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ひ(引)き受けて下さる神を待つ(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ルカ1:26-38(눅1:26-38)/ 大嶋博道牧師(오오시마 히로미찌 목사)/ アドベント礼拝(3)(대림절 3주차 예배)/ 2006-12-10
引き受けて下さる神を待つ(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ルカ1:26-38(눅1:26-38) 2006/12/10(日) 引き受けて下さる神を待つ」大嶋博道牧師 アドベント礼拝(3)(聖書)ルカ1:26~38   クリスマスの出来事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の誕生が実現したのは神の一方的な働きかけです。まさに「万軍の主の熱意」であり、神の愛の表れであります。(イザヤ9:6) しかし、人間の側から見れば、それを信仰によって引き受けた人たちがいたからこそ、神の聖なるみ業が成ったとも言えます。今朝は、引き受けた人たちの「信仰による生き様」を学びましょう。 ①東方の博士たち  ~与えられたしるしを神の預言の成就と信じて、礼拝することを引き受けた。  東方からの長旅は、おそらく多大な犠牲を強いられたことでありましょう。彼らは、神の約束が実現したことを喜び、ひたすら幼子を礼拝をするために来たのです。彼らは「黄金、乳香、没薬」を献げました。また、ベタニヤのマリヤは、十字架を前にした主イエスに高価なナルドの香油を惜しみなく注ぎました。「礼拝」は喜びと感謝の爆発する場なのです。私たちもキリスト者として、喜びと感謝をもって日曜ごとの礼拝をしっかりと引き受けましょう。 ②貧しい羊飼いたち (ルカ2:8~20)  ~天の使いのメッセージを信じて、貧しさに耐えて生きることを引き受けた。ルカは当時、「アム・ハ・アレツ(地の民)」と言われ、最も貧しかった羊飼いたちに与えられた大きな喜びを語っています。彼らは天の使いから救い主の誕生を告げられた時、「さあ、ベツレヘムへ行こう」と口々に交わしながら家畜小屋を探し当て、天の使いが告げたとおりの光景を見ました。彼らは神をあがめ、賛美しながら帰って行きました。彼らの魂は信仰によって喜びと平安にに満たされ、貧しさに耐えながら生きることを引き受けたのです。  信仰生活はいつもハッピーとは限りません。試練や困難が突如として襲ってきて信仰を側面から揺さぶる時もあります。「試練の真っ直中にある私を引き受ける」「今日の私をしっかりと引き受ける」~これが信仰者の生き方です。 ③救い主の母マリア  ~戸惑いと決断の中で、救い主の母となることを信仰によって引き受けた。 「神には出来ないことは何一つない」と天の使いが告げた時に、マリアは「わたしは主のはしため。お言葉どおり、この身になりますように」と謙虚に、従順に神の言葉を受け入れました。彼女は様々な困難と問題の真っ直中で、神様の救いのご計画の受け皿になることを引き受けたのです。言い換えれば、救い主の母となることを引き受けたのです。  クリスマスの出来事に関わった東方の博士たちも、貧しい羊飼いたちも、そして、マリアも「信仰によって」神の言葉を自分に与えられたメッセージとしてしっかり受け止め、様々な困難な問題や課題や使命を引き受けたのです。 ☆まとめ:  生きるということは「自分の人生のすべてを引き受ける」ことです。大変なことですが、神様はその私たちの人生をそのまま背負い、持ち運んでくださることを信仰によって確信いたしましょう。 「アドベント」は、この「引き受けてくださる神を待つ」時です。
가인의 아우? 아벨의 형?/ 창4:1-15/ 대림절설교/ 2012-12-02
가인의 아우? 아벨의 형? 창4:1-15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0. 들어가는 글 12월 첫째 주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 기간에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대통령이 선출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교회적으로는 건축이 순조롭게 완공되어 입당이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창세기에서 가인과 아벨의 형제 갈등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과 이웃의 관계가 어떻게 파괴되는지 깨닫고 회복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인생이 역전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합니다(창1:31). 그러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세상은 죄가 들어옴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갔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외형적으로 가인과 아벨의 모습은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들은 같은 부모에서 태어난 형제이며, 땅을 경작하는 사람과 양을 치는 사람으로서 상호 보안적인 직업에 종사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똑같이 하나님께 땅의 소산과 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심지어 2-5절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름을 네 차례나 교대로 사용하면서 보시기에 좋은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좋아보였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미 죄로 인하여 무서운 불공평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와는 맏아들 가인이 태어났을 때 기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외쳤습니다(1절). 그 기쁜 마음을 담아 ‘생산하다’는 뜻으로 명예로움이 담긴 가인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둘째의 탄생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에게는 무가치하고 열등한 존재라는 아벨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또한 두 사람의 직업은 상호 보완적이었지만 가인은 큰 땅을 가진 부유한 농부였고, 아벨은 얼마 되지 않는 양떼를 먹일 정도의 작고 척박한 땅을 가진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죄의 결과 때문에 태어난 순서로 서열이 생겨나고, 남녀 성별로 차별이 생겨나고, 물질의 소유로 빈부 차이가 생겨나고, 직업의 종류로 귀천이 생겨났습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옴으로 생겨난 형제 사이의 불공평을 해결 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두 사람이 모두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부유했던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난에서 하나님을 절실히 의지했던 아벨의 제물을 존중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인이 장자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벨이 영적인 장자로 세워졌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가치가 효력을 잃고, 모든 차별이 사라짐을 보여줍니다. 또한 세상의 불공평이 하나님의 공평으로 새롭게 재창조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유하려는 것은 욕심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세상은 조건에 따라서 불공평하고 차별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을 보시고 공평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2. 가인의 아우 아벨은 있었지만 아벨의 형 가인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릴 때 세상에 있던 조건을 보지 않고 오직 그들의 중심을 보고 받으셨습니다. 제물을 드린 후에 가인은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가인은 세상에서 자신이 장자이듯이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이 당연히 장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조건으로 별 볼일 없는 아벨이 인정받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관계는 항상 형인 가인 중심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인의 아우 아벨”은 나오지만 “아벨의 형 가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가인의 중심으로만 아벨을 바라본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가인은 아벨과 비교하여 항상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동생을 인정하였을 때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5절). 가인은 하나님의 선택을 바꿀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분노의 감정으로 하나님과 아벨까지도 배제시켰습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전혀 포용하지 못하고 배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배제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첫째로 하나님과 자신까지 속이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나님과 자신까지도 속이고 있습니다(9절).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잘못되었고,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바울도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자며, 의인중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잘못되었기에 철저히 배제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깨어지게 되자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였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리는 자치하면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형의 자리는 지키면서 아우에 대해 조금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니므로 아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할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9절).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어떤 문제 앞에서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책임을 회피 합니다. 지금의 대통령 선거를 보면서도 서로들 자리는 차지하려고 힘쓰지만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회피하는 모습에 씁쓸함이 밀려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합니다(12절). 가인은 하나님과 이웃을 포용하지 못하고 배재시킴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모르는 삶은 열매가 없는 무익한 삶을 살게 됩니다(12절). 우리가 자기중심에 많이 벗어나면 날수록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는 영역은 더 넓어지는 것입니다. 3. 죄의 명령이 말씀의 명령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인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미리 경고합니다(7절). 그러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죄에게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죄가 원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에 말씀의 영향력보다 죄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범죄 이전에 가인은 죄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었고. 죄라고 불리는 포식자를 다스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를 못하고 오히려 죄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살인을 범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면 잘 다스릴 수 있는 분에게 맡겨야 합니다. 운전을 잘하지 못하면 운전을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함께 타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서 핸들 잡고 주인 노릇하고 있으면 사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우리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우리를 더 잘 인도할 수 있는 주님께 인생의 핸들을 맡겨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 가인을 죽이려고 해서 “하나님이 그의 이마에 표를 주었느냐?”입니다(15절). 하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의도와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인은 죄의 결과로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14절). 하나님은 잠재적인 희생자가 된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표를 주었습니다. 가인이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배제의 삶을 시작하였지만 또 누군가에 의해서 배제의 삶이 반복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배제의 악순환을 끓기 위해 포용의 삶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배제를 못 박고 포용의 길을 여셨습니다.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세상의 불공평이 믿음 안에서 역전되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늘 보좌의 자기중심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부디 대림절 기간 동안 자기중심을 깨뜨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더 닮아갈 수 있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조영식 목사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눅2:25-35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 눅2:25-35 현대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희망의 사람,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자\\\'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희망과 꿈을 안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윌리암 말스톤(Dr. 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삼천명을 상대로 해서 리서치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이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과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갑자기 많은 포로들이 죽어갔습니다. 그 원인을 조사했더니 포로들이 크리스마스에는 석방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고통을 참고 살았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석방을 하지 않자 그들은 희망을 잃게 되었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들은 갑자기 죽어갔던 것입니다. 희망은 능력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작심, 좌절, 자살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키엘케골이 말한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희망, 기다림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더 좋은 날을 기다리고, 더 성공적인 날, 더 행복한 날을 기다립니다. 약혼한 처녀는 결혼의 날을 기다리며, 결혼한 부부는 예쁜 자식을 기다립니다. 자식을 낳은 부부는 자녀들의 성공을 기다리고, 병상에 누어있는 환자는 퇴원의 날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는 달력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 성령의 보내심을 중심으로 대강절, 성탄절, 현현절, 성회수요일, 사순절, 수난주간,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 성령강림절로 진행됩니다.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합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됩니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대강절을 엄격히 지켰으며 모든 신자들이 날마다 금식하고 교회예배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중대한 사건이나 기대되는 즐거운 일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다못해 결혼기념일, 아이들 생일까지도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예수님 오심을 기다림 없이, 준비없이 어찌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기다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렘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대강절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도성인신’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빌2:) . . 이런 자기를 비움(자기비하)이 없다면 세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은 성탄주일 직전까지 4주 동안을 말하며 글자 그대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그 오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사는 기간입니다. 마리아가 동정녀의 깨끗한 몸으로 주님을 탄생시킨 것 처럼, 또는 예수께서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 것처럼 겸손히 낮은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버림받은 이웃을 생각하며,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도 하는 기간이 이 기간입니다. 성경은 기다림이라는 문구를 끝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계시록22:20에 ‘마라나다’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강림하셨을 때 주를 맞이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 합니다. 메시야 오심에 대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관심과 미온적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지식은 갖고 있었으나 간절한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헤롯 치하에서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권을 일정 부분 나누어 받고 누리는 동안 그 상황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주권자인 메시야가 온다면 그때까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그 모든 권세와 명예와 특혜를 다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을 상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30년 후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구원사역을 펼치기 시작할 때 예수님에게 종교적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경계하고, 시기하며, 견제하며 그를 흠집 내고 비방하며 급기야는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방세속권력을 비롯한 모든 종교 세력들과 결탁하여 끝내 그들의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장본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이 없었던 그들은 세속권력자 헤롯의 협력자들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헤롯보다 더한 범죄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보면 오래 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온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은 먼저 예루살렘에 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평생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간절하게 기다린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갔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이 정한대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은혜를 입을 수 있었을까요? 1. 간절한 기다림이 메시야를 만나게 했습니다. 시므온이 우연히 성전에 갔다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따라 오랜 기다림 후에 만난 것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이 없어도 예수님은 오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은 일찍이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다림 없이 만나는 그러한 만남은 그와는 아무 관계없는 만남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 ’ 우리가 가만있어도 성탄은 옵니다.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다시 재림하십니다. 그러한 성탄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성탄, 의미 없는 성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 두 사람만이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당시 유다 나라의 형편을 보면,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와 통치를 받으면서 생활을 거의 자유가 없는 생활을 하였고, 사회적으로는 대제사장들과 유대지도자들의 억압과 착취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므온도 그들과 함께 핍박 속에서 살았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재 이라크를 중심으로 해서 적지 않은 크리스찬들이 중동 지방에서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야말로 2000년간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크리스찬으로는 PLO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대통령인 아라파트(Arafat)의 부인이 있고, 또 PLO의 15%가 현재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이곳 중동 지방은 초대 교회 이후 줄곧 지금까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는 1200만명의 성도가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 크리스찬들은 한 번도 숨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의 오심을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뜨겁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이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2. 올바른 신앙으로 기다렸을 때 메시야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말씀 속에서 자신의 영달이나 성공을 위해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원자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신나는, 즐거운, 추억의 성탄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기울어진 나라, 아니 무너져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거대한 소망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성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조국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로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대로 예수님은 억압과 고통과 죄악과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 처한 우리들에게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실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실패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슬픔에 빠진 자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와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은 시므온만은 아닙니다. 사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모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성령의 지시함을 받은 거룩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기다림이었습니다. 3. 성령과 동행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메시야를 만날 수 있습니다. 25절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말씀을 볼 때 시므온은 한 마디로 성령충만한 자였습니다. 시므온이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인데도 성령충만한 사람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두 종류의 늙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얽매여, 늙는 것을 한탄하며, 서러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며 수동적으로 늙어가는 사람, 반대로 성령충만하여 거룩한 비젼을 가지고, 도전하며, 싸우며 나아가는 독수리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은 마치도 과일이 익어가듯 우리인생이 익어가는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시므온은 성령충만하여 의롭게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의와 경건은 능력이 있습니다. 약5:16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의 기다림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 의와 경건이 그 시대를 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우리도 시므온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부정과 부패가 많아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마시고,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한 신앙, 늘 성령충만한 가운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4. 경건한 신앙으로 기다린 사람만이 예수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34절에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님을 축복한 시므온, 그는 우리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을 기다라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요, 특권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오직 경건하고 의로운 자만이 할 수 있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자만이 할 수 있고 성령 충만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성탄이었습니다. 29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기다림 없는 성탄, 아이들에게 인기 얻을려고 선물이나 나눠주는 성탄이 과연 죽어도 좋은 성탄일까요? 죽으면 안되는 성탄이지요.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첫 번째 성탄절에만 가능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이시간도 예수님을 가슴에 안을 수 있습니다. 안을 수 있는 특권을 성령님께로부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눅2:25-35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눅2:25-35 2008-02-05 10:42:59 read : 296 현대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희망의 사람,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자'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희망과 꿈을 안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윌리암 말스톤(Dr. 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삼천명을 상대로 해서 리서치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이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과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갑자기 많은 포로들이 죽어갔습니다. 그 원인을 조사했더니 포로들이 크리스마스에는 석방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고통을 참고 살았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석방을 하지 않자 그들은 희망을 잃게 되었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들은 갑자기 죽어갔던 것입니다. 희망은 능력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작심, 좌절, 자살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키엘케골이 말한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희망, 기다림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더 좋은 날을 기다리고, 더 성공적인 날, 더 행복한 날을 기다립니다. 약혼한 처녀는 결혼의 날을 기다리며, 결혼한 부부는 예쁜 자식을 기다립니다. 자식을 낳은 부부는 자녀들의 성공을 기다리고, 병상에 누어있는 환자는 퇴원의 날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는 달력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 성령의 보내심을 중심으로 대강절, 성탄절, 현현절, 성회수요일, 사순절, 수난주간,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 성령강림절로 진행됩니다.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합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됩니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대강절을 엄격히 지켰으며 모든 신자들이 날마다 금식하고 교회예배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중대한 사건이나 기대되는 즐거운 일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다못해 결혼기념일, 아이들 생일까지도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예수님 오심을 기다림 없이, 준비없이 어찌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기다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렘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대강절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도성인신’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빌2:) . . 이런 자기를 비움(자기비하)이 없다면 세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은 성탄주일 직전까지 4주 동안을 말하며 글자 그대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그 오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사는 기간입니다. 마리아가 동정녀의 깨끗한 몸으로 주님을 탄생시킨 것 처럼, 또는 예수께서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 것처럼 겸손히 낮은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버림받은 이웃을 생각하며,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도 하는 기간이 이 기간입니다. 성경은 기다림이라는 문구를 끝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계시록22:20에 ‘마라나다’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강림하셨을 때 주를 맞이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 합니다. 메시야 오심에 대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관심과 미온적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지식은 갖고 있었으나 간절한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헤롯 치하에서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권을 일정 부분 나누어 받고 누리는 동안 그 상황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주권자인 메시야가 온다면 그때까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그 모든 권세와 명예와 특혜를 다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을 상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30년 후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구원사역을 펼치기 시작할 때 예수님에게 종교적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경계하고, 시기하며, 견제하며 그를 흠집 내고 비방하며 급기야는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방세속권력을 비롯한 모든 종교 세력들과 결탁하여 끝내 그들의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장본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이 없었던 그들은 세속권력자 헤롯의 협력자들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헤롯보다 더한 범죄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보면 오래 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온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은 먼저 예루살렘에 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평생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간절하게 기다린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갔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이 정한대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은혜를 입을 수 있었을까요? 1. 간절한 기다림이 메시야를 만나게 했습니다. 시므온이 우연히 성전에 갔다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따라 오랜 기다림 후에 만난 것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이 없어도 예수님은 오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은 일찍이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다림 없이 만나는 그러한 만남은 그와는 아무 관계없는 만남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 ’ 우리가 가만있어도 성탄은 옵니다.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다시 재림하십니다. 그러한 성탄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성탄, 의미 없는 성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 두 사람만이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당시 유다 나라의 형편을 보면,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와 통치를 받으면서 생활을 거의 자유가 없는 생활을 하였고, 사회적으로는 대제사장들과 유대지도자들의 억압과 착취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므온도 그들과 함께 핍박 속에서 살았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재 이라크를 중심으로 해서 적지 않은 크리스찬들이 중동 지방에서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야말로 2000년간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크리스찬으로는 PLO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대통령인 아라파트(Arafat)의 부인이 있고, 또 PLO의 15%가 현재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이곳 중동 지방은 초대 교회 이후 줄곧 지금까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는 1200만명의 성도가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 크리스찬들은 한 번도 숨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의 오심을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뜨겁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이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2. 올바른 신앙으로 기다렸을 때 메시야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말씀 속에서 자신의 영달이나 성공을 위해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원자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신나는, 즐거운, 추억의 성탄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기울어진 나라, 아니 무너져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거대한 소망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성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조국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로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대로 예수님은 억압과 고통과 죄악과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 처한 우리들에게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실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실패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슬픔에 빠진 자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와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은 시므온만은 아닙니다. 사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모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성령의 지시함을 받은 거룩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기다림이었습니다. 3. 성령과 동행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메시야를 만날 수 있습니다. 25절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말씀을 볼 때 시므온은 한 마디로 성령충만한 자였습니다. 시므온이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인데도 성령충만한 사람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두 종류의 늙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얽매여, 늙는 것을 한탄하며, 서러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며 수동적으로 늙어가는 사람, 반대로 성령충만하여 거룩한 비젼을 가지고, 도전하며, 싸우며 나아가는 독수리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은 마치도 과일이 익어가듯 우리인생이 익어가는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시므온은 성령충만하여 의롭게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의와 경건은 능력이 있습니다. 약5:16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의 기다림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 의와 경건이 그 시대를 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우리도 시므온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부정과 부패가 많아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마시고,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한 신앙, 늘 성령충만한 가운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4. 경건한 신앙으로 기다린 사람만이 예수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34절에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님을 축복한 시므온, 그는 우리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을 기다라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요, 특권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오직 경건하고 의로운 자만이 할 수 있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자만이 할 수 있고 성령 충만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성탄이었습니다. 29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기다림 없는 성탄, 아이들에게 인기 얻을려고 선물이나 나눠주는 성탄이 과연 죽어도 좋은 성탄일까요? 죽으면 안되는 성탄이지요.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첫 번째 성탄절에만 가능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이시간도 예수님을 가슴에 안을 수 있습니다. 안을 수 있는 특권을 성령님께로부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눅2:25-35 2008-02-05 10:42:59 read : 6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현대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희망의 사람,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자'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희망과 꿈을 안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윌리암 말스톤(Dr. 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삼천명을 상대
간절히 기다리는 대림절/눅2:25-35 2008-02-05 10:42:59 read : 6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현대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희망의 사람,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자'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은 희망과 꿈을 안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윌리암 말스톤(Dr. 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삼천명을 상대로 해서 리서치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이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과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갑자기 많은 포로들이 죽어갔습니다. 그 원인을 조사했더니 포로들이 크리스마스에는 석방해 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고통을 참고 살았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석방을 하지 않자 그들은 희망을 잃게 되었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들은 갑자기 죽어갔던 것입니다. 희망은 능력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작심, 좌절, 자살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키엘케골이 말한 것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희망, 기다림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더 좋은 날을 기다리고, 더 성공적인 날, 더 행복한 날을 기다립니다. 약혼한 처녀는 결혼의 날을 기다리며, 결혼한 부부는 예쁜 자식을 기다립니다. 자식을 낳은 부부는 자녀들의 성공을 기다리고, 병상에 누어있는 환자는 퇴원의 날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는 달력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 성령의 보내심을 중심으로 대강절, 성탄절, 현현절, 성회수요일, 사순절, 수난주간, 부활절, 승천일, 오순절, 성령강림절로 진행됩니다.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시작합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됩니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대강절을 엄격히 지켰으며 모든 신자들이 날마다 금식하고 교회예배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중대한 사건이나 기대되는 즐거운 일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다못해 결혼기념일, 아이들 생일까지도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예수님 오심을 기다림 없이, 준비없이 어찌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기다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렘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대강절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도성인신’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빌2:) . . 이런 자기를 비움(자기비하)이 없다면 세상에 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은 성탄주일 직전까지 4주 동안을 말하며 글자 그대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그 오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로 사는 기간입니다. 마리아가 동정녀의 깨끗한 몸으로 주님을 탄생시킨 것 처럼, 또는 예수께서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 것처럼 겸손히 낮은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버림받은 이웃을 생각하며,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도 하는 기간이 이 기간입니다. 성경은 기다림이라는 문구를 끝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계시록22:20에 ‘마라나다’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강림하셨을 때 주를 맞이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 합니다. 메시야 오심에 대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관심과 미온적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지식은 갖고 있었으나 간절한 기다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헤롯 치하에서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권을 일정 부분 나누어 받고 누리는 동안 그 상황에 만족하며 안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주권자인 메시야가 온다면 그때까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그 모든 권세와 명예와 특혜를 다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을 상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30년 후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구원사역을 펼치기 시작할 때 예수님에게 종교적 주도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경계하고, 시기하며, 견제하며 그를 흠집 내고 비방하며 급기야는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방세속권력을 비롯한 모든 종교 세력들과 결탁하여 끝내 그들의 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장본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이 없었던 그들은 세속권력자 헤롯의 협력자들로 전락했을 뿐 아니라 헤롯보다 더한 범죄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보면 오래 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온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이 사람은 먼저 예루살렘에 사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평생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간절하게 기다린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갔다가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이 정한대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은혜를 입을 수 있었을까요? 1. 간절한 기다림이 메시야를 만나게 했습니다. 시므온이 우연히 성전에 갔다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따라 오랜 기다림 후에 만난 것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이 없어도 예수님은 오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은 일찍이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다림 없이 만나는 그러한 만남은 그와는 아무 관계없는 만남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 ’ 우리가 가만있어도 성탄은 옵니다.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그리스도는 다시 재림하십니다. 그러한 성탄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성탄, 의미 없는 성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 두 사람만이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다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당시 유다 나라의 형편을 보면,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와 통치를 받으면서 생활을 거의 자유가 없는 생활을 하였고, 사회적으로는 대제사장들과 유대지도자들의 억압과 착취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므온도 그들과 함께 핍박 속에서 살았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재 이라크를 중심으로 해서 적지 않은 크리스찬들이 중동 지방에서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야말로 2000년간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크리스찬으로는 PLO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대통령인 아라파트(Arafat)의 부인이 있고, 또 PLO의 15%가 현재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이곳 중동 지방은 초대 교회 이후 줄곧 지금까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는 1200만명의 성도가 핍박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 크리스찬들은 한 번도 숨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의 오심을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뜨겁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향한 간절한 기다림이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2. 올바른 신앙으로 기다렸을 때 메시야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 말씀 속에서 자신의 영달이나 성공을 위해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원자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신나는, 즐거운, 추억의 성탄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기울어진 나라, 아니 무너져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거대한 소망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성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조국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로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대로 예수님은 억압과 고통과 죄악과 질병과 가난과 죽음에 처한 우리들에게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실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실패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슬픔에 빠진 자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와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은 시므온만은 아닙니다. 사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모두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확실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성령의 지시함을 받은 거룩한 기다림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기다림이었습니다. 3. 성령과 동행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메시야를 만날 수 있습니다. 25절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말씀을 볼 때 시므온은 한 마디로 성령충만한 자였습니다. 시므온이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인데도 성령충만한 사람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두 종류의 늙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얽매여, 늙는 것을 한탄하며, 서러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며 수동적으로 늙어가는 사람, 반대로 성령충만하여 거룩한 비젼을 가지고, 도전하며, 싸우며 나아가는 독수리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은 마치도 과일이 익어가듯 우리인생이 익어가는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시므온은 성령충만하여 의롭게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의와 경건은 능력이 있습니다. 약5:16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의 기다림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시므온의 의와 경건은 살아 역사하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 의와 경건이 그 시대를 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우리도 시므온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부정과 부패가 많아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마시고,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한 신앙, 늘 성령충만한 가운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4. 경건한 신앙으로 기다린 사람만이 예수를 축복할 수 있습니다. 34절에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부모님을 축복한 시므온, 그는 우리 인간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을 기다라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요, 특권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오직 경건하고 의로운 자만이 할 수 있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자만이 할 수 있고 성령 충만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의 성탄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성탄이었습니다. 29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기다림 없는 성탄, 아이들에게 인기 얻을려고 선물이나 나눠주는 성탄이 과연 죽어도 좋은 성탄일까요? 죽으면 안되는 성탄이지요.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찬양한 것은 첫 번째 성탄절에만 가능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이시간도 예수님을 가슴에 안을 수 있습니다. 안을 수 있는 특권을 성령님께로부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값진 선물 /요1:10-13 2015-04-07 15:04:16 read : 1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마 여러분은 어느 누구 예외없이 여러 가지 선물을 드려보았거나 받아보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받은 선물 가운데 기억에 남는 선물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 기억에 남는 선물은 비싼 선물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선물입니다. 비싼 것은 아니더라도 마음과 정성이 담긴 선물은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선물은 선
값진 선물 /요1:10-13 2015-04-07 15:04:16 read : 1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마 여러분은 어느 누구 예외없이 여러 가지 선물을 드려보았거나 받아보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받은 선물 가운데 기억에 남는 선물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 기억에 남는 선물은 비싼 선물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선물입니다. 비싼 것은 아니더라도 마음과 정성이 담긴 선물은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선물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무엇을 선물할 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품목을 결정하면 그 다음에는 가격은 얼마 정도로 해야 할지, 색깔은 무슨 색으로 할 지, 포장지는 무엇으로 할 지, 심지어 전달은 어떻게 할지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선물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소중한 선물은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은 선물은 그것의 값어치가 얼마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의 사랑과 정성이 담겨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최소한 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선물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한 사람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은 별로 가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값진 선물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세상적인 가치,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은 언젠가 그 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선 당장은 소중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중에는 그것이 별로 소중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 아침!!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귀한 선물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바로 그 선물을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12절을 보시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눈을 번쩍 뜨게 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캄캄한 세상에 소망의 빛과 같은 말씀입니다. 먼저 ‘믿음’, ‘하나님의 자녀’, ‘권세’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 보석과도 같은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어떤 것입니까?” 첫번째는 이 선물을 받은 자는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엄청난 권세입니다. 여러분, 신분이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있으며,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인생이 흔들립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를 믿고 사는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가장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칭호입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우리의 신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 였습니다. 요 8장에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하고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까? 로마서 5장에서는 죄인의 신분이었고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였습니다. 도무지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전혀 새로운 신분을 얻은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갖춘다고 해도 새로운 신분을 얻지 못하면 헛된 일입니다. 몇해 전에 tv 방송에 인기 프로 중에 하나인 진품명품이라는 코너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본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진귀한 물건을 소유한 사람들이 자기 물건을 나름대로 가격을 매겨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면, 전문가들은 그 물건이 진품인지 아닌지, 진품이라면, 명품의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해 가격을 산출합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출연자들의 얼굴은 희비가 엇갈립니다. 자신은 수 천 만원의 가치가 있는 진품인 줄 알고 소중히 보관해 오다가 가져옵니다만,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 “이것은 가짜입니다. 이-삼십 만원에 지나지 않는 모조품입니다. ” 라고 말 할 때 그 물건을 들고 나온 사람들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소장한 물건이 진품인지 아닌지 미심쩍어 그저 확인 차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격도 대충 몇 십 만원 정도 매겨 가지고 나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물건을 감정 한 후 뜻 박의 결정을 내립니다. “이 물건은 보기 드문 진품입니다. 부르는 게 값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억대가 넘습니다. ” 뭐 이 말 한마디에 혹시나 했던 그 물건의 주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아주 어렵게 결정해서 나왔다 하면서 옛날 한 문서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오랜 세월 가문의 영광처럼 생각하며 지녀 온 것인데 이 내용이 어떤 것인지 잘 몰라 하던 차에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심사위원들이 한 참 감정하더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생님, 이것은 노비 문서입니다.” 그 순간 그 의뢰인의 얼굴은 백지 장처럼 하얗게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가문이 노비였음에도 그 문서가 얼마나 얼마나 자신들의 선조들을 얽어 매놓은 것을 가보로만 간직하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는 양반 상놈 제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양반은 조선시대 시대 초기에 전체인구의 약 1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비가 40%나 될 정도로 상놈이라는 아픔을 가진 자들이 많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이 신분을 가지고는 과거 시험도 볼 수 없고 가문대대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머슴이나 종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정식 이름은 없고 그냥 그를 부르기 위한 호칭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3월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삼월이’라고 불렀고, 마당을 쓰는 머슴은 ‘마당쇠’라고 불렀습니다. 힘이 좀 세고 일을 잘하는 머슴은 ‘돌쇠’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진짜 이름이 아니라 주인이 부르기 위해서 그렇게 불러준 것뿐입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우리나라 신분제에 일대 동요가 일어나게 됩니다. 양반들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바쁜 반면, 일반 농민과 상민, 서민들이 의병을 조직해 관군보다 더 큰 전과를 올리게 되자, 백성들 사이에 양반과 지배층에 대한 회의와 저항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비롯한 지배층이 한양을 비우고 평양과 신의주로 떠나자 가장 먼저 불태워진 것은 노비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관청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후에는 전쟁으로 인해 바닥난 재정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돈 많은 서민과 양민들에게 돈을 받고 양반직을 파는 공명첩(空名帖)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공명첩을 사면 자신의 신분이 달라집니다. 노비들도 일정량 이상의 양곡을 바치면 공명첩을 살 수 있었고, 그러면 노비는 평민으로 신분이 상승됩니다. 그래서 돈 좀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공명첩을 사서 신분상승을 얻게 되었습니다. 10% 밖에 안되던 양반의 숫자는 철종 때에는 양반의 수가 무려 50%를 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하든 신분 세탁을 할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를 믿기만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했나요? 12-13절.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the right)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기서 ‘권세’라는 단어는 ‘합법적 권리’라는 뜻입니다. 이런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나요? 오직 개인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인간의 유전으로 되질 않습니다. 혈통적으로 세습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적인 노력(종교적인 고행, 금욕, 수도 등 의지적인 노력)으로도 되질 않습니다. 돌은 아무리 닦아도 돌인 것처럼 죄인인 인간이 제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여전히 죄인일 뿐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도 따를 뿐입니다. 미국 국적법을 예로 들어보죠. 그 나라는 부모의 국적에 관계없이 미국 땅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심지어 불법 체류자의 자식이나 원정 출산으로 태어난 자식이라도 미국 시민이 됩니다. 황당해 보이지만 자기들이 정해 놓고 그렇게 하겠다는데 누가 뭐랍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고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합니까? 그대로 믿고 따르면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이 선물을 받은 자는 신분과 더불어 거기에 걸맞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고도 그 권세의 내용을 잘 모르거나 확신하지 못하면 충분히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바보 같이 살 수 있습니다. 큰 손해를 보는 것이죠. 여러분,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미운오리새끼」를 잘 아시죠? 어미 오리가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알에서 오리 새끼들이 깨어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 큰 알이 아직 나오질 않습니다. 계속 품었더니 며칠 후 큰 알도 깨어났는데, 생김새가 좀 목이 길쭉하고 털이 희끗희끗하고 덩치만 큰 미운 오리 새끼였습니다. 다른 오리들이 조롱을 하고 미워합니다. 그는 외톨이가 됩니다.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갑니다. 이곳저곳을 배회하는데 너무 쓸쓸합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미운 오리 새끼가 자라 모습이 점점 변화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조가 나는 것을 봅니다. 얼마나 멋있어 보이는지! 그런데 연못에 비춰진 자기 모습이 똑같았습니다. 자신도 본래 백조였던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미운 오리새끼로 고민하며 바보처럼 살았던 겁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미운 오리새끼처럼 바보 같은 세월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상처받고 조롱받으며 힘없이 ... 그러나 이건 아니죠!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깨닫고 그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정말 하나님 자녀로서 위풍당당하게,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자녀가 된 그의 제자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 보십시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새는 심지도 않고 추수도 않고 곡간에 쌓아 두지도 않았어. 그러나 너희 천부께서 다 기르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또 자녀 된 제자들 보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의 백합화는 길쭉하고 보기 싫 은 꽃이지만 유대나라 백합화는 새빨간 것이 얼마나 이쁜지 모릅니다. "들에 저 백합화를 봐라. 저렇게 아름다운 백합화에 누가 저렇게 옷을 잘 입혔냐. 하나님이 입히셨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공중에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료를 보니 지구상에 있는 조류가 약 1000억 마리 정도 된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 새들이 어떻게 매일 먹고 사는지 상상이 잘 안갑니다. 우리나라에 절기 따라서 왔다갔다하는 제비에 대해서 어느 교수가 연구한 자료를 보니, 제비는 새끼에게 하루 100번 이상 먹이를 갖다 준다고 합니다. 숫놈과 암놈이 번갈아 가면서 곤충을 잡아다가 100번 이상 먹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루에 줄잡아 7000마리의 날파리 곤충을 갖다가 새끼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끼를 키우는 3주간 동안에는 무려 15만 마리를 먹이는 것입니다. 우리 보고 그렇게 제비에게 먹을 것을 주라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비가 한 두 마리입니까? 하나님이 그 모든 날짐승을 다 먹이고 키우신단 말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날짐승도 먹이고 키우는데 하물며 나일까 보냐,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날짐승을 먹이시는 하나님, 들판에 있는 풀도 키우시는 하나님. 그것에 비해서는 너무나 중요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가만히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볼 때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십니다. 너무 사랑 받는 자녀이기에 우리에게 있는 모든 악과 죄와 모든 범죄를 예수의 십자가로 깨끗이 씻으시고, 이제는 죄와 흠이 하나도 없는 거룩한 자기 자녀들처럼 날마다 보시면서 그 머리터럭도 다 세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어디를 가나 동행하시고 모든 기도를 귀담아 들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공중에 새도 저렇게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소중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신앙생활이란 자녀됨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구하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 하기 때문에 옵니다. 자녀에게는 안정감이 있습니다. 기도 안 들어주셔도 좋고 그냥 깊은 내적 평안이 있습니다. 상속권자가 누리는 특권은 내가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everything I have is yours)” 누리면 되는데 누리지 않고 해준 것이 없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원망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마음껏 누리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살면서 어려움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풍파가 있고 시련이 있어요. 제 설움이 제일 큰 것 같지만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축복의 계속을 갖고 있어도 레드 카펫 깔아 놓는 게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극복하고 승리하도록 도와주실 뿐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과잉 사랑 같은 것 안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항상 도와주심을 기억하십시오. 고전10: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 범위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항상 동행하며 도와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결국 승리합니다. 잠24: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고난에 관한 한 어느 누구 못지않게 시련을 많이 당했던 사도 바울이 외칩니다!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구절은 A. 링컨이 특별히 좋아했던 말씀입니다. 그는 무수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실망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때마다 자기 이름을 A. Lincoln이라 쓰면서 자신을 격려했습니다. 자신을 보면 한심하지만 자신을 하나님 자녀 삼으신 하나님 때문에 A 학점을 줄 수 있었던 겁니다. 마침내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역사에 남는 위대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성탄의 은혜는 도무지 자격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 위해 영광의 보좌를 내려놓으시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 영접하는 것과 믿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믿는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영접한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귀한 손님을 집으로 초대하듯이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11절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세상의 특징은 거부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제 성턴절이 다가 오지만,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누기 받아들이고 영접했나요?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성탄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영접한 사람의 숫자는 그 당시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빈방 하나를 구하기 위해 외치며 다니는 그 처절한 외침을 외면한 우리 인간이 도대체 누구길래 저 구유에까지 당신의 자리를 펴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내가 무엇이길래 저 거룩한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하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합니까? 도대체 내가 무슨 가치가 있다고,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 그런 수모, 그런 수치를 감당을 하셨습니까? 암만 생각해도 이것은 말로 달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 앞에 여기 먼저 부름 받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서 그렇지 그 십자가의 보혈로 적셔진 우리는 그 엄청난 은혜 앞에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 만약, 예수님을 믿고 사는데도 기쁨이 없다면 그 마음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겼거나,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보다 세상의 것들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성탄절은 이웃을 돌아보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이 영광스러운 현장을 가장 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신 섬김과 나눔의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연약하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고 나의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일을 생각하며, 나의 메마름 때문에, 나의 무정함 때문에 버려지는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 보고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사랑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풀 수 있는 뜻 깊은 성탄을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도 교회는 자양동과 등대 교회에 여러분 가슴에 담긴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저들에게 나누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니다. 아-멘
강림절과 성찬 /눅3:4-6 2013-01-09 14:39:33 read : 10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님들!! 오늘 예배하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오시면서 계단에 정성을 다한 성탄절 장식을 보셨는지요? 지금 우리는 성탄을 앞두고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 지금 12 월을 맞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아니 성탄을 앞두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사람들은 대답 합니다 성탄의 장식을 보며 좋아할 만큼 성탄
강림절과 성찬 /눅3:4-6 2013-01-09 14:39:33 read : 10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님들!! 오늘 예배하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오시면서 계단에 정성을 다한 성탄절 장식을 보셨는지요? 지금 우리는 성탄을 앞두고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 지금 12 월을 맞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아니 성탄을 앞두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사람들은 대답 합니다 성탄의 장식을 보며 좋아할 만큼 성탄을 기뻐 할 만큼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진정한 성탄은 여유가 있기에 편안하기에 무엇인가 잘 풀리는 사람이기에 성탄이 성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성탄이 가져다 주는 축복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세상의 점점 화려해 지고 성탄이 화려해 지지만 성탄의 진정한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청교도 정신으로 세워진 미국에서조차도 성탄절에 “메리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것이 종교적 차별이므로 “해피홀리데이”를 쓰자는 운동이 일고 있음은 충격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화라는 옷을 입고 종교자유라는 옷을 입고 성탄절마저 그 색채가 흐려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지키되 성탄절이 성탄절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 목숨을 걸고 지켜져야 할 용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신기하고 오묘한 방법으로 이 용어들이 교회 안에서 사라져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1) 구원받으셨습니까? - 구원파의 등장으로 이 질문을 우습게 만들어버렸습니다 2) 성령받으셨습니까? - 귀신론을 다루는 2 단의 등장으로 어느덧 교회 안에서는 성령받아야 산다 라는 말이 사라지기 시작 했습니다 3) 주님 재림, 주님 다시 오십니다 -- 이것은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다미선교회를 비롯한 종말론 주의자들 등장으로 교회 안에서 주님 재림을 열망하는 신앙을 물타기 식으로 흐려 놓았습니다 4) 성탄은 어떠합니까? -- 교회 밖에서 더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점점 조용해 지고 있습니다. 점점 성탄이 없는 성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12월은 참으로 중요한 달입니다 지나온 한해를 정리하고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새년을 준비해야 하는 달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12월에 성탄을 두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한해를 정리하고 신앙 안에서 한해를 맞이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탄에 관심이 없습니다 각종 망년회 각종 모임들로 가장 분주한 시간들로 보내고 있습니다 성탄이 세상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 조차 관심에 대상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의 초청 앞에 - 장가 간 사람이라 분주하다 하고 소를 사서 분주하다 하고 밭을 사서 분주하다며 자기 일에 매인바되어 주님의 초청에 관심이 없듯이 말입니다 성탄에 관심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범죄가 가장 난무하는 시간들이 되고 말았다는 것. 가장 거룩해야 할 12 월이 가장 성결해야 할 성탄이 가장 사건과 사고가 나무하는 시간들로 얼룩져 가고 있다는 것 저는 이 모든 것이 누구의 문제냐를 말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성탄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 있어 또 하나 잃어버린 것이 있으니 대강절이라고도 하는 강림절입니다 첫째 : 여러분은 강림절을 알고 계십니까? 원래 기독교 역사는 성탄절 전 4주간을 강림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앞서 그의 오심을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한 기간으로 대강절 또는 강림절이라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큰 절기를 앞두고 그 절기를 준비하는 절기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앞두고 지켜지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부활주일 40일 전부터 주님의 고난에 감사와 함께 그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 사순절 기간에는 금식도 하고 기도운동도 하고 오락을 금하며 많은 절제와 함께 더 많이 기도하고 경건에 참여하니 지금도 이 사순절 절기는 잘 지켜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성탄을 앞두고 지켜지는 4 주간의 강림절입니다 원래 성탄을 앞둔 강림절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역사 중에 최대의 사건이었던 메시야의 오심,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을 미리 준비하여 가신을 영적으로 가다듬는 소중한 절기였던 것입니다 사순절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약간의 어두운 면이 있었다면 대강절은 그리스도의 타생을 감사하며 지켜지는 밝은 분위기를 가진 절기로 볼수 있습니다 1. 그래서 강림절은 점점 더 장식을 하여 꾸며져 왔고 화려해져 왔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12월이 시작되면서 장식을 했던 이유는 12월 첫주가 강림절 시작이었기에 주님 오심을 기뻐하면서 장식을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기간이 점점 화려해 지면서 상업주의도 판치게 되었고 교회 안고 밖에서 진정한 성탄과는 무관한 성탄 분위기로 조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성탄을 잃어버린 성탄이라 합니다. 예수님 없는 성탄 말입니다 옛날에는 성탄에 교회가 제일 화려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교회보다는 백화점과 상점들 그리고 술집 등이 더 극성을 떨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 예수 안믿는 사람이 십자가 목걸이 하고 다니는 것 술집에서 성탄절을 더 기다리는 것입니다 2. 문제는 성탄의 감격도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성탄이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탄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화려하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성탄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성탄이 교회에서 최고의 행사였다 둘째 : 교회역사에 있어 성탄을 앞둔 강림절은 아주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1. 주님 오셨음에 의미를 철저하게 되새기는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 이신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이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을 위해 오셨으니 그 오셨음에 그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인류구원을 위해 오신 아기예수를 최선을 다해 경배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랜기간을 걸어 걸어 아기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며 경배하는 동방박사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또한 성탄을 앞두고 구원을 받은 자로서 주님을 부끄러움 없이 맞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영적으로 자신을 가다듬어야 하니 교회와 성도는 이 기간에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수고하고 더 많이 섬기고 하는 경건 운동을 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자신을 가다듬는 면에서는 사순절이나 강림절 기간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사순절 기간에는 더 기도 더 금식 더 절제하자는 운동이 있는데 비해 강림절 기간에는 이 소중한 마음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자 성탄을 앞두고 있으니 더 기도합시다, 성탄을 앞두고 있으니 더 경건합시다,” 해야 하는데 오히려 성탄을 앞두고 영적으로 무너지고 헤이해 지고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강림절 기간이니 더기도 더 예배 더 은혜 받자 해야 하는데 어디 놀러 갈 생각, 망년회는 누구하고 할 것인가 점점 즐기자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해를 마무리 하고 예수님과 함께 한 해를 설계하는 중요한 기간인데 예수 없는 성탄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묻겠습니다 - 여러분의 성탄에는 예수가 밀려나 있지는 않습니까? 3. 그리고 강림절이 중요했음은 성탄을 뛰어넘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로서 자신을 가다듬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탄에는 세가지 형태가 있다 하겠습니다 1)과거의 성탄입니다 - 과거의 성탄이란 이천년 전에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시간과 공간 안으로 오셨음을 믿고 나를 위해 오신 메시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현재의 성탄이 있으니 - 예수께서 지금 내 마음에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마28 : 20 절의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3)미래의 성탄은 -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약속하신 주님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과거의 성탄을 믿는 것과 동시에 현재의 성탄에 감사하며 앞으로 맞이 할 미래의 성탄을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탄을 앞둔 강림절 기간은 주님의 형상으로서 자신을 가다듬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영적으로 무너지거나 휩쓸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더 기도하고 더 많이 예배하고 더 영으로 충만해져서 25 일 성탄에 주님 오심을 부끄러움 없이 마음껏 환영하는 감사 축제로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성탄을 아름답게 맞는 연습 속에 주님 재림도 기쁘게 맞이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성도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주님 없는 성탄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자신의 즐거움이 아니라 주님의 즐거움이요 내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그러므로 강림절 기간에 성도들의 각오는 어떠해야 합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들로서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셔야 합니까 1. 영적으로 회복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탄에 앞서 강림절이 요구하는 진정한 정신입니다 밀려오는 세상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여러 가지 분주함 속에서 주님을 놓아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특별히 청년들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남성 되시는 분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마귀가, 아담을 건드려 보았던 마귀가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가 갈 것입니다 여성 성도님들!! 가정과 젊은 청소년들을 위해 영적싸움을 싸우면서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메시야의 오셨음을 전해야 합니다 처음 메시야가 오셨을 때 천사들이 그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처음 메시야가 오셨을 때 목자들이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입니다 이제 우리가 전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전하지 않으면 성탄은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1)사실 전도하기 제일 좋은 기간입니다 - 성탄절이 있고 새해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분들이 여러분의 주변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2)믿다가 낙심하고 있는 분들이 있거든 도전하십시오 전하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십시오, 여러분 가슴 속에 있는 예수를 전하십시오 3)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강림절 기간에 하루 한번이상 한 사람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 “성탄절이 무슨 날 인줄 아세요 예수께서 나를 위해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답니다”- 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자신 없으면 길거리 아이들에게라도..... 자신 없으면 등에 업혀 있는 아이들에게라도.... 아니 같이 예수를 믿는 목장 식구들에게라도 예수를 말해보는 것입니다 전해보는 것입니다 “한번 해봅시다--성탄절이 무슨날인지 아세요” *한 신사기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오게 된 간증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 기독교 용품을 파는 가개 앞을 지나던 신사는 어릴 적 교회 다니던 기억을 되새기면서 예수님 사진을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신문팔이 소년이 다가오더니 묻는 것입니다 - “아저씨 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세요 그 분은 이천년 전에 오신 분이예요 그 예수님은 아저씨를 위해 돌아가셨어요” 소년은 그 말을 하고 막 달음질 하여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왜 도망합니까?- 주일날 담당 전도사님이 숙제를 내 준 것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하루 한번 예수님을 말하기 그리고 전하기입니다 - 그 숙제를 하고 자신 없어 도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 도망하던 소년이 다시 오더니 - 이렇게 말 하더랍니다 "그리고요 제가 깜빡 했는데요 아저씨 그 예수님은 다시 오신데요 아저씨 위해서요“ 하고 또 도망하는 것입니다 그 소년의 숙제에 그 신사는 주님의 감동을 받고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 없으면 전화로라도 해 보세요 - 902호 아줌마 얼마 안 있으면 성탄절이네요“ 하고 끊어 버리면 됩니다 - 그러면 궁금해서 다시 전화 올 것입니다 - ”무슨 말이예요“ - 이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좋은 것은 전화 요금도 그쪽에서 내는 것이거든요 주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성탄의 진정한 정신이 살아나길 원하시고 전해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 하루 한번 성탄을 말 하기 운동 말입니다 - 우리 주님에게도 최고의 성탄 선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통해 한 사람이 예수를 영접한다...!! 나를 통해 낙심했던 한 영혼이 돌아온다!! - 놀라운 일 아니겠습니까? 잠 자기 전에 남편에게라도 하십시오 - 당신 성탄이 오고 있는데 알아요!!- 좀 해봐요 눈 오는 소식만 전하지 말고요........ 힘드니까 전도는 하지 말고 전하기만 하세요 _ 3. 성탄을 맞는 강림절의 또 하나의 정신은 섬김이요 나눔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나만의 성탄이길 원하지 안으실 것입니다 연약하고 외로운 이웃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올해도 디딤찬양팀과 함께 청송 보호감호소를 방문하려 합니다 - 처음에는 짐이다 싶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주님이 맡기신 기쁨이라 여겨 봅니다 내의도 사다 주고 간식도 사다 줄 것입니다 강림절 - 여러분을 기다리는 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 말입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할 것을 도전합니다 교회는 강림절이 살아나야 합니다 1)영적으로 깨어 자신을 지키고 영성이 회복되는 소중한 시간이길 바랍니다 2)예수그리스도의 성탄을 전하십시오 - 나를 통해 성탄이 성탄되는 것입니다 3)이웃을 섬기고 이웃을 살펴 작은 예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강림절에 우리는 작은 결단과 함께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살이요 내 피라 하셨던 주님의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성찬과 함께 죄와 허물로 얼룩진 12월에 자신을 지킬 것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가장 성결하고 감사로 성탄을 맞을 각오와 함께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올해보다 내년 주님을 더 잘 섬기고 수고하는 하나님의 사람이겠습니다 하는 각오와 함께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 날 밤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떡과 잔을 나누며 “이것은 내 살이요 내 피라” 하셨습니다 강림절이 시작되는 이날 우리는 주님의 살을. 주님의 피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성찬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없는 성탄이 아니라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성탄이길 원하실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너지는 12 월이 아니라 세상을 정복하는 12월이길 원하십니다 오늘도 성탄은, 성찬은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자 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제자들에게 그리 하셨던 것 처럼 피묻은 손을 우리에게 내 밀것입니다 “이것은 내 살이요 내 피란다”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2-34)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2-34) http://mission.bz/5482대강절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2-34)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이를 뒤집는 말씀을 한다.(34절)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다. 그런데 본문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며 칼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마귀의 지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흑암에서 빛으로 옮겨진 사람이 되기에, 빛과 어둠이 하나님과 사탄이 충돌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영적으로 싸우고 이겨야 한다. 그러면 검을 주러왔노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을 시인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고 검을 주셨다.(요10:32-33절) 세상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시인해야한다. 어떤 손해와 유혹 앞에서도 예수를 시인하기 위해싸우라고 칼을 주셨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브갓네살 왕에게 절하지 않아 풀무불에 던져지기까지 주를 시인했다.(단3:18)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며 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승리 할 수 있는 영적전쟁이다. 믿음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거절 당하고 외면 당한 경험이 있는가? 아직 도박판이나 술자리를 기웃거리지 않는가? 년말 년시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 영적전투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둘째,가족과 영적으로 싸우라고 검을 주셨다. (35-37절)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다. 가족끼리 사랑을 나누고 화목하고 단란하게 지내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먼저는 비록 가족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의미이다.(37절) 이것은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안 믿는 가족이 있을 때 생긴다. 믿지 않는 가족들은 가족보다 예수님을 소중하게 챙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 예수에 미쳤다고 비난하고 핍박자가 된다. 그래서 영적으로 가족들과 싸우라는 말씀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셋째, 자기 십자가를 위해서 검을 주러 오셨다.(38-39)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고 이것은 고통을 가져온다. 그래서 벗고 싶고 피하고 싶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르라!(마16:24) 결단이란 말은 “선택(Choice)”이라는 말과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선택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을 말하지만, 결단이란 말은 하나를 택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수많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길 결단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과 싸워야 할까? (1) 죄와 싸워야 한다. 죄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가진 크리스찬들은 죄와 싸우고 불의와 싸워야 한다. 저항 없이 세상 물결 따라 떠내려가는 사람은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가 없다. (2) 마귀와 싸워야 한다. 영혼이 거듭나서 영안이 조금이라도 열린 사람이라면 순간순간 사탄 마귀가 저항해 오고 핍박해 오고 유혹해 올 때에 마귀와 타협하거나 고난의 길을 피해 가지 않는다.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한다.(약4:7-8) (3). 잘못된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못 박힌 정욕이 다시 살아 발동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한다.(고전9:27) 이런 영적 싸움을 싸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무기, 검은 무엇인가? 첫째, 기도이다. 기도가 없이는 절대로 마귀를 이길 수가 없고 죄를 이길 수가 없다. 둘째, 말씀이다.(히4:12)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쳤다. 맺음말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마귀와 싸우지도 않는 교회는 마귀들이 지붕에서 졸고 있다. 그런데 기도하고 전도하고 영적싸움을 하는 교회는 마귀가 어쩔 줄 모르고 활동한다. 성령 충만하여 살아 역사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영적 싸움을 쉬지 않고 계속하게 마련이다. 서문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탄 마귀의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다. 싸워서 승리하시기 바란다. 편안하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은 자랑하지 말라! 이런 자는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사탄이 깔보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14:27)고 하셨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진정한 평안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사탄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한 이후에 주시는 참된 평안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라 시인하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가족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 사랑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이 주어진다. 출처/이상민목사 설교 중에서 이 게시물을... 목록
경배하러 왔노라 /마2:1-8 2016-04-14 10:31:01 read : 15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경배하러 왔노라 /마2:1-8 2016-04-14 10:31:01 read : 15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마2: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마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마2: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마2: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계보가 두 가지 면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먼저 사람 편에서 보는 인적 계보로 설명하면,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뒤이어 하나님 편에서 보는 신적 계보로 설명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이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성령님은 성삼위 하나님의 삼위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시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1:21 말씀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천사가 요셉에게 일러준 대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시려 함이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쁨으로 맞이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들을 보여주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서로 다른 세 종류의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처럼, 예수님에게 경배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헤롯 왕과 같이, 예수님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주일로 지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를 올바르게 확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헤롯 왕 때에.” 예수님은 헤롯 왕 때 나셨습니다. 헤롯은 로마에 의해서 유대인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본시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 사람 곧 이두매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는 자신의 권좌에 대해서 늘 불안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웅장하게 재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세력에 걸림이 된다고 여겨지면, 무자비하게 죽여 버렸습니다. 성경에는 그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가 나옵니다. 마2:16 말씀입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처럼 헤롯 왕은 잔인했습니다.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유대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마을입니다. 눅2:4 말씀처럼, 유대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곳에서 다윗이 태어나 자랐기 때문입니다. 본시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이사 아구스도의 영에 의해서, 호적을 하러 다윗의 동네인 유대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때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레위 지파가 제사장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메대에서는 마고스 지파가 제사장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의 박사는 헬라어 마고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박사들이 영어에서는 Magi, M-A-G-I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복수형이고 그 단수형은 Magus, M-A-G-U-S입니다. 영어의 Magus가 바로 헬라어 마고스를 음역한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말 성경의 박사는 메대의 마고스 지파를 일컫습니다. 그들은 과학적으로 말하면 천문학에, 미신적으로 말하면 점성술에 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은 매 시대마다 높임을 받았습니다. 단2:48 말씀처럼, 그들은 바벨론에서는 지혜자라고 불렸습니다. 또한 에1:13 말씀처럼, 그들은 바사에서는 현자라고 불렸습니다. 이전의 우리말 성경은 바벨론의 지혜자나 바사의 현자를 모두 박사라고 번역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들은 본시 메대의 마고스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뒤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이 연이어 일어났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높은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다”라는 동사가 미완료 시제입니다. 아직 완료가 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계속해서 말하고 또 말했던 것입니다. 곧이어 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한 내용이 나옵니다.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 지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오면, 쉽게 그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묻고 다녔던 것입니다. 당시는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벨론과 바사의 뒤를 잇는 동방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과거에 자신들이 누리던 영화를 회복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막강한 왕이 세움 받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의 별을 보았습니다. 분명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른이었던 다니엘을 통해서, 또는 그들의 땅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을 통해서, 메시야 사상을 접했을 것입니다. 이제 몇몇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만나는 사람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도 자기들처럼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그들은 아기 예수님에게 경배하러 왔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성경에서 경배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마4:9∼10 말씀입니다.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처럼 경배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또한 행10:25~26 말씀입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여기서 엎드리어 절하는 것이 바로 경배한다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경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계22:8 말씀입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사도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에게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계22:9 말씀입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천사는 요한에게 오로지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나 천사는 경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그러므로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헤롯 왕에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요셉에게도, 마리아에게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아기 예수님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바르게 알았던 것입니다.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에게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세토록 우리의 경배를 받으셔야 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마리아에게 경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결코 경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우리와 똑같은 죄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에게만 경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둘째로,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했습니다. 마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 왕은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지 묻고 다닌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할 때 헤롯 왕은 소동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불안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이 이두매 사람인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새로운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고 떠들며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헤롯으로서는 매우 심기가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동한 것은 헤롯 왕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온 예루살렘도 더불어 소동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헤롯의 잔인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머지않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있을 것임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헤롯 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헤롯 왕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모두 불러 모은 것이었습니다. 헤롯이 그들을 소집한 목적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지 물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반면에 헤롯 왕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동방 박사들이 말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아무튼 이 때 동방 박사들도, 또한 헤롯 왕도 똑같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에게 경배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헤롯 왕은 예수님을 죽여 없애기를 바랐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서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곳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리스도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은 이미 구약성경 미5:2 말씀에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마2: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마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처럼 그들은 그리스도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방 박사들에게서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는 말을 듣고서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즉시 유대 베들레헴으로 뛰어가서, 아기 예수님에게 경배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들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면 동방 박사들이 왔을 때, 헤롯 왕을 두려워하면서 헤롯 왕과 더불어 함께 소동했던 일반 예루살렘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나중에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동조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아우성쳤습니다. 행여 우리도 예수님의 나심이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처럼, 성탄의 달을 무심히 지나쳐 보내지는 않습니까? 그저 세상일에만 우리의 정신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다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저버리는 자리에 이르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탄을 무심하게 맞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나심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고 더욱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기를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헤롯은 가만히 박사들을 불렀습니다. 마2: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헤롯은 예수님이 나시도록 되어 있던 곳이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때였습니다. 장소와 때, 이 두 가지만 알면, 헤롯은 자기가 뜻하는 바를 쉽게 행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가만히 박사들을 불렀습니다. 왜 가만히 불렀겠습니까? 무엇인가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숨은 의도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권좌를 지키기 위하여, 아기 예수님을 죽여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헤롯은 큰 연회를 베풀면서 동방 박사들을 환대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짐짓 박사들이 동방에서 보았던 메시야의 별에 대해서 자기도 관심이 많은 척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박사들에게 그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하게 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동방 박사들의 답변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2:16 말씀을 보면, 헤롯은 박사들에게서 그 때를 자세히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박사들은 헤롯의 교활한 연기에 속아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헤롯은 박사들이 자기에게 잘도 속아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그들에게 아무도 딸려 보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만큼 헤롯은 박사들을 철석같이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자기 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헤롯은 박사들을 속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가 속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헤롯은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2: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은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그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습니다. 첫째,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게 했습니다. 예컨대 그 아기의 이름과 그의 출생일, 그리고 그 아기의 부모와 그 아기가 있는 장소 등등을 알아보게 했을 것입니다. 둘째, 그 아기를 찾으면 자기에게 돌아와서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헤롯은 그 아기를 자신의 정적으로 생각하고서, 그 아기를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헤롯은 박사들을 안심시키려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허울 좋은 구실을 댔습니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은 동방 박사들에게 자기도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에게 가서 경배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선적인 말이었습니다. 헤롯은 박사들을 속이기 위해서, 경건을 가장하여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15:18 말씀처럼,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기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또한 미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더라도 얼마든지 예수님 안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반응을 세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둘째로,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했습니다. 셋째로, 헤롯은 가만히 박사들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성탄에 무관심하지 맙시다. 동방 박사들은 멀리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드릴 귀한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입술만의 경배가 아니라 진정한 경배를 예수님에게 드렸습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에게 경배하기를 갈망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에게 귀한 예물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 모두에게는 성탄을 맞이하는 큰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경배할 때만 주님을/ 마2:1-12/ 대림절제3주일설교/ 2009-12-17
경배할 때만 주님을 마2:1-12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신 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사람이 말했습니다.\\\"너는 나쁜짓만 하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니?\\\" 또 대답했습니다.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나에게는 천국에 들어갈 비책이 있다구\\\" 그 비책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내가 죽어 천국 문 앞에 가면 천국 문을 잡고 열었다 닫았다를 계속 반복하면 문을 지키는 베드로가 \\\"야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아니면 가라\\\"고 소리치면 그때 쏙 들어갈꺼야\\\" 과연 가능할 것 같습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천국도 내 마음대로, 하나님도 내 마음대로, 기도도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고, 성탄절을 지내는 것도 마음대로 하고... 언제나 기준이 나에게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인입니까? 문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있다는데 있습니다. \\\'스트로맨\\\'이라는 한 연구원이 교회에 다니는 청년 7천명을 대상으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니 대답의 60% 이상이 선한생활을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한생활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경배해야 한다, 영광을 돌린다는 대답은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만족케 해 드리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70%이상이 최선을 다해 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없습니다. 순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은 없습니다. 단지 좋은 일만 하고 정성만 하고... 하나님을 믿되, 신앙생활을 하되, 내 마음과 내 계획으로, 내 공로로 천국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경계해야할 이단의 사상입니다. 초대교회가 이 문제로 얼마나 많은 문제를 겪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예배당을 크게 하나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해도 틀림이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존경받아야 합니까? 멸시 받아야 합니까? 이 사람의 신앙의 정도는 어떠합니까? 또 어떤 사람은 예배당에서 평생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바른 삶을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연구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 하고 인도하고 심방도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먹고 살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존경받아야 합니까 비난받아야 합니까? 또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예배당에서 성도로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수요예배, 금요예배, 구역 예배등 각종 예배와 행사에든 빠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먼 곳까지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느냐고 묻습니다. 대답합니다 \\\"나는 교회 다니는게 좋아서 그래\\\" 교회에 열심히 먼 것도, 힘든 것도 마다하지 않고 오는 분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도 보면 멀리 인천에서, 금촌 에서, 일산에서, 분당에서, 안양에서 곳곳에서 열심히 옵니다. 그러면 그분들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합니까? 기뻐하시고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상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분명히 이 세 사람의 신앙이 좋습니다. 교회를 짓기 위해 전 재산과 노력을 다 바쳤습니다. 예배당에서 봉사하기 위해 전생애를 바쳤습니다. 예배당에 오기 위해 시간과 열심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을 오늘 성경에서 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헤롯왕입니다. 둘째는 대 제사장과 서기관입니다. 셋째는 동방박사들입니다. 이세사람은 여러분의 판단대로라면 분명히 신앙이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헤롯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을 세번째로 지은 사람입니다. 예루 살렘 성전의 첫번째는 솔로몬의 성전이고 두번째는 수룹 바벨의 성전이고 세번째는 헤롯의 성전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 성전이 바로 헤롯이 지은 성전입니다. 많은 돈을 들여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 유대 땅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두번째,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예배당에서 평생을 일하며 평생 주를 위해 제사드리는 일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지난 주간 한 방송국의 특집을 통해 몇 교회의 세습을 문제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었습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세습이라는 말도 싫고 그러한 일에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사된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목사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결코 쉬운 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속에 살면서도 세상 사람 같이 살수 없는 것이 목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루 24시간, 1년365일 교회 안에서 살아야 됩니다. 때로는 아내도 목사처럼, 자녀들도 목사와 같이 살라고 합니다. 한때 아이들이 크면서 말썽 아닌 말썽이 있었습니다. 아빠가 화가 나서 매를 들었더니 아이가 하는 말이 \\\"아빠 목사딸로 나도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줄 알아?\\\"라고 합니다. 정말 아내는 옷을 입어도 어두운 계통의 옷만 입고, 저는 강요하지 않는데 아이들에게 까지 부담을 준다고 생각을 하니 그 이후로 아이들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목사의 삶이고 목사의 가정입니다. 그런 목사님이 아들을 목사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일 하다가 좋은 일만 있지 않습니다. 속상한 일도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아이들에게 하면 아이들이 크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교회를 사랑하겠습니까? 예수 믿을만 하다고 느끼겠습니까? 어디 가서 마음놓고 속상한 얘기 하지 못하는 것이 목사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또 목사가 된다는것, 그것만 봐도 얼마나 부러운 일이니 모릅니다. 큰 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목사 자체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믿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어떤 분은 말하기를 일주일에 한번 설교하고 봉급받으니 얼마나 좋겠느냐 고 합니다. 그 사람말대로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말에 동조해서 안됩니다. 비난을 하기 전에 그들의 수고도 알아줘야 합니다. 목사가 대접만 받고 산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목사님만 대접하고 삽니까? 비난이나 정죄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심판을 하나 님이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야 합니다. 수원에 있는 김장환 목사님, 이분은 어려서 구두닦이를 한 사람아닙니까? 이분의 부인은 미국인이어서 태어난 아기가 혼혈아였습니다. 이런 자식들이 크면서 얼마나 어려움이 있는지 아십니까? 혼혈아면서 목사의 자녀, 어디가도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아이들이 사춘기일때는 교회에는 죄송하지만 크리스마스 때가되면 휴가를 받아 미국에서 아이들과 같이 지냈다고 합니다. 교회는 일못하면 사임하면 되지만 아이들이 잘못되면 누가 책임져 줄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난을 하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아이들을 책임져 주지 않기에 본인은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수고는 대단한 것입니다. 오늘 목사들의 수고가 그렇다면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수고는 어떻겠는가를 우리는 상상해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메기\\\'라고 하는 별을 연구하는 점성술가들입니다. 십수년전에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점성술가를 찾아 다니면서 자신의 미래, 미국의 미래, 세계의 미를 물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습니다. 과거의 점성술가는 지금의 무당들과는 달리 하늘은 연구하고, 천계를 연구하고, 영계를 본다고 해서 소위지도자 급에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신라의 역사, 중국의 역사, 동방의 역사를 보면 특히 점성술가들은 대단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임금 옆에서 일을 했습니다. 이들은 베들레헴까지 시간을 들여 왔습니다. 오늘 11절 말씀에도 보면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께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곳은 분명히 마굿간인데 말씀에는 분명히 그 집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헤롯이라는 임금이 2살 밑에 어린 아이를 다 죽였으니 적어도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한두시간, 하루이틀이 아니라 일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헤롯은 성전을 지어 물질을 드리고,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일생을 바쳤습니다. 박사들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참으로 귀한 헌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탄생한 그 시대적인 상황속에서는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지만 그 로마의 시대가 평화의 시대라고하는 말은 몇 사람만이 말하는 것이지 대부분의 식민지 사람들은 메시야 대망사상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 별을 연구하는 이들이 하늘의 별을 보고 \\\'아 저것은 메시야가 탄생한 증거이구나\\\'라고 알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리고는 동방에서부터 그 별을 보고 태어나신 왕께 경배하러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먼저 어디로 갔습니까? 별을 좇아 오다가 예루살렘쯤 와서는 왕궁에 갔습니다. 적어도 별이 비춰지고 있는 그땅, 그 땅의 지도자는 적어도 그 별과 함께 메시야 대망의 감격과 기쁨이 있지 않겠는 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왕은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들이 알려 주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러 가자고 하니 문제가 생 겼던 것입니다. 메시야가 탄생한 것은 좋은데 그 분에게 경배하러 가자고 하니 문제가 된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일생을 주를 위해 살겠다고 한 이들도 경배하러 가자고 하니 문제가 되었다는 것, 우리는 이사실을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를 지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반대로 직분을 맡아 일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자고 했더니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교회를 지었고, 직분을 맡았고 시간을 드려 일을 하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입니다. 내가 교회도 지었고 시간드려 일도 했고 선교사도 보냈고 헌금도 했는데 무엇을 더 예배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측면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전을 건축하고 일을 많이 했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생명은 누가 주었습니까? 내가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재물은 누가 주었습니까? 직분은 누가 준 것입니까? 지혜는 누가 내게 준 것입니까?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께 지음받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앞에서 언제나 무슨 일이든지 경배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 즉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예배하는 것 앞에서는 일한 것, 직분, 시간을 바쳤다는 것은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모두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받은 것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경배하자고 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까? 헤롯은 경배하자고 하니 이제까지 자신이 한 일이 있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왕권을 빼앗길까봐 자신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까지 죽이려고 두살 아래 아이들은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자고 하니 대 제사장들은 알고도 가지 않았습니다. 단지 박사들이 가고 목자들이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이자리에 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오히려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상 숭배자였을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이들도 우상숭배자였지만,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주님 앞에 경배했다는 사실 하나가 오늘 우리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했다는 그 한마디가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내 생각과 내 경험, 내 일대로 하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아픈 일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무엇입니까? 그 말은 그리스도와 마스, 즉 예배라는 뜻의 복합어로 그리스도께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예배하고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말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어떤 사람은 X-마스, 예배가 없는 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날입니다. 그것이 중요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주님 앞에 오라고 했습니다. 이제까지 한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언제든지, 어디 서든지 하나님을 경배할 자세가 되어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교회교인이 아니지만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합니다. \\\"나 교회일을 괜히 했나봐요\\\" 조용히 평신도로 살껄 일하다가 괜히 말 듣고 상처받고 일하다가 힘들다고 말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미안하지만 일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 일도 하나님이 하게 하셔서 그 일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에게 있어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심고 아무리 물을 줘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뭐가 그렇게 조급하고 뭐 때문에 다퉈야 하고 상처 입어야 합니까? 기다리시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 경배하는 사람이야말로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스답게 보내는 사람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한번이면 되지 뭐 그렇게 매번 하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일은 일반 사람들의 생일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다시 오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첫번째 오실 때 그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주님 다시 오실 날에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점검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박사들은 어떻게 주님께 경배했는지 말씀해 줍니다. 1.기쁜 마음으로 경배했습니다. 별이 비춰지니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앞에 예배하는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별이 비췰 때 그 별이 있는 곳에 메시야 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박사들이 제일 먼저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저 좋다고 말만하고 들어갔겠습니까? 빨리 경배하고 집으로 돌아 올 것을 생각했겠습니까? 그 곳에 주님이 있다는 사실 앞에 다시 한번 옷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서로의 옷과 머리를 봐주고 자신들의 예물을 들고는 조심조심해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기쁨으로 경배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의 형편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앞에, 주님이 오실날이 바로 이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앞에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발도 닦고 머리도 잘 매만지고 옷도 깨끗이 하고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2.엎드려서 경배했습니다.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은 주님앞에 최선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뭐가 그렇게 자랑스럽습니까? 성전을 짓고 일생 주를 위해 살았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마땅히 엎드려야하지 않습니까? 주님 때문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착하게 살았던 사람이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몽둥이를 든 베드로가 그를 인도했습니다. 평생을 착하게 살았던 사람이 생각하기를 \\\'내가 들어가면 크게 환영하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천국문에 들어가니까 아무런 환영도 없이 그냥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섭섭한 마음에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첫눈에 봐도 너무나 부자였습니다. 목걸이며 반지, 옷입은 것도 너무나 부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부자에게 아주 기쁘게 환영을 했습니다. 이것을 본 착한 사람이 참 실망했습니다. \\\'천국도 별수 없구나 나는 별로 환영하지 않고 저 부자는 크게 환영을 하는가\\\' 그래서 착한 사람이 베드로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왜 천국에서 까지 차별을 두어 부자는 환영하고 나는 이렇게 환영하지 않습니까?\\\" 이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천국에는 당신같이 착한 사람은 하루에도 몇백명씩 들어오지만 저런 사람은 몇백년 만에 한 사람 들어올까 말까 해서 환영했습니다.\\\" 우리가 직분 맡고 일하고 나서 엎드리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엎드려야 합니다. 3.예물을 드려 경배했습니다. 황금과 유황과 몰약입니다. 그것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어느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왕에게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아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삶을 마땅히 살아야 될줄로 믿습니다. 16세기에 가르멜의 수사였던 \\\'브라더로렌스\\\'라는 사람이 수도원 주방에서만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언제나 얼굴이 환하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늘 주방에서 지저분한 일만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환하고 기뻐할수 있습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후라이팬의 부침개를 뒤집을때에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데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찾고 갖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무슨 일에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때에도 그 사랑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이 더 쉽고 간접적인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작은 일 하나에도 하나님 앞에서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섭섭해도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아도 자기가 잘났어도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 때 주님이 오시면 기쁨으로 맞이 할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온 맘과 뜻 다해 주 사모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어떤 분이 말씀하기를 올해 크리스마스는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해는 갑니다. 모든 사회적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있어서는 시대적인 분위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형편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크리스마스를 통해 주님이 오심을 오늘도 기쁨으로 맞이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세주 납시오 /막1:1-8/ 대림절 2015-12-30 20:50:29 read : 19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 절기 상 대강절(待降節 Advent)입니다. 대강절은 대림절(待臨節 Advent)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성탄 4주 전부터 성탄절까지 이어지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을 기념하고 맞이하는 시즌입니다. 세상은 성탄절을 장삿속과 향락거리로 기다리지만, 그리스도인들
구세주 납시오 /막1:1-8/ 대림절 2015-12-30 20:50:29 read : 19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 절기 상 대강절(待降節 Advent)입니다. 대강절은 대림절(待臨節 Advent)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성탄 4주 전부터 성탄절까지 이어지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을 기념하고 맞이하는 시즌입니다. 세상은 성탄절을 장삿속과 향락거리로 기다리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차분히 자세로 성탄을 맞이해야 합니다. 성탄절의 핵심은 두말할 필요 없이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성탄절 문화가 세속화되면서 예수님을 빼놓고 흥청거리는 모습입니다. 장삿속이나 향락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왜곡된 문화에 휩쓸리지 말고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시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대강절이 중요합니다. 미리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마가복음 1장을 통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준비를 할 수 있을지 살펴봅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성탄 기록이 없습니다. 4복음서 중에서 유독 마가복음에만 성탄 기록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에는 1장에 예수님의 족보,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르쳐 준 사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한 사건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1장 후반부에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성령 잉태를 알려준 사건, 2장에는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한 사건, 목자들이 찾아와서 경배한 사건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건 기록은 없고 대신 신학적으로 성탄을 설명합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합니다. 이를 가리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 부릅니다. 마가복음은 성탄의 자세한 기록, 예수님의 30세 이전까지의 모습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가복음의 특징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집중해서 간략하게 역동적으로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하나남의 아들이 성탄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더 나아가 삶 속에 모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성탄 후 2천년이 지났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성탄절이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에 등장한 세례 요한의 이야기부터 꺼냅니다. 그가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에 성탄 기록이 없어도 그를 통해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해야할지 준비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요한에 관한 이야기는 대강절에 꼭 읽어야 할 말씀 중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요한이란 이름은 아주 흔합니다. 동명이인이 수두룩합니다. 그래서 공생애 직전 예수님의 등장을 준비하는 세례를 베푼 사람이란 뜻으로 세례 요한 이렇게 구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는 본래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 태어난 사람입니다(눅1:5~23,57~80)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늙기까지 아이를 갖지 못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극적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태에서부터 성령 충만했던 사람으로 일찍이 집을 떠나 광야에서 기도하며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그가 대중 앞에 등장하기 전의 모습이 눅1:8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1] 세례 요한의 사명 : 구세주의 행차 준비 세례 요한은 흔히 구약시대 마지막 선지자로 부릅니다. 구약성경 마지막 책이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가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가 대중 앞에 등장해서 한 일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차를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옛날 임금님이 행차하실 때 어떻게 합니까? 미리 신하가 앞서 나가 준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상감마마 납시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요한도 예수님이 오심을 미리 증거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한 일은 “구세주 납시오!” 이 말을 선포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막1:1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먼저 예수의 이름은 그 뜻이 마1:21에 나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했을 때 영문을 모르던 정혼자 요셉이 고민에 빠집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고 그 아기가 태어나면 붙일 이름을 알려줍니다.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즉 구원자(=구주,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메시아(히브리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직분에 취임할 때 기름을 머리에 붓는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 등 세 가지 직분에 해당됐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런 역할들을 감당하신다는 뜻입니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고 바른 길로 가르치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리스도란 이름도 예수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Savior)라는 말입니다.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저주와 멸망에서 구원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은 갑자기 행한 일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었던 일입니다. 막1:2~3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여기사 ‘나’는 하나님, ‘너’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나의 사자’(My messenger)는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이 외치는 소리처럼 사명을 감당하는데, 그 내용이 바로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구세주가 행차하시니까 길을 잘 닦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고대에 왕이 행차하시면 미리 길을 잘 닦아 놓았습니다. 요즘처럼 도로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왕의 행차 시 미리 길을 닦아 놓는 것은 필수적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2] 구세주 영접 준비 : 회개 → 마음의 길 준비하기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오시는데 미리 길을 준비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미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왕의 행차 시 길을 준비하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니까 결국 마음의 길을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예수님의 공생에 직전 마침내 등장하는데 맨 처음 한 일이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막1:4~5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회개의 세례는 오늘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와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의 세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씻음을 의미하는데 비해 세례 요한의 세례는 회개한 것을 확인해 주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을 회개하는 마음을 준비시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게 했음을 의미합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범죄하고 타락해서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가고 있던 사람이 이제 돌이켜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길을 하나님께로 향해 닦아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풂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그 마음의 방향을 구세주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한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의 일을 길을 닦는 것으로 이렇게 묘사합니다. 눅3:3~6 눅3:3~6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사40:3~4)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마가복음의 기록보다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길을 준비하는데, 골짜기는 것을 메우고, 산이나 구릉 언덕 같이 높은 것은 깎아 내리고,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하고, 울퉁불퉁하고 험한 것은 평탄하게 만들라고 말합니다. 구세주가 오시기 좋게 길을 닦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길은 마음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예수님이 임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잘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마음의 준비를 어떻게 해야 될까요? ① 정결한 마음: 첫째, 더러운 마음을 정결한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마음에는 오시지 않습니다. 정결한 마음에 오십니다. 팔복 중 제6복의 말씀 마5: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정결해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예수님도 정결한 마음에 임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 마음이 추하고 악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게 통회 자복입니다. 다윗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범죄한 적도 있었지만 통회 자복함으로 마음을 정결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성군이란 이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쓴 참회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성탄을 준비하면서 우리 마음을 정결한 마음으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만삭이 되어서 요셉과 함께 호적 하러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빈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구간애서 탄생하셨습니다. 사실은 빈방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여관에 방이 없어도 마음만 먹으면 방 하나 비우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예비로 남겨둔 방이 있을 수도 있고,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방 하나를 비울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빈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관 주인의 대목을 보려는 탐욕, 불편을 감수하기 싫어하는 손님들의 이기심으로 가득한 마음에 예수님을 모실만한 빈방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에 살다 보니까 탐욕으로 마음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오실 수 있는 마음의 길이 열립니다. 어느 선교단체의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안건 처리를 마치고 본래 해외에서 사역하다 국내 본부에서 사역하던 선교사가 다시 복귀한다며 인사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서 몇 년 지내다 보니까 그동안 짐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떠나기 전에 짐 정리를 하느라 분주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면서 그 선교사가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선교지에서는 이런 것들이 없이도 충분히 살았었는데 … ”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욕심이 많아서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도 군살이 얼마나 쪘는지 모릅니다. 마음의 다이어트를 해야 합니다. 부디 이번 성탄절을 앞두고 마음의 다이어트를 해서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실 수 있도록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② 겸손한 마음: 둘째, 교만한 마음을 나줘 겸손한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낮은 데 임하십니다. 마음이 높아지면 예수님을 모실 마음의 길이 없어집니다. 마음이 낮아지면 예수님이 기쁨으로 임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는 물과 같아서 낮은 데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만하면 망하고 겸손하면 흥합니다. 잠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수도 예루살렘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왕족이 사는 왕궁이나 귀족이 사는 저택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천사들이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준 대상도 비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현지에 가면 예수탄생기념교회가 있습니다. 많은 순례객들이 방문하는데, 넓은 광장을 지나면 교회당 입구가 나옵니다. 그리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높이가 불과 1.2 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처음 건축할 당시에는 입구가 제법 높았는데 말을 타고 들어가는 것 방지하기 위해 입구를 낮추었다고 합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겸손히 머리 숙여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그 문을 가리켜 ‘겸손의 문’이라 부릅니다. 제가 오래 전 성지순례 갔을 때 그 교회당을 방문했는데 입구에 보니까 한국인 순례객 중에 누가 써 붙였는지 쪽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머리 조심’이란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 쪽지를 읽고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까 너무 중요한 겁니다. 육신의 머리도 숙여야 하지만 마음의 머리도 숙여야 합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1992년 템플턴상을 수상할 때 거듭 고사하다 하는 수 없이 수상했습니다. 시상식 자리에서 그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이런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한 죄인입니다.” 그 시절 주기철 목사님 같이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분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하고 말았습니다. 해방 후 일언반구 회개하지 않고 그때는 그룰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합리화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을 그것을 철저히 참회하셨습니다. 상금을 자신이 쓸 수 없다면 전액 북한선교헌금으로 드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칭송하고 높였지만 자신은 늘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이번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마음을 낮추고 겸손함 마음의 길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오심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③ 정직한 마음 : 셋째, 부정직하고 불의한 마음을 정직하고 정의로운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상류층에게 임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탐관오리 많았는데, 그들은 가난하고 천한 백성들을 억압하고 강탈하는 등 횡포를 부렸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다행히 그들 중의 일부는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어떻게 해야 구세주를 영접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한 말이 눅3:12~1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모든 부정직과 불의를 회개하고 정직한 마음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시15:1~2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정직한 마음이 있는 자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런 마음에 예수님도 임하십니다. 오래 전에 교보문고에 한 남자로부터 편지 한 통이 배달됐습니다. 본인이 옛날에 책을 여러 권 훔쳐간 적이 있는데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서 마음이 걸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용서를 비는 편지를 쓰게 됐다는 사연입니다. 그리고 책값에 해당되는 금액의 수표를 동봉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회개하고 정직하게 살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이나 부정직함으로 실수하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정직한 마음을 준비할 때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남에게 준비하라고 하기 이전에 본인이 구세주 영접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삶으로 실천했습니다. 막1:6~8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그는 제사장 가문 귀족 집안의 자제였습니다. 얼마든지 편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로 나가서 살았습니다. 낙타털 옷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 탐욕을 버리고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뒤에 오실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욕심이 없는 청결한 마음, 교만이 없는 겸손한 마음, 불의가 없는 정직한 마음을 준비함으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금년에도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매년 기계적으로 맞이하고 보내는 성탄절이 아니리 매년마다 새로운 성탄절 되어야 합니다. 이미 오셨지만 또 다시 내 마음에 오시기를 소원합니다. 부디 이번 성탄절에도 구세주 예수님을 마음 속 깊이 영접함으로 그의 은혜를 받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디 세례 요한의 메시지 “구세주 납시오!” 그 외침을 들으시고 마음의 길을 준비함으로 복된 성탄절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구세주가 세상에 오심
구세주가 세상에 오심 성경 : 마 1:18-2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것은 주께서 선지자 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 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함이라](마 1:18-23). = 서론 = 성탄절은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또한 동서고금을 막론 하고 나라와 종족을 초월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절기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의 말씀을 가지고 구세주가 세상에 오신 이유와 배경에 대해 알아 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천사가 와서 요셉에게 들려준 소식은 두 가지 예언의 말씀이었습니 다. 첫째는 22,23절에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하신 예수님이 나시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한 예언이 이루어진 상태를 예언한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시대순, 즉 이사야의 예언부 터 다루고자 합니다. 1. 이사야의 예언 - 소망의 예언 본문에 인용한 예언의 말슴은 이사야 7장 14-16절로써 [그러므로 주 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이사야에서 두번( 7:14,8:8), 본문 에 한 번 나타날 뿐 다른 곳에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임마누엘은 누구일까요? 그분은 어떤 분일까요? 그 대답은 이사야 9장 6,7절에서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 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 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 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즉 이사야로부터 수세기가 지나 천사가 한 여인의 꿈 속에 나타난 그 예언의 궁극적인 성취가 임박했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 스도의 탄생은 옛날 이사야의 예언 속에 담겨 있는 그 광대한 가치를 성취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하여 장차 태어나실 분은 어떤 분일까요? 첫째로 기묘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이하고 묘한 자 라는 뜻으로서 주님의 가르침과 사역, 탄생과 죽음, 부활과 승천 이 모든 일들이 기묘하게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모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온갖 피를 잘 내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잠언의 지혜와 동 일시하고 있습니다. 셋쩨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 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전능하신 하 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넷째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씀은 영원한 보호자라는 뜻입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 한 자라](계 1:8) 는 말씀대로 주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 분입니다. 다섯째로 평강의 왕으로 묘사된 것은 주님께서 참된 평화를 가져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했을 때 주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시므로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 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는 위와 같은 이 름을 가진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며, 임마누엘은 그의 백성 가운데로 요셔서 낮아진 상태에서 그들과 고락을 함께 나눈다는 뜻입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전진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인간 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인간 세계에 무슨 낙이 있으며 무슨 소망이 있기에 이 세상에 오시려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단순합니다. 바로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고통많고 슬픔많 은 인간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천사의 선포를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며 마리아 는 그 말씀을 듣고 찬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들도 그 사실을 듣고 믿었기에 온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 니다. 지금 우리들은 이들보다 더욱 믿기가 쉽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이 수세기에 걸쳐 실행되어 온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계에 널리 전파해야 될 것입니다. 2.천사의 예언 - 성취의 예언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절). 성경은 한날 목수에 불과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며 곧고 진실한 사 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셉의 약혼녀인 마리아는 옛부터 내려오는 히브리인의 아름다운 풍습에 따라 요셉과 앞날을 약속한 여 인이었습니다.이러한 약혼기에 거룩하고 신비한 이적이 생긴 것입니 다. 그것은 마리아가 잉태를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26-38절에 보면 마리아가 잉태하기 전 가브리엘 천사장 의 수태고지가 있었고, 또한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을 가만히 끊고자 할 때에 천사가 현몽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는 사실을 알려 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에게 현몽하여 전해 준 천사의 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 흔하고 평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란 구원자를 의미하는 히브리 이름인 여호수아의 헬라어 이름입니 다. 천사는 바로 그 이름을 아이에게 주라고 한 것입니다. 2)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백성은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한마리도 압작 당하고 유린당한 백성이요 참목자를 잃은 어린양들이었습니다. 3)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외적인 것과 싸우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마음 의 죄에서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근본 적인 문제의 해결자로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때 천사가 요셉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아기에게 주라고 한 이유는 오직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은 이루어 져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그 백성과 함께 하셨으며, 또한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 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 입니다. = 결론 = 오늘날 아니, 지나간 세대와 오는 세대에 있어서 이름만큼 수없이 불 려지고,흠없고, 찬양받을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이렇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 사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심으로 임마누엘에 대한 소망은 완전하게 성 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영원한 통치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인 간 예수를 통하여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사 왕국을 건설하시고 영원토 록 그 왕국을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구원의 소식을 널리 전함으로 성탄의 기쁨이 온 세상에 충만하기 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유의 아기/눅2:10-12
구유의 아기 눅2:10-12 성탄절이 바로 눈 앞에 왔다.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이 날에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여러가지 파티도 벌리고 행사도 한다. 선 물도 주고 받는다. 보너스도 많이 받고 싶어한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사랑하 는 사람들끼리 행복한 시간을 갖고 싶어한다. 그것도 좋다. 어떤 방법으로건 행복해 지는 건 좋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려는 것은 그 수준이 아니다. 이 성탄절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에 확실하게 오셨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이 먼 하늘에서 그냥 인간을 돕고 축복하는게 아니다. 세상으로 들어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내려 오신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이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다. 그가 왕궁에서 난게 아니다. 그가 부자집에서 난 것도 아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마구간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황제가 신민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자기가 속한 곳 에 가서 호적에 등록하라는 것이다. 명령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고향으로 부 리나케 돌아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어머니도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달려 갔다. 해산날이 되었는데 여관에는 방이 없었다. 아마 돈이라도 많이 있었더 라면 구했을 것이다. 할 수 없이 남의 집 마구간을 숙소로 빌린 것이다. 이야기는 본래 여러 백년 전부터 예언된 것이다. 구약의 여기 저기에서 부분적으로 예언된 것이 모아져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기에 천사가 설명해 준다. 목자들이 밤에 양들을 지킬 때 천사들이 나타나 말해준 다. \"너희가 기다려오던 구세주가 나셨다.\" 그리고 그 증거까지 말해준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그것이 바로 증거이다. 이상한 증거이다. 더러운 말구유에 아기가 놓였는데 그것이 증거라는 것 이다. 사람들은 예사로이 보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마구간에서 나고 아기 놓 을 침대가 없어서 차마 땅바닥에 놓지 못해 말밥그릇에 놓았을까! 세상의 눈 으로 보면 이처럼 한심한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아는 사 람들은 말구유의 아기야말로 구세주의 참된 증거인 것이다. 이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의 질고를 짊어진 것이다. 그의 한평생 어디 인간의 질고를 외면한 것이 있었던가!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인 간들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받으려함이 아 니다. 섬기려하는 것이다. 오! 이 원리를 우리 모두가 깨닫는다고 한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저 다 주고 섬기려고 한다면! 키엘케골은 성탄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 나라에 임금이 있었다. 그에게 는 모든게 있었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 그것은 바로 아내였다. 그는 아 내를 원했다. 그는 변장을 하고 거리를 자주 다녔다. 혹시 자기 마음에 드는 처녀를 찾을 것 같아서였다. 어느날 그는 가난한 농가를 지나다가 들에서 일 하는 처녀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 잡히고 말았다. 그는 그녀 앞에 왕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면 결혼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권위와 명령을 가지고 결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왕비는 얻겠지만 아내는 얻을 수 없다. 그러면 중매를 통해서 만날 것 인가?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변장을 하고 나타날 것인가? 그것은 거짓의 방 법이다. 다른 사람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그는 결심했다. 나는 농부가 되겠다. 국사는 믿을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농부가 되겠다. 그는 품군 농부가 되었다. 농부의 옷을 입고 음식을 먹 었다. 완전히 그들중 하나가 되었다. 힘든 일을 하면서 그 아가씨의 사랑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세상에 오시는 마음이 그것이다. 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기 속에 이 마음이 주어졌음을 알아야 할텐데.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자기 입장에서 하는게 아니다. 자기 원하 는대로 자기 입장에서 마구 말하고 명령하는게 아니다. 사랑은 같아지는 것 이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비판할 자격이 되어 있지 않다. 또한 상대방의 입장이 되기 전에 그들을 이끌어나올 힘도 없는 것이다. 왕은 이렇게 해서 농부의 딸과 결혼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방법이었다. 성탄은 구원의 시작이었다. 왕이 농부가 되는 것 정도가 아니다. 영원하 신 하나님이 유한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인형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이 인형이 된다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하나님이 인간 이 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하셨다. 그 는 사람을 사랑하셨다. 그는 사람중에 가장 천한 사람이 되셨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33년은 온통 섬김의 삶이었다. 왕이 농부를 섬기는 것은 차라리 참을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배신할 인간을 섬기는 것, 그리고 영원한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보통 인간 이 극복할 수 없는 모든 삶을 인간으로 극복했다. 죽음까지 지옥까지 하나님 의 진노까지 다 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말한다. \"이게 다 너희 것이다.\" 이 하나님이 우리 속에 태어나야 한다. 마굿간이 어디인가? 우리 마음 속 아닌가! 나는 깨끗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마굿간 이 아니다. 그것은 왕궁이다. 사람들은 왕궁 옆을 배회한다. 화려한 모습의 사람들 속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천만에, 거기 아무도 날 도와줄 사람이 없다. 교만한 마음, 정죄하는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구유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복음의 말씀이다. 거기에 구세주가 담겨있 다. 들여다보라. 거기 아기가 있다. 거기 구세주가 있다. 스스로 확인해 보 라. 강보에 싸여 말씀에 누워있는 하나님을.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 도록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가 확실하게 살았다는 그 사실이 우리 에게 증거가 된다. 실제로 그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증거이다. 이제 그의 삶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 그리고 그가 자기를 통해서 살 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경험한다. 그리고 구원의 능력을 맛보게 된 다. 구원의 경험이 무엇이고 구원의 능력이 무엇인가? 지금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평안하고 기쁘다면 우리는 구원을 맛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 에 의해서 되고 있다면 우리는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 마음 속을 들여다 보라. 양심에 깨끗함이 없다면, 불안하다면 걱정 과 근심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건 구원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남에 대한 미움, 역시 마찬가지이다. 돈 걱정, 미래 걱정, 병의 고통, 모두 가 마찬가지이다. 어떠한 상태이건간에 괴로움에 잡혀 있다면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세주는 이것들에서 해방하신다. 그러면 예수를 믿으면 이런 근심 걱정이 전혀 없단 말인가? 병도 없고 실패도 없고 실수도 없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미 천국에 있는 것이다. 하지 만 우리는 아직 세상에 있다. 고통과 결핍과 배신 그리고 오해 각종 아픔으 로 붉게 물들여져 있는 곳이 바로 세상이다. 바로 죄와 악의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런 괴로움들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는 이런 문제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문제를 피하려면 죽어야 한 다. 사람마다 잘 극복하는 문제도 있고 약점도 있다. 잘 못하는 분야도 있 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좋아하는 일과 나 좋아하는 사람으로만 이루어진게 아니다. 신자도 불신자와 똑 같은 세상에 산다. 아니 신자는 불신자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산다. 그래서 각자의 십자가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곧 능력이다. 이것들을 다 극복하고도 남을 능 력이다. 그것은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자기의 머리를 잘 쓰거나 재산이나 권력으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 도가 모든 고난에서 자유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유케 하는 것이 바로 그 능력 이다. 그것을 사용해보기 전에 아직 우리는 구원을 맛볼 수 없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바로 성탄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세상 에 오시는 기적으로 그친다면 그래서 우리 밖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그친다면 우리에게 구원은 없다. 그리스도의 성탄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야만 우리에게 구원이 경험된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탄생 과 삶이 나를 통해서 실제로 이루어져 가겠는가? 이것이 신자의 삶인데. 중요한 모임에 가기 위해서 마음 속에 입을 옷을 생각한다. 그래서 준비 를 다하고 마지막에 옷을 입는다. 옷장에서 꺼내보니 형편없이 구겨져 있다. 구겨진 옷을 입고 나갈수는 없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다리미다. 다리미는 구겨진 옷을 펴는 필수적인 기구이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는 반드시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시집가는 색시는 꼭 다리미를 가져간다. 이 다리미가 일을 하려면 반드시 열이 있어야 한다. 자기 혼자서는 절대 로 힘을 쓸 수 없는게 바로 다리미다. 요즘에는 편리한 전기 다리미를 많이 쓴다. 그러려면 한 쪽 끝이 소켓에 꽂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뜨거워 지게 된다. 아무리 좋은 다리미라도 전원에 꽂히지 않으면 절대로 힘을 쓸 수 없다. 그래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끝을 꽂아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슴도 뜨거워지려면 그리스도에게 꽂혀야 한다. 포 도나무가 줄기에 붙어있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 도에게 붙어있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삶이 시작된다. 그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만 가능하다.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 보라. 정말로 그리스도가 내 속에 지금 계신가?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를 대하고 남을 대하는가? 이 질문에 \"예\"하고 대답할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누가 말을 하든간에 무엇이 속상할 것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에 언제나 계셨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언제나 사랑으로 뜨거웠다. 이제 똑 같은 일을 하나님은 내 속에서 하고 싶어하신다. 자. 부정하지 말자. 이 말씀을 받아들이자. 하 나님은 예수를 마굿간처럼 낮추셨다. 그리고 거기 탄생하시고 사셨다.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성탄이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 님으로 채우자. 그러면 그리스도처럼 극복할 것이다. 그는 외로웠다. 그는 가난했다. 그는 연약했고 그는 오해받았다. 그는 모두에게 배신 당했다. 그 는 비참하게 너무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속의 하나님 으로 구원을 받았다. 지금 우리도 그것을 맛보아야 한다. 가난도 역경도 미래도 모두다 같은 방법으로 극복한다. 그리스도가 한 것처럼 나도 하는 것이다. 정말로 마굿간 같은 내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가? 그리스도는 잘난 곳 왕궁에는 나지 않으신다. 겸손히 회개하고 자신을 낮추 는 마음에 나신다. 마음에 꺼리낌이 있다면 그리스도는 안계신다. 그러므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확실하면 일어나라. 그리스도로 일어나라. 이 말을 당위론으로 들으면 않된다. 왜 할 수 있는데 저항하겠는가! 하 나님이 도와주시겠다는데 반대할 것인가? 않된다. 하나님께 다 맡기자. 그리 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자. 그리스도처럼 가슴을 덥혀보자. 원수를 용서하고 자기 모욕하는 사람을 사랑해 보자. 이것이 이상론인가? 아니,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경험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것이 성탄을 경험하는 길이다.
귀한 선물 /요3:16-17 2015-04-07 00:31:12 read : 18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등산객이 험한 산을 오르다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해는 저물고 갑자기 눈보라까지 세차게 몰아쳐 ‘이렇게 죽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즈음에, 멀리서 작은 불빛이 보였습니다. 깊은 산속에 작은 초가산간 집이 있었던 것입니다. 거의 탈진한 상태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에는 연세가 제법 많이 드신
귀한 선물 /요3:16-17 2015-04-07 00:31:12 read : 18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등산객이 험한 산을 오르다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해는 저물고 갑자기 눈보라까지 세차게 몰아쳐 ‘이렇게 죽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즈음에, 멀리서 작은 불빛이 보였습니다. 깊은 산속에 작은 초가산간 집이 있었던 것입니다. 거의 탈진한 상태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에는 연세가 제법 많이 드신 할머니가 살고 계셨는데, 그 등산객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할머니가 자신을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정신이 좀 드시오?’ 라고 묻는 할머니의 물음에 그 등산가는 ‘죄송하다’고, ‘허락도 없이 집에 불쑥 들어와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되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편하게 쉬었다 가라’고, ‘아마도 눈보라가 멈추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며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할머니는 무척 가난해 보였지만 자신이 모아놓은 겨울 양식을 등산가를 위해서 기꺼이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 줍니다. “나에게는 당신만한 아들이 있었다오.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이놈의 산이 문제지요.” 아마도 할머니의 아들이 산에 갔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던 모양입니다. 아들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할머니는 당신 아들을 보살피는 것처럼 등산객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덕분은 그는 금방 몸을 회복할 수 있었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신 할머니를 위해서 무엇을 해 드릴까 생각하다가, 할머니에게 새로운 집을 지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등산가는 다름 아닌 큰 사업을 하는 회장님이었습니다. 그는 할머니의 집이 너무 낡아 벽에 구멍이 나 있었고, 찬바람이 거세게 들어 닥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할머니가 따뜻하게 겨울을 나실 수 있도록 집을 지어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을 떠나오면서 새로운 집을 지을만한 큰 금액이 적힌 수표를 꺼내 봉투에 넣어 할머니에게 주었습니다. ‘그 동안 고마웠노라’고, ‘이것 가지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실 수 있을 것’이라며 봉투를 건넸습니다. 마다하시는 할머니의 손에 봉투를 쥐어 드리고는 등산객은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어느 겨울날 그는 할머니의 집을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고 계신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집을 찾아가 보니 그 집은 여전히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그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방 안에서는 부패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할머니는 홀로 죽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겨울 동안 너무 춥고 양식이 없어서 동사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에 자신이 새로 집을 지을 만큼 충분한 돈을 드렸는데, 할머니는 집을 짓지 않았고 추위에 돌아가시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안을 둘러보던 중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할머니에게 준 수표가 구멍 난 곳을 막는 문풍지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서야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할머니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드렸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어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가치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소중한 것들을 소중하게 사용하지 못한 채 휴지조각과 다름없이 버려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그것이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정말 값지고 귀한 선물을 주었는데도,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 것인지 모른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마치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는 큰 금액의 수표를 주었음에도 그것을 문풍지로 쓰다가 추위에 얼어 죽은 할머니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선물 가운데 가장 값지고 소중한 선물은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기억에 남은 선물은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값지고 소중한 선물은 값비싼 것을 의미하진 않을 것입니다. 정말 소중한 선물은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받은 선물은 그것의 값어치가 얼마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의 사랑과 정성이 담겨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최소한 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선물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한 사람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은 별로 가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값진 선물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세상적인 가치,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은 언젠가 그 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선 당장은 소중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중에는 그것이 별로 소중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맙니다. ‘시간’이라는 선물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루 24시간이 주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24시간이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매일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를 깨닫지 못한 채 그 시간을 허비하며 살곤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닫는 순간이 언젠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10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귀한지 알고 싶으면 명퇴 하신 50대 가장에게 물어보십시오. 4년의 세월이 얼마나 귀한지 알고 싶으면 대학을 졸업한 졸업생에게 물어보십시오. 1년이 얼마나 귀중한 세월인지 알고 싶으면 성적이 나빠서 유급 당한 학생에게 물어보십시오. 한 달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싶으면 한 달 먼저 미숙아를 낳은 산모에게 물어보십시오. 일주일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주간 잡지 편집장에게 물어보십시오. 1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애인을 기다리는 총각에게 물어보십시오. 1분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방금 기차를 놓친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십시오. 1초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시면 사고의 순간, 간발의 차이로 살아난 생존자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100분의 1초의 소중함을 알고 싶으면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선수에게 물어보십시오.’ 시간은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시간’이라는 선물을 가슴에 가득 담고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상 최고의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처럼’이라는 말은 본문 앞에 기록된 사건을 언급한 말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만들어 매단 사건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할 때입니다. 호르산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깝고 빠른 길을 통해 가나안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에돔 땅을 통과해서 가면 그래도 조금 쉽게 빨리 갈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돔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에돔 땅을 가운데 두고 멀리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만 해도 멀고 험한 길을 오느라 고생이 심했는데, 또다시 먼 길로 돌아서 가라고 하시니까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보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불뱀에게 물린 백성들 가운데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일부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범죄한 이 백성을 용서하시고, 뱀들이 물러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 기도를 들으시고 불뱀을 떠나가게 하시고, 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을 위해서 놋뱀을 만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높은 장대 위에 달아놓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마다 다 치유받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이 바로 그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놋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으로 자기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 죽어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모두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죽어가던 사람을 살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단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모두 살아났습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치료받기 위해서 뭔가 애써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모두 살아났습니다. 그것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뭔가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준을 마련해 놓으시고 ‘그것을 통과하는 사람에게만 구원을 줄 거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를 믿는 자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선물은 그런 것입니다. 가장 귀한 선물은 내가 뭔가를 해서 그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거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뭔가 애쓰고 노력한 결과로 구원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가장 귀한 선물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당신의 독생자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받는 사람에게는 영생을 덤으로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은 다른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선물은 세상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준 귀한 선물도 예수 그리스도만큼 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나에게 많은 유익을 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 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덤으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선물은 그것을 준 사람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을 때 진정으로 내 것이 됩니다. 아무리 값지고 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받지 않으면 그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 형사사건에 휘말려서 교도소에 가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담당한 판사가 지혜롭게 잘 사건을 해결해 주어서 누명을 벗고 감옥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장로님은 재판을 지혜롭게 잘 해준 판사가 너무 고마워서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판사는 강직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선물을 갖다 주어도 다 거절하고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것을 안 장로님 부부는 그분에게 정성을 담은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하다가 쌀을 선물로 보내기로 하고, 호남평야에서 나온 가장 좋은 쌀 두 가마니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가마니의 쌀을 방에 부어놓고는 그 가운데서 가장 좋은 쌀만 골랐습니다. 돌을 제거하고 쌀알 가운데서도 둘로 나눠진 것이나 상처가 난 것들을 다 골라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시간이 나는 대로 몇날 며칠을 걸쳐 좋은 쌀을 골라냈습니다. “주님, 그 판사님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 쌀 하나하나마다 저희들의 정성을 담았습니다. 그 판사님이 잘 되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면서 쌀을 골라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두 가마니의 쌀 중에서 좋은 것만 골라 한 가마니를 만들었습니다. 골라낸 것 중에 좋지 않는 쌀은 자기들이 먹기로 하고, 좋은 쌀만을 담은 한 가마니를 판사에게 선물로 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직접 손수레에 쌀 한 가마니를 싣고 판사의 집에 가서 쌀을 건네주었습니다. 판사가 출근하고 없는 낮에 판사 부인에게 쌀을 전달해 주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날 판사는 그 쌀을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러면 장로님 부부는 그 다음날 또 그 쌀을 싣고 판사님 집에 갖다 줍니다. 그렇게 며칠을 하자 판사가 이렇게 편지를 써서 쌀과 함께 되돌려 보냈습니다. “쌀을 돌려주는데 드는 사람 품삯을 감당하기 힘드니 이제 쌀을 그만 가져오시오. 당신의 그 마음과 정성을 아니까 이제 쌀을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로님께서 그 쌀을 보내게 된 내력과 쌀 한 알 한 알 정성어린 기도와 함께 낱알을 골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여 쌀과 함께 다시 판사에게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는 판사가 장로님 부부를 자기 집으로 초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정성을 물리치면 자기가 죄를 받을 것 같아서 판사가 된 이래 처음으로 선물을 받겠노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어려서는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은 다니지 않는데, 이제부터 열심히 장로님이 다니는 교회에 다니겠노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 후 그 판사도 열심히 신앙생활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장로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귀한 사랑과 정성이 담긴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축복이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선물은 우리가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귀한 선물을 주셨다는 것 때문에 부담이 되어서 그 선물 받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님 부부가 쌀알 하나하나를 정성으로 골라가며 만든 선물도 귀한 선물이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이 선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 담긴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물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 길만이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세상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 길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이단들은 자기들의 교주가 구원주라고 선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통일교의 문선명, 구원파의 박옥수, 신천지의 이만희, 그 어떤 사람도 구원의 주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이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공로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이면 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선물로 오신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멸망시키려 오신 분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어떻게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지,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온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설명된다 하더라도 그 설명을 듣고 수긍하여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인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만이 구원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그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그 하나님의 선물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그 선물이 정말 귀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귀한 선물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 성탄절은 별 의미가 없는 날이 되고 맙니다. 조엘 오스틴(Joel Osteen, 1963-)이라는 목사님이 쓴 『긍정의 힘』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유명한 골프선수가 사우디아라비아 왕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왕은 자신의 전용 비행기를 미국까지 보내 그를 데려왔습니다. 둘은 며칠 동안 골프를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골프선수가 돌아갈 때가 되자, 왕은 비행기에 오르려는 그를 세워놓고 물었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서 저를 찾아주셨으니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골프 선수는 “아닙니다. 이렇게 환대해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제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했지만, 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꼭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야 선생님이 이 여행을 평생 기억하실 테니까요.” 골프선수는 왕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골프채가 좋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내내 골프선수는 왕이 어떤 골프채를 보낼까 궁금했습니다. ‘내 이름이 새겨진 순금으로 만든 골프채? 아니면 다이아몬드 보석이 여기저기 박힌 골프채? 세계 최고 갑부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이 보내는 선물은 얼마나 대단할까?’ 골프 선수는 궁금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골프 선수는 날마다 우편함을 확인합니다. 언제쯤 왕의 선물이 도착할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골프채는 좀처럼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몇 주 후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이 서명한 편지가 한통 도착했습니다. “아니, 기대하던 골프채는 어디가고 달랑 편지 한 장이라니!” 그는 실망하면서 봉투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봉투 안에는 놀랍게도 미국에 있는 커다란 골프장을 선물로 준다는 기증서가 들어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의 생각은 평범한 우리의 생각과 차원이 다릅니다. 골프선수는 좋은 골프채가 선물로 오기를 기다렸는데, 사우디의 왕은 골프장을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하나님은 왕 중에 왕이십니다.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이 너무 귀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나니.”(요한복음 1:9-1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우리 인간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선물을 거부했습니다. 마땅히 그 선물을 받아야 할 ‘자기 백성’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 귀한 선물을 우리에게 또다시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탄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대림절이라는 아름다운 절기를 주셨습니다. 이 대림절 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신 예수님을 기다리십시다. 예수님을 선물로 받는 사람은 세상 그 무엇과도 그 선물을 바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은 모든 것이 다 담긴 종합선물세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2)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도 아끼지 않고 다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을 선물로 주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가장 값진 선물에 보너스로 말입니다.
그 날이 임하리라!/ 눅21:25-36/ 대림절제1주일설교/ 2009-11-29
그 날이 임하리라! 눅21:25-36 오늘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눅 21:25-36절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25-28절은 인자(사람의 아들)가 올 것이라는 묵시적 선언입니다. 둘째, 29-33절은 그것의 징조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셋째, 34-36절은 그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각각의 단락이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는 같지만 ‘마지막 때’가 온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합니다. 그 마지막 때에 대한 것을 첫 단락은 ‘인자’ 개념으로, 둘째 단락은 ‘하나님 나라’로, 셋째 단락은 ‘그 날’이라는 단어로 묘사합니다. 마지막 때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2천 년 전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는 누가복음 기자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인자’는 마지막 때에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올 전능자를 가리킵니다. 곧 메시아입니다. 그 마지막 때는 곧 새로운 시작의 때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그 마지막 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가 곧 인자, 즉 사람의 아들입니다. 인자 이야기는 구약에 종종 등장합니다. 에스겔서 2장 이하에 인자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겔 2:1, 이외 3,6,8절 참조) 다니엘서에도 나옵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단 7:13) 그 인자의 권세는 소멸되지 않고 영원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구약의 인자 개념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 21:28) 이런 인자 사상에서 핵심은 ‘마지막 때’와 ‘심판’입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때가 이르게 될 터인데, 그 때 인자가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와 심판 마지막에 대해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눅 21:25) 마지막 때에 해와 달과 하늘의 모든 별들이 흔들린다고 합니다. 바다가 요동치고 큰 파도가 몰아칩니다. 이 때 모든 민족들이 극심한 혼란에 빠집니다. 26절에서는 하늘의 권능이 흔들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계 6:13,14) 이런 구절들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 전체가 해체된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요? 지난 인류 역사에 인류의 종말이나 우주의 최후를 예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프랑스의 의사이자 신비주의철학자인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의 예언이 가장 유명한 것 같습니다. 그는 나중에 교황이 될 사람을 정확하게 짚었으며, 프랑스 왕 앙리 2세가 마상경기의 사고로 죽을 것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예언이 적중한 탓인지 1999년 7월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는 그의 예언도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인류와 지구의 최후를 주제로 하는 영화도 많습니다. 최근에는 <2012>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끈다고 합니다. 고대 마야문명 시절부터 2012년이 인류 멸망의 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그것이 확실하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지진, 화산폭발, 해일 등으로 모든 인류가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인류의 후손을 남기기 위해서 우주선을 만든다고 합니다. 우주가 총체적으로 파괴되는 때가 올까요? 우주까지는 가지 말고 지구만 생각합시다. 그 중에서도 인류만 생각해 봅시다. 인류가 이 지구에 더 이상 살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올까요? 이게 허무맹랑하거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는 우주의 한 귀퉁이에 떠 있는 태양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지구는 계속 움직입니다. 그게 몸으로 느껴지지는 않겠지요. 우리가 오감으로 느껴야만 확실한 건 아닙니다. 태양계 안에는 수많은 행성과 혹성과 유성과 혜성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일정한 궤도에 따라서 움직이기도 하고 제멋대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만약 지금 지름 1킬로미터 되는 혜성이 지구에 부딪친다면 모든 생명은 끝장이 납니다. 개미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개미도 결국은 사라질 겁니다. 또 빙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인류는 지구에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인류가 문명의 꽃을 피우고 있는 지금은 1만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고 새롭게 시작될 빙하기 사이인 간빙기에 해당됩니다. 이런 큰 자연재난만이 아니라 인간의 소비 문명에 의해서 지구의 생태적 균형이 급격하게 깨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인자가 올 마지막에 대한 성서의 증언이 바로 위에서 설명한 것과 똑같은 종말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겉으로만 보면 아주 비슷합니다. 우주의 해체를 말하니까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로 봅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의 창조 행위도 역시 선하고 정의롭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고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노아 시대에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물로 심판을 내리셨지만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앞으로 이런 재앙이 없을 것이라고 노아와 약속했습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창 9:15) 성서와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이 세상은 허무하게 해체되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딛고 있는 땅은 탄탄합니다. 비록 홍수와 지진과 해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토대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본문은 왜 일월성신이 뒤틀리고 바다와 땅이 흔들린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것이 결국 세상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인류 멸망과 똑같은 게 아닐까요? 성서가 말하는 종말은 해체와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세움과 들어올림입니다. 그것은 죽임이 아니라 살림입니다. 그것은 중단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입니다. 그런 세계를 누가복음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온다고 표현했습니다.(눅 21:27) 그리고 그 때는 곧 ‘속량’의 때입니다.(눅 21:28) 그렇습니다. 인자가 오는 때는 구원의 때입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두 구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십시오. 거기에 기독교가 희망하고 기다리는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인자는 능력과 영광을 가진 분입니다. 그가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이는 곧 능력과 영광을 가진 인자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능력과 영광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1세기의 놀라운 과학도 우리를 이 세상에서 조금 더 편리하게 살도록 도와줄 수는 있지만 능력과 영광은 없습니다. 인간과 과학은 바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아주 무능력합니다. 이 말이 이상한가요?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과학의 능력은 지금 이런 세상 안에서만 발휘되지 인자로 인해서 완성될 세상에서는 무기력합니다. 무슨 말인가? 인자로 인해서 완성될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릅니다.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다릅니다. 양적으로 다른 게 아니라 질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을 개량하는 게 아니라 전복시킵니다.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외계인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질적으로 다른 세상이라고 해서 해괴한 세상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여기 코스모스 씨앗이 있다고 합시다. 굵기가 1,2미리, 길이가 1센티 정도 되는 가늘고 길쭉한 모양입니다. 그게 봄에 땅에 심겨졌습니다. 조금 지나면 거기서 화사한 코스모스 꽃이 핍니다. 씨앗만 놓고 본다면 꽃은 상상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세계입니다. 씨앗과 꽃을 따로 놓고 본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그러나 씨앗과 꽃은 신비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씨앗과 비슷합니다. 씨앗이 때가 되면 꽃을 피우듯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그걸 이루실 분이 바로 능력과 영광으로 오실 인자이십니다. 인자에게만 그런 능력이 있으며, 그런 세상이 바로 그분의 영광입니다.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냥 그대로 믿을 수도 있겠지만, 뭔가 속 시원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자가 세우실 세상이 아무리 새롭다고 하더라도 그건 지금 우리와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라서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 지금 당장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더 나아가서 여기서 이웃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자칫하면 이원론적이고 초월적인 종말론에 빠져서 현실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역사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일어났습니다. 1992년 다미선교회 사건은 단적인 예입니다. 거기에 속했던 사람들은 1992년 10월28일에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자신들만 휴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직장과 학교도 그만 두고 매일 종교적인 집회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런 신앙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현실의 역사에 발을 굳건히 딛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불완전합니다. 창조가 아직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참된 안식이 불가능합니다. 오죽했으면 묵시적 문서들이 죽음을 영원한 안식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보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것들은 모두 지나갑니다. 여러분의 젊음을 보세요.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우리가 소유했던 것들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이 모두 빠져나갑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생명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 운명의 종착역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입니다. 우리의 이웃 종교인 불교가 해탈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만 열반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열반은 기독교 용어로 구원, 또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많은 점에서 우리와 다르지만 그들도 지금의 세상과 삶이 이것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만은 우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깨어 있으라 불완전한 이 세상이 완전하게 질적으로 변형되는 그 하나님의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일까요? 그 때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도 모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압니다. 그러나 그 때의 징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마지막 때의 징조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사이비 종말론이 창궐할 때 그들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666이나 144,000이라는 숫자를 세계사의 큰 사건과 연결해서 설명하곤 했습니다. 유럽 연합(EU)이나 상품의 바코드를 실례로 들었습니다. 자연재해를 예로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주장들은 모두 공허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에게 공연한 두려움을 조장함으로 종교적 열정을 불러내려는 행태들입니다.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마지막 때가 “덫과 같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 겁니다. 한편으로는 마지막 때의 징조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예상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모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징조가 보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혀 보이지 않을 겁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누군가요? 본문이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 사람입니다.(눅 21:34) 세상의 일에 모든 영혼이 치우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삶을 향한 의지와 열정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성취, 자기만족에 몰두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치켜세웁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보는 사람은 누군가요?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눅 21:36)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며 깨어 있다는 건 생명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힘인 성령과 민감하게 공명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볼 수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이런 사람에게는 그 마지막이 내일이든지, 10년 후이든지, 10억년 후이든지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회력의 시작인 2010년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기억하며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심판주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2천년동안 기다렸지만 아직도 오지 않을 걸 보니 그의 약속이 확실하지 않다는 불안, 의심을 하지 마십시오. 2천년은 하룻밤과 같습니다. 그분이 오시어 생명이 확 드러나면 그 시간의 신비도 모두 밝혀질 것입니다. 마지막 그 때를 공연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때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는 순간입니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구원의 그 날이 속히 올 것입니다. 이미 왔습니다. 2천 년 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용섭 목사(대구샘터교회)
그 이름 예수/ 마1:18-21/ 대림절제1주일설교/ 2005-12-01
그 이름 예수 마1:18-21 오늘은 강림절 첫째 주일이다. 이제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름을 갖기 마련이다. ‘사람’이라고 하는 말도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다 동일한 이름을 갖기 어려우니까 각각 이름을 갖게 되었다. 사람이 이름을 가지면 그 이름의 뜻이 있다. 그래서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하고 또 그 사람에 걸맞게 이름을 지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 구주의 이름은 ‘예수’이다. 예수라고 하는 이름 은 다 한사람 밖에 없다. 그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이다. 석가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예수님은 아니다. 예수 님 당시에도 예수라고 하는 이름이 종종 있었고 구약에도 ‘여호수아’ ‘호세아’ 등도 ‘구원’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별하기 위해서 ‘나사렛 예수’라고 지명을 넣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름이 같다고 해서 같은 예수는 아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한분 밖에 없으신 것이다. 예수라고 하는 원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본문 21절 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수라고 하는 이름의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자기백성’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에 는 강하고 위대한 백성들이 많이 있었으나 약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 유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신비요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 실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주 약하고 신비요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주 약하고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이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엡 2:12)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동일한 시민(엡2:19)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귀중한 신분인가! 바벨론이 세계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귀중한 신분인가! 바벨론이 이 세계를 휩쓸 때는 바벨론 시민이 제일이었고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할 때는 로마 시민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늘나라의 시민권은 바벨론 시민권이니 로마시민권이나 미국시민권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 다. 둘째, ‘저희 죄에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살아왔다고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해 주었으나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자기 힘으로는 그 죄에서 벗어나거나 헤어 나올 길이 없게 되었다. 미물 같은 존재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놓았더니 그들이 계속해서 죄를 짓고 그 죄에 눌려서 죽어가고 신음 하는 자기 백성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생각해야 만 할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이 성적이 좀 나빠도 속이 상하고 시험에 떨어지면 죄 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 나는 주님 거역한 죄인이었고 내 뜻으로 산 죄인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큰 죄인입니다]하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 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할 자’라는 말이다. 왜 자신이 죄를 짓고 스스로의 잘못으로 신음하는 백성을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죗값을 치루면서 구원하셔야만 했는가? 그것은 자기 백성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백성이기 때문에 외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불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다. 온갖 정 성을 다해서 가꾸고 길러온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자기 백성은 은금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훨씬 귀한 것이다. 비록 흙이 묻고 때가 묻긴 했지만 포기하거나 내버릴 수 없는 귀한 보배였고 사랑하는 보석이었다. 그래서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 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바로 그날이 크리스마스 날이다. 이 날 이야말로 너무나 감격스럽고 참으로 우리에게 있어 기쁨의 날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감격스럽고 눈물 흘리는 까닭이 있다고 한다면 나 같은 비천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하는 그 사실과 그 사랑 때문인 것이다. 아무나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남 은 일은 구원하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일만 인간에게 남은 것 이다.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낙심을 찬양하며 기쁘게 기다리면서 그날을 보다 더 뜻있게 보내는 금년도 성탄이 되시길 바란다.
그를 기다리는 자의 복/ 사30:18-22/ 2012-02-12
그를 기다리는 자의 복 사30:18-22 H.G. 웰스라고 하는 작가의 \'대 주교의 죽음\' 이라고 하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서 설명해주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대 주교는 날마다 습관처럼 대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똑같은 말로 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오늘 내게 말씀하소서.\" 이것이 그의 기도 첫 문장입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오늘 내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한평생 수십 년을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오냐, 무슨 일이냐?\" 이 소리를 듣고 그는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이여 말씀하소서\"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실까?\" 그 많은 시간 기도하면서도, \"정말 기도가 응답되는 걸까?\" 어쩌면 기도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기 감정을 순응하는 이 정도에 그치는, 소위 말하면 추상적이고 감상적 신앙이라 말입니다. 여러분 예배하고 기도하고 믿고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얼마나 내 생활 속에 확실하게 응답된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기다린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깊은 아주 깊은 오묘한 말씀이올시다. 하나님이 기다리신다. 그는 능력이 많고 그는 지혜가 많습니다. 그런데 왜 기다리는 겁니까? 그는 창조주입니다. 그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왜 기다림이라고 하는 고통을 택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자 보세요. 가지고 싶지만은 지금 갖지 못하니까 돈을 벌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내가 무능해서 할 수가 없으니까 기다려야지요. 우리는 기다려야 됩니다. 부득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나약함, 그런 불가피적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거든요. 능력이 많으세요. 하시고 싶은 일은 해요. 언제나 하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 섭리자 하나님, 도대체 무엇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얼마동안이나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 뜻을 자제하시고 그 행사 속에서 왜 그 많은 시간 기다리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그의 편지 베드로후서 3장 8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죽기에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 일을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기다림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 같이\"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릴 때는 하루가 천년 같아요, 어떤 때는 천년이 하루 같아요. 이런 시간 그 관념을 초월해서 완전하게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왜 이 기다림의 고통을 선택하셨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주 쓸모 없는 자로, 아주 구제불능한 자로, 아주 끝난 그런 존재로 대하지 않고 아직도 가능성을 두고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죠.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있는 존재라고 인정해 주시는 거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 결혼생활하고 뭐 이렇게 시작하고 가만히 보면 어떤 분들은 한 삼십 년을 참았다가 이젠 더 못 참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왜요? 기다릴게 없으니까 이제는. 기다려 봤자 뭐 이제 싹이 노란데 뭐. 그렇게 생각하고, 절망하고, 실망하려고 그러는데, 그건 참으로 인격에 대한 최고의 모독입니다. 저는 늘 얘기합니다. 신랑, 신부들에게 늘 얘기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실망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절망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그건 마지막 말이라고. 아직도 나는 너를 기다린다.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사랑입니까? 얼마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겁니까? 기다림!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고통을 스스로 감수하시면서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심판을 멈추시고 다음 때를 기다립니다. 다음 시간을 기다립니다. 오래오래 천년이 하루같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건 곧 은혜입니다. 성숙하게 되기를 기다립니다. 깨닫고 성장해서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큰 회사에서 그 신입사원 모집하는데 아주 지혜를 냈다고 합니다. 요새 회사 직원하나 잘못 쓰면 회사 거덜나거든요. 보통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을 채용한다는 거. 아 그래서 \"사람을 자 써야 되겠는데, 어떻게 좋은 사람을 고를까. 성적표대로 되는 건 아니요, 물론 IQ도 아니요. 사람됨을 어떻게 바로 심사할 수 있을까?\" 하던 중에 그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 마지막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 아주 우수한 사람들을 한 방에 놓고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인터뷰 몇 시부터 합니다.\" 해 놨거든요, 그리고 한 시간을 두었어요. 그러니까 한시간 동안 처음에는 조용히 있다가 \"왜 시간이 늦지?\" \"왜 말이 없지?\" \"왜 이거 뭘 하는 거지?\" \"아 이거이거 왜들 이러는 거야\'\" 하고 하나씩 둘씩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초조해서 어떤 사람은 몸을 동동 구르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고, 손가락을 만지고. 서로가 이러는 시간에 한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 동안에 그 기다리는 시간을 전부 녹화를 해 뒀습니다. 한 시간 후에 \"인터뷰 끝났습니다\" 거기서 사람됨을 충분히 고를 수가 있었어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어떤 모습입니까? \'그럴 일이 있겠지. 뭐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겠지\' 하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그 자세, 대단히 중요한 것이에요. 이게 바로 EQ지수가 높은 거예요. 자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저는 박학전 목사님이라고 하는 저희 목사님, 제가 인천에서 목회 할 때 협동 목사님 이셨어요, 나이 많으신 어른인데 그렇게 목회를 많이 간접적으로 도와주셨는데, 가끔 그 집에 이렇게 초대받아서, 방문했을 때 보면 목사님이 연세가 높으시고 아주 참 귀한 어른인데 너무 외롭고 그래서 손자 하나를 데려다 키웠는데, 아 이놈이 말이죠, 밖에 나가 놀다 들어와선 버릇이 없어요. 자기 할아버지를 발길로 차면서 \"이 새끼, 이놈\" 별소릴 다 해요. 그래도 할아버지는 좋다고 끌어 안아줘요. 난 이 장면을 너무너무 아름답게 봤어요. 그래 제가 한마디하죠, \"아니 천하의 저렇게 무례한 놈, 할아버지를 발길로 차는 놈을 왜 사랑합니까?\" 그랬더니, \"그건 몰라서 그러는 건데, 애가 지금 이놈소리가 무슨 소린지, 님 소린지 놈 소린지 그건 알 바 아니요. 자기 딴에는 이거 내가 웃어주니깐 좋아하는 줄 알고 더 좋아한대요.\" 그러면 자 이제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얘가 그 뜻을 다 알 때까지, 철이 날 때까지 기다려 줄 수밖예요. 이걸 즉각적으로 심판을 해야 되겠습니까? 기다려 주는 거죠, 그것이 사랑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예요. 기다려 주는 거. 딜레이(Delay)라고 하는 거, 사실 우리가 지연된다는 건 참 괴로운 것이에요. 약속이 지연되고, 무슨 일이 자꾸 늦어지는 것 참 어렵지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실 때, 그 지연됨, 이 속에는 위대한 사랑이 계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모르면 원망과 불평에 치우치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했던 나사로의 집이 있습니다. 오빠와 누이동생 둘, 이렇게 사는 가정으로서 어쩌면 예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가정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저들도 예수님을 제일 많이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빠 되는 그 집의 기둥입니다. 오빠가 병들었습니다. 누이동생들이 사람을 보내서 좀 빨리 와서 저희 오빠를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 갔습니다. 안 가시고 죽을병이 아니다 그러고 안 갔습니다. 지연됩니다. 나흘이 지연되는 가운데 오빠는 죽었습니다.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저들은 마음에 지금 불만이 많습니다. \'왜 오라고 할 때 오시기 않았습니까? 왜 내가 구하는 그 시간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장례가 끝나서 냄새가 나는데 지금 오시면 뭐하러 오셨습니까?\' 복잡합니다 생각이.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일찍 이 자리에 오지 아니 한 것을 기뻐하노라\" 왜요? 병상에서 일으키질 않았고 무덤에까지 들어간 자를 뒤에 끌어냈습니다. 어느 쪽이 더 큰 은혜입니까? 어느 쪽이 더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고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지연 작전을 씁니다. 이 기다림, 요 기간을 못 참아서 마르다가 주님 앞에 실수하는 걸 볼 수가 있어요. \"환란의 떡과 고생을 물을 마시며\"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환란의 떡과 고난의 물을 마시게 하면서 기다립니다. 여러분 너무나 잘 아는 탕자의 비유도 보십시다. 저는 탕자의 비유를 볼 때 몇 가지를 생각합니다. 제일 궁금한 것은 그 아들을, 왜 가출을 아버지가 도와줬나 하는 겁니다. 그 못된 아들. 성경에는 간단하게 \'유산을 받아 가지고 갔다.\' 이렇게 되어 있지만은, 그렇게 까지 되기까지에는 오죽이나 못되게 놀았겠어요. 그냥 용돈 있는 대로 써 버리고 써 버리고, 많은 사건이……마지막에 \"아버지 죽을 때에 네게 줄 유산 미리 주세요.\" 이 말까지 아버지는 들어주었습니다. \"그래 어차피 네 거니까 가져가라.\" 그 재산을 떼 주는 삼분의 일을 잘라주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이게 기다림입니다. 시간적으로만이 아니고, 그의 인간 됨을 기다리는 것이에요. 아버진 뭘 생각합니까? \"이 재산 다 날려도 좋으니까, 부디 내가 바라는 좋은 착한 아들이 되어다오.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 소리 좀 하고 돌아와 다오.\" 그거 아닙니까? 그 날을 기다리며 아버지는 여기에 엄청난 것을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계시된 것이에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은 과원지기가 무화과를 심어놓고 열매 열리기를 기다렸다. 삼 년을 기다렸다 하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길 되기를 특별히 아주 겸손해져서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에요. 여러분, 은혜 입었다고 은혜가 됩니까? 내가 겸손할 때만이 은혜가 은혜 됩니다. 내가 온유한 마음, 참으로 착한 마음이 되기까지는 어떤 은혜도 내게 은혜 될 수 없는 것이에요.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되기를 회개하고 믿음에 서서 모든 정욕을 버리고 아주 빈 마음으로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되기를 그리고 그 깊은 사랑의 뜻을 깨닫고 감사 감격하게 되기를 하나님은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은혜 베푸시기 위함이요. 심판을 위해 기다리는 게 아니요, 두고보자. 잘못되면 다 진멸하리라. 그 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은혜 베풀기 위하여 은혜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비라고 하는 건 참 좋은 거 아닙니까? 비가 와야죠. 그러나 폭우가 쏟아지면 이건 망하는 겁니다. 조용하게 땅이 흡수할 만큼 봄비처럼 이렇게 비가 와야지 그대로 장대비가 막 쏟아지면은 다 무너지고 마는 거예요. 비는 중요합니다 만은 정도에 맞게 와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냇물이란 언제나 아름다운 게 아닙니까? 그러나 물이 범람해서 홍수가 되면 다 쓸어버리고 마는 거지요. 아무리 하나님의 귀한 은혜라고 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절대로 은혜 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감당할 그 날을 주님은 기다린단 말입니다.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기다림을 알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다림을 함께 기다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대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기다리는 것과 나의 기다림의 초점을 맞춰야 되요. 그가 내 인격의 성숙을 기다린다면 나도 그 날을 기다려야죠. 부자 되기를 기다려선 안돼요. 잘 살게 되기를 기다려서는 안돼요. 그는 우리가 진실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교만하기를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성공을 기다린다는 말이 이거는 하나님 앞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기다림, 그 뜻을 똑바로 알고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통해야 됩니다. 소망과 약속! 그 날을 기다리는 겁니다. 은혜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 그가 종종 출석하던 워싱턴 D.C. 의 뉴욕 에비뉴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의 조셉 C. G.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기간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펴놓은 성경을 옆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낡은 성경에 그리고 그 성경을 여러 번 손으로 짚어서 그 손자국이 많이 나고 눈물자국이 있는 성경 한 페이지를 눈여겨볼 수 있었답니다. 그것은 시편 37편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것을 수없이 읽고 명상했다는 흔적을 그의 성경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끝까지 참아 기다릴 것입니다. 그가 은혜 베푸실 때까지, 또 나는 은혜 베푸심을 받을 수 있는 그 수준에까지 도달하도록 기다리겠다. 하나님의 기다림의 뜻을 알고 충분히 이해하고 나면 나의 기다림은 아주 쉽게 됩니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저 앞에 있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의 그 거룩하신 시나리오 속에 오늘 내가 있어요. 오늘의 내 사건이 있어요. 이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요, 그런고로 조용히 그 날을, 그 시간을 기다릴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교육학적인 그런 책을 조금 읽다가 한마디 뜻을 찾고 제가 아이들을 키울 때 그렇게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진작 이렇게 했으면 참 좋았을 것인데\' 하고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지금은 손자, 손녀들에게 그 방법을 그대로 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또 어머니들에게 부탁을 해 봅니다. 그게 뭐냐면 기다림의 훈련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가르쳐야 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기다리는 자세, 그것을 훈련시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뭘 달라고 하면 말입니다. 대체로 즉시 주는 것도 있지만은 중요한 것들은 절대로 바로 주지 말라는 거지요. 뭘 달라고 하면은 \"내일 준다\" 그래요.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고 \"한 밤 자고 나면 내일 아침에 준다.\" 이렇게 딱 한마디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아무리 울어도 주면 안돼요. 하고 하룻밤 자고 난 다음에 \"아이들은 다 잊어버렸지 벌써\'\" \"너 어제 나하고 약속했지?\" 하고 이것을 줍니다. 그 다음에 얼마 있다가는 또 두 밤 자면 준다, 그 다음엔 세 밤 자면 준다, 일년 후에 준다 이렇게 약속해서 약속을 기다리고, 그 성취의 날을 맞는 그런 기쁨을 가르쳐야 되요. 그런데 우리는 약속 했다가도 지금 안 된다고 했다가도 발버둥치고 울면 \"옜다 가져라 모르겠다\" 완전히 버리는 거래요. 울면 되더라, 발버둥치면 되더라, 이거는 무서운 거예요. 이게 바로 오늘과 같은 무서운 세상을 만든 거예요. 폭력이 통하지 않습니까? 폭력은 안 통해야 되요. 잘못된 소원은 절대로 이루어져선 안 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걸 가르쳐야 되는데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가르쳐야 되는데 이걸 못 했어요. 그건 약속으로 대체하는 거예요. 이걸 못 가르쳤던 거예요. 이걸 훈련을 받아야 되요. 그래서 이 훈련이 되면 보세요. 외국 가서 보면 무슨 일을 하나 줄서잖아요. 줄 서놓고서 거기서 서둔다고 되는 겁니까? 가만히 기다리잖아요. 마냥 기다려요. 사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은 미국서 공부 할 때, 뭐 \'조스\' 라고 하는 영화 있지요. 그 영화를 보러 간다고 미국 학생들이 야단을 하더라고요. 그래 저녁에 공부 마치고 11시에 가자고. 아 그래! 도서관에서 공부마치고 나오는데 하도 가자고들 그래 나도 따라나서 봤지요. 이 사람들 금요일 날 저녁에 영화구경 가는걸 알기 때문에 따라가 봤는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줄을 길게 섰는지 표를 사지도 못하고 서있는 거예요. 보세요. 다 보고 나온 다음에 또 기다리고 기다렸어요. 제가 3시에 봤어요 영화를. 그런데 돌아가는 사람도 없어요. 밤중에 그 영화간 앞에서 3시간 4시간이죠 11시부터. 그리고 아침에 돌아왔습니다. 나는 어디 어떡하나 보자 하고 끝까지 기다려보고 아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이라고요. 아 별것도 아닌 영화 하나 보겠다고요.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기다려서 보고 나오면서 나는 영화는 생각이 안나요. 기다리던 생각만 나요. 그겁니다. 바로 우리가 이것이 없어요. 조급해서 그저 욕을 하고 저주하고 폭동을 하고 미치고 왜 이 모양이 된 겁니까 이게? 기다리는 훈련이 없어요, 기다리는 성품이 없어요, 또 기다림에 대한 믿음이 없어요. 미래 지향적인 약속을 놓고 그리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얼마나 중요합니까. 기도 응답은 세 가지로 온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래라\" 하는 응답이 있고요,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게 있고. 또 하나는 \"버려라! 네 소원 잘못됐으니 생각을 고쳐\" 이게 응답이에요. 세번째 응답은 \"기다려, 때가 될 때까지. 그 어느 때까지 기다려라\" 그러면 그것도 응답이에요. 기다림 그 자체가 응답이라는 걸 알아야 되요. 그것이 행복이어야 되요. 그것이 즐거움이어야 되요. 기다린다는 것이 그 자체가 내게는 큰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니까요. 사랑이니까요.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이니까요. 여호수아 7장 13절에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려라.\" 말씀하십니다. 곽선희 목사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빌1:3-11 2018-04-19 04:20:15 read : 5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 바울은 마음이 몹시 급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그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얼마나 부지런히 전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어느 지역에서든지 복음이 어느 정도 전해졌다고 생각하면 그 지역 사람들끼리 교회를 세우도록 맡기고 새로운 곳을 향하여 떠나곤 하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빌1:3-11 2018-04-19 04:20:15 read : 5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 바울은 마음이 몹시 급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그는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얼마나 부지런히 전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어느 지역에서든지 복음이 어느 정도 전해졌다고 생각하면 그 지역 사람들끼리 교회를 세우도록 맡기고 새로운 곳을 향하여 떠나곤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타의에 의해서 떠난 경우도 있었고 한 곳에 제법 오랜 머문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렇게 바쁘게 선교 여행을 다녔습니다. 때문에 그토록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오늘 우리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헤어져 있는 시간이 짧거나 거리가 가까우면 용건만 간단히 씁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길거나 거리가 먼 경우에는 그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먼저 서로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과 같은 것들을 나누면서 편지를 쓰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도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잊지 않고 늘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그들을 위해서 간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왜 기뻐했습니까?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5) 그들은 단순히 복음을 믿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누가 그들에게 전했습니까?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만남과 사귐은 오직 복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또 지금까지 그 복음 안에서 교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맛보는 기쁨은 자기가 성취한 일에 대한 기쁨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바나바와 함께 처음 선교 여행을 다니던 때에는 별로 큰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와 헤어진 후 비로소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에서 그리고 에베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꿈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빌립보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믿고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들이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도들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구원받은 자로서 마지막 날까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구원을 완성해야 합니다. 때문에 그는 그 구원을 완성하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여기서 착한 일이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마음속에 복음이 자리 잡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무리 열심히 전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복음은 그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고 자리 잡을 수도 없습니다. 그가 볼 때에 빌립보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생기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그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께 마지막 날까지 그들의 믿음을 잘 지켜 주실 것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매여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옥에 갇혀 있다는 말입니다. “나의 매임”이란 표현은 7절 말씀 외에 13절 말씀과 17절 말씀에도 나옵니다. 매여 있다는 사실을 그가 거듭 강조한 것을 보면 그의 상황이 별로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간절히 보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만나러 갈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아주 솔직히 표현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여기서 우리는 잠시 사도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도 예수의 날과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빌 1:6, 10 참조)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날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를 비롯한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주님의 재림의 날이요 성도들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여러 지역을 부지런히 다니던 때에 복음의 핵심 내용은 세 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이 그것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빠트릴 수 없는 복음의 핵심 요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님의 재림에 관한 메시지가 한국 교회에서 사라진 것 같아서 매우 안타깝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란 다만 세상에서 사는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죽은 후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기대하는 그런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한국 교회에서 들리는 메시지는 지극히 세속적인 것이 되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으면 천당 갑니다! 예수 믿으면 복 많이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돈 많이 벌고 부자가 됩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합니다!” 이런 식의 메시지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 절기에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의 가족, 이익, 야망 등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우리는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고 우리도 주님처럼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 아닙니까? 세상의 재물과 권세와 영광 대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눈앞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보다 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믿고 세상 권력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진짜 신의 아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초라하게 죽으셨으나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과의 거리 둠, 세상 권력과의 거리 둠, 세속적 욕망과의 거리 둠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는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의 죽으심은 크게 보면 세상의 불의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통을 당한 것도 불의한 세력들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지막 날까지 주의해야 할 일은 불의와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삶으로 구원의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의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의의 열매를 맺되 풍성하게 맺는 삶을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의의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이미 받은 바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끝까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서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구원의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2:5-11/ 대림절설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2:5-11 1차 대전 중 크리스마스 전날 밤, 영국 해협에서 스위스 국경에 이르는 기나긴 전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전쟁 중 독일군 참호 바로 위에 크리스마스 츄리가 세워졌고, 불빛이 환하게 들어 왔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저들 밖에 한밤 중에” 우리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영국군은 박수로 응답하고 이어서 영어로 ”참 반가운 신도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독일군도 뒤질세라 박수로 응답하며 같은 찬송을 독일어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평화의 시간은 1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양쪽 군인들은 전쟁도 잊은 듯 서로 참호에서 기어 나와 크리스마스 축하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고, 축구시합도 했습니다. 선물교환도 했으며, 즉석에서 오케스트라도 연주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마는 성탄절 이 24시간 동안 화염은 멈추고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을 마음껏 축하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천군 천사들이 노래했던 것처럼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원래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두 단어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매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매스는 예배 드린다, 축하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생각해 볼 때 크리스마스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을 올바로 축하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 그 의미를 바로 잘 알고 기뻐하고 축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의 주인공은 당연히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탄절을 맞이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탄절은 어떻게 보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이 날의 주인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알면서 사람들이 성탄절을 축하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성탄절의 의미를 바로 알고서 이 날을 어려운 이웃들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면서 보내고 있습니까? 혹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론가 간 곳 없고, 사람들만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축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성탄절이 되면 더 난리 법석을 떨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탄절은 결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세상적인 잔칫날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날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경청해 보시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의 성탄의 참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주님은 낮아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철저하게 낮아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영광 다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근본(根本)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同等)됨을 취(取)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自己)를 비어 종의 형체(形體)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模樣)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自己)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服從)하셨으니 곧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이라.> 바로 이 점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일을 하려면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이 되려고 애쓰는 것 아닙니까? 사랑을 외치는 교회에서도 일을 하려고 하면 중직자가 되어야 하고, 무언가 한 자리 해야 교회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사람들은 무언가 큰 일을 하려면 물질도 많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옳은 돈인지 구린 돈인지 구별하지 않고 그저 많이 가지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 인간들과는 철저하게 다르십니다. 완전하게 다르십니다. 근본적으로 다르십니다. 질적으로 다르십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높아지려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성을 쌓았습니다. 하늘까지 그 이름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낮아지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에 종의 형체인 육신을 입고 찾아 오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큰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요,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을 정말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정말로 버려야 할 것을 버렸습니까? 참 평화를 알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저는 정치가 전문 분야는 아니지마는 우리 나라 정치인들을 볼 때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저들이 정말 국민을 사랑하는가 의심이 들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 최근의 정치 이슈로 떠오르는 것은 경제청문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청문회에 전직 대통령이 증인으로 나와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여야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정치 논리로 해석하지 않고, 성경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당연히 전직 대통령이 경제 환난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청문회장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옳으냐 그르냐,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정말로 백성을 사랑한 지도자였다면, 오늘도 이 나라의 미래를 염려한다면 자신의 체면, 명예 다 버리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데 가장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욕먹음으로 동서가 화합할 수 있다면, 잘못된 이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다. 어떤 기사 타이틀을 보니까 YS송장 되도 청문회장 못나간다. 내가 왜 나가나? 이런 무책임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자식이 사고를 쳐서 어디 갇혀 있다고 생가가해 보십시오. 감옥인들 안 가겠습니까? 파출소인들 안가겠습니까? 그 어떤 자리인들 안 가겠습니까? 대접받는 자리, 칭찬 받는 자리는 아무나 다 갈 수 있습니다. 영광의 자리 기쁨의 자리는 소인배라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먹은 자리, 희생하는 자리는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더더구나 생명을 내 놓는 죽음의 자리는 정말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의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청문회 정도 참석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단순히 욕 좀 먹고, 비난받고 수모 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 정도 수준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 아닙니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존재입니까?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존재입니까? 뭐가 대단한 존재라고 건방을 떱니까? 겸손하지 못합니까? 낮아지지 못합니까? 버리지 못합니까? 순종하지 못합니까? 성탄절의 참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은혜는 힘에 논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높아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고, 자신의 모든 권리를 버리고, 우리 주님처럼 완전하게 죽어지게 될 때 비로소 이 땅에 진정한 평화, 생명, 자유, 사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버릴 때 얻는 것입니다. 낮아질 때 높아지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고난받을 때 승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 사실을 웅변처럼 증거하지 않습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至極)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者)들과 땅에 있는 자(者)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시인(是認)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榮光)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자기를 비우기를 원하십니다. 남을 섬기는 종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낮아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죽기까지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할 때 우리들의 이름도 높아질 것이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根本)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同等)됨을 취(取)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自己)를 비어 종의 형체(形體)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模樣)으로 나나나셨으매 자기(自己)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服從)하셨으니 곧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至極)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者)들과 땅에 있는 자(者)들과 땅 아래 있는 자(者)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시인(是認)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榮光)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 막12:35-40/ 대림절설교/ 2014-12-15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 막12:35-40 다음주는 성탄주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알고는 있으나 그날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아는데는 별 관심도 없으며 또한 잘못 알고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던 일이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이 누구신지를 교훈 하시며 또 덧붙여서 예수님과 정 반대되는 사람들을 보이심으로써 예수님을 더욱 정확히 알게 해주십니다. 본문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정치적으로, 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발버둥침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그만 데나리온 동전을 보이심으로 능숙하게 정치적인 올무를 벗어납니다. 이 데나리온에는 시저의 초상이 있으므로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본문 앞 13절부터 17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올무는 그네들이 좋아하는 Torah의 핵심부인 출애굽기를 들어서 벗어납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이 없다는 것을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임을 설명하시고는 아브라함의 영혼과 육체, 이삭의 영혼 육체, 야곱의 영혼 육체의 하나님이라서 이 각각의 영혼뿐만 아니라 각각의 육체를 영원히 보전하는 하나님 이신데 어찌 부활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3번째 종교적인 올무는 무엇이 첫째가는 계명이냐고 묻는 질문인데 영원한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합쳐서 교회가 지켜야 할 우선 순위를 결정하심으로 벗어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 절 34절에는 ”그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마치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을 잡으려고 무진 애를 쓰나 번번히 실패하고 마는 블레셋 방백들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계교가 깨어진 것을 아신 주님은 오늘 본문으로써 대적자들을 공격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주 대상은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또 흰색의 옷을 입으므로 어디를 가나 눈에 잘 뜨이게 됩니다. 오늘날 같으면 비싸고 좋은 옷만 입는 model같은 존재요, 마치 흙투성이가 되어있는 닭장 가운데서 흰 백로처럼 다니는 존재들입니다. 유명한 신약학자 예레미아는 그의 저서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이란 책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도중에 있는 바쁜 자가 아니면 모든 사람은 서기관이 지나갈 때 존경의 표시로 반드시 일어서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랍비”(나의 위대한 분의 뜻)나 ”주인님”, 또는 ”아버지”의 존칭으로 불리워졌으며 항상 연회나 잔치가 있으면 이들은 음식을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장식품처럼 꼭 있어야 하는 자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들은 노인이나 심지어 자기 부모보다 더 앞선 위치에 앉거나 대접받았습니다. 회당에 오면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되며 일반인들은 토라를 가슴에 안고 있는 그들의 경건한 뒷모습만 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거만한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빤히 쳐다보시며 반격하십니다. 우선 첫째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시며 다음으로 서기관들을 근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의 바른 신앙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질문을 시작하자 굉장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우선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소 가벼운 질문을 하시고 계십니다. 즉 ”어찌하여 서기관들이(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라고 묻습니다. 구약에 메시아, 즉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구약말씀을 생각하도록 유도하십니다. 즉 사무엘하 7장 12절이나 이사야 9장 7절, 예레미아 23장 5절 후반에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와 다윗의 혈통과의 관계를 생각하게끔 유도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어떤 초자연적인 생각은 전연 없습니다. 그러다가 본문 36절에서 서기관들의 생각을 뒤흔드는 성경적 놀라움을 던져주십니다. 이는 시편 110편 1절 말씀으로 서기관들도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 구절의 권위를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말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서, ”여보게, 이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지. 자, 시편 110편에 다윗이 말한 것을 보면 주(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주(구세주, 메시아)께 말씀하시는데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라고 하셨다고 되어있어.”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반격하시는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말입니다. 이는 좋은 질문입니다. 여러분도 해답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말해서 ”어째서 메시아가 동시에 다윗의 아들도 되고 다윗의 주님이 되느냐? 만약에 메시아 그가 단지 인간이라면 말이야.”라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생각으로는 No answer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전문이라고 하는 성경을 사용하여서 서기관들의 제한된, 불완전한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한 지식이 깨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보셨다시피 하나님이요 인간이라는 이 2중성이 그리스도에게 있어야만 성경의 요구조건이 만족됨을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실이 사도시대의 교회가 반복해서 외쳤던 점입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는 그의 위대한 설교에서(행전 2:34-36)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느니라 하니라”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히브리서 기자도 똑같이 시편 110편 말씀을 들어 예수님의 초자연적 우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서 1장 13절은 초자연적 예수가 시편 110편을 만족시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 대화는 당신 스스로가 메시아요 그리스도임을 스스로 고지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동시에 인간으로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입이 하나님인 본성에 의해 통제되고 의인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한 주가 채 지나기 전에 다윗의 자손인 육체가 죽어 시편 22편의 예언을 성취합니다. 그리고서는 그의 인간성과 신성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분명하게 부활을 통하여 강력히 증명됩니다. 마침내는 승천하셔서 시편 110편 1절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를 성취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서기관들에게 한 이 질문을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고 본문 37절 말미에 기록합니다. 백성들이 예수님 말씀의 중심을 조금밖에 알지 못했어도 그 위세 당당한 서기관들이 끙끙대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그렇게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이 상황을 벗어날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정치적, 세상적, 인간적 왕국과 메시아를 생각하는 동안 그들은 성경의 영적 의미에는 까막눈일 뿐임을 넌지시 가르쳐 주시고 나서는 역시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시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시대적 문화에 맥을 못 추고 지내왔음을 교회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영국의 무용담”이라는 책을 쓴 Arthur Bryant경은 그 책 ”어두운 사탄의 공장”이라는 장에서 19세기 전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청소년 학대를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9살이나 8살 먹은 소년소녀들이 탄광 노동자로 착취당하는 것은 그 당시 예사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3살 짜리도 동원되었습니다. 이 소년소녀들이 통상 16시간 넘게 일했습니다. 1833년 보고서에도 보면 많은 제조업자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1833년 면화공장에는 60,000명의 남자 어른과 65,000명의 여자 어른, 84,000명의 14세 미만의 소년소녀가 일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상류층의 고용인들은 기독교인이었고 부자였으며 매일 돈을 남용하고 기업확장으로 즐거워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당시 교회는 수수방관만 하였습니다. 미국도 노예제도에 오히려 동조하고 찬성한 교회와 교단이 많았습니다. 한국도 신사참배를 주장하고 일본 앞잡이 노릇한 교계 지도자가 많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성경말씀이 세상문화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이혼율은 기독교인이나 비 기독교인이나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물질주의는 신자나 비신자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보편화된 사상이 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성경의 경고가 축소되거나 그냥 들리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나간 역사인 영국의 산업주의, 미국의 노예주의, 한국의 사대주의의 실상이 오늘날 진실한 기독교인에게는 이상한 것 같이, 몇 십 년 후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산 오늘을 되돌아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머리를 흔들면서 이들이 과연 어떤 교인이었냐고 물을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초대교회시대의 때묻지 않은 눈을 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질긴 썩은 문화를 우리 존재로부터 끊어낼 수가 있습니다. 이제 38절에서 4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간접적인 공격으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으로 한 단계 높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위엄 있는 복장에 대해 분노로 대적하십니다. 칭찬과 지위에 병든 자들은 오늘도 도처에 있습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글을 읽어보면 목사가 무슨 직책과 명함이 그렇게도 많은지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다고 쓰여있습니다. 조금만 유명해지면 교회보다는 비행기 속에 있는 시간이 많고 강단보다는 TV에 많이 나타나는 우스운 사태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앉으면서 까지도 꼿꼿이 앉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들과 조금도 같지가 않았으며 절대로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40절에 보니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길게 기도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런 종교를 빗댄 탐심을 과감히 대적하십니다. 워렌 워어스비 교수는 ”19세기동안 교회는 세상을 향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쳐왔지만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보고 죄를 대적하고, 회개하고, 복음에 합당한 진실한 교회가 되라고 외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거짓되고 자존심 세고 이익만 챙기려는 자에게 강하게 나타납니다. 본문 40절 후반에 보면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나니”라고 나옵니다. 오랜 신앙생활과 많은 성경지식을 가진 자들 중에 조금씩 타락해 감으로써 믿음 떠난 지 꽤 되어서까지도 훌륭한 기독교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1절에서도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라고 충고합니다. 이제 말씀을 요약하면서 오늘 본문이 던지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보겠습니다.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생활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읽기를 즐겨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현시대 문화에 젖어서 말씀이 우리 맘에 와 닿지가 않습니까? 진정으로 말씀이 역사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은 우리 기독교가 조심스럽고도 어찌 보면 고통스럽기까지 하는 성경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왜 우리는 하나님께 봉사해야 합니까? 불나비처럼 권력과 인기와 돈을 따라다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목사든, 청소년 사역자든, 주일학교 교사든, 성경공부 지도자든 그 어떤 교회 직책을 가졌든 간에 그 동기가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진정으로 거룩하게 보이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십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도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큰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42절 말씀대로 ”그는 누구의 자손이냐”는 질문입니다. 만약 다윗의 자손이라는 대답뿐이라면 크나큰 실수를 한 것이요 지금부터 영원히 생명에서 분리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대신 다윗의 자손이었고 육신으로 오신 주님으로 고백된다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건강한 영혼과 바른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 전부터 계셨고, 사랑으로 육신을 입어 다윗의 자손이 되셨고, 죄 없는 삶을 사셨고, 스스로 부나 권력이나 특권을 결코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우리의 모델이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셔서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하신 그 자리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간구 하시며, 우리 모두가 자기 모습을 닮도록 기도하시며,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우리의 조그만 아픔에도 함께 하시며,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 모두는 그와 같이 화하여 영원히 기뻐하게 될 그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알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더 많이 믿을수록 당신은 더욱더 기뻐하게 되고 영혼은 더욱 건강해질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