family)을 이룹니다. 그 다음에 이 가족이 여럿 모여서 대가족 형태의 족속(clan)을 이룹니다. 이것을 ‘씨족’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이 족속들이 모여 열두 지파(tribe)를 이룹니다. ‘부족’이라고도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이 열두 개의 지파가 모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가족 중심으로 민족이 이루어지다 보니 각 가족마다 가장이 있고, 또 족속과 지파를 이끌어 가는 어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이끌어가는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도 있었던 것이고요.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이름이 본디 ‘아브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이란 ‘한 가족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가장(家長)입니다. 또 그의 아내 사래도 그 뜻이 ‘한 집안의 어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의 이름을 아브람과 사라, 즉 열국의 아비와 어미로 바꾸십니다. 그만큼 이들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이들을 통해 한 가정이 점점 더 커져서 큰 민족을 이루고 마침내 열국, 세상 모든 민족을 다스릴 민족으로 성장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공동체에 있어서 가장과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선민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탁월한 민족의 지도자도 있었지만 민족을 구성하는 단위인 ‘족속’과 ‘가족’들 모두 그 집안의 가장과 어른들을 통해 신앙을 잘 지켜나갔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결국 가정과 가정이 모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무수히 많은 가정들이 모이고 모여 대한민국 전체를 이루고 있는데 만약 이 가정들이 건강하면 대한민국 전체도 건강할 것이요, 가정이 약해지고 무너지기 시작하면 이 나라 민족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가 큰 위기를 맞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가정이 붕괴되고 가족이 해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가정이, 나아가 그 가정이 모인 가문이 중요합니다.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도 너무나 중요하고 더욱이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더욱 중요합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일어난 일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납니다. 그 여종은 귀신의 힘을 빌려 점을 쳐서 주인이 큰 이익을 얻고 있었는데 그만 그 여종이 두 사람을 끈질기게 쫒아오면서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괴롭히는 바람에 바울은 그 여종을 도와 귀신을 쫓아내게 됩니다 . 그러니 큰 수입원이 떨어진 주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점쟁이라고 다 똑같은 점쟁이가 아닙니다. 저 서울 미아리 고개에 점집, 무당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평범한 점쟁이가 아니라 우리나라 1,2위를 다투는 재벌들만 찾아가는 재벌 전담 점쟁이나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줄을 서는 정치인 전담 점쟁이도 있다는데 이런 점쟁이는 한 번 점 봐주는데 최소 수백 만 원에서 수천 만 원까지 된다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만약 제가 그 점쟁이를 찾아가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고 귀신을 쫓아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그 사람으로 먹고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가만히 안 놔둘걸요? 똑같은 현상이 지금 바울과 실라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종의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날 밤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려버립니다. 죄수들은 이게 왠 떡이냐 하며 다 도망가고 마는데 이를 본 간수는 칼을 빼어 자결을 하려 합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죄수를 도망하게 한 간수는 그 죄수가 받은 형량만큼 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받을 벌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그만 칼을 빼서 자결하려 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 간수가 정말 자살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분명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이 도망한 것은 하나님이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기 위해 일으키신 일인데 아마 사람들은 간수가 죄수들을 다 풀어주고 자기도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게 되는 것이지요. 또 자살한 간수도 안 됐지만 그 가족들은 어떻게 됐겠습니까? 나중에 이 간수가 예수 믿게 될 때 간수만 아니라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고 예수 믿게 되는 것을 볼 때 이 간수는 한 가정의 가장이며 아마도 모든 수입까지도 책임 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요즈음처럼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만약 간수가 자살을 했다면 그 가족 모두 파탄을 맞게 되었을 것입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지고 나아가 죄수들을 풀어주고 자살한 비겁한 죄인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이나 받고 살게 되었겠지요. 이 얼마나 간수 자신에게나 온 가문에게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간수가 칼을 빼서 자결하려는 순간 바울이 크게 소리 지르며 말립니다. 그러자 간수는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묻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이는 “선생님들, 도대체 내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살겠습니까?” 하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울은 그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간수가 사는 방법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오직 주 예수를 믿는 것뿐이듯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도 예수 믿어야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가 아니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 점입니다. 그래서 32절부터 보면 정말 바울이 그 집에 가서 그 집 모든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간수와 함께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이 빌립보 감옥 사건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영적인 가르침을 주는 사건입니다. 첫째, 우리도 다 이 간수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이런 죄인이 예수님 믿고 구원 받는 것 외에는 살 길이 없다는 복음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둘째, 우리 기독교는 물론 ‘내가’ 구원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혼자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 온 가족이 함께 예수 믿고, 함께 구원 받고, 함께 천국 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에서, 혹은 우리 가문 전체에서 나 한 사람이 예수 믿게 된 것은 나로 인하여 온 집안이, 온 가문이 예수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 복음화, 가문 복음화의 사명입니다. 셋째, 이렇게 되기 위해 나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본문에 보면 그 집 가장인 간수가 믿으니 온 가족이 믿게 됩니다. 물론 가장의 권위로 “오늘부터 우리 집은 모두 예수 믿는다”고 선포했겠지만 아무리 가장이라도 이게 가능합니까? 더욱이 그 당시에는 이런 권위가 좀 통했을지 모르지만 요즘 같이 가장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는 더욱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가 평상시에 잘해야 합니다. 요즘 세상이 어찌 된 셈인지 남편이 믿는다고 아내가 무조건 교회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자 신앙의 자유를 존중한다며 남편은 교회 나와도 아내는 안 나오거나 성당이나 절에 다니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아내가 믿는다고 남편이 당연히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또 부모가 믿는다고 자녀가 옛날처럼 무조건 순종하고 교회 나옵니까? 아니지요. 그러니까 점점 더 가정 복음화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자유로워지고 서로를 존중한다는 구실로 가정 안에서 권위가 없어지고 기강이 해이해 지다보니 가정 복음화는 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가정 안에서 가족들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너무 중요합니다. 먼저 가장인 아버지요 남편은 한 가정의 제사장입니다. 영적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임명하신 가정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성경에서 영적 권위를 아버지에게 준 것은 남편과 아버지들이 그 가정을 영적으로 잘 이끌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가장이 바로 서서 영적으로 그 가정을 이끌어 가면 그 가정이 다 복을 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것처럼 가장이 영적으로 책임을 다하면 온 가정이, 가문이 다 복을 받지만 반대로 영적 가장이 잘못하면 온 가정의 복을 까먹게 만들고 맙니다. 얼마나 중요한 사명입니까? 또 아내와 어머니는 가정 안에서 역할이 이렇습니다. 가족들 밥해 먹이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살림 잘하고 애들 잘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아내와 어머니의 사명은 기도하는 아내,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가정 안에서 가장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뒤에서 기도로 뒷받침 해주는 아내의 영적 내조 없이는 어렵습니다. 또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 축복기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머니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기도하고 또 낳아서도 품에 안고 기도하는 그 기도가 자녀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역할은 이렇습니다. 아들과 딸뿐 아니라 사위, 며느리 모두 한 가정의 자녀로서 그 가정의 신앙의 맥을 이어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집안의 대를 잇고 신앙의 맥, 영적인 대를 이어간다고 여긴 장자뿐 아니라 모든 아들과 딸이 모두 이 영적인 대를 이어가야 합니다. 자녀가 여럿인데 그 중에 어떤 자녀는 예수 잘 믿지만 어떤 자녀는 부모 곁을 떠나 타지에 나가서 공부하거나 취직한 후에 예수 안 믿게 되었다면, 또 시집 장가 간 후에 신앙을 잃어버렸다면 부모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과연 그 가정을 정말 예수 믿는 온전한 가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집안은 그래도 장남이 믿으니 됐지, 자녀들 중 반타작은 했으니 이만하면 예수 믿는 가정이지”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위나 며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이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후 역시 과부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시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며느리들이 안쓰러워 나를 따라오지 말고 각자 살 길을 찾아 가라고 하는데 두 며느리 중에 오르바는 그렇게 했지만 룻은 말을 안 듣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룻기 1장 16절입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요즘 이런 며느리 감 있습니까? 있으면 좀 소개해 주세요. 당장 우리 며느리 삼게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요즘 며느리들 시어머니 예수 믿는다고 같이 신앙생활 잘 안 합니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 더 어렵고요. 하지만 며느리와 사위가, 또 아들과 딸 모두가 이렇게 가문의 신앙을 잘 따라주고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다면 정말 복 받은 가정입니다. 또 복 받을 가정이기도 하고요. 여러분, 우리 가정, 우리 가문, 어떻게 해야 복 받은 가정이요 가문 될까요? 부모 모두 건강하게 장수하고 자녀들 모두 성공하고 잘 사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온 가정이 다 예수 믿어 구원 받고 부모와 형제, 자녀들, 그리고 사위와 며느리까지 온 가정이 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면 이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코 쉬운 일 아닙니다. 그러기에 더 복된 일인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 가문을 위해 뿌립시다 이제 마지막으로 “온 가족 중에 나만 예수 믿는다,” 혹은 “온 가문 중에 우리 집만 교회 다닌다”는 분들 이야기를 잠시 하지요. 이런 분들 참 예수 믿기 너무 힘듭니다. 어떤 분이 제게 그럽디다. “목사님, 명절이 되어도 부모님 집에 가기 싫어요. 온 집안이 다 불교, 유교라 제사 지내야 되는데 우리 집만 예수 믿어서 제사상에 절 안 하니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형제들, 가족들하고 말을 해도 너무 안 통해서 참 힘듭니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그러면 안 됩니다. 안 만나면 편한지 모르지만 그래서는 평생 전도 못합니다. 평생 가정 복음화, 가문 복음화 불가능합니다. 힘들지만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섬기세요. 구박도 받고 눈치도 봐야 하고, 때로는 자존심 구기는 일도 있고 더럽고 치사한 꼴도 보겠지만 그럴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낮아지고 더 머리 숙이고 섬기고 더 굳은 일 앞장서서 열심히 하세요. 그래야 역사가 서서히 일어납니다. 비록 너무 힘들고 오랜 세월이 걸릴 수 있지만 이렇게 씨를 안 뿌리면 열매 없습니다. 그리고 잘 섬기고 열심히 일하는 것뿐 아니라 안 보는 데서 눈물 뿌리세요. 너무나 힘든 일이기에 더군다나 눈물의 씨를 뿌리지 않으면, 기도의 씨를 몇 동이씩 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사명감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왜냐? 온 집안에 나 혼자만 믿는다, 온 가문에 우리 집만 믿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 어떤 사명이요? 가정 복음화, 가문 복음화의 사명 말입니다. 이 사명은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나는 가족 전체와 가문 전체의 기도 후원을 받는 든든한 처지가 됩니다. 이 일이 어렵다고 못하고 시간 오래 걸린다고 못하면 평생 예수 믿어도 가족과 가문 눈치 보며 믿어야 하고 평생 내 마음에 무거운 짐을 안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해야 합니다. 사명감으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추석에 가족들 모이거든 먹고 설거지하고 또 먹고 하는 일보다, 추석 특선 TV 프로그램 보는 일보다, 고스톱 치고 수다 떠는 일보다 내 가정 위해, 내 가문 위해 함께 예배드리고, 온 가족이 함께 눈물의 씨를 뿌려봅시다. 그것이 어렵다면 가족들 안 보는 데에서라도 남몰래 눈물의 씨를 뿌립시다. 이 씨를 눈물로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것이 이번 추석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가족 구원을 위한 강청 기도/ 창18:22-33/ 추석주일설교/ 2015-09-17
가족 구원을 위한 강청 기도 창18:22-33 추석이 이제 여섯 밤 남았습니다. 어릴 때는 손꼽아 기다렸는데 요즘은 손꼽아 기다리지 않아도 금방 찾아오죠. 추석 그러면 제일 먼저 뭐가 생각이 납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이 생각이 날겁니다. 그리고 가족이 생각이 나겠지요. 이제 며칠 후면 귀향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뭐 평소에 세 시간 네 시간 가던 거리를 열 시간 스무 시간 걸려가면서까지 그렇게 극성맞게 고향집을 찾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함께 오손도손 이야기 할 수 있는 그 시간. 바로 그 시간을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것이죠. 지금 산업화의 영향으로 우리가 지금 핵가족 제도로 그저 엄마, 아빠, 나 혹은 엄마, 아빠, 나, 누나나 오빠 이렇게 세 명 네 명이 살고 있습니다만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정상적인 가족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사촌 팔촌까지 한집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 추석이 되면 아버님 손을 붙잡고 큰집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또 사방에 사촌들이 많이 몰려옵니다. 그러면 큰아버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 너희들은 한집안 식구야. 옛날 같으면 한솥밥 먹고 자랐을 사람들이야. 다투지 말고 함께 나누어 먹어라.” 그리고는 이같이 교훈 하셨습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굶어도 함께 굶고 먹어도 같이 먹는 거야 다른 사람 안주고 너만 먹으면 못쓴다.”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족을 공동 운명체라 할 때 나는 먹는데 상대방은 못 먹는다 그러면 가족이 됩니까? 그것은 가족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가족과 함께 영원히 살 소망을 가졌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온가족이 다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데 가족 중에 누가 예수를 안 믿습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영원히 이산가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중년 사나이가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더니만 의사가 병을 주면서 소변을 받아오라고 합니다. 보통 바닥에 조금 찰 정도로 받아가도 괜찮은데 이 남자는 그냥 한 통 가득 받아갔습니다. 의사가 이렇게까지 많이 가져올 필요가 없는데, 그렇지만 이왕 가져왔으니 검사해 보십시다. 검사해 보았더니만 아무 이상이 없답니다. 이상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이 사나이는 재빨리 전화를 합니다. “아무 염려 없대. 건강하대. 안심하라구.” 조금 우직하기는 합니다만 자신의 건강만 염려하지 않고 가족의 건강도 염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가 가족이 공동 운명체라면 어떻게 나만 예수 믿었다고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 중의 일부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은 내가 예수 믿게 되면 내 가족은 자동적으로 예수를 믿게 된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 개개인이 다 예수를 믿어야죠. 아들이 믿는다고 아버지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럼 왜 그렇게 말씀했겠습니까? 그건 바로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족은 함께 있는 가까운 존재입니다.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거죠. 이게 바로 복음의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가 굶고 있는 사람에게 쌀 한말을 주었다고 합시다. 가서 집안 식구끼리 나누어 먹어라. 그런데 그 사람이 나누어 먹지 않고 자기 혼자만 해 먹었습니다. 그럼 그게 가족 맞습니까? 한식구면 그럴 수는 없는 거거든요. 굶어도 함께 굶도 먹어도 함께 먹는 것이 가족이요. 한 식구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추석을 맞이하여서 온 가족이 함께 모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너와 네 집 여기서 말한 집이라는 것은 지금 말하는 핵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촌 팔촌이 함께 사는 전통적인 가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 추석에 모이는 온 친척들이 다 예수 믿어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아직까지 예수 믿지 않은 가족이 있으면 가족 구원을 위해서 강청 기도하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강청기도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바로 한 불쌍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서 밤낮 부르짖어서 마침내 소원을 이루었다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집중적인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낙심치 않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응답 될 때까지 끈기 있게 하는 불퇴진의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문제를 가지고 기도 할 때에는 기도 후에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강청기도할 때 영혼을 위해서 기도 할 때에는 그런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노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 원하기 때문에 영혼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우리 부모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강청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떤 식으로 강청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 강청기도 하여 자기 조카 롯을 구원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이죠. 데라는 아브라함과 하란 아들이 둘 있었는데 하란에게서 난 아들이 바로 롯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의 삼촌이죠. 그런데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라함이 롯도 같이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양과 소떼가 많아지고 롯도 양과 소 떼가 많아지니까 같이 있을 수가 없어요. 서로 좋은 초장을 차지하려고 종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함께 있으면 피차 불편하니까 우리 서로 떨어지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먼저 선택하라고 했을 때 버릇없는 조카 롯이 욕심을 내서 자기가 먼저 좋은 편을 택했습니다. 동쪽을 보니 물이 넉넉하고 푸른 초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롯은 동쪽을 택해서 점점 동쪽으로 가다가 마침내 소돔성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그 나그네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접을 받으시고 아브라함에게 비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소돔 고모라성이 심히 약해서 불로 그 성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바로 조카 롯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18장 22절-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롯의 문제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소돔성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롯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소돔성을 구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거기에 의인 50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 50이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혹 50이 모자랄 수도 있겠거든요. 그래서 혹 5명쯤 모자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자신이 없거든요 그래서 혹 40명쯤이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아! 그래도 내가 멸망시키지 않겠다. 그래도 자신이 없어요. 혹 30여명쯤은 어떠하기겠습니까? 30명도 괜찮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20명이 있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내가 20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한 번 더 말합니다. 열 명 있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끈질기게 조카 롯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봅니다. 이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하나님만 능력 있습니다. 여러분 가족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가족을 위해서 전도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전도해보니까 어떻습니까? 참 전도하기 어려워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어려워요.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더 쉽습니다. 이제 내 힘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어요. 하나님만이 내 남편을 구원할 수 있고 하나님만이 내 가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소망은 하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대면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방책이 있으면 좀 도와주세요 하다가 안 도와주면 다른 방책을 찾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책이 없어요. 그러면 포기할 수 없죠. 끝까지 그 사람에게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내 가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용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내 가족의 삶이 깨끗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차례 내 나름대로 노력해 왔습니다만 안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여기 ‘감히’ 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는데 조카 롯을 위해 감히라는 말을 쓰며 용기를 냈듯이 용기를 내야 합니다. 진정한 용기가 어디서 나옵니까? 진정한 용기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혼자 길을 가다가 사나운 개를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명을 지르고 도망을 치겠죠. 이 여자가 결혼하여서 사랑하는 자기 자녀와 함께 길을 가는데 개가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를 내버리고 도망치겠습니까? 그런 어머니는 안 계실 겁니다. 용기를 내서 아이를 등 뒤에 숨기고 개를 쫓아내겠죠. 어디서 용기가 나왔습니까? 바로 사랑에서 용기가 나온 것이죠. 우리가 내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내 가족을 구원해야 되겠다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강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 12절 이하에서 이같이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 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큰 근심 그리고 그치지 않는 고통이 그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골육지친을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이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는 이 말의 의미는 예수를 믿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를 안 믿으면 천국 못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죠. 내 사랑하는 가족이 지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냥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조카 롯이 불 심판을 받게 됩니다. 불과 유황불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릴 텐데 그 속에서 불탈 자기 조카 롯을 생각하니까 아브라함이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회사원이 아주 더운 지역인 앨라배마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호텔 방에 들어가자마자 자기 아내에게 이메일로 급히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급하게 편지를 쓰느라고 주소를 잘못 썼어요. 아내 이름이 Jenn인데 Jene로 잘못 써서 엉뚱한 사람에게 잘못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메일 받은 사람이 공교롭게도 남편 장례식을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온 부인입니다. 이메일이 와서 열어보니 이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여보 나는 무사히 도착했소. 그런데 이곳은 무척 뜨겁구려.” 그 소식 듣고 부인이 실신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지옥을 생각한다면 열심히 전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노방 전도하는 송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전도에 열심이 조금 식었을 때 아마 자기마음을 다짐하기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겪어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모기향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 그것을 그냥 쥐어 본 겁니다. 엄지와 검지로 빨간 모기향을 쥐고는 주여! 주여! 하며 끝까지 참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양쪽이 새까맣게 타고 콩 하나가 들어갈 만큼 구멍이 파져 있습니다. 거기에다 굵은 소금을 비벼 넣고 막 비볐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엄청난 고통이 왔습니다. 그 순간 내 사랑하는 동족아 지옥 가는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서울역 앞에서 ”예수 천당“이라고 전도한 것입니다. 이제 내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지옥 불에 빠져 가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가 그냥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책임지고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 성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강청 기도 덕분에 롯은 건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역사가 이번 추석에 일어나야겠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때문에 여러분의 불신 가족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야겠습니다. 내 가족을 위해서 누가 나보다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월드컵이 끝난 다음에 그 뒷이야기를 여성잡지에서 보았습니다. 안정환 선수가 대 이탈리아 전에서 골든 볼을 터트려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는데 그 부인이 미스코리아 출신인데 아주 예수를 잘 믿어요. 월드컵 경기 때에 금식하면서 기도했답니다. 그러다가 쓰러졌어요. 얼굴만 예쁜 줄 알았는데 예수를 참 예쁘게 믿어요. 가족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롯을 위해서 기도해줄 사람은 아브라함 밖에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불신 가정을 위해서 정말 안타깝게 기도 해줄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책임져야 되요. 끝까지 응답 받을 때까지 구원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강청기도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은 영원한 현재형입니다. “I Loved You.” 내가 당신을 사랑했었다는 이혼할 때나 하는 말입니다. “I Love You.”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기도했는데 안 됩디다. 기도는 과거형이 아닙니다. 흘러가는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번 추석에 전도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우리가 기도로 준비하십시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다름 추석과 다르지 않습니까? 태풍 ‘루사’를 겪었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고 종말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번 추석만큼 좋은 전도의 기회가 없습니다. 충분히 기도로 준비하고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주님 주시는 지혜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온가족이 천국에서 영생할 수 있는 복된 가정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진희근 목사(고양 승리교회)
가족 구원을 위한 강청 기도/ 창18:22-33/ 추석주일설교/ 2015-09-17
가족 구원을 위한 강청 기도 창18:22-33 추석이 이제 여섯 밤 남았습니다. 어릴 때는 손꼽아 기다렸는데 요즘은 손꼽아 기다리지 않아도 금방 찾아오죠. 추석 그러면 제일 먼저 뭐가 생각이 납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이 생각이 날겁니다. 그리고 가족이 생각이 나겠지요. 이제 며칠 후면 귀향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뭐 평소에 세 시간 네 시간 가던 거리를 열 시간 스무 시간 걸려가면서까지 그렇게 극성맞게 고향집을 찾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함께 오손도손 이야기 할 수 있는 그 시간. 바로 그 시간을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것이죠. 지금 산업화의 영향으로 우리가 지금 핵가족 제도로 그저 엄마, 아빠, 나 혹은 엄마, 아빠, 나, 누나나 오빠 이렇게 세 명 네 명이 살고 있습니다만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정상적인 가족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사촌 팔촌까지 한집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 추석이 되면 아버님 손을 붙잡고 큰집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고 또 사방에 사촌들이 많이 몰려옵니다. 그러면 큰아버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 너희들은 한집안 식구야. 옛날 같으면 한솥밥 먹고 자랐을 사람들이야. 다투지 말고 함께 나누어 먹어라.” 그리고는 이같이 교훈 하셨습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굶어도 함께 굶고 먹어도 같이 먹는 거야 다른 사람 안주고 너만 먹으면 못쓴다.”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가족을 공동 운명체라 할 때 나는 먹는데 상대방은 못 먹는다 그러면 가족이 됩니까? 그것은 가족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가족과 함께 영원히 살 소망을 가졌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온가족이 다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데 가족 중에 누가 예수를 안 믿습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영원히 이산가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중년 사나이가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더니만 의사가 병을 주면서 소변을 받아오라고 합니다. 보통 바닥에 조금 찰 정도로 받아가도 괜찮은데 이 남자는 그냥 한 통 가득 받아갔습니다. 의사가 이렇게까지 많이 가져올 필요가 없는데, 그렇지만 이왕 가져왔으니 검사해 보십시다. 검사해 보았더니만 아무 이상이 없답니다. 이상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이 사나이는 재빨리 전화를 합니다. “아무 염려 없대. 건강하대. 안심하라구.” 조금 우직하기는 합니다만 자신의 건강만 염려하지 않고 가족의 건강도 염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가 가족이 공동 운명체라면 어떻게 나만 예수 믿었다고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 중의 일부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은 내가 예수 믿게 되면 내 가족은 자동적으로 예수를 믿게 된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 개개인이 다 예수를 믿어야죠. 아들이 믿는다고 아버지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럼 왜 그렇게 말씀했겠습니까? 그건 바로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족은 함께 있는 가까운 존재입니다.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거죠. 이게 바로 복음의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가 굶고 있는 사람에게 쌀 한말을 주었다고 합시다. 가서 집안 식구끼리 나누어 먹어라. 그런데 그 사람이 나누어 먹지 않고 자기 혼자만 해 먹었습니다. 그럼 그게 가족 맞습니까? 한식구면 그럴 수는 없는 거거든요. 굶어도 함께 굶도 먹어도 함께 먹는 것이 가족이요. 한 식구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추석을 맞이하여서 온 가족이 함께 모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너와 네 집 여기서 말한 집이라는 것은 지금 말하는 핵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촌 팔촌이 함께 사는 전통적인 가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 추석에 모이는 온 친척들이 다 예수 믿어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 아직까지 예수 믿지 않은 가족이 있으면 가족 구원을 위해서 강청 기도하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강청기도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바로 한 불쌍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서 밤낮 부르짖어서 마침내 소원을 이루었다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집중적인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낙심치 않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응답 될 때까지 끈기 있게 하는 불퇴진의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문제를 가지고 기도 할 때에는 기도 후에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강청기도할 때 영혼을 위해서 기도 할 때에는 그런 기도가 필요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노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 원하기 때문에 영혼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우리 부모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강청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어떤 식으로 강청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 강청기도 하여 자기 조카 롯을 구원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이죠. 데라는 아브라함과 하란 아들이 둘 있었는데 하란에게서 난 아들이 바로 롯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의 삼촌이죠. 그런데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라함이 롯도 같이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양과 소떼가 많아지고 롯도 양과 소 떼가 많아지니까 같이 있을 수가 없어요. 서로 좋은 초장을 차지하려고 종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함께 있으면 피차 불편하니까 우리 서로 떨어지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먼저 선택하라고 했을 때 버릇없는 조카 롯이 욕심을 내서 자기가 먼저 좋은 편을 택했습니다. 동쪽을 보니 물이 넉넉하고 푸른 초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롯은 동쪽을 택해서 점점 동쪽으로 가다가 마침내 소돔성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했는데 그 나그네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접을 받으시고 아브라함에게 비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소돔 고모라성이 심히 약해서 불로 그 성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바로 조카 롯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18장 22절-2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롯의 문제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소돔성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롯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소돔성을 구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거기에 의인 50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 50이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혹 50이 모자랄 수도 있겠거든요. 그래서 혹 5명쯤 모자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자신이 없거든요 그래서 혹 40명쯤이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아! 그래도 내가 멸망시키지 않겠다. 그래도 자신이 없어요. 혹 30여명쯤은 어떠하기겠습니까? 30명도 괜찮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20명이 있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내가 20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한 번 더 말합니다. 열 명 있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끈질기게 조카 롯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봅니다. 이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하나님만 능력 있습니다. 여러분 가족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가족을 위해서 전도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전도해보니까 어떻습니까? 참 전도하기 어려워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어려워요.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더 쉽습니다. 이제 내 힘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어요. 하나님만이 내 남편을 구원할 수 있고 하나님만이 내 가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소망은 하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대면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방책이 있으면 좀 도와주세요 하다가 안 도와주면 다른 방책을 찾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책이 없어요. 그러면 포기할 수 없죠. 끝까지 그 사람에게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내 가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용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내 가족의 삶이 깨끗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차례 내 나름대로 노력해 왔습니다만 안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여기 ‘감히’ 라는 말을 두 번이나 했는데 조카 롯을 위해 감히라는 말을 쓰며 용기를 냈듯이 용기를 내야 합니다. 진정한 용기가 어디서 나옵니까? 진정한 용기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혼자 길을 가다가 사나운 개를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명을 지르고 도망을 치겠죠. 이 여자가 결혼하여서 사랑하는 자기 자녀와 함께 길을 가는데 개가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를 내버리고 도망치겠습니까? 그런 어머니는 안 계실 겁니다. 용기를 내서 아이를 등 뒤에 숨기고 개를 쫓아내겠죠. 어디서 용기가 나왔습니까? 바로 사랑에서 용기가 나온 것이죠. 우리가 내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내 가족을 구원해야 되겠다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강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 12절 이하에서 이같이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 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큰 근심 그리고 그치지 않는 고통이 그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골육지친을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 이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는 이 말의 의미는 예수를 믿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를 안 믿으면 천국 못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죠. 내 사랑하는 가족이 지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냥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조카 롯이 불 심판을 받게 됩니다. 불과 유황불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릴 텐데 그 속에서 불탈 자기 조카 롯을 생각하니까 아브라함이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회사원이 아주 더운 지역인 앨라배마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호텔 방에 들어가자마자 자기 아내에게 이메일로 급히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급하게 편지를 쓰느라고 주소를 잘못 썼어요. 아내 이름이 Jenn인데 Jene로 잘못 써서 엉뚱한 사람에게 잘못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메일 받은 사람이 공교롭게도 남편 장례식을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온 부인입니다. 이메일이 와서 열어보니 이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여보 나는 무사히 도착했소. 그런데 이곳은 무척 뜨겁구려.” 그 소식 듣고 부인이 실신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지옥을 생각한다면 열심히 전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노방 전도하는 송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전도에 열심이 조금 식었을 때 아마 자기마음을 다짐하기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겪어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모기향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 그것을 그냥 쥐어 본 겁니다. 엄지와 검지로 빨간 모기향을 쥐고는 주여! 주여! 하며 끝까지 참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양쪽이 새까맣게 타고 콩 하나가 들어갈 만큼 구멍이 파져 있습니다. 거기에다 굵은 소금을 비벼 넣고 막 비볐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엄청난 고통이 왔습니다. 그 순간 내 사랑하는 동족아 지옥 가는 것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서울역 앞에서 ”예수 천당“이라고 전도한 것입니다. 이제 내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지옥 불에 빠져 가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가 그냥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책임지고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 성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강청 기도 덕분에 롯은 건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역사가 이번 추석에 일어나야겠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때문에 여러분의 불신 가족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야겠습니다. 내 가족을 위해서 누가 나보다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월드컵이 끝난 다음에 그 뒷이야기를 여성잡지에서 보았습니다. 안정환 선수가 대 이탈리아 전에서 골든 볼을 터트려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는데 그 부인이 미스코리아 출신인데 아주 예수를 잘 믿어요. 월드컵 경기 때에 금식하면서 기도했답니다. 그러다가 쓰러졌어요. 얼굴만 예쁜 줄 알았는데 예수를 참 예쁘게 믿어요. 가족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롯을 위해서 기도해줄 사람은 아브라함 밖에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불신 가정을 위해서 정말 안타깝게 기도 해줄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책임져야 되요. 끝까지 응답 받을 때까지 구원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강청기도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사랑은 영원한 현재형입니다. “I Loved You.” 내가 당신을 사랑했었다는 이혼할 때나 하는 말입니다. “I Love You.”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기도했는데 안 됩디다. 기도는 과거형이 아닙니다. 흘러가는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번 추석에 전도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우리가 기도로 준비하십시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다름 추석과 다르지 않습니까? 태풍 ‘루사’를 겪었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고 종말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번 추석만큼 좋은 전도의 기회가 없습니다. 충분히 기도로 준비하고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주님 주시는 지혜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온가족이 천국에서 영생할 수 있는 복된 가정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진희근 목사(고양 승리교회)
가족들이 모여 감사하는 추석이 된다면/ 시50:23/ 추석주일설교/ 2005-09-23
가족들이 모여 감사하는 추석이 된다면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편 23절 말씀 크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염려거리, 근심, 걱정거리 많은 인생살이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고, 우리 자녀들이 잘 되는 것 보며 기뻐하십니다. 복된 주일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 기뻐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 가운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들을 불러놓고 축복을 해줍니다. 그런데 이 축복이 그냥 희망사항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어지더라! 아멘! 우리 가정과 자녀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잘 되는 길이 있다면 날마다 시간마다 자녀를 가슴에 부둥켜안고 축복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축복이 우리 가정과 자녀들의 앞날에 복의 열매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눈으로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간증거리가 생겨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일어나는 역사들이 귀한 간증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영광 받으시는 가정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여호와 나의 목자 내게 부족 없네 이번 주간이 추석입니다.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만나게 되고, 서로 정을 나누게 될 것인데, 늘 생각해도 지난날은 아쉽더라는 거예요. 생각한대로 잘 되어진 일들이 있는가 하면 잘 안 되어진 일들 때문에 후회되는 일들이 있더라는 거예요. 아무리 아쉬워도 지난날은 돌릴 수가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은 어쩔 수 없더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앞날이더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날들보다 앞으로 주어진 인생을 잘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될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이 결심한다고, 어금니를 문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의 결심과 애쓰는 것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고, 돌보심이 함께 하셔서 열매가 나타나고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이 우리에게 새로운 결심과 새로운 출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결심과 다짐마다 하나님께서 크게 복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걸어가는 앞날에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놀랄만한 믿음의 증거와 열매들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점점 나아져 가는 복된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술 마시던 사람이 술을 끊고, 잘못된 습관을 고치고, 윤리적으로 이전보다 나은 사람 된다고 근본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사람 되고, 착한 사람 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 되는 것이 유교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유교가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 우리민족은 가난과 저주로 불쌍하게 살던 나라였습니다. 사람의 문제는 윤리나 도덕으로 해결 할 수 없다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열고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잘 되고 싶은 마음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심한다고, 어금니를 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축복하셔야 됨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축복의 바른 길을 깨달을 뿐 아니라 그 길로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무엇보다 명절을 지내면서 우리 마음속에 감사를 회복할 수 있다면 더 큰 복이 임하는 명절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구약에서의 제사는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입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또 감사로 예배로 드리면 주께서 구원을 보이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는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세상의 역사를 손에 쥐고 계시는 크신 하나님이에요. 이런 하나님 앞에 감사를 회복하므로 더욱 사랑받는 복된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 축복받는 믿음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마음 잘 쓰면 축복입니다. 마음 잘 쓰면 생각한 것 이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정원에는 잡초가 나기도 하고 좋은 화초가 자라기도 하는데, 잡초는 심지 않아도 잘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라더라는 거예요. 잡초와 좋은 화초가 함께 있으면 어느 사이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화초는 시들시들 해집니다.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정원을 가꾸는 일이에요. 부지런히 김을 매서 잡초를 제거해 주어야 좋은 정원 되는 거예요.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같이합니다. “마음 잘 쓰면 축복입니다. 마음 잘 쓰면 생각한 것 이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교회 다닌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달라요.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게 될 때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힘겨운 환경 속에서도 여유가 생깁니다. 두려움이 없어져요. 담대해 집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보장하시기 때문이에요. 인생의 모든 것이 결국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스케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 회복하면 여유가 생깁니다. 남들처럼 많은 것을 남기지 못하고 행하지 못해도 낙심할 필요가 없어요. 자존심 상해할 것 없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성민으로 택하셨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을 꼭 지키시는 하나님! 이루시는 하나님! 성취하시는 하나님! 내게 믿음만 있다면 이미 우리는 앞날을 하나님께 보장받은 인생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순한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더라! 아멘! 나만이 아니라 가정과 자녀와 후손까지 잘 되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먼저 함께 있는 부모님과 가족들을 향한 감사가 회복될 수 있다면 더욱 복된 가정이 됩니다. 흔히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라고 합니다. 부모나 조상을 향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지요. 그러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부모나 조상에게 전혀 효가 되지 못합니다. 그 음식을 부모나 조상이 먹지도 못하고, 정성을 받지도 못합니다. 참된 효도는 무엇이냐? 많은 사람들이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명목으로 죽은 조상들을 위해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효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문제입니다. 효도는 부모님 살아계실 때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에게 아무리 천 번 만 번 제사를 잘 지내면 무엇 합니까? 부모님이 오셔서 떡을 잡수십니까, 물 한 잔을 드시기라도 하십니까? 이 세상을 떠난 조상들에게 제사하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 믿기 전에 조상들에게 제사 지내온 사람들이 갑자기 제사를 안 지내니 허전하고 뭔가 섭섭한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 날에 맞추어 음식을 준비하고 대신 추모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추모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좋고, 온 가족이 모여 찬송을 하고 말씀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의미 있는 추모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고인의 유훈을 되새기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습니다. 또한 남아있는 어른들에게 효도하기로 결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는 효도할 길이 없으므로 이제 남아 있는 분에게 갑절의 효도를 하기로 결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형제간에 우애 있게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님께 용돈을 많이 드리고 효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형제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울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좋은 음식이라도 편하게 드실 수가 없어요.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도우며 우애 있게 사는 것이 정말 효도입니다. 무엇보다 신앙생활을 잘하기로 결심하는 시간이 된다면 더욱 행복한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우상을 섬기면 망하게 됩니다. 지나온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믿음이 좋은 왕들은 언제나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축복을 받고 나라가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왕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종교를 따라 우상을 섬기므로 해서 저주를 받고 고통을 많이 당했습니다. 자기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함께 고통을 겪게 되더라는 거예요. 우상 숭배는 함께 망하게 합니다. 주님을 잘 섬기는 복된 가정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가까운 사이일수록 감사의 표현이 있으면 좋습니다. 부부간에도 서로서로 감사하면 행복한 가정되어지고, 형제와 자매간에도 서로 감사할 제목을 찾아 보아야 합니다. 혼자 있으면 편합니다. 신경 쓸 것도 없고, 부담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때로 부담이 되고, 염려거리가 되는 형제라도 있는 것이 더 나아요. 감사의 제목을 찾아서라도 서로 서로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감사하며 살면 좋은 줄 모릅니까? 감사하고 싶어도 감사할 수 없는 여건,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가족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정의 행복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행복은 만들어 나가는 거예요. 한집은 싸움 소리가 그치지 않고, 한 집은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집이 있었는데, 싸움 소리가 그치지 않는 집에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집에 물어 보았더니, “아! 그것은 간단합니다. 우리 집에는 나쁜 사람만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령 내가 방 한 가운데 있는 물그릇을 모르고 엎질렀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내는 ‘제가 그곳에 물그릇을 놓아두었으니 제 탓이에요’라고 하면, 어머니는 ‘아니다. 나잇살 먹은 내가 보고도 치우지 못했으니 내 탓이다’하십니다. 모두가 자진해서 나쁜 사람이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답니다.”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고 하면 어떤 경우에도 과거의 실수를 들추어 내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라도 원망하지 말고, 받은 축복을 헤아려 보는 것이 더욱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닌 것이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작은 한 마디 때문에 증폭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의 일인데, 중년 부부들이 야유회를 가게 되었는데,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다음에 아내가 나타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편이 아내의 사연을 들어 보지도 않고, 친구 부부가 있는 앞에서 “이런 여편네를 마누라라고 데리고 사는 내가 한심한 놈”이라며 아내를 크게 꾸짖었습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 온 아내는 말없이 집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부 싸움을 하더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될 말들이 몇 가지 있는데, “능력 없는 남자”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리는 능력 없는 남자라는 말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갈라서자, 이혼하자” 이런 말도 나중에 사과하고, 화해했더라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고 남아서 괴롭히는 말 중에 하나입니다. “집에서 놀면서 그것도 못해”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표가 안나 는 것이 집안일이에요. 온갖 잡다한 집안일, 애먹이는 아이들, 하루 종일 씨름하다가 이 말을 들을 때의 아내의 마음은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남편들이 잘 몰라요. “아무래도 우리 잘못 결혼 것 같아” 장난으로라도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특별히 아내가 조심해야 할 말 가운데 하나는 “돈 돈 돈, 그 놈의 돈 때문에” 이것은 환경이나 돈을 원망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남편의 무능력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듣는 남편은 심각해집니다. 치유하기 힘든 좌절감을 맛보게 되는 거예요. 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열등감에 빠져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부부간 뿐 아니라 부모가 되기는 쉽지만 제대로 된 부모 노릇하기는 참 어려운 때입니다. 인생은 1-2년 1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더라는 거예요. 위대한 사람의 뒤에는 반드시 위대한 부모가 있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위대성을 기른 것은 대체로 어머니들이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어머니에게 달려있다고까지 말한 것입니다. 자녀들의 형성은 환경을 보고도 배우지만 가정에서 부모에게서 직간접으로 배운 것입니다. 엄마들은 툭하면 “저 얘는 지 아빠를 닮아서...” 아이의 단점을 아빠에게로 돌립니다. 사실 알고 보면 대 부분의 책임이 엄마에게 있어요. 자녀의 성격형성의 하나하나는 엄마의 살아가는 모습 하나 하나가 영향을 끼친 것이더라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안 가르쳤어요.” 그렇게 안 가르쳤어요. 그러나 그렇게 보여 준 경우가 많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늘 근심 어린 얼굴을 보여주면 아이도 어느새 근심 걱정이 많은 표정이 되어버립니다. 표정뿐 아니라, 행동을 닮아가게 되어있어요. 물론 단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장점이 단점을 가리게 되어 있어요. 단점을 탓하지 말고, 장점을 살려 나가면 됩니다. 부모의 본이 자녀들에게 평생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은 아들 3형제를 길러 모두 대학교수가 되었는데, 장로님과 자녀들 가정이 모일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 아들이 어릴 때인데, 아버지가 운전하고 어머니가 옆에 타고 아들 셋이 뒤에 타고 시골길을 달릴 때 오른편에 넓은 깨밭이 있더라는 거예요. 어머니가 말하기를 “여보! 잠깐만 차를 세워요. 깻잎 좀 따 가지고 가서 된장에 넣어 먹읍시다.” 차를 멈추고 5명이 깨밭에 들어가서 순식간에 깻잎을 딴 후 가려고 할 때 아버지가 모두를 세우고 말했습니다. “남이 농사지은 깨에서 잎을 따 가는 것은 도둑질이다. 사가야 한다.” 그러면서 지갑을 꺼내더니 1000원짜리 한 장을 둘둘 말아 깨 나무에 붙들어 매 놓고는 가자고 하더라는 거예요. 세 아들의 머릿속엔 평생 깨나무에 매달린 1000원짜리가 떠나지 않았더라! 그 이후로 모두가 아버지처럼 정직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부모의 배려는 자녀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일평생을 좌우하기도 해요. 고든 박사가 잊을 수 없는 회고담을 썼는데, 자기가 14살이고, 동생이 11살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가 서커스에 데리고 가겠다고 해서 모두들 좋아합니다. 그때 전화가 걸려 왔는데, 사업상 중요한 의논이 있으니 곧 나와 달라는 거예요. 어머니가 “중요한 일이니 나가 보세요. 서커스는 또 올 거예요” 아이들이 실망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말하기를 “서커스는 또 오지만 저 아이들의 소년시절은 다시 오지 않아요. 사업도 중요하지만 아이들과의 약속은 지켜야지” 이 말에 중학생이었지만 얼마나 기쁨과 감동을 받았던지, 어른이 될 때까지 그 아버지의 사랑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작은 일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부모의 교훈은 평생 가더라! 자녀에게 좋은 생각, 좋은 습관, 좋은 믿음을 물려주는 복된 부모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을 향하여도 감사하는 자에게 주님은 더 많은 것으로 채우시고, 갚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다 그림자 같은 것이고, 우리의 사는 날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솔로몬 왕은 인생의 헛됨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려 보았어요. 먹고 싶은 것 다 먹어보고,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져보고,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려보았더니 결론은 아무것도 아니더라! 왔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더라!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해요.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차를 바꾼다고 인생이 달라집니까? 넓은 집 들어가 살면 인생이 달라집니까? 우리가 앉는 자리가 좀 높아진다고 인생에 성공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시 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주님으로 만족하며 사는 복된 가정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안에서 행복한 삶 사시는 복된 가정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중고를 겪었던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사람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라. 마치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사람처럼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도록 하라. 마치 내일이면 아무것도 만질 수 없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만지며 즐기도록 하라”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생각하기에 따라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소중한 것들입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 가족들, 주변 사람들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하면 나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고, 내 주변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가 행복해지고, 내 삶이 의미가 있어집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행복이 오고, 복이 임합니다. 같이 인사합시다. “감사한 만큼 행복해집니다. 감사한 만큼 기쁨이 옵니다” 믿음과 감사로 우리 인생을 살맛나는 인생으로 바꾸어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삼하9:1-8/ 추석주일설교/ 2015-09-17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삼하9:1-8 내일이 추석입니다. 얼마나 좋은 명절입니까? 객지로 나간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함께 기뻐하고 교제할 수 있는 날입니다. 한 해 동안 풍성한 결실을 나누는 풍요로운 명절입니다. 얼마나 좋은 명절입니까? 좋은 추석명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은 거룩한 주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립니다. 주님의 날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세상의 어느 명절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명절이 좋고 특별한 날이라 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을 따라 올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셨습니다. 지옥의 형벌 받을 자리에서 천국의 영생복락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앞으로도 우리를 천국까지 인도하실 분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편).” 그리고 하나님은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한해 농사의 결실을 감사하지만, 그 농사의 결실을 주신 분을 알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풍요로운 결실을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감사하지만 우리는 천지만물이 주인이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돌립니다. 1.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푼 은총 다윗이 요나단을 인하여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합니다.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자가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1절).” 1) 다윗은 언제 은총을 베풀고자 합니까?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다윗이 즉위한지 20년쯤으로 생각합니다. 블레셋과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 왕이 전사하고 20년이 지난 때입니다. 그동안 다윗은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는 전쟁에 몰두했습니다. 이제는 나라가 안정되어 한숨을 돌릴 만한 기반이 마련된 때입니다. 다윗은 지난날 자신이 요나단에게 받은 은혜를 기억했고, 요나단과의 약속을 이행할 때가 된 것입니다. 2) 다윗은 누구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합니까? 사울의 집의 남은 자입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은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과연 남은 자가 누구입니까? 사울왕의 종이었던 시바를 통해 수소문 한 결과 마길의 집에 살고 있는 요나단의 아들이요 사울왕의 손자인 므비보셋이 살아 있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 왕과 이스라엘이 길보아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모가 급히 안고 도망가다가 떨어뜨려서 두 발이 절뚝발이가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일입니다. 3)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무슨 은총을 베풀었습니까? 7절에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므비보셋은 두려웠습니다. 한 왕국이 망하고 다른 왕국이 세워지면 이전 왕국의 모든 핏줄은 다 멸절시키는 것이 예사입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다윗이 자기를 찾을 때 죽을 줄로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살려 주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난날 므비보셋의 아버지 요나단이 목숨을 걸고 다윗을 살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미워해서 죽이려 했지만, 요나단은 왕자로 왕위 계승권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다윗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왕의 밭을 다시 회복해 주었습니다. 당시 사울왕의 종 시바가 그 밭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시바로서는 큰 재산상의 손실이지만 므비보셋에게는 죽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한데 재산까지 회복한 것입니다. 나아가서 다윗은 므비보셋을 왕자와 같이 대우해서 다윗 왕과 함께 상에서 먹도록 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큰 사랑이고 호의입니다. 4)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푼 모든 은총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윗은 지난날 받은 은총을 갚는 것이고, 지난날 행한 약속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넉넉함과 신실성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그런데 이 은총은 다윗의 인간적인 면모로 그치지 않습니다. 다윗은 3절에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리라”고 합니다. 자신이 베푸는 은총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입니다. 인간 다윗의 성품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에 베푸는 은총입니다. 신앙 때문에 베푸는 은총입니다. 은총이라는 말은 언약적인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지난날 다윗은 요나단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요나단과 언약한 바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푼 은총은 영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 때문에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은혜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죽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하시기로 언약하셨습니다. 므비보셋이 은총을 입은 것과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입은 은총이 무엇입니까? 밭을 회복하고 식탁에서 먹는 은총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멸망당하고 죽을 자가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하나님의 친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영으로만 교제하지만, 장차 천국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3-4).” 고난당하는 욥을 아십니까? 욥의 자녀 열 명이 죽고 재산을 약탈당하고 명예를 잃었습니다. 친구도 아내도 욥을 죄인 취급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나님이 욥을 곤경에서 돌이키시고 잃었던 모든 것을 갑절로 회복했습니다. 욥이 회복한 것처럼, 므비보셋이 회복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감당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총을 입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은총을 입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므비보셋은 처음에 다윗왕의 부름을 받았을 때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염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지난날처럼 두려워하거나 염려하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요셉을 노예로 판 형들은 요셉을 두려워했습니다. 괜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아무리 천둥과 번개가 치고 풍랑이 크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곧 잠잠케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8:34절).”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절).”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시23:4절)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은 돈에 매수되어서 이스라엘을 백성을 감히 저주하기 위해 손을 들었지만 저주하는 하지 못하고 축복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한 자를 누가 저주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없습니다. 2) 은총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왕의 호의를 받고 감격했습니다.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8절).” 여기서 비교되는 것이 있습니다. 왕과 개입니다. 왕은 존귀한 자의 상징입니다. 개는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에게는 천하고 부정한 것입니다. 더구나 산 개도 아니고 죽은 개는 전혀 돌아볼 가치가 없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본문은 므비보셋이 절뚝발이라고 거듭 밝힙니다. 3절에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13절에도 “그는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육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왕에게 은총을 입은 감격을 어찌 형언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입니다. 죽은 개보다 못하고 절뚝발이 보다 못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입은 은총으로 얼마나 감격해야 할지 모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도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남다른 감격이 있었습니다. 죄인의 괴수인 나에게, 혹은 만삭되지 못한 나에게 어찌하여 사도의 직분을 맡기시고 이방인을 위해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까? 중국에서 온 사랑방 선교 편지을 잠간 소개합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내가 뭐 잘나서 이렇게 살고 저들은 저렇게 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낍니다(임채석 중국 선교사).” 선교사와 탈북자가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선교사님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격을 잃지 맙시다. 3)끝까지 겸손함으로 은총을 간직해야 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절).” 삼하16장에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당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길에 오릅니다. 이 때 사울왕의 종으로 므비보셋을 섬기던 시바가 다윗에게 나아옵니다.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삼하16:1절).” 그런데 시바가 므비보셋을 참소합니다. “왕이 가로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뇨 시바가 왕께 고하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삼하16:3절).” 므비보셋이 다윗을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므비보셋을 역적으로 만들어서 재산을 가로채려는 흉계였습니다. 은총을 빼앗아 가는 도둑은 교만입니다. “내가 이만큼 살만 하다. 내가 이만큼 일했다. 내가 이만큼 성장했다.” 이런 것들이 다 교만입니다. 반역이고 불순종입니다. 이것이 은총을 빼앗아 가는 도둑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고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립시다. 은총으로 시작해서 은총으로 끝나야 합니다.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습니다. 사울왕이 이스라엘의 처음 왕으로 세움을 받았는데 왜 은총을 박탈당했습니까? 불순종과 거역입니다. 처음에는 왕으로 뽑히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수레 밑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난 후에는 이런 저런 핑계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하셨고 사울왕은 버렸습니다. 우리 신앙의 큰 물줄기가 어디로 가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십자가 아래,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나아갑시다. 은혜에 이르는 첫걸음은 나에게 은혜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은혜를 소유한 첫걸음은 더 큰 은혜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 잊어버리고 다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은혜로 구원받았고, 지금까지 은혜로 살았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은혜의 도가니 속에서 다시 정금같이 새롭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 추석설교
감사 추석설교 2007-04-01 04:09:38 read : 361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올해에도 어김없이 추석이 찾아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인척들로 각 가정마다 웃음꽃이 핍니다. 또한 원근 각처에서 찾아온 성도들의 가족들로 인해 주일에는 교회에도 새로운 얼굴들이 보입니다. 믿음의 가정들은 성묘를 통해 가족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추석을 맞이하여 주일 예배와 성묘 예배를 위해 몇 편의 설교를 요약 게재합니다. 이번 추석이 믿음을 더욱 새롭게 다지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1. 제목: 온전한 감사 성구: 하박국 3장 16절-19절 찬송: 305장 추석(중추절)의 의미는 한 해 동안 농사한 곡식과 과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감사라고 하는 단어는 생소한 단어가 아닙니다.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요, 단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감사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고 혹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온전한 감사가 무엇인지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하박국 선지자는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까? 그 당시 상황을 보면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바벨론 대 제국이 유다를 침략하는 시대입니다. 즉, 바벨론의 침략으로 유다가 멸망당하는 공포와 두려운 상황 속에도 불구하고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온전히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앙인의 참 감사가 무엇인가를 역력히 보여주는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들의 신앙체질은 너무 허약하고 미숙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뜨거운 감사가 없습니다. 행여 감사할지라도 너무 감정적이고,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박국 선지자는 고난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온전한 감사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환난 가운데 드리는 감사 본문 16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가올 환난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우면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으며, 내 몸의 처소가 떨린다고 고백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그런 환란을 눈 앞에 두고도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환란 가운데서 드리는 감사, 찬양, 이것이 온전한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한 소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로 인해 걷지 못하고 언제나 휄체어에 의지하는 한 소녀가 늘 기쁘고 맑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밝게 살 수 있나요? 그러자 그 소녀가 말했습니다. “비록 제가 걷지는 못하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음을 감사하고,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 감사하고, 아빠,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걷지는 못해도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비록 걷지 못하는 불구의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모습, 우리에게 도전을 주지 않습니까? 환난 가운데 찬양과 감사를 돌리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없음에도 드리는 감사 본문 17절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먹을 것도, 양식도, 사업장도 모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생으로 비유하자면 철저하게 부서진 인생을 의미합니다. 가정으로 표현한다면 풍비박산된 가정이라고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정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성공하고 풍성한 가운데는 쉽게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없는 고난 가운데 감사하며 살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감사는 비록 가진 것이 없을 지라도, 즉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드리는 감사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0명이 다 고침을 받았으나 9명은 그냥 가고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께 감사했다는 내용입니다. 그중 16절을 보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한 명의 문둥병자가 무엇을 가지고 와서 사례했겠습니까? 금은보화를 가지고 와서 사례했을까요? 아니요. 눈물과 진심으로 사례하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록 가진 것은 없지만, 아무 것도 없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드리는 감사가 온전한 감사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 마지막으로 온전한 감사는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며 사는 인생입니다. 18절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하박국 선지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두려움과 무서움이지만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신앙으로 인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그 은혜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한 번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나의 힘,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온전히 감사하는 가정이 되길 소원합니다. 온전한 감사는 구원의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 구원을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중추절)을 맞이해서 풍성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인생에 환난이 닥쳐와도, 비록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손길을 바라보며 온전한 감사를 할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제목: 감사하자 성구: 마태복음 18장 15-20 찬송: 78장, 313장 오늘은 즐거운 민속 명절인 추석입니다. 이렇게 모여 예배하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할아버지나 할머니 등 어른들이 아이들을 버릇없이 만든다는 통설이 있지만 어른들이 계시고 가족이 있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커다란 울타리 역할을 해줍니다. 더구나 이렇게 믿음을 갖고 둘러 앉아 예배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요.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큰 은혜주시길 사모합니다. 아주 맑은 연못에 개구리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구리들은 늘 평범한 삶에 지루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간구했습니다. “저희들에게 좋은 선물을 보내 주세요” 하늘은 연못에 커다란 통나무를 던져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개구리들은 통나무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통나무 주변에는 애벌레, 정벌레, 지렁이들이 모여 살게 되어 맛있는 먹이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구리들은 몇 달이 지나자 시들해졌습니다. 그 동안 맛있게 먹은 벌레들에 싫증을 느낀 것입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통나무에 대해 불만을 품고는 그래서 다시 하늘을 향해 빌었습니다. “좀더 멋있는 선물을 주세요” 그러자 하늘은 연못에 식욕이 왕성한 큰 뱀을 던져 주었습니다. 개구리들은 멋도 모르고 물뱀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부터 물뱀은 개구리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습니다. 몇 달 후, 연못에는 단 한 마리의 개구리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에 곧장 실증을 느끼고 늘 새로운 것을 찾곤 합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는 삶은 금방 싫증나고 불행이 닥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은 교회에서 설교할 때나 기도하실 때마다 날씨를 주제로 늘 감사했답니다. 좋은 날은 당연히 감사하고 비오는 날이나 바람부는 날에도 여전히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는 눈보라가 마구 달려드는 악천후 기후였습니다. 그런 날은 성도들도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결석하기도 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은 이런 날씨에도 과연 우리 목사님이 감사기도를 하는지에 대해 궁금했습니다. 그날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이런 험한 날씨는 오늘만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도들은 모두 “아멘”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어느 날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서 감사할 이유를 몇 가지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로 기도할 수 있음에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어려운 때가 꼭 있습니다. 나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때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답답하고 막막하고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옵니다. 그럴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절망하거나 크게 낙심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신세타령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가 있음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경험하십니까?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18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땅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음을 감사합시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분명히 도우십니다. 늘 감사하기 바랍니다. 둘째로 함께하는 사람들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19절의 중요한 키워드(Key word)는 ‘합심’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이 이루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함께하는 가족을 주셨습니다. 함께하는 성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친구와 동역자도 주셨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을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로 주께서 함께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20절은 바로 ‘임마누엘’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사실은 주께서 함께하셨기에 그 동안 잘 지냈습니다. 때로 어려울 때는 혼자인 줄 알았지만 결국 하나님이 도우셨기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주변에 권력있는 사람, 넉넉한 부자, 무엇인가 힘 있는 사람, 어느 기과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이 함께해 주는 것도 때론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나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진정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이 시간 기도하게 하심에 감사합시다. 내 주변에 가족과 친구와 동역자 주셨음을 감사합시다. 임마누엘로 주님이 언제나 함께하심을 믿고 감사합시다. 좋은 명절이 될 줄 믿습니다. 3. 제목: 노아의 예배 성구: 창세기 8장 20- 9장 2절 찬송: 278장, 34장 아프리카 밀림에서 가장 강한 동물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개미입니다. 개미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면 그 길이가 무려 2-3킬로미터나 됩니다. 밀림의 맹수들도 개미 떼를 발견하면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숲으로 도망한다고 맙니다. 물론 몸집이 가장 크다는 동물인 코끼리도 겁을 먹습니다. 그런가 하면 밀림의왕이라는 사자도 개미가 이동하는 반대 방향으로 쏜살같이 도망한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개미를 무서워할까요? 잘못 걸리면 영락없이 놈들의 밥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수십만 마리의 개미가 동물의 몸에 붙어 살을 뜯어 먹으면 그것을 견딜 동물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맹수들이 개미를 두려워하는 것은 개미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개미의 무서운 협동심 때문입니다. 개미는 지극히 작은 벌레 불과하지만 수십만 마리가 힘을 합쳐 코끼리를 공격하면 단 하루만에 앙상한 뼈만 남는다고 합니다. 협동심은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하나님이 가족들을 주신 것은 가족 간에 서로 협력하여 삶의 위협적인 맹수들을 물리치라는 섭리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협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도 이기고 고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추석을 맞아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는 이 귀한 시간 우리 모두 협력하고 도우며 살기를 결심합시다. 오늘 성경의 인물은 노아입니다. 홍수 심판을 겨우 빠져 나온 노아의 가정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택해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노아의 감사예배를 받으시고 그 가족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노아처럼 일년 동안 열심히 살다가 추석 명절을 맞아 감사하며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가정처럼 복을 주실 것입니다. 첫째로 노아의 가정은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방주를 만들 때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주를 다 지은 다음 가족들 모두 함께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방주에 나와서도 함께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9:1에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가족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배를 드리도록 기도합시다. 둘째로 노아의 가정은 하나님께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예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전에 하던 습관대로 정성껏 제물을 드렸습니다. 노아의 가족이 홍수 심판을 견디고 나와 자신들을 위해 할 일도 많았을 것이고, 궁금한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전에 살던 집은 어찌 되었을까? 예전에 알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까? 등 관심이 많았을 텐데 이들은 오직 하나님께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는 가정에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6:34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항상 예배를 먼저 드리는 가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셋째로 노아의 가정은 제물을 정성껏 드렸습니다(20절). 정성을 다해 드린 예물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그 홍수 심판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 제물들을 하나님은 흠향하셨다고 합니다. 구약시대이므로 짐승으로 제무을 드린 것입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즉 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모두 드립시다. 하나님이 받으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넷째로 감사예배를 드린 노아의 가정에 복을 주셨습니다(9:1). 노아의 가정이 예배를 잘 드렸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매우 엄격했습니다. 제사를 잘못 드리다 죽은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제사장이라도 잘못 제사를 드리면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형식적으로나 외식적으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잘 드린 가정은 복을 받음을 믿고 우리 가정들은 언제나 예배를 정성껏드려 복을 받기 바랍니다. 이 추석날 모여 예배드리는 우리 가족 모두는 노아의 가정처럼 언제나 예배가 우선되기 바랍니다. 온 가족인 빠짐없이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해야 하겠습니다. 항상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는 노아 가정처럼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4. 제목: 인생은 무엇인가? 성구: 욥기 7장 1-10절 찬송: 326, 363장 유명한 작가인 헤르만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이란 책을 보면, 젊은 시절에 정원을 돌보는 일은 마치 노동처럼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정원 일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한 것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보금자리였던 스위스의 몬타뇰라에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나이 오십이 넘어 다시 정원 삽과 물뿌리개를 들면서 그는 “이제부터는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한가롭게 즐길 것이며, 수풀을 개간하고 곡식을 재배하기보다는 가을의 다는 장작불의 푸른 연기 곁에서 꿈꿀 것이다”라고 다짐하고 실천합니다. 헤르만헤세는 정원을 가꾸는 일이 인생 경작과 같다고 합니다. 모종삽이 인생의 황폐함을 갈아주듯 인생에도 모종삽이 필요하며, 정원의 농부와 같이 느긋하게 꽃 필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즐거움으로 정원 일을 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누구든지 욥기를 읽으면 인생의 많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이 욥기를 읽고 힘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도 고통 중에 있는 욥의 인생고백입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성경이 가르쳐 주는 진리를 발견합시다. 첫째로 인생은 전쟁과 같다고 합니다(1절). 욥은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고 고백합니다. 정말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이 전쟁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특히 수많은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출근하여 일하는 것과 사업하는 것이 정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전쟁터에 있는 인생과 같이 사는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에베소서 6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씨름은 형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의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엡6:12). 인생은 전쟁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우리는 신앙의 전신갑주로 무장을 잘 해서 인생 전쟁에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인생은 베틀의 북과 같다고 합니다(5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업이 보내는 구나”고 했습니다. 여기서 베틀의 북이란 베를 짜는 베틀에 딸린 부속품의 하나로 날의 틈으로 오가며 옷감이 짜지게 하는 도구입니다. 숙련된 아낙들은 베틀 북을 재빨리 날줄 사이에 넣고 지나게 해서 섬유를 만들어 냅니다. 욥은 인생을 마치 베틀의 북과 같이 빠르며 꽃처럼 쉽게 시들고 그림자처럼 빨리 지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인생은 베틀의 북처럼 신속하게 빨리 지나갑니다. 봄이 시작되나 싶었는데 벌써 가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빠른 세월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렇게 빠른 인생 가운데서 세월을 허송하지 말고 아껴 쓰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엡5:16). 셋째로 인생은 구름이 사라짐 같다고 합니다(9절).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인생을 구름에 비유해 노래했습니다. 생겼다가 곧 사라지는 구름처럼 인생이 태어나지만 곧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름 같은 한평생을 살면서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지 않으면 이리저리 흔들릴 것입니다. 당장은 힘들어도 하나님이 우리 가족들을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즐겁게 인생을 삽시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은 주님만을 붙들고 믿음 안에서 삽시다. 잘 아는 것처럼 북미와 남미는 경제력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납니다. 왜 북미는 세계를 호령할 정도로 부강한 나라인데 남미의 많은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어떤 역사학자는 흥미있는 주장을 했습니다. “북미에 도착한 청교도 선조들은 하나님(God)을 찾아왔으나 남미에 찾아온 스페인과 포루투갈 선조들은 황금(Gold)을 찾아왔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북미를 찾아온 선조들은 하나님을 찾았더니 금도 얻었는데 남미의 선조들은 금을 찾았더니 하나님도 잃고 금도 잃었다는 것이지요. 이 추석날 우리 인생을 생각해 봅시다. 나는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 인생 모종삽인 말씀과 기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십니까? 욥이 말한 것처럼 인생이 전쟁과 같고, 베틀의 북과 같으며, 구름 같은 인생이지만 즐거움으로 인생을 사십니까? 그렇다면 나와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5. 주제: 기쁨의 잔치 성구: 신명기 16장 13절-15절 찬송: 310장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에서도 추석에 해당하는 절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초막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합니다. 한 해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매년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무려 7박8일에 걸쳐서 감사 절기를 지켰습니다. 좋은 집에서 편하게 지내며 감사한 게 아니라 이런 들판에서 텐트를 치고 그 속에서 지내며 감사했습니다. 초막절은 두 가지의 감사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조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초막생활하던 것을 기념하며 믿음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초막 생활하듯이 나그네로 이 땅에 왔다가 영원한 집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갈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일년 동안 거둔 곡식을 초막에 저장하며 한 해 동안 추수하게 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는 말로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향해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크게 외친 후 끝나는 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다면 어떻게 그 감사를 표현하고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구체적인 감사의 실천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는 절기를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얼굴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고향에 계신 우리 부모님이 가장 원하는 것은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얼굴, 손자들 얼굴 바로 우리 얼굴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얼굴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저마다 유일한 독특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덜 감사할 것도 없고 더 감사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습 그대로에 만족하며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기뻐 받아주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도 온 가족이 모여 성묘하며 하나님께 먼저 예배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 감사의 실천은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14절 끝부분에 보면 ‘연락하되’라는 말이 나옵니다. 연락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잔치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 잔치는 모든 이웃이 함께하여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른 제사는 다 하나님께 온전히 태우는 제사이거나 제사한 후 얼마간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리는 제사인데, 유독 화목제는 제사의 목적이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함께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이 제사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려면 해지기 전에 그 모든 음식을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싸 가서도 안 되고 다음 날로 남겨서도 안 됩니다. 그래야 그 제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됩니다. 소 잡고 양 잡고 해서 제사드렸는데 그 큰 동물 잡아서 남기지 않으려면 모든 이웃이 다 나와 함께 먹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받은 바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어려운 이웃들을 초대하여 함께 잔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외된 이웃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삼대 약자인 나그네와 부모 없는 아이들, 남편 잃은 여성을 반드시 이 잔치에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이제 믿음 안에서 사랑 받은 우리가 우리 가족을 넘어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계기가 되어야겠습니다. 어느 작은 마을에 국밥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아이와 할머니가 들어와서 국밥 한 그릇을 시켰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이에게 그 국밥을 건네고는 맞은 편에 앉아 깎두기 한 개만 오물오물 드시며 손자의 맛있게 먹는 모습을 흐믓하게 보셨습니다. 다 먹고 나서 할머니가 계산대로 오십니다. 옷 속 이곳저곳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는 것을 보고 주인은 안스런 마음에 돈을 안 받고 싶었는데 혹시나 마음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은 “할머니 오늘은 돈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100번째 손님에게는 공짜로 국밥을 드립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와 손자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서 그 국밥집 건너편에 차길 지나서 한 아이가 앉아 있는 게 보였습니다. 바닥에 큰 원을 그리고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며칠 전 할머니와 함께 온 그 아이였습니다. 손님이 한 명씩 올 때마다 큰 원에 돌을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할머니에게 국밥을 드시게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으니까 공짜 손님으로 들어갈 걸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그날따라 손님이 많지 않아서 돌멩이가 몇 개 없었습니다. 실망한 아이의 얼굴이 멀리서 보였습니다. 국밥집 주인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어, 김사장, 우리 국밥집에 손님들 좀 많이 데리고 와, 내가 공짜로 먹여줄테니까. 될 수 있으면 많이 와야 해”, “박선생님, 오늘 우리 집에 오셔서 국밥 좀 드시죠. 제가 오늘 쏩니다. 친구 분들 좀 많이 모시고 오세요.” 조금 지나자 가게에 손님들이 몰려옵니다. 아이의 손이 빨라집니다. 돌멩이가 늘어납니다. 40, 50, 60, 99개가 되자 급히 할머니를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아이가 말합니다. “우리가 백번째 손님이지요?” 아이는 할머니 앞에 국밥을 놓고 자신은 깍두기를 오물오물거리며 할머니가 드시는 것을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국밥집 주인 역시 그 모습을 흐믓하게 보았습니다. 아이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마음도 아름답고 또 할머니를 생각하는 손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국밥집 주인의 마음입니다. 두 사람만을 위한 감동의 이벤트를 준비한 주인의 마음,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재료가 아닌 하늘의 재료로 만든 따끈한 국밥으로 나만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주시고 가장 아름다운 찬양을 들려주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때론 어려움이 있으나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어려움 너머에 은혜와 희망을 선물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정은 그 기쁨의 잔치에 초대되어 누리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크신 사랑 받은 우리는 이제 아직도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어두운 곳에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절망의 커텐 너머 환히 빛나는 주님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슬픔의 커텐을 걷고 불신의 문을 열어젖히고 우리와 함께 기쁨의 잔치를 벌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해 동안 우리 가족과 각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앞으로 주실 은혜가 더 크고 위대하실 것이기에 미리 감사합니다. 과거뿐 아니라 미래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잔치 안에 살아가는 우리 가정이 이제 우리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서 그 사랑과 은혜를 이웃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의 부모님(돌아가신 분 - 성묘지)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값진 믿음의 유산입니다. 6. 제목: 감사의 조건 성구: 예레미야 애가 3장 22-25절 찬송: 460장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하나님께서는 소중한 외아들을 죽이시고 대신에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셨구나. 이 하루도 주님 안에서 주님처럼 성실하게 살아가야지 하는 감사와 결단의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추석을 맞이하여 한 자리에 모인 사랑하는 우리 가족에게 하나님은 불평불만보다 감사의 조건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먼저 부모님들은 자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부모들이여, 내 자녀가 잘 자라고 있는 것에 감사합시다. 누군가가 쓴 글처럼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것은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교회 잘 다니고 몸 건강하고 늘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럼 된 것입니다. 공부를 좀 더 잘 했으면 하는 것, 뭣 조금 마음에 안 드는 것 그런 것 바라보면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어느 라디어 프로에서 들은 것인데 수능시험 보는 날에 한 어머니가 보낸 사연이었습니다. 작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이가 공부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아이에게 공부, 공부 노래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동생에게는 절대 공부 압력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건강한 게 중요합니다. 성적이 중요합니까? 아이가 행복한 게 중요합니까? 좋은 대학 가는 게 중요합니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불평 불만들의 까만 먼지를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감사뿐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어늘 추석을 맞이하여 쉬는 날 집에서 게임하고 놀고 싶을 텐데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애써 나와 주어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친구도 좋고 재미있는 놀이, 음악도 좋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결국 남는 것은 가족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그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 어리석은 사람은 지금에 충실하지 못하고 현재 함께 있는 사람들보다 다른 일에 마음을 씁니다. 그리고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기보다 상처를 주고 냉담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부모 여러분,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잇는 가족에게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따뜻한 말 한 마디, 사랑의 표현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망하고 하나님의 도시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예레미야는 오히려 감사의 노래를 부립니다. 절망 저편에 있는 너무도 큰 하나님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커다란 은혜와 긍휼하심은 믿음의 눈, 감사의 왕눈으로 보면 보이는데 불평불만의 와이셔츠 단추 구멍 눈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뒤돌아보며 어려움도 있었고 기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는 각자 처한 위치와 환경에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버님(어머님)의 산소에 모여 그분이 남기신 믿음과 신앙을 되돌아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보다 더 험난한 인생을 살아오시고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계신 그분은 나라의 어려움 속에서도 가정의 궁핍함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시고 우리 자녀를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다 나은 세상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이 이만큼 살게 된 것은 그 믿음 안의 소망 때문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조상을 본받아 희망을 갖고 전진하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아버님(어머님)의 묘 앞에서 주님이 우리 가정에 주시는 커다란 희망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우리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7. 제목: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 성구: 히 11:38 찬송: 158, 222장 1) 세상이 이길 수 있는 힘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장’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1절에서 믿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정의를 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11장을 끝맺으면서 ‘더 좋은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보지 못하고 바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감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달리는 것은 모험이기 때문에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선진들이 이미 이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증인들로 서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받고 있는 수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향 땅을 등지고 외국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곳에서도 역시 심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산업을 빼앗기기도 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위험을 피해 토굴에서 숨어 살기도 하고, 어둠을 밝히는 등불로서 태워지기도 하고, 처자를 죽음에 넘겨야 하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수신자들에게 이미 믿음에서 승리한 수많은 증인들을 앞세우면서 신앙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의 백성들 곁에서 돕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결코 헛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권력이나 부요함, 지식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생명을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사람만큼 무서운 적수는 없습니다. 그는 죽기를 각오했기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2) 믿음으로 승리하기. 우리를 대적하는 세력들은 세상을 즐비하게 서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믿음에서 이탈하게 하기 위해 도전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정도에서 넘어질 때 그들은 잔치를 벌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이미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시고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우리의 이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근거합니다. 혹시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 인간의 수단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돈을 모으면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권력을 잡으면 그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힘 있는 사람이 나에게 큰 도움이다’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좇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실망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힘은 믿음입니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믿는 믿음이 당신을 승리하는 삶으로 이끌 것입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세상적인 방법을 택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세상 사람들은 조소를 보내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 제목: 부모로 인한 후손의 복 성구: 삼하 9장 7-8절 찬송: 234, 291장 1) 복의 근원 사람들은 대개 어려운 형편에 처하여 고생하다 보면 편하게 살면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기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나를 인하여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추석명절 추모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분을 만나고,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 왕으로부터 숱한 고생을 당하였습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를 피해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대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왕이 된 다윗은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원수 갚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의 집안을 오히려 환대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삼하9:1) 얼마나 멋있는 질문입니까? 원수를 갚아도 철저하게 갚아야 할 판국에, 다윗은 은총을 베풀기 위해 남은 가정을 찾고 있습니다. 수소문을 해서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두 발을 저는 절뚝발이였습니다(삼하4:4, 9:13). 다윗은 므비보셋을 초청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성, 궁궐로 데리고 옵니다. 영문도 모르면서 공정으로 끌려온 므비보셋은 “이제는 죽었구나. 모든 것이 끝장이다”고 생각하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윗이 “무서워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의 할아버지 사울의 전답을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도저히 사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으로서는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자신의 심경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조부 사울이 다윗에게 행한 악행 때문에 도망치면서 숨어살던 므비보셋,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불구자의 몸으로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살려만 줘도 감개무량한 일인데, 조부 사울의 땅을 되돌려주고, 왕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고 화려한 궁중에서 왕자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므비보셋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요나단의 우정어린 충성 때문에 온 것입니다. 므비보셋에게는 이 행복을 누릴 어떠한 공적도 없습니다. 오로지 그의 아버지 요나단이 다윗에게 행했던 것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2) 생명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죄와 허물로 인해 죽어야 하는 진노의 자녀가 아닙니까? 우리는 두 발을 절어야 하는 절뚝발이가 아닙니다. 죽은 개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당신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면 형편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단과 같은 예수님을 인하여 우리를 은총의 세계로 초청합니다. 그분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고, 그분 때문에 우리는 예루살렘 성으로 초청되었고, 왕의 상에서 잔치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당신을 사울과 요나단,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삶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집안의 불행을 초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집안의 행복을 초청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선택 때문에 당신의 후손이 생명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당신 때문에 당신의 후손들이 증오하면서 살아야 하는 불행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추석명절 추모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나로 인하여 후손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수 있는 생명 길을 선택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 제목: 영화와 애통 성구: 계18:7-8 찬송: 532, 545장 1) 나의 삶은 어떠한가? 몇 년 사이에 사회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탄탄하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잘 나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너져서 가난뱅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영화를 꿈꾸고 살아가지만 그 영화는 쉽게 물거품이 되고 있습니다. 행복이 10년을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꿈꾸면서 끝없이 욕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추석명절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2)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의 말로 바벨론은 세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큰 음녀, 큰 성’으로 불리워집니다(17:1, 18:1).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여 세속화시키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부추기는 것은 달콤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멀도록 만듭니다. 큰 성이 무너지고 ‘귀신의 처소,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습니다(2절). 그런데 이 바벨론 성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바벨론을 대상으로 치부하ㅗ 영화를 축적했던 모든 자들의 무가 일식간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울고 애통합니다(16-17). 그들은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호언장담하였지만, ‘하루 동안’에 망하게 되었습니다(7-8절). 그들이 영화를 누리고 사치한 만큼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 맙니다. 인간의 호언장담이 소용없게 되고, 하나님의 위력적인 심판이우리의 삶에 미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호언장담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호언장담을 무색케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들어야 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4-5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여전히 관심이 있으십니다. 세상에 도취되어 음녀와 즐기고 있는 악한 자들이 망하게 되는 그 심판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라!” 당신이 나와야 할 것이 어디입니까?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망하게 됩니다. 인간의 불의는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를 결코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받게 될 재앙을 받지 않으려면 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3) 후회하지 않는 삶. 많은 사람들은 부를 축적하기에 바쁩니다. 영화와 사치를 누릴 수만 있다면 부정도 할 수 있고, 양심의 소리도 외면할 수 있으며, 믿음마저도 뒤로 제쳐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쌓아두려는 모든 영화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쌓고 있는 부와 사치와 영화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강하신 자의 심판이 있습니다. 아무리 호언장담할지라도, 아무리 그것을 지키기 위해 튼튼한 성곽을 쌓을 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의 불길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도취되어 이쓴 당신을 향해 하나님은 이 시간도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당신이 심판의 장소에서 나와서 그들의 불의함에 참여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눈으로 보는 것 때문에, 귀로 듣는 것 때문에, 누리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음녀를 따라가고 있다면 우리는 머지 않아 후회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추석 명절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은 무너지는 바벨론의 심판을 기억하면서 음녀와 즐기는 장소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강한 심판을 피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제목: 유언 성구: 왕상 2장 1-3절 찬송: 158, 232장 1) 신앙의 유언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유언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노년이 된 부모님이 유언장을 만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언장을 만들어 두는 것이 자녀들 간에 일어날 수 있는 불화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살아계실 때는 불효했지만, 임종 전에 남기신 마지막 유언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하는 ‘유언’의 개념들이 주로 무엇입니까? 재산 분배의 문제가 아닙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언이라고 할 때 상속의 문제에 치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언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2) 후손들에게 신앙을 당부 다윗,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지만, 한편으로 멋진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용맹이 있었고, 관용이 있었고, 믿음이 패기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다윗을 추앙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죽는 날이 임박하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 역시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않으려고 합니다. 조금만이라도 더 살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성공적이고 화려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더 고통스러워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을 놓고 가야 하는가? 이제 좀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내가 여기서 죽어야 하는갚라고 하면서 항변합니다. 지금까지 노력하고 성공했던 것들을 포기하기가 너무 아깝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얼마나 피땀을 흘리면서 벌었던 것들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들을 포기하고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은 냉정히 기록합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들어서야 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가기 싫지만 그날이 이르게 되었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언젠가 들려질 말씀입니다. 그때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재산 분배를 거룬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아들 솔로몬을 불러놓고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지키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이 다윗의 시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알고 있는 다윗으로서는 아들에게 가장 남겨주고 싶은 유언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4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평생토록 이 약속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 약속의 말씀을 확실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형통한 비결”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대장부가 되라고 유언하고 있습니다. 3) 믿음의 유산을 주라. 혹시 지금까지 모아둔 것들이 아까워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번 돈이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지 몰라서 돈거래 장부를 꺼내들고 재산 상속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자녀들이 재산분배 때문에 싸울 것을 걱정해서 재산 분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분이 있습니까? 다윗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아무리 죽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죽을 날이 임박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단신은 재산분배 따위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고, 자녀들이 영적인 세계를 붙잡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바로 서있는가, 참된 형통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를 점검하시고, 그 일을 위해서 유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남겨주는 수많은 재산 상속이 믿음의 유산만큼 중요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녀들의 믿음을 좀먹는 좀벌레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도서> 박현모 외, 설날, 추석, 추도 장례설교모음 추모설교집, 청우, 2005 전형준, 장례 추모예배 이렇게 준비하라, 아가페, 2005 박종순 외, 장례예식설교, 한국문서선교회, 2005
감사가 있는 추석/ 시50:23/ 추석주일설교/ 2001-09-23
감사가 있는 추석 시50:23 오늘 이 시간에는 “감사가 있는 추석”,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번 따라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가 있는 추석.” 추석은 우리나라 2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이틀 후면 새 천년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석입니다. 추석은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이 그 열매에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그래서 추석을 말하기를 “수확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추석은 수확하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그렇습니다. 추석은 수확을 많이 하는 겁니다. 또 수확을 한 후에 감사하는 겁니다. 또 감사한 후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추석이 수확이 없다면 쓸쓸하죠. 그런데 수확은 있는데, 감사가 없다면 또 마음이 메마르죠. 사회가 메마르죠. 또 우리가 감사는 하는데, 사랑이 없다면 이것도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진정한 추석은 수확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있는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없는 것에 더 불평을 합니다. 떨어진 과일 아깝죠. 그러나 아직 나무에 붙어 있는 과일을 보고 감사 해야죠. 애써 농사지은 것이 태풍에 쓰러졌습니다. 참 아깝죠. 그러나 세울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유가 많아서, 가진 것이 많아서 감사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감사는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보니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랬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랬습니다. 또 감사는 하나님의 복 받는 약속입니다. {그 감사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를 잘 하라, 감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보이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 감사는 하나님 제일 기뻐하시는 것, 감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통로,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할 것들이 얼마나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개인으로 봐도, 가정으로 봐도, 사회로 봐도, 직장으로 봐도, 나라로 본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이 얼마나 얼마나 많아요. 모두가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새 천년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석 명절을 앞두고,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함으로 신앙을 회복하고, 축복의 문을 활짝 여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감사가 회복되면, 신앙이 회복되고, 감사가 회복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린다 그 말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할 것인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첫째, 가족·친척·이웃에게 감사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가족, 친척, 친구에게 감사하자.” 아멘 입니까? 그렇습니다. 가족과 친척과 이웃에게 감사하자. 지난 8월 15일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가족의 귀중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족, 친척, 이웃은 새의 날개와 같은 존재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새의 날개는 때로는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울 수 있습니다. 새가 날아가지 않을 때는, 모이를 쪼아 먹을 때는 새의 날개가 부담스러워요. 아주 거추장스러워요. 그러나 날아가야 할 때, 짐승이 와서 잡아먹으려고 할 때, 도망가려고 할 때는 날개가 없이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날개가 있기 때문에 훨훨 날아갑니다. 공중을 나릅니다. 창공을 나릅니다. 다른 짐승이 아무리 좇아 와도 잡히지 않습니다. 지붕으로 날고, 산으로 날고, 나무 위로 날고, 다 나를 수 있습니다. 그 날개가 어떤 때는 거추장스럽지만, 그러나 필요한 때는 날개 때문에 훨훨 날아간다 그 말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도, 이웃도, 친척도 좋은 때가 있는가 하면,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이들에게 감사해야 됩니다. 가족에게 감사하고, 친척에게 감사하고, 이웃에게 감사하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이들을 통해서 돕기도 하시며, 연단시키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친척이, 이웃이, 나를 도와줄 때가 있고, 때로는 그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을 통해서 내가 연단받기도 한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롬 8:28). 인간적으로 보면 구약에 나오는 요셉은 그 형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찌 그 동생을 형 10명이 달려들어서 때렸습니다. 물 없는 우물에 빠지게 했습니다. 장사꾼들에게 팔아먹었습니다. 이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 형들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러나 지나고 보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그런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불과 나이 30세에 당시 세계 최고 강한 나라, 애굽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자기 고향 땅, 가나안 땅이 가뭄이 들고 7년 동안 흉년이 들어서 먹을 수 없을 때,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자기 아버지를 살렸습니다. 자기 형제들을 살렸습니다. 그러므로 효도할 길을 얻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형제 우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돌보아 주어야 될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19:19). “가족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친척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가슴 아플 일이 없습니다. 문제가 생길 리가 없습니다. 이번 추석명절에 적당히 잡수세요. 배탈 나지 마시고. 절대로 과속하지 마세요. 교통사고 나지 마세요. 났다 그러면 큰일 나는 거예요. 왜? 병원에 가도 누가 받아줄 사람이 없으니까, 치료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의료대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도 정말로 너도 나도 모두가 다 가족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고, 친척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으로, 또 가족에게 감사하고, 친척에게 감사하고, 이웃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이런 일은 해결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사와 약사는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와 약사는 서로서로 의사는 약사에게 사하고, 약사는 의사에게 감사해야 됩니다. 진찰은 의사가, 처방은 의사가 합니다. 약을 내주는 것은 약사가 합니다. 그러면, 서로서로 협력하면 이것이 좋은 거예요. 그러므로 의사는 약사에게 “참 고맙습니다.” 약사는 의사에게 “참 감사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환자는 의사가, 약사가 있기 때문에, 병을 치료받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의사나 약사에게 환자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야 돼요. 또 뒤집어 말하면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할 일이 뭐가 있으며, 약사가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서로서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감사하는, 이웃에 게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러므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있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가족, 친척, 이웃을 향해서 어리석고 죽이는 말이 아니라, 감사의 말을 하자, 그 말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말이 아니라, 원망 불평하는 말이 아니라, 감사하는 말을 하자. 서로서로 감사하자. 서로서로 감사하자. 그러므로 추석명절에 잃어버렸던 가족, 친척, 이웃끼리 감사 많이 하는 이런 명절이 되십시다. 성경이 말을 합니다. 에베소서 5장 4절입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그랬습니다. 2. 둘째, 부모와 조상에게 감사 따라하시겠습니다. “부모와 조상에게 감사하자.”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부모와 조상에게 감사하자고 말하면, ‘부모가 먼저 잘하고, 조상이 훌륭해야 고마워할 것 아닙니까? 부모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조상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어찌 내가 감사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큰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지 않을 때 안 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수지 안 맞으면 불평하고, 수지맞으면 감사하고, 그게 아닌 것 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 또 그 뿐이 아닙니다. 내가 효를 행하지 아니하고, 역사의식이 부족한 것이 내 탓이기보다는 부모 잘못 만나고, 조상 잘못 만나서 그런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것은 더더구나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현상유지하고 살기도 어려운 거예요. 현상유지도 안 하고, 퇴보하고 살 사람은 그렇게 사세요. 괜찮아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 수가 없어요. 오늘보다 내일을 위해 삽니다. 지금은 없을지라도 내일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넘어졌을지라도 내일은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은 실패 만났다, 내일은 우리가 실패 당하지 아니하고, 성공의 자리로 옮겨져야 될 것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의 손가락질 받아도 내일은 존경받고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내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조상이 나에게 남겨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그랬으니까, 정말로 부모에게 감사하고, 조상 어른들에게 감사하는 삶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부모도 감사를 받지 못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자녀들에게 교육을 바로 시켜주지 못한 책임. 효를 가르쳐주지 못한 책임. 어른 공경을 가르쳐주지 못한 책임. 성경적 효를 가르쳐주지 못한 책임이 있습니다. 또 그뿐이 아닙니다. 조상들의 훌륭한 유업과 업적을 자기 자손들에게 전수해주지 못하고, 알려주지 못한 것.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다 떠나서 자녀들은 부모에게 감사해야 됩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신 것, 그것 감사한 것 아닙니까? 부모님이 건강하신 것, 그것만 봐도 감사한 것 아닙니까? 나의 효를 받으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녀는 마땅히 감사해야 될 것 아닙니까? 돌아가시고 후회하지 말고,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 부모님께 효를 해드릴 기회가 있을 때, 감사해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는 나를 피로 낳아주셨습니다. 눈물로 길러 주셨습니다. 땀 흘려 교육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 들어야 됩니다. 그런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에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자기를 피로 낳아주시고, 눈물로 길러 주시고, 땀 흘려 교육을 시켜준 그 부모님에게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에게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 감사하더라도 그것은 다 가짜입니다. 유익이 오면 감사, 피해가 오면 불평, 원망, 시기. 그것만이 아니라, 폭행. 그것만이 아니라, 살인.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행복의 원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행복하기 원하십니까?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행복의 원천이고요, 평화는 감사의 나무에서 피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평화는 감사의 나무에서 피는 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에 행복이 있고, 감사의 나무에 평화가 있다. 그러므로 감사 없이는 행복도 없고, 감사 없이는 평화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행복을 원하고, 평화를 원한다면, “감사, 감사”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정에서 부모님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고, 자녀는 부모에게 “부모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부모님은 자녀들을 보면서 “감동”이 있으면 돼요. 부모님은 자녀를 보면서 감동을 합니다. “이 놈이 벌써 키가 컸네. 벌써 서서 따로 따로 하네. 벌써 학교를 가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감동하는 부모. 자식을 보고 감동하는 부모.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자식이 컸는지, 학교를 가는지, 어떤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 딸이 몇 살인지도 생각해 봐야 안대. 이건 문제죠. 자기의 자식을 보고 시시때때로 감동하는 부모가 되어야 돼요. 자기 부모님을 보고 감사, 감사, 감사하는 자녀가 되었을 때, 이런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가정이 다 그런 가정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셋째, 국가에 감사 따라합시다. “국가에 감사하자.” 그렇습니다. 국가가 있고, 내가 있습니다. 나라가 있고, 내가 있습니다. 나의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있고,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있고, 내 기업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가족, 친척, 이웃 그리고 부모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조국에 대한 감사가 없어요. 나라에 대한 감사가 없어요. 나라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감사하면서, 감격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적다 그 말인 것입니다. 돈이 좀 있다는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해외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나라를 비판할지라도, 성도들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사랑하고, 뿐만 아닙니다.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그런 신자가 되어야 참다운 신자요, 참다운 국민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이 나라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보니까, 대한민국 사람이 되어서 대한민국 땅에 태어났습니다. 한국 사람에 의해서 한국 땅에 태어났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이나 나를 이 땅에, 이 세상에, 이 우주에 태어나게 하실 때, 대한민국 사람을 통하여 대한민국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하나님께 더 많이 감사해야 돼요. 왜요? 전쟁이 아닌 평화의 때에 태어났으니까. 여러분의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할머니나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가난한 보릿고개 같은 어려울 때, 굶주릴 때, 태어나지 아니하고, 이 만큼이라도 먹고 있고 마실 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에 태어나지 아니하고, 독재주의에 태어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 민주주의 나라에 태어난 것, 전도 받을 수 있으며, 전도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이런 나라에서 산다는 것, 얼마나 얼마나 감사해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는 것,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IMF를 극복하고, 이 만큼 회복되게 된 것도 감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땅에 전쟁이 없는 나라 만들자, 평화의 나라를 만들자, 전쟁 없이 통일이 되는 나라를 만들자’하고 노력하고 애쓰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격려해 주어야 돼요.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돼요. 그리고 감사하는 삶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4. 넷째, 자연에 감사 따라합시다. “자연에 감사하자.” 그렇습니다. 자연에 감사하라는 것은 자연을 신격화해서 숭배하라, 그런 말은 전혀 아닌 것입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의 터전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존귀를 돌리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자연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삶의 터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에 감사하라는 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을 우리는 육성시키는 겁니다. 그 안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들에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시인들은 뜨거운 태양과 휘몰아치는 태풍을 견디어가면서 생산된 자연의 소산물과 아름다움을 너무 값싸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은 과일 하나, 쌀 한 톨, 김 한 장도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농부나 어부들의 땀과 눈물과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들을 다 소중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사소한 풀 하나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귀중한 생명입니다. 심각한 환경오염에 직면해 있는 이때에, 생명에 대한 귀중함을 가지고 자연과 그 소산물을 대하는 것이 현대인에게 필요한 감사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해를 보고도 마음속으로 감사해야 돼요. 달을 보고도 감사하고, 들을 보고도 감사하고, 마실 수 있는 공기가 깨끗한 것도 감사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는 것도 감사. 흙, 땅이 있는 것도 감사하고, 곡식이 자란 것도 감사. 이 자연을 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악하지 않습니다. 자연에 감사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살인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절대로 폭행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사람끼리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 착한 사람입니다. 5. 다섯째,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 따라 하시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렇습니다. 감사의 결론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롯해서 가족, 친척, 이웃, 조상, 국가, 자연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니라} 말씀했습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아멘.}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의 지위, 자기의 환경, 자기의 명예, 자기의 성공, 자기의 재산만이 감사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다 일시적이고 순간적이고 조건적인 감사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환경이 바뀌면 감사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 “항상 감사하라”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죽을 뻔 한 위기를 몇 번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감사가 넘쳤습니다. 감옥에 가도 감사, 매를 맞아도 감사, 핍박을 받아도 감사, 그저 사도 바울은 감사, 감사, 감사, 감사하는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서도 찬송을 부르고, 성도들에게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감사를 가르쳐 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냐? 그의 감사의 조건은 환경이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환경을 만드시고, 환경을 지배하시는 그리스도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얼마나 범사에 감사한 것,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진실 된 사도 바울의 감사의 조건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조건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아들 되었고, 예수님 때문에 천국 가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범사에 형통하며 복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로마서 7장 25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랬습니다. 예수로 인해 감사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찬양하면,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 있더라도 하박국 선지자와 사도 바울과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박국서 3장 17절로 18절 말씀이십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해 범사에 감사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씀이십니다. 시편 50편 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불치의 질병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가난과 저주가 축복을 받아 부요할 수 있습니다. 없는 자가 있는 자가 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절망에 처한 사람이 소망의 사람이 됩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최대의 감사는 무엇일까요? 예배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 이것이 하나님께 향한 최대의 감사. 최대의 감사가 예배다, 그 말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감사는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주의 말씀을 우리가 늘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성취되도록 하는 것, 이것인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신앙 회복, 인간성 회복, 삶의 회복은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잃어버린 감사가 회복되면, 신앙이 회복되고, 인간성이 회복되고, 삶이 회복된다, 그 말입니다. 이는 힘으로 안 됩니다. 능으로 안 됩니다. 오직 여호와의 신, 성령으로만 가능한 것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구원의 확신을 얻고, 우리가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여서 성령세례 받고, 성령 충만 받아서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우리들. 그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부모님, 가족, 친척, 이웃, 더 나아가서 민족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구원받게 하는 데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그래서 어느 해 보다 새 천년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석명절, 더 즐겁고 더 기쁘고, 더 감사하고 더 감격해서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도 좋고, 하나님도 좋으신 추석이 되게 합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날마다 사랑하시는 주님, 새 천년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석명절이 되었습니다. 우리 두가 다 수확하고, 또 감사하고, 또 사랑하는 우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가 있는 추석/ 시50:23/ 추석주일설교/ 2013-09-15
감사가 있는 추석 시50:23 추석은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이 수확한 열매에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한 마디로 “수확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있는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없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이며(살전5:18),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1. 첫째, 가족·친척·이웃에게 감사 가족, 친척, 이웃은 새의 날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새가 날지 않고 모이를 쪼아 먹을 때는 그 날개가 매우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새는 날개 때문에 저 높은 곳으로 비상할 수 있고, 자신의 생명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족, 친척, 이웃도 좋은 동료가 있는가 하면,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이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우리를 돕기도 하시며, 연단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요셉의 형들은 인간적으로 도저히 용서받기 힘든 죄를 저질렀습니다. 동생 요셉을 사로잡아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며, 급기야는 노예로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요셉을 서른의 나이에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뭄으로 어려움에 처한 가족과 친족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가족과 친척과 이웃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것이고,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고, 그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의료대란의 원인은 바로 이 진리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사와 약사는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속히 깨닫고, 환자는 의사와 약사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고 권면했습니다. 특별히 이번 추석은 가족, 친척, 이웃을 향해서 어리석고 죽이는 말이 아니라, 감사의 말이 넘치는 추석 명절이 되도록 합시다. 2. 둘째, 부모와 조상에게 감사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부모와 조상에게 감사하자고 말하면, 부모가 먼저 잘하고, 조상이 훌륭해야 고마워할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효를 행하지 않고, 역사의식이 부족한 것이 내 탓이기보다는 부모 잘못 만나고, 조상 잘못 만나서 그런 것처럼 말합니다. 물론 부모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들에게 성경적 효를 가르치지 않았고, 조상들의 유업과 업적을 전수하지 않은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부모나 조상 탓만 하고 있는 사람은 내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희망도, 발전도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을 위해 삽니다. 지금은 없을지라도 내일은 있어야 합니다. 당장은 실패했더라도 내일은 성공의 자리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감사할 것이 없습니까?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 건강하신 것, 나의 효를 받으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녀는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8.15 이산가족상봉은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한 상에 둘러서 함께 먹고 마심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나를 피로 낳아주시고, 눈물로 길러 주시며, 땀 흘려 교육시켜 주신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누구에게 감사하겠습니까? 감사는 행복의 원천이며, 평화는 감사의 나무에서 피는 아름다운 꽃이라고 했습니다. 한 가정에서 부모님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고, 자녀에 대한 “감동”이 피어난다면, 그 가정처럼 아름다운 가정은 없을 것입니다. 3. 셋째, 국가에 감사 오늘날 현대인들은 가족, 친척, 이웃 그리고 부모님에게 감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에는 더더욱 감사하지 않습니다. 돈이 좀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 해외로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나라를 비판할지라도, 성도들은 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눈물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이 나라를 통치하고 계시며, 우리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전쟁이 아닌 평화의 때에, 식민지 치하나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는 것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올해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IMF를 이만큼이라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각계 지도자들을 격려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4. 넷째, 자연에 감사 자연에 감사하라는 것은 자연을 신격화해서 숭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인간 삶의 터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립니다. 그러므로 자연에 감사하라는 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들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시인들은 뜨거운 태양과 휘몰아치는 태풍을 견디며 생산된 자연의 소산물과 아름다움을 너무 값싸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은 과일 하나, 쌀 한 톨, 김 한 장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풀 하나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귀중한 생명입니다. 심각한 환경오염에 직면해 있는 이때에,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자연과 그 소산물을 대하는 것이 현대인에게 필요한 감사의 자세입니다. 5. 다섯째,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 나를 비롯해서 가족, 친척, 이웃, 조상, 국가, 자연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롬 11:36).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어야지, 지위, 환경, 명예, 성공, 재산이 감사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감사는 일시적이고 조건적인 감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죽을 뻔 한 위기를 몇 번 넘겼지만, 감사가 넘쳤습니다. 바울이 옥중에서도 찬송을 부르고, 성도들에게 감사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감사의 조건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롬 7:25).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찬양하면,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 있더라도 하박국 선지자와 바울과 같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불신자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해 범사에 감사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대의 감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이며,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취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회복, 인간성 회복, 삶의 회복은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는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날마다 감사함으로 축복의 문을 활짝 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감사로 인생을 충만하게 하라/ 눅17:11-19/ 추석설교
감사로 인생을 충만하게 하라 눅17:11-19 다음주는 민족의 절기인 추석입니다. 일년 농사를 지어 첫 곡식을 수확하여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절기입니다. 속담에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김전도사가 속담같이 하는 말입니다. 맞는 것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욕심을 자제하지 못하면, 손발뿐이 아니라 온몸이 고생을 합니다. 그리고 평생 헛수고만 하다가, 결국 아주 불행하게 되어 인생을 비극으로 마치게 됩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에게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입을 걱정은 아예 할 필요가 없었고, 먹거리도 사방 천지에 쌓여 있었습니다. 손만 들면 따먹을 수 있는 최상급 과일들이 지천이었습니다. 잠 잘곳도 물론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어디든지 누우면 안방이고, 일어나 앉으면 응접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이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베풀어주신 그 모든 것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누리지 못하고, 감히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보다가 그만 낙원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가 나빠서 손발이 고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머리가 너무 좋아 욕심을 부리다가 인생을 망친 사람도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에는 어느 정도의 욕심은 삶을 의미있게 하지만 욕심은 날카로운 칼날과 같아 조금만 과해도 갖가지 재앙과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감사하는 마음은 별로 없이, 계속 욕심만 부리며 살게 될 경우, 불행하게 됩니다. 구원받지 못하여 죄와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불쌍한 죄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병 환자 열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바쁘게 머리 굴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에,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리 서서 예수님을 향해 외쳤습니다.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자신들의 병을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즉시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가 나았다는 것을 보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환자들은 성전의 제사장을 찾아 제사장에게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신기하게도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병이 모두 나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병환자들에게 있어서, 정작 고침 받아야 할 부분은 육신적인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의 병이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고침 받은 사람은 몇명이었습니까? 열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몇명이나 예수님과 관계를 바로 맺었습니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의 예(禮)를 올린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에게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눅17: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육신은 멀쩡해서 힘은 넘쳐 흐르지만, 정신과 영혼은 병든자가 대단히 많습니다. 육신만 온전하다고 해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오직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무서운 말씀입니까? 은혜를 입고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육신적인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병에 걸려 있는 환자라는 것을 예수님이 지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이라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어야,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이며 사람다운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ㄱ.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고 ㄴ.우리의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며 ㄷ.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떼들이기 때문이라고, 시 100편 1-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ㄱ.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며 ㄴ.감사한 마음으로 찬양과 찬송을 부르고 ㄷ.감사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경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살전 5: 18에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델교회를 꿈꾸는 태평양교회 성도 여러분의 하루 하루 생활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을 늘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께, 진정 감사와 감격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있습니까? 특히, 죄 중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 그 구원의 은총에 대하여 얼마 나 고마워하고 감격하며 살고 있습니까? 눅 17장의 말씀을 보면, 열 명의 나병 환자 모두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명만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열 명이 모두 나았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 명만 주님께 감사드렸듯이 그만큼 사람들이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돌아와 감사의 예를 드리는 일이, 무엇이 그리 힘들다고 마다 했을까요? 병 낫기를 소원하며 몸부림쳤던 것에 비하면, 그 노력이란 ’새 발의 피’에 불과했을 텐데 말 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갖는 일반적이고 평범해진 심적 상태입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영적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육적인 일에 치우쳐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몸도 건강해야 하고, 어느 정도 지적 수준도 있어야 하죠. 그리고 이왕이면 물질적인 여유가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하나님의 모습을 가진 영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돌릴 수 있다는 점이, 바로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이 가지는 특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까닭에, 이 세상에는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비극들입니까?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비극인 것입니다. 작년봄에 박사과정 학생들과 과학기술원 장관출신 정근모 박사와 오찬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정색을 하면서 말하기를 ”정작 과학자들은 과학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하나님 의 존재를 깨닫게 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과학을 전혀 모르는 비과 학자들이 ’지금은 과학 문명 시대’라고 말 하며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편의 고마움을 모르는 아내는 아내가 아니고 아내의 고마움을 모르는 남편은 이미 남편의 가치를 벗어나고 있듯이 부모님의 고마움을 모르는 자식도 참된 자식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생기가 없기 때문에 이미 망가진 고물인 것입니다. 고물은 어떻게 됩니까? 엿장수가 주워 가서 뜨거운 용광로에 넣어 다 녹여 없애 버리고 마는 것이죠.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불못, 지옥불에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 목적을 상실한 인간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셨으니, 우리 또한 조건 없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예화)여러분이 잘 아시는 우화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가 착하고 부지런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가 무를 밭에 심었더니, 농사가 잘 되어서 거의 사람 몸뚱이 만한 무를 수확했습니다. 농부는 이렇게 잘된 무를 혼자 먹기가 너무 아까웠습니다. 이 농부는, 농사가 잘된 것이 그 고을을 잘 다스려 주 는 원님의 선정(善政) 탓이라 생각하고, 그 무를 잘 포장해서 원님께 갖고 갔습니다. 원님은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칭찬한 뒤에, 하인을 불러 요즘 관가에 들어 온 것 중에서 가장 귀하 고 좋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인은, 최근 들어 큰 황소 한 마리가 들어 온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원님은, 그 황소를 끌어다가 이 농부에게 주라고 했습 니다. 마음씨 착한 농부는 무 한 개를 바치고, 그 대신에 크고 좋은 황소 한 마리를 얻게 되 었습니다. 이 소문이 온 동리에 퍼졌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심보가 고약한 농부 한 사람이 생각하 기를, ”무 한 개를 바치고 황소 한 마리를 얻었으니, 내가 황소 한 마리를 바치면, 이번에는 땅이라도 몇 마지기 얻을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에서 키우고 있는 황소를 끌고 원님에게 갔습니다. ”원님, 저는 오랫동안 집에서 황소를 길러 왔습니다만, 이렇 게 크고 좋은 황소는 처음입니다. 이것이 다 원님께서 백성을 잘 다스려 주신 덕택인 줄 알 고, 이 황소를 바치려고 가져왔습니다” 원님은 이 말을 듣고, 농부의 마음씨가 착하다고 칭 찬한 다음에, 하인을 불러 요즈음 관가에 들어온 것 중에서 귀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인이 하는 말이, ’며칠 전에 들어 온 크고 잘 생긴 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원님 은 그 무를 이 농부에게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 내 려앉는 것 같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농부는 별 수 없이 무 한 개를 들고 집으 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을 위해 살아가다 보니 때로는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축복을 위해 선택된 백성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10명의 문둥이는 누구입니까? 일평생동안 자신의 몸이 썩어 들어가는 고치지 못할 질병으로 탄식하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은 많으나 삶의 참 맛을 잃고 우왕 자왕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솔직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모델성도로 부름받은 태평양가족 여러분! 주님은 감사하는 한 문둥이처럼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기도생활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달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5년간 신앙생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일평생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끝까지 잘해야 잘하는 성도입니다. 벌써 햇과일이 탐스럽게 익은 추석이 다음주에 시작됩니다. 농부가 이 과일이 익기까지 작년 겨울부터 거름주고 관리하고 지금까지 땀 흘리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 추석이 어떤 상황으로 다가서게 되었을까요? 그 농부에게는 비탄과 배고픔의 추석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심은 대로 땀 흘린 대로 거두게 됩니다. 승천하시는 주님은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가정과 가족,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영적인 열매를 많이 심으십시다. 그래서 천사도 부러워하는 축복의 결실을 맺으시길 축원합니다.
감사를 넘어서는 감사/ 합3:16-19/ 추석주일설교/ 2007-09-23
감사를 넘어서는 감사 합3:16-19 한신교회의 집사님의 간증 모진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로부터 받은 온갖 상처와 시집살이 속에서도 그녀는 감사하면서 신앙생활을 잘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모질게 하는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져 3년 동안을 수발. 시어머니가 먼저 가시고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시어머니를 따라 그렇게도 가슴 아프게 했던 시아버지가 또 중풍으로 쓰러져 똥을 싸서는 여기저기에 발라놓는 통에 며느리의 하루 일과는 시아버지가 싸서는 장난쳐놓은 똥을 치고 닦고 옷 갈아입히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 7년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렇게 시부모 모시고 살기를 10년의 세월! 젊은 날의 그 행복했던 날들은 다 지나갔건만. 시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녀는 고백하기를. 그래도 저는 시어머니, 시아버지 모시던 날이 행복했습니다. 와! 뭐 이런 며느리가 있어요. 천사 아니에요. 그 말없이 10년의 세월을 보냈던 집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모두가 다 눈물바다를……. 아침마다 식탁에 앉아 식사할 때면 남편은 “아이들아 너희들은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 행복한 것이란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를 드러내고 있어요. 우리 함께 17-18절을 한 음성으로 읽읍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서는 역사적으로 기원전 6세기 말-7세기 초의 남 유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왕이 여호야김이었는데, 아버지 요시야 왕이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고 왕위에 오른 형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납치되어 가면서 왕이 된 인물입니다. 왕이 되자 우선 애굽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많은 공물을 애굽으로 보냅니다. 다른 한편으로 왕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사치스런 생활을 합니다. 이 돈이 잔부 어디서 나오겠어요?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 낸 거거든요. 게다가 백성들마저 타락할 대로 타락해서 나라 전체가 범죄를 속성시키는 비닐하우스 같았어요. 상황으로 보면 최악의 상황입니다. 도저히 감사하고는 사돈의 팔촌의 팔촌도 안 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들어서 유대를 멸망시키시겠다는 선언을 하박국에게 말씀 하시는 겁니다. “내가 바벨론을 도구로 사용해서 유대나라를 심판할 것이다!” 와 -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이라는 초강대국이 쳐들어와서 나라가 완전히 쑥대밭이 될 것이다! 좀 실감이 안 나시면 이리 생각해 보세요. 저 김정일이가 핵폭탄을 발사해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그 심정이 어떠하겠어요?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배속이 뒤틀렸다는 말이지요),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강도당한 주부가 입술이 파래져서 달달달 입술을 떨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죽게 될 날이 눈앞에 닥쳤는데 도망갈 수도 없이 그냥 앉아서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뼛속이 녹아내리고 뼈가 썩는 것 같고 아랫도리가 후들후들 거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던가요? 전쟁이 나면 모든 게 정지합니다. 농사가 어디 있어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손볼 틈이 어디 있어요? 농작물 관리할 여유가 어디 있어요? 전쟁나면 내 것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힘 있는 자의 차지입니다. 아군들은 군량미라고 걷어가지요. 적군들은 노획물이라 해서 다 뺏어 가지요. 쌀이니 과일이니 남아나는 게 없습니다.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도 없습니다. 밭에 작물도 남아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감사하고 상관이 있어요? 이럴 때는 당연히 원망해야 정상이지요. 하박국이 경험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처절한 환경! 이런 환경과 처지를 우리는 망했다!! 망한 나라여!! 망했구나!!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배경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절로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한숨과 절망이 쏟아져야하는 환경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박국은 절망은커녕, 원망하기는커녕, 불평하거나 한숨을 쏟아내기는커녕 오히려 하박국은 감사하고 있어요. 저절로 원망해야할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하박국이 오늘 우리들의 상황으로 비교할 때는 토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 하박국의 믿음은 가히 올림픽으로 하면 금메달감입니다. 저는 하박국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와츠라는 유명한 그리스도인 화가가 그린 그림이야기입니다. 지구본 위에 한 소녀가 바이올린을 들고 서 있습니다. 하늘은 캄캄하게 어둡습니다. 자세히 보면 캄캄한 밤하늘에 별 하나가 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이 소녀는 눈이 먼 소경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관찰을 하면 소녀가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은 현이 한 줄만 남고 모두 끊어져 있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남은 바이올린의 현을 켜고 있는 소녀를 담은 그림입니다. 그리고 화가는 그림 아래에다 이런 메모를 해놓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 줄의 희망이 있어 감사합니다.” 오늘은 추석명절 감사 주일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좋은 시각이 되질 못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 안에서만 인생을 바라보면 답답하고 짜증나는 일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환경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들은 이렇습니다.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 그러나 환경을 넘어서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확 다릅니다. 지금은 비록 절망적이고 짜증날만한 상황입니다.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날들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희망을 향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결코 답답해하지 않습니다. 실망스러울 수는 있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의 하박국처럼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일급장애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사랑을 고백하며 감사의 인생을 살아가는 송명희 시인의 시중에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감사절에만 감사하는 자여! 범사에 감사하라 고난주간에만 주의 고난을 기억하는 자여! 주의 죽으심을 언제나 기억하라 위급할 때만 기도하는 자여!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쁠 때만 기뻐하는 자여! 항상 기뻐하라! 시는 매우 단순하지만 또 얼마나 심오합니까? 여러분! 은혜를 아는 자가 감사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욕심 많은 주인장 노인과 마음씨 착한 머슴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동이 트자 머슴이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가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주인이 “저 녀석이 산에 가서 빈둥거리며 놀기만 할지도 모르니 오늘은 내가 뒤를 한번 밟아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따라갑니다. 산중턱쯤 머슴을 좇던 주인이 숨이 차고 힘들고 다리도 아파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발길을 뒤로 돌리는데 갑자기 곰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기겁을 하고 달아나려 했지만 몇 발자국도 가지 못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눈앞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대는 곰을 보는 순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빌고 빌었습니다. “하나님! 저요! 목숨만 건져주세요. 그러면 제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착하고 선하게 살겠습니다.”라구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퍽”하는 소리와 함께 그 큰 곰이 쿵하고는 땅바닥에 쓰러진 거예요. 주인장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언제 달려왔는지 하인이 곰의 등을 도끼로 후려쳐 곰을 잡아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죽은 곰을 나무에 묶어가지고는 주인과 머슴이 함께 메고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회복된 주인은 환한 얼굴로 그 곰의 잡아 가죽을 벗기고 곰발바닥이랑! 쓸개랑! 가죽을 벗겨 장터에 나갔습니다. 쓸개랑, 가죽이랑! 발바닥이랑! 고리덩어리들을 몽땅 팔고는 집에 돌아왔는데... 주인의 얼굴이 밝지를 못했습니다. 주인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머슴을 향하여 큰소리로 부릅니다. “얘야! 너 어서 내게로 당장에 오너라.” 영문도 모르는 머슴은 주인앞에 달려갔습니다. 주인은 머슴을 향하여 큰소리를 쳤습니다. “야! 이놈아! 네 놈의 내리친 도끼자국 때문에 반값밖에 받지를 못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의 모습을 통렬하게 풍자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 감사가 없습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나 은혜를 은혜로 알고 살기만하면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그곳이 작은 천국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천국에 갔습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구경을 합니다. 그런데 한 곳에 가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무슨 모임인가하고 가보니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두 노인이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아니 천국에서도 싸움을 하나?”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옆에서 들어보았습니다. 그들이 다투는 내용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아서 감사할 것이 크다”는 것을 서로 우기는 것이었습니다. 한 노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나빠 부모의 말씀도 안 듣고 학교도 퇴학을 당하고 나쁜 짓만 골라하며 살다가 깡패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결국은 살인 강도죄로 교도소에서 종신형을 받고 지내다가 한 전도인을 통하여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이렇게 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나보다 더 크게 은혜 받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내가 감사할 것이 제일 크다고 하는 거예요.” 가만히 듣고 있던 한 노인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받은 은혜도 크지만 내 얘기를 들어보세요. 나는 어릴 적부터 잘 믿는 가정에 태어나서 유아세례도 받고 주일학교에도 빠지지 않고 잘 다녔고 커서는 교사로도 봉사하고 찬양대로 집사로 열심히 교회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에서 장로로 뽑혀 안수도 받아 헌신하면서 선교와 교육 사업으로 일생을 은혜가운데 살다가 이렇게 천당까지 왔으니 저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제가 그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누가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까? 두 분 다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천국의 특징은 은혜를 은혜로 아는 곳입니다. 은혜를 알아 감사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나 어떤 형편에서라도 은혜로 보면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추석명절에 가족들을 만나고 형제들을 만나면 감사할 것만 골라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운한 것 생각하지 말고 부모님에게 받은 은혜만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에게 받은 은혜만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성도들의 기도의 일번은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18절부터 21절까지 보면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 충만한 삶의 증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열매가 감사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감사하고 기뻐하고 불평불만이 없습니다. 모든 일들과 환경이 하나님의 일들로 생각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감사하는 삶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21절에서 말씀했습니다. 한 청년이 기적적으로 교통사고현장에서 여러 사람이 다치고 중상입고 죽었는데 이 청년은 무사히 어느 한 곳도 상하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이 일이 너무너무 감사하고 감격스러워 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아버지 앞에 이야기를 합니다. 아들의 기적적인 간증을 다 듣고 난 아버지는 아들을 향하여 “아들아! 참으로 놀라운 간증이구나! 아들아! 나에게도 오늘 너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있었단다.” 그러니까 아들은 성급하게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오늘 무슨 기적을 경험하셨는데요?” 그러자 아버지는 말을 이어갑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는 나를 오늘 하루 종일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셔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셨으니 이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겠느냐?”했답니다. 결과에 감사가 아닙니다, 조건에 감사가 아닙니다. 범사에! 모든 일에 모든 환경에서도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감사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감사입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다 함께 찬양을... 벌써 가을이 되었나... 이리 빠른 세월을 의식하지 못하고 산 걸 보면 우리가 참 바삐 살긴 바삐 사는가 봅니다. 우리 현대인들이 바쁘게 살면서 잊고 사는 게 많은 데 ‘감사’도 ‘잃어버리고도 찾아가지 않은 분실물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감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하박국의 감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감사의 조건에는 고난이 빠져 있지요. 누구도 고난을 놓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달갑지 않은 것, 피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정말 타도의 대상인가요? 고난이 우리로 감사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인가요? 카프만 부인이 지은 “광야의 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카프만 부인이 누에고치에서 나비가 되는 장면을 아주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누에고치에 직경이 2미리 정도의 아주 작은 구멍이 뚫렸습니다. 보셨는지 모르지만 누에에서 나비가 나올 때 아주 작은 구멍이 누에에 뚫립니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 나비가 나옵니다. 그런데 나비가 그 구멍을 나오는데 거의 하루가 걸립니다. 나비가 누에에서 정말 고생스럽게 나오는 것을 보고, 카프만 부인이 누에의 작은 구멍을 가위로 더 크게 뚫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보다 내가 더 사랑이 크다. 하나님께서는 나비가 나오기 힘들게 작은 구멍만 뚫어 주셨는데 나는 구멍을 크게 뚫어서 나비가 고생하지 않도록 했으니 내가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랑을 가졌다.”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혼자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누에의 큰 구멍에서 쉽게 나온 나비는 날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몇 번 돌다가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카프만 부인은 나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비가 누에에서 쉽게 나오도록 구멍을 크게 뚫어 준 것인데, 결국 그것으로 인해 나비가 죽고 말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비는 작은 누에의 구멍에서 나오면서 몸부림 칠 때 번데기에 있던 영양분이 날개로 흘러간다고 합니다. 영양분이 날개로 흘러가고, 그 영양분으로 날개에 힘이 생기고 날개가 튼튼해진다고 합니다. 작은 구멍으로 나오면서 나비는 날개에 힘을 얻게 되고, 결국 나온 후에 날 수 있는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때로는 정말 나오기 힘든 누에의 작은 구멍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순간순간의 삶이 마치 나비가 작은 누에 구멍에서 날개 하나를 빼는 것과 같은 고역과 어려움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내 혼자 힘으로는 빠져 나갈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생의 터널을 통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훨훨 날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날개에 영양분을 주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고통과 아픔으로만 기억되는 그것도 단지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섭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어렵게 여기는 그 고난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여기까지, 여기까지를 깨닫는다는 게 보통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까지 깨달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가 가능해집니다. 생선 먹을 때 가시 골라내듯 고난은 무익한 것이라고 골라내지 마세요. 모든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도 감사의 조건입니다. 개혁교회의 교리적 틀을 세운 인물이 존 칼빈입니다. 그분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성격을 두 가지로 요약했어요. I am nothing, God is everything.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신다! 칼빈의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진수를 잘 담고 있어요.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은 흙 한줌이지요. I’m nothing! 열심히 일해서 무언가를 손에 잡아도 역시 I’m nothing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 이 말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에도 궁극적인 가치를 두고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저 그것에 목을 매고 그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사는 것들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봐야 I’m nothing!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역전이 되면 문제가 발생하지요. I’m everything; God is nothing! 내가 모든 것이 되면 참 좋을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람 잘 날이 없지요. 모든 것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살다보니 뭐하나만 펑크 나도 야단입니다. 99가지 일 때문에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단 한가지 일 때문에 불평하고 사는 게 인생입니다. 내가 전부이고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에 매인 사람이 되 버립니다. 그러나 ...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전부인 사람은 다 감사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오직 모든 것 되신 하나님 그 분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모든 것의 모든 것 되는 그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분에게만 매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자각위에서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God is everything ; I’m nothing! 이 차원에 이르게 되면 ‘상황이 좋다 나쁘다? 유리하다 불리하다?’ -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이번 추석명절에는 온 가족과 함께 ‘그래서 감사’는 당근이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로 감사의 가문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를 하나님께/신32:12-19/정영민 목사/추석설교/2006-10-01
감사를 하나님께 신32:12-19 추석명절은 4대 명절로 삼고 있습니다. 이 주간은 추석절로 어떻게 드리면 될것인가? 감사 제사를 하나님께.. 추석은 원래 한가위라고 했다 한은 큰 것이고 가위는 가배, 길삼 이라는 뜻이다. 신라시대때 유리왕이 왕녀들을 둘로 나눠서 농사후에 7월 15일날부터 농사일을 마치고 좀 쉴 때 8월 15일까지 길삼을 경쟁을 시켰다 승자와 패자를 나눠서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큰 잔치를 했다. 이때 패자중 대표가 해소라는 노래를 불렀다. 해소라는 노래는 했다. 해소라는 노래는 가사가 서글펐던 내용들이다. 자신의 한을 달래는 노래였다. 이렇게 유래된 것이 추석이다. 추석은 추석전까지 경쟁하고 단합하기 위해서 만든 절기이다. 추석은 무엇을 하는 날인가. 추석때는 차래를 지낸다 조상에게 큰 상을 차려서 제사를 드린다. 우리의 민족은 조상을 섬기는데 열심히 하는 민족이다. 송편은 보름달을 뜻하고 열매를 잘 영근 열매를 상징하는 것 과일은 땅위의 나무에서 나오는 열매, 토란은 땅속의 열매, 햅살로 밥을짖고 상을 차려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며 우리 조상들의 전통이다. 바울사도는 종교성이 강한 아덴민족에게 알지 못한 신을 올바를게 가르쳐주었다 알지 못한 신을 섬기는 백성들에게 올바를게 가르쳐서 전도를 한 것이다. 우리도 친척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보고 서로 싸우지 말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잘 가르쳐주고 복받기 원하는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알지 못할 때 잘못알고 있는 것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해야할 일이다. 우리도 알지 못할 때 가족 때문에 제사를 드렸지만 이제 알았으니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한다. 장정 두명이 소를 만들어서 풍악과 함께 제일 잘 사는 집으로 가서 문앞에서 소가 배가고파 구정물좀 달라고 하면 집주인이 음식을 내놓고 같이 얻어먹는 풍습이다. 이것은 농사를 잘 짖게 한 소를 섬기는 잘못된 풍습이다. 여로보함왕이 북쪽의 자기 백성들이 절기때 남쪽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고 오는것을보고 경쟁의식을 가지게되었다. 이것을 가만히 두면 남쪽으로 갈것이라고 생각해 벧엘, 단 지역에 금송아지를 두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하였다. 남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명령을 한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종이 나와서 단이 무너지라고 명하였다 이때 왕은 막으려고 손이 마르게 되었고 단은 무너지게되었다. 마른 손을 종에게 부탁해서 다시 나았다 왕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제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도리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섬기다 몰락하게된다. 솔로몬은 정성스러운 1000번의 제사를 드리고 꿈중에 하나님을 만났다. 난 어리기에 왕으로 잘 재판을 잘 할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선 솔로몬에게 지혜와 구하지 않은 부와 명예를 같이 주었다. 하나님은 무었이든지 구해야 하는 것이다 구해야 주시는 것이다.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서 구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을 위해 기도를 해서 많은 복을 받았다. 우리는 젊어서 가난해도 갈수록 풍족하고 좋은 소리를 듣고 돌아가는 것이 좋은복이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때는 자자손손 복을 받게되지만 알지 못한신에게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다. 우리가 제사를 드릴 때 조상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바르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추석절기에도 감사의 예물을 드려야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절기를 통해서 감사를 드려야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같이 모여서 즐거운 게임도 하는 것이다. 노래와 악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모든 오락게임도 생각에 따라서 즐거운 게임이 되는 것이다. 우리모두 하나님께 즐거운 제사를 드리는 추석 명절이 됩시다.
감사와 나눔 /신16:9-17
감사와 나눔 /신16:9-17 2010-01-21 15:00:28 read : 40 추석 명절에 믿음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추수감사주일이 하나님께는 감사, 가족과 이웃들에게는 축복의 날이 되길 바랍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키던 세 가지 축제가 있는데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수장절입니다 .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감사축제라고 한다면, 칠칠절과 수장절은 땅에서 난 식물들을 거둔 후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축제였습니다. 칠칠절과 수장절은 비슷한 부분도 있고 각각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칠칠절은 유월절 축제가 끝난 다음 날부터 49일을 계산하여 50일째가 되는 날 드리는 축제였습니다. 보리와 밀 등 그 해의 첫 곡식에 낫을 댄 날부터 칠 주간이 지난 50일이 되는 날에 하나님 앞에 모여 감사제사를 드렸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예식을 행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옛날 조상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때 고생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감사하는 축제였습니다. 수장절은 한 해의 모든 추수를 마치고 농산물을 창고에 저장한 후 열린 축제라는 점에서 칠칠절과 시기가 다릅니다. 이때 사람들은 집 밖에 풀과 나뭇가지 등으로 천막을 지은 후 거기서 7일 동안 생활했는데 옛날 조상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천막을 치고 살았던 시절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 유월절이 애굽으로부터의 해방 기념이었던 것처럼 칠칠절과 수장절 역시 애굽에서 나온 조상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자유와 풍요를 누리게 됨을 감사하는 축제라는 점에서 세 절기들이 서로 연결이 됩니다. 애굽으로부터의 자유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자유 회복이었고 가난과 인권 말살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함이었습니다. 이 모든 복이 자신들의 노력이나 수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로서는 도무지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잊지 않도록 세 가지 축제를 정하여 주시고 이스라엘이 자손대대로 이 날들을 감사함으로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 수치스러움 등 나쁜 기억은 할 수 있으면 속히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울 때 나와 함께 하시고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마저 함께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들의 연약함이고 뻔뻔함입니다. 오늘 내가 있는 것은 나 혼자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감사하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망각하는 습관이 있음을 잘 아시기에 옛날을 기억하고 오늘을 감사함으로 살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세 가지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칠칠절과 수장절은 서로 다른 축제였지만 지키는 방식에서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생각해보고 내 힘껏 자원하는 예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뿐 아니라 온 가족이 한데 모여 감사예배를 드리는데 거기에는 직계 가족뿐 아니라 그 집에서 일하는 종들과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레위인들 그리고 나그네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청하여 함께 즐거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내 밭에서 내가 수고하여 거둔 곡식들이지만 그것은 나와 내 식구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땅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이웃들과 나누며 살라고 주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애굽에서 종살이 할때 내 손으로 지은 곡식을 내 맘대로 먹지 못하였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신 것을 활짝 열어 이웃과 나누며 잔치함으로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나는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칠칠절의 축제는 그 해의 첫 곡식을 거둔 후 복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잔치라고 한다면 수장절은 한 해의 모든 농사를 마감하고 긴 겨울 동안 먹을 양식을 곡간에 저장하고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한 해 동안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림과 동시에 또 내년에도 우리의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바라고 믿음으로 맡겨드리는 즐거운 잔치였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하시고 이 모든 것들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앞으로 주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 고백하던 이 잔치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는 정신과 동일합니다. 쌀을 의미하는 한자 ‘米’는 쌀 한톨을 얻기 위해 농부가 씨뿌리고 거두기까지 농부의 손이 88회 거쳐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지요. 그만큼 힘들여 지은 농사이며 소중한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람의 수고만 담겨있을까요? 씨를 뿌렸지만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아 싹을 내지 못하여 시작부터 실패하거나, 한 여름 가뭄으로 식물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새까맣게 말라죽는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농부들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눈물겨운 수고를 했지만 추수 전에 불어닥친 태풍과 홍수로 모든 것을 잃고 통곡하는 농부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하늘의 도움을 바라며 추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 졸이고 그날을 기다립니다. 사람이 수고하였지만 하늘의 도움이 아니면 열매를 얻을 수 없음을 아는 농부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는 추석의 덕담이 있듯 추석이 되면 농촌 마을들은 활기가 넘칩니다. 황금색 들판에 알알이 영글어 고개 숙인 곡식들이 농부의 낫을 기다리고 있으며 사과나무, 감나무, 밤나무 가지마다 잘 익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황금빛 물결 치는 논에는 허수아비가 세워져 있고 농부들은 논둑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쓰러진 볏단을 일으켜 세우고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얻으려고 마지막 손질에 쉴틈이 없습니다. 하루종일 허리가 휘도록 일하느라 온 몸이 저리고 아프지만 잘 익은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마음은 잘 자란 자식들을 바라보듯 만족감에 젖어있습니다. 이렇듯 가을 농부의 훈훈한 마음은 농촌 마을을 넘어 우리에게까지 그 온기가 전해집니다. 일년 내내 이렇게 넉넉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추수의 계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이런 마음 아니겠습니까? 위로는 창조주 전능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위를 돌아볼 때는 함께 어울려 사는 가족과 이웃들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은 감사와 나눔의 잔치가 열리는 날입니다. 넉넉한 마음에서 풍성한 나눔이 나옵니다. 이 넉넉한 마음은 내 손에 들린 풍성한 열매를 바라보는 즐거움에서 나옵니다. 내 마음을 채우고도 넘치는 넉넉함이 이웃을 돌아볼 여유를 가져다 줍니다. 감사절 축제의 나눔은 우리의 기쁨을 배나 더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제물로 드리는 곡식단이나 짐승의 기름으로 배불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은혜를 이웃과 나눔으로 모든 것의 주인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그 제사를 즐거이 받으십니다. 이 나눔의 제사가 하나님께는 즐거운 드림이 되고 이웃 사람에게는 사랑의 실천이 됩니다. 받는 즐거움이 크지만 내가 가진 것으로 이웃과 나눔에서 더 큰 즐거움을 얻는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많이 가진 사람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부요한 사람입니다. 우선 나의 필요를 채운 다음에, 내 가족 먼저 넉넉히 챙긴 다음에 그래도 남은 힘이 있으면 그때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과 나누겠다는 생각으로는 평생 단 한번도 나눔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게 됩니다. 마지막 남은 기름과 밀가루로 작은 떡을 만들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먼저 공궤하였던 사르밧 여인은 그것 때문에 생애 최후의 식사를 빼앗긴 어리석은 여인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핍과 구차함 중에도 기꺼이 나눔으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 집에 양식이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복을 누렸습니다.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쓸 것을 아시고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살고 계십니까? 오늘 추수감사절 그리고 추석 명절을 맞이한 믿음의 가족들 모두 하늘을 여시고 땅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예배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을 기쁨으로 열어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여 땅의 소출을 얻지 못하던 레위인들과 그 땅에 나그네로 머물며 토지 소유권이 없어 농사 짓지 못하던 외국인, 그리고 종들과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의 소출을 함께 나눔으로 살았던 보살핌의 대상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는 일하고 싶지만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턱 없이 적은 수입으로 가족들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여 어깨가 축 늘어진 가장들과 배고픈 어린이들이 있으며, 취업의 길이 막혀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어깨가 부서지도록 일하여 풍작을 이루었지만 농산물이 제 값을 받을 수 없어 실망한 농부들의 눈물도 있습니다. 자식처럼 정성껏 가꾸며 기른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 비용조차 나오지 않아 그 자리에서 갈아엎어야만 하는 농민들의 분노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번 추석이 이런 분들에게 외로움과 허망함이 아니라 넉넉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넉넉하여 쓰고도 남는 재물을 주심은 이 땅에 쌓을 곳이 없도록 쌓아두고 곰팡이가 피도록 움켜쥐고 있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곳간 문을 열어 함께 나누어 균형을 이루라고 맡기신 사명입니다. 많이 가졌다고 누구나 즐거이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나누고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많은 은혜를 나누는 법입니다. 그래서 나눔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믿음에 비례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홀로 지키려고 하늘에만 머물러계셨다면, 하늘 영광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남아계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고 고단한 인간의 삶을 외면하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거절하셨다면 이 세상의 구원은 영원히 실현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 위해 내어주시고 당신의 생명을 나누셨기에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먹고 마시는 성찬식의 떡과 잔은 예수께서 주신 주님의 몸을 나눔입니다. 나와 우리를 위하여 떼어주신 주님의 몸과 흘리신 보혈이 그 피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오는 모든 죄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얻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감사는 드림과 나눔에서 고백됩니다. 하나님께 즐거이 드리는 마음으로 사람들과 즐거이 나누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마음을 나누고, 물질도 나누며, 시간을 나누고 복음을 나눕시다.기쁨과 즐거움도 나누지만 때로는 아픔과 고통도 함께 나눕시다. 해외에서 나그네 삶을 살며 학업과 생활에 대한 긴장감이 지속되고 경제적인 압박이 시시때때로 밀려올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그라들고 삭막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 남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지고 오직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다가 놓쳐버리는 소중한 것들은 없는지 진지하게 살펴보는 추수감사의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즐거움으로 드리고,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 나눔으로 누리는 기쁨이 오늘의 감사잔치 가운데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금년 남은 시간들을 주님과 함께 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와 나눔/ 신16:9-17/ 추석설교/ 2009-10-21
감사와 나눔 신16:9-17 추석 명절에 믿음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추수감사주일이 하나님께는 감사, 가족과 이웃들에게는 축복의 날이 되길 바랍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키던 세 가지 축제가 있는데 유월절, 칠칠절 그리고 수장절입니다 .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감사축제라고 한다면, 칠칠절과 수장절은 땅에서 난 식물들을 거둔 후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축제였습니다. 칠칠절과 수장절은 비슷한 부분도 있고 각각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칠칠절은 유월절 축제가 끝난 다음 날부터 49일을 계산하여 50일째가 되는 날 드리는 축제였습니다. 보리와 밀 등 그 해의 첫 곡식에 낫을 댄 날부터 칠 주간이 지난 50일이 되는 날에 하나님 앞에 모여 감사제사를 드렸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예식을 행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옛날 조상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때 고생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감사하는 축제였습니다. 수장절은 한 해의 모든 추수를 마치고 농산물을 창고에 저장한 후 열린 축제라는 점에서 칠칠절과 시기가 다릅니다. 이때 사람들은 집 밖에 풀과 나뭇가지 등으로 천막을 지은 후 거기서 7일 동안 생활했는데 옛날 조상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천막을 치고 살았던 시절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 유월절이 애굽으로부터의 해방 기념이었던 것처럼 칠칠절과 수장절 역시 애굽에서 나온 조상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자유와 풍요를 누리게 됨을 감사하는 축제라는 점에서 세 절기들이 서로 연결이 됩니다. 애굽으로부터의 자유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자유 회복이었고 가난과 인권 말살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함이었습니다. 이 모든 복이 자신들의 노력이나 수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로서는 도무지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잊지 않도록 세 가지 축제를 정하여 주시고 이스라엘이 자손대대로 이 날들을 감사함으로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 수치스러움 등 나쁜 기억은 할 수 있으면 속히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려울 때 나와 함께 하시고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마저 함께 잊어버리는 것이 사람들의 연약함이고 뻔뻔함입니다. 오늘 내가 있는 것은 나 혼자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감사하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망각하는 습관이 있음을 잘 아시기에 옛날을 기억하고 오늘을 감사함으로 살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세 가지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칠칠절과 수장절은 서로 다른 축제였지만 지키는 방식에서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생각해보고 내 힘껏 자원하는 예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뿐 아니라 온 가족이 한데 모여 감사예배를 드리는데 거기에는 직계 가족뿐 아니라 그 집에서 일하는 종들과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레위인들 그리고 나그네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청하여 함께 즐거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내 밭에서 내가 수고하여 거둔 곡식들이지만 그것은 나와 내 식구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땅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이웃들과 나누며 살라고 주신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애굽에서 종살이 할때 내 손으로 지은 곡식을 내 맘대로 먹지 못하였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신 것을 활짝 열어 이웃과 나누며 잔치함으로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나는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칠칠절의 축제는 그 해의 첫 곡식을 거둔 후 복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잔치라고 한다면 수장절은 한 해의 모든 농사를 마감하고 긴 겨울 동안 먹을 양식을 곡간에 저장하고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한 해 동안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림과 동시에 또 내년에도 우리의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바라고 믿음으로 맡겨드리는 즐거운 잔치였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하시고 이 모든 것들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앞으로 주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 고백하던 이 잔치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는 정신과 동일합니다. 쌀을 의미하는 한자 ‘米’는 쌀 한톨을 얻기 위해 농부가 씨뿌리고 거두기까지 농부의 손이 88회 거쳐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지요. 그만큼 힘들여 지은 농사이며 소중한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람의 수고만 담겨있을까요? 씨를 뿌렸지만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아 싹을 내지 못하여 시작부터 실패하거나, 한 여름 가뭄으로 식물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새까맣게 말라죽는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농부들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눈물겨운 수고를 했지만 추수 전에 불어닥친 태풍과 홍수로 모든 것을 잃고 통곡하는 농부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하늘의 도움을 바라며 추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 졸이고 그날을 기다립니다. 사람이 수고하였지만 하늘의 도움이 아니면 열매를 얻을 수 없음을 아는 농부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는 추석의 덕담이 있듯 추석이 되면 농촌 마을들은 활기가 넘칩니다. 황금색 들판에 알알이 영글어 고개 숙인 곡식들이 농부의 낫을 기다리고 있으며 사과나무, 감나무, 밤나무 가지마다 잘 익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황금빛 물결 치는 논에는 허수아비가 세워져 있고 농부들은 논둑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쓰러진 볏단을 일으켜 세우고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얻으려고 마지막 손질에 쉴틈이 없습니다. 하루종일 허리가 휘도록 일하느라 온 몸이 저리고 아프지만 잘 익은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들의 마음은 잘 자란 자식들을 바라보듯 만족감에 젖어있습니다. 이렇듯 가을 농부의 훈훈한 마음은 농촌 마을을 넘어 우리에게까지 그 온기가 전해집니다. 일년 내내 이렇게 넉넉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추수의 계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이런 마음 아니겠습니까? 위로는 창조주 전능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위를 돌아볼 때는 함께 어울려 사는 가족과 이웃들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은 감사와 나눔의 잔치가 열리는 날입니다. 넉넉한 마음에서 풍성한 나눔이 나옵니다. 이 넉넉한 마음은 내 손에 들린 풍성한 열매를 바라보는 즐거움에서 나옵니다. 내 마음을 채우고도 넘치는 넉넉함이 이웃을 돌아볼 여유를 가져다 줍니다. 감사절 축제의 나눔은 우리의 기쁨을 배나 더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제물로 드리는 곡식단이나 짐승의 기름으로 배불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은혜를 이웃과 나눔으로 모든 것의 주인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그 제사를 즐거이 받으십니다. 이 나눔의 제사가 하나님께는 즐거운 드림이 되고 이웃 사람에게는 사랑의 실천이 됩니다. 받는 즐거움이 크지만 내가 가진 것으로 이웃과 나눔에서 더 큰 즐거움을 얻는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많이 가진 사람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부요한 사람입니다. 우선 나의 필요를 채운 다음에, 내 가족 먼저 넉넉히 챙긴 다음에 그래도 남은 힘이 있으면 그때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과 나누겠다는 생각으로는 평생 단 한번도 나눔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게 됩니다. 마지막 남은 기름과 밀가루로 작은 떡을 만들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먼저 공궤하였던 사르밧 여인은 그것 때문에 생애 최후의 식사를 빼앗긴 어리석은 여인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궁핍과 구차함 중에도 기꺼이 나눔으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 집에 양식이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복을 누렸습니다.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쓸 것을 아시고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으로 살고 계십니까? 오늘 추수감사절 그리고 추석 명절을 맞이한 믿음의 가족들 모두 하늘을 여시고 땅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예배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을 기쁨으로 열어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하여 땅의 소출을 얻지 못하던 레위인들과 그 땅에 나그네로 머물며 토지 소유권이 없어 농사 짓지 못하던 외국인, 그리고 종들과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의 소출을 함께 나눔으로 살았던 보살핌의 대상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는 일하고 싶지만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생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턱 없이 적은 수입으로 가족들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여 어깨가 축 늘어진 가장들과 배고픈 어린이들이 있으며, 취업의 길이 막혀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어깨가 부서지도록 일하여 풍작을 이루었지만 농산물이 제 값을 받을 수 없어 실망한 농부들의 눈물도 있습니다. 자식처럼 정성껏 가꾸며 기른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 비용조차 나오지 않아 그 자리에서 갈아엎어야만 하는 농민들의 분노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번 추석이 이런 분들에게 외로움과 허망함이 아니라 넉넉한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넉넉하여 쓰고도 남는 재물을 주심은 이 땅에 쌓을 곳이 없도록 쌓아두고 곰팡이가 피도록 움켜쥐고 있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곳간 문을 열어 함께 나누어 균형을 이루라고 맡기신 사명입니다. 많이 가졌다고 누구나 즐거이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나누고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많은 은혜를 나누는 법입니다. 그래서 나눔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믿음에 비례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홀로 지키려고 하늘에만 머물러계셨다면, 하늘 영광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남아계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고 고단한 인간의 삶을 외면하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거절하셨다면 이 세상의 구원은 영원히 실현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우리 위해 내어주시고 당신의 생명을 나누셨기에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먹고 마시는 성찬식의 떡과 잔은 예수께서 주신 주님의 몸을 나눔입니다. 나와 우리를 위하여 떼어주신 주님의 몸과 흘리신 보혈이 그 피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오는 모든 죄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얻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감사는 드림과 나눔에서 고백됩니다. 하나님께 즐거이 드리는 마음으로 사람들과 즐거이 나누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마음을 나누고, 물질도 나누며, 시간을 나누고 복음을 나눕시다.기쁨과 즐거움도 나누지만 때로는 아픔과 고통도 함께 나눕시다. 해외에서 나그네 삶을 살며 학업과 생활에 대한 긴장감이 지속되고 경제적인 압박이 시시때때로 밀려올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그라들고 삭막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 남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지고 오직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다가 놓쳐버리는 소중한 것들은 없는지 진지하게 살펴보는 추수감사의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즐거움으로 드리고,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 나눔으로 누리는 기쁨이 오늘의 감사잔치 가운데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금년 남은 시간들을 주님과 함께 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