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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보호하심에 대한 감사/ 시127:1-5/ 송년주일설교/ 2002-12-27
1년 동안 보호하심에 대한 감사 시127:1-5 일년을 마무리하는 주일입니다. 오늘도 거룩한 주님의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다같이 은혜 받을 말씀은 \\\"일년동안 보호하심에 대한 감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대개 이웃을 돌아보며, 한해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한해동안 도움을 주고 은혜를 베풀어준 이웃에게, 교역자에게, 가족들에게 선물도 하고 감사도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사람들은 어려운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고 불우 이웃을 방문도 합니다. 이렇게 연말이면 사람들은 웬지 감사할 사람들을 찾고, 은혜 베풀어 줄 사람들을 찾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이렇게 넉넉한 연말인데도 유독 사람들은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인색합니다. 이웃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회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정작 감사드려야 할 예수님에게 소홀해진 것입니까? 그러나 이 시간에 가장 먼저 감사 드려야 할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한해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기에 이리저리 여러 사람들에게 감사할 수 있는 조건들이 있는 것입니다. 1. 내 영혼과 육체를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시기 바랍니다.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 했습니다. 1)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십니다. 사람이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자녀에 대한 걱정, 사업으로부터 오는 염려, 경쟁 사회를 살면서 오는 시기와 질투, 이웃에 대한 미움과 불화 등 우리 성도들이 신앙을 잃고, 구원에 치명적 타격을 입을 마음 고생들이 여간 많지 않습니다. 이런 심령의 고통과 갈등 속에서도 우리가 믿음을 상실하지도, 구원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능히 영혼을 굳건히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연약한 처지를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시고, 강한 두 팔로 우리의 영혼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한해동안 우리 영혼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2)우리의 육체를 지켜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한해동안 육신의 건강함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흔히 자신의 육신이 강건하고, 또 튼튼하여 질병 한번 앓지 않는 것이 모두 자신의 치밀한 건강 관리 덕분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로병사, 길흉 화복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참새 한 마리 죽고 사는 문제까지 하나님의 절대 권한에 달려 있다면 사람의 건강, 질병, 죽음, 출생 이 모든 것들이 어찌 인간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이루어진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한해동안 병을 앓지 않고 건강하게 지낸 성도는 건강을 주신 데 감사합시다. 그리고 질병을 앓았지만 회복한 성도는 질병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말고 그 후에 회복케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합시다. 그리하여 모두가 육신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시기 바랍니다. 2. 우리의 가정을 지켜주셨습니다. 대하 6:15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에게 허하신 말씀을 지키시되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1)의식주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성도는 한해동안 가정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먼저 성도는 가정의 의식주를 책임져주신 가장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공중의 새 한 마리, 들의 풀 한 포기까지 하나님이 먹이사 입히신다 하셨습니다. 이렇듯 천하의 미물들까지도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신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또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 구원하신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야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성도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먹이고, 입히시는 은혜로 한해를 지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맙시다. 아무리 생활력이 강해도 하나님이 의식주를 책임져주지 않으시면 결코 누구도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집을 떠나 거리를 떠도는 이들이 많습니다. 먹고, 입고, 살아야 할 집이 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2)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평안을 주십니다. 최초로 가족 제도를 만드시고, 가정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 많은 자손들이 번성하고, 또 믿음의 자녀들이 번창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말틴 루터(Lutter)의 말대로 성도의 가정은 작은 천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도 개인뿐만 아니라 성도의 가정도 항상 평안하고, 믿음 가운데 굳건히 서기를 간절히 소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가정은 곧 하나님 나라의 일부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전진 기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가정이 평안하도록 지키고 보호해 주십니다. 일 년을 돌이켜 보면서 한해동안 우리의 가정이 그리스도의 평안 가운데 안식을 얻었다면 이는 필시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요즘처럼 가정의 순결이 위협받고, 가족의 안전이 위협받는 세상에서 어찌 우리의 가정이 평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일년동안도 가정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3. 하나님은 우리 검상교회를 지키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1)우리 검상교회를 마귀와 세상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하나님은 늘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주십니다. 교회는 성도들 전체를 말합니다. 우리교회 성도들 모두를 하나님은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과 사상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 눈에 보여주지는 교회를 하나님은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를 배반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삼고 굳게 서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우리 교회에 물질에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해보다 30%의 재정을 더 결산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다른 교회는 재정이 줄었다고 합니다. 특히 시골지역 교회들은 재정이 적자라고 합니다. 줄어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30%나 더 많이 나왔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 내년에는 여러분 가정과 직장과 생업에 놀라운 축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종이 기도대로 한 달에 100만원 이상 십일조하는 성도들이 많이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선교도 하고 노인대학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4. 우리나라를 지켜주셨습니다.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라고 했습니다. 1)우리나라의 국경을 지켜주셨습니다. 국가가 아무리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첨단 과학 무기를 갖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면 이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고백하기를, 잠언 21: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가 지난 일년동안 남북한과 또는 다른 나라와 아무런 전쟁이나 국경 분쟁 없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보호하심 덕분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한해를 회고하면서 감사하되 특별히 국가를 지키고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2)우리나라에 평화를 보장하셨습니다. 아무리 대외적으로 국가가 튼튼해도 대내적으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하고, 분쟁과 불법이 난무한다면 그 나라는 내부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회의 공의를 세우시고, 또 사회에 질서를 세워주지 않으시면, 나라에는 반란이 일어나고, 질서가 무너지게 됩니다. 옛날 북 이스라엘 초창기 역사가 이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시니, 북 이스라엘에는 내란과 반란이 수없이 발생했고 사회는 잠시도 평안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한해동안 국내적으로 큰 변고없이 지냈다면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일년동안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국가가 평안한 것이 인간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0년의 종말(終末)/ 딤후4:3-8/ 송년주일설교/ 2000-12-31
2000년의 종말(終末) 딤후4:3-8 2000년은 오늘로 영원히 종말을 고하고 사라져 갑니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새로운 일년이 시작되는데, 우리는 새로운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마지막을 가리켜서 때가 가깝다 혹은 종말이다 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0~11절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 하였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때가 가깝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때에 관하여 매우 민감한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6, 18절과 로마서 13장 11~12절의 말씀을 통하여 때를 강조하였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1~12) 바울은 2000년을 끝내고 2001년의 역사가 전개되는 시점에 있는 우리를 향하여 마지막 때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세 가지 현상에 관하여 증거 하였습니다. 1) 마지막 때가 되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변질됩니다. 디모데 후서 4장 3절에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하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크리스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크리스천이 어떻게 변질이 됩니까? 바른 교훈을 받지 않게 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기쁘게 들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게 들리며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로 들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복이 없기 때문에 바른 교훈을 듣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논산훈련소에 가서 2,235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논산훈련소의 참모장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요즘 군대에 오는 청년들은 옛날의 청년들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옛날 청년들은 훈련을 받다가 힘이 들면 탈영을 했는데 지금은 자살을 합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서를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결단과 의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가 되면 약해져서 이러한 일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2) 마지막 때가 되면 귀가 가려지게 됩니다. 이것은 들을 수 있는 귀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만 들리고 싫어하는 것은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 교회의 목사는 이혼이나 간음에 관한 설교를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나 장로나 교인이나 말할 것 없이 전부 이혼을 떡 먹듯이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목사가 주례를 할 때 “오늘 내가 주례하는 이 부부는 평생동안 이혼하지 말라”하고 말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이혼율이 엄청나게 높기 때문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조그만 것도 서로 참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고 헤어집니다. 왜 부부가 멀쩡한 아이들을 낳고서 헤어져야 합니까? 이것은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자신을 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입을 넓게 열어라 내가 채워주겠다”, “마음 문을 열어라 내가 성령을 부어주겠다” 따라서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 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내가 전하는 말씀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3장 16~17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세 가지 징조가 있었습니다. ①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하늘 문이 열린 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늘 문이 막혀서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육개월 전에 미리 온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전파하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 예수님으로 인해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그 침묵을 깨뜨릴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②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습니다. ③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TV방송국과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을 하고 있지만,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TV수상기와 라디오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끊임없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못 듣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일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하나하나 잘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가장 복있는 사람입니까? 3) 마지막 때가 되면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게 됩니다. 나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공격하는 사람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열린 어느 이사회에서 사회를 하고 있을 때 어떤 분이 일어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발언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저런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발전을 합니다.”하고 말하자, 발언을 하던 사람이 이야기를 중단했으며 상을 찌푸렸던 사람들도 좋아했습니다. 그 회의는 보통 5~6시간이 걸리는 회의였는데 그 날은 2시간 10분만에 마쳤습니다. 회의를 마친 후 사람들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사회를 잘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원래 사회를 못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사회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셔서 사회를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바른 말을 듣지 않는 까닭은 자기의 욕심에 끌리는 이야기를 하면 ‘아멘!’하고, 자기에게 해로운 이야기를 하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4) 마지막 때가 되면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4장 7~8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허탄한 이야기를 좇아가지 말고 경건을 이루기 위해서 연습하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마지막 때에 우리는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첫째, 모든 일에 근신해야 합니다. 나는 감리교 본부로 7시 30분에 출근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린 후 업무를 시작합니다. 역대 감독들은 한 달에 한 두 번 출근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근하는 직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리교의 지도자가 뛰어야 따라오는 사람이 걸어오고 지도자가 걸어가면 따라오는 사람은 기어가며 지도자가 기어가면 따라오는 사람은 아예 누워버립니다. 근신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면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자런해야 합니다. 근신하며 기도하고 말씀 보아야 합니다. 둘째, 전도인의 일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부흥할 수 없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도인이 되어서 주일에 교회에 올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오면 교회는 자연히 부흥합니다. 전도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옆 사람의 손을 잡고 “전도인이 됩시다.”하고 말하시기 바랍니다. 1월 첫 주일에 올 때 한 사람씩 꼭 데리고 오시기 바랍니다. 만약 데리고 올 수 없으면 여자들은 아기를 낳으세요. 만약 그렇게 못한다면 양자라도 기르시기 바랍니다.” 셋째, 자기 직무를 다해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의 직무가 있고 장로는 장로의 직무가, 권사는 권사의 직무, 집사는 집사의 직무가, 성도는 성도의 직무가 있습니다. 부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금년에 우리 교인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돌아가신 분이 32명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이 노인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장례를 치른 분은 31세인 분으로서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 올 때에는 어떤 병이 들었든지 간에, 여기서 신앙생활을 잘해서 전부 고침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장 14~15절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35년 전에 우리 교회에 와서 가난한 집을 심방할 때마다 이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복을 두었다가 무엇을 합니까? 복을 흔들어서 눌러서 넘치게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현실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광규 장로님이 부장으로 있는 경조부 부원들이 늘 모여서 어려운 일을 당한 이들이나 혹은 결혼식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을 보면 감격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박수를 쳐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가서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세월은 쏘는 화살처럼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딤후 4:6) 바울은 이처럼 사명의 종말을 고하면서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1) 선한 싸움을 다 싸웠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악한 싸움이거나 남을 망신주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선한 것을 만들기 위한 싸움입니다. 2)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내내 일등으로 달렸어도 결승점을 1m 남겨놓고 쓰러지면 우승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절대로 도중하차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생활과 아멘의 생활과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생활을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3) 믿음을 지켰습니다. 한결같은 믿음을 갖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찬송가 133장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히/ /한결같은 주 예수께 찬양합시다/ 이러한 생활을 하는 자는 그 결과로서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이러한 종말의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아멘 -
2008년을 기억하자 /신8:1-10
2008년을 기억하자 /신8:1-10 2008-06-25 14:55:48 read : 298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나오신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엊그제 신년을 맞이한 것 같은데 벌써 송년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은 금년 마지막 주일로서 지나간 1년을 돌이켜 보면서 지난 한 해 동안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은혜를 다시 한 번 감사하고 되새기고 또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신명기 서를 보면 “기억하라” 는 말씀이 10번이나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신명기 중에서 오늘 분문 말씀으로부터 10장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될 때에 광야 40년 동안의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일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8:2절의 말씀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겪은 가지가지의 시련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는 것입니다. <예> 우리나라의 천안에 가면 독립기념관이 있듯이 이스라엘 나라에도 독립기념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는 글귀가 있습니다. 그들은 A.D70년 로마의 티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한 후에 전 세계로 유랑을 하는 민족이 되었고 세계 제2차 대전 때에 독일로부터 참으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아우슈비츠 형무소와 마이다네크, 베르체크 형무소에서는 히틀러에 의해서 600만 명을 가스실에서 질식시켜 학살을 하였고 주사 또는 총살을 하여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1948년 그들이 독립을 한 후 저들은 나치 독일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고 저들은 굳게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40년의 역사는 문자 그대로 시련의 역사였습니다. 40년은 한 세대에 해당하는 세월입니다. 이와 같이 기나긴 세월을 소비한 이유는 단 한가지뿐입니다. 3절 말씀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단순한 진리 한 가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40년의 세월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는 사방으로 열려있는 공간입니다. 이 넓은 광야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는 곳입니다. 그런 반면에 광야는 많은 위험이 존재하고 아직 개발되지 않는 미지의 거친 땅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할 때에 저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위험을 동시에 체험을 하였습니다. ① 홍해의 막힘이 있는가 하면 홍해가 갈라지는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있었고, ② 목마른 기갈의 위험이 있는가 하면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는 역사도 일어났고, ③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의 위험이 있는가 하면 만나의 양식을 날마다 새벽마다 공급받는 신비의 체험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④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불 뱀에 물려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때도 하나님은 구원의 상징인 구리 뱀을 장대에 세워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받는 체험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광야는 위험과 은혜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위험과 약속, 시련과 은혜, 절망과 소망, 흑암과 빛이 교차되는 곳으로써 위기와 긴장의 장소인 광야에서만 진정한 신앙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들도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상황과 환경과 현실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광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나간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은 결코 무의미하거나 고생만 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의 보살핌이 없이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항상 때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보호하심이 함께 하신 것이며 또한 축복의 약속을 받은 아주 소중한 은혜의 체험이기 때문에 그 40년의 세월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모세는 무엇을 기억하라고 하였는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1. 광야생활에서 겪은 「고난을 기억하라」 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중에 어떤 때가 자신의 인생에 유익을 주느냐 하면 모든 일이 잘 되고 안일 할 때가 아니라 환난과 고난과 역경 중에서 자신들이 더욱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는 오늘날까지 축복을 받고 살면서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하던 것을 기억하고 지냅니다. 인도의 간디는 말하기를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원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이란 인간의 살아가는 과정에서 뺄 수 없는 한 과정입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은 말하기를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더욱 깊고 위대하게 만드는 도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도구를 통하여 인간은 연마되고 신앙은 빛을 내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자에게는 정금과 같이 빛나지만 고난에 패하는 자는 그 고난이 멸망의 재난으로 바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 이르기를 (시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 40년의 시련을 이겼기 때문에 그 시련은 금과 같이 옥과 같이 진주와 같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2. 광야생활에서 체험한「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1) 출애굽의 기적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주는 교훈은 40년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강한 팔로 구원하여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라고 할 때 그의 마음이 강퍅하여 보내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더욱 고역을 시켰습니다. 그와 같은 바로에게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내렸고 마지막 열 번째 장자가 죽는 재앙이 애굽 전역을 휩쓸던 날 밤 애굽 전역에는 곡성이 진동을 하였습니다. 바로의 왕으로부터 천한 종들에게까지 장자가 죽임을 당하였고 심지어는 기르는 육축의 새끼들에게까지 첫 새끼가 모두 죽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마침내 바로는 하나님께 항복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상징인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면하고 이른 새벽 드디어 애굽을 탈출하게 됩니다. 이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행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온 출애굽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애굽이 있습니다. 그 애굽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영과 육을 사로잡아서 종처럼 부리고 억압하고 죄악입니다. 우리들은 모두가 죄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우리들의 모든 죄악이 사하여 졌고 그 죄악에게서 탈출하게 된 것입니다. (2) 험한 길을 통과한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걸어온 길은 참으로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단 한 명도 그 길을 가본 사람이 없습니다. 낯선 길을 가려면 길을 잘 아는 안내자가 있든지 아니면 지도라도 있어야 찾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네비게이션이라는 길 찾아주는 기계가 생겨서 낯선 길이나 초행길도 잘 찾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안내자도 없고 지도도 없이 기나긴 여정 길을 갔습니다. 다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바로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하시는 증거이며 저들을 인도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광야의 길을 가는 어려운 생활과 같습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어려운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가기만 하면 우리가 가는 영원한 가나안땅,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좌로나 우로 치우치면 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불평과 원망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저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3) 하나님이 광야에서「만나로써 먹여주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가장 염려되었던 것이 의, 식, 주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를 하나님이 모두 해결하여 주었습니다. 저들이 애굽에서 출발할 때는 구운 양고기 얼마와 그리고 무교병 조금뿐이었습니다. 많이 있어야 사흘 분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이 배고플 때 만나를 내려 주셨고, 목마를 때 물을 주셨고, 또 고기가 먹고 싶을 때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먹은 만나(Manna)는 작고 둥글며 깟씨 같고 진주 모양처럼 생긴 것으로,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거나, 솥에 삶아서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습니다.(출16:14, 민11:7-8) 그러나 이것은 땅에서 생산된 땅의 소산물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준 하늘 양식이었습니다. 무려 200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물이나 음식이 없는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을 지켜 오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야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매일 내리시는 하늘 양식인 만나를 먹음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지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4) 40년 동안「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은 것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4절 말씀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와 같은 일은 전무후무한 기적입니다. 어떻게 1년 2년도 아닌 수십 년간 입은 옷들이 떨어지지를 않습니까? 그리고 그 험한 광야 길을 걷는데 어찌 발이 부르트지를 않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십니다. (마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3. 하나님은「사랑으로 징계하시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온 지 2년 동안 천신만고 끝에 가데스바네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모세의 명령에 따라서 12명의 정탐꾼들을 선발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이 좋은 곳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라고 하였고 나머지 열 명은 그곳 가나안 땅을 악평하여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 말에 실망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여 애굽으로 돌아가자 고 하였습니다. 이 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작당을 하여 백성을 충동질을 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고라 일당과 그의 가족들을 생매장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살라 죽였습니다. 또 이 반역의 사건으로 인하여 단 며칠이면 가나안 땅에 진입할 수 있던 것을 가지 못하고 무려 40여년을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고통스런 40년의 광야생활은 하나님의 진노의 징계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깊이 내면적으로 생각하여 보면 하나님은 이 고통의 기간 동안, 시련의 순간들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더욱 낮추시고 시험하시며 그들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 이란 인간을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악한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들을 더욱 성숙시키고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연단(test)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고통과 채찍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더욱 온전한 인격과 더욱 굳센 신앙으로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단 과정에 놓인 성도는 불평 대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깊이 이해하며 겸손히 그 상황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히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4.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 갔을 때에「모든 축복을 허락하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6-10절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어떤 곳입니까? (신8:7-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너의 후손들에게 주리라고 약속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는 이미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일곱 족속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일곱 족속들을 모두 멸하고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은 우리나라에 비하면 그렇게 좋은 땅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보다 더 좋은 땅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땅을 매우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 땅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그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신 가나안은 어디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그 천국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희생을 하십니까? 천국은 힘쓰고 애쓰는 자가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믿음 가지고는 천국을 갈 수가 없습니다. 살아서 약동하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 더욱 힘쓰고 애쓰는 믿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오늘의 우리 성도들은 하늘나라 가나안을 소망하고 광야의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에게 주신 말씀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광야의 여정에서 탈락하지 않고 무사히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어진 시험과 연단과 환난의 과정을 잘 통과하여야 합니다. 오늘이 금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병술년이 다가고 정해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2006년의 송년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들도 지난 1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며 우리와 함께 역사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2006년 한 해 동안 날마다 시간마다, 그리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섭리 중에 우리가 살아온 것입니다. 환난이나 고난이 와도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시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억하여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이 고난 중에서도 나를 통하여 역사하심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서도 역사 하십니다. (시81:7)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시140:12)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2)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능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로를 꺾으시고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게 하시고 반석에서 샘물을 주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능력을 어찌 다 열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오늘의 나와 여러분을 통하여서도 능력으로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르신 것처럼 오늘의 여러분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과 섭리를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나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도 기억하여야 합니다. (히12: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성도 여러분들이여!! 지난 한 해 동안에 아프고 쓰라린 때가 있었습니까? 슬픈 일을 당하였던 때가 있었습니까? 하는 일이 잘 안되고 실패를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기억하고 깨달아야 할 것은 그와 같은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역사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참고 견디며 낙심치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은 환난이 변하여 축복과 은총이 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환난 중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 고통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할 때에 우리를 징계하시사 아프게 하시다가도 싸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6년도에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국내외적으로 유난히도 어려움이 많은 한 해였습니다. 더욱이 농촌은 참으로 어려운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에 영원한 가나안 하나님의 나라 새 예루살렘을 허락하실 것이며 은혜와 평강과 영생과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갈등과 포용/ 마22:15-22/ 송년주일설교/ 2008-12-28
갈등과 포용 마22:15-22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쉽지 않다. 2008년을 마무리 하는 오늘 한해를 돌아볼 때 세상과의 얼마나 긴장 관계가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사업하시는 분이면 2중 장부의 문제가 자신의 마음을 두드렸을 것이고, 교육을 하시는 분이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가르치느냐? 참된 예수님의 정신으로 교육을 했느냐의 문제가 힘들었들 것이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라면 세상의 기준으로 가르치느냐, 말씀의 기준으로 가르치느냐 갈등이 공존했다. 오늘 진급을 하는 학생들 학교에서 기독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 싶지 않다. 주일날 학원에 오라고 한다. 혼자 가지 않으면 도퇴되는 느낌을 받는다. 주일날 학교로 오라고 한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권위를 세우려고 용서를 하지 않는다. 주일날 앞날을 위하여 시험을 치러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 주일날 시험을 치러가면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런데 주일을 지키다가 회사에 취직을 못한 사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 정답은 나와 있다 그런데 막상 나의 현실이 되면 힘들어 진다. 이것이 요즘만의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진리가 세상에 들어오니 세상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주님은 21장과 22장에 걸쳐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신다. 그 비유에 반기를 들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따진다. 오늘 본문은 화가 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잡고자, 자신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낸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좀 더 첨예하게 대립된다. 1.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공격: 갈등 바리새인들은 최고의 정통주의 자들이다. 이방 왕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하나님의 신권을 침해한다고 분개했다. 한편 헤롯 당원은 로마의 힘을 빌려서 권력을 장악하려고 한다. 갈릴리의 왕 한편 헤롯의 일파로서 로마에 적극 협력하는 자들이다. 서로 정치적인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을 어려움에 빠드리려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참으로 우리의 정치판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지만, 이익을 위해서 공조한다.) 이들은 함께 주님을 공격하고 있다. 이들은 사상적 논쟁점은 차이가 있다. 그런데 연합전선을 구축한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하여 반대세력과 연합한다. 이러한 의기투합하는 것은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고 한다. 악을 도모하는 이유는 세상적인 관심이다. 높아지려는 본성이다. 세상적인 가치관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 절대적인 권위의 상승을 싫어한다. 자신들의 세상적인 권위가 위축되니 그들은 반론의 제기할 수 밖에 없다. 기존 질서에 새로운 질서가 들어오니 기존 질서 속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자들이 긴장한다. 갈등이 야기된다. 놀라운 것은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서로 다르면서도 함께 악을 모의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한 것은 참으로 교묘하다. 원하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빠져나갈 수 없는 말로 선수를 친다. 악의 교묘함이다.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참으로 간사하고 교묘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양자택일을 권한다. 가이사이게 바치면? 신성모독이다.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잃을 것이다. 사람들이 세금을 내는 것을 싫어했고, 특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싫어했다. 하나님께만 바치면? 법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세금을 지불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선동자로 잡히게 될 것이다. 진퇴양난에 빠뜨려 예수님을 매장하기 위함이다. 진퇴양난의 질문이다. 추구하는 바가 다른 이들이 모인 이유는 한 사람을 매장하기 위해서이다. 오늘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 우리 공동체에 질문을 던져 본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모이고, 우리는 모여서 어떠한 뜻을 추구하고 있는가? 신앙의 성숙인가? 신앙을 갉아먹고, 한 사람을 매장하기 위함인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다.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 일 년을 돌아보면서 그러했다면 이 시간 회개할 수 있길 바랍니다. 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나의 부서가 드러나지 않고, 나와 관계된 공동체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혹 불만을 가지고 책잡기를 원했다면 그것은 주님이 싫어하시는 바리새인들의 가식적인 모습과 동일하다. 그러한 모습이 나에게 있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나에게,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주님께서 우리를 함께 모이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다. 제자를 부르신 이유는 주의 뜻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모습이라면 그 자리에서 떠나는 용기가 있길 바란다. 내가 남을 비방하기 위하여 모였다면 그 자리가 바로 바리새인의 자리요 헤롯당원의 자리이다. 그 자리는 그리스도인의 자리가 아니라, 음모를 모색하는 권력에 눈이 먼 자리이다.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교회 속에도 갈등이 생긴다. 그것은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리만 있을 뿐이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은 자신들의 자리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위기를 느꼈다. 이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의 자리가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하여 불안해한다면, 그것은 신앙을 오해하는 것이다. 나의 자리가 사라져도 주님의 권위가 드러나면 감사할 수 있는 자의 모습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꾸 세상적인 것을 요구한다면 갈등이 유발될 수 밖에 없고, 음모가 난무한다. 그러한 모습에서 벗어나야 진실된 공동체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되어 간다. 참된 신앙의 성숙이 우리에게 풍성하길 소망합니다. 잘못된 갈등에서 벗어나는 은혜가 이 가운데 임하길 소망합니다. 서로 다른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함께 와서 주님께 자신들의 음모의 전모를 드러낸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2. 예수님의 대응: 포용 이러한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그들의 진의를 보신다. 로마제국에서 요구하는 세금에서는 3종류가 있다. 토지세 곡물의 10분의 1, 자기가 생산한 기름과 포도주의 5분의 1을 내야한다. 소득세이다. 수입에 대한 100분의 1이다. 그 다름이 인두세이다. 14~65세까지의 모든 남자들이 낸다. 12~65세까지의 모든 여자가 지불하는 세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두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받고 있는 고통을 대변해준다.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세금 낼 돈을 보이라 하신다.” 로마동전이다. 거기에는 황제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묘사하는 문구가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금을 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동전을 사용하는 것을 가급적 피했다. 그러데 동전을 보이라고 하자. 그들은 데나리온을 가지고 왔다. 그들이 동전을 가져왔다는 것은 동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가져올 수 있었다.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신념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알고 계신다. 그러나 주님은 흥분하지 않는다.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한다. 냉철함을 유지하신다. 주님은 냉철하게 그들의 진의를 파악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주님은 둘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양자택일의 입장에서 둘을 선택한다. 둘을 포기하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평화도 원하신다. 이웃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동일하게 보여주신다. 그 절정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다. 그리고 주님은 마태복음 17장 27절에서는 주님은 성전세도 내셨다. 주님은 세상의 것을 포용하신다. 주님께서는 문제를 품으심으로 해결하신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으신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계신다. 우리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용감한 자처럼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양쪽을 품는 자이다. 세상 반 이 땅 반 이렇게 물리적으로 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이 땅을 사랑하신 사랑으로 품는 것이다. 모든 것에 이러한 품음이 나타나길 원하신다. 갈등의 원인은 품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의 배척이고,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칼은 없지만 날카로운 모습으로 주님께 다가왔다. 그런데 주님은 품으셨다. 주님은 우리도 품어주셨다. 우리는 일 년을 보내며, 모여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우리의 욕심을 찾을 때도 많았다. 그러기에 갈등도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송년주일을 허락하셔서 삶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주님 앞에서 다짐하게 하신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품어주시고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죄인의 무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사랑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도 품어주셨고 용서해주셨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았지만, 사랑으로 보둠어 주셨다. 품어 주심의 은혜가 이 가운데 있다. 우리의 삶이 품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양자택일에서 품으시는 주님을 보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이중적인 시민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시민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 내가 단지 대한민국 국민으로만 삶을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는 이 땅의 사람이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 국가에 참된 국민이며 또한 하늘나라의 좋은 시민임을 자각하고 살아가는 자이다. 주님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셨다. 이러한 모든 품는 것은 사랑의 마음이다. 주님은 이 땅을 사랑의 마음으로 보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주님의 성육신은 곧 이 땅을 품으심이다. 우리는 이제 진급을 한다. 그것은 세상으로 한 발짝 더 내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이사, 하나님의 나라와 대한민국에서 어느 한편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의 역사적 책임을 완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주님도 그것을 원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그는 범법자요!? 비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나는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가? 가이사를 따라가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권력하에 있지만 당당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지에 답을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세상을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가운데 살아가면서 세상의 변화의 주역이 되길 원하신다. 능력있는 크리스챤은 세상의 법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묵살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법을 준수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가이사, 신앙과 권력, 하나님 나라와 세상, 신권과 인권 사이의 갈등이다. 예전에는 신권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의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리를 우리가 찾아드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작은 결단과 노력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의 답변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포용한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가 우리의 삶이 되실 소망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갈등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넉넉한 사랑이 넘침으로 언제나 주님의 편에서 이 땅을 이끄는 우리의 삶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과 가이사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감사(1)/ 시95:2/ 송년주일설교/ 2010-12-27
감사(1) 시95:2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해를 돌아보면서 일년동안 과연 내가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또는 또 한 살 먹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년동안 눈동자같이 지켜주시고 인도하여주신 것을 생각하면 지난 일년이 참 감사가 됩니다. 제 경우에는, 국현이가 일년동안 건강하게 자라주었고 주신 아들로 인해 우리 가정에 행복을 주셨고, 일년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웠는데 수입이 전혀 없던 달도 있었고 살수가 없는 상황인데 매달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어요. 또 참 좋은 교회인 영화교회로 보내주셔서 지금 너무나 행복하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10년 사역하면서 사역을 가장 즐겁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잘 순종해주고 청년회에 헌신해주시는 여러분에게 또한 감사가 됩니다. 또 인격적인 발전, 자기개발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가장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점이 감사가 됩니까? 한명씩 한가지만 이야기해봅시다. 뭐 우리가 연말이나 연시때나 추수, 맥추감사절에만 감사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감사가 늘 생활화 되어야하겠지요. 성경에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햇는데 우리가 가끔은 이렇게 감사할 수 잇지요. 또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할 수 있죠. 장미를 들고는 감사할 수 잇지만 장미꽃 가시를 놓고는 감사하기 어렵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는 감사는 내가 병들었을때도 내가 시험에 직장면접에 떨어져도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모가 연인이 하늘나라에 가도 감사하라는 것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있을까요? 하박국 선지자가 무화가 나무 열매가 없고 송아지가 없고 다 망해도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했는데,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일회용 기쁨이 일회용 감사가 아니죠. 둘째, 천국의 상과 천국의 기쁨을 생각하면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게 될 기쁨을 체험할 수 없지만 상상을 해봅시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천국의 기쁨을 지금 안주시는가 많은 이유가 있겟지만 하나님께서 천국의 기쁨을 주시면 우리가 죽어요. 그 기쁨을 우리 육신이 감당하지 못해서 죽어요. 여러분 너무너무 기쁘고 황홀하면 어때요. 힘이 쭉 빠지지요. 천국의 기쁨은 이 세상의 기쁨과는 차원이 다르고 종류가 달라요. 셋째,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비천함에 비해 아무리 비참한 상황도 은혜이기 때문에 어떤 부자가 아들이 멀리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와요. 아버지가 아들을 마중나갑니다. 아들이 말을 타고 숲을 지나서 아버지도 말을 타고 사막을 지나서 약속한 곳에서 드디어 만났아요. 아들이 “아버지 건강하셨죠..그런데 아버지 이렇게 아버지를 만나게 되니 참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오면서도 감사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숲을 지나오면서 나뭇가지에 걸려 말이 세 번이나 넘어졌어요.”“그게 어째서 감사할 일이냐”“네 세 번이나 말에서 떨어졌지만 저나 말이나 전혀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아들아 나도 참 감사한 일이 있다. 이렇게 사먹을 건너오는데 말이 한번도 넘어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감사하냐?” 병에 걸려도 내 죄악이 또 하나님께서 은혜주시지 않는다면 사단이 네게 문둥병에 걸려야 되는데 죽어야 하는데 겨우 감기에 걸렸으니 하나님의 은혜아니에요. 넷째, 하나님께 감사하면 사람들에게도 감사가 된다 운동권 사람들보면 감사가 없는 것 같아. 원망 그리고 불평 비판이 가득하죠. 그런데 공산주의 국가 사람들이 순박하긴 한데 그러면이 많다는거에요. 반면 서구 사람들은 감사에 대한 표현을 어려서부터 잘 가르치죠. 원망하면 그 가족에서 그 모임에서 행복할 수 없죠. 제 여동생이 임신중독에 걸려서 아이가 8개월 반만에 났어요 이름이 도현인데..인큐베이터에 들어가고 염증 때문에 백혈구 수치가 너무 높아서 위험했어요. 그렇게 산모도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생을 하면서 아이도 고비를 넘기고 몇개월 정도지나면서 건강해졌는데 또 한달전에 신우염에 걸려서 구멍이 굉장히 크게 났다는거에요. 그게 사돈어른이 아이를 거품목욕을 시켜서 그랬데요. 그리고 4,5살 될 때까지 항생제를 투여를 해야 한다는거에요. 지금은 굉장히 건강해졌는데 나도 앞이 캄캄해요. 동생 남편에게 전화를 하면서 위로를 하면서 이런이야기를 했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엊그제 책을 보는데 어떤 목사님이 굉장히 온유하셔서 일환형제처럼 도무지 화를 안내시는 분이 있으신데 사모님이 바가지를 긁어도 또 사모님이 외출갔다가 잘 늦으시는데 화를 내는 일이 없다는거에요. 그러던 하루는 사모님이 연락도 없이 아주 많이 늦으셨데요. 그래서 아무리 목사님이 성격이 좋다지만 오늘은 화를 많이 내시겠구나 잘못했다고 삭삭 빌어야겠다하고 들어와서 ‘미안해요 제가 그만..’“아 왔군요 돌아와서 감사해요”그랬다는거에요. 사모님이 목사님이 비꼬는 말인지 알고 적반하장으로 화를 버럭 냈데요. ‘아니 차라리 화를 내요 비꼬지말고’ 목사님이 “당신이 늦어서 무슨일을 당하지 않았나 걱정을 많이 햇는데 이렇게 무사히 잘 돌아왔으니 감사하지 않아요”그랬다는거에요. 이런 친구를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잖아요. 이런 전도사님을 준 것이 이런 지체들을 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잖아요. 내가 여러분 같은 지체들을 섬길 자격이 없다고요. 하나님께 감사 여러분께 감사해요. 여러분이 저같은 전도사 성민형제같은 회장 만날 자격이 없다고요. 민정자매같은 그룹장 만날 자격이 없다고요. 감사해야죠. 우리 서로에게 감사의 고백을 해봅시다. 한해동안 기도해주어서 고맙다.
감사로 맺는 매듭/시116:12-19
감사로 맺는 매듭/시116:12-19 2008-06-24 15:41:58 read : 334 벌써 2006년이 오늘로 끝입니다. 상투적인 말 같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야말로 2006년 신년주일 지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배웅해 보내야 하니 말입니다. 현대 지성들이 참여해서 [시간의 박물관]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장을 현대 지성을 대표하는 움베르토 에코라는 분이 썼는데 제목이 “시간의 창조”입니다. 이 분은 이 장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바로 시간의 발견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가장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다.” 실제로 인간만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잴 수 있는 도구를 발명했습니다. 바로 시계입니다. 나아가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달력입니다. 하루, 한 주, 한 달, 1년 등. 그러면서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 주년, 한 시대, 세기, 밀레니엄, 회갑, 희년 등. 이 시간 흐름의 매듭의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어려서 사랑방에서 볏짚으로 새끼 꼬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자 집에서 가져온 볏짚으로 새끼를 꼽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새끼를 꼽니다. 배고프면 감자 고구마를 삶거나 구어 먹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볏 집을 부드럽게 하려고 계속 손에 침을 뱉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다 꼰 새끼는 깔고 앉기도 하고 등 뒤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새끼를 꼽니다. 새끼를 다 꼬고 나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반드시 매듭을 짓는 일입니다. 만일 매듭을 짓지 않으면 밤새 꼰 새끼가 다 풀어지게 되고 긴 밤 헛수고를 하고 말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듭을 잘 짓고 마무리를 잘 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간 매듭의 의미가 우리의 소중한 역사로 아름답게 간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 삶의 더욱 풍성해 지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2006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매듭을 잘 지어야 하겠습니다. 2006년 한 해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우리의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2006년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한 마디로 “감사”입니다. 감사라는 관점에서 2006년이라는 역사를 매듭지어 우리 인생의 역사 한 페이지로 장식해 보자는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으로 살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가족들, 이웃들, 교우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의, 식, 주 부족함이 없이 생활하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또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 서로 도와야 할 수 있습니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주의 종들과 교우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고객과 이웃과 동료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식당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식당 주인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신선하고 제일 좋은 식재료를 준비하느라고 정말 큰 수고를 합니다. 밑반찬을 만드느라 여러 날 고생을 합니다. 당일 주 메뉴를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식당 주인은 찾아오는 손님에게 “내가 이렇게 큰 수고로 음식을 만들었으니 당신들이 내게 감사해야 하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큰 수고를 했지만 “그렇게 많고 많은 식당 중에 우리 식당을 찾아주었으니 감사합니다. 내가 정성껏 만든 음식을 그렇게 맛있게 먹어주니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찾아온 손님들은 “당신 식당을 찾아주었느니 감사해야 하오, 비싼 돈을 내고 당신 음식 사 먹어주었으니 감사해야 하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식당을 찾아왔고 돈 내고 음식을 사 먹지만 “여기 이런 가게를 열어주어 감사합니다. 그렇게 큰 수고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수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두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인정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다 당신 탓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마누라 탓이고, 남편 탓이고, 부모 탓이고, 자식 탓이고, 네 탓이고 당신들 탓이요”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며 한 해를 마감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아무리 둘러 봐도 감사할 조건이 찾아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라고 소망하던 것이 하나도 된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생각지 않았던 큰 불행이 닥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 한숨과 절망뿐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창 37장에서 50장까지는 요셉이라는 사람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도표로 그려본다면 영어 알파벳 V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인생의 전반기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여러 충격적인 사건으로 졸지에 바닥까지 떨어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후반기는 또한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졸지에 저 하늘 가까이 올라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전반기 대표적인 사건 몇 가지만 꼽아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요셉은 야곱이라는 당대 부잣집 아들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로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됐습니다. 부잣집 아들에서 예고 없이 또 준비 없이 타국에 팔려온 노예 신세가 된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가정 총무로 있던 중에 모함에 걸려서 죄인이 되어 감옥에 수감되게 됩니다. 이제 졸지에 죄수가 되어 언제 어떻게 처벌 받게 될지 모를 처지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은 이런 설상가상의 불행이 겹쳐 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내 던져진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비록 노예로 끌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죄수로 옥에 갇혀있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의 앞길을 선하게 여실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그토록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감사를 지켜줍니다. 믿음이 차원 높은 감사를 이끌어냅니다. 믿음이 선취적 감사를 만들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황과 여건이 좋지 않으십니까?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까? 너무 힘이 드십니까? 상황과 여건을 보지 마십시오. 지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앞길을 복되게 펼쳐주실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열고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앞 당겨서 감사를 드리십시오. 또 하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그 누군가와 맺힌 감정 때문에 감사할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큰 상처 때문에 감사가 자리 잡을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감사가 그 마음에 깃들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는 한 공동묘지는 특별한 묘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군과 적군이 함께 묻혀 있는 묘지입니다. 독불 전쟁 때 피차간에 많은 희생자가 났는데 전쟁은 계속됐습니다. 할 수 없이 시체들을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묻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워 두었고 그 십자가 위에 전사자들의 군번을 걸어놓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프랑스군의 어머니가 군번을 보고 자기 아들의 묘를 찾았습니다. 가져간 꽃을 꼽고 한 없이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있는 묘를 보는 순간 독일군 묘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분명히 자기 아들이 이 독일 군 병사와 싸우다 여기 이렇게 무덤에 누어있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 분노를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욕을 퍼 붓고 침을 뱉고 무덤을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순간 자기 아들 무덤에 세워진 같은 십자가가 이 독일 군 무덤에도 세워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단 사람들을 용서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그 십자가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독일군 병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다시 무덤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무덤에 꼽았던 꽃을 반 나누어 이 병사의 무덤에 꼽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강물처럼 평안이 밀려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 감사가 그 마음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며 용서의 능력을 덧입을 때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입혔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가 이 한 해를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내년 2007년의 삶이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우리 삶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주께로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시 65:4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다윗은 어떻게 하든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무엇보다 더 큰 복인 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17-18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찌라” 시인은 감사하는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새롭게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킵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을 주님 곁에 가 있게 해 줍니다. 감사는 우리를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해 줍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감사 고백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 앞 가까이에 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몇 해 됐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특강을 청해서 정말 시간 내기 힘들었는데 선약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녀오게 됐습니다. 지방이어서 오후에 KTX를 타고 갔다가 강의 후 바로 기차를 타고 올라와야 했습니다. 다음날 스케줄도 꽉차있고 해서 몸도 마음도 무척 무거웠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기차에 올라 피곤에 지쳐 눈을 감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가 날라왔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오실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와 주신 것 감사하고, 귀한 강의로 먼저 제가 큰 도전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모든 피로다 다 사라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 이름이 제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분을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그분과의 관계는 훨씬 좋은 관계로 발전됐음은 물론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작지만 깊은 마음의 감사는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어줍니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줍니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특히 실패했던 과거는 우리를 덫처럼 옥조이게 만들고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과거의 덫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성 도덕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살다가 헤어지고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여자는 지탄의 대상이 될 텐데 2000년 전에는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물을 뜨러 나올 때도 아무도 없는 정오 즈음에 나와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 때문에 죄사함을 받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께서 대한 감사가 솟구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를 딛고 일어설 힘을 줍니다. 감사가 과거의 덫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고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게 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2006년을 보내야 할 시점입니다. 감사로 잘 매듭을 지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모두가 당신 덕입니다.” 인정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미움과 분노의 대상일지라도 용서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해에 더욱 복된 삶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감사의 회고/ 신8:1-6/ 송년주일설교
감사의 회고 신8:1-6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을 맞아, 한 해동안 우리를 지켜주시며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 하실 때, 쉽고 편한 땅을 택하지 않으시고 광활하고 넓은 황량한 광야를 선택하셨습니다. 또한 그 기간도 4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하여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킴으로써 결국은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광야롤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훈련을 통하여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통과하도록 하신 광야의 의미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광야는 하나님의 훈련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의 과정을 통과하여야만 합니다. 이는 용맹한 군인이 되려면 반드시 혹독한 정신적, 육체적 훈련을 거쳐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도 피나는 노력과 땀과 절제를 대가로 지불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의 애굽 종살이 동안,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에배도, 말씀도, 자유도, 기적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꿈도 기본적인 권리도 빼앗긴 채, 하루하루를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그들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로 거듭 나기 위해서 훈련은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영국인들에게 있어서 바다를 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 게 있어서 광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장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광야를 예비하셨고 그들은 광야에서 귀한 것들을 얻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간의 훈련을 받았고 세례 요한도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앞서 광야에서 금식하셨습니다. 이처럼 불모의 땅으로만 보이는 광야는 사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훈련 장소였으며 그들은 이 광야 훈련을 통해 귀한 것들을 얻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인생은 고달프고 목마르고 춥고 배고픔이 있습니다. 질병과 위험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야를 다 지나고 나면 우리는 젖과 끌이 흐르는 땅, 곧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 온 인생 여정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함께 하시며 지금까지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2. 광야는 겸손을 배우는 장소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는 무엇보다도 겸손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가장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천국은 겸손한 사람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교만한 자는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동안 원망과 불평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습관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들은 광야 훈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원망과 불평하는 자는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통과하면서 홍해 앞에서 원망하고 마라의 쓴 물 앞에서 원망했습니다. 또한 신 광야에서 굶주릴 때, \\\"우리를 주려 죽게 한다\\\"고 원망했습니다. 또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신\\\"이라며 춤추고 경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12정탐꾼은 가나안 땅을 악평 하여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죽게 하려는가?\\\"하고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통과하면서도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생활이 계속되면서 그들은 이러한 원망과 불평을 줄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험들을 잘 통과해서 원망과 불평의 사람에서 감사와 평화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2) 교만한 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실 때 인용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빼앗아 가시는 것은 육신의 양식 외에 다른 양식, 곧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종종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에 비교됩니다. 만나는 담백하고 가벼운 음식이기 때문에 싫증이 나기 쉽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도 매우 단조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또 만나가 매일매일 공급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매일매일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 온 기적의 양식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영의 양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이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로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했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인생의 광야를 통과해 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힘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떠나 버립니다. 물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광야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처럼, 인생을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면 오히려복이 됩니다 .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9)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온 삶을 돌이켜 볼 때, 감당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수많은 일들을 통과하여 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삶도 광야와 같은 인생 여정 중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담대히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3. 광야는 위로가 임하는 장소입니다. 본문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공급해 주셨음을 나타내 줍니다. 옷은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옷 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것은 얼마나 세심하고 자상하게 그들을 돌보아 주셨는지 보여 줍니다. 또한 그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심으로써 광야 생활 속에서도 위로와 만족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끊임없이 범죄하고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때로 사탄의 올무에 빠져서 실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할 때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성도를 보호하시고 위로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 까지 함께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도 많은 환난과 위험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환난을 겪을수록 더욱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광야같이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다 사랑과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은총과 하나님의 자비, 성령님의 인도와 보호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4. 광야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장소입니다. 또한 본문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이 부릍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발에 힘을 주심으로써, 40년 동안 행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붙들어 주시고 힘을 주셔서 광야의 고된 행군을 이겨내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시험을 주 실 때는 감당할 만한 것을 주시며, 이를 통해서 그들을 더욱 강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 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를 죽인 후, 이세벨의 추적을 피하여 로뎀 나무에 이른 엘리야는 실망이 극에 달하여 나무 밑에서 잠들었습니다. 그는 너무 낙심하여 죽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사명이 남아 있었고 하나님의 사자는 그를 위로하고 그가 다시 새 힘을 내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인생의 광야 속에서 지치고 낙심하여 엘리야처럼 죽기를 구하기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할 때, 그 의 자녀들을 그대로 내어 버려 두시지 않고 다시 힘을 내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행군을 멈추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은 광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없는 것은, 이 광야 길 내내 우리 하나님께서 동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늘 함께 계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위로의 하나님, 광야 같은 인생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시키시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광야 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감사하며 마무리 /롬8:28-30
감사하며 마무리 /롬8:28-30 2010-02-22 10:43:04 read : 376 정유찬 시인의 '12월의 끝에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사랑한 날이 미워하는 날보다 많았는지 슬프고 힘들었던 날보다 행복했던 날이 많았는지 12월의 끝에서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고 있어 보석 같은 날들을 가슴으로 살았니 머리로 살았니 얼마나 웃고 살았어 아니면 찡그렸어 맑은 하늘아래 투명한 날들을 뿌연 눈으로 보낸건 아닐까 별이 찬란하던 밤 내가 깨어 있었는지 잠들어 있었는지 난 거울을 봐 거울속의 나를 봐 아름다워 진거야 추해진 거야 무엇이 변한 것일까 밤이 깊어만 가네 한해가 또 저무네 12월 마지막 주일을 맞아 어떤 감회가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아쉬움입니까? 만족스러움입니까? 후회입니까? 기쁨입니까? 섭섭함입니까? 감격스러움입니까? 무엇보다도 감사함이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감사속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송년이 될 줄 믿습니다. 수많은 사고와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무사히 여기까지 온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무서운 질병이 난무하는 가운데에도 건강하게 살아온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수많은 기도가 응답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금년에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셨음을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보내주셔서 풍성한 사랑을 받고 살게 하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좋은 기회의 문을 활짝 열어주셔서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이 더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많이 맺게 해 주신 것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외에도 아름다운 눈으로 감사의 제목을 하나 하나 헤아리며 감사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중에는 2009년도에 어려운 일을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 아직 위기에 처한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의 긴 터널을 지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들도 감사해야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지나온 한 해 동안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고 환영할 수 없었던 질병과 사고, 실패와 가난을 만나 된통 시달리고 그로인한 상처와 고통이 있었는데도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1.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기 때문입니다.(28) 하나님 나라에는 쓰레기통이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도 쓰레기통이 없습니다. 버릴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쓰레기 같아서 정말 버리고 싶은 일들도 나중에 보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오늘의 구원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고난 까지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까닭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연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필연이며 그 속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 모든 하나님의 뜻은 다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선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꼭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승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힘든 일이 없어서 잘 사는게 아닙니다. 힘든 일이 있어서 못 사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어서 못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못 사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힘들지 않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기에 힘들고 어려운 일을 쉽게 극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셉이야 말로 얼마나 나쁜 일들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까? 형제들의 질투와 핍박, 사막의 웅덩이인 사지에 던져진 죽음과의 대면, 원치않는 노예생활, 억울한 감옥살이, 은혜를 잊어버린 관원 등 불행하게 보이는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요셉의 입술에서 불평이나 원망의 언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그 비밀을 그가 자기를 사지로 내몰고 죽음을 시도한 형제들을 만나서 그가 고백한 간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45:5을 보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다시 7-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어떻게 이 험한 세월을 이기고 요셉이 이런 간증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섭리를 일찍부터 믿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개입하셔서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던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며 2009년도의 남은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2.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9) 사실 성도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있다고 해서 당장에 악한 일이 선한 일로, 악한 상황이 선한 상황으로, 실패의 환경이 성공의 환경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동안 우리의 상황은 나쁘고 악하고 고단한 상황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얼마동안 우리를 나쁜 상황 한 복판에 그대로 두신채로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십니다. 그때 우리를 둘러싼 고난은 우리의 인격을 연단하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다듬어 빚으시는 인격의 모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인 것입니다. 롬8:29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바로 이 목적을 마음에 두시고 때로 사람들과의 갈등을 사용하여 다듬으십니다. 때로 인내의 한계에 이르기가지 시련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뜻을 우리가 알지 못하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과 사람을 피해 도망갈 궁리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고난을 주시고 당시에는 괴롭고 힘들어도 인내하며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까지 성숙하고 거룩해지는 기회로 삼으라고 하시는데 사람들이 도망가면 어떻게 됩니까?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도망간 거기까지 쫓아가셔서 똑같은 환경,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하시어 고난과 갈등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과하며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성화의 자리에 이르면 어떻게 하십니까? 30절을 보십시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정하시고 때가 찬 어느 날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의롭다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인치셨다가 우리를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연단하사 마침내 영화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영화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려고 지금 다듬으십니다. 여러분 영화롭게 변화될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범죄심리학자인 소퍼 박사는 형무소에 있는 죄수와 수도원에 사는 수도사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종일 불평과 요구만을 말합니다.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는 하루 종일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도 만일 감사의 기도 대신 요구와 불만의 기도만을 드린다면 형무소의 죄수와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윌리엄 리바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그는 무려 네 번이나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리바인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방탄조끼를 입고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주변의 상인들이 물었습니다. "우리도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방탄조끼를 입어야겠는데 어디서 그것을 구할 수 있나?" 리바인은 방탄조끼를 주문받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이 점점 늘어나서 손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육점을 정리하고 '방탄조끼 주식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 회사는 크게 성장해서 세계 40개 도시에 지사를 세우고 일약 국제적인 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리바인은 회장으로 취임하며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습니다. "강도를 네 번 만난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강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칼을 들고 고기를 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된 가나안은 사실 아주 황폐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가나안을 옥토로 표현했을까요? 거기에는 무서운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은 어떤 곳이든지 최상의 것으로 여긴다는 고백입니다. 그 감사의 마음이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으니, 토지 소산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청지기 신앙이 저들을 부요하고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물질도 감사하는 사람에게 흘러듭니다. 남미보다 자연환경이 좋지 않은 미국이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된 것은, 청교도들의 감사신앙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가 넘치는 가정에 불행이 침범하지 못합니다. 감사가 곧 자산입니다.
건강한 교회 건강한 믿음/ 행2:46-47/ 이정익 목사/ 송년주일설교/ 2012-12-27
건강한 교회 건강한 믿음 행2:46-47 한해 마지막 주일입니다. 1년 52주 가운데 오늘은 마지막 주일 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은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오늘쯤 되면 사람들이 모두 지난 시간을 회고해 보고 많은 생각을 할 때입니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온 한해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쁨도 있었고 속상한 일도 교차하면서 살아온 한해였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에 바빠서 하나님을 잊으며 살아오기도 했던 한해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간이 되면 후회만 남습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망년회를 합니다.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은 아무리 아름답고 추억이 있어도 다가올 미래보다는 소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을 회고하기 보다는 다가오는 새해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새해 2003년도 우리교회 신앙표어를 “건강한 교회 건강한 믿음”이라고 정했습니다. 사도행전 2:46-47절에 근거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초대교회 때의 교회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 보면 초대교회시대의 교회모습이 얼마나 건강한 믿음이었고 얼마나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로 보면 가장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날마다 모이고 모여 기도하고 교제하고 찬미하고 구제하고 물건을 서로 나누어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백성들로부터 교회가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에 하나님이 날마다 신자들을 보내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원형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때 교회의 모습은 우선 교회가 건강했고 신앙도 건강했고 생활도 건강했고 서로의 관계도 아주 건강했습니다. 이것이 원래 교회의 모습이고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우리교회의 꿈이고 목적이고 이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들이 시대가 변해 오면서 교회도 신앙도 많이 변했습니다. 교회와 신앙이 제도화되고 안정화되다 보니까 타성에 젖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참신성은 없어지고 습관신앙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모여도 그냥 감정 없이 모이고 찬송을 해도 그냥 의무적으로 합니다. 대중가요를 불러도 흥이 나고 감정이 나타나는데 찬송은 애국가 부르듯 감정 없이 그냥 부릅니다. 그것은 신앙이 자꾸만 퇴색하고 생명력이 약화되고 교회는 자꾸만 제도화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의 목표도 이 제도화되는 것을 가능하면 막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교회가 제도화되는 것을 막고 신앙이 다시 뜨겁게 회복되는 것을 기대합니다. 새해 목표를 그렇게 잡았습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몇 가지 새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영아세례”입니다. 각 가정에서 아기가 태어납니다. 얼마나 신선한 축복입니까. 결혼한 부부들이 아기를 얼마나 고대합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대하지 않는 부부에게는 빨리 임신을 하고 고대하고 기다리는 부부에게는 왜 그렇게 임신이 안 되는지 모릅니다. 부부가 결혼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아기가 없습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간절히 소원하겠습니까. 그렇게 기다리다가 드디어 아이를 잉태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 한달이 지납니다. 그러면 보통 아이를 안고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 40일 정도 되면 나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아이를 받아들고 축복의 기도를 해 줍니다. 그 기도는 간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해 주다 보니까 좀 아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만 해 줄 것이 아니고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그 아이에게 주일 예배 때 모든 분들이 축복해 주는 앞에서 영아세례를 주자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교회에 나오는 날 여러분 앞에서 영아세례를 주려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이가 커서 “나는 언제 세례 받았어요?” 하고 물으면 ”너는 태어나서 처음 교회 가던 날 만인 앞에서 세례를 받았단다. 하고 대답해 준다면 그 아이가 얼마나 선선한 감동을 받겠습니까. 당장 내일 모레 송구영신 예배 때부터 한아기가 세례를 받습니다. 앞으로 아이 낳는 분들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것이 새해에 우선 행할 일입니다. 두 번째는 “심야기도회”입니다. 그동안 한달에 한번씩 심야기도회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달에 한번 하다 보니까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전체 모임은 한달에 한번씩 하되 원하는 분들이 모여 매주 기도회를 갖기로 해서 지난해 한 해 동안 매주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소수가 모이고 형식적으로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교회의 최대 약점은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교회의 약점입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금요일에 하던 심야기도회를 생략하고 수요일 저녁예배를 마치고 이어서 기도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원래 주일 저녁예배는 찬양예배로 드렸습니다. 주일예배는 너무 엄숙해서 찬양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일 저녁예배는 찬양을 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예배는 기도회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예배는 수요기도회였습니다. 이제 원래 의미를 되찾아서 수요예배는 기도회로 가지려고 합니다. 여러분, 내년에는 직장에서 퇴근하고 잠시 교회에 들러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돌아갔으면 합니다. 새해에는 기도하는 일에 많은 분들이 참여했으면 합니다. 세 번째는 “주말 프로그램” 을 신설했습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지금까지 매년 세례교인 400여 명씩을 증가시켜 왔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신앙이 자라서 세례 받은 분이 매년 약 150여명이고 세례를 받고 우리교회에 오시는 분이 250여명이 되어서 매년 400여 명씩 세례인 을 증가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신 자수는 매년 증가하는데 출석률이 지난 2년 동안 멈추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많을 것입니다. 우선 예배장소가 협소합니다. 그리고 주차공간도 협소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왔다가 장소가 없으면 그냥 돌아갑니다. 현재 우리교회의 예배공간은 어린이를 포함해서 3천 명 정도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주일이면 5천명 가까이 모이니 문제입니다. 거기다 근래에 형성된 주 5일 근무제의 부작용이 현실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말이면 가족단위로 빠져나갑니다. 주일날 젊은 커플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겨울이면 젊은 커플들이 금요일에 스키장으로 갔다가 월요일 아침 직접 직장으로 출근합니다. 봄가을이면 더 자연스럽게 가족단위로 밖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불가불 이런 모임을 교회가 만들어주기 위해서 주말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새해에는 사회위원회와 주말문화부가 이를 감당할 것입니다. 네 번째는 “미자립교회 교역자 초청 위로회” 를 마련했습니다. 우리교회는 도시교회 가운데서도 도심교회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들입니다. 지방에서 올라오면 지방교회 특히 농촌교회는 자꾸만 공동화 되어갑니다.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빠져나가면 농촌교회는 인적자원과 재정자립이 아주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존립마저 흔들리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매년 60여교회개의 미자립 농촌교회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도 도왔고 남녀전도회에서 도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와주다 보니까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돕는 일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그 돕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그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는 어떤 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봄과 가을 두 차례 우리교회가 돕는 미자립교회의 교역자들을 직접 초청해서 격려도 하고 함께 예배도 드리며 실정도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초청되어 오면 여러 기관에서는 그분들에게 선물도 좀 준비해주고 환영도 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분들을 외국에 가 있는 선교사 돕는 이상으로 환영해 주었으면 합니다. 다섯 번째는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을 강화”하는 일입니다. 우리교회는 수년전부터 몇 개의 지역사회 프로그램을 실시해 오고 있습니다. 우선 서강 어린이 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금년에는 구청 산하 많은 어린이집 가운데 가장 우수한 어린이 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실무자들이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년소녀 가장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관내에 소년소녀 가장이 발생하면 구청은 먼저 우리교회로 보냅니다. 그러면 그동안 수 제한 없이 우리교회가 받아서 후원하고 돌보아주었습니다. 한때는 23가정까지 돌보아왔는데 지금은 조금씩 줄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 상담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주변이 상업지역입니다. 유흥밀집지역입니다. 그래서 맞벌이 부부들이 많습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 우선 어린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오면 아이들이 집에서 방치됩니다. 돌볼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하면 이 아이들이 밖으로 나돌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 아이들을 맡아서 공부시키고 부모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주는 방과 후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이런 환경에서 발생되는 알코올중독, 마약중독, 탈 선자들이 발생하는데 이들을 위해서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있는 상담실과 상담전화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수고하고 있습니다. 또 교회 주변학교를 선교대상학교로 지정했습니다. 우리교회 주변에는 연대, 홍대, 서강대, 이대, 명지대 등 5개 대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몇 개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새해에는 이들 학교를 선교지정학교로 정하고 장학금을 보내고 관심을 가져서 선교대상 학교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특별히 장학금을 대폭 늘렸습니다. 교회내 장학금도 늘리고 주변 학교에 보낼 장학금도 늘렸습니다. 우리교회 새해 예산 중에서 순수 사회봉사와 선교비로 지출되는 예산이 전체예산의 27.6%입니다. 그중에서 장학금만도 2억여 원이 지출되고 있습니다. 전체예산에서 교회가 비좁아서 공간을 늘리려고 저축되는 예산이 새해 13억원입니다. 이 수치는 전체예산의 31%입니다. 그 31%를 뺀 예산에서 사회 봉사비와 선교비를 계산하면 무려 33%입니다. 이 정도의 재정운용이면 아주 건강한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그런대로 건강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헌금하시는 헌금이 이렇게 건강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여섯 번째는 “50주년 준비”입니다. 우리교회는 55.1.2일 창립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후년이면 50주년 희년을 맞이합니다. 이제 2년 남았습니다. 50주년이면 사람나이로 보면 이제 중년입니다. 사람이 중년이면 그 사회에서 뭔가 자리를 확보하고 있어야할 나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나이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해는 “건강한 교회, 건강한 믿음”이라고 목표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희년 준비의 해“로 정했습니다. 이제 50주년이 되는 2005년에는 “미래로 비상하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우리교회는 한 가지 아주 특별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교회에 젊은이 신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20대가 25.6%입니다. 그리고 30대가 26.3%입니다. 40대는 17,7%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70%가 2-40대입니다. 이 수치는 우리교회의 재산 중 재산입니다. 전국 교회에서도 아주 특이한 현상입니다. 이제는 인재를 키우고 미래를 위해서 젊은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50주년을 전후해서 세 가지 큰 사업을 확대해 나갔으면 합니다. 하나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입니다. 사업 중에서 가장 소망적인 사업은 인재를 키우는 사업입니다. 옛날 시골의 농부들 중에서도 생각이 있는 부모는 땅을 팔아 자식들을 가르쳤습니다.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장학금을 대폭적으로 확대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을 해외로 내보내 공부시키고 길러야 합니다. 인재양성이 최고의 사업입니다. 두 번째는 길러진 젊은이들을 선교사로 많이 내보내는 일입니다. 이제는 내 보내야 합니다. 기능을 가진 평신도 사역자들을 많이 내보냈으면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교회 개척하는 일입니다. 이제는 교회개척도 건물 세 얻어서 개척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렇게 개척하면 안 됩니다. 이제는 신 개척지역에 종교부지를 얻어서 정상적인 교회로 개척이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교회는 이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자니까 오늘 현재 교회의 공간이 너무 협소해서 문제입니다. 공간확보 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우리교회는 현재 공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어떻게 할 틈이 없습니다. 예배드리고 나면 어디로 가서 은신할 처소가 없습니다. 교육공간도 좁고 앉아서 대화하고 친교할 공간은 전혀 없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마치고 갈 곳이 없습니다. 예배 마치고 엄마를 기다려야 하는데 가서 있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주변 오락실로 가서 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미래를 위해서는 아주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서 앞에 있는 500평 대지를 구입하게 된 것입니다. 그 대지는 우리 후손들 몫입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커 가는데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그곳에 아담한 교회를 지을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지향하는 철학은 호화롭고 편안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절대로 호화로우면 안 됩니다. 앞으로 교회를 지으면 호화롭게 짓는 것이 아니고 아주 실용적으로 간이식으로 지을 것입니다. 교회는 천막교회라도 좋습니다. 임시 건물이라도 좋습니다. 은신처만 되어도 좋습니다. 대신 그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젊은이들은 있어야 하고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미래가 있습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날마다 모이고 음식을 나누고 찬미하며 구제하고 예배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원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됩니다. 그런 교회를 만들어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 새해 한 해 동안 힘써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로 하여금 믿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결국을 아는 지혜/ 벧전1:5-9/ 송년주일설교/ 2011-12-28
결국을 아는 지혜 벧전1:5-9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연초에 여러분들은 많은 계획을 세우고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해오셨을 줄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연초에 시작했던 일들이 지금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요? 아마 여러분들이 일년 뒤를 생각하고 바라보며 그 결국을 예상하면서 살았다면 아마 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 한해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지 않고 되는대로 사셨다면 지금 올해를 마무리하는 여러분들에게는 많은 후회와 회한이 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지혜있는 사람은 당장 눈 앞에 있는 일만 생가하지 않고, 먼 미래를 내다 볼 줄 아는 사람이요, 그 일의 결국을 알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반대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건과 행위의 결국을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청지기 직분을 빼앗기게 된 사람이 청지기직을 그만 둔 후에 될 일을 생각하면서, 땅을 파자니 부끄럽고 얻어 먹자니 부끄럽고 해서 자기가 청지기로 있을 때에 인심이나 써 두자고 생각하여 빚진 자들을 모두 불러다가 탕감해 주는 것을 보고, 그 주인이 지혜있다고 칭찬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듯 일의 결국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을 소유한 자는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한 말씀대로 믿음은 바로 말씀을 통해 모든 일의 결국을 미리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말씀에 의지해서 모든 이르이 결국과 삶의 결국을 영감으로 깨닫고 아는 것이 믿음이므로 믿음을 가진 자는 참으로 지혜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거짓된 악한 영이므로 사람을 속여서 일의 결국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죄의 결국을 알지 못하도록 해서 범죄케 하여 멸망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마귀는 하와를 속여서 \'따 먹는 날에는 너도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이 사단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보다 더 믿고 범죄하여 세상에 불행과 멸망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요 8:44에 보며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늬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서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의 목적은 전 인류를 속여서 결국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겔 18:4에 보면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으며, 에스겔 18:20에도 보면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고 했습니다. 죽이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요, 죽이는 방법은 일의 결국에 대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사단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은 믿지 않고 이단 사설, 마귀의 거짓말을 더 믿다가 멸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든 일의 결국과 미래를 알기 원하는데, 알아야 될 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몰라도 될 것을 더 알려고 듭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알려 주지 않는 것은 기어코 알려고 하다가 그만 잘못되고 마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믿어서 마귀에게 속지 말고 미래를 바로 알고 일의 결국을 바로 알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마귀에게 속아서 파멸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 일의 결국을 알아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술의 결국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술 마시는 데 많은 매력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잠 23:31,32에 보면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 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붉은 빛의 술은 아름답게 보이나 피의 색깔입니다. 죽음으로 끝나게 됨을 경고합니다. 알콜은 독약입니다. 알콜은 중추 신경을 마비시키고, 도덕 의식과 책임감을 죽입니다. 위기 의식도 없어지고 분별력도 없어집니다. 적당히 마신다는 것도 중독되어가다 보면 위험합니다. 롯도 적당히 마시는 자였으나, 재산이 불타 버리고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고, 결혼한 딸들의 남편들이 불타 죽었을 때 만취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말하기도 부끄럽게 친딸들과 동침하여 무서운 죄를 범했습니다. 누구든지 처음부터 술주정꾼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술은 사람을 혼미케 하다가 결국 치명적으로 독사같이 물고, 살모사같이 쏩니다. 만약 아직도 술을 입에 대고 있다면 멈추어 그 치명적인 결국을 생각하십시오. 끊고 돌아서십시오. 2. 성적 범죄의 결국 잠 5:3-5에 보면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타락한 여자는 더욱 매력과 매혹을 느끼게 합니다. 음란 마귀가 잡힌 여자는 더욱 성적 매력을 풍깁니다. 더 아름다워 보이고, 더 친절해 보이고, 그 입술은 부드럽고 그 몸은 남자의 피를 끓게 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파멸입니다. 물론 자연적인 성적 본능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 7:25-27에서는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되지 말지어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며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 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타락한 여자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었고, 타락한 여자 때문에 많은 용사들이 살육되었습니다. 그런 여자의 집은 지옥으로가는 길입니다. 잠 9:17에서는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은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했습니다. 음녀의 입술을 맛보기 전에 음녀의 가슴을 안아보기 전에 그 결국이 얼마나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날 같이 날카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미국 텍사스 포트워즈에서 자살 직전에 있던 남자가 붙잡혔는데, 이 남자는 악한 여자 때문에 유산을 탕진하고 성병이 심해져서 귀여운 아들과 뽀뽀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를 받고, 마지막으로 자기 신세를 망친 그녀와 동반 자살을 하려고 권총을 준비하고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미국 어느 곳에서 15세 소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기는 엄마의 죄로 코가 비틀리고, 눈이 골았고, 입이 비틀렸습니다. 실로 이러한 성적 범죄는 철저히 회개치 않으면 기회 있을 때마다 또 짓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과 가정, 그리고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멀리하고 피해야 됩니다. 3. 불의한 재물의 결국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은 돈이 필요합니다. 돈으로 양식을 사고, 의복도 사고, 거처할 곳도 마련합니다. 또 교육도 하고 하나님의 일도 합니다. 가난한 자를 돌볼 수도 있습니다. 돈은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유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딤전 6:8-10에 보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한 재물로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탐욕이 무서운 죄를 짓게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탐욕 때문에 가혹한 이자도 받고, 술과 아편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처녀들이 몸을 팔기도 하고, 주일과 십일조도 도둑질합니다. 그러나 렘 17:11에 보면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도리라\"했습니다.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갑니다(Easy Come easy go). 그리하여 그것이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눅 12:16 이하에서 자기만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안심하는 부자에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습니다. 4. 세상 쾌락의 결국 딤전 5:6에 보면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니 죽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탕자는 세사의 쾌락에 빠져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고 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사람은 일을 하고 수고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휴식과 즐기는 일(enjoy)이 있어야 하지만, 세상 쾌락에 아주 빠져 버리면 반드시 악한 세상 속에서 죄악에 빠지고 타락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특히 물질의 여유가 있고 시간적 여유가 있고 사회적으로 존귀하게 되어도 세상 쾌락에 빠지지 않도록 자제해야 됩니다. 이상 특정한 몇 가지 죄의 결국을 살펴 보았습니다. 약 1:15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죄는 사망으로 이릅니다. 로마서 6:23에서도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죄를 짓고 있다면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거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사 55:6,7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죄의 결국이 얼마나 영원하고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를 아시고, 의로운 지혜의 눈을 떠서 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 멘-
결단해야 할 순종/ 빌2:3-11/ 송년주일설교/ 2015-12-27
결단해야 할 순종 빌2:3-11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예배에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결단하기 바랍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순종을 통해서 주십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창조 이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신 것은 순종밖에 없습니다.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순종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순종이 모든 것의 핵심입니다. 구원도 순종으로 받습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구원 받습니다. 지옥 간 사람은 불순종해서 지옥에 갑니다. 믿으라는 말을 불순종해서 지옥에 간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 (눅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고 합니다. 즉 말은 주라고 했는데 행동으로 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란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모든 행위가 순종입니다. 만약 어떤 행위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순종이 아닙니다. 성경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가령 커피를 끓여달라고 할 때 커피를 끓이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 남편을 남편으로 인정하므로 행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억지로 성질내면서 타박하면서 잔소리 하면서 하는 것은 행위는 커피를 끓이니까 순종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아닙니다. 남편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은 밝고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순종을 어둡고 부정적이도록 만듭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밝고 긍정적으로 순종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마귀는 자원해서 할 수 없도록 즐거움으로 할 수 없도록 마음을 조종합니다. 그래서 순종을 하는데 기쁨을 잃어버렸다면 타락입니다. 순종이 아니고 의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기쁨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무엇을 하는 것은 도둑질, 간음과 같이 타락한 것입니다. 헌금을 해도, 봉사를 해도, 자원하는 마음이 없고 억지로 했다면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돈이 아니고 시간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의지입니다. 즐거움으로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해라. 그런데 억지로 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이 쉽지 않습니다. 사실 순종은 내 실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내 실력으로는 순종이 즐겁지 않습니다.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예수님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순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듯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통해 모든 것을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만족이 되셨습니다. 2. 듣되 아래서 듣는 것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순종은 듣는 것입니다. (쉐마) = ‘들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인데 단순히 청각적인 것만 아니라 듣는 마음의 자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순종(ύπακοη)은 ‘아래에서 듣다’, ‘밑에서 듣다’입니다. 커피를 끓이는 일을 밑에서 하는지, 옆에서 하는지에 따라 순종인지 불순종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밑에서 들으면, 겸손하게 들으면, 기쁜 마음으로 들으면 순종입니다. 그러나 거북하게 들으면, 억지로 들으면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의 모델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 곧 타락한 천사입니다.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인 하나님 밑에 있지 않고 하나님 옆자리 심지어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했던 존재입니다.(사14:13-14) 그러므로 자기 자리를 높이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자리는 내려가야 합니다. 마음자리가 내려가지 않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윗자리는 하나님 자리였습니다. 아담의 타락도 마귀에게 배운 것입니다. 마귀가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는 말에 유혹을 받고 하나님 옆으로 가려고 했기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기에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동등하시지만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밑으로 내려가 순종하셨습니다.(빌2:6-7) 요즘은 자식을 하나 혹은 둘을 낳아서 자식을 옆에 놓고 키웁니다. 혹은 위에 놓고 키우니까 결국 불효자식 됩니다. 밑에 두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개념을 넣어주어야 합니다. 순종은 대상자를 알아보고 밑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순종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빌2:3절 말씀처럼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는 말씀처럼 서로 밑으로 내려가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 밑으로 내려갑시다. 서로 밑으로 내려갑시다. 먼저 일어납시다, 먼저 인사합시다. 밑으로 내려가는 일을 합시다. 밑에서 하는 마음으로 사역합시다. 한해를 보내며 새해를 맞이하며 순종을 결단합시다. 진정한 순종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류우열 목사(인천 복된교회)
결산 할 때 /마25:14-30
결산 할 때 /마25:14-30 2010-07-26 16:20:02 read : 338 -오늘은 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벽에 걸린 마지막장 달력을 내리면서 세월의 아쉬움을 느끼는 주간입니다. -2008년도, 내 생애 이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시간과 작별을 고하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시간이란 그냥 강물 흘러가듯이 흘러만 가버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했고, 천국을 향해 1년 더 가까이 다가가게 했고, 한정된 나의 수명을 수명이 1년이 더 줄어들게 만든 한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70-80번 마지막장 달력을 내리면 우리 인생은 끝을 맺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직전에서 우리는 70-80년 살아온 자기의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회한(悔恨)에 젖게 됩니다. /허무한 인생이었구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닷가 어촌에서 홀로 살아가는 산티아고라는 가난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일생을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인생을 살아온 늙은 노인입니다. 어느 날 노인은 낚시를 배에 싫고 매우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노력을 한 후에 드디어 청새치 한 마리가 낚시를 물었다. 자기가 탄 조각배보다 더 등치가 큰 놈이다. 노인은 꼬박 이틀 동안 배보다 큰 청새치와 사투를 벌리면서 싸웁니다. 그리고 겨우 힘이 빠진 청새치를 끌로 노를 저어 바닷가로 나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상어 떼를 만나게 됩니다. 또 상어 떼와 사투를 벌립니다. 노인이 간신히 바닷가에 도착을 하여 낚시 줄에 걸린 청새치를 모래사장으로 끌어 올립니다. 그러나 낚시에 걸려 올라온 청새치는 상어 떼에게 다 뜯어 먹인 앙상한 물고기의 뼈만 남았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노인과 바다’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지난 2008년 한해를 살면서 이 노인과 같이 험난한 인생의 고해(苦海)에서 사투를 벌리며 한 해를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2008년도 마지막 시간에 인생의 낚시 줄을 올려보니 앙상한 물고기의 뼈다귀만 남아있지는 않은지요?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천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달란트 비유’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적인 진리는 ‘천국은 결산하는 나라’ 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산 일생에 대하여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결산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남겼나?, 어떻게 살았나?, 선악 간에 심판을 받게 되고, 우리의 일생에 대하여 결산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 달란트를 맡김 -14-15절을 읽읍시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여기서 타국에 간주인은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여기서 종들은 바로 우리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달란트는 우리에게 준 재능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각각 귀한 재능-달란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의 재능... *금 1달란트=34kg, 1돈=3.75g, 약11만원, *금 1달란트=10억원, 2달란트=20억원, 5달란트=50억 -여러분 중에 아무도 나는 이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각자에게 인생을 복되게 살고,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값지고 놀라운 재능들을 선물로 주어 보내셨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여기까지 살아온 것은 그 달란트로 여기까지 살아 온 것임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 충성된 종들 -16-17절을 읽읍시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여기서 중요한 두 단어가 있습니다. ① ‘바로 가서...’-시간을 아꼈다는 뜻입니다. -벤자민 프랭크린 -Time is money-“시간은 돈이다” 고 하였습니다. -요즘 유명 변호사에게 1시간 법률상담을 받는데 30만원-100만원을 상담비로 내야 합니다. -요즘 경제원리에서 제일 중요한 개념이 시간과 인재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잘 활용해야 돈을 벌고 성공을 거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고 말씀합니다. -‘남는 게 시간뿐이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지냐?” 고 물어보면 ‘방콕’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 가운데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지(四肢) 멀쩡한 사람들이 빈둥빈둥 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노느냐고 물어보면...“할일이 없어서 논다..”고 말합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꼭 돈을 버는 일만 중요한 시간이 아닙니다. 돈을 못 벌어도 보람되게 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중요한 일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비유에서 말하는 달란트가 꼭 돈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달란트(Talant)가 재능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돈버는 일자리가 없더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재능을 사용하는 일에 시간을 소중하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은 빠른 교통수단, 전화, 인터넷 같은 편리한 정보시대에 살다가 보니까, 우리는 얼마나 시간을 세이브(save)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종이 ‘바로 가서..’ 노력했다는 것은...시간을 소중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낭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나라입니다. -여러분..! 2008년 한해를 살면서 얼마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살았습니까? -빈둥빈둥 놀면서 밥만 축내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사용한 시간에 대하여 결산하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난 1년간의 삶을 무엇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며 살았습니까? -또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많이 빼앗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괜한 일로 불러내어 내어 노닥거리고, 쓸데없는 잡담이나, 잡기를 하면서 시간을 빼앗지는 않았는지요? -약속시간을 여러 차례 어기면서 남의 소중한 시간을 망처 놓지는 않았는지요? -전화기를 붙잡고 1시간, 2시간씩 쓰잘데 없는 이야기로 통화하면서 다른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 버리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② ‘장사하여..’ -부지런히 일했다는 뜻입니다. -장사하는 일은 부지런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 문을 열고 밤 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고 장사를 해야 합니다. -늦게 문 열고, 일찍 문 닫고, 지 바쁘다고 수시로 가게문 닫아걸고 하는 사람은 결코 그 장사 일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장사는 다른 일도 그렇지만 부지런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종들은 ‘바로 가서’ ‘장사하여..’ 또 5란트, 2달란트의 이익을 남겼다고 하였습니다. 부지런히 일했다는 것입니다./부지런한 성공하고 하나님의 축복도 받습니다. *L 회장이 사업을 처음 할 때였다. 미국에 있는 한 교포가 사업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서 넥타이를 선물했다. 그런데 넥타이에는 영문 알파벳 ‘Y.C.D.N.O.Y.A’가 적혀 있었다.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이 회장은 그 뜻이 궁금해 물어 보았다. 그 뜻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You can do nothing on your armchair) 라는 의미의 약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회장은 그 말을 듣고 이것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리의 옛말에도 “사람은 엉덩이가 가벼워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뒤로 이 회장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며 30년 세월을 열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 그분은 저녁 9시 TV 뉴스를 본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일찍 자고 새벽 4시에 일찍 일어나서 일터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구어 놓은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고 칭찬 받은 종들은 모두 시간을 아끼고 부지런 하므로 성공하고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들은 10달란트, 4달란트의 돈을 결산 한 것이 아니라...자신들의 인생의 시간을, 근면한 삶을 하나님께 결산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2008년도 이 마지막 시간에 여러분의 한 해에 대하여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런 것들을 찾아 결산하실 것입니다. ☐ 게으른 자의 벌 -27-30절을 읽읍시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1달란트 받았던 종에 대한 주인의 책망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단어가 26절의 ’악하고 게으른..‘ 이라는 말입니다. -1달란트 받아서 땅에 파묻은 것은 아무리 변명을 하여도 그것은 악한 행동이고, 게으른 모습입니다. -1달란트가 적어서가 아닙니다. 10억의 자산입니다.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말씀처럼 이자만 계산해도 큰 이익을 남길 수 있게 됩니다. -순전히 주인에 대한 불신과 게으름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게으름에 대하여 주시는 교훈이 많습니다. -잠언 26:13...‘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잠언 6:6...‘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언 15:19...‘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잠언 26:15...‘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잠언 10:26...‘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잠언 24:33-34...‘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있자 하니, 네 궁핍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 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개미와 베짱이 3탄 <제1탄> 개미는 열심히 일하고 베짱이는 놀다가 겨울이 되었습니다. 베짱이는 개미에게 얻어먹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입니다. <제2탄> 개미는 열심히 일하다가 허리에 디스크가 걸려 눕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벌어놓은 재산을 다 탕진하여 거지가 되었습니다. 베짱이는 노래만 하다가 너무 노래를 잘 하게 되어 음반을 냈습니다.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치관의 혼돈 시대를 말합니다. <제3탄> 개미는 목사님을 모셔다 안수기도를 받고 다 나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었습니다. 베짱이는 그 많은 돈으로 술, 마약을 하다가 몸이 망가져 죽었습니다. 다시 정상적인 가치관으로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속담에 "일과 노동을 천시하고 외면하면 권태, 죄악, 결핍을 물리치기 어렵다"고 했다. *탈무드에도 "자식에게 노동을 가르치지 않는 아버지는 자식에게 도둑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는 말이 있다. *이탈리아 출생으로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를 지냈던 안셀무스는 "태만은 살아있는 자의 무덤이다." 라고 까지 표현했다. 태만하고 게으른 자는 살아 있어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교훈이다.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인생이 슬픈 사람이 있습니까? 꿀벌처럼 남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그리하면 절대로 슬퍼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시인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시간을 짧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활동이다. 내 시간을 지루하도록 길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태다." 옳은 말입니다. *독일의 철혈 수상이라고 말하는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청년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오직 세 가지 말뿐입니다. 일해라. 좀더 일해라. 끝까지 일해라" -작고 소소한 것이라고 우습게보아서는 안 됩니다. 작은 것일수록 더 소중하게 여기고 마음을 주고 충 성해야 합니다. *1947년에 시카고 근교의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천체물리학자인 첸드리스카 박사입니다. 그가 어느 날에 시카고 대학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오셔서 최첨단 고급물리학 Advanced Physic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지요? 과학자가 그러겠다고 승낙을 했어요. 그런데 몇 주 후에 다시 시카고 대학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사님 아무래도 강의를 취소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왜요. 제가 준비 했는데요” “예, 클래스가 너무 작아서요. 두 명밖에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첸드리스카 박사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클래스가 작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 두 학생, 등록한 학생의 information만 보해 주시지요. 그래서 대학에서 알려줬어요. 첸드리스카 박사는 그 추운 겨울에 강의를 하기 시작합니다. 시카고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를 일주일에 이틀 동안 한 번도 빠짐이 없이 두 학생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십 년이 흘러갔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 라는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충도 리라 박사'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입니다. 그들은 노벨상을 수상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상을 받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비록 두 학생이라고 해도 요령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 때문에 이런 아름다운 열매가 맺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금년을 보내는 이 마지막 주간에 우리들의 지난 한 해의 삶에 대하여 결산하자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살아온 시간에 대하여 결산하자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삶에 대하여 결산 하자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결산 할 때 인생 /눅19:11-27
결산 할 때 인생 /눅19:11-27 2010-07-29 16:43:59 read : 516 오늘은 2009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1년 52주일 중에서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를 다 보내면서 마음이 어떠신지요? -1년을 보람 있게 참 잘 살았다고 생각되십니까? -너무 후회스럽게 살았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어느 쪽입니까? -내 인생 내가 사는데 왠 잔소리냐?...어떻게 살았던 그게 무슨 대수냐? 그냥 사는 대로 살다가 죽으면 되는 것이지!...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안계신가요? -성경은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존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일생동안 살 채비를 해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일생동안 먹을 양식 가져 왔습니까? -일생동안 입을 의복 준비해 왔습니까? -일생동안 마실 물 준비 해 왔습니까? -일생동안 하나님이 지으신 지구를 사용하고, 그 안에 있는 자연을 사용할 사용료를 준비해 왔습니까? -발가벗고 알몸으로 왔습니다. -빈손 들고 왔습니다. -일생동안 하나님의 것으로 먹고, 마시고, 입고, 하나님의 것 가지고 쓰면서 여기까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인생은 은혜로 사는 존재입니다.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지난 2009년 한 해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은혜’는 대가(對價)나 보상(報償)을 바라지 않는 공짜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은혜’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감사’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좋게 만드는 일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사명(使命)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도 있지만 사명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해야 되는 사명이 있습니다. -농장주인이 자기 집에다 머슴을 잠재우고, 먹이고, 마시우고, 옷 입히고...하는 것은 주인을 위하여 일을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것을 먹고, 입고, 마시고, 하나님의 지으신 자연을 값없이 사용한다면...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을 이런 각도에서 이해해야 그것이 성서적이고 바른 인생관이 됩니다. -이 성서적인 관점에서 벗어난 인생은 허무한 인생, 무가치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요일 2;16-17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어떤 부자가 숨을 거두자,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묘 비석(碑石)에 글을 쓰려고 한 시인을 찾아갔습니다. 그 시인은 아들에게 아버지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물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조용히 편안하게 사시다가 편안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시인은 그에게 사흘 후에 오라고 했습니다. 사흘 후에 갔더니...그 때 내어준 비명(碑銘)은 너무 간단했다. 그것은 “태어나다, 먹다, 죽다”였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니 그 비명(碑銘)이 틀리지는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도 돈 있다고 아무 일하지 않고 평안히 살아서는 안 됩니다. /2009년 1년을 그렇게 산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요를 주신 것은 아무 일하지 않고 놀면서 평안히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일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받은바 은혜를 보답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많은 돈과 물질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 생각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놀면서 살았다면...그 사람은 사명(使命)에 대하여 직무유기(職務遺棄)를 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젊어서 일 많이 했는데...늙어서는 놀면서 평안히 살아야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젊어서는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수입을 얻고 소득을 위하여 일했지만...이제 늙어서는 하나님이 주신 그 소득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 사용하면서 일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므나 비유’는 인생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므나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비유’와 비슷하지만 그 강조하는 것이 다릅니다. -달란트 비유는 ‘재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므나 비유는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 하신 교훈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므나 비유’ 를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사시는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 므나는 인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12-13절을 읽자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종 10명을 불러 각각 1 므나 씩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똑 같은 한 므나의 생(生)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두 번 인생의 기회를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오직 1회의 인생이 있을 뿐입니다. -불교에서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輪回思想)은 매우 잘 못된 것입니다. 전생의 업보에 따라 다음에는 더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또 짐승이나 다른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것이 윤회설(輪回說)입니다. -윤회설은 역사를-시간을 원(圓)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사고에서 만들어진 사상입니다. -역사를-시간을 돌고 도는 것으로 원(圓)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역사관이 아닙니다. -성경은 역사를-시간을 선(線)으로 이해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 기독교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신 것은 바로 역사가 시작과 종말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에서 단 1회적인 생을 살다가 가는 존재입니다. -귀인이 열종 각각에게 1 므나씩을 나누어 준 것처럼-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각각 1 므나의 인생을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단 한번뿐인 인생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한 번 뿐인 목숨을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간의 생명은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2008년도에 우리 한국 사람들이 12,047명이 자살로 했다고 합니다. 하루평균 33명이 목을 매고, 뛰어내리고,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이 자살 율 1위. -기독교인은 자살을 하면 안 됩니다. -자살은 타인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 무서운 살인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우리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매우 소중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자신을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길 줄 알게 됩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 돌아와서는 10종들을 불러 나눠준 므나에 대하여 결산을 하자고 합니다. -어떤 종은 1 므나로 10 므나를 남겼다고 합니다. -어떤 종은 1 므나로 5 므나를 남겼다고 합니다. -다른 종들로 각기 장사하여 이익을 남겨...왕이 되어 돌아오신 주인과 더불어 결산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 므나를 받은 종은 그것을 수건에 싸서 땅에 감추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내어 놓았습니다. -10 므나, 5 므나의 이익을 남긴 종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10 고을 차지하라..”고 하셨습니다. -5 므나를 남겨온 종에게도 같은 칭찬을 하시면서 5 고을을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1 므나를 땅에 묻었다고 1 므나 그냥 그대로 가지고 온 종에게는...“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시면서 그 1 므나를 빼앗아 10 므나 남긴 자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므나 비유는 이렇습니다. -인생을 본전치기로 살아서는 안 된 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자기인생이나 살고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한 인생도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인생도 제대로 못살아 남의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10 몫을 사는 사람도 있고...다른 사람의 5 몫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도 성실하게 살고...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많은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므나 비유의 교훈입니다. -2009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성도들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주님은 결산하자고 하십니다. -정말 그리스도인다운 인생을 살았는지 결산해 보자고 하십니다. -자신에게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지 결산하자고 하십니다. -그리고 타인을 위해서는 몇 몫을 살았는지 결산하자고 하십니다. ☐ 므나는 시간을 의미한다. -23절을 읽읍시다.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은행에 돈을 맡기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자가 붙습니다. 이자수입도 만만찮은 것입니다. -왕은 종에게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받게 하지 아니하고 수건에 싸서 땅에 파묻었느냐고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22절을 보면 “악한 종‘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이 악합니까? -시간을 선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건국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벤자민 프랭클린’은...“시간은 돈이다..”고 했습니다. -경제논리에서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시간은 부(富)를 창출하고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옛날에는 시간을 10년 단위로 말했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말하면 맞아 죽습니다. -요즘은 시간을 1년 단위, 1개월 단위, 1주일 단위로 말해도 상대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현대는 하루가 옛날 10년을 막 먹는 시간입니다. -현대인의 1시간이 옛날 사람의 1년입니다. -요즘은 초단위로 시간을 쓰는 때입니다. -요즘은 전자시간시대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손목시계를 잘 안찹니다. -초단위로 일을 처리해야 되는데 손목시계는 불편합니다. -e-mail 은 초단위로 편지와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미국에, 지구반대편이라도 단 1~2초이면 편지가 전달되어 집니다. -그러니 모든 상거래, 계약관계, 모든 중요한 일들이 1초단위로 이루어집니다. *동부시찰체육대회를 할 때에 뚝섬체육공원운동장 계약을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1초만 늦어도 운동장을 빌릴 수가 없다. -단 1초의 시간 차이에도 엄청난 결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아이디어 상품이 시간에 밀려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1초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1초가 아닙니다. 사람은 1초에 몇 발짝밖에 못 뛰지만 빛은 1초에 지구둘레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돕니다. -같은 시간이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시간의 질이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는 2009년에도 한 해의 므나를 똑같이 분배 받았습니다. -1년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분배된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하루의 시간 24시간도 똑같이 분배 되었습니다. 못난 사람은 23시간, 잘 난 사람에게는 25시간을 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시간의 므나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그해 마지막에 결산의 내용이 달라지게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마지막 주일에 2009년을 결산하자고 하십니다. -2009년 한 해 동안 무엇을 남겼습니까? -자신을 위하여 얼마를 남겼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얼마를 남겼습니까?
결산의 날/ 마25:14-30/ 송년주일설교/ 2007-12-30
결산의 날 마25:14-30 기독교의 특징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만사에 때와 기한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열차가 출발점이 있는가 하면 종착역이 있듯이 인생의 총결산을 해야 하는 그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돌고 도는 . .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대개 1월이 되면 “이상주의자”가 되고, 6월쯤 되면 “현실주의자”가 되고, 12월에는 “허무주의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1월에는 갖가지의 설계를 세웁니다. 새로운 비젼을 갖습니다. 그러나 한달 두 달 지나고 6개월이 지나면 세웠던 계획들은 마음대로 이루워지지 않고, 그만 현실 속에 푹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년말이 되면 자신이 한 해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하고 생각해 볼 때 참으로 허무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이상적인 자기의 모든 계획이 무너져 버리고, 내 인생이 고작 이것밖에 안되는가? 하고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계속하다 보면 매번 그렇게 발전 없이 반복하는 그런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2005년의 종점에 서 있습니다. 한 해를 정신없이 살아 온 것 같은데 실상 무엇을 얻었는가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은 한 해 같습니다. 연말이 되면 모든 회사감사, 정부관계 기관에서 국정감사가 있습니다. 구멍가게를 운영할지라도 그날 판매에 따라서 하루의 결산을 합니다. 본전을 빼고 순수 수익을 꼼꼼히 챙겨봅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어떻게 사업을 할까하고 새로운 계획을 새워봅니다. 오늘 당회가 있습니다. 당회는 결산의 의미와 새 일꾼을 세우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당회에서는 책임을 맡은 자들이 보고서를 내 놓게 됩니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한번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결산하고 감사받는 날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 . .누구나 예외 없이 한번은 인생을 결산하는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아무도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결산의 때를 기억하고 예비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유명한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느 날 주인이 외국에 다녀올 일이 생겼습니다. 그냥 가면 종들이 빈둥빈둥 시간을 보낼 것 같아서 세 종에게 장사밑천을 주고 떠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다섯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이 돈을 가지고 곧바로 장사를 합니다. 그리고는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하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아무것도 벌지 못했습니다. 후일에 돌아온 주인은 세 종을 불러 모으고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는 상을 내리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한 달란트마저 뺏고 밖으로 쫓아버립니다. 쓸모없는 종이라고 . . . .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얼마를 남겼느냐?는 경제적 이익을 찾는 것으로 이해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사업적 결산을 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평가는 일군으로서의 자세, 인격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 으로만 평가를 하고 결산을 한다. 1. 내게도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평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없었기 때문에 주의 일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 소중한 달란트를 다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받은 달란트가 너무 작다고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찮게 보이는 재능이라도 잘 활용하면 보석과 같이 빛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묻지 마십시오. 소중하게 생각하십시오. 활용하십시오. 눅12:48 “무릇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 받았느냐 두 달란트 받았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맡은 일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2. 착하고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 얼마나 착한가? 하는 것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삶은 착해야 됩니다. 악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착하다는 말은 믿기를 잘 한다는 말입니다. 또 말을 잘 듣는 다는 말입니다. 순종을 잘한다는 말입니다. 왜 순종이 중요합니까? 교회는 인간의 힘으로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순종하는 곳에 기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순종할 때 주님의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악하다는 말은 불신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믿지를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을 안듣는다는 말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칭찬듣고 복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이 인신매매로 팔아 넘겼습니다. 애굽으로 팔려가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형들은 자기들에게 원수 갚을까 벌벌 떱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이유가 형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이곳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요셉은 이렇게 착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착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욥을 보십시오. 그는 고된 고난을 받았지만 착한 사람입니다. 고난 중에도 “나의 가는 길을 주께서 아시나니 나를 이와같이 단련한 후에는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착하기 때문입니다. 그 착함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이 죽이기 위해 추적할 때에 사울을 죽이고도 남을 만한 상황이 왔음에도 죽이지 않습니다. 용서합니다. 얼마나 착합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착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는 이렇게 착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착한 사람은 충성된 사람입니다. 변개치 않습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3. 어떤 자세로 결산의 날을 기다릴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운 시대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잠시 잠간후면 오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우리 주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바로 첫 번째 종류의 종들과 같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심정으로 주님의 결산의 날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럴려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들을 열심히 주를 위해 일함으로 갑절로 남겨야 할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달란트들을 활용함으로 갑절로 남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주님의 일꾼에는 4종류의 일꾼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악하면서 게으른 종. 이런 사람이 되선 안됩니다. 이런 사람은 착함도 없으면서 열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 착하면서 게으른 종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을 도덕과 윤리정도로 아는 사람입니다. 셋째, 악하면서 충성된 종.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나 뜻은 안중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에 충실할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충성이 아닙니다. 네째, 착하면서 충성된 종.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인의 뜻을 압니다. 주인을 신뢰합니다. 순종합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있습니다. 두달란트 받은자, 다섯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게 유익을 남겨주었습니다. 22절에 “두 달란트를 더 벌었나이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것을 주인의 소유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주인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을 위해서 충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주인을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구원의 감격 속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함으로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께 봉사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들이 나타나길 축원합니다. 그러나 한달란트 맏은 자는 ‘왜 내가 뼈빠지게 일해서 주인 좋은 일 해 주느냐?’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의 호된 책망을 받고서도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변명했습니다. “주여, 주께서는 엄격한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것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므로 두려워서 가서 땅 속에 당신의 달란트를 숨겨 놓았나이다. 보소서, 주인님의 돈을 가지소서”(25:24-25). 조금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었습니다. 모든 원인의 탓을 주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엄격하신 분이라서’ ‘두려워서’ 4. 성공자와 실패자의 사이에는 분명한 차잇점이 있습니다. 한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하나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내가 가진 달란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잘못한 것은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가볍게 생각하고 땅속에 묻어두고 쓰지 아니한 것입니다. 내게 주신 직분이 하찮은 것입니까? 개나 소나 다 받는 것들입니까? 참으로 충성된 사람은 작은 일에도 충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무슨 직분을 맡았던지 간에, 크든지 작든지 관계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실 것이며 더 큰 직분도 맡겨 주실 것입니다. 기회를 붙잡는 일에 있어서도 차이가 납니다.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자기에게 달란트를 맡겨주실 때에 그것을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가서 장사를 하고 많은 이익을 남긴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비젼과 열정,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털도 안뜯고 먹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 핑계나 대고 그래서 일할 맛이 안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못난 사람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법칙에는 자신이 열심히 일하지 않고 남의 덕만 보고 살려는 적당주의가 통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심은 대로 거두는 진리가 적용되는 곳입니다. 자신의 행위대로 검증을 받습니다. 내가 몇 달란트를 받았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과 도전을 해서 더 많은 이익을 남겨 주님 앞에 드리느냐? 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도전의식입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자 하는 도전의식이 필요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언제나 부정적인 사고를 가졌습니다. 나비효과라는 것을 아십니까? 나비의 날개의 바람으로 시작하여 지구반대편에서는 태풍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1961년 로렌츠라는 미국의 기상학자가 기상예측모델을 만들었습니다. 뉴욕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면 다음달 쯤 서울에서는 태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기상학적 연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나비효과의 작은 습관이 후대에는 엄청난 부와 명예, 혹은 반대로 엄청난 폐해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점차 차이가 나면서 사이가 크게 벌어집니다. 그것은 자기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물림이 된다는 것에 파급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에서 방영되었던 스누피라는 만화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남편이 매사에 부정적인 자기 부인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작가였던 부인은 어떤 주제로 글을 쓰든지 항상 글의 첫머리에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어둡고도 우울한 밤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남편이 하루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여보, 좋은 글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써보지 그래?” “그럼 어떻게 써야 하는데?” “음, ‘옛날 옛적에’라는 말로 시작해 보면 어떨까?” “알았어.” 부인은 남편의 조언을 좋게 받아들여서 큰 마음을 먹고 첫 문장을 다시 썼습니다. “옛날 옛적에 어둡고도 우울한 밤이었습니다.” 그는 매사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연말에 다시 한번 우리 모두 달란트의 사명들을 점검하고 잘 감당하여 갑절로 남길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도록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산의 날까지 의롭게 살자/ 딤후4:3-8/ 송년주일설교/ 2007-12-30
결산의 날까지 의롭게 살자 딤후4:3-8 모든 만물이 결산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언제나 인생의 때를 바로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림은 그리다가 잘못 그렸으면 다시 그릴수 있고 길은 가다가 잘 못 갔으면 돌이켜 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지나가 버리면 다시 지울수도 돌이 킬 수도 없는 단 한번뿐인 인생이기에 잘못 살면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앞에서 인생을 결산할 날이 반 드시 올것입니다. 그날의 결산을 위해 후회없는 결산보고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 은 인생의 결산이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때를 바로 알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정하신 기약이 있음을 알고 살았습니다. 인생의 시작도 하나님으로부터이며 마지막도 하나님의 정하심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시작과 끝이 인간의 마음대로 연기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 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는 일이기 때문 입니다. 농부는 계절을 바꾸거나 고칠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겨울이 싫다고 가을이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를 알고 때를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둘째로 그는 선한 싸움에서의 승리를 선포했습니다. 모든 영광과 관심과 상급은 이긴자의 것입니다. 바울은 싸움에서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선한싸 움]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이요, 신령한 싸움을 의미합니다. 바로 바울은 이런 신앙의 싸움에서 승리자였습니다. 셋째로 그는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 나의 달려갈 길, 이 길을 바울은 마쳤다고 했습니다. 바로 우리 신앙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이말은 이땅에 하나님이 주신 모든 책임 또는 사명을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로서 할 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책임울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출발점도 중요하고 그 코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 한 것은 마지막 결과입니다. 한 사람의 경주자로서 자기에게 주어졌던 이 땅 에 사명을 유감없이 완수했다는 이것이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입니 다. 참으 로 바울은 최선을 다해 인생의 길을 바로 달려왔기에 후회가 없었습니다. 끝으로 그는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고 했습니다. 신앙에서 믿음을 지키는 일은 경기규칙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경기는 언제나 정당한 규칙대로 해야지, 아무리 잘했어도 경기자가 법대로 경기하 지 아니하면 무효가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믿음을 지키지 않고 신앙의 법도를 벗어나면 축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나는 끝 까지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믿음을 간직했다 는 말이요 믿음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또한 믿음을 지키되 끝까지 지켰 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일. 이 길을 통해서만 성공과 승리가 있음을 바울은 고백 하고 있다. 무엇보다 진리가 혼탁해져가는 이시대에 더욱 믿음을 생명같이 지키기를 힘써야 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대 못위를 맨발로 걸어갔고 순교의 피를 흘려가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서 울 영안교회> ◇ [축복의 코스]를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 오늘의 기도 ◀ 하나님 아버지! 한해를 거의 달려온 이 시간 잘못 살았노라고 뉘우치는 일이 많았습니 다. 선하게 살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보다 의롭게 살 수 있는 기회도주셨 지만 주께서 주신 축복의 코스를 이탈하고 곁길을 갈때가 너무 많았습니 다. 용서하소서! 언젠가는 떠날 기약이 있음을 깨닫고 바울처럼 달려 갈길을 마치고 믿음 을 지켰으나 내 앞에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는 귀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앞날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결산하는 인생/ 마25:14-30/ 송년주일설교/ 2006-12-27
결산하는 인생 마25:14-30 오늘은 2006년 마지막 날, 마지막 주일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세월이 느리게 간다고 말하지 않고 빨리 간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 속에는 아쉬움이 있다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세월만 다 갔다.\' 그런 아쉬움 때문에 그런 말들을 합니다. 얼마 전에는 결혼 주례를 했는데 그 신랑의 아버지도 제가 주례를 했었습니다. 저는 신랑에게 말했습니다. \"네 아들, 딸도 또 내가 주례할지 모르니 빨리 아기 낳아라.\" 제가 21살 때 목회를 시작했는데 목사님이 안 계신 교회에 제가 담임 교역자로 일하게 되었을 때 다른 흠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항상 너무 어리다는 말을 하고, 또 공중 기도를 하면 항상 \"오늘도 어린 종을 단 위에 세우셨사오니\"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이제 앞으로 제가 들을 소리는 뻔합니다. \"오늘도 노종을 단 위에 세우셨사오니\" 그 소리는 더 듣기 싫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를 안 시킵니다. 원로 목사님께서 제 아들 결혼 주례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경직 목사님의 후임자가 되었을 때 한경직 목사님이 내 아들의 주례를 하셨는데 오늘은 내가 내 후임자 이필재 목사의 아들을 주례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빨리 갔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설교 중 비교적 긴 문장을 기록한 비중이 큰 오늘 말씀의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몇 가지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라는 금덩어리를 주었다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달란트라는 것은 화폐 단위로서 한 달란트만 하더라도 그 자본은 그 사회에서 넉넉한 자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부흥회를 하셨고 사람들이 1만 명이 모여서 남자만 5천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너무 오래 부흥회를 하셔서 해가 질 때까지 설교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좀 짜증이 났습니다. 배도 고프고 갈 길도 먼데 설교만 계속하시니까 \"이제 그만 돌려보내소서. 해가 저물어 가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먹을 것을 좀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럼 우리는 200데나리온이 2만 명의 한 끼 식사분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한 끼에 5천 원씩만 계산을 하더라도 200데나리온은 5천만 원이 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는 신학자들이 보통 6천 데나리온이라고 계산을 하니까 넉넉한 자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넉넉한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돈으로만 환산을 지 않더라도, 시간! 시간은 곧 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너에게 70~100년의 시간을 넉넉히 주었다.\" 건강! 활동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혜! 문명과 문화의 모든 기업 성취가 다 생각에서 나오잖아요?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성공합니다. 물질! \"세계 모든 물질을 다 너희에게 주었다. 넉넉히 주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인간 창조의 순서를 보면 천지 창조가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넉넉히, 충분히 살 수 있는 행복의 기초를 완벽하게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인간을 만드셔서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노라. 넉넉하다.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이 괜히 약삭빠른 생각을 해서 \'땅덩어리는 제한되어 있고 사람이 계속 많아지면 나중에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그래서 전쟁하고 산아제한하고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원고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믿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금보다 10배 인구가 많아져도 넉넉히, 더 잘 먹고 살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셨습니다. 다만 인간이 관리를 잘 못해서 재앙을 불러올 뿐이지 \'자원고갈\'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인구가 많아지고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더 잘 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관리를 더 잘 하라는 뜻이 오늘 성경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창조물에 비해서 최고의 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이미 주어졌다.\" 그게 인간이 받은 축복입니다. 다른 것들은 에덴동산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향상하고 발전하는 창조적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 인간에게는 삶의 자율권이라는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인은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고 나서 멀리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이 말은 주인이 주어진 권한에 대해서 참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자율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에게는 각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직업 선택!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 선택! 내 마음입니다. 생활의 근거지 선택! 이민을 가도 좋고 와도 좋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주님은 참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율권 축복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자율권 축복은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심한 책망과 저주 선언이 주어졌습니다. 이유는 주인이 준 자율권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 진리의 특수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종교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안 해도 그만, 해도 그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인들에게 좀 극성스럽다는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는데,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진리와 하나님의 축복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의무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가다가 우리 교육관에 현수막이 붙어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시뻘겋고 퍼런 글씨로 눈에 잘 띄게 색깔 조화를 해서 큰 글씨로 눈에 잘 띄도록 \"당신은 오늘 밤이라도 죽으면 천국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말부터가 기분을 침울하지 않습니까? 멀쩡한 사람에게 오늘 밤 죽는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질문으로 여기며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여기 분당선 지하철 타고 왔다 갔다 할 때 가끔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전도하시는 나이가 70은 되신 듯 한 노인으로, 그분은 그 지하철 안에서 전도를 하시는데 사람들에게도 환영을 못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나도 지하철 타고 서울을 가는데 그분이 와서 막 전도를 합니다. 옆에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이구~ 재수 없네! 저거 또 만났네!\" 그러십니다. 그런데 이 전도자는 특징이 있습니다. 반말을 쓰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란 말이야, 어? 알았지? 안 믿으면 지옥 가! 불교 믿는 거 다 쓸데없어! 그런 거 하지 마! 예수 믿고 천당 가란 말이야, 알았어? 내 잘 알아들어야 돼! 어?\" 그러면서 막 책망하듯 하고 \"난 또 딴 데 간다고!\" 그러면서 떠나가시더라고요. 방법은 좀 세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것을 한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잘 한다고 누가 칭찬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십니다. 핀잔과 꾸중을 받으면서도 말입니다. 그 분 마음에는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의 자율권 행사로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그걸 왜 하셨습니까? 우리 크리스천의 성공 개념! 주신 것만큼 일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온 세계가 TV로 반드시 방영해 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해마다 하는 것으로 저는 미국에서 10번도 더 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항상 합니다. 지난 24일 날 했지요? 보신 분들 계실 것입니다. 세계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는 거의 다 합니다. 반드시 23일이나 24일 저녁에 해줍니다. 바로 스크루지 영감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영화가 세계 명작 영화로 선정되었기 때문에 해마다 계속 보여줍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받은 것은 많은데 절대로 주지 않는 대표적 인물을 조명한 이야기 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어떤 계기와 영적 느낌으로 자기 모습의 미래를 보게 된 후에 변화되어 영국에서 손꼽히는 자선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 하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달란트를 사용해서 주인에게 기쁨을 결산하시도록 하는 노력을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충성보다도 더 중요한 말이 충성 앞에 있는 말입니다. \"착하고\"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충성한다는 이름 아래 불필요한 충성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착하게 해야 됩니다. 초대 교회 최초로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 집사 선택할 때 선택 기준이 세 가지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어떤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공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 듣는 사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충성한다고 혼자 떠드는데 저 사람 때문에 문제야!\"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착한 기초에서 해야 합니다. 깡패같이 한다든지 사기꾼 같이 하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때가 있고 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때에는 쓰임을 받는데 필요한 힘을 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여준 서구 사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똑같습니다. 사회가, 교회가 먼저 풍성해 집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을 하고 선교를 많이 하면 그 일을 계속 하라고 하나님이 그 사회와 그 국가, 민족을 튼튼하게 해주셨습니다. 유럽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그룹을 청교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이민으로 미국이 이루어졌습니다. 1774년이 독립이라면 역사가 230년 밖에 안 되었는데 오늘의 미국은 합중국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 땅에 교회를 먼저 번영시켰습니다. 그래서 청교도의 추수감사절 예배가 세계 명절이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일을 계속하라고 그 사회를 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게 서구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를 생각해 보면 역사가 짧습니다. 개신교회는 120년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계 교회 역사에 유래 없는 성장을 했습니다. 아울러 이렇게 교회가 성장하고 세계 선교를 하니까 나라도, 국민도 점점 더 강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주고 계십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세계 평화의 가장 중요한 자리인 유엔의 사무총장이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계산을 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세계 평화의 가장 중심의 자리에 섰지 않습니까? 미국 사람들에게 대통령보다도 훨씬 더 인기 있게 취급하는 사람이 누구군가 하면, 미식축구 선수의 MVP 상을 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미국 사회에서 일 년 중에 최고로 인기 있는 사람인데, 한국 여인의 아들 하인즈 워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시아 수영에서 최우수 MVP가 우리 박태환입니다. 한국 사람이 근처에도 못 가던 피겨스케이팅 부분에서 김연아가 우승하였습니다. 옛날에는 꿈도 못 꾸던 자리입니다. 세계 수준의 인물들이 앞으로 계속 나올 테니 두고 보십시오. 미국에서 가장 관심인 한국의 소녀들의 미국 골프계 장악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도 제가 아쉬운 것은 황우석교수입니다. 그분만 잘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건지…. 미래학자 사세휘가 \"대한민국 2025년이면 10대 강국이 된다.\" 허만칸은 \"아니다. 2010년이다.\" 엘빈토플러 박사는 \"벌써 된 것이다. 한국은 10대 강국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가 먼저 번성하게 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모든 것에 힘을 주신 것이 서구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지금 한국에 그런 것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금년 일 년 동안 갈보리교회가 목표한 세계 선교사 파송 건은 목표를 넘어섰습니다. 오늘 예배 마치고 나가시다가 책 한 권을 받으시게 될 겁니다. \"2006 갈보리 미션\" 해마다 12월 달에 나옵니다. 일 년 동안 했던 사역의 현장사진들이 사진첩으로 아주 보기 좋게 나와 있으니까 이 책을 하나씩 가져가셔서 보세요. 그리고 \'나는 이 선교에 어떻게 일 년 동안 동참했는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많은 선교사 가운데 기도의 목표로 내가 한 명은 책임지자!\' 그런 식으로 해보세요. 이제 2006년부터 파송했으니까 해마다 이 책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선교지 교회 건축은 미얀마에 하나, 필리핀에 하나, 말레이시아에 둘이 완성되었고, 지금 계속 추진 중에 있는 교회 건축은 도미니카에 하나, 말레이시아에 둘, 아프리카에 다섯 곳입니다. 내년 2007년도에 완성이 될 것입니다. 각 봉사회와 선교회는 일 년 내내 교도소, 복지원 등을 찾아서 봉사해 왔고, 착한 사마리아인주일을 열네 번 지켜서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하였습니다. 가끔 TV에서 어느 단체에서 사회 봉사한 것, 장애인들에게 가서 목욕시켜주고, 밥 먹여주고 이런 일을 했다고 칭찬하는 프로그램이 나옵니다. 지난주에도 나왔습니다. 그런 일을 우리 갈보리교회 선교회는 일 년 내내, 10년 내내 항상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TV에 한 번도 안 나옵니다. 우리는 숨어서, 남모르게, 그러나 누구보다도 많이, 가장 그늘진 곳에서 일 년 내내 합니다. 경비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아십니까? 금년에도 300가정이 갈보리교회를 찾아와 등록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선교에 동참하신 교우님들, 끊임없이 봉사해 오신 사역자들, 청지기 모두 감사를 전합니다. 어린이 기독교 교육을 목적으로 어린이집을 개원했는데 두 주일 전에 분당 구청에 담당 직원과 우리 관계자들이 함께 만나서 마지막 도장 찍는 자리에서 담당직원들은 갈보리교회 어린이집이 성남시에 있는 모든 어린이집과 유치원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된 다섯 곳 중에 하나라고 하시며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그것보다도 우리는 교사를 완벽하게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교사를 100%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세계 문화권에 절대 떨어지지 않는 어린이집을 어려서부터 운영함으로써 이곳을 거쳐나간 어린이들이 어릴 때의 기억이 평생 신앙적으로, 또는 세계 사역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게 교육시키려고 모든 준비를 다 끝냈습니다. 우리는 청년신앙공동체와 교육부 신앙교육에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이며 노년층이 소외되지 않도록 \"늘푸른집\" 오픈을 열심히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열매는 몇 종류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맨 앞에 나가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 뒤에서 계속 뿌릴 씨를 보내주는 사람, 그리고 맨 나중에 열매를 수확하는 사람입니다. 씨를 뿌리면 언젠가는 반드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조직을 실천신학에서는 \"V form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 \"V formation\"의 원리는 어느 공동체나 다 똑같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예를 들 수도 있고, 국가, 사회, 작게는 여선교회, 남선교회 등 조그만 공동체도 모두 \"V formation\"에 해당됩니다. \"V formation\"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가을철에 간혹 눈에 띄는 아름다운 광경이 있습니다. 가을 하늘에 기러기들이 멀리 하늘을 날아갑니다. 그런데 날아갈 때는 반드시 \"V\"자로 줄을 지어 날아갑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V\"자로 가는 이유는 과학적으로 그렇게 날아가야 장거리를 무난히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일 앞에 가는 기러기가 제일 힘듭니다. 뒤쪽으로 갈수록 힘이 점점 적게 들어서 맨 앞에 있는 기러기와 맨 뒤에 있는 기러기는 71%의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가장 강한 기러기를 앞에 세우고 가장 약한 기러기를 맨 뒤에 세워서 줄을 지어 갑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하나가 훼방을 놔서 줄을 서지 않고 자기 맘대로 열을 이탈하여 왔다 갔다 하면서 진형을 흐트러뜨리고 다른 기러기를 툭툭 치면 전체가 다 못갑니다. 일단 그들은 모두 땅에 내립니다. 그리고 그 훼방꾼 기러기 하나를 집중적 공격을 해서 날지 못하도록 만들고 다시 날아갑니다. 이처럼 훼방꾼이 있단 말입니다. 앞서가는 교회는 힘듭니다. 이 기러기들이 날아가면서 소리를 냅니다. \"웩! 웩!\"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앞에 가는 기러기보고 조금 더 빨리 가라고 소리 내는 것입니다. 앞서 가는 사람은 힘듭니다. 앞서 가는 교회 힘듭니다. 그러나 아름답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고 헌금하며 열심히 합니다. 가을 하늘을 나는 기러기 떼를 보면서 내가 복음의 열매를 위해 어떻게 동참하여 지금 저 장거리를 향해서 날아가고 있는가? 뿌리고 있는 자는 언젠가 기쁨의 단을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 일 년 동안 모든 나쁜 추억들은 다 지워버리시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시면서 새해가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일 년 동안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나름대로 열심히 다 마치고 오늘 즐거운 결산 할 수 있게 된 것을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수고한 모든 청지기들에게 복을 주시고 새해가 2006년도 보다 더 큰 희망의 빛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마다 건강 지켜주시고 지혜를 지켜주시며 식탁이 풍요롭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관심 있게 사랑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파송한 모든 선교사들의 현지 사역을 주님이 지켜주시옵소서. 내년에는 더 큰 일을 저희들에게 맡겨주시고 실천할 수 있는 새해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구원을 보라/ 출14:13-14/ 송년주일설교/ 1999-12-27
구원을 보라 출14:13-14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맞이해야할 중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리 밝은 것 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갖가지의 어려움이 있고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따라서 심리적 불안이 더욱 우리를 짜증나게 합니다. 이러한 때에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새힘을 얻어 세상을 이기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430년간의 애굽의 종살이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으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놓치고 난 애굽의 바로왕이 다시 잡아오려고 600승의 병거를 거느리고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에는 넘실거리는 홍해바다가 그들을 좌절하게 하고 먼지를 일으키며 무서운 속력으로 따르는 애굽의 정예부대의 군인들의 말발굽소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기에 싸울 무기도 없고 노약자와 부녀자와 각종 짐승을 몰고 가는 그들은 좌절할 수 밖에 없어 두려운 마음에 불평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차라리 애굽땅에서 종으로 사는 것이 이광야에서 죽는 것 보다 낫겠노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에게 담대하게 외치는 영도자 모세의 고백이요 신앙의 확신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이 한마디는 불안한 이 시대를 이기라고 격려하시는 우리를 향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보라” 제목하고 이 말씀의 뜻을 몇가지로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13절초)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하셨으니 백성들의 입장에서 두려운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눈으로 볼 때 앞에도 홍해바다요 뒤에서 들리는 강력한 애굽군대의 진격소리는 그들을 두렵게 하는 것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려워 말라고 하심은 하나님을 굳게 믿으라는 말씀이요 가만히 서 있으라는 말씀은 의심하고 불안하여 우왕좌왕 하지말고 자리를 지키라는 뜻입니다. 왜 두려움이 찾아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 보다 현실만 보는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10가지 재앙을 내려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면 담대하게 서 있을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못한 불신앙으로 그들은 두려워합니다. 그러기에 구원을 보라 하심은 믿음을 굳게 잡고 승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현실적인 어려움만 보며 불안하게 불평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고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과 등등하시나 종의 형체를 빌어 이땅에 오셨고(빌2:6-8)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심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사하여 주시기 위하였던 것이요(사53:4) 부활의 산소망 주시려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고전15:20) 주님을 믿는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요11:25-26) 하셨으니 믿음으로 불안을 몰아내고 죽음도 이기시고 살아가는 성도가 구원을 보는 자입니다. 2. 구원의 감격이 있어 라는 말입니다. (13절하)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하셨는데 “오늘 본 애굽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엄청난 공포의 대상입니다. 노예의 근성이 아직도 살아 있는 때였고 괴로움이 생생할 때 였습니다. 그러한 대상을 또 다시 영원히 보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은 구원의 엄청난 감격과 기쁨을 계속 누리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구원을 보라는 말씀 속에는 그 기쁨과 감격을 맛보고 누리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죽어 주셨고 3일만에 부활하심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함인줄 진심으로 믿어질 때 우리의 어떤 질병도 고쳐주시고 고난도 이기게 하시며 슬픔까지 주님이 담당해 주셨습니다. (사5:4) 그러기에 믿음으로 굳게 선 자는 사자굴속에서도 찬양했던 다니엘의 기쁨이 충만할 것이요 평소보다 일곱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춤을 추었던 다니엘의 3친구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감사와 감격이 충만하여 믿는자에게 불가능이 없는(막9:27) 역사를 체험하는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4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찌니라” 하셨으니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그 백성을 구원하심이 전적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요 역사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공로나 지식이나 힘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엄청난 사랑입니다. 믿음을 갖고 가만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찬송해야 합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10) 하셨으니 우리의 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앞에 안전히 순복하여 겸손하게 엎디어 감사해야 할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베푸셨으니 세상을 향하여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자신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심이 우리의 그 어떤 조건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요15:16, 갈1:15, 엡1:4) 그러기에 더욱 겸손하게 진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0세기를 끝맺는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선물 때문에 좋아하는 성탄절이 아니라 성탄의 뜻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어 이땅에 태어나게 하셨으니 “구원을 보라”고 외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그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하겠고 전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셨으니 겸손하고 감사하며 그 주님과 더불어 새로운 한 세기를 열어가는 성도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김조 목사
그 때는 찍어 버리소서/ 눅3:9/ 송년주일설교
그 때는 찍어 버리소서 눅3:9 한 해를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올 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올 해는 새로운 천년 시대를 앞두고 \"과연 어떤 일들이 우리 눈 앞에 나타날 것인가??하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별일 없겠지 하면서도 Y2k니 뭐니 하는 불안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작성할 때부터 줄 곧 마음 속에 떠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젊은 해군 장교가 유명한 해군 제독 리크오버(Rickover)에게 인터뷰를 받았습니다. 시사문제, 전투함의 구조, 해군의 전략에 대한 문제들에서 부터 음악,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들을 받으면서 이 젊은 장교는 답변을 하 느라고 진땀을 흘렸습니다. 제독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사관학교 졸업 당시의 성적이 어떠했는가?\" \"네. 820명 중 에서 59등을 했습니다.\" 이 젊은 장교는 자신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독은 이 젊은이를 쳐다 보면서 \"그 성 적이 그대의 최선을 다 한 결과였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당황한 이 젊은 장교는 \"글쎄요.....꼭 최선을 다했다고 는 말할 수 없겠지요......\" 이렇게 얼머무리는 그에게 다시 제독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대는 최선을 다 하 지 않았는가(Why not the best)?\" 이 질문에 이 젊은 장교는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말을 그의 인생 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습니다. 이 젊은 장교가 바로 지미 카터(Jimmy Carter)였습니다. 카터는 그 후 1976년에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선거 캠페인 용으로 「Why not the best?」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의 39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연 최선을 다 해서 살았던 한 해였습니까? 아니면, 최선을 다 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 한 해였습니까? 오늘 누가복음 13장 본문 말씀은 회개(悔改, repentance)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 고 하셨습니다. 아마 짐작컨대 그 해에 이스라엘에 대형 참사가 두건 이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실제로 빌라도가 갈릴릴 사람들의 피를 저희 제물에 섞었다기 보다는 비유적인 표현(figure of speech)이지요? 갈릴 리 사람들은 성격이 과격하고, 선동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 데모가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러니까 빌라도가 본보기로 그 선동자들을 희생제물로 처형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사 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 생각에 그 사람들이 너희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느냐??/font> 또 실로암에 있는 높은 망대가 무너지면서 18명이나 깔려 죽은 사건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인용하면서 \"그러면 이 18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일을 당했겠느 냐??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아서 그런 불행한 일을 당했겠느 냐??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잘 믿어서 아무 탈이 없었다고 생각하느냐??예수 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런 불행한 참사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 리는 그 메세지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메세지가 무엇입니까?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라는 말은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희랍어에서 온 말인데 이 말의 본래 의미는 \"돌아선다\" 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쪽 방향으로 가던 사람이 돌아서서 지금까지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처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때 그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여태껏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습관, 잘못된 생각, 잘못된 가치관(價値觀)을 버리고 새롭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3년을 기다려 서 열매를 얻으려고 했지만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과원지기를 불러 이 무화과 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고 이대로 두었다가는 땅만 버리겠으니 그만 찍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청하기를 \"주인님, 이 번 한 해만 그대로 두시지요. 제가 열심히 거름을 주고 가꿔 보겠습니다. 그래도 열매가 없으면 그 때는 찍어 버리 십시요.\" 이 말씀은 전통적으로 포도원은 교회를 뜻하고, 무화과 나무는 유대인을 뜻하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고, 과원 지기는 예수님이라고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比喩, parable)는 알레고리(allegory) 하고 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알레고리는 어떤 메시지나 교훈을 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짜 맞추는 것입 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비유는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주변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순간적(瞬間的)으 로, 그리고 매우 충격적(衝擊的)으로 메세지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는 깊이 책상에 앉 아서 연구를 해야 그 뜻이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하!\" 하고 그 뜻을 알게 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비유는 너무 골똘하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오히려 그 비유의 본래 뜻에서 멀어진다 고 하겠습니다. 이 무화과 나무가 포도원에 심겼다는 말씀을 주목해 주십시오. 그저 아무 곳에서나 척박한 땅에 버려진 무화과 나 무가 황송하게도 포도원에 심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코스타리카에 단기선교를 갔다가 그곳에서 그런 것들을 봤습니 다. 그곳은 열대우림 지역이기 때문에 식물들의 생장 조건이 이곳보다 훨씬 좋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화분에 심어 놓고 보는 것들이 그곳에 가면 울타리 나무로 쓰고 있는 것들이 많더라구요. 선인장들도 아무데서나 잘 자라서 울타 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운목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지요? 저희 집에도 두 그루가 있는데, 참 안자랍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니까 완전히 울타리 나무더라구요. 무화과 나무가 그렇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아무데서나 자라는 것입니다. 볼품이 없어서 관상용으로도 적합하지 않 습니다. 그리고 줄기와 가지가 비틀어지고 퍼져서 재목으로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름그대로 무화과(無花果)입니다. 꽃이 없는 나무입니다. 꽃이 없으니까 물론 향기도 없습니다. 꽃이 없는대신 열매는 제법 먹을만 합니다. 무화과 나 무의 존재 이유는 오직 열매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 나무를 좋은 포도원에 옮겨 심고 3년이나 공드려서 가꾸었지만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농사 를 짓는 사람들은 금방 압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금방 \"아이구, 저런! 그대로 두었다가는 땅만 버리겠 네.....?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연 주인이 과원지기를 불러서 이 나무들을 베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원 지기가 주인에게 애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여, 금년만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그래도 열매 가 없으면 그 때 찍어 버리소서.\"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는 언제나 강한 여운(餘韻)이 있습니다. \"아하! 이 무화과 나무가 바로 나로구나!\" \"아하! 지금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으면 저 무화과 나무처럼 되고 말겠구나!\" \"아하! 저 무화과 나무의 운명이 바로 나의 운명이로구나!\"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 중에 열매 맺지 않는 나무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에 길을 가시다가 무척 배가 고프셨습니다. 어디서 요기나 할까 하고 둘러 보던 차에 마침 길가에 있는 무화과 나무를 보셨습니다. 멀리서 보니까 잎이 무성한 것이 열매가 있을 것 같아서 가 보았더니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하나도 없 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 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들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 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한나절이 지나서 제자들리 보았더니 그 무화과 나무가 뿌리 채 말라 죽은 것을 보았습니 다.2 이 말씀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때는 무화과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무화과 철도 아닌데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 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적당한 핑게를 댑니다. 왜 내가 그 일을 못했는지 설명합니다. 그 일의 결과가 없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유를 잘 설명하면 excuse가 됩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논리입니다. 하나님의 논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열매를 맺지 못한데 대한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지 않습니까? 달란트의 비유도 그래요. 주인이 언제 온다고 사전에 통 고해 주고 왔습니까? 갑자기 오지 않았습니까? 어느날 갑자가 주인이 와서 너 그동안 내가 준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 을 어떻게 했는지 보고를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열처녀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신랑이 언제 온다고 말해 줬습니 까?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 졸고 있을 때 갑자가 신랑이 온 것입니다. 그 때까지 기름을 준비했던 다섯 처녀만 혼인잔치에 들어갔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도 그래요.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그 때와 시간을 몰라요. 그 때를 말씀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때에 있을 징조들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때가서 어떤 이유와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주인에게 한 달란트 받 은 사람이 한 달란트를 내 놓고 주인에게 설명했습니다. \"여차 여차 해서 한 달란트를 가져 올 수 밖에 없었습니 다.\" 하고 그 이유 대면서 주인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변명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 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3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서 이를 간다는 말은 가슴을 치면서 통곡한다는 뜻을 가지 숙어(熟語, idiom)입니다. 그 사 람이 이를 가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무지와 게으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후회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너무 늦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그렇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만 일 우리가 그냥 2,000년을 맞이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온 나의 삶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변화된 마음으로 2,000을 맞 이한다면 새해는 우리에게 축복의 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이 내일 모렌데, 2,000이라고 뭐가 다를 것이 있겠느냐?\" 하면서 과거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고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다면, 장차 우리가 어두운데로 내어 쫓겨서 슬 피 울며 이를 가는 인생으로 전락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먼저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던 우리의 지난 날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늘 어정쩡하게 믿어왔던 지난 과거를 철 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말처럼 내 심장(心臟, heart)을 포기하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 지고 사는 것입니다.4 heart는 내 몸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으십시요. 예수님께서 내 삶의 가장자리, 주변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한 중심에 계시는 것입니다. 바울 의 말처럼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For me, to live is Christ).\"5 이렇게 선포해 버리는 것입니다. 주변 의 사람들에게 \"그래요. 나는 이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결단해 버리는 것입니 다. 회개할 일이 또 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한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지난 일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오한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값을 주시고 사신 것입니다.6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이라고 합니다. 그리 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肢體, member)이라고 합니다.7 지체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나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하고 유니크(unique)한 일들이 있습니다.8 그 일들은 바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결코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할 수 없는일들입니다. 교회 생활의 의미에 대하여 이런 생각까지 해 보 셨습니까? 「베리 스쿨(Berry School)」을 창설한 마싸 베리(Martha Berry) 여사에 대한 이런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그녀는 가진 것이 없었지만 농촌의 가난한 아이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교육을 시켜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 나 아무도 그녀를 알아 주는 사람도 없고 도와 주는 사람도 없어 낙심한 끝에 당시의 거부였던 헨리 포드(Henry Ford)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글을 일고 쓰도록 가르쳐야 할텐데 책도 없고, 교실도 없으니 도와 달라고 했 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 포드는 선뜻 돈을 주겠다고 하면서 10쎈트 짜리 다임을 하나 던져 주었습니다. 보통 사람 이라면 응당 모욕과 멸시를 참을 수 없었을텐데 베리 여사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임 하나를 가지고 상점에 가서 씨앗 한봉지를 샀습니다. 그것을 아이들과 함께 뿌리고 가꾸어서 작으나마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것 을 다시 팔아서 더 많은 씨앗을 구해 가지고 농사의 규모를 키워 나갔습니다. 그러기를 여러 해 반복한 끝에 그녀는 건물 하나를 세우고 자기가 소원하던 학교를 열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헨리 포드를 찾아가서 \"내가 당신이 준 다임 하나로 무슨 일을 했는지 와서 보라(See what your tiny dime has done).\"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포드는 기가 막 혔지만 그 일을 확인하기 위해 Berry 여사를 찾아 갔습니다. 학교와 농장을 직접 목격한 포드는 큰 감명을 받고 베 리 스쿨을 위해 100만불을 선뜻 내 놓았다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에 속한 지체로서 할 수 있는 일은 Berry 여사가 받은 10쎈트짜리 다임처럼 보잘 것 없고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의 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면, 왜 최선을 다 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 앞에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그 이유를 댈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부족했던 것들을 그대로 내 놓고 회개하면 됩니다. 이 회개하고 변화된 마음으로 2,000, 새해를 맞이 하십시오. 이 새해에도 대충 대충 흉내 를 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된 열매를 맺는 새해가 되게 하십시오. 이 세상은 보다 진실하고, 그리스도께 헌신된 그리스도인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새로운 천년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생명을 걸고 이 시간 결단하십시오. \"다시 나에게 한 해를 허락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내년 이 맘 때에 지금과 똑 같이 열매 맺지 못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도록 도와 주십시오. 그 때도 열매를 맺지 못 했거든 그 때는 사정없이 저를 찍어 버리십시오.\" 1. 누가복음 13:3 2. 마가복음 11:12-14, 20 3. 마태복음 25:30 4. 빌립보서 1:8 5. 빌립보서 1:21 6. 사도행전 20:28 7. 고린도전서 6:15 8. 로마서 12:4
그대로 두소서 /눅13:6-9
그대로 두소서 /눅13:6-9 2010-02-22 11:23:30 read : 185 2009년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1년 동안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오늘 송년 주일로 보내고자 합니다. 세월이 빠르다는 말은 누구나 똑같이 느끼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말을 합니다. 또,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모두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옛날 사람들이 써 놓은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려 말년에 우탁이라는 문인은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라는 시조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학생시절에 누구나 다 외웠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말년 시조도 모두 시간 개념입니다. 어느 날 제가 실수를 해서 새 성경책 한 권을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결혼 주례 할 때는 언제나 신랑, 신부에게 새 성경책에 “축 결혼 신랑 ○○○ 신부 ××× 주례 이필재” 그리고 평생 행복하게 살라는 문장과 함께 날짜를 써서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날도 주례가 있어서 항상 제가 하던 대로 새 성경책을 펴놓고 그렇게 쓰는데 “축 결혼” 이렇게 써놓고 잠시 다른 생각을 했는지 “신랑 이필재” 라고 썼습니다. 그러니 그 성경을 어디에 쓰느냐 말입니다. “착각은 자유”라고 누가 그러더니 세월이 갈수록 이 착각의 퍼센트가 많아지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능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생존권의 욕구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제 할아버지는 장수하셔서 100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손자, 손녀들이 수십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 사시니까 장난꾸러기 손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면 손자들이 할아버지한테 가서 자주 놀리는 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언제 죽을 건데?” 그러면 할아버지가 늘 무슨 말로 대답하셨느냐 하면 “나보다 먼저 죽지나 말아라!”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해가 바뀌는 시간 개념이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3년을 왔으나” 하는 말이나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는 말은 모두 시간 개념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우리 인간의 마음과 거의 같은 정신적 공백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한 과일 나무를 조명했습니다. 먼저 성경 내용을 설명하려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부터 해석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유대 나라는 망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는 동네마다 망대를 높이 만들어서 항상 파수꾼이 망대를 지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망대 이야기, 파수꾼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겁니다. 실로암 망대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망대가 무너졌습니다 . 그래서 그 망대에 있던 18명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해석해 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죗값입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많은 줄 아느냐?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오늘 비유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랑하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면서 왜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일은 안하느냐? 너희도 그렇게 망하게 된다.” 이렇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재료는 포도원, 즉 과수원에 숨겨진 무화과나무입니다. 여기 6절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도원이란 온 세상을 뜻합니다. 그 중에 무화과나무는 지금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초점으로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신 것은 다른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주인이 화가 났다고 했습니다. “열매 맺지 않은 나무를 찍어버려라. 왜 땅만 허비하느냐? 내가 3년 동안이나 와서 열매 산출을 기대했으나 얻지 못했다.” 여기서 3년이라는 숫자 개념은 우리가 말하는 365일이 3번 지나간 개념이 아닙니다. 유대 사회에는 숫자 문화가 있습니다. ‘3’은 완전 숫자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넉넉히 지나간 후를 말할 때 항상 3년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살아왔는데 사실 예수님 시대까지 세 가지 특징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율법 시대, 선지자 시대, 그리고 메시야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가장 큰 열매를 맺기 바라며 유대 민족을 선택하셔서 키워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 유대 백성들은 하나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준 이 영생과 구원의 선물을 너희들이 수고하여 온 세상에 나눠 주어라.”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구원의 선물을 유대교라는 종교로 만들어서 그 안에 가두고 누구도 주지 않는 제도적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저절로 자랐거나 야생 돌 무화과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름을 주고 비싼 노동력을 지불하면서 정성스럽게 투자를 한 무화과나무입니다. 과수하는 경영주들은 과일 나무 한 그루에 들어가는 생산성 비용이 있고 만약 그것이 실패할 경우 어떤 손실이 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과일나무를 수십 년간 길렀는데 열매 맺지 않는다면 그 집안은 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이 주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다 최종 결단을 내렸습니다. “찍어버려라.” 우리가 연말이 되면 결산을 합니다. 사업체도 결산을 내고 교회도 결산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인생 결산도 생각해 보는데 이것이 연말 개념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선물을 독점하고 절대 구원 선물을 이방인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있습니다. 완전수가 되도록 하나님이 기다렸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종 결론은 “찍어버려라.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다.” 이렇게 예수님이 설교하신 겁니다. 인생의 결산 의미는 성경 속에 제일 많습니다. 예수님 설교도 다 종말론적 설교 개념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마지막 주일을 지나는데 일 년이라는 세월을 시간적으로 계산하면 8,760시간이 됩니다. 이 시간 속에서 우리가 제일 많이 하는 일이 잠자는 시간으로 보통 우리가 2,500시간을 1년 동안에 잡니다. 2,000시간 일합니다. 1,300시간을 먹는데 소비합니다. 1,000시간 정도를 자동차 안에서 자게 됩니다. 500시간을 신문, TV 보는데 소비하게 되고, 500시간을 세수하고 옷 입고 화장실 다니는데 사용합니다. 그리고 전화 받는데 300시간, 이것저것 기다리는데 100시간 정도를 보냅니다. 이 모든 시간은 컴퓨터로 계산해 낸 것입니다. 아마 사람에 따라서 이 계산은 다를 수가 있지만 대략은 다 비슷합니다. 교회 생활 열심히 하시는 교우들은 약 500~1,000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물질 계산은 확실합니다. 가계부 정리하는 주부들은 1년 동안 어디에 돈을 지출했는가를 가계부에 기록해 놓으니까 금방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 물질, 건강, 은사를 어디에 소비하고 살았나 하는 것이 결산의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제도를 보면 아주 신비합니다. 항상 새로움을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날마다 아침이 주어진다는 것은 어제 일을 청산하고 오늘 새로움의 길을 가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은 일주일 동안 예배를 통해 은혜 받은 마음으로 또 일주일을 시작하는 새로움이 있습니다. 열두 달 동안 한 달, 두 달을 결산합니다. ‘이달에 어떻게 되었나? 그 다음 달은 어떻게 되었나?’ 하는 것이 새로움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에 일 년이 지나고 새로운 해가 된다는 것은 더 큰 의미의 새로운 역사를 우리가 가지게 됩니다. 또, 더 크게 계산하면 10대, 20대, 30대, 40대를 어떻게 살았나 10년씩 새로움의 역사로 살 수 있는 제도적 삶을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 말씀과 같이 땅만 허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용하면 작은 것도 내게 큰 복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은 6·25 전쟁을 다 기억하시죠? 공산당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그 마을에서 전쟁할 만한 젊은이들을 다 소집하여 따발총을 주면서 전쟁에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반항하면 죽입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공산당이 되어 할 수 없이 월북한 청년들이 많은 겁니다. 지금 이산가족 만난 사람들은 월북한 사람들이 80퍼센트입니다. 그런데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면에서 공산당이 이와 똑같이 마을 청년들을 모두 마을 회관으로 모이라고 소집했습니다. 청년들을 모두 차출해서 “너희들은 군인이다. 미군들과 싸워야 된다.” 따발총 주면서 별안간 인민군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안가면 죽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생존권 때문에 공산당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어떤 한 사람도 마음에도 없이 공산당이 되어 공산당 복장을 하고 미군들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 수용소 안에는 군목들이 일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 군목, 한국 군목들이 성경책을 무조건 한 사람씩 나눠주며 예배드리게 했습니다. 포로이니까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신복교라는 포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수용소 안에 예배드리다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석방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살아라.” 그런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공산당이 두 패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자유대한에서 살겠다. 북한에 안가겠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과 “너희들 어버이 수령을 배반할 거냐? 우리는 모두 북한으로 가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두 패로 갈라졌습니다. 큰 포대에 보따리 하나씩 집어넣고 “가려면 가라. 수용소에서 가지고 있던 옷, 구두, 개인 소집품은 가지고 가라.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살았다. 내 마음에도 없는 공산당이 되었는데 살았다.’ 각자 소집품을 정리하는데 그동안 목사님들이 나눠준 성경을 사람들이 다 집어 던지는 겁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성경을 다 버리는 구나!’ 그래서 자기는 헌 옷가지, 신발을 다 버리고 남들이 버린 성경을 자기 포대에 가득하게 넣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다 버려져 있는 겁니다. ‘이것을 모두 가져가야 할 텐데….’ 옛날 군복에는 주머니가 많았습니다. 있는 주머니에 성경을 두 권씩 전부 채우고 가려고 하는데 북한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산당들이 어떻게 탈출을 했는지 총들을 몇 자루씩 가지고 와서는 남한에 남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겁니다. “이 나쁜 놈들! 북한으로 가야지!” 그러면서 총을 쏘며 막 죽이는 겁니다. 결국 남한에 남겠다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딱 한 사람만 살아남았습니다. 신복교 씨만 살았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 성경을 주머니에 넣었는데 성경책 중간에 총이 들어온 겁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혼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성경을 가지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모두 나눠주며 예수 믿자고 해서 성경책이 우리 아들 살렸다고 할머니부터 할아버지까지 미신 섬기던 것을 전부 불태워 버리고 예수 믿고 마침내 교회가 없던 그 동네에 교회를 세우고 목사님을 모셔서 세운 교회가 순성 감리교회입니다. 그 가족들이 지금 우리교회 교인들이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고자 합니다. 그 중에 제일 큰 은혜가 뭐라고 생각되십니까? 이렇게 살아있다고 하는 생존권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또 다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이 큰 은혜를 사람들이 거의 잊어버리고 삽니다. 새해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혜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내가 또 가능할 수 있는 새 역사의 시간에 내가 또 다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이나 가능한 기회가 또 다시 나에게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변하지 않고 진행되는 자연 법칙 속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생존권에 대한 행복을 새롭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무의미한 삶을 지루하게 연결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 있지요? 그 년이 그 년이라고요. 대 기업들은 1년 사업 결산서를 발표합니다. 그래서 흑자 결산을 낸 기업들은 성과금을 주면서 모두 신이 나서 좋아하는데 그렇지 못한 기업은 사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고 울상이 됩니다. 이것이 연말 결산의 의미란 말입니다. 이제 이 열매 없는 나무의 운명은 찍어 불에 던져 태워 버릴 것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큰 자비의 사건 하나가 주워집니다. 과원지기의 소원이 나타났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시간의 연장 의미가 나타납니다. “또 한 번의 기회를 그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과원지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으로 해석하는 자가 제일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모든 인생의 시간을 연장시켜서라도 오래 참으심을 요청하신다는 것입니다. 버나드 쇼의 묘비는 “갈팡질팡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라고 씌어져 있답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이런 생각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아직도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혜 안에 생존권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장에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오늘 성경말씀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이 후”라는 말이 있는데 신학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후 신학”이라고 합니다. ‘이 후’가 뭐냐? 나의 남은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이 후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후를 위해서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 단어 “만일”이라고 그랬는데 이 만일은 양면성입니다. 창조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공존하는 의미입니다. “창조적이냐 부정적이냐는 너한테 달려있다.” 교회 공동체를 목회하는 목회자로서 2009년 연말을 결산해 낸다면 우리는 큰일에 대한 업적은 없지만 노력하는 교회라고 평가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몇 가지 가는 길이 있는데 제일 먼저는 우리 자신의 풍성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교인들을 보면 우리 목회자들은 영적 감각으로 평가합니다. 비교적 모두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에 흔하게 나타나고 있는 분열에 의한 상처는 우리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겸손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에 충실했다고 평가해도 좋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이 그토록 간절하게 부탁하신 지상명령 선교는 참으로 열심히 하였다고 평가가 됩니다. 이제 임기 만료된 선교사까지 7년 동안 45개국 1,200명 선교사가 무난히 파송이 잘 이루어져서 기초가 튼튼해 졌고 선교지에 61번째 교회건축이 완공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체 교회도 많은 성장을 해서 이제는 헌금 예산의 40퍼센트를 선교비 지출을 하고도 계획한 본 교회의 모든 프로젝트에 차질 없는 마감을 잘 이루었고 지난 1년 동안 장막터를 확장하는 일에 아름다운 마무리가 이루어짐을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교회 교우들의 아름다운 헌신적 수고로 이루어졌습니다. 모두의 노력과 기도가 이루어낸 성취라고 우리는 평가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후 신학이 얼마나 많은지 다 나옵니다. 엘리야 때 바알 종교에 휘말려서 유대 민족의 정신문화가 암흑기가 되었을 때 엘리야가 뭐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 다 망했습니다. 나 밖에 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 마저 죽이려 하니 끝나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 후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다 쓰러진 암흑기에서 엘리야의 손을 끄집어내서 “나는 이런 일을 너와 함께 계획해 나가겠다.” 그래서 이 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새롭게 이루어지는 신학이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암흑 역사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다 불구덩이에서 망했는가? “아니다. 이 후가 있다.” 아브라함의 손을 붙잡고 폐허가 된 소돔과 고모라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창조해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노예로서 400년 동안 이제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절망하던 유대 민족을 하나님이 “이 후가 있어.” 모세를 내세워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거야.” 새로운 역사를 이 후에 시작하셨습니다. 세상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이 히틀러에 의해서 마귀 집단 같이 되어 버린 후 “그러면 우리는 다 망한 거야? 온 세상 사람들이 히틀러 때문에 우리는 다 죽일 놈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 거야?” 그럴 때 희망의 신학을 외쳐 이 후를 창조한 몰트만 박사 때문에 독일의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폐허가 된 덴마크 잿더미 위에서 “우리는 이제 살 수가 없어.” 하나님은 “아니야. 이 후가 있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자고 이 후 신학을 부르짖은 그룬트비 목사의 활동 때문에 지상 천국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후 신학’입니다. 나에게 새로운 역사가 주어진다는 ‘이 후 신학’입니다. “하나님, 나는 다 망했습니다. 할 것도 없습니다.” “아니야. 나는 너의 손을 붙잡고 이 후를 창조해 낼 거야.” 마지막 주일의 의미는 이 후, 오늘 그 자리에 우리가 서 있는 겁니다. 일 년 동안 있었던 행복했고 괴로웠던 추억 중에서 안 좋은 추억은 오늘 다 정리하십시오. “하나님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이 후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거름을 주며 싸며 노력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의 손을 붙드시고 하나님께 간청하시는 주님의 신뢰를 우리가 감사드리면서 우리 모두 이 후 신학의 발견을 가지고 다가오는 2010년의 새해 아침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이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모두가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이 약속해 주시는 이 후를 바라보면서 괴로웠던 모든 추억을 소멸시키는 오늘 마지막 주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2010년의 밝아오는 아침 햇살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움의 역사를 힘차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그리스도인의 특권 (로마서 5:1-11)
그리스도인의 특권 (로마서 5:1-11) http://mission.bz/5583송년주일 그리스도인의 특권 (로마서 5:1-11) 우리들교회/김양재 목사 [시작기도] 하나님 아버지, 2003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일년을 잘 지켜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들이 특권을 누리고 화평을 누리기 원하는데 마지막은 또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셨사오니 마지막에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이 시간 찾아오셔서 말씀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크리스마스에 무슨 선물을 주고 받으셨습니까. 연말연시에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입니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또 우리들교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지난 주 신문에서 감동적인 기사를 보았습니다. 켄터키 넉스빌에 있는 미들브룩 연합감리교회 프랭크 포토 담임목사가 자기 교회 성도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50세 된 어느 성도가 재혼을 해서 아내와 신혼 여행을 떠났는데 한 곳의 백화점에서 아내가 진열대의 진주 목걸이를 보면서 \'\'너무 예뻐요. 값이 무척 비싸겠네요. 그래도 누가 사는 사람이 있으니까 진열했겠죠.\'\'하고 감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혼 생활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고 6개월밖에 못 살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결혼 10주년을 맞아서 주례 목사님을 초청해 예배를 드리는데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선물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선물은 10년 전에 아내가 갖고 싶어했던 진주 목걸이였습니다. 아내는 너무 놀라서 이렇게 비싼 것을 어떻게 샀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에게 이 선물을 하기 위해서 지난 10년 동안 내가 좋아하던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목마를 때 마시는 콜라도 안 마시고 한 푼, 한 푼 저금을 했소.\'\'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고 했을 때 남편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그 아내는 기쁨과 평안 가운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기쁨과 평안이라는 말이 저에게 들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어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고, 부부끼리도 서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무엇인가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특권을 주신다고 오늘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버지의 선물을 누리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선물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확인해야 합니다. 사단이 우리 자존감을 짓밟아서 자녀가 마땅히 누려야 할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다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목사, 장로, 권사에게 주어지는 선물도 아닙니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소유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꿔놓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가진 것은 쉽게 없어지지만 존재 자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부모된 모든 사람의 마음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합니다. 성탄에, 생일에 물건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자녀들의 존재 자체가 업그레이드되는 선물을 줄 수만 있다면 생명이라도 버리겠습니다. 정말 자녀들의 존재 자체가 바뀌는, 업그레이드되는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중고등부 열린 예배를 하는데 여러분이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까. 이 근처에 사는 분들에게 이런 선물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떤 특권을 선물을 주고자 하실까요. 첫 번째,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선물입니다. 1절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모든 사람이 평화를 원하지만 얻지 못합니다. 먼저 화평을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 바른 진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건강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멋있는 사랑을 만나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것은 죄입니다. 1장부터 4장까지 죄에 대해서 지겹게 들었습니다. 인생은 100% 죄인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의롭다 할 인생이 없고... 그 예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었습니다. 허물의 가리우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공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이제 그 선물을 주신 분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화평을 누리자\"는 권고가 아니라 선포입니다. 원한다고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특권을 왜 못 누리는가 말입니다. 못 누리고 있으니까 \"누리자\"고 선포를 했겠죠. 화평은 하나님과 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분쟁이 없는 어떤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싸움을 하고 화해하지 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선물을 아무리 주고받아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평은 권세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일대일의 관계에서 성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바른 지식을 알고 있다해도 알아듣지 못할 상대방에게 교훈을 하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바른 지식을 알고 있는 것이 절대 의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한 며느리 다말을 보고 시아버지인 유다가 \"그는 나보다 옳도다\"했습니다. 그것을 \'\'의-righteousness\'\'로 표현했습니다.(창38장) 이것이 어떻게 도덕적인 개념이겠습니까. 히브리어로 \'\'샬롬\'\'의 역어이고 헬라어로 \'\'에이레넨\'\'이라고 하는 \"화평\"은 전쟁이 없는, 전쟁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보상과 회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빚진 상태를 청산하고 긴장 관계가 풀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믿으면서도 이런 화평이 없습니까. 긴장 관계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빚진 것부터 갚으십시오. 회복할 것 있으면 빨리 회복하시고, 보상할 것 있으면 빨리 보상하십시오. 우리들교회의 비전이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는 교회입니다. 누리는 것 중에 화평을 누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부활의 주님이 가장 먼저 빌어주신 말씀도 \"평강이 있을지어다\" 였습니다. 돈이 있고, 자식이 잘나고, 건강하고, 용모가 빼어나도 평강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성탄 예배 때 정몽준 캠프의 대변인이었던 김행씨 간증을 들려드렸습니다. 지난 대선 때 후보지지 철회 일로 세계 언론이 보는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신문기자에 대변인으로 그렇게 잘하는 글과 말이 전혀 소용이 없다는 걸 느끼고,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는 그 상황에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됐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정몽준 후보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너무 미워하다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 25년이나 안 만나던 어머니를 찾아가서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평강을 누리려면 이렇게 빨리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강을 누리려면 관계에서 자기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일대일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아내 자리, 남편 자리, 자식 자리, 사장 자리, 사원자리.. 자기 자리를 알아야 어떻게 하면 평강이 이루어지는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상대방의 수준과 학력과 성격으로 낮아지면서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며 섬기는 것이 성실입니다. 화평의 근거입니다. 2절 말씀은 이것이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는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절 -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과거형입니다.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간 사람들은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즐거워한다\"는 원래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자랑할 만큼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아내 자리, 남편 자리.... 각각 제 자리로 찾아가는 것, 이것이 쉬운 것 같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나의 영광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역대 뉴욕시장 중에서 1934년부터 45년까지 재직하며 가장 훌륭한 시장이라는 평을 들었던 피에렐로 라가디아씨가 판사로 재직할 때 이런 일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쳐먹다 기소된 노인을 재판하는 자리였습니다. 라가디아는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벌금 10달러 형(刑)에 해당합니다. 그 10달러는 제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는데 나는 그 동안 그것도 모른 채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벌금으로 제가 10달러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중절모를 벗어 재판장 서기에게 주면서 \'\'여기에 계신 여러분 중에서 나처럼 너무 잘 먹은 것에 대해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금 47달러를 손에 쥐고 기소되었던 법정을 눈물을 흘리며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사람의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공부도, 결혼도, 이제 목적이 달라집니다. 은혜를 받으면 즐거워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균 수명이 이미 희수(喜壽-77세)를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20년이면 망구(望九-81세)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고령화되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치매인데 어느 신문에서 치매 안 걸리는 방법을 보도했습니다. 하루 2시간씩 책을 읽어라, 의도적으로 왼발과 왼손을 많이 사용해라, 웃어라 등등.. 여러 가르침이 있는데 가장 기억나는 것이 \'\'가능하면 자주 감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제임스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 보도에서는 감동하기 위해서 극장과 공연장을 자주 찾으라고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감동하면 어디에 와야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목장 모임에서 누리는 감동을 어디에 비교하겠습니까. 우리는 축제로 교회에 오기 때문에 이미 즐거움과 감동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고, 웃음이 있습니다. 제가 피아노를 전공하고, 평생 피아노 치느라 애썼는데 연주회 가서 울어본 적이 없고, 미술 전람회에서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심방을 하면서 또 어찌나 웃는지 다들 코미디언이 따로 없습니다. 왜 웃는 지도 모르고 그냥 말 한 마디만 해도 웃습니다. 큐티를 하면서 우리끼리 통하는 \'\'방언\'\'이 있고, 성경을 읊어대면서 딱 던지는 말들이 그렇게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줍니다. 참 평안은 의롭게 살기 위해 흘리는 눈물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사단은 거짓 평안으로 우리를 속입니다. 자꾸 합리화시키며 다른 사람과 화평을 이룬 것으로 속입니다. 진리를 온 마음으로 생각하면 거기에 불안이 있습니다. 심각함이 있습니다. 복음이 바르게 전파돼서 100% 죄인임을 지적 받으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하면 적용이 힘들고 고민스럽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거룩함은 힘들어합니다. 지옥 가는 건 싫어서 용서 구하는 일은 너무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열광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거룩을 이루어 가는 일에 소홀하기 때문에 참 화평을 못 누립니다. 우리 믿음의 수준이 말씀으로 올라간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파산을 할 지경이고, 남편이 부정맥이고, 카드 빚을 지고.... 그런데 어떻게 평강을 누릴 수 있는가 할 수도 있습니다. 빚이 많은데 빚 안 갚고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게 옳으냐 그르냐.... 적용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찬송만 부르면 평안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배는 열심이어도 그런 일에 적용을 못하면 평안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거룩을 열심히 이루어가기 때문에 화평이 아니고,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거룩을 이루어가면서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자마자, 또는 믿은 후로도 끊임없이 화평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3~4절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의 의롭다 함, 화평, 즐거움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 체험인 신유, 환상, 방언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 것만 대단하다고 합니다. 성경 지식,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주관적입니다. 내 체험이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으로 하나님께서 양육시켜 가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환난이 올수록 내 믿음이 객관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의 사랑은 맹목적이거나, 이기적이거나, 이해관계에 얽혀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나를 양육해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무턱대고 양육하고, 보호하고, 복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단잠도 주시고, 환난도 주시고, 가난도 주시고, 박해도 주십니다. 육체와 물질과 정신의 고통은 모두 영적 시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환난은 누르다, 짜내다, 분쇄하다 그런 뜻입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필수 코스입니다. 바울 사도가 275명과 함께 행선하다 유라굴로 광풍의 환난을 만났습니다. 배가 파손되고, 기구, 재물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 없이 로마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환난에는 인내가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내는 무엇 무엇 밑에서 누구 밑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 밑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내를 모릅니다. 밑에서 누구 밑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 밑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내를 모릅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한 것은 시어머니 밑에서 극심한 시집살이를 하고 남편 밑에서 힘든 경험을 당해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성도를 섬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날마다 합니다. 온유와 화평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확고 부동함으로 끝까지 버티는 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연단은 그런 인내를 가지면 인정받는 품질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인정받은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소망은 인정받은 인격에 예수 안에서 항상 좋은 것만 바라고 기대하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3절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5절 -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 소망이 강해 보일 때도 있고, 약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했다, 미워했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환난이 주제가 되고, 성경이 교과서가 되고 성령이 스승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만취한 상태로 음주운전을 한 차에 치어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이지선 자매의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 그 자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미팅에서 만나야 될 의대생을 스물 세살 처녀가 발가벗고 병원에서 만나는 환난을 겪으면서 스무살의 나이를 없애버렸다고, 세살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올바른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선이의 어머니는 지선이가 아프고 고통 당할 때 부둥켜안고 울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엄마가 감정적이 되면 아이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수술에 들어가면서 지선이는 다른 아무 것도 안 보고 엄마 눈이 흔들리는가만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에 힘주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냉정하게 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 안 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기에 열 세 번 수술에 한 번도 울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힘이었고 계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울어야 할 때와 안 울어야 할 때를 이렇게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가해자가 떠오르지 않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 바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화상을 당해서 힘이든데 가해자를 떠올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내 힘으로 못하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선이가 하루, 하루를 눈물로 시작하고 모든 거울을 다 치웠는데 숟가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살려놓았으면 대책이 있으실 것 아니냐\'\'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이 화상을 알기나 하느냐고 따졌다는 겁니다. 제가 전에 조그만 화상을 입고 화상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사포(sand-paper)로 문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선이가 전신화상으로 55% 이상 피부가 죽었기 때문에, 온 몸을 날마다 소독하고 거즈를 붙이면서 당하는 고통은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했습니다. 염증이 나면 죽기 때문에 날마다 그렇게 해줘야 하는데 정말 예수님이 화상을 당해봤느냐는 말이 나올 것 같습니다. 스물 세살의 여대생 마음으로는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믿으면서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좀 성숙했을 때는 완벽주의가 생깁니다. 죄에 대해서 예민한 것까지는 좋은데 화평이 깨질 정도로 예민하게 되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안 고쳐주신 질병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질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안질인지, 간질인지 모르지만 안질이라고 해도 기가 막히고, 간질이라고 해도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 설교하다가 갑자기 발작을 하면서 쓰러지고, 그러다 다시 일어나서 설교를 한다면 그 모습이 어땠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끝까지 안 고쳐주셨습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편두통이 심해서 일주일에 두 세 번 편두통이 발작하면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졸도까지 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이고, 설교자인데 그 분이 화평을 누렸겠습니까. 그러니 날마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언행심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정죄감과 완벽주의 때문에 예수 믿고 나서도, 의롭다 함을 얻고 나서도 화평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시고, 우리는 100% 죄인입니다.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과 100% 죄인인 인생이 만나는데 어떻게 날마다 공포와 두려움과 갈등이 없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보겠습니다. 6절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연약할 때\", 8절 \"죄인 되었을 때\", 10절 \"원수 되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나의 많은 정죄감과 나의 불완전한 모습, 나의 모습을 보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화평이 깨어집니다. 그 때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보라는 겁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화평을 이야기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다섯 번이 나옵니다. 나를 의롭다 칭해주신 근거도 예수님이고, 화평의 근거도 예수님입니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이루어갈 일이 쉬지 않고 엄습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어떻게 해야될까요. 오늘 바라봤으면 내일은 안 바라봐도 될까요. 그래서 올바른 예배가 쉬지 않고 드려져야 되고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말씀 가운데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날마다 바라봐야 합니다. 순간 순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 나눔 예배, 수요 예배... 이 모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굉장히 시간을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한 주일 동안 나를 보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얼마나 감정의 낭비가 줄어드는지 아십니까. 훨씬 유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을 줄여주시는 주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간 순간 나를 보게 됩니다. 말 한 마디하고도 금새 나를 봅니다. 내가 말 실수를 했어, 쓸데없는 말을 했어, 말을 해야 될 때인데 못했어, 거긴 괜히 갔어.... 이러면서 나를 보기 때문에 이상한 데 가서는 교만하고 이상한 데 가서는 열등감이 듭니다. 나를 보기 때문에 교만과 열등감이 교대, 교대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화평이 깨집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으면 자신도 남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어도 끊임없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은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되었다 하는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님처럼 그렇게 설교를 잘 해도 \'\'나\'\'를 보는 겁니다. 다 똑같습니다. 금새 믿은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이나 \'\'나\'\'를 보기 때문에 화평이 깨집니다. 나는 100% 죄인이기 때문에 나에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7~8절 -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지선 자매가 아프고 힘든 시간을 지내면서 자기 고통을 천 번, 만 번이라도 대신해줄 수 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기 몸을 던져서 동생을 구해준 오빠의 사랑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신을 위해 금식해주는 교회 분의 사랑을 광야 같은 투병생활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 아픈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나니까 화상이 사랑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백 억을 준다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 내 삶이고 얼굴이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얼굴도 이만하면 꽤 귀엽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지선 자매의 화상 전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선이는 대학교 2학년 때의 그 아름다운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용모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체격 때문에 괴로운 사람 있습니까. 지선이는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뭔가 오픈하고 나서 \'\'괜히 오픈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깁니다. 지선이는 서럽고 힘든 시절 다 지나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너의 찢김과 찔림과 고통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공포와 두려움을 내가 알고 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아시면 우리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지선이가 병들고 약한 자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안 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를 보기 때문에 용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못 보던 거울도 이제 볼 수 있게 되고, 거울을 보면서 \'\'안녕 이지선!\'\' 하고 인사하면서 지나간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데 7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7개월, 너무 아픈 동안에 자기 얼굴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55%의 죽은 피부 대신에 나머지 피부를 가져다가 이식을 하고 붙이는데 스테플러로 찍는 것처럼 갖다 붙이니까 여기 저기 땡기고, 쭈글쭈글 해집니다. 화상을 당하고 초기에 수술을 하러 일본에 갔는데 병원에서 어떤 꼬마가 지선이를 보더니 \'\'엄마, 괴물이야, 괴물!\'\'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는 걸 듣고 지선이는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놓으셨으면 사람답게 고쳐주세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 후 수술을 하고 교회에 가게 됐는데, 교회에 간 첫 주에 식당에서 어떤 아이가 지선이를 보더니 \'\'엄마, 저기 이상한 <사람>있어.\'\' 하더랍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된 것 때문에 너무 감사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지선 자매가 감사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화평이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그 즉시, 즉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선이의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실 것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님도 자기의 완벽주의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기로 하고, 십자가만 바라보기로 했더니 놀라운 평안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목사님도 해결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을 껴안아주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껴안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누구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 3주 후에 편두통이 사라지고 그 이후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속 아플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보다 수준이 훨씬 높아서 평생 안 고쳐주셨습니다. 고쳐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고쳐주지 않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만 바라보셔야 합니다. 과거의 죄도, 현재의 죄도, 미래의 죄도... 나를 보지 말고 \"모든 죄를 사하셨으니\"(골2:13) 순간 순간 나를 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의 피, 보혈의 공로만 의지한다면 9절에도 \"구원을 얻을 것이고\", 10절에도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는 미래형이지만 로마서 8장 24절에 가면 \"구원을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끊임없는 갈등 구조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봄으로 화평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나의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가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지만 또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면 화평이 없습니다. 정말 주님의 보혈을 보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나를 쳐다 볼 때는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기도 제목을 드립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됐으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선물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올바른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 믿고도 정죄감과 나의 완벽주의 때문에 절망할 때 나를 보지 말고 십자가의 예수님만, 이 보혈의 공로만 즉시 즉시 바라보게 해달라고 그래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하나님으로 더불어 우리가 화평을 누리자 했는데 왜 화평을 못 누리는가를 알았습니다. 주님, 믿으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바라볼 때가 많은 것을 고백합니다. 열등감과 교만이 날마다 오갑니다. 나는 되었는 줄 알고 거기에서 내가 무엇인가 하려고 해서 절망했습니다. 주님, 참으로 화평을 누리기 원합니다. 그래서 썩어질 옛날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100억을 준다해도, 이 세상을 다 준다해도 옛날로 돌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환난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올바른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서, 부끄럽게 되지 않는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지금 환난을 주셨사오니 누르고, 분쇄하고, 짜내는 고통을 통해서 저희들이 올바른 소망을 이루어가기 원합니다. 주님, 내가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볼 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연약할 때,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에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 주님의 공로를 인하여, 그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을 오늘도 고백합니다.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쳐다보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나는 100% 죄인입니다. 즉시, 즉시 주님만 쳐다보게 도와주옵소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하신 주 예수님만 바라보게 도와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모든 문제를 이렇게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찾아가 주옵소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살아나기를 원합니다. 화평을 누리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 게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