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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칠언에 나타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가상 칠언에 나타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http://mission.bz/4850사순절 눅23:34-43, 마27:45-54 지난 수요일 새벽 제 자리에 앉아서 잠시 기도하는 가운데 다음 주일 무슨 설교를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고난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와 “죽음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기 때문에 “부활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나 “천국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상 칠언”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고난 주간을 앞두고 “가상 칠언”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주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상 칠언”이라는 제목으로 2년 전 종려 주일에도 설교를 했고, 5년 전 종려 주일에도 설교를 했는데, 또 그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저에게 이런 강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상 칠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백 번 해도 좋다.”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으로 간절하고 처절하게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은 백 번 들어도 좋고 천 번 들어도 좋다” 라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가상 칠언”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2002년 3월 24일 주일에는 "나를 위한 가상 칠언" 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05년 3월 20일 주일에는 "가상 칠언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 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가상 칠언에 나타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랑에는 로맨틱한 감미로움도 있지만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의 사랑에는 로맨틱한 감미로움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만 나타났습니다. 십자가 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 사랑이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도 우셨고 예수님께서도 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아파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슬퍼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슬퍼하셨습니다. 아니 온 우주가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태양이 얼굴을 가렸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비극적인 사랑을 바라볼 때 우리들의 가슴에도 아픔과 슬픔과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제가 여기까지 원고를 썼을 때 저의 가슴과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비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십자가를 대하면서도 가슴에 탄식이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 신자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음악가 파블로 카잘르는 파리에서 처음 “마태 수난곡”을 듣고 십자가의 죽음을 느끼면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두 달 동안 아팠다고 합니다. 너무 슬퍼서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독일의 진젤돌프 백작은 박물관에 걸려있는 십자가상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고 울었는데 박물관 문이 닫힐 때까지 울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상태에 따라서 "가상 칠언"에 대한 반응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일곱 마디를 들으면서 통곡을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아무런 느낌도 아무런 감정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진한 사랑에는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이 나타나곤 합니다. 제가 가슴에 지니고 있는 진한 사랑은 아마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어린 아들 철원이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에는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이 가득가득 나타났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도 저의 가슴에도 아픔과 슬픔이 진하게 나타났습니다. 철원이의 가슴에도 저의 가슴에도 아픔과 슬픔이 진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할 때 그리고 어머니와 철원이에 대한 사랑을 생각할 때 가슴에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가상 칠언에 나타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를 한 마디 한 마디씩 들으며 가슴에 새겨보겠습니다. 그 일곱 마디들은 우리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우리들은 그 말씀들 때문에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지금 이곳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과 저를 위해서 하시는 주님의 일곱 마디 말씀들을 바로 듣고 바로 마음 속에 받아 드릴 때 강도에게 임했던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할 것이고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에게 임했던 뜨거운 사랑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씩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Father, forgive them."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하신 기도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은 도저히 용서를 받을 수 없는 대역 죄인입니다. 지옥에 가도 지옥의 밑 바닥에 갈 대역 죄인입니다. 그런 대역 죄인을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일이고 우주의 질서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아마 천사들도 모두 합세해서 “그것만은 안됩니다” 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었지만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느니라”(요3:16-18). 그런데 독생자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독생자를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을 때 예수님의 가슴에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신의 뜻에 위배되는 호소의 기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의 가슴에도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런 주님의 기도 때문에 로마 군인들이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고통스런 주님의 기도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울도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마펫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쳐서 쓰러뜨린 이기풍도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한 평생 주님을 무시하고 거역하고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과 저도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주님의 기도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과 제가 죄 사함과 구원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Father, forgive them." 이 기도는 또한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해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아무 아무개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나에게 해를 끼친 아무 아무개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강도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도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는 말씀이었고 주님 자신이 하신 말씀에도 위배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천국이 임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예수님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1,24). 예수님은 또한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마25:46). 그런데 이 강도는 회개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신앙 고백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선행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한 모든 말씀을 어기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간절하게 소원하시면서, 강도의 신음 소리 한 마디를 듣고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의 신음 소리는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 라는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자기의 말과 자기의 체면에 위배되는 말을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안타까운 일이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의 가슴에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때문에 강도를 비롯한 수 많은 범죄자들이 용서함을 받고 낙원에 이르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수 많은 살인 강도들이 이 말씀 때문에 지옥에서 옮겨 낙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 속에는 비극적인 사랑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Woman, behold, your son."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서 슬피 우는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인간 예수님으로써 자기 때문에 한 평생을 가슴에 칼이 찌르는듯한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신 인간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하신 슬픔과 아픔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써 어머니를 제대로 효도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 한 분을 위해서 살지 못했고 수많은 죄인들을 위해서 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 예수님으로써 인간 어머니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참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 때부터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써 모셨습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7). 이 말씀은 요한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말씀은 성모 마리아에게 하신 슬픔과 아픔과 위로의 말씀이었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 이별의 슬픔과 죽음의 아픔 가운데서 슬피 울면서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신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나인성 과부를 위로하셨고 나사로의 누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때문에 슬픔 가운데서 위로를 주고 받으며 외로움 가운데서도 효와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슬픔과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아무개여 보소서 그대는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대는 나의 부모요 나의 자녀입니다." 4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마27:46). 이 말씀의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경험하신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극치를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하시고 버림 받게 되신 비극을 절규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의 극치였고 모순의 극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뒤집어 엎는 비극의 절규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 속에 비극적인 사랑의 극치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절규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대신 부르짖은 절규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해야 하고 버림을 당해야 하는데 주님이 나대신 끊어짐을 당하고 버림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화란의 유명한 신학자 스킬더 박사는 이 비극의 극치는 지구상에서 사는 인간은 아무도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비극의 극치였다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지구 상에 살던 모든 인간들이 모두 함께 지옥에 내려가서 지옥의 고통을 당한 후 그 모든 고통을 한 곳에 쌓아 놓아야 알 수 있는 극치의 고통이요 총화의 고통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고 부르짖었을 때 예수님은 극치의 고통과 총화의 고통을 당하셨고 극치의 슬픔과 총화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그 극치의 고통과 극치의 아픔과 극치의 슬픔 때문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죄 사함과 구원의 축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대신하여 버림을 받는 비극을 감수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아무 아무개 때문에 나를 버리셨나이까." 5 "내가 목마르다"(요19:28). "I thirst."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목마름을 토로한 말씀이었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목마름을 토로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 인간의 모든 목마름을 대신 감수하신 우주적인 목마름이었습니다. 내가 목 말라서 소리 지르는 나의 목마름의 소리를 대신 지르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목말라야 하는데 주님께서 나 대신 목마르신 것이었습니다. 수가성 여인 대신, 십자가에 달린 강도 대신, 간음한 여인 대신, 그리고 우리 모두 대신 목마른 목마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과 지옥에서 목 말라야 할 목마름을 대신 당하시면서 "내가 목 마르다" 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목마름은 목마름과 애탐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 상에서 목 마르셨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천국에서 목 마름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I thirst." 이 말씀은 또한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대신해서 목마른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목 마릅니다. 여기 아프카니스탄의 형제들과 함께 내가 목 마릅니다." 6 "다 이루었다"(요19:30). "It is finished."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므로 자기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은 마음에 만족과 기쁨을 지녔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엄청난 해산의 고통과 아픔을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이 아기 하나를 출산하는데도 피와 땀을 쏟으면서 심한 고통과 아픔을 당하는데 하늘의 별과 같이 수 많은 자녀들을 출산하시면서 물과 피와 생명을 다 쏟으신 주님의 고통과 아픔은 우리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극치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믿음과 순종과 헌신과 죽음의 제물이 되시므로 우리들이 이루어야 할 믿음과 순종과 헌신과 죽음의 일들을 다 이루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데 주님께서 우리 대신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의 사역을 극치의 수고를 하시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순종도 우리의 헌신도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봉사도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죽음도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이 말씀은 만족과 기쁨의 이루심이었던 것과 함께 수고와 고통과 아픔의 이루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며 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이루어야 할 일들을 대신 이루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나는 부족하지만 저들이 이루어야 할 일들을 대신 이루며 살게 하시옵소서."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은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지녔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지금 엄청난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당하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나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즉시 낙원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그 순간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사망에 버리시는 고통의 순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사53:12).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다음 옥에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했습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3:19).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던 일이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영어로 된 사도 신경은 “He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죽음이 평안한 죽음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영혼을 사망에 버리는 형벌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는 고통과 슬픔과 아픔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형벌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끊어짐의 고통과 슬픔과 저주의 죽음을 머리에 그려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롬9:2,3). 예수님은 지금 자기의 영혼을 사망에 버리는 저주의 죽음을 당하면서 이렇게 호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호소의 말씀 속에도 비극적인 사랑이 나타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상에서 하신 주님의 일곱 마디 말씀들 속에는 모두 사랑의 고통과 사랑의 아픔과 사랑의 슬픔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극적인 사랑이고 예수님의 비극적인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가상 칠언”의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의 비극을 감히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논리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비극적인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엎드려서 겸손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겸손이 엎드려서 그 말씀들을 조용히 들으면 됩니다. 파블로 카잘르처럼 진젠돌프 백작처럼 무릎을 꿇고 그저 바라보며 들으면 됩니다. 십자가와 가상 칠언에 나타난 비극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슴에 깊이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 이 게시물을...
가상칠언(架上七言)
가상칠언(架上七言) http://mission.bz/4857사순절 - 본 내용은 제가 총회신학연구원에서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으로 설교자료를 만들고 싶은 분은 위 "성경공부"를 클릭하시고 하단에서 "절기관련 자료모음"에서 "수난절 메세지"를 클릭하시면 더 자세하게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 1. 가상칠언의 정의 1) 가상칠언[Seven Words from the Cross, 架上七言]이란? 한마디로 가상칠언을 정의 한다면 "예수님께서 골고다 형장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남긴 일곱 가지 말" 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2) 가상 칠언은 음악화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F.J.하이든의 오라토리오《가상칠언 Die sieben letzten Worte unseres Erlgmlsers Kreuz》이 유명합니다. 2. 가상칠언의 역사적 배경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예수가 예루살렘 북쪽 성벽 밖 골고다 형장에서 십자가에 달려 발설한 일곱 가지 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면서 한 말이기에 사세구(辭世句), 임종을 맞아 한 말이므로 임종게(臨終偈)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는 네 복음서에 흩어져 있는 일곱 편의 마지막 말입니다. 금요일 오전 11시경 안토니아성문앞에서는 예수를 잡아죽이라는 무리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벌써 닷새전 호산나를 부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십자가 에 못박으라"고 소리칩니다."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 비겁하지만 합리적인 빌라도는 "그대들은 이 사람을 데려다가 십자가에 매달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못했노라."그러나 무리들은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라고, 메시야라고 고백하던입술에서 큰소리로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오."그때 빌라도는 군중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 박게하고 예수의 죄상을 희랍어, 라틴어,아랍어순으로 쓰게 하였 습니다. "유대인의 왕" 그것은 예수의 죄목 이었습니다. 십자목중 세로 목은 항상 세워져 있었고 함께 붙일 가로목은 직접 죄수가 지고 세로목은 세워진 언덕까지 갔었는데 그 나무는 전나무로 깎은 것으로 두께가 12.7cm 길이는 1m80cm 무게는 40kg 가량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피를 흘리며 석양의노을에 휩싸여 고통으로 걸어가셨습니다. 오전 12시경에 병사들은 13cm의 못을 입에 물고 예수의 손목중 뼈가 없는 부분을 찾고 그 위에 힘차게 못을 때려 넣었습니다. 백부장이 소리쳤습니다. "끌어 올리라" 올릴때 예수의 손목은 비틀어졌고 검붉은 피는 치솟아 흘러내렸습니다. "갑작스럽게 어둠이 밀려왔고 하늘은 어두워졌습니다. 병사들은 포도주를 마시며 주사위를 띄우고 예수의 옷 나누기를 할때 예수는 첫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순서대로 말씀하셨다는 객관적 근거는 없습니다. 3. 가상칠언(架上七言)의 내용 요약 예수님은 죽기 직전에 십자가에서 유언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한편으로 그분의 생애를 잘 요약해 주는 말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번을 말씀하셨다고 해서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일곱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1언 : 첫째 말씀(눅 23:33-34) (容) (대상 : 아버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못합이니다." 이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평소의 가르침을 예수가 삶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순간에 몸소 실천한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예수님야말로 말과 행위가 일치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도 예수는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한번의 기도가 아니라, 여러번 끊임없이. 무지한 까닭입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오늘 이 기도는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36절에 있는 베드로의 오순절설교는 뜨거운 회개의 불길을 일으켰고 무려 3000명이나 회개하게 하였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그 리스도였습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았던자도, 침뱉었던 자도, 창으로 찌른자도 능욕하고 저주하고 비웃는 자도 우리 주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자, 다음의 고백을 보십시요. 그러나 그들은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행 3:37 그리고 예수님은 주변에 매달린 두 사람중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인 정하는 한 강도에게 용서와 사랑과 구원을 확증시켰습니다. 행 3:38 제2언 : 두번째 말씀 (눅 23:42-43) (藥) (대상 : 회개하는 강도)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가 십자가에 함께 처형당한 죄수와 주고받은 대화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 내세관을 나타내는 말로 풀이됩니다. 죽어 예수와 함께 있을 곳이 낙원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한 강도에게 임한 구원을 우리에게도 임합니다. 종교의식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율법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다만, 은혜로! 이 강도를 보십시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즉 이런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기억이라도 해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말하시길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있으리라."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더 큰 것을 주십니다. 더 큰 것을! 그러나 이제 고백이 필요합니다.나의 모든 것에 대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그의 사랑은 세밀하셔서 눈물을 흘리시는 십자가 아래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시면서 말씀 하십니다. 제3언 : 세번째 말씀(요 19:26-27) (子) (대상 : 마리아와 요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또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요한)에게 한 말인데, 실제로 마리아와 제자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여기서 부인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자는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킨다고 풀이합니다. 구원의 시간이 온 것을 알고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스도 교회를 맺어 준 것입니다. 구원사의 전환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 교회를 아들처럼 아끼고, 교회는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머니처럼 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어머니를 여자라고 부른일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는 육신의 어머니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어머니의 고통, 그 아픔을 예수님은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말합니다. "보라, 네 어머니다." 그의 용서와 사랑의 기도 후 그에게는 극심한 아픔이 다가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철저히 버리신 외로움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외칩니다. 제4언 : 네 번째 말씀(마 27:45-46) (棄) (대상 : 하나님, 심판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임종 단계에서의 고독감, 절망감을 나타내는 말로, 예수님께서 죽음의 극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에 희망을 걸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극심한 고통으로 외친 예수님의 십자가 주위엔 어두움이 몰려오고 십자가에 쓸쓸함이 뭉쳐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버리심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하나님이 누구를 버린적이 있었나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독 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후 5:21 :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없이함 받았습니다. 누구안에서입니까? 롬 8:1 : 그의 고통과 아픔은 우리의 구속을 인함이요. 눈물과 피는 우리의 영생을 위함이었습니다. 놀라운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극심한 아픔은 목마름으로 나타났습니다. 고통받은 사람의 아들, 복종하는 종의 모습으로 그는 다섯번째 말씀을 하십니다. 제5언 : 다섯번째 말씀(요 19:28) (渴) (대상 : 자신) "내가 목마르다." 자기의 성업(聖業)을 완성하려는 염원을 드러낸 말로 풀이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고통과 더불어 승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마라톤 시합을 보며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한 사람은 결승점에 도달해도 여전히 팔팔한 모습이고 또 한 사람은 결승점을 넘자마자 지쳐서 쓰러지는 모습입니다. 전자의 사람과 달리 후자의 사람은 최선을 다한 결주였기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최선의 경주를 하신것입니다. 이러한 목마름과 고통은우리의 모든 목마름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안에 있을때 우리에겐 목마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계 7:16 우리가 목마르다 외치실때 예수님은 이미 먼저 아시며 그 고뇌를 깨뜨리고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 요 4:14 예수의 얼굴은 이제 고통의 고개를 넘어서 기쁨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은 모든 사탄의 유혹을 깨뜨린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섯번째 말씀을 하십니다. 제6언 : 여섯번째 말씀(요 19:30) (成) (대상 : 온 인류) "다 이루었다." 성부가 예수를 통하여 이루려 하였던 일, 즉 신앙인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는 일을 끝냈다는 말로 풀이됩니다. 어떤 미술가가 나사렛목공소의 소년 예수를 그렸는데 그는 창가에서 창문 양끝을 쥐고 바깥을 내다보는 그림이었습니다. 서 있는 예수에게 햇빛이 들어와그림자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그림자였습니다. 그의 전생애는 십자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십자가가 오늘 성취되었습니다. 영원한 구속, 고통의 끝,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평화였고 버려졌 던 아들 예수에게로 하나님의 찾아오심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제7언 : 일곱번째 말씀 (눅 23:46) (魂) (대상 : 아버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것은 본래 유대인들이 바치던 저녁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이 기도를 한 것은 곧 임종을 수락하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완전한 회복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회복이었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회복이었습니다. 대지는 떨고 땅을 가르는 작은 금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치고 처형장의 큰 바위가 깨어졌고 작은 금은 길을 가로 질러 예루살렘 성문을 지나 거리와 성전을 꿰뚫었고 마지막엔 성전의 장막을 둘로 나누어 찢어 놓았습니다. (눅 23:45) 완전한 용서였습니다. 이미 찌른 자와 능욕한자, 십지어 가롯 유다까지의 용서였습니다.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극심한 혼란과 적대를 깨뜨린 사랑이 었습니다. 구속이었습니다. 공허한 세상의 묶은 끈을 풀고 영원한 생명으로의 구속이었습니다 갈보리 언덕 그 십자가위에 새로운 길이 생겼습니다. 십 자가의 언덕을 너머 있는 길. 그 길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께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히 12:2 우리가 이제 자랑할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갈 6:14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갈 2:20 그리고 그 분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도 또 하나의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게시물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10:30-37/ 김명국 목사/ 사순절 설교/ 2000-03-15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10:30-37 여러분들 혹시 “연탄길” 이라는 책을 읽어 보신적 있나? 이 책은 “이 철환” 이라는 저자가 수 년 동안 노량진에서 학원 강사를 하며 학생들을 통해 듣고, 자신이 직접 보았던 실화들을 글로 남겨 책으로 만든 것인데 2000년에 1권을 냈고 현재 4권의 책을 시리즈로 낸 것이다. 그 책 속에 이런 실화가 나온다. 서울 근교의 유원지를 다녀오는 한 가족이 있었다. 짙은 어둠이 깔린 시간이라 조심스레 차를 운전하면서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서 오던 중에 차도 한 쪽에 검은 물체가 길에 누워있는 것을 아빠가 보았다. 예감이 심상치 않아서 차를 멈추고 내려보니 한 청년 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었다. 뺑소니 사고였다. 경찰에 신고하고 우리는 관여하지 말고 가버리자는 아내의 말을 돌이키고 설득을 해서 그럴 수 없다고, 일단 경찰에 신고하고 이 골목에 애들과 함께 이대로 좀 서있으라고 말을 한 후, 그 신음하는 사람을 차에 태워 인근병원에 갔는데 너무 중상인지라 작은 병원에서 볼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그를 차에 태워서 큰 병원 응급실로 가서 치료를 하고 입원수속을 하는 동안에 시간이 많이 흘렀다. 사고를 당한 청년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경찰이 와서 경찰에게 모든 것을 인수인계 해주고 다시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그 골목엘 갔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없었다. 너무 기다리다 지쳐서 다른 편으로 집에 갔다보다 생각을 하고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데, 자기 집 쪽으로 소방차가 싸이렌 소리를 내며 가는 것이었다. 어디에 불이 났나보다 하고 조심스레 집으로 갔더니 자신의 집, 조그만 빌라에 불이 난 것이었다. 큰일이 났다고 생각하고 급히 차에서 내려 보니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집 밖에서 서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윗집에 살고 있던 처제 식구들도 나와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기다리다 지처서 처제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가지고 좀 와서 우리를 데려가라 했더니, 처제가 자기 식구들과 함께 차를 몰고 와서 우리를 태워서 가는데, 아래층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다 무사했다. 하지만 102호에 살고 있던 젊은 부부만 그 불에 타서 죽고 말았다. 그 뒤에 경찰 조사에 의하면, 바로 102호에 사는 그 젊은 부부가 그 청년을 차로 치고 뺑소니를 한 그 장본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밝혀짐으로 모두의 마음을 깜짝 놀라게 했다. 나도 이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놀랐다.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구하려고 나섰던 이 남자는 자기 집안 식구 뿐 아니라 처제의 식구들까지 모두를 살릴 수 있었고, 사고를 내 놓고 자기만 살겠다고 뺑소니를 쳤던 부부는 죽었다. 이것은 실화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연탄길에 나오는 실화처럼 어려움을 당한 자를 도와주는 것인가? 물론 그런 일도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을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불신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죄에서 구원받게 하는 일이다. 우린 오늘 본문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왜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V25을 보면 한 율법사와 예수님이 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하는 나쁜 의도에서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에 대하여 질문? 영생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있다. 단순한 구제차원의 말씀을 뛰어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율법사에게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영생에 대한 말씀을 질문 받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는 뭐라고 기록했느냐고 되물으셨다. 그러자 이 율법사는 자기의 전공을 들추시는 예수님의 역 질문에 단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율법에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신명기6:5의 말씀을 바로 인용하여 아주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율법사가 하는 말을 들으시고 곳 이어서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맞다는 것이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네가 알고 있는 데로 행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 하셨나? 산다는 것이다. 살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제사장이나 또는 레위인 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남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에게도 이 사마리아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남 다른 요소들이 여러분들에게 마음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그러면 이 사마리아 사람이 남 달랐던 것은 무엇인가? ♠영혼을 바라 보는 시각이 남과 달랐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보다 앞서서 그 곳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의 기록을 볼 때 이들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다. 본문 V31을 보면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라고 기록되어 있다. V32도 보라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무엇인가? 강도들에게 매를 맞아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 모두 한결같이 “피하여 지나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봐도 매를 맞아 쓰러져 죽어져가고 있는 환자를 만났을 때 그를 피해야 하나? 아니면 구해 주어야 하나?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 본문을 해석할 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매를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본인들도 똑 같이 매를 맞을 수 있겠다는 공포와 위협을 감지했기 때문에 피했다고 설명을 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제사장과 레위의 입장이라면 가장 먼저 떠 올려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들은 가장 먼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나” 를 질문해 보고 행동해야 할 사람들이다. 당시의 제사장과 레위는 성경에 통달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수준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그 상황에 맞는 성경을 바로 인용 할 수 있는 한마디로 성경말씀에 박사 들이었다. 그러면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나? ♠잠21:13을 보자“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고 말씀하셨다. 또 ♠사 58:7을 보면“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고 말씀하셨다. 이 제사장과 레위가 이 말씀을 몰랐을까?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위기를 당한 그 사마리아 사람의 영혼을 바라보는 영혼을 사랑하는 시각이 없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그에게는 위기에 처한 금방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도 귀중한 영혼이 있음을 알았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돕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런 시각이 필요하다. 불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주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들의 시각을 달리하자. 그동안 묵과 해 왔던 우리 주변의 모든 불신영혼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자.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저들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해 보자. 분명 거기에는 성령님이 뜨겁게 개입하실 것이다. 예))나는 운전면허를 1986년에 냈다. 운전을 배운지 2개월 만에 부평이라는 곳으로 교육전도사 시절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때 내게 교회 봉고차로 연수 교육을 시켜 주었던 분이 그 교회 집사님이셨다. 이 분은 택시를 운전하시는 분이었다. 어느 날, 이 집사님과 약속을 하고 교회에 심부름을 할 일이 있어서 부평에서 수원까지 목사님의 심부름을 가게 되었는데 이 집사님이 마침 쉬는 날이라고 장거리 운전연수를 해 주겠다고 하시면서 교회 봉고를 운전하게 했다. 부평을 벗어나 수인 산업도로를 빠져 수원 시내로 들어서니까 이 집사님이 내 옆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자꾸 세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어 보았다 “집사님 뭐하시나?” 그랬더니 이 집사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전도사님! 저 길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보이시나요?” 그래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아닙니까?” 하고 대답했더니 자기 눈에는 저들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그럼 집사님의 눈에는 저들이 무엇으로 보이시나?” 하고 질문했더니 “내 눈에는 저들이 모두 택시를 타야 하는 손님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중얼거린 것은 저사람 태우면 만원은 벌겠다. 저 아주머니와 아이들을 태우면 최소한 15,000원은 벌겠다. 저 할머니는 어딜 가든지 그냥 태워 드릴 수 있는데... 그런 시각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수원에서 택시 영업을 하면 한 시간 동안 얼마나 벌게 될지 잠시 계산 좀 해 보았다는 것이다. 그 후에 이 집사님을 올해 21년 만에 속초에서 만났다. 교회에 큰 어려움이 닥쳐와서 당시의 목사님과 다른 곳에서 개척을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하기 시작했는데 장로가 되었다. 그분은 아직도 택시를 운전하고 계셨다. 그래서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그 장로님에게 다시 물어 보았다. “요즘도 운전하시다가 길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손님으로 보이시나?” 그랬더니 이 장로님의 입에서 너무나 감동적인 고백이 흘러 나왔다. “목사님 요즘 운전하며 다니다가 길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교회를 다닐까 안 다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전도 대상자로만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 자기 차를 타는 손님을 만나면 가장 먼저 자기 입에서 나오는 간절한 첫 소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손님! 어디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사마리아 사람의 시각이 영혼을 구원해야 할 대상자가 있는 그 지역을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시각과 완전히 달랐던 것처럼 우리들의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우리 교회가 2009년을 들어서서 제 1차 VIP 초청 주일을 7. 5. 맥추 감사 주일로 정하고 지난주에 VIP 선포식을 갖고 기도하고 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기도로 VIP를 찾고 성령의 충만함을 먼저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특별히 속장들을 중심으로 속 별로 이 운동이 전개 될 터인데 올해는 한 명이 한명을 전도하자는 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요소가 불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아야 한다. 그런데 영혼을 사랑하는 시각은 그냥 와 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불신 영혼을 사랑하는 시각을 가질 수 있나? 그것은 ♠바울과 같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진정으로 만나는 개인적인 변 화점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을 때에는 예수님을 핍박하고 진멸하는 일에 앞장을 선 사람이었지만 진정한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은 후 에는 오직 예수님만 증거 하면서 반평생 복음을 외치며 살지 않았나? 신약성경 중 사도 바울이 대필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구구절절 넘쳐흐른다. 그래서 그 말씀을 접하는 사람들마다 큰 은혜를 경험하지 않나? 전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자랑하는 것인데 예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거나, 십자가 지신 그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결코 전도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믿음의 많은 선배들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많은 선교사들이 왜 그들의 개인적이 삶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했을까? 그것은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귀중한 영적인 사랑이 그 마음에 충만했기 때문이다. 예))루비 켄드릭 이라는 여자 선교사는 1908년 6월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왔다가 급성 맹장염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녀의 화강석 묘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만일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나는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고 말이다. 얼마나 감동적인 말인가? 그 안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았으면 천개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순교하겠다고 말하겠는가? ♠이시간 우리 마음을 한번 들여다보자.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대한 믿음과 진정한 만남이 있었는지 그로 말미암아 사랑이 가득한 성도로 변화가 되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처럼 우리의 직분과 겉모습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영혼을 사랑하고 행하는 믿음이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사=사랑의 예수님을 만납시다. 꼭 만납시다.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생각이 할수 있다는 매우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은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하고 영적인 분휘기도 변화시키기도 한다. 어떤 모임에나 그 사람이 나타나면 금방 남의 얘기에 부정적으로 분위기를 끌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이 나타나면 금방 환해지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바뀌며 힘찬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분명 성령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난 사람의 모습이다. 주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가는 곳마다 웃음과 희망과 긍정적인 힘을 공급해주는 공급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한다. 예))아주 특이한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이 학교는 폐교 위기에서 벗어나 1년 만에 서울 어느 사립초등학교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시골 초등학교가 있다. 이젠 주변 지역에서 입학하려고 줄을 서 있기까지 하다. 판문점에 있는 “대성동 초등학교”다. 이 학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1968년에 초등학교로 정식 인가된 뒤 지금까지 졸업생이 149명(41년 역사, 졸업생 평균 년4.6명)에 불과한 초미니 학교다. 이 학교가 명품학교로 두각을 나타나게 된 이유? “사교육 뺨치는 교내 특별활동” 때문이다. 대성동 초교는 작년 2월 6학년 3명이 졸업하면서 전교생이 6명만 남는 위기를 맞았다. 2006~2007년 두 해 동안 입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파주교육청이 “학생이 6명만 있으면 교육효과를 높일 수 없어 폐교한다.” 는 방침을 세운 탓에, 이 학교는 폐교 대상이 됐다. 그렇게 되자 이 학교의 교장인 “최 평” 교장 선생님과 교직원 17 명은 위기를 미리 감지하고 2006년 9월부터 머리를 맞대고 “학교의 생존을 위한 묘안”을 짜기 시작했다. 먼저 “파주에 사는 학생이면 누구나 올 수 있도록” 대성동 초교를 파주공동학군에 넣는 방안을 파주교육청과 협의해 성사시켰다. 하지만 학생들이 굳이 먼 학교까지 올 리 없었다. 하여 교직원들은 연구를 거듭한 뒤 “학교 안에서 사교육을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우선 미군들을 영어교사로 초빙하기로 했다. 이 학교와 마을을 24시간 지키는 유엔군사령부 소속 미군들이 주변에 널린 장점을 활용하기로 하고 2007년 5월 최 교장이 UN사의 대대장을 찾아가 도와 달라고 간청 했는데 유엔사는 학교 측의 간청을 흔쾌히 들어줬다. 그래서 미군 35명이 3명씩 돌아가며 2008년 3월부터 주 2회, 4시간씩 그 학교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로 하고, 특별활동과 현장학습도 강화했다. 리코더 합주 반· 퓨전 타악 반· 연극 반· 컴퓨터 자격증 반 같은 방과 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비용은 파주 교육청과 협력하여 학교가 100% 부담하면서 다양한 체험학습을 실시했다. 이 학교에 가려면 미리 유엔사 허가를 받아야 한다. 판문점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무장 군인이 지키는 관문 3개를 통과해야 한다. 그럼에도 작년 가을 이 학교 학생 수는 역대 최다인 25명으로 늘었다. 올해 신입생 5명이 들어왔고, 2명이 다른 학교에서 또 전학 온다. 올해 졸업생이 1명이다. 하지만 개교 이래 최대 인원인 전교생 31명이 되었다. 이 중 대성동 마을에 사는 어린이는 6명뿐이다. 유엔사와의 협약에 따라 최대 학생 수를 30명 선으로 제한한 이 학교로 옮길 날만 기다리는 전학 대기 학생만도 15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람이 생각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잘 증명해 준 좋은 예이다. 이 학교가 우리나라 최고의 명품 초등학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최 평” 이라는 교장 선생님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으로의 전환이 폐교하기에 이른 시골의 한 초등학교를 명품학교로 거듭나게 했다. 우리교회도 여러 가지로 환경이 열악하지만 능력과 지혜의 왕이신 예수님을 믿고 계속적으로 기도함으로 최평 교장 선생님이 학교를 명품학교로 만들고, 초등학교 학생들이 가고 싶은 학교로 만든 것처럼, 우리도 가고싶은 교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명품교회를 만들어 가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한다. 인사=우리 교회를 명품교회로 만듭시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더 배울 것이 있다. 그것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끝까지 돌보아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한번 보자. V33을 보면 그가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다. 그리고 V34에서는 그에게 다가가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의 짐승에 태워 주막에까지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고 했다. 당시에 알려진 바로는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없애는데 사용되었고 또한 포도주는 살균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또 실제적으로 그랬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아주 구체적이고 희생적으로 돌봐 주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V35을 보면 그 사마리아 사람은 하루를 그와 함께 보내면서 그를 정성껏 간호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주인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이 환자를 좀 돌봐 주시오 내가 지금 여행 중인데 돌아 올 때도 이 지역을 통과해야 하니까 만약에 비용이 더 들어가면 그때 다 지불 하겠소” 라고 하면서 2데나리온을 주었다. 당시에 2데나리온이면 노동자의 이틀 품삯이다. 역사가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동시대 “이탈리아” 에서의 하루 숙박비가 로마 제국 화폐로 1/32 데나리온이었다. 고 한다. 로마 제국 내에서 통용되던 화폐의 가치가 이스라엘 전역에도 동일하였다고 볼 때 이 금액은 약 2개월 동안의 숙박비에 해당한다. 놀랍지 않나? 그렇다. 이 사마리아 사람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버려진 사람을 끝까지 책임졌다는 것이다. 전도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버려져 상한 영혼을 끝까지 돌보는 것이다. 내가 전도한 그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 교회에 나와 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까지 돌보아 주는 것이 전도자들이 갖어야 할 전도자의 자세인 것이다. 나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에게 이 마음이 있기를..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불신 영혼을 끝까지 돌보는 것이다. 나는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사랑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①하나님의 말씀의 시각을 갖고 ②예수님의 사랑이 충만하여서 ③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앞장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인사=사마리아 사람처럼 살리는 사람이 됩시다.
가시 면류관/마27:27-31/사순절
가시 면류관 마27:27-31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28-30) 사순절 다섯째주일입니다. 다음주일은 종려주일이고 한 주간 동안을 고난주간으로 지킨 후에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순절 절기를 보내면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온 교우가 한 덩어리가 되어 교회를 섬기겠다는 다짐이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고난당하신 것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습니다.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며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때리면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칭 왕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조롱한 것입니다. 무지한 그들이 주님의 머리에 관을 씌웠지만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손에 갈대를 드렸지만 그것은 진정한 왕권을 인정하는 상아로 만든 홀이 아니라 갈대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때리고, 벗기고, 희롱하고, 끌고 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파렴치범에게 가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파렴치범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예수님께서는 당해서는 안 될 온갖 굴욕과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금면류관을 쓰셔야 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희롱과 수치를 당하셔야 할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주님에게 침을 뱉고 매를 때리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러한 수모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31절에 보면 이처럼 “희롱을 다 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하신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왜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까?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바로 나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 죄송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심부름이나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 쉬는 것, 결혼하는 것, 죽는 것은 대신할 수 없습니다. 특히 고통과 관계된 인생문제일수록 대신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식을 대신해서 부모가 아플 수 없습니다. 남편을 대신해서 아내가 죽을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죄의 문제는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 값은 자신이 치러야 합니다. 성경은 “죄 값은 사망이라”(롬6:23)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어가는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는 대속의 방법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짐승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 지은 죄를 사함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년 반복되는 제사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방법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는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3:16, 행16:31, 엡2: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과 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찔리고, 상처받고, 매를 맞고, 희롱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사53:4-6) 그래서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쓰신 가시 면류관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가시 면류관은 희롱을 의미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우승하면 월계수로 만든 승리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게 됩니다. 이것은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우리 주님에게 가시 면류관을 쓰도록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상상도 못할 멸시요, 굴욕이요, 조롱이었습니다. 또한 가시 면류관은 고통을 의미합니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그의 머리는 상처를 입게 되고 많은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피로 얼룩졌으며 퉁퉁 부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머리와 마음이 아프고 피로해지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온전히 우리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도 이 고통스러운 장면을 그리라고 하면 아마 포기하고 물러설 것입니다. 천사장이라도 우리의 죄 때문에 수욕 당하시는 주님의 슬픔을 다 노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귀로 들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명상해야 합니다. 뜨거운 사랑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아픔과 희롱을 우리들을 위해서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때에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열두 천사를 동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의 불꽃같은 눈초리로 단숨에 로마 병정들을 없애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침묵하시던 그의 입술에서 한 마디만 발하시면 빌라도의 궁전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수도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우유부단한 통치자와 악당들을 산 채로 땅 속에 매장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희롱과 고통을 끝까지 참고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인내하시는 모습은 무지한 군병들에게까지도 감동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기록한 마태는 주님이 가시관을 쓰시고 고통 당하시던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마태는 이러한 목격자들을 통해서 생생한 증언을 듣고 이 장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54)라고 말한 백부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의 내용이 목격자에 의해서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는 것은 옛날 로마 군병들만 저지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바로 우리가 주님께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울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인격과 교리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런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제대로 일하지 않고 성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다하지 못하면 주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는 사람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로 알았다면 가시 면류관 대신에 진주보다 더 값진 존경과 사랑의 금강석으로 만든 왕관을 씌워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수님을 잘 몰랐기 때문에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님께 씌우고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을 주님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불경건한 거짓 고백을 추궁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면 그분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왕이시라면 그분께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아무 면류관도 씌우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된 존경심과 명목상의 충성이라는 구실로 또 다시 주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을 통회의 눈물 없이는 바라 볼 수 가 없습니다. 그분의 모습은 주님의 일을 하다가 당하는 수치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큰 용기를 우리들에게 불어넣어 줍니다.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을 당할 때, 견디기가 힘든 일을 겪을 때 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면 모든 불만과 고민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수치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시관을 쓰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벗기고, 때리고, 희롱하고 끌고 가도 말이 없으셨던 주님,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머리에 씌워도 침묵하시던 주님, 침 뱉고 조롱해도 초연하시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또한 많은 상처가 있습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은 우리의 불평도, 근심도, 허영도, 욕심도, 불만도 모두 치료해 주십니다. 우리들이 이 가시 면류관을 잘 쓰면 마지막엔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립니다. 우리 몫의 가시관을 잘 써서 마지막에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7-21/ 사순절설교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7-21 우리 교회는 20일 새벽기도 학교를 사순절 후반부터 20일간 진행하는 것이 정례화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새벽기도 학교를 시작한지 2주가 지나고, 마지막 주일이 남은 주일 아침입니다. 특별히 어느 날 어느 주일에만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효험을 발하는 것이 아닐 것이지만 우리는 어떤 특정기간을 정하여 지킴으로 우리의 영적 성장에 큰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절 전 한 주간을 우리가 특별히 교회력이 정하는 바를 따라 예수님의 고난을 집중적으로 묵상하고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그 뜻을 찾고 그 아픔을 되새기며 그 사랑과 그 은혜에 확실히 다가서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달라져서 그런지 오늘 사람들의 마음은 참된 의미에서 감동되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도 어마어마한 충격적인 보도를 많이 보고 들었기 때문인지 그저 사람들은 덤덤할 뿐 감동이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떤 작은 나라에서는 최근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하여 민주적으로 정권을 교체가 되었는데, 정권을 빼앗긴 쪽에서는 여전히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표를 몰아준 주민을 무섭게 보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하룻밤 사이에 어린 소년, 소녀들을 1500명이나 잡아다가 팔 목이나 발목을 잔인하게 절단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이것이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구촌의 모습니다.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분쟁은 드디어 나토의 폭격을 유발했고 막강한 미국제품의 화력이 불을 뿜는 것을 뉴스에서 보면서 우리는 그저 무덤덤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대량으로 죽어가고 있는 끔찍한 현실로 우리에게는 별로 큰 느낌이 없습니다. 죽음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개인적으로 심각하게 다루 어지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했고 한 인간의 죽음을 슬퍼할 줄 알았는데, 오늘날에는 도움을 준다고 하면서 IMF는 세상을 더욱 도박판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IMF관리 체제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에게 미국은 외환위기 이니 달러를 절약해야 한다고 교훈 하면서 미국의 무기를 팔아먹으려 합니다. 미국은 IMF에 출자하면서 반도체, 자동차공업, 조선업과 같은 미국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업종에는 금융지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세기적인 바람둥이가 대통령이 되어 이락과 코소보에 세계평화를 위해 포탄을 퍼부으라고 명령하는데 누가 그것을 글자 그대로 믿어 주겠습니까? 아무리 그럴듯하게 명분을 세워 거짓과 죄를 가리우려해도 그것은 무화과 나뭇잎 일뿐 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거짓이고 위선입니다. 지금 세상은 점점더 나쁜 쪽으로 눈이 밝아지고 있어서 서로 속고 속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악의 눈이 밝아질수록 하나님을 향하여, 진리를 향하는 운이 어두워집니다. 보이지를 않습니다. 고난주간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2. 세계는 진리와 거짓의 대결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을 상징하는 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적대관계를 투쟁이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원수가 되게 하고\\\"라는 말의 원수는 히브리어로「에바」인데 적대감, 증오심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상대방에 대해 마음속에 깊이 품고 있는 적대감입니다. 이로써 인류의 역사는 뱀의 후손인 악의 세력과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간의 투쟁이 역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장차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인류의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보다 확대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있는 모든 신구약의 거룩한 씨들, 모든 성도들이 여자의 후손이 됩니다. 사탄은 한 여인 하와를 통해 인류를 타락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한 여인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여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탄의 머리를 부수고 멸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사탄의 문화가 범람합니다. 뱀의 혀로 거짓과 비속함과 천박한 노래와 몸짓으로 세상으로 완전히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0일 보도에 의하면 최초의 사이버 가수라고 하는 조중훈이 컴퓨터 음악파일을 통해 인터넷에 등장한 그의 노래는 폭발적으로 퍼져 나갔고 그 인기를 발판으로 정식음반을 냈습니다. 한국공연 예술 진흥 협회는 그의 앨범 수록 곡중에 \\\"브레이크 프리\\\"(Break Free)라는 노래에 남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비속어가 7번이나 등장하고 저속한 표현과 더러운 욕설이 상당수 들어 있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 서 이 음반은 앞으로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에게 판매할 수 없다고 판정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정을 내려놓고 찬성반대 토론이 천리안 찬성반대 코너에서 불이 붙었는데 조중훈의 가사가 오히려 시원하다는 쪽이 69%로 우세하고, 그의 가사가 유해하니 공진협의 결정이 옳다는 주장이 열세였습니다. 지금세계는 이러합니다. 사단의 세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세력과 싸우고 있는데 지금 오히려 진리의 세력이 밀리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최후 발악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십시오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그 머리를 부쉈기 때문에 사탄은 몸부림치는 것뿐이지 곧 망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이 무서운 전쟁 중에서 상처 나고 찢기고 기진 맥진한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습니다. 상당부분 그들 속에 끌려 들어가서 죄의 영향력에 조종당한 이들도 있습니다. 21절 말씀에 보면 놀라운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가죽옷을 지어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셨다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뭇잎 같은 너절한 옷을 다 벗기시고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가죽은 곧 구약시대 인간의 속죄를 위해 희생된 양의 가죽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서 인간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영원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가죽옷을 위해 주님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인생, 죄로 얼룩진 인생이라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은혜의 옷을 입혀 주심으로 세상과 죄를 이기는 승리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마귀와 싸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든든한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 한 여자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가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는데 어머니가 얼굴을 못 보기에 목소리를 듣고십다고 하심으로 취입한 음반이 불티나게 팔려 일약 복음 가수가 된 여인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최지영씨, 그의 남편은 현직 검사인 황고안씨입니다. 최지영씨는 간증거리가 많습니다. 충남 홍성에서의 일인데 어느 날 첫째아이가 고열이 나서 급히 차를 몰고 좁은 길을 빠져나가는데 갑자가 골목에서 어린아이가 튀어나와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아이는 다행이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10M 앞에서 건축자재회사의 철근과 건물 벽이 길 쪽으로 무너졌습니다. 아이가 튀어나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이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옷 입혀 주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 그곳에 갈 계획이 있었는데 학교 급식 봉사하고 와서 피곤하여 잠시 눈을 붙이고 가려고 누었는데 그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그 때부터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현직 검사부인이 생각밖에 복음 가수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세상은 죄짓는 눈만 밝아지고 있어 죄악이 극성을 부립니다. 주님을 날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최후의 승리를 믿으며 싸워야 합니다. 패배를 두려워 마십시오 주께서 천지 지으신 은혜의 옷 든든한 가죽옷을 입혀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와 싸울 마음을 가지십시오 은혜의 옷으로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대로/ 고전7:17/ 사순절설교
각자에게 주어진 대로 고전7:17 그러므로 어느 때가 경건하게 살아야하는 것처럼 어느 때나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 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니, 각자 자기 방식과 정도에 따라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박해라는 이름은 하나지만 싸움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며, 드러난 원수보다는 숨은 음모자에게서 오는 더 큰 위험이 종종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주시고, 그들이 가는 길이 굽이굽이 험난한 길일지라도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고 함께 해 주십니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에 개개인의 소소한 역사속에 배어 있는 지난한 아픔과 상처들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상처요 아픔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과정을 걸어가는 믿음의 도정은 또한 주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그려주신 선명한 발자취를 좇아 걷는 과정에서 때로 기뻐하고 삶의 환희를 누리며 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려진 이정표로 인해 당황하기도 하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대 레오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에게 맞는 십자가를 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박해라는 이름은 하나이지만, 싸움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밥상위에 올라오는 그릇은 용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듯이 동일한 크기나 동일한 내용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고기를 담은 그릇이라 해도 소금 종지만 못할 때가 있듯이, 그 가운데 어느 것은 중요한 것이고 어느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탐색과 발견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릇이어서 우리에게 어울리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려면 내가 담을 수 있는 내용물은 무엇이고 잘 씻겨져 있는지를 살펴야 하고, 우리가 물감이어서 내게 적합한 색상을 선별하려면 나는 무슨 색이며 다른 색과 혼합될 때의 변형된 모습을 견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리스 젱델Maurice Zundel 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태양처럼 늘 ‘이미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신다. 부재중인 것은 우리이다. 그분의 빛을 가로막는 벽도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 마음이 부숴진 조각마음이면 영롱한 하나님의 모습도 단지 섬벅거리는 램프처럼 보일 것이며 혹 우리 마음이 뿌옇게 내려앉은 티끌마음이면 의초롭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부질없는 억지시늉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을 먼저 아는 것 은 바울 사도가 말한 각각의 지체로서의 삶에 선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게의 가치나 그 경중에 의미를 두고 있지 않으니 내 그릇의 크기와 용도, 그리고 무엇보다 청결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동일한 오감이 주어졌다고 해도, 경험에 따라 체감할 수 있는 영역이 달라지며 동일한 신체 조건이 주어졌다고 해도, 운동량에 따라 초시계를 달리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들려주신 바통을 부여잡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힘껏 양 팔과 다리를 움직여 도약하는 우리의 영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누어 주신 은총의 선물을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대로 살아가십시오.
값비싼 헌신/ 요12:1-8/ 사순절설교/ 2009-08-10
값비싼 헌신 요12:1-8 오늘 읽은 본문의 이야기는 유월절 축제가 열리기 엿새 전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열린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께서 유월절의 안식일이 시작하기 직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이 일은 예수님이 세상을 뜨시기 전 마지막 주간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베다니 동네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친구 나사로와 그 누이들이 살고 있는 동네입니다. 나사로는 갑작스런 병으로 죽어 무덤에 장사 지내졌다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베다니를 찾아온 예수님의 의해 다시 살아나 온 동네와 이웃 마을까지 그 놀라운 소문이 전해졌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에 베다니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들떠 있었고 그 동네의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청하여 잔치를 열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 시몬이 나환자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 시몬은 전에 나환자였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 이렇게 베다니 동네는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 듯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열고 있는 중입니다. 그 시간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집 안에 앉아 있고 언니 마르다는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동생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 그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나 마가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한 여인이 이 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이 일을 하였다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한 순간에 예수께 부어버리는 것을 보고 가룟 유다가 분하여 마리아를 책망한 것으로 기록하는 반면에 다른 복음서에서는 여인을 책망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누가복음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베다니 사건을 기록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초기 사역 기간 중에 이와 비슷한 일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것으로 기록합니다(눅7장). 공교롭게도 둘 다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두 사건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누가복음의 시몬은 바리새인으로서 그 지역의 지도층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 베다니의 시몬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에 나병에 걸렸다 회복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하는 부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볼 때에 누가복음의 일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있었던 일이고 베다니의 일은 죽으시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므로 누가가 이 일을 혼동하여 기록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가셨을 때 그 동네에 살고 있는 한 죄 많은 여인이 예수께 찾아와 울며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열어 그의 발에 부은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이 베다니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과는 서로 다르지만 그날 예수께 찾아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독특한 행동으로 최상의 예우를 해드린 점에서는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마리아와 또 다른 여인의 헌신적인 섬김을 통해 유대인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로부터 못 마땅하다는 투의 불평을 들으셔야 했습니다 . 그만큼 이런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또 유대 사회에서 여인이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남자의 발을 씻기거나 몸에 향유를 붓는 것은 결코 정숙한 여인의 행동일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여인들의 행동을 중단시키거나 책망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여인들을 꾸짖는 사람들을 나무라시고 여인들이 행한 일을 높이 칭찬하셨습니다. 교회의 절기 가운데 이제 부활주일을 두 주 앞두고 있으며 다음 주일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엿새 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행진하셨던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그 주간은 주님의 고난 받으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는 계절을 지나고 있는 오늘 아침에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난 한 여인의 용기 있고 값진 헌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까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베다니 동네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어떤 마음의 동기에서 이런 특이한 행동을 하였을까요? 나사로와 예수님이 어떤 친분 관계인가를 알고 있는 분들은 마리아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나사로와 예수님은 평소에도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으며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다시 살리신 특이한 관계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 그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마침 자기 동네에서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가 열렸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현했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잔칫집의 귀한 손님이나 주인공의 머리에 값진 향유를 부어주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노래하기를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 하였습니다. 나를 위한 잔치가 열리고 나를 초대한 주인이 나의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는 말은 나를 최고로 높여주었다는 기쁨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 곧 그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원수들 앞에서 다윗을 가장 존귀한 자로 높여주셨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격스런 일인가 하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회에서 향기로운 기름을 몸에 부어주는 행동은 그 사람에 대한 최고의 대접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날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행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날 마리아가 예수께 부은 향유는 지극히 비싼 나드 한 근이었습니다. 나드 향유는 북인도에서 수입이 되는 값진 것으로 당시 로마의 귀족들이 사용하던 고급품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가정이 얼마나 부유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들리실 때마다 나사로의 남매들을 자주 찾아주셨고 친구로 지내면서 가끔 예수님의 일행을 대접한 것을 보면 그런대로 경제적 여유는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은 그 가격이 자그마치 300 데나리온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남자 어른의 하루 품삯이라고 했으니 일년 동안 일한 품삯을 모았다가 한 순간에 털어버렸다는 셈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최소한 2천만 원 혹은 4천만 원 정도까지의 가치가 있는 향유였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자리에서 순식간에 예수님께 부어버렸으니 유다의 말대로 허비했다고 탄식할만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300 데나리온의 향유는 기꺼이 깨뜨려 드릴만한 가치가 있는 분에게 드리는 최고의 보답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향유는 결혼을 앞둔 처녀가 결혼 지참금으로 준비해 둔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 1호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께 드려진다면 그 어떤 일보다 더 값진 행동이라 여겼기에 서슴없이 옥합을 깨뜨려 드렸고 심지어 여인의 자존심이요 영광과도 같은 긴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예수께 대한 최고의 감사표시를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본 다른 제자들도 이게 무슨 일인가 놀랐겠지만 유독 가룟 유다가 나서서 마리아의 행동을 무참히 꾸짖었습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지 어찌 이렇게 허비하느냐?’는 비난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돈에 대한 아쉬움이었습니다. 차라리 그 향유를 자기에게 맡기면 돈으로 바꾸어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어리석은 여자가 일을 그르쳤다는 속상함에서 나온 불평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동료 제자였던 요한은 이런 유다의 심보를 가리켜 도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돈궤를 맡은 사람으로 공금을 관리하면서 그 동안 남모르게 횡령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300 데나리온이라는 거금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것을 보고 속이 뒤틀려 그렇게 불평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몰래 유대인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찾아가 자신의 스승 예수를 넘겨주는 대가로 은 30냥을 챙긴 것을 보면 유다는 도적이었다는 요한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전 재산과도 같은 향유를 부었고 목숨과도 같은 머리털을 풀어 예수께 헌신을 하고 있는 반면에 그래도 3년씩이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라고 하는 유다는 돈 생각이 앞서 지극한 선을 행하는 사람을 못마땅히 여기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리아를 망신 주려 했던 속 좁은 남정네에 불과하였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이 너무 뜻밖이었지만 지금 감격스런 장면이 한참 진행 중인데 갑작스레 끼어들어 마리아를 난처하게 하고 잔치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드는 유다의 행동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를 가만히 두어라 나의 장례식을 위하여 향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지만 나는 너희와 함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부분에서 여러 사람들이 분하여 서로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들 보기에 마리아가 나서서 하는 짓이 해괴망측하고 꼴불견이었는데 예수께서 잠잠하시니 차마 말을 못하던 차에 유다가 마리아를 책망하자 속이 시원하였고 기다렸다는 듯이 너도나도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를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히느냐? 그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라도 도울 수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식을 미리 준비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념할 것이다’ 하고 칭찬을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선생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무슨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일까? 이상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에게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기는 태평스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걸 가리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라고 해야 할 지 영적으로 무딘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지는 몇 일 후에 밝혀질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비록 예수님의 장례식 준비로 그 일을 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번에는 꼭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을 고백하리라 준비된 마음으로 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다음에 할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는 이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올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에서 온 힘을 다하여 주님께 드린 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람에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마리아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지금까지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대접 받고 존경 받는 일에 길들여진 제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초자연적인 기적을 자주 체험하고 겁날 것이 없었습니다. 각종 환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회복되며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되살아나는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이보다 더 좋은 인생 경험이 없었습니다. 비록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는 자주 위협을 당하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주신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쯤은 일도 아닐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 대한 일종의 믿음이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은 그 정도가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고난과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제 육신으로는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고 떠나갈 시간이 다가오는데 우쭐대기 잘하고 덩치 큰 남자 제자들은 아직 어린아이들처럼 천방지축 나설 데 나서지 않을 데를 구분하지 못하고 덜렁대는 철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차라리 값진 향유를 몸에 부어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마리아가 겉으로는 여려 보이지만 제자들의 행동과 믿음보다 훨씬 진지하고 성숙된 것이었기에 주님은 마리아를 지극히 높여 칭찬해 주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크고 작음은 말에 있지 않고 행함에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은 말로만 반복할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삶에서 드러나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다는 고백은 주께서 나의 주인이시고 나를 다스리시는 왕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주인과 왕이 되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나의 믿음과 함께 나의 가장 소중한 그 무엇도 드려질 수 있다고 고백하며 사는지요? 큰 소리 치던 제자들은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도 직업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속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아직은 버려야 할 것들이 더 많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뭔가 더 얻을 것은 없을까, 버린 것보다 더 멋지고 화려한 것은 언제쯤 얻을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이 더 많았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소유한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으로 주님을 섬겼고 머리털을 풀어 발을 씻길 정도로 완전한 섬김의 자세를 보였다면,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 때문에 덕을 보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더구나 가룟 유다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제 뱃속을 채우던 도적이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께 찾아와 말도 없이 하염없이 울고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발을 씻었고 그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런 여인을 보고 그 잔칫집 주인 바리새인 시몬은 기분이 상하여 왜 이 여인의 행동을 중단시키지 않느냐고 예수께 불평하였습니다. 가룟 유다 또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반응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시몬에게 물으시기를 ‘오백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 빚을 진 사람 둘이 있는데 둘 다 갚을 능력이 없어 주인이 두 사람을 다 탕감하여 주었다면 누가 더 주인을 사랑하겠느냐?’ 하였습니다. 시몬이 말하기를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하자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여인을 보라 너는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다. 너는 나에게 손님을 맞이하며 입맞춤도 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조차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한다. 이 여인의 많은 죄가 용서받았다. 이 여인의 사랑이 많기 때문이다. 용서함을 받은 일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 시몬은 지금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예수 선생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대접 한 번 했다고 생색내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교만하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인 것은 예수님을 초청한 주인이 손님보다 더 높임을 받으려는 의도에서 예수님 대접을 최소한의 기본으로만 하였던 것을 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그는 손님을 청해놓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으며 손님을 얕보는 투로 대하였던 졸장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귀빈 대접하였다면 마땅히 발 씻을 물도 내어드리고 머리에 기름도 발라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유대 사회의 품위 있는 집안의 전통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 시몬은 그런 절차를 깨끗이 생략하고 다만 예수를 불러다가 자기 자랑만 늘어놓으려는 심보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와 교제하며 자기 신분도 드러내고 고상한 학자나 유명한 인물과 친구한다는 평판이나 노리는 사람에 속합니다. 많이 사함을 받은 사람이 더 많이 예수를 사랑합니다. 스스로 의롭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어리고 연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예수께 감사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자기 의로움으로 만족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사는 환자들에게나 필요하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다’ 하셨고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혼의 의사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나는 용서받을 만한 죄를 지은 것도 없고 혹시 가벼운 실수는 하고 살지만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주님이 그리 급하게 필요한 의사는 아닙니다. 적어도 나는 하나님 앞에 머리 들 수 없는 불쌍한 죄인임을 깨달을 줄 아는 사람에게 예수께서 가장 좋은 의사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유,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물론 영혼 구원이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위한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그런 순전한 마음으로 주를 따르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죽어 지옥 가는 것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세상에 사는 동안 사고와 질병이 없이 편안하게 살기 위하여 절대자를 의지하는 목적도 아닙니다. 어떤 신앙의 대상을 정하고 진리를 따르며 착하게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세상 사는 동안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일부분일 수는 있지만 주 목적이 아닙니다. 정말 목표는 무엇인가요?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날 위하여 죄 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를 영원한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주심을 감사하며 살기 위함입니다. 지옥불에 떨어질까 무서워서 피하려고 어쩔 수 없이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나라를 준비하고 나를 기다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 원하는 그 기쁨과 즐거움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을 받아 감사함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더 가까이, 예수를 더 가까이 하고 그분을 위하여 살고자 함이 우리 믿음의 참 목표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사랑 고백이 가능할까요? 어려움으로부터 건져준 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보답을 합니까? 더구나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어떤 방식으로 감사를 고백하고 있습니까? 입술로만 당신은 나의 왕 나의 구주이십니다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더 좋은 것은 없을까 기대하는 마음은 아닙니까? 은혜로 얻은 영원한 생명보다 더 좋은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시간, 물질, 달란트, 건강, 가족…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가장 소중한 이런 것들을 주님께 기꺼이 드림으로 나를 고치신 주님, 나를 용서하신 그분께 보여드리는 헌신이 있습니까? 주일 아침 한 번 예배 드리러 오는 것조차 세상 일 때문에 미루고 첫째가 아닌 뒷전으로 두면서 그래도 나는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그 말에 과연 진실성이 있을까요? 무엇으로 나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지요? 금년 부활주일과 고난주간을 준비하면서 우리 교회는 다음 주일 이후 한 주간을 금식기간으로 정하고 함께 기도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자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것인가 막연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에 우리 교회는 이웃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동참하고자 합니다. 고난 당하는 이웃의 현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나누고자 하는 뜻에서 북한을 탈출하여 나온 ‘새터민’들의 고난에 대하여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과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들이 있습니다. 물론 영국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주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라 믿습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이 그들의 운명, 자업자득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까요? 너무나 힘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고난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입니다. 한 주간 금식을 하되 목적 없이 굶는 것이 아니고 다이어트 목적도 아니고 금식으로 우리 육신에 고통을 주면서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 겸비해지는 시간을 갖고자 함입니다. 하루 한끼 혹은 일주일에 한끼도 좋고 그 이상 금식도 좋습니다. 자원하여 금식에 동참하면서 고난 중에 있는 동포들을 기억하고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금식하며 사용하지 않은 식대를 모아 부활주일 감사헌금으로 드려 그것으로 고난 중에 있는 동포들 혹은 그들을 위하여 일하는 분들을 후원하는 일에 사용되면 참 의미 있는 부활감사헌금이 되리라 믿습니다. 한 주간 기도하며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한 주간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날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하나의 길이라면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겁니다. 값진 헌신이 되길 바랍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헌신이란 없습니다. 주의 위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강청하는 기도의 능력/ 눅18:1~8
강청하는 기도의 능력/ 눅18:1~8 (서론) 강청의 기도를 좋아하시는 하나님 뜨거운 강청의 기도를 하나님은 듣기원하신다 낙심은 절대 금물:성공한 사람의 특징은 마지막 포기의 선을 넘은 것 그리스도인의 성공은 기도의 성공이요 실패는 기도의 살패다 (본론) 강청하는 기도의 능력 가. 구체적 소원갖고 (2,3) 간절한 소원을 잡으라 자꾸 내속에 떠오르는 것이 기도제목이다 나. 믿음으로 (8)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막11;24) 받은줄로 믿으라 그대로 되리라 (믿으라 되리라) 다. 뜨거운 감정을 담아 (5) 인격 = 지 + 정 + 의 열정 : 새벽에 일찍 일어난다 하나님은 뜨거운 열정의 사람을 좋아 하신다.(야곱의 복받음) 라. 집중해서 (7,8) 자주한다. 밤낮. 속히 이루어 주신다. 마. 포기하지 않고 (5절, 늘와서) 고비를 넘기라 역사는 도전에 응전함으로 발전하듯(토인비 역사학자) 기도에 도전하라 연합으로 합심해서 기도하라 (한나, 엘리야, 여호수아 등) (결론) 응답받는 강청하는 기도에 승리하는 성도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거기 너 있었는가/마27:27-44
거기 너 있었는가/마27:27-44 2008-01-27 18:18:09 read : 172 8살 난 어린이를 유괴 살해한 파렴치범을 보며 지금 온 국민이 분노에 떨고 있습니다. 유괴살인 자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큰 죄지만 아이를 유괴하자마자 산 채로 물에 던져 죽게 하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목소리를 이용해 마치 아이가 살아있는 듯 부모를 계속 협박한 것을 보면 정말 인면수심, 사람의 탈을 쓴 짐승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이 유괴범이 한 살 난 아이까지 가진 가장이며 돈도 잘 벌면서 유흥비로 탕진한 돈을 갚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모두는 도대체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영화제작소라는 단체에서 이런 설문조사를 했답니다. “관객이 선정한 영화사상 최고의 악당은 누구인가?“ 영화에서 악당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B급 영화는 주인공만 잘 생기고 멋지게 활약하면 되지만 완성도 높은 A급 영화를 만들려면 조연배우뿐 아니라 악역을 맡은 사람까지 연기가 빛나야 합니다. 악역이 정말 '저런 나쁜 놈' 소리 나올 정도로 연기를 해야 영화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화사상 가장 끔찍한 악역으로 인기 아닌 인기를 누린 악당은 누구일까 조사한 것인데 그 결과 쟁쟁한 악역들을 다 물리치고 영화 <양들의 침묵>에 나온 한니발 렉터 박사가 1등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안소니 홉킨스라는 배우의 악역 연기가 정말 빛났지요. 2위는 영화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 3위는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악역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성경에서 최고의 악역은 누구인가?“ 묻는다면 1, 2, 3등은 누가 할 것 같습니까? 저는 1등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 2등은 히브리인들을 핍박한 애굽의 바로 임금, 3등은 여성 중에는 유일하게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차지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순위에 절대 빠질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이 고백되기 시작한 후 지금까지 1500년 이상 세계 수십억의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이 구절을 외웁니다. 그러니 빌라도가 지옥에 가면 만날 1순위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디 빌라도뿐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에 보면 참 여러 사람이 십자가 처형을 주도하거나 돕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용서 받지 못할 죄인들이요 기독교 사상 최고의 악역을 감당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준 빌라도 총독과,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병들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십자가 주변에 서서 주님을 조롱한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사주하고 사실상 이 일을 주도한 안나스와 가야바를 비롯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또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사형을 적극 지원한 헤롯 임금도 빠질 수 없습니다. 여기에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형에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본의 아니게 악역을 담당하게 된 바라바(예수님 대신 풀려난 죄인이지요)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도 있습니다. 설교 첫머리에 악역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악역이 나쁜 역할 제대로 못 해주면 영화도 제대로 완성되지 못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여러 명의 악역을 쓰고 계십니다. 물론 가룟 유다가 악역 중에 주연 역할을 맡았습니다. 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도 조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세 주에 걸쳐 가룟 유다와 제자들을 제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악역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빌라도, 로마 군병, 유대인,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 헤롯, 바라바, 두 강도들입니다. 사순절 기간인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특별히 이 악역들의 모습을 살펴보려는 하는데 왜 하필 십자가 주변의 악역들이냐? 좋은 사람들도 많은데... 여러분, 이 악역들이 결코 잘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정말 나쁜 인간들'이구나 하고 분노하며 치를 떨라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회개에 대한 시리즈를 계속 설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 선 주역들을 살펴보면서 남 이야기로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죄인 아닌가? 나는 오늘 또 다시 예수님을 못 박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바로 그 십자가 현장에 서서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소리치며 조롱한 죄인 아닌가?“를 돌아보려는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 오늘은 십자가 주변의 악역 중 두 사람만 다루지요. 제일 먼저 살펴볼 악역이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때론 빌라도가 참 억울하겠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아니, 아마 제일 억울해 할 사람은 빌라도 자신일 것입니다. 아마 빌라도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준다면 이런 항변을 할 지 모릅니다. “아니, 한 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라는 말이야. 당신이 그 때 유대 총독이었다면 어떻게 했겠냐고? 물론 예수님이 죄 없는 것은 다 아는 일이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상황인데 어떻게 바라바 대신 예수를 풀어줄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이렇게 억울하다고 말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빌라도의 이런 항변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 준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대중의 요구와 위협 앞에서 얼마든지 꺾을 수 있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언제든지 악이나 죄와도 타협할 사람입니다. 본문 19절에 빌라도의 아내가 자기 꿈에 대해 전하면서 죄 없는 예수님을 그냥 두라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 빌라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경고하셨음에도 그는 악과 타협하고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빌라도는 본디 로마의 상류계급출신이 아니라 중류계급 출신 군인인데 부인 잘 만나서(빌라도의 부인은 로마 티베리우스 황제의 세 번째 아내인 클라우디아의 사생아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라고 합니다) 귀족이 되고 유대의 총독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극적인 신분상승을 이룬 입지전적 인물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성공과 이익에 민감한 법입니다. 늘 성공과 출세를 따라 살았겠지요.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손해 볼 짓을 하지 않았겠지요. 늘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익숙했겠지요. 아마 이런 습성 때문에 오늘도 군중들을 만족시키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도 이 빌라도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가 무슨 똑똑한 사람인 양 생각합니다. 유연성 있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치켜세웁니다. 괜한 고집 부리다가 손해 보지 말고 세상의 흐름을 잘 따라가고 사람들의 요구에 적당하게 자신을 변신시키면서 살라고 말합니다.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들려준 하여가(何如歌)에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라고 말했듯이 그렇게 얽혀서 한 번 잘 살아보자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고 경고하셔도 무시하고 그 길로 갑니다. 오직 자기 성공과 이익을 위해 눈치를 보며 시류를 따르다가 그만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 우리가 이 빌라도나 빌라도 같은 현실주의자, 타협주의자들을 보고 손가락질 할 자격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혹시 신앙적인 신념보다 현실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손해 안 보려면 얼마든지 불의한 현실과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적인 세계보다 육적인 이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 모습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빌라도 비난할 자격 없습니다. 나도 만수산 드렁칡처럼 세상과 벗 삼아 이리저리 얽혀 살면서 어떻게 빌라도를 비판합니까? 나도 대중의 비난과 따돌림이 무섭고, 그들의 요구가 부담스럽고, 그래서 손해 볼까 무서워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간다면 빌라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막 15:15에서는 분명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빌라도의 죄는 무리에게,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아닌,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나님을 희생시킨다면, 또한 나 자신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주님을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 빌라도와 똑같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정몽주처럼 오늘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신앙의 단심가(丹心歌)를 부를 줄 알아야 빌라도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 두 번째 십자가 주변의 악역은 바로 로마 군병들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군병들도 빌라도 이상으로 억울할지 모릅니다. 군병들의 말을 한번 들어볼까요? “나는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총독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요?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물론 예수님이 죄 없는 것 다 압니다. 하지만 위에서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제가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저야말로 정말 억울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판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이 군병들 말이 맞습니다. 빌라도 총독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예수님께 잔인하게 굴었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누가 잔인하게 하라고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몹시 잔인하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못 박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27절부터 보십시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부터 희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 그 앞에서 무릎 꿇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더니 다시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툭툭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요한복음) 모욕한 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끌고 갑니다. 또 35절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끝까지 한 줌이라도 자기들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지는 모습입니다. 어떤 영화에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도 망치로 못을 내려치는 이 군병들이 잔인하게 웃으면서 망치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장면이 안 나왔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을 조롱하며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 이렇게 로마 군병들은 나쁜 놈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또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로마 군병보다 나은 사람이냐?“ 오늘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불의를 저지르지는 않습니까? 윗사람 명령이라 어쩔 수 없고, 부모님이 원하시니 어쩔 수 없고,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고, 세상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어서 한다고요? 변명이 안 됩니다. 군병들도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면서 한편으로는 시키지도 않은 조롱을 하며 자기를 만족시키고, 어쩔 수 없이 사형시킨다면서 옷 한 벌이라도 얻으려고 제비를 뽑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실은 내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 위해 얼마든지 손해도 감수하겠다고 결심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 이익 포기하고, 꼭 하고 싶은 일이라도 주님 위해 안 하겠다고만 결심하면 가능합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오늘 나는 누구의 군병 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세상 사람들입니까? 빌라도나 로마 같은 세상의 권력입니까? 아니면 마귀사탄의 군병 노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딤후 2:3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싫으면, 예수님의 군사 되기 싫고 고난도 받기 싫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세상의 종노릇 하던지, 세상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던지, 마귀의 군사 노릇을 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군병입니까? 거기 너 있었는가? 제가 좋아하는 렘브란트(Rembrandt)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는데 그는 돈독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어서 성경에 나오는 장면을 많이 그렸고 그 중에도 십자가에 관한 작품을 참 많이 남겼습니다. 이 가운데 <십자가를 세우다>라는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십자가를 세우는 로마 병정들 사이에 이상하게도 베레모를 쓴 남자가 함께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를 세우고 있습니다. 참 안 어울리는 복장입니다만 이 사람은 바로 베레모를 쓴 화가,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바로 그 십자가 처형의 현장에 있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니, 그 현장에 서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이 로마병정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화가 자신의 어떤 설명도 붙어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심정을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병정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그림을 보는데 성지순례 갔을 때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본 그림이 생각났습니다. 이즈미르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서머나입니다. 이 서머나에는 순교자인 폴리캅 감독을 기념하여 세운 폴리캅 기념교회가 있고 그 안에 각종 벽화와 장식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유난히 페레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에 제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바로 폴리캅 감독의 화형장면을 그린 그림인데 칼을 들고 폴리캅을 화형 시키는 무리들 뒤에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서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손이 밧줄로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그림을 그린 페레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순간 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페레 역시 순교자 폴리캅을 생각하며 내가 그 화형 장소에 서 있었다고 자기 그림을 통해 고백한 것입니다. 아니, 페레는 한 술 더 떠서 아예 내가 그 순교자 폴리캅과 함께 화형 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렘브란트는 자신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으로 묘사하고, 페레는 자신을 순교자와 함께 화형 당하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객관적으로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십자가의 현장에 내 자신도 서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군중들 중에 나도 들어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조롱하던 사람이 바로 나며,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병정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설교 후 부를 찬송 136장 가사처럼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하고 물을 때 “네, 제가 거기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병정으로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저도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하고 인정할 때 진정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의미/ 겔36:24-28, 요3:1-15/ 유경재 목사/ 안동교회/ 사순절제4주일설교/ 1999-03-14
거듭남의 의미 겔36:24-28, 요3:1-15 제가 1976년에 이 교회에 부임한 이래 70주년, 80주년, 9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70주년에는 오랜 숙원이었던 새 예배당을 기공하여 그 이듬해 봉헌하였습니다. 80주년에는 교육관을 봉헌하였고, 85주년에는 파이프 오르간을 봉헌하였습니다. 내적으로는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개척교회를 하였고, 농촌교회 지원을 비롯하여 방송선교와 여러 사회복지단체들을 지원하였습니다. 노인학교를 비롯한 주부교실, 공부방과 어린이집을 개설하였고, 1990년부터는 특별신앙운동을 전개하여 농촌 살리기 운동과 환경 보존 운동, 통일 운동 등을 전개하였습니다. 또 1992년에는 농촌목회연구원을 개원하여 지금까지 계속하여 농촌 교역자를 위한 강좌를 갖고 있습니다. 70주년 혹은 80주년이라는 큰 역사의 고비를 맞으면서 안동교회는 그만큼 발전하였고, 우리의 의식을 새롭게 하여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난 20여년 사이에서 우리의 의식을 개혁하여 왔던 것입니다. 외적으로 나타난 건축이나 사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룩하도록 우리의 신앙 의식과 사회 의식, 혹은 역사 의식이 새로워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9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의식을 새롭게 하여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날에 이룩한 것에 만족하면서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우리는 또다시 끊임없이 변하는 시대에 뒤쳐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조선일보에 실린 일본 소니 사장 이데이 노부유키의 인터뷰 기사 가운데 \\\"기업에 어떤 전략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패러다임과 장(場)이 바뀌었는데도 과거의 성공체험에 안주해 과거 방식을 고수하면 결과는 실패일 뿐입니다. 그 동안의 성공경험을 완전히 포기하고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이런 대변혁기엔 과거식 구조를 해체하는 세력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해집니다. 나는 이들을 Rule Breaker(틀을 깨는 자)라고 부릅니다.\\\" 이 말을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거듭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업만이 거듭나야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야말로 거듭나지 않으면 쓸모 없는 교회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교회야말로 \\\'룰 브레이커\\\' 즉 틀을 깨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틀과 경험과 의식에 안주해 있는 동안 변화하는 역사 앞에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낙오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기업보다 그 시대, 그 역사에 더욱 민감하여야 할 파수꾼이기에 시시각각 변하는 그 시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열린 의식,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역사 변화는 그 변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불과 1세기 동안 과학과 산업의 발전은 놀라운 변화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는데, 지금은 더 빨리 더 많은 변화를 우리 앞에 예고하고 있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가진 역사에 대하여 우리가 잠시라도 방심하면 곧 우리는 그 대열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열에서의 낙오란 곧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한 번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자라지 않으면 안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땅에 묻어 두는 일은 곧 죄악입니다. 결국 그는 어두운 바깥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듭남의 의미는 한 번만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천국에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고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만 경험하고 알뿐입니다. 따라서 이런 의식 이런 경험만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요한복음 3장 12절에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땅의 변화도 미쳐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늘의 일을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듭남이란 이 땅의 모든 사고 방식과 틀을 깨트리고 하늘의 일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고,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사건건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과 충돌하신 것은 근본적으로 그 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틀을 가지고 그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율법의 틀에 매인 유대인들과 충돌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에 대한 해석의 차이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성전 중심의 시대가 끝났음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도 황당한 이야기여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십자가에 처형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틀을 깨신 \\\'룰 브레이커\\\'이셨습니다. 누구든지 부자가 되고자 하는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되라고 하셨고, 누구든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세상에서 서로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모두가 넓은 길로 가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으며, 모두가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목숨을 위해 사는데, 그 목숨을 버리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틀을 완전하게 깨신 분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룰 브레이커\\\'가 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영, 새로운 사고 방식, 열린 마음 없이는 이런 예수님의 새로운 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듭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나야 천국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의식의 성격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욱 분명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영, 새로운 생각, 새로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영, 새로운 생각, 새로운 마음이란 거듭나기 이전의 생각이나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거듭나기 이전에 우리의 생각은 주로 자기 중심적이었고, 그 마음은 대체로 다른 세계, 다른 사람에 대하여 닫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그가 지으신 세계와 사람에 대하여 닫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생각이나 마음이 항상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고 한 번 경험하고 붙잡은 것은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존재로 그 생각이나 의식이 제한되어 있고 주로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남을 생각할 줄 모르며, 더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그를 바라보거나 그에게 기도하지 않기에 그의 생각의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함을 뜻하며 따라서 그 변화를 따르기보다는 현재에 만족하며 안주하려는 경향이 뚜렷한 것입니다. 이런 것과 달리 새 마음, 새 생각, 새 영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옛것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므로 그가 이루시는 일과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가 지으신 세계와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의 폭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뜻을 헤아리고자 하기에 그 역사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기 위하여 항상 열린 마음으로 그가 이루시는 새로운 일들에 대하여 받아드리고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은 대단히 유연하여 한 틀에 매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과 같아서 좁은 곳을 통과할 때는 소용돌이쳐 흐르고, 넓은 곳에 이르러서는 유유히 흐르며, 바다에 이르러서는 바다처럼 폭을 넓혀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영으로 거듭난 사람은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일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넓고 깊어서 우리에게는 항상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는 나라이기에 우리가 쉬지 아니하고 그 나라를 탐험하여도 늘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영도 날마다 성령으로부터 새롭게 하심을 받지 않고서는 계속 자랄 수가 없습니다. 계속 새롭게 하시는 성령 안에 내가 있을 때 내 안에 들어온 새로운 영이 자라게 되며, 살아있는 영이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들어온 새로운 영은 그 자체로는 새로운 것으로 남아 있지를 못합니다. 마치 전기와 같아서 발전소로부터 공급되는 전깃줄에 전등이 달려 있을 때 빛을 발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안에 들어온 새 영이 성령과 연결되어 그가 공급하시는 하늘의 능력으로 채워질 때만 그 영이 자라며 그 영의 능력이 더욱 확대되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계속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호롱불을 켜던 집에 전기를 가설하여 불을 밝히는 것은 거듭남에 비유할 수 있는 획기적인 변화입니다. 그러나 계속 전력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그런 변화는 순간적인 기쁨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계속 전력이 공급될 때 비로소 그 변화가 실감 있게 우리의 삶에 다가올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어둠을 밝히는 전등에 만족하였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라디오도 듣게 되고, 전기 다리미도 쓰게 되며, 선풍기를 사다 놓고 틀게 되고, 좀더 지나니까 텔레비전이 들어오고, 냉장고가 생겼으며, 온갖 전기 제품들이 밀물처럼 우리 가정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과 우리가 한 번 연결되면, 우리의 죄사함을 받는 일에 그치지 않고, 우리 생활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사랑과 소망이 생겨나며, 기쁨과 평화, 온유와 겸손, 절제와 인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통해 세계를 알게 되듯이 성령이 보내시는 뉴스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정보를 얻게 되면서 우리 속에 새로운 의식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와 정치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문화를 보는 눈이 다양해지고, 역사의식이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와 다른 눈으로 피조세계를 보게 되며, 그래서 환경 보전의 필요성을 알고 그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저녁이면 불을 밝히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새로운 정보, 새로운 기쁨을 얻는 것처럼, 매일 성령이 보내시는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며, 성경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제와 다른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면서 생각을 고쳐먹게 되고, 그가 보내시는 위로와 소망을 통해 기쁨과 용기를 얻게 되며, 미래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신앙의 삶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새로운 영은 텔레비전과 같습니다. 방송국에서 보내오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얼마든지 받아보게 하는 것처럼 우리 속에 들어온 영도 성령께서 보내시는 새로운 정보들을 계속 받아보면서 우리의 삶을 늘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 이렇게 우리는 늘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정보들을 받을 수 있는 영을 받았으면서도 마치 텔레비전을 갖다 놓고도 켜지 않는 것처럼, 날마다 기도하지 않고, 날마다 성경을 보지 않기 때문에 성령이 보내시는 새로운 정보들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옛날에 보았던 명화 한편 기억하고 아무리 새로운 영화가 나와도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면서 영화 하면 옛날에 한 번 본 것만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한 번 은혜 받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데 옛것에만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결국은 낙오자가 되거나 보수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난 영을 받은 지도자와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늘 새롭게 변화를 이룩하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 가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들은 항상 되풀이되는 고루하고 새로울 것이 하나 없는 그런 일들만 하면서 결국은 쓸모 없는 교회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동교회는 70주년과 80주년을 지내면서 외적으로 내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였고, 시대의 변화를 미리 내다보면서 하나님의 일들을 준비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90주년을 맞았고, 또 곧 1백주년을 맞이할텐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새롭게 할 것이며, 이 역사의 변화에 따라 어떤 새로운 일들을 기획하고 이룰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90주년을 전후로 하여 문화선교를 지향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지난 95년부터 매년 십수 차례의 음악회를 가져왔습니다. 21세기는 문화세기가 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보편화된 생각입니다. 한국 교회들 가운데도 이에 대비하여 틀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선교 전략을 구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룰 브레이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70주년과 80주년에 이룩한 일들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룰, 새로운 틀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9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또 다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새 시대의 새로운 일군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담당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거 우리 교회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롭게 그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였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세기를 맞이할 때 새로운 선교 전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거듭난 영을 가지고 날마다 위로부터 오시는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계십니까? 이 역사의 변화를 예민하게 읽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지난날의 틀 속에 안주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 주신 달란트는 지금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땅속에 묻혀 있습니까? 90주년을 맞은 안동교회는 새로운 영으로 거듭난 일군을 필요로 합니다. 새로운 마음을 갖고 역사를 볼 줄 아는 새로운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에 이룬 것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군을 필요로 합니다. 이제 깨어 일어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새로운 정보를 따라 자신을 새롭게 하십시오. 사고 방식을 바꾸십시오. 마음문을 활짝 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넓은 세계를 호흡하게 될 것이며, 그가 이루시는 역사를 알게 될 것이며, 새로운 정보를 통하여 새 역사에 동참하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깨어 일어날 때 이 안동교회는 90주년을 새롭게 맞이할 것이며, 새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새 역사 창조에 거듭남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연합/ 요17:22-23/ 김태복 목사/ 사순절 설교/ 2008-03-07
거룩한 연합 요17:22-23 지금은 사순절(四旬節) 기간입니다. 사순절이란 부활절 전 40일부터 부활절 이브까지로 금년에는 3월 24일부터 4월 3일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명상하면서 회개와 금식, 혹은 기도와 구제 등으로 경건하게 보내는 것입니다. 이번 이 사순절 기간을 맞으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해야겠다는 의미에서 오늘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사탄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롬 11:17에 보면 우리는 원래 돌감람나무 가지로 아무 쓸모 없는 자였으나 참감람나무이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 참감람열매를 맺는 좋은 가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열매로 표현한다면 시골에 가면 마굿간이나 뒷간 옆에 흔히 자라는 돌배나무가 있습니다. 그 열매는 대단히 작으면서도 어찌나 단단한지 돌처럼 딱딱합니다. 그러나 어느 배는 나주에 배처럼 어찌나 크고 단맛이 나는지 먹으면 시원하고 답니다. 그러한 배를 참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참배가지를 짤라서 돌배나무에 접을 붙이면 이상하지요, 참배가 열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접붙임은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쁜 열매만 맺던 우리라는 가지를 좋은 나무이신 예수님에게 접붙임하면, 어느날부터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된다는 점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돌배나무 가지와 같았습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 되어야지 결심해도 결과는 죄만 짓는 자였습니다. 남을 사랑해야지 하면서 왜인지 미움과 시기의 열매로 나타나고, 남을 용서하고 도와주어야지 하지만 인색한 자신,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선하게 살고 싶어하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가 나타내는 것은 갈5:19절의 열매들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의 열매를 맺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롬7:15에 ”나의 행하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하는 탄식을 자아내게 되며, 더 나가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절망의 외침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을 예수님이라는 줄기에 접붙이니 놀랍지요, 예수님이라는 나무의 뿌리 진액이 우리 속에 흘러 넘치게 되며, 어느날 보니 예수님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접붙임이 바로 거룩한 연합인 것입니다. 엡 5:22-33에서는 거룩한 연합을 결혼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 어떤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 집안은 환경이 대단히 안 좋은 가정이었습니다. 언제나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때리고 도박하고 여인관계가 복잡합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미신을 많이 섬기면서 쩍하면 굿을 하는, 어두운 기운이 꽉 들어찬 가정이었습니다. 처녀는 그런 미신적인 삶이 싫었으나 어쩔 수 없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처녀는 친구를 따라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의 핍박이 대단했으나 끝까지 이기고 교회를 다닙니다. 그러다가 좋은 총각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안은 예수님을 잘 믿는 가정으로 언제나 가정예배를 드리고 주일이면 교회 왼종일 나가 충성봉사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친정 가정은 언제나 우울과 반목과 어두운 영이 가득하던 가정이었으나 시댁 가정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가정이었습니다. 이 처녀는 결혼함으로 마귀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으로, 지옥적인 삶에서 천국적인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어느 신앙이 좋은 가정에서 자란 처녀가 믿지 않는 가정으로 시집을 감으로 영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 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처녀들은 결혼을 잘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남자는 머리와 같고 여인은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몸이 팔등미인일지라도 머리가 나쁘면 비참한 삶을 삽니다. 제가 결혼식에 자주 쓰는 내용으로남자는 연주자와 같고 여인은 악기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백 수천 만원 짜리 악기라도 연주자가 형편 없으면 씨그러운 소리가 납니다. 아무리 미인이요, 훌륭한 대학을 나온 여인일지라도 주정뱅이를 만나면 주정뱅이 부인이 되고 사기꾼을 만나면 사기꾼의 아내로 살면서 허무한 세월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볼품이 없고 배운 것이 많지 않은 여인이라도 좋은 남자를 만나면 나중에는 귀부인처럼 대우 받으며 삽니다. 아무리 악기가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명연주자가 연주하면 좋은 음률이 울려 퍼지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우리 신자들은 여인이나 신부와 같습니다. 그런데 마귀 신랑을 만나면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할지라도 마귀가 시키는 대로 범죄의 삶을 살면서 나쁜 열매를 맺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신랑을 만나면 우리는 성격이나 외양이나 환경은 형편없을지라도 귀한 성도가 됨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백민영이라는 분의 간증입니다. 그 분이 어느 처녀와 결혼을 했는데 두 사람이 다 못된 성격을 가진 자였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날마다 술에 취해서 밤 11시나 12시에 들어와서는 ‘물 떠오너라.’ ‘발을 씻겨라.’ ‘옷을 벗겨라.’ ‘밥을 채려라.’고 하면서 주정하기를 다반사로 했고, 아내도 아주 성질이 고약해서 남에게 싸움을 해서 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남편에게 지겠습니까? 한 마디 하면 열마디 하고, 한 대 때리면 같이 때리는 거친 성격이었으므로 그 가정은 밤낮 싸우고 깨어지면서 편한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부인이 먼저 교회를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였는데 얼마나 변화되고 생활이 바뀌었는지 남편이 한 밤중에 와서 주정을 하든, 때리든 그 시중을 다 들어주었고 반항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의 거친 성격을 잘 아는 남편은 감동을 받아 교만과 자만을 버리고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기 시작하더니 그도 완전히 변화되어서 나중에는 인천 제7교회 백민영 장로님이 되고 부인은 하 권사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면 이 정도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변화를 받으려면 옛사람의 생활을 과감히 끊고 예수님에게 철저하게 접붙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철저하게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연합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22-23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예수 신랑과 거룩한 연합을 하는 신부가 되기를 원하시며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 좋은 가지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와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들이 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주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루는 길은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거룩한 연합을 이루려면 예수 신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남녀가 연애를 하든지, 중매를 통해서 남녀가 결혼할 때 그 결혼의 외적조건부터 따지는 사람은 그 결혼이 불행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최근에 많은 남녀들이 결혼이 불행해지거나 파탄이 오는 이유가 사람의 됨됨이를 보기보다 먼저 결혼조건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같이 어려운 시기에는 조금 나아졌지만 한 때 우리나라의 큰 문제 중의 하나가 호화혼수였습니다. 언제인가 신문에 보니까, 어느 화약회사의 상무의 아들과 어느 그룹 회장의 딸이 결혼하는데 신랑측은 예물로 몇캐럿 짜리 다이어반지, 몇 십 평 짜리 아파트요, 신부측에서는 롤렉스 시계, 외제 가전제품 일체 등 무려 트럭 4대분의 혼수품을 해왔다고 하며, 어느 병원원장의 원장은 자기 딸을 어느 의사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고급아파트와 몇 천만원이 넘는 중국식 자개장 등 혼수품을 보내었다고 하며, 더 나가서는 제주도의 감귤농장이나 대도시의 빌딩까지고 혼수품으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혼수품을 주고 받으면서 결혼하면 행복이 넘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결혼이 불행해지기 쉽고 파탄이 오기가 쉬운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가장 잘 사는 미국입니다. 그러면 미국 사회는 가정 천국입니까? 아닙니다. 미국사회는 물질의 부가 높아갈수록 가정은 점점 파탄을 만났던 것입니다. 1900년도에는 12명의 한 부부가 이혼했는데, 1922년에는 8명의 하나가 이혼했고, 1980년대에는 세 부부의 하나꼴로 이혼하고 지금은 모든 부부의 반 이상이 이혼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결혼은 외적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외적 조건을 보기 보다 먼저 그 사람의 신앙이나 인격 등, 됨됨이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신부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 신랑을 바라보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에게서 육신적인 조건으로만 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 되는 날, 자기에게 주어질 자리에만 연연헸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바램과는 전혀 달리 서로 높은 자리만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십자가 사건이 터지자 너나 없이 도망치는 자가 됨으로 신앙의 실패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들을 고전 2:14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교회를 나와서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지고 충성하지만 육신적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저 물질적인 복, 자녀의 복만 원하고 병 낳기만 원하는 등, 육신의 축복만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가지고 아무 변화도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신앙의 실패로 끝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단계로 경건의 연합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영접할 때 일 어나는 것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선을 보아서 이든, 연애에서 이든 만나서 깊은 교제를 나누다 보면 점점 사랑이 깊어집니다. 나중에는 같이 있고 싶어지고 싶고 헤어지기 싫습니다. 그래서 어떤 남녀는 서로 바래다 준다고 왔다가 다시 가고 다시 오다 보니 자정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부터는 아무 헛간이나 오두막이라도 좋으니 함께 살고 싶어 못 견딥니다. 그 때는 결혼해야 할 때입니다. 결혼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서로가 배우자로 맞아들이어야 합니다. 그 때에 결혼관계, 부부관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남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거의 15년 이상이나 흉허물 없이 친구처럼 지내면서 어떠한 비밀도 서로 의논할 정도로 친했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좋아하면서도 결국 결혼하지 못하고 다른 여인, 다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가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하고 결혼하자고 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결혼관계는 서로가 신랑으로, 신부로 맞아들일 때만 성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간직해 왔던 나의 몸과 마음을 신랑, 신부에게 다 맡기므로 한 육체, 한 마음, 더 나가서는 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만 예수님을 보고 따르던 제자들은 오순절 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는 예수님은 언제나 밖에 계신 분이셨습니다. 어느 때는 멀리 떠나 계시고, 어느 때는 풍랑이는 바다 위에 제자들을 그냥 팽개치듯 놓아두실 때도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후에는 영원히 그들을 떠나신 주님처럼 보였습니다. 3년을 열심히 쫓아다닌 결과,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허무했습니다. 이제는 고향에도 고개를 들고 돌아갈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약속대로 오순절날 성령의 세례를 받고야 그들의 영혼과 마음, 그리고 육신 속에 예수님의 영이 임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이 그들 속에, 그들이 주님 속에 거하는 거룩한 연합체,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던져지든지, 핍박을 받고 광야에서 헤메이는 자가 되든지 주님과 함께 계신 것만으로 최고로 행복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들을 사로 잡음으로 그들을 그처럼 괴롭히던 죄와 사망의 법이 떠나감으로 세상의 것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이러한 기쁨과 평안을 체험하지 못한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그것은 아직도 에수님 밖에 계신 탓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품으로 들어와 예수님을 나의 신랑,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십시오. 그 때 영적 생명이 싹틉니다. 그러면 어느날부터 영적인 기쁨의 꽃, 영적인 열매를 맺게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단계로 거룩한 연합은 신랑 예수님을 닮아갈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경건의 연습 단계입니다. 처음 남녀가 결혼한 다음에는 세상 말로 앉으나 서나 깨가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단칸방이든, 반찬이 한가지이든, 그저 부부가 함께 사는 것만으로 최고의 행복과 기쁨이 있는 것같습니다. 그러한 감정이 일생 간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4-5년의 세월이 되어 가면서 신혼의 기쁨과 행복감은 점점 사라지고 왜인지 권태가 이끼처럼 끼게되고 서로의 결함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분홍빛처럼 아름답게만 보이던 것들이 안개처럼 걷히고 나니 살림살이, 요리, 성격, 습관의 차이 때문에 서로가 부딪히기 시작하는 느끼게 됩니다. 결혼 초기에는 부부싸움을 해도 곧 화해하지만 이 때는 부부싸움하면 상처도 오래가고 화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때가 젊은 부부들로서는 참으로 위기입니다. 그 때에 깨지는 부부가 많으므로 그 고비를 잘 넘겨야 합니다. 부부 싸움의 댜부분은 자기 이기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R. L 스투라우스 박사가 저술한 「사랑의 신비」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부부의 갈등은 자아가 들어 있다. 무조건 상대방의 찬성을 기대하다가 그렇게 안해 줄 때 서로 빈정대로 성난 말로 퍼붓는다.>고 했습니다. 이지연이라는 분이 쓴 「행복지수를 높인느 66가지 지혜」라는 책에서는 부부 싸움할 때 제일 조심할 말은 ‘능력 없는 남자’ ‘이혼하자.’ ‘집에서 놀면서 그것도 못해.’ ‘아무래도 우린 잘못 결혼한 것같애.’ ‘돈돈돈… 그놈의 돈 때문에’ ‘당신 집안은 왜 그 모양이야.’ ‘집에만 있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부부가 싸움할 때 사소한 문제로 다투는데 싸움이 커지는 이유는 거친 말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엡4:26 말씀대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라는 말씀과 잠 15:1 말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한 말씀들을 우리 부부들은 언제나 명심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부부 싸움은 백해 무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속에서 성장하는 부부들은 서로의 이기심이 점점 깨어져 갑니다. 그리고 서로가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랑은 신부의 좋은 점을 닮아가고 신부는 신랑의 좋은 점을 닮아가는 유익이 있습니다. 더 나가서는 습관이나 입맛, 취미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결혼하고서는 아내가 해주는 요리가 입에 맞지 않고 어머니 요리가 입맛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3년이 지난 후에 보니 오히려 어머니의 요리가 입에 맛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부는 서로 티거덕 태거덕 다투기도 하면서 자아는 깨어지고 세월만큼 점점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신랑을 모시고 사는 삶도 비슷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 때는 얼마나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지요. 찬송가 493장의 가사대로 <나 이제 주님의 새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주안에 감추인 새생명 얻으니 이전의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함께 살리라>는 내용대로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니까 그저 그 어디나 천국같습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그런 기쁨이 없어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내게 지워진 십자가 너무 무거워 짜증이 납니다. 요나처럼 도망치고 싶습니다. 탕자처럼 하나님의 율례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또한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주님에게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충성봉사하는 데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따지며 기도하기를 자주합니다. 어찌된 노릇입니까? 그 하늘의 기쁨과 평안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떠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느 때는 믿음이 충만하여 주님과 깊은 관계에 있다가, 어느 때는 주님과 거리가 멀어지는 과정이 반복되면 자아가 깨어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연단과정일 뿐입니다. 그것을 신앙적으로 말하면 성화(聖化) 혹은 성결의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열매는 하루 아침에 안 커집니다. 참배 나무 가지를 돌배나무에 접목했다고 해도 단번에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자아가 더 깨어져야 합니다. 때로 또 신앙적으로 넘어질 때라도 다시 일어나 탕자처럼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혹 죄를 범하는 때라도 다시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런 속에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깊어가는 것이요, 주님의 용서의 횟수가 많아가고 용서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우리는 더 주님을 닮아가게 될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넷째 단계로 마침내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한지 10년이 될 때는 곧잘 말다툼이 많아지고 성격차가 두드러지더니 15년 -20년이 넘어서면 상대방 표정만 보아도 좋고 나쁜 것을 알고 서로 참게되고 부딪히는 일을 피하게 됩니다. 사실, 제가 늘 농담 삼아 ‘부부 싸움도 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힘 없으면 부부 싸움도 하기 싫어진다.’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사실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부부 싸움하고 2-3일 말을 안해도 견딜 수 있지만, 이제는 귀찮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싸울 일이 생기면 서로 조금 언성을 높이다가 슬그머니 서로 피하게 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젊어서처럼 서로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을지라도 부부 사이에 서로가 안되었다는 감정이 생기면서 서로 편하게 해주려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환히 알므로 좋아하는 것을 해주려는 마음이 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40년, 50년 살아온 부부들을 보면 육체는 다 쇠해서 볼 품이 없으나 서로가 오누이처럼 닮아 있는 모습이 나름대로 어떤 세상을 초연한 아름다움이 진하게 전해오는 것을 느낍니다. 옳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연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실 때는 그저 사랑을 받기만 하고 그저 용서만 받기만 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헤서 항상 순종하지 못하고 반항하면서 무척 가슴을 아프게 해드리었으나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감싸주시고 덮어주시는 동안 성숙함으로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내 중심보다 그저 주님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그저 주님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저미어 옵니다. 그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드리고 싶고 주님이 인도하신다면 어디라도 따라가고 싶은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한나 W. 스미스 여사가 쓴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비결」이라는 책은 미국에서만도 한 때 300만부가 팔린 책인데 그 글 중에서 세 가지 거룩한 연합단계를 영어로 재미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 I and not Christ 번역하면 나요 그리스도 아니요. (2) I and Christ 번역하면 나요 그리스도요. (3)Christ and I 그리스도요 나요.>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먼저시오, 그 다음이 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룩한 연합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것처럼 주님도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개척자이며 선교사인 리빙스톤이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와 글래스고우대학에소 명예박사를 받게될 때나 너무나 쇠약헤 있는 것을 모든 사람은 발견했습니다. 아프리카의 특유의 열병으로 스무번이나 쓰러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제 리빙스톤이 고향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강단에서 인사말을 하면서 ‘나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염려하자 그는 말하기를 ‘여러분이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 나의 길동무로 원시림과 광야를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과연 주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룬 모습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여러분은 주님과 거룩한 연합을 이루시는 체험을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거룩한 하나님-거룩한 제물/ 레22:17-22
거룩한 하나님-거룩한 제물 레22:17-22 1. 야훼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구약 율법 중에서 정결법이 무척 발달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음식, 직업, 물건 등 하나 하나까지 정과 부정을 나누고 깨끗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이 너무 지나쳐 율법을 통한 본래의 의도를 왜곡하기는 했어도, 그 취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교인은 거룩한 백성(성민), 교회는 거룩한 장소(성전), 찬양은 거룩한 노래(성가) 라고 부릅니다. 세속적인 것보다 호화로워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연관된 것들이기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거룩해야 합니다.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배는 엄숙한 제사입니다. 신앙 생활의 핵심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원래 제사입니다. 죽은 신앙은 예배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일상 생활의 자세와 태도를 그대로 예배에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예배가 즐겁고 기다려지며, 예배의 진실한 자세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일상을 예배화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평일의 주일화, 일상의 예배화일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제사를 준비하면서 최대한의 정성과 거룩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과일 하나 생선 하나도 아무렇게나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반듯하고 온전한 것으로 드리고자 노력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교적 가치관과 생활 자세는 오늘 기독교가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처음 전래될 때는 유교 사회와 필연적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었기에 허례허식이라고 몰아붙였지만, 유교적 자세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엄격하고 정성된 형식 속에 진실한 내용을 담으려고 했다고 봅니다. 우리는 선조들이 제사를 드릴 때 지녔던 자세와 마음을 예배에서 회복해야 합니다. 3. 예배의 핵심은 제물입니다. 예배는 제물을 중심으로 엮어집니다. 옛날 예배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드리는 구원의 제사에서 거룩한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땅이 지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제물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물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 생활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고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제물은 좁은 의미에서는 헌금입니다. 4. 흠 없는 제물을 드리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시도록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강조합니다. 애써 드렸는데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면 아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카인은 가장 어리석고 가장 불행한 모델입니다. 우리는 흠 없는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진 제물을 함부로 대하다가 엘리 제사장 가문은 패망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물에 먼저 손을 댔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들은 전장에서 모두 전사했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목이 부러져 죽었고, 며느리는 해산하다가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생명을 잃었습니다. 두려운 사실입니다. 5. 제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십일조입니다. 우리는 지금 물질이 주인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을 결정하는 동기가 물질인 사회입니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따르려는 많은 사람들을 고민하게 했고, 실제로 그들의 발걸음을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묶어놓았습니다. 십일조는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 누구도 얼마를 냈는가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제대로 냈는가만 중요합니다. 아이들에게 십일조 신앙을 교육하는 것은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6. 십일조 신앙의 자세 1)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물을 드릴 수 있는 마음과 여건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십일조를 율법화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율법은 강제적이고, 의무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자식을 보살피는 것이 의무라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가 아니라, 사랑이기에 계산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도 의무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구원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3)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거짓으로 드리는 것은 불행합니다. 하나님을 속여서는 안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을 속이다가 부부가 변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흠 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허락하시고 주시는 그대로 감사하게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 적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명, 가정, 일터,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상, 이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업이나 잘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7. 목회자의 회개와 부탁 저는 요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헌금 설교를 잘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쑥스럽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을 한 사람씩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밀려오는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신앙적으로 더 성숙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하나님 앞에서 물질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자책을 합니다. 어리석은 이는 하나님 뜻에 온전히 따르지 않으면 어찌되는지 시험해 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 뜻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면 어찌 되는지를 시험해 봅니다. 마지막 부탁을 드립니다.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서 떼 부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현재의 구원과 은총에 대한 감사와 고백 그 자체입니다. 그 것에 대해 더 큰 축복을 주시고 말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둘째는 동전을 넣으면 바로 음료수가 튀어나오는 자판기 시대에, 십일조 드렸다고 바로 무언가가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도 버리기 바랍니다. 십일조 제물 후에 주시는 너무 집착하면 제물의 순수성이 훼손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순종하며 감사할 때, 주님은 우리의 계획과 생각은 다르겠지만, 우리의 삶과 가정과 일터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거친 환경의 창조적 극복 이야기/ 우물물아 솟아나라/ 민21:10-18
거친 환경의 창조적 극복 이야기/ 우물물아 솟아나라 민21:10-18 우리 인생살이는 거칠고 메마른 광야를 헤쳐가는 여정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풍요를 버리고 자유를 위하여 미지의 땅 가나안 복지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는 광야를 거쳐서야 당도할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여정이 광야를 거친다는 것은 고통스런 진리입니다. 애굽에 비하여 광야는 모든 것이 부족한 환경이었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먹고 마시는 문제가 손쉽게 해결되지 않는 곳입니다. 엄청난 숫자의 군중은 \"물\"의 결핍 때문에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물과 양식의 결핍으로 시달릴 때마다 군중들은 영도자 모세를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적인 말들을 토했습니다. 아주 빈번히 백성들은 애굽으로 되돌아가겠다고, 때로는 광야에서 차라리 죽고싶다고 푸념하며 하나님과 투쟁하였습니다. 이런 불평들과 반역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은 뿌리깊은 노예근성의 결과입니다. 그들은 물이 없는 환경을 보고 즉시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만 늘어놓았지, 그 환경을 믿음으로 돌파할 패기와 상상력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백성들과 38년간을 씨름하며 함께 뒹굴던 모세마저도 마음이 강퍅하여 졌습니다. 하나님의 무한 인내와 무한 자비를 믿지 못하고 므리바에서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민 20:1-13). 물이 없어 갈증을 느낄 때마다 언제나 자신에게 덤벼드는 백성들에게 극도로 화가 났습니다. 지도자의 권위와 위엄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명령(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을 불신하고 반석을 두 차례나 쳐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자제력 붕괴를 큰 죄로 보고 그에게 가나안 입성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므리바 물 사건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다룹니다. 본문에서는 아주 성숙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맛봅니다. 본문이 다루는 사건은 민수기의 전형적인 악순환(물/양식 결핍-백성 불평-모세 중보기도-하나님의 응답과 심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으로 물이 없는 광야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창조적으로 눈에 보이는 환경을 극복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불평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믿음과 거친 환경을 창조적으로 극복한 아름다운 지도력이 빛나며 이 지도력을 칭송하는 백성들의 노래 소리만 들립니다. 이스라엘은 오봇에서 브엘이라는 장소에 올 때까지 진을 치고 이동하는 가쁜 여정을 소화했습니다. 어떤 불평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지 브엘에 가면 물을 줄 테니까 참고 브엘까지 가자고 설득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바로 백성들의 지도자들과 귀인들이 자신들의 지팡이와 막대기(지도자의 지휘봉)를 갖고 광야땅을 파서 우물을 얻은 것입니다. 그 우물에서 풍성한 샘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날의 감격이 오늘날처럼 이런 노래로 전해져 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깨닫습니다. 첫째, 물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 안에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약속은 믿는 자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는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자를 향하여 부어집니다. 둘째, 불평하던 마음을 버리고 환경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메마른 광야를 향하여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서라도 땅을 파서 우물근원을 찾는 창조적 노력이 중요합니다. 셋째, 지도자의 헌신적 희생이 난국을 돌파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불평을 터뜨리게 만들만큼 열악한 광야의 표토 아래 하나님의 샘물이 흐르고 있음을 믿고 적극적으로 파 봅시다. 이 사순절에 광야의 표토같이 느껴지던 말씀 안에서 생수의 맥을 찾아 파들어 가십시다. 그리하여 광야 방황의 역사를 끝내고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정진하십시다. 다짐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삶이 광야를 방황하는 이스라엘의 여정과 같습니다. 자주 넘어지고 자주 자빠집니다. 그 동안 저희들은 거칠고 메마른 환경을 대할 때 불평과 원망만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순절 기간에는 물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의 우물을 파서 샘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우리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서라도 샘물을 파서 마시겠습니다. 저희들을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검을 주러 오신 예수/ 마10:34-39/ 사순절설교
검을 주러 오신 예수 마10:34-39 지금 우리는 연중 가장 좋은 계절을 살고 있습니다. 춘 3월은 옛부터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 환경에서 3월은 가장 소망적인 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력으로 볼 때도 이 3월은 가장 뜻이 있는 달입니다. 3월은 사순절과 수난절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이 3월이 아주 소중한 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과 수난절은 기독교에서는 그만큼 중요한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난도 받으셨고, 수모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조화가 깨진 세상으로 하여금 조화를 이루게 하셨고, 죄 많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닦아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주셨고,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는 치료와 자유와 기쁨을 주셨고, 죄와 무지와 가난과 억압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일대 혁신의 삶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르고 살던 사람들에게는 깨달음과 죄 사함과 변화의 삶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구세주라고 부르고, 구속주라고 부르고, 메시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거기에 깜짝 놀랄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주님은 검을 주고, 불화를 주고, 십자가를 주고, 싸우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로 검을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34절을 보면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이해 못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오셨다 해도 사람들이 예수 믿기가 어려운 세상인데 오히려 검을 주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검은 분명 칼이라는 말인데 주님께서 칼을 주려고 세상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칼이 무딘 칼이겠습니까? 그 칼은 예리하고 날카롭고, 도려 내고, 찔러 대신 날선 그런 칼일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 세상에 칼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여러분,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은 그런 대로 화평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모르고 살 때는 그런 대로 마음도 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예수께서 오신 후부터는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또 피 흘림과 고통과 고민들이 처처에서 나타났습니다. 그 첫 희생자가 마리아입니다.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이 처녀 마리아가 어느 날 갑자기 성령에 의해서 잉태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사건으로 인해 이 처녀가 얼마나 고된 곤욕을 치러 냅니까? 그 수모와 오해와 욕을 먹어 가며 아이를 낳기까지 그 고통, 고민, 이것이 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 시골 바닷가에서 조용히 고기나 잡아 먹고 살던 제자들, 어느 날 예수께서 오시더니 \\\"나를 따르라\\\" 해서 멋 모르고 따라 나선 후에 그들이 또 얼마나 곤욕을 치릅니까? 죽을 때도 곤히 죽습니까? 하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또 하나는 목이 잘려 죽고, 또 하나는 외딴 섬에 유배되어 쓸쓸히 죽어 갔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지 않았던들 이 사람들은 조용히 살다가 갔을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광장에 모여 있던 3천 명의 군중들에게 베드로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한결같이 가슴을 쥐어 뜯어 가며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울부짖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얼마나 예리한 칼 같은 말씀이 그들의 가슴을 후벼댔으면 \\\"우리가 어찌 할꼬\\\"하고 탄식했겠습니까? 그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를 모르고 살때는 그런 대로 마음 편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때는 죄가 뭔지, 천국이 뭔지, 심판이 뭔지 알고나 살았습니까? 모르면서 잠도 잘 잤고, 마음도 편하게 살았고, 할 짓을 다하고 마음 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주님을 알고 나서부터는 어떻습니까? 양심의 고통과 영적인 갈등과 죄책감들 때문에 마음들이 얼마나 아픕니까?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하고 절제하고 끊어 버리자니 그게 쉽게 끊어집니까? 거기서 오는 부담감, 갈등, 아쉬움, 고통이 얼마입니까? 확실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부터 이 세상에는 큰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검은 곪은 곳을 찌르는 검입니다. 썩는 곳을 도려내는 날카로운 검입니다. 무딘 양심을 사정없이 찔러 대는 검입니다. 끊어야 할 것을 끊도록 내려 치는 그런 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검을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불화를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35-36절을 보면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했습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는 자식과 부모 사이에 갈등이 많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갈등이 많은 세상인데 화합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더 불화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으면 불화하던 가정도 화합이 되어야 합니다. 싸우던 가정은 화합을 하여야 하고, 울던 가정은 웃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조용하던 가정에 불화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 때문에 불화한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용하게 살던 집에 예수를 잘 믿는 며느리가 시집을 왔습니다. 그 집에 어떤 현상이 벌어졌겠습니까? 믿지 않는 남편이 이해를 해주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이해를 안해 줍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니 그 가정이 얼마나 불화하겠습니까? 그 가정이 예수를 모를 때는 그 문제에 관한 한 화평했습니다. 그 가정에 예수를 믿는 며느리가 들오오기 전까지는 무지하게 살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화평을 유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조용하던 가정에 예수가 들어오면서부터 화평이 깨지고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불화를 주러 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가정은 그 며느기라 모든 몰이해와 찌든 관습과 무지를 깨우치고 그 가정을 복음화시키기까지는 불화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한 가정이 맏아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들이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는 제사 때만 되면 불화가 일어납니다. 집사이다 보니 제상 차려 놓고 지방을 붙여 놓고 거기에 절하며 제사를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추도 예배를 드리자니 완고한 어른들이 이해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어정쩡하게 지냅니다. 그러다가 \\\"이럴 수는 없다\\\"하고 우겨서 추도 예배를 드립니다. 그랬더니 가깝던 친척들이 한 사람도 참석을 하지 않습니다. 가깝던 친척들이 자꾸만 멀어져 갑니다. 그리고 뒤에서 조상도 모르는 자식이라고 욕을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외톨이가 됩니다. 그 가정에 예수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친척들이 모여서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뜻을 알고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에 웃으면서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그 집안에 들어오면서부터 불화가 시작되었습ㄴ니다. 그래서 어떤 집은 제사 지내지 않는 자식은 자식도 아니라고 해서 족보에서 빼 버린 집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다고 구타를 당하고, 수모를 당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도 있습니다. 지금 한창 이 과정을 거치고 있는 가정이 있고, 이 단계를 이미 넘긴 가정도 있고, 또 앞으로 이 단계를 넘여야 할 가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이 단계를 극복해야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십자가를 지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십자가냐 하면 세 가지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라는 맹목적 순종을 부정해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이 말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고, 받들고, 효도하라고 누차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욕하고 경히 여기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은 부모가 무지하고 완고해서 자녀들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을 한사코 막을 때 할 수 없이 이 길을 포기하고 마는 그런 용기 없는 사람은 내게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에 따라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날 때는 납득시키고, 이해시키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맹목적 순종의 부정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마10:37)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맨목적 사랑을 부정하는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부모는 모두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는 그 사랑이 지나쳐서 자식이 우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신앙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까지 생겨 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이들을 키우느라고 신앙 생활을 못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을 학교에나 들어가게 해 놓고 나서 신앙 생활을 하자 하고 됩니까? 그때는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학원으로, 학교로 열심히 뛰어 다니는 일로 바쁩니다. 그때는 또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시집이나 보내 놓고 시작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쉽니다. 그러면 또 신앙 생활 할 이유가 주어집니까? 이번에는 손자 손녀들을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고, 그 아이들이 또 커서 학교를 갈 때가 되면 이번에는 또 집을 지켜 주느라고 바쁩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이것이 아니다 싶어 용기를 내서 신앙 생활을 다시 하자해서 시작해 보지만 이제는 다 늙고, 힘이 없어지고, 흔들리는 무릎으로 무슨 일을 할 것입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종말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 때 모두 후회하고, 당황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제는 할 수 없이 죽을 시간은 다가왔는데 갈 준비는 되어 있지 않고, 가기는 가야 하겠고, 얼마나 당황이 될 것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용기 없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일제 때 신사 참배한 것을 놓고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때 왜 참배를 했는가 하면 처자식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처자식이 염려가 되어서 할 수 없이 신사 참배를 하고 나서 후에 그때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자식이 우상입니다. 처자식 때문에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면 이렇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하면 이렇게 맹목적인 사랑도 부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그런 십자가가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희생의 십자가이고, 자기 부정의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부정해야 할 때,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여야 할 때 희생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 주저주저 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진정 우리들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생활은 그래서 용기 없는 사람은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를 위해서 나머지는 모두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를 위해서 나머지를 과감히 버리면 버릴 때는 아쉽고, 아깝고 미련이 남아 있지만 그 후에는 버린 부분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삶은 버리는 생활입니다. 버려야 얻어지고, 죽어야 살아나는 생활입니다. 이를테면 십자가의 삶은 버려야 비로소 얻어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검을 주러 오셨습니다. 불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우러 오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의미를 잘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들이 묵상해야 할 일입니다.
검을 주러 오신 예수/ 마10:34-39/ 사순절설교
검을 주러 오신 예수 마10:34-39 지금 우리는 연중 가장 좋은 계절을 살고 있습니다. 춘 3월은 옛부터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 환경에서 3월은 가장 소망적인 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력으로 볼 때도 이 3월은 가장 뜻이 있는 달입니다. 3월은 사순절과 수난절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이 3월이 아주 소중한 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과 수난절은 기독교에서는 그만큼 중요한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난도 받으셨고, 수모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조화가 깨진 세상으로 하여금 조화를 이루게 하셨고, 죄 많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닦아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주셨고,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는 치료와 자유와 기쁨을 주셨고, 죄와 무지와 가난과 억압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일대 혁신의 삶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르고 살던 사람들에게는 깨달음과 죄 사함과 변화의 삶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구세주라고 부르고, 구속주라고 부르고, 메시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거기에 깜짝 놀랄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주님은 검을 주고, 불화를 주고, 십자가를 주고, 싸우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로 검을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34절을 보면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이해 못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오셨다 해도 사람들이 예수 믿기가 어려운 세상인데 오히려 검을 주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검은 분명 칼이라는 말인데 주님께서 칼을 주려고 세상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칼이 무딘 칼이겠습니까? 그 칼은 예리하고 날카롭고, 도려 내고, 찔러 대신 날선 그런 칼일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 세상에 칼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여러분,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은 그런 대로 화평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모르고 살 때는 그런 대로 마음도 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예수께서 오신 후부터는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또 피 흘림과 고통과 고민들이 처처에서 나타났습니다. 그 첫 희생자가 마리아입니다.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이 처녀 마리아가 어느 날 갑자기 성령에 의해서 잉태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사건으로 인해 이 처녀가 얼마나 고된 곤욕을 치러 냅니까? 그 수모와 오해와 욕을 먹어 가며 아이를 낳기까지 그 고통, 고민, 이것이 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 시골 바닷가에서 조용히 고기나 잡아 먹고 살던 제자들, 어느 날 예수께서 오시더니 “나를 따르라” 해서 멋 모르고 따라 나선 후에 그들이 또 얼마나 곤욕을 치릅니까? 죽을 때도 곤히 죽습니까? 하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또 하나는 목이 잘려 죽고, 또 하나는 외딴 섬에 유배되어 쓸쓸히 죽어 갔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지 않았던들 이 사람들은 조용히 살다가 갔을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광장에 모여 있던 3천 명의 군중들에게 베드로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한결같이 가슴을 쥐어 뜯어 가며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울부짖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얼마나 예리한 칼 같은 말씀이 그들의 가슴을 후벼댔으면 “우리가 어찌 할꼬”하고 탄식했겠습니까? 그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를 모르고 살때는 그런 대로 마음 편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때는 죄가 뭔지, 천국이 뭔지, 심판이 뭔지 알고나 살았습니까? 모르면서 잠도 잘 잤고, 마음도 편하게 살았고, 할 짓을 다하고 마음 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주님을 알고 나서부터는 어떻습니까? 양심의 고통과 영적인 갈등과 죄책감들 때문에 마음들이 얼마나 아픕니까?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하고 절제하고 끊어 버리자니 그게 쉽게 끊어집니까? 거기서 오는 부담감, 갈등, 아쉬움, 고통이 얼마입니까? 확실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부터 이 세상에는 큰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검은 곪은 곳을 찌르는 검입니다. 썩는 곳을 도려내는 날카로운 검입니다. 무딘 양심을 사정없이 찔러 대는 검입니다. 끊어야 할 것을 끊도록 내려 치는 그런 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검을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불화를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35-36절을 보면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했습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는 자식과 부모 사이에 갈등이 많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갈등이 많은 세상인데 화합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더 불화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으면 불화하던 가정도 화합이 되어야 합니다. 싸우던 가정은 화합을 하여야 하고, 울던 가정은 웃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조용하던 가정에 불화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 때문에 불화한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용하게 살던 집에 예수를 잘 믿는 며느리가 시집을 왔습니다. 그 집에 어떤 현상이 벌어졌겠습니까? 믿지 않는 남편이 이해를 해주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이해를 안해 줍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니 그 가정이 얼마나 불화하겠습니까? 그 가정이 예수를 모를 때는 그 문제에 관한 한 화평했습니다. 그 가정에 예수를 믿는 며느리가 들오오기 전까지는 무지하게 살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화평을 유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조용하던 가정에 예수가 들어오면서부터 화평이 깨지고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불화를 주러 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가정은 그 며느기라 모든 몰이해와 찌든 관습과 무지를 깨우치고 그 가정을 복음화시키기까지는 불화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한 가정이 맏아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들이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는 제사 때만 되면 불화가 일어납니다. 집사이다 보니 제상 차려 놓고 지방을 붙여 놓고 거기에 절하며 제사를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추도 예배를 드리자니 완고한 어른들이 이해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어정쩡하게 지냅니다. 그러다가 “이럴 수는 없다”하고 우겨서 추도 예배를 드립니다. 그랬더니 가깝던 친척들이 한 사람도 참석을 하지 않습니다. 가깝던 친척들이 자꾸만 멀어져 갑니다. 그리고 뒤에서 조상도 모르는 자식이라고 욕을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외톨이가 됩니다. 그 가정에 예수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친척들이 모여서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뜻을 알고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에 웃으면서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그 집안에 들어오면서부터 불화가 시작되었습ㄴ니다. 그래서 어떤 집은 제사 지내지 않는 자식은 자식도 아니라고 해서 족보에서 빼 버린 집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다고 구타를 당하고, 수모를 당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도 있습니다. 지금 한창 이 과정을 거치고 있는 가정이 있고, 이 단계를 이미 넘긴 가정도 있고, 또 앞으로 이 단계를 넘여야 할 가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이 단계를 극복해야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십자가를 지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십자가냐 하면 세 가지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라는 맹목적 순종을 부정해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이 말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고, 받들고, 효도하라고 누차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욕하고 경히 여기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은 부모가 무지하고 완고해서 자녀들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을 한사코 막을 때 할 수 없이 이 길을 포기하고 마는 그런 용기 없는 사람은 내게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에 따라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날 때는 납득시키고, 이해시키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맹목적 순종의 부정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마10:37)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맨목적 사랑을 부정하는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부모는 모두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는 그 사랑이 지나쳐서 자식이 우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신앙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까지 생겨 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이들을 키우느라고 신앙 생활을 못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을 학교에나 들어가게 해 놓고 나서 신앙 생활을 하자 하고 됩니까? 그때는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학원으로, 학교로 열심히 뛰어 다니는 일로 바쁩니다. 그때는 또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시집이나 보내 놓고 시작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쉽니다. 그러면 또 신앙 생활 할 이유가 주어집니까? 이번에는 손자 손녀들을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고, 그 아이들이 또 커서 학교를 갈 때가 되면 이번에는 또 집을 지켜 주느라고 바쁩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이것이 아니다 싶어 용기를 내서 신앙 생활을 다시 하자해서 시작해 보지만 이제는 다 늙고, 힘이 없어지고, 흔들리는 무릎으로 무슨 일을 할 것입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종말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 때 모두 후회하고, 당황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제는 할 수 없이 죽을 시간은 다가왔는데 갈 준비는 되어 있지 않고, 가기는 가야 하겠고, 얼마나 당황이 될 것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용기 없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일제 때 신사 참배한 것을 놓고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때 왜 참배를 했는가 하면 처자식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처자식이 염려가 되어서 할 수 없이 신사 참배를 하고 나서 후에 그때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자식이 우상입니다. 처자식 때문에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면 이렇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하면 이렇게 맹목적인 사랑도 부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그런 십자가가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희생의 십자가이고, 자기 부정의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부정해야 할 때,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여야 할 때 희생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 주저주저 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진정 우리들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생활은 그래서 용기 없는 사람은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를 위해서 나머지는 모두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를 위해서 나머지를 과감히 버리면 버릴 때는 아쉽고, 아깝고 미련이 남아 있지만 그 후에는 버린 부분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삶은 버리는 생활입니다. 버려야 얻어지고, 죽어야 살아나는 생활입니다. 이를테면 십자가의 삶은 버려야 비로소 얻어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검을 주러 오셨습니다. 불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우러 오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의미를 잘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들이 묵상해야 할 일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막14:32-36/ 사순절설교
겟세마네의 기도 막14:32-36 사순절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며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와 고난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예루살렘 진입구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은 혼잡한 도심을 떠나 하나님과 대화하기에 아주 좋은 한적한 동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땅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어찌나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에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기도를 그렇게 간절히 하셨을까요? 그 내용이 3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잔은 물론 고난의 잔이며 십자가의 잔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주님이기에 다가오는 고통 앞에서 두려워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혹 가능하다면 그 고난의 잔을 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혹시 이 기도 때문에 예수님께 실망하는 교우님이 계시지는 않는지요? “예수님께서 좀 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죽음을 앞에 두고 초연한 모습을 보여준 위인들이 역사에는 수없이 많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앞두고 제자들이 피신하라고 간청했지만 “악법도 법”이라고 하면서 의연하게 독배를 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신 우리 예수님이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빠(아바)”라고 부르시면서 죽지 않게 해달라고 이렇게 매달리고 계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한없이 연약한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처럼 연약하신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보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보다, 지금 이 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예수님도 이처럼 연약하실 때가 있었구나. 그러니 내가 연약할 때 나를 얼마나 잘 이해해 주실까?”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용감하고 굳세기만 한 성인군자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이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아니 나약하기까지 한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네요. 그래서 저는 더욱 더 예수님이 좋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27년 전인 1979년 봄, 그 때는 제가 대학 졸업반이었습니다. 학부를 마치면 신학대학원에 갈 것인가, 저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대로 경영대학원에 갈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며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느 한국의 기독교인처럼 저 역시 보수적인 신앙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평생 복음을 전하며 사는 삶보다 더 가치있는 삶은 없어보였습니다. 당시에 저는 버스를 타면 버스 안에서, 강의시간이 되면 교수님이 들어오시기 전의 조각 시간을 이용해서 미친 듯이 전도에 몰두하던 열렬신자였습니다. 그러나 평신도로서 복음을 전하며 사는 삶과, 목사가 되어 하느님의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과는 매우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목사가 되면 철저하게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하다가 이 말씀을 만났습니다. 절망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시는 겟세마네의 예수님, 그 예수님이 저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용기를 주었는지요. “예수님도 이렇게 약하실 때가 있었구나. 그렇다면, 내가 약해질 때도, 내가 좀 잘못을 해도, 크게 야단치시지 않겠구나. 오히려 더 잘 이해하시고, 더 잘 도와주시겠구나.” 그 때 저에게, 목회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신 분은 물 위를 걷는 기적의 예수님이 아니라, 수천 명을 먹이고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위대한 예수님이 아니라, 심히 고민하여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겟세마네의 예수님이었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성정을 갖고 계신 예수님, 그래서 연약한 우리들을 너무도 잘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살다보면, 힘들 때도 있겠지요. 그 때, 예수님처럼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께 투정도 부려보세요. 제가 만난 하나님은, 유창한 기도보다, 담대한 믿음의 기도보다, 비장한 헌신의 기도보다, 솔직한 기도를 좋아하는 분이었습니다. 다시 겟세마네로 돌아가 보지요. 지금 우리가 겟세마네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한없이 연약한 예수님,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거기서 멈추지는 않으셨습니다. 고민과 좌절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날이 밝으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할 처절한 상황이었지만,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지만, 심히 고통스럽고 겁도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의탁하시는 주님의 이 겟세마네 기도는, 진정 믿음의 기도가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 마음 깊이 새겨주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믿어서 고난 없애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그래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일까요?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 그러나 고난에 쓰러지지 않고 고난을 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고결한 삶에 도달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두 개의 선택 사이에서 갈등은 하셨습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고난을 피해갈 것인가? 갈등하셨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사순절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요?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겠다며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쇠사슬로 묶고 못침대에 누워 보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처절한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과연 그런 이벤트성 체험을 원하실까요?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저에게도 주님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와 부활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그 십자가와 부활 신앙이 언제부터인가 저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저는 ‘교리적 대속신앙’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리적 대속신앙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주님의 부활도 없고, 우리들의 부활도 없으며, 허깨비에 의해 조종되는 무서운 갈등과 폭력이 우리 기독교와 지구마을의 미래를 덮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는, 온갖 이기심과 탐욕에 젖어 살면서도, 온갖 못된 짓은 도맡아 하면서도,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고 믿기만 하면 저절로 구원이 보장된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그런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살아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아도,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지 않았다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믿는 그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대속신앙은 이제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교리적 대속신앙은, 그렇게 믿는 사람을 교리의 노예로 만들어, 자주적으로 살아갈 능력을 박탈할 뿐 아니라, 다양한 신념과 문화 속에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과 문화를 공격하고 파괴하기 때문에, 이제는 극복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과 십자가가 의미가 있는 이유는 고난과 십자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길을 선택하신데 있습니다.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러워도 하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릴 수 없다는 그 ‘선택’ 말입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야 했지만, 정복자 로마의 정치체계에도 순응해야 했지만, 주님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잠시는 살아도 결국은 영원히 죽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죽음으로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이 저를 포함하여 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의 그 선택이 영혼의 눈이 먼 자들의 눈을 뜨게 했고, 정신적 영적으로 장애를 겪으며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 자유와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저는 주님의 대속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회피하셨다면, 세상에 자유와 생명이 살아 숨쉬는 부활의 세계가 열리지 못했을텐데,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지셨기에, 주님의 말씀과 삶이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며 부활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아름답고 찬란한 삶과 말씀은 다시 살아나 세상을 뒤바꾸는 힘이 되고 생명이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사건은 그 때 거기에서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피와 땀을 흘리신 그 겟세마네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 여기, 우리 앞에 다가와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2000년전, 너의 주님은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 끝에 하늘 아버지의 뜻을 선택했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하려느냐?”
경건 연습 더하기/ 딤전4:6-9
경건 연습 더하기 딤전4:6-9 할렐루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안에서 더하기 할 수 있다. 주안에서 빼기 할 수 있다. 주안에서 나누기 할 수 있다. 주안에서 곱하기 할 수 있다. 어느 주일 아침 어떤 꼬마소년이 늦게 일어나 아무래도 교회에 늦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꼬마소년은 허둥지둥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집을 나와 교회로 가면서 소년은 계속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제발 늦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발 늦지 않게 해주세요.” 교회에 겨우 도착한 소년은 계단을 뛰어 올라가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한숨을 크게 쉬며 하늘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저를 미실 필요는 없잖아요!” 어떤 신부님이 어두운 밤에 뉴욕 맨해튼의 거리를 걸어가다가 칼을 든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라고 위협하는데 신부님은 돈도 없었고 그날 따라 시계도 차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주머니에 있는 담뱃갑을 꺼내서 이거라도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강도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강도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이 \"신부님은 사순절에도 담배를 피우십니까? 나는 사순절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하면서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순절이라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강도짓은 직업의식을 가지고 충실하게 하고 있는 강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짓된 경건, 왜곡된 경건을 가르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엄숙한 것을 경건함으로 착각하고 예배 시간에 부동자세로 눈동자도 굴리지 않는 것을 경건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식에 따라 화석화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취향이겠지만 성경적인 경건은 아닙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으로 가득하여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한 신앙생활은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통로가 되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나타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성경에서 경건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말씀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약1:26-27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딤후2:16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히12:28절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시32:6절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딤전2:1-2절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 여러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경건이란 말과 행동을 항상 반듯하게 하며 살고 또 어려운 사람들을 잘 도우며 살 뿐 아니라 무엇보다 예배와 기도에 힘쓰는 것을 가리켜 경건이라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탈리아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등장합니다. 누가는 이 고넬료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행10:2절에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이 말씀대로 본다면 고넬료의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기 때문이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경건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경건을 연습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 날마다 연습하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날마다 연습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항상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이란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연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선수가 연습을 몰라 경기에 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습을 말로만 하였기 때문에 패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몸과 말에 저절로 될 수 있는 경지까지 도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반복해야 합니다. 신앙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만 경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건연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리챠드 포스터라는 영성신학자며 목사님이 제시하는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세 가지입니다. 내적연습, 외적연습, 집단연습입니다. 그 것을 토대로 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경건에 이르는 내적 연습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내적 연습에는 묵상, 기도, 금식, 성경공부 이렇게 4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 째는 묵상입니다. 이 묵상이란 경건에 이르는 중요한 행위 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사실 경건에 이르는 문과 같은 것으로서 아주 고전적인 연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고전적이라는 말은 오래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도 창세기부터 등장합니다. 창24:63절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 시1:1-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63:6절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시119:78절 ‘교만한 자가 무고히 나를 엎드러뜨렸으니 저희로 수치를 당케하소서 나는 주의 법도를 묵상 하리이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묵상을 통하여 경건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묵상이란 어떤 무엇을 위해 생각에 잠기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대개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묵상이라는 방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십자가에 고난당하시는 예수님과 말씀을 떠올려야 합니다. 이러한 묵상 연습을 통해 우리는 경건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대하여서는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 없지만 경건을 유지하기 위한 기도가 아닌 복을 달라는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경건을 위한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바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복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경건을 유지하기 위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금식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도 못지않게 중요한 방법이 금식에 대한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을 받은 모세가 금식하였고, 다윗 왕, 선지자 엘리야, 왕후 에스더, 환상을 본 다니엘, 여선지 안나, 사도 바울, 그리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도 금식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다 금식을 하면서 경건의 삶을 영위해 갔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에도 보면 종교개혁자 죤 칼빈, 죤 낙스, 요한 웨슬레, 죠나단 에드워드 등 많은 분들이 금식을 통하여 경건을 유지했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네 번째는 성경공부입니다. 딤후3:16-17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완전히 회복하는데 성경을 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6:6-9절에 보면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 하였습니다. 시119: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알고 말씀을 배우기에 열심내고 그리고 경건유지 하기 위해 내적 연습에 충실하기 바랍니다. 이제 큰 두 번 째로 경건에 이르는 외적 연습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리차드 포스트 목사님은 이 외적 연습에서 홀로 있기와 봉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첫 번 째 외적연습은 홀로 있기입니다. 이 홀로 있는 연습은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 온 경건 연습의 한 부분으로 묵상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묵상과 홀로 있기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묵상은 내적인 것을 세우는 것이고 홀로 있기는 외적인 것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 홀로 있기가 경건에 좋은 것은 홀로 있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지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홀로 있는 것을 무서워 꼭 누군가 함께 해야 한다든지 어떤 다른 것에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라디오를 켜 둔다든지 아니면 집에 들어오자 마자 텔레비전을 켜는 방법입니다. 그만큼 홀로 있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이 부분을 놓칠 수 없는데 예수님은 자주 그렇게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홀로 있기를 하셨습니다. 이 시간 철저하게 하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것이 홀로서기입니다. 홀로있으면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고 더욱더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게 됩니다. 두 번 째 외적연습은 봉사입니다. 봉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봉사를 통해 경건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만일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경건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며 이 땅은 이렇게 삭막하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봉사는 생색내는 봉사와 알아주기 바라는 봉사만 있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봉사 그런 것은 이 땅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아무도 칭찬하는 이 없어도 기쁘고 즐겁게 봉사할 수 있는 것 하나님만 알아주는 진정한 봉사를 통하여 경건을 유지하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이제 마지막 큰 세 번째로 경건에 이르는 집단 연습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경건에 이르는 집단 연습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경건에 이르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홀로 드릴 수도 있고 집단으로 드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리도록 계속 반복 연습해 나아가는 것이 경건의 자세이며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에 가서는 경건에 이르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에도 핸드폰을 켜 놓고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는 사람, 쪽지에 메모해서 이리 저리 돌리는 사람, 이런 저런 걱정에 도저히 예배에 집중하지 않고 있는 사람, 사실 이러한 사람들은 앞으로 예배를 좀 더 귀히 여겨야 합니다. 요4: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우리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려면 먼저 예배에 임하는 나의 마음과 몸가짐이 달라져야 하며 그 다음엔 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집중하는 그러한 자세가 나와야 하는데 이것은 부단한 연습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매주의 예배는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경건을 유지하는 중요한 방법임을 알고 참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경건 연습 더하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경축하기에 앞서/ 벧전2:12
경축하기에 앞서 벧전2:12 경축해야 할 축일이 크면 클수록 이를 경축하는 사람도 그만큼 잘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 축제의 날에 더 화려하게 차려입고 마음의 기쁨을 육체의 옷으로 표시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며 종교적인 태도로 여겨집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의를 더 기울여 교회 자체를 화려한 장식으로 꾸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살아 있는 진짜 성전인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지혜롭게 자신을 단장하고, 자기에게 구원을 주는 성례를 경축하기에 앞서 어떤 죄의 때가 자기를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이중적인 마음의 주름이 자기를 흉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사람의 내면이 악습들로 오염되어 더렵혀져 있다면, 아무리 외적으로 잘 꾸며 말끔한 모습을 보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현재 여성 단체의 대략적인 추산으로는, 전국에 걸쳐 ‘향락업소’는 30만 곳이 넘고, 여기서 일하는 여성은 120만명 가량으로 15-29세 여성 전체 인구의 20%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2000년 10월 13일, 한겨레신문 칼럼, 김금수 ‘여자답게 살고 싶어라’에서] 저의 표현으로 ‘사회 비평계의 중견 테러리스트’인 홍세화 씨는 위의 기사를 읽고, 한국 사회를 모파상의 소설에 빗대어 ‘비곗덩어리’ 사회라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 전북 군산 대명동 ‘쉬파리골목’ 화재 현장에서 다섯 명의 매춘 여성이 감금 상태에서 도피하지 못하고 숨졌다는 보도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던 때에 씌여진 글이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더하였습니다. 젊은 여성 다섯명 중 한명은 매춘을 하고 있는 사회. 대한민국의 밤 풍경은 향락없소의 불 빛과 교회의 십자가만이 지키고 있다고 했나요. 전혀 어울리지 않아야 할 이 두 불빛이 우리 사회에서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읽혀지고 있는 것은 어처구니 없이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수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이루어왔던 유럽의 그것보다도 더 화려한 맘모스 교회들이 수도권에 집중해 있음에도, 이처럼 외마디 소리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한 줄의 복음도 아니었습니다. 간혹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몇 몇 훌륭한 성직자나 교회를 볼 때면 저자신이 부끄럽기도하면서 유난스런 자극을 받게되는 것은, 그 프로그램이 마치 “(못믿겠지만) 그래도 아직 이런 성직자가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본연의 모습은 없고 외양만 찬란-휘청이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빠스카와 성탄과 같은 기쁨의 날을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세상 속 저 아래 사람들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인 나의 웃음과 화려함에 가려진 것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해야겠습니다. 大 레오의 설교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읽혀집니다. “얼굴에도 빛이 있어야지만 마음은 더구나도 빛이 나야한다”는 함석헌 선생 의 가르침처럼,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닦고創業 그것을 지키는데守成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얼굴에 지는 주름이걸랑 인생의 경륜으로 기쁘게 받아두고, 특별히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 마음에 진 주름을 펴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겠습니다. ■■■■ 그리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실을 단정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하던 그들도 여러분의 아름다운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그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 받은 예수의 모형 요셉/ 창39:20-23/ 사순절네번째주일설교
고난 받은 예수의 모형 요셉 창39:20-23 오늘은 우리주님 고난 당하심을 묵상하는 교회력으로 사순절 네 번째 주간입니다. 우리 나라 경제 상태가 나아지고 있다고 하나 실직 문제는 작년보다 금년이 더 심각해지고 물가는 오르고 세 부담은 늘어가는데 수입은 줄어들어 고통이 심해지는 때에, 우리는 지금 사순절 절기 중에 주님을 바라보며 모든 고난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제 11자 새벽기도 학교를 시작한지 한 주간이 지났는데 매일 새벽에 이 성전을 가득 메워 간절히 기도하는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모든 고난을 이기시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지금 창세기를 주일마다 강해하고 있는데 사순절 기간이니 만큼 고난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어서 창세기 안에서 장을 뛰어넘어 창세기 39장에서 요셉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주님의 고난을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의 배경은 우리가 너무 잘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의 족장 야곱의 12아들가운데 11번째 아들입니다. 어려서 부터 요셉은 하나님은 사랑하고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영특하여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꿈을 잘 꾸어서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꿈 내용이 너무 거창했습니다. 하루는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데 요셉에게 모두 절하더라 했고, 또 하루는 들에서 형제들이 곡식의 단을 묶었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이 요셉의 단에게 절하더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위에는 10명의형이 있었고, 아우는 베냐민 하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건방진 꿈이나 꾸고 아버지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요셉을 미워하면서 죽이려고 공모했습니다. 형들이 양 때를 치는 세겜과 도난에 이르렀을 때 동생 요셉을 잡아 죽이려 하다가 죽이지는 않고 물 없는 깊은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이스마엘들중 한사람에게 팔았더니 그가 요셉을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어 주인이 모든 재산관리를 요셉에게 맡길 만큼 되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였으나 거절하니, 그 여인이 분하여 요셉을 무고하여 감옥에 넣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되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에 던져 졌으나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요셉은 그 이후 바로왕의 꿈을 해몽하여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생애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틀을 발견하게 되고,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대한 예표를 볼 수가 있습니다. 1. 요셉은 터무니없는 꿈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요셉의 꿈을 그가 가진 이상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요셉은 자신이 이상을 소유했다기보다 하나님이 꿈을 주셨습니다. 그런 꿈을 가지려한 것이 없으나 하나님이 정말 이상한 꿈, 터무니없는 꿈을 주신 것입니다. 하도 꿈이 기이하고 큰 꿈이기 때문에 형제들에게 말했더니 그것이 미움을 사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꿈은 자기가 평소에 가졌던 생각도 아니고 잠재의식도 아닙니다. 그러치 않아도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밉던 터에 그의 꿈 이야기는 형들의 가슴에 증오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멋모르고 형들에게 갔다가 고난의 웅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그 구덩이 속에서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옷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요셉에게 잘못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사랑 받은 것이 그의 죄는 압니다. 꿈을 꾼 것도 그의 죄는 아닙니다. 그는 죄 지은 일없이 미움을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요셉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 형편을 거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을 다 했습니다. 구덩이에 던져 졌을 때에도 낙심치 않았습니다. 전후좌우가 꽉막힌 구덩이지만 하늘을 향해서만 뚫려 있었습니다. 요셉이 무엇을 했겠습니까? 하나님께 위를 향하여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은 까닭은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입니다. 요셉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꿈을 주심은 내가 세상에서 반드시 할 일이 있고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일을 하기까지 나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라고 확실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죄 없이 고난 당하신 것과 닮은 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과 온 인류를 구원할 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그 큰 사명이 주어진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사역을 수행하시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라고만 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예수님은 좋은 분이고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가 없었으나 그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 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큰 환상이라고 보았고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하는 범죄로 몰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아짜피 고통의 길입니다. 인생이 70을 살고 강건하면 80이라도 알고 보면 수고와 고생할 바에 꿈 때문에 사명 때문에 고생하시기 바랍니다. 옛날이나 이제나 하나님 사랑을 받는 사람, 예수님을 만나서 믿음으로 일생을 사는 사람은 요셉처럼 터무니없는 꿈을 가진 꿈쟁이가 됩니다. 그리고 그 꿈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자기 사명 때문에 어려움을 당해도 낙심치 않고 전진하여 끝내는 승리를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 여류작가 미우라야야꼬라는 분이 있습니다. 1963년도에 빙점이라는 소설을 써서 전 일본뿐 아니라 우리 나라의 돌릴 작가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일흔일곱살이 되었는데 이분을 보기 위해서 세계의 여러 사람들이 그가 살고 있는 훗가이도에 그가 살고있는 교회에 찾아옵니다. 이분은 13년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있었습니다. 폐병에 걸렸고 그 후 척추 카레이스로 온몸을 기부스로 감고 누어있었습니다. 꽃 다운 23살에 누어서 13년만에 일어나서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병상에서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미우라 아야건의 인생이 초라한 존재가 아니고 가치 있는 별이고 볏단임을 알게 하시었기 때문입니다. 누워있으면서 쪽 편지를 써서 전도를 했습니다. 편지를 통해서 그의 문학적 재질이 훈련되었고, 드디어 병상에서 일어났으며 신앙으로 격려해 주던 이우라씨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의 사명 때문에 당신이 이루신 구원사업을 우리에게 꿈으로 주시고 우리를 통해 그일을 완성코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를 영접하는 자 또한 엉뚱한 꿈쟁이가 됩니다. 어차피 인생은 고난을 받는 존재입니다. 고난을 받을 바에야 거룩한 꿈과 사명으로 고난받는 성도들이 도시기를 바랍니다. 2. 요셉은 유혹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오늘본문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거절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은 자리이고 요셉은 용모가 준수한 젊은이입니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 출세욕에 눈이 가리우면 그 유혹을 뿌리 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큰 사명 큰 꿈을 가신 사람이 눈앞의 관능적 욕구와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의 조부인 이삭과 그의 부친 야곱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가 사냥을 갔다와서 시장한 때에 야곱이 만든 팥죽 냄새의 유혹에 빠져 장자의 축복을 팔아버린 사실을 들었습니다 눈앞의 작은 욕망을 위해서 영원하고 큰 꿈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그는 유혹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들어갔지만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유대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이때에 사탄은 세 번이나 유혹했습니다. 타협하면 십자가를 지지 않고 쉽게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했으나 예수님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직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위해 달려 갔으며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승리의 선언을 하신 후에 부활 승전하여 지금 영광의 보좌에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곤고 할 때 유혹을 받게 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듯이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듯이 단호히 거절하시기 바랍니다. 거절함으로 감옥에 들어갔으나 요셉은 그 감옥에서 벗어나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사탕의 유혹을 향하여 \\\"사탄아 물러 가라\\\"거절하심으로 주 예수의 뒤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비록 감옥에 갔으나 여호와께서 형통게 하시었던 것입니다. 3. 요셉의 고난은 애굽의 흉년을 구제했습니다. 요셉이 고난 당함으로 왕의 신하들이 죄짓고 갇히는 감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애굽의 정치와 경제를 배우게 되고 끝내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총리대신이 되어 적절한 정책을 펴서 애 굽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오늘날 전 세계그리스도인들의 주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죄 없이 고난 당하시는 일이 있습니까? 반드시 그는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큰일에 쓰임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 없이 고난받으시는 형제들이여, 살 돼지를 우리가 부러워 아니함 같이 죄짓고도 잘사는 이들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이 죄 없이 고난을 받는 일이 있다면 이는 정금 같이 단련케 하심이고 보석같이 진주 같이 다듬어 쓰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가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미숙한 불임정자를 쥐의 고환에 넣어 숙성시켜 쥐 아기를 밴 여인이 여섯이나 된다는 보도가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국 아기도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쥐새끼가 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쥐새끼를 위해서 지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준재입니다. 사람가운데도 꿈이 있고 사명 있는 사람은 보석과 같습니다. 보석은 갈고 닦아야 빛을 발합니다. 갈고 닦는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 요셉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귀하게 연단 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아 잘 참고, 이기고 난 후에 하나님 의 하신 일이 이처럼 놀랍다고 간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 주간 넷째날 말씀/막11:20-25/이한규목사
고난 주간 넷째날 말씀/막11:20-25/이한규목사 2001-12-04 16:39:10 read : 318 고난 주간 셋째 날 화요일은 '변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날은 '성전 청소의 날'이라는 것을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둘째 날의 일과 셋째 날의 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왜 성전 청소 후에 변론이 있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교권을 가진 사람들의 밥그릇을 건드렸는데 명색이 교권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가만히 물러서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 올무에 걸리는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질문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질문을 자세히 살펴 보면 하나같이 올무에 걸릴만한 질문이었습니다. 1)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막 11:28) 주님은 이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유명한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하셨습니다(막 12:1-12). 2)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막 12:14) 주님은 이 질문에 대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하셨습니다(막 12:17) 3) 이 땅에서 일곱 형제와 살았던 아내의 경우 천국에서는 누구의 아내입니까.(막 12:23) 주님은 이 질문에 대해 천국에서는 장가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하셨습니다(막 12:25) 4)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막 12:28) 주님은 이 질문에 대해 첫째와 둘째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막 12:31). 예수님께서 이처럼 모든 질문에 대해 지혜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그 후에는 감히 더 이상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막 12:34).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나가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제자 중 하나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성전 돌들과 건물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막 13:1) 바로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게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바로 저 앞에 성전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곳에 앉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호기심많은 어린이처럼 졸라대며 물었습니다. "어느 때에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겠으며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바로 그때 주님은 유명한 말세에 관한 감람산 강화를 하셨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바로 셋째 날, 화요일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셋째 날에 가장 먼저 벌어진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날 저주를 했던 무화과나무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어떤 내용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셋째 날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다가 전날 주님이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 정말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유명한 기도 응답에 관한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기도 응답을 위해 '하나님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가장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믿음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주님께서 믿음에 관해 하신 말씀 중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를 진단케 합니다. 왜 우리의 믿음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까요? 여러 가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본문은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1. 첫째, 하나님이 소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나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뜻, 자기 믿음'을 지나치게 앞세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원어나 영어 번역을 보면 이 말은 정확히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소유하신 것과 같은 믿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사용하실 때 그 믿음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할 때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항상 앞세우고 살면 우리도 부족하나마 '하나님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순종하는 믿음이 있기를 기도해 보십시오. 산을 옮기는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지 허황된 꿈을 목표로 하는 이상한 믿음이 아닙니다. 2. 둘째, 믿음은 자란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자란다는 것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믿음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말씀을 먹는 것'과 다른 하나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고 믿음이 생기면 그 믿음을 훈련(운동)시켜야 합니다. 덩치는 큰데 무거운 물건을 못 드는 사람이 있고 덩치는 작은데 무거운 물건을 드는 사람이 있듯이 믿음도 훈련하지 않으면 산을 옮기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기도의 맹장 조지 뮬러는 수천 명의 고아의 아버지였는데, 그 많은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서 수시로 엎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조지 뮬러가 93세가 되었을 때, 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처음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는 1달러를 구하기 위해 나의 모든 믿음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에는 50년 전 1달러를 구했던 믿음으로 아주 쉽게 1백만 달러를 믿음으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의 기도도 다른 사람과 별 차이 없었습니다. 1달러를 구하기 위해서 그는 간절을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으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훈련의 위력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훈련이란 말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까?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백만 달러 지점의 기도제목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잘되지 않으면 금방 포기합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지금 그 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사다리를 오를 때처럼 맨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의 믿음 분량 이상을 처음부터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이 실패의 이유입니다. 1달러 지점부터, 사소한 일부터 기도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은 "암을 낳게 하소서!"라고만 합니다. 그러나 쉬운 것부터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도가 먼저입니다. "하나님! 제가 용서하지 못했던 저 사람은 용서하게 하옵소서." 산을 옮기는 능력 있는 믿음을 위해서는 후자의 기도가 훨씬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본문 25절 말씀에서 용서에 관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의 기도제목부터 믿음으로 처리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주변의 사소한 기도제목을 위해서도 여러분의 믿음을 총동원하십시오! 3. 산을 옮기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믿음이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따뜻한 눈길을 통해 나올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눈길도 사랑스러워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발걸음과 손끝과 태도를 통해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힘찬 발걸음, 사랑의 손길, 겸손한 태도는 믿음의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역시 믿음이 가장 잘 밖으로 표현되는 수단은 언어인 것 같습니다. 믿음은 입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본문 11장 23절을 자세히 보면 믿음이라는 단어는 한 번 나오지만, 말한다는 단어는 세 번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은 "믿음대로 이루리라!"고 단순히 말하지 않고 "그 말하는 것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기도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두가지를 살피십시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 다음에는 자기를 살피십시오. 그리고 자기를 살필 때 가장 먼저 살필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의 언어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무엇이고,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평가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알고 보면 우리가 말한 것을 나중에 거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우리를 채찍처럼 휘감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실패를 말하는 순간 실패가 우리를 채찍처럼 휘감을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승리를 말하는 순간, 승리가 우리를 채찍처럼 휘감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절한 시점에 감긴 것이 풀어지면서 승리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 실패와 패배를 말하지 마십시오. 실패를 의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분이 여러분 안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요일 4:4).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와주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도움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 믿으시고, 믿음을 훈련하시고, 믿음의 말을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