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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한 알처럼/ 마13:31/ 선교원 졸업 동화설교/ 2011-02-25
겨자씨 한 알처럼 마13:31 어느 마을에 꼬마 겨자씨가 살았다. 얼마나 작던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엄지공주보다 천배 만배나 더 작았다. 콩이나 팥에 비교해도 너무 작았다. 그런 겨자씨에게 친구들이 있었다. 무씨와 배추씨였다. 친구들은 사이좋게 놀다가도 겨자씨를 놀렸다. 작다고 무시하고 콧바람에도 날아갈 거라며 겁을 주었다. 겨자씨는 울면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왜 나는 이렇게 작아? 왜 나는 무씨나 배추씨만도 못한 거야?” 그럴 때면 엄마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겨자씨야, 지금 너의 몸은 작지만 하나님이 네게 주신 꿈은 작지 않아. 이다음에 너는 큰 나무처럼 될 거야. 꼭 그렇게 되고 말거야.” “그게 정말이에요? 엄마, 나도 큰 나무처럼 될 수 있는 거예요?” 겨자씨는 엄마의 말씀을 듣는 순간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어느새 힘이 솟아나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후로 겨자씨는 친구들이 놀려도 울지 않았다. 꼭 큰 나무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따뜻한 봄날이 되자 겨자씨는 땅에 심겨졌고 작은 싹을 틔웠다. 무씨와 배추씨도 땅에 심겨져 겨자씨보다 더 큰 싹을 틔우고 한껏 뽐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겨자씨 싹은 점점 자라더니 사람의 키보다 더 큰 나무가 되었다. 어둔 밤이 지나고 아침 해가 떠오르면 겨자씨네 가지에 새들이 날아와 아름답게 노래했다. 하루 종일 놀러 다니다 피곤한 새들도 잠깐 쉬어 가며 고을고을의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새들에게 가지를 내어준 겨자씨는 늘 기쁘고 행복했다. 무씨와 배추씨의 싹들도 자랐다. 그렇지만 무씨와 배추씨의 싹은 사람들 무릎만큼 밖에 자라지 않았다. 그들에게 새들이 찾아와 쉬어갈 가지란 없었다. 무씨와 배추씨는 부끄러웠다. 그동안 겨자씨를 놀린 일이 몹시 미안했다. 그들은 용기를 내어 겨자씨에게 말했다. “겨자씨야 정말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큰 나무처럼 될 줄 몰랐어. 이젠 우리랑 친구 안할 거니?” 겨자씨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땐 다 모르고 그랬는 걸 뭐. 우리 더욱 다정한 친구로 지내자.” “고마워, 겨자씨야, 너는 키도 크지만 마음씨는 더욱 크고 착하구나.” 무씨도 배추씨도 기뻐서 이파리를 살랑거렸다. 오늘 선교원을 졸업하는 원아들과 언니들을 떠나보내는 원아들은 모두 겨자씨이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로서 강서선교원 원훈인“넓고 깊게, 맑고 높게”를 늘 기억해야 한다. 마음을 넓혀 세계를 품고, 무엇이든 깊게 살펴 생각해야 한다. 맑고 밝은 마음으로 죄와 유혹을 이기고, 높은 꿈과 이상을 품어 큰 나무로 자라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위로와 쉼을 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큰 나무로 키우시고 많은 사람을 행복케 하는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가 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한 소망과 다짐으로 모두 힘차게 외치자. “나는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 한 알이다!!” *위 동화설교는 제10회 강서선교원 졸업식에서 한 설교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란 강서선교원 원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큰 나무로 자라기를 축복한다.
고난 신학교 졸업하기/ 욥42:1-6,10-17/ 2001-08-21
고난 신학교 졸업하기 욥42:1-6,10-17 욥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어려운 고난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습니다. 욥은 잘 통과하였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고난신학교를 졸업하여 신앙의 차원을 달리하고 새로운 축복을 열어 길이 누리며 장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듬으시고 새롭게 하실 때는 고난이란 신학교를 통과하게 하십니다.다른 길은 없습니다. 고난신학교를 잘 졸업하여야 한다는 결론부터 말씀드리고 고난에 대한 주제로 은혜받고자 합니다. 1. 고난이 무조건 저주요 불행은 아닙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축복이고 고난은 저주이며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고난이 와도 몹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축복을 받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간증들을 들어보면 다 지난 날의 고난을 얘기합니다. 고난을 통해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무조건 저주가 아니며, 불행은 아닙니다. 2.고난이 다 죄값은 아닙니다. 모든 고난이 다 죄값으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작은 어려움이 돠도 곧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신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신 것은 아닐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고난이 와도 금방 힘을 잃고 낙심합니다. 죄로 인해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면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영적 유익을 얻기 어렵습니다. 고난이 무조건 죄 때문에 오는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은 더욱 많습니다.(시34:19) 3.나 혼자만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 고난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해보면 나만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왜 이럴까, 참으로 나는 복이 없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들어 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다윗은 사울 때문에 많은 고통에 시달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도 어두움도..환난도 창조하십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2장에는 죄로 인해 매를 맞게 되는 고난과,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과, 선을 행함으로 받게 되는 고난이 있다고 했습니다(벧전 2:19-20).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겠습니까? 너희를 향한 생각은 내가 안다고 하셨습니다.(렘29:11-14) 하나님만이 아실 일입니다. 고난에 유익이 많습니다. 1. 고난으로 경건해집니다. 죄의 뿌리는 너무나 깊어서 뽑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겪으면 죄를 끊어내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4:1-2절을 보면 [육체의 고난을 받는 자가 죄를 그쳤음이여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은 경건생활에 유익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줍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회개하며 죄를 끊어내게 됩니다. 특별히 기도하게 됩니다.거룩하게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제마음대로 살았는데, 고난을 통하여 이제는 말씀대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2. 고난중에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출애굽기2장에..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하나님이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고난 중의 기도는 깊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고역에 시달리며 탄식하며 기도하는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간절해 찾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도 대부분은 병든 사람, 문제가 많은 사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환난도 없고, 아무런 문제도 없는 사람들은 좀처럼 예수님 앞으로 나오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힘들고 문제가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기가 쉽습니다. 3. 고난중에 은혜를 받습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나...제가 돌이켜 보면 그래도 몸부림치고 고생하는 중에 설교가 깊어지고 그래도 그릇이 좀 다듬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난 때문에 생각이 깊어지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내 죄와 허물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도 생깁니다. 나의 할 일이 무엇인지,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암을 고치는 것보다 새사람 되는 것이 더 큰 기적입니다. 믿음이 강해지고 온전해집니다. 성품이 변화되고 가치관의 변화가 옵니다. 행복관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물질적이고 세상적이었는데 달라집니다. 예수믿고 사는 것이 행복하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들이 충성스럽고 온전한 성도가 되게 합니다. 4.고난중에 성숙한 인격이 됩니다. 흔히 어른들은 좀 덜 된 사람보고 고생을 좀 해야겠다. 아직 고생을 안해봐서 그렇다고 합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사람을 채용할 때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너무 빨리 출세한 사람,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채용을 꺼렸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너무 쉽게 그리고 빨리 출세한 사람은 독선적이기 쉽습니다.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남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맨몸으로 달릴 때보다 등에 적당한 짐을 실을 때 더욱 빨리 달린다고 합니다. 사람도 적당한 시련을 만날 때 도전함으로 인생의 가속이 붙게되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고치 속에서 나올 때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몸부림을 치는지 차마 애처로워서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이 보고 있다가 애처로워 고치 구멍을 가위로 좀 찢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 쉽게 빠져 나온 그 애벌레의 나방은 날개를 단 뒤에도 날 수 없는 나비가 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힘들게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나방, 고난의 과정을 겪은 나방만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하찮은 벌레 한 마리에게도 그렇게 섭리하시 이유와 목적이 있는데 하물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이 올 때 우연히 오는 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좋으신 계획이 있으시기 때문에 고난을 주신 줄 믿습니다. 이와같이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고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고난의 신학교에서 어떻게 수업하느냐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좋은 학점으로 졸업해야 합니다. 낙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제는 다시 수강해야 합니다. 일평생 신학교만 다니다가 그렇게 인생을 마쳐서 되겠습니까?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그 고난속에서 적극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어려움이 오면 반응하게 되어있습니다. 요즘 황토사우나라고 있지요, 계란이 익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계란은 익혀도 사람은 익히지 않습니다. 사람은 들어가면 즉시 반응합니다. 땀을 줄줄줄 흘리어 체온을 조절합니다. 체온조절이 안되면 익혀 죽는겁니다. 천하태평으로 살면 안됩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몸부림치라고고난이 왔는데 천하태평으로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더 큰 고난이 와야 되겠습니까? 고난때에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몸부림쳐야 합니다. 바울은 육체를 찌르는 가시라는 고난 때문에 특별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귀한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가시가 방해되는 것인줄 알았는데 응답을 받고 보니 그것 때문에 약해지고 겸손해지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되고 그래서 주님의 큰 능력으로 사역할 수 있게되는 비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약함을 자랑하고 주만 의지하면서 능력있게 사역하게 되었으니 고난신학교를 최우수상을 받고 졸업한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신학교를 잘 수학하여 깊고 큰 은혜의 체험으로 훌륭한 왕이 되었습니다. 욥은 완벽을 추구하는 신앙에서 의존하는 신앙, 입을 막는 신앙으로 졸업하고 여러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직 그릇이 안될 때는 고생하고 있는것이 축복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목사님들을 뵙는 중에 강력한 영적 파워를 가진 분, 어디서 저런 영적 파워가 생겼을까 생각되는 분이 두분입니다. 저는 유심히 살펴 보았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한 것입니다. 한분 목사님은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하다보니 하루에 세번씩 기도하고 그래도 모자라 때때로 철야기도, 금식기도, 산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제게 고난이 있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 고난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고난때문에 매달리다 보니 은혜를 많이 받아 강력한 영적 능력의 목사님이 된 것이고 큰큰 목회를 하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중에 있습니까? 과정 중에 있습니까? 졸업을 했습니까? 일평생 고생만 하면서 세월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고난은 일평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너무나 짧습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이 지나가는 한 과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좋은 학점 받고 졸업하여 새로운 축복을 열고 주님과 하나님의 교회에 좋은 일꾼으로 쓰임받는 생애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난의 학교에 입학합시다/ 고후1:3-9/ 2003-02-28
고난의 학교에 입학합시다 고후1:3-9 서론:성경에 고난이 기록된 구절이 107개나 된다. 고난은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격게 되는 인생의 필수과목이다. 우리는 고난이 나에게만 있는 것 같고, 나에게 더 특별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시편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90:10)’고 했다. 유사이래로 오늘날처럼 편리한 세상은 드물거다. 그렇다고 고난이 사라지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모양과 질만 달라졌지 동일한 고난이 여전히 있다. 옛날에는 못먹어서 고난이었지만, 요즘은 있어도 못먹는 고난이 심하다. 옛날에는 힘쓰면서 돈을 벌었지만, 요즘은 힘쓰면서 돈을 내야한다. 부러 고난을 당할 필요는 없겠지만, 필요한 고난을 거부하지 말자.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그 유익을 잘 알자. 우리는 모두 고난의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고난을 배워야 한다. 고난을 모르면 않된다. 본론: 1.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합시다.(5) 우리 예수님은 고난의 선생님이시다. 고난받으러 이 세상에 오셨고, 고난중에 가장 큰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우리도 이렇듯 남을 위한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짧게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당하고 싶지 않는 고난이라고 느낄지 몰라도, 이것만큰 소중하고 유익한 고난도 없다.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 당하는 것의 가치를 크게 여겼다. 고난에도 종류가 있다. 죄가 많아서 당하는 고난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고난이다. 그러나 애매히 당하는 고난, 특히 하나님을 위하는 고난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19-벧전2:21) 이처럼 하나님을 위하는 고난, 교회를 위하는 고난, 이웃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왜냐면 이런 고난은 그 열매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또 우리가 경건한 삶을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고난을 선물로 주신다.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67)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고난이 없을 때에 나는 배우는 것이 없다. 그러나 고난으로 인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다른사람들의 구원사역을 위해서 힘쓰고 애쓰며 고난을 당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모르고 행하고, 잘못 행하였지만, 고난을 당하고 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다. 부모의 품을 떠나 봐야 부모의 소중함을 안다. 사별의 고통을 격어 봐야 배우자의 소중함을 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너무 너무 힘든 고통 중에 죽어간 사람이 있는 가정을 종종 만난다. 그 가정의 고통 앞에 나는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극한 고통을 격은 가정은 무언가 큰 힘이 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미가 있고 많은 사람을 배려하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 앞에 놓여있는 인생은 걱정이 없다. 이런 풍파를 견딘 사람인데 무슨 어려움인들 이겨내지 못하랴 하는 인생에 대한 능숙하고 성숙한 모습이 보인다. 고통을 격어보지 않는 사람은 보편적으로 이기적이다. 자기만 알고 공주병적 기질이 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기분에 민감하다. 고난을 격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분에 민감하다. 고통을 격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려 한다. 왜? 격어 보았으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2.고난을 견디어 냅시다(6)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고난이라도 고난 그 자체가 즐겁고 좋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도 고난 그 자체를 즐기시는 분은 아니시다. 고난은 엄밀하게 말하면 죄로인해서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많은 세상에 고난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죄가 많은 사람이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고난이지만, 다른 사람의 죄를 내가 대신 당하는 고난도 고난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내가 지은 죄로인한 고난과 다른사람이 지은 죄로인한 고난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죄의 성격상 자신과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이 모든 고난에서 벗어난다. 거기에는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다.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4)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에 대해서 잘 배워야 한다. 고난의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그래서 고난에 대해서 잘 배워서 고난에 대해 능숙한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을 통해서 연단 하신다. 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사48:10) 무작정 고난당하는 자는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는 자는 아직 고난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철부지와 같다. 이런 사람은 고난이 닥칠 때 쉽게 무너진다. 자기가 당하고 있는게 고난일줄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 당하려는 사람이 바로 고난에 대해서 바로 아는 사람이고 고난을 견디고 이기는 사람이다. 고난을 견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고난을 이러 저리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작정 고난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난의 원인도 알고, 고난의 성질도 알고, 내가 얼마나 수고하며 희생해야 하는지도 알고, 내가 견디어 내지 않으면 어떤 불행이 닥치는지도 알고, 내가 견디어 냈을 때 어떤 유익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고난을 이겨낸다. 5년전 강원도 고성에 산불이 났다. 보름 동안 산이 계속 탔는 데 군인들 몇 만명이 달려 들어도 그 불을 못 껐다. 헬리콥터 수십 대가 달려들어도 그 불을 끄지 못하였다. 불길을 잡지 못하고 계속 번져 나갔다. 동리의 집들과 임야등 수 없는 재산 피해가 났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집에서 기르던 짐승들 특히 소들이 수천 마리가 죽었다. 소가 왜 죽었는가? 주인은 소를 다 풀어 주었다. 주인이 데려 가려고 끌었지만 소들이 우리안에 갇혀서 일년 동안 걸어본 경험이 없었다. 밖에 언덕도 있다는 경험이 전혀 없었다. 가는 도중 언덕을 내려가다 다리가 부러지고 하며 다 죽었다. 왜 그런가? 걸어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성도를 이길 세력이 이 세상엔 없다. 성도가 낙심할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못 넘을 장애물은 하나도 없는데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은 너무 유약한 자가 되어서 조그마한 분위기나 날씨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치우치고, 연약해 지는 모습을 볼 때에 참으로 주님께서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말씀이 생각난다. 3.하나님만 의뢰합시다.(9) 누가 고난을 이겨 내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이다. 고난을 견디어 낸다는 것은 인내력 테스트가 아니다. 견딜 수 있는데까지 견디다가 한계에 도달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더 이상 못참겠다고 뛰쳐 나가는 것이 아니다. 고난은 그렇게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난은 하나님만 의뢰할 때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이다. 견딜 수 없는 고난이 성도에겐 없다. 성도는 고난에 능숙하다. 그래야 성도이다. 왜 성도들이 고난에 허덕이면서 고통스러워 하는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아서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견뎌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고난을 요리해야 한다. 고난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면 않된다. 고난은 요리해서 먹어야 한다. 고등어 한 마리 날걸로 먹으려면 어렵지만, 요리를 해서 먹으면 맛있다. 고난도 그렇다. 그냥 견디려면 어렵지만, 요령을 알면 쉽다. 이 요령이 무엇인가? 성도는 특별한 무슨 능력이나 요령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어려운 문제와 예수 그리스도를 접목시키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줄로 믿는다. 나는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승리 할 수 있다. 누구 때문인가? 주님 때문이다. 어떠한 고난과 역 경 속에서도 함께 하시고,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일어설 것이고, 바울 이 말한 대로 승리할 줄 믿는다. 왜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는가? 내가 하나님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방법을 배울 수 없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배울 때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 고난을 이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사랑하는 방법이다. 사랑이 가장 큰 방법이다. 아무리 큰 고난도 사랑하면 너끈히 견딘다. 사랑하기 때문에 대신 고통 당하고, 같이 있어줄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빅톨 위고가 쓴 ’레 미 제라블’이란 소설이 있는데 주인공이 장발쟝입니다. 장발쟝은 배고픈 조카 때문에 빵을 훔치다가 걸려서 감옥에 들어가서 네 번 탈출하려 했으 나 실패하고 15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석방되었으나 아무도 사람 대접을 하지 않고 전과자라 하고 욕 하고 그러다 먹을 것이 없어서 또 도적질하려 할 때에 신부님 댁에 가서 대접을 받고 나오면서 은촛대를 갖고 나오다가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그래서 경찰들이 신부에게로 그를 데리고 가서 물건을 보이며 ”이 촛대 신부님 댁 것이지요?” 하니 신부가 대답하기를 ”아니 그것은 내가 준 것입니다. 내가 은그릇까지 모두 주었는데 왜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하였습니다. 장발쟝이 거기에 서 마음이 돌아서서 ’아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그 분에게 주신 위로를 이 분에게 베푼 거예요. 이 분의 마음이 변화를 받는 거예요. 그리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사업을 하고 나중에 시장까지 되고 잘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장발쟝은 사랑에서 변화받았다. 사랑이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고 이해하게 한다. 세계적인 큰 인물이 고난을 겪 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마지막 잎새를 쓴 오 헨리도 감옥에서 옥살 이를 하면서 글을 썼고 유명한 작품 을 낼 수 있었습니다. 루즈벨트는 39살까지 소아마비로 걷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을 네번이나 역임 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슈베르트는 31살까지 피아노도 없었어요. 유치원 때부터 피아노 사준다고 음악가 되는 것이 아니예요. 남의 집에 가서 피아노를 배우면서 역경을 잘 넘어설 줄 아는 분이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행복의 조건이 이렇게 많은데도 실질적인 행복을 누리지 있으며 성공할 수 있는 많은 조건을 가져다 놓고도 불평불만을 많이 합니다.
광야대학을 졸업하는 방법/ 신32:10-12/ 2003-03-21
광야대학을 졸업하는 방법 신32:10-12 지난 주간에 걸쳐 연속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모세는 40년간 왕자로서 최상의 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최고의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교육 방법이 필요하셨던 같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 줄 아세요? 광야 교육입니다. 참으로 독특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려 시면 광야 카페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 시고 호위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그렇습니다. 바로 광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임을 알려 줍니다. 그렇다면 광야는 무엇입니까? 들판입니까? 황무지입니까? 먼저 광야의 본질적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입니다. 그런데 본 어간은 디바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디바르의 뜻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말씀, 말하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결국 광야라는 말은 \\\'말씀 안에서\\\' 라는 말입니다. 광야는 말씀을 만나는 것으로 히브리인들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말씀하십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처럼 이야기했을까? 간단합니다. 광야대학을 다니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죠. 우리는 가진 것이 많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긴 모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잘못된 것은 하나님께 돈을 벌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것은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돈이 있을 때가 죄로 빠지기 쉽거든요. 여러분들은 돈을 쓰기 위한 기도를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왜요? 한 부자가 있었는데 매일 창고 지을 생각만 했다. 즉 간단합니다. 광야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창고만 짓죠? 그런데 거지 나사로를 보십시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거지입니다. 왜 천국에 갈 수 있었습니까? 비유를 통해서는 어떤 이유도 안나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사로는 삶의 광야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광야에 있던 것으로도 신앙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광야에 있으면 믿음이 좋아집니까? 고난을 당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난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즉 광야는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도서관에 가면 공부를 집중할 수 있어요. 운동을 하려면 헬스 장에 가야 합니다. 집에 러닝머신이 있어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려면 교회에 와야 집중을 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자신의 영성을 집중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직접적인 하나님만을 체험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갖았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내게 고난이 없으면 은혜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빠지게 되면 얼마나 은혜가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개인적으로는 광야에서 무엇을 배우게 될까요? 실제적으로 모세는 왕자로서 40년을 훈련받았으면 되었지, 광야에서 40년을 무슨 훈련을 받 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을 받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찰스 스윈돌이라는 사람은 모세가 광야에서 네 개의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1)무명에 대한 박사입니다. 광야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부탁 할 일도 없는 곳입니다. 단지 사막의 들짐승과 양떼만이 친구였습니다. 우리가 수술하러 들어 갈 때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을 때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 모세는 광야에서 자기 존재를 알은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즉 무명박사입니다. 2)시간에 대한 박사입니다. 이스라엘을 가보신 분을 아시겠지만 한나절이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갈 수 있는 거리입니 다. 아마 당시로 보면 보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 하면서 3일만에 불평하고 짜증을 냈습니다.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기다리는 것을 배웠습니다. 3)외로움에 대한 박사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에 가면 자기 혼자 밖에 없습니다.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한번은 제가 훈련을 하러 갔는데 5일 동안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나중에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자기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많으면 자기를 알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광야로 여러분을 내 모셨겠습니까? 고독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혼을 보라는 것입니다. 4) 불편에 대한 박사입니다. 광야의 생활은 \\\'불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광야에 나온다면 실제적인 문제가 부딪치게 됩니다. 화장실문제, 먹는 문제? 자는 문제 등 의식주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불편하게 됩니다. 불편을 감사로 받아들이면 참으로 광야에서 훈련을 잘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능력 있게 행한 사람입니다. 빌4:12-13\\\"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 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백한 것입니다. 광야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은 바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의 이해와 더불어 광야로 인도하시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잡초근성입니다. 광야에서 훈련을 받아 광야 박사가 되게 한 것은 잡초근성을 회복하기 원한 것입니다. 믿음 생활 이건 사회 생활이건 이대로가 좋사오니 하면 마귀에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잡초 근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운동경기를 직접 경기장에서 보신 적이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아니! 축구경기를 텔레비전에서 보면 오죽 좋아? 누워 보면 되지, 사람들도 없지, 게다가 해설도 해주지,\\\" 이런 분들은 이해 못합니다. 그러나 직접 가서 보는 것은 180도로 다릅니다. 말로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게다가 직접 운동을 해보면 그냥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함이 있습니다. 경쟁이 있고, 몸싸움이 있습니다.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잡초 근성을 원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광야로 내모신 것입니다. 온실 속의 모세가 광야 속에 잡초근성을 지닌 모세로 바뀝니다. 결국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광야에 있으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종이를 찢는 버릇이 있습니다. 항상 불안해하면서 주보도 찢고 책도 찢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하게 됩니다. 내담자 중심 상담법, 정신분석학, 내적치유, 상관관계 방법 등을 활용합니다. 그러나 차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러자 잡초근성으로 자란 목사님! 하시는 말씀 \\\"종이 찢지마!\\\"라고 말하자 그후부터 종이를 찢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인생은 단순합니다. 단순한 곳 그곳이 광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생활은 힘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사람이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핑계를 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생활이 더욱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신학교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제가 들어갈 때도 쉽지 않았습니다. 8수하여 들어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때 제가 한 기도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건방진 기도였는지.... \\\"하나님! 합격 안 시키시면 저는 목사 안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합격 시켰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잘 못되었는지 모든 수험생들이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피곤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설득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힘들어 집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설득 당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철저하게 도구로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조언을 구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평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 하는데 있어서 주인공은 모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도구로 쓰임 받은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되묻지요? 출3:11을 보세요.\\\"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 까?\\\" 모세는 몰랐습니다. 자기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힘이들지요. 내가 전도할 수 있다고요? 기도할 수 있다고요? 돈을 벌 수 있다고요? 공부 할 수 있다고 요?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요? 천만예요, 어렵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은혜를 경험한 많은 청소년기의 학생들이 선교사를 자원합니다. 그런데 선교사!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도 잘해야 합니다. 성격도 좋아야 합니다.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건강해야 합니다. 선교사를 나가려다 탈락한 분들이 많습니다. 저희교단 목사님들 중 4500분이 무임으로 쉬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성령이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마귀는 항상 나를 주목하게 만듭니다. 무엇을 요? 나의 약함, 한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 니가 그 모양인데 전도를 한다고? 어쭈! 말씀도 모르면서 산다고?\\\" 그렇게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그래서 정신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보십니까? 우리의 가능성! 가능성을 봅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구임을 알게 하십니다. 고후 4:7을 보십시오,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있 고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 떠나야 합니다. 모세가 왕자로만 또는 광야에만 살았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떠나는 것입니다.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떠날 때 그리고 확신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구정입니다. 제사를 드릴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확실히 떠났는가? 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가족, 친지, 배를 떠났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잘 떠나야 합니다. 왜 떠남이 필요한 줄 아십니까? 그것은 떠남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확신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본인이 원하지 않았지만 로마로 가야 한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3:11을 보면 \\\'네가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 다. 왜 바울이 그렇게 능력이 있었겠습니까? 바로 로마에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는 확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확신을 가지십시오, 믿음은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 주셨다는 확신! 이 확신보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무엇입니까? 확신을 작게 만듭니다. 그리고 어려움은 크게 보이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넘어야 할 고비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부딪친 사건은 바로의 저항과 유대인들 의 원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해서 간 것인데 어려움과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여전히 고난은 있을 것입니다. 광야학교를 졸업하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지난주 한 분 집사님에게 평범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한 주간 동안 제 마음에 있었습니다. \\\"정말 고난에 빠져있으면 힘이 들어요\\\" \\\"그래요 저는 힘이 들 때 하나님 사랑해요\\\" 혼자 읊조립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해요.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암초를 만났을 때 암초를 보면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대학에서 바로에게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에게 간절히 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바로를 제거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섯 번에 걸쳐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에 있습니까? 광야에서 해 메고 계십니까? 하나님만이 해결책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광야대학을 졸업하는 방법/ 신32:10-12/ 2003-03-21
광야대학을 졸업하는 방법 신32:10-12 지난 주간에 걸쳐 연속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모세는 40년간 왕자로서 최상의 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최고의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교육 방법이 필요하셨던 같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 줄 아세요? 광야 교육입니다. 참으로 독특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려 시면 광야 카페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 시고 호위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그렇습니다. 바로 광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임을 알려 줍니다. 그렇다면 광야는 무엇입니까? 들판입니까? 황무지입니까? 먼저 광야의 본질적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입니다. 그런데 본 어간은 디바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디바르의 뜻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말씀, 말하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결국 광야라는 말은 ’말씀 안에서’ 라는 말입니다. 광야는 말씀을 만나는 것으로 히브리인들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말씀하십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 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처럼 이야기했을까? 간단합니다. 광야대학을 다니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죠. 우리는 가진 것이 많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긴 모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잘못된 것은 하나님께 돈을 벌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것은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돈이 있을 때가 죄로 빠지기 쉽거든요. 여러분들은 돈을 쓰기 위한 기도를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왜요? 한 부자가 있었는데 매일 창고 지을 생각만 했다. 즉 간단합니다. 광야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창고만 짓죠? 그런데 거지 나사로를 보십시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거지입니다. 왜 천국에 갈 수 있었습니까? 비유를 통해서는 어떤 이유도 안나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사로는 삶의 광야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광야에 있던 것으로도 신앙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광야에 있으면 믿음이 좋아집니까? 고난을 당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난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즉 광야는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도서관에 가면 공부를 집중할 수 있어요. 운동을 하려면 헬스 장에 가야 합니다. 집에 러닝머신이 있어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려면 교회에 와야 집중을 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자신의 영성을 집중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직접적인 하나님만을 체험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갖았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내게 고난이 없으면 은혜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빠지게 되면 얼마나 은혜가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개인적으로는 광야에서 무엇을 배우게 될까요? 실제적으로 모세는 왕자로서 40년을 훈련받았으면 되었지, 광야에서 40년을 무슨 훈련을 받 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을 받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찰스 스윈돌이라는 사람은 모세가 광야에서 네 개의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1)무명에 대한 박사입니다. 광야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부탁 할 일도 없는 곳입니다. 단지 사막의 들짐승과 양떼만이 친구였습니다. 우리가 수술하러 들어 갈 때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을 때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 모세는 광야에서 자기 존재를 알은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즉 무명박사입니다. 2)시간에 대한 박사입니다. 이스라엘을 가보신 분을 아시겠지만 한나절이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갈 수 있는 거리입니 다. 아마 당시로 보면 보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 하면서 3일만에 불평하고 짜증을 냈습니다.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기다리는 것을 배웠습니다. 3)외로움에 대한 박사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에 가면 자기 혼자 밖에 없습니다.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한번은 제가 훈련을 하러 갔는데 5일 동안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나중에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자기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많으면 자기를 알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광야로 여러분을 내 모셨겠습니까? 고독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혼을 보라는 것입니다. 4) 불편에 대한 박사입니다. 광야의 생활은 ’불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광야에 나온다면 실제적인 문제가 부딪치게 됩니다. 화장실문제, 먹는 문제? 자는 문제 등 의식주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불편하게 됩니다. 불편을 감사로 받아들이면 참으로 광야에서 훈련을 잘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능력 있게 행한 사람입니다. 빌4:12-13”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 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백한 것입니다. 광야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은 바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의 이해와 더불어 광야로 인도하시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잡초근성입니다. 광야에서 훈련을 받아 광야 박사가 되게 한 것은 잡초근성을 회복하기 원한 것입니다. 믿음 생활 이건 사회 생활이건 이대로가 좋사오니 하면 마귀에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잡초 근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운동경기를 직접 경기장에서 보신 적이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아니! 축구경기를 텔레비전에서 보면 오죽 좋아? 누워 보면 되지, 사람들도 없지, 게다가 해설도 해주지,” 이런 분들은 이해 못합니다. 그러나 직접 가서 보는 것은 180도로 다릅니다. 말로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게다가 직접 운동을 해보면 그냥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함이 있습니다. 경쟁이 있고, 몸싸움이 있습니다.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잡초 근성을 원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광야로 내모신 것입니다. 온실 속의 모세가 광야 속에 잡초근성을 지닌 모세로 바뀝니다. 결국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광야에 있으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종이를 찢는 버릇이 있습니다. 항상 불안해하면서 주보도 찢고 책도 찢습니다. 그래서 상담을 하게 됩니다. 내담자 중심 상담법, 정신분석학, 내적치유, 상관관계 방법 등을 활용합니다. 그러나 차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러자 잡초근성으로 자란 목사님! 하시는 말씀 ”종이 찢지마!”라고 말하자 그후부터 종이를 찢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인생은 단순합니다. 단순한 곳 그곳이 광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생활은 힘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사람이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에게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핑계를 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생활이 더욱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신학교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제가 들어갈 때도 쉽지 않았습니다. 8수하여 들어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때 제가 한 기도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건방진 기도였는지.... ”하나님! 합격 안 시키시면 저는 목사 안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합격 시켰을까요?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잘 못되었는지 모든 수험생들이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피곤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설득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힘들어 집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설득 당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철저하게 도구로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조언을 구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평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 하는데 있어서 주인공은 모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도구로 쓰임 받은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되묻지요? 출3:11을 보세요.”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 까?” 모세는 몰랐습니다. 자기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힘이들지요. 내가 전도할 수 있다고요? 기도할 수 있다고요? 돈을 벌 수 있다고요? 공부 할 수 있다고 요?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요? 천만예요, 어렵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은혜를 경험한 많은 청소년기의 학생들이 선교사를 자원합니다. 그런데 선교사!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도 잘해야 합니다. 성격도 좋아야 합니다.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건강해야 합니다. 선교사를 나가려다 탈락한 분들이 많습니다. 저희교단 목사님들 중 4500분이 무임으로 쉬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성령이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마귀는 항상 나를 주목하게 만듭니다. 무엇을 요? 나의 약함, 한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 니가 그 모양인데 전도를 한다고? 어쭈! 말씀도 모르면서 산다고?” 그렇게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그래서 정신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보십니까? 우리의 가능성! 가능성을 봅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구임을 알게 하십니다. 고후 4:7을 보십시오,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있 고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 떠나야 합니다. 모세가 왕자로만 또는 광야에만 살았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떠나는 것입니다. 떠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떠날 때 그리고 확신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구정입니다. 제사를 드릴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확실히 떠났는가? 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가족, 친지, 배를 떠났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잘 떠나야 합니다. 왜 떠남이 필요한 줄 아십니까? 그것은 떠남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확신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본인이 원하지 않았지만 로마로 가야 한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3:11을 보면 ’네가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 다. 왜 바울이 그렇게 능력이 있었겠습니까? 바로 로마에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는 확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확신을 가지십시오, 믿음은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 주셨다는 확신! 이 확신보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무엇입니까? 확신을 작게 만듭니다. 그리고 어려움은 크게 보이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넘어야 할 고비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부딪친 사건은 바로의 저항과 유대인들 의 원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해서 간 것인데 어려움과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여전히 고난은 있을 것입니다. 광야학교를 졸업하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지난주 한 분 집사님에게 평범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한 주간 동안 제 마음에 있었습니다. ”정말 고난에 빠져있으면 힘이 들어요” ”그래요 저는 힘이 들 때 하나님 사랑해요” 혼자 읊조립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해요.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암초를 만났을 때 암초를 보면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대학에서 바로에게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에게 간절히 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바로를 제거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섯 번에 걸쳐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에 있습니까? 광야에서 해 메고 계십니까? 하나님만이 해결책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목표를 설정하라(Set the goal of your life in Christ)/ 빌3:11-16/ 김태환 목사/ 미국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한인교회/ 졸업예배설교/ 2002-05-19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목표를 설정하라(Set the goal of your life in Christ) 빌3:11-16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어느 아름다운 날, 한 천사가 천국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 왔습니다. 그는 세상의 아름다운 광경들을 돌아 보며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해질 무렵이 되어서 천사는 금빛 날개를 가다듬으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곧 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 왔던 기념으로 무엇을 가져갈까? 저 꽃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가! 저 꽃들을 가져가야겠다.” 다시 천사는 시골 집을 다니면서 열린 문을 통해 누워 있던 아기의 미소를 보았습니다. ”저 아기의 미소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기의 미소도 가져가야겠다.” 바로 그 때 천사는 아기의 빰에 입을 맞추며 사랑을 쏟아 붓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아! 저 어머니의 사랑이야말로 내가 세상에서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답구나!” 천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가지 보물을 가지고 천국의 진주문으로 날아갔습니다. 그 문을 들어가기 전에 천사는 자기가 가지고 온 것들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꽃들은 보기 싫게 시들어 있었습니다. 아기의 미소는 어느 새 짜증스러운 울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오직 어머니의 사랑만은 그 본래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시들은 꽃과 사라진 아기의 미소를 버리고 진주문을 통과했습니다. 그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보기 위해 천사들 모여 들었습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이것이 지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찬양하는 노래들이 많이 있지만,「어머니의 마음」1 보다 나은 노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 가지 소원/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가지/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우리가 이런 어머니의 사랑,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오늘 졸업하는 분들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중의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니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 성현(聖賢)들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孝道)를 사람의 근본 도리(道理)라고 가르쳤습니다. 공자(孔子)는 사람이 자기 어버이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를 패덕(悖德)이라고 했고, 자기 어버이는 존경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을 패례(悖禮)라고 했습니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이란 말이 있습니다. 효도를 하려 해도 이미 부모가 죽고 없어 효행을 다할 수 없는 슬픔을 뜻하는 말로, 부모가 살아 있을 때 효도하지 않으면 뒤에 한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공자가 자기의 뜻을 펴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날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몹시 슬피 우는 소리가들려왔습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울음 소리를 따라가 보니 고어라는 사람이 그렇게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는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고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저에게는 세가지 한(恨)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부를 한답시고 집을 떠나있다가 고향에 돌아가보니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일이고, 둘째는 저의 경륜(經綸)을 알아 주는 임금을 만나지 못한 것이고, 셋째는,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와 사이가 멀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고어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계속했습니다. “아무리 나무가 조용히 있고 싶어도 불어온 바람이 멎지 않으니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樹欲靜而風不止).2 마찬가지로 자식이 효도를 다하려고 해도 그때까지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子欲養而親不待也).3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는 뵙지 못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저는 이제 이대로 서서 말라 죽으려고 합니다.” 고어의 말이 끝나자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을 명심해 두어라. 훈계로 삼을 만하지 않느냐?” 이날의 충격과 깊은 감동으로 공자의 제자 중에 열세명이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섬겼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4 또 골로새서에서는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Children, obey your parents in everything, for this pleases the Lord.)”5 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과 앞서 말한 공자의 가르침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공자는 효도를 인륜의 근본으로 가르쳤습니다. 사람이라면 마땅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말씀을 잘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사람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한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 새로운 인간 관계를 맺고,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새로운 인간 관계를 맺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을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지 않고 ”주 안에서(in Christ)?부모에게 순종하고,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올바로 형성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주 안에서” 우리의 모든 인간 관계가 달라져야 합니다.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잘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 말씀이 모두 옳기 때문에 순종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 때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주 안에서(In the Lord)”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사람은 이제부터 부모를 부모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하나님으로 알고 공경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요?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모와 관계를 끊고 산다고요?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 사는 것입니다. 이제 졸업하는 여러분에게 말씀 드립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또 박사학위를 받는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의 기쁨과 영광을 먼저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그리고 부모님들에게 돌리십시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얼마나 어려운 고비가 많았습니까? 그 어렵고 힘든 순간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얻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얻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My help comes from the LORD).”6 그리고 또 한군데 더 여러분의 도움이 출처가 있습니다. 바로 부모님의 기도입니다. 오직 자식 잘되기를 위해서, 자식들 건강을 위해서, 공부 잘 하도록 눈물로 기도하신 부모님의 기도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옛 성현들이나 고전에서 보면 최고의 효도는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돈으로, 물질로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것은 아주 저 차원적인 효도이고, 고차원적인 효도는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는 부모에게나 믿지 않는 부모에게나 진정한 효도를 하는 길은 우리 자식들이 바르게 자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부모들에게 여쭤 보십시오. 부모가 정말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 많이 버는 것이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요? 어쩌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가치관이나 지식도 어쩔 수 없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밖에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자식들은 ”우리 부모는 그런 것 밖에 몰라!” 이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본 마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비록 아는 것이 그것 밖에 없고, 표현하는 것이 그것 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자식들이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말 필요한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못하시거나 안하신 것 뿐이지 부모의 마음은 자식들이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빌립보서 말씀에서 졸업하는 여러분들에게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 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동시에 우리 자식들이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진정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에게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푯대을 향하여”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은 ”목표를 향하여(toward a goal)” 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따라 그 목표를 향해서 나가는 사람의 현재의 삶이 결정됩니다. 그 목표가 세속적인 것이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달려가는 사람의 삶이 세속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돈만 아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성공지향적인, 또 권력지향적인 삶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바울은 그의 현재의 삶을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힘껏 달려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에도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쫓아 가노라.” 여기 ”쫓아간다” 는 말은 영어로는 ”press on” 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어떤 목표를 향해서 맹렬하게 마치 100m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dash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길가는 사람이 한 눈 팔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는 뜻입니다. 졸업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는 graducation 이라고 하지요? 이 말의 원래 뜻은 계단(grade) 하나를 올라섰다는 뜻입니다. 등급, 눈금 하나가 올라간 것입니다. 또 졸업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commencement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시작(beginning)이라는 뜻입니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박사 학위를 받아도 끝이 아니라 더 넓은 학문의 세계에 겨우 발을 디뎌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 만족하지 말고 계속해서 성장하십시오. 더 배우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를 어디에다가 어떻게 설정하겠습니까? 바울은 몇가지 서로 다른 표현으로 자기의 인생의 목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12절에 나와 있는대로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 을 얻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인데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나를 자기의 것으로 붙잡으셨겠느냐? 왜 나를 부르셨겠느냐? 내 인생의 목표는 그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둘째는,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the prize of the high calling of God in Christ Jesus)” 을 얻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high calling)” 이라는 표현이 독특합니다. 이 말을 좀 더 쉬운 표현으로 바꾸어 본다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고상한 소명”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귀한 소명”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인생의 목표를 자기나름대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정했습니다. 빌립보서 말씀을 잘 읽어 보십시오. ”지금까지 나는 내 자랑을 하면서 내가 원하고 내가 기뻐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입니다. 내가 이만큼 이방 세계에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했다고 해서 그 목표가 다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해서 달려갈 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위해서 큰 상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바울의 인생의 목표가 자기를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인생의 목표도 그렇게 설정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세상의 것을 주워 담는 똥차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서 정진(精進)하는 고귀한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에 그것을 보여 주십시오. 모두 이기적인 마음으로, 이기적인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사는 삶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이 시대를 본 받지 말고 이 시대와 싸워 이기는 삶도 있다는 신선한 충격을 주십시오. 희망을 상실한 이 시대에 여기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이 얘기를 들으신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얼만 전에 한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홍제동에서 화재가 났는데 6명의 소방관들이 안에 갇힌 사람을 구하러 들어갔다고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모두 희생되었습니다. 그 중에 김기석이라는 소방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사고나기 얼마 전에 자기 후배에게 e-mail 을 보낸 내용이 알려졌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내 한 목숨을 선선하게 던질 수 있다는 것, 나는 이것도 성직(聖職)으로 여긴다네.” 저는 그 사람이 기독교 신자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 적어도 성직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그의 인생의 목표가 성스럽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그의 이 얘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무언(無言)의 메세지을 던져주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경에도 정확하게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7 그렇습니다. 졸업하고 직장을 잡든지, 아니면 더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박사과정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결혼을 하든지,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를 올바로 설정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하여, 내 이웃을 향하여 열려진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정진하십시오. 온 힘을 다하여 달려가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여러분에게 맡겨진 성직으로 받아 들이십시오.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스프링복(Springbok)이라는 산양(山羊)들의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놈들이 처음에는 풀을 뜯으면서 평화롭게 행렬을 이루지만 앞에 있는 놈들이 풀을 뜯어 먹어버리면 뒤에 있는 놈들이 풀을 먼저 차지하려고 앞으로 헤집고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놈들은 뒤에 있는 놈들이 앞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좀 더 속력을 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모든 양 떼가 전 속력으로 달려가게 되고,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달려가다가 모두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무리 속에 들어 있는 한마리의 스프링복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누군가가 그 방향을 바꾸어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누가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어 놓는 사람들이 나와야 이 세상이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니면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라/ 눅10:30-37/ 졸업축하설교/ 2009-02-12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라 눅10:30-37 찬: 253.352.324장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거미같은 인간, 개미같은 인간, 꿀벌같은 인간, 세종류의 사람으로 인간을 구분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니 세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1.있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이는 거미 같은 인간 남의 피를 빨아 먹고사는 강도를 뜻합니다. 이런 자들 때문에 세상은 살벌해지고 살맛을 잃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강도를 만나 가진것 다 빼앗기고 신음하는 피해자같이 신음하는 세상이라 하겠습니다. 2.있으나 마나 한 인간이 있습니다. 이는 개미 같은 인간, 남이야 죽던 말던 자기만 살겠다는 레위인 제사장 같은 자를 뜻합니다. 다 죽어가는 자가 신음하면서 울부짖고 있는데 그 소리를 듣고 그냥 지나친 레위인 제사장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습니다. 이런 무관심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3.꼭 있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꿀벌같은 사람,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강도만나 신음하는 자는 그만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시간 물질, 정성을 투자하여 그 불쌍한 사람을 구원하였습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선한 사마리아 사람 같은 사람이 되어서 이웃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밝게하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계22:13/ 졸업축하예배설교/ 2012-02-27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계22:13 오늘은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한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축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입학과 졸업은 우리 인생의 삶에서 한 매듭, 한 매듭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치 대나무의 한 마디, 한 마디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유치원에 처음 입학을 하여 배움을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등.... 입학과 졸업을 계속하 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상급학교의 진학을 그만두고 좀더 일찍 사 회로 진출하기도 합니다. 내가 각 마디에 해당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배우는 일에 충실했느냐에 따라.... 그 마디가 그만큼 단단하게 될 것입니다. 한 매듭, 한 매듭이.... 한 마디, 한 마디가.... 단단해야 잘 부러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단단한 매듭, 단단한 마디를 가지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사회생활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의 한 매듭, 한 마디가 단단한 만큼.... 여러분의 사회생활은 쉽게 무너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등... 그 여러분의 한 매듭을, 한 마디를 충실하게, 단단하게 하셔야 합 니다. 이 매듭, 매듭이 이어져서.... 여러분의 미래의 삶의 기초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성도들의 믿음이 자 라가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영이 자라가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도 있습니다(롬14:1). 젖을 먹어야 하고, 채소를 먹어 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먹을 수 있고, 어린아이의 일 을 버린 자도 있습니다(고전13:11).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어린아이에서 시작을 하여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이 되 기까지에는(엡4:13) 숱한 매듭과 마디, 마디를 이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 나, 신앙생활의 매듭과 마디, 마디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한 번에 훌쩍 커 버리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믿음 이 자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 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했습니다(마19:30.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오늘 본문에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처음과 나중이요, 또한 시작과 끝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영원하 심과 완전하심을 일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시작에서 끝까지.... 그 가운데 모든 것이 주님께 속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살펴 봄으로....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한 매듭, 한 마디를 굳건히 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나는 알파( )라 본문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나는 알파라\\\".... 이 말씀은 주님이 모든 것의 처음이요, 시작이라는 말씀이다. 창조 세계의 온 우주 만물의 처음이요, 시작이다. 곧 그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요1:3). 창조 세계뿐만 아니라 구속 세계(救贖世界)의 모든 것도 주님이 처음이요, 시작이다. 곧 그에게서 나왔다. 우리의 거듭남도, 구원도, 믿음의, 의로움도.... 모두가 주님에게서 나오고, 주님에게서 시작이 된 것이다. 나에게서 시작된 것은 하나도 없다. 나에게서 시작이 되고, 인간에게서 시작이 되면.... 바로 인간 중심의 \\\"종교\\\"가 되고 만다. 인간 중심의 신앙인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신(神) 곧 \\\"구원자\\\"를 찾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지혜와 판단으로 낙원(樂園)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인간이 \\\"구원자\\\"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가 인간을 찾아오 는 것이다. 인간이 낙원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성 새 예루 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계21:2).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거나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찾아오신 \\\"구주\\\"를 영접하는 것이요, 새 창조의 새 하늘과 새 땅 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곧 알파 되시는 주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알파의 주님이 내 육신 의 시작인 동시에, 내 영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알파 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육신생활도, 나의 영적인 생활 도 시작이 됩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고, 나의 모든 삶을 주께 의뢰하 고,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 활입니다. 2.나는 오메가( )라 본문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나는 오메가라\\\" 이 말씀은 주님이 모든 것의 나중이요, 끝이라는 말씀이다. 창조 세계의 온 우주 만물의 나중이요, 끝이다. 곧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롬11:36). 창조 세계 뿐만 아니라 구속 세계(救贖世界)의 모든 것 도 주님이 나중이요, 끝이다. 곧 그에게서 완성된다는 말씀이다. ①.대속의 오메가 요한복음 19: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이 말씀은.... 바로 대속(代贖)의 오메가를 말씀하시 는 것이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대속의 오메가가 되셨다. (히9:12) ②.심판의 오메가 마태복음 25:31-33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바로 심판의 오메가를 보여 주시는 말씀이다. 이렇게 양과 염소가 분별 이 되고 나면.... 더 이상 양과 염소는 함께 살 수가 없다. 영생과 영벌 로 갈라지게 된다. 처음 하늘 처음 땅에서는 양과 염소가 함께 살았다. 영생에 들어 갈 자도, 영벌에 들어 갈 자도....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았다. 그러나, 새 하 늘 새 땅은 그렇지 않다. 영생하는 자만이 그곳에 들어가 살 수 있다. 벧후 3:12-13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도다/ 그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없어진다는 말씀이 다. 그러므로 양과 염소는 더 이상 함께 같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③.하늘, 땅의 오메가 계시록 21:1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사야 65:17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새 하늘과 새 땅\\\".... 바로 우리 성도들이 소망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말씀한 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알파의 세계는 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오 메가의 세계가 오는 것이다. 바로 하늘, 땅의 오메가가 완성되는 것이 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곧 오메가 되시는 주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오메가의 주님이 내 영의 오메가로 중생의 새 생명을 이루시고, 내 육신의 오메가로 부활체 를 이루시어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오메가 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과 몸이 완전한 구원을 얻어,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 곳에 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히,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오메가의 세 계가 열릴 것입니다(계21:3). 계시록 21: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성도들의 눈에서 다시는 눈물이 없습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습니다. 다 시는 애통이 없습니다. 다시는 곡하는 것과 아픈 것이 없습니다. 이유는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이 좋은 낙원, 새 하늘 새 땅에.... 믿지 않는 자, 우상 숭배자, 들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 곧 지옥입니 다.(계21:8) 벧후 3:11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할까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불타 없어지고, 모 든 일이 다 드러난다고 했습니다(벧후3:10). 우리의 쌓은 공력이 그 불 에 타고 없어지면 큰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곧 반석 위에 터 닦고 집을 짓는 자입니다(마7:24). 나무나, 풀,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그 세운 공력이 불타 없어지고 맙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이 터 위에 세워 공력이 불타 없어지 지 않는 믿음의 집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3.나는 알파( )와 오메가( )라 본문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알파( )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자이고, 오메가( )는 끝 자이다. 그래서,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 된다. ①.영원성 시간적으로 보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가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 곧 영원에서 내다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 다. 언제나 현재일 뿐이다. 그래서, 진리를 나타내는 때에는 현재를 사 용한다. 예를 들어 설명을 하자면.... 둥근 원 위의 한 점과 같다. 시계 방향으로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결국은 제 자리로 돌아온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개념은 이들이 결 코 서로 만날 수 없는 일직선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시간 개념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는 창조 세계의 시간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다. 시작과 끝이 하나가 되어 버린 영원한 시간 곧 현재일 뿐이다. 뿐만 아 니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②.완전성 알파에서 시작을 하여 오메가에 이르러 끝이 될 때.... 하던 일이 완성 이 된다. 알파에서 시작한 일이 오메가에 이르기 전까지는 완성이란 있 을 수 없다. 곧 완전한 것이 못된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시작과 끝이 동시에 존재함으로 언제나.... 완성된 상태가 된다. 미완성 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언제나 완전한 상태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그 알파와 오메가의 주님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알파에서 시작한 구원이 오메가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멈추어 버리는 불완전한 미완 성의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 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 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이 말씀은.... 자주 말씀 드립니다만.... \\\"믿음의 시작자이요, 완성자이신 예수\\\"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믿음의 시작자가 예수이요, 나의 믿음의 완 성자가 예수라는 말씀입니다. 빌립보 1: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내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한 이가.... 내가 아닙니다. 따로 있습니다. 그 착 한 일을 내 속에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룬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건축자/ 마7:24-28/ 졸업축하예배설교/ 2010-02-23
두 사람의 건축자 마7:24-28 오늘은 우리 교회가 졸업하는 학생들을 축하하며 드리는 졸업 축하예배입니다. 축복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고로 우선, 먼저 졸업생 여러분의 머리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일생동안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에서 봉독해드린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 설교 가운데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여기 두 사람의 건축자에 대한 비유는 학자가 서재에서 생각해낸 것도 아니고 멀리서 끌어온 설명도 아니며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보고 느낄 수 있는 사실을 소재로 하여 주신 보배로운 교훈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두 사람의 건축자를 비교하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 복된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설교는 지식적으로 머리에서 깨달아 알고, 감정적으로 가슴 속에서 크게 감동을 받아 의지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될 때에야 잘한 설교요, 바로 들은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은혜로운 사람 같으며,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아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올 때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사람은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나 모래 위에 세운 사람의 집은 그 무너짐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두 사람에게는 서로 닮은 공통점과 서로 다른 상이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두 사람이 서로 같은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반석 위에다 집을 짓든지, 혹은 모래 위에다 집을 짓든지 두 사람은 다같이 집을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위에 보내심을 받은 인간은 누구나 집을 짓는 건축자와 같은 것입니다. 사실상 졸업생 여러분들은 집을 지을 기초를 닦는 사람들이요, 집을 지을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어른들은 지금 제각기 집을 짓고 있는 시공자들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건축자에 대한 비유가 본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절 이하에서는 집을 짓는 자의 공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으며 구약 성경 에스겔 3장 10절 이하에는 사람들이 담을 쌓을 때, 기초는 무시하고 외부에다가 회칠만 하고 있음에 대하여 지적하고 계십니다. 옳습니다. 인간의 삶이 집을짓고 있는 건축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집을 잘 짓든지 아니면 수년 전에 무너진 삼풍백화점처럼 잘못 짓든지 말입니다. 비유의 말씀을 풀어 말하자면 두 사람이 다같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함께 들었습니다. 교회에도 함께 나왔습니다. 말씀을 듣는데 귀를 기울이였으며 둘 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도 하였습니다. 누렇게 빛이 난다고 해서 다 金은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참 교인은 아닌 것입니다. 여기 졸업생 여러분들이 한 자리에 같이 앉아 있습니다. 같은 시간에 함께 설교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집을 반석위에 짓는 사람같이 듣고 행하는 자기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모래 위에 세우는 사람처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도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다같이 다니고 있으나 행하는 것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2.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세운 집터의 기초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세웠고 다른 한사람은 모래 위에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마태복음에는 단순하게 반석 위에 지었다고 되어 있으나 누가복음 6장 48절에 가보면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모래 위에 세우고 있음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은 모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집을 잘 지을 수 있는 참 터전이며(고전 3:11), 우리들의 삶을 마음 놓고 세울 수 있는 견고하고 완전한 반석이 되십니다(고전 10:4). 우리들은 오직 반석과 같인 강하고 부동적인 그리스도 위에만 설계한 소망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기초공사는 맨먼저 하는 일이며 가장 잘하어야 할 중대 공사입니다. 누구든지 생의 시작을 그리스도로부터 하지 아니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고 하는 생활인 동시에 아무리 고르게 각을 세워도 기초가 잘못되면 붕괴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아닌 곳에 삶을 세우고 자랑한다면 어제인가는 무너짐이 심한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기초 공사란 분명히 숨겨져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들의 신앙 생활은 어디까지나 내적인 것이요, 정신적인 부분이며 심적인 영역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기초로하고 살아가는 삶은 외부에 대한 치중이 아니요, 회칠을 하는 표면적 채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집의 벽에 금이 가고 집에 기울어지는 위험은 기초 공사가 잘못된 데서 오는 직접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금이 가고 위험스럽게 기울어져 가고 있음은 분명히 그 사람의 삶이 반석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지 않는 까닭인 것입니다. 두 사람의 건축자에게 있어서 무서운 차이점은 보이지 않는 ”기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철학도 흔들리는 기초이며, 과학도 불완전한 기초이며,돈도 믿을 수없는 기초인 것입니다. 이 땅위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는 우리의삶을 마음놓고 세울만한 반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으며 천하의 다른 이의 이름으로서는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행 4:11-12). 그리스도는 확고하고 유일한 반석이 되십니다. 우리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고 지어야 할 것입니다. 깊이 판다고 하는 말은 곧 철저한 회개를 뜻하는 것입니다. 죄를 경하게 취급하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치 땅을 파지 않고 주초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과도 같은 것입니다. 집을 잘 지으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큰 빌딩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일 수록 지하로 깊이 파고 공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이 되어 의인을 흔드는 사단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철저한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 안에 바로 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좋은 기초가 마련된 곳에서는 외부의 시련은 별로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 안에 세움 받은 건전한 그리스도인은 불의와 불신이나 유혹과 이단 사상같은 강물 속에 들어가도 그 물속에 빠져 있을 수는 있으나 그것들을 자기의 내적 본질 속으로 받아들이도 아니하며 넘어지지도 아니하게 됩니다. 그러나 건전치 못한 신자는 스폰지와 같아서 세속의 물결들을 신속하게 빨아들이게 되며 밀려오는 물결에 보잘것없이 넘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2)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 결과가 달랐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무너짐이 심하나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무너지지 아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세움이 달랐으니 물론 결과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잠언에는 ”회리 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가 같으니라”(잠 10:25) 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가 매우 많이 계속적으로 쏟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반석 위에 집을 굳건히 잘지은 사람은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집안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수도 있으며 창 밖에서 세찬 비바람이 부딪혀와도 이렇게 좋은 집을 갖게 된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며 감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창수가 나도 반석 위에 세운 집은 요동함이 없음으로 불안함이 없이 먹고 자고 살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오는 천재지변이나 세상에서 몰려오는 시험의 물결이 아무리 흉용하여도 소망의 지붕을 견고하게 덮고 믿음의 창문을 잘 닫고 사랑의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가 내 생명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이까? 악한 자들이 나의 원수가 되고 대적이 되어 내 살을 먹으려고 달려들다가 실족하여 엎드러지리이다. 군대가 진을 치고 달려 들어도 내 마음은 두려워 하지 아니하며 난리가 나서 나를 몰아쳐도 내 마음이 든든하리로다. 고난이 임할 때에 나를 당신의 초막 속에 숨기시고 나를 들어 반석 위에 세우시리도 (시 27편). 세상의 모든 것을 흔들고 옮기어버릴 수 있는 무서운 종말이 올 때에도 지혜로운 건축자의 소망은 요동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하는 내용의 성경에는 ”그리고”(Kzj)라는 접속사가 4회나 거듭 나타나서 아주 숨가쁜 연속적인 연타의 시험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련은 참된 신앙을 가진 자나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나 구별 없이 임하게 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한 밭에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참 신자와 거짓 신자는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건축자와 같은 참 성도 앞에서는 병들게 되고 노쇠하게 되며, 가정에 어려운 일을 만나고, 가족 중에 먼저 사별하여 이 세상을 떠나가는 자가 생기고, 박해, 조롱, 중상, 모략, 사업의 실패로 인한 가난이 몰아 닥쳐와도 이 모든 것들이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건축자가 그 집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그 집이 자신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기를 기대할 때 태풍과 창수에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때에는 다시 또 다른 집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은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수치와 손해와 실망만이 그의 것으로 안겨질 뿐입니다. 지식은 행동화되지 아니하면 무용합니다. 이론은 실천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은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일치해야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실천을 동반하지 아니하고 고백으로 그칠 때 허위의 신앙이며 이와 같은 신앙은 유사시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산상 설교는 무너짐이 심한 무서운 경고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영국의 성서학자 윌리암 바클레이 씨는 예수께 대한 복종이 곧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생활이라고 하면서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국 해군에서 있었던 일인데 거센 바다에서 대형의 배를 끌고 가는 소형 증기선이 있었는데 두 배는 쇠밧줄로 매어 있었습니다. 갑자기 선장은 선원들을 향하여 ”엎드려”하고 명령을 하였으며 선원들은 기계와 같이 날쌔게 엎드렸습니다. 그순간 배를 끄는 쇠밧줄이 끊어지면서 발광하는 쇠뱀처럼 내려쳤습니다. 그때에 얻어 맞았다면 어느 누구라도 여지없이 즉사를 하였을 것이나 전 승무원이 복종하였으며 아무도 상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왜 엎드라고 하느냐고 이유를 물으려고 서 있었다면 이미 죽은 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종은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요구하는 복종은 바로 이러한 복종입니다. 예수께 대한 복종만 이 새 영을 얻는데 유일한 기반이 됩니다. 어떠한 푹풍이 몰아쳐 와도 그에 대한 복종에 근거하고 있는 삶은 안전하리라는 것이 주님의 약속이요, 성경의 보장입니다. 할렐루야!
목표에 이르도록/ 빌3:12-14/ 입학설교/ 2011-02-15
목표에 이르도록 빌3:12-14 찬:394.397.401장 산다는 것은 목표를 향한 달음질을 의미하며, 학교에 입학한 것도 그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목 표에 이르도록 경주를 잘해야 한다. 1, 출발을 잘해01한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과 지혜를 가졌다 해도 출발할 때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그는 인생의 실괘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공이라는 목표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출발을 잘하도록 해야 한다. 성공의 길과 실패의 길이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나중에는 엄청난 간격으로 벌어지는 법이다. 2, 인내와 지구77이 필요하다. 공부를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공장에서 일을 하든지 힘이 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인내와 지구력이 요구된다. 충분히 목적지에 도달할 만한 요건들을 구비한 사람일지라도 이것이 얼으면 실패하고 만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자세를 몸에 익히도록 힘써야 하겠다. 3, 그리스도의 모덛을 따라야 한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닮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성도들이 본받고 딜아야 할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닳되 철저하게 길아지도록 힘싸야 하겠다. 인격을 닳고. 성품을 닳고. 생촬을 본받아서 우리가 처한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내게 될 때 주께 영광이 된다.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인생의 한 과정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아름답게 시작하자.
목표에 이르도록/ 빌3:12-14/ 입학식축하심방예배/ 2008-02-23
목표에 이르도록 빌3:12-14 394.397.401 산다는 것은 목표를 향한 달음질을 의미하며, 학교에 입학한 것도 그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목 표에 이르도록 경주를 잘해야 한다. 1, 출발을 잘해야 한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과 지혜를 가졌다 해도 출발할 때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그는 인생의 실괘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공이라는 목표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출발을 잘하도록 해야 한다. 성공의 길과 실패의 길이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나중에는 엄청난 간격으로 벌어지는 법이다. 2, 인내와 지구77이 필요하다. 공부를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공장에서 일을 하든지 힘이 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인내와 지구력이 요구된다. 충분히 목적지에 도달할 만한 요건들을 구비한 사람일지라도 이것이 얼으면 실패하고 만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며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자세를 몸에 익히도록 힘써야 하겠다. 3, 그리스도의 모덛을 따라야 한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닮고자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성도들이 본받고 딜아야 할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닳되 철저하게 길아지도록 힘싸야 하겠다. 인격을 닳고. 성품을 닳고. 생촬을 본받아서 우리가 처한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내게 될 때 주께 영광이 된다.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인생의 한 과정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아름답게 시작하자.
물고기 신학교 졸업/ 욘1:17-욘2:3/ 2007-02-24
물고기 신학교 졸업 욘1:17-욘2:3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아주 베스트셀러가 계속 서점을 잘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패하는 사람이 늘 실패하게 되는 것은 실패하는 습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같은 태도와 행동을 가지고는 그 습관을 다시 말하면 바꾸지 아니하고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별 수가 없을 것이라 그랬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 그랬습니다. 나가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고 삶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을 바꾸어야 하고 그런즉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짜놓은 습관의 그물망에 걸려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주 이런 유명한 말을 하나 남겼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과거와 다르게 보면 어떤 일을 사건을 또 사물을 과거와 다른 시각으로 보기만 해도 변화는 즉시 발생할 수 있다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공은 어떤 성공하는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원칙을 알고 그 원칙을 행하고 또 마치 자연의 법칙에 있어서 자연이 잘 순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 성공하는 습관의 원칙을 이루기만 하면 우리도 거기에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그랬습니다. 오늘 저는 요나서를 읽으면서 이러한 자세의 문제를 생각하고 행복도 습관이고 훈련이고 또 생각이라는 그런 점에서 우리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자세와 또 생각을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왜냐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 진리는 시간이나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모든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근본 원리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만나시거나 선택해놓으시고는 그 사람을 인도해 가는 그 원리가 요나 시대에나 오늘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각자 사람에 따라 나타나는 형태나 모양은 또 다르겠지만은 근본 원리는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가 만난 하나님 또 요나에게 임하였던 그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가 서야 할 자리 우리가 가야 할 길 우리가 무엇을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떤 지침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서 그 말씀 자체가 살았다 그랬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의 아멘으로 깊이 영접하고 또 깊이 아멘 하면 그 말씀이 살았다 그랬습니다. 말씀이 살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서 그 말씀을 책임지신다는 뜻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 앞에 겸손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바꾸려고 애를 씁니다. 또 그리고 하나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 그랬습니다. 다이내믹한 어떤 역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받는 내 심령이 내가 연약해서 할 수 없지만은 이 말씀이 들어가면 나도 할 수 없는 것 내가 약해서 또 의지가 부족해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신다. 왜요? 우리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줄 믿으시고 오늘도 주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며 또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권고하시는 이 사랑의 메시지를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누군가로부터 오는 사랑과 관심과 격려가 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여기까지 이르러 살고 있습니다. 만약에 내 주변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내게 대하여 어떤 기대와 믿음을 가진 사람도 없고 나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도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아마 굉장히 불행하거나 아마 죽음을 자주 생각하지 아니할까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 오늘 우리 이 땅에 한시간의 수많은 38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끊어 가는 이 불행한 시대에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그 사랑과 격려와 기대와 믿음을 받아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저장소요 하나님의 영적인 발전소와 내가 연합이 되어 있을 때 곧 그 연합해 있는 줄은 전깃줄은 그 밧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주시고 그 아들과 더불어 다른 모든 것을 주시마 약속하신 하나님의 그 신실한 약속 안에 우리가 연합이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하고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영적인 자산이 내 것이 될 수 있고 내가 구하면 내게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대학생 두 커플이 연애를 했습니다. 그런데 총각 둘이서 거의 동시에 입대를 했습니다. 서로 약속을 하면서 우리 사랑이 변치 말자. 혹시 내가 군대 가더라도 편지를 못하고 어렵더라도 아가씨보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마라고 손가락을 걸고 그렇게 약속을 했답니다. 그런데 석달이 못 되어서 한 아가씨는 그만 마음이 변해 가지고 다른 대학생하고 데이트를 하고 편지도 안 쓰고 그렇게 되버렸어요. 그런데 한 자매는 갈수록 더 군대 가있는 총각을 그리워하고 그래요. 이유를 알아본즉 군대 가면은 한달 동안은 아무 편지를 못 쓰게 만듭니다. 전혀 이제 단절시키면서 군대 정신을 넣기 위해서 이제 다 단절을 하는데 그 한달 동안에 편지가 없어요. 그리고 또 강한 또 그런 포병훈련이라든지 또 강한 훈련을 하면은 편지 쓸 사이가 없습니다. 너무 바쁘고 너무 힘들어 가지고 이렇게 한 서너달 동안 편지를 제대로 못 썼어요. 그러니까 이 아가씨는 점점점 마음이 끈이 느슨해져서 그만 다른 총각으로 마음을 돌리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버렸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럼 이 한 처녀는 한 자매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마음이 달아오르느냐? 전혀 그 총각 군대가 청년은 편지 쓸 사이도 없고 그랬는데 누가 어떻게 했느냐? 그 총각의 어머니가 혹시라도 이 딸 마음 변하면 우리 아들 군대에서 탈영할까봐. 그래가지고 이 아들의 이름으로 이 어머니가 연애편지를 써주는 거예요. 이틀에 한번 삼일에 한번. 물론 늘 똑같은 말 비슷한 말이지만은 나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다고. 그리고 이 끈 때문에 이 나중 아가씨는 계속 마음에 사랑이 공급이 되가지고 다른 총각이 곁눈질을 해도 싸늘하게 자를 수가 있었고 여러 가지 그런 어려움을 이기고 나갈 수 있었다 그래요. 결국은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에서 넘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우리가 낙심하고 세상으로 방향을 돌리는 우리의 연약함도 결국은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지 못함이라 생각을 하시고 만약 오늘 여러분들이 나오지 못했다면 눈 때문에 빠지고 다음에 무슨 결혼식 때문에 빠지고. 우리 하나님의 사랑 물고기 뱃속에 있을찌라도 거기서 망하지 아니하고 거기서 죽지 아니하고 거기서 소화되어서 뒤로 배설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입으로 다시 토하여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이 메시지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심령에 와 닿을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날마다 또 주일마다 시간마다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이어져 가는 성도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향하여 어떤 시험 핍박이 오더라도 진실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달려갈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이어지지 아니한다면 마치 전선이 끊어진 것처럼 공급에 수도가 끊어진 것처럼 그 심령은 메말라질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메마른 곳에 결코 거기에 어떤 행복이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평강과 행복이 오늘 이 아침 꼭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능력으로 우리 심령에 하나님 사랑을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 사랑이 결코 변하지 않음을 확실히 믿습니다. 오늘 요나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선지자였지만은 그는 아직도 영을 쫓아 사는 성도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지적하고 구분하였던 것처럼 너희가 아직도 영에 속하지 아니하고 육신에 속한 자로다. 이는 너희 중에 시기와 분쟁이 있음으로 인하여 그랬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의지의 지배를 따라 삽니다. 내주 하신 성령을 쫓아 살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육신에 속한 자라 성경은 말하는 것처럼 오늘 이 요나는 사명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변화되지 못하였습니다 . 개조가 필요하고 변화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뜻보다 자기의 뜻을 먼저 앞세웠던 것입니다. 니느웨 도성은 저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에 그 나라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입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느낀 감정에 반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명령받았을 때에 돌아서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귀한 비둘기라고 하는 자기 이름에 합당한 복음의 희망을 선포하고 해야 할 그가 사명을 버렸던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쳤던 것이지요. 때로는 모든 일을 자기 기준으로 해서 교묘하게 합리화를 하려고 합니다. 도망치는 그 길 항구에 도착하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습니다. 잘 됐다. 이 배를 타고 가라는 또 하나님의 제2의 기회가 아닌가? 또 배를 타고 보니까 배 밑창이 고요합니다. 여기서 잠자라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편한 대로 자기 중심적으로 육신의 사람은 늘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온 뱃사람들이 풍랑 때문에 아우성을 지르고 자기의 신들을 부르고 살기를 위하여 몸부림 칠 때 그는 깊은 영적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육신에 속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냥 쓰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귀한 일에 사용하기 편하시기 위하여서는 준비하는 학교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고기 신학교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그 물고기 신학교에서 새로운 관점을 배워야만 했던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스티븐 코비 박사가 말씀한 대로라면 따라서 우리가 이 상황을 변화시키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지 아니하면 우리는 스스로 짜놓은 습관의 그물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생각하고 내가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지만은 그 프로그램은 성공할 수 없는 승리할 수 없는 행복할 수 없는 그런 습관의 프로그램에 짜여서 내가 가고 있다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과거와 다른 눈으로 보기만 하면 어제와 다르게 사물과 현재와 사람을 보기만 하면 변화는 즉시 일어날 수 있다 그랬습니다. 이런 자기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 하지 못한 요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물고기 신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으며 또 어떤 역사를 이루었는가 하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왜냐 하니까 이 물고기는 지중해 연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요나를 흔들고 요나를 집어삼켰던 거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현대에도 내 삶의 현장에도 여러 가지 많은 큰 물고기들이 나를 삼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던져 넣을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고기가 있습니까? 물질의 물고기가 있습니다. 정말 돈이 떨어질 때는 그렇게 초라하게 돈이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호주머니에 동전 하나 없습니다. 아이들의 버스 차비를 줄 수 없을 정도로까지 그렇게 되어 있다면 그분은 물고기 뱃속에 지금 들어있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의 물고기에 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박수를 치고 싶어도 손에 힘이 없어 못합니다. 찬송을 크게 부르고 싶어도 목에 소리가 나지 않아 힘이 다 빠져버립니다 . 일어나서 주의 전에 오르고 싶어도 허리가 말을 듣지 못해서 일어날 수 없는 이런 건강의 물고기에 잡혀서 탄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자녀들로 인하여 때로는 아내와 남편으로 인하여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모로 인하여 날마다 시달리는가 하면 때로는 자존심과 명예가 다 땅바닥에 떨어져버리고 초라한 모습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그런 명예의 물고기 뱃속에 잡혀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밖에도 여러 많은 모양과 종류를 따라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물고기들이 우리 주변에 배회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서 던져 넣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학교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가 말씀했습니다. 오늘 이 풍랑을 만난 것은 내 탓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져 달라는 자기 고백. 자기가 그 범죄함이요 자기의 부족이요 자기의 연약함이요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깨어지지 못했고 또 많이 기도하지 못해서 우리 하나님이여 내 탓입니다 라는 이 고백을 들어야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이 신학교도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인생의 책임이 있고 자기에게 하나님이 책임을 묻고 있다는 그 자기가 부서지는 이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신학교에 합격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면 어떨까요? 이 신학교에 입학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들어갔다 나오신 분들 또 그리고 지금도 그런 자리에 힘들게 몸부림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경험에 의하면 첫째 답답합니다. 그리고 막막합니다. 그리고 캄캄합니다. 답답 캄캄 막막. 거의 다 비슷한 단어들이지만은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냥 터질 것 같습니다. 뭔가 미칠 것 같습니다. 뒤집어질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들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혹시라도 이런 분들이 있다면 또 그런 기회를 만날 때 이 물고기 뱃속에서 탈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뛰어나오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환경적으로 그렇게 물고기 뱃속에 있지는 아니할찌라도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심리적으로 이렇게 시달리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결박도 자유케 하시기를 원하는 줄 믿으시고 이 아침 뛰어나오시기를 바랍니다. 토하여내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입니까? 별로 나오고 싶지 않으신 모양인데 그런데 얼굴 표정은 보니까 지금 고래 속에서 한 삼일쯤 지나신 분들처럼 보일 때도 있고 오느라고 힘들어서 그렇습니까? 주님 안에서 주의 능력으로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 나와야 되요. 요나는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았어요. 아멘. 믿음이 뭐냐? 믿음은 때로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역사를 기적이라고 말을 합니다. 아무리 큰 것이라도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면 앞으로 나와요? 뒤로 나와요? 뒤로 나옵니다. 왜요? 뼈다귀까지 다 녹아 가지고 완전히 그냥 뒤로 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 요나는 들어갔던 대로 다시 뛰쳐나왔어요. 하나님이 토하여내게 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들어갈 때는 절망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죽었다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토하여 나올 때는 새사람이 되었어요. 변화되었어요. 능력이 임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선지자로 바뀌어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졸업장을 받으신 줄 믿습니다. 아멘. 아멘 크게 하면 졸업장 빨리 줄 줄 믿습니다. 요즘도 조기 졸업장이 있거든요? 그냥 4년 대학도 3년에 졸업도 시켜준다니까. 오래 계시기 원하시면 그냥 어먼 하시고. 주여 나도 빨리 나와야 되겠습니다. 내 심령이 답답합니다. 주님 여기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토하여내어 주시옵소서.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내어보내 주세요. 살려 주세요. 토해 주세요. 아멘. 졸고 있어요. 옆에 분. 아직도 영적 잠을 자고 있는 분들에게 형제여 자매여 나오세요. 나오십시오. 아멘. 나오셔야 되요. 거기는 오래 있을 곳이 아닙니다. 그 졸업장은 빠르게 빠르게 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나올 수가 있었을까요? 이런 믿음의 역사 상식을 뛰어넘는 역사 다시 말하면 나를 변화시키려면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우리가 사물을 과거와 다르게 보기만 하면 변화는 즉시 일어난다는 이 말을 다르게 좀 적용을 해본다면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어떤 사물을 어제와 다른 시각 곧 하나님의 시각으로 관점만 바꾸면 기적은 일어난다. 생각 관점 하나님의 관점을 붙들면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하는 것을 알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또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많은 관점을 바꾸어서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의 사람으로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귀한 성도 여러분 2500, 600년 전에 있는 이 요나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하신 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이 요나를 인도하시고 세워 가시고 훈련하신 그 하나님의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 한다는 것을 꼭 기억을 하시면서 환경을 바꾸려고 애를 쓰시지 마시고 생각을 바꾸십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경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또 내게 일어나는 이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만 주어지신다면 우리도 요나처럼 뛰쳐나올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요나는 어떻게 거기서 나왔는가? 크게 4가지의 그의 기도와 고백 속에 귀한 진리가 관점이 그 속에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째가 그는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랬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대단한 능력의 기도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그는 감사하고 찬송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그는 이미 하나님이 자기 기도에 응답하신 것을 알고 하나님께 찬송하는 이런 귀한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아무나 노래를 하는 것이 그것이 찬송이 아닙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가슴 아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그리고 감사하는 것이 찬송의 참 뜻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다면 내가 오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도 내가 오늘 이렇게 욕을 먹는 것도 시달리는 것도 병든 것도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이유와 까닭은 모르지만 내가 주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은 꼭 이 고백을 하셔야 졸업장을 주셔요. 이것은 절대적인 그런 원리입니다. 부르짖어라.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서 네가 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느냐? 이 고백이 떨어져야 하나님께서 물고기 뱃속에서 토하여내신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래요. 우리가 지나간 날 하나님의 역사 속에 내가 버텨봅니다. 몸부림을 쳐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항복합니다. 그때서야 하나님이 풀어주십니다.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던져 넣었습니다. 물고기 입 속에. 그러나 나오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이 토해내게 하셔야만 나올 수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사람이 녹아져서 소화가 되어버리지 아니하고 나올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돕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물고기 뱃속에서 첫째는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나라 이것입니다. 하나님 살아 계시면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 나와 약속하십시다. 하나님 어찌하여 그렇게 믿음이 적습니까? 나를 좀 한번 믿어주세요. 내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한번 살도록 몸부림치겠습니다.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서약하고 맹세할 때 하나님이 그 역사를 이루는 것을 얼마든지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서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약속입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덤에서 나와야 됩니다. 무덤에서 나오라 이거예요. 오늘 이 요나의 사건이 하나의 어떤 픽션 꾸며낸 이야기나 소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온 세상의 진리의 근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요나의 물고기를 친히 언급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와서 하는 말이 당신은 무슨 기적을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느냐.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왔지 않느냐. 모세를 봐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지 않느냐. 네가 선지자라면 기적과 표적을 보여 달라. 그랬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내가 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없나니 그랬어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내가 보일 것이 없나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인자도 십자가에 죽고 3일 만에 무덤에서 있다가 부활하리라. 다시 살아나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이 요나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요나는 예수님 때문에 미리 예수님의 죽음을 맛본 사람이라 그 말이에요. 아멘 입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벌써 700, 800년 전에 그는 예수의 죽음을 실제로 살고 거기서 죽음을 경험하고 거기서 물고기 뱃속에서 예수의 죽음을 체험하고 다시 부활하여 나온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앞서간 모든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살아 계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제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삶을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주로 믿는 성도는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내가 죽어야 됩니다. 그리고 3일이 될는지 30년이 될는지 모르지만은 여하튼 죽어야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십자가의 죽음 곧 세례를 받는 이 영적 결단이 있어야 주님 앞에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통과해야 됩니다. 무덤을 지나가야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에 핵심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십자가도 없이 그리고 죽음의 과정 없이 늘 부활의 기쁨 영광 그 어떤 행복만을 구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나는 죽어야 됩니다. 예수 믿기 전 거듭나기 전에 여러 가지 것들을 십자가에 날마다 깨닫고 진리의 말씀으로 토하여 내고 죽여버려야 그 속에 주님이 내 안에 역사 하는 영의 역사를 보게 되는 줄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늘 말했잖아요. 나는 날마다 뭐하노라? 죽노라.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죽으라 그러면 내가 왜 죽어. 네가 죽어야지 합니다. 신앙생활이 뭡니까? 교회생활이 뭡니까? 오늘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늘의 위로와 안식과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얻을 수 있느냐? 내가 붙들고 있는 것 내가 의지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만이 나의 기쁨이라는 것을 가지려면은 내가 죽어야 되요. 교회는 바로 신앙생활은 날마다 죽는 삶의 연속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가 뭐냐? 잘 죽이는 영적인 지금 죽음의 현장입니다. 좌우의 날선 검을 예리하게 잘 들도록 해 가지고 양들이 목을 딸 때 그냥 시원해 가지고 히죽이 웃으면서 그냥 죽어가도록 그게 진짜 설교 잘하는 거래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서툴러 가지고 그냥 날이 덜 서 가지고 한번 자르면 이 사람도 튀고 저 놈도 튀고 날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기도 하고 뿔이 나가지고 달려들기도 하고. 얼마나 내가 더 물고기 뱃속에서 훈련을 받아야 우리 성도들 소리 없이 잘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예수의 성품으로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이룰 수 있을는지. 내 생전에 그런 날이 꼭 오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그러니까 제가 힘이 덜 들게 하시려면은 여러분이 빨리 죽어주면 되요. 날 보고 자꾸 그러지 마시고 그냥 십자가에 좀 못을 박으세요. 정욕과 아집과 고집과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버리고 주님의 은혜로 자든지 깨든지 예수로 더불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옆구리 누가 푹 쑤셔도 히죽이 웃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그래 당신이 나의 선물이야.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다듬어질 수 있다면 감사해 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성숙에 이르는. 따라서 합시다. 살든지 죽든지 깨든지 자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누구와 더불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와 더불어 함께 살게 하려 하노라. 이 예수와 함께 사는건요 무덤에 들어갔다 나와야 되요. 무덤을 통과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대충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죽지 아니하고 살아서 나온 것처럼 오늘 연단이나 또 여러 가지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짓눌려있는 영혼들 첫째 따라서 합시다. 부르짖어라.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탈출원리. 졸업장을 빨리 1학기를 마치려면은 뭘 졸업해야 된다고요? 부르짖는 기도에 학점을 따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2장 1절, 2절을 같이 소리내어서 읽겠습니다. 시작.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아멘. 요나는 기도해야 할 때 잤어요. 다른 사람 부르짖을 때 그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어요. 제비를 뽑혀서야 겨우 입을 한번 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가서 부르짖는 기도를 배웠습니까? 브니엘 신학교에 가 가지고 부르짖는 걸 배운 거예요. 아멘. 보세요. 이 부르짖는 기도는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보통 해 가지고는 안 나옵니다. 이게. 쉽게 부르짖는 기도가 안 나옵니다. 왜요? 부르짖는 기도는 겸손의 뜻이기 때문에. 왜 부르짖으려니까 쉽게 말하면 내가 쪽팔려요. 내가 뭐 사람들한테 뭐 별 일 없냐? 잘 있었냐? 잘 있으라고 말하고 싶은데 부르짖는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거예요. 이걸 내려놓기 전에는 부르짖는 기도가 죽어도 안 나옵니다 . 체면 때문에도 안 나오고요 하나님 살아 계신 것에 대한 믿음도 부어지지 않기 때문에도 그렇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귀가 먹었나?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하라 그랬어요. 찾으라 그랬어요. 환란 날에 나를 찾으라.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 그랬어요. 아멘 입니까?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르짖는 것과 그냥 기도하는 것을 별개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보면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러지 다른 데는 그냥 기도했다 그랬어요. 우리 하나님의 그 법칙 가운데 왜 이렇게 부르짖는 것의 응답을 기뻐하실까? 그것은 첫째로 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내가 가진 지식 지혜 힘 어떤 것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항복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여 삼창은요 보통 은혜를 입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자기가 깨어지고 십자가에 자기가 부서지고 내가 자아가 십자가에 완전히 부수어질 때 다니엘이 주여 행하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일어나소서. 이 삼창을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급한 사람이. 오늘도 요나가 자기의 고난으로 인하여 죽게 된 지경에 쏟아져 나오는 쓴 물 스올의 그 어두움 속에서 그는 그 두려움 속에서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외쳤습니다. 얼마나 외치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으면 고래가 그냥 소화를 못 시키고 토하여냈겠습니까? 이 무슨 뼈다귀가 이런 것이 들어왔나 해 가지고 왝 하고 토하여낼 정도였으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밀어주실 때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겸손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완전히 포기되어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자백할 수 있는 이 부르짖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시편 107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107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건지시는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갈 길을 모를 때 막막할 때 내 갈 길이 어디로 가야할지 그리고 내가 어디 가야 이 몸뚱이 하나 쉬어야할 직장 또 배우자 가정 이사집 여러 가지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편 107편 4절을 같이 읽습니다. 시작.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뭐하매?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아멘. 두 번째는 아무리 몸부림쳐봐도 결박이 더 죄어옵니다. 나를 더 윽박지릅니다. 그 쇠사슬이 묶여 있을 때에 어떻게 하라 그랬느냐? 107편 10절입니다. 시작.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아멘. 그리고 범죄한 결과로 주님이 이제는 징계와 고통을 당할 때 죽게 생겼을 때 107편 1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다같이요.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뭐하매? 거기다 빨간줄 좍 그으십시오.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어떻게? 말씀을 보내어서 건져내셨다 그랬습니다. 할렐루야. 인생의 광풍을 만났을 때에 요나처럼 또 삼손처럼 인생의 광풍을 만났을 때에 2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 삼손이 데릴라의 그 향기에 취하여 그 무릎에서 꿈과 비젼 하나님의 약속을 잃어버렸습니다. 머리가 다 깎였습니다. 드디어는 쇠사슬에 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눈이 눈알이 다 뽑혔습니다. 노리갯감이 되었을 때 그가 외친 기도가 있습니다. 도저히 그는 자기 자신도 자기를 용납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라는 그 약속을 붙들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여호와여 이번만 나로 이번만 한번 강하게 하여 주옵소서. 삼손이 부르짖은즉. 할렐루야.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해달라는 회개의 눈물 그리고 자기 자신이 완전히 하나님 앞에 포기되어진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가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도 더 많았더라 그랬습니다. 우리 귀한 성도 여러분 어차피 신앙생활 하는 것은 체험이 따라야 됩니다. 그래도 저래도 천당은 갑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것을 왜 요리 조리 피하려고 합니까? 합리화하려고 합니까? 성경에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생각을 바꾸고 관점을 바꾸어서 골방에서 한번 부르짖어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이 도시가 그렇게 부르짖는 환경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말 다급한 문제가 있으면 직장에도 휴가를 내고 또 여러 가지 사업 가게문도 닫고 기도원으로 올라갑니다. 왜요? 거기 가면 부르짖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우리 금요성령대망철야기도를 도심 속의 기도원으로 바꾸기를 원합니다. 아멘 입니까? 그래서 목마른 자들이 갈한 자들이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이 부르짖어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사람들이 삼손처럼 야곱처럼 씨름해야 할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람들의 체면을 보지 아니하고 신앙의 판단을 받지 아니하고 감정에 정서에 메임이 없이 찬양과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오늘 임마누엘 함께 하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충만히 체험할 수 있는 도심 속의 기도원 브니엘 기도원을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변에 문제가 있고 또 기도응답이 필요하신 분 또 다른 사람 합심해서 기도가 필요한 분들. 여러분 기도는 모든 문제의 열쇠인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믿으시고 더 많은 간증이 쏟아져 나와서 우리의 생애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람의 땅, 하나님의 산/사2:7-8, 시121:1-2/졸업축하예배설교/2008-02-29
사람의 땅, 하나님의 산 사2:7-8, 시121:1-2 오늘이 졸업예배인데 박윤경 자매는 교육부장이니 이해가 되지만 저를 보며 저 사람은 왜 저기 올라가 있나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아마도 이번에 제 딸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제 아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때문에 학부모로서 한 마디 하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정신과의사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병원식구들과 등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산에 올랐던 이야기를 느꼈던 점과 함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산에 오르기 전 날, 같이 일하는 동료의사가 연락을 해서 짐이 있으니 빈 배낭을 하나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만나보니 산에 올라가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 과일, 음료수 등등을 준비해 왔더군요. 그래서 둘이 나누어 배낭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병원 식구들이 모두 30명 정도 됩니다. 그래서 제 배낭에는 15인분 정도의 음식을 담았습니다. 음식을 모두 넣고 배낭을 매는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배낭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저도 대학시절에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설악산을 뛰어 올라간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제 몸의 짐이 20킬로그램 이상 되고, 운동은 별로 하지 않고, 등산은 1년에 한 두 번 하는 정도입니다. 여기서 제 몸의 짐이라는 것은 대학시절 이후 불어난 체중을 말합니다. 그래도 옛날 생각을 하며 이까짓 거 하고 산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얼마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누가 뒤에서 자꾸 배낭을 잡아당기는 것 같고, 숨이 차오르고, 진땀은 나기 시작하고, 종아리가 단단해지고,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더 가야 하는 지. 이걸 꼭 해야 하는지, 정말 산 꼭대기까지 갈 것인지, 등산을 하자고 한 게 누구인지 등등 계속 머리 속에서는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산 중턱쯤 올라가서 쉬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돌 위에 걸터앉아 쉬면서 내 짐을 떠맡길 사람이 없나 둘러보았습니다. 그래도 내가 원장인데… 나 혼자 먹을 건 아닌데… 하며 다소 억울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병원에는 남자 직원은 딱 한 명이 있습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내 짐을 맡길 대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데 가만 보니 그 직원도 배낭을 하나 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낭을 바꾸자고 할 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 배낭도 그리 가벼운 것 같지 않아 그냥 바꾸자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앞으로 올라 갈 일을 생각하니 마음속으로는 그만 올라가자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중간에 그만 두자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그 배낭이 없었다면 조금 덜 힘들었을 것이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덜 들었을 것이고 좀 더 등산을 즐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이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금 다른 의미로 생각해보면 배낭을 메고 가는 것이 마치 세상의 욕심을 지고 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살다 보면 세상 욕심을 버리고 가면 쉬울 일도 꼭 그걸 지고 가느라 고생을 하는 적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출발을 해서 올라가는데 주변의 나무나 꽃 등등 경치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말없이 앞만 보며 한 걸음씩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옆을 보니 다른 사람들 중에도 나처럼 힘이 들어 말도 못하고 올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대개는 나처럼 운동을 별로 안 하거나 자기 몸의 짐이 많은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고, 나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사람도 있어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다 보니 결국 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아무도 없이 혼자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 올라 왔으면 충분하지.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시간이 너무 늦을 텐데. 잘못하면 길을 잃을 지도 모르는데’ 등등 여러 이유로 자신에게 변명을 하면서 끝까지 가기를 포기하고 산 중턱쯤에서 돌아 내려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상까지 갈 수 있던 것은 나 혼자가 아니고 동반자가 있어서 말은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는 서로를 격려했기 때문이고, 나만 힘든 것은 아니고 다른 사람도 힘든 것을 참고 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의도에 있는 63빌딩에 가서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초 정도밖에 안될 것 같은 짧은 시간에 59층으로 올라가면 서울 시내가 잘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저녁 시간에 고급스럽게 꾸며진 그 곳에서 값비싼 음식을 먹으며 창 밖으로 멋있는 서울의 밤 경치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꽤 근사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 앉아서 느끼는 감정을 자세히 돌이켜보면 저 아래 보이는 세상을 내려다 보며 그 위에 올라서서 세상을 소유하고, 지배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잠시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착각이지만 인간의 허영과 소유욕을 잠시나마 만족하는 경험을 하라고 그 곳에 음식점을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더 높은 산에 오르고, 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나 행동은 상당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산을 정복한다는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산에 오를 때에는 화려하게 장식을 한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고 한 발 한 발 땀을 흘리며 올라 가야 합니다.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하는 지를 따지는 그런 어리석은 경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 대개는 마지막에 도착하는 사람을 모두 기다려주고 박수로 격려해주곤 합니다. 또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에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아주는 지도, 내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도, 누가 100점을 받았는지도, 누가 나보다 더 좋은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운했던 일도 누구를 미워했던 일도 잠시 잊어 버립니다. 그 순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며 자연이 주는 위로에 세상 일은 다 잊어버리고 나 혼자 하나님을 대하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산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습니다. 산은 소돔이 멸망할 때 천사가 롯에게 피하라고 한 곳이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러 간 곳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또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계명을 받았습니다. 산은 여호수아, 기드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이기도 하고, 엘리야가 죽음을 피해 찾아간 곳도 하나님의 산 호렙이었습니다. 야곱 족속이 심판을 피해서 간 시온산은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으며, 잡히시기 전날 밤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신 곳은 감람산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 산에 오른 것을 가지고 너무 길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 내려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저 개인의 신앙적 관점에서 산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앞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본문인 이사야서 2장 7,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들의 땅에는 은과 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땅에는 군마가 가득하고, 병거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땅에는 우상들로 꽉 차 있고, 그들은 제 손으로 만든 것과 제 손가락으로 만든 것에게 꿇어 엎드립니다.’ 이것은 여호아께서 자기 백성인 야곱을 버리신 이유에 대해 이사야가 말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런 것들을 철저히 멀리하고 여호와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정반대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사람의 땅에는 금은 보화와 군마가 가득합니다. 다시 말하면 돈과 물질과 권력으로 차 있습니다. 우리들은 종종 이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우상으로 섬기는 순간이 많습니다. 요즘 세상은 너나 할 것 없이 재테크에 열중이고 10억 만들기가 대세인 것 같습니다. 언론이나 방송에서도 그 대열에 서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고 나중에 굶어 죽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닮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 길은 돈이나 권력을 우상으로 쫓아가는 것이 아니고,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계신 산을 바라보고 그 곳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제 마음도 63빌딩과 하나님의 산을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그 산길을 가는 것이 힘듭니다. 그것이 산에 대한 두 번째 의미입니다. 제 아이가 수학 공부를 하며 종종 너무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너는 쉬운 문제만 풀 거냐, 그러면 늘 그 수준에서 머물고 말 것이다. 힘들지만 어려운 문제를 참고 풀어야 더 아는 것이 많아지고 현명해 질 수 있는 것 아니냐. 평지만 가려 하지 말고 길을 가다 언덕이 나와 숨이 차고 힘이 들어도 넘어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세부 전공이 소아청소년정신과여서 진료실에서 어른보다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더 많이 만납니다. 요즘과 같이 학년이 바뀌는 계절에는 중학 입학을 앞둔 아이들에게 중학생이 되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을 종종 하는데.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의 대답은 싫다는 것입니다. 공부가 너무 어렵고 많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며칠 전에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여자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그 아이 역시 아주 씁쓸한 표정으로 ”싫다”고 했습니다. 불과 초등학교 1학년인 그 아이도 이유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어느 10살짜리 아이는 취직 할 일이 걱정이라고 합니다. 김 두현 형제 아들인 명준이가 25~6개월 정도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만일 명준이에게 여기 피아노 위에 있는 거울을 가져다 달라고 하면 명준이는 속으로 ‘저 아찌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손도 안 닿는데’라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 손도 닿지 않고, 의자를 가져다 올라갈 수도 없으니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명준이가 열살 정도만 되면 그것은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단지 시간이 흘러 성장을 하는 것 만으로도 이전에 불가능하던 일이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됩니다. 학년이 올라가는 것이 싫다는 아이들에게 점점 더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하고, 더 많은 양의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너도 전보다 더 컸고, 점점 아는 것이 많아지고, 머리가 똑똑해지고, 더욱 강해지기 때문에 충분히 해낼 수 있다’라고 말해주곤 합니다. 공부를 할 때 쉬운 문제만 풀고 있을 수는 없는 것처럼 살아가면서 평탄한 길만 찾아 다녀서는 예수님도 하나님도 만날 수 없습니다. 힘들더라도 산길을 선택해서 가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가려는 새길도 그런 산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졸업과 입학을 하고, 새 학년이 되는 여러분들께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산길을 가려면 평소에 운동을 해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산을 가기 위한 운동은 마음의 연습입니다. 아이들에게 꿈이 무어냐고 물으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아름답게 쓰는 것이 당연히 더 중요할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만 따라가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 여러분을 지배하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마음을 두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창세기 22장 앞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적어도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하나님이 자신의 그 귀한 자식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명령에 대해 아브라함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제게 이러실 수 있느냐’거나, 명령에 불복하고 어디로 도망을 갈 지 등등 고민을 했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라고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늘 마음의 연습을 해 두어야만 돈과 권력이냐 하나님의 가르침이냐의 갈림길에 섰을 때 주저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주저하지 않고 따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고 또 신앙의 스승들과 어른들이 앞서서 간 길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혼자서 가는 길이 아니고 주위를 돌아보면 동반자도 많고 모두 힘든 것을 참고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을 즐기며 한 걸음씩 올라가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 힘이 들 때는 눈을 들어 산을 보면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님보다 더 높은 산에 올라 하나님과 더 가까이 만나고, 또 그런 과정을 통해 이 땅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좀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 어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속에서도 똑같이 살아가기/ 막8:27-38/ 졸업축하예배설교/ 2010-02-24
세상 속에서도 똑같이 살아가기 막8:27-38 1. 졸업은 인생의 지각변동에 비유된다. 졸업과 동시에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삶의 환경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동안 학교와 가정, 교회 공동체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졸업과 동시에 우리는 직장, 사회라는 새로운 공동체속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그 동안 지내왔던 학교와 교회공동체에서는 비전중심, 관계 중심이었지만 우리가 새롭게 만나게 될 직장과 사회는 일 중심, 과제중심, 효율중심, 성과 중심, 결과 중심 등 모든 면에서 변화가 있다. 새로운 환경과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주의할 점이 있다. 바로 그 순간이 사탄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다. 이 때 사탄은 주님에게 사람들이 따를만한 능력 있는 메시야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능력을 사용하라고 유혹했다. 예수님은 그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셨다. 그리고 그 이후(마가복음의 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들이 계속해서 나온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이런 구조를 따라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도대체 저 예수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마가복음의 딱 중간인 오늘 성경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고백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 시작했다. 그것이 왜 자신이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의 이유를 가르치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신의 메시야됨.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 그 엄청난 새로운 사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셨을 때 역시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했다. 사탄은 베드로를 통해 시험했다. 자신의 죽으심을 진지하게 말씀하시던 예수님께 베드로는 “예수님은 절대로 죽으실 수 없다”고 항변했다. “예수님 죽으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왕이 되세요. 그래서 로마를 정복하세요. 그러니 죽으시면 안 됩니다.” 이 때 사탄은 이제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났으니 이제는 그 문제를 세상적이고 권력 중심적인 시각으로 해석하고 마침내 고난과 죽음을 거부하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최후의 결정을 기다리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 때도 사탄은 예수님에게 죽음을 거부하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로 계속 간구하시고 마침내 사탄을 이기셨다. 사탄은 자신의 목표가 되는 대상이 인생의 분기점에 있을 때 가장 유혹에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사탄의 가장 강력한 전략 중 하나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신실하고 믿음이 계속 자라는 과정에 있다면 유혹에 맞서는 일은 한결 쉬울 것이다. 대학생 기독교 동아리에 들고, 선교 단체에 들어가서 우리는 계속 영적성장을 위한 훈련을 받는다. 그 때는 유혹을 이기기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로운 환경 속에 있다. 많은 변화를 경험해야 할 순간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때, 바로 대학교를 졸업하는 그 때가 그 유혹을 이겨내기가 참 어렵다. 2. 사탄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통해서 유혹하고 있는가? 1) 우리의 영적성장을 수포로 만들거나 영적성장을 둔화시키는 전략을 쓴다. 우리는 그 동안 대학캠퍼스에서 영적 성장을 위해 훈련해왔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그 대학캠퍼스를 떠나는 변화의 시기에 우리를 유혹한다. 사탄이 유혹하는 가장 달콤한 유혹은 “네가 꿈꾸고 믿어왔던 그 이상적인 믿음의 삶이 더 이상 직장과 사회 같은 현실세계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니 그만 거기에서 영적 성장을 멈추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2) 사탄은 후회라는 전략을 쓰기도 한다. 내가 그 동안 학교 다니면서 믿음으로 결정했던 것들이 결국에는 내 취업과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것이었다는 후회와 실망감을 주려고 한다. 여러분은 단기선교 가기 위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인턴쉽 훈련을 받는 것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교회에서 내가 교사를 하고 있어서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 준비한다고 졸업반 학생들을 위한 취업반 준비 모임에 제대로 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것이 후회된다. 그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손길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삶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한다면 우리의 후회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될 수도 있다. 3) 사탄은 질투라는 전략을 쓰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입술을 통해 “이제는 현실 속에서 살아야지 언제까지 하나님, 믿음 타령하면서 그렇게 살래? 네 앞가림 좀 하면서 살아라.” 이런 세속적인 충고에 귀를 기울이라고 유혹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졸업생 여러분! 사회로 진출하는 시기는 사탄이 우리의 약점을 공략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기 전에 표준으로 삼았던 삶의 기준으로 회귀시키려는 가장 좋은 때임을 잊지 말라. 우리는 그것을 정말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기 전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좀 더 많이 벌고, 좀 더 많이 쉬고, 좀 더 많이 편안하고 안락하고, 좋은 노후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하나님 나라가 가장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으로 가장 좋은 것과 가장 선한 것을 추구해 왔다. 그런데 사탄은 새로운 변화를 앞두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그 옛날의 것으로 돌아가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오늘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3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맨 처음 시작하실 때 이렇게 선포하셨다.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것이 예수님보다 먼저 사역했던 요한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다른 우상을 섬겼던 것을 포기하고 그 대상을 바꾸어야만 한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가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내가 너희 비전을 크게 하고, 삶을 풍성케 하겠다. 내가 너희 인생의 목표를 바로 세워주겠다.” 그러자 시몬과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물과 아버지를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물과 부친. 그것은 그들에게 걸리적거리는 것을 단순히 떼어놓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그런 말이 아니다. 시몬과 안드레에게 그물은 직업을 의미했고, 그 직업은 안정을 의미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가족 간의 연대와 사업을 의미했고, 그것은 관계상의 안정을 의미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너희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었다. 오늘 졸업하는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환경과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이때도 예수님께서 새로운 관계 안으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주님은 더 강력하게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 가치 속으로 부르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우리가 어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옛날의 가치관으로 돌아가겠는가? 3. 졸업생들에게 드리는 권면 사회에 첫 발걸음을 내딛는 여러분은 많은 사람들의 좋은 조언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여러분보다 앞서 인생을 살았고, 좋은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경영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피터 드러커는 『프로페셔널(전문가)의 조건』에서 그에게 영향력을 끼쳤던 사건을 말하면서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1) 목표와 비전을 가져라. 2) 신들이 보고 있다. 3)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를 공부하라. 4) 자기 일을 정기적으로 검토하라. 5) 새로운 일이 요구하는 것을 배워라. 6) 피드백 활동을 하라. 7)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 바라는가 4. 경영과 성공을 위한 사람들의 이런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옥한흠 목사님은 2월 3일 주일 설교에서 한국교회를 향한 우려의 메시지를 전했다. 옥 목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기독교의 본질이 되는 말씀을 교인들이 지겨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요즘 한국교회는 ”단것만 좋아하는 어린아이처럼 기분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옥 목사는 ”교인들이 그저 무엇이나 믿고 구하면 이룬다는 소원성취의 말이나 좋아하고, 예수 믿는 목적이 마치 무병장수에 있는 것처럼 큰소리로 외치고 있다”며 기복신앙과 맘몬주의사상에 물든 한국교회를 비판했다. 목회자에게 ”예수님을 바로 가르쳐야 된다”고 했다. 옥 목사는 베스트셀러인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잘 되는 나>에 대한 우려도 표명했다. 그는 ”오스틴이 주장하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개발하면 성공한다는 가르침에 모두가 다 입을 벌리고 있고, 이런 풍토가 교회 안에 만연하다. 오스틴은 긍정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인 것처럼 설교하지만 오직 긍정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복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자”고 거듭 강조했다. 옥 목사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혈통·학벌·자기경건·선행은 다 해로운 것이고 배설물이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하고 목숨을 바쳤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건널목이다. 건널목은 넘어가는 곳이지, 종점이 아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데 그때 정말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의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설교 마지막에 옥 목사는 ”언제부터인가 나 자신이 바울처럼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쁘고 흥분되어야 하는데….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지금은 식어버린 것 같다”고 고백하고 ”나부터 다시 바울처럼 은혜를 회복하고, 성도들도 바울과 같은 은혜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세상의 사람들이 다 따라간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고, 그것이 복음도 아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근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이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은 자이다. 둘 다 모두 죽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한 쪽은 생명을 얻고, 한 쪽은 생명을 잃을 것이다. 한쪽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잃어버리고, 한쪽은 복음과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렸지만 결국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은가? 1966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 ‘사계절의 사나이’의 마지막 부분에서 토머스 모어 경이 법정에 서게 된다. 평소 알고 지내던 리처드라는 한 젊은이가 증인으로 나와서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위증을 한다. 그는 거짓 증언의 대가로 웨일즈 지방의 검사장 자리를 얻는다. 결국 토마스 모어 경은 선고를 받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슬퍼하며 이렇게 말한다. “리처드, 온 세상을 다 얻어도 영혼을 잃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네... 그런데 그 대가가 오직 웨일즈라니...” 우리의 영혼을 팔고, 믿음을 팔고, 하나님을 팔고, 무엇을 얻든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다. 가장 인생을 잘 산 사람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가장 인생을 잘 산 사람은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향해 가는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라.” 저는 오늘 그렇게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다.
쉬지 말고 열심히/ 빌3:12-14/ 졸업설교/ 2011-02-15
쉬지 말고 열심히 빌3:12-14 찬:363,364,365장 졸업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므로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본문은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를 교훈해 주고 있다. 1,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 자만은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저해 요인이다. 전도가 유망하던 젊은이들도 이 덫에 걸리기만 하면 성장이 정체됨은 물론 오히려 퇴보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 아무에게도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란 없는 법이므로 룬임없이 추구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가잘 바람직하다. 2, 목표를 잃지 말아야 한다. 분명한 목적지를 향괘서 경주를 시작한 사람들도 여러가지 문제들과 씨름하다 보면 그것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들이 허다하기 때문에 목표를 잃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들처럼, 목표를 상실한 사람들의 달음질은 헛것이 되고 만다. 애써 일한다고 모두 상 받는 것이 아니다. 3,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바울의 달음질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철두철미한 소명의식의 표현이었다. 어느 분야에서 종사하든지 소명의식을 가지고 이에 임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고,주를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바울과 같은 소명의식을 갖도록 해야 하겠다. 인생이라는 기회는 누구에게도 두번 주어지는 법이 없음을 명심하고 잘살도록 최선을 다하자.
쉬지 말고 열심히/ 빌3:12-14/ 졸업축하예배설교/ 2010-02-23
쉬지 말고 열심히 빌3:12-14 363,364,365 졸업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므로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 본문은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를 교훈해 주고 있다. 1,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 자만은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저해 요인이다. 전도가 유망하던 젊은이들도 이 덫에 걸리기만 하면 성장이 정체됨은 물론 오히려 퇴보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 아무에게도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란 없는 법이므로 룬임없이 추구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가잘 바람직하다. 2, 목표를 잃지 말아야 한다. 분명한 목적지를 향괘서 경주를 시작한 사람들도 여러가지 문제들과 씨름하다 보면 그것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들이 허다하기 때문에 목표를 잃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들처럼, 목표를 상실한 사람들의 달음질은 헛것이 되고 만다. 애써 일한다고 모두 상 받는 것이 아니다. 3,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바울의 달음질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철두철미한 소명의식의 표현이었다. 어느 분야에서 종사하든지 소명의식을 가지고 이에 임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고,주를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바울과 같은 소명의식을 갖도록 해야 하겠다. 인생이라는 기회는 누구에게도 두번 주어지는 법이 없음을 명심하고 잘살도록 최선을 다하자.
어린이를 영접함/ 막9:35-37/ 졸업축하예배설교/ 2008-02-24
어린이를 영접함 막9:35-37 저에게 의미 있었던 “졸업”은 유치원졸업과 대학 졸업입니다. 유치원졸업은 다리를 다쳐 40일간 깁스를 하고 앉아만 있다가 깁스를 푼 기쁨과 이제 학교에 간다는 즐거움에 들떠서였지요. 반면에 대학졸업은 취업걱정에 마음이 무겁고 근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졸업은 첫 아이의 유치원졸업이고 가장 두려운 졸업은 현재 고2인 제 아들의 다가오는 고등학교 졸업입니다. 어느덧 ‘나’보다는 ‘어머니’로서의 삶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저는 27살에 결혼하여 30살에 첫아이를 낳아 노산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결혼이 늦어지고 출산도 늦어집니다. 아이도 하나 아니면 둘만 낳는 추세입니다. 따라서 남녀가 가정을 이루어 아이를 낳으면 한 아기에게 6명의 어른들, 즉 부모와 친가/외가 어른들의 관심이 집중됩니다. 예전에는 많은 자녀를 낳아 길렀기 때문에 부모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사회 분위기 또한 아이들을 배려하고 존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부모가 되면 정보가 넘치는 이 사회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아이를 위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려 애쓰게 됩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게 되고 항상 나의 편이 되 주는 어머니란 존재에 길들여집니다.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얼마나 배려하며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는지는 모두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취학 전에도 유명한 피아노학원에 가려면 6개월을 기다려야 하고 어머니들끼리 서로 좋은 학원은 가르쳐 주지도 않는답니다. 초등학교 생일잔치엔 몇 달 전에 실내 놀이터를 예약하고 반 학생을 다 초대하면 어머니들도 모두 함께 참석하여 어머니모임도 함께 한다고 합니다. 저는 올해로 여고 교사로 재직한 지 20년을 맞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예전과 다르게 본인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자기감정에 솔직해서 당황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또한 자기가 손해를 보는 일은 참지 못하고 조목조목 따집니다. 자신이 납득하지 않으면 어떤 일에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정확하게 이유를 말하고 납득시켜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또 자신을 자기가 생각한 대로 예쁘게 꾸미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칙과 상관없이 염색 파머 화장을 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소풍을 가면 머리는 드라이로 예쁘게 하고 큰 귀걸이에 화장을 한 후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하이힐을 신고 옵니다. 졸업앨범사진을 찍을 때는 드라이어를 학교에 가지고 와서 서로 예쁘게 머리를 해 주고 화장을 곱게 한 후 사진을 찍고, 다시 세수를 한 후 수업을 듣습니다. 수능이 끝난 후엔 한 반에 3명이상이 성형수술을 하고 졸업식에 옵니다. 정말 자신의 개성을 다 드러내고 싶어 하지요. 제 아들을 통해 들은 남자고등학교의 실태는 더욱 심합니다. 급식장에서 자기가 먹은 식판을 그냥 두고 가 버리거나 식당 구석진 곳에 숨겨놓고 가버리기도 하고 잔반을 버리는 곳에 식판채 버리고 가버리든가 수저도 함께 버리고 가 버립니다. 또한 특정 수업시간에 몇 몇 아이들은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며 논답니다. 그러다 선생님께서 아시게 되면 빨리 교실로 돌아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축구공을 찾으러 갔다가 늦었다, 함께 사먹은 간식으로 식중독이 걸려 양호실을 다녀왔다는 등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고 합니다. 청소시간에는 담임선생님이 청소당번을 정해준 뒤 청소하라고 나가시면 모두 다 도망가고, 간혹 남아서 청소하는 학생이 있으면 어떤 아이들은 너 때문에 도망친 내가 혼날 수도 있다고 오히려 화를 내기도 한답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학원복도에서 앞에 있던 몇 명이 장난을 치다가 화분이 넘어져 그 속에 있던 작은 돌들이 쏟아졌습니다. 화분을 넘어뜨린 학생은 맨 뒤로 도망 가버리고, 그의 친구들이 화분을 세우고 돌을 집어넣었더니 뒤에 서 있던 친구들이 그 광경이 웃긴지 웃더랍니다. 그래서 결국 몇주먹 주어 넣다가 그만두고 수업하러 들어갔다나요. 그 옆에 있던 제 아들은 당연히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뒤에서 친구들이 비웃을까봐... 혹은 자기가 도와서 정리할 때 선생님들이 나오시면 자신이 쏟은 것으로 오해받을까봐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놈이지요. 요즘 학생들은 입시지옥에서 공부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질 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기적인 학생들의 성격은 공통적인 것 같습니다. 또 그들의 내면은 유약하며 인내심과 진취력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개성에 따라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개발하는 용기있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또한 여전히 착하고 성실하여 무한 경쟁의 사회에 나간다고 생각 했을 때, 도리어 걱정이 되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요즘 아이들의 성격 형성에 부모님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겁니다. 어려서부터 자녀의 교육 스케줄을 짜고 맞춤 교육을 해서 자신의 아이를 최고로 만들고 싶은 부모의 대단한 열망!!!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러기 아빠입니다. 기러기 아빠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는 것만 봐도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열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가 들은 놀라운 일 중 하나는 군대 간 큰 아들이 작은 아들 시험기간에 첫 휴가를 나온다고 해서 휴가를 다음으로 미뤘다고 하는 엄마의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다른 엄마들이 모두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직장 여성들만큼 매우 바쁩니다. 그 이유는 아이의 모든 스케줄을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일정에 따라 학교와 학원을 차로 데려다 주고 좋은 학원을 분기별로 선별해 보내면서 아이를 관리합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대학수업 신청과 방학일정까지 계획해주며, 대학 졸업 후에는 취업까지 모든 것을 다 어머니가 관리해 줍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마가복음에 ‘영접’이 나오는 데 사전적 의미로 “영접”이란 ‘맞아서 접대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엔 소외된 어린이들을 영접하는 맘이 소중하다는 말씀이셨겠지만 지금 우린 어린이들을 너무나 소중히 여겨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영접함에서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로 싸우는 것처럼, 지금 우리는 내 자녀를 더 잘 나게 하기 위하여 싸우며 또 다른 방법으로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찾고 자신의 삶을 찾아 정진하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이 내게 맏긴 한 영혼으로서 그 아이의 부족한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며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한 사회인으로 스스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도록 옆에서 도우는 따뜻한 존재의 어머니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남들이 다 말하는 강남으로 와서 넘치는 학원 속으로 아이들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인지 모르겠으나, 이곳에 와서 보니 부모로서의 제 길을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전 제 욕심을 하나 둘 내려놓으면서 우리 아이들이 자기 길을 찾아 갈 수 있도록 제가 만든 따뜻한 밥이나 준비해주며 그들이 더욱 성장하기를 조용히 바라보렵니다. 물론 아이들의 양면성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유롭게 인정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을 강하게 인도해 줬으면 하는 맘이 있다는 거지요. 나중에 엄마는 날 위해 해준 일이 아무것도 없다며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지혜가 필요할 겁니다. ‘누구는 어떻게 됐다더라’ 에서 벗어나 우리 아이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지금의 그 모습 그대로 저에게는 사랑스럽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삶속에서 이들을 영접하며 살 때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닮아 가는 것이 아닐런지요. 감사합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히13:1-9/ 졸업예배설교/ 2010-02-23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히13:1-9 오늘은 우리 교회가 졸업생 여러분의 졸업을 축하하고, 신입생 여러 분의 입학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초, 중, 고, 대학교의 학업을 무사히 마친 여러분의 졸업을 우리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우리 모두 함께 축하를 드립니다. 또 초, 중, 고, 대학의 학업을 위해 새로 입학을 한 여러분의 입학을 우리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우리 모두 함께 축하를 드립니다. 새로운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우리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되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곧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주님을 본받아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에게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구별이 없이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구별이 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삶에 표본이 되실 분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구별이 없이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것이 다. 너희에게 말씀을 이르고 인도하는 자라도 그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한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과연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을까?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살펴보며..... 졸업생으로서, 또 신입생으로서 나 의 삶이 어떠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고져 한다. 1.시간의 흐름을 말해 준다. 본문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 라\\\\\\\"고 했다. 누가복음 13:32-33절에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 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고 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바로 시간의 흐름을 말해 주고 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간 다. 바로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로 흘러간다. ①.쉼 없이 흘러간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렇게 시간은 쉼 없이 계속 흘러간다. 우리 인간이 흘러가는 시간을 막을 수 없다. 잡을 수도 없다. 지체시킬 수도 없다. 요한 계시록 22:13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 과 끝이라\\\\\\\"고 했다. 요한 계시록 1:8절에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 한 자라 하시더라\\\\\\\"고 했다.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게서 시작하여 하나님에게서 끝이 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디에 도, 그 누구에게도 머물 수도 없는 것이 시간이다. ②.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간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하루는 24시간이다. 이것은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의 차별이 없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이다. 이 하루가 오 고 가는 것에 따라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흐름이 이루어진다. 잘난 사람의 하루가 가면, 못난 사람의 하루도 간다. 지식의 유무나, 재물의 많고 적음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성공자나 실패자에게 차 별이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동일하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변함없이 흘러간다. 더 빨리 가는 법도 없고, 더 늦게 가는 법도 없다. 항상 일정한 속도로 흘러간다. 쉼 없이 계속해서 흘러간다. 그래서 시간 의 흐름을 진리라고 한다. ③.빨리 흘러간다. 욥기 7:6절에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 나\\\\\\\"라고 했다. 욥기 9:25-26절에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라고 했다. 흔히들 유수와 같이 흐르는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고 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 흐름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느 사이엔가 흘러 흘러 바 다에 다다르는 강물처럼 시간 또한 그렇게 흘러간다는 뜻이다. \\\\\\\"세월 참 빠르다\\\\\\\" 이것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지나온 사람 들이 뒤돌아보는 눈길에 담겨진 모습이다. 연로하신 분들의 말씀을 들 어보면 한결 같이 \\\\\\\"세월 참 빠르다\\\\\\\"고 하신다. 그러나 초등학교 학생들이 말하는 시간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세월 참 빠르다\\\\\\\"가 아니다. 오히려 \\\\\\\"세월 참 느리다\\\\\\\"가 된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리다.....고 못하게 하 는 것이 많아서 어서 어른이 되고픈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것은 분명 시간의 흐름을 말해 준다.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누 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다. 되돌려 받을 수 없기에 지나고 보면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그래서 \\\\\\\"세월 참 빠르다\\\\\\\"의 심정이 된다. 2.역사의 흐름을 말해 준다. 본문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 라\\\\\\\"고 했다. 전도서 3:15절에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 으시느니라\\\\\\\"고 했다. 요한 계시록 1:19절에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바로 역사의 흐름을 말해 준다. 곧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일들 을 말한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의 흐름 속에 한 개인의 일을 말할 때 \\\\\\\"인간사\\\\\\\"라고 한다. 한 나라의 일을 말할 때 \\\\\\\"국사\\\\\\\"라고 한다. 세계의 일을 말할 때 \\\\\\\"세계사\\\\\\\"라고 한다. 우리 인간이 죄에서 구 원되는 일을 말할 때 \\\\\\\"구원사\\\\\\\" 혹은 \\\\\\\"구속사\\\\\\\"라고 한다. 이 모두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의 흐름 속에 무엇을 이루어 가는가....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살아온 삶의 발자취인 것 이다. ①심은 대로 거둔다. 갈라디아 6: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다. 바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공의 길을 걸어왔다면 성공사가 기록될 것이고, 실패의 길을 걸어왔다면 실패사가 기록될 것 이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 시간의 흐름 속에다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심어야 할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심어야 한다. 갈라디아 6:7-8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 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 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 라\\\\\\\"고 했다. 자신의 육체를 위해 심어서 썩어진 것을 거두지 말고, 성령을 위하여 심어서 영생을 거두라고 했다. 바로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 을 쫓아 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것이다. ②.사랑으로 심어라 본문 1-2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했다. 요한복음 13: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 시간의 흐름 속에 심어야 할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는 주님 주신 새 계명이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마22:40)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손님을 대접하고, 사랑으로 갇힌 자를 찾아보고, 사랑으로 학대받는 자를 위로하고, 사랑으로 혼인을 귀 중히 여겨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을 쫓아가는 잘못된 사랑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하니 금하라는 것이다. 음행하는 자도 잘못된 사랑이요, 간음하는 자 도 잘못된 사랑이요, 돈을 사랑하는 것도 잘못된 사랑이라고 했다. 이 잘못된 사랑은 만족하는 마음이 없는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있는 바를 만족하게 여기라고 한다. 스스로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사 람은 그 어떤 것에도 만족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잠언 27:20절에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했다. 잠언 30:15-16절에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 니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고 했다. 우리 인간의 욕망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않는 것이다. 곧 만족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는 말씀이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적은 것에도 만족을 느 끼고 감사할 줄을 알게 된다. ③.바른 본을 받아 심어라 본문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 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 음을 본받으라\\\\\\\"고 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 성도들이 심어야 할 사랑은 스스로 판단하기 가 힘든 부분도 있고, 마음과는달리 삶이 따라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바로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여 감당치 못하는 것이다(마26:41) 이럴 때 우리 성도가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 이(히11:1-2) 보여주신 \\\\\\\"믿음의 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 르치고 인도하는 목자를 따르는 것이다. 목자라고 해서 무조건 따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 씀대로 삯꾼 목자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7절의 말씀도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의 본을 받으라\\\\\\\"고 했다. 이런 일은 참으로 불행한일이다. 양 떼들이 그 목자를 믿지 못하고, 종말을 주의하여 지켜보고 \\\\\\\"믿음의 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만큼 시 간의 낭비이고 믿고 의지하는 삶이 되지 못하는 불행이다. 참 목자이요, 훌륭한 지도자 상은 바로 주님처럼 양 떼를 위해 자신 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이다. 모세처럼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차라리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소서..... 하는(출 32:32)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④.많이 심어라 고후 9:6절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 둔다\\\\\\\"라고 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 시간의 흐름 속에 많은 열매를 거두고, 성공적인 역사를 남기기 위 해서는 많이 심어야 한다고 했다. 적게 심어서 많이 거두는 것도 성공 이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많이 심어서 많이 거두는 자가 『어제, 오 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의 흐름 속에 성공적인 삶을 이루는 것이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그것은 바로 역사의 흐름이다. 나의 \\\\\\\"인생사\\\\\\\"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우리 \\\\\\\"교회사\\\\\\\"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우리 \\\\\\\"나라 역사\\\\\\\"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제 불과 3년 정도 남은 20세기 \\\\\\\"세계사\\\\\\\"에 무엇을 남길 것인 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바로 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얼마나 충실하게 심을 것인가.....에 따라 흘러가는 역사의 페이지에 \\\\\\\"무엇을 남기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다. 사랑으로 심자. 충실하게 심자. 그리고 많 이 심자. 주는 나를 돕는 자이시다. 과연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과연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라고 약속하신 주님이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 무궁히 변함없는 그의 사랑이다. 변함없는 그의 도우심이다. 변함없는 그의 인도하심이다. 변함없는 그의 보호하심 이다. 변함없는 그의 약속이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본문 5절에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 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3.각각의 구별을 말해 준다 본문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 라\\\\\\\"고 했다. 마태복음 6: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바로 어제는 어제, 오늘은 오늘, 그리고 내일은 내일.... 각각의 구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어제가 오늘일 수 없음 같이 오늘이 내일일 수 없 다. ①.하나 하나의 매듭 출애굽기 14:13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 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 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했다. 마태복음 6:30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라 고 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 각각의 날들은 서로 다르며 분명히 구별되고 있다. 오늘 본 너희를 추격하던 애굽 사람들을 내일은 보지 못하리라 아니 영 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했다. 오늘의 그 싱그러움을 자랑하는 들풀도 내일은 아궁이 던지어져 불탈 것이라고 한다. 싱그러움은 고사하고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은 하나 하나의 매듭을 지 으며 흘러가고 있다.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초, 중, 고, 대학교의 학업의 과정을 매 듭을 지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그 매듭 속에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을 담고 있나요? 초등학교 6년 동안, 중학교 3년 동안, 고등학교 3년 동안, 대학교 4년 동안, 과연 무엇을 담고서 매듭을 지었나요? 이 시간 한번 곰곰이 생각 해 보세요.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신앙인으로서 나는 \\\\\\\"시간의 주인\\\\\\\"이신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이루어 놓았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나의 신앙 역사에 무슨 기록을 남겨 놓았을까.... 하나님이 가지신 행위 의 책에는(계20:12) 어떤 기록이 있을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②.하나 하나의 단계 마태복음 6: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 에 족하니라\\\\\\\"고 했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한다. 어제의 일은 어제로서 족하 고, 오늘의 일은 오늘로서 족하고, 내일의 일은 내일에 족하다는 것이 다. 어제의 일을 오늘에 하려 들지 말고, 내일의 일을 오늘에 앞당겨 하 려 들지 말고, 또 오늘의 일을 미루어 내일에 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 시간의 흐름은 어제를 지나 오늘에 이르고, 오늘을 지나 내일로 간 다. 어제를 지나지 않고서 오늘에 이를 수 없고, 오늘이 없는 내일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어제는 오늘을 위한 단계이고, 오늘은 내일을 위한 단계이다. 신입생 여러분, 여러분들의 오늘의 입학은 내일의 단계를위한 과정입니다. 여러분들이 새로이 입학을 한 오늘의 초, 중, 고, 대학의 단계를 잘 다지지 못하면 다음 단계인 내일의 단계를 위해 도약할 수가 없습니다. 내일을 위해 다음 단계로 도약하려고 뛰어 오르면 잘 다져지지 못한 여러분의 발판이 기초가 약해서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제, 오 늘, 그리고 내일』 바로 이 도약을 위한 하나 하나의 단계를 잘 다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벧후 3: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 시간의 흐름 속의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주께서는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 같이 사용하신다고 했습니다. 물론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시요, 시작과 끝이신 주님만이 가 능한 시간 사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도 주님처럼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 같 이..... 값지고 효용성 있게 사용합시다. 하루에 주어진 24시간은 누구에 게나 다 같은 시간입니다. 세월을 아낄 줄 아는 자가 됩시다(엡5:16) 본문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 라\\\\\\\"고 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변함없는 그분을 본받아 사랑으로 심고, 변함없는 그분을 본받아 믿음 으로 심고, 변함없는 그분을 본받아 소망으로 심자. 본문 5절에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변함없는 그분의 약속이다.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아니하신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그분의 변함없는 도우심으로 담대히 나가자. 사람 이 내게 어찌하리요? 변함없는 그분의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하고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의 시간의 흐름 속을 힘차게 달리자. 역사의 흐름 속에 사랑으로 심 은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자.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 시간의 흐름을 값지게 사용하기 위해 하나 하나의 매듭을 잘 마무리 하자. 하나 하나의 단계를 튼튼히 다지자. 내일을 향해 더 높이 도약하 기 위해 튼튼히 다져 나가자.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 시간의 흐름이 끝나는 날 저 하늘 저 천국에서 사랑하는 주를 만나 뵈오리라. 그 주님과 함께 살리라. 요한 계시록 21:3-4절에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 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 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했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는 때.....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 역사의 흐름이 하나님에게 서 끝나는 날이다. 바로 영원 무궁한 세계의 시작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 영원 무궁한 세계를 소망하며,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의 시간 역사의 흐름 속에 내게 주어진 나날을, 내게 주어진 사명을, 내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이루어 나갑시다. 아름답게 가꾸어 나갑시 다.
여호수아의 도전/ 수1:1-9/ 졸업설교/ 2011-02-15
여호수아의 도전 수1:1-9 찬: 344,340,341장 여호수아의 일대기는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찬 생애였다 그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과 도전은 학교를 졸업하는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1, 주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모험과 도전은 자칫 잘못하면 인생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신중함이 요구되며, 무엇보다도 주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호수아가 담대히 모세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의 뜻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무모한 도전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되기 쉬우므로 먼저 주의 뜻을 성찰해야 한다. 2, 주를 온전히 의뢰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광야 40년 동안 주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심을 목도했기 때문에 그분을 온전히 의뢰할 수 있었고, 이것이 그에게 유일한 큰 힘이 되었다. 주는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에게 퍼난처가 되시고 그 능력이 되신다. 따라서 성도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생각 등을 버리고 주를 온전히 의뢰하도록 힘쌔야 하겠다. 3, 주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폐셔서 그들의 길을 평탄케 하시고 형통케 하시기 때문에 꿈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서 도전하는 사람들은 철두철미 주의 말씀을 순종토록 힘써야 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사울은 특권을 부여받았음에도 불순종함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성공을 위한 확실한 에너지는 순종이다. 졸업은 한 과정을 마치고 다른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절차이다. 주 안에서 새로운 꿈을 가지자.
여호수아의 도전/ 수1:1-9/ 졸업축하예배설교/ 2010-02-23
여호수아의 도전 수1:1-9 찬송 344,340,341 여호수아의 일대기는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찬 생애였다 그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과 도전은 학교를 졸업하는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1, 주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모험과 도전은 자칫 잘못하면 인생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신중함이 요구되며, 무엇보다도 주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호수아가 담대히 모세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의 뜻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무모한 도전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되기 쉬우므로 먼저 주의 뜻을 성찰해야 한다. 2, 주를 온전히 의뢰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광야 40년 동안 주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심을 목도했기 때문에 그분을 온전히 의뢰할 수 있었고, 이것이 그에게 유일한 큰 힘이 되었다. 주는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에게 퍼난처가 되시고 그 능력이 되신다. 따라서 성도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생각 등을 버리고 주를 온전히 의뢰하도록 힘쌔야 하겠다. 3, 주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 폐셔서 그들의 길을 평탄케 하시고 형통케 하시기 때문에 꿈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서 도전하는 사람들은 철두철미 주의 말씀을 순종토록 힘써야 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사울은 특권을 부여받았음에도 불순종함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성공을 위한 확실한 에너지는 순종이다. 졸업은 한 과정을 마치고 다른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절차이다. 주 안에서 새로운 꿈을 가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