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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대부흥을 다시/ 욘2:10-3:1/ 송구영신예배설교/ 2007-12-31
1907년 대부흥을 다시 욘2:10-3:1 솔개는 맹금류이면서도 30-40 년의 수명을 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어떤 솔개는 그보다 두배의 수명을 누리기도 한답니다. 솔개가 늙으면 부리가 구부러지고 깃털도 두꺼워져 날기가 어려워집니다. 이쯤되면 솔개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거나 6 개월 정도의 매우 고통스러운 갱생 과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갱생을 선택한 솔개는 산 정상 부근에 둥지를 짓습니다. 먼저 바위를 쪼아 부리를 깨뜨립니다. 그러면 부리가 빠지고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납니다. 그런 후 새로 난 부리로 발톱을 하나씩 뽑아냅니다. 극심한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솔개들은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독한 마음으로 제 발톱을 뽑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새 발톱이 돋아납니다.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면 솔개는 새 깃털을 얻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갱생한 솔개는 그로부터 30 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매일경제 신문에 우화경영이란 컬럼에 실린 정광호씨의 글에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조류학자는 솔개가 70 년 산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정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사람도 그렇게 해서 수명이 배로 연장이 된다면 자기 손발톱을 빼고 피부를 벗겨 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죽지 않고 수명이 연장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 재림 하실 때 죽은 몸이 부활의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됩니다. 할렐루야~ 2006 년 막바지 시간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은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새해를 맞으려고 합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동해로 몰려가 새해 아침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찬란한 빛을 바라보며 새해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전에 나아와 이렇게 새해 첫 시간을 예배합니다. 태양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을 받아주시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홈플러스 매장에 소원을 비는 나무가 있더군요. 카드에 소원을 적어서 나뭇가지에 매달게 해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매달아 놓았는지 카드를 매달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겹겹이 달아놓았습니다. 그런 소망나무가 소원을 들어줄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망을 달아 놓습니다. 인공연못 가운데 종지를 놔두면 사람들은 동전을 던집니다. 종지에 동전이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헛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전을 던집니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합당한 소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새해 결심은 대부분 건강에 대한 것과 재물에 대한 것과 가정 행복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결심들은 대부분 작심삼일입니다. 연초에만 반짝하다가 이내 옛 습성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그래서 영국 하트포드셔 대학의 연구팀이 작심삼일을 극복하는 5 가지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첫째, 한 가지만 결심하라. 이것저것 결심하다가 다 놓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둘째, 미리 실천하라. 마음먹었을 때 즉각 행동에 옮기는 것이 달성에 더 쉽습니다. 언제부터 하겠다고 미뤄두는 순간부터 그 결심은 멀리 도망가게 됩니다. 셋째, 작년에 했던 결심을 반복하지 말라. 한 번 실패한 것은 또 실패하기 쉽습니다. 꼭 이뤄야 할 목표라면 방법을 달리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넷째, 스스로 보상하라. 결심을 실천할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상을 주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다이어트를 목표로 했을 때 1 Kg 살이 빠지면 음악 CD 1 장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이 때 열량 높은 먹을 것을 선물하면 안 됩니다. 다섯째,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하라.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피하게 됩니다. 2007 년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 멋진교회는 어떤 각오를 다질까요? 우리 교단 총회에서는 새해 첫날부터 3 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진행합니다. 세이레 새벽기도회란 제목으로 전국에서 동시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문을 그저께야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쳐 준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희 교회는 이 세이레 새벽기도회는 부활절을 앞 둔 사순절 새벽기도회 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세이레 새벽운동은 우리나라가 1907 년에 평양에 독노회가 세워지면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그 때로 딱 100 년이 되는 해에 이를 다시 재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907 년은 일본이 정미7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시켜 한국의 경찰과 군대를 해산시키고 사실상 국권을 장악한 해입니다. 7 월에는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를 당했습니다. 그로부터 3 년 후 한일병탄이 되고 말아 500 년 조선왕조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습니다. 군대의 해산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계속되는 흉년과 기근 속에서 백성들을 약탈하는 일제와 탐관오리들로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황폐해져 갔습니다. 이렇게 국가적 난경과 민족의 애달픈 삶에 1907 년의 교회 부흥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습니다. 개인의 철저한 회개와 공동체 신앙의 결속이 다가오는 일제의 폭압에 맞설 수 있는 영적 힘을 비축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1907 년 1 월 2 일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겨울 남자 사경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남녀가 사경회를 따로 모였습니다. 전국에서 1,500 명 이상의 남자들이 모였습니다. 저녁집회 때 방위량 선교사가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 장의 말씀을 들어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프다는 예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교인끼리 싸우면 온 교회가 병든 몸과 같이 고통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기대한 만큼의 어떤 은혜는 없었습니다. 몇몇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지만 그저 별 다른 일이 없이 청중들은 돌아갔습니다. 이튿날은 주일이었기에 각자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대현교회의 예배에서 길선주 장로가 큰 능력에 사로잡혀 설교를 했습니다. 이 때 그는 죄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를 몸짓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몸짓 설교를 듣던 청중들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몇몇은 마룻바닥에 나뒹굴며 울며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 날 저녁에 다시 장대현교회에서 집회가 열렸습니다. 낮에 있었던 은혜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큰 기대를 하고 모였습니다. 그러나 집회는 차갑다 못해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월요일 저녁집회가 다시 열렸습니다. 이길함선교사가 집회를 인도했는데 설교 후 통성기도를 하고 몇 명이 신앙간증을 하고 찬양을 한 후 집회가 끝났습니다. 집회가 끝났지만 아쉬운 분들은 남아서 기도하고 돌아가라고 안내를 했습니다. 약 5-600 명 정도가 남아 자리를 정돈하고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기도하는데 그 기도소리가 마치 폭포수처럼 우렁찼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게 할 파도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기도하던 이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번갈아 자리에서 일어나 죄를 고백하며 주저앉기도 하고, 어떤 이는 몸을 바닥에 내 던지고,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면서 지은 죄에 대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 기도회는 새벽 2 시까지 이어졌습니다. 죄고백 후 서로 원수로 지냈던 사람들이 화해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장대현교회의 강유문은 같은 교회의 김장로에게 미워했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평소에 자존심이 강했던 강유문이 자기를 낮추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김장로는 사과를 받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화요일 저녁집회가 열렸습니다. 어제와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고 집회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에 남은 자가 역시 600 명 정도 되었습니다. 이들이 또 통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강유문의 사과에 대해 고개를 돌렸던 김장로가 벌떡 일어나 강단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교회 장로이면서도 강유문을 미워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 방위량도 증오해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발작하는 사람처럼 울부짖었습니다. 회중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한꺼번에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강유문과 김장로는 서로 얼싸안은 채 목 놓아 크게 울었습니다. 이제는 김장로가 방위량 선교사에게 다가 갔습니다. “목사님 나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겠습니까?” 이에 방위량선교사는 기도하려고 “아버지 아버지”를 두 번 불렀는데 더 이상 기도를 잇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수백명이 한꺼번에 일어나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벌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기도를 했습니다. 이 날 밤 모든 죄가 공개적으로 고백되었습니다. 미움과 증오심, 절도, 간통 등등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악이 낱낱이 고백되었습니다. 여성들의 집회는 네 곳으로 분산되어 열렸습니다. 이들의 집회에서도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큰 기쁨 속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사경회 집회는 끝났지만 성령의 역사는 그 때부터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장대현교회 수요일예배가 끝난 후 예배당에 남은 사람들이 통성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놀랍게도 교회에서 존경을 받던 주공삼장로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간음한 죄와 부적절하게 교회 재정을 유용한 사실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 세상에서 나처럼 무지막지한 죄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며 온 힘을 다해 손바닥으로 강단을 내리쳤습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주장로를 사람들이 감싸 안아 주면 위로해 주었습니다. 다른 교인들로 울면서 지은 죄들을 회개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평양의 여러 초 중등 학교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이 울면서 지은 죄를 고백하는 통에 예정된 시간에 예배를 마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특별한 집회가 평양의 여러 교회에서 한달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수천명이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평양에서 시작된 신앙각성과 큰 부흥은 평양신학교 학생들에게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전국에서 모여 온 학생들은 나누는 인사말이 ‘성령을 받았느냐?’였습니다. 개학 첫 주간에 75 명의 신학생 대부분이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 운동의 바람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평양의 교회 대부흥은 눈물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 성령이 임재하시면서 부흥의 불길이 번져나간 것입니다. 1907년 1월 2일부터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사경회가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월 14일 한밤중에 성령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신앙각성이 시작되었습니다. 1월 14 일은 멋진교회가 창립한 바로 그 날입니다. 100 년 전 이 날 성령의 역사로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번 2007 년에 맞는 멋진교회 창립 주일인 14 일이 마침 주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멋진교회는 남들보다 감회가 큽니다. 우리는 2007 년을 맞으면서 100 년 전 평양에서 일었던 대부흥운동이 다시 재현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나가 물고기 배 안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삼일 만에 살아난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가 물고기의 먹이가 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딴 길을 갔습니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 타고 간 배가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이 폭풍의 연고가 누구 때문인지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결국 요나는 바다의 제물이 되어 던져졌습니다. 풍랑은 곧 그쳤지만 요나는 물고기 밥이 되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요나를 삼킨 물고기는 아주 큰 물고기였습니다. 그래서 통째로 삼켜졌지만 뱃속에 공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지옥과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요나는 다른 먹이와 뒤엉켰습니다. 물고기 위장은 소화를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요동쳤습니다. 캄캄하고 냄새나고 한증막 같이 후덥지근했으며 끈적이는 소화액이 온몸을 뒤덮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죽지 않고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요나는 그곳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견뎠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진 생명이었지만 그의 기도는 점점 회개하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영혼까지 피곤한 중에서 실낱같은 생명의 끈을 잡고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 죽음의 구덩이에서 살려주시면 남은 생애 주님만 위해 살겠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나 물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해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내용이 요나서 2 장입니다. 그리고 3 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을 거역했다가 혼쭐이 난 요나에게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나 같은 자를 길이 참으시고, 다시 믿어주시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멋진교회는 두 주일 후에 창립 6 주년을 맞습니다. 지난 세월동안 우리가 이 만치 성장한 것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이보다 훨씬 부흥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리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다시 한 번 1907 년의 부흥이 재현되기를 소망하십시다. 멋진교회의 부흥도 역시 기도 외에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새해에는 멋진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먼저 엎드려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과오를 통회자복 해야 할 것입니다. 부흥의 비결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전도도 저절로 될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형통의 간증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다. 만나면 하는 인사가 성령을 받았느냐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직장과 사업에 성령의 은혜와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907년의 대부흥을 다시 한번/ 욘2:10-욘3:1/ 송구영신예배설교/ 2007-12-31
1907년의 대부흥을 다시 한번 욘2:10-욘3:1 솔개는 맹금류이면서도 30-40 년의 수명을 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어떤 솔개는 그보다 두배의 수명을 누리기도 한답니다. 솔개가 늙으면 부리가 구부러지고 깃털도 두꺼워져 날기가 어려워집니다. 이쯤되면 솔개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거나 6 개월 정도의 매우 고통스러운 갱생 과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갱생을 선택한 솔개는 산 정상 부근에 둥지를 짓습니다. 먼저 바위를 쪼아 부리를 깨뜨립니다. 그러면 부리가 빠지고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납니다. 그런 후 새로 난 부리로 발톱을 하나씩 뽑아냅니다. 극심한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솔개들은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독한 마음으로 제 발톱을 뽑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새 발톱이 돋아납니다.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면 솔개는 새 깃털을 얻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갱생한 솔개는 그로부터 30 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매일경제 신문에 우화경영이란 컬럼에 실린 정광호씨의 글에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조류학자는 솔개가 70 년 산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정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사람도 그렇게 해서 수명이 배로 연장이 된다면 자기 손발톱을 빼고 피부를 벗겨 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죽지 않고 수명이 연장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님 재림 하실 때 죽은 몸이 부활의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됩니다. 할렐루야~ 2006 년 막바지 시간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은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새해를 맞으려고 합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동해로 몰려가 새해 아침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찬란한 빛을 바라보며 새해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전에 나아와 이렇게 새해 첫 시간을 예배합니다. 태양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을 받아주시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홈플러스 매장에 소원을 비는 나무가 있더군요. 카드에 소원을 적어서 나뭇가지에 매달게 해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매달아 놓았는지 카드를 매달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겹겹이 달아놓았습니다. 그런 소망나무가 소원을 들어줄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망을 달아 놓습니다. 인공연못 가운데 종지를 놔두면 사람들은 동전을 던집니다. 종지에 동전이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헛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전을 던집니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합당한 소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새해 결심은 대부분 건강에 대한 것과 재물에 대한 것과 가정 행복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결심들은 대부분 작심삼일입니다. 연초에만 반짝하다가 이내 옛 습성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그래서 영국 하트포드셔 대학의 연구팀이 작심삼일을 극복하는 5 가지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첫째, 한 가지만 결심하라. 이것저것 결심하다가 다 놓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둘째, 미리 실천하라. 마음먹었을 때 즉각 행동에 옮기는 것이 달성에 더 쉽습니다. 언제부터 하겠다고 미뤄두는 순간부터 그 결심은 멀리 도망가게 됩니다. 셋째, 작년에 했던 결심을 반복하지 말라. 한 번 실패한 것은 또 실패하기 쉽습니다. 꼭 이뤄야 할 목표라면 방법을 달리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넷째, 스스로 보상하라. 결심을 실천할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상을 주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다이어트를 목표로 했을 때 1 Kg 살이 빠지면 음악 CD 1 장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이 때 열량 높은 먹을 것을 선물하면 안 됩니다. 다섯째,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하라.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피하게 됩니다. 2007 년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 멋진교회는 어떤 각오를 다질까요? 우리 교단 총회에서는 새해 첫날부터 3 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진행합니다. 세이레 새벽기도회란 제목으로 전국에서 동시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문을 그저께야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쳐 준비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희 교회는 이 세이레 새벽기도회는 부활절을 앞 둔 사순절 새벽기도회 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세이레 새벽운동은 우리나라가 1907 년에 평양에 독노회가 세워지면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그 때로 딱 100 년이 되는 해에 이를 다시 재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907 년은 일본이 정미7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시켜 한국의 경찰과 군대를 해산시키고 사실상 국권을 장악한 해입니다. 7 월에는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를 당했습니다. 그로부터 3 년 후 한일병탄이 되고 말아 500 년 조선왕조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습니다. 군대의 해산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계속되는 흉년과 기근 속에서 백성들을 약탈하는 일제와 탐관오리들로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황폐해져 갔습니다. 이렇게 국가적 난경과 민족의 애달픈 삶에 1907 년의 교회 부흥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습니다. 개인의 철저한 회개와 공동체 신앙의 결속이 다가오는 일제의 폭압에 맞설 수 있는 영적 힘을 비축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1907 년 1 월 2 일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겨울 남자 사경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남녀가 사경회를 따로 모였습니다. 전국에서 1,500 명 이상의 남자들이 모였습니다. 저녁집회 때 방위량 선교사가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 장의 말씀을 들어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프다는 예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교인끼리 싸우면 온 교회가 병든 몸과 같이 고통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기대한 만큼의 어떤 은혜는 없었습니다. 몇몇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지만 그저 별 다른 일이 없이 청중들은 돌아갔습니다. 이튿날은 주일이었기에 각자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대현교회의 예배에서 길선주 장로가 큰 능력에 사로잡혀 설교를 했습니다. 이 때 그는 죄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를 몸짓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몸짓 설교를 듣던 청중들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몇몇은 마룻바닥에 나뒹굴며 울며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 날 저녁에 다시 장대현교회에서 집회가 열렸습니다. 낮에 있었던 은혜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큰 기대를 하고 모였습니다. 그러나 집회는 차갑다 못해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월요일 저녁집회가 다시 열렸습니다. 이길함선교사가 집회를 인도했는데 설교 후 통성기도를 하고 몇 명이 신앙간증을 하고 찬양을 한 후 집회가 끝났습니다. 집회가 끝났지만 아쉬운 분들은 남아서 기도하고 돌아가라고 안내를 했습니다. 약 5-600 명 정도가 남아 자리를 정돈하고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기도하는데 그 기도소리가 마치 폭포수처럼 우렁찼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게 할 파도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기도하던 이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번갈아 자리에서 일어나 죄를 고백하며 주저앉기도 하고, 어떤 이는 몸을 바닥에 내 던지고,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면서 지은 죄에 대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 기도회는 새벽 2 시까지 이어졌습니다. 죄고백 후 서로 원수로 지냈던 사람들이 화해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장대현교회의 강유문은 같은 교회의 김장로에게 미워했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평소에 자존심이 강했던 강유문이 자기를 낮추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김장로는 사과를 받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화요일 저녁집회가 열렸습니다. 어제와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고 집회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에 남은 자가 역시 600 명 정도 되었습니다. 이들이 또 통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강유문의 사과에 대해 고개를 돌렸던 김장로가 벌떡 일어나 강단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교회 장로이면서도 강유문을 미워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 방위량도 증오해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발작하는 사람처럼 울부짖었습니다. 회중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한꺼번에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강유문과 김장로는 서로 얼싸안은 채 목 놓아 크게 울었습니다. 이제는 김장로가 방위량 선교사에게 다가 갔습니다. “목사님 나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겠습니까?” 이에 방위량선교사는 기도하려고 “아버지 아버지”를 두 번 불렀는데 더 이상 기도를 잇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수백명이 한꺼번에 일어나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벌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기도를 했습니다. 이 날 밤 모든 죄가 공개적으로 고백되었습니다. 미움과 증오심, 절도, 간통 등등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악이 낱낱이 고백되었습니다. 여성들의 집회는 네 곳으로 분산되어 열렸습니다. 이들의 집회에서도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큰 기쁨 속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사경회 집회는 끝났지만 성령의 역사는 그 때부터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장대현교회 수요일예배가 끝난 후 예배당에 남은 사람들이 통성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놀랍게도 교회에서 존경을 받던 주공삼장로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간음한 죄와 부적절하게 교회 재정을 유용한 사실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 세상에서 나처럼 무지막지한 죄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며 온 힘을 다해 손바닥으로 강단을 내리쳤습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주장로를 사람들이 감싸 안아 주면 위로해 주었습니다. 다른 교인들로 울면서 지은 죄들을 회개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평양의 여러 초 중등 학교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이 울면서 지은 죄를 고백하는 통에 예정된 시간에 예배를 마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특별한 집회가 평양의 여러 교회에서 한달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수천명이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평양에서 시작된 신앙각성과 큰 부흥은 평양신학교 학생들에게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전국에서 모여 온 학생들은 나누는 인사말이 ‘성령을 받았느냐?’였습니다. 개학 첫 주간에 75 명의 신학생 대부분이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 운동의 바람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평양의 교회 대부흥은 눈물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 성령이 임재하시면서 부흥의 불길이 번져나간 것입니다. 1907년 1월 2일부터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사경회가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월 14일 한밤중에 성령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신앙각성이 시작되었습니다. 1월 14 일은 멋진교회가 창립한 바로 그 날입니다. 100 년 전 이 날 성령의 역사로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번 2007 년에 맞는 멋진교회 창립 주일인 14 일이 마침 주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멋진교회는 남들보다 감회가 큽니다. 우리는 2007 년을 맞으면서 100 년 전 평양에서 일었던 대부흥운동이 다시 재현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나가 물고기 배 안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삼일 만에 살아난 이야기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가 물고기의 먹이가 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딴 길을 갔습니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 타고 간 배가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이 폭풍의 연고가 누구 때문인지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결국 요나는 바다의 제물이 되어 던져졌습니다. 풍랑은 곧 그쳤지만 요나는 물고기 밥이 되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요나를 삼킨 물고기는 아주 큰 물고기였습니다. 그래서 통째로 삼켜졌지만 뱃속에 공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지옥과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요나는 다른 먹이와 뒤엉켰습니다. 물고기 위장은 소화를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요동쳤습니다. 캄캄하고 냄새나고 한증막 같이 후덥지근했으며 끈적이는 소화액이 온몸을 뒤덮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죽지 않고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요나는 그곳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견뎠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진 생명이었지만 그의 기도는 점점 회개하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영혼까지 피곤한 중에서 실낱같은 생명의 끈을 잡고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 죽음의 구덩이에서 살려주시면 남은 생애 주님만 위해 살겠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나 물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해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내용이 요나서 2 장입니다. 그리고 3 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을 거역했다가 혼쭐이 난 요나에게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나 같은 자를 길이 참으시고, 다시 믿어주시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멋진교회는 두 주일 후에 창립 6 주년을 맞습니다. 지난 세월동안 우리가 이 만치 성장한 것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이보다 훨씬 부흥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리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다시 한 번 1907 년의 부흥이 재현되기를 소망하십시다. 멋진교회의 부흥도 역시 기도 외에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새해에는 멋진교회가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먼저 엎드려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과오를 통회자복 해야 할 것입니다. 부흥의 비결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전도도 저절로 될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가 넘쳐날 것입니다. 형통의 간증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다. 만나면 하는 인사가 성령을 받았느냐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직장과 사업에 성령의 은혜와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2년을 돌아보면서/ 딤후4:5-8/ 송구영신예배설교/ 2002-12-31
2002년을 돌아보면서 딤후4:5-8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와피"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처음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습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처음에는 와---하다가 얼마 안가서 피---하고 끝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는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태산이라도 넘어뜨릴 기세로 모두 와-- 하고 뛰어 나가지만, 상대가 "어느 놈이냐 나와" 하면 풍선 바람 빠지듯 피-- 하고 다 도망가고 만다는 뜻입니다. 시작 할 때는 멋진 계획도 세우고 또 실천도 해 봅니다.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서 희망을 걸어 봅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가면 조금씩 미루다가 이유를 멋지게 대고는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에게 '끝이 좋아야 한다' 고 말하게 됩니다. 시작과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 출발은 조금 부족하였을 지라도 끝을 잘 마무리하면 그 부족함을 메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끝이 좋으면 지난 실수나 허물을 묻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2002년도에 희망과 소망을 가슴에 안고 승리를 향하여 출발 하였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한해 마지막 주일을 맞이 하였습니다. 마지막 용기를 내어 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여 2002년이 후회 없는 한해로 여러분의 생애에 남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처음에는 비천하게 볼품없이 시작했지만 끝을 아름답게 장식한 모범적인 신앙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들판의 양때 속의 다윗은 너무 초라했습니다. 사무엘이 왕을 찾으러 이새의 집에 왔을 때도 초대받은 자리에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끝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대왕이 되었고 성군이 되었습니다. 또 주님 보시기에 엉망인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어 그의 끝은 잊을 수 없는 세계속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멋있는 출발은 중요합니다. 진행해 나가는 과정 또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시대에 출발 했습니다. 2002년도에 성도로서, 집사로서, 권사로서, 장로로서 달린 경주는 이제 끝이 보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끝을 맺느냐 하는 것이 2003년을 향하여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도바울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몇 번이고 죽일 놈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고 주의 종들을 죽이고, 교만하고 자만했던 사울은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늘 말씀에서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인생길을 달려왔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렇게 멋있는 고백을 남길 수 있었는지 교훈 삼으려고 합니다. "나는 한 해 동안 주님이 허락하신 선한 싸움에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나는 한 해 동안 주님이 주신 사명 부여잡고 최선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나는 한 해 동안 믿음의 세마포에 때 안 묻히려고 생명을 다했습니다." 여러분도 한 해 마지막을 보내면서 이런 고백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첫째, 당신은 선한 싸움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가? 본문 7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는 인생 삶 속에서 끝없는 싸움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싸움 가운데는 시간만 낭비하고 힘만 빠지고 아무런 유익도 없이 끝나는 싸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혈과 육의 싸움은 그만 합시다. 생존을 위한 싸움은 마귀의 종이 되어 철없을 때 이야기이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는 영생을 위한 싸움에 땀과 피를 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올 한해 어디에다가 그 많은 시간을 투자 하였습니까? 자신의 높음을 과시하고, 사람에게 이기려고 미워하고 질투하면서 원수 맺으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아무런 유익도, 가치도 없는 곳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바울처럼 마귀와 싸워야합니다. 죄악과 싸우고 불의와 싸워야합니다. 경기에서 우리나라 축구팀과 일본 축구팀이 싸워서 우리나라 축구팀이 이기면 운동장에 나가 뛰지 않아도 우리는 일본을 이긴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전쟁에서 싸워 승리했으면 여러분의 가정의 온 식구가 마귀와 싸워 승리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올 한해 마귀와 싸워 승리한 공이 있으면 하나님은 분명히 아름다운 승리의 깃발을 여러분의 가정에 꽂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한해 부끄러움 없는 선한 싸움을 남들에게 미움을 받아도, 조롱을 받아도 힘껏 싸웠다면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승리의 훈장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좋아하는 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싸우지 못하고, 내가 좋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여러분은 후회 될 것입니다. 내년에는 응답의 열매를 기대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 해 마무리 지으면서 선한 싸움에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습니까? 괜한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쓸데 없는 데 신경질내고 시간만 허비하였기에 마지막 가는 거룩한 주일 아침, 진정 후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당신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려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가? 7절에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여기 '달려갈 길'은 '정해진 코스'(Course)를 말합니다. 경주하는 선수가 정해진 코스를 달려야 하는 것처럼, 인생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생의 코스를 달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의 길을 다 달리고 그 모든 사명과 임무를 남김없이 수행했다'는 가슴 벅찬 보고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신에 넘치는 고백입니까? "나는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두려울 것이 없었고, 거침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길은 원거리 경주요, 또 장애물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풀 코스(Full Course)를 완주했다는 것입니다. 42.195Km를 완주한 마라토너와 같았습니다. 여러분, 사실 [바울]에게 장애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육체의 질고가 있었습니다. 그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동족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여행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사탄의 끈질긴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방해, 장벽, 가난, 고통, 질병과 정치적 음모와 비밀 결사대의 추적, 도적의 위험 속에서도 끝까지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명의 코스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명의 코스를 다 달려가야 합니다.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끝이 다할 때까지 우리의 수고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디까지 달렸습니까? 아직 끝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 달렸다고 인정하시기까지 우리의 달리기는 결코 멈춰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주신 사명이기에 순간마다 주님께 물어 보았습니까? 주님이 나를 믿고 주신 사명 이렇게 감당하면 잘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자주 물어 보기나 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전개 되고 있는지 깊이 생각도 한번 안하고, 주어진 직분가지고 주님 뜻 한번 제대로 물어 보지도 아니하고 내 생각으로 주님 주신 고귀한 직분을 사용하지는 아니했습니까? 한 해를 결산 하면서 주님이 여러분을 믿고 주신 사명을 가지고 후회없이 감당했습니까? 여러분은 사명을 맡겨주신 주님께 어떤 보고를 하시렵니까? 셋째, 당신은 믿음의 법을 깨지 않으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 7절 " 믿음을 지켰으니"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나 임직을 받을 때 서약를 합니다. 이는 서약한 대로 지키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것으로 이는 믿음을 지키지 못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많이 아멘, 아멘 하고 대답을 하였습니까? 그러나 그 아멘한 말씀대로 살아오지 못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의 신앙의 아름다운 세마포에 때를 묻힌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이 해, 깨끗이 씻고 내년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삶에는 룰이 있습니다. 규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믿음의 룰이 있습니다. 그 룰을 깨면 안 됩니다. 내가 믿음의 룰을 지키지 못하면서 남들을 지도할 수가 없음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반칙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반칙을 하면 화내고 꾸중하며 불평을 늘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믿음의 룰을 지키고, 아래로는 사람들과 믿음의 룰을 지켜 십자가의 완성을 이루어야 하늘에서 준비된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하나만은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이 얼마입니까? 믿음에 때 묻히지 않으려고 서러움을 당해도 참았습니까? 믿음의 뿌리 흔들리지 않으려고 유혹도 뿌리쳤습니까? 여러분은 이 한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겠지만, 혹 믿음의 세마포에 때라도 묻을까봐 참으셨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02년도도 영원히 지구의 역사에서 사라지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 장을 넘기기 전에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고백을 여러분도 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혹 여러분이 자신만을 위하여 여기까지 뛰어 왔다면 부끄러워하고 고개를 숙이십시오, 그리고 이 해가 다가기전에 주님 앞에 다짐합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을 닮아 가겠노라고 서원 합시다. 한 해 마지막 주일에 결산을 해야 하듯이, 우리에게 언젠가 주님 앞에 설때 주님께서 결산을 보자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오늘의 다짐은 훗날 예수님 앞에 결산 할 때 영광스러운 존재로 칭찬을 받게 할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낙오 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분명히 끝나야 할 유한 인생의 삶에 후회 없는 인생으로 마지막 멋있는 보고를 주님께 드리므로 아름다운 의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가야 할 길을 가는 사람들/ 눅13:31-33/ 송구영신예배설교/ 2010-01-01
가야 할 길을 가는 사람들 눅13:31-33 우리는 새해 2010년을 맞이하였습니다. 기축년을 보내고 경인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집에서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깊습니다. 송구영신예배라는 것이 교회력 가운데는 없지만, 모든 교회들이 이 예배를 소중히 알고, 우리 한국교회의 중요한 예배로 정착되고 있습니다. 먼저 한 해를 회고하고, 돌이켜 보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한해를 마감하면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며, 이 예배는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주고, 한 단계 끌어올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해를 말씀과 기도 속에서 맞이하는 것은 한 해를 의미 있게 하나님 앞에서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는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한 해 동안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일들도 있고,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미흡한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괜찮아”라고 말해주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말해봅시다. 지난 해 세상을 떠난 유명 인사 중에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인 장영희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 그 분의 유작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그 분이 평생을 살아오며 자기 인생에서 가장 용기가 된 말이 있다면, ‘괜찮아’라는 말이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몸이 불편하여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없을 때에, 지나가던 깨엿장수가 미소를 지으면서 ‘괜찮아’라고 말해준 것이 자기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주일 밤에는 ‘도전 골든벨’을 시청하는데, 그 날에 골든벨을 울린 학생이 나오면 얼마나 흐뭇한지... 마치 내가 골든벨을 울린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도 최후의 1인으로 남아서 48번, 49번 문제 난이도가 아주 높은 문제를 풀다가 그만 정답을 쓰지 못하고 “친구들아 미안해”라고 쓰고 답판을 들고 서 있는 학생을 봅니다. 그 때에 온 학생들이 뛰어나오면서 최후의 1인에게 격려하는 말이 멋이 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이었습니다. ‘괜찮아’라는 말에는 ‘너는 최선을 다한 거야, 다음에 골든벨을 울리면 되는 거야.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잖아’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옆에 앉아 있는 성도들에게 “괜찮아”라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송구영신예배는 성서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예배입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해묵은 문제는 새해로 넘기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2009년의 일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든지 해를 넘기지 말고, 연말에 마무리를 짓고 새해를 맞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용산참사의 문제도 연말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결과 잘 마무리가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 풍속에 섣달 그믐날을 수세(守歲)라고 하여 집 안팎에 불을 밝히며 새벽까지 자지 않고 밤을 지새우는데, 보통 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집안 구석구석에 등촉을 밝히고 밤을 새우며 묵은해를 보냈습니다. 이 수세라는 풍습을 ‘해지킴’이라고 하였고, 수세(守歲), 또는 별세(別歲)를 지킨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에는 어른들로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했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을 ‘눈썹 세는 밤’이라고 불렀습니다. 옛 사람들은 섣달 그믐날 밤을 제야(除夜) 또는 제석(除夕)이라고 하여 한 해를 돌아보면서 묵은해를 의미 있게 보냈습니다. 정월 초하루는 설날이라고 하여 연시제를 지냈으며, 집안과 동네의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설날에 세배하러 온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대접하였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덕담을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수세를 보내던 풍속이 있었기에, 한국교회에는 송구영신 예배가 자연스럽게 들어와 자리 잡았습니다. 서구의 교회에는 별로 없는 예배가 한국 전통사회라는 토양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들어왔습니다.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얼마 되지 않은 1887년부터 송구영신예배를 드린 것을 보면 아주 일찍이 들어온 예배입니다. 1887년 12월 31일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새문안장로교회와 아펜젤러 목사님의 정동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송구영신예배를 드린 것이 최초의 예배였다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신년절기가 있었는데, 나팔절이라는 명절입니다. 나팔절은 유대력으로 일곱째 달인 티쉬리월 초하루에 지켰는데, 이 날에는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나팔을 불어 신년축제의 기쁨을 알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민간력에는 이 7월 티쉬리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력은 3월의 니산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습니다. 나팔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하면서 성회로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날에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포로 후기의 느혜미야 총독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나팔절에 학사 에스라를 모셔오고, 온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새롭게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일곱째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느8:2)라고 했습니다. 정초는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면서 새롭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헌신과 섬김을 결단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월남 이상재선생님은 유머감각이 뛰어났습니다. 유머 감각이 넘치고 기지가 넘치는 선생님은 ‘만년청년’으로 불리었습니다. 당시 보수적인 인사들은 “나이가 지긋한 분이 체통을 지키지 않는다.”면서 이상재선생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청년더러 노인이 되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청년들과 교류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청년으로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노인이 되었다고 하여 노인으로 살아가지 말고, 청년처럼 활발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그가 황성 기독청년회 YMCA에서 연설할 때에 일본의 순사들이 곳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옛날 순사들을 ‘나리’라고 불렀습니다. 이상재선생님이 연설하면서 첫 마디가 “여기에 개나리가 많이 피었습니다.”라고 하자 실내는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순사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유머감각이 뛰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설교에 나타나는 유머를 보면, 사람들이 아주 쉽고 흥미 있게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당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에게 헤롯왕의 음모를 알려주면서 헤롯의 영지를 벗어나 떠나라고 권고했습니다. 헤롯왕은 세례요한을 죽인 사람이었지만 예수님도 죽일 의사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대하여 아주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자기 앞에서 기적을 행해주기를 바란 사람입니다. 그러나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사회적인 안정을 위하여 예수님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혹시 종교 계파간의 어떤 마찰이나 소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압박할 수도 있었습니다.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음모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전해준 일에 대하여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좋게 보려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은 헤롯을 향하여 “여우”라는 말을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고 봅니다. 여우라는 짐승은 간교하고 교활하여 고대 랍비들의 문헌에는 간교함의 대명사로 기록되었습니다. 탈무드에는 여우는 가장 게으른 동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했습니다. 헤롯왕은 교활하였고,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협박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당신의 길을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헤롯이 협박하는 정도는, 예수님이 가시려고 하는 길에 지극히 하찮은 일이었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늘과 내일, 그리고 제 삼일”이라는 날짜가 주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내일, 제 삼일은 문자적으로 3일 간, 오늘, 내일 모레를 말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3일 후에 헤롯의 관내를 떠나신다는 뜻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말을 격언적인 표현으로 보고, 3년 공생애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상징적인 해석으로 오늘은 현재를 말하고 내일은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를 말하고, 제 3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역을 완성하실 때까지를 말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당신의 생애를 완성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알듯 모를 듯 상징적이고, 영적이고, 무한한 지혜가 담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야 신비하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면서도 진리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33절입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은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강인한 정신과 사명에 충실하려는 자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헤롯이 위협하고 있다고 하여, 예수님이 가시려는 길을 수정하거나 변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상황도 주님이 가시는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 그리고 모레는 주님이 하시려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 고치시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당신의 가실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대속의 위업을 이루시겠다는 의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눈물로 말씀하시는 비통한 예언이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당신의 운명을 내다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갈릴리에서는 위협이 없고, 당신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마지못해 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은 당신이 원하여 그 길을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요10:18에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하셨기에 순전히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신 것이었습니다. 헤롯의 핍박이 있다 하여도 예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길을 가시겠다는 확신에 찬 말입니다. “가야 하리니” 라는 말은 “가야만 한다”는 말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해야만 한다”, 의무와 책임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한번 되돌아보고, 정말 제대로 살아온 길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의 인생길을 잘 걸어오셨습니까? 아니면 정말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습니까? 그래서 후회가 되십니까? ‘길’이란 성경에서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인생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란 하나의 길이며 하나님은 이 길을 감찰하시고 있습니다. 이 길은 인간의 삶의 방식과 생활 태도를 말합니다. 길이란 목적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가야만 하는 목표점을 향하여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목표를 말하지 않고 길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목표와 길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야하는 길을 가리라고 하시는 것도 당신이 목적하는 바를 성취하겠다, 당신이 살아가시는 방법을 변경하지 않고 고수하리라는 의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든지 그것은 우리의 자유이지만, 그 길의 결국, 마지막은 자기의 몫이요, 자기의 책임입니다. 사도들의 권면하시는 말씀은 주의 일에는 흔들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심을 다하면 누구나 주역입니다.”라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심을 다한다면 누구나 주역입니다. 그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 명의 벽돌공이 부지런히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벽돌공이 대답했습니다. “벽돌을 쌓고 있어요.” 두 번째 벽돌공이 대답했습니다. “시간당 9달러 50센트 자리 일을 하고 있어요.” 세 번째 벽돌공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요? 나는 지금 세계 최대의 예배당을 짓고 있어요.” 라고 했습니다. “이 세 사람의 미래는 어떻게 변했을까요?”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데이비드 슈어츠의 ‘크게 생각하면 크게 이룬다’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벽돌을 쌓거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일당을 버는 사람일 지라도 벽돌을 성의 없게 쌓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통하여 세계 최대의 예배당이 지어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는 경우라면 벽돌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는 그 손길에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갈 것입니까? 그 결과는 다른 벽돌공들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지라도 혼신의 힘을 다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에 회자되고 있는 명언 가운데 감동주는 글이 있습니다. “바보는 천재를 이기지 못하고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며,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재도 아닙니다. 그러나 노력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다른 사람이 결정해줄 수 없습니다. 나의 인생을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닙니다. 한 해를 살아가는데, 매사에 성심과 성실로 살아간다면 세상의 그 어떤 분야에서도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대한 생애를 살아간 사람들은 오직 한 길, 부르신 소명에 충실한 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한 눈 팔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사도행전20:24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걸어가는 길이란 말도 싫어하였습니다. 그의 가는 길에서 달려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대통령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의 기도 생활이나 경건생활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수행한 흑인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에서 많은 전문가들이 북군의 패배를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이긴다고 해도 쉽지 않은데, 북군의 패배를 말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각료들조차 ‘이 전쟁은 하나님의 진노요, 저주이며, 하나님은 우리 편에 계시지 않으니 휴전하자’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신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가를 확인합시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기만 하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구 편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편에 서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 어떤 길에 서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달리 생각하실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 그분이 길이 되시기에 주님이 살아가신 방법대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 우리도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길이란 방향이 있어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내일과 연관되어 있고, 내일은 모레와 또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것으로 내일을 살고, 내일을 살아가는 것으로 계속하여 모레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보람 있게 살아야 내일도 보람 있고, 모레도 알차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결단하십시오. “내가 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야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는 그 길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간증이 풍성한 교회/ 갈2:20/ 송구영신예배설교/ 2008-12-31
간증이 풍성한 교회 갈2:20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름을 남길 것이 아니라, 위대한 간증을 남겨야 한다.” 간증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 간증을 남겨야 한다. 성경적인 간증은, 감정적 흥분상태에서 생기는, 변화를 말하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분명한 체험, 말씀 속에서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분명한 체험을 말한다. 이러한 체험적인 신앙이 있을 때,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뒤로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성경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남긴 위대한 간증들이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됨을 체험하고 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간증을 듣는데 만족하지 말고, 간증의 주인공이 되어야, 신앙생활을 재미있게, 또한 확실하게 할 수 있다. 1970년대 ‘신과 인간’, ‘영성과 이성’을 놓고, 기독교계와 격한 논쟁을 펼친, 당대 최고의 석학이며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 전 교수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금년 7월 23일 일본 도쿄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직후 “자신은 자연인으로 태어났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신령으로, 영성으로 태어난 오늘의 기억은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지금까지는 이성과 지성, 의지로 살아왔는데, 그것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잘 모르는, 또 다른 영적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내가 크리스천이 되리란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이 넌-크리스천에서 크리스천이 됐다. 이건 내게 있어서, 어떤 기적보다 큰 기적이라고 했다. 무신론자였던 그가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이 교수의 딸 장민아씨는, 미국의 변호사이며 LA지방 검사였다. 그러나 1992년 갑상선 암 판정을 받고 수술했지만, 재발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유치원에 들어간 민아 씨의 작은 아들이 ‘주의력 결핍 행동 장애’로 판명이 났다. 딸 민아씨는 자신의 몸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아들의 치료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 쏟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눈이 점차 흐릿해졌다. 망막이 손상돼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어령 명예교수 부부는, 급히 미국으로 건너갔다. 눈이 안 보여 설거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딸을 보고, 두 부부의 마음은 애가 탔다. 그는 동네의 한 작은 교회를 찾아가, 무릎 끓고 기도했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딸에게서 빛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딸과 함께 한국에 돌아 온지 얼마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교수의 딸인 민아 씨가 점차 시력을 회복하더니, 정상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는 망막이 다 나았다고 진단했다. 또한 암도 치료받았다. 이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민아 씨의 눈물의 기도로, 아들의 병이 완치되었다. 이렇게 딸과 손자의 병이 치유되는 과정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남의 일이지만 얼마나 신나고 좋은가? 우리교회가 2008년도에는, 간증이 풍성한 교회가 되기 원한다. 그러면 어떠한 간증을 남겨야 할까? 1. 십자가의 죽음을 간증하자(20上).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같이 죽었다. 따라서 자신이 죽었다는, 분명한 경험이 있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새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은 신앙생활에 실패하여, 믿음의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기 전, 옛사람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려면, 먼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육신의 뜻대로 살아온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십자가뿐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거치지 않은 회개는, 모두 다 거짓 회개일 뿐이다. 한 죄인이 십자가에서, 옛사람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남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구원받음으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수는 없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다. 구원받았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축복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저절로 가정에 평화가 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평안과 축복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다. 우리 가정에 평안이 없거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구원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 없는 성경은, 세속 종교의 경전에 불과하며,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세속 종교에 불과하다. 십자가 없는 체험은, 죽은 정통, 죽은 교리, 죽은 교회를 초래한다. 진정한 회개는, 세상을 포기하고, 십자가로 나아가야 한다. 이어령 전 장관 딸, 장민아 집사 간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내 자아가 죽으니,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았어요. 아이의 병이 낫지 않아도, 내가 시각장애인으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넉넉한 은혜를 알았거든요.” 바로 이런 모습이,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한 자의 삶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죽은 사람은 화를 내지도 않는다. 죽은 사람은 남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욕심도 없다. 높은 자리를 탐하지도 않는다. 자기 의지가 없기에, 남이 시키는 대로 순종한다. 낮은 자리에 겸손히 누워있다. 우리는 율법을 향하여 죽은 사람이기에, 내 생각과 기준으로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면 안 된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생각하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이해가 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그것이 틀린 것은 결코 아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상대방을 내 생각에 맞추려 하지 말고, 상대방의 다른 생각을 ‘아! 내 생각과 다르구나!’하고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의 법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사랑이 많고 좋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믿기 전의 마귀의 속성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지, 신앙생활도 더욱 잘 해야지,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 교회 봉사도 많이 해야지 마음을 먹는다. 그러다 은혜가 떨어지면, 마귀의 속성이 금방 드러나, 낙심하고, 좌절하고, 믿음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구원받은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의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살아가려는 나를 죽여야 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가 죽어야 산다. 내가 죽어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산다. 또한 내가 속한 공동체가 산다. 바울처럼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2.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간증하자(20中).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말씀을 보다 쉬운 말로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다. “나는 산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아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해 왔던 옛사람이 죽었으니, 이제 새로운 생명, 그리스도가 나를 지배하는 생애가 전개된다는 말씀이다. 이 새로운 생명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임재를 의미한다. (롬8:9)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성령님께서 나를 지배하셔야 한다. 믿는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육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면, 사는 방식이 잘못된 사람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확실히 자기 자신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나라고 하는 육의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살아계셔서, 마음과 생각을 붙잡아, 좋은 생각, 좋은 일을 하도록 만드신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니까, 생각과 생활 속에서 주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면, 주님의 능력을 힘입게 된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D.L 무디가 사용한 성경을 보면, 온통 T자와 P자로 표기되어 있다. “T자는 Tried요, P자는 Proved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시도했더니, 이 말씀이 입증되어진 말씀 위에는 T자와 P자를 적어 놓았다고 했다. 옛날에 아주 지독한 구두쇠 부자 영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구두쇠 영감님이 회갑을 맞게 되었다. 그래서 종들은 ‘회갑 날이니까 오늘 하루는, 잘 먹고 잘 쉴 수 있겠지’하고, 다들 기대를 잔뜩 했다. 그런데 이 지독한 영감님은, 그 날조차도 쉬지 못하게 하면서, 종들에게 새끼를 꼬라고 하였다. 그것도 가늘고 길게 말이다. 그러자 종들이 투덜댄다. “오늘 같은 날 무슨 새끼를 꼬냐!”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이, 그 새끼를 가늘고 길게 꼬라는 말에 순종했다. 잔치가 다 끝난 그날 저녁에 이 구두쇠 영감님이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꼰 새끼를 가지고 오너라. 그리고 거기다가 너희가 끼울 수 있을 만큼, 엽전을 가득 끼워 가지고 가서,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라.” 새끼를 제대로 안 꼰 사람들은, 엽전을 제대로 가져가지 못했다. 그러나 가늘고 길게 꼬았던 사람은, 많은 엽전을 끼워 가지고 나가서, 잘 살았다고 한다. 우리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어려운 난관에 부딪힐 때도, 늘 주님께서 주인이기에, 주인 되신 하나님께 부탁하면, 주인이 돌보아주신다. 모르스 부호는 가장 쉽고 유용하게 만들어진, 전신 부호로, 1832년부터 인공위성통신으로 대치되기까지, 주요 해상구조신호로 사용되었다. 이 모르스 부호는 사무엘 모르스 교수가 발명했는데, 하루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 교수님은 발명품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중단하신 적은 없나요? 예! 여러 번 있었지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셨나요?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고, 그로 인해 모르스 부호를 발명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축복을 주신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이다. 모르스 교수가 모르스 부호를 발명한 뒤, 제일 먼저 보낸 전문이, 잠언3장 5-6절이었다고 한다.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런 위대한 신앙인이기에, 하나님이 놀라운 전신부호를 발명하게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사용하게 만들어 주셨다. 우리의 삶의 주권은 주님께 있다. 우리 인생이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 주님이 주권자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고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형통한 길로 인도하신다. 이런 사람들이 되시기 바란다. 3.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을 간증하자(20下).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을 직역하면, “믿음 안에서 나는 산다. 하나님의 그 아들의, 나를 사랑하신 자,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자의”라는 말씀이다. 즉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사는 사람은, 아름다운 간증이 있다. 우리 인생에는 무거운 짐들이 많다. 사람마다 조금씩 달라도, 모두 다 인생의 무거운 짐들이 있다. 이 모든 짐을 나 혼자 지고 가려고 하면, 교만이고, 불신이다. 주님께 맡기며 사는 것이 믿음이다. 주님은 우리의 실수와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실수를 복으로 바꿔주시는 분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이런 간증을 남기도록 만들어 주신다. (1) 여기까지 도와주신, 에벤에셀의 은혜 우리 성도의 과거를 한 마디로 하면 에벤에셀이다. (삼상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사무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여호와의 도우심에 감사하며, 미스바와 센 사이에 에벤에셀의 돌을 세웠다. 우리도 지금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에벤에셀의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 보자. 우리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사고의 위험, 질병의 위험, 생계의 고통, 부부의 갈등, 자녀의 고통 등등 정말 많다. 그런데 우리가 잊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역경과 고통 속에서 살아왔나요? 영적으로는 또 어떤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 신앙생활의 방황, 시험으로 인한 위기…, 어찌 다 열거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와주셨고, 지켜주셨다. 구원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짐은, 우리의 자격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받았을 뿐이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는, 분명히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 (2)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 성도의 현재 모습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동행하심이 없이는 설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다. 포도나무를 떠난 가지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열매 맺는 가지일 뿐이다. 마지막 임종을 하면서 웨슬리 목사님은 “내 평생에 내가 가장 좋았던 것은, 나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신앙인은, 무슨 일이 있든지 담대하고 용감하며, 환경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령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다. (3) 앞날의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시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 성도들의 미래의 고백은,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는 확신이다. 아브라함의 장래 길을 인도하셨듯이, 우리의 장래도 여호와께서 인도하시고, 준비하심을 믿어야 한다. 인간은 아무도 얼마를 살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살아야할 미래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자는, 아브라함의 뒤에 수양을 예비해두신 여호와 이레의 복이 앞날에 있다. 성도들은 미래를 염려하면 안 된다. 과거에도 함께 하시고, 지금도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장래에도 함께 하심을 믿고 전진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등불과 같이 인도하신다. 등불은 비록 전방 2m 이상은 비춰주지 못하지만,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등불도 전진하면서 길을 밝혀준다. 결론이다. 올해도 참 힘들고 어려웠지만, 지금까지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잘 살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며, 내 멋대로 살아온 일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죄송할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이르게 해주셨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수가 있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들을 도와주시는 분이다. 사자굴 속의 다니엘도 구원해 내셨고, 풀무불 속에 던짐을 받은 그의 세 친구도 구원해 주셨다. 문둥병자도 고쳐주셨고, 귀신에게 끌려서 무덤 사이에 살던 자도 고쳐 주셨고, 무덤 속에 장사된 나사로까지 살려주셨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경험,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체험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란다.
감사(感謝)하는 성도/ 시107:1-9/ 송구영신예배설교/ 2000-12-31
송구영신 예배 시107:1-9 1.감사(感謝)하는 성도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으로 블레셋을 물리친 후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에벤에셀이란 기념비를 세우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새 천년, 2000년을 희망의 돛을 높이 올리고 힘차게 출발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65일이 지나 우리는 한해의 끄트머리에 와 있습니다. 지난 365일 동안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험난한 세상을 헤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늘 시인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1) 구속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1,2) 하나님이 시인을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금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건강주셨고 온갖 위험 속에서도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여기까지 연장해 주셔서 새 천년의 성탄절을 지냈고 21세기를 마지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연초에 우리 나라는 IMF를 졸업했다고 해서 잘됐다 했더니 년 말에 와서 보니 아닌 것 같습니다. 희로(喜怒)애락(愛樂)의 인생을 살면서 금년은 희로 시작해서 노로 끝나는 노동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셨고 생활에 복을 주셨고, 일터에 복을 주셨고, 교회에 복을 주셨습니다. 또 우리의 가정에 복을 주셨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도 감사하지만 최고로 감사한 것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죄는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죄인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죄인에겐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구원받게 하신 은혜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141-5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값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찬송하며,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8)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과 민족을 들어 쓰십니다. 감사하지 않고 귀하게 쓰임 받은 개인이나 민족이 없습니다. 2)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9)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근심 걱정 고통 중에 기도할 때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시인은 그런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더 축복하십니다. \"감사는 벽을 향해 공을 던지는 것과 같아서 자기에게로 반드시 돌아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불행은 감사를 모르는데 있습니다. 감사한일을 주어도 원망하고, 불평만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은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면 건강한 영혼이 됩니다. 감사가 죽으면 모든 것이 다 죽어버립니다. 감사가 살면 모든 것이 다 살아납니다. 3) 하나님이 바른길로 인도하셨습니다.(7) 하나님은 그 백성을 바른길로 인도하십니다. 안전하게 거할 성에 이르게 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인도하셔서 홍성교회에 다니게 하셨습니다. 지상에 교회가 많지만 우리는 바른 교회, 좋은 교회가 되기를 갈망하는 교회입니다. 바른길로 살아가는 성도는 건강하며, 넘치는 소망으로 살게 됩니다. 2000년 한해를 살았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참 감사합니다. 2001년에도 더 큰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2. 철저히 회개(悔改)하는 성도 혹시 지난 1년 하나님 앞에서 잘 못 산 것이 있으면 묵은해를 보내면서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까지 혼자 고민해야할 죄, 아내에게도 말못할 죄, 남편도 모르는 죄, 부모도 모르는 죄, -하나님께 회개합시다. 조용히.................. 3. 성찬에 참여하자 주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회개하고 주님의 거룩한 상에 참여합시다. 성찬의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분병, 분잔 -------------------------------------------------------- 2001. 1. 1. 00시 시보 할렐루야 .... 찬양하라 내 영혼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전후좌우 -------------------------------------------------------- 4. 새 시대를 위해 준비된 사람 성경: 히 11:24-26 우리는 새 시대, 새로운 세기 21세기를 맞았습니다. 우리 인류는 지난 100년 동안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섰습니다. 새로운 시대입니다. 21세기는 지식과 정보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지식을 가진 자가 앞서고 정보를 빨리 가진 나라가 앞섭니다. 지식이 우리를 어디까지 이끌어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식이 제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잘 되어야 합니다. 지식도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공헌을 해야 합니다. 인류의 미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미래는 지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새 시대가 와도 사람이 잘못되면 불행하게 되는 것이고, 아무리 어려운 시대가 온다 할지라도 훌륭한 사람이 준비되면 그로 인해 밝고, 좋은 사회와 국가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 신앙의 사람이 매우 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오랜 기간 준비하셨고, 멀리 보시고 준비하셨습니다. 모세는 미래를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새 시대를 위해 준비된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1. 믿음의 사람입니다. 모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우상문화 가운데서도 어머니 품에서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40년 동안 그는 애굽의 왕자였지만 어머니에게 배운 신앙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2. 지식을 갖춘 사람입니다. 모세는 지식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들어 쓰시기 위해서 바로의 궁궐에서 40년 동안 최고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3. 사명감을 가진 사람입니다. 모세는 참으로 동족을 사랑하는 불타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건져내는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사명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2001년 새해 결단의 말씀 성명.........................결단 번호................... 꼭 실천하고 이루어야할 번호를 적으세요 1. 오직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요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3. 시간, 지식,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신 26:12]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4. 믿는 자로서 늘 승리하며 살겠습니다. [삼상 26:25]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5.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시 39: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6.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7. 가정을 이루게 하옵소서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8. 사업이 튼튼하고 확장되게 하옵소서 [잠 22:29]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9. 자녀를 주옵소서 [시 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10. 집을 주옵소서 [시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11.진학. 진급을 주옵소서 [창 41: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창 41: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감사로 마치고 감사로 시작합시다/신8:1-10
감사로 마치고 감사로 시작합시다/신8:1-10 오늘 2006년도 첫날, 송구영신 예배에 참석한 성도여러분들의 가정과 생업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화단 구석에 장미 한 송이가 피었다. 그 장미는 얼마나 불평이 많은지, 눈만 뜨면 불평을 털어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장미는 밤이면 춥고 어두워서 화단에 못 있겠으니 거실로 옮겨 달라고 주인을 졸랐다. 주인은 장미를 화분에 옮겨서 거실에 두었다. 얼마 후 장미는 또다시 불평을 했다. 여기는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니 창가로 옮겨 달라는 것이었다. 주인은 장미를 창가에 옮겨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창가에는 고양이가 지나다녀서 싫으니 방안 꽃병에 꽂아 달라는 것이었다. 주인은 장미를 화분에서 꽃병으로 옮겨 방안에 두었다. 며칠 뒤 장미는 또다시 주인에게 햇살이 있는 바깥 화단으로 옮겨 달라고 말했다. - 하지만 장미는 이미 뿌리가 잘려 시들어버렸고, 주인은 장미를 뽑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성도여러분 아름다운 꽃인 장미가 왜 쓰레기통에 버려져야 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의 위치에서 감사하고 만족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은 불편하고,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감사하며 만족해하는 사람이 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일까요? 기억하십시오.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빨리 찾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하는 데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 감사하는 자가 행복을 누린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고, 아리스토틀은 <인간의 마음 중에 가장 쉽게 늙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감사하는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서운한 일은 10년이 지나도 잊어지지 않지만, 고마운 일은 열흘이 안 되어도 잊어지고 만다. 그래서 성자 어거스틴은 <인간에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것이지만, 자기더러 한 가지만 더 말하라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감사>를 말하고 싶다.>고 했다.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는 2005년 한 해를 마무리하고,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2006년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2005년은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 흐뭇한 해는 아니었다. 정치 경제 사회가 어려웠던 한 해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어두운 현실에서도,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람과 모래뿐인 사막에서도 감사를 드리고 있다. 그럼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1. 시련을 통과케 하신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1-2절을 보겠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난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정리해주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 힘들고 어려운 광야 길을 통과케 하신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 사실 지난 40년간의 광야 생활은, 완전히 밑바닥으로 낮아지는 삶이었고, 험난한 인생 여정이었다.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미지의 여행이요. 생명을 건 전쟁터로서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련을 하나님의 은혜로 잘 통과했다. 이제 드디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귀한여러분, 지난 1년 동안 어떤 어려움과 혹독한 시련이 있었나요? 어떤 아픔과 모진 고통을 겪었나요? 사고와 질병, 직장퇴출, 사업부도, 사기와 배신, 상처와 고통, 주가 폭락으로 인한 큰 손실과 가정불화 등 시련들이 의외로 많았을 겁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여기까지 잘 견뎌왔다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때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 같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견딜 수 있는 어깨를 주셨다. 귀한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어려운 시련을 당하고 계시나요? 그 시련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되시기에 연단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시련을 허락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시련을 통과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이 군사력이 강하거나 전투 실력이 탁월해서 광야를 통과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통과했다. 하나님께서 바다를 육지처럼 통과하게 하셨고(느 9:11), 강을 도보로 통과케 하셨으며(시 66:6), 사막을 대로처럼 통과케 해주셨다(시 136:14,16). 하나님의 크신 팔로, 진로를 가로막는 여러 나라들을 무찌르고 통과케 해주셨다.(신 29:16). 귀한여러분,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큰 시련이 있나요? (있더라도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환경도, 은혜로 통과케 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2. 현재를 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3절을 보겠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여러분,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어떻게 먹고살았을까요? 비행기나 화물선으로 식량을 공급해준 것도 아닌데, 어떻게 40년 동안 사막에서 먹고 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200만 명이 넘는 대 집단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을 오늘 본문 3절에서 매우 간단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먹여주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여주셨고, 땅에서는 바위를 터뜨려 물을 마시게 해 주셨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함으로 광야 40년 동안 항상 새 옷과 새 신발까지도 공급해주셨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모자라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고, 항상 새 밥 먹고 새 옷 입도록 은혜로 보살펴주셨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럼 어떤 방법으로 돌보아주셨을까요? 18절을 보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에게 재물 얻을 힘을 주셨음이라.> 즉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기에, 40년 광야생활을 승리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힘주시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귀한여러분,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우리도 하나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건너기 힘든 강도 있었고, 오르기 힘든 산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잘 견뎌왔다. 간증)그래서 제가 2005년 마지막 중부시찰회 교역자예배를 인도하면서 같이 부른 찬송이 460장이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성도여러분,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인 줄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에 최대한 감사하시기 바란다. 세 번째로,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3. 미래의 축복을 약속하신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6-10절을 보겠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가나안 땅의 미래의 축복된 환경을 매우 생생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성경은 언제나 더 나은 미래의 전망을 약속해주고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의 시련을 하나님의 은혜로 통과했기에, 이제는 가나안 땅의 미래의 축복을 바라보며 미리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겁니다. 7절 이하의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시냇물과 연못이 있고 산골짜기에 샘물이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땅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8) 그 곳은 밀과 보리와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이 많은 땅이며 (9) 양식이 풍부하여 부족함이 없고 철이 돌처럼 흔하며 산에 구리가 많은 땅입니다. (10) 여러분은 먹을 것이 풍부할 때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기름진 땅에 대하여 그분에게 감사하십시오.> 미래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질 약속의 땅은 한 마디로 <축복의 땅>이다. 아직까지 밟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한 땅이지만, 매우 기름지고 풍성한 축복의 땅이다. 이러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약속입니까? (이런 축복의 약속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우리를 하나님이 돌보시기만 한다면, 그곳이 광야이든지 바다 한 복판이든지, 불경기든지, 경제 불황이든지 염려할 것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한 우리의 미래는 안전하다.> 6절 말씀의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을 순종하며 살기만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절대로 안전하고 형통한다.>는 것을 믿으... 우리들이 사는 시대가 아무리 어둡고 힘들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형통케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이것이 바로 신명기 말씀의 핵심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 바란다. 그리고 미래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란다. 왜냐하면 감사는 미래의 전망을 더욱 밝게 하기 때문이다. 예)어느 뜨거운 여름날 한 농부가 호두나무 밑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호박 넝쿨에 매어 달린 큼직한 한 개의 호박을 보았다. 농부는 혼자 중얼거렸다. <하나님도 참. 왜 저렇게 무거운 호박이 약한 넝쿨에 매어 달리게 하셨담? 넝쿨은 약하고 호박은 무거우니 땅에 닿을 듯이 매어 달려 있지 않아?> 그러면서 머리 위 호두나무를 바라보았다. 더욱 하나님이 불공평해 보였다. 그 크고 튼튼한 호두나무 가지들에 겨우 작은 호도들이 매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참 쯧쯧 하면서 그만 호두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 때 <딱>하고 호도 하나가 떨어지면서 농부의 머리를 때렸다. 깜짝 놀란 농부는 벌떡 일어나서 아픈 머리를 만지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했답니다. <아이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큰 호박이 이 나무에 매어 달려 있었다면 나는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하나님 이 호도 나무에 작은 열매들을 매어 다신 일은 참 잘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저 호박 넝쿨에 큰 호박을 매어 다신 일도 참 잘하신 일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은 2005년도를 감사함으로 마친 것처럼, 2006년도를 감사함으로 시작함으로 새해에는 더욱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들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감사로 맺는 매듭/ 시116:12-19/ 송구영신예배설교/ 2006-12-31
감사로 맺는 매듭 시116:12-19 벌써 2006년이 오늘로 끝입니다. 상투적인 말 같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야말로 2006년 신년주일 지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배웅해 보내야 하니 말입니다. 현대 지성들이 참여해서 [시간의 박물관]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장을 현대 지성을 대표하는 움베르토 에코라는 분이 썼는데 제목이 “시간의 창조”입니다. 이 분은 이 장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바로 시간의 발견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가장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다.” 실제로 인간만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잴 수 있는 도구를 발명했습니다. 바로 시계입니다. 나아가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달력입니다. 하루, 한 주, 한 달, 1년 등. 그러면서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 주년, 한 시대, 세기, 밀레니엄, 회갑, 희년 등. 이 시간 흐름의 매듭의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어려서 사랑방에서 볏짚으로 새끼 꼬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자 집에서 가져온 볏짚으로 새끼를 꼽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새끼를 꼽니다. 배고프면 감자 고구마를 삶거나 구어 먹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볏 집을 부드럽게 하려고 계속 손에 침을 뱉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다 꼰 새끼는 깔고 앉기도 하고 등 뒤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새끼를 꼽니다. 새끼를 다 꼬고 나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반드시 매듭을 짓는 일입니다. 만일 매듭을 짓지 않으면 밤새 꼰 새끼가 다 풀어지게 되고 긴 밤 헛수고를 하고 말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듭을 잘 짓고 마무리를 잘 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간 매듭의 의미가 우리의 소중한 역사로 아름답게 간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 삶의 더욱 풍성해 지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2006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매듭을 잘 지어야 하겠습니다. 2006년 한 해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우리의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2006년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한 마디로 “감사”입니다. 감사라는 관점에서 2006년이라는 역사를 매듭지어 우리 인생의 역사 한 페이지로 장식해 보자는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으로 살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가족들, 이웃들, 교우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의, 식, 주 부족함이 없이 생활하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또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 서로 도와야 할 수 있습니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주의 종들과 교우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고객과 이웃과 동료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식당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식당 주인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신선하고 제일 좋은 식재료를 준비하느라고 정말 큰 수고를 합니다. 밑반찬을 만드느라 여러 날 고생을 합니다. 당일 주 메뉴를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식당 주인은 찾아오는 손님에게 “내가 이렇게 큰 수고로 음식을 만들었으니 당신들이 내게 감사해야 하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큰 수고를 했지만 “그렇게 많고 많은 식당 중에 우리 식당을 찾아주었으니 감사합니다. 내가 정성껏 만든 음식을 그렇게 맛있게 먹어주니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찾아온 손님들은 “당신 식당을 찾아주었느니 감사해야 하오, 비싼 돈을 내고 당신 음식 사 먹어주었으니 감사해야 하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식당을 찾아왔고 돈 내고 음식을 사 먹지만 “여기 이런 가게를 열어주어 감사합니다. 그렇게 큰 수고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수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두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인정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다 당신 탓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마누라 탓이고, 남편 탓이고, 부모 탓이고, 자식 탓이고, 네 탓이고 당신들 탓이요”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며 한 해를 마감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아무리 둘러 봐도 감사할 조건이 찾아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라고 소망하던 것이 하나도 된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생각지 않았던 큰 불행이 닥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 한숨과 절망뿐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창 37장에서 50장까지는 요셉이라는 사람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도표로 그려본다면 영어 알파벳 V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인생의 전반기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여러 충격적인 사건으로 졸지에 바닥까지 떨어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후반기는 또한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졸지에 저 하늘 가까이 올라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전반기 대표적인 사건 몇 가지만 꼽아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요셉은 야곱이라는 당대 부잣집 아들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로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됐습니다. 부잣집 아들에서 예고 없이 또 준비 없이 타국에 팔려온 노예 신세가 된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가정 총무로 있던 중에 모함에 걸려서 죄인이 되어 감옥에 수감되게 됩니다. 이제 졸지에 죄수가 되어 언제 어떻게 처벌 받게 될지 모를 처지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은 이런 설상가상의 불행이 겹쳐 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내 던져진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비록 노예로 끌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죄수로 옥에 갇혀있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의 앞길을 선하게 여실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그토록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감사를 지켜줍니다. 믿음이 차원 높은 감사를 이끌어냅니다. 믿음이 선취적 감사를 만들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황과 여건이 좋지 않으십니까?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까? 너무 힘이 드십니까? 상황과 여건을 보지 마십시오. 지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앞길을 복되게 펼쳐주실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열고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앞 당겨서 감사를 드리십시오. 또 하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그 누군가와 맺힌 감정 때문에 감사할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큰 상처 때문에 감사가 자리 잡을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감사가 그 마음에 깃들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는 한 공동묘지는 특별한 묘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군과 적군이 함께 묻혀 있는 묘지입니다. 독불 전쟁 때 피차간에 많은 희생자가 났는데 전쟁은 계속됐습니다. 할 수 없이 시체들을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묻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워 두었고 그 십자가 위에 전사자들의 군번을 걸어놓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프랑스군의 어머니가 군번을 보고 자기 아들의 묘를 찾았습니다. 가져간 꽃을 꼽고 한 없이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있는 묘를 보는 순간 독일군 묘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분명히 자기 아들이 이 독일 군 병사와 싸우다 여기 이렇게 무덤에 누어있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 분노를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욕을 퍼 붓고 침을 뱉고 무덤을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순간 자기 아들 무덤에 세워진 같은 십자가가 이 독일 군 무덤에도 세워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단 사람들을 용서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그 십자가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독일군 병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다시 무덤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무덤에 꼽았던 꽃을 반 나누어 이 병사의 무덤에 꼽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강물처럼 평안이 밀려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 감사가 그 마음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며 용서의 능력을 덧입을 때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입혔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가 이 한 해를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내년 2007년의 삶이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우리 삶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주께로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시 65:4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다윗은 어떻게 하든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무엇보다 더 큰 복인 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17-18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찌라” 시인은 감사하는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새롭게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킵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을 주님 곁에 가 있게 해 줍니다. 감사는 우리를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해 줍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감사 고백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 앞 가까이에 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몇 해 됐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특강을 청해서 정말 시간 내기 힘들었는데 선약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녀오게 됐습니다. 지방이어서 오후에 KTX를 타고 갔다가 강의 후 바로 기차를 타고 올라와야 했습니다. 다음날 스케줄도 꽉차있고 해서 몸도 마음도 무척 무거웠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기차에 올라 피곤에 지쳐 눈을 감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가 날라왔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오실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와 주신 것 감사하고, 귀한 강의로 먼저 제가 큰 도전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모든 피로다 다 사라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 이름이 제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분을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그분과의 관계는 훨씬 좋은 관계로 발전됐음은 물론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작지만 깊은 마음의 감사는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어줍니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줍니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특히 실패했던 과거는 우리를 덫처럼 옥조이게 만들고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과거의 덫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성 도덕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살다가 헤어지고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여자는 지탄의 대상이 될 텐데 2000년 전에는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물을 뜨러 나올 때도 아무도 없는 정오 즈음에 나와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 때문에 죄사함을 받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께서 대한 감사가 솟구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를 딛고 일어설 힘을 줍니다. 감사가 과거의 덫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고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게 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2006년을 보내야 할 시점입니다. 감사로 잘 매듭을 지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모두가 당신 덕입니다.” 인정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미움과 분노의 대상일지라도 용서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해에 더욱 복된 삶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감사로 맺는 매듭/ 시116:12-19/ 송구영신예배설교/ 2008-12-31
감사로 맺는 매듭 시116:12-19 벌써 오늘로 끝입니다. 상투적인 말 같지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야말로 신년주일 지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배웅해 보내야 하니 말입니다. 현대 지성들이 참여해서 [시간의 박물관]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장을 현대 지성을 대표하는 움베르토 에코라는 분이 썼는데 제목이 “시간의 창조”입니다. 이 분은 이 장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바로 시간의 발견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가장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다.” 실제로 인간만이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잴 수 있는 도구를 발명했습니다. 바로 시계입니다. 나아가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달력입니다. 하루, 한 주, 한 달, 1년 등. 그러면서 그 시간의 흐름의 매듭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1 주년, 한 시대, 세기, 밀레니엄, 회갑, 희년 등. 이 시간 흐름의 매듭의 의미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어려서 사랑방에서 볏짚으로 새끼 꼬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자 집에서 가져온 볏짚으로 새끼를 꼽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새끼를 꼽니다. 배고프면 감자 고구마를 삶거나 구어 먹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볏 집을 부드럽게 하려고 계속 손에 침을 뱉으면서 새끼를 꼽니다. 다 꼰 새끼는 깔고 앉기도 하고 등 뒤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새끼를 꼽니다. 새끼를 다 꼬고 나면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반드시 매듭을 짓는 일입니다. 만일 매듭을 짓지 않으면 밤새 꼰 새끼가 다 풀어지게 되고 긴 밤 헛수고를 하고 말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듭을 잘 짓고 마무리를 잘 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간 매듭의 의미가 우리의 소중한 역사로 아름답게 간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 삶의 더욱 풍성해 지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한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매듭을 잘 지어야 하겠습니다. 한 해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우리의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매듭지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한 마디로 “감사”입니다. 감사라는 관점에서 2006년이라는 역사를 매듭지어 우리 인생의 역사 한 페이지로 장식해 보자는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감사로 매듭짓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으로 살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가족들, 이웃들, 교우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의, 식, 주 부족함이 없이 생활하게 된 것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또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한 해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 서로 도와야 할 수 있습니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주의 종들과 교우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고객과 이웃과 동료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매듭을 짓는 것입니다. 식당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식당 주인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신선하고 제일 좋은 식재료를 준비하느라고 정말 큰 수고를 합니다. 밑반찬을 만드느라 여러 날 고생을 합니다. 당일 주 메뉴를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식당 주인은 찾아오는 손님에게 “내가 이렇게 큰 수고로 음식을 만들었으니 당신들이 내게 감사해야 하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큰 수고를 했지만 “그렇게 많고 많은 식당 중에 우리 식당을 찾아주었으니 감사합니다. 내가 정성껏 만든 음식을 그렇게 맛있게 먹어주니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찾아온 손님들은 “당신 식당을 찾아주었느니 감사해야 하오, 비싼 돈을 내고 당신 음식 사 먹어주었으니 감사해야 하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식당을 찾아왔고 돈 내고 음식을 사 먹지만 “여기 이런 가게를 열어주어 감사합니다. 그렇게 큰 수고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이렇게 상대방의 수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두가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인정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다 당신 탓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마누라 탓이고, 남편 탓이고, 부모 탓이고, 자식 탓이고, 네 탓이고 당신들 탓이요”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며 한 해를 마감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아무리 둘러 봐도 감사할 조건이 찾아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라고 소망하던 것이 하나도 된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생각지 않았던 큰 불행이 닥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 한숨과 절망뿐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창 37장에서 50장까지는 요셉이라는 사람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도표로 그려본다면 영어 알파벳 V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인생의 전반기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여러 충격적인 사건으로 졸지에 바닥까지 떨어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후반기는 또한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졸지에 저 하늘 가까이 올라가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전반기 대표적인 사건 몇 가지만 꼽아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요셉은 야곱이라는 당대 부잣집 아들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로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됐습니다. 부잣집 아들에서 예고 없이 또 준비 없이 타국에 팔려온 노예 신세가 된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가정 총무로 있던 중에 모함에 걸려서 죄인이 되어 감옥에 수감되게 됩니다. 이제 졸지에 죄수가 되어 언제 어떻게 처벌 받게 될지 모를 처지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은 이런 설상가상의 불행이 겹쳐 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내 던져진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비록 노예로 끌려왔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죄수로 옥에 갇혀있지만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의 앞길을 선하게 여실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그토록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를 잃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감사를 지켜줍니다. 믿음이 차원 높은 감사를 이끌어냅니다. 믿음이 선취적 감사를 만들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황과 여건이 좋지 않으십니까?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까? 너무 힘이 드십니까? 상황과 여건을 보지 마십시오. 지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앞길을 복되게 펼쳐주실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열고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앞 당겨서 감사를 드리십시오. 또 하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그 누군가와 맺힌 감정 때문에 감사할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큰 상처 때문에 감사가 자리 잡을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감사가 그 마음에 깃들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는 한 공동묘지는 특별한 묘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군과 적군이 함께 묻혀 있는 묘지입니다. 독불 전쟁 때 피차간에 많은 희생자가 났는데 전쟁은 계속됐습니다. 할 수 없이 시체들을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묻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워 두었고 그 십자가 위에 전사자들의 군번을 걸어놓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프랑스군의 어머니가 군번을 보고 자기 아들의 묘를 찾았습니다. 가져간 꽃을 꼽고 한 없이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있는 묘를 보는 순간 독일군 묘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분명히 자기 아들이 이 독일 군 병사와 싸우다 여기 이렇게 무덤에 누어있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 분노를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욕을 퍼 붓고 침을 뱉고 무덤을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순간 자기 아들 무덤에 세워진 같은 십자가가 이 독일 군 무덤에도 세워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단 사람들을 용서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그 십자가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독일군 병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다시 무덤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무덤에 꼽았던 꽃을 반 나누어 이 병사의 무덤에 꼽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강물처럼 평안이 밀려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 감사가 그 마음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입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 십자가의 사랑으로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며 용서의 능력을 덧입을 때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입혔던 사람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우리의 마음에 가득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가 이 한 해를 감사로 매듭지으면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내년의 삶이 더욱 풍성해 질 것입니다. 우리 삶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주께로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시 65:4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다윗은 어떻게 하든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무엇보다 더 큰 복인 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 17-18을 보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찌라” 시인은 감사하는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새롭게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단축시킵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을 주님 곁에 가 있게 해 줍니다. 감사는 우리를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해 줍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감사 고백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 앞 가까이에 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몇 해 됐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특강을 청해서 정말 시간 내기 힘들었는데 선약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녀오게 됐습니다. 지방이어서 오후에 KTX를 타고 갔다가 강의 후 바로 기차를 타고 올라와야 했습니다. 다음날 스케줄도 꽉차있고 해서 몸도 마음도 무척 무거웠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기차에 올라 피곤에 지쳐 눈을 감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가 날라왔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오실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와 주신 것 감사하고, 귀한 강의로 먼저 제가 큰 도전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모든 피로다 다 사라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 이름이 제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분을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그분과의 관계는 훨씬 좋은 관계로 발전됐음은 물론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작지만 깊은 마음의 감사는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물어줍니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줍니다. 그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잡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특히 실패했던 과거는 우리를 덫처럼 옥조이게 만들고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은 과거의 덫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성 도덕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살다가 헤어지고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여자는 지탄의 대상이 될 텐데 2000년 전에는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물을 뜨러 나올 때도 아무도 없는 정오 즈음에 나와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 때문에 죄사함을 받게 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주님께서 대한 감사가 솟구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가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과거를 딛고 일어설 힘을 줍니다. 감사가 과거의 덫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고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게 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올해를 보내야 할 시점입니다. 감사로 잘 매듭을 지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모두가 당신 덕입니다.” 인정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미움과 분노의 대상일지라도 용서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해에 더욱 복된 삶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감사와 더불어 믿음이 필요한 시간/ 수4:19-5:9/ 송구영신예배설교/ 2008-12-31
감사와 더불어 믿음이 필요한 시간 수4:19-5:9 다사다난했던 2007년도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속절없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다사다난했던 올 해의 수많은 뉴스 가운데서 <조선일보>가 굵은 뉴스 10개를 선정했습니다. 1. 이명박 대통령 당선 2. 한미 FTA 타결 3. 제2차 남북정상회담 4. 펀드 열풍이 전국을 휩쓸어 총 규모 300조원 돌파 5. 변양균․신정아 사건을 비롯한 잇단 권력형 비리 6. 대구 육상, 인천 아시안 게임, 여수 엑스포 유치 성공 7. ‘기자실 대못질’과 기자들의 저항 8. 단기선교팀의 아프가니스탄 피랍 9. 태안 유조선 기름 유출 그리고 10째는 수능 등급제와 내신 반영률 대란을 꼽았습니다. 그 외에도 김연아 박태환 전도연이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서 있었던 사건과 사고들을 종합해서, 그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말이 될까요? 대학 교수들이 <대학교수신문>에 올해를 표현하는 사자성어를 설문을 통해 조사를 했는데요. 그 결과 “자기기인(自欺欺人)”이 가장 많은 비율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자기기인”은 주자(朱子, 1130~1200)의 어록을 집대성한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오는 말입니다. <주자어류>에서 주자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무자기, 毋自欺)”는 <대학(大學)>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남을 속이는 것은 곧 자신을 속이는 것인데, 이는 자신을 속이는 짓이 심해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서적인 <법원주림(法苑珠林)>에도 “망언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고 또한 남을 속인다“라는 대목이 나온다고 합니다. 안대회 성균관대(한문학) 교수는 \\\"자기기인은 분수를 모르는 인간의 탐욕이 도에 넘칠 때 나타나는 행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안 교수는 \\\"지난 1년간 신정아를 비롯한 유명 인사의 학력 위조, 대학 총장과 교수의 논문 표절, 유력 정치인과 대기업의 도덕적 불감증 같은 ‘자기기인’에 들어맞는 사건을 너무 많이 접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히면서, 의혹의 장본인이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바람에 거짓과 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상황을 잘 표현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손주경 고려대(불문학) 교수는 \\\"신정아 사건이나 대통령 선거가 보여주듯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스스로 언행에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정리해 볼 때 올 한 해는 어느 해보다 “거짓”이 판을 친 한 해였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끝자락에 섰습니다. 그 끝에서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올 한 해의 다사다난했던 뉴스를 다시 들을 필요도 없고, 아님 또 다른 누군가가 들려주는 세상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습니다. 한 해를 매듭짓는 시점에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여기까지 인도하심에 감사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도 한 시대를 마감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4장 19절부터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을 향해 오던 중, 요단강을 만났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 모세는 마지막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임명한 후에,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 꼭대기에서 1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내어 그 땅과 주민들의 상황을 미리 살피게 했습니다. 그들이 돌아온 지 3일이 지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을 따라 요단강으로 나아갔습니다(수3:4). 그런데 그들이 나아갔던 요단강은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지형과 기후의 작용으로 실개천만도 못하게 되었지만, 당시는 말 그대로 강이었고, 또 그때가 봄철의 우기였기 때문에 물이 꽤 불어있었습니다. 여호수아 3장 15절에 보면, “요단이 모맥을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고 하는데, 바로 그때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였습니다. 이른 바, “늦은 비의 계절”인 봄철의 요단강은 물이 상당히 불어 있어 홍수 단계에 이르곤 했었습니다. 이스라엘로서는 이 요단강을 건너야만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물이 불어나 강뚝을 넘쳐흐르는 요단강은 과히 위협적이었습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독려하여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기적적인 역사로 응답하셨습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그 발을 요단강에 집어넣자마자 위로부터 흐르던 물이 갑자기 멈추어 섰습니다. 그러고는 먼저 발을 내디뎠던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매고 이미 말라버린 강 한 복판에 서 있었고, 그 사이에 백성들은 신속히 그 강을 건넜습니다. 백성들이 다 건너기까지 강물은 흐르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들의 조상들이 출애굽 할 때 홍해가 갈라지고 그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너 건너편 시내반도 지역으로 옮겨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와 똑같은 기적의 역사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그 첫 걸음에 생긴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각 지파의 대표로 하여금 강 가운데 바닥의 돌을 하나씩 취하게 했고, 그것으로 요단강을 건넌 일을 기념하여 탑을 쌓으라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것은 첫째 달 10일이었고, 그 후 여리고 동쪽 경계에 있는 길갈에 진을 쳤습니다. 거기서 여호수아는 요단강 바닥에서 가지고 나온 12개의 돌들을 길갈에 쌓으라고 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紅海)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能)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2~24).” 하나님께서 길갈에서 요단강을 건넌 일을 기념하게 하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그 첫째는 땅의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일이 알려지면, 아모리 사람을 비롯한 가나안의 모든 왕들의 마음이 녹을 것이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5:1).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껏해야 애굽의 노예 출신에 불과하며, 정착할 자기 땅이 없어서 사십년 동안 광야를 정처없이 떠돈 힘없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작 그들이 두려워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힘없고 질그릇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전능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그 왕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때문이었던 것이죠. 따라서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라고 하신 첫 번째 이유는 가나안인들이 이 기념비를 바라보면서 여호와와 그의 사랑받는 백성을 두려워하게 만드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라하신 두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을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로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여호와를 바로 알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강대국인 이집트에서 잃기보다는 빼앗고 얻어 해방되었고, 넘실되는 홍해 바다를 건넜으며, 광야 생활 40년 동안 백성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으며(신 8:4), 하늘 양식인 만나를 먹었고, 반석에서 물이 나와 먹었던 것, 그리고 이제 거기에 하나 더 보태서 많은 비로 인하여 넘실대는 홍해를 가르사 그 백성을 건너게 하신 그 하나님을 잊지 않고 영원토록 경외하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너서 첫 발을 디딘 곳인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무능함과 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나 위대한 백성이 되는지를 알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렇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라고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라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는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못해도 잊는 것은 너무나 잘 하지 않습니까? 지난 한 해도 셀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았는데, 분명 많이 받았고 누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길갈의 기념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기념비를 세우는 시간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즉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도 기념비를 세우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게 하고, 또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 능력과 권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사람의 복과 일의 복을 주신 하나님, 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복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작고 부족한 우리를 크고 강하게 만드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시간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에 기념비를 세우십시오. 감사의 기념비, 여호와를 경외하는 기념비! 아멘! 3. 내일에 대한 믿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에서 한 일은 기념비를 세운 일 외에 세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은 유월절을 지킨 일이었습니다(5:10). 이스라엘은 시내산 이후, 단 한 번도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약속의 땅에 도착했으며,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았으므로, 절기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서 지정된 날 곧 니산월의 14일에 유월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길갈에서 있었던 세 번째 일은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가 멈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여행의 첫 해부터 기적적인 식량을 제공해주셨습니다(출16:14~22). 이것이 거의 40년 동안 계속되었으나, 이제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이상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땅에서는 그 “땅의 수확”을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길갈에서 행한 할례의식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라고 합니다. 길갈은 요단강을 건넌 지역으로 여리고 동편 3키로 지점에 있습니다. 즉 지금 이스라엘은 적들로 우글대는 가나안 지역으로 들어왔고, 또 우리가 라합을 통해서 보았듯이 여리고 성 사람들을 비롯하여 가나안의 모든 원주민들이 긴장하고서 전쟁을 벌일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서 이스라엘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도무지 인간의 이성이나 인간의 경험이나 인간의 논리나 지혜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사방의 적들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장 앞에 있는 여리고성 사람들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로서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하여, 당장이라도 전쟁을 치룰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례를 행하면, 싸움에 임해야 할 모든 남자 장정들은 거의 움직일 수 없고, 게다가 회복을 위해서는 일정 기간이 필요했고, 그 기간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적들이 먼저 전쟁을 걸어온다면 그대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앞으로 해야 할 그 중대한 일에 아무 관심도 없는 듯, 오히려 그 사명을 성취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는 할례를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무리들에게 바라신 것은 무엇일까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눈에 보이는 위험한 상황과 적들의 견고한 성읍과 그들의 무기와 덩치에 눌려 두려움과 불안에 떨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하고 절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눈에 보이는 적들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바로 그 믿음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자 할례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감각이나, 생각이나, 방법이나, 논리나, 이성이나, 경험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지금 형편과 처지와 상관없이, 혹시 여러분이 지금 어렵고 위험한 형편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설사 여러분의 경험과 논리와 다를지라도, 또 하나님의 명령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시겠습니까? 우리 시대는 여러분에게 많은 생각과 고민과 계산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가나안으로 진군할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하나님께서 전적이고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하셨듯이, 내년을 바라보는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즉 내년도를 위한 가장 우선적인 준비물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죠. 내년도의 경제 사회 정치 그리고 지역에 관한 상세한 정보와 전망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내년에 대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보고, 새롭게 하고픈 일들을 정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은 신뢰하는 것입니다. “2008년도에도 너는 나를 믿겠느냐?” “2008년도에도 흔들림없이 오직 믿음으로 살겠느냐?” “내년을 위한 가장 우선적인 준비물은 바로 너의 믿음이라는 것을 알겠느냐?”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길갈의 의미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침공했을 때, 프랑스 군의 한 부대가 오스트리아의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포위했습니다. 펠드리히 시는 비상의회를 소집하고 사태를 논의했습니다. ‘미리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오자 한 교회 지도자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우리의 힘을 의지한다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활절인 오늘의 예정대로 교회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나머지 문제는 모두 하나님께 맡겨버립시다.” 그 분의 말에 시의회 의원들은 모두 찬성하였고 펠드리히 시에는 우렁찬 종소리가 울리고 기쁨에 찬 찬송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들은 프랑스군 진영에서는 오스트리아의 구원병이 온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돌려 다른 곳으로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펠드리히 시민들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막강한 나폴레옹의 군대를 맞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은 이런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낸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와 함께 결단합시다. 오는 2008년도를 오직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일도, 되어지는 상황도, 사람도, 돈도, 건강도, 주를 믿는 믿음보다는 앞서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4. 감사와 믿음이 필요한 시간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07년도를 정리하고 2008년도를 맞을 준비를 하는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 여러분의 “길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그리고 그 첫 관문인 여리고로 나아가기 전, 길갈이 바로 오늘인 셈입니다. 이 길갈에서 여러분이 하실 일은 두 가지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지나온 여정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기념비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바라시고 그것을 기뻐하셨던 것처럼 오늘 여러분에게 그것을 바라고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앞을 바라보면서 믿음을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앞날을 위한 최고의 준비물은 바로 여러분의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감사와 믿음으로 올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강을 건너가는 자/ 창32:1-32/ 송구영신예배설교/ 2006-12-31
강을 건너가는 자 창32:1-32 예로부터 강이란 것은 육상 통행로를 방해하는 난관이 되어왔습니다. 단단한 땅바닥으로 이어지던 길이 일단 강을 만나게 되면 전혀 발을 디딜 수 없는 표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서 헤엄을 치기도 하고 나룻배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아예 다리를 만들어서 영구히 길을 이어놓기도 해왔던 것입니다. ’도하(渡河)’ 즉 강을 건넌다는 것은 이처럼 길가는 사람에게 현실적으로도 보통의 길과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하지만, 때로는 정신적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해주고 더 나아가서는 역사적으로 큰 전환점을 통과하게 만드는 경우도 자주 벌어집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갈리아 지방 정복에 출정했던 자기 휘하의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향하여 진군해오다가 루비콘 강을 만났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 강은 시저의 지휘권 아래에 있는 지역과 그가 월권할 수 없는 로마 사이에 있는 마지막 경계선이었기 때문에, 그 강을 건너는 순간 그는 이제 공식적으로 나라에 반역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 셈이 되는 것이었고, 만약 그 일이 실패하면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성공과 실패, 생과 사가 걸려 있는 그 중대한 기로에서 루비콘 강을 바라보던 시저는 저 유명한 말,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치면서 자신이 제일 먼저 말을 몰고 강물 속으로 뛰어 들어서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시저에게 있어서 그 루비콘 강 도하는 자기의 한 인생 전부를 가름하는 최대의 도박판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단 그 강을 건너간 순간, 그는 다시는 되돌아올 길이 없이 그저 로마를 향하여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국면, 그의 전 인생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한 장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강을 건너간다는 것이 이처럼 정신적 및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경우는 성경에서도 종종 발견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들 중에 가장 첫 번째의 것이 바로 야곱의 얍복강 도하였습니다. 20년 전에 맨손으로 고향 땅을 떠났던 야곱은 이제 말하자면 금의환향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아내와 여러 자식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가축을 크게 두 떼나 거느리는 거부가 되어 고향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귀향길에서 야곱은 바로 얍복강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강을 건넌다는 것은 그저 행로가 좀 어렵게 되는 정도가 아닌,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얍복강 건너편에는 형 에서와 그가 거느리는 사백 인의 사람들이 야곱을 마주 향하여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서는 분명히 20년 전에 야곱에게 속임 당한 일에 대하여 여전히 분기탱천해 있을 것이며, 그 형이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이끌고 오고 있다면 그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실로 야곱은 그 얍복 나루에서 문자 그대로 인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강을 건너간다는 것은 시저의 경우처럼 이제 그의 인생 전체의 성패를 걸어놓고서 다시는 물릴 수 없는 일생일대의 승부를 거는 일이었습니다. 즉 일단 건너가면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둘 중 하나이지 다시는 되돌아 올 길이 없는 도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의 전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분수령이 되었던 얍복강을 어떻게 해서든지 건너가야만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으며, 또한 만약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면 이제는 밧단아람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발붙일 곳 없는 신세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주일은 한 해를 보내면서 새 한 해를 기다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시점입니다. 우리 역시 얍복강을 앞에 두고 있는 야곱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2006년을 향하여 되돌아 갈 수 없 으며, 오직 우리가 건너가게 될 2007년의 한 해를 성공하고 복을 받느냐 아니면 또 허송하고 실패하느냐 하는 양자택일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단의 순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이 ’얍복강’을 어떻게 건너가야 하겠습니까? 1.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경주하면서 이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본문 32장 13절부터 20절에 ”13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15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16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17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18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고하고 20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을 향하여 가던 도중에 자기 종들을 앞서 보내어서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던 형 에서에게 자기의 귀향 사실을 미리 전해주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 종들은 야곱의 형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야곱을 만나려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아직도 에서가 20년 전의 감정을 그대로 품고 틀림없이 자기를 죽이려고 오는 줄로 생각되어 ”심히 두렵고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어차피 피할 길도 없고 닥쳐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자 야곱은 그 난관을 돌파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7절과 8절을 보면 그는 우선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떼는 피하리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앞일이 어찌될지 알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야곱이 판단하기에는, 에서와 조우하게 되면 그의 물리적인 공격을 받게 될 위험이 가장 농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진 소유물을 일단 둘로 분산시킴으로써 만일 에서가 자기 가축 떼를 공격해오더라도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보자는 의도에서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그처럼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을 뿐 아니라, 그 나쁜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 또한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까 봉독했던 말씀대로, 자기 형 에서를 위하여 선물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선물은 일단 양적으로도 풍성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 선물을 형 에서에게 보내는 방법에 있어서도 치밀한 의도와 계획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그 많은 선물을 한꺼번에 보내지 않고 여러 떼로 또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떼를 거느리고 가는 종자들에게 ”형 에서를 만났을 때 그가 너희들더러 ’이게 뭐냐?’하고 물으면 ’당신의 종 야곱이 형을 위하여 보내는 선물이고, 야곱은 뒤에 따라오고 있다.’라고 말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첫째 떼를 거느리고 가는 종자 뿐 아니라 그 뒤 둘째, 셋째, 넷째에 이르기까지 각 떼를 거느리는 모든 종자들에게 꼭 같이 그렇게 말하도록 사전교육을 철저히 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복잡한 방법으로 선물이 전달되도록 한 야곱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20년 동안 응어리진 감정을 한 순간에 삭히기란 그 어떤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임을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고 좋은 선물이라 할지라도 한 번에 갖다 주면 에서의 마음이 돌아설 시간적 여유가 매우 짧은 것이고, 그처럼 짧은 순간에 그런 획기적인 감정의 변화가 에서에게 일어나기란 매우 확률이 낮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양의 선물이라 할지라도 여러 번 나누어서 보내면, 처음 선물 받을 때 일단 그 형 에서의 마음에 약간만 변화가 있어도 그 다음 두 번째, 세 번째 계속해서 받게 될 때마다 차츰차츰 마음이 조금씩 더 풀려서 나중에서 아주 자기를 용서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야곱은 치밀하게 계산했던 것입니다. 즉 야곱은 같은 양의 투자를 이용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꾀했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의 이와 같은 행위를 두고 믿음 없어서 한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최악의 사태를 위해 대비하는 일과 또 그 최악을 막아 보기 위하여 현재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그 두 과정 중간에서 야곱이 또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었음을 본문 9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즉 야곱의 그와 같은 철두철미한 준비와 노력은 결코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믿음에 철저하게 바탕을 두고 행해졌던 것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잃든지 모든 것을 얻든지 하는 양자택일을 앞에 둔 사람은 어찌하든지 그 승부에서 이기기 위하여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아낌없이 쏟아 넣게 됩니다. 무슨 드라마 때문에 ’올인’(all in)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귀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슨 ’배팅의 올인’이 아니라 바로 ’최선의 올인’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진실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 도우심을 믿는 성도는 결코 그 믿음을 핑계로 해서 자신은 ’나 몰라라.’하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은 결코 바른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요 사실상 위선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 앞에서 소원하고 또 기도 드린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원들을 위해서 과연 얼마나 자신의 최선을 다했습니까? 기도는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아니하고 그저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식의 기도, 사실 미신숭배자들과 별 다름없는 기도를 드려놓고서는 아무 응답이 없다고 하나님께 불평하지는 않았습니까? 피할 길 없어 보이는 최악을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아예 미리 포기해버림으로써 무방비 상태로 그 최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완전히 버리셨다고 원망한 적은 없었습니까? 내 가정이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고, 내 직장에서 승진 못했다고, 내 사업이 축복을 맛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하기 이전에, 지난 한 해 동안 그것들을 위하여 과연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를 먼저 살펴보고, 실상은 나의 무기력함과 나태가 진짜 원인이 아니었는지를 솔직히 돌이켜보시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한 후에 실패하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지만 노력을 하지 않고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일 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의 달란트를 그냥 ’땅에 묻어 둔’ 진짜 불충의 죄인 것을 우리는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허락해주시는 새 한해만큼은 그런 시행착오와 핑계로 일관하는 한 해가 되지 않도록, 어떤 불리해 보이는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일단 끝까지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 기도 드리면서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이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바로 야곱이 보여 준 저 유명한 ’얍복강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본문 32장 21절로 32절의 말씀에 ”21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22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32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 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살펴보았던 대로 야곱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형 에서를 만나게 될 것이 두렵다는 것을 솔직하게 아뢰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그에게 베풀어주신 축복의 소유물들을 지켜달라고, 하나님께서 애초에 그에게 약속해주셨던 언약을 따라 자기를 도와달라고 기도를 드리면서, 자기 소유물을 두 떼로 나누고 또 형 에서의 마음을 풀 수 있는 선물들을 먼저 보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나고 자기 아내와 여종과 아들들과 마지막 소유까지 다 얍복강을 건너가게 한 후 야곱은 자기만 혼자 남아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나중에 30절에서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 또는 ”천사”로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바로 화육강생 이전에 전현(前現)하신 성자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또한 그 ”씨름”은 단순히 힘을 겨루는 투기로서의 씨름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밀고 당기는 그의 간절한 심정이 마침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늘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12장 3, 4절에 보면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의 씨름은 여기서 증거하고 있듯이 ”울며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의 씨름이었고, 그 결과 그 기도에 응답을 받게 된 것이 곧 그 씨름에서 이긴 것이었습니다. 그 씨름의 과정과 결판이 나는 장면을 본문의 말씀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쳐서 ”위골”되고 ”절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끝까지 간절히 그를 놓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날 그만 붙잡고 좀 가게 해주어라.”고 야곱에게 부탁을 해올 정도로 결사적으로 달라붙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자기 기도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같은 야곱의 간절한 기도에 ”네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라는 말씀으로 응답해주셨습니다. 무슨 암호 같은 내용이지만 사실은 야곱의 소원의 핵심을 찌르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까 호세아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야곱”이란 원래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름이 이제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아주 멋진 새 이름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원래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즉 형이 받게 될 축복을 자기가 다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이 세상 태어나는 첫 순간부터 이미 발휘하고 있던 것이 바로 ’야곱’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처럼 형이나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축복 받고 싶다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형 발꿈치 잡는 정도가 아니라 형의 시장기를 이용해서 그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이라는 턱도 없는 세일 가격으로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버지 이삭까지 속이면서 에서인 체하고 그 앞에 앉아서 형이 받을 축복을 몽땅 가로채는 일종의 사기행각까지 벌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실로 복 받기 위해서라면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대어들었던 것이 바로 ’야곱’이라는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야곱이 그 날 밤 얍복 강가의 기도를 통하여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는 이제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하고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릴 줄 아는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을 축복해주시는 주권자가 되어주지 아니하시면, 나 혼자서는 아무리 용쓰고 기를 써도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결코 이 기도의 씨름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할 줄 아는, 완전히 다른 인생으로 변모되어 갔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복 받아야겠다고 기를 쓰고 형의 발꿈치를 잡던 야곱,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자기의 인생을 성취시켜보겠다고 형과 아버지 사이에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던 야곱이, 이제는 그 같은 과거의 야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를 축복해주시기만을 울며 간구하는’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야곱에게 ’네가 이 씨름에서 이겼다’라고 말씀해주신 것은 곧 그 간절한 기도가 축복으로 응답 받게 될 것을 확인해주신 것이며, 그제야 야곱은 마음놓고 얍복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양처럼 온순하게 만들어놓으신 에서가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 자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덥석 자녀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세뱃돈 주세요.”하고 두 손을 모아 벌릴 때, 그 손에 돈을 쥐어주는 것이 할아버지에게는 보통 기쁨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 자란 대학생 자녀라 할지라도 그냥 용돈을 주면서 자기가 알아서 사도록 할 때보다는, 함께 쇼핑을 나갔다가 ”아빠, 저 외투가 하나 필요한데, 이게 마음에 들어요.”라고 부탁해올 때 ”그래라.”하면서 당장 그것을 사주는 것이 훨씬 더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원하시는 순서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자신의 최선을 준비하고 나면 그 다음은 곧 그 문제와 그 소원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하며, 특히 그 기도를 하나님과 씨름하듯이 결사적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간절히 드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혹 야곱의 행세만 하지는 않았습니까? 복 받고 싶다는 욕심만은 굴뚝같이 솟아 있지만 그것을 성취하려는 과정에서 오직 철없는 야곱의 전철만 반복하지는 않았습니까? 옆 사람의 ’발꿈치를 붙잡고’ 내가 앞에 나서려는 편법만 날마다 궁리하지는 않았습니까? 가까운 친구나 형제까지라도 속여서 일단 나부터 잘되고 보아야 하겠다는 야곱의 심보가 지난 한 해동안 내 사고 방식을 좌우하지는 않았습니까? 이 강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그 같은 ’야곱’이 먼저 ’이스라엘’로 바뀌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해주셔야만 함을 깨닫고 인정하는 ’이스라엘’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저 ”하나님, 이것저것 해주십시오.”라고 자기의 요구사항만 차례로 한번 나열하고서 끝내어서는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통지’에 불과하지 결코 밀고 당기는 ’씨름’이라고 불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 인생 앞에 놓인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면서, 혹 어떤 결정적인 사건에 성패를 걸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더욱 문자 그대로 씨름하듯이 결사적으로 기도 드려야만 합니다. 이 연말의 강가에서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놓지 않겠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그 응답이 새해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이 강을 건너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 또 하나의 강이 놓였습니다. 우리는 이 강을 반드시 건너가야만 할 사람들입니다. 2006년으로 되돌아갈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건너가야 할 강이라면 그 강 건너편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축복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하는 두 가지 갈림길만 있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강을 건너가는 자세와 방법 역시 분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하든지 일단 각자의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한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의 복을 받기 위해서 교역자는 말씀과 기도와 심방과 전도로 최선을 다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이 평안하고 기업이 번창하는 복을 받기 위해서 성도는 또한 각자의 모든 땀과 노력과 시간과 정성을 아낌없이 바치면서 뛰어드는 새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선의 투자 없이는 최선의 결과란 것을 하나님께서 내려주실 리가 만무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최선의 노력과 함께 이제 하나님께서 그 성패를 인도해주실 것을, 아니 성공으로 축복해주실 것을 기도로 씨름할 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또한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해들과 마찬가지로 2007년 한 해의 우리 각자의 인생과 교회를 향한 축복의 열쇠 역시 오직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노력과 간절한 씨름의 기도로써 이 이 2006년의 강가에서 2007년의 강 저편으로 건너감으로써, 그처럼 ’얍복강을 건너가는 자’에게 이미 예비해놓으신 형통의 은총과 번성의 축복을 꼭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강을 건너기 전에/창32:21-31/ 송구영신예배설교/ 2007-12-31
강을 건너기 전에 창32:21-31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호 12:3∼5> 야곱은 그의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저 밧단아람 삼촌집으로 도망간지 20년만에 크게 성공을 하고 금의 환향을 합니다. 거부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가 밧단아람으로 도망가게된 동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자기 부친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를 속이는 그로 인해서 에서가 악한 감정을 가지고 그를 죽이려 하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도망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 자기 모친 리브가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 네 형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지게 되면 너에게 기별할테니 그때에는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좋은 기별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에서는 마음속에 여전히 야곱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공하고 돌아와서 얍복강이라는 강가에 이르러서 몇 명의 종들을 강건너편에 있는 에서에게로 사람들을 보냈는데 들려오는 소식은 큰일났습니다. 에서라고 하는 사람이 칼을 손에 빼들고 400명의 군사에게 무장을 시켜서 당신이 건너오기를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말에 야곱은 기가 질렸습니다. 온 몸이 떨렸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크게 성공을 한 것같은데 생명의 위험을 느끼게 되니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창세기 32장 24절 말씀에 보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야곱과 씨름을 하다가 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지금 야곱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야곱은 그 사람을 붙들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매달려 살려달라고 간구를 합니다. 그때 그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말이 호세아서 12장 4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2절에서 4절까지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에서의 소행대로 벌을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다는 말이 4절에 나옵니다. 호세아선지자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홀로 남아 하나님과 씨름했던 야곱, 그때 그는 울었다. 그리고 간구했다 라고 보충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강을 건너야만 고향에 갈 수 있는데 지금 고향에 갈 수 없는 장애물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지금 그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얍복강이 아닙니다. 그가 지금 강을 건널 수 없도록 막고 있는 것은 불안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죄의식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게 되면 가까운 사이가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형제와도 멀어지고, 친한 친구와도 멀어지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두렵게 만듭니다. 어떻게 해야만 될 것인가? 울어서 눈물로 해결할 것인가? 참아서 기다려서 해결할 것인가? 여러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내는 죄, 그것이 우리를 사망에 처하게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울어서 눈물로 해결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야곱은 하나님을 잊고 살았다가 어떤 한계상황이 나타나자 그때서야 잃었던 하나님을 다시 찾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속성을 둘로 나눈다면 그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떤 죄인 괴수라도 그 죄로 인하여 망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된다라고 공의를 외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택한 백성이 죄를 범하면 육신의 병으로 치든지, 경제적 파탄으로 치든지, 정신적 갈등으로 치든지 어느 하나도 편안함을 주는 게 아닙니다. 죄의 결과는 망하는 것이고 지옥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 앞에 지은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의 방법으로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능한데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일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죗값은 그 아들 예수님이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각기 양처럼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무슨 공로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보배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 한 것이라고 베드로전서 1장 18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 유전 죄를 금식기도한다고 없어지겠습니까? 우리가 죽는다고 없어지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뤄놓은 대속을 통해서만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 구원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문제 해결은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일입니다. 어떤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빈 손 들고 나와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은 주님이 버리지 않고 구원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말씀 지키지 않는 범죄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은 회개를 통해서만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1서 1장9절 말씀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의롭고 미쁘시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 했습니다. 회개해야만 우리가 천국 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첫 번째 외친 복음의 내용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바로 되지 못한 생각, 마음가짐, 언행을 하나님 기뻐하는 대로 고쳐 놓는 것입니다.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인격적으로 해야 합니다. 인격적인 회개한 삼단계를 거치는 것인데 첫째, 무슨 죄를 지었나 죄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내가 어떤 죄를 범했는지 깨달은 것을 자백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하나님께 내놓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다시는 그렇게 좋지 못한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 하였습니다. 여리고성의 세무서장 삭개오가 토색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삭개오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할 때 주님, 나의 재산을 다 팔아서 절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남의 물건 토색한 일에 대해서는 사배를 갚겠습니다 하고 삶을 정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자백은 하는데 삶을 고쳐놓지 않는다면 열매없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4장 22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으라 그랬습니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헌 옷을 벗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 다니는 신자들 가운데 가장 회개하기 어려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목사님, 장로님, 오래된 사람들이 참으로 회개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한 책을 보니까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 가운데 제일 골치 아픈 환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의사, 의사가 입원했을 때 제일 골치가 아프다고 합니다. 아는 게 많아서 왜 이렇게 하냐, 저렇게 하지? 자기가 환자인줄 잊어버리고 의사인줄 알고 자기가 처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가 입원하면 제일 골치 아프다고 합니다. 그 속에 독선이 있고, 오만이 있습니다. 저는 2001년도를 설계하면서 나는 어떠한 목사가 되어야 하는가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목사가 되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것 때문에 날마다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고민은 우리를 회개하게 합니다. 우리를 주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합니다.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지만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복된 자리로 우리를 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존심 강하고, 자기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누구입니까? 오래된 사람들 중에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많이 알고 있는데 삶을 바르게 고쳐놓지 못하는 사람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소경된 인도자라 그렇게 책망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개혁이 위에서부터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백성이 변화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는 어떤 대표성을 가진 분들, 어떤 부서를 담당한 책임자들 우리들이 새로워지면 전체가 새로워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강을 건너기 전 야곱은 해결할 문제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지난날의 삶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는 강을 건너기 전에 눈물로 자기 죄를 회개합니다. 그는 마음이 강퍅한 에서의 마음을 녹여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내 힘과 수단방법을 의지해서 살아온 내 고집을 꺾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우리는 2000년도라고 하는 강을 건너서 2001년도라고 하는 새로운 역사에 들어가기 전에 오늘 이 역사적 시점에서 무엇을 할 것이냐? 누군가의 마음에 한을 심어주었거나 상처를 주었거나 누군가로부터 원망을 받을만한 잘못된 일들이 생각나거든 이 강을 건너기 전에 오늘 우리가 해결하고 나아간다면 새로운 역사는 전개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에 우는 사람입니다. 1840년 영국의 선교사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선교를 갔습니다. 전도를 갔습니다. 그리고 의료선교를 계속 하는데 그는 일기장에 이런 일들을 써놨습니다. 토인들은 수술할 때에 잘 참는다. 지름 2.5cm 되는 커다란 종기를 칼로 찢을 때에도 태평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울면 안된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복음이 그들에게 들어가고 성령의 역사가 그들에게 나타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울기 시작했다. 우는 것을 수치로 알았던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운다는 것은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남자 어른이 운다는 것은 수치로 알고 있던 토인들, 그러나 복음이 그 속에 들어가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니까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와서 울어본 일이 있습니까? 더욱이 복음을 접할 때 십자가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며, 그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은 주님이 받으셨다. 그래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울어본 일이 있습니까?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웁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도 죄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복음을 접할 때 울 수 있는 사람, 사람이 울 때 가장 순수해지고, 가장 착해집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 땅에서 많이 우는 사람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눈물을 닦아준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우는 자, 죄 사함을 받은 증거입니다. 눅 7:48절 보면,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발라드리고 눈물을 흘립니다.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때에 딸아, 네 죄사함을 받았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윗왕은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얼마나 많이 울었든지 침상이 썩기까지 울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야 장군을 전선에서 죽게 했던 야비했던 다윗,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울 때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고 다시 붙잡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완전한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과거의 잘못이 있어도 진심으로 뉘우쳐 회개하는 사람에게 소생의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외칩니다.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은 강을 건너기 전에 회개했습니다. 우리도 지난 날 바로 살지 못한 부분을 오늘 회개하고 새해를 시작한다면 좋은 일들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야곱은 강을 건너기 전에 환도뼈가 위골되었습니다. 천사와 씨름할 때 천사가 환도뼈를 치니 환도뼈가 위골되었습니다. 이 환도뼈는 엉덩이 아래쪽 넓적다리를 받들고 있는 좌골입니다. 그래서 좌우의 한 쌍의 뼈를 환도뼈라고 하는데 환도뼈는 몸의 중심으로 힘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고대 군인들은 이 환도에 칼을 찼기 때문에 그래서 환도뼈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위골이 되었다는 말은 뼈가 부러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신체 중심, 한 부분을 위골시켜서 더 이상은 힘을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환도뼈가 위골되게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야곱이 믿고 살아온 자신을 더 이상은 믿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남보다 영리한 사람입니다. 신체가 건강한 사람입니다. 뜻을 한번 정하면 반드시 성취하고야 마는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수성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보다 뛰어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보다 머리가 좀 더 영리하고 지식이 꽤 많고 신체적으로 결함이 없고 사회적으로 지위, 명예와 권세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릎 꿇습니까? 하나님보다는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사람이 자아의식을 갖는 다는 것은 자아실현을 목표로 살기 때문에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자아의식이 강한 나머지 하나님이 들어갈 틈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것을 쳐서 더 이상 못 믿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나를 의지한다든지, 하나님보다 더 아들, 딸을 의지한다든지, 하나님보다 더 명예나 권세와 재물을 의지하면 그것을 뺏어 가시고 하나님을 믿게 만듭니다. 이유는 육신보다는 영혼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환도뼈가 위골되어야 하나님 의지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왜 우리는 편안할 때 건강할 때, 잘 될 때 하나님 찾지 않을까? 왜 깨어지고 망가지고 병들고 망해야만 하나님을 찾을까? 이것이 바로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어젯밤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삼십년 전에 어느 부흥강사로부터 들었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독립문 성결교회를 담임했던 임영재 목사님 부흥회에 참석했다 제가 들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어른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전도사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겨울에 부흥회를 할 때인데 밤집회를 마치고 숙소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온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알고 보니 동네 공동우물속에서 도깨비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무슨 도깨비인가 해서 가봤더니 이상한 것은 우물 안에 파란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해서 이게 무엇인가? 그래서 기다란 대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쿡 찌르니까 야옹 그러더랍니다. 고양이가 쥐사냥에 나섰다가 그만 빠진 것입니다. 고양이같은 짐승들은 밤에 눈을 뜨면 파란 불이 켜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고양이눈을 보고 도깨비가 나타났다고 야단법석을 떤 것입니다. 그래서 후레쉬를 비취 보니까 추운 겨울에 우물벽이 너무 미끄러워 올라오지 못하고 빠져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저 고양이를 구원해 주어야겠다 하고 기다란 대나무 가지 끝에 갈고리를 달아서 얘야, 타라 하고 내밀었더니 고양이가 비명을 지르면서 탁 쳐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를 구원해 주겠다고 내미는 갈고리를 자꾸 치는 것입니다. 아니야, 이것은 너를 해치는 갈고리가 아니고 너를 구원하는 갈고리이니 빨리 올라타! 하고 내밀면 치고 내밀면 치고 해서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 고양이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쯤 죽여야 되겠다 생각해서 거꾸로 막대기를 쥐고 탁 때리니까 깩 하고 죽었습니다. 기절을 해 버린 것입니다. 기절을 하니 이제는 덤벼들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갈고리로 건져서 수건으로 싸서 아랫목에 갖다 놓았더니 나중에 야옹 하고 살아나더랍니다. 자기는 그 사건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 있답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겠다고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해주면 꼭 고양이처럼 할퀸다는 것입니다. 나 들으라고 설교했지? 나 들으라고 설교했지? 그러면 누구 들으라고 설교하겠습니까? 결국 시험만 잔뜩 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탁 쳐서 반 죽여놓으면 그때서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손을 든다는 것입니다 . 야곱이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기도 할 사람이 아닙니다. 머리가 얼마나 영리하고 신체가 얼마나 건강한데 네 명의 여자를 거느릴 정도면 보통 남자가 아닙니다. 이 사람이 기도합니까? 하나님 찾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환도뼈를 확 꺾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힘을 못 쓰니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 한 것입니다. 남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조심하십시오. 환도뼈가 위골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위골을 시켜 놓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고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고난이 도리어 유익되는 때가 있는 줄 믿습니다. 시편119:67절 말씀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욥이라고 하는 동방의 의인이 많은 시련을 당합니다. 10남매의 자녀를 잃었습니다. 많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몸에 악창이 나서 병들어 쓰러집니다. 그의 아내가 악담을 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을 받는 것도 마땅하니라. 그대의 하는 말이 어리석도다 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시인하더니 그가 그 시련을 이길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욥기서 23장 10절 말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이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복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것, 신체적인 것이고, 하나는 영적인 것인데 지금 야곱은 신체적으로 자연적으로 육신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 갖추었어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그동안 끊어져 있었습니다. 영적인 신령한 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복을 누가 준 것이냐?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냐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멋있는 자녀가 있고 많은 재물이 있어도 생명의 위협 앞에 놓이게 되면 그게 나에게 무슨 유익입니까?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환도뼈가 위골된 상태에서 무슨 기도를 하느냐면 당신이 내게 축복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보내지 아니하겠나이다 하고 붙들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구하는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위골된 환도뼈를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위골된 환도뼈를 고쳐주십시오.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환도뼈 고쳐달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내 환도뼈 부러진 대로 내버려두고 날 좀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죽음의 위기에 있으니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에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없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믿었던 그는 강을 건너기 전에 내 생명의 보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내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축복하기 전에 그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이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뜻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빼앗는 자란 뜻입니다. 야, 그런 이름을 가지고 무슨 복을 받겠느냐? 그런데 그는 솔직하게 제 이름을 속이는 자, 빼앗는 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부정적인 면을 공개적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부정한 것을 다 내놓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치료의 은총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할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이기었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용납하고 그의 믿음을 인정해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그 말은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과 승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죄와 싸워 이기는 승리자,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 이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7절 말씀 보면, 예수님은 그 마음속에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거짓이 없고 진실할 때 바르게 살 때 참 이스라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2000년의 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는 야곱이란 이름을 버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바꾸라는 명령을 따라서 우리가 좀 새로워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새로워져야 새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새 달력 갖다 걸고, 무슨 계획을 세우고, 새 결심만 했다고 새 역사가 나타나는 게 아니고, 사람이 변해야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기 전에 새 이름을 받자는 것입니다. 야곱은 새 이름을 받아서 새 아침을 맞이하는데 브니엘에서 해가 돋았는데 그 날 아침의 해는 유난히도 밝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은혜 받고 맞이하는 새 아침은 별난 날로 우리에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새 이름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때 에서가 달려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에서의 손에 칼이 없습니다. 400명의 군사도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반가운 표정으로 에서가 달려와서 야곱을 끌어안더니 엉엉 울었습니다. 왜 울었겠습니까? 너를 미워했던 내 마음을 용서해라. 야곱이 왜 울었겠습니까? 20년전에 잘못했던 내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피차 울었습니다. 야곱이 변화를 받으니 에서가 변화를 받습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되고 자아가 깨지니 강퍅했던 에서의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문제는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개하면 다른 사람도 회개하게 되고 내가 새로워지면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도 함께 새로워질 줄 믿습니다. 누가 이런 역사를 이루십니까? 배후에서 조종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모두 강을 건너기 전에 지금까지 잘못 믿고 잘못 살아온 우리의 과거를 얍복강 가에 묻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 환도뼈를 의지하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믿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거두어 가거나 그것을 깨뜨려 주십니다. 우리 모두 강을 건너기 전에 야곱처럼 회개하고 강을 건너기 전에 울며 기도하고 강을 건너기 전에 환도뼈를 의지하지 말고 강을 건너기 전에 새 이름을 받고 강을 건너기 전에 축복을 받고 강을 건넌다면 장애물은 오히려 우리의 길잡이로 바뀌어 질 줄로 믿습니다. 에서가 말합니다. 동생 야곱이여, 이곳은 광야라 가시 엉겅퀴가 많고 길이 험난하니 이 유약한 어린아이와 함께 가기에 적합지 않도다. 내가 이 길을 잘 아노니 내가 너의 길잡이가 되리라. 놀라운 일 아닙니까? 가지 못하도록 버티고 섰던 사람이 길 잡이로 바뀌어 졌으니 원수가 친구로 미워했던 사람이 사랑의 관계로 바뀌어 질 수 있었던 것은 강을 건너기 전에 야곱이 기도했고 야곱이 변하여 새사람 된 결과였습니다. 우리 모두 2008년도의 강을 건너기 전에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 마음, 새 이름 가지고 출발한다면 우리를 해치던 사람도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변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산의 날까지 의롭게 살자/ 딤후4:3-8
결산의 날까지 의롭게 살자 딤후4:3-8 모든 만물이 결산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언제나 인생의 때를 바로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림은 그리다가 잘못 그렸으면 다시 그릴수 있고 길은 가다가 잘 못 갔으면 돌이켜 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지나가 버리면 다시 지울수도 돌이 킬 수도 없는 단 한번뿐인 인생이기에 잘못 살면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앞에서 인생을 결산할 날이 반 드시 올것입니다. 그날의 결산을 위해 후회없는 결산보고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 은 인생의 결산이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때를 바로 알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정하신 기약이 있음을 알고 살았습니다. 인생의 시작도 하나님으로부터이며 마지막도 하나님의 정하심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시작과 끝이 인간의 마음대로 연기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 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는 일이기 때문 입니다. 농부는 계절을 바꾸거나 고칠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겨울이 싫다고 가을이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를 알고 때를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둘째로 그는 선한 싸움에서의 승리를 선포했습니다. 모든 영광과 관심과 상급은 이긴자의 것입니다. 바울은 싸움에서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선한싸 움]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이요, 신령한 싸움을 의미합니다. 바로 바울은 이런 신앙의 싸움에서 승리자였습니다. 셋째로 그는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 나의 달려갈 길, 이 길을 바울은 마쳤다고 했습니다. 바로 우리 신앙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이말은 이땅에 하나님이 주신 모든 책임 또는 사명을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로서 할 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책임울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출발점도 중요하고 그 코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 한 것은 마지막 결과입니다. 한 사람의 경주자로서 자기에게 주어졌던 이 땅 에 사명을 유감없이 완수했다는 이것이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입니 다. 참으 로 바울은 최선을 다해 인생의 길을 바로 달려왔기에 후회가 없었습니다. 끝으로 그는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고 했습니다. 신앙에서 믿음을 지키는 일은 경기규칙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경기는 언제나 정당한 규칙대로 해야지, 아무리 잘했어도 경기자가 법대로 경기하 지 아니하면 무효가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믿음을 지키지 않고 신앙의 법도를 벗어나면 축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나는 끝 까지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믿음을 간직했다 는 말이요 믿음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또한 믿음을 지키되 끝까지 지켰 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일. 이 길을 통해서만 성공과 승리가 있음을 바울은 고백 하고 있다. 무엇보다 진리가 혼탁해져가는 이시대에 더욱 믿음을 생명같이 지키기를 힘써야 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대 못위를 맨발로 걸어갔고 순교의 피를 흘려가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서 울 영안교회> ◇ "[축복의 코스]를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 오늘의 기도 ◀ 하나님 아버지! 한해를 거의 달려온 이 시간 잘못 살았노라고 뉘우치는 일이 많았습니 다. 선하게 살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보다 의롭게 살 수 있는 기회도주셨 지만 주께서 주신 축복의 코스를 이탈하고 곁길을 갈때가 너무 많았습니 다. 용서하소서! 언젠가는 떠날 기약이 있음을 깨닫고 바울처럼 달려 갈길을 마치고 믿음 을 지켰으나 내 앞에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는 귀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앞날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결산의 날까지 의롭게 살자/ 딤후4:3-8
결산의 날까지 의롭게 살자 딤후4:3-8 모든 만물이 결산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언제나 인생의 때를 바로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림은 그리다가 잘못 그렸으면 다시 그릴수 있고 길은 가다가 잘 못 갔으면 돌이켜 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지나가 버리면 다시 지울수도 돌이 킬 수도 없는 단 한번뿐인 인생이기에 잘못 살면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앞에서 인생을 결산할 날이 반 드시 올것입니다. 그날의 결산을 위해 후회없는 결산보고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 은 인생의 결산이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때를 바로 알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정하신 기약이 있음을 알고 살았습니다. 인생의 시작도 하나님으로부터이며 마지막도 하나님의 정하심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시작과 끝이 인간의 마음대로 연기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 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는 일이기 때문 입니다. 농부는 계절을 바꾸거나 고칠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겨울이 싫다고 가을이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를 알고 때를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둘째로 그는 선한 싸움에서의 승리를 선포했습니다. 모든 영광과 관심과 상급은 이긴자의 것입니다. 바울은 싸움에서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선한싸 움]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이요, 신령한 싸움을 의미합니다. 바로 바울은 이런 신앙의 싸움에서 승리자였습니다. 셋째로 그는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 나의 달려갈 길, 이 길을 바울은 마쳤다고 했습니다. 바로 우리 신앙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이말은 이땅에 하나님이 주신 모든 책임 또는 사명을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로서 할 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책임울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출발점도 중요하고 그 코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 한 것은 마지막 결과입니다. 한 사람의 경주자로서 자기에게 주어졌던 이 땅 에 사명을 유감없이 완수했다는 이것이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입니 다. 참으 로 바울은 최선을 다해 인생의 길을 바로 달려왔기에 후회가 없었습니다. 끝으로 그는 믿음을 끝까지 지켰다고 했습니다. 신앙에서 믿음을 지키는 일은 경기규칙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경기는 언제나 정당한 규칙대로 해야지, 아무리 잘했어도 경기자가 법대로 경기하 지 아니하면 무효가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믿음을 지키지 않고 신앙의 법도를 벗어나면 축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나는 끝 까지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믿음을 간직했다 는 말이요 믿음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또한 믿음을 지키되 끝까지 지켰 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일. 이 길을 통해서만 성공과 승리가 있음을 바울은 고백 하고 있다. 무엇보다 진리가 혼탁해져가는 이시대에 더욱 믿음을 생명같이 지키기를 힘써야 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대 못위를 맨발로 걸어갔고 순교의 피를 흘려가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서 울 영안교회> ◇ \"[축복의 코스]를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 오늘의 기도 ◀ 하나님 아버지! 한해를 거의 달려온 이 시간 잘못 살았노라고 뉘우치는 일이 많았습니 다. 선하게 살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보다 의롭게 살 수 있는 기회도주셨 지만 주께서 주신 축복의 코스를 이탈하고 곁길을 갈때가 너무 많았습니 다. 용서하소서! 언젠가는 떠날 기약이 있음을 깨닫고 바울처럼 달려 갈길을 마치고 믿음 을 지켰으나 내 앞에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는 귀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앞날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광야생활 같은 인생/ 신8:1-3/ 송구영신예배설교/ 2009-12-31
광야생활 같은 인생 신8:1-3 오늘은 금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는 여느 해 보다 더 다사다난(多事多難)하였던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사건을 몇 가지만 들면, 정권이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고 새 대통령이 취임한 것과, 5월초부터 시작해서 석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던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것과, 그리고 미국 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 걸쳐서 많은 변화와 그로 인한 진통이 있었고, 연말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가하면, 개인적인 삶에도 차이가 나긴 하겠지만 저와 성도님들이나 나름대로 다사다난하게 보낸 한 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매년 연말이 되면 느끼는 것은 특별히 힘든 해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수월했다고 생각되는 해는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순탄한 시기가 계속되다가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갑작스레 다가오고, 그 반대로 어려운 시기가 계속되다가도 다시금 순탄한 시기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고 말씀했다고 생각합니다. 맑은 날과 흐린 날이 교차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좀 더 살아보면 삶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는 솔로몬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전 11:8)고 했습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야곱이 요셉의 주선으로 애굽의 바로를 만났을 때, 바로가 야곱에게 “당신의 연세가 얼마입니까?”라고 묻자, 야곱이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입니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으면 그렇게 대답했을까요? 그러나 어디 야곱의 생애만 그렇겠습니까?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모든 사람의 나그네 길이 험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경우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똑같이 겪는 삶의 어려움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성도들을 연단하십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성도들이 겪는 삶의 어려움을 일컬어 연단이라고 말합니다. 연단(鍊鍛)을 글자를 바꾸어 단련(鍛鍊)이라고도 하는데, 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풀무질을 해서 뜨겁게 달군 화로 속에 쇠붙이를 넣어 벌겋게 달군 다음에 그 쇠를 모루에 놓고 쇠망치로 두들깁니다. 그러고는 물속에 넣어 식힌 다음에, 또 다시 불속에 넣어 달구어서 쇠망치로 두들기고 물속에 넣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쇠의 성질이 단단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연단을 한 쇠라야 보검을 만들 수 있고, 쓸 만한 농기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연약한 우리를 고난이라는 풀무 불을 통해서 이모저모로 연단하십니다. 그리하여 작은 시험 앞에서도 맥없이 넘어지던 사람이 연단을 통해서 어떤 시험도 능히 이겨내는 강한 신앙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윗 왕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이 불순종하자 사무엘 선지자를 이새의 집에 보내어 홍안의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는 다윗을 사울 왕 대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표시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고 나자 하나님의 신이 다윗과 함께 하셨으므로 그는 전장에 나가 골리앗을 물리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건져냈습니다. 사울 왕의 총애를 받아 공주인 미갈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근 십년에 걸쳐서 다윗에게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서 황량한 광야의 동굴 속에 숨어 지내기도 하고, 이방나라인 모압에 가서 머물기도 하고, 심지어는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의 왕 라기스에게 몸을 의탁하기도 했습니다. 굶기도 하고, 배신도 당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같은 혹독한 시련을 통해서 연단을 잘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상(天上) 회의에서 천사들과 사단 앞에서 욥을 칭찬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욥기 1장 8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욥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같은 욥에게는 아무런 시련이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욥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 후에 욥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고난에 직면했습니다. 그 많던 가축과 종들을 강도떼에게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욥에게는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열 자녀가 맏형 집에 모여 잔치하다가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에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몰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욥은 상피증(象皮症)이라는 고약한 병에 걸려서 온 몸의 피부가 마치 코끼리 피부처럼 딱딱하게 되고 물집이 생겼다가 터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어찌나 가렵던지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욥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게 되자 “그래도 당신이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멀리서 소문을 듣고 위문 차 찾아온 세 친구도 욥의 형편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생각을 바꾸어서 이는 필경 욥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면서 욥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한 욥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욥은 자기가 받는 고난의 원인은 모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서 그 고난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과연, 욥은 그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고, 병이 물러가고 건강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의 인물들 뿐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연단을 위한 시련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때로 우리의 범죄로 인해 고난 받을 때도 있지만, 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다가오는가 하고 당황해 하지 마시고 욥과 같이 신앙의 연단을 위해 주신 기회로 알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 이 말씀과 같이, 시련이 다가올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마시고, 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기 위해서 연단하시는 줄 아시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시련에 대하여 왜곡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유약해서 시련을 참아 내려는 의지를 발동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너무 쉽게 생을 포기하는 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이치를 자연계를 통해서도 보여주십니다. 어제 낮에 쌍암 공원을 산책하러 갔는데 바람이 어찌나 차갑던지 겨울 맛이 물씬 났습니다. 그런데 호숫가에 서 있는 벚나무들을 보니까 가지마다 꽃눈이 달려 있었습니다. 아직 가장 추운 시기가 두 달이나 남아 있는데, 가지마다 꽃눈을 달고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궁금해서 나무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더니, 봄철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꽃눈의 분화를 마친 상태로 겨울을 난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겨울의 어려움을 겪어내야 새 봄에 꽃을 피울 것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무가 ‘겨울은 너무 추우니까 꽃눈을 만들지 말고 따뜻한 봄이 오면 그 때가서 만들지’, 그러면 그 나무는 봄이 되어도 꽃을 피울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도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의 삶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다가올 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닥쳐오느냐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연단의 기회로 알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내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의 인생은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과 같습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광야의 여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도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한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되었습니다. 모세의 인도 아래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나안 접경 지역인 가데스 바네아까지 가는 데는 열 하룻길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성막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호헵산 아래에서 일 년 가까이 머물렀지만, 그 기간을 감안하더라도 광야생활은 일 년 남짓이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무려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들을 겁내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아직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연단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마음의 준비가 없이 큰 축복을 받으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오히려 그 축복 때문에 망하는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아무 준비도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을 40년 광야생활을 통해서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생활 40년이 끝나갈 무렵에,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이유를 이 같이 말씀했습니다. “1)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생활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지, 이스라엘 자손의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를 굴복시키셨고, 홍해를 갈라 그 사이에 난 길로 선민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들을 두려워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의 불순종하는 마음과 불신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즐거이 준행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연단을 통과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을 하던 40년 동안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만나는 밭에서 재배하는 곡식이 아닙니다. 밭에 곡식을 심어 거두려고 해도 광야에는 비가 오지 않으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몇 안 되는 오아시스에서 곡식을 재배할지라도 200만이 넘는 큰 백성에게 필요한 식량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웃 나라에 가서 곡식을 사올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사람도 영양실조로 죽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이슬을 내리듯 만나를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안식일 예비일 아침에만 이틀 분을 거두는 것이 허락되었을 뿐, 평일에는 그 날의 만나만 거두어야 했습니다. 백성 중에 이 명령을 어기고 여러 날 분을 거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튿날 보니까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매일 아침마다 그 날의 양식으로 내려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먹고 사는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해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것일까요? 그 마음이 교만한 것이 원인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에 맞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여지없이 불순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하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고달픔과 결핍을 통해서 이 백성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광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양식 뿐 아니라 마실 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광야에는 낮에는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고, 밤이 되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춥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차일을 펴서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난방을 해 주셔서 추위를 면케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수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만나와 생수, 구름기둥 불기둥은 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겪는 시험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 하면 “떡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경제 문제를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더 중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경제 문제를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앞에 두면, 그 사람의 신앙은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일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데 두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던 하나님께서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성도들의 지상의 삶은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생활을 은혜롭게 하려면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도들은 광야의 연단을 통해서 천국 백성의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가서 살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지상의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기간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이 말씀을 한번 뒤집어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는 복이 없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 될 수 없음이요”라고 바꾸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시민이 된 사람은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겸손과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면 저절로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광야의 연단을 거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이어령 교수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하와이에 살고 있는 그 분의 따님이 갑상선암 수술을 했는데 얼마 후에 재발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망막이 손상되어 앞을 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때 이어령 교수는 딸이 시력을 잃게 되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지식과 돈이 딸을 구하지 못한 것은 곧 자기의 무력함이 증명된 것이라고 하면서 딸이 믿는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하와이의 한 작은 교회에 가서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딸 민아에게서 빛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주님의 종으로 살겠나이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얼마 지나서부터 시력이 조금씩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을 데리고 한국에 와서 수술하려고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가 망막이 다 나았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후로, 이어령 교수는 국내외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하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딸에게 닥친 비극적인 운명이 이어령 교수의 교만을 깨뜨려 주님 앞에 손들고 나오게 하였고, 그 일로 주님을 만나고 기적을 체험하였으며, 하나님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당면했던 시련이 오히려 새 생명을 얻게 했을 뿐 아니라 지적인 교만을 깨뜨려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는 귀한 기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아, 하나님께서 아직도 나에게 남아있는 세속적인 성품을 깨뜨리시고 천국 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하시려고 연단을 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시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시련을 감당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목적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천국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 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하시기 위해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우리가 연단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법을 배울 때 하나님의 복스러운 약속을 현실로 받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연단의 목적이 지극히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겁내지 말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알고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라고 한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항상 순종함으로 매일 같이 구름기둥, 불기둥의 보호와 신령한 만나와 생수를 공급받는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생활 같은 인생/ 신8:1-3/ 송구영신예배설교/ 2009-12-31
광야생활 같은 인생 신8:1-3 오늘은 금년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더 다사다난(多事多難)하였던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사건을 몇 가지만 들면, 정권이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고 새 대통령이 취임한 것과, 5월초부터 시작해서 석 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던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것과, 그리고 미국 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 걸쳐서 많은 변화와 그로 인한 진통이 있었고, 연말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가하면, 개인적인 삶에도 차이가 나긴 하겠지만 저와 성도님들이나 나름대로 다사다난하게 보낸 한 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매년 연말이 되면 느끼는 것은 특별히 힘든 해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수월했다고 생각되는 해는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순탄한 시기가 계속되다가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갑작스레 다가오고, 그 반대로 어려운 시기가 계속되다가도 다시금 순탄한 시기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고 말씀했다고 생각합니다. 맑은 날과 흐린 날이 교차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좀 더 살아보면 삶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는 솔로몬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전 11:8)고 했습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야곱이 요셉의 주선으로 애굽의 바로를 만났을 때, 바로가 야곱에게 “당신의 연세가 얼마입니까?”라고 묻자, 야곱이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입니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으면 그렇게 대답했을까요? 그러나 어디 야곱의 생애만 그렇겠습니까?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모든 사람의 나그네 길이 험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경우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똑같이 겪는 삶의 어려움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성도들을 연단하십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성도들이 겪는 삶의 어려움을 일컬어 연단이라고 말합니다. 연단(鍊鍛)을 글자를 바꾸어 단련(鍛鍊)이라고도 하는데, 쇠를 불에 달구어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풀무질을 해서 뜨겁게 달군 화로 속에 쇠붙이를 넣어 벌겋게 달군 다음에 그 쇠를 모루에 놓고 쇠망치로 두들깁니다. 그러고는 물속에 넣어 식힌 다음에, 또 다시 불속에 넣어 달구어서 쇠망치로 두들기고 물속에 넣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쇠의 성질이 단단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연단을 한 쇠라야 보검을 만들 수 있고, 쓸 만한 농기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연약한 우리를 고난이라는 풀무 불을 통해서 이모저모로 연단하십니다. 그리하여 작은 시험 앞에서도 맥없이 넘어지던 사람이 연단을 통해서 어떤 시험도 능히 이겨내는 강한 신앙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윗 왕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이 불순종하자 사무엘 선지자를 이새의 집에 보내어 홍안의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는 다윗을 사울 왕 대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표시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고 나자 하나님의 신이 다윗과 함께 하셨으므로 그는 전장에 나가 골리앗을 물리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건져냈습니다. 사울 왕의 총애를 받아 공주인 미갈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근 십년에 걸쳐서 다윗에게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서 황량한 광야의 동굴 속에 숨어 지내기도 하고, 이방나라인 모압에 가서 머물기도 하고, 심지어는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의 왕 라기스에게 몸을 의탁하기도 했습니다. 굶기도 하고, 배신도 당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같은 혹독한 시련을 통해서 연단을 잘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상(天上) 회의에서 천사들과 사단 앞에서 욥을 칭찬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욥기 1장 8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욥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같은 욥에게는 아무런 시련이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욥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 후에 욥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고난에 직면했습니다. 그 많던 가축과 종들을 강도떼에게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욥에게는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열 자녀가 맏형 집에 모여 잔치하다가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에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몰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욥은 상피증(象皮症)이라는 고약한 병에 걸려서 온 몸의 피부가 마치 코끼리 피부처럼 딱딱하게 되고 물집이 생겼다가 터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어찌나 가렵던지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욥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게 되자 “그래도 당신이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멀리서 소문을 듣고 위문 차 찾아온 세 친구도 욥의 형편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생각을 바꾸어서 이는 필경 욥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면서 욥에게 죄를 자백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한 욥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욥은 자기가 받는 고난의 원인은 모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서 그 고난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과연, 욥은 그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고, 병이 물러가고 건강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의 인물들 뿐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연단을 위한 시련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때로 우리의 범죄로 인해 고난 받을 때도 있지만, 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다가오는가 하고 당황해 하지 마시고 욥과 같이 신앙의 연단을 위해 주신 기회로 알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 이 말씀과 같이, 시련이 다가올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마시고, 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기 위해서 연단하시는 줄 아시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시련에 대하여 왜곡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유약해서 시련을 참아 내려는 의지를 발동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너무 쉽게 생을 포기하는 편을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이치를 자연계를 통해서도 보여주십니다. 어제 낮에 쌍암 공원을 산책하러 갔는데 바람이 어찌나 차갑던지 겨울 맛이 물씬 났습니다. 그런데 호숫가에 서 있는 벚나무들을 보니까 가지마다 꽃눈이 달려 있었습니다. 아직 가장 추운 시기가 두 달이나 남아 있는데, 가지마다 꽃눈을 달고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궁금해서 나무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더니, 봄철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꽃눈의 분화를 마친 상태로 겨울을 난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겨울의 어려움을 겪어내야 새 봄에 꽃을 피울 것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무가 ‘겨울은 너무 추우니까 꽃눈을 만들지 말고 따뜻한 봄이 오면 그 때가서 만들지’, 그러면 그 나무는 봄이 되어도 꽃을 피울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도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의 삶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다가올 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닥쳐오느냐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연단의 기회로 알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내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의 인생은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과 같습니다. 성도들의 인생은 광야의 여정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도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한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방되었습니다. 모세의 인도 아래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나안 접경 지역인 가데스 바네아까지 가는 데는 열 하룻길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성막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호헵산 아래에서 일 년 가까이 머물렀지만, 그 기간을 감안하더라도 광야생활은 일 년 남짓이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무려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들을 겁내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아직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연단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마음의 준비가 없이 큰 축복을 받으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오히려 그 축복 때문에 망하는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아무 준비도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을 40년 광야생활을 통해서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생활 40년이 끝나갈 무렵에,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이유를 이 같이 말씀했습니다. “1)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생활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지, 이스라엘 자손의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를 굴복시키셨고, 홍해를 갈라 그 사이에 난 길로 선민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들을 두려워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의 불순종하는 마음과 불신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즐거이 준행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연단을 통과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을 하던 40년 동안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만나는 밭에서 재배하는 곡식이 아닙니다. 밭에 곡식을 심어 거두려고 해도 광야에는 비가 오지 않으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몇 안 되는 오아시스에서 곡식을 재배할지라도 200만이 넘는 큰 백성에게 필요한 식량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웃 나라에 가서 곡식을 사올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사람도 영양실조로 죽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이슬을 내리듯 만나를 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안식일 예비일 아침에만 이틀 분을 거두는 것이 허락되었을 뿐, 평일에는 그 날의 만나만 거두어야 했습니다. 백성 중에 이 명령을 어기고 여러 날 분을 거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튿날 보니까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매일 아침마다 그 날의 양식으로 내려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먹고 사는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해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것일까요? 그 마음이 교만한 것이 원인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에 맞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여지없이 불순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하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고달픔과 결핍을 통해서 이 백성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광야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양식 뿐 아니라 마실 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광야에는 낮에는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쬐고, 밤이 되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춥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차일을 펴서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난방을 해 주셔서 추위를 면케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수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만나와 생수, 구름기둥 불기둥은 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겪는 시험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 하면 “떡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경제 문제를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더 중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경제 문제를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앞에 두면, 그 사람의 신앙은 퇴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일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데 두면,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던 하나님께서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성도들의 지상의 삶은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생활을 은혜롭게 하려면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도들은 광야의 연단을 통해서 천국 백성의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가서 살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지상의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기간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이 말씀을 한번 뒤집어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는 복이 없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 될 수 없음이요”라고 바꾸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시민이 된 사람은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겸손과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면 저절로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광야의 연단을 거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이어령 교수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하와이에 살고 있는 그 분의 따님이 갑상선암 수술을 했는데 얼마 후에 재발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망막이 손상되어 앞을 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때 이어령 교수는 딸이 시력을 잃게 되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지식과 돈이 딸을 구하지 못한 것은 곧 자기의 무력함이 증명된 것이라고 하면서 딸이 믿는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하와이의 한 작은 교회에 가서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딸 민아에게서 빛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주님의 종으로 살겠나이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얼마 지나서부터 시력이 조금씩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을 데리고 한국에 와서 수술하려고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가 망막이 다 나았다고 진단했습니다. 그 후로, 이어령 교수는 국내외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하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딸에게 닥친 비극적인 운명이 이어령 교수의 교만을 깨뜨려 주님 앞에 손들고 나오게 하였고, 그 일로 주님을 만나고 기적을 체험하였으며, 하나님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당면했던 시련이 오히려 새 생명을 얻게 했을 뿐 아니라 지적인 교만을 깨뜨려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는 귀한 기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아, 하나님께서 아직도 나에게 남아있는 세속적인 성품을 깨뜨리시고 천국 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하시려고 연단을 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시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시련을 감당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목적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천국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 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하시기 위해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우리가 연단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법을 배울 때 하나님의 복스러운 약속을 현실로 받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연단의 목적이 지극히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시련이 다가올 때 겁내지 말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알고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라고 한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항상 순종함으로 매일 같이 구름기둥, 불기둥의 보호와 신령한 만나와 생수를 공급받는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도자의 삶/ 수1:1-9/ 송구영신예배설교/ 2002-12-31
구도자의 삶 수1:1-9 2002년을 보내며. 내가 살아온 금년 한해는 무엇이었는가 생각해 봅니다. 새해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목회를 하는 저에게 가장 부담스러울 때가 목사를 완성자로 생각할 때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완성자가 아니라 구도자입니다. 목사는 어떤 존재입니까? 구도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라 생각을 할 때, 내 안에 자유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 해를 맞이하면서 제가 한 가지 주님 앞에 소원하고 싶은 사실은 좀더 진지한 구도자로 서고 싶다는 점입니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는 진지한 구도자이고 싶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이미 섰다 함도 아니오, 이미 이르렀다 함도 아니지만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 가노라 하신 그 현장에 서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오는 한 해 동안, 구도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1. 우리 구도자에겐 건너가야 할 땅이 있습니다(선교)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서있는 요단 동편은 만족할 만한 땅이 아닙니다. 비옥한 땅일 수는 있어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불만족스런 땅입니다. 그곳 요단강 동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낯 선 땅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주신 땅입니다. 우리 서머나 교우들에게 맡겨주신 땅이 어디입니까? 먼저 이곳 토론토입니다. 150여 개의 민족이 모여 사는 이민지 토론토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선교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분들은 우리들로 인하여 복을 받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곳에 선교본부인 서머나 교회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서머나교회를 본부로 해서 원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우리가 건너가야 합니다. 우리 아홉 다락방에게 맡겨주신 선교지로 건너가야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몇 사람이든지 금년 여름에는 유럽 땅으로 건너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C국에서 선교 중에 있는 J선교사님은 우리 동족들에게 들어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최선수 장로님께서는 북한 탈북자들을 도우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1월 중순에 들어가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가야할 땅이 있는 선교의 공동체입니다. 가는 분이나 보내는 분이나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땅에 들어가든지 보내든지 구체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건너야할 강이 있었습니다. 그 강 이름은 요단강입니다. 이 땅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건너야할 강이 있습니다. 그 강이 무엇일까요? 그 강은 사람에 따라 같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를 수도 있습니다. 자기 부인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물질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시간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이기주의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이 때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땅을 얻게 하리라(내가 그 조상에게 주리라 한 땅을) 뼈를 깎는 아픔이 수반되는 도강 속에서 우리는 그 땅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2.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땅이지만 그곳에는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을 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대적들이 건너오는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기 위해 창과 칼을 갈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그들과 싸우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곳에 선교본부인 서머나 교회를 세우시는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하여, 그리고 선교지를 후원하기 위해서는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놀라지 않는 마음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곳 토론토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해보면 위축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 무지막지한 북한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생각할 때, 갑갑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전쟁이나 일으키려 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놀라지 말라 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9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백성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 홈페이지에 오늘 황환영 집사님께서 올리신 글을 보니까 이미 추방명령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집사님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간증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놀라지 맙시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십시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함께 하십니다.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3.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모세가 명한 율법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이 법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가장 힘써 지켜야 할 법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지만, 금년 한 해도 노력하였고 내년 한 해도 도달하기 위해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 일은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이 사랑의 법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인 결단을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약속하신 줄 아십니까? 평탄한 길 형통한 길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요, 네가 형통하리라. 마무리하는 말 2003년이 밝아옵니다. 새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소원하기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진지한 구도자로 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기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오는 한 해 동안, 구도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업에 들어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겐 건너가야 할 땅이 있습니다. 지금 서있는 곳은 비옥한 땅일 수는 있어도 사명인으로서의 우리에게는 불만족스런 땅입니다. 약속하신 그땅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안주하면 안됩니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깊이 새기고 사랑의 법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사랑의 법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시고 평탄하고 형통함을 주실 것입니다. 복된 새해를 맞아 우리는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시는 한해가 되게 하소서 다함께 외우고 한 해를 시작하십시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구도자의 삶/ 수1:1-9/ 송구영신예배설교/ 2002-12-31
구도자의 삶 수1:1-9 2002년을 보내며. 내가 살아온 금년 한해는 무엇이었는가 생각해 봅니다. 새해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목회를 하는 저에게 가장 부담스러울 때가 목사를 완성자로 생각할 때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완성자가 아니라 구도자입니다. 목사는 어떤 존재입니까? 구도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라 생각을 할 때, 내 안에 자유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제가 한 가지 주님 앞에 소원하고 싶은 사실은 좀더 진지한 구도자로 서고 싶다는 점입니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는 진지한 구도자이고 싶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이미 섰다 함도 아니오, 이미 이르렀다 함도 아니지만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 가노라 하신 그 현장에 서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오는 한 해 동안, 구도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1. 우리 구도자에겐 건너가야 할 땅이 있습니다(선교)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서있는 요단 동편은 만족할 만한 땅이 아닙니다. 비옥한 땅일 수는 있어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불만족스런 땅입니다. 그곳 요단강 동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낯 선 땅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겨주신 땅입니다. 우리 서머나 교우들에게 맡겨주신 땅이 어디입니까? 먼저 이곳 토론토입니다. 150여 개의 민족이 모여 사는 이민지 토론토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선교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분들은 우리들로 인하여 복을 받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곳에 선교본부인 서머나 교회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서머나교회를 본부로 해서 원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우리가 건너가야 합니다. 우리 아홉 다락방에게 맡겨주신 선교지로 건너가야 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몇 사람이든지 금년 여름에는 유럽 땅으로 건너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C국에서 선교 중에 있는 J선교사님은 우리 동족들에게 들어가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최선수 장로님께서는 북한 탈북자들을 도우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1월 중순에 들어가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가야할 땅이 있는 선교의 공동체입니다. 가는 분이나 보내는 분이나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땅에 들어가든지 보내든지 구체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건너야할 강이 있었습니다. 그 강 이름은 요단강입니다. 이 땅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건너야할 강이 있습니다. 그 강이 무엇일까요? 그 강은 사람에 따라 같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를 수도 있습니다. 자기 부인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물질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시간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이기주의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이 때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땅을 얻게 하리라(내가 그 조상에게 주리라 한 땅을) 뼈를 깎는 아픔이 수반되는 도강 속에서 우리는 그 땅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2.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땅이지만 그곳에는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을 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대적들이 건너오는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기 위해 창과 칼을 갈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그들과 싸우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곳에 선교본부인 서머나 교회를 세우시는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하여, 그리고 선교지를 후원하기 위해서는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놀라지 않는 마음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곳 토론토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해보면 위축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 무지막지한 북한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생각할 때, 갑갑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전쟁이나 일으키려 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놀라지 말라 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9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백성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 홈페이지에 오늘 황환영 집사님께서 올리신 글을 보니까 이미 추방명령을 받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집사님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간증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놀라지 맙시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십시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함께 하십니다.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3.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모세가 명한 율법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이 법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가장 힘써 지켜야 할 법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지만, 금년 한 해도 노력하였고 내년 한 해도 도달하기 위해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 일은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이 사랑의 법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인 결단을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약속하신 줄 아십니까? 평탄한 길 형통한 길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요, 네가 형통하리라. 마무리하는 말 2003년이 밝아옵니다. 새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소원하기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진지한 구도자로 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기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오는 한 해 동안, 구도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업에 들어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겐 건너가야 할 땅이 있습니다. 지금 서있는 곳은 비옥한 땅일 수는 있어도 사명인으로서의 우리에게는 불만족스런 땅입니다. 약속하신 그땅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안주하면 안됩니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깊이 새기고 사랑의 법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사랑의 법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시고 평탄하고 형통함을 주실 것입니다. 복된 새해를 맞아 우리는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시는 한해가 되게 하소서 다함께 외우고 한 해를 시작하십시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구원의 성곽이신 하나님/ 사26:1-6/ 송구영신예배설교/ 2009-12-31
구원의 성곽이신 하나님 사26:1-6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찌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높은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마태복음 16:18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시며 지상에 자기의 교회 설립을 선포하셨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반석위에 세워져야 됩니다. 본문 말씀 4절에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반세반석)\"이라고 하였습니다. Ⅰ. 믿음의 기초가 되는 반석 본문 4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의뢰한다」는 말은 신뢰하고 맡긴다는 뜻으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실 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였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셔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크게 칭찬하시고 이어서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반석\"이란 방금 베드로가 대답한 그의 신앙고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 신앙은 구원에 이르게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온갖 시련과 환난중에도 흔들림이 없는 불변의 진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금같이 빛나는 믿음이 교회의 기초임을 명시하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교회론에서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서 예수님은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22-23에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고 예수님은 건물의 기초석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4-5에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예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라고 하였습니다. (3) 불변의 진리 에베소서 2:20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기초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고 한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뜻합니다. 이는 시대와 환경에 관계없이 전혀 변치 않는 진리임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은 어느 시대 어떤 환경에서도 달라지거나 변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히13:8). 또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역시 조금도 변개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계22:18-19). 교회역사에 있어서 때로는 무신론적인 정치권력에 의하여 폭력으로 탄압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짓 선지자나 이단이 일어나 사상적인 변질을 강요하기도 했지만 교회는 흔들림이 없이 건재하여 왔습니다. 그것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이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Ⅱ. 생명을 지켜주는 반석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16:18). 지상 교회나 성도들은 음부의 권세로부터 그침없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하나님의 대적인 마귀의 세력들은 유형무형으로 주님의 교회를 유린하려고 날뛰는가 하면 주님의 양된 성도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 설교에서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라고 하였습니다(행20:29-30).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5:8). 그렇지만 만세반석 되신 예수께서는 그의 교회를 붙들고 계시며 성도를 보호하십니다. 시편 18:1-2에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호자가 되시고 은신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2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도피성의 제도가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요단강 동편에 세 곳, 서편에 세 곳씩, 여섯 성읍을 구별하여 「도피성」이라 이름하고 부지중 오살한 자가 피의 보수자에게서 도망하다가 그곳에 들어오면 생명을 보호받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도피성의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 아래서 신음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곳입니다. 로마서 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11:28). Ⅲ. 생수를 공급하는 반석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메마른 광야 길을 여행하면서 물이 없는 고통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들이 40년간 여행하였던 노정은 거의 오아시스를 찾아볼 수 없는 사막이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백성들을 도와 주셨는데 특히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할 때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주신 일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7:6에 보면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20:7-8에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고 하였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생수의 근원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중 반석에서 샘물을 마신 것은 신약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신령한 교훈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0:1-4에 보면 \"…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말씀하시면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요4:13-14). (2) 교회는 영혼의 생수를 공급합니다. 포로시대를 살았던 선지자 에스겔은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에스겔 47:1에 \"그가 나를 데리고 전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 물은 점점 불어나서 그 흘러내려가는 유역의 땅을 기름지게하고 바다에까지 들어가 그곳 물을 소생시키며 어족들이 모여 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겔47:6-12).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목마른 인생에게 생수를 공급하며 영혼의 갈증을 면하게 하여 줍니다. 요한복음 7:37-39에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삶을 뜻합니다. 출애굽기 15:23-27에 보면 가나안 여행을 하던 이스라엘이 수르광야에서 쓴물을 마시고 고통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한 나뭇가지를 꺾어 던져서 물을 달게 하였습니다. 그후 백성들이 엘림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물샘 열 둘과 종려나무가 칠십 그루나 있는 오아시스를 만났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 문화 속에서 백성들이 겪는 영혼의 갈증을 묘사해 주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 물처럼 물은 물인데 먹을 수 없는 물이거나 배속에서 갈증만 더해줄뿐 목마름을 해갈 못하는 물들입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서도 영혼의 빈곤과 갈증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엘림의 오아시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8:11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편기자는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고 하였습니다(시84:5-6). Ⅳ. 승리적 삶의 기초가 되는 반석 마태복음 7:24-25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라고 하였습니다. (1) 말씀에 순종하는 자 예수님께서는 천국시민의 대헌장이라고 불리우는 산상 보훈을 강론하시고 그 결론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만세반석」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요 또 그의 말씀이며 나아가서 이 말씀에 근거한 바른 믿음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반석을 자기 인생의 기초로 삼는 사람이 복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믿음과 행위가 일치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물의 주초를 반석 위에 놓는 것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신앙의 교육을 통하여 항상 바른 신앙의 기초를 다지게 하여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위에 인격의 기초를 쌓아 가도록 가르쳐야 됩니다. 솔로몬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잠22:6). (2) 환난과 질고를 이기는 삶 세상에는 전혀 예측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집을 무너지게 하는 요소, 곧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천재지변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내일 일을 장담못하고 살아갑니다.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요동하지 않고 든든하게 버티어 나가게 하는 비결은 만세반석입니다. 그것이 아닐 때는 재앙의 날에 모래위에 세운 성과 같이 삽시간에 기초부터 무너져 나가고 맙니다. 시편 73편을 기록한 아삽의 고백을 보면 반석에 기초를 둔 사람과 모래위에 성을 쌓은 사람을 대조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시편 73:18에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고 하였으며 다시 28절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3) 영원한 승리의 보장입니다. 본문 말씀 4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반석이기 때문에 그를 의지하는 우리의 믿음도 영원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토록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때 언제까지나 요동하지 아니하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달라질 때 모두 변질되거나 쇠잔해 버립니다. 권력도 재물도 명예도 인기도 다 풀의 꽃과 같이 한때 반짝하다가 허무하게 사라져 가고 맙니다. 마치 오래된 건물에 지붕이 내려앉고 벽이 무너지고 폐허만 남아 있는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기초는 남아 있어서 후세 사람들이 그 유적을 통하여 그 건물의 역사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만세반석은 요동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반석위에 세운 교회나 그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승리자로 남게 됩니다. 예레미야 1:18-19에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성곽이신 하나님/사26:1-6
구원의 성곽이신 하나님/사26:1-6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찌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높은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마태복음 16:18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시며 지상에 자기의 교회 설립을 선포하셨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반석위에 세워져야 됩니다. 본문 말씀 4절에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반세반석)"이라고 하였습니다. Ⅰ. 믿음의 기초가 되는 반석 본문 4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의뢰한다」는 말은 신뢰하고 맡긴다는 뜻으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실 때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였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셔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크게 칭찬하시고 이어서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반석"이란 방금 베드로가 대답한 그의 신앙고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 신앙은 구원에 이르게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온갖 시련과 환난중에도 흔들림이 없는 불변의 진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금같이 빛나는 믿음이 교회의 기초임을 명시하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교회론에서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서 예수님은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22-23에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고 예수님은 건물의 기초석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4-5에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예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라고 하였습니다. (3) 불변의 진리 에베소서 2:20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기초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고 한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뜻합니다. 이는 시대와 환경에 관계없이 전혀 변치 않는 진리임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은 어느 시대 어떤 환경에서도 달라지거나 변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히13:8). 또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역시 조금도 변개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계22:18-19). 교회역사에 있어서 때로는 무신론적인 정치권력에 의하여 폭력으로 탄압하기도 하고 때로는 거짓 선지자나 이단이 일어나 사상적인 변질을 강요하기도 했지만 교회는 흔들림이 없이 건재하여 왔습니다. 그것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이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Ⅱ. 생명을 지켜주는 반석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16:18). 지상 교회나 성도들은 음부의 권세로부터 그침없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하나님의 대적인 마귀의 세력들은 유형무형으로 주님의 교회를 유린하려고 날뛰는가 하면 주님의 양된 성도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 설교에서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라고 하였습니다(행20:29-30).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5:8). 그렇지만 만세반석 되신 예수께서는 그의 교회를 붙들고 계시며 성도를 보호하십니다. 시편 18:1-2에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호자가 되시고 은신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2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도피성의 제도가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요단강 동편에 세 곳, 서편에 세 곳씩, 여섯 성읍을 구별하여 「도피성」이라 이름하고 부지중 오살한 자가 피의 보수자에게서 도망하다가 그곳에 들어오면 생명을 보호받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도피성의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 아래서 신음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곳입니다. 로마서 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11:28). Ⅲ. 생수를 공급하는 반석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메마른 광야 길을 여행하면서 물이 없는 고통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들이 40년간 여행하였던 노정은 거의 오아시스를 찾아볼 수 없는 사막이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백성들을 도와 주셨는데 특히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할 때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주신 일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7:6에 보면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20:7-8에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고 하였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생수의 근원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중 반석에서 샘물을 마신 것은 신약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신령한 교훈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0:1-4에 보면 "…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말씀하시면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요4:13-14). (2) 교회는 영혼의 생수를 공급합니다. 포로시대를 살았던 선지자 에스겔은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에스겔 47:1에 "그가 나를 데리고 전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 물은 점점 불어나서 그 흘러내려가는 유역의 땅을 기름지게하고 바다에까지 들어가 그곳 물을 소생시키며 어족들이 모여 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겔47:6-12).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목마른 인생에게 생수를 공급하며 영혼의 갈증을 면하게 하여 줍니다. 요한복음 7:37-39에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삶을 뜻합니다. 출애굽기 15:23-27에 보면 가나안 여행을 하던 이스라엘이 수르광야에서 쓴물을 마시고 고통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한 나뭇가지를 꺾어 던져서 물을 달게 하였습니다. 그후 백성들이 엘림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물샘 열 둘과 종려나무가 칠십 그루나 있는 오아시스를 만났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 문화 속에서 백성들이 겪는 영혼의 갈증을 묘사해 주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 물처럼 물은 물인데 먹을 수 없는 물이거나 배속에서 갈증만 더해줄뿐 목마름을 해갈 못하는 물들입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서도 영혼의 빈곤과 갈증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엘림의 오아시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8:11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편기자는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고 하였습니다(시84:5-6). Ⅳ. 승리적 삶의 기초가 되는 반석 마태복음 7:24-25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라고 하였습니다. (1) 말씀에 순종하는 자 예수님께서는 천국시민의 대헌장이라고 불리우는 산상 보훈을 강론하시고 그 결론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만세반석」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요 또 그의 말씀이며 나아가서 이 말씀에 근거한 바른 믿음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반석을 자기 인생의 기초로 삼는 사람이 복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믿음과 행위가 일치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물의 주초를 반석 위에 놓는 것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신앙의 교육을 통하여 항상 바른 신앙의 기초를 다지게 하여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위에 인격의 기초를 쌓아 가도록 가르쳐야 됩니다. 솔로몬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잠22:6). (2) 환난과 질고를 이기는 삶 세상에는 전혀 예측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집을 무너지게 하는 요소, 곧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천재지변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내일 일을 장담못하고 살아갑니다.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요동하지 않고 든든하게 버티어 나가게 하는 비결은 만세반석입니다. 그것이 아닐 때는 재앙의 날에 모래위에 세운 성과 같이 삽시간에 기초부터 무너져 나가고 맙니다. 시편 73편을 기록한 아삽의 고백을 보면 반석에 기초를 둔 사람과 모래위에 성을 쌓은 사람을 대조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시편 73:18에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고 하였으며 다시 28절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3) 영원한 승리의 보장입니다. 본문 말씀 4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반석이기 때문에 그를 의지하는 우리의 믿음도 영원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토록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때 언제까지나 요동하지 아니하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달라질 때 모두 변질되거나 쇠잔해 버립니다. 권력도 재물도 명예도 인기도 다 풀의 꽃과 같이 한때 반짝하다가 허무하게 사라져 가고 맙니다. 마치 오래된 건물에 지붕이 내려앉고 벽이 무너지고 폐허만 남아 있는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기초는 남아 있어서 후세 사람들이 그 유적을 통하여 그 건물의 역사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만세반석은 요동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반석위에 세운 교회나 그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승리자로 남게 됩니다. 예레미야 1:18-19에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