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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롬9:1-5 2014-04-02 15:07:48 read : 14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즘 우리나라는 일본과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그런 고통과 아픔을 가지게 됩니다. 남의 집 가정에 들어온 강도가 안방을 차지하고 이 집은 내 집이라고 외치는 정말 분통이 터지는 일을 일본이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지난 날 이 땅을 찬탈하고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위안부 등으로 끌고 간 사람이 100만명 넘습니다. 지금도 일
3.1운동 /롬9:1-5 2014-04-02 15:07:48 read : 14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즘 우리나라는 일본과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그런 고통과 아픔을 가지게 됩니다. 남의 집 가정에 들어온 강도가 안방을 차지하고 이 집은 내 집이라고 외치는 정말 분통이 터지는 일을 일본이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지난 날 이 땅을 찬탈하고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위안부 등으로 끌고 간 사람이 100만명 넘습니다. 지금도 일말의 양심을 버린 채 당시 조선인 희생자들에게 개별적으로 피해 보상을 해주기는커녕 사과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몇해전 부터 미 의회가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분명한 잘못임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법적 책임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심지어 ‘역사를 왜곡해서 만든 교과서를 버젓이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니 정말 가슴이 미어지듯 통분하는 심정입니다. 거기에는 위안부 문제 같은 것은 아예 빼버렸고 대신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젠 아예 극우 보수 진영들이 나서서 다케시마 행사를 독려하는 후안무치한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어제 95년 전에 빼앗긴 조국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우리 선조들의 피가 맺힌 3.1절을 가졌습니다. 오늘 교회도 3.1절 기념 예배로 드리는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라의 주권과 언어와 영토를 빼앗긴 그 아픔을 지난 36년간 정말 뼈가 저리도록 느끼며 살아 왔습니다.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200여만 명이 참가하여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고 위키 백과사전은 삼일운동 전모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삼일독립운동이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 사랑한 애국애족운동의 정신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당시 1600만명의 국민 가운데 1.3%가 한 20만명 정도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수가 당시 민족을 일깨우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리더였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승훈과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삼일독립운동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 운동의 준비과정과 조직, 그리고 온 민족이 참여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기록을 보면 우리 민족의 대표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이었으며, 거사 준비 과정에서 중심되는 인물 48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24명 이었다고 문헌은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3·1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는 소수였지만 이 민족을 이끌었습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절망 가운데 지쳐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를 세워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했습니다. 병원을 세워서 죽어가는 이 땅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키가 고장난 배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상 부흥의 기적을 이루었던 한국교회는 지금 선교 130주년을 맞이하여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을 다시한번 직시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 기독교가 이 민족을 살리는 역할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에게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불편한 심정은 1절에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큰 근심이 되었고, 그 근심이 지나쳐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육체가 아픈 것을 고통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아픈 것을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아픔이 지나쳐서 그것이 바울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자기 동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 때문에 큰 근심이 되었고, 이 근심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큰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큼 고통했느냐 하는 것은 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는 말씀에서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인데,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데마’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 없지만,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형제, 나의 친척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와 같은 기도가 출 32:32에도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사하지 아니하시려거든,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주옵소서』 정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이의 영혼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를 드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아침!! 여기 모인 우리에게도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 부르짖음이 있습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한 때 도움이라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바울에게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이 피를 토하듯 끌어안고 기도하며 사랑했던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을 배척했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같이 바울은 일생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평생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태장을 때린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자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자기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칠만큼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갈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핍박할수록, 견딜 수 없는 자리까지 고난에 빠뜨려도 오히려 바울은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더 간청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워해 달라고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그는 안타가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10: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동족을 보면서 바울은 끊임없이 고통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의 고통에는 자기 민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원통해서 답답해하는 마음, 무엇이나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계란을 내 손에 아무리 오랫동안 쥐고 있어도 병아리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암탉이 계란을 품고 있으면 병아리가 태어납니다. 내 문제를 내가 끌어안고 있으면 여전히 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품에 안겨 드리면 주님께서 새롭게 바꾸어 주십니다. 내 자식의 문제를 내가 끌어안고 있으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내 숙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내 자녀를 올려드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내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사업의 문제 모두 내가 붙잡고 있으면 여전히 내 문제가 됩니다. 이 민족의 앞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아시지 않습니까? 무너진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응답되어 성벽이 재건되고 백성이 소망으로 가득한 삶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제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에 올려 드리십시오.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기도하는 손은 절망의 감옥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기도하는 손은 하늘의 능력과 기적을 가져옵니다. 기도하는 손은 치유와 회복을 일으킵니다. 기도하는 손은 모든 원수를 물리치는 능력을 가져옵니다. 지금 바울이 이처럼 자신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자신의 동족을 위해 이 몸부림치는 기도는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도까지 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기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보았습니다. 견딜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이 얼마나 큰가를 보았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신을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였던 자기를 그 완악함과 그 더러움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의 용서의 진액으로 사랑의 보혈로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가슴을 안고 자기를 핍박하는 동족을 향해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섬김과 희생과 봉사로 그들을 복음으로 끌어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95년이 지난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역사 이래 이렇게 잘 사는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역사 속에서 이렇게 평화롭게 살았던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굶주림으로 시달렸던 나라가 이제는 경제 규모가 세계 12위권에 진입하였습니다. 선교를 받던 나라가 지금 169개국에 2만 5665명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미국 다음으로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평균 수명이 42년에는 45세였는데 지금은 여성은 84세 남성은 77세가 되었습니다. 대학교도 47년에는 학생수 2만, 학교 24개였는데 2012년에는 학교 251개로 대부분 대학에 다닐 수준이 되었습니다. 자동차도 48년에는 1만 5천대이었던 것이 지금은 가정마다 차가 있습니다. 세계 조선 산업 1위입니다. 세계 철광 제조 산업 1위입니다. 반도체 생산률 1위입니다. 컴퓨터 보급률 1위입니다. 초고속 통신망 보급률, OECD국가 중 초고속무선인터넷 보급률100%는 대한민국뿐입니다. 학교 정보화 시설, 대학진학률 세계1위입니다. 산업혁명으로 근대 지구촌 고도성장의 전형으로 꼽히는 영국은 170년간 9배의 GDP 파이를 키웠고 일본은 57년간 14배의 GDP 성장세를 보였지만, 한국은 1960년 이후 48년간 32배로 국부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는 8년째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가정이 중독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민 8명 중 1명이 알코올이나 인터넷, 도박, 마약에 중독돼 사회경제적 비용만 연간 109조 5,000억 원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중독 전문가 단체인 ‘중독포럼’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알코올 중독자는 155만 명, 인터넷 중독자는 233만 명, 도박 중독자는 220만 명, 마약 중독자는 10만 명으로, 우리나라 인구 약 5,000만 명 중 618만 명이 4대 중독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인명을 경시합니다. 범죄 시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8시간 10분마다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점점 사람 생명의 존귀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명경시 풍조는 자연스럽게 황금만능주의, 쾌락 지상주의로 연결이 됩니다. 일 년 술값으로 14조, 성매매로 24조가 소비된다고 합니다. 성매매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는 33만 명으로 이는 20, 30대 여성 취업 인구의 8%나 된다고 합니다. 쾌락이면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을 찾아가는 불나비처럼 쾌락의 불더미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내일은 정말 암담해 질 수 있습니다. 기미독립만세를 부른지 95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3·1독립운동에는 유관순 열사와 같은 어린 여학생들까지 참여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도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습니다. 선조들의 애국정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 은 후손들에게 바른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후손들에게 건강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 고민하고 기도합시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기를 보나 저기를 보나 의지할 곳이 없어 보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침략성이 강한 일본과 중국, 러시아가 버티고 있는데다가, 남북이 양단된 채, 강한 무기로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가장 든든하게 여기던 우방 미국도 이제는 점점 자국이기주의와 패권주의로 치닫고 있음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의지할 곳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어느 때 보다 한국교회의 책임이 너무나 큽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가장 필요한 것은 800만이다, 1000만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남은 자,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빛과 소금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숫자가 100만만 되어도, 아니 남은 자가 10만만 되어도 하나님은 이 나라를 강하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 때문에! 이 민족의 미래가 소망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물고기가 짠 바닷물 속에 있어도 생명이 있으면 마음껏 헤엄쳐 다닙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으면 허연 배를 위로 하고 둥둥 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면 나 자신의 힘이 아니리 그분의 능력으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됩니다. 바뀌는 삶이 아니라 바꾸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물드는 삶이 아니라 물들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동성의 성도들이 이 마지막 때에 아무리 사회가 도덕적으로 혼탁 할지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넓은 길로 갈지라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보시에게 합당한 의인의 길로 감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과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합시다. 아-멘
3.1운동과 감리교회/ 갈5:1-13/ 삼일절기념주일설교/ 2004-03-01
3.1운동과 감리교회 갈5:1-13 오늘은 3.1운동 84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주후 1919년 3월 1일은 일제 탄압에서 우리 민족은 서울, 평양, 대전, 광주, 대구 등의 도시를 비롯하여 방방곡곡에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한국인은 자유인이라는 것을 세계에 호소한 바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말하기를 1919년을 ”아시아의 위대한 자각과 독립의 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3월 1일. 한국 민족의 만세 독립 운동이고, 둘째, 3월 30일. 간디의 영도하에 있었던 영국에 대항하여 인도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이며, 셋째, 5월 4일. 중국 북경 대학생들의 항일시위 운동이 그것인데, 이들 세 운동의 특징을 본다면, 하나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민족의 생존권과 자유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전민족이 참여하는 총체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이때에 우리 민족은 불가항력 속에서도 3.1운동을 일으키게 된 동기는 첫째로, 1910년에 일본에게 강제로 병합된 이후 말할 수 없는 일제탄압으로 고통과 망명의 쓰라림을 당하여 자유와 독립을 달라는 폭발이고 둘째는, 인권의 유린과 굶주림으로 시달리며 말과 성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과정에서요, 셋째는, 1914년에 시작된 세계대전 이후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의 완전 승리로 전쟁이 종국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의 영구평화를 희구하면서 그의 기본적 조건으로 14조의 원칙 중에 세계민족은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라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시함으로 조국광복의 기회를 찾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는 큰 희망을 주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이유들이 3.1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맨주먹으로 나아가 만세를 불렀습니다. 모두 2백만 애국 시민이 참여했습니다. 4만 6천 명이 투옥 당했습니다. 1만 5천여 명이 피살되었습니다. 이렇게 돌멩이 한 개도 들지 않고 총칼 앞에 맞서서 비폭력 무저항 투쟁을 벌인 것은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자유 수호 정신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처럼 사람은 본래가 조물주 하나님께로부터 창조함을 받을 때에 자유함으로 받았습니다. 평등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계급과 귀천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인간들의 조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일본의 한 시인은 어린이가 출생하면 첫 음성이 우는 것이라 하지 않고 그것은 자유의 감탄사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면 누구나가 분가를 원하는 것은 인간 기본의 자유의 갈망에서라는 것입니다. 본문 갈라디아서 5: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고 계속해서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자유를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① 정치적인 자유를 위하여 자신을 불살라버린 애국자, 우국지사가 많이 있습니다. ② 경제적인 자유를 위하여 조국도 버리고 형제도 친구도 버린 이들이 많습니다. ③ 육체적인 향락의 자유를 위하여 신앙도 버리고 가족도 친구도 버리고 후회하는 이가 많습니다. ④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명예도 물질도 초개같이 버리는 이도 많습니다. ⑤ 종교적인 자유를 위하여 그의 인격도 자존심도 버리고 순교적인 길을 택하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어떠한 자유이든지 그 자유의 보장되는 기초가 있습니다. 3.1운동은 그 당시에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자유의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3.1운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운동이기에 지금까지 고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정신을 간직하고 부패와 타락과 거짓된 양심을 회복하고 3.1운동의 위대한 교훈을 살리는 운동이 벌어져야 이 조국에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3.1운동을 종합 분석해 볼 때 1. 우리 감리교회는 중앙에서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박희도 전도사님을 중심해서 서울에서 운동을 벌여 평양, 원산, 수원, 천안, 공주 등지에까지 확산시켜 3.1운동의 핵심 역할을 하였습니다. 2. 우리 감리교회는 중앙에서만 한 것이 아니라 최일선에서도 가장 많이 운동을 하였습니다. 지방운동 대표 6명중 4명으로, 평남의 책임자는 신홍식 목사님, 개성과 황해도는 오화영 목사님, 함남은 정춘수 목사님, 경기과 충청도는 김세환 선생님 등으로 평북과 경상 전라도를 제외한 전역에 걸쳐 3.1운동을 하였습니다. 3. 우리 감리교회는 학생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만세 운동을 배재 학교, 이화 학교, 배화 학교, 송도고보 학교 등 많은 감리교 계통 학교들이 주동이 되어서 전 한국에 흩어져 있는 여러 미션 스쿨이 일어나 계속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4. 3.1 독립운동에 성도는 참여했어도 교회는 참여하지 아니했다고 하니 우리 감리교회는 교회들이 독립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참가하였습니다. 서울의 상동/정동/중앙감리교회를 모체로 해서 많은 교회들이 참가하였습니다. 특별히 평양에서는 다른 교파에서는 학교에서 운동을 하였지만 감리교회는 남산현 교회당에서 봉도식도 하고 3.1운동을 벌렸습니다. 5. 우리 감리교회는 여성들의 활동이 특이하게 나타났습니다. 서울, 평양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단체에는 우리 감리교 여선교회 회원들이 대거 참여하여 그 지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타교파나 일반인과 함께 할 때라도 언제나 감리교인은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6. 우리 감리교회는 해외활동에서도 특이하게 참가하였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의 현 순, 손정도 목사님을 비롯하여 미주에서의 감리교인의 활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감리교회는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대담하게 역사에 참여해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개인의 구원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원을 적극적으로 힘쓰는 역사적인 감리교회 였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한국 감리교회는 민족교회로서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애국적인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당시 조선민족대표 33인 중에 천도교인이 15명, 불교인은 2명 뿐이며,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 중에 10명이 감리교인이며, 7명이 감리교회 목사님이신데, 이필주, 길선주, 김창준, 신흥식, 신석구, 오화영, 정춘수, 최병훈 목사님이십니다. 그때는 어디나 감리교회가 많은 곳은 더욱 피해와 희생자가 많이 나타났으며, 그중에 대표적인 지역이 수원이었으며, 29명을 성전에 몰아 넣고 불질러 죽인 제암리교회도 감리교회입니다. 제암리교회는 1905년 선교사 아펜젤러의 전도를 듣고 기독교에 입교한 안종후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또한 유관순 열사도 1920년 10월 12일, 17살의 나이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몸이 7토막이 되어 죽어갔는데, 그것은 그녀가 이화학당에 다닐 때 정동감리교회에 출석하면서 손정도 목사님으로부터 애국 신앙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서재필 선생님은 갑신정변으로 미국에 가서 12년만에 돌아올 때 그는 성도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다음 그는 계속 감리교 정동교회의 목사님인 아펜젤러의 집에 있으면서 정동감리교회를 다녔으며, 그런 관계로 독립신문을 만들 때 남감리교인 윤치호 선생님과 만나고 또 감리교 삼문출판사 책임자인 헐버트를 통해 그의 인쇄소에서 신문을 발간하였습니다. 그는 또 아펜젤러의 소개로 배재학당의 선생님이 되었으며 거기서 학생들 중심의 토론단체인 협성회도 조직하였습니다. 그가 설계와 공사감독을 한 독립문 정초식만 해도 마치 기독교의 예배의식과 같았는데 그것도 모두 아펜젤러와 정동교회 그리고 배재학당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의 독립신문, 협성회, 독립협회 운동은 그가 떠났어도 이상재, 정 교, 윤치호, 남궁억, 이승만, 안창호, 신흥우 등에 의해 계속되었고 그 가운데 이상재와 안창호를 빼놓고는 모두 감리교인들이었습니다. 남궁억 선생님은 감리교회 장로님이시고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송도 지으시고 무궁화나무 묘목을 길러 전국적으로 무상으로 나누어 주시기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들려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진 고문과 취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겁냄이 없이 정정당당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때 취조관이 묻기를 ”조선이 꼭 독립되리라고 확신하는가” 물었습니다. 그때 대답이 ”우리 민족은 자고로 타민족의 침략을 받은적이 없고, 혹 침입을 당했어도 오래 가지를 못했던 것이니 꼭 독립이 되리라고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굽히지 않자 일본인 경찰서장이 직접 나서서 전향을 회유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나이 70으로 이제 다 산 몸이 전향을 한다는 것은 개가 웃을 일이다”라고 하면서 끝내 굴복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애국자 월남 이상재 선생님은 일본총독이 하사금 5만을 줄테니 공연히 고생하지 말고 시골에 내려가서 여생을 평안히 쉬라고 일본경찰이 와서 전할 때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처음부터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고생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거절하고 구국운동으로 일평생을 바쳤다고 합니다. 우리의 조국은 지금도 이러한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리교회 후예들입니다. 후예들 답게 멋지게 살아요. 아 멘. ①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② 나는 내 조국과 내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겠노라(출 32:32). ③ 나는 내 가정과 내 제단을 지키겠노라(딤전 5:8).
3.1운동과 감리교회/ 시126:1-6/ 삼일절기념주일설교/ 2003-03-01
3.1운동과 감리교회 시126:1-6 올해는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민족의 참담함을 참을 수 없는 울분으로 3.1 대한 독립 만세운동을 벌인지 84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역사는 대략 이렇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끝나고, 개항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쇄국에서 개항으로의 정책변화는 봉건체제를 해체시키고 근대 사회로 전환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1876년 2월 (고종13년) 당시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국제 조약이었으나 불평등조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해 끊임없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면서 급기야는 1910년 8월 22일 일본의 3대 총독인 데라우찌와 매국노 이완용 사이에 한일합방을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대한민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을 협박함으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인해 일제의 한반도 침략은 완성이 되고 한국은 35년에 걸친 식민지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1910년은 경술년이기에 이때 한일합방의 선언은 국가적인 치욕의 해이기에 한일합방이라는 말보다는 경술국치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우리 민족은 길고 긴 식민지의 생활로 접어들면서 우리 나라 말도 잃어버리고 이름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런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하자는 운동이 3.1 만세 독립운동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누군가의 아들과 딸로 태어나기 마련이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가 속한 사회의 한 일원이 되는 동시에 한 나라의 국민이 됩니다. 그러기에 인간이란 자기가 속한 국가를 운명적으로 택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의 선택은 운명이요 숙명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기 싫다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잘사는 집에서, 가문 좋은 집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그대로 될 수 없는 것과 같이, 문명과 문화와 경제가 발전된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난 후 직장과 살아 갈 곳과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부모의 선택이나 나라의 선택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자신의 운명이 동시에 그 국가의 운명이 곧 자기의 운명입니다.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 이것이 나와 국가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외부의 침략을 받게 된다 이것은 마치 자기 몸의 일부가 해를 입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며, 나라의 경제가 어려우면 모든 국민들이 함께 살기가 어려워지고, 나라에 좋은 일이 생기면 마치 내가 좋은 일을 당한 것처럼 기뻐하는 이유가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땅에 6.25와 같은 전쟁이 일어난다면 나라가 살면 내가 살고, 나라가지면 내가 지는 것입니다. 국가는 영토와 국민 그리고 그 국민이 가지는 주권으로 구성됩니다. 아무리 영토가 있다고 할지라도 국민이 없을 때 그 영토는 한 국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또한 아무리 한 민족이 유구한 오랜 전통을 가지고 단일 민족으로 존재한다고 하지만 국토가 없을 때 그 민족은 한 국가를 수립할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국토 없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면서 제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독일의 나치에 의해 가스실에서 6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영토 없이 남의 나라에 사는 것의 서러움을 톡톡히 맛본 것입니다. 그러나 영토도 있고 국민도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국가가 설립될 수는 없습니다. 국가에는 국가가 가지는 힘이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주권은 나라의 힘입니다. 주권이 없는 민족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 우리 민족의 일제 35년 간의 식민지 생활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국민이 있었습니다. 국민들이 살아갈 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겼습니다. 우리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우리 나라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일본의 이름을 가져야 했습니다. 우리의 재산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들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집에 들어와서 주인 노릇을 하면서 전기도 못쓰게 하고, 말도 못하게 하고, 아이들을 욕하고 때리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서 주인행세를 한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장로님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세입자가 법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말 죽을 맛일 것입니다. 집의 주인으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 들어 사는 사람에게 조롱이나 받고 멸시받으면 얼마나 치욕스럽고 괴롭겠습니까? 바로 우리 나라가 일제 식민지하에서 그런 대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기 위해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벌인 운동이 3.1 독립 만세 운동인 것입니다. 이념도 사상도 종교도 지역도 뛰어 넘어 하나가 되어 외쳤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를 말입니다. 민족대표 33인이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대한 독립을 향한 민족의 의지를 전세계에 표명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 천도교인들이 15명, 불교인이 2명이 참가하게 됩니다. 그 기독교인 16명 중에 감리교회에서는 이필주 목사, 신흥식 목사, 정춘수 목사, 최성모목사, 오화영 목사, 신석구 목사, 박동완 전도사, 박희도 전도사, 김창준 전도사 9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한국 감리교회는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며 민족과 하나가 된 민족적인 교회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감리교회의 교리장정에도 “한국 감리교회는 한 세기 역사를 통해, ‘한 말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족이 처한 사회. 국가적 상황과 현실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의 구원을 구현하는 민족주의 신앙 전통’을 계승하여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는 민족과 세계 복음화 민족의 평화 통일 그리고 세계 인류의 평화 공동체 구현을 위한 선교 사명이 있음을 확인한다.”고 정해놓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 때문에 감리교회는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1 운동을 생각하면 우리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류관순 열사입니다. 그는 이화학당의 학생이었으며 매봉 감리교회의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에 내려가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때 류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일본군의 칼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제암리 교회와 수촌 교회에서도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당시 만세 운동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지르고 총을 쏴서 주민들과 교인들을 모두 학살하는 사건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암리교회와 매봉교회는 지금도 감리교회에서는 성지화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 둘러보면서 민족과 함께 했던 감리교회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 시인은 노래하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였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고 노래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민족 보다 더 오래되고 깊은 식민지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간 이후 그들의 애굽에서의 역사는 기나긴 식민지의 생활이었습니다. 430년의 식민지로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말 할 수 없이 수치를 당하고, 조롱과 고달픈 생활을 살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의 식민지에서 해방시키시는 유월절의 기적을 행사하십니다. 그들이 노예의 생활에서 해방될 때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BC 722년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유대민족 마저도 BC 586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가서 세계 각 국에 퍼지게 됩니다. 그 백성들이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의 서글픔을 시137편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137편 기자는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는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생각하면서 수 천리나 떨어진 이국 땅의 강가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수금이 있었는데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보고 노래를 청하는데 자기들을 위해 여호와의 노래를 불러보라고 조롱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시인은 “우리가 이방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하면서 노래부르기를 거절하고 수금을 바벨론 강변 버드나무에 걸어두었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주권을 상실한 민족의 아픔을 절절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참담한 식민지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혀에는 찬양이 가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도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꿈꾸는 것 같아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차는 시인의 노래의 성취를 꿈꾸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입니다. 누가 해방시켰는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2 - 3절에서도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해방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독립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독립운동 당시 감리교회는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독립시켜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민족의 독립을 맡기면서 함께 민족의 독립을 위해 나섰던 것입니다. 감리교회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기도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기도하고는 하나님께서 독립 운동 속에 역사하여 주심을 믿고 나섰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만 하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고 기도의 응답을 성취하기 위해 발로 뛰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니엘은 기도만 하고 앉아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자 굴에서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을 확신하면서 기도의 응답을 바라보며 사자 굴에 들어갔던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감리교회의 일원이라면 민족을 사랑하는 감리교회의 정신을 이어 받아야만 합니다. 내가 감리교회의 교인이라고 한다면 선배 감리교인들이 보여 주었던 나라 사랑의 실천을 몸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이제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독립 만세 운동이 있은지 84년 뒤인 지금으로 돌아와 봅시다. 84년 전에 이 민족은 주권을 잃어버려 되찾기 위해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대한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84년이 지난 지금 우리 나라는 심각한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나라는 독립이 되었지만 국론은 분열되고 심각한 사상대립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올해 3.1절인 1일은 서울 시내 곳곳에서 보수와 진보진영이 주최하는 대규모 집회가 별도로 열렸습니다. 한국자유 총 연맹과 6.25전쟁 납북인가 가족협의회, 61개 교단이 가입한 한국기독교 총 연합회의 보수진영은 ‘주한미군 감축 반대, 북한 핵 개발 저지, 김정일 반대’ 등을 외쳤습니다. 반면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와 여중생 범대위 전쟁반대 평화실현 공동실천 등의 단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민족자주 반전평화 실현 촛불 대 행진을 하였습니다. 누가 옳은지 가치관이 흔들립니다. 보수진영의 사람들의 외침 속에도 귀담아 들을 말들이 있습니다. 진보진영의 사람들의 부르짖음 속에도 귀담아 들을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상대방의 말에는 귀를 막고 너희들은 틀렸다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만이 옳다고 목소리만 높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표출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그 도를 분명 넘은 것 같습니다. 진보는 빨갱이, 보수는 수구꼴통 이런 등식으로 상대를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이념의 식민지 시대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 식민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즐기는 분위기입니다. 이제 이 땅은 제 2의 독립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고 노래할 수 있는 시대가 빨리 도래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민족의 하나 됨을 맡기면서 우리들은 기도하고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하는 성도들이 됨으로 자랑스러운 감리교회를 만들어가며 위대한 감리교인의 삶을 살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1운동과 기독교 정신/ 마6:33/ 2009-03-01
3.1운동과 기독교 정신 마6:33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1960년대에 큰 변화가 있었던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싱가포르, 필리핀, 그리고 한국입니다. 싱가포르는 1965년에 말레시아로부터 독립하여 나라를 새롭게 세우게 되었습니다. 리콴유가 초대 수상이 되어 26년간 장기 집권을 했습다. 싱가포르가 말레시아로부터 독립하던 해인 1965년에 필리핀은 페르난도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마르코스도 20년간 장기 집권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박정희가 1961년에 5·16 쿠테타로정권을 잡고 1963년에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합니다. 당시의 경제 상황을 보면 세 나라 가운데 필리핀이 가장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그다음이 한국이었고, 다음이 싱가포르였습니다. 우리나라가 필리핀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싱가포르는 자국의 대표단을 우리나라에 보내 경제 발전의 동력을 배워갔습니다. 그런데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달라졌습니다. 가장 가난했던 싱가포르가 가장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싱가포르에 경제 발전의 모델이 되었던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못 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경제적인 지원을 했었던 필리핀의 국민소득은 1000 달러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성경에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 는 말씀이 세 나라에 적용 된 것 같습니다. 자원이나 인구를 보면 아마 필리핀이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원이나 인구를 보면 싱가포르가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뛰어 넘어 나라의 부강함이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자원과 인구가 가지고 있는 힘이 나라의 부강함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면 무엇이 힘이 되었겠습니까? 우리들은 그 부분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라를 다스렸느냐?’의 차이입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얼마나 정직하냐?’의 문제입니다.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싱가포르는 리콴유가 총리가 되어 청렴결백하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자리를 잡을 수 없도록 정직한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공무원의 비리는 결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싱가포르에 가 보지는 않았지만 거리에 휴지 하나 발견할 수 없답니다. 도시 환경과 연관시켜 껌까지도 엄격하게 관리하는 나라입니다. 질서있게 잘 세워진 나라입니다. 반면에 1960년대에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부유했던 필리핀은 페르난도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되어 다스렸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은 마르코스는 국민들에 의해 해외로 추방되고 맙니다. 나라 곳곳이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있습니다. 수시로 쿠테타가 일어나 정국이 불안합니다. 사회가 무질서합니다. 결국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과 각 분야의 전문가들, 그리고 국민들은 각자의 주장과 방법을 쏟아냅니다. 경제 회복과 발전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되어 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경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경제 회복과 성장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에 더 시급하게 세워야할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너진 정신의 세계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정신세계가 성숙하지 못한 개인과 사회는 경제적인 부를 관리하며 누릴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정신의 세계가 튼튼히 세워지지 않는 상태에서 경제적인 부가 주어지면 그 경제적인 부는 어김없이 폭력과 성적 음란으로 빠지게 됩니다. 선진국이란 성숙한 정신 세계 위에 경제적인 부를 세운 나라를 말합니다. 정신의 세계가 부정과 부패로 무너져 있는데 그곳에 경제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선진국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성은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한 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밤이 되면 도시 전체가 향락에 빠져 불야성을 이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적인 세계는 피폐해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는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갔을 때 그곳의 사람들은 동성 연애를 하기 위해 천사들을 내어 놓으라고 집주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그 성을 심판하실 만큼 소돔과 고모라 성은 타락해 있었습니다. 정신적인 성숙함이 없는 경제적인 부는 결국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한 것은 경제가 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한 이유는 의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 명의 의인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세계가 무너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사회가 바뀌려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사회는 절대 변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다거나 부부간에 문제가 있어서 한 지붕 밑에 살아도 밤낮으로 싸우며 괴로워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가 주말 저녁에 팔짱을 끼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백화점에서 맘껏 쇼핑을 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남편이 변하든지, 아내가 변하든지 아니면 둘이 다 변하든지 해야 합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잠시 동안은 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바로 되려면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그것도 악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변해야 합니다. 사람이 변하면 나라가 변합니다. ‘에콰도르’ 는 중남미의 조그마한 국가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 불쌍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사법제도는 형편없어서 누군가가 기소되면 미결수로서 4-5년을 지내야 정식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도 뇌물을 쥐어 주지 않으면 10년이 걸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일단 한번 무슨 일로 혐의를 받아 구치소에 들어가면 자기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구치소에서 4, 5년을 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뇌물을 주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곳에서 10년 동안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인간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현실의 모순과 고통을 마음 아파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호르에 크레스포 박사라는 분입니다. 그는 그 나라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법을 전공한 법학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나서 발견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은 자기가 믿는다고 말하는 대로 사는데 있다.’ 곧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참된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는 데 있다.’ 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나혼자 구원 받으면 된다. 나혼자 복 받으면 된다. 나혼자 주님과 동행하면 된다.’ 는 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사회 전반에 드러나도록 쓰임 받는 것이 신앙생활의 진수라고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법제도와 교도소를 개혁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나섰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두 번이나 투옥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사법제도를 개선하는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하셨습니다. 거기에 미결수는 3년 이내에 반드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백성들이 의인이 되어서 그 사회의 일원이 되면 그 사회와 나라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을 ‘거듭난다’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사람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기능을 잃었던 양심이 다시 살아납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은 폭력과 음란, 무질서와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지금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는 증가한 반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점점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고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데 왜 범죄는 더 늘어납니까? 사람들은 왜 더 잔인해지고 난폭해 집니까? 왜 성범죄는 입에 올리기 부끄러울 만큼 문란해집니까? 국회의원 가운데 거의 2/3 정도가 믿는 사람인데 국회가 왜 저 모양으로 돌아갑니까?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고 정치, 경제의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많은 부분이 믿는 사람들인데 나라 모양이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3·1절 기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3·1절 독립 만세 운동에는 기독교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3·1 독립운동은 기독교가 없었으면 불가능 했다고 일반역사 학자들이 평가할 만큼 교회는 대단한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의 인구가 2천만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 기독교인의 숫자는 20만 정도였습니다. 전체 인구의 1%였습니다. 1%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민족의 아픔을 끌어 안았습니다. 이 민족이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가장 고통스런 시간을 보낼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교회의 숫자는 적었지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었습니다. 어두움에 있었던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서 비취는 소망의 빛을 보고 교회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는 전체 국민수의 25%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무척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에 속하는 대형 교회가 우리나라에 몇 개가 있습니다. 경제, 정치적인 힘도 막강합니다. 어느 누구도 교회의 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니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무엇이고 생각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에서 성도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어떤 다른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가 다른 것보다도 이것을 ‘먼저’ 구하는 자리에 서 있으면 숫자가 적더라도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즉 세상에서 편하게 즐기고 누리는 것’을 먼저 구하는 자리에 있으면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3·1절 기념 예배를 드리면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며 나라와 민족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 조상들의 믿음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그 정신을 우리의 삶의 자리로 이어가야 합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정신이 살아 있는 곳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며 약속하신 은혜의 영역으로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3·1절 기념 예배를 드리며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1운동과 기독교/ 출3:7-10/ 2003-03-01
3.1운동과 기독교 출3:7-10 오늘은 3.1절 기념 주일이다. 이 뜻깊은 3.1절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3.1 운동에서 보여준 선열들의 리더십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겨야 할 줄 안다. 그리고 3.1절과 기독교 신앙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한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 볼 때 3.1 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참으로 자랑할 만한 정신적 유산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3.1 운동에 대한 연구나 행사가 비교적 등한시 되어온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문학 평론가는 3.1 운동과 프랑스 혁명을 비교해 볼 때, 프랑스인들에게는 프랑스 혁명이 대문자로 부각되어 그들의 문학, 예술, 언론, 종교,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실생활 속에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그들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결정하고 이끌어 가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우리의 3.1 운동은 허전하고 쓸쓸한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3.1 운동에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물어보면서 3.1 정신이 보여준 애국애족 운동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한다. 오늘의 상황에서 3.1 운동이 갖다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한 마디로 3.1 운동은 우리 민족의 출애굽 사건이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고생하고 울부짖으며 신음하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과 고통을 보시고 응답하시며 모세를 통해 그들을 바로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었듯이 3.1 운동은 일본의 억압과 착취에서 고통 당하던 우리 민족을 일본의 손에서 해방시키려던 우리 민족의 출애굽 운동이었다. 3.1 운동이 너무 가상적이고 맨주먹 투쟁이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 정신에 의한 비폭력적 무저항주의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1) 3.1 운동은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과 말살 당하는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되찾으려는 자각운동이었다. 말하자면 민족의 자존심과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자기 민족 공동체에 대한 자존심과 주체성이 없는 민족은 쇠퇴하고 망하게 된다. 자기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잊어버리고 자기 민족의 역사를 망각한 개인이나 민족은 참 불쌍한 것이다. 그러한 주체성을 잃어버린 개인이나 민족에게 기대될 것이 별로 없다. (2) 3.1 운동에서 우리는 해외동포들의 역할이 컸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3.1 운동이 민중들의 자각운동에 의해 싹튼 것이 사실이지만 시발점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자결주의와 국제정세를 가장 빠르게, 그러면서도 슬기롭게 포착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으로 연결시킨 미국과 일본에 거주하는 해외동포들의 역할이 컸던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해외동포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만한 3.1 운동이 태동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도 분단된 우리 조국의 현실에 우리 해외동포가 기여하고 공헌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고 찾아보아야 한다. 물론 그 동안 해외동포들이 한국의 민주화나 북한의 굶주린 자들을 위한 돕기 운동이나 이산가족 찾기나 북한 선교 또는 남북의 교류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했다고 본다. 우리는 계속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앞장서서 일해야 할 것이다. (3) 3.1 운동에서 우리 겨레는 단결과 화합을 보여주었다. 3.1 운동에서 보여준 가장 감동적인 교훈은 직업, 종교, 지식의 유무나 세대차이를 뛰어넘어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단결하여 투쟁하였던 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조국에서나 해외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화해와 단결이다. 하나되는 것이다.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망한다는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에도 너희가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망한다고 말씀한다(갈 5:13). 반면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33편) 말씀하신다. 3.1 운동에서 우리의 선열들은 대아를 위해 소아를 희생할 줄 아는 참 위대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3.1 운동의 아름다운 유산을 다 잃어버렸다. 그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공동체도 마구 헐고 정치적 신념도 없다. 어제의 적과도 마구 야합한다. (4) 3.1 운동에서 새 시대에 대한 우리 겨레의 열망이 행동화한 것이었다. 우리 선열들은 새롭게 전개되는 새 시대에 대한 비전과 열망이 있었다. 그것은 강국이 약소국가를 짓밟는 그러한 식민시대는 사라지고 어느 민족이나 어느 국가나 자기의 주권이 인정되고 자유와 독립이 인정되어 인류사회에서 공존하고 기여하는 민주사회에 대한 비전과 통찰력이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살펴보면 미래지향적인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 인류역사에 기여하고 공헌하게 된다. 시편 33편 12절에 보면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였다. 1. 화평의 복음을 주셨다고 말씀하였다. 기독교복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화목\\\' 또는 \\\'화평\\\'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간의 갈등과 인종과 인종간의 갈등과 단절도 하나로 연결시키고 묶어 놓았다. 주님은 이러한 단절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는 세상에 하나됨과 연합을 위해 오신 다리(bridge)였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 화해(reconciliation)이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것처럼 절실히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없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갈등하고 있는가? 가정들도 얼마나 깨어지고 무너지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고 화해하며 화목하기를 배워야 한다. 특별히 한국사회의 정치적 현실은 더욱 이러한 화해가 요청되는 시점에 서 있다.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망한다고 성경은 경고한다. 우리는 이조 500년간 사색당파로 서로 물고 뜯다가 망하였다. 그러한 역사의 쓰라린 경험이 있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우고 있다. 2. 능력을 행하셨다고 말씀하였다. 하나님이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이 부어 주셔서 선한 일과 귀신에게 눌린 자들을 고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이뤄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은 한 마디로 삶의 원동력이요 능력이다.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켜주고 모든 질병에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능력이요 힘이다. 우리에게는 능력(힘)이 필요하다. 왜 돈을 벌려고 하는가? 왜 권력을 얻으려고 하는가? 힘을 갖기 위해서이다. 요새 한국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각 당에서 후보를 추천하는데 그것 때문에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가? 그런데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정말 그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참된 힘은 그러한 물력과 권력의 힘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참된 힘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복음의 힘이요 능력이다. 복음은 인생을 창조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다. 이 복음의 창조적 능력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깔려 있다. 3. 우리는 그의 십자가와 부활과 그의 심판의 증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 있다. 십자가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요 지혜이다. 어리석은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했다. 진정한 삶의 힘과 능력이 어디에서 오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온다.
3.1운동과 기독교정신 /마6:33 2009-04-28 11:48:24 read : 39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1960년대에 큰 변화가 있었던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싱가포르, 필리핀, 그리고 한국입니다. 싱가포르는 1965년에 말레시아로부터 독립하여 나라를 새롭게 세우게 되었습니다. 리콴유가 초대 수상이 되어 26년간 장기 집권을 했습다. 싱가포르가 말레시아로부터 독립하던 해인 1965년에
3.1운동과 기독교정신 /마6:33 2009-04-28 11:48:24 read : 39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1960년대에 큰 변화가 있었던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싱가포르, 필리핀, 그리고 한국입니다. 싱가포르는 1965년에 말레시아로부터 독립하여 나라를 새롭게 세우게 되었습니다. 리콴유가 초대 수상이 되어 26년간 장기 집권을 했습다. 싱가포르가 말레시아로부터 독립하던 해인 1965년에 필리핀은 페르난도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마르코스도 20년간 장기 집권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박정희가 1961년에 5·16 쿠테타로정권을 잡고 1963년에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합니다. 당시의 경제 상황을 보면 세 나라 가운데 필리핀이 가장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그다음이 한국이었고, 다음이 싱가포르였습니다. 우리나라가 필리핀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싱가포르는 자국의 대표단을 우리나라에 보내 경제 발전의 동력을 배워갔습니다. 그런데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달라졌습니다. 가장 가난했던 싱가포르가 가장 부자 나라가 되었습니다.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싱가포르에 경제 발전의 모델이 되었던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못 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경제적인 지원을 했었던 필리핀의 국민소득은 1000 달러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성경에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된다’ 는 말씀이 세 나라에 적용 된 것 같습니다. 자원이나 인구를 보면 아마 필리핀이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원이나 인구를 보면 싱가포르가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뛰어 넘어 나라의 부강함이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자원과 인구가 가지고 있는 힘이 나라의 부강함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면 무엇이 힘이 되었겠습니까? 우리들은 그 부분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라를 다스렸느냐?’의 차이입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이 얼마나 정직하냐?’의 문제입니다.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싱가포르는 리콴유가 총리가 되어 청렴결백하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자리를 잡을 수 없도록 정직한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공무원의 비리는 결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싱가포르에 가 보지는 않았지만 거리에 휴지 하나 발견할 수 없답니다. 도시 환경과 연관시켜 껌까지도 엄격하게 관리하는 나라입니다. 질서있게 잘 세워진 나라입니다. 반면에 1960년대에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부유했던 필리핀은 페르난도 마르코스가 대통령이 되어 다스렸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은 마르코스는 국민들에 의해 해외로 추방되고 맙니다. 나라 곳곳이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있습니다. 수시로 쿠테타가 일어나 정국이 불안합니다. 사회가 무질서합니다. 결국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과 각 분야의 전문가들, 그리고 국민들은 각자의 주장과 방법을 쏟아냅니다. 경제 회복과 발전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가 되어 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경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경제 회복과 성장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에 더 시급하게 세워야할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너진 정신의 세계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정신세계가 성숙하지 못한 개인과 사회는 경제적인 부를 관리하며 누릴 수 있는 힘과 지혜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정신의 세계가 튼튼히 세워지지 않는 상태에서 경제적인 부가 주어지면 그 경제적인 부는 어김없이 폭력과 성적 음란으로 빠지게 됩니다. 선진국이란 성숙한 정신 세계 위에 경제적인 부를 세운 나라를 말합니다. 정신의 세계가 부정과 부패로 무너져 있는데 그곳에 경제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선진국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성은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한 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밤이 되면 도시 전체가 향락에 빠져 불야성을 이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적인 세계는 피폐해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는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갔을 때 그곳의 사람들은 동성 연애를 하기 위해 천사들을 내어 놓으라고 집주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그 성을 심판하실 만큼 소돔과 고모라 성은 타락해 있었습니다. 정신적인 성숙함이 없는 경제적인 부는 결국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한 것은 경제가 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한 이유는 의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 명의 의인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세계가 무너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사회가 바뀌려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사회는 절대 변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다거나 부부간에 문제가 있어서 한 지붕 밑에 살아도 밤낮으로 싸우며 괴로워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가 주말 저녁에 팔짱을 끼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백화점에서 맘껏 쇼핑을 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남편이 변하든지, 아내가 변하든지 아니면 둘이 다 변하든지 해야 합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잠시 동안은 문제를 덮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바로 되려면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그것도 악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변해야 합니다. 사람이 변하면 나라가 변합니다. ‘에콰도르’ 는 중남미의 조그마한 국가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 불쌍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사법제도는 형편없어서 누군가가 기소되면 미결수로서 4-5년을 지내야 정식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도 뇌물을 쥐어 주지 않으면 10년이 걸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일단 한번 무슨 일로 혐의를 받아 구치소에 들어가면 자기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구치소에서 4, 5년을 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뇌물을 주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곳에서 10년 동안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누가 인간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현실의 모순과 고통을 마음 아파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호르에 크레스포 박사라는 분입니다. 그는 그 나라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법을 전공한 법학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나서 발견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은 자기가 믿는다고 말하는 대로 사는데 있다.’ 곧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참된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는 데 있다.’ 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나혼자 구원 받으면 된다. 나혼자 복 받으면 된다. 나혼자 주님과 동행하면 된다.’ 는 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사회 전반에 드러나도록 쓰임 받는 것이 신앙생활의 진수라고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법제도와 교도소를 개혁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나섰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두 번이나 투옥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사법제도를 개선하는 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하셨습니다. 거기에 미결수는 3년 이내에 반드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백성들이 의인이 되어서 그 사회의 일원이 되면 그 사회와 나라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을 ‘거듭난다’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사람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기능을 잃었던 양심이 다시 살아납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은 폭력과 음란, 무질서와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지금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는 증가한 반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점점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고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데 왜 범죄는 더 늘어납니까? 사람들은 왜 더 잔인해지고 난폭해 집니까? 왜 성범죄는 입에 올리기 부끄러울 만큼 문란해집니까? 국회의원 가운데 거의 2/3 정도가 믿는 사람인데 국회가 왜 저 모양으로 돌아갑니까?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고 정치, 경제의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많은 부분이 믿는 사람들인데 나라 모양이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3·1절 기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3·1절 독립 만세 운동에는 기독교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3·1 독립운동은 기독교가 없었으면 불가능 했다고 일반역사 학자들이 평가할 만큼 교회는 대단한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의 인구가 2천만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 기독교인의 숫자는 20만 정도였습니다. 전체 인구의 1%였습니다. 1%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민족의 아픔을 끌어 안았습니다. 이 민족이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가장 고통스런 시간을 보낼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교회의 숫자는 적었지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했었습니다. 어두움에 있었던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서 비취는 소망의 빛을 보고 교회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는 전체 국민수의 25%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무척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에 속하는 대형 교회가 우리나라에 몇 개가 있습니다. 경제, 정치적인 힘도 막강합니다. 어느 누구도 교회의 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니 교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무엇이고 생각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보고자 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에서 성도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어떤 다른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가 다른 것보다도 이것을 ‘먼저’ 구하는 자리에 서 있으면 숫자가 적더라도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즉 세상에서 편하게 즐기고 누리는 것’을 먼저 구하는 자리에 있으면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3·1절 기념 예배를 드리면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며 나라와 민족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 조상들의 믿음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그 정신을 우리의 삶의 자리로 이어가야 합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정신이 살아 있는 곳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며 약속하신 은혜의 영역으로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3·1절 기념 예배를 드리며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1운동은 민족 통일 희년운동으로 계승되어야 한다/ 시103:1-11, 출3:1-12/ 2008-03-01
3.1운동은 민족 통일 희년운동으로 계승되어야 한다 시103:1-11, 출3:1-12 올해는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75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진정한 자주독립인 통일국가 건설과 민주화 완성이라는 절박한 관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기독교와 신앙인들에게 적극적인 참여와 헌신을 통해 민족의 새 날을 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 3․1운동은 하나님의 해방운동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펴시고 모든 억눌린 권리를 찾아주시는 분입니다. 떨기나무처럼 천덕꾸러기로 살아가는 히브리 백성을 찾아 오셔서 그들을 해방으로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들이 지금 종살이라는 뜨거운 불길 속에 타고 있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들 가운데 게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절박한 현실 속에서,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당신의 백성 가운데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입니다. 내일이 없는 절망의 구덩이 가운데 계시는 분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노예화와 종속과 억압당하는 민족이 있는 고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해방자로 계시하시고 행동하신다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예수 사건(성육신, 십자가, 부활,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교훈)은 모든 인종들과 민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 혈연, 지역, 언어와 문화, 사회적 신분과 계급, 사상과 이념, 종교와 신앙,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차이 등에 근거하여 가해지고 있는 모든 차별과 억압과 소외를 불법화하고 무효화합니다. 세상의 죄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킵니다. 3․1운동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하심과 예수 사건이 한반도의 역사 현실에 터져나온 사건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3․1만세운동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불어 오늘 우리 민족사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2.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해방운동입니다. 본디 사람은, 그가 누구든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신앙인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대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또는 명령하고 있는지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시대의 명령, 즉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알고 그 명령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거역할 것인가를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대의 사명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이들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완성해 나가십니다.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 지배와 사람됨의 파괴에 항거했던 운동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10월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 민족은 식민지 나라에서의 광범한 민족적인 자각과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시대적 요구, 사람됨의 요구를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기로 결단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3․1민족봉기 때의 그리스도인들의 결단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시대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그 명령에 순종했던 신앙인들의 숭고한 모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하겠습니다. 민족과 교회, 신앙과 삶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하나의 문제로 받아들였던 신앙정신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참여는 어디까지나 개인으로서의 결단에 의한 것이지 제도적 교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제도교회가 민족의 대사건 앞에서 신앙인들을 지도하지 못하고 침묵했던 역사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3․1운동은 민족대단결 운동입니다. 3․1운동은 해외는 물론이고 한반도 방방곡곡으로 확산된 민족적 봉기입니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 유교 등 종교를 초월하였고 지식인, 학생, 농민, 노동자 등 계급과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 민족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전 민족이 단결한 운동입니다. 이 운동으로부터 오늘 우리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전민족이 단결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4. 3․1운동은 민족통일희년운동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민족은 45년 해방과 더불어 분단되어 지내온 지 50년을 맞이했습니다. 진정한 자주 독립국가를 소망하면서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의해 숨져간 수많은 애국 선열들을 생각하면 오늘 50년 분단의 세월을 살아온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신앙선배들의 고귀한 뜻과 신앙전통을 이어받아 민족의 분단,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됨을 이루기 위한 희년운동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라 확신합니다. □ 예화 1. 「독립선언서」중에서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서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서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로나.\\\"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 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 역사에 투사하기 시작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래하야 만물의 희소를 최초하난도다.\\\" 3․1운동에서 부각된 민족의 갈망은 독립이요, 해방이었다. 절망과 억압의 현실에서 터져나온 새 역사에의 갈망은 한국 역사의 새로워짐을 희구하는 것이었다. 새 것과 낡은 것, 미래와 과거, 비전과 전통이 교체되는 역사의식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곧 역사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의심은 방해물을 보지만, 믿음은 길을 본다. 오늘 우리는 새것, 미래, 비전을 내다보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 예화 2. 3․1운동과 기독교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온 민족운동이었다. 특히 기독교가 민족의 암울한 현실에 침묵하지 아니하고 민족의 새 날을 열고자 한 공헌은 커다란 것이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을 종교별로 보면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 유교는 한 사람의 대표도 없고 대부분 기독교,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 대표자들에 의해 구성되었다. 이것은 1919년 당시 기독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또한 3․1운동 때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 일본경찰에 구속된 피검자들을 종교별로 보면 다음과 같이 집계된다. 기독교 3,373명, 천도교 2,283명, 시천교 14명, 불교 229명, 유교 346명, 천주교 55명 등으로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당시의 기독교는 민족과 민중의 현실에 뿌리를 박고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많은 고난을 당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선배들이 신앙전통을 저버리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나아가 오늘 우리 민족의 분단현실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대적 과제, 즉 민족통일희년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며 땀흘리며 희망의 씨앗을 심어야 할 것이다. □ 예화 3.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배에 관한 몇개의 신앙조건(본 회퍼의 「십년 후」중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서, 더욱이 최악의 것에서도 선한 것이 생겨나도록 하실 수 있고, 그리고 또 그것을 원하신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가 어떠한 곤경에 처할지라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저항력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힘을 미리 주시지 않으신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게 하려 함이다. 그렇게 믿는다면 장래에 대한 모든 불안은 틀림없이 극복될 것이다. 나는 우리들의 과실도 과오도 헛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과실과 과오를, 우리가 선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여 주시는 경우보다도, 더 기꺼이 받아들여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이 결코 무시간적인 운명이 아니라 성실한 기도와 책임있는 행위를 기대하시고 그리고 그것들에 대답하여 주신다고 믿는다. ━━━━━━━━━━ 기 도 ━━━━━━━━━━ 이 나라를 사랑하사 역사의 수렁에서 끌어주시고 고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을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이땅에서 살아가는 것도 억압의 시대에 조국해방을 위해 힘썼던 신앙 선조들의 기도와 노력이 있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이제는 통일의 과제가 우리 앞에 남아 있사오니 이 굴레 또한 벗고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그 과정을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1절 / 기억하라! /신6:10-15 2019-04-18 03:23:00 read : 5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루살렘에는 독일 나치에 의하여 희생된 600만 유대인을 추모하는 기념관 이름이 ‘야드바심’입니다. 야드바심이란 ‘기억’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은 동족이 참혹한 학살을 당한 것을 ‘기억’하고 ‘절대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이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독립기념관’이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의 참혹한 상황들을 재
3.1절 / 기억하라! /신6:10-15 2019-04-18 03:23:00 read : 5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루살렘에는 독일 나치에 의하여 희생된 600만 유대인을 추모하는 기념관 이름이 ‘야드바심’입니다. 야드바심이란 ‘기억’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은 동족이 참혹한 학살을 당한 것을 ‘기억’하고 ‘절대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이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독립기념관’이 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의 참혹한 상황들을 재연하고, 일제 때의 형무소와 소름끼치는 고문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전의 일을 기억하는 것보다 이후의 독립을 ‘기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름부터 ‘기념관’입니다. 말 그대로 ‘기념관’일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단순히 기념하는 것’은 같은 고통을 반복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고 기념하는 것은 감사를 상실할 수도 있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의 결국은 또 다른 죽음일 뿐입니다. 물고기의 지능은 0.4밖에 되지 않고 기억은 3초밖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과 수초 전에 물고 혼났던 미끼를 또 다시 물어 낚시에 걸린다고 합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인간에게 역사는 배의 방향타(Key)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배의 방향타(Key)는 배가 진행하는 방향을 잡아줍니다. 그처럼 역사는 삶의 방향을 잡아줍니다. 특히, 과거의 역사는 미래의 올바른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늘 역사의 교훈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늘 기억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구약성경의 중요한 당부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살펴 오셨는가?’를 늘 기억하도록 요구했습니다. 모세 설교로 구성된 신명기 말씀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중요한 당부, 역시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출애굽 후 광야 40년의 생활을 통해서 방황과 훈련의 과정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곧 요단강을 건너기만 하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를 눈앞에 두고서 지도자 모세가 동족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6:12~13에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12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한마디로 ‘잊지 말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행하시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를 기념하여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고귀하게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을 현재화시키는 역사적인 기억(historical remembrance)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역사적인 기억을 통해서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들, 특히 출애굽 사건을 현재화 시켰습니다. 이런 독특한 기억은 우리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에도 적용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예배에서의 기억은 그 사건을 현재화시켜서 오늘 우리를 구원하는 사건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재화는 그리스도 사건을 하나님 앞에서 기억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을 통해 재확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억을 통해서 자신의 약속을 다시 상기하고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역사적인 기억을 ‘과거 사건의 현재화’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한국 교회가 3.1만세운동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00년 전 우리 기독교 선조들이 역사적 사건인 3.1운동에 참여할 때, 성경 속 사건인 출애굽 사건과 동일시한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는 나라의 독립이라는 민족적, 국가적, 정치적 투쟁 목적도 물론 있었지만 그 목적 저변에는 바로 강력한 신앙적 동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바로 3.1만세운동을 출애굽 사건과 같은 것으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면서 이 운동을 성경의 출애굽 사건과 나란히 놓고 보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우리 기독교 신앙의 선조들에게 있어 ‘출애굽의 사건’은 ‘3.1만세운동의 모델’이었습니다. 애굽은 일본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조선 민족으로, 애굽의 바로는 일본의 천황으로, 애굽의 압제는 일제의 식민통치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압제에서부터 해방시켜주셨듯이 우리 민족을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참여했습니다. ‘3.1만세운동’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국판 출애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 사건이 너무나 감격적이고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하지 않고 유월절 예식에 담아 해마다 기념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해방의 가치를 늘 되새기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후일에 또다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바벨론제국의 포로로 붙잡혀가서 이방 민족과 신들에게 굽힐 것을 강요받았을 때, 이 출애굽 사건이 주는 자유의 정신으로 결코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희망을 불태우는 기름으로 사용했습니다. 오랫동안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귀국할 때, 그들은 그 기쁨을 시편 126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 시편에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을 동안에도 그들에게 출애굽 정신이 있었기에 굴복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고, 그 정신으로 끝까지 견딘 결과 그들은 다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편이 표현한대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울며 씨를 뿌린’ 댓가였습니다. 출애굽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의 영성에 자유와 해방의 정신을 주사한 사건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3.1만세운동도 우리 민족에게 자유와 해방, 독립의 정신을 뼛속 깊이 새겨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3.1독립만세운동은 세계사에도 기록된 ‘자유의 운동’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선조들의 이 정신을 배워야 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3.1만세운동은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보다 깊은 의미를 특별히 갖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지금도 그런 면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3.1만세운동 당시 전까지만 해도 서양종교, 즉 외래 종교로써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이 척박한 조선 땅에 뿌리를 내리기에는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이미 수백 년, 수천 년을 흘러 우리 민족의 심성에 박혀진 도교와 불교, 유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그렇게 쉬이 우리 민족에게 받아질리 만무했습니다. 그러나 외래종교, 서양종교로써의 이미지 때문에 우리 민족과 쉽게 융화할 수 없었던 기독교회가 이제는 당당히 우리나라의 중추적 신앙 종교로써, 물론 여전히 풀어 나가야할 과제들이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나라와 민족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그 무엇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이 땅, 우리 민족에게 자리잡혀가고 뿌리를 내리며 민족과 더불어 함께하는 소중한 종교로 변화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3.1독립만세운동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나라와 민족이 가장 어려움과 고난에 처했을 때, 일제의 탄압과 수난을 이 땅과 겨레의 민초들이 당하고 있을 때에 기독교는 그 어려움과 고난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우리나라의 초기 교회와 성도들은 민족의 아픔과 고난을 외면하거나 저버리지 아니하고, 내 이웃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동참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민족의 동반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제로부터 독립 쟁취를 위해 우리 민족이 분연히 일어났을 때,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도 분연히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실상은 어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이 3.1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주도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당시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던가 하는 사실은, 당시의 피해를 조사해 놓은 역사적 기록물과 같은 자료들에서 객관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비율을 보면 당연히 기독교인들이 현저하게 높았으며, 또 체포되거나 주검을 당한 사람들은 교회 성도들이요, 더불어 파괴된 건물들은 교회예배당 건물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과 교회는 가까워지게 되었고, 또 우리 기독교회는 우리 민족 속에서 그 중추적 역할을 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국경이 없지만/국경을 초월하지만, 그래서 복음은 어디 어느 곳이나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기독교인은 분명 민족과 국가가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나라 사랑과 조국의 독립은 곧 신앙을 지키는 것으로 보고 출애굽의 정신과 신앙으로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민족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으면서, 오늘의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이 역사와 민족과 나라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깊이 생각하고, 신앙의 선배들을 통한 그 역사적 교훈을 마음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람이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적으로는 현세의 나라에,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 두 나라는 이원론자들 처럼 서로 갈등이나 적대관계가 아닌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는 말씀처럼 현세, 즉 이 세상에서의 믿음이 내세, 즉 영원한 세계의 구원을 좌우하는 열쇠가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나라를 차별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나라 모두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뿐 아니라 세상 나라의 권력자들을 세우기도, 폐하기도 하시는 최고의 통수권자이자 역사를 섭리하시는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군림하거나 교만하거나 사리사욕을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의 대행자로서 무슨 일이든지 항상 정의롭고 공평하며 정직하게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하수같이 세상에 넘쳐흐르는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나라의 삼부요인과 수많은 공직자들을 세우신 목적이며, 또한 온 국민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와 같은 이상적인 국가는 공직자들만이 아니라 온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를 사랑해야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첫째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의 지도자들과 그들이 펼치는 정책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됨 없이 잘 성취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국가의 평안이 결국 교회와 가정, 기업의 평안인 것입니다. *둘째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여 민족을 복음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에드워드 기본은 로마제국의 멸망은 군사력의 약화가 아니라 정치․사회의 부패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셋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선진 국가는 경제성장 지수만이 아니라 국민의 도덕 지수도 높아져야만 됩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므로 세상에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시인 괴테(Goethe)는 ‘눈물로 얼룩진 빵을 먹어보지 않는 자는 박물관을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나라 사랑과 조국의 독립이야말로 곧 신앙을 지키는 것으로 보고 출애굽의 정신과 신앙으로 3.1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리하여 기독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민족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 선조들이 그들의 목숨을 던지고 또 신앙으로 지키고 이어준 이 고귀한 자유와 해방의 가치를 우리도 소중하게 지켜야 합니다. 아울러 이 자유와 더불어 영원한 자유를 주시며 그 자유를 지키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영적 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는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 아멘.
3.1절 / 하나님의 종 /벧전2:16 2010-06-03 09:27:10 read : 2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오늘은 3.1절 기념주일입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아 갔습니다. 우리 민족은 모든 주권과 자유를 일본에 빼앗긴 것입니다. 3.1 독립만세운동은
3.1절 / 하나님의 종 /벧전2:16 2010-06-03 09:27:10 read : 2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오늘은 3.1절 기념주일입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아 갔습니다. 우리 민족은 모든 주권과 자유를 일본에 빼앗긴 것입니다. 3.1 독립만세운동은 이러한 우리 민족이 민족적 자주생존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자유를 선언한 운동입니다. 3.1운동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정신의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자유와 평등입니다. 3.1운동은 빼앗긴 자유를 찾고 일본인과의 불평등에서 평등을 찾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의로운 운동입니다. 독립선언문에 보면 도의의 시대가 열렸다고 했습니다. 양심과 진리가 우리와 함께 함으로 만세를 부른 것입니다. 권력과 압제의 폭력에 양심과 진리와 도의를 빼앗길 수 없기 때문에 맨주먹으로 나가서 진리와 양심의 소리로 만세를 부르짖은 것입니다. 민주정신의 운동입니다. 삼일운동은 어느 특정한 지도자가 지시한 사건이 아닙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전 민족이 일어나 자율적으로 일치단결하여 일으킨 민주적 운동이었습니다. 비폭력저항 운동이었습니다. 간디의 무저항 운동도 이미 삼일운동이 일어난 후의 사건이었습니다. 인도의 정신적인 지도자 네루수상이 자기 딸에게 “빈 손들고 독립운동을 편 한국의 저 소년들을 보라”고 했습니다. 3.1운동의 비폭력 운동을 표현한 말입니다. 독립운동의 공약삼장을 보면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신, 인도, 생존, 번영을 찾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마지막 한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 “모든 행동을 먼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3.1운동은 감정이나 파괴적인 생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총칼 앞에 빈손 들고 비폭력적으로 공명정대하게 자유와 독립을 주장한 운동으로 문화민족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적 참여 운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서적으로 볼 때에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애족 하는 신앙입니다. 3.1운동당시에 기독교는 모든 교파를 초월해서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3.1 운동은 교회의 역사적 참여 운동이었고,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과 함께 하는 애국운동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3.1 독립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주도적 역할을 다했습니다. 이 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해 지도자들을 보면, 목사가 54명, 전도사가 127명, 장로가 67명이었습니다. 특히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가 16명이었는데, 그 중에 9명이 감리교 지도자였습니다. 기독교는 많은 교회가 불타며, 많은 신앙인들이 순교하면서 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축복 중의 하나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토마스 제퍼슨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동시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유 없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패드릭 헨리는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너희는 자유가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새번역성서에서는 ‘여러분은 자유를 누리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어느시 대 보다도 자유를 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시대보다도 자유롭지 못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또 다른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럼 그 자유는 무엇입니까? 죄에서부터 자유입니다. 인간의 참된 자유는 ‘죄’로부터 자유 하는데서입니다. 죄의 지배와 죄의 영향력에서부터 자유 해야 인간은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 해야 영혼의 자유를 가지게 됩니다. 왜 이유 없이 불안해야 합니까? 필요한 것 다가졌는데도 왜 만족할 수 없습니까? 죄 아래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자유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죄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까?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 하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구원 받고, 그 은혜아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참 자유의 기쁨과 평화 즐거움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나’ 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들은 ‘나’의 노예로 살아감을 봅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나에게서 자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서 자유를 얻어야 ‘너’가 보이는 것입니다. 나의 노예가 되면 너가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에 편견과 고집 속에 살게 되고, 이기적이 되어 모든 것을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에 항상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에 배려와 용납이 없습니다. 나누고 베풀어 주는 선행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혹, 선행을 행할 지라도 그 선행까지도 자기자랑이 되고 맙니다. 나에서 자유 하여야 너가 보이는 것입니다. 너가 보일 때에 이해해 주게 되고 배려하고 베풀어 주게 됩니다. 간섭이 아니라 관심을 가져 주는 것입니다. 선행을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7-40) 네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내가 나에게서 자유 해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조덕삼 장로-나에게서 자유로운 지도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그곳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의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세속성으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성공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야 하는 곳입니다. 세상은 관리하고 운영해야 할 곳인 데, 그 세상이 우리를 지배하는 곳이 될 때에 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에는 세상이 만들어 내는 세속성이 있습니다. 세속성은 우리를 지배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세속성의 대표적인 성향은 쾌락적이며 소비적입니다. 세속성이 탐욕을 누리는 문화를 꽃피워 우리를 주관 할 때에, 우리는 참 자유를 가진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자유의 보람과 즐거움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성에서 자유 해야 합니다. 세속성의 노예가 아니라 세상을 고나리하고 운영하는 자유를 가져야 합니다. 이 자유를 가져야만 세속성이 꽃피워지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세속성에서 자유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고 종의 삶을 살아가는데서입니다. 예화/ 항해 중에 새장 안에 있는 새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 자유는 하나님께 복종할 때만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6절부터 읽겠습니다.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참 자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감으로 참 자유를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3.1절 독립선언 /요8:31-36/ 김상복목사 2015-06-09 15:03:12 read : 18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
3.1절 독립선언 /요8:31-36/ 김상복목사 2015-06-09 15:03:12 read : 18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한복음 8:31-36 오늘은 3.1절 90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3.1절을 맞이하여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가 좀 더 강한 애국심을 갖고 선진국가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하자고 연설했습니다. 그랬더니 인터넷에 이런 반응이 올라왔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정부! 때가 어느 때인데 애국심을 강요하는가? 연예인까지 동원해 정부홍보에 나서는 현실은 정말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거기다가 랩송이라니! 현재 청와대는 별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것 같다.” 나라를 사랑하자는 말에 ‘어처구니없는 정부’라고 하다니, 이 사람이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애국심은 부모사랑, 가족사랑, 고향사랑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저는 ‘평양 제19인민학교’를 졸업했는데, 평양을 방문할 때마다 모교를 가보고 싶었으나 거절을 당했고 세 번째에야 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던 학교를 가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했습니다. 모교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애국심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다’니, 예수 믿는 우리 가운데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과 자기 부모와 자기 고향과 모교와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 땅에 살 자격이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중학교에 다녔던 어느 분이 쓴 글이 있습니다. “저는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에는 왜놈이 반, 조선 사람이 반 있었습니다. 조선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도 급장, 반장은 하나도 주지 않고 모두 머저리 같은 왜놈들이 차지했습니다. 왜놈들은 우리말과 우리 역사, 우리 국기, 우리 이름까지 못쓰게 하니 젊은 나이에 왜놈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 매일 싸우고 왜놈 선생한테 기합을 받았습니다.” 이 땅의 한국인이라면 누군들 이런 울분이 없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한 것, 해방과 자유를 준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하신 것처럼, 우리도 일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한 학기 만에 해방이 되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신사참배 문제가 떠오릅니다. 제가 평양에서 다닌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본거지였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서시던 주기철 목사님께서는 7년 동안 극심한 고초를 당하다가 안타깝게도 해방되기 몇 달 전에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전도사님도, 방계성 장로님을 비롯한 여러 장로님들도 감옥에 가시고, 제 어머니도 피해 다니셨습니다. 저는 비록 어렸지만 어른들이 눈물을 흘리며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죽도록 충성하리라” 이런 찬송을 부르며 투쟁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일제는 학생들에게도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했습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일본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굽혀 절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에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하고 배웠기 때문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또 한 명이 저 쪽에 서 있는데 제 누이였어요. 우리 둘은 꼿꼿하게 서 있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모두 다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들키지 않았습니다. 지금 평양 김일성 동상이 있는 언덕 꼭대기에 신사(神社)가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나는 전차는 모두 그 앞에 멈춰서고 승객들이 신사를 향해 절을 하고 나서야 다시 출발을 했습니다. 저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교회 어른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 전차 안에서도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서 자기 나라 말을 못하고, 자기 문화를 누리지 못하고, 자기 이름을 쓰지 못하는 것은 매우 기분 나쁜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과거의 이런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고 더욱 깨우쳐 다시는 이와 같은 수치를 당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미독립선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이 독립선언문을 여러 번 읽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를 들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구절마다 기독교적, 성경적,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33명의 서명인 가운데 16명이 목사님, 장로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선언문에는 하나님, 예수님, 마태복음, 요한복음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정확하게 들어있습니다. 기미 독립 선언문 우리 조선은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똑똑히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반 만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 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를 두루 펴 밝히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움직임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움이니, 이는 하늘의 분명한 명령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니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 있은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십 년이 지났는지라, 우리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무릇 얼마이며, 겨레의 존엄과 영예가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력으로써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것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 예로부터의 억울함을 떨쳐 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위협을 없이 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체모가 도리어 짓눌려 시든 것을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올바르게 가꾸어 나가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이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길이 누리도록 이끌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고,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무기로써 지켜 도와주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얻고자 하매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랴?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 수호 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죄주려 하지 아니 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물려 온 터전을 식민지로 보고, 우리 문화 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우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의리 적음을 꾸짖으려 하지 아니하노라. 우리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을 갖지 못하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가릴 겨를도 없노라.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로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한 때의 감정으로써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심에 희생된,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그릇된 상태를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바른 길, 큰 으뜸으로 돌아오게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의 요구로서 나온 것이 아닌 두 나라의 병합의 결과가 마침내 한때의 위압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지금까지의 실적을 보라! 용감하고 밝고 과감한 결단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이해와 한 뜻에 바탕한 우호적인 새 판국을 열어 나가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울분과 원한이 쌓인 2천만 국민을 위력으로써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동양의 안전과 위태를 좌우하는 굴대인 4억 중국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의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지지하는 자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면하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리요? 아아! 새 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도다.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지난 온 세기에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의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도다. 새 봄이 온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 도다. 얼어붙은 얼음과 찬 눈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이 저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때를 맞고, 세계 변화의 물결을 탄 우리는 아무 머뭇거릴 것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온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온누리에 민족의 정화를 맺게할 것이로다. 우리가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나아가는 도다. 남녀노소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은밀히 우리를 지키며,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나니, 시작이 곧 성공이라, 다만 저 앞의 빛으로 힘차게 나아갈 따름이로다. 공약 3장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하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이 선언문을 읽은 제 반응은 “아멘!”입니다. 이런 훌륭한 생각과 사상을 가진 선조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사상, 성경적 기독교 가치가 분명하게 표현된 이 선언문의 사상이 오늘 우리에게도 너무 필요합니다. 예수를 믿든 안 믿든 누구든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진리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그런 고통을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에게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정치는 사색당파가 서로 물고 뜯으면서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에 힘이 없는 우리는 일본의 침략을 막아 낼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나라에 정치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네가 하니까 나는 반대야!”라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이 뭉치고 정당이 협력해서 나라를 강하게 세우려고 함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다른 나라가 보면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100년 전과 똑같습니다. 그때는 그나마 우리나라가 한 덩어리였지만 지금은 두 덩어리에, 북쪽은 북쪽대로 남쪽은 남쪽대로 정부와 국민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3.1절 이 날, 우리나라의 정치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지도자들이 독립선언문으로부터 지혜를 얻고 꿈을 꾸고 새로운 비전을 품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힘, 경제적인 힘, 교육적인 힘, 과학적인 힘, 군사적인 힘, 윤리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슴속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 분이 우리의 가슴을 펴 주시고 넓혀 주시고 높고 깊게 하셔서 우리 속에서 3.1운동 당시 솟구쳤던 엄청난 새로운 힘들이 솟아나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 정도 된 것은 사실 교육의 힘이 아닙니까? 우리나라의 기틀을 세운 세대가 누구입니까? 우리 세대입니다. 우리 세대는 일제 강점기와 6.25사변을 겪으며 학교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시절에 어렵게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를 팔고 논을 팔아서 자식들을 공부시켰습니다. 바로 교육의 힘입니다. 이 땅에 무슨 자원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 국민의 두뇌요 우리 젊은 자녀들의 두뇌입니다. 두뇌를 개발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부모들도 열심히 시켜서 이 땅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이 세계 어느 나라 아이들보다 우수한 리더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북한에서 살았을 때 모란봉에서 군인들이 훈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동강 모래사장에서는 비행기 폭격 훈련도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그저 ‘군사훈련 하나 보다’하고 재미있게 구경했습니다. 남한을 침략할 준비인 줄은 전혀 몰랐지요. 북쪽은 완전무장이 되어 있었지만 남쪽은 어땠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미국인들이 6.25 당시에 찍은 필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군은 한국이 일제에서 해방되자 한국 땅에서 철수했다고 합니다. 왜?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게 되면 미국이 쏘련, 중공, 북쪽과 한바탕 또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남한에 미군과 무기가 없으면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 생각을 못할 것이라 여기고 철수해버렸다고 합니다. 남쪽은 미군도 없고 무기도 없는 맨손이 되었습니다. 북한이 그것을 알지요. 그것은 마치 침략 초청장과 같은데 왜 침략을 안 하겠습니까! 미군은 철수하고 남한에 남은 무기는 하나도 없으니 북한에게 통일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이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도록 여건을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때도 6.25때도 우리는 힘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힘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문에서 말하는 힘은 아직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변국가인 중국은 경제와 군사대국으로, 일본 역시 경제와 군사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정부와 국민들에게 역사적인 안목을 주셔서 이 나라를 강력하게 만드는 새로운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둘째, 적이 우리보다 강했기 때문입니다. 강한 자가 침략을 합니다. 독립선언서에 우리 조상들은 “우리는 일본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길 정도로 허약한 나라를 만들어서 온 민족을 고생하게 했으니 스스로 채찍질해야 합니다. 3.1절을 맞이한 지금도 우리의 지도자들과 국민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태도를 바꿔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와 후손들이 이 땅에서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살면서 외세에 무릎을 꿇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자유와 진리와 사랑 속에서 힘차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권을 빼앗긴 결과는 죽도록 고생하는 것입니다. 독립선언문에도 “생존권을 빼앗겼다”, “정신상의 발전의 장애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자유가 없으면 창의력이 말살됩니다. 노예근성이 생기고 정신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비가시적이지만 정신이 발달 돼야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제대로 발전합니다. “민족의 존엄성과 명예에 손상을 입었다”,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억울했다”, “눈앞에 고통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국권을 잃은 민족의 모습입니다. “가엾은 아들딸들”이라 했고 “부끄럽다”고도 했습니다. 우리가 약하고 사분오열되었기 때문에 민족과 국가와 자손들에게 부끄러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정치적인 참된 자유는 영적인 자유에서 시작됩니다. 사탄이 인간을 침략하여 죄성과 파괴를 심어 놓았고, 그 결과 인간은 사탄의 독재, 죄성의 독재 아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도 영적인 문제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을 아는 우리의 가슴에 영적인 자유의 운동이 일기를 원합니다. 영적 쇠사슬, 지적 쇠사슬, 정서적 쇠사슬, 관계의 쇠사슬, 육체적, 환경적 이 모든 사슬에서 벗어서 영적, 육적, 정서적, 사회적, 환경적으로 건강한 개인과 나라가 되도록 열심히 기도하십시다. 그 중심에 진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면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참된 자유를 누리면 속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활짝 열리면서 우리 속에서 창의력과 에너지가 솟아납니다. 생각이 분명해지고 앞이 보이고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우리 모두 진리 안에서 참된 내면의 자유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내면이 건강하고 아름답고 자유로워 창의력과 에너지가 넘쳐 이 나라가 당당한 나라가 되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3.1절 설교/ 선택의 기로 /창16:1-5 2008-05-27 16:21:15 read : 33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NPW(New Product Works) 박물관은 아주 희한한 곳입니다. 이곳에는 무연 담배, 무색 콜라, 스프레이식 치약 등 그동안 연구 개발은 완료되었지만, 결국에는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한 수 만여 점의 제품이 진열돼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실패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엔 그다
3.1절 설교/ 선택의 기로 /창16:1-5 2008-05-27 16:21:15 read : 33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NPW(New Product Works) 박물관은 아주 희한한 곳입니다. 이곳에는 무연 담배, 무색 콜라, 스프레이식 치약 등 그동안 연구 개발은 완료되었지만, 결국에는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한 수 만여 점의 제품이 진열돼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실패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이 곳이 지금은 코카콜라, 미쓰비시, P & G 등 거대 다국적 기업에서부터 중소기업까지 신제품 출시 전에 관계자들이 꼭 이 곳을 거쳐갈 정도의 중요한 현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제품들이 진열되어있는 것은 실패 그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실패를 통해 교훈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실패가 위대한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뭐, 우리 인생 역시 예외는 아니지 않습니까? 누구나 우리의 가는 길이 평탄하길 원하고 또 내가 선택한 일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원하지만, 때로 우리가 기대한 결과가 속히 얻어지지 않고 우리 인생이 후퇴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사면초가에 부딪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본문의 말씀은 서둘러서 결과를 얻고자 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잉태할 수 있는 기간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 아브라함은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얻은 아들을 인정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이 때문에 아브라함 가문에 끊임없는 갈등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1. 무엇보다 서두르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가 가나안 땅에 온지 10년이 될 때까지도 자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 10년은 아브람과 사래가 정한 데드라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10년 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겠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설마 10년 안에 어떤 일이 없을라구" 하면서 기다려 왔는데 그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주님이 자식을 이렇게 까지 안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최악의 상태의 것도 최상의 것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입으로 하늘의 별처럼 자손을 많이 주시겠다고 약속해 놓으시곤, 왜 10년이 지나도록 10년은 고사하고 한 명도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이러한 현상은 아내엔 사래가 더 심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 후이었더라" 사라는 그 남편에게 자신의 몸종으로 있던 여인인 하갈을 첩으로 내 줍니다. 그래서 계집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어쨌든 자식을 얻었다는 면에서 성공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자녀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여주인에게 늘 눌러 산다고 생각했던 이 계집종이 자녀를 잉태한 순간부터 사라에 대한 도전을 시작합니다. 사라는 자신의 여종에게 괄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여기 5절을 보세요.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당신과 나 사이에' 사래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도 사래는 이런 말을 할 여자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흥분해 있고 너무나도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어서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채 그냥 마구 퍼부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라는 순종의 여인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도, 애굽의 왕에게 자신이 보내질때도, 남편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았던 여인입니다. 평소에 사래는 남편을 부를 때도 '당신', '자기' 이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사래는 남편을 부를 때 '주님'이라고 불렀던 여자입니다. 사래는 정절과 절제로 자신을 단정했던 아주 존귀한 부인이었어요. 그러나 한번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고갈되니까 속에 분노가 차서 자기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무서운 말이 막 튀어나왔습니다. 이제 '주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입니다. 조급함이 빚어낸 하나의 아픔이 아닙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또한 이 일 때문에 얼마나 큰 정신적 부담과 심리적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을까요? 모두가 서두른 결과입니다. 서두름이 항상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속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속도는 중요합니다. 속도가 강조되는 경쟁문화 속에서 나 혼자만 뒤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급할수록 좀더 긴장을 풀고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삶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현대인들은 결과주의의 함정에 빠져 진정한 결과도 얻지 못한 채 인생의 길을 방황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축복은 서두름이 아니라 기다림에서 옵니다. 서두름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 폴발레리대 교수를 지낸 피에르 상소르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서 바쁘게 사는 삶만이 최선일까라는 물음을 제시합니다. 피에르 상소가 주장하는 것은 '차라리 느리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느림이란 게으름이 아닙니다. 느림이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입니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리지 않으며,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나 자신을 성찰해 가면서 세상을 향한 확고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도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삶의 장에 실패가 있다면 그것이 너무 조급함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닌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남보다 더 빨리 성장하고 성공해야만 되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빨리 빨리를 외치며 달려왔습니다. 밥도 빨리 먹고 더 많이 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일도 더 빨리 많은 분량을 해 치워야만 경쟁에서 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실공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건강도 빨리 상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빠른 성공을 추구하다보니 대박 열풍에 휘말려 사기도 잘 당합니다. 차근차근 기초를 다지며 제대로 올라가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게 여겨지고 바보처럼 생각됩니다. 정상적인 비정상적으로 취급되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조급하여 실수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렇게 조급하여 손해를 많이 보는구나! 깨닫고 조급증을 고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겠다 생각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조급증을 고쳐 주십시오. 인내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지금 당장" 조급하면 불평하고 화를 잘 내게 됩니다. 작은 일에도 노를 발하곤 합니다. 여유가 조금만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일을 불필요하게 화를 내고 손해를 많이 봅니다. 결국 우리 인격의 미성숙만 드러낼 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손해만 보게 될 뿐입니다. 조급하여 그렇게 불평하고 화를 내다보면 웃음과 기쁨이 사라집니다. 사단은 조급함을 심어 우리의 감정을 메마르게 만들고 황폐한 삶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지금 선택과 거절의 자리에서 아브람의 가장 큰 실수는 사람의 충고에는 민감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이 순간에 닫혀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 1-2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여러분, 사라의 말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좀더 침묵하며 기도해야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정말 옳은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이런 방법을 통해서 주시는 것일까? 침묵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이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하나님의 음성보다 아내의 말에 귀기울인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라가 자식을 얻었지만 가정이 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로부터 면박을 당합니다. 종 하갈이 주인인 사라를 괴롭힙니다. 하갈이 집을 나갑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파괴가 들어왔습니다. 침묵하며 자기를 돌보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 현실을 깊게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성숙치 못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통이 닥쳐왔습니다. 이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태어난 아이가 누구입니까? 15절에 보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방법에 따라 상속자를 얻으려고 했었던 결과로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12에 보면 이스마엘이 어떤 자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이스마엘의 출생 이후 13년 만에 아브람은 아내 사래에게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사라와 하갈의 갈등도 고통이지만, 이들의 배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후손을 통해 일어나는 갈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배 다른 두 자식 사이의 갈등만은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길고 긴 민족적 갈등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랍의 조상이 아닙니까? 지금도 지구 한 모퉁이 중동지방에서 계속되고 있는 민족적 분쟁과 역사적인 갈등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아브라함의 실패가 주는 교훈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 앞에'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잠3:6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학자 챨스 브릿지는 "잠언 3장 6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북극성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많은 여행자들이 행로의 방향을 잡으려면 언제나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을 좌표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처럼 우리 역시 얼마든지 인생의 여정에서 나에게 부딪혀오는 문제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다 때로 잘못된 결정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에게 북극성과도 같은 약속의 말씀에 생의 초점을 맞추어 그 분을 집중하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이 음성을 민감하게 들으며 삶의 여정을 걸어가는 사람은 좌우로 탈선도 하지 않으며, 길을 일고 헤매거나 시행착오를 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폭풍우, 삶의 역경 속에서 때로 우리가 고통하고 울고 탄식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허용하셨습니까? 자! 예를 들어보십시다. 여기 재벌 총수가 있습니다. 그에게 외아들이 있다고 하면 자기 재산을 주고 싶을까요? 주기 싫을까요? 우문이죠. 무척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직 어립니다.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당장은 줄 수 없죠. 왜냐하면 그 돈이, 그 재산이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잘못 다루면 독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돈을, 재산을 잘 관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공부도 시키고 훈련도 시키고 사람 노릇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이 더 답답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되 보통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을 보면 아직 시원치 않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드러났잖아요? 10년을 기다렸다고 하지만 그때 믿음의 수준이 어땠습니까? 인간적인 가능성만 따져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가능성이 아직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있을 때 자기들 방식으로 해보자고 작정했던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한심스러운 수준이요 함량미달입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줄 수 없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시려고 계획하시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 그것을 감당할 만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봄기운이 물씬거리는 계절에 산에라도 가보면 겨우내 얼었던 계곡사이에 얼음이 녹으면서 흐르는 개울물 소리는 대단히 아름답고 감미롭게 들립니다. 저는 이 개울물 소리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래서 산에 가면 먼저 계곡을 찾는 버릇이 있습니다. 뭐 개울물 소리는 어떻게 보면 매우 단조로운 것 같지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개울에서 돌멩이를 다 건져내고 날카로운 바위나 절벽을 다 깍아서 평평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아름답던 개울물 소리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에서 그의 영광을 찬송하고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고귀한 자녀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든지 우리 입에서 아름다운 찬양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인생 길을 가로막는 바위를 치우지 아니하시고 높은 절벽을 낮추지 아니하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이 몹시 아플지라도 그렇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 하는 가운데 고난을 당해 보았기 때문에 드디어 감사할 줄 아는 귀한 형제자매를 봅니다. 너무나 돈이 궁색해서 나중에는 불과 단돈 몇천 원을 들고도 눈물로 감사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된 모습을 저는 봅니다. 하늘처럼 보이던 남편이 졸지에 몰락하여 낭떠러지 아래로 처참하게 떨어진 모습을 보자마자 비로소 남편에 대한 진한 애정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 부인을 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실패를 모르고 승승장구하던 분이 난관이 부딪쳐 좌초했을 때 비로소 그의 시야에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전부임을 고백하는 겸손함을 보게됩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지만 동시에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둘 사이에 끼어 사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왜 고통과 아픔이 옵니까?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 하니까 세상이 우리를 놔두지를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있어요. 직장에서 술자리에 함께 앉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나중에는 근무평가에 직원들간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그럴싸한 이유 때문에 진급마저 잘 안돼서 만년 계장 노릇 하는 가장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하는 투기성 재테크에 덤벼들기만 했더라면 그런 대로 한 재산 모았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하다 이제는 자녀들이 크면서 더 빠듯해진 살림을 꾸려야 하는 부분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나이는 차서 시집은 가야되겠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고집, 그것 꺽지 못해서 혼기를 놓친 채 아직도 결혼하지 못하고있는 자매들, 그렇다고 믿는 것 따지고 말고 조건보고, 결혼하자니 신앙양심이 허락지 않아 남들로부터 이 눈치 저 눈치 받아가면서 지금까지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의 청년들 모습 속에서 저들의 아픔을 봅니다. 그러나 거절과 선택의 자리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때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3.1절을 다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데 이 운동 역시 결코 놓칠 수 없는 진리를 위해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세상의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승리입니다. 1905년 11월 17일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의 국권이 사실상 일본에게 넘어가는 날이었습니다. 비통에 젖은 민영환은 조국이 사라진 이상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몇 개의 유서를 쓰고 주머니에 있는 칼로 목숨을 끊는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살아남아 조국의 수치를 보기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뜻 있는 애국지사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제1대 총독으로 취임했고 국민들은 깊은 절망 속에 1906년을 맞이합니다. 당시 한국인의 삶 속에 깊게 잠재된 불교도, 조선왕조500년을 이어온 유교도 열강의 패권다툼 앞에 이 한반도에 어떤 희망도 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일본의 합방이 시작되고 세계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1906년 봄부터 이 땅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이듬해 1907년 1월 2일부터 두 주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겨울 남자 사경회 약 1,000명이 모인 이 모임(중간에 1,500명 나중에 2,000명으로 증가)이 바로 대 부흥의 진원지가 된 것입니다. 백낙준 박사는 이 광경을 보고 "이것은 장차 한국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자 그리스도인이 직면해야 할 더 큰 시련의 때(일제 식민 통치시대)를 예비하려는 깊으신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때 복음을 받아들인 이 땅에 수많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악에 타협하는 길을 가는 대신 복음을 받아들인 자신들은 그 말씀을 붙잡고 그 절망의 현장에서 일어섭니다. 거절과 선택의 기준에서 이 땅이 포기한 미래를 그들은 다시 희망의 역사를 꿈꾸며 젊은이들의 가슴 가슴을 불 태웠던 것입니다. 독립 선언문을 작성 할 때도, 국채 보상 운동 때도 그들은 민족을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마다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어 목이 터져라 자유 조선을 외쳤습니다. 포기한 희망의 노래가 이 땅에 다시 울려 퍼지게 만들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주신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이 소망이 3.1운동이 되고, 이 소망이 기독교학교가 되어 미래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게 되었고, 이 소망이 우리민족의 패배적인 사고와 절망을 치유하게 되었습니다. 죽어 가는 이 땅에 다시 소망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루에도 수 없이 결정해야하는 삶의 한 복판에서 서두르지 말고, 문제에 직면할 때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더 귀를 귀 울이며, 내게 약속하신 그 말씀을 신뢰하며 나갈 수만 있다면, 지금은 이 고난이, 이 어려움이 왜 내게 다가와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주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 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내가 있어야 할 것과 또 내가 버려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내 인생에 잠깐의 고난을 허용하심으로 나를 더욱 가치 있게 사용하신다는 이 사실을 믿고 나간다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가장 아름다운 승리자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3.1절, 지금은/ 레19:13-14/ 2004-03-01
3.1절, 지금은 레19:13-14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앞에 앉히고 얘기했습니다. \"6·25때 얼마 나 배가 고팠는지 아니?, 밥이 없어서 사람들이 굶기를 밥 먹듯 했단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습니다. \"밥이 없으면 빵을 먹지 왜 굶었어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밥도 없는데 어떻게 빵이 있었겠니.\". 그러자 아이는 또 \"그러면 라면 먹으면 되잖아요.\"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그 시절의 배고픔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며칠 전에 3·1절 85돌 기념일을 보냈습니다. 3·1절은 이제 옛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흐려져 가고 우리네 관심 속에서도 지워져가고 있습니다. 그 역사가 벌서 85년이나 되었습니다. 어떤 아버지들은 3·1절이 무슨 날이냐고 아이들이 물으면 \"일제 때 우리 조상들이 탑골 공원에서 독립 만세 부른 날이다.\"라고 대답 해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특별한 관심도 없고 역사적인 의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근대역사 가운데 두드러진 날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3·1절이고 또 하나는 8·15입니다. 이 두 날은 우리 신앙인들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의 역사 가운데 깊이 섭리하신 날이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관련된 날입니다. 그래서 이 두 날은 우리 민족이 그리고 한국기독교가 꼭 되새기고, 교훈을 받고 넘어가야 할 날입니다. 3·1절이나 8·15는 모두 자유와 평등과 관계가 있는 날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선물입니다. 약자는 반드시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본문의 말씀 정신입니다. □ 부약사상(扶弱思想)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씀들을 기록한 아주 소중한 책입니다. 여기 보면 \"부약사상(扶弱思想)\"이 나타납니다. 약한 자를 도우라는 신앙정신입니다. 성경 속에는 이 사상이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강자에게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약자에게는 \"이렇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친 말씀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삯을 떼먹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말씀이 \"부약사상\"입니다. 이를테면 \"약자 보호사상\" 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한 가지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약자를 압제하고 핍박하면 내가 심판하겠다.\"는 경고입니다. 일본사람들이 36년 동안 우리민족을 아주 가혹하게 압제했고 지배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우리의 주권과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이름과 성과 이 땅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약한 나라라고 얕잡아보고 통째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 부약사상을 깡그리 무시한 것입니다. 그런 일본이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 왕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고종을 독살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밥을 먹을 때마다 항상 개를 옆에 두고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개에게 음식을 먹여서 별 이상이 없으면 그제야 안심하고 먹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위협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일본이 당시에 한일합병을 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민비였습니다. 민비는 아주 똑똑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냥 밀어붙이면 뜻대로 될 줄 알았는데 똑똑한 여인 하나 때문에 가로막혔습니다. 그래서 민비를 죽이려고 모의를 하고 군인들을 그 방에 집어넣었습니다. 군인들은 민비가 자고 있는 침실에 들어가 민비를 시해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시체를 녹지원으로 끌고 나와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기름을 붓고 불태웠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잔학하게 우리를 압제했습니다. 우리 민족을 무시했습니다. 인권이고 주권이고 모든 것을 약탈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냥 두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 부약사상을 송두리째 무시해 버린 그들을 하나님이 심판해서 그 나라가 잿더미로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신 갚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압제를 받다가 견디지 못하여 들고 일어난 것이 3·1 운동입니다. 지금 그 1세대들이 모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역사를 통해서 들은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날을 그냥 지나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3·1절이라는 지난날의 역사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고난은 때로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난을 거치면 사람이 다듬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성경 전도서 7:14절을 보면 \"너희는 곤고하거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은 사람은 생각이 성숙해집니다. 어른스러워집니다. 고난을 겪고 나면 상상도 못했던 생각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고난이 지혜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독립선언문을 보면 참 문장이 아름답습니다. 문학적으로도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그런 작품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다듬어서 나올 수 있는 글이 아닙니다. 그 글 속에 절절한 고난이 배어 있습니다. 그 고난을 통과한 후에 나오는 인간의 가장 소중하고 근본적인 외침이 거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군대에 갔는데 지금 2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시인이 다 됐습니다. 어른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집에 있으면 상상도 못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소중함, 집의 소중함, 음식의 소중함,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구구절절 이 철든 편지를 썼습니다. 철없던 아이가 군대에 가서 고생을 조금 맛보더니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삶에서 오는 어려움과 고난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보면 아들에 대한 부성애가 절절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기도문은 어느 날 번뜩 생각나서 쓴 기도문이 아닙니다. 전장(戰場) 터에서 수많은 아픔과 죽음을 보면서 체험한 것을 쓴 것입니다. 보통 때는 그런 기도문이 나오질 않습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남자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그런 기도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을 보면 절절이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헌신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가 참담한 방탕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불후의 명작으로 우리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존 밀턴의 \"실낙원\"을 말합니다. 이 작품들도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이 암흑과 같은 인생의 고통스런 터널을 지나가면서 쓴 책들입니다. 한 사람은 감옥의 고난을 겪으면서, 또 한 사람은 노년에 시력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그 고난의 산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흑인영가를 들어보면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흑인들에게 탁월한 음악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노예생활을 하면서 아픔을 당하고 압제를 당하면서 그 영혼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고백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3·절이 일어나기까지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곤혹을 치렀습니까. 이 날은 우리 민족이 아픔을 당하면서 겪은 것의 발로입니다. 유순했던 민족성으로 보아 우리 선조들이 어지간하면 봉기를 일으킬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음의 자존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 하나님의 역사 3.1 운동 3·1절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만든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역사하신 날입니다. 평등, 자유는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육당 최남선의 글을 보면 \"평등, 자유\"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육당은 그 말을 기독교에서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육당이 살아가던 그 시대는 평등, 자유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그 개념이 퍼지게 된 것이고 그 사상에 고무된 것입니다. 기독교를 통해서 그 말과 개념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리입니다. 평등이 없고 자유가 없는 것은 짐승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노예의 세계입니다. 짐승의 세계에는 힘만 있을 뿐 자유가 없습니다. 죄인들의 세계에도 자유가 없습니다. 평등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먼저 자유부터 박탈합니다. 짐승, 노예, 죄인은 이렇게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을 무자비하게 압제하고 자유를 뺏고 억압하면 그 억압자를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런 정권, 왕조를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독재자는 그 권세가 하나같이 길지 못하고 그 말로는 비참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꾼의 삯을 떼먹지 말라, 귀먹은 자를 조롱하지 말라. 소경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모두 부약사상, 즉 약한 자를 억압하거나 어려움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만일 약자를 압제하거나 억압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힘없는 사람의 돈을 떼먹으면 당장은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일군의 품삯을 떼어먹으면 당장은 돈이 쌓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먼 인생길을 살다보면 하나님이 반드시 몇 배로 심판하십니다.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무시하면 하나님이 대신 그 억울함을 갚으십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교훈이고 원리입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짓밟았습니다. 우리 민족을 아주 우습게 여겼습니다. 밟으면 아무 소리 못하고 밟힐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용렬하고 무지해도 밟으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잔디는 밟으면 죽지 않고 되살아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정신이고 생명력입니다. 하물며 인간이 그렇게 쉽게 꺾이고 죽겠습니까. 그래서 억압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억압당하는 자에게는 힘을 더해주십니다. 억압자는 심판하고 당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억압당하고 살던 우리 선조들이 들고일어났던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니까, 민족적 분노가 폭발하니까 삽을 들고 곡괭이를 들고 작대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일본이 깜짝 놀랐습니다. 참 무서운 민족입니다. 우습게 여겼는데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아주 무섭게 나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고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3·1운동입니다. 세계 역사에서도 이 3·1절은 유명한 비폭력, 반독재 독립운동입니다. 그래서 지난 역사를 조용히 되돌아보면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주권을 찬탈한 침략자들을 향하여 비폭력 운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3·1운동은 우리 선조들이 일으킨 운동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는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3.1절은 그냥 넘길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한말의 세계정세와 한국 주변국의 구도가 동일하다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정신 차리지 못하고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득세하고 역사 없는 정치인들이 애국지사인양 행세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깨어 기도할 때이고, 주님 앞에서 내 나라와 이민족의 분단현실의 아픔을 품고 신령적 번민을 가질 때 입니다. 사랑하는 의왕중앙의 성도 여러분이여! 지금 우리는 일제가 우리를 압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권국가요 국민입니다. 모든 것이 1919년 3월보다는 비교가 되지 않도록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 때보다 형편없이 약해지고, 부족한 것이 있으니 민족을 위한 뜨거운 가슴과 주를 향한 사모함입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지금은 번민할 때 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모세가 외치듯이, 여호수아의 외침처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선언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 나라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 민족을 위하여 울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독립선언서를 읽을 때마다 전율을 느낍니다. 태극기를 향하여 설 때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번민을 가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정 우리가 진정 독립국가의 자유민다운 삶과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남의 나라에 이민백성처럼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찾고 무릎을 꿇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샬롬.
3.1절. 운동과 기독교 /행1:6-8 2017-01-08 21:58:02 read : 20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3.1절 91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해마다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조국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염원하면서 전국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기념일입니다.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라는 3.1절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3·1절 기념식이나 예배 때마
3.1절. 운동과 기독교 /행1:6-8 2017-01-08 21:58:02 read : 20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3.1절 91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해마다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조국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염원하면서 전국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기념일입니다.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라는 3.1절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3·1절 기념식이나 예배 때마다 부르는 이 노래는 우리 선진들의 복받쳐 올랐던 대한독립의 소망과 의지를 잘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나라 잃은 지 10년, 한이 되고 피눈물이 되고 터지는 함성이 되어 온 천지를 뒤흔들던 배달민족의 기미독립만세 소리는 91주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을 흔들어 주고 있습니다. 해마다 기념하면서 들었던 노래이지만 내일은 특별히 남다른 감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역사의 기록은 이때 참여한 총인구는 당시 인구의 5분의 1인 200만/ 210개 도시에서 1,500회의 대중집회/ 사망자가 7,500명/ 부상자 16,000명/ 투옥된 사람이 47,000여 명에 달했다고 하였습니다. 3.1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이 길이길이 본받고 간직해야 할 중요한 민족정신을 남겨 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3.1운동은 <세계 혁명사의 기원>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5.4 운동과 인도의 무저항 <사티아그라하>운동, 이집트와 터키의 민족운동, 아시아와 중동의 민족운동이 한국의 3.1 독립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된 민족자결주의 운동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3·1 운동을 잊지 않고 특별절기로 예배를 드리며 기억해야 하는 데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숫자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미약했지만 첫째, 국권을 상실한 민족의 눈물과 비통을 씻어 준 것이 교회였으며, 둘째, 3·1 운동의 주체와 진원이 교회였으며, 셋째, 3·1 운동 후에 직접적으로 박해받은 것이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3.1절과 교회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한국 민족의 피묻은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일제에 의해 합병된 지 9년째 되는 1919년 3월 1일, 우리 선열들은 민족대표 33인을 선두로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하여 일제히 전국 거국적으로 민족의 자유와 겨레의 독립을 위해서 총 귈기한 것입니다. 그 33인 중에 기독교인은 무려 16명이나 되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1884년에 선교를 시작했기 때문과 불과 35년의 젊은 나이에 불과 했습니다. 그런데 이 3·1운동에서 주역들이 모두 우리 기독교인이었던 것을 찾아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당시 전인구의 1%밖에 안 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47개의 교회가 파손되었고 151명의 성직자들이 투옥되었습니다. 당시 기독교 정신으로 가르친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전체 학생 120명 가운데 70% 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감옥에 갔다고 합니다.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서 이화여전에 다니며 만세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경우와 익산 남전교회 출신 문용기 열사외 구시장 4.4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성도들이 있습니다.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 교회가 불탄 것도 그 해였습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그들의 야만적인 행위에 의분과 분노를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익산 사사만세운동은 규모나 피해면에서도 남한 최대치를 이룰 정도입니다. 지난해 역사의 현장을 다녀왔습니다만 남전교회 교인중 도남소학교 교사 문정관(용기), 학생 박영문, 교인 장경춘이 현장에서 순국하셨다고 합니다. 문용기 열사가 순국할 때의 모습은 많은 감동을 줍니다. 일본 헌병들은,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는 문용기 열사의 손을, 칼로 칩니다. 그러자 왼손에 다시 태극기를 들고 조선 독립만세를 부릅니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은 칼로 왼손을 칩니. 그래도 계속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자, 칼로 배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넘어지며 외쳤습니다다. “여러분! 여러분!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 독립에 음조하겠소!”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의 아내는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어린 자녀들은 고아로 흩어져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처녀 유관순 보다 가정을 이룬 가장 문용기 열사의 이야기가 더욱 감동적입니다. 그러면 왜 일제는 이렇게 교회를 탄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운동에 주체적인 관여를 했고 항일투쟁에 선두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운동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투쟁을 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기독교 복음의 가르침과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 복음과 애국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신앙은 국경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조국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금에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나아가서는 핍박하는 방송을 보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자성하기도 해야하지만 우리들이 더더욱 분명하고 바른 자세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교회들이 되고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애국애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공동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91주년을 맞는 3.1절에 그 당시 우리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나라가 위기에 있을 때에 행했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날에도 그때와 같은 모습의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떤 모습의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3일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가 이제 하늘나라로 승천하실 때에 있었던 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질문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란 질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그것은 하나님께 있는 소관이고 너희는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6절)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의 조국이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의 억압으로부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그들로부터 이 나라가 회복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관심을 갖고 예수님께 “이제 우리 조국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때가 지금이 아닙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같이 우리들도 우리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라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에스더가 그랬습니다. 느헤미야가 그랬습니다. 바울도 동족을 위한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아파하면서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 일입니다. 일제의 억압 가운데서 나라를 사랑했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라를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태안의 기름 유출 사고에 대해 한국교회는 엄청난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나라의 질서를 잡고 바른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하여 기초질서를 지키고 나라에 유익이 되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2. 우리나라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7절) 제자들의 조국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실 때가 이제 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었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말하면 너희 조국에 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우리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란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도우심입니다.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완전히 망하지 않고 비록 분단되었지만 이만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나라가 이 작은 땅에서 자원이라고는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이만큼 살게 된 것입니다. 인류역사 속에 나타난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로 우리나라의 미래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고 은혜를 주셔야만 살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대통령이명박 장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바르게. 깨끗하게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며, 후세에 잘 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도록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3.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8절) 제자들이 이 나라를 회복시키시는 때가 이때입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이 나라를 회복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오직 너희 아버지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성령을 받아서 권능을 받고 너희 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나라를 살리는 길은 다른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 국민들이 아니 너희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적극적인 사람이 됩니다. 담대하고 열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킵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변합니다. 사람이 변화되는데 믿음의 사람으로! 범죄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르고 정직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하여 변화된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나라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변하면 사회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면 나라가 변합니다. 영국이 도탄에 빠져있을 때에 홀리클럽이란 작은 모임을 결성했습니다. 그들이 매일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영국이 변화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요한 웨슬레이며 찰스 웨슬레였습니다. 내가 성령의 사람으로 변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면 우리 교회가 새로워지며 가정이 새롭게 되고 이 사회가 새로워지며 이 나라가 새롭게 변합니다. 아름답고 깨끗하고 바르고 정직한 나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 가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충만하게 되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3.1절/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롬9:1-5 2008-05-27 16:17:11 read : 5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66년 6월 12일 이스라엘이 아랍과 6일전쟁을 치룰 때에 일어난 일화입니다. 미국 스탠포드대학교에 총장이 유대계학생들과 아랍계학생들을 모아놓고 당부를 했습니다. “자네들의 고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는데 자내들은 동요하지 말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학기말 시험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네.”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며칠 지나
3.1절/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롬9:1-5 2008-05-27 16:17:11 read : 5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66년 6월 12일 이스라엘이 아랍과 6일전쟁을 치룰 때에 일어난 일화입니다. 미국 스탠포드대학교에 총장이 유대계학생들과 아랍계학생들을 모아놓고 당부를 했습니다. “자네들의 고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는데 자내들은 동요하지 말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학기말 시험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라네.”라고 부탁을 했답니다. 며칠 지나고 나서 유태인 학생들이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디 갔는지 알아봤더니 유대인 학생들은 “지금 우리 고국에 전쟁이 났는데 우리가 편안하게 공부만 하고 있을 수 있느냐”며 나라를 위해서 총을 들고 싸우기 위해서 고국으로 다 짐을 싸들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총장은 또 아랍계 학생들을 찾았더니 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랍학생들은 어디 갔는가 물어봤더니 그들은 본국에 차출명령을 받을까봐 무서워서 다 은신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도망가서 숨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전쟁의 결과는 물어보나 마나일 것입니다. 300만도 안 되는 이스라엘이 1억이 넘는 아랍과 싸워서 당당히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전쟁의 승패는 이미 유대인 학생들의 정신력, 그들의 애국심에 의해서 결판났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래어이지만 요즘 우리에게 자주 사용되는 영어단어가 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귀족의 의무’, ‘지도층들의 도덕적 의무’ 이렇게 우리가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로마에서부터 출발된 말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많은 특권과 지위와 부를 누렸습니다. 사회적인 신분으로서 그들의 지위는 보장되었다고 합니다. 한번 귀족이 되면 평생 귀족인 것입니다. 그 자녀도 귀족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사회의 지도자로서 나아가는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귀족들은 다른 국가의 귀족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라가 어려움 당할 때 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나가서 희생을 감수한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위기를 당했을 때, 나라가 어려움 당할 때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가장 앞장서서, 전방에 서서 싸우는 사람들이 로마의 귀족 자녀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귀족은 귀족으로서의 특권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귀족으로서의 자격과 그 의미와 책임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이 말은 영국 황실에서도 종종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영국 황실은 대대로 왕자나 공주들이 군복무를 다하기로 이름이 나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 나름대로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입니다. 몇 일전 신문을 보니까 화제가 된 기사가 있었습니다. 영국의 왕위계승서열 3위인 해리왕자가 지금 23살인데 그가 아프가니스탄 교전지역에서 군복무 중에 있는 사진이 신문에 보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이것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이미 현재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도 그가 공주 시절에 2차 세계대전 당시 운전병으로 병역의 의무를 마친 바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국 황실의 자랑입니다. 그들은 특권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황실이라는 권위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나라의 의무를 다하고 나라가 위기를 당할 때 제일 먼저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사람들이 바로 귀족들이고 황실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국의 긍지요 자부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인들도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 또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시민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지만, 동시에 우린 천국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의 삶을 삽니다. 우린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백성이요, 영원한 천국이 보장된 사람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우리는 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이 사회에서 남보다 더 희생하고, 더 봉사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사회에서 교회나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우리하고 근본적으로 달라. 너희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냐? 너희들은 우리와는 삶이나 그 인격이나 행동이 달라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들은 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더라도 기독교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살아야 되지 않느냐?” 하는 그들의 소망과 바람이 그들의 비판에 묻어난다고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초기 기독교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감당했다고 저는 자부하고 싶습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대해서 이런 잘못된 평가를 합니다. “교인들은 이 땅의 현실은 무관심하고 죽어서 가는 내세에만 관심이 있다.” “죽어서 가는 천당에만 관심이 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인들은 현실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내세의 복이나 혹은 기복적인 데에만 관심이 있다” 이렇게 왜곡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기독교는 누구보다도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종교입니다. 현실참여적인 종교입니다. 그리고 역사의식을 가진 종교입니다. 저는 그 대표적 예가 바로 1919년 3.1운동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1919년 3.1운동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1910년 일본에 의해서 한국의 주권이 완전히 강탈당하고 한일합방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만세를 부르면서 우리가 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선포한 사건이 바로 3.1운동만세사건입니다. 그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민족대표로서 거기 이름을 기록한 33인이 나오는데 그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입니다. 교회의 목사님, 장로님, 전도사님 이런 분들이 민족대표 절반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15명이 천도교 대표입니다. 그리고 2명이 불교대표입니다. 이것만 봐도 한국에 기독교가 얼마나 우리 동족의 현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참여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런 지역이 311개 지역이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지역이 78개 지역, 천도교 교인들이 주도한 지역이 66개 지역, 기독교와 천도교가 공동으로 주도한 지역이 42개 지역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만세운동을 일으킨 지역의 25%내지 28%를 주도했다는 것입니다. 또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사람이 19,000명이었는데 그 중 기독교인이 3,373명 약 17%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참 놀라운 기록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여러분 지금은 우리남한의 인구만 해도 약 5,000만 명이 됩니다만, 1919년 당시에는 남북한 인구를 다 합쳐도 2,000만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기독교인은 20만내지 30만이었습니다. 2,000만 명 중에 20만~30만이면 1%내지 1.5%입니다. 전체 인구 중에 기독교인이 1%내지 1.5%밖에 안 되는데 17%가 운동하다가 구속당했습니다. 25%내지 28%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놀라운 수치입니다. 그만큼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사회참여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종교 가운데 종교시설이나 집회시설이 가장 많은 손상을 입은 종교가 바로 기독교였습니다. 수원 재암리교회는 우리가 잘 알듯이 수많은 교인들과 지역민을 교회 안에 들여보내놓고 문에 못을 박고 휘발유를 부어 불태워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배당 47동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24동이 일부 파괴되었으며, 41동이 손실을 입었다고 합니다. 3.1운동을 통해서 투옥된 교역자 수만 151명에 이르고, 고문으로 죽은 사람이 5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기독교가 얼마나 한국의 역사현실에 근접해 있었느냐를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분이 바로 육당 최남선 선생님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작가입니다. 그분도 바로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당시의 조선일보사장을 지낸 이상재 선생님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그가 만세운동을 주도한 협의로 일경에 체포되어서 고문을 당할 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누가 3.1운동을 시켰느냐?” 그 때 이상재 선생님은 하나님이 시켰다고 당당하게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3.1운동 본부는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다”고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3.1운동은 신앙의 발로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이 모든 포로에서 자유하기 위해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3.1운동을 일으켰고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알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애국자가 되어야 된다고 말씀하고, 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길을 살아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바울의 글을 한번 읽어봅시다. 1절과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로마서 9장 1장 1절~2절) 오늘 사도바울이 어떤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그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을 위한 그릇, 사도로 택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주로 유대인보다는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더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 땅에서보다 외국, 이방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한 사도였습니다. 사도바울에 마음속에는 큰 근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근심이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마음속에는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고통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근심이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먼저 유대인들을 찾아갔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거기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내 동족이 먼저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그는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면 그들이 마음을 열고 그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데, 유대인들은 한결같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에 고통이요 아픔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면 그들이 영원한 불 못에,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내 동족이 바로 그런 삶을 산다고 할 때 그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내 동족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내가 어떤 대가라도 다 치룰 수 있다고 그렇게 고백합니다. 3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 오늘 바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의 형제 골육 친척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좋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저주받아서 지옥 불에 던져지더라도, 내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 길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을 위해서 너무 비통해하고 너무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바울의 간절한 고백은 이제 10장 1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구원을 얻게 함이라. 바울은 소원은 오직 한 가지, 내 동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기도를 드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입니다. 모세가 십계명판을 받으려고 시내산 위에 올라가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을 추며 먹고 마시고 음란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시려고 할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했습니 다. 생명을 건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제 이름을 생명책에서 빼 주십시오. 제 이름을 하늘 생명책에서 지워주십시오.”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도 그 기도에 응답을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마음이었고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인들은 나만 잘되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 나라는 망할지라도 나만 잘 되면 돼!”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89주년 3.1절 기념주일을 맞이하면서, 이제 또 이명박 장로님이 대통령으로 지난 주간에 취임을 했는데,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서 정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나라를 사랑해야 될 것인가를 이 시간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 기독교인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 무엇일까요? 첫째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장 큰 사명은 기도하는 사명입니다. 역사의 파수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파수꾼이 되어서 이 민족이 죄로 물들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자의 사명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잘 아시지요?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 나라를 빼앗긴 백성의 서러움을 여러분은 너무나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일제에 의해서 주권을 뺏기고 말도 뺏기고 재산도 뺏기고 모든 가족도 뺏겼을 때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아갔습니까? 우리의 누님들이, 우리의 한국여성들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서 갖가지의 만행들에 참으로 희생물이 되지 않았습니까? 나라 잃은 설움과 아픔인 것입니다. 시편 137편에 보면 이스라엘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는데 거기서 그들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자기나라 고국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눈물짓던 모습들을 시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바벨론 강변에 그들은 수금을 걸어놓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눈물 흘리며 수금을 켰다는 것입니다. 고국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외국에 나가도 대한민국으로서 여권을 가지고 가면 어디 가서도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 대한민국 참 훌륭한 나라입니다. 경제대국입니다. 축구 잘하는 나라입니다. 서울 올림픽을 무사히 치룬 나라입니다. 세상이 다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다면, 나라가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지 아시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렇게 좋은 나라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나라를 위해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라를 위해서 안전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나라는 우리를 위해서 참으로 보호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 나라를 막 욕합니다. “이런 나라에 왜 사는지 모르겠다.” “여기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여러분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 대한민국처럼 살기 좋은 나라가 많지 않습니다. 그걸 아셔야합니다. 그래서 불평하는 분들은 외국에 내보내야합니다. 나가보면 대한민국 같은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치안이 나쁘다하지만 미국에 가보십시오. 마음 놓고 밤거리 못 다닙니다. 그래도 한국은 아직은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이 살기 좋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은 참 특별한 민족 아닙니까? 우리가 늘 부르는 애국가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런 가사를 가진 국가를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특별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정말 살기 힘든 나라였지만 기독교가 들어와서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경제대국이 되고 교육 강국이 되었습니다. 세계10위안에 드는 그런 나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축복한 결과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나라에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더욱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않겠다.” 특별히 한국 초기 기독교를 보면 초기 기독교의 찬송가 14장이 애국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시간에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축복하셔서 이렇게 우리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은혜 안에 살게 하신 것이 주님의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도 잃어버려가고, 국가에 대한 고마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나라 사랑하는 첫 번째 길은 무엇입니까?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이번 성경통독새벽기도회에 나오셔서 새벽을 깨우면서 나라를 위해서, 위정자들을 위해서,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라사랑하는 길은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인들은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무엇입니까?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어두움이 있는 곳에 사랑의 빛을 비출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구제하는 사람, 긍휼이 많은 사람, 남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사회의 사랑이 없는 것은 바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삭막하고 어두운 세상 가운데 사랑의 빛을 전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 교회에 대해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동시에 모든 우상숭배를 척결하고 범죄를 배척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할 때, 그리고 범죄 할 때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오늘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는 길이 무업니까? 말씀 안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다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물질우상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성의 우상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쾌락의 우상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민족이 될 때에 하나님이 이 민족을 더 귀하게 사용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상을 던져버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의 삶인 것입니다. 태안에 기름유출사고가 일어나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참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100만의 신화”라고 그럽니다. 일본의 한 도서지역에 기름이 유출되었는데 33만이 모여서 그 기름때를 다 제거해서 그것을 ‘일본의 기적’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100만 명이 모여서 그 일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역시 한국인은 저력이 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기독교의 정신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태안에 봉사하는 데에도 절반이상이 교회단체고 기독교인들이 봉사자로 나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한국 기독교는 바로 역사참여적인 종교입니다. 애국하는 종교입니다. 우리 2008년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도 더욱 나라를 사랑하고 이 사회에 사랑을 실천하는 교인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민족복음화에 앞장서야 됩니다. 안창호선생님이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찰서 한 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10개를 세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교회는 이 사회의 정신적 지주인 것입니다. 정의의 보루입니다. 이 사회의 양심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 민족이 복 받는 길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민족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이유는 예배당 좌석이 비어서 이것을 채우려고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명이고 민족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 기독교인 숫자가 지금 대략 865만이라고 통계를 냅니다. 1919년 당시에 20만 명이 좀 넘었다면 지금은 865만 명입니다. 아직 1,000만 명이 좀 되지 않는다고 그럽니다. 그러면 5,000만 인구 중에서 약 20%가 기독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0명 중에 2명이 기독교인이고 8명은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 동족들이 장차 어떤 일을 당할 것인지 생각하면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되, 여러분 가족에게 먼저 복음을 증거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은 알지 못하다가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 그 비참함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오늘 기회가 있을 때 복음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복음을 증거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증거 하지 않을 때 그건 이미 죽은 기독교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만 예수 잘 믿다가 우리만 구원받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대한민국 민족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 한 동포가 구원받아야 합니다. 내 믿지 않는 가족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주님의 선택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3.1절 기념주일을 맞이하면서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다시금 여러분 마음속에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십시다. 사랑을 실천하십시다. 민족복음화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어둠이 있는 곳에 사랑의 빛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1절/ 나라 사랑 /에4:13-17 2019-04-18 04:02:18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올해가 3·1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세워진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일본의 강압된 식민 통치 아래서 고통을 받으면서 나라의 독립을 갈망했습니다. 대표적인 독립 운동이 온 민족이 함께한 3·1 독립운동입니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국내외적으로 있었습니다. 국
3.1절/ 나라 사랑 /에4:13-17 2019-04-18 04:02:18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올해가 3·1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세워진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일본의 강압된 식민 통치 아래서 고통을 받으면서 나라의 독립을 갈망했습니다. 대표적인 독립 운동이 온 민족이 함께한 3·1 독립운동입니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국내외적으로 있었습니다. 국내적인 동기로는 고종의 죽음입니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그 해 1월 21일에 고종이 갑작스럽게 죽습니다. 고종이 너무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소문이 떠 돌았습니다. 일본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 일본에 끌려간 셋째 아들 영친왕이 일본 공주와 결혼하게 된 것을 못 마땅히 여긴 끝에 자살했다는 소문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가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과 울분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았습니다. 그 당시에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의 종교 단체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독립 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고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 날이 3월 3일로 정해졌습니다. 그들은 3월 3일은 장례식 날이니 그 날을 피하고 이틀 앞당겨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습니다. 2월 28일 밤에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되고 독립선언서가 작성했습니다. 거사일인 3월 1일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곳곳에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글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 탑골 공원이 있는 서울 종로 거리는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그곳에 모인 군중들은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민족 대표 33인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대표 33인은 약속했던 탑골 공원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탑골 공원에서 가까운 인사동에 있는 요리집 태화관에 33명 중에 29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민족 대표들이 모여 있는 태화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이 모였으니 빨리 가야 한다고 재촉했습니다. 그 러나 민족 대표들은 혼란해 질 수가 있으니 자신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학생들은 민족 대표들을 설득하다 포기하고 탑골 공원으로 달려갔습니다. 2시 30분에 학생들 중에 하나가 단상 위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주인임을 선언하노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독립선언서 한 구절 한 구절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흘렀는데 이곳저곳에서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외침이 일어났습니다. 그 외침은 순식간에 거대한 함성으로 변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3·1 독립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전국적으로 3·1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2백만 명이었습니다. 전 국민의 1/10이 참여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의 독립 운동사를 보아도 전 국민의 1/10이 동참한 역사가 없습니다. 3·1 독립운동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1년이 넘도록 전국 방방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3·1 독립 운동에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기생들도 동참했습니다. 황해도 해주에서 시작되었는데 전국의 기생들이 ‘기생도 이 나라 백성이거늘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며 만세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일본 경찰이 천한 기생 주제에 뭘 알아서 독립 만세를 불렀겠느냐며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을 대라고 고문할 때 ‘우리는 일본 기생과 다르다. 내 나라를 사랑할 줄 아는 한 사람, 한 여자이다’라고 외쳤습니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국외적인 동기가 있습니다. 1918년 11월에 연합군에 의해 1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입니다.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권리가 있고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대의명분으로 보면 지당한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승전국이 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나라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둔 것입니다. 일본은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은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아무리 민족자결주의 정신을 부르짖으며 독립을 외쳐도 서방 강대국들과 일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일본의 편을 들어 더 확고한 식민지 정책을 지원하였습니다. 민족 대표자들은 3·1 독립운동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지만 시대의 흐름과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독립을 외치기 위해 목숨 걸고 모였는데 가장 호화로운 요리집인 명월관의 별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일본 정부에 자수를 해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5분 후에 출동한 일본 경찰에 잡혀 갔습니다. 잡혀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걸어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3·1 독립운동은 순수한 백성들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이었습니다. 3·1 독립운동은 일본의 억압 속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볼 때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3·1 독립운동의 기운을 받아 4월 11일에 일본 통치에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중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백성들이 힘을 모아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을 보고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은 우리나라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임시정부를 통해 이어지는 윤봉길 의사와 같은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꾸려진 광복군의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은 새롭게 전개되었습니다. 올해는 3·1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의미가 더 새롭습니다. 우리는 아픔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인 독일은 미국을 중심으로한 연합군과 소련의 합의하여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같은 패전국인 일본은 분단이 되지 않고 도리어 일본에 의해 억압을 받았던 우리나라가 강대국들에 힘에 의해 북한과 남한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 분단은 결국 6.25 전쟁으로 이어지며 남한과 북한 모두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지만 엄밀한 의미로 보면 진정한 해방을 이뤄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억압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오뚝이같이 다시 일어나 짧은 한 세대 안에 농업화, 산업화, 정보화 시대를 거치며 세계 무역의 10대국에 드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세계의 원조를 받았던 나라 가운데 다른 나라를 원조하는 발전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우리나라는 거칠고 험한 역사의 모든 역경을 극복하며 경제적,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이런 나라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우리 국민들이 만든 기적입니다. 서로 다투고 갈등이 크지만 나라가 어려우면 모두 하나가 되어 극복했습니다. 아직도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를 앉고 있습니다. 이념의 갈등, 빈부의 갈등, 지역의 갈등, 세대의 갈등 등 넘어야 할 산들이 많습니다. 저는 3·1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 예배를 준비하면서 오늘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모르드개, 에스더, 그리고 온 유대 백성들이 하만의 음모에 의해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민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모두에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영성을 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통해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이루는 곳에 사용하심을 믿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분단되었던 독일과 베트남은 통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만 분단된 나라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 주 27일, 28일에 베트남에서 온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립니다. 1년 전에 강원도에서 열렸던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에 1년 만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비핵화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은 길이지만 하나님이 도우심 가운데 커다란 변화의 시대가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분단을 넘어 평화의 통일이 오는 새 길을 조금 더 열리고 언젠가 평화 통일이 이루어져 지구촌에 평화를 전하는 나라와 민족이 되는 그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3.1절/ 나라 사랑하는 교회 /렘18:5-12 2011-03-22 14:58:57 read : 33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위험합니다 파시즘, 파시스트라고 하는 용어를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난 20세기에 등장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준 괴물과도 같은 이념입니다. 때로는 이 파시즘이 전쟁을 일으키고 인권을 말살하면서 수많은 악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국가, 민족, 인종이 개인보다 더 우월하고
3.1절/ 나라 사랑하는 교회 /렘18:5-12 2011-03-22 14:58:57 read : 33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위험합니다 파시즘, 파시스트라고 하는 용어를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난 20세기에 등장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준 괴물과도 같은 이념입니다. 때로는 이 파시즘이 전쟁을 일으키고 인권을 말살하면서 수많은 악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국가, 민족, 인종이 개인보다 더 우월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찬양을 하는 이념이기도 합니다. 파시즘은 애국심을 고양합니다. 그리고 애족사상, 국익 등을 강조하는데 거의 맹목적인 수준으로 예찬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파시즘을 강조하게 될 때 선의의 민족주의나 애국사상과 구별하기 어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전범인 도조 히데키 치하의 일본제국주의가 파시즘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베니토 무슬리니의 국가주의 또한 파시즘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도 파시즘의 전형적인 형태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갔고 인권을 말살한 악한 이념이었습니다. 유태계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히틀러가 나치즘을 선언한 것에 대해서 광기어린 민족주의의 폭행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독재자 히틀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한 민족 지도자의 능력은 국민들의 주의를 흩트리지 않고 공동의 적에게 집중하도록 만드는데 있다.” 그래서 나치즘은 거대한 공동의 적을 만들었습니다. 구체적인 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로 나아갔고, 600만의 유태인들을 죽이는 악을 행하기도 하였으며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전쟁의 악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민족주의의 악행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족주의는 근친상간이며 우상숭배이자 광기이다. 애국심은 민족주의의 예찬이다.” 그는 잘못된 애국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독일의 문호였던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화의 수준이 가장 낮을 때 민족주의의 감정이 가장 강하고 격렬하다.” 수많은 독재자들과 선동가들이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주창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조종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악을 만들어냈습니다. 민족보다 더 중요한 보편적 가치인 인권, 생명, 자유, 정의,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민족주의는 아주 위험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외국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글로벌한 다원화 사회에서 우리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다시 이해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민족주의’라는 단어에만 매몰된 ‘민족’이라는 용어는 역사의 뒷전으로 서서히 물러가야 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족이라는 명분으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민족’이라고 하는 단어는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공동체를 뜻합니다.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민족이라는 개념 속에서 묶여집니다. 민족이라는 명분을 통해서 우리 대한민국은 잃어버렸던 국권을 되찾았습니다 . 그리고 대한민국을 민주화의 자리와 경제발전의 토대에 올려놓은 것도 우리의 조상들이 대한민국의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국민 모두가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외치면서 응원했던 것도 우리가 같은 대한민국 백성이라는 민족에 대한 공통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3월 1일, 3.1절입니다. 92주년을 맞이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1919년 3월 1일로부터 벌써 백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주권을 빼앗겼던 대한민국의 한 맺힌 슬픔을 전 세계에 토로하면서 분연히 일어났던 우리 조상들의 자랑스러운 민족운동, 애국운동 그리고 신앙운동이 바로 3.1절입니다. 3.1절은 대한민국이 독립민족이요 자주민족임을 온 천하에 보였던 아주 소중한 사건이었습니다. 삼일운동 이후 3개월간의 전국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살펴보면 집회 횟수가 무려 1500회 이상이었습니다. 참가인원의 숫자는 200만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사망한 사람이 7500명에 달했고, 부상자가 16000명, 체포된 사람이 47000명, 불타 없어진 교회가 47개, 학교가 2개, 민가가 715개였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10개교의 여학생들도 이 민족운동에 참여했는데 그 숫자가 2천명이 넘습니다. 3.1운동은 계층, 지역, 남녀, 연령에 상관없이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일종의 시민저항운동이었고 시민혁명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나 일제치하의 고통 속에 있었던 우리의 선배들은 정말 힘들고 아팠습니다.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이 된다는 슬픔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라가 없고 민족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슬픔과 아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그 말만 들어도 우리의 가슴은 설레고 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민족만 생각하면 눈물이 났습니다. 자기 백성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잊고 하나님을 떠나 욕심과 탐욕 속에서 우상숭배에 빠진 자신의 민족을 보면서 고통 속에서 부르짖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고 우리는 토기장이가 만든 토기에 불과하다. 만약 하나님의 마음에 안 들면 토기장이가 마음에 안든 토기를 깨뜨려버리듯이 이 민족을 산산조각 낼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그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운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천하가 복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은 자신만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에 가득 찼습니다. 폐쇄적인 이기주의가 되었습니다. 민족주의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만을 아는 민족주의를 택할 때가 언제였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자기 배가 부르고 등짝이 따뜻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풍요는 내 힘과 내 능력 때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때부터 고마움이 사라졌습니다. 가슴의 떨림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백성을 택하셨는지를 망각했습니다. 소명이 사라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사명을 망각한 백성으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세상에 빛을 발하십시오 이사야서는 49장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 49:6) 내가 복 받은 것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복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교회가 복 받은 것은 한국 교회를 축복하고 섬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대한민국에 복 주신 것은 우리가 떵떵거리고 뽐내면서 교만하게 살게 하려함이 아니라, 이 나라를 이웃나라와 전 세계를 향한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을 발하려면 먼저 내 속에 빛이 있어야 됩니다. 그 빛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빛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내 속에 하나님의 빛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인간성은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편협해집니다.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탐욕스럽게 자기의 것만 챙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들을 제사장 나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 편협한 민족주의가 그들의 삶을 붙잡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예레미야 18:6) 예언자 예레미야가 답답해서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제발 하나님 앞에서 까불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뽐내지 마라! 뭔가 조금 가지고 뭔가 조금 이루어졌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지 마라!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흥망성쇠를 지니고 나의 주님임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그리고 예레미야는 8절에서 계속 말씀합니다.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예레미야 18:8) 아무리 못 되고 악독한 민족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악에서 돌이키면 그에게 내리려고 했던 재앙을 다시 제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예레미야 18:10) 내가 아무리 너희에게 복을 주고 너희를 풍요롭게 하겠다고 말했어도 너희가 악한 것을 행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그것을 도로 뺏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너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풍요가 악을 행하는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풍요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뭔가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나 자신도 그렇습니다. 내 가정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민족사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이 잘 나간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나라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떤 민족이었는가? 어떤 어둠속에 있었는가? 어떤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이것을 다시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풍요가 악을 행하는 기회가 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축복들을 인생의 쾌락을 즐기는 것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무신론적 사고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고, 하나님을 겁내지 않는 사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망가뜨립니다. 12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말씀에 대해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예레미야 18:12) 그들은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관두세요. 참견하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거예요. 내가 계획한데로 갈 거예요. 내가 악을 행하든 선을 행하든 간섭하지 마세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대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예레미야는 통곡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와 자유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4천년 역사 속에서 이러한 풍요를 누려본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교육의 열기도 주셨습니다. 정보화에 있어서도 우리가 가장 앞장서고 있습니다.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우리의 모습 속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교만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 능력과 내 힘인 것처럼 자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풍요를 악으로 바꿉니다. 탐욕스럽게 갈등하고 다투고 서로 빼앗으려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 민족사가 더욱 얼룩져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연평도 사건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구제역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정치인들이 싸움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폭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경고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내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이 어려운 난국을 슬기롭게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은 누구나 할 줄 압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정치인이면 정치인답게, 경제인이면 경제인답게, 교육자면 교육자답게, 과학자면 과학자답게, 내가 세상의 어떤 직업을 가졌어도 충성을 다해 맡겨진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라사랑이란 거대한 것을 외치는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에서부터, 내 삶의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다시 한 번 새로운 도약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3.1절/ 나라사랑 /시146:1-10 2015-04-16 14:51:58 read : 1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주일이면서 마침 삼일절입니다.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여 지정된 국경일입니다. 3.1 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함께 한 항일독립운동입니다. 특히 3.1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고,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일어난
3.1절/ 나라사랑 /시146:1-10 2015-04-16 14:51:58 read : 1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주일이면서 마침 삼일절입니다.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여 지정된 국경일입니다. 3.1 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함께 한 항일독립운동입니다. 특히 3.1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고,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두말할 것 없이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통치입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강행했습니다.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한 것입니다. 이런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해외에서는 애국 열사들이 국제 사회에 일제의 조선 강점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일제에 독립을 요구하는 다양한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민족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독립요구 운동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일본정부에게 보낼 독립통고서를 작성했고, 대규모 시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됨으로써 3.1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3.1 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도시와 같은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났고,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물론 일제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만세 운동 현장에서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하는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여 가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때 3개월 동안 시위진압 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고, 15,961명이 부상을 입었고, 46,948명이 구금되었습니다. 이 3.1운동은 온 국민을 나라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였습니다.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이 보다 체계적으로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제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무단통치를 끝내고 문화통치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5.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등 지구촌의 지역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자랑스러운 발자취 3.1운동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운동에 앞장을 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이 되는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명하지 않은 민족 지도자 48명 가운데 24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각 지역에서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도 기독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전국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을 살펴보면, 기독교가 주도한 곳이 78개 곳이고, 천도교가 주도한 곳이 66곳이고, 기독교와 천도교가 공동으로 주도한 곳이 42곳이나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시위를 주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3.1 운동을 출범시켰던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치밀한 계획 하에 3월 1일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파고다 공원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민족 대표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민족 대표 33인 중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일경에게 자수하여 체포되고 만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재용이라는 사람이 파고다 공원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만세를 부르게 되면서 3.1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재용이라는 사람은 미션스쿨인 경신학교 출신이고,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3.1운동에 앞장서자 일제의 탄압이 기독교에 집중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총독부가 1919년 5월 3.1 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이렇습니다. 교회당이 완파된 곳이 17교회, 반파된 곳이 24교회, 그리고 일부 피해를 본 곳이 42교회입니다. 교회의 재산 손해액이 당시 3만 불, 미션스쿨인 오산중학교의 피해액이 5천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19년 6월 30일 3.1 운동으로 투옥된 사람이 기독교인이 2,190명으로 유교, 불교, 천도교인을 합한 1,556명 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교역자도 151명이 투옥되었는데 이것은 다음으로 많은 천도교 직원 72명보다 월등하게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 복음화율입니다. 당시 조선의 인구 1700만 명 중 기독교인은 고작 20여만 명 그러니까 복음화율이 1.5% 정도의 미미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기독교가 한국의 주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막 전파되어 아직 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새싹과 같은 종교인 기독교가 항일독립투쟁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종교의 3.1운동 참여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학혁명 이래로 민중 운동을 주도하던 종교는 천도교였습니다. 교세가 200만이 넘었습니다. 당연히 항일독립투쟁에 천도교가 앞장을 섰습니다. 그래서 민족지도자 15명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천도교의 열정도 교세가 1/10 밖에 안 되던 기독교의 열정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교는 교세가 300만이 넘는 대중 종교였지만 민족 대표에는 2명만 참여하여 소극적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당시 유교는 조선의 국교이다시피 했지만 한 명도 민족 대표에 나서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만세운동에 후발주자로 참여했습니다. 역시 불교나 유교도 기독교의 주도적 역할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당시 천주교입니다. 당시 교황청은 이태리의 무솔리니 정권과 독일의 히틀러 정권을 지지했습니다. 이태리와 독일과 일본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교황청은 일본의 신사참배에 참여해도 된다는 전교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인들은 항일에 나서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기독교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복음화율 1.5%의 미약한 힘으로도 민족운동을 주도하는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3.1 운동 이후 국민들로부터 존경 받는 종교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세도 급격히 늘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에 32만 3천 명으로, 1922년에는 37만 3천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리고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산 안창호를 비롯하여 상해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이승만,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준 등 모두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그야말로 바다의 소금이 미량으로 바닷물을 짜게 만드는 것처럼 소수의 힘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이 애국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빛나는 유산을 깊이 간직하고 나라사랑에 앞장 서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헌신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미약한 힘으로도 어떻게 3.1 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나라사랑에 앞장서게 한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시인은 7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도다”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불의에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삼일운동 당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시인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일본을 정의로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빼앗긴 조선에 자유를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시인은 8절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는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시인은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께서 용기를 잃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셔서 불의와 맞서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고난과 박해를 무릎 쓰고 의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삼일운동 당시 우리 믿음의 선배들 역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게 될 것을 보았습니다.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용기를 내어 일제와 맞섰습니다. 어떤 두려움에도 물러서지 않고 의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당시 기독교 대표를 대표해서 3.1 만세 운동을 주도해 나갔던 사람으로 남강 이승훈을 들 수 있습니다. 남강은 3.1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대적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길선주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3.1 만세 운동에 참여토록 이끌었습니다. 남강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도중에 총독부 판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피고는 항상 일한 합병에 불평을 품고 조선독립을 희망하였는가?” 남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바가 있으니 오색 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왕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에 합병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겠는가?” 당시 여학생의 몸으로 잔다르크처럼 3.1 만세 운동에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분으로 유관순 열사가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독실한 믿음의 집안에서 자라던 중 선교사의 권유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3.1 만세 운동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6명의 학생과 함께 시위 결사대를 조직했고 3.1 만세 운동 현장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일제가 3.1 만세 사건 이후 학교를 폐쇄시키자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고, 유관순 열사는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치밀하게 준비하고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유관순 열사는 이 만세운동 현장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 경찰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체포되어 투옥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하 감방에 갇힌 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켰고, 나라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20년 9월 28일 18살 꽃 다운 나이에 순국, 순교하게 됩니다. 유관순 열사가 남긴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나라사랑에 온 몸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존경하고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의 나라사랑을 받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믿음의 선배들의 본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나라사랑에 앞장서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연합과 일치 당시 신흥종교였던 기독교가 3.1 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연합과 일치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기독교는 내부적으로 연합하는 일을 잘 수행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지역별로 교인들의 성향이 달랐습니다. 조선에 와서 선교했던 선교사들이 사역지를 지역별로 분담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에는 장로교가 강세였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기호지역에는 감리교가 강세였습니다. 서북지역의 대표인 남강 이승훈이 주동이 되어 기호지역의 기독교 대표들과 긴밀한 협력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33인 대표에 서북지역과 기호지역이 반반 참여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장로교와 감리교가 거의 반반 대등하게 참여하게 됐습니다. 서로 주도권 싸움을 한다든지 정치적인 갈등을 빚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 조선 기독교가 나라사랑에 일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3대 종교를 하나로 아울러 나갔습니다. 기독교를 대표하여 남강 이승훈은 천도교의 대표인 손병희와 긴밀하게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불교계를 대표하는 한용운을 설득해서 불교계의 참여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래서 3.1 만세 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그리고 불교 3대 종교가 연합한 항일독립운동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당시 난립해 있던 애국 세력들이 3.1 만세 운동을 중심으로 연합하는 대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던 독립단체들은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한청년단이 있었습니다. 후에 상해 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단체입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동경유학생들을 중심한 대한인국민회가 있었습니다.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3.1 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단체입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YMCA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단체의 핵심 인사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저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하여 곳곳에서 저마다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단체들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하나로 연합하여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교회는 각 지역에서 모임의 구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모임의 장소를 제공했고, 교회의 등사시설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데 사용됐고, 교회의 종소리는 만세 시위의 신호탄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서구의 자유 민권사상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이런 연합과 일치의 역할 때문에 당시 조선의 애국독립운동 세력들이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펼쳐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연합과 일치의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연합과 일치가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의 연합과 일치가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기독교는 분열과 다툼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교파가 갈라지고 교회가 분열되면서 기독교 내부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고 반기독교 정서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기 보다는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배들이 물려준 이 연합과 일치의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삼일절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온 몸을 던졌던 뜻 깊은 날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의 나라사랑의 빛나는 믿음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의 유산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선배들의 본을 받아 믿음으로 더욱 나라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1절/ 나를 따르려거든 /막8:31-38 2018-05-13 07:21:29 read : 7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의 여러 마을로 다니셨다. 하루는 길을 가시던 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 때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베드로가 대답하였다
3.1절/ 나를 따르려거든 /막8:31-38 2018-05-13 07:21:29 read : 7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의 여러 마을로 다니셨다. 하루는 길을 가시던 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 때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같은 본문인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본문에는 곧 이어 예수는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단한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신 내용을 담고 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일 후에 예수는 자신이 장차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당할 고난과 죽음과 그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밝히셨다.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시자 가장 먼저 반응한 제자는 역시 베드로였다. 32절에, ‘드러내놓고’라는 표현은 ‘명백하고 담대하게’라는 뜻이다. 즉 예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에 장차 자신에게 임할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고 확실하게’ 설명하셨던 것이다.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였다. 그 당시의 상황을 공동 번역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고 번역해 놓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경우에 주변 사람에게 이렇게 반응하나. 아무에게나 그럴 수 있나. 아니다.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곁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면서 까지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대단히 흥분되고 격양된 행동을 보이지는 못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예수께 대하여 그리하였다. 예수를 붙잡고 잡아 흔들면서 항변하였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예수의 가실 길과 겪을 고난에 대하여 막아서려는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면서 항변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셨다. 성경이니까 젊잖한 표현으로 기록한 것이지 쉽게 말하면 무슨 말씀인가. “너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려면 내 곁에서 꺼져 버려라.”하고 무섭게 책망하신 말씀이다. 그 당시 상황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꾸짖으셨다. 그 사건 이후에 예수는 곧 이어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심각한 교훈을 말씀해 주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이렇게 해야 한다고 중대한 신앙의 태도에 대하여 차근차근 말씀해 주셨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대하는 중에 은혜가 되길 바란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렇다.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첫 태도는 ‘자기 부인’(自己 否認, Self Denial)이다. 그렇지 않나.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자. “요즘 내 신앙생활이란 것이 나 중심인가 아니면 예수 중심인가.”하고 반문해 보자. 애초부터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좋다더라. 예수 믿으면 마음이 평안해 진다더라. 예수 믿으면 집안이 편안해 진다더라.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더라.”뭐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를 믿는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좋다. 예수 믿고 나서 가정이 평안하고 가족 간에 행복하고 가정사가 형통하고.... 뭐 그런 거 다 좋다. 그러나 그런 식의 바람이나 소원을 갖고 종교에 귀의하려하는 이들은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많다.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원어의 뜻은 자기 본래의 성품이나 죄된 생각이나 습관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육의 욕망을 억제하고 다스릴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의 뿌리를 끊고 주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교회가 지향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신앙이며 칼럼에서 99세를 일기로 엊그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신 빌리 그래함 목사를 붙들었던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의 신앙이기도 하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그 무엇도 대신 할 수 없는 신앙.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이다. 내 안에 내가 주인으로 살아서 나를 내가 주장하고 내 생각, 내 경험, 내 판단, 내 느낌, 내 목적, 내 취향, 내 요구, 내 욕망이 원하는 대로 하루하루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자고 싶은 것 다 자고, 가고 싶은 곳에 다 가고, 사고 싶은 것 다 사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지내면서 나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며 산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어떻게 나 중심으로 원하는 것을 다 하면서 주를 따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이런 믿음직스럽고 멋진 신앙 고백을 했던 베드로인데 어떻게 잠시 뒤에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게 된 것일까. 베드로의 그 어떤 태도와 모습이 그런 지경으로 자신을 몰고 간 것인가. 베드로는 예수께서 장차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버린바 되고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후 삼일 후에 살아나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받아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대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붙들고 항변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동들은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예수는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그를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신 아버지의 분부하신 사명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께서 하루하루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에게 하라고 하신 아버지의 분부를 이루어 가는 주님의 삶의 과정을 부인하였던 것이다. 맞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이다. 교회 생활 즉 우리의 공동체 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늘날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해야만 할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가.”하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40년 전인 1977년에 신학교에 입학하니까 첫 학기 첫 시간에 어느 과목 교수께서 칠판에 크게 백묵으로 독일어 단어 세 자를 써 놓았다. 그리고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그 시간 그 강의의 장면과 내용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Sit's in Leben 삶의 정황 이란 세 단어였다. ‘생명의 자리, 삶의 자리, 살아가는 인생의 자리’에서 매 순간마다 어떻게 반응하고 응답하며 살아가느냐고 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다. 예수의 12제자들은 예수께서 붙잡히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처참하게 달려 고통 중에 돌아가시기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다. 그래서 가롯 유다는 결국 예수를 부인하고 팔아 버렸다. 베드로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거짓말하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버렸다. 다른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저들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 하신 후에도 그랬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알고도 저들은 한 자리에 숨어 있었다. 그 현장에 부활 예수께서 찾아 가셨다. 그런데도 그 날 밤에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 일곱 명은 갈릴리에 가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였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등 저들 제자들이 평소에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던 제자들이었다면 그랬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역사의 중심에서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과 일 앞에서 믿음의 사람답게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겁해지고 초라해지고 후대의 역사가들과 후손들에게 지탄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고 말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일제 36년 식민지를 겪어야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일제의 만행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신사 참배 강요, 창씨개명, 한국말 사용금지, 일본말 사용 강요, 태평양 전쟁에 쓸 전쟁 물자 강탈 등등 점점 더 탄압이 극심해져만 갔다. 세월이 지나면서 일본의 편에 서서 살아 남으려 하고 그런대로 출세도 하고 성공도 하고 자식들도 가르치고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젖어 살려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해방의 날이 찾아오고 후대에 역사를 재평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분류되기 시작한 것이 항일파와 친일파가 아닌가. 각계각층의 내노라 하던 인물들 중에서 친일파로 구분되어 후대에 그 이름을 거론하기조차 부끄러워진 이름들이 많다. 왜 그렇게 되었나. 그 시대, 그 역사의 현장에서 ‘자기 부인’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이처럼 오늘 날도 역사의 현장에서 비겁하게 판단하고 부끄럽게 살면 자자손손 그 부끄러움이 점점 더해 가고 말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내 앞에 떡이 있으니 떡 먹고 술이 있으니 술을 마시고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다가 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역사의 흐름 앞에 예수 정신을 가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을지라도, 극심한 고난이 내 앞을 가로 막을지라도, 내 앞에 죽음의 칼이 놓여 있을지라도 역사 앞에 비겁하게 타협하며 목숨을 연장하려 하지 않고 의로운 고난과 의로운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자기 부인’이 아닌가.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자기 부인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만 것이다. 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군지를 제대로 깨닫고 살지 못하고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하며 분별력 없이 살았기 때문에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 조차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린 것이다. 아이 성 전투 현장에 투입되었던 정예화된 3,000명의 특공부대원 중의 한 명이 아간이었다. 그러나 아간은 전쟁 명령을 어기고 자기를 부인하는 전투태세를 지키지 못하였다. 결국의 그의 탐심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아골 골짜기에서 돌 탕에 맞아 죽고 불태워지는 무서운 심판을 받고 만 것이다. 우리가 지난 해 마틴 루터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지냈다. 그 당시의 역대 교황들과 교황청의 높은 자리에 있던 추기경들과 신부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그러나 역사는 그런 타락한 교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지내던 종교인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 시대 현장에서 역사의식을 갖고 불의에 항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 원했던 종교 개혁자를 주목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예수”이런 신앙의 중심에 서서 자기를 부인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역사의 불의 앞에 맞섰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마의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던 그 사명의 십자가였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내게서 이 쓴 잔을 옮겨 주시옵서.”라고 기도하던 그 십자가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한 후에 새벽에 붙잡히셨다. 그리고 묵묵하게 죽음의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온갖 수치와 고난과 아픔을 다 참고 견뎌 내시며 끌려 다니셨다. 그러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자기 십자가’가 무엇인가. 어떤가. 자신에게 물어 보라. 지금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가. 나의 이기적인 마음인가. 나의 탐심인가. 나의 게으름인가. 세상이 너무나 좋게 느껴지는 세상 열락인가. 너무 형통하고 너무 좋고 너무 세상이 신나서 세상으로부터 발을 뺄수가 없는가.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란 자기 가난, 자기 고난, 자기 연약함, 주기 질병, 자기 부족, 자기 불만족, 자기 열등감 혹은 반대로 나의 풍요, 나의 성공, 나의 교만, 나의 지식, 나의 학벌, 나의 거만, 나의 우월감 등등 도대체 뭐가 나의 십자가인가.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난, 고통, 거룩한 두려움, 불이익, 제약, 순교의 위협, 죽음의 도전 뭐 이런 것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공동체로 하면 “예수사랑교회”라는 교회 생활의 공동체성이 오늘 날 우리에게 지워 주신 우리들의 십자가일 수 있다. 초급장교로 임관하고 광주 보병학교에 입소하였다. 임관한 이후였지만 소위 계급장을 띠고 유격 훈련장에 들어갔다. 빨간색 모자를 눌러 쓰고 까만 썬글라스를 쓴 날카로운 외모의 교관과 조교들이 초급장교를 햇병아리 다루듯 했다. 혹독한 유격 훈련이 일주일 내내 계속되었다. 한 나절 내내 목봉 체조라는 것을 한 적도 있다. 전봇대만한 통나무를 7-8명의 분대원들이 어깨 위로 높이 들었다 내렸다하는 반복 동작을 오전 내내 하는 체력의 극한점을 경험하게 하는 혹독한 훈련이었다. 나는 큰 키도 작은 키도 아닌 중간 키였다. 내 앞에 성균관 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해 온 동기가 한 조였다. 키가 너무 작아 어떻게 임관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동기는 두 팔을 높이 들어 보아도 목봉에 손바닥이 다치를 않는다. 그러하다 보나 마음에는 원할 지라도 그 동료는 목봉체조에 고통 분담이 되질 않았다. 어떤가. 나는 나의 가족의 일원으로 나의 몫의 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교회의 지체로서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예수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을 거쳐서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자기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 하는 곳을 향하여 나아갔다. 물론 중간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기도 하였다. 그 당시 예수는 이미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시고 너무나 채찍에 몹시 맞으셔서 거반 죽은 자처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예수는 이마와 얼굴과 잔등과 온 몸이 피 범벅이 된 채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힘겹게 일어났다가는 다시 넘어지고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골고다를 향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고 있었다. 사순절 신앙이란 무엇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는 자기 점검의 기회여야 한다. 주님의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가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다. 마카리우스는 또 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 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다시 한 번 애원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다. 그러고는 마카리우스가 당신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다. 거기에는 그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와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온데 간 데 없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마카리우스가 주님께 물었다.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진배 없단다." 이 이야기는 지난 19세기와 20세기 초 까지의 남아공의 선교사요 영성가요 목회자요 설교가요 탁월한 저술가였던 엔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의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이란 묵상 중에 나오는 글이다. 이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이 있나. 아이스스케이팅 쇼트 트랙 여자 계주 3000미터를 보았나. 넘어져도 일어나고, 앞서거니 뒤 서거나 금방 또 부딪칠 것 만 같은 아슬 아슬한 순간들을 극복하며 서로 선수의 힙을 힘껏 밀어 주며 이어 달리는 순식간의 숨막히는 경기의 장면을 보라. 얼마나 긴긴 시간의 연습과 노력과 수고와 땀 흘림과 인내와 투지와 기술이 쌓이고 쌓여서 거기 까지 갔겠나. 교회 생활, 기도 생활, 예배 생활, 누군가를 주의 자녀로 전도해서 새 사람으로 세워 가고, 봉사하고, 섬기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주를 섬기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지 않나.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데 엄청나게 좋은 결과가 있는 경우가 있나. 컬링이란 경기도 보라. “여어어영미이이이이야아아아...........”검은테 안경을 지긋히 콧 잔등에 내려 쓰고 두 눈의 초점을 맞추어서 온갖 집중력을 다 하는 그 모습을 보라. 그래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감상이 아니다. 유희와 소풍이 아니다. 자기 십자기를 지는 것은 매 순간의 영적 전쟁이며 자기와의 싸움이다. 나를 따를 것이니라. 기독교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이다. 그냥 명상하다 말고, 좌선하고 마는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주삼라만상과 각 인생의 중심에 찾아 오셔서 우리 속에서 일하시고 역사하시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런 구원 사역의 모범을 보이시고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다. 예수께서는 늘 고단한 나날을 사셨다. 어떤 때는 너무 배가 고파하시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갈릴리 호수를 건너는 배 안에서 고물을 베고 잠이 드셨는데 큰 풍랑이 일었다. 배 안에까지 물이 넘쳐 들어오고 배가 가라앉게 생겼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고단하게 깊은 잠을 주무시기도 하셨다. 예수는 밤이 되어도 잠자리도 변변히 준비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물론 언제나 그러셨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12제자가 함께 동행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한 끼 음식을 먹어도 꼭 13인분이 해결되어야만 했다. 물 한 잔씩을 마시려고 해도 13잔의 물이 필요하였다. 그런 예수와 예수의 12제자들을 섬기고 돌보고 공궤하는 손길도 끊임이 없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다른 복음서에 없는 그런 내용들을 자세히 기록한 부분이 있다. 누가복음 8장 1-3절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오늘 날 우리 교회의 지난 8년도 마찬가지였다. 첫해, 둘째 해, 그리고 해마다 달마다 주마다 날마다 주의 사역을 위해서 남다르게 헌신해 온 막달라 마리아. 권력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같은 아름다운 헌신을 계속해 온 이들이 구석구석에 있어서 오늘 날의 교회로 자리 매김해 온 것이다. 예수 당시에 저들이 자기 소유로 예수를 섬기고 예수 곁의 제자들을 섬겼다. 오늘 날 우리교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주를 섬기고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또 섬겨온 헌신이 있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렸던 여인이었다. 그는 예수를 만나 귀신이 떠나가고 새 사람이 되어 새 인생을 살았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는 그 당시 로마의 헤롯 왕 곁에서 출세한 남편의 아내로서 세상적인 지위와 권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열심히 주님께 받은 은혜와 구원의 감격을 감사하며 예수와 제자들의 선교를 돌보고 섬겼다. 신앙생활, 교회 생활이 내 기분, 내 감상, 내 비위 맞추기 정도의 수준에서 맴돌다 마는 상태의 반복의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어쩌다 보니까 물댄 동산이 되나. 어쩌다 보니까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되나.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주어지는 열매요 결과요 축복이지만 내 몫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때에 기적도 일어나고 표적도 일어나는 것이다. 빈 항아리에 아구까지 차도록 물을 퍼다가 붓는 순종이 먼저 있었고 그 물을 다시 퍼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는 과정에 순종하던 하인들은 알았다. 언제 어떻게 해서 물이 포도주가 되었는지를 하인들은 알았다. 역사의 현장에 순종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이들이라야 체험한 기적을 생생하게 간증할 수 있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렇지 않나. 우리 민족의 해방도 어떻게 하다 보니 그런 날이 왔나. 아니다. 3.1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이 생명을 바쳐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 헌신하였는가. 서재필, 유관순, 윤동주, 윤봉길, 안중근, 안창호, 김구, 이준, 신석구 목사, 신홍식 목사, 이상재, 조만식, 이승훈, 전덕기 목사,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길선주 목사, 김규식 등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죽음과 희생의 땅에 피어난 무궁화 꽃이 해방의 꽃이며 광복의 꽃이 아닌가. 6.25 전쟁 극복과 유신군사 독재를 뛰어 넘고 민주화와 번영하는 대한민국을 이룩한 오늘 날 큰 나무처럼 세계 강국으로 발전하게 된 밑거름이 된 저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자랑스럽지 않나. 후대의 역사가 이완용을 귀한 인물로 치나. 누가 일본 눈치보고 러시아에 기웃거리며 중국에 빌붙어 살아남아 보려고 한 자들을 귀하게 여기나. 수많은 매국노들과 친일파 나부랭이들을 귀하게 여기나. 역사의 현장에서 비겁하게 쭈뼛쭈뼛하며 살고 아첨하며 살다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마는 인생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주의 제자다운 삶을 살 것인가 선택하여야만 한다. 결단하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기도와 말씀과 헌신과 희생의 중심에서 존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각 사람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
3.1절/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에4:13-16, 에7:1-4 2009-04-27 16:30:39 read : 32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3.1운동과 에스더 "오등은 자( )에 아(我) 조선인의 독립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서 세계 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피끓는 젊은 시절 - 주먹 쥐고 읊어대던 이 구절을 기억하십니까? 3.1 독립운동이 있은지 어언 90주년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건
3.1절/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에4:13-16, 에7:1-4 2009-04-27 16:30:39 read : 32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3.1운동과 에스더 "오등은 자( )에 아(我) 조선인의 독립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서 세계 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피끓는 젊은 시절 - 주먹 쥐고 읊어대던 이 구절을 기억하십니까? 3.1 독립운동이 있은지 어언 90주년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후 많은 혁명과 정권교체 그리고 헌법개정이 있었지만 헌법 전문 첫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이 만큼 3.1운동은 이 나라의 건국정신이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1운동은 세계사의 찬란한 등불이 되었습니다. 1919년 5월 4일 있었던 중국의 5.4운동 필리핀의 독립 시위운동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 등은 모두 3.1운동의 또 다른 하나의 불꽃이기도 합니다. 3.1운동이 있은지 10주년이 되던 1929년 인도 간디의 스승 타고르는 이렇게 한국을 노래했습니다.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등불의 하나였던 조선인,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빛이 되리라. 무한히 퍼져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전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조선이여 이제 깨어나소서." 3.1운동이 있은지 이틀후 기독교계는 「경고! 아, 이천만 동포」라는 제목으로 3.1운동은 곧 하나님의 운동임을 선포한 바가 있습니다. "평화의 하나님, 자유의 하나님은 이제야 그 큰 손을 들어 침략주의를 타파하고 세계 수평선상에 평화의 낙원을 축조하여 자유의 무대를 건설하는도다"라고. 지금부터 90년전 당시 이 나라 그리스도인은 전국민의 1.5%인 30만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독립운동을 선도하고 있었고 시대를 판단하는 분명한 통찰력과 안목을 가지고 참혹한 식민정책속에서 절망하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용기있고 박력있게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임을 세상에 알리며 살았습니다. 3.1운동은 33명의 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인이 2명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세는 천도교의 10분의 1도 안되었지만 불교인의 8배, 천도교인보다 그 숫자가 많았습니다. 6개월간 계속된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사람들 중 종교인으로는 장로교인이 2,468명으로 가장 많았고 천도교인이 2,200명 감리교인이 560명 유교인이 346명 기타 개신교인이 320명 불교인이 220명 천주교인이 55명이었습니다. 이 애국운동은 곧 기독교운동이었고 장로교운동이었습니다. 오늘 3.1운동을 기념하는 그 90주년이 되는 이 주일 아침 설교 제목을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라고 잡았습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이 말씀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 민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위해 외쳤던 에스더의 외침이었습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이 말씀의 뜻은 "내 민족을 내가 책임지겠습니다"하는 각오요, "내 민족을 구원 해 주소서"하는 기도였습니다. 신구약 66권 중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란 말이 한 번도 안나오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보게 하는 책입니다. 바로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서의 이야기는 페르시아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주전 500년을 전후로 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에스더는 일찌기 고아가 되어 사촌 오라버니 모르드개의 집에서 자라났으나 그는 미모와 믿음과 지혜가 뛰어나 페르시아 임금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때에, 오만 불손하기 짝이 없는 하만이라는 총리대신이 있었는데 하만은 유대민족을 미워했고 특히 모르드개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아부하지 않았던 모르드개를 당장 처형하고픈 마음이 수십번씩이나 있었지만 왕후 에스더의 사촌이라는 이유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안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한 치밀한 음모를 꾸몄고, 마침내 전 유다인을 학살해도 좋다는 결재를 아하수에로 왕에게 받아냈습니다. 엄청난 뇌물을 주고 왕의 결재를 받은 하만은 쾌재를 부르며 서기관들을 소집하여 대신들과 각 지방 총독과 관리들에게 보낼 조서를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각 지방과 민족의 말로 번역하여 왕의 반지로 인을 친 다음 전국 각처에서 그 조서를 공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조서의 내용인즉, 12월 13일 하루 동안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유다인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II. 민족은 공동체 이때 에스더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는 이토록 무시무시한 음모가 진행되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에스더 왕비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다 얘기한 후 에스더에게 한 두가지 충고를 하게 됩니다. 첫 번째 충고가 4:13에 있는 말씀입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은 곧 "네가 지금 왕후가 되어 왕궁에서 편히 지내고 있다해서 만족하지 말라. 모든 유다인이 말살 당한다면 너 역시 화를 면키는 어려울 것이다"는 충고입니다. 에스더를 향한 모르드개의 이 충고는 비록 2500년 전의 절규만은 아닙니다. 바로 오늘 나와 여러분을 향한 외침입니다. 즉 우리에게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고, 하루 하루를 편히 산다해서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있는 것이고,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입맛이 있으며, 국민은 국민으로서의 갈길이 있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나혼자 편히 잘먹고 잘산다해서 숱한 이 민족의 문제를 외면한다면 이는 우리 각 사람의 값어치 조차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이름하여 "공동 운명체"라고 합니다. 자식이 죽어가는데 어찌 부모가 가만히 있을 수 있으며 남편이 파멸되어 가는데 어찌 아내된 사람이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정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나 국가나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 운명체란 마치 태평양에 떠 있는 한척의 배와도 같은 것입니다. 배가 침몰하면 선장도 갑판장도 선원도 승객도 다 함께 물에 빠져 죽게 됩니다. 국가가 잘되어야 개인이나 가정이 잘되고 개인이나 가정이 잘되어야 국가가 잘되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신령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의 운명이 반드시 공동체의 운명일 수는 없으나 공동체의 운명은 그래도 개인의 운명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멸망하면 개인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투옥당했던 마틴 니뮬러 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독일에서 그들은 반대 정당 사람들을 숙청할 때 나는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유다인들을 잔인하게 죽였는데 나는 유다인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노동조합에 가맹한 노동자들을 체포하러 왔는데 나는 내가 노동조합원이 아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그들이 카톨릭교도를 잡으러 왔는데 내가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그땐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명심하고 기억해야 될 대목이 아닐런지요! 한국에서 26년동안 살아온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라는 사람이 재미있는 책을 한 권 냈습니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란 책입니다. 그가 언젠가 방송에 나와 '나 밖에 모르는 한국인'이라는 프로그램 타이틀로 서스럼 없이 한국인을 비판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영리하고 똑똑한데 자기 밖에 모른다. 일본 사람은 아무리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이익이 되어도 나라에 손해가 되면 그짓을 안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자기 개인에게 유익이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얘기입니까? 모르드개의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에 대한 에스더의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16절에 보면 "수산에 있는 모든 유다인이 모여 금식하며 합심하여 기도하자"는 말씀입니다. 공동체의 문제이니 만큼 모두 하나가 되어 해결하자는 말씀입니다. 성도의 연합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탄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성도들의 마음과 뜻을 흩고 기도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위인들은 위기때마다 기도했습니다. III. 지금은 함께 기도해야 할 때 우리는 지금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시며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는 한이 있어도 이 백성만은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 나라가 망하고 있다고 예수님은 호통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내 일만 하고 편안히 누워 있는 것만을 즐겼더라면 우리는 분명 이렇게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아, 내가 나라를 망치고 있구나!"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가 조금 어렵다고 민족이 망하지는 않습니다. 사업이 조금 안된다고 굶어 죽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라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 역사의 문을 닫으십니다. 그 날이 바로 이 민족이 망하는 날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러분, 좋은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에 오십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목사가 없으면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교회에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오십니까?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은 배울 것이 없으면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친구를 만나러 교회에 오십니까? 친구가 없으면 신앙도 버립니다. 그러나 기도하러 교회에 오는 사람은 언제든지 신앙이 살아 있습니다. 목사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최후까지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입니다. 또 회개하며 기도할 일이 있습니다. 세계 경제와 함께 수출로 먹고 살던 우리나라도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서로 위로하며 조금만 견디면 됩니다. 그런데 금방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돈이라는 우상 앞에 무릎을 꿇었기에 우리는 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만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 모르드개의 절개를 우리는 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치가들은 오랫동안 돈으로 정치를 했습니다. 기업가는 기술과 성실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사업을 했습니다. 정치가에게 돈을 주고 기업을 했습니다. 법관들은 공의로 재판을 하지 않고 돈에 따라 재판을 했습니다. 유전 무죄, 무전 유죄? 교육자나 학부모들도 돈으로 교육을 했습니다. 교회는 신앙을 가르치지 못했고 기복을 가르쳤습니다. 부모들이 모두 물주로 보이기 때문에 불효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에게 돈을 먹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야 내 아이들이 살고 그들의 미래가 살고 나라가 삽니다. 온 백성과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고 일어선 에스더의 용기를 보십시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여기에 잠시 페르시아 왕궁의 관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왕비라고 할지라도 왕이 부르지 않으면 왕 앞에 나갈 수 없는 것이 궁중법도 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만이 유다인을 몰살 시키기로 한 12월 13일은 다가오고 왕은 에스더를 부른지 30일이나 지났습니다. 그렇다고 궁중법도를 어기고 그냥 왕 앞에 나아갔다가 이 일 저 일도 그르치게 될 위기를 맞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바로 그때, 에스더는 자신과 온 민족이 금식하며 기도하자고 요청한 것입니다. 기도하자! 민족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자! 일이 다급하고 중차대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자!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위기나 민족적인 문제 상황속에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분명합니다. 기도만이 이 민족을 구원합니다. 기도만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기도하는 민족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면 나라가 살고 한국교회가 살 것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워지면 민족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지금은 함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한 교회에서 존경받는 장로님 가정에 한밤 중 강도가 들었습니다. 총을 내밀며 "엎드려! 집안에 있는 것 모두다 내 놔" 그때에 가족을 다 안방에 눕혀놓고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고 머리 위로 두 손을 얹어놓고 싹싹 빌면서 그렇게 빌었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시면 있는 것 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통장도 보석도 수표도 현금도 다 강도의 손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하는 말이 "앞으로 10분동안 일어나면 죽는다. 꼼짝하지 말고 고개숙이고 엎드려 있어." 고개 숙이고 엎드려 있는 동안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울음보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 성령의 감동이 들려왔습니다. 「종아 목숨만 살려 주시면 모든 것 다 내어놓겠습니다. 참으로 너로부터 오랜만에 들어보는 신앙고백이구나. 목숨만 살려주시면 모든 것 다 내어놓겠습니다. 종아 몇십년만에 너에게 들어보는 신앙고백이구나. 6.25의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네 앞에 거대한 포탄들이 떨어질 때 먼지 앞에 고개를 숙이고 네가 그 신앙고백했지. 하나님 목숨만 살려주시면 내 생애를 깨끗하게 주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그 이후 한번도 너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신앙고백, 강도 앞에서 네가 하게 되었구나. 강도가 너의 하나님이더냐. 강도 앞에서 해야 될 신앙고백을 왜 내게는 하지 못했더냐. 가난 가운데 살려주시면 이 질병 가운데 살려주시면 하나님 앞에 헌신하겠다고 진실하게 살겠다고 주여 일제치하에서 이 민족을 살려주시면 주여 6.25의 저 괴뢰의 손아귀 속에서 민족이 두 동강이 나는 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 이 백성을 살려주시면 이 가난 가운데 이 민족을 살려주시면... 얼마나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신앙고백이더냐.」 IV. 이때를 위함이라 에스더를 향한 모르드개의 두 번째 충고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4:14절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이 말씀은 에스더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이 충고를 듣고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단하고 분연히 일어섰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로마의 박해자들이 기독교를 이기지 못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고 지혜를 얻은 에스더는 임금께 나아갔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3.1운동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소중한 유산 중 하나는 바로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날, 일제는 교회를 부수고 종탑을 헐어 버리고 성경과 찬송을 빼앗아 불태우고 주요 기독교 인사들을 검거하여 투옥하고 고문하였습니다. 1919년 3월 21일 독립 운동을 하다가 왜경에 잡혀 고난을 당한 한 여자 신도의 기록을 살펴봅니다. "나는 평양에서 3월 21일에 체포되어 경찰에 구금되었다. 그 감옥에는 여자들도 여럿이 있었고, 남자들도 많이 있었다. 경찰들의 질문 요지는 거기에 잡혀 온 사람들의 성분이 기독교인가? 아닌가를 조사함에 있었다. 거기에는 열 네 사람의 여자 기독교 신자와 1명의 천도교 신자가 있었다. 그 중에 세 사람은 전도사 부인이었다. 그런데 경찰들은 채찍으로 우리 여자들을 내려치면서 옷을 다 벗기고 벌거숭이로 여러 남자들 앞에 세워 놓았다. 경찰은 나에게 대해서는 길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죄목밖에 찾지 못했다. 그들은 내 몸을 돌려가면서 마구 구타해서 전신이 땀에 흠뻑 젖었다. ... 내 양손을 뒤로 제쳐 꽁꽁 묶었다. 그리고 내 알몸을 사정없이 때리고 정신을 잃으면 찬물을 끼얹곤 하였다. 또 담배불로 내 몸을 지졌다. ... 어떤 여자는 정신을 잃었고 ... 또 어떤 여자는 두 발이 꽁꽁 묶인 채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 견딜 수없는 무서운 욕과 조롱을 우리는 받았다..."(3.1운동비사 기독교사상 1966.3월호)고 기록하였습니다. 또 수원에 있는 제암리 교회당의 소실 사건은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일본군 중위 아리다는 군대를 동원하여 그해 4월 15일 낮 2시경 교인들을 예배당 안으로 모이게 한 후 불을 지르고 그 불꽃 속에서 뛰어 나오는 교인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결국 30명의 교인은 다 타 죽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학살과 만행은 서천리 부근 기독교인들이 사는 열 다섯 군데에서도 똑같이 감행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가 만난 비극에 대하여 친일 활동을 하던 미국 목사 귈리크 (S.L. Gulick) 마저 미국 선교본부에 보내는 그의 3.1운동 보고서에 마지막 결론에서 "너무나도 비참하고 처참하여 우리는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라고 합니다. V.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임금 앞에선 에스더의 절규가 무엇이었습니까?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왕후 에스더가 요구하는 소청은 부귀나 영화나 관능이 아니었습니다. 진멸 위기에 처한 자기민족을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부귀 영화와 관능에 빠져 시동생 헤롯과 함께 살던 왕후 헤로디아는 자신의 부정을 책망하는 세례 요한의 목을 제거해 달라고 소청했습니다. 민족을 살리고 인간을 구원하는 소청이 아니라 의인의 목을 자르는 비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같은 왕후의 자리에서 에스더는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고, 헤로디아는 의인을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소청이 한 사람은 만고의 애국자로 다른 한 사람은 만고의 악녀로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소청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이제 한국 교회는 하나님 앞에 조용히 엎드려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조국을 우리에게 맡겨 주십시오. 대한민국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역사를 책임지고 이끌어 가겠습니다. 이같은 책임과 불타는 사명의 기도가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서 터져 나와야 합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오늘 우리교회를 이만큼 성장시켜 주신 이유가 이때를 위함이 아니더냐? 오늘 우리교회에 한국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비젼을 보여 주신 이유도 이때를 위함이 아니더냐?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3.1절 90주년을 기념하는 이 주일아침, 민족복음화의 염원이 불타오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으나 기독교인들에겐 조국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민족이 구원 받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일찌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국이 로마로부터 해방 되기를 바라며 승천하시기전 예수님께 "주여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정한 회복이 무엇이며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때와 기한은 너희의 알 바가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이 민족 회복의 궁극적인 해답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애국의 길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된 애국은 궁극적으로 하늘 나라와 연결된 선교적인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동족 구원을 향한 사도 바울의 애끓는 고백을 들어 보십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거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나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도 조국의 멸망을 눈앞에 보면서 피맺힌 동족애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졌으나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향하는 피맺힌 애국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한소망교회라 부릅니다. 한국의 소망, 복음 한국은 인류의 소망이기를 원하는 우리의 몸부림이 담겨져 있는 이름입니다. 나라 사랑의 마음이 담긴 이름입니다.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하고 분연히 일어섰던 결과가 무엇입니까? 1. 유다인을 죽이려고 세워두었던 사형대에 대적 하만이 달리는 통쾌한 대역전극이 펼쳐졌습니다. 2. 에스더는 왕비로서의 그 지위가 더 높아졌고 왕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가 하면 3. 모르드개는 하만이 앉았던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에스더서의 결론 - 마지막절 10:3을 보십시오. "유다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다인 중에 크게 존경받고 그의 허다한 형제에게 사랑을 받고 그의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더라" 할렐루야! 일찌기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이 백성을 버리지 마옵소서. 주의 백성들을 주의 나라들을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몸부림했습니다. 이 하박국의 몸부림이 한국교회에 가득 차야 할 때입니다. 주여 수년내에 이 땅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황무한 이 땅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실망하고 절망하는 저들 가운데 희망의 불을 붙여주시옵소서.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희망과 용기를 선포할 수 있는 용기를 희망을 꿈을 주시옵소서. 우리민족은 대단히 정적인 민족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신바람이 나면 뭐든지 해 냅니다. 좀 성공했다 싶으면 금방 우쭐하다가도 금방 실패했다 싶으면 쉽게 낙심합니다. 기가 죽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바람 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민족입니다. 주여, 한국교회에 성령과 기도의 신바람을 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경제위기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간다고 해서 너무 기죽지 마십시오. 인내하십시오. 주께서 한국인의 기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주님앞에 기도하면 새로운 신바람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있어서 일제치하에서 다시 살아났습니까? 우리가 무기가 있어서 6.26 한 가운데서 이 민족을 다시 살려낼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전능한 힘으로 역사의 주인되신 주의 힘으로 이 나라가 오늘까지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주여,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주여, 한국교회에 제2의 부흥을 주소서. 주여, 한국교회 새롭게 일어나 그날의 만세 소리만큼 크게 외쳐 기도하게 하소서.
3.1절/ 다메섹 2009-04-27 16:10:19 read : 1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 충렬 감독의 다큐멘타리 영화 워낭소리가 이 땅의 국민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돈도 별반 들이지 않고 만든 기대하지 않았던 이 영화가 대박을 터트린 원인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명한 인기 배우 하나 출연시키지 않고 등 굽은 여든 노인부부와 마흔 살 소의 출연만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비밀
3.1절/ 다메섹 2009-04-27 16:10:19 read : 1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 충렬 감독의 다큐멘타리 영화 워낭소리가 이 땅의 국민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돈도 별반 들이지 않고 만든 기대하지 않았던 이 영화가 대박을 터트린 원인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명한 인기 배우 하나 출연시키지 않고 등 굽은 여든 노인부부와 마흔 살 소의 출연만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비밀이 궁금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등 굽은 투박한 농부의 다 닳아 버린 그 손과 절룩거리며 생존을 이어가는 그 치열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모 세대의 거룩한 희생을 새롭게 발견한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저의 뇌리에 줄곧 머물렀습니다. 팔순의 노부부가 소 한 마리 의지하여 한 많은 일생을 이어가는 유일한 목적은 자식들 교육이었습니다. 오직 자식들 하나만 생각하며 소꼴 뜯고 쇠죽 끓이고 소 먹이러 동네 산을 힘든 줄 모르고 오르내리던 이 노부부의 모습에서 그리고 이제 그 생명을 다해가는 비틀거리는 충직한 소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모 세대의 거룩한 희생의 가치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희생의 결과가 우리가 불평을 쏟아 내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대로 살만한 오늘의 한국의 모습을 만든 것입니다. 결국 내일의 한국의 모습은 우리가 다시 우리의 다음 세대의 리더십을 어떻게 길러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선교의 개척자인 믿음의 사람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열두 제자 곧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는 일로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말에도 “인사는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이 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3.1절을 기념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행스럽게 민족의 내일을 걱정하고 조국의 자유를 위해 일어설 수 있었던 애국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6.25전쟁의 잿더미에서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우리 부모들이 논 팔고 소 팔아 자기 자녀들을 미래의 리더십으로 준비시킨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방금 회심한 젊은이 바울을 축복하고 기도하여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광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그 통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비밀- 무엇일까요? 1.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일은 우선 하나님의 일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일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기를 소원한다면 말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만난 바울은 이미 다메섹 도상의 회심의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바울의 기도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11절에 보면 눈이 먼 바울(사울)은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새 인생을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은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부르십니다. 10절입니다.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래서 아나니아가 바울을 만나러 갑니다. 11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직가’란 ‘곧은 길’이란 뜻입니다. 이 길은 본래 바울이 살던 당시 동서를 가로지르는 1,600m의 곧은 길이었고 너비만도 15m이었는데 지금은 다메섹 시내 복잡한 시장 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곳을 우리 교회 성지순례단과 함께 방문했을 때 지금도 이 시장 내에 남아있는 몇 개의 석주와 성문의 잔해로 미루어 과거의 아름다운 길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길의 끝머리 골목길 에는 유다의 집터를 개조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아나니아 기념교회(1973년에 세운 프란치스코 교회)가 서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인도로 아나니아와 바울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예로부터 사람과의 만남을 ‘신적 만남’(Divine encounter)으로 간주하는 것도 영성 훈련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주선으로 만난 것이라면 얼마나 의미 있는 만남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모든 만남은 진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낯선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이런 복음 성가를 부르며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잊기엔 너무한 나(우리)의 운명이었기에/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아나니아 시대에 이 노래가 있었으면 아나니아와 바울은 틀림없이 이 노래를 이 중창으로 불렀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을 태우는 만남이었고 시대를 바꾸는 리더십의 출현을 예고하는 만남이었습니다. 2. 인간적 편견을 기도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나니아 편에서 보자면 애초에 이 만남은 기뻐할만한 그런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70제자중(처음 12명의 제자를 전도하러 보내시고 다시 후에는 70명을 보내심)의 한 사람으로 후일 다메섹 교회의 첫 감독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교회의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복음의 적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원수였기 때문에 그와 바울의 만남은 정확하게 말하면 원수와의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13-14절을 읽어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별수 없이 아나니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바울에 대한 편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편견은 당연한 편견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나니아에게는 이런 편견을 깰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아나니아가 자신의 편견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한 리더를 세우는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나의 편견, 나의 이데올로기, 나의 신념도 아무리 중요해도 하나님이 바꾸라고 하시면 언제든 바꿀 준비를 하고 사는 것-그것이 바로 아나니아가 쓰임 받은 이유였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 하나님의 음성,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17절에 보면 바울이 거하는 집으로 갑니다. 원수를 만나러 가는 겁니다. 그는 인간적 편견의 틀을 깨고 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 생각을 버릴 수 없다고 버티시는 분들-이런 분들은 굳은 신념을 지닌 사람으로 존경받을 수는 있을지는 모르나 하나님 나라의 리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나니아가 이런 편견을 깰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그는 환상 중에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이런 영적 민감성이 바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리더가 되게 한 것입니다. 3. 주께서 보내시는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시리아 성지 순례 여정중 다메섹의 아나니아 기념교회를 방문했을 때 가장 감동적인 것은 마당에 세워진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는 모습의 동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동상이 서있는 마당의 좁은 지하통로로 내려가 자리 잡은 10평 남짓한 작은 지하 예배당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명이 부연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작은 지하 채플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감상에 젖었던 감회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나니아가 이 젊은 청년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할 때에 아나니아 자신도 아마 그가 역사를 바꾸는 인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그들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까. 아나니아의 안수 곧 그의 축복으로 세상을 바꾸는 리더가 태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00년대 중엽 미국 보스톤의 한 교회에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이란 이름을 가진 주일 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주일 학교 반에 한 소년이 등록을 했습니다. 그는 교회 학교에 삼촌의 권유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킴 볼 선생은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자 했으나 그는 성경도 없었고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구두방에서 일하는 소년이었습니다. 킴볼 선생은 그에게 성경을 사주고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자주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그가 바로 불세출의 세계적인 전도자로 백만명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디가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킴볼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이들을 축복할 준비만 되어있다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동일한 원리로 우리가 바울은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바울을 축복하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던 아나니아는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바울의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 그는 앞을 보지 못하고 실명한 장애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인도에 민감했습니다. 그의 마음속 깊은 편견을 뛰어 넘어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그 순간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18절입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지라 일어나 침례(세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새로운 세상을 보도록 도운 것입니다. 사울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마당 언저리에는 눈을 뜨지 못하고 사는 이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은 오늘 누군가의 축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축복하는 순간 그들은 눈을 뜨고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3.1절 기념 주일입니다. 이 맘 때가 되면 우리는 신앙인 소녀, 민족의 누나 유관순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가 민족의 여인 하나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눈을 뜨게 하려는 여러 도움의 손길이 있어서 가능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찍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린 그녀의 부친 유중권의 영향, 그리고 그녀의 공주 영명학교 시절, 이 믿음 좋은 소녀의 미래를 열고자 그녀를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도록 도운 선교사 앨리스 샤프(Alice H. Sharp), 그녀의 이화학당 시절 “십자가 신앙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십자가 신앙으로 민족을 섬겨야 한다”는 정동 교회 손 정도 목사님의 영적 감화 또한 그녀를 만든 정신의 모자이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에너지를 나라 사랑으로 실천할 것을 늘 강조한 이화학당 박인덕선생의 영향이 그녀의 믿음과 애국이라는 가치를 만들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전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찾은 이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 이제 우리의 가정, 학교, 교회가 함께 다음 세대를 축복하는 일에 어떻게 헌신할 수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도 유관순 기념비에는 그녀의 3.1운동 거사 직전의 기도문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에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 독립만세! 대한 독립만세!” 우리는 그 기도에 빚진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