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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성찬의 진미/ 갈6:6-10/ 2002-11-13
가을 성찬의 진미 갈6:6-10 아름다운 가을의 계절을 표현하는 말중에, \"천고마비(天高馬肥)\"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입니다. 원래 이 말은 중국 북쪽에 살던 흉노족 때문에 유래된 것입니다. 이 흉노족은 말 타고 전쟁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해마다 북쪽의 광대한 들판에서 봄 풀과 여름 풀을 말들에게 먹여서 가을에 살찐 말들을 타고 중국의 본토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제왕들은 \"올해도 맑은 하늘에 살찐 말을 타고 흉노족들이 쳐들어 올 계절인 가을이 왔으니, 우리 모두 경계하자\" 하고 \"천고마비\"란 말을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진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이룩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로서, \"좋은 가을철을 맞이하니 식욕이 좋아서 살이 찐다\"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등화가친(燈火可親)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등불과 친하듯 가을밤 늦도록 책 읽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구추풍국(九秋楓菊)이란 말도 있습니다. 가을의 단풍과 국화란 뜻입니다. 결국, 가을은 기름진 오곡백과들로 육신이 살찌는 계절이요, 독서로 정신이 살찌는 계절이요, 아릅다운 풍경으로 정서가 맑아지는 계절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창세기 8장 22절에 보면,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땅에는 창조 때부터 지금 까지 사시사철이 반복되어 왔고 모든 인생은 순환되는 철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왔듯이 우리의 후손들도 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아무도 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0절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라고 말하는데 계시의 한 방편으로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연 계시\"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가을의 성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두가지 성찬을 베풀어 주셨는데 하나는 천지와 만물을 통한 자연 계시의 성찬이요, 다른 하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혼 구원의 성찬입니다. 가을 성찬에는 첫째, 자연의 성찬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성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기후를 조절하시되 꽃피는 봄, 성장의 여름, 결실의 가을, 동면의 겨울을 주관하시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모든 위성계가 자기 궤도를 운행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또한 땅위에 내리는 이슬, 철따라 부는 바람, 그리고 대양의 밀물과 썰물 등을 주관하십니다. 이것은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생존 조건을 알맞게 조절하시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9:1-4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는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 자연 법칙은 하나님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춘하추동을 만드시고 밤은 달과 별에게, 낮은 해가 주장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세우신 자연 계약을 이행하심에 이렇게도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무지개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 진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연의 성찬을 받습니다. 둘째, 결실의 성찬이 있습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산에는 밤과 대추, 밭에는 오곡이, 들에는 각종 과실과 만곡들이 결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결실의 성찬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금년에 풍년이었습니다. 쌀 농사가 대풍작이라 농민들은 한때 울쌍(?)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쌀값이 너무나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일도, 채소도 대풍작이었으나, 농민들은 기쁨에 앞서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수고한 보람이 없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여튼, 금년에 농사가 대풍작이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제가 어렸을 때에는 보리밥도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보리 고개\"란 말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꿀꿀이 죽\"은 최고로 맛이 있었습니다. 이웃집 친구의 부모님은 20리 정도 걸어가서 검고 찌그러진 남비에 꿀꿀이 죽을 사옵니다. 저는 이웃집 친구의 도움으로 그것을 얻어 먹습니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옛날을 생각하면 입맛이 다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신선하고 풍요로운 가을 결실의 성찬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한국은 과일이 풍성한 나라입니다. 과일마다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에 교회 청소년(중고학생)들과 함께 부천지역에 가서 \"복숭아 먹기대회\"를 인도했습니다. 제일 많이 먹는 남학생이 복숭아 18개를 먹었습니다. 저는 13개로 4등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맛있게 먹었는데, 나중에는 무슨 맛인지(?) 스스로 기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회개 기도하였습니다. \"먹기 대회를 주관했으니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용서하셔서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무엇에든지 먹기대회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결실의 성찬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3장 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열매가 없음에 징계하셨을 때 그 무화과 나무는 곧 말라 죽었습니다. 열매없는 나무는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인생의 삶에 있어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찬송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가을은 우리 인간에게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열매가 없는 인생, 열매가 없는 삶은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열매는 그 나무의 진실성을 말해 줍니다. 셋째, 심판의 성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라지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3:37-43) 요한 계시록에는 인간 추수의 심판 타작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추수는 익은 곡식을 거두는 일입니다. 이는 성도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에게는 기쁜 일이 됩니다. 또한 땅의 익은 포도송이를 거두는 추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자의 종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무서운 심판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타디온에 퍼졌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종말에 불신자들의 참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가을의 계절은 인간 종말의 심판을 경고하는 때입니다. 가을은 타작 마당에서 알곡과 죽정이가 제 갈 곳으로 가는 계절입니다. 알곡은 주인의 곡간에, 죽정이는 불속에 각기 나누어 지는 때입니다. 성도는 주의 곡간으로 들리움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가을은 성도의 승리를 성취하는 축복의 성찬을 갖게 하는 때입니다. 본문 7절 이하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진실로, 그러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가을은 심은 대로 거두는 계절입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푸신 진리의 법칙입니다. 심음과 거둠의 원리! 이것은 자연계나 영계에 공통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여나 자신을 위하여 육체의 소욕을 심지 맙시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짖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들을 심는 자는 사망을 낳게 됩니다. 1960년대 후반, 이 세상에는 후리 녂스(Free Sex)가 번져서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문란하였습니다. 그래서 찾아온 것이 성병이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에는 세계적으로 호모 녂스(Homo Sex)가 유행하여 마침내는 \"AIDS\"라고 하는 무서운 재앙이 찾아왔습니다. 어떤 분이 AIDS를 한국말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이고 이제 다 살았다!\" 음행을 심으면 무서운 죽음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과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고,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육체를 좇아 행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매사에 성령으로 시작하되, 성령으로 기도하고, 성령으로 봉사하고, 성령으로 사랑하고, 성령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저와 여러분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실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그가 보혜사, 위로의 성령이십니다. 오늘도 성령님은 우리를 가둡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권능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분별력도 주시고 각종 은사도 주십니다. 이 많은 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유익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시간에도 성령님은 우리를 감동케 하십니다. 예배를 통하여, 설교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찬송을 통하여 감동케 하십니다. 찬송가 410장 3절에,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아멘. 오늘 우리는 성령으로 주님의 성찬을 받습니다. 이 성찬은 영혼 구원의 성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영혼 구원을 이룩하셨습니다. 구원받는 성도들만이 주님께서 베푸신 성찬에 참여할 특권이 있습니다. 성경은 기록된 말씀이며, 설교는 선포된 말씀이며, 성찬은 먹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성찬이 있고, 성찬을 받을수 있는 자만이 성도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 성찬속에 신비가 있고 주님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인생 최대의 축복은 예수님에게서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성찬은 생명이요, 영생입니다. 인간이 함께 먹는 것처럼 깊은 교제는 없습니다. 짐승은 혼자 먹습니다. 개는 같이 먹으면 \"으르렁\" 하고 싸움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같이 먹어야 합니다. 혼자 먹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 혼자 먹나요? 맛있는 것이 있을 때 혼자 먹지요. 욕심장이, 탐욕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족이 함께 먹는다는 의미에서 \"식구(食口)라고 말합니다. 한 집안에서 살고 있으면서 한 식탁에 앉지 못하면 가정이 아니요, 하숙집에 불과 합니다. 인간의 깊은 정은 한 식탁에서 먹음으로 깊어집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깊은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성도의 거룩한 교제는 이 성찬으로 이루어집니다. 성찬을 통하여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지며 상호 교통을 이루게 됩니다. 성찬을 받은 후에는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느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한번은 서울대학 병원에서 입원하여 수술도중 의사의 실수로 동맥파열로 죽어가는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시골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서울대에 진학하여 고시에 합격한 기대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눈물로 뒷바라지한 어머니에게, \"어머니, 은혜를 갚지 못하고 불효자식으로 먼저 죽으니 죄송합니다. 동생 난이야, 네가 날 위해 수고가 많았는데 보답 못하고 죽는구나....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빚진 죄인으로 죽어감을 용서하소서 이토록 길러 주신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하지 못하고 밥값도 못하고 죽는 이 죄인의 허물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살면서 밥값은 하고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주님의 성찬을 받습니다. 이 성찬은 주님의 희생의 떡이요, 피흘리심으로 주시는 잔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의 뜻대로 사는 진실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성찬은 새로운 삶의 약속이요, 새 힘을 얻는 양식을 얻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양식으로 풍성한 삶을 얻고 능력있는 영원한 삶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끝으로, 본문 9절에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아멘. 일반적으로, 선행을 심을 때에 두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는 낙심하기 쉽고, 다른 하나는 피곤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돈을 벌고 명예와 지위를 얻는데는 피곤을 모릅니다. 그런데, 선을 행할 때에는 남이 알아주지 않음으로, \"내가 꼭 이렇게 해야 되나!\" 하며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할때에는 더욱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피곤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더욱이 믿음의 가정들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선행을 심고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선을 심지 아니하고 거두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모든 선한 일에 많은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가을 성찬의 진미로 더욱 풍요로운 삶과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하는 성례식/ 마28:18-20
감사하는 성례식 마28:18-20 오늘은 보통 때와 다른 특별한 성례식이 있는 예배를 드린다. 세례식, 성찬식이 있어서 2중으로 은혜를 받는 예배를 드린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감사하는 성례식’이다. 성례식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감사할 수 밖에 없고, 또한 감사의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크게 기뻐하시고 영광받으시며, 우리는 큰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번 한 달은 계속해서 ’감사를 회복하자’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였다. 금년 한 해는 우리의 삶속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증거해 왔다. 오늘 특별히 성례식 속에 감추인 뜻을 바로 깨달아 진정으로 감사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1. 성례식은 무엇인가?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받는 것이다. 교회에 입교하는 공식적인 절차이다. 세례받기 전에는 우리는 교회의 정식 멤버가 아니다. 세례를 받으므로 교회에 소속되고 멤버가 되어 교회를 알아가면서, 교회 생활 속에서 봉사하고 교회를 위한 직분을 맡으면서 주님을 알아가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바로 섬기게 된다. 성찬은 세례받은 사람, 구원받은 신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세례를 아기가 출생하는것과 비유한다면, 성찬은 태어나서 자라는 것, 젖을 빨며 음식을 먹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성찬에 우리가 조그만 떡 한 조각과 한 모금의 포도주를 마시는데, 이것은 주의 식사이다. The Lord’s Supper. 식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준다. 성찬의 유래는 마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셨다. 유월절 식사이었다. (마26:26-28)”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것이 최초의 성찬이다.(고전11:23-26)”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는 성찬을 들고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 10가지의 재앙을 내리지만 바로왕은 항복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사람, 짐승의 모든 장자를 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시고 살리셨다. 하나님은 이 유월절 절기를 대대로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지금 예수님께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시고 계신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유월절 절기를 지키면서 떡과 잔을 가리키며 하시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2000년전에 있었던 유월절 사건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문설주에 바른 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의미한다.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성찬을 제정하시고 떡과 잔의 의미를 내 피와 내 몸이라 말씀하고 계신다. 오늘 성찬을 드는 분들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 속에 우리가 들어가야 할 것이다. 세례를 출생, 성찬을 양육에다 비유하였다.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공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세례이다. 세례를 받은 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안에서 계속적으로 은혜를 받는 특별한 한 가지 방법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하여야 한다. 2.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교회는 새로운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많은 영혼들을 낳아야 한다.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을 교회가 열심히 하여야 한다. 오늘 본문 (마28: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세례를 강조한다. 교회는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다. 많은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 얻은 사람들을 또 자라나게 해야 한다. (마28: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세례를 준 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 생명의 말씀, 성경은 구원의 책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에 관한 것을 알리시기 위해 주신 것이다. 이 성경책을 열심히 골고루 가르치고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우리 영혼이 힘을 얻고 영적 생명이 풍성하게 하는 일에 교회는 힘을 쏟아야 한다.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교회의 삶을 가르치고 계신다. 오늘 세례를 받는 분들, 이미 세례를 받은 분들은 우리가 받은 구원, 복음,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3. 우리가 세례를 받고, 믿음을 얻고 나누는 과정 속에서 집중해야 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계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처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많이는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가 좋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서 세례를 받는다. 그것으로 끝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피의 의미,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세례를 받을 수 없다. 많이는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적으로 알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하고 복음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 길이 열렸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단의 권세를 꺽으셨다. 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나의 승리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이 나의 모든 것임을 우리 마음 속에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감사가 나와야 한다. 이것을 알고 성례식을 맞이 할 때 감사와 감격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4.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의 합쳐짐 오늘 세례를 받는 분들은 (롬6: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오늘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 합쳐짐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함께 죽는다. (롬6: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어야만 주님의 살아나심, 즉 부활과 합해져서 새 생명으로 살아난다. 주님의 부활에 동참되어서 새 생명으로 살아나기 위하여 우리는 죽게 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인것이다. (롬6:5-8) (롬6: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살았던 우리의 과거, 아직도 우리 안에는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에 옛사람의 부분이 남아 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고 계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 옛사람의 부분이 자꾸만 죽어야 한다. 다시는 죄의 종노릇 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주님의 새 생명 속에 참여하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분들은 예수님의 몸에, 피에 동참하는 것이다. (요6:53-57)”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하였다. 성찬식에서의 떡의 의미는 우리를 위하여 주님이 죽으실 때 찢기신 살을 의미한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서 새 생명으로 변화되는 오늘 성찬으로 말미암아 주의 생명이 우리 속에 다시 한번 풍성히 넘치는 경험을 하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 (요6: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성찬을 주의 만찬으로 주와 함께 먹는 일이 아니라 주의 생명을 먹고 주의 생명이 우리 안에 넘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성찬식과 세례식이 예식이 아니라 예식 안에 감추어진 놀라운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고 참여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기회가 될 것이다. 5. 성례식을 참여하면서 몇가지를 감사해야 한다. 1)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서 이땅에 오심을 진정으로 감사해야 한다.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고 주의 생명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2)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갖은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심을 당하신 것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그 죽으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고 새 생명을 얻었다. 3)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찾아 오셨고 예수를 믿게 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고 은혜를 받게 하심을 감사해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예배하게 하시고 말씀을 들으며 성례식에 참여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심에 감사하면서 이 감사를 가지고 성례식에 참여하고 예배에 참여할 때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를 안아 주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로 풍성하게 하시는 축복을 주신다. 특별히 세례를 받으면서 주의 교회에 입교하는 여러분들 이제부터 주의 생명을 가지고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쓰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라고, 성찬에 참여한 여러분들은 새 생명이 다시 한번 약동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길 진실로 바란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 속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구원 속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성도로서 놀라운 신분과 특권을 누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며 귀한 성례를 가지면서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고 진실로 그 의미를 붙잡고 감사, 감격하며 살아 가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 축복해 주시옵소서.
개혁주의 성례관/ 겔36:25-27
개혁주의 성례관 겔36:25-27 청교도의 신앙관과 개혁주의의 신앙관이 같은 것처럼 청교도의 성례관도 개혁주의의 성례관과 같습니다. 청교도들은 이민 초기에는 성례식을 매주일 행하다가 나중에는 매월 행하였고, 역사가 흐름에 따라 스코틀랜드 교회의 영향을 받아 1년에 4번씩 계절적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1년에 봄 가을로 두 번씩 거행하고 있습니다. 세례나 성찬은 개신교의 2대 축전입니다. 옛날부터 그 교회의 영성은 교인들의 성례 참여정신을 보아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1. 세례 세례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17:11에 의하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구원의 계약입니다. 이 계약의식을 구약시대에는 할례로 표시했고 신약시대에는 세례로 표시했습니다. 골로새서 2:11에서는,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3에 의하면,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성별된 백성들에게 이 의식을 행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이 예식에 참여하셨습니다. 1) 세례의 의미 세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만, 이 시간에는 간략히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된 표시입니다(요 3: 26,27). 요한계시록 7:4에 언급된 바 각 지파에서 이마에 인 맞은 14만 4천 명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사 43:1). (2) 육신의 몸의 일을 벗고 그리스도와 접붙임을 받은 표시입니다(요 15:5). (3)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표시입니다(마28:19). 1980년대 이후에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용어는 \\\'제자\\\'라는 용어였습니다. 서점에서 잘 팔리는 책도 제자란 말이 붙은 책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명칭까지도 \\\'제자교회\\\', \\\'제자화교회\\\', \\\'제자되는 교회\\\', \\\'제자삼는 교회\\\',\\\'제자만든 교회\\\'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신령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37,38에 의하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회개한 많은 무리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할 때, 베드로는 기탄없이 저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고 명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요,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예수님의 제자된 표시입니다. 2) 세례의 의식 (1) 세례의 의식에 대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세례를 줄 때 물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물은 씻는 것입니다. 물은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25을 보면,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들이 성전에 제사하러 들어갈 때 성전 안에 있는 물두멍에서 자신을 씻지 않고는 결코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2) 그러나 물만 가지고는 우리의 죄를 깨끗이 제할 수 없습니다.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할 뿐입니다. 그 물은 우리 죄를 씻기 위해 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히 12:24). 모세는 번제물의 피를 양푼에 담고 제단에 뿌렸습니다(출 24:6). 3) 세례의 특전 세례는 단순히 죄를 씻는 표로서 시행하는 의식의 의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에 의하면, 세례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목적은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돕기 위함이며, 두 번째로는 우리의 신앙을 사람들 앞에 고백하는 것을 돕기 위함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 주님과의 연합이 확인됨으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바르게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영적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성도들과 동일한 천국 시민이 되며 하나님의 권속이 됩니다. 이때부터 교회의 영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서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며 일치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자는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믿음이 성숙하게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4) 세례의 조건과 의무 세례를 받고 특권을 얻은 자는 그와 함께 의무도 뒤따릅니다.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습니다(마28:20). 이는 기도생활, 성경공부, 주일성수, 십일조, 감사, 구제, 열심히 기도하는 것, 교회 봉사하는 일 등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도 한 나라의 국민이 되면 적어도 몇 가지 의무를 행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 자는 반드시 자기의 믿음을 고백한 후에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세례자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행 8:36; 10:48; 16:15; 16:33).. 신앙고백 없이 신자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아닙니다.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교단의 안수를 받은 목사가 주어야 합니다. 교단은 신앙과 신조와 신학이 분명해야 합니다. 세례는 반드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최후의 부탁입니다. 간혹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름만 가지고 세례를 베푸는 일도 있었습니다(행 2:38).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일은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 생명이 영적으로 태어남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 하시는 것은 크고 풍성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불러내시고 구원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신 이로서 나의 세례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이로서 나의 세례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나를 믿게 하시고 세례를 받게 하시고 믿음을 고백하게 하신 분이시며 도한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의 세례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이십니다. 2. 성찬 성찬은 우리 주님이 직접 집행하셨던 기독교 최대의 예전으로, 영어로는 유카리스트(Eucharist) 또는 \\\'Holy Communion\\\'이라고 부릅니다. 1) 성찬에 관한 네 가지 주장 (1) 천주교의 주장 천주교에서는 화체설(化體說)을 주장합니다. 떡과 잔이 참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사제가 미사를 집례할 때에 떡과 포도즙이 곧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는 교리입니다. 이 설은 중세 스콜라 신학자 롬바르트의 주장을 따른 것입니다. (2) 마틴 루터의 주장 종교개혁자 루터는 천주교의 화체설 보다는 공재설(共在說)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화체설의 변형으로, 성찬식을 집행할 때에 주님께서 육신으로 함께 계신다는 주장입니다. 주님께서 성찬의 떡 위에,아래 그리고 옆에 육체로 와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3) 쯔빙글리의 주장 쯔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쯔빙글리는 성찬 때 주님이 우리와 영으로만 함께 하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루터와 신학적 입장을 달리했습니다. (4) 칼빈의 주장 칼빈은 개혁주의의 모든 신학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임재적 기념설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성찬 때 주님이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동시에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구원하심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념한다는 뜻입니다(고전 11:25,26) 하나님은 성찬을 통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연약함에까지 자신을 낮추사, 그의 말씀에 보이는 표식(visible signs)을 더해주시고, 우리를 모든 의심과 불확실함에서 건지십니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칼빈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보이는 표식을 통해서 약속의 실체를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영적 둔감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이 수용하는 정도에 맞추어 우리를 이해시키고자 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교제한다는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둘째로, 성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을 보다 온전히 찬양하게 됩니다. 세째로, 성찬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고 모든 성결에 힘쓰게 됩니다. 2) 떡과 잔의 의미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성찬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도하여 우리에게 무슨 불의가 있든지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과, 우리에게 어떠한 비참함이 있든지 지복(至福)으로 우리를 채우신다는 사실을 우리로 확신케 합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성찬이 우리에게 하나의 거울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거울을 통해서 우리를 정죄함에서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에게 의와 영생을 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찬의 유익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게 하고, 특히 우리 안에 사랑과 형제애을 지키도록 강력히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성찬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머리되신 그와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동일한 몸의 지체가 가져야 할 그런 사랑과 일치를 서로 가져야만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영적 임재는 임마누엘 신앙의 근거가 됩니다. 성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경험합니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는 믿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성찬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이 성찬에 업신여김이나 무관심으로 접근하여 우리 주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따라가는 데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자는 성찬을 사악하게 능욕하는 자요 더럽히는 자이다. 하나님이 그토록 거룩하게 하신 것을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늘과 땅위에 주님의 몸과 피보다 더 귀하고 더 존엄한 것이 없을진대, 경망스럽고 준비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사소한 실수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성찬에서 합당한 영양을 얻기 위해선 마땅히 우리 영혼은 기근으로 고통 당하여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하나가 된 그리스도인을 미워하거나 그에게 원한을 품고서 성찬을 대하려 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싸우고 다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여러 조각으로 찢게 되며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주님과의 새생명의 교제가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성찬의 떡과 잔에 참예해야 합니다. 칼빈에 의하면, 성찬은 우리의 허약함을 돕고 우리의 믿음을 강건케 하며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키고 더욱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치료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질병으로 억압된 느낌을 받으면 받을수록 성찬을 삼가하기 보다 더욱 활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연약함이 우리를 억누르면 누를수록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해주고 순결한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이 성찬에 의지함이 더욱 더 필요한 것입니다. 개신교회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입니다. 이 성례는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들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좇아 그리고 믿음으로 이 복된 성례에 참여함으로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거기 한 사람이 있었다/ 행27:33-38/ 김기석 목사/ 세계성찬주일설교/ 2014-10-05
거기 한 사람이 있었다 행27:33-38 [날이 새어 갈 때에,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오늘까지 열나흘 동안이나 마음을 졸이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목숨을 유지할 힘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빵을 들어,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떼어서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용기를 얻어서 음식을 먹었다. 배에 탄 우리의 수는 모두 이백일흔여섯 명이었다. 사람들이 음식을 배부르게 먹은 뒤에, 남은 식량을 바다에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였다.] • 불의의 연대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중에 우리는 또 다시 가슴 철렁한 일을 만났습니다. 홍도 앞바다에서 유람선 바캉스호가 좌초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홍도 주민들의 적극적인 구조 활동으로 인명 피해가 나지 않았습니다. 좌초된 바캉스호는 선령이 27년 된 배로 역시 일본에서 사용하던 것을 들여왔다고 합니다. 대형 사고를 겪은 후에도 안전에 대한 불감증은 여전합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돈을 중시하는 세태에 변화가 없음을 재확인하는 마음이 씁쓸합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데, 이게 무너지고 있으니 우리 삶은 늘 위태롭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공교롭게도 오늘의 본문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배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룹니다. 가이사랴에 몇 해 동안 구금되어 있던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함으로써 로마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압송할 책임을 맡았던 백부장 율리오는 그들을 아드라뭇데노 호에 태웠습니다. 그 배는 지중해 연안을 끼고 항해하여 지금의 레바논 땅인 시돈에 이르렀고, 맞바람 때문에 키프로스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앞 바다를 가로질러 루기아에 있는 무라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습니다. 맞바람이 심했습니다. 배는 크레타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항해하다가 크레타 남쪽 해안의 ‘아름다운 항구’에 닻을 내렸습니다. 항해하기에 위태로운 때였습니다. 바울은 그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고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기로 작정하고 항해를 서둘렀습니다. 항해 일자를 줄여 이득을 많이 남기려는 선장과 선주의 이해관계와 편하고 안락한 곳에서 쉬고 싶은 군인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위험이 예기되었지만 그들은 ‘잘 되겠지’ 하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기댔습니다. 순하게 남풍이 불었고 항해는 순조로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섬 쪽에서 몰아치는 광풍 유라굴로를 만났습니다. 선원들이 배를 어떻게든 통제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속절없이 이리저리 떠밀리고 있었습니다. 좌초를 막기 위해 짐을 바다에 던지고, 항해에 필요한 필수 장비마저 버렸습니다.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날이 여러 날 계속되었습니다. 살아남으리라는 희망이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광풍을 잠잠케 하셨던 주님의 기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요나서의 선원들처럼 희생양을 선택하여 바다에 던지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배에 탄 이들은 여러 날 먹지 못해 기운이 빠졌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의 영혼이 절망과 낙담의 바다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공포와 원망이, 그리고 누군가를 탓하는 마음이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었을 겁니다. 작은 불꽃 하나만 튀어도 폭력적인 상황이 빚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 아, 바울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옵니다. 그 희망은 경험 많은 선원들을 통해 오지 않았습니다. 침착하고 용감한 백부장을 통해 오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려는 한 사람, 바울을 통해 왔습니다.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을 살리려는 바울의 마음은 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날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한 말을 전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곤경의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안전 보장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증언은 절망의 심연에서 허덕이던 이들의 내면을 밝히는 실낱같은 빛이 되었을 겁니다. 그 후에도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열 나흘째 밤이 되었을 때 그들이 탄 배는 아드리아 바다를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고 있었습니다. 선원들이 수심을 재보자 점점 얕아지고 있었습니다. 암초에 걸릴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선원들은 닻을 내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선원들은 좌초할 지도 모를 배를 버려두고 자기들만 빠져나가기 위해 슬쩍 거룻배를 풀어 내렸습니다. 눈치 빠른 바울이 그 사실을 백부장에게 알려 선원들의 탈출을 막았습니다. 그런 소동 가운데 날이 샜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말합니다. “여러분은 오늘까지 열나흘 동안이나 마음을 졸이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목숨을 유지할 힘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33-34) 그는 마음조리며 지낸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고통을 함께 겪었기에 그 공감은 진실합니다. ‘입장의 동일함’이야말로 관계의 최고 형태라지 않습니까?(신영복) 바울은 그들에게 음식을 권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음식 모티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압니다. 이세벨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가 로뎀나무 아래 지쳐 쓰러진 엘리야를 위해 천사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을 준비해주었습니다(왕상19:5-8).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깊은 절망에 빠졌던 제자들이 디베랴 바다로 돌아갔을 때 해변에서 그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신 주님의 모습도 떠오릅니다(요21장). 음식을 먹는 행위처럼 거룩한 것이 없습니다. 음식 나눔은 타인을 내 삶속으로 영접하는 일이고, 따라서 경계선을 지우는 일입니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음식을 권함으로 그들의 육체의 필요를 채우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운명공동체로 빚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빵을 들어 모든 사람 앞에서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런 후에 그것을 떼어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도 하늘을 우러러 축복기도를 올리신 후에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먼저 뗀 빵을 먹은 것이 차이라면 차이이겠지만 그것은 제 배를 먼저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기를 불어넣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용기를 얻어서 음식을 먹었다.”(36) 그들은 ‘빵’이라는 물질을 먹었지만 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먹은 것이었습니다. • 절망의 먹구름 속에서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을 위험 속으로 내모는 선주와 선장, 그리고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군인들로 상징되는 이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나라는 풍랑을 만난 채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고 있습니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아드리아 해를 표류하던 그 배에는 바울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지혜와 용기가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지금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런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된 사람은 세상이 절망의 먹구름으로 덮여 있다 하여 낙심하지 않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영접합니다. 엘리야가 그랬듯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이 아름다운 성찬을 통해 또 다시 순례자로 살아갈 새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순례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하늘의 빛을 가져가십시오. 지금 울고 있는 이들 곁에 다가가십시오.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평화와 생명의 세상을 열기 위해 땀 흘리십시오. 하나님은 이웃의 운명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려는 이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김기석 목사(청파감리교회)
거룩한 만찬 /마26:26-30
거룩한 만찬 마26:26-30 오늘은 성례 주일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성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이고 하나는 성찬입니다.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이 성례 식에 참여해야 기독교인이 됩니다. 이 성례식에 참여 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자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례에 참여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먼저 교회에 등록하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죄 씻음 받은 증표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 씻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 씻음 받은 증거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세례를 증표로 행하는 것이 교회에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받음으로 너는 죄없다하는 선언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죄가 나를 억압하고자 할 때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는 죄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거나 지옥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하늘나라 백성이다. 나는 구원받은 백성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사는 사람이다. 믿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이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마치 아이가 방안에서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방안에서 안전하게 놀면 됩니다. 재미있게 놀면 됩니다. 그런데 아이는 두려워합니다. 걱정을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렇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늘 고통스럽게 사는 쥐가 있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마법사가 하루는 쥐를 고양이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양이가 되어가지고는 개를 두려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법사는 이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개가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법사는 그 개를 호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호랑이는 이번에는 사냥꾼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법사는 이 무기력한 호랑이에게 다시 쥐가 되어라. 너는 쥐의 가슴밖에 가질 것이 없으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했습니다. 당신은 두려움이 없습니까? 믿습니다. 하고는 또 걱정하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는 또 염려 합니다. 뭐가 문제 입니까?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안개가 사라지듯 당신에게서 걱정 근심이 살아질 줄로 믿습니다. 세례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돌보십니다. 지켜주십니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낮의 해가 상치 않고 밤의 달이 해치 않도록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세례를 받은 교인은 성찬에 참여 합니다. 성찬식은 우리 주님이 잡히시던 날밤 제자들과 함께 나눈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만찬에서 주님은 자신의 몸을 그리고 자신의피를 다 나누어 주는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이 만찬을 마치고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으시고 자기피를 다 쏱아 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찬에 참여 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곤ㄴ 당하셨기에 우리는 고난 없이 주님의 찢기신 몸으로 찢어져야 할 내 몸을 대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에 우리는 이 성찬에 참여함으로 내가 고통 받고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모든 죄의 빚을 갚은 것입니다. 죽음에서 해방 되었습니다. 신약으로 오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무교병을 먹고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예식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애급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급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 고통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져서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 바로에게 마지막 주신 심판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모든 애급 땅에 거하는 사람이나 짐승의 장자는 다 죽음을 당하는 재앙입니다. 하나님의 이 심판에서 면함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무교병을 만들어 먹고 양을 잡아서 문인 방에 바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의 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표가 있으면 장자를 죽이지 않고 그냥 지나가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대로 순종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유월절은. \'지나간다\'(pass over)라는 뜻입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그날 밤 아마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고 양의 피를 칠한 다음 편안하게 코를 골며 단잠을 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깨어보니까 주변의 많은 집에서 장자가 죽어서 우는 통곡을 듣고 자기 집이 구원받음에 감격하여 하나님은 찬미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양의 피를 칠해놓고도 의심이 많아서 우리 집 아이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잠을 못 이루다가 옆집에서 아이가 죽었다는 울음소리를 듣고 더욱 걱정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자가 실수해서 우리 집에도 오면 어떻게 하나?\' 하다가 밤을 꼬박세우고 아침에 눈이 벌개가지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으리라 하는 생각입니다. 나는 어떤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까? 주의 약속이 있는 그 집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갔습니다. 오늘도 약속을 믿고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432장에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어려워 낙심 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유월절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같이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성찬식이 있습니다. 성찬식은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 성찬식을 주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행하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행하라 하심은 혹이나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을 잊을까 해서 계속행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잊어버리기 잘하는 동물입니다. 보지 않으면 잊어버립니다. 반복하지 않으면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 사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외국에 나가서 몇 달이 안 되어 데리고 간 자녀들이 영어를 잘합니다. 1년 2년 있다가 다시 한국에 옵니다. 얼마쯤 지나면 그렇게 잘하던 영어를 다 잊어버립니다. 반복하지 않으니까 다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성찬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몸과 피를 마심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것 입니다. 주님과 하나 됨으로서 주님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이기심이 내가 이긴 것이 되는 것이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죄 값을 지불한 것이 성찬에 참여함으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사건이 주님의 사건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도 죽었다가 다시 사는 생명력을 얻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온 인류를 불행케 만들고 어둠 속에서 고통을 준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루어 놓으신 것을 확인하며 동참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이것을 기억하며 기념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이 만찬은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지는 것을 받는 중요한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언약\'이라는 단어는 \'맹세\'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내가 맹세한 것이다. 보통 맹세가 아니라 내 피로 맹세한 약속이다.\"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 아래서 내 죄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깨끗이 씻겨진 것을 믿습니다. 내 죄가 사하여졌기에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나의사건으로 보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자녀 되었기에 이제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집이 없어서 여기 저기 방황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이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성찬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의 식탁에서 주와 같이 나눌 식사를 생각하며 성찬에 참여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찬은 생명잔치입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 합니다. 떡을 받음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거룩한 모습과 형상이 나에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의 모습을 보고 예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성찬에 참석한 의미를 찾을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잔을 받음으로 예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생명은 곧 능력입니다. 다 죽은 것 같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으면 되 살아 납니다. 잡초를 보세요. 그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제초제를 뿌리며 없애려고 해도 뿌릴 때뿐이지 얼마 안 있으면 되 살아 납니다. 강한 생명력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력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력입니다. 주의 잔을 받는 여러분 안에 이 생명력이 생겨지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성찬은 거룩한 만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만찬에 참여 하며 더욱 거룩해져서 영원한 하나님의 거룩한 만찬에 참여 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거룩한 만찬 /마26:26-30
거룩한 만찬 /마26:26-30 2008-01-10 18:22:27 read : 56 오늘은 성례 주일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성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이고 하나는 성찬입니다.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이 성례 식에 참여해야 기독교인이 됩니다. 이 성례 식에 참여 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자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례에 참여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먼저 교회에 등록하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죄 씻음 받은 증표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 씻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 씻음 받은 증거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세례를 증표로 행하는 것이 교회에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받음으로 너는 죄없다하는 선언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죄가 나를 억압하고자 할 때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는 죄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거나 지옥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하늘나라 백성이다. 나는 구원받은 백성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사는 사람이다. 믿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이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마치 아이가 방안에서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방안에서 안전하게 놀면 됩니다. 재미있게 놀면 됩니다. 그런데 아이는 두려워합니다. 걱정을 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렇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늘 고통스럽게 사는 쥐가 있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마법사가 하루는 쥐를 고양이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양이가 되어가지고는 개를 두려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법사는 이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개가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법사는 그 개를 호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호랑이는 이번에는 사냥꾼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법사는 이 무기력한 호랑이에게 다시 쥐가 되어라. 너는 쥐의 가슴밖에 가질 것이 없으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했습니다. 당신은 두려움이 없습니까? 믿습니다. 하고는 또 걱정하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는 또 염려 합니다. 뭐가 문제 입니까?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안개가 사라지듯 당신에게서 걱정 근심이 살아질 줄로 믿습니다. 세례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돌보십니다. 지켜주십니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낮의 해가 상치 않고 밤의 달이 해치 않도록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세례를 받은 교인은 성찬에 참여 합니다. 성찬식은 우리 주님이 잡히시던 날밤 제자들과 함께 나눈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만찬에서 주님은 자신의 몸을 그리고 자신의피를 다 나누어 주는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이 만찬을 마치고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으시고 자기피를 다 쏱아 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찬에 참여 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곤ㄴ 당하셨기에 우리는 고난 없이 주님의 찢기신 몸으로 찢어져야 할 내 몸을 대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에 우리는 이 성찬에 참여함으로 내가 고통 받고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모든 죄의 빚을 갚은 것입니다. 죽음에서 해방 되었습니다. 신약으로 오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무교병을 먹고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예식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애급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급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 고통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져서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 바로에게 마지막 주신 심판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모든 애급 땅에 거하는 사람이나 짐승의 장자는 다 죽음을 당하는 재앙입니다. 하나님의 이 심판에서 면함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무교병을 만들어 먹고 양을 잡아서 문인 방에 바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의 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표가 있으면 장자를 죽이지 않고 그냥 지나가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대로 순종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유월절은. '지나간다'(pass over)라는 뜻입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그날 밤 아마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고 양의 피를 칠한 다음 편안하게 코를 골며 단잠을 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깨어보니까 주변의 많은 집에서 장자가 죽어서 우는 통곡을 듣고 자기 집이 구원받음에 감격하여 하나님은 찬미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양의 피를 칠해놓고도 의심이 많아서 우리 집 아이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잠을 못 이루다가 옆집에서 아이가 죽었다는 울음소리를 듣고 더욱 걱정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자가 실수해서 우리 집에도 오면 어떻게 하나?' 하다가 밤을 꼬박세우고 아침에 눈이 벌개가지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으리라 하는 생각입니다. 나는 어떤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까? 주의 약속이 있는 그 집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갔습니다. 오늘도 약속을 믿고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432장에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어려워 낙심 될 때에 주 너를 지키리.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주 너를 지키리. 유월절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같이 하시며 지켜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성찬식이 있습니다. 성찬식은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 성찬식을 주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행하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행하라 하심은 혹이나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을 잊을까 해서 계속행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잊어버리기 잘하는 동물입니다. 보지 않으면 잊어버립니다. 반복하지 않으면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 사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외국에 나가서 몇 달이 안 되어 데리고 간 자녀들이 영어를 잘합니다. 1년 2년 있다가 다시 한국에 옵니다. 얼마쯤 지나면 그렇게 잘하던 영어를 다 잊어버립니다. 반복하지 않으니까 다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성찬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몸과 피를 마심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것 입니다. 주님과 하나 됨으로서 주님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이기심이 내가 이긴 것이 되는 것이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죄 값을 지불한 것이 성찬에 참여함으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사건이 주님의 사건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도 죽었다가 다시 사는 생명력을 얻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성찬은 온 인류를 불행케 만들고 어둠 속에서 고통을 준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루어 놓으신 것을 확인하며 동참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이것을 기억하며 기념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이 만찬은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지는 것을 받는 중요한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언약'이라는 단어는 '맹세'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내가 맹세한 것이다. 보통 맹세가 아니라 내 피로 맹세한 약속이다."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 아래서 내 죄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깨끗이 씻겨진 것을 믿습니다. 내 죄가 사하여졌기에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나의사건으로 보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자녀 되었기에 이제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집이 없어서 여기 저기 방황해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이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성찬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의 식탁에서 주와 같이 나눌 식사를 생각하며 성찬에 참여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찬은 생명잔치입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 합니다. 떡을 받음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거룩한 모습과 형상이 나에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의 모습을 보고 예수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성찬에 참석한 의미를 찾을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잔을 받음으로 예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생명은 곧 능력입니다. 다 죽은 것 같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으면 되 살아 납니다. 잡초를 보세요. 그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제초제를 뿌리며 없애려고 해도 뿌릴 때뿐이지 얼마 안 있으면 되 살아 납니다. 강한 생명력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력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력입니다. 주의 잔을 받는 여러분 안에 이 생명력이 생겨지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성찬은 거룩한 만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만찬에 참여 하며 더욱 거룩해져서 영원한 하나님의 거룩한 만찬에 참여 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거룩한 만찬/ 마26:26-30/ 성찬식설교
거룩한 만찬 마26:26-30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마 26:26-30) 십자가의 약속의 성취를 통해 변화된 것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모든 약속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세 가지가 우리에게 필요해졌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안식일이 변해서 주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일어나신 주님의 날을 기념하는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 주일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런가하면 유대인들에게는 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 아브라함의 씨라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할례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그 놀라운 은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영혼 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세례증표가 새겨진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만찬에 앞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대한 민족으로 만드시기 전, 그들을 괴롭히는 무서운 원수, 바로의 세력을 거꾸러뜨린 결정적인 일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이 말을 안들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집트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땅에 죽음의 사자를 보냅니다. 어느 집이든 태어난 장자는 다 죽이겠다는 하나님의 무서운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문인방에 양의 피를 칠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표가 있는 줄 알고 지나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입니다. \\\'지나간다\\\'(pass over)라는 뜻입니다. 아마 그 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신실하신 약속을 의지해서 양의 피를 칠해놓고 저녁 식사 끝나자마자 피곤해서 코를 골며 잤을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보니까 정말 주변의 많은 집에서 장자가 죽었는데 자기 집만 구원받은 것을 알고는 감격으로 찬미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밤에 양의 피를 칠해놓고도 옆집에서 아이 죽는 소리, 곡성 소리가 터지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실수해서 우리 집에도 오시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잠을 못 잔 채, 밤을 지새우는 심약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믿음인데도 불구하고 주의 약속이 있는 그 집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념해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백성이라는 잔치였습니다. 성만찬 그런데 그 잔치가 십자가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성만찬으로 바뀝니다. 한 민족을 구원해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집트에서 구속해준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온 인류를 불행케 만들고 어둠 속에서 고통을 준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것을 기억하며 기념하라\\\"고 이 만찬을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이 만찬은 모든 죄악이 약속의 성취로서 바뀌어진 중요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런가하면 이것은 성취일 뿐 아니라 또 새로운 약속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새크라멘툼\\\'이라는 단어는 \\\'맹세\\\'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내가 맹세한 것이다. 보통 맹세가 아니라 내 피로 맹세한 약속이다.\\\"는 새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 아래서 내 죄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깨끗이 씻겨진 것을 믿습니다. 그 새 약속 앞에서 내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전가되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여김을 받습니다. 내 죄가 씻겨진 다음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영광을 안겨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게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기념하라고 말합니다. 이 약속은 고백으로 받습니다. \\\"정말 내가 그 약속을 믿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어떤 때는 고백을 말로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고백을 글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 전체로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몸 전체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입니다. 세례는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는 것을 몸 전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이 있습니다. 그 물에 들어갑니다. 들어가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장사지낼 때 내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되었습니다.\\\"하는 심정으로 물 속으로 들어갑니다. 같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에 동참해서 다시 일어납니다. 이 몸 전체의 고백이 세례입니다. 세례의 원류가 사실은 침례입니다. 형태적으로 침례가 더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침례가 복잡할 때도 있습니다. 과거에 공산권이나 모슬렘권에서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으면 세례를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호텔입니다. 저와 이동원 목사가 같이 가면 저는 간단합니다. 그냥 물로 머리에 세례를 주면 되는데 침례교 목사인 이동원 목사는 침례를 해야하기 때문에 물통에 물을 받고 옷을 벗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 초대 교회 성도들이 이런 번거러움 때문에 머리 위에 물을 뿌렸는가 보다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어떤 곳에서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의 명단입니다. 공개되면 위협을 느끼는 지역이 있습니다. 세례 받았다는 것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리는 지역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침례보다 세례가 간단하니까 더 좋더라구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냈다가 부활하신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이 내게 온 것은 주께서 나를 위하여 흘리신 바 그 보배로운 피 때문입니다. 내가 그것을 내 몸으로 마십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 중심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가 세상의 양식으로 살아지는 것처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을 살겠습니다. 산 떡이신 주님을 인해서 내가 삽니다. 그래서 내가 이 떡을 받습니다.\\\" 이런 놀라운 고백을 내 행동으로 하는 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이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율법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것은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우리에게 더 크고 놀라운 것을 주시기 위해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는 생명나무를 주셨고, 노아에게는 무지개의 약속을 주셨고, 아브라함에게는 할례의 약속을 주셨고, 새 민족으로 출발시키실 때 이스라엘에게는 유월절의 약속을 주셨는데 이제 성만찬의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우리는 고백으로 받습니다. 날마다 고백으로 기념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성만찬을 잔치로 받아야 됩니다. 우리는 \\\'인과응보\\\'라는 세상의 질서 속에 삽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습니다. 씨 뿌린 데서 얻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인이 없는데도 일방적으로 그 분이 날 사랑하셨습니다. 아니 주께서 시작하셨고 완성하셔서 내게 주시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받을 뿐입니다.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잔치 밖에 없습니다. 성만찬은 잔치의 놀라운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잔치는 우리 성도들에게 생명의 잔치인 것을 알게 해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삽니다. 높은 신분으로 살아도 죽고, 부자로 살아도 죽고, 멋지게 살아도 죽고, 죽음이 생애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우리는 생명을 향해 삽니다. 성찬은 생명잔치입니다. 그런가하면 거룩에의 잔치입니다. 우리는 육의 욕심 따라 이기적인 인생을 삽니다. 그랬던 우리가 성찬을 통해서 주님께서 완성하신 거룩의 식탁으로 나아갑니다. 거기서 주의 거룩을 사모하고 주의 거룩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또 성찬은 구속의 보증입니다. 성찬을 받으시는 분은 안심하십시오. 성찬을 믿음으로 온전하게 먹는 사람은 어느 날 아버지의 영광의 잔치에 그대로 참여해서 그 기쁨을 현실로 누릴 날이 올 것입니다. 성찬은 사랑의 잔치입니다. 홀로 받는 것 아닙니다. 영원히 천국에 함께 살 우리 형제, 자매들과 함께 영광의 식탁에 둘러앉아 떡을 뗄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속받은 자녀들이 사랑을 함께 나누는 잔치입니다. 홀로가 아닙니다. 같이 나눕니다. 그 은혜가 우리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최후를 준비시켜주는 잔치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가 해야될 것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됩니다. 우리가 가든지, 주님이 오시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최후입니다. 주께서 \\\"내가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잔치 상을 배설하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영원한 잔치 상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귀한 잔치에 우리들이 이 시간 참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위대한 약속을 성취시켜주셨습니다. 성찬을 받으면서 우리는 그것을 다시 음미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 그 맹세를 든든히 붙잡습니다. 그것을 떡을 떼면서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 몸 전체로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천국의 영광의 잔치를 믿음으로 이 땅에 누리면서, 또 하나님께서 앞으로 주실 것을 소망하며 이 잔치에 참여합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이미 이룩하신 이 놀라운 구속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잔치를 받으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사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영광의 우리 주님, 성찬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나눠주실 것입니다. 이제 성찬을 하겠습니다. (이하 성찬식)
거룩한 만찬/마26:26-30
거룩한 만찬 마26:26-30 가령 하나님은 여셋 동안 우주를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신 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님의 날로 기념하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유대인들에게는 몸에는 아브라함의 자손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인 할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지금 우리는 우리의 영혼 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세례증표가 새겨집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전, 그들을 괴롭히는 무서운 원수, 바로의 세력을 거꾸러뜨린 결정적인 일을 기념하는 절기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이 말을 안 들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집트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땅에 죽음의 사자를 보냅니다. 어느 집이든 태어난 장자는 다 죽이겠다는 하나님의 무서운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려고 작정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린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문지방에 양의 피를 칠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표가 있는 줄 알고 그냥 지나가겠다(pass over)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마 그 날 밤 어떤 사람은 양의 피를 칠해놓고 저녁 식사 끝나자마자 피곤해서 코를 골며 잤을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보니까 정말 주변의 많은 집에서 장자가 죽었는데 자기 집만 구원받은 것을 알고는 감격으로 찬미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밤에 양의 피를 칠해 놓고도 옆집에서 아이 죽는 소리, 곡성 소리가 터지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실수해서 우리 집에도 오시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잠을 못 잔 채, 밤을 지새우는 심약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약한 믿음인데도 불구하고 주의 약속이 있는 그 집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념해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백성이라는 잔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만찬으로 바뀝니다. 성만찬은 한 민족을 구원해주었다거나, 이집트에서 구속해준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 인류와 세상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죄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루어 놓으신 것을 기념하는 우주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것을 기억하며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모든 죄악에서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우주적 약속의 성취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것은 성취일 뿐 아니라 이전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라틴어에서 성만찬이라고 말하는 \'새크라멘툼\'이라는 단어는 \'맹세\'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맹세는 보통 맹세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맹세한 새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 아래서 내 죄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깨끗이 씻겨진 것을 믿습니다. 그 새 약속 앞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여김을 받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영광을 안겨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게 주신 놀라운 약속의 축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 약속을 정말로 아멘으로 받아들인다는 고백을 의미합니다. 고백이란 말로 표현할 수도 있고, 글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 전체로 고백하는 것만큼 강렬한 표현이 없습니다. 우리 개신교에는 몸 전체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두 개의 거룩한 의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요, 다른 하나는 성만찬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세례행위란 물 속에 잠겼다가 올라오는 행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침례라는 말이 세례의 뜻을 더욱 실감있게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 속에 들어간다는 행동의 상징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장사지낼 때 내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되었다, 다시 말해 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요, 물 속에서 올라오는 행위는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나도 이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다, 즉 그 부활에 동참해서 다시 일어나 새 생명을 받은 자답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장로교에서 행하는 세례의식은 물 속에 들어가고 나오는 이 침례를 간소화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침례를 받던 머리에 물을 흘려 세례를 받던 내가 세례를 몸으로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는 것을 몸 전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만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만찬을 몸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 놀라운 구원이 내게 온 것은 주께서 나를 위하여 흘리신 바 그 보배로운 피 때문이요, 내 육체가 세상의 양식으로 살아지는 것처럼 내가 그것을 마심을 통해 이제부터는 내 중심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생을 살겠다는 각오로 이 떡을 몸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고백을 내 행동으로 하는 것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사실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인류가 시작될 맨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옛날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를 주셨습니다, 노아에게는 무지개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할례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새 민족으로 출발시키실 때는 유월절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성만찬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생명의 하나님이라 부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찬미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만찬은 은혜의 잔치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과응보\'라는 세상에 삽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습니다. 씨를 뿌려야 열매를 얻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인이 없는데도 일방적으로 그 분이 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면, 그저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감사가 없다는 것은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깨달음이라는 차원에서는 아직 이런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그저 받았기 때문에 성만찬은 감사의 잔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성만찬의 분위기는 매우 어둡고 침울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잔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주님과 더불어 새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야겠다는 결의가 비장하기 때문에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지겠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에 대한 슬픔의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살아나셨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생명의 잔치이자 거룩의 잔치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삽니다. 높은 신분으로 살아도 죽고, 부자로 살아도 죽고, 멋지게 살아도 죽고, 그야말로 죽음이 생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성만찬에 참여하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삽니다. 사람들은 육의 욕심 따라 이기적인 인생을 삽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모를 때는 그랬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서 주님께서 완성하신 거룩의 식탁으로 나아갑니다. 거기서 주의 거룩을 사모하고 주의 거룩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더구나 성만찬은 사랑의 잔치이자 승리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는 잔치입니다. 성만찬은 홀로 받는 것 아닙니다. 영원히 천국에 함께 살 우리 형제, 자매들과 함께 영광의 식탁에 둘러앉아 떡을 뗄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속받은 자녀들이 사랑을 함께 나누는 잔치입니다. 이 잔치는 우리의 최후를 준비시켜주는 잔치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 죽음과 부활보다 더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이 죽음과 부활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성만찬이란 말을 영어에서는 Eucharist 라는 말로 종종 표현하는데 이것은 \"좋은 선물\"이란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가장 좋은 선물,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초대하는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함께 참여함을 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떡과 잔을 받을 때 우리는 단순히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죽음과 동시에 부활의 승리를 선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나눈 주의 만찬은 죽음을 앞두고 나눈 비장한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누신 만찬은 영원한 이별을 전제로한 송별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더불어 죽음이 우리를 건너 뛰어가는 승리의 만찬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5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 말씀이 증거하는 것처럼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만찬은 모든 흩어진 하나님의 가족을 하나로 묶는 거룩한 연대의식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요즘처럼 복잡한 사회생활은 가족이 같이 식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족회식이라는 이상한 말까지 등장한 것이지요. 그러나 옛날에는 식사할 때 흩어져 있던 가족이 모두 한 자리에 쭉 둘러앉아서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서로가 한 가족임을 확인하며 사는 것입니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영양분을 몸에 공급하기 위한 생물적인 행위만은 아닙니다. 가령 반가운 친구나 내가 마음을 나누어야 할 분을 만났을 때 우리는 흔히 같이 식사를 하면서 정을 나눕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곧 마음과 뜻을 연결한다, 친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친구란 말을 영어로 Companion이라고 말하는데 이 단어는 함께라는 단어와 먹는다는 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친구가 된다는 뜻이요, 한 상에 둘러앉아 같이 식사하는 것은 한 가족임을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성만찬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식구들이 한 상에 둘러앉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가족이 됨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만찬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곧 사회적 지위, 지식의 많고 적음, 빈부와 격차와 인종, 고향이나 남녀 노소가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한 가족임을 확인하자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겠다는 강력한 연대의지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자랑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지난 110년 동안 싫건 좋건 한 가족으로 강력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연대의식이 자기 중심적이어서 우리 공동체만을 생각한다거나 새가족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하고 폐쇄성을 가지게 된다면 더 나쁜 결과를 몰고 오겠지만, 언제나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사람들을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관계에 있어서 이 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국과 우리나라의 관계를 말할 때 흔히 \"血盟\"이라는 말을 씁니다. 피로 연결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피를 먹고 마시는 이 성만찬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즉 그의 목적이 성취되는 그 날까지 하나가 되어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기 위해 피로 맺는 혈맹의 계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는 분열해서 안됩니다. 분열이 있는 공동체는 성만찬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고백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이 매우 추산적이며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이는 성격경적인 신앙고백으로 충분치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요, 완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반쪽 짜리 신앙에 불과한 죽은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언제나 사람과의 관계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사람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해 보려고 몸부림쳐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결단과 각오가 없이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요, 동시에 주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어리석은 행위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가운데 마지막 부분에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결심을 명백히 하고서 책임있게 성만찬에 참여하고 가담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렇게 귀한 축복의 잔치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위대한 약속을 성취시켜주셨습니다. 성만찬을 받으면서 우리는 그 성취에 대해서 다시 음미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 그 맹세를 든든히 붙잡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고 떡을 떼면서, 또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 몸 전체로 고백하십시다. 그러면서 동시에 천국에서 베풀어질 영광의 잔치를 소망하면서 이 잔치에 참여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신앙고백과 믿음으로 이 떡을 떼며 잔을 나누는 모든 분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그들의 삶 속에 임재하시는 언약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목적/ 골1:9~12/ 전병욱 목사/ 세례식설교/ 2001-07-01
거룩한 목적 골1:9-12 우리 모두가 이름을 들으면 다 아시는 분입니다. 문학평론가로서 지금까지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해왔던 어느 모 교수가 서울 시내에 있는 어느 교회에 초대를 받아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공언하는 사람입니다. 그 날 초청을 받은 이유는 왜 예수를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듣기 위해 그 교회가 초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미션 스쿨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이고, 산상수훈도 나름대로 다 알고 있으며, 어떤 때는 연구도 해 본 적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참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산상수훈대로 사는 교인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고, 그것이 자기가 예수를 믿지 않는지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만 요란하게 떠들 뿐 실제 삶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마지막으로 아주 따끔한 말을 한마디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산상수훈대로 살고 있는 교회가 있다면 저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예수 믿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도 더 악한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면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이 절대 범할 수 없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 목적을 우리가 확인하고 이 목적대로 부응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감히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수년동안 복음을 전할 때 골로새에서 온 에바브로라고 하는 훌륭한 청년이 복음을 듣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울로부터 훈련을 받은 다음 자기 고향 골로새로 돌아가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아름답게 잘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서 수년 후,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입니다. 골로새 교회 지도자가인 에바브로가 감옥으로 사도 바울을 문안 왔습니다. 그리고는 골로새 교회의 형편을 상세하게 보고해 주었습니다. 그 보고를 들으면서 바울이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감사했던지, 그 입에서는 끊임없이 감사가 나왔고, 하나님 앞에 기도가 나왔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 바울은 한가지를 작심했습니다. ‘나는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지금까지 여러 번 기도했지만 이제는 쉬지않고 기도를 좀 해야 되겠다. 쉬지않고 기도하겠다.’ 9절입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되 한두 번 기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해서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 내용이 9절부터 12절까지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기도 내용의 핵심은 10절에 있습니다. 10절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즉 ‘골로새 교인들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점점 자라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라는 기도를 이제는 쉬지않고 해주기로 작심을 한 것입니다. 10절 내용을 순서적으로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Key는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앞뒤로 우리가 3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 나온 순서대로 할 필요는 없고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순서를 찾으면 됩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갖추어 순종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꾸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계속 풍성해져야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두 번째로, 10절 처음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께 합당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즉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 안 하면서 하나님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가지를 놓고 바울이 지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골로새 교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것을 위해 하나님을 더 많이 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자라나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순종의 삶을 매일 살게 해 주시고, 인생을 살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탐스러운 열매를 남기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끝까지 쉬지않겠다고 작심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기도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 믿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가난하고 세상에서 천대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감옥에서 쉬지않고 기도해야 된다면 우선적으로 ‘주여, 이들의 가난을 물리쳐 주시고 세상에서 좀 사람대우 받을 수 있도록 이들의 신분을 바꾸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 기도도 중요하겠지만 바울은 뒤로 미루었습니다. 그리고 ‘주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앞세웠습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여러 가지 여건에서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로부터 왕따 당하고, 어디서나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니기가 곤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그들을 위해서 바울이 정말로 감옥에서 열심히 기도한다면 이런 기도가 먼저 절실히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여, 이들에게도 참 자유를 주옵소서. 신앙의 자유를 주시고, 사람대우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고, 어려운 시험이나 핍박이 없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런 기도를 다 뒤로 돌렸습니다. 그러면 그 보다 더 중요한 기도가 무엇입니까? ‘주여, 가난해도 좋습니다. 천대 받아도 좋습니다. 핍박 당해도 좋습니다. 골로새 교인들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산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비전입니다. 자기 비전이 아닌 하나님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가진 사람은 자기 중심적으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사랑의교회를 포함하여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영적 질병 중의 하나는, 너무나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유럽 교인이 한국을 몇 번 방문하고 나서 한국교회를 진단할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을 보니 딱 3가지만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고, 둘째는 자기이고, 셋째는 돈입니다.” 제가 볼 때 바로 본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정곡을 치는 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보면 너무 자기 중심적인 기도에 매달려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겠다고 하는 열정과 의지가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여, 하나님을 나는 더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까?’라고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하나님을 아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온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처음과 끝이시며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안다 해도 얼마나 알겠습니까? 결국 안다고 해봐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시고 계시하신 범위 안에서 그분을 아는 것인데,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 자신도 너무나 광대하셔서 우리는 도무지 그 옷자락을 만지는 것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원대하시고 강대하시고 거룩하시고 자존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참 끝이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알아도 조금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꾸 발전해야 됩니다. 바울이 기도할 때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여기에서 ‘자라게 한다’이 중요합니다. 한번에 하나님을 다 아는 사람은 없거니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을 배우면서 계속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차오르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차오르는 거예요. 이렇게 차오르다 보면은 하나님을 조금 알았을 때보다도 하나님을 많이 알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더 밝히 분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금방 찾아내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입니까? 못하지요. 그러므로 바울이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골로새 교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위해서 얼마만큼 하나님을 알기를 사모합니까? 2년 전에 비해서 금년에 하나님을 하는 지식이 얼마나 성장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빈약하면 빈약할수록 모든 신앙생활은 자기 중심에서 머무르고 맙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죽은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믿음이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닙니다. 산 자의 믿음입니다. 산 자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한 말씀을 들거나 배워도 그대로 순종해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믿음이 산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설교 들을 때는 듣는 듯 하다가 교회밖으로 다 귓전으로 흘려버리고는 옛날의 습관대로 제 맘대로 살다가 적당히 회개하면 되는 줄로 안다면 하나님을 우롱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슬프게 할 뿐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아닐 수가 있습니까? ‘주여, 어떻게 하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순종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기도가 안 나오겠습니까? 어떻게 이 기도를 멈출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 기도하는 사람이 훨씬 순종 잘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그러한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를 멈추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간절함이 있으니까 문을 두드리기를 계속하는 것 아닙니까? 순종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으니까 그 입에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대로 순종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기도가 한 달에 한번도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이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에서 사라져버렸다면,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은 이미 다른 데 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변질된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마다 슬퍼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요란하게 구름 떼와 같이 몰려나와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 얼굴 돌리실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고 계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말은 다 알아듣는 것 같은데 실제로 나가면 제 맘대로 하는 자식이 부모를 찾아와서 집안에 앉아 있으면 얼굴 마주 대하고 대화할 수 있습니까? 악한 우리 부모도 불순종하는 자식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 맺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선한 일에 열매 맺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람은 한 생을 살다보면 열매를 남깁니다. 평생 술주정뱅이가 되어서 되는 데로 살다가 가는 아버지 뒤에는 구역질 나는 술 냄새만 남습니다. 평생 삯바느질 하면서 자식 하나 사람 만들어 보겠다고 피눈물을 쏟으며 산 어머니의 뒤에는 세상을 바꾸어 놓는 위대한 후손을 남기게 되는 열매가 있습니다. 이엏듯 사람에게는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지금이라도 당장 이세상을 하직하고 떠난다고 할 때, 여러분의 삶의 흔적에 어떤 열매들이 맺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이 자기를 위해 날마다 ‘돈돈’ 하다가 재산 남겨두고 가겠습니까? ‘이 젊음 다 하기 전에 마음대로 한번 즐기면서 살아보자. 자, 인생 늙으면 다 소용 없느니라.’ 하고는 실컷 즐기다가 골프채 몇 개 남겨두고 떠나겠습니까? 그것을 열매로 남겨두시겠습니까? 과연 무엇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열매로 남겨놓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고민하면서 진지하게 살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실직을 당한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실직 후 몇 달이 지나자 가족을 위해서 아무데나 들어가서 일을 해야 되겠다고 조바심을 내다가 어느 회사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 회사에서 판매원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거리를 헤매면서 무언가를 파는 세일즈맨 말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딸, 4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수심이 서린 눈으로 아빠를 바라봅니다. 아빠는 집에 들어와서 절대 티를 내지 않고 명랑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눈 여겨 보면 매일 구두가 엉망인 채 집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걸었는지 구두에 먼지가 가득 앉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달도 안 되어 구두 앞창이 덜렁덜렁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본 자녀들이 매일같이 아빠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를 물어도, 아빠는 설명을 안 합니다. “나 일이 많아 열심히 뛰어서 이래.” 이 정도로 대꾸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구두가 자꾸 망가져 한두 켤레 사다가 나중에는 돈이 없어 운동화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운동화도 한 달을 못 버티고 자꾸 낡아서 바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 큰 딸의 소원이 ‘어떻게 하면 아버지 구두 한 켤레 사드릴까? 그래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까?’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밤을 새워 가며 고민한 결과, 학교 갈 때 버스를 타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먼 길인데도 부모 몰래 걸어서 학교를 다니면서 몇 백원씩 저금통에 계속 넣는 것입니다. 어느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버스를 탈 수 없다는 생각에 덥고 힘든 것을 견디면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자기 동생도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 너 왜 버스 타지 않고 걸어가니?” 동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나, 아빠 구두 사주고 싶어서 요즘 걸어 다녀. 누나도 그렇게 하는 거야?” “그래. 너 얼마 모았어?” 동생이 “나 이제 2000원 모았어. 누나는?” “나는 이제 5000원 됐어. 우리 조금만 더 모으면 아빠 구도 사줄 수 있을 꺼야?” 실제로 자기를 낳고 키워주며 사랑해주는 아빠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타지 않고 힘겹게 학교에 걸어다니며 푼돈을 모으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오늘도 예수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보실 때마다 큰 꿈을 가지고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만약 그와 같은 거룩한 목적이 우리 가슴 속에 있고, 그 거룩한 목적이 우리의 쉬지않는 기도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만큼 은혜를 모르는 악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목적을 지닙시다. 전병욱 목사
거룩한 식탁/ 고전11:23-29/ 종려주일설교/ 성찬식설교/ 2008-06-28
거룩한 식탁 고전11:23-29 2003년도에 해외에서는 온·오프라인 경매에 잇따라 등장한 특별 이벤트 ‘명사와 한끼 식사 경매’가 화제였습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 팝스타 엘턴 존과의 저녁식사 경매가 7억5천만원(39만파운드)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각각 5명씩 초대할 수 있다고 하니 1인당 평균 6천 만원이 넘는 값비싼 식사인 셈이다. 미국 제2의 갑부이자 세계적 주식투자자인 워런 버핏과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온라인 경매에서 3억원(25만달러)에 낙찰되었습니다. 엘턴 존과의 저녁식사 값보다는 싸지만, 투자 고수에게서 ‘한 수’를 배우는 값 치고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낙찰자로서는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이런 명사와의 식사 경매가 자선기금 마련을 위한 행사였습니다. 엘턴 존은 식사 경매로 나온 수익금을 자신이 운영하는 에이즈 자선기금에, 워런 버핏은 비영리 자선단체인 글라이드재단에 기부하였습니다. 이 보다 더 값비싼 식사는 없을까요? 2003년도로 기억이 됩니다. TV프로 가운데 VJ 특공대에서는 식도락의 나라 중국의 전통요리 몇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베이징 덕\'으로 알려진 요리는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 통오리를 특별 제작한 아궁이에 과일나무의 불 180도로 50분 동안 익혀서 과일 향이 베어들게 하는 오리요리라고 했습니다. ‘화려한 황제의 밥상’이라는 요리는 중국요리의 자존심이라고 하는데 청나라 시대의 화려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먹는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2박 3일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그 요리는 황제의 상에서 먹게 되는데 먹는 동안 궁녀로 분장한 여인들이 서빙을 해주고 그 값은 2천만 원이라고 했습니다. 어디 중국요리만 유명하겠습니까? 세계 각 나라마다 유명한 요리가 있겠지만 거의가 다 육체의 배를 채웠다가 나중에 배설해 버리면 그만인 요리들일 것입니다. 여기 육체를 만족케 하지 아니하고 영혼을 만족케 하는 요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기에 우리는 그 요리를 성찬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거룩한 식사 곧 성찬에 초대한 날입니다. 먼저 거룩한 식사 곧 성찬에 초대해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거룩한 식탁”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렇다고 값이 얼마인가 매길 수 없습니다. 혹시 거룩한 식사에 참여하면서 맛있는 요리를 기대하고 계시는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식사는 맛있는 요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분이나 누룩을 넣지 않은 떡 한 조각과 포도즙 한 잔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거룩한 식사에 참여하면서 배불릴 것을 기대하고 계시는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식사는 배불리는 것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작은 떡 한 조각과 아주 작은 양의 포도즙 한 잔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식사를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이 거룩한 식사는 맛이나 양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의미를 귀중하게 여기며 하는 것입니다. 비록 아주 작은 떡 한 조각과 아주 작은 양의 포도즙 한 잔이지만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찢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하루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모여 이 식사를 하시면서 누가복음22장15절 말씀에 보면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거룩한 식사의 의미를 유월절 식사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유월절 식사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 받기 전날 밤 가족들과 함께 모여서 했던 식사인데 그 음식의 주체는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었던 이 거룩한 식사는 아주 오래 전 애굽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거룩한 식사에 사용하였던 어린양과 후대에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 곧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해 보면서 아주 깊은 의미와 능력을 알아본 후 거룩한 식사를 같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죄 없이 희생되었던 어린양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4절을 보면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되 그 어린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어린양을 계산할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8절 이하를 보면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불에 구어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다 소화하라\"고 했습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그 거룩한 식사를 위하여 죄 없는 어린양이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밤 거룩한 식사에서 희생된 어린양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나라는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 번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가 되게 하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허기진 배를 채워보려고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요한복음6장27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배만 채우려고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혼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사는 육체의 배를 채우는데 있습니다. 도대체 영혼의 만족이나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지각이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육체의 만족보다 영혼의 만족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의 양식은 어디에 있는가? 요한복음 6장3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5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에덴동산의 실과가 사람의 영혼을 죽음으로 이끄는 불량식품이었다면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참된 양식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시켜 그의 백성들에게 참된 양식이 되셨고 참된 음료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옛날 유월절 거룩한 식사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양식이 된 어린양 보다 훨씬 더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되어 오늘 우리에게 거룩한 식사를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제자들에게 떡을 가지고 축복기도를 하신 후에 떼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렇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신 이 거룩한 예식을 기념하여 거행하고자 합니다. 둘째, 유월절 양을 잡을 잡을 때 그 피가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졌습니다. 그 양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출애굽기12장 7절에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라 했고, 13절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를 피의 종교라고 합니다. 어린양의 피, 송아지의 피, 염소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등 피에 대해서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구약성경 레위기를 보면 여러 가지 제사가 나오는데 제물의 피가 주제로 되어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칼로 성경을 베면 피가 떨어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기독교를 피의 종교라고 할 만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처럼 피의 종교가 되어야 했는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레위기 17:14에 보면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7:11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예수님은 포도즙을 따라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마태복음 26:28에도 보면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 했습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린 피가 언약의 피라는 말씀입니다. 그 옛날 애굽에서 거룩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어린양의 피가 언약의 피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으로 살려주었듯이, 오늘 이 거룩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언약의 피가 되어 영생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식사를 하면서 비록 적은 양의 포도즙을 마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생각하며 그 피가 언약의 피임을 알고 죽어야 할 사람이 살게 되었다는 감격과 감사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어린양이 피가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져야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마음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져야 하겠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거룩한 식사를 하는 집을 확실하게 구별하게 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거룩한 식사를 하는 우리를 확실하게 구별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재앙을 넘어가도록 하여 생명을 구할 뿐 아니라 죄와 사망에서 해방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식탁에 참여하여 식사를 하면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죽음을 막아주시고 영생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이 거룩한 식사를 하면서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믿으며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 팝스타 엘턴 존과의 저녁식사 경매가 7억5천만원(39만파운드)짜리 식사, 미국 제2의 갑부이자 세계적 주식투자자인 워런 버핏과 점심식사 3억원(25만달러), 먹는데만 2박3일이 소요되는 ‘화려한 황제의 밥상\'이라는 2천만원짜리 중국요리라 할지라도 이것은 먹고 나면 곧 배가 고파 옵니다. 또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화려하지 않고 영양가 있는 식탁은 아니라 할지라도, 작은 누룩 없는 떡 조각, 작은 포도즙 한 잔에 불과한 주님이 자신을 희생시켜 차려주신 거룩한 식탁 성찬은 나를 살리고 당신을 살리며 성도 여러분 모두를 영생하게 만드는 능력의 식탁입니다. 이것은 값을 환산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값이 곧 거룩한 식탁의 값이기 때문입니다. 이 식탁은 온 인류를 구원한 식탁이니 그 값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식탁에 주님이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경매가 없이 다만 믿음 하나 보시고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거룩한 식탁/고전11:23-29 종려주일-성찬식
거룩한 식탁/고전11:23-29 종려주일-성찬식 2008-06-28 12:03:05 read : 114 2003년도에 해외에서는 온·오프라인 경매에 잇따라 등장한 특별 이벤트 ‘명사와 한끼 식사 경매’가 화제였습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 팝스타 엘턴 존과의 저녁식사 경매가 7억5천만원(39만파운드)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각각 5명씩 초대할 수 있다고 하니 1인당 평균 6천 만원이 넘는 값비싼 식사인 셈이다. 미국 제2의 갑부이자 세계적 주식투자자인 워런 버핏과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온라인 경매에서 3억원(25만달러)에 낙찰되었습니다. 엘턴 존과의 저녁식사 값보다는 싸지만, 투자 고수에게서 ‘한 수’를 배우는 값 치고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낙찰자로서는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이런 명사와의 식사 경매가 자선기금 마련을 위한 행사였습니다. 엘턴 존은 식사 경매로 나온 수익금을 자신이 운영하는 에이즈 자선기금에, 워런 버핏은 비영리 자선단체인 글라이드재단에 기부하였습니다. 이 보다 더 값비싼 식사는 없을까요? 2003년도로 기억이 됩니다. TV프로 가운데 VJ 특공대에서는 식도락의 나라 중국의 전통요리 몇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베이징 덕'으로 알려진 요리는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 통오리를 특별 제작한 아궁이에 과일나무의 불 180도로 50분 동안 익혀서 과일 향이 베어들게 하는 오리요리라고 했습니다. ‘화려한 황제의 밥상’이라는 요리는 중국요리의 자존심이라고 하는데 청나라 시대의 화려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먹는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2박 3일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그 요리는 황제의 상에서 먹게 되는데 먹는 동안 궁녀로 분장한 여인들이 서빙을 해주고 그 값은 2천만 원이라고 했습니다. 어디 중국요리만 유명하겠습니까? 세계 각 나라마다 유명한 요리가 있겠지만 거의가 다 육체의 배를 채웠다가 나중에 배설해 버리면 그만인 요리들일 것입니다. 여기 육체를 만족케 하지 아니하고 영혼을 만족케 하는 요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기에 우리는 그 요리를 성찬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거룩한 식사 곧 성찬에 초대한 날입니다. 먼저 거룩한 식사 곧 성찬에 초대해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거룩한 식탁”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렇다고 값이 얼마인가 매길 수 없습니다. 혹시 거룩한 식사에 참여하면서 맛있는 요리를 기대하고 계시는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식사는 맛있는 요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분이나 누룩을 넣지 않은 떡 한 조각과 포도즙 한 잔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거룩한 식사에 참여하면서 배불릴 것을 기대하고 계시는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식사는 배불리는 것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작은 떡 한 조각과 아주 작은 양의 포도즙 한 잔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식사를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이 거룩한 식사는 맛이나 양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의미를 귀중하게 여기며 하는 것입니다. 비록 아주 작은 떡 한 조각과 아주 작은 양의 포도즙 한 잔이지만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찢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하루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모여 이 식사를 하시면서 누가복음22장15절 말씀에 보면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거룩한 식사의 의미를 유월절 식사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유월절 식사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 받기 전날 밤 가족들과 함께 모여서 했던 식사인데 그 음식의 주체는 어린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었던 이 거룩한 식사는 아주 오래 전 애굽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거룩한 식사에 사용하였던 어린양과 후대에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양 곧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해 보면서 아주 깊은 의미와 능력을 알아본 후 거룩한 식사를 같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죄 없이 희생되었던 어린양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4절을 보면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되 그 어린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어린양을 계산할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8절 이하를 보면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불에 구어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다 소화하라"고 했습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그 거룩한 식사를 위하여 죄 없는 어린양이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밤 거룩한 식사에서 희생된 어린양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나라는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 번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가 되게 하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허기진 배를 채워보려고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요한복음6장27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배만 채우려고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혼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사는 육체의 배를 채우는데 있습니다. 도대체 영혼의 만족이나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지각이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육체의 만족보다 영혼의 만족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의 양식은 어디에 있는가? 요한복음 6장3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5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고 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에덴동산의 실과가 사람의 영혼을 죽음으로 이끄는 불량식품이었다면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참된 양식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시켜 그의 백성들에게 참된 양식이 되셨고 참된 음료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옛날 유월절 거룩한 식사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양식이 된 어린양 보다 훨씬 더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되어 오늘 우리에게 거룩한 식사를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제자들에게 떡을 가지고 축복기도를 하신 후에 떼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렇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신 이 거룩한 예식을 기념하여 거행하고자 합니다. 둘째, 유월절 양을 잡을 잡을 때 그 피가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졌습니다. 그 양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출애굽기12장 7절에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라 했고, 13절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를 피의 종교라고 합니다. 어린양의 피, 송아지의 피, 염소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등 피에 대해서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구약성경 레위기를 보면 여러 가지 제사가 나오는데 제물의 피가 주제로 되어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칼로 성경을 베면 피가 떨어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기독교를 피의 종교라고 할 만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처럼 피의 종교가 되어야 했는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레위기 17:14에 보면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7:11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예수님은 포도즙을 따라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마태복음 26:28에도 보면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 했습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린 피가 언약의 피라는 말씀입니다. 그 옛날 애굽에서 거룩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어린양의 피가 언약의 피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으로 살려주었듯이, 오늘 이 거룩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언약의 피가 되어 영생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식사를 하면서 비록 적은 양의 포도즙을 마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생각하며 그 피가 언약의 피임을 알고 죽어야 할 사람이 살게 되었다는 감격과 감사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어린양이 피가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져야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마음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져야 하겠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거룩한 식사를 하는 집을 확실하게 구별하게 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거룩한 식사를 하는 우리를 확실하게 구별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재앙을 넘어가도록 하여 생명을 구할 뿐 아니라 죄와 사망에서 해방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식탁에 참여하여 식사를 하면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죽음을 막아주시고 영생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이 거룩한 식사를 하면서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을 믿으며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 팝스타 엘턴 존과의 저녁식사 경매가 7억5천만원(39만파운드)짜리 식사, 미국 제2의 갑부이자 세계적 주식투자자인 워런 버핏과 점심식사 3억원(25만달러), 먹는데만 2박3일이 소요되는 ‘화려한 황제의 밥상'이라는 2천만원짜리 중국요리라 할지라도 이것은 먹고 나면 곧 배가 고파 옵니다. 또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화려하지 않고 영양가 있는 식탁은 아니라 할지라도, 작은 누룩 없는 떡 조각, 작은 포도즙 한 잔에 불과한 주님이 자신을 희생시켜 차려주신 거룩한 식탁 성찬은 나를 살리고 당신을 살리며 성도 여러분 모두를 영생하게 만드는 능력의 식탁입니다. 이것은 값을 환산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값이 곧 거룩한 식탁의 값이기 때문입니다. 이 식탁은 온 인류를 구원한 식탁이니 그 값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식탁에 주님이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경매가 없이 다만 믿음 하나 보시고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거룩함을 향한 출발/ 롬6:1-11/ 성례식설교/ 2008-11-19
거룩함을 향한 출발 롬6:1-11 마음이 선량한 어떤 부자가 읍내에 나갔다가 구걸하는 거지 아이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물어보니 고아였다. -너 아저씨하고 함께 살래? -네! 그 아이를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혔다. 맛있는 음식을 먹였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호적에 올렸다. 이제 그 거지 아이는 그 부잣집의 아들이 된 것이다. 그런데 밤에 그 아이는 침대에서 자지 않고 방구석에 구부리고 자고 있었다. 아이를 안다가 침대에 눕혔다. 아침에 가보니 역시 방구석에 구부리고 자고 있었다. 그리고 공부를 시키기 위해 학교에도 데리고 갔다. 그런데 늦게까지 돌아오질 않아서 찾아나섰는데 읍내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너는 이제 내 아들이야. 우리 가족이야. 그리고 여긴 너의 집이란다. 그리고 이 방은 네 방이야. 여기 있는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란다. 그렇게 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는 여러 차례 집을 나가서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 아이를 찾아왔다.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해주었다. 이 아이는 비로소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다시 가출하지 않았다. 그 집 주인의 아들로 반듯하게 잘 자라게 되었다. 이 예화를 통해서 본문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 7절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의롭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거리에서 데려온 고아 아이와 같이 이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지적하고 있다.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분명히 우리의 신분이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 동료인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죄사함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죄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까?’ 그러자 상대방이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를 덧 입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여러분, 이 대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은혜를 받기 위하여 죄를 짓는다는 말은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는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롬 5:20의 말씀에 대한 오용이라 할 수 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이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지, 죄를 짓는 자에게 은혜를 더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교계에 유력한 목사님들 가운데는 과거에 폐병을 앓은 병력 있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 이전에 이런 말들을 하기도 했다. ‘유명한 목사가 되려면 폐병이나 암에 걸렸다 낫는 경험이 있어야겠네!’ 그러나 그분들이 유명해지기 위해 폐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니까 은혜 받으려고 죄를 범한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 가운데 그런 위험에 빠질 것을 염려하면서 강력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를 경험한 신자들이 예전의 습관대로 범죄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의롭다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죄의 자리로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원인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한 마디로, 세례 받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례에 대한 중요성과 그 의미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이라 할 수 있다. 아니면 남들이 받으니까 유익이 될 것 같아서 따라서 받았다는 말이 된다 예)진중 세례식.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일차적으로 물세례라고 말할 수 있다. 세례는 문자적으로 ‘잠근다’ 또는 ‘씼는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세례의 방법에도 물을 뿌리는 방법 말고도 침례교에 행하는 ‘침례’라는 방법이 있다. 강이나 또는 수조에 세례자를 담그는 의식을 행하는데 훨씬 더 실감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에 잠글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일으킬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세례라는 의식이나 방법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요 천국에 들어감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고백의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가 단순히 그리스도인됨의 표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과거 중세 천주교에서 면죄부를 남발했던 과오를 반복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죄와의 단절이 없는 로마교회의 신자들에게 대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1. 세례의 의미 사도 바울은 세례를 한 마디로 ‘연합’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이다. 이 연합은 두 가지 면에서 이뤄졌는데... 1)죄에 대한 죽음이다. 본문 중에서 사도 바울은 계속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2절에서 11절까지 한 번도 빠짐 없이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왜 ‘죽음’이라는 용어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사용하고 있는가? 그 이유를 6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2)살리심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신자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될 것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 세상에서 죽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산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은 믿는 자 심령 속에 내주하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갈 2:20상)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신자가 더 이상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과 부활의 영원한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2. 세례의 목적 그렇다면 세례의 목적은 무엇인가?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는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은 것은 그 부자의 사랑이었다. 그 아이는 아무런 공로가 없으나 그 부자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다. 이젠 그의 거처가 거리의 처마밑이나 다리밑이 아니라 그 부자의 집이다. 이제 그 부잣집 아들로서 살려면 그 집안의 습관을 배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옛사람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들이다.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었으면 그 가운데로 걸아가야 한다. 다시 죄인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죄에게 종노릇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 한다. 거룩한 삶을 향한 출발점에 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3. 거룩함을 향한 성도의 자세 1)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 2절,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나의 신앙고백이 진실한 것이라면 더 이상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 이미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성들에 대하여 죽이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성령께 의지하면서... 2)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몸이 되었다는 사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황해도 완악에 유명한 깡패였던 김익두가 예수 믿고 난 후에 장인 어른에게 부고장을 보냈다고 한다.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이전의 내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성령으로 인치셨다. 떨어지면 고통스러울 뿐이다. 주님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라. 3) 거룩한 선포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라’는 말은 의식화하라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향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 혈기가 일어날 때,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다’ ‘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나의 존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리에 버려진 고아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죄악의 자리에서 떠나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예수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의 습관을 익혀야 한다. 오늘 세례 받는 분들과 교우 여러분들을 향하여 권면의 말씀을 드린다. 1. 오늘 세례 받은 분들에게 이 세례 의식을 통해서 오늘부로 ‘나는 죽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살아났다. 이제는 죄의 줄을 끊고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2. 세례 받은 분들에게 이미 과거의 어느날,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서약했던 일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동안 죄악을 끊지 못하고 죄의 자리에 머물렀던 것을 회개하라.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으로서 다시 한 번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결단하라.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새 생명 가운데로 행하는 삶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주님과 함께 하며 새 생명의 길로 걸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길 축원한다.
거룩함의 시작/ 세례/ 롬6:1-13/ 성례식설교/ 2009-01-08
거룩함의 시작/ 세례 롬6:1-13 조선 25대 임금인 철종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임금이 되기 전 강화 도령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강화도령으로 살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아버지 영조의 손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입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을 때 아들 셋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자빈에서 태어난 장남은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조 임금이 되었고, 다른 아들 둘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들은 당시 천주교인이란 사실이 발각되면서 유배지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고 후손들은 모두 강화도에서 왕가와는 관계없는 비참하게 살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선 왕조에 왕가에 대가 끊기게 됩니다. 새로운 왕을 옹립해야 되는데 권력을 쥐고 있던 세도가들은 똑똑한 왕을 원치 않았습니다. 왕이 똑똑하면 왕권을 강화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왕조가 전주 이씨의 나라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 중에 왕을 세워야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오래 전 강화도로 유배를 떠난 이 집안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강화도령 철종은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왕이 되는데 기본적으로 하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다는 것과 왕답게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는 왕이 되었으나 전혀 왕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가 왕답게 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국방을 튼튼히 하고,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의 발전을 도모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살게 할 것인지를 배워야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술이나 마시고 궁녀들 꽁무니나 따라다니면서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철종형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나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여기 \'알지 못하느뇨?\' 이 말은 어쩌면 그 당시 로마에 사는 많은 성도 가운데 자신들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휘둘리고, 마귀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무력한 삶을 사는 자들을 향한 질책의 말씀이기도합니다. 뭐 이 말씀은 오늘 우리도 깊이 들어야할 말씀이 아닙니까? 특별히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과 또 이미 세례를 받은 형제, 자매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풍성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세례가 무엇이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세례 받았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세례요한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3:14절에 보면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네게로 오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말속에는 아주 중요한 구원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죄 때문에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세례를 자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가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 바울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보시면 \'합하여\' \'연합한자\'라는 단어가 5번이나 등장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고 또한 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죽고 이제 새로운 생명, 영생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연합된 것입니다. 이 연합되었다는 말은 무엇보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철저히 죽은 자들이란 말입니다. 나 혼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죽었어요. 십자가을 쳐다 볼 때마다 나는 죽어지는 거예요. 혹시라도 꿈틀거리거나 무엇인가에 집착하려 하다가도 십자가만 보면 나는 죽어요.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라오는 제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 핍박과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 자존심이 무너지는 아픔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누리고 싶은 것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방해, 핍박, 어려움이 있어요. 그러나 결코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런 고통이 있어야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면 우리에게는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듯이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고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죽었다면 부활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죽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언제나 손해만 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남이 나를 못살게 구는데 그에 맞서지 않고 죽은 것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말 죽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는 않았으면서 잠깐 죽은 것처럼 위장하며 살고 있습니까? 왜 교회에 와서는 죽은 척하고 살고 세상에 나가서는 기고만장하게 살아갑니까? 죄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듯이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롬5:6에 보시면 지난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리스도를 알기 전 나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바울은 좀 고상한 표현을 썼지만, \'경건치 않은 자\'란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자, 도무지 변화될 수 없는 죄에 찌들대로 찌든 불신과 음란과 거짓으로 물든 소망 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내려가서 8절에 보시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자격 없는 자, 이 소망 없는 인생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인생황혼에 한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가 지난 시절 얼마나 당신 앞에 잘못된 삶을 살아왔습니까? 믿는 자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복음을 방해하는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로 살아온 나를 당신의 능하신 손길로 그 모든 것을 덮어주시고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충성되이 여겨 하나님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신 하나님! 나의 연약함을 허물치 않으시고 오히려 격려하시고 소망을 주신 하나님! 내가 어찌 이 사랑! 이 은혜를 감당하겠습니까?\"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하나님 사랑을 깨달은 그 날부터 어떤 자리 어떤 환경, 어떤 핍박 앞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쏟았습니다. 자신을 믿어주신 자신을 죄에서부터 건져주신 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은혜 앞에 살아간다면, 더 이상 지난날에 나의 연약함에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 \"여길지어다\"는 이 명령형의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 말은 본래 회계사들이 전문적으로 사용하던 말입니다. 나의 통장 계좌에 돈이 입금되었을 때 그것은 현금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라\'고 할 때 씌여진 것입니다. \'여기다\'는 말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카드\'가 저에게 있습니다. 저의 통장에 돈이 있을 때 비록 조그마한 카드지만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자신감을 가지고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여기다\'는 \'생기 있게\' 살라는 말입니다. 얼마든지 통장 안에 돈이 있습니다. 부도나는 통장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찾아 쓰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이나 능력이나 감격적인 삶이 없습니까? 이는 말씀을 듣기만 할 뿐 확신이 없어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리서치 회사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인생 최고의 날이 언제인가?\"를 물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결혼한 날\"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답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많이 나온 대답은 \"첫 아이가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저도 결혼 생활 후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그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가슴 떨리던 감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새 생명을 맞이하는 그 날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쁜 날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가슴 떨리며 맞았던 자식들이 모두 부모의 기쁨이 됩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무자식 상팔자\"란 말이 나왔겠습니까? 우리에게 참으로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이 아침! 세례를 받으시는 분은 인생 최고의 날입니다. 그리고 지난 날 세례를 받으신 분들도 세례 받은 날을 인생 최고의 날로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오죽하면 어떤 분이 저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세례를 다시 받을 수 없나요?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때 자기는 아무 생각 없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억울해서 다시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강요나, 아무 생각 없이 받을 만큼 세례가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어령 교수를 아시죠. 이대 명예교수이며 전 문화부 장관으로 한국 최고 지성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분입니다. 지난 9월 동경에서 있던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과거에 기독교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분입니다. 그런데 따님이 시력을 잃어가고 외손자가 과잉행동장애를 겪는 극한 고난 속에서 자신의 그 대단했던 지식과 학문이 아무 것도 아님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이성과 과학은 초월하는 절대자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 겁니다. 그는 이제 ‘지상의 언어’를 버리고 ‘천상의 언어’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멋있게 표현해서 그렇지 간단히 말하면 영적인 눈이 떠졌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중생이죠. 그러고 나니까 하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믿어지게 된 겁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고서,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서 왜 우는지 깨닫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물세례는 이미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가, 이 놀라운 감격을 하나님 앞과 이제 함께 동역해야 할 먼저 믿은 성도들 앞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사탄의 노예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나는 결코 철종형 그리스인으로 살아가지 않겠습니다. 이제 나는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내 삶을 아낌없이 주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하는 결의를 담고 감격하며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이제 세례를 받는 여러분의 삶이 주님과 연합된 인생임을 알고 주안에서 늘 교회와 성도들과 함께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결단의 기회/ 겔33:13-16, 고전1:4~9, 마13:24~30/ 성찬식설교/ 2006-07-20
결단의 기회 겔33:13-16, 고전1:4~9, 마13:24~30 오늘은 성만찬이 있는 주일이라 말씀을 짧게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고 만나면 늘 웃게 되는 분이 한 분 계신데, 그 분의 직업은 변호사입니다. 이 분은 유머감각이 많으신데, 법률가가 유머를 쓰니까 듣기에도 좋고, 엔돌핀도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한 2주 전에 어떤 회의장소에서 이 분께서 “제가 변호사인데, 하나님 나라를 가보니 변호사는 한 명도 없더라”고 하셨습니다. 죄를 얼마나 지어서 그러냐고 반문하니까, “천당 갔더니 소송이 한 건도 없어서 어디에 가면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지옥을 가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지옥에 가보았더니 변호사들이 우글우글 하더라”고 답하셨습니다. 판단은 여러분께서 하십시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 웃고서 나오다가 ‘목사인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무엇이라고 하실까. 목사가 왜 왔느냐고 하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치시는 의사분들, 천국에 가면 환자가 있을 것 같습니까. 그래서 지옥에 가보라고 하시면 지옥에 가고 싶으시겠습니까. 아주 흔하고 웃긴 이야기 같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고, 어떤 세상이며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오늘 이런 배경을 두고 에스겔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즉 이 말은 내가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 맹세를 합니다. 첫째, 악인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는 않는다. 악인이 자기의 길에서 돌이켜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악인이 살 것이다. 나는 악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가 범했던 과실은 전혀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다. 돌아와서 살라. 이것이 첫 번째 주님의 말씀입니다. 둘째, 의인은 반드시 살리라고 선언했지만, 의인이 자기 자신의 의를 믿고 악을 행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의인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내가 반드시 살려 내겠다. 에스겔서는 아주 쉽고 기초적인 우리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번 의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변함없이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날까지 의인으로 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분명히 살리라고 약속받은 의인은 자기 의를 행하는 죄를 범해서 악 때문에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한번 악한 사람이라고 찍힌 사람이 평생 악인으로 산다는 법도 없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성은 우리가 스스로 의 때문에 살 수 없고, 스스로 죄를 지고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의 묘미는 한 번 태어나는 대로, 한 번 결단한 대로 변하지 않고 계속 가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넘어지고, 찢어지고, 힘들지만 또 오뚝이처럼 일어나 살 수 있습니다. 잘되는가 싶었더니 망하고, 망하는가 싶었더니 또 일어납니다. 저는 이 인간의 한계성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평생 행복하게 사는 인간의 삶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평생 불행만 느낀다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행과 불행, 의와 악이, 죄와 선이 교차하면서 제 삶을 다이나믹하게 이끌어 줍니다. 그런 점에서 죄악에 빠진 불의한 제 삶이 한편으로는 고맙게 생각됩니다. 저는 변화되고 새로 거듭날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단에 따라서 생과 사, 의와 불의가 갈라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변한다. 사람의 사고도 변해야 한다. 사람의 삶도 변해야 한다. 사람의 인격의 모체도 변해야 한다. 인간이 통체로 변해야 하고 인간의 모든 시스템이나 제도도 변해야 한다.” 변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악에서 선으로, 죄에서 의로 변해야 합니다. 이 변화의 초점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이 주도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이 변화를 이끌어 가자고 하십니다. 이것이 영원하신 사랑의 뜻이자 창조의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반성이자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매우 냉혹하시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죄를 용서하시는 엄청난 사랑도 함께 지니고 계십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밀을 심었더니 밤에 사탄에 와서 가라지를 심었고, 두 개가 같이 자랐습니다. 가라지를 뽑을까요 라고 물었더니, 예수께서는 가라지는 ‘죄’인데, 죄를 뽑다가 의인인 밀까지 상하면 안된다. 끝까지 두어라. 내가 추수하는 날에 가라지는 뽑아서 불에 태우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엄격하시지만, 회개할 때를 기다리십니다. 마지막 추수 때까지는 기다리시만, 그 때까지 회개가 없다면 불에 태워버려십니다. 그 때에는 가라지만 태우시는 것이 아니라, 밀가지도 태우십니다. 예수께서 늘 강조하신 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라(메타노이아)’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방향도 바꾸고, 과거에서 미래로 바꾸고, 죄에서 선으로 바꾸고 변화의 역사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제가 회개라는 말을 요즘 다시 배웠습니다. 회개는 교인, 교회가 아니라 비즈니스에서 제일 잘 하더군요. 그 중에서 자동차회사가 제일 잘합니다. 과거에는 자동차회사가 부속품이 망가지면 숨기기만 했지만, 요즘은 자동차를 팔 때 부속품이 망가졌으면 공개적으로 리콜을 선언합니다. 리콜은 현대판 회개입니다. 과거에는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리콜을 선언하면 소비자들이 기꺼이 리콜에 응할 뿐만 아니라, 리콜하는 회사를 믿기 시작합니다. 신뢰성 때문에 리콜하는 문화, 이것이 우리의 문화인 것 같습니다. 교회가, 오늘의 정치가 리콜을 선언할 수 있습니까. 하늘이 신뢰한다는 데 왜 하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리콜을 해서 신뢰성과 이익을 버는 회사가 공적으로 훨씬 더 공적으로 솔직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입니다. 저는 이 리콜문화가 모든 사회영역에서 회복되었으면 합니다. 공적자리에 있으신 분들은 내 정책이 잘못되었으니 다시 시작하겠다고 공적으로 리콜선언하셔야 합니다. 사적으로 리콜선언 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한테 리콜선언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나 공적으로 하든 사적으로 하든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십시오. 하나님의 진실 앞에서 메타노이아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살려주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회개, 결단의 역사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 주변, 이웃, 가정, 사회에 대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그 원형이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바리새파, 유대교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며 혹독하게 의를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회개를 주제로 하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필요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언자적 비판의 원형입니다.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필요로 했고,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심판적 결단입니다. 세례요한의 심판적 예언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길을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신학적, 신앙적으로 세례요한의 예언자적 비판과 냉엄함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 자신이 아니라 그 분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숭배나 예배의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메타노이아,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은 세상 사람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타협할 수 없기 때문에 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자신에 대해 냉혹하셨느냐 하면 죄를 죄인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 아니라,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를 받기로 하셨습니다. 스스로 생명을 걸고 우리의 죄와 대결하십니다. 세레요한은 세상의 죄값을 진 적은 없고 비판적 예언만을 했을 뿐입니다. 예수의 결단,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결단은 자기 자신에게 매우 냉엄하여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가 고마운 이유는 하나님은 죄인 모두에게 냉혹하시지만, 자기자신에게도 냉혹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사회에 비리가 많아서 공격해야 하지만, 왜 자신의 비리에는 유약합니까. 자신에게 냉혹하면서 현실에도 냉혹할 방법은 십자가에서 보여준 삶의 진실, 결단의 진실입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을 드리면서 한 가지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경동교회 제단의 십자가를 볼 때 마다 제가 두 가지 고백을 합니다. 하나는 너무 감격적이고 고맙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매우 큽니다. 상징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다른 교회에서는 자기들 좋으라고 십자가를 치우고 자신들이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영상스크린으로 비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작은 태도같지만 십자가 자리에 영상스크린을 갖다놓는 것이 축복인지, 개방적인 태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진실하게 예배드리고 고백해 봅시다. 저는 우리 교회의 십자가가 큰 것은, 신학적으로 우리의 죄가 이렇게 크다는 회개하는 마음을 더욱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며, 엄청난 부활의 축복을 나누어 가지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감격하는 한편 두려운 마음으로 단에 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인간사랑의 극치로서, 오늘 우리 삶의 좌표를 설정해 주고 있습니다. 이따가 떡을 드시고, 잔을 드시러 나오실 때 꼭 이 십자가를 가슴으로 쳐다보고 나오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박멸하시지만, 죄인은 회개시켜서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자기자신에게 냉혹하게 십자가를 지게 하는 방법으로라도 동참케 하십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님께 고맙습니다. 하나님께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오늘 고린도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냉혹하면서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들을 친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친교란 말은 원어로 ‘코이노니아’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함께 이 거대한 십자가에서 부활의 생명을 주시려고 코이노니아의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십시오. 박종화 목사(서울 경동교회)
고난과 세례
고난과 세례 http://mission.bz/5710성찬예배 마태복음 27:45-54 얼마 전에 안타까운 사고소식이 있었습니다. 한국의 중심교회 라고 하는 Y교회 부속 성전에서 천장에 있는 석고보드가 떨어져서 사고가 났습니다. 석고보드가 일 톤 정도되는 무게였다고 하는데 1층에서는 칠백 명의 학생들이 예배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고등부 교사되는 분이 떨어진 그 석고보드를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대형사고가 될 뻔한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그 무게 때문에 떠밀려서 아래로 떨어져 중상을 입어 죽고 말았습니다. 이 교사는 현직 교사였습니다. 대형사고로 인명피해가 날 뻔한 천정의 석고보드를 버티고 있다가 애석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 성전은 입당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새 건물인데 날림공사로 인해 천장이 떨어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저는 교사되신 그 집사님의 죽음을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살리고 본인은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속죄적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버티다가 결국은 죽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승리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이미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한 기도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2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의 소원을 구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는 주님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기도하실 대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먼저 구했습니다. 나의 소원이 결과가 되어 그것에 얽매이면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주님은 그런 실수를 하시지 않았으며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십자가를 지는 일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의 깊은 기도가 십자가를 지는 능력을 입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기분으로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것세마네의 목숨을 건 기도의 시간이 바쳐져야만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의 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속죄의 죽음입니다. 그저 한 사람이 이 땅에 나서 살다가 죽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 없는 메시야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또 죽을만한 죄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대속의 죽음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일곱 가지 징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비아 돌로로자(Via Dolorosa)라고 합니다. 즉 슬픔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빌라도 관저에서 갈보리까지 폭 사미터 길이 오백미터 정도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에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셨습니다. 그 비아 돌로로자에는 일곱 가지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정죄가 있었습니다. 무죄한 자를 사형으로 정죄했습니다.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눅23:23-24) 둘째는 조롱이 있었습니다. 백성들과 관원들이 조롱하고 군병들도 조롱하며 한 강도도 조롱하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매맞음과 침뱉음과 손으로 침과 가시관을 받음과 홍포를 입힘으로 조롱을 받았습니다. 셋째는 죽음이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넷째는 긍휼이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눅23:28) 다섯째는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23:47) 여섯째는 구원이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일곱째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한 낮에 어두움이 임하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죽은 성도들이 일어나는 이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광경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오전 9시, 숨을 거둔 운명의 시간은 오후 3시로 6시간만에 운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동안 세 가지 큰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두움이 임하다 첫째는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45절에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제 육시는 12시 정오를 말합니다. 제 구시는 오후 3시입니다. 세 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태양이 가장 강렬하게 비취는 한 낮에 세 시간 동안 태양이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왜 그런 이적이 일어났을까, 그 이적의 의미가 무엇일까 라고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하나는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애도라고 해석합니다. 창조주가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멸망에서 구원시키기 위하여 죽임 당하는 그 죽음이 너무도 장렬하기 때문에 태양을 비롯한 모든 우주의 만물들이 창조주의 죽음을 애도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시적입니다. 또 하나는 죄에 대한 인류의 고통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가 하는 그 무시무시한 죄 값에 대한 고통을 홀로 지고 죽으신 주님의 고통에 대한 인류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오후 3시가 가까웠을 때 마지막 고통의 절정에 절규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주님의 절규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절정을 이 대목에서 발견합니다. 그 고통의 절정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순간입니다. 죄 값으로 심판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죄 값 때문에 메시야가 심판을 당하는 그 순간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버림받아야 될 것을 주께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 절규와 함께 온 세상은 세 시간 동안 어두움으로 애도를 했습니다. 그 애도에는 우리 자신의 죄 값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죄 값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고통의 절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그 고통 속에는 나의 죄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다 두번째 이적은 성전 안에서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습니다. 이 두 곳을 구분하는 것이 휘장입니다. 가운데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성소와 지성소는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이면서도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인이 하나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만약 메시야의 죽음이 없었다면 아직도 대제사장을 통하여 기도해야 하고 대제사장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 함께 예배당에 왔으며 또 영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온 것입니다. 죽은 성도들이 일어나다 세번째 징조는 성전 밖에서 일어났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성도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또한 전무후무한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그 순간 무덤이 열리고 죽은 성도들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아무나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물론 성도가 다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골고다 근방에 있는 성도들의 무덤이 열리고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진기한 이적입니다. 그러나 이 이적에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적이 동반되는가? 이제는 죽음의 권세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옥으로 몰고 가는 그 죽음의 권세가 예수님의 속죄로 인하여 끝났다는 것이고 죽은 성도가 부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는 부활한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던 그 날 부활한 성도들은 그 길로 하늘나라에 간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적인 설교입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살아났던 성도들 중에는 욥도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근거는 구약 70인역의 욥기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는 주께서 일으키는 자와 함께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 날 부활했던 성도들 중에는 욥이 포함됐을 것이라는 구전이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자연인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 분은 죽을 필요도 없고 죽음을 알지도 못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의 죄 값을 대신하는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징조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우리들의 은혜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직결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우리의 죄 값을 지고 부르짖었던 주님의 속죄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고난에는 세례의 의미가 있다 세례는 죄 사함 받은 것을 표하는 예식인 것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녀됨을 표하는 예식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성도들이 살아나서 하늘나라에 입성하는 이 놀라운 이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예표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가족됨을 표하는 예식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표하는 예식입니다. 이와 같은 세례는 주님의 속죄사역의 의미가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맺는 말 세례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세례는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죄 사함과 하나님의 자녀됨과 그리스도와 연합된 영적인 표식입니다. 세례의 믿음은 일평생동안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시켜 주는 표식인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여러분들과 세례를 지켜보는 가족들, 세례 교인들을 영접하는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이 게시물을...
고린도전서강해(28)/ 성찬 받는 자의 올바른 태도/ 고전11:17-34/ 정수환 목사/ 학운교회/ 2004-10-13
성찬 받는 자의 올바른 태도 고전11:17-34 Ⅰ.내용 분해와 조직 1.머리말 1.이번에는 칭찬할 수 없는 일을 한 가지 말하겠다(17) 2.너희가 성만찬을 위해서 모이는 자리가 유익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는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17) 2.본론 ①교회분열과 주님의 만찬 ㄱ.너희가 분열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a.너희가 모임에서 논쟁과 분열을 일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 간다는 말이 여러 사람을 통하여 자주 내 귀에 들려온다(18) b.그러니, 어찌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18) c.물론,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분열도 생기게 되어 있다(19) ㄴ.그런 형편에 어떻게 성찬을 가질 수 있는가? a.너희가 분열되어 있으니, 너희가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20) b.너희는 다른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음식을 나누지 않고, 앞다투어 제각기 제 양만 채우고 있다(21) c.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배고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한 사람도 있다(21) ㄷ.그처럼 행하는 성찬은 잘하는 짓이 아니다. a.먹고 마시는 일은 자기 집에서도 할 수 있다(22) b.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으니, 그것이 잘하는 짓인가?(22) c.이 일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말해야 옳겠는가?(22) ②성찬 받기 위한 바른 태도 ㄱ.내가 전해 준 것은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a.주께서 잡히시던 밤, 빵을 손에 들고 감사드리신 후에 빵을 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걸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3-24)” b.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5) c.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너희는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의미를 되풀이해서 선포해야 한다(26) ㄴ.성찬을 받기 전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a.만일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빵을 먹고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님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27) b.그 떡을 먹고 그 잔을 마시기 전에, 누구나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봐야 한다(28) c.주님의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29) ㄷ.우리 스스로를 살피면 심판을 받지 않으리라. a.이 때문에, 너희 가운데는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많다(30) b.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살피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31) c.우리가 심판받아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다(32) 3.맺는말 ①너희가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라(33) ②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라(34). ③그것은 너희가 모이는 일로 해서 심판하실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34) Ⅱ.내용 연구와 삶의 적용 1.고린도교회의 성찬식 ①성찬 받기 전의 자세 ㄱ.교인들이 모일 때에 논쟁과 분열을 일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져가고 있다(18) ㄴ.옳고 그름을 따지다 보면 때로는 분열도 생기지만, 그런 상태에서는 주님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19-20) ②성찬 받을 때의 모습 ㄱ.다른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먹지 않고, 앞 다투어 제각기 제 양만 채우고 있다(21) ㄴ.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고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한 사람도 있다(21) ③성찬 받은 결과 ㄱ.교회 명예를 손상시키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22) ㄴ.주님의 심판을 받아서,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이 많다(30) 2.성만찬 ①성만찬의 시작 ㄱ.언제 : 주께서 잡히시던 밤(23) ㄴ.실행순서 : 빵을 먼저, 포도주를 나중에(23-25) a.감사기도 : 빵, 또는 포도주를 들고 감사기도를 드렸다(23,25) b.말씀선포 ○빵을 떼어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4)’ ○포도주를 마시게 한 후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25)’ c.함께나눔 : 예수께서 떼어준 빵을 함께 먹고, 또한 예수께서 나 눠준 포도주를 함께 마셨다(25) ②올바른 성만찬 ㄱ.받기 전 : 누구나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봐야 한다(28) ㄴ.받을 때 : 주님의 만찬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서 받아야 한다(29) ③그릇된 성만찬 ㄱ.태도 : 주님의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신다(29) ㄴ.결과 :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29) 3.삶의 적용 ①인간의 문제와 그 결과 ㄱ.교회 안에서 분쟁과 분열이 많다. ㄴ.성찬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한 채 받는 경우가 많다. ㄷ.다른 사람의 형편을 자세히 돌아보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행할 때가 많다. ②하나님의 섭리와 치료 ㄱ.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ㄴ.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하기 위하여 성만찬을 제정하여 주셨다. ③인간의 응답과 실천 ㄱ.교회 안에서 분열과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ㄴ.성찬을 받기 전에 자기 자신을 잘 살펴봐야 한다. ㄷ.성만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서 성찬을 받도록 해야 한다.
교회의 거룩한 예식/마26:26-30
교회의 거룩한 예식 마26:26-30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을 향해 입성하시는 우리 주님을 앞서고 뒤따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면서 찬송하고 찬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정말 주님을 찬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배를 오전 11시에 드리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교회사를 보면 이렇게 예배를 오전 11시에 안 드렸던 때도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미국적인 전통이 우리 한국에 들어와서 사실 오전 11시 예배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예배 시간은 얼마든지 교회에서 변경할 수도 있고 정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배가 주로 저녁 시간에 드려졌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해서 교회로 갑니다. 그래서 음식을 펼쳐놓고 예배를 드리기 전에 음식을 나눠 먹었습니다. 그리고 애찬 식사를 다 마친 뒤에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 성찬에 참여를 하는 이런 일들이 흔하게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유럽 교회들 가운데 저녁 7시에 주일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섬기던 비엔나 장로교회가 원래 빌려쓰던 알버트 슈바이처 하우스에서 드리는 그 모임은 우리는 오전 11시에 예배를 드린 반면에 그들은 저녁 7시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빌려쓰면서 주인 행세를 했던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에 애찬과 성찬에 대한 경계가 불확실할 때, 그들이 저녁에 모여서 함께 만찬을 나누고 또 예배를 드리면서 성찬을 하고 이러는 가운데, 그들 사이에 약간의 내부적인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부자인 어떤 사람들은 늘 맛있는 암소 갈비를 먹는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늘 말라 곰팡이가 쓴 빵만 한 조각씩 먹어야 되는, 똑같은 사랑하는 성도들이라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너무나 요즘말로 하면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이 \"아! 이거 뭔가 제도를 바꿔야 되겠구나. 식사는 식사이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성찬은 성찬이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식탁을 나누는 애찬과 성찬을 완전히 구분을 하게 되어졌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먹는 음식을 두고 마음 상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실 그런 일들이 흔히 있지 않습니까? 특히 한국 사람들은 더할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상대방을 앞에 앉혀놓고 혼자 먹을 수 있는 그런 문화입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앞사람이 빤히 쳐다보고 먹지 않은 데서 배짱 좋게 혼자 음식을 먹어내질 못합니다. 그게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가끔 생깁니다. 성찬 의식을 진행하다 보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온전하게 세례 받은 세례 교인으로 한정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찬 예식이 거행되는 동안에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떡을 떼고 잔을 나눌 때 멀뚱멀뚱하게 쳐다보게 되는 민망스러움을 아마 느끼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모처럼 교회에 와서 성찬 예식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되는데 성찬 예식을 통해 상처를 받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목회를 하는 분들은 대부분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어느 한 교회에 남편이 믿지 않아서 늘 기도하고 남편을 전도하려고 애쓰던 어느 집사님이 계셨는데, 모처럼 달래고 달래고 애원하고 애원해서 남편을 어느 날 드디어 교회에 인도해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이 그 교회에서 성찬 예식을 거행하는 날이었습니다. 앞에서 집례하는 목사님이 성찬 예식을 집례하면서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주욱 말씀을 하시고 난 뒤에 \"여러분 가운데 세례를 받으신 분만 이 떡과 이 잔에 참여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큰 일 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그게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고 이제 떡과 잔이 돌았습니다. 그분이 봤을 때 떡과 잔이라고 해봐야 빵도 조그마한 빵 조각 하나에다가, 포도주라고 해봐야 조그마한 잔에다 한 컵씩 돌리면서 그걸 치사하게 누구는 먹으라 그러고 누구는 먹지 마라고 그러냐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것 같습니다. 그분이 집에 돌아가서 내가 다시는 교회에 안 갈 것이니까, 나에게 교회 가자고 하면 당신하고 이혼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더랍니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우리 한국 교회 안에 아주 흔하게 일어납니다. 그것은 성찬과 세례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례와 예식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이 성찬 예식과 세례 의식은 교회에서 정말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아주 거룩하게 거행되어져 내려오는 하나의 의식인 것입니다. 수많은 이 예식을 통해 기독교회가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기독교가 온전하게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제국 하에서 4세기 초 AD312년까지는 기독교는 자유가 없었고, 엄청난 박해를 받고,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순교를 당했어야만 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수많은 로마 황제들이나 로마의 정치권력은 이 성찬 예식을 오해함으로 기독교 박해의 빌미를 찾아내기도 했습니다. 예수쟁이들은 음침한 지하 무덤 카타콤에서 어린 아이를 잡아서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다는 이런 유언비어가 온 로마 제국에 퍼져나가면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솟아 올랐고 또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진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를 탄압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여러분! 이 성찬 예식에 대해 오해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성찬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지하 무덤에서 어린 아이를 잡아먹는다?\" 이게 뭔가 연결이 되지 않습니까? \"월하의 공동묘지\"도 아니고... 하여간 그렇게 오해들이 좍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 성찬과 세례 의식은 기독교가 양보할 수 없는 가장 거룩한 교회의 예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교회의 거룩한 예식 교회의 거룩한 예식은 일반적으로 우리 개신 교회에서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두 가지 외에는 교회에서 어떤 의식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 안에도 우리 개신교가 있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있고, 동방 정교회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는 이 두 가지 의식을 교회의 거룩한 의식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카톨릭에서는 7가지 거룩한 예식이라고 해서 7가지 예식을 그들은 지키기도 합니다. 우리 개신교 안에서도 침례교회에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례 의식을 반드시 그들은 침례라는 용어를 쓰고, 침례교회 용 성경을 보면 우리는 세례라고 번역을 해 놓았는데 그들은 침례라고 번역하고, 우리는 세례 요한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들은 침례 요한이라고 번역해놓은 성경을 서점에 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이만큼 교파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특별히 카톨릭과 우리 개신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카톨릭의 신학자로 알려진 한스 큉 같은 독일 튀빙겐 대학의 교수는 20세기 마틴 루터라고 할 만큼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카톨릭의 7성례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카톨릭 내부에서 아주 집중적으로 사실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카톨릭은 일곱 가지 성례가 있는데 이것을 성사라고 합니다. 첫 번째로 성세성사인데 이것은 우리가 말하는 세례와 같습니다. 흔히들 영세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카톨릭 신자가 되는 하나의 관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의 세례와 그들의 성세성사와의 차이점은, 우리는 반드시 성직자가 세례를 집례하지만, 그들은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평신도 가운데에도 이 성세성사를 거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 입원해있는 환자가 지금 임종을 맞이하려고 하는 급박한 상황일 때에는 카톨릭 신자인 의사나 간호사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다음 견진성사라고 거룩한 예식이라고 자기들이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이마에 기름을 바르는 하나의 의식입니다. 또 성체성사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흔히들 말해 거룩한 몸이라는 말인데 곧 우리 개신교에서 말하는 성만찬 곧 성찬예식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당 안에 가면 고해소가 있죠? 신부가 그 속에 들어가 앉아 있고, 신자가 가서 자기의 모든 죄를 다 고백하고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고해성사는 카톨릭 역사 속에 가장 많은 비리의 온상이 되었고, 많은 문제가 되었는데도 카톨릭 교회는 이것을 절대 양보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부들의 권위를 높여주는 면이 있지만, 오히려 신부들이 영적으로 타락하는 하나의 타락의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한스 큉 교수 같은 사람은 이 부분에 대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다음 병자성사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종유성사라고 하기도 합니다. 질병이나, 사고나, 노회 현상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임박한 신자들에게 기름을 발라서 축복해주는 의식입니다. 그 다음 신품성자는 성직자로 임직하는 즉 개신교로 본다면 목사나 장로나 집사 안수식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혼인성사 또는 혼배성사는 흔히들 교회에서 하는 결혼식을 거룩한 성사 혹은 거룩한 예식이라고 붙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 칼빈은 성찬예식과 세례예식 외에 어떤 예식도 성경적이지 못하고 그것은 다 거짓된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개신교에서 지키는 세례의식과 성찬의식은 가장 성경적인 원리 하에서 교회에서 지키는 거룩한 예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2. 성찬 예식 그러면 우리가 이 성찬예식과 세례의식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다 불러모으고 같이 먹을 때에 오늘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그 생애 마지막 자리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이 성만찬의 예식을 집전을 하시고, 세우시고, 그리고 앞으로 이것을 지키도록 명령을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예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예식이 바로 이 성찬 예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성찬예식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념하 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그 말씀을 좇아서 우리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은 이 성찬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이 땅에 오심과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해야 합니다. 또한 이 성찬예식의 의미는 예수님의 살과 피에 동참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받아먹으라고 나눠주시면서 \"이것이 바로 내 몸이다.\" 빵을 찢어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라고 했고, 잔을 가지시고 하나님께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것을 다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성찬예식의 의미는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살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성찬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이 성찬예식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다음 세대에까지 계속적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성찬의 의미는 언약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새로운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우리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어지고 허물어졌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시고 새 언약을 세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천국백성으로써 함께 먹고 함께 마시는 영적인 교제관계에 서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따라 이 성찬 예식에 우리 모든 믿는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이 성찬예식에 참여하지 않고 이 성찬을 회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성찬을 회피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태도인 것입니다. 모든 세례 교인이라면 자기가 지은 죄와 죄책감 때문에 부담감을 느껴서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성찬을 참여하기 전에 자기가 지은 죄를 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우리는 성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됩니다. 내 마음에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으니까 나는 용서하지 않고 이 성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 이렇게 뻗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써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용서를 본받아 다른 사람을 다 용서해야 됩니다. 여기에 따르는 많은 예화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찬에 참여함으로 우리를 더욱 더 주님 앞에서 새롭게 하는, 그리고 주님의 몸과 주님의 피에 동참함으로 주님의 삶을 주님의 그 본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해나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또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함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신령한 양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심으로 우리의 몸과 영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우리에게 있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 우리의 육신의 건강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신령한 천국양식을 먹고 천국음료를 마심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힘을 부여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만났던 어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요즘은 이런 예화를 하나 하려고 해도 인터넷이 발달되어서 자기 이야기를 알아보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예화를 들 때 각색을 좀 많이 합니다. 각색을 너무 심하게 하다보면 말이 완전히 엉터리 말이 되기도 합니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 한 집사님이 계셨는데 신앙생활은 너무 잘하는데 지독한 골초였습니다. 그리고 지독한 술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어떻게 저렇게 교회에 성실하게 다니면서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할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본인도 그 문제 때문에 늘 부담감을 느끼고 고생을 하던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서 이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자기가 그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정말 하늘의 신령한 양식과 하늘의 신령한 음료를 내가 먹고 세상에 얽매여 있는 이것을 끊고 살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했는데, 그 성찬예식을 끝마치고 나서 담배를 피우려고 하니까 헛구역질이 자꾸 나더랍니다. 술을 마시려고 하니까 머리가 아파서 술을 못 마시겠더랍니다. 그 이후에 그 사람이 술과 담배로부터 온전하게 자유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야! 나도 한 번 실험해봐야 되겠구나.\" 이런 분이 혹시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몸과 마음을 더 깨끗하게 더 정결하게 더 거룩하게 해야 하는데, 우리가 성찬예식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세속에 물들고 찌든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함께 정결하게 해 나갈 수 있도록 애쓰고 노력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성찬에 참여함의 유익은 축복과 사례를 통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시고 축복하시고 잔을 가지시고 사례하셨다고 했습니다. \"축복하셨다. 사례하셨다.\" 축복하셨다는 말은 쉽게 알겠는데 사례하셨다는 말은 어렵습니다. 이 말은 원어적으로 유카리스테오라는 말인데 이 말도 번역하면 축복이라는 말로 씁니다. 주님께서 그 떡과 그 잔에 축복하시고 그것을 나눠주셨습니다. 이 잔과 이 떡을 받는 것은 바로 우리가 축복에 동참하는 아주 거룩한 행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찬예식은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가 체험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 가운데,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그리스도와 내가 일심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와 너가 일심동체가 되어지고, 우리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지는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아주 중요한 정통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가장 상징적이고 기념적인 그런 의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이 성찬예식을 그렇게 자주 하지 않는데, 서양교회들 가운데에는 매주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교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뒤에 목사님이 이렇게 떡과 잔을 가지고 준비를 해놓고 나가면서 성찬을 받고 퇴장을 하는 이런 교회들도 있습니다. 또 우리 한국교회는 이 성찬예식을 할 때 보면 포도주 잔도 각자, 떡도 잘게 썰어서 입에 집어넣기만 하면 아주 쉽게 잘 녹아서 넘어가도록 이렇게 하는데, 실질적으로 어떤 교회는 큰 빵 덩어리를 이렇게 목사님이 옆구리에 수건에 말아서 끼고 찢어서 주는 그게 더 성찬의 의미가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잔도 말입니다. 큰 잔 하나에 가득 부어서 그 한 잔을 다 돌아가면서 마십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더럽다고, 비위생적이라고 아마 야단법석을 떨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도 그런 사람이 있는지 흰 수건을 가지고 한 사람이 마시고 나면 싹 닦고 또 마시고 그러는데 그래도 그게 그것 아닙니까? 저도 거기서 목회를 할 때 제 1조 한 20명 정도가 나와서 둘러앉아서 그렇게 하고 들어가고, 다음 2조가 나와서 그렇게 하고, 또 3조가 나오는 이런 식으로 우리가 성찬예식을 앞에 다 놔두고 둘러서서 떡과 잔을 나누었던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사실은 교회마다 다르고 교파마다 다릅니다. 우리 장로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많이 하지만, 카톨릭에서는 얇은 빵을 이상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100원짜리나 500원짜리 동전만하게 만들어서 입에 딱 넣으면 웨하스가 입에서 녹듯이 사르르 녹도록 이렇게 만들어서 주지 않습니까? 그것을 집전하는 신부가 직접 넣어주는 경우도 있고, 본인이 그것을 집어서 입에 넣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방정교회 곧 러시아나 유고나 폴란드나 이런 동방정교회 정통에서는 성찬예식을 좀 더 걸쭉하게 합니다. 빵을 포도주 속에 다 집어넣어 가지고 저어서 어린아이들 이유식 같이 만들어서 신부가 이렇게 숟가락을 들고 다니면서 입에 떠 넣어 줍니다. 제 생각에는 그건 좀 안 맞다 생각됩니다. 여러분들도 잘 이해가 안되시죠? 참 우리가 수용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동방정교에서는 그게 정통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뭐 그렇게 떠 넣어주셨는지 모르겠지만 자기들은 그게 정통이라고 고집을 합니다. 방식은 다 다르고 횟수도 다르지만 성찬의 본래적인 의미는 우리가 이렇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을 통해 하나 되어지고,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되리라 생각됩니다. 3. 세례예식 또 이와 아울러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세례의식인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을 통해 \"가서 세례를 주라.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세례에 대한 명령은 전도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지상명령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됩니다. 이 세례는 일반적으로 학자들 가운데에는 구약의 할례의식에서 예수님 안에서 세례로 승화되었다고 이렇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초대교회 때 세례요한이 베풀었던 물세례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례는 씻음을 통한 용서의 상징을 가지고 있는 의식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이 세례의식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 씻음 받는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라는 말은 헬라어 밥티스마(banptisma)라는 단어에 유래하는데, 이 밥티스마라는 단어를 우리 장로교나 일반교회에서는 세례라고 번역을 하고, 침례교에서는 침례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밥티스마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다의적인 의미 중 어떤 의미가 있느냐면 \"물 속에 잠근다\"가 있는데 물 속에 잠그는 의식으로 번역하면 침례가 되지만, 또 \"물로 씻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물로 씻는 의식이라고 하면 세례가 되는 것입니다. 또 \"물을 뿌린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번역을 하면서 교파간에 용어간의 차이가 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다시 살아나는 부활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이 세례의식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흔히들 우리 장로교에서는 유아세례, 입교, 학습, 세례 이렇게 나눠서 구분을 합니다만, 어떤 교단에서는 유아세례를 베풀지 않는 교단도 있습니다. 침례교 같은 경우에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기도 합니다. 유아세례는 부모님들의 신앙고백과 부모들이 자녀를 말씀으로 교육하고 성경의 원리를 따라 양육하고, 영적인 본을 보이면서 아이들을 키우겠다는 그런 서약과 함께 당회에서 부모들의 서약을 확인하고 그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성년세례와 꼭 같이 물세례로 거행하는 것이 유아세례입니다. 이 조건은 양친 가운데 한 사람이 반드시 세례 교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 세례교인이라면 좋지만, 그 중에 한 사람 이상 세례교인이고, 어린 아이가 2세 미만일 경우에 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교는 이렇게 유아세례를 받았던 어린 아이가 이제 믿음 안에서 말씀 가운데 부모의 그 신앙적인 양육태도에 의해 자라나서 만 14세 이상이 되면 영적인 성인식과 같은 입교라는 의식을 통해 이제 부모님들의 신앙고백이 아닌 자기 스스로가, 유아세례를 받을 때에는 부모님의 품에 안겨서 부모님들의 신앙고백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제 입교는 자기 자신이 자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온 회중들과 교회 앞에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확인 받는 의식입니다. 서양에서는 입교 의식을 일생에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거대하게 치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학습이라는 이 의식은 사실 우리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의식이고, 교회를 등록하고 출석한지 6개월 이상되는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믿기로 작정했을 때 교회에서 베풀 수 있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그가 앞으로 6개월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또 신앙적인 교육을 받고 다음 세례를 받겠다는 그런 서약과 함께 교회에서 거행하는 의식입니다. 세례는 1년 이상 교회 생활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 당회에서 세례 문답과 또 신앙적인 점검을 통해 확인 받았을 때 교회에서 베풀 수 있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개신교 안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는 학습을 반드시 받은 사람만 세례를 받게 하기도 하고, 학습을 받지 않아도 세례를 바로 베푸는 그런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학습을 반드시 받고 세례를 베풀게 하는 교회는 진짜 교회이고, 학습을 받지 않고 세례를 바로 받게 하는 교회는 가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성경적인 원리는 성경에는 학습이라는 제도가 없습니다. 바로 세례를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교회 전통 속에서 하나의 안전장치입니다. 결혼할 때 약혼 절차 없이 바로 결혼하는 경우도 있지만, 약혼 절차를 거쳐서 결혼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이와 유사하다고 여러분이 생각하시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예수님께서 사례하시고, 떼어서 성찬에 참여하게 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이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 더 신령한 믿음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는 일평생 한 번만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성찬은 일평생 반복적으로 계속해야 된다는 것을 함께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목, 세례와 성찬
구원에 이르는 길목, 세례와 성찬 http://mission.bz/5698성찬예배 마28: 19,20,막16:15,16,요6:51,54,55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고행도 하고 자선도 합니다. 기독교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인간의 '구원'을 추구합니다. 예수란 이름 자체가 '구원자’ 라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구원을 얻으려면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나 대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믿으면 안되고 마음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믿어야 합니다.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마음으로 믿어야 하지만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그리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 회개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김창인 목사님이 말한 대로 회개하지 않고 구원 얻는 길은 없고 회개하지 않고 천국 가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자기의 거짓과 교만과 위선을 무릎을 꿇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종착역에 이르는 길목에 반드시 거쳐서 지나가야 하는 두 가지 정류장이 있습니다. 한 정류장에 머물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하고 다른 정류장에 머물면서는 성찬에 참예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정해 놓으신 정류장들입니다. 기독교는 영의 종교이고 마음의 종교인 동시에 몸의 종교이고 의식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으로 마음으로 믿어야 하지만 동시에 몸으로 믿어야 하고 의식에도 참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세상에 오셨고 친히 몸으로 세례를 받으셨고 친히 의식으로 성찬을 거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너희도 몸으로 세례를 받고 의식으로 성찬에 참예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16:1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 "받아 먹으라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바 나의 피니라"(마26:26,27). 우리가 구원의 종착역에 이르려면 몸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고 의식으로 성찬에 참예하여야 합니다. 먼저 세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우리 장로교회에서는 물 뿌림의 세례를 거행하지만 세례는 본래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였습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쌔"(막1:9,10). 예수님은 우리들 보고만 세례를 받으라고 분부하지 않았고 자신이 먼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몸으로 세례 의식을 거행하실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친히 세례를 받으시고 그 다음 우리들보고 너희도 몸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 속으로 들어가신 것은 ‘절대 겸손’을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금도 무릎 꿇고 몸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절대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을 더 나아가서 물 속에 들어가서 물에 잠기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물 속에 장사 지내는 ‘자기 죽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죄 씻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례는 ‘절대 겸손’과 ‘자기 죽음’과 ‘죄 씻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례는 주님과 하나 되고 성도들과 하나되는 ‘하나됨’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고 성도들과 하나가 됩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 다음 모두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1). 루디아가 빌립보 강변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믿은 후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행16:14,15). 구원의 종착역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절대 겸손’과 ‘자기 죽음’과 ‘죄 씻음’과 ‘하나됨’의 의식인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정해 놓으신 의식이고 주님께서 분부하신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성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성찬은 기독교의 복음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생생한 그림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요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을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받는 것인데, 성찬이 바로 그것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나타내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찬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에 생생하게 참여하게 하는 참여 의식입니다. 이제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성찬은 ‘기념’의 의미가 있고 ‘임재’의 의미가 있고 ‘화체’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기념의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찬을 거행하면서 우리는 과거의 십자가 사건을 생생하게 기념합니다. 우리가 성찬을 거행하면서 십자가 사건을 생생하게 기념할 때 그것은 2천년 전에 일어난 과거의 사건으로 머물지 않고 바로 지금 오늘의 사건으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은혜가 바로 지금 내 몸에, 내 세포에, 내 영혼에, 임합니다. 둘째 임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 계시는 추상적인 분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찾아오시고 죄인들에게 임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에게 임재하셨고 솔로몬에게 임재하셨고 엘리야에게 임재하셨고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에게 그리고 디베랴 바다가의 일곱 제자들에게 임재하셨습니다. 어떻게 임재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방편이 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임재하시고, 기도와 함께 임재하시고, 제물과 함께 임재하시고, 그리고 성찬과 함께 임재하십니다. 성찬을 거행할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지금 여기에 임재하십니다. 셋째 화체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받아 먹고 마실 때 그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가 됩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 떡과 포도주가 영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내 피니라" 라고 분명하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와 계시게 됩니다. 주님이 내 속에 들어오시고 내가 주님의 몸 속에 들어가는 신비한 일이 일어납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주님과 일체가 되는 신비한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이 물러가고 죄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사탄 마귀의 세력이 항복을 하게 되고 질병의 세력이 물러가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요 신비한 일이요 두려운 일이요 축복의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믿음과 회개와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죄 사함과 구원을 얻고 영원한 구원의 종착역에 이르게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신비로운 일체의 삶을 지금부터 살게 됩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이런 신비한 예식에 참예합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물론 루터교회도 성공회도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습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무릎을 꿇는 자세로 성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찬을 받는 이 시간에 여러분들의 죄가 사해지고 주님의 살과 피가 여러분들 속에 부어지는 놀라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 이 게시물을...
구원에 이르는 길목, 세례와 성찬/ 마28:19-20, 막16:15-16, 요6:51,54-55/ 김명혁 목사/ 2015-08-23
구원에 이르는 길목, 세례와 성찬 마28:19-20, 막16:15-16, 요6:51,54-55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고행도 하고 자선도 합니다. 기독교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인간의 \\\'구원\\\'을 추구합니다. 예수란 이름 자체가 \\\'구원자’ 라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구원을 얻으려면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나 대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믿으면 안되고 마음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믿어야 합니다.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마음으로 믿어야 하지만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그리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 회개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김창인 목사님이 말한 대로 회개하지 않고 구원 얻는 길은 없고 회개하지 않고 천국 가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자기의 거짓과 교만과 위선을 무릎을 꿇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종착역에 이르는 길목에 반드시 거쳐서 지나가야 하는 두 가지 정류장이 있습니다. 한 정류장에 머물면서는 세례를 받아야 하고 다른 정류장에 머물면서는 성찬에 참예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정해 놓으신 정류장들입니다. 기독교는 영의 종교이고 마음의 종교인 동시에 몸의 종교이고 의식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으로 마음으로 믿어야 하지만 동시에 몸으로 믿어야 하고 의식에도 참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세상에 오셨고 친히 몸으로 세례를 받으셨고 친히 의식으로 성찬을 거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너희도 몸으로 세례를 받고 의식으로 성찬에 참예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16:1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4,55). \\\"받아 먹으라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바 나의 피니라\\\"(마26:26,27). 우리가 구원의 종착역에 이르려면 몸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고 의식으로 성찬에 참예하여야 합니다. 먼저 세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우리 장로교회에서는 물 뿌림의 세례를 거행하지만 세례는 본래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였습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쌔\\\"(막1:9,10). 예수님은 우리들 보고만 세례를 받으라고 분부하지 않았고 자신이 먼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몸으로 세례 의식을 거행하실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친히 세례를 받으시고 그 다음 우리들보고 너희도 몸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 속으로 들어가신 것은 ‘절대 겸손’을 나타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금도 무릎 꿇고 몸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절대 겸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을 더 나아가서 물 속에 들어가서 물에 잠기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물 속에 장사 지내는 ‘자기 죽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죄 씻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례는 ‘절대 겸손’과 ‘자기 죽음’과 ‘죄 씻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례는 주님과 하나 되고 성도들과 하나되는 ‘하나됨’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고 성도들과 하나가 됩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 다음 모두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1). 루디아가 빌립보 강변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믿은 후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행16:14,15). 구원의 종착역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절대 겸손’과 ‘자기 죽음’과 ‘죄 씻음’과 ‘하나됨’의 의식인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정해 놓으신 의식이고 주님께서 분부하신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성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성찬은 기독교의 복음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생생한 그림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요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을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받는 것인데, 성찬이 바로 그것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나타내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찬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에 생생하게 참여하게 하는 참여 의식입니다. 이제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성찬은 ‘기념’의 의미가 있고 ‘임재’의 의미가 있고 ‘화체’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기념의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찬을 거행하면서 우리는 과거의 십자가 사건을 생생하게 기념합니다. 우리가 성찬을 거행하면서 십자가 사건을 생생하게 기념할 때 그것은 2천년 전에 일어난 과거의 사건으로 머물지 않고 바로 지금 오늘의 사건으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은혜가 바로 지금 내 몸에, 내 세포에, 내 영혼에, 임합니다. 둘째 임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 계시는 추상적인 분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찾아오시고 죄인들에게 임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세에게 임재하셨고 솔로몬에게 임재하셨고 엘리야에게 임재하셨고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에게 그리고 디베랴 바다가의 일곱 제자들에게 임재하셨습니다. 어떻게 임재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방편이 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임재하시고, 기도와 함께 임재하시고, 제물과 함께 임재하시고, 그리고 성찬과 함께 임재하십니다. 성찬을 거행할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지금 여기에 임재하십니다. 셋째 화체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받아 먹고 마실 때 그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가 됩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 떡과 포도주가 영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내 피니라\\\" 라고 분명하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와 계시게 됩니다. 주님이 내 속에 들어오시고 내가 주님의 몸 속에 들어가는 신비한 일이 일어납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주님과 일체가 되는 신비한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이 물러가고 죄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사탄 마귀의 세력이 항복을 하게 되고 질병의 세력이 물러가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요 신비한 일이요 두려운 일이요 축복의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믿음과 회개와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우리는 죄 사함과 구원을 얻고 영원한 구원의 종착역에 이르게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신비로운 일체의 삶을 지금부터 살게 됩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이런 신비한 예식에 참예합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물론 루터교회도 성공회도 무릎을 꿇고 성찬을 받습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무릎을 꿇는 자세로 성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찬을 받는 이 시간에 여러분들의 죄가 사해지고 주님의 살과 피가 여러분들 속에 부어지는 놀라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구원증서인 세례 / 마3:13-17
구원증서인 세례 / 마3:13-17 2010-06-25 12:47:23 read : 39 <미션>이라는 영화를 보면 스페인 선교사들이 남미에 선교하러 갔다가 핍박을 받지만 그 속에서 문화도 만들고 교회도 세우는 과정들이 나옵니다. 그렇게 종교적인 부분에서뿐만 아니라 16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해군력이 강하고 바다를 지배할 수 있어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5세기 말인 1492년 이후부터 신대륙을 향해서 두 나라는 배를 이용해 남미를 점령했습니다. 그 때 세계적으로는 15세기 말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이 유럽에서 불길처럼 일어났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사회에서는 ‘르네상스’라고 해서 문화가 꽃피고 문명도 일어났습니다. 이 물결을 타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바다를 점령한 위대한 힘을 가지고 남미로 향합니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하나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가톨릭 전통이 강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으로 유럽복판은 들끓고 있는데 가톨릭을 업은 포르투갈 스페인은 16세기 내내, 한 100년 동안 배를 타고 신대륙을 점령합니다. 남미에 가보면 남미 모든 국가가 스페인어를 쓰거나 포르투갈어를 씁니다. 브라질도 포르투갈어를 공용으로 쓰고 있는데 그걸 보면 바다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내부의 종교개혁은 종교개혁이고 르네상스는 르네상스지만 밖으로 나가는 힘이 굉장히 큰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남미는 거의 가톨릭교회입니다. 그런데 배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배 속에 물건도 실어야 하고 기술도 담아야 하고 먹고 살 것을 실어야 합니다. 소위 상업이 발달하고 무역이 발달해야 하는데 스페인, 포르투갈을 이어서 네덜란드가 아시아에서 동인도 회사를 만들고 세계 무역을 지배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17세기, 1600년대는 네덜란드가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 다음에 18세기, 1700년대가 되면서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불길처럼 일어납니다. 모든 주도권은 다시 영국으로 넘어갑니다. 역사가들이 18, 19세기, 1700년대에서 1800년대까지는 영국이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20세기가 시작합니다. 1차 대전이 생기고 2차 대전이 생깁니다. 누구나 다 그 때를 가리켜서 20세기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고 소련과 나누어서 세계를 지배했다고 얘기를 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종교적으로 말하면 가톨릭을 전파하는 선두주자가 되었고, 네덜란드는 칼뱅 사상을 받은 개신교를 주로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양쪽 기독교를 적당히 분배하셔서 가톨릭도 전하고 개신교도 전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미국과 소련이 지배하던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에는 미국과 중국과 21세기를 지배한다고들 얘기합니다. 20세기까지 우리나라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전쟁에 휘말려 많이 죽었고, 힘든데 먹을 것도 없어서 배고프고 추웠습니다. 그런데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이제는 G21의 하나가 되는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2025년이 되면 세계 제1의 군사강국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올 것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것은 그 때 가봐야 알겠지만 그 때까지 우리가 잘 살아서 그 전에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된 나라를 이루고, 우리도 21세기를 맞을 준비를 제대로 해서, 세계 전체의 흐름 속에 우리나라가 잘 되길 바랍니다 . 2025년까지 안 가더라도 이제는 세계 주역으로 나서서 무엇을 우리가 해야 할지, 어떻게 세계 속에서 소위 선진 강국답게 살아야 할지를 살펴보면 경제와 군사만으로 강국의 조건이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 이제는 문화도 강국이어야 하고, 사상적으로도, 예술로도, 윤리로도, 도덕으로도, 강국이 되어야 합니다. 하드 파워만 가지고 되지 않고 소프트 파워도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 우리 영력까지 합쳐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파워를 가지고 이 땅에서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전하며 문명도 맛보고, 끌려다니는 나라가 아니라 함께 주도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 우리가 모두 동의하는 꿈이고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저희한테 축복을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축복을 주시는데 그중에 하나가 ‘세례’라는 축복입니다. 세례는 일종의 허가증(license)입니다. 세례 받는 것을 단순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교인 됐다는 멤버십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세례는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선택받은 자가 하나님의 선택에 ‘예’라고 응답을 하고 하나님의 분신이 된 사건입니다. 학교에 입학하면 입학증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졸업하면 졸업증서를 받습니다. 아주 비근한 예로 운전하려면 반드시 운전면허증이 필요합니다. 면허증은 받았으나 운전하고 싶지 않으면 안하면 되고, 차를 운전하려면 면허증이 필수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살라고 하는 가정이라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운전 면허증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하는데 그 면허증을 “세례”라고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이름으로 살고 싶으시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헌신하고 싶으시면 여러분의 몸이 자동차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라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징적 사건이 있습니다. 세례라고 하는 사건입니다. 세례 받은 자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을, 함께하는 가정의 몸과 마음을, 직장을, 이 나라를, 기업체를,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할 하나님이 주신 자동차입니다. 그걸 운전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새기고 뜻대로 살겠다고 서약하고 받는 세례증서가 필요합니다. 세례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걸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운전면허 받았다고 그걸로 복 받는 게 아니듯 면허 받았으면 운전하면 됩니다. 수업을 잘 마쳤으니 이제부터는 사회에 나가서 배운 대로 열심히 살라는 것이 졸업증이지, 증서 자체가 전부는 아닙니다. 증서는 시작하는 자격증입니다. 세례는 세례 받은 자로서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라는 증서일 뿐이지 세례 받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면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로마서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몸으로 항상 산 제사를 드리십시오. 유대 백성들이 하던 방식대로 죽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제사 드리면 안 받겠습니다. 물건으로 예배드리면 안 받겠습니다. 사람으로 드리는 예배만 받겠습니다.” 그래서 산 제사라고 했습니다. “산 사람이 와서 직접 몸과 마음으로 헌신하십시오. 그것을 예배라고 하고 그 예배를 받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세요. 변화 받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좋아하는 뜻을 이제부터 펼쳐야 합니다. 세례는 그가 하라는 자격증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세례에 관해서 중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분량대로 사시고, 분수에 맞게 사시고, 믿음의 분량과 분수에 따라서 생각하며 사십시오. 우리 몸이 살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마음은 뭘 먹고 삽니까? 혼은 뭘 먹고 삽니까? 답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는데 마음은, 정신은, 생각을 먹고 삽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철학자들은 말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긴 합니다. 생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멋대로의 생각이 아니고 한자로 표현해 보면 살아있는 깨달음, 깨달아서 사는 것, 깨닫고 죽는 것이 아니고 깨닫고 사는 것, 살면서 깨닫는 것, 깨달으면서 사는 것, 뭘 깨달아야 합니까? 주님의 뜻을, 주님의 생각을, 주님이 주신 분부를, 주님과 함께 한 모든 축복이 있음을 깨달으면서 삽시다. 생각하면서 삽시다. 그 말을 사도 바울은 믿음의 분량대로 사는 게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전 세계가 이제는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전 세계가 새롭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각(覺)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생하고, 그래서 온 세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만큼 서로 돕고 살고, 그 일을 위해서 그렇게도 가난하고 힘없던 우리나라의 경제력, 정치력을 주시고 이제는 사고하는 능력까지, 문화와 예술의 능력까지, 정신의 능력까지 주셔서 면허증을 주시면서 “세계를 위해서 뛰어봐라. 뛰면서 행복하게 뛰어봐라.” 그렇게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발전했다고, 남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그렇게만 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21세기 문턱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대로 우리 스스로를 산제사로 드리면서 우리와 함께 하는 모든 세계에 우리가 받은 복을 나누면서 사는 결단을 합시다. 주님이 오셨다는데, 주현 하신다는데, 구체적인 모습으로 오신다는데 주현절을 지키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꿈꾸던 세상에서의 꿈, 윤리적인 꿈, 도덕적인 꿈, 생각 속의 꿈, 꿈이 만져볼 수 있는 만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랑하는 백성들아, 나를 믿는 백성들아, 내가 세례를 주노라. 세계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라. 그리고 그들도 함께 일해 봐라. 세례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다는 뜻입니다. 하늘 뜻을 섬기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줄 때는 한 사람 한 사람만 세례를 주는 게 아니라 나라에도 세례를 줍니다. 기업에도 세례를 줍니다. 가정에도 줍니다. 개인만 주는 게 아닙니다. 모든 공동체에 함께 세례를 주되 세례를 주면서 하나님의 부탁이 있습니다. 하늘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택했다. 하늘나라를 가지고 가서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 하나님 뜻을 늘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펼쳐라. 내가 너를 좋아한다.” 하늘이 열리면 성령이 임하여 물로 받은 세례, 성령세례를 더하여 예수를 택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주도자로, 화신으로, 분신으로 예수님을 택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문자로 쓰여 있지는 않지만 문맥상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면 성령이 축복을 무한대로 부어 주실 텐데 단 땅도 열려야 한다. 요단강이 열렸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받고 뭍으로 나온 예수님께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렸습니다. 바다도 열렸습니다. 땅이 열리면서 열린 하늘에서 축복이 내려옵니다. 성령은 바로 이런 겁니다. 하늘이 열려서 물로 받는 세례, 성령이 함께 하는 세례를 베풀 텐데 단 세례 받는 자의 몸과 세례 받는 자의 땅과 세례 받는 자의 가정과 세례 받는 자의 마음은 열려야 합니다. 열린 곳에 하늘에서 오는 축복이 들어가지, 닫히면 축복은 다른 데로 갑니다. 세례 받으신 여러분, 세례는 자격증입니다. 면허증입니다. 구원의 자격증, 그것을 가지셨으면 활용하세요. 세례증서를 가지고 하늘에 갈 수 없습니다. 세례 증서를 받은 자는 세례 받은 자로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님께 신고하셔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이 세례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세례를 받을 때 무릎을 꿇고 고백했습니다. 하늘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땅을 열겠다고. 성령의 은사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 제 마음속에 생각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의 영을 담겠다고. 제 사고 방식에 인식의 가장 중심에 하늘 뜻을 담겠다고 무릎 꿇고 약속하고 물로 세례를 받았고 그 때 하늘이 열려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인사법이 두 개가 있다고 합니다.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체온이 아쉽기 때문에 인사할 때, 체온을 서로 교환하고 싶어서 마구 끌어안는 포옹을 많이 합니다. 그런 인사를 x축 인사라고 합니다. 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 땀 냄새도 많이 나고 가까이 접촉하는 게 싫어서 멀리 서서 고개 숙여 인사를 합니다. 이걸 y축 인사라고 합니다. 어느 인사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더운 지역에서는 끌어안는 것도 별론 안 좋은 것 같고 추운 지역에서는 멀리 떨어져서 인사하는 것도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제는 x, y로 같이 갑시다. 하나님이 우리한테 오셔서 인사를 받으실 때, 여러분 멀리서 인사하고 싶습니까, 하나님 한번 끌어안고 싶습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릎 꿇고 하나님과 약속할 때 먼 곳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한테 성령의 은사를 y처럼 주시고, 일단 세례 받고 아멘으로 응답할 때는 직접 오셔서 우리를 x처럼 끌어안고, 뉴기니 사람들처럼 손가락 껴가지고 한참 흔들다가 놓는 방식으로 하시든지, 티베트 사람들처럼 귀 양쪽을 혀를 내밀면서 인사를 하실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하나님의 부탁이 있습니다. “세례는 내가 주는 축복이다. 하늘이 열린다. 땅이여 열려라. 하나님의 마음이 열린다. 사람의 가슴도 열고 몸도 열어라. 그 속에 축복을 주마. 받을 수 있는 만큼 받아서 배를 타고 가든지 비행기를 타고 가든지 자유로 여러분은 온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가면서 그대들도 기뻐하고 세계에 기쁨을 주고 모두가 함께 하자.” 세례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주는 축복의 은사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축복입니다. 단 항상 열려진 하늘을 향해서 땅을 열라고 하십니다. 괴로우시면 하늘 보시는데, 열린 하늘을 쳐다보면서 금년을 살아갑시다. 하늘은 열려있습니다. 열린 하늘과 열린 땅에만 은총이 함께 합니다. 우리 땅도 엽시다. 마음도 엽시다. 그래야 주님이 주현하실 것 아닙니까? 주님이 오실 것 아닙니까? 세례는 그런 겁니다. 이제 세례 받은 우리는 영으로도 받았고 물로도 받았고 일상생활로도 받았고 모든 은총을 받았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변화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고 여러분의 믿음의 분량만큼 최선을 다해서 산제사를 매일매일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당신들은 내 사랑하는 아들과 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