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가장 좋은 스승이신 예수님/ 요13:12-17/ 2010-05-14
가장 좋은 스승이신 예수님 요13:12-17 사람이 살아가는데 막대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첫째의 사람은 바로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는 부모님입니다. 좋은 부모 훌륭한 부모를 가진 자녀는 좋은 환경에서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한다면 그 밑에서 자란 자녀들의 삶이 결코 복된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이 성장하면서 누구와 사귀며 누구와 친구로 삼느냐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면 그 역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친구나 악한 자를 친구로 삼아 살아가면 결국 그 사람도 나쁘고 악한 자가 될 소지가 많습니다. 더불어 나를 가르치신 선생님이 어떤 선생님이냐에 따라 삶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친구라는 영화가 한국 영화의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1981년 부산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서 일어난 일로 시작됩니다. 내용을 보면 야비하게 생긴 40대 중반의 교사가 교단에서 내려오더니 한 학생의 뽈을 세게 꼬집어 잡고 나머지 손으로 한 쪽 뺨을 후려갈깁니다. 그리고는 "다음!"하고 다른 학생을 부르고는 교사가 그 학생에게 묻습니다. " 느그 아부지 뭐하노?" 학생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 회사 다닙니다."교사는 눈을 부릅뜨고 호통칩니다."이 놈아, 느그 아버지는 상사에게 굽신 거리면서 돈을 벌어와서 널 공부시키는데, 니 놈은 공부하는 꼴이 이게 뭐꼬? " 그리고는 주먹을 날립니다. 그리고는 "또 다음 나와" 느그 아부지는 뭐하노?""장의사요" "느그 아버지는 죽은 사람 염하고 오만 고생 다해 너 공부시키는데 성적이 이게 뭐꼬?" 그리고 또 한방 먹입니다. "느그 아버지는 뭐하노?" 그 다음 학생에게 묻습니다. 그 학생은 망설이다가 "건달입니다" 그러자 선생은 또 한방 날립니다. 학생들은 어느 누구도 교사의 폭행을 피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맞습니다만 마음속에서는 반항심이 불일 듯 합니다. 그 선생님은 자기 딴에는 학생들을 잘되라고 때렸겠지만 아이들을 개 패듯이 때렸기 때문에 심령이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 둘은 건달이 됩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이며 그 당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학생이 선생을 잘 만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인생 전체가 행복하고 못된 선생님을 만나면 인생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선생님을 만나도록 기도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좋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우리나라 선생님 중에서 제일 훌륭한 선생님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세종대왕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에게 글을 가르쳐 주어서 무식에서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세상 "세" 자요 종자는 으뜸 "종", 마루 "종"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선생님이 세종대왕이라는 것입니다. 그 세종대왕 선생이 태어난 날이 5월15이므로 오월15일을 스승의 날로 제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선생이 세종대왕이라면 이세상과 저 세상, 지금세상과 오는 세상을 합해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 누구일까요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저와 여러분들의 선생님이신 예수 선생님이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은 우리의 참 선생님이시오 참 교사로서 우리에게 바른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가르치심은 분명 그 당시 선생님이었던 랍비들과 달랐습니다. 그렇기에 마7:28절로 보면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고 하였던 것입니다. 참 선생님이라고 하면 마땅히 가르칠 것을 가르치되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교사는 가르침에 그 사명이 있습니다. 가르침이 없는 교사는 교사 일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교사로서 그의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복음서의 말씀은 모두 그분이 가르치신 내용들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분명 랍비들과 달랐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만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가르치심은 4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그 첫째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사람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을 알 때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에 존재에 대하여도 잘 모릅니다. 죄인 된 자기를 모릅니다. 멸망 속에 있는 자신을 모릅니다. 죽음의 길을 가고 있으며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모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기본적인 것을 배우지 않고 어떻게 안다고 하겠습니다. 기본적인 지식이 갖추어지지 않는 데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배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바른 지식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잠1:7절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9:10절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여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그러므로 호세야 선지자는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느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주님은 그 백성인 우리들에게 오늘도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바른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도 이제 그 분의 가르치심을 받았으니 우리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만이 교사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참 선생님이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분부이십니다.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둘째로 그 분은 교사로서 생명을 얻는 방법 즉 구원의 길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모든 지식과 영화와 모든 것을 다 소유한다고 할지라도 생명을 잃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생명을 얻고 그 다음에 세상을 대처할 수 있는 지식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살게 하는 것이 교육이고 사람에게 생명의 길과 생명의 방법을 제시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교사의 사명입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얻는 길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 진리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생명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분이 주시는 생명을 소유하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요5:24절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은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6장47절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삶의 길은 제쳐놓고 어떻게 하면 잘 살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보다 뛰어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가르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 생명을 얻는 길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생명의 풍성한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사들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것이요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생명을 살려야 하는 교사가 오히려 생명을 실족시키고 구원의 진리를 바로 증거하지 못한다고 하면 이는 참 교사 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 교사로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 놓아 죽으심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스승이 없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참 교사로서 섬김의 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분은 자신이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도리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분명 섬김을 받으셔야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이 땅위에서 세워진 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사람의 교육을 받고 교사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그 분이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을 섬기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으로도 보면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드시다가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기셨습니다. 사람의 발을 씻기는 일은 종이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베드로가 나의 발은 씻기실 수 없습니다 라고 했을 때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고 하시고 모든 제자의 발을 씻기시고 그 씻기신 연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느니라 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철저히 실물 교육과 함께 모범 교육을 행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육방법을 보시고 저희 랍비와는 다르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선생님이라고 일컷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교육을 하였는가를 보십시오 오늘날의 교사들과 흡사한 점이 많다는 점을 인식하실 것입니다. 마23장1절로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고 주님은 섬김이 없는 교육 본이 되지 못하는 교육에 대하여 얼마나 엄히 문책을 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교육은 철저하게 모델 교육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메사에 본을 보이시며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교사가 훌륭하면 그 교육을 받은 제자들도 훌륭한 제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가 본이 되지 못하고 인격적으로나 삶에 경건을 잃어버리면 그 제자들도 형편없는 제자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르치신 주님 얼마나 훌륭하신 선생님이십니까 우리는 바로 그 분으로부터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과 윤리를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선생에 그 제자라 했듯이 우리도 좋은 섬김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가르치셨듯이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본을 보이며 살아야 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특별히 어린 생명들을 지도하는 우리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이 가르치는 어린 생명들에게 바른 섬김의 도리를 행함으로 가르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교육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나요 17절 말씀으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였으니 주님의 인정과 축복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끝으로 주님은 교사의 사명을 감당하시매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충성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 요한13장1절 이하로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 넘기려는 계획을 아시면서도 가롯 유다의 발을 씻겨 주셨고 그의 입맞춤에 응하셨습니다. 그 분은 교사로서 제자의 그런 악한 잘못도 용서하시고 그런 제자에게도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교사는 전자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생명을 구원시키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생명을 지키고 구원하는 일에는 생명의 바쳐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치노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사들이 과연 자기의 생명을 바쳐 자기가 가르치는 제자들을 지키고 자신의 생명까지 바쳐서 그들을 온전히 가르치는 교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사는 교사다워야 합니다. 교사는 정말 스승으로서 존경을 받을 만 해야 합니다. 죽도록 자기를 희생하며 제자를 가르친다면 그 제자는 정말 훌륭한 제자가 될 것입니다. 요새 학교를 7판이라고 합니다. 1)교장 선생님은 죽을 판 ,2) 교감선생님은 살얼음판 3) 선생님은 이판사판 4) 학생들은 개판 5) 교실은 난장판 6) 장학관은 닭다리 판 7) 학부모는 전전긍긍 판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표현을 했는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요즈음처럼 교육의 현장이 살벌해 지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포기한 이판 사판의 현실 속에서 이들을 감싸고 아픈 상처를 끌어안고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면 서 상담해줄 참 선생님들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자신의 뼈를 부수고 살을 찢어가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셨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수의 사람으로 변화 받게 된 것입니다. 희생의 열매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사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이 직분은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가장 귀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교사로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충성을 다 했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그 발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라면 바른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훌륭한데 제자들이 형편이 없는 제자들이 된다는 것은 훌륭하신 선생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수고와 애씀을 그냥 허비해 버리는 일입니다 분명 좋은 선생님에게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가 좋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도 좋은 제자들 훌륭한 스승 못지않는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갈6:6절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아무리 훌륭한 교사라 할지라도 시공을 초월하여 그의 제자들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서, 그의 가르치심도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유명한 스승을 만나려면 먼 길을 찾아가거나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계시기 때문에 그분께 배우려고만 한다면 먼 길을 찾아갈 필요도, 많은 돈을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됩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스승 되심이 태양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참 좋은 교사입니다. 훌륭한 선생님이십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교사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교육을 받고 지도를 받는 사람일진데 우리 모두도 예수님 못지 않게 좋은 성도가 되십시다 실력 있는 성도가 되고 은혜로운 성도들이 되십시다. 그리고 우리도 좋은 교사들이 되어 좋은 신앙의 제자들을 만들어 주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럽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장 훌륭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마7:28-29
가장 훌륭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 마7:28-29 요즘 T.V를 보면 이 땅의 많은 부모들이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에 실망하고 자녀들을 위하여 캐나다로 교육이민을 떠난다는 뉴스가 자주 나옵니다. 어쩌다 우리나라 교육이 이렇게 되었나 생각하면 한숨이 저절로 나옵니다. 플루다크 영웅전에는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생명을 보람 있게 하는 것을 배웠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스승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로서, 교육이 온전해지려면 훌륭한 스승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교육은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배우는 학생, 그리고 학부형이 삼위일체가 될 때 최대의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은 점점 암울해져 가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교육이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가르치지 못하고, 지식의 전달에만 편중되어 있으며, 물질만능 주의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육이 나갈 방향을 잃은 채 혼돈과 방황을 일삼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들은 이럴 때일수록 가장 훌륭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스승으로서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왜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훌륭하신 스승이신가에 대하여 말씀드림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훌륭한 스승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 가장 인격적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무엇보다 인격적인 사람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스승이 인격적이어야 그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학생들도 인격적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주님처럼 인격적인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히브리 기자는 주님에 대하여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심으로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우하실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최고의 인격자이십니다. 2. 가장 지식이 풍부하시기 때문입니다. 잘 가르치는 스승은 아는 것이 많아야 모든 것을 골고루 조화있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모든 것에 대하여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자연을 통한 교훈이 많았는데 공중의 새, 들의 백합, 알곡과 쭉정이, 가라지, 물고기 등 그 가르침이 다양했습니다. 또한 인간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하지 악한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진실한 사람인지 가증한 사람인지, 필요한 사람인지 불필요한 사람인지 모두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삶의 비결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조건으로 팔복을 말씀해 주셨고, 대접받고자 하는 자는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과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뽑은 후에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뽑을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미래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주님 자신이 핍박을 받으실 것과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과 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실 것 등 미래에 이루어질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이 자연과 사람, 그리고 삶의 방법과 미래에 대하여 모두 아실 수 있었던 까닭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전지하심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사11:1-2)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 가장 잘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많다고 하여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치는 것에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매우 잘 가르치는 스승이셨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평가를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사렛 사람들은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13:54)라고 하면서 주님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주님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막11:18). 주님께서 얼마나 잘 가르치셨는지 어떤 때는 주님의 교훈을 듣는 무리들이 사흘씩이나 집에 가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습니다(마15:32). 심지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보낸 하속들 조차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육은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켜야 하고,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며, 죄인이 의인이 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도적질하는 사람이 구제하는 사람으로, 강퍅한 사람이 부드러운 사람으로, 증오의 사람이 사랑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되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 그 마음이 변화되어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남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구두쇠였던 삭개오가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제자들은 가장 무식하고 무능한 사람들이었으나 주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가장 유식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변화를 받는 사람이 허다한 것을 보면 주님께서는 이 세 상에서 가장 잘 가르치시는 스승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4, 가장 사랑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왜 오늘날 제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참된 스승이 적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사랑하시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리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 하는 것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셔서 그들을 참된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하셨으며(마9:36), 밤낮 없이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가르치셨고(막1:38), 심지어는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사랑으로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요21:15-17). 또한 주님께서는 친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1)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실 정도로 사랑이 많으신 분임을 직접 나타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가장 위대한 스승이 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을 실천할 때 세계평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전쟁이나 미움, 증오와 보복은 또 다른 전쟁을 낳는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끊임없는 전쟁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끊는 것임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피의 전쟁을 불러일으킨 자들은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금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5. 가장 능력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훌륭한 스승이 많이 있지만 인간들을 어려움에서 건져줄 수 있는 스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즉, 세상의 스승들은 가르치는 일밖에 할 수 없으나 우리 주님은 친히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스승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으신 스승이십니다. 주님을 만난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이 고침 받는 기적을 체험했고(막7:24-30), 회당장 야이로는 죽은 딸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막5:22-43). 그리고 무능했던 주님의 제자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유능한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행1:8).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하셨으며, 병든 자를 고쳐 주셨고, 슬픔과 절망에 처한 자에게 소망을 주셨으며, 무능한 자들을 유능한 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6. 언제 어디서나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사라 할지라도 시공을 초월하여 그의 제자들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서, 그의 가르치심도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 행하심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적인 권위를 가지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르침은 한 세대에서 끝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현재적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성령으로 믿는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임재해 계십니다. 이 성령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치심으로 선한 목자로서의 역할을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정치가, 경제가, 예술가, 발명가 과학자, 문학가, 사회사업가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유명한 대학에서 배웠다는 것과 유명한 스승 밑에서 수학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세계 최고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우는 사람들로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욱 더 큰 긍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육은 참된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참된 교육을 할 수 있는 스승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어 사랑과 능력으로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세상의 유명한 스승을 만나려면 먼 길을 찾아가거나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계시기 때문에 그분께 배우려고만 한다면 먼 길을 찾아갈 필요도, 많은 돈을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됩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스승 되심이 태양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빨리 만나면 만날수록 여러분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서 여러분의 삶이 주님으로 인하여 더욱 윤택해지고 아름다워지시길 축원합니다.
가장 훌륭한 스승이십니다/ 요13:12-15/ 2015-05-15
가장 훌륭한 스승이십니다 요13:12-15 매년 5월 15일은 스승의 날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스승의 날의 유래는 1958년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세계 적십자날을 맞이할 때마다 병중에 계시거나 퇴직한 교사들을 위문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던 것을 1982년에 세종대왕의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스승에 대해서는 각별한 존경심을 가져왔고 군사부일체라고 해서 스승의 권위를 임금님과 부모님의 권위와 동일시 해왔습니다. 옛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처럼 아름다운 사제관계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공교육이 추락하고 사교육이 성황을 이루고 있고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없고 학생은 많으나 제자는 없다는 말이 입에 오르고 있고 교실붕괴, 학교붕괴라는 말까지 나오는 안타까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나라가 부강하여지려면 무엇보다 교육이 잘되어야 하고 교육이 잘되려면 교육을 담당하고 계시는 선생님을 소중히 여기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전의 학교교육은 지식교육만이 아니라 인성교육까지 감당해 왔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참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깨우쳐 왔습니다. 가르침이 없이 성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신대학교 총장이셨던 김재준 박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단에서 10년 봉직하셨으면 그분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머리에서 모자를 벗고, 20년을 봉직하셨으면 허리를 굽혀라. 30년을 봉직했으면 무릎을 꿇어라 하셨습니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참된 제자입니다. 오늘날 나의 나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스승의 가르침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가르치는 스승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스승을 존경하라 했습니다.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슴을 가르치기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가르치기에 수고하는 이들은 신상생활을 지도하는 목회자와 교사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자기를 가르치는 스승에 대하여 존경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교육이 바로 서게 됩니다. 학교에서 우리 자녀들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또한 자녀들에게 스승을 존경하도록 가르쳐 주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영적인 스승에 대하여도 존경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인격이 바로서고 신앙이 바로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스승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살전 5:12-13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은 너희가 알고 사랑안에서 귀히 여기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스승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스승에게 배운 가르침이 바로 실천하게 됩니다. 스승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 스승에 대하여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로 하여금 이것을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근심하게 라는 말에는 탄식하고 원망토록 괴로워한다는 뜻입니다. 스승에게 불순종하고 거역하면 탄식하여 괴로움을 가지게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할 때 조금 어려운 일을 당하면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제 고집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살았습니다. 모세는 탄식하며 괴로워 했습니다. 영적지도자에게 순종하라. 불순종하고 거역하면 탄식하고 괴로움을 당하게 만듭니다. 4) 스승과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것을 함께 하리라 마음 속으로만 스승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스승에 대하여 잘 대접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도리를 세밀하게 가르쳐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승에 대한 존경과 순종없이는 교육이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승에 대한 바른 자세없이는 신앙이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승이 존경을 받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날을 지나면서 아름다운 사제간의 윤리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인류의 참된 스승이 한분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시고 훌륭하신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13절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세상에는 교육지도자들, 정치지도자들, 경제 지도자들 등 수많은 스승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시고 유일하게 하늘에서 오신 인류의 참된 스승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국과 지옥의 비밀을 알고 오신 스승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3: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참 생명의 길로, 은혜의 길로, 축복의 길로, 영생의 길로 확실하게 인도해 주시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인생의 가장 훌륭하고 위대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수천억만 인생들이 생의 변화를 받고 새출발했습니다.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인생을 산 것처럼 이 지구촌안에 인류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생의 변화를 받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촌 땅끝까지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인류의 참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회개하고 변화받아 새로운 인생길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에게 삶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15절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의 참된 스승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닦아 주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배웠다고 교만하고 높아지고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탐욕을 버리고 겸손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줌으로 섬김의 삶에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으로 친히 본을 보여주신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또한 우리들의 스승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위대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삭개오도 변화시키었고 창기였던 마리아도 놀라운 변화를 주었습니다. 교회안에서도 지식만 전달하는 교사들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사랑을 쏟아주는 교사들은 제자들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삽니다. 이론적으로만 가르치는 머리로만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일일이 어린이들을 보살펴주고 안아주는 가슴으로 대하는 사랑만이 오랫동안 어린이들 가슴속에 남아 그들의 인생을 변화시켜 주게 될 것입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오늘 우리는 땅위에서 가르침을 주셨던 스승님들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영혼을 인도하며 가르치는 영적 스승을 존경하라 순종하고 복종하라 좋은 것을 함께 나누나 사랑하고 귀히 여기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 인류의 참된 스승.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 되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사랑과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류의 참된 스승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함으로 구원과 영생의 길로 인생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용래 목사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 빌3:17-21/ 차용철 목사/ 2007-01-05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 빌3:17-21 <序言>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바른 신앙을 교란하는 자들을 유대의 교사들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율법 관습과 전통을 강조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혼돈되게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끼고 그들을 멀리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자들이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고 하늘에 속한 자신과 자신의 동역들을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本論> 1.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17)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전11:1). 뿐만 아니라 17절 뒷부분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암시합니다 (2:25,29).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뿐 아니라 신실한 동역자들을 본받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를 위해 헌신하려는 생애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얻고 발견되기 위해 세상의 자랑하던 이전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고 그 안에서 주어질 하나님의 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범사에 양심을 따라 행하는 자였습니다 (행23:1). 오늘날 자기 양 떼를 향해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자신의 신앙, 자신의 윤리적 삶을 모방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된 목자일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원수들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18-19) 바울이 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모범과 반대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개탄입니다. 그들은 3:2부터 바울이 유대인들을 대적자들로 염두에 두었음을 생각할 때 본문의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는 유대인들을 주고 한 말 같습니다. 로마서9:1-5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에 대해 표현하는 슬픔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구원을 먼저 얻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므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못하는 것을 생각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율법에 의해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하고 (신21:23),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는 교훈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조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허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일 수 밖에 없습니다 (19절). 그들은 믿지 않는 자에게 가해질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들의 윤리적 가치관을 지적합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19절). \\\'저희의 신은 배\\\'라는 말은 그들의 율법적 범주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들은 정결법 특히 뱃 속에 무엇이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가 우상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는 말은 할례를 두고 한 말입니다 (3:2). 부끄러움의 헬라어 아이스퀴네(αισχυνη)는 사람의 벌거벗음이나 사람의 은밀한 곳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할례는 남자 아이의 8일만에 성기의 표피를 돌칼로 베는 의식입니다. 당시 헬라인들의 운동경기는 옷을 벗고 했고, 로마 문화 자체가 목욕문화였으며 노동하는 종들을 거의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성들의 할례한 모습은 놀림거리가 되었고 정욕적인 사람들로 멸시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헬라 문화에 동화된 자들은 수술하여 할례 자국을 없애려 하기도 했습니다. 할레 문제 때문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꺼려 했기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논쟁을 통해 이방인이 그리스도교에 들어올 때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동의를 얻어냅니다 (행15장). 유대인들은 그 부끄러운 것을 자랑삼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민이라고 자랑하고 그것을 행해야 구원 얻는다고 합니다. 바울을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는 말은 뒤에 나오는 20절의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는 말의 반대 개념입니다. 그들은 종말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 삶을 목표로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지 않는 자는 먹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육욕을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말세에 사람들이 온통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디모데후서3:1-5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3. 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20-21) 빌립보시(市)는 마게도냐에 속한 지역입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입니다. BC356년 마게도냐(마케도니아)왕 빌립2세(Philip∥,BC359-336)가 이웃하고 있는 야만인들의 나라 드라케에서 나라를 빼앗아 새 도시를 건설하면서 그 곳 이름을 자기 이름을 본따 \\\'빌립보\\\'라고 칭했습니다. BC168년에 로마에 의해 정령당해 로마에 편입되었습니다. BC42년 로마에 내전이 일어났는데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승리를 하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을 종식하고 황제가 되어 빌립보에 안토니우스의 해산된 군대와 퇴역한 자기 군대를 정착시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은 이탈리아 본토 로마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시작합니다. 빌립보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고 로마 시민으로서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곧 빌립보는 로마에서 떨어져 야만세계에 있으면서도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그림에 하늘나라와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대입시키고 있습니다. 빌립보시가 로마에서 떨어져 야만 세계에 있으면서도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권위와 혜택을 누리며 로마의 일부인 것에 자부를 갖고 사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하늘을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속적이고 마귀적인 세상 문화와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 나라의 법과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생각을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복종케 하실 분입니다 (고전15:27-28). 그의 재림 때에는 만물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6-17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의 약한 몸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5:42-44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도 하늘에 시민권이 있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는 당연히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 피나는 싸움을 합니다. 그 싸움을 해 본 사람은 피곤합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 속에 도저히 뿌리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오셔서 만물을 굴복시키고 우리 몸을 굴복시킬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을 고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롬7:15-25). <結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배로 신(神)을 삼고 부끄러운 것을 영광삼고 땅의 일만 생각하며 삽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인생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되는 삶입니다. 저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를 닮아 가려 합니다. 그래서 그의 영광에 참여하려 합니다.
거짓 교사와 거짓 가르침/ 고후11:1-15/ 2001-11-01
거짓 교사와 거짓 가르침 고후11:1-15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포스트모던 후 현대시대라고 합니다. 이성과 합리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세상이 많이 좋아졌고 편리해 졌습니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후 현대 사회로 들어가면서 사람들이 이성의 발달과 과학의 발달로 생활이 많이 편리해 졌지만 자기의 정체감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어떤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생활은 많이 편리해 졌는데 사람들이 많이 무력해 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이 발달한 미국의 정신병자들을 상담하는 것을 보면 거의 65%이상이 우울증 환자입니다. 그렇게 사회가 편해졌고 살기 좋아졌지만 그들의 내적으로는 더욱 공허해 졌습니다. 이성과 합리가 채워질 수 없는 것 과학과 기술이 채워줄 수 없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부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권을 추구합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추구하는 시대로 점점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후 현대사회의 특징입니다. 진리와 윤리의 상대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더 이상 절대 진리가 존재하지 않고 절대 윤리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사회로 넘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치관에 혼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윤리가 상대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윤리적이다 비윤리적이다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잣대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도덕성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이러한 영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뉴에이지 운동입니다. 이름을 달리해가면서 사회 각 분야에 아주 무서운 속도로 퍼져갔고, 또 이미 퍼져가고 있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입니다. 그 안에 내용이 “네 안에 영성을 개발하라. 너도 신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초월적인 명상을 하고 음악이나 미술이나 모든 분야에서 자기 안에 있는 잠재력과 통찰력을 개발하고 자극하기 위해서 너도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사람들을 격려하고 더 많은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 소위 말하는 동기부여를 하는 강사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듣게 하는데요, 동기부여를 하는 그 사람들의 학문과 영성이 많은 경우에 뉴에이지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도 할 수 있다. 당신도 신적인 능력으로 이런 것을 감당해 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영성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이런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됨으로 영성이나 직감이나 감성에 관심을 갖으면서 종교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옵니다. 교회에 와서 그런 갈증 속에 주님을 만나고 그 영의 만족을 누리고 하는 축복의 길을 걷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종교집단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됩니다. 아주 전형적인 예가 한국에서 발생했던 천존회입니다. 7월 초에 이것이 사회문제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80년대 초에 현대직장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이런 스트레스 해소나 또 무기력한 것을 회복하기 위한 기 훈련을 하면서 시작된 모임입니다. 이런 것이 점점 발달하면서 거기에 잘못된 영성이 끼어들고 90년도에 들어가면서 시한부 종교회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기 단련을 하는 것도 무언가 힘을 얻어서 능력 있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드러난 내용을 보면 대출사기로 비롯한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이제까지는 사회에 소외된 계층들이 어떤 돌파구를 찾다보니깐 이런 사이비 집단에 연루되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뚜껑을 열어보니깐 소위 말하는 화이트칼라 계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급 장교들, 변호사, 의사, 교사, 회계사, 기자, 은행원들이 거기에 연루되어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통해서 가정이 파탄되고 개인이 파탄되고 하는 그런 경우를 겪게 됩니다. 지금 후 현대사회를 들어가면서 영적으로 더 혼탁해져 갑니다. 이런 시대가운데 교회역시 그런 사회적인 변화 속에 거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밖에서의 좋지 않는 영향으로 교회도 타락해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풍조와 기독교의 교리와 교묘하게 혼합되어서 교회가운데 이상하게 몰고 가는 그런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건전한 교회가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변해져 버리는 그런 일들도 자주 봅니다. 지난 화요일부터 앞으로 며칠 동안 아침마다 우리 교회가 고린도후서 10-13장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주요 하는 내용이 이야기가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변증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사도라고 하는 자신의 공명심 때문에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그런 개인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자신의 사도됨을 그렇게 주장하고 또 잘못된 가르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런 이유가 사도 바울이 전했던 은혜의 복음과 건강하게 세워진 그 교회가 자칫하면 거짓교사와 거짓 가르침에 의해서 이단화 되어버릴 수 있는 그런 위험이 있기 때문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사도권이 인정되고 또 다시 인정되면서 사도 바울이 가르쳤던 그 복음이 올바르게 세워지고 교회를 세워야 했기에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사도권을 주장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거짓교사와 거짓가르침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거짓교사 거짓가르침이 어떤 모습을 띄는지 나누어 보고 우리가 이 시대가운데 거짓교사와 거짓가르침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지 그래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우리 가정을 보호하고 이 사회와 교회를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인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올바른 교육과 올바른 영성은 교회가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책임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다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거짓교사와 거짓 가르침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2-3절까지의 말씀을 참조해서 보면 거짓교사와 거짓 가르침은 예수그리스도를 교회로부터 떨어지게 만듭니다.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하게 하고 그런 가르침을 하게 됩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어떤 곳에서 예수님은 모퉁잇돌이다. 교회는 그 모퉁잇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있는 그런 존재이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설명을 합니다. 이 땅의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예수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았을 때 교회와 예수그리스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향해서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또 교회의 주인이 예수그리스도이며. 교회의 창시자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교회의 완성자와 교회를 계속 세워 가시는 분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에 나타난 베드로의 고백을 보고 기뻐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내가 그 반석위에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니” 이런 뜻입니다. 그런 것을 보았을 때 교회의 시작과 교회를 계속해서 세워나가게 하시는 분은 예수그리스도라는 분이십니다. 오늘 여기서 사도 바울이 썼던 것처럼 예수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입니다. 또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만나야 합니다.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를 썼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옵니다. 들어와서 신부되어 있는 교회의 정결함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중매한다는 것은 에스코트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딸을 잘 키워서 정결하고 깨끗하게 잘 키워서 결혼을 시킬 때, 신랑에게 정결하게 키운 딸을 에스코트에서 넘겨주듯이 사도바울이 자기의 임무를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잘 양육하고 진리로 정결하게 잘 보존해서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께 잘 에스코트하고자 하는 그런 열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열심은 자세하게 말해서 질투입니다. 혹시라도 거짓된 것이 와서 교회를 더럽히고 교회가 예수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향해가는 관심을 조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돌릴까봐 이끌어 가는 그런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진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진실함과 깨끗함에 대한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여기서 “진실함” 이것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추적해 보면 “한 방향으로 행해서 배가 향해가다”라는 단어로 연유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한 방향을 향하서 온 정성과 온 마음과 뜻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가는 그런 헌신을 방향을 흐트러뜨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깨끗함”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여기에서의 거룩함은 우리의 생활에서의 거룩함을 말하지만 교리의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 처녀가 마치 자기의 정조를 지키면서 신랑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교회가 교리적으로 정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결함에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런 교회이어야 하는데 거짓교사들이 들어와서 예수님께 가야할 헌신과 영광과 마음을 살짝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자리를 잘 잡은 미국에서도 아직까지도 그런 사람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자칭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10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예수라고 재림주라고 하는 분이 10명이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자기가 교주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황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말씀을 듣는 자나 전하는 자가 다 굴복해야 하는데 교주는 자기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절대적인 자신을 절대화 하고 신격화 하고 더 높이 신봉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이나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마음껏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교리를 만들어 내서 그것을 집중적으로 교육을 합니다. 그런 것들은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이단의 역사를 보면 아주 정통적인 역사가 있죠. 존 스미스 2세가 몰몬교를 시작했는데 아무리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고, 제가 JMS 정명석 모임에 한번 가 보았거든요. 거기에 따라 다니는 대학생들이 많습니다. 저도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직장 다닐 때 가보자고 해서 한번 가보았어요. 정명석이 사람들 앞에서 뭐라고 중얼중얼 해요. 그러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저 분이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고, 말도 저렇게 어눌한데, 굴에 들어가서 성경을 100독인지 200독인지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근거로 성경을 자신들의 견해대로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는 예수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정명석을 올려놓고 그들을 자신의 선생님이라고 추종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안 보입니다. 전형적인 이단의 특성입니다. 어느 교회를 갔는데 예수가 잘 보이지 않는다, 메시지에 예수가 없다라고 한다면 물음표를 달아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멀어지게 하고 예수를 가리고 교회를 교회답지 않게 하는 것이 이단적인 가르침이고 이단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정말 교회 가운데 경계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가운데 가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냐면, 목사의 권위가 교회 전체를 주관하는 교회는 위험한 교회입니다. 그 분이 올바르게 주님 앞에 서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잘못된다면 교회에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교회안에 분명한 영적인 질서와 권위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권위주의는 교회 안에 뽑혀 나가야 됩니다. 두 번째로 거짓교사들은 교회의 건강한 교리를 혼돈 시키는 그런 일을 합니다. 중복되는 말씀이지만 자세하게 나누어 보길 원합니다. 4절 말씀에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여기에서는 조롱조로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참 잘도 받는구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사도 바울이 전하지 않는 예수에 관해서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하지 않는 성령과 복음을 전했습니다. 진리를 혼동하게 합니다. 교회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런 방법가운데 자칫 자신이 예수의 위치에 올라가는가 하면 다른 예수를 소개함으로 올바른 예수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예수, 본문에는 또 다른 예수라고 말하고 있는데 언어를 보면 사도바울이 전한 예수와 라이벌이 되는 다른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참된 예수님의 대한 교리를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교리는 지금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양성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있어서 특이한 분이셨습니다. 100% 하나님이시면서 100%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수치를 이야기 하면 틀린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100% 인간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여기에 가르쳤던 예수가 어떤 예수인지 바울학자나 많은 신학자들이 연구를 해서 발표를 하고 합니다. 바울 신학의 아주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F. S. 브루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브루스가 고린도교회가 거짓교사로서 배웠던 예수가 어떠한 예수인가 추정을 하면서 영지주의적 예수였을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영지주의라고 하면 그 당시에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이분화 된 영적인 세계 이데아를 바탕으로 참된 것이고 거룩한 것이지만 메타나 물질의 세게는 추악한 것이고 포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와 연합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했느냐면 영적인 것은 다 선하고 아름답고, 육적인 것은 천하고 더러운 것이다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영지주의자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했느냐면 거룩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믿는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어떻게 입을 수 있었겠는가 하며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육의 몸으로 존재한 것은 잠깐 나타났을 것이고 현현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육을 입고 30년 동안 존재했던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입니다. 그런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쳤습니다. 또 왈프 마틴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이 이 부분을 아주 자세하게 일곱 가지의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을 하는 것을 제가 읽어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예수그리스도는 걸어 다니면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소개했을 거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 당시에 보면 돌아다니면서 예언을 이야기 하고 기적을 일으키면서 그들로부터 사례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런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걸어 다니면서 예언을 하고 병을 고쳐주고 기적을 일으키는 디바인 맨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 디바인 맨이라고 하였을 때 100% 인간이며, 100% 신이라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사람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포지션을 취하던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그리스도와 다르게 이야기 했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100% 하나님, 100% 인간, 200의 예수 그리스도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그러합니다. 이것이 정통입니다. 이것에서 벗어난 것은 어떠한 아름다움과 어떠한 기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단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영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영이라고 할 때 왈프 마틴의 말을 빌어보면 사도바울이 전한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령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일으키는 영을 가르쳤을 거라고 그 사람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영, 우리가 영성을 추구할 때 잘못된 영을 추구할 때가 많습니다. 또 겉에 드러난 영을 쫓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또 제가 봤습니다. 저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룩한 진리 밖에서 이러한 능력만 쫓아다니다가 사단의 영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영도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고 예언을 말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이단의 특징을 보면 새로운 가르침을 한 다음에 꼭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 신유와 기적과 표시입니다. 그런 기적을 일으키면서 이상한 가르침을 하니깐 사람들이 현혹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문제에 급급해서 그것을 쫓아다닙니다. 다른 영을 받는지도 모르고서 말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과 악력의 차이는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은 능력을 주셔서 병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죄에 대해서, 의의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깨우치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의 복음과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듣지만 이성적으로 다 받아들일 수 없기에 성령께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게 하고 믿게 하고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의 해결책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런 다음에 복음에 견고한 역사 후에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신유도 허락해 주시고 성령의 은사들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건전한 성령의 역사가 빠져 있고 능력만 쫓아다니다가는 패가망신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때가 점점 악해져 가고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자기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급급해서 능력을 쫓아다닌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가정이 파괴되고 교회가 파괴되는 결과들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른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에 의해서 우리의 행위가 조금도 끼어서는 안 되는 오히려 그것은 복음을 오염시키고 구원을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내가 구원 받는데 내 행위가 첨가되어야 만이 속이 편하거든요. 내가 뭔가를 공헌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그래야만이 안도감을 위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인간의 생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가능합니다. 사도바울이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몰래 들어온 사람이 이 구원의 뭔가의 행위를 첨가해야만 구원을 받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단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구원 받고 우리가 진심으로 거듭났다면 우리가 현재 사는 모습이 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구원의 확신과 이러한 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행위를 자꾸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못할 때 구원을 잃어버린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강박관념 속에 박히게 됩니다. 헌금이라도 많이 해야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순수한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행위의 문제는 구원 이후에 문제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합당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사람들을 초청할 때 담배 끊고 오라고 하지 마세요. “피면서 오십시오, 교회 들어올 때만 잠깐 꺼 주시면 됩니다.”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담배 피고 술 먹는 것 때문에 자꾸 복음을 못 듣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이후에 문제입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아도 구원 받습니다. C. S 루이스라고 하는 유명한 평신도신학자이자, 교수였던 그는 평생 골초였습니다. 그래도 다 구원 받고 하늘나라 갑니다. 청교도적인 우리의 신앙은 참 좋습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신앙을 정경하게 하기 때문에 참 좋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런 모습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복음으로 나가는데 많은 경우에 방해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에게 강요할 문제이지 구원 받기 이전의 사람에게 강조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복음의 순수성을 우리가 잘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네 가지를 보면서 정통적으로 이단을 규명하는 기준과 잣대가 있습니다. 네 가지의 잣대가 있습니다. 여기서 벌써 2가지가 나왔습니다. 하나는 기독론에 있어서 벗어나면 이단입니다. 기독론은 이전에 말한 양성론입니다. 100% 하나님, 100% 인간. 종교혁명가로서 인성만 강조하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신론만 강조하던지 하면 이단입니다. 동일하게 신성과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 정통 기독론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상 나타났던 이단이 여기에서 넘어졌습니다. 두 번째가 삼위일체론입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 안에 삼위일체에 대한 혼란이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한 학기를 공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하나님을 섬기는데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공동체로 함께 존재하는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세분이십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하나의 공동체로 존재하시면서, 한 목적과 하나의 뜻과 한 목표대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입니다. 우리가 구약 창세기에 보면 벌써 그때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벌써 그때 함께 협력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목표를 잡고 아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도와 성령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게 하시고 깨달게 하신 공동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하나님, 동등한 위치로 일하십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이단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 같은 데서 유일신을 믿는 그들이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새 성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번역해 내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요한복음 일장에 예수그리스도가 나오는데 거기에 예수그리스도를 소문자 god로 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대문자 GOD가 아닙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하나님, 유일신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고 그 가운데 위치로서 예수그리스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이단입니다. 아주 미묘하지만 명백한 이단입니다. 삼위일체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사용할 때도 성령을 어떤 에너지 정도로 봐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오는 어떤 능력으로 본다면 이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성령을 쓸 때 인격명사를 썼습니다. 성령이 감성을 가지고 통곡하는 하나님 성령입니다. 성령하나님이 맞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골고루 동일한 위상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단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이런 부분에서 분명하게 신학적으로 정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또 세 번째로 구원론입니다. 십자가 이외에 다른 구원을 이야기 하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아버지께로 올 수 있는 것은 나를 통해서만이라는 것을 말씀하셨고 또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준적이 없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다원주의에 관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지금 종교의 다원주의가 굉장히 급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잘 받아들여집니다. 실제로 우리 생각에 좋으신 하나님이 종교생활을 잘하는 모든 분들을 다 구원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른 종교를 무명의 익명의 예수그리스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익명의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간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휴머니스트적이고 쉽게 받아들여지는지 모릅니다. 저도 그것을 보면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 저도 인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사악하게 사는 사람들은 둘째 치고 다른 어떤 종교에서 신실하고 착하게 이타적으로 사는 사람들, 다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고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하나님은 구원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고민을 했습니다. 저의 생각과 성경의 생각과 어떤 것을 취할 것인가.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성경의 생각 중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성경의 생각을 취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지금도 제 마음은 그렇습니다. “하나님 그들을 다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설교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한번도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은 다 지옥 갑니까?” 그에 대한 정답은 “나는 모릅니다.”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다.” 선하신 하나님, 절대적인 하나님이 구원할 자는 구원하고 멸할 자는 멸하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침묵하는데 자기는 끝까지 알려고 하니깐 이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침묵하면 우리도 침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꾸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거든요. 자기의 이성적인 호기심을 계속 추구하다 보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않는 것을 계속해서 추정하다 보면 이단으로 빠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만큼만 믿으면 됩니다. 대단한 겸손이고 진리의 순결함을 유지하는 그런 방법입니다. 성경에서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정경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는데 이 외에 다른 것을 성경의 권위와 함께 놓으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아무리 하늘이 열어주고 성경보다 더 위대한 말을 받아서 기록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지 성경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고린도 전서 후서 중간에 잃어버린 성경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썼던 잃어버린 편지가 있습니다. 지금 그것이 사해 사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합시다. 보니깐 이 고린도 전서 후서보다도 더 은혜로운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 같아요, 그러면 이것을 성경에 끼어 넣어야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단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이 이상으로 성경에 추가될 내용은 없다. 구원에 이르는데 충분하고 이 땅을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교육하기에 충분하다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이외에 다른 것을 경으로 인정하거나 성경의 말씀보다도 권위를 준다면 다 이단입니다. 교주의 말이 아무리 뛰어났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에서 아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가 이 네 가지의 잣대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가 타락한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거짓의 교사들은 마치 자신들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서 사단의 일을 합니다. 사단이 흉측하게 “나는 사단이다.”라고 절대 일하지 않습니다.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납니다. 교회를 가장 좋아하고 교회를 가장 위하는 것처럼 하면서 교회를 망가트리는 것이 사단의 일입니다. 자칫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단의 영향권 앞에 우리가 깨어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순수함과 정결함을 유지하고 신랑 되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은 성도의 공동체입니다. 건강한 진리를 배우고 지키는 일에 힘쓰므로 이단 사설에서 우리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공허성/ 벧후2:17-22
거짓 선생들의 공허성 벧후2:17-22 베드로는 본 서신의 3분의 1을 거짓 선생들과 그들의 멸망에 대해 할애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베드로가 북부 터어키에 있던 신자들의 영적 상태를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한 믿음의 고백 후에 이리저리 표류하는 신앙 생활은 매우 위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위합니다. \\\"나는 교인입니다. 나는 내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씻기셨으므로 나는 죽은 후에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고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사는 안일한 교인들을 염려하였습니다. 인생을 헛되이 보내는 교인들은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사는 자들입니다. 교회를 건성으로 다니며 신앙 생활을 똑바로 하지 않는 자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이런 미지근한 교인들은 성도의 사랑과 교분에서 이탈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영혼을 좀먹는 거짓 선생들에게 노출되는 위험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항상 희생자를 노립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활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자들의 환심을 확보하고 그 다음 단계로서 거짓 교리를 주입시키며 마침내 탈선의 길로 오도합니다. 베드로가 우리들에게 경계시키는 것이 곧 이러한 거짓 선생들의 수작들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헛된 약속들 이들의 입은 부드럽고 재간이 있어 청중의 마음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호감을 얻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약속들은 헛된 것들입니다. 이들은 물 없는 샘과 같습니다(2:17). 목마른 여행자가 무더운 길에서 샘물을 발견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 여행자는 한달음에 샘으로 달려가서 마실 것입니다. 참 신자들 중에는 목마른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인생길은 험난하고 고달픕니다. 그들은 거짓 선생들로부터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는 약속들을 받고는 샘물을 열망하여 더욱 가까이 나아갑니다. 거짓 선생들의 말은 목마른 영혼들의 귀에 솔깃하고 그럴듯한 말처럼 드립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자세히 알고보면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큰 소리로 약속을 해 주지만 영구적인 가치르러 가진 은혜는 전혀 건네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구미가 당기는 말을 하지만 실속은 메마르고 공허하며 무가치합니다. 스펄전의 전임 목사였던 존 질(John Gill)은 거짓 선생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습니다. \\\" 이 사람들은 빛의 천사들처럼 보인다. 이들은 의(義)의 사역자들로 가장하고, 경건한 척하며, 자기들의 지식을 과시하면서 추종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해 준다. 그러나 이들은 메마른 샘터처럼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에게 큰 실망만을 안겨준다. 거짓 선생들의 발 아래로 이끌려 가는 자들은 더럽고 찌꺼기가 가득 찬 오물을 발견한다. 거짓 선생들이 제공하는 샘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나 참된 교리가 없는 오물 투성이의 웅덩이에 불과하다.\\\" 거짓 선생들은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입니다(2:17). 단비를 갈구하는 자는 지평선 위에 두터운 안개가 광풍에 밀리는 것을 보고 기쁨의 탄성을 올립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신선한 단비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 하지만 비를 안겨 줄 것으로 기대했던 안개는 가가이 오기가 무섭게 뜨거운 태양 빛의 열기로 금방 증발해 버립니다. 베드로는 이런 현상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에 자주 경험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이런 거짓 선생들을 가리켜 \\\"바람에 불려가는 물(비) 없는 구름\\\"(유1:120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짓 선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는 말합니다.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2:17). 거짓 선생들은 어두운 지옥의 심연에서 영원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유1:13). 이들은 베드로가 이미 지적한 대로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2:10) 입니다. 유다는 거짓 선생들을 \\\"유리하는 별들\\\"(유1:13)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의(義)의 궤도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방황하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자들입니다. 거짓된 배교자들의 약속들은 힘이 있고 충동적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심리를 흥분시키는 말들을 메시지 속에 넣고 거듭 강조하며 호언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면서 그들은 물질의 축복, 자녀의 축복, 건강과 출세를 보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내세우면서 적극적이고 자신있는 믿음을 가지라고 호소합니다. 그들의 말은 응변적이고 달변이며 듣기에 재미가 있고 시원합니다. 거짓 강사들의 메시지는 구수하여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많이 아는 듯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는 능력 있는 종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우리 인생의 여러 문제들이 쉽게 풀릴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인기 좋은 사역자나 강사들을 부지런히 따라 다니면서 마음도 주고 헌금도 냅니다. 그러나 \\\"헛탄한 자랑의 말\\\"이 돈을 사랑하며 자기가 잘났다고 과시합니다. 거짓 선생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은 결코 경건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욕심이 많고 교만합니다. 거짓 선생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여 거룩한 생활을 떠나 악한 행위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킵니다. 돈과 육욕의 덫에 걸려 넘어지는 성도들의 교회 안에 많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런 풍토 속에서 역으로 더욱 큰 소리를 치며 덕을 보고 좋아합니다. 거짓 선생들은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2:18)합니다. 바울은 육체의 정욕들을 갖가지로 열거하였습니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 거짓 선생들은 특히 새 신자들을 육체의 길로 유혹합니다. 신앙 생활의 훈련이 아직 미숙한 어린 신자들은 세상에서 가졌던 나쁜 습관들과 사고 방식에 쉽게 다시 이끌릴 수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이런 약점을 노리고 새 신자들을 정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힘씁니다. 거짓 선생들은 신자들이 진리에서 이탈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자유를 약속해 줍니다(2:19). 자유의 개념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줍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들은 상당수가 노예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의 귀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들에게 와서 듣기 좋은 말로써 욕망의 충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지금부터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불필요한 죄의식이나 연약한 양심에서 해방되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면서 왜 묶여서 사십니까? 여러분은 영원한 구원을 받았는데 왜 굳이 경건한 척하려고 하십니까? 허리끈을 풀고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 있게 세상을 즐기면서 사십시오. 죄 노이로제에 결려서 살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의 교훈들에 너무 얽매이지 않아도 됩니다. 십자가에서 다 해결되었으니 이제 육신도 좀 생각해 주면서 사십시오. 자기를 학대하면서 거룩하게 산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 것들을 좀 즐겨도 큰 문제가 되지 않으니 자유를 누리십시오.\\\" 하지만 이런 솔깃한 가르침은 참 자유에 대한 왜곡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압니다(요8:36).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진 자유는 신자로 하여금 주님을 따르고 순종케 합니다. 죠지 메티슨(George Matheson: 1842-1906. 스코들랜드의 맹인 목사로서 찬송가 작가로 유명함)은, \\\"주님 나를 포로로 삼으소서 그리하면 내가 자유하리이다.\\\"고 읊었습니다. 거짓 선생들 자신이 \\\"멸망의 종들\\\"인데 어찌 자유를 주겠습니까? 그들은 악한 욕망의 지배를 받으면서 마귀의 손에 묶여 있는 악독한 종들입니다. 그런 인간들이 누구에게 무슨 자유를 약속한다는 말이겠습니까? 거짓 선생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스스로가 참 신자들이라고 공언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버젓이 내세웁니다. 그러면서도 거짓 선생들은 성경을 다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나 교회에 들어오면 신자로 간주해 주고 조금 다닌 사람들에게는 신년 행사 가운데 하나로 직책을 하나씩 안겨 줍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확실히 이해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거짓 목회자들에게는 한 사람이라도 교회에 많이 모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만큼 헌금이 늘고 교회가 커지면 자기 이름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성경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고 회중의 감상적인 심리에 위로가 될 만한 일시적인 격려나 듣기에 부담없는 예화나 기준이 없는 도덕 강좌에 치우칩니다. 그들은 교인수가 불어나는 처방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사용합니다. 그런 방법들이 성경적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인지는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처방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기뻐합니다. 처방의 효과가 나지 않으면 성도들이 열성이 없고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꾸짖습니다. 이런 사이비 목회자들이 죽어가는 죄인들에게 과연 해준 일이 무엇이며 병든 사회에 끼친 영향이 무엇이겠습니까? 학위만 높은 가짜 신학자들과 콧대만 높은 부흥 강사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굳게 세우기 위해 한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들은 처음부터 이런 일들에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생각했던 장사치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거짓 선생들은 종종 참 교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2:20)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표피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만 압니다. 그들은 주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구원의 지식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알았다면 그런 사악한 짓들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선생들을 줄곧 \\\'저희\\\' 또는 \\\'이 사람들\\\'이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속한 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도 스스로 주님을 따르는 참 제자들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개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둘씩 파송했을 때, 유다도 끼어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마가는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6:13)고 기록하였습니다. 유다도 분명 예수님을 알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도 하고 기적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러한 거짓 선생들은 이 세상의 부패를 피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다시 썩어질 세상의 더러움에(2:20) 빠진 자들입니다. 20절의 \\\'얽매인다\\\'는 말은 어업 용어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그물이 갈릴리 호수에서의 분주한 야간 고기잡이 후에 뒤얽히게 되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마지막 상태는 처음보다 휠씬 더 악화될 것입니다. 이들은 의(義)의 길을 안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도록 탈선을 조장합니다(2:210. 유다는 이 명령을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1:30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두 개의 속담 베드로는 두 개의 속담으로 본 장을 끝맺습니다. 이 속담에 나오는 동물들은 개와 돼지입니다(참조, 잠26:11). 유대인들에게는 이 두 동물이 부정(不淨)한 것이었습니다( 참조, 마7:6). 베드로는 이미 \\\'짐승\\\'(야수)들과 \\\'나귀\\\'를 언급했었는데 여기서 다시 두 종류의 동물들을 부가시켰습니다. 개와 돼지들에 대한 베드로의 말은 퍽 역겨운 것입니다. 개가 토한 후에 그 냄새를 맡으면서 다시 핥아먹는거나 돼지가 더러운 흙탕물로 도로 돌아가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납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의 행위가 이처럼 추잡하다는 것이 베드로가 말하고자하는 초점입니다. 베드로의 속담은 개와 돼지가 본능적으로 처신한다는 것입니다. 개는 뱃속에 맞지 않는 음식물을 토하고서 시원해 하고 돼지는 몸을 씻고 휠씬 나은 냄새를 풍깁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개는 토한 것을 다시 핥고, 돼지는 진흙에서 다시 뒹굽니다. 개는 개고 돼지는 돼지입니다. 이들은 다른 종류의 동물들로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항상 개와 돼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렘13:23). 거짓 선생들은 안팎이 씻겨졌다 할지라도 그들의 본성이 온전히 쇄신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모든 죄악이 정결케 되지 않는 한 거짓 선생으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위험한 것은 이 거짓 선생들이 오히려 참 교인들을 개와 돼지로 만들려고 애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매끈하고 구수하며 그럴듯하게 들리는 거짓 선생들의 메시지를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시이비 목회자들과 가짜 선생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믿음에 굳게 서 있으려면 기도와 말씀의 묵상으로 체워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성경의 바른 교훈들만 듣도록 각별히 조심하면서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성도들과 교제해야 합니다. 참된 성도들과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대화를 주고 받으려면 나 자신이 성경 말씀을 매일 묵상하며 거짓과 진실을 식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말3:16).
거짓 선생들의 위험/ 벧후2:1-10
거짓 선생들의 위험 벧후2:1-10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성경에서 가장 무섭고 끔찍한 본문 가운데 하나가 본 장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듯이 사단이 금세기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더욱 큰 해악을 끼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믿음을 파괴시키려고 온갖 공작을 꾸미고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침식시키고 사단의 계획은 여러 방면에서 두드러집니다. 사단은 자기 사역을 위해 사람들을 사용합니다. 그는 자기 손에 들어온 자들을 씁니다. 그들은 사단의 지배를 너무도 깊이 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가 마귀의 수작에서 놀아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모습 거짓 선생들은 거짓 선지자들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1장에서 선지자들의 중요성을 말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는데 그들의 목적은 주님께 영광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유익을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가 있으면 가짜도 있게 마련입니다.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마귀는 항상 진품이 나오면 모조품을 생산해 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악한 자를 위한 꼭둑각시들입니다. 구약에서도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기사를 자주 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언한다고 공언했지만 그것은 거짓이었습니다.(참조, 렘5: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렘14:14). 이같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적은 신랄한 것이었습니다. \\\"(렘23: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렘23: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렘23: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며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은 참 교인들을 엉뚱한 길로 오도(誤導)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들을 추종합니다. 현대판 거짓 선지다들은 갖가지 명색과 간판을 내걸고 사람들을 유혹해 댑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만, 우리들이 섬기는 주님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이나 신성을 벗겨버립니다. 그들은 사이비 기독교를 전파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경고를 들어 보십시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한편 베드로는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거짓 선생들\\\"을 조심하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그런 불순한 선생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바울이 에베서의 장로들과 작별하면서 남긴 교훈을 들어보십시오.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행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행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이러한 경고를 그의 다른 서신들에서 줄곧 반복하였습니다. 거짓 선생들을 어떻게 분별할까요? 거짓 종교들을 내세우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무척 싫어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은 대개 드러내놓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미숙한 교인일지라도 그같은 교회의 적들을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핍박에 관해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다루었습니다. 베드로후서에는 거짓 선생들이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성도들을 미혹하는 문제가 거론됩니다. 가장 위험한 공격 무기 중 하나는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사단은 거짓 선생들이 핍박보다 더 큰 해독을 교회에 끼친다는 것을 압니다. 거짓 선생들이 은밀히 교회에 들어와서 유포시키는 이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가르침과 그릇된 교리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릇된 교훈은 분열적입니다(딛3:10). 베드로는 본문에서 이단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 까지 한다고 말합니다(2:1). 여기서 \\\'주\\\'(主)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거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자기 백성들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구속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고(출12장). 자기 백성들을 갈보리에서 구속하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고전6:20, 행20:28). 이단들은 예수님이 주(主)시라는 것까지 부인합니다. 어떤 이단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한낱 선량한 인간으로만 취급합니다. 또 다른 이단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하나의 신으로만 간주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예수님을 온전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으면 우리 자신들의 구원을 부정하는 결과가 됩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만이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고 온전한 사람만이 우리들의 죄값을 대신 받아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선택된 백성들을 구속했다면 어떻게 주권적인 주님께서 몸소 우리를 사신 구원을 거짓 선생들이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참 성도가 아니라면 그들은 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일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해 보혈을 흘리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들을 사신 주\\\"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2:20-21절의 말씀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이 구절들에 따르면 거짓 선생들은 한때 주님과 의의 길을 간다고 주장하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사셨다고 공언함으로써 자기들의 메시지가 그럴 듯하게 들리도록 위장했다가 결국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부정하고 교회 공동체를 떠난 자들입니다. 요한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요일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히브리서6:4-6, 10:26-29절도 아울러 참조하십시오. 거짓 선생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교회 안으로 거짓된 가르침을 끌어들이는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의 그릇된 주장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의 영적인 행위에 불과했다고 말하며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합니다. 어떤이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와 믿음 이외에 침례와 같은 의식을 더 갖추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어떤이들은 온전한 구원을 얻은 자는 방언이나 계시의 은사가 있다고 내세웁니다. 어떤이들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삼위 세례를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이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제대로 참예하려면 \\\'특수 사제\\\'의 집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어떤이들은 지옥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만인이 다 구원을 받거나 회개치 않은 자들이 그냥 없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짓 선생들은 지금도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단이라고 적힌 명찰을 달고 다니면서 떠들지 않습니다. 이단적인 가르침은 기독교 문서 속에 끼여있을 수 있고 강단의 메시지 속에서도 새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 성도들은 성경 말씀을 날마다 잘 묵상하면서 바른 교훈을 익혀야 합니다. 인기가 있는 강사의 말이라고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들이거나 목사의 설교라고 맹신하면 위험합니다. 거짓 교사들과 거짓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영향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생들을 따를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2:2).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은 힘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언변이 좋고 자기 주장들을 거침없이 내세웁니다. 그들은 청중의 귀를 모을 수 있는 달변과 지식을 내세우 사람들을 모읍니다. (벧후2: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짓 선생들은 문란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도덕적인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오치기 때문에 세상 재미를 보면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무리들에게 인기를 끕니다(2:19). 그 결과 기독교의 진리가 의심을 받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시119:30)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을 따르는 자들은 사악한 길을 따르면서 즐거워합니다.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용합니다. 그들은 생동력이 있고 더 풍성한 삶을 공여해 주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들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자들입니다. (고후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텔레비젼 부흥사들이 성도들의 헌금을 노리다가 세상에 큰 수치를 드러냈던적이 있답니다. 이 거짓 교사들은 신자들을 속이려고 교묘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실례들 4-8절은 경건치 못한 자들을 하나님이 처리하신 실례들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자들은 유다서 1:5-8절에서도 나옵니다. 4절의 \\\"범죄한 천사들\\\"은 루스벨의 타락을 가리키는지(사14:12-15) 혹은 창세기 6:1-4절에 기록된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말하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아무튼 베드로가 여기서 언급한 천사들은 교만해져서 하늘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이 천사들은 지금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데 마지막 심판날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베드로가 다음으로 열거한 자들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2:5)입니다. 하나님은 고대 세계의 사람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이 너무도 사악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순종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의를 전파하는 노아\\\"의 말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였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창6:8).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 노아처럼 거룩한 삶을 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는 자기 이웃들에게 왜 자신이 방주를 짓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전례없는 홍수를 예고하며 익사의 위험을 누누히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의 방주 건조는 장기간이 걸렸을 터이므로 그의 설교도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평지에 있던 도시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습니다(참조, 창19장). 이 도시들의 죄악은 말할 수 없는 극도의 성도착(性倒錯)과 부도덕이었습니다. 소돔 성은 오늘날까지도 성행되는 악행들의 대명사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악한 행실들을 정죄하였습니다. 우리들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인간의 악행들을 어떻게 서술했는지를 읽어 보십시오. 동성 연애, 마약 중독, 인신 매매 등은 용납할 수 없는 죄악들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악행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런 소행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악한 사회에서 신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우선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신다.\\\"(2:9)는 사실을 숙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해주셨습니다(2:5). 하나님은 그들을 물 심판에서 구출되도록 방주를 마련하셨고, 롯을 불 심판에서 구출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옛 세상을 멸망시킬 때에 노아를 구원하셨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롯을 구하셨다는 대목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2:8). 창세기 19장을 보면 롯은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두 딸들에게 못할 짓을 시켰습니다.(창19:8). 그럼에도 하나님은 \\\"롯이 나를 신뢰하였고 아브라함이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0. 그래서 하나님은 롯을 가까스로 구원하셨습니다9창19:15-17, 고전3:15). 롯은 사실 구원 받을 자격을 갖추었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은혜의 의미입니다. 자격없는 무가치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도 크고 깊은 은혜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망하여 잿더미가 되었습니다(2:6). 6절의 \\\'재\\\'라는 헬라어는 고대 역사가들이 주후 79년 폼페이 헤클라리움 도시들을 뒤덮었던 화산재를 서술할 때에도 똑같이 사용한 단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을 불에 타서 재가 되었는데 롯과 그의 두 딸들은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악한 도시들을 차마 떠나기가 아쉬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19:26).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을 시련에서 구해내시는 법을 정확히 아십니다. 우리들에게도 여러 가지 시련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시련들은 영구히 계속되는 것처럼 느켜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시는 때에 우리들을 구출해 주십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은 또한 불의한 자들을 처리하실 줄도 압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이 끼친 해악에 따라 형벌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1절에서 사악한 거짓 선생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멸시키려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 이라고 불렀습니다. (벧후2:3)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 심판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심판날에 크게 떨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모든 악한 것들이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벧후2: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악행과 하나님의 가르침들에 대한 멸시는 어깨동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 중에서 일부가 갈보리의 보혈로 우리들을 속량하신 주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 짓이겠습니까! 주님과 사도들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자들의 죄악은 대단히 심각한 것입니다. 경고 우리들은 거짓 선생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별히 몰래 잠입했다가 교묘하게 이단의 가르침을 퍼뜨리는 자들을 각별히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들은 베뢰아 교인들처럼 (행17:11)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내세우는 모든 가르침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칫하면 세상인기를 바라는 유명 강사들이나, 복음의 진수에 따라 진실을 강론하지 않는 사이비 신학자들이나 혹은 성도들의 헌금을 노리는 부도덕한 사역자들의 말장난에 유혹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시련을 겪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출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으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모두 돌보십니다. 악인들이 우리 신자들을 괴롭히더라도 하나님의 손에 그들의 형벌을 맡겨야 합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거짓 선생을 경계하라/ 딛1:10-16/ 2003-05-15
거짓 선생을 경계하라 딛1:10-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의 생명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어떤사람은 목회자의 설교에 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사람은 선교사역에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사람은 사회봉사에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틀린말이 아닙니다. 다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 말임에 분명합니다. 실제로 목회자의 깔끔한 설교, 선교사역, 구제하는 일, 사회봉사등은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선되고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올바른 진리\'위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편지를 쓸 당시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내에 번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디도가 머물렀던 그레데에 있는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전체에 잘못된 가르침이 확산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가장 우선되고, 근본적인 문제를 이제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퍼지고 있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교훈함으로서 교회가 올바른 진리위에 굳게 서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초대교회 당시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위협하고, 성도들을 미혹함케 함으로서 교회의 생명을 뿌리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잘못된 가르침을 지도자들이 분별하지 못해 거기에 현혹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초대교회 당시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지 못해 그것을 받아 들여 교회가 곤경에 처하고, 심지어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종종 있은 듯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거짓된 가르침을 경계할 것을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잘 살펴봄으로서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관해 세가지 정도로 오늘 본문에서 정리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잘못된 교훈입니다. 먼저 10절을 보면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할례당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할례당이 왜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할례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져 행한 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이 할례의식을 거행하도록 명령을 하셨셨을 때, 하나님의 자녀라는 언약에 대한 하나의 표시로서 이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시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식 자체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후 8일만에 할례의식을 행했을 때 이미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단지 이 의식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례를 받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세례의식 그 자체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의식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지도 못할뿐더러 세례 받았다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내 가슴에 일깨우기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만약 할례의식이나 세례의식이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조건이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기초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할례당은 믿음과 더불어서 모세의 율법도 온전히 지켜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즉 할례가 구원을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니 선한행위가 한가지 더 첨가되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얼핏들으면 참 좋은 말인 듯 합니다. 구원받는데 있어서 우리의 선한행위가 첨가되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자존심을 조금은 지켜주는 말인 것같습니다. 전부 공짜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뭔가 조금의 대가를 치루고 받았다고 해야 자존심이 덜 상하고, 남들에게 말하기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에 관한 것은 우리의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내 자존심을 내 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저 공짜로 주신다고 하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짜로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할례당은 공짜로 받는것에 대해 자존심을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도 준수해야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우리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입니까? 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을 왜곡케 하는 말들입니까? 천주교가 범하고 있는 중요한 오류가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땅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면 연옥에 간다고 합니다. 연옥이란 쉽게 말해서 천국과 지옥의 중간 처소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이런 곳이 있다고 주장한 적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곧 바로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정되어집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연옥이라는 중간단계에 머물다가 어떤사람은 천국에 가고 또 어떤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옥에 머물렀다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첫째 세례를 받아야 하고, 둘째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있는 가족들의 정성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연옥을 거치지 않고 바로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누군가 하면 사제들입니다. 즉 신부들입니다. 신부들은 다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의 정성이 모두어지면 연옥을 거쳐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세례나 이땅에서 있는 사람들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거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우리의 구원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첨가되어져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엄청난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례당이 가르친 잘못된 교훈은 음식과 결혼에 관한 것입니다. 15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이 말이 무슨말인가?하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의 내적인 경건보다는 할례를 받고, 또 어떤음식은 먹지않고, 또 금욕주의생활을 하는 것으로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정죄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를 구별하게 되는 표준이 됩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금욕주의 생활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음식은 물론 가려서 먹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건강을 생각해서 건강에 유익한 음식은 먹고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의 구원과 관련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결혼을 금하거나 금욕주의 생활을 강요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안에서 이루는 가정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 결혼을 했으면 남편이나 아내 모두 결혼생활에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금욕주의 생활이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할례당은 이런 것을 구원과 연관시켜서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그리스도께 십자가를 통해 이룩해 놓으신 구원에 대한 완전함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외에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나 방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그들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10절에 보면 \"복종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질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권위에 대해 반항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일단 걸고 넘어지고 반항하는 것이 체질화 되어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헛된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말은 쓸데없는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 본질에 관한 문제는 말하지 않고 괜히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지고 대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그들은 속임수를 씁니다. 속임수는 우리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속임수는 거짓된 인격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주위에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속입니다. 다른표현을 쓰면 자꾸 말을 바꿉니다. 오늘은 이말을 했다가 내일은 저말을 합니다. 실례로 여호와의 증인같은 경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짜를 말했다가 맞지 않으니까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공중에 재림해 계신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처음말을 바꾸었고, 구원받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진대로 14만 4천명밖에 없고 그 수는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더니 자신들의 숫자가 그 수를 넘어가자 다시 14만 4천명은 상징적인 숫자다라고 바꾸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말을 바꾸고 남을 속이는 것이 그들의 특징입니다. 또 그들은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일도 합니다. 11절을 보면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려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집\'이란 가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엎드러친다\'란 말은 \'전복시킨다\' 혹은 \'멸망시킨다\'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믿음의 가정마저도 파괴시키는 것이 그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각종 이단들 때문에 조용했던 가정이 파괴되어져 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삶에 관해서 결론을 내리기를 가증스럽고, 모든 선한일을 버리는 자라고 했습니다.(16절)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게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세 번째로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11절을 보면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더러운 이를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들은 교회를 생각하고 성도를 생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느 누구도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입니다. 참된 감독, 참된 지도자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습니다. 오직 관심이 다른 이들에게 있으며, 믿음안에서 성장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목적은 믿음안에서 성장을 이루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단의 경우 자신들의 집단에 가보면 교주는 하나님과 같습니다. 철저하게 신격화 되어 있고, 감히 쳐다볼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성도들은 가난한 월세방에 사는데 교주는 호화스러운 별장에 기거하면서, 보통사람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거들먹 거립니다. 그들의 돈에 대한 애착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거짓된 삶을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양심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부패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에 대한 강한 애착은 그 사람을 타락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러한 자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라고 말합니까? 이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우리도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신을 해야하는 것일까요? 먼저 11절을 보면 \"저희의 입을 막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들의 입을 막을 수 있습니까? 손수건으로 틀어막는다고 이들의 입을 막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입을 막으라는 말은 그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펼 수 있는 자릴 제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가르치게 되면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잘못된 교리를 전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이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간혹 남에게 배타적이지 않기 위해서 교회의 문을 이런 자들에게 열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그들이 가르치게 하고 판단은 우리가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르칠 자리를 넘겨주면 결국은 영향을 받게 되어 있고 그들의 영향력은 교회를 넘어트리고 말것입니다. 비건한 예로 우리나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신학이 70년대에 태동을 했습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고, 민중의 한으로서 신학을 말했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같이 억눌린 민중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참된 신학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대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너도나도 할 것없이 받아들였고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적어도 민중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이 우리 한국교회를 망쳤습니다. 그 영향을 받은 교회들이 교회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생명의 복음을 말하지 않고, 사회개혁만을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말하지 않고 민중의 의식이 부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천국은 민중이 주인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보기에 선한 것을 쫓는 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얼마전 김수환 추기경이 어느 절에 가서 \'그 절이 현대인들의 영혼의 안식처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그 답례로 송월주 총무원장이 꽃동네 마을에 가서 쌀을 전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종교란 저러해야 한다고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개신교는 독단적이고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냐고 말들을 합니다. 여러분! 이제 모레 화요일부터 사사기를 공부하게 될텐데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삶을 살았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에 있는 거민을 다 내쫓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그들이 가나안의 우상숭배자들을 내 쫓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제말이 스님들을 다 내 쫓아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그들이 설자리를 제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그들의 설자리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주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좀더 적극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교회가 정말 참된 진리를 외친다면 거짓된 교훈을 말하는 자들의 입은 자연히 막아진다는 뜻입니다. 또 13절을 보니까 \"엄히 꾸짖으라\"고 합니다. 여러분! 엄히 꾸짖어야 할 대상과 입을 막아야 할 대상은 사실 다릅니다. 13절을 보니까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엄히 꾸짖어야 할 대상은 거짓된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는 그레데 교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레데 교회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엄격하다\'란 말은 \'칼로 베이듯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예리하게 꾸짖으라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잘못된 교리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내에 엉뚱한 교리를 퍼트리는 일이 있다면 그리고 반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잘라버릴 각오\'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상실하면 교회는 모든 것을 상실합니다. 다른 부분에 관해서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 치료되어질 수 있겠지만 진리는 교회의 생명이며 결단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믿는 것과 거짓을 믿는 것의 차이는 생명이냐 죽음이냐의 차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 거짓교훈을 경계하고 더욱 진리위에 굳게 서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짓선생을 경계하라/벧후2:1-3
거짓선생을 경계하라/벧후2:1-3 2002-04-12 11:30:17 read : 68 마술을 구경해 보셨습니까? 어렸을 적에 서커스를 구경할 때면 어김없이 마술사가 등장을 해서 멋진 마술을 보이곤 했습니다. 그 마술을 구경하노라면 너무도 신기할 뿐입니다. 마술사의 모자에서 비둘기가 수십마리가 나오는가 하면, 사라졌던 동전이 입에서도 나오고 귀에서도 자꾸 자꾸 나오곤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마술사들은 참 부자겠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필요할 때 코잔등을 한번 슬쩍 만져서 돈을 만들고, 또 귓불도 한번 만져서 돈을 만들어내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성장해서야 비로소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제 자신이 성장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진짜인줄만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도 이와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장하기전까지는 가짜를 가짜로 알지 못하고 진짜인양 속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주위에는 진짜를 흉내내는 거짓된 가짜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시대에도 거짓을 퍼트리는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짓 평화를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거짓평화를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기에 좋은 말만 했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이 퍼트린 종교는 쉽고, 편하고, 주위와 적당하게 타협해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신앙생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영적으로 어떤 상황에 있는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이 듣기에 좋은 말만 골라서 함으로서 그들을 안심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된 모습이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시대에도 여전히 거짓된 자들이 거짓된 모습으로 진짜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교회내에 슬그머니 들어오고 있는 이러한 거짓된 것들에 관해 경계할 것을 당부하면서 거짓된자들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도 베드로의 교훈이 그 시대를 향해서만 했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주위에도 이런 거짓된 자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거짓된 것을 분별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진짜인줄 착각하고 그들을 따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이 귀를 기울이고 경청해야 할 중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는 거짓선생들의 모습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는 속이는 것입니다.(1절) 마술사가 현란한 손 동작으로 관객들의 눈을 속이듯이 거짓선생들의 특징도 속이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속이는 방법은 마술사와는 또 다릅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그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인다\'고 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란 집은 전통적인 한옥이었습니다. 방이 모두 온돌이었고 연탄을 때서 방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런 집의 특징을 잘 아시겠지만 아랫목은 발이 뜨거울 정도로 뜨겁지만 윗목은 얼음장같이 싸늘합니다. 저희 집은 3남 2녀였기 때문에 가족이 적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오면 아랫목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난립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TV에 \'여로\'라는 것이 방영되었는데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이 시간이 되면 동네가 쥐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다행히 동네 TV가 있는 집이 두 집이었는데 그 중에 저희집이 속했습니다. 겨울이 되면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TV앞에 앉습니다. 그것도 서로 아랫목을 차지하려고 아랫목 쟁탈전을 벌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는 제일 막내였고 어렸기 때문에 아랫목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늘 푸대접당하는 쪽은 저희 둘째형입니다. 큰형은 장남이니까 아랫목을 차지하고 저는 막내니까 또 따뜻한 자리에 앉았는데 항상 차남인 저희 둘째형은 제일 추운쪽에 앉아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 방송이 끝날때 쯤이면 제가 늘 제일 추운 곳에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둘째형이 제의를 합니다. 발이라도 아랫목에 조금 넣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발만이라도 아랫목에 펼 수 있도록 자리를 조금 비켜줍니다. 그러면 기회를 봐서 우리가 재미있어서 막 웃을 때 발을 조금 더 안쪽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 슬퍼할 때, 또 발을 조금 안으로 집어 넣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기회를 봐서 밀어넣다가 보면 어느새 제자리는 윗목이 되어 버리고 형의 자리는 아랫목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TV를 볼 때는 정신이 없어서 내가 밖에 나와 있는지 안에 있는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다 끝나고 나면 몹씨 춥습니다. 그래서 내 자리를 살펴보면 자리가 뒤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엉엉 울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거짓선생들이 특징이 무엇입니까? 가만히 들어옵니다. 내가 \'거짓선생이요\'하며 떠들면서 우리에게 접근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들어와서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만히 들어와서 하는 일은 그들의 \'지어낸 말\'을 합니다. 여기서 \'지어낸 말\'이란 원어로 \'플라스토스\'라는 말인데 이 말에서 영어의 \'플라스틱\'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가만히 들어와서 훌륭한 말을 참 많이 합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말하고 \'예수\'에 대해서도 말하고 \'영생\'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모두 자신이 지어낸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단이 하와를 속일 때도 이런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사단은 슬그머니 찾아와서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 정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조장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했습니다. 즉 \'네가 그것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란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지어낸 말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같이 되리라\"였습니다. 두번째는 사신 주를 부인하는 것입니다.(1절 下) 즉 그들의 특징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부인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는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뿐만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부인하고, 심지어 영원한 심판의 실재까지도 부인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로 부터 시작해서 예수그리스도로 끝을 맺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가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외에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것은 거짓입니다. 거짓교리이며, 거짓선생들입니다. 우리나라가 70년대 80년대 군부독재시절을 거쳐오면서 \'민중신학\'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민중신학\'이라는 말을 여러분들 가운데 들어보신분도 있을 것이고 생전처음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카톨릭까지 포함해서 말한다면 20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신학을 거의 모방해왔습니다. 우리의 신학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가 부흥한 국가,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는 한국에 다 모여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학이 없다는 것에 대해 학자들은 굉장히 부끄러워했었습니다. 그러다가 7-80년대 군부독재에 항거하면서 생겨나게 된 것이 이른바 \'민중신학\'입니다. 민중신학이 생기고 부터 학자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남의 신학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신학이 정립되었다고 흥분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민중신학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부활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것도 부인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실재성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가 전부가 아니라 \'민중\'이 전부입니다. 장래 우리가 들어가게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부인하고 이땅에서 민중이 주인이 주인이 되는 세계의 건설을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인간의 죄 때문이 아니라 억압받고 있는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죽으셨다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인 부활로 그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민중들의 의식을 부활시킨 것에 더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언제부턴가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 사상에 심취되었습니다. 그래서 민중을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역설하면서 \'죄\'를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예수의 죽음\'을 말하면 너무나 어리석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심지어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 많은 사람들도 온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기 보다는 \'인류애\'를 말하고 \'봉사\'를 말하고 \'인간다운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과,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사실과,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면 그들은 거짓선생들입니다. 아무리 학식이 풍부하고, 아무리 세상적인 식견이 뛰어나고, 아무리 논리가 정연해도 그들은 거짓선생들입니다. 한때 감리교 학자 가운데 종교다원주의를 들고 나온적이 있었습니다. 즉 기독교외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려서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유교에도 구원이 있고 힌두교에도 구원이 있고 그외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교는 그들 나름대로의 구원을 내포하고 있고 또 그것을 통해 구원을 이룰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현대인들이 들으면 아주 그럴싸한 말입니다. 기독교가 자기들만의 구원을 주장하는데 반해, 얼마나 합리적이고 올바르고 이성적인 생각입니까? 현대인들은 기독교가 자기들만의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기독교는 편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주장들이 상당히 설득력있게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하는자들은 기독교학자라는 가면을 쓴 거짓선생들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주장이 지극히 합리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거짓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그리고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를 편협하다고 생각을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올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번째는 호색하는 것입니다.(2절) 유다서를 보면 그 거짓선생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는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선생들의 또 다른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욕을 만족시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디도서에서도 이런자들을 가리켜서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닌 가증한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1:16절)고 했습니다. 며칠전 신문을 보니까 통일교가 브라질에서 대규모집회를 가졌습니다. 그곳에는 세계 여러국가에서 종교인들과 유명한 인사들을 초청하고 항공료로 부터 시작을 해서 숙박과 관광에 드는 비용을 모두 통일교에서 부담을 하고 그 집회에 초청을 한 것입니다. 물론 이 집회의 하일라이트는 교주 문선명이가 연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지금까지 자신이 주장해왔던 것을 되풀이 했습니다. 즉 \"예수는 죽었기 때문에 완전한 구원을 이루지 못했기에 육신과 더불어 영혼까지 완전히 구원을 받으려면 재림주인 문선명자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자신과 몸을 섞는 피가름을 통해서 이루어질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으면 정말 황당무개한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짓선생을 우리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거짓선생들은 교리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신 주를 부인합니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호색하는자들입니다. 종교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거짓선지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14절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중에도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들을 가리켜서 \"임박할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진정한 종이라고 주장할지는 몰라도 그들은 마지막날에 우리 주님으로 부터 거절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심판대 앞에서서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좇아내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했을 때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하셨듯이 그들은 마지막날에 거절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탐심을 소유한자들입니다(3절) 즉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면 주님은 언제나 가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구약 미가서를 보면 이때 당시의 거짓선지자들에 대해 묘사하기를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을 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미3:11)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거짓 선지자들의 관심은 오직 \'돈\'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편리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이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앞에 목회자들이 먼저 머리를 숙여 반성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요즘 우리 노회에서 그리고 시찰회에서 공문서가 많이 날라옵니다. 그런데 날라오는 공문서마다 거의 대부분이 \'부부동반 야유회\' \'부부동반 친목회\' 이런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올봄에 벌써 이런 공문을 제가 4통이나 받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때마다 여러가지 핑계를 대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핑계를 대면서 가지 않을 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런 것이 모두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밖으로 나가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목회자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줄기차게 목회사역만 감당하다가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아 일찍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젊은 목회자들이 실제로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이러한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정말 나쁜 것은 모이면 놀러갈 생각을 더 많이 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고, 어떻게 하면 성도들을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할 것인가? 이런 것을 논하지 않고 그저 하루 휴식을 취하고,그저 하루 스트레스를 푸는 것으로 만족해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시대의 거짓선생들은 어떤자들입니까? 백성들이 듣기에 좋은 말만 하는자들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축복을 부르짓고, 성도들의 삶에 소망과 희망을 말하면서 \'천국\'이 선포되지 않고 \'지옥\' 선포되지 않는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죄지은 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말이 전파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뿐만아니라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 주시면서 십자가의 \'피\' 공로로 우리를 사신 주님대신에 민중신학을 말하고 그리스도인의 세상적인 윤리와 도덕을 중요시한다면 그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호색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심판받을 만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와서 여러분의 귀에 달콤하고, 듣기에 좋고, 소망적인 말만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회개하라\'고 말하면 부담스러워 하고 \'심판과 지옥\'을 말하면 듣기 싫어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으로 자라지 아니하면 진짜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속이는 마술을 보면서 그것이 진짜인양 속고 살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이 교훈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거짓선생의 모든 교훈으로 부터 여러분을 분리시켜 하나님의 진정한 뜻 가운데 행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이 스승이어라/ 사48:8-10/ 2008-06-23
고난이 스승이어라 사48:8-10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원치 않는데도 우리와 동행하기 원하고, 우리는 오라고도 하지 않는데 찾아 오는 불청객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고난이라고도 하고 역경이라고도 합니다. 학생은 학생나름대로, 청년은 청년 나름대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 나름대로... 우리 모두는 고난의 동참자들입니다.고난에서 면제 된 사람은 없습니다 . 성경도 말하기를 “우리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올라감 이라”.우리 가운 데 어떤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고난 가 운데 신음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는 큰 고난을 겪지 않더라도 고난이라는 불청객을 언제 맞이할는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손대는 일마다 제데로 풀려가지 않고, 사람 마다 나에게서 등을 돌린 것같이 보이고, 하나님조차도 우리를 외면하는 것같이 보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역경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아픔과 슬픔을 겪는 것은 아니지만 고난, 고통의문제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고난의 풀무”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풀무” 이것은 바로 고난의 상태, 상황, 그 모습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바벨론 포로의 현장속에서 있는 뜨거운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깨닫고 바른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연단하여 거룩한 자들로 세우시기 위해 그들에게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된 성도들이 범죄하면 고난을 통해 연단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이 스승의 주일인데 보이는 스승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스승도 있습니다. 곧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가장 값지고 좋은 것들을 배우기 때문에 고난이 주는 유익이 얼마나 큰지요?...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고난은 스승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때 어떤 점에서 우리의 스승이 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고난은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고난에는 세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1)자신의 죄때문에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실수와 허물로 자신이 잘못함으로 당하는 여러움입니다. 2)사탄이 주는 고난도 있습니다.----신앙생활을 등한히 함으로 사탄이 마음에 틈을 타고 들어와서 어려움을 주는는 고난입니다. 3)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 있습니다.---실수와 잘못도 없지만 그 리고 신앙생활도 잘하고 있지만 찾아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함께 생각해 볼려고 하는 고난의 성격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고난은 자극적인 것입니다. 평범한 생활에 변화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극이 심각하고 아프게 찾아오는 것이 고난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주는 고난은 우리를 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는 고난입니다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은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때릴때 선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매를 때립니다. 교육적인 목표가 없이 징계하고 매질을 가한다면 그것은 아이를 학대하는 것이죠! 잘못된 것을 바로 고쳐주기 위해서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징계합니다. 거짖말을 하면 거짖말을 고치기 위해서,남의 것을 훔치는 버릇이 있으면 그 잘못된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매를 가합니다.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부모의 징계가 먼저 사랑이 전재되어 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성도들에게 고난을 주시고 징계하시는 것이 사랑하기 때문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이렇게 나두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잘못된 문제를 지적하고 그 문제를 바로 잡아주어야 하나님앞에서 은혜받는 신앙생활을 할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때 하나님앞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이 없는가? 자신을 살필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 없이 찾아 오는 고난은 하나님이주시는 고난입니다.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볼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나는 기도생활과 말씀생활에 최선을 다하며 모든 면에 하나님중심으로 주님을 바라 보고 있는지 자신을 볼수 있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속에서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문제만을 바라보고 해결할려는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모든 것을 자세하게 묻습니다. 아픈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야 좋은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우리의 상태를 진단하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말씀을 통해서, 주의 종들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고 인도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에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고,신앙생활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아멘! 아멘!.... 하고 그 말씀을 받더니 충만한 은혜 생활을 함으로 모든 것에 하나님이 축복 하시는 것을 봅니다. 저는 목사의 딸로 태어나서 광고 사업하는 남편을 만나서 친구와 동업을 부부를 알고있습니다.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대형광고탑을 제작하여 세워 놓았고 돈도 많이벌렸습니다.열심히 기도해서 이룬 사업이었습니다. 살만큼 물질도 모았고 가정도 행복했는데 이들은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되었습니다.예배생활 기도생활 물질생활 모든 것에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세상속에 폭 빠져서 살아갔습니다. 세상적인 걱정이 없으니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졌고 나름대로 멋있는 인생을 살아가 고있을때 사소한 문제로 동업하는 친구와 사이가 벌어져서 일에 열심히 떨어졌습니다. 제주도에 큰 광고사업을 맡았는데 갑자기 부도가 났습니다. 그일을 따기 위해서 로비활동도 많이 했고 물질도 많이 투자 했는데 부도가 나버렸습니다, 그들이 하루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게 찾아왔습니다. 기도해 달라는 것이엇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물질보다 더욱중요한 것은 당신들의 신앙이 다시금 회복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신앙을 다시 회복하십시다. 물질이 있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단신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더 중요한 믿음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주시는 고난이라고 생각하고 다시금 하나님을 찾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권면했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들이 그렇게 인생을 살아왔다고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전에 신앙을 되찾아서 열심히 믿음 생활에 질력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사업도 점점회복하고 있음을 곁에서 지켜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보다도 영혼에 대한 관심이 가장 크시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이 사람에게 찾아온 이 고난이 얼마나 힘이 들고 고통스러운 고난이었겠습니다까? 그러나 그 영혼이 하나님앞에서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회개 하고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징계하시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 어떠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난 잘모릅니다. 혹시라도 남 모르는 여러움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들의 모습을 기억하시고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2.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스승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관심이 뒤따릅니다. 무관심은 사랑이 떠났다는 증거입니다. 관심의 표현은 다양하지만 좀힘들어도 그것이 나를 향한 관심의 표현이라면 그것을 고맙게 받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면 관심을 갖습니다. 생일을 챙겨주기도 하고 결혼기념일을 챙겨 주기도 하고 외모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이 말을 하면 이런 행동을 하면 저이가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 이런 관심을 진지하게 갖게 되면 절대로 사랑하는 자에게 함부로 행하지 아니하죠? 사랑하면 어떤 무습으로 든지 관심을 갖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관심을 갖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직업이 무엇인가...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관심 보다는 당신이 믿음으로 살면서 당신의 직업에서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당신의 가정 생활이 하나님의 질서와 관심을 나타내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이지 당신이 대저택에 사느냐 아니면 전세 단간방에 사느냐가 아닙니다. 그는 당신의 자동차가 6년 묵은 중고차냐 아니면 번드르르한 최신형이냐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교만과 탐심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주의를 기울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절대로 이런 것들은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의 인간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있는가 아니면 잠자고 있는가? 아니면,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이같은 관심이 충족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으 징표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를 내리는 것입니다. 잘못하고 있는 대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는 것은 사랑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히12: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로 대우하시기에 징계하고 계십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하니님의 징계는 없습니다. 버려진 자들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관심은 무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제멋대로 살고 방향없이 살다가 멸망당하고 말 인생들이기에 하나님의 주시는 고난하고는 상관이 없이 삽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고난이 임하는 것은 나를 아직도 아들로 여겨주고 있고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이시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아들을 자신의 뜻으로 징계하여도 자식의 위치에서 공경하거든 하물며 영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실진대 어찌 우리가 더욱 복종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의 문제, 질병, 사업의 부진 그리고 물질의 궁핍등이 당신을 괴롭게 하고 있습니까? 낙심하지 말고 계속 아버지를 섬기십시오. 그리하면 언젠가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이 오셔서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우리는 다른 사란들을 위해서 돈도 빌려줄수가 있고, 시간도 투자할수 있고 희생과 적당한 헌신을 할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주기 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랑은 해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 하지 못하고, 또한 그 사랑을 받고 살고 있으면서도 실감나지 아니하고, 금방 그 사랑이 식어 버리는 지도 모릅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주시기 까지 사랑했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찾아 볼수 없는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이 사랑을 누가 받았습니까? 내가 받았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앞 에서 나의 존재는 이렇게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들입니다. 있으나 마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무가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땅에서는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는 존재들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징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사랑한고 하면서 징계가 없으면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칭찬만 해주는 사랑, 품어만 주는 사랑,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징계없는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들은 버릇없는 아이들이 되고 맙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불량한 아이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거기에는 징계가 뒤따라야 합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한 것을 지적해 주고 바로 잡아 주어야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에게 임하는 고난이 있으면 아하! 하나님이 아직 나를 버리시지 아니했구나 아직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계시는 구나 생각하시고 깨닫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탄이 주는 고난도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도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에 차이가 있습니까? 사랑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으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보면서 징계하십니다. 힘들때는 힘을 주시면서 고난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슬플때는 위로를 주시면서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의 믿음의 수준과, 신앙의 열정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에 맞추어서 고난을 주십니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구구법을 외우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국민하교 학생들에게 미적분을 푸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수준에 맞는 고난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신앙이 약한 사람에게 감당할 그 이상의 것을 주시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크고 주님의 사랑을 잘알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은 그만한 고난을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고난을 만날때 항상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 고난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징표이구나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복괸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고난은 우리를 더욱 하나님의 사람들로 성숙하게 만드는 스승입니다. 품질 좋은 금은 불속에 여러번 들어 갔다가 나온 금이라야 값어치가 있습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에미 카메켈이 고난을 다루고 있는 그의 책에서 의미깊은 예화를 이야기 것이있습니다. 그가 한번은 인도의 대장장이에게 “당신이 금을 연단할때 이것이 순금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지혜로운 그 대장장이는 대답하기를 “예,금속에서 내 얼굴을 볼수 있을때까지 연단합니다. 불순물이 여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방법은 그속에 미치는 내 얼굴이 얼마나 정확하게 잘 보이느냐를 가지고 결정합니다”하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에 자기 자신의 형상을 비추어보십니다. 고난이란 연단을 통하여 찌꺼기는 없애고, 깍을 것은 깍고 버릴것은 버리도록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그 인격에서 찾으십니다. 이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때가 많이 있습니다. 병을 주시고 마음에 진통을 겪게하시며 어려움을 통하여 괴로룸을 당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들어 보세요 (사48: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테니슨의 시집 “용광로”에 보면 우리의 인격을 쇠붙이에 비유하여 시를 쓴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쇠붙이를 벌겋게 용광로 속에 달구어서 원하는 형태로 두들겨 찬물에 담금니다.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을때는 다시금 달구고, 두들겨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우리의 인격을 만드는 것과 연관시켜 보십시요 타오르는 공포를 뜨겁게 달구어 숙명이라는 매로 두들겨 때립니다. 그 다음에는 눈물에 담그었다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수 있을때까지 고난을 통하여 연단하십니다. 이렇게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격을 형성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한 자로 그리고 능력있는 그리스도인들로 이세상을 승리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작은 일에 넘어지고 하챦은일에 쉽게 요동하며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강한자들로 남아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편안하게 좋은 환경 속에서 적당히 예수 믿어서는 강한 이세상을 이길수가 없습니다.환란과 역경과 어려움을 통해서 주님을 찾고 믿을때 그 신앙은 흔들리지 아니하는 견고한 신앙을 가질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도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인격이 가장 고상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점이 좋으면 또 다른 면에서 냄새나고 문제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나고 페여진 우리의 인격을 더욱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다듬으시는데 고난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겸손을 배웁니다. 성격이 과격한사람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어서 온유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없신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 자리 가장 밑바닥의 자리에 들어가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그 어려움을 경험하는 가운데 많은 연약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하시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 그럼으로 여러분!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들로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인격자들로 그리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만드시는 가장 아름다운 도구인것을 깨달으시고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난이 있을때 하나님의 사람들로 온전케 되어 지기 위해서 더욱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신 고난을 잘 인내하시고 참고 견디어 나갈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한것들로 채우실줄을 믿습니다. 고난은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유익을 주는 도구입니다. 고난중에 주님의 사랑과 그리고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깨닫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라며 더욱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성숙해 지는 믿음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가장 우리 인생의 멋진 스승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아무런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고 믿음생활을 원하지만 자주 찾아오는 고난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그러나 이 고난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고난속에서 나자신을 돌아 보아 회개할것을 회개하는 기회로 삼게 하옵소서. 고난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나를 향한 관심을 깨다는 기회가 되게 하시고 고난속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본받아 더욱 강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가는 능력있는 사람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니다. 아멘!!!
고마운 선생님/ 신6:1-9/ 스승의주일설교
고마운 선생님 신6:1-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 6:1-9)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우리 일생에 많은 스승을 만나게 하셔서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보통 선생님’은 말을 많이 하고, ‘좋은 선생님’은 설명을 잘 하고, ‘우수한 선생님’은 본을 보여주지만, ‘위대한 선생님’은 감동을 준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66권의 책을 주시고 그 책을 통해 이 땅의 지혜와 하늘의 신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2천여 년에 걸쳐 40여명의 저자가 쓴 이 66권의 성경은 여행기, 역사서, 편지, 잠언, 묵시록 등 여러 가지 문학의 장르로 이루어져있으며, 그리스어, 아람어, 히브리어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수백 가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마디로 사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자신과 자연과 환경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의 심성을 치료하셔서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하리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진리를 통해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의 많은 선생님들 중에 가장 훌륭한 선생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지혜와 좋은 품성과 우주의 원리를 가르치시고, 영원한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직접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감동시키시는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그 분에게 감사를 드리십시다. 예수님 역시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님으로 사셨습니다. 소크라테스와 마호메트는 60여세까지 가르쳤고, 석가모니는 80여세까지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겨우 3년 동안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감동과 감화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켜 사랑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스승으로 삼아 그 분에게서 배우면 삶이 절대적으로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 성령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내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줄 터인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성령님은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하늘의 비밀과 땅의 비밀을 깨닫고 이해하도록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를 감동하시고 감화하십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기 전에 무엇을 합니까? 먼저 기도하지요 “하나님, 말씀해주십시오.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성령님이여, 이 말씀을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선생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을 펴고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의 눈과 귀가 뜨이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 나타납니다. 성삼위 선생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가르쳐주심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립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지식을 배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 없는 지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부족할 때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선생님이신 성령님을 통해 순종하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분의 도움을 받으면 배운 것을 그대로 삶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배움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적용하여 행동화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본문의 모세가 그렇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한 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르치시고 모세가 그 말씀대로 백성들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모세, 에스라, 과거의 선지자들, 제사장, 레위인들이 선생님들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비롯해서 사도들이 모두 선생님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가르침이 신약성경 27권 안에 기록되어 우리도 그 가르침을 오늘도 배우고 있습니다. 신학자와 목회자, 전도자, 교회학교 선생님, 사랑방장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의 사랑을 알고 땅의 진리와 하늘의 진리를 배울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인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면 성경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매주 성경구절을 암송해왔는지 체크를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암송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거의 주일학교 때 외운 것들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성경암송대회를 하면 선생님들이 우리를 격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게 하셨습니다. 참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 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저 외우기만 했는데, 장성하여 옛날에 암송했던 그 말씀들이 무슨 뜻인지 하나씩 깨달으면서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금요일 저녁에 초등학생들을 위한 ‘어와나’ 훈련이 있습니다. 제가 금요부흥회를 마치고 지하로 내려가다가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너 어와나 하러 왔니?” 물었어요. “아니요, 저는 어와나 졸업했어요.” “그래? 그런데 오늘 밤에 왜 나왔지?” “어와나 보조 교사거든요.” 중학교 1학년인데 보조교사가 되었답니다. 제가 그 아이를 꼭 안아 주며 “너 정말 훌륭하구나! 어려서부터 주일학교 보조교사를 하다니 정말 복 받았구나. 출발이 참 좋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도 중학교 1학년 때 주일학교 보조교사를 시작으로 미국 갈 때까지 계속 교회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다음 세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으면 어린 생명에게 영원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학교 선생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98세까지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신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큰 가구회사 사장을 지낸 디제이 더프리라는 분은 연세가 많아 어쩔 수 없이 주일학교 교사직을 그만두면서 “사장을 사임하는 것은 쉬웠지만 주일학교 선생을 사임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했습니다. 큰 회사사장을 지낸 분이 98세까지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예수를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또 한 분, 유명한 주일학교 선생님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대통령의 반에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통령이 아니라도 좋아요. 윗사람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그 사랑을 체험하게 하면 얼마나 큰 감동이겠습니까! 저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교회학교 선생님은 제가 중학생 때 토요일 밤마다 저를 불러냈습니다. 저를 옆에 앉혀놓고 본인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기도합니다. 저보고 기도하라고 말 하지 않았지만 그분이 하니까 저도 할 수 없이 기도합니다. 그분이 계속 기도할 때 저는 자고 그랬지만 나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그 선생님이 참 감사하지요.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좋은 선생님은 부모입니다.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치라”(1-2절)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자기 자신과 자녀, 손자까지 삼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선생님으로 임명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자손들에게 하나님 섬기는 것을 가르치면 가장 귀한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손들에게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실 최고의 선생님은 부모와 어른들입니다. 자손들에게, 아래 사람들에게 좋은 본으로 깊은 감동을 남기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제가 성경을 제대로 전에는 성경의 분량이 너무 많아서 힘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기가 쉽지 않아요. 어느 젊은 변호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도대체 성경 전체가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사랑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너는 사랑의 훈련을 꾸준히 해서 사람을 무조건 사랑하라. 또한 너 자신을 사랑하라.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네 주위의 환경과 여건을 사랑하라.” 사도 바울은 “모든 율법의 요약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 한 가지를 가르치기 위해 성경 1500페이지가 있습니다. 사랑은 성경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이것을 깨닫기 전에는 기독교, 교회, 성경은 복잡하게 여겨졌지만 깨닫고 나니까 간단합니다. 사랑 한 가지면 됩니다. 사랑만 내 가슴에 일어나면 이웃, 가정, 나 자신,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 만물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 사랑을 배워서 여러분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도 우리의 선생님입니다. 우주의 작은 부분을 연구해도 논문을 쓰면 박사라고 합니다. 천문학 박사는 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별을 보고 작은 한 부분의 지식을 찾은 사람입니다. 생물학자, 경영학자 등 많은 전문가들 덕분에 우리가 많은 도움을 받고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참 좋은 선생님이지요.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참 많습니다. 제가 일생을 살면서 두 가지 때문에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첫째는 음악입니다. 음악은 인생을 즐겁게 합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찬송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음악을 좋아하고 즐기면 마음이 아름답고 평화로워집니다. 제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님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하루는 형님이 저를 데리고 책방에 갔습니다. 피아노 교본 한 권을 사서 저에게 주면서 “오늘부터 이거 연습해!”라고 했습니다. 저는 형님이 어려워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때 피아노 레슨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도 제가 음악을 즐깁니다. 제 딸 셋도 모두 제가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딸들도 평생 음악을 즐기며 살고 있지요. 윗사람의 한 마디가 제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른이시라면 여러분의 자녀, 손자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영어입니다.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피아노를 배우라고 했던 형님이 저에게 또 왔습니다. “영어 시작했냐?” “예.” “오늘부터 1학년 교과서를 다 외워라.” 나보다 위의 어른이 말씀하시니까 그만 다 외워버렸습니다. 길을 가면서도 중얼중얼 했습니다. 2학년 때는 형님이 외우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제가 그냥 다 외웠습니다. 교과서를 다 외우니까 영어에서 앞서게 되지요. 고등학교 영어 클럽에서는 영어성경을 외우라고 해서 고1부터 고3까지 매주 영어성경을 외웠습니다. 지금 기억하는 영어성경은 다 고등학교 때 외운 것입니다.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영어성경이 훤하니까 한국에서 온지 3년 밖에 안 된 저를 미국교회 목사로 앉혔습니다. 매주 영어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자 영어실력이 또 늘었습니다. 그러자 신학교에서 교수로 오라고 하더군요. 윗사람이 저보다 먼저 알고 한 마디 가르쳐주신 덕분에 저는 영어 때문에 미국에서 무시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부모, 어른들이 한 마디 말해주고, 한 가지 가르쳐 준 것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학교 선생님께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것, 수학, 영어, 물리, 지리, 역사 지식은 모두 선생님들께 배웠습니다. 그분들의 가르침 때문에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라고 하면 저의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혼자 서울에 와서 외롭게 생활하고 있는 저를 많이 사랑해주셨습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분을 생각하면서 대학교 4학년 때 ‘세포학’ 과목을 들었는데 생물전공 4학년이 배우는 과목을 문과 계통의 제가 선택해서 거의 낙제할 뻔 했습니다. 그 선생님을 꼭 한 번 다시 뵙고 싶었는데, 어느 날 우리 교회에 나타나셨습니다. 제가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는데 그 선생님께서 제 앞에 나타나셔서 “내가 자네 소식을 듣고 왔네”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음악은 참 좋아하지만 미술은 좋아한다고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전시회에 누가 데리고 가면 할 수 없이 가는 수준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미술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본 교회에 오던 해부터 담임목사인 저를 초청할 때마다 미술전시회에 갔습니다. 처음 간 전시회에서 작품의 의도를 잘 몰라서 작가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무엇을 그리신 건가요?” “선과 공간입니다.” “언제부터 이것을 그리기 시작했습니까?” “30년 정도 되었습니다.” 선과 공간만 그리다보니 작품이 팔리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릴까 생각도 했지만 마치 외도를 하는 것 같아서 못하겠더랍니다. 저는 아직도 그림을 잘 볼 줄 모르지만 그 분의 그림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 해 그 분의 전시회에 가보면 그 선과 공간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그분의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전시회를 하면 미국, 프랑스, 남미 어디서든 작품이 바로 싹 팔립니다. 죽도록 충성하면 결과가 그렇게 되는 것을 봅니다. 미술에 문외한이던 제가 전시회에 갈 때마다 물어보고 배우면서 점점 미술이 좋아졌어요. 작가들에게 작품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 그분들이 마치 철학자나 신학자 같기도 하고 너무 재미있어요. 요즘은 미술관을 찾아가기도 하는데, 지금 우리 교회 1층에 아예 화랑을 차려 놓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교회에서 미술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찼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아름다운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보고도 아름다운지 모른 채 지나칩니다. 김 교수님은 아무리 바빠도 종종 멈춰서 아름다운 것을 쳐다보라고 하십니다. “장미꽃을 15분만 계속 쳐다보면 감동으로 눈물이 납니다.” 저는 그렇게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후로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그 빛과 모양과 냄새를 음미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전문가의 한 마디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님이 됩니다. 여러분의 모습과 말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배웁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기쁨과 감사와 감격 속에 살아야하는지를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배우지요. 때로는 실수와 실패가 선생님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한 그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를 발전시키고 성공하게 만드는 선생님입니다.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다면 실패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태도를 바꾸도록 은총 주셔서 일생 사는 동안 많은 것을 꾸준히 배우고 성장하여 주위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훌륭한 선생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보내주신 선생님들에게 감사를 드리십시다.
고마운 선생님/ 신6:1-9/ 스승의주일설교/ 2008-06-02
고마운 선생님 신6:1-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 6:1-9)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우리 일생에 많은 스승을 만나게 하셔서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보통 선생님’은 말을 많이 하고, ‘좋은 선생님’은 설명을 잘 하고, ‘우수한 선생님’은 본을 보여주지만, ‘위대한 선생님’은 감동을 준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66권의 책을 주시고 그 책을 통해 이 땅의 지혜와 하늘의 신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2천여 년에 걸쳐 40여명의 저자가 쓴 이 66권의 성경은 여행기, 역사서, 편지, 잠언, 묵시록 등 여러 가지 문학의 장르로 이루어져있으며, 그리스어, 아람어, 히브리어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수백 가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마디로 사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자신과 자연과 환경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의 심성을 치료하셔서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하리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진리를 통해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의 많은 선생님들 중에 가장 훌륭한 선생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지혜와 좋은 품성과 우주의 원리를 가르치시고, 영원한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직접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감동시키시는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그 분에게 감사를 드리십시다. 예수님 역시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님으로 사셨습니다. 소크라테스와 마호메트는 60여세까지 가르쳤고, 석가모니는 80여세까지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겨우 3년 동안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감동과 감화로 인간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켜 사랑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스승으로 삼아 그 분에게서 배우면 삶이 절대적으로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 성령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내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줄 터인데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성령님은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하늘의 비밀과 땅의 비밀을 깨닫고 이해하도록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를 감동하시고 감화하십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기 전에 무엇을 합니까? 먼저 기도하지요 “하나님, 말씀해주십시오.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성령님이여, 이 말씀을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성령님께서 선생님이시기 때문에 성경을 펴고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의 눈과 귀가 뜨이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 나타납니다. 성삼위 선생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가르쳐주심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립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지식을 배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 없는 지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부족할 때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선생님이신 성령님을 통해 순종하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분의 도움을 받으면 배운 것을 그대로 삶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배움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적용하여 행동화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자들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본문의 모세가 그렇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한 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르치시고 모세가 그 말씀대로 백성들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모세, 에스라, 과거의 선지자들, 제사장, 레위인들이 선생님들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비롯해서 사도들이 모두 선생님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가르침이 신약성경 27권 안에 기록되어 우리도 그 가르침을 오늘도 배우고 있습니다. 신학자와 목회자, 전도자, 교회학교 선생님, 사랑방장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의 사랑을 알고 땅의 진리와 하늘의 진리를 배울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인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면 성경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매주 성경구절을 암송해왔는지 체크를 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암송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거의 주일학교 때 외운 것들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성경암송대회를 하면 선생님들이 우리를 격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게 하셨습니다. 참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 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저 외우기만 했는데, 장성하여 옛날에 암송했던 그 말씀들이 무슨 뜻인지 하나씩 깨달으면서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금요일 저녁에 초등학생들을 위한 ‘어와나’ 훈련이 있습니다. 제가 금요부흥회를 마치고 지하로 내려가다가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너 어와나 하러 왔니?” 물었어요. “아니요, 저는 어와나 졸업했어요.” “그래? 그런데 오늘 밤에 왜 나왔지?” “어와나 보조 교사거든요.” 중학교 1학년인데 보조교사가 되었답니다. 제가 그 아이를 꼭 안아 주며 “너 정말 훌륭하구나! 어려서부터 주일학교 보조교사를 하다니 정말 복 받았구나. 출발이 참 좋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도 중학교 1학년 때 주일학교 보조교사를 시작으로 미국 갈 때까지 계속 교회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다음 세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으면 어린 생명에게 영원한 영향을 끼치는 교회학교 선생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98세까지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신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큰 가구회사 사장을 지낸 디제이 더프리라는 분은 연세가 많아 어쩔 수 없이 주일학교 교사직을 그만두면서 “사장을 사임하는 것은 쉬웠지만 주일학교 선생을 사임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했습니다. 큰 회사사장을 지낸 분이 98세까지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예수를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또 한 분, 유명한 주일학교 선생님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대통령의 반에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통령이 아니라도 좋아요. 윗사람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그 사랑을 체험하게 하면 얼마나 큰 감동이겠습니까! 저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교회학교 선생님은 제가 중학생 때 토요일 밤마다 저를 불러냈습니다. 저를 옆에 앉혀놓고 본인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기도합니다. 저보고 기도하라고 말 하지 않았지만 그분이 하니까 저도 할 수 없이 기도합니다. 그분이 계속 기도할 때 저는 자고 그랬지만 나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그 선생님이 참 감사하지요.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좋은 선생님은 부모입니다.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치라”(1-2절)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자기 자신과 자녀, 손자까지 삼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선생님으로 임명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자손들에게 하나님 섬기는 것을 가르치면 가장 귀한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손들에게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실 최고의 선생님은 부모와 어른들입니다. 자손들에게, 아래 사람들에게 좋은 본으로 깊은 감동을 남기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제가 성경을 제대로 전에는 성경의 분량이 너무 많아서 힘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기가 쉽지 않아요. 어느 젊은 변호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도대체 성경 전체가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사랑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너는 사랑의 훈련을 꾸준히 해서 사람을 무조건 사랑하라. 또한 너 자신을 사랑하라.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네 주위의 환경과 여건을 사랑하라.” 사도 바울은 “모든 율법의 요약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 한 가지를 가르치기 위해 성경 1500페이지가 있습니다. 사랑은 성경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이것을 깨닫기 전에는 기독교, 교회, 성경은 복잡하게 여겨졌지만 깨닫고 나니까 간단합니다. 사랑 한 가지면 됩니다. 사랑만 내 가슴에 일어나면 이웃, 가정, 나 자신,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 만물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 사랑을 배워서 여러분의 삶이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도 우리의 선생님입니다. 우주의 작은 부분을 연구해도 논문을 쓰면 박사라고 합니다. 천문학 박사는 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별을 보고 작은 한 부분의 지식을 찾은 사람입니다. 생물학자, 경영학자 등 많은 전문가들 덕분에 우리가 많은 도움을 받고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참 좋은 선생님이지요.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참 많습니다. 제가 일생을 살면서 두 가지 때문에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첫째는 음악입니다. 음악은 인생을 즐겁게 합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찬송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음악을 좋아하고 즐기면 마음이 아름답고 평화로워집니다. 제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님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하루는 형님이 저를 데리고 책방에 갔습니다. 피아노 교본 한 권을 사서 저에게 주면서 “오늘부터 이거 연습해!”라고 했습니다. 저는 형님이 어려워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때 피아노 레슨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도 제가 음악을 즐깁니다. 제 딸 셋도 모두 제가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딸들도 평생 음악을 즐기며 살고 있지요. 윗사람의 한 마디가 제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른이시라면 여러분의 자녀, 손자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영어입니다.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피아노를 배우라고 했던 형님이 저에게 또 왔습니다. “영어 시작했냐?” “예.” “오늘부터 1학년 교과서를 다 외워라.” 나보다 위의 어른이 말씀하시니까 그만 다 외워버렸습니다. 길을 가면서도 중얼중얼 했습니다. 2학년 때는 형님이 외우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제가 그냥 다 외웠습니다. 교과서를 다 외우니까 영어에서 앞서게 되지요. 고등학교 영어 클럽에서는 영어성경을 외우라고 해서 고1부터 고3까지 매주 영어성경을 외웠습니다. 지금 기억하는 영어성경은 다 고등학교 때 외운 것입니다.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영어성경이 훤하니까 한국에서 온지 3년 밖에 안 된 저를 미국교회 목사로 앉혔습니다. 매주 영어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자 영어실력이 또 늘었습니다. 그러자 신학교에서 교수로 오라고 하더군요. 윗사람이 저보다 먼저 알고 한 마디 가르쳐주신 덕분에 저는 영어 때문에 미국에서 무시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부모, 어른들이 한 마디 말해주고, 한 가지 가르쳐 준 것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학교 선생님께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것, 수학, 영어, 물리, 지리, 역사 지식은 모두 선생님들께 배웠습니다. 그분들의 가르침 때문에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라고 하면 저의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혼자 서울에 와서 외롭게 생활하고 있는 저를 많이 사랑해주셨습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분을 생각하면서 대학교 4학년 때 ‘세포학’ 과목을 들었는데 생물전공 4학년이 배우는 과목을 문과 계통의 제가 선택해서 거의 낙제할 뻔 했습니다. 그 선생님을 꼭 한 번 다시 뵙고 싶었는데, 어느 날 우리 교회에 나타나셨습니다. 제가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는데 그 선생님께서 제 앞에 나타나셔서 “내가 자네 소식을 듣고 왔네”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음악은 참 좋아하지만 미술은 좋아한다고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전시회에 누가 데리고 가면 할 수 없이 가는 수준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미술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본 교회에 오던 해부터 담임목사인 저를 초청할 때마다 미술전시회에 갔습니다. 처음 간 전시회에서 작품의 의도를 잘 몰라서 작가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무엇을 그리신 건가요?” “선과 공간입니다.” “언제부터 이것을 그리기 시작했습니까?” “30년 정도 되었습니다.” 선과 공간만 그리다보니 작품이 팔리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릴까 생각도 했지만 마치 외도를 하는 것 같아서 못하겠더랍니다. 저는 아직도 그림을 잘 볼 줄 모르지만 그 분의 그림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 해 그 분의 전시회에 가보면 그 선과 공간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그분의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전시회를 하면 미국, 프랑스, 남미 어디서든 작품이 바로 싹 팔립니다. 죽도록 충성하면 결과가 그렇게 되는 것을 봅니다. 미술에 문외한이던 제가 전시회에 갈 때마다 물어보고 배우면서 점점 미술이 좋아졌어요. 작가들에게 작품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 그분들이 마치 철학자나 신학자 같기도 하고 너무 재미있어요. 요즘은 미술관을 찾아가기도 하는데, 지금 우리 교회 1층에 아예 화랑을 차려 놓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교회에서 미술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찼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아름다운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보고도 아름다운지 모른 채 지나칩니다. 김 교수님은 아무리 바빠도 종종 멈춰서 아름다운 것을 쳐다보라고 하십니다. “장미꽃을 15분만 계속 쳐다보면 감동으로 눈물이 납니다.” 저는 그렇게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후로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라도 발걸음을 멈추고 그 빛과 모양과 냄새를 음미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전문가의 한 마디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선생님이 됩니다. 여러분의 모습과 말하는 것을 보고 들으며 배웁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기쁨과 감사와 감격 속에 살아야하는지를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배우지요. 때로는 실수와 실패가 선생님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한 그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를 발전시키고 성공하게 만드는 선생님입니다.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다면 실패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태도를 바꾸도록 은총 주셔서 일생 사는 동안 많은 것을 꾸준히 배우고 성장하여 주위 사람들과 후손들에게 훌륭한 선생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보내주신 선생님들에게 감사를 드리십시다.
교사 교육의 가치/ 시14:1-4/ 황영복 목사/ 2006-07-11
교사 교육의 가치 시14:1-4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 하는 도다.” 본문 시편 14편 1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라고 다윗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 소위 \'무신론자\'를 가리켜서 혹은\' 무신론\'을 가리켜서 \'어리석다.\'라는 표현을 다윗은 선언했습니다. \'어리석다\'라는 말은 희브리어의 본래 \'나발\'이라는 말입니다. \'나팔\'이 아니라 \'나발\'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보시면 \'나발\'이라는 사람이 사무엘 상 25장에 나옵니다. 그가 다윗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평화롭게 살자! 이런 제안을 했는데 이 \'나발\'이라는 부자였기 때문에 혹시 다윗과 함께 살면 자기 재산에 축이 나고 손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그것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악하게 대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그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아내 \'아비가일\'의 구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비참하게 죽습니다. 성경은 사무엘 상 25장 3절에 보시면 그에 대하여 그는 완악하고 악한 사람이었다. 이름처럼 악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나발이라는 말은 단순히 어리석다는 것뿐만 아니라 악하다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은 단순히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난님을 불신하고, 거역하는 거다란 죄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신론자에 대해서 오늘 시편 14편 4절에 보시면 동시에 \'죄악을 행하는 자\'라고??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엡스키\'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서운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다. 이 말은 모든 질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선언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컴퓨터 기업으로 유명한 IBM은 ‘엘빈토플러’를 고문으로 모신 그런 회사였습니다. 이 토플러 는 1965년에 소위 “미래의 충격”이 라고 하는 “future socke”라는 책을 섰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여러분이 너무 잘 아는 “제3의 물결”이라는 책 그리고 90년대에 와서는 “권력이 동”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면 서 그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이야기를 했는데 어찌 보면 그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상당한 부분에 서 맞아 들어가고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론에서 “우리가 쇼크 흔히 말하는 충격을 왜 받는가 하면 그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변화가 너무 크기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크지 않아도 어느 날 우리가 옷만 바꿔 입고 와도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이 변화라는 것이 우리 에게 굉장한 위기가 되기도 하고 유익이 되기도 하는데 이제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변화가 너무 커서 그 변화의 급류에 우리가 이루어 놓은 좋은 문화와 가치 체계들이 함께 떠내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우리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우리가 잘 이루어 놓은 것도 그 변화의 급류 속에 떠내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퇴보하고 다음에는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충격 속에서 우리가 더 무섭게 여겨야 할 충격적인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다는 사실을 마치 진짜요. 사실인 것처럼 조성해 낸다는 것입니다. 이 세속적 변화의 급류 속에서 하나님 없는 문화, \'무신론 문화\',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사신 문화\' 즉, \'신은 죽었다.\'는 거짓 진리가 난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충격들에 대해 적응력을 잃어버리고 현실을 부정하거나 현실을 도피하거나 도덕을 파괴시키고, 문화를 파괴시키는 무감각하고 돌발적이고, 발작적인 이러한 삶의 형태들이 오늘 우리 주변 에 많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좀 염려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과연 앞으로 우리가 경제는 좀 회복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정신문화를 바르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 라는 점은 불투명하기에 이제는 심각하게 염려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위험 수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겠구나?”를 깊이??깨달았습니다. 인간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창조해놓은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께 도전했다가 실패함으로써 땀 흘리는 수고와 해산하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땅은 저주를 받고 흑암이 세상을 뒤덮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아브라함도 위기에 처하자 부인을 누이라고 속이는 실수를 했습니다. 다윗도 역시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을 신중히 돌아보게 됐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없다며 교만해질 수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했지만 망하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자들도 ‘진짜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시대에도 악한 자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했는데 이것은 가장 무서운 저주입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점점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탓에 악령에 사로잡혀 결국 비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 삶, 그런 인생의 모습은 결국 \'바다가운데 표류하고 있는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데 문제는 그런 이론과 인식과 접하는 일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삶, 현대인들에게 무섭고도 위험한 사탄의 계책이요, 멸망으로 달려가는 길이기에 인류에게 가장 큰 위기인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고”, 구원받은 영혼까지 미혹하여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마귀, 사탄이 어떠한 모습으로 신앙인들을 넘어지게 할지 모릅니다. 동시에??사탄의 유혹에 빠져 어떤 불행과 위기를 더 가져다줄지 우리로서는 미래가 예측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통곡과 한탄의 기도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패와 타락과 죄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한 가운데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참 다윗은 인품이나 신앙이나 지도력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입장이나 자기의 처지나 자기의 권력이나 자기의 어떤 정치적 출세나 그런 입지를 위해서 하나님께 한탄 하며, 통곡하며 눈물 흘려 기도한 것 이 아니라 이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데 이 백성 속에 점점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고, 존재자체를 부인하는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한탄하며 통곡하며,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 없는 것으로 자꾸만 굴러가고 있다고 하는 것 입니다. 한번 교독하십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 하는 도다.” 본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에서 \'어리석은 자\'는 다윗이 본시에서 자세히 규명하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어리석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발\'(* )은 그저 지혜가 부족한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에서 살펴볼 때, 이는 외면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의로운 자의 생명을 위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치 기준 없이 마음대로 행하는 자를 가리키며,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지 아니한 자를 가리킵니다(Craigie). 하나님 없는 모습에 대 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모습은 부패했습니다. 그야 말로 썩었습니다. 소행이 가증 하고 위선과 더러움이 가득합니다.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모습은 \'다 치우쳐있다.\'는 말씀에서 이 치우쳐 있다는 것은 \'다른 길로 빠졌다.\'는 뜻입니다. 한계를 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사의 책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오늘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교회가 신앙교육의 가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특별히 교사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교사 여러분들은 자신의 신앙과 스스로 어떤 가치관을 정립해 놓고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가르치고 계십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우리가 이 시간 짧은 시간 이지만 정말 무엇이 우리 교육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 지 \'교육의 가치\'를 되새겨 보는 그런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교회의 교육, 우리가 정의 중심, 가치관 세계관 이것의 당연한 논리가 무엇입니까???어린이의 영혼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 가르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텅이에 바집니다. 즉, 지옥에 떨어집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운전을 하는 사람이 중앙선을 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우리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마치 중앙선을 넘는 모습과 같은 일들이 너무나 쉽게 자주 드러나고 있습니다. 쉽게 쉽게 중앙선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고 적당하게 함께 더러워져가 고 있고 함께 썩어져 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오늘 다윗은 하나님이 없는 자. 어리석은 자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고 사람들이가 지고 있는 보편적 조성에 대해 지적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을 부정하면서 이런 죄악성은 더욱 크게 기승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없을 때 어리석음과 악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리석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은 지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 대하여 무지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 악행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의로움에 대해 정의에 대해 거절하며,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의적으로 하나님 없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고의적으로 하나님 없는 것으로 하 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뇨?”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하나님에 대해 무식 하는가? 아니라는 얘 기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없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 기도하는데 찬송하는데 실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실천 적 무신론자”라고 얘기합니다. 혹은 “크리스천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언젠가도 제가 한번 말씀 드렸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고 싸웁니다. 기도했으면 안 싸워야 하는데 싸우기에 ‘왜 기도하고 싸우느냐?’고 했더니 기도하고 힘 얻어서 싸운다고 하더랍니다.??하나님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아서 되겠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데 실제적으로는 실천적으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 정말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삶의 가치가 내 속에 분명히 있는 것인가? 여러분 어떤 신앙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 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하 나님을 없는 것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말하고 기도하면서도 개가 없고, 헌신이 없습니다. 화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합니다. 혹시 오늘 우리들이 이런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교육 신앙의 교육 가정의 교육의 가치는 바로 이 하나님이 없음을 배격하고, 하나님 계심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깨우치고 증거 하는 것이 교회요. 가르치는 분이 주일학교 교사인 것입니다. 교회는 학원이 아닙니다. 여기는 친교장소가 아닙니다. 여기서 식사하고 교제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는 하나님 살아 계심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심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곳입니다. 그것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깃발이 꽂혀져 있는 곳입니다. 다른 세상의 깃발과 사람의 깃발이 꽂혀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사실 기념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개신교의 신앙의 전통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계심을 증거하고 가르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본문 3절에서“치우쳤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르\'(* )는 \'제 고집대로 행하다.\', \'완고하고 반항적이다.\'라는 뜻입니다(출 32:8). 저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제 고집대로 행한 것입니다. 나 자신은 물론 이거니와 내 가정 속에 내 자녀들에게 교사들은 어린 심령에게 우리의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가르쳐야겠습니까?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 와 내 가정 속에 내 자녀들에게 또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릴 수 있겠습니까?(본문 이해: Meaning &Significance). 몇 가지를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자연이 저절로 생겼습니까? \'진화론\'에 근거해서 설명하는 이치는 그럴지 모릅니다만 사실 자연 이 제멋대로 입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자연 속에는 질서와 규칙이 있습니다. 조화가 있습니다. 기능이 있습니다. 자연이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아야하고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물론 때때로 불완전한 것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자녀들과 여행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속에서 신비함과 위대한 창조적 능력을 발견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사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시려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신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게서 죽으심을 뛰어넘어 부활, 승천하심으로,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영생의 완성을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한 사건을오 구원받는 은혜를 입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 여러분들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계심을 알아차리게 하도록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어린 생명들이 되도록 신앙 교육을 \'구세주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인도\'를 철저하게 잘 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며, 하나님 앞의 신앙인으로 마땅히 가져야 할 생각의 핵심이 ‘구속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그 구원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우리는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 교사,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과 사람을 만나게 해 주는 중매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교사는 이 귀한 사명이 주어져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부모님이 아직 믿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중매쟁이 역할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이 믿지 않으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에게 정말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할 수 있는 신실한 뜨거운 중매쟁이가 되어야 참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교사 사명의 완성이요. 예수님을 만나는 생명이 되도록 인도하는 교사가 \'사랑의 빚진 자\'로써, \'성령 받은 자\'로서 \'직분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는 구원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는 것이 교사의 가장 귀한 본연의 사명임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보다 교사로서의 더 큰 가치와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적인 증언입니다. 계속 확신을 갖게 하는 공급처, 근원이 됩니다. 따라서 교사가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길, 하나님을 찾는 것, 하나님을 만나는 법, 하나님의 심판을 예비하는 것,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는 자와 지키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교사 여러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고 어린 생명들에게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가감 없이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고 계십니까? 나중에 우리 아이들은 반드시 그 가르침을 받은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오. 하나님은 반석이시오. 하나님은 요새요. 하나님은 전능자요. 하나님은 임마누엘이시며, 여호와 이레가 되시며, 여호와는 평강(샬롬)이 되시며,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고 사랑의 아버지이시라고 우리는 성경말씀을 확신 있게 증거 해야 합니다. 설교를 할 때 간혹 교사들이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걸요?’ 이렇게 전하는 불행하고, 불확실한 신앙을 가진 교사는 자신의 영혼도, 맡겨준 어린 생명들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결국 잡아먹히게 됩니다. 분명히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흔들림이 없이 분명하게 전해야 합니다. 네번 째 기도의 사람이 되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 효과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복음을 전하되 능력 있게 전하고 성경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지식 전달로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을 변화 시키려면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이 통로는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가르치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도록 내게 맡겨주신 어린 영혼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마치 전화선, 수도관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가 하나님과 먼저 기도의 불통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에 게으르면 하나님을 아는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기도를 중단하게 된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나타내는 것을 중단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낮 예배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응답과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할 때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어린 생명들을 면화시켜 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 진리의 말씀이 듣는 심령들에게 깨달아지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그야말로 통로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린 생명들을 위해 교사들이 결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미스바교회 교사 여러분들이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여 몸 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위대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우는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어제 제가 육군훈련소에 3,500명을 세례주고 왔습니다. 설교하러 초청된 이재완 총회장, 세례 문답을 한 국방부 군종실장은 교사와 주일학생 사이였습니다. 어릴 때 입가에 거품과 침이 가득하면서 열정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시더니 총회장이 되었고, 그 가르침 덕분에 한국 군종목사단의 총수가인 군목으로 함께 영광 돌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사의 사명을 참으로 위대합니다. 한 영혼의 운명과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귀중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미스바교회 교사 여러분! 몸속의 심장 혈관 통로는 작은 것 하나라도 막히면 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기도는 심장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뇌의 혈관이 막히면 두뇌 세포가 죽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막히면 영적으로 맡겨주신 어린 생명들의 영혼들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들, 딸들이 우리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멸망의 자리에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강권해서 구원해 주신 것처럼 교사들의 기도를 통해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전하는 말씀에 성령께서 강권하여 권세 있게 역사하심으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나의 살아계심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우리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교사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사신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봉사와 섬김과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교사와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가 집사, 권사, 장로님들이 저렇게 헌신하시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계심이 분명하다.’라고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일에 우리 미스바교회 교사들과 모든 분들이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을 증거 했습니까? 100세에 나은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 한나는 서원하여 나은 사무엘을 주의 종으로 바침으로, 엘리사벳은 사도요한을 제사장이 아닌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바침으로,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하심을 증거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의 봉사와 헌신 과 희생은 어린 자녀들과 주일학생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교육은 단순한 교육활동이 아닙니다. 교육은 물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이라고 해서 다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육은 인간을 지배하는 폭군이다.”, ”교육은 더욱 똑똑한 사기꾼과 악마를 만들 뿐이다.”, “무식한 사람은 칼을 가지고 한 사람을 죽이지만 유식한 사람은 펜을 가지고 수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육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교육의 가치추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해 주는 말들입니다. 참되고, 올바른 교육의 가치를 알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교육을 통해 폐해를 막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 인간이 가져야 하는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며, 최고의 가치가 무엇이며, 최고의 삶은 무엇인가?’를 가쳐야 합니다. 특별히 세상 교육을 통해 알려주지 못하는 자기 생명을 구원하게 하는 구원의 교육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계심의 교육을 통해 ?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시켜야 하는 귀한 사명이 교회 교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말씀과 기도와 예수그리스도와 봉사와 헌신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 계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교육의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치가 있을 때 질서, 조화,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뒤죽박죽되면 모든 것이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듭니다. 여러분 영어로 산다는 것을 “LIVE”라고 합니다. 그러나 단어의 배열을 거꾸로 해보면 “EVIL”이 됩니다. 즉, ‘악’이라는 뜻이 됩니다. 모든 인생들은 생명과 악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한 자가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인간은 언제든지 악하게 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가리치고, 구원의 복음이 필요하며, 교사들은 이 귀한 진리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미스바교회 교사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이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세우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불완전하기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중매쟁이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치시되 기도하여 성령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권세 있게 귀한 생명들을 변화시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로 더욱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변화시키고,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귀한 교사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앙적인 교육으로 멸망으로 향할 수 있는 귀한 어린 생명들을 살려내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아울러 이 시간 충성된 교사 여러분들에게 최선을 다해 주시는 헌신에 감사드리며, 복된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사가 가져야 할 자아상/ 요14:12, 딤전4:7/ 2007-01-26
교사가 가져야 할 자아상 요14:12, 딤전4:7 김남준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교사 리바이벌」이라는 책이 있지요? ○○○교회 교사 선생님들은 일류 교사들이시니까 다 읽어보셨을 줄로 압니다. 그 책 서론에 보면, 오늘날 교회교육의 현장을 둘러싼 우리의 논의는 너무 환경 중심적인데, 이런 환경 중심적 논의를 속히 그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강조하기를, 교회학교의 성공은 교사들의 영적 건강함 없이는 기대하기 어렵기에, 무엇보다 먼저 교사들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해서, 교사들을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목회자가 한 사람이 교회 부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듯이, 잘 세워진 교사 한 사람이 교회학교를 크게 좌우합니다. 영적으로 잘 세워진 교사 한 사람이 한 어린 영혼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학교 교사들은 누구보다도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야 됩니다. 근심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는 산모의 젖을 먹으면 갓난아기는 설사를 한답니다. 주전자 속에 흙을 집어넣고 물을 부으면 흙탕물밖에 안 나오듯이, 건강치 못한 자아상을 가진 교사로부터 좋은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을 듣고 보는 학생이 설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고귀한 사명을 가진 교사는 누구보다도 더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자아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견을 의미합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평가하는가? 아니면 무가치한 존재로 평가하는가? 자신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가? 아니면 능력이 없는 자로 보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견이 바로 자아상입니다. 내가 어떤 자아상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좌우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화실 근처의 길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화가가 그의 창문을 통해 패배감에 젖어 절망의 계곡에 떨어진 그 거지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중요한 변화를 주면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 변화란, 초점이 없이 허공 중에 박힌 그 거지의 눈을 생기 있고 활기에 넘치는 의욕에 찬 사람의 번쩍이는 눈으로 바꾸어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화가는 또한 맥이 풀린 그 거지의 힘없는 얼굴을 강철같은 굳은 의지의 결단성이 강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 화가는 거지를 불러 자기가 그린 그 그림을 보게 하였습니다. 거지는 그 그림 속의 모델이 바로 자신이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게 누구입니까?\\\" 그 거지가 물었을 때 화가는 조용히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여 그를 가리켰습니다. 그 거지는 다시 초상화를 보면서도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의심했습니다. \\\"저 그림의 사람이 바로 저란 말인가요? 저 그림의 사람이 도대체 저일 수가 있을까요?\\\" 거지는 머뭇거리면서 힘없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가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당신을 보고 그린 그림이 저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거지는 그 순간 그의 어깨를 똑바로 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본 내가 바로 저 그림 속의 사람이라면, 나는 앞으로 저 그림의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냐? 거지로 생각하면 거지같이 살고, 10명의 정탐꾼 같이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부정적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아상이 올바르면 나의 인생은 밝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또한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을 때 내가 가르치는, 만나는 사람들 앞에도 얼마나 긍정적이고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올바른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1. 잘못된 자아상 여기 잘못된 자아상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자기 스스로 평가한 대로 보는 자아상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겪는 경험들을 통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믿는 깊은 자기 확신, 이건 잘못된 자아상입니다. 어느 학자가 벼룩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지요. 한 용기에다가 벼룩을 집어넣고는 마음껏 뛰놀게 하다가 어느 순간 10cm 높이에 유리벽을 설치합니다. 벼룩은 평상시에는 30-40cm를 뜁니다. 아주 잘 뛰는 놈은 1m도 뛴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리벽을 설치하면 처음엔 평상시와 같이 힘껏 뜁니다. 그러면 유리벽에 탁 부딪힙니다. 그 실험을 계속 하게 되면 이 벼룩이 이런 경험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아, 이거 이상 뛰어봤자 진짜 벼룩이네. 이 이상은 나는 뛸 수가 없구나!\\\' 그래서 이제는 유리벽을 치워도 벼룩은 10cm 높이 정도 이상으로는 뛰지 않습니다. 실패의 마인드는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진정 더 잘할 수 있는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잠재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리 시달리고 저리 시달리고 어려움을 겪고 낙심하게 되면 그 다음은 진짜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 반복된 경험들을 통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고 그대로 믿는 거지요. 이런 자아상을 가진 사람에게 위대한 미래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②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기준과 판단에 묶여버린 자아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온 나에 대한 평가, 거기에 묶여 \\\'그래, 나는 그런 놈이야.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돼!\\\', 이래 생각하고 산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자아상입니다. 어떤 학생 하나가 \\\'너는 어째 그리 공부를 못 하냐?\\\' 그 소리만 늘 듣고 자랐어요. 거기다가 부모님에게 맨날 책망할 때마다 \\\'아이구, 빌어먹을 놈!\\\' 그 소리 듣고 자랐어요. 그러니 그 학생의 마음 속엔 항상 소리가 들려와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나는 공부 못해! 나는 공부 못하는 사람이야.\\\' 공부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학생이 예수님을 만났어요. 은혜를 크게 받았어요. 자아상이 달라졌어요. 이젠 공부하고 싶어 야단났습니다. \\\'나도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충만했어요. 졸업 땐 전교 10등으로 졸업했어요. 그 학생이 접니다. 여러분, 나의 자아상이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기준과 판단에 묶여 있는 한 더 나은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교사, 성도가 가져야 할 자아상은 무엇입니까? C. S 루이스는 말하기를 \\\"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댄 스니드가 쓴 책 가운데 「하나님이 만드신 참 좋은 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읽어보세요. 정말 귀한 책입니다. 스니드는 그 책에서 \\\"건강한 자아개념을 형성하는 첫 단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에 대해 진정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창조주 되시고, 나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가, 66권 성경 곳곳에서 구원받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내가 나를 평가하는 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나, 그걸 나의 자아상을 삼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있어요? 하나님보다 나를 더 완전하게 평가할 사람 있어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고 평가했는데, 내가 아니다 그러면 어리석지요? 더 이상 나 자신의 평가를 생각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나를 나의 자아상을 삼아야 하겠습니다. ①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나는 첫째,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즘은 가면 갈수록 여자분들은 얼마나 기가 사는지, 옛날에는 뭐 간 큰 남자 시리즈 이야기를 했는데요, 요즘은 이런 답니다. 여자들이 외출하면서 냉장고 문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나가는데, 뭐라고 써놓는 줄 아세요? \\\"까불지마라.\\\" 이래 써놓는답니다. 무슨 뜻인 줄 아세요? 까-가스조심 / 불-불조심 / 지-지프조심(자꾸 조심) / 마-마누라 찾지 마라 / 라-라면 끓여먹고 기다려! 여러분, 기죽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으로, 구주로 믿는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제가 거제도에 10년 있었는데, ○○○ 대통령 아들을 몇 번 봤어요. 그는 대통령의 아들일 뿐이지, 대통령이 아니에요. 그런데 대통령의 아들 온다 그러니까 난리 나더라고요. 당당하게 걸어다닙디다. 예수 믿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입니까? 좀 당당하게 삽시다. 특히 남자들이 좀 당당해집시다. 교사 여러분, 교사의 일이라는 게, 그래요. 요즘 가르친다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좀 어렵다고 기죽어 살지 맙시다. 당당하게 사십시오. 그런 자세, 그런 태도로 사는 교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②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여러분, 하루에 거울을 몇 번 보십니까?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하십니까? 황수관 박사님 강의를 들어보면, 웃음이 안 나오면 거울 쳐다보랍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 보면, 세상에 안 웃을 수가 없대요. 여러분, 거울을 보면 내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살아온 나의 내적 이미지도 떠오릅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말입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면서, 너는 어찌 그리 못 생겼냐? 참 이상하게도 생겼다. 어이구, 너라는 인간은 참 구제불능이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평소에 자기를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자기 자아상입니다. 그러나 거울을 볼 때마다 세상에 그 거울 속에 그렇게 멋있는 남자가 들어있을 수 있어요? 그래 거울 쳐다볼 때마다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특별하게 보는 사람,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그만큼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그러거든요. 거울을 볼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이 듣는 앞에서, \\\'야 거울 속에 장동건 같고 배용준 같은 멋있는 남자 들어있네. 이래 멋있을 수 있어!\\\' 그러면 뒤에서 다 넘어집니다. 넘어지든지 말든지, 저는 저 자신을 볼 때마다 그래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포함하여 자신의 존재나 인생에 만족하고 있지 못한다 그러지요? 이런 불만족은 자신을 비관하는 병적인 열등감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의 말을 귀담아 들으세요. \\\"인간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대한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광활한 태양과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경탄하면서 정작 가장 경탄해야 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경탄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지어진 오묘한 존재이며 걸작 중의 걸작품임을 인정하십시오. 당당한 자신감으로 걸작품답게 살아가는 것이 교사가 가져야 할 자세인 줄 믿습니다. ③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시8편 4절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하셨는데, 여러분, 내가 천지 우주만물을 지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놀랍지 않습니까? 나는 저주의 대상이 아니요, 영원히 형벌 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요, 애정의 대상자요, 관심의 대상자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보면 어떻습디까? 저는 제 아내로부터 사랑을 받아보니까, 밥 안 먹어도 배부르더라고요.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저주의 대상, 미워하시는 대상으로 보시지 않고 사랑의 대상자로 삼아주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④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교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1장 11절에 보면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하십니다. 교사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가 하고 싶어 교사합니까? 달란트와 은사가 있어서 합니까? 오늘 저는 목사가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달란트와 은사가 있어서 목사 된 것 아닙니다. 오늘도 제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목회 하려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셨고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부르셨기에, 오늘 이 시대, 저 교회로 나를 부르셨기에, 그래서 그분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기에 최선을 다해 목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웠다. 나를 부르셨다. 이것이 내가 일해야 될 이유, 충성해야 될 이유로 알고, 나를 교사로 부르신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충성하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⑤나는 성령 안에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나도 한다, 그리고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겠다는 말씀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을 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나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3대 사역, 즉 예수님이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셨듯이 성령 안에서 나도 그 일을 계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겠다는 것은 질적, 본질적 이야기가 아니라 선교적 개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이 땅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마침내 실행될 대대적인 세계 복음화의 위대한 비전을 바라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예수님보다도 더 멀리, 더 넓은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이유는 오늘 본문 전후 문맥을 살필 때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나도 할 수 있고, 내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 우리 교사들이 가져야 할 자아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단한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지금보다 10배 더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 나도 한 영혼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교사가 가르칠 때 얼마나 힘있고,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있는 가르침이 되겠습니까?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가르치게 될 때 학생들에게 긍정적 마음을 심어주고, 꿈을 심어주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심어주고, 가능성을 심어주는, 정말 탁월한 교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교사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교사 여러분과 성도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주안에서 더 복되고 은혜로운 열매 많이 남기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사가 가져야 할 자아상/ 요14:12, 딤전4:7/ 2007-01-26
교사가 가져야 할 자아상 요14:12, 딤전4:7 김남준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교사 리바이벌」이라는 책이 있지요? ○○○교회 교사 선생님들은 일류 교사들이시니까 다 읽어보셨을 줄로 압니다. 그 책 서론에 보면, 오늘날 교회교육의 현장을 둘러싼 우리의 논의는 너무 환경 중심적인데, 이런 환경 중심적 논의를 속히 그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강조하기를, 교회학교의 성공은 교사들의 영적 건강함 없이는 기대하기 어렵기에, 무엇보다 먼저 교사들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해서, 교사들을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목회자가 한 사람이 교회 부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듯이, 잘 세워진 교사 한 사람이 교회학교를 크게 좌우합니다. 영적으로 잘 세워진 교사 한 사람이 한 어린 영혼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학교 교사들은 누구보다도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야 됩니다. 근심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는 산모의 젖을 먹으면 갓난아기는 설사를 한답니다. 주전자 속에 흙을 집어넣고 물을 부으면 흙탕물밖에 안 나오듯이, 건강치 못한 자아상을 가진 교사로부터 좋은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을 듣고 보는 학생이 설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고귀한 사명을 가진 교사는 누구보다도 더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자아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견을 의미합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평가하는가? 아니면 무가치한 존재로 평가하는가? 자신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가? 아니면 능력이 없는 자로 보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견이 바로 자아상입니다. 내가 어떤 자아상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좌우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화실 근처의 길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화가가 그의 창문을 통해 패배감에 젖어 절망의 계곡에 떨어진 그 거지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중요한 변화를 주면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 변화란, 초점이 없이 허공 중에 박힌 그 거지의 눈을 생기 있고 활기에 넘치는 의욕에 찬 사람의 번쩍이는 눈으로 바꾸어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화가는 또한 맥이 풀린 그 거지의 힘없는 얼굴을 강철같은 굳은 의지의 결단성이 강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 화가는 거지를 불러 자기가 그린 그 그림을 보게 하였습니다. 거지는 그 그림 속의 모델이 바로 자신이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게 누구입니까?\\\" 그 거지가 물었을 때 화가는 조용히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여 그를 가리켰습니다. 그 거지는 다시 초상화를 보면서도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의심했습니다. \\\"저 그림의 사람이 바로 저란 말인가요? 저 그림의 사람이 도대체 저일 수가 있을까요?\\\" 거지는 머뭇거리면서 힘없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가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당신을 보고 그린 그림이 저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거지는 그 순간 그의 어깨를 똑바로 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본 내가 바로 저 그림 속의 사람이라면, 나는 앞으로 저 그림의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냐? 거지로 생각하면 거지같이 살고, 10명의 정탐꾼 같이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부정적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아상이 올바르면 나의 인생은 밝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또한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을 때 내가 가르치는, 만나는 사람들 앞에도 얼마나 긍정적이고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올바른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1. 잘못된 자아상 여기 잘못된 자아상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자기 스스로 평가한 대로 보는 자아상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겪는 경험들을 통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믿는 깊은 자기 확신, 이건 잘못된 자아상입니다. 어느 학자가 벼룩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지요. 한 용기에다가 벼룩을 집어넣고는 마음껏 뛰놀게 하다가 어느 순간 10cm 높이에 유리벽을 설치합니다. 벼룩은 평상시에는 30-40cm를 뜁니다. 아주 잘 뛰는 놈은 1m도 뛴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리벽을 설치하면 처음엔 평상시와 같이 힘껏 뜁니다. 그러면 유리벽에 탁 부딪힙니다. 그 실험을 계속 하게 되면 이 벼룩이 이런 경험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아, 이거 이상 뛰어봤자 진짜 벼룩이네. 이 이상은 나는 뛸 수가 없구나!\\\' 그래서 이제는 유리벽을 치워도 벼룩은 10cm 높이 정도 이상으로는 뛰지 않습니다. 실패의 마인드는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진정 더 잘할 수 있는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잠재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리 시달리고 저리 시달리고 어려움을 겪고 낙심하게 되면 그 다음은 진짜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 반복된 경험들을 통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고 그대로 믿는 거지요. 이런 자아상을 가진 사람에게 위대한 미래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②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기준과 판단에 묶여버린 자아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온 나에 대한 평가, 거기에 묶여 \\\'그래, 나는 그런 놈이야.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돼!\\\', 이래 생각하고 산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자아상입니다. 어떤 학생 하나가 \\\'너는 어째 그리 공부를 못 하냐?\\\' 그 소리만 늘 듣고 자랐어요. 거기다가 부모님에게 맨날 책망할 때마다 \\\'아이구, 빌어먹을 놈!\\\' 그 소리 듣고 자랐어요. 그러니 그 학생의 마음 속엔 항상 소리가 들려와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나는 공부 못해! 나는 공부 못하는 사람이야.\\\' 공부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학생이 예수님을 만났어요. 은혜를 크게 받았어요. 자아상이 달라졌어요. 이젠 공부하고 싶어 야단났습니다. \\\'나도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충만했어요. 졸업 땐 전교 10등으로 졸업했어요. 그 학생이 접니다. 여러분, 나의 자아상이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기준과 판단에 묶여 있는 한 더 나은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교사, 성도가 가져야 할 자아상은 무엇입니까? C. S 루이스는 말하기를 \\\"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댄 스니드가 쓴 책 가운데 「하나님이 만드신 참 좋은 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읽어보세요. 정말 귀한 책입니다. 스니드는 그 책에서 \\\"건강한 자아개념을 형성하는 첫 단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에 대해 진정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창조주 되시고, 나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가, 66권 성경 곳곳에서 구원받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내가 나를 평가하는 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나, 그걸 나의 자아상을 삼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있어요? 하나님보다 나를 더 완전하게 평가할 사람 있어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고 평가했는데, 내가 아니다 그러면 어리석지요? 더 이상 나 자신의 평가를 생각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나를 나의 자아상을 삼아야 하겠습니다. ①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나는 첫째,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즘은 가면 갈수록 여자분들은 얼마나 기가 사는지, 옛날에는 뭐 간 큰 남자 시리즈 이야기를 했는데요, 요즘은 이런 답니다. 여자들이 외출하면서 냉장고 문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나가는데, 뭐라고 써놓는 줄 아세요? \\\"까불지마라.\\\" 이래 써놓는답니다. 무슨 뜻인 줄 아세요? 까-가스조심 / 불-불조심 / 지-지프조심(자꾸 조심) / 마-마누라 찾지 마라 / 라-라면 끓여먹고 기다려! 여러분, 기죽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으로, 구주로 믿는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제가 거제도에 10년 있었는데, ○○○ 대통령 아들을 몇 번 봤어요. 그는 대통령의 아들일 뿐이지, 대통령이 아니에요. 그런데 대통령의 아들 온다 그러니까 난리 나더라고요. 당당하게 걸어다닙디다. 예수 믿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입니까? 좀 당당하게 삽시다. 특히 남자들이 좀 당당해집시다. 교사 여러분, 교사의 일이라는 게, 그래요. 요즘 가르친다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좀 어렵다고 기죽어 살지 맙시다. 당당하게 사십시오. 그런 자세, 그런 태도로 사는 교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②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여러분, 하루에 거울을 몇 번 보십니까?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하십니까? 황수관 박사님 강의를 들어보면, 웃음이 안 나오면 거울 쳐다보랍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 보면, 세상에 안 웃을 수가 없대요. 여러분, 거울을 보면 내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살아온 나의 내적 이미지도 떠오릅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말입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면서, 너는 어찌 그리 못 생겼냐? 참 이상하게도 생겼다. 어이구, 너라는 인간은 참 구제불능이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평소에 자기를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자기 자아상입니다. 그러나 거울을 볼 때마다 세상에 그 거울 속에 그렇게 멋있는 남자가 들어있을 수 있어요? 그래 거울 쳐다볼 때마다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특별하게 보는 사람,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그만큼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그러거든요. 거울을 볼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이 듣는 앞에서, \\\'야 거울 속에 장동건 같고 배용준 같은 멋있는 남자 들어있네. 이래 멋있을 수 있어!\\\' 그러면 뒤에서 다 넘어집니다. 넘어지든지 말든지, 저는 저 자신을 볼 때마다 그래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포함하여 자신의 존재나 인생에 만족하고 있지 못한다 그러지요? 이런 불만족은 자신을 비관하는 병적인 열등감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의 말을 귀담아 들으세요. \\\"인간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대한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광활한 태양과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경탄하면서 정작 가장 경탄해야 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경탄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지어진 오묘한 존재이며 걸작 중의 걸작품임을 인정하십시오. 당당한 자신감으로 걸작품답게 살아가는 것이 교사가 가져야 할 자세인 줄 믿습니다. ③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시8편 4절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하셨는데, 여러분, 내가 천지 우주만물을 지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놀랍지 않습니까? 나는 저주의 대상이 아니요, 영원히 형벌 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요, 애정의 대상자요, 관심의 대상자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보면 어떻습디까? 저는 제 아내로부터 사랑을 받아보니까, 밥 안 먹어도 배부르더라고요.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저주의 대상, 미워하시는 대상으로 보시지 않고 사랑의 대상자로 삼아주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④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교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1장 11절에 보면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하십니다. 교사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가 하고 싶어 교사합니까? 달란트와 은사가 있어서 합니까? 오늘 저는 목사가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달란트와 은사가 있어서 목사 된 것 아닙니다. 오늘도 제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목회 하려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셨고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부르셨기에, 오늘 이 시대, 저 교회로 나를 부르셨기에, 그래서 그분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기에 최선을 다해 목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웠다. 나를 부르셨다. 이것이 내가 일해야 될 이유, 충성해야 될 이유로 알고, 나를 교사로 부르신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충성하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⑤나는 성령 안에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나도 한다, 그리고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겠다는 말씀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을 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나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3대 사역, 즉 예수님이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셨듯이 성령 안에서 나도 그 일을 계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겠다는 것은 질적, 본질적 이야기가 아니라 선교적 개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이 땅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마침내 실행될 대대적인 세계 복음화의 위대한 비전을 바라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예수님보다도 더 멀리, 더 넓은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이유는 오늘 본문 전후 문맥을 살필 때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나도 할 수 있고, 내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 우리 교사들이 가져야 할 자아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단한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지금보다 10배 더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 나도 한 영혼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교사가 가르칠 때 얼마나 힘있고,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있는 가르침이 되겠습니까?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가르치게 될 때 학생들에게 긍정적 마음을 심어주고, 꿈을 심어주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심어주고, 가능성을 심어주는, 정말 탁월한 교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교사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교사 여러분과 성도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주안에서 더 복되고 은혜로운 열매 많이 남기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신6:4-9/ 2001-09-17
교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신6:4-9 \\\"선생님이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하고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 나누시기 바랍니다. 서기 70년, 로마의 성난 군대가 그동안 포위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을 향해 물밀듯이 몰려 들어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요아난 벤 자카이라는 존경받는 위대한 랍비이자 스승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몰래 성을 빠져나가 로마 장군을 만나서 \\\"마을의 작은 집 한채가 있는데 그 집만 파괴하지 않겠다면 성문을 열어 주겠습니다\\\" \\\"무슨 집이요?\\\" \\\"예, 그 집은 바로 도서관입니다.\\\" 장군은 동의를 했고 요하난은 돌아가 성문을 열었고 백성들 사이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으나 백성을 향해 요하난은 \\\"울지 마십시오. 로마 군대는 모든 것을 다 약탈해도 저 오두막의 책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소, 우리 자녀들은 오두막의 책을 통해 하나님을 배워 반드시 우리의 조국을 회복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한 사회를 지키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육이 바로 서고 존경받을 만한 스승이 있는 사회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푸른교회는 스승의 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스승의 주일은 어린이 주일이나 어버이 주일 같이 우리 한국 교회가 공식적으로 지키는 절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푸른교회는 특별히 교육을 중히 여기고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하는 교회\\\'를 설립 목적으로 정한 교회인 만큼 푸른교회는 오늘, 오월 셋째 주일을 스승의 주일로 지키고 이를 통해서 참된 기독교 교육의 의지를 다지고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의 노고를 기리고자 합니다. 우리 푸른 교회와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올바른 기독교 교육뿐임을 기억하며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사명과 역할에 푸른교회 교육부서의 교장인 제가 모든 성도님들을 대표하여 다시 한번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부모의 교육적 역할 \\\"들어라!\\\"라는 명령으로 시작되는 이 본문은 하나님의 준엄한 가르침의 명령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교육의 대헌장인 \\\'쉐마\\\'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교육적 사명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래서 7절을 보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뭐라고 그럽니까?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강론하라고 그러고 있습니다. 이 가르치고 강론하는 일을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셨는데 \\\"네 자녀에게\\\"라고 했으니 먼저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부모가 먼저 자녀를 책임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국가와 사회의 인물로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부모를 \\\'호림\\\', 하나님의 말씀을 \\\'토라\\\'라고 하는데 호림과 토라는 둘 다 교육을 뜻하는 \\\'야라\\\'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부모나 교육은 그 어원이 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란 히브리어로 보면 \\\"가르치는 자, 교훈하는 자, 어떤 모양으로 만드는 자\\\"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가정은 단순히 집만이 아니라 더 큰 의미를 가져서 가정일 뿐 아니라 회당이요, 학교요, 배움의 터전이었습니다. 집에서 글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배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 일을 부모가 감당을 하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훌륭한 부모란 바로 훌륭한 교사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이 솔선수범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술 담배를 하면서 자녀들에게 금주, 금연하라는 교육이 얼마나 허약한 가르침인지 알고 계십니까? 자신들은 비윤리적으로 살면서 올바르고 정직하라고 가르치는 가르침이 얼마나 자녀들의 경멸거리가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자신들은 주일에 아무거나 사고 팔고 사먹고 즐기고 놀면서 자녀더러 주일엔 꼭 교회 가라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부 자기 자녀들을 부모가 철저하게 신앙으로 책임을 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전도\\\'라는 말이 없습니다. 내가 낳은 아이는 내가 책임을 지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인 부모의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낳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학교 보내고, 과외 시키는 것이 부모의 일차적인 책임이라고 믿는 우리의 풍토와는 너무나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자녀들은 부모를 부모 이전에 먼저 스승으로 대합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만이 전부가 아니라 나를 사람되도록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가르쳐 주신 스승으로 존경하고 받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버지를 소개할 때는 언제나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의 스승이셨던 나의 아버지는....\\\" 만약에 그냥 \\\"나의 아버지는....\\\"이라고 말하면 유대 사회에서는 버릇없는 불학무식한 자로 낙인찍힙니다. 그 만큼 부모의 교육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 존경 이스라엘은 작은 학교인 회당을 중심으로 사회가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열 가정만 되면 회당을 만듭니다. 그리고 큰 회당이나 작은 회당이나 회당의 교사는 가장 똑똑하고 진실하고 유능한 사람을 택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습니다. 과거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분들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우리 사회는 밝고 건강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가 돈으로 모든 평가하는 천박한 사회가 되더니 선생님의 권위조차도 그런 식으로 평가하고 신랑감 후보로 몇위인가를 따지고 그러다가 선생님을 월급장이로 이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교육이 낙후되고 훌륭한 선생님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교사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합니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랍비(선생님)가 온다고 하면 어머니들이 전부 자기 아기를 다 들쳐업고 나옵니다. 우리 아이를 축복해 달라고 말입니다. 남자들은 모자를 벗어 랍비에게 경의를 표하고 심지어 아버지와 랍비가 물에 빠지면 반드시 랍비를 먼저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선생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선생님을 불신하고 심지어 선생님이 야단치면 112에 신고하는 한심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와 우리 사회가, 특히 학부모인 우리가 우리 자녀들의 교육 현장을 황폐화시키고 스승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 앞에서 지도자인 선생님의 흉을 아무 스스럼없이 내뱉습니다. 텔레비젼에도 선생님의 부끄러운 모습이 아무런 여과 없이 보도됩니다. 이제 교육 현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가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임금님이 가장 위대한 사람을 찾아서 상을 주기로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추천되었는데 재력가, 의사, 법률가, 학자 등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틈에 아주 늙고 초라한 백발의 할머니가 끼어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여기 잘못 온 것이 아닌가?\\\" 그러자 신하들이 \\\"마마, 여기 있는 이 훌륭한 재력가, 의사, 법률가, 학자들은 모두 바로 이 분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입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고 임금님은 이 할머니에게 자신의 왕관을 벗어 씌워 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 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푸른 교회는 교사 선생님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교육이 세상을 살린다 이스라엘의 교육은 성공과 출세를 지향하는 교육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교육입니다. 4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참 마음으로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유대인들의 교육의 근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아무리 크게 성공했다해도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은 배신자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요, 성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당당함이 결국 이스라엘을 1등 국가로 만드는 요인이 된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보면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문설주와 문에 붙이는 율법 상자를 \\\'메주자\\\'라고 하는데 유대인의 집들에는 말할 것도 없고 히브리 대학의 강의실에는 모든 강의실에 이 메주자가 붙어 있습니다. 히브리 대학은 세계 10위권에 드는 매우 오래되고 유서 깊은 대학입니다. 이 대학에서 수십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냈습니다. 그런 대학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을 공경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배운 사람들이 바로 서면 나라가 삽니다. 그러므로 바로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사명은 너무나도 큰 것입니다. 8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것을 네 손목에 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테플린\\\'이라고 하는데 이 것을 통해 유대인들은 나의 손과 발과 입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살겠다는 결단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중에 어느 나이 어린 병사가 부상으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군목이 곁에서 임종을 지키고 있는데 끊어져 가는 목소리로 \\\"목사님, 어머니와 절 가르쳐 주신 고향마을 주일학교 선생님께 어릴 적부터 가르치신 대로 진실한 크리스챤으로 살다 죽었다고 전해주세요.\\\" 이렇게 말하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군목은 그 어린 병사의 유언대로 이 사실을 전했는데 얼마 후 그 병사의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난달 수십 년이나 해오던 주일학교 교사직을 사표 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사로서 하는 일이 너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의 편지를 받고 그 동안의 제가 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다시 교사의 일을 계속하려 합니다. 앞으로는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된 교사가 되려고 합니다.\\\" 푸른 교회 선생님 여러분! 여러분이 하는 일이 하도 작아 큰 열매가 안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이 사역이 교회를 교회되게하고, 교회로 하여금 참된 생명체가 되게하는 가장 소중한 사역임을 깨닫고 여러분의 생명을 바쳐 헌신하는 기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21세기에 주인공인 어린 학생들을 훌륭하게 길러 이 나라와 교계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는 교회되기를 다시 한번 축원 드립니다!
교사로 부르심/ 고전4:16-20/ 2004-06-05
교사로 부르심 고전4:16-20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되 꼭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사람들을 들라하면, 첫 번째는 부모요, 두 번째는 배우자요, 세 번째는 선생님이라 합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과 연관해 교회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하시는 분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다. 아마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존경하는 선생님을 마음에 품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생각해 보면, 아름답고 친절했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홍옥표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첫 번째 만난 선생님이라 그런지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더 나가서 말을 직설적으로 하셨지만 꼭 필요한 말을 하셨던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김종현 선생님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교회학교 선생님으로는 초등부 때의 박혜영 선생님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한 반대로 제가 중등부 2학년 교사로 봉사할 때 개구쟁이 학생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좋은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선생님이 많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의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사랑하고 신실한 사람을 교사로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자신이 세운 고린도교회의 일을 다 감당하지 못할 때 그는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디모데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파송된 목회자요 교사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디모데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도 바울의 행사 곧 그가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바로 파송된 목회자요 교사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한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요 매우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끝까지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 앞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사람이 아닙니까?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신앙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믿는 그대로 고백하고 행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디모데는 그러한 면에서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등 많은 고난을 당할 때 다른 사람들은 떠났어도 그는 끝까지 바울 곁에 있던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변함없이 신앙을 지켜나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한 목회자요 교사로 파송하고 있습니다.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은 꾸준히 사람을 키우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불림을 받은 디모데는 바울을 따라다니던 사람에서 파송을 받는 사람으로 성장하였고 마지막에는 사도 바울의 일을 전적으로 맡아 일하는 속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의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정성을 다해 양육했으면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는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적 전승을 받아 오늘도 노회는 목사를 각 교회에 파송하고 있습니다. 이 정신이 우리 한국장로교회에서는 매우 약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정신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목사는 그 교회에서 많은 교사들을 세우고 파송합니다. 각 교회학교 부서 부서에 파송을 합니다. 그러므로 교사되시는 분들은 물론 자신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분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신실한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요, 이를 우리는 하나님의 복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사람을 키우는 일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더욱이 현대 경영학에 있어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손욱 삼성인력개발원장은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1960년대 경영목표가 무엇(what)을 할 것인가였다면, 1980년대는 어떻게(how)할 것인가였고, 1990년대는 기업 경영의 강조점이 누가(who),할 것인가로 변화했다. 잘 나가는 기업치고 인재경영을 강조하지 않는 기업은 없다. … 세상 흐름이나 기술발전이 현기증 나게 빠르기 때문에 무슨 기술전략을 어떻게 짜기보다 변화에 척척 대응하는 뛰어난 인재를 발굴해 키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훌륭한 인재를 키우는 일이 어찌 오늘의 문제이기만 하겠습니까? 똑같이 교회에서도 사람을 양육하여야 합니다. 다만 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에서 양육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훌륭한 백성으로 양육하는 것이지요. 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이끌 수 있는 목자요 교사로 양육하는 일입니다. 이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꼭 감당하여야 할 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뜻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교사의 개념을 좀더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장년이 되면 교회학교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배만 드리고 가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비록 몸은 다 성장하였고 또한 지적인 힘은 왕성하다 하더라도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성장하여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주로 목회자를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움직여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부흥사를 중심으로 교회가 컸습니다. 그리고 지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역량 속에서 주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즈음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는 평신도지도자들을 많이 세우는 일입니다. 주일에 모이는 교회에서 주중에 흩어진 교회가 될 때 바로 평신도지도자들이 목자요 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적인 면으로만 교회가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법칙을 보면, 기적과도 같은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은 후에는 훈련과 노력을 통해 성장하도록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몇몇 교회 모임에서 언급한 바 우리교회는 목회자로부터 말씀을 듣는 면에서는 아주 좋은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신도를 지도자로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뒤져있다고 사료됩니다. 교회의 앞날을 염려하는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 한국교회가 앞으로 계속 존속하고 성장해 나가려면, 성숙된 평신도지도자들을 얼마나 잘 세우느냐에 달려있다고까지 말하곤 합니다. 이러한 점은 아마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예로 비숫한 시기에 있었던 두 목사님의 경우를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의 힐데만 목사님은 설교계의 거물이요 이름난 문필가였습니다. 그 분이 뉴욕제일침례교회에서 목회할 때 전국에서 교인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 교회는 영광의 뼈대만 남고 주일예배에 200명도 모이지 않는 초라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텍사스주의 달라스제일교회에는 트루엣 목사님이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 역시 설교에 있어서는 둘째라 하면 서운한 분이었습니다. 트루엣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교회도 이제 사그러져 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학교 조직을 통해 말씀 교육을 철저히 하였기 때문에 목사님이 바뀌어도 계속 교세를 유지하며 발전하였습니다. 이같이 개인도 교회도 말씀으로 내린 뿌리가 든든해야 합니다. 바로 모든 사람들을 말씀에 있어 교사와도 같이 키우는 일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평신도를 지도자로 키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달할 교사로 양육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감당하여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도 이러한 점의 중요성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몇 년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함께 키워나가야 합니다. 목사는 평신도들의 신앙성숙을 위해 말씀 선포자로 교사로 또한 섬기는 자로 일하여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는 또한 목사를 위해 기도하고 권면하고 도울 뿐만 아니라 같은 평신도를 양육할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분명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교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잘 전하라는 말씀에 담겨져 있지요. 바울이 전하고 가르친 것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훌륭한 교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남겨주신 명령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도 마태복음 28:19에서 자신이 가르친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할 때 거기에는 진정 사명을 다하는 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교사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칩니다. 또한 인격을 키워줍니다. 더 나가서 사회성을 길러줍니다. 하지만 교회의 교사는 영성을 길러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도록 인도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보다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진정 십자가를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교사가 될 사람도 아니요 평신도 지도자가 될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도 보면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도 달변가일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걱정되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목소리만 크고 사랑의 능력은 없는 목사가 되지 않을까 매우 염려합니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분들은 말보다는 묵묵히 일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들은 필요한 곳을 찾아 자기가 희생할 것을 감당합니다. 그러면서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묵묵히 일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말보다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죄인인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슬비전도 방법도 택하고 있습니다. 이슬비전도를 통해 우리는 우선 전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들을 양육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로부터 배우고 또한 누군가를 가르치며 살아갑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우리 인생여정에서 쉬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감사하고 또한 존경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에게 끼치는 은혜입니다. 유안진씨는 ‘잊을 수 없는 말 한 마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인간에게만 있는 귀중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현재의 자신을 키워 준 은혜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안 잊는다는 것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여러분, 여러분들을 가르친 선생님들이 있기에 오늘의 여러분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은혜를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사는 것이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길입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못드렸던 선생님께 안부전화라도 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 홀로 성장하고 성숙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영향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우리의 선생님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선생님을 기억하시고 좋은 선생님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상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사의 사명 (마18:5-7)
교사의 사명 (마18:5-7) http://mission.bz/5294스승의 주일 교사의 사명 (마18:5-7) 오늘은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지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더 관심을 갖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반 학교에서의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모두들 귀하게 생각하지만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선생님에 대해서는 성도들 조차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학교 선생님들께는 부모님들이 가끔 찾아뵈면서 인사도 하고 자녀들을 잘 부탁하기도 하지만, 교회 선생님들에게 찾아와서 자녀들을 잘 부탁하는 분들은 별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학문도 중요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저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그 어떤 교육보다도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해서 출세하고 잘 살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간혹 보면, 어떤 교사는 구원의 확신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말고 다른데 말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기도 힘든 사람이 교사의 일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런 분은 자신도 고달프지만 그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아이들도 제대로 신앙이 성장하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어린 심령들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사명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주일학교 교사 뿐만이 아니라, 구역회에 구역강사라든지, 각기관의 임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기회가 많으므로 역시 교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래되고 신앙이 좋은 분들은 신앙이 연소하고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역시 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의 사명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교사가 되려면 여러가지 자질과 자격의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①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고 ② 신앙의 본이 되어야 하며 ③ 영적인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④ 생명이 천하보다 귀함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⑤ 항상 기도하며 ⑥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윤리적인 면으로는 ① 단정한 용모를 갖추고 ② 다정한 음성으로 전하며 ③ 웃는 얼굴로 대하고 ④ 화합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⑤ 칭찬 받는 사람 ⑥ 시간에 철저한 교사 ⑦ 윗사람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⑧ 아랫사람에게 존경받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① 공과의 교안을 일찍이 준비하고 검토하며 ② 알아듣기 쉬운 말로 전하고 ③ 학생들의 환경과 상태를 이해할뿐 아니라 ④ 그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⑤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한 교사 ⑥ 시청각 자료들을 활용하는 교사 ⑦ 보충자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⑧ 모범적인 교사를 관찰해서 본을 삼으며 ⑨ 경험있는 교사나 지도자의 조언을 잘 듣고 따르는 교사 ⑩ 기독교 교육에 관한 연구를 하며 그에 대한 서적을 읽는 교사 강습회나 교사 지도회에 참석하기를 좋아하므로 자기 개발에 힘쓰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교사는 영적인 면이나 윤리적인 면에서나 기술적인 면에서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교사로써 최소한 꼭 지켜야 할 것 3가지를 강조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신령한 영의 귀가 열려져서 성령께서 친히 각 사람에게 놀라운 깨달음과 은혜로 역사하셔서 교사의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교사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고 말씀하시면서 7절에서는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마18:7)"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사의 사명은 실로 막중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실족케 하지 않기 위해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종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한 종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친히 우리를 불러 주시고, 나를 인정하셔서 나에게 맡겨주신 교사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만 하겠습니까? 첫째로, 교사는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딤후2:20-21절 말씀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즉, 교사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이 그릇에 묻어 있으면 음식을 담을 수 없듯이,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는 그릇이므로 우리는 먼저 깨끗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질그릇이든지 금그릇이든지, 귀하게 쓰이든지 천하게 쓰이든지...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놈은 우리를 더럽히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킵니다. 우리의 사명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죄를 가지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죄를 가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역사 하실 수 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5:4절에 보면,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멸망하는 것이요 저주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대하25:4절에는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욥21:19절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고 하셨고, 민14:18절에서는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했습니다. 민32:14절에는 "죄는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한다"고 했고, 삼하7:14절에서는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으면 그 죄가 끝까지 찾아다니며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더 큰 죄와 협상하게 되고, 마귀는 하나님께 참소합니다. 눈을 감아도 그 죄는 우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잠을 자도 편치 못합니다. 맥박이 뛰고 심장이 마구 뜁니다. 가지가지 병을 가져다 줍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에 가서 은둔하여도, 비행기를 타고 멀리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민32:23절에 보면,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했습니다. 욥20:27절에서는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51:3절에 보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스9:7절에 보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 뿐만아니라 왕들과 제사장들을 다른나라 왕들의 손에 붙여서 칼에 죽고 사로잡히고 노략을 당하여 심히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느1:8절에서는 "열국 중에 흩을 것이라"했고, 시40:12절에는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시66:18절에는 기도를 해도 "주께서 듣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시125:5에 보면, "죄를 짓는 자에게는 안되고 망하고 안 풀리는 재수없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렘5:25절에서는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했습니다. 렘8:14절에는 "죄로 인하여 멸하시며 독한 물을 마시우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렘17:3절에서는 "죄로 인하여 재산과 모든 보물을 도적질 당하고 노략을 당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렘31:30절에서는 "신 포도를 먹으면 그 이가 심과 같이 자기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겔18:4에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저주 아래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준비해서 말씀을 전하여도...., 아무리 좋은 미사어구를 써서 기도할지라도 허공을 칠 뿐입니다. 죄악을 간직하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가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는 상관이 없이 항상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죄를 위한 유혹을 하지도 말고 당하지도 말아야 하며, 죄의 자리에 앉지도 말고 서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1:1에 보면,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교사 여러분! 그리고 앞으로 교사가 될 여러분!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물리쳐야 합니다. 죄하고는 상관이 없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만 자신은 물론이고, 가르침을 받는 영혼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우리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권속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교사는 모든 공예배에 열심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십계명에 보면 분명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성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 교사들은 얼마나 주일을 성수하고 있습니까? 주일은 하나님의 날로 구별해 놓은 날입니다. 그래서 주일입니다. 뿐만아니라 교사는 주일을 성수할 뿐만아니라, 모든 공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약2:10절에 보면, 10가지 계명중에 하나의 계명을 범하면 10개의 계명을 범한 것과 똑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만일 여러분의 가정에 10개의 문이 있는데 10개의 문을 모두 다 잠가야 효과가 있는 것이지 10개 중에 9개의 문은 단단히 잠갔는데, 1개의 문이 열렸다고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계명 중에 하나라도 범하면 모든 계명을 범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 것은 6법전서에 나오는 모든 죄를 다 져서가 아닙니다. 1개, 2개 많아야 3개 정도 죄를 지어서 재판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일을 성수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남들이 그러니까.... 형편이 그러니까.... 이 정도 나가 줬으면 됐지 뭐..... 무슨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남을 위해서 믿는 것처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교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상의 행위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불의한 일을 당한다 해도, 급한 볼일이 발생한다 하여도 예배시간은 지켜야 합니다. 일상적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 시간만큼 급하고 신속을 요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주일성수는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기본이고, 모든 공예배에 열심으로 참여를 해야만... 자신의 신앙이 자라가게 되고, 그래야만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도 안 지키고 안 나오면서 어떻게 주일성수를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겠습니까? 그 말씀은 허공을 칠 뿐입니다. ex} 제가 아는 어떤 여집사님에게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그 분의 생각에는 격려도 좀 받고, 도움을 받고 싶어서 전화를 한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몇 가지 제목을 정하고 40일 작정 기도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 봤습니다. "집사님 주일 성수는 잘 하십니까? 공예배는 빠짐없이 참석하십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주일 오전 예배는 참석하는데 저녁예배는 가끔 간다는 것입니다. 수요일이나 금요일은 말할 것도 없이 기분이 내키면 가고 보통은 안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집사님, 40일 작정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해야 할 것은 주일을 잘 성수하고 공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시면서 작정기도를 해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제 생각에는 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분의 형편과 사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반은 야단도 치고 설득도 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주일날.... 집에 있으면서도 주일 저녁예배도 안나가고 공예배도 안 갑니까!......." 사실 이 분은 직장에 다니는 맞벌이 부부입니다. 어린아이가 둘씩이나 됩니다. 그래서 주일이 되면 남들처럼 피곤하여 쉬고도 싶을 것입니다. 들로 산으로 놀러도 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분은 40일을 작정하여 기도하고 싶은 열망과 마음의 갈급함은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40일 작정기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성수하고 공예배에 열심히 참석을 하는 것이 더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조금만 성의가 있고 열의가 있다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다 경건의 연습이 덜 되어 있어서 어색하고, 불편하고, 이상한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이 분만의 얘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 분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주님이 내게 말씀하신 것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입니다. 기본...... 그리고 공예배도 열심히 참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후로는 주일 낮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시간에는 다른 계획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를 드리는 일에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더욱이 선생된 자는 주일성수와 모든 공예배에 참석해야 만이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고 더욱 성숙한 성도가 되어서 맡은바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10:1-11절에 보면, 예배는 기독교인의 의무입니다. 이제.... 예배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나아가서 진지하게 오늘의 예배와 자신과 예배 인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새로운 은혜를 맛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교사는 죽도록 충성하고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는 것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때와 여건이 다 맞아야만 할 수 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고, 충성하고 싶어도 충성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직 젊었을 때, 아직 힘이 있을 때, 물질이 있을 때, 재능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민수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레위인들 가운데 고핫자손과 게르손 자손, 므라리 자손들을 성막의 봉사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30세 이상부터 50세 이하의 남자들만 소집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연령을 제한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30세라면 청소년의 혈기나 서투름에서 벗어날 만한 시기입니다. 즉, 성숙한 자라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일에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신앙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연령을 제한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는 힘이 있어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미숙하다거나, 혹은 너무 연로해서도 안됩니다. 30세에서 50세라고 정하신 것은... 그 시기는 정신 활동이나 체력에 있어서 가장 왕성할 때 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황금기에 자신을 위해서 살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고,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전12:1절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하고 말씀합니다. 시110:3절에서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생의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아무런 낙이 없다고 할 때가 되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새벽 이슬처럼 영롱하고 순결한 청년의 정신과 활력이 있을 때...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전12:1,시110:3).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더 늦기 전에.... 자기에게 주어진 힘과 기회를 선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껏 사용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은 주님앞에 충성을 하고서도 종된 우리는 자랑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6:2절에 보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팔을 불지 말라. 즉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마구 떠벌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눅6:35절에서도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교사를 하면서... 혹은 다른 직분을 감당하면서... 어떤 댓가나 칭찬을 받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고 상급을 받는다면 주님앞에 가서 받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눅17:7-10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종입니다. 종은 사례를 받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그런데 때로 우리는 겸손한 척하면서도 우리의 공로를 내세우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그래도 갚지 못할 빚입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주님을 따라 가게 하신 것....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거져 받은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눅17:10절의 말씀은 얼마나 진리입니까?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하십시오! 최선을 다 하십시오! 그리고는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태도, 이러한 신앙의 인격.... 이런 자세는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런 사람들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일을 할 때,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강력한 행위를 통한 증거요, 전도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이런 섬기는 자세가 나타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회학교 교사만 선생이 아니라,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들.... 신앙의 연륜이 있고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을 행해서 성서는 '선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5:12절 말씀에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같은 성도가 아니죠. 신앙의 연륜이 있고 직분을 받은 성도는 마땅히 나중에 믿은 초신자들에게 선생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5:12절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 선생이 되지 않고 항상 초보적인 신앙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먼저 믿은 사람들... 신앙의 연조가 있는 사람들.... 먼저 직분을 받고 여러 기관에서 봉사하고 헌신한 경력이 있는 성도들은 마땅히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에게 본이 되고, 말씀으로 인도하는 교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교사의 길을 가야하고 마땅히 교사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가르치는 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 초보적인 신앙에 있는 분들을 믿음으로 잘 이끌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앙의 연조가 많은 사람들, 직분을 받고 사명을 부여받은 성도들은 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 빛난 면류관이 예비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무익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희들을 교사로 불러 주시고, 천사도 흠모할 여러가지 직분을 맡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서 생명의 면류관 받는 그 날까지.....,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고, 또 신앙이 연소한 자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교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한 교사가 되기 위해서.... 죄와는 상관이 없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하시고, 예배시간마다 열심히 참석하여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 더욱 풍성하여 지며,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할 줄 아는 교사, 이러한 성도가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교사의 사명/ 마18:5-7/ 스승의주일설교
교사의 사명 마18:5-7 오늘은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지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더 관심을 갖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반 학교에서의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모두들 귀하게 생각하지만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선생님에 대해서는 성도들 조차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학교 선생님들께는 부모님들이 가끔 찾아뵈면서 인사도 하고 자녀들을 잘 부탁하기도 하지만, 교회 선생님들에게 찾아와서 자녀들을 잘 부탁하는 분들은 별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학문도 중요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저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그 어떤 교육보다도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해서 출세하고 잘 살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간혹 보면, 어떤 교사는 구원의 확신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말고 다른데 말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기도 힘든 사람이 교사의 일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런 분은 자신도 고달프지만 그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아이들도 제대로 신앙이 성장하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어린 심령들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사명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주일학교 교사 뿐만이 아니라, 구역회에 구역강사라든지, 각기관의 임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기회가 많으므로 역시 교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래되고 신앙이 좋은 분들은 신앙이 연소하고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역시 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의 사명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교사가 되려면 여러가지 자질과 자격의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①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고 ② 신앙의 본이 되어야 하며 ③ 영적인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④ 생명이 천하보다 귀함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⑤ 항상 기도하며 ⑥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윤리적인 면으로는 ① 단정한 용모를 갖추고 ② 다정한 음성으로 전하며 ③ 웃는 얼굴로 대하고 ④ 화합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⑤ 칭찬 받는 사람 ⑥ 시간에 철저한 교사 ⑦ 윗사람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⑧ 아랫사람에게 존경받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① 공과의 교안을 일찍이 준비하고 검토하며 ② 알아듣기 쉬운 말로 전하고 ③ 학생들의 환경과 상태를 이해할뿐 아니라 ④ 그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⑤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한 교사 ⑥ 시청각 자료들을 활용하는 교사 ⑦ 보충자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⑧ 모범적인 교사를 관찰해서 본을 삼으며 ⑨ 경험있는 교사나 지도자의 조언을 잘 듣고 따르는 교사 ⑩ 기독교 교육에 관한 연구를 하며 그에 대한 서적을 읽는 교사 강습회나 교사 지도회에 참석하기를 좋아하므로 자기 개발에 힘쓰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교사는 영적인 면이나 윤리적인 면에서나 기술적인 면에서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교사로써 최소한 꼭 지켜야 할 것 3가지를 강조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신령한 영의 귀가 열려져서 성령께서 친히 각 사람에게 놀라운 깨달음과 은혜로 역사하셔서 교사의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교사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고 말씀하시면서 7절에서는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마18:7)\\\"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사의 사명은 실로 막중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실족케 하지 않기 위해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종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한 종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친히 우리를 불러 주시고, 나를 인정하셔서 나에게 맡겨주신 교사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만 하겠습니까? 첫째로, 교사는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딤후2:20-21절 말씀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즉, 교사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이 그릇에 묻어 있으면 음식을 담을 수 없듯이,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는 그릇이므로 우리는 먼저 깨끗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질그릇이든지 금그릇이든지, 귀하게 쓰이든지 천하게 쓰이든지...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놈은 우리를 더럽히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킵니다. 우리의 사명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죄를 가지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죄를 가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역사 하실 수 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5:4절에 보면,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멸망하는 것이요 저주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대하25:4절에는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욥21:19절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고 하셨고, 민14:18절에서는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했습니다. 민32:14절에는 \\\"죄는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한다\\\"고 했고, 삼하7:14절에서는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으면 그 죄가 끝까지 찾아다니며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더 큰 죄와 협상하게 되고, 마귀는 하나님께 참소합니다. 눈을 감아도 그 죄는 우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잠을 자도 편치 못합니다. 맥박이 뛰고 심장이 마구 뜁니다. 가지가지 병을 가져다 줍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에 가서 은둔하여도, 비행기를 타고 멀리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민32:23절에 보면,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했습니다. 욥20:27절에서는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51:3절에 보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스9:7절에 보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 뿐만아니라 왕들과 제사장들을 다른나라 왕들의 손에 붙여서 칼에 죽고 사로잡히고 노략을 당하여 심히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느1:8절에서는 \\\"열국 중에 흩을 것이라\\\"했고, 시40:12절에는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시66:18절에는 기도를 해도 \\\"주께서 듣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시125:5에 보면, \\\"죄를 짓는 자에게는 안되고 망하고 안 풀리는 재수없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렘5:25절에서는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했습니다. 렘8:14절에는 \\\"죄로 인하여 멸하시며 독한 물을 마시우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렘17:3절에서는 \\\"죄로 인하여 재산과 모든 보물을 도적질 당하고 노략을 당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렘31:30절에서는 \\\"신 포도를 먹으면 그 이가 심과 같이 자기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겔18:4에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저주 아래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준비해서 말씀을 전하여도...., 아무리 좋은 미사어구를 써서 기도할지라도 허공을 칠 뿐입니다. 죄악을 간직하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가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는 상관이 없이 항상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죄를 위한 유혹을 하지도 말고 당하지도 말아야 하며, 죄의 자리에 앉지도 말고 서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1:1에 보면,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교사 여러분! 그리고 앞으로 교사가 될 여러분!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물리쳐야 합니다. 죄하고는 상관이 없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만 자신은 물론이고, 가르침을 받는 영혼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우리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권속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교사는 모든 공예배에 열심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십계명에 보면 분명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성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 교사들은 얼마나 주일을 성수하고 있습니까? 주일은 하나님의 날로 구별해 놓은 날입니다. 그래서 주일입니다. 뿐만아니라 교사는 주일을 성수할 뿐만아니라, 모든 공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약2:10절에 보면, 10가지 계명중에 하나의 계명을 범하면 10개의 계명을 범한 것과 똑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만일 여러분의 가정에 10개의 문이 있는데 10개의 문을 모두 다 잠가야 효과가 있는 것이지 10개 중에 9개의 문은 단단히 잠갔는데, 1개의 문이 열렸다고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계명 중에 하나라도 범하면 모든 계명을 범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 것은 6법전서에 나오는 모든 죄를 다 져서가 아닙니다. 1개, 2개 많아야 3개 정도 죄를 지어서 재판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일을 성수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남들이 그러니까.... 형편이 그러니까.... 이 정도 나가 줬으면 됐지 뭐..... 무슨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남을 위해서 믿는 것처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교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상의 행위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불의한 일을 당한다 해도, 급한 볼일이 발생한다 하여도 예배시간은 지켜야 합니다. 일상적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 시간만큼 급하고 신속을 요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주일성수는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기본이고, 모든 공예배에 열심으로 참여를 해야만... 자신의 신앙이 자라가게 되고, 그래야만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도 안 지키고 안 나오면서 어떻게 주일성수를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겠습니까? 그 말씀은 허공을 칠 뿐입니다. ex} 제가 아는 어떤 여집사님에게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그 분의 생각에는 격려도 좀 받고, 도움을 받고 싶어서 전화를 한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몇 가지 제목을 정하고 40일 작정 기도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 봤습니다. \\\"집사님 주일 성수는 잘 하십니까? 공예배는 빠짐없이 참석하십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주일 오전 예배는 참석하는데 저녁예배는 가끔 간다는 것입니다. 수요일이나 금요일은 말할 것도 없이 기분이 내키면 가고 보통은 안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집사님, 40일 작정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해야 할 것은 주일을 잘 성수하고 공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시면서 작정기도를 해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제 생각에는 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분의 형편과 사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반은 야단도 치고 설득도 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주일날.... 집에 있으면서도 주일 저녁예배도 안나가고 공예배도 안 갑니까!.......\\\" 사실 이 분은 직장에 다니는 맞벌이 부부입니다. 어린아이가 둘씩이나 됩니다. 그래서 주일이 되면 남들처럼 피곤하여 쉬고도 싶을 것입니다. 들로 산으로 놀러도 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분은 40일을 작정하여 기도하고 싶은 열망과 마음의 갈급함은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40일 작정기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성수하고 공예배에 열심히 참석을 하는 것이 더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조금만 성의가 있고 열의가 있다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다 경건의 연습이 덜 되어 있어서 어색하고, 불편하고, 이상한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이 분만의 얘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 분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주님이 내게 말씀하신 것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입니다. 기본...... 그리고 공예배도 열심히 참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후로는 주일 낮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시간에는 다른 계획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를 드리는 일에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더욱이 선생된 자는 주일성수와 모든 공예배에 참석해야 만이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고 더욱 성숙한 성도가 되어서 맡은바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10:1-11절에 보면, 예배는 기독교인의 의무입니다. 이제.... 예배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나아가서 진지하게 오늘의 예배와 자신과 예배 인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새로운 은혜를 맛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교사는 죽도록 충성하고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는 것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때와 여건이 다 맞아야만 할 수 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고, 충성하고 싶어도 충성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직 젊었을 때, 아직 힘이 있을 때, 물질이 있을 때, 재능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민수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레위인들 가운데 고핫자손과 게르손 자손, 므라리 자손들을 성막의 봉사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30세 이상부터 50세 이하의 남자들만 소집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연령을 제한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30세라면 청소년의 혈기나 서투름에서 벗어날 만한 시기입니다. 즉, 성숙한 자라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일에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신앙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연령을 제한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는 힘이 있어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미숙하다거나, 혹은 너무 연로해서도 안됩니다. 30세에서 50세라고 정하신 것은... 그 시기는 정신 활동이나 체력에 있어서 가장 왕성할 때 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황금기에 자신을 위해서 살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고,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전12:1절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하고 말씀합니다. 시110:3절에서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생의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아무런 낙이 없다고 할 때가 되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새벽 이슬처럼 영롱하고 순결한 청년의 정신과 활력이 있을 때...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전12:1,시110:3).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더 늦기 전에.... 자기에게 주어진 힘과 기회를 선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껏 사용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은 주님앞에 충성을 하고서도 종된 우리는 자랑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6:2절에 보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팔을 불지 말라. 즉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마구 떠벌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눅6:35절에서도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교사를 하면서... 혹은 다른 직분을 감당하면서... 어떤 댓가나 칭찬을 받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고 상급을 받는다면 주님앞에 가서 받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눅17:7-10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종입니다. 종은 사례를 받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그런데 때로 우리는 겸손한 척하면서도 우리의 공로를 내세우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그래도 갚지 못할 빚입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주님을 따라 가게 하신 것....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거져 받은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눅17:10절의 말씀은 얼마나 진리입니까?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하십시오! 최선을 다 하십시오! 그리고는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태도, 이러한 신앙의 인격.... 이런 자세는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런 사람들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일을 할 때,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강력한 행위를 통한 증거요, 전도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이런 섬기는 자세가 나타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회학교 교사만 선생이 아니라,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들.... 신앙의 연륜이 있고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을 행해서 성서는 \\\'선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5:12절 말씀에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같은 성도가 아니죠. 신앙의 연륜이 있고 직분을 받은 성도는 마땅히 나중에 믿은 초신자들에게 선생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5:12절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 선생이 되지 않고 항상 초보적인 신앙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먼저 믿은 사람들... 신앙의 연조가 있는 사람들.... 먼저 직분을 받고 여러 기관에서 봉사하고 헌신한 경력이 있는 성도들은 마땅히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에게 본이 되고, 말씀으로 인도하는 교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교사의 길을 가야하고 마땅히 교사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가르치는 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 초보적인 신앙에 있는 분들을 믿음으로 잘 이끌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산본성광교회에 속한 모든 믿음의 권속들은 앞으로 교회에서 실시하는 단계별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잘 참석하고 훈련받아서 교사의 사명들을 잘 감당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앙의 연조가 많은 사람들, 직분을 받고 사명을 부여받은 성도들은 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 빛난 면류관이 예비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무익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희들을 교사로 불러 주시고, 천사도 흠모할 여러가지 직분을 맡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서 생명의 면류관 받는 그 날까지.....,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고, 또 신앙이 연소한 자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교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한 교사가 되기 위해서.... 죄와는 상관이 없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하시고, 예배시간마다 열심히 참석하여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 더욱 풍성하여 지며,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할 줄 아는 교사, 이러한 성도가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교사의 사명/ 마18:5-7/ 스승의주일설교
교사의 사명 마18:5-7 (마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18: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오늘은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지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더 관심을 갖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반 학교에서의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모두들 귀하게 생각하지만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선생님에 대해서는 성도들 조차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학교 선생님들께는 부모님들이 가끔 찾아뵈면서 인사도 하고 자녀들을 잘 부탁하기도 하지만, 교회 선생님들에게 찾아와서 자녀들을 잘 부탁하는 분들은 별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학문도 중요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저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그 어떤 교육보다도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해서 출세하고 잘 살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간혹 보면, 어떤 교사는 구원의 확신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말고 다른데 말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기도 힘든 사람이 교사의 일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런 분은 자신도 고달프지만 그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아이들도 제대로 신앙이 성장하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어린 심령들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사명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주일학교 교사 뿐만이 아니라, 구역회에 구역강사라든지, 각기관의 임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기회가 많으므로 역시 교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래되고 신앙이 좋은 분들은 신앙이 연소하고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역시 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의 사명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교사가 되려면 여러가지 자질과 자격의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①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고 ② 신앙의 본이 되어야 하며 ③ 영적인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④ 생명이 천하보다 귀함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⑤ 항상 기도하며 ⑥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윤리적인 면으로는 ① 단정한 용모를 갖추고 ② 다정한 음성으로 전하며 ③ 웃는 얼굴로 대하고 ④ 화합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⑤ 칭찬 받는 사람 ⑥ 시간에 철저한 교사 ⑦ 윗사람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⑧ 아랫사람에게 존경받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① 공과의 교안을 일찍이 준비하고 검토하며 ② 알아듣기 쉬운 말로 전하고 ③ 학생들의 환경과 상태를 이해할뿐 아니라 ④ 그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⑤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한 교사 ⑥ 시청각 자료들을 활용하는 교사 ⑦ 보충자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⑧ 모범적인 교사를 관찰해서 본을 삼으며 ⑨ 경험있는 교사나 지도자의 조언을 잘 듣고 따르는 교사 ⑩ 기독교 교육에 관한 연구를 하며 그에 대한 서적을 읽는 교사 강습회나 교사 지도회에 참석하기를 좋아하므로 자기 개발에 힘쓰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교사는 영적인 면이나 윤리적인 면에서나 기술적인 면에서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교사로써 최소한 꼭 지켜야 할 것 3가지를 강조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신령한 영의 귀가 열려져서 성령께서 친히 각 사람에게 놀라운 깨달음과 은혜로 역사하셔서 교사의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교사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고 말씀하시면서 7절에서는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마18:7)\\\\\\\"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사의 사명은 실로 막중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실족케 하지 않기 위해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종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한 종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친히 우리를 불러 주시고, 나를 인정하셔서 나에게 맡겨주신 교사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만 하겠습니까? 첫째로, 교사는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딤후2:20-21절 말씀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즉, 교사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이 그릇에 묻어 있으면 음식을 담을 수 없듯이,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는 그릇이므로 우리는 먼저 깨끗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질그릇이든지 금그릇이든지, 귀하게 쓰이든지 천하게 쓰이든지...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놈은 우리를 더럽히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킵니다. 우리의 사명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죄를 가지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죄를 가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역사 하실 수 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5:4절에 보면,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멸망하는 것이요 저주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대하25:4절에는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욥21:19절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고 하셨고, 민14:18절에서는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했습니다. 민32:14절에는 \\\\\\\"죄는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한다\\\\\\\"고 했고, 삼하7:14절에서는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으면 그 죄가 끝까지 찾아다니며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더 큰 죄와 협상하게 되고, 마귀는 하나님께 참소합니다. 눈을 감아도 그 죄는 우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잠을 자도 편치 못합니다. 맥박이 뛰고 심장이 마구 뜁니다. 가지가지 병을 가져다 줍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에 가서 은둔하여도, 비행기를 타고 멀리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민32:23절에 보면,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했습니다. 욥20:27절에서는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51:3절에 보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스9:7절에 보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 뿐만아니라 왕들과 제사장들을 다른나라 왕들의 손에 붙여서 칼에 죽고 사로잡히고 노략을 당하여 심히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느1:8절에서는 \\\\\\\"열국 중에 흩을 것이라\\\\\\\"했고, 시40:12절에는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시66:18절에는 기도를 해도 \\\\\\\"주께서 듣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시125:5에 보면, \\\\\\\"죄를 짓는 자에게는 안되고 망하고 안 풀리는 재수없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렘5:25절에서는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했습니다. 렘8:14절에는 \\\\\\\"죄로 인하여 멸하시며 독한 물을 마시우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렘17:3절에서는 \\\\\\\"죄로 인하여 재산과 모든 보물을 도적질 당하고 노략을 당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렘31:30절에서는 \\\\\\\"신 포도를 먹으면 그 이가 심과 같이 자기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겔18:4에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저주 아래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준비해서 말씀을 전하여도...., 아무리 좋은 미사어구를 써서 기도할지라도 허공을 칠 뿐입니다. 죄악을 간직하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가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는 상관이 없이 항상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죄를 위한 유혹을 하지도 말고 당하지도 말아야 하며, 죄의 자리에 앉지도 말고 서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1:1에 보면,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교사 여러분! 그리고 앞으로 교사가 될 여러분!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물리쳐야 합니다. 죄하고는 상관이 없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만 자신은 물론이고, 가르침을 받는 영혼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우리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권속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교사는 모든 공예배에 열심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십계명에 보면 분명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성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 교사들은 얼마나 주일을 성수하고 있습니까? 주일은 하나님의 날로 구별해 놓은 날입니다. 그래서 주일입니다. 뿐만아니라 교사는 주일을 성수할 뿐만아니라, 모든 공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약2:10절에 보면, 10가지 계명중에 하나의 계명을 범하면 10개의 계명을 범한 것과 똑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만일 여러분의 가정에 10개의 문이 있는데 10개의 문을 모두 다 잠가야 효과가 있는 것이지 10개 중에 9개의 문은 단단히 잠갔는데, 1개의 문이 열렸다고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계명 중에 하나라도 범하면 모든 계명을 범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 것은 6법전서에 나오는 모든 죄를 다 져서가 아닙니다. 1개, 2개 많아야 3개 정도 죄를 지어서 재판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일을 성수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남들이 그러니까.... 형편이 그러니까.... 이 정도 나가 줬으면 됐지 뭐..... 무슨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남을 위해서 믿는 것처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교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상의 행위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불의한 일을 당한다 해도, 급한 볼일이 발생한다 하여도 예배시간은 지켜야 합니다. 일상적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 시간만큼 급하고 신속을 요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주일성수는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기본이고, 모든 공예배에 열심으로 참여를 해야만... 자신의 신앙이 자라가게 되고, 그래야만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도 안 지키고 안 나오면서 어떻게 주일성수를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겠습니까? 그 말씀은 허공을 칠 뿐입니다. ex} 제가 아는 어떤 여집사님에게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그 분의 생각에는 격려도 좀 받고, 도움을 받고 싶어서 전화를 한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몇 가지 제목을 정하고 40일 작정 기도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 봤습니다. \\\\\\\"집사님 주일 성수는 잘 하십니까? 공예배는 빠짐없이 참석하십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주일 오전 예배는 참석하는데 저녁예배는 가끔 간다는 것입니다. 수요일이나 금요일은 말할 것도 없이 기분이 내키면 가고 보통은 안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집사님, 40일 작정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해야 할 것은 주일을 잘 성수하고 공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시면서 작정기도를 해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제 생각에는 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분의 형편과 사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반은 야단도 치고 설득도 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주일날.... 집에 있으면서도 주일 저녁예배도 안나가고 공예배도 안 갑니까!.......\\\\\\\" 사실 이 분은 직장에 다니는 맞벌이 부부입니다. 어린아이가 둘씩이나 됩니다. 그래서 주일이 되면 남들처럼 피곤하여 쉬고도 싶을 것입니다. 들로 산으로 놀러도 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분은 40일을 작정하여 기도하고 싶은 열망과 마음의 갈급함은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40일 작정기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성수하고 공예배에 열심히 참석을 하는 것이 더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조금만 성의가 있고 열의가 있다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다 경건의 연습이 덜 되어 있어서 어색하고, 불편하고, 이상한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이 분만의 얘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 분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주님이 내게 말씀하신 것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입니다. 기본...... 그리고 공예배도 열심히 참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후로는 주일 낮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시간에는 다른 계획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를 드리는 일에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더욱이 선생된 자는 주일성수와 모든 공예배에 참석해야 만이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고 더욱 성숙한 성도가 되어서 맡은바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10:1-11절에 보면, 예배는 기독교인의 의무입니다. 이제.... 예배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나아가서 진지하게 오늘의 예배와 자신과 예배 인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새로운 은혜를 맛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교사는 죽도록 충성하고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는 것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때와 여건이 다 맞아야만 할 수 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고, 충성하고 싶어도 충성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직 젊었을 때, 아직 힘이 있을 때, 물질이 있을 때, 재능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민수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레위인들 가운데 고핫자손과 게르손 자손, 므라리 자손들을 성막의 봉사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30세 이상부터 50세 이하의 남자들만 소집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연령을 제한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30세라면 청소년의 혈기나 서투름에서 벗어날 만한 시기입니다. 즉, 성숙한 자라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일에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신앙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연령을 제한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는 힘이 있어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미숙하다거나, 혹은 너무 연로해서도 안됩니다. 30세에서 50세라고 정하신 것은... 그 시기는 정신 활동이나 체력에 있어서 가장 왕성할 때 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황금기에 자신을 위해서 살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고,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전12:1절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하고 말씀합니다. 시110:3절에서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생의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아무런 낙이 없다고 할 때가 되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새벽 이슬처럼 영롱하고 순결한 청년의 정신과 활력이 있을 때...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전12:1,시110:3).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더 늦기 전에.... 자기에게 주어진 힘과 기회를 선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껏 사용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은 주님앞에 충성을 하고서도 종된 우리는 자랑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6:2절에 보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팔을 불지 말라. 즉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마구 떠벌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눅6:35절에서도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교사를 하면서... 혹은 다른 직분을 감당하면서... 어떤 댓가나 칭찬을 받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고 상급을 받는다면 주님앞에 가서 받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눅17:7-10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종입니다. 종은 사례를 받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그런데 때로 우리는 겸손한 척하면서도 우리의 공로를 내세우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그래도 갚지 못할 빚입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주님을 따라 가게 하신 것....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거져 받은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눅17:10절의 말씀은 얼마나 진리입니까?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하십시오! 최선을 다 하십시오! 그리고는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태도, 이러한 신앙의 인격.... 이런 자세는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런 사람들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일을 할 때,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강력한 행위를 통한 증거요, 전도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이런 섬기는 자세가 나타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회학교 교사만 선생이 아니라,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들.... 신앙의 연륜이 있고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을 행해서 성서는 \\\\\\\'선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5:12절 말씀에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같은 성도가 아니죠. 신앙의 연륜이 있고 직분을 받은 성도는 마땅히 나중에 믿은 초신자들에게 선생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5:12절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 선생이 되지 않고 항상 초보적인 신앙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먼저 믿은 사람들... 신앙의 연조가 있는 사람들.... 먼저 직분을 받고 여러 기관에서 봉사하고 헌신한 경력이 있는 성도들은 마땅히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에게 본이 되고, 말씀으로 인도하는 교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교사의 길을 가야하고 마땅히 교사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가르치는 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 초보적인 신앙에 있는 분들을 믿음으로 잘 이끌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앙의 연조가 많은 사람들, 직분을 받고 사명을 부여받은 성도들은 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 빛난 면류관이 예비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무익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희들을 교사로 불러 주시고, 천사도 흠모할 여러가지 직분을 맡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서 생명의 면류관 받는 그 날까지.....,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고, 또 신앙이 연소한 자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교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한 교사가 되기 위해서.... 죄와는 상관이 없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하시고, 예배시간마다 열심히 참석하여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 더욱 풍성하여 지며,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할 줄 아는 교사, 이러한 성도가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