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ひ(引)き受けて下さる神を待つ(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ルカ1:26-38(눅1:26-38)/ 大嶋博道牧師(오오시마 히로미찌 목사)/ アドベント礼拝(3)(대림절 3주차 예배)/ 2006-12-10
引き受けて下さる神を待つ(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ルカ1:26-38(눅1:26-38) 2006/12/10(日) 引き受けて下さる神を待つ」大嶋博道牧師 アドベント礼拝(3)(聖書)ルカ1:26~38   クリスマスの出来事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の誕生が実現したのは神の一方的な働きかけです。まさに「万軍の主の熱意」であり、神の愛の表れであります。(イザヤ9:6) しかし、人間の側から見れば、それを信仰によって引き受けた人たちがいたからこそ、神の聖なるみ業が成ったとも言えます。今朝は、引き受けた人たちの「信仰による生き様」を学びましょう。 ①東方の博士たち  ~与えられたしるしを神の預言の成就と信じて、礼拝することを引き受けた。  東方からの長旅は、おそらく多大な犠牲を強いられたことでありましょう。彼らは、神の約束が実現したことを喜び、ひたすら幼子を礼拝を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彼らは「黄金、乳香、没薬」を献げました。また、ベタニヤのマリヤは、十字架を前にした主イエス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を惜しみなく注ぎました。「礼拝」は喜びと感謝の爆発する場なのです。私たちもキリスト者として、喜びと感謝をもって日曜ごとの礼拝をしっかりと引き受けましょう。 ②貧しい羊飼いたち (ルカ2:8~20)  ~天の使いのメッセージを信じて、貧しさに耐えて生きることを引き受けた。ルカは当時、「アム・ハ・アレツ(地の民)」と言われ、最も貧しかった羊飼いたちに与えられた大きな喜びを語っています。彼らは天の使いから救い主の誕生を告げられた時、「さあ、ベツレヘムへ行こう」と口々に交わしながら家畜小屋を探し当て、天の使いが告げたとおりの光景を見ました。彼らは神をあがめ、賛美しながら帰って行きました。彼らの魂は信仰によって喜びと平安にに満たされ、貧しさに耐えながら生きることを引き受けたのです。  信仰生活はいつもハッピーとは限りません。試練や困難が突如として襲ってきて信仰を側面から揺さぶる時もあります。「試練の真っ直中にある私を引き受ける」「今日の私をしっかりと引き受ける」~これが信仰者の生き方です。 ③救い主の母マリア  ~戸惑いと決断の中で、救い主の母となることを信仰によって引き受けた。 「神には出来ないことは何一つない」と天の使いが告げた時に、マリアは「わたしは主のはしため。お言葉どおり、この身になりますように」と謙虚に、従順に神の言葉を受け入れました。彼女は様々な困難と問題の真っ直中で、神様の救いのご計画の受け皿になることを引き受けたのです。言い換えれば、救い主の母となることを引き受けたのです。  クリスマスの出来事に関わった東方の博士たちも、貧しい羊飼いたちも、そして、マリアも「信仰によって」神の言葉を自分に与えられたメッセージとしてしっかり受け止め、様々な困難な問題や課題や使命を引き受けたのです。 ☆まとめ:  生きるということは「自分の人生のすべてを引き受ける」ことです。大変なことですが、神様はその私たちの人生をそのまま背負い、持ち運んでくださることを信仰によって確信いたしましょう。 「アドベント」は、この「引き受けてくださる神を待つ」時です。
가인의 아우? 아벨의 형?/ 창4:1-15/ 대림절설교/ 2012-12-02
가인의 아우? 아벨의 형? 창4:1-15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0. 들어가는 글 12월 첫째 주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 기간에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대통령이 선출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교회적으로는 건축이 순조롭게 완공되어 입당이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창세기에서 가인과 아벨의 형제 갈등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가 어떻게 파괴되는지 깨닫고 회복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인생이 역전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합니다(창1:31). 그러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세상은 죄가 들어옴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갔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외형적으로 가인과 아벨의 모습은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들은 같은 부모에서 태어난 형제이며, 땅을 경작하는 사람과 양을 치는 사람으로서 상호 보안적인 직업에 종사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똑같이 하나님께 땅의 소산과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심지어 2-5절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름을 네 차례나 교대로 사용하면서 보시기에 좋은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좋아보였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미 죄로 인하여 무서운 불공평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와는 맏아들 가인이 태어났을 때 기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외쳤습니다(1절). 그 기쁜 마음을 담아 ‘생산하다’는 뜻으로 명예로움이 담긴 가인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둘째의 탄생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에게는 무가치하고 열등한 존재라는 아벨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또한 두 사람의 직업은 상호 보완적이었지만 가인은 큰 땅을 가진 부유한 농부였고, 아벨은 얼마 되지 않는 양떼를 먹일 정도의 작고 척박한 땅을 가진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죄의 결과 때문에 태어난 순서로 서열이 생겨나고, 남녀 성별로 차별이 생겨나고, 물질의 소유로 빈부 차이가 생겨나고, 직업의 종류로 귀천이 생겨났습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옴으로 생겨난 형제 사이의 불공평을 해결 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부유했던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난에서 하나님을 절실히 의지했던 아벨의 제물을 존중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인이 장자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벨이 영적인 장자로 세워졌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가치가 효력을 잃고, 모든 차별이 사라짐을 보여줍니다. 또한 세상의 불공평이 하나님의 공평으로 새롭게 재창조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유하려는 것은 욕심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세상은 조건에 따라서 불공평하고 차별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을 보시고 공평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2. 가인의 아우 아벨은 있었지만 아벨의 형 가인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릴 때 세상에 있던 조건을 보지 않고 오직 그들의 중심을 보고 받으셨습니다. 제물을 드린 후에 가인은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가인은 세상에서 자신이 장자이듯이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이 당연히 장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조건으로 별 볼일 없는 아벨이 인정받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관계는 항상 형인 가인 중심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인의 아우 아벨”은 나오지만 “아벨의 형 가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가인의 중심으로만 아벨을 바라본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가인은 아벨과 비교하여 항상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동생을 인정하였을 때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5절). 가인은 하나님의 선택을 바꿀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분노의 감정으로 하나님과 아벨까지도 배제시켰습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전혀 포용하지 못하고 배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배제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첫째로 하나님과 자신까지 속이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나님과 자신까지도 속이고 있습니다(9절).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잘못되었고,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바울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자며, 의인중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잘못되었기에 철저히 배제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깨어지게 되자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였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리는 자치하면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형의 자리는 지키면서 아우에 대해 조금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니므로 아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할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9절).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어떤 문제 앞에서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책임을 회피 합니다. 지금의 대통령 선거를 보면서도 서로들 자리는 차지하려고 힘쓰지만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회피하는 모습에 씁쓸함이 밀려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합니다(12절). 가인은 하나님과 이웃을 포용하지 못하고 배재시킴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모르는 삶은 열매가 없는 무익한 삶을 살게 됩니다(12절). 우리가 자기중심에 많이 벗어나면 날수록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는 영역은 더 넓어지는 것입니다. 3. 죄의 명령이 말씀의 명령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인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미리 경고합니다(7절). 그러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죄에게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죄가 원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에 말씀의 영향력보다 죄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범죄 이전에 가인은 죄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었고. 죄라고 불리는 포식자를 다스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를 못하고 오히려 죄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살인을 범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면 잘 다스릴 수 있는 분에게 맡겨야 합니다. 운전을 잘하지 못하면 운전을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함께 타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서 핸들 잡고 주인 노릇하고 있으면 사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우리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우리를 더 잘 인도할 수 있는 주님께 인생의 핸들을 맡겨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 가인을 죽이려고 해서 “하나님이 그의 이마에 표를 주었느냐?”입니다(15절). 하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의도와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인은 죄의 결과로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14절). 하나님은 잠재적인 희생자가 된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표를 주었습니다. 가인이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배제의 삶을 시작하였지만 또 누군가에 의해서 배제의 삶이 반복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배제의 악순환을 끓기 위해 포용의 삶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배제를 못 박고 포용의 길을 여셨습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세상의 불공평이 믿음 안에서 역전되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늘 보좌의 자기중심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부디 대림절 기간 동안 자기중심을 깨뜨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더 닮아갈 수 있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조영식 목사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눅2:25-35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 눅2:25-35 현대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희망의 사람,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자\\\'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희망과 꿈을 안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윌리암 말스톤(Dr. 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삼천명을 상대로 해서 리서치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이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과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갑자기 많은 포로들이 죽어갔습니다. 그 원인을 조사했더니 포로들이 크리스마스에는 석방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고통을 참고 살았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석방을 하지 않자 그들은 희망을 잃게 되었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들은 갑자기 죽어갔던 것입니다. 희망은 능력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작심, 좌절, 자살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키엘케골이 말한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희망, 기다림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더 좋은 날을 기다리고, 더 성공적인 날, 더 행복한 날을 기다립니다. 약혼한 처녀는 결혼의 날을 기다리며, 결혼한 부부는 예쁜 자식을 기다립니다. 자식을 낳은 부부는 자녀들의 성공을 기다리고, 병상에 누어있는 환자는 퇴원의 날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는 달력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 성령의 보내심을 중심으로 대강절, 성탄절, 현현절, 성회수요일, 사순절, 수난주간,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 성령강림절로 진행됩니다.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합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됩니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대강절을 엄격히 지켰으며 모든 신자들이 날마다 금식하고 교회예배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중대한 사건이나 기대되는 즐거운 일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다못해 결혼기념일, 아이들 생일까지도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예수님 오심을 기다림 없이, 준비없이 어찌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기다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렘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대강절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도성인신’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빌2:) . . 이런 자기를 비움(자기비하)이 없다면 세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은 성탄주일 직전까지 4주 동안을 말하며 글자 그대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그 오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사는 기간입니다. 마리아가 동정녀의 깨끗한 몸으로 주님을 탄생시킨 것 처럼, 또는 예수께서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 것처럼 겸손히 낮은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버림받은 이웃을 생각하며,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도 하는 기간이 이 기간입니다. 성경은 기다림이라는 문구를 끝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계시록22:20에 ‘마라나다’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강림하셨을 때 주를 맞이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 합니다. 메시야 오심에 대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관심과 미온적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지식은 갖고 있었으나 간절한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헤롯 치하에서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권을 일정 부분 나누어 받고 누리는 동안 그 상황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주권자인 메시야가 온다면 그때까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그 모든 권세와 명예와 특혜를 다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을 상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30년 후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구원사역을 펼치기 시작할 때 예수님에게 종교적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경계하고, 시기하며, 견제하며 그를 흠집 내고 비방하며 급기야는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방세속권력을 비롯한 모든 종교 세력들과 결탁하여 끝내 그들의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장본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이 없었던 그들은 세속권력자 헤롯의 협력자들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헤롯보다 더한 범죄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보면 오래 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온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은 먼저 예루살렘에 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평생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간절하게 기다린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갔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이 정한대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은혜를 입을 수 있었을까요? 1. 간절한 기다림이 메시야를 만나게 했습니다. 시므온이 우연히 성전에 갔다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따라 오랜 기다림 후에 만난 것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이 없어도 예수님은 오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은 일찍이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다림 없이 만나는 그러한 만남은 그와는 아무 관계없는 만남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 ’ 우리가 가만있어도 성탄은 옵니다.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다시 재림하십니다. 그러한 성탄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성탄, 의미 없는 성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 두 사람만이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당시 유다 나라의 형편을 보면,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와 통치를 받으면서 생활을 거의 자유가 없는 생활을 하였고, 사회적으로는 대제사장들과 유대지도자들의 억압과 착취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므온도 그들과 함께 핍박 속에서 살았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재 이라크를 중심으로 해서 적지 않은 크리스찬들이 중동 지방에서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야말로 2000년간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크리스찬으로는 PLO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대통령인 아라파트(Arafat)의 부인이 있고, 또 PLO의 15%가 현재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이곳 중동 지방은 초대 교회 이후 줄곧 지금까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는 1200만명의 성도가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 크리스찬들은 한 번도 숨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의 오심을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뜨겁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이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2. 올바른 신앙으로 기다렸을 때 메시야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말씀 속에서 자신의 영달이나 성공을 위해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원자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신나는, 즐거운, 추억의 성탄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기울어진 나라, 아니 무너져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거대한 소망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성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조국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로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대로 예수님은 억압과 고통과 죄악과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 처한 우리들에게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실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실패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슬픔에 빠진 자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와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은 시므온만은 아닙니다. 사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모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성령의 지시함을 받은 거룩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기다림이었습니다. 3. 성령과 동행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메시야를 만날 수 있습니다. 25절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말씀을 볼 때 시므온은 한 마디로 성령충만한 자였습니다. 시므온이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인데도 성령충만한 사람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두 종류의 늙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얽매여, 늙는 것을 한탄하며, 서러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며 수동적으로 늙어가는 사람, 반대로 성령충만하여 거룩한 비젼을 가지고, 도전하며, 싸우며 나아가는 독수리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은 마치도 과일이 익어가듯 우리인생이 익어가는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시므온은 성령충만하여 의롭게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의와 경건은 능력이 있습니다. 약5:16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의 기다림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 의와 경건이 그 시대를 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우리도 시므온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부정과 부패가 많아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마시고,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한 신앙, 늘 성령충만한 가운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4. 경건한 신앙으로 기다린 사람만이 예수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34절에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님을 축복한 시므온, 그는 우리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을 기다라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요, 특권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오직 경건하고 의로운 자만이 할 수 있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자만이 할 수 있고 성령 충만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성탄이었습니다. 29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기다림 없는 성탄, 아이들에게 인기 얻을려고 선물이나 나눠주는 성탄이 과연 죽어도 좋은 성탄일까요? 죽으면 안되는 성탄이지요.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첫 번째 성탄절에만 가능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이시간도 예수님을 가슴에 안을 수 있습니다. 안을 수 있는 특권을 성령님께로부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눅2:25-35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눅2:25-35 2008-02-05 10:42:59 read : 296 현대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희망의 사람,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자'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희망과 꿈을 안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윌리암 말스톤(Dr. 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삼천명을 상대로 해서 리서치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이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과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갑자기 많은 포로들이 죽어갔습니다. 그 원인을 조사했더니 포로들이 크리스마스에는 석방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고통을 참고 살았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석방을 하지 않자 그들은 희망을 잃게 되었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들은 갑자기 죽어갔던 것입니다. 희망은 능력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작심, 좌절, 자살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키엘케골이 말한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희망, 기다림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더 좋은 날을 기다리고, 더 성공적인 날, 더 행복한 날을 기다립니다. 약혼한 처녀는 결혼의 날을 기다리며, 결혼한 부부는 예쁜 자식을 기다립니다. 자식을 낳은 부부는 자녀들의 성공을 기다리고, 병상에 누어있는 환자는 퇴원의 날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는 달력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 성령의 보내심을 중심으로 대강절, 성탄절, 현현절, 성회수요일, 사순절, 수난주간,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 성령강림절로 진행됩니다.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합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됩니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대강절을 엄격히 지켰으며 모든 신자들이 날마다 금식하고 교회예배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중대한 사건이나 기대되는 즐거운 일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다못해 결혼기념일, 아이들 생일까지도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예수님 오심을 기다림 없이, 준비없이 어찌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기다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렘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대강절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도성인신’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빌2:) . . 이런 자기를 비움(자기비하)이 없다면 세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은 성탄주일 직전까지 4주 동안을 말하며 글자 그대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그 오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사는 기간입니다. 마리아가 동정녀의 깨끗한 몸으로 주님을 탄생시킨 것 처럼, 또는 예수께서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 것처럼 겸손히 낮은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버림받은 이웃을 생각하며,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도 하는 기간이 이 기간입니다. 성경은 기다림이라는 문구를 끝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계시록22:20에 ‘마라나다’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강림하셨을 때 주를 맞이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 합니다. 메시야 오심에 대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관심과 미온적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지식은 갖고 있었으나 간절한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헤롯 치하에서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권을 일정 부분 나누어 받고 누리는 동안 그 상황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주권자인 메시야가 온다면 그때까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그 모든 권세와 명예와 특혜를 다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을 상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30년 후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구원사역을 펼치기 시작할 때 예수님에게 종교적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경계하고, 시기하며, 견제하며 그를 흠집 내고 비방하며 급기야는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방세속권력을 비롯한 모든 종교 세력들과 결탁하여 끝내 그들의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장본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이 없었던 그들은 세속권력자 헤롯의 협력자들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헤롯보다 더한 범죄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보면 오래 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온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은 먼저 예루살렘에 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평생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간절하게 기다린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갔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이 정한대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은혜를 입을 수 있었을까요? 1. 간절한 기다림이 메시야를 만나게 했습니다. 시므온이 우연히 성전에 갔다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따라 오랜 기다림 후에 만난 것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이 없어도 예수님은 오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은 일찍이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다림 없이 만나는 그러한 만남은 그와는 아무 관계없는 만남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 ’ 우리가 가만있어도 성탄은 옵니다.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다시 재림하십니다. 그러한 성탄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성탄, 의미 없는 성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 두 사람만이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당시 유다 나라의 형편을 보면,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와 통치를 받으면서 생활을 거의 자유가 없는 생활을 하였고, 사회적으로는 대제사장들과 유대지도자들의 억압과 착취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므온도 그들과 함께 핍박 속에서 살았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재 이라크를 중심으로 해서 적지 않은 크리스찬들이 중동 지방에서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야말로 2000년간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크리스찬으로는 PLO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대통령인 아라파트(Arafat)의 부인이 있고, 또 PLO의 15%가 현재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이곳 중동 지방은 초대 교회 이후 줄곧 지금까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는 1200만명의 성도가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 크리스찬들은 한 번도 숨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의 오심을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뜨겁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이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2. 올바른 신앙으로 기다렸을 때 메시야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말씀 속에서 자신의 영달이나 성공을 위해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원자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신나는, 즐거운, 추억의 성탄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기울어진 나라, 아니 무너져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거대한 소망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성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조국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로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대로 예수님은 억압과 고통과 죄악과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 처한 우리들에게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실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실패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슬픔에 빠진 자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와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은 시므온만은 아닙니다. 사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모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성령의 지시함을 받은 거룩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기다림이었습니다. 3. 성령과 동행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메시야를 만날 수 있습니다. 25절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말씀을 볼 때 시므온은 한 마디로 성령충만한 자였습니다. 시므온이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인데도 성령충만한 사람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두 종류의 늙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얽매여, 늙는 것을 한탄하며, 서러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며 수동적으로 늙어가는 사람, 반대로 성령충만하여 거룩한 비젼을 가지고, 도전하며, 싸우며 나아가는 독수리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은 마치도 과일이 익어가듯 우리인생이 익어가는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시므온은 성령충만하여 의롭게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의와 경건은 능력이 있습니다. 약5:16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의 기다림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 의와 경건이 그 시대를 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우리도 시므온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부정과 부패가 많아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마시고,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한 신앙, 늘 성령충만한 가운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4. 경건한 신앙으로 기다린 사람만이 예수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34절에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님을 축복한 시므온, 그는 우리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을 기다라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요, 특권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오직 경건하고 의로운 자만이 할 수 있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자만이 할 수 있고 성령 충만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성탄이었습니다. 29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기다림 없는 성탄, 아이들에게 인기 얻을려고 선물이나 나눠주는 성탄이 과연 죽어도 좋은 성탄일까요? 죽으면 안되는 성탄이지요.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첫 번째 성탄절에만 가능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이시간도 예수님을 가슴에 안을 수 있습니다. 안을 수 있는 특권을 성령님께로부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2-34)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2-34) http://mission.bz/5482대강절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2-34)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이를 뒤집는 말씀을 한다.(34절)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다. 그런데 본문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며 칼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마귀의 지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흑암에서 빛으로 옮겨진 사람이 되기에, 빛과 어둠이 하나님과 사탄이 충돌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영적으로 싸우고 이겨야 한다. 그러면 검을 주러왔노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을 시인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고 검을 주셨다.(요10:32-33절) 세상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시인해야한다. 어떤 손해와 유혹 앞에서도 예수를 시인하기 위해싸우라고 칼을 주셨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브갓네살 왕에게 절하지 않아 풀무불에 던져지기까지 주를 시인했다.(단3:18)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며 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승리 할 수 있는 영적전쟁이다. 믿음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거절 당하고 외면 당한 경험이 있는가? 아직 도박판이나 술자리를 기웃거리지 않는가? 년말 년시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 영적전투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둘째,가족과 영적으로 싸우라고 검을 주셨다. (35-37절)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다. 가족끼리 사랑을 나누고 화목하고 단란하게 지내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먼저는 비록 가족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의미이다.(37절) 이것은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안 믿는 가족이 있을 때 생긴다. 믿지 않는 가족들은 가족보다 예수님을 소중하게 챙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 예수에 미쳤다고 비난하고 핍박자가 된다. 그래서 영적으로 가족들과 싸우라는 말씀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셋째, 자기 십자가를 위해서 검을 주러 오셨다.(38-39)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고 이것은 고통을 가져온다. 그래서 벗고 싶고 피하고 싶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르라!(마16:24) 결단이란 말은 “선택(Choice)”이라는 말과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선택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을 말하지만, 결단이란 말은 하나를 택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수많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길 결단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과 싸워야 할까? (1) 죄와 싸워야 한다. 죄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가진 크리스찬들은 죄와 싸우고 불의와 싸워야 한다. 저항 없이 세상 물결 따라 떠내려가는 사람은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가 없다. (2) 마귀와 싸워야 한다. 영혼이 거듭나서 영안이 조금이라도 열린 사람이라면 순간순간 사탄 마귀가 저항해 오고 핍박해 오고 유혹해 올 때에 마귀와 타협하거나 고난의 길을 피해 가지 않는다.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한다.(약4:7-8) (3). 잘못된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못 박힌 정욕이 다시 살아 발동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한다.(고전9:27) 이런 영적 싸움을 싸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무기, 검은 무엇인가? 첫째, 기도이다. 기도가 없이는 절대로 마귀를 이길 수가 없고 죄를 이길 수가 없다. 둘째, 말씀이다.(히4:12)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쳤다. 맺음말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마귀와 싸우지도 않는 교회는 마귀들이 지붕에서 졸고 있다. 그런데 기도하고 전도하고 영적싸움을 하는 교회는 마귀가 어쩔 줄 모르고 활동한다. 성령 충만하여 살아 역사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영적 싸움을 쉬지 않고 계속하게 마련이다. 서문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탄 마귀의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다. 싸워서 승리하시기 바란다. 편안하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은 자랑하지 말라! 이런 자는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사탄이 깔보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14:27)고 하셨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진정한 평안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사탄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한 이후에 주시는 참된 평안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라 시인하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가족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 사랑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이 주어진다. 출처/이상민목사 설교 중에서 이 게시물을... 목록
경배할 때만 주님을/ 마2:1-12/ 대림절제3주일설교/ 2009-12-17
경배할 때만 주님을 마2:1-12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신 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사람이 말했습니다.\\\"너는 나쁜짓만 하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니?\\\" 또 대답했습니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나에게는 천국에 들어갈 비책이 있다구\\\" 그 비책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내가 죽어 천국 문 앞에 가면 천국 문을 잡고 열었다 닫았다를 계속 반복하면 문을 지키는 베드로가 \\\"야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아니면 가라\\\"고 소리치면 그때 쏙 들어갈꺼야\\\" 과연 가능할 것 같습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천국도 내 마음대로, 하나님도 내 마음대로, 기도도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고, 성탄절을 지내는 것도 마음대로 하고... 언제나 기준이 나에게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인입니까? 문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있다는데 있습니다. \\\'스트로맨\\\'이라는 한 연구원이 교회에 다니는 청년 7천명을 대상으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니 대답의 60% 이상이 선한생활을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한생활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경배해야 한다, 영광을 돌린다는 대답은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만족케 해 드리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70%이상이 최선을 다해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없습니다. 순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은 없습니다. 단지 좋은 일만 하고 정성만 하고... 하나님을 믿되, 신앙생활을 하되, 내 마음과 내 계획으로, 내 공로로 천국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경계해야할 이단의 사상입니다. 초대교회가 이 문제로 얼마나 많은 문제를 겪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예배당을 크게 하나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해도 틀림이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존경받아야 합니까? 멸시 받아야 합니까? 이 사람의 신앙의 정도는 어떠합니까? 또 어떤 사람은 예배당에서 평생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바른 삶을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연구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 하고 인도하고 심방도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먹고 살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존경받아야 합니까 비난받아야 합니까? 또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예배당에서 성도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수요예배, 금요예배, 구역 예배등 각종 예배와 행사에든 빠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먼 곳까지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느냐고 묻습니다. 대답합니다 \\\"나는 교회 다니는게 좋아서 그래\\\" 교회에 열심히 먼 것도, 힘든 것도 마다하지 않고 오는 분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도 보면 멀리 인천에서, 금촌 에서, 일산에서, 분당에서, 안양에서 곳곳에서 열심히 옵니다. 그러면 그분들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합니까? 기뻐하시고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상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분명히 이 세 사람의 신앙이 좋습니다. 교회를 짓기 위해 전 재산과 노력을 다 바쳤습니다. 예배당에서 봉사하기 위해 전생애를 바쳤습니다. 예배당에 오기 위해 시간과 열심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을 오늘 성경에서 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헤롯왕입니다. 둘째는 대 제사장과 서기관입니다. 셋째는 동방박사들입니다. 이세사람은 여러분의 판단대로라면 분명히 신앙이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헤롯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을 세번째로 지은 사람입니다. 예루 살렘 성전의 첫번째는 솔로몬의 성전이고 두번째는 수룹 바벨의 성전이고 세번째는 헤롯의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 성전이 바로 헤롯이 지은 성전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 유대 땅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두번째,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예배당에서 평생을 일하며 평생 주를 위해 제사드리는 일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지난 주간 한 방송국의 특집을 통해 몇 교회의 세습을 문제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었습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세습이라는 말도 싫고 그러한 일에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사된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목사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결코 쉬운 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속에 살면서도 세상 사람 같이 살수 없는 것이 목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루 24시간, 1년365일 교회 안에서 살아야 됩니다. 때로는 아내도 목사처럼, 자녀들도 목사와 같이 살라고 합니다. 한때 아이들이 크면서 말썽 아닌 말썽이 있었습니다. 아빠가 화가 나서 매를 들었더니 아이가 하는 말이 \\\"아빠 목사딸로 나도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줄 알아?\\\"라고 합니다. 정말 아내는 옷을 입어도 어두운 계통의 옷만 입고, 저는 강요하지 않는데 아이들에게 까지 부담을 준다고 생각을 하니 그 이후로 아이들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목사의 삶이고 목사의 가정입니다. 그런 목사님이 아들을 목사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일 하다가 좋은 일만 있지 않습니다. 속상한 일도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아이들에게 하면 아이들이 크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교회를 사랑하겠습니까? 예수 믿을만 하다고 느끼겠습니까? 어디 가서 마음놓고 속상한 얘기 하지 못하는 것이 목사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또 목사가 된다는것, 그것만 봐도 얼마나 부러운 일이니 모릅니다. 큰 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목사 자체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믿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어떤 분은 말하기를 일주일에 한번 설교하고 봉급받으니 얼마나 좋겠느냐 고 합니다. 그 사람말대로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말에 동조해서 안됩니다. 비난을 하기 전에 그들의 수고도 알아줘야 합니다. 목사가 대접만 받고 산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목사님만 대접하고 삽니까? 비난이나 정죄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심판을 하나 님이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야 합니다. 수원에 있는 김장환 목사님, 이분은 어려서 구두닦이를 한 사람아닙니까? 이분의 부인은 미국인이어서 태어난 아기가 혼혈아였습니다. 이런 자식들이 크면서 얼마나 어려움이 있는지 아십니까? 혼혈아면서 목사의 자녀, 어디가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아이들이 사춘기일때는 교회에는 죄송하지만 크리스마스 때가되면 휴가를 받아 미국에서 아이들과 같이 지냈다고 합니다. 교회는 일못하면 사임하면 되지만 아이들이 잘못되면 누가 책임져 줄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난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아이들을 책임져 주지 않기에 본인은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수고는 대단한 것입니다. 오늘 목사들의 수고가 그렇다면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수고는 어떻겠는가를 우리는 상상해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메기\\\'라고 하는 별을 연구하는 점성술가들입니다. 십수년전에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점성술가를 찾아 다니면서 자신의 미래, 미국의 미래, 세계의 미를 물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습니다. 과거의 점성술가는 지금의 무당들과는 달리 하늘은 연구하고, 천계를 연구하고, 영계를 본다고 해서 소위지도자 급에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신라의 역사, 중국의 역사, 동방의 역사를 보면 특히 점성술가들은 대단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임금 옆에서 일을 했습니다. 이들은 베들레헴까지 시간을 들여 왔습니다. 오늘 11절 말씀에도 보면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께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곳은 분명히 마굿간인데 말씀에는 분명히 그 집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헤롯이라는 임금이 2살 밑에 어린 아이를 다 죽였으니 적어도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한두시간, 하루이틀이 아니라 일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헤롯은 성전을 지어 물질을 드리고,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일생을 바쳤습니다. 박사들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참으로 귀한 헌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탄생한 그 시대적인 상황속에서는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지만 그 로마의 시대가 평화의 시대라고하는 말은 몇 사람만이 말하는 것이지 대부분의 식민지 사람들은 메시야 대망사상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 별을 연구하는 이들이 하늘의 별을 보고 \\\'아 저것은 메시야가 탄생한 증거이구나\\\'라고 알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리고는 동방에서부터 그 별을 보고 태어나신 왕께 경배하러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먼저 어디로 갔습니까? 별을 좇아 오다가 예루살렘쯤 와서는 왕궁에 갔습니다. 적어도 별이 비춰지고 있는 그땅, 그 땅의 지도자는 적어도 그 별과 함께 메시야 대망의 감격과 기쁨이 있지 않겠는 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은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들이 알려 주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러 가자고 하니 문제가 생 겼던 것입니다. 메시야가 탄생한 것은 좋은데 그 분에게 경배하러 가자고 하니 문제가 된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일생을 주를 위해 살겠다고 한 이들도 경배하러 가자고 하니 문제가 되었다는 것, 우리는 이사실을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를 지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반대로 직분을 맡아 일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자고 했더니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교회를 지었고, 직분을 맡았고 시간을 드려 일을 하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입니다. 내가 교회도 지었고 시간드려 일도 했고 선교사도 보냈고 헌금도 했는데 무엇을 더 예배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측면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전을 건축하고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생명은 누가 주었습니까? 내가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재물은 누가 주었습니까? 직분은 누가 준 것입니까? 지혜는 누가 내게 준 것입니까?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께 지음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앞에서 언제나 무슨 일이든지 경배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 즉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예배하는 것 앞에서는 일한 것, 직분, 시간을 바쳤다는 것은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모두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받은 것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경배하자고 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까? 헤롯은 경배하자고 하니 이제까지 자신이 한 일이 있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왕권을 빼앗길까봐 자신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까지 죽이려고 두살 아래 아이들은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자고 하니 대 제사장들은 알고도 가지 않았습니다. 단지 박사들이 가고 목자들이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이자리에 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오히려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자였을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이들도 우상숭배자였지만,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주님 앞에 경배했다는 사실 하나가 오늘 우리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했다는 그 한마디가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내 생각과 내 경험, 내 일대로 하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무엇입니까? 그 말은 그리스도와 마스, 즉 예배라는 뜻의 복합어로 그리스도께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예배하고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말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어떤 사람은 X-마스, 예배가 없는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날입니다. 그것이 중요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주님 앞에 오라고 했습니다. 이제까지 한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언제든지, 어디 서든지 하나님을 경배할 자세가 되어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교회교인이 아니지만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합니다. \\\"나 교회일을 괜히 했나봐요\\\" 조용히 평신도로 살껄 일하다가 괜히 말 듣고 상처받고 일하다가 힘들다고 말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미안하지만 일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 일도 하나님이 하게 하셔서 그 일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에게 있어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심고 아무리 물을 줘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뭐가 그렇게 조급하고 뭐 때문에 다퉈야 하고 상처 입어야 합니까? 기다리시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 경배하는 사람이야말로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스답게 보내는 사람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한번이면 되지 뭐 그렇게 매번 하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일은 일반 사람들의 생일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첫번째 오실 때 그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주님 다시 오실 날에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점검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박사들은 어떻게 주님께 경배했는지 말씀해 줍니다. 1.기쁜 마음으로 경배했습니다. 별이 비춰지니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앞에 예배하는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별이 비췰 때 그 별이 있는 곳에 메시야 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박사들이 제일 먼저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저 좋다고 말만하고 들어갔겠습니까? 빨리 경배하고 집으로 돌아 올 것을 생각했겠습니까? 그 곳에 주님이 있다는 사실 앞에 다시 한번 옷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서로의 옷과 머리를 봐주고 자신들의 예물을 들고는 조심조심해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기쁨으로 경배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의 형편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앞에, 주님이 오실날이 바로 이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앞에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발도 닦고 머리도 잘 매만지고 옷도 깨끗이 하고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2.엎드려서 경배했습니다.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은 주님앞에 최선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뭐가 그렇게 자랑스럽습니까? 성전을 짓고 일생 주를 위해 살았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마땅히 엎드려야하지 않습니까? 주님 때문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착하게 살았던 사람이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몽둥이를 든 베드로가 그를 인도했습니다. 평생을 착하게 살았던 사람이 생각하기를 \\\'내가 들어가면 크게 환영하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천국문에 들어가니까 아무런 환영도 없이 그냥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섭섭한 마음에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첫눈에 봐도 너무나 부자였습니다. 목걸이며 반지, 옷입은 것도 너무나 부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부자에게 아주 기쁘게 환영을 했습니다. 이것을 본 착한 사람이 참 실망했습니다. \\\'천국도 별수 없구나 나는 별로 환영하지 않고 저 부자는 크게 환영을 하는가\\\' 그래서 착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왜 천국에서 까지 차별을 두어 부자는 환영하고 나는 이렇게 환영하지 않습니까?\\\" 이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천국에는 당신같이 착한 사람은 하루에도 몇백명씩 들어오지만 저런 사람은 몇백년 만에 한 사람 들어올까 말까 해서 환영했습니다.\\\" 우리가 직분 맡고 일하고 나서 엎드리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엎드려야 합니다. 3.예물을 드려 경배했습니다. 황금과 유황과 몰약입니다. 그것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어느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왕에게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아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삶을 마땅히 살아야 될줄로 믿습니다. 16세기에 가르멜의 수사였던 \\\'브라더로렌스\\\'라는 사람이 수도원 주방에서만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언제나 얼굴이 환하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늘 주방에서 지저분한 일만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환하고 기뻐할수 있습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후라이팬의 부침개를 뒤집을때에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데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갖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무슨 일에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때에도 그 사랑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이 더 쉽고 간접적인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작은 일 하나에도 하나님 앞에서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섭섭해도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아도 자기가 잘났어도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 때 주님이 오시면 기쁨으로 맞이 할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온 맘과 뜻 다해 주 사모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어떤 분이 말씀하기를 올해 크리스마스는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해는 갑니다. 모든 사회적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있어서는 시대적인 분위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형편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크리스마스를 통해 주님이 오심을 오늘도 기쁨으로 맞이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세주가 세상에 오심
구세주가 세상에 오심 성경 : 마 1:18-2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것은 주께서 선지자 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 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함이라](마 1:18-23). = 서론 = 성탄절은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또한 동서고금을 막론 하고 나라와 종족을 초월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의 말씀을 가지고 구세주가 세상에 오신 이유와 배경에 대해 알아 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천사가 와서 요셉에게 들려준 소식은 두 가지 예언의 말씀이었습니 다. 첫째는 22,23절에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하신 예수님이 나시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한 예언이 이루어진 상태를 예언한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시대순, 즉 이사야의 예언부 터 다루고자 합니다. 1. 이사야의 예언 - 소망의 예언 본문에 인용한 예언의 말슴은 이사야 7장 14-16절로써 [그러므로 주 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이사야에서 두번( 7:14,8:8), 본문 에 한 번 나타날 뿐 다른 곳에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임마누엘은 누구일까요? 그분은 어떤 분일까요? 그 대답은 이사야 9장 6,7절에서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 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 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 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즉 이사야로부터 수세기가 지나 천사가 한 여인의 꿈 속에 나타난 그 예언의 궁극적인 성취가 임박했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 스도의 탄생은 옛날 이사야의 예언 속에 담겨 있는 그 광대한 가치를 성취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하여 장차 태어나실 분은 어떤 분일까요? 첫째로 기묘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이하고 묘한 자 라는 뜻으로서 주님의 가르침과 사역, 탄생과 죽음, 부활과 승천 이 모든 일들이 기묘하게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온갖 피를 잘 내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잠언의 지혜와 동 일시하고 있습니다. 셋쩨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 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전능하신 하 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넷째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씀은 영원한 보호자라는 뜻입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 한 자라](계 1:8) 는 말씀대로 주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 분입니다. 다섯째로 평강의 왕으로 묘사된 것은 주님께서 참된 평화를 가져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했을 때 주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시므로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 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는 위와 같은 이 름을 가진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며, 임마누엘은 그의 백성 가운데로 요셔서 낮아진 상태에서 그들과 고락을 함께 나눈다는 뜻입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전진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인간 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인간 세계에 무슨 낙이 있으며 무슨 소망이 있기에 이 세상에 오시려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단순합니다. 바로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고통많고 슬픔많 은 인간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천사의 선포를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며 마리아 는 그 말씀을 듣고 찬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들도 그 사실을 듣고 믿었기에 온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 니다. 지금 우리들은 이들보다 더욱 믿기가 쉽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이 수세기에 걸쳐 실행되어 온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계에 널리 전파해야 될 것입니다. 2.천사의 예언 - 성취의 예언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절). 성경은 한날 목수에 불과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며 곧고 진실한 사 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셉의 약혼녀인 마리아는 옛부터 내려오는 히브리인의 아름다운 풍습에 따라 요셉과 앞날을 약속한 여 인이었습니다.이러한 약혼기에 거룩하고 신비한 이적이 생긴 것입니 다. 그것은 마리아가 잉태를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26-38절에 보면 마리아가 잉태하기 전 가브리엘 천사장 의 수태고지가 있었고, 또한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을 가만히 끊고자 할 때에 천사가 현몽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는 사실을 알려 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에게 현몽하여 전해 준 천사의 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 흔하고 평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란 구원자를 의미하는 히브리 이름인 여호수아의 헬라어 이름입니 다. 천사는 바로 그 이름을 아이에게 주라고 한 것입니다. 2)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백성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한마리도 압작 당하고 유린당한 백성이요 참목자를 잃은 어린양들이었습니다. 3)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외적인 것과 싸우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마음 의 죄에서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근본 적인 문제의 해결자로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때 천사가 요셉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아기에게 주라고 한 이유는 오직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은 이루어 져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그 백성과 함께 하셨으며, 또한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 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 입니다. = 결론 = 오늘날 아니, 지나간 세대와 오는 세대에 있어서 이름만큼 수없이 불 려지고,흠없고, 찬양받을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이렇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 사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심으로 임마누엘에 대한 소망은 완전하게 성 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영원한 통치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인 간 예수를 통하여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사 왕국을 건설하시고 영원토 록 그 왕국을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구원의 소식을 널리 전함으로 성탄의 기쁨이 온 세상에 충만하기 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유의 아기/눅2:10-12
구유의 아기 눅2:10-12 성탄절이 바로 눈 앞에 왔다.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이 날에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여러가지 파티도 벌리고 행사도 한다. 선 물도 주고 받는다. 보너스도 많이 받고 싶어한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사랑하 는 사람들끼리 행복한 시간을 갖고 싶어한다. 그것도 좋다. 어떤 방법으로건 행복해 지는 건 좋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려는 것은 그 수준이 아니다. 이 성탄절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에 확실하게 오셨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이 먼 하늘에서 그냥 인간을 돕고 축복하는게 아니다. 세상으로 들어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내려 오신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이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다. 그가 왕궁에서 난게 아니다. 그가 부자집에서 난 것도 아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마구간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황제가 신민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자기가 속한 곳 에 가서 호적에 등록하라는 것이다. 명령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고향으로 부 리나케 돌아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어머니도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달려 갔다. 해산날이 되었는데 여관에는 방이 없었다. 아마 돈이라도 많이 있었더 라면 구했을 것이다. 할 수 없이 남의 집 마구간을 숙소로 빌린 것이다. 이야기는 본래 여러 백년 전부터 예언된 것이다. 구약의 여기 저기에서 부분적으로 예언된 것이 모아져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기에 천사가 설명해 준다. 목자들이 밤에 양들을 지킬 때 천사들이 나타나 말해준 다. \"너희가 기다려오던 구세주가 나셨다.\" 그리고 그 증거까지 말해준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그것이 바로 증거이다. 이상한 증거이다. 더러운 말구유에 아기가 놓였는데 그것이 증거라는 것 이다. 사람들은 예사로이 보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마구간에서 나고 아기 놓 을 침대가 없어서 차마 땅바닥에 놓지 못해 말밥그릇에 놓았을까! 세상의 눈 으로 보면 이처럼 한심한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아는 사 람들은 말구유의 아기야말로 구세주의 참된 증거인 것이다. 이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의 질고를 짊어진 것이다. 그의 한평생 어디 인간의 질고를 외면한 것이 있었던가!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인 간들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받으려함이 아 니다. 섬기려하는 것이다. 오! 이 원리를 우리 모두가 깨닫는다고 한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저 다 주고 섬기려고 한다면! 키엘케골은 성탄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 나라에 임금이 있었다. 그에게 는 모든게 있었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 그것은 바로 아내였다. 그는 아 내를 원했다. 그는 변장을 하고 거리를 자주 다녔다. 혹시 자기 마음에 드는 처녀를 찾을 것 같아서였다. 어느날 그는 가난한 농가를 지나다가 들에서 일 하는 처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 잡히고 말았다. 그는 그녀 앞에 왕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면 결혼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권위와 명령을 가지고 결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왕비는 얻겠지만 아내는 얻을 수 없다. 그러면 중매를 통해서 만날 것 인가?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변장을 하고 나타날 것인가? 그것은 거짓의 방 법이다. 다른 사람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그는 결심했다. 나는 농부가 되겠다. 국사는 믿을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농부가 되겠다. 그는 품군 농부가 되었다. 농부의 옷을 입고 음식을 먹 었다. 완전히 그들중 하나가 되었다. 힘든 일을 하면서 그 아가씨의 사랑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세상에 오시는 마음이 그것이다. 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기 속에 이 마음이 주어졌음을 알아야 할텐데.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자기 입장에서 하는게 아니다. 자기 원하 는대로 자기 입장에서 마구 말하고 명령하는게 아니다. 사랑은 같아지는 것 이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비판할 자격이 되어 있지 않다. 또한 상대방의 입장이 되기 전에 그들을 이끌어나올 힘도 없는 것이다. 왕은 이렇게 해서 농부의 딸과 결혼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방법이었다. 성탄은 구원의 시작이었다. 왕이 농부가 되는 것 정도가 아니다. 영원하 신 하나님이 유한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인형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이 인형이 된다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하나님이 인간 이 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하셨다. 그 는 사람을 사랑하셨다. 그는 사람중에 가장 천한 사람이 되셨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33년은 온통 섬김의 삶이었다. 왕이 농부를 섬기는 것은 차라리 참을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배신할 인간을 섬기는 것, 그리고 영원한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보통 인간 이 극복할 수 없는 모든 삶을 인간으로 극복했다. 죽음까지 지옥까지 하나님 의 진노까지 다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말한다. \"이게 다 너희 것이다.\" 이 하나님이 우리 속에 태어나야 한다. 마굿간이 어디인가? 우리 마음 속 아닌가! 나는 깨끗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마굿간 이 아니다. 그것은 왕궁이다. 사람들은 왕궁 옆을 배회한다. 화려한 모습의 사람들 속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천만에, 거기 아무도 날 도와줄 사람이 없다. 교만한 마음, 정죄하는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구유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복음의 말씀이다. 거기에 구세주가 담겨있 다. 들여다보라. 거기 아기가 있다. 거기 구세주가 있다. 스스로 확인해 보 라. 강보에 싸여 말씀에 누워있는 하나님을.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 도록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가 확실하게 살았다는 그 사실이 우리 에게 증거가 된다. 실제로 그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증거이다. 이제 그의 삶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 그리고 그가 자기를 통해서 살 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경험한다. 그리고 구원의 능력을 맛보게 된 다. 구원의 경험이 무엇이고 구원의 능력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평안하고 기쁘다면 우리는 구원을 맛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 에 의해서 되고 있다면 우리는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 마음 속을 들여다 보라. 양심에 깨끗함이 없다면, 불안하다면 걱정 과 근심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건 구원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남에 대한 미움, 역시 마찬가지이다. 돈 걱정, 미래 걱정, 병의 고통, 모두 가 마찬가지이다. 어떠한 상태이건간에 괴로움에 잡혀 있다면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세주는 이것들에서 해방하신다. 그러면 예수를 믿으면 이런 근심 걱정이 전혀 없단 말인가? 병도 없고 실패도 없고 실수도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미 천국에 있는 것이다. 하지 만 우리는 아직 세상에 있다. 고통과 결핍과 배신 그리고 오해 각종 아픔으 로 붉게 물들여져 있는 곳이 바로 세상이다. 바로 죄와 악의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런 괴로움들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는 이런 문제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문제를 피하려면 죽어야 한 다. 사람마다 잘 극복하는 문제도 있고 약점도 있다. 잘 못하는 분야도 있 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좋아하는 일과 나 좋아하는 사람으로만 이루어진게 아니다. 신자도 불신자와 똑 같은 세상에 산다. 아니 신자는 불신자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산다. 그래서 각자의 십자가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곧 능력이다. 이것들을 다 극복하고도 남을 능 력이다. 그것은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자기의 머리를 잘 쓰거나 재산이나 권력으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 도가 모든 고난에서 자유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유케 하는 것이 바로 그 능력 이다. 그것을 사용해보기 전에 아직 우리는 구원을 맛볼 수 없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바로 성탄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세상 에 오시는 기적으로 그친다면 그래서 우리 밖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그친다면 우리에게 구원은 없다. 그리스도의 성탄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야만 우리에게 구원이 경험된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탄생 과 삶이 나를 통해서 실제로 이루어져 가겠는가? 이것이 신자의 삶인데. 중요한 모임에 가기 위해서 마음 속에 입을 옷을 생각한다. 그래서 준비 를 다하고 마지막에 옷을 입는다. 옷장에서 꺼내보니 형편없이 구겨져 있다. 구겨진 옷을 입고 나갈수는 없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다리미다. 다리미는 구겨진 옷을 펴는 필수적인 기구이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는 반드시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시집가는 색시는 꼭 다리미를 가져간다. 이 다리미가 일을 하려면 반드시 열이 있어야 한다. 자기 혼자서는 절대 로 힘을 쓸 수 없는게 바로 다리미다. 요즘에는 편리한 전기 다리미를 많이 쓴다. 그러려면 한 쪽 끝이 소켓에 꽂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뜨거워 지게 된다. 아무리 좋은 다리미라도 전원에 꽂히지 않으면 절대로 힘을 쓸 수 없다. 그래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끝을 꽂아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슴도 뜨거워지려면 그리스도에게 꽂혀야 한다. 포 도나무가 줄기에 붙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 도에게 붙어있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삶이 시작된다. 그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만 가능하다.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 보라. 정말로 그리스도가 내 속에 지금 계신가?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를 대하고 남을 대하는가? 이 질문에 \"예\"하고 대답할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누가 말을 하든간에 무엇이 속상할 것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에 언제나 계셨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언제나 사랑으로 뜨거웠다. 이제 똑 같은 일을 하나님은 내 속에서 하고 싶어하신다. 자. 부정하지 말자. 이 말씀을 받아들이자. 하 나님은 예수를 마굿간처럼 낮추셨다. 그리고 거기 탄생하시고 사셨다.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성탄이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 님으로 채우자. 그러면 그리스도처럼 극복할 것이다. 그는 외로웠다. 그는 가난했다. 그는 연약했고 그는 오해받았다. 그는 모두에게 배신 당했다. 그 는 비참하게 너무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속의 하나님 으로 구원을 받았다. 지금 우리도 그것을 맛보아야 한다. 가난도 역경도 미래도 모두다 같은 방법으로 극복한다. 그리스도가 한 것처럼 나도 하는 것이다. 정말로 마굿간 같은 내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가? 그리스도는 잘난 곳 왕궁에는 나지 않으신다. 겸손히 회개하고 자신을 낮추 는 마음에 나신다. 마음에 꺼리낌이 있다면 그리스도는 안계신다. 그러므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확실하면 일어나라. 그리스도로 일어나라. 이 말을 당위론으로 들으면 않된다. 왜 할 수 있는데 저항하겠는가! 하 나님이 도와주시겠다는데 반대할 것인가? 않된다. 하나님께 다 맡기자. 그리 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자. 그리스도처럼 가슴을 덥혀보자. 원수를 용서하고 자기 모욕하는 사람을 사랑해 보자. 이것이 이상론인가? 아니,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경험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것이 성탄을 경험하는 길이다.
그 날이 임하리라!/ 눅21:25-36/ 대림절제1주일설교/ 2009-11-29
그 날이 임하리라! 눅21:25-36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눅 21:25-36절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25-28절은 인자(사람의 아들)가 올 것이라는 묵시적 선언입니다. 둘째, 29-33절은 그것의 징조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셋째, 34-36절은 그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각각의 단락이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는 같지만 ‘마지막 때’가 온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합니다. 그 마지막 때에 대한 것을 첫 단락은 ‘인자’ 개념으로, 둘째 단락은 ‘하나님 나라’로, 셋째 단락은 ‘그 날’이라는 단어로 묘사합니다. 마지막 때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2천 년 전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는 누가복음 기자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인자’는 마지막 때에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올 전능자를 가리킵니다. 곧 메시아입니다. 그 마지막 때는 곧 새로운 시작의 때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그 마지막 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가 곧 인자, 즉 사람의 아들입니다. 인자 이야기는 구약에 종종 등장합니다. 에스겔서 2장 이하에 인자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겔 2:1, 이외 3,6,8절 참조) 다니엘서에도 나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단 7:13) 그 인자의 권세는 소멸되지 않고 영원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구약의 인자 개념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 21:28) 이런 인자 사상에서 핵심은 ‘마지막 때’와 ‘심판’입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때가 이르게 될 터인데, 그 때 인자가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와 심판 마지막에 대해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눅 21:25) 마지막 때에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별들이 흔들린다고 합니다. 바다가 요동치고 큰 파도가 몰아칩니다. 이 때 모든 민족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집니다. 26절에서는 하늘의 권능이 흔들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계 6:13,14) 이런 구절들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 전체가 해체된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요? 지난 인류 역사에 인류의 종말이나 우주의 최후를 예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프랑스의 의사이자 신비주의철학자인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의 예언이 가장 유명한 것 같습니다. 그는 나중에 교황이 될 사람을 정확하게 짚었으며, 프랑스 왕 앙리 2세가 마상경기의 사고로 죽을 것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예언이 적중한 탓인지 1999년 7월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는 그의 예언도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인류와 지구의 최후를 주제로 하는 영화도 많습니다. 최근에는 <2012>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끈다고 합니다. 고대 마야문명 시절부터 2012년이 인류 멸망의 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그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지진, 화산폭발, 해일 등으로 모든 인류가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인류의 후손을 남기기 위해서 우주선을 만든다고 합니다. 우주가 총체적으로 파괴되는 때가 올까요? 우주까지는 가지 말고 지구만 생각합시다. 그 중에서도 인류만 생각해 봅시다. 인류가 이 지구에 더 이상 살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올까요? 이게 허무맹랑하거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는 우주의 한 귀퉁이에 떠 있는 태양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지구는 계속 움직입니다. 그게 몸으로 느껴지지는 않겠지요. 우리가 오감으로 느껴야만 확실한 건 아닙니다. 태양계 안에는 수많은 행성과 혹성과 유성과 혜성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일정한 궤도에 따라서 움직이기도 하고 제멋대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만약 지금 지름 1킬로미터 되는 혜성이 지구에 부딪친다면 모든 생명은 끝장이 납니다. 개미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개미도 결국은 사라질 겁니다. 또 빙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인류는 지구에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인류가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는 지금은 1만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고 새롭게 시작될 빙하기 사이인 간빙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큰 자연재난만이 아니라 인간의 소비 문명에 의해서 지구의 생태적 균형이 급격하게 깨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인자가 올 마지막에 대한 성서의 증언이 바로 위에서 설명한 것과 똑같은 종말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겉으로만 보면 아주 비슷합니다. 우주의 해체를 말하니까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로 봅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의 창조 행위도 역시 선하고 정의롭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고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노아 시대에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물로 심판을 내리셨지만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앞으로 이런 재앙이 없을 것이라고 노아와 약속했습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 9:15) 성서와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이 세상은 허무하게 해체되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딛고 있는 땅은 탄탄합니다. 비록 홍수와 지진과 해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토대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본문은 왜 일월성신이 뒤틀리고 바다와 땅이 흔들린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것이 결국 세상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인류 멸망과 똑같은 게 아닐까요? 성서가 말하는 종말은 해체와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세움과 들어올림입니다. 그것은 죽임이 아니라 살림입니다. 그것은 중단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입니다. 그런 세계를 누가복음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온다고 표현했습니다.(눅 21:27) 그리고 그 때는 곧 ‘속량’의 때입니다.(눅 21:28) 그렇습니다. 인자가 오는 때는 구원의 때입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두 구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십시오. 거기에 기독교가 희망하고 기다리는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인자는 능력과 영광을 가진 분입니다. 그가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이는 곧 능력과 영광을 가진 인자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능력과 영광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1세기의 놀라운 과학도 우리를 이 세상에서 조금 더 편리하게 살도록 도와줄 수는 있지만 능력과 영광은 없습니다. 인간과 과학은 바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아주 무능력합니다. 이 말이 이상한가요?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과학의 능력은 지금 이런 세상 안에서만 발휘되지 인자로 인해서 완성될 세상에서는 무기력합니다. 무슨 말인가? 인자로 인해서 완성될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릅니다.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다릅니다. 양적으로 다른 게 아니라 질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을 개량하는 게 아니라 전복시킵니다.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외계인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질적으로 다른 세상이라고 해서 해괴한 세상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여기 코스모스 씨앗이 있다고 합시다. 굵기가 1,2미리, 길이가 1센티 정도 되는 가늘고 길쭉한 모양입니다. 그게 봄에 땅에 심겨졌습니다. 조금 지나면 거기서 화사한 코스모스 꽃이 핍니다. 씨앗만 놓고 본다면 꽃은 상상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세계입니다. 씨앗과 꽃을 따로 놓고 본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그러나 씨앗과 꽃은 신비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씨앗과 비슷합니다. 씨앗이 때가 되면 꽃을 피우듯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그걸 이루실 분이 바로 능력과 영광으로 오실 인자이십니다. 인자에게만 그런 능력이 있으며, 그런 세상이 바로 그분의 영광입니다.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냥 그대로 믿을 수도 있겠지만, 뭔가 속 시원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자가 세우실 세상이 아무리 새롭다고 하더라도 그건 지금 우리와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라서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 지금 당장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더 나아가서 여기서 이웃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자칫하면 이원론적이고 초월적인 종말론에 빠져서 현실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역사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일어났습니다. 1992년 다미선교회 사건은 단적인 예입니다. 거기에 속했던 사람들은 1992년 10월28일에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자신들만 휴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직장과 학교도 그만 두고 매일 종교적인 집회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런 신앙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현실의 역사에 발을 굳건히 딛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불완전합니다. 창조가 아직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참된 안식이 불가능합니다. 오죽했으면 묵시적 문서들이 죽음을 영원한 안식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것들은 모두 지나갑니다. 여러분의 젊음을 보세요.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우리가 소유했던 것들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이 모두 빠져나갑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생명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 운명의 종착역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입니다. 우리의 이웃 종교인 불교가 해탈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만 열반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열반은 기독교 용어로 구원, 또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많은 점에서 우리와 다르지만 그들도 지금의 세상과 삶이 이것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만은 우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깨어 있으라 불완전한 이 세상이 완전하게 질적으로 변형되는 그 하나님의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일까요? 그 때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도 모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압니다. 그러나 그 때의 징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마지막 때의 징조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사이비 종말론이 창궐할 때 그들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666이나 144,000이라는 숫자를 세계사의 큰 사건과 연결해서 설명하곤 했습니다. 유럽 연합(EU)이나 상품의 바코드를 실례로 들었습니다. 자연재해를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주장들은 모두 공허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에게 공연한 두려움을 조장함으로 종교적 열정을 불러내려는 행태들입니다.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 때가 “덫과 같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 겁니다. 한편으로는 마지막 때의 징조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예상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모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징조가 보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겁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누군가요? 본문이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 사람입니다.(눅 21:34) 세상의 일에 모든 영혼이 치우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삶을 향한 의지와 열정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성취, 자기만족에 몰두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치켜세웁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보는 사람은 누군가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눅 21:36)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며 깨어 있다는 건 생명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힘인 성령과 민감하게 공명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볼 수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이런 사람에게는 그 마지막이 내일이든지, 10년 후이든지, 10억년 후이든지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회력의 시작인 2010년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기억하며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심판주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2천년동안 기다렸지만 아직도 오지 않을 걸 보니 그의 약속이 확실하지 않다는 불안, 의심을 하지 마십시오. 2천년은 하룻밤과 같습니다. 그분이 오시어 생명이 확 드러나면 그 시간의 신비도 모두 밝혀질 것입니다. 마지막 그 때를 공연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때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는 순간입니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구원의 그 날이 속히 올 것입니다. 이미 왔습니다. 2천 년 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용섭 목사(대구샘터교회)
그 이름 예수/ 마1:18-21/ 대림절제1주일설교/ 2005-12-01
그 이름 예수 마1:18-21 오늘은 강림절 첫째 주일이다. 이제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름을 갖기 마련이다. ‘사람’이라고 하는 말도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다 동일한 이름을 갖기 어려우니까 각각 이름을 갖게 되었다. 사람이 이름을 가지면 그 이름의 뜻이 있다. 그래서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하고 또 그 사람에 걸맞게 이름을 지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 구주의 이름은 ‘예수’이다. 예수라고 하는 이름 은 다 한사람 밖에 없다. 그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이다. 석가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예수님은 아니다. 예수 님 당시에도 예수라고 하는 이름이 종종 있었고 구약에도 ‘여호수아’ ‘호세아’ 등도 ‘구원’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별하기 위해서 ‘나사렛 예수’라고 지명을 넣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름이 같다고 해서 같은 예수는 아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한분 밖에 없으신 것이다. 예수라고 하는 원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본문 21절 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수라고 하는 이름의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자기백성’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에 는 강하고 위대한 백성들이 많이 있었으나 약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 유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신비요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 실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주 약하고 신비요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주 약하고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이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엡 2:12)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동일한 시민(엡2:19)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귀중한 신분인가! 바벨론이 세계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귀중한 신분인가! 바벨론이 이 세계를 휩쓸 때는 바벨론 시민이 제일이었고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할 때는 로마 시민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늘나라의 시민권은 바벨론 시민권이니 로마시민권이나 미국시민권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 다. 둘째, ‘저희 죄에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살아왔다고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해 주었으나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자기 힘으로는 그 죄에서 벗어나거나 헤어 나올 길이 없게 되었다. 미물 같은 존재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놓았더니 그들이 계속해서 죄를 짓고 그 죄에 눌려서 죽어가고 신음 하는 자기 백성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생각해야 만 할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이 성적이 좀 나빠도 속이 상하고 시험에 떨어지면 죄 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 나는 주님 거역한 죄인이었고 내 뜻으로 산 죄인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큰 죄인입니다]하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 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할 자’라는 말이다. 왜 자신이 죄를 짓고 스스로의 잘못으로 신음하는 백성을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죗값을 치루면서 구원하셔야만 했는가? 그것은 자기 백성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백성이기 때문에 외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불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다. 온갖 정 성을 다해서 가꾸고 길러온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자기 백성은 은금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훨씬 귀한 것이다. 비록 흙이 묻고 때가 묻긴 했지만 포기하거나 내버릴 수 없는 귀한 보배였고 사랑하는 보석이었다. 그래서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 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바로 그날이 크리스마스 날이다. 이 날 이야말로 너무나 감격스럽고 참으로 우리에게 있어 기쁨의 날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감격스럽고 눈물 흘리는 까닭이 있다고 한다면 나 같은 비천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하는 그 사실과 그 사랑 때문인 것이다. 아무나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남 은 일은 구원하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일만 인간에게 남은 것 이다.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낙심을 찬양하며 기쁘게 기다리면서 그날을 보다 더 뜻있게 보내는 금년도 성탄이 되시길 바란다.
그를 기다리는 자의 복/ 사30:18-22/ 2012-02-12
그를 기다리는 자의 복 사30:18-22 H.G. 웰스라고 하는 작가의 \'대 주교의 죽음\' 이라고 하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서 설명해주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대 주교는 날마다 습관처럼 대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똑같은 말로 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오늘 내게 말씀하소서.\" 이것이 그의 기도 첫 문장입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오늘 내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한평생 수십 년을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오냐, 무슨 일이냐?\" 이 소리를 듣고 그는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이여 말씀하소서\"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실까?\" 그 많은 시간 기도하면서도, \"정말 기도가 응답되는 걸까?\" 어쩌면 기도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기 감정을 순응하는 이 정도에 그치는, 소위 말하면 추상적이고 감상적 신앙이라 말입니다. 여러분 예배하고 기도하고 믿고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얼마나 내 생활 속에 확실하게 응답된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기다린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깊은 아주 깊은 오묘한 말씀이올시다. 하나님이 기다리신다. 그는 능력이 많고 그는 지혜가 많습니다. 그런데 왜 기다리는 겁니까? 그는 창조주입니다. 그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왜 기다림이라고 하는 고통을 택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자 보세요. 가지고 싶지만은 지금 갖지 못하니까 돈을 벌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내가 무능해서 할 수가 없으니까 기다려야지요. 우리는 기다려야 됩니다. 부득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나약함, 그런 불가피적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거든요. 능력이 많으세요. 하시고 싶은 일은 해요. 언제나 하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 섭리자 하나님, 도대체 무엇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얼마동안이나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 뜻을 자제하시고 그 행사 속에서 왜 그 많은 시간 기다리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그의 편지 베드로후서 3장 8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죽기에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 일을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기다림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 같이\"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릴 때는 하루가 천년 같아요, 어떤 때는 천년이 하루 같아요. 이런 시간 그 관념을 초월해서 완전하게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왜 이 기다림의 고통을 선택하셨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주 쓸모 없는 자로, 아주 구제불능한 자로, 아주 끝난 그런 존재로 대하지 않고 아직도 가능성을 두고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죠.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있는 존재라고 인정해 주시는 거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 결혼생활하고 뭐 이렇게 시작하고 가만히 보면 어떤 분들은 한 삼십 년을 참았다가 이젠 더 못 참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왜요? 기다릴게 없으니까 이제는. 기다려 봤자 뭐 이제 싹이 노란데 뭐. 그렇게 생각하고, 절망하고, 실망하려고 그러는데, 그건 참으로 인격에 대한 최고의 모독입니다. 저는 늘 얘기합니다. 신랑, 신부들에게 늘 얘기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실망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절망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그건 마지막 말이라고. 아직도 나는 너를 기다린다.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사랑입니까? 얼마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겁니까? 기다림!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고통을 스스로 감수하시면서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심판을 멈추시고 다음 때를 기다립니다. 다음 시간을 기다립니다. 오래오래 천년이 하루같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건 곧 은혜입니다. 성숙하게 되기를 기다립니다. 깨닫고 성장해서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큰 회사에서 그 신입사원 모집하는데 아주 지혜를 냈다고 합니다. 요새 회사 직원하나 잘못 쓰면 회사 거덜나거든요. 보통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을 채용한다는 거. 아 그래서 \"사람을 자 써야 되겠는데, 어떻게 좋은 사람을 고를까. 성적표대로 되는 건 아니요, 물론 IQ도 아니요. 사람됨을 어떻게 바로 심사할 수 있을까?\" 하던 중에 그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 마지막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 아주 우수한 사람들을 한 방에 놓고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인터뷰 몇 시부터 합니다.\" 해 놨거든요, 그리고 한 시간을 두었어요. 그러니까 한시간 동안 처음에는 조용히 있다가 \"왜 시간이 늦지?\" \"왜 말이 없지?\" \"왜 이거 뭘 하는 거지?\" \"아 이거이거 왜들 이러는 거야\'\" 하고 하나씩 둘씩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초조해서 어떤 사람은 몸을 동동 구르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고, 손가락을 만지고. 서로가 이러는 시간에 한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 동안에 그 기다리는 시간을 전부 녹화를 해 뒀습니다. 한 시간 후에 \"인터뷰 끝났습니다\" 거기서 사람됨을 충분히 고를 수가 있었어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어떤 모습입니까? \'그럴 일이 있겠지. 뭐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겠지\' 하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그 자세, 대단히 중요한 것이에요. 이게 바로 EQ지수가 높은 거예요. 자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저는 박학전 목사님이라고 하는 저희 목사님, 제가 인천에서 목회 할 때 협동 목사님 이셨어요, 나이 많으신 어른인데 그렇게 목회를 많이 간접적으로 도와주셨는데, 가끔 그 집에 이렇게 초대받아서, 방문했을 때 보면 목사님이 연세가 높으시고 아주 참 귀한 어른인데 너무 외롭고 그래서 손자 하나를 데려다 키웠는데, 아 이놈이 말이죠, 밖에 나가 놀다 들어와선 버릇이 없어요. 자기 할아버지를 발길로 차면서 \"이 새끼, 이놈\" 별소릴 다 해요. 그래도 할아버지는 좋다고 끌어 안아줘요. 난 이 장면을 너무너무 아름답게 봤어요. 그래 제가 한마디하죠, \"아니 천하의 저렇게 무례한 놈, 할아버지를 발길로 차는 놈을 왜 사랑합니까?\" 그랬더니, \"그건 몰라서 그러는 건데, 애가 지금 이놈소리가 무슨 소린지, 님 소린지 놈 소린지 그건 알 바 아니요. 자기 딴에는 이거 내가 웃어주니깐 좋아하는 줄 알고 더 좋아한대요.\" 그러면 자 이제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얘가 그 뜻을 다 알 때까지, 철이 날 때까지 기다려 줄 수밖예요. 이걸 즉각적으로 심판을 해야 되겠습니까? 기다려 주는 거죠, 그것이 사랑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예요. 기다려 주는 거. 딜레이(Delay)라고 하는 거, 사실 우리가 지연된다는 건 참 괴로운 것이에요. 약속이 지연되고, 무슨 일이 자꾸 늦어지는 것 참 어렵지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실 때, 그 지연됨, 이 속에는 위대한 사랑이 계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모르면 원망과 불평에 치우치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했던 나사로의 집이 있습니다. 오빠와 누이동생 둘, 이렇게 사는 가정으로서 어쩌면 예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가정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저들도 예수님을 제일 많이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빠 되는 그 집의 기둥입니다. 오빠가 병들었습니다. 누이동생들이 사람을 보내서 좀 빨리 와서 저희 오빠를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 갔습니다. 안 가시고 죽을병이 아니다 그러고 안 갔습니다. 지연됩니다. 나흘이 지연되는 가운데 오빠는 죽었습니다.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저들은 마음에 지금 불만이 많습니다. \'왜 오라고 할 때 오시기 않았습니까? 왜 내가 구하는 그 시간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장례가 끝나서 냄새가 나는데 지금 오시면 뭐하러 오셨습니까?\' 복잡합니다 생각이.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일찍 이 자리에 오지 아니 한 것을 기뻐하노라\" 왜요? 병상에서 일으키질 않았고 무덤에까지 들어간 자를 뒤에 끌어냈습니다. 어느 쪽이 더 큰 은혜입니까? 어느 쪽이 더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고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지연 작전을 씁니다. 이 기다림, 요 기간을 못 참아서 마르다가 주님 앞에 실수하는 걸 볼 수가 있어요. \"환란의 떡과 고생을 물을 마시며\"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환란의 떡과 고난의 물을 마시게 하면서 기다립니다. 여러분 너무나 잘 아는 탕자의 비유도 보십시다. 저는 탕자의 비유를 볼 때 몇 가지를 생각합니다. 제일 궁금한 것은 그 아들을, 왜 가출을 아버지가 도와줬나 하는 겁니다. 그 못된 아들. 성경에는 간단하게 \'유산을 받아 가지고 갔다.\' 이렇게 되어 있지만은, 그렇게 까지 되기까지에는 오죽이나 못되게 놀았겠어요. 그냥 용돈 있는 대로 써 버리고 써 버리고, 많은 사건이……마지막에 \"아버지 죽을 때에 네게 줄 유산 미리 주세요.\" 이 말까지 아버지는 들어주었습니다. \"그래 어차피 네 거니까 가져가라.\" 그 재산을 떼 주는 삼분의 일을 잘라주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이게 기다림입니다. 시간적으로만이 아니고, 그의 인간 됨을 기다리는 것이에요. 아버진 뭘 생각합니까? \"이 재산 다 날려도 좋으니까, 부디 내가 바라는 좋은 착한 아들이 되어다오.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 소리 좀 하고 돌아와 다오.\" 그거 아닙니까? 그 날을 기다리며 아버지는 여기에 엄청난 것을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계시된 것이에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은 과원지기가 무화과를 심어놓고 열매 열리기를 기다렸다. 삼 년을 기다렸다 하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길 되기를 특별히 아주 겸손해져서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에요. 여러분, 은혜 입었다고 은혜가 됩니까? 내가 겸손할 때만이 은혜가 은혜 됩니다. 내가 온유한 마음, 참으로 착한 마음이 되기까지는 어떤 은혜도 내게 은혜 될 수 없는 것이에요.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되기를 회개하고 믿음에 서서 모든 정욕을 버리고 아주 빈 마음으로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되기를 그리고 그 깊은 사랑의 뜻을 깨닫고 감사 감격하게 되기를 하나님은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은혜 베푸시기 위함이요. 심판을 위해 기다리는 게 아니요, 두고보자. 잘못되면 다 진멸하리라. 그 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은혜 베풀기 위하여 은혜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비라고 하는 건 참 좋은 거 아닙니까? 비가 와야죠. 그러나 폭우가 쏟아지면 이건 망하는 겁니다. 조용하게 땅이 흡수할 만큼 봄비처럼 이렇게 비가 와야지 그대로 장대비가 막 쏟아지면은 다 무너지고 마는 거예요. 비는 중요합니다 만은 정도에 맞게 와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냇물이란 언제나 아름다운 게 아닙니까? 그러나 물이 범람해서 홍수가 되면 다 쓸어버리고 마는 거지요. 아무리 하나님의 귀한 은혜라고 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절대로 은혜 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감당할 그 날을 주님은 기다린단 말입니다.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기다림을 알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다림을 함께 기다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대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기다리는 것과 나의 기다림의 초점을 맞춰야 되요. 그가 내 인격의 성숙을 기다린다면 나도 그 날을 기다려야죠. 부자 되기를 기다려선 안돼요. 잘 살게 되기를 기다려서는 안돼요. 그는 우리가 진실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교만하기를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성공을 기다린다는 말이 이거는 하나님 앞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기다림, 그 뜻을 똑바로 알고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통해야 됩니다. 소망과 약속! 그 날을 기다리는 겁니다. 은혜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 그가 종종 출석하던 워싱턴 D.C. 의 뉴욕 에비뉴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의 조셉 C. G.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기간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펴놓은 성경을 옆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낡은 성경에 그리고 그 성경을 여러 번 손으로 짚어서 그 손자국이 많이 나고 눈물자국이 있는 성경 한 페이지를 눈여겨볼 수 있었답니다. 그것은 시편 37편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것을 수없이 읽고 명상했다는 흔적을 그의 성경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끝까지 참아 기다릴 것입니다. 그가 은혜 베푸실 때까지, 또 나는 은혜 베푸심을 받을 수 있는 그 수준에까지 도달하도록 기다리겠다. 하나님의 기다림의 뜻을 알고 충분히 이해하고 나면 나의 기다림은 아주 쉽게 됩니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저 앞에 있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의 그 거룩하신 시나리오 속에 오늘 내가 있어요. 오늘의 내 사건이 있어요. 이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요, 그런고로 조용히 그 날을, 그 시간을 기다릴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교육학적인 그런 책을 조금 읽다가 한마디 뜻을 찾고 제가 아이들을 키울 때 그렇게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진작 이렇게 했으면 참 좋았을 것인데\' 하고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지금은 손자, 손녀들에게 그 방법을 그대로 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또 어머니들에게 부탁을 해 봅니다. 그게 뭐냐면 기다림의 훈련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가르쳐야 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기다리는 자세, 그것을 훈련시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뭘 달라고 하면 말입니다. 대체로 즉시 주는 것도 있지만은 중요한 것들은 절대로 바로 주지 말라는 거지요. 뭘 달라고 하면은 \"내일 준다\" 그래요.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고 \"한 밤 자고 나면 내일 아침에 준다.\" 이렇게 딱 한마디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아무리 울어도 주면 안돼요. 하고 하룻밤 자고 난 다음에 \"아이들은 다 잊어버렸지 벌써\'\" \"너 어제 나하고 약속했지?\" 하고 이것을 줍니다. 그 다음에 얼마 있다가는 또 두 밤 자면 준다, 그 다음엔 세 밤 자면 준다, 일년 후에 준다 이렇게 약속해서 약속을 기다리고, 그 성취의 날을 맞는 그런 기쁨을 가르쳐야 되요. 그런데 우리는 약속 했다가도 지금 안 된다고 했다가도 발버둥치고 울면 \"옜다 가져라 모르겠다\" 완전히 버리는 거래요. 울면 되더라, 발버둥치면 되더라, 이거는 무서운 거예요. 이게 바로 오늘과 같은 무서운 세상을 만든 거예요. 폭력이 통하지 않습니까? 폭력은 안 통해야 되요. 잘못된 소원은 절대로 이루어져선 안 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걸 가르쳐야 되는데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가르쳐야 되는데 이걸 못 했어요. 그건 약속으로 대체하는 거예요. 이걸 못 가르쳤던 거예요. 이걸 훈련을 받아야 되요. 그래서 이 훈련이 되면 보세요. 외국 가서 보면 무슨 일을 하나 줄서잖아요. 줄 서놓고서 거기서 서둔다고 되는 겁니까? 가만히 기다리잖아요. 마냥 기다려요. 사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은 미국서 공부 할 때, 뭐 \'조스\' 라고 하는 영화 있지요. 그 영화를 보러 간다고 미국 학생들이 야단을 하더라고요. 그래 저녁에 공부 마치고 11시에 가자고. 아 그래! 도서관에서 공부마치고 나오는데 하도 가자고들 그래 나도 따라나서 봤지요. 이 사람들 금요일 날 저녁에 영화구경 가는걸 알기 때문에 따라가 봤는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줄을 길게 섰는지 표를 사지도 못하고 서있는 거예요. 보세요. 다 보고 나온 다음에 또 기다리고 기다렸어요. 제가 3시에 봤어요 영화를. 그런데 돌아가는 사람도 없어요. 밤중에 그 영화간 앞에서 3시간 4시간이죠 11시부터. 그리고 아침에 돌아왔습니다. 나는 어디 어떡하나 보자 하고 끝까지 기다려보고 아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이라고요. 아 별것도 아닌 영화 하나 보겠다고요.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기다려서 보고 나오면서 나는 영화는 생각이 안나요. 기다리던 생각만 나요. 그겁니다. 바로 우리가 이것이 없어요. 조급해서 그저 욕을 하고 저주하고 폭동을 하고 미치고 왜 이 모양이 된 겁니까 이게? 기다리는 훈련이 없어요, 기다리는 성품이 없어요, 또 기다림에 대한 믿음이 없어요. 미래 지향적인 약속을 놓고 그리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얼마나 중요합니까. 기도 응답은 세 가지로 온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래라\" 하는 응답이 있고요,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게 있고. 또 하나는 \"버려라! 네 소원 잘못됐으니 생각을 고쳐\" 이게 응답이에요. 세번째 응답은 \"기다려, 때가 될 때까지. 그 어느 때까지 기다려라\" 그러면 그것도 응답이에요. 기다림 그 자체가 응답이라는 걸 알아야 되요. 그것이 행복이어야 되요. 그것이 즐거움이어야 되요. 기다린다는 것이 그 자체가 내게는 큰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니까요. 사랑이니까요.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이니까요. 여호수아 7장 13절에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려라.\" 말씀하십니다. 곽선희 목사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2:5-11/ 대림절설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2:5-11 1차 대전 중 크리스마스 전날 밤, 영국 해협에서 스위스 국경에 이르는 기나긴 전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전쟁 중 독일군 참호 바로 위에 크리스마스 츄리가 세워졌고, 불빛이 환하게 들어 왔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저들 밖에 한밤 중에” 우리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영국군은 박수로 응답하고 이어서 영어로 ”참 반가운 신도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독일군도 뒤질세라 박수로 응답하며 같은 찬송을 독일어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평화의 시간은 1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양쪽 군인들은 전쟁도 잊은 듯 서로 참호에서 기어 나와 크리스마스 축하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고, 축구시합도 했습니다. 선물교환도 했으며, 즉석에서 오케스트라도 연주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마는 성탄절 이 24시간 동안 화염은 멈추고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을 마음껏 축하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천군 천사들이 노래했던 것처럼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원래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두 단어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매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매스는 예배 드린다, 축하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생각해 볼 때 크리스마스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을 올바로 축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 그 의미를 바로 잘 알고 기뻐하고 축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의 주인공은 당연히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탄절을 맞이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탄절은 어떻게 보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이 날의 주인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알면서 사람들이 성탄절을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성탄절의 의미를 바로 알고서 이 날을 어려운 이웃들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면서 보내고 있습니까? 혹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론가 간 곳 없고, 사람들만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축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성탄절이 되면 더 난리 법석을 떨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탄절은 결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세상적인 잔칫날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날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경청해 보시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의 성탄의 참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주님은 낮아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철저하게 낮아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영광 다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근본(根本)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同等)됨을 취(取)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自己)를 비어 종의 형체(形體)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模樣)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自己)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服從)하셨으니 곧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이라.> 바로 이 점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일을 하려면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이 되려고 애쓰는 것 아닙니까? 사랑을 외치는 교회에서도 일을 하려고 하면 중직자가 되어야 하고, 무언가 한 자리 해야 교회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사람들은 무언가 큰 일을 하려면 물질도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옳은 돈인지 구린 돈인지 구별하지 않고 그저 많이 가지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 인간들과는 철저하게 다르십니다. 완전하게 다르십니다. 근본적으로 다르십니다. 질적으로 다르십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높아지려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성을 쌓았습니다. 하늘까지 그 이름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낮아지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에 종의 형체인 육신을 입고 찾아 오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요,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을 정말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정말로 버려야 할 것을 버렸습니까? 참 평화를 알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저는 정치가 전문 분야는 아니지마는 우리 나라 정치인들을 볼 때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저들이 정말 국민을 사랑하는가 의심이 들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 최근의 정치 이슈로 떠오르는 것은 경제청문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청문회에 전직 대통령이 증인으로 나와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여야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정치 논리로 해석하지 않고, 성경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당연히 전직 대통령이 경제 환난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청문회장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옳으냐 그르냐,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정말로 백성을 사랑한 지도자였다면, 오늘도 이 나라의 미래를 염려한다면 자신의 체면, 명예 다 버리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데 가장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욕먹음으로 동서가 화합할 수 있다면, 잘못된 이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다. 어떤 기사 타이틀을 보니까 YS송장 되도 청문회장 못나간다. 내가 왜 나가나? 이런 무책임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자식이 사고를 쳐서 어디 갇혀 있다고 생가가해 보십시오. 감옥인들 안 가겠습니까? 파출소인들 안가겠습니까? 그 어떤 자리인들 안 가겠습니까? 대접받는 자리, 칭찬 받는 자리는 아무나 다 갈 수 있습니다. 영광의 자리 기쁨의 자리는 소인배라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먹은 자리, 희생하는 자리는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더더구나 생명을 내 놓는 죽음의 자리는 정말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의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청문회 정도 참석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단순히 욕 좀 먹고, 비난받고 수모 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 정도 수준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 아닙니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존재입니까?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존재입니까? 뭐가 대단한 존재라고 건방을 떱니까? 겸손하지 못합니까? 낮아지지 못합니까? 버리지 못합니까? 순종하지 못합니까? 성탄절의 참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은혜는 힘에 논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높아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고, 자신의 모든 권리를 버리고, 우리 주님처럼 완전하게 죽어지게 될 때 비로소 이 땅에 진정한 평화, 생명, 자유, 사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버릴 때 얻는 것입니다. 낮아질 때 높아지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고난받을 때 승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 사실을 웅변처럼 증거하지 않습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至極)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者)들과 땅에 있는 자(者)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시인(是認)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榮光)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자기를 비우기를 원하십니다. 남을 섬기는 종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낮아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죽기까지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할 때 우리들의 이름도 높아질 것이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根本)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同等)됨을 취(取)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自己)를 비어 종의 형체(形體)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模樣)으로 나나나셨으매 자기(自己)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服從)하셨으니 곧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至極)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者)들과 땅에 있는 자(者)들과 땅 아래 있는 자(者)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시인(是認)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榮光)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 막12:35-40/ 대림절설교/ 2014-12-15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 막12:35-40 다음주는 성탄주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알고는 있으나 그날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아는데는 별 관심도 없으며 또한 잘못 알고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던 일이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이 누구신지를 교훈 하시며 또 덧붙여서 예수님과 정 반대되는 사람들을 보이심으로써 예수님을 더욱 정확히 알게 해주십니다. 본문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발버둥침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그만 데나리온 동전을 보이심으로 능숙하게 정치적인 올무를 벗어납니다. 이 데나리온에는 시저의 초상이 있으므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본문 앞 13절부터 1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올무는 그네들이 좋아하는 Torah의 핵심부인 출애굽기를 들어서 벗어납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는 것을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임을 설명하시고는 아브라함의 영혼과 육체, 이삭의 영혼 육체, 야곱의 영혼 육체의 하나님이라서 이 각각의 영혼뿐만 아니라 각각의 육체를 영원히 보전하는 하나님 이신데 어찌 부활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3번째 종교적인 올무는 무엇이 첫째가는 계명이냐고 묻는 질문인데 영원한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합쳐서 교회가 지켜야 할 우선 순위를 결정하심으로 벗어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 절 34절에는 ”그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마치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을 잡으려고 무진 애를 쓰나 번번히 실패하고 마는 블레셋 방백들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계교가 깨어진 것을 아신 주님은 오늘 본문으로써 대적자들을 공격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주 대상은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또 흰색의 옷을 입으므로 어디를 가나 눈에 잘 뜨이게 됩니다. 오늘날 같으면 비싸고 좋은 옷만 입는 model같은 존재요, 마치 흙투성이가 되어있는 닭장 가운데서 흰 백로처럼 다니는 존재들입니다. 유명한 신약학자 예레미아는 그의 저서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이란 책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도중에 있는 바쁜 자가 아니면 모든 사람은 서기관이 지나갈 때 존경의 표시로 반드시 일어서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랍비”(나의 위대한 분의 뜻)나 ”주인님”, 또는 ”아버지”의 존칭으로 불리워졌으며 항상 연회나 잔치가 있으면 이들은 음식을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장식품처럼 꼭 있어야 하는 자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들은 노인이나 심지어 자기 부모보다 더 앞선 위치에 앉거나 대접받았습니다. 회당에 오면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되며 일반인들은 토라를 가슴에 안고 있는 그들의 경건한 뒷모습만 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거만한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빤히 쳐다보시며 반격하십니다. 우선 첫째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시며 다음으로 서기관들을 근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의 바른 신앙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질문을 시작하자 굉장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우선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소 가벼운 질문을 하시고 계십니다. 즉 ”어찌하여 서기관들이(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라고 묻습니다. 구약에 메시아, 즉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구약말씀을 생각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즉 사무엘하 7장 12절이나 이사야 9장 7절, 예레미아 23장 5절 후반에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와 다윗의 혈통과의 관계를 생각하게끔 유도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어떤 초자연적인 생각은 전연 없습니다. 그러다가 본문 36절에서 서기관들의 생각을 뒤흔드는 성경적 놀라움을 던져주십니다. 이는 시편 110편 1절 말씀으로 서기관들도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 구절의 권위를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말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서, ”여보게, 이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지. 자, 시편 110편에 다윗이 말한 것을 보면 주(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주(구세주, 메시아)께 말씀하시는데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라고 하셨다고 되어있어.”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반격하시는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말입니다. 이는 좋은 질문입니다. 여러분도 해답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말해서 ”어째서 메시아가 동시에 다윗의 아들도 되고 다윗의 주님이 되느냐? 만약에 메시아 그가 단지 인간이라면 말이야.”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생각으로는 No answer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전문이라고 하는 성경을 사용하여서 서기관들의 제한된, 불완전한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한 지식이 깨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보셨다시피 하나님이요 인간이라는 이 2중성이 그리스도에게 있어야만 성경의 요구조건이 만족됨을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실이 사도시대의 교회가 반복해서 외쳤던 점입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그의 위대한 설교에서(행전 2:34-36)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느니라 하니라”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히브리서 기자도 똑같이 시편 110편 말씀을 들어 예수님의 초자연적 우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장 13절은 초자연적 예수가 시편 110편을 만족시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 대화는 당신 스스로가 메시아요 그리스도임을 스스로 고지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동시에 인간으로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입이 하나님인 본성에 의해 통제되고 의인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한 주가 채 지나기 전에 다윗의 자손인 육체가 죽어 시편 22편의 예언을 성취합니다. 그리고서는 그의 인간성과 신성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분명하게 부활을 통하여 강력히 증명됩니다. 마침내는 승천하셔서 시편 110편 1절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를 성취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서기관들에게 한 이 질문을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고 본문 37절 말미에 기록합니다. 백성들이 예수님 말씀의 중심을 조금밖에 알지 못했어도 그 위세 당당한 서기관들이 끙끙대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그렇게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이 상황을 벗어날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정치적, 세상적, 인간적 왕국과 메시아를 생각하는 동안 그들은 성경의 영적 의미에는 까막눈일 뿐임을 넌지시 가르쳐 주시고 나서는 역시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시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시대적 문화에 맥을 못 추고 지내왔음을 교회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영국의 무용담”이라는 책을 쓴 Arthur Bryant경은 그 책 ”어두운 사탄의 공장”이라는 장에서 19세기 전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청소년 학대를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9살이나 8살 먹은 소년소녀들이 탄광 노동자로 착취당하는 것은 그 당시 예사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3살 짜리도 동원되었습니다. 이 소년소녀들이 통상 16시간 넘게 일했습니다. 1833년 보고서에도 보면 많은 제조업자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1833년 면화공장에는 60,000명의 남자 어른과 65,000명의 여자 어른, 84,000명의 14세 미만의 소년소녀가 일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상류층의 고용인들은 기독교인이었고 부자였으며 매일 돈을 남용하고 기업확장으로 즐거워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당시 교회는 수수방관만 하였습니다. 미국도 노예제도에 오히려 동조하고 찬성한 교회와 교단이 많았습니다. 한국도 신사참배를 주장하고 일본 앞잡이 노릇한 교계 지도자가 많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성경말씀이 세상문화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이혼율은 기독교인이나 비 기독교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물질주의는 신자나 비신자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보편화된 사상이 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성경의 경고가 축소되거나 그냥 들리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나간 역사인 영국의 산업주의, 미국의 노예주의, 한국의 사대주의의 실상이 오늘날 진실한 기독교인에게는 이상한 것 같이, 몇 십 년 후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산 오늘을 되돌아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머리를 흔들면서 이들이 과연 어떤 교인이었냐고 물을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초대교회시대의 때묻지 않은 눈을 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질긴 썩은 문화를 우리 존재로부터 끊어낼 수가 있습니다. 이제 38절에서 4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간접적인 공격으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으로 한 단계 높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위엄 있는 복장에 대해 분노로 대적하십니다. 칭찬과 지위에 병든 자들은 오늘도 도처에 있습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글을 읽어보면 목사가 무슨 직책과 명함이 그렇게도 많은지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쓰여있습니다. 조금만 유명해지면 교회보다는 비행기 속에 있는 시간이 많고 강단보다는 TV에 많이 나타나는 우스운 사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앉으면서 까지도 꼿꼿이 앉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들과 조금도 같지가 않았으며 절대로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40절에 보니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길게 기도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런 종교를 빗댄 탐심을 과감히 대적하십니다. 워렌 워어스비 교수는 ”19세기동안 교회는 세상을 향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쳐왔지만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보고 죄를 대적하고, 회개하고, 복음에 합당한 진실한 교회가 되라고 외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거짓되고 자존심 세고 이익만 챙기려는 자에게 강하게 나타납니다. 본문 40절 후반에 보면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나니”라고 나옵니다. 오랜 신앙생활과 많은 성경지식을 가진 자들 중에 조금씩 타락해 감으로써 믿음 떠난 지 꽤 되어서까지도 훌륭한 기독교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1절에서도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라고 충고합니다. 이제 말씀을 요약하면서 오늘 본문이 던지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보겠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읽기를 즐겨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현시대 문화에 젖어서 말씀이 우리 맘에 와 닿지가 않습니까? 진정으로 말씀이 역사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은 우리 기독교가 조심스럽고도 어찌 보면 고통스럽기까지 하는 성경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왜 우리는 하나님께 봉사해야 합니까? 불나비처럼 권력과 인기와 돈을 따라다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목사든, 청소년 사역자든, 주일학교 교사든, 성경공부 지도자든 그 어떤 교회 직책을 가졌든 간에 그 동기가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진정으로 거룩하게 보이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십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도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큰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42절 말씀대로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는 질문입니다. 만약 다윗의 자손이라는 대답뿐이라면 크나큰 실수를 한 것이요 지금부터 영원히 생명에서 분리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대신 다윗의 자손이었고 육신으로 오신 주님으로 고백된다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건강한 영혼과 바른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 전부터 계셨고, 사랑으로 육신을 입어 다윗의 자손이 되셨고, 죄 없는 삶을 사셨고, 스스로 부나 권력이나 특권을 결코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모델이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셔서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하신 그 자리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간구 하시며, 우리 모두가 자기 모습을 닮도록 기도하시며,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우리의 조그만 아픔에도 함께 하시며,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이 화하여 영원히 기뻐하게 될 그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더 많이 믿을수록 당신은 더욱더 기뻐하게 되고 영혼은 더욱 건강해질 것입니다. 아멘.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인 삶/ 렘33:14-16, 살전3:9-13, 눅21:25-36/ 대림절설교/ 2012-12-02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인 삶 렘33:14-16, 살전3:9-13, 눅21:25-36 개척교회에서 신학생으로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수요일 저녁예배에 낯선 삼십대 중반의 여성이 들어왔습니다. 작은 지하교회에 몇 명 안 되는 성도가 전부이기에 눈에 띄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과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이 여성이 사모님을 붙잡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 지금 죽으면 안돼요, 지금 죽으면 안돼요...” 교회가 도립병원 옆이라 병원에 왔다가 예상치 못한 큰 병이 발견되거나, 수술을 앞두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성 또한 그와 비슷한 사정이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여성이 가고, 사모님께 무슨 사정인지를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녀 자신이나 가족에게 큰 병도 없고, 수술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오래 해 왔던 사람이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고 남편과 두 명의 자녀들을 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반년이 넘게 떠돌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평상시에는 얌전하던 남편이 술만 마시면 교인들과 심한 다툼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옮겨 다니는 교회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더 이상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며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정만으로도 연민의 정이 들긴 했지만 왜 그토록 애절하게 ‘지금 죽으면 안 된다’고 울며 소리쳤을까가 더 궁금했습니다. 그 이유가 특별했습니다. 떠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동안 교회와 주님을 위해 봉사해 왔던 일들을 온전히 하지 못하게 되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주님 앞에 선다면 어떻게 하느냐는 이유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 때 당시에는 ‘뭐 그런 이유 때문에...’ 하는 의아한 생각만 들었습니다. 예상했던 큰 병도, 당장 심각한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과 목소리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후로 ‘종말론적으로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민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강림절이란, 성탄절을 맞이하기 4주전에 예수그리스도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입니다. 교회력은 강림절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삶의 옷깃을 여미는 절기입니다. 종말론이라고 하면 왠지 시한부 종말론 같은 이단들이 강조하는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인 기대와 그에 따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고, 또 우리가 그 앞에 서게 될 때를 의식하며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단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우리의 생명과 삶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날과 그 때가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하는 것입니다(29-31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알고 계십니다(마24:36).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 하지만 언제 마감될지 모르는 그 기회 앞에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가는 인자가 다시 오심에 대한 경고의 끝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34절a)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져서 그 날을 의식하지 못하고, 준비됨이 없이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34절b). 우주적인 종말이든, 개인적인 종말이든 그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다가옵니다.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반드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또한 심판의 주로 우리 앞에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알고, 또 믿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누가는 결론적으로 권면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21;36). 부끄러움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기를...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인 삶이란, 내가 주님 앞에 서 있음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 주님께 묻고, 또 그 음성에 귀 기울이며 어떻게 사는 삶이 주님이 기뻐하는 삶일지를 생각하며 매일 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되, 하늘만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확신과 더불어 그 분을 생활 속에서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또 오늘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음을 기억하며 간절히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간절히 살아야 합니다. 주어진 생명과 삶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생명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께, 또 안타깝게 먼저 죽어간 이들에게 생명의 빚진 자가 되어 간절히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며 살아도 부족한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일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들과 묵은 감정, 감정의 쓴 뿌리에 물을 주고,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사랑으로 채워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기 전에 그 간절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가족들에게, 내 옆에 있는 교우들에게, 그리고 만난 모든 이들에게...! 이영복 목사
그분이 맞습니까?/ 마11:2-6/ 대림절설교
그분이 맞습니까? 마11:2-6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교회력 대강절(待降節)은 성 안드레 기념일로 지키는 11월 30일이나 이날에 제일 가까운 주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날은 11월 27일보다 이르게 될 수 없고 또 12월 3일보다 늦을 수도 없습니다. ‘어드벤트(advent:내려오다)’라는 어의가 말해 주듯이 이 절기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이 절기를 지키게 된 것은 A.D. 4 세기경으로 추측되며, 이 대강절은 오늘날에는 4주간에 걸쳐 네 주일을 지키게 되는데 이는 그레고리 1세 때(A.D.590년 경) 정하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전에는 2주간 혹은 6주간으로 지키던 때도 있었습니다. ‘헬라 교회’와 ‘모자라빅 교회’ 그리고 ‘브르로시우스 계통의 교회’에서는 40일로 지키기도 합니다. 그들은 11월 15일부터 대강절을 지킵니다. 이들은 사순절과 같은 날짜를 가지는데 뜻이 있다고 봅니다. 데리다 종교회의(A.D.524년)에서는 대강절 중에 결혼을 금하였고, 도루스 회의(A.D.567년)에서는 대강절 중에 성직자의 금식을 명령하였으며, 마숀 회의(A.D.581년)에서는 성도들이 이 기간을 엄숙히 지킬 것을 작정하였습니다. 이 대강절의 의미는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밝히 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 자신이었던 바로 그 분(요1:1-2)이 인간의 몸으로 오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쁜 마음으로 간절하게 모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의 강림을 기다리고 바랐던 것처럼,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3) 또한 ’강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신자의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와 복종으로써 겸손하게 자기의 심령을 살피고 주님의 자리를 마음속에 마련해야 합니다. 4) 아울러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길잡이가 되었던 것처럼, 신자도 재림하실 주님의 길잡이로서의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할 각오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절기의 색깔은 자주색을 사용합니다. 대강절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대강절은 회개의 때요, 자신을 성결케 하는 기간입니다. 동시에 대강절은 부푼 기대와 설렘을 주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는 마치 ’세례 요한이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던 때’에 해당됩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세례 요한은 남다른 기대를 가지고 메시아 오시기를 기다렸고 선구자로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오신 이’(요 3:31), 혹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하였고(요 1:29), ’나는 그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요 1:27)고 하였으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요 1:34).’라고 선포하면서, 최고의 겸손으로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구약 최후의 선지자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설교를 외치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자기보다 능력이 많고 또 그를 믿는 이에게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요(마 3:11), ’세상을 심판하실 분’(마 3:1)이라고 하면서 메시아이심을 확실하게 믿고 증거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세례 요한은 분봉 왕 헤롯이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과 그의 모든 악행을 책망하고 비난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솔직한 책망과 비난에 분노하여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는데(14:3, 4)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 ’마카이루스’ 성에 약 일 년간 감금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예수님께 제자들을 통하여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중심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은 신뢰에서 견고해 집니다.’ 세례요한의 신앙이 감옥에서 잠시 흔들린 것처럼 세상에 사는 동안 어려움이나 고난이나 고통이나 좌절을 당한 사건이나 일 때문에 신앙이 흔들림이 있다면 성탄의 사건이 역사에서 분명하게 증거 되는 귀한 절기인데 우리는 믿음으로 견고하게 바로 세워야 합니다. 또한 성탄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대강절에 마치 동방박사나 양을 치는 목동들이 주님을 만난 것처럼 체험 있는 기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며, 헌신하던 안나나 시므온처럼 주님을 만나는 체험적인 간증이 있어 더욱 신앙이 견고함으로 바뀌어 지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1. 메시아 기대와 실망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이 세상에 왔고, 들에서 자랐으며, 양떼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광야에서 주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기에 별명이 [광야의 소리]입니다. 광야에서 정의와 회개를 외치며 산 사람입니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뒤에 오실 메시아에 대해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으로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 맞는 열매를 맺어라. …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었으니,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이 외침은 독설에 가까운 심판의 선언입니다. 요한은 당시의 사회상을 보면서 이런 세상은 속히 멸망하고 새 세계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그가 속한 사회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자란 것 같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 사회를 등지고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야인(野人)으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광야 생활은 바로 이 부패한 사회에 대한 반발이요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요한의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볼 때 그의 메시지가 비판적이요. 독설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예비하는 메시아에게 거는 기대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 썩어 빠진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이루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2절에 이하에 보면, ”요한이 증거 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위로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에게든지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사도 요한이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거나 메시야의 명패를 본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휘황찬란한 빛을 가진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그 분의 머리에 임하는 것을 보고 그 분이 메시아인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알고 증거 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이렇게 증거하고, 심지어는 요한과 안드레를 비롯해서 자기 제자 서너 명을 예수님께 양보까지 합니다(요1장).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망하여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신랑의 친구처럼 기쁘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최고로 큰 자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실망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오실 그이’란 시편 118편 26절의 ”야웨(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요, 말라기 3장 1절의 너희가 구하고 사모하는 자가 임할 것인데 그분은 바로 ”언약의 사자”이며, 요한복음 6장 14절에서는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하였고, 요한복음 11장 27절에서는 마르다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했습니다. 즉 ’오실 그이’란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요한은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9:14). 그런데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질문하였습니다. 1) 아마, 메시아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해서 일수도 있고, 2) 메시아를 심판주로만 생각했는데, 자비의 모습만을 보이고 있는 예수님께 대해, 요한 자신이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3) 또한 유대를 로마로부터 해방시키실 정치적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던 당시, 일반의 기대와 요한의 예언이 합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며 4)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소개하여 인계시키려고, 5) 요한의 구원을 예수께 부탁하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해당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기대한 메시아인 예수가 나타나셨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그가 예언하였던 대 심판의 재난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 세례 요한은 헤롯 왕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불의의 세력이 물러가기는커녕, 그 세력에 의해 지금 자기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자기가 기대했던 대로 모든 불의한 세력들을 때려 부수고, 의의 세력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를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옛날 그대로 흘러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였을까요?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하여 듣는 소식은,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저 변방(邊方)인 갈릴리 지역에서 바리새인들을 피해 다니며 병든 자들이나 고쳐 주고, 몇 가지 기적을 행할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요한이 기대했던 것에 반도 못 미치는 것들이었습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가장 미련함은 인간의 가장 지혜로움보다 뛰어 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를 향해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의 신앙이 이런 신앙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우리의 기대와 다른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오늘 우리도 요한과 같은 경험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오시면 이 불공평하고 불의한 세상이 당장 바뀌고, 독재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모두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오시면 모든 병을 다 고쳐 주셔서 우리를 건강하게 하실 것이라고도 기대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가 오시면 우리를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고 안정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기대가 만족하게 응답되어 본 적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그런 기대를 가졌다가 요한처럼 실망을 맛보기 일수입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세상에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과거와 똑같이 오늘날도 여전히 악이 흥하는 것 같고 고난과 범죄와 사랑과 미움이 계속되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한 번이라도 전쟁이 적게 일어났으며, 하나의 감옥이라도 불필요하게 되었으며, 또는 하나의 국가라도 진정으로 정의로운 나라가 되었는가? 달라지기는커녕 어떻게 보면 더 악해지고 더 불행한 세계가 되지 않았는가? 화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전쟁은 더 일어나고, 모든 세계는 분쟁에 휘말리고 있는가? 이렇게 볼 때 과연 예수는 우리가 기대한 메시아인가 하는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나름대로의 기대를 갖고 기다릴 때는 오히려 절망을 맛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빈 마음으로 그가 역사 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할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속에 그의 뜻대로 역사 하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림은 철저한 자기 부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 부정을 통해서 나의 기대와 욕망을 완전히 비우고 빈 마음이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 속에서 깊은 절망을 체험하면서 자기의 생각과 주관이 깨어지는 아픔을 통과한 후 제자들을 예수님에게로 보내어 물었습니다. 3절에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하였는데?? ”기다리오리이까?”의 단어를 살펴보면 ’이는 막연히, 수동적 입장에서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절실한 기대를 안고 마치 사모하듯이 기다려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실로 이 표현으로써 세례 요한의 애타는 듯한 메시야 갈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요한의 이 질문은 한가하게 노변(蘆邊)에 앉아 토론하면서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절박한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일생을 바쳐 증거 한 메시아가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에게 있어서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더 심각한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주어지는 답변 여하에 따라서 요한은 보람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생애가 완전히 헛된 것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요한은 절망을 체험하면서 이 질문을 예수님께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까지 자기가 일생을 바쳐 증거 한 메시아는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한 시점에서 그는 절망을 맛본 것입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증거하고 기대했던 메시아관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예수가 진짜 메시아가 아니든지 둘 중에 어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은 자기의 메시아관이 잘못되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내려지는 결론 앞에서 그는 자기의 생애 전체가 무너지는 절망을 맛본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절망 가운데서 완전히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는 대신에 빈 마음으로 예수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400백 년 동안 긴 영적암흑기가 계속되던 때에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악을 거부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소유자이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은 세례요한이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분명 내가 증거 한 그 메시아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로 하여금 메시아임을 믿게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이 보여 주시려는 메시아상은 무엇입니까?” 요한은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에게 어떤 것을 따지려고 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는 그가 어떤 답을 주시든 받아 드리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깊은 절망의 밤을 보내고 이제 동터 오는 새벽 차분하고 빈 마음으로 새것을 받아 드릴 준비를 갖추고 이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과거 자기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이제부터 새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서는 이제까지 우리가 간직해 온 자존심과 고집이 깨어지는 고뇌의 밤을 거치지 아니하고는 어렵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젖게 할 만큼 자기가 깨어지는 아픔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받아 드리기 어렵습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마11:4-5절에”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61:1절에 있는 말씀의 자유스러운 인용입니다. 이사야는 사61:1-3절에서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 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면서 열거하시는 이 여섯 개의 표적들은 이사야가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하면서 제시한 내용이었습니다(사29:18; 35:5, 6; 42:7; 61:1). 실로 메시야의 통치가 실현될 새 세계에는 모든 질병과 환난과 곤비함, 그리고 애통하는 것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없어지리라는 것이 그 당시 팽배해 있던 보편적인 확신이었습니다(외경 에녹서 25:5 ff; 제 4에스라서 8:52 ff).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런 기대와 구약적 사고를 지닌 자들에게 구약에 근거하여 당신의 메시야 직을 적절히 선포하셨습니다. 메시아는 반드시 이사야가 증거 한 일을 하실 것이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내가 그런 일을 하는 메시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에게 대하여 하신 말씀의 서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마태복음 11:11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하여 극찬의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칭찬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지금부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곧 이어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비록 세례 요한이 나를 위한 훌륭한 선지자이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천국은 세상에 있는 세례 요한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세례 요한에 대한 극찬과 세례요한의 부족함에 대한 말씀을 동시에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세례 요한은 세상에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도 작은 완전치 못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우리 자신들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대망 사상이 바로 이스라엘의 혼입니다. 대망 사상 즉, 메시아와 메시아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그들이 경험한 모진 고난을 다 이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 메시아가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몰랐습니다. 그리고선 좌절합니다. 또 어떤 때는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때로는 믿었습니다. 큰 기적이 나타날 때마다 아! 굉장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하셨다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곧 그 믿음을 저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여기에 큰 유감이 있는 것입니다. 왜 메시아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이유는 그들은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기 사랑과 자기 교만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믿었다 가도 곧 그 믿음을 저버립니다. 기뻐하다가도 절망합니다. 자기 식의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백말을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시는 대 장군, 모세와 같고 다윗과 같은 겉치장이 화려하고 그 업적이 용맹한 정복자를 그들은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타일에 맞지 아니하므로 메시아를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으로 감격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곧 어떤 사건을 만나면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아니면 나를 버리셨는가?’ 하면서 믿음을 저버리며 원망을 합니다. 꼭 종잇장을 뒤집듯이 조석으로 변덕이 심합니다. 왜 이렇게 시원찮은 휘청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가 있을 것입니까 보잘것없는 일을 해 놓고도 칭찬해 주지 아니한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는 사람들, 작은 일을 하고서도 천국에 상이 클 것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기회만 있으면 내가 이 교회의 기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교회에는 헌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대강절이 참회(懺悔)의 기간이 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강절은 결코 어린이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흥분되고 가슴 뛰는 그런 절기가 아닙니다. 보라색이 상징하는 것처럼 가슴을 찢으며 자신을 지탱해 온 자존심을 깨는 기간입니다. 진정 겸손한 자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빈 구유와 같이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될 줄 믿습니다. 3. 예수님의 대답에서 올바른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오실 그이가 진짜 당신입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거기에 직접적인 답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감옥 속에서 제자들을 보내어서 까지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절망과 그 간절함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요한이 알기를 원했던 것은 예수님을 통해 보여 주시려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약 사백년 동안 긴 영적암흑기가 계속되던 때, 사람들의 마음은 악(惡)할 대로 악해져있고, 말씀에 대한 무지로 가득한 때,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을 잘 감당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악을 거부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소유했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은 세례요한이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불안과 의심과 나약함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하신 내용을 보면,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교훈한 것은 들은 대로 전하고, 행하신 표적은 본 대로 전하고, 체험한 것은 경험한 대로 전하라.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전하라.’고 하시면서, ’소경이 보게 된다고 하라. 앉은뱅이가 걷는다고 전하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는다고 전하며, 귀머거리가 듣는다고 하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기원전 700여 년에 살았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인 동시에, 그 예언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29장 18절에는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고 했고, 이사야 35장 5∼6절에는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했으며, 이사야 42장 7절에는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눈먼 자들이 눈을 뜨니 환호성을 지르고,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던 자들이 주를 찬양합니다. 죽은 자가 일어나 산 자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참된 기쁨의 소식을 듣고 즐거워하고 있는 이 나라는 곧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천국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혁명적인 사건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심판도 없고, 파괴도 없으며, 저주와 보복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치유(治癒)와 생명과 복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계는 확실히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것처럼 한꺼번에 놀라운 변혁을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이 세계를 하루아침에 평화롭게 만들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변화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복음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의(義)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선을 이루도록 힘쓰게 만듭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 사회와 세계 속에 많은 문제와 고민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치유와 생명의 역사들이 진행되며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혁명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두 차례의 혁명을 경험하면서 그것은 더욱 깊은 악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들입니다. 그 일은 하루아침에 이 사회를 낙원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 편리한대로 예수를 이해할 때 예수로 인하여 우리가 걸려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비우고 인내로 복음의 사역에 동참할 때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우리 속에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옥에서 꺼내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마도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후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고, 새로 태어난 감격을 안고 죽음을 마지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감옥에서 자유하게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의 영혼을 과거의 망령에서 풀어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1) 먼저, 성도 개인은 약해도 서로 뭉치면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분열하고 나뉘는 것은 죄악이요,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반목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방은 불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불신하게 하고 성도들로 낙심케 하는 아주 악한 죄악입니다. 이제 교회는 사탄이 좋아하는 더 이상 분열하고 비방하고 당파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요 이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도 이루어집니다. 2) 또한 불필요한 것들은 제거해야 합니다. 어느 시인은 ’늙지 말아라, 성숙해져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늙는 것과 성숙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늙는 것은 허무와 쇠퇴와 하락을 의미하지만, 성숙하는 것은 보다 충실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신앙의 연조만 있고 성숙이 없으면 내 고집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숙을 방해하는 모든 불필요한 요인들은 제거해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의 사람이 되게 하는 나태함과 게으름을 버리십시오. 될 일도 안되게 하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제거해야 합니다. 남에게 상처주기 쉬운 급한 성격과 혈기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양심조차 굳게 만드는 자기의 고집과 자존심을 버리고, 창녀의 욕망 같은 방탕과 무절제와 정욕을 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풍요한 복으로 충만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으로 채우시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은혜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충성과 헌신으로 채우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그리고 믿음의 기둥을 박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어 매어야 합니다.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평생, 9천 편이나 되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녀는 어려서 의사의 실수로 맹인이 되었는데도, 그 불행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믿었으며, ”신체장애라는 괴로운 조건이 오히려 거룩한 봉사의 계기가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그녀의 찬송시 중, ’446장’에는 이런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 밑 샘솟는 그곳으로, 내 영혼 숨기시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곧 부러질 갈대 같은 ’화니 크로스비’는, 남의 실수로 평생 맹인으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도 나 피곤치 않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8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상처투성이 일지라도 이제 우리는 굳게 서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이고, 메마른 땅을 달리는 외로운 순례자일지라도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진 질그릇 같고, 바람에 곧 부러질 갈대 같을 지라도 우리는 터에 굳게 박혀있는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흔들리지 맙시다. 십자가의 기둥, 믿음의 기둥에 의지하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기둥을 잡고 나아가게 되면 그 안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이 기둥에 여러분의 신앙이 튼튼히 박혀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시편 139편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만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늘 나와 동행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앞에 계시고, 뒤에도 계시며, 내 안에도 거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내 아래에 계시고, 내 위에 계시며, 내 왼편과 오른편에도 계십니다. 그분은 나에 대한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계시고 나에 대해 말을 하는, 모든 이의 입술 가운데 계시며 나를 지켜보는 모든 눈동자와 나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귀 가운데 계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아멘> 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아무리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고, 비가와도, 강풍이 불고, 폭풍이 밀려와도,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강절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를 기다리는 계절이 아닙니다. 문제들을 앞세우며 그 문제 해결만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오히려 우리는 절망만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려운 난관이나 고통이나 문제가 있을수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문제에 집착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마음을 비우며, 주님께서 오셔서 역사 하시도록 자신을 주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라는 요한의 질문은 바로 자신의 잘못된 아집(我執)을 깨고 이제 새롭게 주님 역사 하시기를 기다리는 겸허한 자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기도에 응답하시며, 치유와 생명의 역사를 우리 속에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본문 6절에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와 그의 사역을 믿으며 그를 참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찬 말씀입니다. 그러나 불쌍히도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야 관으로 인해 참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고답적(高踏的)인 사고를 초월한 복음 사역과 그의 천한 모습과 겸손한 태도에 걸려 실족함으로써 그들이 누려야 할 복(福)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세례 요한을 위시한 유대인들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인, 그리고 급격한 변화와 심판을 동반한 가시(可視)적인 해방을 가져다주는 구속자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오신 그리스도는 비천(卑賤)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현격히 다른 메시야 사역을 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쉽게 거부했던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예수께서 보이신 참 메시야관에 부딪혀 걸려 넘어지게 되었고 또한 결국에 그를 통한 구원의 혜택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런 점을 주의시키기 위해 자신을 인해 실족치 말 것을 당부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 나아온 성도 여러분! 진정 겸손함으로 돌아가며 통회 자복하면서 자신을 비워 주님을 영접하고 그가 들려주시는 복음을 듣고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믿고 신앙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기쁨으로 사랑의 빚진 자의 자세로 주님을 대신하여 하나님나라와 교회 부흥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헌신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다리는 계절 대림절(4)/ 깨어 있으라/ 막13:33-37
기다리는 계절 대림절(4)/ 깨어 있으라 막13:33-37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우리 주님의 평화(schalom)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번째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1999년의 대림절 마지막 설교입니다. 오늘의 설교본문은 마가복음 13장 33절-37절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 말씀을 봉독합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런지 혹 저물 때엘런지, 밤중엘런지, 닭 울 때엘런지, 새벽엘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오늘 우리의 본문은 ”깨어 있으라”라는 말을 네번(33,34,35,37)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계절, 대림절의 마지막 설교제목을 ’깨어있으라’로 정했습니다. ”깨어 있으라”의 사전적 의미는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으라”는 의미입니다만, 이 말의 원래 의미는 파수꾼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영적 각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설명을 하면, ”경건한 사람의 생활은 졸거나 비몽사몽간에 있거나 도취하지 않고 마음이 언제나 깨어 있고 각성된 긴장 속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이 대림절 마지막 주일의 본문으로 택해진 것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즉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여러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우리의 본문(막 13:33-37)에서는 주인과 집을 관리하는 종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집을 관리하는 모든 책임을 부여하면서 ”깨어 있으라”고 당부한 것과 같이,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집주인이 밤중에 오실런지, 새벽에 오실런지 어느때에 오실런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홀연히 와서 자는 모습을 보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유사한 비유를 누가복음(2:35-40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주인과 종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상황은 주인이 어떤 만찬연회에서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종들의 상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다”라고 합니다. 주인이 돌아 왔을 때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어주어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참으로 복이 있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너희들도(제자들, 우리 모두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라고 한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4장 37절-42절에는 ’노아의 때’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노아는 홍수를 대비하여 깨어서 방주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지 못한 자들은 세상의 향락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에 도취되어 살면서 방주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날이 왔습니다. 홍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깨어서 방주를 준비한 노아는 구원함을 받았지만 그와 반대로 세상의 향락에 취해 깨어 있지 못하고 방주를 준비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홍수의 때’와 비슷한 내용을 가진 것을 ’롯의 때’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7:28-32절의 말씀,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로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롯의 처가 어떠했습니까? 롯의 처가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피해 나오던 길에 집에 두고 온 것에 너무 집착을 해서 그것이 아깝게 생각되어 뒤로 돌아본 것이 그만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롯은 죄악이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깨어서 준비를 했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유황불의 심판을 피해 구원함을 받게 되었지만, 그의 처는 지난날에 소유했던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결국 뒤를 돌아봄으로써 소금기둥이 되는 참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거나 이 세상의 쾌락에 빠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노아도 롯도 그 날을 대비하여 깨어 준비함으로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지금 우리가 주님이 오시는 날을 대망하는 ’대림절’의 절기를 살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이 대림절은 성탄절 전 4주간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림절을 지켜야 할 기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을 하셨는데, 그 때 내가 다시 올 터이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은 제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부터 시작해서 주님의 재림시까지 ’대림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 기간을 신학에서는 ’중간시기’ 혹은 ’중간시대’ (Zwischen den Zeiten)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중간시대’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며 그 날을 대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종말론적 하나님 백성 공동체’라고 합니다. 즉 이 땅의 교회가 바로 ’종말론적 하나님 백성 공동체’이다. 시대를 사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종말론적 하나님백성 공동체로서 교회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파수꾼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양심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이 시대를 깨우는 새벽의 수탉이 되어야 합니다. 독일을 여행하고 오신 분들은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독일을 다녀 오신 분이 있습니까? 혹시 독일 교회의 높이 솟은 종탑을 유심히 보셨습니까? 그 종탑 위에 노란 빛을 발하고 있는 ’수탉’ 모양의 조각을 보셨습니까? 그 종탑 위의 수탉의 의미를 아시는지요. 이것은 마태복음 26:38-46절의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고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아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다시 ”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을 했습니다.(마 26:30-35)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동산에 가서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특히 베드로와 세베데의 두 아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지를 못하고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왔습니다. 여전히 제자들은 깨어 있지 못하고 자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깨어 있지를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는 자리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한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하는 죄악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가 왜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까? 우리가 잘 나가다가 어찌하여 실족하게 됩니까? 그것은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실수와 잘못은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그 때는 ’평상시’가 아니었습니다. ’비상시’였습니다. ’비상시’는 평상시와는 달리 깨어 있어야 했는데, 베드로는 그 때를 인식하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독일교회의 종탑 위에 ’수탉’은 ’깨어 있으라’는 경고의 상징입니다. 새벽을 깨우라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역사를 깨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 선교사들은 이 시대를 깨우는 수탉이 되어야 합니다. 이 어둠의 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수탉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 시대의 파수꾼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습니다. 파수꾼은 밤에 어두움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또한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자들입니다. 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파수꾼으로서 예언자로서 이 시대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역사는 너무나 어둡습니다. 우리들은 어두움에서 사는 어두움의 자식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권면하기를 ”여러분들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자고 술마시는 사람들도 밤에 마시고 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람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씁시다”(살전 5:5-8)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어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더 이상 어두움과 밤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빛과 낮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우리들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1:8-9) 결정적으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우리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 거룩한 계절, 대림절에 빈 마음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기다리는 계절 대림절(4)/ 깨어 있으라/ 막13:33-37
기다리는 계절 대림절(4)/ 깨어 있으라 막13:33-37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우리 주님의 평화(schalom)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번째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1999년의 대림절 마지막 설교입니다. 오늘의 설교본문은 마가복음 13장 33절-37절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 말씀을 봉독합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런지 혹 저물 때엘런지, 밤중엘런지, 닭 울 때엘런지, 새벽엘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아멘. 오늘 우리의 본문은 ”깨어 있으라”라는 말을 네번(33,34,35,37)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계절, 대림절의 마지막 설교제목을 ’깨어있으라’로 정했습니다. ”깨어 있으라”의 사전적 의미는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으라”는 의미입니다만, 이 말의 원래 의미는 파수꾼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영적 각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설명을 하면, ”경건한 사람의 생활은 졸거나 비몽사몽간에 있거나 도취하지 않고 마음이 언제나 깨어 있고 각성된 긴장 속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이 대림절 마지막 주일의 본문으로 택해진 것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즉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여러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우리의 본문(막 13:33-37)에서는 주인과 집을 관리하는 종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집을 관리하는 모든 책임을 부여하면서 ”깨어 있으라”고 당부한 것과 같이,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집주인이 밤중에 오실런지, 새벽에 오실런지 어느때에 오실런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홀연히 와서 자는 모습을 보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유사한 비유를 누가복음(2:35-40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주인과 종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상황은 주인이 어떤 만찬연회에서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종들의 상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다”라고 합니다. 주인이 돌아 왔을 때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어주어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참으로 복이 있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너희들도(제자들, 우리 모두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라고 한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4장 37절-42절에는 ’노아의 때’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노아는 홍수를 대비하여 깨어서 방주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지 못한 자들은 세상의 향락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에 도취되어 살면서 방주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날이 왔습니다. 홍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깨어서 방주를 준비한 노아는 구원함을 받았지만 그와 반대로 세상의 향락에 취해 깨어 있지 못하고 방주를 준비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홍수의 때’와 비슷한 내용을 가진 것을 ’롯의 때’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7:28-32절의 말씀,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로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롯의 처가 어떠했습니까? 롯의 처가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피해 나오던 길에 집에 두고 온 것에 너무 집착을 해서 그것이 아깝게 생각되어 뒤로 돌아본 것이 그만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롯은 죄악이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깨어서 준비를 했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유황불의 심판을 피해 구원함을 받게 되었지만, 그의 처는 지난날에 소유했던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결국 뒤를 돌아봄으로써 소금기둥이 되는 참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거나 이 세상의 쾌락에 빠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노아도 롯도 그 날을 대비하여 깨어 준비함으로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지금 우리가 주님이 오시는 날을 대망하는 ’대림절’의 절기를 살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이 대림절은 성탄절 전 4주간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림절을 지켜야 할 기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을 하셨는데, 그 때 내가 다시 올 터이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은 제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부터 시작해서 주님의 재림시까지 ’대림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 기간을 신학에서는 ’중간시기’ 혹은 ’중간시대’ (Zwischen den Zeiten)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중간시대’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며 그 날을 대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종말론적 하나님 백성 공동체’라고 합니다. 즉 이 땅의 교회가 바로 ’종말론적 하나님 백성 공동체’이다. 시대를 사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종말론적 하나님백성 공동체로서 교회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파수꾼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양심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이 시대를 깨우는 새벽의 수탉이 되어야 합니다. 독일을 여행하고 오신 분들은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독일을 다녀 오신 분이 있습니까? 혹시 독일 교회의 높이 솟은 종탑을 유심히 보셨습니까? 그 종탑 위에 노란 빛을 발하고 있는 ’수탉’ 모양의 조각을 보셨습니까? 그 종탑 위의 수탉의 의미를 아시는지요. 이것은 마태복음 26:38-46절의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고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아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다시 ”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을 했습니다.(마 26:30-35)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동산에 가서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특히 베드로와 세베데의 두 아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지를 못하고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왔습니다. 여전히 제자들은 깨어 있지 못하고 자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깨어 있지를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는 자리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한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하는 죄악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가 왜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까? 우리가 잘 나가다가 어찌하여 실족하게 됩니까? 그것은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실수와 잘못은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그 때는 ’평상시’가 아니었습니다. ’비상시’였습니다. ’비상시’는 평상시와는 달리 깨어 있어야 했는데, 베드로는 그 때를 인식하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독일교회의 종탑 위에 ’수탉’은 ’깨어 있으라’는 경고의 상징입니다. 새벽을 깨우라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역사를 깨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 선교사들은 이 시대를 깨우는 수탉이 되어야 합니다. 이 어둠의 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수탉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 시대의 파수꾼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습니다. 파수꾼은 밤에 어두움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또한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자들입니다. 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파수꾼으로서 예언자로서 이 시대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역사는 너무나 어둡습니다. 우리들은 어두움에서 사는 어두움의 자식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권면하기를 ”여러분들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자고 술마시는 사람들도 밤에 마시고 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람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씁시다”(살전 5:5-8)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어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더 이상 어두움과 밤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빛과 낮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우리들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1:8-9) 결정적으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우리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 거룩한 계절, 대림절에 빈 마음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기다리는 사람/ 딛2:11-14/ 대림절설교/ 2012-12-18
기다리는 사람 딛2:11-14 성탄절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절기를 교회의 절기상 대림절(Advent)이라고 합니다. 대림절이란 예수님의 성탄절에 앞선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즉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왜 오셔야 하는지,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인지 바로 알고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을 기쁨으로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2천여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축하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더 귀한 것은 매일의 삶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성탄절을 경험해야 합니다. 매일 능력으로 정결함으로 사명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날마다 승리하고 날마다 복된 삶을 살고 날마다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희망이시고, 개개인 모두에게 희망이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희망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죄악의 어둠에 사로잡힌 인생은 죄와 사망의 노예입니다. 절망의 노예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희망의 태양은 떠오르는 것입니다. 금번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맞이하여 절망 가운데 있는 분들, 고통 가운데 있는 분들, 의심 가운데 있는 분들, 우울함 가운데 있는 분들 모두가 희망을 발견하고 노래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실망을 회복시킬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이 세상에는 실망스런 소식들이 넘쳐납니다. 삶의 환경은 너무도 복잡합니다. 청년 실업자가 늘어납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수가 늘어납니다. 온갖 중독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가정이 깨어지고 있으며 청소년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사회대로 이권에 사로잡혀 단체행동이 끝이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무도 서로 믿지 못하고 거칠고 험한 사회 가운데서 나 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실망스런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희망입니다. 천국 소망을 가집니다. 가야할 목표와 목적이 생깁니다. 실망을 회복시킬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2. 고통에서 풀어 주실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이 세상은 고통이 너무 심합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모친을 살해하여 8개월간 방치한 아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우등생이었던 아들에게 모친은 매질을 했는데 골프채와 심지어 야구 방망이로 아들을 때리면서 공부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아들은 모친을 살해하고 만 것입니다. 너무나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모습입니다. 모친의 집착증 때문에 남편과도 이혼을 했고, 이로 인해 아들에게 더 집착하다보니 생겨난 일입니다. 세상 모든 가정이 이런 가정은 아니지만 모든 가정에 고통이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물질로 인한 고통, 가족 간에 일어나는 고통, 이런 저런 고통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한숨뿐이고 고통만 닥쳐온다는 노래 가사처럼 세상에는 고통과 눈물뿐입니다. 어제 혼자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목사로서 사명 감당하기가 너무 부족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영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오셔야 한다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고통을 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도 기다리고, 내일도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매일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3. 불안에서 평안을 주실 에수님을 기다립시다 세상은 불안합니다. 현대인은 대부분 정신병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이 그렇게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면서도 불안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있어도 불안합니다. 일을 해도 불안하고 안 해도 불안합니다. 잘 되도 불안하고 안 되어도 불안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TV를 끄고 산다고 합니다. 뉴스를 듣는 것이 불안합니다. 여러분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목적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까? 목적지가 흔들리고 불안이 마음을 점령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불안을 몰아내시고 참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4. 우울함에서 기쁨을 주실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현대인에게 가장 많은 질병이 우울증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행복감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굴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 때 사람들은 우울감에 빠진다고 합니다. 내가 가치 있는 존재인 것을 느끼지 못할 때 우울해집니다. 우울증이 깊어지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감정으로 충만해집니다. 여러분 가운데 올해는 정말 어렵고 힘든 일들을 겪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답답하고 기쁨이 없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타래처럼 엉킨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불의가 정의보다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면 정의가 승리할 것이며 진리가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는 행복한 자입니다. 예수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류우열 목사(인천 복된교회)
기다리는 사람/눅2:25-35
기다리는 사람 눅2:25-35 제주도에 가면 아름다운 서귀포 지역의 경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전 세계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서귀포 근방 해안에 소나무가 울창한 곳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바위는 고기를 잡으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할머니가 기다리다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제주도 방언인 \'할망\'이라 부르거나 아니면 \'하루방\'이라 소리를 질러보기도 합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으니 그 기다림이 얼마나 오래였고 힘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연구하던 데니스 레인이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기다리고 신뢰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받고 그것을 주위의 환경이나 개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25년, 즉 4반세기를 기다려 마침내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적인 기다림은 복을 받게 합니다. 이사야 30장 18절에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저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여 하나님께서도 죄인된 인간들이 바르게 되어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공의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심과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기다림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기다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다림은 소망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희망이 있기에 그토록 힘든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인내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이 다 바뀐다고 하여도 그 기다림만은 바꾸지 않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기다림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쉽게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고 소망하며 흔들림 없는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누리는 귀한 믿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장 25-35절에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라고 하여 신실한 믿음의 사람인 시므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기다리던 중에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시므온이란 사람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완벽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늘 말씀을 상고하고 그 말씀에서 깨닫는 것을 삶의 지침으로 삼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표준으로 하여 살아가다 힘들거나 약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힘을 입어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또한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다윗의 자손 중에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약속을 수도 없이 여러 번 하셨습니다. 말씀을 읽고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 언약을 믿고 희망하면서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시므온이 살던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모든 주권이 철저히 로마에 빼앗겼고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속히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원자 메시야가 오시기를 대망 하였습니다. 바로 시므온도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는 말이 있듯이 전혀 희망도 없고 벗어날 힘도 없는 당시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므온의 신앙과 경건함, 그리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을 인정하셔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 구원을 위하여 보낼 메이야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성령을 통하여 시므온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늘 믿음으로 사는 시므온이 영의 지시하심을 받아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영의 지시하심을 받아 성전에 가고 싶었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 성전에 가야 할 날과 시간을 잊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삶은 집과 성전 두 곳에서 이루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성전에 갈 날도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성전에 가고 싶었습니다. 시므온이 성령의 이끄심으로 성전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예수의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기 위하여 아기 예수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내아이를 낳으면 팔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모님들이 예수를 할례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러 그 예식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할례를 행하기 위하여 오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들을 낳기만 하면 팔 일째 되는 날 성전에 찾아와 할례를 행하는 일은 누구나 다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모만 그곳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성전에서 할례 예식을 위하여 바쁘게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이 그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감격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여 고백하기를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아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시므온이 하나님께 드린 찬송의 내용을 보면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와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감사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의 굴레나 속박에 억매이지 않고 참된 자유와 평안함을 누리게 되었음을 찬양하였습니다. 시므온은 계속하여 영원히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눈으로 목도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고 찬양하였습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 구세주를 품에 안았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요 감사한 일이었겠습니까! 메시야가 오심으로 이제 온 세상 만민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셔서 그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예비하셨던 구원의 길이 드디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바로 인간을 영원한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십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도 이 믿음에 바로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의 빛도 되심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스라엘만이 구원이 약속된 선민이란 생각으로 폐쇄적인 신앙에 매어있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체험하고 구원자 예수를 품에 안게 되자 시므온은 이 메시야 구세주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계 만민을 위한 구원자요 참 생명의 빛이 되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만이 인류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예수를 통하여 참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모든 인류가 바로 예수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데 그 예수가 유대인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니 유대인에게는 커다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그 감격에서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찬양하며 고백하였습니다. 시므온이 이렇게 기다리고 소망하던 중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야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품에 안는 기쁨과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그 메시야 구세주를 우리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기 위하여 기다리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소망으로, 기다리는 인내로 대강절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이 땅에 오신 메시야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강절에 들어갑니다. 대강절은 주님이 오심을 기다린다는 절기입니다. 대강절(待降節, Advent)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둘을 함께 지키는 절기로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초림과 세상 종말에 심판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시는 재림을 포함하여 기다리며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은 \'도착한다\'(ankunft, arrive)는 의미로 마치 기차역이나 공항에서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식구들이나 손님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같은 의미로 우리들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가 바로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이미 2천년 전에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제물되시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성탄을 회상하면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바로 그 예수를 내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모시어 들여 구원의 기쁨을 감사하는 계절입니다. 메시야는 2000년전 베들레헴에 오신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곁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바라는 보는 것 이것도 바로 대강절의 또 하나의 의미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스바냐에 3장 17절말씀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는 말씀과 같이 바로 메시야 그 분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요 메시야 그 분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레미야 33장 6절에서도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라고 하여 메시야가 성까지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성이란 나라와 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야는 나라와 민족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메시야가 오셔서 해결해 주십니다. 바로 이런 메시야를 기다리는 절기가 대강절입니다. 또 하나 대강절의 의미는 마지막 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계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대강절은 즐거움과 기쁨으로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하시기를 하늘 나라에 가서 너희 있을 곳을 다 예비한 다음에 너희에게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의 구주를 믿고 소망하며 인내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인사 가운데 하나가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을 가진 \"마라나타\"였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약속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자세를 나타내는 인사말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 상황은 교회가 대단히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였습니다. 아주 심한 박해 때문에 교인들이 많이 떠나가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지키기 어려웠던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들이 기다렸던 재림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재림 신앙을 통해서 그들은 영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강절에 가져야 할 신앙인의 자세요 소망이요 믿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이면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으로 살다 간 미즈노 겐죠라는 시인이 노래하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리라고 한 시가 있습니다. 그 시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사는 자들이여 시험의 폭풍이 지나가기를 거룩한 뜻이 행해지기를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하나님의 보호 속에 사는 자들이여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하나님의 도움 속에 사는 자들이여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들리기를 영광의 주가 오시기를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기도드리면서 기다리세요 뉴스위크」(Newsweek)에 중국 문화혁명 때 반혁명 세력으로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한 중국인을 소개한 것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는 감방생활이 고통스러워 자살할 것을 결심했는데, 그 날 오후 감옥의 창 밖으로 연이 날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연의 무늬는 자기가 만들어 아들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그 날부터 하루에 두 번씩 연이 창 밖으로 떠올랐습니다. 이 사람은 내 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되니 꼭 살아서 아들을 만나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답니다. 이처럼 그는 아들이 띄워 준 연을 통한 메시지로 힘을 얻었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다릴 줄 몰라 기쁨을 잃어버렸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이제 우리는 기다림의 은혜를 새롭게 고마워합니다. 기다림은 곧 기도의 시작임을 다시 배웁니다\'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진정한 기다림의 의미를 몰라 주시는 은혜를 잃고 기쁨도 빼앗기지 말고 기다림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더 기다리고 인내하여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기쁨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람들/ 눅19:11-27/ 대림절설교/ 2009-12-05
기다리는 사람들 눅19:11-27 초등학교 시절 저는 영등포역에서 인천 가는 경인대로변의 3층집에서 살았습니다. 2층에 미장원이 있었는데, 미장원 누나들이 불러서 미장원에서 놀 때가 많았습니다. 그 덕택에 1960년 로마 올림픽과 1964년 동경 올림픽을 연속으로 제패한 위대한 마라톤 선수인 에디오피아의 아베베가 맨 발로 달리는 것을 내려다보기도 했습니다. 그 때 1층, 2층, 3층은 모두 세를 주고, 우리 식구는 안채에 살았는데 어머니는 교회 일로 늘 바빴습니다. 어머니는 길가 집이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많이 온다고 하면서 방문을 잠그곤 했습니다. 실제로 도둑이 자주 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잃어버린다고 열쇠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열쇠가 없는 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툇마루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툇마루에서 숙제를 하고, 잠도 잤습니다. 그 때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오셨는데, 혼자 공부도 잘한다고 하면서 먹을 것을 사 주기도 했는데, 그 후 늘 저를 칭찬했습니다. 그 칭찬이 발전해서 나중에는 저를 사위 삼겠다고 한 적도 있습니다. 결혼하기 원하면 툇마루에서 공부하십시오. 저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어둑해질 무렵 어머니가 맛있는 반찬거리를 사 가지고 오시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젠 역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가 저를 기다립니다. 제 전화를 기다립니다. 어쩌다 서울이라도 가게 되면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모릅니다. 손자와 손녀를 기다립니다. 일전에 제 딸이 서울에 갔는데, 아버님이 지하철까지 나가서 기다리신다고 서로 길이 엇갈려 찾느라고 애를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기다림 그 자체입니다. 아이는 엄마를 기다립니다. 엄마도 학교에 간 자녀를 기다립니다. 늙어서는 자식이 오길 기다립니다. 모든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가게 주인은 손님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의 대상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원서를 넣은 사람은 합격 소식을 기다립니다. 그런가 하면 씨를 파종한 농부는 추수 때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가뭄 때는 비가 오길 기다립니다. 인생이 기다림이라는 것은 그만큼 외롭고 힘들다는 반증입니다. 현재의 삶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면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현재의 삶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간절할수록 처절한 상태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기다림의 끝은 무엇일까요? 가장 불행한 것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경우입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아 발길을 돌릴 때의 그 축 늘어진 뒷모습처럼 쓸쓸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의 허무함을 잘 그려낸 희곡 작품이 있습니다. 1952년에 나온 아일랜드 태생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것입니다. 이 작품은 2차 세계 대전 후의 황폐해진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데, 최초의 부조리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막의 내용을 보면 해질 무렵 어느 시골길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란 두 사람의 떠돌이가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이들은 기다리는 동안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냅니다. 얼마 후 <포조>라는 사람이 노예인 <럭키>를 데리고 와서 두서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떠납니다. 그리고 심부름하는 양치기 소년이 와서 <고도는 내일 온다>고 알려 줍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계속 기다립니다. 2막에서도 거의 같은 내용이 되풀이됩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기다리고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연극은 끝이 납니다. 여기서 심각한 것은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베케트>는 오지도 않을 사람을 기다리면서 애를 태우는 모습을 통하여 현대인의 불안과 허무를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 고도가 누구일까요? 사람마다 기다리는 고도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그 고도가 왔습니까?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지도 않을 대상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예가 누가복음 2장에 나옵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은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시므온>이란 경건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늘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반드시 메시아,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라는 성령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탄생하신 주님께서 그가 기도하던 성전에 오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누가복음 2장 27절 이하에서 길게 말씀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할렐루야!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다림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결코 우리를 기다리다 돌아서게 만들지 않습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십시오.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도 하나님께 부르짖은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그 모습을 하박국서 2장 1-2절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박국은 기다렸고,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의 내용은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박국은 억누르던 영혼의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기쁨과 찬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 반드시 선하신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기다리면서 살 듯이 목사인 저도 많은 것을 기다립니다. 아들이 학기를 마치고 집에 오길 기다립니다. 딸 아이의 합격 소식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은총이 교우들에게 풍성하게 임해서 어려운 교우들의 삶의 그늘에 빛이 비치고, 그 얼굴에서 환한 웃음꽃이 피길 기다립니다. 사업을 시작한 분이 잘 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오길 기다립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병세가 호전되어 퇴원했다는 소식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으로 화해했다는 소식을 기다립니다. 우리 교회가 더 부흥하고 성장하여 이 지역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때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리고 때로는 사역을 마치고 은퇴하는 날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때를 기다립니다. 교우 여러분들은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이것은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같이 기다려야 할 궁극적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합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합니다. 개정된 사도신경에는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천사들이 한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시므온이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도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우리도 기다리는 사람인데, 그 기다림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것은 시므온이 처음 오실 메시아를 기다린 반면,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림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이 세상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다음 세상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천국도, 지옥도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이 목표라면 교회에 올 시간에 기술을 하나 더 배우고, 영어 단어 하나 더 배우고, 친구를 한 사람 더 사귀고 즐기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의 지옥이 주어질 것입니다.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오늘 이 세상에서 잘 준비하여, 장래의 천국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천국의 백성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 다시 오십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을 보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 세상은 종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 화려한 모든 문명은 무너질 것입니다. 왕후장상의 모든 자랑거리가 빛을 잃을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사는 동안에 주님이 오시지 않아도 걱정 없습니다. 때가 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께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이 오시든지, 우리가 부름 받아 가든지 천국에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은 <주님을 만날 때를 기다리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때를 기다라는 사람,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잘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날 때를 기다리다가 반드시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시길 기원합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우선 우리는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방향성을 가집니다.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엄마는 아들이 올 방향을 쳐다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주님께로 고개를 돌립니다. 또 기다림은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아들을 기다리면서 길거리 약장사에게 정신을 팔고 있다면 아이가 와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아이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기다리면서 세상의 부정한 욕망이나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만 우러러야 합니다. 그게 방향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거룩함을 향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모든 사람이 잘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기다림에는 심각한 위기가 있습니다. 이 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첫째는 지루함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루합니다. 어서 빨리 뭔가 이루어지길 기다립니다. 어서 빨리 오길 기다립니다. 그래서 지루함을 참지 못하면 중간에 돌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그렇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오셨으니, 금방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왕이 되기만 하면, 자신들의 고생도 끝이 나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보람이 있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읽은 <열 므나의 비유>입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떠나면서 종들에게 므나를 남겨주고 간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귀인이 왕이 되어 오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때까지 종들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다림을 가르쳤습니다. 참된 구원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바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 후에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오랜 세월 후에 재림하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무엇인가를 추구할 때 그 일이 즉시 즉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아기를 낳아 그 다음날 대학생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란 평생 농사입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 등록하고 오늘 바로 성숙한 신자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모든 기도가 즉시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빗나간 아들 어거스틴이 돌아오길 그 어머니 모니카는 수십 년을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교회가 좋은 교회로 부흥하고 비전을 이루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잘 기다리십시오. 인내하십시오.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조급해 하면 중간에 포기하기 쉽습니다. 주님은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두 번째 기다림의 위기는 기다림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의 여류 시인인 노천명 님의 <사슴>이란 유명한 시를 아시지요? 참 슬픈 시입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 슬픈 모가지를 하고 /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이 시는 가만히 물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또 먼 산을 바라보는 사슴을 통하여 조용하고 슬픈 동양적 기다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그런 조용한 슬픔이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정지 상태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고도를 기다리며>에 보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사람이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다리는 중에 할 일을 발견합니다. 2막에 보면 포조가 눈이 멀어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도와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 때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그를 도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블라디미르가 말합니다. <포조가 지금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이런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게 아니다. 지금 포조가 도와 달라는 것은 우리에게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것인데, 지금 이 자리에는 우리 둘밖에 없으니, 더 늦기 전에 그들 도와야 한다. 우리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한 번만이라도 인간답게 온 인류의 대표가 되어 그를 도와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다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무언가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기다리고 있는 그 분이 기뻐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귀인이 종들에게 하나씩 므나를 나눠주고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13절을 보세요.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 후 종들에게는 기다리는 동안에 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런 내용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같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 장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본문은 귀인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가 부름을 받아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우리가 죽는 그 날까지>입니다. 그 때까지 기다리면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장사는 무엇일까요? 복음을 파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게 성도의 사명이요, 교회의 사명입니다. 주인은 돌아온 후에 장사를 잘 한 종들에게 치하를 합니다. 17절을 보세요.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충성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들이 이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받은 므나를 땅에 파묻어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진노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기다림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혹은 대강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탄생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기다림을 배우는 절기>입니다. 기다림은 무기력함과 다릅니다. 기다림은 소극적 대망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가장 적극적 행동입니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모습처럼 기다려야 합니다. 신랑은 얼굴 화장을 하고, 몸단장을 하고,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고 신랑을 기다립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모든 일을 충성스럽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복음을 증거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조용하게 있으면 안 됩니다. 날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펼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선한 사역은 종말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위한 사역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백성으로, 주님 만날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언젠가 주님을 만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복된 기다림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