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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지 고향/ 히11:13-16/ 오창우 목사/ 한남제일교회/ 설날설교/ 2006-02-20
3가지 고향 히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명절은 고향이 생각이 나는 날입니다. 고향을 찾아가지는 않아도 고향이 그리운 날이 이 명절입니다. 이처럼 고향을 생각하고 찾기도 하는 것은 고향이라는 곳이 단순히 지명이 아닙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광주라고 하는 지명이 아닙니다. 고향이라는 곳은 역사고 숨결이 있습니다. 꿈이 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는 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신앙인의 고향은 어떠해야 되겠는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고향은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찾아가는 고향입니다. 오늘 같이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자기 고향을 찾아 가는 ‘귀성전쟁’ ‘민족대이동’이 있는데... 올해도 1,400만 명이 고향을 찾아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향을 가고 싶어도 못가는 북한실향민들도 있고 개발 때문에 고향이 없어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박용철시인의 ‘고향’이라는 시에 보면 ...고향은 찾아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데 ...마을 앞 시내도 예 자리 바뀌었을라 ...고향은 이제 찾아 무엇 하리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 생각 ... 옛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찾아감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이 고향을 찾는 이유는 3가지가 있습니다. 1. 귀소본능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들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귀소본능은 연어나 진돗개, 비둘기 같은 짐승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 같이 학교를 다니던 동창들이 그리워지고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들이 먹고 싶어지는 것이 다 귀소본능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향수병(home-sick)이 됩니다. 이런 육체적인 향수병이 있는 가하면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영적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2. 나그네 본능입니다. 어디론가 가고 싶은 욕망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떠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설과 같은 명절같이 쉬는 때에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3. 안식본능입니다. 쉬고 싶은 욕망입니다.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사는 삶의 고달픔을 고향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4. 영접본능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고향에 가면 내 부모나 형제가 반겨줄 것을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4가지 본능, 귀소본능, 나그네본능, 안식본능, 영접본능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자란 고향은 나의 본능을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구원사역을 시작하면서 고향을 찾아 갔습니다. 고향에 대한 본능도 있으셨겠지만 내 고향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도 전하고 병도 고쳐 주려고 가셨다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네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면서 오늘의 모습을 보지 않고 과거의 것, 나쁜 것을 기억해서 쫒아 내지 않습니까? 우리 삶속에서도 악습이 있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모르는 곳에는 진정한 의미의 고향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모하는 고향입니다. 하늘에 있는 고향으로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고향입니다. 16절을 큰 목소리로 같이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유치원에 있는 아이가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어요?” “그럼. 있지” “그럼 하늘나라가 좋은 곳이에요? 나쁜 곳이에요?” “좋은 곳이란다” “그럼 목사님이 하늘나라에 가보셨어요?” “아니 안 가봤는데“ “그럼 어떻게 아세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어요? 이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늘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간 사람 중에 한사람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단다.” 여러분 우리가 사모하는 고향, 죽어서 가는 고향 하늘나라임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아프리카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하던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은퇴를 하여 배를 타고 뉴욕 항구에 도착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을 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감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환영 인파는 미국의 유명한 비행사 린드버그가 단발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비행을 성공을 축하하는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은 옳은 것입니까? 선교사는 하나님께 섭섭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목숨을 걸고 한 평생을 복음을 전하는 일이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한 일보다 못합니까? 이때 하나님은 이 선교사 부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충성된 종아! 너무 속상해 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돌아 갈 고향에 돌아올 때는 린드버그가 환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 환영을 할 것이다. 그때는 너희를 환영하기 위하여 천군 천사가 나팔을 불고 먼 저 천국에 온 사람들이 마중을 나갈 것이며 내가 직접 너희들의 손을 잡고 환영할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고 있으라.󰡓 주를 위해 사는 것이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가 힘듭니다. 대우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를 위해 충성한 성도들에게 상을 주시고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고 주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주의 종들이 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어렸을때 저희 아버지께서 오늘 불러 주셨던 222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가정예배 때마다 이 찬송을 부르면 그렇게 좋더라구요. 여러분도 가정예배 드리시면서 이 찬송으로 은혜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넘치시기를 다시 한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인데요, 만들어 가는 고향입니다. 김상진의 노래가운데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다”라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을 주고 고향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창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도 이 땅에 진짜 고향을 만들어 가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갔던 것도 새로운 고향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금의환향은 없습니다. 나이 들면 고향에 돌아가 집짓고 편히 살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꿈은 하나님의 약속.....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빌립보다 3장 20절을 보게 되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다면, 아니 하늘의 본향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나라, 내 가정이 하나님 나라, 그리고 우리교회가, 이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진짜 고향입니다. 진짜 우리의 이상을 충동시켜줄 수 있는 그런 기쁨이 그 고향에 있어야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만들어 가야 하는 고향은 어떤 것입니까?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1)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창 나이에 실직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의논하여 시장에 조그만 야채가게를 내고 장사를 하는데 그런대로 장사가 됐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직장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상처가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실직자다! 나는 밀려난 실패자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초등학교 4학년짜리 딸아이가 가게에 찾아와 아빠에게 예쁜 봉투를 하나 건넸습니다. “이게 뭐니?” “아빠 나중에 보세요.” 궁금해진 아빠는 딸이 나간 후 그는 쪽지를 꺼내어 천천히 읽었습니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좋은 선물은 못해 드리지만 언제든지 쿠폰을 사용하시면 정성을 다해 드릴께요. 힘내세요. 정말 사랑해요. 아빠의 사랑하는 딸 올림” 그리고는 그 밑에 네모난 칸이 여러 개 그려져 있고, 그 안에는 각각 이렇게 쓰여 져 있었습니다. “10분짜리 안마쿠폰” “구두 닦는 쿠폰” “심부름하는 쿠폰” “노래해드리는 쿠폰” “뽀뽀해드리는 쿠폰...” 그리고 밑에 한 줄 더 붙여 놓았습니다. “이 쿠폰들은 딱 한번만 사용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기분 좋으면 두 번도 해 드릴께요” 그 아버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여보. 난 직장에서 쫓겨나는 순간 세상의 모든 걸 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주 부자였구려” 부부는 손을 꼭 잡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세상은 나를 실직자로 보고.. 나 역시 실패자라고 느끼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래도 내 딸들은 나를 아버지로.. 가장으로..... 본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한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로 이런 가정이 고향이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빨리 가보고 싶은 곳은 진짜 고향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이런 사람이 있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 중에서도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이 돈 떨어지고 친구들 다 떨어지고 흉년에 몸에 병까지 들자.. 아버지 생각하고 고향으로 가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묻지 않고 사랑으로 맞이합니다.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나를 품꾼으로 써 주시옵소서.” 그때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을 일으켜 세워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죄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잃어 버렸다가 다시 찾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더러운 옷을 다 벗기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신발을 주고 새 가락지를 끼우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면서 동네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이 아들은 잃어 버렸다고 다시 찾은 내 아들입니다.” 라고 이렇게 하는 그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은 차별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항상 얼마나 가졌는지, 못 가졌는지에 대해서 우리를 평가를 합니다. 성공이냐? 실패냐에 따라서 우리들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따라서 대우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교회마저도 성공한 교회, 실패한 교회에 대해서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신 분이십니다. 세상이 다 나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여도 하나님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지 않으시고 내 사랑하는 내 딸아, 내 아들아라고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간음하다 걸린 여인을 향해 세상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셨지만 예수님만은 비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인이라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나도 사랑해서 만드신 그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 가정 속에서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말을 하다가도 말이 안되면 “옛날에 네가 그랬잖아, 이랬잖아” 이래서 상처에 또 상처를 주는 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가정입니다. 과거의 상처만 들춰내는..... 여러분 그 상처를 들춰내지 않아도 그 상처를 받은 사람은 아픈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눈이, 여러분의 사랑이, 여러분의 입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뀌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을 사랑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딸로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난하고 못먹고 살면서 찬밥, 더운밥을 가리냐”는 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거지들도 더운밥이 맛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곳이 천국이고 그런 고향을 만들어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힘을 얻는 것입니다. 거지를 볼 때에도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 한센시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는 것도 사랑이 있었기에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런 환자에게는 손을 안대지만..... 사랑으로 보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병자로 보지 않으십니다. 눈먼자의 눈을 만지시며, 귀먼자의 귀를 만지시면서... 쫓겨나는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면서....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냥이 아니라 꽃을 주니까... 나를 여인으로 여겨 주셔서 감사! 거지의 손을 잡으며 돈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하니까... 나를 사람으로 대해 주셔서 감사! 했다고 합니다. 처음 사랑이 회복이 되는 곳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은 뭐라 해도... 남편을 남편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라. 아내를 아내로 인정하고 사랑하라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고 효도하라 자식을 인정하고 노엽게 하지말라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 어찌 아내뿐입니까? 강한 것 같은 남편들도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아내들도 친정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먹을 것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딸로 보니까... 아내라는 짐도, 어머니라는 짐도 다 벗어던지고.... 오직 딸로 보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딸로 사랑 받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서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교회와 가정을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서울에 사는 아들의 집을 찾아온 아버지가 아들의 하소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 한 귀퉁이 자투리땅에 동네사람들이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환경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경고문도 붙여 놓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음날 시장에 나가 호미를 사왔습니다. 그리고는 쓰레기를 버리고 돌을 골라내어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그 텃밭에 상추를 심고 고추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상추가 자라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이와 붓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상추가 필요하신 분은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고추가 필요하신 분은 양 것 가져가십시오」라고 크게 써놓았습니다. 상추가 파릇파릇하게 크기 무섭게 따가는 상추, 얼마나 동네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지....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당신이 언제가 저희 곁에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나.”라고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제산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함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예수님의 사랑은 나누어 주는 사랑입니다.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몸을 내 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속에 이런 예수님의 사랑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말만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는 곳이 우리가 만들어 갈 고향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에게 3년 동안 배웠지만 그들은 항상 예수님이 십자기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무엇했습니까?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이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이 안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실천은 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다 도망갔습니다. 언제 가능했습니까? 성령을 받으니까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성령을 달라고 기도를 한때 성령 하나님을 간구하게 되고 그 성령이 충만할 때 이 사람은 비로소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실현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된 교회는 빈부차를 문제 삼기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갔습니다. 우리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라구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양극화는 이조시대에 더 심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초대교회에는 더 했습니다. 지금은 신분에 자유가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양반과 천민, 상민이 있었습니다. 양극화가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도울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해결하려고 하면 영원히 문제는 안 풀립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세상적인 정치적인 논리로, 이념을 가지고 생각을 하게 되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다고 무시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자기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평준화하는 공산당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빈부격차를 인정을 합니다. 빈부차로 싸우지도 않고 투쟁도 하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은 단하나... 권위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를 지고 너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예수의 피로 맺여진 형제, 자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 안에서 우리의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서로를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희생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기도를 하십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하셔서 내 눈이 하나님의 눈이 되게 하시고 내 삶이 주님의 삶이 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 여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오늘 일가친척들을 만났고, 만나시기도 하실 것이잖아요? 여러분 좋은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세배하면 덕담 많이 하시잖아요. 칭찬들 많이 해주세요. “여태 넌 그러구 사냐?”이런 말하시지 마시구요. 만남이 있다는 말은 나눔이 있고 서로가 힘이 된다는 말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자매가 만나는 순간은 아이덴티티(Identity).. 동질성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으로.. ‘너와 나는 한 혈육이다!’ ‘하나의 뿌리다!’ ‘한 가족’ 이라는 동질성을 발견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힘이 생깁니다. 그렇죠?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고향사람이라면... 동지를 얻은 기분이 들잖아요! 하물며 형제자매는 더 하지요 만나면 힘이 될 수 있는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의 고향입니다. 반대로 만나면 싸우고 원수지고.... 힘을 빼는 공동체는 문제가 있습니다. 칭찬 폭격 남아프리카 잠비아의 북부 고원지대에 바벰바족의 특징은 범죄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싸움이 없는 평화주의자들이예요. 배워서도 부자라서도 아닙니다. 바벰바족은 어쩌다 죄 짓는 사람을 처리하는 방법이 기발합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정말 좋은 방법으로 해결을 한다는 말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마을 한복판에 있는 광장에 세웁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든 일을 중단하고 이곳에 모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죄인을 중심으로 둘러섭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일반적으로는 죄인들에게 정죄를 하고 비난을 하고 매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는 일... 사형까지도 합니다. 그러나 바벰바족은 전혀 다릅니다. 죄인을 둘러서서 마을 사람들이 외치는 말은 정죄나 비난하는 책망의 말이 아니라.... 칭찬입니다. 죄인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들을 떠 올리며... 그의 장점, 선행, 미담들이 하나씩 말을 합니다. 이 때, 과장이나 농담은 일체하지 못하고 아주 심각하고 진지하게 그를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이 법정은 검사도 없고 판사도 없습니다. 오직 변호사만 수백 명이 모인 법정입니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칭찬의 말이 바닥이 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한마디로 ‘칭찬 폭격’을 하는 것입니다. 칭찬 폭격은.. 죄를 짓고 위축되어 있는 사람을 회복시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이웃의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고 눈물로 다짐하게 만듭니다. 다 했다 싶으면 이 사람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축제를 엽니다. 죄인이 이제 새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하고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바벰바족 마을에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닙니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비난이나 정죄가 아니라 칭찬입니다. 이렇듯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좋은 점을 찾아 칭찬을 해 주는 것이야 말로 그 공동체와 구성원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프리카의 미개종족도 그렇게 사는데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안에 사는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정말 가고 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나라, 그런 고향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1.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가문 살리는 가정/ 고후5:17/ 설날가정예배설교/ 2012-01-22
가문 살리는 가정 고후5:17 서론 : 우리 가정과 가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1) 출20:4-5 우상숭배 하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귀신 섬기는 것이 (2) 고전10:20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과 교제 하는 것이요 귀신을 섬기는 것이기에 (3) 자녀의 도리로 조상을 섬긴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우상숭배 이다.(출20:4-5, 고전10:20) 2. 하나님께서는 왜 그토록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가? (1)사단에게 속아 사단의 종노릇하는 것이기 때문에(요8:44) (2)그것이 곧 귀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고전10:20) (3)날이 갈수록 영적으로 어려워지고 인생이 실패하기 때문에(출20:4-5 (4)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도록 창조하셨기에(창1:27-28 3. 그런데 왜 사람들은 우상 숭배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1)신분이 운명, 사주팔자에 매여서 (2)미래에 대한 불안함, 밀려올 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 (3)조상을 대접하는 효(孝)로 생각 (4)집안 대소사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5)인생을 살다가 심각한 문제 만나면 어디에도 마음 둘곳이 없기에, 그나마 위안을 삼는 4. 우상숭배 하지 않아도 되는 길(해결책)이 있습니다. - 오직 복음, 오직 그리스도 (1)개인과 가정, 가문의 모든 저주, 재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만나는 길, 죄 문제 해결하는 길, 사단의 세력 깨뜨리는 길 (2)그리스도 믿음으로 가정, 가족, 친척, 가문이 모두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이다.(고후5:17) (3)사랑하는 자녀에게 영적 대물림이 끊어지고, 후대가 살아나는 것이다.(출20:6 (4)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지역에 생명의 빛을 발하는 가정되는 것이다. (5)미래 살리며, 세계 살리는 전도자의 가정으로 응답 누리는 행복한 가정되는 것이다. 결론 : 우리의 온가족이 오직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해답임을 믿고 영접하여 하나님 된 축복 누리는 전도자의 가정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가정의 화목(和睦)/ 창9:20-29/ 설날설교/ 2007-02-15
가정의 화목(和睦) 창9:20-29 오늘은 설날입니다. 설날이면, 원근각처에 있던 모든 식구들이 모두 모이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정에 대해서 설교하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이라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미술가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을 그리기 위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어느 교회에 가서 목사님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신앙이라.’고 하면서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성도의 얼굴을 그리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고 보니 흡족한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새로 결혼한 부부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사랑’이라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의 얼굴을 그렸으나 거기에서도 만족을 못 느꼈습니다. 군인에게 묻자 ‘평화’라고 대답했고, 농부들의 추수하는 장면에서도 만족을 못 느꼈습니다. 화가는 실망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그의 어린 자녀들이 달려와서 아빠를 두 팔로 안고 반겨 주고 아내는 따뜻한 웃음으로 맞이합니다. 온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아 여행 중에 무사히 돌아온 아빠를 위하여 기도할 때 식구의 얼굴에 나타난 사랑과 신앙, 그리고 평화를 보고 거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은 세상의 최소한 단위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곳입니다. 세상에서는 말할 수 없이 고달프고 지친 상태에 있을지라도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하면 그의 생애는 언제나 새 용기와 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이 불화하고 행복하지 못하면 세상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명예와 부귀를 획득했을지라도 그는 불안, 고독, 초조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니나> <부활> 등, 불후의 명작을 쓴 유명한 소설가요, 또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으나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갔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내의 탓으로, 너무나 바가지를 긁어서 견디지 못한 톨스토이는 결국 82세 되던 해에 그 막대한 재산을 팽개치고 가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10일 후에는 어느 기차역에서 객사했습니다. 그는 죽어 가면서도 마지막 유언이 자기의 아내가 옆에 오지 못하도록 막아 달라는 간청이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서 검은 대륙의 성자 알버이트 슈바이처는 “자기가 유명해진 것은 일생동안을 함께 살며 내조해준 아내 헬레네 브라스라의 절대적인 공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가정의 화목은 이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화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느 분은 무엇보다도 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주택과 좋은 가구, 좋은 음식이 풍부할 때 화목이 넘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착각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고 가장 부자 나라였던 미국의 현실은 가정이 날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미국 전체 가정의 3분지 1의 부부가 이혼하고 많은 대부분의 자녀들이 다른 아버지나 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있고 800만 이상의 노인들이 혼자 삽니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과거보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잘 삽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 열한 번째 무역을 많은 하는 경제 강국이 되었습니다. 무역량의 변화추이를 보면 1967년에는 10억 달러, 1974년도 100억 달러, 1988년에는 1,000억 달러, 2005년에는 무려 5,000억 달러로 계속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 사회는 모두가 행복이 넘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부끄러운 일에 1등 국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출생률 저하 세계 1위, 교통사고 발생률 세계 1위, 사교육비 부담 세계 1위, 그리고 이혼율 세계 1위로 올라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이 많으면 가정도, 교회도 잘될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성실하게 자기 삶을 개척, 세계적인 ‘자동차 왕’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헨리 포드입니다. 포드는 거부가 된 다음에도 옛날 농사꾼의 아들로 뛰놀며 자란 농촌에서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집이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포드는 웃으며 “나는 아름다운 집을 짓기보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기 원하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의 방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장작으로 패서 불을 지펴라. 두 배로 따뜻해진다.’ 포드야 말로 참으로 인생의 진수(眞髓)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물질 만능 시대에서 우리 성도들은 가정을 화목하도록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가정의 화목을 이룰까? 노아의 가정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1. 가정의 화목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에 이루어집니다. 노아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산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창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탄식하실 정도로 세상은 모두 타락하고 죄악이 관영하며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의 욕심과 욕망대로 살 때라도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당시 사람들은 허랑 방탕하게 사는 것을 가장 큰 낙으로 아는 때에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120년 동안 거대한 방주를 지었다고 했으니 얼마나 많은 놀림과 비난을 받았겠습니까? 방주의 크기는 길이가 150 미터, 높이가 15 미터로 보통 4-5층 정도의 높이입니다. 어느 주석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크기가 화물 차량 522대의 용적과 맞먹는 크기로서 짐승이 125,000마리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동물의 종류는 17,600종인데 정한 동물 암수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 암수 한 쌍씩 계산하면 45,000마리인데 충분히 들어가고 노아의 식구와 식량 등을 넣을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방주를 120년 동안 잣나무를 베어다가 짓고 틈 사이에 역청을 칠하고 온갖 새와 짐승, 곤충을 잡아들이고 양식을 저장할 때 미친 영감이라는 욕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비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했다는 것은 대단합니다. 또한 노아도 위대하지만 그를 협력했던 그 부인이나 세 아들 내외들도 위대합니다. 그처럼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에 시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 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고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 큰 축복을 아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가정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 화목과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대의 의인 노아가 홍수가 끝난 후에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못할 때 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었고 대낮에 벌거벗고 자는 추태까지 벌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주석가들은 세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1)큰 사건의 후유증 탓인지 신앙의 해이와 나태에서 온 것이요, (2)자신에 대한 지나친 신뢰와 교만 탓이요, (3)육체적인 쾌락과 안일을 바라다가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완전한 정도로 단결되고 화목하던 가정이 금이 갈라지기 시작하여 세 형제가 갈라지게 되고 불행의 기운이 그 가정에 싹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얼마나 간사한 면이 많습니까? 여러분 생각에 하나님이 물질 축복을 주시면 신앙생활을 잘할 것 같지요?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성장 연구가들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국민 소득이 1천불 이하일 때에 교회가 급성장하고 2천불까지는 상당히 성장하지만 3천불 이상이 되면 성장이 멈추게 되고 서서히 성장률이 내려가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1990년대부터 한국 교회가 성장이 둔화된 것은 그런 현상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어렵고 괴로울 때, 단칸방에 살 때는 오직 사나 죽으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더니 건강해지고 사는 집도 마련하여 좀 살 만하면 점점 신앙이 해이하여 기도나 말씀을 읽는데 게을리 하고 충성의 짐도 하나 둘씩 벗어버립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라고 승용차를 주었더니 주일이면 야외로 놀러 나가기 바빠지니 문제가 아닙니까? 이것이 인간의 약점이요, 간사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울 때보다 좀 여유가 있을 때, 사업이 잘되어 점점 바빠질 때 더욱 기도, 더욱 성경, 더욱 성수주일, 더욱 충성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에게 더 큰 축복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책을 많이 저술한 유명한 안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서 경건과 기도, 사랑의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이 그 가문을 크게 축복하여 주시는데 그의 자녀 6명 중 5명이 목회자가 되고 손자 10명이 목사가 되고 13명이 선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금년에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가정이 되므로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화목과 복이 넘치는 가정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가정의 화목은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는 데 있습니다. 노아가 술에 만취하여 벌거벗은 채 누워서 자고 있을 때 함이라는 아들이 이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식구들은 누가 볼까 해서 재빨리 이불을 덮어 주는 것이 상정인데, 함이라는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평소 좋지 못한 감정을 가졌는지 밖에 나가서 두 형제에게 경멸과 조롱의 태도로 떠들기를 “아버지도 이제는 망령이 난가 봐. 우리 보고는 늘 경건하게 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시더니 술에 만취되셔서 벌거벗고 주무시다니, 남부끄러워서 이제는 고개도 못 들고 다니겠어.”라고 떠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이 사실을 듣자마자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벌거벗은 하체를 보지 않고 덮어 드렸던 것입니다. 노아가 술이 깬 후에 그 사실을 듣고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그러다가 함이라는 아들의 행한 일을 알고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너는 형들의 종들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자기의 허물을 감추어 주려고 애썼던 셈과 야벳은 크게 축복을 하였던 것입니다. 가정은 허물을 덮어 주는 곳입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대의 완전하다던 노아도 그런 허물을 들어냈습니다. 만약에 허물이 없다면 그는 인간적이지 못하여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적극적인 사람은 침착하지 못해서 허물이 많이 나타나지만, 침착한 사람은 꽉 막혀서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마 결혼한 사람은 자기 남편, 자기 아내에 대해서 불만의 요소가 많을 것입니다. 만약, 가정에서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의 허물을 계속 서로 들추어내려고만 한다면 견디지를 못하고 가출하여야 할 것입니다. 링컨은 대통령까지 한 사람이었으나 그는 가정에서는 불행한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 아내 매리도트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귀족학교 출신으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산골 출신인 링컨을 고치려고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요? 걸음 거리를 고치라, 옷을 바르게 입어라, 음식을 먹을 때 이렇게 하라고 잔소리를 했고, 나중에는 심지어 귀와 코가 못생겼다고 트집이요, 아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느니, 손발이 너무 크다고 트집을 잡습니다. 그러므로 링컨은 가정에 들어가기를 싫어서 공연히 일거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서로 비판하기에 바쁜 가정은 너무나 끔찍한 곳입니다. 그러나 지체부자유자가 있을지라도 늘 허물을 덮어 주고 감싸주는 가정은 화목이 넘치게 마련입니다. 이조시대에 유명한 분 중의 하나가 율곡 이이입니다. 율곡은 아주 훌륭한 인물인데 비해서 그의 아내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못된 모양입니다. 대부분의 아내는 자기 남편의 인격이 손상이 될 것 같아서 신경을 많이 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율곡의 부인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만 가면 이상하게 남편을 깎아 내리는 입버릇이 있고 품행도 단정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율곡선생의 선친의 제삿날을 당하여 많은 문중 어른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제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슬금슬금 집어먹는 것이었습니다. 문중의 선비들은 너무나 한심하고 기막힌 모습을 보다 못하여 율곡선생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좀 말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 때에 율곡선생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그냥 두십시다. 선친께서는 저 모자라는 며느리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셨는데 당신의 제사상에 오른 것을 집어 먹었다고 그를 책망하면 제사 받으시는 아버님 마음이 기쁘시겠습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위에 언급했던 톨스토이나 링컨보다 얼마나 큰 가슴을 가진 남편의 모습입니까? 가정은 이처럼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곳이기에 천국에 가까운 곳입니다. 그러나 서로 허물을 감싸지 못하면 그 가정은 지옥과 가까운 곳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의 가정은 언제나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허물도 덮어 줌으로 화목이 넘치는 가정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가정의 화목은 서로 축복할 때 이루어집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노아의 또 하나의 실책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자식인 함을 저주한 것입니다. 사실, 아들 함이 자기를 비난한 것을 발견하고 회개해어야 신앙적으로 옳은 자세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다가 한 때 방심한 나머지 술에 만취되어 벌건 대낮에 벌거벗고 누워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식구들 앞에서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단을 쌓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했어야 옳았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제가 큰 죄를 범했나이다. 이제부터는 옛날처럼 의롭게 살겠사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후, 자기의 부족한 아들 함의 잘못도 바로 자기의 탓인 줄 알고 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였어야 옳습니다. 아들만 자기의 허물을 덮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기도 덮어 주었어야 합니다. 아들을 불러다가 눈물로 타이른 후에 축복하였더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러나 노아는 아들 함을 저주에 가까이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정은 큰 불행의 씨를 심게 되고, 형제들 사이가 심한 반목으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부모가 자녀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고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였습니다. 잠언에도 자녀를 축복하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축복대로 되어졌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무능한 엘리 제사장이 축복함으로 한나가 아들을 잉태하는 축복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노아가 셈과 야벳을 축복한 대로 셈은 영적인 축복을, 야벳은 물질의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식구들은 서로 서로 축복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비록 남편이 실직 상태에 있을지라도 “내가 집중적으로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길을 축복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고, 아내가 무슨 일로 낙심할 때에 “여보, 염려하지 말구려. 당신이 그렇게 주님만 의지하고 사는 데 하나님이 반드시 더 좋은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라고 해보십시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녀들을 향해서 축복의 말을 자주 해줄 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부모들은 자녀들을 향해서 제멋대로 말하기를 잘합니다. 어느 엄마는 자녀가 듣고 있는 데서 말하기를 “저 아이는 낳지 않으려고 했는데 조절을 못해서 낳았다.”고 합니다. 혹은 딸이 여섯인 가정의 엄마가 하는 소리가 “아들을 낳으려고 하다 보니 딸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딸들은 개평짜리 인생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얼마나 섭섭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래도 그 말은 애교로 봐 줄 수가 있습니다. 예전의 엄마들은 너무나 살기가 힘들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지독한 욕을 잘했습니다. “저런 빌어먹을 놈” 혹은 “오그라질 놈”, “호랑이가 물어 갈 놈” 혹은 “사지를 찢어 죽일 놈”, “엠병 하다가 고꾸라질 놈” 등등 한이 없습니다. 그런 욕을 잘 들어보세요. 너무나 끔찍한 저주의 욕입니다. 안됩니다. 말로 떠든 대로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우리나라가 조선 시대나 일제시대. 육이오 사변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은 것은 다 그러한 욕들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축복의 말을 자주 심어 주십시오. “너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복된 자가 되어라.” “너는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 하면 그것이 씨가 되어 그 아이 속에서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영국 북부지방의 한 공원에 12사도의 이름을 붙인 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가룟 유다라는 이름을 붙인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을 향해 지나가는 사람마다 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뒤 얼마 안 가서 그 나무는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심을 때는 분명히 12그루를 심었는데 지금은 11그루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한낱 식물이라도 계속 저주하면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데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얼마나 축복과 저주에 영향을 받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축복하면 축복을 받는 날이 오고, 저주를 하면 저주를 받는 날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구끼리 부족한 것이 많을지라도 축복하십시오. 그러면 참으로 시인한 대로 이루어지는 날이 옵니다. ‘실화사전’에는 이런 귀한 예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남편이 이중 생활하는 것을 견디다 못해 목사님께 상담하러 온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살기가 등등한 얼굴로 와서 자기 남편에 대해 심한 욕을 마구 하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자매님의 말을 다 듣고 난 목사님은 “자매님이 남편을 그렇게 저주하시면 남편은 점점 강퍅해질 것 뿐 아니라 그것이 자매에게 나쁜 영향이 가져옵니다. 지금 자매님의 얼굴은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께서 돌아오는 것은 둘째로 하고 우선 자매님의 마음이 평안해지기 위해 남편을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자 자매님은 처음에는 펄쩍 뛰면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설득으로 남편에 대하여 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죽이고 싶던 남편에 대하여 증오심이 풀리고 불쌍히 여겨지고 자신에게 평안한 마음이 가슴속에 가득 찼습니다. 걸핏하면 신경질 내고 애들을 매질하던 손길이 다정스러운 사랑의 손길로 변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남편이 찾아 왔습니다. 전 같으면 냉대하던 부인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반가이 맞아주며 극진하게 대접하니 남편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집을 떠날 수 없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자매님은 더욱 열심을 내서 남편을 위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첩에 안부를 묻기도 하였습니다. 첩이 친구한테 전도를 받아 예수 믿게 되니 본집으로 돌려보내고 남편은 가정에 돌아와 충실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남편을 축복하고 첩을 축복하였더니 그 축복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 부모들은 이재부터 자녀들에게 격려의 말, 비전의 말, 축복의 말, 믿음의 말을 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남편과 아내에게도 늘 축복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금년에는 우리 모든 가정들이 하나님 중심의 가정, 서로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의 가정, 서로 축복하는 가정이 되심으로 가정의 화목과 복이 넘치는 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족의 의무/ 골3:18-21/ 설날설교/ 2011-02-03
가족의 의무 골3:18-21 가정은 두 남녀의 결혼으로 비롯되어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으로 구성되어집니다. 이렇게 시작되 가정을 행복하게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잘 감당하며 사랑으로 화합하여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에게 각자 주어진 의무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 서로가 노력해야 할 부분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1. 남편의 도리(엡5:28) 1) 아내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아내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배필로서 남편과 아내는 주종 관계가 아닌 서로 돕는 사랑의 관계여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남편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고 하였습니다. 아내에게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가부장적 권위에 사로잡힌 결과입니다. 아내를 이해하고 보살피며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사랑한다면 아내들도 스스로 남편의 권위를 세워 주며 따르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내를 연약한 그릇이요, 귀히 여길 자라고 하였습니다(벧전3:7). 아내로 인해 자손이 번성케 되며 가정의 화목이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에 대하여 순결을 지키고 아내로 더불어 족하게 여길 것이며 아내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돌보아야 합니다. 2) 가정을 인도하여야 합니다. 가정을 인도하여야 할 가장의 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경건한 가장은 자손들에게 복이 유업으로 이어지게 하였지만 제사장 엘리와 같은 가장은 자녀를 올바르게 양육하지 못하여 결국엔 저주의 가정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가장은 먼저 가정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시101:2). 가족 구성원의 가장 핵심인 가장이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온전한 모범이 될 때 가족들은 그를 신뢰하여 따르게 됩니다. 성경도 교회 감독의 자격 요건이 "집안을 다스리는 자"(딤전3:4,5)이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장은 외부로부터 가족을 보호하여야 하며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가장이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믿음직스럽게 자신의 의무를 잘 감당한다면 그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하에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아내의 도리(엡5:22-24) 1)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합니다. 아내는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남편을 돕는 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합니다. 남편을 사모하고 경외하며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 아내의 도리 입니다(참조, 고전7:3). 또한 자신의 머리 되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아내의 도리를 다하는 현숙한 여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한 것이며(잠31:10), 이러한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운다고 했습니다(잠14:1). 현숙한 아내는 남편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보필하며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 됩니다(잠12:4). 2) 자녀를 잘 양육하여야 합니다. 잉태하는 고통과 수고로 자식을 낳게 되는 어머니는 낳은 자녀를 잘 양육하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경건한 어머니에게서는 사무엘과 디모데 같은 훌륭한 자녀가 자라나지만 헤롯 와의 아내 헤로디아는 오히려 자녀에게 범죄를 종용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채찍과 꾸지람이 없는 자녀는 결국 그 어머니를 욕되게 합니다(잠29:15). 그러므로 어머니는 자녀를 운례하여야 하며(참조, 잠31:1) 경건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딤후1:5). 자녀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올바른 가르침은 평생 자녀의 삶의 척도가 됩니다. 흔히 말하기를 가정교육을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 가정 교육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여야 할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며 값진 것입니다. 3. 자녀의 도리(엡6:1-3) 1) 부모를 잘 공경하여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며 상급입니다. 부모에게 귀한 존재인 만큼 자녀 또한 부모를 잘 공경하여야 합니다. 부모님으로 인하여 태어났으며 양육되어 성장하게 되므로 자녀에게 있어 부모는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훈계를 잘 들어야 하는 부모의 훈계와 법은 자녀에게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며 목의 금사슬이라고 하였습니다(잠1:8,9). 또한 부모의 교훈은 등불과 빛이며 생명의 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며 순종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자이며 이는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장수하는 비결이 됩니다(신5:16). 부모를 잘 공경하는 자는 또한 그 자녀들 역시 본을 따라 자신을 잘 공경하게 됩니다. 올바른 부모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자들은 인격 형성과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매우 유익한 도움을 얻게 됩니다. 2)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야 합니다. 한 부모 아래 혈육이 된 형제들은 진한 사랑의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친구들과의 사아에서 느끼지 못하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형제간의 사랑은 남을 사랑 할 줄 아는 비결을 배우는 첫 단계인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쌓은 많은 추억과 공동 경험들은 서로를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도 형제 사랑을 명령하셨으며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벧후1:5-7)임을 잊지 말아하 합니다. 자신을 학대하였던 형들에게 사랑을 베푼 요셉과 버려진 동생 모세를 끝까지 따라가 지킨 누이 미리암 등 성경에도 형제 사랑으로 축복 받은 형제간의 이야기가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형제간의 사랑은 부모의 즐거움이 됩니다. 결론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잘 이행하는 것은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원동력이 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건전한 사회를 형성하는 주춧돌이 됩니다. 가정에서 쌓은 사랑의 경험은 사회를 밝게 하는 사랑을 실천 할 수 있게 됩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은 가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잘 순종하는 것이며 그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사회에 밝에 비추게 됩니다. 기도 가정을 축복하신 하나님, 저희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공경하며 우애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함으로 이웃으로부터 칭송받는 복된 가정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빛과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였다는 하나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가정이 되도록 지켜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개척자의 삶/ 정월명절 추모예배, 신자들만의 예배/ 수17:14-15/ 전형준 목사/ 설날추모예배설교/ 설날설교/ 2010-02-18
개척자의 삶/ 정월명절 추모예배, 신자들만의 예배 수17:14~15 1. 개척의 삶 오늘은 정월명절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당신이 걸어왔던 삶이 얼마나 만족합니까? 사람들은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지 못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더 많은 것에 대한 욕구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불평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불평하는 삶이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정신적, 영적인 유산에 대한 만족함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불만족하여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들 속에서 개척하는 사람이 되어 한 해를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함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큰 민족에 대한 약속, 창대한 이름, 복의 근원이 될 것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창 12:1~3).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의지하여 75세의 나이에 어려운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까지 그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수많은 세월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 때에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이미 정착해 있는 원주민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들은 불완전한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차지한 땅을 분배하는 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분을 분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셉 지파가 지분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여호수아에게 와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파에게 분명히 큰 축복을 주셔서 어느 지파보다 큰 지파가 되었는데 왜 땅을 분배하는데 있어서는 불공평하게 작은 비분은 주냐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당한 항의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누구도 땅의 지분에 대해서 불평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요셉지파에게 주어진 축복의 나머지 분복은 개척을 통한 소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요셉 지파에게 “스스로 개척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대신 그들이 개척자적인 태도를 가지고 적극적인 삶을 출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요셉지파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은 “넉넉하지도 못하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철병거를 갖추고 있다”고 불평합니다. 요셉지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불신앙”이었습니다. 3. 믿음의 개척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좋은 조건들을 많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부모님들에게서 좋은 유산들을 많이 물려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물줄기가 풍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혹시 근시안적인 눈으로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평하고 있는 한 우리는 나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평하려고 하는 우리들을 향해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씀합니다. 보무님을 탓할 것이 아닙니다. 물려받은 유산이 적다고 탓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셨습니다. 대신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개척자로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개척자로 출발하려고 하는 당신은 하나님께서 함께 싸우고 계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할 때 인간적인 계산을 해서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변 땅이 넉넉해 보이지 않아도, 주변 국가들이 철제 무기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불평하기보다는 찬송하면서 자신 있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커다란 장애물들이 놓여 있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출발하는 개척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니다.
거룩한 삶과 효도/ 레19:1-4/ 설날설교/ 2008-02-26
거룩한 삶과 효도 레19:1-4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개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습니다. 우선, 설날을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선조 때 학자 이수광 선생이 쓴 ‘여지승람(輿地勝覽)’이란 문헌에 설날이 ‘달도일’로 표기되었는데, ’달’은 슬프고 애달파 한다는 뜻이요, ’도’는 칼로 마음을 자르듯이 마음이 아프고 근심에 차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서러워서 설 추워서 추석’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추위와 가난 속에서 맞는 명절이라서 서러운지, 차례(茶禮)를 지내면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그렇게 서러웠는지는 확실치 않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설날은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 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설날을 ‘삼가다’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합니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입니다. 이러한 설날은 원일(元日) · 원단(元旦) · 정조(正朝) · 세수(歲首), 세초(歲初) · 세시(歲時)· 연두(年 頭) · 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립니다. 이와 같은 설은 우리 고유의 명절로서 지켜졌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만 고향을 찾고 부모님과 친척, 이웃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 날로서 지켜집니다. 이런 의미를 가진 설날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도들은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 즉 명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를 오늘 주신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가운데 “너희는 거룩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회중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해서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로서 오늘 성도들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오늘 우리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오세원 목사에게 말씀하시되 오목사 너는 대구칠곡교회의 온 교인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대구칠곡교회 교인인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거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카도쉬’로서 ‘구별되다’ ‘분리하다’란 뜻입니다. 모든 죄악된 것과 부정한 것으로부터 구별되어 분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 속성상 거룩하신 분으로 죄악 된 모든 것과는 본질적으로 분리된 절대 순결하신 분입니다. 출애굽기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사무엘상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신보다도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약 백성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부정으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정결법을 제정하셨고, 정결법 준수를 통해 외적 정결상태에서 내적이고 영적인 정결의 상태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거룩이란 단어가 신구약 통틀어서 447구절에나 사용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사용된 곳은 창세기2:3에 육일동안 창조하신 후 안식일을 허락하실 때 말씀하신 내용에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 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이것이 주일성수해야 할 이유입니다. 다른 날과 구별된 안식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도 다른 물건과는 구별된다고 해서 거룩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출애굽기13:2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장소도 일반 장소와 구별되기 때문에 거룩이라 표현했습니다. 여호수아5장15절에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기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22장31절에 보면 우리를 향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먹는 것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지니라” 세상 사람들은 아무 것이나 다 먹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목지 말라고 한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도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러주신 말씀을 보면 거룩한 모습, 즉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아야 할 내용을 크게 세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고, 둘째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고, 세 번째가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나름대로 잘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 바쁜 명절 속에서 예배당에 나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불신 가족은 집에 있거나 친척을 찾아다니고 있거나, 이웃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극장을 찾거나 놀이공원을 찾거나 젊은 아이들은 게임방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주일이기 때문에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일의 거룩함을 지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20장11절 후반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을 다른 날 보다 구별했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복된 날입니다. 우리는 안식하고 하나님은 특별히 예배를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나름대로 이 부분은 잘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의 날을 거룩히 지키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아침에 가족들이 예배를 드렸거나 아니면 예배를 마치고 가서 가정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세시 풍습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차례를 지내는 것입니다. 즉 제사지내는 일입니다. 온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지만 그것을 지내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사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불신자들이 행하는 제사를 지낸다면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날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거룩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즉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즉 거룩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첫 번째로 거룩함의 행위 중에 부모를 공경하는 부분에서 거룩함이 나타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부분에서 불신자들과 구별됩니까? 구별된 효도가 행해지고 있습니까?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부분들도 우리가 우상을 섬기지 않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처럼 차별성이 있는 효도가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불신자들의 효와도 구별될 정도의 효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명절을 정해놓고 효도하는 날로 지키고 있는 거기에 우리도 따라가고 있는 정도입니다. 우리도 역시 지금까지는 세상 사람들의 효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버이날도 세상 사람들이 함께 지키는 효의 날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은 분명하게 부모에 효도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에게 구별되게 잘 할 것을 명령해 놓았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10계명 가운데 보면 제5계명이 부모공경에 관한 계명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5계명은 인간과 관계되는 계명 중에는 으뜸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잘 지키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이 주어집니다.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입니다. 출애굽기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나님은 심지어 부모 같은 어른들을 공경하라고 하신 말씀이 레위기19:32 입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노인들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인은 마치 부모와 같은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말씀 가운데도 부모공경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명기5:16 “너는 네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예수님도 부모를 공경하는 데 상당한 비중을 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5:4-6에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드리고 나면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인간의 전통을 지킨다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엄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6:2-3에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당수하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는 부모를 잘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공경에 특별히 거룩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삶에서도 거룩해야 하지만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너희는 거룩하라”고 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 고 하셨습니다. 사실 경외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주로 사용하고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경외라는 단어도 무려 170구절이나 되었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경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부모를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경외’라는 단어는 원어로 보면 ‘야레’입니다. ‘야레’라는 단어는 여호와께만 사용하는 단어로써 두려움을 가지고 존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를 경외하라고 하는 것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특히 늙은 부모를 홀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임을 가장 먼저 드러내어야 할 곳은 가정이며, 가장 먼저 드러내어야 할 사람은 부모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인 성도는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신앙의 의무를 핑계로 부모를 등한시 하는 일은 없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일과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서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진정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야말로 이 땅에서 성도의 가장 근본 되는 의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친애하는 것과, 하나님을 친애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세상에서 신자와 불신자를 가장 큰 차별성을 갖게 해야 할 것이 효도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보세요. 공자가 가르친 유교에서의 교훈에도 보면 “효도는 덕의 근본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모공경을 거룩함으로 드러내라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교육 지침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랍비가 질문을 합니다. “자녀가 마땅히 부모에 대하여 가져야 할 공경이란 어떠한 것이뇨?” 그러면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합니다. “그것은 곧 부모님의 뜻을 거스리거나 부모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요, 또한 부모님의 말씀에 반박하거나 그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도 아니며, 살아계실 때는 물론이요 돌아가셨을 때도 부모님의 존함을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아니하고 대신 ‘제 부친, 제 모친’ 혹은 ‘어르신’으로 부르는 것이며, 또한 물질적으로 성심껏 보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혹시 부모님을 찾지 못했거나 찾을 계획조차도 없는 분 계십니까? 계획이 없었더라도 다시 계획을 세우십시오. 찾으십시오. 물질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얼굴을 보기만 해도 됩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분들은 집안 어른들, 지금까지 소홀히 했던 집안 어른들을 찾아보십시오. 당신이 예수 믿는다고 싫어하신 분들일 수록 더욱 찾으십시오. 다른 집안 식구들조차도 잘 찾아보지 않는 집안 어른이 계신다면 그런 어른을 우선적으로 찾아가십시오. 그것이 거룩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다른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확실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엡6:1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함부로 거역해서는 안됩니다. 세대차이의 말이라고, 생각이라고 무시해버리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십시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잠언23:25에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내게 물려준 재산이 없고 도움이 되는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도 나를 낳아준 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서라도 부모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룻기1:16-17에 보면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고백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보세요. 시어머니 나오미에게는 재산도 없습니다. 집도 없습니다.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반겨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룻이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효도였습니다. 오늘날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으면 모시지도 않습니다. 아니 재산이 있어도 그 재산만 탐내지 부모님을 모시려고 하지 않는 세상 풍속도라고 하면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재물이 없더라도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외에도 여러분이 효도하는 방법을 강구하십시오. 찾아가지 못한 분들은 편지를 쓰든지, 전화 걸든지,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것 드리십시오. 돈을 좋아하시면 돈을 드리십시오. 얼굴을 보기를 원하시면 얼굴을 보여드리십시오. 그리고 혹시라도 부모님의 가슴에 박힌 못이 있다면 그것을 빼어드리세요. 가슴에 못박아 놓고 다른 것을 아무리 잘 해드려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원주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에 가면 효도십계명이 있습니다. 1. 신앙을 갖도록 해드린다. 2. 대답을 잘하고 말씀을 잘 들어 드린다. 3. 표정을 밝게 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다. 4. 궁금증을 풀어드린다. 5.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용돈을 드린다. 6. 향토적인 음식을 해드린다. 7.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 드린다. 8. 일거리를 찾아 드린다. 9. 친구를 자주 만나게 해 드린다. 10. 등을 긁어 드리고, 손․발톱을 깍아 드린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신앙을 가진 자들이 부모에게 효도를 잘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거룩성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들이 있음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욕을 얻어먹거나 집안 식구들 가운데 불신자들로부터 믿음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는 성도 한분이 상담을 했는데 제일 속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목사님의 딸이 맏며느리인데도 혼자 사시는 시어님을 모시고 가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자기도 믿지만 자기는 이 집안에 들어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한 가지 사실만으로, 내가 남편을 만났고 아내를 만난 사실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히 구별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함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격랑 속의 신앙/ 사51:9-11,15-16, 엡1:17-21, 막4:35-41/ 박종화 목사/ 설날설교/ 2008-02-23
격랑 속의 신앙 사51:9-11,15-16, 엡1:17-21, 막4:35-41 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힘으로 무장하십시오, 주님의 팔이여! 오래 전 옛날처럼 깨어나십시오! 라합을 토막 내시고 용을 찌르시던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 바다와 깊고 넓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의 깊은 곳을 길로 만드셔서, 속량받은 사람들을 건너가게 하신, 바로 그 팔이 아니십니까? 주님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입니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입니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바다에 물결을 일으키고, 거친 파도를 일으키는 하나님이니, 나의 이름은 만군의 주다. 내가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맡기고, 나의 손 그늘에 너를 숨겨 준다. 나는 하늘을 폈으며, 땅의 기초를 놓았고, 시온에게 \'너는 나의 백성\' 이라고 말하였다.\" 아멘. 서신서의 말씀: 에베소서 1:17~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름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마가복음서 4:35~41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 갔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아멘 --------------------------------------------------------------- 오늘은 정월초하루입니다. 두 번째 맞는 신년인데, 금년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축복을 받으시려면 오늘 마가복음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고 갈릴리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중입니다. 때는 예수께서 하루 종일 제자들과 함께 모여서 전도하시고, 설교하시고, 기적도 베푸시고 난 후 저녁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오가는 배를 타고 제자들과 가는 길입니다. 저녁이지만, 일을 마치고 쉬러 가는 때가 아닙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저녁이 되면 쉬지만, 유대적 사고방식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 되면 하루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천지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 쉬심에 따라서, 실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하나님이 쉬시는 이레 되는 날에 시작되는 것에 근거합니다. 즉, 하나님이 쉬시는 시간, 하나님과 함께 쉬는 시간, 하나님과 호흡하는 시간은 일상생활에서는 저녁입니다. 하루가 시작되는 저녁 무렵에 배를 타고 건너갑니다. 그런데 깊은 밤에 항해를 가다가 풍랑이 생겼습니다.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고 격랑이 생겼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와 제자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전지전능하신 그 분과 함께 탄 배가 하루를 시작하는 날에 격랑에 휩쓸렸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오늘의 교회를 깊은 대양에 배 한척이 떠가는 그림으로 상징화시켰습니다. 이 세상을 대양으로 보고, 한 척의 배는 교회이자, 예수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비유했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그 뱃속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식구들과 교회와 이웃과 함께 타고 있는 공동체가 예수와 함께 타고 있는 모습니다. 배 안의 예수는 배 뒷머리에 계시면서 풍랑이 이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잠을 자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 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함께하는 첫 시간부터 고요하지 않습니다. 격랑 속에 헤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순풍에 돛 단 것처럼 가는 것이 예수 믿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를 믿든지 아니든지 격랑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비를 내려 주시는데, 악인에게도 내려 주시고, 선인에게도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햇빛을 내려 주십니다. 미안하지만, 우리 삶은 똑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아들이 배 안에 주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 밖에 없습니다. 위기라고 느끼시면 주무시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깨우십시오. 깨우지 않고 주무시면 배는 격랑에 흔들립니다. 깨워서 그 분으로 하여금 ‘바다야 잠잠하라, 바람아 잠잠하라’고 명령하게 하십시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함께 계시다는 믿음, 깨울 수 있는 결단을 가지고 있으면, 격랑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그 믿음이 없으면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격랑이 일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프고, 암에 걸려 죽고, 매맞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런 일들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단, 우리 아픔 속에 예수께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깨우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믈으셨더니 제자들이 그때야 깨닫습니다. 예수께서는 ‘배타기 전에 5천명을 먹이고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도 뫘으면서, 막상 배가 흔들리니 왜 나를 찾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또한 왜 기도할 때 나 혼자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느냐, 왜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탄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느냐고 제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내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기도할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반드시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혼자 축복받겠다고 기도하는 것은 안됩니다. 배 자체가 잠잠해지고 안전해져야 내가 사는 것이지, 배가 뒤집힌다면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어느 노총각이 새벽기도마다 열심히 와서 좋은 배필을 달라고 시끄럽게 기도하는 바람에 교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불러다가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일러주셨답니다. 그랬더니 그 노총각이 기도제목을 바꾸어서 하나님께 자신의 부모님께 훌륭한 맏며느리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더랍니다. 내 아내는 내 부모님의 며느리, 내 남편은 내 부모님의 사위입니다. 따라서 사실 모든 기도는 공동체를 끌어안는 기도가 됩니다. 내가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겠다고 하면 나도 살고 함께 삽니다. 예수께서 뒤편에 주무시면서 우리와 운명을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날이 새서 하루가 시작되면 우리는 여러 격랑과 풍랑을 만날 수 밖에 없는데, 예수가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함께 살자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은 지 몇 년에 되었든지 간에 이 시간 함께 고백해 봅시다. 오랫동안 믿었더라도 우리끼리 산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고, 짧게 믿었어도 주님께서 주무시더라도 우리의 삶 속에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것을 믿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상상하고 다스릴 수 있는 방식을 뛰어 넘어 살아계십니다. 제가 책 한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책은 유럽의 신세대와 정치인의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저자는 유럽의 기독교민주당원으로 교회의 장로이십니다.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신세대가 “정치가 부패되었는데, 정당 앞에 왜 기독교 \'C\' 자를 붙입니까. C (기독교) 글자를 빼면 제가 당에 투표하겠습니다”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비판 같습니다. 저자인 가이슬러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알프스 산의 산봉우리 몽블랑은 4800 미터입니다. 지금까지 등산가가 가장 높이 오른 기록은 4000 미터이고 800 미터는 여전히 못 오르고 있습니다. 못 올랐다고 해서 그 산봉우리를 폭파시킬까요? 아니면 그냥 둘까요? 몽블랑은 올라간데 까지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르지 못했지만, 실재하는 높이까지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C자대로 기독교 정신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C자마저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그것은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입니다.” 제가 이 솔직한 답변을 읽으면서 이런 정치인들이 있으면 그 나라는 잘 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핸드폰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핸드폰이 가진 기능의 100분의 1도 다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핸드폰 기능을 발전시키는 경쟁이 붙었습니다. 쓰는 기능을 빼고 나머지는 없애버린다면 핸드폰에 대한 기술적 신뢰성을 떨어져버립니다. 안 쓰고 못 쓰는 것은 내 한계이지만, 기술은 훨씬 발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동차의 속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누구도 속도를 다 활용하지는 못하지만, 자동차 속도는 계속 좋게 만듭니다. 인간이 다 쓸 수 없어도 계속 높게 만드는 이유는 신뢰도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음악, 그림도 세상에 존재하지는 않으나 존재하고 싶은 것, 생각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하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인간 삶 속에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고, 밟을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것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만든 것만 가지고 역사를 판단하고 비판하면 우리는 동물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재하느냐 안하느냐만 중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지만, 내가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무한대의 가치들이 있습니다. 이 가치들을 준수하는 사람만이 위대한 사람이고 도덕적으로 현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만질 수 있는 것도, 내가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맘대로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무신론은 이 세상 사람들이 믿는 신은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신을 만들어 놓고 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는 하나님이 좋아서 자기 형상대로 우리를 만들어 놓고, 우리와 격랑 속에서도 기쁨이나 슬픔, 좌절 속에서도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을 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신은 초월적 신이기는 하지만, 인간되신 하나님은 아닙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격랑 속에 함께 가시는 인간되신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단, 잠을 자고 계시므로 깨우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한계에 머물지 말고 뛰어넘는 무한대의 도전, 벤쳐를 해 보라고 하십니다. 기술적, 과학적으로는 도전하면서 왜 정신적, 윤리적으로는 하지 않으십니까. 이사야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왜 깨워야 하느냐면, 바다와 깊고 넓은 곳을 길로 만드셔서 속량받은 사람들을 건너가게 하신 바로 그 분의 팔이 여러분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홍해를 건너게 했던 기적의 역사를 이스라엘에게 상기시키는 내용입니다. 애굽백성이 쫓아올 때 바다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선 “나는 그대들을 나의 이미지대로 창조하여 나의 백성으로 삼았으니,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증거로 예수를 인간의 몸을 입게 하여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께서는 “나를 깨워라, 신을 깨워라, 하늘을 두드려라, 사람이 생각한 것만 가지지 말고, 형상을 닮은 신을 깨워보아라 그러면 나도 인간의 모습으로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일 년 내내 신을 깨우는 삶을 삽시다. 1919년 3‧1운동으로 시작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 분노와 좌절, 마음의 격랑이 오죽했겠습니까. 1921년 한 처녀 지도자가 오늘의 마가복음 말씀을 읽고 민족을 아픔을 끌어안고서 ‘캄캄한 밤, 격랑이 일어납니다, 주님 함께 하옵소서. 너무 캄캄합니다. 당신은 왜 주무십니까. 일어나십시오.’라는 내용의 시를 읊었습니다. 24년 후에 이 분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김활란 여사입니다. 기도 후에 이 분이 불렀던 찬송을 부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식민지 생활 후에 바다를 건넜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고비에서 격랑은 있게 마련입니다. 단, 격랑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면, 그 분은 잠잠하라, 나도 함께 있노라고 분명히 답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하나님이 생각하신 그 때에 답을 주실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능력입니다. 오늘 격랑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인간의 가장 심각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주무시지만, 얼마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최대의 격랑이 닥쳐옵니다. 바로 십자가라 이름하는 죽음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격랑 속에서 항상 계셨지만, 예수의 격랑 속에서 제자들은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지만, 인간들은 세례받고 나서도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도망갔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신뢰성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항상 함께 있는 사람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라고 확신하십니다. 하나님은 형상대로 창조 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임마누엘 하십니다. 좋은 때나 나쁜 때나 함께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격랑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최고의 격랑, 누구에게도 피할 수 없는 격랑은 죽음이라는 격랑입니다. 죽음이라는 격랑 앞에서 누구를 깨우시겠습니까. 제가 장례식에서 느끼는 것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같이 죽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같이 죽는다는 말은 불가능합니다. 이 최고의 격랑을 눈앞에 두고 은혜를 받는 말씀은 같이 죽어 줄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는 방식으로 함께 죽습니다. 예수는 “나와 함께 죽으면,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못 찔려 죽을 수 있는 사람, 몸으로, 영으로 함께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이는 하나님의 임마누엘의 증거입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죽어주시고 최악의 죽음을 뛰어넘어 부활이라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도 함께 살아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과 그 분의 아들 예수가 감사합니다. 그 분 안에서 살아가는 격랑의 인생이 즐겁습니다. 올 한 해 그 분이 함께 살아주시겠답니다. 그 분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높은 가치, 숭고한 가치는 우리가 이론적으로, 직접 그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임마누엘하시겠다는 그 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단순하지만, 깊은 신앙의 표현입니다. “나를 격랑 속에서 깨우라, 항상 함께 있겠다.”
고향 가는 길/ 히11:13-16/ 설날주일설교/ 2003-02-17
고향 가는 길 히11:13-16 1. 연어의 일생 동물이나 어류 가운데 귀소본능(歸巢本能)을 가진 것들이 있습니다. 코끼리는 죽을 때를 알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제가 몇 년 전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연어가 돌아오는 계곡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제 다리만한 연어들이 있었습니다. 연어의 일생을 보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벌써 입맛을 다시는 분이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양양 남대천이나 삼척의 오십천, 울진의 왕피천이 연어가 회귀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화한 연어새끼들은 쿠릴열도를 거쳐 알래스카 부근까지 간다고 합니다. 약 3년 정도 바다에서 자라면 큰 것은 약 1미터 정도나 됩니다. 그러나 연어는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알을 낳고 죽습니다. 이것이 연어의 일생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도 연어의 일생과 흡사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민족의 대 이동 민족 고유의 명절 설날이 다가왔습니다. 벌써 많은 분들이 귀성길에 올랐습니다. 올 설 연휴 기간에 약 3천 4백만 명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떠난다고 합니다.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향 가는 길이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먼저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표를 구하기 위해 날밤을 새워야 합니다. 표를 구하지 못하면 몇 배의 돈을 주고 암표를 삽니다. 자가용을 이용해서 내려가도 평상시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립니다. 자칫 잘못하면 사고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매년 명절에 고향을 찾았다가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백 명이 넘습니다. 죽거나 다치는 사람은 수천 명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기를 쓰고 고향을 찾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향에는 자기 존재의 모습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어졌던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을 만나 지난날의 정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고향이라고 말합니다. 3. 영적 실향민 그러나 고향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아픔도 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고,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실향의 아픔은 처절합니다. 그 망향의 한을 달래 기위해 임진각을 찾아 눈물을 흘립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육신이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것은 가슴 아프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훨씬 더 불행한 것은 영적인 고향이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실향민보다 영적 실향민은 더욱 비참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4. 말씀 속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표준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보면 그 뜻이 선명해 집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네가 본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5. 믿음의 사람들 여기서 “이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정든 고향을 떠났습니다. “너는 너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일평생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약속 받았습니다.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 네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 땅을 너와 네 후손들에게 주겠다.” 참으로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약속이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의 자손이 당대에 번성하지도 못했습니다. 남들처럼 많은 땅을 차지하지도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 사래의 무덤과 자기가 죽어서 묻힐 무덤도 사야하는 처지였습니다. 이쯤 되면 후회를 할만도 합니다. 괜히 하나님 말씀 쫒아왔다가 패가망신 했다고 억울해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음만 먹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비록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지만 오직 믿음으로 올곧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6. 본향을 갈망한 사람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16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쫒아 나그네의 삶을 사는 가운데 놀라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믿음의 삶은 땅에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즉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땅의 장막은 초라하고, 묻힐 곳조차 없는 인생이지만 자기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본향을 갈망했습니다. 비록 나그네로서의 많은 아픔과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보다 더 좋은 곳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7. 우리가 갈망하는 본향은 어떤 곳입니까? ▶16절 끝을 보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을 걸어간 자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은 25:34을 보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 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2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에서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5:1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고 했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고 했습니다. 위 말씀들에는 우리가 사모하는 고향의 특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본향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위하여 창조 때에 이미 예비하신 곳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곳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쇠하여지고 낡아집니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천국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언제나 새집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거룩한 곳입니다. 거룩한 세마포를 입고 주님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거룩한 주의 백성들만이 갈 수 있는 잔치 자리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곳입니다. 이 땅의 육신의 장막 집은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곳은 죄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질병도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도 없습니다. 영원한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곳입니다. 할렐루야! 8. 그러면 누가 이 좋은 곳에 갈 수 있습니까? (1) 첫째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입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세상의 지식이나 돈이나 힘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교회학교에서 부른 찬양이 생각납니다. ♬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 천국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분의 종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도, 자유도, 재산도, 가정도, 심지어 자식도 다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이 고백을 가지고 사는 자는 천국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자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양을 하고, 지식을 쌓고, 선행을 베풀어도 그것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뿐입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목을 쳐서 피를 뿌림으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으셨습니다. 옆구리에는 창을 받으셨습니다. 마지막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셨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배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 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받습니다. (2) 둘째로, 천국은 믿음의 길을 걷는 자만이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길은 나그네 길입니다. 그것은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길을 걸으려면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들어가야 합니다. 쌓아두는 삶이 아니라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찌르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말이 아니라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양보해야 하고, 손해를 보며, 희생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그 길은 평탄하고 넓은 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길을 포기하고 세상길로 달려갑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가도 세상의 유혹에 넘어집니다. 믿음의 길은 이 세상의 거짓과 부조리,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에 역행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고난의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때로는 바보와 같고 손해 보는 인생인 것 같지만 결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은 천국이 보장된 길입니다.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축복의 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집보다 아름다운 집이 예비 되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비록 나그네와 같은 생활이지만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시편 84편 1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으니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지 가족 여러분! 이땅의 삶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 길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오늘 우리의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질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일단 죽으면 대부분은 영안실로 실려갑니다. 집에 있어도 3일, 길어야 5일입니다.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들이 사모해야 할 것은 영원한 본향, 천국입니다. 땅에 있는 것에 너무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으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십시오. 그곳은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걷는 자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축복입니다. 어떤 환란이나 핍박이 와도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고, 오직 믿음의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천국을 유업으로 상속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기 두 사람의 죽음이 있습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으로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고통 속에서 소리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예리하게 파헤쳤던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습니다. 그는 입원한지 한 달 만에 육신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그때 한 독자가 신문사에 이런 기사를 투고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도 비그리스도인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다른 한 분의 아름다운 죽음이 있습니다. 한신대 학장을 역임하시고, 1981년 돌아가신 고 김정준 목사님입니다. 생전에 김 목사님은 이렇게 유언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량없도다>라는 찬송을 끝까지 불러주시오. 요한계시록 20장 이하를 끝까지 읽어주시오. 그리고 나의 묘비에는 임마누엘이라는 단 한 마디만을 새겨 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임종 직전에 지어놓은, <내가 죽는 날>이라는 시 한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가 죽는 날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다. 그것은 나의 죽음을 상징하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는 감격의 눈물이기 까닭에.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안에 안긴 그 얼굴의 광채를 보여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어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라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사랑하는 성지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는 고향 가는 길에 서 있습니다. 육신의 고향은 잠시입니다. 우리들이 사모해야 할 본향은 천국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영적 실향민이 되지 않도록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날마다 입술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본향에서 기쁨의 면류관을 던지며 영생복락을 누리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주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아주시고,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설날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우리들이 영원히 갈망해야 할 본향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영적 실향민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주의 말씀에 힘입어 정녕 믿음으로 내일을 바라보게 하시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원한 나라에 능히 이르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향 가는 길/ 히11:13-16/ 설날주일설교/ 2015-02-12
고향 가는 길 히11:13-16 설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급한 귀성객들은 벌써 고향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아직은 길이 붐비지 않지만 이제 공식적인 설 연휴가 시작되면 전국의 도로는 귀성 인파로 북새통이 될 겁니다. 항상 그렇듯이 귀성길은 고생길입니다. 그 고생이 하도 심해서 귀성전쟁이란 표현까지 씁니다. 그래도 고향 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한결같이 환합니다. 그만큼 고향은 좋은 것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명절이 되도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향민입니다. 남북이 분단된 우리나라의 경우 얼마나 많은 실향민들이 있습니까?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명절 때가 되면 그 고통이 심해져 하다못해 임진각에 가서라도, 혹은 금강산에 가서라도 아픈 마음을 달래야 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한번은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탈북한 청년인데 얼마나 고향이 그리운지 한 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엉엉 울 때가 많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참 이상합니다. 거기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 목숨 걸고 탈출했는데, 여전히 그곳을 그토록 그리워하다니! 이게 바로 인간의 심성에 아로새겨진 귀소본능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 고향 외에 또 하나의 고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고향도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고향’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16절 보면 ‘더 나은 본향’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는 땅 위의 고향도 있지만 동시에 하늘 위의 고향도 있다는 것입니다. 땅 위의 고향은 육신의 고향이고, 하늘의 고향은 영혼의 고향입니다. 흔히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불행한 사람은 이 땅의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좋은 고향’ 천국을 잃어버린 ‘영적인 실향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의 고향은 언젠가는 떠나야 하고, 또한 사라지고 말 겁니다. 오직 하늘나라만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고향보다 하늘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 불쌍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영혼의 고향을 갖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행복한 인생인 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여러분 중에 몇 분이라도 아직 영혼의 고향을 발견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꼭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영적인 실향민이 아니라, 영혼의 고향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복된 인생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더 좋은 고향을 가진 사람들 : 믿음의 사람들 잘 아시는 대로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 장(章)이라 부릅니다. 여기 보면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등장합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 이들은 하늘나라를 영원한 고향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13절의 ‘이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물론 그들 모두가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천국에 있는 더 좋은 고향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다가, 그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혹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상관없다는 듯 무관심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불멸입니다. 죽음 너머 내세로 들어가 영원히 존재합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내세가 한 군데가 아니고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아주 쉽게 생각합니다. 증명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이유로 무심하게 넘겨 버립니다. 물론 인간의 지각에 한계가 있으므로 증명하기도 어렵고, 쉽게 믿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원한 운명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둔다면 그렇게 쉽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천국을 증거 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곰곰이 생각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신뢰할 만하다 싶으면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죠. 여러분도 잘 아시는 마르코 폴로(이탈리아의 상인, 여행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3~14세기 사람인데, 당시 유럽인들은 동양에 대해 전혀 무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몽골, 중국 등을 무려 20년 이상 여행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17년간 거주하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했습니다. 그 체험담을 기록한 것이 유명한 「동방견문록」입니다.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신기한 이야기 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진실성에 의문을 가졌고 합당한 호응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늙어 임종이 가까워지자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중 몇이 호기심을 갖고 묻습니다. 그 책에 있는 내용이 정말 사실이냐 이겁니다. 혹시 상상으로 쓴 픽션이 아니냐는 겁니다. 죽기 전에 진실을 밝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르코 폴로는 답답한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닐세. 내가 책에 쓴 것은 전부 진실일세. 오히려 그 내용은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의 절반도 안 되지.”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보고 경험하지 못한 것은 없다고 착각합니다.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우리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은 우주만물 가운데 눈곱만큼도 안 됩니다. 그 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존재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이 보고 겪은 것을 듣고 믿음으로써 그 존재를 받아들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 그곳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천국에 계시다가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와서 천국을 증거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 증언을 믿고 목숨 바쳐 증거 했습니다. 그만큼 확실하다는 겁니다. 특히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천국의 광경을 본 후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말하자면 ‘천국견문록’인 셈입니다. 그 중에 천국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계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2:1~5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 말씀은 천국의 몇 천 만 분의 일도 안 되는 내용일 겁니다. 그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직접 가보지 않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지만 목격자, 경험자의 증언이 있기에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부디 더 좋은 고향 천국을 믿음으로 소유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에게도 천국 복음을 증거 하여 함께 더 좋은 고향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 더 좋은 고향으로 가는 유일한 길 : 예수 그리스도 지상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돌아가는 길도 있고 샛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3절 보면 구약의 족장들도 그 길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갔음을 증거 합니다. “ ...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 ”그 약속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족장들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여기서 ‘나의 때’는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구원 등을 가리킵니다. 즉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오셔서 천하 만민에게 복을 줄 것을 믿었습니다. 비록 희미하게 바라보았으나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그는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 후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서도 그분이 유일한 길 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제자들이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예감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근심하지 말라며 하신 말씀입니다.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아버지 집’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그곳에 예비할 처소는 천국의 거주지를 의미합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곧 예수님 자신이라는 겁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헬라어 원문을 보면 ‘길’이란 단어 앞에 유일성을 나타내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그리고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냐 이겁니다. 다른 길도 있을 수 있다고 우깁니다. 다수가 그러니까 그런 말들이 옳은 듯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다수결이 무조건 옳은 줄 압니다. 만장일치는 마치 절대 진리처럼 신봉합니다. 그거야말로 착각입니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소수가 지지해도 진리를 항상 진리입니다. 성경에 보면 만장일치로 망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이 바로 그겁니다. 당시 사람들이 일치단결해서 성을 쌓고 높은 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악한 마음을 보시고 바벨탑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언어도 혼잡해집니다. 사람들이 일치해서 주장해도 진리가 아닌 것은 무너지게 됩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누가 뭐래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길로 가야 합니다.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어도 오직 예수 신앙으로 더 좋은 고향 천국에 들어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더 좋은 고향을 향한 인생 여정 : 천국 사모하는 나그네 인생 우리에게 천국 고향이 있고, 언제라도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일정 기간 살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수명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인생 여정을 걸어가게 됩니다. 행선지는 물론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상 생애는 천국을 향한 나그네 인생인 것입니다. (1)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 믿음의 족장들이 보여준 인생의 모델이 바로 나그네 인생입니다. 본래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그것을 떠난 가나안 땅으로 간 아브라함은 계속 이동하는 유목민의 삶을 살아갑니다. 가나안 땅은 타향이요 객지입니다. 가나안 땅에 와서도 묘지로 구입한 막벨라 굴 외에는 땅 한 평도 갖지 못했습니다. 행7:5에서 이를 증거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 ” 이처럼 족장들에게 현실적으로 땅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장막 생활입니다. 히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와 같은 장막 생활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히11:10에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하나님이 정말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가나안 땅도 아니고, 이 세상의 부와 축복도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오게 한 것부터가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영원한 도성,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은 이 세상에 정착하지 않고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13절~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그런데 본향 천국을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16절. “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 ” 여기서 ‘사모하다’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 말은 성경 원어 헬라어로 ‘오레고’인데, ‘(~을 얻으려고) 손을 내뻗다’ ‘열망하다’ 등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을 향해 열망한 나머지 마음을 세상에 두지 않고 천국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3:2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 ” 어제 뉴스 앵커가 귀성길을 소개하면서 이런 멘트를 하더군요. “귀성객들의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습니다!” 바로 이게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의 인생 모습입니다. (2) 나그네 인생 여정에 지킬 사항 :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 나그네 인생 여정이 아름답고 복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1) 거룩한 삶 나그네는 이 세상 소속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인데 ‘구별되다’ ‘분별되다’ ‘다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라는 겁니다. 무조건 다르게 살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살라는 것이죠. 말하자면 세상의 사악한 풍조에 물들지 말라는 겁니다. 물고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짠 바닷물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물고기는 그 짠 물에 절여지지 않고 오히려 그 가운데서 산소와 양분을 섭취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물고기는 짠 바닷물에 절여집니다. 천국을 향한 나그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얻었기에 세상의 죄악을 이기며 살아야 합니다. 벧전2:11-12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겁니다. 또 벧전4:2~3 말씀을 보십시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죄 가운데 사는 것은 예수 믿기 전 지난 때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마5:13~1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죄악 세상 속에서 우리가 착한 행실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등 족장들은 그들의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창23:6 보면, 헷 족속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가리켜 ‘하나님의 방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 단순한 삶 나그네는 여행자입니다. 지혜로운 여행자는 짐을 최대한 줄입니다. 짐이 많으면 여행의 즐거움이 반감됩니다. 간수하느라 신경도 쓰이고 여행의 재미를 놓치기 일쑤입니다.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소유에 대해 너무 집착하면 세상 근심으로 괴로워지고, 천국 가는 길에 방해를 받습니다. 롯의 처를 아시죠? 그는 소돔성이 유황불 심판을 받을 때 천사의 지시로 황급하게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중도에 소금 기둥이 되어버립니다. 왜 그가 자꾸 뒤를 돌아보았습니까? 두고 온 짐이 많아서 그런 거죠. 재물도 있고, 향락도 있고 ... 여러분, 세상에는 정말 우리를 마취시키는 게 너무 너무 많습니다. 부귀와 영화, 향락 등 ... 자칫 잘못하면 이런 데 빠져 정신을 못 차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버리는 연습, 떠나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생활의 군살 빼기, 마음의 욕심을 버리는 심령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천국의 기쁨과 평안이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면 환경과 관계없이 기뻐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바울이 말했던 자족의 비결입니다. 빌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3) 인내하는 삶 나그네는 또한 외국인입니다. 요즘도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외국인을 학대하는 일이 흔했고, 외국인은 대개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신분 보장도 되지 않아 노예보다 나을 게 없었습니다. 그 외에도 별도의 세금이 부과되고, 식당에서 따로 앉히는 일도 있었고, 심한 경우 낙인을 찍어 놓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불편함과 조롱을 감수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이므로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대우받고, 여기서 편안한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기쁨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핍박 등이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아마 천국 가는 그날까지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고 천국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최선의 삶 나그네 인생은 지나가는 삶입니다. 아주 짧습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선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 시간, 건강, 재능 등은 우리의 인생 여정 중에 최선을 다해 선용해야 됩니다. 그 중에 어느 것도 갖고 갈 수 없습니다. 가지고 간다 해도 그런 것들은 천국에서 쓸 데 없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최고는 천국의 최저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 있을 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선한 목적을 위해 선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한 부자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고민이 됐습니다. 재물이 많은데 갖고 갈 수 없으니 속이 상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조금만이라도 갖고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천사가 나타나 안 된다고 통보합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계속 졸라대듯이 기도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다시 나타납니다. 하도 졸라서 허락을 하기는 하는데, 여행 가방 한 개만 갖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감지덕지해서 그는 가장 큰 가방을 구합니다. 그리고 가방 속을 순금 금고로 가득 채웁니다. 임종을 앞두고 침상 곁에 그것을 잘 두고 누워 있다가 마침내 죽었습니다. 천국 문에 이르렀는데, 베드로가 정문에서 제지합니다. 가방을 갖고 들어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확인해 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하고 나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확인됐소. 하지만 뭐가 들었는지 짐 검사를 해봐야겠소.” 가방을 열어본 베드로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흔해 빠진 보도블록을 무겁게 왜 갖고 왔소?” 물론 지어낸 이야기겠죠.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갖고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갖고 간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 동안 최선을 다해 선용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마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더 좋은 고향을 소유하셨습니까? 더 좋은 고향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이 세상 살 동안 나그네 인생길에 때때로 고난이 찾아오지만 인내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죄악 세상 살지만 거룩하게, 단순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주신 사명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그네 인생을 승리하고 더 좋은 고향 천국에 당당하게 들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고향 가는 사람들/ 히11:13-16/ 설날설교/ 2009-01-23
고향 가는 사람들 히11:13-16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인구의 약 절반 정도가 고향을 떠나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명절만 되면 고향을 가는 사람들로 교통전쟁을 치루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지지리도 살기 어려워서 떠난 그 고향, 이런 저런 이유로 떠나온 고향을 다시 그리워하고, 그 길이 고생길이고 시간과 비용을 상당히 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갑니다. 고향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입니다. 고향에는 나의 시작이 있고 뿌리가 있습니다. 고향에는 나의 정취와 추억이 있고 나의 혈육이 있습니다. 고향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나 밖에 가질 수 없습니다. 고향은 사고 팔수도 없고 옮길 수도 없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본능에 가깝게 고향을 그리워하고 또 고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 가는 사람들은 들떠 있습니다. 고향가는 길이 고달파도 고생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향 마을에 내리게 되면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정감과 안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향 집에서 반가이 맞아주는 부모님과 가족들 고향 사람들로 인하여 마음은 천국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되어집니다. 그래서 고향은 마치 아버지의 넓은 가슴과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본향(고향)이라고 하는 이 ‘파트리스’라고 하는 단어는 ‘파테르’(father)라고 하는 아버지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향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본향은 고향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고향이 두개 있음을 알려 줍니다. 하나는 ‘나온 바 고향’이고 또 하나는 ‘더 나은 고향’입니다. 이는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믿음의 조상들을 일컫습니다. 이 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육신의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나은 고향을 향하여 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이 교회시대에 성도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또한 성도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출생한 사람들,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가 된다는 것은 죽음으로 시작이 되고 떠남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떠나지 않은 상태는 아직도 거듭나지 않은 상태요 아직도 온전한 출발을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마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사도바울은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안에 사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다윗이 말한 대로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 한 곳, 죄 가운데 자라며 거하였던 이 육체의 고향을 떠나서, 평강과 희락과 의의 영원한 고향으로 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로 기쁨으로 살아 갑니다. 고향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기쁨과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확신에 찬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중요한 메시지 하나가 있다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빌3:1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18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그 숱한 환난과 핍박가운데서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들에게 다가오는 고향 때문이었습니다. 늘 여러분에게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탄식하며 슬퍼하십니까? 지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고 앞으로도 숱한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내 생명을 잃게 되는 위험가운데 직면하게 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할 수 있습니까? 평안히 기쁨으로 우리 조상들처럼 그렇게 인생의 못박석위를 걸으며 사자들의 위험과 불의 위험을 맞이 할 수 있습니까? 고향가는 사람은 그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고향을 빼앗을 수 없듯이 이 기쁨을 빼앗을 수 없는 것이지요. 둘째로 나그네로 살아 갑니다. 11:13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장막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지방에 장막을 치든지 저들은 외국인이었고, 누가 봐도 나그네였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고향을 가는 사람은 고향에 도착하기까지 그 지점이 어디라고 할지라도 나그네입니다. 이방인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이 있어도 아무리 화려한 집이 있어도 거기에서 이 사람은 나그네입니다. 또 실제로 본인들로 그렇게 생각하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되 여유가 있고 관용이 있고 또 이 세상에 참된 빛과 소금이 되고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 나그네 정신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땅이 전부요 이것이 내 고향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아부어야 하고, 여기서 손해보면 안되고, 여기서 물러서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외국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하던 하지 않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증명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수많은 땅을 차지하고 대궐같은 집을 짓고 호위호식을 하며 누리며 살던 사람도 마치 객처럼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다 지나고 지금으로 불과 150년 전만 올라가도 그 이전에 사람이 아직도 이 땅에 주인처럼 자기 땅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 조차도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말들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머물다가 모든 것 그대로 다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셋째로 인내하며 살아 갑니다. 오늘 본문에 히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간혹 어떤 분들 가운데서는 고향을 가다가 너무나 길이 막히고 힘들어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차안에서 밤을 새우면서도 고생길을 돌파하여 고향으로 향하는 것을 보게 되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출발은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을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또 그러한 기회들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부터 술도 끝고 담배도 끊었습니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어느 시점에 가서 자꾸 직장이나 가족 모임에서 술담배를 해야 하는 상황들이 생깁니다. 또 그로인해서 불이익도 당하게 됩니다. 마치 외국인과 나그네가 괄시와 천대와 왕따를 당하듯이 말입니다. 그때에는 그냥 이전으로 돌아갈까하는 마음이 들때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꼭 이길을 가야 하나...실제로 그렇게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고향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고향을 집념하며 가게 될까요?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여러 가지 나름대로의 추억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다녀오면 마음의 안정과 쉼과 새 힘을 충전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향에 가는 사람들의 가장 크고 중한 이유는 그곳에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이 맞이해 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고향 찾는 발걸음의 기쁨이요, 그렇게 고생길을 감수하며 나아가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것이 믿음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살지만 기쁨 가운데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이유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 숱한 환경가운데서도 흔들림없이 오히려 기쁨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이유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이 세상을 실제로 떠나는 그날에도 기뻐하며 평안가운데 떠나며 다시 보자고 여유있는 미소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그 고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눅15장의 탕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타향에서 돈잃고 몸 버리고 거지가 되어 죽게 되었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하였던 진로는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고향을 가기로 결심을 한 것은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의 집과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풍족함이 넘치고, 그 아버지께서는 비록 나같은 탕아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자기를 그래도 맞이해 주리라는 그 소망이 그 기대가 그를 고향을 향하게 했습니다. 고향가는 길이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입니다. 고향이 가까워지고 고향집이 가까워질 수록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가 고향 땅에 이르러고 고향집이 그 눈에 들어왔을 때, 그의 고향을 향한 고향 아버지를 향한 모든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먼저 보고 달려나와 그를 안아주고 반가이 맞아 주었습니다. 누더기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새 신을 신겨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류로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지난 시절 모든 고생과 아픔과 배고픔과 설움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이는 고향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이요, 우리가 거할 고향집의 모습입니다. 계7:14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21:4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저 천국에 이를때까지 이 믿음 굳게 잡고 기쁨으로 찬송하며 인내하며 담대히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향(故鄕) 가는 길/ 눅15:11-24/ 설날설교/ 2010-02-17
고향(故鄕) 가는 길 눅15:11-24 할렐루야!!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은총과 축복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오늘이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인 설날입니다. 이 명절에는 무엇보다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서 그동안 헤어져서 살던 부모님들과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이번 설날에도 우리나라의 인구가 약 3분지2에 해당되는 3천만 명 이상이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왜 이런 고생을 하면서 고향을 찾아야만 합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고향에는 그리운 얼굴들이 있고 기다려 주는 부모님이 있고 어릴 때 뛰어 놀든 향수와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올해도 고향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북한에다가 고향을 두고 남하한 사람들은 고향을 가지 못한 설음에 북녘 땅이 바라보이는 임진강변에서 고향을 향하여 눈물짓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성경에는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구약에서의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① 창세기 31장에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만에 자기 집 고향을 찾아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②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을 나와서 모세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③ 룻기 1장에서는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사를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나오미만이 살아서 며느리 룻을 데리고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을 찾아오는 모습이 있습니다. ④ 에스라서 1-3장에서는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유다 민족이 70년 만에 해방이 되어서 돌아오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로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 동안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에서 풀려나 해방이 되어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였습니다. 둘째로, 신약에서의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① 눅2;1-7절 말씀에는 예수님의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가 당시의 총독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에 따라서 호적을 하러 고향 베들레헴에 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②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의 말씀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가 만신창이의 몸을 이끌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탕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③ 누가복음 24장13절 이하의 말씀에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 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순종을 잘하고 집안일을 잘 하는가 하면 둘째아들은 형과는 반대로 일도 잘 하지 않고 아버지의 속을 썩이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나눠달라고 합니다. 즉 아버지가 죽은 후에 받을 수 있는 유산을 미리 달라는 것입니다. 대대로 가업으로 이어오든 목축업이나 농사일보다는 멀리 도시로 가서 대대적으로 사업을 하여 돈을 벌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퍽 진보적이며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은 재산을 처분하여 돈을 가지고 외지로 나갔습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집을 떠나 왔지만 모든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돈은 자꾸만 줄어들어서 마침내는 바닥이 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서 전국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뒤늦게 후회를 해 보아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탕자에게 훌륭한 점이 있다는 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고향 아버지 집에는 풍성한 생활 속에서 아무 걱정도 없이 풍요함을 누리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 것입니다. 늦었다고 하면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도전한 것이 그에게 아주 훌륭한 생각입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을 때에 그는 자기의 기대치 보다 몇 십배 몇 백배의 축복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탕자의 비유는 환상을 좇아서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실패하고 돌아오는 패배자의 귀향을 보여줍니다. 실패를 하였던 성공을 하였던 고향은 아버지의 품처럼 모든 것을 포용해 주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곳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오늘의 성경 말씀과 같이 고향을 떠났다가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1. 고향이란 무엇입니까? (창47:29-30)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이 말씀을 보면 야곱은 그의 아들 요셉을 따라 애굽에 가서 살다가 죽을 때에 그 아들 요셉에게 유언하기를 애굽에 장사하지 말고 고향 가나안 땅 선영에 장사하라 하였습니다. 야곱의 일생 147년 동안에 애급에 가서 사는 17년 동안의 생활이 가장 영화로운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어서는 고향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또 요셉도 그가 죽을 때에 유언하기를 언젠가는 우리 민족이 애급 땅에서 나갈 텐데 그때에 나의 해골을 가져다가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창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그래서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요셉의 해골을 취하여 가지고 나갔습니다. (출13: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주전597년 이스라엘 나라는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바벨론 그발강 가에서 그들은 고향을 그리면서 버드나무 가지에 거문고를 걸어놓고 망향가를 부르면서 슬피 노래한 역사를 시편137편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이렇게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입니까? 고향에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이 계시고 그리고 가족과 친척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향은 자랄 때에 뛰어 놀든 정든 산천이 있고 자신의 탯줄을 묻은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향에서는 모든 여건과 환경이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히 고향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고향은 아버지의 집과 같은 곳입니다. (1) 아버지의 집은 항상 먹을 것이 풍성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는 “다시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결심을 굳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중에 돈이 떨어지고 기근이 들어서 굶주리니까 비로소 아버지 집의 풍성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떡 한 쪽의 소중함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탕자가 배고픔의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아버지께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진가를 모릅니다. (2) 아버지의 집은 항상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나간 아들은 항상 불안과 초조와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니 자신뿐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즐거워하였고 아버지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3) 아버지의 집은 항상 용서가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아버지가 자기를 용서해 준다거나 아니면 아들로서 받아준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배고파 죽게 되었을 때에 자기의 집에서 배불리 먹는 품꾼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와서도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저 아들이 돌아온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명하여 새 옷을 입히라고 하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는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하여서 아들의 명분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탕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며 온갖 죄를 짓다가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니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3. 고향을 떠난 아들은 얼마 가지 못하여 곧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졌습니다. 목자를 떠난 양이 길을 잃어버리고 온 밤을 헤매는 것처럼 집을 나간 아들은 곧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들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곧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약4:8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4. 집을 나간 아들은 배고픔의 고통 중에서 아버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에 이 탕자가 배고픔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그 아들은 영영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 이와 같은 고난이 있었기에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시119:67절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71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5. 아버지는 날마다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나간 날부터 아버지는 날마다 문 열어 놓고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아무리 효도를 하는 자식이라고 해도 부모의 심정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밤마다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달려 나갑니다. 아무도 그 거지가 이집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어도 아버지는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다른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아버지는 달려가서 목을 끌어 않고 입을 맞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리 인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돌아올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기쁨으로 영접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자여 영원하신 우리의 고향이 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6.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여 주고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만약에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집 나간 자식”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자식” 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지 못하고 굶어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자살을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염체 불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니까 지난날의 모든 죄와 허물은 용서를 받고 또 아들의 명분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본래 죄의 종들이요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로마서 6:17절 말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설날 명절을 맞이하여 영원한 우리의 고향인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야할 고향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예비해 두신 영원한 본향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보이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세상이요 우리는 나그네와 같이 잠시만 머물다가 가야할 인생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영생의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이 하늘나라가 없다면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승천하실 때에 반드시 본대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데리러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날을 맞이하여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대 이동을 하는 이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가야 할 영원한 본향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이 세상에 머물 동안 주의 일에 더욱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성을 다하여 주님 앞에 서는 날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칭찬 듣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고향/ 히11:13-16/ 설날설교/ 2008-02-12
고향 히11:13-16 명절은 고향이 생각이 나는 날입니다. 고향을 찾아가지는 않아도 고향이 그리운 날이 이 명절입니다. 이처럼 고향을 생각하고 찾기도 하는 것은 고향이라는 곳이 단순히 지명이 아닙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광주라고 하는 지명이 아닙니다. 고향이라는 곳은 역사고 숨결이 있습니다. 꿈이 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는 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신앙인의 고향은 어떠해야 되겠는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고향은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찾아가는 고향입니다. 오늘 같이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자기 고향을 찾아 가는 ‘귀성전쟁’ ‘민족대이동’이 있는데... 올해도 1,400만 명이 고향을 찾아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향을 가고 싶어도 못가는 북한실향민들도 있고 개발 때문에 고향이 없어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박용철시인의 ‘고향’이라는 시에 보면 ...고향은 찾아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데 ...마을 앞 시내도 예 자리 바뀌었을라 ...고향은 이제 찾아 무엇 하리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 생각 ... 옛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찾아감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이 고향을 찾는 이유는 3가지가 있습니다. 1. 귀소본능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들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귀소본능은 연어나 진돗개, 비둘기 같은 짐승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 같이 학교를 다니던 동창들이 그리워지고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들이 먹고 싶어지는 것이 다 귀소본능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향수병(home-sick)이 됩니다. 이런 육체적인 향수병이 있는 가하면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영적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2. 나그네 본능입니다. 어디론가 가고 싶은 욕망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떠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설과 같은 명절같이 쉬는 때에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3. 안식본능입니다. 쉬고 싶은 욕망입니다.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사는 삶의 고달픔을 고향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4. 영접본능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고향에 가면 내 부모나 형제가 반겨줄 것을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4가지 본능, 귀소본능, 나그네본능, 안식본능, 영접본능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자란 고향은 나의 본능을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구원사역을 시작하면서 고향을 찾아 갔습니다. 고향에 대한 본능도 있으셨겠지만 내 고향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도 전하고 병도 고쳐 주려고 가셨다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네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면서 오늘의 모습을 보지 않고 과거의 것, 나쁜 것을 기억해서 쫒아 내지 않습니까? 우리 삶속에서도 악습이 있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모르는 곳에는 진정한 의미의 고향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모하는 고향입니다. 하늘에 있는 고향으로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고향입니다. 16절을 큰 목소리로 같이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유치원에 있는 아이가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어요?” “그럼. 있지” “그럼 하늘나라가 좋은 곳이에요? 나쁜 곳이에요?” “좋은 곳이란다” “그럼 목사님이 하늘나라에 가보셨어요?” “아니 안 가봤는데“ “그럼 어떻게 아세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어요? 이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늘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간 사람 중에 한사람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단다.” 여러분 우리가 사모하는 고향, 죽어서 가는 고향 하늘나라임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아프리카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하던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은퇴를 하여 배를 타고 뉴욕 항구에 도착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을 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감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환영 인파는 미국의 유명한 비행사 린드버그가 단발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비행을 성공을 축하하는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은 옳은 것입니까? 선교사는 하나님께 섭섭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목숨을 걸고 한 평생을 복음을 전하는 일이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한 일보다 못합니까? 이때 하나님은 이 선교사 부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충성된 종아! 너무 속상해 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돌아 갈 고향에 돌아올 때는 린드버그가 환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 환영을 할 것이다. 그때는 너희를 환영하기 위하여 천군 천사가 나팔을 불고 먼 저 천국에 온 사람들이 마중을 나갈 것이며 내가 직접 너희들의 손을 잡고 환영할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고 있으라.󰡓 주를 위해 사는 것이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가 힘듭니다. 대우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를 위해 충성한 성도들에게 상을 주시고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고 주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주의 종들이 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어렸을때 저희 아버지께서 오늘 불러 주셨던 222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가정예배 때마다 이 찬송을 부르면 그렇게 좋더라구요. 여러분도 가정예배 드리시면서 이 찬송으로 은혜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넘치시기를 다시 한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인데요, 만들어 가는 고향입니다. 김상진의 노래가운데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다”라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을 주고 고향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창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도 이 땅에 진짜 고향을 만들어 가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갔던 것도 새로운 고향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금의환향은 없습니다. 나이 들면 고향에 돌아가 집짓고 편히 살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꿈은 하나님의 약속.....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빌립보다 3장 20절을 보게 되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다면, 아니 하늘의 본향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나라, 내 가정이 하나님 나라, 그리고 우리교회가, 이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진짜 고향입니다. 진짜 우리의 이상을 충동시켜줄 수 있는 그런 기쁨이 그 고향에 있어야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만들어 가야 하는 고향은 어떤 것입니까?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1)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창 나이에 실직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의논하여 시장에 조그만 야채가게를 내고 장사를 하는데 그런대로 장사가 됐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직장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상처가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실직자다! 나는 밀려난 실패자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초등학교 4학년짜리 딸아이가 가게에 찾아와 아빠에게 예쁜 봉투를 하나 건넸습니다. “이게 뭐니?” “아빠 나중에 보세요.” 궁금해진 아빠는 딸이 나간 후 그는 쪽지를 꺼내어 천천히 읽었습니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좋은 선물은 못해 드리지만 언제든지 쿠폰을 사용하시면 정성을 다해 드릴께요. 힘내세요. 정말 사랑해요. 아빠의 사랑하는 딸 올림” 그리고는 그 밑에 네모난 칸이 여러 개 그려져 있고, 그 안에는 각각 이렇게 쓰여 져 있었습니다. “10분짜리 안마쿠폰” “구두 닦는 쿠폰” “심부름하는 쿠폰” “노래해드리는 쿠폰” “뽀뽀해드리는 쿠폰...” 그리고 밑에 한 줄 더 붙여 놓았습니다. “이 쿠폰들은 딱 한번만 사용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기분 좋으면 두 번도 해 드릴께요” 그 아버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여보. 난 직장에서 쫓겨나는 순간 세상의 모든 걸 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주 부자였구려” 부부는 손을 꼭 잡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세상은 나를 실직자로 보고.. 나 역시 실패자라고 느끼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래도 내 딸들은 나를 아버지로.. 가장으로..... 본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한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로 이런 가정이 고향이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빨리 가보고 싶은 곳은 진짜 고향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이런 사람이 있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 중에서도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이 돈 떨어지고 친구들 다 떨어지고 흉년에 몸에 병까지 들자.. 아버지 생각하고 고향으로 가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묻지 않고 사랑으로 맞이합니다.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나를 품꾼으로 써 주시옵소서.” 그때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을 일으켜 세워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죄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잃어 버렸다가 다시 찾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더러운 옷을 다 벗기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신발을 주고 새 가락지를 끼우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면서 동네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이 아들은 잃어 버렸다고 다시 찾은 내 아들입니다.” 라고 이렇게 하는 그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은 차별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항상 얼마나 가졌는지, 못 가졌는지에 대해서 우리를 평가를 합니다. 성공이냐? 실패냐에 따라서 우리들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따라서 대우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교회마저도 성공한 교회, 실패한 교회에 대해서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신 분이십니다. 세상이 다 나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여도 하나님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지 않으시고 내 사랑하는 내 딸아, 내 아들아라고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간음하다 걸린 여인을 향해 세상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셨지만 예수님만은 비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인이라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나도 사랑해서 만드신 그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 가정 속에서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말을 하다가도 말이 안되면 “옛날에 네가 그랬잖아, 이랬잖아” 이래서 상처에 또 상처를 주는 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가정입니다. 과거의 상처만 들춰내는..... 여러분 그 상처를 들춰내지 않아도 그 상처를 받은 사람은 아픈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눈이, 여러분의 사랑이, 여러분의 입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뀌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을 사랑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딸로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난하고 못먹고 살면서 찬밥, 더운밥을 가리냐”는 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거지들도 더운밥이 맛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곳이 천국이고 그런 고향을 만들어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힘을 얻는 것입니다. 거지를 볼 때에도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 한센시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는 것도 사랑이 있었기에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런 환자에게는 손을 안대지만..... 사랑으로 보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병자로 보지 않으십니다. 눈먼자의 눈을 만지시며, 귀먼자의 귀를 만지시면서... 쫓겨나는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면서....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냥이 아니라 꽃을 주니까... 나를 여인으로 여겨 주셔서 감사! 거지의 손을 잡으며 돈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하니까... 나를 사람으로 대해 주셔서 감사! 했다고 합니다. 처음 사랑이 회복이 되는 곳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은 뭐라 해도... 남편을 남편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라. 아내를 아내로 인정하고 사랑하라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고 효도하라 자식을 인정하고 노엽게 하지말라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 어찌 아내뿐입니까? 강한 것 같은 남편들도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아내들도 친정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먹을 것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딸로 보니까... 아내라는 짐도, 어머니라는 짐도 다 벗어던지고.... 오직 딸로 보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딸로 사랑 받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서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교회와 가정을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서울에 사는 아들의 집을 찾아온 아버지가 아들의 하소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 한 귀퉁이 자투리땅에 동네사람들이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환경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경고문도 붙여 놓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음날 시장에 나가 호미를 사왔습니다. 그리고는 쓰레기를 버리고 돌을 골라내어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그 텃밭에 상추를 심고 고추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상추가 자라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이와 붓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상추가 필요하신 분은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고추가 필요하신 분은 양 것 가져가십시오」라고 크게 써놓았습니다. 상추가 파릇파릇하게 크기 무섭게 따가는 상추, 얼마나 동네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지....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당신이 언제가 저희 곁에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나.”라고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제산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함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예수님의 사랑은 나누어 주는 사랑입니다.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몸을 내 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속에 이런 예수님의 사랑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말만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는 곳이 우리가 만들어 갈 고향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에게 3년 동안 배웠지만 그들은 항상 예수님이 십자기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무엇했습니까?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이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이 안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실천은 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다 도망갔습니다. 언제 가능했습니까? 성령을 받으니까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성령을 달라고 기도를 한때 성령 하나님을 간구하게 되고 그 성령이 충만할 때 이 사람은 비로소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실현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된 교회는 빈부차를 문제 삼기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갔습니다. 우리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라구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양극화는 이조시대에 더 심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초대교회에는 더 했습니다. 지금은 신분에 자유가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양반과 천민, 상민이 있었습니다. 양극화가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도울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해결하려고 하면 영원히 문제는 안 풀립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세상적인 정치적인 논리로, 이념을 가지고 생각을 하게 되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다고 무시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자기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평준화하는 공산당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빈부격차를 인정을 합니다. 빈부차로 싸우지도 않고 투쟁도 하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은 단하나... 권위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를 지고 너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예수의 피로 맺여진 형제, 자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 안에서 우리의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서로를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희생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기도를 하십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하셔서 내 눈이 하나님의 눈이 되게 하시고 내 삶이 주님의 삶이 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 여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오늘 일가친척들을 만났고, 만나시기도 하실 것이잖아요? 여러분 좋은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세배하면 덕담 많이 하시잖아요. 칭찬들 많이 해주세요. “여태 넌 그러구 사냐?”이런 말하시지 마시구요. 만남이 있다는 말은 나눔이 있고 서로가 힘이 된다는 말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자매가 만나는 순간은 아이덴티티(Identity).. 동질성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으로.. ‘너와 나는 한 혈육이다!’ ‘하나의 뿌리다!’ ‘한 가족’ 이라는 동질성을 발견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힘이 생깁니다. 그렇죠?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고향사람이라면... 동지를 얻은 기분이 들잖아요! 하물며 형제자매는 더 하지요 만나면 힘이 될 수 있는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의 고향입니다. 반대로 만나면 싸우고 원수지고.... 힘을 빼는 공동체는 문제가 있습니다. 칭찬 폭격 남아프리카 잠비아의 북부 고원지대에 바벰바족의 특징은 범죄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싸움이 없는 평화주의자들이예요. 배워서도 부자라서도 아닙니다. 바벰바족은 어쩌다 죄 짓는 사람을 처리하는 방법이 기발합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정말 좋은 방법으로 해결을 한다는 말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마을 한복판에 있는 광장에 세웁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든 일을 중단하고 이곳에 모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죄인을 중심으로 둘러섭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일반적으로는 죄인들에게 정죄를 하고 비난을 하고 매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는 일... 사형까지도 합니다. 그러나 바벰바족은 전혀 다릅니다. 죄인을 둘러서서 마을 사람들이 외치는 말은 정죄나 비난하는 책망의 말이 아니라.... 칭찬입니다. 죄인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들을 떠 올리며... 그의 장점, 선행, 미담들이 하나씩 말을 합니다. 이 때, 과장이나 농담은 일체하지 못하고 아주 심각하고 진지하게 그를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이 법정은 검사도 없고 판사도 없습니다. 오직 변호사만 수백 명이 모인 법정입니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칭찬의 말이 바닥이 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한마디로 ‘칭찬 폭격’을 하는 것입니다. 칭찬 폭격은.. 죄를 짓고 위축되어 있는 사람을 회복시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이웃의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고 눈물로 다짐하게 만듭니다. 다 했다 싶으면 이 사람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축제를 엽니다. 죄인이 이제 새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하고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바벰바족 마을에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닙니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비난이나 정죄가 아니라 칭찬입니다. 이렇듯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좋은 점을 찾아 칭찬을 해 주는 것이야 말로 그 공동체와 구성원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프리카의 미개종족도 그렇게 사는데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안에 사는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정말 가고 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나라, 그런 고향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향과 친해지기/ 마13:34-35/ 강문호목사/ 설날주일설교/ 2016-02-12
고향과 친해지기 마13:34-35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 설입니다. 설은 음력 1월 1일입니다. 새로운 해를 낯설게 맞이한다는 의미에서 설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삼국 유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책입니다. 그 책에 서기 488년 신라 비처왕 시절 설날을 지냈다는 기록이 최초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 민족은 1500년 이상 설 명절을 지내왔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명철은 유월절입니다. 3500년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마지막 때에는 전 세계가 예수님의 생일인 초막절을 명절로 지킬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슥 14;16-21)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핍박할 때에 그들은 양력을 쓰니까 음력 명절 설을 없애 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일제시대부터 구정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설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배를 다니며 옷에 먹물을 뿌려서 얼룩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떡 방앗간을 돌리지 못하게 경찰을 동원해 감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총칼도 설을 막지 못 하였습니다. 고향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가족들이 일년에 몇 번 만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이 승만 정부와 박 정희 정부는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이유로 사기업체의 휴무에 불이익을 주면서까지 음력설을 없애려 하였습니다. 양력설에 차례를 지낼 것을 권장하여 서울 등 대도시의 일부 가정에서는 양력설을 지키는 바람이 잠시 일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음력설을 없앨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정부는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음력 1월 1일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하였습니다. 이 후 노태우 정부는 민족 고유의 설날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받아들여 1989년에 음력설을 '설날'로 하고, 섣달 그믐부터 음력 1월 2일까지 3일 간을 공휴일로 지정하였습니다. 설은 앞으로도 도저히 없앨 수 없는 명절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설의 풍습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1. 세배 어른들에게 일년중 최고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며 공경합니다. 어른은 최고의 덕담을 하면서 세배돈을 하사하는 풍습은 우리 나라에만 있는 좋은 풍습입니다. 이 때 일년 중에 최고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색동 저고리가 최고 옷이었습니다. 2. 떡국 설의 음식은 떡국입니다. 추석 음식은 송편입니다. 떡국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떡국 떡은 동전입니다. 옛날에는 지폐가 없고 모두 동전이었습니다. 돈을 끓여 먹이고 나누면서 돈많이 벌라는 의미입니다. 축복입니다. 그래서 떡국을 비스듬하게 자르는 것은 본래 의미를 상실한 것입니다. 아주 똥그렇게 자를수록 본연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떡국의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태양입니다.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해처럼 밝게 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양신 모습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민족은 태양신을 섬긴 흔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1월 1일이면 머리와 꿀을 식탁에 올립니다.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고 꿀같은 한 해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민족은 음식으로 축복을 비는 아름다운 민족입니다. 3. 윷놀이 설에는 윷놀이가 특징입니다. 우리 민족 속에 흐르는 놀라운 DNA가 있습니다. 윶놀이 DNA입니다. 온 민족이 신라 시대부터 윶놀이를 하여 왔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은 윶놀이를 하면서 그 피에 젖게 되었습니다. 윶놀이는 이웃놀이의 준말입니다. 윶놀이 속에 들어 있는 세 가지 사상이 있습니다. 1. 빨리 가기 2. 쉽게 가기 3. 잡아 먹고 가기 이 세가지 사상이 우리 민족성속에 DNA가 되었다는 분석입니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4. 널뛰기 상대방을 높이 올라가기 위하서 자기가 있는 힘을 다 해야 합니다. 살짝 내려 앉으면 상대방에 높이 오를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놀이입니다. 설이면 이 마당 저 마당에서 널뛰기를 하였습니다. 서로 교대로 하늘로 치솟으며 나 때문에 네가 오르고 너 때문에 내가 하늘로 치솟는 널뛰기를 하면서 서로가 잘 되기를 축복하였습니다. 겨우 내내 움쿠려 살다가 발바닥을 그렇게 부딪쳐 주면 너무나 건강하였다는 것입니다. <널을 뛰지 않으면 발바닥에 가시가 박힌다>라는 속담은 여인들의 건강으로 널뛰기 운동을 시키려는 조상들의 지혜였습니다. 그 때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널뛰기를 하였습니다. 묵은 해는 지나가고 새 해 신원을 맞았네 널뛰자. 널뛰자 앞 집에 수캐야 너 왔느냐 뒷 집에 순이야 너도 왔느냐 널뛰자. 널뛰자 만복 무량 소원 성취 금년 신수 좋을 시구 널뛰자. 널뛰자 규중 생장 우리 몸은 설노름이 널 뛰기라 널뛰자. 널뛰자 널뛰기를 마친 후에 떡국놀이 가자세라 널뛰자. 널뛰자 재미있는 널뛰기 노래가 또 있습니다. 허수자 척실루 네 머리 흔들. 내 다리 삽작 허수자 척실루 네 댕기 팔랑. 내 치마 낭넉 허수자 척실루 네 눈이 휘휘. 내 발이 알알 널뛰기를 하면서 친교하며 다른이가 솟아 오르도록 도와주는 미덕을 길렀습니다. 5. 그네뛰기 앞으로 전진하기 위하여서 뒤로 많이 물러 나야 합니다. 뒤로 갈 줄 아는 아는 사람만이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뒤로 많이 갈수록 앞으로 많이 갑니다. 뒤로 높이 오를수록 앞으로 높이 오를 수 있습니다. 많이 양보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6. 제기차기 엽전이나 주화를 한지나 비단에 싸고 끝을 찢어 만든 제기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차는 놀이입니다. 한 가지를 일을 누가 오랫동안 끈기있게 하는 지 길러주는 놀이입니다. 7. 팽이치기 팽이를 실로 쳐 회전이 멈추지 않도록 돌리는 놀이입니다. 여기에도 깊은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돌지 않는 팽이는 쓰러집니다. 계속 도는 팽이만이 쓰러지지 않습니다. 누우면 죽습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부지런한 민족성을 보여주는 놀이입니다. 설에는 이런 놀이들을 하면서 즐겼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중요한 것을 심어주는 놀이들입니다. 모두 아름다운 풍습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설이면 민족 대이동이 일어납니다. 고향찾기입니다. 모든 존재는 고향을 찾아갑니다. 물은 물의 고향인 바다로 흐릅니다. 불은 불의 고향인 태양을 향하여 타오릅니다.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와서 죽습니다. 여우는 죽을 때 꼬리를 고향쪽으로 두고 죽는다고 합니다. 해마다 명절이면 모든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에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귀성 전쟁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명절에 움직이기는 전쟁같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가는 것보다 서울에서 미국가는 것이 빠릅니다. 전에는 태어난 곳이 고향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전에는 부모가 계신 곳이 고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자식이 있는 곳이 고향이라 부모가 자녀있는 곳으로 오는 역 귀향 추세입니다. 평양에 갔을 때였습니다. 이북이 고향인 70대 노인들이 30명 가량 있었습니다. 이 때 예쁜 초등학교 아이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꼴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자리인 동네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모두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훌쩍 훌쩍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는 본능을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두 곳입니다. 하나는 흙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래서 흙에서 왔기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줌인 흙인 육체를 사랑하지 말고 영원한 영을 사랑하라.” 그래서 관을 만들었습니다. 2년 동안 관위에서 가끔 자면서 흙으로 돌아갈 나를 보면서 육체를 사랑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마지막 여섯째 날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말씀대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들의 고향은 흙입니다. 그래서 고향 흙으로 돌아갈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재료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한 줌의 흙입니다. 우리는 한 줌의 흙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옆에 아내도, 남편도, 부모도, 자녀도 결국은 한 줌의 흙덩어리입니다. 자녀가 자녀를 낳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흙덩어리를 낳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은 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흙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별것 아닙니다. 흙 철학은 복귀 철학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언덕위에 대학이 있습니다. 대학원장입니다. 어느 날 택시를 타고 학교로 출근하고 있었습니다. 눈이 조금 내려서 길이 미끄러웠습니다. 학교가 바라보는 언덕 밑에서 택시 기사가 말했습니다. “손님! 길이 미끄러워서 언덕으로 못 올라가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이 곳에서 내리셔서 조금 걸으셔야 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학원장이 소리를 버럭질렀습니다. “지금 바빠서 택시를 탔는 데 올라 가 봐요.” 택시기사가 말했습니다. “언덕에서 미끄러지면 사고날 것같습니다.” 두 번째로 거절하였습니다. 대학원장은 갑자기 혈기를 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가라면 갔지 기사가 왜 말이 많아! 돈 내면 될 것 아니야.”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그 자리에 퍽 쓰러졌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 하였습니다.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대학원장이고 떵떵거려도 결국은 흙 한 덩어리입니다.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고향을 찾는 시기에 우리의 근본 고향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흙 한 덩어리다.” 이런 흙철학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부요한 여자분은 화장품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했습니다. “흙에다가 비싼 화장품을 발라서 무엇하냐? 평생 화장품값만 따져도 수 천만원 정도 될 것이다. 흙덩어리에 아무리 발라도 흙덩어리다. 이 돈을 주의 일에 사용하자.” 그리고 늘 화장품 값을 선교비에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흙 철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막 영감을 받은 곳은 아미쉬 마을입니다. 쉔크라고 하는 집에서 며칠 지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재침례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마을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약 300년 이상 여자들이 화장하지 않습니다. 아예 거울을 안 보고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흙덩어리에 화장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새벽에 좀 깊이 자려고 하다가도 죽으면 흙덩어리를 아껴서 무엇하냐? 살아 았는 흙덩어리일 때 열심히 살자고 외치며 일어나 나와 기도하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할 때마다 2만원 이상되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항상 우리 선교지가 생각이 납니다. 그 곳에서는 한 식구가 3만원을 가지면 한 달을 살아갑니다. 한 달 8만원이면 그래도 중류 생활을 합니다. 그런 돈을 한 끼 식사에 써버린다는 아까움이 항상 나를 누르고 있습니다. 흙으로 돌아 갈 몸을 그렇게 잘 먹고 잘 살아서 무엇합니까? 흙 철학을 가지면 검소하여 지고 겸손하여 집니다. 욕심도 버리고 절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흙은 돕는 존재입니다. 흙은 주는 존재입니다. 나무에게 물을 줍니다. 식물에게 영양가를 줍니다. 무엇을 흙에 심든지 흙은 다 받아 드려서 잘 살게 만들어 주는 돕는 존재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김 용기 장로님이 강원도 신림에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분에서 가서 교육을 받을 때 그 분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흙은 거짓말 안 해. 콩을 심었는 데 팥을 주지 않아. 두 번 김을 매주면 두 번의 효과가 있어. 새벽부터 일하면 그만한 효과가 있어. 사람은 거짓말 하여도 흙은 거짓말 안해.” 흙은 주기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창조하시면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스리라는 말은 지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도우라는 말입니다. 정치는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것입니다. 국회위원은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을 도우라는 말입니다. 대통령은 온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다. 지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잘 도우라는 말입니다. 아담을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은 이 세상을 잘 도우라고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아담은 돕는 사람입니다. 여자는 돕는 배필입니다. 고향과 친해지는 계절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바울은 늘 영원한 고향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 예수믿고 사는 우리는 모두 천국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믿고 사는 우리가 갈 최종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우리 모두 결국은 천국에 모두 모여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지막 목표는 천국입니다. 우리 교회 온 성도들이 얼마 전 남한 산성 등산 야외 예배를 드렸습니다. 약도를 주고 각자 그 곳에서 모이자고 하였습니다. 가보니 모두 결국은 그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 각 자 죽어 각자 가지만 결국은 천국에 가보면 그 곳에 모든 사람들이 다 모여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으로 인도하는 성경에 천국 안내서가 없습니다. 천국에 대한 안내는 계시록 한 장뿐입니다. 왜 천국 기사가 한 장뿐일가요? 천지 창조 이야기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모두 11장입니다. 한 사람 요셉 이야기는 창세기 37장에서 시작하여 창세기 50장에서 끝나 모두 14장입니다. 천국보다 요셉이 귀한 것일가요? 특별히 하나님의 집 조그만 성막 이야기는 성경에 50장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 이야기는 겨우 한 장입니다. 천국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 안내서입니다. 그런데 천국 이야기는 한 장 밖에 없는 것일 가요? 그 이유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비밀이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7가지나 전개시켜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큰 무리들에게 서서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그 때 13장 2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제자들이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1-13) 천국은 비밀입니다.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비밀입니다. <너희>는 누구이고 <저희>는 누구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비밀이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 알지 못 하도록 천국 설명이 성경에는 적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비유로 말하면 알 사람은 알고 모를 사람은 모르게 됩니다. 천국은 비밀입니다. 그래서 천국 안내서인 성경에 천국 설명이 적습니다. 그래서 마 13;34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3;34-35) 어떤 사람이 환상중에 천국에 가 보았습니다. 물론 환상입니다. 성경은 아닙니다. 촌스러운 마을도 있고, 중소도시처럼 잘 단장되지 못한 마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멋진 호반의 도시도 있었습니다. 천국도 등급이 있었습니다. 촌스러운 마을에는 이 땅에서 은혜로 잘 살면서 자기 신앙을 잘 지킨 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듬어지지 못한 중소도시 마을에는 고난 가운데 굴하지 아니하고 감사하며 승리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에서는 고난과 시험과 실패 가운데도 굴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며 더욱 아름답게 헌신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승리한 사람이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고향과 친해지는 계절입니다. 모든 것을 고향을 찾습니다. 불은 불의 고향인 태향을 향하여 타옵니다. 물은 물의 고향인 바다로 흐릅니다. 여우는 죽을 때 고향을 향하여 꼬리를 돌리고 죽습니다. 연어는 기어코 고향으로 돌아와 죽습니다. 붉은 바다 거북은 15년 동안 바다에서 자랍니다. 그리고 성년이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가서 죽습니다. 태어난 고향까지 적어도 1500km를 이동합니다. 북극 제비 갈매기도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 죽는 새입니다. 무려 죽기 전에 7만 8000km 이동을 합니다. 고향을 찾는 데 이같이 결사적입니다. 우리는 육의 고향을 찾아 나서면서 우리는 진정한 고향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육의 고향은 흙입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고향은 천국입니다. 강문호 목사(서울 갈보리교회)
고향을 찾는 나그네/ 히11:13-16/ 설날주일설교/ 2008-02-12
고향을 찾는 나그네 히11:13-16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서로 인사 나누겠습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늘찬양교회,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우리가정,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내 모습” 할렐루야!! 여러분들도 잘 아는바와 같이 내일 모레가 우리나라의 최대 명절인 구정 즉 설날입니다. 올해부터는 신정을 없이 한데다 설날이 주일까지 끼어서 4일 연휴가 되다보니 어떤 직장은 아예 일주일 동안 설 연휴를 주는 곳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올해는 거의 다가 고향을 찾을 것으로 생각이 되어 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일예배도 드리지 않고 습관적으로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오후에 고향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입니까? 경제상황이 어렵고 주위에 밥을 굶어 배고파 죽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바라보며 비애감도 느낍니다. 늘찬양교회 성도들 중에는 그런 분들이 없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고향이 무엇입니까? 고향은 누구나 그리워하고 가고 싶어 하는 곳입니다. 고향은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고향은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어머니의 품입니다. 고향은 부모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좋은 고향을 떠나 온 것입니까? 무슨 이유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서울로 이사 온 것일까요?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살다보니 밥 먹고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서 무작정 고향을 떠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도시로 가서 성공하고자 고향을 떠나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본의 아니게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고향도 나뉘어져 오도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르쳐 실향민이라 부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살면서 아픔이 많아 일부러 고향을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고 싶어 합니다. 두고 온 가족들과 전에 살던 때가 생각나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고향에 가지 못합니다. 추운 겨울에 길거리를 떠돌고 지하도에서 새우잠을 자면서도 집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할 때 비록 6시간 10시간이 걸려서 고향을 찾아가지만 오고 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고향을 찾는 나그네입니다. 아브라함도 고향을 찾는 사람입니다. 고향을 떠나면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고향을 찾아 돌아가 사는 것이 꿈이요 삶의 과제인 우리 인생을 가르쳐 `나그네`라 합니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는 고향에 대한 생각을 안 하다가 자기의 육신에 병들고 아프면 고향 생각을 합니다. 또 사업에 실패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고향 생각을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 중에서도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은 가진 돈이 있을 때, 허랑 방탕 할 때는 고향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돈 떨어지고 죽자 살자 하던 친구들 다 떨어지고 흉년 들어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에 병들자 그제야 아버지 생각하고 고향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가야할 고향이 다릅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오늘 같이 귀한 주일날 교회를 빼먹고 식구들끼리 모여서 T.V 보고 음식 만들고 고스톱 치고 떠드는 일로 아까운 시간을 소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진정 우리가 찾고 떠나야 할 고향은 어디인가? 더 나아가 성경에 있는 대로 더 나은 본향은 어디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Ⅰ. 영적인 고향을 찾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몸이 태어난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어릴 적 정다운 친구들 그리고 친척들을 등 뒤로 하고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이끄시는 대로 가다보니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 가나안 땅을 육신의 정착지로만 삼은 것이 아니라 영혼의 정착지로까지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사는 동안 그곳에 먼저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으로 취급을 당하였고 멸시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브라함은 고향으로 되돌아갈까 생각도 했고 이곳 보다 다른 지역이 더 기름지고 풍요롭다 여겨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도 있건만 아브라함은 자기 마음대로 지역을 옮기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낸 것은 아브라함의 고향이 육신이 태어난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영적으로 약속 받은 축복의 땅 ‘가나안 땅’임을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내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사는 동안 가뭄을 만납니다.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생기고 땅에 먹을 것이 없자 먹을 것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수치와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먹을 것을 잔뜩 얻어 가지고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이 결코 너희가 머무를 땅이 아니고 오로지 참 고향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임을 알게 하고자 깨달을 때까지 훈련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두 번째로 가뭄이 다가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애굽 땅이 아닌 블레셋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똑같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오히려 물질을 얻어갔고 나옵니다. 고향에 대한 하나님의 숨은 비밀과 뜻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연속적인 실패와 수치를 통해 깨닫습니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진정한 축복의 땅 약속의 땅 영혼의 참 고향임을 깨달은 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습니다. 떠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혹시나 훗날에 후손들이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우리 땅이니 이 땅에서 나가라 하면 후손들이 고통을 받을까봐 이번에는 정식으로 돈을 주고 막벨라 굴이 있는 언덕의 조그만 땅을 삽니다. 이 땅이 확실하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영토임을 온 천하에 알리는 행위였습니다. (창23:17-20) 만일 이때에 아브라함이 아직까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임을 알지 못했다면 그 땅을 사기를 주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약속 받은 축복의 땅임을 확인 한 이후 아브라함은 아내가 죽자 그곳에다 시신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죽어 그곳에 묻혔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아브라함처럼 가나안에서 살다가 죽어 거기에 묻혔습니다. 그 아들 야곱도 잠시 가나안을 떠나 외삼촌 라반에 집에서 지냈지만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음은 물론 야곱도 죽어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요셉은 애굽 땅에서 국무총리가 되어 편히 그곳에서 살 수 있었지만 내가 죽거든 내 뼈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고향 막벨라 굴이 있는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00여 년이 지나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 성공하므로 요셉의 유골이 가나안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수24:32). 이러한 고향의 원리를 알지 못하는 나오미와 그의 가족들은 가뭄으로 인해 모압 땅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두 자부들을 얻어가면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잘 살려 하였지만 그곳은 약속의 땅이 아닌 고로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마저 잃어버리는 혹독한 아픔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약속의 고향 땅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렇듯 우리는 고향을 찾아 떠나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담긴 참 고향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이방 신과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에덴동산을 잃듯이 조상 아브라함과 그 믿음의 자손들이 만든 고향을 잃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의 나라 땅에서 포로로 이방인으로 살면서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행한 죄악을 뉘우치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맹세하고 마음으로 잊혀진 고향을 찾아 돌아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는 고향은 아브라함도 그 자손도 앞으로 올 미래도 돌아갈 과거도 하나님 약속으로 주시는 가나안 땅 뿐입니다. 반대로 이 땅에 소망을 둔 사람은 자신의 몸이 태어난 과거의 고향을 찾습니다. 거기에서 사는 기쁨을 얻고 삶의 슬픔을 달래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당하였던 부끄러움과 애굽의 고통과 바벨론 포로의 슬픔만이 있습니다. 이 모든 원인은 모든 인간의 고향 되신 하나님이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Ⅱ. 고향을 만드는 나그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나그네로 살면서 영적 고향 참 고향을 만들 듯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저 하늘에 고향 즉 본향(本鄕)을 만드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품에 내가 영원히 사는 고향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고향을 잃어 이방 땅에 살던 이스라엘이 죄를 회개하고 가나안에 돌아오는 것처럼 교회를 떠나 세상에서 탕자로 살던 죄인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의 참 고향은 흙으로 몸을 만드신 하나님께 있고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게 해준 집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녀도 주일이면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형제자매를 만날 때 삶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반대로 하나님 아버지를 잃고 교회를 떠나서 세상 속에서 살 때 참 평안이 없고 참 기쁨이 없습니다. 어디를 가서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이 복이 되지 않습니다(요 15:4,5). 집을 떠나 사는 나그네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를 못합니다. 자신의 볼 일 때문에 혹은 어려운 사정으로 여기저기를 다니며 머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몸에 가진 것이 많으면 다니기가 불편하므로 언제나 그날그날 필요한 것만 가지고 다닙니다. 그리고 머무는 곳에서 주어진 일이 있으면 열심히 일을 합니다. 하지만 재산은 자신이 앞으로 영구히 살을 집이 있는 곳에 모읍니다. 귀하고 값진 보물도 앞으로 만드는 고향집에 가서 살려고 준비합니다. 임시 머무는 곳에는 어떤 삶의 기반도 많은 인간관계도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앞으로 나그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무거운 짐이요, 얽매이는 사슬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당시 나그네는 본토 사람들에게 의심과 미움과 오해를 받았습니다. 본토 사람들에게 외국인이나 나그네의 사회적인 지위는 노예보다 조금 나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게 살면 본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부자로 살면 트집을 잡아 수모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나 이방 사람들은 자기 나라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소망하며 기다림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은 언제나 나그네일 뿐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세상을 사랑해서 그 삶이 좋으면 안 됩니다. 죄를 먹고 세상을 즐기는 이 땅의 삶이 언제나 낯 설은 나그네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소망을 둔 사람들은 까닭 없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과 맞지 않는다고 차별을 당하고 여러 면에서 손해를 본다. 그래서 교회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와서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필요한 말씀으로 축복해주십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저 하늘나라에 준비하신 상급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가난하게 살고 무시 받고 살고 부족함이 많은 모습가운데 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귀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할 수 만 있다면 물질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쓰려고 합니다. 이 믿음은 성도들이 만드는 하늘 고향에 보물을 쌓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다른 차원의 성도 생활입니다. 사람들은 설과 추석 명절이면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찾습니다. 복잡한 열차를 타고 버스를 탑니다. 승용차를 타고 몇 시간, 어떤 곳은 하루 진종일 고속도로에서 고생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고향을 찾는 웃음이 있고 무엇인가 기대를 하는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손과 손에 든 것이 있는데 그 물건이 고향 계신 부모 형제들에게 나누어 드릴 선물들입니다. 고향에는 산과 들이나 집 건물을 보려고 가지 않습니다. 나를 낳아 사랑으로 길러주신 그리운 부모님을 뵈려고 갑니다. 그 동안 보고 싶었던 형제들을 만나러 갑니다. 고향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부모님이 이날을 기다리셨습니다. 아들딸들이 올 것을 생각하고 며칠 전부터 음식을 준비하고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식이 돌아갈 때는 그들 손에 들려 보낼 이것저것 땀 흘려 농사한 것을 챙기십니다. Ⅲ.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고향 길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집에 가는 것도 사람이 좋아서 가고 집을 나가는 것도 사람이 싫기 때문입니다. 고향에 부모 형제가 있지 않으면 가도 명절이 즐겁지 않고 명절이 되어도 사는데서 보내고 맙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 되어 하나님을 고향 삼고 찾아오는 믿음의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믿음의 자녀가 하나님을 찾아오는 명절이요, 예배는 하나님 준비하신 은혜의 천국잔치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하나님께서 챙겨 주시는 풍성한 복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 땅에서 나그네 되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아브라함과 그 믿음의 자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한 성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늘 본향 되신 하나님께 가는 사람은 아버지가 기뻐하실 선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선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예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 기뻐하실 영광스런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좋은 때를 준비하십니다. 명절에 고향을 가시거나 집에서 계실 늘찬양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부모와 자식을 만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형제들을 보면서 예수의 피 값으로 형제자매가 된 교회 가족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은 교회당 건물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뵈러 나왔습니다. 절대 떠나거나 끊어질 수 없는 교회 가족들을 만나러 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오늘을 복되게 사십시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으로 이 날을 즐겁게 만듭시다. 고향에서 만난 오랜 친구처럼 한없이 사랑하고 예뻐하고 껴안아 줍시다. 고향의 기쁨을 아는 자는 나눔의 기쁨을 아는 자들입니다. 오늘 이 귀한 주님의 전에서 믿음으로 하나 된 형제자매들이 함께 주의 사랑을 나누며 “새해의 덕담”을 원 없이 나누는 귀한 시간들을 갖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8-50)
고향을 찾는 마음/ 출3:15-16, 행7:1-10/ 설날설교/ 2008-01-23
고향을 찾는 마음 출3:15-16, 행7:1-10 옛 언약의 말씀 = 출애굽기 3 : 15 - 16 새 언약의 말씀 = 사도행전 7 : 1 - 10 찬 송 = 460, 492 1월 23일은 민족의 대명절인 설날이다. 뉴스에서 시간시간마다 고향 을 찾는 사람들의 대행렬들을 보도하고 있다. 모천회귀라는 말이 있 다. 연어는 알을 날때나 죽을 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에 한국인들은 고향을 찾아간다. 고향을 찾는 한국인 의 귀소본능은 가히 본능이라 할 만큼 유난히 극렬하다. 교통체증과 불편함을 이끌고서도 고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 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조상들의 묘소를 찾는 모 습이 있고, 둘째는 생존에 계시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찾아 뵙는 효심어린 모습이 있고, 셋째는 산업사회에 찌들린 현대인의 피로에 지 친 모습으로 태고적 고향과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 즉, 죽마고우라고 하는 친구들과 흙을 찾아가는 모습이 있다. 넷째는 타향에서 꿈을 이 루고 금의환향하는 모습도 있고, 다섯번째로 가지 못하는 땅을 바라보 며 임진각에서 자신의 땅을 바라보는 슬픈 모습도 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소명기사와 스데반의 순교전 설교에서 조상들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 ....\\\' 그리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야기와 출애굽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유의 한다. 우리는 고향을 찾는 섣달 그믐날의 분주한 발걸음을 통해서 사람은 고향을 찾는 본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음을 안다. 육신의 몸둥이가 탄 생한 산천의 고향을 넘어서 우리 생명의 영원한 본향을 인간은 그리워 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야기와 오늘 우리들의 삶과는 무슨관계와 의미 가 있을까? 그런데 모세나 스데반의 조상 이야기에는 우리들이 고향을 찾는 것 과는 다른 하나의 이유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 ....\\\'이라는 말 속에는 핏줄을 확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 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구원의 사건에 대한 자손 대대의 고백이 담 겨있는 것이다. 설날을 맞으면서 우리는 몇가지 자각하고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 첫째는 고향을 찾는 발걸음은 단순히 혈육의 고향산천 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믿음의 본향 영생의 나라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자각함이요. 둘째는 우리 조상들의 피땀어린 노력과 애 씀 그들의 고난과 시련을 은혜의 고백으로 감사해야 한다. 셋째는 부 모형제가 하나되고 화목하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축복의 날임을 알아야 한다. 고향은 육으로만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으로도 찾아야 하 고, 또한 더욱 중요하게 영으로도 찾아야한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어디로 돌아갔단 말인가? 반드시 온 곳이 있어야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우리 영혼의 고향,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세배를 드리는 정성을 제의 하고 싶다. 그래서 모세 와 스데반과 많은 믿음의 선조들의 공통된 고백인 \\\'아브라함의 하나 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 ....\\\'이라는 고백 끝에 \\\"나의 하나님\\\" 이라는 고백이 될 수 있어야 겠다. 고향을 찾는 마음은 근원을 찾는 마음이며 나의 뿌리를 찾는 마음이 다. 불의 근원은 어디인가? 하늘 높은 곳 태양이 있기에 불은 항상 태 양을 향해 솟구치는 것이다. 물의 근원은 어디인가? 저 바다에 있기에 물은 항상 낮은 바다로 향해 내려가는 것이다. 나무의 생명의 근원은 뿌리에 있다. 뿌리가 향하는 곳에 생명이 깃든다. 고향을 찾는 마음이 귀소본능이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존재의 가치로 의미를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새로움이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의미있는 사건을 일으키시고 인간 의 자유의지를 통해 그 사건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성서는 그 사건을 구원의 역사 곧 구원사라 한다. 해가 바뀌고 달력이 새로 바뀌는 것 그 자체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 를 한바퀴 돌았다는 것 천체운행의 또한번의 시작을 말하는 것일 뿐 거기엔 아무런 새로운 뜻이 없다. 사계절의 변화가 수천만번 있더라도 거기엔 역사적의미와 뜻이 없는 것이다. 역사와 조상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이야기 하는 것은 그들의 핏줄을 확인하려는 인간적 동기가 아니라 그들을 불 러서 약속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경륜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과 거의 사실들을 오늘 현재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살아나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과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과거를 이어 온 조상들의 얼을 찾는 고향찾는 마음인 것이다.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 신11:8-12/ 설날설교/ 2010-02-23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 신11:8-12 민족 명절인 설날의 그믐날이 되었습니다. 뉴스 시간마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기나긴 행렬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무려 이천 칠백만명의 민족 대이동이 이번 설을 통하여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국가에서 아무리 교통 정책을 잘 한다고 해도 이 숫자 앞에서는 손을 쓸 수가 없게 됩니다. 더구나 영동 지방과 경상도 지방에 눈이 많이 와서 차량 통행이 어렵다고들 하는데도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부모 형제가 있고 추억이 있고 따뜻한 이웃이 있는 고향은 언제나 마음에 풍요로움을 줍니다. 그래서 한 번 명절 때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기를 쓰고 고향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태어난 곳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원천이 있는 곳이 사람에게 평안과 안정을 주는 모양입니다. 저도 가끔씩 가는 고향이지만, 너무나도 멀어서 애들이 지겨워하는 고향이지만 고향 가까이 있는 산천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이는 것은 아마도 사람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이 있는 모양입니다. 연어라고 하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이 고기는 맑은 시내에다 알을 낳습니다. 알이 부화가 된 뒤에 바다로 어린 고기가 나갑니다. 우리나라 동해안에 있는 남대천에서 새끼가 바다로 나가서 북태평양 근처에서 자랍니다. 그 거리는 비행기로도 지겹게 가야 되는 머나먼 거리입니다. 이 연어가 어른 고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우리 나라 동해안까지 와서 자기가 나온 시내를 찾아가 알을 낳고는 죽습니다. 마지막 죽기 전에 자기의 원천을 찾아오는 것이지요. 어떻게 해서 찾아오는지는 모르지만 고향을 찾는 그들의 삶의 모습이 너무나도 놀라움을 안겨 줍니다. 사람에게도 이 연어처럼 자기의 근본을 찾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근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은 모르지만 아마도 자기가 태어난 고향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평상시에는 생활에 쫓겨서 정신없이 살다가 명절이 닥치면 어쩔 수 없는 향수에 그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고향을 찾는 대열에 합류를 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시골에서 노인들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평안하게 죽을까? ·········· 차를 타고 가면서 잘 꾸며진 무덤을 보고서는 그것이 그렇게도 좋아 보이고 부러워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인간이 흙에서 나와서 자기가 가야 하는 고향을 찾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고향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에게 고향이 그리워질 때가 서러움을 겪고 객지 생활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멸시를 받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 너무도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허기진 배를 안고서 밖을 나와 보니 그날 따라 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하늘을 보니 고향집에서 보았던 그 달이 하늘에 새하얗게 떠 있었습니다. 불현듯 집이 그리워지고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영원한 고향을 생각하는 때는 편하고 좋을 때가 아니고 삶이 어렵고 힘이들 때 아무도 자기를 기쁘게 맞아 주지 않을 때 영원한 존재를 그리워하며 자기를 맞아 줄 영원한 고향에 대한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그 정체를 정확히 모릅니다.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간절한 소망의 정체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이시고 영원한 천국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는 자들로서 우리를 존재하게 해주신 그분인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그 분이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고 가야 할 곳이 바로 그곳인 것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고향이 우리가 찾아가는 고향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고향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변해 버린 고향의 모습에 실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의 문학가로 잘 알려진 \\\\\\\'토마스 월트\\\\\\\'의 소설 중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는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젊어서 꿈꾸던 모든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돈도 벌었고 명예도 얻었고 지식도 얻었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똑똑한 자녀도 골고루 두었습니다. 모든 소원하는 것들이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오랫동안 그리던 고향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주인공은 기차를 타고 옛날에 자기가 살던 고향 땅에 갔습니다. 노오스 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애쉬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역전에 내리는 순간 그는 몹시 당황하고 실망했습니다. 고향은 너무나 변해 있었습니다. 거리는 현대화되고 인심도 변해 있었습니다. 친구는 남이 되고, 고향 땅에 온 자기는 오히려 이방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자기가 꿈에 그리던 마음의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돌아오는 기차에 다시 올라 슬프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제의 평화와 고요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 길이 있다면 앞으로 가는 길뿐이다. 뒤로 가는 길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아마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영원한 고향이 있음을 가르치시고 그곳을 사모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영원한 그 고향을 찾아가는 순례자인 것입니다. 「본향을 향하네」라는 성가곡이 있습니다. 합창으로 불리워져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곡입니다. 이 세상-나그네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인생의 거친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환난의 궂은 비바-람 환난의 비-바-람 환난의 궂은 비바람 모질게---모질게--- 불 어-도 천국의-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천국의-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하나 그 괴롬 인하여 천국 보이고 이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세상 지나는 동안에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히 심하나 기쁜 찬송 주예수님 은혜-로 이끄시네 이끄시네 생-명강 맑은 물-가에 백화 가피-고 흰옷을 입은 천사 흰옷을 입은 천사 찬송가 부르실 때 찬송가 부르실 때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겠네 이세상-나그네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거친들에서 하룻밤 머물고 천국의-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본향을 향하네 이스라엘 사람들도 뒤에 두고 온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앞으로 가야 되는 고향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도 두고 온 고향이 아닌 그들 앞에 있는 본향을 찾아가기 위해 뒤에 있는 고향을 고향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히11:13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다가 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참고향이 아니고 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히11:14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11:15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히11:16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가야하는 곳은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은 인내를 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고 용기를 가지고 담대해야만 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I.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때로는 너무나 지치고 되는 일도 없고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언제라도 훌훌 털고 고향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든든한 배경이 있기에 조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돼도 돌아가면 맞아 줄 곳이 있다는 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시골에서 보면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에 갔다가 병들고, 또는 사업에 실패를 해서 가진 것 다 없애고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골에는 빈집이 있고 벌어먹을 수 있는 땅들이 있고, 이웃들이 여러 가지로 도와주어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잡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고향이 좋은 것입니다. 실향민들이 있습니다. 수몰 지구, 공업단지, 이북 ········ 이들은 가진 것들이 있고 친구들도 있지만 남들이 다들 고향을 찾을 때 혼자 눈물을 흘려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절망감이 그들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이 어렵고 살기가 각박한 어려움 속에서 살지라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든든합니다. 우리가 언제라도 가서 살 수 있는 우리의 집이 천국에 예비가 되었으니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90장2절」 광야에 찬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산너머 눈보라 재우쳐 불어도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이 영원한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1980년 3월 불란서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서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하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절규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 있는 자기 아내에게 묻지를 못 합니다. 아내조차도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기 남편에게 그의 병명을 말하지도 못 합니다. 소리치고 발악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위로를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불쌍한 여인과 그 사람! 그런데 이 사람처럼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자유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수필을 썼고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입니다. 이것이 그의 말로입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달 만에 그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불란서의 신문들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르트르가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사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독일 고백 교회 신학자 본훼퍼입니다. 그는 사르트르보다 훨씬 앞서서 세계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죽어 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옵니다. 직감적으로 본훼퍼은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감방에 있던 자기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소. 그러나 기억하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이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는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서 그를 뒤덮고 있었던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나와 감옥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서 충격과 감동을 남겼습니다. 영원한 고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 참된 고향을 확신하면서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I. 고향의 의미 (신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는 고향은 뒤에 두고 온 고향이 아닌 앞에 가야 할 고향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그 만난의 고난을 무릅쓰고 앞에 있는 고향을 찾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땅이요,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과 그 땅위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살핌과 깊은 관심. 그리고 애정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고향은 하나님과 온전히 함께 하는 삶인 것입니다. 아마도 저 천국은 완전히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곳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지금 당장 죽어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고후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는 이 땅 위에서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가? 바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 주님 안에 주님 내 안에 사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천국 고향의 포근한 분위기를 느끼며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아브라함의 선택-가나안 선택-하나님을 잘 섬기고 함께 살아가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약속의 땅이 된 것 III. 소망을 주는 고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고향으로 주시면서 소망을 가지고 그 고향을 찾아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신11: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신11: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아름다운 땅인 고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소망을 든든히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고후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히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희망은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마른 광야를 지나는 세월이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지치고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말씀하시면서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이겨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앞에 있는 고향을 찾아가기 위하여 험한 광야 길을 지났듯이 우리 성도들이 영원한 가나안을 가기 위해서는 오늘의 여러 장애물들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11: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찾아가는 중에 우리는 성별해지고 훈련을 받아 강해지고 하나님과의 각별한 관계가 되어서 하늘나라 백성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명절이 되어서 고향에 가고 싶어서 모든 고난도 마다 않고 기를 쓰고 찾아가고 있는데 우리 성도들은 더 좋은 우리들의 본향을 향하여서 담대하게 전진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의 권세/ 막1:21-28/ 설날설교/ 2008-02-16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의 권세 막1:21-28 깡패로 소문났던 ‘김익두’가 변화되어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높은 산길을 오른 후에 잠시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술 취한 어떤 사람이 올라오더니, 다짜고짜 그를 때렸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때리는 대로 아무 저항 없이 한참 맞다가, 그가 지쳐 잠잠해지자 느닷없이 “예수님은 나 김익두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뜻을 알지 못한 술주정꾼은 김익두란 말에 ‘이젠 죽었구나’ 생각하며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습니다. 그 때 김익두 목사는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런 일을 다했다면, 자넨 여기서 끝장이었을 텐데 내가 예수님을 믿은 덕에 자네가 살지 않았는가? 그러니 내가 예수님을 믿고 복은 자네가 받은 셈이지”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가 미안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자, 김 목사는 그에게 부흥집회에 참석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김익두란 깡패를 변화시키어 목사로 만들었고 술주정꾼을 변화시키어 장로가 되게 하였습니다. 예쑤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세렛에서 배척을 받자, 가버나움으로 옮겨서 선교활동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선교본부라고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회장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당시 종교자도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는 권세가 있어 사람들에게 놀라운 감동과 생명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사람의 나쁜 성품도 변화시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권세란 말은 영어로 ‘authority’라고 하는데, 이 말은 ‘강력한 힘’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모든 것을 잘 처리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시 74:1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고 권세를 가지고 있고,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킬 권세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시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회당은 오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회당은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평일에는 교육, 토론, 재판 등의 장소로 사용하였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영적, 정신적, 도덕적, 요람이며 자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런 회당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가리치실 때, 권세가 있었습니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22)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진리 자체로서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 말씀에 권세가 있었고 영적 기갈이 든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었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분명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제공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실현될 소망을 주었고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해 주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며 모든 슬픈자를 위로하는(사 61:1~2)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권세 있는 말씀을 줍니다. 그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의 심령, 곧 골수를 쪼개는 능력으로 임하고(히 4:12)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여 영생의 문에 들어가도록 인도합니다(요 6:68). 그러면 회당에서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가르치셨을까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장 15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말씀을 가르치셨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생활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복음을 올바로 믿고, 생활화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처럼 말씀을 자기 입장에서 가르치지 않았고, 솔직하고 명백하게 성경 말씀 자체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회당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첫째, 예수님이 인간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발전시키지만, 특별히 사람들을 변화시켜 새롭게 살도록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그자체가 샘에서 솟아나는 생수이며(요 4:10) 우리의 골수를 윤택하게 하는 생명력(잠 3:8)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정의를 실현하도록 용기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불의와 죄악이 가득 찬 사회에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도록 능력을 주기고, 미움과 분노가 가득 찬 사회를 사랑이 가득 찬 사회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주고 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인간의 의식과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인간의 의식과 마음은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힘으로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힘으로는 인간의 의식과 마음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과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악을 정복하시고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말씀이 있고, 말씀이 있는 곳에 예수님의 권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영적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항상 모든 유익한 생활을 탈취해 갈 뿐만 아니라 탐욕에 눈이 어두워 악을 범하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사악한 마음을 갖고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사람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실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들어와 소리 질러 회당의 분위기를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마귀가 회당에 들어왔던 것처럼,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일을 방해하고 말씀을 비판하고 거부하고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마귀는 정신적으로 불안전한 사람에게는 강하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본문 23~24절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마귀도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자기를 멸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권세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가”(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환자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고 건강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중생의 경험을 하기 전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져서, 때때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였고, 교회를 볼 때마다 알레르기 거부반응을 보였으며 말씀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도록 영성을 개발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말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만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다. 마귀는 우리 신앙생활의 최대의 적입니다. 이 시간 우리 안에 있는 마귀를 예수님의 권세로 몰아내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권세는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마귀를 쫓아낸 예수님의 권세를 보면서 깜짝 놀랐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다 놀라고 예수님의 권세 있는 새 교훈과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 즉 순종하는 권세를 온 갈릴리 사방에 전파하였다(27~2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갈릴리 사방’이란 말은 ‘그 근처 사방’(눅 4:37)이란 말과 동일하며, 갈릴리 지역보다 더 넓은 범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귀를 쫓아낸 예수님의 권세가 세계만방에 전파되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권세는 어느 한 곳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성령이 임재하는 곳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의 마귀는 쫓겨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권세를 믿는 사람은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달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금의환향(錦衣還鄕)/ 수22:1-9/ 설날설교/ 2008-02-26
금의환향(錦衣還鄕) 수22:1-9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일제시대에 쓴 동요로서 수 십 년간 초등학교시절에 불려졌던 것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업화로 도시화가 급속히 형성되면서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이제 성인이 되어 고향을 다시 그리워하게 됩니다. 지난주에도 새가족 가운데 시어른이 부산에서 장로님으로 봉사하시다가 은퇴하신 후 고향이 청도라서 청도에 오셔서 살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대게는 성공의 삶을 살았을 때 가능합니다. 삶이 실패했다고 하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꺼려합니다. 우리나라 운동선수들 가운데 박세리, 이승엽, 박찬호, 박지성 그리고 피겨요정 김연아 등 나름대로 해외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성공적인 선수들이 귀국할 때보면 공항에 많은 인파가 몰리고 고향이나 모교를 방문하면 환영하는 분위기가 대단합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금의환향’이란 고사 성어를 사용합니다. 단어의 뜻은 ‘비단 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고사성어가 나온 배경은 이렇습니다. 육조(六朝)시대 양(梁)나라의 유지린 이란 사람이 남군 태수로 승진했을 때 무제(武帝)는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그대의 모친은 연세가 많고 덕망도 높으니 그대에게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今卿衣錦還鄕) 마음껏 효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노라” ‘의금지영(衣錦之榮)’이란 말도 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영예’ 라는 뜻으로 ‘금의환양’과 같은 뜻입니다. 이구절과 대조적인 성어에는 ‘금의야행(錦衣夜行)’이 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다’는 뜻입니다. 즉 아무 보람도 없는 행동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오늘은 설입니다. 설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음력으로 1월1일 새해입니다. 세계적으로는 태양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미 새해를 맞은지 2월 중순을 지났습니다만 음력으로는 오늘이 1월1일입니다. 이 날을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설이라고 합니다. 설은 한자로는 신일(愼日)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한다”는 뜻입니다. 설날의 세시풍속은 매우 다양합니다. 설날이 다가오면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자마자 복조리장사들이 복조리를 한 짐 메고 골목을 다니면서 이것을 사라고 외쳐댑니다. 각 가정에서는 1년 동안 필요한 수량만큼의 복조리를 사는데, 일찍 살수록 좋으며 집안에 걸어두면 복이 담긴다고 믿습니다. 새벽에는 거리에 나가 처음 듣는 소리로 한 해 운수를 점치는 청참(聽讖)을 행하기도 합니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둔 새 옷으로 갈아입는데 이 새 옷을 설빔이라 합니다. 아침에는 가족 및 친척들이 모여들어 정초의 차례를 지냅니다 . 차례는 모처럼 자손들이 모두 모여 오붓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차례가 끝나면 어른들께 순서를 따져 세배를 올립니다. 떡국으로 마련한 세찬(歲饌)을 먹고 어른들은 세주(歲酒)를 마십니다. 세찬이 끝난 후에는 차례상에서 물린 여러 명절음식들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이 마련됩니다. 아이들에게는 세뱃돈을 주며 덕담을 나누고 한해의 복을 빌어줍니다. 이웃 및 친인척을 찾아서 세배를 다니는 일도 중요한 풍습입니다.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는 부녀자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문안비(問安婢)라 하여 여자종을 성장시켜 일가친척에 보내어 신년문안을 드리게 했습니다. 정초에 어른이나 친구를 만나게 되면 말로써 새해인사를 교환하는데 이를 덕담이라 합니다. ”과세 안녕하셨습니까?” 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는 식으로 설날인사를 합니다. 이런 세시 풍속이 있다 보니 설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을 찾거나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흩어졌던 형제자매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그래서 명절에는 항상 이동이 시작됩니다. 명절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의 고향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나의 고향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본향, 하나님이 정해 좋은 본향, 그곳은 고린도후서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준비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 천국을 생각합니다. 히브리서11장16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나그네 인생길을 살다가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을 때 금의환향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곳에서는 비단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세마포 옷을 입게 됩니다만 그 옷을 입는다는 것 자체가 금의환향입니다. 세상에서도 금의환향의 기쁨과 영예를 안고 돌아오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노력 없이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서 피눈물 나는 경건의 훈련이나 믿음을 위한 노력이 없이는 절대로 금의환향할 수 없습니다. 금의환향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설명 드리면 이렇습니다. 모세가 죽고 난 다음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어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에 들어와 원주민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여 분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 두 지파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광야생활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전 즉,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에서 먼저 기업을 얻었습니다. 이들은 요단강을 건널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1장10절 이하에 보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백성들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요단강을 건너갈 준비로 양식을 준비 시켰습니다. 그 다음으로 조치를 취한 내용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명령하기를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도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하라” 이 명령을 받은 두 지파 반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기를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겠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합니다” 이 내용의 말씀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통솔하에 요단강을 전널 때 자신들은 동편에 머물기 때문에 그것에 남겠다고 하지 않고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이때 요단강을 건넌 장병들이 무려 4만 여명이 된다고 합니다. 이들이 내려가서 끝까지 사명을 감당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을 완전히 점령하여 차지하게 되었을 때 여호수아가 이들 두 지파 반 장정들에게 이제는 자신들이 가족이 머물고 있는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하면서 취한 여호수아의 명령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완전한 고향은 아니라 할지라도 금의환향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금의환향한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들도 금의환향하는 인생이 될 것인가를 이 말씀에서 배워서 우리 모두 금의환향하는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첫째,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다 준행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편안해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무리 형제의 일이라 할지라도 위험한 일은 쉽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가나안에 들어가면 분명히 원주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승리할 수도 패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무릎쓰고 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처자식들과 가축들은 다 두고 떠났습니다. 앞으로 몇 개월이 소요될지도 모릅니다. 기한도 없고 승리의 보장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보장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마음에는 인간적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사실 1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다 순종하겠다고 했습니다. 16-1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환영받을 사람이 누굴까요? 가장 칭찬받을 사람이 누굴까요? 돈을 많이 번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부자이십니다. 사회적 명성이 높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권세자입니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누굴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창세기26장 1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 때도 훙년이 들었는데 이삭때에도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주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리고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삭이 잘해서 되었는가? 아닙니다. 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데 그 복은 결국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의인의 삶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구약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명기28장이나 30장에 보면 항상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우리가 금의환향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은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둘째, 성실한 자세로 책임을 감당하였습니다. 일종의 희생정신이 투철했습니다. 3절에 보면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이 두 지파 반 장병들이 쉽게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가정이 없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짐승들은 모두가 요단강 동편에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가나안에 들어가 있었는가 하면,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날짜를 계산하면 약7년 정도 됩니다. 요즘 우리사회에는 기러기 아빠들이 많습니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직 형제가 가나안을 점령하는데 잠시 도와 주러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려 세월이 7년이 소요되었을 때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장애물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 무엇을 할 때까지 기다렸는가 하면, 가나안 남부전쟁과 북부전쟁과 땅을 분배하는데까지 참여했습니다. 이 두 지파 반이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이 함께 어우러져 가나안 정복 전쟁에 기꺼이 심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당신의 책임을 다 감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나의 책임의식을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실한 자세로 끝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이들이 어렵다고 힘든다고 형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일을 이루시고자 여러 가지 일을 맡겼습니다. 그 맡겨진 일에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책임감 있게 감당하셔야 합니다. 어떤 직분이든지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도 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금의환향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받은 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다시 자기의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할 때에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전쟁에서 탈취한 모든 것을 갖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들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누리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이 명령을 그대로 이들이 순종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 /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 우리가 세상속에 살면서 받은 복은 각자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즉 내가 노력해서 얻은 복이든지, 아니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복이든지, 아니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가운데서 얻은 복이든지 그 복을 함께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 동생이 부목사로 있는 서울 모 교회에 원로장로님이 계시는데 그 분은 사업을 해서 생활이 괜찮으신 편인데 형제들에게 그렇게 잘 하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모님에게 잘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형제들에게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은 출가한 여동생들까지도 잘 챙긴다고 하였습니다. 8절에 보면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이 말을 들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9절에 보면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돌아갔다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여호수아가 명령한 내용을 그대로 준행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떠나 온지 7년이 되었고 그 넓은 땅,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 눌러 앉아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다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받은 복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복으로 다시 하늘에 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세상에서 받은 복을 하늘에 쌓지 못한다면 그 복은 복으로 남지 않고 화로 미치게 됩니다. 이 내용의 삶을 살은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을 이야기 하라고 한다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롯입니다. 롯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망하는 소돔성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그동안 불신앙으로 살았던 삶으로 인해 사위고 구원 시키지 못했고 아내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나쁜 문화속에 젖어 있던 두 딸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암몬과 모압 두 족속을 태동시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는 바로 나눔의 삶을 본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만찬석에서 빵과 포도즙을 제자들에게 직접 나누어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것은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셨고,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받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어떤 부자가 친구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인생가하고 날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러나 난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증하기로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다네’ 그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암소와 돼지 이야기가 자네 한테 교훈이 될 수 있겠군. 돼지가 암소를 찾아가 불평을 늘어놓았다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자네를 정 많은 친구라고 떠들어대지. 자넨 사람들에게 우유를 제공하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나에게서 얻어가는 건 그에 비하면 많아도 한참 더 많다네. 훈제한 허벅지, 뱃살고기, 정제한 돼지기름은 물론 심지어 족발까지 한두 가지인가. 그런데 날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들에게 하는 한낱 돼지요 욕심꾸러기일뿐이야.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암소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네. ‘그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나를 내어주기 때문일거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복 혼자 누리지 마시고 이웃과 나누세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세요. 그럴 때에 우리는 장차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 금의환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의환향이 아닌 어깨가 축쳐진 모습으로 고향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예수님의 비유 중 탕자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돈을 가지고 고향을 떠났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나는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쓰소서’이런 모습으로 고향을 찾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위에서 살 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여 금의환향해야 합니다.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그곳, 본래 우리를 있게 하셨던 그곳 천국으로 말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 금의환향하는 모습으로 들어가 신랑 되신 주님 품에 안길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받은 고난을 위로받고 주를 위해 산 삶을 통해 면류관을 받게 되는 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끝까지 도우시는 분/ 삼상7:12-17/ 김청수 목사/ 새영교회/ 설날설교/ 1998-02-15
끝까지 도우시는 분 삼상7:12-17 오늘은 98년도의 설입니다. 음력으로 보면 새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오늘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왔고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며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로 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온 일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사 여기까지 이르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가 있었겠으며 오늘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기른다고 할찌라도 우리가 자녀들을 끝까지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돕고 싶어도 끝까지 도울 수 없고, 도움을 받고 싶어도 끝까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연약성과 한계성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끝까지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사59:1절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자굴 속의 다니엘도 구원해 내셨고, 풀무속에 던짐을 받은 그의 세친구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무덤 속에 장사된 나사로까지 살려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무엇입까?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시되 끝까지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 입니다. 언제나 이스라엘의 눈에 가시와 같았던 불레셋 나라가 갑작이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도우사 불레셋을 물리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삼상7:5절이하의 말씀을 보면 어떻게 불레셋을 이길 수 있었던가에 대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중요한 이유는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국가적인 위기와 난국의 타개를 위하여 그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결과는 위대했습니다. 그날 이스라엘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능력이나 그 응답에 대해서는 누누히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기도하느냐, 기도하지 않느냐에 만사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하나님의 특별하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기고난 후의 결과에 대한 기록입니다. 1.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12절에 보면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삼상4:1-2절에 보면 일찌기 이스라엘은 불레셋과 전쟁이 있었는데 그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여 무려 4000명이나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은 그 사건을 오랫동안 잊지않고 기억하고 기념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했을 때는 패했으나 이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아 승리하였으므로 그 은혜를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에 이 교훈을 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복된 민족이 되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나치 독일로부터 받았던 박해와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기념관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독립기념관이 있습니다. 주님도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또 사건을 통하여 주신 교훈을 잊지않고 기념하여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것입니다. 미국 뉴욕에 가면 세개의 공항이 있습니다. 죤 에프 케데디’를 기념하기 위한 죤 에프 케네디 공항과 뉴욕 공항 그리고 라과디아’ 공항입니다. 라과디아’ 공항 구내에는 라과디아씨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가 판사로 재직시 어느날 절도죄로 붙잡혀온 어떤 노인을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은 가난과 배고품을 견디지 못해 남의 가계에서 빵을 훔쳐 먹다가 구속된 사람이었습니다. 실정법으로는 죄인이었지만 정상을 참작한다면 그리 큰 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상만 참작해서 무죄를 선고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민하던 라과디아’ 판사는 10불의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에게는 단돈 1불도 없었습니다. 선고공판을 마친 라과디아’ 판사는 자기 모자를 벗어서 10불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방척객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노인은 배고픈 죄로 10불의 벌금을 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배불렀던 죄로 이 노인 대신 10불의 벌금을 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처럼 배부른 죄인이 있거든 이 모자 안에 벌금을 넣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그 모자안에 53불의 돈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1800년대의 이야기니까 53불이면 거금이었습니다. 그후 라과디아’ 판사는 뉴욕주의 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그를 기념하기 위해 라과디아’ 공항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념비는 세울만한 곳에, 세울만한 일을 위하여 세워야합니다. 빨리 기억에서 사라져야할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가치나 교훈이 될 수 있는 일들을 기념하는 곳이 바람직합니다. 1987년 미국 어느 교회에 있었던 일입니다. 동부에서 시무하시던 목사님이 서부로 와서 시무하던 첫해에 격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 교회에 이민온지 28년된 여신도가 있었습니다. 28년전 유학차 왔다가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독일 계통의 미국인과 결혼하여 살다가 5년전에 이혼을 한 여자였습니다. 그 여 성도가 어느날 자기 생일이라면서 심방을 요청해, 심방후 예배를 드리고 저녁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그후 몇달이 지나 다시 심방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헤어진 남편과 결혼한 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혼기념일 심방을 했습니다. 그후 몇달이 지난 어느날 세번째 심방요청을 받았습니다. 무슨 날이냐고 물었더니 이혼 기념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어니가 없고, 기가 막힌 일이라 가야할지 가지 않아야 할지 난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심방만은 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로 거절했더니, 목사가 심방을 거절하는 법도있느냐면서 다른 교회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 말씀이 이민 목회 18년에 이혼기념 예배 요청은 처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늘 잊어버릴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미움과 시기와 모든 증오심, 그리고 묵은 감정, 섭섭했던 마음들, 그 누군가에 입혔던 상처들, 격었던 어품들을 잊어버립시다. 그런 것들을 기념비 세우듯 세우지 맙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섭리와 위대하심, 그리고 나에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은혜는 기억합시다. 기념비를 세우듯 잊지말고 세우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을 막으셨습니다. 13절에 보면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손이 블레셋을 막으셨다는 것과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이 살아서 하나님께 국가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셨습니다. 출17:8절 이하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진일퇴를 거듭할뿐 승부가 나지 않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서부터 전세가 호전되면서 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피곤하여 손을 내리면 아말렉의 역습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안 모세가 손을 높이 쳐들고 좌우에서 아론과 훌로 하여금 양팔을 붙들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는 동안 이스라엘군이 아말렉을 물리치고 크게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린 여기서 모세가 든 손은 하나님의 손의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에스라7:9절에 보면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도우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37:24절을 보면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끌어주시지 아니하시면 이 예배당에 나올 수도 없고,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지 않으시면 마귀에게 붙잡여 세상으로 나가 범죄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와 함께사시는 한 내 영혼은 언제나 안전하고 든든한 것입니다. 3. 잃었던 땅이 회복되었습니다. 14절 상반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국권도, 명예도, 땅도 회복하고 도로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의 백성들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죄 때문에 잃었던 생명도 도로 찾게 해주시고, 마귀에게 빼앗겼던 존영도 회복시켜 주셨고, 잃었던 희망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잠5:7-9절에 보면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포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않고 세상과 죄를 가까이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4. 평화가 있었습니다. 14절 하반절에 보면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고 했습니다. 평화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평화입니다. 예를 들면 유엔의 평화기구나 평화 노벨상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렇게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모든 방면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유엔의 평화 유지군을 파병하며, 평화상을 수여하여 세계 평화를 촉구하고 있지만 이 지구상에는 전쟁과 싸움과 피흘림이 그칠날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노력은 매우 한시적입니다. 무슨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같다가 얼마가지 못해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 보자는 평화는 얼마가지 못하는 평화, 깨지는 평화입니다. 그것은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인간 내면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퍼지는 것입니다. 평화의 근본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눅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마다 마음에 참된 평화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점점 멀리, 그리고 넓게 펴져,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땅끝까지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참된 평화는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던 평화도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형언할 수 없는 불신과 증오, 갈등과 대립으로 그 골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안에 까지 그런 것들이 침투해 들어옴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루 빨리 평화의 은총이 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상과 죄를 버리고 여호와께 전적으로 돌아와야 하고 예배와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하님과 평화를 먼저 이루어야 합니다. 삼상7:3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고 했습니다. 오늘 평화의 사람들로 부름받은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도 쓰임 받는 사람 되게 하소서/ 출3:1-12/ 설날설교/ 2008-02-10
나도 쓰임 받는 사람 되게 하소서 출3:1-12 찬양 : 256, 258, (349) 351, 356, 360. ※ 본문 중에 인용된 성구는 개역개정판을 사용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듣는 순간, 생기의 바람이 역사 하셔서 지친 심령들이 소생함을 얻고, 세상에서 상하고 찢긴 심령은 싸매 주시는 은총의 역사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이번주간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인 설날이 있습니다. 이 명절에는 무엇보다도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서 그동안 헤어져서 살던 부모님들과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경기가 예년과 같지를 않아서 선물보따리가 크진 않아도 그래도 고향을 찾아가는 마음은 설레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번 설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평소보다 3배 이상의 긴 시간을 길에서 보내면서도 고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설날에도 우리나라의 인구가 약 3분지2에 해당되는 3천만 명 이상이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왜 이런 고생을 하면서 고향을 찾아야만 합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고향에는 그리운 얼굴들이 있고 기다려 주는 부모님이 있고 어릴 때 뛰어 놀든 향수와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명절을 지내는 풍속도(風俗圖)도 많이 변해 가고 있습니다. 명절을 맞이하여 조상들의 묘소를 찾는 것 보다, 살아계신 부모님을 찾아뵈는 것보다 이제는 명절의 연휴를 기회로 해외로 여행을 나가는 사람들로 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고 국내의 유명 관광지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 그런데 올해도 고향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북한에다가 고향을 두고 남하한 사람들은 고향을 가지 못한 설음에 북녘 땅이 바라보이는 임진강변에서 고향을 향하여 눈물짓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사명을 받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내용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쫓겨 도망을 나와서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양치기가 된지 어언 40년이 지나 모세의 나이 80이 되어 그의 머리는 백발이 되고 그의 얼굴은 몰라보리만큼 늙고 변했습니다. 일개 양치기가 된 모세를 하나님은 왜 부르셨을까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서 사명을 주고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옥 같은 애굽에서 구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 호렙산 떨기나무에 불꽃의 모습으로 강림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80이 넘어 백발의 노인이 된 모세를 불러 사명을 맡기신 것처럼 오늘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계획이 있고 사명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다 같이 한 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도 모세처럼 쓰임 받게 하소서 주여! 나도 이 시대에 모세가 되게 하소서 <아 멘!> 1. 먼저 모세가 부름 받을 당시의 형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모세의 지금 형편은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진 존재입니다. 모세는 애굽 나라의 공주의 양아들로서 문무를 겸비하고 정치 경제 문화 군사학에 통달하여 애굽 나라의 차기 왕으로써 지목 받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세상 사람들은 모세의 존재에 대하여 까맣게 잊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아무도 모릅니다. 그는 목동으로 변신하여 숨어 지내는 은둔자요 실패자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바로왕의 궁전에 있을 때에는 누구나 그를 존경하고 우러러보았고 그의 말은 곧 왕의 어명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지도자가 되면 어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리라는 포부와 욕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여 애굽 사람 하나를 죽이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 하나를 죽이고 나서 자기가 지도자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우쭐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신앙도 없이 하나님 없이 누구를 도와준다고 하는 것이 자칫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런 모세는 지금 살인자요 도망자요 양치기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그렇게 일생을 마무리하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그대로 두시지 않고 호렙산 기슭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모세를 하나님은 찾아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발견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빌3:8)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사도행전13:22절 말씀에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기를 이제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포기하고 낙심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과 사라도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의 나이 90세 때에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였을 때에 이삭을 낳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신약의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간신히 탈출하여 달려왔는데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의 기병대가 추격을 해 오고 있는데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낙심하고 좌절할 때에 하나님은 홍해를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에야 구원의 손길을 펼쳐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3)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기에 형편없는 인물도 크게 쓰시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전혀 불가능한 것도 하나님은 크게 쓰시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21: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사도 바울은 (고전1:27-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이스라엘의 왕을 세워 기름을 부으려고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갔을 때에 이새는 그의 아들 일곱 명을 사무엘 앞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막내 다윗은 들에서 양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사무엘은 그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고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군이 되었습니다. 2. 두 번째로 상고할 말씀은 모세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호렙산은 처음 온 곳이 아닙니다. 매일같이 그곳을 양을 몰고 지나치며 양을 치는 곳입니다. 모세가 일상적으로 다니는 곳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닙니다. 다만 자기의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2: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메시야 구세주가 탄생하심을 알려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목자들도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열심히 하는 중에 메시아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아 멘> 여러분의 가정생활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아 멘> 오늘도 일상적인 생활처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 교회, 이 제단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호렙산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신앙생활이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믿음의 생활이 일상화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은 임재 하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 멘> 기도의 생활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루에 세끼 식사는 완전히 생활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지 않고 출타 중에라도 여행 중에라도 때가 되면 식당에 가서라도 식사를 하고 아니면 차안에서라도 먹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기도 생활도 완전히 생활화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모세는 늘 다니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나오는 교회 생활에서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 여러분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여러분들이 날마다 교회를 오고 가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렘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3.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모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1)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겸손을 나타냅니다. 엎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열왕기상 18:42절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모든 제물을 살랐고, 3년 반 동안 오지 않던 비가 내렸습니다. 엎드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이 보입니다. 엎드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엎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마가복음 5:25절 이하의 말씀에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잡을 때 그의 혈루가 고침 받은 기적의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로 다가가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사람들에게 밀려서 도무지 다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열두 해를 앓던 여인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밀려서 엎어지니까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예수님의 옷자락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얼른 손을 내 밀어 그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옹위 하면서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스쳤으나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은 오직 이 여인이 엎드려 옷을 만졌을 때에 예수님의 능력이 역사 하신 것입니다. (2)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발에서 신을 벗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에게만 신을 벗으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도 여리고성을 점령하기 전에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 나타나서 신을 벗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풍속에 아버지가 죽으면 장자가 그 재산을 상속받는데 이 때 작은 아들이 가난하여 살기가 어려우면 그 장자가 자기의 재산상속을 동생이 받도록 권리를 포기할 때 신발을 벗어 던지는 풍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최대한으로 낮추는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또 신을 벗는 것은 고통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윗 왕은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에 밤에 신을 신지 못하고 울면서 피난을 갔다고 하였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모든 유산이나 배경이나 환경을 버릴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습니다. 그 잘난 자존심이나 명예를 다 버릴 때 주님의 영광의 옷자락이 보이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사도 바울은 빌3:8절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버리고 나니까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크게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주님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멘> 4.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 것처럼 오늘의 우리에게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바로 모세만이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이 시대에 여러분을 이 교회를 통하여 부르신 것은 여러분만이 감당할 수 있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모세에게는 애굽에서 고통 중에 있는 동족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사명을 받았습니까? 바로 가족을 구원해야 할 사명입니다. 언제까지 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이제는 때가 임박하였습니다. 다 같이 찬송 258장 1절을 부르겠습니다. 물 건너 생명 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우리의 가까운 형제이니 이 생명 줄 누구가 던지려나 생명 줄 던져 생명 줄 던져 물속에 빠져간다 생명 줄 던져 생명 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정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주셨다는 그 사명 의식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또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위대한 인물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여 많은 영적 열매를 맺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5.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함께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12절 말씀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는 아무도 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모세와 함께 해 주신 하나님이 지금까지도 나와 함께하여 주셨기에, 오늘의 여러분과 내가 있을 수 있고 또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 멘>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 하나님은 뜻과 섭리와 계획이 계셔서 그 하나님의 Program속에 여러분을 포함시켜 계속하여 역사하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성도 여러분!! 모세만이 위대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모세가 위대하였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 21세기에는 여러분도 모세와 같이, 어쩌면 모세보다 더욱 위대하고 하나님 손에 붙들려 더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이 시대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소명 받은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할렐루야!!!!!! 믿는 자에게 축복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꿈을 가진 사람의 그 꿈을 축복하십니다. 요셉은 어려서 꿈을 꾸고 그 꿈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을 때에 하나님은 그 요셉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가진 사람의 믿음을 축복해 주십니다. 아 멘.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모세가 은둔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 말씀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잠들어 있을 때 침체되어 있는 동안 우리 주변의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 이사야와 같이 “나를 보내소서”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