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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사건의 성서적 의미/ 창25:22-26/ 2003-02-26
9.11 사건의 성서적 의미 창25:22-26 작년에 붕괴된 뉴욕의 쌍둥이 빌딩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쌍둥이 형제 바로 그 에서와 야곱의 상징 이었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처인 리브가가 오랜 기도 끝에 나이 많아 갓 갓으로 잉태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 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국민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 동이 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갓 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 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 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60세 이었더라.\" 고 성서는 말 하고 있는 것이다. ( 창 25:22-26 ) 그러므로 이 쌍 동이가 오늘날까지 세계역사 속에서 무려 3700 여 년 동안을 두고 싸워 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재발 되어 지금 우리 앞에 현실로 가시화 되어 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우리는 이것을 세기적인 대 위기로 깨닫고 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바라보며 여기에 던져진 하나님의 교훈을 지금 똑바로 찾아내야 한다. 오늘날 저 아랍. 이슬람권과 그리고 저 유대. 기독교 권 간의 동서 대립은 그것이 바로 에서와 야곱의 싸움이며 그것이 곧 오늘날 세계 모든 분쟁의 씨앗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거대한 세기적 대결을 종식 시킬 자가 누구 일까 ? 여기에는 하나님 밖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감히 누가 나서는 자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오만이며 그래서 그것이 필경 착오가 될 것이 틀림없다. 이 쌍둥이의 대결은 한때는 이스라엘 역사 자체 속에서도 나타나 400 여 년간이나 남북 왕조의 분열과 대결로 가시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두 왕국의 멸망으로 끝장을 보이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때에도 ( 렘 29:4,38:3) 앗시리아와 바벨론을 몽둥이로 쓰셨다. 그러나 그 후 해방을 얻고 돌아온 후에도 유대인 들은 사마리아를 적대시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배제시킴으로써 그 분쟁의 종결을 이루지 못 했다. 그리고 유대교를 탄생시킴으로 세계역사 안 밖에서 쌍둥이의 투쟁을 다시 재개 해 온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은 유대 땅에 오셔서 원수를 사랑 하라 사마리아를 사랑 하라 하셨다. 그래서 이 쌍둥이의 투쟁을 도말 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어 주셨다. 그리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떠나신 것이다. 그런데 그 동안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까지도 지금껏 그 쌍 동이 투쟁을 세계 역사에서 한번도 떨쳐 버리지 못해 왔다. 오히려 그 투쟁의 대행자로 기독교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연속하여 기독교 2000 년 역사와 인류 역사를 거의 피로 얼룩 지우며 전사의 역할을 대행 하여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 해석으로 볼 때 오늘의 저 뉴욕 쌍둥이 빌딩은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역사적 그리고 그 종교적 상징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해온 에서와 야곱의 그 투쟁의 표적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마침내 인류의 화목과 그 평화를 대신 하는 희생양으로 오늘날 저렇게 붕괴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쌍둥이 빌딩 붕괴는 새삼스럽게 빈 라덴 ( 앗시리아 ) 의 짓이라 지목 할 일이 아니다. 또 후세인 ( 바벨론 ) 의 짓이라 모라 부칠 일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미국은 지금 이 역사의 교훈을 정중히 받아 들여야 한다. 물론 여기서 그 공격을 수행 한자는 부시 대통령이 말 한 것처럼 분명히 악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마를 몽둥이로 쓰셨던 것이다.( 사5:25-30,렘5:15-18 ) 그런데 그 악마를 때려잡겠다고 반격전을 벌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향한 도전이 되고 만다. 그러면 그 결과는 상상 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쓰신 몽둥이는 하나님 자신이 거두실 것이기 때문이다. ( 사10:5-19,렘51:59-64 ) 그러므로 오늘날 동서의 세계는 이 차제에 피차 서로 과거에 저질렀던 모든 역사적 죄부터 인정해야 한다. 선조들의 허물이 곧 우리의 허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그것을 다 털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대 각성을 통한 참회의 운동과 위대한 속죄의 역사와 그리고 놀라운 화해의 한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미 국민의 마음은 그 비통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참고 견뎌야 할 때이다 그리고 이때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미국은 이번 상처를 희생양으로 삼고 동서 화해를 위해 3700 년 만에 찾아 온 이 세기적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기회를 굳게 붙잡고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세기적인 놀라운 대 화해역사를 반듯이 이루어 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오직 미국에게 만 주어진 위대한 기회이자 위대한 은혜 인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미국을 이처럼 쓰시려고 그 동안 2000 년을 참아 오셨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축복은 오늘날 미국의 무조건적 용서와 조건 없는 전쟁 포기로 영광스럽게 성취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는 미국과 겨룰 대적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너진 쌍 동이 터 위에는 다시 또 그 쌍 동이를 지어서는 아니 된다. 거기에는 만국민의 화해를 위한 사랑의 평화공원을 건설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곧 2000 년 만에 처음으로 교회가 원수를 사랑 했다는 첫 기념비가 될 것이며 그래서 그것이 또한 21세기에 빛나는 머릿돌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미국을 만대에 빛나게 하는 오직 하나의 길이며 그래서 한층 더 공의로운 나라 세계 속에 위대한 미국을 만드는 오직 한 길이다. 그리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고 알라 신) 반듯이 오늘의 이 미국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다. 그래서 21세기는 확실히 참 평화의 세기 즉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세기로 다시 계속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 땅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5:43-44에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 하며 너희를 핍박 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로만 제자들에게 명 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몸으로 행 하셨다. 그것이 바로 그의 십자가의 죽음 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었으며 기독교 윤리의 기초가 된 것이다. 그런데 과연 기독교가 오늘날까지 이 계명을 스스로 지켜 왔던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이다. 원수를 사랑 하는 종교 이다. 유대교는 율법의 종교 이었다. 이슬람도 율법의 종교이다. 율법의 종교에는 원수가 있다. 대적이 언제나 상존한다. 그래서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 하는 종교이다. 원수를 철저히 갚고 보복을 앙갚음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이런 종교에서는 자기 신의 원수에 대해서 자살 특공쯤 감행 하는 것이 예사이다. 그렇게 신에게 충성을 보이는 그것이 바로 칭찬 받는 그들의 신앙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믿는 신자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의 신 자신이 문제이다. 그들 신 자신이 일정한 원수를 갖고 있다는 그 사실이 문제 이고 또 신 스스로가 일정한 대적을 갖고 있다는 그 사실이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런 신들은 진작에 인류 역사에서 살아졌어야 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 때문에 신들이 죽어야 세계에 평화가 온다. 는 말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질투의 신이 이었으며 전쟁의 신이였다. 그래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다윗은 힘주어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이 전쟁을 통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기도 했지만 또 그것으로 매를 쳐 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여호와는 결국 그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과 끝 이였다. 스스로 낳고 스스로 잡아먹은 역사이다. 그러므로 이런 신이 존재 하는 한 세상에서 전쟁은 살아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신은 자기 스스로가 원수를 갖고 있으며 그래서 명하기를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이와 같이 세상에 증오의 씨를 남겨준 유일한 신이 이었던 것이다. 모세는 바로 이 신의예언자 이었으며 마호\'X도 바로 이 신의 마지막 예언자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말씀 하시기를 여호와는 원수를 미워하라 했다지만 나는 너희에게 명 하노니 원수를 사랑 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야훼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다른 점이다. 그래서 그 차이가 마치 땅과 하늘인 것이었다. 원수를 미워하라! 와 원수를 사랑 하라! 이다.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 이 사랑 앞에는 법도 굴복하고 힘도 엎드리며 욕심도 살아지고 명예도 물러간다. 그러므로 오직 이 사랑만이 세상에 참 평화를 가져온다. 혹자는 이 사랑의 최대의 적이 증오라고 말 한다. 그래서 세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최고의 주범이 이 증오라고 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원수가 없다. 대적도 없고 증오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이 위대한 것이다. 증오가 혹 세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원인이 될 수는 있다. 그러기 때문에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이 그렇게도 오늘날까지 세계평화를 깨뜨려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동안 세상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증오를 잠재우고 해소 시키는 마지막 수단은 사랑의 힘이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적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존재 하는 곳에는 증오가 없다. 그래서 전쟁도 없다. 지난 9월 11일 뉴욕 쌍둥이 빌딩 붕괴는 바로 이 증오가 만든 결과였다. 세계에서 교회당은 어디에나 그렇게 충만 해 있지만 그러나 그 속에 사랑이 부재 했던 때문이다. 증오는 정의를 가지고도탄핵 될 수 없다. 증오를 미워하고 탄핵 하면 전쟁만 더욱 초래 될 뿐이다. 증오는 오직 사랑의 물을 먹어야 녹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증오는 사랑만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증오를 뿌리 뽑는 방법은 사랑의 길 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구일일 사태’는 미국을 일깨워 준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세계를 일시에 일깨워준 사건이다. 특별히 2천년 간 잠들어 왔던 기독교를 그 잠에서 깨워 준 하나님의 섭리였다. 기독교는 구약의 종교가 아니다. 분명히 신약의 종교이다. 여호와의 종교가 아니라 명백히 그리스도의 종교 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호와의 계명과 같지 않은 아주 다른 명령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원수를 미워하라 대신 원수를 사랑 하라는 명령 이였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 2 천년을 살펴보면 교회가 예수님의 이 계명을 진실로 순행하고 실행 했던 시대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여호와의 구약적 계명만을 따라 원수를 여전히 미워 해 왔으며 대적을 두고 자기들의 장막만을 넓히려고 (개종 선교) 거기에 만 혈안 되어 왔을 뿐이었다. 그래서 2000 년 동안 기독교는 정복과 착취로 그리고 투쟁과 전쟁으로 만 점철 해 온 것이다. 유럽에서나 아메리카에서나 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볼 때 저 ‘구일일’은 단순한 인간의 역사가 아니었다. 세기적 전환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낸 하나님의 역사 였다. 그것은 결코 미국 땅에 내려진 어떤 저주나 심판이 아니다. 세계적인 평화의 기회를 알려 주는 더 놀라운 축복의 신호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이 신호를 엄숙히 바라보고 주어진 이 세기적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그냥 흘려버리지도 말아야 한다. 주어진 이 축복을 과거 2000 년 동안 기독교가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한 참회의 기회로 지금 그것을 대체 시켜야 한다. 그리고 지난 400 년 동안 이 땅에서 저질렀던 미국의 그 수많은 죄에 대한 참회의 기회로 그것을 전환 시켜야 한다. 부시는 미국에 주어진 이 기회를 지금 어떻게 처리 해 갈 것인가?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놓치고 말 것인가 ? 보복의 칼은 반듯이 더 큰 보복의 불을 불러 온다. 쌍둥이의 그 싸움이 400 년도 아니고 2000 년도 아니라 3700년을 두고 그렇게 싸워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을 여하 한 일시적 힘이나 보복으로 끝내어 보겠다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반역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그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바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미국이 세계를 대표 하는 기독교 국가라 자처 한다면 지금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못 하다면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그 명예를 내어 놓아야 한다. 원수를 사랑 하라 ! 이것은 야훼의 명도 아니고 알라의 명도 아니다. 분명한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다른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 자신이 지켜야 할 계명이라는 말이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 오늘날 미국이 원수를 사랑 하는 길은 테러리스트들을 무조건 용서 하는 길이다. 그리고 전쟁을 포기하는 길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든 정치적으로든 적대국을 도와주고 최대로 사랑 해주는 길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다리는 일이다. 이 위대한 계명을 실천 하는 일이 바야흐로 지금 미국의 부시 정부가 해야 할 선택이다. 이 선택 이야말로 그것이 바로 오늘날 미국이 받은 위대한 은혜이자 축복이기 때문이다. 이 축복의 선택이 바로 미국을 앞으로 이 세계 속에서 살리고 세우는 길이 될 것이며 또 세계를 이 우주 속에서 살아남게 하는 길이 될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기회이다. 테러는 하나님이 일시 쓰신 몽둥이 이다. 그러므로 그 몽둥이는 반듯이 하나님이 다시 거둘 것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거둘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가장 귀한 책/ 딤후3:14-17/ 성서주일설교/ 2003-12-12
가장 귀한 책 딤후3:14-17 오늘은 세계 교회가 함께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66권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합니다. 원래 성경은 원본이 없습니다. 바울이나 모세, 선지자 등 원저자가 기록한 원본을 베껴 쓴 사본들밖엔 없습니다. 이런 사본은 파피루스나 양가죽에 옮겨 베껴 쓰고, 또 베껴 쓰면서 오늘날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1450년 요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으로 인쇄가 가능해졌고 성경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게 역사하시고, 또 참된 성경만 정경으로 선택되게 섭리하신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해야 합니다. 또, 다른 성서주일 제정이유는 성경을 널리 보급, 전파함으로 복음이 확산될 수 있도록 도모하는데 있습니다. 한글로 성경이 처음 번역된 것은 1877년에 로스 목사와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등에 의해서입니다. 1882년에 최초의 한글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니복음젼셔』가 만주에서 출판되었고, 다음 해 서상륜이 이런 한글 복음서를 한국에 들여왔습니다. 1887년에는 최초의 신약성경 전권이 한글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성서주일은 1899년부터 우리나라 모든 교회가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6,000여 개인데 성경이 번역된 언어가 2,200여개입니다.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아 복음을 못 듣는 종족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는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일에 우리가 동참해야 할 때입니다. 성서주일 제정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을 맞아 왜 성경이 그렇게도 귀한 책인지를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은 성경의 저자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16)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본래 약 40여명의 기자들이 1,500년의 세월을 통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이 쓰인 장소와 환경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각지에서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이 책을 기록한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선지자, 목자, 군인, 의사, 어부 등 그 하는 일도 다양했습니다. 이들은 서로 의논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각각 다른 저자들이 다른 장소에서 썼는데 하나의 교리, 하나의 구원계획, 하나의 윤리, 하나의 신앙법칙을 담고 있는 한 권의 책으로 통일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40명이 기록했지만 저자는 성령님 한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야 그렇게 통일성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40명의 저자들을 감화 감동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놓고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각 필사자들이 성경을 기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자들은 쓰임 받은 도구들이었을 뿐이지 성경의 원저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기록물이나 소설, 위인전기가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기록한 정확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믿음으로, 깨끗한 자세로 이 성경을 읽고 탐구하는 자들은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쓰인 책이기에 아무나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물론 성경에서 세계사나 윤리, 고대의 제도 등을 배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성경의 목적은 아닙니다. 성경의 목적을 따라 읽고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이런 책이 또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이런 이유로 해서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것으로 알고 읽고, 듣고, 연구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세상에는 무수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책에 길이 있다고도 합니다. 책들의 내용이 인생의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생의 길만 있는 게 아니고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책에도 구원받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은 없습니다. 육신의 질병, 마음의 질병을 고치는 책은 많아도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책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책인 것입니다. 성경은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와 같은 우리에게 나침반 역할을 하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삶의 안내서입니다. 성경은 죄인인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에게로 인도하는 귀중한 안내서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죽지 않고 영생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 길만 따라가면, 그 불빛만 따라가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책이 어디 있겠습니까? 캄캄한 밤중에 시골길을 걸어본 사람은 등불 없이 밤길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 것입니다. 등불이 없으면 넘어지기 쉽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 횃불을 들고도 논 가운데로 들어가 빠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이 어둡고 침침할 때 구원의 빛이 되십니다. 그런 말씀이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성경을 떠나서 구원을 말한다면 아마 이단일 것입니다. 성경의 원리를 이탈하여 구원을 말한다면 그것도 이단일 것입니다. 성경의 원리를 따르면 누구나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계시는지 어떤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은 너무 귀중한 책입니다. 성경은 완전을 추구합니다 성경의 유용함에 대한 오늘 본문입니다. (16,17절)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성경은 교육하기에 합당한 책입니다. 모든 삶 가운데 어린아이를 올바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교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교훈도 성경으로만 가능합니다. 성경은 책망도 있습니다. 잘못된 교리나 행동의 오류를 바로잡고 이단자들의 거짓을 밝혀내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바르고 곧게 살도록 합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바로잡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길로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런가 하면, 엄격한 정의의 책입니다. 그러니 교육하기엔 이 성경보다 더 알맞은 책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의 귀중한 가치를 몰라서 그렇지 실은 학교에서 성명만 가르쳐도 옳고 고른 인재를 넉넉히 키워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온전하게 만드는 진리가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입고 변하여 주의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때는 쓰인 책이 아니라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말입니다. 살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우주관이 새로워지며 인생관이 달라지고 생활관이 바뀝니다. 성경은 사람을 능히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성경책이 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서주일을 맞이하여 인생에게 가장 귀한 책인 이 성경을 바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보석이라도 개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아무리 귀한 성경이라도 그 가치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성경의 가치를 발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직접 쓰신 성경을 구원의 책으로 확신하고 순종함으로 영생의 길로 정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완전에 이르기 위하여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알고 지키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가정에 대한 성경적 교훈/ 엡5:22-엡6:4/ 김동호 목사/ 2004-05-23
가정에 대한 성경적 교훈 엡5:22-6:4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당신의 최선을 다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지어 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빛과 물 그리고 하늘과 땅과 같은 자연입니다. 둘째는 식물입니다. 셋째는 동물입니다. 넷째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의 순서에는 중요한 이유와 까닭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자연을 창조하신 것은 그 다음에 창조하실 식물을 위함이요 하나님께서 먼저 자연과 식물을 창조하신 것은 그 다음에 창조하실 동물을 위함이요 하나님께서 먼저 자연과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신 것은 그 다음에 창조하실 사람을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다 중요한 것을 나중에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피조물은 여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마지막에 창조하신 것이 바로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하와를 돕는 배필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를 위하여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입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창조의 순서와 그 순서의 중요성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은 남자를 또한 여자를 위하여 먼저 창조하셨다는 의미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는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섬기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쌍방적인 섬김의 구조라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것은 가정입니다. 아담을 위하여 하와를 그리고 하와를 위하여 아담을 창조하심으로 하나님은 가정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귀한 창조는 에덴이 아니라 가정입 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 아름다운 에덴을 다 맡겨 주셨지만 아담은 행복해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서 그에게 아내를 주시고 가정을 만들어 주셨을 때 그는 비로소 행복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이 에덴 보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더 중요하고 귀하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에덴과 같이 아름답고 풍족한 세상에서 산다고 하여도 가정이 흔들리거나 깨진다면 그 사람의 불행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세상이 흔들리 고 어려워진다고 하여도 가정이 든 든하고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면 그 힘든 세상도 능히 이겨 살 수 있을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능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목회입니다. 목회는 저의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목회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습니 다. 목회는 그만큼 제게 소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회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입니다. 저는 신학대학 졸업반 때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는 신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목회를 한 햇수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고 결혼 생활을 한 햇수가 거의 같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정에 어려움이 있었던 때가 있었고 목회에 어려움이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씀을 드리자면 목회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가정은 안정이 되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던 때가 있었고, 목회는 안정이 되고 발전도 있었지만 가정이 안정이 되지 않아 심각하게 흔들렸던 때가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목회는 안정이 되었는데 가정이 흔들렸을 때 가정으로 인하여 안정되었던 목회도 결국은 흔들렸습니다. 가정적으로 가장 어려웠을 때 저는 성공적이었던 그리고 저에게 생명과 같았던 목회를 포기하려고 하였습니다. 가정이 흔들리자 도저히 목회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회는 아주 힘들어지고 어려워졌지만 가정이 안정이 되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가정의 안정으로 인하여 힘든 목회를 잘 수습하고 목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곳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국에는 다음과 같은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왕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와 결혼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를 법으로 정한 것이었는데, 영국의 법은 왕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를 18세로 정하였고 결혼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를 20세로 정하였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법을 통하여 영국이 얼마나 결혼과 가정을 중히 여겼을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은 나라 보다 가정이 더 중요하고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그 것은 참으로 훌륭한 지혜였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게 되거든 그 아들을 위하여 하루에 한번씩 기도하라. 사랑하는 아들이 전쟁에 나아 가 전투를 하게 되거든 그 아들을 위하여 하루에 두 번씩 기도하라. 그러나 그 사랑하는 아들이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미게 되거든 그 아들을 위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라. 이와 같은 격언에서도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가를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가정을 중히 여겼던 영국과 러시아의 지혜가 저와 여러분들 속에서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 해 주신 가장 소중한 축복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을 지키고 가정을 복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하여 자기의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사업에 성공을 하고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정말 피나는 노력을 다합니다. 그것은 옳은 일입니다.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대부분은 보다 중요한 가정을 위하여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큰 낭패를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적을 위하여 그리고 직장과 사업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상의 노력을 우리는 가정에 쏟아야만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우리의 가정을 정말 사철에 봄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가정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에 게 주시는 몇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지혜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복된 가정의 기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 분의 말씀을 삶의식과 원칙으로 삼아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려고 하는 믿음없이 행복하고 복된 가정을 꾸밀 수는 없습니다. 사철에 봄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가정이 되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예수를 잘 믿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녀가 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음으로 생명을 걸 고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녀 온 식구가 다 예수만 섬기는 가정이 되기를 위하여 힘쓰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필코 쟁취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행복한 가정 생활에 있어서 필수입니다. 둘째는 질서입니다. 복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질서를 잘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를 질서 있게하시기 위하여 권위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를 질서 있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당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와 같은 권위를 주셨습니다. 교회를 훌륭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것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목사와 항존직분자의 재신임 투표를 결정하고 담임 목사는 이미 지난 3월말에 재신임 투표를 하였고 장로와 집사 그리고 권사와 같은 항종 직분 자들은 연말에 재신임 투표를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하여 총회 헌법위원회가 항존직분자들이 부덕한 일을 하였을 경우에는 공동 의회에서 재신임을 물을 수 있지만 저들이 부덕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재신임을 물을 수 없다는 해석을 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헌법위원회의 법해석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헌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데 ’부덕’이라는 용어를 쓰는 자체가 문제가 있습 니다. ’부덕’이라는 말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단어이지 법을 다룰 때 쓸 수 있는 단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와 우리 교회의 당회는 이와 같은 해석을 바로 잡고 우리가 하려고 하는 재신임 투표를 합법적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저희 당회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헌법이 바뀔 때까지 우리가 보기에는 옳지 않아 보이지만 헌법위원회 해석과 결정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이 세워 주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제가 생명을 걸고 하려고 하는 개혁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교회의 질서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가 있듯이 가정의 질서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가 있습니다. 가정의 질서를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질서를 위하여 부모와 남편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녀와 아내에게 그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모와 남편이라고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선 저들의 권위를 인정해 주고 저 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은 절대로 비겁한 일도 아니고 어리석은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지혜롭고 훌륭한 일입니다. 저는 이번 총회 헌법위원회가 내린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의 권위를 인정하여 우선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순종한다고 해서 재신임 에 관한 일을 포기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이 주장이 총회에서 받아들여 질 때까지 기도하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원칙과 정신이 가정에도 있어야만 합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이와 같은 원칙을 받아들여 남편과 부모를 대한다면 정말 훌륭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리라고 저는 확 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우리 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셋째는 사랑입니다. 부모와 남편에게 권위를 주셨다고 그것을 남용하거나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됩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복종하지 아니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아내와 자녀들에게 불순종의 본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들에게 원칙적으로 부모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 주고 순종하려고 하는 사랑의 마음도 기본적으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과 부모가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잘못 오해하여 함부로 군림하려고 하거나 그 권위를 남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내와 자녀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모든 남편과 부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와 남편은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군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는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내와 자녀의 인격을 존중 해 주어야 합니다. 넷째는 떠남입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5장 31절에 보면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윤리적 뿌리를 이루고 있는 유교는 가정의 중심을 부부에 두지 아니하고 부모와 자식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정의 중심을 부부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 서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를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모를 무시하고 아내만 사랑하라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가르치심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식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를 떠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떠나게 해 주어야만 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키운 자녀가 어느 날 갑자기 이성을 만나 게 되고 그 이성을 사랑하게 되어 부모를 잊어버리게 될 때 어느 부모가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사랑한다면 놓아 주어야만 합니다. 떠나게 하여야만 합니다. 마음껏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인정해 주고 축복해 주어야만 합니다. 저는 제 아이에게 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인정해 주마 그리고 축복해 주마 그리고 내 며느리로 사랑해 주마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애비 생일을 새까맣게 잊어 버리고 넘어가는 놈이 자기들이 사귀는 여자 친구의 생일을 잊지 않고 장미를 다발로 보낼 때 배신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것을 인정하려고 합니다. 아비 생일을 잊어버린 것은 책망하고 꾸짖어야만 하겠지만 아이가 제 여자 친구에게 장미를 보내는 것을 시샘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을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해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이 나보다 자기 아내와 자식을 더 사랑하고 빠지는 것을 인정해 주려고 합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떠나 보내 줄줄 알아야만 합니다. 마음껏 자기 아내와 자식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한 걸음 뒤로 물러 서줄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이 떠나 보낼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우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습에는 아직 잘 맞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관습이 중요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사람 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가정을 귀히 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소중한 가정을 정말 사철에 봄바람이 부는 가정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과 ’순종’과 ’사랑’ 그리고 ’떠남’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고 그 교훈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 해 주신 가정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어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동호 목사(서울 높은뜻숭의교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책/ 딤후3:13-17/ 2005-12-16
구원에 이르게 하는 책 딤후3:13-17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3-17) 이 시간 우리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번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성경읽기표를 한 장씩 나눠 드렸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는 그 이전부터 열심히 성경을 읽어 오시던 분들이 계실 것이고 또 그 읽기표를 받고 ‘아, 지금부터 성경을 읽어야지’하고 읽기 시작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어떤 분은 성경을 2004년도 들어와서 10번 가까이 읽은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2004년이 시작되면서 ‘올해는 성경을 다섯 번 통독해야지’하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목사이면서도, 성경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이면서도 사실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다섯 번 목표를 정했는데 지금 현재 세 번 반 정도 읽고 있습니다. 이 속도대로라면 연말까지 다섯 번 목표를 채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나름대로도 성경읽기 목표를 정하시고 성경을 읽어 나가시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들은 현대 문명의 많은 이기(利器)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도 옛날 사람들이 읽고 듣고 연구하던 것과는 아주 판이할 정도로 다른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CD를 두장 가지고 왔는데 이 한 장의 CD는 비상용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O.K.통독성경이라는 CD입니다. 이것을 컴퓨터에 넣어서 제일 빠른 속도로 돌리면 12시간 만에 성경을 한 번 다 낭독을 해 줍니다. 12시간 만에 성경을 다 낭독을 하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경이 낭독됩니다. 제가 들어 봤을 때는 약 36시간 내지 40시간 속도로 하면 듣고 이해하는 속도입니다. 아직도 12월 중순이 접어들었는데 성경을 한 번도 못 읽어 보신 분이 있으면 이것을 구해다가 연말이 되기 전에 한 번 들으셔도 좋겠습니다. 가격은 1만 5천원입니다. 장사 같은데 사무실에 말씀을 하시면 안내를 해 드릴 것입니다. 이만큼 성경을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또 이 한 장의 CD는 성경 원문에서부터 41가지 성경을 압축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Scholar Version이라고 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나 특별히 성경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CD입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성경을 읽기도 좋은 때를 살아가고 있고 듣기도 하고 또 수십 가지 성경을 서로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안 읽고 교회를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조사 기관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성경통독에 대한 조사를 해 보니까 교회 직분을 가진 집사님들 가운데서도 30%가 성경을 한 번도 통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성경을 한 번 완독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을 때 얼렁뚱땅 ‘나는 성경을 다 읽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집사 직분을 가진 분들 가운데도 성경을 한 번 완독하지 못한 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시도했던 적은 참 많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읽으려고 하다가 레위기쯤 가서는 우리와 상관없는 것 같은 제사법이 나오고 제물이 나오고 법규가 나오고 해서 포기하는 분, 어떤 분은 마태복음부터 시작했다가 마태복음 1장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으면 뭐하고 누가 누구를 낳으면 뭐냐’해서 성경에 대한 부정적인 첫인상을 가지고 성경은 나와 상관이 없는 책으로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사실 지혜가 필요합니다. 먼저 경험했던 사람들의 안내가 필요합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성경 안내서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처음 교회 생활을 시작해서 아직까지 구원의 확신도 없고 기독교 교리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은 구약에 있는 잠언이나 전도서 시편부터 시작하면 아주 쉽게 성경에 흥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특히 잠언은 31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놀랍게 깨달았던 것을 언어로 잘 요약한 책이 잠언입니다. 세계적인 중요한 신앙적인 명언들, 격언들을 다 모아 놓은 것이 잠언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읽어도, 안 믿는 사람이 읽어도 다 은혜가 되고 좋은 말입니다. 하루 한 장씩 읽으면 한달이면 잠언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읽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은 세계교회가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이 성서주일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과 나의 관계, 성경은 어떤 책인지, 그리고 아직도 이 지구상에 1/3이 되는 사람들이 아직도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성경은 성경이지. 성경이 어떤 책이냐고 물으면 어떤 책인가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은 거룩한 경전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서’라고 하면 틀렸고 ‘성경’이라고 해야 맞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성경주일’이라고 하지 않고 ‘성서주일’이라고 일반적으로 하는데 그러므로 이것은 틀린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좀 지나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일본 사람들은 성경을 성서라고 그냥 번역합니다. 영어에서는 Holy Bible이라고 합니다. 원래 이 Bible 혹은 Bibel 이라는 말은 비블리온(βιβλιον : 작은 책)에서 직접 유래했는데 이 말은 어디에서 왔느냐하면 나일강변의 파피루스 나무의 껍질을 잘 재단해서 거기에 글을 쓴 것을 비블로스(βιβλοꐠ)라고 한 것에서 왔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Bible이라는 말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경이라고 하면 Holy Bible, Holy Scripture, Heilige Schrift라고 합니다. ‘거룩한 문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구약 성경(Old Testament), 혹은 ‘신약 성경(New Testament)’이라고 할 때의 의미는 하나님의 언약, 즉 옛언약, 새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언약이라는 이 말은 라틴어 “떼스따멘뚬(Testamentum)”에서 왔습니다. “떼스따멘뚬(Testamentum)”이라는 말은 약속,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옛언약인 구약과 새로운 언약인 신약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경에는 구약이라는 개념과 신약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소위 구약-이 땅에 오실 메시야의 기록을 옛언약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야에 대한 기록 그리고 이 땅에 다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록을 새언약, 신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 지구상에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병든 영혼들을 고칠 수 있는 약은 어떤 약도 없고 구약과 신약 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성경의 특징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이 어떤 책이냐 했을 때 오늘 본문 말씀 16절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이 어떤 책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 34장 16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성경의 기록자들이 그 말씀을 받아 기록했고 이 말씀이 동서사방, 유럽에서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에서 이렇게 1600여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40여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서로 각기 각기 기록되었던 이 책이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이 책이 다 모아지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니 수많은 구슬을 잘 꿰맨 것처럼 이 땅에 오실 메시야와 오신 메시야가 그리고 다시 오실 메시야가 한 주제로(예수 그리스도)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약속과 말씀에 대한 성취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신약은 그 구약에 대한 성취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 땅에 오시리라는 메시야의 재림에 대한 또 다른 약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만큼 진실 된 책은 없습니다. 이 성경은 구원에 대한 지혜가 있게 하고 지식이 있게 하는 책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는 안내서가 바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수많은 말들, 수많은 단어들, 그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다른 말들을 다 빼 버리더라도 이 성경의 핵심 맥을 분명히 집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성경구절은 수없이 많이 외우는데 성경의 핵심주제를 잡지 못하고 신앙생활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합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으로, 영감을 통해서 성경의 기록자들이 성경을 받아 적은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자는 성령 하나님이시고 40여명의 기록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삶의 현장에서 받아 적은 대작이 바로 성경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되, 주의 말씀이 내게 일러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약 2500번 이상 등장합니다. 자신은 성경의 저자가 아니고 기록자임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형무소에 있는 수많은 죄수들이 이 성경을 통해서 변화되고, 성경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간증을 수없이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기록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반 서적과 성경의 차이점입니다. 또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롬 15:4).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요일 5:13). 또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은 구원의 안내서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이 없이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실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춰 주시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구원의 지도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성경을 읽는 사람과 단순히 지식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영문과를 다닌 분들은 킹 제임스 버전(KJV)을 읽습니다. 독문학 사람은 마틴 루터 판 독일어 성경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번역본이 영문학과 독문학 발전에 굉장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식적으로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허물을 깨닫게 하고 그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으로만 성경을 읽으면 그 성경구절을 잣대로 삼아 자꾸 다른 사람을 봅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나를 봐야 하는데, 나를 보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야 하는데, 성경 지식이 더해 가면 더해 갈수록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적이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이런 사람으로 변질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구원의 책으로 읽고 성경은 수천 년 전에 우리에게 주어졌던 고전으로서의 책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반도라는 이 역사적인 공간 속에서 21C를 살아가는 나를 향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이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에게 역사합니다. 2. 성경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어릴 때 동화책에서부터 수많은 종류의 책을 읽었습니다. 나에게 엄청나게 감동을 주었던 책도 있었습니다. 또 엄청나게 재미없는 책을 읽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가장 지루하게 읽어야 될 책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밤을 새워 읽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떤 책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을 새우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책들 가운데서 내게 유익하지 못한 책들도 있습니다. 내 정신세계를, 내 마음을, 내 심령을 황폐하게 만든 책도 있습니다. 너무너무 지겨웠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책을 읽으므로 내가 전문가로서 자격증을 땄을 수도 있고 내게 아주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준 책도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시면 어떻습니까?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 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멘을 한 분도 안 하시네요. 아이고, 목사님! 달기는 뭐가 달아요. 성경만 펴면 잠이 오고 성경은 저에게 수면제입니다, 수면제라고 합니다.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아마 속으로 동의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다른 책을 읽으면 잠이 안 오는데 어찌 성경만 읽으면 잠이 오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딱딱하게 여겨질 수도 있고 무미건조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책들 가운데 전공 필독서가 재미없는 책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전공 필독서는 재미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반드시 읽을 책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읽어 나가다 보면 거기에 대해서 재미를 느끼고 맛을 알고 그러다 보면 거기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목사들이 성경을 열심이 읽으라고 늘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고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성경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단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100% 성경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단의 밥이 되고, 이단의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근본 진리를 바로 알고 있을 때 그 어떤 잡된 사상이 나를 공격해 와도 우리는 거기서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자세히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건성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34장 16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한 번도 자세히 읽어 보지 않고 성경은 이런 책이다라고 쉽게 판단하기가 참 쉬운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 놀라운 진리의 말씀이 숨어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 12절에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깊이 읽어 보지도 않고 성경이 옳다 그르다 폄론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참 용감한 사람입니다. 무식에 대해 용감한 사람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베뢰아 사람들이 나았던 것이 그 말씀을 받고 이것이 진짜 그런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이 생명의 책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책이 구원의 책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이 험악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승리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공급하는 그런 능력의 책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벤허라는 책의 저자 루 월래스(Lew Wallace)의 예를 더 들지 않더라도 이 성경은 놀라운 능력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전합시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나라를 다녀보면 우리 대한민국이 우리가 불평하는 것만큼 그렇게 못사는 나라도 아니고 문제가 많기도 하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은 나라가 많습니다. 조금만 벗어나서 중국을 간다든지, 또 다른 곳에 한번 가 보십시오. 대한민국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모릅니다. 이 말에 공감하지 않은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경을 마음대로 가지고 성경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마음대로 가지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합니다. 그런 정치적 이유, 종교적인 이유, 사회 경제적 이유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제가 성경을 한 권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몇 년 전에 헌책방에서 산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6・25 전쟁이 한창일 때 대한성서공회에서 만든 성경입니다. 아마 그때 나온 책 중에서 이렇게 좋은 종이와 인쇄기술로 만들 책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만든 책 중에서 가장 고급 재질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외국에 있는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성서주일을 지키면서 헌금해서 한국에 보냈기 때문에 이런 최상의 책이 나온 것입니다. 세계 많은 나라 성도들이 이 성서주일에 헌금을 해서 아직도 성경을 제대로 갖지 못한 성도들에게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이 성경은 꽤 잘 만들어진 책입니다. 이 성경은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개방된 뒤 최초로 공동번역 성경을 헝가리어로 번역한 성경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아주 고급스러운 책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생각할 때 이슬람 국가들은 성경을 마음대로 가지고 볼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극소수의 사람만 성경을 접할 수 있습니다. 북한만 하더라도 이 공동번역 성경을 찍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공급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성경을 보냅니다. 캄보디아나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수많은 성경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더라도 선교사들이나, 선교단체들이나 성경을 보급하는 기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성경을 찍어서 공급할 수 있도록 우리가 이 일에 함께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을 나의 것으로만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 축복을 이 지구상의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복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과 성경/ 딤후3:15-17/ 성서주일설교/ 2001-12-12
그리스도인과 성경 딤후3:15-17 오늘은 대강절 셋째주일이고 전 세계 교회가 함께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 믿음이란 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직접 쓰시지는 않았습니다. 신구약 성경책은 총 66권으로서 약 1500여년에 걸쳐서 40여명의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기록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이 책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점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오늘 성서주일을 맞이하여 왜 성경이 사람들이 손으로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성경이 얼마나 중요한 책인가를 설교를 통하여 밝히려고 합니다.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지만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의 계시로, 성령의 역사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쓴 사람, 66권의 각 성경책을 쓴 사람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 책의 저자, 각 성경의 저자가 될 수 없기에 각 성경책을 쓴 사람을 가리켜서 저자라고 말하지 않고 기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자란 ’기록한 사람, 받아 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기자, 마태복음 기자, 요한복음 기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의미는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쓴 책이므로 사실 누구가 받아 썼든지 간에 그 기록자가 누구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 기록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성경 66권 중 어느 한 권을 읽거나 공부할 때 그 성경이 쓰여진 시대를 이해하고 성경의 문체를 이해하기 위해 기록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며 연구할 수 있지만 제일 중요한 한 것은 그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중심내용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20-21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이렇게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사람들이 받아 쓴 책 중에서 정경으로 정해진 성경은 창세기로 부터 요한 계시록 까지 총 66권의 책으로서 여기에는 큰 책도 들어있고 작은 책도 들어있습니다. 가장 큰 책은 시편으로서 150장이나 되는가 하면 가장 작은 책은 1장만으로 된 책으로서 구약에서는 오바댜 한 권, 신약에서는 빌레몬서 요한 2서 요한 3서 유다서 4권으로 신구약 총틀어 5권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큰 책들과 작은 책들을 쓰게 하셨습니다. 그 기간도 약 1500여년을 걸쳐서 여러 지역, 여러 사람의 손을 빌어서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기한 사실은 이 66권의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모든 기록자들이 서로 모여 성경을 기록하자고 의논한 적도 없었고 또 그렇게 모여서 의논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66권의 성경은 1500여년에 걸쳐서 다양한 사람들의 손을 거쳐 다양한 나라와 다양한 역사 속에서 기록되었지만 성령의 감동과 계시를 통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에 처음 부터 끝까지 완벽한 통일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책이 성령의 감동과 계시 가운데 쓰여지지 않았다면 오랜 역사와 많은 기록자들 속에 다양한 상황 속에서 쓰여졌으므로 내용도 각양각색이었을 것이며 통일성이라는 것도 전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사야 34:1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짝이 없는 것이 없으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니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기록된 성경 66권은 일차적으로는 기록될 당시 그 시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뛰어넘어 모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 말씀이 시대를 뛰어 넘어 모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시대 사람들만의 신이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신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마가복음 13:37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그리고 또 성경에 관하여 중요한 점은 성경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주신 백과사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은 요한복음 20:30-31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처럼 성경을 기록한 기록 목적이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데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구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게하기 위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약 창세기에서 신약 요한계시록 까지.... 성경의 관심은 인간 구원과 구원 받은 사람들의 바른 삶에 있으며 구원과 바른 삶에 관한 한 완벽한 교과서가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참된 삶의 교훈을 얻으며 잘못된 삶을 살 때 성경을 통해 책망을 받으며 그래서 우리의 삶을 성경을 통하여 바르게 고치며 죄인들에게는 의로운 삶을 성경으로 교육시킬 수 있습니다. ----------------------------- 독일의 사상가요 신학자이며 의사이며 음악가였던 20세기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 1875-1965)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며 자라난 사람이었는데 그는 성경을 통하여 참된 삶의 교훈을 받고 일평생을 주님께 헌신하여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그 중 한 예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쳐, 그는 독일의 알자스(Alsace)라는 지방에서 목사의 아들로 지금부터 125여년 전인 1875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알자스 지방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영토가 됨에 따라 그의 국적은 프랑스 국적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르게 잘 자라나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후 목사로서 또 대학교 교수로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어려서 부터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파이프 오르겔 연주자로서도 활약하였으며 또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연구도 하여 예수전에 대한 논문도 썼으며 또 음악에도 심취하여 바하 등의 명저도 썼으나........ 어느날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서 몹시 고통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교인 스트라스부르그 의학부에 청강생으로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가 의학 공부를 다 마친 다음 1913년, 아프리카의 적도지방이며 프랑스령인 오고우에(Ogooue) 강 하류의 랑바레네(Lambarene)에 도착하여 혼자 힘으로 병원을 개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을 모두 병원 유지에 쏟아 부었으나 점점 더 몰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에는 그 병원 규모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각지로 다니며 모금운동을 벌일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자기 고향인 알자스에도 들러 모금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향의 동료들과 친지 그리고 각계 인사들은 슈바이쳐가 기차역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모여 영접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조금있다가 기차는 도착하였고 환영나온 사람들과 기자들은 그 기차의 1등실 앞으로 우루루 몰려갔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슈바이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둥대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 맨 뒤칸 3등 열차에서 내려 초라한 모습으로 플랫 폼을 걸어나오는 신사 한사람이 비쳤는데 그가 바로 슈바이쳐 박사였습니다. 여러 가지로 놀란 사람들은 슈바이쳐 박사 앞으로 달려가서 그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아니 박사님, 어째서 3등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그들의 질문은 질문이라기 보다는 불평에 가까웠습니다. 그때 슈바이쳐 박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4등칸이 없어서 3등칸을 타고 왔습니다” 슈바이쳐의 이 대답은 그들 모두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겸손한 그의 말과 태도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저절로 모두 고개가 숙여졌고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제가 여기서 이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여러분은 앞으로 기차를 타려면 1등칸은 타지말고 슈바이쳐 처럼 3등칸을 타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형편과 처지에 따라, 그리고 필요에 따라 사람은 1등칸도 타야하고 2등칸도 타야하고 3등칸도 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삶을 살아나가는 삶의 자세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성경말씀에 따라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고 자기의 형편에 맞게 실제적으로 적절하게 도와주려고 애쓰면서 자비의 삶을 실천하였던 슈바이쳐의 삶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겸손한 삶의 자세! 그리고 헌신적인 삶의 자세! 이타적인 자비의 삶의 자세! 무엇이 그를 이토록 아름다운 삶의 자세를 갖도록 하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말씀을 자주 읽고 배우고 성경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면서 그대로 실천해 나아가기만 한다면 우리의 생애는 반드시 복된 생애가 될 것입니다. 신명기 30:11-14말씀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구가 생긴 이래로 하나님의 말씀은 읽고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다양한 삶의 환경 속에서 구원과 영생과 바른 삶과 그리하여 어려움 가운데서도 건강한 삶을 향한 용기와 자유함과 참된 삶의 의미를 제공하여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가고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난 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점점 회복시켜 나아가고 그리하여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소금으로 나아가게 하며 죄와 악의 구조 가운데 있는 이 세상을 변혁시켜 나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이고 아주 구체적인 말씀이 바로 성경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잘 읽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삶이 분주하고 바쁘다는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고전이란 인간의 삶에 유익한 책이기는 하나 사람들이 읽지 않고 모셔두는 책을 고전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측면에서 성경책은 책장에 고이 모셔두기만 하는 고전(古典)은 아닙니다. 열심히 읽고, 밑줄을 치고, 깨달은 말씀을 써 넣기도 하며 손 가까이 두고 매일매일 삶의 교과서로 삼아야만 하는 생명의 책입니다. 오늘 성서주일을 맞이하여 여러분들에게 성경읽기표를 한 장씩 나누어 드렸습니다. 유용하게 잘 사용하기를 바라며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성경/ 마5:17-20/ 성서주일설교
그리스도인과 성경 마5:17-20 1. 최고의 경영자 예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 20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가고 왔으나 오늘날도 예수님은 인류의 중심 기둥이며 진보대열의 지도자이다. 지금까지 진군하였던 모든 육군과, 조직화되었던 해군과, 개회되었던 모든 의회와, 통치하였던 모든 왕들을 합해 보아도 이 지구상의 인류에게 나사렛 예수 한 사람의 고독한 일생보다 더 강력하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교육학자들은 가장 위대한 스승의 모델을 예수님이라고 지목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요즘 일반 기업체의 경영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최고 경영자의 모델로 연구를 했습니다. 최고 경영자로서의 예수를 연구했던 로리 베스 존스라는 여성이 『Jesus CEO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녀는 광고, 마케팅, 비즈니스 개발회사인 존스그룹의 창업자이자 현 사장으로서 국제 인명 사전에도 올라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지금까지 두 경영스타일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남성적이며 권위적인 힘에 기초한 알파경영과 또한 여성적이며 상호협조적인 힘의 사용에 기초한 베타 경영으로 나룰수 있는데, 이둘을 결합한 것을 오메가 경영이라고 정의하고 이 오메가 경영의 모델인 최고의 경영자를 예수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리더쉽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수 많은 경영자들의 가치와 기술을 완전히 새롭게 뒤바꾸어 놓을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비 그리스도인 경영인들 까지도 읽혀지고 있는 필독서입니다. 예수님은 무식하고 형편없는 배경을 가졌고 성깔도 있고, 때로는 비겁했던 사람들과 함께 일했지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이 세상에 주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팔복으로 시작됩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팔복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내면적인 모습으로 예수님의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이 팔복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보다 무엇이 되느냐에 더 중요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란 예수님의 성품을 그대로 본받는 자입니다. 산상수훈의 두 번째 관심은 제자들이 가지는 이 세상에서의 영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세상에 영향력을 주어야하는 존재들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세상에서 그가 어디에 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바로 그 영향력은 썩어가는 세상속에서 방부제 역할을 하는 것, 그리고 무미건조한 이 세상의 삶에 살 맛이 나게 만드는 맛을 내는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또하나 는 빛으로서 어둠을 몰아내어 세상을 밝히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빛의 역할입니다. 2. 예수님과 성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런 소금과 빛으로 세상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절대적인 가치기준 즉 이세상에서 살아야 할 지침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해 완성하는 일이었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여기서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의 여러 가지 가르침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완전케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한 권 같지만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약은 또 39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수님에 대해 예언해 놓은 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은 27권으로 구약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어떻게 성취되었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을 중심 주제로 쓰여진 책이라고할수 있습니다. 요20:31절 말씀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예언을 그의 삶을 통해 하나둘 완성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에 관 최소한 334개의 예언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수백년전에 예언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성경을 완성시킨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동정녀에게 탄생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이사야 7:14→마1:23).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그 혈통을 타고 태어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태어난 장소도 베들레헴이라고 정확히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서 애굽으로 피신해야 할것도 예언되었습니다. 예루살렘성에 입성할 때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올것이라는 것도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은삼십에 팔릴 것도 예언되었습니다(슥11:12-13→마27:6-7).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처형될것도 예어되었습니다. 그리고 처형된 그 아래에서 그의 옷이 제비뽑혀 나누워질것도 예언되었습니다(시편22:18→요19:24).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용서의 기도를 드릴것이 예언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조차 버림받을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통속에서 목이 말라 초를 받으시게 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마지막 예언이 성취된후에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할것도 정확히 예언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출생부터 축음까지 그 수 많은 예언이 빈틈없이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 분의 삶은 말씀을 완성시킨 삶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를 살면서 끊임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그리고 그의 생의 마지막에 다이루었다고 감격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삶으로 완성하는 것이 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절대적인 기준이요 최고의 권위입니다. 3. 바리새인과 말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다고 할 때 우리는 성경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절대적 가치기준으로 받아드리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바리새인하면 우리는 대단히 나쁜 부류의 사람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들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대단히 존경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 바리새인들은 그당시 성경 말씀을 따르는 일에 열심을 내었던 사람들이 었습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이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최고의 열망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해 율법을 248개의 명령과 365개의 금지령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지킬려고 애를 썼습니다. 대단한 열정이 아닐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이러한 열심히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들의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다보니까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기준을 자기기준에 맞도록 내려뜨리게 된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기가 어려우니까 자기 머리에 이해되는 부분만큼만 받아드립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적당히 떼어버리고, 어떤 부분은 재해석하고, 어떤 부분은 합리화 해 버립니다. 또한 요즘 세상풍조가 다 그러니 뭐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믿을 것이 있느냐 대강 적당하게 살된되지 않겠느냐며 하나님의 기준을 자기수준을 끌어 내립니다. 1)바리새인들고 그랬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외형적인 것은 중요하고 내면적인 것과 세미한 부분은 무시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에는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부분이었고 두 번째는 사람에게 대한 계명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첫째는 중요하지만 두 번째것은 무시해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병을 고치거나 어떤 사람을 위기에서 건져주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일로 취급하고 정죄했습니다. 하나님 일에는 열심인데 사람의 일에는 무관하고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2)또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킨 것은 가르치되 행하지 않는 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르치면서도 자기들은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판단하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실랄하게 비판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저희의 가르치는 것은 본받되 행하는 것은 본받지 말하고 합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말만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는 사람은 행하면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하신 말씀이 1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러분 교회 오신 것을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시면 않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순종하면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들으면서 순종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반석위에 세운 집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향력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금과 빛처럼 세상속에서 부패를 방지하고 삶을 아름답게 맛을 내고 어두움을 몰아내고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기준으로 끓어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순종의 사람이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쓰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많이 모이는 교회가 진짜로 힘있는 교회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다수에 있는것입니다. 다수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될 때 그 교회는 이미 힘잃은 삼손에 불과합니다. 교회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 앞에서 전적으로 순종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 시대에 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서 기도했던 120명의 성도들과 함께 했습니다. 이들은 고난과 핍박이 와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포기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도망가면서도 예수를 전했습니다. 순종한 것입니다. 이들이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강력한 로마를 무너뜨렸습니다. 그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4. 바리새인의 의 오늘 예수님은 매우중요한 부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2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대단히 무서운 말입니다. 이 당시 제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세인의 의라고하면 금방 이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대살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가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의 의가 옳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고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세인들의 의는 무엇입니까/ 1) 바리새인의 의는 본질을 버리고 형식을 중시하는 의입니다. 바리세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면을 중요시합니다. 마23:27-28말씀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여러분 외형적인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면의것 본질적인 것을 버린채 외형적인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립니다. 더럽습니다. 예배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린채 주일 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내가 하나님앞에 해야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예배를 통해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알아 하나님을 위해 살겠노라는 새로운 결단과 결심이 있는 예배입니다. 교회일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물유지하고 건물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와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생명살리는 전도와 사람을 키우는 교육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건물이 필요한것입니다. 재정이 남아서 여유있을 때 전도하고 교육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어도 이일을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본질보다 다른 일이 이 일보다 더중요하게 생각되어서는 않됩니다. 사람들이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사람을 의식하게 되고 외형적인 겉치레로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2)바리새인의 의는 이기심에 근거한 의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르반”입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막 7 : 11에 보면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사람이 부모에게 해야할 당연한 의무를 행치않고 내가 하나님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부모님께 드릴려고 했는데 마침 그 돈을 모두 하나님께 드렸는데요”하고 들러데는 일입니다. 가장은 가장으로 의무를 가정행해야 합니다. 주부는 주부로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자녀는 자녀로서 부모에게 공경해야 합니다. 3)바리새인의의는 자기자랑을 위한 의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를 높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리새인들의 의는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중심적인 의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천국은 노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다. 열심히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열심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의입니다. 내가 이 시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깍아 내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을 내속에서 봅니다. 하나님의의를 힘입어 살려고 하기 보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살려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고 본질을 왜면한채 외적이고 형식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나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기 취해 말슴을 이용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 나를 드러내려는 모습을 봅니다. 이제 철저하게 말씀앞에 순종하고 내 삶을 말씀을 완성시키기 위해 살앗던 예수님을 닮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고백과 결심이 있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적에 대한 성경적 이해/ 마4:1-7/ 성서주일설교
기적에 대한 성경적 이해 마4:1-7 오늘 저는 잘못된 기적관과 성경적 기적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기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중요한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기적에 대한 올바른 성경관과 신앙관을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마귀도 행하고 귀신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때 애굽의 바로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모세는 바로 앞에서 나무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했습니다. 들고 다니던 나무 지팡이를 바닥에 던졌는데 뱀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바로가 애굽의 술객들도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들을 뱀으로 만들었습니다. 기적은 마귀도, 귀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기적관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특별히 우리민족은 지난 오천년 동안 샤머니즘적인 문화에 물들어져 있기 때문에 기적에 대하여 올바른 성경적 지식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우리민족의 토속종교는 샤머니즘이요, 기복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은 특별히 기적이나 은사나 복받는 것에 관심이 높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것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성경적으로 올바른 사고를 갖고 사모해야 합니다. 올바른 성경적 사고를 갖고 복을 구하고, 올바른 성경적 사고를 갖고 은사를 구하고, 올바른 성경적 사고를 갖고 기적을 구하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주위에 이단들에 의하여 사기 당하는 사례들을 보십시오. 거의 대다수가 자기네 지도자는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기적을 통하여 사람을 미혹케 해서 자기 말을 잘 들어야 축복 받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있는 재산 다 팔아서 그들에게 주고,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에 혼란을 주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기적과 은사에 대하여 올바른 성경관이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40일 금식기도 후에 마귀가 예수님께 접근하여 시험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돌들을 떡으로 만들 능력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조각으로 수 만 명을 먹이는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주님께서 돌들을 떡으로 못 만드시겠습니까? 그런데 돌을 떡으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다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인도하여서 그곳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예수님을 받들어 다치시지 않고 보호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위를 걸으시는 능력이 있으신 주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실 능력이 없으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셔도 몸이 상하지 않도록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뛰어내리시지 않습니다. 40일 금식기도이후 이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있는 말씀 속에서 성경적 기적관, 기적에 관한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적이 성경적 기적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돌들을 가지고 떡 덩어리를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들을 떡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것은 이 일은 하나님께 아무런 영광이 되지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없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몸이 상하지 않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데도 뛰어내리지 않은 것은 이일이 하나님께 아무런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과시성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남발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병든자를 고치셨을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치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기적은 그 사건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지 않는 기적은 결코 성경적인 참된 기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도 기적이 발생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기적의 통로에 불과한 인간에게 영광을 돌려서는 안됩니다. 그 기적의 통로에 불과한 인간을 높여서도 안됩니다. 그 기적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기적의 원천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닙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잘못된 신비운동이 이 문제에 걸려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잠시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할 뿐 최종적인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소위 능력있다는 주의 사자들이 가끔씩 나타나 때로는 사람들을 미혹케 하기도 하는데 그 순간에는 잘 판단이 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 기적의 열매가 하나님께 영광으로 나타나게 되느냐, 아니냐를 보면 우리가 진짜, 가짜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통하고 짜릿한 것을 마치 신령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적 기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 개인이 높아지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적 그 자체에만 놀랍니다. 하나님이 하셨는데 하나님은 없고 누가 기도했느냐? 누가 안수했느냐?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높이지 마세요. 하나님만 높이세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적을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기적을 통하여 나의 경제적인 것이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풍부해진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고 기적을 통하여 건강을 회복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건강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기적은 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둘째로 참된 성경적 기적관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누가 기적을 행하라고 했습니까? 마귀입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고, 마귀가 예수님께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었고, 성전에서 뛰어 내리실 수 있었지만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기적은 행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지만 하나님 뜻에 합당치 않을 때는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중에 3분의2가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에게 팔려 수난이 시작 되었을 때부터는 아무 기적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하였을 때 베드로가 검을 가지고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 뜨렸을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 예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세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해도 묵묵히 계셨습니다. 채찍을 맞을 때도 묵묵히 계셨고 가시관이 씌여 졌을 때도 묵묵히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골고다 언덕에서 피흘리고 계실 때, 군중들이 기적을 행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청산 하셔야 하기 때문에 기적을 행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음에도 기적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내가 하고 싶을 때 내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또 하나 놀라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기적만 보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기적이 일어날 때 놀라움을 갖습니다. 질병이 치료될 때 박수를 탄성을 지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겁니다. 기적을 보고 감탄하지 말고 질병의 치료를 보고 탄성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가장 위대한 기적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찾아다니지 마세요. 기적에 매료되지 마세요.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에 매료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질 때 비성경적 기적관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기적이 우선이 되어선 안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그 어떤 기적도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적을 보여 달라는 마귀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돌을 떡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여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지표가 되어야지 기적이 우리의 삶의 지표가 되어선 안됩니다. 혹 우리주위에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이 일어날 찌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틀린 새로운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임을 아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지 기적 중심으로 살아선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에 모든 기적은 잠시뿐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가 불치의 병에서 기적적으로 치료받았다 해도 영원히 이 땅에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다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인생들입니다. 그리고 기적 자체가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성경 그 어느 곳을 살펴보아도 기적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고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끝나도 변치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보다 말씀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잘못된 기적관에 유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 기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왜 기적을 행하시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모든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고,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기적이 절대로 우선이 되어선 안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적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자체가 기적의 삶이 될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딤후3:15-17, 요1:/ 성서주일설교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딤후3:15-17, 요1: 오늘은 성서 주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 주신 특별 계시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소식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구원의 길\\\"도 알 수 없다. 우리 인간의 \\\"구원의 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중간의 막힌 담인(엡2:14)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그 길이 열릴 수 없다. 이 막힌 담을 인간이 헐 수 없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그 중간의 막힌 담을 허셨다. 이 사실을 알려 주는 책이 바로 성경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하나님의 책이다. 인간의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인간의 책에 대한 기준으로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기준과 가치로 판단을 하고 있다. 문학적인 한 작품의 차원에서 보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신화적인 차원에서, 과학적인 차원에서 놓고 판단하고 가치 매김을 하고 있다.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이 판단하고 가치 매김을 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부정하고 무시해도 성경은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언어와 사람의 손으로 기록 되어졌지만 사람의 말이 아니다. 사람의 것이 아니다.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하나님의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에 대하여 살펴 보고져 한다. 1.신·구약 66권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무려 1600 여년에 걸쳐 약40여명의 성경 기록자들이 시간적으로, 또 지역적으로 달리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원에 맞추어져 있다. 왕, 정치인, 서기관, 제사장, 학자, 농부, 어부, 목자, 의사, 세리, 등등..... 이 성경 기록자들은 참으로 다양한 직업과 시대적,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신·구약 66권이다. 처음부터 66권으로 함께 묶여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각의 성경들이 사본의 형태로 전해져 내려왔다. 사본이란 처음 기록한 \\\"원본\\\"을 보고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을 말한다. 책의 수명이 오래되지 못하였고, 또 개인이나 지역적인 문제로 \\\"원본\\\"을 \\\"사본\\\"으로 기록하여 간직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본\\\"은 사라져 없어지고, \\\"사본\\\"의 \\\"사본\\\"으로 전해져 오다가 하나의 \\\"성경책\\\"으로 완성을 이루게 된다. 구약은 A.D 90년경 얌니야 회의에서 39권으로, 신약은 A.D 397년 칼타고 회의에서 \\\"정경\\\"으로 결정된다. \\\"정경\\\"이란 \\\"κανων \\\"으로 \\\"표준\\\", \\\"잣대\\\"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정식 성경\\\"이라는 뜻이다. 그때까지 여러 사람들의 기록들이 내려 왔으나, 성경으로 인정할 만한 책으로 신·구약 66권을 결정한 것이다. \\\"정경\\\"외에도 \\\"외경\\\"이란 책들도 있고, \\\"위경\\\"이라는 책들도 있다. 카톨릭에서는 이들 11권을 더 포함시켜 카톨릭의 성경은 개신교의 성경과 다르다. 이런 \\\"정경\\\"의 결정은 \\\"외경\\\"이나, \\\"위경\\\"의 범람으로 교회가 변질되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서 \\\"모세의 승천기\\\", \\\"동정녀 마리아 승천기\\\" 등이 있다. 이는 성경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에서는 \\\"참고하는 문헌\\\"으로서 바라보지 다른 성경과 같은 \\\"정경\\\"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톨릭은 그렇지 않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신앙관\\\"이 다르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위경\\\"인 \\\"마카비 하\\\"에 나오기에 카톨릭에서는 이 말씀을 기준으로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가능한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신·구약 66권이다. 구약 39권, 신약 27권으로 3×9 = 27로 기억하면 된다. 이를 분류해 나누어 보면, 구약은 ⑴.모세의 오경: 창, 출, 레, 민, 신, ⑵.역사서: 수, 삿, 룻,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 상하, 스, 느, 에, ⑶.시가서: 욥, 시, 잠, 전, 아, ⑷.선지서: ①.대선지서: 사, 렘, 애, 겔, 단, ②.소선지서: 호, 요, 암, 옵, 미, 나, 합, 습,학, 슥, 말, ※히브리 원문은 우리말 성경처럼 구약이라 하지않고 율법, 예언, 시.... 라 한다(눅24:44) \\\"예언 서\\\"에서 제1예언서로, 역사서를제2예언서로 선지서로 구분한다. 신약은⑴.복음서: 마, 막, 눅, 요, (공관복음: 마, 막, 눅) ⑵.역사서: 사도행전, ⑶.서신서: ①.바울 서신: ㉠.옥중서신: 엡, 빌, 골, 몬, ㉡.목회서신: 디모데 전후, 딛, ㉢.교리서신: 롬, 고린도 전후, 갈, 데살로니가 전후, 히, ※히브리서는 학자에 따라 바울서신혹은 공동서신에 넣기도 한다. ②.공동서신: 약, 베드로 전후, 요한1, 2, 3서,유다서 ⑷.예언서: 요한 계시록, 2.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다. 딤후 3:15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다. 베드로후서 1: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한 권, 두 권이 아닌 66권 모두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한다. 곧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어졌다고 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실 때에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이 성경 기록자를 지도하고 감독하신 일이 바로 \\\"성령의 영감\\\"이다. \\\"성령의 영감\\\"은 성경 기록자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 기록자의 사상, 지식, 재능, 성격, 언어 등.... 인간적인 요소를 동원하여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같은 사건의 기록일지라도 기록자에 따라 표현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전하려는 뜻은 일치하고 있다. 곧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 기록을 지도하고, 감독했다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 새긴 패를 놓고 보면, 마태: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마27:37) 마가: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막15:26) 누가: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눅23:38) 요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요19:19) 네 사람 모두 표현이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같은 사건의 \\\"죄패\\\"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이렇게 \\\"성령의 영감\\\"된 책이기에 약40 여명의 성경 기록자에 의해 1600여년에 걸쳐 기록되어졌으나 통일성을 잃지 않는다. 더욱이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또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중심된 주제를 통하여 서로간의 모순 없이 \\\"구원의 길\\\"을 조화롭게 보여 주고 있다. 3.살아 있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다. 베드로전서 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살아 있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책 속에 묻혀 있는 말씀이 아니다. 글자 속에 잠자고 있는 말씀이 아니다. 읽는 이의 가슴 속에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다. 우리 성도는 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 하나님을 알게 된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다. 죄를 대속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된다.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 모두가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속에 \\\"살아 있는 말씀\\\"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이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이 성경을 떠날 수 없다. 시편 119: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했다. 다윗은 이 살아 있는 말씀의 맛을 본 자이다. 참으로 그 살아 있는 말씀 속에 담겨진 축복의 단맛을 본 자이다. 꿀보다도 더 달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살아 있는 말씀 사모하기를 \\\"송이꿀 보다 더 사모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요한복음 1: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살아 있는 말씀이다. 그 말씀 속에는 생명이 있다고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신다(요6:63) 그러기에 이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신다(요5:25)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그 속에 살아 있는 말씀이 나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나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죄 많은 나의 모습을 보게 한다. 나의 죄를 말끔히 씻을 십자가의 보혈을 깨닫게 한다. 주 예수를 믿어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알려 준다. 주님 다시 오시어 믿는 자를 영접해 주님 계신 곳으로 데려가시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한다. 4.날마다 상고하자. 사도행전 17: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다. 요한복음 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을 우리 성도가 왜? 날마다 상고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 속에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성도들의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68절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다. 앞장서서 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된 성도들은 \\\"영생의 말씀\\\"을 결코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따라야 할 \\\"영생의 말씀\\\"이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귀한 \\\"영생의 말씀\\\"이다. 요한복음 4: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했다. 주님이 주시는 물 곧 \\\"영생의 말씀\\\"은 먹는 이의 가슴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했다. 다시는 갈함이 없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시원함과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영생의 말씀\\\"이다. 사도행전 17: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의 터 위에 나의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한다. 베뢰아 교회의 성도들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보다 더 낫다고 칭찬하는 사도 바울이다. 그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사도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사람들이다(살전2:13).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 말씀마다 아~멘, 아~멘으로 받은 성도들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보다,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권위에 자신의 믿음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위에 자신의 믿음의 집을 짓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을 칭찬한 것이다. 마태복음 8:8-10절에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했다. 이 이방인 백부장은 주님이 칭찬하신 큰 믿음의 소유자이다. 택한 백성, 선민 이스라엘 중에서도 찾아보지 못한 큰 믿음이다. 주님 자신이 아니라도, 주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씀에 근거\\\"를 둔 믿음이다. 주님이 전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진실되게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권위를 누구보다도 목도하고 경험한 선민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그 선민 이스라엘은 오히려 주님이 전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을 거역하고, 조롱하고, 무시하고 있고, 이방인 백부장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말씀의 권위\\\"를 깨달은 것이다. 비록 백부장이기는 하지만 자기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말\\\"에 복종을 한다. 자기 또한 남의 수하에 있는 자로 \\\"상사의 말\\\"에 절대 복종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말씀의 권위\\\"를 알고 있다. 주님 말씀 한마디라면 \\\"병마는 쫓긴다\\\"는 것이다. 이 백부장처럼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이 바로 \\\"큰 믿음\\\"이다. 갈릴리 바다 위에서 밤이 맞도록 수고하여도 얻은 것이 없었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심히도 많은 고기가 잡혔다(눅5:5).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그 살아 있는 말씀, 영생의 말씀 위에 우리의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며 터를 닦고 벽돌을 하나 둘 쌓아 올라가는 나의 믿음의 집을 건축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자. 그 속에 영생이 있다. 그 속에 주님이 계신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온다. 그 속에서 구원의 길이 열린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참으로 살아 있는 말씀이요, 영생이 있는 말씀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내 영혼의 양식이요, 내 속에서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이 되는 말씀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참으로 이 성경 우리 모든 성도들이 사랑해야 할 책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나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겠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딤후3:15-17/ 성서주일설교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딤후3:15-17 오늘은 성서 주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 주신 특별 계시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소식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구원의 길\"도 알 수 없다. 우리 인간의 \"구원의 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중 간의 막힌 담인(엡2:14)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그 길이 열릴 수 없다. 이 막힌 담을 인간이 헐 수 없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 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그 중간의 막힌 담을 허셨다. 이 사실을 알려 주는 책이 바로 성경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하나님의 책이 다. 인간의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인간의 책에 대한 기준으 로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기준과 가치로 판단을 하고 있다. 문학 적인 한 작품의 차원에서 보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신화적 인 차원에서, 과학적인 차원에서 놓고 판단하고 가치 매김을 하고 있다.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이 판단하고 가치 매김을 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부정하고 무시해도 성경은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언어와 사람의 손으로 기록 되어졌지만 사람의 말이 아니다. 사람의 것이 아니다.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하나 님의 말씀이다. 곧 하나님의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에 대하여 살 펴 보고져 한다. 1.신·구약 66권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무려 1600 여년에 걸쳐 약40여명의 성 경 기록자들이 시간적으로, 또 지역적으로 달리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원에 맞추어져 있다. 왕, 정치인, 서기관, 제사장, 학자, 농부, 어부, 목자, 의사, 세리, 등등..... 이 성경 기록자들은 참으로 다양한 직업과 시대적,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신·구약 66권이다. 처음부터 66권으로 함께 묶여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각의 성경들이 사본의 형태로 전해 져 내려왔다. 사본이란 처음 기록한 \"원본\"을 보고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을 말한다. 책의 수명이 오래되지 못하였고, 또 개인이나 지역적인 문제로 \"원 본\"을 \"사본\"으로 기록하여 간직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본\"은 사라져 없어지고, \"사본\"의 \"사본\"으로 전해져 오다가 하나의 \"성경책\" 으로 완성을 이루게 된다. 구약은 A.D 90년경 얌니야 회의에서 39권으로, 신약은 A.D 397년 칼 타고 회의에서 \"정경\"으로 결정된다. \"정경\"이란 \"κανων \"으로 \"표준\", \"잣대\"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정식 성경\"이라는 뜻이다. 그때까지 여러 사람들의 기록들이 내려 왔으나, 성경으로 인정할 만 한 책으로 신·구약 66권을 결정한 것이다. \"정경\"외에도 \"외경\"이란 책 들도 있고, \"위경\"이라는 책들도 있다. 카톨릭에서는 이들 11권을 더 포 함시켜 카톨릭의 성경은 개신교의 성경과 다르다. 이런 \"정경\"의 결정은 \"외경\"이나, \"위경\"의 범람으로 교회가 변질되 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서 \"모세의 승천기\", \"동정녀 마 리아 승천기\" 등이 있다. 이는 성경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 문이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에서는 \"참고하는 문헌\"으로서 바라보지 다른 성 경과 같은 \"정경\"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 러나 카톨릭은 그렇지 않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신앙관\"이 다르다. \"죽은 자\"를 위 한 기도가 \"위경\"인 \"마카비 하\"에 나오기에 카톨릭에서는 이 말씀을 기준으로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가능한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신·구약 66권이다. 구약 39권, 신약 27 권으로 3×9 = 27로 기억하면 된다. 이를 분류해 나누어 보면, 구약은 ⑴.모세의 오경: 창, 출, 레, 민, 신, ⑵.역사서: 수, 삿, 룻,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 상하, 스, 느, 에, ⑶.시가서: 욥, 시, 잠, 전, 아, ⑷.선지서: ①.대선지서: 사, 렘, 애, 겔, 단, ②.소선지서: 호, 요, 암, 옵, 미, 나, 합, 습, 학, 슥, 말, ※히브리 원문은 우리말 성경처럼 구약이라 하지 않고 율법, 예언, 시.... 라 한다(눅24:44) \"예언서\"에서 제1예언서로 역사 서를 제2예언 서로 선지서로 구분한다. 신약은⑴.복음서: 마, 막, 눅, 요, (공관복음: 마, 막, 눅) ⑵.역사서: 사도행전, ⑶.서신서: ①.바울 서신: ㉠.옥중서신: 엡, 빌, 골, 몬, ㉡.목회서신: 디모데 전후, 딛, ㉢.교리서신: 롬, 고린도 전후, 갈, 데살로니가 전후, 히, ※히브리서는 학자에 따라 바울서신 혹은 공동서 신에 넣기도 한다. ②.공동서신: 약, 베드로 전후, 요한1, 2, 3서, 유, ⑷.예언서: 요한 계시록, 2.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다. 딤후 3:15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 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다. 베드로후서 1: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 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 니라\"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한 권, 두 권이 아닌 66권 모두다.... 모 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한다. 곧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어졌다고 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실 때에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이 성경 기록자를 지도 하고 감독하신 일이 바로 \"성령의 영감\"이다. \"성령의 영감\"은 성경 기록자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아니 다. 성경 기록자의 사상, 지식, 재능, 성격, 언어 등.... 인간적인 요소를 동원하여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같은 사건의 기록일지라도 기록자에 따라 표현의 차이는 있다. 그러 나 전하려는 뜻은 일치하고 있다. 곧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 기록을 지도하고, 감독했다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 새긴 패를 놓고 보면, 마태: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마27:37) 마가: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막15:26) 누가: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눅23:38) 요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요19:19) 네 사람 모두 표현이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같은 사건의 \"죄 패\"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이렇게 \"성령의 영감\"된 책이기에 약40 여명의 성경 기록자에 의해 1600여년에 걸쳐 기록되어졌으나 통일성을 잃지 않는다. 더욱이 시대적 으로, 지역적으로, 또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중 심된 주제를 통하여 서로간의 모순 없이 \"구원의 길\"을 조화롭게 보여 주고 있다. 3.살아 있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다. 베드로전서 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 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 로 되었느니라\"고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살 아 있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책 속에 묻혀 있는 말씀이 아니다. 글 자 속에 잠자고 있는 말씀이 아니다. 읽는 이의 가슴 속에 살아 역사하 는 말씀이다. 우리 성도는 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해 주 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 하나님을 알게 된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다. 죄를 대속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된다. 죄를 회개 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 모두가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속에 \"살아 있는 말씀\"의 역사 로 이루어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이다. 그러기에 우리 성 도는 이 성경을 떠날 수 없다. 시편 119: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했다. 다윗은 이 살아 있는 말씀의 맛을 본 자이다. 참으로 그 살아 있는 말씀 속에 담겨진 축복의 단맛을 본 자이다. 꿀보다도 더 달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살아 있는 말씀 사모하기를 \"송이꿀 보다 더 사모하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요한복음 1: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 이라\"고 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살아 있는 말씀이 다. 그 말씀 속에는 생명이 있다고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이 영이 요 생명이라고 하신다(요6:63) 그러기에 이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 라\"고 하신다(요5:25)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그 속에 살아 있는 말씀이 나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나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다. 죄 많은 나의 모습을 보게 한다. 나의 죄를 말끔히 씻을 십자가의 보혈을 깨닫게 한다. 주 예수를 믿어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알려 준다. 주님 다시 오시어 믿는 자를 영접해 주님 계신 곳으로 데려가시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한다. 4.날마다 상고하자. 사도행전 17: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 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다. 요한복음 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 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했 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을 우리 성도가 왜? 날마다 상고해야 하는 가? 그것은 그 속에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성도들의 \"영혼의 양 식\"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68절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 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다. 앞장서서 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된 성도들은 \"영생의 말 씀\"을 결코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따라 야 할 \"영생의 말씀\"이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귀한 \"영생의 말 씀\"이다. 요한복음 4: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했다. 주님이 주시는 물 곧 \"영생의 말씀\"은 먹는 이의 가슴 속에서 영생하 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했다. 다시는 갈함이 없는, 영원히 목마르 지 아니하는 시원함과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영생의 말씀\"이다. 사도행전 17: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 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의 터 위에 나의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한 다. 베뢰아 교회의 성도들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보다 더 낫다고 칭찬하는 사도 바울이다. 그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사도 바울이 전한 하나님 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사람들이다(살전2:13).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 말씀마다 아~멘, 아~멘 으로 받은 성도들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보다,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 다 성경을 상고하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권위에 자신의 믿음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위에 자 신의 믿음의 집을 짓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을 칭찬한 것이다. 마태복음 8:8-10절에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 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 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 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 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했다. 이 이방인 백부장은 주님이 칭찬하신 큰 믿음의 소유자이다. 택한 백 성, 선민 이스라엘 중에서도 찾아보지 못한 큰 믿음이다. 주님 자신이 아니라도, 주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씀에 근거\"를 둔 믿음이 다. 주님이 전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진실되게 믿고 받아들이는 사 람을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권위 를 누구보다도 목도하고 경험한 선민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그 선민 이스라엘은 오히려 주님이 전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 을 거역하고, 조롱하고, 무시하고 있고, 이방인 백부장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말씀의 권위\"를 깨달은 것이다. 비록 백부장이기는 하지만 자기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말\" 에 복종을 한다. 자기 또한 남의 수하에 있는 자로 \"상사의 말\"에 절대 복종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말씀의 권위\"를 알고 있다. 주님 말씀 한마 디라면 \"병마는 쫓긴다\"는 것이다. 이 백부장처럼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이 바로 \"큰 믿음\"이다. 갈릴리 바다 위에서 밤이 맞도록 수고하여도 얻은 것이 없었지만 \"말씀에 의 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심히도 많은 고기가 잡혔다(눅5:5).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그 살아 있는 말씀, 영생의 말씀 위에 우 리의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며 터를 닦고 벽돌을 하나 둘 쌓아 올라가는 나의 믿음의 집을 건축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자. 그 속에 영생이 있다. 그 속에 주님이 계신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온다. 그 속에서 구원의 길이 열린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참으로 살아 있는 말씀이요, 영생이 있는 말씀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내 영혼의 양식이요, 내 속에서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이 되는 말씀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참으로 이 성경 우리 모든 성도들이 사랑 해야 할 책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나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겠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딤후3:15-17/ 성서주일설교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딤후3:15-17, 요1:1-4 오늘은 성서 주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 주신 특별 계시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소식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구원의 길\\\"도 알 수 없다. 우리 인간의 \\\"구원의 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중 간의 막힌 담인(엡2:14)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그 길이 열릴 수 없다. 이 막힌 담을 인간이 헐 수 없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 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그 중간의 막힌 담을 허셨다. 이 사실을 알려 주는 책이 바로 성경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하나님의 책이 다. 인간의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인간의 책에 대한 기준으 로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기준과 가치로 판단을 하고 있다. 문학 적인 한 작품의 차원에서 보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신화적 인 차원에서, 과학적인 차원에서 놓고 판단하고 가치 매김을 하고 있다.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이 판단하고 가치 매김을 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부정하고 무시해도 성경은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언어와 사람의 손으로 기록 되어졌지만 사람의 말이 아니다. 사람의 것이 아니다.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하나 님의 말씀이다. 곧 하나님의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에 대하여 살 펴 보고져 한다. 1.신구약 66권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무려 1600 여년에 걸쳐 약40여명의 성 경 기록자들이 시간적으로, 또 지역적으로 달리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원에 맞추어져 있다. 왕, 정치인, 서기관, 제사장, 학자, 농부, 어부, 목자, 의사, 세리, 등등..... 이 성경 기록자들은 참으로 다양한 직업과 시대적,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신구약 66권이다. 처음부터 66권으로 함께 묶여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각의 성경들이 사본의 형태로 전해 져 내려왔다. 사본이란 처음 기록한 \\\"원본\\\"을 보고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을 말한다. 책의 수명이 오래되지 못하였고, 또 개인이나 지역적인 문제로 \\\"원 본\\\"을 \\\"사본\\\"으로 기록하여 간직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본\\\"은 사라져 없어지고, \\\"사본\\\"의 \\\"사본\\\"으로 전해져 오다가 하나의 \\\"성경책\\\" 으로 완성을 이루게 된다. 구약은 A.D 90년경 얌니야 회의에서 39권으로, 신약은 A.D 397년 칼 타고 회의에서 \\\"정경\\\"으로 결정된다. \\\"정경\\\"이란 \\\"κανων \\\"으로 \\\"표준\\\", \\\"잣대\\\"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정식 성경\\\"이라는 뜻이다. 그때까지 여러 사람들의 기록들이 내려 왔으나, 성경으로 인정할 만 한 책으로 신구약 66권을 결정한 것이다. \\\"정경\\\"외에도 \\\"외경\\\"이란 책 들도 있고, \\\"위경\\\"이라는 책들도 있다. 카톨릭에서는 이들 11권을 더 포 함시켜 카톨릭의 성경은 개신교의 성경과 다르다. 이런 \\\"정경\\\"의 결정은 \\\"외경\\\"이나, \\\"위경\\\"의 범람으로 교회가 변질되 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서 \\\"모세의 승천기\\\", \\\"동정녀 마 리아 승천기\\\" 등이 있다. 이는 성경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 문이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에서는 \\\"참고하는 문헌\\\"으로서 바라보지 다른 성 경과 같은 \\\"정경\\\"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 러나 카톨릭은 그렇지 않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신앙관\\\"이 다르다. \\\"죽은 자\\\"를 위 한 기도가 \\\"위경\\\"인 \\\"마카비 하\\\"에 나오기에 카톨릭에서는 이 말씀을 기준으로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가능한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신구약 66권이다. 구약 39권, 신약 27 권으로 3×9 = 27로 기억하면 된다. 이를 분류해 나누어 보면, 구약은 ⑴.모세의 오경: 창, 출, 레, 민, 신, ⑵.역사서: 수, 삿, 룻,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 상하, 스, 느, 에, ⑶.시가서: 욥, 시, 잠, 전, 아, ⑷.선지서: ①.대선지서: 사, 렘, 애, 겔, 단, ②.소선지서: 호, 요, 암, 옵, 미, 나, 합, 습, 학, 슥, 말, ※히브리 원문은 우리말 성경처럼 구약이라 하지 않고 율법, 예언, 시.... 라 한다(눅24:44) \\\"예언서\\\"에서 제1예언서로 역사 서를 제2예언 서로 선지서로 구분한다. 신약은⑴.복음서: 마, 막, 눅, 요, (공관복음: 마, 막, 눅) ⑵.역사서: 사도행전, ⑶.서신서: ①.바울 서신: ㉠.옥중서신: 엡, 빌, 골, 몬, ㉡.목회서신: 디모데 전후, 딛, ㉢.교리서신: 롬, 고린도 전후, 갈, 데살로니가 전후, 히, ※히브리서는 학자에 따라 바울서신 혹은 공동서 신에 넣기도 한다. ②.공동서신: 약, 베드로 전후, 요한1, 2, 3서, 유, ⑷.예언서: 요한 계시록, 2.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다. 딤후 3:15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 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다. 베드로후서 1: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 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 니라\\\"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한 권, 두 권이 아닌 66권 모두다.... 모 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한다. 곧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어졌다고 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실 때에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이 성경 기록자를 지도 하고 감독하신 일이 바로 \\\"성령의 영감\\\"이다. \\\"성령의 영감\\\"은 성경 기록자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아니 다. 성경 기록자의 사상, 지식, 재능, 성격, 언어 등.... 인간적인 요소를 동원하여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같은 사건의 기록일지라도 기록자에 따라 표현의 차이는 있다. 그러 나 전하려는 뜻은 일치하고 있다. 곧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 기록을 지도하고, 감독했다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 새긴 패를 놓고 보면, 마태: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마27:37) 마가: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막15:26) 누가: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눅23:38) 요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요19:19) 네 사람 모두 표현이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같은 사건의 \\\"죄 패\\\"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이렇게 \\\"성령의 영감\\\"된 책이기에 약40 여명의 성경 기록자에 의해 1600여년에 걸쳐 기록되어졌으나 통일성을 잃지 않는다. 더욱이 시대적 으로, 지역적으로, 또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중 심된 주제를 통하여 서로간의 모순 없이 \\\"구원의 길\\\"을 조화롭게 보여 주고 있다. 3.살아 있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다. 베드로전서 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 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 로 되었느니라\\\"고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살 아 있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책 속에 묻혀 있는 말씀이 아니다. 글 자 속에 잠자고 있는 말씀이 아니다. 읽는 이의 가슴 속에 살아 역사하 는 말씀이다. 우리 성도는 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해 주 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 하나님을 알게 된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된다. 죄를 대속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된다. 죄를 회개 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 모두가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속에 \\\"살아 있는 말씀\\\"의 역사 로 이루어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이다. 그러기에 우리 성 도는 이 성경을 떠날 수 없다. 시편 119: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했다. 다윗은 이 살아 있는 말씀의 맛을 본 자이다. 참으로 그 살아 있는 말씀 속에 담겨진 축복의 단맛을 본 자이다. 꿀보다도 더 달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살아 있는 말씀 사모하기를 \\\"송이꿀 보다 더 사모하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요한복음 1: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 이라\\\"고 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살아 있는 말씀이 다. 그 말씀 속에는 생명이 있다고 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이 영이 요 생명이라고 하신다(요6:63) 그러기에 이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 라\\\"고 하신다(요5:25)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그 속에 살아 있는 말씀이 나의 창조자 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나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다. 죄 많은 나의 모습을 보게 한다. 나의 죄를 말끔히 씻을 십자가의 보혈을 깨닫게 한다. 주 예수를 믿어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알려 준다. 주님 다시 오시어 믿는 자를 영접해 주님 계신 곳으로 데려가시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한다. 4.날마다 상고하자. 사도행전 17: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 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다. 요한복음 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 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했 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을 우리 성도가 왜? 날마다 상고해야 하는 가? 그것은 그 속에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성도들의 \\\"영혼의 양 식\\\"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68절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 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다. 앞장서서 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된 성도들은 \\\"영생의 말 씀\\\"을 결코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따라 야 할 \\\"영생의 말씀\\\"이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귀한 \\\"영생의 말 씀\\\"이다. 요한복음 4: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했다. 주님이 주시는 물 곧 \\\"영생의 말씀\\\"은 먹는 이의 가슴 속에서 영생하 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했다. 다시는 갈함이 없는, 영원히 목마르 지 아니하는 시원함과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영생의 말씀\\\"이다. 사도행전 17: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 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의 터 위에 나의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한 다. 베뢰아 교회의 성도들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보다 더 낫다고 칭찬하는 사도 바울이다. 그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사도 바울이 전한 하나님 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사람들이다(살전2:13).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 말씀마다 아~멘, 아~멘 으로 받은 성도들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보다,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 다 성경을 상고하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권위에 자신의 믿음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위에 자 신의 믿음의 집을 짓는 베뢰아 교회 성도들을 칭찬한 것이다. 마태복음 8:8-10절에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 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 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 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 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했다. 이 이방인 백부장은 주님이 칭찬하신 큰 믿음의 소유자이다. 택한 백 성, 선민 이스라엘 중에서도 찾아보지 못한 큰 믿음이다. 주님 자신이 아니라도, 주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씀에 근거\\\"를 둔 믿음이 다. 주님이 전하시는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진실되게 믿고 받아들이는 사 람을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권위 를 누구보다도 목도하고 경험한 선민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그 선민 이스라엘은 오히려 주님이 전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 을 거역하고, 조롱하고, 무시하고 있고, 이방인 백부장은 자신의 삶을 통해 \\\"말씀의 권위\\\"를 깨달은 것이다. 비록 백부장이기는 하지만 자기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말\\\" 에 복종을 한다. 자기 또한 남의 수하에 있는 자로 \\\"상사의 말\\\"에 절대 복종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말씀의 권위\\\"를 알고 있다. 주님 말씀 한마 디라면 \\\"병마는 쫓긴다\\\"는 것이다. 이 백부장처럼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이 바로 \\\"큰 믿음\\\"이다. 갈릴리 바다 위에서 밤이 맞도록 수고하여도 얻은 것이 없었지만 \\\"말씀에 의 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심히도 많은 고기가 잡혔다(눅5:5).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그 살아 있는 말씀, 영생의 말씀 위에 우 리의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며 터를 닦고 벽돌을 하나 둘 쌓아 올라가는 나의 믿음의 집을 건축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자. 그 속에 영생이 있다. 그 속에 주님이 계신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온다. 그 속에서 구원의 길이 열린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참으로 살아 있는 말씀이요, 영생이 있는 말씀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내 영혼의 양식이요, 내 속에서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이 되는 말씀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참으로 이 성경 우리 모든 성도들이 사랑 해야 할 책이다.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나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겠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생활/행17:10-15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생활 행17:10-15 천하를 뒤흔드는 자라고 하는 별호(別號)를 받으면서 이르는 곳마다 눈부신 변화를 일으키는 바울 일행이 마게도냐의 주요 도시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을 피해서 150리 가량 떨어진 베뢰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베뢰아는 두 하천이 흘러 물이 풍성하다고 하는 뜻으로 그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나무가 무성합니다.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마게도냐 제 2의 산간 도시입니다. 그 베뢰아에 교회가 있었는데 사도행전 17장 10절 이하를 보면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는 교회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후일 바울사 도께서 그가 다녀온 여러 교회에 서신을 내면서 혹은 견책하고 혹은 책망하기도 하고 권면하고 격려하기도 하고 칭찬하고 교훈하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교회는 서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당시에 허물 할 것이 없는 가장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짐작이 갑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 바른 신앙입니다. 성경을 생활화할 때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서 우리 기독교는 한마디로 성경의 종교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첫째로 베뢰아 교인들은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나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동시에 회개하게 되고 사죄와 변화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류 월레이스(Lew Wallace)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부정하는 책을 쓰려고 성경을 샅샅이 읽다가 그리스도를 발견하고는 회개하고 쓴 책이 저 유명한 \\\"벤허(Ben Hur)\\\"라는 소설입니다. 영화로도 제작되어서 우리 나라에서도 상영이 되었는데 세계적으 로 감동을 끼치는 명작이 된 것입니다. 옛날 베뢰아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송이 꿀보다 더 달게 여겼습니다.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또 굶주렸을 때 양식을 그 리워하는 것처럼 영의 양식으로 먹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세계적인 유명한 성경학자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목사는 \\\"나는 젊었을 때에는 주로 기적의 그 능력을 느끼기에 힘썼다. 장년기에 이르러서는 성취된 예언에 대한 말씀에 관심을 두 었다. 노경에 들어와서는 내 속에 복음의 말씀이 무르익는 것을 찾아보고 크게 만족함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 인의 신앙도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였을 때에 무한한 성장이 있게 되고 발전이 있고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성경 을 중심으로 하여야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F. Roosevelt)는 어느 때 연설하는 가운데, \\\"....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물론이지만 일반 시 민으로서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곧 나를 이기고, 크거나 작거나 간에 각자에게 알맞은 하나님의 사업 을 할 수가 있고, 이 세계를 보다 선하게 하는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미국 사람들이 한층 더 성경책을 숙독하 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옛날 베뢰아 신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런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 째로 베뢰아 교인들은 성경을 날마다 상고(祥考)했다고 했습니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이 임종 시에 머리맡에 있는 젊은이에게 \\\"젊은이여 이제 생전에 다소나마 세상에 알려진 사람 의 마지막 말을 귀담아 들어 두기를 바란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으라고 하는 말 뿐일세.... \\\" 그렇게 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크게 잘못하는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중요성은 누구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면서, 또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없다고 믿으면서도 그 말씀을 봉독하는 실천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을 들고만 다닐 뿐, 봉독하지 아니하는 것은 성경을 생활화하지 아니하는 위험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무익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또 간혹 어떤 신자는 성경을 통하지 아니하고 하루 아침에 일생에 미치는 영속적 능력을 얻으려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박스터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급한 사람아, 조용히 앉아서 욥과 교제하라. 완고한 사람아, 베드로와 모세의 기사를 자세히 읽으라. 유약한 사람아, 엘리야를 만나라. 마음의 노래가 없는 사람아, 다윗에게 들으라. 정치가가 된 사람아, 다니엘 서를 읽으라. 실망과 암흑에 빠진 사람아, 이사야서를 읽어 라. 마음이 차가 와진 사람아, 사랑의 사도를 가까이 하라. 신앙이 엷어진 자여, 바울을 주의해서 보라. 안일한 자리에 있는 자 여, 야고보 서를 잊지 말라. 장차 소망을 잃은 자여, 계시록에서 약속의 땅을 받도록 하라 !\\\"고 말합니다. 우리가 역경과 시련을 당하였을 때 성경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과 약속을 받게 됩니다. 슬플 때, 건강할 때, 병들었을 때, 가난 할 때, 풍부할 때 모든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유명한 인도주의자며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던 죠지 뮬러(George Mueller)의 전기를 읽어보면 3개월마다 한 번씩 성경 전체 를 읽었다는 것이고 일생 동안에 200번이나 성경을 정독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가 그에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힘이 어째서 이렇게 약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까 ?\\\" 하고 물으니까, 뮬러가 대답하는 말이 \\\"항상 성경을 읽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정독해 가면서 성경을 통하여 공급해 주시는 오천 명의 고 아를 길러 내고 교육시키는 그런 위대한 일을 했던 것을 우리는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철학자가 추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성경은 근본적인 지혜를 주는 책입니다. 교육가의 간절한 소원은 위대한 인격 함양입니다. 성경은 가장 고상한 인격을 키워 내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정치가의 꿈은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세계의 평화입니다. 성경이야말 로 개인과 인간 서로 사이에 참 평안을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각 개 각 층 누구나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 생의 가장 귀중하고 바른 길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베뢰아 교회는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큰 은혜를 입은 교회입니다. 그들은 \\\"신사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 신사적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만 헬라말로는 \\\"유게네스 테로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선량하다, 진실하다, 선한 성질, 고상하다\\\"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성경 을 날마다 상고하는 데서 이런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는 생활을 하면 우선 기쁨과 평안의 체험이 옵니다. 어떤 이는 조용한 기쁨과 평안으로 착실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껑충껑충 뛸 정도로 기쁨이 폭발적으로 넘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빛의 체험이 확실해집니다. 즉 영적인 눈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갑자기 모두 보게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빛\\\"이라고도 하고 \\\"불\\\"이라고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육의 일만 보던 눈이 영의 일을 보 게 됩니다. 개인의 일만 보던 사람이 남의 일도 보게 됩니다. 현세(現世)의 일만 보던 눈이 내세(來世)와 영원을 바라보게 됩니 다. 물질만 보던 눈이 정신과 인격의 세계를 바라 보게 됩니다. 사람의 뜻만 보던 눈이 하나님의 뜻을 또 명확하게 깨닫게 됩니 다. 말하자면 영적 개안(開眼)이 되는 셈입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보여서 크게 걱정되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체험을 겸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간은 언제나 물질만 보았습니다. 삼손은 정욕적인 것만 눈에 보였습니다. 사울은 권세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는 중에 은혜를 입게 되면 이것이 변화되어서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체험입니다. 신령한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틀림없이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 도입니다. 전에 없었던 새로운 품격이 생겼습니다. 새로운 마음씨가 생겼습니다. 뜨거운 사랑이 생겨났습니다. 강한 책임감이 생 겨났습니다. 그리고 남보다 투철하게 사명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이 폭발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환 경 속에서든지 확신이 넘치게 되고,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것을 \\\"신사적\\\"이라고 표현했는데, 말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사\\\"가 아니라 영적인 방면 에서 갖추어진 그런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뢰아 신자들은 고상한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습 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까 그 신자가 날마다 많아졌습니다. 헬라 사람, 즉 이방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유대인도 많아졌습니다. 귀부인과 흑인까지, 말하자면 연합적인 교회 생활이 점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점 점 더 힘을 가지고 더 많이 성장,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다고 하는 이것은 명사(名詞)가 아니라 동사(動詞)입니다. 실제적으로 움직여 힘써 실천하는 생활에서 바 로 이런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옛날 사울이 새로운 바울로 된 것처럼 놀라운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 모두가 다 제 2의 베뢰아 교인들이 되기르 바랍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간절히 욕구하고, 날마다 이 말씀을 상 고하는 실천이, 또 이 말씀으로 인해서 오는 축복 큰 변화된 능력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지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내시의 성경공부/ 행8:26-39/ 성서주일설교/ 2009-12-12
내시의 성경공부 행8:26-39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복중의 복입니다. 성경을 보면 세상의 근원을 알 수 있고 창조과정과 나의 뿌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운명과 나의 종말을 알 수 있고 종말 이후의 문제나 내가 가야 하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없을 때에는 진화론이 대세였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주어지면서 이 세상의 근원이 분명해졌고 창조과정이 적나라하게 밝혀져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섭리와 계획을 모두 성경에서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경을 연구하고 풀어야 하나님의 섭리와 비밀을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마치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는 것처럼 수고하고 노력하여 밝히고 찾는 사람만이 비밀을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점을 오늘 읽은 본문이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디오피아의 내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디오피아 왕국의 국고를 맡은 장관 내시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가는 길에 마차를 타고 가며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이 내시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한 절기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돌아가는 독실한 유대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 성경이 이사야서 53장이었습니다. 그가 그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빌립에게 명하여 그에게 가 보라고 지시하십니다. 여기 빌립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7집사중 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고 예루살렘에 핍박이 시작되었을 때 그 핍박을 피하여 돌아다니던 디아스포라 중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빌립을 사용하셨습니다. 부름을 받고 빌립이 급히 가보니까 내시가 마차를 타고 가며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 그래서 가르쳐 주었더니 듣고 감동을 받고 회심하여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 결과 이 내시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게 되었고 이디오피아에 돌아가 복음을 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디오피아 나라가 전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접한 나라가 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한 사회의 리더가 되면 역할이 그렇게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의 회심이 한 나라를 영적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여기 내시 한 사람이 회심하는 순간 이디오피아 나라와 민족이 전도되고 회심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 내시가 성경을 공부하는 순서가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을 손에 들음 성경을 손에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입지 않으면 성경을 손에 든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손에 성경을 들고 읽고 묵상하고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생활하는 것은 엄청난 축복을 입은 삶인 줄 아십시오. 내시는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는 길에 이사야서를 깊이 묵상하고 지금 진지하게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더 깊이 알려고 성경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첫 번째 순서가 성경을 읽는 일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것의 근원이 들어있고 기준이 들어있고 각종 비밀이 들어있고 그 해답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캐논이라고 부르고 바이블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모든 교훈 중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고 법의 기준이 되고 삶의 기준도 되며 인생의 기준이 되고 영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하였습니다. 박멸하려면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겠다 싶어서 먼저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읽다가 그는 박멸이 아니고 스스로 성경 속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기독교를 박멸할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이제는 그 하나님을 증거 해야겠다 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영화가 벤허라고 영화이고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생키비치라는 감독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거기에 길이 있고 뜻이 있고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 내시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작은 일이 마침내 이디오피아 한 나라에 전도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구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리고 갈구하면 하나님은 누군가 보내서라도 가르쳐 알게 하시고 기회를 주시고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내시의 겸손 내시는 본디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거리가 자그마치 15,000km나 되는 곳을 마차를 타고 한 달을 달려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이제 일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먼 거리를 개의치 않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국 도중에 마차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가 읽은 성경은 오늘 우리들이 읽은 사도행전이 인용한 이사야서 53장 내용입니다. 내시가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지만 그는 그 고난 받는 종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사마리아에서 사역 중이던 빌립을 그에게로 보내신 것입니다. 빌립이 명령에 순종하여 급히 가보니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이해되느냐 ?”고 묻자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알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빌립을 청하여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면서 “여기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이 누구냐 ?”고 묻습니다. 빌립이 “그는 고난받 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고 “오셔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내시는 그 내용이 생전 처음 듣는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과정을 듣지 못하여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충격도 컷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회심하고 마침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내시는 참 겸손한 사람입니다. 모르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한 나라의 국고 맡은 장관이니까 교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르쳐 주는 자가 없는데 어찌 알겠느냐, 올라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합니다. 참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말씀을 잘 받아들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전도할 때 더 잘 영접합니다. 겸손함은 축복이고 은혜 받은 성품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의 사역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줍니다. 성령은 오늘도 쉬지 않고 이렇게 다니시며 역사하시고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설교를 들으면 곧 잊어버리는데 그것도 은혜입니다. 금방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도 걱정할 것 없는 것은 필요할 때마다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마음에 뜻을 품으면 그 뜻을 풀어줄 사람을 보내 주시고 그 뜻을 이룰 사람을 알게 하시고 성취할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내시는 이사야서를 읽어도 뜻 모를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었지만 그때 성령이 사람을 보내서 알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 뜻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뜻을 간직하고 품으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신비 경험 빌립으로부터 내시는 그 고난 받는 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고난은 곧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내시는 그 십자가의 고난은 다름 아닌 자신을 위한 고난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때 그는 생전 처음으로 십자가와 예수와 구원과 부활 같은 언어를 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풀지 못한 질문의 해답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시는 자기의 인생에서 자기의 지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는 신비함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얼마나 신비함을 느꼈겠습니까.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길을 구원의 길이라고 부르고 구원의 도라고 부릅니다. 성경을 보면 말씀을 접하고 신비를 경험을 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유다왕 요아스는 성전수리를 하다가 발견한 율법 책을 발견하여 읽은 후 지금까지 율법 책을 모른 채 기준 없이 너무 무지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삶이 하나님께 너무 죄스러워 놀라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강화도에 살던 유학자인 종순일이라는 사람은 큰 지주였습니다. 그 일대의 사람들이 그에게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인이 된 후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임금님에게 탕감 받는 대목을 읽다가 충격을 받습니다. 이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빚 진자들을 다 모아놓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다 불태우면서 빚을 탕감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도적은 남의 집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물건을 훔쳐다 팔았는데 마지막까지 팔리지 않는 책이 한권 있어서 펼쳐 읽는데 첫 구절 에베소서4장28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도적질 하는 자는 다시는 도적질 하지 말고” 그 순간 얼마나 당황스러움을 느꼈겠습니까. 어거스틴은 방탕생활 하는 도중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들고 펼치는 순간 로마서13장13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방탕하지 말고 술 취하지 말고 호색하지 말며”. 그래서 모두 순간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영감의 의해서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다가 처음으로 십자가와 부활과 예수를 알게 되면서 그는 충격과 감동과 신비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단 그리고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는 빌립에게 “내게 세례를 달라, 무엇을 더 주저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스스로 결단하고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내시가 빌립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이디오피아 사람으로서 첫 번째 세례를 받은 사람이 된 셈입니다. 오늘 세례를 한낱 형식적인 것을 꼭 받아야 하느냐 하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유식한 것 같지만 아주 무지하고 교만한 생각입니다. 그렇게 형식적인 것이면 예수님은 왜 굳이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세례를 받기 위해서 광야 요단강까지 나아갔겠습니까. 그리고 세례요한은 또 굳이 그 형식적인 세례를 베풀려고 안달을 했겠습니까. 몰이해도 어쩌면 교만이고 자만입니다. 예식을 경시하는 태도도 교만일 수 있습니다. 이 내시는 참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나에게 세례를 달라”. 그 결과 내시는 그 순간 지성으로 깨달은 것을 영적으로 체험하는 새로운 안목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내시는 여기서 지적으로 예수를 알았고 영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적 수준자가 영적인 수준자로 변모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의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발 돋음을 한 것입니다. 그 후 영적인 발전의 삶을 통해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였고 그 스스로 영적인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요소는 결단력입니다. 우유부단은 신앙생활의 적입니다. 머뭇머뭇, 기연가미연가, 우유부단, 꾸물꾸물은 모두 신앙생활의 적입니다. 내시는 알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간 결단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나에게 세례를 달라.” 그 말은 “나는 이제부터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사용하시고 역사하시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뜻을 이루십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 싶을 순간에 그때 주저하지 않고 나섰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빌라도를 찾아가서 담판하여 예수의 시신을 인수하여 장례를 치렀습니다. 마리아는 지금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임을 알고 주저하지 않고 옥합을 깨트려 예수의 머리위에 부었습니다. 에스더는 지금이 내가 일어날 때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때라는 것을 알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왕 앞에 나아가 민족을 위해서 탄원합니다.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그물을 버려두고 쫒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이 결단력이 발휘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섭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시는 무서운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모르니 가르쳐 달라”, “내가 무엇을 더 주저하겠는가, 나에게 세례를 달라” 이 결단력이 마침내 한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결단력이 있는 사람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결국 변화 받은 사람 빌립 한사람에 의해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 회심합니다. 그리고 내시 한사람을 통해서 이디오피아 나라에 복음이 전달되고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 아프리카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나 한사람은 결코 나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큰일을 이루십니다. 복음이 세상에 주어질 때 예수 한사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12제자로 늘어나고 그 12명의 제자가 70명으로 120명으로 3천명으로 5천명으로 증가하여 마침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것도 처음에 한 두 사람이 이 땅에 들어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120년이 지난 오늘 천 만 명이 복음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 복음은 또 우리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성령 사역 이와 같은 역사는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은 전도하는 영이십니다. 오늘 교회의 부흥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성령은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확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실 계획을 겸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결단력을 가진 내시를 활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빌립을 보내 그를 가르치게 하였고 그 내시로 하여금 세례 받게 하여 그를 활용하신 것입니다. 이 빌립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 사마리아로 도망가 전도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때 성령이 빌립을 광야를 지나가고 있던 내시에게로 보내셨고 빌립과 내시의 잠간의 대화가 그 잠깐의 대화가 멀리 이방땅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에 박해가 주어진 것은 당장 생각할 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좀 멀리 보면 하나님은 그 핍박을 통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의 벽을 허물었고 또 그 기회에 이디오피아까지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사람의 집사를 통해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고 그리고 지경을 훨씬 넘어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까지 복음을 확장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내시가 성경을 손을 드는 순간부터 이 기적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딤후3:15-17/ 성서주일설교/ 2002-12-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딤후3:15-17 오늘은 성경공회에 속해 있는 우리 고려 교단이 지키는 성경주일입니다. 우리 성도들 귀에 익숙한 말은 성서공회를 중심으로 12월 둘째 주일에 지키는 성서주일일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대한 성서공회를 통하여 지금까지 보급되어 왔습니다. 물론 생명의 말씀사 등 다른 출판사를 통해서도 보급되고 있지만, 저작권이 성서공회에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영감으로 기록되어진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의 손에 의해서 기록되어졌다고 사람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본문16절) 그러나,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의 덜 된 예수쟁이들이 “성경도 사람의 작품”으로.... 타종교의 경전과 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cf. 불경, 코오란경). 다시 말해서, 인간이 쓴 것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정확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다」.... 이것이 성경에 대한 바른 신앙입니다. 시대가 흐를수록, 말세가 가까울수록....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그 중심축이 옮겨지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도 인간 중심으로 옮겨져 가고 있습니다. 대한 성서공회도.... 이런 시대적 조류를 타고.... 자꾸만 인간 중심적 사고로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과 더불어 「공동번역 성서」를 출판했다가 한국교회의 외면으로.... 새로운 시도로 「표준 새번역 성경」을 출판했습니다. 이 「표준 새번역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오염되고 훼손되어,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 포함되어졌고, 보수교단 연합회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외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한 성서공회도 이를 어느 정도 인정했으나....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함께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의 출판을 중단한다는 결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보수교단 연합회를 중심으로.... 「한국 성경공회」를 창설하고 52년판 한글 개역성경을 보완하여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 성경」을 출판 보급하였습니다. 이 「신구약 성경」 대한 성서공회로부터 판권 침해라는 고소를 받아 1심에서 승소를 했으나, 2심에서 패소함으로 사실상 한국 성경공회의 「신구약 성경」은 더 이상의 출판을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보수교단 연합회의 「한국 성경공회」가 보수 신학의 입장에서 성경 원문을 직접 번역하여 새로운 성경을 번역 출간하려는 것입니다. 현재 60%의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보수교단 연합의 「한국 성경공회」에 속한 우리 교단총회의 산하에 있는 교회들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으기 위해서 ”성경주일”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원작자(原作者)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일점일획의 틀림이 없는 정확무오(正確無吳)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을 인간의 작품과 동일하게 바라보고 비평을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대한 성서공회」는 이런 신앙적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원작자(原作者)이십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저작권” 문제는 논의될 수 없어야 하는데, 이 ”저작권” 문제로 성경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많은 분들이 그만두고 있습니다. 「한국 성경공회」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보수교단 연합회에서 「표준 새번역 성경」이 아닌 ”한글개역” 성경을 계속 사용하겠다니까, 출판 중단을 결정한 것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우리 성도들이 사용하는 52년판 ”한글개역” 성경의 출판을 중단한다는 결정이 아니었으면 「한국 성경공회」가 따로 설립되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지침서가 되는 정확무오(正確無吳)한 유일한 법칙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우리 성도들은 ”나의 사랑하는 책”이라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나의 사랑하는 책” 이 성경을 우리 성도들은 듣고, 외우고, 읽고, 배워 왔습니다. 너무도 우리의 귀에, 입에, 눈에 익숙해 있습니다. 새로운 성경이 나오면 어른들의 세대에서는 오히려 혼란스럽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맞아 전체 개신교가 같이 사용하도록 찬송가를 통일시킨 지 20년이 다 되었습니다만, 찬송가를 보지 않고 부르면, 옛날 찬송가의 가사가 나옵니다. 이런 혼란은 우리 어른들 세대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어려서부터 듣고, 외우고, 읽고, 배운 성경, 우리의 귀에, 입에, 눈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성경, 이 성경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이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기에 운동력이 있어서 움직이게 됩니다. 곧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 땅의 그 어떤 사람의 능력으로도 할 수 없는 역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창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다」고 했습니다(창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있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라는 것입니다. 성육신(成肉身)하신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님은 바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입니다. 그래서,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죽은 소녀가 살아서 일어났습니다(막5:41).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관(棺) 속에 있던 죽은 청년이 살아서 일어났습니다(눅7:14).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 나왔습니다(요11:43). 이 것이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입니다. 참으로 크고 놀라운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있는 것도 제대로 불러 사용하지 못합니다. 요즈음 중동 사태가 악화일로(惡化一路)에 있습니다. 세계의 경찰국가로 자처하는 미국의 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UN의 결의도 두 나라간의 분쟁을 중단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도 제대로 불러 사용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 사용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이겠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가진 이 성경 말씀이 그토록 위대한 능력의 말씀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 사랑하여 ”나의 사랑하는 책”이 되어야 합니다. 2.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본문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여기의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란 말은.... [데오프뉴스토스(qeovpneusto”)]란 단어인데, ”하나님의 입김이 쐬인,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어진”의 뜻으로 ”하나님”과 ”숨쉬다”의 합성어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영감(靈感)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은 모든 성경 곧 신구약 66권이 모두 ”영감(靈感)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영감(靈感)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혔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주신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게 하심에 있어서.... 그 내용이 잘못이 없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사로잡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 ”영감(靈感)되었다” 곧 성령의 능력이 사로잡았다는 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받아쓰기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자신의 생각과 표현으로 기록하게 하시되, 그 내용이 잘못됨이 없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사로잡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표현 방식이 조금씩 다릅니다. 이것을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의 기록이 서로 다르니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틀린 것이 있다는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직접 기록한 성경을 ”원본(原本)”이라고 합니다. 이 ”원본(原本)”을 보고 베낀 것을 ”사본(寫本)”이라고 합니다. 선지와 사도들이 직접 기록한 ”원본(原本)”은 지금 없습니다. 여러 종류의 ”사본(寫本)”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사본(寫本)”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영감(靈感)되었다”는 것은 ”원본(原本)”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이 성경에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요5:39). 그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또 날마다 성경을 열심히 상고해야 합니다(행17:11). 마태복음 4: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바로 성경에 기록되어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하나님의 일러주신 말씀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먹고 마시는 것도 기록된 성경 말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는 것도 기록된 성경 말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마4:7).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도 기록된 성경 말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마4:10). 그래서, 「기록하였으되」, 「기록된 바」, 「기록된 대로」, 「기록하기를」, 「기록하였거니와」, 「기록된 모든 것」, 「읽지 못하였느냐?」고 하십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 속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3.이 성경은 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본문 17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 바로 죄인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범죄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이 에덴에서부터 시작하여(창3:15) 다 이루었다(계21:6)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목적이 ”죄인 구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문 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이 하는 일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속에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 구원의 길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을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혀놓고 들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구원 얻은 자의 삶을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케 되어야 합니다. 이 ”온전케 됨”은 구원 얻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한 평생에 이루어가야 할 일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화(聖化)라 합니다. 본문 17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다.... 바로 그 사람의 ”삶”이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의롭게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노력해도 어느 정도 의롭게 살 수 있겠지만, 온전히 의롭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에 기록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롬1:16). 우리 성도들은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살아가는 힘을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얻어야 합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입니다. 이 성경을 상고하라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날마다 상고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역사하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본문15절).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했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 같은 죄인을 구원했습니다. 내가 예수 믿어 「내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 얻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오늘 본문 15절의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는.... 이 말씀을 분명히 깨달아 안다면, 나의 구원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사람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듣고, 듣고, 또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세상 학문을 익히고, 인간의 지식이 늘어가면서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물들어가게 됩니다.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기울면 그때부터 의심의 검은 구름이 심령 속을 덮어옵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성경 말씀은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유명하다는 신학 박사, 목사님들이 한몫 거듭니다. 잘못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조류를 타고 성경을 제대로 번역한다면서 ”처녀”라는 말을 ”젊은 여자”로 바꾸어버립니다. 메시야의 탄생은 「여인의 후손(창3:15)」, 「처녀가 낳은 아들(사7:14)」, 「동정녀 마리아가 낳은 아들 예수(마1:23; 눅1:27,34)」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여인」은 ”처녀”의 의미가 없고, 「처녀」는 ”소녀에서 젊은 여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영감을 받아 기록한 마태는 「처녀」를 「동정녀」로 기록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내를 알지 못하는 처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귀에 익고, 입에 익고, 눈에 익은 이 말씀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님 중심 사상이 아닌 인간 중심 사상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귀에 익고, 입에 익고, 눈에 익은 이 말씀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님 중심 사상이 아닌 인간 중심 사상입니다. 이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은 마침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에 도달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는 「인격 수양」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입니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으로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으로 나 같은 죄인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어감을 맛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의 말씀입니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귀에 익고, 입에 익고, 눈에 익은 이 성경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세요.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날마다 상고하세요. 그 속에는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습니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딤후3:15-17/ 성서주일설교/ 2002-12-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딤후3:15-17 오늘은 성경공회에 속해 있는 우리 고려 교단이 지키는 성경주일입니다. 우리 성도들 귀에 익숙한 말은 성서공회를 중심으로 12월 둘째 주일에 지키는 성서주일일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대한 성서공회를 통하여 지금까지 보급되어 왔습니다. 물론 생명의 말씀사 등 다른 출판사를 통해서도 보급되고 있지만, 저작권이 성서공회에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영감으로 기록되어진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의 손에 의해서 기록되어졌다고 사람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본문16절) 그러나,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의 덜 된 예수쟁이들이 “성경도 사람의 작품”으로.... 타종교의 경전과 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cf. 불경, 코오란경). 다시 말해서, 인간이 쓴 것으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정확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다」.... 이것이 성경에 대한 바른 신앙입니다. 시대가 흐를수록, 말세가 가까울수록....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그 중심축이 옮겨지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도 인간 중심으로 옮겨져 가고 있습니다. 대한 성서공회도.... 이런 시대적 조류를 타고.... 자꾸만 인간 중심적 사고로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과 더불어 「공동번역 성서」를 출판했다가 한국교회의 외면으로.... 새로운 시도로 「표준 새번역 성경」을 출판했습니다. 이 「표준 새번역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오염되고 훼손되어,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 포함되어졌고, 보수교단 연합회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외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한 성서공회도 이를 어느 정도 인정했으나....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함께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의 출판을 중단한다는 결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보수교단 연합회를 중심으로.... 「한국 성경공회」를 창설하고 52년판 한글 개역성경을 보완하여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 성경」을 출판 보급하였습니다. 이 「신구약 성경」 대한 성서공회로부터 판권 침해라는 고소를 받아 1심에서 승소를 했으나, 2심에서 패소함으로 사실상 한국 성경공회의 「신구약 성경」은 더 이상의 출판을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보수교단 연합회의 「한국 성경공회」가 보수 신학의 입장에서 성경 원문을 직접 번역하여 새로운 성경을 번역 출간하려는 것입니다. 현재 60%의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보수교단 연합의 「한국 성경공회」에 속한 우리 교단총회의 산하에 있는 교회들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으기 위해서 ”성경주일”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원작자(原作者)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일점일획의 틀림이 없는 정확무오(正確無吳)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을 인간의 작품과 동일하게 바라보고 비평을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대한 성서공회」는 이런 신앙적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원작자(原作者)이십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저작권” 문제는 논의될 수 없어야 하는데, 이 ”저작권” 문제로 성경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많은 분들이 그만두고 있습니다. 「한국 성경공회」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보수교단 연합회에서 「표준 새번역 성경」이 아닌 ”한글개역” 성경을 계속 사용하겠다니까, 출판 중단을 결정한 것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우리 성도들이 사용하는 52년판 ”한글개역” 성경의 출판을 중단한다는 결정이 아니었으면 「한국 성경공회」가 따로 설립되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지침서가 되는 정확무오(正確無吳)한 유일한 법칙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우리 성도들은 ”나의 사랑하는 책”이라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나의 사랑하는 책” 이 성경을 우리 성도들은 듣고, 외우고, 읽고, 배워 왔습니다. 너무도 우리의 귀에, 입에, 눈에 익숙해 있습니다. 새로운 성경이 나오면 어른들의 세대에서는 오히려 혼란스럽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맞아 전체 개신교가 같이 사용하도록 찬송가를 통일시킨 지 20년이 다 되었습니다만, 찬송가를 보지 않고 부르면, 옛날 찬송가의 가사가 나옵니다. 이런 혼란은 우리 어른들 세대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어려서부터 듣고, 외우고, 읽고, 배운 성경, 우리의 귀에, 입에, 눈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성경, 이 성경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이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기에 운동력이 있어서 움직이게 됩니다. 곧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 땅의 그 어떤 사람의 능력으로도 할 수 없는 역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했습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창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다」고 했습니다(창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成肉身)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있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라는 것입니다. 성육신(成肉身)하신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님은 바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입니다. 그래서,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죽은 소녀가 살아서 일어났습니다(막5:41).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관(棺) 속에 있던 죽은 청년이 살아서 일어났습니다(눅7:14).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 나왔습니다(요11:43). 이 것이 바로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입니다. 참으로 크고 놀라운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있는 것도 제대로 불러 사용하지 못합니다. 요즈음 중동 사태가 악화일로(惡化一路)에 있습니다. 세계의 경찰국가로 자처하는 미국의 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UN의 결의도 두 나라간의 분쟁을 중단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도 제대로 불러 사용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 사용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이겠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가진 이 성경 말씀이 그토록 위대한 능력의 말씀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 사랑하여 ”나의 사랑하는 책”이 되어야 합니다. 2.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본문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여기의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란 말은.... [데오프뉴스토스(qeovpneusto”)]란 단어인데, ”하나님의 입김이 쐬인,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어진”의 뜻으로 ”하나님”과 ”숨쉬다”의 합성어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영감(靈感)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은 모든 성경 곧 신구약 66권이 모두 ”영감(靈感)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영감(靈感)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혔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주신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게 하심에 있어서.... 그 내용이 잘못이 없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사로잡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 ”영감(靈感)되었다” 곧 성령의 능력이 사로잡았다는 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받아쓰기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자신의 생각과 표현으로 기록하게 하시되, 그 내용이 잘못됨이 없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사로잡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표현 방식이 조금씩 다릅니다. 이것을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의 기록이 서로 다르니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틀린 것이 있다는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직접 기록한 성경을 ”원본(原本)”이라고 합니다. 이 ”원본(原本)”을 보고 베낀 것을 ”사본(寫本)”이라고 합니다. 선지와 사도들이 직접 기록한 ”원본(原本)”은 지금 없습니다. 여러 종류의 ”사본(寫本)”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사본(寫本)” 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영감(靈感)되었다”는 것은 ”원본(原本)”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이 성경에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요5:39). 그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또 날마다 성경을 열심히 상고해야 합니다(행17:11). 마태복음 4: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바로 성경에 기록되어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하나님의 일러주신 말씀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먹고 마시는 것도 기록된 성경 말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는 것도 기록된 성경 말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마4:7).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도 기록된 성경 말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마4:10). 그래서, 「기록하였으되」, 「기록된 바」, 「기록된 대로」, 「기록하기를」, 「기록하였거니와」, 「기록된 모든 것」, 「읽지 못하였느냐?」고 하십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 속에 모든 문제의 해결이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3.이 성경은 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 본문 17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한다.... 바로 죄인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범죄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이 에덴에서부터 시작하여(창3:15) 다 이루었다(계21:6)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목적이 ”죄인 구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문 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이 하는 일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속에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 구원의 길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을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혀놓고 들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구원 얻은 자의 삶을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케 되어야 합니다. 이 ”온전케 됨”은 구원 얻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한 평생에 이루어가야 할 일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화(聖化)라 합니다. 본문 17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다.... 바로 그 사람의 ”삶”이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의롭게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노력해도 어느 정도 의롭게 살 수 있겠지만, 온전히 의롭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에 기록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롬1:16). 우리 성도들은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살아가는 힘을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얻어야 합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입니다. 이 성경을 상고하라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날마다 상고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역사하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본문15절).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했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 같은 죄인을 구원했습니다. 내가 예수 믿어 「내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 얻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오늘 본문 15절의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는.... 이 말씀을 분명히 깨달아 안다면, 나의 구원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사람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듣고, 듣고, 또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세상 학문을 익히고, 인간의 지식이 늘어가면서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물들어가게 됩니다.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기울면 그때부터 의심의 검은 구름이 심령 속을 덮어옵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성경 말씀은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유명하다는 신학 박사, 목사님들이 한몫 거듭니다. 잘못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조류를 타고 성경을 제대로 번역한다면서 ”처녀”라는 말을 ”젊은 여자”로 바꾸어버립니다. 메시야의 탄생은 「여인의 후손(창3:15)」, 「처녀가 낳은 아들(사7:14)」, 「동정녀 마리아가 낳은 아들 예수(마1:23; 눅1:27,34)」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여인」은 ”처녀”의 의미가 없고, 「처녀」는 ”소녀에서 젊은 여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영감을 받아 기록한 마태는 「처녀」를 「동정녀」로 기록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내를 알지 못하는 처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귀에 익고, 입에 익고, 눈에 익은 이 말씀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님 중심 사상이 아닌 인간 중심 사상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귀에 익고, 입에 익고, 눈에 익은 이 말씀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님 중심 사상이 아닌 인간 중심 사상입니다. 이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은 마침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에 도달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는 「인격 수양」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입니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으로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으로 나 같은 죄인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어감을 맛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의 말씀입니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 귀에 익고, 입에 익고, 눈에 익은 이 성경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세요.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날마다 상고하세요. 그 속에는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이 있습니다. 이 ”살아 있는 말씀(Living Word)”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달리면서 읽게 하라/ 합2:1-8/ 성서주일설교/ 2004-01-13
달리면서 읽게 하라 합2:1-8 오늘 구약 하박국에서 몇 절을 봉독하였습니다. 선지자 하박국 때는 바벨론이 앗시리아 나라를 뒤집어 엎고 중동지역의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처럼 큰 나라들의 틈 바구니에 끼어 있던 약소국 유다는 그 비극적인 최후를 목전에 두고 떨고 있었습니다. 왕이 바뀌 고 정부가 새로 조직되었지만 큰 나라들에게서 오는 정치적 파동은 유다의 심장부를 자극시키고 그들의 운명을 풍전등화와 같이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하박국이란 선지자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박국이란 그 이름의 뜻은 포옹 한다 는 말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하박국에 대하서 하박국은 그 이름에 합당한 직 책을 감당한 사람이다. 그것은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이 위로하는 자 또는 다른 사람을 자기 팔 로 안는 자란 뜻이다. 마치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으며 울지 말라 고 달래고 위로하는 사람과 같은 뜻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박국은 수난을 앞두고 불안과 공포에 쌓인 사람들 을 위로한 사람입니다. 그 위로의 말씀이 바로 달리면서 읽게 하라 는 것입니다. 책을 읽는 일 은 사실 달리면서 읽을 수는 없습니다. 혹시 천천히 걸으면서 읽을 수는 있습니다. 제가 대학 시절에는 청파동에 살았는데 동숭동에 그 당시에 문리대 교사가 있을 때였습니다. 청파동에서 동숭동까지 버스도 있고 전차도 탈 수 있지만 너무 복잡해서 조금 미리 떠나 걸어가곤 하였습니 다. 지금 같으면 차가 많아서 걷기도 어렵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차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만리 동 길로 서대문 방면으로 신문로를 거쳐 돈화문 앞으로 해서 서울대학 병원으로 지나가면 한 시 간 15분 내지 30분이 걸리곤 했습니다. 아침 일찍 집을 떠나 천천히 책을 읽으며 그렇지 않으면 단어를 따로 외며 걸어가던 생각이 납니다. 교통이 복잡하지 않은 데서는 혹 걸으면서 책을 읽 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하박국은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상식 밖의 말씀을 대담하게 하고 있습니다. 달 리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은 하박국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 님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달리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달 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생활이 가만히 앉아서 율법 책을 읽을 만큼 안정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 사람이 평안을 나타내는 말은 샤간(Shak an) 곧 앉는다 라는 동사를 썼습니다. 그런데 달린다 는 말은 그와 반대의 의미로 위기와 불안 을 표시한 말입니다. 곧 여기서 달린다고 하는 것은 적군에게 쫓기어 도망가고 있는 상태를 연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위급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 내 포되어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처지에 있더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리면서 읽게 하라 는 것은 평안히 앉아서 한가한 시간을 가 질 수 없더라도 바쁜 일과 속에서도 문자 그대로 달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라는 뜻입니 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복잡한 환경을 떠나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세상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런 환경을 만 들기가 퍽 어렵습니다. 바쁜 세상입니다. 우리는 늘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달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 일을 힘쓰라 고 말입니다. 전에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 오늘은 할 일이 많이 있으니까 보통 날 보다는 두 시간 은 더 기도해야겠는데 우리 생각과는 좀 다르지요? 우리는 흔히 아, 오늘은 좀 바쁘니까 하면서 오히려 기도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렇지 않으면 빼먹기 쉬운데 루터는 할 일이 많고 바쁘기 때문 에 오히려 더 기도하였습니다. 왜요? 기도를 통해서 그는 지혜를 얻고 용기를 얻고 능력을 얻었 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달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바쁜 생활 속에서 피곤 할 때 좀 쉬어야지 성경을 읽으라고 합니까? 성경은 우리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 니다. 양식을 먹지 아니하고 일할 수 있습니까? 군량을 공급하지 아니하고 전쟁을 생각할 수 있 습니까? 하물며 신령한 전쟁인 마귀와의 싸움에서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힘 의 공급을 받지 아니하고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들으세요. 바쁜 세상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읽어 힘을 얻어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에서는 비교적 성경을 공 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성경공부반에 될 수 있는 대로 가셔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성경 읽지 않고, 성경 배우지 않고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우리 교 회 젊은이들이 얼마나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동안은 매 화요일 밤에 25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공부하고 삼일 기도회 끝난 다음에 청년들끼리 모여 나라 와 교회를 위해서 젊은이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이제는 이 모임을 더 확장해서 월, 화, 목, 금 나흘 동안 매일 밤 누구든지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 청년들이 나와서 같이 성경을 배우고 친교를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 성서 학원에도 120여명의 평신도가 매일 밤 나와서 성경을 체계 있게 배우고 있습니다. 이거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러분 바쁜 세상일수록 성경을 일어 야 합니다. 달리면서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조간 신문 보시기 전에 성경을 몇 절이라 도 꼭 읽으세요. 그리고 나서 신문을 보세요. 칼 바르다(Karl Barth)박사는 성경에 비추어 신문 을 읽고, 신문을 읽으며 성경을 생각하라 고 하였습니다. 직장에 다니시는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포켓 성경을 꼭 하나씩 가지고 다니시면서 짬짬이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으세요. 제 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런 생활을 계속하시면 신앙생활을 하는 맛을 느끼게 될 것 이고 보람을 찾게 되리라 생각합니다.더구나 이 말씀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달리면서도 읽어야 합니다.칠그윈(A. M. Chirgwin)의 세계 전도에 있어서의 성경(The Bible in World Evangelism) 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를 썼어요. 뉴욕 감옥에서 갖나온 미결수 은 행강도의 두목이었던 사람과 소매치기 한 사람이 같은 날 센츄럴 공원(Central Park)에 나갔다 가 사람이 웅성거리는 데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소매치기를 연구하다가 결국 은행강도의 두목이 었던 사람보다 소매치기가 먼저 지나가는 사람의 주머니 속에서 무엇을 훔치는 데 성공했습니 다. 이 사람은 기분이 좋아서 자기 아파트에 가서 그것을 펴보니 돈이 아니라 예수쟁이들이 읽 는 성경 쪽 복음인 것을 발견하고 이 소매치기는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침대 밑으로 휙 집어던지고 말았습니다.밤에 잠을 자려 해도 별로 졸리지도 않고 해서 혼자 놀음을 하자니 그것 도 시시하고 밤늦게 누구를 찾아가기도 어렵고 해서 아까 저녁에 집어 던졌던 성경 쪽 복음을 펴서 도대체 예수쟁이들이 읽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첫 페이지를 펴서 읽어보았습니 다. 그 책이 마침 마태복음이었는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첫 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지 않아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이삭을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도무지 재미가 없단 말이에요, 그래 집어던질까 하다가 뒤적뒤적하면서 마태복음 5장 산상보훈 에 눈길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동안 시간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그만 그의 마음이 녹아졌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날 밤 주님께 회개하며 주님을 그의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감옥에서 알게 된 은행강도 두목 미결수를 만나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이 책을 꼭 보라고 권하면서 마태복음 책자를 주었습니다. 사실 이 미 결수는 원한을 품고 어떤 사람을 미워해서 기회만 있으면 죽이기로 계획하고 호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려고 옷을 벗는데 주머니에서 책이 떨어져 그것을 주워 침대에 누워 몇 장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옛 사람에게는 살인하지 말라 하였거니와...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 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 고. 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 습니다. 그래도 계속 내려가면서 읽었습니다. 11장에 가서 마지막 부분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은행 강도 두목은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습니다. 그는 울부짖었습니다. 오, 자비하신 하나님, 나는 죄 인입니다 . 내가 주님께 갑니다. 이 순간 그의 마음 속에는 미움과 불안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화 가 충만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우리의 가정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 겠지만 국제 기드온 캠프에서는 일 년에도 수천만 권의 성경을 인쇄해서 호텔이나 병원, 감옥, 군대 등에 보급합니다. 그런데 이 사업을 통해서 얼마나 놀라운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 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 단체가 있어서 굉장한 활동을 하고 있고 한국 복음화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사실이 세계에 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달리면서 읽게 하라 는 말씀은 동분서주 달리고 있는 오늘, 바쁜 세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꼭 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쁘기 때문에 더 읽어야 합니다. 바쁘다 보면 정신적인 안정 없 이 허덕이기 쉬운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잘 무장해서 바쁜 세상, 곁길 많은 세 상에서도 성공적으로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은 여전히 성경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명작보다 성경이 가장 많이 팔린다는 것은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인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읽 는 이상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면서 읽게 하라 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함을 가 리킵니다. 판에 명백히 새겨 달리면서 읽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왜 달리면서 읽기가 어렵습니 까? 달리면서 읽으려면 그의 줄이 혼란을 일으켜 잘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좀 읽는다고 하여도 내용을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책이 움직이고 우리의 눈이 움직이기 때문입 니다. 그러므로 여기 선지자 하박국은 분명히 새겨 라고 했습니다. 곧 달리면서 읽어도 읽을 수 있게 그 내용이 명백한 것을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명백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 자 신이 부족해서 이해를 잘못할 때가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세 가지 물음에 사람들은 서로가 엇갈린 말들을 합니다. 사람이 어디에서 왔 는가? 하는 것은 인류역사를 통해서 계속 질문되어 온 것입니다. 어떤 이는 유인원이 진화된 것 이라고, 어떤 사람은 아메바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고. 이처럼 분명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 이 세상에 무엇 하러 왔는가? 이것 역시 사람들이 쉽게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질문입니다. 저속 하게 말하면 먹으러 왔다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좀 고상하게 말하면 일하러 왔다고 합니다. 그러 나 성경은 인간이 이 땅 위에 온 목적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류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 세상에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에는 누구나 분명히 대답할 사람이 없습니다. 전에 맹자같이 훌륭한 사람도 그 제자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게 되면 어디로 갑니까? 그때 제자의 질문을 듣고 있던 맹자 선생이 한참 동안 가만히 계시더니 하신 말씀이 여보게, 사람이 살아 생전에도 다음 시간에 무슨 일이 어떻 게 일어날는지도 모르고 사는데 죽은 다음의 일까지야 어떻게 알겠나? 나도 그것은 모르겠네. 그렇습니다. 사람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 것은 분명히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무덤 에 가는 것으로 알고 보든 보화를 무덤에 같이 묻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니라. 내 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 : 1-3). 이보다 분명히 말씀 하실 분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읽는 까닭은 우리 인생의 가는 길을 너무도 분명하 게 확실하게 말씀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달리면서 일게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곧 누구나 어느 때나 읽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박국 선지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달리면서 읽게 하라는 것 이 아닙니다. 그 계시가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힘과 빛이 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 이 이 말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언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읽 어야 할 말씀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바른 목표를 찾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죄인이 이 말씀을 읽을 때 회개하고 새로워집니다. 교만한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겸손해집니다. 상한 심령이 이 말씀을 읽을 때 고침을 받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지혜를 얻습니다 . 지혜있는 사람이 이 말씀을 읽으므로 지혜가 더해집니다. 실망한 사 람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새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예술가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위대한 영감을 얻게 됩니다. 정치가가 이 말씀을 읽음으로 나라를 바로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의사가 이 말씀 을 읽을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교사가 이 말씀을 읽고 바른 지도를 할 수 있습니 다. 군인이 이 말씀 읽으므로 더욱 용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구나 다 읽어야 할 책입니다. 오늘 성서주일을 당해서 달리면서 읽게 하라 시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여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풍성한 축복을 충분히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달리면서 읽게 하라/ 합2:1-8/ 성서주일설교/ 2004-12-13
달리면서 읽게 하라 합2:1-8 오늘 구약 하박국에서 몇 절을 봉독하였습니다. 선지자 하박국 때는 바벨론이 앗시리아 나라 를 뒤집어 엎고 중동지역의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처럼 큰 나라들의 틈 바 구니에 끼어 있던 약소국 유다는 그 비극적인 최후를 목전에 두고 떨고 있었습니다. 왕이 바뀌 고 정부가 새로 조직되었지만 큰 나라들에게서 오는 정치적 파동은 유다의 심장부를 자극시키고 그들의 운명을 풍전등화와 같이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하박국이란 선지자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박국이란 그 이름의 뜻은 포옹 한다 는 말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하박국에 대하서 하박국은 그 이름에 합당한 직 책을 감당한 사람이다. 그것은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이 위로하는 자 또는 다른 사람을 자기 팔 로 안는 자란 뜻이다. 마치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으며 울지 말라 고 달래고 위로하는 사람과 같은 뜻이라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박국은 수난을 앞두고 불안과 공포에 쌓인 사람들 을 위로한 사람입니다. 그 위로의 말씀이 바로 달리면서 읽게 하라 는 것입니다. 책을 읽는 일 은 사실 달리면서 읽을 수는 없습니다. 혹시 천천히 걸으면서 읽을 수는 있습니다. 제가 대학 시절에는 청파동에 살았는데 동숭동에 그 당시에 문리대 교사가 있을 때였습니다. 청파동에서 동숭동까지 버스도 있고 전차도 탈 수 있지만 너무 복잡해서 조금 미리 떠나 걸어가곤 하였습니 다. 지금 같으면 차가 많아서 걷기도 어렵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차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만리 동 길로 서대문 방면으로 신문로를 거쳐 돈화문 앞으로 해서 서울대학 병원으로 지나가면 한 시 간 15분 내지 30분이 걸리곤 했습니다. 아침 일찍 집을 떠나 천천히 책을 읽으며 그렇지 않으면 단어를 따로 외며 걸어가던 생각이 납니다. 교통이 복잡하지 않은 데서는 혹 걸으면서 책을 읽 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하박국은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상식 밖의 말씀을 대담하게 하고 있습니다. 달 리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은 하박국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 님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달리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달 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곧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생활이 가만히 앉아서 율법 책을 읽을 만큼 안정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 사람이 평안을 나타내는 말은 샤간(Shak an) 곧 앉는다 라는 동사를 썼습니다. 그런데 달린다 는 말은 그와 반대의 의미로 위기와 불안 을 표시한 말입니다. 곧 여기서 달린다고 하는 것은 적군에게 쫓기어 도망가고 있는 상태를 연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위급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 내 포되어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처지에 있더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리면서 읽게 하라 는 것은 평안히 앉아서 한가한 시간을 가 질 수 없더라도 바쁜 일과 속에서도 문자 그대로 달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라는 뜻입니 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복잡한 환경을 떠나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세상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런 환경을 만 들기가 퍽 어렵습니다. 바쁜 세상입니다. 우리는 늘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달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 일을 힘쓰라 고 말입니다. 전에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 오늘은 할 일이 많이 있으니까 보통 날 보다는 두 시간 은 더 기도해야겠는데 우리 생각과는 좀 다르지요? 우리는 흔히 아, 오늘은 좀 바쁘니까 하면서 오히려 기도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렇지 않으면 빼먹기 쉬운데 루터는 할 일이 많고 바쁘기 때문 에 오히려 더 기도하였습니다. 왜요? 기도를 통해서 그는 지혜를 얻고 용기를 얻고 능력을 얻었 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달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바쁜 생활 속에서 피곤 할 때 좀 쉬어야지 성경을 읽으라고 합니까? 성경은 우리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 니다. 양식을 먹지 아니하고 일할 수 있습니까? 군량을 공급하지 아니하고 전쟁을 생각할 수 있 습니까? 하물며 신령한 전쟁인 마귀와의 싸움에서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힘 의 공급을 받지 아니하고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들으세요. 바쁜 세상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읽어 힘을 얻어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에서는 비교적 성경을 공 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성경공부반에 될 수 있는 대로 가셔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성경 읽지 않고, 성경 배우지 않고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우리 교 회 젊은이들이 얼마나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 동안은 매 화요일 밤에 25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공부하고 삼일 기도회 끝난 다음에 청년들끼리 모여 나라 와 교회를 위해서 젊은이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이제는 이 모임을 더 확장해서 월, 화, 목, 금 나흘 동안 매일 밤 누구든지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 청년들이 나와서 같이 성경을 배우고 친교를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 성서 학원에도 120여명의 평신도가 매일 밤 나와서 성경을 체계 있게 배우고 있습니다. 이거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러분 바쁜 세상일수록 성경을 일어 야 합니다. 달리면서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조간 신문 보시기 전에 성경을 몇 절이라 도 꼭 읽으세요. 그리고 나서 신문을 보세요. 칼 바르다(Karl Barth)박사는 성경에 비추어 신문 을 읽고, 신문을 읽으며 성경을 생각하라 고 하였습니다. 직장에 다니시는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포켓 성경을 꼭 하나씩 가지고 다니시면서 짬짬이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으세요. 제 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런 생활을 계속하시면 신앙생활을 하는 맛을 느끼게 될 것 이고 보람을 찾게 되리라 생각합니다.더구나 이 말씀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달리면서도 읽어야 합니다.칠그윈(A. M. Chirgwin)의 세계 전도에 있어서의 성경(The Bible in World Evangelism) 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를 썼어요. 뉴욕 감옥에서 갖나온 미결수 은 행강도의 두목이었던 사람과 소매치기 한 사람이 같은 날 센츄럴 공원(Central Park)에 나갔다 가 사람이 웅성거리는 데서 어떻게 성공적으로 소매치기를 연구하다가 결국 은행강도의 두목이 었던 사람보다 소매치기가 먼저 지나가는 사람의 주머니 속에서 무엇을 훔치는 데 성공했습니 다. 이 사람은 기분이 좋아서 자기 아파트에 가서 그것을 펴보니 돈이 아니라 예수쟁이들이 읽 는 성경 쪽 복음인 것을 발견하고 이 소매치기는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침대 밑으로 휙 집어던지고 말았습니다.밤에 잠을 자려 해도 별로 졸리지도 않고 해서 혼자 놀음을 하자니 그것 도 시시하고 밤늦게 누구를 찾아가기도 어렵고 해서 아까 저녁에 집어 던졌던 성경 쪽 복음을 펴서 도대체 예수쟁이들이 읽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첫 페이지를 펴서 읽어보았습니 다. 그 책이 마침 마태복음이었는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첫 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지 않아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이삭을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도무지 재미가 없단 말이에요, 그래 집어던질까 하다가 뒤적뒤적하면서 마태복음 5장 산상보훈 에 눈길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동안 시간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그만 그의 마음이 녹아졌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날 밤 주님께 회개하며 주님을 그의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감옥에서 알게 된 은행강도 두목 미결수를 만나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이 책을 꼭 보라고 권하면서 마태복음 책자를 주었습니다. 사실 이 미 결수는 원한을 품고 어떤 사람을 미워해서 기회만 있으면 죽이기로 계획하고 호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려고 옷을 벗는데 주머니에서 책이 떨어져 그것을 주워 침대에 누워 몇 장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옛 사람에게는 살인하지 말라 하였거니와...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 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 고. 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 습니다. 그래도 계속 내려가면서 읽었습니다. 11장에 가서 마지막 부분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은행 강도 두목은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습니다. 그는 울부짖었습니다. 오, 자비하신 하나님, 나는 죄 인입니다 . 내가 주님께 갑니다. 이 순간 그의 마음 속에는 미움과 불안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화 가 충만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우리의 가정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 겠지만 국제 기드온 캠프에서는 일 년에도 수천만 권의 성경을 인쇄해서 호텔이나 병원, 감옥, 군대 등에 보급합니다. 그런데 이 사업을 통해서 얼마나 놀라운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 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 단체가 있어서 굉장한 활동을 하고 있고 한국 복음화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사실이 세계에 소문이 나고 있습니다. 달리면서 읽게 하라 는 말씀은 동분서주 달리고 있는 오늘, 바쁜 세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꼭 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쁘기 때문에 더 읽어야 합니다. 바쁘다 보면 정신적인 안정 없 이 허덕이기 쉬운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잘 무장해서 바쁜 세상, 곁길 많은 세 상에서도 성공적으로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은 여전히 성경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명작보다 성경이 가장 많이 팔린다는 것은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인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읽 는 이상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면서 읽게 하라 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함을 가 리킵니다. 판에 명백히 새겨 달리면서 읽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왜 달리면서 읽기가 어렵습니 까? 달리면서 읽으려면 그의 줄이 혼란을 일으켜 잘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좀 읽는다고 하여도 내용을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책이 움직이고 우리의 눈이 움직이기 때문입 니다. 그러므로 여기 선지자 하박국은 분명히 새겨 라고 했습니다. 곧 달리면서 읽어도 읽을 수 있게 그 내용이 명백한 것을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명백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 자 신이 부족해서 이해를 잘못할 때가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세 가지 물음에 사람들은 서로가 엇갈린 말들을 합니다. 사람이 어디에서 왔 는가? 하는 것은 인류역사를 통해서 계속 질문되어 온 것입니다. 어떤 이는 유인원이 진화된 것 이라고, 어떤 사람은 아메바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고. 이처럼 분명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 이 세상에 무엇 하러 왔는가? 이것 역시 사람들이 쉽게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질문입니다. 저속 하게 말하면 먹으러 왔다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좀 고상하게 말하면 일하러 왔다고 합니다. 그러 나 성경은 인간이 이 땅 위에 온 목적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류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 세상에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에는 누구나 분명히 대답할 사람이 없습니다. 전에 맹자같이 훌륭한 사람도 그 제자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게 되면 어디로 갑니까? 그때 제자의 질문을 듣고 있던 맹자 선생이 한참 동안 가만히 계시더니 하신 말씀이 여보게, 사람이 살아 생전에도 다음 시간에 무슨 일이 어떻 게 일어날는지도 모르고 사는데 죽은 다음의 일까지야 어떻게 알겠나? 나도 그것은 모르겠네. 그렇습니다. 사람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 것은 분명히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무덤 에 가는 것으로 알고 보든 보화를 무덤에 같이 묻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니라. 내 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 : 1-3). 이보다 분명히 말씀 하실 분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읽는 까닭은 우리 인생의 가는 길을 너무도 분명하 게 확실하게 말씀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달리면서 일게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곧 누구나 어느 때나 읽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박국 선지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달리면서 읽게 하라는 것 이 아닙니다. 그 계시가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힘과 빛이 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 이 이 말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언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읽 어야 할 말씀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바른 목표를 찾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죄인이 이 말씀을 읽을 때 회개하고 새로워집니다. 교만한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겸손해집니다. 상한 심령이 이 말씀을 읽을 때 고침을 받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지혜를 얻습니다 . 지혜있는 사람이 이 말씀을 읽으므로 지혜가 더해집니다. 실망한 사 람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새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예술가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위대한 영감을 얻게 됩니다. 정치가가 이 말씀을 읽음으로 나라를 바로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의사가 이 말씀 을 읽을 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교사가 이 말씀을 읽고 바른 지도를 할 수 있습니 다. 군인이 이 말씀 읽으므로 더욱 용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구나 다 읽어야 할 책입니다. 오늘 성서주일을 당해서 달리면서 읽게 하라 시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여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풍성한 축복을 충분히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하였습니다.
도올의 성경관에 대하여/ 눅2:1
도올의 성경관에 대하여 눅2:1 ”이 때에 가이사 아구도스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Quirinius)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며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 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 이러라”(눅2:1-7) 지난해 10월 27일(금요일) 오후 10시에서 11시까지 방영한 KBS1 TV의 ’도올의 논어 이야기’(제5강)에서 도올 선생의 성경관에 대하여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얻고자 한다. ’도올의 논어이야기’는 100강(講)을 예정하고 근 1년간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도올 선생 (김용옥,중국철학자)은 원체 박학다식하며, 특유한 음색을 갖고 열정적인 강의를 하는 지라 많은 시청자들이 매료되고 있는 것이다. 그 분의 특유한 창조적인 논리전개 때엔 스튜디오에 있는 분들이 모두 감탄하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그 분이 공자의 논어 강의를 위하여 자주 비교 예로 드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엔 매우 큰 의견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있다. 1. 도올선생이 인용한 성경본문(눅2:1-5) ”이 때에 가이사 아구도스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Quirinius)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며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 이러라”(눅2:1-7) 2. 구레뇨 총독의 실재문제에 대하여 1) 도올선생의 견해 도올선생은 로마 역사 사료(史料)에 예수 탄생당시 구레뇨(Quirinius)가 수리아 총독이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 본문은 허구라는 것이다. 2) 성경의 바른 이해 ① A라는 역사사료에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B사료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이나 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역사연구의 객관적 접근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다른 사료에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성경의 기록이 허구라는 논리는 무리다. 성경은 신앙적 케리그마 이지만 동시에 고대의 많은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역사적사건의 기록에 관하여서는 가장 오래되고 신뢰할만한 역사서의 가치가 있다. ② 인용한 본문의 누가복음서는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케리그마:Kerygma)이지만, 로마 역사의 사료로서 가장 신뢰할 만한 서증(書證)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의 문서는 AD 60년경에 기록되었지만, 기록자인 누가는 예수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는 잘 모를 지라도 누가의 부모세대들은 당대의 총독을 모를 리 없고, 또 혹 오기(誤記)의 경우는 있다 손치더라도 누가가 예수의 케리그마를 만들기 위하여 하필 구레뇨의 이름을 조작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③ 대부분의 로마 역사서들은 요세퍼스(Jesephus,AD37-100)나 기본(Gibbon,Edward,1737-1794, 로마제국 흥망사 저자)등과 같은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기록, 정리되었지만 로마의 모든 역사의 사료를 포함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 된다. 사도 요한이 요한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 참조: 요20:30)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기록된 역사의 한계성을 알 수 있다. ④ 로마 역사의 한 사료에 의하면 구레뇨의 호적등록은 AD 7년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탄생 10년 내지 12년 후였다. 이 사적 차이는 오랫동안 성경 연구자들에게 큰 난점 이였다. 그러나 근년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된 고대 파피루스와 다른 증거가 발견되어, 구레뇨는 2회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것이 알려졌다.또 인구조사를 위하여 사람들이 그 선조들의 고향에 돌아가도록 명령되었던 것도 발견되었다.[자료:Heury H.Halley Bible Handbook(번역판), 신한문화사, 서울,1955,P.434] 앞으로도 이러한 고고학자들의 삽이 성경기사의 역사성을 계속 확증해 나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현재의 사료간의 다소의 불일치는 앞으로의 연구과제 일뿐 전적인 배척의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3. 마리아의 베들레헴 여행문제 1) 도올선생의 견해 도올선생은 만삭의 마리아가 먼 거리의 여행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다윗의 적통을 주장하기 위하여 꾸민 것으로,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은 믿기 어렵다는 뜻을 말했다. 2) 성경의 바른 이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로 그 사실은 허구가 아니라 실화라고 믿는다. ①모든 로마 속 국민은 로마 가이사 아구도스 황제의 호적령에 복종하여 그들의 선조의 고향으로 돌아갈 의무가 있었다. ② 나사렛과 베들레헴의 거리는 약103km 거리임으로 낙타나 나귀를 타고 요셉과 동행하면 약 3-4일 정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도올선생께서 만삭의 여인이 약100km정도의 여행을 할 수 없다고 단정하였으나, 아기 예수가 탄생하자마자 헤롯의 살해명령을 피하여 베들레헴에서 급히 먼 애굽까지 피난하셨다는 기록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도보로 걸은 것이 아니고 나귀를 타고 다녔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오늘날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나귀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③ 사람의 해산은 만삭이라도 한 두 달 시차가 있을 수 있고 더구나 마리아는 초산이므로 해산시기를 예측할 수 있는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해산때까지 여행을 미룰 수 없었을 것이다. ④ 그리고 다윗의 적통 유지를 위하여 꾸민 이야기라는 도올의 주장은 큰 무리다. 4. 역사와 케리그마(Kerygma)의 이해 문제 1) 도올선생의 개념의 이해 ① 역사의 정의(定義) 도올선생은 에머선(Ralph Walds Emerson, 1803-82, 미국철학자)이 말한 ”역사란 개인의 전기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역사책은 역사적 사실의 정보를 전하는 문헌이다”고 주장하였다. ②케리 그마(Kerygma) 도올선생의 성경책에 관한 정의는, ”성경은 역사적 사실의 정보를 전하는 문헌(즉 역사책)이 아니고 신화적 양식(Form)에 의하여 기독교신앙의 메시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만든 케리그마”라고 하였다. ③ 예수와 공자의 전기관(傳記觀) 도올선생이 이해하고 있는 예수와 공자의 전기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도올선생은 불트만(Bultman,1884-1976)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 예수의 인생드라마엔 초자연적 사건이 많다. 동정녀탄생, 로마의 사형수로서 십자가의 죽음, 부할, 승천 등의 예수 생애의 사건들은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비하여 중국의 사마천(司馬遷, BC4C-5C)이 쓴 공자(孔子, BC5C-6C)의 일생엔 초자연적 사건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도 신화적 양식(Form)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생애와 공자의 일생은 동일한 접근법(방법론)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 성경의 바른 이해 ① 기독교의 케리그마(Kerygma)란 원래 복음(gospel, god-spell, God-story. 하나님의 이야기)이란 말에서 연유되었다. 복음이란 틴데일(Tyndale: 영국의 종교개혁가, 성경번역가)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노래하고, 춤추고, 기쁨으로 뛰어 놀게 하는 좋고 즐겁고 기쁨에 가득찬 기쁜 소식”이다. 이 기쁜 소식(복음; gospel)의 본질은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결실인 죄인에 대한 자유(해방)와 평화와 영생의 선포(요3:16,사61:1-2)이다. 도드(C. H. Dodd)의 말에 의하면 이 복음의 선포(전도)가 기독교의 케리그마다. ②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다음 네 가지 특징을 내포한다. 첫째 예언의 성취(하나님의 섭리)로서 그리고 인간의 책임(인간의 죄)을 내포한 것으로서 제시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무덤에서의 부할, 승천에 대한 역사적 사건의 선포 둘째 예수의 신성과 그리스도(구세주)로서의 위격(位格)에 대한 신학적 평가 셋째 죄인에게 회개와 용서함을 받으라는 설교 넷째 예수에 의한 구원(Salvation), 평안(Shalom), 영생(Eternal life)의 보장의 선언 등이다. ③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신화적 양식(Form)으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역사 속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사실(예수의 동정녀 탄생, 죽음, 부할, 승천 등)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신학적 케리그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역사주관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운 개념이다. 도올선생께서 TV강의 중 ”예수도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라고 하신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기독교의 진리의 명제에 대한 이해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전능 전지하신 하나님이 어찌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서 배울 것이 있단 말인가? ○ 근자에 도올선생의 KBS1 TV의 ’논어 이야기’의 강의를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동요를 가져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다. 많은 비기독교인과 심지어 일부기독교인 들이 갖고 있는 성경(케리그마)에 대한 편견 또는 오해 일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을 재확인하여 어떤 유혹이 온다고 해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신앙인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마태복음강해(131)/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생각/ 마26:1-5/ 2002-04-16
마태복음강해(131)/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생각 마26:1-5 잠언 16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19장 21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장소는 선교현장입니다. 선교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데 어느 순간에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그저께 금요기도회 시간에 8월중에 있을 낙도선교를 위해 기도하면서 날씨를 위해 특별히 합심하여 간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낙도선교는 날씨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8월은 태풍이 자주 발생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도 출발하는 당일 날 태풍이 불어온다고 하면 낙도선교를 떠날 수 없게 됩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운데 ’바람 불어도 괜찮아요, 주님 내 안에 계시니까 나는 괜찮아요’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만약 태풍이 불어오는데 어설프게 믿음도 별로 없으면서 ’바람 불어도 괜찮아요’하며 배를 타고 나갔다가는 요나처럼 되기 십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어디 이 태풍에서 나를 건지시나 못 건지시나 한번 보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입니다. 어설픈 믿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이번 중국선교여행도 그랬습니다. 출발할 때 저희일행은 일정을 미리 세워두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하던 날, 그 첫날부터 모든 일정을 조절해야만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미리 세워 두었던 계획들이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불편했었습니다. 현지에 계시는 분들이 좀더 우리 일행에 대해 사려깊은 배려를 해 주었다면 원래 계획했던 모든 일정을 다 소화해 낼 수 있었을텐데 사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또 다른 좋은 계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일정을 다시 조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계획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는 설령 그 계획이 하나님께서 세워두신 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 비록 그것을 수정하시더라도 결국은 더욱 선한 길, 더욱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악한 계획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들이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 일을 추진하려 해도 도저히 그 일을 할 수 없도록 막으시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악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의 모의와 하나님의 계획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악한 일을 도모하는 자들은 나름대로 치밀한 계산과 여건을 고려해서 행동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계산이나 생각을 전혀 의식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지도 않습니다. 아니 그들의 치밀한 계획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원래 자신이 계획하신 일을 행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과 사람의 생각사이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승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오늘 본문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여러 곳에서 이와 동일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 28절과 11장 1절, 13장 53절과 19장 1절에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본문의 시작이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치셨다는 표현 앞에 ’다’라는 수식어가 첨가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 마치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의 사역이 모두 종결되었다는 뜻입니까?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다 마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말씀으로 가르치셨던 모든 사역이 끝이 나고, 이제 남은 것은 십자가 희생을 통해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만 남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까지 오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참 많이 접했습니다. 산상수훈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들,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씀이 결국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과 연결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다 마치신 후, 이제 그 마지막 사역을 위해 한 걸음 성큼 더 다가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최종적인 권위는 행동하는데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 중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말한 것을 행동하려면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압니다. 특히 저와 같은 목회자나 아니면 교회 내에서는 교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많은 말을 쏟아내고는 있지만 정작 그 말씀대로 행동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나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목회자든, 교사든, 가르친 말씀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려면 그 말씀대로 행하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 예배 때 한국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 온 조선족 전도사님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중국 선교여행 중에 탈북자를 만날 수 있도록 이곳에서 도움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 날 저녁, 그 전도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분들이 그분의 설교에 힘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공감을 했습니다. 물론 말씀을 너무 빨리 하시고 북한 억양이 섞여 있어서 때로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탈북자들에 대한 얘기, 그리고 북한 주민들에 대한 얘기는 거침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힘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십일조보다는 구제헌금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씀을 하실 때에 우리의 구제생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까? 굶주린 북한의 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처고모 가족이 굶어죽은 모습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앞에서 화형 당해 죽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에 그 설교에 힘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굶주려 있는 현장을 목격했는데 어떻게 북한을 모른 척 할 수 있겠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약 가르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면 역사에 기억되어질 한 명의 훌륭한 인물정도로만 평가되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자신이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마지막으로 행동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6장은 예수님의 수난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그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수난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너희의 아는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마지막 사역인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실 때, 유월절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왜 주님은 ’이틀 후에’라고만 하셔도 되셨을텐데 굳이 여기서 유월절을 언급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틀 후면 유월절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월절을 언급한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너희도 아는바와 같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이유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언급하고 있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유월절을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시키려 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이 어떤 날입니까?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종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고, 피를 바르지 않은 집들은 모두 그 장자를 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난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날과 자신의 죽음을 연관시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이 죽는 대신 백성이 살아난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살아나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날 수 있었듯이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팔리우리라’고 했는데, 이 말은 ’팔리게 될 것이다’라는 어떤 추측이나 짐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일을 위해 팔리실 것이 이미 확정된 일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가 뭐래도 이 일은 결코 변경되거나 바뀌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확신에 찬 이 말씀, 그것도 자신이 십자가에 죽게 될 것임을 너무도 명백하게 선언하시는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줄 아십니까? 만약 ’팔리게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셨다면, ’팔릴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불안해하고, 우리의 구속에 대해 의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 자체가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유월절에 팔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실 것을 말입니다. 어디 주님의 확신에 찬 말씀이 이것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삶, 전 영역에 걸쳐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고 확신에 찬 말씀을 이미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너무도 분명하고 확신에 찬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들이 확신에 찬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는지를 각자에게 물어보아야 할 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분명한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계십니까? ’길이요 진리’되신 주님과 그 분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말씀 속에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하고 계십니까? 이 말씀대로 살면 내 삶이 정말 풍요로와 질 수 있음을 믿고 계십니까? 손해보는 인생이 아니라 언제나 풍성해지는 삶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굳게 신뢰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말씀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 일 점 일획도 거짓 없는 진리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을 더 의지하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마치 본문 3절에 나오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확신에 찬 말씀 앞에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까? 3절과 4절을 보면 ”그 때에 대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하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그 때’란 어떤 때를 말합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다가오는 유월절에 잡혀서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계실 때를 말합니다. 그때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은 가야바의 집에 모여 예수를 죽이기 위해 공모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바가 누굽니까? 그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가 자기의 집을 내주어 예수를 죽이는 일을 공모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그들은 모여서 ’궤계’로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의논하였다고 했습니다. ’궤계’란 ’속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교활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이 자리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다만 이 자리는 어떤 방법으로 언제 죽일 것인지에 대해 서로 의논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궤계’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악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서 당시 종교지도자들만 탓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형태의 모습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말하면서 불법을 자행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또 궤계를 사용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 일들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면 수단도 목적만큼이나 정당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곳에 모여서 의논하고 결정을 내린 사항이 무엇입니까? 5절에 보면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은 ’유월절’을 말합니다. 유월절은 전국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두 모이는 날입니다. 그래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한 곳에 집중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기도 하고 또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몰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괜히 이 날에 예수를 잡아 죄를 뒤집어 씌워 죽게 한다면 큰 소동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회의 끝에 얻은 결론은 유월절을 피해서 예수를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민요가 일어나게 되면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쌓아둔 인기가 무너질 수도 있고, 더 이상 백성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명절을 피해서 예수를 죽이자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민원’ 발생을 우려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요즘은 너나 할 것없이 민원에 대해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민원은 대개 집단이기주의에서 발생한 것들입니다. 물론 자신들은 절대 아니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대개는 자신들의 이기주의적 발상이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고 아주 안타까운 일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단군상 철거와 관련해서 교계에서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역광장에서 단군상 철거를 위한 집회를 교계에서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회를 위해 강사로 서울에서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목사님 세 분을 섭외했습니다. 물론 그 날 교인동원까지 함께 부탁을 드리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섭외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쁘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을 하셨다고 합니다. 정말 바빠서였을까요? 그것도 세분이 똑같이 말입니다. 그분들은 부활절 연합 예배 때에는 강사로 선정되기 위해 수천만원을 기탁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날 그 집회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한결같이 거절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해를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종종 사람들을 의식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좋은 뜻에서 사람들을 의식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해서 사람을 의식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 단군상 철거운동에 강사로 나가면 여러 곳에서 공격의 대상이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어쩌면 상당한 불이익을 당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꺼렸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부활절 연합 예배때 강사로 나가면 모두가 우러러 봅니다. 한국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분으로 생각하며 떠받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강사가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이 아름다운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느냐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민요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지, 그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민요를 피해 예수를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계산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인지를 먼저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가 먼저입니까? 사실 민원에 대한 얘기라면 우리도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장애인 학교를 세우는데 제일 염려되는 부분이 민원발생문제입니다. 여러모로 우리교회가 지난주에 구입한 부지가 법적으로는 아무 하자가 없지만 녹지인 까닭에 환경단체나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하면 학교를 세우는데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면 이 문제를 두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지혜롭게 해결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면서 무조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것이 상책은 아닙니다. 한 발짝 물러서기도 하고, 한 발짝 바싹 붙이기도 하고, 어쨌든 민원이 발생할 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할 줄 압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혜롭게 처신하되 하나님의 선한 일을 중도에 포기하거나 지리멸렬(支離滅裂)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날, 가야바의 집에서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많은 백성의 장로들이 머리를 맛대고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명절을 피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심이 동요하는 것도 막고, 예수도 죽이고 일거양득을 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이미 살펴보았지만 그들의 이런 계획과 상관없이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유월절 날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뜻밖에 예수의 제자인 가룟 유다에 의해 그들의 계획한 일정이 취소되고 예언되어진 그 날에 그 모든 일들이 그대로 성취되고 맙니다. 그들이 밤을 새워가며 아무리 계획을 세우면 무얼 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면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합니까?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면 역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정대로 유월절 어린양으로 우리의 십자가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획과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생각이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니고, 노력이 필요없다는 뜻도 물론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나의 생각과 열정을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내가 열정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열정에 맞추어주실 줄 착각합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가상히 여겨 나에게 축복하실 줄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한 기업인이 하루에 네시간만 자고 성공한 사례를 들어가면서 누구든지 노력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우리가운데 스며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노력해도 안됩니다. 어느 때 안됩니까?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면 안됩니다. 열심히 공부해도 안됩니다. 어떤 때 안됩니까?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에 내 인생을 맞추어야지 내 생각에 하나님의 계획이 맞추어지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신 어떤 계획들이 여러분의 지식과 이성에서 출발되어진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그 뜻을 묻고, 하나님의 계획아래서 가지게된 생각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 일을 지금 이루려 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가족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믿지 않는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내 생각과 내 지식으로 가족의 구원을 방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나의 생각이 방해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말씀을 깊이 새겨 주의 뜻에 합당한 삶의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생활 속으로/ 합2:1-8/ 성서주일설교/ 2002-12-15
말씀을 생활 속으로 합2:1-8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성서주일을 통해서 성경의 귀중함을 다시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에 오면 성경을 보게됩니다. 이 성경은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것인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말씀이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책일 수 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태러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평상시 보다 40%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 미국 사람들이 성경을 사서 읽고있는가? 테러사건과 성경과는 아무런 관련이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 팔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성서의 저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오류가 없는 책입니다. 진리의 원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독되어졌기 때문에 믿는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전과 용기와 영적 충만함을 줍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졌기 때문에 읽는자들에게 감동과 역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약 40명의 기자들이 썼는데, 약1600년간 기록된것입니다. 베드로는 벧후1:21에 ’오직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것이다’라고 언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는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하박국의 메시지입니다. 당시 유다는 약소국가입니다. 반대로 바벨론은 중동지역의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 위기의 때였습니다. 유다는 약소국가로서 나라의 앞날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였습니다. 이와같은 때에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공포에 휩쌓인 백성들을 위로합니다. 그 위로하는 말씀이 바로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그 위로의 말씀은 달려가면서도 읽게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리면서 책을 읽을 수 있습니까? 읽을 수 없습니다., 희브리말에 사람이 평안을 나타내는 말은 ’샤간’이라는 말인데 의미는 ’앉는다’라는 동사입니다. 반대로 ’달린다’는 말은 아주 반대의 의미인데, 불안과 위기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달린다는 것은 적군에게 쫒기어 도망가고 있는 상태를 연상케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아주 위급하고 바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처지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면서 읽게하라’는 것은 평안히 앉아서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없더라도 바쁜 일과 속에서도 말씀을 읽는 일을 힘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쁘면서도 피곤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세계적인 신학자 칼바르트 목사님은 ’한손에는 신문을, 한손에는 성경’을 들고 신학을 했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직장에 다닐 때 포켙용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틈나는대로 성경을 읽읍시다. 이러한 생활을 하다보면 신앙생활의 보람을 느끼게 되고 신앙이 성숙해집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졌기 때문에 역사속에서 이 성경을 읽는 사람마다 위대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방탕 생활을 하다가 성경을 펴고 읽은 구절이 롬13:11-14절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회개하여 중세 교회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롬1:12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을 읽다가 깨닫고 그 시대의 부조리와 캐톨릭의 부패성을 바라보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성경을 읽읍시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위인들의 성서평> 아브라함 링컨은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간에게 주신 제일 귀한 선물이다. 세상에 모든 좋은 것은 성경책을 통해서 주어졌다”라고 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 기도의 응답을 수없이 경험했던 죠지뮬러는 ”나는 성경을 읽으므로 69년동안 행복스럽게 살았고” 고백했습니다. 글래스톤은 ”나는 내 일생에서 95명의 위대한 사람을 보았다. 이중 87명은 성경을 읽고 성경 정신대로 사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인 죠지 워싱턴은 ”하나님과 성경책이 없이는 세상을 옳게 다스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인생의 길이 열립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총알을 막은 성경> 영국의 크롬웰은 영국왕 찰스1세가 민권을 무시하고 백성을 괴롭힐 때 청교도의 군대를 거느리고 왕을 친후 공화정치를 베풀었던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성경을 심히 사랑하고 늘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 아들에게도 언제나 성경을 읽어야 할 것과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크롬웰은 어려서부터 늘 성경을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한번은 크롬웰이 전장에 나가서 적군과 대항하여 용감히 싸우는 중 그만 적군의 총알이 크롬웰 대장의 가슴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크롬웰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이게 웬일인가?’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웃옷을 벗었을 때 총알은 포겟속 성경책에 박혀있었습니다. 총알이 타기 시작한 데를 보니까 그곳은 전도서12장1절의 ”네가 젊었을 때에 네 조물주를 기억하라”는 곳이었습니다. 크롬웰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언제나 갖고 다니는 중에 뜻밖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은 습관이 필요합니다. 이 성경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우리를 건져주실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가정문화가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 가족이 모여서 대화의 주제가 없어서 서로 연속극만 보다가 잠자리로 들어가는 가정이 많습니다. 가족간의 대화가 단절된 집이 있습니다.. 가족이 둘러 앉아서 성경을 돌아가면서 읽는다면 그것도 아름다운 가족문화를 만들어가는 지름길이라 생각이되어집니다. 용식이 형제와 명예자매가 결혼을하고, 임신을 했습니다.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잘자라고 있습니다. 나는 임신한 그 부부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성경 시편을 하루에 한 장 씩 읽고, 쓰고 묵상하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잘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남편이 잠언을 한 장씩 읽어주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 가정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가는 가정입니다. 태어날 아이를 축복하며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반드시 복주실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가정문화가 아닙니까/ 우리 교회에 임신한 가정이 두 집이 있습니다. 참으로 기쁜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건강한 자녀를 출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태어날 아이가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는 복된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기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으로 잘 준비하는 귀한 부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랍니까? 교회를 통해서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성경을 배우며 읽는 자녀는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금요일날 교회 김장을 했습니다. 올해는 김장을 맛있게 담구었습니다. 김옥자 집사님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사람들이 수고를 했습니다. 김옥자 집사님의 친구분이 자기 자녀 양육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렵게 살아서 자녀들을 유치원에 보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본인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지만, 교회에 가면 최소한 아이들이 반듯하게 성장할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선교원에 보냈고, 놀때도 교회에서 놀라고 했고, 수련회는 꼭 참석시켰다고 합니다. 본인 생각대로 아이들이 반듯하게 성장해서 교회에서 청년회장도 하며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감사하게 생각하며 자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교회에 다녀도 되고, 안다녀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듯이 주일에는 자녀들을 교회학교에 보내서 예배를 드리게 해야합니다. 이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자녀가 잘되는 길이며, 가정이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주일은 철저하게 지키며 말씀을 사모하면서 말씀을 듣다가도 귀한 말씀이 깨달아 지면 성경을 열고 줄을 긋고 사모하는 심정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읽고, 자녀들에게도 성경을 읽게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인간관계 때문에 적당히 다니는 분들이 계십니까? 나에게는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적에 대해서 믿어지지도 않지만, 무시하는 인본주의자들이 있습니까? 왜 믿어지지 않는 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기적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읽는자는 감동을 받고 변화를 일으키는 감화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허다벌스 잉그설’이라고 하는 무신론자가 무신론자인 친구인 ’류 윌리스’라는 자에게 기독교를 반대하는 책을 쓰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권면을 듣고 그런 책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성경을 읽어보았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어가는 가운데 생각이 점점 변했고, 나중에는 회개하고 오히려 성경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류 읠리스가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그 유명한 ’벤허’라는 책을 썼던 것입니다. 성경의 감화력은 이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살펴보면 거의가 성경을 읽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경 그자체를 읽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34:16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행17:11절 말씀을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성경 그 자체를 읽는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윌슨 박사가 성경을 사람들이 얼마나 읽는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63%가 성서를 한 장도 읽지 않았으며, 97%가 10장이상을 읽어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최고로 많이 팔리는 성경이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성경 그 자체를 읽고 애독하고 있습니까? 물턴 교수는 ”현대 독자를 위한 성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서와 더불어 해야 할 한가지 일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성서를 읽는 일이다”. 성서는 인류 최대의 보물이기 때문에, 골동품처럼 선반이나 책상 모퉁이에 먼지가 끼도록 내버려둘게 아니라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서기관 에스라는 ”율법책을 가지고 ...새벽부터 오정까지 읽었다”(느8:3) 이제는 성서주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읽는 습관과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뜨거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인생의 문제도 해결받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기를 소원하며 축복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들/ 행8:26-40/ 성서주일설교/ 2008-12-12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들 행8:26-40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강림하심을 대망하는 대림절 기간에,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성서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성경이 들어오게 된 것은 1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1877년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만주에서 영국의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 목사님이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씨와 함께 한글 성서번역에 착수하였습니다. 로스와 매킨 타이어 목사님은 1873년에 한국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압록강 가까지 왔었으나, 멀리 바라만 보고 돌아가는 길에 고려문에 들려서 한국 사람들을 만났으나 불러서 인사하려고 해도 한국인들이 만나주지를 않았습니다. 외국인을 만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하고 있었기에 때문이었습니다. 1874년에는 로스와 매킨타이어 목사님이 만주의 고려문에 왔으나 직접 나가지 않고 중국인 서기를 시켜서 한국인들을 여관으로 데려오게 하여 은밀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에 한꺼번에 4명의 한국인을 만났는데, 의주에서 온 한 동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네 분은 한국교회사에 길이길이 기억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4명입니다. 이들은 서양의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기 위하여 만주에 나온 사람들이었는데, 먼저 이응찬이 선교사를 따라 우장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3명은 다음해에 합류하였습니다. 이들은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었고, 선교사로부터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들 4명은 3년 후 1876년에 가서야 예수 믿기로 하고 매킨타이어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들이 우리 한국의 최초의 개신교인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이 처음 개신교인들에게 중국어에서 한글로 성경을 번역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후에 서상륜이 합류합니다. 이래서 최초로 우리 한국인의 손으로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성경을 읽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입니다. 원로장로님들이 앞장서서 성경을 읽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루에 5시간 이상 성경을 읽으실 때가 있고, 일 년에 13독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 열정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아무리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그렇게 수십 번 읽지는 않습니다. 금년 6월에 번역된 시크릿이란 책이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슈퍼 베스터셀러입니다. 초판발행 이후에 3개월 만에 73쇄 판을 가지고 있으니, 이 책을 번역 출판한 회사는 완전히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수십 번 읽지는 않습니다. 이 책이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미국의 최고의 책으로 소개되면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시크릿이란 비밀이란 말인데, 우리 사람에게는 “끌어당김의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인생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비밀스러운 일인데, 자신이 끌어당긴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마음에 그린 그림과 생각이 그것들을 끌어당겼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생각은 실체이며, 끌어당기는 힘이다”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것을 끌어당기라고 합니다. 사랑은 위대한 감정입니다. 좋은 생각을 구하라, 믿어라, 그리고 받으라고 합니다. 오늘 하루를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획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웃으며, 긍정적인 그림을 그리라고 합니다. 불치병이란 없습니다. 당신은 과거의 당신이 아닙니다. 자신의 웅대함을 받아들이라. 참 좋은 책입니다. 그러나 그 책에는 자신의 힘, 자신의 생각, 자신의 신념, 자신의 능력을 말하지,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려고 하는 헌신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좋은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한번 읽고 책장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비밀이라는 책 정도는 수십 권도 쓸 정도의 위대한 책입니다. 그래서 일 년에 수십 번 읽고 또 읽는 우주적인 베스트셀러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수용하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 말씀을 받아 달라지고 싶다, 변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탈무드를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건을 예로 들어 성경을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려서부터 그 탈무드를 읽었으며,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억지로 짜 맞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려고 했습니다. 내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성경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스티븐 모티어라는 학자는 “열려라 성경”이라는 책에서 “성경이 스스로 말하게 해야 실제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성경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계속 읽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책 중에서 하나의 책이요, 소장용으로 한 권을 더 가진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전혀 읽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가장 위대한 보화요, 인생의 길잡이요, 위대한 보검을 한 번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항복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히4:12에서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마4:4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7집사님 중의 한 분이신 빌립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복음전도자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불레셋 땅이었던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길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광야였습니다. 빌립은 사실 사마리아에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의 명령을 받들어 순종하여 일어나 가사로 가는 광야에 도달하고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에디오피아 사람은 경건한 사람으로, 유대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절기를 지키러 머나먼 길을 나선 사람입니다. 지금은 광야요, 다른 사람이 없고, 이디오피아의 내시가 수레를 타고 돌아가고 있고, 빌립이 광야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가 에디오피아에서 온 관리요,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였습니다. 그 내시가 수레를 타고 내려가면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큰소리 내어 성경을 낭송하였지 눈으로 읽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들어보니 이사야서를 읽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빌립에게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빌립에게 내적인 음성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내시는 분명히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붙였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 내시가 대답합니다.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고 하더니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고 했습니다. 내시는 집을 떠나서 머나먼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것도 훌륭하지만, 수레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그런데 더 훌륭한 것은 겸손한 성품과 사모하는 마음과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라는 말은 듣기에 따라 기분이 상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니 네가 무엇인데 읽는 것을 깨닫느냐” 시건방지게 묻는 것이냐고 호통을 칠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누구인데, 함부로 나서고, 사람을 무시한다고 야단을 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란 지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바르게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겸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 자라도 더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런데 내시가 읽고 있는 성경은 이사야서였고, 이사야53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이 말씀은 히브리어 성경이라기보다는 헬라어로 번역된 70인역으로 보여 집니다.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합니다.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여기서 선지자가 말하는 “그”라는 분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그 입을 열지 아니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죽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것을 말씀하였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사야53장의 말씀은 메시아의 고난을 말씀한 것입니다. 길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는데, 내시가 말합니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이미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빌립이 광야를 지나오면서 아주 상당한 말씀을 증거하였고, 내시는 세례 받아야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복음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37절에 “없음”이라고 하였지만, “어떤 사본에는 빌립이 이르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이 그렇게 물었을 것이요, 내시가 또한 바른 신앙고백을 하였을 것으로 보아서 후대에 그런 말씀을 삽입했을 것입니다.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물에 내려갔으며,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둘이 물에서 올라올 때에 주의 성령이 빌립을 이끌어가 버렸습니다.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빌립을 다시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시는 말씀을 깊이 깨달아 알게 되었고, 주의 종을 만났고, 세례도 받았고, 말씀을 간직하고 예수님을 사모하면서 감격 속에 고국에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런 것은 이 사건은 잠시 동안 광야에서 이루어진 작은 교회였습니다. 에디오피아는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내시는 생각할 때에 천사가 다가와서 자기에게 말씀을 가르쳐주고 세례도 주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한 사람이었고, 먼저 믿고 있는 성도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내시를 보십시오. 에디오피아가 이스라엘에서 얼마나 먼 나라입니까? 수륙만리 머나먼 나라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와 예배하고 돌아갑니다. 그 내시는 한 나라의 국고를 맡은 귀한 신분의 사람이요, 여왕의 신임을 받는 관리였습니다. 그 바쁜 시간을 내어 예배드리고 돌아갑니다. 오늘 주일을 경시하고 주일에 조금만 바빠도 마음대로 결석하고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내시를 본받아 예배에 열심을 내어야겠습니다. 이 내시는 돌아가면서 흔들리는 수레에 앉아서도 성경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그리고 지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겸손한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을 청하여 올라앉으라고 하고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가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관리이며, 여왕의 신임을 받는 내시인 것을 알렸습니다. 성경은 지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해석, 전통적인 해석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사도행전17:11에는 베뢰아 교인들의 좋은 신앙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습니다. 베뢰아 교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범적인 교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교회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듣습니다. 선지서를 읽을 때에 내 앞에 그 선지자가 있는 것처럼, 복음서를 읽을 때에 우리 주님이 앞에 서셔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가 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모릅니다. 눅24:32에서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두 제자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뜨거운 힘은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 능력인 것입니다.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은 우리 장로교회의 목사님으로 전도폭발을 일으킨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이 “내가 믿는 이유”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성경에는 약2000 가지의 예언이 있는데, 그 모든 예언이 구체적이고 상세한데, 역사상에 이루어지지 않는 예언이 하나도 없다고 하며 몇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예레미야51:58에는 바벨론의 성이 완전히 무너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제가 확인하면서 성경을 보았습니다. 렘51:58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의 성벽은 훼파되겠고 그 높은 문들은 불에 탈 것이며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요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잔하리라”(렘 51:58)고 했습니다. 62절 말씀을 보면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에 살지 못하게 하고 영원한 폐허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하니라”(렘 51:62)고 했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터스가 바벨론을 여행하면서 바벨론 성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성벽은 높이가 약60m였으며, 그 위에 90m 높이의 망대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성벽의 두께는 밑 부분이 56m였습니다. 그 성벽으로 둘러싸여진 면적이 502평방킬로미터였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가로세로 사방으로 약24km 되고, 넓이가 502평방킬로미터가 되는 어마어마한 도시입니다. 그런 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습니까? 한번 쌓은 성이 무너진다고 해도 흔적이라도 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위용을 자랑하는 성벽이 어디에 있습니까?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AD 4세기 기독교인이었다가 변절한 줄리언이라는 사람이 로마의 황제에 올랐습니다. 그는 중동의 바벨론의 폐허 근처에서 페르시아 인들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 폐허가 된 성이 페르시아 군대에게 이용물이 되지못하게 하기 위하여 바벨론의 남은 성벽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돌을 멀리 치워버려서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이 범람하면서 그 땅은 늪지대가 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의 예언은 하나도 틀림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에 우리의 운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 성경이 최종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성서주일을 맞아 우리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요한복음5:39에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요20:31절에는 이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잘 나와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1서5:13에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에배 중심의 신앙, 말씀 중심의 신앙, 실천하는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