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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진정한 종교개혁/삼상7:3-6/2001-11-15
21세기의 진정한 종교개혁 삼상7:3-6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도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은총이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9<아 멘>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종교개혁 기념일은 10월 31일인데 매년 10월 끝 주일을「종교개혁 기념 주일」로 지킵니다. 매년마다 지키는 주일이 지만 금년에도 종교개혁이 무엇이며, 또 오늘의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이 날을 지킬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당시의 국민들을 향하여 모든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외친 말씀입니다. 사무엘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민족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의 우리들은 죄악이 관영하고 패역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이 시간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아 멘> 1. 먼저 종교개혁 주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매년 10월 끝 주일마다 종교개혁 주일을 지킵니다. 그래서 매년 종교개혁에 대하여 말씀을 드려도 사람들은 잘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오늘도 종교개혁에 대하여 간단하게 먼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종교개혁이란 지금으로부터 484년전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가 당시 타락과 부패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전통과 관습으로 일관된 캐톨릭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신앙 개혁 운동을 일으킨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이 날을 기념하고 새로운 신앙 부흥과 회개와 각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에서는 성탄절과 부활절 다음으로 매우 뜻깊고 중요한 날입니다. 1천 여년 동안 걸쳐 내려온 중세 암흑시대가 막을 내리고 부패한 천주교의 무지한 교권의 탄압으로부터 해방된 신앙의 사람들이 복음의 광명을 되찾고 자유를 회복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저 유명한 면죄부사건입니다. 면죄부 사건이란 캐톨릭교회의 교황 레오10세(Lro.X 1475-1521) 가 자기 당대의 사업으로서 베드로 대성당을 완공할 계획을 세우고 당시 엄청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그 모금 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면죄부입니다. 알베르트(Albert of Brandenburg. 1490-1545) 라는 사람은 당시 이 면죄부의 판매를 청부 맡아서 그 이익금을 교황과 반분하기로 하고 유명한 웅변가 테첼(Tetzel, Johann. 1450-1519)을 고용하여 그에게 신학 박사의 학위를 주고 가는 곳마다 면죄부에 대하여 설교 아닌 웅변을 하게 하였고 이 유창한 웅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웅변에 속아서 너도나도 거금을 들여서 면죄부를 사게하였습니다. 알브레트와 테첼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면죄부를 판매할 때에 그의 일행이 비텐베르크(Wittenberg)에 왔을 때의 일입니다. 이 기막힌 사기꾼들의 쇼를 목격한 루터는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교황이 발행한 면죄부를 많은 돈을 들여서 사기만 하면 지옥에 간 사람도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거짓말 설교를 듣고 모두가 줄을 서서 면죄부를 샀습니다. 이와 같은 악행을 목도한 루터는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관행을 95가지를 적어서 벽에 붙이고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루터의 모습은 마치 요단 강가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나니라\"를 외치는 세례요한과도 같았습니다. 마3:7-12절의 말씀을 보면 세례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고 외쳤습니다. 외로운 투쟁입니다. 루터는 마치 세례요한과도 같이 외로운 투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나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 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외친 말씀 중에 유명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이라면 천국이라도 살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라면 비록 그곳이 지옥이라도 살아갈 자신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이 없이는 살아 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하지 못한 날은 마귀에게 패한 날이다. 나는 평소에 아침마다 두 시간을 기도한다. 그러나 일이 많고 바쁠 때에는 세 시간 이상의 기도 시간을 갖는다\" 라고 했는데 신앙은 기도 생활에서 유지되고 성장한다는 말입니다. 기도 생활이 없는 사람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합니까? 두 시간은 고사하고 새벽기도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는커녕 저녁예배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야 어찌 진정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셋째로,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목회자가 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고 말함으로써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384장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라고 하는 찬송은 1529 년에 루터가 직접 작사 작곡을 한 찬송입니다. 우리 다같이 1절만 부르겠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 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롬1:17절의 말씀을 그의 신조로 삼고 아무리 교황으로부터 어려운 처벌과 환난이 와도 능히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루터와 같은 믿음으로 어떤 환난이나 고통이 와도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2. 사무엘 선지자 시대의 종교개혁은 대각성 운동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신탁을 받고 백성들을 향하여 우상 숭배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죄악으로 달려가는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유일한 선민이었지만 그들은 종종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어김없이 이방 민족을 도구로 삼으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사 그들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곤 하였습니다. 이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 신 즉 불레셋 족속들이 섬기는 아스다롯 신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 벌로서 불레셋 나라로 하여금 침략케 하시고 이스라엘 나라는 고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백성들이 고통에 빠지자 그들은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사무엘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을 전하였습니까? (1) `우상을 제거하라` 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10계명을 주실 때에 제일 첫째 계명이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20:3-4)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3-4절 말씀에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고 하였습니다. 개혁은 우상을 제거하는데서 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무엘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우선 급선무가 우상을 제거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축복과 구원을 위한 확실한 길이며, 그것만이 불레셋 나라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암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하였고, 요엘 선지자도 외치기를 (욜1:14)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또 (욜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 오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종교개혁 48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들 주변을 돌아보아서 내 마음속에나 어디든지 우상을 제거하여야 합니다. 진정한 개혁은 우상 제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상 제거 운동은 거국적으로 이루어 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나라에서 보물로 정한 국보가 80%이상이 우상이요 우상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공영방송이라고 하는 KBS에서는 민족문화라는 명목으로 공공연하게 굿판들을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 제거 운동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도 이루어 져야 합니다. 우상이란 보이는 형상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형체가 없어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바로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나 하나님보다 더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빨리 버려야 합니다. (2)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오직 그만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우리의 푯대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히12:2절 말씀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빌3:14절 말씀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면 하나님만을 확실하게 섬기고 믿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면 안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상에서 백성들에게 어찌하여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고 하였습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3) 회개 운동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대로 물을 길어다가 여호와 앞에 붓고 그날에 금식을 하며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나이다\" 라고 자복 하였습니다. 새로운 개혁 운동은 반드시 회개의 관문부터 통과를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나니라\" 고 하였고 또 예수님도 복음 전파의 제1성(第一聲)이 \"회개하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천국은 회개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여 은혜를 주시는 것도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하였고 다니엘은 동족의 죄를 회개하면서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도 백성들의 죄악을 인하여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면서 눈이 상하도록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윗은 범죄한 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중한 것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침상이 썩기까지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한국 강산에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니느웨 성과 같은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개혁 운동이 성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니느웨 성이 어떻게 회개를 하였습니까? 요나의 전도를 들은 성민들이 보좌에 앉은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재를 무릅쓰고 회개하였습니다. 온 나라의 백성들과 심지어는 기르는 육축까지 금식을 하면서 자복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멸하시겠다고 하신 진노를 거두시고 저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킬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회개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 한국 민족이 살고, 하나님의 진노가 걷히고, 축복된 백성, 축복된 나라가 되려면 우리나라 삼천리 방방곡곡에 산재되어 있는 우상을 기드온과 같이 때려부수고 오르지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간의 모든 죄를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 길만이 이 나라 이 민족이 살길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3. 오늘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개혁 운동은 어떤 것입니까? 루터가 살고 있던 16세기에만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이 사회에도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종교는 기독교를 막론하고 어느 종교나 부패하였습니다. 요즘 불교계는 어떻습니까?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중세 암흑시대보다도 더욱 부패하여 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끼리도 서로 모함하고 중상 모략을 일삼고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든지 간에 자신만 살면 된다는 식으로 부패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지도자들도 부패하고 있습니다. 교권주의와 향락주의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물질주의가 만연 된 것은 아주 오랜 이야기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굵직굵직한 대형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에 70%가 기독교인이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가 부패하면 나라는 망합니다. 역사상 어느 나라든지 종교가 마지막 보루인데 그 종교가 부패하면 여지없이 나라는 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이 아무리 선지자들을 보내어 깨우쳐도 저들이 돌아오지 않자 하나님은 북방의 바벨론을 채찍으로 삼으사 이스라엘 유대 백성을 모두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그발강 가에서 하나님께 통회하면서 부르짖어 간구 했습니다. 70년만에 해방이 되어 돌아온 저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낮1/4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낮1/4은 통회 자복을 하는데 열조의 죄악까지 회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오늘의 우리나라의 1천만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이 나라의 불의와 죄악을 회개하는 회개의 역사, 개혁의 역사가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1) 오늘의 종교개혁은 먼저 자기 개혁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자기 개혁이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새로워 져야 합니까? ①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타성이 붙고 요령만 생겨서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믿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형식과 외식에서 과감하게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② 우리의 생활도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보십시오 불신자들과 비교하여 과연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이켜 보고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행함의 생활로 변화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③ 우리의 봉사도 헌신도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봉사니 헌신이니 하는 말들을 곧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고 얼마나 봉사를 하였는지도 이 시간에 돌이켜 보고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2) 자기 개혁이란 성령의 역사로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실상은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믿음이 없이 살아온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처럼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시몬이 변하여 베드로가 된 것처럼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스텐레스 공장에서 수십 종류의 그릇을 만들어 냅니다. 그 중에 재떨이가 있습니다. 그 재떨이는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재떨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악된 인간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새롭게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낡아서 못쓰는 그릇이나 고철들은 그대로는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3천도 이상의 뜨거운 용광로 속에 들어가서 녹아져서 새로운 제품의 그릇이 되어야 하듯이 우리의 인간성 변화는 나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슥4:6)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3) 성령 받고 변화되면 하나님의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의 나이 80세에 백발을 날리며 호렙산 기슭에서 양을 치는 목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불러 성령을 체험케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일생 동안 고기나 잡던 어부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 받고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습니까? 바울도 성령 받고 거듭나서야 하나님의 큰 일군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회개하고 오르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때에 바른 믿음의 생활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그러므로 먼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랜 관습에 젖어서 의례 그러려니 하고 또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는데 하는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오늘의 종교개혁은 이와 같이 우리들의 가슴속에서부터 소리 없이 이루어 져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교회가 새로워지고 나아가서는 국가와 사회가 새로워 질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고하면서, 주님 보시기에 부족하고 잘 못된 것은 회개하여, 뜨거운 열심 있는 믿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는 안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되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려면 열심을 내야 합니다. 마틴 루터와 같이 불의와 죄악과 싸워서 다시 한 번 우리들 자신의 믿음에 개혁의 불을 붙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루터와 같이 모두가 신앙 개혁 운동을 일으킨다면, 우리교회는 변화될 것이고,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고, 이 지역사회가 변화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신앙 개혁 운동이 여러분들 가슴마다 뜨겁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감사가 있는 종교개혁/행5:1-11
감사가 있는 종교개혁 행5:1-11 이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처음 교회가 생길 때 우리는 그 교회를 가리켜 초대교회 라고 합니다. 여러분, `초대교회`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이 초대교회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참으로 많은 교회입니다. 첫 번째, 교회가 부흥되고 성장된 것입니다. 삼천명, 오천명 이야기가 나오니까, 적어도 만 여명 이상의 교인이 모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을 받고 교회를 시작합니다. 이 때 제자의 수가 삼천명입니다. 그 때 제자들이 하는 일은 단 하나 전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다. 그 분은 다시 살아나셨다.` 이들은 전도자였고 예수부활 의 증인들이었습니다. 그것밖에 한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삼천명이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유무상통하고, 성전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니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두려워 떨면서 이들을 감옥에 가둡니다.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것입 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를 전하는 것이 내 생명이고 내 삶의 존재의미라고 하면서 한 일 이 하나님, 종들로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 사람이 하는 일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다. 그 분이 우릴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다시 살아났다.`라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교회가 부흥하 고 성장했습니다. 교회 부흥과 성장의 비결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전도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우리가 이해 못할 일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사건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하나, 둘 자기들의 집과 밭을 바쳐서 성도들간에 가난한 자가 없게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나바도 자기 밭을 팔았고, 오늘 성경의 주인공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기 소유를 팔아서 바쳤습니다.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분명 성도요, 충성된 일군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헌금을 했던 것이 죽음의 원인이 됩니다. 왜 죽었냐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문제입니다. 이 부부는 헌금 즉, 자기의 소유를 팔은 거금을 바쳐 놓고도 하나님의 벌을 받고 죽은 것 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경제적 논리로 본다면 더욱 그렇 습니다. 이 초대교회는 기존교회도 아니고 개척교회 아닙니까? 한푼이 새로울 때입니다. 그 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죽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들과 다른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단면적으로 보아도 하나님께 있어서 헌금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헌금을 기뻐 하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바쳤더니, 전 재산을 바쳤다고 칭찬하시지 않습니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전 재산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머리 위에 붓습니다. 주님께선 이 여인이 행한 일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알려지게 될 것이라고 칭찬하시지 않습니까?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바쳤더니, 잘했다고 칭찬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것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관심은 헌금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신앙인의 삶의 태도에 관심이 있으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 엇입니까? 정말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무엇입니까? 이건 교회 개혁인데, 교회 개혁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찾자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첫째, 거짓과의 전쟁입니다. 여러분,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속이는 것입니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처럼 말하는 것입니 다. 저는 지난 금요일에 황당한 일을 당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말한 사건의 장본인이 있다면 저를 만났으면 합니다. 금요일 구역장,권찰 성경공부를 들어가려고 하는데, 한 분이 찾아왔 습니다. 부목사님이 면담을 한 후 \"우리 동네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이고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러니, 꼭 상담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 분을 만나러 들어갔습니다.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는데, 눈물을 짜고, 수건을 꺼내들고 한참을 웁니다.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꺼내서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금요 심야기도회에 도 이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도와주어야겠다 생각을 하고, 이분이 있었다는 병원에 연락도 해 보고, 또 이분의 사정을 알아야 하겠기에 그 분이 살던 집도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병원에도 이런 사람이 없었고 이런 사람이 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속임당했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는 정말로 그 분을 도와주려 했는데 말입니다. 속은 것도 기분이 나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너무나 불쌍한 것입 니다.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사람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거짓말 하는 사람을 멸망시킨다고 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제구계명이 무엇입니까?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시편130편2절에 여호와는 우리 행위를 익히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 우리가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소유의 일부를 바칩니다. 좀 아까웠던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도 앞에 바치면서 다 바쳤다고 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왜 하나님을 속이느냐`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원치 않으심을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면 안 됩니다. 미국의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에게 한 기자가 \"당신은 정직하다고 하는데, 정말로 거짓말해 보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내가 인권을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돕는 일을 위해서 거짓말을 해 보았지만, 그것이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신앙인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하는 중심에는 자기 자랑이 있고 자기 명예가 있습니다. 조금 바쳤다고 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거기에는 내가 헌금했다, 나 때문에 교회가 되고 있다 하는 자기 자랑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거짓말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다는 것입니다. 3절에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라고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마태복음 16장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그의 신앙을 귀하게 보시고 칭찬하시고 그 신앙고백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뜻과는 다른 말을 합니다. 그 때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제자인 베드로도 금방 칭찬받고, 금방 사탄의 종노릇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보게 되면 사탄은 충성하는 사람에게 더 유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믿음없는 사람에겐 유혹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탄의 유혹입니다. 예수님께 서 공생애를 위하여 금식기도 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만난 것이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돌을 들어 떡을 해 먹으라` -능력이 있는가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내 능력입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내게 절하라, 내가 너에게 이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다` - 권세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받쳐줄 것이 아니냐?` - 명예를 시험합니다.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단호하게 물리치십니다. 우리가 잘한다고 할 때 사탄이 유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부흥사경회를 위해 영적 특별집회를 했습니다. 전 첫시간 패기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패기라고 하는 것은 승리를 위해 도전하는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기, 힘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패기와 신앙적인 패기, 육적인 패기와 영적인 패기입니다. 세상적이고 육적인 패기는 한마디로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이고 영적 인 패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 내가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문제가 이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드러내기 원합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할 때는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그 때는 기도원에 사람이 많았습니다. 새벽기도가 차고 넘쳤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쇠퇴하고 침체되는 원인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국교회가 쇠퇴되기 시작할 때 기도원이라고 하는 이름은 사라지고 수양관이 되었다.\" 무슨 뜻입니까? 기도는 하나님께 목표가 있습니다. 수양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새벽기도가 변해서 성경공부가 됩니다. 새벽기도는 하나님께 관심이 있습니다. 성경공부는 나에게 관심 이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지식을 쌓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 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오늘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로마카톨릭 교회가 베드로성당을 짓는 일 때문에 발단이 되었습 니다. 저는 이태리에 가서 베드로 성당을 보았습니다. 엄청난 건물입니다. 아름답습니다. 가치가 어느 정도나 되나 물어 보았더니, 이태리 나라 예산 곱하기 몇 년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짓는 것만이 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공적 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카톨릭 교회가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는 말 그대로 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네 부모가 지옥에 갔지! 그런데 그 부모를 천국에 가게 하는 길은 이 면죄부를 사는 것이다. 네가 금돈을 이 헌금통에 던지는 순간, 그 헌금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지옥에 있는 네 부모가 천국에 올라갈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천국가고 안 가고는 하나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것은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의 공로에 있고, 헌금에 있다는 것입니까? 이단들을 보십시오. 다미 선교회 1998년 1992년 10월 28일 교인들에게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면서 무엇을 이야기했습니까? 재산 팔아서 갖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늘 올라가 기가 좋다는 것입니다. 올라갔습니까? 여호와의 증인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전도를 많이 하고 다닙니까? 그들은 열심히 공적을 쌓아야 십사만 사천명의 반열에 선다는 것입니다. 공적을 강요합니다. \"도를 아십니까?\" 라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성격이 다르지만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 이 갖다가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너무나도 잘못된 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여기엔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누구를 믿나? 자기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시작되고 잘 될 때에 이런 유혹들을 뿌리 치게 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하는 일은 단 하나, 열심히 전도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전도자요, 증인입니 다. 교회가 성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이 교회가 핍박받고 흩어집니다. 삼천명, 오천 명 모였으면 만명 이상 모였는데, 왜 이 교회를 핍박받게 해서 흩어 놓으십니까? 어느 성서학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 컵안의 물이 있는데, 망치를 들어 내려쳐 물 하나 남기지 않고 흩어지게 만들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이 순교하고, 8장에 박해 로 흩어지게 하는데, 그렇게 많이 모이던 예루살렘 교회가 역사속에 뒤안길로 물러나게 됩 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예루살렘 교회는 구제받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부흥하던 교회가 구제 받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중심이 안디옥 교회로 옮겨 갑니다. 안디옥 교회가 하는 일은 복음 증거하는 일입니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안디옥 교회지만 복음 증거하는 일에 힘 쓸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의 중심을 안디옥 교회로 옮겨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헌금을 얼마나 했느냐, 몇 명이나 모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 닙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나가는 증인인가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 다. 하나님의 사람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선교를 많이 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선교학자들이 말하길 이 선교의 장애물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엇이냐? 그것은 그 지역이 나쁘다, 사람이 나쁘다, 돈이 없다, 등등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한국도 전도 못하고 외국 나가서 무슨 전도를 합니까?\" 이것이 가장 큰 장애물이 랍니다. 사람의 생각은 예루살렘이 다 복음화 되고 그리고 사마리아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모이니까, 그 안의 자기 자랑, 자기 명예, 자기를 높이는 일에 앞장 서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깨트리시는 것입니다. 교회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차고 넘쳐서 교회를 건축한다? 맞는 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식당을 경영해 보십시오. 10명 모이면 10평 짓고, 15명 모이면 15평, 그렇게 합니까? 그게 아닙니다. 라면집은 지금도 라면집입니다. 식당 하나를 지어도 믿음을 가지고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지어도 믿음을 갖고 짓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건축할 때 참여했던 분들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했다.\" 이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교인이 차고 넘쳐서 지었다? 아닙니다. 교인이 차고 넘쳐야 건축한다던지, 한국이 다 복음화 되어야 선교를 해야 한다던지, 그 내면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힘이 많아야 할 수 있다는 것 아닙니다. 공적세우고, 사람세우고, 자기를 내세우는 것은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지 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이런 거짓과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헌금도 중요하고, 많이 모이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개혁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3대원리가 무엇입니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정직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왜? 거짓의 반대는 정직, 진실입니다. 우리 삶의 정직과 진실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솔로몬은 최고의 부자입니다. 좋은 것 다 누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말년에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헛되지 않은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헛되지 않은 인생이 무엇입니까? 잠언과 전도서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잠언과 전도서를 읽어 보십시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나를 믿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 님을 믿고 의지하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위대한 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폰 틸리히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의 불행은 역사 속에 서 볼 때, 어디에서 오는가? 고대사람들의 불행 - 운명 그들은 잘살고 못사는 것이 운명이고, 숙명이다. 그래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 - 죄와 저주 병, 홍수, 흉년이 와도 저주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어떤 노력과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현대 사람들의 불행 - 교만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집도 짓고, 옷도 좋은 것을 입고, 잘 먹고 생활합니다. 그러면 서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난 번 수해로 경상도, 남부쪽 사람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부모가 된 후, 인생이 얼 마나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른들이 \"자식은 품안의 자식이다.\" 말씀하실 때, 품안 에 있다가 품 밖에 나서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아플 때, 대신 아파줄 수 없습니다. 깡패 만나서 매맞았고 돈뺏길 때, 내가 그 아이들을 보호해 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속상한 지 알 수 없습니다. 아이들 결혼 문제도 그렇습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 속으로 낳은 자식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만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해 주셔야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말을 잘해서 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욥기를 보십시오. 잘 믿는 것 같은데도 안됩니다. 무력해 집니다. 성경에 `약한자를 들어 강한자를 부끄럽게 하고, 어리석은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하나님을 믿어야 한 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인간은 약하고 하나님은 강하다는 것입 니다. 하나님만 믿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정직함입니다. 405장 찬송이 그렇게 좋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내가 구원 받은 것도 내가 잘나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사도바울 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안에 뿌리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 외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감사해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스티븐 호킹` 박사, `아인슈타인`보다 위대한 과학자라고 칭송을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근육이 굳어 가는 병에 걸렸습니다. 의사는 현대의학으로 2년밖에 살 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호킹` 박사는 2년이 아니 라 10년, 20년 지금까지도 살고 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시간과 역사」라는 책의 서문에 `나는 매일 매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또 그 힘 때문에 살아 갑니다.`라고 썼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그가 쓸 수 있는 생존의 시간은 2년밖에 없었습 니다. 그러나, 생명뿐 아니라 그의 능력까지도 크게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해야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특히 신앙인은 감사하고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일본 해군 장교 `가와까미 기히찌`씨 세계2차 대전때, 장교로 나가 싸우다가 그만 폐전하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고향이 어떻습니까? 비참한 폐전국 형편입니다. `내가 이것 을 위해 목숨바쳐 전쟁을 했는가.`하고 원망,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그의 몸 이 굳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이 와서 병명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자, 마 지막 결론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 보십시요.\"라고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그를 만났습니다. 그 의사의 이름이 `후찌`랍니다. 그에게 \"당신은 하루에 만 번 이상 `감사합니다.`를 하십시요.\"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제가 해보니까, 100번 하는 데 쥐가 납니다. 그런데, `감사합니다.`를 만번 이상 해 야 낫는다고 하니까, 그대로 합니다. 하루는 아들이 감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 감 드세요.\" 하는데, 하도 \"감사합니다.\"를 하다 보니, 순간적으로 아들에게 \"감사합니다.\" 하며 손을 내 미는데 그만 손이 쑥 내밀어지는 것입니다. 차츰 굳어졌던 근육들이 풀어지고 정상인의 몸 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인간이 해야 할 본질입니다. 우리 인생은 감사 없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감 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구원받은 것도 감사하고, 이날까지 살아온 것도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 신앙인이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 주실 줄로 믿 습니다. 종교 개혁은 단순히 종교구조를 고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변화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고, 전도하는 자가 되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다.\" 하나님이 나를 살게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일해놓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하면서도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인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가운데 `세바스찬 바하`가 있습니다. 그는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곡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작품처럼 화려하지 못했습니다.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열살 되기 전에 조실부모해서 고아로 자랍니다. 형 밑에서 크는데, 많은 구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서도 결혼했는데, 아내가 13년만에 죽었습니다. 또 다시 결혼을 해서 자식이 스무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열명이 죽습니다. 남은 열명 가운데 하나 는 스무살이 되어서 죽고, 그 중에 하나는 뇌성마비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자신은 나이 가 들어 감에 눈이 점점 안 보이다가 그만 맹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뇌일혈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곡을 만드는데, 그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곡들을 만드는 것입 니다. 그는 오라트리오를 만들 때 맨 밑에 싸인을 하는데, `세바스찬 바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합창곡을 만들었을 때는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께.` 오르간 반주곡 을 만들 때는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싸인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기를 전혀 내세우지 않습 니다.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내세우고 모든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 은 그의 어려운 인생을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살면서 두려운 말이 있습니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론 좋기도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허구에 놀아나선 안 됩니다. 무엇을 했느냐 가 아니고, 진정한 개혁은 사람의 개혁입니다.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직한 사람이 되십시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거짓말을 하지 않기 바랍니다. 남을 억울하게 만드는 일을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원하시는 것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종교 개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당연히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음주일은 우리가 추수감사주일로 지냅니다. 일년에 한번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물론 봄에 맥추감사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고, 정말 변화된 사람으 로 증거를 보일 수 있기 바랍니다. 감사가 있는 종교개혁,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될 길인 줄로 믿습니다.
개혁 시대의 신앙/ 사1:15-23
개혁 시대의 신앙 사1:15-23 1.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이다. 그러나 개혁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여러 차원으로 확대되어 모든 면에서 개혁이 필요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정치권에서의 금품 수수가 도가 지나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각 기관들의 행정 절차나 과정이 돈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면 이 나라에는 더이상 희망이 없다. 그러나 어떤 외국신문은 최고의 지도자였던 사람의 부패를 파헤치는 현실에서 아직 가능성이 있는 나라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제 먼저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개혁시대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이를 실천해 나아가야 한다. 과거의 불의나 악한 행실은 이제 개혁의 시대를 맞이하여 모두 폐기되어지고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히9:9-12) 개혁없이 미래란 없기 때문이다. 2. 우리는 이 시대의 불의를 발견할 줄 아는 정의의 눈을 가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될 것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으며(눅12:56,눅16:8)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은 의를 따라 살며 이것을 선포하는 자가 되고자 하였다.(시40:10) 그리고 이러한 정의를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분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의를 드러내시는 분이시다.(사61:8,렘51:10)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혜로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표를 향해 올바른 지침을 가지고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의의 길을 따르는 자를 사랑하신다.(잠15:9) 또한 민중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자의 옹호자가 되시며(시 140:12,사1:17)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 그러므로 개혁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손해보는 사람들을 향해 구원과 옹호의 손길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선교의 모습이다. 이로써 주의 이름으로 의의 열매가 가득한 자가 되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빌1:11) 종교 개혁자 루터는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되지만 참된 믿음이란 게으르게 빈둥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갈5:6) 예수께서 ‘타인을 위한 사람(the Man for others)으로 사신 것처럼 우리의 소명은 약자의 옹호자로 활동함으로써 복음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불의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사3:13-15) 신앙이란 종교적 공동체 안에 한계선 내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본질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에 드러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이 인류사회’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지상목표이다. 이를 위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단지 흘러가는 풍문이 아니라 행동과 진실로 드러내야 한다.(요일3:18) 뇌물이나 좋아하고, 약한 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정책이나 법은 민중에게서 거부되며, 사회복지를 외면하는 지도자나 관리는 더 이상 민중의 대표자가 될 수 없는 시대가 오도록 우리는 이 시대의 개혁에 부단히 참여하여야 한다.(사2:26-28) 3. 하나님은 만물의 새로운 창조자이듯이 이 시대의 불의를 엎어버리고 새로운 개혁의 시대를 향해 우리를 부르신다. 오늘날 예언자는 누구이며, 이러한 개혁은 누가 담당해야 할 것인가? 먼저 주님 앞에서 변화된 자이며, 오늘의 그리스도인이다. 성전의 불길 가운데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이사야와 같이 담대히 ‘나를 보내소서!’ 외치는 성도가 되어져야 한다.
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마9:14-17
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마9:14-17 로마시대의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역사]라는 책에서 나라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간단한 명제 형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 한다”(mutatis mutandis!) 그는 이 말을 잘 실천한 나라는 흥하고 성했지만, 이 말을 실천하지 못한 나라는 쇠하고 망했다고 역사를 진단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늘 도둑일 때 고치지 않으면 소 도둑이 된다는 말입니다. 작은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할 때 바로 잡지 못하면 큰 문제로 발전하게 되고, 결국은 그 문제 때문에 망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고칠 것을 고치는 것, 바로 잡아야 할 것을 바로 잡는 것 이것을 좀 거창한 말로 “개혁”이라고 부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 그것이 개혁입니다. 낡고 맞지 않는 것을 새롭게 바꾸는 것 그것이 개혁입니다. 이 개혁을 잘하는 나라가 흥합니다. 이 개혁을 잘하는 공동체가 흥합니다. 이 개혁을 잘하는 개인이 흥합니다. 반대로 이 개혁을 못하는 나라는 망합니다. 이 개혁을 못하는 공동체는 망합니다. 이 개혁을 못하는 개인은 망합니다. 개혁할 때 개혁해야 합니다. 그래야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흥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가장 강력한 개혁을 추구한 인물로 조광조를 듭니다. 중종 시대 부패한 훈구파의 득세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를 바로 잡아보려고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능력있는 사림파를 등용하여 개혁의 발판을 탄탄하게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혁에 실패하고 누명을 쓰고 사사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개혁이 성공했다면 우리나라는 어쩌면 일본을 능가하는 나라가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개혁을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획기적인 녹훈삭제 조치 때문입니다. 공신의 대부분의 녹훈을 삭제하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면서 훈구파들의 거센 반발을 자초했습니다. 불필요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천천히 해도 될 일을 너무 성급하게 시도했습니다. 결국 개혁을 뒷받침하던 중종까지도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광조는 개혁해야 할 명분도 확실했습니다. 개혁의 방향도 잘 잡았습니다. 그러나 개혁하는 방법이 서툴렀습니다. 그래서 개혁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개혁에 나섭니다. 그러나 문제는 개혁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개혁에 실패합니다. 오늘 우리나라도 많은 부분 개혁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도 많은 개혁을 시도해 왔지만 아직도 부분적으로 개혁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일터, 우리 가정, 우리 개인의 삶 속에 개혁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은 종교개혁 49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95개조로 된 면죄부에 대한 반박문을 내 건 날을 기념하여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루터의 이 반박문을 기점으로 종교개혁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서구 사회를 완전히 새롭게 뒤바꿔놓았습니다. 천 년간 서구를 지배하던 저 로마 천주교를 대체한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 개신교로 태동하여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종교개혁의 성공을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오늘 우리가 개혁을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적 관점에서 개혁을 성공하려 할 때 꼭 본받아야 할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1.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16세기 개혁자들 마음속에 강하게 새겨져 있었던 구호가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애드 폰테스!\\\"(ad fonte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근원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source)라는 뜻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직접적인 동기는 바로 저 유명한 면죄부 사건입니다. 면죄부는 당시 로마 천주교회의 교황 레오 10세가 고안해 낸 작품입니다. 그는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을 자기 살아생전에 완공할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엄청난 공사였기 때문에 그 공사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사비를 충당할 묘안으로 만들어 낸 것이 면죄부입니다. 면죄부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교황이 발행한 면죄부를 사면 어떤 죄도 다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심지어 지옥에 간 사람도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값을 비싸게 매겼습니다. 성경 내용과는 너무도 멀리 나간 것입니다. 또한 이 면죄부를 많이 판매하기 위한 꾀도 냈습니다. 알버트라는 천재적인 수완가를 고용했습니다. 물론 수익금 일부를 넘기기로 하고 면죄부 판매를 청부로 맡겼습니다. 그는 당대 유명한 웅변가 테젤이라는 사람을 고용해서 곳곳을 다니며 유창한 웅변으로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상품 판매하듯이 전했으니 초대교회의 복음 전도 방법과는 너무도 멀리 나간 것입니다. 이 면죄부 사건에서 보듯이 로마 천주교가 지난 1000년 동안 세상을 지배하면서 세속화 되었고, 타락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근원으로부터 멀어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멀어져왔습니다. 초대 교회가 보여주었던 교회의 본질로부터 멀어져왔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을 개혁의 기본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기독교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요한 칼빈은 그래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물은 고이면 썩듯이 사람이 하는 일은 세월이 지나면 변질됩니다. 아무리 좋은 정신도 세월이 지나다 보면 변질되어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뜨겁게 맹세하고 약속한 사랑도 세월이 지나다 보면 변질되어 싸늘하게 식어버립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제도나 법률도 세월이 지나다 보면 변질되어 허점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개혁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마치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한국사회에서 그 거룩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옥한음 목사는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라는 책에서 오늘의 이 안타까운 한국교회 현실을 삼허현상(三墟現像)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바로 허수(虛數), 허세(虛勢), 허상(虛象)입니다. 먼저 허수(虛數)는 한국교회가 통계에 정직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내 놓은 교인 통계는 무려 1300만이 넘습니다. 그러나 통계청 발표는 861만 천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차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계수하는 방법 차이에서 나온 결과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정직하지 못해서 나온 점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허세(虛勢)는 사회 각 분야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많은데 비해 그 영향력이 미미한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국회의원 가운데 무려 30%가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입법과정에서 기독교 정신이 고려되고 있지 못합니다. 재계에 역시 1/4이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패 문제는 전혀 개선되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허상(虛象)은 한국 교회에 몸담고 있는 대부분의 평신도가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지 못해 불신자와 그 차별성을 보이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고작 성경책을 들고 교회 출입하는 것 외에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이 안타까운 현실이 우리를 정말 슬프게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런 병리적 현상을 보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주일 다시금 개혁자들이 본질로 돌아가고자 외쳤던 종교개혁의 3대 명제를 마음에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오직 믿음입니다(Sola Fide)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한마디의 말씀은 지난 2000년 성도들의 신앙을 든든하게 지켜온 신앙의 기초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무엇으로 사는가? 바로 오직 믿음입니다. 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오직 성경입니다(Sola Scriptura). 루터는 “나의 신앙은 오직 성경 말씀에 사로잡힌 포로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루터의 말처럼 우리의 신앙은 철저하게 성경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셋째, 오직 은혜입니다.(Sola Gratia)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15:10)이라는 바울의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또 다른 기초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선행을 베풀고, 그 많은 일들을 하지만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개혁은 애드 폰테스(근원으로 돌아가자) 즉 본질로 돌아가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개혁, 신앙의 개혁은 교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2.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종교개혁을 성공할 수 있었던 드러나지 않은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인쇄술의 발달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직전 구텐베르그라는 사람에 의해 인쇄술이 개발되어 점점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달을 종교개혁의 중요한 도구로 받아들였습니다. 우선 면죄부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인쇄하여 반포했습니다.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전 독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유럽으로 빠르게 확산되어나갔습니다. 각지에서 동조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천주교 지도자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이 사태를 수습할 길이 없어 전전긍긍하게 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루터가 오직 성경을 외쳤을 때 일반 신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당시 모든 성경은 다 필사본이어서 너무도 고가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실이나 귀족들 소수만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은 오직 라틴어로만 되어있었습니다.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인들은 성경이 있어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남들이 생각지 못하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우선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독일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성경을 쉬운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그 번역한 성경을 과감하게 인쇄하여 반포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싼 값으로 성경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독일어로 된 성경이어서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남보다 앞서서 시대를 열어가는 그의 열린 정신이 종교개혁을 성공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혁은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은 정신으로 이어가되 형식은 열린 마음으로 새롭게 창조해 내야 합니다. 구태의연한 과거를 금지옥엽 지켜내는 것이 개혁이 아닙니다. 최근 미국에서 주목 받고 있는 신학자 가운데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교회를 크게 네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박물관 교회, 현상 유지적 교회, 목회적 교회, 그리고 선교적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었습니다. 현재 유럽교회는 이미 박물관 교회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미국교회는 현상유지적 교회에서 박물관 교회로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목회적 교회에서 현상 유지적 교회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상은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호흡하고, 더 나아가 변화하는 시대를 선도하게 될 때 교회는 더욱 역동적으로 이 시대를 주도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분은 오늘의 시대 변화를 네 가지로 진단했습니다. 하나는 이해(understanding)에서 경험(experience)으로, 둘은 대리(representation)에서 참여(participation)로, 셋은 문자(words)에서 이미지(image)로, 그리고 넷은 개별성(independence)에서 연결(connection)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이들의 앞자를 따서 ‘EPIC’이라고 부른다. 이분은 오늘의 교회가 이 ‘EPIC’ 시대를 열어가지 못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면 얼마간 현상 유지적 교회로 버티다가 결국은 박물관 교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EPIC’ 시대를 열어가면서 성공한 한 예로 스타벅스 커피를 들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스타벅스 커피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우선 스타벅스는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는 경험(Experience)을 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고 행복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게 해서 커피 자체를 마시는 경험에 깊이 빠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스타벅스는 고객들에게 참여(Participant)를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꼭 자기가 먹고 싶은 커피, 자기만의 커피를 말하고 그것을 스타벅스의 언어로 말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타벅스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이미지(Image)를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특별한 로고와 마크로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커피 하면 스타벅스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미지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 교회만의 이미지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스타벅스는 사람들의 관계의 장을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만나서 상호작용하고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 자리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간의 코이노니아가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개혁은 시대를 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고색창연하고 구태의연한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는 도태됩니다. 늘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앞서서 읽고 그 흐름에 발맞추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선도할 수 있을 때 그 개혁은 큰 성공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개혁은 참 어렵습니다. 본질을 회복하는 일과 시대를 열어가는 일을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둘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이 개혁을 실패하는 이유는 시대를 열어가려고 몸부림치면서 본질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이 개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본질을 붙잡는다고 시대를 열어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로는 안 됩니다.(either or) 이것과 저것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both and) 우리는 개혁을 성공해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 교회의 본질을 철저하게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우리 앞에 빠르게 변해 가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이에 발맞춰야 합니다. 본질은 철저히 지키면서도 형식은 시대에 맞게 바꿔가야 합니다.
개혁/ 고후5:17-17/ 2008-10-28
개혁 고후5:17-17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랍비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3:3).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연인의 상태를 본래의 사람 또는 옛 사람이라고 한다면 새로운 피조물은 거듭난 사람 또는 새사람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옛사람을 새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죄에 오염되어 파괴된 세상을 창조의 원형으로 복원시키는 작업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도 죄와 죽음아래 얽매여 있는 인간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역은 지금도 지상에 있는 그의 교회를 통하여 전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개혁의 원리를 생각해 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개혁의 양상 개혁(reform)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낡고 잘못된 부분을 뜯어 고치고 새롭게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국가나 사회가 그동안 잘못된 관행과 적폐를 일신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개혁을 단행하곤 합니다. 1) 물리적인 개혁 대체로 쿠데타나 혁명적인 방법으로 체제를 전복시키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잘못된 체제나 구조를 바꾸려 할 때 순리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 하다고 판단되어 비합법적인 수단이 동원되는 경우입니다. 역사적으로 봉건 왕조나 독재체제로부터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 정부로 전환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시민혁명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근대 국가들 중에는 군부의 힘을 가진 소수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체제를 전복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혁명에는 피를 흘리거나 많은 사람의 희생을 치르게 하는 악순환을 가져오게 됩니다. 권력이나 무력 또는 다수에 의한 군중 심리가 작용하더라도 결국 혁명은 힘의 논리가 정당시 되는 비합법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2) 정신적인 개혁 사람들은 크든지 작든지 개혁을 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개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공감대를 이루지 못할 경우 그것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여간한 고통이 따르더라도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생각이 바뀌고 의식 개혁이 먼저 이루어지게 되면 행동의 개혁도 쉽게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건전한 사고를 가지고 사상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인간은 가변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옛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곤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9). 3) 영적인 개혁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토기장이의 손안에서 질그릇이 새롭게 만들어 지듯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인간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어 지는 법입니다(렘 18:4). 본문 말씀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는 다는 것은 육신의 사람이 성령의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뜻하며,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 3:6-7). 요한복음 1:13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성경적 개혁의 특징 중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교회가 오랜 기간 로마 캐톨릭(Catholic)에 의하여 타락하고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개혁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제자리로 돌려 놓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 방법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1) 말씀 운동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운 슬로건은 ‘오직 말씀’(Sola Scripture)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오랜 기간 혹독한 박해를 이겨내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으나 콘스탄틴(Constantinus)황제 이후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본래의 길에서 이탈하고 말았습니다. 교황권이 강화되자 세상 권력까지 장악하게 되고 급기야는 성직을 매매하는 풍조가 만연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온 말씀의 진리는 훼손되고 온갖 부조리와 비진리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세속화 되고 형식종교로 전락해 갈 때 개혁자들이 ‘말씀으로 돌아가자’ 는 기치를 내걸고 교황권에 맞서며 개혁운동을 벌였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교회는 말씀이 지배하는 기관입니다. 오늘날 개혁신앙을 계승하는 교회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교회요, 그 말씀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2) 성별 운동입니다. 교회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고 하였습니다(레 11:4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거룩한 민족(聖民)이라고 불렀습니다(신 7:6). 이스라엘 백성에게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게 한 것도 거룩한 민족으로 구별된 증거를 남기기 위함이었습니다(수 5:2-3).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기관입니다. 세상이 타락하고 죄악으로 오염되어 갈 때 교회는 순결을 지키며 세상의 빛이 되어야합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개혁되어야만 합니다. 온갖 불의와 세속적인 요소들을 단절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빌립보서 2:15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하였습니다. 3) 회복 운동입니다. 개혁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는 일입니다. 혁명이나 쿠데타의 경우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뒤엎어 버리고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지만 개혁은 잘못된 부분을 수술하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놓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래의 신앙과 생활에서 이탈하여 불신앙과 범죄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을 때 이를 깨우쳐 주고 바른길로 돌아서게 하는 것이 개혁운동입니다. 예레미야 6:16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하신 것도 겉사람은 그대로 이지만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바뀌어 지는 것을 뜻합니다(빌 2:5).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결국 그 생각과 행동까지 새롭게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3. 개혁의 열매 어떤 것이나 그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면 여러 가지 부작용과 모순으로 불행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진통이 따르고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에게 유익을 주고 행복을 가져오게 만들어 줍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에게 주신 계명은 첫째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출 20:3). 이 명령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서 지켜져야 될 기본적 관계를 명시하신 말씀입니다. 이 관계는 바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정립하신 것입니다(레 26:12).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고 거기에 지배당하고 사는 것은 최상의 행복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와 같은 축복의 길을 외면하고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길을 찾아가다가 멸망하고 맙니다(왕하 24:1-4). 이런 일은 신약시대 이후에도 반복되어 중세교회의 타락을 불러왔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회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 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하면서도 자기의 얼굴을 내세우고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행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42:8에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중세기 교회를 암흑시대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교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eo Gloria)을 슬로건으로 했던 종교개혁의 성공은 바로 온 세계에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약속된 축복을 행사합니다. 낡은 수도관을 교체하거나 보수 했을 경우 좋은 물을 안전하게 공급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절되고 신령한 교통이 이루어 지지 못했던 사람이 그 근원을 치유하고 새로운 관계로 회복하게 되면 약속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 6:1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 새벽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개혁신앙의 바른길을 지키기만 하면 약속된 축복을 행사하면서 시대를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개혁/ 왕하23:1-3, 대하34:3-7,29-33
개혁 왕하23:1-3, 대하34:3-7,29-33 지금 우리나라의 최대의 국민적 관심은 새 정부가 이끌고 있는 개혁작업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개혁을 통해 30년 부정부패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우리 국민들은 그 부패의 규모에 대해 경악을 금하지 못하고 있읍니다마는 사실 이것은 아직 곁가지 몇에 지나지 않고 그 둥치나 그 뿌리는 아직도 드러나고 있지도 않은 정도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 국민들의 기대는 이 개혁이 철저히 지속되어서 그 뿌리까지 부정의 고리들이 드러나 끊어지고 전혀 새로운 나무를 심듯이 이 나라의 기초가 새롭게 심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희망이며 아마 새 정부의 구호에 비추어 볼 때 개혁의 목표도 거기에까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개혁이 거기에까지 미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며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이 과연 어떻게 해야지 거기까지의 개혁이 가능하며 이런 차원에서 우리 신앙인으로서는 이 시대적 과제에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이제 차분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앞에 놓여진 이 과제에 대한 성서의 교훈을 한번 새겨보고 거기에서 개혁의 성서적 원칙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정치적이 사안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은 다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서는 이런 정치사회적 사안에 대해서도 영적인 일에 못지 않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김영삼 대통령에 의한 개혁과 같은 개혁작업이 이스라엘 역사속에서도 있었습니다. 그 한번은 히스기야 라고 하는 왕에 의해 추진되었고 다른 한번은 요시아란 왕에 의해 추진되었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보면 이상하게도 이 때의 이스라엘의 개혁과 오늘 우리 나라의 개혁사이에는 어떤 비교할 점이 없지않아 보입니다. 이들의 개혁이 추진된 것은 한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두 나라중에 하나가 망한 사건에 자극을 받고 시작이 됩니다. 조금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울왕에 의해 세워진 이스라엘나라는 다윗왕과 솔로몬왕의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가 견고히 섰지만 솔로몬왕의 무리한 경제개발 위주의 통치때문에 솔로몬왕이 죽고 난후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분단된 남북 이스라엘마저도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하고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왕국에 의해 나라가 세워진지 불과 200여년만에 멸망해 버립니다. 이제 남은 나라로서 남쪽에 세워진 유다가 겨우 이스라엘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나라마저도 극심한 위기와 불안정속에서 처해 있었습니다. 다윗왕이 확보해 놓았던 영토도 많이 잃어버리고 솔로몬의 무역정책으로 성장했던 경제도 어려워지고 멸망해 버린 북쪽 이스라엘에서부터 난민은 계속 넘어오고 민심은 말할 수 없이 흉흉해져갔습니다. 나라가 이처럼 위기와 불안정속에 들어간 원인은 국제적 정세와 국내적 요인 여러가지가 있었겠으나 역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왕들의 거듭된 실책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비롯하여 계속된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여로람, 아하시야, 아달랴, 요아스, 웃시야, 요담, 아하스로 이어지는 통치자들은 여호사밧, 웃시야등 극히 소수의 왕들만이 국가를 안정시켰을 뿐 대부분의 왕들은 살해, 모사 등으로 왕위를 찬탈하는 등 권력투쟁만을 일삼고 집권하면 호화생활을 하는 등 국가경영이나 민생문제는 뒷전으로 하여 사회는 극히 불안장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세워진 나라를 왕들이 마음대로 국가이념을 바꾸어 이방종교를 끌어들이고 이방신당을 세우고 이방신을 섬기는등 통치철학자체가 흔들리고 이러한 틈을 타서 귀족들은 부를 축적하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부패는 정신적 부패를 늘 같이 갖고 오는데 공직자 재산공개이후에 언젠가 김대통령이 재산을 공개한 사람에게서 참회하는 빛을 본적이 없다고 하면서 도덕적 불감증을 이야기한 적이 있읍니다만 이스라엘 나라의 당시에는 도덕적 불감증 정도가 아닌 신앙적 불감증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이스라엘 나라 자체는 신앙이고 신앙 자체가 이스라엘 나라라고 할 만큼 신앙과 이스라엘 나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회는 이 신앙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예배 등 종교행사는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행사는 다 형식에 지나지 않을 뿐 일상의 삶은 뇌물과 부패와 불의로 가득찼습니다. 이것은 동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 미가나 이사야의 설교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들은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너희는...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예언자 미가도 이와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내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당시에도 교회는 신자들로 가득찼고 성가대의 찬양소리도 우렁찼고 제단에는 신자들이 잡아바치는 제물과 기름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제물이 부담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제물들을 걷어치우고 오히려 억압받는자를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변호하고 정의를 행하고 사랑을 행하고 하나님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이 제사보다 더 우선해야 할 일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착취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람들을 억압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가난하고 억압받고 있는데 우리만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은 부담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토록 국기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을 때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개혁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개혁정책은 두가지 면에 촛점이 맡추어졌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앗수르로부터 자주독립을 하는 것이고 둘 째는 종교개혁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온갖 이방종교의 우상들을 철거하고 모든 다른 예배처소들을 폐하고 예루살렘성전으로만 예배를 일원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에는 물론 민족을 외세로부터 구원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개혁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너무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일원화하는 것도 예루살렘 성전이 곧 왕권도 상징했기 때문에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는 마치 과거에 박대통령이 충무공정신을 강조할 때 국민이 자기에게도 충성하기를 기대하면서 한 것처럼 자기의 왕권도 강화하는 정치적 계산이 깔린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 솔로몬시대에 예루살렘성전은 곧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므로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여러모로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그의 개혁을 꽃피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왕위는 그의 후계자 므낫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므낫세는 가장 무력한 왕으로 기록될 만큼 그는 계속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며 그저 자기 왕위만을 보호하며 즉위를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히스기야에 의해 겉으로나마 고개를 들었던 민족자주의식은 물에 물을 탄 듯한 므낫세에 의해 원위치 하여 버렸습니다. 이러던 중 민족주의자 요시아가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이 민족주의자 요시아의 등극과 함께 이스라엘은 요시아를 축으로 하여 민족운동을 펼치고 개혁작업을 다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시야는 다윗이 확보한 영토를 다 탈환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영토를 확보하고 국민정신개조를 하기 위해 종교개혁에 착수를 했습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도 처음에는 히스기야처럼 이방종교의 우상들을 제거하고 부패를 몰아내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히스기야는 그것을 자기의 정치적 목적으로 했고 요시아는 민족주의적 사관에 입각하여 했었고 또 훨씬 더 철저하게 전개해 갔습니다. 그러나 이 부패를 들추어내고 추방하는 일만으로는 개혁이 계속 추진되어 나가기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이나 오늘에나 사람들은 정치적 위기로 불안에 처하면 흔히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하는데 이런 분위기를 당시 수구세력들이 조성하며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요시아에게는 하나의 행운과 같은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방신상을 몰아내고 개축을 하던중 한 두루마리를 성전바닥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구약학자들은 바로 이것이 오늘의 신명기라고 보고 있는데 이 책의 발견을 통해 그동안 진행해 오던 개혁이 그저 정치적 프로그램이었다면 이제는 개혁의 정신적 신앙적 근거가 확립되게 된 셈인 것입니다. 이 책을 발견함으로써 요시야의 개혁은 더욱 힘을 얻고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개혁을 겉으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속으로부터의 개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이방신상을 제거하고 모든 이스라엘 예배를 예루살렘성전으로 중앙화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여기에서 발견된 책은 이 신앙적 개혁을 훨씬 더 영적인 차원에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만 여기 발견된 책 신명기는 \"여화와의 거하실 곳,\"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단순히 예루살렘성전이 아니고 이스라엘초기에 하나님이 주셨던 것이 언약궤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 의미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성전이란 장소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약을 마음에 새기고 실행하는 곳이란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결국 개혁은 형식의 개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개혁에서 완성되며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따라 정의를 세우고 사랑을 일구고 하나님앞에 겸손하게 되는 바로 그 삶의 개혁에서 완성되며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실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 위대한 개혁의 정신적 토대를 발견한 후 요시야 왕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 즉 각료들을 모으고 보든 백성과 주민, 제사장들과 예언자, 어른에서 아이에 이르기까지 성전에 모인가운데 이 개혁의 정신적 토대가 되는 신명기를 듣는 장면입니다. 요시야는 국민전체가 이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지속적인 개혁이 불가능함을 알고 각료를 포함한 모든 국민을 모아놓고 이 말씀을 읽어주라고 한 뒤에 자기는 성전기둥곁에 서서 온 마음과 목숨을 다 바쳐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과 이 책에 적힌 언약의 말씀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언약을 하나님앞에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늘 한국의 현대사와도 이상하게 많은 유사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개혁은 온 국민이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진실에로 복귀하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음을 알고 여기에 동참하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깊은 뜻을 모든 국민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개혁과 보전/애5:19-22
개혁과 보전 애5:19-22 계절이 달라지면 옷을 갈아입는다. 계절의 변화를 거스리면 춥기만 하고 자신만 손해를 보게 된다. 옷을 바꿔 입는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 시대에 따라서 형식이라는 옷은 갈아입어야 한다. 옷을 바꿔 입는다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듯이 형식을 바꾸는 것은 내용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루터는 낡은 형식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바꾸어야 했다. 종교개혁 427주년을 맞이하여 개혁은 무엇이며 보전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1. 개혁이란 옛적으로 돌아가는 것. 예레미야는 애가에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소서\\\"라고 한다. 옛적 같게 하는 것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 내용, 탈색된 본질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개혁이란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성경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라고 한다. 옛적에 가지고 있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야곱이 실패했을 때에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고 바울은 다메섹을 늘 회상하며 살았다. 우리에게도 돌아가는 옛적이 있어야 한다. 2. 개혁이란 율법에서 은혜로 돌아서는 것. 예수님은 금식 논쟁에서 혼인잔치 비유, 생베조각의 비유, 새 포도주 비유를 말씀하신다. 반드시 있어야 할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바리새적이 되고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율법은 필요하지만 율법주의는 반 은혜적이다. 형식이 필요하지만 형식주의는 반 복음적이다. 바리새는 구별되게 살려는 좋은 의미의 종파였지만 율법에 얽매이니까 사랑도 은혜도 없이 율법만 따지게 되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 되고 외식하는 자가 된 것이다. 율법적인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되고 자신도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개혁은 이런 율법을 벗어나서 은혜로 나아가는 것이다. 3. 개혁이란 헌 부대를 새 부대로 바꾸는 것.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일파가 아니라 완성이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다. 율법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완성하지 못한 진리를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완성한다. 내용과 형식을 다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대를 새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새 부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새 포도주를 보존하기 위한 필연적 방법이다. 형식의 개혁이란 복음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다. 새 포도주는 원칙적으로 시간이 가도 변치 않는 것이고, 새 부대는 시간을 따라 낡아지고 부패하는 것이다. 개혁과 보존을 조화하여 복음을 슬기롭게 전하자.
개혁과 사람/ 느7:1-/ 2001-08-20
개혁과 사람 느 7:1- 드디어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습니다. 기적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빠른 시간 내에 성벽이 재건되는 역사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전체 둘레가 약 6.5킬로미터나 됩니다. 이 성벽을 재건하는데 52일이란 단기간이 소요된 것입니다. 모두가 놀랐습니다. 제 일차 귀환이 있은 지 약 백년 정도가 지난 후에야 이루어진 성벽 재건작업은 놀랄만한 개혁속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개혁에는 필요한 요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개혁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개혁의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명확하게 그려진 개혁의 목표가 없으면, 개혁이 진행되어 가면 갈수록 개혁의지가 희미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개혁의 목표는 획득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하려는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의 개혁목표도 정해질 수 있고, 그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개혁에는 분명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합니다. 개혁하려면 왜 개혁해야 하는지 개혁이 이루어지면 어떤 결과가 우리에게 나타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이 작업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엇 때문에 개혁이 있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작업, 그래서 그 개혁의 작업에 들어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정말이지 조그마한 개혁이라 할지라도 개혁이란 이름의 모든 것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준비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도 너무나 많기 때문에 개혁한다는 것은 거대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혁 작업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입니다. 아무리 목표가 분명하고 동기부여도 명쾌하고, 실천 가능한 비젼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 개혁에 참여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없이는 개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시카고 한인 연합 장로교회가 있습니다. 건물도 완전히 구입했고 지목 변경도 완전히 했습니다. 조직도 짜여져 있습니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진행시킬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없으면 이 조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건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유지시킬 인적 자원이 필요합니다. 컴퓨터로 얘기하자면 이 나머지 것들은 다 하드웨어에 속합니다. 사람이 소프트웨어입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제일먼저 하는 작업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교체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을 바꿉니까? 새로운 정치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들어서면 새 정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7장은 멋있는 장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그래서 별 의미가 없는 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장보다 중요한 장입니다. 사람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성벽을 재건할 때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약 40개 이상이 작업반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해 주었기 때문에 성벽재건 작업이 끝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1장에서 6장까지는 성벽재건이라는 목표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반발이 있어도, 걸림돌이 등장했어도 지속적인 성벽재건의 목표에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7장은 그것에서 전환하는 장입니다. 성벽이라는 목표에서 사람이라는 목표로 옮겨가는 첫 번째 기록입니다. 여러분 성벽만 있으면 예루살렘이 잘 지켜집니까? 성벽하나만 잘 지어놓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까? 다른 민족들이 공격을 아예 포기하고 맙니까? 여러분, 교회 건물만 잘 지어놓으면 교회가 저절로 성장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거대한 오산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건물이 시원치 않아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간간이 언급하는 캘리포니아의 새들백 교회는 바로 그런 전통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교회입니다. 교회 성장의 잘못된 신화 하나는 교회는 건물만 세워놓으면 저절로 성장한다는 신화입니다. 그런데 새들백 교회 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한 후에 사람이 점점 불어남에도 불구하고 교회 건물을 먼저 지으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람을 세우는 일에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사람 세우는 작업이 건축작업으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중단될까봐 이 건물, 저 건물로 옮겨다니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이제는 교회를 건축했지만 말입니다. 이제는 건물을 세워도 사람을 훈련시키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에 건물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건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도 있어야 합니다. 외적인 조건도 갖추어진다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느헤미야도 성벽을 재건하는 작업을 통해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연합하도록, 중심부로 집중하도록 묶어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작업입니다. 건물을 세운 후에 반드시 튼튼하게 세워져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세우는 작업입니다. 사람이 세워져야 멋지게 세워진 예루살렘 성벽과 치안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21세기 교회의 핵심 이슈는 교회 성장이 아닌 교회의 건강이다\'고 릭 워런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교회는 건강하기만 하면 저절로 성장한다는 원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인적 자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건강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7장 일절을 보실까요? \"성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짝 단 것이 끝이 아니라 그 다음 작업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했습니까? 일절 후반부를 읽어 보실까요?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사람을 세운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세우는데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사람, 일할 수 있는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 이엠 바운즈는 \"사람이 하나님의 방법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최선의 방법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 없이는 아무 것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년 사업과 행사와 프로그램 진행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일군을 만드는, 제자를 삼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통해서 영적 생산이 멈추지 않고 진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교회의 성장입니다. 우리 교회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키우는데 투자하는 일은 아깝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서 58장 1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황폐한 곳이 문제가 아닙니다. 파괴된 기초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무너져 있어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일군만 있으면 황폐한 곳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신된 사람만 키워놓으면 무너진 데를 보수할 것이며 길을 닦아놓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미래는 사람을 기르는데 있습니다. 사람에게 투자하는 교회는 미래가 보장된 교회입니다. 사람을 기르기 위한 곳에 투자해야 합니다. 사람을 교육시키는데 필요한 건물에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건강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제일 먼저 세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은 사실 모두 레위인들입니다. 레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강조하면서 적어놓은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길러야 하고 세워야 하는데 제일 먼저 어떤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는 말입니까? 새로운 정치권이 새 사람을 등용한다면 교회는 제일 먼저 \"레위인을 길러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는 자를 길러내야 합니다. 프로그램 잘 짜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줄 아는 사람을 길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없이는 진정한 교회의 개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개혁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세상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이끄는 사람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안디옥 교회에 사역할 사람들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두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선택했는지 사도행전 15장 25절-2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우리가 길러내야 하는 사람도, 우리가 필요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기르면 교회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개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왜 성공할 수밖에 없을 까요? 사무엘 상 2장 30절이 그 대답을 들려줍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기시면 우리 사역에 문제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런 사람 만드는 교회로 남기만 한다면 우리의 교회 미래는 열린 문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사람,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길러내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2절을 보십시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 이제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리더를 선정합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느헤미야가 수산 성으로 되돌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뽑았습니까? 잘 보십시오. 하나니와 하나냐입니다. 자신의 동생 하나니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 됨됨이가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리 중에서 돋보이는 자라\"고 말입니다. 1절 말씀의 연속아닙니까? 레위인들만 그런 사람, 목회자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이 아니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람 만드는 교회의 목표입니다. 하나냐에 대해 성경은 다른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레위인인지 아닌지, 다른 능력이 뛰어난 사람인지 아닌지, 그렇지만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돋보이는 사람이다\'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을 우리 교회는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어떤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십니까? 우리는 무엇에 돋보이는 사람입니까? 무엇에 우리 교회는 뛰어납니까? 무엇으로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릅니까? 우리의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고 키우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능을 가르치고 능력을 심어주는 곳보다, 리더쉽을 길러주는 곳이 되기 보다,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는가에 신경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교회는 무엇하는 장소입니까? \'사람을 살리고 그 사람을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으로 만드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드는 목표가 있는 곳이 우리의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 무엇이 이어집니까? 3절을 보십시오.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거민으로 각각 반차를 따라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 편을 지키게 하라\" 사람을 세우고 그리고 사역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먼저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일부터 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사역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이 점에서 실패합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을 놓치고 나중 일인 사역에 먼저 접어들게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야기되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니까 교회 일의 순서를 착각하고 큰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일이 제일 먼저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우선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통해 교회의 물줄기가 바뀌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능이 많아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파워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가 높아지고, 우리 교회가 높아지고 일으켜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준비되기만 하면 우리는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핵심당원을 뽑을 때 네가지 중요한 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필요한 말입니다. 개혁을 하려는 우리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네가지 요소입니다. \"Total Belief, 절대적인 신념-신앙적으로 표현하자면 절대신앙,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완전한 경외심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둘째는 Total Training 철저한 훈련, 공산당들의 훈련은 무서운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바로 개혁의 핵심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Total Commitment, 완전한 헌신, 마지막으로 Total Action 과감한 행동, 최종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행동\"입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사역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개혁에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다른 조건을 잘 갖춘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현재가 부족하면 훈련받을 줄 알고, 헌신하기로 결정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우리 교회는 개혁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7장 7절부터 가득하게 적힌 명단을 보며 이런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사람을 보내 주옵소서. 훈련받고 하나님께 헌신할 사람을 보내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이런 일 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개혁에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십시다.
개혁과 사람/ 느7:1/ 2002-02-16
개혁과 사람 느7:1 드디어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습니다. 기적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빠른 시간 내에 성벽이 재건되는 역사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전체 둘레가 약 6.5킬로미터나 됩니다. 이 성벽을 재건하는데 52일이란 단기간이 소요된 것입니다. 모두가 놀랐습니다. 제 일차 귀환이 있은 지 약 백년 정도가 지난 후에야 이루어진 성벽 재건작업은 놀랄만한 개혁속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개혁에는 필요한 요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개혁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개혁의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명확하게 그려진 개혁의 목표가 없으면, 개혁이 진행되어 가면 갈수록 개혁의지가 희미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개혁의 목표는 획득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하려는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의 개혁목표도 정해질 수 있고, 그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개혁에는 분명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합니다. 개혁하려면 왜 개혁해야 하는지 개혁이 이루어지면 어떤 결과가 우리에게 나타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이 작업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엇 때문에 개혁이 있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작업, 그래서 그 개혁의 작업에 들어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정말이지 조그마한 개혁이라 할지라도 개혁이란 이름의 모든 것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준비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도 너무나 많기 때문에 개혁한다는 것은 거대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혁 작업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입니다. 아무리 목표가 분명하고 동기부여도 명쾌하고, 실천 가능한 비젼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 개혁에 참여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없이는 개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시카고 한인 연합 장로교회가 있습니다. 건물도 완전히 구입했고 지목 변경도 완전히 했습니다. 조직도 짜여져 있습니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진행시킬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없으면 이 조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건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유지시킬 인적 자원이 필요합니다. 컴퓨터로 얘기하자면 이 나머지 것들은 다 하드웨어에 속합니다. 사람이 소프트웨어입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제일먼저 하는 작업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교체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을 바꿉니까? 새로운 정치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들어서면 새 정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7장은 멋있는 장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그래서 별 의미가 없는 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장보다 중요한 장입니다. 사람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성벽을 재건할 때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약 40개 이상이 작업반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해 주었기 때문에 성벽재건 작업이 끝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1장에서 6장까지는 성벽재건이라는 목표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반발이 있어도, 걸림돌이 등장했어도 지속적인 성벽재건의 목표에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7장은 그것에서 전환하는 장입니다. 성벽이라는 목표에서 사람이라는 목표로 옮겨가는 첫 번째 기록입니다. 여러분 성벽만 있으면 예루살렘이 잘 지켜집니까? 성벽하나만 잘 지어놓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까? 다른 민족들이 공격을 아예 포기하고 맙니까? 여러분, 교회 건물만 잘 지어놓으면 교회가 저절로 성장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거대한 오산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건물이 시원치 않아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간간이 언급하는 캘리포니아의 새들백 교회는 바로 그런 전통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교회입니다. 교회 성장의 잘못된 신화 하나는 교회는 건물만 세워놓으면 저절로 성장한다는 신화입니다. 그런데 새들백 교회 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한 후에 사람이 점점 불어남에도 불구하고 교회 건물을 먼저 지으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람을 세우는 일에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사람 세우는 작업이 건축작업으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중단될까봐 이 건물, 저 건물로 옮겨다니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이제는 교회를 건축했지만 말입니다. 이제는 건물을 세워도 사람을 훈련시키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에 건물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건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도 있어야 합니다. 외적인 조건도 갖추어진다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느헤미야도 성벽을 재건하는 작업을 통해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연합하도록, 중심부로 집중하도록 묶어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작업입니다. 건물을 세운 후에 반드시 튼튼하게 세워져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세우는 작업입니다. 사람이 세워져야 멋지게 세워진 예루살렘 성벽과 치안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21세기 교회의 핵심 이슈는 교회 성장이 아닌 교회의 건강이다\'고 릭 워런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교회는 건강하기만 하면 저절로 성장한다는 원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인적 자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건강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7장 일절을 보실까요? \"성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짝 단 것이 끝이 아니라 그 다음 작업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했습니까? 일절 후반부를 읽어 보실까요?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사람을 세운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세우는데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사람, 일할 수 있는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 이엠 바운즈는 \"사람이 하나님의 방법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최선의 방법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 없이는 아무 것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년 사업과 행사와 프로그램 진행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일군을 만드는, 제자를 삼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통해서 영적 생산이 멈추지 않고 진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교회의 성장입니다. 우리 교회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키우는데 투자하는 일은 아깝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서 58장 1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황폐한 곳이 문제가 아닙니다. 파괴된 기초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무너져 있어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일군만 있으면 황폐한 곳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신된 사람만 키워놓으면 무너진 데를 보수할 것이며 길을 닦아놓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미래는 사람을 기르는데 있습니다. 사람에게 투자하는 교회는 미래가 보장된 교회입니다. 사람을 기르기 위한 곳에 투자해야 합니다. 사람을 교육시키는데 필요한 건물에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건강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제일 먼저 세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은 사실 모두 레위인들입니다. 레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강조하면서 적어놓은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길러야 하고 세워야 하는데 제일 먼저 어떤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는 말입니까? 새로운 정치권이 새 사람을 등용한다면 교회는 제일 먼저 \"레위인을 길러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는 자를 길러내야 합니다. 프로그램 잘 짜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줄 아는 사람을 길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없이는 진정한 교회의 개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개혁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세상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이끄는 사람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안디옥 교회에 사역할 사람들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두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선택했는지 사도행전 15장 25절-2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우리가 길러내야 하는 사람도, 우리가 필요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기르면 교회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개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왜 성공할 수밖에 없을 까요? 사무엘 상 2장 30절이 그 대답을 들려줍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기시면 우리 사역에 문제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런 사람 만드는 교회로 남기만 한다면 우리의 교회 미래는 열린 문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사람,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길러내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2절을 보십시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 이제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리더를 선정합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느헤미야가 수산 성으로 되돌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뽑았습니까? 잘 보십시오. 하나니와 하나냐입니다. 자신의 동생 하나니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 됨됨이가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리 중에서 돋보이는 자라\"고 말입니다. 1절 말씀의 연속아닙니까? 레위인들만 그런 사람, 목회자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이 아니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람 만드는 교회의 목표입니다. 하나냐에 대해 성경은 다른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레위인인지 아닌지, 다른 능력이 뛰어난 사람인지 아닌지, 그렇지만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돋보이는 사람이다\'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을 우리 교회는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어떤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십니까? 우리는 무엇에 돋보이는 사람입니까? 무엇에 우리 교회는 뛰어납니까? 무엇으로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릅니까? 우리의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고 키우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능을 가르치고 능력을 심어주는 곳보다, 리더쉽을 길러주는 곳이 되기 보다,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는가에 신경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교회는 무엇하는 장소입니까? \'사람을 살리고 그 사람을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으로 만드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드는 목표가 있는 곳이 우리의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 무엇이 이어집니까? 3절을 보십시오.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거민으로 각각 반차를 따라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 편을 지키게 하라\" 사람을 세우고 그리고 사역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먼저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일부터 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사역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이 점에서 실패합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을 놓치고 나중 일인 사역에 먼저 접어들게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야기되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니까 교회 일의 순서를 착각하고 큰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일이 제일 먼저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우선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통해 교회의 물줄기가 바뀌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능이 많아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파워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가 높아지고, 우리 교회가 높아지고 일으켜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준비되기만 하면 우리는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핵심당원을 뽑을 때 네가지 중요한 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필요한 말입니다. 개혁을 하려는 우리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네가지 요소입니다. \"Total Belief, 절대적인 신념-신앙적으로 표현하자면 절대신앙,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완전한 경외심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둘째는 Total Training 철저한 훈련, 공산당들의 훈련은 무서운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바로 개혁의 핵심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Total Commitment, 완전한 헌신, 마지막으로 Total Action 과감한 행동, 최종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행동\"입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사역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개혁에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다른 조건을 잘 갖춘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현재가 부족하면 훈련받을 줄 알고, 헌신하기로 결정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우리 교회는 개혁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7장 7절부터 가득하게 적힌 명단을 보며 이런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사람을 보내 주옵소서. 훈련받고 하나님께 헌신할 사람을 보내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이런 일 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개혁에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십시다.
개혁과 사람/느7:1-
개혁과 사람 느7:1- 드디어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습니다. 기적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놀랄 만큼 빠른 시간 내에 성벽이 재건되는 역사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전체 둘레가 약 6.5킬로미터나 됩니다. 이 성벽을 재건하는데 52일이란 단기간이 소요된 것입니다. 모두가 놀랐습니다. 제 일차 귀환이 있은 지 약 백년 정도가 지난 후에야 이루어진 성벽 재건작업은 놀랄만한 개혁속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개혁에는 필요한 요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개혁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개혁의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명확하게 그려진 개혁의 목표가 없으면, 개혁이 진행되어 가면 갈수록 개혁의지가 희미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개혁의 목표는 획득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하려는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의 개혁목표도 정해질 수 있고, 그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개혁에는 분명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합니다. 개혁하려면 왜 개혁해야 하는지 개혁이 이루어지면 어떤 결과가 우리에게 나타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이 작업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엇 때문에 개혁이 있어야 하는지를 밝히는 작업, 그래서 그 개혁의 작업에 들어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정말이지 조그마한 개혁이라 할지라도 개혁이란 이름의 모든 것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준비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도 너무나 많기 때문에 개혁한다는 것은 거대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혁 작업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입니다. 아무리 목표가 분명하고 동기부여도 명쾌하고, 실천 가능한 비젼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 개혁에 참여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없이는 개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시카고 한인 연합 장로교회가 있습니다. 건물도 완전히 구입했고 지목 변경도 완전히 했습니다. 조직도 짜여져 있습니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진행시킬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없으면 이 조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건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유지시킬 인적 자원이 필요합니다. 컴퓨터로 얘기하자면 이 나머지 것들은 다 하드웨어에 속합니다. 사람이 소프트웨어입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제일먼저 하는 작업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교체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을 바꿉니까? 새로운 정치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들어서면 새 정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7장은 멋있는 장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그래서 별 의미가 없는 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장보다 중요한 장입니다. 사람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성벽을 재건할 때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약 40개 이상이 작업반들이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해 주었기 때문에 성벽재건 작업이 끝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1장에서 6장까지는 성벽재건이라는 목표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반발이 있어도, 걸림돌이 등장했어도 지속적인 성벽재건의 목표에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7장은 그것에서 전환하는 장입니다. 성벽이라는 목표에서 사람이라는 목표로 옮겨가는 첫 번째 기록입니다. 여러분 성벽만 있으면 예루살렘이 잘 지켜집니까? 성벽하나만 잘 지어놓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까? 다른 민족들이 공격을 아예 포기하고 맙니까? 여러분, 교회 건물만 잘 지어놓으면 교회가 저절로 성장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거대한 오산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건물이 시원치 않아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간간이 언급하는 캘리포니아의 새들백 교회는 바로 그런 전통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교회입니다. 교회 성장의 잘못된 신화 하나는 교회는 건물만 세워놓으면 저절로 성장한다는 신화입니다. 그런데 새들백 교회 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한 후에 사람이 점점 불어남에도 불구하고 교회 건물을 먼저 지으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람을 세우는 일에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사람 세우는 작업이 건축작업으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중단될까봐 이 건물, 저 건물로 옮겨다니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이제는 교회를 건축했지만 말입니다. 이제는 건물을 세워도 사람을 훈련시키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에 건물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건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도 있어야 합니다. 외적인 조건도 갖추어진다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느헤미야도 성벽을 재건하는 작업을 통해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연합하도록, 중심부로 집중하도록 묶어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작업입니다. 건물을 세운 후에 반드시 튼튼하게 세워져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세우는 작업입니다. 사람이 세워져야 멋지게 세워진 예루살렘 성벽과 치안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21세기 교회의 핵심 이슈는 교회 성장이 아닌 교회의 건강이다\\\'고 릭 워런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교회는 건강하기만 하면 저절로 성장한다는 원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인적 자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건강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7장 일절을 보실까요? \\\"성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짝 단 것이 끝이 아니라 그 다음 작업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했습니까? 일절 후반부를 읽어 보실까요?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사람을 세운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세우는데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사람, 일할 수 있는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 이엠 바운즈는 \\\"사람이 하나님의 방법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최선의 방법은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람 없이는 아무 것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년 사업과 행사와 프로그램 진행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일군을 만드는, 제자를 삼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통해서 영적 생산이 멈추지 않고 진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교회의 성장입니다. 우리 교회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키우는데 투자하는 일은 아깝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서 58장 1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황폐한 곳이 문제가 아닙니다. 파괴된 기초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무너져 있어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일군만 있으면 황폐한 곳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헌신된 사람만 키워놓으면 무너진 데를 보수할 것이며 길을 닦아놓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미래는 사람을 기르는데 있습니다. 사람에게 투자하는 교회는 미래가 보장된 교회입니다. 사람을 기르기 위한 곳에 투자해야 합니다. 사람을 교육시키는데 필요한 건물에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건강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제일 먼저 세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은 사실 모두 레위인들입니다. 레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강조하면서 적어놓은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길러야 하고 세워야 하는데 제일 먼저 어떤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는 말입니까? 새로운 정치권이 새 사람을 등용한다면 교회는 제일 먼저 \\\"레위인을 길러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는 자를 길러내야 합니다. 프로그램 잘 짜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줄 아는 사람을 길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없이는 진정한 교회의 개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개혁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세상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이끄는 사람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안디옥 교회에 사역할 사람들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두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선택했는지 사도행전 15장 25절-2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우리가 길러내야 하는 사람도, 우리가 필요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기르면 교회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개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왜 성공할 수밖에 없을 까요? 사무엘 상 2장 30절이 그 대답을 들려줍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기시면 우리 사역에 문제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런 사람 만드는 교회로 남기만 한다면 우리의 교회 미래는 열린 문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사람,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길러내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2절을 보십시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 이제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리더를 선정합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느헤미야가 수산 성으로 되돌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뽑았습니까? 잘 보십시오. 하나니와 하나냐입니다. 자신의 동생 하나니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 됨됨이가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리 중에서 돋보이는 자라\\\"고 말입니다. 1절 말씀의 연속아닙니까? 레위인들만 그런 사람, 목회자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이 아니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람 만드는 교회의 목표입니다. 하나냐에 대해 성경은 다른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레위인인지 아닌지, 다른 능력이 뛰어난 사람인지 아닌지, 그렇지만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돋보이는 사람이다\\\'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을 우리 교회는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어떤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십니까? 우리는 무엇에 돋보이는 사람입니까? 무엇에 우리 교회는 뛰어납니까? 무엇으로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릅니까? 우리의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고 키우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능을 가르치고 능력을 심어주는 곳보다, 리더쉽을 길러주는 곳이 되기 보다,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는가에 신경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교회는 무엇하는 장소입니까? \\\'사람을 살리고 그 사람을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으로 만드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드는 목표가 있는 곳이 우리의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 무엇이 이어집니까? 3절을 보십시오.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거민으로 각각 반차를 따라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 편을 지키게 하라\\\" 사람을 세우고 그리고 사역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먼저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일부터 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사역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이 점에서 실패합니다. 먼저 해야 할 것을 놓치고 나중 일인 사역에 먼저 접어들게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야기되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니까 교회 일의 순서를 착각하고 큰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일이 제일 먼저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우선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통해 교회의 물줄기가 바뀌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능이 많아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파워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가 높아지고, 우리 교회가 높아지고 일으켜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준비되기만 하면 우리는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핵심당원을 뽑을 때 네가지 중요한 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필요한 말입니다. 개혁을 하려는 우리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네가지 요소입니다. \\\"Total Belief, 절대적인 신념-신앙적으로 표현하자면 절대신앙,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완전한 경외심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둘째는 Total Training 철저한 훈련, 공산당들의 훈련은 무서운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바로 개혁의 핵심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Total Commitment, 완전한 헌신, 마지막으로 Total Action 과감한 행동, 최종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행동\\\"입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사역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개혁에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다른 조건을 잘 갖춘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현재가 부족하면 훈련받을 줄 알고, 헌신하기로 결정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우리 교회는 개혁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7장 7절부터 가득하게 적힌 명단을 보며 이런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사람을 보내 주옵소서. 훈련받고 하나님께 헌신할 사람을 보내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이런 일 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개혁에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십시다.
개혁과 융통성/ 막2:18-22
개혁과 융통성 막2:18-22 지난 금요일 오전 11시에 98할렐루야 대회 준비기도회가 한민교회에 서 있었습니다. 이날 강사로 오신 분은 주 유엔 한국 대사 이시영 장로 였습니다. 이분이 하신 말씀중에 한국의 IMF 문제는 세월이 지나 면 반듯이 해결 될 것이지만 문제는 IMF문제를 바로 알고 바로 이해하는 영적 통찰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보는 IMF는 외부로 보이는 상처에 불과한 것이고 깊은 곳에 IMF의 균이 있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균은 교회가 세상의 탁류와 합류하고 사회와 정치에 대해서 세례요한 처럼 목을 내 놓고 정의를 외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IMF라는 것은 이런 문제를 회개하지 않 는 교회 에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매는 한국 동란과 맞먹는 매라는 것을 김대중 대통령이 보는 IMF위기론을 들어 제시했습니다. 이분의 말씀은 현재의 한국 교회의 상황으로 볼때 깊이 받아들여야 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목사 들 앞에서 한 정치인이면서 장로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이것은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 탄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심각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 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이런 소리 를 들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 를 더 이상 신성하게 보지 않습니다. 교회가 거룩한 곳이라고 생 각하 지 않습니다. 목사들을 존경의 대상에서 끌어 내린지도 오래 됐습니다. 참으로 교회가 새로워 져야 합니다. 나 자신이 예수님의 마음에 든 사 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 에 합한 사람입니까?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관점에 맞추어 \\\"개혁과 융 통성\\\"이라는 제목으로 말 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금식 오늘 본문은 앞 부분의 레위집에서 잔치에 참여하고 계시는 예수님께 몇 사람이 금식에 대한 질문을 하 는 데서 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 새인 의 제자들은 금식하는 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 나이까?\\\" 이 질문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실날하게 공격하는 질문입니다. 당시 경건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세례요한이나 바라새인들의 제자들 은 율법을 따라 금식을 하고 있었습 니다. 사실 금식기도한다는 것이 얼 마나 훌륭한 기도이고 이런 기도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 이 얼마나 훌륭한 경건된 신앙생활입니까?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제 자들과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금 식기도는 칭찬들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본 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이들의 금식기도를 자랑했습니다.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기도를 왜 당신의 제자들은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부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여 기서부터 우리 성도들이 무엇을 개혁해야하고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금식을 하기 때문에 가장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사야는 이런 사람들을 이미 오래전에 책망했 습니 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제시했습니 다. 이사야 58:6-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 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 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 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을 분석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기도라는 것이 밥을 먹 지 않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위의 말씀을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약한자를 도와주며 그들에게 자비와 선행을 베 푸는 것이 금식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사야가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58:4절에 보면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기\\\" 때문이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 앞에서 금식은 하 지 만 이들은 싸우며 미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즉 금식기도 정신이 잘못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금식기도를 예수님 시대에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세인들이 다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식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저들의 모습을 보셨습니 다. 저 들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금식기 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 었을 때 수고한다는 격려를 하지 않으셨습니 다. 칭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축복하시지 않으셨 습니다. 왜 그 렇습니까? 이들은 금식기도를 해도 금식기도의 정신을 모르기 때문이 었습니다. 금식기도 의 정신은 약한자를 도와주고 멍에를 메고 수고하는 자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주린자들을 도와주는 것 입니다. 한마디로 이웃 사랑의 진정한 정신을 가지고 금식기도를 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금식기 도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 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 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 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8-9)\\\" 올바른 금식기도정신을 가지고 금식기도를 하면 위의 말씀처럼 하나 님이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 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축복 의 말씀을 그들에게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개혁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완전한 개혁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금식기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금식하는 자 의 정신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것 을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사건을 배경으로 설명하시 고 있습니다. 첫 번째것은 어머니들이 헌바지를 줍는 것에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옷을 하나 준비하면 그것 이 삭아서 버석버석하니 찢어질 때 까지 입었습니다. 그리고 떨어지면 그것을 꿔매입었습니다. 저희들 자랄때도 옷을 한번 입고 버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꿔매입고 그리고 동생들이 계속 물려 입었습 니다. 그런데 헌옷에 새 헝겁을 자꾸 달면 새 헝겁이 오히려 본 바지를 찢어내립니다. 그럴바에야 차라 리 새 바지로 바꾸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옷을 입을 수 없게 되 면 새것을 사는 것 아니겠 습니까? 그러면 이런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간단한 이야기가 개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여기서 낡은 옷은 우리의 옛 마음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세례요한의 제 자들의 마음입니다. 자기들이 만 든 규례를 따라 금식기도하고 있는 그 들입니다. 낡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이 낡은 사람들이 더 잘 살아 보고 더 경건하게 살려고 금식기도를 하고 성전 생활을 하는 것은 생베조각 을 붙이는 행위입니다. 그래 서 생베조각을 붙이고 나면 몇일은 더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일이 지나면 그 옷이 생베조각 을 붙이는 주위부터 떨어지듯이 금식기도가 끝나면 곧 옛사람으로 돌아가서 사람 을 미워하기 시작합니 다. 주위 사람들을 원수로 만듭니다. 불쌍한 사람 을 만나도 감각이 없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없기 때문 에 자비심이 발동 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외모로 보고 비평합니다. 더럽게 생 각합니다. 상종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계속 붙이는 사람이 없는 것 처럼 우리도 계속 되는 죄를 씻는 행위나 금식같은 것 은 그만 하고 완전히 새 옷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반복하는 금식기도보다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까? 율법을 따 라 금식하며 경건하게 사는 이들이 어떻게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습 니까? 어떻게 생베조각으로 낡은 옷을 꿔메는 행위를 중지 할 수 있습 니까? 그것은 예수를 메시야로 영 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처 럼 예수님 곁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잔치에 참 여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현대인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예 수 믿고 자신이 변하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모 기독교 대학에서 신학강의를 했습니다. 그는 강의를 할 때마다 예수 믿고 천당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로 결론을 내렸답니 다. 그런데 하루는 한 학생이 와서 \\\"저는 불교학생회 회장입니다. 상 담 하고 싶은 데 시간을 내 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지금 시간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잔디에 앉아서 상담을 하는 중에 그 학생이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 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났을 때 이 학생의 코에서 많은 피가 쏟 아졌습니다. \\\"이런일이 종종있었느냐\\\"고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없었 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헤어졌습니다. 다음 시간에 그 학생을 만 났을 때는 얼굴이 보름 달 처럼 밝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믿고 변한 모 습이 아닐 수 없습 니다. 이런 모습이 사람들에게 보여져야하고 행동이 달라져야 합니다. 로이(Roy)라는 사람이 절도와 어린이 납치로 중형을 선고 받고 형무 소에서 복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런데 그는 형무소에서 성경을 읽으 며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기도하는 중에 \\\"남은 형량 기간동안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리하여 그는 매일 매일 기쁘게 형무소생활을 하면서 지내다가 이제 출 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출옥하기 몇일 전에 다른 동료 죄 수로 부터 2장으로 된 편지를 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나는 간옥에 들어온 이후 목사나 성경같은 것은 미 워했습니다. 그러나 감방에서 아무 것도 할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떼우기 위해서 셩경공부반에도 가보았습니다. 주일날은 예배도 드렸 고 목사님의 설교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여러날 예배를 참석하는 동안 동 료들이 당신에 대해서 하는 말 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완전히 예수를 믿은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이고, 변화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 다. 나 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당신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성경을 이용하여 간수와 사 면위원들에게 잘보여 일찍 출옥하려는 또 하나의 사기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온 지 2년 반동안 당신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분명히 우리들과는 달 랐습니다. 실수가 없었습니 다. 말씨가 달랐습니다.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변화시켜 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믿고 당신이 출옥한 이후부터 나도 예수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로이는 이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참으로 아 찔했습니다. 식은 땀이 흘렸습니 다. 그 2년 반동안 한번이라도 실수하 는 모습을 그가 보았다면 그 친구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안겨 주 었을 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덕을 끼쳐야 합니다. 언제나 생베를 붙이는 금 식과 회개의 삶을 계속해야 합니 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 니다. \\\"완전히 새옷을 입으라\\\" \\\"완전히 변해라\\\" \\\"완전히 포기해라 \\\"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를 새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 다. 셋째 융통성있는 개혁 예수님이 이제 두 번째로 말씀하시는 핵심내용은 \\\"새 술은 새부 대에 부어 보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 다. 이것도 술을 보관하기 위하여 부대를 사용하지 않는 우리들에게는 이해가 안되는 말씀입니다. 그러 나 당시 이 말씀을 듣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금방 알아 들을 수 있는 생활 이야기 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도를 따서 술틀이라고 부르는 웅덩이에 넣었습니다. 그 리고 큰 돌로 포도를 갈면 포도즙 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양의 가 죽으로 만든 부대에 부었습니다. 이 가죽부대는 양의 가죽을 통째 로 벗 긴후에 아래를 묶고 위에는 입으로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 는 가죽부대가 오래된 것은 포도주를 보관하기는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좀 늘어나야 하는데 너무 마르고 굳어 있어서 탄력성이 없습 니다. 그러 나 새로 만든 가죽 부대는 탄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 만든 포도주에는 이것이 좋 았습니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는 오랬동안 가스 를 배출하기 때문에 가죽부대를 늘어나게 합니다. 새 가 죽부대는 탄력 성이 있어서 이것을 견뎌내지만 오래된 것은 견뎌내지 못하고 터져 버 립니다. 그래서 예 수님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니라고 말씀하셨 을 때 당시에는 이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사람 은 없었습니다. 그러 나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말 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새 술은 새 교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개혁의 내용입 니다. 그리고 새 부대는 변화된 마 음입니다. 변화된 마음은 융통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무슨 교훈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된 마음입니 다. 어떤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요즈음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국가와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정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따지 고 보면 상대방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자기의 주장외에는 틈이 없습니다. 마음의 탄 력성 이 없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받아주지 못 합니다. 이해 할 수가 없습니 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지식을 가지고 바리세인들과 예수님이 부딪치는 장면을 보십시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안식일에 한편 손마른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 주 셨습니다. 평생을 손을 제대로 쓰 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면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바리세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사 례를 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안식일날 이런 일을 하며 안식일을 어겼다고 이때부터 예수님을 잡아 죽 이기 위해서 바리세인들이 헤롯당원과 논의 하기 시작했다(막3:1-6)고 말씀하고있습니다. 왜 그렇습니 까? 마음에 융 통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팽창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부대 도 낡았고 술도 낡았습니다. 그래서 통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문 제입니다.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두 딸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딸에게 매우 엄했습니다. 무슨 부탁을 받으면 허락보다는 거절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딸들 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곳에서부터 마음을 바꾸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유명한 가수가 동네에 와서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대했던 대로 그들은 가도록 허락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딸들 에게 봉투를 주며 거기가서 뜯어보라고 말했습니다. 딸들은 많은 궁 금 증을 갖이고 공연장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 보았습니다. 거기 에는 공연장 티켓 두장이 있 었습니다. 그것을 안내원에게 주었습니다. 안내원이 자리를 찾아주었습니다. 자리가 너무 좋은 앞에서 11번째 중 앙에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딸들이 자리를 안내하는 아가씨한테 자리가 잘못된 것 같다 며 다시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분명히 맞 다고 말했습니다. 딸들은 정말 좋은 자리에 앉아서 멋 있는 구경을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딸들이 와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아이는 아버지의 무릎을 뛰어오르 고 한아이는 팔로 아버지의 목을 감으며 \\\"우리 아빠가 최고야 !\\\"하면서 소리질렀습니다. 분명히 변한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합니다. 다른 사람을 받아 줄 수 있는 마 음의 팽창력이 필요합니다. 예수 님의 말씀으로 하면 새 부대가 필요합 니다. 새말씀과 새교훈은 많이 듣는데 마음이 팽창하지 않기 때문 에 변 화가 없습니다. 개혁이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가 변하기를 원하 십니다. 할렐루야!
개혁과 축복/ 창35:1-7
개혁과 축복 (창35:1~7) 2002-03-12 15:57:41 read : 55 오늘은 종교개혁 484주년을 맞는 주일이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있었던 종교 개혁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1) 사무엘 선지자가 주도한 미스바 대각성과 종교 개혁, (2) 요시야 왕의 성전 수리와 종교 개혁, (3) 에스라, 느헤미야의 율법낭독과 종교 개혁 등의 개혁이 있는데, 이러한 종교개혁은 모두가 민족적 차원의 종교개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민족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 개혁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읽은 야곱 집안의 신앙개혁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야곱 가정의 개혁의 스토리를 통해서 오늘 나의 신앙, 나의 삶을 어떻게 바꾸고 새롭게 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저는 이 야곱의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한 사람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야곱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니까, 그 집안 전체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큰 복을 받고 가정에 평화가 이루어지고, 주변의 대적자들이 감히 넘볼수 없고 오히려 야곱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는 놀라운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을 보면서 소수의 개혁적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 나 자신의 신앙 개혁이 교회, 가정,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 개혁의 첫 걸음(1절) - 말씀이 들려옴, 말씀으로 돌아옴 오늘 본문 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원하시는 것은 \"처음의 그 하나님을 찾으라!\" 는 말씀이다. 즉,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나에게 역사하시고 비젼을 주셨던 그 하나님을 찾으라!\" 는 말씀이다. 일단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와야 시작된다.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벧엘로 돌아가야겠다고 결단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2} 개혁을 위한 조건들 1) 이방신을 버리라!(2절 上) 야곱은 20년 이상을 외삼촌의 집에서 보낸 까닭에 청산해야할 과거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들도 모두 이방의 여인들이었다.그래서 야곱은 벧엘로 가기 전에 그의 아내들을 설득하였다. 그래서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라고 가족들에게 외쳤다. 영어 성경에서는 \"Put away the foreign gods among you\" 라고 쓰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 외에 <낯선 신들>을 다 치워버리라는 명령이다. 관계를 끊어버리라는 것이다. 2) 자신을 정결케 하라!(2절 中) \"자신을 정결케 하고...\" 라고 했다. Purify yourselves! 즉,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세겜 땅의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구별시키고 오직 하나님만을 정직하게 바라보라는 말씀이다. 결국 이 정결은 마치 구약의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섬기기 위해서 그 머리에 기름을 붓고, 물로 씻어 성결케 하는 것처럼, 야곱의 모든 가족은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것을 말한다. 곧 쉽게 말하면 목욕을 하라는 것이다. 이전의 사람 그대로 가지 말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서 올라가라는 것이다. 3) 의복을 바꾸라(2절 下) \"의복을 바꾸라!\" Change your garments! 의복은 그 시대의 문화와 환경에 맞추어서 입게 된다. 그래서 패션이라고 한다. 곧 유행을 말한다. 야곱은 그 자신이 하나님을 섬겨왔지만 오랫동안 이방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옷도 이방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장신구나 부적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바꾸라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말과도 같다. 결국 의복을 바꾼다는 것은 현재의 삶과 신분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전진과 결단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4) 옛 것을 땅에 묻으라!(4절) 4절에 야곱은 그 모든 것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다 묻어버렸다. 그들의 손에 있는 이방신상은 결코 싸구려 인형이 아니었다. Imitation이 아니었다. 비싼 물건이었다. 그리고 귀걸이도 보석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 묻어버렸다. 하나님을 위해서 나의 귀한 것을 묻어버렸다는 말이다. 즉, 포기와 헌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야곱을 진정한 축복의 길로 이끌어주는 삶인 것이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아직 세상 것에 연연해 있는 성도들이 있는가? 아직도 생각나고 그리운 것이 있는가? 완전히 다 묻어 버리시기 바란다. 그리고 이제는 가장 값진 보화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섬기는 즐거움이 함께 하시기 바란다. {3} 개혁의 결과 - 능력과 축복 1) 능력이 함께 함(5절) 5절에 드디어 야곱이 벧엘로 첫 발을 뗐다. 은 100개나 주고 싼 땅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벧엘로 이제 올라간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고 있을 때 그 때부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결단에 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고 있지만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 왜 그럴까? 하나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하고 떠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손길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대적들로 하여금 꼼짝 못하도록 두려운 마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야곱이 세겜 땅에서 얼마나 대적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았는가? 그러나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개혁의 첫 발을 떼니까, 하나님께서 형통한 길로 열어 주시는 것이다. 2) 축복(9-13절) (EX) 필립스라는 설교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우하느냐? 에 따라서 당신의 장래가 결정된다!(How you treat God is based on your future)\" 참 중요한 말이다. 9-13절을 읽지는 않았지만, 개혁 이후의 축복은 놀라운 것이었다. 야곱은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다시금 만나는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는 복을 주셨는데 그 복을 보면 ① 야곱이라 부르시지 않고 이스라엘로 완전히 불러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 이름에 합당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불러 주신 것이다. 이것은 야곱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신 것을 말한다. 예전에는 땅의 일에 지혜롭고 밝은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거룩한 일, 하나님의 일에 눈을 뜨고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자녀로 세우신다는 말씀이다. ②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과 ③ 아름다운 땅을 자자손손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축복을 받았다. 축복은 아무 곳에서나 받는 것이 아니다. 축복이 얍복 강에서 약속되었지만, 축복을 받는 것은 벧엘이었다. 오늘 종교 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금 점검해 보고 버릴 것을 버리고 묻을 것을 묻고 씻을 것을 씻어 버립시다.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날마다 올라가는 신앙생활이 되고 하나님을 바로 섬겨서 약속된 축복을 받아 누리시게 되기를 축원 드린다.
개혁교회 교리시리즈(5)/ 전적 타락(Total Depravity)(1)/ 시51:5-3, 전도서전7:20, 마3:1-10/ 윤경선 목사/ 2012-12-09
개혁교회 교리시리즈(5)/ 전적 타락(Total Depravity)(1) 시51:5-3, 전7:20, 마3:1-1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안에서 진실된 구원의 신앙을 확신하는 것은 주님의 주시는 은혜와 깨닫게 하심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은혜의 보좌 앞에서 최고의 신앙을 고백하는 “예배”를 기뻐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 신앙은 거짓 신앙이며,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하여 억지로 드리는 신앙임이 분명합니다. 예배는 구원 받은 백성들의 기본적인 “삶”입니다.1 그러기에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의 선포는 너무나 당연한 설교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예배에 대한 선포에 부담을 가진다면 그 신앙은 총체적인 점검(點檢) 이 필요한 상태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4주간그중 2주간은 칼빈의 설교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번역하여 함께 읽었습니다. 개혁교회 5대 교리를 준비하는 워밍업(warming-up)을 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개혁교회 5대 교리의 중요한 핵심 교리를 하나하나 살펴볼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주제는 바로 “전적타락”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저번 주 저는 설교를 시작하기 전과 후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깊이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집사후보생들”과 “신앙고백 이전 반”들은 주중에 설교를 읽고 정리하여서 제출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가 가지는 기본적은 컨셉트concept가 무엇입니까? 바로 “인간의 전적타락”입니다. 이사야의 설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전전타락의 교리설교를 통하여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지에 대한 인간실존에 대하여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누차 강조를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처참함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우리 신앙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감사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의 처참함이 드러나며,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인간 회개의 자리를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이 형성되는 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전적타락의 교리는 “은혜의 교리The Doctrines of Grace”2가 분명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많은 언약백성들이 이 설교를 들으면 마음속에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끝없는 부름심과 그 환대를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감사가 멈추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깨달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환대라는 사실이 얼마나 제겐 위로와 큰 복음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제가 이 사실을 전적으로 깨닫지 못했다면, 지금의 제 삶은 생각할 수 없는 타락한 그리고 사람을 속이고, 매 순간 살인을 범하는 성경의 말씀창6:5 그대로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너무나 타락하였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필요하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복음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2 세상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많은 죄인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죄가 관영br\\\\\\\"라브합니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 큰 죄로 인하여 세상 법정에 서서 그 차가운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 이 세상에는 그 생활을 마치고 보통의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놀라운 실존의 현실이 기독교 안과 기독교 밖에서 동일하게 보여지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게 크나큰 인생의 죄값을 치르고 나서 여전히 동일한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전적타락”의 실제적 모습입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짓고 감옥에 다녀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사람들이 자신의 죗값을 치르고 사회에 복귀할 때 대부분의 죄인들을 받아주지 못하는 사회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신의 언약 백성들을 받아 주십니다.도 문제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감옥을 가게 된 그 똑같은 생활을 여전히 하면서도 자신이 받았던 그 엄청난 형벌을 받기 원하지 않으며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을 드리지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 전적타락”의 실제적 모습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정하는 펠라기우스적이며 알미니안적인 신학은 성경을 완전히 왜곡한 이단적 사상입니다.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Free Will or Human Ability) 이 확실하고 진리된 교리는 기독교신학(철학적)의 교리만이 아니라 우리 실존의 모습을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진실된 말씀입니다.롬1:18-23[이 본문은 공부하는 성도들과 그룹들이 함께 읽어 보기 원합니다.] 죄인들은 자신이 지혜 있다고 말하나 사실은 이것이인간의 전적타락을 고백하는 것 지혜의 근본시111:10;잠1:7;잠9:10이므로 그는 실제로 지혜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고백합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1. 전적타락은 “광야의 길 즉 언약의 길”을 걸어가야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악한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가장 심각한 공격을 당했던 교리가 바로 이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의 교리입니다. 네델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이며 교수인 조엘비키Joel R. Beeke는 자신의 칼빈주의라는 책을 통하여 전적타락의 용어를 다르게 사용됨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칼빈주의 5대교리의 용어를 수정하기도 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전적으로 악하며 그들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의미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보다 악이 사람의 본질이라는 의미에서 ‘철저한 타락, 철저한 오염, 또는 널리 퍼져 있는 악’이라는 용어를 선호했다.(중략)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수정된 용어들칼빈주의 5대교리의 수정된 용어들이 성경 사상과 합치되기만 하다면 그 어느 것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용된 단어가 어떠한 단어이든지 인간이 악으로부터 심각하게 오염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사실임에 분명한 것 같습니다. 특별히 제 개인적으로 공감되는 용어는 “널리 퍼져 있는 악”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이미 “관영 br\\\\\\\"라브”이라는 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3 다시 소 주제를 생각해보면서 “전적타락의 실체(實體)”를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전적인 타락을 깨닫던 깨닫지 못하던 성경은 분명히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신학적인 이해를 충분히 배우지 못하게 될 경우 신앙의 여정 중에서 굉장히 유혹적인 “번영 메너리즘(mannerism)”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전적인 부패는 전적인 무능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구원에 대해서 가지는 신앙적인 인식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의 메시지가 있습니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마3:2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마4:17”이 메시지는 신약성경, 즉 새 언약을 위한 위대한 선포입니다. 이 강력하고도 거침없는 메시지에는 인간의 전적부패에 대한 기본적인 메시지가 깔려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을 고발하는 메시지가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렇게 위대한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선지자의 강력한 메시지로 시작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오직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참회(懺悔)하는 인간의 성찰만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면 저와 여러분이 지금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설교의 내용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마3:1-10 그러니 우리와 같은 역사적 개혁교회가 언약을 이야기하면서 “축복과 저주”를 함께 선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광야의 길”입니다. 하지만 이는 “언약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단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소극적으로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반대하는 모든 신앙의 형태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약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충분히 말씀하셨습니다.렘31:31-3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새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은 참으로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이해 가운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선지자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다음의 짧은 아티클article이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을 이해하기 쉽게 여러분을 인내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욱 더 “독사의 자식”에 대한 전적인 타락과 무능 또한 이해가 쉽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전적타락’으로 묘사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용어에 대하여 거부 반응을 보이는데, 그것은 전적타락(total depravity)과 절대적 타락(utter depravity)4 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절대적 타락이란 인간이 부패할 대로 부패한 상태를 뜻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는 그렇게 극한 상태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반적 은혜의 능력으로 이를 막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을 뿐이다. 전적 타락은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더 자주, 더 크고 흉악한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전적타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들이 의미한 것은 죄가 그 능력과 영향력과 성향으로 사람의 전 인격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와 정신과 감정까지 타락해 버렸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의 모습에서 제외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이 짧은 아티클article을 통하여 이 은혜의 복음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어 선포되어졌고, 오해를 일으켰는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이 복음을 싫어하는 펠라기우스주의와 알미니안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 “은혜의 교리”The Doctrines of Grace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신학교에서, 때로는 자신들의 교회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성경공부시간에서 공격을 하는지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복음서의 메시지는 독사의 자식들은 “의(義)”에 있어서 우리가 배워야할 부분들이 있던 그룹이라는 사실입니다.마5:20 그러기에 이 메시지에는 더 깊고, 심오한 복음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은 “광야의 길 즉 언약의 길”을 걸어가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우리를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장소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메시지가 울리는 그 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제사장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편입되었는지 말입니다.행6:7 그들이 무엇으로 인하여 유대교를 뿌리치고 나왔습니까? 요즘말로 하면 그렇게 좋은 지위와 권력(위)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교(敎)로 적(籍)을 옮겼습니까? 그들이 자신들이 물려받은 제사장직에 머물러 있었다면 평생에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제사장들의 허다한 수가 그리스도교로 적(籍)을 옮겼다는 말을 초대교회의 핍박 받는 교회 공동체 그리고 흩어짐을 준비하는 고난 받는 교회 공동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의 메시지 다음에 나온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제사장들의 신앙적 고백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고백이 있는 다음에야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에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무능 그리고 독사의 자식이라는 메시지가 가지는 그 근본뿌리에 충분히 공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대에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에 대한 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의 회개의 메시지 뒤에 강력하게 숨겨있는 “인간의 전적 타락”교리는 광야에서 시작하여 광야의 길(언약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사도행전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우리의 하늘소망개혁교회까지 전해진 구한 복음인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이라는 메시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채찍으로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채찍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 채찍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심정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쉬운성경 고전4:21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벌을 주시고, 그의 아들로 받아들인 자들을 채찍질하신다.쉬운성경 히12:6 하물로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과 온유의 심정으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지금은 독사의 자식임을 인정하시고, 주님의 해독제(解毒製)를 맞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개혁되어야 할 한국교회/ 욜2:28-32
개혁되어야 할 한국교회 욜2:28-32 한 시대의 종교는 그 시대의 정신적 양심이요 동시에 도덕적 심장입니다. 심장이 심장의 역할을 다하고 양심이 양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현대교회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네 가지 의미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첫째, 신앙적 개혁, 둘째, 도덕적 개혁, 셋째, 가치관 개혁, 넷째, 올바른 생활관 개혁을 해야 합니다. 1. 신앙적 개혁을 해야 합니다. 이는 현대의 세속주의와 혼합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는 교회가 다시 순수한 개혁자들의 신앙과 청교도들의 신앙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관과 인간관 그리고 교회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1) 신관 정립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의 교리를 모두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했고 인간의 최대의 목적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신관의 정립이란 하나님의 절대주권 정립을 뜻합니다. 다니엘서 3:28에서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메삭,아벳느고가 극렬히 타는 불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 살아난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송할 찌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시면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악한 이방왕도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다고 인정하면서, 만일 누구든지 함부로 하나님께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집을 허물고 그 집터를 거름 터를 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단 3:29).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신관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버리고 종교의 다원화를 주장하여 모든 종교가 기독교와 같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하나님의 위치에서 퇴위시키고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보려고 까지 시도합니다. 지금 세계에 자기자신을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라고 자칭하는 자가 무려 거의 3백 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기의 인기를 위해서 기독교를 혼합종교로 만들고 기독교를 이방종교와 혼합시키고 있습니다. 기복신앙, 유물주의, 천박한 신비주의,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뉴에이지(New Age)운동 같은 것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일본의 기독교가 왜 부흥이 안되는 줄 아십니까? 일본사람들의 신 개념 속에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들은 신(神)하면 \\\'가미\\\'로 통할 뿐, 우리처럼 유일신의 개념이 없습니다. 일본의 신 개념은 물신론,범신론,다신론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8백만 신을 다 인정하며 신은 다 같은 것이니 아무 것이나 믿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모든 물건에 반드시 \\\'어\\\'(御)자를 붙여 물건 하나하나를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방인의 물신사상이 점차적으로 교회에까지 만연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상대화시키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주의를 희석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시며 우주에 충만하시고 어디에서나 우리 인간의 행위를 한 눈에 보고 계십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 하나님은 피할 길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상대화시키고 있습니다. 즉, 내가 눈을 감으면 하나님도 눈을 감으시면, 내가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도 하나님도 거짓말을 하시며, 내가 배고프면 하나님도 배고프시고, 내가 할 수 없으면 하나님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우리의 신관이 바로 정립되어야만 오늘의 기독교가 이방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받지 않고 오히려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2) 인간관 정립 성경에는 두 가지 인간관이 나와 있습니다. 골로새서 3:1,2에 의하면, 위엣 것을 바라보는 인간과 땅의 것만 찾는 인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엣 것을 찾는 인간은 신앙이이며 땅의 것만 찾는 인간은 생물학적 인간입니다. 진화론 후 인간은 하나의 생물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번에서는 \\\"사람의 제일 되는 계명\\\"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은 청교도적 신앙을 가진 개혁주의자들이 1643년 7월부터 1948년 9월까지 영국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모여 작성한 장로교회 문서입니다. 140여명의 학자와 성직자들이 작성한 이 <대 소요리문답>의 제 1문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5일간 그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바로 그 장소에 모여 350년만에 다시 그 때의 신앙고백을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간관! 내 존재의 의미도, 내 생존의 목적도 모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3) 교회관 정립 교회관 정립이란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는 교회 되게 하는 작업입니다. 따지고 보면 중세의 종교개혁이나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모두 그 당시 교회가 교회의 구실을 다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성례를 행하고 성도가 서로 교제하며 봉사하는 곳입니다. 또한 질서를 위해 권징도 하는 곳입니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의 필수적인 표식들입니다. 신앙적 개혁을 하기 위해 우리는 교회관을 성경적으로 정립해야 합니다. 2. 도덕적 개혁을 해야 합니다. 오늘의 도덕을 두 가지로 분류하면, 하나님의 영광 중심의 도덕과 인간의 이권 중심의 도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사회의 최대의 부족한 점은 도덕성의 부재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정치하는 사람들도 자주 도덕정치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요즈음 볼 수 있는 살인, 강도,방화,마약 등 사회의 모든 범죄행위는 모두 인간의 도덕성 결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1960년에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세계에서 가장 정숙하다고 하는 일본의 중상층 여성을 상대로 앙케이트를 작성했는데 놀랍게도 자기 남편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답한 사람이 60%나 되어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의 도덕성은 법망에 걸리지 않는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답하는 사람이 90%이상은 될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언론사에서 여론 통계를 발표했는데, 기독교인의 도덕성 순위가 신부,수녀,의사,변호사,승려에 이어 여섯 번째였습니다. 한국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재산비리자 중 개신교인이 52%,천주교인이 15%, 불교도가 15%, 무종교가 8%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교회가 도덕성 개혁에 앞장서야하지 않겠습니까? 교인들은 교통순경이 없어도 신호를 지켜야 하고 신문가판대의 파는 사람이 없어도 몰래 집어 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3. 가치관을 개혁해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치관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점점 만연해 가는 사회학적 병리현상 때문에 완전히 전도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치관에는 성경적 가치관과 일반 사회학적 가치관이 있습니다. 성경적 가치관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느냐에 초점을 두는 가치관이고, 일반 사회학적 가치관이란 어떤 것이 간접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는 나에게 유익한가를 따지는 가치관입니다. 가치관이 전도된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고려대학교 한 사회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오늘날 사람들은 가공할만한 죄를 저지르고도 죄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중범자일수록 파렴치하고 뻔뻔스럽습니다. 둘째, 오늘의 모든 범죄행위는 철저하게 자기만을 생각하는 극단의 이기주의적 현상을 보입니다. 세상을 모조리 파멸시키더라도 자기만은 살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이기주의입니다. 셋째로,사람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따돌림을 받았다는 열등의식과 갈등 때문에 생기는 극단의 증오심과 자포자기에서 오는 악의 폭발입니다. 이같은 극단의 증오심과 이기주의 때문에 많은 죄가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11:11).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한번도 자기를 불행하다거나 가난하다거나 부족하다거나 못났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서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선구자로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4백년 간의 유대의 침묵을 깨는 선지자로 살았습니다. 성경적 가치관은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이냐?\\\"가 아니라, \\\"어떤 것이 바로 사는 것이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가치관의 개혁은 \\\"잘 살아보세\\\"가 아니라, \\\"바로 살아보세\\\"가 되어야 합니다. 제3공화국 때 박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잘 살기운동 이전에 바로 살기 운동이었다면 지금쯤 우리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4. 올바른 생활관 개혁을 해야 합니다. 현대문명은 더불어 사는 문명입니다. 그러므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과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자율성부터 배워야 합니다. 일본 상사 주재원이었던 어떤 분의 아들이 5학년 때 복도에서 소리나지 않게 걸었다고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본 소학교에서는 예쁘게 걷는 상, 예쁘게 먹는 상, 인사 잘하는 상, 친구에게 상냥한 상을 준다고 합니다. 일본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제일 먼저 \\\"죄송합니다\\\"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배웁니다. 이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학부모가 왜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식의 길을 죽였냐고 선생님의 뺨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을 꾸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데모를 주동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들은 논리가 정연하기는 하지만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사회는 머리가 좋은 사람보다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 앞장서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교육을 받고 더불어 사는 생활을 하는 개혁운동을 일으킵시다. 현대교회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적 개혁을 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덕적 개혁을 합시다. 바르게 살기 위한 가치관 개혁을 합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생활개혁을 이룩합시다.
개혁된 믿음/ 막9:14-29/ 2011-02-11
개혁된 믿음 막9:14-29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신 사이에 산아래 남아있던 제자들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찾아와 귀신을 내어 쫓아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일의 결말을 보고자 큰 무리가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시는 일에 약점을 잡기에 혈안이 된 종교 지도자들인 서기관들도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함으로서 무리들과 서기관들의 변론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놀림감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이 무리에게로 돌아왔고,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을 고치십니다. 개혁된 믿음은 권세가 있습니다. 하늘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귀신을 꾸짖습니다. 벙어리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또한 개혁된 믿음은 모든 변론을 그치게 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 모든 말쟁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맙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믿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개혁된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 우리의 믿음에 개혁을 일으켜야 겠습니다. 1.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 말씀을 하시고, 세 명의 제자들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말이 필요가 없답니다. 그런데 산 아래에서는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와 절망에 빠진 아버지의 고통이 있습니다. 또한 귀신을 쫒아내지 못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 커녕 비난을 받고 있는 제자들과 이때다 싶어서 변론을 거는 서기관들과 구경을 일삼는 큰 무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산 아래 세상은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고, 문제를 더 복잡하게만하는 사람들의 말장난이 무성할 뿐입니다. 산 위의 제자들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라고 고백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자기 혼자가 아닌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적인 책임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산 아래의 사람들은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 라고 말을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신앙의 동기가 언제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생활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귀신들린 사람들과 말쟁이들이 많아집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진지한 인간애는 없고 무관심과 무가치한 자기과시만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 아래에 사람이 없어서 귀신들린 아이와 그 아버지가 절망한 것이 아닙니다. 용하다는 의사와 유명한 의원이 있다고하나 귀신들린 병에는 도움은 커녕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보니 시간과 가산 만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큰 무리가 몰려왔으나 도와주지 않고 구경만 합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종교를 찾았습니다만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예수의 제자들과 서기관들은 말싸움으로 열을 낼 뿐 아이는 여전히 귀신에 잡혀 고통을 당합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가정과 자녀는 불행과 허무만을 가져다 주었을 뿐이고, 사람들의 사회와 발달된 문명은 실망과 권태를, 종교는 회의를 안겨주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절대 절망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여기에 희망이 있고 기쁜 소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산 위에 계신 예수를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산 위의 영광을 버리시고 문제 많은 산 아래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찾아오신 하나님 !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 고 명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시는 예수께로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삶속에서 고난의 풍랑을 만나고, 고통의 밤을 맞을 때, 바로 그 때야말로 예수님께서 찾아오시고 역사하시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을 믿음의 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2.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 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함이 없느니라 ! 귀신들린 자식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온 아버지를 보십시요.세상에서 시달리고,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종교에까지 회의를 느낀 지친 모습입니다.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쫓아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무능한 제자들의 선생님 정도로 보였습니다. 이런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서는 기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앞에선 자신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신과 의혹이 가득한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호통을 치십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개혁시키십니다. 이 말씀은 너의 아들을 고치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네게 달려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네가 문제다... 라고 문제의 핵심을 짚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 고 이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모두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의 해결과 불가능의 차이점은 그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의 성격에 따라 좌우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해결의 열쇠는 인간적인 행위와 노력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믿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기력한 제자들의 선생정도로 생각해 가지고서는 귀신들린 아이를 고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상대해야 절대적인 기적이 일어납니다. 3.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 산 아래에 왜 귀신들린 아이가 있게 되었으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을까요 ?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산 아래에 귀신들린 아이가 생겨난 것처럼, 오늘날 예수 없는 도시 속에서 청소년의 문제는 날로 심각해져 갑니다. 사단은 우리의 젊은이들을 집으로 부터 떠나게 합니다. 평화와 쉼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인간다움을 버리고 동물적인 쾌락의 노예가 됩니다. 그들은 끝없는 불안과 죽음에의 공포로 부터 쫓기면서 자살을 생각합니다. 부탄가스나 본드등의 환각제를 흡입하고, 하드록의 선정적인 음악으로 영혼을 약탈하는 음참한 곳으로 갑니다. 사단은 예수 없는 사람들을 폭력과 정욕과 방탕과 허무의 노예로 만들고 맙니다. 영혼을 여지없이 파괴하고 맙니다. 이 시대의 문제아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 어른들 또한 심각한 죄의 유혹과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의 무능력함때문에 불신자들에게 권세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맙니다. 문제의 한복판에 서서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을 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놓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 아무리 왕년에 능력이 있다고하나, 오늘,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예수님이 곁에 계시지 아니하면 창피를 당할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은 공부,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업,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목회,.... 예수님이 없는 그 어떤 일도 성공같으나 실패요, 망하고 만다고 하는 것입니다. 산 위의 제자들에게나 산 아래에 있는 제자들에게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해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쉬고 계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종용히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서기관들에게 비방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것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얼마전에 예수님께서 둘씩 둘씩 짝을 지어 각 고을로 내 보내실 때 귀신이 떨고 나갔었는데 왜 오늘은 이렇게 창피를 당해야 했을까... 예수님께서는 기도외에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 예수님이 있어야만 된다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행하시도록 우리는 기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세운 그 어떤 믿음도 예수 없이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요,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예수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요, 그래서 예수님을 모든 생활의 현장으로 초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악을 이기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쉬지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 제가 믿나이다.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개혁신앙의 관심/ 롬8:31-39/ 2002-11-27
개혁신앙의 관심 롬8:31-39 베트남 전쟁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전투상황이 아주 불리해져서 후퇴를 하는 중에 한 병사가 뒤에서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안전지대로 대피한 중대 대원 중에 한 사람이 “저 총에 맞은 저 병사는 내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구출하러 가야겠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듯 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이 친구는 총에 맞은 자신의 친구를 구출하기 위하여 그 무서운 장소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중대장은 말렸습니다. 안된다고. “그렇게 하다가는 너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고 위험하고 또 보건대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니 자네 친구는 벌써 죽었어. 그러니까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반드시 가야된다고 중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그 전쟁터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친구를 등에 업고 부대로 돌아왔지만, 생각대로 친구는 죽었습니다. 업혀 오는 동안에 죽었습니다. 그 때에 중대장이 말하기를 그것보라고 왜 고집스럽게 쓸데없는 일을 했냐고. 자네 생명도 참으로 위험했다고 그런데 자네가 업고 온 친구는 이미 죽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때에 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병사는 말합니다. “아니올시다. 내 친구는 내가 등에 업어서 이리로 데려올 때에 내 등에 업혀서 말하기를 ‘네가 올 줄 알았다. 네가 반드시 올 줄 알았다. 나는 너와 같은 친구가 있으니 참으로 행복했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이 있습니다. 누구의 사랑을 받아본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바로 그 같은 친구를 가졌기에 그 사랑을 경험했기에 그 사랑에 감격했기에 죽어가는 이 친구는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살고 죽는 일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살고 죽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내가 물질이다 성공이다 번영이다 자유다 뭐다 말과 문제가 많지만은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있습니까? 그래도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근심 걱정도 다 물러갈 뿐만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것입니다. 유명한 근대 신학자인 칼바르트라고 하는 교수가 어느날 시카고 대학에 방문하여 젊은이들에게 신학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다음에 젊은 친구 하나가 따라오면서 집요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교수님께서 쓰신 책을 다는 못읽었습니다만 몇 권을 읽었는데 감동적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해박한 지식에 저는 늘 놀라곤 했습니다. 한평생 저술 생활을 하고 가르치고 또 연구하고 그러면서 깨달은 진리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평생 연구하고 깨달은 가장 중요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고 한마디로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은 껄걸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닐때에 부른 찬송 한 구절을 외웠습니다. “Jesus loves me bible said so;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예수사랑 하심은, Jesus loves me bible said so. 그것이 핵심이요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다 잊어버리세요. Jesus loves me. 예수께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딱 한마디만 똑바로 알고 똑바로 느끼면 모든 문제는 다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문제, 그것이 마스터키요 그것이 생명선이요 모든 것을 이기는 힘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본문입니다. 여기는 세가지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승리, 둘째는 의의 승리, 셋째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오늘 먼저 생각할 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은사로 모든 것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은사로 주신다. 그럼 우리 편에서는 은사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있습니까? 내가 얻은 일이 있습니까? 내가 성취한 일이 있습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압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런 이야기도 합니다. “내 마음대로 안된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영영 못쓸 뻔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잘 되는 일이건 안되는 일이건 때로는 우리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 것이라고,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실패든 역경이든 건강이든 질병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사람으로 볼 때에는 모든 것이 은혜요 또, 은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생각하면 기적과 같은 은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왜? 아들은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독생자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외아들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에는 게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아들을 내어주는 것 같은 그 엄청난 사랑으로 자기 희생을 지불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다면 모든 것이 어찌 주신 바가 아니겠습니까? 우스운 이야기이고 좀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은 전 어렸을 때에 어머니로 부터는 맞은 기억이 없는데 아버지로부터 많이 맞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십니다. 어쩌다 몇마디 하고 때리고는 설명도 없이 나가십니다. 중얼중얼 하십니다. ‘사랑한다면서 왜 때렸냐’고 했다가 다시 맞았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이 전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때에 맞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때 그렇게 엄한 징계를 받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피난을 나와서 군대에 들어가 있을 때에나 혼자서 고학을 할 때에 순간순간 어머니가 그립기도 하지만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나를 자주 때리시던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싶어요. 그 아버지의 채찍이 그립고 그 아버지의 징계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때 뭐라고 말씀 좀 하세요’ 그러고 싶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에게 대하는 모든 것은 그대로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합니다. 주도적으로 사랑합니다. 주도적으로 창조적으로 사랑합니다. 그것이 은혜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은혜란 곧 이기는 힘입니다. 은혜를 아는 순간, 은혜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종교심리학자 애디 깁스(Eddie Gibbs)라고 하는 분이 깊은 연구 끝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각 좀 개인적으로 다른 체험을 가지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에 공통점은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 안에서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가지는 이만큼의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살게 만든 것입니다. 네단계를 말합니다. 첫째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한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무신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단계가 있고. 두번째는 막연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무언가 우리 인간의 의지 외에 큰 의지가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내가 잘못했지, 우리 인간이 잘못했지, 우리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가보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천벌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우리 인간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두려워합니다. 네번째 단계는 이제 이 모든 노력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됩니다. 오직 긍휼 오직 사랑 오직 은총만이 우리로 하여금 오늘이 있게 하는 것이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그런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보십시오. 이 과정 이 단계 전부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도적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의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을 어떻게 소화하십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대가를 그가 치르시고 우리를 의로 싸서 의로 옷입혀서 당신의 자녀로 맞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탕자가 돌아옵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오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런데 나는 그 성경을 볼때마다 내가 아버지 입장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집을 나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꼭 한마디 하고 싶은데, 전혀 아무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또 한가지 있습니다. “네가 집을 나갔을 때에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느냐.” 꼭 한마디 하고 싶은데, 만일 그랬다면 이 아들은 조용히 집을 나가서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한마디의 말이 없습니까? 다시 한 번 잊지 마십시오. 탕자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로 영접한 것입니다. 전혀 관계없는 아들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오로지 아들로. 그래서 “잃었다 얻었노라. 죽었다 살았노라. 내 아들이 돌아왔다.” 이렇게 환영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의를 주어서 영접한 것이요. 가끔 보면 부부간에도 다투다가 자녀간에도 가출한다 어쩌고... 꼭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의인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맞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No! 그것은 의롭다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완전히 의로 대하신 것입니다. 그 모든 부족함은 내가 대신 지불하고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자로, 가장 깨끗한 자로, 가장 의로운 자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즐기는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입니다.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의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의 집에 가서 대접을 받으실 때에도 절대로 죄인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똑같이.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오명을 받으시면서도 예수님은 새리의 집에가서 머뭅니다. 그들을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그대로 향유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의롭게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의의 승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랑의 승리입니다. 여기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이렇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종일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이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 사랑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순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참하게 죽어도 사랑이 있고 아무리 어렵게 고생을 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며 고난을 치르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러분, 참으로 사랑하면 병도 이깁니다. 원수도 이깁니다. 의심도 이깁니다. 죄를 이깁니다. 사망을 이깁니다. 위대한 역사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성경은 말합니다. ‘이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끊으리요. 그가 나를 의롭다 하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입니다.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당당하게 그리고 그 사랑을 깊이 깊이 간직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유명한 폴 틸리히의 이런말이 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세가지 회색 어두움이 있다. 첫째, 공허감입니다. 가만히 보면 종종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공부하느라 정신없다가 그 다음엔 연애하느라고 한참 빠졌다가 그 다음엔 결혼을 해가지고 애낳고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다가 애들이 다 결혼해가지고 나가고 그러니까 “허전합니다. 허망합니다.” 왜요? 당신의 사랑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았거든. 정말로 사랑한 일엔 허망함이 없습니다. 사랑이 의미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참사랑 속에는 허망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공허감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죄책감입니다. 현대인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복잡합니다. 이렇게 변명하고 저래서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지만, 그 양심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I.Q.가 90이하가 되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멍청하면 걱정도 없습니다. 똑똑하니까 생각이 많습니다. 이렇게 변명, 아무리 변명을 해보아도 내 양심은 나를 정죄합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안에서 회개의 용기를 얻을 때에 비로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 이 많은 죄책에서 아무도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술집으로 가고, 그래서 마약을 하고 그래서 폭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숨길 수 없는 죄책감, 여기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또한 공포감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암담하기만 합니다. 옛날에 제가 써놓은 제 학위 논문이 종말론입니다. 그래서 미래학에 대해서 Futurology에 대해서 제가 책을 비교적 많이 읽는 편입니다. 새로 나온다는 책이 나오면 제가 또 사서 읽어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래학을 아무리 보아도 결론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암담하다, 절망이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종말론과 미래학은 다릅니다. 여러분, 이 무서운 공포, 불확실함, 암담함, 절망이 밀려옵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입니까?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약속,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그 믿음 안에서만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그 사람만이 모든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은혜 Sola Glatia! 모든 것은 은혜다. 절대적 은혜다.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Sola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 다시 한 번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생각하십시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영광! 새로운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생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와 절망과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희들에게 오늘도 참 믿음을 일깨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믿음을 주시옵소서. 사랑을 주시고, 은혜를 알게 하시고,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확실한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은혜로 의로 사랑으로 승리하는 밝고 명랑한 오늘과 내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곽선희 목사
개혁신앙의 뿌리/ 창15:1-7
개혁신앙의 뿌리 창15:1-7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수도원 에서 기도와 명상과 고행을 통해서 그 영혼을 깨끗케 하고 또 하나님의 나라를 봉사하는 수도사였습니다. 수도사로 살아가는 동안 어째 인간 적으로 생각하면 죄를 지을래야 지 을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흔히 말 하는 \\\'리얼 신(Real Sin)\\\' 사실적 죄 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없으니 간음죄를 지을 수 없 고 사유재산이 없으니 도적질 할 것 도 없고 가족도 없고 또 나아가서 출세니 명예니 하는 그것도 없으니 까 인간적 욕망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 기 도, 명상하는 그것인데 그러나 그는 수도원에서 죄로 고민했습니다. 개 혁자 마틴 루터의 가장 심각한 고민 은 오직 하나 죄입니다. 죄와 의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죄, 내 죄, 내 죄, my sin, my sin, my sin 하며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죄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회개 하고 참회하고 고행을 해도 이것으 로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가 않는다 는 거예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걸 느꼈어요. 그는 당시의 수도사들이 가르쳐 준 대로 그대로 참회했습니다. 명상했습니 다. 고해했습니다. 그래 마침내 고 해성사라는 게 있지요. 그것은 고 해성사 하는 장소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면 잠시 후에 신부가 나와서 옆 으로 비스듬히 앉고 이제 그 귀에다 대고 자기 죄를 자복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런 고해하는 일을 하루 에 스무번도 더 했답니다. 가서 죄 를 고하고 돌아와서 또 고민돼서 또 가서 고하고 또 고하고……. 마지 막엔 신부가 너무 귀찮아 가지고 \\\"루터야, 죄 좀 모았다 오너라\\\" 그 랬다고 그런 전해지는 얘기가 있습 니다. 또 그랬을 거 같아요. 그는 죄로 인하여 많이 고민했으니까요. 아무리 참회하고 고해해도 그 마음 속에 진정한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 을 보지 못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지은 죄가 있습니다. 여 러분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가 지금 아무리 회개하고 뉘우치고 뭐 이제부터는 그런 일에서 떠났다 하더라도 이미 지은 죄가 어디로 갑 니까? 자 우리가 빚을 졌다고 생각 해 보세요. 빚으로 죄를 상징해서, 비유로 말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빚을 졌어요. 내가 이 시간에 뉘우 치고 이제부터는 바로 산다고 한다 고 그 빚이 없어집니까? 내가 사람 을 죽였다고 합시다. 내가 여기서 아무리 회개하고 빠르게 고행, 한 평생 내가 의롭게 산다고 몸부림을 친들 죽은 자가 살아납니까? 죄를 소홀하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미 지은 죄는 죄 대로 그대로 있는 것 입니다. 여러분 요새 뭐 어떤 사람 이 좀 잘못해 가지고 쫓겨다니다가 10년만에 이제 자수했다면서요? 바 로 살겠다고 자수했지만 덜커덕 감 옥에 들어가던데요. 이미 지은 죄 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는 이 죄가 나를 타락시켜서 죄의 결과로 내 속에 타락성이 있다는 것 을 또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내 가 지금 바르게 한다 뭘 한다고 몸 부림쳐봐야 그건 벌써 정상적인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 의 를 논해도 그게 의가 될 수가 없고 공로를 논해도 공로가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벌써 타락했기 때문에. 이 타락성이 무서운 것이에요. 그래서 정욕의 노예가 되고 불신앙의 노예 가 되고 때로는 사악한 마음이 이 마음속에 있는 것이거든요. 아직 큰 죄는 짓지 않는 거 같아도 죄로 인한 변질된 타락한 내 심령 이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죄요. 그런가 하면 미래로 지향하 면서 우리는 걱정, 근심이 많습니다. 불신이 있고 불안이 있고 또 하나님 의 약속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이 의심은 병이요 그 의심은 죄입니 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나 하 나님의 자녀 됨에 대해서, 내게 주 어진 미래에 대하여 의심이 많습니 다. 이것이 곧 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행을 통해서 해결해 보려고 할 때가 있습 니다. 수도원의 계율을 지켜 가면 되지 않을까? 그게 아무 소용이 없 습니다. 루터는 로마에 있는 \\\'스칼라 산 타\\\'라고 하는 성당에 갔었답니다. 지금 같이 교통이 편리할 때가 아닙 니다. 로마에 한 번 간다는 건 일 생의 한 번 큰 순례의 길입니다. 가서 \\\'산타 스칼라\\\'라고 하는 이 성 당에 들어가서 거기에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으실 때에 올 라가셨다고 하는 그 계단이 있습니 다. 28계단이 있는 그 나무로 된 계단, 그것을 콘스탄친 대제의 어머 니, 헬레나가 믿음이 좋아서 이것을 뜯어다가 로마에 갖다 놓고 이 스칼 라 산타 성당 안에다가 딱 갔다 놓 았습니다. 지금도 가보면 성 요한 성당 바로 옆에 있는데 그 예배당에 는 사람이 들어가서 예배하게 되어 있지 않아요. 그저 건물을 지어 놓 고는 한 가운데에 그 계단이 이렇게 놓여있습니다. 이천년 된 계단이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계단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 계단을 무 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 죄 사함 받 는다, 심지어는 연옥에 있는 죄인도 여기서 기도하면은 구원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당시에 가르치고 있었 습니다. 이제 루터는 이 계단을 무 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면서 계단마다 올라가며 주기도 문을 외우면서 계속해서 올라갑니 다. 다 올라가서 보니 아무 해결될 것도 없어요. 이게 이런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더라고. 그 때에 마 치 큰 불빛을 보는 것처럼 어떤 전 광같은 말씀이 귀에 들려 왔다는 겁 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이까짓 것 무릎으 로 기어오른다고 죄사함 받는 게 아 니라는 것이죠. 여기서 소중한 것 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긍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우리가 의롭게 살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져 스티피케이션(Justification)\\\',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이 자체, 이 중요 한 교리를 그는 발견하게 되고 벌떡 일어나서 신앙을 조정하게 되고 마 침내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내 의를 세 워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게 아닙니 다. 심지어는 지난날의 죄 때문에 내가 오늘 공로를 세운다고, 고행을 한다고 해서 나 자신의 과거의 죄나 타락된 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중요한 것 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디카이오\\\' 라고 하는 말, 의롭다 함을 얻는다, 영어로 \\\'져스티파이(Justify)\\\', \\\'져스 티파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의 관심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고 사회가 잘 되고, 못 되 고, 안 되고, 출세하고 못 하고, 오 래 살고 못 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어 디에 있습니까? 그래 오래 살아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잘 살면 뭣하 고 못 살면 뭣합니까? 좀 더 심각 하게 생각합시다. 적어도 이 고민 은 이 고민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해 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궁극적 관심입니다. 죄 문제, 이것은 내 죄 문제요. 여러분 아시잖아요. 그리 애써서 민주화 해 놓고 보니까 소용 있습니까? 그 래 요새 어떤 사람들은 글을 씁니 다. 민주주의의 종말이라고 그럽니 다. 왜? 죄 문제가 이렇게 남아 있는 동안 아무 소용없어요. 죄와 부정이 있는데 제도하나 바꾼다고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아무 소용 없는 거라고요. 점점 더 혼란의 구 덩이로 빠질 뿐이요. 문제는 의! 자 보세요. 그 많은 의! 뭐 정화, 개혁 해봐도 까딱도 하지 않아요. 뭐 3배나 더 한다면서요. 문제는 의의 문제가 남았어요. 우리가 잘 살고 못 살고도 의의 문제요, 죄와 의의 문제란 말입니다. 나라가 견 고하게 스는 것은 의(義)지, 사람 바 꾸고 제도 바꾼다고 되는 건 아니에 요. 이제쯤은 깨달아야죠. 문제는 내 마음속에 있는 죄, 자 이 문제요. 죄의 문제는 곧 하나님 앞에 의뢰의 문제입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어 떻게 설 수 있느냐? 하나님의 법 앞에 그 심판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냐? 의의 문제가 있 고. 자 이제 이에 대한 해결은 오 직 하나, 의롭다함을 얻는 그 길밖 에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나 칼뱅이나 간에 이 분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전승이나 어느 교 황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 성경 안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또 얻었습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신앙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얻었어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성경 안 에서 사도 바울을 만납니다. 사도 바울이 \\\'이름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다\\\' 하는, \\\'져스티피케이션 바이 페 이드(Justification by faith)\\\', 이 문 제에 대한 깊은 해답을 바울을 통해 서 얻게 됩니다. 로마서, 갈라디아 서의 주제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다.\\\" 이것을 흔히 \\\'칭의\\\', \\\'득의\\\' 이 런 말로 우리가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내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 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 들이는 데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 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의 계시입 니다. 이 의로운 계시를 하나님의 의를 내가 수용함으로써 죄인이 의 롭다 함을 얻는다. 이것이 종교 개 혁 신앙의 뿌리입니다. 그래 바울 에게서 칭의(稱義)의 의를 배웁니다. 루터와 모든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여러분 그 런데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어디서 또 받아 들였느냐 하면 구약성경으 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 다. 오늘 본문 말씀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여기시고 …….\\\" 그 말씀, 아주 중요하게 여깁 니다. 마치 사도 바울은. 다시 또 하박국 2장 4절에 가서 보면은 \\\"의 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 과 같으니라\\\" 이 두 말씀, 두 요절 이 말씀에다가 뿌리를 두고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를 전제합니다. 이 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고 죄와 저주로부터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을 설명하게 됩니다. 이 신앙을 그대 로 받아서 바울로부터 받아들여서 종교 개혁자의 신앙이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 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라\\\"하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에 보 면은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 다. \\\"동으로 가랍니까? 서로 가랍 니까?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 까? 전혀 묻지 않습니다\\\" \\\"고향을 떠나라! 익숙한 곳, 죄악의 도시, 과거, 옛날 생활……떠나라\\\" 믿음으 로 떠납니다. \\\"지시할 땅으로 가라, 떠나면 지시하겠다 또 내가 네게 아 들을 주겠다 그래서 자자손손 이 축 복이 이어지도록 해주마\\\"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때 나이 75세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아브라함은 정처 없 이 고향을 등지고 떠납니다. 이것 이 믿음이요. 그래 아브라함의 믿 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었어요. 그러 기 위해서 자기의 익숙한 혹은 평안 히 살아오던 고향을 그 옛날 생활을 다 버렸어요. 그리고 대모험을 강 행합니다. 그것이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 펴보면은 그의 믿음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을 떠났지만은 일단은 떠났는데 그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흉년이 들 때 그는 애굽으로 갔습니다. 피난을 가버립니다. 그 믿음없는 짓입니다. 아 흉년이 들던, 살던 죽던 이 땅에 머물러야지 왜 하나님이 지시한 땅 을 떠납니까? 그는 그만큼 나약한 사람입니다. 일단 떠났는데 자 보 세요. 하나님께서 보호하지 않았더 라면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마누라 잃어버리고 자기도 죽을 뻔 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이 땅으로 돌 아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마\\\" 했으면 기다려야 지. 좌우간 몇 십년이라도 기다려 야지. 그는 또, 또 실수를 합니다. 십년 쯤 기다려 보고는 \\\'아 이게 어 쨌든 내 종자면 되지 꼭 그 마누라 여야만 될 건 없잖아?\\\' 해석이 좋아 요. 그래가지고 또 제 멋대로 이스 마엘을 또 낳아 놓았거든요. 하나 님이 당장 책망하십니다. \\\"그건 아 니다 이거야. 그런 편법이 통하지 않는다. 네 아내 사라가 낳을 것이 다.\\\"이거예요. 자 그런데 창세기를 자세히 보면은 이제 마지막으로 25 년만에, 말씀하신 지 25년, 그가 백 세가 되었을 때에 이제 말씀하십니 다. 하나님께서 \\\"내년에 아들을 낳 으리라.\\\" 그 때 나이, 벌써 자기 부 인의 나이는 단산한 지 이미 오랬어 요. 90세요. 그것이 생리학적으로 는 불가능해요. 생산적으로 볼 때 는 로마서 4장 19절에 있는 말씀처 럼 \\\"마치 죽은 자와 방불한 자기를 알면서도…….\\\"그래요. 죽은 자와 방불한, 생식 능력에 대해서는 내외 가 다 죽은 자와 같아요. 이미 끝 난 지 오랬어요. 인간의 지식으로 는, 인간의 경험으로는. 그러나 아 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 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또 믿어요. 그래 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시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이 미 너무나 많이 실패했잖아요. 자 기 자신에 대해서 실패했고, 믿음 생활에 대해서 실패했고, 너무나 많 은 낙심한 잘못된 흔적이 있어요. 이 허물, \\\"하나님, 이미 나는 너무너 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습니다. 믿음대로 살지 못한 사람 아닙니 까?\\\" 그런 가책이 있건만 하나님이 \\\"네게 아들을 주리라\\\"하면 또 \\\"예\\\" 하고 받아들입니다. 이 사람 여기 에 훌륭한 데가 있어요. 자기 자신 의 부족함이나 허물된 과거를 가지 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있다면 두려움 이 없어야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와 더불어 그가 이 본문 무려 15장 을 보았습니다만은 14장에 보면은 그가 나가서 전쟁을 하는 일이 있습 니다. 전쟁에 하나님의 은혜로 일 단은 승리했습니다만은 그 후속 결 과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요. 이제 저들이 다시 동맹해 가지고 쳐들어 오면 꼼짝 못하고 몰살될 수밖에 없 는 그런 처지입니다. 하나님은 함 께 한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 다. 두려워하지 말라!\\\" 아브라함은 또 믿었습니다. \\\"예, 말씀대로 두려 워하지 않겠습니다.\\\" 손에 가진 것 도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도 없어 요.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또 믿 습니다. 아주 훌륭한 분이에요. 그 뿐 아닙니다. 이렇게 믿고 그는 순 종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클라이 막스적인 얘기가 있지요.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쳐 라\\\" 그럴 때에 그걸 바칩니다. 한 번쯤 의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식을 주 신다고 하신 말씀을 오래 전부터 들 어왔습니다. 이제 이 아들 장가도 가기 전에 이걸 바치라면 약속이 틀 리지 않습니까?\\\" 대답할 만도 한데 그는 하나님께서 \\\"바치라\\\" \\\"그러죠\\\" 그냥 바치려고 듭니다. 그때에 하 나님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에게 큰복을 주시고 네가 메시아의 조상 이 되리라는 것을 그 때 말씀하시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대단한 믿음입니다. 보세요. 이것이 믿음 입니다. 이렇게 믿을 때에 그 많은 허물, 그 많은 잘못, 많은 실수 다 덮어 주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에 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 는 거예요. 이 믿음을 말하는 것이 에요. 그런고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거예요. 여러분 의라고 하는 것은 일단 도덕적 의가 있습니다. 내가 선하 게 살아서, 진실하게 살아서 의를 이룹니다 만은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두 번째는 회개의 의가 있 어요. 내가 스스로 회개하고 뉘우 치고 이제부터 바르게 살겠다고 몸 부림쳐도 사실은 지난날의 죄가 그 냥 남아 있습니다. 내 회개라는 것, 사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런고 로 오직 의롭다함을 얻는 길, 이것 밖에는 없는 거예요. 오직 은혜, 오 직 긍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우 리를 의롭다 하실 때만이 가능합니 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 한 전적인 신뢰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요, 전적인 헌신 입니다. 순종입니다. 여기에 용기 가 있는 것이올시다. 인도에서 한 평생을 선교사로 산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라고 유 명한 분입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디바인 예스(Divine Yes)\\\'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69세 때 중풍 에 걸려서 보스턴 병원에 입원하고 5개월 동안 있는 동안에 이 책을 썼 습니다. 디바인 예스, 하나님의 말 씀에 대하여 \\\"예\\\" 하는 것이죠, 긍 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이죠. 하나님 의 말씀에는 언제나 \\\"예\\\" 가 있을 뿐이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는 중풍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간호원에 게 부탁했답니다. \\\"내가 잠에서 깰 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 니 일어나라!\\\' 그렇게 나에게 말해 달라\\\"고. 그는 언제든지 \\\"일어나 라\\\" 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 어요. 들려져야 된다는 거죠. \\\"나 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 어나라!\\\" 하는 말씀이 귀에 확실하 게 들려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사 실로 그는 그렇게 듣고 그는 일어났 고 그 후 20년 동안을 계속해서 선 교사로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사가 무엇 입니까? 부하든 가난하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든 못 받든 그게 중요한 거 아닙니다. 우 리의 관심은 죄, 의,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깨 끗한 믿음,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살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를 기울이십시다. \\\"아브라함이 하 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셨 느니라\\\"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뿌리 가 있습니다.
개혁신앙의 뿌리/창15:1-7
개혁신앙의 뿌리 창15:1-7 곽선희 목사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기도와 명상과 고행을 통해서 그 영혼을 깨끗케 하고 또 하나님의 나라를 봉사하는 수도사였습니다. 수도사로 살아가는 동안 어째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죄를 지을래야 지을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흔히 말하는 \'리얼 신(Real Sin)\' 사실적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없으니 간음죄를 지을 수 없고 사유재산이 없으니 도적질 할 것도 없고 가족도 없고 또 나아가서 출세니 명예니 하는 그것도 없으니까 인간적 욕망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 기도, 명상하는 그것인데 그러나 그는 수도원에서 죄로 고민했습니다. 개혁자 마틴 루터의 가장 심각한 고민은 오직 하나 죄입니다. 죄와 의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죄, 내 죄, 내 죄, my sin, my sin, my sin 하며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죄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회개하고 참회하고 고행을 해도 이것으로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가 않는다는 거예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걸 느꼈어요. 그는 당시의 수도사들이 가르쳐 준 대로 그대로 참회했습니다. 명상했습니다. 고해했습니다. 그래 마침내 고해성사라는 게 있지요. 그것은 고해성사 하는 장소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면 잠시 후에 신부가 나와서 옆으로 비스듬히 앉고 이제 그 귀에다 대고 자기 죄를 자복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런 고해하는 일을 하루에 스무번도 더 했답니다. 가서 죄를 고하고 돌아와서 또 고민돼서 또 가서 고하고 또 고하고……. 마지막엔 신부가 너무 귀찮아 가지고 \"루터야, 죄 좀 모았다 오너라\" 그랬다고 그런 전해지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 그랬을 거 같아요. 그는 죄로 인하여 많이 고민했으니까요. 아무리 참회하고 고해해도 그 마음속에 진정한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보지 못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지은 죄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아무리 회개하고 뉘우치고 뭐 이제부터는 그런 일에서 떠났다 하더라도 이미 지은 죄가 어디로 갑니까? 자 우리가 빚을 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빚으로 죄를 상징해서, 비유로 말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빚을 졌어요. 내가 이 시간에 뉘우치고 이제부터는 바로 산다고 한다고 그 빚이 없어집니까?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합시다. 내가 여기서 아무리 회개하고 빠르게 고행, 한 평생 내가 의롭게 산다고 몸부림을 친들 죽은 자가 살아납니까? 죄를 소홀하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미 지은 죄는 죄 대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새 뭐 어떤 사람이 좀 잘못해 가지고 쫓겨다니다가 10년만에 이제 자수했다면서요? 바로 살겠다고 자수했지만 덜커덕 감옥에 들어가던데요. 이미 지은 죄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 죄가 나를 타락시켜서 죄의 결과로 내 속에 타락성이 있다는 것을 또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내가 지금 바르게 한다 뭘 한다고 몸부림쳐봐야 그건 벌써 정상적인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이 의를 논해도 그게 의가 될 수가 없고 공로를 논해도 공로가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벌써 타락했기 때문에. 이 타락성이 무서운 것이에요. 그래서 정욕의 노예가 되고 불신앙의 노예가 되고 때로는 사악한 마음이 이 마음속에 있는 것이거든요. 아직 큰 죄는 짓지 않는 거 같아도 죄로 인한 변질된 타락한 내 심령 이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죄요. 그런가 하면 미래로 지향하면서 우리는 걱정, 근심이 많습니다. 불신이 있고 불안이 있고 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이 의심은 병이요 그 의심은 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나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해서, 내게 주어진 미래에 대하여 의심이 많습니다. 이것이 곧 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행을 통해서 해결해 보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수도원의 계율을 지켜 가면 되지 않을까? 그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루터는 로마에 있는 \'스칼라 산타\'라고 하는 성당에 갔었답니다. 지금 같이 교통이 편리할 때가 아닙니다. 로마에 한 번 간다는 건 일생의 한 번 큰 순례의 길입니다. 가서 \'산타 스칼라\'라고 하는 이 성당에 들어가서 거기에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으실 때에 올라가셨다고 하는 그 계단이 있습니다. 28계단이 있는 그 나무로 된 계단, 그것을 콘스탄친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믿음이 좋아서 이것을 뜯어다가 로마에 갖다 놓고 이 스칼라 산타 성당 안에다가 딱 갔다 놓았습니다. 지금도 가보면 성 요한 성당 바로 옆에 있는데 그 예배당에는 사람이 들어가서 예배하게 되어 있지 않아요. 그저 건물을 지어 놓고는 한 가운데에 그 계단이 이렇게 놓여있습니다. 이천년 된 계단이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계단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 죄 사함 받는다, 심지어는 연옥에 있는 죄인도 여기서 기도하면은 구원을 받는다 라고 그렇게 당시에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루터는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면서 계단마다 올라가며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다 올라가서 보니 아무 해결될 것도 없어요. 이게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더라고. 그 때에 마치 큰 불빛을 보는 것처럼 어떤 전광같은 말씀이 귀에 들려 왔다는 겁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이까짓 것 무릎으로 기어오른다고 죄사함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여기서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긍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우리가 의롭게 살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합니다. \'져스티피케이션(Justification)\',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이 자체, 이 중요한 교리를 그는 발견하게 되고 벌떡 일어나서 신앙을 조정하게 되고 마침내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내 의를 세워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는 지난날의 죄 때문에 내가 오늘 공로를 세운다고, 고행을 한다고 해서 나 자신의 과거의 죄나 타락된 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중요한 것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디카이오\'라고 하는 말, 의롭다 함을 얻는다, 영어로 \'져스티파이(Justify)\', \'져스티파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의 관심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고 사회가 잘 되고, 못 되고, 안 되고, 출세하고 못 하고, 오래 살고 못 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 오래 살아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잘 살면 뭣하고 못 살면 뭣합니까?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합시다. 적어도 이 고민은 이 고민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궁극적 관심입니다. 죄 문제, 이것은 내 죄 문제요. 여러분 아시잖아요. 그리 애써서 민주화 해 놓고 보니까 소용 있습니까? 그래 요새 어떤 사람들은 글을 씁니다. 민주주의의 종말이라고 그럽니다. 왜? 죄 문제가 이렇게 남아 있는 동안 아무 소용없어요. 죄와 부정이 있는데 제도하나 바꾼다고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는 거라고요. 점점 더 혼란의 구덩이로 빠질 뿐이요. 문제는 의! 자 보세요. 그 많은 의! 뭐 정화, 개혁 해봐도 까딱도 하지 않아요. 뭐 3배나 더 한다면서요. 문제는 의의 문제가 남았어요. 우리가 잘 살고 못 살고도 의의 문제요, 죄와 의의 문제란 말입니다. 나라가 견고하게 스는 것은 의(義)지, 사람 바꾸고 제도 바꾼다고 되는 건 아니에요. 이제쯤은 깨달아야죠. 문제는 내 마음속에 있는 죄, 자 이 문제요. 죄의 문제는 곧 하나님 앞에 의뢰의 문제입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느냐? 하나님의 법 앞에 그 심판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냐? 의의 문제가 있고. 자 이제 이에 대한 해결은 오직 하나, 의롭다함을 얻는 그 길밖에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나 칼뱅이나 간에 이 분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전승이나 어느 교황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 성경 안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또 얻었습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자의 신앙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얻었어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성경 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납니다. 사도 바울이 \'이름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져스티피케이션 바이 페이드(Justification by faith)\', 이 문제에 대한 깊은 해답을 바울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것을 흔히 \'칭의\', \'득의\' 이런 말로 우리가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내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겁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의 계시입니다. 이 의로운 계시를 하나님의 의를 내가 수용함으로써 죄인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것이 종교 개혁 신앙의 뿌리입니다. 그래 바울에게서 칭의(稱義)의 의를 배웁니다. 루터와 모든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 신앙의 근본이 됩니다. 여러분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어디서 또 받아 들였느냐 하면 구약성경으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여기시고…….\" 그 말씀,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치 사도 바울은. 다시 또 하박국 2장 4절에 가서 보면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두 말씀, 두 요절 이 말씀에다가 뿌리를 두고 의롭다함을 얻는 교리를 전제합니다. 이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고 죄와 저주로부터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을 설명하게 됩니다. 이 신앙을 그대로 받아서 바울로부터 받아들여서 종교 개혁자의 신앙이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하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에 보면은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동으로 가랍니까? 서로 가랍니까?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전혀 묻지 않습니다\" \"고향을 떠나라! 익숙한 곳, 죄악의 도시, 과거, 옛날 생활……떠나라\" 믿음으로 떠납니다. \"지시할 땅으로 가라, 떠나면 지시하겠다 또 내가 네게 아들을 주겠다 그래서 자자손손 이 축복이 이어지도록 해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나이 75세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고향을 등지고 떠납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그래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었어요. 그러기 위해서 자기의 익숙한 혹은 평안히 살아오던 고향을 그 옛날 생활을 다 버렸어요. 그리고 대모험을 강행합니다. 그것이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은 그의 믿음은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지만은 일단은 떠났는데 그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흉년이 들 때 그는 애굽으로 갔습니다. 피난을 가버립니다. 그 믿음없는 짓입니다. 아 흉년이 들던, 살던 죽던 이 땅에 머물러야지 왜 하나님이 지시한 땅을 떠납니까? 그는 그만큼 나약한 사람입니다. 일단 떠났는데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마누라 잃어버리고 자기도 죽을 뻔 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마\" 했으면 기다려야지. 좌우간 몇 십년이라도 기다려야지. 그는 또, 또 실수를 합니다. 십년 쯤 기다려 보고는 \'아 이게 어쨌든 내 종자면 되지 꼭 그 마누라여야만 될 건 없잖아?\' 해석이 좋아요. 그래가지고 또 제 멋대로 이스마엘을 또 낳아 놓았거든요. 하나님이 당장 책망하십니다. \"그건 아니다 이거야. 그런 편법이 통하지 않는다. 네 아내 사라가 낳을 것이다.\"이거예요. 자 그런데 창세기를 자세히 보면은 이제 마지막으로 25년만에, 말씀하신 지 25년, 그가 백세가 되었을 때에 이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그 때 나이, 벌써 자기 부인의 나이는 단산한 지 이미 오랬어요. 90세요. 그것이 생리학적으로는 불가능해요. 생산적으로 볼 때는 로마서 4장 19절에 있는 말씀처럼 \"마치 죽은 자와 방불한 자기를 알면서도…….\"그래요. 죽은 자와 방불한, 생식 능력에 대해서는 내외가 다 죽은 자와 같아요. 이미 끝난 지 오랬어요. 인간의 지식으로는, 인간의 경험으로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또 믿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시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이미 너무나 많이 실패했잖아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패했고, 믿음 생활에 대해서 실패했고, 너무나 많은 낙심한 잘못된 흔적이 있어요. 이 허물, \"하나님, 이미 나는 너무너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습니다. 믿음대로 살지 못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 가책이 있건만 하나님이 \"네게 아들을 주리라\"하면 또 \"예\"하고 받아들입니다. 이 사람 여기에 훌륭한 데가 있어요. 자기 자신의 부족함이나 허물된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있다면 두려움이 없어야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더불어 그가 이 본문 무려 15장을 보았습니다만은 14장에 보면은 그가 나가서 전쟁을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전쟁에 하나님의 은혜로 일단은 승리했습니다만은 그 후속 결과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요. 이제 저들이 다시 동맹해 가지고 쳐들어오면 꼼짝 못하고 몰살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한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아브라함은 또 믿었습니다. \"예, 말씀대로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손에 가진 것도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또 믿습니다. 아주 훌륭한 분이에요. 그 뿐 아닙니다. 이렇게 믿고 그는 순종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클라이막스적인 얘기가 있지요.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쳐라\" 그럴 때에 그걸 바칩니다. 한 번쯤 의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식을 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이제 이 아들 장가도 가기 전에 이걸 바치라면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대답할 만도 한데 그는 하나님께서 \"바치라\" \"그러죠\" 그냥 바치려고 듭니다. 그때에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에게 큰복을 주시고 네가 메시아의 조상이 되리라는 것을 그 때 말씀하시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대단한 믿음입니다. 보세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을 때에 그 많은 허물, 그 많은 잘못, 많은 실수 다 덮어 주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는 거예요. 이 믿음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거예요. 여러분 의라고 하는 것은 일단 도덕적 의가 있습니다. 내가 선하게 살아서, 진실하게 살아서 의를 이룹니다 만은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두 번째는 회개의 의가 있어요. 내가 스스로 회개하고 뉘우치고 이제부터 바르게 살겠다고 몸부림쳐도 사실은 지난날의 죄가 그냥 남아 있습니다. 내 회개라는 것, 사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런고로 오직 의롭다함을 얻는 길, 이것밖에는 없는 거예요. 오직 은혜, 오직 긍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의롭다 하실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요, 전적인 헌신입니다. 순종입니다. 여기에 용기가 있는 것이올시다. 인도에서 한 평생을 선교사로 산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라고 유명한 분입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디바인 예스(Divine Yes)\'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69세 때 중풍에 걸려서 보스턴 병원에 입원하고 5개월 동안 있는 동안에 이 책을 썼습니다. 디바인 예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 하는 것이죠,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예\" 가 있을 뿐이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는 중풍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간호원에게 부탁했답니다. \"내가 잠에서 깰 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렇게 나에게 말해달라\"고. 그는 언제든지 \"일어나라\" 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어요. 들려져야 된다는 거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는 말씀이 귀에 확실하게 들려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사실로 그는 그렇게 듣고 그는 일어났고 그 후 20년 동안을 계속해서 선교사로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부하든 가난하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든 못 받든 그게 중요한 거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죄, 의,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깨끗한 믿음,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살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있습니다.
개혁신앙의 뿌리/창15:1-7
개혁신앙의 뿌리/창15:1-7 2004-03-16 15:05:35 read : 541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수도사로서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명상하며, 주를 섬기며, 또 때로는 고행을 하면서 그 영혼을 깨끗케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혹은 이미 죽은 망령들을 위하여,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엄격히 생각하면수도원 생활이라는 것은 리얼 신(real sin), 실제적인 죄를 범할래도 범할 수가 없습니다. 여자가 없으니 간음죄를 짓지 못할 것이요, 또 사유 재산이 없으니 도둑질하고 욕심부릴 것도 없고, 수도원 안에 있으니 출세하고 얻고 빼앗기고 빼앗는 그런 일들도 없습니다. 오로지 기도와 명상으로 그 수도생활을 하는 루터의 마음 속에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고민은 오직 하나로 집약이 됩니다. 죄 문제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항상 내 죄, 내 죄, 가슴을 찢으며 죄에 대한 아픔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그는 당시에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그런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하는 고해성사를 가게 됩니다. 고해성사란, 일정한 장소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면 신부님이 나와서 이렇게 비스듬히 앉습니다. 그러면 그 귓가에다 대고 자기의 잘못된 죄를 다 고합니다. 그러면 신부께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죄 사함을 선포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제 고해성사를 가서 죄를 자복했습니다. 조금 와서 생각하니까 또 다른 죄가 생각나서 또 가서 고백했습니다. 하루에도 스무 번 이상 이렇게 신부님을 괴롭혔답니다. 신부께서는 마침내 지겨워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루터야, 죄 좀 모았다 오너라.\" 그럴 것 같아요. 저라도 견디기 어렵겠어요. 이렇게 됐단 말이에요. 또 들어보니까 죄가 무슨 도둑질입니까, 간음입니까, 살인입니까, 그런 것 아니에요. 마음 속에 있는 의심과시기와 질투와 정욕과, 어쨌든 심리적으로 마음 속에 있는 그런 것들이에요. 이걸 가지고 자꾸 찾아와서 이랬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죄가 뭡니까? 죄라는 것은 이미 지은 죄, 그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것이 없어지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회개하고 오늘부터 바로 산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은 죄는 죄입니다. 마치 빚을 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예컨대, 빚을 져 놓고 그것 놔두고 이제부터 선하게 바르게 산다고 그 빚이 갚아집니까? 또 그로 인해서 파급된 손해가 많았는데 그건 무엇으로 보상할 겁니까? 설사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누굴 죽였다면 이제부터 바르게 진실하게 의롭게 선하게 한평생 산다고 한들 죽은 자가 살아납니까? 어떻게 죄를 간단하게 봅니까? 그저 바르게 살고 의롭게 살고 오늘부터, 그런 망상을 버리세요. 죄란 사실이에요. 그대로 죄로 남아있는 거예요. 이걸 무서운 줄 알아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요새도 보니까 십 년 동안 도망다니다가 자수했다고 하니까 감옥에 쳐넣잖아요. 십 년 지난 죄라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래서 죄는 무서운 거예요. 또 하나는 그 죄가 내 성품에, 내 인간성 속에 타락성으로 남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부터 내가 바르게 산다고 해야 소용없어요. 죄인의 의라는 것은 의가 아니에요. 왜냐 하면, 벌써 생각이 잘못됐고, 감성이 잘못됐고, 판단이 잘못된 그 주제에 의가 무슨 의! 소용없는 겁니다. 내 마음, 성품, 판단, 이성이 전부 다 타락된 가운데 있거든요. 이 자체가 죄예요. 그뿐 아니라 이런 죄인은 미래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수용할 수가 없어요. 말씀이 내 안에서 왜곡됩니다. 말씀에 대한 의심이 많습니다. 근심, 걱정, 불안,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이 또한 엄청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행도 생각하고 극기도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마는, 그런 방법으로 죄를 씻을 수가 없는 것이올시다. 마틴 루터는 오랫동안 벼르고 생각했던 바대로 로마에 있는 스칼라상타라고 하는 성당엘 갔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한 번씩 로마를 갈 때마다 누구나 보는 곳입니다. 성 요한 성당 바로 옆에 스칼라상타라고 하는 그런 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은 이처럼 이렇게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곳이 아니고, 성당 안에는 오직 커다란 계단 하나가 있습니다. 이 계단은 예루살렘의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이 끌려 올라갔던 그 계단입니다. 이것을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믿음이 좋아서 이것을 예루살렘에서 뜯어서 로마로 옮겨다가 성당 안에다가 그것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거룩한 계단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올라가면 모든 죄가 사함 받고,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연옥에 있는 심령들이 구원받을 수도 있다 하는 그런 교리가 함께 하는 그런 성당입니다. 여기에 마틴 루터가 가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며 무릎을 꿇고 한 계단마다 올라갈 때에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기도문을 외우면서 계속 올라갔어요. 28계탄 다 올라가서 그는 결코 시원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마음 속에 아주 번개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말씀이 있었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까짓 계단 아무 소용없는 거다. 어떤 모임도 소용없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긍휼로,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 의롭다 함을 얻는 그 길 외에 죄 문제의 해결이 없다고 깊이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종교개혁을 단행해서 오늘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궁극적 관심은 죄입니다. 바로 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의롭다함의 문제입니다. \'디카이오스우네\', 저스티피케이션(justification), 저스티파이(justify), 이게 문제란 말이에요. 보세요,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정치 문제, 경제 문제, 사회 문제, 번영 문제, 자유 문제, 이런 외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나는 어떤 모양으로 서게 되겠느냐, 하나님 앞에 있는 나. 죄 문제 하나만 생각하는 것이에요. 자, 이제 우리 생각합시다. 그런고로 종교개혁자는 죄, 그것도 내 죄, 내 마음 속에 있는 죄 문제 가지고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의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어디 있느냐, 이것을 생각하면서 대표적인 루터, 칼빈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해결이 있어요. 어느 교리 어느 교황의 말이 아니라 오로지 성경 속에서 문제의 해답을 얻게 됩니다.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을 만납니다. 바울의 교리를 생각합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주제인 그 복음 속에서 \'디카이오스우네\',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를 발견하고 여기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뿌리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 즉 칭의(稱義), 혹은 득의(得義),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고 복음의 진수를 설명할 때에 그 성경적 근거를 구약에 두었습니다. 구약에 두고 거기서 설명을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설명할 때, 이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타내 주신 하나님의 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위에 나타났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할 때에 그 역사적 맥락을 구약에서 찾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읽은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여기시고\' 하는 거예요. 하박국 2장 4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은 이 두 요절을, 이두 성경 말씀을 아주 소중히 여기고 여기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롭다 함의 교리를 설명하는데, 오늘 역시 종교개혁자들도 마찬가지로 그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올시다. 자,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을 좀 생각해 보십시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을 떠나라\' 그럽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고향은 편한 곳입니다. 고향은 익숙한 곳입니다. 고향은 안정된 곳입니다. 고향을 떠나라면, 지금처럼 무슨 비자 받아 가지고 떠나는 것도 아니고요, 한 번 떠나면 그야말로 광야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라는 얘기입니까? 사방이 전부 원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내가 네게 자식을 주겠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을 주겠다.\' 어디로 가라는 것도 없습니다. 지정표도 없습니다. 그저 떠나라는 거예요. 말씀을 믿고, 약속을 믿고 떠나는 바로 거기에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떠남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는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약한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고 약속했습니다마는, 그는 흉년이 들 때 그만 그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지 않았더라면 마누라 잃어버리고 자기는 죽을 뻔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돌아옵니다마는. 자, 이렇지요, 이 정도예요.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을 받았지마는, 그때 벌써 말씀 처음 들을 때가 75세입니다. 빨리 주셔도 주셔야겠는데, 웬걸요, 세월이 흘러가 무려 10년이 지나가는데. 로마서 4장 19절에 의하면, \'마치 죽은 자와 방불한 자기를 알면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리적으로 볼 때는 나이 100세가 되니까 죽은 자와 마찬가지예요. 마누라는 단산한 지가 오래되었어요. 90세가 되었어요. 여기서 뭘 기다리겠어요. 그래 그도 역시 휘청합니다. 뭐 종자만 내 종자면 되지, 그래서 이스마엘을 또 만들어요. 하나님은 책망하십니다.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정당한 길로 가야지 편법으로는 아니다 이거예요. 기어이 90세가 넘은 사라, 그로부터 아들을 주시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 줄기찬 믿음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휘청휘청 했어요. 다 이 나약함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얼마나 마음으로 믿는지 안 믿는지는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다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나약함을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인데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만 하면 또 믿어요. 그 믿음이 뭡니까?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는 거예요. 자기의 무자격, 자기의 허물 생각하지 않아요. 말씀만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또한 이미 실패한 과거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이래 실패하고 이리 넘어지고 실수한 것들 많아요. 이것을 자기가 알고 있고 하나님이 알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하실 때에 오늘 또 순종하는 겁니다. 또 받아들이는 거예요. 오늘 성경 말씀대로 보면 그는 소돔 고모라 왕과 전쟁을 벌인 일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일시 이기기는 했습니다마는 불안합니다. 저들이 연합을 해 가지고 다시 쳐들어오면 속수무책입니다.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승리하고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해함은 믿음이 아닙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또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이것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약속을 확실하게 그대로 믿습니다. 이제 클라이맥스가 옵니다. 100세에 아들을 얻었죠? 모름지기 그가 27세쯤 됐을 때 같습니다. 꽤 나이가 많았을 때예요. 이제 장가보내면 돼요. 바로 그런 때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제사를 드려라 그래요. 원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거야말로 큰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판단이 있고, 그가 질문할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통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장가도 보내기 전에 이것을 죽여 바치라고요?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날더러 아들을 죽이라고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입니까?\' 할 말 많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일체 질문이 없습니다. 반항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바치라면 바치는 거지. 약속은 약속대로 이루어질 거지. 여기에 이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성적 판단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대로 하나님 앞에 이삭을 드리게 됩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메시아의 조상이 될 것을 그때에 약속해 주십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는 종종 믿음을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이 엄청난 믿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러하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실수와 잘못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의롭게 여기십니다. 믿음을 보시고, 오로지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의라고 하는 것은 먼저는 도덕적 의가 있고 종교적 의가 있습니다마는, 인간으로서는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요. 두 번째는 회개의 의가 있습니다.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리고 이제부터 바로 해보겠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형식 뿐이요 실제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회개하고 뉘우치면 다인지 알지마는, 그것이 해결의 길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셔야 됩니다. 그 근거는 믿음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믿고 이에 따라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수용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그 깨끗한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죄인이지마는 그가 의롭다 하시면 나는 의인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곧 용기입니다. 믿음은 나 자신이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아야 됩니다. 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뭡니까? 아직도 잘사는 겁니까? 아직도 부를 원합니까? 오래 산다고요?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우리의 최고 관심은 의요, 바로 죄 문제에 있는 겁니다. 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내가 수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 위대한 종교 개혁적 능력이 있는 것이올시다. 이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시고\' 바로 여기에 개혁 신앙의 뿌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개혁신앙의 뿌리/창15:1-7
개혁신앙의 뿌리/창15:1-7 2001-11-14 12:21:27 read : 191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수도사로서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명상하며, 주를 섬기며, 또 때로는 고행을 하면서 그 영혼을 깨끗케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혹은 이미 죽은 망령들을 위하여,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엄격히 생각하면수도원 생활이라는 것은 리얼 신(real sin), 실제적인 죄를 범할래도 범할 수가 없습니다. 여자가 없으니 간음죄를 짓지 못할 것이요, 또 사유 재산이 없으니 도둑질하고 욕심부릴 것도 없고, 수도원 안에 있으니 출세하고 얻고 빼앗기고 빼앗는 그런 일들도 없습니다. 오로지 기도와 명상으로 그 수도생활을 하는 루터의 마음 속에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고민은 오직 하나로 집약이 됩니다. 죄 문제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항상 내 죄, 내 죄, 가슴을 찢으며 죄에 대한 아픔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그는 당시에 죄 사함 받을 수 있는 그런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하는 고해성사를 가게 됩니다. 고해성사란, 일정한 장소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면 신부님이 나와서 이렇게 비스듬히 앉습니다. 그러면 그 귓가에다 대고 자기의 잘못된 죄를 다 고합니다. 그러면 신부께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죄 사함을 선포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제 고해성사를 가서 죄를 자복했습니다. 조금 와서 생각하니까 또 다른 죄가 생각나서 또 가서 고백했습니다. 하루에도 스무 번 이상 이렇게 신부님을 괴롭혔답니다. 신부께서는 마침내 지겨워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루터야, 죄 좀 모았다 오너라.\" 그럴 것 같아요. 저라도 견디기 어렵겠어요. 이렇게 됐단 말이에요. 또 들어보니까 죄가 무슨 도둑질입니까, 간음입니까, 살인입니까, 그런 것 아니에요. 마음 속에 있는 의심과시기와 질투와 정욕과, 어쨌든 심리적으로 마음 속에 있는 그런 것들이에요. 이걸 가지고 자꾸 찾아와서 이랬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죄가 뭡니까? 죄라는 것은 이미 지은 죄, 그것이 죄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것이 없어지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회개하고 오늘부터 바로 산다고 하더라도 이미 지은 죄는 죄입니다. 마치 빚을 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예컨대, 빚을 져 놓고 그것 놔두고 이제부터 선하게 바르게 산다고 그 빚이 갚아집니까? 또 그로 인해서 파급된 손해가 많았는데 그건 무엇으로 보상할 겁니까? 설사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누굴 죽였다면 이제부터 바르게 진실하게 의롭게 선하게 한평생 산다고 한들 죽은 자가 살아납니까? 어떻게 죄를 간단하게 봅니까? 그저 바르게 살고 의롭게 살고 오늘부터, 그런 망상을 버리세요. 죄란 사실이에요. 그대로 죄로 남아있는 거예요. 이걸 무서운 줄 알아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요새도 보니까 십 년 동안 도망다니다가 자수했다고 하니까 감옥에 쳐넣잖아요. 십 년 지난 죄라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래서 죄는 무서운 거예요. 또 하나는 그 죄가 내 성품에, 내 인간성 속에 타락성으로 남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부터 내가 바르게 산다고 해야 소용없어요. 죄인의 의라는 것은 의가 아니에요. 왜냐 하면, 벌써 생각이 잘못됐고, 감성이 잘못됐고, 판단이 잘못된 그 주제에 의가 무슨 의! 소용없는 겁니다. 내 마음, 성품, 판단, 이성이 전부 다 타락된 가운데 있거든요. 이 자체가 죄예요. 그뿐 아니라 이런 죄인은 미래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수용할 수가 없어요. 말씀이 내 안에서 왜곡됩니다. 말씀에 대한 의심이 많습니다. 근심, 걱정, 불안,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이 또한 엄청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행도 생각하고 극기도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마는, 그런 방법으로 죄를 씻을 수가 없는 것이올시다. 마틴 루터는 오랫동안 벼르고 생각했던 바대로 로마에 있는 스칼라상타라고 하는 성당엘 갔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한 번씩 로마를 갈 때마다 누구나 보는 곳입니다. 성 요한 성당 바로 옆에 스칼라상타라고 하는 그런 성당이 있는데, 이 성당은 이처럼 이렇게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곳이 아니고, 성당 안에는 오직 커다란 계단 하나가 있습니다. 이 계단은 예루살렘의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이 끌려 올라갔던 그 계단입니다. 이것을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믿음이 좋아서 이것을 예루살렘에서 뜯어서 로마로 옮겨다가 성당 안에다가 그것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거룩한 계단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올라가면 모든 죄가 사함 받고,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연옥에 있는 심령들이 구원받을 수도 있다 하는 그런 교리가 함께 하는 그런 성당입니다. 여기에 마틴 루터가 가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며 무릎을 꿇고 한 계단마다 올라갈 때에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기도문을 외우면서 계속 올라갔어요. 28계탄 다 올라가서 그는 결코 시원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마음 속에 아주 번개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말씀이 있었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까짓 계단 아무 소용없는 거다. 어떤 모임도 소용없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긍휼로,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 의롭다 함을 얻는 그 길 외에 죄 문제의 해결이 없다고 깊이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종교개혁을 단행해서 오늘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궁극적 관심은 죄입니다. 바로 의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의롭다함의 문제입니다. `디카이오스우네`, 저스티피케이션(justification), 저스티파이(justify), 이게 문제란 말이에요. 보세요,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정치 문제, 경제 문제, 사회 문제, 번영 문제, 자유 문제, 이런 외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나는 어떤 모양으로 서게 되겠느냐, 하나님 앞에 있는 나. 죄 문제 하나만 생각하는 것이에요. 자, 이제 우리 생각합시다. 그런고로 종교개혁자는 죄, 그것도 내 죄, 내 마음 속에 있는 죄 문제 가지고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의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어디 있느냐, 이것을 생각하면서 대표적인 루터, 칼빈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해결이 있어요. 어느 교리 어느 교황의 말이 아니라 오로지 성경 속에서 문제의 해답을 얻게 됩니다.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을 만납니다. 바울의 교리를 생각합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주제인 그 복음 속에서 `디카이오스우네`,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를 발견하고 여기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뿌리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 즉 칭의(稱義), 혹은 득의(得義),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고 복음의 진수를 설명할 때에 그 성경적 근거를 구약에 두었습니다. 구약에 두고 거기서 설명을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설명할 때, 이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타내 주신 하나님의 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 위에 나타났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할 때에 그 역사적 맥락을 구약에서 찾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읽은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로 여기시고` 하는 거예요. 하박국 2장 4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은 이 두 요절을, 이두 성경 말씀을 아주 소중히 여기고 여기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롭다 함의 교리를 설명하는데, 오늘 역시 종교개혁자들도 마찬가지로 그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올시다. 자,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을 좀 생각해 보십시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을 떠나라` 그럽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고향은 편한 곳입니다. 고향은 익숙한 곳입니다. 고향은 안정된 곳입니다. 고향을 떠나라면, 지금처럼 무슨 비자 받아 가지고 떠나는 것도 아니고요, 한 번 떠나면 그야말로 광야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라는 얘기입니까? 사방이 전부 원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내가 네게 자식을 주겠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을 주겠다.` 어디로 가라는 것도 없습니다. 지정표도 없습니다. 그저 떠나라는 거예요. 말씀을 믿고, 약속을 믿고 떠나는 바로 거기에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떠남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는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약한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고 약속했습니다마는, 그는 흉년이 들 때 그만 그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지 않았더라면 마누라 잃어버리고 자기는 죽을 뻔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돌아옵니다마는. 자, 이렇지요, 이 정도예요.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을 받았지마는, 그때 벌써 말씀 처음 들을 때가 75세입니다. 빨리 주셔도 주셔야겠는데, 웬걸요, 세월이 흘러가 무려 10년이 지나가는데. 로마서 4장 19절에 의하면, `마치 죽은 자와 방불한 자기를 알면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리적으로 볼 때는 나이 100세가 되니까 죽은 자와 마찬가지예요. 마누라는 단산한 지가 오래되었어요. 90세가 되었어요. 여기서 뭘 기다리겠어요. 그래 그도 역시 휘청합니다. 뭐 종자만 내 종자면 되지, 그래서 이스마엘을 또 만들어요. 하나님은 책망하십니다.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정당한 길로 가야지 편법으로는 아니다 이거예요. 기어이 90세가 넘은 사라, 그로부터 아들을 주시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 줄기찬 믿음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휘청휘청 했어요. 다 이 나약함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얼마나 마음으로 믿는지 안 믿는지는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다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나약함을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인데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만 하면 또 믿어요. 그 믿음이 뭡니까?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는 거예요. 자기의 무자격, 자기의 허물 생각하지 않아요. 말씀만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또한 이미 실패한 과거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이래 실패하고 이리 넘어지고 실수한 것들 많아요. 이것을 자기가 알고 있고 하나님이 알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하실 때에 오늘 또 순종하는 겁니다. 또 받아들이는 거예요. 오늘 성경 말씀대로 보면 그는 소돔 고모라 왕과 전쟁을 벌인 일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일시 이기기는 했습니다마는 불안합니다. 저들이 연합을 해 가지고 다시 쳐들어오면 속수무책입니다.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승리하고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해함은 믿음이 아닙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또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이것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약속을 확실하게 그대로 믿습니다. 이제 클라이맥스가 옵니다. 100세에 아들을 얻었죠? 모름지기 그가 27세쯤 됐을 때 같습니다. 꽤 나이가 많았을 때예요. 이제 장가보내면 돼요. 바로 그런 때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제사를 드려라 그래요. 원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거야말로 큰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판단이 있고, 그가 질문할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아들을 통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장가도 보내기 전에 이것을 죽여 바치라고요?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날더러 아들을 죽이라고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입니까?` 할 말 많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일체 질문이 없습니다. 반항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바치라면 바치는 거지. 약속은 약속대로 이루어질 거지. 여기에 이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성적 판단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대로 하나님 앞에 이삭을 드리게 됩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메시아의 조상이 될 것을 그때에 약속해 주십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는 종종 믿음을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이 엄청난 믿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러하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실수와 잘못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의롭게 여기십니다. 믿음을 보시고, 오로지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의라고 하는 것은 먼저는 도덕적 의가 있고 종교적 의가 있습니다마는, 인간으로서는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요. 두 번째는 회개의 의가 있습니다.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리고 이제부터 바로 해보겠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형식 뿐이요 실제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회개하고 뉘우치면 다인지 알지마는, 그것이 해결의 길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셔야 됩니다. 그 근거는 믿음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믿고 이에 따라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수용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그 깨끗한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죄인이지마는 그가 의롭다 하시면 나는 의인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곧 용기입니다. 믿음은 나 자신이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아야 됩니다. 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뭡니까? 아직도 잘사는 겁니까? 아직도 부를 원합니까? 오래 산다고요?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우리의 최고 관심은 의요, 바로 죄 문제에 있는 겁니다. 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내가 수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 위대한 종교 개혁적 능력이 있는 것이올시다. 이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시고` 바로 여기에 개혁 신앙의 뿌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어차피 주님의 거룩한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오나 어느새 내 의를 내세우고, 내 교만을 내세우고, 내 노력으로 의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고, 과거도 현재도 또 미래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확실히 알고 이 믿음에 굳게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떨치고 일어나서 새로운 미래를 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