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21세기에 맞이하는 부활절/ 요11:21-27/ 2001-04-12
21세기에 맞이하는 부활절 요11:21-27 세계의 표준시를 정하는 그리니치 천문대에서는 2001년이 진정한 의미에서 21세기가 시작되는 해라고 발표했습니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시대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부활절 연합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부활의 희망과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입니다.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인류에게 영생복락과 새 역사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수많은 전쟁과 비극, 미움과 거짓으로 얼룩진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를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를 계속 하였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까?\\\"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내가 아벨을 죽였습니다. 내가 아우를 죽인 살인자입니다\\\"하고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다면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이 땅에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회개가 없는 세계는 암흑과 절망입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부활의 새 아침에 여러분과 잠시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기 원합니다. 특히 우리가 역사적 책임을 망각하고 미움과 분열과 전쟁으로 우리민족의 역사를 악하게 만들어 왔던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합시다. 회개는 개인의 심령뿐 아니라 인간 세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하는 은총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민족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에도 인간들은 예수님을 또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을 중지합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불행만 가져오게 합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부활하신 주님은 인류의 소망이요, 이 민족의 소망이요, 교회의 소망이요, 여러분의 소망입니다. 우리민족의 과거는 민족분열로 국력이 약화되어 일본 등 주변 국가의 압제와 통치를 받는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노블 선교사에 의해 최근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삼일운동 당시 독립만세시위가 민족적인 애국독립운동으로 크게 번지자 일제는 군경을 총동원하여 길거리에서 기독교신자인가 아닌가를 물었다고 합니다. 만일 기독교 신자라고 말하면 무조건 시위주동자로 간주하여 연행했고 그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그 가슴에 십자가를 꽂아 죽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배들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활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죽음도 극복하는 위대한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은 크나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일본의 교과서 왜곡사건을 통해서 볼 때 일본의 만행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오늘 우리민족은 과거의 아픈 역사를 딛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과거의 아픔과 비극은 민족이 결속하지 못하고 뜻을 모으지 못한데 원인이 있음을 깨닫고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하나로 단결해야 합니다. 화합하지 못하는 국가는 마치 구약 에스겔 선지자 시대에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바싹 마른 뼈들처럼 이리저리 흩어진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싹 마르고, 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생기가 없던 뼈들에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자 마자 부활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희망과 꿈을 갖게 한 부활의 환상입니다. 오늘 우리민족에게 바로 이 부활의 환상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은 에스겔 선지자가 본 사방에 흩어진 마른 뼈들처럼 생기 없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희망이 없다고 하며 조국을 등지고 이민을 가고 있습니다. 실업자는 늘어나고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의 분노와 원망과 한숨이 이 강산에 가득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되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으로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될 때 새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면서 조국 근대화의 문이 열렸습니다.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무지와 병들고 가난한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감리교의 아펜젤라,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아펜젤러 선교사는 당시의 벅찬 감격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조선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빛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최초의 한국 교회사는 이 복음의 역사를 \\\"하늘로써 이상하고 기이한 생명의 종자가 조선 땅에 던져졌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새로운 역사로 부활하여야 합니다. 21세기를 여는 새천년에 부활절은 우리 민족 역사상 큰 의미를 주어야 합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말씀을 대언할 때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덥고, 너희에게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그들이 살아나서 섰는데 극히 큰 군대였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큰 군대로 부활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큰 군대처럼 힘있는 단결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오늘 21세기를 여는 첫 번째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 주님의 평강이 우리 조국과 세계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의 기쁨이 전파되는 곳마다 다시 살아나는 새역사가 창조되길 기원합니다. 부활의 기쁨이 전파되는 곳에 새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을 자가 살아나고 절망한 이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고 절망과 고통 속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 이것은 마치 산 자를 죽은 데서 찾았던 여인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 무덤에 찾아 간 여인들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았습니다. 그들은 죽은 예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죽은 예수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울었습니다.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음에는 희망도 없고, 미래도, 기쁨도, 꿈도 없습니다. 그저 눈물과 슬픔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은 바로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희망을 줄 수 없는 죽은 곳에서 살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의 벽은 더욱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실업의 증가, 굶어 죽어 가는 북한 백성들은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있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결코 예수의 죽음은 희망과 꿈이 있는 부활로 이어집니다. 2) 여인들은 빈 무덤을 보고 당황했고 슬퍼했지만 오히려 빈 무덤은 부활의 희망을 보인 것입니다. 빈 무덤은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현장입니다. 사람들의 상식으로 볼 때 죽은 사람은 무덤에 있어야 했고 썩는 냄새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상식을 초월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빈 무덤을 보고 오히려 예수님이 다시 사셨구나 하고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당황하고 슬퍼하듯 오늘날 믿음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현실만 보고 낙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의 기쁨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을 찾아 간 여인들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 24:5)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무덤이 있던 곳에서 마리아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현장을 목격한 여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증인은 자신이 보고들은 것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 민족의 소망이요, 온 세상의 기쁨이요, 개개인 구원의 확신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대망해야 합니다. 빈 무덤이나, 산 자를 죽음의 골짜기에서 찾지 말고 빈 무덤이 오히려 소망이라고 생각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주저앉지 말고 부활신앙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 민족 가운데 놀라운 평강과 축복이 넘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덤 속에서 핀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며 생명의 열매입니다. 결론 : 우리에게는 통일 조국의 부활과 신앙민족이 되게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맞이한 21세기야말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 조국이 통일의 기쁨을 맞이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첫째는 남북이 어떻게 하든지 서로를 신뢰하며 자유스러운 교류, 즉 경제 교류, 문화 교류, 체육 교류, 우편교류 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일 자주 만나서 정담을 나누는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 민족이 무슨 비자나 통제가 필요합니까? 자유왕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남북의 신앙의 자유와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는 문이 열려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교류, 교통, 교제가 이루어질 때 닫혀있던 신앙의 문도 서서히 열리고, 신앙의 자유를 통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 시기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민족이 새롭게 부활하는 그 날이 하루속히 오게 될 것입니다. 명년에는 부활절 연합예배가 남북한 성도들과 함께 모여서 드릴 수 있도록 합시다. 21세기를 열어가는 부활절에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이 땅에 가득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가지 부활/ 예수 부활, 신자 부활, 불신자 부활/ 마28:1-10/ 부활주일설교/ 양복석 목사/ 2009-04-03
3가지 부활/ 예수 부활, 신자 부활, 불신자 부활 요절: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부활의 새아침 영원히 빛나리! 할렐루야! 예수 부활하셨네. 사망의 어둠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 부활의 권능의 축복이 항상 임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요, 구원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요, 복된 종교요,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하는 삶의 종교입니다. 이 세상 물질계에서 동식물로 부활진리를 간접적으로 증거 합니다. ①계란이 부화되어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체 병아리가 되어 살아갑니다. ②물벌레가 탈바꿈하여 새로운 형체 잠자리로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③번떼기가 완전히 탈바꿈하여 나비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다닙니다. ④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고 죽은 후에 새로운 형태의 밀 나무가 됩니다. 기독교의 부활이란? 어떠한 의미입니까? 부활이란? 헬라어 아나스타시스( (αναστασις) 은 ‘죽은 자가 살아남을 의미합니다. “신령한 몸으로 살아난 것” “새로운 형체로 살아난 것”을 부활이라 합니다. 부활체는 썩을 몸이 썩지 아니 할 몸이 되고, 욕될 몸이 영광스러운 몸이 되고, 약한 몸이 강한 몸이 되고, 저주 몸이 영화로운 몸이 되고, 육의 몸이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는 썩지를 않는 몸이 됩니다. 다시는 저주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몸이 됩니다. 다시는 악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몸이 됩니다. 다시는 죽지를 않습니다. 다시는 오염되지를 않는 몸이 됩니다. 다시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몸이 됩니다. 다시는 사망이 해치 못하는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영안실에서 3일 만에 살아난 일이 있는데. 그런 것은 부활이라 하지를 않습니다. 다시금 죄 아래, 마귀아래,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오염, 타락되는 몸은 부활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고전15:42-44절에 증거 하기를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했습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영원히 약하지 않고, 영원히 오염되지 않고, 영원히 악령과 죄에 지배받지 않고, 영원히 병들지 않고, 영원히 불안하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시공간을 초월하는 천사 같은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을 부활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一.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3가지 부활 중에 첫 번째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33년간 구원역사를 완성하시고, 십자가에 죽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 (1)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증거 부활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요, 참으로 있었던 부활입니다.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시며 승천하시기까지 15번이나 나타나 부활사건을 역사적으로 증거하신 것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①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막16:9,요20:18) ②여인들에게 보이시고(눅24:34,고전15:5) ③베드로에게 보이시고(눅24:34) ④두 제자에게 보이시고(막16:12) ⑤도마 없는 열 사도에게 보이시고(눅24:39) ⑥도마에게 보이시고(요20:26) ⑦일곱 사도에게 보이시고(요21:1-2) ⑧열 한 사도에게 보이시고(마28:16-17) ⑨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시고(고전15:4-6) ⑩야고보에게 보이시고(고전15:7) ⑪승천시 갈릴리 사람들에게 보이시고(막16:14) ⑫다멕석 도상에서 바을에게 보이시고(행9:3-) ⑬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울에게 보이시고(행22:17-) ⑭스데반에게 보이시고(행7:55) ⑮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에게 보이시고(계1:10-19) 신앙을 격려하시고, 부활신앙으로 살도록 당부하셨습니다. (2)예수님의 부활은 승리부활입니다 사망케 하심이 죄요, 죄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과 마귀세력을 이기는 부활권세를 예수님께 허락하시여 죽음에서 부활로 승리하였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5-58) 사망과 죄와 마귀세력을 꺾어 승리하셨으니, 승리하신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는 날마다 이깁니다. 할렐루야! (3)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부활입니다. 첫열매는 ①감나무의 첫열매 감을 보고, 그 다음에도 열매 맺음을 알고 ②씨(열매) 하나 속에 수백 트럭의 열매를 딸 것을, 열매(씨) 하나 속에 미리 저장한 것같이, 예수 부활 첫 열매 안에 택자의 부활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씨)가 되셨도다”(고전15:20) 예수 부활 씨 안에 우리의 부활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음에 부활합니다. 할렐루야! (4)예수님의 부활은 생명부활입니다 생명부활과 사망부활이 있습니다. 안 믿는 자는 지옥 가서 영원히 고통받기 위하여 부활하고, 성도는 영원히 주님과 복락 중에 영생하려고 부활하니, 생명부활입니다. 요11:25-27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큰 권능과 축복을 받은 성도들이여!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시고 이 복된 부활 소식을 증거 하시고, 부활신앙으로 날마다 신앙 성공 길을 가시기를 주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二. 성도는 부활 합니다. 3가지 부활 중 두 번째는 성도의 부활입니다. 성도는 믿는 순간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이 중생하므로 살아 부활하셨습니다. 영이 살아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내주하시므로 영이 부활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다 고 엡2:1 절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성도는 영이 살아났기에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 부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영육결합부활체가 되어 공중에 현현하시는 주님을 만나, 영원한 나라, 천국에 들어갑니다. 三. 불신자도 부활 합니다. 3가지 부활 중에 세 번째로 불신자의 부활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5-29) 불신자가 살아나는 것은 지옥가기 위하여 살아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습니다“(골2:3)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용서가 있고 위로가 있고 치료가 있고 사죄가 있고 소망이 있고 권세가 있고 성결이 있고 성화가 있고 기쁨이 있고 존귀가 있고 평화가 있고 안식 있고 쉼이 있고 생명이 있고 출세가 있고 영광이 있고 성공이 있고 천국이 있고 돈이 있고 부요가 있고 강건이 있고 승리가 있고 사랑이 있고 잘됨이 있고 영생복락이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닮아 해와 같이 영원히 빛나시기를 주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3가지 약속의 말씀
3가지 약속의 말씀 http://mission.bz/4974부활주일 누가복음 24장 1-12절 나 중심적 세계관을 버리십시오 저는 2000년부터 인터넷 말씀선교 사역을 했습니다. 그 덕택에 일반 성도들은 잘 몰라도 목사님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해졌습니다. 저의 웹사이트 방문자는 대부분 목사님들입니다. 요새는 설교파일을 개별적으로 원하는 목사님들에게 따로 공급하면서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매주 수천 명의 목사님들이 저의 웹사이트를 방문해 설교 자료를 얻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한 친구 목사님은 농담을 섞어서 저에게 ‘몇 천 명 목사님들의 교회 목사’라고 말합니다. 2004년 10월에는 미션퍼블릭을 세워 설교파일을 목사님들에게 공급했는데, 지금까지 21개의 설교파일 세트가 완성되었고 2년 5개월 동안 나간 설교파일 세트가 약 5100 세트였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선교사들을 후원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원해야 할 선교사님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션퍼블릭에서 공급하는 설교파일을 목사님들이 많이 찾는 것을 보면 겉으로는 내색 안 해도 속으로는 가끔 “내가 정말 설교를 잘하나보다!” 하고 착각합니다. 착각은 자유잖아요? 그런데 3주 전에는 그 착각이 진짜로 판명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임경성 집사 결혼 주례 후에 몇 사람이 제게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결혼 설교가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제 뒤의 하객들도 목사님이 설교를 참 잘하신데요.” 제가 속으로 우쭐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내가 키는 작아도 인터넷에서 얼마나 유명한데...” 그런데 도대체 어느 내용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는지 알고 싶어 들뜬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집사님! 어떤 말씀이 그렇게 감동적이었어요?” 그분이 말했습니다. “특히 결혼 설교가 짧아서 감동적이었어요. 다른 분들도 주례 설교가 짧아서 너무 좋았대요.” 그 말을 듣고 순식간에 김이 팍 샜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습니다. 그날 제가 6분 설교했는데, 원래 의도가 설교를 짧게 해서 신랑신부와 하객들을 행복하게 해주자고 미리 작정하고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다시 한번 ‘짧은 설교가 명 설교’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성찬식 때문에 짧게 명 설교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약간 우스갯소리지만 실제로 설교는 준비할수록 짧아집니다. 1시간 분량의 설교를 한번 보고 설교하면 1시간 걸리지만 두 번 다듬으면 45분, 세 번 다듬으면 38분, 네 번 다듬으면 34분, 다섯 번 다듬으면 31분, 여섯 번 다듬으면 29분, 일곱 번 다듬으면 28분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저의 목표는 ‘원고를 일곱 번 다듬고 28분 전후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물론 짧은 설교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많이 기도하고 준비할수록 설교가 짧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부흥회에서 3시간 이상 말씀을 전하는데, 그처럼 과거에 했던 설교를 즉흥적으로 반복하면 설교는 자연히 길어지고, 가끔 걸쭉한 말과 상스러운 말과 욕 비슷한 말도 말씀에 섞여 나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웃음과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면서 은혜 받았다는 느낌도 주지만 때로는 신앙의 밸런스를 잃게 하는 영혼의 독이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원리는 ‘나 중심적 세계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생활이나 시간생활 등에서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가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질 때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 부활절이 주는 3가지 약속 >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한 부활절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만 끝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부활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흔히 부활절의 대표적인 상징에는 3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빈 십자가, 빈 무덤, 빈 세마포’입니다. 그 3가지 상징은 무엇을 약속할까요? 1. 빈 십자가는 용서를 약속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부활절 새벽에 몇몇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은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며칠 전에 그들의 선생님이었고, 친구였고, 영웅이셨던 예수님이 비참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로 그들의 희망은 철저히 무너졌고,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그들은 숨어 지내고 싶었지만 안식 후에 용기를 내서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약 1시간쯤 걸었습니다. 그리고 언덕을 넘자 멀리 희미하게 영문 밖에 주님이 달리셨던 십자가와 다른 두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그 십자가는 그 전날이 안식일이라서 아직 치워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멀리서 피로 물든 그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그 십자가는 예수님이 없이 빈 상태였는데, 그 빈 십자가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상징합니다. 2. 빈 무덤은 영생을 약속합니다 그때 여자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계속 무덤을 향해 갔습니다. 무덤 가까이 가자 그들은 본문 2절 말씀처럼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돌은 2톤쯤 되는 돌로 쉽게 옮길 수 없었고, 로마 군인들의 허락이 없으면 치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 빈 무덤은 영생을 약속하는 상징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주일학교 선생님이 부활절 전에 아이들에게 플라스틱 달걀을 주며 일주일 동안 새 생명에 대한 상징을 발견하면 그 달걀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다음 주에 달걀이 하나씩 개봉되었습니다. 첫째 달걀을 개봉하자 예쁜 꽃이 나왔습니다. 둘째 달걀에는 아름다운 나비, 셋째 달걀에는 초록색 풀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렇게 개봉될 때마다 그 물건을 넣은 아이가 그 물건의 의미를 나름대로 설명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달걀이 개봉되었을 때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걸 보고 아이들이 다 야유를 보냈습니다. “이 달걀 누구 거야?” 그때 한 아이가 선생님의 셔츠를 잡아당겼습니다. 그 아이는 필립이란 아이로 장애도 있고 사회성도 떨어져 평소에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그건 내 거야. 주님이 계셨던 무덤이 빈 무덤이었잖아. 그래서 그냥 빈 달걀로 가져왔어.” 잠깐 침묵이 흐른 후에, 아이들은 다 빌립을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빌립은 용기를 얻고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습니다. 그러나 그해 여름 빌립은 고열로 인한 합병증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장례식 때 선생님은 빌립의 친구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 된 그 빈 달걀을 가져와 빌립의 관 옆에 두었다고 합니다. 빈 무덤은 영생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망은 마귀의 벌침과 같습니다. 빈 무덤을 통해 하나님은 그 벌침을 뽑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사망의 침을 뽑았다. 이제 사망이 너를 해칠 수 없다!” 벌침이 뽑힌 벌은 곧 죽습니다. 그처럼 침이 뽑혀 거의 죽어가는 마귀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3. 빈 세마포는 교제를 약속합니다 그때 여자들이 돌아가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즉시 사도들에게 전하자 다른 사도들은 믿지 않았지만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즉시 일어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무덤 안을 살펴보자 정말 무덤은 빈 무덤이었고, 예수님을 쌌던 빈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만약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쳤다면 번거롭게 세마포를 벗길 이유가 없고, 머리를 쌌던 수건도 반듯하게 개켜 놓았을 리가 없습니다(요 20:7). 결국 그 빈 세마포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이자 동시에 주님의 부활이 유령처럼 영이나 환상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육체로 부활해서 사람들과 직접 교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과 함께 앉아서 대화도 하셨고, 같이 잡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어떤 신비한 기운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제자들과 함께 교제하셨듯이 지금도 우리와 직접적인 교제를 하실 수 있고, 우리도 주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예수님을 아는가?(Do I know Jesus?)”라는 질문을 삶의 평생 과제로 삼고 더욱 주님을 더욱 알려고 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아는가?(Do I know Jesus?)”라는 질문은 “나는 예수님에 관해 아는가?(Do I know about Jesus?)”라는 질문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알아도 그를 진짜로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는 많이 알아도 사실 대통령을 잘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직접 만나 대화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직접 만나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더 깊이 알려고 해야 합니다. 대통령을 만나기는 쉽지 않지만 주님은 우리가 원하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오늘 우리가 말씀 듣고 주님께 마음을 열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하실 것입니다. <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 그처럼 부활절에 주님은 빈 십자가를 통해 용서를 약속하셨고, 빈 무덤을 통해 영생을 약속하셨고, 빈 세마포를 통해 친밀한 교제를 약속하셨습니다. 삶의 가장 위대한 승리의 비결은 그 약속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천사가 여자들에게 나타나 말했습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 천사의 말대로 여자들은 본문 8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보았습니다. 주님은 일전에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3일 만에 살아나신다고 말씀하셨는데(눅 18:31-34), 그 말씀을 기억하자 비로소 모든 상황이 이해되고 부활에 대한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성경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엄청난 체험과 깨달음이 있어도 그 체험과 깨달음을 말씀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다가 교만해져서 사단의 앞잡이가 됩니다. 어느 날, 마귀가 부하 귀신들과 함께 걷는데 저 앞에서 한 사람이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귀신이 물었습니다. “대장님! 저 친구가 뭘 발견했어요?” 마귀가 대답했습니다. “음. 진리의 한 조각을 발견했어.” 그때 귀신이 다시 물었습니다. “대장님! 저 친구가 진리의 한 조각을 발견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세요?” 그때 마귀가 말했습니다. “아니! 하나도 불편하지 않아! 이제 저 친구가 자신이 발견한 그 작은 진리로 교회를 어떻게 만드는지 그냥 지켜보면 돼! 우리는 저 친구만 이용하면 많은 영혼들을 망칠 수 있네.” 내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생각할 때가 조심할 때입니다. 균형을 잃어버리고 극단에 치우친 진리는 결국 진리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이탈한 체험은 성경적인 체험이 아니고 말씀에서 이탈한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들어 있는 인생 최대의 보고입니다. 우리는 그 성경 말씀을 항상 기억하되 무엇보다도 주님의 부활을 통해 주어진 ‘속죄와 영생과 교제의 약속’은 꼭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 약속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지금 TV 광고는 어떤 물건을 사면 행복해질 것처럼 선전하지만 곧 그 약속이 ‘빈 약속’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빈 약속’이 아닌 약속으로 가득 찬 ‘빈 무덤’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영적 가난과 불행이 임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아버지가 그 지역의 부잣집 관습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자녀에게 차를 사주려고 아들과 함께 틈틈이 차를 보러 다니다 마침내 알맞은 차를 발견했습니다. 졸업식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작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 선물 포장을 뜯자 성경책과 함께 이런 편지가 있었습니다. “빌! 졸업선물로 주는 이 성경을 평생 가까이 하며 살아라.” 빌은 아버지가 차 대신 성경을 준 것이 너무 속상해 그날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빌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가 아버지의 서재에 앉아있는데 그의 눈에 옛날에 아버지가 준 성경책이 들어왔습니다. 그가 그 성경책의 먼지를 닦고 성경을 열어보자 거기에는 그의 졸업 날짜에 맞춰 발행된 수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수표에 아버지와 함께 골랐던 차와 똑같은 금액이 적힌 것을 알고 그는 한탄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아들처럼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약속을 내던져버립니다. 그러나 세상 약속에는 빈 약속이 많아도 하나님의 약속에는 결코 빈 약속이 없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성경의 약속대로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고, 영육 간에 강건함을 주시고, 부활의 약속대로 부활하신 것처럼 재림의 약속대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 주님의 위대하신 컴백 > 한국 남자들은 2001년의 미국 야구 월드 시리즈를 거의 기억할 것입니다. 그 해 월드 시리즈에서는 월드시리즈 4연패를 노리던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와 창단 4년 만에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Arizona Diamondbacks)가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양키스가 우승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게임은 커트 실링을 내세운 다이아몬드백스가 9대 1로 승리합니다. 둘째 게임도 랜디 존슨을 내세운 다이아몬드백스가 4대 0으로 승리합니다. 셋째 게임은 로저 클레멘스를 내세운 양키스가 승리합니다. 넷째 게임은 커트 실링을 내세운 다이아몬드백스가 7회까지 1대 1로 팽팽한 접전을 벌이다 8회 초에 2점을 뽑아 3대 1로 앞섭니다. 그러자 밥 브렌리 감독은 8회 말에 주저 없이 당시 최고의 마무리인 김병현 선수를 투입합니다. 김병현은 토네이도 마구로 9회 말 투아웃 1루까지 만듭니다. 이제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경기가 끝나는데, 그때 김병현이 던진 초구를 티노 마르티네스가 쳐서 홈런을 만들었습니다. 3대 3이 되자 뉴욕 양키스는 최고 마무리 리베라를 마운드에 올립니다. 10회 초 공격이 끝나고 10회 말에 김병현이 또 마운드에 오릅니다. 그런데 또 투아웃에 데릭 지터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결국 김병현은 홈런 두 방으로 패전투수가 되었습니다. 다시 5차전이 되었습니다. 그날 다이아몬드백스가 9회까지 2대 0으로 리드하자 9회 말에 밥 브뻗?감독은 또 김병현을 마무리로 올립니다. 또 투아웃에 2루가 됩니다. 이제 아웃 하나만 잡으면 승리하는데 그때 김병현은 스캇 브로시어스에게 또 동점 홈런을 맞습니다. 그때 김병현은 털썩 주저앉았고, 모든 한국 팬들도 함께 주저앉았습니다. 저는 그때 TV를 꺼버렸습니다. 결국 그날 알폰소 소리아노의 끝내기 안타로 뉴욕 양키스가 3대 2로 승리합니다. 6차전은 랜디 존슨을 앞세운 다이아몬드백스가 15대 2로 승리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7차전이 되었습니다. 9회 초까지 양키스가 2대 1로 앞섰습니다. 9회 말 다이아몬드백스의 마지막 공격 때 양키스는 최고의 마무리 리베라를 내세웠습니다. 이제 양키스의 극적인 우승 드라마가 펼쳐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빗맞은 안타와 리베라의 악송구에 이어 루이스 곤잘레스의 끝내기 안타로 다이아몬드백스가 극적인 역전 우승을 했습니다. 너무 극적인 역전의 역전 드라마가 연출되어서 미국에서 2천 만 명 이상의 독자를 가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 잡지는 11월 호에서 다이아몬드백스의 우승을 ‘최고의 컴백’이라고 표현하며 잡지 편집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역사상 최고의 10가지 컴백(TOP TEN COMEBACKS OF ALL TIME)’이란 리스트를 만들었습니다. 그 리스트에는 1968년 TV 특별공연으로 화려하게 컴백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베트남 전쟁 징병소집을 거부해 복싱 계에서 추방되었다가 7년 만에 포먼을 누르고 화려하게 컴백한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여론조사에서 크게 뒤진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이 1948년 토머스 듀이(Thomas Dewey)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야구를 포기하고 농구선수로 돌아온 것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그 10가지 컴백 중에 2번째 순위에는 2차 대전 후 황폐화되었던 독일과 일본이 1세대가 지나기 전에 경제적 부흥을 이룬 것이 선택되었고, 그때 그 편집진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컴백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이 선정되었습니다. 주님은 2천년 전에 컴백하셨고, 앞으로 컴백하실 것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우리도 삶에서 온갖 패배감을 물리치고 다시 컴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컴백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컴백을 이루신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면 우리에게도 위대한 컴백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죽음은 예수님을 무덤에 가두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도 죽음과 문제에 갇히지 않고, 이생과 내생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영어로 굳뉴스(Good News)라고 하는데, 주님의 부활은 단순한 굳뉴스가 아니라 베스트 뉴스(Best News)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담대히 내일을 맞이할 수 있고 우리 인생은 살만한 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원하면 이 시간 내 삶을 예수님께 드리겠다고 새롭게 결단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 다시 한번 주님께 내 삶을 드리겠다는 다짐을 통해 영혼이 새로워지는 복된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이 게시물을...
Vacancy!(빈 무덤!)/ 마27:61, 요20:11-23/ 2007-04-08
Vacancy!(빈 무덤!) 마27:61, 요20:11-23 성탄절만 되면 교회에서 자주 하는 성극이 있습니다. \'빈 방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성극입니다. 이 성극은 원래 1977년 12월호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980년 성탄 무렵 일간신문 한 구석에 <월리의 성탄절>이라는 칼럼으로 소개된 것을 보고, 감동받은 연출가 최종률씨에 의해 극화된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함께 많은 깨달음을 주는 성극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덕구는 ‘빈 방 없습니다.’라고 해야 하지만, 빈 방을 애타게 찾는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를 보면서 대본과 달리, ‘빈 방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연극을 망치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연극처럼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실 때에는 방 하나도 구하지 못하여 마굿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 그 어디에도 빈방이 없는, ‘NO VACANCY!‘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빈무덤\'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VACANCY!‘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삶은 ‘NO VACANCY!‘로 시작되어 VACANCY!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요한복음 20장 1절 이하를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왔습니다. 물론 그녀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는 목적에서 온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던 육중한 돌문은 옆으로 옮겨졌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분명히 사흘 전에 예수님의 시체를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큰 돌을 굴려다가 무덤 문을 막아놓았습니다. 또한 그 돌문에 로마 황제의 도장이 찍힌 인봉을 붙여 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 돌문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군대를 시켜서 24시간 동안 철통같이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는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외쳤습니다. “주님의 시신이 없어 졌어요! 누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나 봐요!” 마리아의 이 말을 들은 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은 단숨에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말대로 주님의 시신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주님의 시신은 온데간데없고, 주님의 시신을 쌓던 세마포와 수건만이 잘 정리되어 개켜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9절에서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빈무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도 않고,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없어진 주님의 시신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간 베드로와 요한과 달리, 주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꺼리는 무덤에 한 번도 아니고 하루에 두 번씩이나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빈무덤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11절을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여기 마리아가 \'울었다‘는 것은 단순히 울먹이거나 눈물 흘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애간장이 끊어지는 것같이 소리 내어 통곡했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 주님의 빈무덤에 다시 찾아온 마리아는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가정이지만 만약 주님의 시신이 사라지지 않고 무덤 안에 그대로 있었다면 그녀는 울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 마음먹은 대로 주님의 시신에 정성껏 향품을 발라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주님의 무덤이 빈무덤이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울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영원히 울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시신이 무덤 속에 그대로 있었다면, 우리의 기독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무덤은 막달라 마리아의 기대와는 달리, 빈무덤이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심히 통곡하며 주님의 무덤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을 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주님의 시신이 있었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울고 있는 이유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어디로 옮겼는지 알지 못해서 운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인기척이 나며 이러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무덤 속에 누워 있어야 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빈무덤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이 빈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분명한 증거이며, 기독교진리의 핵심내용입니다. 인도에서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설교 중간에 나서서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가지지 못한 것한 가지를 가졌소.\"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탠리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이슬람교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있어서 정말 마호메트란 사람이 역사적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소. 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빈 무덤밖에 볼 수 없지 않소?\"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스탠리 존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말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빈 무덤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죽은 교주를 믿고 있지만, 우리는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른 어떠한 종교의 창시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특징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사건은 불교나 힌두교나 회교도, 등의 세상의 종교와 다른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줄로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과 4절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신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자기 앞에 있는 분이 예수님인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동산지기, 즉 묘지 관리인으로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그 때 주님은 다정하게 “마리아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대”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여인들이 분명히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언뜻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만지지 말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만지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Hold\'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붙잡고 늘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땅에 40일 동안 더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해야 하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 기쁜 나머지 예수님의 붙잡고 늘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붙잡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보이셨습니다. 이어서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다른 여자들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보이셨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5절 이하를 보면, 게바라는 별명을 가진 베드로에게와 12제자에게와 500여 형제에게와 야고보에게와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는 사도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이셨을 뿐 아니라, 일시에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여자에게 보이셨을 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길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보이셨을 뿐 아니라, 골방에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도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증인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로 볼 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은 사흘 만에 확실하게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세주이심이 증명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몇 가지 귀한 선물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선물은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1) 평강(Peace) 첫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비밀장소에 숨어서 문들을 꼭꼭 닫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그곳에 들어오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께서 로마 군사들에게 붙잡혀 가실 때, 자기들도 체포당할까봐 뿔뿔이 도망을 쳤던 겁쟁이들이 아닙니까? 베드로 같은 사람은 주님을 두 번씩이나 부인하고 세 번째에는 저주까지 했던 배반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그야말로 제자의 모습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한심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주님이라면 이러한 한심한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제가 주님이라면 난리법석을 부렸을 것입니다. 야단과 함께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배반한 제자들에게 첫 번째 하신 말씀은 책망이 아니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였습니다. 또 21절에서 다시 한번 여전히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한 도마를 책망하는 대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화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과 차원이 다른 진정한 평강을 우리에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2) 기쁨(Joy) 둘째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16:20)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슬퍼했지만,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은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절망스러웠지만, 세상 사람들은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0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슬픔과 근심, 절망과 고통이 사라지고 그들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기쁨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에게 근심을 가져다주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난 주 화요일 저녁에 인버카고순복음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녁집회에서 말씀을 증거 한 후, 강대상 앞으로 나온 모든 성도들에게 안수를 해주고 부흥회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친교실에서 성도들과 친교를 하는데, 이지영사모님이 한 여학생을 저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사모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도에서 3년, 그리고 또 다른 나라에서 몇 년 유학을 하다가, 인버카길로 유학을 와서 지금은 키위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 여학생인데, 그 여학생이 지금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학생의 얼굴을 쳐다보니 사모님 말씀대로 그 여학생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때 두 곳의 성경을 먼저 펼쳐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는 말씀과, 요한복음 14장 27절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는 말씀을 읽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백성들에게 걱정이나 근심을 주시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 악한 마귀가 준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된다.’라고 말하고 그 여학생에게 안수하며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의 얼굴이 서서히 평안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조금 후, 이번에는 형제님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형제님은 인버카고순복음교회 성도는 아닌데, 부흥성회에 참석차 교회에 나오신 분이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2주 전에 너무 무서운 꿈을 꾸며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전한 \"두 가지 무기\"라는 제목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빈무덤을 남기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가운데에서 슬픔과 걱정과 근심에 쌓여 있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생명(Life) 셋째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모든 인간이 범한 죄를 위하여 죄가 하나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죄에서 해방되고 영생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피 흘림과 십자가를 빼놓고는 우리 기독교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고난과 죽음에서 끝나버린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돌아가신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망 권세 깨뜨리고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에 가면 고대 왕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물론 아직 저는 가보지 않았지만, 그 무덤은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들어졌고, 그 무덤 속에는 많은 미라들이 있다고 합니다. 왕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시신을 썩지 않도록 방부제 처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살아나지 못하고 미라로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피라미드를 발굴하다가 작은 물병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물병 속에서 몇 개의 완두콩이 들어 있었습니다. 비록 색깔은 시커멓게 되었고 겉은 쪼글쪼글하게 말라 있었지만, 3천년 전에 넣어둔 완두콩이었습니다. 학자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완두콩을 물에 담가 놓았는데, 놀랍게도 싹이 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완두콩을 땅에 심었더니 뿌리가 나고 줄기가 솟아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완두콩에서 싹이 난 이유를 아십니까? 그 완두콩 속에는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생명을 소유했다면 우리 또한 영원히 죽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3천년 전에 물병에 들어간 완두콩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난 것처럼, 부활하셔서 참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요11:25) 말씀 하신 것처럼,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4) 사명(Mission) 넷째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2~2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으신 다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명이 있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용서함 받을 수 있지만, 그대로 두면 그 죄는 그대로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이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믿고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따라 살았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이른 새벽에 빈무덤에 찾아왔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0절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바울도 옥에 갇히면서도, 돌과 태장을 맞으면서도,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으면서도,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목숨 걸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들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누가 뭐라고 해도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가정이지만,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만약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 땅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이비 집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사건은 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또 주님 스스로도 수도 없이 많이 예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주님은 희대의 사기꾼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빈무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빈무덤 밖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의 눈에 있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강과 기쁨과 생명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마리아의 눈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 주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믿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만져 주신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평강과 기쁨과 생명을 누릴 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며 부활의 신앙을 간직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か(枯)れた骨の復活(마른 뼈의 부활)/ エゼキエル書37:1-14(겔37:1-14), ヨハネによる福音書3:1-9(요3:1-9)/ 2009-10-25
か(枯)れた骨の復活(마른 뼈의 부활) エゼキエル書37:1-14(겔37:1-14), ヨハネによる福音書3:1-9(요3:1-9) 2009年10月25日・主日礼拝説教  ◆ 「枯れた骨の復活」  牧師 藤掛順一 ・ 旧約聖書: エゼキエル書 第37章1-14節  ・ 新約聖書: ヨハネによる福音書 第3章1-9節 ・ 讃美歌:58、493、348 枯れた骨の谷  今日は皆さんとご一緒に、旧約聖書エゼキエル書第37章を読み、味わいたいと思います。ここには、エゼキエルという人が神様に導かれて見た幻が語られています。彼はある谷へと導かれました。その谷は骨で満ちていました。全て人間の骨です。おびただしい人骨がそこらじゅうにころがっているのです。それらの骨は甚だしく枯れていた、とあります。「枯れている」とはカラカラに乾燥して干涸び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が、それは単に水分がないということではなくて、命の痕跡がどこにもないということです。かつてはこれらの骨も、肉を帯び、筋がそれを繋ぎ、そこには血が流れ、瑞々しい皮膚がそれを覆っている命ある人間だったのです。しかしその命は失われ、もはや動くことも見ることも語ることも、愛することもない、命の営みの一切が失われた抜け殻、それが枯れた骨です。  これらの骨は、年老いて、あるいは病気で、自然に死んだ人々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この人々は天寿を全うして死んだのではないのです。9節に、「これらの殺されたもの」とあります。彼らは殺されたのです。まだまだ生きることができるはずだったのに、生きたかったのに、命を奪われたのです。つまりこの谷で、多くの人々が虐殺されたのです。あそこにもここにもころがっている頭蓋骨の、もはや見ることのない目が、目があった跡のうつろな穴が、彼らの苦しみ、無念さ、絶望を訴えつつこちらを見つめています。これらの骨の間をヒューヒューと吹き抜ける風の音が、彼らの悲痛な叫びのようです。この谷はまさに、虐殺された人間たちの絶望に覆い尽くされているのです。 我々の骨は枯れた  私たちはこのような光景を思い浮かべる時、例えばナチスによる600万とも言われるユダヤ人虐殺や、カンボジアのポル・ポト政権の下での虐殺、あるいは日本軍による中国や朝鮮における残虐行為、広島、長崎の原爆など、人類の歴史の中で繰り返されてきた虐殺行為のことを考え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これらの枯れた骨の群れは、過去の歴史の中で虐殺の被害者となった人々のことを指し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エゼキエルはこの幻を見た時、昔こんな残酷なことが行われた、こんなことが二度と繰り返されないようにしなければ、と思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主なる神様はエゼキエルに、これらの骨は、今生きている人々、エゼキエル自身がその一員であるところのイスラエルの民の姿なのだとお告げになったのです。そのことが11節に語られています。「主はわたしに言われた。「人の子よ、これらの骨はイスラエルの全家である。彼らは言っている。『我々の骨は枯れた。我々の望みはうせ、我々は滅びる』と」」。イスラエルの民は今、「我々の骨は枯れた。我々の望みはうせ、我々は滅び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預言者エゼキエルの時代、イスラエルは、バビロニア帝国によって国を滅ぼされ、多くの人々がバビロンに捕え移されていました。自分たちの国を失い、敵の国に捕虜として連れて来られてそこで苦しい屈辱的な生活を強いられている、いわゆる「バビロン捕囚」の時代です。エゼキエル自身も、捕囚としてバビロンに連れて来られているのです。そういう苦しみ、民族としての存続の危機の中で、「我々の骨は枯れた。我々の望みはうせ、我々は滅びる」と嘆かずにはいられない現実を彼らは体験しているのです。枯れた骨に満ちたこの谷の有り様は、昔の悲惨な出来事ではなくて、まさに今の自分たちの現実なのです。 魂の憂いは骨を枯らす  それはエゼキエルの時代のイスラエルの民だけの話でしょうか。私たちはこの枯れた骨に満ちた谷の幻を、歴史上の悲惨な虐殺事件を振り返り、そのようなことが二度と繰り返されないようにとの願い、決意を新たにする機会とするだけで済むのでしょうか。枯れた骨に満ちたこの谷は、私たち自身の現実、今の私たちの姿をも描き出し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私たちは国を滅ぼされて他国に連れ去られ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私たちのこの社会のあちこちで崩壊が始まっており、存亡の危機に瀕していることを私たちは感じ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セーフティーネットの崩壊という言葉を聞くことが多くなりました。新自由主義というと聞こえはいいが要するに弱肉強食の世の中となり、欲望がどこまでもふくれあがっていく一方で、貧富の差、格差が拡大し、社会的弱者が支えられることなく放置され、絶望と怒りが社会に満ち、自暴自棄に走る人々が増えています。それが他者に向かえば「誰でもいいから殺したかった」という無差別殺人になるし、自分に向かえば自殺となります。私たちの社会における人と人とのつながり、支え合いはこれからどうなっていくのか、明るい展望が見えないという思いを私たちは持っています。また私たち一人一人の生活においても、先行きへの不安がいろいろあります。目前の経済的不安に脅かされている人もどんどん増えているし、超高齢化社会となっていく中で、自分の老いをどう迎えるか、家族の介護をどうするかという不安を抱いている人も多い。昔から病と死とは人間を脅かす恐怖であり苦しみでしたが、今はそれに加えて、死ぬまでどうやって生きていったらよいのか、という不安が私たちを苦しめているのです。また社会が複雑化し、価値観が多様化する中で、昔からあった秩序は崩壊し、流動的になっています。その中で、人間関係の破れ、家庭の崩壊という苦しみを味わっている人も増えています。私たちは今まさに、「骨が枯れる」ような思いをしながら生き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旧約聖書、箴言の17章22節に、「喜びを抱く心はからだを養うが、霊が沈みこんでいると骨まで枯れる」とあります。後半の部分は、以前の口語訳聖書では、「たましいの憂いは骨を枯らす」となっていました。まさに私たちは、骨を枯らすような魂の憂いを覚えつつ日々を生き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我々の骨は枯れた。我々の望みはうせ、我々は滅びる」というイスラエルの民の嘆きは、私たちの嘆きでもあるのです。 神からの問いかけ  神様がエゼキエルをこの枯れた骨の谷に導いたのは、彼に一つの問いを投げかけるためでした。3節に、「そのとき、主はわたしに言われた。『人の子よ、これらの骨は生き返ることができるか』」とあります。「これらの骨は生き返ることができるか」、命の痕跡が全く失われた、干涸びた骨の山が、もう一度生き返り、瑞々しい命を再び得ることができるのか、絶望に覆われているこの谷に、人々が生きて活動し、喜び、愛し、語り合う声が再び響くことはあり得るのか、エゼキエルは神様からそういう問いかけを受けたのです。枯れた骨の谷が私たち自身の現実でもあることを見つめる時、同じ問いかけが神様から私たちに投げかけられていることを知らされます。私たちはその問いにどう答えるのでしょうか。「そんなことはあるはずがない、無理だ、死んだ者は生き返らない、枯れた骨が再び命を得ることなどあり得ない」、これが、私たちの知識、常識、経験から導き出される答えです。骨は、その人が死んでしまったことの動かぬ証拠であり、そして、私たちはもはやその事実を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という私たちの無力さを物語るものでもあります。神様からの問いかけに対して私たちは、「これらの骨は生き返ることができません」と答えるしかないのです。 あなたのみがご存じです  けれども、神様からの問いかけに対するエゼキエルの答えは、それとは違っていました。彼は、「主なる神よ、あなたのみがご存じです」と答えたのです。これは大変含蓄のある、また広がりを持った言葉です。「神様のみがご存知です」というのは、一つには、私には分かりません、ということです。私だけでなく、人間には誰も分からない、神様にしか分か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英語でもGod knows.「神様が知っている」というのは、「そんなこと誰にも分かるはずがないだろう」という意味です。「神のみぞ知る」という日本語の言葉も同じ意味です。「神様のみがご存知です」というエゼキエルの答えは、「そんなことは私には分かりません」と言っているのです。しかしこの答えは「そんなことはあり得ません、不可能です」と言ってはいません。神様のみがご存じですというのは、枯れた骨が生き返ることができるか否かは神様次第です、ということでもあるのです。神様さえそう意志なさるならば、枯れた骨が復活することも起り得る、そういう神様の力への信頼が語られていると言うこともできます。つまりこの言葉はエゼキエルの信仰の告白であると言うこともできるのです。エゼキエルはここで、「これらの骨は生き返ることができるか」という神様の問いかけに対して、「それはわたしには分かりません、私の知識や常識では、そんなことが起り得るとは思えません、でも、神様あなたがそのように決意なさるならば、そういうことも実現します」、と答えたのです。人間が神様の前で本当に謙遜になるというのはこのような思いを持つことな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してこれこそが、神様を信じることなのです。  エゼキエルがこのような思いを持つことができたのは、彼が神様に対して「あなた」と語りかけることができたことによってです。先ほど、「神のみぞ知る」というのは、そんなことは誰にも分からない、という意味だと申しました。「神のみぞ知る」というのは神様を信じていない人の言葉です。それは「成り行きに任せる他ない」という意味でしかないのです。エゼキエルは、「神のみぞ知る」と言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主なる神よ、あなたのみがご存じです」と言ったのです。この違いは決定的です。「神のみぞ知る」においては、神様のことが第三者的に、三人称で呼ばれています。神様を三人称で呼んでいる間は、私たちは神様を信じることはできないし、信頼することもできません。信仰とは、神様と私の間に「あなた」という二人称で呼び合う関係が生まれることです。「主なる神よ、あなたのみがご存じです」という答えの最も大事なポイントはそこにあるのです。神様との間に、「あなた」と呼びかける関係が生まれるなら、「あなたのみがご存じです」という言葉は、神様の力への信頼の言葉、つまり信仰の告白となるのです。  それではエゼキエルはなぜ神様に「あなた」と語りかけることができ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神様の方から先に彼に語りかけて下さったからです。彼は枯れた骨の谷に導かれ、「人の子よ、これらの骨は生き返ることができるか」という神様の問いかけを受けたのです。この問いかけは、他の誰でもない、エゼキエルに向けられたものです。だから彼は、「あなたのみがご存じです」と答え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しかし神様の問いかけは「エゼキエルよ」ではなくて「人の子よ」となっています。それは、私たちがそこに自分自身の名を置いて読むことができるためです。神様は私たちにも今語りかけ、問いかけておられるのです。このことを信じて、私たちも神様に向かって「あなた」と呼びかけ、問いかけに応答していくならば、私たちと神様との間に、「私とあなた」という関係が生まれるのです。それが、信仰を得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預言  「主なる神よ、あなたのみがご存じです」と答えたエゼキエルに神様は「これらの骨に向かって預言し、彼らに言いなさ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預言するとは、これから起ることを言い当て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神様のみ言葉を語り、宣言することです。エゼキエルは、枯れた骨の群れに向って、「おまえたちは生き返る」という神様のみ言葉を語るように命じられたのです。彼の言葉を聞いている者など一人もいない、枯れた骨だけがころがっているこの谷に、エゼキエルの声が響きます。それは、虚空に向って語りかけるような、まことに虚しいことのように思われます。けれども、彼がその虚しさに耐えてみ言葉を語っていると、死の沈黙に支配されていたはずのこの谷に、新しいことが起っていったのです。枯れ果てて横たわっていた骨がカタカタと音を立てて動き始めたのです。骨と骨とが寄り集まり、そこに筋と肉が生じ、皮膚がそれを覆い、人間の姿になっていったのです。枯れた骨の群れはこうして、人間の群れとなりました。「しかしその中に霊はなかった」と8節にあります。つまりこの人間の群れはまだ復活してはいないのです。神様はもう一度エゼキエルに、預言せよ、とお命じになります。今度は、「霊」に向かってこのように語ることを彼は求められたのです。9節、「霊よ、四方から吹き来れ。霊よ、これらの殺されたものの上に吹きつけよ。そうすれば彼らは生き返る」。彼がそのように語ると、霊が彼らの中に入り、彼らは生き返って自分の足で立ち、非常に大きな集団となったのです。神様が天地創造のみ業において、土の塵で人間の体を造り、そこに命の息を吹き込んで生きたものとして下さったの同じことがこの幻において行われたのです。 神による救い  この幻は、バビロン捕囚の苦しみの中で、「我々の骨は枯れた。我々の望みはうせ、我々は滅びる」と言っているイスラエルの民に神様が与えて下さる救いを描いています。神様が彼らを捕囚の苦しみから解放して下さり、イスラエルの地に連れ帰って下さる、その救いの約束がこの幻によって示されたのです。しかしこの幻は同時に、神様が私たちに与えて下さる救いをも描いています。骨を枯らすような魂の憂いの中にある私たち、枯れた骨に満ちた谷のように死と絶望に支配されてしまっている私たちの現実の中に、神様がお立てになった預言者を通して、神様のみ言葉が響くのです。それは誰も聞く人のいない虚しい言葉のようにも思われます。しかしその言葉が語られていく中で、枯れた骨に新しいことが起っていくのです。それらが動きだし、寄り集まり、結び合わされて一つの体となっていくのです。さらにそこに霊が、命の息が、風のように吹き来り、その体は生き返り、自分の足で立ち、非常に大きな集団となるのです。神様はこのような枯れた骨の復活のみ業を私たちの中で行なおうとしておられます。そのみ業は、「人の子よ、これらの骨は生き返ることができるか」という神様の問いかけを私たちが自分に向けられた問いとして聞き、「主なる神よ、あなたのみがご存じです」とそれに答えていくことによって、つまり神様と私たちの間に「あなたと私」という関係が生じることによって実現します。このような神様との生きた関係の中で私たちは、人間の知識や常識ではとうてい考えることも期待することもできない枯れた骨の復活が、神様の力によって実現することを体験していくのです。 あしあと  本日の礼拝のもう一つの目玉は、この後聖歌隊の奉唱において歌われる「あしあと」という賛美です。この曲に歌われている詩も、枯れた骨の復活の体験を語っていると言うことができます。「ある日私は夢を見た」と始まるこの詩も、一種の幻を歌っています。詩人が見たのは、砂の上に残された自分のこれまでの人生の足跡です。その足跡はある時点から二つになっています。それは彼が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る救いを信じる信仰者となった時からです。その時主イエスは、「わたしはどんな時にもあなたと共にいる」と約束して下さいました。その主イエスと共に、彼はその後の人生を歩んで来たのです。ところがある所から、足跡はまた一つになっています。そしてその時点というのは、彼の人生の最も暗く、厳しい試練の中にあった時でした。主イエスによる助けを最も必要としていた時です。しかしそこから、足跡は一つになっている。彼は主イエスに激しくつめよるのです。「主よ、私があなたに従うと決めた時、あなたは約束して下さ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どんな時にも共にいて下さると。それなのになぜ、あの最も困難な苦しみの時に、あなたは私を離れ去り、一人にしてしまわれたのか」。この詩人の悲痛な叫びは、「我々の骨は枯れた。我々の望みはうせ、我々は滅びる」というイスラエルの民の、そして私たちの絶望と重なり合います。苦しみ悲しみ絶望の中で、私たちの目には、神様にも見捨てられた、枯れた骨に満ちた谷のような現実しか見えてこないのです。けれども、激しく抗議する彼に対して、「主はささやかれた」とこの詩は歌っていきます。枯れた骨の谷の現実の中に、神様のみ声が、ささやくように、しかしはっきりと響いていくのです。「私の大切な子よ、私はあなたを愛している。あなたを決して捨てたりはしない。ましてや、苦しみや試みの中で足跡が一つだったとき、私があなたを背負って歩いていた」。 枯れた骨の復活  この詩は、この主の言葉で終わっています。しかし私たちは、この主のみ言葉、語りかけによって私たちの中で何が起るのかを、エゼキエルの見た幻から示されているのです。魂の憂いによって、「我々の骨は枯れた。我々の望みはうせ、我々は滅びる」と嘆いている私たちの枯れた骨が、このみ言葉を聞くことによってカタカタと動き出すのです。骨と骨とが近づき、そこに筋や肉が生じ、皮膚がその上を覆い、一人の人間としての姿が回復されていくのです。そしてそこに神様が霊を、命の息を吹き込んで下さることによって、枯れた骨は生き返るのです。「彼らは生き返って自分の足で立った」と10節にありました。それは自立ということです。自分という人間が確立し、誰にも支配されたり強制されたりすることなく、自由な人間として生きるよう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本当の意味で自立し、自由に生きる人間は、「彼らは非常に大きな集団となった」とあるように、人と共に生き、人とよい関係を築き、共同体を形成してい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ここに描かれている、人間としての自立、自由の確立と、共同体の形成の両立こそ、人間が本当に人間として生きることができている印です。私たちは今その印を失い、自分の足でしっかり立つことも、共同体を形成することも、どちらも覚束ないまま、干涸びてバラバラになった骨のような状態に陥ってしまっているのです。その私たちが、本当に人間として生きるようになり、自分の足でしっかり立ちつつ、人と人とがつながり支え合って生きる共同体を築いてい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のは、神様の独り子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を背負って歩いて下さっていることを知ることによってな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私たちは、自分の力では担い切れない苦しみや悲しみや重荷の中で、もう一歩も進むことができないと思うことがあります。絶望し、投げやりになってしまうことがあります。神様を信じる信仰者として生きていても、その神様が自分を見捨ててしまったと思ってしまうことすらあります。しかしそのような私たちに、神様は、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と復活による救いの恵みを与えて下さり、私たちを担い、背負って下さっているのです。神様のみ言葉によってそのことを示される時、私たちは、自分の足で立って歩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す。主イエスによって背負われているからこそ、自分の重荷を背負う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のです。  枯れた骨の谷のような私たちの現実の中に、神様の恵みのみ言葉が響き、神様の霊、聖霊が風のように吹き来たり、私たちを生かして下さる、そういうことが起るのが教会の礼拝です。ここで私たちは、枯れた骨の復活という神様のみ業を体験していくのです。 藤掛順一(ふじかけ じゅんいち)牧師(横浜指路教会) (후지까께 즁이찌 목사(요꼬하마 시로교회))
ふっかつ(復活)=信仰+希望+α(부활=신앙+희망+α)/ 第一ペテロの手紙1:21(벧전1:21)/ 綾康輔 伝道師/ 2005-04-03
復活=信仰+希望+α 第一ペテロの手紙1:21 ○題目:復活=信仰+希望+α ○本文:第一ペテロの手紙1章21節 ○導入:イエスキリストは十字架に死んで葬られてから三日目に復活されました。 聖書は復活事実を証明しようと努力した事がありませんが、復活の事実を目擊した人達が「私たちがその証人である」と言いました。人類の歴史上イエス様の復活事件のように、数多の人を変化させた事件はありません。 このイエス様のご復活が事実としてなされたが故に、私達も希望があるのです。三歲の時に高熱にうなされた後遺症で、小兒麻痺になり左手が辛うじて動く、そして、二十歲まで生き延びる事が出来ないとまで言われた牧師がいました。 しかし、神様の恵みと憐れみによって76歲まで生き延び、牧会生活に幕を閉じイエス様の懷に戾って行かれました。この牧師は說教をしに講壇に上る時は、おくさまが背負い椅子に座らせてあげます。その姿は麗しい光景で、始めてみる人は感動さえおぼえるほどでした。 ある時この様に話されるのを聞きました。「私は地上では家內に背負ってもらってばかりでしたが、天国で妻を背負って走り回っている夫が見えたなら、私たち夫婦だと思ってください。」と。なんと感動的な言葉でしょうか。と同時にこの言葉の裏には、復活への確かな希望と信仰が伺えます。 ○本論:今日はイエス様が十字架上での救いの御業を終えて、葬られた後三日後に甦られた日を記念する日曜日であります。今日の題目からすると、「なにやら数学じゃあるまいし、変な題目だな。」と思われる方が多くいらっしゃると思いますが、私なりに付けた独特な題目です。 この公式?!の最後の部分にある、αは一体なんでしょうか。ご一緖に見て行きながら、そのαに当てはまる答えを見つけていきましょう。 ○ポイントの第一番目は、「復活は信仰の基となるものである」という事であります。本文の前半部分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書いてあります。「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て栄光をお与えになった神を、キリストによって信じています。」と。この御言葉は、パウロの告白であると共に私たち一人一人の告白でもあるのです。 もし、この復活の事件が無かったらどうなるでしょうか。第一コリント人への手紙15章17節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書かれています。「そして、キリストが復活しなかったのなら、あなたがたの信仰はむなしく、あなたがたは今もなお罪の中にあることになります。」と。 そうです。まさにイエスキリストの復活の事件があったからこそ、私たちが信仰を持ち得ることが出来たのであります。またその信仰の根源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 キリスト教以外の宗教と言われているものの、全てがこの点において絶対にキリスト教に勝る內容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宗教には罪からの完全な赦しと解放と、復活が無いからであります。もし、その內容を持った宗教があるなら、聖書はうその手紙となってしまいます。 なぜなら、使徒のはたらき4章12節に書かれてある通りです。「ほかのだれによっても、救いは得られません。わたしたちが救われるべき名は、天下にこの名のほか、人間には与えられていないのです。」と。ここで、「この名」と書かれていましたが、誰でしょうか?そうです。今日復活の祝いをする対象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です。 この御言葉の少し前の部分に、4章10節の御言葉があります。「あなたがたもイスラエルの民全体も知っていただきたい。この人が良くなって、皆さんの前に立っているのは、あなたがたが十字架につけて殺し、神が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られたあのナザレ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るものです。」と。 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のみ本当の救いがあるのです。私たちに与えられた信仰の原点が、この復活にあるのです。イエス様のご復活を感謝して、拍手で御名を褒め賛えたいと思います。 ○ポイントの第二番目は、「復活は希望の基となるものである」という事であります。本文の後半部分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書いてあります。「従って、あなたがたの信仰と希望とは神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と。 「従って、あなたがたの信仰と…」の次は、何と書いてありますか?そうです。「希望」という言葉です。では、その信仰と希望がなんでしょうか?そうです。「神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つまり私たちに与えられた信仰だけではなく、希望も神様から与えられるもの、即ち復活による事であると語っています。 使徒のはたらき24章15節に次のような御言葉が書かれています。「更に、正しい者も正しくない者もやがて復活するという希望を、神に対して抱いています。この希望は、この人たち自身も同じように抱いております。」と。 この場面は使徒のはたらき24章1節以降に出てくる、テルティロという弁護士によってパウロを拘束する口実を、フェリクス閣下に訴えた後の答弁でした。5、6節でテルティロはこのように訴えています。「実は、この男は疫病のような人間で、世界中のユダヤ人の間に騷動を引き起こしている者、『ナザレ人の分派』の主謀者であります。この男は神殿さえも汚そうとしましたので逮捕いたしました。」と。 この訴えに対して、10節以降にパウロの弁明が記録されています。そしてその弁明の中の一部に、先ほどの15節の御言葉が記録されているのであります。パウロの大膽さはどんなものであるか、想像してみて下さい。自分を告発した彼らが、自分に何をするか分からないと言う、身の危険を感じていたと想像できる、そのような緊迫した場面です。 しかし、彼はイエス様の復活の確かさを知っていたため、そしてそこに希望を持っていたがゆえ、このように大膽に弁明をする事が出来たのであります。私達も復活による希望を持ち、いつ誰に聞かれたとしても說明する事が出来るよう、また弁明する事が出来るようにしたいと思います。 更に、この世の人たちにとって死は永遠の別れであり、永遠の終わりです。しかしこのイエス様の復活を信じる人にとって、再び天国で会えると言う希望は、何にも変えがたい希望であり喜びであります。 この復活の事件を証しし、イエス様を通して救いを受け入れた者に与えられるこの特権を、復活を知らずに暗闇の中を歩んでいる人達に、希望を与えるはたらきを共に励んでまいりましょう。 ○ポイントの第三番目は、「復活は新生の基となるものである」という事であります。ロ-マ人への手紙6章4節には、次のような御言葉が書いてあります。「わたしたちは洗禮によってキリストと共に葬られ、その死にあずかるものとなりました。それは、キリストが御父の栄光によって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られたように、わたしたちも新しい命に生きるためなのです。」と。 ここに書かれてある通り、洗礼つまりバプテスマはキリストが葬られたが三日目に甦られたように、私達もそのバプテスマによって、古い自分は死に新しく生まれ変わった者として、新しい命を受けた者としての歩みをするのであります。 その意味でもこの教会はバプテストの教団で、滴礼ではなく浸礼を施します。それは、まさに葬式と誕生を一度にする事のようであります。即ち、バプテスマを授かる前は古い自分で、水に漬かった時に古い自分は死に葬式をし、水から上がる時には、新たな命をもって誕生する。と言った具合です。 浸礼を施す教会が正しい、滴礼を施す教会が間違っているという論議を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の様なことは一つの儀式であり、まさに結婚式をするか、あるいは婚姻屆だけを提出するかだけの違いです。結婚すると言う意味では、式を挙げようか挙げまいかは問題ではありません。 ただ、大切なものはイエスキリストを自分の罪からの救い主であり、自分の主として心に迎え入れた事が重要な事であります。バプテスマはある極端な意味で言えば、形式に過ぎません。バプテスマを受ける事が救いの基準ではないからです。神様の前に夫婦と認められた男女が、結婚式を通して親族や友達の前で公に知らせるのと同じく、バプテスマはあくまで、イエス様を信じ救われた事を教会と神様の前に公にする事なのです。 とにかく復活のもたらす大いなる恵みと素晴らしさは、信仰、希望、新生ということがお分かりいただけたでしょう。とすれば、今日のテ-マに沿って見ると、+αの部分はもうお分かりですね。そうです。「α=新生」です。 この復活祭の時に、卵にカラフルに色をつけたイ-スタ-エッグを教会で配るのも、卵が新しい命を生み出すものと見て、その様にするのであります。私たちはこの復活祭の時だけ、イエス様の復活と私たちに与えられた信仰、希望、新生を思うのではなく、每日の歩みの中で覚えられたらどんなに幸いでしょうか。 そして、その復活の背後にあったイエス様の十字架の御業があったことを、決して忘れてはいけない事です。そのためにも聖餐式を執り行う事は有意義であります。私の故鄕の教会では、每週禮拝の時に聖餐式を執り行います。日本でも每週執り行う教会は多くはありませんが、とても良い方法だと思っています。 私が牧師になって教会を任されるようになったなら、必ず每週聖餐式を執り行う教会にしたいと思っています。そして常にイエス様の十字架を覚え、感謝を捧げる歩みを通して神様にご栄光を帰したいと思っています。
가장 위대한 승리/ 고전15:50-58/ 2002-04-12
가장 위대한 승리 고전15:50-58 2002년 부활의 새 아침입니다. 죽음의 어두운 장막이 걷히고 영광스럽고 감격에 찬 생명의 새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되새기는 감격의 새아침! 부활 생명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는 어둠이 하나님께 찾아와서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태양이 자기가 가는 곳마다 쫓아오니 귀찮아 죽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태양을 불렀습니다. \"태양아. 네가 까닭 없이 어둠을 쫓아다닌다면서.\" 태양이 어이없어 하면서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어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둠을 제가 쫓아다니다니요. 너무 억울하니, 어둠과 저를 대질 신문해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태양과 어둠을 법정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출두를 했지만, 어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지만, 오늘까지도 태양 앞에 어둠을 소환하지 못하였습니다.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이지만, 태양과 어둠을 같은 시간 한 자리에 세우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태양 앞에 어둠이 존재할 수 없듯이, 예수님의 눈앞에 어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 안에서도 어둠을 보지 못하는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은 태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죽음의 권세 앞에서도 생명의 부활을 보여주신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 땅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불교도 있고, 유교도 있고, 무속종교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다른 여러 종교들과 다른 점은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의 사건은 인류의 역사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 또한 바꾸어 놓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겼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 영생을 남기셨습니다. 톨스토이는 부활이라는 그의 책에서 \"땅속에서 연한 새싹이 나오지 못하도록 돌을 깔고, 나오는 풀을 뽑아내도 그 풀의 생명은 다시 사나니, 생명의 힘을 막을 자 누구인가?\" 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계와 생태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부활을 계시하십니다. 굼벵이가 땅속에서 7년을 지내다가 어느 날 매미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날며 사는 것을 볼 때 부활의 신비를 느낍니다. 생명의 신비, 성장의 신비, 죽음의 신비, 부활의 신비 생명의 신비는 우리가 영원히 신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나 자신이 생명인데, 내가 나를 모릅니다. 출생부터 신비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이 생명의 출생이 얼마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또한 성장의 신비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젖을 먹이는 것뿐인데도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아버지 어머니를 고루 닮아서 자라납니다. 뼈는 뼈대로,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날로 자라납니다. 성장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엄연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다 이해할 수 는 없는 성장의 신비 역시 생명의 신비입니다. 죽음의 신비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옛날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라져버린다. 없어진다 라고 생각했고 한편에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는 것이고 생명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떠나가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변화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죽음의 신비를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사람은 죽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반드시 생각하여야할 문제입니다. 또한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부활 그 생명 자체가 신비인 것입니다. 스스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신비가 없고 이적이란 없습니다. 다만 창조의 역사가 있고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신비입니다. 자라나는 싹을 한번 보십시오. 다 죽은 것 같은 동토(凍土)에서 움이 돋아나는 작은 생명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애벌레가 나비로 자라서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벌레였던 잠자리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생명은 여전히 신비롭고 그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말은 변화라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의 변화, 생명으로의 변화, 그리스도적 생명으로의 변화가 있습니다. 생명 자체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없던 생명이 태어났고 그 생명이 성장하다가 죽게됩니다. 그 다음 단계로 부활이라고 하는 차원의 생명이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사실이고 죽음이 사실이듯이,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생명도 다음 단계로 향하는 사건입니다. 부활의 생명도 우리 앞에 놓여있는 엄연한 변화의 한 단계일 뿐입니다. 인류의 가장 큰 패배는 죽음 인류의 가장 큰 패배는 죽음입니다. 죽으면 끝장입니다. 지금까지 문화가 발달해 왔고 최근에는 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한 아직도 고개만 숙일 뿐입니다. 과연 죽음은 무섭습니다. 죽음은 직장도 떠나게 하고 가족도 떠나게 하고 지식이나 돈도 남겨 두고 떠나게 합니다. 죽음은 권력이나 명예도 두고 떠나게 합니다. 죽음은 진수성찬과 세상에 아름다운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가라고 합니다. 죽음 앞에는 꿈쩍을 못합니다. 죽음이 와서 \"가자 하면”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정복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나 죽음에는 백전백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가장 큰 원수요 마지막 원수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총 주제는 예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이 메시지의 중심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십자가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초대교회가 웅변하는 메시지의 방향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를 부활신앙 안에서 이해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 제자들은 이제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잃어버렸다고 실망했습니다. 꿈도 야망도 다 무너지고 자기들도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골방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자 저들은 비로소 용기를 얻었습니다. 확신의 사람들이 됩니다. 환희의 사람들이 됩니다. 특별히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불의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악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시던 바로 그 법정에도 설 수 있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였을까요? 부활의 아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 권세와 율법과 심판을 다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생명 안에서 죽음을 보았습니다. 큰 생명의 빛 안에서 죽음을 이해했습니다. 죽음은 잠깐이요, 하나의 과정이요, 하나의 필연일 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직업이 의사인 어느 분이 부활신앙과 관련된 재미있는 비사(比辭)를 말해주었습니다. 모태에 있는 생명은 그야말로 근심걱정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없이 평안하고 좋기만 한 그 속에서 잘 자라납니다. 모태를 벗어나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출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출생이 모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죽음인 것입니다. 그 좋은 곳에서 춥고 더운 곳으로 나와야 합니다. 탯줄을 끊어버립니다. 죽음입니다. 출생했다고 기뻐해 주지만 실은 거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태-세상이라는 태(胎) 속에 있습니다. 언제이건 그 탯줄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출발하게 될 때, 세상에서는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엄연한 생명을 바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부활생명 안에서 사망을 이해하고 부활생명 안에서 생명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세계관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초대교회 사람들은 빌라도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도, 로마군인도, 가룟 유다도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부활 앞에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사는 자는 모든 것을 부활신앙 안에서 해석하고 다 소화합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곧 내가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은 자연적 변화가 아닙니다. 한낱 자연현상이 아니라 재창조의 역사요, 변화케 하시는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케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친히 살리신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은 죄와 율법과 사망을 다 이길 수 있고도 넉넉한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 우리의 원수인 죽음을 이긴 분이 계신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자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입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둔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가장 위대한 승리자 된 것을 기뻐합시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데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신 곳을 보라(마28:5-6절).”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약속대로 삼일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여자들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고 많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다른 어느 기적 보다 위대한 것이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만 다시 사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살리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절).”첫 열매가 있으면 계속해서 열매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장차 예수님 재림하실 때 다 부활할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의 기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들은 잠시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남들은 하나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았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립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절).”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믿습니까? 다시 사신 예수님과 비교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마지막 원수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여러 가지 노래들 성경에는 여러 가지 노래가 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감격하여 노래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창2:23).” 사랑의 노래만 있지 않습니다. 무시무시한 칼의 노래도 있습니다. 라멕은 일부다처제를 행하고 살인도 저지른 자입니다. 그가 노래합니다.\"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배이리로다(창4:3-24).”이런 노래는 없어야 합니다. 홍해를 건넌 모세의 감격의 노래도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1).”홍해 바다 건너서 애굽의 군대의 시체를 바라볼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아들이 없어서 슬펐던 한나가 사무엘을 얻고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라(삼상2:1).”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바울의 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8:37-39).” 그러나 이런 노래 보다 더 위대한 노래가 있습니다. 사망을 이긴 노래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사망은 진 적이 없습니다. 사망이 독침을 한번 찌르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망이 이기지 못합니다. 독침을 쏘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망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독침을 쏘고 그 침을 뺄 수 없었습니다. 독침은 십자가에 그대로 꽂혔습니다. 여분의 침은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쏠 독침이 없습니다. 그것만 아닙니다.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이김이 사망을 삼켰습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킴바 되리라”사망은 지금까지 무엇이든지 삼켰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사망이 삼킨 바 될 것입니다. 수동태입니다. 삼키던 것이 삼킴을 당합니다. 부활의 생명이 사망을 삼킵니다. 놀라운 역전입니다. 이런 광경을 우리가 얼마나 기대했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예수님으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노래입니까? 사망을 이긴 노래를 부릅시다 바울은 사망을 이긴 노래를 부릅니다. 아니 사망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는 사망으로 인해 슬픈 노래만 불렀습니다. 슬픔을 달래는 노래만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망을 이긴 노래를 부릅시다. 얼마나 놀라운 노래입니까? 얼마나 부르고 싶었던 노래입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사망을 이긴 노래가 있습니까? 바울이 부른 승리의 노래가 있습니까? 죽음은 숙명처럼 우리 곁에 있습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그러나 이제는 노래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늘은 종일 부활의 노래를 불러 봅시다. 가장 위대한 노래를 실컷 불러 봅시다. 오늘만 아니라 날마다 부활의 노래를 부릅시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입니까? 우리가 언제 다시 살아납니까? 그 승리의 날은 멀기만 합니까?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날은 장래 어느 시점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51-52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는 다시 살고, 산 자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 날이 내일인지 모레인지 십 년 후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 날은 멀지 않습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 앞에서는 부활의 날은 오늘과 같습니다. 육체가 죽어야 하는 오늘과 다시 사는 내일은 분명히 시간적으로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면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이 오늘입니다. 간격이 없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그 날은 오늘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사는 자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아니 이미 영생하고 있는 자 같이 살아야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이 오늘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을 것을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혹은 죽었다가 이미 다시 산 사람처럼 삽니다. 오늘을 보고 내일을 판단하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일을 알고 오늘을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밤 죽을 것을 모르고 창고를 지은 어리석은 부자는 불쌍합니다. 아무리 많이 쌓아두면 뭐합니까? 오늘 죽으면 헛일입니다. 먼저는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가 죽음을 이긴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믿었습니다. 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몇 일을 더 살기 위해 우리의 남은 재산이라도 다 내어놓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보다 더 귀한 선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견고하여 흔들리지 맙시다. 기독교 신앙을 마음의 수양으로 믿는 것은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출세의 수단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행운의 표적으로 안다면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읍시다.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신앙을 도적질하는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맙시다.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부인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굳건한 믿음의 반석에 서도록 말씀을 묵상하고 배웁시다. 부활의 신앙이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에 더욱 힘씁시다. 구원받기 위해 힘쓰는 것은 안타깝고 불쌍하기도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잠을 자지 않는다면, 구원받기 위해 금욕한다면, 구원받기 위해 전도하고 구원받기 위해 선행을 한다면 불쌍합니다. 그러나 값없이 구원받고 부활에 참여한 때문에 힘쓴다면 아름다운 일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힘을 써서 일한다면 참으로 장하고 잘하는 일입니다. 얼어붙었던 대지에 봄이 되면 싹이 나는 것도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새순이 나는 것도 모두 생명의 힘입니다. 생명은 승리합니다. 죽음을 이깁니다. 부활의 생명은 사망을 정복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어떤 죽음도 패배가 아닙니다.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하늘나라에 가는 관문일 뿐이며 주님 오시는 날에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는 준비일 뿐입니다. 마틴 루터는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책에만 기록한 것이 아니고 봄에 자라는 나무 잎마다 쓰셨다 고 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승리가 내 개인과,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안에서 성취될 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있고,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생활에서 진리가 뿌리내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생명의 존엄을 들어내고 살 수 있을 때 부활이 안겨주는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실을 영원으로, 고통을 평안으로,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그리고 순간의 삶을 영생으로 이르게 한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나의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겠습니다. 웨스콧(Wescott) 감독은 \"부활절의 선물\")과 \"오순절의 선물\"의 차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부활절 선물은 부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요 오순절의 선물은 승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 된다\". 다시 말하면 부활절의 선물은 살려주시는 은혜이며 오순절의 선물은 부여의 은혜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경건의 삶을 사신 영암의 성도 여러분, 이제 부활의 영광도 함께 누립시다. 로마서 6:5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부활로 연합된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잃는 것과 얻는 것 생명에 관한 큰 역설은 생명을 잃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설은 바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친구에게 매달린다면, 그 친구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소유하려 들지 않으면, 많은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명성을 구하고 원한다면, 흔히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손에 넣는 순간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에게 알려지려고 하지 않는데도 오히려 우리가 죽은 후에까지 오래 기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뜻깊은 2002년 부활절을 맞이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장 위대한 승리인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승리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절 기도 -최효섭- (미 아쿨라 한인교회 목사) 그리스도여 당신은 오늘 나의 마음속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당신은 오늘 나의 관을 깨뜨리고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덤 속에 가득 찬 광명과 향기, 그것은 오늘 나의 영혼에 차는 소망의 기쁨입니다. 주여, 이 새봄에 나의 마음 밭에 오소서. 당신이 오시면 사람이 살고 당신이 오시면 어제의 슬픔이 가고 당신이 오시면 저 밝은 하늘 열리고 당신이 오시면 미움도 사라지고 당신이 오시면 마음과 마음 다시 만나고 당신이 오셔야 사람다운 사람, 남편다운 남편, 아내다운 아내, 자식다운 자식이 되겠습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여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게 하시고 먼지가 묻어도 빨리 털어 내게 하시고 미움을 품고 잠자리에 들지 않게 하소서.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굼벵이가 매미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말랐던 뿌리에서 백합의 미소가 피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어두운 태에서 생명의 울음이 터지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사나운 소리가 들려도 너무 겁내지 말게 하시며 꾸지람을 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않게 하시며 바람이 분다고 아무데로나 끌려 다니지 않게 하시며 햇볕이 뜨겁다고 그늘만 찾지 않게 하소서. 갈 길이 멀다고 걱정만 하지 말게 하시며 지나온 길 되돌아보지 않게 하시고 어둠이 와도 외로워하지 않게 하소서. 몽치가 다가올 때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주님, 배반하는 제자에게도 위로의 시선을 던지시던 주님, 침 뱉는 자들도 용서하시던 주님, 십자가위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던 주님, 오 주님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내 가슴이 푸른 하늘이 되게 하시고 내 생각이 넓은 하늘 되게 하시며 내 영혼을 봄 동산으로 만들어 주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나의 무덤을 헤치고 새롭게 태어날 힘을 주소서. 하루 하루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시고 미래를 설레는 흥분으로 기다리게 하시며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꿈꾸게 하시며 알지 못해도 소망으로 전진하게 하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이 봄,이 부활절에 나도 새 출발하게 하소서. 두려워 말라’(마태복음 14:27)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34)하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오늘 새 출발하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선장이시오 진정한 후원자, 주님은 나의 모든 문제의 해답자 시오니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품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최후까지 나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 나도 오늘 부활하게 하소서 아멘.
가장 위대한 승리/ 고전15:50-58/ 2003-04-05
가장 위대한 승리 고전15:50-58 우리 기독교의 최대의 절기인 부활절 아침입니다. 오늘 예배하기 위해 모인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유일한 특징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오직 예수만이 이루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새생명의 종교인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를 하신 부활 예수를 이 시간 모시고, 큰 기쁨과 영광을 함께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옛부터 이 부활절에는 계란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1071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회교도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다시 찾기 위하여 기독교의 청년들이 모두 십자군이 되어서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 무렵 자그마한 마을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어느 날 이 마을에 얼굴이 예쁘고 고운, 그러나 남루한 옷을 입은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모자린드(Mozarlind)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마을에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군대에 나가고 집은 고약한 사람에게 빼앗겼습니다\" 부인을 본 집 주인은, \"참 안되었군요 저의 집에 남은 방 한 칸이 있으니 거기서 사십시오.\" 하고 인정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부인은 감사하다고 절을 하면서 그 날부터 이 마음씨 고운 주인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줄을 지어 이 부인에게 먹을 것과 생활용품을 갖다 주었습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이 고마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하여 닭을 사다가 길러서 마을 사람들에게 보답하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원래 유럽 쪽에서는 닭이 매우 귀했습니다. 부자들이나 닭을 길렀습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닭을 기르는 집이 한 집도 없었습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멀리 가서 닭을 몇 마리 구해왔습니다. 닭은 잘 자라서 알을 낳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알은 다시 병아리가 되었습니다. 닭의 숫자도 많아지고 알도 많이 낳았습니다. 그 해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동네의 어린이들을 모두 초청하여 잔치를 하였습니다. 맛있는 요리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좋아하였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부인은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뒷동산에 가서 나무 밑에다가 새둥지를 하나씩 만들어 놓고 그 둥지에 이름을 달아두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왁자지껄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새둥지를 만들어 놓고 왔습니다. 부인은 아이들에게 마실 쥬스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노는 동안에 준비하였던 달걀 그릇을 가지고 뒷동산에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새둥지에 달걀을 하나씩 놓고 돌아왔습니다. \"자 이제 다시 뒷동산으로 가서 자기가 만든 둥지에 있는 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아이들은 뒷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둥지에는 색칠을 예쁘게 하고 예쁜 글씨를 쓴 달걀이 한 개씩 들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달걀을 가지고 기뻐서 떠들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달걀에는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자. 하나님은 사랑이 있고 마음 착한 사람을 도우신다\" 이 말은 모자린드 부인 가정의 가훈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고 모자린드 부인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그 날 오후 모자린드 부인은 낯선 소년을 만났습니다. 그 소년은 앓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러 먼길을 걸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부인은 그 소년에게도 부활절 달걀을 주었습니다. 소년은 달걀을 받아들고 부지런히 길을 갔습니다. 어느 산 고개를 넘을 때 소년은 길에 쓰러진 기진한 병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그 병사가 너무 불쌍하여 가지고 가던 달걀을 주었습니다. 병사는 고맙게 달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달걀에 쓰인 글씨를 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병사는 이 달걀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달걀을 준 부인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이 병사는 모자린드 부인의 남편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갔다가 제대하여 돌아왔으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아다니다가 지쳐 쓰러진 것입니다. 모자린드 부인은 그 달걀 때문에 헤어져서 소식도 몰랐던 남편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살던 집도 다시 찾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인류의 가장 큰 패배는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죽으면 끝장입니다. 지금까지 문화가 발달해 왔고 최근에는 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한 아직도 고개만 숙일 뿐입니다. 아직까지 죽음을 정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늘 관심사는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이지만 누구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떠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직장도, 가족도, 모든 재산도 떠나게 합니다. 죽음 앞에는 꼼짝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와서“가자 하면”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남극도 북극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도, 달도 우주도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1.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승리입니다. 1) 예수님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승리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입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둔 예수님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신 곳을 보라(마28:5-6절).”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약속대로 삼일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부활의 몸을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또한 사도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어느 기적 보다 위대한 것이 부활 사건입니다. 부활은 가장 위대한 승리입니다. 부활신앙으로 삽시다. 부활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를 살리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절).”첫 열매가 있으면 계속해서 열매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장차 예수님 재림하실 때 다 부활할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의 기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지만, 부활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들은 잠시 살다가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절).”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 바라보지 맙시다. 다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봅시다. 부활로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루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 성도들은 부활의 소망과 기쁨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2)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노래합시다. 성경을 보면 많은 노래들이 나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감격하여 노래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말입니다. 또한 홍해를 건넌 모세의 감격의 노래도 있습니다. 기도로 얻은 아들 사무엘로 인하여 기쁨으로 부른 한나의 노래가 있으며,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바울의 노래가 있습니다.(롬8:37-39) 그러나 이런 노래 보다 더 위대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을 이긴 노래입니다. 오늘 본문 55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람이 죽음을 이긴 경우는 없습니다. 사망의 독침에 모두 쓰려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망의 독침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부활의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렸습니다. 놀라운 역전입니다.“사망이 이김의 삼킴바 되리라(Death is swallowed up in victory).” 우리는 가장 위대한 승리인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해야 합니다. 조지 몰간 목사님이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어느 시골 교회를 목회 하실 때의 일입니다.(잡지사에 글을 기고함) 톰이라는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건강이 좋지 못했습니다 발로 걸어다닐 수도 없는 그런 처지였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총명했고 믿음이 좋았습니다. 부활절을 앞둔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이 어린아이들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계란 하나씩을 주었습니다. 그 계란 속은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일주일 동안 잘 생각해서 이 계란 속에 생명을 넣어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어느 아이는 그 속에 꽃을 꺾어서 넣어왔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꿈틀거리는 곤충을 잡아서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톰은 빈 플라스틱 계란을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선생님은 톰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몸이 불편하니까 다른 아이들처럼 과제를 해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톰아 숙제를 못 했어도 괜찮다.\"고 오히려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톰은 심각한 얼굴로 \"저는 이 속에 생명을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생명을 담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톰은 부활신앙으로 비어있는 예수님의 무덤을 생각하고, 이 속에 참생명을 담아 가지고 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아이는 얼마 후에 하늘나라고 갔습니다. 오늘은 종일 부활의 노래를 불러 봅시다. 가장 위대한 노래는 예수님의 부활노래입니다. 우리는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을 가진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부활을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1) 부활신앙은 우리가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51-52절).”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자는 다시 살고, 산 자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을 것을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막델라나라는 14살 된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은 중병에 걸려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임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간,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루터가 딸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아이를 진정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데려가려 하시다니요.\" 루터는 딸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막델라나, 너는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좋으니, 아니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이 좋으니?\" 그러자 딸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며,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어요.\" 라고 말하고는 눈을 감았답니다. 순간 방안에는 침묵이 흐르고 모두들 눈물조차 흘릴 수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막델라나야! 편히 쉬거라, 이제 너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날 것이다. 그리고 곧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래, 우리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 우린 아주 잠깐 헤어져 있는 게야, 난 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련다. 우린 조금도 뒤 다시 만날 테니...\" 다시 사는 부활이 있기에 슬픔도 소망으로 바꾼 것입니다. 2) 부활신앙은 감사하며 사는 생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가 죽음을 이긴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믿었습니다. 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생명이 있기에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3) 부활신앙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영원히 사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견고한 믿음으로 살면서 세상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흔들리지 않고, 굳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부활의 복음/ 고전15:1-11/ 최병문 목사/ 늘푸른교회
가장 중요한 부활의 복음 고전15:1-11 바울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에베소. 빌립보, 갈라디아, 로마, 골로새... 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초대의 교회들입니다. 고린 도에도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곳을 가 보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마음을 담은 복음의 편지를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오늘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복음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들에게 여러 가지의 복음을 다시 정리하여 보내면서 부활에 관한 복음도 자세히 정리해서 보내 주었습니다. 이 복음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왜그런가 하면 바울의 복음 편지를 받은 그들이 믿음으로 그 편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리도 교회 성도들은 이 복음을 굳게 지켜 나가면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1절과 3절의 말씀을 보면 이 복음이 가장 중요한 복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가지고있는 개역이나 개역 개정에는그렇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공동번역을 보면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라고 3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복음이란, 행 3:15 \"부활의 증인\"임을 말합니다. 행 4: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에게 전함\"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다 잡힌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와 너희 모든 이스라 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강건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예수의 이름 외에는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이름도 없다\"고 행 4:10, 12에서 각각 말했습니 다. 이렇게 베드로가 목숨걸고, 또 바울이 목숨 걸고 전하던 복음 그 가장 중요한 복음은 무엇 입니까?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 아무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박혀서 말입니다. 그러나 죽음이라고 다 같은 죽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양은 무엇을 말합니까? 양은 죄인을 대신해서 죽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란 바로 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 루시는 그런 희생적 죽음이었습니다. - 3절 히 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곧 사함을 위한 죽음 이었습니다.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이 죽음은 곧 사랑의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이셨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 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활의 복음입니다. 다음 가장 중요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2.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지냄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으면 다 무덤에 갑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한 세월이 지나고 나면 한 줌의 흙으로 남는 것입니다. 또는 한 줌의 재가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죽음 뒤의 장사지냄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 수님의 장사는 달랐습니다. 무덤에 장사를 지내고 그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 27:66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하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십자가의 고난으로 죽을 것이고 장사 지낸 뒤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다.\"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혹시나 하며 걱정하던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장사를 지내고 그 무덤 을 지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복음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누구 의 무덤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무덤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지켰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복음 입니다.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여러 사람들에게 그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셨음\"을 4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 부활은 복음입니다. 가장 중요한 복음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아는 대로 다시 살아난다는 뜻 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지냄 그리고 부활 이 세 가지 사건은 하나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 다.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면서 십자가를 뺄 수 없고 십자가를 말 하면서 부활을 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복음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장사지냄 있는데, 이것은 곧 돌 무덤을 말하는 것 입니다. 파숫꾼들이 돌로된 무덤에 돌문을 닫고 인봉한 후 지켰습니다. 그러나 안식 후 첫 날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올라갔을 때 이미 무덤을 막았던 돌문은 옮겨져 있었고, 빈 무덤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무엇을 느끼십니까? 파수꾼들의 지킴, 옮겨진 돌문, 빈 무덤, 성경에 약속하신 부활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 에서 말하기를 \"성경대로\"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심과 부활하심은 심심해서 된 일이 아니고, 또, 어떤 단순한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된 것이 아니고, 성경의 약속된 일이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복음이고 복음 중에 가장 귀한 복음 입니다. 물론 복음 안에는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그의 탄생, 성장, 공생애의 활동, 고난, 죽음, 장 사,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이 있습니다. 모두 다 복음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으면 다 허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후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된 것입니다. 초대 사도들의 신앙 고백을 보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 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며\" 부활은 가장 귀한 복음입니다. 부활은 가장 귀한 예수님이십니다. 부활은 가장 귀한 사랑입니다. 부활은 가장 귀한 약속의 성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부활도 믿으십니까? 이제 부활의 확실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부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복음을 들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 믿음대로 전하기를 원합니다. 가장 중요한 복음이 무엇입니까?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가장 행복한 부활절/고전15:20-22
가장 행복한 부활절/고전15:20-22 2007-06-21 10:16:46 read : 155 강대준 목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껏 인류를 영원히 불행케 했던 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영원한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불행케 했던 숙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요, 또 하나는 죽음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류는 불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와 죽음은 이 세상의 어떤 철학, 어떤 종교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죄의 본성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부터 인간은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롬3:10). 그러므로 인류는 아무리 돈과 권력이 많아도 죄의 종노릇을 하다가 그 죄값으로 영원히 사망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롬3:23, 6:23). 죄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으나 성공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죄에서부터 승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던 것입니다(고전15:20).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사건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죽은 자를 따라가며 죽은 자에게 길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을 지니고 오셔서 완전한 죽음을 맛보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으며, 죽음 가운데서 사망 권세를 이기심으로써 완전히 승리하셨습니다. 어느 날 한 소작농이 밭을 갈다가 보화궤짝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엄청나게 큰 그 궤짝 안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보화가 들어 있었습니다. 소작농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 궤짝을 얼른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소작농은 그 보화궤짝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렇다고 가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 비밀이 새나가면 그 밭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소작농은 밭주인에게 그 밭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주인은 밭값을 몇 배로 비싸게 불렀지만 소작인은 모든 소유, 전 재산, 곧 세간까지 팔아서 그 밭을 사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비롯하여 친구와 친척들은 그가 미쳤다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세상에 저런 바보가 있나. 하찮은 땅을 저렇게 비싼 값에 사다니.... 그것도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말이야. 미친 사람이 아니고선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겠어” 심지어는 아직 영문을 모르는 가족들까지도 미쳤다며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그러나 소작인은 자기를 미쳤다고 비웃는 자들 앞에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너희는 내 마음 모른다. 아무도 내 마음 모를 꺼야. 아! 이 기쁨, 감격, 행복. 주님만이 알고 계실 꺼야. 하나님! 많은 사람이 해마다 이 밭을 갈았을 텐데 왜 그들은 이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무슨 복으로 저 혼자만 이 보화를 발견하게 되었을까요. 주님 밖에는 아무도 내 마음 모를 거예요” 바로 이 감격의 고백과 행복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다는 것은 앞으로 많은 성도의 부활이 있을 것임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자연계에서도 첫 열매는 나중 열매를 보증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부활을 보증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의 부활을 보장한다는 증표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부활 보증금(고후1:22,5:5)으로 주셨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불완전한 존재였지만 이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온전한 의인이 되었습니다(갈3:11). 인간의 죽음이 첫째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온 것처럼 부활도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인하여 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죽음의 필연성과 부활의 필연성이 있으며, 대표성과 연합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 이후로 인류 역사를 꿰뚫고 내려오는 복음의 줄기인 것입니다. 대표성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로 죽음에서 먼저 다시 사시고 그 뒤를 이어 그를 믿는 자들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말하며, 연합성이란 죄를 사함 받아 세례를 받고 영생에 이르는 부활신앙을 가졌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시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인간의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면 깃털보다 가벼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두 가지 문제를 완전히 해결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복음은 모든 인류의 숙적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죄와 사망 권세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한 순간에 억만 가지 죄악의 문제를 해결 받고 영원한 저주의 법칙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 받아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부활의 복음은 소작농이 밭에서 발견한 ‘보화궤짝’입니다. 그러므로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 아니 이 보화를 내 것으로 만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 받았다면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철천지원수인 죽음을 이기고 오히려 죽음의 권세를 향하여 두 눈을 부릅뜨고 호령(고전15:55)하면서 마지막 날 영광스럽게 부활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이 복음의 보화를 소유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하게 될 나야말로 이 세상 65억 인구 중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가장 기쁜 부활절입니다. 부활이라는 보화를 차지한 날, 행복한 복음의 날입니다. 부활절을 이스터(Easter)라고 하는데 이 말은 ‘봄의 여신’을 지칭하는 ‘오이스터’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얼어붙었던 긴 겨울이 지나고 저 넓은 대지에 봄의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면 겨우내 잠자던 생명들이 약동하고 모든 씨앗들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부활절은 생명과 삶의 축제일입니다. 현대과학과 의학은 죽음을 정복하려고 노력해왔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으나 실패했습니다. 오직 죽어서 사는 부활을 믿어야 해결되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의 열쇠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은 죽어도 모두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으로 생명을 만들었으며, 우리가 받은 부활 생명은 죽음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부활절 축하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극치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파멸을 의미하기도 하고 변화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으로서, 전자는 불신자에게 오는 것이요, 후자는 믿는 자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요일은 주님께서 사신 주님의 날, 주일이며 주일은 부활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예배와 말씀을 통하여, 기도와 찬송으로, 전도와 봉사로, 구제와 성도의 교제로 거듭 소생하는 날입니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2000년전에 나타난 계시 사건이면서 동시에 미래에 있을 종말론적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의 인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즉 무덤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이 2000년 전 불안과 절망과 허무가 가득했던 제자들에게 생의 용기를 주고 좌절과 낙심으로 흩어졌던 제자들을 부활의 소망으로 다시 하나가 되게 하였듯이 부활의 능력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삶의 어두운 구석구석까지 새 소망으로 비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이어받은 교회는 이러한 사명의 한가운데 서있는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작품에 한 귀족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여인에 대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여 가는 내용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죽음과 죄의 문제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살아가게끔 변화하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살아 계신 주님께 여러분의 인생 길을 물으십시오. 답답하고 괴로울 때 살아 계셔서 위로하시고 해결해 주시는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태초에서나 2천 년 전에나 오늘에나 동일하신 주님께 기도합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께 붙어살기 위하여 기도하기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행2:42,46). 내가 어디에 붙어있으며 어디에 힘을 쓰느냐가 나의 삶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할 까닭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인들에게 소망의 보증이요, 기독교의 지속적인 최대 사건이며, 약속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시대의 사도들의 설교 주제가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기도할 때 비로소 성도의 영권이 회복되고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사건을 기다리지만 말고 지금의 자리에서 만나고 증거하며 변화하여 나가는 21세기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짜 부활과 진짜 부활/ 눅24:1-12
가짜 부활과 진짜 부활 눅24:1-12 * 이 계시의 말씀을 봉독하는 중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 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 가 뵈지 아니 하더라 4이를 인하여 근심 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 이 이르돠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찿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는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 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제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 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들에 게 고하니 10 (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 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11 사도들은 저희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 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프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 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기도 하시겠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 주님의 부서지고 찢어진 발앞에 눈물로서 기도 하옵나 니,황 길상, 홍 희숙, 하 윤경, 김 현주, 남 정우, 안 민자, 백 영화 등 아직 부활이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않는 사랑하는 자 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 주님의 생명책에 이들의 이름을 적으시고 주님께서 저들을 선택하시고 주 님께서 저들을 불렀다고 명하여 주시옵소서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사시는 만군의 주 여 호와여 ! 주의 장중에서 이들을 붙드시고 보아도 보지못하고 들어도 깨닫 지 못하게 하는 저 우상과 흑암의 권세들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 이제 이 부족한 주의 종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할 때에 이 종 의 허물과 부족함을 십자가에 가려 주시오며, 성령님께서 이들의 눈을 열 어 주시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놀라 운 구속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 설 교 ) 며칠전 온 나라를 시끌시끌하게 하던 뉴스가 있었읍니다. 잘 아시는 대 로 연천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입니다. 그들은 집단으로 산 중턱에 무허 가 건물들을 지어 놓고 생활 하면서 상제의 딸이라고 칭하는 전직 다방 여종업원이었던 어느 한 여인을 교주로 모시면서 이 여인이 명령하는 것 은 무조건 신의 말이라 생각하고 복종 하였다고 합니다. 맹물을 부활하 게 하는 생명수라고 공갈쳐서 여러사람이 이맹물을 얻기위해 온 재산을 다 바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다가 누군가 말을 잘 안 듣자 집단으로 구 타하여 살해한 사건 이었지요.자 - 그런데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 이 일어 날 수가 있었을 까요? 여러분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 다. 과연 그 사람들이 학식과 배운게 모자라서 그런 허무맹랑한 말에 따 랐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틀림없이 그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출세한 꽤 똑똑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 에 사람들이 맹종하며 따를까요? 이것은 영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바로 마귀의 영적인 권세인 것이지요. 마귀는 인간을 이렇게 그럴듯한 \"가짜부 활\"로믿게 하여 인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바보로 만드는 것이지요. 마 귀가 잘 쓰는 전술중에 하나가 바로 \"미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 짓을 진짜인 것처럼 \"그럴듯\" 하게 위장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서도 마귀는 하와를 유혹할때 바로 이 \"미혹\" 의 전술을 사용합니다. 5절 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 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라고 그럴듯하게 미혹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주적인 실재적 사건 들을 다루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시 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인하여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직접 마귀와 대적 하시는데 바로 그것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에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살아나신 바 로 \"진짜 부활\" 사건 인것입니다. 그럴듯하고 비슷한 \"가짜 부활\" 이 아 니라 실제적이요 사실적인 \" 진짜 부활 \" 사건을 성경은 어떻게 증거하 고 있는지 이제 함께 보도록 합시다. 언제인가 \"성경은 오류가 없다\" 고 하는 저의 주장에 대해서 우리의 서 한규 동문이 바로 이 누가복음 24장 1절에서 24절의 말씀을 예로 들어가 면서 \" 성경에는 오류가 많다\" 면서 정면으로 저를 반박 하였었는데요. 서 한규 동문의 주장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후 에 나타난 천사들의 숫자가 모두 제각기 틀리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절에는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 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라고 기록하여 \"천사는 1 명\"입니다. 마가복음 16장 3-5에는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에서 돌 을 굴러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돌이 벌써 굴러졌으니 그돌이 심 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힌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라고 역시\"천사가 1명\"으로 기록 되어 있고요, 바로 이 누가 복음서에는 24장 2절-4절에 \" 돌이 무덤에서 굴러 옮기운것 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4 이를 인하여 근 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 지라 라고 \"천사 가 분명 2 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서 한규 동문의 \"성경에는 오류가 많 다\" 는 주장을 뒷 바침 해주는 듯 합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 루터의 말 대로 우리가 성경을 볼때에는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 합니다. 만일 성령님의 은혜와 조명이 없다면 성경을 그릇된 신화나 오류 가 많은 기록쯤으로 착각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요. 대단히 죄송 하지만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잠간 신학적인 용어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성경은 \"유기적으로 영감\" 되어 서 \"절대로 무오\"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유기적인 영감설은 하나님께 서 \"성경저자의 전 인격\"을 사용 하시어서 오류가 없게 만드셨다는 것인 데 \"기계적인 영감설\"관는 다른 개념입니다. \"기계적 영감설\"은 하나님께 서 저자들을 마치 기계처럼 타자 치듯이 사용 하여 오류가 없게 하셨다 는 것인에 그런 주장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마태,마가,누가 복음서의 저자들은 각기 다른 환경 다른 위치에서 이 복 음서들을 들은대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똑같은 주장을 강하 게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 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 바리새인 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에 권력잡은 자들이 예수님의무덤을 서슬이 퍼런 칼을 찬 군 인들을 보내어서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예수의 시체를 도둑 질해 갈가봐 집중적인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긴장된 상황 속에서 이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 하셨다고 소문을 퍼트리다가 걸리 면 그건 당장에 사형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이 여인들의 입을 통하 여 조용히 퍼져 나갔습니다. 사랑하는 8회동문 여러분 ! 주 예수님께서 는 진짜로 부활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절대로 오류가 없습니다. 디 모데 후서 3장 16절에도 바울은 성경에 대하여 증거 하기를 \" 모든 성경 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 하기에 유익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 한규 동문의 \"성경 은 오류가 많다\" 라는 는 주장은 성경을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잘못된 주 장 입니다. 마태복음서에는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위에 앉았다 고 하고있고 마가복음서에는 누가 돌을 굴려 주리오 라고 고민 하고 있는 데 돌이 이미 굴러 졌더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매우 유동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동에번쩍 서에 번쩍하는 천사들이 움직 이니까 두려움에 얼어붙어 부동적이었었던 증언자들은 1명만 볼수가 있 고 또 다른 증언자들은 2명도 볼 수가 있고 또 3명도 볼수가 있는데(몇명 인지는 모르지만),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전달 하시고자 하는 의미는, \"예 수 그리스도 께서는 진짜로 부활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역시 이전에는 \"예수가 진짜로 부활 하셨다\"라고 전하는 사람들 을 잡아다가 사형 시키려고 사형장으로 끌고 가다가 다메섹이라는 언덕에 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자긍심이 매우 강 한 사람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을 목 격 하고서는 그만 꼬꾸라 지고 말았읍니다. 서 한규 동문이 말했었던 직접체험 했었다고 한 여러가지 환상과 꿈등은 매우 위험성이 크다고 보여 짐니다. 꿈은 꿈으로 끝이 나야지 그런것에 자꾸 의미를 두게 되면은 미혹의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주 예수의 역사는 \"그럴듯\" 하게 하시는 법이 없으며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처 럼 명명 백백하게 역사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서 한규 동문은 \" 성령을 직접만나 보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었 다\"고 하였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서 한규 동문에 대하여 끊 임없는 애정을 가지고 합심하여 기도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망상은 대단 히 위험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데 본체는 하나이시며,이중 3 위가 성령 하나님이시고 그 권능과 영광은 성부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동 등 하심니다. 성령 하나님은 지,정,의 를 가지신 인격체 이시며, 그 형체 는 없으신 분이십니다. 형체가 없으신분을 서 한규 동문은 \"보았다\"라고 주장 하였는데, 이런 망상은 무서운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망하게 할 뿐 아니라 자칫 타인의 영혼까지도 망하게 할 수있는 부드럽고 강한 독 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망상에서 서 한규동문이 하루빨 리 자유케 되기를 사랑으로 함께 기도 합시다. 한가지 우리가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이루어 나갈 문제가 또 있습니 다. 그것은 모임에서 가끔씩 술기운에 그러는 지는 몰라도 싫다고 뿌리치 는 여자동문에게 계속해서 \"성추행\"을 가하는 남자 동문이 가끔 있는데 이러한 짓은 죄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부글부글 끓으면서 많 이 참았었는데 앞으로는 절대로 참지 않겠습니다. 이런 일을 보는즉시 사 랑으로 충고 하고 그래도 안 고칠때는 좀더 강하게 권면하여 줍시다. 그 래도 안 고칠때는 절대 때리지 말고 그냥 내 버려 둡시다. 사랑하는 동문 여러분 ! 성경은 절대로 오류가 없읍니다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진짜로 부활 하셨습니다 ! 이 부활의 신앙이 여러분에 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는 바 입니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주님 ! 우리의 만남들을 주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답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천하 인간에게 주 예수 이외에는 다른 이름으 로 구원을 얻을수 있는 이름을 주신적이 없었던,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하시 옵소서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갈릴리 바닷가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요21:1-
갈릴리바닷가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요21:1- 오늘은 전 세계 교회가 기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향해서 천사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16:6).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느니라\"(3,4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16,17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 이 얼마나 장엄한 부활 선언입니까?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듣고 믿어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녀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은 40여일 동안 제자들과 자주 만나셨는데, 21장은 제자들을 공적으로 만나신 세 번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들이나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 외에 열 제자들과 한꺼번에 만나셨고, 나중에는 도마까지 포함한 열 한 제자들과 함께 만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보면 다시 일곱 제자를 찾아오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이 본문 말씀의 내용을 읽을 때마다 참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이 본문을 참 사랑합니다. 읽고 묵상 할 때마다 참 좋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새 몸으로 부활을 하셨으니 그리고 그는 몹시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존재가 되셨으니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오신 예수님, 고기 잡는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시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답지 않게 너무나 인간적이다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이게 좋은 거예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주님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셨다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그런 자리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역시 우리와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진한 감동이 몰려오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6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나 뵌 후에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갈릴리에 가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와서 그들은 여러 날을 아마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오겠다 약속을 안 하셨으니까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러 날 보내다 보니 자연이 아마 좀 적적했던 것도 사실이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갑자기 \'나는 오늘밤 고기를 좀 잡으러 가야 되겠어.\' 이렇게 말을 던지니까 다른 6명의 제자들도 \'우리도 따라 갈게.\' 그래 가지고 이 7명의 제자가 바다로 가서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밤에 나갔습니다. 왜 갑자기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려고 했을까? 이것을 놓고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요. 어떤 분은 \'3년 전에 예수님을 따라 가느라고 인정사정 없이 다 내 버리고 갔던 배요, 그물을 다시 베드로가 손에 들고 배를 타고 갈릴리로 나갔다는 것은 그는 영적으로 이미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병이 들었고 타락했는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지금 잘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차례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심한다든지 타락했다든지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해석이 우리에게는 공감을 느끼게 합니다.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갈릴리에 와서 여러 날을 있으면서 생활비를 충당해야 될 어려움이 직면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황소 같은 장정 7명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빈둥거리는 것, 이것은 쉬운 일 아닙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시골의 정서상 그것은 용납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또 고향에 있는 형제, 친지들 앞에서는 그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언제 오실 지 잘 모르는 판국이니까 \'주님이 오실 때까지 뭔가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나는 고기 잡아 와서 그걸 팔아서라도 살겠다.\' 아마 베드로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해석이 어떤 면에는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신앙은 참 좋아 보이는데 자기 생활에 무책임한 사람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하기 싫으니까 날마다 기도하네, 전도하네, 그런 데 관심을 가지고 매일 소일하는 사람,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 보겠다고 고생을 하고 있는데 자기는 날마다 교회에 와서 빙빙 도는 사람, 저는 정상이라고 보지 않아요. 남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딱한 처지에 있으면서, 3D든 4D든 가리지 아니하고 소매 걷어붙이고 일할 생각을 해야지, \'이 일은 힘들다, 저 일은 남의 눈에 망신스럽다\' 하면서 일은 별로 하지 아니하고 성경공부 열심히 좇아 다니는 사람, 나는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도 그들의 생활은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배를 탔다고 보고, 또 잘 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3년만에 다시 그물을 싣고 바다로 나갔기 때문에 아마 처음에는 손발이 잘 맞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하던 일이라도 한 3년 가까이 손을 떼고 있다가 다시 잡으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요.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갈릴리 고기잡이는 야간 작업인데 그날 따라 이상하게 고기가 잡히지를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땀을 흘리며 그들을 열심히 그물을 던졌다 당겼다 해 보았지만 허탕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심정이 착잡했을까요? 아침이면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항구로 돌아가리라 기대했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새벽녘에 멀리 떨어진 해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사이 우리말로 말하면 \'고기 좀 잡았느냐?\' 이런 소리를 지르는 분이 할 분 서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맥 빠진 소리로 \'아무 것도 못 잡았소.\'하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고 있던 요한이 알아차렸습니다. 물가에서 소리를 지르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 그리고는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주님이 서 계신다.\'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빈 그물을 던지고 있는 갈릴리 바닷가에 와서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상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밤새도록 허탕만 치고 있던 제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그 바닷가에 오셔서 조용히 지켜보고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 여러분, 영적인 상상력이 있으면 최대로 동원해서 한번 그 아름다운 장면, 그 감동적인 장면을 한번 그려보세요. 언제부터 부활의 주님은 그 바닷가에 와서 서 계셨을까? 초저녁부터일까? 밤중부터였을까? 아니면 새벽 바로 그 때 오셨을까? 저는 밤새도록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밤에 계셔도 어두워서 제자들이 볼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또 날이 새어서 제자들이 누가 서 있는 것을 보아도 예수님이 자기를 그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면 제자들은 절대로 발견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예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한 십 리 길을 같이 동행한 일이 있었지요. 두 제자는 낯선 사람이 옆에다가 오기 때문에 같이 동행할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고는 같이 가기로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은 성경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도 느꼈습니다만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는 자만이 발견하게 되 있어요. 나중에 그들이 그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주님은 그 앞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예수님이 꼭 그 시간에 오셨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그물을 던지고 끌어올리고 한 마리도 못 잡은 허탈감을 가지고 또 던지고 아주 힘든 수고를 밤새도록 하고 있는 그 갈릴리 바닷가에 주님은 오래 전에 와서 계셨고 밤새도록 일하고 있는 제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셔도 전혀 잘못된 것 아닙니다. 한번 물어 볼까요? 이 자리에 주님이 계셔요? 안 계셔요? 부활하신 주님 이 자리에 계셔요? 안 계셔요? 언제부터 계시나요? 예배 시작한 10시부터 계시나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그물을 던지는 바닷가에 와 서 계십니다. 제자들이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큰 고기 153마리가 잡혔어요. 조그마한 그물에 153의 고기가 바동거리는 것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신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밤새도록 빈 그물을 가지고 고생한 것은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생각하니 헛수고가 아니었습니다. 빈 그물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홍해가 앞을 가로막는 위기가 있었기에 바다가 갈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목이 타는 갈증을 경험했기에 큰 바위가 갈라지면서 생수가 솟는 놀라운 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이 고생을 했기에 떡 5덩이,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그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을 하였기에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낫게 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빈 그물을 가지고 밤새도록 고통하고 고생하는 것,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헛수고가 아님을 믿습니다. 일시적인 고통은 될 수 있고, 한동안의 눈물과 한동안의 어려움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부활의 주님 만나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고통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당신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까?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 바닷가에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용히 펴놓고 눈을 감고 묵상하면서 읽어보십시오. \'아, 이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이구나. 주의 음성이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빈 그물을 가진 자는 그 음성을 더 빨리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다락방에서 말씀을 나누는 중에 다른 형제들의 입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구나. 저 이야기는 나를 위한 이야기야.\' 손을 털고 배에서 내리라고 하시는지, 아니면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는지,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빈 그물을 채우는 비결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고기 잘 잡는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그래서는 안될 사람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 있게 세상을 살다가 갑자기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빈 그물의 인생을 체험하는 되는 사람이 왕왕이 있습니다. 아마 \'내가 그런 사람이다\'하고 마음에 짚이는 분들은 귀를 기울이세요. 또 나도 그럴 위험이 있다 하는 분들도 귀를 기울이세요. 빈 그물의 인생이 된 다음에 부활의 주님이 옆에 서 계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과거의 돈으로도 명예로도 살 수 없었던 하늘의 부활을 그 빈 그물에 가득히 채우는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 안에 많아요. 저는 좀 극단적인 예가 될 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예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을 때, 4년 동안 많은 강의를 들었습니다. 영문학을 했기 때문에 들어도 될 강의, 들을 필요도 없는 강의, 이것저것 주어서 들었는데 그 많은 강의 중에서, 지금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제 마음에서 깊은 자국을 남긴 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강의가 있어요. 그러므로 \'대학에서 당신 제일 감동 있게 들은 강의가 뭐냐?\' 하면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딱 이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하시는 분들 강의 잘하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있던 오화섭 교수가 한 학기 동안 제가 다니는 성균관대학교에 와서 희곡을 가르쳤습니다. drama를 가르쳤어요. 영문 drama를 가르쳤는데 그 당시 강의 제목이 Arthur Miller가 쓴 \'Death of a Salesman\' 즉, \'세일즈맨의 죽음\'이라고 하는 유명한 희곡을 한 학기 동안 강의했어요. 저는 자랄 때부터 청교도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연극하면 귀를 막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작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자랐어요. 연극이다, 드라마다, 춤이다 이런 소리하면 이것은 완전히 타락된 예술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랐기 때문에 아주 흥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교수가 와서 강의를 하는데 저는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습니다. \'야, 드라마가 이런 것이구나. 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예술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워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제가 비로소 알게 됐지요. 그래 가지고 한 학기 동안 그 시간은 정말로 제 정신 다 빼앗기고 들었어요. 참 감동적인 강의였습니다. 명강의였어요. 그래서 그 분을 늘 기억하고 있는데 그 분에게 그 당시 아주 총명한 딸이 한 분 계셨어요. 연세대를 나오고 그리고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딸인데 \'성야\'라고 하는 희곡을 발표해서 데뷔를 했고, 그 후로 작가로 배우로 방송인으로 또 수필 작가로서 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숱한 소녀들의 편지나 엽서에 그녀의 글귀가 인용될 정도로 사랑 받는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오혜령 씨가 최근에 \'당신 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오니\'라는 책을 내 놓았어요. 그래서 제가 관심이 있어 가지고 사서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그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한번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분이 지금까지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는 제가 그 책을 사 보았어요. 그는 미션 스쿨을 다녔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요. 그러나 흔히 똑똑한 지성인들이 잘 빠지는 길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안 믿으려 하고 신앙생활은 인생의 실패자들이나 매달리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곁길로 가는 그런 사례들이 많이 있어요. 교만한 거지요. \'나는 그물을 던지면 얼마든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 자기 과신 때문에 이 오혜령 씨도 예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금부터 한 20여 년 전 위암과 임파선 암을 진단 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달력의 숫자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나가면서 죽을 날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자가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혈변을 보는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주마다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50송이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반시간 가까이 꽃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순간 그는 정신없이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직감적으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찾아 오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그물이 텅 비어 있을 때 주님께서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왜 죽음의 한복판에까지 따라 오시는 것입니까?\' 그 말을 내 뱉고 나자 그 동안 주님을 나 몰라라 하면서 마음대로 살았던 자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아졌습니다. 며칠동안 화선지에 붓글씨로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수십 개의 양초가 녹아 내릴 때까지 회개하고 또 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기를 반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며 예배를 혼자 드리고 있었는데 온몸의 오한이 덮쳐 왔습니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 왔구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 어깨에 복숭아 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복수로 차 올랐던 배가 꺼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아 계신 주님이 자기를 찾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그물은 고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는 경기도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의 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는 하루 9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에 바친다고 합니다. 그가 쓴 글을 제가 읽다가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 없이 한평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비록 저희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당신을 지금 당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희의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당신께 대한 신뢰 속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각오가 설 때 저희 행위에 방향과 성취가 부여됩니다. 당신은 가장자리에 계시지만 늘 저희에게 그물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던지라고 분부하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날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너무 영감 있고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이와 같은 고백을 해야 될 분들이 이 자리에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이 서 계시는 것을 보자 급히 뭍으로 나왔습니다. 와서 보니 숯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고 그 위에는 떡과 생선이 향긋한 냄새를 피우며 익어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 더러 잡은 고기를 좀 더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고기를 더 많이 숯불에 얹어서 구웠습니다. 준비가 다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13절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예수께서 가셔서, 자기가 직접 가 가지고 숯불 위에 있는 떡을 가져다가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일일이 떡을 갖다 주시고, 그 다음에는 생선도 숯불 위에서 뜨끈뜨끈한 그 생선을 또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 에게 갖다 주고 일곱 제자에게 다 갔다 주셨습니다. 이게 13절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에요? 어린아이를 앉혀 놓고 열심히 먹이려고 하는 어머니 같은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밤새도록 고기 잡다가 지치고 배고프고 한기를 느끼는 제자들에게 이것만큼 반가운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아침해가 두둥실 떠오르는 바닷가에서 따뜻하게 데운 떡과 생선으로 배를 불리면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해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리고 긴장했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온유하신 부활의 주님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그 시간을 보내는 제자들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참 좋은 예수님이시다, 부활의 주님에게서 느끼는 인간미, 참 인간적이시다 하고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인간적이다. 부활하기 이 전에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지신 주님이 이런 행동을 하셨다면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기 구워서 갖다 주시고, 떡 구워서 갖다 주시고, 너무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이 이런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분이 지금 내 곁에 계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4장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그래요. 우리의 연약함을 다 동정합니다. 배고픈 것 아닙니다. 지친 것 압니다. 밤새도록 잠자지 못한 것 압니다. 실패로 인해서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압니다. 기분 좋은 것도 없고 마음이 끌리는 것도 없는 지친 인생임을 우리 주님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 이렇게 말씀하시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따끈한 떡을 가지고 따끈한 생선을 가지고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린도후서 9장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얼마나 아름다워요? 여러분 만약에 상황을 좀 바꾸어서 예수님이 이렇게 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아 녹초가 되어 가지고 지친 제자들이 물에서 올라오는데 예수님께서 근엄한 얼굴로 \'자, 전부 이리 모여. 나하고 기도하자.\' 만약 그랬다면 어떨까요? 또,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요. \'너희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잖아? 분명히 이유가 있을 꺼야. 나하고 그 이유를 좀 분석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자. 전부 모여.\' 아마 그랬다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나 그 분위기가 살벌할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잖아요? 가뜩이나 베드로와 같이 며칠 전에 자기를 가장 중요한 순간에 3번이나 부인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할 말씀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요즈음 말로 손 좀 보아야 할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밤새도록 떨었던지 못 먹었던지 상관 않고 \'베드로, 이리 좀 와. 너 양심이 있냐? 없냐?\' 이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얼마든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고 싶은 모든 말씀을 가슴에 묻어 두시고 예수님은 부지런히 떡을 떼어서 제자들을 먹이시고 생선을 구워서 먹이시고, 추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려고 애를 쓰시는 모습,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여러분, 사람에게 영은 육보다 중요합니다. 사실입니다. 영적인 문제는 육적인 문제를 앞섭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를 다루기를 원하는 사람일수록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느끼고 있는 요구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배가 고픕니까? 먹을 거 줘야 해요. 병으로 고통 합니까? 그들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자세를 가져야 돼요. 우리가 거룩한 일을 다루면 다룰수록 좀더 인간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장황한 설교?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잠을 자지 못한 자에게 성경공부? 그렇게 감동적인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상당히 사납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런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좀더 인간적이 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람이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여유가 있다, 정말 훈훈하다, 포근하다, 이렇게 느끼지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밤새 헛수고를 하고 있는 제자들을 바닷가에 서서 지켜보신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빈 그물을 가득히 채워 주신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지치고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 숯불에 떡을 굽고 고기를 구워 일일이 먹여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연약한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해 너무나 인간적인 부활의 주님을 이제 우리는 한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빈 그물을 가지고 땀을 흘릴 때든지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 올 때나 항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혼자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좋으신 주님, 어떻게 말하면 너무나 인간적인 주님, 이 분을 우리는 모시고 이 험한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외로울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했습니까? 혼자 교통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픕니까? 혼자 흐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내 빈 그물을 던지며 고생하는 그 바닷가에 서 계십니다. 이 자리에 실패하고 빈 그물을 계시는 분 있나요? 이 가운데 배고픈 분이 계시나요? 이 가운데 잠자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는 자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만나세요.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오스왈드 샌더스가 소개한 우리가 잘 아는 시 하나 있지요? \'모래 위의 발자국\' 열 번, 백 번 들어도 은혜스러운 시가 되어서 제가 다시 한번 전문을 놓고 읽어보았습니다. 여러분, 눈을 조용히 감으시고 한번 감상을 해 보세요. 제가 목소리는 신통치 않지만 한번 읽어 드릴게요. 참 은혜스러운 시 아닙니까?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 위에/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쌍은 내 것 또 한 쌍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그 곳에서/ 내 인생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인생 길에는 오직 한 쌍의 발자국만 보였네/ 그 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펐던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러나 보세요/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그때 거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나요?\'/ 주님께서 대답하셨다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여,/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너를 조금도 떠나지 않았단다./ 너의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쌍의 발자국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었느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너무 좋으신 주님, 부활의 주님, 영원히 살아 계신 주님, 우리 모두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심히 지쳐 걷지 못할 때에는 우리를 등에 업고 걸으시는 주님, 그분이 오늘 우리의 주님이시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생명을 다시 한번 가슴에 불태우면서 우리 매일매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릴리 바닷가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요21:1-14
갈릴리 바닷가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요21:1-14 2004-03-14 00:32:02 read : 145 오늘은 전 세계 교회가 기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향해서 천사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16:6).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느니라\"(3,4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16,17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 이 얼마나 장엄한 부활 선언입니까?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듣고 믿어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녀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은 40여일 동안 제자들과 자주 만나셨는데, 21장은 제자들을 공적으로 만나신 세 번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들이나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 외에 열 제자들과 한꺼번에 만나셨고, 나중에는 도마까지 포함한 열 한 제자들과 함께 만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보면 다시 일곱 제자를 찾아오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이 본문 말씀의 내용을 읽을 때마다 참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이 본문을 참 사랑합니다. 읽고 묵상 할 때마다 참 좋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새 몸으로 부활을 하셨으니 그리고 그는 몹시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존재가 되셨으니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오신 예수님, 고기 잡는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시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답지 않게 너무나 인간적이다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이게 좋은 거예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주님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셨다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그런 자리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역시 우리와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진한 감동이 몰려오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6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나 뵌 후에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갈릴리에 가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와서 그들은 여러 날을 아마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오겠다 약속을 안 하셨으니까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러 날 보내다 보니 자연이 아마 좀 적적했던 것도 사실이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갑자기 \'나는 오늘밤 고기를 좀 잡으러 가야 되겠어.\' 이렇게 말을 던지니까 다른 6명의 제자들도 \'우리도 따라 갈게.\' 그래 가지고 이 7명의 제자가 바다로 가서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밤에 나갔습니다. 왜 갑자기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려고 했을까? 이것을 놓고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요. 어떤 분은 \'3년 전에 예수님을 따라 가느라고 인정사정 없이 다 내 버리고 갔던 배요, 그물을 다시 베드로가 손에 들고 배를 타고 갈릴리로 나갔다는 것은 그는 영적으로 이미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병이 들었고 타락했는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지금 잘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차례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심한다든지 타락했다든지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해석이 우리에게는 공감을 느끼게 합니다.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갈릴리에 와서 여러 날을 있으면서 생활비를 충당해야 될 어려움이 직면했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황소 같은 장정 7명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빈둥거리는 것, 이것은 쉬운 일 아닙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시골의 정서상 그것은 용납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또 고향에 있는 형제, 친지들 앞에서는 그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언제 오실 지 잘 모르는 판국이니까 \'주님이 오실 때까지 뭔가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나는 고기 잡아 와서 그걸 팔아서라도 살겠다.\' 아마 베드로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해석이 어떤 면에는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신앙은 참 좋아 보이는데 자기 생활에 무책임한 사람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하기 싫으니까 날마다 기도하네, 전도하네, 그런 데 관심을 가지고 매일 소일하는 사람,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 보겠다고 고생을 하고 있는데 자기는 날마다 교회에 와서 빙빙 도는 사람, 저는 정상이라고 보지 않아요. 남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딱한 처지에 있으면서, 3D든 4D든 가리지 아니하고 소매 걷어붙이고 일할 생각을 해야지, \'이 일은 힘들다, 저 일은 남의 눈에 망신스럽다\' 하면서 일은 별로 하지 아니하고 성경공부 열심히 좇아 다니는 사람, 나는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도 그들의 생활은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배를 탔다고 보고, 또 잘 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3년만에 다시 그물을 싣고 바다로 나갔기 때문에 아마 처음에는 손발이 잘 맞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하던 일이라도 한 3년 가까이 손을 떼고 있다가 다시 잡으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요.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갈릴리 고기잡이는 야간 작업인데 그날 따라 이상하게 고기가 잡히지를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땀을 흘리며 그들을 열심히 그물을 던졌다 당겼다 해 보았지만 허탕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심정이 착잡했을까요? 아침이면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항구로 돌아가리라 기대했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새벽녘에 멀리 떨어진 해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요사이 우리말로 말하면 \'고기 좀 잡았느냐?\' 이런 소리를 지르는 분이 할 분 서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맥 빠진 소리로 \'아무 것도 못 잡았소.\'하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고 있던 요한이 알아차렸습니다. 물가에서 소리를 지르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 그리고는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주님이 서 계신다.\'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빈 그물을 던지고 있는 갈릴리 바닷가에 와서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상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밤새도록 허탕만 치고 있던 제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그 바닷가에 오셔서 조용히 지켜보고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 여러분, 영적인 상상력이 있으면 최대로 동원해서 한번 그 아름다운 장면, 그 감동적인 장면을 한번 그려보세요. 언제부터 부활의 주님은 그 바닷가에 와서 서 계셨을까? 초저녁부터일까? 밤중부터였을까? 아니면 새벽 바로 그 때 오셨을까? 저는 밤새도록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밤에 계셔도 어두워서 제자들이 볼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또 날이 새어서 제자들이 누가 서 있는 것을 보아도 예수님이 자기를 그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면 제자들은 절대로 발견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예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한 십 리 길을 같이 동행한 일이 있었지요. 두 제자는 낯선 사람이 옆에다가 오기 때문에 같이 동행할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고는 같이 가기로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은 성경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도 느꼈습니다만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는 자만이 발견하게 되 있어요. 나중에 그들이 그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주님은 그 앞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예수님이 꼭 그 시간에 오셨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그물을 던지고 끌어올리고 한 마리도 못 잡은 허탈감을 가지고 또 던지고 아주 힘든 수고를 밤새도록 하고 있는 그 갈릴리 바닷가에 주님은 오래 전에 와서 계셨고 밤새도록 일하고 있는 제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셔도 전혀 잘못된 것 아닙니다. 한번 물어 볼까요? 이 자리에 주님이 계셔요? 안 계셔요? 부활하신 주님 이 자리에 계셔요? 안 계셔요? 언제부터 계시나요? 예배 시작한 10시부터 계시나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그물을 던지는 바닷가에 와 서 계십니다. 제자들이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큰 고기 153마리가 잡혔어요. 조그마한 그물에 153의 고기가 바동거리는 것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신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밤새도록 빈 그물을 가지고 고생한 것은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생각하니 헛수고가 아니었습니다. 빈 그물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홍해가 앞을 가로막는 위기가 있었기에 바다가 갈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목이 타는 갈증을 경험했기에 큰 바위가 갈라지면서 생수가 솟는 놀라운 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이 고생을 했기에 떡 5덩이,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그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을 하였기에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낫게 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빈 그물을 가지고 밤새도록 고통하고 고생하는 것,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헛수고가 아님을 믿습니다. 일시적인 고통은 될 수 있고, 한동안의 눈물과 한동안의 어려움은 되었을지 모르지만 부활의 주님 만나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고통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당신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밤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까?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 바닷가에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용히 펴놓고 눈을 감고 묵상하면서 읽어보십시오. \'아, 이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이구나. 주의 음성이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빈 그물을 가진 자는 그 음성을 더 빨리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다락방에서 말씀을 나누는 중에 다른 형제들의 입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구나. 저 이야기는 나를 위한 이야기야.\' 손을 털고 배에서 내리라고 하시는지, 아니면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는지,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빈 그물을 채우는 비결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고기 잘 잡는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그래서는 안될 사람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 있게 세상을 살다가 갑자기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빈 그물의 인생을 체험하는 되는 사람이 왕왕이 있습니다. 아마 \'내가 그런 사람이다\'하고 마음에 짚이는 분들은 귀를 기울이세요. 또 나도 그럴 위험이 있다 하는 분들도 귀를 기울이세요. 빈 그물의 인생이 된 다음에 부활의 주님이 옆에 서 계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과거의 돈으로도 명예로도 살 수 없었던 하늘의 부활을 그 빈 그물에 가득히 채우는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 안에 많아요. 저는 좀 극단적인 예가 될 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예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을 때, 4년 동안 많은 강의를 들었습니다. 영문학을 했기 때문에 들어도 될 강의, 들을 필요도 없는 강의, 이것저것 주어서 들었는데 그 많은 강의 중에서, 지금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제 마음에서 깊은 자국을 남긴 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강의가 있어요. 그러므로 \'대학에서 당신 제일 감동 있게 들은 강의가 뭐냐?\' 하면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딱 이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하시는 분들 강의 잘하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있던 오화섭 교수가 한 학기 동안 제가 다니는 성균관대학교에 와서 희곡을 가르쳤습니다. drama를 가르쳤어요. 영문 drama를 가르쳤는데 그 당시 강의 제목이 Arthur Miller가 쓴 \'Death of a Salesman\' 즉, \'세일즈맨의 죽음\'이라고 하는 유명한 희곡을 한 학기 동안 강의했어요. 저는 자랄 때부터 청교도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연극하면 귀를 막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작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자랐어요. 연극이다, 드라마다, 춤이다 이런 소리하면 이것은 완전히 타락된 예술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랐기 때문에 아주 흥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교수가 와서 강의를 하는데 저는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습니다. \'야, 드라마가 이런 것이구나. 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예술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워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제가 비로소 알게 됐지요. 그래 가지고 한 학기 동안 그 시간은 정말로 제 정신 다 빼앗기고 들었어요. 참 감동적인 강의였습니다. 명강의였어요. 그래서 그 분을 늘 기억하고 있는데 그 분에게 그 당시 아주 총명한 딸이 한 분 계셨어요. 연세대를 나오고 그리고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딸인데 \'성야\'라고 하는 희곡을 발표해서 데뷔를 했고, 그 후로 작가로 배우로 방송인으로 또 수필 작가로서 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숱한 소녀들의 편지나 엽서에 그녀의 글귀가 인용될 정도로 사랑 받는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오혜령 씨가 최근에 \'당신 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오니\'라는 책을 내 놓았어요. 그래서 제가 관심이 있어 가지고 사서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그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한번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분이 지금까지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는 제가 그 책을 사 보았어요. 그는 미션 스쿨을 다녔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요. 그러나 흔히 똑똑한 지성인들이 잘 빠지는 길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안 믿으려 하고 신앙생활은 인생의 실패자들이나 매달리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곁길로 가는 그런 사례들이 많이 있어요. 교만한 거지요. \'나는 그물을 던지면 얼마든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 자기 과신 때문에 이 오혜령 씨도 예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금부터 한 20여 년 전 위암과 임파선 암을 진단 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달력의 숫자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나가면서 죽을 날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자가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혈변을 보는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주마다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50송이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반시간 가까이 꽃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순간 그는 정신없이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직감적으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찾아 오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그물이 텅 비어 있을 때 주님께서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왜 죽음의 한복판에까지 따라 오시는 것입니까?\' 그 말을 내 뱉고 나자 그 동안 주님을 나 몰라라 하면서 마음대로 살았던 자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아졌습니다. 며칠동안 화선지에 붓글씨로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수십 개의 양초가 녹아 내릴 때까지 회개하고 또 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기를 반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며 예배를 혼자 드리고 있었는데 온몸의 오한이 덮쳐 왔습니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 왔구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 어깨에 복숭아 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복수로 차 올랐던 배가 꺼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아 계신 주님이 자기를 찾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그물은 고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는 경기도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의 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는 하루 9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에 바친다고 합니다. 그가 쓴 글을 제가 읽다가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 없이 한평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 비록 저희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당신을 지금 당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희의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당신께 대한 신뢰 속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각오가 설 때 저희 행위에 방향과 성취가 부여됩니다. 당신은 가장자리에 계시지만 늘 저희에게 그물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던지라고 분부하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날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너무 영감 있고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이와 같은 고백을 해야 될 분들이 이 자리에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이 서 계시는 것을 보자 급히 뭍으로 나왔습니다. 와서 보니 숯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고 그 위에는 떡과 생선이 향긋한 냄새를 피우며 익어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 더러 잡은 고기를 좀 더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고기를 더 많이 숯불에 얹어서 구웠습니다. 준비가 다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13절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예수께서 가셔서, 자기가 직접 가 가지고 숯불 위에 있는 떡을 가져다가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일일이 떡을 갖다 주시고, 그 다음에는 생선도 숯불 위에서 뜨끈뜨끈한 그 생선을 또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 에게 갖다 주고 일곱 제자에게 다 갔다 주셨습니다. 이게 13절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에요? 어린아이를 앉혀 놓고 열심히 먹이려고 하는 어머니 같은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밤새도록 고기 잡다가 지치고 배고프고 한기를 느끼는 제자들에게 이것만큼 반가운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아침해가 두둥실 떠오르는 바닷가에서 따뜻하게 데운 떡과 생선으로 배를 불리면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해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리고 긴장했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온유하신 부활의 주님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그 시간을 보내는 제자들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참 좋은 예수님이시다, 부활의 주님에게서 느끼는 인간미, 참 인간적이시다 하고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인간적이다. 부활하기 이 전에 우리와 똑같은 몸을 가지신 주님이 이런 행동을 하셨다면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기 구워서 갖다 주시고, 떡 구워서 갖다 주시고, 너무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이 이런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분이 지금 내 곁에 계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는 것을 느끼는 것,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4장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그래요. 우리의 연약함을 다 동정합니다. 배고픈 것 아닙니다. 지친 것 압니다. 밤새도록 잠자지 못한 것 압니다. 실패로 인해서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압니다. 기분 좋은 것도 없고 마음이 끌리는 것도 없는 지친 인생임을 우리 주님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 이렇게 말씀하시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따끈한 떡을 가지고 따끈한 생선을 가지고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린도후서 9장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얼마나 아름다워요? 여러분 만약에 상황을 좀 바꾸어서 예수님이 이렇게 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아 녹초가 되어 가지고 지친 제자들이 물에서 올라오는데 예수님께서 근엄한 얼굴로 \'자, 전부 이리 모여. 나하고 기도하자.\' 만약 그랬다면 어떨까요? 또,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요. \'너희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잖아? 분명히 이유가 있을 꺼야. 나하고 그 이유를 좀 분석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자. 전부 모여.\' 아마 그랬다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나 그 분위기가 살벌할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잖아요? 가뜩이나 베드로와 같이 며칠 전에 자기를 가장 중요한 순간에 3번이나 부인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할 말씀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요즈음 말로 손 좀 보아야 할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밤새도록 떨었던지 못 먹었던지 상관 않고 \'베드로, 이리 좀 와. 너 양심이 있냐? 없냐?\' 이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얼마든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고 싶은 모든 말씀을 가슴에 묻어 두시고 예수님은 부지런히 떡을 떼어서 제자들을 먹이시고 생선을 구워서 먹이시고, 추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려고 애를 쓰시는 모습,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여러분, 사람에게 영은 육보다 중요합니다. 사실입니다. 영적인 문제는 육적인 문제를 앞섭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를 다루기를 원하는 사람일수록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느끼고 있는 요구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배가 고픕니까? 먹을 거 줘야 해요. 병으로 고통 합니까? 그들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자세를 가져야 돼요. 우리가 거룩한 일을 다루면 다룰수록 좀더 인간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장황한 설교?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잠을 자지 못한 자에게 성경공부? 그렇게 감동적인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상당히 사납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런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좀더 인간적이 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람이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여유가 있다, 정말 훈훈하다, 포근하다, 이렇게 느끼지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밤새 헛수고를 하고 있는 제자들을 바닷가에 서서 지켜보신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빈 그물을 가득히 채워 주신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지치고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 숯불에 떡을 굽고 고기를 구워 일일이 먹여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연약한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해 너무나 인간적인 부활의 주님을 이제 우리는 한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가 빈 그물을 가지고 땀을 흘릴 때든지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 올 때나 항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혼자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좋으신 주님, 어떻게 말하면 너무나 인간적인 주님, 이 분을 우리는 모시고 이 험한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외로울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했습니까? 혼자 교통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픕니까? 혼자 흐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내 빈 그물을 던지며 고생하는 그 바닷가에 서 계십니다. 이 자리에 실패하고 빈 그물을 계시는 분 있나요? 이 가운데 배고픈 분이 계시나요? 이 가운데 잠자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는 자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만나세요.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오스왈드 샌더스가 소개한 우리가 잘 아는 시 하나 있지요? \'모래 위의 발자국\' 열 번, 백 번 들어도 은혜스러운 시가 되어서 제가 다시 한번 전문을 놓고 읽어보았습니다. 여러분, 눈을 조용히 감으시고 한번 감상을 해 보세요. 제가 목소리는 신통치 않지만 한번 읽어 드릴게요. 참 은혜스러운 시 아닙니까?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 위에/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 쌍은 내 것 또 한 쌍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그 곳에서/ 내 인생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인생 길에는 오직 한 쌍의 발자국만 보였네/ 그 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펐던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러나 보세요/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그때 거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나요?\'/ 주님께서 대답하셨다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여,/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너를 조금도 떠나지 않았단다./ 너의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쌍의 발자국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었느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너무 좋으신 주님, 부활의 주님, 영원히 살아 계신 주님, 우리 모두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심히 지쳐 걷지 못할 때에는 우리를 등에 업고 걸으시는 주님, 그분이 오늘 우리의 주님이시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생명을 다시 한번 가슴에 불태우면서 우리 매일매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계신 부활의 주님/ 요21:1-14/ 옥한흠 목사/ 2008-04-12.
갈릴리 바닷가에서 계신 부활의 주님 요21:1-14 오늘은 전 세계 교회가 기뻐하는 부활 주일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 들을 향해서 천사들은 이렇게 외쳤 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 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 라\\\"(막16:6).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 니까?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 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느니 라\\\"(3,4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 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 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 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 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 라\\\"(16,17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 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 이 얼마나 장엄한 부활 선언입니까?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듣고 믿어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 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녀 된 것 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겠습니 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 은 40여일 동안 제자들과 자주 만나 셨는데, 21장은 제자들을 공적으로 만나신 세 번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들이나 베 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 외에 열 제자들과 한꺼번에 만나셨고, 나중 에는 도마까지 포함한 열 한 제자들 과 함께 만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보면 다시 일곱 제자를 찾아 오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이 본문 말씀의 내용을 읽을 때마다 참 마음이 따뜻 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의미에 서 저는 이 본문을 참 사랑합니다. 읽고 묵상 할 때마다 참 좋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새 몸으로 부활을 하셨으니 그리고 그는 몹시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존재가 되셨으 니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같은 사 람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것이 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오신 예수님, 고기 잡는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 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시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 답지 않게 너무나 인간적이다 느낌 을 받습니다. 저는 이게 좋은 거예 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함 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는 주님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셨 다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그 런 자리에 계시는 분이 아니고 역시 우리와 함께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 는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 이 이야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 다. 그러니까 자연히 진한 감동이 몰려오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6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만 나 뵌 후에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갈 릴리에 가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와서 그 들은 여러 날을 아마 무료하게 보내 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오겠다 약속을 안 하셨으니 까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는 기다 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러 날 보내다 보니 자연이 아마 좀 적 적했던 것도 사실이고 또 다른 이유 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갑자기 \\\'나는 오늘밤 고기를 좀 잡으러 가야 되겠 어.\\\' 이렇게 말을 던지니까 다른 6 명의 제자들도 \\\'우리도 따라 갈게.\\\' 그래 가지고 이 7명의 제자가 바다 로 가서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밤 에 나갔습니다. 왜 갑자기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가려고 했을까? 이것을 놓고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요. 어떤 분은 \\\'3 년 전에 예수님을 따라 가느라고 인 정사정 없이 다 내 버리고 갔던 배 요, 그물을 다시 베드로가 손에 들 고 배를 타고 갈릴리로 나갔다는 것 은 그는 영적으로 이미 잘못되어 있 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영적으로 병이 들었고 타 락했는지도 모른다. 베드로는 지금 잘못하고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 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해석을 받아들이 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 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차례 만 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심한다든지 타락했다든지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런 해 석이 우리에게는 공감을 느끼게 합 니다.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갈릴 리에 와서 여러 날을 있으면서 생활 비를 충당해야 될 어려움이 직면했 을지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입니다. 황소 같은 장정 7명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빈둥거리는 것, 이것은 쉬운 일 아닙니다. 그리 고 조그마한 시골의 정서상 그것은 용납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또 고 향에 있는 형제, 친지들 앞에서는 그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언제 오 실 지 잘 모르는 판국이니까 \\\'주님 이 오실 때까지 뭔가 일을 해서 먹 고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나 는 고기 잡아 와서 그걸 팔아서라도 살겠다.\\\' 아마 베드로가 이렇게 생 각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 니다. 저는 이 해석이 어떤 면에는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신앙은 참 좋 아 보이는데 자기 생활에 무책임한 사람들,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 하기 싫으니까 날마다 기도하네, 전 도하네, 그런 데 관심을 가지고 매 일 소일하는 사람,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해서라 도 살아 보겠다고 고생을 하고 있는 데 자기는 날마다 교회에 와서 빙빙 도는 사람, 저는 정상이라고 보지 않아요. 남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 는 딱한 처지에 있으면서, 3D든 4D 든 가리지 아니하고 소매 걷어붙이 고 일할 생각을 해야지, \\\'이 일은 힘들다, 저 일은 남의 눈에 망신스 럽다\\\' 하면서 일은 별로 하지 아니 하고 성경공부 열심히 좇아 다니는 사람, 나는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 각합니다.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도 그들의 생활은 그들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 습니까? 그러므로 배를 탔다고 보 고, 또 잘 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들은 3년만에 다시 그물을 싣고 바 다로 나갔기 때문에 아마 처음에는 손발이 잘 맞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잘하던 일이라도 한 3년 가 까이 손을 떼고 있다가 다시 잡으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요.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갈릴리 고기잡 이는 야간 작업인데 그날 따라 이상 하게 고기가 잡히지를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땀을 흘리며 그들을 열심 히 그물을 던졌다 당겼다 해 보았지 만 허탕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심정이 착잡했을까요? 아침이면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 며 항구로 돌아가리라 기대했던 꿈 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새벽녘에 멀 리 떨어진 해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애들아 너희에 게 고기가 있느냐?\\\' 요사이 우리말 로 말하면 \\\'고기 좀 잡았느냐?\\\' 이 런 소리를 지르는 분이 할 분 서 계 셨습니다. 제자들은 맥 빠진 소리로 \\\'아무 것도 못 잡았소.\\\'하고 대답했 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특 별히 받고 있던 요한이 알아차렸습 니다. 물가에서 소리를 지르고 계시 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 그리고는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주님이 서 계신다.\\\'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 으면서 여러 가지 느끼는 것이 많습 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빈 그물을 던지고 있는 갈릴리 바닷가에 와서 서 계신 부활의 주님, 상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얼마 나 감동적입니까? 밤새도록 허탕만 치고 있던 제자들이 구슬땀을 흘리 고 있는 그 바닷가에 오셔서 조용히 지켜보고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 여러분, 영적인 상상력이 있으면 최 대로 동원해서 한번 그 아름다운 장 면, 그 감동적인 장면을 한번 그려 보세요. 언제부터 부활의 주님은 그 바닷가에 와서 서 계셨을까? 초저녁 부터일까? 밤중부터였을까? 아니면 새벽 바로 그 때 오셨을까? 저는 밤 새도록 주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밤 에 계셔도 어두워서 제자들이 볼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또 날이 새어서 제자들이 누가 서 있는 것을 보아도 예수님이 자기를 그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면 제자들은 절 대로 발견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예를 갖고 있지 않 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한 십 리 길을 같이 동행한 일이 있었 지요. 두 제자는 낯선 사람이 옆에 다가 오기 때문에 같이 동행할 사람 인가 보다 생각하고는 같이 가기로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들은 성경 말씀을 들었고, 그 말 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 동도 느꼈습니다만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는 자만이 발견하게 되 있어요. 나중에 그들이 그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주님은 그 앞에 계시 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예수님이 꼭 그 시간에 오셨다 그렇게 말하고 싶 지 않아요. 이미 그물을 던지고 끌 어올리고 한 마리도 못 잡은 허탈감 을 가지고 또 던지고 아주 힘든 수 고를 밤새도록 하고 있는 그 갈릴리 바닷가에 주님은 오래 전에 와서 계 셨고 밤새도록 일하고 있는 제자들 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 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으셔도 전 혀 잘못된 것 아닙니다. 한번 물어 볼까요? 이 자리에 주님이 계셔요? 안 계셔요? 부활하신 주님 이 자리 에 계셔요? 안 계셔요? 언제부터 계시나요? 예배 시작한 10시부터 계 시나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그물을 던지는 바닷가에 와 서 계십니다. 제자들이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 리하면 잡으리라.\\\'고 지시하셨습니 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큰 고기 153마리가 잡혔어요. 조그마한 그물 에 153의 고기가 바동거리는 것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신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 은 찢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밤새도록 빈 그물을 가지고 고생한 것은 나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생각하니 헛수고가 아니었습니 다. 빈 그물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홍해 가 앞을 가로막는 위기가 있었기에 바다가 갈라지는 체험을 할 수 있었 습니다. 목이 타는 갈증을 경험했기 에 큰 바위가 갈라지면서 생수가 솟 는 놀라운 일을 볼 수가 있었습니 다. 먹을 것이 없이 고생을 했기에 떡 5덩이,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그 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12년을 혈 루증으로 고생을 하였기에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낫게 되는 기 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빈 그물을 가지고 밤새도록 고통하고 고생하는 것, 부 활의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절 대로 헛수고가 아님을 믿습니다. 일 시적인 고통은 될 수 있고, 한동안 의 눈물과 한동안의 어려움은 되었 을지 모르지만 부활의 주님 만나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고통이라고 우리 는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당신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밤새도록 수 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습니까?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 바 닷가에 서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엇 이라고 하시는지 들을 수 있어야 합 니다. 기도하면 여러분의 마음에 주 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하나님 의 말씀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용 히 펴놓고 눈을 감고 묵상하면서 읽 어보십시오. \\\'아, 이 말씀이 바로 나 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이구나. 주의 음성이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빈 그물을 가진 자는 그 음성을 더 빨리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다락방 에서 말씀을 나누는 중에 다른 형제 들의 입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 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구나. 저 이야기는 나를 위한 이야기야.\\\' 손을 털고 배에서 내리라고 하시는 지, 아니면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고 하시는지,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의 빈 그물을 채우는 비결입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고기 잘 잡는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 지 그래서는 안될 사람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자신 있게 세상을 살 다가 갑자기 어느 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빈 그물의 인생을 체험 하는 되는 사람이 왕왕이 있습니다. 아마 \\\'내가 그런 사람이다\\\'하고 마 음에 짚이는 분들은 귀를 기울이세 요. 또 나도 그럴 위험이 있다 하는 분들도 귀를 기울이세요. 빈 그물의 인생이 된 다음에 부활의 주님이 옆 에 서 계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리고 그 분을 통해서 과거의 돈으로 도 명예로도 살 수 없었던 하늘의 부활을 그 빈 그물에 가득히 채우는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이 교회 안에 많아요. 저는 좀 극단적인 예가 될 지 모 르지만, 한 사람의 예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 니고 있었을 때, 4년 동안 많은 강 의를 들었습니다. 영문학을 했기 때 문에 들어도 될 강의, 들을 필요도 없는 강의, 이것저것 주어서 들었는 데 그 많은 강의 중에서, 지금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제 마음에 서 깊은 자국을 남긴 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강의가 있어요. 그러 므로 \\\'대학에서 당신 제일 감동 있 게 들은 강의가 뭐냐?\\\' 하면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딱 이것이다 하 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수로 서 강의를 하시는 분들 강의 잘하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있 던 오화섭 교수가 한 학기 동안 제 가 다니는 성균관대학교에 와서 희 곡을 가르쳤습니다. drama를 가르 쳤어요. 영문 drama를 가르쳤는데 그 당시 강의 제목이 Arthur Miller 가 쓴 \\\'Death of a Salesman\\\' 즉, \\\' 세일즈맨의 죽음\\\'이라고 하는 유명 한 희곡을 한 학기 동안 강의했어 요. 저는 자랄 때부터 청교도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연극하면 귀를 막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작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자랐어요. 연극이다, 드 라마다, 춤이다 이런 소리하면 이것 은 완전히 타락된 예술이라고 생각 을 하고 자랐기 때문에 아주 흥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교수가 와서 강의를 하는데 저는 완전히 매료되 어 버렸습니다. \\\'야, 드라마가 이런 것이구나. 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것 이구나. 예술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 워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제가 비로 소 알게 됐지요. 그래 가지고 한 학 기 동안 그 시간은 정말로 제 정신 다 빼앗기고 들었어요. 참 감동적인 강의였습니다. 명강의였어요. 그래서 그 분을 늘 기억하고 있 는데 그 분에게 그 당시 아주 총명 한 딸이 한 분 계셨어요. 연세대를 나오고 그리고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딸인데 \\\'성야\\\'라고 하 는 희곡을 발표해서 데뷔를 했고, 그 후로 작가로 배우로 방송인으로 또 수필 작가로서 활동을 아주 활발 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숱한 소녀들 의 편지나 엽서에 그녀의 글귀가 인 용될 정도로 사랑 받는 작가였습니 다. 그런데 이 오혜령 씨가 최근에 \\\'당신 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오니\\\' 라는 책을 내 놓았어요. 그래서 제 가 관심이 있어 가지고 사서 보았습 니다. 오래 전에 그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 식을 한번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분이 지금까지 살아 계시는구 나.\\\' 하고는 제가 그 책을 사 보았 어요. 그는 미션 스쿨을 다녔기 때 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요. 그러나 흔히 똑똑한 지성인들이 잘 빠지는 길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살아 계심 을 안 믿으려 하고 신앙생활은 인생 의 실패자들이나 매달리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곁길로 가는 그런 사례들 이 많이 있어요. 교만한 거지요. \\\'나 는 그물을 던지면 얼마든지 많은 고 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 자기 과 신 때문에 이 오혜령 씨도 예수 없 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 자기 지금부터 한 20여 년 전 위암 과 임파선 암을 진단 받고 3개월 시 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 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달력의 숫자 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나가면 서 죽을 날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 고 있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자 가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혈변을 보는 고 통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 주마다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었 다고 합니다. 그날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50송이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반시간 가까이 꽃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 고 합니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 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그 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 을 느꼈습니다. 순간 그는 정신없이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직감적 으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 기를 찾아 오셨다는 것을 느꼈습니 다. 그의 그물이 텅 비어 있을 때 주님께서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 까? 왜 죽음의 한복판에까지 따라 오시는 것입니까?\\\' 그 말을 내 뱉고 나자 그 동안 주님을 나 몰라라 하 면서 마음대로 살았던 자기 죄에 대 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어디서 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 아졌습니다. 며칠동안 화선지에 붓 글씨로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수 십 개의 양초가 녹아 내릴 때까지 회개하고 또 했습니다. 그렇게 회개 하기를 반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이 었습니다. 그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 며 예배를 혼자 드리고 있었는데 온 몸의 오한이 덮쳐 왔습니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 왔구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불깃 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아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깨에 복숭아 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습니 다. 또 복수로 차 올랐던 배가 꺼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아 계신 주님이 자기를 찾으신 것을 알았습 니다. 그의 그물은 고기로 가득 차 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는 경기도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서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 의 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는 하루 9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에 바친다고 합니다. 그가 쓴 글을 제가 읽다가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 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 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 없이 한평 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 비록 저희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당신을 지금 당 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 희의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당 신께 대한 신뢰 속에서 새로 시작하 려는 각오가 설 때 저희 행위에 방 향과 성취가 부여됩니다. 당신은 가 장자리에 계시지만 늘 저희에게 그 물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던지라고 분부하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날 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너무 영감 있고 아름다운 고백이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이와 같은 고백을 해야 될 분들이 이 자 리에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이 서 계시 는 것을 보자 급히 뭍으로 나왔습니 다. 와서 보니 숯불이 이글이글 타 고 있었고 그 위에는 떡과 생선이 향긋한 냄새를 피우며 익어가고 있 었다. 예수님은 베드로 더러 잡은 고기를 좀 더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 니다. 고기를 더 많이 숯불에 얹어 서 구웠습니다. 준비가 다 되자 예 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13 절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예수께서 가셔서, 자 기가 직접 가 가지고 숯불 위에 있 는 떡을 가져다가 베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일일이 떡을 갖다 주시고, 그 다음에는 생선도 숯불 위에서 뜨끈뜨끈한 그 생선을 또 베 드로에게 갖다 주고, 도마에게 갖다 주고, 요한 에게 갖다 주고 일곱 제 자에게 다 갔다 주셨습니다. 이게 13절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 얼마 나 아름다운 장면이에요? 어린아이 를 앉혀 놓고 열심히 먹이려고 하는 어머니 같은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밤새도록 고기 잡다가 지치고 배고 프고 한기를 느끼는 제자들에게 이 것만큼 반가운 선물이 어디 있을까 요? 아침해가 두둥실 떠오르는 바닷 가에서 따뜻하게 데운 떡과 생선으 로 배를 불리면서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해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리 고 긴장했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 고 온유하신 부활의 주님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그 시간을 보내는 제자 들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 오.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참 좋 은 예수님이시다, 부활의 주님에게 서 느끼는 인간미, 참 인간적이시다 하고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인간적 이다. 부활하기 이 전에 우리와 똑 같은 몸을 가지신 주님이 이런 행동 을 하셨다면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 지지 않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고 기 구워서 갖다 주시고, 떡 구워서 갖다 주시고, 너무 인간적이지 않습 니까? 부활의 주님이 이런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분이 지금 내 곁에 계시 고, 내 마음에 계신다는 것을 느끼 는 것,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4장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 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그래요. 우 리의 연약함을 다 동정합니다. 배고 픈 것 아닙니다. 지친 것 압니다. 밤 새도록 잠자지 못한 것 압니다. 실 패로 인해서 마음이 가라앉아 있는 것을 압니다. 기분 좋은 것도 없고 마음이 끌리는 것도 없는 지친 인생 임을 우리 주님 너무나 잘 알고 계 십니다. 그래서 주님 이렇게 말씀하 시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 게 하리라.\\\" 따끈한 떡을 가지고 따 끈한 생선을 가지고 너희를 쉬게 하 리라. 고린도후서 9장 8절을 보십시 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 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얼마나 아 름다워요? 여러분 만약에 상황을 좀 바꾸어 서 예수님이 이렇게 했다고 한번 가 정해 봅시다.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아 녹초가 되어 가지고 지친 제자 들이 물에서 올라오는데 예수님께서 근엄한 얼굴로 \\\'자, 전부 이리 모여. 나하고 기도하자.\\\' 만약 그랬다면 어떨까요? 또, 충분히 그럴 수 있잖 아요. \\\'너희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잖아? 분명히 이유가 있을 꺼야. 나하고 그 이유를 좀 분석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자. 전부 모여.\\\' 아마 그랬다 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나 그 분위 기가 살벌할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 요. 그렇잖아요? 가뜩이나 베드로와 같이 며칠 전에 자기를 가장 중요한 순간에 3번이나 부인했던 과거를 가 지고 있는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 이 할 말씀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요즈음 말로 손 좀 보아야 할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밤새도록 떨었던 지 못 먹었던지 상관 않고 \\\'베드로, 이리 좀 와. 너 양심이 있냐? 없 냐?\\\' 이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요? 얼마든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 하고 싶은 모든 말 씀을 가슴에 묻어 두시고 예수님은 부지런히 떡을 떼어서 제자들을 먹 이시고 생선을 구워서 먹이시고, 추 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분 위기를 만들어 주시려고 애를 쓰시 는 모습, 얼마나 인간적입니까? 여러분, 사람에게 영은 육보다 중 요합니다. 사실입니다. 영적인 문제 는 육적인 문제를 앞섭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를 다루기를 원하는 사람일수록 사람들 이 인간적으로 느끼고 있는 요구에 관심을 기울어야 합니다. 배가 고픕 니까? 먹을 거 줘야 해요. 병으로 고통 합니까? 그들의 고통에 조금이 나마 동참하는 자세를 가져야 돼요. 우리가 거룩한 일을 다루면 다룰수 록 좀더 인간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할 수 있 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장황한 설 교?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잠을 자 지 못한 자에게 성경공부? 그렇게 감동적인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는 주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상당히 사납다는 말을 많이 들 었는데, 이런 아름다운 예수님의 모 습을 보면서 좀더 인간적이 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람이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 에 주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여유 가 있다, 정말 훈훈하다, 포근하다, 이렇게 느끼지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밤새 헛수고를 하고 있는 제 자들을 바닷가에 서서 지켜보신 부 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는 빈 그물을 가득히 채워 주신 부 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 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지치고 배 고픈 제자들을 위해 숯불에 떡을 굽 고 고기를 구워 일일이 먹여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연약한 우리를 이 해하시기 위해 너무나 인간적인 부 활의 주님을 이제 우리는 한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 은 우리가 빈 그물을 가지고 땀을 흘릴 때든지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 아 올 때나 항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주님입니다. 그분이 부 활하신 주님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혼자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좋으신 주님, 어떻게 말하면 너 무나 인간적인 주님, 이 분을 우리 는 모시고 이 험한 인생 길을 걸어 가고 있습니다. 외로울 필요가 없습 니다. 실패했습니까? 혼자 교통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픕니까? 혼자 흐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내 빈 그물을 던지며 고생하는 그 바닷가에 서 계 십니다. 이 자리에 실패하고 빈 그 물을 계시는 분 있나요? 이 가운데 배고픈 분이 계시나요? 이 가운데 잠자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있는 자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만나세요.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오스왈드 샌더스가 소개한 우리 가 잘 아는 시 하나 있지요? \\\'모래 위의 발자국\\\' 열 번, 백 번 들어도 은혜스러운 시가 되어서 제가 다시 한번 전문을 놓고 읽어보았습니다. 여러분, 눈을 조용히 감으시고 한번 감상을 해 보세요. 제가 목소리는 신통치 않지만 한번 읽어 드릴게요. 참 은혜스러운 시 아닙니까?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 가 모래 위에/ 두 쌍의 발자국을 보 았네/ 한 쌍은 내 것 또 한 쌍은 주 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 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 춘 그 곳에서/ 내 인생의 길을 돌이 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인생 길에는 오직 한 쌍의 발자국만 보였네/ 그 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펐 던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 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 기로 했을 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 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러 나 보세요/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 로 했던 그때 거기에는/ 한 쌍의 발 자국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나요?\\\'/ 주님께서 대답하 셨다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아이 여,/ 나는 너를 사랑하였고 너를 조 금도 떠나지 않았단다./ 너의 시련 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쌍의 발자국 그것은 나의 발자국 이었느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너무 좋으신 주님, 부활의 주님, 영원히 살아 계신 주님, 우리 모두 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심 히 지쳐 걷지 못할 때에는 우리를 등에 업고 걸으시는 주님, 그분이 오늘 우리의 주님이시요, 부활의 주 님이십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생명 을 다시 한번 가슴에 불태우면서 우 리 매일매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 기를 바랍니다.******** 옥한흠 목사(서울 사랑의교회)
갈릴리로 가라 /마28:1-10 / 부활주일낮 설교
갈릴리로 가라 /마28:1-10 / 부활주일낮 설교 2008-06-26 11:58:30 read : 185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시고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무덤에 도착하니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의 천사가 무덤 문인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이 놀라운 모습에 모두 죽은 자들 같이 있었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을 보더니 너희가 죽으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고 말하며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며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며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니 그곳으로 빨리 가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여자들은 놀라서 두려움과 부활의 소식에 기쁨을 함께 가지고 그곳을 떠나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그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저들이 그 발을 붙잡고 그 앞에 경배하니 그들에게 평안을 축복하시고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첫 번째 명령이 갈릴리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심오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부활의 아침 주님은 우리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이 주님의 귀한 명령을 들으시고 되새기고 갈릴리로 가는 길을 꼭 행하셔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귀한 뜻을 완성하시는 북실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갈릴리는 예수님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처음 만난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셨고 그들은 그 명령을 듣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에게 가서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시는 뜻은 제자들이 처음 만났을 때에 가졌던 그 순종, 그 첫 사랑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라는 귀한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신 우리 주님은 2000년이 지난 오늘 부활주일을 맞는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가졌던 그 첫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가졌던 그 기쁨, 그 감사, 그 순수한 사랑으로 이 복된 부활주일 아침에 돌아가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뜻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받고 세월이 지난 후에 힘들어지고 나태해지고 낙심이 될 때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고 그 일을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간증하며 처음 기쁨을 유지하였습니다. 야곱도 처음 신앙을 잊지 않고 돌아가므로 승리한 인물입니다. 그는 벧엘에서 하나님의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하늘에서 자신이 돌 베개를 베고 누운 곳까지 이어지고 그 사닥다리를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며 그 위에 하나님이 서셔서 축복과 동행을 약속하는 꿈이었습니다. 야곱은 꿈이 깨고 너무도 감격하여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잠만 잤도다 하고 베개 한 돌을 취하여 단을 쌓고 기름을 부어 감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집에 가서 20년을 살면서 기쁠 때나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그리고 환난의 때마다 그 벧엘로 돌아갔습니다. 세겜에서 큰 환난을 당하여 가정이 몰살을 당할 위기가 처할 때에도 그는 이 돌아가는 신앙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을 불러서 명령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 35:3) 그리고 처음 하나님을 만난 벧엘로 올라 갈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 주셔서 환난을 면하게 해주셨습니다. 어느 점원이 일할 때 주인집에 기르는 포인터 종 개가 있었습니다. 가게 청소를 하고 나면 주인 아주머니가 종업원과 교대를 해서 아침을 먹게 합니다. 그러면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개를 풀어놓습니다. 밤새 묶여있던 개는 너무 좋아서 집을 몇 바퀴를 돕니다. 그동안 집앞에 쌓여있는 배설물과 집을 청소해주면 좋아서 어깨에 그 더러운 두발을 올려놓고 꼬리를 흔듭니다. 얼마나 큰지 종업원 키랑 비슷합니다. 하루에 식사 때마다 세 번씩 그렇게 하니까 이 종업원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장님 친구 중에 한 분이 사냥을 좋아하는데 올 때마다 이 개를 탐내더니 결국 돈을 조금 주고 사갔습니다. 종업원은 얼마나 서운한지 마음에 울었습니다. 그런데 개를 사간 사람이 사냥을 나가서 총을 쐈는데 총소리에 개가 놀라서 산 속에 들어가 숨어서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 아주머니가 시외버스를 타고 한시간 거리에 있는 곳을 종업원더러 가라고 하십니다. 버스를 타고 약속한 곳에 내리니 사냥꾼이 차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차를 타고 산밑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과 좀 떨어져서 개 이름을 불렀습니다. 조금 있다가 숲속에서 개가 나오더니 종업원을 보고 반갑다고 큰 소리로 짖으며 길길이 뛰며 뛰어오릅니다. 정작 주인인 사냥꾼은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는데 종업원이 부르니까 숨어있던 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개를 그분들에게 넘겨주고 오는데 얼마나 낑낑거리고 우는지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개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는데 우리가 나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짐승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처음 만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바로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부흥을 의미합니다. 첫 사랑을 되찾으라는 명령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부활하시자 마자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와 죽음이 두려워 모두 도망해버려 자신들이 질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맡긴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셨던 주님은 부활주일 아침에 저와 여러분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이제 갈릴리로 되돌아 가셔서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기쁨과 첫사랑을 되찾고 그때 받았던 그 은혜를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흥의 역사를 다시 이루시는 북실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갈릴리는 처음 믿음을 보여 드린 곳입니다. 갈릴리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님이 따라오라는 명령에 그물과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또 야고보와 요한은 부친과 함께 배를 돌보는 중이었는데 그 부친과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 4:18-22) 제자들은 어떻게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늙은 아비에게 힘든 뱃일을 모두 맡기고 예수님을 쫓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마음이 모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배고픈 것도 모르고 집 떠나면 고생인 것도 모르는 미련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우리 주님께 보여 드린 것입니다. 그때 그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지금 믿음이 고갈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시며 그 처음 믿음을 회복하고 그 처음 믿음을 보여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명하신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주님을 처음 만날 때 보여 드렸던 믿음의 자리로 가라고 이 아침 명령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믿음을 회복하여 처음 믿음을 부활하신 주님께 보여 드리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페르시아의 한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어떤 목동을 만났는데 첫눈에 신실한 사람같아 보여서 데리고와서 경호원의 직무를 맡겼습니다. 과연 왕의 기대대로 모든 일에 충성스런 삶으로 왕을 섬겼습니다. 왕의 신임을 얻게 되자 왕궁의 모든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왕궁재산 관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신하들이 그를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웬 촌놈이 들어와서 자신들을 제치고 왕의 신임을 독차지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책잡을 것을 찾아 혈안이 되었으나 워낙 진실하게 행동하니 책잡힐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눈에 뜨이게 되었습니다. 왕궁의 조그만 방을 몰래 드나드는데 그 방의 열쇠는 자기 혼자만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신하들은 그가 왕궁의 재산을 몰래 빼돌려 숨겨놓는 곳으로 알고 왕에게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왕과 신하들은 그 방을 급습했습니다. 그 방에 귀중품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그 방은 텅텅 비어있고 한 구석에 떨어진 조끼한벌과 장화 한 켤레만 있는 것입니다. 왕은 신하에게 이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보물인양 몰래 감추어 두었는가 물었습니다. 그 신하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폐하 제가 폐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사람인지라 자꾸 욕심나고 높아지고자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이방에 들어와 옛날을 생각하고 마음을 스스로 낮추고 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왕은 그를 계속 신임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을 처음 만나서 우리의 믿음을 보여 드렸던 그 첫 믿음으로 돌아가십시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 주님을 좇아 좋은 믿음을 보여 드렸던 그 갈릴리로 돌아가십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활절 아침에 복되고 자랑스러운 처음 믿음을 우리 주님께 보여 드리는 북실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갈릴리는 처음 사명을 받은 곳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처음 예수를 만나고 처음 믿음을 보여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처음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은 이제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19)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쫓아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환난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힘없이 잡히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 죽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모두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를 따라갔지만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아닌 마리아와 같은 여인들은 부활의 아침에 무덤까지 찾아왔지만 제자들은 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처음 받았던 그 사명을 그곳에 가서 다시 생각하고 다시 그 사명을 회복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향하여 갈릴리로 가서 첫 사명을 회복하라고 명하시던 주님은 오늘 2008년 부활주일을 맞는 우리들에게도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처음에는 주님만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단하며 사명의 의지를 불태운 적이 있었습니다. 귀한 직분을 받을 때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사명을 주시는가 하고 감격하여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달픈 인생을 살다보니, 세월이 흘러서 그 처음 사명의 뜨거운 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감격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사명도 잃어버린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열심도 사라지고 기쁨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열심히 아닌 체면 때문에 마지못하여 일을 하면서 주의 일 한다고 착각하고 생색 낼 때가 많았고 조금만 섭섭해도 조금만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신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릴 생각을 할 때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부활절을 맞는 우리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 귀한 절기에 우리의 첫 사명을 회복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에 이웃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우리교회가 아닌데도 저는 어머니 손을 잡고 그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신나는지 졸지도 않고 그 긴 저녁집회에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말씀을 듣고 온 교우들과 함께 통성기도를 하는 중에 커다란 손이 내 머리에 안수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체험을 하면서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깨닫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면서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맛 볼 때마다 낙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하나님의 손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이 나의 머리에 손을 얹어 당신의 일꾼을 삼으셨는데 내가 낙심하면 되나하고 용기를 얻었고 기가 막힌 고생과 연단 속에서도 잃어버릴 뻔한 믿음을 되찾고 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환경과 주변의 사람 때문에 사명을 잃어버리고 옳은 길을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바른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고 원망을 감사로 바꾸어야합니다. 며칠전 재미있는 글을 읽었는데 제목이 “여자들이 얄미워하는 여자”입니다. 10대 - 예쁜데다가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대 - 성형수술 했는데 티 안 나고 예쁜 여자 30대 - 결혼하기 전에 실컷 놀았는데 시집가서 잘사는 여자 40대 - 밤낮 쇼핑하고 노는데 자식이 일류대학에 잘 들어가는 여자 50대 - 아무리 먹어도 살 안찌는 여자 60대 - 타고난 건강에 돈까지 많은 여자 70대 - 자녀들이 효도하고 거기다가 남편도 멀쩡한 여자 80대 -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 읽고 한참을 웃을 그런 재미있는 글이었는데 읽고나서 조금 깊이 있게 생각해보니 마음이 무거운 글이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 속에는 깊은 질투와 나보다 나은 사람들에게 대한 미움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처음 가졌던 사명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 때문에 실족하고 사회의 구조적인 악 때문에 감사의 사람이 아니라 불평과 원망의 사람이 되어 교회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갈릴리로 가십시다! 예수를 처음 만난 사랑을 회복합시다. 그리고 처음 믿음을 보여 드렸던 그 활기차고 충만한 첫 믿음을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 주님께 보여 드립시다. 그리고 처음 사명을 받을 때 가졌던 열심과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명하시는 갈릴리로 되돌아가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갈릴리로 가라 /마28:1-10 /부활주일
갈릴리로 가라 마28:1-10 부활주일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시고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무덤에 도착하니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의 천사가 무덤 문인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이 놀라운 모습에 모두 죽은 자들 같이 있었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을 보더니 너희가 죽으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고 말하며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며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며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니 그곳으로 빨리 가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여자들은 놀라서 두려움과 부활의 소식에 기쁨을 함께 가지고 그곳을 떠나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그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저들이 그 발을 붙잡고 그 앞에 경배하니 그들에게 평안을 축복하시고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첫 번째 명령이 갈릴리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를 가리키는 심오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부활의 아침 주님은 우리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이 주님의 귀한 명령을 들으시고 되새기고 갈릴리로 가는 길을 꼭 행하셔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귀한 뜻을 완성하시는 북실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갈릴리는 예수님을 처음 만난 곳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처음 만난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셨고 그들은 그 명령을 듣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에게 가서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시는 뜻은 제자들이 처음 만났을 때에 가졌던 그 순종, 그 첫 사랑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라는 귀한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신 우리 주님은 2000년이 지난 오늘 부활주일을 맞는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가졌던 그 첫 사랑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가졌던 그 기쁨, 그 감사, 그 순수한 사랑으로 이 복된 부활주일 아침에 돌아가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뜻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받고 세월이 지난 후에 힘들어지고 나태해지고 낙심이 될 때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고 그 일을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간증하며 처음 기쁨을 유지하였습니다. 야곱도 처음 신앙을 잊지 않고 돌아가므로 승리한 인물입니다. 그는 벧엘에서 하나님의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하늘에서 자신이 돌 베개를 베고 누운 곳까지 이어지고 그 사닥다리를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며 그 위에 하나님이 서셔서 축복과 동행을 약속하는 꿈이었습니다. 야곱은 꿈이 깨고 너무도 감격하여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잠만 잤도다 하고 베개 한 돌을 취하여 단을 쌓고 기름을 부어 감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집에 가서 20년을 살면서 기쁠 때나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그리고 환난의 때마다 그 벧엘로 돌아갔습니다. 세겜에서 큰 환난을 당하여 가정이 몰살을 당할 위기가 처할 때에도 그는 이 돌아가는 신앙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을 불러서 명령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 35:3) 그리고 처음 하나님을 만난 벧엘로 올라 갈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 주셔서 환난을 면하게 해주셨습니다. 어느 점원이 일할 때 주인집에 기르는 포인터 종 개가 있었습니다. 가게 청소를 하고 나면 주인 아주머니가 종업원과 교대를 해서 아침을 먹게 합니다. 그러면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개를 풀어놓습니다. 밤새 묶여있던 개는 너무 좋아서 집을 몇 바퀴를 돕니다. 그동안 집앞에 쌓여있는 배설물과 집을 청소해주면 좋아서 어깨에 그 더러운 두발을 올려놓고 꼬리를 흔듭니다. 얼마나 큰지 종업원 키랑 비슷합니다. 하루에 식사 때마다 세 번씩 그렇게 하니까 이 종업원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장님 친구 중에 한 분이 사냥을 좋아하는데 올 때마다 이 개를 탐내더니 결국 돈을 조금 주고 사갔습니다. 종업원은 얼마나 서운한지 마음에 울었습니다. 그런데 개를 사간 사람이 사냥을 나가서 총을 쐈는데 총소리에 개가 놀라서 산 속에 들어가 숨어서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 아주머니가 시외버스를 타고 한시간 거리에 있는 곳을 종업원더러 가라고 하십니다. 버스를 타고 약속한 곳에 내리니 사냥꾼이 차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차를 타고 산밑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과 좀 떨어져서 개 이름을 불렀습니다. 조금 있다가 숲속에서 개가 나오더니 종업원을 보고 반갑다고 큰 소리로 짖으며 길길이 뛰며 뛰어오릅니다. 정작 주인인 사냥꾼은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는데 종업원이 부르니까 숨어있던 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개를 그분들에게 넘겨주고 오는데 얼마나 낑낑거리고 우는지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개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는데 우리가 나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짐승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처음 만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바로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부흥을 의미합니다. 첫 사랑을 되찾으라는 명령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부활하시자 마자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와 죽음이 두려워 모두 도망해버려 자신들이 질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맡긴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셨던 주님은 부활주일 아침에 저와 여러분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이제 갈릴리로 되돌아 가셔서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기쁨과 첫사랑을 되찾고 그때 받았던 그 은혜를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흥의 역사를 다시 이루시는 북실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갈릴리는 처음 믿음을 보여 드린 곳입니다. 갈릴리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님이 따라오라는 명령에 그물과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또 야고보와 요한은 부친과 함께 배를 돌보는 중이었는데 그 부친과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 4:18-22) 제자들은 어떻게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늙은 아비에게 힘든 뱃일을 모두 맡기고 예수님을 쫓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마음이 모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배고픈 것도 모르고 집 떠나면 고생인 것도 모르는 미련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을 우리 주님께 보여 드린 것입니다. 그때 그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지금 믿음이 고갈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시며 그 처음 믿음을 회복하고 그 처음 믿음을 보여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명하신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주님을 처음 만날 때 보여 드렸던 믿음의 자리로 가라고 이 아침 명령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믿음을 회복하여 처음 믿음을 부활하신 주님께 보여 드리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페르시아의 한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어떤 목동을 만났는데 첫눈에 신실한 사람같아 보여서 데리고와서 경호원의 직무를 맡겼습니다. 과연 왕의 기대대로 모든 일에 충성스런 삶으로 왕을 섬겼습니다. 왕의 신임을 얻게 되자 왕궁의 모든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왕궁재산 관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신하들이 그를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웬 촌놈이 들어와서 자신들을 제치고 왕의 신임을 독차지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책잡을 것을 찾아 혈안이 되었으나 워낙 진실하게 행동하니 책잡힐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눈에 뜨이게 되었습니다. 왕궁의 조그만 방을 몰래 드나드는데 그 방의 열쇠는 자기 혼자만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신하들은 그가 왕궁의 재산을 몰래 빼돌려 숨겨놓는 곳으로 알고 왕에게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왕과 신하들은 그 방을 급습했습니다. 그 방에 귀중품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그 방은 텅텅 비어있고 한 구석에 떨어진 조끼한벌과 장화 한 켤레만 있는 것입니다. 왕은 신하에게 이 보잘 것 없는 것들을 보물인양 몰래 감추어 두었는가 물었습니다. 그 신하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폐하 제가 폐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사람인지라 자꾸 욕심나고 높아지고자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이방에 들어와 옛날을 생각하고 마음을 스스로 낮추고 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왕은 그를 계속 신임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을 처음 만나서 우리의 믿음을 보여 드렸던 그 첫 믿음으로 돌아가십시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 주님을 좇아 좋은 믿음을 보여 드렸던 그 갈릴리로 돌아가십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활절 아침에 복되고 자랑스러운 처음 믿음을 우리 주님께 보여 드리는 북실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갈릴리는 처음 사명을 받은 곳입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처음 예수를 만나고 처음 믿음을 보여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처음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은 이제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19)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쫓아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환난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힘없이 잡히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 죽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모두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를 따라갔지만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아닌 마리아와 같은 여인들은 부활의 아침에 무덤까지 찾아왔지만 제자들은 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처음 받았던 그 사명을 그곳에 가서 다시 생각하고 다시 그 사명을 회복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향하여 갈릴리로 가서 첫 사명을 회복하라고 명하시던 주님은 오늘 2008년 부활주일을 맞는 우리들에게도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처음에는 주님만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단하며 사명의 의지를 불태운 적이 있었습니다. 귀한 직분을 받을 때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사명을 주시는가 하고 감격하여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달픈 인생을 살다보니, 세월이 흘러서 그 처음 사명의 뜨거운 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감격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사명도 잃어버린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열심도 사라지고 기쁨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열심히 아닌 체면 때문에 마지못하여 일을 하면서 주의 일 한다고 착각하고 생색 낼 때가 많았고 조금만 섭섭해도 조금만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신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릴 생각을 할 때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부활절을 맞는 우리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 귀한 절기에 우리의 첫 사명을 회복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에 이웃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우리교회가 아닌데도 저는 어머니 손을 잡고 그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신나는지 졸지도 않고 그 긴 저녁집회에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말씀을 듣고 온 교우들과 함께 통성기도를 하는 중에 커다란 손이 내 머리에 안수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체험을 하면서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깨닫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면서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맛 볼 때마다 낙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하나님의 손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이 나의 머리에 손을 얹어 당신의 일꾼을 삼으셨는데 내가 낙심하면 되나하고 용기를 얻었고 기가 막힌 고생과 연단 속에서도 잃어버릴 뻔한 믿음을 되찾고 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환경과 주변의 사람 때문에 사명을 잃어버리고 옳은 길을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바른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고 원망을 감사로 바꾸어야합니다. 며칠전 재미있는 글을 읽었는데 제목이 “여자들이 얄미워하는 여자”입니다. 10대 - 예쁜데다가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대 - 성형수술 했는데 티 안 나고 예쁜 여자 30대 - 결혼하기 전에 실컷 놀았는데 시집가서 잘사는 여자 40대 - 밤낮 쇼핑하고 노는데 자식이 일류대학에 잘 들어가는 여자 50대 - 아무리 먹어도 살 안찌는 여자 60대 - 타고난 건강에 돈까지 많은 여자 70대 - 자녀들이 효도하고 거기다가 남편도 멀쩡한 여자 80대 - 아직도 살아있는 여자 읽고 한참을 웃을 그런 재미있는 글이었는데 읽고나서 조금 깊이 있게 생각해보니 마음이 무거운 글이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 속에는 깊은 질투와 나보다 나은 사람들에게 대한 미움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면 처음 가졌던 사명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 때문에 실족하고 사회의 구조적인 악 때문에 감사의 사람이 아니라 불평과 원망의 사람이 되어 교회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갈릴리로 가십시다! 예수를 처음 만난 사랑을 회복합시다. 그리고 처음 믿음을 보여 드렸던 그 활기차고 충만한 첫 믿음을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 주님께 보여 드립시다. 그리고 처음 사명을 받을 때 가졌던 열심과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명하시는 갈릴리로 되돌아가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갈릴리로 가라/ 마28:1-10
갈릴리로 가라 마28:1-10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10절). 갈릴리는 제자들이 처음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이며, 이곳에서 부터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갈릴리는 기독교가 시작된 곳이 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부활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행 10:34-43). 예수께서 보여 주신 부활은 출생에서 죽음을 겪고 부활로 끝을 맺은 \"해피 엔딩\"이 아닙니다. 부활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부활에서 사회의 부활을 의미한다 해도 좋겠습니 다. 이것은 분명 변화된 시작입니다. 부활한 새 사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전개될 수 없습니다. 변화된 의식과 삶이 변화된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개인이 변화되지 않고는 사 회문화 변혁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작은 사회적 책임 을 지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과 민중으로부터 위임받고 있는 사회 변혁의 사 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전두화 대통령이 약속한 헌법개정을 유보하겠다는 발표는 계약의식이 결여된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사람이 변화되어야 새 사 회 시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부활은 선교의 시작입니다 (요 21:1-23). 갈릴리에서 시작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기독교의 선교적 과업이었 습니다. 부활은 하나님 나라로 부활한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다 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불의한 세력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화평과 정의와 일치의 삶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는 \"어린 양을 먹이라\"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을 먹이는 일은 양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예수를 더 살아할 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예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은 연약한 사람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힘없고 고통받는 민중이빈다. 그들은 내 것이 아니라 예 수께 속한 하나님이 민중입니다. 그들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며, 그들은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선교는 인간에 대한 고문과 폭력행 위를 반예수적 행위로 간주합니다. 부활하신 예수처럼 목숨을 주어 사랑하 는 것이 어린 양을 먹이는 부활의 선교입니다. 셋째로, 부활은 우주적 선교의 시작입니다 (마 28:16-20). 갈릴리에 모인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 운동의 우주적 선언을 들었습니다.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나 가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제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유혹이나 시련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 가서 예수를 만난 사람은 예수의 변화와 어린 양 사랑을 증거하게 됩니다. 믿음을 다시 회복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 모르고 따라 다녔던 행동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확신을 가지고 새롭 게 시작하는 것입니다.갈릴리의 선교는 편협한 지방주의나 민족주의를 넘어 서는 것입니다. 예수의 우주적 선언에 기초하여 세계적 에큐메니칼 연대를 결속시키는 것입니다. 과연 갈릴리는 우주적 선교의 기지라 하겠습니다. 부 활하신 주님의 \"갈릴리로 가라\"는 부탁을 이 땅의 젊은 기독인들도 순정해 서 개인과 사회의 변화의 시대를 열도록 합시다.
갈릴리로 가라/ 마28:1-10/ 부활절설교
갈릴리로 가라 마28:1-10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10절). 갈릴리는 제자들이 처음 예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이며, 이곳에서 부터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갈릴리는 기독교가 시작된 곳이 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부활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행 10:34-43). 예수께서 보여 주신 부활은 출생에서 죽음을 겪고 부활로 끝을 맺은 \"해피 엔딩\"이 아닙니다. 부활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부활에서 사회의 부활을 의미한다 해도 좋겠습니 다. 이것은 분명 변화된 시작입니다. 부활한 새 사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전개될 수 없습니다. 변화된 의식과 삶이 변화된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개인이 변화되지 않고는 사 회문화 변혁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작은 사회적 책임 을 지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과 민중으로부터 위임받고 있는 사회 변혁의 사 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전두화 대통령이 약속한 헌법개정을 유보하겠다는 발표는 계약의식이 결여된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사람이 변화되어야 새 사 회 시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부활은 선교의 시작입니다 (요 21:1-23). 갈릴리에서 시작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기독교의 선교적 과업이었 습니다. 부활은 하나님 나라로 부활한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다 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불의한 세력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화평과 정의와 일치의 삶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교는 \"어린 양을 먹이라\"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을 먹이는 일은 양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예수를 더 살아할 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예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은 연약한 사람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힘없고 고통받는 민중이빈다. 그들은 내 것이 아니라 예 수께 속한 하나님이 민중입니다. 그들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며, 그들은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선교는 인간에 대한 고문과 폭력행 위를 반예수적 행위로 간주합니다. 부활하신 예수처럼 목숨을 주어 사랑하 는 것이 어린 양을 먹이는 부활의 선교입니다. 셋째로, 부활은 우주적 선교의 시작입니다 (마 28:16-20). 갈릴리에 모인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 운동의 우주적 선언을 들었습니다.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나 가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제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유혹이나 시련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 가서 예수를 만난 사람은 예수의 변화와 어린 양 사랑을 증거하게 됩니다. 믿음을 다시 회복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 모르고 따라 다녔던 행동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확신을 가지고 새롭 게 시작하는 것입니다.갈릴리의 선교는 편협한 지방주의나 민족주의를 넘어 서는 것입니다. 예수의 우주적 선언에 기초하여 세계적 에큐메니칼 연대를 결속시키는 것입니다. 과연 갈릴리는 우주적 선교의 기지라 하겠습니다. 부 활하신 주님의 \"갈릴리로 가라\"는 부탁을 이 땅의 젊은 기독인들도 순정해 서 개인과 사회의 변화의 시대를 열도록 합시다.
갈릴리로 가야 하는 이유(주활주일 설교)
갈릴리로 가야 하는 이유(주활주일 설교) 2002-03-29 15:56:18 read : 579 그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복음 16장 1-8절) <목회기도>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로 죽음 저편의 삶을 보여 주신 하나님! 여전히 질병과 고통과 거짓과 범죄 등이 판치는 어둠의 세상에 살던 우리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 실패와 좌절에서 일어나게 하시고 우울함과 쓸쓸함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막힘과 갇힘에서 놓임 받게 하시고 영생의 소망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둥교회에 오늘이 있게 하시고 연약한 종이 담임목사로 일하게 하신 하나님, 현재 모습에 만족하고 머무는 교회가 아니라 더 크게 쓰임받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성도들의 삶을 축복하시고 십일조가 늘게 하시고 감사의 조건이 더해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이 끝이 아닌 것으로 보여 주시려고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확신의 길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부활절에 "할렐루야"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에게 오늘은 어떤 날이십니까? 어떤 분에게는 결혼기념일이고, 어떤 분에게는 첫사랑을 고백받은 날이기도 할 것이며, 또 어떤 분은 오늘이 생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이 "특별한 어떤 날"로 기억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게 기억되는 4월 15일은 "해병대 창설기념일"이고, "김일성 생일"입니다. 제가 해병대에 있었을 때 4월 15일이면 해병대 창설기념일이라고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김일성 생일'이라고 매번 "무찌르자 김일성"이라고 외치고 대회에서 1등을 하면 상으로 휴가를 얻어 집에 갈 수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오늘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 천국에 소망을 가진 사람들, 영생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기뻐해야 할 [죽음이 극복된 날], 죽음이 이 세상의 끝이 아닌 것이 선포된 부활절입니다. 이 부활절이 여러분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하나님의 법이지만(히9:27), 그 죽음이 끝이 아님을 예수님이 몸소 보여 주신 날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오늘은 절망과 죽음의 무덤 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 오늘은 절망을 말하는 날이 아닙니다. • 오늘은 죽음을 말하는 날이 아닙니다. • 오늘은 소망을 말하는 날입니다. • 오늘은 승리를 말하는 날입니다. • 오늘은 부활을, 영생을 말하는 날입니다. 그 모든 복된 것이 여러분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 … 돌문을 굴려 주리요? 2000여년 전, 오늘 아침에 예수님을 찾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째 되던 날 새벽, 주일 새벽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무덤을 향하여 가면서 여인들은 걱정이 앞섰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문을 굴려 주리요?"라는 이 질문은 슬픔에 잠긴 온 인류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을 열어 주리요? • 누가 우리를 위하여 막힌 것을 열어 주리요? •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갇힌 것을 풀어 주리요? • 누가 우리를 위하여 캄캄한 것을 밝게 하리요? 라는 물음은 모든 사람의 질문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 막고 있는 것, 인간의 소망과 기쁨을 가로 막고 있는 그 돌문을 누가 열어 줄 것인가하는 것이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걱정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누가 이 돌문을 열어 주리요, 누가 내 삶의 돌문을 열어 주리요, 누가 내 기쁨의 문을 열어 주리요"하며 그 문을 열지 못해 근심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정하심으로 이미 열려진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대한 돌문을 누가 옮겨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절망의 문을 누가 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철학이나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나 사상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수없는 시도를 해 보았으나 결국은 모두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이 아침에 그 무거운 돌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을 여셨을 뿐 아니라 죽음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죽음이 이 세상의 끝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갈 곳이 있는 나그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여기 저기 떠도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갈 곳이 있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잠시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닙니다. 아직도 목적지가 없이,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이 이 세상의 나그네로 끝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의 나그네로 만족하고, 이 세상이 나그네길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 목적지가 있는 나그네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 인간이 모두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녀를 먼저 하나님 나라에 보내신 분이 계십니까? 마음이 아프고 슬프시겠지만 오늘은 울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부모를 먼저 보내신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남편, 아내, 형제들을 잃었습니까? 아직도 그 슬픔을 잊지 못하고 계십니까? 이 부활의 아침에 그 눈물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제사장들의 간계와 음모로 무죄인 상태에서 로마 병정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불의와 죄악과 권력의 대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정의와 진리를 십자가에 못박고 돌무덤을 이용하여 묻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얼핏보면 죄와 세상의 권력들이 승리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승리한 것처럼 보여졌을 뿐, 부활의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이긴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돌로 막을 수 없는 진리 돌문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한 사람들은 3일 만에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감춰 두고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로 무덤을 막아 놓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물량적인 힘으로 진리를 막아보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돌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량적인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로 막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이 막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그 돌을 굴리시고 다시 사셔서 의의 승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진리는 물질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에 반드시 진리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진리를 돈으로 막으려 하고 의를 돈으로 사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아도 정의와 진리가 물질의 힘, 인위적인 힘에 의하여 가려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정의와 진리는 물질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봉으로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큰 돌로 무덤을 막았을 뿐 아니라 거기에 '가이사'의 권력을 표시하는 "인봉"(印封)을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 돌을 움직인다면 로마 "가이사"의 권력에 반항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봉했다"는 것은 국가에서 하는 일이고, 제도와 권력의 표시입니다. 지금도 권력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아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넓고 깊게 복음이 전파되어 왔음을 우리는 압니다. 세상의 권력이 십자가를 막지 못했습니다. 이 지구상에 어느 곳이든지 갖은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전파되고 있습니다. 파수꾼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문을 돌로 막고, 인봉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여 파수꾼까지 세웠습니다. 사람의 힘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힘을 가지고도, 파수꾼의 정찰하는 능력과 파수꾼이 가진 무기를 가지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막아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막힌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갈릴리로 가신 예수님 무덤은 반대자들을 가두는 영원한 감옥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마지막때에 선악의 심판이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이 땅위에 언제나 의와 진리가 최후 승리를 거둔다는 확신을 안겨 준 것입니다. 돌문을 걱정하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문을 열어 주리요"라는 생각을 가지고 무덤에 다가갔던 여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무덤문이 열린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덤은 땅속에 관을 묻고 흙으로 덮어 작은 봉우리를 만들고 그 위에 표시를 해 놓습니다. 그런데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무덤의 형태는 그 곳이 사막지역이기 때문에 땅에 묻고 돌로 표시를 해 놓습니다. 그리고 좀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돌무덤을 만들어 놓고 죽은 후에 무덤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무덤을 예수님께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 무덤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무덤문이 열린 것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무덤문이 엄청 큰 돌로 막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도 엄청난 일에 몹시 슬퍼서 어쩔 줄 모르는 여인 앞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너희가 찾는 예수는 다시 살아나셔서 갈릴리로 가셨느니라"(눅24:5) 우리는 곧잘 살아 계신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무덤에서 찾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능한 곳에서 찾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물을 파괴시키는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면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던 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혼쭐이라도 내실 것이지,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죽어서 장례를 지내고 무덤에 묻혀 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날 잡아서 죽였던 놈들이 어떤 놈들이냐"고 한다면,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나타나기만 해도 아마 모든 사람이 기절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다른 봉사는 잘하는데 초상난 집에는 절대 가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가지 않는 이유는 무섭고 겁나서 가기가 두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게 하는 말이 "그런 곳은 목사님이 가시는 것 아닌가요? 저는 잔치집에나 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잔치집에는 못가더라도 장례식에는 가라고 했습니다(전7:2). 새 출발의 상징 "갈릴리" 여러분도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의 옷차림을 아실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이 그 옷차림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로마의 병정들 앞에 나타나셔서 "이놈들아~"하면서 못박히셨던 손이라도 드셨더라면, "천국을 믿어라, 나를 믿어라"는 말씀을 하실 필요도 없이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정치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자신들이 누구를 왜 죽이는 줄도 모른 채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그 사람들이나, 예수는 죽이고 바라바를 살리라고 말했던 무지한 많은 백성들 앞에 나타나셔서 멋있게 보여 주지 않으시고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처음 만났던 [갈릴리]는 새 출발의 상징이었습니다. 무덤이 끝이라면 갈릴리는 시작입니다. 무덤은 과거요 갈릴리는 미래입니다. 무덤은 정지요 갈릴리는 움직임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갈릴리에 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시고 사람들을 만나셨던 그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셨다는 말입니다. 부활신앙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회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부활절은 그 기념식도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현재의 확실한 삶의 현장에서 "나는 예수 믿음으로 죽어도 다시 산다"는 소망을 갖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신 것은,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일터에, 마음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신 줄로 믿습니다. 삶속에 함께 계신 예수님 우리는 갈릴리에서 목수였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기적을 행하셨던 그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런 것에 얽매여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던 그 갈릴리에서 일하셨던 그분을 추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과 죽음을 우리들의 삶 속에 그대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음으로 고난 당하고, 손해 보고, 빛되고 소금된 삶을 살기 위해 때로 눈물도 흘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포기하고, 예수 믿음으로 이 세상이 터전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아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돈 때문에 예수를 판 가룟유다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돈 때문에 예수를 팝니까? 돈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다고 합니까? 우리가 가룟유다를 향해서 손가락질 하기도 하지만 때로 우리가 가룟유다처럼 돈 때문에 예수를 팔 때도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신변의 안전 때문에 예수를 모른다고 대답한 베드로 같은 신자는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신변의 안전 때문에, 죽을까봐, 위험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와 같은 때가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종교적인 교권 때문에 예수를 감옥에 가둔 가야바와 같은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정권유지 때문에 무죄인줄 알면서도 예수를 고발하고 반역자로 몰아 사형에 처하는 빌라도가 아니어야 합니다. "나는 아무 상관없다"고 했지만 자기의 권력의 힘을 포기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빌라도의 모습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없어져야 합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 질서와 치안 유지를 위해 단지 명령에 따른 것 뿐 자신의 의지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할 수 있는 당시의 군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군인들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렸던 것을 회개해야합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겁에 질려 숨어 벌벌 떨던 제자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숨어서 벌벌 떱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의 탄생을 알고 찾아간 동방박사들은 왕궁에 가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 버리고 아는 집과 친척에게서 예수를 찾아 헤맸습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들은 무덤에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예수님을 찾고 계십니까?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나려 합니까? 어디에 계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부활은 지금 우리의 현재적인 사건이요, 우리들 가슴 속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채 들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권력과 부와 명예의 상징인 성(城)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아름답게 치장한 당시의 성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삶의 현장, 사람들을 만났던 곳, 사람들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땀흘리고 애쓰는 삶의 현장인 갈릴리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현장 갈릴리에 계십니다.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운 때에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이 우글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 부활의 주님, 승리의 주님이 계십니다. 인간의 끝... 하나님의 시작 인간은 끝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끝이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끝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끝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가이드 포스트]지에 킬링거 부인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이혼한 지 만 1년이 되던 날, 그녀는 친구, 가족, 경제생활 등 모든 것이 먹구름에 싸여 정말 자살 일보 전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딸의 책장에서 딸의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숙제물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여덟 쪽인데 매 쪽에 한 살부터 여덟 살 때까지의 사진 한 장씩을 붙이고 자기의 삶을 기록한(설명한) 숙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쪽에 End(끝)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의 글씨 옆에 담임선생님의 'Your beginning'(너의 시작이다)이라는 글씨가 'End'라는 글씨를 내리 누르듯이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킬링거 부인이 새 출발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여덟 살 난 아이가 사진 이야기의 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마흔이 된 자기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 믿고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여덟 살의 어린아이가 자신의 숙제에 "끝"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던 것처럼 마흔살이지만 내 삶은 이제 시작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지금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끝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이지, 하나님에게는 시작점입니다. 부활을 증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세상의 삶속에 빛되고 소금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 헛된 생활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주일, 부활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왕궁에 계시지 아니하고, 권세자들과 함께 앉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셨음을, 왜 가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삶에 오신 주여, 우리들 가슴 속에 계신 주여 믿음을 가지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우리들, 우리가 함부로 끝을 선언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의 삶 속에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갈릴리로 가야 하는 이유/막16:1-8
갈릴리로 가야 하는 이유 막16:1-8 그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복음 16장 1-8절) <목회기도>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로 죽음 저편의 삶을 보여 주신 하나님! 여전히 질병과 고통과 거짓과 범죄 등이 판치는 어둠의 세상에 살던 우리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 실패와 좌절에서 일어나게 하시고 우울함과 쓸쓸함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막힘과 갇힘에서 놓임 받게 하시고 영생의 소망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둥교회에 오늘이 있게 하시고 연약한 종이 담임목사로 일하게 하신 하나님, 현재 모습에 만족하고 머무는 교회가 아니라 더 크게 쓰임받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성도들의 삶을 축복하시고 십일조가 늘게 하시고 감사의 조건이 더해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이 끝이 아닌 것으로 보여 주시려고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확신의 길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 부활절에 \"할렐루야\"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여러분에게 오늘은 어떤 날이십니까? 어떤 분에게는 결혼기념일이고, 어떤 분에게는 첫사랑을 고백받은 날이기도 할 것이며, 또 어떤 분은 오늘이 생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이 \"특별한 어떤 날\"로 기억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게 기억되는 4월 15일은 \"해병대 창설기념일\"이고, \"김일성 생일\"입니다. 제가 해병대에 있었을 때 4월 15일이면 해병대 창설기념일이라고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김일성 생일\'이라고 매번 \"무찌르자 김일성\"이라고 외치고 대회에서 1등을 하면 상으로 휴가를 얻어 집에 갈 수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오늘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 천국에 소망을 가진 사람들, 영생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기뻐해야 할 [죽음이 극복된 날], 죽음이 이 세상의 끝이 아닌 것이 선포된 부활절입니다. 이 부활절이 여러분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하나님의 법이지만(히9:27), 그 죽음이 끝이 아님을 예수님이 몸소 보여 주신 날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오늘은 절망과 죽음의 무덤 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 오늘은 절망을 말하는 날이 아닙니다. • 오늘은 죽음을 말하는 날이 아닙니다. • 오늘은 소망을 말하는 날입니다. • 오늘은 승리를 말하는 날입니다. • 오늘은 부활을, 영생을 말하는 날입니다. 그 모든 복된 것이 여러분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 … 돌문을 굴려 주리요? 2000여년 전, 오늘 아침에 예수님을 찾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째 되던 날 새벽, 주일 새벽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무덤을 향하여 가면서 여인들은 걱정이 앞섰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문을 굴려 주리요?\"라는 이 질문은 슬픔에 잠긴 온 인류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을 열어 주리요? • 누가 우리를 위하여 막힌 것을 열어 주리요? •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갇힌 것을 풀어 주리요? • 누가 우리를 위하여 캄캄한 것을 밝게 하리요? 라는 물음은 모든 사람의 질문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 막고 있는 것, 인간의 소망과 기쁨을 가로 막고 있는 그 돌문을 누가 열어 줄 것인가하는 것이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걱정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누가 이 돌문을 열어 주리요, 누가 내 삶의 돌문을 열어 주리요, 누가 내 기쁨의 문을 열어 주리요\"하며 그 문을 열지 못해 근심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정하심으로 이미 열려진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대한 돌문을 누가 옮겨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절망의 문을 누가 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철학이나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나 사상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수없는 시도를 해 보았으나 결국은 모두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이 아침에 그 무거운 돌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을 여셨을 뿐 아니라 죽음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죽음이 이 세상의 끝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갈 곳이 있는 나그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여기 저기 떠도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갈 곳이 있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잠시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닙니다. 아직도 목적지가 없이,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이 이 세상의 나그네로 끝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의 나그네로 만족하고, 이 세상이 나그네길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 목적지가 있는 나그네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 인간이 모두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녀를 먼저 하나님 나라에 보내신 분이 계십니까? 마음이 아프고 슬프시겠지만 오늘은 울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부모를 먼저 보내신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남편, 아내, 형제들을 잃었습니까? 아직도 그 슬픔을 잊지 못하고 계십니까? 이 부활의 아침에 그 눈물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제사장들의 간계와 음모로 무죄인 상태에서 로마 병정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불의와 죄악과 권력의 대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정의와 진리를 십자가에 못박고 돌무덤을 이용하여 묻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얼핏보면 죄와 세상의 권력들이 승리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승리한 것처럼 보여졌을 뿐, 부활의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이긴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돌로 막을 수 없는 진리 돌문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한 사람들은 3일 만에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감춰 두고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로 무덤을 막아 놓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물량적인 힘으로 진리를 막아보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돌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량적인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로 막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이 막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그 돌을 굴리시고 다시 사셔서 의의 승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진리는 물질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에 반드시 진리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진리를 돈으로 막으려 하고 의를 돈으로 사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아도 정의와 진리가 물질의 힘, 인위적인 힘에 의하여 가려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정의와 진리는 물질의 힘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봉으로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큰 돌로 무덤을 막았을 뿐 아니라 거기에 \'가이사\'의 권력을 표시하는 \"인봉\"(印封)을 하였습니다. 만약에 그 돌을 움직인다면 로마 \"가이사\"의 권력에 반항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봉했다\"는 것은 국가에서 하는 일이고, 제도와 권력의 표시입니다. 지금도 권력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아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넓고 깊게 복음이 전파되어 왔음을 우리는 압니다. 세상의 권력이 십자가를 막지 못했습니다. 이 지구상에 어느 곳이든지 갖은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전파되고 있습니다. 파수꾼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문을 돌로 막고, 인봉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여 파수꾼까지 세웠습니다. 사람의 힘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힘을 가지고도, 파수꾼의 정찰하는 능력과 파수꾼이 가진 무기를 가지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막아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막힌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갈릴리로 가신 예수님 무덤은 반대자들을 가두는 영원한 감옥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마지막때에 선악의 심판이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이 땅위에 언제나 의와 진리가 최후 승리를 거둔다는 확신을 안겨 준 것입니다. 돌문을 걱정하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문을 열어 주리요\"라는 생각을 가지고 무덤에 다가갔던 여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무덤문이 열린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덤은 땅속에 관을 묻고 흙으로 덮어 작은 봉우리를 만들고 그 위에 표시를 해 놓습니다. 그런데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무덤의 형태는 그 곳이 사막지역이기 때문에 땅에 묻고 돌로 표시를 해 놓습니다. 그리고 좀 넉넉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돌무덤을 만들어 놓고 죽은 후에 무덤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무덤을 예수님께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 무덤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무덤문이 열린 것을 보고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무덤문이 엄청 큰 돌로 막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도 엄청난 일에 몹시 슬퍼서 어쩔 줄 모르는 여인 앞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너희가 찾는 예수는 다시 살아나셔서 갈릴리로 가셨느니라\"(눅24:5) 우리는 곧잘 살아 계신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무덤에서 찾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무능한 곳에서 찾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물을 파괴시키는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면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던 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혼쭐이라도 내실 것이지,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죽어서 장례를 지내고 무덤에 묻혀 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날 잡아서 죽였던 놈들이 어떤 놈들이냐\"고 한다면,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나타나기만 해도 아마 모든 사람이 기절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다른 봉사는 잘하는데 초상난 집에는 절대 가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가지 않는 이유는 무섭고 겁나서 가기가 두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게 하는 말이 \"그런 곳은 목사님이 가시는 것 아닌가요? 저는 잔치집에나 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잔치집에는 못가더라도 장례식에는 가라고 했습니다(전7:2). 새 출발의 상징 \"갈릴리\" 여러분도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의 옷차림을 아실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이 그 옷차림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로마의 병정들 앞에 나타나셔서 \"이놈들아~\"하면서 못박히셨던 손이라도 드셨더라면, \"천국을 믿어라, 나를 믿어라\"는 말씀을 하실 필요도 없이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정치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자신들이 누구를 왜 죽이는 줄도 모른 채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그 사람들이나, 예수는 죽이고 바라바를 살리라고 말했던 무지한 많은 백성들 앞에 나타나셔서 멋있게 보여 주지 않으시고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처음 만났던 [갈릴리]는 새 출발의 상징이었습니다. 무덤이 끝이라면 갈릴리는 시작입니다. 무덤은 과거요 갈릴리는 미래입니다. 무덤은 정지요 갈릴리는 움직임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갈릴리에 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시고 사람들을 만나셨던 그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셨다는 말입니다. 부활신앙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회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부활절은 그 기념식도 아닙니다. 부활신앙은 현재의 확실한 삶의 현장에서 \"나는 예수 믿음으로 죽어도 다시 산다\"는 소망을 갖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신 것은,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일터에, 마음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신 줄로 믿습니다. 삶속에 함께 계신 예수님 우리는 갈릴리에서 목수였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기적을 행하셨던 그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런 것에 얽매여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던 그 갈릴리에서 일하셨던 그분을 추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과 죽음을 우리들의 삶 속에 그대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음으로 고난 당하고, 손해 보고, 빛되고 소금된 삶을 살기 위해 때로 눈물도 흘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포기하고, 예수 믿음으로 이 세상이 터전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아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돈 때문에 예수를 판 가룟유다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돈 때문에 예수를 팝니까? 돈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다고 합니까? 우리가 가룟유다를 향해서 손가락질 하기도 하지만 때로 우리가 가룟유다처럼 돈 때문에 예수를 팔 때도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신변의 안전 때문에 예수를 모른다고 대답한 베드로 같은 신자는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신변의 안전 때문에, 죽을까봐, 위험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와 같은 때가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종교적인 교권 때문에 예수를 감옥에 가둔 가야바와 같은 사람이 아니어야 합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정권유지 때문에 무죄인줄 알면서도 예수를 고발하고 반역자로 몰아 사형에 처하는 빌라도가 아니어야 합니다. \"나는 아무 상관없다\"고 했지만 자기의 권력의 힘을 포기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빌라도의 모습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없어져야 합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 질서와 치안 유지를 위해 단지 명령에 따른 것 뿐 자신의 의지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할 수 있는 당시의 군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군인들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렸던 것을 회개해야합니다.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겁에 질려 숨어 벌벌 떨던 제자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숨어서 벌벌 떱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의 탄생을 알고 찾아간 동방박사들은 왕궁에 가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 버리고 아는 집과 친척에게서 예수를 찾아 헤맸습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들은 무덤에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예수님을 찾고 계십니까?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나려 합니까? 어디에 계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부활은 지금 우리의 현재적인 사건이요, 우리들 가슴 속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채 들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권력과 부와 명예의 상징인 성(城)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아름답게 치장한 당시의 성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삶의 현장, 사람들을 만났던 곳, 사람들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땀흘리고 애쓰는 삶의 현장인 갈릴리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현장 갈릴리에 계십니다.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운 때에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이 우글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 부활의 주님, 승리의 주님이 계십니다. 인간의 끝... 하나님의 시작 인간은 끝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끝이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끝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인간이 끝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가이드 포스트]지에 킬링거 부인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이혼한 지 만 1년이 되던 날, 그녀는 친구, 가족, 경제생활 등 모든 것이 먹구름에 싸여 정말 자살 일보 전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딸의 책장에서 딸의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숙제물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여덟 쪽인데 매 쪽에 한 살부터 여덟 살 때까지의 사진 한 장씩을 붙이고 자기의 삶을 기록한(설명한) 숙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쪽에 End(끝)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의 글씨 옆에 담임선생님의 \'Your beginning\'(너의 시작이다)이라는 글씨가 \'End\'라는 글씨를 내리 누르듯이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킬링거 부인이 새 출발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여덟 살 난 아이가 사진 이야기의 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마흔이 된 자기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 믿고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여덟 살의 어린아이가 자신의 숙제에 \"끝\"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던 것처럼 마흔살이지만 내 삶은 이제 시작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지금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끝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생각이지, 하나님에게는 시작점입니다. 부활을 증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세상의 삶속에 빛되고 소금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 헛된 생활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주일, 부활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왕궁에 계시지 아니하고, 권세자들과 함께 앉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가셨음을, 왜 가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 삶에 오신 주여, 우리들 가슴 속에 계신 주여 믿음을 가지고 부활의 소망을 가진 우리들, 우리가 함부로 끝을 선언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의 삶 속에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