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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묵상(3)/ 늦깎이 성탄절/ 눅23:29-43/ 2004-12-25
12월의 묵상(3)/ 늦깎이 성탄절 눅23:29-43 전기 현상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주전 600년경에 살았던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입니다. 그는 보석의 하나인 호박을 마찰하면 가벼운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 후 <호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엘렉트론>에서 <일렉트리시티>, 전기란 말이 나왔습니다. 탈레스 이후 2,500여 년이 지난 1879년에 발명왕 <에디슨>은 탄소 전구를 발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지 8년이 지난 1887년 3월 6일에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 뜰 앞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밝혀졌습니다. 당시에는 향원정 연못가에 세워진 전등소에서 7㎾짜리 <에디슨 다이나모발전기 3대>로 전기를 만들었는데, 16와트 짜리 전등 750개를 켤 수 있는 규모로 당시 동양에서 가장 우수한 설비였다고 합니다. 그 후 1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잠시도 전기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전기가 없는 곳이 있었습니다. 제 부친께서 과수원을 하시던 경상북도 봉화의 한 산 자락에는 불과 몇 년 전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호롱불 아래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어두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온 세상에 전등불이 밝혀져 있었지만, 그 골짜기에는 전기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뒤늦게까지 아직 탄생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예수님이 탄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탄을 체험치 못한 한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제가 설교를 위해 선택한 인물은 강도입니다. 그의 양심은 편안치 못했습니다. 길가는 사람을 가로막고 금품을 빼앗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랑민이 넘쳐나던 당시 상황에서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떤 비관적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생활 근거지 없이 떠도는 집시 같은 사람이 80%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는 동료들과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이건 우리 탓이 아니야. 우리만 강도냐? 그 놈들은 칼만 안 들었을 뿐, 우리 보다 더 나쁜 강도지> 이들이 증오하는 소위 <그 놈들>이란 여러 부류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로마에 아부하여 돈으로 분봉왕 자리를 사고, 그 밑천을 뽑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뽑아가던 헤롯왕, 새로 부임한 로마 총독 빌라도, 아니 연약한 유대 왕국을 집어먹은 로마 제국, 그 로마에 빌붙어 세금이란 이름으로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던 세리들, 강포한 군인들, 성전을 차지하고 앉아 마지막 희망을 하나님께 두고 찾아오는 불쌍한 백성들을 가로막고 서서 거들먹거리는 제사장들, 병든 짐승을 제물용으로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하던 성전의 장사치들, 율법 지식을 자랑하면서 무식한 민중을 무시하던 바리새인들, 이들이 다 강도로 보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나만 강도냐? 그리고 내가 강도가 되고 싶어서 되었나? 나는 시대의 희생양일 뿐이야!>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상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은 최근에 나타난 아주 특이한 선생님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그 선생의 이름은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간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갈릴리의 디베랴 바닷가에는 수만 명이 모인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선생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명을 먹이기도 하고, 병든 사람을 고치기도 하며,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세리도 친구로 삼으셨고, 심지어 그 제자 중에도 세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이전의 어떤 선생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특출한 분이라고들 했습니다. 게다가 그 분은 자신이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왔다고 말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선하고 의로운 선생님은 본 적이 없다고들 했습니다. 그는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그 예수 선생님에 대하여 좀 더 알길 원했습니다. 그가 수집한 정보는 이렇습니다. <그 예수 선생은 탄생부터가 특별했다. 그는 약 삼십여 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데, 그 날 밤 하늘에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밝은 별이 나타났고, 천사들이 노래를 했다. 그 날 밤 들판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이 그 모든 것을 다 보았고, 목자들은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베들레헴에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라\\\'는 말을 듣고 실제로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다. 지금도 베들레헴에 가면 그 목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그 목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은 예수 선생님에게서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을 직접 만나 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보았는데, 그가 지금도 베다니 마을에서 여동생들과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최근 소식은 그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그 예수 선생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지금 여리고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분이 여리고를 지나면 이제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의 거칠고 황량한 유대 광야를 무대로 강도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예수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 예수를 한 번 만나볼까?> 그러나 그로 하여금 예수께로 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죄책감이었습니다. <너는 망가진 인생이야. 네 부모가 너를 회당에 데리고 다니면서 율법을 가르칠 때, 강도가 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지 않느냐? 네 손에는 피가 묻었고, 네 주머니는 희생자들의 돈으로 채워져 있지 않느냐? 네가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그 의로운 선생님 앞에 나간단 말이냐?> 자신이 죄인이라는 양심의 가책이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둘째는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는 핑계들이었습니다. <넌 이 유명한 산채의 두목이야. 네 목에는 지금 거액의 현상금이 붙어 있어. 너는 졸개들을 먹여 살릴 책임이 있어. 그 예수 선생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닌다고 하는데, 어쩌면 네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 만약 잡히면 너는 끝장이야. 십자가에서 죽게 될 거야. 네가 호기심 때문에 예수 선생을 만나러 나간다는 것은 위험천만이야> 그를 예수께 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세 번째 이유는 그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대 변신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터는 강도였지만, 이제 세력을 모아서 자기 민족을 억압하는 로마와 맞서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로마의 고관 대작이나, 군인들은 건드릴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로마 군인도 털고, 귀족들 주머니도 털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자신들을 강도가 아니라, 로마와 맞서 투쟁하는 독립 투사로 대접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혼자 속삭였습니다. <예수 선생, 나도 당신을 만나고 싶고, 당신의 가르침도 들어보고 싶소. 나도 이 강도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요. 어쩌다 보니 인생이 이렇게 비탈에 미끄러지고 만 것 뿐이요. 당신만 왕국이 있는 게 아니요. 내게도 내 왕국이 있소. 내게는 수하들이 있고, 앞으로는 로마와도 맞서볼 계획이요. 우리 한번 내기 해 봅시다. 당신과 내가 나이도 비슷한 것 같으니, 당신은 당신의 나라를 세우고, 난 내 나라를 세우는 거요. 당신은 당신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대로> 결국 그는 예수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 선생님이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졸개들에게 명령하여 귀찮게 하지말고 보내 드리라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는 예전처럼 자기 생활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활은 몇 일 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로마에 대항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빌라도 총독은 수색대를 파견했습니다. 오합지졸인 그의 수하들은 잘 훈련된 로마군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쫓기다가 체포되어 짐승처럼 예루살렘에 끌려갔습니다. 거반 죽을 정도로 얻어맞은 후, 너무도 당연히 십자가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문난 강도가 잡혀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날 아침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이유가 바로 그 예수 선생님 때문임을 알게 되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불과 일 주일여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 예수 선생님이 자기와 함께 처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오를 때에도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예수 선생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그도 예수 선생님을 보려고 했으나, 사람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 선생님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후였습니다. 자신 옆에,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그 분이 매달린 후에야 그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이 부끄러운 십자가에 달린 채로 그 분을 뵙게 되다니. 그는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강도로 죽게 된 자신의 인생을 슬퍼했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세상을 저주했습니다. 악을 쓰고, 욕을 해댔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 선생님은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가 운명하기까지 긴 시간 동안 한 말은 고작 일곱 마디뿐이었습니다. 그 예수 선생님은 심지어는 고통을 줄여주는 신 포도주로 마시길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고통에 헐떡이면서도 그의 얼굴을 평화로웠고, 그의 깊은 눈빛 속에 사람들을 향한 자비와 애정이 보였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의 왕들이 가지는 음흉하고 교만함도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 선생님의 말에 놀랐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할 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원수들을 용서하다니, 이건 강도가 세우려고 했던 나라에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세우고자 했던 나라에는 잔인한 복수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신을 강도가 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게 만든 이 세상에 대한 복수, 부자들에게 대한 복수, 로마 군인들에 대한 복수, 다 죽이고 빼앗아라. 다 뒤집어엎어라. 그리고 그 위에 군림하라. 힘이 정의이다! 이게 그의 나라의 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나라는 달라 보였습니다. 그의 나라에는 용서가 있었습니다. 용서가 있는 나라라면! 나 같은 강도도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인가? 로마법도, 유대법도 나를 용서하지 않고, 이렇게 십자가에 나를 매달았는데, 이 예수의 나라에는 용서의 법이 있다니! 더구나 예수 선생님은 한 젊은이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을 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어머니, 이 얼마나 그리운 말이던가! 그는 집을 떠난 이후, 강도로 떠돌게 된 이후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그의 험한 인생에 어머니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독기 어린 그의 눈에 눈물이 배어 나왔습니다. 그의 마음은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런 욕심도 없이 어머니 품으로 만족하던, 그 어리고 맑던 시절. 때묻지 않았던 시절! 그 시절이 그리웠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놀던 그의 손에는 지금 커다란 못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우고자 했던 나라에는 사랑은 없었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세우려는 나라에는 따뜻한 가정의 사랑 따위는 사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선생님의 나라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있고, 아들이 있었습니다. 돌봄이 있고, 사랑에서 우러나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아, 이 예수 선생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이미 내 나라는 다 무너졌건만, 이 예수의 나라는 건재하지 않는가? 강도는 자신의 나라는 힘으로 세우는 나라였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세우는 나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사랑 앞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는 모든 체면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 때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사랑하는 내 형제여, 그대가 세상에서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 수명이 짧고 허무한 나라였지만, 내 나라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일세. 내가 그 생명의 나라로 그대를 받아들이겠네> 왕이신 예수님은 그 날 강도를 당신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날 강도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강도의 왕이 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삼십 삼 년 전에 탄생하셨건만, 강도에게는 그 날이 예수님의 성탄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구원자로, 그의 인생에 탄생하신 날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양아버지 요셉, 모친 마리아, 동방박사들, 목사들 보다 삼십 삼 년 늦게 성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늦깎이 성탄절>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절은 언제입니까? 12월 25일입니까? 아닙니다. 성탄절은 우리가 예수님을 인생의 왕으로 영접하는 그 날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성탄절을 맞이했지만, 어떤 이는 아직도 성탄절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아직도 성탄절을 맞지 못했나요? 그렇게 된 이유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 때문에 의로운 주님께 못 온다고 합니다. 바쁘고 피곤하다고 핑계합니다.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합니다. 아직은 자신의 나라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왕이 될 나라를 세우는 데 몰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탄생하셨습니까? 아직 그렇게 못하셨다면 예수님을 영혼에, 가정에, 일터에 구주로, 왕으로 영접하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입니다. 두 가지 질문으로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첫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2천년 전 베들레헴에 나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탄생하셨습니까?> 이 시간 여러분 개인의 대답을 주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지금 이 순간이라도 예수님을 구주요, 왕으로 영접하심으로써 <늦깎이 성탄절>이라도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2000년의 성탄절에 보는 이 시대/눅2:10-11
2000년의 성탄절에 보는 이 시대 눅2:10-11 내일이면 성탄절입니다. 오늘 말씀을 제목을 2000년 성탄절에 보는 이 시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탄의 소식이 가장 처음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들에서 양들과 함께 잠을 자던 목자들에게 하늘의 천사들이 나타나서 경배하며 예수가 태어난 사실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예수 탄생하신 사건이 온 세상에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천사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얼마나 먹혀들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이 기쁜 소식이라고 해서 기쁜 소식인지 내가 기쁜 소식으로 느껴져서 기쁜 소식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어짿든 성탄절이 기쁜 날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온 세계가 이날을 기쁨의 날로 축제를 즐기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2000년의 성탄절을 맞이하며 느끼는 것은 옛날 첫 번 크리스마스 때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성탄절을 통해서 이 시대를 바라보려고 합니다. ①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 첫 번 성탄은 목마름과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눅2:25-27절에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에 따라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기 위해 성전에 갔을 때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것은 단지 시므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목말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시대입니까?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본문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오신 소식이 왜 기쁨의 좋은 소식인가 하는 것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너희를 위해 구주가 오셨다는 정도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목말라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엄청난 기쁨이었습니다.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물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목마르면서도 목마름을 못느끼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 물을 먹어야 하는지를 애써 설명해야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정말 목마른 사람은 갈급함이 있어서 설명할 필요없이 먹고 봅니다. ② 형식과 외형만 남은 시대 이시대는 성탄은 간곳없고 성탄절만 있는 이 시대가 되었습니다. 알맹이는 없고 껍질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12,25일이 성탄절인가 기독역사의 처음 1-2세기 때에는 박해의 기간이었기에 생일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에 초점을 추어 그것을 더 기념하는 풍습이 있었고 예수님의 탄생일을 알만한 사도들이 모두 순교하여 주님의 탄생 일자에 대한 체계적인 정립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인이 된 후 밀나노 칙령을 발효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후 자연적으로 예수님의 생일에 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354년 리베리우스 황제가 그들의 전통적인 명절 시기인 한날 즉 12,25일을 지정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대한 경축행사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12,25일이 중요시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날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만일 날이 중요했다면 성경에 예수의 탄생날자를 명시하였을 것이다. 그 날이 12,25일든, 1,6일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성탄절이나 또는 부활절 안식일 이런 날들을 믿거나 지킴으로 구원받는 다고 결코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오직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어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다만 한 날들을 정하여 그분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기념하고 그분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뿐이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다. ③ 진정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시대 세 번째로 이 시대는 성탄절에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 것인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성탄절만 되면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것이 산타 크로즈 할아버지다. 붉은 모자 붉은 옷에 긴 장화를 신고 힌 수염에 커다란 선물 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여덞 마리의 사슴이 끄는 썰매를 타고 북극에서 찾아와 집집마다 굴뚝을 통해서 몰래 집안에 들어가 착한 아이의 양말 주머니에 여러 가지 선물을 넣어준다는 전설적인 존재이다. 이 싼타 클로스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주후 270년경 소아시아 지방의 주교였던 \\\'성 니콜라스\\\'(St. Nicolas, 주후 350년경 순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이 라틴어로 \\\'상투스 니콜라우스\\\'인데,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산타클로스\\\'로 변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성탄절에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 예수에 대한 기대와 찬양보다 1년 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한 아이에게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는 기대를 심어줌으로서 크리스마스가 싼타 마스로 둔갑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탄절에서 교회는 싼타클로스를 추방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싼타크로스는 바로 예수 그리스입니다. 왜냐면 예수그리스도는 온 인류에게 구원과 평화의 선물을 가져다 주신 분이다.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밤중에 목자들에게 나타났던 천사들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라고 하면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2:10-11) 라고 하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과 온갖 은사를 가지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진정한 산타크로스이시다. 거짓 산타 크로스를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자. ④ 거짓된 것이 찬양 받는 시대 크리스마스 캐럴송(Christmas carol song)은 크리스마스 축가(祝歌)이다. 그러기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내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럴 (Christmas carol) 은 어떤가? \\\'아기 예수 탄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루돌프 사슴코, 징글벨, 실버벨, 산타클로스 등은 정말 성탄절과 무관한 것들이다. 천사들이 불렀던 찬양을 우리가 다시 불러야 한다. 더 이상 루돌프 사슴코나, 징글벨, 실버벨, 산타클로스를 노래하지 말고 크리스마스 찬양을 주님께 드리자 ⑤ 어둠에 대하여 빛이 필요한 시대 성탄절에 크리스마스 츄리를 한다. 츄리를 하는 풍습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북유럽의 튜튼족 사람들은 전나무나 소나무와 같은 상록수가 영생을 갖다 준다고 믿는 성수(聖樹)사상이 있었는데 튜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 후에도 이 민간신앙이 그대로 남아서 성탄절에 소나무나 전나무를 세우고 성탄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북 유럽 사람들의 풍습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크리스마스 트리가 전세계적인 크리스마스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며 세상의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약간의 장식을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매년 성탄절에 교회마다 수 십 만원 또는 수 백 만원씩 드려서 교회 외부에 네온 싸인 또는 장식 전구로 화려하게 불을 밝히는 것에 대하여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보다는 \\\"너희가 빛이다\\\"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따라 우리들이 성탄을 알리는 성탄의 장식품이 되고 성탄 츄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성탄 츄리가 되자.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진정한 성탄의 의미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조용히 그리고 주님 탄생의 의미를 살려서 낮은 자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 외롭고 마음이 슬픈자들에게 주의 오심을 전하자.
7월의 크리스마스/눅1:26-38
7월의 크리스마스 눅1:26-38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글 중에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여 구원하는 방법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놓은 이런 우화 내용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자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궁 밖 사냥터로 사냥을 나갔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시골길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만났다.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왕자는 궁궐에 돌아와서도 그 여인의 모습이 아른거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왕자의 가슴은 사랑으로 불탔고 마침내 마음의 병이 들고 말았다. 왕자의 주위에는 수많은 대신대작들의 귀하고 아름다운 딸들이 많았으나 그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드디어 왕자는 그 시골 처녀를 데려와 아내로 삼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데려오는 방법이다. 왕자는 궁리 끝에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첫 번째는 왕자 자신의 권위로 청혼하는 방법이다. 왕자가 화려한 정복을 입고 백마를 타고 수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시골 마을에 나타나 그 처녀에게 직접 구혼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왕자는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그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여인이 어디 있겠는가? 여인은 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어도 왕자라는 내 직위와 외모, 권위에 반하여 나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러나 그건 아니다. 두 번째는 신하들을 시켜서 그녀를 왕궁으로 데려온 후 휘황찬란한 궁궐의 모습을 보여주며 청혼하여 아내로 삼는 방법이다. 이를 싫다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 역시 아니다. 마지막으로 왕자는 그녀의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아니다. 왕자도 왕궁도 결혼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그녀도 진심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왕자는 시골 목동의 모습으로 그 처녀가 사는 시골집 옆에 거처를 정하여 살고 그녀와 교제하다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가 이를 받아들일 때, 그때 그녀를 왕궁으로 데려와 백년가약을 맺어야겠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방법만이 어떤 좋은 조건 때문이 아닌, 오직 순수한 사랑으로 그 아름다운 처녀를 아내로 맞는 길임을 알게 된 것이다. 왕자는 예수 그리스도요, 시골 처녀는 땅위의 인간이며, 왕궁은 하늘나라의 영화를 가리킨다. 그렇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직접 이 땅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의 이웃이 되셨고,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으며 우리의 순수한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평범한 시골 처녀요. 때문에 평범한 남자 요셉과 약혼했고 결혼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했습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천사의 방문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왜 가브리엘이 수많은 여인가운데 마리아를 찾아 주었습니까? 본문28절이 답해 줍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한 것은 마리아가 예뻐서도 아니고, 재물이 많고, 학문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한대로 천사의 방문은 마리아에게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받는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찾아와 주신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육신 사건, 성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신 이 사건이야 말고 최고의 은혜요, 또 이것이 최초의 크리스마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 받으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은혜 받으면 근심이 사라집니다. 불안 염려가 사라집니다. 은혜 받으면 성령께서 나와 동행해 주십니다. 은혜 받으면 겸손해 집니다. 낮아집니다. 38절입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계집종이라는 말은 굉장히 낮고 천한 하인을 뜻합니다. 천사의 통보를 받았을 때 만일 마리아가 조금이라도 교만한 여인이었다면 \'그러면 그렇지 나를 빼 놓을 수가 있는가\' 자기가 선택된 것을 아주 지당한 것으로 여기면서 으스대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은혜 받은 마리아는 고백합니다. 주의 계집종입니다. 나는 천주교에서 경배와 찬양을 받는 성모 마리아가 아닙니다. 계집종,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자기의 신분을 하인의 자리에다 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계절입니다. 겸손의 은혜를 받는 절기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자기를 비우는 절기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자기를 낮추는 절기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자기를 희생하는 절기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절기입니다. 35절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마리아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처녀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한번도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리적 불가능이 곧 하나님의 불가능은 아닙니다. 여기 덮는다는 말은 감싼다는 말입니다. 임재하다 다시 말하면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다. 그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감싸면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마리아는 감추어지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것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내게 감싸질 때 모든 불가능이 사라집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의심이 사라집니다. 불신이 사라집니다. 확신과 믿음이 생깁니다. 순종의 삶을 살게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 성탄은 순종의 계절입니다. (삼상 15:22)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때 당시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을 찍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정혼자인 요셉으로부터 파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신22:23-24를 보면 처녀가 남자와 정혼한 후에 다른 남자와 간음하면 성밖으로 그들을 끌어내어 돌로 쳐죽일 지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요8장에서도 실제로 어떤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군중들은 이러한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쳐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러한 자신에 대한 불합리한 조건,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신뢰하고 순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말대꾸가 필요없습니다. 변명과 설명이 첨가되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어떠한 불합리, 어떤 어려움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순종할 때 역사가 나타납니다. (찬송가 377장)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해를 당하거나 우리 고생할 때 주가 곧 없이 하시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안위해 주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31-33절입니다. 마리아가 낳게 될 아이가 보통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 낳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유치원에 입학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보통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부터 이름까지 지어 주셨습니다. 본문31절입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예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 헬라어로는 예수스, 다시 말하면 예수라는 말은 여호와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마1:21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가 낳게 될 아이는 예수 곧 그 이름이 구주이시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겠습니까? 처녀의 몸에 잉태된 아이, 그 아이가 인류의 메시아인 것을 천사가 밝혔을 때에 아마 마리아는 너무도 놀랐을 것입니다. 32절에서도 보면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높으신 이의 아들 또 다윗의 위를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33절에서도 \"야곱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라고 했고 \"그 나라가 영원하리라\"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요약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시냐?\' 이러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2000여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줄곧 물어온 물음이 있습니다. 철학적이면서도 실존적인 그리고 구원을 갈망하는 인생의 절규라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라\" 대답을 못하니까 재차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나 하느냐\" 이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은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정의 왕이시고, 우리 교회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교육계의 왕이시고, 경제계의 왕이십니다. 왕 되신 그분이 화려한 정복을 입고 백 말을 타고 수많은 천군 천사들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우리를 구원하시려 오셨다. 누가 그 직위와 외모 그 권위에 굴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휘황찬란한 궁궐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당장이라도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왕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시며 천한 자의 높임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온 교회의 머리와 만국인의 구주시며 모든 왕의 왕이요 심판하실 주님 되고 우리 영광 되시네
Merry Christmas!/ 눅2:8-14
Merry Christmas! 눅2:8-14 Merry란 말은? 기쁜, 즐거운이란 뜻입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말은 그리스도(Christ)와 마스(mas) 의 두 말이 합하여 된 말이다. "마스"란 말은 "예배"란 말과 같다. 카톨릭교회에서 예배를 "미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미사"와 "마스"는 같은 말이다.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하는 거기에 참 뜻이 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해야 할까요? 그것은? 첫째, 생명의 빛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사 9: 2, 요 1: 4, 8: 12) 둘째,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려 오셨습니다(마 1: 21) 셋째,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아니하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마 9: 13, 14) 넷째, 전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막 1: 39) 다섯째,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막 10: 45, 롬 4: 25) 여섯째,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눅 19: 10) 일곱째,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요한 삶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요 10: 10, 3: 16) 여덟째, 마귀를 멸하고 포로되어 지옥에 끌려가는 자들을 구출하러 오셨습니다 (눅 4: 18, 19, 히 2: 14, 15, 요일 3: 8) 아홉째, 임마누엘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 1: 23, 28: 20) 그러므로 온 세계 백성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탄절은 죽어야 할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우리들(인류)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서 오신 날입니다. 예수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Merry Christmas ! ================= 성경제목: Merry Christmas ! 성경본문: 누가복음 2장 8절-14절 해마다 성탄절에는 먹고 마시고 즐기느라 술집이나 여관, 호텔 등에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성탄절이 되면 교회는 갈수록 조용해 가는데 술집들이 왜 그렇게 야단들입니까? 유흥업소들이 왜 그렇게 시끄럽고 흥청망청 댑니까? 술집에가도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글자를 붙여놓습니다. 호텔이나 유흥업소에 가도 축 성탄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어떤 술집에서는 "성탄절 기념 술값 30% 세일"이라는 희소식도 써놓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탄절은 불신자들의 축제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 성탄절은? 산타판이에요. 아이들이 입으로 부르는 캐롤송이 '징글벨', '루돌프 사슴코'이고,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엔 선물을 안 주신 대요"를 부르면서 율동을 하고, 그야말로 참 어리둥절하겠어요. 크리스마스 카드에 산타가 주인공이죠? 여러분, 도대체 누가 주인공인가? 산타인가? 예수님이신가? 이걸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성탄 문화를 바로 가르치고 올바른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어떤 날입니까? Merry란 말은? 기쁜, 즐거운이란 뜻입니다. 크리스마스는 christ라는 말과 mas(예배-카톨릭의 미사)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 christ는 예수를 의미하고 mas는 만나다(예배)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날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날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신 하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큰"Merry Christmas!"다. 즐거운 성탄, 기쁨의 성탄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탄절에는 아기 예수를 만나는 예배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신 그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 분을 만나고 그분께 경배를 드리고 그분께 감격의 예물을 드리는 날입니다. === 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언은? 구약에 예언된 진리입니다. 사실상 전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여인의 후손으로 오셔서 뱀의 후손(마귀)을 이기실 것을 예언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창 3:15). 마귀를 이기신 예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출생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갈 4:4 ). (2) 이사야서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탄생 74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징조라고 하였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을 말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3, 사 8:8-10). (4) 예수님이 탄생할 나라는 유대라고 하였습니다.(미5:2) 마태복음 2장 1절에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헤르만 바빙크(H. Bavink) 박사는 이런 기록 을 남겼습니다. '70인역(LXX)이 지적한 대로 구약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456번인 데, 오경(창, 출, 레, 민, 신)에서 75번이요, 선지서에서 243번이요, 그 나머지 부분에서 138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탄생과, 33년의 지상에서의 삶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다 이루어졌습니다. ==== ex)타이항공에서 어느 선교사의 질문 : Do you Jesus christ?⇒ "아무리 찾아봐도 승객 중에는 그런 분이 탑승하지 않았습니다." ==== <예화> 며칠전 중졸 아저씨가 퀴즈왕이 되면 사람들은 감동합니다. 경찰서장이 교회 가서 화장실 청소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합니다. 서울법대 졸업+고시합격 ⇒ 자기 집에서 일하는 초등학교 나온 식모아가씨를 사랑해서 결혼한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합니다. 대장금을 보면서도 감동합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께서 영원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당신의 모든 권세와 품위와 자존심을 버리시고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에는 감격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이 성탄 사건에 감격하여 울고 뜨겁게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별로 없습니다.(2x)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이 사건에는 감동을 뜨겁게 받지를 않습니다. === <중요 본문해석>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나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깊이 깨달았을 때 그분에겐 가장 기쁘고 감동적인 크리스마스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가 전하여 준 기쁨의 좋은 소식의 핵심도 "구주의 나심"입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나신 날이 바로 성탄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주목적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속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을, 저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오신 날이 바로 성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사실을 새롭게 깊이 깨닫는 그런 감격적인 성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큰 기쁨을 새롭게 회복하는 성탄절이 됩시다. 천사가 전하여 준 소식이 어떤 소식인가? 10절에서 그 소식의 성격을 말씀하여 주고 있다. ①먼저 "온 백성에게 미칠" 소식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 소식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소식, 열려진 소식이라는 뜻이다. 대통령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소식이고 국민들 모두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소식이고, 어른에게도 열려진 소식이고 아이들에게도 열려진 소식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도 열려져 있는 소식이고, 저기 북한 사람들에게도, 유럽 사람들에게도 열려져 있는 소식이라는 것이에요. 그야말로 이 소식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어요.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는 소식이 바로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입니다. ②둘째는 "큰 소식"이다. 여기서 '큰'이란 말은 헬라어로 '메갈렌'인데, 그 의미는 '큰' '중대한' '위대한' '굉장한'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아주 굉장한 소식, 놀라운 소식을 말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들어본 적이 없는 가장 놀라운 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탄절(크리스마스)은? 아기 예수를 만나는 날입니다.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그분께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날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탄사건이야말로 인류에게 있어서 최고의 뉴스요 영원한 뉴스이기 때문입니다. ⇒ 생명뉴스, 기쁜 뉴스, 영원한 구원과 축복의 굿뉴스임. <예화> 그것은 한 나라가 망하고 흥하는 그런 식의 시시한 뉴스와는 다릅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우승자가 되었다는 그런 뉴스와도 다릅니다. 김대통령이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는 그런 뉴스와도 다릅니다. 또 콜롬부스+리빙스턴이 신대륙+아프리카를 발견했다는 탐험소식과도 비교가 안됩니다. 그것은 영원한 뉴스, 복음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복음뉴스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 그 수수께끼같은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아픔, 고통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성탄사건의 이야기가 우리의 영원한 복음입니다. 태초에 사람들이 창조되어 이 세상에 살기 시작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 있었던 수많은 소식들 중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 소식보다 더 크고 굉장하고 중대한 소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Great News"지요. 제일 크고 놀라운 소식이 바로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이라는 것이다. ③그리고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 그랬어요. 여러분들 동생들이 태어나면 가족과 친적, 여러분들이 기뻐하며 잔치을 열지 않나요? 모두들 모여서 기뻐하며 음식을 차려놓고 즐겁게 지네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 소식은 그 정도 기쁘고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에서 용서받아야 할 인생들, 그리고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진 인생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한 마디로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기쁘고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에요. 아니,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음으로 타락한 우리 인간 모두에게는 진정 차원이 전혀 다른 그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바로 예수님 탄생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목자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15절) 그랬다. 그리고 16절에서도 "빨리 가서" 그랬다. 실로 목자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대망하던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듣자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천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즉시로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이 목자들과 같이 진정으로 기뻐하며 성탄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다. <중요> ***** 내영혼아!...Merry Chrstmas!****** 우리가 성탄을 맞이하여 하는 인사 가운데 즐겨 쓰는 인사가 "Merry Chrstmas!"다. 즐거운 성탄, 기쁨의 성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새벽송을 돌면서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이 되기까지 '메리 크리스마스'를 수없이 외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번 깊이 생각해 보자. 혹 '메리 크리스마스'를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내 마음에는 진정한 큰 기쁨이 없이 형식적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짱> 어느 불치병 환자에게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의사의 말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절망을 소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순식간에 바꾸는 그런 기쁨입니다. 그의 얼굴, 말, 생각, 생활, 인생 전부를 확 바꾸게 하는 그런 결정적 기쁨의 소식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구주가 나신 이 날을 맞이하는 우리 역시 나의 얼굴, 말, 생각, 삶까지, 그야말로 나의 인생 전부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그런 놀라운 기쁨의 성탄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기쁨을 간직한 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성탄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정 이 세상에 구주가 나신 이 차원이 다른 기쁨, 이 기쁨을 회복하는 그런 성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성탄절은 예수님이 주인공이심을, 구주가 나신 날임을 새롭게 깨달아 지금까지의 그 어느 성탄절보다도 더 감격적인 성탄절이 되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구주가 나신 이 큰 기쁨을 다시금 회복하여 진정으로 "Merry Christmas!"를 외치는 그런 성탄절이 되도록 힘씁시다. ==== 본문 10절에 예수 탄생은 좋은 소식, 곧 복음(福音)이라고 하였습니다.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큰 이유는 온 인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는 구원만이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기 예수님께 선물을 드립시다. (1) 친구들을 전도하자!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전도 대상자로 작정하고 기도해 왔던 사람을 전도해서 성탄절 예배에 데려오는 것도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참으로 보람되는 일입니다. (2)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합시다. 물론 성탄절을 맞이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소외된 사람을 돌아보는 것도 더 할 수 없이 귀중한 일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런 일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친척가운데, 이웃가운데 그런 분이 계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ex)고아원, 양로원, 장애인 센타등도.. == 천지 창조를 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란 말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으로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어쩔 수 없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그 끊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위하여 엄연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일어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 무어니무어니 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죄와 죽음 아래 사는 우리들(인간들)에게 가장 크고 귀한 복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모든 인생 문제의 해결자이신 구주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 <중요> 예수 그리스도가 2003년 전에 오심을 어떻게 우리는 알 수(증거 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성경에서요, 둘째는 우리 마음가운데 계신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입니다. 더 나아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컫는 사람들(우리들) 속에 나(우리)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이 살아 계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성탄 진리는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성탄의 영광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빛을 주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멋진 승리의 삶을 창조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 <타종교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과연 어느 종교에서 이런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경전, 어느 종교설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감히 어느 종교의 신이 이런 흉내라도 내 볼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로서는 도무지 풀 수 없는 미스테리같은 사랑이야기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끊을 수 없이 사랑하시는 그 어쩔 수 없는 사람 때문에 현실의 사건으로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탄절(크리스마스)의 감격이 바로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너무나 수수께끼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내가 감격하는 날입니다. 너무나 미스테리같은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깊이 체험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가슴 벅찬 감회와 말로 못할 감격으로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하늘에 사무치는 찬양을 드리고 경탄의 눈물로 감사하며 예물을 드리는 날입니다. 이렇게 하는 날이 성탄절입니다. <삭막함을 버리고, 따뜻함=>아기 예수님으로부터> 오늘 우리 가정이 어떻게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축복을 받은 성탄에 평화의 왕을 우리 가정에 모시 는 믿음이 있을 때에, 어린 아기 예수님을 찬양하는 예배가 있을 때에, 주님의 이름으로 선을 베푸는 사람들의 가정에 성탄의 축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 고후8:9-/ 성탄절설교/ 2002-12-25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 고후8:9- 이번 성탄절은 우리가 어떤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맞이할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흑인들의 연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아무리 겸손하여도 예수님보다 겸손할 수 없네\" \"아무리 가난하여도 예수님보다 가난할 수 없네\" 여러분께서는 이 구절을 생각하면서 어떤 감동을 받으십니까? 2000여 년 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그 때에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우선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경제적으로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전 세계를 다스리는 우월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오실 메시아는 적어도 좋은 환경에서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할 만한 왕의 왕으로 세상에 오실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며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와 반대로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삶을 우리와 비교하여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날 때에 짐승의 우리에게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에도 옷 한 벌 입지 못하고 다 벗은 모양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가난하여도 값싼 수의라도 입고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도 말구유에서 나셨고 세상을 떠나실 때에도 로마군병들이 제비뽑아 예수님의 옷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본문(고후8:9)을 보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가난한 자로 오신 것은 우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믿은 후 모두가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부요라고 하는 말과 부자라고 하는 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자라고 하는 말은 소유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양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요라고 하는 말은 소유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와 가치의 의미입니다. 많이 소유하였어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더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부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며 예수 한 분만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받은 은혜 중 가장 큰 은혜는 그리스도안에서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영국 어느 귀족의 집 하인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 하인이 탄식을 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침 주인이 지나다가 보게되어 \"너는 무슨 일로 그렇게 탄식을 하고 있는고?\"하며 주인이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하인은 \"예. 저에게 일만 파운드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그 만한 돈이 없으므로 이렇게 하인이 되어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마음이 넉넉한 주인은 \"그래 그 돈으로 행복하여 진다면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라고 하인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돌아서기 무섭게 하인은 다시 탄식을 하였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10만 파운드만 있으면 행복하여 질 수 있다고 말할 것을 일만 파운드 밖에 못 받았네\"라고 탄식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이처럼 한량이 없습니다. 가져도 가져도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셋방살이하는 사람이 전세라도 있으면 좋겠지 하며 전세 사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전세를 얻을 만큼 돈이 모아지면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저 단칸방이라도 내 집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방 하나라도 내 집을 가진 후에도 더욱 위를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부족하다고 사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나를 비교할 때에 나는 부요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위에서 가지고 계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잠자리 하나 내 것이라고 마련하신 것이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얼마나 부요한 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어떠한 자세로 바라 보느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부자 예수님을 생각하면 \"내가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왜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성공을 하지 못하는가?\" 고민하며 세상사람들만 바라보며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 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던 화려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서지도 못할 것입니다. 아마도 권력이 있는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제일먼저 예수님을 차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구가 되셨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비천한 사람, 세상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같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자나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족하는 부요함이 없이 탐심으로 가득하여 소유만 늘이려하면 그것은 진정한 복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많이 가졌던 그렇지 않든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부요한 자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에 의미를 두는 사람은 어떠한 처지에도 만족하게 됩니다. 교회가 구제사업에 역점을 두어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주고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세주로서 오신 것이 단지 가난에 지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도록 모든 것을 가지고 오셔서 넉넉히 먹여주고 입혀주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함 속에서도 부요케 됨을 얻는 비결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난한 형제를 돌보고 그들이 잘 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네가 먼저 가난해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저는 오늘날 민중을 위한다고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가난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에 민중은 희망을 가지고 부요한 마음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 지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혜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어느 회사의 사장님이 계셨습니다. 회사는 노사분규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에 따라 매년 20%이상을 올려주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장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여야 노사분규가 없고 사업체를 잘 운영하겠습니까?\"를 물었습니다. 사장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가난하여져라!\"하는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그는 그 때부터 가난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부요한 자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노사분규가 사라지고 회사는 잘 운영되게 되었다고 하는 간증입니다. 민족의 살길도 같은 이치입니다. 정치하는 사람이나 백성이나 똑 같이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자족하는 마음은 가난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보다 더 가난하여 질 수 없네. 예수님께서는 인류역사상 가장 가난한 분이셨네.\"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부요한 자가 됩니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재미있는 실험결과가 있습니다. 음식을 과하게 섭취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돼지같이 먹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돼지에게 음식물을 많이 먹게 하여 가장 많이 먹었을 때 잡아 위를 열어 보았더니 음식물이 위장의 80%밖에 차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많이 음식을 섭취하였을 때를 측정하여보니 위장의 120%나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가 늘어나고 늘어나서 더 이상 터지기 직전까지 먹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20%를 먹어도 만족이 없이 더 먹을 것을 찾는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빌2:6)에는「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되 종처럼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을 침상으로 삼으시고 낙엽을 이불 삼아 하늘을 지붕 삼고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가난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능력으로 우리를 부자가 되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영화로운 영광의 옷을 벗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벗어버린 인간은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값비싼 밍크 코트를 입고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갈 때에는 우리는 새 마포 옷을 입어야합니다. 땅위에서는 무엇을 먹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먹고 또 먹어도 인간은 끊임없이 배고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4:13)「이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하셨고, (요6:35)「...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거할 처소가 되시기를 원하셔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4: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으로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죽으시려 가신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처소에 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처소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없는 나라와 예수님이 없는 심령들은 결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끊임없이 달라고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비도 흙으로 집을 짓고, 여우도 자기가 잠자고 숨을 쉴 수 있는 굴 하나 만들어 놓고 지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과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마6: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마음을 비우면 평안이 옵니다. (히12:2) 말씀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게 되면 너희가 부요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가난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만족이 있습니다. 가난한 중에서도 남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요한 자입니다. 그러한 성탄절을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시작하신 성탄/눅2:8-20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시작하신 성탄 눅2:8-20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탄절, 즉 크리스마스는 본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변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계셔야 할 축하의 자리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차지해 버렸습니다. 산타는 아이들에게 꿈과 이상의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성탄영화들도 산타가 주인공입니다. 또 하나는 온간 인쇄물들입니다. 대표적인 것인 카드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축하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 것은 온갖 장난스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청소년들의 것은 이성교제를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 거룩하고 성스러운 아기예수와 마리아의 모습은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본질적인 이유는 상업주의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돈이 바로 권력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있는 자는 성공한 자요 돈이 없는 자는 아무리 바르게 살고 성실한 인생을 살았더라도 멸시받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 시대의 흐름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성탄의 바른 뜻을 알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성탄의 가장 기쁜 소식을 들에서 자기 양떼를 돌보고 있는 목자들에게 알리셨습니다. 목자들은 가장 가난하고 천대받는 직업입니다. 직업상 안식일도 지킬 수 없는 그래서 율법을 범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이었기에 율법주의 사회인 유대인들에게는 죄인으로 까지 취급받을 수 있는 그런 직업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렇게 가난하고 천대받는 목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어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신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오직 그들에게만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BC 700년 - 680년경에 기록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이사야서에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사야 61장 1-3).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700년 후에 탄생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취하신 것입니다. 즉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시겠다는 그 약속의 말씀대로 성탄의 기쁜 소식을 왕궁에 있는 자도 아니요, 귀족도 아니요, 이름 있는 지도자도 아닌 가난하고 천한 유대 목동들에게 전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하시는 이들은 바로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입니다. 글도 모르고 지식도 없고 돈돈 없는 자들, 죄인이라고 비웃음을 당하는 그런 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하시며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가난하고 병든 자 고아와 과부등 불쌍한 자들을 돌보실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특히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오늘날은 농촌에 사는 사람들조차도 옛날의 인심이 아닙니다. 서로 없으면서도, 무식하면서도 돈 없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도와주기는커녕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가지시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무시하는 것은 주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그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바로 주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천사들을 통해서 성탄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들은 목자들은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들판에서 양들을 돌보기 때문에 한 밤중에도 양떼를 지켜야만 했습니다. 언제 늑대나 다른 맹수들이 양을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한 밤중에도 불을 피우고 잠도 자지 않고 양들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는 자에게는 자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아무에게나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온갖 부정부패로 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부가 한 사람에게 집중될수록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 최고, 아니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거상이었던 평민출신의 의주사람 임상옥은 말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나누어 주고 모든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당시 그의 재산은 한해 바치는 세금만 해도 조선 궁궐의 재산과 맞먹는 규모였습니다. 그가 죽기 전 財上平如水요 人中直似衡(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이란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재물은 평등하기가 흐르는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재물은 한 사람이 취해서 고여 있는 물과 같이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은 고이면 썩기 마련입니다. 악취가 나게 되고 결국은 가장 소중한 물이 가장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은 이렇게 올바르고 진실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정직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물을 썩게 만드는 사람, 재물을 끌어안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성탄은 결코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돈을 가지고 성탄절을 즐길 수는 있지만 진정한 구세주의 탄생에 초대받을 수는 없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좋은 침대는 살 수 있지만 달콤한 잠은 살 수 없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화려한 집은 살 수 있지만 화목한 가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탄은 정직한 사람, 진실한 사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 에게라야 찾아오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탄의 놀라운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목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20절에 보니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캐롤송은 천사들은 이렇게 불렀습니다. 천사들은 외쳐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런 천사의 소식을 듣고 목자들은 즉시 천사들이 알려준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표적이다”라는 말씀대로 그 아이를 찾아갔습니다. 놀랍게도 과연 천사의 말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서 이루어 진 것을 자신들의 눈을 통하여 목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해준 천사들에 대해서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화답의 캐롤송을 불렀습니다. 한번은 하늘에서 천사들이 땅에서는 천사의 소식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목격한 목동들에 의하여 화답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요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던 자들이었습니다 . 그러했기에 목동들은 인류를 위해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 했습니다. 성탄은 아무에게나 성탄이 아닌 것입니다. ‘메리크리스마스’란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즐겁게 예배합시다’란 내용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뜻도 모르고 그저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쳐댑니다. 아무리 외쳐도 그들에게는 결코 성탄의 기쁜 소식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신 자, 자신의 죄를 그분께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은 자만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실히 자신의 일터에서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성실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성탄은 가장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주님을 믿기로 사모하는 이들이여! 이 성탄의 기쁜 소식이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진정 관계가 있는 기쁜 성탄절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가난한 자들의 성탄/ 눅2:1-7
가난한 자들의 성탄/ 눅2:1-7 가난한 자들의 성탄/ 눅2:1-7 오 석득 목사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할렐루야! 예수님의 오심을 축하하며 감사 드립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높고 높은 별을 넘어 낮고 낮은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한 고귀한 사랑이 있었기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그 예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세상에서 가난을 좋아 하는 사람을 만나 보신적이 있나요?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부자가 아니라도 부자인척 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가난이 싫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해서 헐벗고 굶주리는 것처럼 서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할 것 없이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던 첫 번 성탄절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나 보니 모두 가난한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난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그러나 주님을 만나는 사람으로서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축하했던 것처럼 한 마음이 되어 축하하는 귀한 성탄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자신도 이 세상에 오실 때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모르면 몰라도 마구간에서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 빼놓고는 아무도 없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저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따뜻한 방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일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분이 바로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그 분은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성 경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라도 존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창조하셨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이 우주 만물의 창조자며 운영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그 분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그 분이 아니면 아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은 모든 것에 풍성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부자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만물을 다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자기들이 부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누군가 알고 계시나요? 지금 60층짜리 빌딩의 저택을 짓고 있는 인도 사람인 무케시 암바니라고 합니다. 그는 지금50세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유산을 늘려 지금은 세계 갑부가 된 것입니다. 그는 최고 갑부로 이름이 자자하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의 623억 달러를 제치고 최고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멕시코 통신 재벌인 칼로스 슬림(623억 달러)와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559억 달러) 등을 모두 제치고 무려 632억 달러(약 57조원)의 주식을 보유한 사람으로 선정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불란서의 베르사유 궁전보다 더 넓은 60층 높이(173m)의 초 호화 개인 저택을 짓고 있어 화제에 오르고 있습니다. 내년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 저택은 관리하는 인원만 6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택 내부에는 헬리콥터 착륙장과 6개 층의 주차장과 수영장, 그리고 극장 등을 갖춘 초 호화 건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넓은 저택에서는 자신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세 자녀인 6명만 살 계획이라고 합니다. 여러 분! 저는 632억 달러라는 돈이 얼마큼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엄청난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부자도 우리 예수님과 비교하면 한마디로 새 발의 피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돈은 바다에 있는 물 중에 겨우 한 방울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우주를 다 소유하신 분입니다. 그 사람의 632억 달러의 돈도 사실은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부자이신지 알 것 같지요? 그런데 그런 부유한 분이 어디에서 태어나셨나요? 마구간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호적을 하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리아가 아기를 낳으려고 합니다. 요셉이 이 여관 저 여관을 쫓아 다니며 문을 두드리며 머물 곳을 찾았지만 한 군대도 없었습니다. 그 때는 로마 황제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호적하라는 명령 때문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모든 여관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머물만한 여관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심이 참 고약했습니다. 아기가 태어난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입니다.아기를 낳도록 방을 양보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마음이 조금 착한 한 여관 주인이 있었는데 그가 요셉의 사정을 듣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구간에 조그마한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서라도 머물려면 머물고 가라는 호의를 베푼 것입니다. 요셉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곳이라도 감사하며 받아야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마구간도 감사하며 그곳에서 여장을 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곳에서 인류를 구원할 아기 예수를 낳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이 이런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 분은 이 세상에 우리 같은 죄인을 섬기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올라가 우리의 죄 대신 죽으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내가 너희의 선생이지만 너희의 발을 씻어 섬긴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낮은 자로 이 세상에 오셔서 별 볼일 없는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우리를 위해 부자로서 가난해지신 예수님을 보며 우리도 가난한 마음을 가진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자만할 것이 무엇이 있나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가지고 내 것인 양 거들먹거린다면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만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자신을 낮추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우리를 섬기려 가난한 자로 성탄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가난한 심령이 되어 예수님을 닮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라고 했나요? 그 분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왕궁에서 태어나려고 하셨다면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인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자랄 때 대부분이 가난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 부모를 둔 친구들을 보면 부러울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학교에 찾아 오면 괜히 창피해서 학교에 부모가 찾아 오지마라고 짜증을 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 속에는 아~ 나는 언제나 부자 부모를 가져 보나라고 부러워 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선택해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보잘 것 없던 요셉이 아닌가요? 그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목수였습니다. 그런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도구로 쓰임 받았다는 것을 보시며 나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오실 무렵 유다의 혈통이 단지 요셉이라는 한 사람뿐이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할 수 없이 가난한 요셉을 사용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사회에서 인정 받는 쟁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가난한 요셉을 선택하셔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셉이라는 사람은 마음이 아주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착한 사람이었냐 하면 자기와 정혼했던 마리아가 갑자기 임신이 된 것입니다. 분명 약혼 기간이었기에 자기와는 함께 잔적이 없으니 분명 불륜을 저질렀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폭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리아를 죽일 년이라고 사회 속에 매장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마리아와 정혼했던 것을 파혼하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의 성품이 어떤가를 알게 해 주는 단서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셉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마음이 착할 확률이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난하면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보다 낫게 생각 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무시한다고 무시가 되나요? 마치 바위에다 계란을 던지는 것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그러나 부자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베짱이 두둑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부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자들은 예수를 안 믿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 가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가난한 자의 복음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라 하는 거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는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배설하고 즐기는데, 나사로는 병이 들어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얻어먹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다가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는데, 거지는 천국에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고,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나사로가 세상에서는 거지로 살았지만 내세에 천국을 간 것입니다. 이 비유는 가난한 자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거지로 산다고 내세에까지 거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예수를 잘 안 믿는 사람들을 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잘 안 믿는가. 무엇인가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인가 자기가 의지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 믿기를 거절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 예수를 믿지 못합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겸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물질적으로 풍성하지 않기에 마음이 겸손해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축복 받은 인생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성해서 예수 없어도 살 것 같은 인생은 불쌍한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낮은 자를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좋아 하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좋아 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풍성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셉이 그런 사람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가난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혼자서도 풍성하여 주님의 도움 없이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나요?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시나요? 그러면 마음이 가난해 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저와 여러분은 선택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하면서도 겸손하지 못하거나 착하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것도 없으며 교만한 사람은 이중적으로 악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가난하다면 요셉같이 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물질이 많아서 교만한 사람은 그래도 이 세상에서 물질 때문에 누리다 지옥 가면 덜 후회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하면서 교만하거나 옹고집으로 예수 믿지 않고 악하게 살던 사람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후회만 남기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번 성탄절에는 요셉과 같이 가난한 모습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 받는 자가 되고자 다짐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가난한 목동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을 먼저 알리셨습니다. 여러분은 목동들의 삶이 그 당시에 어떠했는지 아시나요?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치는 양으로 인해 하나님께 제사 드려졌지만 막상 그 제물을 키우는 목자들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회 속에서 소외당하고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던 목자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제일 먼저 알리셨다는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제일 먼저 그 소식을 들어야 할 사람들은 대 제사장이나 서기관들과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 속에서 대우를 받으며 지도자로 굴림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찾아오므로 그때야 비로서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그들에게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거나 찾아와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묵묵히 삶의 현장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속에서 큰 권력을 가지지 않아다 할지라도, 세계 갑부와 같이 돈을 가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또한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는 직업을 갖고 있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자기의 일에 열심 내는 성도에게 소망과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보세요. 가장 보잘 것 없는 목자들에게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알리려고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제일 먼저 경배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가난한 자에게 제일 먼저 오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은 다른 사람에게 찾아 오신 성탄절이 아니라 가난하고 낮은 나에게 찾아 오신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목자와 같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인생이 되고자 열심을 내시길 바랍니다. 목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는 성도가 되고자 결단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 도 여러분! 우리는 가난이라는 단어를 듣기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가난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가난이라는 단어를 다른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가난보다 마음이 가난한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가난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 첫 번 성탄절에는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제일 먼저 찾아 오시므로 그들이 축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번 성탄절에 이런 가난한 마음이 되어 주님과 함께 보내는 뜻 깊은 성탄절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장 고귀한 선물/ 마2:9-11
가장 고귀한 선물 (마 2:9-11) http://mission.bz/5502성탄절 가장 고귀한 선물 (마 2:9-11) 내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가 되면 밤에 잘 때에 머리맡에 양발을 걸어놓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산타할아버지가 오셔서 내가 잠든 사이에 몰래 선물을 넣고 가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그 다음 날 아침이면 그 양발 속에 선물이 들어 있곤 하였습니다. 그것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눈깔사탕, 평소에 전혀 먹어 볼 수 없었던 초콜릿, 예쁜 색연필 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매년 선물을 가져다주시는 산타할아버지가 누구신가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새 눈을 가늘게 뜨고 기다려도 보았습니다. 그라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너무 피곤하여 잠이 듭니다. 그러면 그 날 새벽잠에서 깨어나면 또 선물이 틀림없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타할아버지는 어떻게 모든 어린이들의 잠든 것을 다 알고 계실까하고 신비스럽게 생각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 산타할아버지가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는 것을 아주 늦게야 알았습니다. 여러분들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누구로부터인가 선물을 받고 싶고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은 오늘 읽은 동방박사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자리를 연구하면서 나라에 되어질 일들을 예언하는 분들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천문학자에 해당되겠지요. 그 때 당시 첨성가들 사이에는 세상을 다스릴 위대한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위대한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나타난 것입니다. 박사들은 그 별이 비치는 빛의 인도를 따라 동방에서 예루살렘에까지 온 것입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그 위대한 왕이 궁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헤롯의 궁으로 찾아가서 헤롯 왕에게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마 2:2) 유다나라의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궁정 안에서는 왕자가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박사들은 다시 별빛을 신중히 관찰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아니한 베들레헴으로 인도 받게 되었고 그 빛이 정확하게 가리키는 한 마구간에서 갓 태어난 아기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은, 비록 비천한 가운데 태어난 아기이지만 이 아기가 장차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평화의 왕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그 아기 앞에 꿇어 엎드리어 아기에게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져온 귀한 예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에게 드렸습니다. 이 예물은 하나하나 그 당시에 최고로 귀한 값비싼 예물들입니다. 그들은 가장 최고의 선물을 아기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예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인류를 사랑하셔서 보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하여 보내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왜일까요? 1.그에게는 속죄의 은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큰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은 죄가 많이 있기 때문에 죽은 후에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여러분이 지은 수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2.하나님의 모든 소유(기업)가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여러분! 하나님께서 얼마나 부자인신지 생각해 보셨나요? 사람들은 몇 십억 몇 백억을 가지고 있으면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국민타자 이승엽이 일본으로 가는데 2년간 110억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한 주일에 일억씩 버는 것입니다. 굉장하지요? 서울 강남에 땅 몇 백 평만 가지고 있어도 큰 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주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나라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다양합니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다 주신다는 것입니다. 3.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살이라도 더 오래살고 더 건강하게 살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인간의 수명은 백 살을 넘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최고 오래 살은 분이 누군지 아세요? 무두셀라예요. 무려 969세를 살았습니다. 1000년가량을 건강하게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꿈이 아니 예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고 하였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부활하신지 40일 만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니 영원토록 하늘나라에서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도 예수님처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이러한 놀라운 복을 받게 됩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마음에 품은) 사람에게 누구나 이러한 복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 놀라운 선물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입니다. 로또 복권 수백억에 당첨되고도 그 사실을 몰라 당첨금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러나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하여 최고의 선물 예수님을 주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음으로 속죄의 기쁨,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기쁨, 영새의 기쁨을 다 누리시기 바랍니다.
가장 귀한 선물/ 히2:14-18/ 성탄절설교/ 2007-12-21
가장 귀한 선물 히2:14-18 ***** IMF때 보육원에 열 살짜리 아이를 맡겼는데 지금은 18세가 되었습니다. 8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아버지를 만나고 싶으냐.’고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돈 없는 아버지라면 만나기 싫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소년에게는 아버지보다 돈이 더 필요했고 더 소중했던 모양입니다. 불행한 아이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돈보다 아버지가 귀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돈을 벌러 갔다가 사고를 당해서 모두 죽고 한 사람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보험금은 사망자만 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다른 자녀들은 평생을 먹고 살아도 남을 만큼 보상금을 탔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덕분에 돈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아무 보상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사고로 몸을 다쳐서 돈벌이도 못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 집 아들들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죽고 보상금을 많이 탄 사람이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까? 아니면 그 일로 힘든 삶을 살게 되었지만 살아 돌아온 아버지를 얻은 사람이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까? 제대로 된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도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것이 더 큰 선물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성탄절이 되면 누가 더 좋은 선물을 받았는지 서로 비교하고 자랑합니다. 어른들도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받았는지 자랑합니다. 부자가 된 것을 자랑하고, 성공한 것을 자랑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선물입니까? 예수님 자체가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어주신 것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는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 예수 믿는 것, 믿음 주신 것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선물이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창시자를 신이라고 부르는데 있습니다. 유교에서 공자를 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격화시켜서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정통유교에서 공자는 신이 아닙니다. 공자는 자신을 신이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신이 아닙니다. 불교가 토속종교와 결합되면서 신격화시킨 것입니다. 불경 전에 어디를 보아도 부처가 신이란 말은 없습니다. 마호메트도 자신을 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창시자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창시자 이신 예수님만이 신이십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신격화시킨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신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 이로라.”(요 10:32-33절)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신비한 일입니다. 무슨 이유로 신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야 했나? 그 이유를 오늘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하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고픔을 느끼셨습니다. 목이 마른 것도 느꼈습니다. 피곤하셔서 잠이 들기도 하셨습니다. 지성도 우리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배워서 지성이 점진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정상적인 발육과정을 통해서 몸이 성장했습니다. 성장하기도 하셨고 분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랑하기도 하셨고 분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고 영적인 것을 볼 수 없어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신기한 사실을 바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건을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세상에 그와 비슷한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머니들과 요즘 어머니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요즘 어머니들은 옛날 어머니들보다 훨씬 헌신적입니다. 아이들이 성공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못할 짓이 없이 용감합니다. 그런데 요즘 어머니들이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 못하는 것 참아주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하도록 도와주는 데는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만 공부 못하는 아이를 감싸주고 위로해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부모가 많지 않습니다. 자식이 자신의 자존심 상하게 하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일등 하다가 중간으로 떨어지면 함께 죽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지극히 헌신적인 것 같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자식인데도 자식이 내려간 낮은 자리에 함께 내려가지 못합니다. 아이들의 장래보다는 자신의 자존심 때문입니다. 학교 때 나보다 공부 못했던 누구의 집 아이보다 자기 아들이 공부를 못하면 못 참습니다. 학교 때 자기보다 공부를 잘한 친구보다 못해도 못 참습니다. 나도 맨 날 지고 살았는데 너라도 이겨 주어야지. 높아지는 것, 위대해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낮아지는 것은 못합니다.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위해서 학비를 대느라 밤새 잠자지 않고 일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죄를 짓고 경찰서에 갔을 때에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경찰들에게 무릎 꿇고 비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모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죄를 지었을 때에 함께 그 죄에 책임을 집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시기 위하여 죄인들을 위하여 하늘 영광을 두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죄인들이 당해야 할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가진 예수님이 영광을 스스로 버리시고 벌레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벌레 같은 인간이 되셨으니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으로 하늘의 보좌에 계시면서 천사들의 수종을 받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지존하신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천사들보다 낮게 되시고 부서지기 쉽고 병들고 죽어야 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았습니다. 배고픔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고통과 가난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2. 왜 하나님이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까? 첫째,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4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신은 원래 죽을 수 없습니다. 신이 죽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연약한 인간이 되셔서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수치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대한 승리를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죽을 수 있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으셨는데 이 죽음은 사망의 권세를 가진 사단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가진 사단을 멸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 있는 인간의 몸을 입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신이 죽을 수 있느냐고 의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바로 예수님이 죽으시기 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사망권세를 가지고 인간을 괴롭히는 사단의 세력을 무너뜨렸습니다. 마귀가 사망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마귀가 사람의 생사를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고 죽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신 32:39) 사단이 사망의 권세를 가졌다는 뜻은 인간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죽음이 들어왔는데, 사단이 그 죽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남의 아내를 강제로 범해 놓고 남편에게 알린다고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것처럼 사단은 사람을 유혹해 놓고 사망의 자리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우리가 받을 저주와 고통을 받았을 때에 사단의 힘은 사라졌습니다. 사망으로 위협할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사단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을 이기는 방법은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둘째, 죽음의 공포에 빠져 있는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본문 15절에 보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사망의 공포를 이기고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줄기세포를 비롯한 과학과 의학의 발달은 가히 놀랍습니다. 굉장한 신약들이 계속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거두신 승리만이 참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시고 죽은 다음에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셔서 예수 안에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늘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들을 붙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6절에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 지은 천사들은 버려두셨습니다. 그러나 죄 지은 인간은 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건져주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붙들어주십니까? 대제사장이 되셔서 붙들어주십니다. 17절에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그랬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대신 용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다른 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제사장들은 죄 값으로 짐승을 잡아서 드렸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 대신에 짐승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제물은 죽여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물이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죽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2) 제사장들은 자기들도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먼저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3) 대제사장은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해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번에 모든 사람들을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받은 시험을 함께 받으시므로 돕습니다. 본문 18절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는 인간을 구하시기 위하여 시험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시험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고 시련을 당한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그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과 다릅니다. 천사들은 고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겪는 모든 시련과 아픔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에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죽음으로 사람을 위협하여 자기를 순종하게 하는 사단의 권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모든 시험과 역경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돈 많은 것, 공부 잘 한 것, 잘 생긴 것, 자랑하지 말고 예수 믿게 된 것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은 예수님이십니다. 가장 귀한 재산도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이 아름답고 복된 성탄절, 이 날에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구원의 은총을 가슴 깊이 새기고 주님의 탄생을 찬양하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가장 귀한 선물/히2:14-18/성탄절설교/2008-11-25
가장 귀한 선물 히2:14-18 *IMF때 보육원에 열 살짜리 아이를 맡겼는데 지금은 18세가 되었습니다. 8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아버지를 만나고 싶으냐.’고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돈 없는 아버지라면 만나기 싫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소년에게는 아버지보다 돈이 더 필요했고 더 소중했던 모양입니다. 불행한 아이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돈보다 아버지가 귀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돈을 벌러 갔다가 사고를 당해서 모두 죽고 한 사람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보험금은 사망자만 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다른 자녀들은 평생을 먹고 살아도 남을 만큼 보상금을 탔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덕분에 돈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아무 보상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사고로 몸을 다쳐서 돈벌이도 못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 집 아들들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죽고 보상금을 많이 탄 사람이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까? 아니면 그 일로 힘든 삶을 살게 되었지만 살아 돌아온 아버지를 얻은 사람이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까? 제대로 된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도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것이 더 큰 선물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성탄절이 되면 누가 더 좋은 선물을 받았는지 서로 비교하고 자랑합니다. 어른들도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받았는지 자랑합니다. 부자가 된 것을 자랑하고, 성공한 것을 자랑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선물입니까? 예수님 자체가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어주신 것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는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 예수 믿는 것, 믿음 주신 것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선물이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창시자를 신이라고 부르는데 있습니다. 유교에서 공자를 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격화시켜서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정통유교에서 공자는 신이 아닙니다. 공자는 자신을 신이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신이 아닙니다. 불교가 토속종교와 결합되면서 신격화시킨 것입니다. 불경 전에 어디를 보아도 부처가 신이란 말은 없습니다. 마호메트도 자신을 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창시자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창시자 이신 예수님만이 신이십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신격화시킨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신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 이로라.”(요 10:32-33절)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신비한 일입니다. 무슨 이유로 신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야 했나? 그 이유를 오늘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하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고픔을 느끼셨습니다. 목이 마른 것도 느꼈습니다. 피곤하셔서 잠이 들기도 하셨습니다. 지성도 우리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배워서 지성이 점진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정상적인 발육과정을 통해서 몸이 성장했습니다. 성장하기도 하셨고 분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랑하기도 하셨고 분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고 영적인 것을 볼 수 없어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신기한 사실을 바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건을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세상에 그와 비슷한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머니들과 요즘 어머니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요즘 어머니들은 옛날 어머니들보다 훨씬 헌신적입니다. 아이들이 성공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못할 짓이 없이 용감합니다. 그런데 요즘 어머니들이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 못하는 것 참아주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하도록 도와주는 데는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만 공부 못하는 아이를 감싸주고 위로해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부모가 많지 않습니다. 자식이 자신의 자존심 상하게 하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일등 하다가 중간으로 떨어지면 함께 죽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지극히 헌신적인 것 같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자식인데도 자식이 내려간 낮은 자리에 함께 내려가지 못합니다. 아이들의 장래보다는 자신의 자존심 때문입니다. 학교 때 나보다 공부 못했던 누구의 집 아이보다 자기 아들이 공부를 못하면 못 참습니다. 학교 때 자기보다 공부를 잘한 친구보다 못해도 못 참습니다. 나도 맨 날 지고 살았는데 너라도 이겨 주어야지. 높아지는 것, 위대해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낮아지는 것은 못합니다.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위해서 학비를 대느라 밤새 잠자지 않고 일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죄를 짓고 경찰서에 갔을 때에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경찰들에게 무릎 꿇고 비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모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죄를 지었을 때에 함께 그 죄에 책임을 집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시기 위하여 죄인들을 위하여 하늘 영광을 두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죄인들이 당해야 할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가진 예수님이 영광을 스스로 버리시고 벌레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벌레 같은 인간이 되셨으니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으로 하늘의 보좌에 계시면서 천사들의 수종을 받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지존하신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천사들보다 낮게 되시고 부서지기 쉽고 병들고 죽어야 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았습니다. 배고픔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고통과 가난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2. 왜 하나님이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까? 첫째,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4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신은 원래 죽을 수 없습니다. 신이 죽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연약한 인간이 되셔서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수치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대한 승리를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죽을 수 있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으셨는데 이 죽음은 사망의 권세를 가진 사단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가진 사단을 멸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 있는 인간의 몸을 입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신이 죽을 수 있느냐고 의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바로 예수님이 죽으시기 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사망권세를 가지고 인간을 괴롭히는 사단의 세력을 무너뜨렸습니다. 마귀가 사망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마귀가 사람의 생사를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고 죽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신 32:39) 사단이 사망의 권세를 가졌다는 뜻은 인간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죽음이 들어왔는데, 사단이 그 죽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남의 아내를 강제로 범해 놓고 남편에게 알린다고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것처럼 사단은 사람을 유혹해 놓고 사망의 자리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우리가 받을 저주와 고통을 받았을 때에 사단의 힘은 사라졌습니다. 사망으로 위협할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사단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을 이기는 방법은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둘째, 죽음의 공포에 빠져 있는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본문 15절에 보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사망의 공포를 이기고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줄기세포를 비롯한 과학과 의학의 발달은 가히 놀랍습니다. 굉장한 신약들이 계속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거두신 승리만이 참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시고 죽은 다음에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셔서 예수 안에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늘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들을 붙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6절에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 지은 천사들은 버려두셨습니다. 그러나 죄 지은 인간은 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건져주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붙들어주십니까? 대제사장이 되셔서 붙들어주십니다. 17절에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그랬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대신 용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다른 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제사장들은 죄 값으로 짐승을 잡아서 드렸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 대신에 짐승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제물은 죽여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물이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죽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2) 제사장들은 자기들도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먼저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3) 대제사장은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해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번에 모든 사람들을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받은 시험을 함께 받으시므로 돕습니다. 본문 18절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는 인간을 구하시기 위하여 시험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시험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고 시련을 당한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그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과 다릅니다. 천사들은 고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겪는 모든 시련과 아픔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에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죽음으로 사람을 위협하여 자기를 순종하게 하는 사단의 권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모든 시험과 역경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돈 많은 것, 공부 잘 한 것, 잘 생긴 것, 자랑하지 말고 예수 믿게 된 것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은 예수님이십니다. 가장 귀한 재산도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이 아름답고 복된 성탄절, 이 날에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구원의 은총을 가슴 깊이 새기고 주님의 탄생을 찬양하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가장 귀한 선물/히2:14-18/성탄절설교/2008-12-25
가장 귀한 선물 히2:14-18 IMF때 보육원에 열 살짜리 아이를 맡겼는데 지금은 18세가 되었습니다. 8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아버지를 만나고 싶으냐.’고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돈 없는 아버지라면 만나기 싫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소년에게는 아버지보다 돈이 더 필요했고 더 소중했던 모양입니다. 불행한 아이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돈보다 아버지가 귀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돈을 벌러 갔다가 사고를 당해서 모두 죽고 한 사람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보험금은 사망자만 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다른 자녀들은 평생을 먹고 살아도 남을 만큼 보상금을 탔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덕분에 돈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아무 보상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사고로 몸을 다쳐서 돈벌이도 못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 집 아들들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죽고 보상금을 많이 탄 사람이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까? 아니면 그 일로 힘든 삶을 살게 되었지만 살아 돌아온 아버지를 얻은 사람이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까? 제대로 된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도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것이 더 큰 선물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성탄절이 되면 누가 더 좋은 선물을 받았는지 서로 비교하고 자랑합니다. 어른들도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받았는지 자랑합니다. 부자가 된 것을 자랑하고, 성공한 것을 자랑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선물입니까? 예수님 자체가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어주신 것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는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 예수 믿는 것, 믿음 주신 것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선물이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창시자를 신이라고 부르는데 있습니다. 유교에서 공자를 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격화시켜서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정통유교에서 공자는 신이 아닙니다. 공자는 자신을 신이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신이 아닙니다. 불교가 토속종교와 결합되면서 신격화시킨 것입니다. 불경 전에 어디를 보아도 부처가 신이란 말은 없습니다. 마호메트도 자신을 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창시자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창시자 이신 예수님만이 신이십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신격화시킨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신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 이로라.”(요 10:32-33절)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신비한 일입니다. 무슨 이유로 신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야 했나? 그 이유를 오늘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하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베고픔을 느끼셨습니다. 목이 마른 것도 느꼈습니다. 피곤하셔서 잠이 들기도 하셨습니다. 지성도 우리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배워서 지성이 점진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정상적인 발육과정을 통해서 몸이 성장했습니다. 성장하기도 하셨고 분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랑하기도 하셨고 분노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고 영적인 것을 볼 수 없어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신기한 사실을 바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건을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세상에 그와 비슷한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머니들과 요즘 어머니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요즘 어머니들은 옛날 어머니들보다 훨씬 헌신적입니다. 아이들이 성공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못할 짓이 없이 용감합니다. 그런데 요즘 어머니들이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 못하는 것 참아주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하도록 도와주는 데는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만 공부 못하는 아이를 감싸주고 위로해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부모가 많지 않습니다. 자식이 자신의 자존심 상하게 하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일등 하다가 중간으로 떨어지면 함께 죽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지극히 헌신적인 것 같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자식인데도 자식이 내려간 낮은 자리에 함께 내려가지 못합니다. 아이들의 장래보다는 자신의 자존심 때문입니다. 학교 때 나보다 공부 못했던 누구의 집 아이보다 자기 아들이 공부를 못하면 못 참습니다. 학교 때 자기보다 공부를 잘한 친구보다 못해도 못 참습니다. 나도 맨 날 지고 살았는데 너라도 이겨 주어야지. 높아지는 것, 위대해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낮아지는 것은 못합니다.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위해서 학비를 대느라 밤새 잠자지 않고 일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죄를 짓고 경찰서에 갔을 때에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경찰들에게 무릎 꿇고 비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모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죄를 지었을 때에 함께 그 죄에 책임을 집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시기 위하여 죄인들을 위하여 하늘 영광을 두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죄인들이 당해야 할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가진 예수님이 영광을 스스로 버리시고 벌레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벌레 같은 인간이 되셨으니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으로 하늘의 보좌에 계시면서 천사들의 수종을 받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지존하신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천사들보다 낮게 되시고 부서지기 쉽고 병들고 죽어야 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알았습니다. 배고픔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고통과 가난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2. 왜 하나님이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까? 첫째,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14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신은 원래 죽을 수 없습니다. 신이 죽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연약한 인간이 되셔서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수치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대한 승리를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죽을 수 있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으셨는데 이 죽음은 사망의 권세를 가진 사단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가진 사단을 멸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신은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 있는 인간의 몸을 입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신이 죽을 수 있느냐고 의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바로 예수님이 죽으시기 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사망권세를 가지고 인간을 괴롭히는 사단의 세력을 무너뜨렸습니다. 마귀가 사망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마귀가 사람의 생사를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고 죽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신 32:39) 사단이 사망의 권세를 가졌다는 뜻은 인간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죽음이 들어왔는데, 사단이 그 죽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남의 아내를 강제로 범해 놓고 남편에게 알린다고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것처럼 사단은 사람을 유혹해 놓고 사망의 자리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우리가 받을 저주와 고통을 받았을 때에 사단의 힘은 사라졌습니다. 사망으로 위협할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사단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을 이기는 방법은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둘째, 죽음의 공포에 빠져 있는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본문 15절에 보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사망의 공포를 이기고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줄기세포를 비롯한 과학과 의학의 발달은 가히 놀랍습니다. 굉장한 신약들이 계속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거두신 승리만이 참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시고 죽은 다음에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셔서 예수 안에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늘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들을 붙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6절에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 지은 천사들은 버려두셨습니다. 그러나 죄 지은 인간은 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건져주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붙들어주십니까? 대제사장이 되셔서 붙들어주십니다. 17절에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그랬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대신 용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다른 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제사장들은 죄 값으로 짐승을 잡아서 드렸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 대신에 짐승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제물은 죽여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물이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죽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2) 제사장들은 자기들도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먼저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3) 대제사장은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해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번에 모든 사람들을 모든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받은 시험을 함께 받으시므로 돕습니다. 본문 18절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받는 인간을 구하시기 위하여 시험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신은 시험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고 시련을 당한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그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과 다릅니다. 천사들은 고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겪는 모든 시련과 아픔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에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죽음으로 사람을 위협하여 자기를 순종하게 하는 사단의 권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모든 시험과 역경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돈 많은 것, 공부 잘 한 것, 잘 생긴 것, 자랑하지 말고 예수 믿게 된 것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은 예수님이십니다. 가장 귀한 재산도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이 아름답고 복된 성탄절, 이 날에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복된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구원의 은총을 가슴 깊이 새기고 주님의 탄생을 찬양하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가장 귀한 예물/ 마2:1-12/ 성탄절설교/ 2000-12-25
가장 귀한 예물 마2:1-12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 먼 곳 파사에 있는 동방박사들에게 이 소식이 알려졌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에 있는 박사들은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동방의 박사들은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을 사람들은 Magi [meid ai] [meigai] 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냥 ‘박사’라고 부르지만 이것을 아무도 정확하게 번역할 수가 없습니다. ‘메기’ 라는 말은 메데스, 메디아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메데스는 파사 제국의 일부였는데, 그들은 파사를 무너뜨리고 메데스 종족의 제국을 세우고자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이 ‘메기’는 (메데스, 메디아 종족은) 어떤 권력이나 특권을 가질 모든 야망을 완전히 잃어 버렸습니다. 메데스 종족은 파사 제국에서 사제직만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메기종족에 속해있는 사람이 없이는 파사에서 제물이 헌납될 수가 없었습니다. 메기 종족들은 지혜가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철학, 의학, 자연과학에 전문가들이었고 특히 종교적으로 아주 경건하였으며, 꿈을 해석하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점성술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에 살고 있는 메기 종족 가운데 몇 사람이 하늘에 이상한 별이 나타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메기들이 무슨 별을 보았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Halley 혜성이라고도 하고, 토성과 목성이 결합된 것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그 당시에 시리우스라는 별이 태양과 함께 떴는데, 그것이 메소리 성좌이고, 이 메소리 성좌는 왕자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태어나심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학자는 이전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별이 탄생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 별이 어떤 별이었건 간에 천체를 살피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던 동방박사들은 그때 그들이 본 하늘의 찬란한 별이 ‘왕자의 탄생’을 그들에게 알려 준다는 것을 그들은 즉시 알았습니다. 예수가 탄생하실 그 당시에는 이상하게도 온 세계가 왕의 오심을 대망하는 이상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유대로부터 세계를 통치할 자들이 올 시기가 결정이 되었다’ 고 하였고, 탁티우스는 ‘동방이 세력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대망의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늘에 찬란한 이상한 별을 발견한 메기들은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길을 알아내었습니다. 별을 따라서 그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먼 길을 여행하였습니다. 낮에는 쉬고 밤에는 여행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그 별이 베들레헴 아기가 탄생한 마구간 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때 그 별이 메기들을 안내하는 일을 다 마친 후에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에 빠졌는데, 지금도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는 그 별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방의 전설에 의하면 동방박사는 셋이 아니라 열 두 명이었다고 하고, 어떤 곳에는 넷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셋이라는 말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찬송가에는 “동방박사 세 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을 따라 왔다”는 내용의 노래가 있습니다. 동방 박사를 세 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온 선물이 세 가지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세 사람은 나이가 많고 백색 머리에 긴 수염을 가진, 황금을 가져온 멜키올과 젊고 수염이 없으며 얼굴이 붉은, 유향을 가지고 온 카스파르와 수염을 막 기르기 시작하였으며 얼굴이 거무스레한 벨타잘 이었으며 그는 몰약을 가져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져온 예물은 예수님의 특성과 업적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것들이었습니다. 아무렇게나 생각 없이 가져온 물건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선물을 준비한 것을 볼 때 이 사람들이 메데스 종족으로서 비록 유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동방에 살았지만 메시야 대망의 신앙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구약에 기록된 예수에 관한 예언의 내용을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의 표현으로서, 또 상징으로서 이 예물들을 드렸고, 그래서 동방의 메기들이 탄생하신 아기 예수께 드린 예물이 아주 귀한 예물이 되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드린 예물의 첫째는 황금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금을 ‘왕들의 금속’이라고 했습니다. 황금을 가지지 않고는 누구도 왕 앞에 나갈 수 없는 관습을 가진 나라도 있었습니다. 요즈음 고고학자들이 옛 유물을 발굴하는 것을 보면 왕의 무덤에는 꼭 이 황금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꽤 오래 전 이집트에서 투탕카하만(Tutankhamen) 이라는 왕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그곳에서는 특히 금이 많이 나왔습니다. 예수가 왕이시라는 사실을 이 메기들은 알았습니다. 예수는 왕 중의 왕이십니다. 왕이신 주님은 무력으로서, 잘못 적용되는 원칙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서 통치하십니다. 그는 우리 모든 인류의 마음을 지배하시되 왕좌로써가 아니라 십자가로써 하시는 것입니다. 왕의 왕이 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의 뜻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관계로 맺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갈 때는 완전한 복종과 완전한 순종의 자세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죄의 결박을 풀어주시고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나갈 때 원망과 시기, 불평의 칼을 가지고, 의심의 못된 창을 가지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오래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군 제독 넬슨 장군은 전장에서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격자였습니다.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면 패배한 적군을 언제나 친절과 예의로 잘 대우했습니다. 한번은 치열한 전투를 끝내고 난 후, 부하들이 적의 패장을 넬슨의 기함 위 후미 갑판으로 데려왔습니다. 넬슨이 적군에게 언제나 친절과 예의로 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라 이 적의 대장은 성큼 앞으로 나아가 넬슨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넬슨은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칼을 먼저 건네고 그 다음 손을 내시오’ 아무리 우리를 용서하고 잘 해주신다고 해도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왕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올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친구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을 왕으로서, 왕 중의 왕으로서, 내 마음의 왕좌에 분명히 모셔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로, 주인으로, 참된 터로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 직분을 감당할 때, 우리가 서로 모일 때마다 ‘주님이 우리의 왕이시다’ 라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며 지금처럼 마음대로, 버릇없이, 제멋대로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왕 앞에서,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겠습니까?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냄새나는 그 누추한 곳에 탄생한 그리스도를 왕으로 믿고 그에 합당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그들을 왕이라고 했습니다. 왕의 신분에 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들이 드린 예물은 유향입니다. 황금은 왕에게 드려진 예물이었고, 유향은 제사장을 위한 선물이었다고 합니다. 향기가 좋은 유향은 예배를 드리는 성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때 이 유향을 사용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고 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이 선물을 드림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했습니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구약의 제사법에서 이 유향이, incense가 죄의 사죄를 위한 제사에서는 절대 사용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기와 술은 죄를 위한 제물에 속했으나, 여기에는 유향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곡식으로 드리는 제물에만 이 유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감사와 찬양의 제물에 사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며, 죄를 알지도 못하시고, 죄와는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만 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에게 유향의 예물이 바쳐져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죽은 자를 위한 선물로서의 몰약입니다. 몰약은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로서, 또 극심한 고통을 잊게 해 주는 마취제로서 사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담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새로 탄생한 아기에게 죽을 때에 사용하는 몰약을 선물로 드렸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당시 이 몰약이 굉장히 값이 비싸고 중요한 선물의 한 품목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선물이 아기 예수께 드려진 것은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구약에 여러 번 기록된 예수의 고난당할 것과 그의 사명에 대한 것을 미리 알았거나 추측을 했던 것에 틀림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이런 선물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라는 이름도 몰약(myrrh)에서 왔습니다. 계시록 2장에 나오는 ‘서머나’라는 말도 myrrh에서 온 말입니다. 그 때, 서머나는 몰약의 주요 생산지였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 백 근(100 pounds) 쯤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장례에 사용을 했는데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그의 탄생에도 몰약이, 그의 장례에도 몰약이 드려졌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는가를 잘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마침내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의 생명과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여기로 오셨습니다. 몰약은 이러한 주님의 생애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William Holman Hunt (1827-1910, 영국 런던)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그의 그림 중에 The light of the world은 나사렛 예수가 목공소 문에 서 있는 그림입니다. 저녁 햇살이 문에 비취올 때에 예수께서 일을 하시다가 잠깐 쉬시기 위해 문 입구에 서서 팔을 펴셨습니다. 그러자 그 뒤로 그림자가 생겼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그림자였습니다. 마리아가 그림자에서 십자가를 보면서 다가올 비극의 공포를 그 눈에 나타내 보이고 있는 그림입니다. 왕을 위한 황금(:royalty), 제사장을 위한 유향(:purity of his life), 죽은 자를 위한 몰약(:suffering). 이것들이 바로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가 탄생하셨을 때 가지고 온 귀한 예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참된 왕이시오, 완전하신 최고의 제사장이시오, 마침내는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예언했습니다. 예물에는 이러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60장 6절 이하를 보면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절에서 중요한 사실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처음 오실 때와 비슷한 장면이 펼쳐지는데, 그때는 금과 유향만 있고 몰약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고난을 다 당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고난당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몰약에 의해 상징되는 주님의 고난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 우리 주님이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몰약이 드려졌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때 금과 유향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성탄은 이 땅에 오셨다는 한 가지만을 되새기는 게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왜 오셨는가를 동시에 생각해야 합니다. ‘outside there’뿐만 아니라 ‘inside’를, ‘up there’뿐만 아니라 ‘down here’을, ‘then(past)’뿐만 아니라 ‘now’를 생각해야 합니다. 안데르센의 이야기책에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에서도 부잣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밖에서는 불쌍한 소녀가 얼어 죽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기뻐만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지만 동시에 그 분이 치르신 그 엄청난 고난을 생각하면 얼마나 죄송한지요.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기쁨과 감사와 아픔이 함께 어우러진 마음으로 주님의 성탄을 맞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선물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까? 이번 성탄에는 첫째로, 몰약을 드립시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 안에서 영원토록 살게 해 주셨음을 감사합시다. 완전히 죽고 다시 살아난 사실을 확인하는 믿음의 선물을 드립시다. 둘째로, 유향을 드립시다. 향기로운 제물, 찬양과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십시다. 이것이 우리에게서는 절대로 나오지 못합니다. 우리 가운데에 주님이 계실 때만 가능합니다. 셋째로, 황금을 드림으로 내가 주의 종임을 고백합시다. 당신은 나의 구주십니다. 나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지켜 주시옵소서. 영적으로 성장하여 당신을 영화롭게 하며 당신만을 따라 잘 섬기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가장 아름답고 귀한 믿음의 선물이 바쳐지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2000년 성탄절에 동방의 박사들처럼 가장 귀한 예물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급한 일을 위하여/눅2:29-32
가장 급한 일을 위하여 눅2:29-32 사랑의 하나님, 저희들에게 크리스마스 시즌을 주셔서, 주님의 탄생을 찬양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기념하게 하시며, 헌신하게 하신 것을 진실로 감사하옵나이다. 이 시간 부족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라 준비하게 하셨는데, 주님 원치 않으시는 말이 있으면 입을 다물게 하시고, 이 시간 저희들이 들어야 하는 말씀이면 부족한 것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셔서 온전히 증거하게 하여 주셔서, 단순히 듣고 그치는 설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고, 저희들의 가슴에 새겨져서 저희들의 삶이 변화하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주님께 귀한 선물을 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시기를 원하여 부족한 것을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옵나니 그리하여 주시옵소서.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함께 은혜를 받고, 이 시대에 저희들에게 주신 작은 소명을 감당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I.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성탄 선물 \'인류 역사 가운데에서 훌륭한 자취를 남긴 분들과 또 그저 그렇게 평범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과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이 크리스마스 시즌을 통해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분,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저는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을 사람들이 기억할 때에는 그 사람이 언제 죽었는지 죽은 날을 기억하지만, 인류 역사에 위대한 일을 남기고 이 사회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들의 죽은 날짜보다도 그들의 태어난 날짜를 기념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돌아가신 날보다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그 복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왔기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12월이 되면, 우리는 주님께서 탄생하셔서 이 땅에 오신 참된 의미를 생각하고 감사와 헌신하기보다는, 크리스마스 카드 쓰기에 바쁘게, 선물 준비하기에 바쁘게, 산타 클로스 만들기에 바쁘게, 행사하기에 바쁘게 넘어 가기가 쉽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과 제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주님의 생일을 참으로 축하하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가 될까\'를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성탄은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것인데,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그 사건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인데, 그 분이 이 땅에 오셨기에 중요합니다. 둘째,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우리에게 향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 주셨는데,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그 사랑을 보여 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 향하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시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 인간 역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예수님께서 다 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을 우리가 어찌 기념하지 않겠습니까? 최근에 초등학교 6학년인 제 둘째 아이가 학교에서 오다가 삼백 원을 주고 메추라기 새끼 한 마리를 사왔습니다. 그런데 이 메추라기를 보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뒤뚱뒤뚱 거립니다. 제 마음에 \'이것을 판 사람이 조금이라도 양심적이었다면 좀더 키워서 팔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가 너무 좋아하면서 먹이 주는 통과 함께 메추라기를 사왔기에, 저희들이 상자에 넣고, 먹이와 물도 넣어주고, 따뜻하라고 헝겊도 좀 넣어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메추라기는 뒤뚱거리면서 돌아다니다가 넘어질 줄만 알았지, 먹을 줄을 몰라요. 제 생각에 이것이 제대로 살려면 물도 좀 마시고 먹어야 할텐데, 물을 아무리 주어도 넘어지기만 하고 몸을 적시기만 하지, 마시지를 않습니다. 하도 답답하기도 하고 이것이 물에 젖었으니까 추울까 싶어서, 제 손에 놓고 물을 주어도 목을 뽑아 소리만 지르지, 먹을 줄을 모릅니다. 음식을 입에 갖다 주어도 먹을 줄을 몰라요. 결국 우리 집 아이가 \"아빠, 사람이 자꾸 만지면 죽는대\" 해서 얼른 놓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혼자 돌아다니기는 하는데 제대로 걷지를 못합니다. 그 다음날도 아침에 보니까 여전히 살아 있기에 \'이것이 살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이 학교에 간 다음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메추라기 한 마리를 보고 저는 귀한 것을 깨달았는데, 저는 이 메추라기를 살려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이 메추라기를 살릴 수 있는지, 이 메추라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왜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왜 물을 주어도 먹지를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내가 메추라기가 되었으면, ......\' 하고 생각할 수는 있었지만, 저는 메추라기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했어요. 나는 왜 메추라기가 되지 못했는가? 세 가지로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 내가 메추라기가 되지 못한 것은 나의 무능함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가 메추라기가 되어서 메추라기와 얘기하고 싶을지라도 나는 메추라기가 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만약 내가 메추라기가 될 수 있다 할지라도 과연 내가 그 메추라기를 위해서 메추라기가 될까? 내가 안타까워하고 동정은 할지라도 과연 내가 메추라기가 되어서 메추라기를 위해서 나를 희생할까? 절대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셋째, 내가 메추라기가 된다고 할지라도 과연 내가 메추라기의 필요한 것을 채워서 그 메추라기를 살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 그거예요. 나의 무지예요. 그러나 이와는 달리,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 자유함으로 우리 인간이 되기까지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이 땅에 오셨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고통 당하신 그 길을 묵묵히 걸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고, 그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우리 인간의 그 중하고 무거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아시고 풀어주신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이기에,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그 사랑이 감사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누가복음 2장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인 시므온이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한탄스럽고 괴로워서 이 백성들을 위로할 자이신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탄생한 아기 예수님을 안고 기뻐서 좋아하며 고백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 신앙 고백이 오늘 설교 전에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 얼마나 멋진 신앙 고백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축하하여야 합니까?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왜 우리는 그 죽으러 오신 예수님을 슬퍼하지 아니하고 기뻐 찬양합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보이셔서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신 이후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지만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이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가신 예수님, 다시 오십니다. 가신 예수님과 오실 예수님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예수님의 엄청난 사역과 사랑으로 인해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우리가 축하하는 데에는 두 가지를 빼서는 안될 줄로 믿습니다. 첫째는 감사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오신 그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그 감사가 우리의 크리스마스 축하에서 빼어서는 아니될 부분인 것을 저는 믿습니다. 둘째는 헌신입니다. 이 헌신을 저는 \'크리스마스를 통해서 예수님께 드리는 예수님의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예쁜 꽃을 하나 들고 왔습니다. 이 꽃은 종이로 만든 것인데, 지난 번 달란트 시장을 할 때에 김 영구 형제님의 딸 재인이가 두 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김 동명 목사님께 드리고 하나는 제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너무 좋아서 제가 사무실에 두고 \'이것을 어디에 걸어두어야 할까?\' 하고 즐거운 고민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선물은 일년 365일 계속되어야 합니다. 일년 중 하루인 크리스마스에는 감사로, 나머지 364일은 헌신으로 주님께 선물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축하는 1996년 12월 25일 하루만 있는 것이 아니라, 365일이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주님께 어떤 선물을 드려야 참으로 좋은 선물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빌려 쓰고 있는 이 곳을 떠나서 땅도 좀 넓게 잡고 멋진 교회를 지으면 우리 주님이 기뻐하실까? 아니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자꾸 끌어 모아서 숫자를 키우는 교회가 되면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실까? 오늘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깨어서 일어나야 할 때인 줄 믿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바로 기념할 줄 알아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선물을 안겨드릴 수 있을까? 우리 김 동명 목사님께서 늘 가르치시는 바와 같이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풀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입니다. 그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 때문에 여전히 오늘도 주님은 여러분과 저를 부르시고 축복해 주시니, 이일이 가장 중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가심이 여기에 있고, 예수님의 오심이 저기에 있는데, 오시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가 없으니 우리가 지금 이 가심과 오심 사이에서 어느 순간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 오시는 가까운 때에 있는지, 아니면 그 중간 정도에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오심과 가심의 그 사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가장 중히 여기시고 예수님께서 가장 급히 여기시는 일을 우리가 이루어 드리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선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II. 가장 중하고 급한 일 1. 이 나라가 서 있는 곳 그러면 한국인으로서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는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가장 중하고 급하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 나라가 어디에 서있는지 살펴보면 분명해 집니다. 오늘 사회를 돌아보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 자꾸 생기는 것은 왜 그런지, 어떤 때에는 울분이 터져서 울부짖어 보기도 하고, 새벽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나라의 모습은 어둡고 답답합니다. 어느 여고생이 밤늦게 공부하고 아버지 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잠시 아버지가 차를 세워두고 그 여학생의 동생을 데리러 건물 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차에 태워진 채로 납치 당해서, 처참하게 한 순간의 쾌락을 즐기려는 낯모르는 자들에게 몸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는 신문의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나고, 정치인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서 아귀다툼하는 것은 여전히 일면과 이면을 비롯한 온 지면을 메우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생명의 귀중함이 사라져 버리는 이 나라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중국의 연변 동포들에게 사기를 친 자들은 흑룡강의 그 구석진 곳까지 갔다고 합니다. 사기를 당해서 화병 때문에 죽은 자가 이십 명이 넘는다고 하였습니다. 동아일보의 논설 기자는 \"그 책임은 전적으로 한국인의 몫이다\" 라고 했습니다 (1996년 11월 20일자, 동아일보 3면 논설 \'조선족 울리는 못된 한국인\'에서). 좀더 분명히 하면, 저는 \'이것은 그 사람의 책임만 아니요, 저 교회의 책임만도 아니요, 이것은 우리 믿는 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아일보의 권 재오 소장의 증언에 의하면, 이 조선족의 사기 피해 사실이 알려지면서 북한인들도 \'이등 국민인 중국 조선족들도 그렇게 당하는데 3등 국민인 우리는 통일이 됐을 때 얼마나 당하겠느냐?\'며 걱정한다고 합니다 (1996년 12월 6일자 동아일보 45면 \'알려진 피해, 빙산의 일각\'에서)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 삼풍 백화점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또 다른 경고이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왜 제가 이런 무거운 얘기를 크리스마스 설교에 드리는가? 주님께서 이 민족을 내려다보시며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사도행전에, 성령에 충만한 베드로가 설교를 했을 때에 \"형제여, 우리가 어이할꼬?\" 하고 울부짖은 그들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 \'주님이여, 우리가 이때에 어찌해야 합니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질문 없이는 우리가 참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물을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어찌해야 합니까?\' 이 질문 없이는, 새누리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참된 의미를 모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 우리에게 급한 일 : 성령의 새 역사 오늘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믿는 자의 회개입니다. 이 민족의 어두움과 이 민족의 아픔이 나의 잘못이요, 나의 책임이요, 나의 아픔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의 참된 빛을 비추라고 주셨는데, 나는 그것을 가리워놓고 살았으니, 내가 만일 그 빛을 비추어 살았으면 나의 작은 헌신이 내가 처한 곳에서 작은 빛이라도 이 민족에게 밝힐 수 있지 않았을까요? 둘째,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시대에 향하신 부르심이 무엇인가, 귀를 기울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선지자적인 안목과 영의 눈을 떠야 할 때가 이때라 생각합니다. 셋째, 복음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불신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마음으로, 급한 마음으로, 중한 마음으로 달려가서,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내 마음의 헌신을 새롭게 갖춰야 할 때가 이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일은 우리 힘으로는 못합니다. 그런데 이일은 꼭 이루어야만 합니다. 이런 일이 꼭 이루어져야만 하겠기에, 하나님께서는 끊이지 아니하고 이 나라에게, 믿는 자들에게, \"깨우치라! 깨어라! 일어나라!\" 경고하시는 음성을 자꾸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은 우리에게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고 외치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가장 작은 자인 이 목사가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그 음성을 같이 듣자고 해서 이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런 주님께서 주시는 경고 뒤에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습니다. 한 가지의 선택은 그 일이 너무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던가 귀찮은 일이라 생각하고 내 육신의 귀도 막아버리고 내 마음의 문도 닫아버리고 모른 체하면서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선택이 있고, 또 다른 한 가지의 선택은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일어서서 \'내 희생과 나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 고백하고 일어서며 뛰며 달려가며 걸으며 기도하며 내 인생을 투자하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때가 그리할 때인 줄 믿습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돌아보고 내린 결론은 성령의 새 역사가 이 민족의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성령의 새 역사를 통하여 어둠에 지친 이 민족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잠자는 자리에서 깨어나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 내게 비춰주시는 빛을 이 민족에게 비추는 것이, 주님께서 가장 급하게 여기시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생일선물일 것입니다. 1) 회개하며 기도하자. 이 민족을 기다리는 성령의 새 역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 믿는 자들이 회개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1904년에 영국, 웨일즈(Wales)라는 작은 도시의 젊은 광부였던 이반 로버츠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기도하는 가운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 교회의 목사님에게 \"내게 설교할 기회를 주십시오\" 하고 간구했으나, 그 목사님은 그를 우습게 알고 여러 번의 간곡한 부탁에도 들어주지 아니하다가, 어느 날 \"오는 수요일에 설교를 하게 할텐데, 몇 명이나 오는지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며 허락하였습니다. 그 수요일에 겨우 17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밤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밤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젊은 청년은 숫자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 메시지를 빌브라이트 박사는 네 가지로 요약하여 그의 책에서 쓰고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아는 모든 죄를 회개하라. 둘째는, 너희의 모든 죄의 관습과 습관을 버려라. 셋째는, 성령의 부르심에 무조건 순종하라. 넷째는, 급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의 참 증인이 되어라. 그날 하루로 예정되었던 그의 설교는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고,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고,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고,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습니다. 장장 30일간이나 계속된 그의 설교를 통해서 37,000명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이후로 오 개월 동안 영국에 그 부흥의 불길이 번지고, 그 불길이 바다를 건너서 유럽으로 가고, 유럽에서 서유럽으로, 나중에는 아프리카로, 인도까지 그 불길이 번져갔던 것입니다. 1906년에 뉴욕에서 온 존슨이라는 목사님이 인도에서 일어난 엄청난 성령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하루에 8,000명이 강가에서 침례 받는 것을 목격하고, 이분은 중국을 통해서 평양에 왔습니다. 당시 평양에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왔는데, 1903년에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님들이 모여서 \'왜 우리는 선교의 열매가 없는가?\' 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904년 영국의 한 광부가 회개하고 그 메시지를 담대히 전할 때에, 영국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그 불길이 먼 나라인 우리 나라까지 온 증거가 여기에 있는 것은, 그때에 선교사님들이 여러 주 동안 기도하여도 아무 응답이 없는 것 같아서, 한 선교사님이 \"우리 이제 기도 그만하고 각자의 선교지로 돌아가십시다\" 할 때에, 어느 선교사님이 \"우리의 기도가 부족한 모양이니 우리 기도의 시간을 늘리자\" 하여 오히려 기도의 시간을 여러 시간 더 늘려서 기도한 끝에 하디 선교사님은 이렇게 회개했습니다, \"내가 선교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백인의 우월감을 가지고 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복음을 전하려 한 탓이로다. 내가 회개합니다.\" 그의 회개가 1906년 평양에서 선교사님들 사이에서 일어났고, 존슨 목사님이 당시에 평양에 와서 어느 교회에서 인도에서 목격한 성령의 역사를 그대로 전하며, \"오늘 이 땅에 성령 받고 이 백성을 구할 자가 누구냐?\" 하고 울부짖었을 때에, 당시에 길 선주 장로가 일어나서 \"이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나 같은 아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친구 장로의 돈을 떼어먹고도 모른 체 하였습니다. 이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나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면서 회개하고 자복했습니다. 이분의 회개로 시작하여 큰 부흥의 물결이 이 나라에 시작되었습니다. 길 선주 목사님을 통해서 1907년부터 일어난 우리 나라의 영적 대 부흥은 세계 역사상의 기록에 남을 만한 사건인 것입니다. 길 선주 목사님을 통해서, 당시 우리 나라 인구가 2,000 만 명이라고 했는데, 30년 평생의 그분 설교를 들은 자가 우리 나라 인구의 1/4인 500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길 선주 목사님을 통해서 목사, 장로, 교사된 자가 800명이고, 30년 동안 이만여 회의 설교를 통해서 수만 명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많은 교회가 서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또 섬기던 교회의 영적 부흥을 위해서 새벽마다 기도하니, 어느 장로님이 함께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후일에는 그 새벽기도의 부흥의 물결이 교회에 알려지게 되어서, 시계가 없는 많은 교인들이 새벽 두 시부터 나와서 기다렸는데, 그 기다린 자의 숫자가 200명 내지 300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도 없이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안다는 자들이, 주님을 영접한 자들이 일어서서 분연히 기도할 때입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 김 동명 목사님께서 사무실에 팩스를 보내셔서, \'12월 9일부터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새벽 기도다\' 할 때에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이 물컹거렸습니다. 한 청년이 회개하며 기도할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났거든, 우리 새누리 교회의 온 성도들이 일어나서 기도한다고 하면 이 나라에는 틀림없이 성령의 새 역사가 일어날줄을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 성경적 성령 역사 두 번째는 성령의 새 역사를 위하여 성령의 올바른 운동을 일으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찌하여 성령의 운동이 기적과 이사에만 한하는 모양으로 되어 가는지 한스럽습니다. \'성령 충만\'이라고 하면 그저 기적과 이사만 생각하는 세대가 되어 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무척이나 아픕니다. 성령의 새 역사는 성경적이어야만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는 기적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일어난 역사는 방언하고 치료받고 귀신 쫓아내는 일이기 전에, 그 메시지를 들은 자들이 회개하여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삼천 명씩, 오천 명씩, 주님의 품으로 안기는 역사, 이것이 참된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의 새 역사라 함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되어 가는 성령의 역사가 그쳐야 하고, 참된 성령의 새 역사가 이 나라 이 땅에서 뿌려야 하겠기에, 저는 성령의 새 역사가 꼭 일어나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목사님은 기적도 믿지 않으십니까? 치유도 믿지 않으십니까? 귀신 쫓아내는 것, 믿지 않으십니까?\' 천만 에요. 저는 믿습니다. 병 낳은 것과 같은 성령의 기적을 저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에 가장 우선되고 가장 급한 것은 영혼 구원이요,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하시면 하나님께서 그 이상의 기적들도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용한 권사님들이나, 용한 목사님들이나 오셔서 예언한다고 할 때에, 순진한 성도들은 두려워합니다. 그런 것을 받아야 뭔가 하는 것 같이 여겨지니 그렇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성령 역사의 내용을 바로 안다고 하면,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얘기를 할지라도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그런 두려움과 혼란으로부터 우리가 자유한 가운데에 성령의 역사를 행할 수 있는 것은 성령운동의 초점은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요, 이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영혼들을 구원받는 것이니, 여기에 성령의 새 역사의 초점을 맞출 줄 아는 영적 안목을 여러분과 저는 꼭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계속적으로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며, 헌신을 통해서, 이런 역사에 동참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3) 내 선 곳에서부터 세 번째, 이런 운동을 어디에서 시작합니까? 내 선 곳부터 시작하십시다. 여러분 중에 혹 \'신이 택한 여자\'라는 책을 읽어보신 분 계십니까? 저는 그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야, 목사님도 희한한 책을 다 읽네. 무당 책을 왜 읽을까?\' 하시겠지만, 세상이 하도 복잡한 세대가 되어서 목사가 성경만 읽고는 안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면, 그분은 감사(?)하게도 기독교에 대해서 참 좋게 썼어요. 그런데 그것이 나를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좋게 쓴 것은, 기독교에도 기적이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예언이 일어난다고 인정해 준 것인데 참으로 이것은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성령의 역사를 마치 그분이 섬기는 그 귀신의 역할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려 버린 것이지요. 어쩌다가 우리 주님의 역사가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까?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며, 성령의 새 역사를 위해서 내 선 곳에서부터 나를 바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이렇게 땅에 떨어지는데,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할지, 이것을 모르고는 우리가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축하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 선 곳부터 시작하십시다. 이중에 혹 불신자가 계시면 여러분이 서 계신 곳에서부터 시작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는데, 여전히 믿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서 계신 분은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주님을 깨닫고 나를 구원해 주시는 참된 하나님,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시는 것부터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이거든, 오늘 이 시간부터 이 시대에 나를 부르시는 소명이 무엇인지 깨달아서 행해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이 새누리 교회에 보내주신 것은 지금은 분명히 그림을 그릴 수 없으나, 앞으로 그려질 그 그림들을 위해서 김 목사님과 저와 여러분들을 함께 사랑의 띠로 묶어 주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새해부터는 우리가 \'구역\'이라고 하지 않고 \'목장\'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렇게 저는 목장들을 위하여 기도해 봅니다. 새해에는 십목외선(十牧外宣), 오목내선(五牧內宣), 일양일득(一羊一得)이라. \'십목외선\'이라 함은 열 목장이 모이면, 한 명의 해외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붙여본 이름이요, \'오목내선\'이라 함은 다섯 목장이 모이면, 한 명의 국내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붙여본 것이며, \'일양일득\'이라 함은 참으로 착한 양된 한 명의 성도가 믿지 아니하는 한 명의 불신자를 주님께 득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이음 붙여본 것입니다. 또 우리가 \'교회 교육\'이라 함은 우리의 어린 영혼들을 그저 재미있게만 가르치고, 그저 소리 질러서 위압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주님의 비전을 그들의 작은 가슴속에 심게 하여서 자라게 하고 저들이 커서 준비되었을 때에, 그 시대적인 사명을, 우리가 못 다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까지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다섯 분의 전도사님들이 계십니다. 권하옵건대, 한 사람의 말에 의해서, 또는 환경이나 조건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이런 시대적인 사명을 여러분의 가슴속에도 새기시기 원합니다. 또한 평신도들은 그저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다가오는 성령의 새 역사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모습\'이라 함은 이전에는 몇 몇 사람들을 통해서 이 나라의 부흥의 물결을 이루었지만, 새로 일어나야 할 이 성령의 새 역사는 저는 감히 평신도를 통해서 일어날 것이라고 분명히 믿습니다. 목사는 교단에 매이고, 목사의 직분에 매이고, 교회라는 한계를 벗어나기가 점점 힘들어 가지만, 평신도들은 교단의 벽을 뛰어 넘고, 직분이라는 한계를 초월하고,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사역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자기 교회를 키우는데 급급하지만, 평신도들은 참으로 주님의 마음을 아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곳곳에 흩어져있는 평신도들이 주님의 사역을 헌신하며, 내 주머니 털어서 내 돈 바쳐서, 내 시간 바쳐서, 보수를 요구하지 아니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볼 때에, 저는 \'아하, 이 나라에 일어날 성령의 새 역사는 목사를 통해서도 아니요, 부흥사를 통해서도 아니요, 평신도를 통해서 일어날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이런 시대적인 부르심 앞에서, 여러분, 어찌하시겠습니까? 과연 이 나라는 소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나라의 돌아가는 모양을 볼 때에, 이 나라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경제 부흥의 소망은 있을는지 몰라도, 이 나라의 백성들에게 영적인 소망은 없습니다. 과연 이 나라에 소망이 없습니까? 이 나라의 소망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 형제 자매님들이여, 그게 아닙니다. 이 나라에는 큰 소망이 있습니다. 이 큰 소망이라는 것은 우리 믿는 자들이 참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솔로몬을 통하여 오늘도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을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나라에는 큰 소망이 있습니다. 1904년에 웨일즈에서 일어났던 이반 로버츠는 회개하는 가운데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를 부수어 주소서, 나를 부수어 주소서, 나를 부수어 주소서. 나를 구부리소서, 나를 구부리소서, 나를 구부리소서. 오, 하나님이여! 이런 기도로 헌신한 이름 없는 까만 흙탄을 묻히는 한 젊은 광부를 사용하여서 그 마을을 변화시키고, 영국을 회개케 하고, 그 부흥의 물결이 작은 나라 우리 민족에게 멋있는 부흥의 운동을 일으켜서, 그 부흥 운동의 불길이 오늘도 여러분과 제 가슴에 당겨지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새해에 여러분에게 맡기는 일들이 많을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에 \'나는 못한다. 시간이 없다\' 하면서 외면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나를 드려 행하리이다\' 하며 순종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교회가 여러분에게 일을 맡길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내가 할 일이 있으면 스스로 찾아 행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주님께 귀한 생일 선물을 드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가장 급하게 여기시는 일을 위하여 기도하며, 내 선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값진 선물을 우리 주님 위해 함께 준비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이반 로버츠는 무릎꿇고 자기의 가슴을 두드리며 기도하였을 텐데, 우리는 이 나라의 아픔을 보고 비판만 하며 손가락질은 하였지만 내가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였을 때에 여전히 주님은 우리를 불러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새누리 교회가 꿈틀대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새해가 되게 하여 주실 줄 믿사옵나니, 주여, 불러주소서. 내가 행하리이다. 주님께 귀한 선물 드리기를 원하옵나니,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새누리 교회에 속한 온 형제 자매들을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참으로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님께 드림으로 새해를 시작하게 하옵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가장 기쁜 날/눅2:8-14
가장 기쁜 날 눅2:8-14 지난 달에 워싱턴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기념관 착공식이 있었습니다. 킹 목사님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960년대 미국의 흑인민권운동을 이끈 분으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이라는 명연설로 유명합니다. 이분의 기념관이 착공되었는데, 사실 기념관을 만든다는 것은 놀라울 만한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왜 놀라운 일이 되었느냐 하면 장소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기념관이 세워지는 장소가 내셔널몰이라는 곳입니다. 이곳은 의사당을 중심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과 미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 기념관이 있는 곳입니다. 이날 부시 대통령이 축사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킹 목사님의 기념관은 에이브러햄 링컨 기념관 및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과 일직선상에 세워질 것이며, 여러 세대에 걸쳐 그의 업적을 기릴 건축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뉴스를 보면서 후손들에게는 기쁜 날이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셔널몰이라는 곳은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들의 기념관이 있는 곳인데, 킹 목사님은 대통령이 아니면서도 대통령의 반열에 들어섰으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CNN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텔레비전 방송들이 이 기공식을 생중계했는데 기쁘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그런지 킹 목사님의 막내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땅에는 기쁜 날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서 기뻐하는 날도 있고, 가족이 함께 기뻐하는 날도 있고, 나라가 기뻐하는 날도 있고, 온 세계가 기뻐하는 날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가 기뻐합니다. 천사는 말하기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성탄절은 온 인류가 기뻐하는 날입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많은 나라가 이 기쁜 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봅니다. 로마제국이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을 정도로 막강했는데, 자기 나라의 기원을 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맞추어서 역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어떻습니까? 세계 곳곳에 자기 영토를 가지고 있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국가의 시조를 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맞추어서 계산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보면 건국 신화인 단군에 맞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맞추어서 사용합니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온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맞추어서 2006년을 사용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주후 2006년이라고 말하는데, 언젠가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A.D. 라는 것은 주후, 예수님 이후, 에프터 크라이스트(After Christ)가 아닙니다. A.D.는 라틴어로 \'안노 도미나이(Anno Domini)\'라는 말입니다. 안노(Anno)라는 말은 \'년, 해, Year\'이라는 뜻이고, 도미나이(Domini)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주\'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인더 이어 오브 아우어 로드(In the year of our Lord)\' 주님의 해, 주님이 다스리는 해, 우리 주님이 주관하시는 해라는 뜻입니다. 온 세계가 이것을 사용하고 있어요. 이탈리아도 금년을 2006년이라고 부릅니다. 독일도 2006년, 영국도 2006년, 우리 나라도 2006년, 미국도 2006년, 온 세계가 예수님의 탄생에 맞추어 2006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입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따라서 합시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온 세계가 자기 나라의 국력을 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한 날에 맞추어서 역사를 카운트다운 하는 것은 예수님이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인류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가 이날을 기뻐하고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선진국이나 미개한 나라나 대도시나 농촌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성탄절이 되면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로 내일이 그런 날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세계 역사를 보면 훌륭한 인물이 많이 태어나는데,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는 지도자는 한 명도 없다는 겁니다. 지난 20세기에 세 명의 천재가 태어났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 화가인 피카소,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이 세 사람에 의해서 인류는 큰 혜택을 입고 많은 발전과 변화를 맛보았습니다. 예, 맞습니다. 이러한 천재들 덕분에 과학과 문화와 예술,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삶이 윤택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재들이 우리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구주로 오셨습니다. 온 인류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구주라는 말은 구세주라는 말인데, 히브리말로 메시아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구원자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가장 큰 날이며 큰 기쁨의 날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날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성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신 날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신에게로 나아가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육신하셨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incarnation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에요. 사건 중에 사건이에요.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오셨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요. 찬송가 109장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는 찬송이 있지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오늘밤을 가리켜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고 하는데, 왜 거룩한 밤- Holy Night라고 할까요? 1년 364일은 그냥 Night이라고 하는데, 왜 유독 오늘밤은 Holy Night이라고 할까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밤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비천한 나에게 구원자로 찾아 오셨기 때문에 거룩한 밤 Holy Night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하니까 이 말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드리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교와 모슬렘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달리 해석하고 있어요. 유대교는 예수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님을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받아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 예수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것이 말이 되느냐 그러는데, 죄송하지만 말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세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에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데, 하나님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것이 피조물이에요. 마태복음 10장 29절에 있는 말씀처럼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거예요.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거예요.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못 오실 이유가 없지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 3학년 때인데, 은혜 받아서 마음이 뜨거워서 친구들에게 전도합니다. 하나님이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셨다. 그러면 그 친구들이 \'야, 하나님이 신삼국지 쓰셨냐?\'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시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면 \"예수님이 오른발 빠지기 전에 왼발을 올려놓고, 왼발 빠지기 전에 오른발을 올려놓았냐. 그게 말이 되냐\"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할 말이 없잖아요. 상식에서 어긋난다는데, 믿지를 않으니. 그 때에 근사한 답변을 했지요. \"내가 믿는 하나님은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야. 내가 말하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고 네가 말하는 것은 돌아가신 하나님이야. 돌아가신 하나님은 힘이 없어서 홍해를 가르지도 못하고 물위를 걷지도 못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야. 땅 집고 수영하기야.\" 여러분 맞아요? 틀려요? 제가 말씀드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에요? 돌아가신 하나님이에요? 예, 살아계신 하나님이에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까짓 홍해를 떼었다 붙였다가 못합니까? 홍해뿐이겠어요? 우주를 만드시는 분인데, 우주를 떼었다 붙였다 하시지요. 욥기 38장에 있는 말씀처럼 구름으로 바다를 덮고 흑암으로 바다를 감싸는 것이 하나님이신데, 바다가 넘지 못하게 금을 그어 놓고 바다를 가두어 놓고 빗장을 지른 것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그것을 못하시겠어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지 못해요? 제가 친구들에게 그랬어요. 만일에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지 못하신다면 나는 그 하나님을 안 믿겠다. 능력도 없는 하나님을 뭐 하러 믿어. 그랬더니 친구들이 \"어 진짜인가 봐.\" 그리고는 예수를 믿었어요. 그 덕인지 모르지만 60명 친구들 중에 40명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선생님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날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이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드릴 때에 성탄은 크나큰 은혜가 되는 것이고 한없는 기쁨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제일 먼저 들었던 사람들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천사들이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의 좋은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던 박사들이 별을 보고 탄생의 소식을 알았습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얼마나 멋있는 찬양입니까? 이보다 멋진 찬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 땅에는 평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찬양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고백하며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천사의 찬양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면 먼저 평화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면 나라가 평안합니다. 나라가 잘 되잖아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는 다들 부강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면 평안합니다. 성탄이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경험하실 겁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신앙생활이 시작되면서 마음의 평화가 주어집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니까 걱정이나 근심, 의심, 염려, 낙심, 좌절. 모든 것들이 떠나갑니다. 걱정이 없어서 걱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근심 염려의 옷을 벗겨 주시고 평안의 새 옷으로 갈아 입혀 주시기 때문에 평안이 있게 되는 겁니다. 성탄의 기쁜 소식은 가정에도 가져다줍니다. 주님을 구세주로 믿는 가정을 보세요. 가정이 평화롭습니다. 행복합니다. 그런 가정에 심방 가보면 따뜻합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있습니다. 서로가 존중해 주고 아껴주고 돌보아주고 섬깁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가 있어요. 남편은 남편의 역할에 충실하고, 아내는 아내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저와 여러분 심령과 가정에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드림으로 이러한 복과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이조 시대에 있었던 얘기입니다. 나라가 어려움을 당해서 왕이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왕은 신변보호를 위해서 평민으로 변장을 하고는 신하들과 같이 도망을 하다가 어느 시골에서 지내게 되었답니다. 그 마을의 어느 촌부의 집에 가서 몇 일을 묵고 가겠다고 말을 하니까, 주인은 전후 사정을 묻지도 않고 그러시라고 하면서 방을 하나 내 주더랍니다. 주인 생각에는 나라가 온통 어려운 이 난리에 먼 길을 떠나는 객이려니 생각했던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불쌍해요. 촌부는 정성으로 대접을 했습니다. 왕이 이렇게 몇 일을 묵는 동안에 상황이 바뀌어서 왕궁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왕이 궁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니까 그 시골의 촌부가 너무나 고마운 거예요. 이 난리에 자기도 먹고 살기가 힘들텐데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을 잘 대접해 주었으니 이게 얼마나 감사해요. 그래 신하를 불러서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이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이 시골 촌부가 난생 처음으로 왕궁을 오게 된 거예요. 왕 앞에 나오면서 가만히 보니까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에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몇 달 전에 자기 집에 몇 일을 거하던 이서방이에요. 그 때는 이서방이라고만 알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까 그 나라의 왕이지 뭐예요. 깜짝 놀란 촌부에게 왕이 말을 합니다. \"자네가 전에 나를 그렇게 도와주었으니 내가 참 고맙게 생각하네. 그 은혜를 내가 갚으려고 하는데 소원이 있으면 말하게. 땅이든 벼슬이든 뭐든지 말하면 다 들어주마\" 임금이 해 주겠다는데 말 못 할게 없잖아요. 그런데 이 촌부가 이러는 겁니다. \"임금님, 아닙니다. 저는 그저 지나가는 객이라고 해서 몇 일 묵게 한 것 밖에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아 이 사람아, 그래도 한 가지 소원은 있을 게 아닌가? 그것을 말해 보게. 내가 그것을 이루어 주마\" 임금님이 자꾸 말하라고 하니까 촌부가 말을 합니다. \"임금님, 정 그러시다면 말씀을 드리지요. 저에게는 특별한 것은 없고 몇 달 있으면 제 환갑날이 되는데 저의 환갑 잔치에 저희 집에 한번 와 주시면 족하겠습니다.\" 왕이 무엇이든지 말하라고 했으니 거절할 수 없잖아요. 임금님이 \"그러지. 내가 그 날에 자네 집을 가지\" 이렇게 됐어요. 왕이 시골 촌부의 환갑에 간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어떻게 되었겠어요? 난리가 났지요. 왕이 걸어서 가나요? 요즘 말로 전용차 타고 가요. 차가 가려면 시골길에 아무 데나 가나요. 길이 좁은 데 어떻게 가요. 그러니 길을 새로 놓아야지요. 그래 이 촌부의 집 앞에까지 근사한 도로를 새로 널찍하게 만들었어요. 또 왕이 혼자서 가나요? 비서에다가 경호에다가 얼마나 많은 수행인원이 가요. 공식 방문인데. 요즘 말로 주지사, 시장, 국회의원, 시의원, 기업체 사장, 뭐 할 것 없이 한 자리하는 사람은 모두 갑니다. 또 빈손으로 가나요? 금일봉을 들고 가지요. 옛날이나 요즘이나 별로 다르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해서 왕이 시골 촌부의 집에 갔는데, 얼마나 많은 환갑 선물과 돈이 들어 왔는지, 그 촌부가 그냥 그냥 부자가 됐답니다. 왕이 한번 왔다가고 나서 그 촌부의 집이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온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왕보다도 더 높으신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집에 오신 것이 바로 이런 거예요. 이것이 성탄입니다. 왕이 촌부의 집에 찾아가서 촌부에게 기쁨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나의 메시야로 받아드리는 사람은 기쁨이 있는 것이고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드리는 모든 사람에게는 믿음의 의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면 모든 식구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 어린 아이 하나 때문에 그 가정에 웃음꽃이 피게 됩니다. 정말 신비스럽습니다. 가정에 아이 한 명이 태어나도 그렇게 기쁘고 즐거운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로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가정에 오시면 얼마나 기쁘고 좋겠습니까? 이것이 성탄절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성탄의 기쁨을 맛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성탄의 기쁨으로 구원의 복된 소식을 온 누리에 퍼트려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얻는 역사를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사람의 몸을 입고 친히 이 땅에 오셔서 구원해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저희들에게 한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백성에게 전해서 그들도 우리와 같은 기쁨이 넘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가장 아름다운 명절/ 마2:7-12
가장 아름다운 명절 (마 2:7-12) http://mission.bz/5508성탄절가장 아름다운 명절 (마 2:7-12) 어느나라 어느민족을 막론하고 대개 명절이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명절, 가장 귀한 명절, 가장 영원한 명절이 있다면 주님 탄생하신 성탄절일 것입니다. 그날은 너무 고맙고 놀라운 날이기에 하늘문이 열리고 천군천사가 내려 왔으며, 목자들이 새벽찬송을 시작하였고, 동방 박사들이 출동하였으며,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소란스러운 세상에 평화를 주는 복된 날이며, 우리 믿는자에게는 행복의 문을 열어주시는 즐거운 날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곳에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생각이 바뀌고, 말이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지는 역사가 나타나며 열매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회나 국가는 일반적으로 평화와 부강과 축복을 누립니다. 불교나 미신을 국가적으로 섬기면서 잘사는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미국은 개척한지 300여년, 독립한지는 불과 20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그 나라가 그렇게 부강하게 된것과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된것은 기독교를 빼 놓고 달리 설명 할수가 없습니다 한때 미국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과 때를 같이해서 더 이상 교회성장에 있어서 미국에서는 배울게 없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러나 몇년전부터 기독서점에 가보면 미국교회들의 성장을 다룬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교회가 새로워지고 있고 곳곳에서 역사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새로워지고 교회가 성장하게되니 자연히 사회경제가 회복되어 진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그저 우연으로 돌릴 수 밖에 없는 역사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우리 현실은 어떠합니까? 올 겨울은 유난히 춥게 느껴진다고들 합니다. 호주머니는 가벼워지고 가슴이 썰렁해지며 인정이 메말라지는 때 입니다. 유래없이 많은 실직자들이 거리를 헤매고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딱한 가장들이 늘어만 갑니다. 세상이 자꾸 어두워져 갑니다. 이런 때 일수록 회복해야 될 것은 교회! 믿음! 바로 우리들입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교회는 밝은 빛을 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제일 큰 문제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희망을 잃은 이 시대에 바른 가치관을 잃고, 살아야 할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린 이시대를 바로 우리가 감당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 되시고, 내 가정의 주인 되시고, 직장의 주인 되셔서 주님 뜻대로만 행하고 살아간다면 주님이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차관을 상환하기 시작하는 등 경제회복의 조짐이 보입니다. 바로 위기중에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이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가(교회들이) 회복되면 육적문제와 장애물들은 얼마든지 이길 힘을 주실줄로 믿습니다.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누가 이끌어 갑니까? 정치가들이 아니고 경제인들이 아닙니다. 드러나기는 그들이지만 늘 시대의 역사를 보면 믿음있는 사람들, 기도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가 바뀌어 가는 것을 봅니다. 다른 사람 볼 것 없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의 앞날은 우리 교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앞날은 바로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 가정과 일터의 앞날은 누구에게? 바로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실 뿐 아니라 이번 성탄은 영적 회복의 성탄, 기쁨의 성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동방박사들을 보세요. 아기 예수를 찾아서 먼 여행을 합니다. 동방이 어느지방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먼 거리 입니다. 하지만 거리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소중했기에 지위가 있고 학문이 있는 그들이었지만 먼 길을 찾아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은 많은 경우에 문제와 장애물을 넘어섭니다. 원근각처의 힘든 여건 속에서도 주님 사랑하시는 여러분에게 주님이 영육간에 더 큰 은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보다 경배입니다. 목자들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어 경배 드렸으며 동방박사들이 고랬습니다. 헤롯은 󰡒아이를 찾거든 내게도 알려주어 나도 가서 경배하게 해달라󰡓고 하며 겉으로는「경배하겠다」하였지만 속으로는 「찾기만 하면 죽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통해서 -성경에는 전문가들로 많은 지식이 있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실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을 알지만 가슴으로 뜨겁게 믿지 못하는 사람은 매사에 논리적이고 타산적이 됩니다. 주님은 싸늘하게 식은 가슴의 이론을 원치 않습니다. 뜨거운 가슴을 원하십니다. 문제는 중심이고 자세입니다. 헤롯은 예수님 나심을 알고 죽일것을 생각 하였고, 서기관들은 알고도 현실로 믿지 못하니까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말씀을 들은대로 순종하였고 직접 베들레헴으로 갔으며 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려고 대기하는 생활이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기대가 없다면 더 이상 믿음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으실 때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되게 하심을, 또 하나님이 이루어 가심을 생활로 많이 체험해 나가시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동방박사들이 먼 길을 여행하여 주님앞에 왔을 때 이들의 손에는 귀중한 예물이 들려 있었습니다. 미리 준비한 것입니다. 왕앞에 빈손으로 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황금 - 왕권을 의미합니다. 유황 - 제사장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쓰던 것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의미합니다. 몰약 - 죽을 때 부패방지를 위해 몸에 바르는 것으로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합니다(예수님의 속죄). 동양 풍속에는 예물 없이 왕앞에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예물이나 선물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이들의 예물은 정성된 예물이며 의미있는 예물입니다. 누가 강요한 것 아닙니다. 체면 때문도 아닙니다. 기쁨으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려 주님께 경배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탄을 맞으면서 지난 한 해를 돌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면서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까? 형편이 각기 다르고 처지가 달라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시간도 주님께 드리고 몸도 드리고 재능도 주님께 바쳐드리는 복된 절기가 되거니와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는 성탄이 되어서 절망의 환경을 나를 통해서 또 우리 교회를 통해서 극복하고 힘차게 다시 일어나는 기쁜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 게시물을...
가장 아름다운 성탄/ 마1:21-23/ 2010-12-25
가장 아름다운 성탄 마1:21-23 1. 약속 한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기적처럼 목숨은 건졌지만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그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사고는 그의 두 눈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남자는 의사를 붙들고 절규했지만 의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환자의 등만 쓸어주었습니다. 그 남자는 안구이식을 하는 것 말고는 가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곧 일반 병실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한 꼬마숙녀를 만났습니다. 옆 침대에 입원중인 아이는 놀아줄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가워했습니다. 그 소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와 두 눈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저씨 눈이 꼭 미라 같다. 아저씨, 아저씨, 말 못해?” 그러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말을 주고받을 만큼 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소녀가 자꾸만 성가시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이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을 감싸 쥐고 흐느꼈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곁에 와서 손을 꼭 잡으며 말합니다. “아저씨, 울지마... 울 엄마가 그러는데 자꾸 울면 병이 안 낫는데.” 그 날 이후로 남자는 그렇게 다가와 손을 잡아주고 말을 붙여준 소녀와 단짝이 되었습니다. 함께 정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이야기도 주고받았습니다. “아저씨, 나 있잖아 아저씨랑 결혼할래?” “정혜는 아저씨가 그렇게 좋니?” “응 좋아.” 그러나 남자와 일곱 살 꼬마숙녀의 이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습니다. 그가 퇴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소녀는 자기가 퇴원할 때 꼭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꼬마가 퇴원하는 날 꼭 예쁜 꽃을 사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두 사람은 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주후에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안구 기증자가 나타나서 눈을 이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뛸 뜻이 기뻤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는 잃었던 빛을 찾았고 온전한 세상을 찾았습니다. 수술이 다 끝난 다음 병원에서는 기증자가 보낸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편지를 보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편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아저씨, 나 아무래도 아저씨랑 결혼은 못 할 것 같애. 그래서 아저씨 눈 할래.” 일곱 살 어린 꼬마가 하늘나라에 가면서 마지막으로 그에게 준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밝은 눈이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손가락을 걸며 약속하신 것을 지키신 날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던 그 약속을, 죄와 어둠과 절망과 죽음에 헤매던 우리를 건지시겠다던 그 약속을 이루신 날입니다. 사람은 약속을 배반합니다.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약속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합니다. 약속하신 것을 결코 취소하지도 바꾸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기억 속에 있는 약속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2. 단 5분 만이라도 시골 어느 집에 한 군인이 찾아 왔습니다. 빨래를 널고 있던 어머니는 낯선 군인이 전해준 한 통의 편지를 받아 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들의 전사 통지서였습니다. 전쟁터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아들의 모습이 떠올라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식, 집안의 기둥이었고 하늘이었던 아들인데...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어머니의 가슴에는 아들이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 한 번만이라도 아들을 볼 수 있다면, 단 5분 만이라도....” 곁에서 어머니의 기도를 듣던 군인이 물었습니다. “아들을 단 5분 동안 만날 수 있다면 어머님이 만나고 싶은 아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했던 지난날들을 떠올렸습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엔 참 여러 아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던 어릴 적 모습. 학교의 단상에 올라가 우등상을 받던 자랑스럽던 모습. 착한 일을 해서 가족들을 기쁘게 하던 모습. 그리고 군인으로 용감하게 싸우던 모습까지도..... 그러나 다시 보고 싶은 아들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습니다. “언젠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르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문 밖에서 울던 그때의 아들과 단 5분만이라도 만날 수 있었으면...” 어머니는 눈물을 참으며 어렵게 말을 이었습니다. “아이는 그 때 너무 어려서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지요.” 어머니는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아들의 얼굴을 닦아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무서워하고 어렵고 힘들었던 때의 아들을 다시 만나 품에 안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했던 많은 날 들 가운데서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과 조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들과 단 5분만이라도 다시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아들이 가장 무서워하고 절망하고 있던 순간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왜였을까요? 그것은 어머니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아들을 위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자신을 위했다면 어머니를 기쁘게 했던 순간을, 어머니에게 효도했던 순간을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아들이 괴로워하고, 어머니의 위로가 가장 필요한 그 순간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신 신비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들에게 독생자를 주셨고, 우리 주님은 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채 사람이 되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사건도, 주님을 위한 사건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위하여 낮고 낮은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탄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었다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리에서 영광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성탄이 거룩하신 주님을 위한 일이었다면 더럽고 추한 우리가 거룩해지고 의로워진 다음에 우리에게 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버려두고 더럽고 추하여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는 죄인들에게 오셨습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자식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가장 연약하여 두려워하던 아들에게 와서 아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하기를 원했던 어머니처럼, 하나님은 죄악으로 인해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와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품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성탄은 눈물로 얼룩진 우리의 얼굴을 닦아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달려오신 날입니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넓은 사랑으로 덮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한 걸음에 달려오신 날입니다. 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 시장통 작은 분식집에서 찐빵과 만두를 만들어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오후, 아침부터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후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나기였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빗줄기는 그치기는커녕 더 굵어졌습니다. 어머니는 서둘러 가게를 정리한 후에 길거리에서 우산을 두 개 샀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다니고 있는 미술학원으로 달려갔습니다. 학원에 도착한 어머니는 학원 문을 열려고 하다가 깜짝 놀라며 자신의 옷을 살폈습니다. 기름에 찌든 작업복에 낡은 슬리퍼, 천 원짜리 돈과 동전이 들어있는 허리에 차는 작은 돈 주머니, 앞치마엔 밀가루 반죽이 더덕더덕 붙어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감수성이 예민한 여고생 딸이 상처를 입을까 걱정된 어머니는 건물 아래층에서 학원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한 참을 서성이던 어머니는 문득 3층의 미술학원의 창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마침 아래쪽의 어머니를 내려다보던 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어머니는 반갑게 손짓을 했지만 딸은 엄마를 못 본 척 얼굴을 숨겼다가 다시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숨겼다가 다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마도 딸은 초라한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나 봅니다. 딸은 초라한 자기 어머니를 다른 친구들에게 보이기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슬픔에 잠긴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어머니는 딸의 미술학원에서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딸이 부끄러워할까봐 가지 않으려고 망설였지만 저녁이 되어서야 가게를 이웃 사람에게 맡기고 미술학원으로 갔습니다. 저녁이 되었지만 다행히 전시장은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어머니는 한 그림 앞에서 가슴이 멎는 듯 했습니다. 딸의 그림 속에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비, 우산, 밀가루 반죽이 허옇게 묻은 앞치마, 그리고 낡은 슬리퍼까지. 그림 밑에는 그림의 제목이 이렇게 붙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 그림 속엔 어머니가 학원 앞에서 딸을 기다리던 날의 초라한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그 날 딸은 어머니가 창피해서 고개를 들였다 내밀었다 한 것이 아니라 우산을 들고 서있는 어머니를 화폭에 담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어느 새 어머니 곁으로 다가온 딸이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모녀는 그 그림을 오래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딸은 밀가루 반죽이 덕지덕지 붙은 어머니의 앞치마와 낡은 신발을 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 화장하는 것도 모르고 시장에서 만두를 빚다가 늙어버린 초라한 모습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딸은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자랑했습니다. 딸이 어머니를 부끄러워하지 않듯 우리도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 하나님을 우리도 이젠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죄인의 비참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 보여주시려고 마구간의 구유에 오신 그 하나님을 우리도 이젠 자랑할 수 있을까요? 나와 함께 하기 위해서 내가 흘린 눈물을 흘리셨고, 내가 겪은 아픔을 겪으셨고, 내가 당한 슬픔을 당하신 하나님을 이젠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으신 그 하나님을 이젠 나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는 나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님’이라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가장 작지 아니한 베들레헴/마2:1-6/김정호 목사/성탄절설교/2008-12-24
가장 작지 아니한 베들레헴 마2:1-6 물고기 중 유일하게 둥지를 만드는 것이 가시고기입니다. 가시고기는 주둥이로 강바닥의 모래를 퍼내고 그 곳에 둥지를 짓습니다. 모래집에 수초까지 덮어 완벽한 산란의 보금자리를 꾸밉니다. 가시고기 수컷은 이때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몸집이 큰 물고기들과 처절한 싸움도 불사합니다. 알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부지런히 알을 넣고 꺼내는 작업도 잊지 않습니다. 가시고기 수컷은 보통 15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알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알이 부화할 무렵, 둥지 옆에서 장렬하게 죽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치어들은 무심하게도 제 아비의 살을 뜯어먹으며 성장합니다. 가시고기는 치어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최후에는 몸까지 내어놓습니다. 그 부성애로 인해 가시고기의 부화율은 90%를 웃돕니다. 예수의 사랑은 가시고기의 희생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한 영혼의 부화를 위해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쏟고 계십니다. 철없는 치어 같은 인류에게 ‘구원‘과 ‘영생‘이라는 값진 선물을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을 가진 아주 작은 고을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고을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고을 중 하나가 됐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그곳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이라는 곳은 구약 시절부터 많은 애환과 추억을 갖고 있는 특이한 곳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한 고을을 마치 사람 대하듯 표현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애통하시면서 부른 예루살렘, 저주하신 도시 고라신과 벳새다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한 개인에게 당신의 뜻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마을 전체나 나라를 상대로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에 나오는 지명의 뜻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가장 작지 아니한 베들레헴은 어떠한 땅이었을까요? 1. 축복의 땅입니다 본문 6절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성경은 베들레헴을 ‘가장 작지 않은‘ 땅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과거 사사 입산이 태어났고(삿12:8-11), 다윗의 고향이었으며(삼상16:1), 하나님의 성막이 있던 곳(시132:5)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메시야가 예언을 성취시키며 탄생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십자가 상에서 저주받아 죽으셔야만 했던 예수님이지만 그분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기억하고 기뻐하듯이 장차 올 고난과는 다르게 기쁨과 축복의 땅이 된 베들레헴을 기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데서 오는 축복입니다. 사실상 메시야를 배출한다는 것은 한 고을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명예와 축복을 얻은 것입니다. 금메달이나 노벨상 출신의 고을도 영광이지만 메시야 탄생 고을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지역의 규모로는 작은 고을이지만 메시야 탄생의 땅이기에 가장 큰 축복을 받은 큰 땅이 된 것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은 약점 투성이었습니다. 그는 달걀을 삶는다면서 끓는 물에 시계를 집어넣은 적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난롯불에 화상을 입은 줄도 모르고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뉴턴은 불에 데인 곳을 어루만지며 하인에게 당부했습니다. “제발 저 난로를 좀 옮겨주게.“ 하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주인님, 난로를 옮기는 것보다 주인님이 난로에서 조금 떨어져 앉으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뉴턴은 신음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음, 그렇군.“ 뉴턴은 결혼식 날에도 결혼 사실을 깜빡 잊어버린 채 연구실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또 20년 동안 준비해온 자료를 개가 물어 가는 것도 모른 채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약점 투성이인 뉴턴이 대학자가 된 것은 두 가지 장점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집중력‘과 ‘낙천적 인생관‘이었습니다. 이 장점이 많은 약점들을 상쇄시켰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보통 무서운 집중력과 낙천적 인생관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표정이 밝은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표정이 밝은 사람들이 예쁘고, 호감이 가고, 건강하고, 젊어 보입니다. 대체적으로 긍정적이고 믿음의 성장 속도도 빠르고 봉사도 잘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 모두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이나 조건과 전혀 상관없이 절대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축복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영적 베들레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땅과 집은 베들레헴처럼 작을지 몰라도 메시야를 모시고 사는 곳이기에 가장 작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크고 값비싼 곳입니다. 거룩한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성소이며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축복하십니다. 우리 교회를 축복하십니다. 인류를 구원하신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땅임을 믿고 선포하고 누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고난의 땅입니다 본문 6절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예수님이 탄생한 당시 베들레헴에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약 20여명 가량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헤롯은 이 아이들을 전부 죽여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장차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를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헤롯은 20여명이 아니라 2만명이라도 거침없이 죽였을 탐욕과 살인적인 금수만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졸지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부모들은 위로 받기를 거절하고 애통하였습니다. 누구도,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최고의 고통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죄없이 죽은 아기를 부둥켜안고 너무도 큰 충격에 실신한 아기 엄마도 많았을 것입니다. 과거 옛 조상인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 죽은 곳에서(창35:19) 이번에는 순진무구한 유아들이 살해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아기 예수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아기들이 죽어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결코 아닙니다. 사단의 사주를 받은 악한 헤롯이 결국 이 엄청난 참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메시야가 태어난 마을인 베들레헴은 이처럼 참혹한 핍박과 고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기쁨과 웃음도 잠시였습니다. 슬픔과 눈물이 범벅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모든 땅에는 끝없이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유명한 에드워드 기본의 중요한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와 최근에 나와 베스트셀러가 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 제국의 멸망에 기독교가 일조했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정치화되어 버린 권력의 중심이 된 기독교, 특권을 누리고 사명을 상실한 기독교, 타 종교에 대한 지나친 배타성,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권력 다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증언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우리가 변호를 할 수 있다면, 그러한 부정적인 모습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후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아무런 특권 없이 핍박 받는 사람들, 권력을 비판하고 권력에 초연했던 사람들, 오히려 믿음 때문에 권력을 포기하던 사람들, 이웃 사랑을 위해 자신이 기꺼이 희생하던 사람들, 이들이 초기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로마의 흥망에 관한 좀 더 객관적인 기술을 하자면, 초기 기독교의 거룩한 영향과 함께 로마의 문명은 절정에 도달하고, 기독교의 부패와 함께 로마가 쇠락했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원인 분석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초기 로마의 기독교가 세상의 소금이었다면, 후기 로마의 기독교는, 마르크스의 비판처럼 민중을 타락시킨 아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소금 역할을 하느냐, 아편 역할을 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입니다. 고난과 핍박을 고의적으로 받을 필요는 없지만 고난을 통해서 겸손과 기도와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이 유익인 것입니다. 고난 때문에 개인의 신앙이 성숙해지고 교회가 교회다운 건강한 교회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반드시 주십니다. 베들레헴은 피비린내 나는 고난의 땅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충성하려고 하면 반드시 고난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이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강하고 건강하게 할 뿐입니다. 고난의 중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고난의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그들을 지키시고 높여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고난을 넘어 더 믿음이 성장하고 건강해 지는 놀라운 성탄의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사명의 땅입니다 본문 6절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베들레헴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곳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다른 고을들보다 훨씬 돋보입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 때문에 영광을 입고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단순한 예수님의 출생지로 끝나버린 것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 모든 고을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영적인 베들레헴이 되게 해야 합니다. 각 고을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태어나도록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모든 고을들이 하나님을 믿는 성지가 되도록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참된 베들레헴과 이스라엘이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합니다. 미신과 우상의 나라가 아니라 여호와만 섬기는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가 되도록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몇몇 선교사나 전도자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자비량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사이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곳이 파송받은 선교지입니다. 이 사명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조국 이스라엘로부터 대통령직을 제의 받았습니다. “국회는 만장일치로 당신을 이스라엘 초대대통령으로 추대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봉사해 주십시오.“ 아인슈타인은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물리학을 가르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이스라엘의 벤구리온이 어느 날 갑자기 수상직을 사임했을 때 기자들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나는 키부츠 땅콩 밭으로 갑니다. 수상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땅콩농사는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대통령은 ‘임시직‘이지만 교사직은 ‘평생직‘입니다.“ 세상은 소신을 가진 ‘창조적 소수‘에 의해 움직입니다. 남의 장단에 박자나 맞추는 인생에게 아무도 박수를 보내지 않습니다. 사명 없는 국가와 기업과 교회와 사람들은 쓰러지고 사라집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생명을 불사르는 성도가 될 때 하나님이 세우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들을 부르시고 교회를 주신 것은 인류 구원을 위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메시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지역과 사람들에게 전파하라는 사명 때문입니다. 이 사명을 위해 살고, 공부하고, 일하고, 충성을 다하는 작지 아니한 큰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은 성탄주일입니다. 여러분과 교회는 이 시대의 베들레헴입니다. 축복과 고난과 사명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믿고 기뻐하고 전파하는 작지 아니한 위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가장 큰 선물/ 마1:16,23/ 김기석 목사/ 성탄절설교/ 2002-12-25
가장 큰 선물 마1:16,23 가장 위대한 신학적 통찰 갈등과 분열의 땅에 평화를 가지고 오시는 예수님을 감사함으로 영접합니다. 딸에게 “아빠를 위해 성탄절 선물을 준비했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선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그 눈초리가 심상치 않아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눈치 하나는 빠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를 위해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어요.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데, 그가 1961년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 초청 교수로 가서 한 한기 동안 강의를 했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그의 마지막 강의가 있던 날 신학대학의 학장은 청중들에게 “바르트 박사가 건강도 여의치 않고 몹시 피곤한 가운데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여러분의 질문을 받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그건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습니다. “대신 제가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한 가지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학장은 그 저명한 신학자를 향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얻은 그 수많은 신학적 통찰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미 수십 권의 책을 써낸 노대가에게 주어진 최고의 질문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그가 하는 말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받아 적으려고 펜을 잡고 노트를 끌어당겼습니다. 바르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몇 분간 생각에 잠겼습니다. 얼마 후 그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그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얻은 신학적 통찰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성경이 내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대 신학자의 입에서 나온 고백치고는 너무나 소박해서 어쩌면 듣는 이들이 맥이 탁 풀려버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의 고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번 성탄절에 칼 바르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선생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얼굴 하나’ 만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 얼굴을 만나면 삶이 뜻을 얻고,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얼굴, 언제 보아도 늘 그러한 넉넉한 얼굴, 그 얼굴을 만나야 우리 삶이 덧없는 일에 이리저리 끄달리지 않고, 든든하게 자리 잡히게 됩니다. 세상에 잘 생긴 사람은 많지만, 그 속에 생명의 신비와 우주의 깊이를 담고 있는 얼굴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얼굴과 만난 사람들입니다. 온 인류 가운데서 가장 사람다운 사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오롯이 드러내주는 분, ‘만물이 그분 안(in)에서 창조되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by)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for) 창조된 분’(골1:16),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왜 태어났니? 사람들은 친구나 가족의 생일을 맞으면 케이크에 불을 붙여놓고 축하노래를 불러줍니다. 그런데 짓궂은 사람들은 ‘생일 축하합니다’의 멜로디에 가사를 바꾸어 부르기도 합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물론 이것은 악의 없는 장난이겠습니다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건 꽤 괜찮은 가사입니다. 해마다 생일을 맞을 때, 내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저는 제가 왜 태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는 잘 압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8-39)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 아닐까요? 그분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속에 생명의 기쁨을 불어넣는 일일 거예요.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애머리염낭거미(맞나?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가 뱀을 잡아먹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뱀의 몸에다 독을 주입해서 녹여서 먹더군요. 끔찍했어요. 그러면서 우리도 누군가의 영혼에 대롱을 꽂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명과 기쁨과 희망을 주입해서 생명을 살리는 이도 있고, 죽음과 슬픔과 좌절을 주입해 생명을 서서히 죽게 만드는 이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셨나요?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이 사람대접을 받았고, 세상살이에 지쳐 시든 영혼들이 깨어났습니다. 무엇을 낳으려는가? 우리는 그분을 가리켜 ‘임마누엘’이라 부릅니다.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지요. 어머니 마리아와 양부 요셉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사실 예수님을 낳은 것은 죄와 폭력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인류의 간절한 염원과 그런 염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삶을 통해 무엇인가를 부르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백성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라는 말이나, ‘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 행동 하나 하나는 무엇인가를 이 세상에 가져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다소 닮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잘못된 길로 접어들기 쉬운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탄식합니다. 악인은 악을 잉태하여 재앙과 거짓을 낳는구나(시7:14)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호8:7)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여러분은 무엇을 낳고 계십니까? 평화입니까, 불화입니까? 사랑입니까, 미움입니까? 모자에 손을 넣었다 꺼내는 마술사의 손에는 꽃다발이나 비둘기가 들려 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우리의 마음 씀, 혹은 실천이 이처럼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경탄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지배하던 시기를 가리켜 사람들은 ‘로마의 평화’ 시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 평화의 실체는 로마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약소국가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예수님은 땅의 평화가 아니라, 하늘의 평화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의 드러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도 예수님이 오실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원합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김소월의 시「진달래꽃」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정한의 고향으로 기억되고 있는 영변은 지금 핵재처리시설로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진달래꽃에서 핵까지’, 우리는 가파른 현대사를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이 강토에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세상 도처에서 테러와 폭력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그분을 우리의 가슴에, 그리고 민족의 가슴에 모셔야 합니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을 두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나라들을 침묵시킴으로 얻어지는 거짓 평화 말고, 섬김과 나눔과 사랑에 바탕을 둔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평화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선물이 되어야 할 차례입니다. 이 아름다운 성탄 절기에 우리 모두 세상의 선물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 목사(서울 청파감리교회)
가장 큰 은혜의 날 성탄절/눅1:26-38/김필곤 목사/성탄절설교/2009-12-13
가장 큰 은혜의 날 성탄절 눅1:26-38 오래 전 연예인 교회에서 구봉서 장로님이 신앙생활 할 때였답니다. 당시 하목사님께서 목회를 하고 계셨는데 주일 오후 연예인들이 모여 성경공부를 했답니다. 그날 목사님께서 동정녀 마리아 사건에 대하여 열정을 다하여 가르쳤는데 뒤에서 한 젊은 연예인이 손을 번쩍 들더니 "목사님 농담하지 마세요. 어떻게 처녀가 아기를 낳아요? 그런 얘기는 그만 하시고 예수님께서 좋은 일 많이 하셨잖아요. 다른 말씀을 가르쳐 주시지요."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목사님께서는 더 열정적으로 예수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에 대하여 가르쳐 주니까 이 젊은 연예인이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갑자기 성경 공부 분위기가 이상해지니까 그 때 구봉서 장로님이 벌떡 일어나 상기된 얼굴로 그 후배 연예인을 향하여 "야, 임마! 마리아 신랑 요셉도 믿었는데 네가 뭔데 안 믿어?" 라고 했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과학이 발달되어 체세포 복제를 하는 것을 보면 동정녀 탄생이 과학적으로도 이해가 되어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기 위해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탄생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1. 오늘 성탄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임을 확신합시다(28,30). 우리 옆 사람을 향하여 인사합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집사님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안에 위대한 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를 주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외모가 모자라서 항상 머리 숙이고 다녀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한자로 줄이면? 나! 두자로 줄이면? 또 나! 세자로 줄이면? 역시 나! 네자로 줄이면? 그래도 나! 다섯자로 줄이면? 다시봐도 나! 이것은 정신병 걸린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자존감이 높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 16:3)"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마리아는 큰 은혜를 받은 존귀한 자였습니다(28.30)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마리아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합니까? 지금까지 이름없는 초라한 시골 소녀였습니다. 무시 받는 동네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대단한 부자이고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닙니다. 장례가 촉망한 수능 만점 맞은 사람이 아닙니다. 당시 강력한 로마의 귀족 부인도, 지혜 있다는 헬라 귀부인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리아를 향하여 뭐라고 말씀합니까?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말하길 "은혜를 받은 자여"라고 말씀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마리아가 받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1절) 32절 이하를 보십시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요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32-33절) 메시아가 그의 몸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 예수님을 잉태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2)우리는 큰 은혜를 받은 존귀한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내 인생 나 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질그릇같은 우리 몸에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성령의 전이 된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아들로 삼았습니다. 종이 아닙니다. 품꾼이 아닙니다. 어둠의 자식이 아닙니다. 빛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똑같은 돌이라도 미켈란젤로가 만지면 위대한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 16:3)" 성탄절을 바로 큰 은혜를 주어 우리를 존귀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보내신 날입니다.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가 인생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신에 대한 생각은 자신의 인생을 그 생각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 보람있는 삶, 성공적인 생을 살려면 생각과 말과 행동의 뿌리인 '의식(Consciousness)'을 바르게 갇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생각, 말, 행동을 결정하는 밑바탕입니다. 의식이란 인간 행동의 숨겨진 결정자(The Hidden Determinant of Human Behavior!)입니다. 인간의 말과 행동, 생각 그리고 감정의 뿌리가 의식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녀도 자의식이 썩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걸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을 쥐라고 망상하고 있던 사람이 마침내 정신병원을 퇴원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병원 출입문에서 발이 땅에 달라 붙어 버렸는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질 않았답니다. 의사가 이상해서 이유를 물었답니다. "왜 그러구 서 계시오?" "바루바루 저기 고양이가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이제 쥐가 아니라는 걸 아셨지 않소?" "그건 틀림 없습니다만 고양이 쪽에서는 모르고 있을지 도 모르잖아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가있는 다니엘을 향하여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단 10:11)"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단 10:19)"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큰 은총을 존귀한 자들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오늘 성탄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큰 은혜를 받았으니 참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28)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늘 불안하게 사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주시는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8절을 보십시오. 1)천사는 은혜를 받은 마리아에게 평안을 누릴 것을 말씀합니다(28). "평안할지어라"라고 말씀합니다. 마리아를 불안하게 하기 위해, 두려워하게 하기 위해, 복잡하고 초조하게 만들기 위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였습니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갖는 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입니다. 정혼한 상태에서 아이를 갖는 것은 간음죄에 해당되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잉태하게 한 것은 불안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니 평안하라고 말씀합니다. 메시아를 잉태하는 것이 은혜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안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첨부하여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평안하라는 말씀입니다. 2)우리도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신다해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평안은 우리 삶에 있어서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평안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여호수아 리프맨의 소설,「마음의 평안」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젊은 청년이 어느 노인을 찾아가 자기 소원을 부탁하였습니다. 노인은 무엇을 갖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고, 넷째는 재능이며,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말을 듣고 있던 노인은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그러나 평안이 없이는 아무것도 즐길 수 없다네." 이 모든 것이 있다하여도 평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도 평안이 있을 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쌓여진 명예도, 재물도, 성공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84세로 죽기 직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답니다.그는 건강비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적당한 운동, 적당한 음식, 신선한 공기 그리고 마음의 평화인데 그중에 제일은 마음의 평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와 파키스탄 사이에 있는 훈자라는 곳의 사람들은 120세를 넘겨 산다고 합니다. 병원도 없지만 죽을 때도 그 날의 밭일을 다 하고 저녁먹고 잠들고 아침에 가보니 조용히 죽어있음을 발견할 정도로 건강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들의 장수 비결은 마음의 평안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평안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가정에도, 교회에도, 나라에도, 직장에도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이 평안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은혜로 누릴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평안입니다. 조건적 평안은 그 조건 사라지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자신을 비워서 이루어지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도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면 없어지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평안은 다릅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조건에 의해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안에서 생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바울과 실라는 이 평안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은혜로 주시는 평안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죄사함 가운데 주시는 구원의 평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하여도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은혜로부터 오는 평안은 감정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을 성령 충만으로 누리게 만듭니다. 마음의 평안이란 단순이 감정 조절이나 적극적인 사고 훈련이나 명상, 마인드 컨트롤, 요가, 최면요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은 육체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심령의 문제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쫓아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요한복음 20:22). 우리의 내면 세계의 평정은 성령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사울왕을 보십시오 성령이 떠나니까 그 순간부터 얼마나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됩니까? 심리적 불안으로 미친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 충만한 다윗을 보십시오. 그 위기 가운데서도 시를 짓고 찬양을 드립니다. 더욱 담대해지도 평안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한 제자들을 보십시오. 십자가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으니까 얼마나 심령의 평안을 누리게 됩니까? 감옥에 가서도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처럼 평안하고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용서를 구합니다. 성령충만하면 확신을 가지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감옥에서도 평안하게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이 함께 하신 것을 체험하기 때문에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평안한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 아버지와만 함께 걸으면 두렵지 않듯이 하나님과 함께하면 평안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 친척을 평안한 가운데 어떻게 떠날 수 있었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그 약속의 말씀 때문입니다. 요셉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과 사람과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그 좁은 길을 걸어 갈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가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말씀하였습니다. 문제가 일어나면 기도를 통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빌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면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문제가 있을 때 그것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이 성탄절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3. 오늘 성탄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큰 은혜를 받았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세상에서 꿈을 가지고 삽니다. 대부분 보면 세가지 범주의 꿈을 갔습니다. 첫째는 소유에 대한 꿈입니다. 갖고자 하는 것(Having)입니다. 둘째는 행위에 대한 꿈입니다. 하고자 하는 것(Doing)입니다. 셋째는 존재에 대한 꿈입니다. 되고 싶은 모습(Being)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소유에 대한 비전을 세우고 그 다음에 성취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재에 대한 꿈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진정 성공하는 사람들은 꿈의 순서를 반대로 세웁니다. 먼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꿈을 세웁니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큰 은혜를 받은 존재가 이미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옥가는 인생이 아니라 천국가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큰 은혜를 부어 주어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살게 해 주셨는데 문제는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까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이루어 드리는 삶,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해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서부터 예언한 구속사를 성취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잉태할 아기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이름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이름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저가 자기 백성의 죄를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말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될 것을 말씀합니다. 이미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탄생이 마리아를 통해 이루진다는 말입니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 기적적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예증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37절에 마지막으로 말씀합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믿습니까? 아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 때 마리아는 어떻게 합니까? 38절을 보십시오.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고백이 은혜 받은 마리아의 믿음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34절에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이루어지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과정에서 전적으로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리는 삶만큼 값지고 귀중한 삶은 없습니다. 마리아의 영광과 축복은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는 순종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11:28)라고 말씀합니다. 2)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예배에 참여한 우리는 큰 은혜 받은 자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은혜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특성이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은혜를 받으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의 뜻을 이루어 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여리고가 무너집니다.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메시아가 탄생합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몸을 주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리는 도구로 내어 놓았을 때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그에게 메시아를 잉태하게 하였고 마리아는 신비한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루는 것을 몸으로 실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비천"(눅 1:48)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이루어드리는데 자신을 내어 놓으므로 복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아기 예수의 탄생부터, 십자가의 죽음, 3일만에 부활, 40일 후의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세례를 모두 체험하는 영광을 누린 여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룰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순종으로 활짝 꽃이 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로마를 정복해서 구원사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순종함으로 구원사가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얼마든지 힘을 상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순종하였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힘의 원리와 은혜의 원리입니다. 힘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인가 하는 사람이고 은혜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나라는 힘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고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그 힘이 돈일 때는 재력이라고도 하고, 벼슬일 경우에는 권력이라 하며, 지식일 때는 실력, 육체적 건강일 때는 체력, 숫자일 때는 세력, 아름다움 일 때는 매력, 영적인 것일 때는 영력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무엇인가 이루고자 하는 자들은 이것을 추구하여 얻고 그것을 자신 마음대로 휘두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하나님께 내어 놓고 하나님이 사용하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이 땅을 통치하시고 은혜로 섭리하는 도구로 내어놓는 것입니다. 은혜로 아브라함을 불러 믿음의 조상을 만들고 이삭을 바치는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모세를 은혜로 나일강에서 구원하여 순종으로 택한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합니다. 목동의 지팡이지만 순종할 때 그 지팡이가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나게 만듭니다. 다윗을 은혜로 불러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고 순종할 때 그 물맷돌이 골리앗을 넘어뜨리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힘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믿고 나아가면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 주십니다. 힘으로 능으로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창12:1~3). 이삭을 바치라고 합니다. 모세에게 애굽에 가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라고 합니다.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순종을 통해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의 순종을 통해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큰 은혜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어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합니다. 성탄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아기 예수로 오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큰 은혜를 받은 존귀한 사람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과 고난이 있습니까? 두려움과 절망이 있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성탄절 아침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말씀 붙들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드리는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격, 기쁨, 찬양/눅1:39-56
감격, 기쁨, 찬양 눅1:39-56 온 나라가 축구의 열기 16강 진출의 감격에 가득하다. 내가 철이 든 이후로 이 만큼 남녀노소 구분 없이 지역의 구분 없이 온 국민이 마음을 합하여 같은 기쁨을 누린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우리 대표팀 선수들이 참 잘 뛰어 주었다. 선수 두 사람이나 퇴장을 당하고 유사이래 가장 잘 뛰는 우리 대표팀 선수들을 상대하는 포르투갈 선수들이 좀 안쓰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박지성의 차분하고도 너무 잘 짜여진 슈팅이 우리를 감격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것이 사실이지만 차라리 조금 봐 주면서 비겼으면 어떨까하는 바램을 가지기도 했다. 그렇게 그림 같은 슛을 날려 승리의 골을 넣은 박지성이 어떻게 하던가? 히딩크 감독이 어떤 모습이던가? 박지성은 감독에게로 달려가고 감독은 두 발을 벌려 감싸안는 모습이 더욱 감격적이었다. 온 국민이 그렇게 얼싸 안고 밤이라도 지새고 싶은 하루였다. 1. 믿음의 여인 본문 성경말씀에도 감격과 기쁨을 안고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이 있다. 누구인가? 천사를 만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은 마리아이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산중에 있는 유대의 한 동네 사가랴의 집이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재빨리 가고 있었다. 왜 그렇게 걸음을 재촉하여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것인가? 여러분도 알다시피 엘리사벳은 마리아보다 앞서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었다. 마리아가 그 사실을 알고 친척이었던 엘리사벳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만나는 첫 장면을 보라.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문안하고, 엘리사벳을 마리아에게 온갖 축복을 쏟아 붓고 있다. 어떤 말을 하는가? 42절. \"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복된 여자로 기정 사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리아에게 당장 눈에 보이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복되다고 하는 것인가? 45절을 보자.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마리아가 소유가 갑자기 많아져서 복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권세 있는 남편을 만나서, 잘나고 똑똑한 자녀를 두어서 복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믿음이 있어서 복된 여자라는 말이다. 어떤 믿음이 복이 되는가? 믿음에는 항상 정확한 내용과 확실한 대상이 있어야 한다. 무턱대고 믿는다고 하면 복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무엇을 믿었는가? 전능하시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복이 된다는 것이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향해서 그랬던 것처럼 나도 여러분은 향해서 \"복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형편에 있던지 상관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있는 자체가 벌써 복된 증거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는 한 이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이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복을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러니까 감히 여러분의 의사를 묻거나 확인하지도 않고서 여러분을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무명의 선수들을 발굴하여 저 뛰어난 사람들로 키워놓은 것을 보라. 그래서 히딩크에게 픽업된 선수는 복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그보다 더 하신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가신다. 여러분이 그 하나님에게 픽업된 사람들이니 복되다. 얼마나 복된지 조금만 확인하자. 고후4:7-10 엄청난 사람이 되도록 계획되어 있지 않은가? 신 28:1-10 이 정도로 만드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 내가 여러분은 복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리인가?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인가? 마리아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을 바라만 보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 아니라 그 약속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따라서 복된 사람을 복을 구하는데 연연하지 않고 믿음을 키우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찾으면서 그 말씀을 따라 나아가는 사람이 풍성한 복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가 복된 사람인데 엘리시벳이 크게 기뻐하고 있는 점을 유의하라. 심지어 6개월 된 \"태중의 아이가 기쁨으로 뛰놀았도다.\"고 표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복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만 끼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진정한 복이 될 수 없다. 다만 그 욕심을 채우는 수준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은 그 당사자에게 감격과 기쁨이 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그 복을 끼쳐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으시는 복이 항상 그렇다. 나눌 때에 더 커져간다. 심지어 분량이 한정된 물질까지라도 나누어 가지면 모자람이 없다. 여러분은 5병2어의 기적을 잘 알 것이다. 그 때 5000명 넘는 군중을 먹인 약식은 한사람의 한끼니 분량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이 나누어 먹었어도 배부르게 먹었다. 아마 10000명이 있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이것이 복을 나누어 더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믿음에서 복된 마리아 때문에 엘리사벳과 태중의 아이만 기뻐 감격한 것이 아니다. 그후에도 수많은 인류가 동정녀에게서 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격한다. 2. 은혜의 여인 엘리사벳만 마리아를 복된 여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마리아 스스로도 자기를 \"복이 있다.\"고 주장한다. 48下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사실 그 때까지 누구도 마리아를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자타가 공인하는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주장할 수 있었는가? 48上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도무지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마야부인을 아는가? 마야부인은 싯다르타(훗날의 석가모니)의 어머니다. 그의 신분을 기억하는가? 가비라바소도의 국왕의 왕비였다. 그러니까 석가모니는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가? 그 분의 신분은 만 왕의 왕이시다. 그렇다면 최소한 예루살렘의 왕족에게서 태어나야 신분에 어울린다. 그런데 누구에게서? 스스로를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일컫는 나사렛의 마리아에게 잉태되고 태어나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일등 공신 외동딸이 왕비가 되어 비단금침에서 온갖 보호를 받으며 대군을 낳는 것을 은혜라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생각에 그만한 조건이면 그만한 결과가 당연하다고 하는 것을 은혜라고 하지 않는다. 사람으로서는 안 되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되게 하신 것이 은혜의 바른 정의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경우는 은혜라는 말 말고는 다른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도무지 될 수 없는 일이 마리아에게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본인도 전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더욱 은혜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찾아보면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든지 발견된다. 다만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가기 때문에 은혜를 은혜로 느끼지 못할 뿐이다. 기왕에 잉태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와 관련해서 좀더 생각해 보자. 어떤 잉태가 가장 은혜로운 경우인가? 어떤 부부가 결혼을 하고 1년여를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임신이 되고 순산하여 아들을 낳았다. 또 세월이 지나서 이번에는 순조롭게도 원하던 딸을 낳았다. 그 이웃에 좀더 결혼생활이 오래된 부부가 있다. 결혼 10년이 다 되었는데도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다. 여러 해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렸는데도 결과는 그랬다. 그런데 11년째 되던 해 드디어 그 부인이 입덧을 하고 상당한 산고 끝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어느 가정이 더 은혜를 크게 느끼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후자라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이것은 동일한 은혜) (매일 교통기관을 이용하면서 탈없이 지내면서 덤덤한 경우/ 예상치 못한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의 감격과 감사. 어느 경우의 은혜가 더 큰가?) 자기들이 건강해서 뜻하는 대로 아이들을 가졌다는 엉뚱한 생각이, 자기가 운전 잘해서 늘 안전하다는 착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곁에 계셔서 베푸시는 은혜를 망각하게 만든다. 마리아는 착각에 빠지지 않았다. 자기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대하지도 못할 비천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고 \'은혜 받은 자\'(28)임을 통보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온 목소리를 다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4:6, 벧전5:5)고 하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사에 더 겸손해지라. \"내가 했다.\"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이루셨다.\"고 말하라. 거기에서 큰 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크신 하나님께서 이토록 나에게 이루시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큰 감격을 맛보면서 마음에서 우러난 감사를 하나님께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알지 못했다면 임신하고 아이 하나 낳는 일은 그렇게 대수로운 일도 아닐 것이다. 남들도 대부분 저절로 경험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리아로서는 \"그냥 그럴 수 있겠지, 다들 그렇지 뭐\" 그런 반응으로 그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엄청난 감격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수사력을 총동원하여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높여 찬양하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그렇게 은혜를 체험하기 바란다. 마리아처럼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란다. 찬양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큰 기쁨으로 채우시기를.... 3. 약속의 여인 마리아의 감격과 감사는 당장 경험하는 은혜에만 그치지 않는다. 54, 55절을 보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엄청난 약속을 주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다윗에게도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그리고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32,33절. 마리아는 그 말씀들이 자기에게 이루어질 것을 믿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이 약속들이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것들인가? 마리아로부터 1000에서 2000년이나 차이가나는 것들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1-2000년 전의 약속이 하나님이 어제 주신 약속을 오늘 이루신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이 대단하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기간 동안이나 믿는가?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 약속을 기억하시면서 지켜주신다고 믿는가?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응답하심을 얼마동안 기다리는가? 1년 정도는 기다리는가? 한 10년 정도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가? 2-30년 동안은 버티겠는가? 그 정도면 아브라함 수준은 되겠다. 75세에 후손축복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25년이 지난 100세에야 이삭을 얻었지 않은가? 여러분도 그 정도 기다리는가? 그만큼 지속적으로 기도하겠는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25년이 지나도 그것을 기억하시고 이루셨고, 수백 년이 지나도 다윗에게 그 약속을 재확인 하셨고, 수천 년이 지나서 마리아에게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그 약속을 이루사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지극히 큰 자가되고...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리니..\"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시효가 없다. 유효기간이 영원이다. 우리는 혹 그 약속을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신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마리아처럼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인데 그런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 얼마나 신용이 있어서 영원까지 계속될 약속을 주신다는 말인가? 우리의 이 땅에서의 수명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데 영원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하신 것인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이 강한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큰 권세의 자리에 앉지 않았어도 상관이 없다. 여러분이 부자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복된 사람이라고 인정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여러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한 그렇다. 여러분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그렇다. 여러분이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속에 품기만 하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