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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명이 성령 받은 이야기/ 행2:1-4/ 2006-05-27
120명이 성령 받은 이야기 행2:1-4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으면서 사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머리로 생각을 하든지, 마음으로 느끼든지, 펜으로 글을 쓰든지, 입으로 말을 하든지, 발로 걸어가든지, 손으로 사랑을 베풀든지, 모든 것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저는 탄식 같은 짧은 기도 세 마디를 항상 하곤 하는데 그 중 하나는 “성령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다른 두 마디의 기도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첫째는 예수님이고 둘째는 성령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120명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신 날을 기념하는 오순절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오순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 째 되는 날이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 째 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자 대신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약속의 선물로 보내주신 날이 바로 오늘 오순절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120명 제자들에게 ‘강한 바람 같이’ 또는 ‘불의 혀 같이’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120명 제자들에게 오셔서 저들의 보혜사와 저들의 위로자로 함께 사시게 되었습니다. 120명 제자들은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가장 기쁘고 가장 행복한 신자들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120명 제자들에게 임하신 것은 출발에 불과했습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가 일어나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고넬료 집에 모였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고,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고,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는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였던 1,500여명 성도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처음으로 성령을 받았던 120명 제자들이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설펴 보겠습니다. 첫째, 일백이십 명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열 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이 있었는데, 열 한 제자들과 120명 제자들은 그 분부의 말씀을 그대로 듣고 순종했습니다.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 일백이십 명 제자들은 모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한 곳에 모여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행1:12,13,15).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신자들을 가장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가장 큰 선물인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떠나지 말라고 하시면 떠나지 말고, 함께 모이라고 하시면 함께 모이고, 기다리라고 하시면 기다리는 것이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일백이십 명 제자들이 열흘 동안 한 곳에 모여서 기다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다리라고 분부하셨으므로 열 한 사도들과 120명 제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저들은 모두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모두 성령을 받았습니다. 둘째, 일백이십 명 제자들은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 열 한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함께 모여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함께 모인 사람들의 수는 11명이 아닌 120명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이는데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며 그곳에 복을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며 그곳에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했을 때, 고넬료 집에 초신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했을 때, 평양 장대현교회에 1,500 명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120명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무엇보다 먼저 회개의 기도를 힘썼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베드로는 일어나서 배신의 죄를 고백했을 것이고, 도마는 일어나서 불신앙과 의심의 죄를 고백했을 것이고, 야고보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일어나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툰 죄를 고백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1907년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이 일어나서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 라고 부르짖으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을 때 거기 모였던 모든 회중은 가슴과 마루 바닥을 주먹으로 치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는데,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바다 물처럼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곳에 하나님은 성령을 바람처럼, 불처럼, 바닷물처럼 부어주십니다. 120명 제자들이 함께 모여 진정한 회개의 기도를 드렸는데 저들은 모두 성령을 받았습니다. 셋째, 일백이십 명 제자들은 사명을 다짐하며 새롭게 헌신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120명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열흘 동안 기도했다는 획기적인 사건을 기록하면서 제일 길게 기록한 사건의 내용은 사도의 직무 즉,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을 한 사람 새로 선출했다는 사건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길게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까? 궁극적으로는 사도의 직무를 바로 수행하라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힘있게 증거하라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 직무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서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와서 죽은 사실을 슬프고 아프게 기억했을 겁니다. 이제 남은 제자들이 다시는 배신하지 말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충성스럽게 증거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일백이십 명 제자들이 증인의 사명을 다짐하며 헌신의 기도를 드렸을 때 홀연히 성령께서 저들 위에 임하셨습니다. 이제 성령 받은 제자들의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120명 제자들에게 강한 바람 같이 또는 불의 혀 같이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강한 바람은 ‘심령이 거듭 남’을 상징했습니다. 심령이 성결해지고 거룩해짐을 가리켰습니다. 불의 혀는 ‘입이 성결하게 됨’을 상징했습니다. 입이 성결하게 되어서 입에 기도와 찬양과 전도가 가득하게 됨을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120명 제자들은 성령님을 가슴에 입에 그리고 몸에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모두, 사도 바울이 지적한 대로, 성령을 몸과 가슴과 입에 모신 성령의 성전들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또한 모두 방언을 했습니다. 방언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하나님과 영으로 대화하며 기도하는 방언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그 나라의 말로 대화하며 말하는 방언이 있었습니다. 일백이십 명 제자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방언을 했다는 것은 저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했다는 말이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회복했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에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이웃과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서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게 만듭니다. 저들은 또한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났습니다. 베도로와 사도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살리셨느니라”(행2:22-24).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결국 사도들과 120명 제자들의 전도로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조금 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와 갈릴리와 모든 땅으로 흩어져서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행8:4). 조금 후에는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행11:19).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120명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성령을 받았고, 함께 모여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므로 성령을 받았고, 증인의 사명을 다짐하며 헌신하므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심령이 새롭게 거듭났고 혀와 말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사람들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나타났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2007년을 바라보면서 또 한 번의 1907년 평양 성령 강림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은 모든 참으로 믿고 참으로 기도하는 신자들에게 임하십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게 될 때 성령은 슬퍼하시면서 신자들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되고 심지어는 떠나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지난날들에 비할 때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가슴의 성결, 입의 성결, 몸의 성결을 거의 상실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제2의 한국의 오순절 성령 강림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난 6월 1일과 2일 부흥사들이 한 곳에 모여서 ‘부흥사부터 회개하자’ 라는 플랜카를 내 걸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주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는 곳에 성령께서 강한 바람 같이 불의 혀 같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고 시대가 사는 길은 성령께서 강한 바람 같이 불의 혀 같이 다시 임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 안에는 진정한 회개의 제물들이 아직 뚜렷하게 나타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진정한 회개의 제물들을 만들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같은 진정한 회개의 제물들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제2의 한국의 오순절 성령 강림을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너무너무 부족하지만 지극히 작은 회개의 제물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부족한 우리들의 지극히 작은 회개의 제물 위에 성령의 바람과 성령의 불길이 조금이라도 임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처럼, 생명을 잃은, 형식만 남은, 말라빠진,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바람을 다시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1세기 성령 강림절/ 행2:4-8/ 2001-05-26
21세기 성령 강림절 행2:4-8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와 나와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21세기 첫 번째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최초의 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10일 만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오순절 사건입니다. 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이어 인류 역사상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원래 오순절은 처음 익은 소출을 하나님께 드리는 추수 감사제로서 유월절로부터 50일이 지난날에 해당합니다(민9:11). 그러한 절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성령 강림의 사건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온 성령 강림의 내용에 대해 함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21세기에 성령 강림절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최초로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 강림은 갑작스럽게 된 일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예언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의 강림을 약속하셨습니다. 1,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십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마지막 기간에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아버지께서 자기 이름으로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14:26). 이 약속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신다는 사건은 이미 구약에도 예언되었습니다.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그 약속이 중요하며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십니다. 곧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성령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범죄한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어야 하듯이 연약한 인생에게는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임합니다. 성령의 본질과 능력이 그리스도와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제자들을 영원히 떠나시지 않고 함께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은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최초의 성령 강림은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얼마나 충만했던지 오고 오는 세대가 다 구원을 받고 진리로 인도하시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오셨습니다. 사도행전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증거 하신 후에 마지막 승천하시기 직전에 한 번 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 곧 명령으로 주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기다리라” 는 말씀은 믿음 가운데서 준비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또한 예수님의 틀림없는 약속입니다. 또한 그 약속은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약속을 불신하고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의 길로 가버린다면 결코 그 귀한 약속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과 신실한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며 그 약속을 기다렸습니다(행1:14).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에 예언자들이 약속했고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변화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성령 강림의 내용에 있어서 또한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보혜사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요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보혜사라는 뜻은 “돕는 자, 변호자, 탄원자, 중보자를 가리킵니다. 먼저 보혜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 14:16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그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보혜사(돕는 자)로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며, 힘주셨는데, 이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보혜사, 대언자이십니다. 보혜사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은 오셔서 신자와 함께 있고, 속에 거하시면서(요 14:16, 17),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고(요 15:26),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요16:14).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믿는 자를 가르치시고(I 요 2:27),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또한 장래 일을 알려주십니다(요 15:26, 26:13). 또한 그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 사람의 눈을 여십니다(요 16:8). 또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연약을 도우시며, 말로 할 수 없는(간절한)탄식으로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십니다(롬:26-27). 그래서 보혜사 성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 이상의 큰일도 하게 하시는(요 14:12),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의 은사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가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충만은 보혜사로 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영이십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가 되신 것처럼(요14:6) 오순절에 임할 성령도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께서는 진리를 바로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대로 증거 해 주시는 분이며(요15:26)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요14:26). 그러므로 성령 강림은 진리를 잘 모르고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하신 분입니다.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요 14:16 하반절 …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고 했습니다. 성령 강림은 보혜사 성령께서 성도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돕는 자로 항상 성도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길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고 했습니다. 곧 성령께서는 믿는 성도 속에 항상 내주해 계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성령 강림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영원히 이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는 것입니다(마28:20).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며(고전12:3) 성령의 도움을 항상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친히 도와주십니다. 특히 기도하는 자를 도와주십니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4, 오순절 날에 120문도에게 성령이 임함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의 약속 성취로 주어진 오늘날의 교회가 탄생된 사건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고 했습니다. 오순절에 한 곳에 모인 무리들 가운데 홀연히 하늘에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가 나면서 성령이 강하게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행2:2). 놀라운 것은 그 자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그 자리에 모인 성도들에게 첫 성령 충만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도들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으며 이적과 기사가 일어났고 또한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능력 있게 증거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함으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고 했습니다. 오순절에 최초로 임한 성령 강림은 큰 부흥을 이루게 했던 사건입니다. 그날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무려 3천명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3천명은 오늘날처럼 단순한 교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의 수가 3천명이나”(41절) 더한 것입니다. 곧 구원받은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이 강림이 3천명의 부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5천명이 되었으며(행4:4) 그리고 계속적으로 부흥하여(행2:47, 5:14, 6:1, 6:7, 9:31) 복음이 온 지역과 온 민족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인류 역사를 새롭게 한 사건입니다. 그 성령 강림의 내용은 예수님이 친히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했습니다. 또한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와주실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강림은 그 곳에 모인 성도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해 주었으며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21세기 첫해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앞으로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복음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최초로 마가 다락방에서 임한 성령의 충만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 고급한 믿음이 되는 것 모두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HSC 2003 성령축제 첫째날/ 치유/ 겔36:24-28/ 2003-04-01
HSC 2003 성령축제 첫째날/ 치유 겔36:24-28 우리 크리스천의 삶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는 상반된 명암이 교차합니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구원과 심판, 성공과 실패, 빛과 어두움, 저주와 축복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희망으로 시작했다가 절망으로 끝나는 인생을 수없이 봅니다. 이혼급증, 가정의 붕괴, 성적 부패로 오염되어 가는 세상을 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이 절망, 죽음, 좌절,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 반대인 사람이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도 있습니다. 절망 중에 희망의 꽃을 피우고, 심판 가운데 구원받고, 실패 후 성공의 기쁨을 맛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두움의 자식들이 빛의 자녀로 변화되고 모든 저주가 축복으로 변하는 사람도 가끔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명암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많은 삶이 죽음으로 끝나고 희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30대 전도집회에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고 그 중 86명이 이번 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중 한 분이 간증을 했는데 그분이 간증을 할 때 그분도 울고 우리도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 분은 노조 위원장을 하며 회사와 동료를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자기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깨닫기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은 예수님을 오래 믿어온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의 감동과 눈물이 가득한 첫 사랑을 잊고 있었습니다. 첫사랑을 회복하고, 우리 신앙생활에 부흥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기적과 복을 우리 삶 속에 누리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듣고도 감동이 없는 사람은 이미 여러분의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십자가란 단어를 듣고도 눈물이 없다면 우리 영혼은 이미 무디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셨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을 한 일이 없고 무지막지한 죄를 졌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내 영혼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감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합니다. 태초부터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까지 그분은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으셨고 이천년을 기다렸기에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조건 없는 아버지의 사랑, 영원불변하신 사랑,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이신 아버지의 사랑, 망부석처럼 내가 돌아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내가 깨달을 때 우리의 신앙의 혁명에 일어납니다. ▶십자가 경험하기 두 번째, 우리 신앙과 삶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감동을 잊어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므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 사랑의 클라이맥스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체험은 십자가 체험입니다. 십자가 체험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수 없이 하고 찬양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그 십자가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은 내 정과 욕심이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없이 십자가 설교만 듣고 가기 때문에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라고 아무리 찬양을 불러도 십자가는 내게 그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나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거룩한 능력이 내게 나타나지 않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내 할 말 다하고 내 주장 다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니 십자가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자기를 찢는 것이요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에 사람들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는 하지만 다 흩어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경험은 바로 자아가 깨지는 경험입니다. 자아가 죽는 경험입니다. 옛 사람, 육의 사람, 옛 성품이 무너지는 경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자신은 변하지 않고 자신의 못된 성품을 그대로 둔 채 예수님을 믿습니다. 교활하고 강퍅하고 자기주장, 자기 생각이 많은 것을 개성이나 특성이라고 하며 그대로 둡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귀신 성격입니다. 귀신 성격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남에게 위로와 격려,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멋있는 언어를 구사한다 해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 육신, 자아, 옛 성품이 죽는 경험, 고통, 아픔 이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우리는 성령세례와 십자가의 고통이 연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집회는 방언하고 예언하고 불덩어리가 임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자기가 죽는 경험이 없는 성령체험은 감상적입니다. 영적 쾌락에 불과합니다. 자기 자랑, 내가 방언하고 예언하고 능력이 있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은사 자랑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짜 성령 경험은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경험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보혈이 만나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 중 뜨거움은 있으나 비인격적 부분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받아 뜨거운 것은 좋은데 비인격적인 부분도 가끔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새벽마다 방언하던 사람이 시험 시간에 컨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성령 경험이 천박스럽고 무능하고 피상적이고 기복이 심한 것은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회개가 따릅니다. 회개가 없는 성령의 역사는 다 가짜입니다. 그것은 감상적 경험, 종교적 체험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자기 생명을 내 놓습니다. ▶성령을 내 안에 받으라 우리 삶이 빛으로 향하는 변화, 기적이 일어나기 위한 세 번째는 성령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성령 경험은 십자가 경험입니다. 그것은 보혈의 체험입니다. 십자가의 경험과 보혈의 경험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자기 의지, 내 생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 의지로 십자가에 못박히지 못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그 분의 인치심, 그 분의 세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경험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 봉사를 하면서도 내적인 능력이 내 안에 없는 것은 십자가의 체험과 성령의 체험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종합한 말이 로마서 8장 1절과 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 불같은 성령이 임하길 바랍니다.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고 예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고 예수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 성령의 인치심으로 내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깨지는 것입니다. 부서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형극과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손과 발이 실로 묶여진 인형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이 움직이시는 대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인형,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불같은 성령, 바람 같은 성령이 임하는 것일까요?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내 힘으로 안됩니다. 성령이 임해야만 합니다. 성령은 내가 불러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성령이 능력이 있으니 돈을 주고 사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돈을 주고 사려는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령님은 인위적인 행위, 기술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을 살펴보면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은 오시는 것이라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내가 원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시대에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서입니다. 에스겔서 24절부터 27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게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새 영을 주셔서 새 사람을 만들게 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 그 분이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내가 성령 받고 싶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 저주를 끝내고 내가 축복, 회복을 해주겠다고 할 때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스겔 33장에서 48장까지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은 심판과 치유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부터 32장은 심판에 대한 예언만 나옵니다. 심판을 끝내고 33장부터 48장까지 축복을 주고 모든 심판을 끝내고 모든 저주를 끝내고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하고 회복하고 부활시켜주겠다는 메시지가 나옵니다. 33장에서 48장까지의 핵심단어는 ‘새 영’입니다. 마른 뼈에도 생기가 들어가게 하고 성전에서도 샘물이 나오게 만드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영을 부어주는 것입니다. 영이 부활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어떤 사람, 어떤 시대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지’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르매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 같이 역사하는 것이 나타나 그곳에 앉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일어났습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누구든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나 누구든지 어느 때든지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구약에는 어떤 사람, 선지자, 임금, 지도자 어느 시대에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이 가기만 하면 기적과 치유와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한 이후에는 누구든지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어느 때든지 여러분 오늘은 성령이 쏟아지는 날이 아닙니다. 이미 성령님은 이곳에 충만하게 계십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그 성령이 구약에서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했던 그 놀라운 성령이 오늘 여러분과 나와 이곳에 있는 분들과 서빙고, 부천에 있는 분들에게 쏟아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의 축복입니다. 성령 시대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만나를 가득 채우시고 누구든지 만나를 먹도록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약속을 믿고 손을 펴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성령은 오셨습니다. 성령은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 분을 환영하기만 하면 오늘 약속된 성령이 여러분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이 성령을 이래도 외면하겠습니까? 지금 입을 열어 ‘아멘’ 하십시오. 이 약속을 믿고 ‘주님을 환영합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약속된 성령이, 능력, 기름부으심이 오늘 여러분에게 쏟아질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약속한 것, 내가 지금까지 네게 가르친 모든 것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성령은 남종과 여종, 젊은이와 늙은이, 유대인과 이방인 누구에게나, 모든 시대에 부어주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약속을 믿으면 그 축복이 지금 임할 줄 믿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축복입니다. 주님이 약속한 방언, 능력, 예언, 병고침, 사랑의 은사 다 받으십시오. 우리는 영적으로 가난뱅이가 아닙니다. 풍성한 사람입니다. 나는 미래의 주인공이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요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복의 존재인줄 믿습니다.
가르치시는 성령/ 요14:25-26/ 이종윤 목사
가르치시는 성령 요14:25-26 이번 말씀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성령님에 대해 배우려 합니다. 우리가 선생님이라는 말을 할 때에 선생님이라는 분이 얼마나 중요한 분인지를 잊고 함부로 말 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가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바로 너희에게, 사도들 제자들 그리고 우리들에게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들은 오늘날 교회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성령님의 가르침대로 크고 있을까요? 1.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치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가 우리의 구주임을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를 따르게 되었으며 그를 믿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가 오실 것이며 그가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핍박받는 가운데서도 기도를 하며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신다 아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항상 기억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아픔을 항상 기억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 망각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건 바로 성령님에 의해서 입니다. 진리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변치 않고 항상 같은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건 바로 예수님이 항상 변함없이 같은 모습으로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항상 기억하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인 것입니다. 3.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우리가 전도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영적 진리를 남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육체의 힘으로 불가능하고 지혜로도 불가능합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심는 것과 물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손으로 말미암아 교회도 부흥하고 가족도 모든 사업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전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진리되신 그 분을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바로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우시고 우리에게 주신 그 믿음들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자세로 이 모든 역사하심에 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가르치시는 성령/고전2:10-6
가르치시는 성령/고전2:10-6 2003-02-20 14:17:26 read : 117 미국의 사회 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이라는 사람이 쓴 'The Age of Acess' 즉 '접속의 시대'라는 책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책의 주된 논지는 소유의 개념과 함께 시작된 산업자본주의가 막을 내리고 대신 접속이란 개념을 앞세운 문화자본주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것을 패러디해서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이 한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했지만 이제는 인터넷에 접속해서 정보를 얻는 것이 한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과거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접속하며 사는 사람들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배우는 것입니다. 과거에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했지만 오늘은 접속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부지런해 배워서 문맹을 극복해야 했지만 오늘은 부지런해 배워서 컴맹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사람은 배워야 살 수 있습니다. 배워야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배우기를 중단하면 그 날부터 삶이 퇴보합니다. 배우기를 게을리 하면 그 삶이 황폐화되고 초라해 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 탓을 하며 배우기를 주저합니다. '내가 이 나이에 배워 무엇하노!'라며 배우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나이 70이 가까운 나이에 운전 면허를 따신 분이 계십니다. 무엇을 배웠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인가를 배우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무엇인가를 배워가는 과정에서 얻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환경 탓을 하며 배우기를 포기합니다. '시간도 없고 할 일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아서'라고 배우는 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분들 가운데 직장 생활하면서 방송통신대학에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새벽에 학원에 나가 영어니 중국어니 어학을 공부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삶이 활기찹니다. 그 삶이 풍성하고 행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부를 이미 많이 했다고 배우는 일을 중단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나니 선배 가운데 한 분에 제게 잊을 수 없는 귀한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박사란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닐세, 박사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고 있는가를 알게 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세' 그러니까 박사가 됐다고 공부하는 일 배우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배우는 것은 학창시절에 국한 된 일이 아닙니다. 평생교육이라고 배우는 것은 평생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배워 가는 삶은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앙생활도 배우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보다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면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배움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지식을 배우는 것과 영적인 것을 배우는 것은 다른 일임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배움의 방법론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에 보면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에 속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육에 속한 자입니다. 육에 속한 자란 헬라어로 프쉬키코스입니다. 프쉬케를 중심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프쉬케는 혼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인데 육체적인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육에 속한 사람은 이 정신을 통해서 자기의 육체적인 생명을 풍성케 해 주는 것들을 배워갑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돈 잘 버는 법을 배웁니다. 세상의 지식을 많이 얻기 위해 공부합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처세를 배웁니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 놀고 즐기는 법을 배웁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정신이라는 것을 통해서는 영적인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 배워 가는 그 방법으로는 영적인 것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신령한 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자와 대조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프뉴마티코스입니다. 이 사람은 프뉴마를 중심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프뉴마는 성령과 교통할 수 있는 우리의 영을 말합니다. 이 영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지탱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자는 그 영이 깨어서 성령께 민감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으며 신령한 것을 분별합니다. 13절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치는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것은 신령한 사람만이 배울 수 있으며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육에 속한 사람은 신령한 일을 배울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해서 칼빈은 정말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배움의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teachable spirit' 즉 하나님에 관해서 가르쳐도 배울 수 있는 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소 귀에 경읽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에게 아무리 문자를 가르쳐 주어도 소는 배울 수 있는 지능이 없기 때문에 배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아무리 영적인 것을 가르쳐 주어도 이 배움의 영이 없기 때문에 신령한 것을 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사실은 하나님에 관해서 신령한 세계에 관해서 배울 수 있는 배움의 영을 가지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비로소 하나님과 신령한 세계에 관해서 배울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번에 종교개혁 성지 순례를 하면서 정말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수행했던 그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정말 많은 것을 깨닫고 도전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는 몇 곳을 감격적으로 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독일 베를린 서남쪽 에르푸르트라는 크지 않은 구 동독지역의 작은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곳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던 도시이고, 회심 후에 들어가 영적 훈련을 받았던 어거스틴 수도원이 있던 도시이고, 그가 신부로 서품을 받았던 도시입니다. 그 루터의 흔적을 돌아보는 도중 버스 기사의 제안으로 전혀 기대하지도 뜻하지도 않았던 곳을 가게 됐습니다. 바로 Luthrstein 즉 루터의 기념비가 세워진 곳입니다. 시간이 없었지만 멀리 돌아서 시골 길 한 복판 지금은 유채 꽃이 만발한 길 한 복판에 돌로 세워진 기념비가 있었습니다. 그 기념비가 제가 너무도 무겁고 중요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었습니다. 루터가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루터 발 길 앞에 벼락이 떨어진 것입니다. 만일 조금만 빨리 걸었다면 그는 그 벼락을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루터 앞의 나무 가지를 쳐서 떨어진 나무 가지가 루터 발 앞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루터는 그 순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고 그 이후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었고 종교개혁을 위한 거보를 걷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자리가 루터가 회심했던 자리였던 것입니다. 물론 루터는 천주교 교인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알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아직 몰랐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서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 몰랐고,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이후 그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후 그는 변호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접고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영적인 가치를 깨달았고 보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우고자 긴 순례의 길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배움은 그 방법이 다릅니다. 세상 지식을 얻기 위해 도서관이나 강의실에서 땀을 흘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먼저 그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배움의 영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처럼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 교사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영적인 것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13절을 보면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요 14:26을 보면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면 제자들이 누구의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이제 주님 대신 성령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만 홀로 남겨졌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 사도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주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책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학이 정립된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 제자들이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아시다 시피 제자들은 대개가 공부를 제대로 한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늘 영적 지도자로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던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고기 잡던 어부였습니다. 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선포했습니다. 이게 바로 신비입니다. 제 은사이기도 하신 장신대 학장을 지내신 이종성 박사가 그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 신학을 공부한 박사이고 성경에 대한 내용 신학에 관한 내용은 우리 나라에게 둘째라면 서러울 분이십니다. 정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분이 얼마간 목회를 하셨는데 3달 지나고 나니 할 말이 없더랍니다. 밑천이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설교 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가르쳐주시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주님 말씀처럼 성령께서 베드로를 가르치셨습니다. 깨닫게 하셨습니다.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지식도 없고, 주님의 말씀도 다 흘려들어서 생각나는 것이 없었지만 성령이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믿는 형제들 앞에서 설교할 때 말해야 할 것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인도해 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외칠 때 말해야 할 것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 하루에 3천명이 회개했습니다. 마 16:16에 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누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절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의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습니다. 신령한 것은 사람이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사람이 혼자 연구해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가르치십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가르치십니다. 주의 종인 저를 가르치셔서 말씀해야 할 것을 가르치시고 알려주십니다. 여러분들을 가르치십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십니다. 말씀을 읽는 중에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특별히 성령이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고 또 하시고 계시는 분이신지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뜻을 두고 계신지 가르쳐 주십니다. 둘째, 우리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던지, 또한 지금도 어떤 죄 가운데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때문에 그 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실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셋째, 세상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도저히 용납하실 수 없는 죄와 악이 얼마나 넘쳐나고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탄이 얼마나 간악하게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사실들은 오직 성령이 가르쳐 주실 때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책에서도 배울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교사로부터도 들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때만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의 가르침을 잘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영적인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시인의노래처럼 주님의 가르침을 간절히 사모할 때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 향락을 찾아 헤매는 사람 눈에는 향락거리만 보입니다. 돈벌 궁리만 하는 사람 눈에는 모든 것이 돈으로 보입니다. 그가 어떤 관심으로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사물이 달라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성령의 가르치심을 갈망하면 그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과 깊은 교제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과 깊은 교제가 있는 그가 성령의 가르침을 놓치지 않고 배울 수 있습니다. 전화 통화할 때 감이 좋지 않으면 저쪽에서 아무리 열심히 말해도 제대로 듣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성령이 말씀하셔도 듣기가 어렵습니다. 셋째,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배웠으면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 들어서는 제대로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르쳐준 것을 실천하지 않을 때 성령을 근심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울 수 없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 위에 충만히 임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령 강림은 2천년 전 그 날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임하셔야 합니다. 임하셔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깨우치시고, 우리를 인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이 영적으로 어두운 시절,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어려운 시절 우리가 영적 소경되어 실족하기 쉬운 시절 우리를 인도하셔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가르치심을 오늘도 받으시고 남은 여생 지속해서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것을 계속 배워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마다 소금과 빛의 영이 /마5:13-16
가정마다 소금과 빛의 영이 /마5:13-16 2009-05-27 11:41:13 read : 52 오늘이 교회력으로는 성령강림주일이고요, 우리 그냥 생활달력으로는 어머니, 어버이주일이 되었습니다. 두 가지가 겹쳤는데요, 우연히 겹친 것 같긴 한데 내용을 살펴봤더니 꼭 우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력의 출발은 예수께서 강림하시는 강림절로 시작을 해서 한 바퀴 쭉 돌아오다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120명의 성도들이 하늘에서 내린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제자가 되기로 하고 세상의 구원을 향해서 나가는 날, 이 날이 오늘입니다. 120명이 성령을 받은 날, 성령강림절로 지킵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가 또 하나 있습니다. 성령강림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성령강림이지만 성령의 예수님을 중심으로 보면 언제 처음 예수께로 왔느냐, 그걸 우린 물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마태복음, 마가복음, 또 요한복음까지 보면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 기록이 쓰여 있습니다. 천사가 와서 하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서 났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생리적, 성적 접촉이 없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았습니다. 사실입니까? 이 질문이 늘 교리에서 나오는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를 잠깐 접어놓고 우리가 믿는 예수가 누군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서 진실로 사람처럼 말구유에 태어났고 아기가 됐고, 자랐고, 십자가에 못 박혔고 사람 때문에 죽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믿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하신 분, 그 분이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성경말씀 기록에도 다 그렇게 썼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을 입고 참 사람으로 오신 그 분이 하시는 일을 봤더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만 하신 게 아니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도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병자를 고쳤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병을 싹 낫게 했습니다. 의학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다 죽은 사람을 손을 얹어서 일으켜 놨더니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가 하시는 일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한계를 넘는 초인적인 능력을 행하신 걸 보고 이 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인가보다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마지막 결론에 가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똑같이 사람들처럼 처형을 당하시고 그리고 무덤에서 영영 묻혀 있었으면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럴텐데 이 분이 무덤문을 열고 성령의 능력으로 무덤문이 열린 틈을 타고 부활하셔서 우리한테 오셔서 하시는 말씀, “나는 영원한 생명을 주러 왔고 앞으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허락하여 주겠다. 부활하신 분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전해주신 말씀이 진심임을 믿고 승천하시면서 사람들은 그 분이 전해주신 말씀이 진실임을 믿기로 하고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재하여 그 분은 참 생명의 주다, 이렇게 성령강림 하는 날 성령이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는 참 사람입니다. 예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아닌 귀신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아주 훌륭한 사람. 참 사람이면, 훌륭한 사람이면 그걸로 우리가 전기도 만들고 훌륭하신 분 기리면 되는데 왜 그 분을 신앙으로까지 고백합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분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는 참 사람이시고 참 하나님이시라는 그 단순한 고백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공경도 하고 사람으로 존경도 하지만 그 분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타고나신 모습을 우리가 “인성”, 그렇게 말합니다. “인성” 사람이 타고난 것 중 가장 훌륭한 것 인성. 그런데 예수님이 가진 또 하나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 성품을 우리가 ‘신성’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제가 오늘 무슨 이야기를 드리려고 하냐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지부식간이든 고백적으로 쓰든 중요한 언어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인격은, 인간의 존엄성은 신성합니다. 그렇게 고백하시죠? 사람으로만 보면요, 저의 성품은 우리의 성품은 우리 인간의 인간됨은 아주 훌륭하여 인성합니다 . 그렇게 말할 수 있지요. 사람의 성품으로 가장 훌륭합니다. 그런데 왜 인간의 성품을 보고 신성하다고 하십니까? 국토방위의 의무는 국가를 위해서 신성한 의무입니다. 제가 태어난 날, 제가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의 모습이 인성 쪽으로만 좋은 것이 아니고요, 신성합니다. 저는 확실히 신성한 인품을 타고 났다고 자부하고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지요? 왜 신성하다고 하십니까? 그 말의 뜻은요, 모든 인간의 생명에는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인간의 틀을 넘고 인간의 높은 곳에 있는 인간이 아닌 창조주 신이 준 아름답고 고상한 품격이 있습니다. 그 품격을 신성이라고 합시다. 누가 강요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신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보시기에도 인성과 신성이 풍만하고 제가 보기에도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우리 자식들까지 너무 신성합니다. 꼬마 아이들 길러보셨죠? 낳아보셨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하는 짓 한번 보십시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기획할 수 있고, 창작할 수가 있습니까? 신성합니다. 인성과 신성이 합쳐져 있습니다. 인간도 그런데 우리한테 구세주로 오신 예수는 어떤 분이시냐 하면 그 분은 참 인간이시고, 동시에 그분은 정말 신성합니다. 신성하다는 말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신앙고백적으로 어떻게 표현할까 하다가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그 분은 마리아에게 나신 인간이지만 그 분은 너무 신성한 걸 보니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우리의 논의의 초점은 동정녀가 애기를 낳았느냐 못 낳았느냐 그 이야기가 아니고 동정녀에게서 났던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처럼 똑같이 아주 신성하고 신성 중에서 원조같이 신성합니다. 그 말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그 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사, 이 말을요 신앙고백으로 받으시면 예수님은 참 인간이지만 신성한 하나님의 모습을 타고 나셨다. 저도 하나님의 축복 받아서 신성한 하나님의 성품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여기 앉으신 여러분 모두가 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어머니에게서 나셨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사 하늘을 품고 예수님은 신성한 하나님의 모습을 타고 났습니다. 여기 앉으신 여러분 모두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어머니에게서 나셨지만 하늘을 품고 하나님의 성품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 이야기를 창세기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받고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난 사람,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만 우리 모두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영을 품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으로 살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인간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받아 살아가야 할 기쁨과 권리와 축복과 의무가 있습니다. 어머니날, 어버이날, 육신의 어머니, 아버지가 중요하고, 육신의 자식이 중요합니다. 근데 모든 부모와 모든 자식은 오늘 말씀대로 하면 성령으로 잉태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힘을 입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한테 오셔서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허락해 주신다고. 그래서 오늘 저희들이 성령강림주일과 어머니주일을 같이 지킬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믿으십니까? 성령을 타고나신 걸 믿으십니까? 그만큼 귀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신성한 존재들입니다. 아주 훌륭한 인간이기도 하지만 신성한 존재여서 우리 존재들 속에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은 늘 하늘의 꽃을 피어갑니다. 자식들 속에서 피어나는 꽃은 하늘의 꽃이지 우리 몸의 꽃만은 아닙니다. 육의 꽃만이 아니고 영의 꽃이고 신성한 하늘의 꽃을 우리가 배워갑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같이 있다고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 사실은 어머니날을 맞아서 어버이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얼마나 눈물겨운지 그런 말씀을 드려야겠는데 우리는 사실 우리 주변에 오늘 어머니날을 아주 아프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 어머니날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저희들은 이 땅에 나서 여기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미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그럴 여가가 없어서 베트남에서, 몽골에서, 필리핀에서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을 모셔다가 가정을 꾸미고 살아갑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자녀들 가운데, 가정 가운데, 국제결혼 하신 분 꽤 계시죠? 그리고 외국에 사는 분 다 계시지요? 저도 많이 경험을 했습니다. 왜 우리나라 남자가 그런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노력도 하고 하는데 왜 이 땅에서 사는 외국인 여성은, 외국인 남성은 여기서 자식을 낳으면 그렇게 사회에서 천대받아야 합니까? 왜 여기서 모여서 살면, 소위 말이 좋아서 다문화 가정이지, 엄마와 아이 간에 학교 보내지도 못하고 대화도 못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남처럼 살고 한가족 한지붕 뭐 몇 가정이 아니고 한지붕 수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자녀교육, 엄마교육, 아빠교육, 문화교육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최근에 있는 다문화가정 이야기 많이 들으셨죠? 인종과 국적을 초월해 같이 결혼해서 사랑으로 뭉치면 아름다운, 신성한, 사람다운, 그리고 신성한 사랑과 축복이 같이 있는 것이 진정한 가정입니다. 그 아이들이 우리 식구고, 그 어머니가 우리 식구고, 그 아버지가 우리 식구입니다. 만약에 베트남에서, 몽골에서 온 우리 어머니가, 그런 권리를 누릴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제도가 안 받아주고, 우리 사회 양심이 안 받아주고, 사회 문화가 안 받아 주면 문제는 그분한테 있는 게 아니라 우리한테 있습니다. 이럴 경우 옛날에 있었던 인신매매, 집단적으로 있었죠. 혹시 다문화 가정이라는 말이 옛날에 있었던 인신매의 현대판 언어, 정교하게 꾸며진 거짓, 혹시 이런 거 아닙니까?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됩니까? 오늘 어머니의 날, 우리 어머니 말고요,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눈물을 흘리지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는 수많은 눈물의 여성들, 눈물의 아버지들, 한번 되돌아다 보십시다. 국제사회라고요? 세계화라고요? 인간이 죽어가는데, 그 아이들이 울며 가는데, 쫓겨나는데, 세상에 이런 나라에 살면서 선진국이라고요?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으면 복 받는다고요? 장수한다고요? 일이 잘 된다고요? 저는 오늘 어머니날을 당해서 우리 주변에 있는 또 다른 어머니들, 또 다른 자식들, 한 분을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바꿔봅시다. 그리고 어디 나라에 있든지, 여기 있든지 밖에 있든지 행복하십시다. 오늘 말씀대로 일마다 잘 되고, 장수할거고, 복되게 살거고, 그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하사 하는 말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 하나님이 영이 함께 주어져 있다. 성령으로 잉태한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담보되어 있다. 그런데 그 성령은 만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아니고 만민에게 만백성에게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리고 나서 오늘 어머니날을 성령강림주일과 함께 지켜라. 남의 나라 이야기해서 안됐습니다만, 저는 미국 유권자들이 결정할 일이긴 합니다만 오바마란 사람이 백인어머니와 흑인아버지한테, 그랬다가 또 백인어머니와 인도네시아 계부한테, 이런 사실을 가지고 논란이 분분합니다. 훌륭한 정책을 할거다, 대통령이 될거다, 저는 모릅니다. 시민들이 결정을 해야 되지만 이런 사실 자체 하나가 오늘 세계로 떠오르면서 우리 함께 살아야 될 거 아닙니까? 이 땅에서 가능한 얘기입니까? 다문화가정에서 나온 훌륭한 우리 사람이 혹시 이 다음에 구의원, 국회의원, 장관되면 여러분, 그런 문화를 언제쯤 맛볼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까? 자존심이 많다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란서 사람들이 비록 지금은 인기가 하락되었습디다만 불란서어머니와 헝가리아버지 사이에서 난 사람을 튀기를 대통령을 뽑았습디다. 또 하나 놀랜 사실이 있습니다. 한번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서독 사람은 동독을 향해서 비하하는 말로 오씨라고 그랬습니다. 동쪽에 사는 바보들. 자기들은 귀한 매씨라고 했습니다. 통일이 되어가지고 자존심 많은 독일이 정부를 구성했는데 통일정부의 수상으로, 그것도 여성으로, 동독 출신 메르케이라는 사람을 수상으로 뽑아서 잘 나가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남과 북 사이에 지금 살아가면서 탈북한 백성들을 향한 우리의 가슴이 어떻습니까? 북쪽 사람들의 배고픔, 어려움 다 압니다. 체재 반대도 다 압니다. 통일이 되었는데 북쪽에서 온 한 여성을 통일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모실 자격이 있습니까?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행여나 가능성이라도 있는겁니까? 남이 한다고 우리가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오늘 만민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영, 영이 임하면 다 변화를 받고 잘 되고 이 땅도 잘 되고 이 나라도 잘 되고 이 사회도 잘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아서 번성하고 융성하고 그리고 장수하고 이런 축복이 오늘 주신 성령이 오신 날의 축복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성령은 열려있다. 성령은 만민에게 열려있다. 이걸 받으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신성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최대주권인 인성의 최고봉과 신성의 아름다움이 합하여 복되게 살라. 그 어머니들을, 그렇게 낳게 되는 자녀들의 어머니들을 우리에게 주셔서 어머니를 공겅하라, 아버지를 공경하라, 하나님은 신성한 모습으로 항상 함께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저희들한테 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으로서 신성한 하나님의 얼을 타고 난 여러분, 여러분은 이 땅에 오셨으면 이 땅을 녹이고 썩지 않게 하는 맛있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내가 소금이다. 세상을 맛있게 하는 소금이 신성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신성함은 소금이 된다는 일입니다. 내가 소금이 되었으니 그대들도, 신성한 그대들도 이 땅을 이 세상을 이 가정을 썩지 않게 보호하는 소금이 될찌니라. 두 번째, 나는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신성한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 났으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십시오. 우리는 소금으로 태어났고요, 빛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을 신성한 하나님의 조화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어머니날 소금들 많이 내 놓으신 어머니 여러분, 어머니는 어머니다워야 합니다. 딸은 딸다워야 합니다. 딸의 맛, 어머니의 맛, 아버지의 맛, 아들의 맛,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가정을 썩지 않게 하고 복되게 하는 각자 다른 맛이 모여서 오늘 아름다운 가족 하모니를 이룹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먼저 소금처럼 되어 세상을 구하고 가정을 구하고 인류를 구했으니 그대들도 소금맛을 내어 세상을 구하라. 그러면 내가 세상을 비치는 빛이 되었듯이 그대들도 빛이 될 것입니다. 소금이 십자가에서 녹아져서 죽음까지 만들어냈다고 하면, 빛은 십자가에서 부활한 부활생명으로 빛납니다. 우리는 오늘 세상을 살아가면서 십자가의 소금처럼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궁극에는 세상을 녹이면서 가정을 녹이면서 부활하여 부활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이 두 가지 은총을 오늘 성령강림절에, 어머니날에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십니다. 성령을 받으시면 세상을 녹이는 소금이 됩니다. 세상을 구하는 빛이 됩니다. 가정을 구하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다. 성령 충만케 받으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구해야 할 성령/ 눅11:9-13
간절히 구해야 할 성령 눅11:9-13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당부말씀은 \"가서 모든 민족 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 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의 직제자 열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 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주어진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칠만한 자리에 서있는가 물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 할 수 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안에서부터도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상실함으 로써 사회와 국가에 대한 지도력과 영향력을 잃어왔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자만심, 세계와 사회의 변화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무사안일주의, 이기심, 세속적 욕심으로 그 마음을 채워가면서 그 영성이 빈곤하여졌고, 이 세상과 별 차이가 없이 되어버림으로써 사회로부터 그 존재이유 를 인정받지 못하게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교회 안의 신학적 혼란과 이를 틈탄 이단과 사이비기독교종파들의 확산으로 교회의 공신력은 더욱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곧 이렇게 될 것임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2의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에 요구된다는 외침과 경고 의 소리가 들려온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디서부터 변해야하고 무엇부터 고쳐야할지를 몰랐거나, 알았다 하드라도 나부터 달라져야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결핍된 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옛 소련을 위시한 동구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냉전시대를 벗어났지만 오히려 그 여파로 크고 작은 지역분쟁과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냉전은 사라졌으나 그 이상으로 치열한 무한경쟁의 시대, 전쟁 아닌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진과학기술을 보유 한 국가들의 패권주의와 그렇지 못한 나라들의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은 냉전시대 이상의 갈등을 빚고 있 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자정보교류수단의 숨가쁜 발달과 경쟁은 소수의 첨단정보과학기술을 소유한 집단 들이 부를 독점하게 만들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경쟁을 좇아가지 못하 거나 날로 새로워지는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절대다수의 국가들과 개인들은 심한 좌절감을 안고 살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많은 편리함을 제공하며 피상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켰을지 몰라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갑작스럽게 처하게 된 소외상태 속에서 내면적으로는 삶의 질의 저하를 강요당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삶의 변화를 주도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유전공학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전자조작기술과 생명체복제기술의 발달은 무한하고 무절제한 인간의 욕망과 결 합될 때 무분별한 인간생명조작을 낳게되고 그로 인한 인간성과 생명의 존엄성 파괴와 함께 통제불능의 재앙을 온 인류에 초래하게 될 것으로 크게 우려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어떠합니까? 한국사회는 이 모든 오늘날 세계의 세기말적 현상을 고스란히 공유하면서 이에 더하여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을 드러내고있습니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남북한의 관계는 우리 정부의 소위 \"햇볓정책\"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긴장감과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있으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원인도 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분열과 대립상황은 남북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크게는 동서로, 그리고 보다 세부적으로는 각 지역별로 고착되어있습니다. 망국적이라고 하는 지역감정과 지역주의는 선거가 거듭되고 정권이 바 뀔수록 더욱 심화될 뿐입니다. 이와 병행하여 극심한 집단이기주의 또한 한국사회가 유기적이고 공생적 인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큰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한국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극도의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지상주의가 만연되어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과 쾌락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며 온갖 인륜파괴현상이 빈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경제적인 여건이 호전되면서부터 우리 국민들은 아마도 역사상 지구상의 그 어떤 민 족도 보여주지 못했던 교만과 허세부리기, 허영과 사치, 낭비와 과소비를 일삼아 왔습니다. 그리고 성공지상주의, 결과지상주의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고, 수단과 방법과 과정에서의 정당 성은 중요시하지 않는 풍조에 젖다보니 준법정신과 질서의식이 실종되었으며, 범법행위에 대한 죄의식이 사라지거나 극도로 약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정직한 삶에 대한 냉소주의를 낳았고 한탕주의를 부추기 는 결과를 빚었으며 거짓말의 상습화로 이어졌고 결국 우리 사회전반에 불신풍조가 자리잡게 만들고 말 았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갈수록 경박해지고 각박해지며 험악해지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사랑과 신뢰, 화해와 평화, 일치와 공생의 도를 심어야할 사명을 가진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안에서부터 공신력과 감화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공신력과 감화력 상 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원인들 중 하나가 무엇보다도 기복주의 신앙 때문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바입니다. 그러 나 단지 일반교인들의 기복주의 성향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심리를 악용하는 목회자들의 세속 적 야망과 이기적 욕심에 더 큰 책임이 있음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는 가치관의 변화와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향전환을 가르치기보다 는 교인들의 기복적 심리를 자극하고 이용하는 손쉬운 목회와 급속한 양적 성장을 꾀한 탓이 크다고 보 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목회철학이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과 교회를 단지 세상적 성공과 출세 의 도구와 발판으로 여기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또 이러한 사고는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하고, 세상사람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이 편법과 부정을 가책 없이 일삼게 만들 뿐 아니라, 믿음을 그런 일들을 자행하고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호 장치로 여기게 만들며,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부정직하고 불법적인 일에 있어 세상보다 오히려 더 앞질 러가는 교인들 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인수를 부풀려가며 자랑하고 허세부리는 교회가 세속사회 와 무엇이 다릅니까? 교회, 노회, 총회 등에서 연출해내는 돈 뿌리는 선거, 지역패권주의는 우리가 세 상사회에서 목격하는 그것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기복주의는 왜곡된 신앙이해의 전형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날의 우리의 잘못되었던 신앙행태를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회 개는 그저 마음으로 후회하거나 단지 입술로 고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며, 가치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 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식까지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좋던 것, 옛날에 추구하던 것, 세 상에서 즐기며 기쁨으로 삼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육을 향하여 죽고 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지식과 함께 섭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은 배워서 아는 대로 행하는 실천적 삶입니다. 성경지식이 곧 믿음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역사적으로 이해하 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를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 믿음 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바로 서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밖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오늘날 세상의 모든 병리현상과 한국교회의 문제는 결국 성령의 역사와 다스림에 거스르고 대항하는 악의 역사 이며 육의 소욕을 좇는 결과이기에 성령께서 임하시고 강하게 역사하지 않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것들입 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한국교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성령의 임재를 간구해야 할 때입니다. 스스로 새로워지고 바로 서기에는 너무나 허약해진 그리스도인들이고 너무나 무력해진 오늘날의 교회이 기에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을 의지하고 그 의 명령과 인도를 따르는 것밖에 한국교회가 그 생명력과 존재이유를 유지할 길이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이해가 가장 큰 문제라고 했지만, 우리에게 참 믿음을 깨닫게 하시고 갖게 하시는 이가 성령 이십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의 조성자이신 성령께서 한국교회에 임하셔서 진리의 바른 이해와 올곧은 삶의 의지를 회복시켜 주시며, 육의 소욕으로부터 돌아서서 성령의 소욕을 좇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배워서 아는 대로 행하는 실천적 삶이라고 했지만,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삶으로 살게 하시 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삶의 믿음이 되며 우리의 삶이 믿음의 삶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우리의 잘못되었던 신앙행태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우리로 참된 회개를 하게 하 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온전히 변화시키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를 육을 향하여 죽게 하시고 영으로 살리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에 눈뜨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 에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케 하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고 바로 서기 위 하여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치라는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비로소 확신있고 담대하 고 능력있는 주님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오시고 그 증거의 능력이 오늘날 우 리에게도 주어지도록 우리는 간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하는 일을 어떤 위험이나 손해나 오해나 멸시나 외로움이나 고난이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 라도 변하지 않고 일생 동안 계속할 수 있는 견인의 능력을 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는 온갖 시련과 유혹 앞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임하시고 함께하셔 야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인데 그런 삶 속에서도 오히려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세상사람들 같으면 슬퍼할 일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불안해할 일 앞에서 평안을 누리며, 불행하다 여길 형편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원망할 일을 두고도 감사할 수 있으며, 탄식할 일을 놓고도 찬송할 수 있게 해주시는 이도 성령이 십니다. 참 믿음은 우리를 거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우리에게서 믿음의 열매, 성결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바울은 갈5:19-23에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 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 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하고 있는데 실로 한국인들의 병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치유 할 힘이 오직 성령께 있음을 봅니다. 날로 더욱 피폐해 가고 흉포해지는 우리의 심령을 치유받기 위하 여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고맙고 위로가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끝 절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 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의 기자는 같은 예수님의 이 말씀 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 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마태복음의 기자가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한 것을 누가복음의 기자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로 바 꾸어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 좋은 것,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 성령이심을 보아야 할 줄 압 니다. \"구하면 좋은 것을 주신다\" 했다고 그저 인간적이고 세상적으로 좋은 것만 한없이 달라고 쉴새 없이 조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것이 어떤 것임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뿐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해서 진정 필요한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참 주님의 제자들로 만드시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교회로 하 여금 진실로 능력있는 믿음의 공동체로 만드시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고 온 세상을 제자 삼아 가르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그저 나에게 좋은 것, 세상적으로 좋아보이는 것 밖에 구할 줄 모르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좋은 것, 그의 의를 위해서 중요한 것,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먼저 구 하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성령께서 함께해주시기를 늘 기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 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어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간절히 구해야 할 성령/눅11:9-13
간절히 구해야 할 성령 눅11:9-13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당부말씀은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예수님의 직제자 열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주어진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과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칠만한 자리에 서있는가 물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안에서부터도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상실함으로써 사회와 국가에 대한 지도력과 영향력을 잃어왔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자만심, 세계와 사회의 변화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무사안일주의, 이기심, 세속적 욕심으로 그 마음을 채워가면서 그 영성이 빈곤하여졌고, 이 세상과 별 차이가 없이 되어버림으로써 사회로부터 그 존재이유를 인정받지 못하게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교회 안의 신학적 혼란과 이를 틈탄 이단과 사이비기독교종파들의 확산으로 교회의 공신력은 더욱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곧 이렇게 될 것임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2의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에 요구된다는 외침과 경고의 소리가 들려온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디서부터 변해야하고 무엇부터 고쳐야할지를 몰랐거나, 알았다 하드라도 나부터 달라져야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결핍된 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옛 소련을 위시한 동구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냉전시대를 벗어났지만 오히려 그 여파로 크고 작은 지역분쟁과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냉전은 사라졌으나 그 이상으로 치열한 무한경쟁의 시대, 전쟁 아닌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진과학기술을 보유한 국가들의 패권주의와 그렇지 못한 나라들의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은 냉전시대 이상의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자정보교류수단의 숨가쁜 발달과 경쟁은 소수의 첨단정보과학기술을 소유한 집단들이 부를 독점하게 만들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경쟁을 좇아가지 못하거나 날로 새로워지는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절대다수의 국가들과 개인들은 심한 좌절감을 안고 살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많은 편리함을 제공하며 피상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켰을지 몰라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갑작스럽게 처하게 된 소외상태 속에서 내면적으로는 삶의 질의 저하를 강요당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삶의 변화를 주도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유전공학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전자조작기술과 생명체복제기술의 발달은 무한하고 무절제한 인간의 욕망과 결합될 때 무분별한 인간생명조작을 낳게되고 그로 인한 인간성과 생명의 존엄성 파괴와 함께 통제불능의 재앙을 온 인류에 초래하게 될 것으로 크게 우려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어떠합니까? 한국사회는 이 모든 오늘날 세계의 세기말적 현상을 고스란히 공유하면서 이에 더하여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을 드러내고있습니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남북한의 관계는 우리 정부의 소위 \\\"햇볓정책\\\"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긴장감과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있으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원인도 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분열과 대립상황은 남북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크게는 동서로, 그리고 보다 세부적으로는 각 지역별로 고착되어있습니다. 망국적이라고 하는 지역감정과 지역주의는 선거가 거듭되고 정권이 바뀔수록 더욱 심화될 뿐입니다. 이와 병행하여 극심한 집단이기주의 또한 한국사회가 유기적이고 공생적인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큰 장애요소로 작용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한국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극도의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지상주의가 만연되어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과 쾌락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며 온갖 인륜파괴현상이 빈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경제적인 여건이 호전되면서부터 우리 국민들은 아마도 역사상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도 보여주지 못했던 교만과 허세부리기, 허영과 사치, 낭비와 과소비를 일삼아 왔습니다. 그리고 성공지상주의, 결과지상주의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고, 수단과 방법과 과정에서의 정당성은 중요시하지 않는 풍조에 젖다보니 준법정신과 질서의식이 실종되었으며, 범법행위에 대한 죄의식이 사라지거나 극도로 약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정직한 삶에 대한 냉소주의를 낳았고 한탕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빚었으며 거짓말의 상습화로 이어졌고 결국 우리 사회전반에 불신풍조가 자리잡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갈수록 경박해지고 각박해지며 험악해지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사랑과 신뢰, 화해와 평화, 일치와 공생의 도를 심어야할 사명을 가진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안에서부터 공신력과 감화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공신력과 감화력 상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원인들 중 하나가 무엇보다도 기복주의 신앙 때문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단지 일반교인들의 기복주의 성향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심리를 악용하는 목회자들의 세속적 야망과 이기적 욕심에 더 큰 책임이 있음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는 가치관의 변화와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의 방향전환을 가르치기보다는 교인들의 기복적 심리를 자극하고 이용하는 손쉬운 목회와 급속한 양적 성장을 꾀한 탓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목회철학이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과 교회를 단지 세상적 성공과 출세의 도구와 발판으로 여기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또 이러한 사고는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하고, 세상사람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이 편법과 부정을 가책 없이 일삼게 만들 뿐 아니라, 믿음을 그런 일들을 자행하고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호장치로 여기게 만들며,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부정직하고 불법적인 일에 있어 세상보다 오히려 더 앞질러가는 교인들 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인수를 부풀려가며 자랑하고 허세부리는 교회가 세속사회와 무엇이 다릅니까? 교회, 노회, 총회 등에서 연출해내는 돈 뿌리는 선거, 지역패권주의는 우리가 세상사회에서 목격하는 그것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기복주의는 왜곡된 신앙이해의 전형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참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날의 우리의 잘못되었던 신앙행태를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는 그저 마음으로 후회하거나 단지 입술로 고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며, 가치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식까지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좋던 것, 옛날에 추구하던 것, 세상에서 즐기며 기쁨으로 삼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육을 향하여 죽고 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바른 지식과 함께 섭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은 배워서 아는 대로 행하는 실천적 삶입니다. 성경지식이 곧 믿음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를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바로 서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밖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오늘날 세상의 모든 병리현상과 한국교회의 문제는 결국 성령의 역사와 다스림에 거스르고 대항하는 악의 역사이며 육의 소욕을 좇는 결과이기에 성령께서 임하시고 강하게 역사하지 않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한국교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성령의 임재를 간구해야 할 때입니다. 스스로 새로워지고 바로 서기에는 너무나 허약해진 그리스도인들이고 너무나 무력해진 오늘날의 교회이기에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힘을 의지하고 그의 명령과 인도를 따르는 것밖에 한국교회가 그 생명력과 존재이유를 유지할 길이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이해가 가장 큰 문제라고 했지만, 우리에게 참 믿음을 깨닫게 하시고 갖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의 조성자이신 성령께서 한국교회에 임하셔서 진리의 바른 이해와 올곧은 삶의 의지를 회복시켜 주시며, 육의 소욕으로부터 돌아서서 성령의 소욕을 좇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배워서 아는 대로 행하는 실천적 삶이라고 했지만,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삶으로 살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삶의 믿음이 되며 우리의 삶이 믿음의 삶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우리의 잘못되었던 신앙행태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우리로 참된 회개를 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온전히 변화시키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를 육을 향하여 죽게 하시고 영으로 살리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에 눈뜨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기쁨을 발견케 하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고 바로 서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치라는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비로소 확신있고 담대하고 능력있는 주님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오시고 그 증거의 능력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지도록 우리는 간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하는 일을 어떤 위험이나 손해나 오해나 멸시나 외로움이나 고난이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라도 변하지 않고 일생 동안 계속할 수 있는 견인의 능력을 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는 온갖 시련과 유혹 앞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임하시고 함께하셔야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인데 그런 삶 속에서도 오히려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세상사람들 같으면 슬퍼할 일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불안해할 일 앞에서 평안을 누리며, 불행하다 여길 형편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원망할 일을 두고도 감사할 수 있으며, 탄식할 일을 놓고도 찬송할 수 있게 해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참 믿음은 우리를 거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삶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우리에게서 믿음의 열매, 성결한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바울은 갈5:19-23에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하고 있는데 실로 한국인들의 병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치유할 힘이 오직 성령께 있음을 봅니다. 날로 더욱 피폐해 가고 흉포해지는 우리의 심령을 치유받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고맙고 위로가 되는 것은 오늘 본문의 끝 절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의 기자는 같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마태복음의 기자가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한 것을 누가복음의 기자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로 바꾸어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 좋은 것,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 성령이심을 보아야 할 줄 압니다. \\\"구하면 좋은 것을 주신다\\\" 했다고 그저 인간적이고 세상적으로 좋은 것만 한없이 달라고 쉴새 없이 조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좋은 것이 어떤 것임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뿐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해서 진정 필요한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참 주님의 제자들로 만드시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교회로 하여금 진실로 능력있는 믿음의 공동체로 만드시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고 온 세상을 제자 삼아 가르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그저 나에게 좋은 것, 세상적으로 좋아보이는 것밖에 구할 줄 모르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좋은 것, 그의 의를 위해서 중요한 것,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먼저 구하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성령께서 함께해주시기를 늘 기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어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갑절의 성령을 받으라/ 왕하2:1-11
갑절의 성령을 받으라 왕하2:1-11 이 시대를 가리켜 병든 시대요, 타락의 시대요, 향락에 도취 된 시대요,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진 시대요, 하나님을 떠난 시대라고 어떤 철인은 단정지어 말하였읍니다. 이와같은 시대에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1. 길갈로 가야 합니다(길갈이란 마음이 깨끗함을 말함) 1)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2)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2. 벧엘로 가야 합니다.(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란 말임) 1) 벧엘을 떠나면 타락하고 2) 벧엘로 올라 갈 때 하나님을 만나고 3) 벧엘로 올라 갈 때 자기를 발견하고 3. 여리고로 가야 합니다(여리고란 향기란 뜻) 1) 향기는 기도를 상징 합니다. 2) 기도는 성도의 호흡 입니다. 3)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읍니다. 4. 요단으로 가야 합니다.(요단은 구별해 냈다는 뜻임) 1) 성별된 생활 2) 성별된 행동 3) 성별된 언어 갑절의 성령을 받으려면 마음이 청결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모두어 기도에 힘쓰며 성별된 생활과 구별된 행동 언어를 통해 갑절의 성령을 주십니다.
갑절의 성령을 주옵소서/ 왕하2:1-11/ 2004-09-17
갑절의 성령을 주옵소서 왕하2:1-11 “유명한 스승 밑에 유명한 제자가 배출된다”는 말이 있듯이 엘리사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영계의 거성 엘리야를 스승으로 모시고 시종일관 그의 모든 신앙생활과 인격 및 사상까지 물려받았습니다. 엘리사(하나님은 구원이시다)는 아벨므홀라성의 사밧의 아들로 상당히 부유한 농부의 가정출신이었습니다. 엘리사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곳은 왕상 19:16절이며, 주로 북왕국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여호람왕 시대에 활동을 시작하여 예후, 여호아하스 시대를 걸쳐 BC800년 경 요하스 시대에 죽었습니다. 또한 그는 엘리야에게 선지자 훈련을 받았지만 엘리야와는 대조적인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약대털 옷을 입었던 엘리야를 광풍과 지진, 부싯돌에 비유한다면 엘리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성음에서 산, 작은 음성의 소유자로 부드럽고 우아하고 외교적인 사람으로 벧엘, 여리고 길갈에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엘리야 선지가가 갈멜산 상에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이세벨의 복수가 두려워 남쪽의 브엘세바 까지 도망갔는데,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여호와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 보다 낫지 않습니다”하고 죽기를 구하다 잠이 들었는데 천사가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주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하였습니다. 천사의 격려와 음식으로 힘을 내어 시내반도에 있는 호렙산에 있는 동굴에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셨습니다.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할 때, 여호와께서 먼저 거센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내신 후에 “세미한 소리(12절)”로 엘리야에게 그 자신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음 세대를 위하여 사명자를 택하게 하였는데 1.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2.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며 3. 아벨므홀라의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엘리사를 만나러 갔을 때 엘리사는 마침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그의 위에 던지니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알아차리고 동리사람을 불러 놓고, 소한겨리를 취하여 잡고, 쟁기를 불사르고 큰 잔치를 한 후에 부모와 작별하고 엘리야를 쫓았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 올리울 때가 이르러 그와 엘리사는 선지자의 생도들과 더불어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갔습니다. 길갈과 벧엘에서 엘리야는 엘리사가 따라오지 말고 뒤에 남을 것을 요구했으나 엘리사는 곁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생도들과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겉옷으로 강물을 이리저리 치자 물이 갈라지고 강 가운데 길이 생겼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고 엘리사에게 물었는데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을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사명자는 가도 사명은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왜 엘리사는 선생보다 더 많은 갑절의 영감을 원했을까요? 첫째, 갑절의 성령을 구한 이유 1. 죄악이 전 시대보다 갑절이나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작년보다 금년, 어제보다 오늘이 과학문명은 발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문명의 이기 속에 산다 한들, 인간의 죄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죄악의 세력은 더 팽창해 갈 뿐더러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살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성도들은 이 죄악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갑절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2. 갈수록 믿음이 없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구하자,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너무 어려운 것을 구한다 합니다. 그러나 거절을 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는 그가 하늘로 올리 우는 것을 엘리사가 보면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자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그의 스승이 떨어뜨린 겉옷을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서 다시 여리고로 돌아왔을 때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 위에 머무른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가다가 어는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는지” 모르니까 용사 50인을 보내자고 고집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저들이 부끄러워하도록 강청 하매 승낙했지만 결국 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시대는 어떻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따지고, 고등비평, 하등비평, 양식사 비평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잃어버린 시대에 설령 학문은 발달할 수 있지만 교회는 문 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언어학적으로, 교리적으로만 연구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조명하여 줄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마귀가 갑절이나 더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벧전5: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잇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에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4. 주의 재림이 갑절이나 가까웠으므로, 갑절의 영력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주님은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도적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밤에 잘 옵니다. 와서 좋은 보물만 가져갑니다. 주의 재림이 가까왔습니다. 주님은 알곡 성도, 기름등불 준비된 성도, 양과 질이 좋은 고기 같은 성도, 깨어있는 성도만 데려갑니다. 주의 재림이 가까운 이때에 갑절의 영력, 갑절의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 168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5. 우리 할 일이 갑절이나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는 할 일이 많은 시대입니다. 이 할 일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영력 있는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말씀 충만한 능력의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성령 충만 받아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는 기도를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큰 기도했다고 탓하지 않습니다. 이와, 구할 것 크게 구하고 크게 받아야 되겠습니다. 할 일 많은 세상입니다. 저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칠 배나 더 받아야 될 줄 믿습니다. 둘째 엘리사는 어떻게 해서 갑절의 성령의 받을 수 있었는가? 1.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인내하며 따랐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에게도 막중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갑절의 영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길갈로 가면 길갈로, 벧엘로 가면 벧엘로, 여리고로 가면 여리고로 요단강으로 가면 요단강으로 따라갔습니다. 길갈은 할례 받은 장소로서 수치를 굴러 보냈다는 뜻으로 회개를 상징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기도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여리고는 선지학교가 있었으니 말씀을 상징하는 곳이요 요단은 죽음을 상징하는 곳이니 끝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갑절의 성령의 받는 비결은 죄를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하며 말씀을 중심 하여 끝까지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말세에 내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시 마고 약속하신 주의 말씀을 믿고 받을 때가지 간절히 기도합시다. 갑절의 성령은 변치 아니하고 끝까지 따라가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받아야겠습니다. 설령 선생님이 만류한다하더라도 나는 받아야겠습니다. 또 제자들이 반대해도 나는 받아야겠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반드시 갑절의 영감을 받아야겠습니다. 주여! 나는 이왕 일어선 몸입니다. 그래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대로 살다가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 힘과 능력을 주세요! 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엘리사처럼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15:21-28절에 보면 헬라인인 불쌍한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에게는 귀신들린 딸이 있었는데, 아무리 약을 쓰고 힘을 써 보아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오셨습니다. 그 여인은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였기에 있는 힘을 다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옆에 있던 제자들이 청하여 “그 여자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 합니다. 예수님의 매몰찬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더욱더 간절하게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간구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한솔 더 떠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노라”고 말합니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이렇게 거절당하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포기할 텐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개 같은 이방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방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대답하십니다. 할렐루야! 성경에 보면 그 시로 그의 딸이 나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엘리사 역시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갑절의 영감을 받아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쫓아가다가 받았습니다. 2. 엘리사는 목숨걸고 기도를 했기 때문에 받았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를 들어보세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12절) 이 기도는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고 부르짖는 절규입니다. 히스기야는 왕일지라도 낯을 벽으로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왕후일지라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는 육신의 생활로 말미암아 기도를 하지 못하셨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엘리사처럼 부르짖는 기도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한 시대를 책임지는 병거와 마병이었다면 여러분들도 한 시대를 책임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여! 21세기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에게도 갑절의 성령을 칠 배나 주옵소서”라고 간구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입이 시끄럽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야 생활이 마음이 평안합니다. 입에서 기도가 그치고 입이 조용하면 마음과 생활은 시끄러워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3. 엘리사는 죄악의 옷을 찢어버림으로 받았습니다. 엘리사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기 전까지는 죄악의 옷, 음란의 옷, 교만의 옷 불순종의 옷을 그대로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한 후에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어 버렸습니다,. 다윗도 왕복을 입고 왕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했으나 그는 음란한 죄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아무리 훌륭한 왕관을 썼을지라도 영의 머리에는 밧세바라는 여인의 관을 쓰고 살았든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엎드려 통회 자복하며 음란의 겉옷을 사정없이 벗어 던져 버림으로 위대한 성군이 되었습니다. 또한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재산을 모으는데 특출한 재능이 있었기에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권모술수에 능수 능란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면초가의 위기상황가운데 얍복 강가에서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하다가 그의 거짓 권모술수와 이중 인격적인 죄된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의 보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4. 엘리사는 자기의 귀중한 소를 바치는 생활을 하더니 갑절의 성령을 받았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나설 때에 농사짓는 황소를 아끼지 않고 잡아 하나님께 바쳐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엘리야를 따라 나섰던 것을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때나 주님께 바치는 생활을 잘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도 은혜 받고 갑절의 성령과 갑절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면 우리에게 있는 귀중한 황소를 바칠 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질의 황소를 드립시다. 재능의 황소를 드립시다. 건강의 황소를 드립시다. 시간의 황소를 드립시다. 여러분! 갑절의 영감 받기를 원하십니까? 갑절의 성령 충만 받기를 원하십니까? 갑절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갑절의 축복을 받아 한 시대를 깜짝 놀라게 할 생을 보내길 원하십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죄된 옷을 벗어 던지는 일입니다. 음란의 옷, 권모술수의 옷, 나태의 옷, 교만의 겉옷까지 벗어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새마포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내 자신을 산산조각으로 찢어 버리고 믿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여기에 주의 성령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는 것입니다. 예화) 미국의 제 22대 대통령이었던 글리브랜드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들고 좋지 못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극장으로 가는 길에 예배당에서 박수치며 찬송하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그때 클리브랜드는 ‘나! 예배당에 갈래!“하고 다른 친구들은 따분하게 예배당이 뭐냐고 극장에 가자고 했습니다. 이들은 한참 옥신각신 하다가 하나는 예배당에, 친구들은 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더랍니다. 예배당에 온 클리브랜드는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의 역사로 지금까지의 음란한 죄, 거짓말하는 죄 등등 21살이 되도록 지었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새 사람이 되었답니다. 그는 술도, 여자관계도 다 끊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국회의원 비서로 지내다가 국회의원이 되고 마침내 미국의 22대, 2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성공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극장을 향하여 달려갔던 친구는 타락하여 은행강도가 되어 한꺼번에 세 사람이나 죽이는 살인자로 종신토록 교도소 신세를 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위대한 결단이 위대한 사람을 만들뿐입니다. 똑 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죄의 옷을 벗어 던지고 은혜의 옷을 입은 사람은 성공한 반면에, 죄의 옷을 그대로 입고 살던 사람은 종신토록 감방신세를 면치 못하는 실패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걸쳐 입고 다녔던 죄의 겉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리시고, 오늘 이 시간부터는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의 옷, 권능의 옷, 축복의 옷으로 갈아입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을 구했던 엘리사는, 영감을 구함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야보다 갑절의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만방에 전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가 있고 또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누구나 다 태어나서 죽는다고 아무렇게 세상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시시하게 형식으로 주를 섬기지 맙시다. 이제부터라도 외식적인 모든 행위를 버립시다. 하나님의 갑절의 은혜를 원하십니까? 사모하십시오. 죄된 옷을 찢어버리십시오. 간구 하십시오. 문제는 내가 옷을 바꿔 입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듣고 피하려 하지 마시고 지금 결단하십시오. 여러분도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끝까지 따라 가는 믿음, 옷을 찢고 따라 갔다. 목숨을 걸고 기도하였다. 자기의 귀중한 황소를 드림.
갑절의 성령을 주옵소서/왕하2:1-11
갑절의 성령을 주옵소서 왕하2:1-11 “유명한 스승 밑에 유명한 제자가 배출된다”는 말이 있듯이 엘리사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영계의 거성 엘리야를 스승으로 모시고 시종일관 그의 모든 신앙생활과 인격 및 사상까지 물려받았습니다. 엘리사(하나님은 구원이시다)는 아벨므홀라성의 사밧의 아들로 상당히 부유한 농부의 가정출신이었습니다. 엘리사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곳은 왕상 19:16절이며, 주로 북왕국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여호람왕 시대에 활동을 시작하여 예후, 여호아하스 시대를 걸쳐 BC800년 경 요하스 시대에 죽었습니다. 또한 그는 엘리야에게 선지자 훈련을 받았지만 엘리야와는 대조적인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약대털 옷을 입었던 엘리야를 광풍과 지진, 부싯돌에 비유한다면 엘리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성음에서 산, 작은 음성의 소유자로 부드럽고 우아하고 외교적인 사람으로 벧엘, 여리고 길갈에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엘리야 선지가가 갈멜산 상에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이세벨의 복수가 두려워 남쪽의 브엘세바 까지 도망갔는데,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여호와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 보다 낫지 않습니다”하고 죽기를 구하다 잠이 들었는데 천사가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주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하였습니다. 천사의 격려와 음식으로 힘을 내어 시내반도에 있는 호렙산에 있는 동굴에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셨습니다.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할 때, 여호와께서 먼저 거센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내신 후에 “세미한 소리(12절)”로 엘리야에게 그 자신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음 세대를 위하여 사명자를 택하게 하였는데 1.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2.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며 3. 아벨므홀라의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엘리사를 만나러 갔을 때 엘리사는 마침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그의 위에 던지니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알아차리고 동리사람을 불러 놓고, 소한겨리를 취하여 잡고, 쟁기를 불사르고 큰 잔치를 한 후에 부모와 작별하고 엘리야를 쫓았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 올리울 때가 이르러 그와 엘리사는 선지자의 생도들과 더불어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갔습니다. 길갈과 벧엘에서 엘리야는 엘리사가 따라오지 말고 뒤에 남을 것을 요구했으나 엘리사는 곁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생도들과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겉옷으로 강물을 이리저리 치자 물이 갈라지고 강 가운데 길이 생겼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고 엘리사에게 물었는데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을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사명자는 가도 사명은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왜 엘리사는 선생보다 더 많은 갑절의 영감을 원했을까요? 첫째, 갑절의 성령을 구한 이유 1. 죄악이 전 시대보다 갑절이나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작년보다 금년, 어제보다 오늘이 과학문명은 발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문명의 이기 속에 산다 한들, 인간의 죄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죄악의 세력은 더 팽창해 갈 뿐더러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살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성도들은 이 죄악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갑절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2. 갈수록 믿음이 없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구하자,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너무 어려운 것을 구한다 합니다. 그러나 거절을 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는 그가 하늘로 올리 우는 것을 엘리사가 보면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도중에 홀연히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자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엘리사는 그의 스승이 떨어뜨린 겉옷을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서 다시 여리고로 돌아왔을 때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 위에 머무른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가다가 어는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는지” 모르니까 용사 50인을 보내자고 고집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저들이 부끄러워하도록 강청 하매 승낙했지만 결국 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시대는 어떻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따지고, 고등비평, 하등비평, 양식사 비평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잃어버린 시대에 설령 학문은 발달할 수 있지만 교회는 문 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언어학적으로, 교리적으로만 연구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조명하여 줄 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마귀가 갑절이나 더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벧전5: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잇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에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4. 주의 재림이 갑절이나 가까웠으므로, 갑절의 영력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주님은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도적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밤에 잘 옵니다. 와서 좋은 보물만 가져갑니다. 주의 재림이 가까왔습니다. 주님은 알곡 성도, 기름등불 준비된 성도, 양과 질이 좋은 고기 같은 성도, 깨어있는 성도만 데려갑니다. 주의 재림이 가까운 이때에 갑절의 영력, 갑절의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 168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5. 우리 할 일이 갑절이나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는 할 일이 많은 시대입니다. 이 할 일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영력 있는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말씀 충만한 능력의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성령 충만 받아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는 기도를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큰 기도했다고 탓하지 않습니다. 이와, 구할 것 크게 구하고 크게 받아야 되겠습니다. 할 일 많은 세상입니다. 저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칠 배나 더 받아야 될 줄 믿습니다. 둘째 엘리사는 어떻게 해서 갑절의 성령의 받을 수 있었는가? 1.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인내하며 따랐기 때문입니다. 엘리사에게도 막중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갑절의 영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길갈로 가면 길갈로, 벧엘로 가면 벧엘로, 여리고로 가면 여리고로 요단강으로 가면 요단강으로 따라갔습니다. 길갈은 할례 받은 장소로서 수치를 굴러 보냈다는 뜻으로 회개를 상징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기도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여리고는 선지학교가 있었으니 말씀을 상징하는 곳이요 요단은 죽음을 상징하는 곳이니 끝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갑절의 성령의 받는 비결은 죄를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하며 말씀을 중심 하여 끝까지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말세에 내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시 마고 약속하신 주의 말씀을 믿고 받을 때가지 간절히 기도합시다. 갑절의 성령은 변치 아니하고 끝까지 따라가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받아야겠습니다. 설령 선생님이 만류한다하더라도 나는 받아야겠습니다. 또 제자들이 반대해도 나는 받아야겠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반드시 갑절의 영감을 받아야겠습니다. 주여! 나는 이왕 일어선 몸입니다. 그래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이대로 살다가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 힘과 능력을 주세요! 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엘리사처럼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15:21-28절에 보면 헬라인인 불쌍한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에게는 귀신들린 딸이 있었는데, 아무리 약을 쓰고 힘을 써 보아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오셨습니다. 그 여인은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였기에 있는 힘을 다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옆에 있던 제자들이 청하여 “그 여자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 합니다. 예수님의 매몰찬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더욱더 간절하게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간구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한솔 더 떠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노라”고 말합니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이렇게 거절당하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포기할 텐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개 같은 이방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방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대답하십니다. 할렐루야! 성경에 보면 그 시로 그의 딸이 나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엘리사 역시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갑절의 영감을 받아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쫓아가다가 받았습니다. 2. 엘리사는 목숨걸고 기도를 했기 때문에 받았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를 들어보세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12절) 이 기도는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고 부르짖는 절규입니다. 히스기야는 왕일지라도 낯을 벽으로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왕후일지라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는 육신의 생활로 말미암아 기도를 하지 못하셨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엘리사처럼 부르짖는 기도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한 시대를 책임지는 병거와 마병이었다면 여러분들도 한 시대를 책임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여! 21세기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저에게도 갑절의 성령을 칠 배나 주옵소서”라고 간구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입이 시끄럽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야 생활이 마음이 평안합니다. 입에서 기도가 그치고 입이 조용하면 마음과 생활은 시끄러워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3. 엘리사는 죄악의 옷을 찢어버림으로 받았습니다. 엘리사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기 전까지는 죄악의 옷, 음란의 옷, 교만의 옷 불순종의 옷을 그대로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한 후에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어 버렸습니다,. 다윗도 왕복을 입고 왕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했으나 그는 음란한 죄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아무리 훌륭한 왕관을 썼을지라도 영의 머리에는 밧세바라는 여인의 관을 쓰고 살았든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엎드려 통회 자복하며 음란의 겉옷을 사정없이 벗어 던져 버림으로 위대한 성군이 되었습니다. 또한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재산을 모으는데 특출한 재능이 있었기에 남을 속이고 기만하는 권모술수에 능수 능란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면초가의 위기상황가운데 얍복 강가에서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하다가 그의 거짓 권모술수와 이중 인격적인 죄된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의 보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4. 엘리사는 자기의 귀중한 소를 바치는 생활을 하더니 갑절의 성령을 받았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나설 때에 농사짓는 황소를 아끼지 않고 잡아 하나님께 바쳐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엘리야를 따라 나섰던 것을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때나 주님께 바치는 생활을 잘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도 은혜 받고 갑절의 성령과 갑절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면 우리에게 있는 귀중한 황소를 바칠 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질의 황소를 드립시다. 재능의 황소를 드립시다. 건강의 황소를 드립시다. 시간의 황소를 드립시다. 여러분! 갑절의 영감 받기를 원하십니까? 갑절의 성령 충만 받기를 원하십니까? 갑절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갑절의 축복을 받아 한 시대를 깜짝 놀라게 할 생을 보내길 원하십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죄된 옷을 벗어 던지는 일입니다. 음란의 옷, 권모술수의 옷, 나태의 옷, 교만의 겉옷까지 벗어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새마포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내 자신을 산산조각으로 찢어 버리고 믿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여기에 주의 성령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는 것입니다. 예화) 미국의 제 22대 대통령이었던 글리브랜드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들고 좋지 못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극장으로 가는 길에 예배당에서 박수치며 찬송하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그때 클리브랜드는 ‘나! 예배당에 갈래!“하고 다른 친구들은 따분하게 예배당이 뭐냐고 극장에 가자고 했습니다. 이들은 한참 옥신각신 하다가 하나는 예배당에, 친구들은 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더랍니다. 예배당에 온 클리브랜드는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의 역사로 지금까지의 음란한 죄, 거짓말하는 죄 등등 21살이 되도록 지었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새 사람이 되었답니다. 그는 술도, 여자관계도 다 끊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국회의원 비서로 지내다가 국회의원이 되고 마침내 미국의 22대, 2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성공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극장을 향하여 달려갔던 친구는 타락하여 은행강도가 되어 한꺼번에 세 사람이나 죽이는 살인자로 종신토록 교도소 신세를 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위대한 결단이 위대한 사람을 만들뿐입니다. 똑 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죄의 옷을 벗어 던지고 은혜의 옷을 입은 사람은 성공한 반면에, 죄의 옷을 그대로 입고 살던 사람은 종신토록 감방신세를 면치 못하는 실패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걸쳐 입고 다녔던 죄의 겉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리시고, 오늘 이 시간부터는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의 옷, 권능의 옷, 축복의 옷으로 갈아입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을 구했던 엘리사는, 영감을 구함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야보다 갑절의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만방에 전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가 있고 또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누구나 다 태어나서 죽는다고 아무렇게 세상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시시하게 형식으로 주를 섬기지 맙시다. 이제부터라도 외식적인 모든 행위를 버립시다. 하나님의 갑절의 은혜를 원하십니까? 사모하십시오. 죄된 옷을 찢어버리십시오. 간구 하십시오. 문제는 내가 옷을 바꿔 입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듣고 피하려 하지 마시고 지금 결단하십시오. 여러분도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끝까지 따라 가는 믿음, 옷을 찢고 따라 갔다. 목숨을 걸고 기도하였다. 자기의 귀중한 황소를 드림.
거대한 영적 전쟁에서 영적인 것과 망상적인 것을 분별하라/ 고후10:4,5
거대한 영적 전쟁에서 영적인 것과 망상적인 것을 분별하라 고후10:4,5 세상은 과연 귀신들이 점령하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모든 문제들이 정말 마귀의 역사에 의한 것일까요? 그것이 정서적인 문제이든, 중독에 관한 것이든, 육체의 질병에 관한 것이든, 또는 부부간의 부정이나 간음에 관한 것이든, 과연 이 모든 일들이 모두 마귀의 역사에 의한 것일까요? 이러한 것들은 사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영적 전쟁 운동(Spiritual Warfare movement)\"에서 주장하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영적 전쟁 운동의 교사들은 한때 소수의 극단주의자들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새로운 복음주의적인 영적인 리더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이 영적인 진리가 혼탁한 적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의 지배로부터 영적인 자유를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별다른 분별없이 \"영적 전쟁\" 운동에 뛰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영적 전쟁에 대한 현대의 메시지는 혼돈스러울 정도로 비성경적입니다. 신자들은 자신들도 귀신들릴 수 있다는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이웃, 그리고 우리 동네의 공원도 또한 귀신들려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귀신들림을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시된 것들은 신뢰할 수도 없고, 또한 입증되지 않은 영적 전쟁 전술들입니다. 슬프게도 이들이 제안하고 있는 영적인 자유로 가는 단계들은 성경에 기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제로 귀신들림의 경험으로부터 기인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싸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미 수 천년 전에 영적인 싸움터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탄과의 진정한 영적 전쟁과 그 견고한 진은 지상의 그 어떤 싸움보다 얼마나 맹렬하며 잔혹한지 이미 잘 알려진 바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탄의 미혹케 하는 각종 전략을 밝혀내서 신자들로 하여금 영적 전쟁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움을 주어왔습니다. 이러한 전쟁을 대하는 과거의 영적 군사들의 방법은 순전히 성경적이었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이 쓴 『천로역정』이나 『거룩한 전쟁』(Holy War), 그리고 윌리엄 거날(William Gurnall)이 쓴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와 같은 책들은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초기 세대주의 작가들도 조심스럽게 사탄과 그리스도인을 향한 그의 공격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 완전하고 체계적인 방법들을 제시했는데, 루이스 쉐이퍼(L.S. Chafer)가 쓴 『사탄, 그의 동기와 방법』, 그리고 F. C. 제닝스(Jennings)가 쓴 『사탄, 그의 인격과 역사, 거하는 곳, 그리고 운명』 등이 역시 마찬가지로 매우 유익한 책들입니다. 이 책들은 신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과 같은 감각적인 일들을 피하고, 교리적으로 바른 교훈을 제시하기 위해 학문적으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입니다. 오늘날 주창되는 것처럼 신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성경에서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귀신들에게 소리를 지른다던가, 전도서 4장 1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삼겹줄로 귀신들을 의자에 묶는 식의 방법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밥 라슨 저, 『사탄의 이름으로』 참조, 토마스 넬슨사 출판, 1996년, p175).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마귀를 대적하라(약 4:7)고 가르치고 있지, 결코 사탄의 왕국을 영적으로 먼저 공격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귀신들을 쫓아낸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실 주님은 강한 자를 결박하고, 그의 왕국을 약탈했으며(마 12:29), 마침내 갈보리 십자가에서 최종적인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도 우리 주님이 사탄을 다루신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사탄을 대적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십자가 이후에 우리로 하여금 귀신을 쫓아내는 일(축사 사역)에 힘을 쓰도록 권하는 가르침이 왜 없는 것일까요? 왜 신약 성경의 서신서들은 축사 사역에 관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미 십자가로 승리하였기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이 말은 결코 우리가 마귀나 귀신들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 임금(사탄)이 심판을 이미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더 이상 주도 아니요, 임금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사탄과는 전혀 다르고 더욱 강한 주님, 그리고 사탄을 이기시고 그를 묶으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임금과 신으로 하여금 이를 갈고, 분통을 터뜨리고, 으르렁거리도록 그냥 두십시오. 그는 사슬에 묶인 못된 개에 불과합니다….\"(『루터』, 에드워드 플래스 저, 컨콜디아, 1959, p291).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영적인 전쟁을 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엡 6:11)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이 예비하신 전쟁 무기들로 무장하고 서게 될 때, 대적은 패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병기들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후 10:4,5)는 하나님이 주시는 강력한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효과적으로 이러한 영적인 병기들을 사용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또한 대적을 영원토록 이기신 주님을 믿음 안에 굳게 서기를 바라십니다.
거룩한 바람/ 행2:1-4/ 성령강림주일설교
거룩한 바람 행2:1-4 교회력으로 볼 때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 약속하신 대로 다른 보혜사인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습니다. 전세계교회가 이것을 기리기 위해 오늘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킵니다. 성령강림의 의미 신학에서는 성령강림 사건을 새생명을 주는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특별히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성령강림 사건을 재창조 사건이라고 보았습니다. 죄로 인해 훼손되고, 망가지고, 일그러진 인간에게 성령이 강림하셔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게 하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성도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성도이고, 진정한 교회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찬송 172장 1절에 보면 \\\"빈들에 마른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의 허락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라고 노래했습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메말라 죽어 가는 대지 위에 단비가 내려 새생명을 베풀 듯이, 성령이 우리 위에 강림하시면 죽어 가는 우리의 영혼이 새생명을 찾을 수 있게됩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은 새생명을 주는 새로운 창조 또는 재창조 사건인 것입니다. 창 2: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됐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미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불어넣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짓게 되자 인간 안에 있던 하나님의 영은 점점 소멸되기 시작하고,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루터의 말처럼 범죄한 인간 안에 하나님의 영은 흔적만 남게 됐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령강림이란 바로 이런 인간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불어넣어지는 사건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인간은 새생명을 얻게 되고, 과거와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고 했습니다. 이제 성령강림으로 전혀 새로운 인간, 신인류가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받은 우리가 바로 새로운 피조물, 신인류인 것입니다. 성령강림 Story 본문 말씀은 성령이 최초로 강림하신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행 1:4절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고 또 당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제자들이 이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두려웠지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고, 모여서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 수가 1:15절에 보면 120이나 됐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며 기도하던 이들에게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이들 모두가 다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됐습니다. 성령의 은사도 받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놀라운 체험을 했겠습니까?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인류 역사상 초유의 사건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 체험을 2절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이들이 그 놀라운 체험을 표현하기 어려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성령과 바람 당시 예루살렘에 이제까지 인간에 겪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바람이 분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요 거룩한 바람입니다. 바람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우선 자연계에 부는 물리적 현상으로서 바람이 있습니다. 우리 뺨을 스치고, 나뭇잎을 떨게 하고, 태극기를 휘날리게 하는 바람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인간사에 부는 바람이 있습니다. 정치바람, 치맛바람, 투기바람, 춤바람 등등. 이걸 세상풍조라고도 부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 한 복판에 부는 이런 바람에 능수버들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바람들 말고 전혀 다른 바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특히 요 3:8절에 보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영적 세계에 불어오는 바람입니다. 즉 성령의 바람입니다. 그러면 왜 바람일까요? 우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 실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시절 읽었던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영시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다만 나뭇잎 하나의 흔들림에서 바람이 지나는 것을 느끼는 것을...\\\" 그렇습니다. 누구도 성령을 눈으로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나뭇잎 떨리듯이 흔들려 흐느낄 때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느낍니다. 저 높은 곳에 세찬 바람맞아 깃발이 펄럭이는 것처럼 내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느낍니다. 다음으로 바람은 강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름철 태풍은 바닷물을 치켜올려 해일을 일으킵니다. 수십 년 된 고목도 쓰러뜨리고, 지붕도 날리고, 건물도 무너뜨립니다. 미국 중부를 강타하는 회오리바람 토네이도는 자동차도, 황소도, 통나무집도 하늘 높이 날려버립니다. 중국 고비사막에 부는 바람은 황사를 하늘 높이 들어올려 수천 키로 떨어진 우리나라에까지 날려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바람도 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강퍅한 사람도 성령의 바람이 불면 넘어집니다. 아무리 교만한 사람도 성령의 바람이 불면 꼬꾸라집니다. 성령의 바람은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성령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람이 지나간 뒷자락에는 언제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남쪽에서 봄바람이 소리 없이 불어오면 얼어붙은 강물이 풀리고 눈 녹은 대지 위로 새싹이 돋아납니다. 열기를 가득 품은 한 여름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과수원 포도송이가 탐스럽게 영글어 갑니다. 가을이 깊어 소슬바람이 불어오면 나뭇잎은 한 잎 두 잎 낙엽 되어 길 위를 뒹굽니다. 겨울 문턱을 넘어 북쪽에서 삭풍이라도 불라치면 온 세상은 그만 꽁꽁 얼어붙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개인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나라와 민족이 변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바람이 불면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요? 우선 성령의 바람이 불면 죽었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어느 날 에스겔 골짜기에 이 성령의 바람이 불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가득히 쌓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그곳을 지나가게 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이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이 뼈들을 향해 대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에스겔이 그 명하신 대로 대언했더니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갔습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뼈 저 뼈 힘을 얻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살아난 뼈들이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죽었던 영혼들이 살아납니다. 잃어버렸던 생명을 되찾게 됩니다. 오늘 이 땅에 수많은 뼈들이 뒹굴고 있습니다. 거리거리 나뒹구는 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집안에도 뒹굴고, 동네에도 뒹굴고, 학교에도 뒹굴고, 직장에도 뒹굽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지 못한 채 여기 저기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이 민족 위에 불어야 하고, 이 상도동 골짜기에 불어야 하고, 우리 집안에 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에 불었던 그 바람, 1907년 원산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에 불었던 그 바람, 성령의 바람 거룩한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령의 바람이 불면 새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뒤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흩어지는 제자들의 마음에는 허탈감이 가득 차여 있었습니다. 3년 동안 공들여 주님을 따랐건만 그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 버린 것입니다. 허탈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패배감도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주님과 함께 몸부림 쳐봤지만 그 결과는 이렇게 참담한 실패로구나! 가슴 가득 패배감이 넘쳤습니다. 절망감도 있었습니다. 이제 잡히면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릴 것이라는 두려움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 근심이 어우러져 감당키 어려운 절망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을 받아 예루살렘에 모였지만 이런 마음들은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던 제자들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 바람이 허탈감도, 패배감도, 절망감도 다 날려버렸습니다. 문을 활짝 열고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어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이런 마음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IMF바람으로 우리 마음 가득 허탈감, 패배감, 그리고 절망감이 넘쳐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태풍이 서울 시내 오염된 공기를 한꺼번에 씻어 내듯이 성령의 바람이 불면 우리 안에 있는 허탈감, 패배감, 절망감을 한꺼번에 씻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새 힘을 얻고 용기를 얻게 됩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각 가정에, 이 나라 민족 역사 위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서 달리고 뛰어야 합니다. 또 하나 성령의 바람이 불면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강림절이 구약의 오순절과 같은 날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의미 심장합니다. 구약의 오순절은 유월절 지난 50일째 되는 날 지키는 명절이라 해서 오순절이라 합니다. 다른 말로는 맥추절이라 하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식인 밀을 추수합니다. 추수한 알곡을 거둬들인 다음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가 바로 오순절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오순절에 불었다는 것은 바로 영적인 추수와 연관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영적인 추수를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성령의 바람이 불자 행2:41에 보면 그 날에 삼천 명이 예수믿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말씀합니다. 놀라운 영적인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영적 결실이 주춤해 졌습니다. 특히 95년을 기점으로 한국교회 부흥이 멈췄다고들 합니다. 이 땅에 다시 한번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이 민족 위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민족 복음화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려면 우선 기도할 때 성령의 바람이 붑니다. 본문 1:14를 보면 120문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120명이나 되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 한마음으로 기도했을 때 성령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은 아무 때나 불지 않습니다. 불만한 조건과 상황이 갖춰질 때 붑니다. 매서운 한겨울 북서풍은 저 시베리아 지역에 거대한 한랭기단이 형성됐을 때 불어옵니다. 지루한 장마 뒤에 불어오는 태풍은 필리핀 동남방 북태평양 상공에 고온 다습한 기단이 형성됐을 때 불어옵니다. 이제 우리도 기도의 기단을 마련해야 합니다. 성령의 바람은 얼마나 기도하느냐에 따라 그 세기가 달라집니다.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기도의 기단을 만들면 솔솔 바람, 산들바람밖에 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뜨겁게 기도하면 태풍과 같은 성령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리고 혼자서 기도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기도하면 더 효과적입니다. 온 교회가 함께 합심해서 기도하면 놀라운 기도의 기단이 형성됩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진원지가 돼서 이 상도동 골짜기에 성령의 바람이 불 것입니다. 이 민족 역사 위에 성령의 바람이 불 것입니다. 다음으로 회개할 대 성령의 바람이 붑니다. 행 2:37-8을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회개하면 그 사람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현상도 따지고 보면 기압 차에서 생겨난 현상입니다. 공기의 밀도가 높고, 공기의 압력이 높은 곳에서 공기의 밀도가 낮고, 공기의 압력이 낮은 곳으로 공기가 이동해 가는 현상이 바로 바람입니다. 그러니까 기압 차기 클수록 바람은 세게 붑니다. 마치 높이가 높은 폭포가 높이가 낮은 폭포보다 물이 세차게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마른 막대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나는 만물의 찌꺼기 같은 존재입니다.\\\' 고백한 사람들에게 성령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경고를 받고도 회개는커녕 주님을 비난하고 정죄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성령의 바람이 미풍도 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하느냐에 따라 성령의 바람의 강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얼마나 낮추느냐에 따라 성령의 바람의 강도가 달라집니다. 끝으로 영국의 찬송작가 몽고메리의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목은 성령이여 오소서 입니다. 주 하나님, 거룩한 영이시여 지금 허락된 이 시간에 오순절 그 날처럼 당신의 권능으로 내려오소서. 우리가 정한 장소에 한 마음으로 만나 우리 주의 약속인 은혜의 성령을 기다리나이다. 파도치는 바다의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저마다의 마음속에 한 영으로 하나의 숨결로 한 가지 감격으로 내려오소서.
거룩한 열망/롬8:1-4.갈5:16-8
거룩한 열망/롬8:1-4.갈5:16-8 2004-06-18 12:46:04 read : 81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강림은 구약의 율법시대를 마감하 고, 이제 은혜의 시대,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성령 강림을 통하여, 믿는 우리들은 새로운 보화를 얻게 되었고, 성령과 함께하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이 땅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 강림은 “기독교 역사의 시작이요, 우리 신앙생활의 근거”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찰스 어드만(Charles Erdman) 박사는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을 가리켜 “교회역사의 제 1장이며, 제 1페이지”라고 말했습니다. 오스왈드 샌더스 목사는 “오순절은 기독교의 발전소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이 임한 사건은 너무나도 중요한, 주님의 초림과도 같은 축복의 사건이요, 은혜의 사건인 것입니다. 자 이제 성령의 시대가 열림으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은혜 아래에 거하게 되었고, 성령과 함께 새 시대,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영원토록 우리의 삶을 지키시며, 늘 은혜 가운데 머무를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함이요 또 너희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이제 우리에게는 성령께서 계심으로, 예수님이 계실때보다 더 귀하고 좋은 보화를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이 성령을 통해 영의 세계를 마음껏 여행할 수 있으며, 이 땅에서 진정으로 힘 있고, 능력 있는 성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 충만함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새로운 법의 적용입니다. 성령이 임한 그 순간, 저와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하늘의 원칙이 적용되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많은 사역이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그의 사역은 우리를 죄에서 구해주신 것입니다. 이 죄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원치 않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가난, 멸시, 무능, 연약함과 병, 억울함, 슬픔, 이별, 무엇보다도 두려운 죽음 그리고 영원한 지옥까지 말입니다.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은 인간의 이러한 모습을 잘 설명해 줍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죄가 욕심을 일으키고 우리의 모든 의지를 악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절망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바울도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 자 그러나 로마서 8장은 복된 소식으로 충만합니다. 전혀 새로운 한 법이 소개됩니다. 앞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다 경험하고 있는 삶의 법이요, 운명이 그려지면서, 아무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로마서 8장에서는 새 법이 선포됩니다. 이 새 법은 단절되어 있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합니다. 동시에 원치 않는 모든 저주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싸워 이길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일방적으로 기쁨과 소망이 공급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후에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창조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로 성령이 임한 이후, 새로운 법적용 아래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일에 대해서 완전하게 책임을 지시고 밀어주십니다. 자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새 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의 법입니다. 이 성령의 법대로 사는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게 됩니다.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던 일을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그래서 죄와 저주,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십니다. 자 그래서 성령의 사람인 우리는 새 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1-2절) 여러분 얼마나 기가막힌 소식입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엄청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바로 오늘 성령강림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선포되고, 확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법이 적용되는 성도를, 이제 그 어떤 것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는 이미 새 법아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하늘의 원칙이 우리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법, 하늘의 원칙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법이 적용되는 성도들에게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는 데, 그것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하늘의 물이 끊이지 않는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펜실베니아에 큰 공장과 초라한 공장이 나란히 있었습니다. 큰 공장은 엔진이 강해서 거기 있는 모든 기계를 다 돌리고도 힘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에 반해서, 작은 공장의 엔진은 힘이 없어 돌아가다가는 꺼지곤 했습니다. 작은 공장 주인이 큰 공장 주인을 찾아가서 사정합니다. "사장님, 저는 사정이 딱해서 제대로 작동되는 엔진을 살 힘이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공장에 남아도는 엔진의 힘을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큰 공장 주인은 마음이 너그러웠습니다. 허락을 하자 담에 구멍을 뚫어 공장 엔진에 벨트 하나를 걸어주었습니다. 자 이제 작은 공장은 엔진 없이도 기계를 잘 돌려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힘만으로는 작은 공장과도 같습니다. 엔진이 약해서 돌아가다 꺼지는 기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큰 공장은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힘도 도움도 다 거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새 원칙이 적용되는 내 삶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 힘은 성령으로 내안에 실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 엄청난 힘의 세계를 나의 것으로 만들고, 거기로부터 무한한 힘을 받는 방법은 벨트만 걸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음으로, 성령의 법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능력 아래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법, 성령이 통치하시는 자리에 서계시기를 바랍니다. 이 새로운 법적용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 거룩한 열망을 불어넣으시는 성령 자 이제 이렇게 새로운 법에 적용받게 되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 있는데 거룩한 열망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도가 되면 욕심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가들은 "욕심을 없애라, 모든 문제는 욕심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음을 비우라“고 충언 합니다 자 그러나 오늘 갈라디아서의 말씀은 전혀 다른 소리를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거스린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두개의 다른 욕심이 서로 싸운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육체가 욕심을 가진 것은 알겠지만 성령도 욕심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기에 성령이 욕심을 가졌다면, 그 성령이 거하시는, 집과 같은 우리들도 당연히 욕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욕심은 곧 하나님의 욕심인 것입니다. 이 욕심이란 지나친 소원이란 뜻을 내포합니다. 바로 새로운 법이 적용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성령의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좋은 것도 지나치면 나쁘다는 말이 있지요, 돈도 힘도 권력도 지나치면 나쁜 것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큽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러할 것입니다. 자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지나친 경우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누가 욕심을 많이 가지면, 금방 경계의 대상이요 경쟁의 목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것입니다. 욕심을 가질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의와 사랑 그리고 평안은 많을수록 좋은 것아닙니까? 그것이 많다고 남을 괴롭히겠습니까? 아니면 남의 것을 빼앗을까요? 그것이 많다고 교만해 질까요? 아니면 악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그것은 하나님의 욕심인 것입니다. 누가 하늘의 기쁨이 넘치고 자비하고 온유하다고 시비 걸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자기에게 잘해준다고 덤벼들 사람이 있을까요? 여러분 그래서 내안에 성령이 거하시면서 갖게 되는 복음에 대한 비젼, 성령의 욕심, 그것을 우리는 “거룩한 열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망은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더욱더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정유공장의 서기로 취직합니다. 대단히 가난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친구와 함께 조그만 회사를 시작하고 부업으로 클리블랜드에 정유소를 차리면서 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신앙인이었고, 그의 마음속에 거룩한 열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서른하나에 본격적인 회사를 세워서 마흔두살에는 미국 전체 정유소의 95%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이 바로 존 록펠러입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이 미국에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98세까지 살면서 자선 사업을 벌렸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 안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거룩한 열망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는 점점 더 자기안에 존재하는 열망을 키웠습니다. 그는 시카고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지요. 계속해서 대학원 위주의 엄청난 학교를 만듭니다. 당시 돈으로 4억 3천만불이나 기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2백년 전에 세워진 하버드와 예일의 수준으로 만들었습니다. 시카고 대학의 위용과 학적인 수준은 록펠러의 거룩한 열망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의 외아들 록펠러 2세는 아예 36세에, 저랑 같은 나이인데요,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은퇴하게 됩니다. 자선 사업에 몰두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록펠러 센터를 세웁니다. 뉴욕 맨하탄 중심부에 70층짜리 건물을 비롯해서 15개의 거대한 빌딩입니다. 여기서 미국 경제가 재편성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UN본부를 위한 비싼 땅을 희사하게 됩니다. 뉴욕의 엄청난 리버사이드 교회는 록펠러 2세의 거룩한 열망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거대한 리버사이드 교회와 광활한 시카고 대학 동편 모퉁이의 대학교회는 그 아름다움과 건축형식이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위대한 석학들과 목사님들이 영혼을 깨우쳤습니다. 이제 록펠러와 2세가 죽은지 오래 되었어도, 그들의 일은 땅 위에 오래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더우기 하늘에 기록된 그 이름은 더욱 큰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속에 있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거룩한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록펠러 2세가 교회와 자선에 몰두했지만 사업은 더욱 번창했습니다. 그리고 후손들은 모두가 미국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록펠러 3세가 사업의 대부분을 계승하고, 2남은 정치가로 뉴욕주지사,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3남은 뉴욕 주식계를 석권합니다. 4남은 아칸소주지사를 지냈습니다. 5남은 체이스 맨하탄 은행의 회장입니다. 록펠러가는 모건 재벌과 함께 미국 경제를 2분하는 재벌집안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저와 여러분에게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그 지점과 목표를 향해 달려갈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 우리의 죄와 세상적인 욕심이 함께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룩한 영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서 함께 살아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법적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라면, 거룩한 열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요, 이 복음을 가진자는 가슴이 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세기의 제자들과 바울은 이 세계를 가슴에 품고, 복음의 비젼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그 큰 가슴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이 자리에 있게 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가슴속에 뛰고 있는 거룩한 열망을 찾아보십시오. 내 마음을 들여다 보면, 우리안에는 누구나 다 그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것을 따라서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일은, 더욱 더 복음과 말씀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왜입니까? 복음의 지식이 없으면 절대로 성령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저 내 멋대로, 생각하는대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서 경건한 소원이 일어나면 그대로 순종하고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하늘의 경험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감격한 것 이상의 더 큰 감동이 올 것입니다. 록펠러처럼 돈이 많아야만 경건한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말씀하시는 경건한 소원, 거룩한 열망이 있습니다. 그것을 행동에 옮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고, 하늘의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안이 확실하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한없이 성령을 따라서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욕심을 내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따라서 행동하십시오. 눈을 들어 영적인 세계의 거장들을 보십시오. 록펠러를 보십시오. 워너 메이커를 보십시오. 지미 카터를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성령을 좇아 행했기에 더욱 부자가 되었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테레사를 보십시오. 다미엔 신부를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멀리 있는 믿음의 영웅들 말고, 여러분의 교회에 늘 기도의 자리를 지키시는 권사님들을 보십시오. 심방으로 봉사로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선한 땀방울을 보십시오. 너무나 귀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도 그 자리에서 함께 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좇아 행하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한계도 넘어서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헬렌 켈러는 눈멀고 귀먹어 완전히 갇힌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영혼은 한없이 자유로웠습니다. 그녀의 영혼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고, 새처럼 노래하며 꽃처럼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녀는 성령을 좇아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 모두가 성령을 좇아 행하시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절대 순종, 절대 복종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늘 예민하게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 질 것입니다. 잘되는 집과 안되는 집이 있었습니다. 잘되는 집은 별 재산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는데 잘 됩니다. 늘 화목해서 모두가 웃는 얼굴 환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매사에 잘 풀립니다. 그런데 다른 쪽 집은 재산도 꽤 물려받고 자식도 많은데 뭐 하나 제대로 되는게 없습니다. 늘 화목하지 못하고 화난 얼굴입니다. 가족은 늘 아프고 사업은 안되고 점점 가난해져 갑니다. 안되는 쪽 가장은 잘되는 쪽 가장의 집에 가서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가족들을 불렀습니다. "다 나오너라." 그러자 즉시 모두가 다 뛰어 나왔습니다. 가장은 명령했습니다. "들어가서 냉장고를 들고들 나와라." 그러자 온 가족이 여자들까지 가세해서 낑낑거리며 냉장고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자 가장은 말했습니다. "자 이제 그 냉장고를 지붕으로 던져라." 모두들 지붕을 향해서 자세를 취했습니다. 냉장고가 지붕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 물론 안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에게 복종함으로 단합된 힘과 화합을 보여주었습니다. 안되는 쪽 가장이 집에 돌아갔습니다. 똑같이 해보았습니다. "다 나오너라." 아무리 외쳐도 나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찾아다니며 불렀더니 마지 못해서 찡그리며 나왔습니다. "냉장고를 들고 나와라."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내아들이 따집니다. "아버지가 들고 나오시지요. 우리가 저걸 어떻게 들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매사에 내 안에 계신 성령을 좇겠다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교회를 삶의 중심에 놓아야 하고 복음의 말씀이 내 마음을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은 성령을 통해 내 안에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가 풍성한 영광의 삶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한 교회의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그 교회 집사님이 묻습니다. “목사님, 저희 오빠를 한번 데리고 올테니, 오빠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수 있으세요.” “아니 김집사 무슨 말이야, 당연히 기도해 줄 수 있지, 얼른 모시고와” 며칠이 지나서 이 집사님이 또 묻습니다. “목사님 저희 오빠가 몸이 많이 안 좋은데, 저희 오빠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수 있으세요” “내가 전에 말했잖아, 얼른 모시고와” 그 후 며칠이 지나서, 평일에 비가 무척이나 오는날, 김집사에게서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오늘 밤 8시에 오빠를 목사님께 데려 갈테니, 기도를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속에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교인의 부탁이니, 들어주어야지 하고 기다립니다. 약속된 시간이 되었지만, 김집사가 오지를 않습니다. 한 두시간이 더 지나서, 이제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막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요. 사모님이 나가보니 김집사였습니다. 비를 흠뻑 맞고 사택으로 뛰어 왔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을 찾으면서, 목사님 오빠를 모시고 왔습니다. 기도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리고 오빠를 데리고 오는데, 문둥병자였습니다. 아주 중증 문둥병자였던 것입니다. 코도 문드러지고, 얼굴에는 고름이 마구 쏟아지고 있는 아주 심한 문둥병자였습니다. 목사님은 그 순간 너무 겁을 먹고, “김집사, 아무래도 내가 기도하기가 어려운데, 안되겠어” “그렇죠 목사님, 알았습니다. 저도 이해 합니다. 그럼 가 볼께요” 문을 닫고 가는데, 사모님이 김집사의 뒷 모습을 보니까 너무 처량한 거예요. 목사님에게 말합니다. “아니 당신은 기도를 해주어야지, 목사님이 기도를 안해주면 어떻게 하느냐구” “아니 내가 어떻게 저 중증 문둥병자에게 안수기도를 한단 말이요, 어휴 난 안되요” 사모님과 함께 엄청난 다툼을 하시다가, 너무 안되겠든지, 그럼, 가서 불러오라구, 간단히 기도를 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모님이 열심히 뛰어가서, 김집사와 그 오빠를 불러왔습니다. 이제 그들을 사택에 앉혀 놓고, 목사님은 말씀하십니다. 제가 잠깐 내 서재에 가서 기도하고 와서, 기도해 주겠노라구, 잠깐만 기다리라고, 그때 까지만해도 목사님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무언가 아주 찝찝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석연치 않았습니다. 자 그리고 서재에 가서 무릎을 탁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하는데, 마음은 왠지 거북스럽고, 병이 옮으면 어떻하나 두려움까지도 밀려왔습니다. 자 그런데 목사님의 마음속에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기도할때는 지났다. 네가 빨아라” 순간 움찔하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 생각을 막 지워버리고, 다시한번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하는데, 또 그 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기도할때는 지났다. 입으로 빨아라” 목사님은 쉽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서재에서 나오십니다. 성령의 소리에 순종하려고 하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자 그래도 이제 사모님께 물동이를 가져오라고 말하고, 김 집사의 오빠 온 몸에 있는 붕대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깊은 중증 문둥병자라서, 온 몸이 거의 다 썩었습니다. 붕대를 풀어보니, 냄새와 그 모양이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자 그런데 이 목사님, 양동이의 물로 몸을 한번 씼기고, 그리고 입으로 빨기 시작합니다. 피고름이 나오고, 빠는데, 막 살점이 뚝뚝 떨어지기도 하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계속 빨다가 거울을 보니까, 고름과 피로 얼굴이 범벅이 되었고, 이빨 사이에 문둥병이 든 피부가 막 껴있는 것도 느끼게 됩니다. 자 그런데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성껏 모든 피고름을 빨아서 짰습니다. 이 목사님은 처음에 기도해주지 않겠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며 계속 마음속에서 들려온 성령의 소리에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라운 사실은 김집사의 오빠 문둥병이 그 이후에 깨끗하게 나았다고 합니다. 한 목사님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성령의 소리에 대한 철저한 순종으로 영혼을 낫게 한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교회는 지금 수 만명의 교회로 변했고, 부흥이 불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에 실존하고 계시는 한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적용되고 있는 새로운 하늘의 원칙을, 지금 나에게 반복하시는 내안에 있는 성령의 거룩한 열망을, 내 속에서 나를 아름답게 살고자하는 내 영혼을 돕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 시간을 더 내십시오.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을 계획하십시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더 헌신하십시오. 여러분의 이웃들을 더 섬기십시오. 영혼을 구하기 위해 더 움직이십시오. 더욱더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물으십시오. 그리고 그의 뜻, 성령을 따라 행동하십시오. 엄청난 성령의 열매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은, 성령입니다/행2:1-4
결론은, 성령입니다/행2:1-4 2001-10-22 08:23:30 read : 86 11월은 부족한 종이 목양교회 8대 담임목사로 부임한지 1년이 되는 달입니다. 지난 1년을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부족한 종의 목회에 잘 협력하여 주신 성도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1년의 소감은 다음 주일 금요합심기도회 때 자세하게 말씀 드리려고합니다. 목양교회 목회 1년의 결론을 한마디로 한다면 무엇이 될까요? 여러분, 어떤 결론을 기대하십니까? 오늘 설교제목이 이미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결론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합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본문의 성도들처럼 성령충만해야합니다. 이것이 저의 결론이며 동시에 성도 여러분의 결론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 수요일에 수능시험을 치루는 입시생들과 그 부모들의 결론이 되기 바랍니다. 너무 평범한 결론입니까? 신선미가 없는 결론입니까? 기대가 깨졌습니까? 아닙니다. 가장 성숙한 결론입니다! 목사님들이 축도를 할 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마지막으로 성령의 교제를 구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꼴찌의 영이 아니냐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계급이나 등급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두 같습니다. 축도에서 성령의 교제를 끝에 말하는 것은 성령이 결론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해야 은혜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결론입니다! "결론은, 성령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했던 많은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20세기 신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칼 바르트와 역시 20세기 교회 부흥운동의 거장인 부흥사 빌리 그래함이 스위스에서 같이 휴가를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빌리 그래함은 칼 바르트에게 "신학에서 제일 강조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었습니다. 칼 바르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성령이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황 요한이 임종을 얼마 앞두지 않고 있을 때 누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교리 중에서 제일 재강조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교황 요한은 "성령에 대한 교리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자동차에서 제일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제일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밧데리입니다. 밧데리는 시동이 걸리게 하고 클랙션을 울리게 해 줍니다. 헤들라이트를 켜주고 라디오도 듣게 해줍니다. 밧데리에 이상이 생기면 차는 정말 꼼짝을 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성령은 바로 이 밧데리와 같습니다. 성령은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 줍니다. 저희 교회 올해 표어가 "영적 예배를 드리는 교회"인데 영적 예배는 온전한 헌신이 있는 예배입니다. 동시에 말 그대로 성령이 함께 하는 예배가 영적 예배입니다. 성령은 선교를 하게 합니다. 성령은 성도들 사이에 진정한 교제가 있게 합니다. 자동차의 밧데리가 다 소모되거나 밧데리와 엔진을 연결하는 장치에 이상이 생겨 시동이 걸리지 않는데 다른 데서 원인을 찿으려 한다면 그것은 무익한 것이 됩니다. 교회도 부진한 것이 있다면 그 원인을 성령에서 찿아야할 것입니다. 성령은 교회를 태어나게 했고 교회를 성장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정황을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해서 120문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리 인정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을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 없는 범인(凡人)으로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쉽게 이해되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렸다", 받아 들일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이른바 대표적인 유언비어입니다. 사람들은 놀라고 의심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새술에 취했다"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 났습니까?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묻습니다. 삼천 명이 하루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 났습니다. 상식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성령의 역사로 상식으로는 가능하지 않던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의 본문에 기록된 일은 그뒤에 세계 여러 곳에서 반복됩니다. 110여 년 전에 한국에 복음이 들어 왔습니다. 한국은 이교적인 바탕이 강한 나라입니다. 한국을 숲에 비유한다면 전통사상인 샤머니즘의 잡목이 우거져 있습니다. 불교와 유교가 거목들이 여기저기 솟아 있습니다. 큰 사찰이 있는 곳에 가면 그 지역사회 전체가 불교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제일 약한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경상남도 합천군입니다. 전체인구의 4.4%만이 기독교를 믿습니다. 왜 그런지 잘 아실 것입니다. 부산 부근 양산에 가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기독교라는 묘목이 심어졌습니다. 이 묘목은 잘 자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 묘목의 가지를 자르고 줄기를 자르고 뿌리를 뽑으려고 한 세력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통사상이 그랬고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가 그랬고 공산당의 박해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 묘목은 힘있게 자랐고 계속 분양을 해서 한국이라는 수풀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른 정원으로 자꾸 이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성령께서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왕성하게 성장하는 교회는 놀랍게도 중국의 교회입니다. 1949년에 80여 만 명, 1979년에 300여 만 명, 지금은 6천만 명 이상의 교인이 있습니다. 곧 1억이 넘을 것으로 예견됩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교회는 여러 가지 제약을 받습니다. 신앙이 자유가 보장되고 오랜 신앙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보다 여러 가지 제약이 강한 중국의 교회가 왕성하게 성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도 같습니다. 성령께서 그 지역에서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령께서 함께 해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A라는 회사에서 만든 제품을 B라는 회사의 직원에게 아프터 서비스를 받으면 만족한 서비스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제품의 성능과 취약점과 어떻게 수리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수리에 필요한 부품들을 A회사의 직원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깨닫게 하는데 필요한 것들은 성경을 기록하게 한 성령을 통해서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기도의 문을 열어 줍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고 기도의 줄이 잡히지 않을 때의 답답함을 여러분은 많이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성령은 성숙한 기도를 하게 합니다. "수능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내가 원하는 전공,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필요한 기도입니다. 절박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주님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한 계획을 이루는데 필요한 점수가 있을텐데 부족한 부분을 성령께서 채워 주세요!" 진일보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공정한 평가가 이뤄지게 해 주세요!" 성숙한 기도입니다. "주님, 많이 배워 더 많이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싶습니다!" 더 성숙한 기도입니다. "주님,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인도하소서!" 가장 성숙한 기도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은 선택이 아닙니다. 이것은 필수입니다. 모든 성도가 반드시 성령충만 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한 것은 특정한 사람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특별한 체험이 아닙니다. 보편적인 체험입니다. 성도 모두에게 가능한 일이며 성도 모두에게 허락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입니다. 빌리 그래함은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영혼의 생명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이 건강을 얻지 못합니다.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열매 맺기 위해서 성령이 충만해야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있지 아니하면 대신 음란과 호색과 이기심과 방탕이 우리를 채우게 됩니다. 이 세상에 성령이 있지 아니하면 지옥의 것들이 대신 이 세상을 채우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까 성령을 자동차의 밧데리에 비유했는데 밧데리로 인한 고장은 고치기가 쉽습니다. 충전하거나 전선을 손질하거나 바꾸면 됩니다. 성령 받는 것도 쉽습니다. 요즘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가 동맥경화증입니다. 여러 가지 노폐물과 기름기가 심장으로 가는 혈관을 좁게 만들고 나가서는 막아서 생기는 병입니다. 동맥경화증에 걸리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계단을 제대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빠른 걸음으로 걷지를 못합니다. 때때로 심한 통증이 찿아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이것을 체험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심장에 맑은 피가 제대로 공급되고 있습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오는 통로가 막혀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막는 것은 죄입니다. 교만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성령충만하기 위해서는 이 죄와 교만을 제거해야 합니다. 성령충만 받기 위해서는 고백해야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해야합니다. 내가 교만했음을 고백해야합니다. 내가 성령을 갈구하고 있음을, 성령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고백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을 해야지 결혼이 이뤄집니다. 내가 먼저 청혼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것 같아서, 그러면 결혼생활 하는데 약점 잡힐 것 같아서 청혼을 하지 않으면 결혼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혼이 이뤄지는 젊은이를 실제로 본 일이 있습니다. "성령님, 내가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내게 와 주세요!" 해야합니다. 병원에 가서 아무 말도 말도 하지 않고 의사가 다 알아서 고쳐주기를 바라면 손해입니다. 여기는 이렇게 아프고 저기는 이렇게 아프다고 알려주어야합니다. 영혼의 병원인 교회에 와서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이 알아서 다 고쳐주고 채워주기를 바라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강해집니다. 담대해 집니다. 불을 받습니다 - 믿음의 불을 받고, 기도의 불을 받고, 감사의 불을 받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전도하게 됩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려고 합니까? 성령이 함께 하기를 구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습니다. 성령 받고 구원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은 한주간이 새롭게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이 주간이 성령이 함께 하는 주간이 되도록 기도해야합니다. 매일매일을 맞이할 때도 성령이 동행하는 하루가 되도록 기도 해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이 성령입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이 작전을 일선에서 지휘한 일본공군 지휘관은 후지야 마쓰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이 350대의 폭격기를 지휘해서 진주만 기습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 사람이 1950년에 전역을 하고 한가하게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길에서 어떤 사람이 전도지를 주면서 오늘 저녁 어디에서 전도집회가 열리니까 꼭 와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호기심이 생겨서 가보겠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분들이 겪는 애로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고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웃는 얼굴로 "생각해 보지요" 또는 "가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합니다. 그러면 올줄로 알고 기대하면서 기다리면 오지 않습니다. 또 일본 사람들은 성탄절에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석탄일이 되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절에 가서 예불을 드립니다. 일본의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본 사람들의 이런 심성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후지마 마쓰요는 군인답게 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전도집회에 갔더니 미국인 선교사가 설교를 하는데 이 미국인 선교사는 전에 미국 공군 전투조종사였다고 했습니다. 후지마 마쓰요는 자기와 같은 직업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느끼고 경청을 했습니다. 선교사는 자기가 일본을 상대로 수많은 전투를 치루면서 1942년에 동경을 폭격하기 위해서 오다가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비상탈출했는데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서 3년 동안 온갖 고생을 했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석방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간 이 전투조종사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일본복음화를 위해 일본 선교사를 자원해서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습니다. 8년 전인 1942년에는 동경을 폭격하기 위해서 폭탄을 품은 비행기를 몰고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폭탄을 들고 왔는데 복음의 폭탄을 들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폭탄이 훨씬 더 위력이 강하다고 했습니다. 후지마 마쓰요는 5년 전까지 적국이었고 모욕을 주고 고통을 준 나라를 위해서 다시 찿아온 그 선교사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일본이 미군 포로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대했는지는 후지마 마쓰요 씨가 제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었고 오사까 사까이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1972년에는 우리나라에 와서 이 간증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군 조종사야말로 매력적인 일이고 폭격이야말로 현대 작전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힘 있는 방법이라고 믿고 전투조종사 생활에 생명을 걸었던 그가 그가 장로가 된 다음에 하는 말은 성령의 폭탄, 말씀의 폭탄이 화약 폭탄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성령이 폭탄이 성도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서 폭발하기를 바랍니다. 목양교회 한가운데서 폭발하기를 기원합니다! 성령은 미워하던 사람도 사랑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미국인 선교사로 하여금 정말 자기를 그토록 핍박한 나라, 원수였던 나라를 다시 찿아오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지금 중국에 이관숙이라는 장로교 목사님이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직접 선교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분은 장애인들을 돕는 일을 통해서 간접선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분 자신이 다리가 하나 없어서 의족을 사용하고 있는 지체장애인입니다. 6·25 때 군인의 신분으로 참전했는데 중공군이 매설한 지뢰에 다리를 잃었습니다. 이 분이 "중국은 내 다리를 뺏어 갔지만 나는 중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특히 중국의 장애인들을 사랑해서 여기 와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 듣는 이들이 모두 감동을 받습니다. 선교효과가 아주 큽니다. 정말 자기 다리를 뺏어가서 평생을 장애인으로 -예전에는 불구자, 병신이라고 했습니다-만든 나라를 다시 찿아가게 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지금은 성령이 폭발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클클함이 있습니다. IMF 위기가 있습니다. 1907년에 한국교회에 성령폭발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이전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맺어져서 나라를 빼앗겼고, 그런 가운데서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폭발했습니다. 그 때와 비슷합니다. 이미 그런 징후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이제 성령께서 역사하셔야겠습니다!" 하는 공통된 기도가 있습니다. "결론은, 성령입니다." 하는 인식을 가지고 성령의 임재와 동행을 간구하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연말이 되어서 잘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계획하는 때입니다. 제자들이 열흘 전에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하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저들이 열흘 동안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늘이 여러분 각자에게, 교회에 또 하나의 오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바람처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 자리에 강하게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바람, 얼마나 강합니까? 태풍이 불오온다는 예보가 나오면 우리가 얼마나 긴장하며 두려워합니까? 태풍은 파괴하지만 성령의 바람은 건설합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을 모두 보고 각 사람 위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결론은, 성령입니다!" 이 사실 위에서 다시 출발하는 여러분과 저, 그리고 컴퓨터를 통해 이 설교를 대하는 모든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을 견디게 하는 위로자/ 고후1:3-11/ 2001-12-15
고난을 견디게 하는 위로자 고후1:3-11 1.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한 모습의 고난을 경험하고 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의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홍수, 지진 등 자연적인 재난으로 인한 고난을 경험하기도 하며, 의롭게 살기 위해 핍박을 받는 고난도 경험하며, 세상의 가치관의 압력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시달리는 고난도 경험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이것들을 모두 목격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고난의 환경 가운데 놓여져 있기도 합니다.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홍수와 지진 등 자연재해를 만나고, 핍박을 받고, 가치관의 압력을 받는 등 다양한 고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잘못 없이 당하는 그 고난이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참고 견디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고난이 자신에게만 임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고난들 중 자연재해나 의를 인한 핍박의 경우는 세상 가운데 드러나며, 명확한 것으로서 눈에 보이는 고난입니다. 그래서 훗날 상급이나 보상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 고난을 모두가 보아서 알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난들은 특별한 경우에 맞이하게 되는 고난들입니다. 그중 자연재해로 인한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두가 체념하고 감당해 나갑니다. 의를 인한 핍박의 경우는 하나님만을 한 주인으로 섬기는 자들의 순교자적 신앙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기에 기쁨으로 감당해 나갑니다. 그러나 가치관의 압력이라는 형태로 다가오는 고난은 일상적인 삶 자체이기에 우리의 행복을 실제적으로 빼앗아가는 심각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 고난은 우리에게 정신적인 고난을 안겨 줍니다. 이러한 고난은 세상 가운데서 위로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위로자로부터 더욱 큰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더군다나 고난으로 여겨지지도 않기에 사단의 장난이 심한 영역이기도 합니다. 2. 우리의 삶은 다양한 가치관과 환경 속에서 사는 영적 전쟁의 삶이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다양성과 개방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가치관의 압력이라는 고난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세계와 접촉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세계에 자신을 개방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세계 속에서 주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부름 받은 기존의 영역은, 기존의 영적 토양은 좋은 토양이 아닙니다. 우상숭배, 조상숭배, 각종 미신들, 성적과 학벌 지상주의 등의 악한 토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악한 영역들 속에서 억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억눌린 삶들 속에서는 자신의 것을 먼저 챙겨야만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두들 자신의 것만 챙기는 삶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볼 때, 자신에게 평안을 주는 환경이라는 고백이 나오기가 힘듭니다. 우리가 접촉하고 있는 모든 세계가 강한 압력을 행사하는 세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압력에 대항하여 절충하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며, 승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환난과 고통이며, 고난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러한 상태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고린도시는 저속한 물질주의, 간통 등 비도덕적인 삶, 우상숭배의 전형적인 도시였습니다. 아프로디테 신전에 천명에 이르는 매음녀가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매춘 사업이 고린도시의 부유함과 악을 동시에 가져왔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고린도로 항해하지 말라”는 격언까지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곳에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신앙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성령의 은사가 충만했지만, 이들 가운데 세상의 영이 더욱 세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고린도지역의 악한 토양의 영향으로 믿음보다는 보이는 것에 따라 행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어지러운 교회를 바로잡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보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권고에 충격을 받고 돌이키기는 하였으나,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도전 세력들로 인해 복음의 진실성까지 침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먼저 그들의 어려운 환경에 대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3. 인간의 상처를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변덕스런 신앙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험악한 환경을 무시한 바울의 혹독한 충고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상처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네 가지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고후 1:3-4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첫째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원문: 아버지)”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땅에서 인간의 몸으로 고난당하시며, 죽임까지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둘째로, “자비(자비들)의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지극히 자비로우신 아버지라는 고백입니다. 셋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위로의 주관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고, 모든 환난을 견디었고, 지금도, 미래도 그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건져내어진다는 확신 속에 있습니다. 넷째는,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환난” 중에 있는 “모든 위로”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환난에 대해 “모든” 위로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환난(들리보)”은 “모여들다, 에워싸다”의 뜻에서 유래한 단어로 에워싼 것들이 압력을 가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위로(파라칼레오)”의 원 뜻은 “가까이서 부르다”라는 의미로서 능력 있는 자의 초청을 받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든 환난에 모든 위로”란 우리를 악한 환경이 에워쌀지라도 우리 가까이서 두르고 계신 능력의 주가 우리의 중심 속에 대신 계셔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겨 쌈을 당하여 고난과 고통, 환난 속에 있을 때 가까이 계신 분을 더욱 확실하게 보며 위로를 받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술, 담배, 돈, 쾌락, 음란, 오락들로 위로를 삼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성도들은 그 환난 속에서 우리 주님을 더욱 선명히 바라보게 합니다. 마치 위기 속에서 아이들의 눈에 오직 어머니 모습만 보이는 것처럼 주님만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최악의 상태에 있을 때 예민하게 체험됩니다. 환난은 성도들로 하여금 외적이며,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눈을 돌리도록 도와줍니다. 환난과 고통 속에서는 가장 강력한 존재를 찾고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위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위로였습니다. 그는 고후 1:5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환난과 모든 위로는 그리스도와 관계된 환난과 위로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입니다. “우리에게 넘친 것”은 우리가 받는 고난, 우리가 받는 환난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삶으로 인해 받는 환난과 고난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위로”가 그러한 환난과 고난 가운데 임합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매 맞고, 헐벗고, 고생하는 자들에게 위로가 넘칩니다. 악하고 다양한 세계관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살며 겪는 모든 환난에 함께하시는 위로의 하나님을 통해 건져짐의 소망을 지니게 됩니다. 위로는 강하신 분의 긍휼히 여겨 주심에 의해 오는 것입니다. 사 49:13은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에워싸고 있는 환경의 압박으로 환난 가운데 있을 때 강한 분이 가까이서 불러 막아주시는 긍휼히 여겨주심이 바로 위로입니다. 우리가 환경의 압박으로 환난당할 때, 내 가까이서 고난 가운데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가까이서 불러주시며, 영원한 삶에의 소망을 견고하게 해 주시는 위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그러한 위로로써 고린도교인들의 환난과 고난을 위로하였던 것입니다. 4. 하나님께 받는 위로도 은사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도록 주어진 것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도 은사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지체들을 위로하도록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고후 1:6은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바울이 환난 가운데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위로를 받은 것은 다른 지체에게 그 위로를 주어 고난을 견디도록 돕게 하고자 함임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과 위로는 다른 연약한 지체를 돕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받은 자는 그 위로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그 위로를 들고 다른 지체에게 가게 합니다. 또한 환난 가운데 있는 자가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하나님과 다른 지체로부터 오는 위로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환난이 서로에게 알려져야 하고 서로에게 위로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환난을 알렸고, 그 환난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고 고후 7:13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환난 중에 받은 위로는 다른 지체들에게 위로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로 소망 속에 견고하게 하기에 다른 지체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고후 1:7은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로 고린도 교인에 대한 소망이 견고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로 견고해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도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위로 속에 견고해질 줄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위로의 확신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5. 하나님의 위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임하여진다. 하나님의 위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임하여지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다른 지체로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고후 1:8-9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환난 속에서 받은 하나님의 위로로 고린도 성도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 11:23-27에 보면, 바울은 옥에 갇히고, 매 맞고, 파선 당하고, 강도를 만나고, 거짓 형제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고, 헐벗고 굶주렸고, 거짓 교사들의 훼방을 받고, 육체의 가시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등 수많은 고난과 환난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의 환난과 고통 중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죽고 싶을 정도의 환란 중에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뢰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붙잡은 하나님의 위로를 고린도 성도들도 붙잡을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며 위로하고 있습니다. 환난 중에 위로받은 자가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지체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이 가장 좋은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환난 중에 견딜 수 있었던 하나님의 위로를 다른 지체에게 이야기해 줌으로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 1:10에 보면,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자신 있게 위로와 확신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건지셨고”, 현재에 “건지시리라”고 확신하며, 미래에 “건지시기를” 기대하는 건져짐의 확신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에 체험한 구원과 자비는 현재의 평안과 미래에 대한 확신의 근거가 됩니다. 바울의 이러한 위로와 확신은 지금 우리에게 증거가 되어 우리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두 번째 방법은, 지체된 자들의 기도의 후원을 통해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후 1:11은,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환난 당하는 지체들을 위한 기도후원을 통해 위로받게 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간구함으로 도울 때 하나님이 이후에라도 건지시리라는 소망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환난 당하는 다른 지체를 위한 우리의 기도와 간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돕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긴밀한 성도의 교제를 통해 서로의 환난과 고난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공동체적 예배와 모임은 서로의 환난을 알고 기도하는 모임인 것입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위로로 다른 지체들을 위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위로로 다른 지체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로 인한 모든 환난은 환난 당하는 다른 지체를 돕기 위한 것이므로 감사와 찬양으로 맞이하고, 그 위로로 다른 지체를 위로해야 합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건져짐을 받은 바울의 위로를 우리도 은혜 가운데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위로는 다른 지체에게 그 위로를 들고 가게 하여 그들을 향한 우리의 소망이 넘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경험한 위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소망도 견고하게 하여, 장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겪는 환난에서 건져지게 됨을 확신하게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경험한 하나님의 위로는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 간증되어지도록 주어진 것들입니다. 우리의 위로를 들고 환난 당하는 자들을 찾아 갈 성령의 강권함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예배 중이나 기도회, 남녀 전도회나 구역예배 등 모든 곳에서 우리가 받은 각종 위로들이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둘째로, 아름다운 교회는 모든 환난이 서로 나누어지며, 그 환난에서 위로 받은 자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위로와 공동체적 간구로 견고해지므로 환난이 고백되어지고, 그 환난을 위한 기도와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세상의 다양한 가치관에 우겨 쌈을 당하여 겪는 압력, 환난을 고백하며 위로 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양한 가치관의 세계 속에서 위로 받고 승리한 체험들은 공동체 속에서 서로 나누어져서 다른 지체의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위로받지 못하고, 환난 당하는 자를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환난이 얼마나 알려졌고, 기도요청을 받고 있고, 기도하고 있는가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숨쉬는 교회 공동체의 척도가 됩니다. 위로를 주고 함께 간구할 환난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겪는 고통, 고난, 물질의 손실, 인간관계의 아픔, 가정과 직장 환경의 비참함 등이 고백되어지고 간구되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당하는 환난과 고난은 회개함으로 돌이켜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의 마음, 손길, 물질, 행동,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고린도전서강해(15)/ 우리의 몸은 성령의 성전이다/ 고전6:12-20/ 정수환 목사/ 학운교회/ 2004-07-28
고린도전서강해(15)/ 우리의 몸은 성령의 성전이다 고전6:12-20 Ⅰ.내용 분해와 조직 1.머리말 - 고린도교회가 다툼과 분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2.본론 ①우리 몸은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 ㄱ.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a.우리에게나 그리스도께서 금하신 것 외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12) b.그러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12) c.나도 무슨 일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다(12) ㄴ.우리 몸은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a.음식은 배를 위해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이다(13) b.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실 것이다(13) c.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우리 몸을 보살피신다(13) ②예수와 한 몸이 되어야 할 우리 몸 ㄱ.예수의 지체인 몸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 a.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리셨으니, 그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실 것이다(14) b.너희 몸이 예수의 지체라는 걸 알지 못하는가?(15) c.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15) ㄴ.창녀가 아닌 예수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a.창녀와 결합하는 자는 그녀와 한 몸이 된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16) b.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자는 주와 한 영이 된다(17) ③우리의 몸은 성령의 성전 ㄱ.음행을 피해야 한다. a.사람이 짓는 모든 죄는 몸 밖에서 일어나지만(18) b.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이다(18) ㄴ.너희 몸이 성령의 성전인 것을 알아야 한다. a.너희 몸은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너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성전이라 는 것을 알아야 한다(19) b.하나님은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다. 그러므로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20) 3.맺는말 ①한 마디로 말해서, 고린도교회는 하나님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중심의 교회였다. ②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지 않고, 인간 자신의 육신적인 즐거움을 위하여 행했던 것이다. ③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주님의 성전이며 동시에 예수의 지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Ⅱ.내용 연구와 삶의 적용 1.우리의 몸 ①목적과 소속 ㄱ.목적 :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13) ㄴ.소속 : 예수의 지체다(15) ②중생과 변화 ㄱ.중생 : 하나님께서 그 권능으로 다시 살리셨다(14) ㄴ.변화 : 주님과 합하여 주님과 한 영(靈)이 된다(17) ③소유와 기능 ㄱ.소유 : 우리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다(19-20) ㄴ.기능 :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이다(19) ④주의 할 일 ㄱ.음식문제 a.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 : 예수께서 금하신 것 외에는 무엇이나 다 먹을 수 있다(12) b.모든 것이 다 유익하지 않다 : 하지만 그 중에는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을 것도 있다(12) c.쉽게 끊을 수 없는 것은 멀리해야 : 비록 허락된 것이라도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라면 그런 것들은 과감하게 거절해야 한다(12) ㄴ.음행문제 a.우리 몸은 예수의 지체다 : 우리 몸은 예수의 지체인 고로, 이 지체를 창녀의 지체로 만들면 안 된다(15) b.창녀와 결합하면 안 된다 : 창녀와 결합하는 자는 창녀와 한 몸이 되어 그 지체가 되는 것이다(16) c.음행은 자기 몸에 죄 짓는 것 :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2.삶의 적용 ①인간의 문제와 그 결과 ㄱ.인간의 몸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마치 자기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맘대로 함부로 사용하고 있다. ㄴ.심지어 창녀와 결합하여 음행하는 사례까지 있다. ㄷ.무엇이나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해서, 우리 몸에 해롭거나 쉽게 끊을 수 없는 것까지 취하고 있다. ②하나님의 치료와 섭리 ㄱ.주님을 살리신 그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셨다. ㄴ.우리를 값을 치르고 사셨다. ㄷ.우리 몸을 주의 성전 삼으시고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신다. ③인간의 응답과 실천 ㄱ.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몸을 거룩하게 사용해야 한다. ㄴ.우리는 주님의 지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과 합하여 주님과 한 영이 되어야 한다. ㄷ.우리 몸은 주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인 고로 음식도 가려서 먹어야 한다. 현대어 성경 12 우리에게나 그리스도께서 금하신 것 외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유익하지 않은 것이 종종 있으므로 비록 허락된 일일지라도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일이라면 거절할 것입니다. 13 먹는 문제를 예로 들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음식을 먹도록 식욕을 주시고 그것을 소화시키도록 위장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필요 이상으로 먹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먹는 것을 중요한 일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위장도 음식도 다 없애 버리실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적인 범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은 음행하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라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우리 몸을 보살펴 주십니다. 14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과 같은 능력으로 우리의 몸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려고 하십니다. 15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지체를 매춘부와 한 몸이 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6 만일 누가 매춘부와 한 몸이 된다면 매춘부는 그 사람의 일부가 되고 그 사람은 매춘부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왜 모른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이미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 그러니 만일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주께 바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18 성적인 범죄를 멀리하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몸에 영향을 미치는 죄는 달리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죄를 지을 때는 여러분 자신의 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성령의 집이며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신다는 것을 아직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20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비싼 대가를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사용하십시오. 여러분의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표준새번역 12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 13 d)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십니다. 14 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리셨으니 그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실 것입니다.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 그럴 수 없습니다. 16 창녀와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7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영이 됩니다. 18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사람은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그것을 여러분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20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고린도전서강해(29)/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재능과 은사/ 고전12:1-11/ 정수환 목사/ 학운교회/ 2004-10-20
고린도전서강해(29)/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재능과 은사 고전12:1-11 Ⅰ.내용 분해와 조직 1.머리말 ①형제들이여, 이제 성령께서 너희에게 주신 특별한 재능에 대해서 쓰려고 한다(1) ②너희가 행여나 잘못 생각하는 일이 있을까봐 염려스럽기 때문이다(1) 2.본론 ①같은 주님과 같은 성령 ㄱ.성령 받아야 예수는 주님이라 고백할 수 있다. a.너희가 아는 대로, 너희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말 못하는 우상이 끄는 대로 끌려 다녔다(2) b.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를 저주할 수 없고, 또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없다(3) ㄴ.우리는 같은 주님과 같은 성령을 섬긴다. a.은혜의 선물은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시다(4) b.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이나, 같은 주님을 섬긴다(5) c.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이나,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다(6) ②성령의 능력과 은사 ㄱ.성령은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능력을 주신다. a.성령은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 각 사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주신다(7) b.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식의 말씀을 주신다(8) c.성령은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신다(9) ㄴ.성령은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신다. a.어떤 사람에게는 기적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의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靈) 분별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통역의 능력을 주신다(10) b.이 모든 것은 같은 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이런 은혜의 선물을 나누어주신다(11) 3.맺는말 ①사람에 따라 받은 은사와 능력은 다양하지만,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신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 ②우리가 받은 은사와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과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Ⅱ.내용 연구와 삶의 적용 1.성령의 역사(役事)와 능력(能力) ①성령께서 하시는 사역 ㄱ.신앙고백 :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감동시킨다(3) ㄴ.저주금지 :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를 저주할 수 없다(3) ②성령께서 주시는 능력 ㄱ.목적 :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주신다(7) ㄴ.종류 : 각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주신다(4) ㄷ.방법 :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혜의 선물을 나누어주신다(11) ③성령이 주시는 은사들 ㄱ.지혜와 지식의 말씀(10) ㄴ.특별한 믿음과 병 고치는 능력(10) ㄷ.기적과 예언과 영 분별의 능력(10) ㄹ.방언의 능력과 통역의 능력(10) ④결론 ㄱ.다양한 은사, 같은 성령 : 은혜의 선물은 여러 가지 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시다(4) ㄴ.여러 가지 일, 같은 주님 :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이나, 같은 주님을 섬긴다(5) ㄷ.모든 일, 같은 하나님 :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다(6) 2.삶의 적용과 실천 ①인간의 문제와 그 결과 ㄱ.거짓된 영을 받은 까닭에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미워한다. ㄴ.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개인의 명예와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ㄷ.자신이 받은 은사만이 최고인 줄로 알고 자랑한다. ②하나님의 섭리와 치료 ㄱ.성령을 보내어 사람을 감동시킴으로써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게 하신다. ㄴ.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다양한 은사와 능력을 베풀어주신다. ③인간의 응답과 실천 ㄱ.성령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사용해야 한다. ㄴ.내가 받은 은사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와 능력도 귀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ㄷ.사람에 따라 그 받은 은사와 능력은 다양하지만, 그 모든 것을 주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현대어성경 1 형제들이여, 이제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특별한 재능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행여나 잘못 생각하는 일이 있을까봐 염려스럽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말 한마디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을 기억하겠지요? 3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은 자기가 하나님의 영에게서 받은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가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를 몰라 당황할 것입니다. 그렇거든 이 점을 잘 살피십시오. 하나님의 영을 받아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수 없고 또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특별한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한 성령에게서 온 것입니다. 5 하나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지만 우리는 다 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6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각기 여러 가지지만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 가운데서 또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분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7 성령께서는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 각 사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주십니다. 8 성령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현명한 조언자가 되는 재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연구하고 남을 가르치는 뛰어난 재능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9 성령께서는 또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나 10 어떤 사람에게는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을 하고 설교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말하고 있는가 어떤가를 분별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전혀 배운 일도 없는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언어지만 사람이 말하는 것을 통역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11 이렇게 같은 성령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각 사람에게 은사와 능력을 주십니다. 표준새번역 1 형제자매 여러분,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나는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2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은 이방 사람으로 있을 때에는, 이리저리 끄는 대로 말 못하는 우상 앞으로 끌려 다녔습니다. 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4 은혜의 선물은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같은 주님을 섬깁니다. 6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시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9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10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11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교통하시는 성령/창1:2
교통하시는 성령/창1:2 2002-09-13 10:13:37 read : 124 본문 : / 고후13:13 금번 제86회 교단 총회는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라는 주제로 총회장의 \"성령의 교통\"이라는 제목의 설교와 함께 개회되어 대체로 은혜 가운데 거행되었습니다. 우리 교단에 속한 교회는 앞으로 일년 동안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라는 주제 아래 신앙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주제를 생각하는 가운데 오늘 같이 문제가 많고 복잡 다단한 구조 가운데 살아가는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의 곳곳마다 진정한 성령의 교통이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이 주제를 생각하는 가운데 피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성령께서는 창조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타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1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웅장한 선언을 한 후 다음 말로 창조를 설명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2절).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의 \'하나님의 신\'이 바로 성령을 가리키고 있고, 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이 창조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않으셨음을 보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분이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원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을 쓰는지 모릅니다. 성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창조의 현장에 계셨음을 골로새서 1:17을 보면 알게 됩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창세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직접 말하지 않지만 골로새서에 오면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셨다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창조 전에 계셨던 분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창조사역에 같이 계셨던 분입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령도 천지 창조 사역에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성령이 지구에 교통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1.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생명은 탄생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창 1:2상), 성령은 거기에 관계를 하셨는데 다른 말로 하면 거기에 성령의 교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땅은 지구를 의미하는데, 최초의 지구 상태가 세 가지 특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천문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우리가 바라보는 은하계는 약 1천억 개 이상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계산할 수 없고 한계를 알 수 없을 만큼 상상 밖의 무한한 숫자입니다. 사실 하늘 위에 별이 얼마나 있는지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지구상의 식물과 나무들의 숫자를 세려는 어리석음과 같고, 우리의 머리카락 수를 세려는 어리석음과 같을 것입니다. 과연 이 우주는 끝이나 한계가 있는 것일까?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는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합니다. 여름 휴가 때에 공기가 맑은 시골에 가서 즐기는 것이 있습니다. 맑은 날 밤하늘을 보면 수많은 별들이 초롱초롱,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신비로움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로 내 머리 위에 떨어질 듯이 보입니다. 그 많은 별들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이 창조의 위대함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과학의 잣대로 어찌 잴 수 있겠습니까? 과학의 잣대가 하나님의 창조보다 어찌 더 클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은 감탄사뿐입니다. 창조의 끝에는 감탄사가 있을 뿐입니다. 과학으로나 학문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설명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창조를 느낄 수도 없습니다. 무인 우주선을 쏘거나 사람이 탄 우주선을 달나라에 보내어 찍어 온 달 표면 사진에는 아무 생명체도 없었습니다. 원자와 분자가 화학적으로 합성된 거대한 물체에 불과했습니다. 분화구 같은 것이 있었지만 생명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먼지만 쌓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최근에는 과학이 좀더 발달되어 탐사선을 화성, 목성까지 보내서 사진을 찍어 옵니다. 그러나 그 곳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빛과 물 같은 요소들이 있어야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창조 전 지구는 다른 모든 별들처럼 생명이 없었습니다. 물도 빛도 생명도 없는 하나의 거대한 물질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구의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혼돈이라는 말이 ‘공허’라는 말과 함께 있습니다. 영어로 formless, ‘형태가 없다’는 뜻입니다. 형태가 없기 때문에 질서가 없고 자연 물질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지구 최초의 모습은 지금의 달처럼 생명이 없이 물질만 있었습니다. 혼돈과 공허였습니다. 어두움만 있었습니다. 달나라를 상상해 보십시오. 밤이 되면 캄캄한 어두움이 달을 지배할 것입니다. 지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구도 생명이 없을 때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깔려 있는 하나의 물질이었다는 것입니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있는 달과 같은 지구에 ‘하나님의 신’이 찾아오셨습니다. 즉 성령님이 교통하셔서 지구를 감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을 히브리말로 ‘루하흐’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바람’입니다. ‘루하흐’에는 바람이라는 말 외에도 ‘숨, 호흡’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호흡이 공허하고 흑암이 있고 혼돈이 있는 지구를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고 하는데 ‘운행했다’라는 말의 의미는 ‘움직였다, 진동했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는 말은 영향력이나 기운을 물체 위에 내리쏟았다는 것입니다. 이 뜻을 조금 더 풀이해 보면 암탉이 계란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암탉은 계란을 그저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굴리고 있습니다. 어미 닭의 체온이 계란에 전달됩니다. 이제 어미 닭과 계란은 각각이 아닙니다. 따뜻한 어미 닭의 따뜻한 체온으로 계란과 하나가 됩니다. 암탉이 알을 품었다는 말은 암탉이 계란과 통했다, 교통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이 지구를 품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집어넣으십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어떻게 주어집니까? 생명 있는 것만이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부모를 본 일도 없이 외롭게 자랐기에 “나에게는 부모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에게 부모가 없는 것입니까? 없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를 낳아 준 부모가 있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돌에서 나오거나 굴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생명은 생명에게서만 태어납니다. 이 우주에 일 천 억 개의 별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생명이 있는 별은 오직 지구뿐입니다. 가까운 달이나 다른 별에는 왜 생명이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외계인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래에는 우주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한때 인기 있는 영화들의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어떤 위성에도 생명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물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성경의 ‘수면에 운행하다’라는 말에서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수많은 별들 중에 성령 하나님이 지구라는 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이 지구 주위를 운행하십니다. 이 말은 성령님이 지구와 통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지구와 관계를 갖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구와 교통이 잘 되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구를 하나의 계란이라고 생각해 볼 때, 어미 닭이 계란을 품고 있듯이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잉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고 엄청난 사실입니까?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수면에 교통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빛이 있으라”고 하실 때 지구 상에 생명체가 막 태어났습니다. 2. 성령의 교통은 죽은 것이 살게 합니다. 창세기는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접근 방법으로 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별에도 생명이 없지만 지구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성령을 받는 자마다, 성령의 교통이 있는 자마다 생명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도 성령의 생명의 영이 부활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안에도 생명의 영이 들어가면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며, 죽은 생각, 죽은 사상이 거듭나고 부활될 줄 믿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성령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며,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며, 기쁨이 있게 하시며,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살아 있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미온적인 이유는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성령이 들어오셔서 교통하셔야 우리가 삽니다. 우리가 생동합니다. 오늘의 세상은 온통 미움과 증오, 파괴와 보복의 악순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 권모와 술수, 속임과 거짓거리들이 세상을 밝고 명랑한 생명의 세계로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몰아내려 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왜입니까? 한 마디로 성령의 교통이 아니라 악령의 교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악령이 자리 잡으면 미움과 증오, 파괴와 보복의 심리만 생깁니다. 그러나 성령이 자리 잡으면 기쁨과 사랑, 생산과 축복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 각계 각층에, 세계 곳곳마다 성령의 교통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교통은 살리는 일, 생명을 불어넣는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창세기 1:2에 나타난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 차 있던 이 지구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생명력이 생기고 놀라운 창조의 역사가 생겼던 것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어 교통하시면 생명이 생기고 능력이 활발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교통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 분과 항상 교통하시면서 창조의 능력을 현실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힘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별것 있는가?”라며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립니다. 하나님도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영적 삶의 수준이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신앙은 아주 밑바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생명은 따분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와 감격, 기쁨, 확신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고난, 위기, 아픔, 어떤 실망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게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이제 여러분 가운데도 나타나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창세기 1:3절 말씀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여기에서 신비스러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성령이 운행하심으로 생명이 들어가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운행하시고 그 다음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능력과 기적과 감동이 없을 때는 우리 안에 성령이 교통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교통하실 때는 감동이 옵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이 운행하시고 그 다음에,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빛이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운행함, 성령의 교통함이 없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말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교통 없이는 다 구호뿐입니다
교통하시는 성령/창1:2
교통하시는 성령/창1:2 2002-04-06 15:30:57 read : 61 금번 제86회 교단 총회는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라는 주제로 총회장의 \"성령의 교통\"이라는 제목의 설교와 함께 개회되어 대체로 은혜 가운데 거행되었습니다. 우리 교단에 속한 교회는 앞으로 일년 동안 \"성령이여, 교통케 하소서\"라는 주제 아래 신앙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주제를 생각하는 가운데 오늘 같이 문제가 많고 복잡 다단한 구조 가운데 살아가는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의 곳곳마다 진정한 성령의 교통이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번 이 주제를 생각하는 가운데 피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경 창세기에 보면, 성령께서는 창조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타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1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웅장한 선언을 한 후 다음 말로 창조를 설명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2절).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의 \'하나님의 신\'이 바로 성령을 가리키고 있고, 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이 창조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않으셨음을 보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분이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원어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을 쓰는지 모릅니다. 성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창조의 현장에 계셨음을 골로새서 1:17을 보면 알게 됩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창세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직접 말하지 않지만 골로새서에 오면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셨다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창조 전에 계셨던 분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창조사역에 같이 계셨던 분입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뿐만 아니라 성령도 천지 창조 사역에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성령이 지구에 교통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1.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생명은 탄생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창 1:2상), 성령은 거기에 관계를 하셨는데 다른 말로 하면 거기에 성령의 교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땅은 지구를 의미하는데, 최초의 지구 상태가 세 가지 특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천문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우리가 바라보는 은하계는 약 1천억 개 이상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계산할 수 없고 한계를 알 수 없을 만큼 상상 밖의 무한한 숫자입니다. 사실 하늘 위에 별이 얼마나 있는지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지구상의 식물과 나무들의 숫자를 세려는 어리석음과 같고, 우리의 머리카락 수를 세려는 어리석음과 같을 것입니다. 과연 이 우주는 끝이나 한계가 있는 것일까?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는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합니다. 여름 휴가 때에 공기가 맑은 시골에 가서 즐기는 것이 있습니다. 맑은 날 밤하늘을 보면 수많은 별들이 초롱초롱,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신비로움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로 내 머?위에 떨어질 듯이 보입니다. 그 많은 별들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이 창조의 위대함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과학의 잣대로 어찌 잴 수 있겠습니까? 과학의 잣대가 하나님의 창조보다 어찌 더 클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은 감탄사뿐입니다. 창조의 끝에는 감탄사가 있을 뿐입니다. 과학으로나 학문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설명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창조를 느낄 수도 없습니다. 무인 우주선을 쏘거나 사람이 탄 우주선을 달나라에 보내어 찍어 온 달 표면 사진에는 아무 생명체도 없었습니다. 원자와 분자가 화학적으로 합성된 거대한 물체에 불과했습니다. 분화구 같은 것이 있었지만 생명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먼지만 쌓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최근에는 과학이 좀더 발달되어 탐사선을 화성, 목성까지 보내서 사진을 찍어 옵니다. 그러나 그 곳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빛과 물 같은 요소들이 있어야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창조 전 지구는 다른 모든 별들처럼 생명이 없었습니다. 물도 빛도 생명도 없는 하나의 거대한 물질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구의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혼돈이라는 말이 ‘공허’라는 말과 함께 있습니다. 영어로 formless, ‘형태가 없다’는 뜻입니다. 형태가 없기 때문에 질서가 없고 자연 물질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지구 최초의 모습은 지금의 달처럼 생명이 없이 물질만 있었습니다. 혼돈과 공허였습니다. 어두움만 있었습니다. 달나라를 상상해 보십시오. 밤이 되면 캄캄한 어두움이 달을 지배할 것입니다. 지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구도 생명이 없을 때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깔려 있는 하나의 물질이었다는 것입니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있는 달과 같은 지구에 ‘하나님의 신’이 찾아오셨습니다. 즉 성령님이 교통하셔서 지구를 감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을 히브리말로 ‘루하흐’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바람’입니다. ‘루하흐’에는 바람이라는 말 외에도 ‘숨, 호흡’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호흡이 공허하고 흑암이 있고 혼돈이 있는 지구를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고 하는데 ‘운행했다’라는 말의 의미는 ‘움직였다, 진동했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는 말은 영향력이나 기운을 물체 위에 내리쏟았다는 것입니다. 이 뜻을 조금 더 풀이해 보면 암탉이 계란을 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암탉은 계란을 그저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굴리고 있습니다. 어미 닭의 체온이 계란에 전달됩니다. 이제 어미 닭과 계란은 각각이 아닙니다. 따뜻한 어미 닭의 따뜻한 체온으로 계란과 하나가 됩니다. 암탉이 알을 품었다는 말은 암탉이 계란과 통했다, 교통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이 지구를 품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집어넣으십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어떻게 주어집니까? 생명 있는 것만이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부모를 본 일도 없이 외롭게 자랐기에 “나에게는 부모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에게 부모가 없는 것입니까? 없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를 낳아 준 부모가 있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돌에서 나오거나 굴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생명은 생명에게서만 태어납니다. 이 우주에 일 천 억 개의 별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생명이 있는 별은 오직 지구뿐입니다. 가까운 달이나 다른 별에는 왜 생명이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외계인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래에는 우주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한때 인기 있는 영화들의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어떤 위성에도 생명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물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성경의 ‘수면에 운행하다’라는 말에서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수많은 별들 중에 성령 하나님이 지구라는 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이 지구 주위를 운행하십니다. 이 말은 성령님이 지구와 통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지구와 관계를 갖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구와 교통이 잘 되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구를 하나의 계란이라고 생각해 볼 때, 어미 닭이 계란을 품고 있듯이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잉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고 엄청난 사실입니까?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수면에 교통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빛이 있으라”고 하실 때 지구 상에 생명체가 막 태어났습니다. 2. 성령의 교통은 죽은 것이 살게 합니다. 창세기는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접근 방법으로 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별에도 생명이 없지만 지구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성령을 받는 자마다, 성령의 교통이 있는 자마다 생명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도 성령의 생명의 영이 부활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안에도 생명의 영이 들어가면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며, 죽은 생각, 죽은 사상이 거듭나고 부활될 줄 믿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성령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며,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며, 기쁨이 있게 하시며,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살아 있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미온적인 이유는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성령이 들어오셔서 교통하셔야 우리가 삽니다. 우리가 생동합니다. 오늘의 세상은 온통 미움과 증오, 파괴와 보복의 악순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 권모와 술수, 속임과 거짓거리들이 세상을 밝고 명랑한 생명의 세계로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몰아내려 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왜입니까? 한 마디로 성령의 교통이 아니라 악령의 교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악령이 자리 잡으면 미움과 증오, 파괴와 보복의 심리만 생깁니다. 그러나 성령이 자리 잡으면 기쁨과 사랑, 생산과 축복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 각계 각층에, 세계 곳곳마다 성령의 교통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교통은 살리는 일, 생명을 불어넣는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창세기 1:2에 나타난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 차 있던 이 지구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생명력이 생기고 놀라운 창조의 역사가 생겼던 것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어 교통하시면 생명이 생기고 능력이 활발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교통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 분과 항상 교통하시면서 창조의 능력을 현실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힘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별것 있는가?”라며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립니다. 하나님도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영적 삶의 수준이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신앙은 아주 밑바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생명은 따분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와 감격, 기쁨, 확신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고난, 위기, 아픔, 어떤 실망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게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이제 여러분 가운데도 나타나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창세기 1:3절 말씀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여기에서 신비스러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는데, 성령이 운행하심으로 생명이 들어가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운행하시고 그 다음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능력과 기적과 감동이 없을 때는 우리 안에 성령이 교통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교통하실 때는 감동이 옵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이 운행하시고 그 다음에,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빛이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운행함, 성령의 교통함이 없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말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교통 없이는 다 구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